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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의회 - 한국 기업 교류…무역협회 ‘오작교’ 성황

    한국무역협회(KITA)가 21일(현지시간) 미국 연방의회와 한국 기업 간 교류와 이해를 확대하기 위해 워싱턴DC에서 개최한 ‘KITA·의회 네트워킹 리셉션’ 행사가 성황을 이뤘다. 미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과 관련 주 의원 등 의회를 연결하기 위한 ‘오작교’ 행사로 불리는 이날 행사는 올해로 4회째로, 에드 로이스(공화) 하원 외교위원장과 마이크 캘리(공화), 찰스 랭걸(민주), 마이크 혼다(민주), 트렌트 프랭스(공화), 그레이스 맹(민주) 등 10여명의 연방의원이 참석했다. 또 하원 세입세출위, 에너지통상위 등 주요 상임위 전문위원, 정책보좌관 등 모두 200여명의 의회 관계자들이 한국 기업 관계자들과 만났다. 한국에서는 삼성전자와 현대·기아차, 포스코, LG전자, LIG넥스원, 대우인터내셔널, 윕스, 바이오뉴트리젠 등 20여개 미국 진출 기업들이 참석해 미국 내 경영 활동 애로 사항과 통상 현안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김인호 무협 회장은 인사말에서 “한·미 양국은 한국전쟁 이후 피를 나눈 혈맹국으로서, 한층 강화된 관계 발전을 위해 큰 그림을 공유해야 한다”며 “양국 경제 통합을 위해 높은 수준의 표준을 바탕으로 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양국 모두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특히 이날 한·미 FTA 등 무역협정을 ‘일자리 킬러’라고 비난해온 미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 캠프의 좌장 격인 제프 세션스 상원의원과 별도로 만나 트럼프 측의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이에 세션스 의원은 “현재 미국은 전 세계 모든 문제에 개입할 만큼 여유 있는 나라가 아니다”라며 “한·미 FTA 등으로 인해 미국의 무역적자가 너무 많아 괴롭다. 이 점을 이해해 달라”고 밝혔다고 김 회장이 전했다. 세션스 의원은 특히 “대미 무역에서 흑자를 보는 나라를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미 무역대표부(USTR)가 협상을 잘못했다”고 주장했다. 한·미 FTA 등에 대해 재협상 가능성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한국전 참전용사 추모벽 건립 법안 美 의회 통과

    미국 워싱턴DC에 6·25전쟁에서 전몰한 미군을 기리는 추모벽을 세우자는 내용의 법안이 하원에 이어 상원에서도 가결됐다. 21일(현지시간) 미 의회에 따르면 상원은 지난 19일 한국전 참전용사 추모벽 건립에 관한 법안(H.R.1475)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서명만 남겨 뒀다. 이 법안은 지난 2월 하원을 통과했다. 한국전 참전용사 출신인 샘 존슨(공화·텍사스) 의원이 발의했고 같은 한국전 참전용사인 찰스 랭걸(민주·뉴욕), 존 코니어스(민주·미시간) 의원이 최초 공동 발의자로 참여했던 이 법안에는 상원의 별도 법안에 대한 병합 과정을 거치면서 307명의 의원이 공동발의자로 추가로 참여했다. 통과된 법안에는 추모벽에 전사자 이름과 더불어 전쟁에 참여한 미군과 한국군, 카투사 장병, 연합군 사망자의 수 같은 다른 정보도 기록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최초 공동 발의자였던 랭걸 의원은 이날 성명에서 “추모벽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는 공짜가 아님’을 일깨울 것”이라며 “돌아오지 못하게 된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기릴 수 있는 장소가 한국전쟁 기념공원에 더 생길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19명의 병사 조각상으로 잘 알려진 현재의 한국전 기념공원은 1995년 7월 27일 개장했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한국전쟁 미화 논란 中 영화 ‘나의 전쟁’ 관객 외면과의 전쟁

    한국전쟁 미화 논란 中 영화 ‘나의 전쟁’ 관객 외면과의 전쟁

    중국군의 한국전 참전을 미화한 중국 영화 ‘나의 전쟁’(我的戰爭)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영화는 개봉 전부터 홍보영상 때문에 한국인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샀다. 한국 관광에 나선 중국 노인들의 여권에 처음으로 한국 입국 도장이 찍힌 사실을 발견한 한국 가이드가 “한국을 소개하겠다”고 하자, 노인들이 “우린 60여년 전에 이미 와 봤어. 여권은 필요 없었지. 대신 붉은 깃발을 들고 왔지”라고 말하고는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대항해 북한을 돕자)를 외치는 장면이 문제가 됐다. 지난 15일 개봉한 이 영화는 초반 흥행에 실패하고 있다. 개봉 6일간의 박스오피스 수입은 413만 달러(약 46억원)에 머물러 박스오피스 9위에 그쳤다. 주요 국유 영화배급사의 전폭적인 지원과 3D, IMAX 영화관 개봉 등 여러 우대에도 관객이 모이지 않는다. 중국 공산당 및 정부 기관 내 선전부가 조직적으로 영화 관람을 독려하고 있지만, 효과가 별로 없다. ●일부 항미원조 선전전에 보이콧 오히려 일부 누리꾼은 보이콧에 나서기도 했다. 하얼빈사범대 역사학 교수 린치는 웨이보에 “일본 노인 단체관광객이 난징에 와서 자신들이 70여년 전 난징대학살 때 욱일승천기를 들고 왔었다고 말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며 보이콧을 선언했다. 베이징의 변호사 자오후도 “셀 수 없이 많은 중국인이 죽었지만, 한국이 남과 북으로 분단됐고 북한 김씨 일가 3대에 혜택을 줬는데도 여전히 자랑스러운가”라고 지적했다. ●中매체들 “위대한 승리” 영화 엄호 영화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자 중국 매체들이 영화 엄호에 나섰다. 중국국방보는 22일 “항미원조 전쟁을 일본의 중국 침략과 빗대 정의성을 의심하는 것은 반역행위”라면서 “그 전쟁은 미군으로부터 중국을 지킨 위대한 승리였고, 시진핑 주석도 전쟁 60주년 당시 ‘평화를 보호하고 미국의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고 주장했다. 관찰자망도 평론을 통해 “전쟁 당시 한국이란 국가는 엄밀하게 말하면 없었으며, 미국을 추종하고 항일투사들을 살해한 매국적 괴뢰정권만 있었을 뿐”이라면서 “북한이 미국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중국이 북한을 도와 조선 남쪽을 해방시키려 한 전쟁임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이징 이창구 특파원 window2@seoul.co.kr
  • 청주 일가족 극단적 선택…전문가 “자식은 소유물 아냐, 명백한 살인”

    청주 일가족 극단적 선택…전문가 “자식은 소유물 아냐, 명백한 살인”

    지난 19일 밤 청주의 한 아파트에서 40대 부부가 자녀 2명과 함께 숨진 채 발견됐다. 이 부부는 수십억원의 채무에 시달리는 처지를 비관하다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과 관련, 부모가 자녀의 생존권을 박탈한 것은 어떤 이유로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입모아 비판했다. 부모와 함께 숨진 큰딸이 유서를 남겼고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사회관계망(SNS)에 남겼다고 하지만 판단력이 부족한 어린 자녀에게 부모가 결정을 하도록 몰아갔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부모가 극단적인 선택에 앞서 자식을 해치는 행위는 동양, 특히 한국·중국·일본 등 동북아시아에서 유독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서구에서는 부부나 연인이 함께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는 있어도 부모와 자녀가 함께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청주의료원 정신건강의학과의 최영락 전문의는 “자식을 부모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의식구조가 동양문화, 특히 한·중·일에 깊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나타나는 악습”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녀를 살해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부모는 명백한 살인자”라며 “동반자살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가족을 해치는 행위는 살인죄를 적용, 엄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행위에 대한 사법부의 엄벌 의지도 강하다. 대법원은 지난 2월 주식 투자에 실패하자 경제 사정을 비관하다가 처자식을 살해한 혐의(살인)로 기소된 박모(51)씨에게 징역 35년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2014년 12월 대전에서 검거된 박씨는 처자식을 살해한 뒤 자신도 목숨을 끊으려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법정에서는 범행 당시 ‘심신 미약’ 상태를 주장하며 선처를 호소했지만 1심은 징역 25년을, 항소심은 35년을 선고했다. 대법원 2부는 “범행 동기와 수단, 결과 등을 살펴보면 원심의 징역 35년이 심히 부당하다고 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웃과 사회에 대한 불신이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김대환 청주 정신건강센터 관장은 “1990년대 후반 금융위기 이후 처지를 비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부모가 자녀의 목숨을 앗아가는 사례가 늘었다”고 분석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는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이웃이 서로 돕고 고민을 나눴지만,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진 요즘 오히려 옆집과 인사만 나누거나 아예 누가 사는지도 모를 만큼 사회안전망이 붕괴했다고 김 관장은 꼬집었다. 김 관장은 그러면서 정부 차원의 사회안전망 강화와 함께 실패하더라도 재기할 수 있도록 돕는 지원 시스템을 보완, 극단적 선택을 방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물방울 작가’ 김창열미술관 24일 제주도서 개관 행사

    ‘물방울 작가’ 김창열미술관 24일 제주도서 개관 행사

    ‘물방울 작가’ 김창열미술관이 오는 24일 개관한다.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 문예술인 마을에 들어선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은 김 화백이 한국전쟁 당시 제주에 머물렀던 인연으로 자신의 대표작품 220점을 기증해 제주도가 92억원을 들여 지상 1층, 연면적 1587㎡ 규모로 최근 완공했다. 김 화백은 파리에서 활동하던 1972년부터 영롱한 물방울을 소재로 그리면서 ‘물방울 작가’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대중적인 인기와 함께 국내 및 해외 미술계에서도 미학적 논의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등 한국 현대미술에 큰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개관 행사는 24일 오후 2시 30분 미술관 야외특설무대에서 열리며 25일부터는 ‘존재의 흔적들’이란 개관전이 열린다. 내년 1월 22일까지 열리는 ‘존재의 흔적들’은 김 화백의 기증 작품을 연대기적 접근으로 시대별 대표작들로 구성, 김 화백의 전반적인 작품세계를 살펴볼 수 있게 했다. 김창열미술관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 개관을 기념해 3개월 동안은 무료로 운영된다. 이후 입장료는 성인 1000원, 청소년 700원이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WSJ “김정은, 김일성 서민적 이미지 그대로 따라해”

    WSJ “김정은, 김일성 서민적 이미지 그대로 따라해”

     지난 9일 실시된 북한 5차 핵실험을 계기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단순히 어리고 미숙한 지도자가 아닌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 같은 ‘노련한 독재자’라는 평가가 다시 나오고 있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서울발 기사에서 김정은이 북한에서 현재까지 숭배받고 있는 김일성의 선전과 경제정책, 심지어 옷과 헤어 스타일까지 따라 하고 있다면서 그가 미숙하다는 전반적 평가와 달리 계획적인 지도자일 수 있다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인용해 1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특히 김정은은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정적을 숙청하면서 굳어진 무자비한 이미지를 불식하려 서민적 스타일이나 실용주의를 활용하는 한편, 경제성장과 핵무기 개발을 동시에 꾀하는 ‘투트랙 전략’을 펼치고 있다고 WSJ가 분석했다.  김일성은 한국전쟁 뒤 중공업과 광물자원 개발에 집중하는 경제정책으로 북한의 번영을 끌어냈지만, 후계자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0년대 대기근에 직면해 군을 우선시하는 선군정치와 경제적 내핍정책을 펼쳤다.  그에 반해 김정은은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해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의 정책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신문은 최근 김정은이 경기부양을 목표로 평양에서 대규모 진행하고 있는 주택 및 도시 건설사업과 제한적이나마 시장경제도 허용하고 있다는 점을 대표적 예로 꼽았다. 북한은 전통적으로 사기업 활동을 금지해왔지만, 김정은은 장마당이나 소규모 자영업을 용인해 최근 북한에서는 그동안 거래가 금지됐던 중국제 스마트폰이 인터넷 접속이 불가능한데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또한 고모부 장성택 등 정적 100여명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잔인한 이미지를 가리려고 김정은은 잘못된 기상예보를 한 관리를 질책하거나 놀이공원에 쪼그려 앉아 잡초를 뽑는 등 서민적 모습을 의도적으로 노출하기도 했다.  WSJ는 군부 내 정적을 숙청하는 김정은의 행보는 노동당의 권위를 되살려 국민 지배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김일성의 정책을 되풀이한 것이라며 김정은은 줄어든 군대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김일성의 꿈이기도 했던 대량파괴무기의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일성은 구소련의 도움을 받아 핵 개발 프로그램을 시작했지만, 북한은 김일성 사후인 1994년 제네바 핵협상을 통해 영변 핵시설 동결 등을 합의한 바 있다.  김정일은 핵무기 프로그램을 원조와 안보 협상 카드로 이용했지만 김정은은 이와 달리 군부 장악력을 강화하고 남한을 위협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를 활용한다는 점은 다르다고 WSJ는 설명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美평화봉사단과 한국 ‘50년 우정’ 한눈에

    美평화봉사단과 한국 ‘50년 우정’ 한눈에

    스티븐스 前대사·커밍스 교수도 단원영어교육·결핵치료 등 희귀자료 전시 1966년부터 1981년까지 우리나라의 교육, 보건, 농업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던 미국 평화봉사단을 조명하는 전시가 마련됐다. 13일부터 오는 11월 20일까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미국 평화봉사단 한국 활동 50주년 기념 특별전 ‘아름다운 여정, 영원한 우정’이 그것이다. 김용직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은 12일 박물관에서 열린 개막식에서 “평화봉사단원들이 우리나라에서 펼친 활동을 기억하고 우리와 그들이 나눈 우정을 되새겨 한·미 관계가 더 돈독해졌으면 한다”고 밝혔다. 개막식엔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 등 평화봉사단원 80여명을 비롯해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등이 참석했다. 미국 평화봉사단은 개발도상국의 교육·농업·기술 향상, 보건 위생 개선, 지역 개발 등을 위해 1961년 창설됐다. 1966년 100명의 단원이 한국에 파견된 이후 1981년 철수할 때까지 2000여명의 단원이 활약했다. 이들은 전국 농어촌 지역 중·고등학교에 배치돼 영어를 가르치거나 읍·면 보건소 보조요원으로 근무하면서 결핵 퇴치 사업을 벌였다. 전시는 2012~2015년 우리나라를 다시 찾은 봉사단원 100여명을 인터뷰한 영상을 비롯해 단원 62명이 기증한 자료 1236점을 중심으로 꾸며졌다. 단원들의 한글 공부 연습장, 귀국하면서 남긴 작별 편지, 미국 국제협조처(ICA) 소속 한국기술원조계획 책임자인 팔리의 보고서, 단원들이 만든 노래인 ‘결핵 없는 내일’이 수록된 LP판 등 다양하다. 단원 중엔 친숙한 사람이 적지 않다. 스티븐스 전 대사는 1975~1976년 충남 예산중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했다. 그는 ‘방황하다 wander, 유감천만이다 really regretable, 제기하다 提起 institute’ 등 한자까지 곁들여 가며 한국어를 익혔다.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한반도 근현대사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1967~1968년 선린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한국 근대화 연구 분야 석학인 카터 에커트 하버드대 석좌교수도 평화봉사단 출신이다. ‘한옥 지킴이’로 유명한 피터 바돌로뮤는 봉사 활동을 하러 왔다가 아예 한국에 뿌리를 내렸다. 평화봉사단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증인 역할도 했다. 전남 영암에서 결핵 퇴치 봉사를 하던 데이비드 도링거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외신 기자들 통역을 해 주고 병원을 찾아가 부상자들을 직접 인터뷰했다. 1969년 서울대 사범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에드워드 베이커는 개헌 반대 시위로 잡혀간 학생들의 구명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역사 속 ‘은폐의 여성史’ 다시 보다

    역사 속 ‘은폐의 여성史’ 다시 보다

    글로벌시대에 읽는 한국여성사/정현백·김선주·권순형·정해은·신영숙·이임하 지음/사람의무늬/296쪽/1만 5000원 1980년대 말 이후의 한국 여성운동은 국제사회에서도 언급할 만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군 위안부’ 운동이 대표적이다. 1970·80년대 활발했던 한국의 여성노동자운동은 제3세계 여성운동의 모델로, 동남아나 중남미지역 여성노동자운동에서 하나의 전범으로 간주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근대사에서 남성 중심적 역사서술을 통해 이 땅 여성들의 주체적 행위는 거의 은폐돼 있었다. ●한국사학계 여성 경제활동 주목 못 받아 성균관대·중앙대·성공회대 교수와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등 6명이 쓴 이 책은 그 역사 속 ‘은폐의 여성’을 재조명해 눈길을 끈다. 간과됐던 여성사 속의 문제들을 새로 찾아 여성사의 새로운 위치 지우기(positioning)를 시도했다. 무엇보다 도외시됐던 여성의 경제활동과 일상생활 역사를 복원해 도드라진다. 한국사학계에서 여성의 경제활동은 주목받지 못한 게 사실이다. 저자들은 그 이유를 “여성은 가사에 전념하는 수동적 존재로 간주된 역사적 상식에 역사학자들의 상상력이 묶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면서 그 같은 인식의 거풀을 보기 좋게 벗겨내는 반전의 사례들을 세밀하게 제시한다. 우선 경제활동을 보자. 원시·고대사회의 여성들은 생산활동에서 통념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농사일 외에도 길쌈을 통해 경제활동에 기여했으며 공적으로 역역(力役)을 부담하기도 했다. 고려시대 여성들은 자신의 재산을 기초로 상업과 무역활동에 종사해 재산을 축적하기까지 했다. 조선시대 여성은 가부장적 통제의 강화에도 불구하고 한 가정의 운영자로서 중심적인 지위를 확보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전문직 여성 처음 등장 근대 일제강점기 여성들은 가혹한 착취 아래 가족 생계를 위해 혹독하게 일해야 했다. 이 시기에 전문직 여성이나 서비스직 여성이 처음 등장한 점이 흥미롭다. 여성교육 확장으로 여교사, 간호부, 조산부, 여기자 등의 전문직은 물론 전화교환수, 점원이 서비스직업으로 부상했다. 전체 공장노동자의 30%가 여성이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저자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여성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은 식민지 자본주의 착취의 젠더화를 확인하게 한다”면서 이런 현실 속에서 여성들은 노동운동의 새로운 저항주체로 등장했다고 해석한다. ●저항 주체로 성장→여성인권 제도 개선 성취 한국전쟁에서 여성들은 생계부양자로서 후방에서 남성의 자리를 대신했으며 경제성장 주역으로 등장했다. 1960년대 공업화와 함께 ‘공순이’로 불린 여성공장노동자가 대거 등장했고 이들의 희생을 토대로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본원적 축적이 가능했다. 1980년대 이후 등장한 사무직 여성노동자가 더해져 여성은 경제활동의 주체일 뿐 아니라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저항주체로 성장했고 이들의 투쟁을 토대로 민주화체제 아래 여성운동은 역동적으로 발전해 여성인권 증진을 위한 법, 제도 개선을 성취했다. 저자들이 책에서 특히 강조한 점은 주체적 행위자로서의 여성 모습이다. 정치에서 종교적 권위가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고대에는 제정에서 여신이나 여사제의 역할을 토대로 여성의 정치적 비중이나 역할이 컸다. 특히 불교가 전통신앙과 습합되는 과정에서 여성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왕비나 귀족여성이 비구니로 출가했고 재산이 있는 여성들은 사찰을 건립하는 등 비중 있는 활동을 했다. 신라에서는 여성을 매개로 가계 계승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중국식 사회제도가 정비돼 공적 영역에서 여성 배제가 심해졌지만 조선시대 들어선 여성이 가정경제를 운영하는 책임자로 각종 경제활동을 담당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기에는 전쟁에서 활약한 여성들도 나타났다. ●“진취적 여성운동, 근대 가족 탄생 가져와” 일제강점기 여성들은 각종 단체를 조직해 치열해진 반제·반식민지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 시기 여성 교육이 확대되고 사회진출이 늘면서 민족독립이나 사회문제 해결, 그리고 여성 지위에 대해 여성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참정권을 가진 국민국가의 구성원으로 등장했으며 해방공간에서 조직된 여성운동은 분단사회의 이념 대립 속에서 과도한 정치화의 과정을 겪어야 했다. 저자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고양된 여성의식은 한국사회에서 근대 가족 탄생을 가져왔다”면서 “그러나 199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더불어 여성의 노동권이 취약해지고 여성 내부의 경제적 불평등도 심화됐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여성사 새로 쓰기의 작업을 이렇게 전한다. “여성의 행위성과 주체성은 역사적 맥락에 의해 규정받고 여성들은 내적으로 분할되어 있고 복수적이고 때로는 모순적이다. 이런 여성 정체성의 다중적인 복합성을 읽어내는 것도 여성사의 몫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시장 언덕길 따라 3층 같은 7층 건물… 속 깊은 요셉처럼 약현 성당 보호했나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시장 언덕길 따라 3층 같은 7층 건물… 속 깊은 요셉처럼 약현 성당 보호했나

    성 요셉 아파트. 뭔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름이다. 가톨릭 성자의 이름이 붙은 아파트라니? 게다가 한국 최초의 서양식 성당으로 일컬어지는 약현 성당이 바로 옆에 있다니? 약현 성당은 명동 성당보다 6년 앞선 1892년에 세워졌다. 설계자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코스트 신부로 명동 성당과 같다. 명동 성당은 사대문 안, 약현 성당은 사대문 밖과 그 너머의 경기도와 황해도 일부까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관할하는 등 역할의 분담이 있었다. 명동 성당의 주보성인이 성모 마리아였기 때문에 그 준비 과정에 해당하는 약현 성당은 마리아의 남편인 성 요셉을 주보성인으로 모셨다고 한다(*이상 약현 성당 홈페이지 참조). 그런데 그 중요한 주보성인의 이름이 바로 성당 옆 아파트에 붙여진 것이다. 대중적인 지명도는 낮지만 아파트 연구가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건물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이 두 건물 사이에는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을 것만 같다. 종교적 이유에서 이 아파트가 세워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사회 복지 사업의 일환으로 공동 주거를 마련했다거나, 혹은 신앙 공동체를 위한 시설이었다거나 하는 등의 시나리오다. 그러나 현장에서 들은 이야기와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보면 성 요셉 아파트는 약현 성당의 수익 사업으로 진행된 프로젝트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종교 단체가 건물을 지어 수익 사업을 하는 것은 물론 종종 있는 일이다. 예를 들어 이 연재에서 다룰 예정인 신문로의 피어선 아파트 또한 같은 맥락에서 지어진 건물이다. 다만 개신교인 장로교 교단과 관련됐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통적으로 주상복합 아파트를 지었다는 점은 자못 흥미롭다. 이 두 건물은 지어진 연대도 비슷하다. 성 요셉 아파트는 1971년 6월 20일에, 피어선 아파트는 같은 해 11월 10일에 각각 사용 승인을 받았다. # 답사의 시작은 서소문 공원부터 성 요셉 아파트의 답사는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인근의 서소문 공원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약현 성당 자체가 한국 가톨릭의 순교지인 이 서소문 처형장 터를 내려다보는 장소에 지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인 최초로 영세를 받은 이승훈의 집 또한 이 근처였다고 전한다. 약현(藥峴)이라는 이름은 ‘약초밭이 있던 고개’를 의미하며 지금의 중림로가 바로 약현이다. 이처럼 고개 옆 언덕 위에 지어진 약현 성당에서는 그 주변 일대가 잘 내려다보였을 것이다. 사실 이 서소문 처형장은 지난번 서소문 아파트 편에서 이야기한 욱천, 즉 만초천의 모래사장이었다. 지금은 복개됐으나 유난히 모래가 곱고 아름다웠다고 하는 바로 그 하천이다. 모래라서 처형된 사람의 피가 금방 스며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만초천 위에 지어진 서소문 아파트도 여기서 경의중앙선 철길 하나만 건너면 바로 지척이다. 청파로로 들어서서 브라운스톤 북서쪽 코너에서 보면 주변의 고층 빌딩 사이로 뾰족탑, 그리고 그 앞에 길게 누워 있는 누런색의 건물이 보인다. 약현 성당과 성 요셉 아파트다. 약현 성당이 능선 위에 있다면 성 요셉 아파트는 그 바로 아래에 낮게 깔려 있다. 하지만 이 정도 높이의 건물로도 성당 북쪽으로의 경관은 거의 다 막힌다. 그 방향으로 서소문 공원도 일부 있기 때문에 애초에 이 자리에 성당을 지은 취지에 위배되는 배치다. 지금이야 워낙 고층 건물이 많아서 경관이 거의 다 막혀있지만 성 요셉 아파트가 건립된 1970년대 초만 해도 이 일대에 높은 건물은 거의 없었다. 당시 성 요셉 아파트의 건립은 약현 성당으로서는 매우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성 요셉 아파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본다. 청파로를 향해 우뚝 선 한림학사가 이 아파트의 일부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두 건물은 서로 떨어져 있다. 이 일대는 시장 지역이다. 한때 칠패(七牌)시장으로 불렸고, 지금의 이름은 중림시장이다. 마포에서 만리재를 넘어온 어물과 곡물을 파는 시장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조선 시대에는 종루, 즉 종로의 시전을 능가하는 큰 규모였으나 상권이 많이 축소된 지금도 아침이면 어물 시장이 열린다. 그 시장의 일부가 좁은 언덕길을 따라 오르는데 그것이 성 요셉 아파트의 저층부를 이룬다. 통인시장과 한 몸을 이룬 효자 아파트나 인왕시장에 인접한 원일 아파트를 연상케 한다. 그 시장의 소음과 혼잡으로부터 성당을 보호하기 위해 이 아파트를 지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 아파트 지어 인접한 시장의 소음·혼잡 차단 성당으로 들어가는 길과 성 요셉 아파트로 들어가는 길은 완전히 분리돼 있다. 아파트 옆 언덕길 어딘가에 성당으로 들어가는 부출입구가 있지 않을까 궁금해 직접 찾아도 보고 주민들에게도 물었는데 찾지 못했다. 약현 성당의 부출입구는 완전히 반대쪽인 중림로 쪽으로 나 있다. 즉 적어도 현재 상황으로 보면 약현 성당과 성 요셉 아파트는 인접해 있을 뿐 별다른 물리적 연결 고리 없이 분리돼 있다. 모르고 보면 경관이나 접근 등의 측면에서 성당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이 들어선 건물 같은데, 막상 건립 주체가 성당이었다니 좀 의아하다. 두 건물 사이의 긴장된 관계는 성 요셉 아파트 안에 들어가 보면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성 요셉 아파트의 복도는 약현 성당 쪽으로 나 있다. 이쪽이 남쪽이므로 결국 이 아파트는 북향이다. 즉 주거 가구는 약현 성당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고 있다. 남향 선호가 워낙 강해 마주 보는 중정형 아파트에서도 이에 대한 고민이 심각하다는 것을 이 연재에서 여러 번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아파트에서는 그런 고뇌가 아예 읽히지 않는다. 아파트를 짓기는 짓되 시선은 성당 밖으로 돌리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 같다. 복도에 창이 나 있지만 상당히 높아서 성당 쪽을 잘 볼 수 없게 해 놓은 것도 유사한 맥락으로 읽힌다. 하지만 그런 덕분에 사적 252호로 지정된 이 유서 깊은 장소가 갖는 안온하고 경건한 분위기가 잘 유지되고 있음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약현 성당 마당 한구석에 앉아 늦은 오후의 햇살이 성당 벽면에 드리우는 것을 보고 있으면 서울 시내 한 복판에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것이 기적 같은 일로 느껴진다. 건축은 수많은 대립과 모순의 관계 속에서 내리는 괴로운 결정의 과정이다. 다만 이 경우는 너무 ‘모 아니면 도’의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성 요셉 아파트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제3의 좋은 대안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찾는 것이 건축가의 역할이기도 하다. 약현 성당이 세운 건물치고는 성당과의 관계가 좀 뜻밖이라 그렇지 사실 성 요셉 아파트는 지금의 관점으로 봐도 배울 것이 많은 건물이다. 일단 지형의 흐름에 철저하게 순응하고 있는 건물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고갯길을 따라 지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지형과 건물, 그리고 길 사이에 서로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가 만들어졌다. 툭하면 대지를 평탄화해서 경사지를 계단으로 만들어 버리는 요즘의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국토 대부분이 경사지인 한국에서 경사지를 최대로 이용하는 건물의 유형이 발달하지 않았음은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다. 이 오래된 아파트가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선도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내부의 공간 구성 방식이다. 경사지를 따라 아래에서 올라가다 보면 건물이 한 층씩 한 층씩 줄어들게 된다. 그러다 보면 조형적으로나 동선적으로 혼란이 생길 수도 있는데 성 요셉 아파트는 이 문제를 비교적 간단하게 해결하고 있다. 즉 건물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고 그 중간과 양 끝에 계단실을 두어 편복도로 연결한 것이다. 건축물 관리대장에도 이 두 부분이 명확하게 나뉘어 있다. 그래서 개념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건물의 전체적인 윤곽이 단순하다. 다만 이런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저층부의 각 부분에서 레벨을 미세하게 조절한 흔적들이 많이 보인다. 전체적으로 보면 가장 낮은 층을 기준으로 볼 때 가장 높은 층은 7층에 해당한다. 실제로 건물 안을 다녀보면 처음에는 미로 같지만 금방 구성의 논리를 알게 된다. 주어진 문제를 매우 간결하고 상식적으로 해결하고자 한 설계자의 생각이 읽히는 부분이다. # 선형식 서소문 아파트와 닮은 듯 다른 매력 성 요셉 아파트 최대의 특징은 역시 가장 대표적인 선형식 아파트라는 점이다. 특히 이 유형에서 최대의 라이벌이라고나 할 서소문 아파트가 또한 지척이다. 이 두 아파트는 여러 모로 비교 대상이다. 일단 지어진 시기도 비슷하다. 서소문 아파트는 1971년 1월 23일에, 성 요셉 아파트는 1971년 6월 20일에 사용 승인을 받았으니 이 둘은 동갑이다. 게다가 마치 자로 잰 것처럼 두 건물의 길이도 115m 내외로 비슷하다. 공통점은 또 있다. 둘 다 곡선형 건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중간에 두 군데가 꺾인 직선의 조합이다. 만약 완전히 곡선으로 지었으면 개념이나 조형면에서는 근사했겠지만 가구 배치, 콘크리트 타설 등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당시 기술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자 유일한 해결책이었을 것이다. 두 아파트의 차이점도 많다. 서소문 아파트가 만초천이라는 물길 위에 자리 잡은 것처럼 성 요셉 아파트도 물길 위에 지어진 것이라는 자료가 여기저기에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오류다. 물길에 대해 매우 자세한 조선 시대나 일제강점기의 지도 어디를 봐도 이 자리에 물길은 없었다. 성 요셉 아파트는 그냥 자연 지형 위에 지어진 건물일 뿐이다. 토지대장에도 종교용지로서 면적이 1790.8㎡에 달한다는 기록이 엄연히 나와 있다. 물길 위에 지은 건물이면 다르게 기술됐을 것이다. 또한 서소문 아파트가 계단실형인 데 반해서 성 요셉 아파트는 편복도식이다. 서소문 아파트는 거의 평지에 면하고 있지만 성 요셉 아파트는 경사지에 지어졌다. 한국의 대표적인 두 선형식 아파트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서로 저마다 다른 이야기와 건축적 가치를 보여 주고 있음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꼭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화려하고 눈에 띄는 건물만이 우리에게 감동과 의미를 주는 것은 아니다. 이 두 아파트는 설계자가 누구인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익명의 존재가 계획하고 구상한 건물들인 것이다. 다만 지어진 지 45년에 불과한 두 건물이 너무 낡은 상태로 있는 것은 안타깝다. 약현 성당이 1892년에 지어져 무려 124년이나 나이를 먹었고, 그 사이에 한국전쟁, 심지어 1998년에 취객의 방화로 인한 화마까지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팎 모두 멀쩡하게 잘 남아 있는 것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모쪼록 중년을 맞은 이 두 아파트가 앞으로도 그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의 삶을 담는 그릇으로 건강하게 잘 남아 있기를 바랄 뿐이다.
  • 베이비부머 은퇴 본격화… 연금소득세 징수 급증

    국민연금이나 퇴직연금, 연금저축 등에 매겨지는 연금소득세 징수 규모가 5년 사이 25배나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로 각종 연금 수령자들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5일 국세청의 ‘국세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연금소득세 징수 실적은 모두 368억 4100만원으로, 전년(181억 9100만원)의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2010년 14억 7800만원였던 연금소득세는 2011년 24억 4700만원, 2012년 57억 5600만원, 2013년 100억 9100만원으로 최근 5년 사이 24.9배로 급증했다. 이는 인구구조 변화로 연금 수급자들이 늘어난 데 따른 결과로 보인다. 특히 우리나라 인구의 약 14%를 차지하는 베이비붐 세대, 즉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5년에서 1963년까지 태어난 사람들이 본격적인 은퇴 시기를 맞이한 영향이 큰 것으로 분석된다. 베이비붐 세대의 맏형격인 1955년생이 올해 만 61세를 맞았는데, 정년을 만 60세로 늘리기 전 일반 기업의 평균 정년이 57세 전후였던 점을 고려하면 이들의 상당수가 최근 4~5년 사이 은퇴한 것으로 추정된다. 베이비붐 세대의 정점인 ‘1958년생 개띠’ 인구는 올해가 은퇴 연도이거나 1~2년 내에 은퇴를 앞두고 있어 연금소득자의 증가세는 한층 더 가속화될 전망이다. 세종 장형우 기자 zangzak@seoul.co.kr
  •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국가보훈처 감사패

    김재철(81) 동원그룹 회장이 2일 한국전쟁 유엔군 참전용사들에 대한 보은 활동에 힘쓴 공로로 국가보훈처의 감사패를 받았다. 한국전쟁 당시 학생이었던 김 회장은 전후 대한민국의 눈부신 발전이 참전용사들의 희생 덕분이라고 보고 이들에 대한 보은에 힘써 왔다. 2010년 이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참전용사들을 위한 오찬 행사를 3번 개최했고 2013년에는 뉴질랜드 참전용사와 가족 등 120여명을 초청해 보은 행사를 열기도 했다. 이 행사에는 존 키 뉴질랜드 총리도 참석했다. 김 회장은 2011년 뉴질랜드 명예총영사에 임명됐다. 보훈처는 “유엔군 참전용사를 위한 보은 행사를 추진하는 기업과 단체 등을 적극적으로 찾아 다양한 방식으로 감사의 뜻을 전달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경하 기자 lark3@seoul.co.kr
  • “1975년 무력통일 승인받으려던 김일성… 마오에 사전차단”

    “1975년 무력통일 승인받으려던 김일성… 마오에 사전차단”

    “북한과 중국 관계는 1992년 한·중 국교관계 수립 시기를 지나 이제 특수성은 사라졌다는 게 객관적 사실이지만 중국이 과거의 사고방식을 갖고 대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역사학자 선즈화(沈志華) 중국 화둥사범대 교수는 1일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과거의 특수 관계는 이제 중국의 전략적 이익에 합치하지 않지만 북한은 이런 이전 관계를 요구하고 있고, 중국은 여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면서 “불만 속에서도 혈맹이란 말로 얼버무리면서 신화화해 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혈맹’을 내세우면서도 내면적으로는 강한 불신을 느꼈다”면서 “(적대적) 대외환경 속에서 북·중 모순을 대외적으로 숨기면서, 양자는 강온을 오가는 밀고 당기기의 관계를 반복했다”고 지적했다. 선 교수는 오는 5일 일본에서 출간되는 저서 ‘최후의 천조(天朝), 마오쩌둥·김일성 시대의 중국과 북한’(이와나미서점)에 이 같은 내용을 담았다. 이 책은 중국과 소련의 문서 및 증언 등 미공개 자료를 바탕으로 했다고 저자가 밝혔다. 천조는 제후들을 거느리는 천자가 다스리는 조정이라는 뜻이다. 선 교수는 마오쩌둥이 1975년 4월 18일 베이징 중난하이에서 마지막 회담을 했을 당시 김일성에게 “나는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이는 남한에 대한 무력공격을 허가받으려는 김일성의 ‘의중’을 미리 파악한 선수 치기였다고 해석했다. 이 마지막 회담을 계기로 북한은 중국에 의존하지 않고 핵 개발을 진척시키는 등 독자노선을 걸은 것으로 선 교수는 풀이했다. 그는 마오와 김일성 두 지도자의 갈등을 사례로 들었다. 마오가 1956년 중국을 찾은 북한 고위 관료를 접견한 자리에서 김일성의 친중국적인 북한 연안파 숙청을 거론하며 “당신들 당 내부에 공포 분위기가 퍼져 있다”고 언급했고 “김일성에게 한국전쟁을 해야만 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또 1956년 11월 30일 마오는 중국주재 소련대사에게 “김일성은 ‘너지’가 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너지는 (사회주의 진영에서) 이탈하려다가 실패했지만, 김일성은 성공할지 모른다”고 경계했다고 말했다. 너지는 1956년 헝가리 반(反)소혁명의 주역으로, 소련에 처형된 너지 임레 전 총리를 말한다. 뒤에 소련으로부터 이를 전해들은 김일성은 “중국의 지도자는 얼굴을 마주하고 말하는 것과 뒤에서 하는 게 너무 다르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선 교수는 “마오의 대북 자세는 양보와 인내였으며 그는 ‘북한은 내 자식’이라는 생각으로 북한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려 했다”면서 “그런 태도는 중앙 왕조가 주변 종속국을 대하는 자세와 같은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김영탁의 시식남녀] 시인은 속초 물소리 속으로 들어갔다

    [김영탁의 시식남녀] 시인은 속초 물소리 속으로 들어갔다

    물소리를 아시는지. 설악에서 발원하여 산과 계곡을 타고 논밭을 적시며 냇가를 이루다가 속초 앞바다까지 흐르는 물이 내는 소리. 그 소리엔 고 이성선 시인의 음성이 흘러내리는 듯하다. '구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산길을 걸으며/ 내 앞에 가시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들의 꽃 피고 나비가 날아가는 사이에서/ 당신 옷깃의 향기를 맡았습니다// 당신 목소리는 거기 계셨습니다/ 산안개가 나무를 밟고 계곡을 밟고 나를 밟아/ 가이없는 그 발길로 내 가슴을 스칠 때/당신의 시는 이끼처럼/ 내 눈동자를 닦았습니다// 오래된 기와지붕에 닿은 하늘빛처럼/ 우물 속에 깃들인 깊은 소리처럼/ 저녁 들을 밟고 내려오는 산그림자의 무량한 몸빛/ 당신 앞에 나의 시간은 신비였습니다// 돌담 샘물에 떨어진 배꽃의 얼굴을 보셨습니까/ 새벽 산에서 옷을 벗는 새벽빛을 보셨습니까/ 당신은 나의 길을 이렇게 오십니다// 산사로 향한 따뜻한 길처럼/ 하늘에 새 날려 보내고 서 있는 나무처럼/ 내 앞에 당신은 그렇게 계십니다'(이성선의 '당신이 나를 스칠 때') 강원도를 향해 가는 두 시간 남짓으로 짧아진 그 길 위에서 왜 문득 이성선 시인이 떠올랐을까. 늘 말이 없던, 서늘한 물 안에 따뜻함을 가졌던 시인. ‘물소리시낭송회’에서 만났던 게 족히 20년은 되었을 터. 그때 그에게 느낀 건 물의 이미지였다. 잡아도 잡히지 않는 그의 손이 그랬고 말이 그랬고 음성이 그랬다. 그렇게 흐르는 물과 늘 함께했던 은자(隱者) 최명길 시인의 온화한 미소가 떠오른다. 고 이성선 시인이 세상을 뜨고 난 이후 속초의 산과 물을 지키는 이였다. 그 역시 이성선 시인의 뒤를 따라 2014년 5월 백두대간 심연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설악산에 걸린 흰 구름 조각/ 그가 내게 보낸 편지인가/ 내용은 날아가 지워지고/ 지워지다 한 줄만 남아 청봉에 걸려 있다'('구름편지') 고 최명길 시인과 시를 생각하면 은자와 미륵이라는 이미지가 겹쳐진다. 생전에 숨어있곤 하는 그를 찾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연락이 되다가 한동안 연락이 두절되기 일쑤다. 미륵 같은 그의 미소를 생각하면 그냥 기다리는 게 상책일지 모를 일이다. 그러다 바람에 실린 물소리를 타고 문득 나타나 평화로운 미소를 말없이 건넬 것 같은 부질없는 생각이 든다. 20분 가량 늦게 도착한 버스가 속초 동명동 터미널에 멈추니 최근에 시집 '바람의 독서'(황금알)를 펴낸 채재순 시인과 부군인 최재도 극작가가 마중을 나왔다. 이곳은 무슨 몬스터인지, 괴물인지를 사냥하겠다며 전국의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명소가 됐다지만 새삼스러운 일이다. 속초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그 자체로 시(詩)와 식(食)의 명소다. 곤드레밥상을 한상 앞에 앉으니 이미 건강해진 기분이다.척박하고 부족한 농토에 산이 많은 데서 난 감자와 산나물이 시대를 돌고 돌아 이제 누구나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다. 밥상을 압도하는 무쇠돌솥의 곤드레밥은 묵직하고 튼실한 강원도의 힘이다. 슴슴한 간장을 넣어 비빈다. 비빈 밥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고, 나물 반찬을 입맛대로 젓가락으로 당기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채재순 시인의 얘기를 들어보면, 식량이 모자라 늘려 먹던 시절에는 곤드레 나물을 많이 넣고, 쌀을 조금 넣어 죽이나 밥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허기를 기신기신 때워야 했던 곤드레밥이 이제 어엿한 건강식이 됐으니 세상의 변화는 놀랍기만 하다. 조미료를 첨가하지 않고, 텃밭에서 금방 따온 나물이나 채소로 만들어낸 음식들은 마음을 살찌우는 밥상을 만들어낸다. 이 집에서 곤드레 밥상을 앞에 놓고 축하할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고, 종종 이야기와 정에 취해 있곤 한다. '산 중 솔바람과 구름이 안으로 들어오네/ 곤드레 꺾어 한 아름 안기던 친구의 얼굴 아른거리고/ 그윽한 이야기와 정에 취해 빙그레 웃음이 이는 오후/ 눈동자엔 산나리 피어나고, 마음 가득 퍼지는 산내음'(채재순 '곤드레밥') 솔바람과 구름까지 끌어당겨 비벼 내놓았으니 참 맛나겠다. 거기에 곤드레를 보내온 친구까지 끌어온다. 자연과 사람이 하나 되는 청정무구한 밥이 이루어진다. 낙산사 양양에서는 뭐든지 주면 먹어라 양양으로 가는 길목 해맞이 공원에 들려서 황금찬 시인의 '설악의 아침'시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요즘 노 시인은 자주 고향 속초를 찾는다고 했다. 몇 년 전에 아들 황도제 시인이 세상을 뜨고 난 후, 수유리 마을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났다. 조금 야윈 듯한, 쓸쓸한 모습이 눈에 밟혀왔다. 황도제 시인이 세상을 뜨기 전 공간시낭송에서 함께 시낭송을 하고 뒤풀이 때 소주 한잔 하면서 시집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가 세상을 뜨고 난 이틀 후에 그의 '겨울새가 물어온 시 한 편'시집이 도착했다. '별이 묻어나는 이슬과의 이별/ 가을은 겨울을 예감하였다./ 시를 모르는 짐승/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데/ 눈이 내렸다./ 겨울새가 물어온 시 한 편/ 꽃보다 아름다운 눈/ 희고 고운 서정시였다' 2009년 1월이었다. 설악 소공원을 소요할 때는 어둑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해맞이 공원에 오고 나니 아직 해 떨어지려면 한참 남았다. 일행은 낙산사와 홍련암을 향하여 차를 몰았다. 낙산사는 신라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동해의 명산인 오봉산에 창건한 사찰이다. 낙산사라는 사찰명은 관음보살이 상주하는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에서 유래한 것이다. 대표적인 관음도량으로서 우리 민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간직된 사찰로 인정되어 2009년 사적 제495호로 지정되었다. 홍련암 및 의상대 주변 해안 일대가 독특하고 아름다운 해안 경관을 보유하고 있어 2007년 명승 제27호로 지정되었다. 창건 이래 여러 차례 걸쳐 화재와 전쟁 등으로 파괴와 중건이 계속되었다. 858년 범일국사의 중창 이후 몽골군 침입,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파괴된 것을 그때마다 재건하였다. 특히 2005년 4월 5일 양양지방에서 발생한 대형산불로 보물 제479호였던 낙산사 동종이 녹아내리고, 원통보전을 비롯한 많은 전각이 소실되었다. 불길에 재만 남은 흔적 위에 불심은 불처럼 일어나 낙산사는 다시 새살이 돋아나고 있다. 양양 뚜거리탕과 은어 낙산사 문을 나서자 벌써 밤기운이 몰아왔다. 수미산을 떠나 환속한 세속의 밤은 반짝이는 전기 불빛이 현실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었다. 양양에서 전화가 빗발치고 있다. 기다리고 있는 시인들과 음식 때문일 것이다. 양양 '강촌식당'에 도착했다. 시인들의 단골집이었다. 잠깐 헤어졌다가 미리 와서 기다린 노금희 시인이 반갑다. 이곳 양양에서 태어난 노 시인은 이곳에서 직장생활 하며, 결혼해 살면서 친구들이나 가족들이 오면 통과의례같이 한 번씩 먹는 음식이 뚜거리탕이라고 한다. 뚜거리, 뚝저구, 꾹저구 등 동해안의 마을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른 이 민물어종은 돌과 모래의 색깔과 비슷한 보호색을 가지고 있는 어종이다. 작지만 아귀를 닮은 입만 커서 못 생겼지만 맛이 좋다고 한다. 양양에서는 뚜거리라 하는데 보드랍게 갈아 만들거나, 혹은 통째로, 또 툭툭 썰어서 끓인다. 여기에 고추장과 막장(해풍에 익은 구수한 강원도 토속장)을 적절히 맞춰 섞어서 끓인 후 수제비를 넣거나 부추, 파를 밀가루에 살짝 버무려 함께 한소끔 끓여내는 음식이다. 자주 접하는 추어탕이나, 섭국(홍합국), 뚜거리탕 모두 장맛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음식이니 집집마다 손맛을 가늠케 하는 음식이다. 최명길 시인이 생전에 무거운 입을 열어 칭찬했던 뚜거리탕을 한 숟가락 떠서 먹어 보니 아득한 느낌이다. 70년대 배고팠던 가난한 냄새가 난다. 도시로 나간 자식들이 오면 정성 어린 손길로 해주는 어머니 음식이다. 청정무구한 뚜거리와 쫀득한 수제비의 감촉에 더해 토속장이 배어 있는 질감은 눈이 감길 정도다. 주인공인 뚜거리와 찬조 출현하는 파와 부추 등속이 적절하다. 과장이 되겠지만 여기서 석 달 정도 살면서 뚜거리탕만 먹고 살았으면 좋겠다. 은어는 섬진강에서도 많이 살지만, 양양 남대천으로 회귀해 올라온다. 바다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와 물살 빠른 하구에 서식하는 일년생 회귀 어족이 은어다. 은어는 맑은 물에 서식하며 돌의 이끼를 먹고 자란다. 은어는 회, 구이, 튀김, 조림, 탕 등 여러 가지 요리법이 있다. 단백질이 풍부한 은어, 자연산만 쓰는 이곳 양양 남대천의 은어 요리는 귀한 재료임에 비해 비교적 값이 싸다. 제철이 아니면 회를 먹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잡은 후 급속냉동을 시킨다고 하니 회를 제외한 어느 요리도 사철 먹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뚜거리탕을 먹고 나니 은어 튀김이 들어왔다. 은어 튀김은 입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빙설이 녹듯 사라졌다. 비린내나 기름 냄새는 흔적도 없고 수박향이 은은하다. 너무 빨리 입속에서 사라지는 은어는 투명한 몸 때문일까. 양양의 은어 튀김은 만년빙설이다. 어려서부터 남대천을 끼고 살아온 양양 남자들의 은어낚시와 뚜거리 잡는 일은 인이 박힌 추억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 어린아이가 오십이 넘어 늙고 늙어서도 남대천을 서성거린다고 한다. 봄이면 민물 벚굴과 재첩을 채취하고, 황어와 은어, 가을에 연어까지 고향을 찾아 남대천으로 돌아온다. 양양의 시인들은 여름이면 멱을 감고 율구(해당화 열매)로 간식을 대신하고, 남대천에서 은어와 뚜거리, 지금은 사라진 칠성장어와 함께 놀았다고 한다. '남대천 유유히 흐르다 멈칫,/ 사람들 품에 흘러들었다/ 뚝배기의 붉은 기운, 어머니의 품'(노금희, '뚜거리탕') 뚜거리탕을 감싼 뚝배기는 어머니 품이 되었다. 넉넉하고 따뜻하다. 간밤 허기진 배를 달래는 때늦은 아침, 혹은 이른 점심. 식사가 시작되기 전 반지르르한 감자전이 식탁에 놓였다. 양은술잔의 구기자 막걸리가 식욕을 당긴다. 다들 허기진 뒤라 조용한 가운데 먹는 데 열중이다. 식탐일까 마는 그래도 배고픈 건 어쩔 수 없다. 황태구이가 상위로 올라오자 구기자 술이 더 당긴다. 고성의 김진희 최문석 최광호 백형태 황연옥 시인 등이 자리에 합류했다. 산채비비빔밥이 들어왔다. 강원도 산나물이 오늘 여기 다 모여서 우리 몸과 함께하게 되었다. 정갈하고 담백한 비빔밥을 모두 다 비운 식객들은 배를 두드리고 있다. 그래도 구기자 막걸리는 잘 들어간다. 속초는 포켓몬인지, 무슨 괴물인지 아니라도 속초는 이리 맛있다. 글·사진 김영탁 시인 tibet21@naver.com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나는 눈물의 왕이로소이다…덕수궁의 밤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나는 눈물의 왕이로소이다…덕수궁의 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1922년 9월 <백조 3호>지에 발표된,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한 설움을 토해내던 홍사용 시인의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마지막 시구이다. 눈물의 왕이었다. 고종(高宗)은 덕수궁 함녕전에서 1919년 1월 21일 식혜를 마시고 승하했다. 조선의 제 26대 임금으로, 대한제국(1897~1910)의 초대황제로, 결국은 일본 제국의 이태왕(李太王)으로 조각 구름같은 삶을 정동(貞洞)의 하늘에서 놓았다. 이렇듯 대한제국의 절멸, 고종의 독살(毒殺)설, 3.1운동의 실패로 만들어진 공포와 비애의 감정, 그 시원(始原)이 ‘덕수궁’이다. 비가 내렸다. 엊그제 폭염을 하루 만에 추억으로 만들어 버린 비였다. 덕수궁이 앉아 있는 정동에도 낮 동안 가을 내음, 비가 내렸다. 덕수궁은 비가 어울린다. 덕수궁은 다른 궁과는 달리 눈물겹다. 목이 한껏 메어오는 공간이다. 서글픈 집이다. 누구든 이 궁에서는 주인 자리 한번 제대로 잡지 못한 이야기만 한가득 만들었다. 굳이 지금에서야 벼르고 벼른 듯 덕혜옹주의 삶을, 고종황제의 삶을, 역사적 진위를 확인하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이문세가 노래하듯 이제는 그 때의 모든 것들이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서 이 모든 것들의 덕수궁의 아픔, 그 시간만으로도 늘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궐로서의 덕수궁만을 우리는 살펴보자. ● 정릉동 행궁(行宮)이 경운궁(慶運宮)으로 덕수궁은 시청 광장 옆,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에 있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궁궐이다. 또한 대한민국의 사적 제124호이며 면적은 6만 3069㎡에 이르는 서울 도심 속에 위치한 궁궐이기도 하다. 덕수궁은 시민들에게는 늘상 지하철 1호선이나 2호선 시청역에서 내리면 바로 만나게 되는 생활 속의 공간이자, 가을길 은행나무 잎 가득 덮인 돌담길로 연인들을 유혹하는 옛날 궁궐이기도 하다. 대개의 사람들은 덕수궁을 20세기 역사의 언저리에 등장하는 근대의 궁궐로 인식한다. 그러나 애당초 덕수궁은 궁궐이 아니라 세조(世祖)의 큰 손자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다. 그러다 조선의 역사 한가운데로 급작스레 등장한 시기가 임진왜란 때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의주로 피난을 갔던 선조(宣祖)가 한양으로 돌아와서 승하할 때까지 이곳을 시어소(時御所)로 명하여 거처하는 행궁으로 삼는다. 비로소 왕이 거주하는 궁궐이 되었다. 이후 1608년 선조가 승하한 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고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 붙여주게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명명한 경운궁에서, 자기를 쫓아낸 인조가 임금이 된다. 인조는 경운궁에 거처하지 않고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경운궁은 다시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져 한적한 별궁으로 변한다. ●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에서 덕수궁으로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곳 경운궁으로 옮겨오게 되자 본격적으로 근대 궁궐로서의 기능을 하게 된다. 9월 17일에는 소공동(小公洞)에 위치한 환구단에서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내고 드디어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이 된다. 그러나 1904년에서 화재가 일어나 궁궐의 상당 부분이 소실이 되고 급하게 선원전(璿源殿)·함녕전(咸寧殿)·보문각(普文閣)·사성당(思成堂) 등이 축조, 복원되었지만 제대로 보수되지는 못한다. 1907년 7월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純宗)이 즉위하면서 이제껏 불렀던 경운궁을 덕수궁이라 부르게 된다. 이는 고종의 궁호(宮號)가 '덕수'이기 때문에 지금의 덕수궁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순종은 즉위 후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였고, 이후 1910년에 한성부가 ‘경성부(京城府)’로 바뀌게 되자 덕수궁은 일제 총독부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게 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1913년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벚나무 500그루가 경성일보 사장 ‘요시노’에 의해 덕수궁 곳곳에 심어졌으며, 1914년에는 대한제국의 원년을 선포했던 환구단 자리에 조선철도호텔이 들어선다. 이후 일제는 193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덕수궁의 색깔을 지우기 위해 많은 공사들을 시행한다. 우선은 1933년에 덕수궁의 주요 전각인 함녕전, 덕홍전, 중화전, 석조전을 제외한 나머지 전각을 철거하거나 그 규모를 축소하고, 공원으로 개조하여 일반에 공개한다. 석조전은 일본근대미술품을 전시하는 ‘덕수궁미술관’으로 개관하고 급기야 1935년 5월에는 돈덕전이 있던 자리에 동물원을 신설해서 옛 궁궐로서의 품격을 완전히 격하시킨다. 그러다 한국전쟁을 거쳐 1955년 6월, 석조전을 국립박물관으로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 1963년 1월 18일에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어 다시 우리 역사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본격적인 수많은 복원 공사를 거쳐 현재 석조전이 대한제국역사관 개관, 운영되는 등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다시 자리 잡게 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덕수궁에 대한 여행 10문답> -아래 질문은 실제 독자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을 바탕으로 만든 10문답입니다.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인가? -당연하다. 서울 4대 궁궐로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을 들 수 있는 데, 이 중 가장 근대적인 면모를 갖춘 궁궐이다. 특히 석조전, 석어당, 정관헌 등은 기존의 옛 궁궐에서 찾기 힘든 근대 역사 유적으로서 가치가 있다. 한 마디로 궁궐로서의 위엄보다는 생활공간으로서의 친근함이 묻어나는 공간이다. 2. 이 공간을 추천해주고 싶은 사람은? -이제 갓 사랑을 시작한 연인이라면 누구든지. 특히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의 경우 10월과 11월에는 누구든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고즈넉함을 제공한다. 3. 덕수궁 야경이 그렇게 유명해? -말을 할 필요가 없다. 1964년 4월 15일에 덕수궁 야간공개가 시작된 이래 야경투어의 정석이다. 특히 종로의 높은 빌딩과 네온사인들이 결코 부담스럽지 않은 밤풍경을 제공한다. 4.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면 연인들은 진짜 헤어지나? -과거 가정법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지금은 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 역시 덕수궁 돌담길을 유명하게끔 만든 재미있는 이야기다. 5. 덕수궁에서 놓치지 말고 꼭 봐야 하는 건축물은? -물론 최근에 복원된 건축물들도 많지만, 근대 건축물로서의 원형이 보존된 곳이 많다. 덕수궁 미술관으로 불리는 석조전, 새로 지어진 석어당, 고종황제가 커피를 즐겨 드시던 정관헌, 덕혜옹주를 위해 유치원을 만들어 주었던 준명당 등이 있다. 6. 홈페이지 주소 및 도움되는 사이트 주소는? -문화재청 덕수궁 http://www.deoksugung.go.kr/ 7. 입장료와 기타 관광지정보는? -25세 이상 개인1000원, 단체 800원이다. 만 24세 이하, 65세 이상은 무료이다. 단, 미술관은 덕수궁의 관람권을 구입하고 난 뒤, 미술관에서 별도의 관람권을 구입해야 한다. 8. 주변에 가 볼만한 다른 공간도 있을까? -정동 주변은 근대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공간이다. 우선, 덕수궁 돌담길을 걷고 난 뒤 성공회 서울 주교좌성당, 예전 대법원과 가정법원자리였던 서울 시립 미술관, 정동제일교회, 배재학당, 러시아 공사관, 세실극장, 김수근의 경항신문 사옥 등등 덕수궁 돌담길은 다른 볼거리도 무궁무진한 진정한 서울 근대 문화유산의 보고(寶庫)다. 9. 이곳에서 꼭 추천하고픈 체험은? -당연히 덕수궁 대한문에서의 수문장 교대 의식이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3회 이루어지는데 오전 11시, 오후 2시, 오후 3시 30분에 의식이 있다. 좀 더 자세한 사항은 02-120(다산콜센터)로 문의하면 된다. 10. 총평 및 당부사항, 기타정보 -모든 궁궐을 둘러보는 것 자체가 역사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지만, 덕수궁은 더더욱 그러하다. 비운의 역사를 통해 현재의 우리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되는 귀한 체험이 될 수 있다. 반드시 문화재해설을 듣는 것을 강추!!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기자 vieniame2017@gmail.com
  • 70대 할머니 6·25 때 헤어진 사촌오빠와 60년 만에 극적 해후

    70대 할머니가 6·25때 헤어진 사촌오빠를 60년 만에 극적으로 만나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30일 경기 의왕경찰서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가족들을 모두 잃고 홀로 힘들게 살아온 강모(78) 할머니가 청계파출소 도움으로 사촌오빠와 극적으로 상봉했다. 강 할머니는 지난달 7월 중순 청계파출소를 찾아와 “죽기 전에 내 마지막 소원을 들어달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전북 익산이 고향인 강 할머니는 한국전쟁 당시 집에 포탄이 떨어져 친언니 3명 모두를 잃은 뒤 홀로 힘들게 살아왔다. 강 할머니는 살아생전에 60년 전 헤어진 유일한 혈육인 사촌오빠를 만나기 위해 경찰서, 시청 등을 돌아다녔지만 허사였다. 강 할머니가 기억하는 것은 사촌오빠 이름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정을 들은 청계파출소 직원들은 사촌오빠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한달여간 수소문 끝에 인천에 거주하는 할머니의 사촌오빠인 강모(85) 할아버지와 연결됐다. 두 사촌은 지난 21일 청계파출소에서 60년 만에 만나는 감격을 맛봤다. 강 할아버지는 “처음 경찰관들이 사촌 여동생을 찾았다는 말을 했을 때 거짓말인 줄 알았다며”며 “어릴 적 한번 보고 60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만나니 아직도 믿기질 않는다”고 기뻐했다. 강 할머니는 “경찰관들이 죽기 전 내 마지막 소원을 들어줘 너무 행복하다”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경술국치일에 109년 된 교회서 부른 독립군가

    경술국치일에 109년 된 교회서 부른 독립군가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싸우러 나가세.” 29일 밤 첩첩산중 경북 봉화군 법전면 척곡리 척곡교회(등록문화재 제257호)에서 100여년 전 일제강점기 당시 광복군의 대표적 노래 ‘독립군가’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경술국치 106년이 되는 날을 맞아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척곡교회가 마련한 ‘제1회 나라사랑 음악의 밤’ 행사에서였다. 이날 행사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09년 역사와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척곡교회 김영성(92) 장로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사비를 털어 마련했다. 김 장로는 1907년 이 교회를 세운 대한제국 탁지부(지금의 재경부) 관리(당시 주사)를 지낸 김종숙(1956년 소천) 목사의 종손이다. 행사에서는 영주기독남성합창단이 일제 치하의 동요, 민요, 가요 등을 들려줬고 250명의 참가자가 가곡 ‘선구자’를 합창했다. 김 목사와 함께 독립운동 모금 활동에 앞장섰던 정용선(1883~1928년)의 증손자 정병기 선생도 참석했다. 척곡교회는 김 목사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처가가 있던 봉화 유목동으로 낙향해 세웠다. 독립운동가들을 숨겨 주면서 일경들의 탄압을 받았고 신자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어려움도 겪었다. 척곡교회는 초기 예배당이 대부분 기역(ㄱ)자나 일(一)자 형태로 지어졌던 것과는 달리 정사각형이고, 교육시설인 서당(명동서숙)이 그대로 남아 있는 유일한 교회다. 김 장로는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애쓰다 숨진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넋을 노래로 달래기 위해 뒤늦게나마 음악회를 마련했다”며 “이 행사가 이어질 수 있도록 많은 성원과 관심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 사진 봉화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주말 하이라이트]

    ■다큐 공감(KBS1 일요일 밤 8시 5분) 일본 지바현의 한적한 어촌 호타의 한 요양원에 제주 출신 노해녀 홍석랑(91)씨가 고향을 그리며 누워 있다. 뇌경색으로 쓰러져 거동조차 힘든 그는 스무 살에 일본에 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제주 해녀들이 그랬다. 당시 제주 바다는 일본 잠수 어선들이 잠식했다. 할 수 없이 해녀들은 돈을 벌러 일본으로 ‘출가 물질’을 나갔다. 해녀들은 일본에서 감태와 우뭇가사리를 채취했다. 전쟁에 열 올리던 일본에 군수용 물자 원료로 유용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전시 동원을 위해 국가 총동원법도 공포했다. 이런 이유로 일본을 떠난 이들은 제주 4·3항쟁과 한국전쟁 등으로 영영 귀향하지 못한 채 망향가를 부른다.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MBC 일요일 오전 8시) 25년차 개그맨 김한석은 연예계에서 ‘성실함’의 아이콘이다. 어느 프로그램에서도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내 그가 출연하면 장수 프로그램이 된다는 속설도 있다. ‘안 웃기는 개그맨’이라는 꼬리표가 싫었다는 그는 이젠 누군가를 빛내는 ‘아름다운 들러리’로 자리매김했다. 16년 전 ‘TV는 사랑을 싣고’에서 만난 중학교 시절 첫사랑 아내, 아이와 함께하는 그의 소중한 일상을 들여다본다. ■니하오 차이나(EBS2 토요일 오전 9시 20분) 14억 중국인이 추석 기간에 사 먹는 월병의 양은 엄청나다. 추석 기간에만 무게로 따지면 약 20만톤, 약 100억 위안어치의 월병이 팔려 나간다. 가족과 함께 월병을 만드는 쉬웨이웨이의 집, 월병 속에 담긴 중국인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 한국·북한·일본의 ‘경계인’ 재일조선인, 또 다른 이름 자이니치의 삶과 역사

    한국·북한·일본의 ‘경계인’ 재일조선인, 또 다른 이름 자이니치의 삶과 역사

    자이니치의 정신사/윤건차 지음/박진우 외 옮김/한겨레출판/ 928쪽/4만 5000원 재일조선인, 재일한국인, 재일동포, 재일교포 등의 용어가 일정한 정치성과 이데올로기성을 띠고 있는 반면 1970년대 후반부터 쓰이기 시작한 ‘자이니치’(在日)는 단지 ‘일본에 있다’는 뜻의 보통명사다. 한국, 북한, 일본 세 나라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경계인의 정체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이니치의 정신사’는 자이니치 2세이자 한·일 현대사상사 연구가인 윤건차 일본 가나가와 대학 명예교수가 온 삶을 걸고 쓴 역작으로, 자이니치의 삶과 역사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재일조선인은 1945년 8월 15일 이후 일본에 잔류한 조선인을 의미하는 역사적 용어다. 하지만 그 출발은 근대 일본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배이다. 1911년 2527명에 불과하던 재일조선인은 1945년 해방 당시 230만명으로 늘었다. 생계를 위해 밀항한 이부터 일본 본토의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강제 연행된 이까지 다양했다. 이들은 해방 이후 귀환을 서둘렀지만 결과적으로 60만~70만명이 일본에 남게 됐다. 저자의 경우 1930년 도일한 부모 밑에서 1944년 12월 태어나 다섯 살 무렵 귀환하려다 한국전쟁 발발로 무산돼 일본에 머물게 됐다. 이처럼 많은 재일조선인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대의 격랑에 휩쓸려 내몰려지곤 했다. 책은 한국과 북한, 그리고 일본이라는 세 국가의 틈바구니에서 자이니치가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기 위해 어떻게 신음하고 고뇌해 왔으며 일본 사회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어떻게 고군분투해 왔는지를 파헤치고 있다. 저자는 각종 학술자료와 200명이 넘는 사람들과의 인터뷰, 저자 본인의 이야기를 통해 자이니치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다룬다. 책의 제목에는 ‘정신사’를 내세웠지만 내용은 재일조선인의 사상·정신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자이니치가 가지는 의미를 역사·정치·사회·문화·문학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식민지 시기의 조선인, 해방 이후 점령 공간의 재일조선인, 조총련의 탄생과 민족갈등, 북한의 귀국사업과 한일조약에 이어 자이니치의 사상·사회운동사와 재일 문단, 자이니치와 결혼한 일본인 아내의 삶 등 여성·젠더 문제까지 다뤘다. 저자는 “일본 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적 체질과 남북 분단의 현실 앞에서 절대적 소수자인 자이니치의 문제는 여전히 미완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되뇐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시론] 北 붕괴론, 아직 이르다/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시론] 北 붕괴론, 아직 이르다/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박근혜 대통령이 연이어 대북 고강도 제재 효과의 자신감을 강하게 표출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한 당국과 간부, 주민에 대한 분리 대응을 언급하는 등 ‘레짐체인지’(정권교체)를 시사했다. 이어 22일 을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북한 정권의 심각한 균열 조짐’, ‘체제 동요 가능성’, ‘자멸’ 등의 표현을 사용해 정권 붕괴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박 대통령은 또 “북한 핵심 엘리트층마저 이반하면서 탈북이 이어지고 있는 지금은 잠시도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재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태영호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 망명 등 엘리트들의 탈북을 그 징후로 제시했다. 대통령이 북한 체제의 붕괴 가능성을 좀더 분명히 한 느낌이다. 하지만 해외 체류 종업원의 집단 탈북과 외교관의 망명 등으로 김정은 정권이 심각한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박 대통령의 분석에 동의하기 어렵다. 1997년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귀순 때도 수많은 언론 매체가 조기 붕괴를 예측했다. 한국전쟁 이후 최악의 경제난과 식량난이 엄습한 ‘고난의 행군기’에 벌어진 황 비서 탈북에 세계는 환호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북한 체제는 유지되고 있다. 쿠바는 수많은 사람들이 망명하고, 심지어 쿠바 국가평의회의 의장 피델 카스트로의 딸 알리나 페르나덴스 레브엘타마저 체제를 비판하며 미국으로 망명했는데도 여전히 건재하다. 최근 탈북, 귀순 사례들을 북한의 분열과 붕괴 가능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들의 탈북을 전체 주민의 체제 비판 혹은 반감으로 확대할 만한 근거가 아직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북한 체제는 정보 유통이 종적으로는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지만, 횡적으로는 잘 이뤄지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다. 주민들의 상호 정보 유통이 막혀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태 공사 망명에 대해 주민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조선중앙통신을 통해서만 강도 높은 비난을 퍼부었다. 북한 내부에는 망명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철저한 통제를 이어 가고 있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제재가 체제 균열로 나타나고 그것이 곧 붕괴로 이어진다고 인식하는 듯하다. 하지만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확정 이후 대북 제재 전선에 구멍이 뚫리고 있다. 실제로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이후 감소했던 북·중 간 교역량이 다시 증가세로 돌아서고 있다. 지난 8일 중국 해관총서가 공개한 국가별 월 무역액 통계에 따르면 북·중 간 올 6월 무역 총액은 전년 대비 9.4% 증가한 5억 377만 달러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 4월과 5월 교역량이 전년 대비 각각 9.1%와 8.2% 감소세를 나타낸 것과 비교하면 의미 있는 변화다. 북·중 국경 1000㎞에서 이뤄지는 밀무역, 즉 밀수는 뺀 수치다. 최근의 세계사를 봐도 내부 문제로 붕괴된 국가의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라크 후세인 정권, 리비아 카다피 정권도 내부 분열로 붕괴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망명이 이어졌으나 이들 정권은 외부 침공으로 붕괴됐다. 미국의 엄청난 분열 공작에도 이란 호메이니 정권은 건재했다. 쿠바, 리비아, 이란 등의 사례를 보면 이들 국가에 30~40년에 걸친 오랜 국제 제재가 가해진 결과 의미 있는 변화가 나타났다. 수년 정도 제재를 가해 괄목할 만한 성과가 나타난 예를 찾기 어렵다. 몇 번이나 세계사를 다시 봐도 그렇다. 김정은 정권이 핵을 포기하지 않고 핵경제 병진노선을 지속하는 한 제재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제재에만 올인한다 해도 버티는 쪽이 피죽만 먹고라도 버티기 시작하면 답은 막막하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에 한·미·중 3국 중 한 국가라도 빠지면 효과는 사라진다. 중국이 빠진 제재는 성공 확률이 낮다. 중국은 제재 전선에서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다. 제재 단계에서 발목이 잡혀 가고 있는데, 체제 균열과 붕괴로 이어진다는 논리는 희망 사항이다. 압박과 제재만으로 북한을 굴복시키기엔 한계가 있다. 이 시점에 제재와 대화의 병행, 뭔가 알파가 필요하다. 제재와 대화의 양 날개로 북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 대구 ‘10월 항쟁’ 민간 피해자 추모 조례 마련

    대구 10월 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에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 피해자를 추모·지원하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대구시의회는 최근 본회의에서 ‘대구시 10월 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안’을 가결했다고 22일 밝혔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등 국가기관 진실규명과 사법부 판단으로 확인한 한국전쟁 전후 시기에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을 추모함으로써 아픔을 치유하고 인권 증진과 평화에 기여하기 위해서다. 이에 따라 대구시는 조례에서 규정한 민간인 희생자 추모·위령사업 지원을 위한 시책을 강구하고 담당 부서를 지정해 업무를 추진해야 한다. 또 민간인 희생자 관련 자료 발굴·수집, 간행물 발간, 평화·인권운동 교육 등에 예산을 지원할 수 있다. 시의회 관계자는 “민간인 희생자 유족이 조례 제정으로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대구 10월 항쟁 유족회는 2009년부터 해마다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위령제를 연다. 지난달 31일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 가창댐 수변공원에서 열린 올해 위령제에서는 영혼 천도재에 이어 살풀이, 전통제례, 위령제 순으로 진행됐다. 유족과 대구시, 시의회 관계자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대구 10월 항쟁은 해방 직후인 1946년 미군정 시절에 정부의 쌀 배급 정책 실패로 굶주리던 민중과 경찰이 충돌해 일어난 것으로, 대규모 유혈 사태를 빚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를 조사해 2010년 3월 경찰에 의해 민간인 60명이 적법 절차 없이 희생된 사실을 확인했다. 이 조례안을 발의한 김혜정 시의원은 “10월 항쟁은 대구에서 가장 먼저 시작돼 전국으로 확산됐으나 그동안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묻혀 있었다”며 “조례안이 통과됨에 따라 희생자 위령탑과 추모공원 조성, 자료수집 등 관련 사업들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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