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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만·김일성 승용차 나란히 전시

    이승만·김일성 승용차 나란히 전시

    10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개관 20주년을 맞아 전시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캐딜락 승용차를 둘러보고 있다. 이 전 대통령의 의전 차량은 1956년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기증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방탄 차량이다. 멀리 보이는 전시 차량은 김일성의 리무진으로 1948년 스탈린에게 선물받았으며 한국전쟁 당시 국군 6사단이 청천강변에서 노획한 것이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 상업성 넘어선 만화, 한국을 말하다

    상업성 넘어선 만화, 한국을 말하다

    “인물을 너무 많이 배치하면 이야기가 산만해질 수 있고, 너무 적게 하면 이야기의 맥락이 끊어져요. 그 적당한 간격을 찾아 캐릭터를 배치해야 합니다. 사건도 마찬가지예요.” ‘만화공장’을 운영하는 만화가들은 이른바 문하생이라 부르는 만화가 지망생들을 고용해 창작 과정을 분화한다. 이야기 작가와 계약을 맺어 줄거리를 짜고, 문하생에게는 일종의 기능공 역할이 주어진다. 이때 만화가는 일종의 감독이 되는 셈이다. 최열 미술평론가는 이런 제작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홀로 창작에 매진하는 이들을 ‘작가주의 만화가’라고 불렀다. “창작의 양이 적으니 눈길을 끌자면 작품의 수준을 높이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퇴르’(소신에 따라 작품을 만드는 작가)라는 헌사를 받은 로베르 브레송, 앨프리드 히치콕, 존 포드 등 상업자본의 틀에서 벗어난 감독들이 그랬던 것처럼. 독창적인 작화와 철학적 텍스트로 ‘만화가들의 만화가’로 불리는 박흥용(53) 화백은 대표적인 국내 작가주의 만화가다. 상업의 영역이 아닌 예술의 영역에서 만화의 미학에 초점을 맞춰 왔다. 그는 데뷔작 ‘돌개바람’(1981년)부터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1995년), ‘영년’(2013년)에 이르기까지 30편 가까운 만화를 통해 30여년간 만화의 미학을 탐구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 아르코미술관은 이런 박흥용을 ‘2014년 대표 작가’로 선정해 오는 8월 3일까지 전시회를 이어 간다. 만화가로선 고우영 화백의 전시 이후 두 번째다. ‘펜 아래 운율, 길 위의 서사’전에서는 펜 끝에서 흘러나온 선을 통해 한국적 정서와 문학·사회·철학적 깊이를 읽을 수 있다. 제1전시실에는 1980~1990년대 초반의 사회상이 담긴 작품들이 아카이브 형태로 놓였다. 제2전시실에선 최근작 ‘영년’의 인물 드로잉 과정부터 8분짜리 영상 작업을 볼 수 있다. 미발표작인 ‘6일 천하’도 처음 공개됐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사람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스스로 행복해지려는 의지를 품었다. 바로 그 낙원을 찾는 과정이 내 만화의 소재”라고 힘줘 말했다. 예컨대 2010년 이준익 감독이 동명 영화로 제작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는 조선시대 서자 출신 검객 이몽학과 견자가 등장한다. 그런데 시대, 계급, 환경에서 벗어나려는 전형적 남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몽학이 혁명을 통해 세상을 뒤엎으려는 반면 견자는 “달은 구름과 똑같이 하늘에 떠 있어도 바람에 밀리지 않는다”며 스스로 수행에 매진한다. 이몽학이 세상을 향해 칼을 겨눈다면, 견자는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눈 셈이다. 이 밖에 ‘무인도‘(1984년)나 한국전쟁 직후를 시대 배경으로 어느 마을 사람들의 피란 과정과 공동체를 되짚어 본 ‘영년’은 현실 세계를 사유할 수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은 거예요. 어떤 종류나 장르의 공부를 하다 보면 나 같은 생각을 품은 사람이 이미 있더군요. 그 이야기를 재해석해 보니 내 생각을 그 위에 올려놔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작가의 만화는 한때 정부에 의해 강제로 연재가 중단되기도 했다. 작가는 “평생 만화에 헌신한 모든 작가들을 존경한다”며 “내가 원하는 ‘낙원’과 독자들의 ‘낙원’ 사이에서 끝없이 고뇌하겠다”고 말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명인·명물을 찾아서] 해안로 따라 작가의 산책길 4.3㎞

    [명인·명물을 찾아서] 해안로 따라 작가의 산책길 4.3㎞

    제주 서귀포에는 이중섭미술관과 함께 해안도로와 골목길을 따라 걸으면서 다채로운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지붕 없는 미술관’이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추진한 마을 미술 프로젝트의 하나로 2012년 들어선 작가의 산책길(유토피아로)은 샛기정공원~칠십리시공원~천지연로~자구리공원~소암로~부두로~이중섭거리~중앙로를 거쳐 다시 샛기정공원으로 돌아오는 4.3㎞ 코스. 주변 환경이나 풍광에 알맞게 숲, 집, 바다, 길 등 4개 주제로 나눠 각각 특별한 공간이 연출돼 있다. 샛기정공원에서 칠십리시공원으로 이어지는 숲 공간에는 돌담 조형물, 말라 죽은 나무나 돌 등을 이용해 만든 말 가족 조형물이 자리 잡고 있다. 자구리해안공원에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서귀포에 피란 와 살던 천재 화가 이중섭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가로 7m, 세로 3.1m 크기의 브론즈로 실감 나게 재현해 놓았다. 유토피아로 조성사업에는 작가 250여명이 참여했다. 작품은 모두 43점이다. 총감독을 맡았던 김해곤씨는 “불로초를 구하러 서귀포에 온 진시황의 사신 서복의 전설과 무병장수의 별인 남극노인성, 이중섭이 서귀포에서 꿈꾼 행복한 가족 등 다양한 이야기가 산책로에 들어선 작품에 녹아 있다”고 말했다. 올해 작가의 산책길 일대에는 예술작품이 더 들어선다. 서귀포시는 6억원을 투입해 도내 작가와 국내외 유명 작가의 작품 10여점을 추가 설치할 예정이다. 스토리텔링, 영상 콘텐츠를 담은 작가의 산책길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도 개발 중이다. 개발 중인 앱은 작가의 산책길 내에 있는 마을 미술 프로젝트 작품 영상, 작품 해설, 주변 관광 정보(요금, 주차, 대중교통, 음식, 숙박 등) 등을 담을 계획이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된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명인·명물을 찾아서] 서귀포 이중섭 미술관

    [명인·명물을 찾아서] 서귀포 이중섭 미술관

    천재 화가 이중섭과 서귀포. 이중섭(1916~1956)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4 후퇴 때 고향인 평남 평원군을 떠나 부산에 잠시 머물다가 제주 서귀포로 피란을 왔다. 서귀포 바다 섶섬이 보이는 초가집 한 평 남짓한 셋방에서 부인과 두 아들을 데리고 고달픈 피란살이를 했다. 1년여의 피란 생활을 마치고 그해 12월 이중섭은 서귀포를 떠났다. 하지만 서귀포는 이중섭과의 소중한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97년 그가 살았던 옛 삼일극장 일대를 ‘이중섭거리’로 이름 짓고 이중섭이 세 들어 살던 초가집을 복원했다. 2002년 11월에는 그가 피란살이를 했던 초가집 바로 옆에 이중섭미술관을 세웠다. 문을 연 지 13년째를 맞는 이중섭미술관은 이제 서귀포를 대표하는 문화 명소로 자리 잡았다. 개관 당시 미술 애호가들이 ‘섶섬이 보이는 풍경’, ‘파도와 물고기’, 은지화인 ‘가족’, ‘물고기 아이들’ 등 이중섭 원화 8점을 흔쾌히 내놨다. 이듬해에도 ‘파란 게와 어린이’란 작품을 기증받았다. 가난하고 절박한 피란 시절이었지만 서귀포에서 이중섭은 이상 세계를 발견해 작품에 몰두했다. 전쟁이란 암울한 현실과는 무관한 남국의 평화로움을 담은 ‘서귀포의 환상’과 부인과 두 아이를 데리고 달구지를 타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나는 이중섭 가족의 모습을 기록한 ‘길 떠나는 가족’ 등을 그렸다. 2009년 이중섭미술관은 10억원을 들여 ‘선착장을 내려다본 풍경‘과 ‘꽃과 아이들’ 등 그의 원화 작품 2점을 구입했다. 규모가 작은 지역 미술관이 예산을 마련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서귀포시와 시민들은 이중섭과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해 흔쾌히 지원했다. 2012년에 은지화 1점을 추가 구입했고 지난해 은지화 2점을 기증받아 이중섭의 원작 14점을 전시 중이다. 2012년 11월에는 일본에 거주 중인 이중섭의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94·한국명 이남덕)가 서귀포를 직접 찾아와 이중섭의 유품인 팔레트를 기증했다. 야마모토는 이중섭으로부터 사랑의 징표로 받았던 팔레트를 70여년간 고이 간직하다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서귀포시민들을 위해 기꺼이 내놓았다. 요즘 이중섭미술관은 제주 올레 6코스가 지나가면서 문화 올레꾼들의 발길이 넘쳐 난다. 올해 들어 벌써 10여만명이 미술관을 찾았고, 미술관 바로 아래 이중섭이 살았던 초가집에도 그의 서귀포 행적을 엿보려는 관람객이 줄을 잇는다. 미술관은 올해 관람객이 2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또 국내 최초로 화가의 이름이 붙여진 이중섭거리에는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등 그의 작품을 형상화한 조형물 등이 설치돼 거리에서도 그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다. 이중섭미술관 인근에서 주말마다 펼쳐지는 서귀포문화예술디자인시장에도 올해 들어 4만명이 찾았다. 문화예술디자인시장에서는 지역의 작가와 동아리, 시민이 손수 만든 목공예품, 도자기, 퀼트공예품, 천연염색, 한지공예품 등을 전시 판매하고 은지화와 탁본 체험도 할 수 있어 인기다. 청년 작가들에게 창작공간을 제공하는 이중섭미술관 창작 스튜디오도 해마다 전국에서 희망자가 넘친다. 이중섭거리 카페 바농에서는 제주 올레의 상징인 간세 인형을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다. 이중섭의 사랑과 서귀포 피란 시절 등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도 제작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일본 영화제작사인 우쓰마사는 지난해 일본과 한국에서 영화 ‘이중섭의 아내’(감독 사카이 미쓰코)를 촬영했다. 부부는 이중섭이 도쿄의 미술학교에서 유학할 때 만나 194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결혼했다. 야마모토가 직접 출연해 피란 시절 살았던 초가와 인근에 조성된 ‘이중섭 문화거리’, 이중섭 작품의 중심 무대였던 서귀포 바닷가 등에서 촬영이 이뤄졌다. 일본에서 시사회를 연 뒤 올해 개봉될 예정이다. 전은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는 “이중섭과의 소중한 인연을 놓치지 않으려는 시민들의 이중섭 사랑 열기가 대단하다”며 “서귀포 칠십리 아름다운 바다와 문화 예술을 함께 즐기려는 문화 올레꾼들의 명소로 해마다 관람객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아이젠하워의 ‘롤렉스 시계’ 경매…무려 10억원

    아이젠하워의 ‘롤렉스 시계’ 경매…무려 10억원

    역대 제작된 롤렉스 중 가장 중요하다고 평가받는 시계가 경매에 나온다. 최근 미국 회사 PR 경매는 과거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착용한 롤렉스 시계가 오는 9월 경매에 나올 예정이라고 밝혔다. 지난 1951년 스위스 롤렉스사가 제작한 이 시계는 정확히 이 회사의 15만 째 제품이다. 기념비적인 이 시계는 당시 나토(NATO)군 최고사령관을 지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1969)에게 기증됐다. 이유는 당시 아이젠하워가 전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최고의 전쟁 영웅이었기 때문이다.지금으로 부터 70년 전인 1944년 6월 6일 연합군 최고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 장군은 독일 치하에 있던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을 감행해 성공시킨다. 바로 제 2차 세계대전 승리의 결정적 계기가 된 작전명 ‘오버 로드’(Operation Overlord)로 알려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다. 이후 아이젠하워는 미 육군참모총장과 나토군 최고사령관을 거쳐 1952년 미국의 제34대 대통령에 올랐다. 특히 아이젠하워는 우리나라하고도 인연이 깊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 장군의 참모 출신인 그는 대통령 당선 직후인 1952년 12월 한국을 방문했으며 이듬해 7월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도 한국전쟁을 휴전으로 마무리했다. 이번에 경매에 나온 롤렉스 시계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재임시 공식 초상화와 1952년 라이프 잡지와의 사진 촬영시 실제로 착용했던 것이다. 이 시계는 사후 유언에 따라 절친한 육군 동료에게 넘겨진 후 30년 전 그의 미망인이 유명한 백악관 전문 수집가에게 판 것이다. PR 경매 부회장 바비 리빙스턴은 “이제까지 만들어진 롤렉스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시계” 라면서 “대략 100만 달러(10억 2000만원) 이상에 경매될 것으로 추산된다”고 평가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부고] 2차대전 암호병 활약 마지막 나바호 인디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해병대에서 해독 불가능한 암호 개발에 크게 이바지한 나바호 인디언의 마지막 생존자 체스터 네즈가 4일(현지시간) 사망했다. 93세. 고인은 구전으로 전해온 부족 고유의 언어를 전쟁용 암호로 고안한 나바호 인디언 29명 가운데 한 명으로 2차대전이 끝난 후에는 한국전쟁에 참가하기도 했다. 고인과 동료들은 1942년 5월 미 해병대에 합류해 군의 대령을 ‘은 독수리’, 잠수함을 ‘쇠 물고기’라고 칭하는 등 특유의 표현으로 암호를 만들어냈다. 나바호족 말에 전쟁 용어와 일치하는 단어가 없어 항공기는 ‘새’로, 폭격기는 ‘새끼를 밴 새’로 암호에 활용되기도 했다. 이후 나바호 인디언 약 400명이 전장을 다니며 암호를 전파했다. 이들의 활약상은 미국 정부가 기밀을 해제한 1968년까지 비밀에 묻혀 있었으며 네즈 역시 20년 넘게 침묵을 지켰다. 고인은 지난해 “일본군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고도 암호를 풀지 못했다는 것이 매우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유명 영화감독인 우위썬(吳宇森)이 2002년 니컬러스 케이지 주연의 ‘윈드토커’로 영화화했다. 이기철 기자 chuli@seoul.co.kr
  • [TV 하이라이트]

    ■현충일 특집 다큐멘터리 백년의 유산(KBS1 밤 7시 30분) 구한말 일제에 맞선 1대 수당 이남규 선생, 2대 유재 이충구 선생,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3대 평주 이승복 선생, 한국전쟁에 해병대 장교로 참전한 4대 이장원 소위…. 현충원에는 이들 4대가 안장돼 있다. 구한말부터 한국전쟁까지 국난이 있을 때마다 기꺼이 목숨을 바친 수당 선생 가문의 이야기를 통해 현충일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 ■나 혼자 산다(MBC 밤 11시 20분) 배우 김광규가 같은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는 친구이자 배우 류승수와 함께 바이크 도전에 나선다. ‘상남자’로 변신한 광규는 바이크 헬멧을 쓰고 바람과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상쾌한 라이딩을 즐긴다. 한편 가수 육중완은 자신의 안식처 옥탑방에서 이른 여름 맞이에 돌입한다. 친구를 초대해 수박 먹기 게임을 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평상 꾸미기에 나선다. ■제로 다크 서티(OBS 밤 11시 10분) 2012년 개봉한 미국의 스릴러 영화. 9·11테러 그 이후 단 하나의 타깃을 잡기 위해 싸워야만 했던 10년간의 추적이 마침내 공개된다. CIA 요원 마야는 순수한 열정과 원칙에 따라 작전에 임하지만, 매번 타깃에 대한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는 상황에 좌절한다. 어느 날 유일한 단서를 발견한 마야는 동료와 함께 거래를 시도하다가 테러리스트들의 함정에 빠지고 마는데….
  • 고지전 ‘애록고지’ 숨은 뜻 ‘KOREA’에 있다?

    고지전 ‘애록고지’ 숨은 뜻 ‘KOREA’에 있다?

    고지전 ‘애록고지’ 숨은 뜻 ‘KOREA’에 있다? 6일 현충일을 맞아 영화 ‘고지전’이 특선영화로 방영된 가운데 영화에 등장하는 ‘애록고지’에 네티즌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 영화는 휴전협상의 시작과 함께 모든 전쟁이 고지전으로 돌입한 한국전쟁 마지막 2년간의 전쟁을 담은 작품이다.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애국 선열과 국군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며, 현충일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영화이다. 2011년 개봉한 ‘고지전’은 100억의 투자한 대작답게 실감나는 전쟁과 전투신이 보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고수, 신하균, 이제훈, 이다윗 등 배우들의 열연으로 주목을 받았다. 영화에는 ‘애록고지’라는 지역이 등장하는데 이는 ‘KOREA’를 거꾸로 읽은 가상의 지역이다. 실제로는 한국전쟁 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백마고지’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네티즌들은 “고지전 애록고지 뜻 재밌네”, “고지전 애록고지 그런 뜻이었구나”, “고지전 애록고지 가상의 지역이라고 이미 나왔는데”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꽁꽁 숨어버린 문정왕후 어보

    꽁꽁 숨어버린 문정왕후 어보

    한국전쟁 당시 미군 병사가 몰래 가져가 미국 박물관에 소장 중인 조선시대 문정왕후 어보는 못 돌아오는 것인가, 안 돌아오는 것인가. 3일 문화재계와 교민사회에 따르면 문정왕후 어보를 소장 중인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박물관(LACMA)은 지난해 9월 프레드 골드스틴 수석 부관장이 어보의 반환 의사를 표시하며 60여년 만의 반환을 일단락짓는 듯했다. 하지만 사건은 미 수사당국의 전격적인 어보 압수와 박물관 측의 법적 대응이 이어지면서 끝을 알 수 없는 교착상태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중종의 둘째 왕비인 문정왕후의 어보는 거북 모양 손잡이가 달린 금장 도장이다. 1951년 미군이 종묘에서 불법으로 훔쳐간 40여 과의 인장 가운데서도 가치가 높은 문화재로 꼽힌다. LACMA 측은 도난품인지 모르고 2000년 경매를 통해 문정왕후 어보를 구입했다고 밝혔고, 지난해 9월 반환을 요구하며 박물관을 찾은 혜문 스님 일행에게 “조속한 시일 안에 일정과 방식 등을 (한국 정부와) 논의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보는 지난 4월 오바마 미 대통령의 방한 때 대한제국 국새 등과 함께 돌아오지 못했다. 수사당국인 미 국토안보수사국(HSI)은 “복잡한 법률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만 밝힌 상태다. 복수의 현지 관계자에 따르면 수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HSI는 지난해 9월 말 LACMA에 전시 중이던 문정왕후 어보를 전격 압수했다. 혜문 스님 일행이 박물관을 방문해 반환을 약속받고 나서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서다. 이에 LACMA는 3만 쪽에 이르는 법리 검토서를 사법당국에 제출해 몰수에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HSI가 몰수 과정에서 LACMA 직원에 대한 사법 처리나 벌금형 등을 거론한 것도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다는 것이다. 한 문화재계 인사는 “LACMA가 단단히 감정이 상한 것으로 보인다”며 “법리 검토를 마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라고 전했다. HSI는 지난해 5월 문화재청의 수사 의뢰를 받으며 수사에 착수한 상태였다. 문화재청도 LACMA와 어보의 반환을 놓고 밀고 당기는 물밑 협상을 벌여 왔다. 이 과정에서 박물관 측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영구 임대 방식의 반환이 검토되기도 했다. 신미양요 당시 미 해병대에 약탈됐다가 2007년 장기임대 형식으로 반환된 ‘어재연 장군기’의 사례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그러나 시민단체의 반환운동이 드세지면서 협상은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HSI는 LACMA의 어보 구입 과정을 문제 삼으며 수사를 확대했다. LACMA에 어보를 판매한 사람은 국내에도 잘 알려진 LA의 한 고미술품 수집가. 미 사법당국은 문정왕후 어보는 물론 이 수집가가 소장하고 있는 현종 어보까지 압수했다. 사건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어보의 반환은 물론 향후 미국에 있는 국보·보물급 문화재의 반환 협상도 악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한 박물관 관계자는 “LACMA는 한국인 큐레이터를 고용할 만큼 한국 문화재에 큰 관심을 나타냈던 곳”이라며 “이번 사건으로 미국에 있는 대부분의 박물관이 유통 경로가 불분명한 한국 문화재들을 전시실에서 치워 수장고에 감출 것”이라고 우려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World 특파원 블로그] 미국인에게 추모는 일상이었다

    [World 특파원 블로그] 미국인에게 추모는 일상이었다

    “집 근처에 전쟁 영웅 등을 기리는 국립묘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답니다.” 미국 최대 공휴일로 꼽히는 ‘메모리얼 데이’(현충일)인 26일 오후(현지시간) 버지니아주 알링턴 국립묘지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만난 한 가족의 가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면서 알링턴 국립묘지에 있는 할아버지 묘를 찾는 일은 가족의 일상이 됐다고 했다. 수많은 인파를 따라 들어선 알링턴 국립묘지는 입구에서부터 장미꽃과 가족사진 등으로 둘러싸인 묘비들로 가득했다. 주로 가족 단위로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넓은 묘역 사이를 거닐며 사진을 찍고 영웅들을 기렸다. 국립묘지 관리소 관계자는 “무료 입장이라서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평소보다 방문객들이 훨씬 많이 왔다”며 “특히 올해는 알링턴 국립묘지가 문을 연 지 150주년 되는 해라서 더욱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알링턴 국립묘지에는 독립전쟁부터 제1·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이라크전쟁 등 미 건국 이후 각종 전쟁에서 사망한 병사들과 대통령, 우주비행사 등 국민 영웅들까지 40만명 이상이 잠들어 있다. 이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은 곳은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 가족 묘다. 케네디 전 대통령의 이름과 부인 재클린 케네디 이름이 새겨져 있는 석판형 묘비와 그 뒤편에서 타오르는 ‘영원의 불꽃’을 보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비탈길을 따라 걸으니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무명 용사의 묘’가 나타났다. 이곳에는 두 번의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등에서 전사한 신원 미상의 병사들이 매장돼 있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 묘는 지하에 있어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오는 순간 옆에 있는 작은 벤치가 눈에 들어왔다. ‘한국전쟁 명상의 벤치’라고 명명된 벤치는 큰 나무 앞에 혼자 덩그라니 놓여 있어 쓸쓸해 보였다. 등을 대는 쪽에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미국인들을 기억하며’라고 새겨져 있었다. 지나가는 방문객에게 벤치에 대해 물었더니 “이곳에 한국전쟁 기념물이 있는지 몰랐다. 더 잘 보이는 곳에 두면 좋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한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오전 이곳에서 열린 메모리얼 데이 행사에 참석, 한국전쟁에서 실종됐다가 지난해 12월 유해로 귀환한 조지프 갠트 중사와 클래라 갠트(96) 부부의 ‘러브 스토리’<서울신문 2013년 12월 23일자>를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클래라는 63년간 수절하며 남편을 기다리다 고향으로 돌아온 남편의 유해를 눈물로 맞이했다. 글 사진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사상전향 강요 받다 옥중 사망… 국가가 배상해야”

    군사정권 시절 사상전향을 강요받다 옥중에서 사망한 비전향 장기수들에게 국가가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는 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5부(부장 이성구)는 사상전향 제도에 의해 갖은 가혹행위를 당한 끝에 사망한 희생자 4명의 유족이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총 5억 900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고 22일 밝혔다. 재판부는 “수형자들의 사상적 판단에 대한 표현을 강제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불법 행위”라면서 “정부는 희생자와 유족들이 입은 정신적 고통을 금전적으로나마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사상전향 제도는 일제의 독립운동 탄압에서 비롯됐으나 한국전쟁 이후에는 좌익수에게 물리적 폭력을 동원해 사상을 바꾸도록 하는 악법으로 변질됐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지역색(하)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지역색(하)

    ●이중도시 서울, 북촌·남촌에서 강북·강남으로 양분화 조선 내내 사대문 안 북촌과 남촌의 양촌 체제가 공고했다. 그러나 대한제국기 고종이 중국의 천자나 일본 천황과 같은 황제에 오르는 이른바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선언하고서 북촌 체제의 중심인 경복궁을 버리고 서촌에 위치한 경운궁(덕수궁)으로 정궁을 옮겨 가면서 상황이 변했다. 건국 500년 만에 나라의 중심이 백악(북악)을 중심으로 한 북촌에서 종로를 넘고, 청계천을 건너 서울시청 쪽으로 이전한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 이러한 정치권력의 공간이동은 이후 식민지 시기와 한국전쟁,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조선시대에는 없던 태평로를 서울의 경제 중심지로 만들었다. 1926년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경복궁 안에 건립돼 정치권력은 북촌으로 회귀했지만, 자본주의의 꽃인 경제권력은 태평로에 남았다. 확장된 경제권력이 1970년대 한강을 넘어 강남과 여의도를 향해 중심이동하기 전까지. 강남으로의 팽창과 더불어 서울은 2000년 전 한성백제의 수도 한강 이남으로 수도를 옮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와대는 강북에 남았지만, 자본주의 권력의 원천인 경제자본과 대의기관인 국회가 강을 건너가 버렸기 때문이다. 조선의 서울이 강북 사대문 안이었다면, 대한민국의 서울은 강남이 됐다. 사대문을 남북 체제로 나누는 경계의 역할을 하던 개천(청계천)이 복개되면서 남·북촌이 하나로 통합되는가 했더니 급기야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남과 강북으로 양분돼 버린 것이다. 서울의 남북 경계선이 청계천에서 한강으로 옮겨 간 셈이다. 도시사학 분야에서 ‘이중 도시’(Dual City)의 개념은 식민지를 경험한 도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박찬승(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식민지 도시는 토착 집단에 대한 외래 집단의 지배 공간이었고 양자의 문화적 이질성은 사회적, 공간적 격리로 나타났다. 대체로 토착민들의 자생적 주거지는 전통적·전근대적 성격을 띠었고, 식민권력에 의해 개발된 새로운 주거지는 근대적·서구적 성격을 띠는 것이 일반적이다. 식민지 권력은 외래 식민집단의 주거지를 토착민들의 열악한 주거공간과 분리시켜 근대적이고 서구적인 주거지로 만들어 식민권력의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고 문명에 의한 지배의 정당성을 선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서울의 양분 정치적 기획의 산물인가, 체제경쟁의 산물인가 조선시대 한양도성이 북악 아래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자리를 잡은 북촌, 낙산 아래 동촌, 인왕산 아래 서촌 그리고 남산 아래 남촌과 청계천변 중촌이 서로 아우르는 모습을 보였다면 식민 시기 경성은 일제의 의도적인 정치적 기획의 산물로서 남·북촌 체제로 양분됐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동·서·남·북촌을 중심으로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사람들이 어울린 사색붕당(四色朋黨)이 식민지 사관의 혐의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다. 다른 풀이도 있다. 안창모(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 교수는 “청계천을 품에 안고 내사산으로 둘러싸인 인구 10만명을 수용하는 계획도시로 출발한 한양이 600여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한강을 품에 안고 외사산으로 둘러싸인 인구 1000만명의 대도시로 성장했다. 외견상 인구는 100배 이상 증가했고, 면적도 30배 이상 확대됐다. 600년 시차를 가진 조선의 한양과 한국의 서울은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존재했다”고 말했다. 현재의 서울은 계획됐다기보다는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거치면서 급증하는 인구를 수용하려는 방편으로 확장됐고 결과를 추인하는 방향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시대적 상황이 도시의 물리적 성장과 변화 배경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남북 분단과 강남 개발은 서로 얽혀 있다. 비록 도시화와 산업화의 결과이지만 1976년 건설된 잠수교로 말미암아 한강은 서해 뱃길이 끊어지면서 자연 울타리가 됐다. 유사시 30만~40만명이 대피할 수 있는 요새화 차원에서 뚫린 3개의 남산터널과 정부청사의 과천이전 등은 한국전쟁과 남북 분단이 서울의 도시구조 변화에 남긴 대수술 자국이다. 경부고속도로와 한남대교(제3한강교)의 건설로 강남이 개발돼 현대 서울의 모습이 한강을 중심으로 강북과 강남 두 개의 도시로 나뉜 것도 결국은 남북 체제경쟁의 산물이다. ●일제강점기 서울은 어떻게 분열됐을까 서울은 식민시기 어떤 분열과정을 거쳤을까. 일본인의 서울 진출과 일본인 거류지의 형성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답이 보인다. 일본공사관은 1880년 서대문 밖 천연동 청수관에 처음 자리를 잡았다. 임오군란 때 소실되자 1884년 교동 박영효 저택에 공사관을 지어 사대문 깊숙이 진출했으나 같은 해 갑신정변 와중에 또 타버렸다. 1885년 남산 아래 예장동으로 옮긴 뒤부터 식민지배 권력의 본거지가 됐다. 남산과 일본을 잇는 역사의 끈은 질기고도 질겼다. 일본 사신이 묵었던 왜관(동평관)이 조선 초 자리 잡았고, 임진왜란 때 왜군이 7년 동안 진지를 구축한 왜장대가 있었다. 개항기 조선과 대한제국 조정은 일본공사관을 사대문 안에 들이지 않으려고 애썼고, 사대문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개천을 건너지 못하도록 했다. 삼강오륜에서 부부유별(夫婦有別) 따지듯 북남유별(北南有別)을 따졌지만, 결과는 남북 역전으로 나타났다. 남촌은 식민지 조선의 새로운 메인스트리트였다. 조선 신궁(남산식물원)이 일본 정신을 상징했고, 통감부(서울애니메이션센터)와 헌병사령부(남산한옥마을)가 무력통치를 상징했다. 일본인 거주 지역인 충무로, 진고개 일대는 본정통(本町通)이라고 하여 조선의 유일한 동서 간 대로인 종로를 대신했다. 일제는 황토마루(黃土峴)를 광화문통, 구리개(을지로)를 황금정(黃町), 명동을 명치정(明治町), 소공동을 장곡천정(長谷川町), 다방골(茶洞)을 다옥정(茶屋町)으로 멋대로 바꿔 버렸다. 남촌에는 조선은행(한국은행)과 경성우체국(중앙우체국)이 들어서고 미쓰코시백화점(신세계백화점)과 히라타(平田) 등 대형 유통업체가 진출해 상권을 장악했다. 2~4층의 현대식 상점 진열대에는 일제와 서구 외제 상품이 휘황찬란한 전등불 아래 진열됐다. 도로는 포장되고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식재됐다. 광고탑과 마네킹, 네온사인이 불야성을 이뤘다. 본정통은 식민지 서울이 아니라 도쿄를 여행하는 듯했다. 지금의 강남 격이다. 한국인이 상권을 쥐고 있던 종로통은 상대적으로 낙후됐다. 1935년 시인 임화는 ‘다시 네거리에서’라는 시에서 “번화로운 거리여/내 고향 종로여/웬일인가/너는 죽었는가/모르는 사람에게 팔렸는가”라고 외쳤다. 별건곤 1930년 6월호에서 김화산은 “달리는 차, 매연, 여자의 스커트, 자욱한 연애, 주머니 속의 1전짜리 동전, 비애, 주점, 여자에 대한 증오, 정거장, 잡다한 사상을 가진 군중, 쇼윈도, 밤의 샹들리에와 카페의 홍수, 길에 버려진 영화광고지…”라면서 남촌의 화려함을 묘사했다. 당시 경성은 전차 120여대, 자동차 250여대(관용차와 자가용 제외), 승합차 70대, 버스 40대가 뒤섞여 달리는 혼잡한 대도시였다. 식민지 통치권력과 외국 자본에 의해 서울 사람은 서울의 객이 돼 버렸다. 1936년 행정구역 확대에 따라 경기도 고양군과 시흥군, 김포군이 서울로 각각 편입됐다. 고양군 용강면(오늘의 공덕동, 아현동)과 연희면(신촌), 은평면(홍제동), 숭인면(성북동, 청량리), 한지면(이태원, 서빙고)이 서울 땅이 됐다. 시흥군 영등포와 노량진, 상도동이 서울에 포함됐다. 서울의 팽창은 인구 집중과 더불어 지역 분화를 재촉했다. 동소문 일대 주택지대를 문화촌이라고 했고, 광희문 밖 신당동에는 달동네가 형성됐다. 정동 일대에는 서양인촌이, 용산 일대에는 공업촌, 서울역과 봉래동 일대에는 노동촌, 다동·청진동·관철동 일대에는 기생촌 등 특수촌이 형성됐다. 홍제동, 돈암동, 아현동에는 경성부가 운영하는 토막 수용 시설이, 종로와 본정통, 명치정, 장곡천정에는 다방과 카페, 영화관 같은 유흥업소가 밀집했고, 쌍림동에는 유곽이 있었다. ●서울·지방 나누듯 서울도 신분 따라 거주지 나눠져 전우용은 ‘서울은 깊다’에서 “서울(사대문)이라는 작은 공간 안에서 오촌(동·서·남·북·중촌)과 양대(윗대·아랫대), 자내(성밖 거주지)와 오강(한강변 거주지) 지역의 문화가 달랐다. 18~19세기 양반문화만 놓고 보아도 동서남북 사촌이 다 달랐고, 그들 사이에는 쉬 해소될 수 없는 차별의식과 적대감이 가로놓여 있었다”고 분석했다. 서울은 조선 500년 내내 유일한 도시였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한양이라는 도시와 나머지 지방으로 나눠졌다. 중엽 이후 서울과 지방의 인적 교류가 막히면서 경인(京人)과 향인(鄕人)의 차이가 벌어졌다. 지방 출신이 벼슬길에 오르는 것조차 어려웠다. 말씨와 문체가 다르다는 이유로 시골 선비는 무시되기 일쑤였다. 영조 대 이후 지방 출신을 과거급제자에 할당할 정도였다. 심지어 고종 때 서울내기 군관이 시골뜨기 예조좌랑(교육부 사무관급)을 멸시하고 구타하는 하극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라가 서울과 지방으로 나눠졌듯 서울도 나눠졌다. 궁궐 주변인 북촌과 동촌, 서촌에는 고관대작과 그들의 시중을 드는 아전, 겸인배(집사)들이 살았다. 남산 아래에는 쇠락한 양반이나 무반이 거주했고, 인사동과 청계천 주변에는 역관이나 의관, 화원 같은 중인들이 중촌을 이뤘다. 상민은 윗대나 아랫대 혹은 사대문 밖 자내, 오강에 터전을 잡았다. 거주 지역에 신분과 지위, 직업 정보가 새겨졌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능청스러운 유머 익살과 과장 속 통렬한 풍자

    능청스러운 유머 익살과 과장 속 통렬한 풍자

    “일본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가 그러더군요. 한 명의 작가는 기존 작품에 대한 절반의 존경과 절반의 회의가 있을 때 탄생한다고요. 기존 작품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아쉬움과 문제의식을 함께 품고 있었어요. 그래서 회의주의자로 남느니 내가 한번 써보자고 한 거죠.” 첫 번째 소설집 ‘시티버스투어를 탈취하라’(창비)를 펴낸 최민석(37) 작가는 엄숙함과 진지함이 주류를 이루는 국내 문학계에서 독특한 위치에 서 있다. 문단의 ‘구라파’(성석제, 박민규, 천명관, 이기호) 작가들에 비견될 만큼 능청과 유머로 직조해내는 이야기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호쾌하게 질주한다. 안산의 가발공장으로 돈 벌러 온 키르기스스탄 전사의 후예가 사장의 악행에 반발, 동료 외국인 노동자들과 서울시티버스를 탈취해 청와대로 돌진하는가 하면(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보초를 서던 북한군 장교 리혁수가 과음으로 졸다 남쪽으로 넘어져 엉겁결에 귀순하고 남한에서 국회의원으로 출세하는(국가란 무엇인가) 식이다. 그가 등단한 2010년부터 올해 초까지 쓴 7편의 단편들은 유치하다, 허무맹랑하다고만 치부될 수 없다. 익살과 과장 속에 단단한 심지가 박혀 있는 통렬한 사회 풍자와 결기 때문이다. 인물과 소재들은 외국인 노동자, 탈북자, 외계인, 치매 노인 등 무거운 것들이다. 그는 이 무거운 글감들을 유쾌하게 주물거리고 뚝심 있게 밀어붙여 ‘21세기형 해학과 풍자’를 만들어낸다. ‘B급’, ‘사이드’임을 자처하지만 작가 스스로는 순문학에서 허용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부단히 검열(?)한다고. 그는 “신동엽이 섹드립(야한 농담)을 날릴 때 사람들이 불쾌해하지 않는 선과 인격적 모독이 아닌 경계를 잘 지키듯 소설의 품격이 떨어지지 않도록 늘 신경 쓰고 있다”고 했다. “겉에 설탕을 발라놔도 안에 앙꼬는 있어야죠(웃음). 스스로 세운 원칙은 있어요. 문장의 품위는 잃지 말자. 최소한의 서사성은 확보하자. 하나의 주제는 품고 있자는 거죠.” 2010년 1월까지 국제구호단체에서 일하다 같은 해 창비신인소설상으로 데뷔한 그는 2012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다. 관심사는 예술계 전방위로 뻗쳐 있다. 2009년 결성한 밴드 ‘시와 바람’의 보컬리스트이자 인터넷 문학 라디오 ‘문학의 소리’ DJ로도 활동 중이다. 만화와 영화로 서사를 익혀 왔고 지금도 일주일에 2~3편씩 영화를 섭렵한 덕분인지 그의 소설은 이미지가 명징하다. 표제작 ‘시티투어버스’는 영화 판권으로 팔려 작가가 직접 시나리오 작업에도 나설 예정이다. “야구선수로 치면 단편은 투수가 한 이닝에 올라 중간계투를 던지는 것이라면, 장편은 선발로 올라가 내가 이 게임을 소화할 수 있겠다는 확신으로 임하는 것”이라는 그는 오는 8월에는 세 번째 장편 ‘풍의 역사’(민음사)를 발표한다. 1930년대부터 ‘서태지와 아이들’이 출현한 1990년대 후반. 허풍이 심해 허풍으로 불리는 이풍과 허구로 불리는 아들 이구, 허언으로 불리는 손자 이언 등 3대가 한국전쟁, 베트남전, 10·26 사태 등 한국 등 동아시아 근·현대사에 개입하는 이야기라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한 방이 살아 있는 너스레 한판이 또 펼쳐질지 주목된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읽어라, 청춘] 최인훈 ‘광장’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읽어라, 청춘] 최인훈 ‘광장’

    “개인의 밀실과 광장이 맞뚫렸던 시절에, 사람은 속은 편했다. 광장만이 있고 밀실이 없었던 중들과 임금들의 시절에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 밀실과 광장이 갈라지던 날부터 괴로움이 비롯됐다. 그 속에 목숨을 묻고 싶은 광장을 끝내 찾지 못할 때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물의 정체는 갈등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어서 이명준의 이 독백은 이명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이명준은 어떻게 했을까. 분명한 것은 적어도 그가 전후의 파편화된 현실을 그대로 추인하는 선택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광장이 집단적 삶, 사회적 삶을 상징하고 밀실이 개인적인 삶, 실존적 삶을 상징한다면 ‘광장 없는 밀실’(남한)과 ‘밀실 없는 광장’(북한)은 1950년대 한반도에 존재한 두 자화상이었다. 이명준은 이러한 상황을 자포자기하는 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제3의 선택을 한다. 작가가 한 언론사 인터뷰에서 “4·19는 세월을 어떻게 산 것인가에 대한 국민의 의사 표현으로, 광장을 쓰게 한 추동력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듯이 이 작품은 4·19혁명 후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독재에 대한 저항에서 탈출구를 분명하게 발견하지 못한 시대의식이 반영된 작품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6·25 한국전쟁 전후 시기다. 1948년쯤 철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이명준은 남한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죽고 철저한 공산주의자인 아버지 이형도는 월북한 상태였다. 공산주의자 아버지와 달리 이데올로기에 무관심한 그였지만 그가 현실에서 대면하는 것은 ‘모두의 것이어야 할 꽃을 꺾어다 저희 집 꽃병에 꽂구’, ‘똥오줌에 쓰레기만 더미로 쌓여 있는 광장’이다. ‘필요한 약탈과 사기만 끝나면 광장은 텅 비어 죽는 곳’이 남한이다. 더구나 아버지가 대남 비난 방송에 자주 나온다는 이유로 치안 당국자들에게 고문을 받으며 개인의 자유를 보장받으리라는 기대는 무너진다. 밀실의 보루였던 윤애와의 사랑마저 실패로 돌아간다. 이후 이명준이 이상적인 사회를 기대하며 간 북한도 다르지 않다. 이명준은 북한에서 기자로 활동하지만 획일화된 기사내용만을 강요받을 뿐이다. 이명준이 보기에 ‘광장에는 꼭두각시뿐 사람이 없는’, ‘공문과 명령된 혁명’만 있어서 ‘광장에는 플래카드와 구호가 있을 뿐’이었다. ‘명준이 스스로 사람임을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녀를 안을 때뿐’이었지만 이데올로기의 대립에서 촉발한 전쟁은 은혜를 죽음으로 끌고 갔다. 밀실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을 잃은 후 그는 결국 중립국행을 선택한다. 그러나 동중국 바다를 지날 때 윤혜와 딸을 떠올리며 바닷물에 몸을 던진다. 이명준의 선택에 대해 논의가 다양할 수 있는데, 작가가 여섯 번에 걸쳐 개작한 ‘광장’의 변화를 살펴보면 이 작품을 감상하는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갈매기에 대한 상징과 결말부의 변화다. ‘바다를 본다. 큰 새와 꼬마 새는 바다를 향해 미끄러지듯 내려오고 있다. 바다. 그녀들이 마음껏 날아다니는 광장을 명준은 처음 알아본다’며 중립국으로 가는 이명준의 뒤를 쫒는 갈매기 두 마리를 이명준이 사랑한 여자 은혜와 둘 사이의 딸로 표상한다. 또한 이 작품을 발표한 ‘새벽’ 지에서는 명준이 ‘떨어진 모양이었다’라고 표현함으로써 그의 죽음을 삶의 끝으로 보았지만, 개작을 통해 나온 ‘민음사판’과 ‘문학과 지성사판’은 ‘다른 데로 가버린 모양이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죽음을 또 다른 삶의 연장으로 암시하고 있다. 이전 판본에서 명준의 죽음은 체제에 의한 희생양이었다면 개작에서는 은혜와의 동일시로 ‘푸른 광장’인 또 다른 삶의 선택이다. 중립국에서도 희망 없음을 깨달은 자의 죽음이 ‘무덤에서 몸을 푼 여자의 용기’에 해당하는 사랑의 행위로 변화한 것이다. ‘밀실만 충만하고 광장은 죽어버린’ 남한에 구토를 느끼고 ‘끝없는 복창만 강요하는’ 북한에서도 안식처를 발견하지 못한 지식인 이명준의 문제의식은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북한의 공산주의 이념에 대해 비판하며 진정한 삶의 행복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이명준이 발견할 수 없었던 제3의 이데올로기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절실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에서 ‘소설의 진행은 문제적 개인이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이라며 ‘개인에게는 이질적이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단순히 존재하고만 있는 현실에서 침울하게 갇혀 있는 개인이 자기 인식에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언급한다. 그런 의미에서 ‘광장’은 이명준이 남과 북의 두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여 사랑하지 못하고 사는 것보다, 이데올로기를 초월해 광장과 밀실의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랑으로 자기인식에 도달하고자 한 여정이다. 이명준이 ‘광장’에서 자기인식에 도달하려 제3의 선택을 했다면 최인훈의 다른 소설에서는 좀 더 확장된 모습을 보여준다. ‘회색인’과 ‘서유기’에서 역사까지 포함하는 사유를 보여주는 독고준으로, ‘구운몽’에서 분열적인 심리상황을 보여주는 독고민으로, ‘화두’에서는 ‘나’를 통해 제국주의자들의 실상과 세계 속의 우리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세계에 대한 인식과 개인의 자유를 소중히 여겼던 청년 이명준은 동중국 바다에서 사라졌지만 어쩌면 그는 작가의 다른 소설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이명준의 변화처럼 독자인 나의 감상은 읽을 때마다 달라졌다. ‘광장’을 처음 읽은 고등학교 시절엔 이 글로 감상문을 써서 상을 받은 기억도 있는데 당시 감상문의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삶을 살아가는 세 가지 방법에 대해 쓰며 이명준을 비판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더 살아보니 선택의 가능성은 무수히 많고 매번 선택의 기준은 달라질 수 있으며 어떤 선택이든 한마디로 규정지을 수 없는 다층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 삶의 순간순간이었다. 그 뒤로 읽은 ‘광장’은 자유주의의 열망을 가진 지식인 청년이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회와 합의점을 찾지 못해 고뇌하는 이야기였다. 이번에 새로 읽으면서 발견한 것은 결국 모든 문제 해결의 도착지는 사랑으로 귀결된다는 메시지였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세상을 떠난 지 54년이 지났다. 54년이 지나는 동안 이명준은 이데올로기의 고뇌를 벗어나 보다 초월적인 사랑을 선택했다. 광장과 밀실이 온전하지 않았던 주인공이 살았던 시절보다 지금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문득 휴대전화로 전달된 선거 홍보문구와 광고문자들을 지우며, 밀실과 광장의 경계가 흐려진 지금을 생각한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밀실’이 이명준이 살았던 그때보다 더 나아졌다고 확언할 수 있을까. 대답에 머뭇거리는 것을 보면 “다만, 나에게 한 뼘의 광장과 한 마리의 벗을 달라”고 말했던 이명준의 말은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팁: 2004년에 시인, 소설가, 평론가와 교수 등을 대상으로 한 한국문학 100년 최고의 소설 설문에서 ‘광장’은 이상의 ‘날개’와 함께 공동 1위로 꼽혔다. 1960년에 발표한 이 작품은 이상의 날개와는 24년의 시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바라보는 비슷한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광장’에서 바다를 ‘푸른 광장’으로 보듯이 ‘날개’의 주인공은 자기 삶에 드리워진 모종의 억압을 끊고자 올라간 옥상에서 몸에 ‘날개’가 돋아난다. 이는 현실과 체제의 종결이자 새로운 희망과 꿈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최인훈의 다른 작품과 더불어 이상의 ‘날개’를 비교하며 읽기를 추천한다.
  • [뉴스 플러스] 휴전 특수임무자 61년만에 유공자로

    서울행정법원 행정7단독 이상덕 판사는 오모(80)씨가 “서울지방보훈청의 국가유공자 요건 비해당 결정을 취소해 달라”며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고 11일 밝혔다. 오씨는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11일 강원 지역에서 특수임무를 수행하다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오씨는 2012년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을 냈지만 임무 수행 중 입은 부상임을 입증할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되자 소송을 제기했다. 이 판사는 “어깨뼈에 있는 반흔은 포탄 파편이나 총탄으로 입은 부상의 흔적이라고 봄이 상당하다”고 판시했다.
  • [독자의 소리] 입양, 신중하게 판단하고 준비해야/방인호 농협경주환경농업교육원 교수

    5월 11일은 입양의 날이다. 입양의 날은 ‘한 가정(1)이 한 아동(1)을 입양해 새로운 가정(1+1)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로 건전한 입양문화 정착 및 국내입양 활성화를 위해 제정됐다. 한국전쟁 이후 가난 때문에 아이들을 해외로 보내는 입양정책이 시작된 이래 우리나라는 고아수출국의 오명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 성장과 함께 입양가정에 대한 가슴 훈훈한 사연들이 소개되면서 우리 사회도 입양에 대한 인식 변화와 관심이 증대됐다. 2012년 통계를 보면 전체 1880명의 입양아동 중 국내입양은 1125명, 해외입양은 755명으로 국내입양의 저변이 크게 확대됐다. 또한 입양 시 법원 허가를 의무화한 입양특례법이 시행되면서 양부모 자격요건과 입양절차 등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이 마련됐다. 입양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입양아동을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으로 양육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춰야 하고 소정의 교육과정도 이수해야 한다. 입양절차도 까다로워져 가정방문 조사, 교육이수, 가정법원 허가 등을 받으려면 출산을 준비하는 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입양을 결심했다가 포기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한번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에게 또다시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큼 신중한 판단과 준비가 필요하다. 입양은 함께 나누는 행복이며 가족이 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편견 없는 시선 속에서 입양아동과 입양부모 모두가 입양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으면 한다. 방인호 농협경주환경농업교육원 교수
  • 조선왕실 옥새 돌아오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

    조선왕실 옥새 돌아오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

    “갑자기 숨이 턱 하고 멈추는 듯했어요. 곧바로 답장을 보냈죠. ‘당신이 내게 역사를 보냈다’고 썼습니다.” 지난해 9월 23일, 그날 일을 떠올리면 김병연(41) 문화재청 국제협력과 주무관은 지금도 얼굴이 상기된다. 미국 국토안보수사국(HSI) 조태국 서울지부장은 김 주무관에게 이메일 한 통을 보냈다. 흐릿한 사진에 담긴 9점의 도장들과 함께 ‘구한말 한국의 문화재가 맞느냐’는 물음이 덧붙어 있었다. ●옥보 ‘황제지보’ 역사책에만 전해지던 것 ‘융희원년존봉도감의궤’ 등 옛 기록을 샅샅이 뒤져 사진과 일일이 대조했다. 며칠 밤을 지새웠다. 도장들은 고종 황제가 자주독립의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만든 국새 ‘황제지보’(1897년)와 고종의 황제 존봉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어보인 ‘수강태황제보’(1907년) 외에 유서지보, 준명지보, 우천하사 등의 왕실 인장으로 확인됐다. “황제지보는 옥으로 만든 ‘옥보’예요. 예전 금으로 만든 국새들과는 다르죠. 옥보는 기록도 없고, 그저 역사책에만 전해지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고종이 만든 국새는 기존 8점에서 9점으로 늘었다. 지난달 25일 방한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손에는 조선과 대한제국에 이르는 국새와 어보, 왕실 인장 등 9점이 들려 있었다. 감정가만 150억원에 이르렀다. 모두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불법 반출한 것들이다. 세간에선 다양한 추측이 떠돌았다. 유네스코 협약이 작용했다거나, 미국과 모종의 협상이 오갔다는 내용이었다.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서 만난 김 주무관은 일련의 추측들을 일축했다. “외국군 점령 당시 이전된 문화재는 ‘사안별 접근’ 방식을 따릅니다. 1970년 맺어진 유네스코 협약은 이전 사건에는 소급 적용되지 않아요. 오바마 대통령의 방한 때 인장을 들여오자는 아이디어도 우리 측이 먼저 냈지요. 약탈 문화재 반환은 늘 상대의 명분을 살려 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번 반환은 지난해 9월 돌아온 우리나라 최초의 미발행 지폐인 ‘호조태환권’ 원판 이후 한·미 공조수사에 의한 두 번째 수확물이다. HSI는 제3국의 테러 자금이 문화재 거래에 유입되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우던 터에 경매에 나온 도장들을 우연찮게 발견했다. 미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 사는 80대 미망인이 내놓은 물건들이었다. 주한미군이던 그녀의 남편은 1950년대 이 도장들을 몰래 국외로 반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美 주한미군 80대 미망인이 경매에 내놓아 HSI로부터 이를 통보받은 문화재청은 다급해졌다. 즉시 경매 회수와 인장 압수를 요청했고 미 법원에 영장 발부를 신청했다. 미 형법인 연방도품법(NSPA)에 따라 법 논리를 펼쳤다. “미국 판례와 형법을 뒤져 수사요청서를 작성하는 데만 수주일이 걸렸어요. 도난 문화재임을 증명하기 위해 관련 내용이 담긴 1950년대 국내 신문기사와 옛 대한제국 문건 등을 몽땅 제출했죠. HSI는 자국민에 대한 형사 처벌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민사소송을 통해 환수하길 원했습니다.” 그해 11월 미 법원이 영장을 발부하자 HSI 수사관들은 미망인으로부터 도장들을 압수했다. 그녀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실명을 공개하지 않고 인장을 기증받았다고 발표했다. ●오바마 방한 일주일 전 특공대 호위 속 도착 그렇게 도장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방한 일정보다 일주일 앞서 서울 광화문의 미 대사관 건물에 특공대(SWAT)의 호위를 받으며 도착했다. 외교관을 꿈꾸던 김 주무관은 환수의 전 과정에 참여했다. 대학시절 프랑스국립도서관을 방문했다가 구석에 처박혀 있던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를 보고 국새와 어보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됐다. 환수 업무를 맡기 위해 7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문화재청으로 자원해 이동했다. 그는 “약탈이나 불법 반출된 문화재라도 감정을 앞세워 되찾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면 상대국의 박물관은 우리 문화재를 수장고에 감춰 버린다”면서 “물밑에서 협상을 통해 명분을 살려 찾아오는 게 최선의 대안”이라고 말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유병언 출판기념회에 박진영, 전양자도 참석”…유병언 회장 늘어놓은 무용담은?

    “유병언 출판기념회에 박진영, 전양자도 참석”…유병언 회장 늘어놓은 무용담은?

    ‘유병언 출판기념회’ ‘박진영’ ‘전양자’ 유병언 출판기념회에 각국 대사, 연예인 등 수백명이 참석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중앙일보는 1일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이 지난해 1월 말 서울 강남의 유명 호텔에서 각국 대사와 연예인, 사진업 종사자 등 수백 명을 초청해 호화 출판기념회를 열었다고 보도했다. ’아해’라는 예명으로 주로 해외에서 사진전시회를 열어 ‘얼굴 없는 사진작가’로 불렸던 유병언 전 회장은 이 자리에서 얼굴을 처음 공개한 것은 물론 두시간여 동안 인생역정을 설명했다고 한다. 당시 행사에 참석했던 A씨에 따르면 행사는 지난해 1월 25일 열렸다. 유럽 여러 나라의 대사를 비롯한 외교관들, 유병언 전 회장의 조카사위인 JYP엔터테인먼트 대표 박진영씨, 앵커 출신 아나운서 등이 참석했다. 또 유병언 전 회장과 각별한 사이인 것으로 알려진 탤런트 전양자씨도 유병언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던 가수, 탤런트, 아나운서 등은 유병언 전 회장과 유병언 전 회장이 창립한 종교 종파인 기독교복음침례회(일명 ‘구원파’)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A씨는 “사진집은 세계 최고 수준의 고급 서적 전문인 아술린 출판사가 제작했는데 현장에서 수백만원대에 판매했다”며 “시와 사진으로 구성된 시집만 33만원에 샀다”고 말했다. 그는 테이블마다 ‘아해 2012’라고 새겨진 파리의 최고급 드보브에갈레 초콜릿 선물 세트가 놓여 있었다고 전했다. 형태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좋아했다는 ‘피스톨 초콜릿’이었으나 오렌지꽃향이 아닌 다크 초콜릿이었다고 한다. 유병언 전 회장의 차남 혁기씨는 드보브에갈레 뉴욕점의 CEO다. 행사 분위기는 기묘하고 낯설었다고 기억했다. A씨는 “시집은 한국어와 러시아 ·프랑스 등 8~9개 외국어본이 있었다”며 “사회를 본 아나운서가 아해의 시를 낭송한 뒤 각국 대사 부인들이 자기 나라 말로 그 시를 낭송하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기분이 묘했다”고 말했다. 당일 아해는 무대에 올라 장시간 얘기를 했다고 한다. 사진 작품보다는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때 집 옆에 폭탄이 떨어져 이웃들은 다 죽었는데 자기 가족만 불사조같이 살아남았다는 등의 무용담 위주였다고 한다. A씨는 “오대양 얘기는 거론하지 않았다”며 “다만 어떤 사람(세력)이 자기를 죽이려고 음해해서 정권의 탄압을 받았는데 결국은 그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고 전했다. 한편 유병언 전 회장의 장남 대균씨가 운영하는 서울 강남의 몽테크리스토 카페가 들어선 빌딩 21층에는 유병언 전 회장 관련 갤러리가 있다. 이에 대해 또 다른 참석자는 “거기엔 사진 전시회를 열었던 장소와 세계 각국 귀족들과의 관계를 과시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고 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열린세상] 4·16 참사 전과 후/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 교수

    [열린세상] 4·16 참사 전과 후/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 교수

    도대체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국가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우리 사회는 무엇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인가. 나는 진정 잘살고 있는가. 무죄한 300여 생명을 희생양으로 붙잡고 차가운 바닷속으로 속절없이 침몰해 버린 돈벌이 여객선 세월호의 ‘4·16 참사’는 지금 대한민국에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있다. 너는 누구이냐? 너는 왜 사느냐? 형언할 수 없는 참혹한 슬픔과 안타까움, 분노, 자책은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받지 못하고 깊은 상처로 남을 터이다. 그럴 것이고 그래야 한다.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사회와 나의 잘못을 대신하여 억울하고 참혹한 죽음을 당해야 했던 순진무구한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우선 용서를 빌어야 한다. 내가,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하시고 안전하고 정의가 살아있는 나라에서 안식하시기를…. 너무나 죄송하게도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하게 죽은 어린 학생들의 희생을 통해서 비로소 그동안 은폐돼 잘 드러나지 않았던 대한민국 사회의 온갖 고질적인 병폐들과 물적 욕망에 가득 찬 부끄러운 가치관의 혼란상을 비로소 체험적으로 자각하게 됐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줘야 할 국가와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은 엄청난 참사 앞에서 무능했고 의지도 박약했다. 한때 경제발전의 주역이었던 공직자들은 어느새 정치적 낙하산 줄을 타고 자기들끼리 자리와 이권을 나눠 먹는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집단의 모습을 드러냈다. 세월호-청해진해운-유병언 일가-해운조합-해양수산부로 이어지는 이권의 먹이사실과 부패와 비리의 온상이 드러나고 있지만, 이러한 부패 사슬의 독이 섣불리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든 공직사회에 뿌리 깊게 만연해 있음을 확실히 알게 됐다. 이대로 가다간 대한민국은 세월호처럼 침몰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 그리고 우리 모두는 탑승객을 두고 혼자 살겠다고 탈출한 선장처럼 직업윤리에 둔감한 채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자성이 일고 있다. 사람보다 물질과 돈을 추구한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가치관이 어린 목숨의 참혹한 희생을 불렀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에도 한편에서는 희생자 가족들에게 사기를 치거나 피싱 문자 등으로 불법 돈벌이에 나서는 쓰레기 인간군상도 있다. 죄 없는 어린 목숨의 희생을 두고 좌파 우파 편 가르기 하며 비난, 비방, 욕설 공방을 일삼는 멀쩡한 생김새의 정치꾼들은 참으로 염치도 없다. 이것이 세월호 참사를 빚은 대한민국의 현주소이다. 시민의 편에서 권력을 감시해야 할 언론사 기자들은 4·16 참사를 취재 보도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신뢰 위기를 경험해야 했다. 많은 기자가 어느새 권력의 편에서 관급기사를 받아쓰는 데 안주해 있거나 돈벌이가 되는 선정적인 기사를 양산하는 월급쟁이로 전락했음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억울한 희생자의 편에서 선 진실 보도야말로 공정한 언론이 되는 길임을 망각한 많은 언론은 그동안 하던 관행대로 권력과 돈의 친구가 되면서 사실상 공공의 적이 됐다. 4·16 참사 앞에서 진정성 없는 정치권력은 무력했다. 삶과 죽음의 첨예한 경계에 서 있던 희생자 가족들에게 ‘높으신 분이 직접 오셨다’는 식의 생색내기 정치는 모멸감과 분노만 살 뿐이다. 대통령의 연출된 대국민 사과와 사진촬영용 조문은 유가족과 일반 국민의 항의와 반발만 사는 형국이다. 최고 권력집단이라는 청와대 참모진들은 4·16 참사 이전과 달라진 것이 전혀 없다. 우리 자식이 억울하게 죽어가는 판국에 대통령이 언제 어떻게 사과하는 것이 무슨 대수이고, 총리가 사퇴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4·16 참사는 정치권력에 더 근본적이고 진정성 있는 조문을 요구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전쟁은 남북 분단체제를 고착화했고, 5·16쿠데타와 1980년대 말 민주화는 정치체제의 변동을 불렀고, 1997년 IMF 금융위기는 경제체제를 요동치게 했다. 이제 2014년 4·16 세월호 참사는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방치된 악폐들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사람을 위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가치 혁명의 계기를 마련하는 분수령이 되고 있다. 정부, 사회, 개인 모두가 이참에 진정한 가치 혁명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희생자들에게 용서를 비는 진심 어린 조문이 될 것이다.
  • “유병언 출판기념회에 각국 대사, 연예인 등 참석” 관심 집중

    “유병언 출판기념회에 각국 대사, 연예인 등 참석” 관심 집중

    ‘유병언 출판기념회’ 유병언 출판기념회에 각국 대사, 연예인 등 수백명이 참석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중앙일보는 1일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이 지난해 1월 말 서울 강남의 유명 호텔에서 각국 대사와 연예인, 사진업 종사자 등 수백 명을 초청해 호화 출판기념회를 열었다고 보도했다. ’아해’라는 예명으로 주로 해외에서 사진전시회를 열어 ‘얼굴 없는 사진작가’로 불렸던 유병언 전 회장은 이 자리에서 얼굴을 처음 공개한 것은 물론 두시간여 동안 인생역정을 설명했다고 한다. 당시 행사에 참석했던 A씨에 따르면 행사는 지난해 1월 25일 열렸다. 유럽 여러 나라의 대사를 비롯한 외교관들, 유병언 전 회장의 조카사위인 JYP엔터테인먼트 대표 박진영씨, 앵커 출신 아나운서 등이 참석했다. A씨는 “사진집은 세계 최고 수준의 고급 서적 전문인 아술린 출판사가 제작했는데 현장에서 수백만원대에 판매했다”며 “시와 사진으로 구성된 시집만 33만원에 샀다”고 말했다. 그는 테이블마다 ‘아해 2012’라고 새겨진 파리의 최고급 드보브에갈레 초콜릿 선물 세트가 놓여 있었다고 전했다. 형태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좋아했다는 ‘피스톨 초콜릿’이었으나 오렌지꽃향이 아닌 다크 초콜릿이었다고 한다. 유병언 전 회장의 차남 혁기씨는 드보브에갈레 뉴욕점의 CEO다. 행사 분위기는 기묘하고 낯설었다고 기억했다. A씨는 “시집은 한국어와 러시아 ·프랑스 등 8~9개 외국어본이 있었다”며 “사회를 본 아나운서가 아해의 시를 낭송한 뒤 각국 대사 부인들이 자기 나라 말로 그 시를 낭송하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기분이 묘했다”고 말했다. 당일 아해는 무대에 올라 장시간 얘기를 했다고 한다. 사진 작품보다는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때 집 옆에 폭탄이 떨어져 이웃들은 다 죽었는데 자기 가족만 불사조같이 살아남았다는 등의 무용담 위주였다고 한다. A씨는 “오대양 얘기는 거론하지 않았다”며 “다만 어떤 사람(세력)이 자기를 죽이려고 음해해서 정권의 탄압을 받았는데 결국은 그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고 전했다. 한편 유병언 전 회장의 장남 대균씨가 운영하는 서울 강남의 몽테크리스토 카페가 들어선 빌딩 21층에는 유병언 전 회장 관련 갤러리가 있다. 이에 대해 또 다른 참석자는 “거기엔 사진 전시회를 열었던 장소와 세계 각국 귀족들과의 관계를 과시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고 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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