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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근현대사의 산증인 충정아파트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근현대사의 산증인 충정아파트

    이 연재에 충정 아파트를 포함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이 있었다. 한국 도시에 지어진 무지개떡 건축, 즉 주거와 다른 기능이 복합된 건물들을 추적하는 것이 이 연재의 골격이다. 그런데 과연 충정 아파트가 그 기준을 충족하는가? 현재의 충정 아파트는 물론 1층에 상점과 음식점 등이 들어가 있으므로 상가아파트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랬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부터 상가아파트였다는 확실한 기록은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정 아파트를 이 연재에 포함하기로 한 것은 두 가지 이유다. 어쨌건 현재 상가아파트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다. 그다음으로는 충정 아파트가 한국 최초의 아파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최초의 아파트 충정공 민영환 이름 딴 거리정작 설계한 일본인 이름 따 ‘도요다 아파트’로 불리워 ‘최고’, ‘최대’, ‘최장’ 등 뭐든지 1등에 민감한 사회에서 ‘최초’가 예외일 리 없다. 아파트가 하도 많아서 ‘아파트 공화국’으로 불리는 한국 사회가 아닌가. 그러니 ‘최초의 아파트’란 타이틀에 대해서 민감한 것 역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그 타이틀을 가져갈 주인공에 대한 합의는 어느 정도 이루어진 듯하다. 적어도 이에 대한 강력한 반대 의견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다름 아닌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위치한 충정 아파트가 그 주인공이다. 을사보호조약 당시 분사한 충정공 민영환의 이름을 딴 거리에, 게다가 같은 이름이 붙은 건물이다. 그러나 정작 건물을 설계하고 지은 것은 일본인 도요다 다네오(豊田種松)였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의 이름을 따라 ‘도요다 아파트’ 혹은 ‘풍전 아파트’라고 불렸다고 전한다. 한국 최초의 아파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일본의 미쿠니 상사가 조선 주재 일본인 직원들을 위해 지었다고 하는 미쿠니 아파트가 있었다. 심지어 평양에 있었다는 아즈마 아파트까지 이 논쟁에 등장한다. 하지만 회사 직원들을 위한 관사가 아닌 일반 임대용이었다는 점에서 결국 충정 아파트가 우세를 보였다. 주거 연구가인 박철수 서울시립대 교수에 따르면 시기적으로도 1930년에 건립된 충정 아파트가 가장 앞선다. # 영욕의 세월 30년 지상 4층 건립 이후 45년 동포들에 무단 점유 50년 민간인 학살 장소로 한국전쟁 때도 원형 유지 학문적인 논쟁과 별도로 다행스러운 것은, 이 최초의 아파트가 비록 심하게 변형되기는 했으나 21세기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도 원래의 기능을 수행 중이다. 다만 그 과정이 보통의 건물에 비해 너무나 험난하다. 실로 한 건물의 인생역정이라 할 만하다. 존중하는 의미에서 연도별로 소개한다. 1930년 일본인 도요다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지하 1층, 지상 4층, 연면적 1050평의 철근 콘크리트 구조였다. 당시 이 지역은 갑신정변 당시 일본 공사였던 다케조에 이치로의 이름을 따서(!) 다케조에초로 불렸다. 이후 호텔 혹은 어묵 파는 술집이 되었다거나, 동아기업으로 소유권이 넘어갔다는 등의 내력이 전해진다. 1933년에는 같은 죽첨정 3가 구역에서 일제 강점기의 유명한 살인사건이었던 금화장 문화주택지 단두 유아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945년 이후 해외에서 귀국한 동포들에 의해 무단 점유되었다는 설이 있다. 1946년 10월 1일 이 지역의 이름이 충정로로 변경되었다. 민영환은 종로구 공평동에서 순국했는데 왜 이 지역에 그의 이름이 붙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1950년 인민군 재판소가 설치되어 지하실에서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사실은 충정 아파트에 대한 자료라면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온다. 다만 그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도 공통적이다. 추정하자면 그 기간은 서울 함락에서 수복에 이르는 6월 28일에서 9월 28일 사이의 3개월이었을 것이다. 물론 1951년 1·4 후퇴 당시인 1월 4일에서 3월 14일 사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보면 개전 초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정말 인민군 재판소가 여기 있었을까? 그랬다면 이 건물이 당시 우익 인사들이 수용되어 있던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지금의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의 중간 지점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그리고 그 학살설이 사실이라면 서울대병원 학살 사건 등과 더불어 인민군의 서울 점령 기간과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건축사와 전쟁사가 교차하는 중요한 사례로서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하겠다. 이 지역은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였다. 서울역에서 신촌역으로 가는 경의선 충정로 터널이 인민군의 군수창고로 쓰여 미군 전투기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충정 아파트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 것은 바로 한 장의 사진 때문이다. 국방부의 정책 블로그인 ‘NARA’에 따르면 9·28 서울 수복 전날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이 사진은 AP통신의 맥스 데스퍼 기자가 촬영한 것이라고 한다. 미 해병대가 땅속에 숨어 있던 북한 저격병을 백린 연막탄으로 공격하는 장면을 담고 있는 희귀한 사진이다.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배경에 바로 당시의 충정 아파트가 등장한다. 층간의 가로줄과 굴뚝이 선명하다. 옥상에는 옥탑으로 보이는 구조물과 경사지붕 등이 보인다. 충정 아파트의 원형을 보여 주는 자료이면서 동시에 한국전쟁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렇게 전쟁통에도 원형을 유지한 충정 아파트가 오히려 전후에 여러 번의 변형을 겪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한편 미군은 서울 수복 후 이 건물을 수용하여 ‘트레머 호텔’이란 이름을 붙이고 유엔군을 위한 시설로 활용했다. 1961년 한국전쟁 당시 아들 6형제를 모두 잃었다는 김병조라는 사람에게 불하되어 5층이 증축되었고 이름이 ‘코리아 관광호텔’이 되었다. 그러나 김병조는 사기꾼으로 판명되어 구속되었다. 당시 상황을 담은 뉴스 영상도 존재한다. 이후 이 건물은 국세청 등 여러 소유주를 전전했다. 1975년 서울은행 소유가 되면서 이름이 ‘유림 아파트’가 되었다. 이후 다시 주민들에게 소유가 넘어갔다. 다만 유림 아파트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던 시점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도 있다. 1979년 충정로가 8차선으로 확장되면서 건물 전면이 잘려 나갔다. 원래 전면이 계단식 평면으로 된 특이한 건물이었다고 전하나 이 부분이 깨끗하게 일직선으로 잘려져 나갔다. 이 과정에서 52가구 중 19가구 270여평이 헐렸다. 1층 전면의 상가는 어쩌면 이 과정에서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2015년 서울시의 미래 유산 후보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건축물 관리대장에 따르면 현재 충정 아파트의 규모는 김병조에 의한 5층 불법 증축과 도로 확장으로 인한 멸실 부분을 종합하여 지하 1층, 지상 5층이다. 5층은 불법 증축 이후 양성화된 것으로 보인다. 연면적은 3550.41㎡, 즉 1074평이다. 도요다가 지었을 때보다 층은 하나가 더 늘었고 연면적은 24평이 늘었다. 총 41가구이다. 물론 오래된 건물들이 종종 그러하듯이, 이러한 공식 기록이 얼마나 현재 상태와 일치하는지는 정밀 실측과 조사를 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 충정 상가아파트? 식당 등 상가 들어선 1층 인도보다 1m 높아 이례적 지하실 채광 위해 올린 듯 녹색 외관도 본래는 타일 현재의 충정 아파트는 상가아파트다. 만약에 처음부터 그랬다면 한국 최초의 아파트는 바로 상가아파트였다는 사실이 확립된다. 지금의 아파트 문화로 보면 매우 생소하게 들릴 이야기다. 즉, 주거동과 상가동이 분리된 요즘의 통상적인 아파트가 아닌 주거와 상가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요즘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상복합 건물에서 한국의 아파트가 시작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반복해서 이야기하지만 기록이 충분치 않아 단언할 수는 없다. 1층의 경우 현재의 건축물 관리대장에 따르면 일부의 상가를 제외하고는 아직 대부분이 아파트다. 전면이 모두 상가인 것을 감안하면 현실과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뿐 아니라 처음부터 이 부분이 모두 상가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지하실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건립 당시부터 지하층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건축물 관리대장에 따르면 지금도 이 부분은 ‘근린생활시설’(일반음식점)로 되어 있다. 지하실은 어차피 건물이 세워지고 난 다음에는 팔 수도 없다. 환기나 채광 등으로 인해 주거가 들어가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바로 이 지하실의 존재야말로 한국 최초의 아파트는 상가아파트였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충정 아파트는 이야깃거리도 많고 역사적 의미도 깊은 셈이다. 충정 아파트를 찾아가면 제일 처음 눈에 띄는 것이 흔치 않은 녹색의 외관이다. 원래는 타일로 마감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위에 두껍게 페인트가 발라져 있다. 특이한 색상 때문에 멀리서도 눈에 잘 띈다. 건물 앞이 버스 정류장이라 사람들의 왕래도 활발하다. 그런데 건물과 인도가 만나는 부분이 다소 독특하다. 1층은 모두 상가고 아파트로 들어가는 입구가 별도로 있는데 모두 전면에 1m 정도 높이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즉 건물이 일종의 기단 위에 올려져 있는 셈이다. 물론 오래된 건물에서 흔히 보는 방식이기는 하다. 그러나 충정 아파트의 경우는 그 높이가 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상가 입장에서 보면 계단을 올라와 진입하는 것은 매우 불리한 방식이다. 다만 1층이 처음부터 상가가 아니고 주거였다면 그리고 지하실의 환기나 채광을 위한 개구부를 설치하기 위해서 1층을 들어 올렸다면 이해될 수 있는 문제다. 이 역시 건물의 변화 과정을 면밀히 추적해 봐야 풀릴 수 있는 수수께끼다. 나이가 80이 넘었고 풍상을 하도 겪어서 그런지 건물은 매우 낡은 상태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써 놓고도 ‘과연 그래야 할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건물 나이 80이면 역사적으로 보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다. 사실 건물의 나이는 현실적으로는 무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구 상 수많은 오래된 건물들이 이를 보여 준다. 물론 애초에 짓기도 잘 지어야 하겠지만 관리가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이 점에서 건물과 사람은 유사하다. 약골로 태어나도 철저한 자기 관리를 통해 건강하게 오래 사는 사람도 있고, 무쇠 같은 몸을 갖고 있지만 험하게 굴려서 망가뜨리는 사람도 있다.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세계적으로도 긴 편이지만 건물은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런 점에서 충정 아파트는 안타까운 예다.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기는 하지만 이제 이 건물을 제대로 돌봐야 할 때가 되었다. 한국 근현대사의 산증인으로 이만 한 건물도 드물다.
  • [이슈&이슈] ‘부산의 산토리니’ 감천문화마을 지도 강매 논란

    [이슈&이슈] ‘부산의 산토리니’ 감천문화마을 지도 강매 논란

    “단체 관광객은 마을 지도를 구매하지 않으면 입장이 불가합니다.” ‘부산의 산토리니’로 불리며 연간 수백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감천문화마을이 때아닌 ‘마을지도 강매’ 논란에 휩싸였다. ㈔감천문화마을 주민협의회는 지난 1일부터 15명 이상 단체 관광객일 경우 지도를 사지 않으면 마을에 들어올 수 없도록 통제한다. 마을 초입 도로에서는 주민들이 2인 1조로 교통정리를 하면서 단체버스가 도착하면 관광객들에게 마을지도 구매를 강권한다. 단체 관람객은 울며 겨자 먹기로 마을지도를 사야 한다. 16절지 4장 크기의 마을지도 가격은 2000원이다. 1인당 지도 하나씩을 구매하지 않을 경우 마을 주민 해설사의 유료 안내를 받도록 한다. 15명 기준 90분에 10만원이다. 개인 관광객은 마을지도를 사지 않아도 된다. 감천문화마을의 단체 관광객은 지난해 40%가량을 차지했다. 수익금은 주민협의회 운영 기금으로 적립된다. 지난 17일 찾아간 감천문화마을 초입 관광안내소 벽면과 반대편 가로등에는 “알림! 단체 관광객은 지도를 구매하지 않으면 입장이 불가합니다”라고 쓰인 대형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마치 오순도순 사는 주민들이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무언의 항명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국전쟁 전후 형성… 재생사업으로 관광지로 감천문화마을은 한국전쟁 때 태극도 신도 피란민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됐다. 그래서 지금도 ‘태극도마을’이라고도 불린다. 전후 어려운 시절의 애환과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부산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곳이다. 당시 피란민들이 몰리며 산등성이를 따라 하나둘 집이 생기기 시작해 산허리까지 촘촘하게 들어섰다. 조망을 고려해 뒷집이 앞집 지붕보다 높은 곳에 지어지면서 계단식의 독특한 마을 풍경이 탄생했다. 부산시는 2009년 도시재생사업 목적으로 골목 곳곳에 벽화를 그리고 조형물을 설치했다. 칙칙하고 어두웠던 마을은 밝고 산뜻하게 바뀌었다. 재개발·재건축에서 벗어나 도시의 옛 모습을 그대로 두면서도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당시 큰 화젯거리였다. 파스텔톤의 색채, 모든 길이 통하는 골목길, 아름다운 야경 등이 그리스 산토리니와 닮았다고 해서 ‘부산의 산토리니’라는 별명이 붙었다. 소문을 타고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2011년 2만 5000명이던 관광객이 지난해 140만명으로 급증했다. 올해엔 160만명이 찾을 것으로 본다. 문화해설사로 활동하는 주민협의회 김문생 문화예술사업단장은 “평일에는 5000명, 주말이면 1만명이 방문한다”고 귀띔했다. 자연스레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 커피점, 편의점, 기념품 가게 등이 들어서기 시작해 현재 40여곳이 성업 중이다. 주민들도 마을기업을 잇달아 설립해 수익금을 지역 발전에 보탠다. ●세계 3대 우수 교육도시… 年 100만 이상 찾아 이에 힘입어 감천문화마을은 지난달 1일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열린 국제교육도시연합(IAEC) 주최 제14회 세계 총회에서 핀란드 에스포, 스페인 오스피탈레트데요브레가트와 함께 ‘제1회 우수 교육도시상’ 수상 도시로 뽑혔다. 이경훈 사하구청장은 지난달 현지에 가서 성공 사례를 발표했다. 이처럼 보기 드물게 재생사업이 성공하자 일본, 중국 등 해외에서도 관광객이 찾아오는 등 부산의 대표 관광지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부작용도 생기기 시작했다. 관광객들 때문에 조용하던 마을이 시끄럽게 변하고 마을 어귀부터 무질서한 주정차로 주민들의 고통과 불만이 커졌다. 주민 서모(49)씨는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삶의 질이 급격히 떨어지자 참다못한 주민들은 관광객 통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사하구와 주민협의회는 지난 1월 유료화를 추진했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이나 경주 양동마을처럼 입장료를 받아 마을 유지·보수 등에 사용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감천문화마을이 도시재생의 성공 사례라 사람들이 찾는데 입장료를 받으려 한다는 비난이 일면서 사실상 백지화했다. 2009년부터 시작된 감천문화마을 조성 사업에는 국·시비 270억여원이 투입됐다. 한동안 유료화 논란이 잠잠하던 차에 주민들이 최근 단체 관광객 마을지도 구입이라는 카드를 다시 빼 들면서 재점화됐다. 하지만 일각에선 이번 지도 판매는 절차와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최소한 조례를 통한 근거 법령을 마련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손창민 사하구 창조도시기획단장은 “감천문화마을은 관광지나 문화재 지역이 아닌 주민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라 입장료 등을 징수할 수 있는 상위법이 없어 조례 제정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형평성 문제도 불거진다. 적절한 설명도 없이 단체 관람객에게만 지도를 강매하기 때문이다. 관광업계에서는 지도 강매가 사실상 유료화라며 반발한다. 한 여행사 관계자는 “지도 강매는 사실상 입장료를 받는 것”이라며 불만을 나타냈다. 시민 류모(52)씨도 “도시재생사업의 하나로 국고 등의 보조를 받아 조성된 마을이 입장료를 받으면 당초 취지가 퇴색된다”며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단체 관광객에게 주민협의회라는 명목으로 지도를 강매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꼬집었다. 마을지도 판매에 찬성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이날 친구들과 이곳을 찾은 심모(49)씨는 “관광객들로 인해 불편을 겪는 주민들을 생각하면 과하지 않은 선에서 입장료 성격인 마을 지도를 구입하는 데 찬성한다”며 “다만 대부분 외국인인 단체 관광객들에게 지도를 강매하는 것은 호객행위라는 느낌을 줄 수 있으니 방문객 모두에게 마을지도를 판매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민협의회 전순선 부회장은 “단체 관광객들이 마을에 몰려들면서 소음, 교통 체증 등을 유발해 주민들의 고통이 심하다”며 “주민들의 삶도 지키고, 진정성을 갖고 마을을 방문하는 손님도 배려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라며 이해를 구했다. 전문가들은 도시재생사업으로 인해 불편함을 겪게 된 주민들이 변화된 마을 덕분에 체감할 수 있는 복지 혜택이 많아진다면 불만이 줄어들고 상생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조언한다. 주민협의회에서 운영하는 9개 마을기업 수익금 중 일부를 관광객들로 인해 피해를 입는 주민들의 집수리 비용 등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 좋은 사례다. 부산발전연구원 김형균 선임연구원은 “감천문화마을은 서민 관광지 개념인 만큼 관광객들이 이들의 복지를 위해 약간의 입장료를 내는 포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 사진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최고 70년 된 서울의 ‘평양냉면’ 노포(老鋪)

    최고 70년 된 서울의 ‘평양냉면’ 노포(老鋪)

    ‘냉면’의 계절이다. 냉면을 여름 음식으로 착각하지만, 그 기원은 북쪽에서 겨울에 동치미 국물에 메밀국수를 말아 먹은 것이다. 더위를 식힐 음식으로 주목받으면서 냉면은 ‘슴슴한’(심심하다는 뜻의 북한어) 육수와 거친 메밀 면이 조화를 이룬 ‘평양냉면’이 대세가 됐다. 북한 평양 인근에서 냉면집을 하던 식당 주인들이 해방과 6·25 한국전쟁을 거치며 경기 연천과 서울 등에 자리 잡으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여름 음식으로 떠올랐다. 을밀대 등 고향의 맛을 못 잊어 실향민들이 주로 찾는 서울의 대표적인 노포(老鋪)뿐 아니라 그 나름대로 노하우로 냉면의 진화를 이룬 신흥 강자들이 서로 경쟁한다. 인터넷과 SNS를 중심으로 어느 집 냉면이 더 맛있느냐를 설명하느라 치열하다. 평일 점심 때 20~30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다. 더위를 잊게 해줄 시원한 평양냉면의 세계로 빠져보자. 우리 민족이 냉면을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정확히 알 순 없지만 1843년 유만공이 서울 모습을 그린 시집 ‘세시풍속’에 ‘냉면집과 탕반(국밥)집이 길가의 권세를 잡고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또 조선 말기 문신 이유원의 임하필기(1871년)에 ‘순조가 초년(1800년)에 달을 감상하며 냉면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따라서 냉면은 조선시대에는 최소한 한민족과 함께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서울의 평양냉면 노포는 크게 둘로 분류된다. ‘의정부파’와 ‘평양 식당파’다. ‘평양 식당파’의 대표는 누가 뭐래도 ‘우래옥’이다. 평양에서 명월관을 운영하던 장원일씨가 1946년 서울 중구 주교동에 차린 식당이다. 서울 냉면집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암소의 엉덩이살과 다리 안쪽 살을 고아낸 진한 고기 육수가 특징이다. 본래 평양냉면은 꿩 육수에 동치미를 섞지만, 우래옥은 순수 소고기 육수를 고집한다. 육향이 너무 강해서 처음 맛보는 사람은 ‘누린내가 난다’는 표현까지 할 정도이다. 하지만, 담백하고 시원한 고깃국물 육수는 수십 년 미식가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삶은 계란을 얹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대신 채를 썬 배와 백김치가 맛을 잡아준다. 비싸기는 하지만 입에서 살살 녹는 불고기를 먹고 냉면으로 입가심하면 제격이다. 냉면 1만 2000원, 불고기(150g) 3만원. 1984년 서울 장충동에 자리 잡은 ‘평양면옥’은 실향민들이 고향 맛에 가장 가까운 집으로 꼽을 만큼 기본기가 탄탄하다. 평양에서 ‘대동면옥’을 운영하던 김면섭씨가 6·25 한국전쟁 직후 서울로 내려왔다. 다른 일을 하다가 1984년 며느리인 변정숙씨와 함께 장사를 시작한 곳이 평양면옥이다. 정갈하고 맑은 육수가 특징이다. 짭조름하면서 구수하다. 면을 한 입 베어 물면 메밀의 향이 그윽해진다. 냉면과 곁들이는 만두도 맛있다. 돼지고기를 비롯해 두부, 콩나물, 파가 넉넉히 들어 있으며 여자 주먹만 한 크기로 가성비가 뛰어나다는 평가다. 냉면 1만 1000원, 만두 1만 1000원. 서울 마포 을밀대는 평양냉면의 진화를 이룬 집이다. 평안도가 고향인 창업주 김인주씨가 1971년 문을 연 곳으로 평양냉면에 함흥냉면의 장점을 살짝 더했다. 일단 면발이 굵고 차지다. 메밀에 녹말 전분을 섞어서 전통 평양식 면발과 차이가 있다. 또 냉면의 냉(冷)이란 뜻에 가장 걸맞게 얼음이 버적버적한 셔벗 형태의 육수를 내어놓는다. 차진 면이 얼음 육수에 풀리면서 쫄깃함이 더하다. 면을 삶아 얼음물로 담그면 쫄깃해지는 식이다. 또 겉은 바삭하고 안이 촉촉한 녹두전은 별미 중 별미다. 냉면 1만 1000원, 녹두전 8000원. ‘의정부파’로 불리는 을지면옥과 필동면옥은 같은 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4 후퇴 때 남쪽으로 온 평양 출신 김경필 할머니가 1969년 경기 연천에 평양냉면집을 열었다. 김 할머니의 두 딸이 서울에서 냉면집을 차렸는데 그곳이 바로 을지면옥과 필동면옥이다. 그래서 두 집은 냉면의 면과 육수 등의 특징이 같다. 이들의 특징은 고춧가루다. 냉면 위에 투박하게 올라간 고기 고명 위에 파와 고춧가루를 뿌려준다. 이상하게도 심심한 육수와 고춧가루가 잘 어울린다. 고춧가루는 메밀의 냉기를 누그러뜨리고 은근한 매운맛으로 입맛을 돋운다. 두 집 중에서도 을지면옥 손님은 70대 어르신들이다. 을지로 뒷골목의 허름한 건물에 자리한 덕분에 1970년대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해서인 듯하다. 고소하면서도 슴슴한 육수가 최고이며 면의 양도 다른 곳보다 많다. 또 기름기 적당한 편육은 이 집의 특제 소스와 잘 어울린다. 냉면은 1만원, 편육은 1만 8000원.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호국영령 천도법회 19일 봉행

    조계종 군종특별교구는 오는 19일 오전 10시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중앙광장에서 ‘제16회 호국영령 천도법회’를 봉행한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국군과 참전국 장병, 군 복무 중 순직한 호국영령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행사다. 국군불교총신도회가 추진하는 천도재는 천도의식과 추모, 문화행사 등으로 진행된다. 조계종 한국불교전통의례전승원 소속 의전단 스님들이 영가 청혼과 천도의식을 거행한 뒤 호국영령을 추모한다.
  • 제주서 이중섭 탄생 100주년 오페레타 무대 오른다

    제주서 이중섭 탄생 100주년 오페레타 무대 오른다

    화가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제주 서귀포시가 마련한 창작 오페레타 ‘한국의 화공-중섭’이 오는 17일 오후 7시 30분 서귀포 예술의전당 대극장에서 첫선을 보인다. 9월 9, 10일 정식 공연에 앞서 주요 장면만을 선보이는 하이라이트 공연이다. 15일 제주시에 따르면 공모를 통해 작곡 부문은 현석주씨, 대본은 이영애씨의 작품이 선정됐고 연출은 대한민국 오페라 대상 등을 받은 유희문씨가 맡았다. 하이라이트 공연에는 테너 노성훈(이중섭), 소프라노 정혜민(이중섭 부인 마사코), 바리톤 박근표(중섭 친구 구상), 메조소프라노 황은애(중섭 어머니), 소프라노 오능희(마사코 어머니), 이서연(중섭 큰아들)과 백지웅(중섭 작은아들)이 출연한다. 나레이션은 대본가 이영애씨가 맡아 관객들의 이해를 높여준다. 본 공연에서는 더블캐스팅한 테너 이영화(이중섭), 소프라노 박미자(마사코)도 참여한다. 작품 내용은 이중섭의 삶과 가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이중섭이 피난 생활한 서귀포와의 인연을 강조하는 이야기다. 1916년 9월 16일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난 이중섭은 1945년 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95) 여사와 한국에서 결혼했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1951년 1월 서귀포에서 11개월간 피난 생활하며 ‘서귀포의 환상’, ‘바다가 보이는 풍경’, ‘바닷가의 아이들’, ‘섶섬이 보이는 풍경’ 등 4점을 그렸다. 이중섭이 당시 살았던 초가집이 있는 거리는 199년 ‘이중섭 거리’로 지정됐고 인근에는 이중섭미술관이 들어섰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호국 보훈의 달… 외신이 본 한국전쟁 사진전

    호국 보훈의 달… 외신이 본 한국전쟁 사진전

    서울역사박물관이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다음달 17일까지 박물관 1층 로비에서 ‘AP통신이 본 6·25와 서울’ 전시회를 연다. ① 부서진 건물 사이로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는 아현동 일대 ② 유엔기를 달고 있는 참전 군인들 ③ 포탄 더미 사이에서 립스틱을 바르는 여성 등 AP통신 특파원이 포착한 전시 서울 사진들을 선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 55일간 피로 물든 강… 날마다 붉게 번지는 상흔

    55일간 피로 물든 강… 날마다 붉게 번지는 상흔

    1950년 8월, 경북 칠곡은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다. 전투는 낮밤을 가리지 않았고, 남북으로 갈린 젊은이들은 이유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서로를 쏘고 찔렀다. 낙동강은 시퍼런 아가리를 벌려 젊은 꽃넋들을 닥치는 대로 삼켰다. 그렇게 피의 대가로 지켜낸 곳이 칠곡이다. 나라 안에 한국전쟁이 남긴 핏자국으로 얼룩진 곳이 어디 한둘일까만, 낙동강과 그 언저리를 적신 자국은 유난히 붉다. 호국 보훈의 달에 칠곡을 찾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먼저 한국전쟁 당시 상황을 개략적으로나마 짚자. 그래야 칠곡의 여행지들을 이해하기 쉽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일으킨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몰아쳤다. 기습 남침에 허를 찔린 국군은 3일 만에 서울을 내준 데 이어 한 달 만에 국토의 대부분을 잃고 낙동강 아래로 후퇴했다. 남은 곳은 대구와 부산뿐. 두 곳을 잃으면 대한민국도 끝이다. 당시 한미연합군을 지휘하던 월턴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두 지역을 사수하기 위해 ‘낙동강 방어선’(워커 라인)을 구축했다. 낙동강과 그 상류의 산악 지대를 잇는 최후의 방어선이다. 칠곡은 그 ‘낙동강 방어선’의 핵심이었다. ●한국전쟁 가장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 흔적 배수진을 친 곳인 만큼 전투도 치열했다. 그중 가장 처절했던 곳이 칠곡 동북쪽의 다부동이다. 대한민국 전승사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다부동 전투’의 전설은 바로 이때 쓰였다.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꼽히는 ‘다부동 전투’는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55일간 이어졌다. 국군 제1사단이 북한군 3개 사단과 맞서는 동안 북한군 2만 4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승리는 얻었지만, 우리 또한 학도병을 포함해 1만여명이 총탄과 포탄에 스러져 갔다. 그런데 왜 하필 다부동이었을까. 다부동은 대구에서 불과 22㎞ 떨어진 전략 요충지다. 여기가 뚫리면 대구, 부산 함락은 시간문제다. 그러니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온전하지 못할 만큼 처절한 전투가 이어진 것도 당연했다. 이 같은 피의 역사를 기억하는 이라면 다부동을 지날 때 잠시라도 발을 멈추고 흙먼지처럼 스러져간 젊은 꽃넋들을 기릴 일이다. 다부동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조붓한 언덕 위에 전적지가 조성돼 있다. 탱크를 형상화한 기념비가 특히 인상적이다. 기념관 안에 당시 총기류와 수류탄 등이 전시돼 있다. 수량은 많지 않아도 전쟁의 상흔을 엿보기엔 충분하다. ●국내 최대 규모의 명부전 지닌 송림사 다부동 서북쪽은 유학산이다. 골골마다 붉게 물들었다던 격전지다. 산자락 중턱의 팥재휴게소와 그 위쪽의 도봉사에 오르면 일대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절집 담장에 기대 망연히 산하를 굽어보자면 당시의 젊은 넋들이 바람 되어 흐르는 듯하다. 도봉사 진입로가 협소하다. 경사도 급해 오르내릴 때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다부동 동쪽엔 송림사와 가산산성이 있다. 송림사는 국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전탑(보물 제189호)이 있는 절집이다. 다만 현재 보수 공사 중이어서 전탑 기단부에 가림막을 둘러친 게 아쉽다. 국내 최대 규모라는 명부전은 그대로다. 다양한 형태의 건물 벽화가 특히 볼만하다. 가산산성도 격전지 중 하나다. 차로 돌아볼 수 있다. 다시 전쟁의 복판으로 들어가자. 낙동강에서 국군의 저항에 발이 묶인 북한군은 다부동으로 연결되는 통로였던 매원마을에 주둔하게 된다. 매원마을은 광주이씨 집성촌으로, 한때 경주 양동마을, 안동 하회마을과 더불어 ‘영남 3대 반촌’으로 불리던 곳이다. 마을이 최고로 번성했던 1905년엔 무려 400여채에 이르는 기와집들이 언덕을 가득 채웠다고 한다. 한데 북한군이 박곡종택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지경당을 야전병원으로 운영하면서 매원마을도 전쟁의 한복판으로 빨려들고 만다. 미군은 적의 사령부가 있던 박곡종택을 겨냥해 집중 폭격을 퍼부었다. 대부분의 고택이 이때 소실됐다. 한데 신기하게도 포탄이 가려 떨어졌다. 살림집들은 혹독한 피해를 입었지만 재실과 사당은 대부분 화를 면했다. 여태 박곡종택을 지키고 있는 광주이씨 종부 이명숙(74)씨는 “예전엔 담장 안에 잣나무로 지은 건물이 86칸이나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며 “바늘이 떨어져도 어렵지 않게 찾을 만큼 촘촘하게 지은 집이었다는데 이젠 사당과 사당 앞을 지키는 회화나무 그리고 주춧돌 몇 개만 남았다”고 아쉬워했다. 마을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됐다는 해은종택도 여기저기 새로 손본 흔적이 역력하다. 그나마 문이 잠긴 경우가 많아 들여다보기조차 쉽지 않다. 야전병원으로 쓰였던 자경당은 토담이 허물어진 상태다. 다행히 담장 안 건물은 비교적 옛 모습을 잃지 않아 곰삭은 시간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1895년 세워진 가실성당… 전쟁의 포화에 살아남아 매원마을을 지나면 곧 낙동강이다. 이제 옛 왜관철교(현 호국의 다리, 등록문화재 제406호)를 만날 차례다. 1905년 일제가 대륙침략을 목적으로 낙동강 위에 세운 다리다. 개전 이후 속수무책으로 낙동강까지 밀린 한미연합군 측에 가장 시급한 과제는 북한군의 남하를 막는 것이었다. 결국 연합군 지휘부는 낙동강의 모든 교량을 폭파해 적의 도하를 저지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왜관철교 폭파는 미군 제1기병사단에서 맡고 있었다. 그리고 운명의 8월 3일 오후 8시 30분. 마침내 왜관철교가 폭파됐다. 다리 위에 있던 수많은 피란민도 함께 목숨을 잃었다. 이후 국군은 낙동강 전투를 통해 북한군을 괴멸시키면서 북진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종교 시설물이 전쟁의 포화에서 살아남은 건 그나마 다행이다. 낙동강변의 가실성당이 대표적이다. 1895년 세워져 1922~23년 중건된 가톨릭 교회로, 대구 계산성당에 이어 경북 지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성당이다. 당시 야전병원으로 쓰였던 덕에 비교적 온전히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옛 성당 건물도 아름답다. 원래 1928년 ‘왜관성당’으로 지어졌는데, 1952년 함경남도 덕원에 있던 베네딕도회가 북한 정권에 성당을 몰수당한 뒤 칠곡에 자리를 잡으면서 이름도 바뀌었다. 가실성당 맞은편 강 건너엔 노석동 마애불상군(보물 제655호)이 있다. 7세기 후반 통일신라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이다. 일반적으로 본존불과 좌우 협시불 등 삼존불로 구성되는데, 오른쪽 협시보살 옆에 작은 불좌상을 하나 더 배치한 게 특이하다. 글 사진 칠곡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가는 길:낙동강 전적지는 칠곡 곳곳에 흩어져 있다. 지역 안배를 잘해야 효율적으로 둘러볼 수 있다. 중앙고속도로 가산 나들목으로 나오면 유학산이 지척이다. 팥재 휴게소 옆길로 도봉사까지 오르면 유학산과 낙동강 일대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이어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다부동, 송림사, 가산산성 순으로 돌아보면 된다. 다부동 일대를 먼저 보겠다면 중앙고속도로 다부 나들목으로 나와야 한다. 다부동 전적지가 고속도로 나들목 인근에 있다. 옛 왜관철교, 왜관수도원, 매원마을, 가실성당 등은 경부고속도로 왜관 나들목을 이용하는 게 편하다. 노석동 마애불상군은 성주군과 경계지역에 있다. 다른 여행지들과 떨어져 있어 별도로 계획을 짜야 한다. 게다가 도고산 중턱의 외진 곳에 있어 찾아가는 데 시간과 품이 적잖이 든다. →잘 곳:매원마을의 관수재, 풍각댁, 이석고택 등 몇몇 한옥들에서 고택 체험을 할 수 있다. 다만 객실 수가 1~2개로 적은 데다 사랑채를 통째 빌려야 하는 집도 있어 사전 확인이 필수다. 칠곡 문화관광 누리집(tour.chilgok.go.kr) 참조. 도개온천 쪽에도 칠곡도개온천모텔(054-975-4811) 등 숙박업소가 몇 곳 있다.
  • [세종로의 아침] ‘호국’에 대한 짧은 생각들/손원천 문화부 전문기자

    [세종로의 아침] ‘호국’에 대한 짧은 생각들/손원천 문화부 전문기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을 떠날 때 ‘밝은’ 장소를 찾기 마련이다. 예쁘고 아름다운 관광지, 활기 넘치는 축제장 등을 주로 찾아간다. 한데 ‘어두운’ 장소를 돌아보는 여행도 있다. 참사 현장, 전쟁 유적지 등이 주요 대상이다. 이를 ‘다크 투어리즘’이라고 부른다. 여행의 즐거움을 포기하면서까지 어두운 장소를 찾아가는 것엔 분명 이유가 있다. 다시는 불행한 사건이 반복되지 않도록 스스로 다짐하기 위해, 더 나아가 아픔을 공유하고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통한의 장소를 직접 찾는 것이 무엇보다 유효하기 때문일 터다. 그런 점에서 며칠 전 다녀온 경북 칠곡은 ‘다크 투어리즘’의 의미와 목적에 딱 맞는 여행지였다. 칠곡은 예부터 크고 작은 전쟁이 잦았던 곳이다. 낙동강을 끼고 있는 비옥한 도시라 그랬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는 ‘호국의 성지’로 부각됐다. ‘낙동강 전투’ ‘다부동 전투’ 등을 통해 패전의 위기를 딛고 반전의 기틀을 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왠지 찾아가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목에 작은 가시가 걸린 듯한 묘한 거리낌, 근원을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뒷덜미를 낚아채고 있는 듯했다. 국립4·19민주묘지 같은 곳을 찾을 때는 분명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 것이다. 고백하자면 이런 거다. 이런 장소를 찾는 게 어딘가 ‘보수’ ‘우익’ 등의 단어로 상징되는 곳을 찾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이를 자기 검열이라 해도 좋겠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때 전적기념관 등을 방문하는 건 그리 흉이 되지 않는다. 한데 대학생이 되고, 머리가 무거워질수록 호국, 보훈 등의 이름을 내건 곳들을 방문하는 걸 꺼리게 된다. 이렇게 이중적일 수 있나. 시점만 다를 뿐 같은 장소인데 말이다. 원인를 꼽자면 모두의 역사를 마치 제 것인 양 만들려는 이들 탓이 크다. 좌우를 불문하고 이념을 자신들만의 생존 도구로 이용하려는 이들 말이다. 오래전 전북 무주 적상산의 피나물 꽃과 관련된 기사를 쓴 적이 있다. 꽃잎은 샛노란데, 줄기를 자르면 핏물처럼 붉은 액체가 흐른다는 들꽃이다. 당시는 세월호의 비극으로 나라 전체가 슬픔에 빠졌을 때였다. 적상산을 노란빛으로 물들인 꽃들을 보면서 세월호에 휩쓸린 어린 넋들이 생각났고, 그 느낌을 그대로 적었다. 한데 기사에 달린 댓글 몇 개가 가슴을 후벼 팠다. 요약하면 당신 따위가 왜 그 아픔을 운운하느냐는 거다. 세월호의 아픔은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만 공유해야 한다는 독선, 잘 알지 못하는 세계의 사람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이 글 전체에서 읽혔다. 계급을 타파하자고 외치는 이들이 외려 층위 나누기를 즐긴다. 세상엔 흑과 백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뒤에 어른거리는 독선의 그림자를 보는 경우도 흔하다. 따지고 보면 지역을 이용하는 자들보다 이념을 이용하는 자들이 더 나쁘다. 사람 됨됨이를 판단하는 기준이 지역일 수 없듯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건 이념이 아니라 이념에서 비롯된 행동들이다. 그런데 왜 꽃 같은 젊은 넋들의 절규가 담긴 곳을 쭈볏대며 찾아야 하는가. 호국 보훈의 달에 드는 생각이란 게 겨우 이 모양이다.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 anlger@seoul.co.kr
  • 충무로 토박이의 인생 2막 ‘의경 대모’

    충무로 토박이의 인생 2막 ‘의경 대모’

    46년 운영한 한식집엔 영화인들 발길 손자 같은 의경들 챙기는 건 소소한 낙 “명동·충무로 이어져 예전 활기 되찾길” 서울 중구 충무로에서 46년째 한식집을 운영해 온 여주인이 ‘한국 영화사의 산 증인’에서 의경들의 숨은 대모로 변신해 인생 2막을 살고 있다. 8일 중구에 따르면 주인공은 한식집 ‘장독대’를 운영하는 문금순(80)씨다. 중구 토박이인 문씨는 어린 시절부터 어깨너머로 고춘자, 황해 등 만담가들의 악극, 활동사진을 보며 연예계를 지척에서 지켜봤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연예주식회사 경리직원으로 영화계에 발을 담갔다. 당시 사장 임화수씨는 영화제작비에 대해 면세 조치를 따내고 민간자본을 끌어모으는 등 한국 영화 산업의 토대를 닦은 인물이다. 임씨가 영화 수준을 높이기 위해 찾았던 기획자가 바로 문씨의 남편인 차태진 극동흥업영화사 사장이었다. 1959년 화촉을 밝힌 뒤 충무로, 명동 일대에서 셋방살이를 전전하면서도 남편 차씨는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1962), ‘김약국집 딸들’(1964), ‘맨발의 청춘’(1964) 등 한국 영화 대표작 108편을 제작했다. 그야말로 충무로의 전성시대였다. 그러나 TV의 등장으로 영화계가 기울고 1969년 극동흥업영화사가 부도를 맞으며 문씨는 회사 자리에 설렁탕집 설미옥을 열었고 지금의 한식당으로 이어졌다. 지금도 김기덕 감독 등 유명 영화인들이 집에서 담근 된장찌개를 먹기 위해 심심찮게 찾곤 한다. 충무로에 터를 잡고 두 아들과 딸을 키워낸 문씨는 근처 중부경찰서와 인연을 맺고 26년째 의경 어머니회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다. 손자 같은 의경들의 간식거리와 식사를 챙겨 주는 게 문씨의 소소한 낙이다. 문씨는 “충무로가 예전처럼 활기를 되찾으려면 인근 명동과 이어져야 한다”며 “문예인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임대료도 싸게 하고 건물 리모델링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감천마을 ‘교육도시’ 선정 배경

    부산 사하구 감천문화마을이 세계 3대 우수 교육도시에 선정되는 쾌거를 이뤘다. 국제교육도시연합(IAEC)은 최근 감천문화마을과 핀란드 에스포, 스페인 로스피탈레트 데 요브레가트를 ‘제1회 우수 교육도시상’ 수상 도시로 결정했다. 이경훈 사하구청장은 지난 1∼4일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열린 제14회 세계 총회에 참석, 수상과 함께 성공 사례를 발표했다. 국제교육도시연합은 도시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들을 교육적으로 접근해 해결하자는 취지로 1994년 발족했다. 현재 36개국 471개 도시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격년제로 열리는 세계 총회에는 200여개 도시에서 1000여명이 참가했다. 감천문화마을은 세계 45개 도시에서 응모한 57개 사례 가운데 최종적으로 3개 사례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감천문화마을은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됐으며 전후 어려운 시절의 애환과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등 부산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곳이다. 창조적 재생을 통해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이 구청장은 “우수교육도시상 수상은 민관이 힘을 합쳐 이뤄낸 쾌거”라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전사자 유해발굴 알리는 ‘혜리 목소리’

    전사자 유해발굴 알리는 ‘혜리 목소리’

    영어판도 만들어 재외 한인에게 소개 “유해 빠른 귀환 위해 힘 모아 주세요” MBC TV ‘진짜사나이’와 케이블TV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던 걸그룹 걸스데이 혜리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제작한 프로젝트 영상에서 내레이션에 참여하는 재능 기부를 해 화제가 되고 있다. 혜리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홍보대사인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7일 이에 관한 홍보 영상을 공개했다.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라는 제목의 이 프로젝트 영상은 5분 분량으로, 6·25전쟁의 참상과 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의 중요성 등을 대한민국 남녀노소 누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한국어(http://c11.kr/7cl)와 영어(http://c11.kr/7cm)로 제작해 유튜브에 공개했다. 특히 영어 동영상은 미국과 영국, 호주 등 6·25전쟁에 참전한 21개 국가를 포함한 전 세계 주요 50개국의 한인회 홈페이지와 한인 커뮤니티 등에 공개해 재외동포와 한인 유학생들에게도 유해발굴사업을 적극 홍보할 예정이다. 서 교수는 “지금 이 순간에도 6·25 전사자 유해는 차가운 땅속에서 우리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만 이런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고, 국가에서 시행하는 의미 있는 사업이기 때문에 영상으로 만들게 됐다”고 제작 이유를 설명했다. 이번 영상에서 내레이션을 재능 기부한 혜리는 “이런 국가적인 중요 사업에 함께할 수 있어서 무엇보다 영광”이라면서 “전사자 유해가 어서 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힘을 모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07년 국방부 직할 기관으로 창설된 유해발굴감식단은 지금까지 국군 전사자 9000여명의 유해를 발굴했고 이 가운데 113명의 신원을 확인해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냈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서울역 길모퉁이서 바라본 ‘도시의 살풍경’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서울역 길모퉁이서 바라본 ‘도시의 살풍경’

    전쟁의 상처…서울의 관문…재건의 망치소리…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건축으로 평가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끝났다. 이미 그 전부터 폐허가 된 수도 서울로 사람들이 모여 들고 있었다. 개전 초기에 한 번 그리고 1·4 후퇴 때 한 번 수도를 빼앗긴 뒤 다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특히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막아 낸 1951년 이후 전선은 주로 최전방에서의 국지전 양상으로 형성되었고 후방은 비교적 빨리 일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원래 서울에 살았던 사람들, 이북에서 부산, 거제 등으로 피란왔다가 대한민국에서 정착할 곳을 구하던 사람들, 그리고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찾던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기차가 그들을 서울역에 토해 놓고 나면 아직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도시의 살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던 1950년대 후반, 드넓은 역전 광장의 북쪽 길모퉁이에 재건의 망치 소리와 함께 4층 건물 하나가 올라가고 있었다. 훗날 관문빌딩으로 불리게 될 그리고 어떤 자료에 의하면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건축으로도 평가될 건물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숭례문 앞 남지(南池)가 메꿔지지 않았다면 그 한구석에 모습이 살짝 비쳐졌을지도 모른다. ‘서울역 앞 상가주택’은 이렇게 전쟁의 폐허 속에서 태어났다. 개발시대의 기록문화는 참으로 어처구니없을 정도다. 도면을 구하는 것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다. 결국 직접 가서 부딪혀 봐야 한다. 건물 안에 식당이 있으면 뭐라도 시켜 먹으면서 슬슬 말을 붙여 본다. 부동산 사무소에 가서 양해를 구하고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는 것도 도움이 많이 된다. 이 건물의 답사도 그런 과정을 거쳤다. 건물명이 관문빌딩이라는 것도 이렇게 알게 되었다. 다만 현지의 증언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은 금물이다. 객관적 사실과 대조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건물은 당혹스러운 경우였다. 왜냐하면 증언 중에 이 건물이 상가주택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 이 건물에서 사업을 한 지 30년이 넘었는데 주거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 만약 그랬으면 상층부에 화장실 같은 것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 이 건물은 일본인들이 지었다고 알고 있다. - 작년에 서울시에서 지주들을 모아 재건축을 결정해 조만간 새로 지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만 들으면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것 같다. 그러나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보면 그 내용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게다가 30년 전에 입주했다고 해도, 그 당시 이 건물은 이미 서른 살 가까운 나이였다. 그러니 지금의 입주자들이 이 건물의 옛날 모습을 정확히 알기란 어렵다. 결론적으로 이 건물이 상가주택으로 지어졌다는 객관적 증거는 많다. 게다가 그것은 아주 큰 계획의 일부였다. 대강의 경과는 이렇다. 전후 복구 과정에서 당시 대통령 이승만의 지시로 남대문 일대를 우선적으로 재건하게 되었다. 수도 서울의 관문이라는 이유였다.(관문빌딩이라는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지금이야 이 일대를 수도의 관문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없지만 철도 의존도가 높았던 시대였으니 이해가 된다.(한반도의 통일이나 이에 준하는 상황이 되면 다시 한 번 서울역과 함께 이 일대의 위상도 달라질 것이다.) 당시 각료들이 이에 대한 방안으로 제시한 것이 남대문 일대를 포함한 서울시내 13곳의 간선도로변에 소위 ‘상가주택’을 짓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그 현장을 돌아보는 사진이 전해지기도 한다. 총력을 다해 사업을 진행한 결과 1964년 서울에 93동의 신축 상가주택이 들어섰다. 아직도 남아 있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이 서울역 앞 상가주택, 일명 ‘남대문로 5가 역전 시범상가주택’인 것이다. #시대를 앞선 개념 특이하게도 ‘상가주택 건설요강’을 지킨다는 전제하에 이 방대한 프로젝트의 건축비에 대한 융자를 제공했다. 그 요강은 지금도 참고할 만하다. 기술적인 내용이 많으나 그중 특기할 것은 다음과 같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4층 건물. -1, 2층은 점포, 3, 4층은 주택. -벽체는 벽돌이나 콘크리트, 혹은 블록. -바닥과 지붕은 콘크리트, 혹은 PSC(pre-stressed concrete) 들보. -도로변은 타일 이상의 외장재, 다른 방향은 모르타르 뿜기. -3, 4층은 양면 캔틸레버, 즉 외팔보(한쪽에 기둥 없이 벽에서 튀어나온 보). -변소는 수세식. -옥상에 난간 설치. 주거와 일반 도시 기능을 한 건물에 수직적으로 갖춘다는 무지개떡 건축의 기본적인 조건 대부분이 이 안에 들어가 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3, 4층의 양면 캔틸레버 규정이다. 1, 2층의 점포 위로 주택을 튀어나오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비나 눈이 올 때도 별다른 불편 없이 점포 앞을 걸어 다닐 수 있다. 저층부의 후퇴된 부분에 간판이 달릴 것이므로 간판으로 인해 건물 전면이 혼잡스럽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또한 점포의 소음이 주택으로 전달되는 것을 어느 정도 방지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기대할 만하다. 간단한 규정인 것 같지만 도시 건축의 여러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매우 좋은 방식이다. 싱가포르 구도심의 아케이드 지역이 바로 이런 원칙을 지키고 있다. 안타깝지만 건물 저층부의 이런 문제를 자발적으로 해결하는 경우는 요즘도 별로 없다. 심의에서 강제로 지적해야 마지못해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건물 입구에 차양 등이 덕지덕지 붙으면서 건물의 외관은 물론 전체 도시 경관을 망치는 일이 흔하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무려 50년도 넘은 이전에, 게다가 전쟁 복구 기간 중에, 이런 참신한 내용이 정부에 의해 공표되고 이에 따라 사업이 진행되었다니. 희열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무지개떡 건축의 기본 개념이 이렇게 구체적인 문자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희열이라면, 그 영향력이 도시 전체로 충분히 확산되지 못했다는 것은 아쉬움이다. 기록 이야기는 이쯤 하고 현재의 모습을 좀더 충실히 들여다보기로 한다. 건물의 위치야 당시 그대로일 수밖에 없지만, 외관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건립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아니었으면 같은 건물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건물 양 끝부분에 원래의 외벽이 노출되어 있는데 자세히 보면 당초의 외벽 재료가 벽돌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가운데 부분이 알루미늄 복합 패널로 덮여 있을 뿐 아니라 대형 입간판이 들어서 완전히 원래 모습을 잃어버렸다. 계단실은 모두 여섯 개가 있다. 그중 지하로만 내려가는 것이 네 개, 2층으로 올라만 가는 것이 하나, 지하와 상층부를 모두 연결하는 것이 두 개다. 결국 3, 4층까지 연결되는 계단은 단 두 개다. 후면에 편복도가 있지 않고서는 주거가 한 층당 겨우 4채만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렇다면 전체 건물 규모로 보아 주거의 규모가 상당했을 것인데 그 사실 여부는 안타깝지만 원도면을 구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당시 사진을 자세히 보면 2, 3, 4층의 대형 유리창 뒤에 가벽 같은 것이 서 있는 게 보이는데 그 일부가 현재 상태에서도 발견된다. 남쪽에서 쏟아지는 햇살 혹은 거리의 소음을 막기 위한 조치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단열이 되지 않는 창호 프레임에 복층이 아닌 단판 유리가 끼워져 있었을 것이므로 소음이나 냉난방 등에 있어서 당시의 거주 환경이 그리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햇살이 밝게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 안의 실내 풍경은 상당히 근대적이지 않았을까. 현재 저층부에는 식당, 카페, 직업소개소, 마사지 업소 등이 있고 지하에는 맥줏집, 식당, 노래방 등이 있다. 특이한 것은 상층부인데 부동산, 문서감정원 등과 함께 고시원과 원룸텔 등이 있다. 사람이 잠을 자는 곳이라는 점에서 준주거시설이라고나 할 이 시설들이 원래 주거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건물 안에 들어가 보면 일단 계단실이 아주 좁다. 게다가 계단이 돌아가는 방향이 제각각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건물의 가운데 부분이 곡선이고 양쪽 부분은 직선인데 그 연결 부위에 계단실이 있기 때문에 묘하게 각을 이루는 공간들이 만들어진다. 건물은 4층인데 입구의 안내판을 보면 5층이 있다. 숨어 있는 층이 하나 더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건물에 4층이 없는 것과 같은 이유다. 즉 불길하다는 이유로 4층을 생략하고 5층으로 건너뛴 것이다. # 참신한 디자인 건립 당시의 사진은 지금 보아도 상당히 참신하다. 특히 2, 3, 4층의 창문을 서로 엇갈리게 배치한 것은 파격적인 디자인이다. 교통량이 많은 대로변 모서리의 건물이므로 역동적인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게 한다. 보다 전문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처럼 창이 엇갈리는 디자인은 이 외벽이 건물의 하중을 받는 내력벽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근대건축의 선구자인 르코르뷔지에가 말한 소위 ‘자유로운 입면’의 개념을 보여 주는 예다. 옥상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계단실과 연결된 옥탑이 있고 주변에 난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위에서 언급한 건설 요강을 충실히 따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외관상 상가가 1층에만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은 요강과 다른 부분이다. 요강을 지키지 않은 또 다른 부분은 바로 주거 부분을 돌출시키라는, 즉 캔틸레버에 대한 규정이다. 1층과 나머지 층이 거의 같은 면으로 연속되어 있다 보니 햇살을 막고 비를 긋기 위해 1층 부분은 거의 예외 없이 차양이 설치되어 있다. 작은 디테일 하나가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오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1950년대 말이면 서울역 앞에 고층빌딩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탁 트인 풍경 너머로 저 멀리 관악산까지 시원하게 보였을 것이다. 남쪽을 향해 시원하게 뚫린 저 커다란 창문 안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으며, 또 어떤 삶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을까. 주거로서의 만족도는 어떠했을 것이며 사람들은 이 건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당시의 실내 사진이나 기록을 언젠가 접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조만간 재건축된다는 것이 주민들의 증언이지만 이 귀중한 도시건축의 한 선례를 잘 복원하여 상가주택으로 다시 활용하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서울시립대 박철수 교수의 블로그인 ‘살구나무 아랫집’을 참조했습니다.)
  • 대대손손 나라 지키는 참전 용사의 가족

    대대손손 나라 지키는 참전 용사의 가족

    부친 故 조재범씨 한국전쟁 병사 복무 조 준위, 두 아들·며느리도 직업군인 부인 윤숙희씨는 부대 식당 조리원 6·25 참전용사의 후손 일가족 5명이 대를 이어 직업군인을 배출하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일가족 5명이 모두 육군 39사단 독수리연대에서 근무하는 조복래(54) 준위의 아버지 고(故) 조재범씨는 6·25전쟁 당시 병사로 참전했다. 2006년 지병으로 작고한 조 준위의 아버지는 생전에 보급부대 소속으로 목숨을 걸고 전쟁에서 군수품을 지원했다. 4형제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조 준위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들었던 참전 경험담의 영향으로 1986년 하사로 투신했다. 그는 2010년 준사관으로 임관한 후 지금은 연대 탄약반장 임무를 수행하며 두 아들에 며느리까지 얻은 다복한 가장이 됐다. 하지만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처와 두 아들, 그리고 둘째 며느리까지 모두 육군에 복무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 준위의 큰아들 조현진(30·3사45기) 대위는 2010년 임관해 일반전초(GOP)에서 소초장을 마치고 현재는 52군수지원단에서 중대장으로 복무 중이다. 형의 뒤를 이어 2011년 임관한 작은아들 조현우(29·학군49기) 대위도 역시 GOP 소초장을 시작으로 현재는 7사단 신병교육대대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또 조 대위의 처이자 조 준위의 며느리인 권혜수(29·간호사관51기) 대위는 국군대전병원과 2사단을 거쳐 지금은 66사단 의무대에서 간호장교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조 준위의 부인 윤숙희(53)씨는 현역 군인은 아니지만 조 준위와 같은 부대의 식당조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윤씨는 1996년 육군 탄약사령부에서 처음 근무를 시작할 때 장염을 앓아 식사를 못 하는 병사를 위해 죽을 끓여 주고 급체한 병사를 위해서 엄지손가락에 피를 내주는 등 엄마와 같은 자상한 조리원으로 유명했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한국전쟁 다룬 中대하드라마 인기 끌까

    관영매체 “전쟁드라마의 신기원” 한국전쟁 발발 66주년을 앞두고 중국에서 처음으로 이 전쟁을 다룬 대하드라마 ‘38선’(三八線)이 방영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와 관영 매체는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의 승리를 사실적으로 그린 전쟁 드라마의 신기원을 이룬 작품”이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중국은 한국전쟁을 미국에 대항해 조선(북한)을 도운 전쟁이라는 뜻으로 항미원조전쟁이라고 부른다. 북경위성TV, 안후이위성TV, 랴오닝위성TV, 윈난위성TV 등은 지난 28일부터 ‘38선’ 1회를 방영하기 시작했다. 최근 ‘태양의 후예’를 독점 공급했던 중국 최대 동영상 사이트 아이치이(愛奇藝)도 매일 2회씩 틀기 시작했다. ‘38선’은 베이징시 당선전부, 베이징시 신문출판광전국 등이 제작한 38부작 드라마로, 제작비가 1억 위안(약 181억원)으로 알려졌다. 1950년 미군이 압록강 주변을 폭격할 때 아버지를 잃은 청년이 자원 입대해 북한에서 미군 및 한국군과 싸우는 내용을 그렸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강조해 온 문예 분야에서의 애국주의 강화에 호응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관영 환구시보는 30일 “항미원조전쟁은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중국이 스스로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최초의 ‘입국(立國)전쟁’이었다”면서 “드라마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고 내용 전개도 탄탄해 중국의 문화·역사적 자신감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전했다. 국가신문출판방송총국 드라마국장 리징성은 “전쟁 드라마의 모범”이라고 평가했다. 첫 방송을 본 시청자들의 평가는 엇갈렸다. 일부 시청자들은 ‘중국인민지원군 만세’라는 댓글을 달며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는 드라마”라고 평가했으나, 일부는 “남녀 주인공이 바보처럼 보인다. 쓰레기 수준의 작품이다”라고 혹평했다. 베이징 이창구 특파원 window2@seoul.co.kr
  • 부산 피란수도 밤을 누비다…새달 3·4일 ‘부산 야행’

    부산 피란수도 밤을 누비다…새달 3·4일 ‘부산 야행’

    부산 피란수도 건축·문화 자산을 탐방하고 피란민들의 생활상을 재조명하는 ‘밤여행’(夜行)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부산시는 문화재청 공모사업인 상반기 ‘피란수도 부산 야행(夜行)’을 다음 달 3일과 4일 이틀간 서구 일대에서 진행한다고 30일 밝혔다. 서구에는 임시수도 정부청사(현 동아대 석당박물관)와 대통령 관저(현 임시수도기념관), 피란민 이주지역인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등 부산만의 특별한 건축·문화 자산이 있다. 이번 행사는 야경(夜景, 야간개방 시설 관람 및 야간 경관 조망), 야로(夜路, 피란수도 역사 투어), 야사(夜史, 피란수도의 과거·현재·미래 이야기), 야화(夜畵, 그림 속 피란 시절), 야설(夜設, 밤에 하는 공연), 야식(夜食, 피란 시절 음식체험) 등 6가지 테마로 이뤄진다. 다음 달 3일 오후 7시 임시수도 정부청사 특설무대에서 개막식이 열린다. 야경과 야로는 다음 달 3, 4일 오후 5시부터 11시까지 임시수도 정부청사, 대통령 관저,비석문화마을 등 당시의 건축·문화 자산을 둘러본다. 문화해설사가 흥미로운 당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야사는 실제 운행했던 부산의 마지막 전차인 부산전차 탑승과 피란 시절 거리 재현 퍼포먼스, 육군 헌병 재현 및 교대식 퍼포먼스 등으로 진행된다. 야화는 한국전쟁 종군기자로 활동했던 서구 출신의 임응식과 우리나라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최민식의 사진을 전시해 전쟁과 가난, 재건의 사회 분위기를 살펴본다. 야설은 피란 시절 노래 경연대회와 비보이 댄스 경연대회, 천마산 에코하우스 단편영화 상영 등이다. 야식 행사에서는 주먹밥, 보리개떡 등 피란 시절 음식을 직접 시식하게 된다. 부산시 관계자는 “이번 피란수도 부산 야행은 올해 처음 시도하는 문화재를 활용한 야간 문화 향유 프로그램”이라며 “피란수도 부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물방울 작가’ 김창열 화백, 9월 제주도립 미술관 개관

    ‘물방울 작가’ 김창열 화백, 9월 제주도립 미술관 개관

    ‘물방울 작가’ 김창열(87) 화백의 미술관이 제주에 문을 연다.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 ‘저지문화예술인마을 문화지구’ 내에 들어서는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 공사가 다음달에 마무리된다. 전시 준비작업 등으로 정식 개관은 9월이다. 김창열미술관은 9800㎡ 부지에 지상 1층 연면적 1587㎡의 규모로 국비와 지방비 등 모두 92억원을 들여 2014년 4월 착공했다. 김 화백은 2014년 제주도에 자신의 작품 200여점을 기증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1957년부터 2013년까지의 주요 작품들로 200여억원의 가치를 평가받고 있다는 게 제주도의 설명이다. 평안남도 맹산 출신인 김 화백은 한국전쟁 당시 1년 6개월 정도 머물렀던 인연으로 제주에 자신의 미술관 건립을 제안했고 제주도는 세계적인 문화관광 명소가 될 것이라며 미술관 건립에 적극 나섰다. 김 화백은 청년 시절 서울대 미대에서 공부한 뒤 뉴욕에서 판화를 전공했고 1969년부터 40여년을 프랑스 파리에 정착, 작품 활동에 전념해 왔다. 1972년 파리에서 열린 살롱전 ‘살롱 드 메’에서 처음 ‘물방울’이 등장한 작품을 선보인 이래 40여년간 물방울을 소재로 작업해 왔다. 2004년 프랑스 파리의 대표적 국립미술관인 주드폼 미술관에서 초대전시전을 열어 주목받기도 했다. 주드폼 미술관에서 초대전시전을 연 작가는 일본 국적의 백남준과 주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이우환, 김창열 등 단 3명이다. 글 사진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물방울 작가’ 김창열 미술관 제주에서 문연다

    ‘물방울 작가’ 김창열 미술관 제주에서 문연다

    ‘물방울 작가' 김창열(87) 화백의 미술관이 제주에 문을 연다.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 ‘저지문화예술인마을 문화지구’ 내 들어서는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 공사가 다음달에 마무리된다. 전시 준비작업 등으로 정식 개관은 9월이다. 김창열미술관은 9800㎡ 부지에 지상1층 연면적 1587㎡의 규모로 국비와 지방비 등 모두 92억원을 들여 지난 2014년 4월 착공했다. 김 화백은 2014년 제주도에 자신의 ‘작품 200여점을 기증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1957년부터 2013년까지의 주요 작품들로 200여억원의 가치를 평가받고 있다는 게 제주도의 설명이다. 평안남도 맹산 출신인 김 화백은 한국전쟁 당시 1년 6개월 정도 머물렀던 인연으로 제주에 자신의 미술관 건립을 제안했고 제주도는 세계적인 문화관광 명소가 될 것이라며 미술관 건립에 적극 나섰다. 김 화백은 청년시절 서울대 미대에서 공부한 뒤 뉴욕에서 판화를 전공했고, 지난 1969년부터 40여년을 프랑스 파리에 정착, 작품 활동에 전념해 왔다. 1972년 파리에서 열린 살롱전 ‘살롱 드 메’(salon de mai)에서 처음 ‘물방울’이 등장한 작품을 선보인 이래 40여 년간 물방울을 소재로 작업해왔다. 지난 2004년 프랑스 파리의 대표적 국립미술관인 쥬드폼 미술관에서 초대전시전을 열어 주목받기도 했다. 쥬드폼 미술관에서 초대전시전을 연 작가는 일본 국적의 백남준과 주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이우환, 김창열 등 단 3명이다. 현재 그의 작품은 한국(국립현대미술관, 부산시립, 대전시립, 삼성리유, 선재미술관 등)과 프랑스(파리 퐁피두센터)를 비롯해 미국 보스톤 현대미술관, 캐나다 뮈니팩 갤러리, 스페인 풀라시오 스템플리, 일본 도쿄도 미술관, 네덜란드 보이만미술관, 독일 쾰른 아시아갤러리 등 세계 정상급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글·사진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디지털로 복원한 한국전쟁 실종 미군

    디지털로 복원한 한국전쟁 실종 미군

    한국전쟁 참전 미군의 유가족들이 23일 경기 파주 임진각에서 열린 ‘한국전쟁 참전 미국군 전사·실종 장병 추모식’에 참석해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유가족 앞에 있는 사진은 디지털 보정으로 복원한 전사·실종 장병의 젊은 시절 사진. 연합뉴스
  • [월요 정책마당] 창조경제 한류의 아세안 진출 거점으로서 태국의 가치

    [월요 정책마당] 창조경제 한류의 아세안 진출 거점으로서 태국의 가치

    지난해 말 동남아 주요 10개국(아세안)은 ‘단일 권역, 단일 시장으로의 경제통합’을 목표로 아세안경제공동체를 출범시켰다. 이제 아세안은 세계의 공장이라고 일컬어지던 중국을 잇는 제조업의 차세대 거점이자,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내수시장으로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아세안경제공동체 중에서도 인도차이나 반도 중앙에 위치한 태국은 그동안 아세안의 지역적, 경제적 중심지로 인정받아 왔다. 하지만 최근 삼성전자 태국법인은 베트남으로 생산 공장을 옮겼고 일본 니콘도 태국에서 라오스 남부로 생산라인을 옮긴 바 있다. 동남아의 대표적인 제조업 중심이던 태국이 빠르게 성장하는 이웃 국가들 사이에서 정정불안 등으로 오히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떨어지는 ‘중진국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는 상황이다. 태국은 이런 경제위기에서 벗어나 ‘아세안 허브’로 탈바꿈하기 위해, 올해 3월 솜킷 차투스리피탁 경제부총리와 경제부처 수장들이 방한해 철도, 항만, 스마트시티 등 한국의 성공 사례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부산과 대전 등을 다녀간 바 있다. 특히 대전 창조경제혁신센터를 방문해서는 대기업, 스타트업이 함께 만들어 낸 창조경제 모델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태국도 지역적 특색과 산업을 연계하는 클러스터 조성과 스타트업의 확대를 통해 지방경제를 활성화하고자 노력하고 있는데, 창조경제야말로 태국에 변화와 혁신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솜킷 부총리는 “한국의 창조경제를 태국에 적용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함께 온 태국 장관들에게 지시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미래창조과학부의 과학기술·정보통신기술(ICT) 협력파트너인 태국 과학기술부와 정보통신부 장관이 회담 자리에서 필자에게 태국 정부가 처음 개최하는 ‘스타트업 태국 2016’ 행사에 꼭 참석해 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태국 정부와 기업 관계자에게 한국의 창조경제가 미래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창업을 시도하고 아이디어를 현실화할 수 있도록 도와줬는지 알려 달라”고 부탁해 온 것이다. 그래서 가게 된 태국에서 직접 경험한 태국의 스타트업 열풍은 38도를 넘는 태국의 낮 기온보다도 더욱 뜨거웠다. 쁘라윳 짠오차 총리가 직접 행사에 참석할 정도로 높은 정부 차원의 관심과 지원도 놀라웠지만, 200여개 스타트업들이 참여한 전시회에 몰려와 길게 줄을 서 있으면서도 밝게 웃는 태국 젊은이들의 모습 속에서 희망과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중국, 프랑스, 이스라엘 등 글로벌 스타트업 사이에서 창조경제혁신센터를 통해 성장한 한국 스타트업 기업들도 참신한 아이디어와 경쟁력으로 태국 사람들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특히 플라스마를 이용한 살균 기술은 태국의 중요한 전략 수출품목인 식품 등에 활용할 수 있어 태국 현지에 맞는 맞춤형 아이템으로 많은 관심을 끌기도 했다. 필자가 만난 경제·산업 분야 주요 인사들은 모두 한국과의 긴밀한 협력을 절실히 원하고 있었다. 농업, 식품 분야에서부터 위성 등 첨단과학 분야까지 창조경제와 혁신을 통해 발전할 수 있는 모든 분야를 한국과 함께 하고 싶다는 적극적인 구애에 놀랄 정도였다. 한국의 창조경제 전문가와 함께 태국의 창조경제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싶다고 요청해 와서 현재 태국과 함께 이를 위한 준비도 하고 있다. 태국은 한국전쟁 때 미국 다음으로 전우를 파병해 함께 싸운 정통적인 한국의 우방국이자 케이팝과 한국 드라마에 열광할 정도로 문화적·정서적인 동질감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한국의 창조경제와 스타트업 바람도 양국의 적극적인 의지와 협력이 함께한다면, 한류 열풍이 되어 태국은 물론 아세안의 여러 국가로까지 빠르게 퍼져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세안은 이제 더이상 단순한 관광지나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곳이 아니다. 각종 첨단산업의 유치와 대형 인프라 확충 과정에서 우리가 진출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의 땅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변화의 흐름을 놓치지 말고 태국과의 창조경제, 스타트업 교류를 본격 확대해 협력 파트너로서 아세안 시장으로 함께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태국이 발전할수록 우리의 성장가능성도 늘어나기에 함께 발전하는 협력의 길을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모색해 나가야 할 것이다.
  • ‘무너진 도심 백화점’ 잊을 수 없는 기억들

    ‘무너진 도심 백화점’ 잊을 수 없는 기억들

    1995년 서울, 삼풍/메모리(人) 서울프로젝트 기억수집가 지음/동아시아/280쪽/1만 6000원 “아, 이 말은 진짜 기록으로 남겨야 될지 모르겠는데, 일부의 일부만 남아 있는, 그런 몸의 일부만 우리는 볼 수 있었어요. 제가 그 구조 현장에서 계속 울고 살았어요. 그 전날 사람을 많이 살릴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과 당장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감에 시달렸습니다.”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 서울 서초구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당시 구조 현장 응급의였던 안명옥씨는 그 현장의 참혹함이 너무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1995년 서울, 삼풍’은 한국전쟁 이후 단일 사건 최대 사상자(사망 502명, 실종 6명, 부상 937명)를 초래한 참사의 당사자들을 직접 찾아 인터뷰한 구술·기록 프로젝트 결과물이다. 5명의 기억수집가가 2014년 10월부터 약 10개월간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108명을 인터뷰했고 책에는 59명의 구술이 실렸다. 붕괴 현장의 구조요원, 골프채를 훔치는 좀도둑을 잡은 경찰, 취재를 위해 자원봉사자로 위장한 기자, 자녀에게 참사 경험을 숨긴 생존자, 매몰된 부상자에게 노래를 불러 주던 119구조대원, 소방호스로 구조대의 옷에 밴 시신 냄새를 씻겨 준 자원봉사자, 실종자 가족 대표를 뽑는 절차를 만들었던 서울시 공무원, 난지도에 버려진 발가락 시체를 붙들고 울던 유가족 등…. 그러나 이 모든 아픔과 사연은 양재동 시민의숲 위령탑이라는 전형적인 국가주의적 조형물에 묻혀 버렸다. 정윤수 한신대 교수는 ‘사회적 기억을 위한 삼풍백화점 참사기록’이란 부제를 단 책의 말미에 “참사로 숨져 간 이들은 단지 희생자라고만 불려서는 안 되며 고인들 저마다의 삶의 기억들이 개별적 존재로 다시 기억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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