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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 플러스]

    26일 만해학회 학술세미나 만해학회는 26일 오전 10시 서울 강남구 신사동 ‘불교평론’ 사무실에서 ‘만해사상의 현대적 지평’이란 주제로 제13회 만해학회 학술세미나를 개최한다. 세미나에서는 김광식 동국대 교수(만해사상과 현대 사조), 이승훈 한양대 명예교수(하이데거와 만해), 이도흠 한양대 교수(탈식민주의로서 만해 한용운 사상 읽기)와 김종주 라캉 분석치료연구소장(라캉의 정신분석으로 본 만해), 전형철 서울여대 초빙교수(들뢰즈와 만해의 ‘님의 침묵’), 백원기 동방대학원대 교수(서구 초현실주의 시와 만해의 시), 김종인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간디와 만해)가 발표한다. (02)739-5781. 25일 영통교회서 ‘힐링연주회’ 하나님의교회는 25일 오후 8시 수원 영통교회에서 ‘어머니의 마음을 담은 힐링 연주회’를 연다. 지난 17일 서울 노원구를 시작으로 강동구, 경기 평택·시흥시에서 상처받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잇따라 열어온 무료 순회 연주. 연주회는 실내악 앙상블과 브라스 앙상블, 남녀 혼성중창단 협연으로 진행되며 애니메이션·영화 주제음악과 새 노래 성가곡 등을 들려준다. 한편 하나님의 교회는 다음 달 11일 서울 영등포구와 춘천을 시작으로 수도권을 순회하는 무료 ‘힐링 연주회’를 이어갈 예정이다. (031)738-5805. 천주교주교회의 DMZ 순례 천주교주교회의는 26일∼8월 1일 ‘2013 DMZ 평화의 길’ 순례를 실시한다. 이번 순례는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로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연천군, 강원도 철원·화천·양구·인제군을 거쳐 고성군 통일전망대까지 DMZ 전 구간을 횡단한다. 참가자들은 초등학생과 청년, 60대까지 다양한 세대로 구성됐으며 이주민 6명, 새터민 12명도 포함됐다. 참가자들은 26일 고양시에 모여 친교의 시간을 갖고 27일 오전 파주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평화기원 미사를 한 뒤 임진각 평화의 종 앞에서 출정식을 갖고 행진을 시작한다. (02)460-7681.
  • 63년의 그리움, 내 딸 미요코… 회한에 사무친 父情

    63년의 그리움, 내 딸 미요코… 회한에 사무친 父情

    1950년 9월 김운태씨가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을 때 일본에서는 일본인 아내와 두 살짜리 딸 미요코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씨는 학도의용군이었다. 그해 12월 미군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이듬해 3월 다시 한 번 모국의 전쟁터로 향했다. 아내와 딸을 본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수십 통의 편지를 보냈지만 가닿지 않았다. 산달을 기다리던 만삭의 아내가 아이를 낳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김씨는 일본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62년이 지났다. 김씨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642명의 재일 동포 청년 중 한 명이었다. 고향에 대한 기억은 희미했지만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은 결코 작지 않았다. 일본의 미군 기지에서 3일간 훈련을 받고 바다를 건넜다. 대가는 혹독했다. 135명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242명은 일본의 재입국 거부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들은 연고도 없이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모국에 남겨졌다. 김씨는 재혼을 했다. 새로 가정을 꾸렸다는 미안함에 생활고가 겹쳐 일본의 가족은 찾지 못했다. 남은 것이라곤 미요코의 흑백 사진뿐이었다. 지난 4월 김씨는 일본 민단의 초청으로 미요코를 찾아 나섰다. 그가 살던 니가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 생년월일로 미요코의 정보를 조회하려고 해도 자격이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김씨는 크게 낙담했다. 김씨를 비롯한 재일 학도의용군의 사연은 지난 6월 초 KBS 1TV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소개됐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방송을 보고 김씨의 사연을 취재해 보도했다. 한 달 뒤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자신을 미요코라고 밝힌 여성이 아사히신문사에 찾아온 것이다. 그 여성은 김씨가 꿈에도 그리워한 딸이 맞을까. ‘아빠’라고 부르는 미요코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것이 소원이라는 김씨의 사연은 25일 밤 10시 KBS 1TV 파노라마 ‘63년의 그리움, 내 딸 미요코’ 편에서 방송된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생큐 아메리카” 상이군인 美서 600㎞ 자전거 질주

    “생큐 아메리카” 상이군인 美서 600㎞ 자전거 질주

    한국 상이용사들이 미국 뉴욕에서 워싱턴까지 무려 600여㎞를 자전거로 달릴 예정이어서 주목을 끌고 있다. ‘국가유공자1급 중상이용사회’(회장 최희용) 소속 회원 16명은 지난 22일(현지시간) 오전 뉴욕 맨해튼 중심가에 있는 유엔본부 앞에 모였다. ‘핸드바이크’(다리 대신 손으로 움직이는 자전거)에 몸을 실은 이들은 이날 유엔본부 앞을 출발해 워싱턴 소재 한국전쟁 참전비까지 달릴 예정이다. 상이용사들이 이날 모인 것은 정전협정 60주년을 기념해 한국전쟁에 힘을 보태 준 미국과 미국민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하고 싶다는 취지에서다. 그래서 행사 이름도 ‘정전60주년 희망의 핸드사이클 출정식’이다. 주자들은 6·25 한국전과 월남전, 제2연평해전에서 다리를 잃었거나, 군 복무 중 척수손상으로 하반신 마비가 된 퇴역 용사들이다. 이번 행사의 단장인 박상근 용사회 부회장은 “해방 후 해외로부터 원조를 받고 나라를 지킬 힘도 없을 때 미국과 유엔의 도움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됐다”면서 “미국에서 세계평화와 자유민주주의, 한·미 동맹 관계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자 이번 행사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척수 손상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한태호(49·1996년 애틀랜타장애인올림픽 사격 금메달리스트)씨도 “부상 후에도 삶은 존재할 뿐만 아니라 ‘할 수 있다’는 도전정신으로 내 자신을 일깨우며 이번 행사에 참석했다”고 말했다. 출정식에 나온 손세주 뉴욕 총영사는 “여러분의 숭고한 뜻을 바탕으로 한·미 동맹이 굳건해지고 남북통일과 세계평화가 조속히 실현되기를 희망한다”면서 참석자들의 용기를 북돋웠다. 상이용사들은 오는 27일 워싱턴DC 한국전쟁 참전기념비 공원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참석할 예정인 정전 6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한다. 백악관 앞에서 미국민에게 전하는 감사의 편지도 낭독한다. 또 28일 미국 상이군인중상이자(PVA)들과 백악관에서 합류해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 등대까지 동반 레이스를 하고 나서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담은 글을 읽을 예정이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연합뉴스
  • KBS 한민족방송, 한국전 재조명

    KBS 한민족방송은 한국전쟁 정전 60년 특집 3부작 다큐멘터리 ‘만약, 기적 그리고 진실’을 25~27일 밤 12시 10분에 방송한다. 1부 ‘만약…그래서 당신들이 영웅입니다’는 한국전쟁 주요 전투의 의미를 되돌아 보고, 2부 ‘기적…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드라마 흥남 대탈출’은 흥남 철수작전 과정을 짚어 본다. 3부 ‘진실…대한민국은 정전회담 당사자였다’는 정전협정을 조명한다.
  • 전우 찾아 60년 만에 방북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조종사 출신 88세 미국인이 동료 유해를 찾아 60년 만에 북한을 방문해 눈길을 끈다. 19일 AP통신 등에 따르면 20일 미국을 떠나 평양으로 향하는 주인공은 1950년 12월 함경남도 장진군 장진호 전투에서 해군 조종사로 콜세어 항공기를 몰며 항공화력지원 작전을 수행했던 토머스 허드너 중위. 그는 당시 동료이자 미 해군 최초의 흑인 조종사인 제시 브라운 소위가 몰던 콜세어가 중공군에 피격돼 추락했음을 알고 그를 구하러 달려갔다. 그는 자신의 콜세어를 근처 눈밭에 동체 착륙시키고 브라운 소위를 구하려 했지만 영하의 추위 속에서 브라운 소위의 다리가 부서진 기체에 끼여 결국 구조에 실패했다. 비록 구출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의 구조 노력이 알려져 1951년 4월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은 허드너에게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허드너는 베트남전에도 참전한 뒤 중령으로 전역했다. 그러던 중 허드너의 전기 집필을 문의해온 작가 애덤 마코스로부터 방북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들은 워싱턴 한국전 참전기념비 설립자이자 북한 군부와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온 재미교포 김지연씨를 찾았고, 김씨는 허드너와 마코스, 그리고 장진호 전투에 함께 참전했던 리처드 보넬리 등과 함께 유해 발굴단을 꾸렸다. 김미경 기자 chaplin7@seoul.co.kr
  • 막국수 집만 160여곳… 건강식품으로도 인기

    ‘막국수를 밥처럼, 연중 하루 한 끼 이상 먹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춘천 사람들이다. 그 호반의 도시에 막국수 집만 160여곳이다. 그중에는 서울 사람들이 드나드는 유명한 집들이 있는가 하면 토박이들만 들락거리는 작고 외진 ‘그들만의 단골집’이 있다. 식당들로선 춘천 단골들이 시어머니이고 제일 눈치가 보인다. 막국수는 쉬운 듯하면서도 반죽이나 불의 세기 등 만들기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더 삶았느니, 덜 삶았느니, 툭하면 노인들에게 트집 잡히기 일쑤다. 주인이 바뀌지 않고 한결같다는 것은 단골이 많다는 얘기다. 그러니 춘천 사람들에게 막국수는 송아지 친구나 큰 사돈을 만나 오롯한 그 시절을 거칠게 불러내는 향수다. 문헌을 보면 메밀은 중국에서 들어왔다. 고려시대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 처음으로 거론되지만, 조선후기 농서 서명응의 ‘고사십이집’(古事十二集)에 “국수는 본디 밀가루로 만든 것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메밀가루로 만든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조선시대부터 서민들이 즐겨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훗날 강원도권에서 막국수가 인기를 끈 것은 한국전쟁 이후의 생계형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이야 건강식품으로 각광받지만 옛 어른들에게는 먹고 돌아서면 배고픈, 하지만 밥이 되어 준 구황식품이다. 오죽하면 메밀음식 먹고 뛰지 말라고 했을까. 소화가 잘 되고 탈이 없었다. 특히 메밀은 칼로리가 낮아 다이어트에 좋으며 필수아미노산과 칼슘, 철분 등이 많이 들어 있어 성인병 예방에 도움을 주는데, 루틴(rutine) 성분은 고혈압 등 각종 혈관계 질환에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옛날에는 메밀을 수확해서 빻는 과정에 돌이 많이 들어갔어요. 먹다 보면 어석어석 씹히는데, 그게 거친 메밀 맛이기도 해.” 일주일에 서너 번 막국수를 먹는다는 김봉석(76)씨는 “맷돌에 갈아 메밀가루를 만드는 과정에서 껍질이 덜 벗겨진 것을 모아 국수를 만드는 것”이라며 “동치미의 무는 해독작용을 한다”고 선조들의 지혜를 짚어 주었다. 막 빻아낸 국수라서 막국수이고, 면이 뚝뚝 끊어지니 ‘바로, 막’ 먹으라고 하여 막국수라는 것이다.
  • 롯데, 유엔군 참전용사 돕기 나서

    롯데그룹이 국방부와 함께 생활고를 겪고 있는 한국전쟁 해외 참전 용사 지원에 나선다. 롯데그룹은 17일 국방부와 6·25전쟁 정전 60주년을 맞아 유엔군 참전용사를 지원하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다. 롯데그룹은 향후 5년간 국방부가 추진하는 한국전쟁 해외 참전용사 보은 활동에 소요될 사업비를 지원한다. 롯데와 국방부는 매년 사업 규모와 대상 등을 협의하기 위한 공동 실무위원회를 운용하기로 했다. 다음 달 태국에서 첫 활동을 시작한다. 롯데와 국방부는 참전용사들의 거주마을인 방콕 외곽 ‘람인트라’ 지역을 방문해 복지회관 건립 및 주거시설 개·보수 작업을 진행한다. 롯데는 이 활동에 7억원을 지원한다. 박상숙 기자 alex@seoul.co.kr
  • [씨줄날줄] ‘평화헌법’/문소영 논설위원

    일본 헌법은 ‘평화헌법’이라고 불린다. 전력(戰力)을 보유하지 않고 국가의 교전권을 포기한다고 명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은 미 군정하에서 1946년 11월 3일 대일본제국헌법(大日本帝國憲法)을 개정했다. 평화헌법의 핵심은 제9조의 1, 2항에 들어 있다. 1항에는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 발동으로서의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는 영구히 포기한다”고 돼 있다. 2항은 “전항(1항)의 목적 달성을 위해 육·해·공군 등 기타 전력은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 평화헌법에 대한 균열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 군정이 일본 내 치안유지를 목적으로 경찰예비대를 창설하면서 시작됐다. 경찰예비대는 1952년 보안대를 거쳐 1954년 자위대로 개편됐다. 자위대는 사실상 군대이지만 군대라고 부르지 못한다. 일본은 2012년 기준 세계 국방비 순위 6위의 ‘군사대국’이다. 침략전쟁과 위안부의 존재를 부인해 온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엊그제 나가사키 국제TV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9조를 개정하고, (자위대의) 존재와 역할을 명기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오는 21일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의 압승이 예상되자 그동안 자제해 온 개헌론을 재점화한 것이다. 개헌에 대한 그의 의욕은 두 달 전 도쿄 돔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시구식에 등번호 96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등장한 데서도 엿볼 수 있다. 개헌 요건을 규정한 헌법 제96조를 손질해 개헌을 수월하게 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돼 논란을 낳았다. 제96조 1항에는 “헌법 개정은 각 의원의 총의원 3분의2 이상의 찬성으로 국회가 발의하고… 국민투표 등에서 과반수 찬성을 필요로 한다”고 돼 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국회의원 3분의2 이상을 개헌 발의의 요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아베 총리가 개헌 ‘적정선’을 과반수 찬성으로 완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자민당 내부에서도 이견이 제기되고 있다. 아베 총리의 개헌 시도는 2007년 1기 집권 때부터 있었으니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일본은 1946년 평화헌법이 나오게 된 이유를 직시해야 한다. 평화헌법은 과거 일본의 군국주의에 따른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반성이 결여된 일본의 재무장은 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깨뜨린다. 따라서 일본의 재무장은 프랑스 등 유럽이 용인한 서독의 재무장 사례처럼 한국과 중국 등 이웃나라의 최소한의 동의와 용인이 필요하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야구 입문 50년…살아 있는 전설의 타자 백인천

    [김문이 만난사람] 야구 입문 50년…살아 있는 전설의 타자 백인천

    다 알지만 지구는 둥글다. 해와 달도 둥글다. 그리고 공도 둥글다. 그렇다면 우주에서 가장 완벽한 모형은 둥근 것일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원은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건축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수레바퀴를 이용해 힘의 균형, 힘의 극대화를 추구하면서 문명의 발전을 가져왔다. 뉴턴의 물리학적 측면에서도 원은 힘의 균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도형으로 여긴다. 수박, 토마토, 사과 등 대부분의 맛있는 과일이 둥근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둥글기 때문에 이변도 많이 생긴다. 특히 스포츠에서는 더욱 그렇다. 야구 경기에서는 어떨까. 공도 둥글고 방망이도 둥글다. 파울도 많고 땅볼도 많다. 그러나 둘 다 제대로만 맞으면 큰 이변이 생긴다. 경기를 뒤집는 홈런이다. 까닭에 야구에 열광하는 팬들이 많아지고 있다. 국내 프로야구의 높아진 수준도 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추신수나 류현진 선수의 경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이기면 짜릿하고 지면 안타까워한다. 에라, 비오는 날 공통분모나 다름없는 야구 얘기나 실컷 해 보자. 전설의 타자가 있다. 우리나라 프로야구 역사상 4할 1푼 2리. 아직도 그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주인공은 백인천(70)씨다. 그가 올해로 야구에 입문한 지 50년이 됐다. 비록 현역은 아니지만 여전히 영원한 야구 선수처럼 살아간다. 야구장을 직접 찾기도 하고 집에서 TV를 시청하면서 국내외에서 활약하는 후배 선수들을 열심히 응원한다. 우리나라 홈런의 역사를 잠깐 살펴보자. 1960년 6월 제15회 청룡기쟁탈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서울시 예선에서 경동고와 휘문고가 맞붙었다. 경동고의 선공으로 시작된 경기에서 4번 타자 겸 포수로 출전한 백인천 선수는 3회 초 휘문고 투수 이명우의 볼을 받아쳐 왼쪽 담장을 훌쩍 넘기는 투런 홈런을 터뜨려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홈런은 서울운동장 야구장 개장 이래 고교 선수가 터뜨린 첫 홈런이 됐다. 이후 백인천 선수는 국가대표로 활약하면서 명성을 날렸다. 1962년 1월 타이완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쑹산(宋山) 구장에서 홈런을 쳤다. 이 역시 쑹산구장 개장 이후 첫 홈런이었다. 주최 측은 홈런상으로 은 트로피를 수여했고 홈런공이 떨어진 지점에 기념패를 박아 백인천의 홈런을 기렸다. 이 대회 이후 백인천은 1963년 일본 프로야구계에 진출했고 곧바로 3할대를 유지하는 수위 타자가 됐다. ‘프로야구 일본 진출 1호’인 그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멸시를 받으면서도 일본 프로야구 생활 18년간 타격왕과 최다 2루타, 최다 3루타 등의 기록을 세운다. 40세 때에는 한국으로 귀국해 MBC청룡에서 감독 겸 선수로 뛰어 4할 1푼 2리의 시즌 타율 기록을 세웠고 아직도 경신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다. 한국야구위원회(KBO) 원년 최다 안타, 타격왕, 득점왕, 최고 출루율, 최고 장타율도 기록하고 있다. 그는 현재 한국프로야구은퇴선수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다. 지난 12일 오전 경기도 일산 자택에서 전설의 타자를 만났다. 아파트 입구에서 동호수를 찾아 헤매고 있을 때 백씨와 마주쳤다. 동네 헬스클럽에서 막 운동을 마치고 나오는 중이라고 했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집으로 올라갔다. 자연스럽게 건강에 대한 얘기부터 나왔다. “제가 프로야구 생활을 한 지 벌써 50년이 됐네요. 현역 선수로 뛴 20년 동안 얻은 것도 많고 잃은 것도 많습니다. 이제는 건강해지는 프로선수가 되려고 합니다. 1996년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삼성의료원에 입원했거든요. 그때 프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새삼 알았습니다. 휠체어에 의지한 채 절망 속에 허덕이다가 건강에 대한 답을 찾았습니다. 야구에 미쳤듯 운동에 미치자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이젠 보다시피 이렇게 다 좋아졌어요.” 그의 집 안에는 현역 시절 야구공이며 배트, 모자, 각종 트로피 등이 진열돼 있었다. 건강을 과시하듯 MBC청룡 시절 4할 타율을 기록했던 배트를 꺼내 왕년을 회상하면서 스윙 자세를 취한다. 과연 운동만으로 그의 건강이 회복됐을까. 물었더니 침과 운동 요법을 병행하면서 구운 소금을 꾸준히 섭취했단다. 1년 전에 다친 고관절도 다 붙었고 뇌경색으로 가물가물했던 기억력도 완전히 회복했다며 웃는다. 18년 가까이 건강 찾기에 공들인 끝에 지금은 골프도 치고 사그라졌던 근육도 되살아나고 있다고 했다. 나이 70이지만 다시 청년으로 돌아간 기분이라며 팔뚝 근육을 자신 있게 드러내 보인다. 야구 얘기로 화제를 바꿨다. 한국 프로야구의 수준에 대해 “여러 가지로 발전했지만 섬세한 면에서 아직 부족하고 프로답지 않은 경우가 더러 있다”고 평가했다. 자신의 현역 시절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공의 반발력이 훨씬 좋아졌다고 했다. 이 때문에 번트를 잘 안 하고 한 방 날리는 것을 자주 노린다는 것이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한국 출신 선수들에 대해서는? “외국에 나가면 길게 가는 선수가 있고 짧게 가는 선수가 있습니다. 박찬호는 밑바닥(마이너리그)부터 출발해 오래갈 수 있었고 추신수도 그렇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2군부터 시작했습니다. 밑바닥에서 고생한 경험 때문에 오래갈 수 있었지요.” 요즘 타율이 내려앉은 추신수 얘기를 꺼냈더니 “타율은 바뀌지만 타점과 홈런은 안 바뀐다”고 하면서 원 포인트 레슨을 한다. 추신수는 5월까지만 해도 타율이 3할 3푼 3리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2할대로 떨어졌다. 백씨는 한국야구 최고의 이론가나 다름없다. 가장 큰 문제는 타격할 때 발사 자세에서 배트를 쥔 손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추신수는 전형적인 어퍼스윙 타자이기 때문에 밑에서 위로 퍼 올리는 타격을 합니다. 이런 유형의 타자들은 장타력을 지녔지만 체력적 부담이 크게 됩니다. 시즌 초반 체력에 문제가 없을 땐 홈런과 타율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5월에는 3할대 타율과 7개의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경기 수가 늘고 원정의 피로가 겹치면서 퍼 올리는 타격 자세는 부담을 주게 됩니다.” 그러면서 배트를 쥔 손이 떨어지는 것, 지나치게 넓은 보폭, 어깨가 먼저 열리는 자세에서는 결코 좋은 타격을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살인적인 경기 스케줄을 잘 견뎌내야 살아남는다고 했다. “홈런보다 정확도를 높이는 쪽이 추신수에게 바람직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배트를 쥔 손을 높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몸쪽 공을 좀 더 공략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류현진 선수에 대해서는 어떤 지적이 나올까. “류현진도 원정 경험을 잘 견디는 것이 관건이다. 팬들은 이기길 바라지만 상대가 있다. 프로는 냉정하며 그에 따른 정신력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야구 중독자가 돼야 한다. 심한 중독자가 돼야 꽃을 피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에서 뛰고 있는 이대호 선수에 대해서는 “성격도 좋고 비교적 적응을 잘하고 있다. TV를 통해 경기를 쭉 지켜보고 있다”면서 일본 감독들이 대부분 후배인데 만나면 힘도 좋고 수준이 높아졌다는 얘기를 듣는다고 말했다. 한국 야구의 수준과 관련해서는 “거의 일본과 비슷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야구 인생 50년을 회고한다. “처음 일본 갔을 때 일본 무대에서 통할 수 있을까 많은 걱정을 했습니다. 아침마다 ‘야구 중독자가 되자’고 몇 번이고 다짐했습니다. 방망이에 무거운 쇠붙이를 붙이고 계속 스윙 연습을 했습니다. 제가 그걸 개발했는데 요즘에는 많은 후배 선수들이 그렇게 하더군요. 결국 일본에서도 통할 수 있었습니다. 후회 없는 야구 인생이었습니다.” 지금까지 4할 타자는 미국에 4명이 있고, 일본에는 없다. 그만큼 그의 기록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타자와 투수의 대결에서 누가 유리할까 물었더니 “그건 모릅니다. 잘 맞은 공도 수비수가 잡아 버리면 아웃되는 것이 아니냐”며 웃는다. 그의 고향은 평북 철산이다. 아버지가 중국에 사업차 갔을 때 출생했고 3세 때까지 중국에 살다가 북한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광복 이듬해 해주를 통해 바닷길로 가족들과 함께 월남했다. 장충초등학교에 다니다 한국전쟁 때 피란을 갔고 졸업은 효제초등학교에서 했다. 중학교는 성동중학에 입학했다가 경동중학교에서 야구를 하는 친형의 권유로 전학을 했다. 그가 야구를 하게 된 계기가 된다. 이후 경동고에 진학하면서 야구 선수로 두각을 나타냈다. 광복 후 고등학생으로는 최초의 홈런을 친 선수가 됐다. “그때부터 야구에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질은 별로 없었어요. 스포츠는 반복 연습입니다. 집에서 타이어 매달고 연습하다 보니 팔에 힘이 생기더군요. 시간만 되면 공을 쳤죠. 나중에는 저절로 신 나더라구요.” 그는 1983년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그리고 2002년 롯데 감독을 끝으로 야구장을 떠났다. 지금은 건강 관리에 전력을 쏟고 있다. 앞으로 야구 아카데미를 만들어 야구팬, 그리고 야구 꿈나무들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말한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1982년 당시 4할 1푼 2리를 기록했던 방망이를 들고 지그시 미소를 짓는다. 선임기자 km@seoul.co.kr ◆백인천은 누구 1943년 중국 장쑤(江蘇)성 우시(無錫)시에서 태어났다. 3세 때 북한 철산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광복 이듬해 가족들과 함께 월남했다. 성동중학에 입학했으나 경동중학으로 전학하면서 야구 방망이를 잡게 됐다. 1960년 경동고 시절 서울운동장에서 개장 이후 첫 홈런을 쳤다. 1962년 타이완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쑹산(宋山)구장 개장 첫 홈런 타자가 됐다. 1963년 일본 프로야구 진출 1호 선수가 됐다. 일본에서 타격왕과 최다 2루타, 최다 3루타 등의 기록을 세운다. 한국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귀국해 MBC청룡에서 감독 겸 선수로 뛰었다. 이때 기록한 4할 1푼 2리의 시즌 타율(80경기)은 현재까지 경신되지 않고 있다. 이후 LG 트윈스,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을 역임했다. 1999년과 2006년에는 각각 SBS와 tvN에서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건강 관리에 힘쓰면서 한국 프로야구은퇴선수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다. 이영민 타격상(1959년), 대한체육회 대한민국 최우수선수상(1962년), 일본 프로야구 수위 타자, 베스트나인(1975년), 일본 프로야구 올스타전 출장(1967, 1970, 1972, 1979년), 한국 프로야구 최우수감독상(1990년) 등을 받았다.
  • 아프고 아련한, 재미 이산가족·외국인 간호사의 한국전쟁

    아프고 아련한, 재미 이산가족·외국인 간호사의 한국전쟁

    아리랑TV는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기념해 전쟁의 비극을 다룬 4부작 다큐멘터리 ‘미싱’(Missing)을 17일부터 4주간 수요일 오전 9시 방송한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각. 판문점 동편과 서편 출입구에서 제복 차림의 무표정한 사람들이 들어와 지정된 자리에 앉은 뒤 5조 63항으로 작성된 문서를 검토하고 서명한다. 주인공은 유엔군 수석대표인 미 육군 중장 윌리엄 케이 해리슨과 북한군 및 중공군 수석대표인 조선인민군 대장 남일이다. 두 사람은 ‘유엔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협정에 관한 협정’이라는 긴 제목의 문서에 서명한다. 한글, 영어, 중국어로 각각 작성된 문서에 서명하고 이를 교환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12분. 세계 최장의 정전 체계가 비롯된 한국 정전협정에 서명한 잉크는 말라버려 빛바랜 지 오래지만, 여전히 가슴 시린 사연을 폐부 깊숙이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다큐멘터리 ‘미싱’은 그들의 비극을 그린다. 1부에서는 재미 이산가족 이야기가 펼쳐진다. 재미 이산가족들은 미국 시민권자라는 이유만으로 남북 이산가족상봉 협상 대상에서 제외돼 생이별의 아픔을 60년 동안 참아내야 했다. 상당수가 가족을 만나겠다는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있다. 2부 ‘전장의 나이팅게일’은 외국인 간호사들의 사연을 전한다. 외국인 간호사들은 포탄이 빗발치는 와중에도 부상병을 돌보다 숨져간 동료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3부는 전쟁고아를 살리려고 군법까지 어겨가며 사선을 넘나들었던 어느 미군 장교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블레이즈델 대령은 중공군의 남하로 서울이 점령당하기 직전 한 학교에 피신해 있던 고아 1000여명을 제주도로 후송한다. 그를 ‘아버지’로 기억하던 고아들의 증언을 통해 당시 상황을 전한다. 4부에서는 세계 분쟁지역 아이들을 돕는 한국인들을 조명한다. 시리아는 60년 전 한국의 상황처럼 3년째 내전이 이어지고 있는 곳. 이곳의 소녀 디나는 부모가 처참하게 학살되는 모습을 목격한 후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디나를 구하기 위해 한국인들이 나섰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7) 한반도 분단을 보는 외국의 시각(상)

    [정전협정 60년] (7) 한반도 분단을 보는 외국의 시각(상)

    ■미국·중국의 입장 美 ‘中 견제 전초기지’ vs 中 ‘대미 완충지대’… 전략적 인식 심화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조야(朝野)를 막론하고 한반도 분단의 조속한 종식과 평화적 통일을 바란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미국 연방하원의 여야 의원들이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한반도 평화·통일 기원 결의안’을 발의한 것이 단적인 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리 간단치 않다. 한반도 통일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국익에 부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통일 한국’은 친미적이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통일 한국’이 친(親)중국 성향으로 기울 것이란 우려가 제기될 경우 한반도 통일에 대한 미국의 자세는 소극적으로 변할 개연성이 크다. 현실주의 이론의 대가인 미국 시카고대학의 존 미어셰이머 교수는 2011년 한 세미나에서 “그동안 급속한 국력 신장을 이룬 중국이 향후 수십년간 더욱 힘을 키워 미국을 능가할 정도가 된다면 한국은 중국에 편승해 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이런 맥락에서 급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는 것을 동아시아 정책의 기조로 설정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한국에 공을 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지리적으로 중국에 매우 근접해 있는 한국이야말로 대(對)중국 견제의 전초기지로 삼기에 더할 나위 없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이 틈만 나면 한·미 동맹을 “린치핀”(linchpin·핵심)으로 부르며 중요성을 부여하는 배경에는 이런 계산법이 작용한다. 한반도가 통일되면 북한발 위협이 사라지면서 미국의 한반도 방위 부담이 줄어들 것이란 관측이 과거에는 많았지만 최근 중국의 국력이 급신장하면서 이런 전망에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한반도 통일 이후에도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해 한반도 방위 역량을 유지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중국과의 갈등이 불가피해질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들이 ‘한국전쟁’ 하면 떠올리는 것은 ‘미군의 북한 침략’이다. 중국의 대표 백과사전 격인 사해(辭海)에는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과 관련해 “한국에 내전이 일어나자 미군이 북을 침략하고 나아가 중국 변경인 단둥(丹東)까지 치고 올라온 탓에 중국이 전쟁에 참여해 나라를 지키고 북한을 도와 미국을 물리쳤다”고 미화한다. 중국에서도 김일성의 남침설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다. 화둥(華東)대학 역사학과 선즈화(沈志華) 교수는 러시아 비밀 문서를 토대로 한 연구를 바탕으로 꾸준히 남침설을 제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2010년 환구시보 영문판에서 “스탈린이 1950년 4월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허락했고, 그해 5월 중국 베이징에서 마오쩌둥(毛澤東)으로부터 미군이 개입하면 중국이 돕겠다는 승락을 받았다”며 남침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주류 역사관은 아직도 북침이다. 일부 개혁파 지식인들은 “중국의 참전 결정은 마오가 소련과 밀착해 국내 정권 기반 강화 수단으로 삼기 위해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당국의 인식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참전 결정은 마오가 내린 것이고 마오는 중국의 국부여서 마오에 대한 부정은 곧 중국 공산당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전문가들은 한·중 관계가 어느 때보다 좋지만 당국이 아직은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물론 한반도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를 바꿀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역사학자 장리판(章立凡)은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핵은 중국에도 위협 요소여서 중국이 북에 대한 지지를 거둬들이고 미국과 협력하면 북한 문제는 바로 해결된다”면서 “다만 이 경우 미군의 도움으로 남한 주도의 통일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되고, 중국은 여전히 완충지대로서의 북한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한반도 분단 해결에는 장애물이 많다”고 내다봤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러시아·일본의 시각 러 “北, 중·러 감정골 이용 땐 분단 상황 지속” 1948년 한반도 분단은 냉전의 산물이었다. 미국과 함께 냉전의 한 축을 이뤘던 소련(현 러시아)은 영토 접경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막을 ‘완충지대’가 필요했다. 홍완석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 소장은 “소련은 영토가 크기 때문에 항상 완충지대를 만든다. 유럽의 핀란드, 중앙아시아의 몽골이 대표적이다. 북한도 그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소련은 38선 이북을 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의 보루로 삼았지만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소련이 갖고 있던 영향력의 우위는 서서히 중국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북한 문제 전문가인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는 “소련은 미국과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하려고 북한 정권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즈음만 해도 북한 지도부가 혁명적 이상주의를 어느 정도 유지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시각에서 북한의 남침은 침략이 아닌 해방전쟁이었다”며 한국전쟁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을 설명한다. 그러나 중국이 사회주의 진영에서 러시아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면서 중국과 소련 간 감정의 골이 깊어졌고, 북한이 이를 잘 활용하면서 분단이 계속 이어지게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단을 끝내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역할이 남아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기계형 한양대 아태지역연구센터 연구교수는 “러시아는 한국이 통일되는 게 동북아의 안정에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통일 한국이 중국과 일본을 견제할 수도 있는 등 한국의 통일이 러시아의 장기적인 이익과도 일치한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분단의 ‘당사자’였다면 일본은 ‘수혜자’였다. 분단이 고착화된 결정적 계기 중 하나인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을 한국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들고 싶었던 미국의 입장 때문이다. 미국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일본과 서둘러 맺었고, 이를 통해 패전국 일본은 정치적으로 ‘정상 국가화’ 됐다. 김민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일본의 정치인들은 이런 점을 대놓고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한반도의 지정학적 요인이 일본에 혜택을 줬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민희 기자 haru@seoul.co.kr
  • 자갈치시장 CNN 타고 세계로

    부산의 대표적 관광지인 자갈치시장 등이 미국 유명 케이블 방송인 ‘CNN’에 소개 됐다. 부산시는 ‘CNN 인터내셔널’의 여행 전문 프로그램인 ‘CNNGo’에서 자갈치시장, 금정산성, 범어사 등 부산의 대표 관광지를 지난 10일 전 세계에 소개했다고 12일 밝혔다. 이번 방송은 한국시간으로 13일 오후 1시 30분, 14일 밤 9시 30분 두 차례 더 전파를 탈 예정이다. 프로그램 진행자들은 부산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부산의 매력을 전 세계에 알렸다. 먼저 전 라디오 호스트였던 페트라 정은 자갈치시장을 한국에서 가장 큰 어시장으로 소개한 뒤 항구도시에서 사는 맛이 어떤지 보여 주기 위해 수조에 있던 해산물을 즉석에서 먹는 장면을 연출했다. 또 부산에서 최고로 꼽히는 해물 철판구이와 막걸리의 비밀을 알아보는 시간도 마련했다. 다음으로 HAPS 매거진의 에디터 바비 맥길은 금정산성과 범어사를 관광하며 한국전쟁과 임진왜란 때 부산의 역할을 보여줬다. 사진가 윤민호는 부산 시민의 영혼을 느낄 수 있는 롯데자이언츠 야구게임을 선보이며 부산 야구게임은 스포츠 이벤트라기보단 노래방에 온 것 같은 분위기라고 전 세계에 알렸다. 마지막으로 카페운영자 제이 송은 한국인의 커피 열정을 소개했다. CNN 인터내셔널의 뉴스와 정보 서비스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4600만명 이상을 포함한 전 세계 3억 7500만 가구에 주요 TV, 인터넷, 모바일 플랫폼을 통해 5개 언어로 제공되고 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부고] 조계종 前 원로의원 도견 스님 입적

    대한불교 조계종 전 원로의원 도견 스님(대종사)이 12일 새벽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입적했다. 법랍 70세, 세수 89세. 도견 스님은 19세에 오대산 동관암에서 출가한 뒤 이듬해 상원사에서 한암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한국전쟁 때 의용군에 징집됐다 빠져나온 뒤 해인사와 범어사, 송광사, 통도사 등지에서 효봉 스님과 청담 스님을 비롯해 당대의 선지식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평생 수행에만 힘썼지만 성철 스님의 권유로 해인사 주지를 2년간 맡기도 했다.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 대흥사 조실, 조계종 총무원장 직무대행, 원로의원을 지냈으며 2005년 대종사 법계를 받았다. 장례는 조계종 원로회의장으로 닷새간 치러지며 16일 해인사에서 영결식과 다비식이 열린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현재진행형 비극 (하) 참전 군인들 인터뷰

    [정전협정 60년] 현재진행형 비극 (하) 참전 군인들 인터뷰

    ■윌리엄 웨버 ‘한국전 미군참전용사 기념재단’ 회장 “참전 증인들 사라져가 안타까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생존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한국전쟁에 대해 가장 직접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우리가 모두 사라져 버리면 한국전쟁이 미국인의 의식에서 완전히 실종될 것만 같아 걱정입니다.” 인생 거의 전부가 ‘한국전쟁의 역사’인 노병(老兵)은 자신의 사후(死後)에 한국전쟁의 역사가 겪게 될 운명을 벌써부터 걱정하고 있었다. 한국전 정전 60주년을 맞아 서울신문이 만난 윌리엄 웨버(87·예비역 대령) ‘한국전 미군 참전용사 기념재단’ 회장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전 참전용사다. 해마다 6월 25일이 다가오면 그는 언론들의 1순위 인터뷰 대상이 된다.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한쪽 팔과 다리를 잃은 그의 외모 때문만이 아니다. 그 누구보다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한국을 사랑하는 일에 대한 열성이 그를 특별하게 하고 있다. 그는 워싱턴의 한국전 참전기념비 옆에 서 있는 19명의 미군 병사 조각상 가운데 하나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지난 5월에는 미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웨버 회장은 1943년 17살의 나이에 직업 군인으로 미 육군에 입대해 2차대전에 참전했다. 이어 1950년 8월 육군 187 공수 낙하산부대 소속 대위로 인천 상륙작전과 함께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서울 수복 후 그는 평양 등 북한 내 요충지 곳곳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해 승전보를 울렸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중부전선까지 밀린 그는 1951년 1월 격전지 강원도 원주에서 북한군의 수류탄에 오른쪽 팔꿈치 아래와 오른쪽 무릎 아래를 잃고 말았다. 이 부상으로 그는 전선과 이별했다. 지난달 24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열린 북핵 문제 관련 세미나에 의족에 의지한 몸을 이끌고 나타난 그에게 ‘20대 젊은 나이에 소중한 팔다리를 잃은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유감스럽지 않다. 한국전에서 정규군으로 복무한 것은 내게 무한한 영광”이라며 마치 젊은 현역 군인처럼 우렁차게 답했다. 정전 60주년을 맞는 소회를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지난 60년간 또 다른 전쟁이 없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참전용사들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이 슬프다. 앞으로 15년 뒤에는 정전 75주년 기념식이 열린 텐데 그때는 극소수의 참전용사만 살아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우리 참전용사들끼리 하곤 한다. 왜냐면 지금 가장 어린 참전용사가 80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전쟁은 ‘알려지지 않은 전쟁’에서 ‘잊혀진 전쟁’이 돼 가고 있는데 앞으로 완전히 미국 역사에서 실종될까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2차대전에 참전해 일본군과 싸울 때만 해도 한국과 중국, 일본 사람은 모두 똑같은 줄 알았지만 1950년 한국 땅에 처음 왔을 때 한국인은 일본인과 완전히 다른 문화를 가진 다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서 “그런 한국인들을 위해 싸운 것은 더없이 가치 있는 일이자 영광, 특권이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한국 정부가 참전용사들에게 충분히 보답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건 말할 필요도 없다. 진심을 다해 끊임없이 미국에 감사를 표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밖에 없다”고 했다. ‘다시 한국전이 일어난다면 참전하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단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당연히 참전할 것이다. 그건 물어볼 필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다 할 것이다. 바로 1950년에 나는 그렇게 했다”고 답했다. 웨버 회장에게 한국전은 박제된 역사가 아니다. 90세를 바라보는 고령임에도 그는 미국에서 ‘한국전 알리기’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는 워싱턴의 링컨기념관 앞에 있는 한국전 기념비 옆에 미군과 카투사 전사자들의 이름을 모두 새긴 ‘한국전 추모벽’ 건립을 위해 백방으로 뛰는 중이다. 2002년 참전 이후 51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이후 올해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한국행을 계획하고 있는 웨버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원주를 꼭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글 사진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중국인민지원군 출신 자빙수 전 中인민공안대 교수 “美의 침략 언론보도 믿고 참전” “한국전은 중국에서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돕다)로 표현한다. 이 말과 같이 한국전은 중국이 미국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북한을 도와 목숨 바쳐 싸운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로 인해 남북이 분단됐는데 한국전쟁 정전일인 7월 27일이면 항미원조 승리 운운하며 자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중국 인민지원군 출신의 자빙수(査秉樞·81) 전 중국인민공안대 교수는 매년 7월 27일을 ‘한반도정전기념일’로 고쳐 불러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 5일 베이징 무시디(木?地) 자택에서 만난 그는 “세월이 지나면서 언론 등을 통해 한국전쟁은 북침이 아닌 남침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 “하지만 중국 인민지원군은 미군이 턱밑까지 치고 올라온 탓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며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자 전 교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49년 신중국 건국과 함께 자원 입대했다. 타이완을 수복해 통일을 이루려는 국가정책에 따라 인민해방군 25군 75사 소속으로 푸젠(福建)성 최전방에 배치됐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후 미군이 단둥(丹東) 변경을 폭격했다는 등 미군의 침략에 초점이 맞춰진 언론 보도로 미국이 타이완 국민당 정부를 도와 중국을 칠 것이란 위기감이 고조됐다. 부대 전환 배치를 신청해 한국전에 참여한 데는 이 같은 국내 분위기가 작용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로는 1952년 7월 13일부터 14일 동안 강원도 상감령 동북쪽 남대천에서 벌어진 ‘금성(城) 반격전’을 꼽았다. 중국 입장에서는 원래 북의 땅에 침입한 미군을 물리쳤다는 의미에서 이 전투를 반격전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 전투만 버텨 내면 미국과 정전협정을 체결해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고 회고했다. 미군을 상대로 중국 인민지원군 25만여명이 참가한 이 전투에서 그는 오른쪽 다리와 허리를 다쳤다. 그는 정전 이후에도 북한 재건 사업에 투입되며 1953년 10월부터 황해남도로 배치돼 1년간 고 유옥례씨 집에서 지냈다. 당시 14세이던 유씨의 딸 김영희로부터 조선인민군진군가, 조선국가, 아리랑, 봄노래, 샘물터의 노래, 푸른 하늘의 노래 등 27개의 북한 노래를 배웠다. 한국 노랫말을 중국어로 표기해 적어 둔 노래 연습장과 유씨 가족의 사진을 보며 지금도 그 시절을 회상한다. 영희씨와 주고받은 100여통의 편지도 간직하고 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은 탓에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두 나라 언어로 적어 가며 수십년간 소통의 끈을 이어 갔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오라버니’라는 문구 등 편지 내용 곳곳에 깊은 우의가 배어 있다. 문화대혁명 등의 시기를 제외하고 영희씨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줄곧 연락을 주고받았다. 의료품, 식료품, 의류 등을 북에 보내 주기도 했다. 그는 “중국은 참전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만약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남북은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외세의 개입 없이 남북이 자체적으로 통일하도록 돕는 것이 중국이 (한국에) 진 빚을 갚는 일”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 부회장 김완기씨 “조국의 전쟁 소식에 태극기 혈서 쓰고 참전” 1950년 6월 25일. 22살의 청년은 아침을 먹으며 라디오를 듣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소식을 접한다. 현해탄 건너 조국에 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이다. “어쩌다 같은 민족끼리 총칼을 들이대게 됐나”라는 참담한 심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청년은 개전 3일 만에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참전을 결심한다. 그후 63년이 속절없이 흘렀고, 청년의 얼굴엔 주름살이 내려 앉았다. 재일학도의용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김완기(85)씨를 지난 3일 만났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김씨는 12살 때인 1940년 공부를 하기 위해 부모님과 함께 큰아버지가 있는 구마모토현으로 갔다. 대학에 진학해 엘리트가 되라는 부모님의 바람과 달리 광복 이후 진학을 포기하고 민단 소속으로 조직 활동에 앞장섰다. 전쟁이 터지자 김씨를 포함한 642명의 재일학도의용군은 태극기에 혈서로 참전 의사를 밝히고 조국으로 향했다. 미군 부대에 배치돼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김씨는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경험했다. “고막이 터져 육군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함께 배를 타고 참전한 친구들을 그곳에서 만났는데 동상 때문에 손발이 잘린 전우들이 수두룩했다”고 김씨는 회고했다. 미군의 순환배치 방침에 따라 1·4 후퇴 즈음인 1951년 1월 일본으로 복귀한 김씨는 “이대로 그만둘 수는 없다”며 다시 입대를 자원했다. 100여명이 지원해 58명이 국군에 재입대하게 됐고, 김씨는 1952년 6월까지 전선에 머물렀다. 이후 김씨는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일본 정부가 “허락 없이 참전했고 일본 거주도 불확실하다”며 입국을 막았다. 결국 부산 소림사에서 재일학도의용대(현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의 전신)를 만든 뒤 정전 후인 1953년에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탑골공원 뒤편에 사무실을 꾸렸다. 그곳을 본적으로 등록하고 1961년까지는 수용대기소에서 생활했다. 국내 안착도 일본 귀환도 아닌 애매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 사이 일본에 있던 김씨의 가족은 전쟁통에 모두 유명을 달리했고, 공주에 남아 있는 가족들도 정전 이후에야 겨우 연락이 닿았다. 현재 동지회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씨는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국민들이 학도의용군의 존재를 모르는 게 가장 안타깝다”고 말했다. 정부는 종전 후 10년 뒤인 1963년에야 일본에 안치돼 있던 전사자 53명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고, 1968년 재일학도의용군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했다. 글 사진 김민희 기자 haru@seoul.co.kr
  • 中, 김정일 밀랍인형 北에 선물

    中, 김정일 밀랍인형 北에 선물

    중국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밀랍 인형을 만들어 북한에 선물했다. 중국은 오는 27일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일’을 포괄적인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 승리 기념일’(10월 25일)로 간주해 당과 민간 차원에서 북·중 간 우의를 다지는 행사도 벌일 계획이다. 10일 관영 통신인 중국신문사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는 전날 베이징에서 북한 인사들을 초청한 가운데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 밀랍 인형 증정식’을 열고 북측에 김정일 밀랍 인형을 전했다. 북한 측 참석자 명단은 공개하지 않았다. 통신은 북한이 항미(미국에 대항해 싸움) 승리 6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오는 27일 묘향산 국제우의궁에서 이 밀랍 인형의 제막식을 가질 계획이라고 소개했다. 중국위인밀랍인형관이 제작한 이 인형은 말년의 김 위원장 모습으로 김 위원장이 외부 시찰 때 즐겨 입던 인민복과 야전 외투를 걸치고 있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북한에 김 위원장의 밀랍 인형을 선물한 것은 3차 핵실험으로 한동안 냉각됐던 북·중 관계가 본격적인 회복기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지난해 12월 북한이 중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거리 로켓을 발사한 데 이어 3차 핵실험까지 강행하면서 양국의 고위급 교류는 완전히 끊어지다시피 했다. 그러나 지난 5월 최룡해 북한군 총정치국장의 방중을 계기로 관계가 회복되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기고] 혈맹 한국과 호주, 아태시대를 이끄는 동반자/김봉현 주호주대사

    [기고] 혈맹 한국과 호주, 아태시대를 이끄는 동반자/김봉현 주호주대사

    지난 4일 서울에서 한국과 호주 간의 외교·국방장관 합동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를 외교용어로 ‘2+2’라고 한다. 지금까지 한국이 ‘2+2’ 회의를 개최한 나라로는 미국이 유일했으며, 이번에 호주가 그 두 번째가 된다. 호주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파병을 결정하였고, 호주의 파병 결정은 다른 나라들의 파병을 촉발시킨 중요한 결정이었다. 이러한 전통을 기반으로 한국과 호주는 외교·국방협력을 발전시켜 왔다. 지난해 10월 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으로 나란히 당선되었으며 , 지난 2월 북한의 제3차 핵실험에 대응하여 단호하고 단합된 행동을 보여 주었다. 또한 호주는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인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동북아 평화협력구상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이번 ‘2+2’ 회의에서 양국은 한반도 미래에 대하여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한국과 호주는 경제, 통상 분야에서도 매우 중요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우선 호주는 면적이 거의 미국, 중국과 비슷하며 엄청난 양의 자연자원을 가지고 있다. 우라늄, 철광석, 아연 및 니켈의 매장량은 세계 최대이며 구리와 유연탄의 매장량은 세계 2, 4위를 각각 기록한다. 한국이 소비하는 광물자원의 40%를 호주에서 수입한다. 한국과 호주의 교역량은 2012년 322억 달러로, 한국은 호주의 4대 교역국이며 호주는 한국의 7대 교역국이다. 현재 교섭 중인 양국 간의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되면 교역과 투자규모는 더욱 커질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해 우리 기업은 호주 북서부 바다에서 가스 채굴 사업을 수주하였다. 채굴한 가스는 특수선박을 이용해 바다에서 직접 액화하는데, 이 특수선박은 한국이 최초로 건조하였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수행되면 우리의 조선 산업은 새로운 블루오션을 맞이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올해에 우리 기업은 철광산, 도로 건설 및 항구 건설을 패키지로 연결한 57억 달러 규모의 철광산 개발 프로젝트(EPC 방식: 엔지니어링, 구매 및 건설)를 수주했다. 나아가 호주는 1994년부터 ‘창조 국가’(Creative Nation)라는 보고서를 기초로 창조산업을 육성하고 있으며, 앞으로 우리와 창조경제의 파트너로서뿐만 아니라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한 지역으로서 협력이 더욱 증진될 것이다. 이와 함께 양국은 인권 등 보편적 가치를 존중·공유하고 있으며 이를 확산시키기 위해 국제사회에서 협력하고 있다. 특히,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위원장으로 호주의 대법관 출신인 마이클 커비 판사가 임명되었다.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호주 측의 기여가 기대된다. 러드 호주 총리는 21세기에 호주는 아시아 국가로서 정체성을 더욱 확립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번에 서울에서 열린 ‘2+2’ 회의는 이러한 호주의 노력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호주는 우리와 가치를 공유하면서 정치, 경제, 국방 등 모든 분야에서 긴밀하게 협력해 나갈 것이며 이를 통하여 21세기에 아시아를 함께 이끌어 나가는 동반자가 될 것이다.
  • [열린세상] 중국의 해양 전략 주시할 때다/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열린세상] 중국의 해양 전략 주시할 때다/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미·중 정상회담에서 향후 세계 질서는 미국과 중국이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역학구도가 형성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후진타오 전 주석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미국에 중국의 세계적 위상을 확인시키는 모습이었다. 시진핑의 중국은 더 강대해지는 중국, 동북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는 중국이 될 것이다. 그래서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실험을 하는 일에 과거보다 훨씬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이다. 강대국 중국을 건설해야 하는 노정에 북한이 설쳐대며 동북아 안정을 흔드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지정학적 여건을 보면 중국은 북한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지만 북한의 행동이 중국의 국익 전개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북한이 은하 3호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하자, 미국은 조지 워싱턴 핵항공모함을 서해로 보내 북한을 압박했다. 일반적으로 항공모함을 보내게 되면 항공모함과 F18 같은 함재기들만 출동하는 것이 아니고 해상에는 이지스함 등의 수상함, 해저에는 핵잠수함, 공중에는 전자정찰기와 대잠 초계기 등 거의 모든 항공력과 해군력이 따라 붙는다. 중국은 북한의 행동 때문에 중국 동해안과 중국 앞바다가 미국의 군사작전과 정찰에 노출되는 것에 히스테리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중국 동해안은 중국의 경제와 중요한 공업시설 등이 밀집된 곳이다. 그야말로 중국의 국력이 집중된 곳이다. 북한의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 등으로 인해 미국이 개입하는 것에 극도로 예민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차기 목표는 미국이 중국 동부로부터 2000㎞ 이내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것이고, 일본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센카쿠열도를 손아귀에 넣는 것이다. 이미 그 목표를 향해 랴오닝 항공모함을 취역시켰고,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중국의 이런 해양전략은 갑자기 마련된 것이 아니다. 이미 1970년대부터 시작되어 남중국해의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해 공군력과 해군력을 꾸준히 증강시켜 왔다. 1970년대는 지금처럼 경제력이 강한 중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동중국해는 물론 저멀리 남중국해에 해·공군력을 투입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급속한 경제력 신장과 함께 엄청난 국방예산을 첨단 수상함, 잠수함, 전투기 획득에 투입하여 이제는 상당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미국의 태평양 군사력과 일본의 해·공군력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의 해양력은 더욱 빠른 속도로 증강될 것이다. 이에 맞서 일본은 미·일동맹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잠수함 전력을 강화하고 있다. 1970년대에 만들어진 일본의 전통적인 잠수함 전력체계인 16척 체제를 22척 체제로 만들어 중국 견제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일본의 잠수함들은 이미 스텔스 잠수함으로 변환되고 있다. 중국의 수상함정이나 잠수함들이 추적하려고 해도 음파를 흡수하는 흡음 타일들이 잠수함 외부 전체를 뒤덮고 있어 여의치 않다. 이런 동북아 정세 변환에 대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첫째, 선택과 집중의 국방력 개선사업에 나서야 한다. 군사력에서 앞선 중국과 일본에 맞서는 가장 효과적인 선택과 집중은 잠수함 전력의 증강과 미사일 전력에 가장 우선점을 두는 것이다. 이 전략은 북한에 대응하는 데도 유효하다. 두 번째로는 외교역량 강화에 국력을 모아야 한다. 군사력만으로 나라를 지킬 수는 없다. 한국이 한반도 주변국가들인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과 동북아 평화 프로세스라는 큰 담론을 바탕으로 주도적인 소통의 메커니즘을 다져 나간다면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으로 볼 때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비전을 갖는 게 중요하다. 한국전쟁이 종료된 지 60년이 지나면서 한국도 그렇지만 중국도 그때와는 전혀 다른 국가의 모습으로 등장한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의 60년은 한국이 중심국가가 되어 동북아 평화와 번영을 창출하는 꿈을 실현해 나가야 하겠다.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④한강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④한강

    >>청계천:거꾸로 흐르는 역수(逆水)가 서울 풍수의 핵심 서울은 하천의 도시다. 서울 바닥에는 35개의 하천이 흐른다. 큰 하천은 강(江)이요, 작은 하천은 내(川)다. 한강이 모든 하천의 본류이자 유일한 강이며 나머지 청계천, 중랑천, 홍제천, 불광천, 양재천, 안양천, 탄천, 고덕천, 성내천 등이 한강의 지류인 하천이다. 하천의 발원지는 대부분 북한산, 도봉산, 남산, 관악산이다. 2000년 이전에는 한강을 제외한 34개 하천의 31%가 복개돼 생명을 잃었다. 2005년 10월 청계천 복원을 계기로 19개 하천 복원 계획이 세워져 지금까지 15개의 하천이 되살아났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아직도 절반가량의 하천이 청계고가를 뜯어내고 복개도로의 배 속을 갈랐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누워 있다. 빛과 바람이 끊기면서 광합성 활동이 정지된 지하 세계에 남아 있다. 정도전의 북악주산설(北岳主山說)에 의한 한양 풍수의 핵심은 북악을 주산으로 목멱산(남산)이 내명당(內明堂)을 이루는 혈(穴) 자리에 경복궁을 짓는다는 계획이었다. 도읍 중심부에 개천(청계천)이 흐르고 외명당(外明堂)을 이루는 목멱산과 관악산 사이에 한강이 흐르도록 설계했다. 청계천을 내수(內水), 한강을 외수(外水)라고 불렀다. 서울을 관통하는 두 개의 하천, 한강과 청계천은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본류인 한강은 태백에서 발원해 황해로 흘러가지만 지류인 청계천은 역으로 북악에서 발원해 사대문 중심부를 흐르고서 중랑천을 거쳐 한강으로 빠져나간다. 그래서 청계천을 역수(逆水)라고 한다. 풍수에서 ‘세상만사는 순(順)해야 하나 지리(地理)는 역(逆)해야 한다’는 이치 그대로다. 풍수에 따르면 거꾸로 흐르는 청계천의 역기(逆氣)가 사대문 안을 조선 도읍터로 600년 세월을 버티게 한 ‘힘’이라고 풀이한다. >>한강의 섬과 나루:여의도 등 10여개 크고 작은 섬들 물길 따라… 뚝섬, 잠실(잠실도), 여의도, 난지도가 대표적 하중도(河中島)였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300년 전 강원도를 여행하고 나서 “홍수가 나서 산이 무너지면 한강으로 흘러들어 한강의 깊이가 점점 얕아진다”라고 기록했다. 한강을 따라 흘러들어 온 모래와 흙은 자연 제방과 삼각주 섬을 형성했다. 한강변 지명에 섬 도(島)와 나루 진(津) 자가 많이 들어 있는 이유다. 눈에 보이는 밤섬, 노들섬, 선유도를 하중도의 전부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불과 60년 전만 해도 한강에는 뚝섬, 잠실도, 여의도, 난지도 같은 큰 섬을 비롯해 석도, 부리도, 저자도, 선유도 같은 크고 작은 10여개의 섬들이 그림처럼 떠 있었다. 광나루(광진)부터 뚝섬, 이촌, 노량진, 양화진(합정)까지 은빛 백사장으로 이어져 강(江)수욕을 즐기던 자연 휴양지였다. 뽕나무가 숲을 이룬 잠실은 대대적인 매립공사가 이뤄진 1971년 이전에는 강북 쪽에 근접해 있었다. 지금은 내륙의 인공호가 돼 버린 석촌호수는 한강의 물줄기가 이곳으로 흘렀던 유일한 증거로 남았다. 난지도는 이름처럼 꽃섬이었지만 쓰레기매립장으로 둔갑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동호대교 아래 저자도는 정선의 그림에 등장하는 경승지였으며 얼음을 채빙하는 벌빙꾼이 살았다. ‘신선이 노닌다’는 선유도는 정수장이 되었다가 공원으로 돌아왔다. 1968년 한강제방과 여의도를 짓는 골재 채취로 파괴된 밤섬은 자연의 치유력으로 기적처럼 되살아나 철새도래지가 됐다. 지금은 서강대교를 머리에 이고 있다. 조선시대 한양은 전국의 재물이 모이는 수운(水運)의 중심지였다. 한강 중 한양을 감싸고 흐르는 강을 경강(京江)이라고 불렀는데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쳐 경강상인들이 용산과 마포 그리고 서강 나루를 주름잡았다. 두모포(두무개)와 뚝섬은 땔나무의 집산지였다. 송파나루에는 쌀과 지방 특산품 등이 몰렸다. 고려시대 한강은 사평도(沙平渡) 또는 사리진(沙里津)이라고 불릴 정도로 모래 천지였다. 광나루, 뚝섬, 난지도 등이 퇴적 사면이며 백사장이었다. 한강 나루를 이루는 이촌은 사평리(沙坪里)라고도 불렸고 광나루 둔치는 서울의 마지막 강수욕장이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선거 구호가 난무했던 1959년 대통령 선거 유세장에 20만 인파가 구름 떼처럼 몰린 곳이 한강백사장이었다. 한강제방이 축조되기 전 경원선(지금의 용산~성북 간 전철) 철길 바로 옆 지금의 동부이촌동에서 흑석동까지가 바로 그곳이다. 이때 강물은 흑석동~노량진 언덕에 붙어 가늘게 흐르고 있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10만, 15만명의 인파가 강수욕을 즐겼다. 겨울이면 천연 얼음 스케이트장이 제공됐다. 60년 전 한강 풍경이다. >>3차례 한강 개발:개발독재시대의 비극 3차례의 한강 개발 사업은 한강의 쓰임새와 풍광을 바꿨다. 지도를 다시 그려야 했다. 강변은 콘크리트 호안과 도로가 됐으며 강수욕을 즐기던 모래밭은 매립용 모래로 쓰였다. 한강은 ‘강물’이 주가 아니라 ‘강변’이 주가 되는 이상한 강이 됐다. 손이나 발을 담글 수 없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 변했다. 일차적인 원인은 홍수와의 전쟁 때문이었다. 한강 상류에 댐이 없고, 제방이 없던 시절 물난리는 최악의 재앙이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용산, 뚝섬, 광진, 여의도, 잠실, 압구정동, 신사동, 반포, 잠원이 잠겼다. 이때 몽촌토성과 암사동 유적지가 발견됐다. 한강은 자원이 아닌 극복의 대상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한강철교 폭파에서 보았듯이 군사정권은 한강을 피란 시간 확보 대책용으로 여겼다. 1967년 김현옥 서울시장이 급조한 ‘한강 개발 3개년 계획’에 따라 강변을 메워 제방을 쌓았고, 제방 위에 강변도로가 건설되고, 여의도가 물에 잠기지 않도록 윤중제가 건설되고, 잠실이 내륙이 됐다. 택지 개발과 도로 건설을 목적으로 한강을 파괴한 것이다. 서울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대비용으로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진행된 ‘한강종합개발계획’에 따라 2개의 수중보(잠실보와 신곡보)와 올림픽대로, 한강둔치공원이 들어섰다. 두 번의 공사를 거친 이후 한강은 본모습을 잃었다. 풍광은 사라졌다. 혹자는 ‘빠질까 봐 겁나는 강’ ‘거대한 콘크리트 호수’라고 깎아내린다. 개발독재시대의 즉흥적인 개발이 빚은 비극이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는 2001년 펴낸 ‘한강의 어제와 오늘’에서 1982년 착공한 한강종합개발사업을 “말끔하게 정리된 한강의 모습이 보기에 좋을지 모르나 자연미의 상실과 함께 한강 본래의 생태계는 엄청난 타격을 받고 말았다.…한강종합개발사업은 한강 자연 하천의 모습을 앗아갔으며 생명 서식지 교란으로 한강 생태계를 크게 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서울 도심 속에서 한강 생태계가 갖는 기능과 역할은 경제 가치로는 평가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하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2007년 오세훈 시장이 내건 ‘한강 르네상스’도 구호만 요란했을 뿐 저수 제방 탈피, 호안 콘크리트 철거라는 한강 복원의 핵심에는 손이 미치지 않았다. ‘유람선과 요트가 떠다니는 한강’이라는 서구식 만화경에 매달려 본질에 접근하지 못했다. >>한강 복원:도시고속도로 울타리를 걷어내자 동서로 뻗은 두 개의 도시고속도로가 거대한 철책선처럼 한강을 남과 북으로 갈라놓고 있다. 강은 도시와 유리된 채 따로 흐른다. 서울은 남과 북으로 인위적으로 절단됐으며 서울 사람은 강북 사람, 강남 사람으로 나뉘었다. 양쪽은 다리로만 통행한다. 자전거길과 산책길이 부분적으로 열렸지만 강북 사람은 강북 쪽으로, 강남 사람은 강남 쪽에서 다닐 뿐이다. ‘한강의 남북 절단’에서 ‘한반도의 분단’이 떠올려진다. 환경학자들은 두 도로를 일반도로로 바꿔서 건널목과 신호등을 놓아 사람들이 자유롭게 건너다닐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버스전용차선을 놓거나 전차를 놓는 방법도 제시됐다. 한강은 사람들을 위해 심장(잠실)과 내장(여의도)을 아파트 택지로 내놓았다. 두 개의 보(洑)가 목젖과 다리를 각각 누르고 있고, 29개의 한강 다리가 포박하고, 고층 아파트 숲이 태양과 바람을 가로막고 있다. 양팔과 두 발은 올림픽대로와 강변도로가 돼 꼼짝달싹 못하지만 묵묵히 흐를 뿐이다. 이제 한강을 풀어줘야 한다. 한강은 대한민국과 서울을 대표하는 이미지다. 지난해 서울 시민 1000명에게 서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니 37%가 한강을 꼽았다고 한다. 남산타워(35%)와 경복궁(25%)이 뒤를 이었다. 외국인에게도 ‘한강의 기적’은 한국과 한국의 경제성장을 대표한다. 우리는 60년 전 아름다운 섬과 백사장이 있었던 시절의 한강을 잠시 잊고 있다. 다리 위에서, 배 위에서, 자전거 위에서, 산책로에서 바라보는 강이 아니라 손발을 담글 수 있는 강이 필요하다. 사람이 자유롭게 다가갈 수 있는 진정한 한강 복원이 이뤄져야 서울 소통, 한민족 통합도 가능하다. 서울이 세계 최고의 관광 휴양 도시로 발돋움하는 건 덤이다. 파괴된 밤섬이 20년 만에 기적처럼 스스로 살아난 것이 그 예언이다. joo@seoul.co.kr
  • 첫 여성 전투비행사 김경오씨, 국민훈장 동백장

    첫 여성 전투비행사 김경오씨, 국민훈장 동백장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전투비행사가 국민훈장을 받는다. 2일 제18회 여성주간 기념식에서 김경오(84) 극동지역 여성항공연맹 총재가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는다. 건국 이후 여성으로서는 처음 조종간을 잡은 김 총재는 한국전쟁에 공군 조종사로 참전해 공훈을 세웠다. 1956년 전역 후에도 국제여류비행사협회, 국제항공연맹을 통한 민간외교와 국위 선양으로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깨는 데 기여했다. 특히 정부에 육해공군 사관학교의 여성 생도 입교 허용을 건의해 실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금도 대한민국항공회 명예총재, 한국여성항공협회 명예회장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美하원, 한반도 평화통일 기원 결의안 추진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연방 하원의원 4명이 정전 60주년을 맞아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제출한 것으로 28일(현지시간) 알려졌다. 민주당의 찰스 랭글, 존 코니어스, 공화당의 샘 존슨, 하워드 코블 하원의원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촉구하기 위한 결의안’을 지난 25일 발의했다. 한국전 정전 60주년인 7월 27일을 전후해 하원 본회의를 통과시키는 게 목표다. 이들 4명의 의원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5월 초 미국 방문 당시 의회에서 상·하원 합동연설을 할 때 한 명씩 호명해 동료 의원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은 바 있다. 이들은 이번 결의안에서 의회가 한국전쟁의 역사적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1950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에서 봉사하고 희생한 미군과 동맹국 군인들에게 감사하고 미국이 한반도 평화와 번영에 기여해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궁극적으로 평화와 통일로 이끌 대화를 재개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국제법을 지키고 핵확산을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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