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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린세상] 동북아 정치의 지각변동, 주도적으로 대응해야/신봉길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객원교수

    [열린세상] 동북아 정치의 지각변동, 주도적으로 대응해야/신봉길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객원교수

    환구시보(環球時報)는 중국 매체 중 해외 언론의 가장 큰 관심을 끄는 국제뉴스 전문 신문이다. 중국 공산당의 기관지인 인민일보의 자매지다. 영향력이 대단하다. 매일 200만부를 발행한다. 특히 허를 찌르는 사설로 유명하다. 사설은 총편집 후시진(胡錫進)의 손을 거쳐 나온다.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정부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대만 심지어는 북한을 수시로 놀라게 했다. 때로는 중국 외교부도 항의 전화를 한다. 필자가 베이징에서 근무할 때 집에서 같이 식사를 할 정도로 가까이 지냈는데 자신이 환구시보를 키웠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너무 튀면 모회사인 인민일보에서 뭐라고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환구시보가 벌어서 인민일보를 먹여 살리는데 뭐라고 하겠느냐고 대답했다. 그는 중국도 언론 환경이 많이 변해서 중국 공산당이나 지도자를 비판하는 것만 아니면 쓰는 데 거의 제약이 없다고 했다. 그의 강점은 사회주의 언론에 오래 길든 중국 언론계에서 남다른 이야기와 새로운 발상을 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그는 몇 년 전 방한 때 필자의 집을 찾아와 주택의 평당 가격을 세세히 물어보며 베이징, 도쿄와 비교하기도 했다. 그는 경제, 사회문제 등에 대한 칼럼도 쓰는데 그의 칼럼집이 베스트셀러 명단에 오른다. 환구시보는 지난 22일자 사설에서 미국이 북한 핵시설에 대한 외과적 공격을 할 경우 전면전이 아니라면 중국이 군사적 개입을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폈다. 기존의 통념을 깨는 것이다. 북?중 간에는 1961년 체결돼 계속 연장돼 온 상호원조조약이 있다. 이 조약은 북한이 무력 침공을 당하면 중국이 지체 없이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하게 돼 있다. 다음날 사설에서는 북한이 스스로 중국의 안전을 지켜 주는 초병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오해라고 했다. 오히려 북한의 핵 개발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중국의 핵심 국가 이익을 해치고 있다고 논평했다. 중국은 북한을 더는 완충지대나 전략적 자산으로 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보다 며칠 전인 8일에는 상하이의 화둥사범대학 션즈화(沈志華) 교수의 강연 내용이 뉴욕타임스에 소개됐다. 한국전쟁 연구로 유명한 학자다. 그는 동북아 정치 지형에 근본적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과 북한 중 누가 중국의 적이고 동지인가? 그는 핵 개발에 몰두하고 있는 북한을 중국의 잠재적 적으로 지목했다. 북?중 혈맹의 역사는 이미 과거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들이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주류 의견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그간의 통설이었던 북?중 혈맹관계나 북한 완충지대론 등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도 지지 않고 험한 말들을 중국에 뱉어 내고 있다. 21일 게재된 북한의 조선중앙통신 논평은 “주변국이 우리의 의지를 오판하고 경제 제재에 매달린다면 파국적 결과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서 주변국은 중국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정치 지형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과거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보자. 구한말 조선은 변화에 대응할 전략도 힘도 없었다. 강대국들이 한반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조선의 국왕 고종은 1907년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다. 주권 회복을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후 조선은 일본에 병합됐다. 물론 지금의 한국은 1세기 전의 조선이 아니다. 한국의 국력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그러나 사드 배치 문제, 북핵 문제 등을 두고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들이 한반도에서 각축하고 있는 것은 역사의 데자뷔를 보는 것 같다. 누가 적이고 동지인가? 오직 국가 이익이 있을 뿐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주도한다는 확고한 비전과 이를 실천할 전략이 필요한 때다. ‘코리아 패싱’이라는 말이 다시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위기가 정점에 달하면 기회가 오는 법이다. 북핵 문제의 협상 국면이 나타날 수도 있다. 강력한 제재와 함께 당근이 필요할 수도 있다. 오랫동안 단절된 남북 관계에 주도적으로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도 필요하다.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고 북핵 문제를 해결해 평화통일을 이루는 역사적 과업은 한국의 창의적이고 주도적 노력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 [사설] 오늘 세계가 주시하는 北, 핵실험은 파멸만 재촉

    북한이 오늘 인민군 창건 85주년을 맞아 6차 핵실험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와 같은 도발을 할 가능성이 제기됨에 따라 한반도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북한의 인터넷 선전매체 ‘메아리’는 어제 “트럼프 행정부의 군사적 도발 광기로 조선반도(한반도)에서 ‘4월 전쟁설’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면서 “제2의 한국전쟁이 나면 이길 것”이라고 강변하고 나섰다. 한반도 해역으로 향하는 미국의 핵 추진 항공모함 칼빈슨호에 대해 “수장해 버리겠다”며 결사항전 의지를 거듭 드러내고 있다. 세계가 한반도를 주시하는 중대한 순간을 맞았다. 북한은 지난해에만 1월과 9월 두 차례의 핵실험과 8차에 걸친 미사일 발사 실험을 감행했다. 올해도 실패 여부를 떠나 탄도미사일을 포함해 4차례나 미사일을 쐈다. 엊그제 북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 북쪽 갱도에서는 트레일러로 보이는 물체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북한의 동향을 정밀감시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문제는 북한이 핵실험이나 ICBM 등의 군사적 행동을 벌일 경우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국면에 빠져들 수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어제 이례적으로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잇따라 통화를 해 북핵에 긴밀히 대응하기로 했다. 북핵 저지를 위한 공동 행보에 나선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일을 넘어 중국의 북한 압박 움직임이 심상찮다. 북한이 90% 이상 의존하고 있는 ‘생명선’인 대북 송유 중단까지 내비치고 있다. 관영매체인 환구시보는 엊그제 사설에서 북한이 6차 핵실험을 한다면 “중국은 원유 공급을 대폭 축소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미국이 북한의 핵시설에 대해 ‘외과수술식 타격’을 한다면 외교적 수단으로 반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묵인 방침과 다름없다. 칼빈슨호는 일본 호위함들과 함께 서태평양에서 공동훈련에 돌입했다. 북한에 대한 실질적인 행동인 것이다. 김정은 정권의 냉정한 현실 인식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들에 비해 북핵 해결에 적극적이다. 중국의 대북 역할론도 미·중 정상회담 이후 달라졌다. 중국은 북핵을 주요 의제로 삼고 북한을 압박하는 동시에 대화와 협상을 촉구하고 있다. 북한은 확실하게 종전과 다른 상황에 부닥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벼랑 끝 전술도 통할 수 없다. 북한은 ‘특단의 선택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하며 긴장 수위를 높이기보다 파멸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야 할 때다.
  • [시론] 시진핑의 역사 인식과 한·중 관계/박병광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동북아연구실장

    [시론] 시진핑의 역사 인식과 한·중 관계/박병광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동북아연구실장

    최근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Korea actually used to be part of China)라고 말했다는 트럼프의 인터뷰 내용이 논란을 낳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에 따르면 이달 초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으로부터 중국과 한국의 역사에는 수천 년 세월과 많은 전쟁이 얽혀 있고,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란 말을 들었다”고 하면서 파문이 불거진 것이다. 트럼프의 전언(傳言)만을 놓고 보자면 우리로서는 “대체 시진핑이 무슨 말을 어떻게 했기에?”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비공개 회담에서 오간 말이니 두 지도자 간 대화의 구체적 내용을 알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아울러 통역 과정에서 내용을 단순화하는 실수가 있었을 수도 있고, 트럼프가 시진핑의 발언을 뭉뚱그려 자기 방식대로 이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는 과거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북한 김정은과 그의 부친 김정일을 완전히 혼동하는 발언까지 한 적도 있다. 이 때문에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의 경솔함과 무지가 한국에서 큰 분노를 일으켰다”고 비판했다. 이번 트럼프 발언의 파문은 그 진위 여부를 떠나 몇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시진핑의 중국 중심적 역사 인식이 그것이다. 비록 트럼프가 시진핑의 발언을 확대 해석하거나 단순 화법으로 잘못 전달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시진핑이 한반도와의 관계를 역사적 측면에서 설명했다는 것이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자기중심적이었다는 것이다. 시진핑은 과거 국가 부주석 시절에도 한국전쟁에 대해 “항미원조전쟁은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위대한 전쟁이었다”면서 “세계 평화와 인류 진보를 지켜 낸 위대한 승리”라고 주장해 한국전쟁의 역사적 진실을 호도했다. 둘째, 파문이 불거진 이후 나타난 중국 정부의 태도다. 중국 외교부는 발언의 진위 여부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으면서 “한국 국민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만 했다. 그런 말을 한 사실이 없으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간단히 답하면 될 문제인데 중국 정부는 오히려 사실 여부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국 국민들로 하여금 시진핑은 실제로 그런 말을 했고, 한국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트럼프는 듣고만 있었던 것이 아닌가 우려하게 만드는 것이다. 더불어 중국 정부의 오만함이 배어 나오는 태도이기도 하다. 셋째, 미·중 정상끼리 만나 한국의 역사 얘기를 자기들 방식으로 도마에 올렸다는 것이다. 이는 향후 한국을 배제한 채 얼마든지 미·중 양국이 북핵을 포함한 한반도 문제를 처리하는 이른바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 상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비록 국제정치가 ‘강대국 정치’라는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비뚤어진 역사 인식의 지도자와 한반도에 대한 기본적 역사 지식도 없는 다른 지도자가 만나 우리의 운명이 걸린 문제를 자기들끼리만 논의하고 결정하게 된다면 이는 매우 위태로운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갈등을 빌미로 한국에 대해 치졸한 보복 행위를 일삼는 가운데 자국 중심적 역사 해석에 치우친 것으로 보이는 중국에 대해 분노하기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전언을 이유로 한·중 관계의 갈등이 더욱 걷잡을 수 없는 불신과 대립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한·중 양국에 바람직하지 않다. 오늘 당장 해결될 수 없고 발언의 진위도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을 향해 핏대를 올리는 것은 스스로의 감정 소모일 뿐이다. 다만 사드 갈등과 이번 시진핑의 발언 파문에서 나타난 것처럼 중국의 ‘민낯’과 ‘복심’이 무엇인지 우리는 똑똑히 볼 수 있었고 그것을 분명히 기억해 두는 게 필요하다.
  • 101세 美사진작가, 6·25 사진 30점 부산 기증

    101세 美사진작가, 6·25 사진 30점 부산 기증

    미국 전쟁사진작가 데이비드 덩컨(101)이 한국전쟁 때 찍은 사진 30점이 부산 유엔평화기념관에 영구 전시된다.부산 유엔평화기념관은 오는 26일 오후 유엔평화기념관에서 사진 기증식을 연다고 23일 밝혔다. 사진 기증은 덩컨과 친분이 있던 주한 영국대사 부인 파스칼 서덜랜드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한 덩컨을 대신해 서덜랜드가 기증식 행사에 참석한다. 기증식은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방한한 영국·호주·뉴질랜드·캐나다 등 영연방 4개국의 한국전쟁 참전용사와 가족 100여명을 환영하는 행사를 겸한다. 2014년 11월 개관한 유엔평화기념관은 지상 5층 규모로 상설 전시관 3개, 기획전시관, 4D 영상관, 컨벤션홀, 전망대 등을 갖추고 있다. 기증 사진은 그의 사진집 ‘디스 이즈 워’ 등에 실렸던 것으로 낙동강과 장진호 등 치열했던 전투 현장 곳곳에서 촬영된 것이다. 덩컨은 사진잡지 ‘라이프’의 일본 주재 기자로 일하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종군기자로 활동했다. 이 사진들은 국가유물관리시스템에 기증 유물로 등록하고 6월 호국보훈의 달에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장삼이사’ 희생으로 꽃피운 한국 민주주의

    ‘장삼이사’ 희생으로 꽃피운 한국 민주주의

    민주주의 잔혹사/홍석률 지음/창비/308쪽/1만 5000원대중은 사회적으로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역사의 길목에서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서 이들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다. 새 책 ‘민주주의 잔혹사’는 바로 그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 제목은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탄압, 국가폭력 등만 뜻하는 게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부차적인 존재로 물러나 앉아야 하는 수많은 사례들이 민주주의의 잔혹한 측면이라는 걸 말하고 싶은 거다. 책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박종철,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국가권력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맞았던 도시 빈민 박영두 등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현대사의 8가지 사건들을 그늘 밖으로 드러내고 있다. 책은 특히 여성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여성이야말로 한국현대사에서 주목하지 않은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 보통선거가 도입된 이후 처음(1972년)으로 여성 노동조합장을 탄생시킨 동일방직의 여성노동자들, 4·19혁명 뒤에 가려진 마산의 할머니들과 여대생 등이 그 주인공이다. 같은 이유로 저자는 6월 항쟁 때의 기자와 의사, 한국전쟁 당시 외공리 학살 사건의 희생자들, 해방 직후 돌아온 학병들 모두에 골고루 시선을 준다. 이 가운데 경남 진주 외공리 소정골에서 벌어진 양민 학살은 강자들 사이의 갈등이 약자들에게 이전되고 증폭되는 양상을 그대로 보여 준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베크는 부는 상층에 축적되지만 위험은 하층에 축적된다고 했다. 저자는 “한반도가 여전히 분단돼 있는 한 강대국이 조성한 갈등이 약소국 내부의 다양한 갈등을 걷잡을 수 없이 증폭시키는 구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했다. 현실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 여전히 세계의 주변국 처지를 벗어나지 못한 한반도 해역으로 미국의 항공모함이 결집되고 중국 역시 서해로 이지스함을 출동시키는 등 요란을 떨고 있는데, 우리는 손 하나 까딱 못 하거나 혹은 이념을 앞세워 갈등만 증폭시키고 있는 모양새다. 5·16군사정변과 미국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등이 민주주의 잔혹사로 다뤄진 것은 다소 의외일 수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해 5·16을 일으킨 군인들이 당시 한국 군부에서 주류가 아닌 주변부에 머물렀던 청년 장교들이었고, 푸에블로호 사건은 국제관계에서 우리의 지위가 주변부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진정한 컬렉터라면 딱 ‘한 점’만 가진다

    진정한 컬렉터라면 딱 ‘한 점’만 가진다

    30년간 조선의 미(美)에 미쳐 조선 도자기를 예찬해 온 컬렉터 전기열(65)씨. 부산의 한 중견기업 회장이자 사설 연구소인 한국조선백자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그는 10여년 전 일본 교토에서 만난 일본인 학자에게 일본 국보인 ‘기자에몬 이도다완’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되겠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기자에몬은 직경 15㎝, 높이 9㎝의 조선 사발로 16세기 무렵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찻잔으로 썼던 것으로 전해지는 기물(器物)이다. 당시 가치는 120억엔 정도로 평가됐다. 그러나 박물관장을 지낸 일본 학자는 서슴지 않고 1000억엔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한화로 1조원이다. “그 가격에 살 사람이 있겠느냐”고 되묻자 정색을 하며 일본의 컬렉터들은 살 것이라고 자신했다. 전 소장은 “머슴 밥그릇으로나 쓰던 조선사발에 대한 지독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조선 도자기의 미와 컬렉터 인생을 풀어낸 ‘조선 예술에 미치다’(아트북스)를 펴낸 전 소장은 20대 청년 시절부터 골동(骨董)인 고미술품을 수집해 온 이름난 컬렉터다. 그의 부친은 부산 온천장에서 요정을 운영했는데 목재 허행면 등 소문난 예술가들이 식객으로 거했다고 한다. 그가 그동안 수집에 투자한 돈은 수백억원. 한때 3000여점까지 모았던 수장품은 입소문을 타고 찾아온 컬렉터들과 옥션 등에서 팔려 현재는 수백점 정도가 개인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그의 수집품은 백자 달항아리, 백자철화 매죽문각병, 분청사기 덤벙문 소병, 사발 등 조선 도자기가 대부분이다. 이 밖에 남관, 이응노, 김환기, 최영림, 이우환, 김창열 등 현대 미술 거장들의 작품도 50여점을 갖고 있다. 지난 3일 부산 해운대 인근의 개인 사무실. 전 소장이 ‘비마’(悲魔)라는 이름의 백자 사발(김해요)을 꺼내 들었다. 비마는 성불 전 경험하는 다섯 번째 마귀로, 세상 모든 게 슬프고 부질없게 느껴지는 ‘심마’(心魔)다. 그는 “이 사발을 볼 때면 곱게 빚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없는, 그저 손맛대로 빚어낸 무심함이 느껴진다”며 애착한다. 그런데 전 소장이 비마를 책상 위에 뒤집어 놓는 순간 별안간 그 사발이 달리 보였다. “영락없는 여성의 젖가슴같지 않나요”라는 그의 말대로 백색 태토에 옅은 노란색 기운을 띠는 사발의 뒤집어진 자태는 젖가슴 형상이었다. 거칠고 투박해 보이지만 선이 곱고 뚜렷한 사발에서 흙을 매만지는 도공의 탁월한 솜씨가 엿보인다. 그는 “가슴에 품기도 하고, 어루만지기도 하고, 그냥 기약없이 쳐다만 보기도 한다”며 “조선 사발은 만지고, 보고, 느끼고, 즐겨야 비로소 그 진가를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야나기 무네요시 같은 일본 학자들의 도자기 이론이 아닌 우리 고유의 미감으로, 나아가 컬렉터라면 자신만의 시각과 안목으로 미를 이해하고 판별해야 한다는 지론이다. 그에게 조선사발은 최첨단 과학의 유산이다. 전 소장은 “세계 최고의 사발 기술 종주국이 조선이었다”며 “일본 다이묘들이 조선 사발을 가리켜 일국(一國), 일성(一城)과도 바꾸지 않는다고 말한 건 과장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한국의 컬렉터 문화는 태생적으로 일본, 특히 일제강점기와 깊이 연관돼 있다. 미술사학자인 김상엽 박사는 한국 근대 미술시장의 태동을 고려청자의 도굴 수난사에 빗댄다. 김 박사는 “청일전쟁 시기 일본 장사치들이 처음으로 고려도기 거래에 나섰으며 1906년 일본인 아키오가 도굴한 청자들을 경매한 게 국내 미술 경매의 시초”라고 말한다. 우리 근대 미술시장의 태동기가 일제강점기였고 이때 미술품 감식부터 전시기획, 매매상, 거간꾼 등 이전에 없던 직종과 산업이 탄생했다는 설명이다. “1930년대 경성의 인구는 40만명 남짓했고 1935년에도 45만명에 미치지 못했는데, 당시 경성에서 거의 매월 교환회 및 경매회가 열렸고 30개가 넘는 골동상들이 활동하고 있었음을 보면, 당시에 골동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김상엽의 ‘미술품 컬렉터들’ 56~57쪽) 김 박사는 우리의 ‘근대 컬렉터’로 민족지사 오세창, 친일파 박영철, 국내 첫 치과의사인 함석태, 친일파로 해방 후 수도경찰청장을 지내고 국무총리까지 된 장택상, 조선 왕실의 마지막 내시였던 이병직, 민족유산을 수호한 위대한 수장가로 평가받는 전형필 등을 꼽는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인물이 간송 전형필(1906∼1962)과 송은 이병직(1896∼1973)이다. 간송은 탁월한 안목으로 정평 난 컬렉터다. 그가 전 재산을 털어 평생 수집한 미술품은 1938년 국내 최초의 사립박물관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에 보존됐다. 상당수 작품이 국보급으로, 계미명 금동 삼존불 입상,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훈민정음 해례본, 고려청자 등이 대표적이다. 간송이 1935년 일본인 골동상으로부터 사들여 골동계의 전설이 된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당시 돈 2만원으로, 서울의 기와집 열 채 값에 달했다. 간송은 보성고등학교를 인수해 민족 교육에도 헌신하는 등 한국의 컬렉터 가운데 독보적인 민족문화 수호자로 꼽힌다.대한제국 마지막 내시 출신이자 구한말의 재력가였던 송은은 수장가뿐 아니라 서화가로 유명한 예술인이었다. 조선 유일의 미술품 경매회사인 경성미술구락부 경매회에서 실명 컬렉션으로 경매를 두 차례나 연 인물이다. 한국전쟁의 혼란기에 일연의 ‘삼국유사’(국보 306호)를 지켰고 전 재산을 고향의 양주중학교(현 의정부고등학교) 설립에 기부했다. 전 소장은 현대의 최고 컬렉터로 호암 이병철(1910~1987) 삼성그룹 창업주를 꼽는다. 이 회장의 수집품들을 모아 놓은 서울 리움미술관과 용인 호암미술관에는 국보 37건, 보물 115건이 소장돼 있다. 전 소장은 “리움과 호암의 2만여점에 달하는 컬렉션들을 보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안목이 높지 않으면 가치를 알수 없는 고미술품들이 수두룩하다”며 “그 점에서 이 회장은 미적 감각과 인문학적 시각이 탁월한 컬렉터였다”고 평가했다. 현재 활동 중인 국내 컬렉터 규모는 3000~5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전 소장은 그러나 대다수가 예술품에 대한 안목이나 심미안을 갖고 있지 않은 ‘투자(투기)형 컬렉터’로 본다. 그에 따르면 국내 미술시장의 ‘큰손’으로 통하는 대형 컬렉터는 20~30명 정도로 압축된다. 이들 정도가 당대 예술품의 ‘수장 경로’로, 예술품의 가치 지표가 된다고 본다. 그는 “컬렉터로 살아온 30년 동안 안목과 역사성, 미에 대한 사유와 관념을 갖춘 컬렉터는 국내에서는 1~2명이 떠오를 뿐”이라며 “안목이 없는 사람에게 골동 귀신이 붙는 것만큼 고약한 경우가 없다”고 말했다. “저 역시 골동 귀신에 홀리고 절박한 심정으로 기물을 찾아 나서죠. 진정한 컬렉터라면 딱 한 점만 소장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전에 충분한 눈으로 기물을 익혀야 하며, 눈앞에 영혼을 흔드는 일생일대의 기물이 나타날 때 혼신을 다하면 수집 인생은 완성될 것입니다. 두 점부터는 무거운 짐이 될 수 있거든요.” 그가 체험하고 깨닫게 된 컬렉터 인생의 노하우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종로 뒷골목 인사동, 옛 시간을 더듬다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종로 뒷골목 인사동, 옛 시간을 더듬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중략)…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시 ‘귀천’ 中 일부) 천상병(千祥炳·1930∼1993) 시인은 세상에 소풍 나왔다가 그렇게 갔다. 독일 유학을 하였던, 서울대 상대 동기로부터 막걸리 값 몇 번 받아썼던 게 빌미가 되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이다. 막걸리 값은 어느덧 ‘간첩자금수수’라는 죄목으로 그를 전기고문 의자에 앉혔다. 친구 누구에게도 스스럼없이 막걸리 값 얻어 술 마시고 시 쓰던 천상병은 졸지에 간첩이 되고 만다. 진정한 블랙코미디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수사일지에는 “100원 내지 6500원씩 도합 5만여 원을 갈취 착복"한 무뢰한으로 천상병은 국가기관 기록에 남는다. 행려병자로 ‘서울시립정신병원’에 갇히기도 한 그를 따뜻하게 받아 준 여인이 바로 목순옥(1935~2010) 여사였다. 목 여사는 문인들의 도움으로 인사동에 작은 찻집을 하나 내고 생계를 이어 나간다. 문단에서 이름 석 자 대면 절 서너 번씩 받을 수 있던 문필가들도 인사동 거리에서는 결코 내로라하지 못했다 한다. 인사동 골목 골목에는 이런 저런 사연들이 상처 아문 실핏줄처럼, 보드라운 이야기길을 만들어 서울 한 복판을 흐른다. 1984년 11월 7일에 길이 0.7㎞, 너비 12m에 이르는 인사동길이 제정된다. 이후 인사동은 1988년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되었고, 1997년 4월 13일부터는 일요일마다 차 없는 거리로 꾸며진다. 또한 1999년 7월부터 역사탐방로 공사를 하여 2000년 10월부터 본격적인 현재의 인사동 길의 모습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지금의 인사동 길은 종로 2가에서 안국동 사거리까지를 말하지만, 예전에는 종로에서 태화관길(현재 태화빌딩)과 만나는 곳까지였다. 또한 인사동의 명칭은 조선시대 한성부의 관인방(寬仁坊)과 대사동(大寺洞)에서 가운데 글자인 인(仁)과 사(寺)를 따서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방(坊)은 조선의 행정구역 명칭으로 하나의 구획을 일컫는다. 인사동에 골동품 가게가 들어서기 시작한 때는 일제강점기부터였으며, 1970년대까지 인사동은 한국전쟁 이후 흘러들어온 골동품을 거래하던 큰 골목이었다. 하지만 가짜 고서화 사건, 금당살인사건으로 인해 1980년대부터 인사동 골목은 골동품 가게들이 점차 토속음식점, 전통찻집,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기념품 판매점이 들어서면서 현재 인사동 모습의 원형을 만들었다. 현재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길을 가리키는 ‘매니스 앨리’(Many’s Alley)로 통하며 서울 시내에서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인사동 거리에서 눈여겨 볼만한 주요 유적지 및 전통 가게들이 몇 군데 있다. 최근에 스타강사인 설민석 강사의 룸살롱(?) 발언으로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옛 독립선언 유적지인 태화관(현 태화빌딩) 자리다. 사실 태화관은 원래 이완용의 집터였기에 삼일운동 때 그 조약을 무효화시킨다는 뜻으로 여기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인사동 194번지인 이 곳에서 한용운 선생이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또한 인사동 주요 유적지로는 경인미술관으로 운용되는 조선 철종 때 지어진 박영효 대감댁의 터, 삼일운동 기념비가 있는 승동교회,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15인 민가다헌, 조선시대 궁중 약재를 관리하던 전의감터, 한국 전통 회화의 요람이던 도화서터,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자결하였던 충정공 민영환의 집터가 있다. 인사동에는 거개 나름의 전통을 뽐내는 점방(店房)들도 많다. 1934년에 개업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인 통문관, 국내 최초의 전각 전문 갤러리인 문정전각, 목조각상을 소장하고 있는 목인박물관, 인사동 대표명소인 쌈지길, 다양한 전시회를 만날 수 있는 인사아트센터, 한국 최고 김치박물관인 뮤지엄김치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들린 서예도구 판매점 명산당필방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다양한 가게와 전시관 등이 있다. 인사동 골목길을 걷는 맛은 나름 운치가 있다. 대로변 번화한 거리의 번잡함을 피해 잊혀진 옛 시간이 만든 길을 걷다보면 가슴 먹먹한 추억도 한량없다. 인사동 골목길은 길을 잃어도 또 다른 길을 만나게 한다. 우리네 인생사와 닮았다. <인사동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한 번은. 아직은 명맥이 살아있는 곳. 특히 외국인 친구가 있으면 필수! 2. 누구와 함께? -누구라도. 3. 가는 방법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6번출구 인사동 방면 도보 1분/ 지하철 1호선 종각역 3-1번 출구 안국동 방면 도보 7분 4. 감탄하는 점은? -골목 골목, 구석 구석에도 관광객들이 차고 넘친다는 점. 볼거리가 풍부하다.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명성에 비해 점점 유흥업소들이 많이 들어서고 있는 추세. 인사동의 장소성과 문화경쟁력 제고의 방향으로 인사동 거리가 유지되어 함. 6. 꼭 봐야할 곳은? -쌈지길, 경인미술관 7. 예상 소요시간은? -1시간 남짓 8. 홈페이지 주소는? -http://www.insainfo.or.kr/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낙원상가, 조계사, 탑골공원 10. 총평 및 당부사항 -인사동 들리기 전 반드시 북인사 관광안내소 나 남인사 관광안내소에 들러 나들이 장소 체크하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갔다가는 아무 생각 없이 나올 수 있는 곳. 구석 구석 볼거리 많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문화마당] 여러분의 뉴스는 안녕할까요?/김민정 시인

    [문화마당] 여러분의 뉴스는 안녕할까요?/김민정 시인

    딸 넷 가운데 유독 아빠가 나를 예뻐한 이유를 자매들은 첫정이니 그로 인한 편애니 말들 많이 해 왔지만 거두절미하고 나는 이 때문이라고 보는 바이다. 그러니까 아침에는 화장실에서 볼일 보며 신문 보는 일곱 살짜리 유치원생이 나였고, 저녁에는 밥상 물리고 과일 먹어 가며 9시 뉴스 보는 여덟 살짜리 초등학생이 나였던 것. 우리 큰딸은 글쎄 첫 장부터 끝 장까지 신문 활자를 한 자도 안 빼고 다 읽는다니까. 우리 큰딸은 있지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부터 시청자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까지 텔레비전 뉴스 한마디도 안 놓친다니까. 그게 무슨 자랑거리라고, 아빠는 물텀벙이집에서 두꺼비 소주병을 젓가락으로 뻥뻥 따가며 친구들에게 허세를 떨어 대곤 했다. 간혹 그 자리에 껴 있던 나는 부끄러움에 아빠의 손등을 꼬집고는 했다. 그때마다 아빠는 내게 귓속말로 이랬었다. 다 이 맛에 자식 키우는 거지 뭐. 근데 어디 취해서 기억들이나 하겠냐? 그래, 가게방 안쪽 농문이 화장실 문인 양 그거 열고 오줌을 싸려는 아저씨도 말린 적이 있었으니 무슨 기억들을 하겠어 그랬건만 후에 만난 아저씨들은 내게 덕담이랍시고 이런 말들을 건네고는 했다. 세상사 관심이 그리 많담서. 그래도 데모는 절대 안 된다. 네 아부지 피 토하고 죽는다. 이담에 육영수 여사 같은 영부인 되어 갖고 인천을 크게 빛내야 한다. 삼십 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이런 말들은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에 남으니 어른들이여, 부디 어린이들에게 건네는 말들은 최소 다섯 번은 곱씹고 내뱉길 바라노니 그때부터 조숙한 짐승의 털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던 나는 아빠와 매일 저녁 뉴스 보기를 자기 전 양치하기처럼 습관화해 나갔다. 책 좀 읽으라면 졸기 바쁜 아빠가 뉴스만 보면 일인극을 하는 배우처럼 온몸을 던져 상황에 몰입하는 연유가 궁금도 하고 신기도 했으나, 반복되는 레퍼토리를 아는 까닭에 더는 알려하지도 않았다. 해방둥이라니까, 한국전쟁을 겪었다니까, 월남을 갔다 왔다니까, 박정희 전 대통령 덕분에 우리 가족이 먹고살 수 있던 거라니까, 데모하는 대학생들 돈 대주는 게 간첩이라니까, 북한에 돈 퍼갖다 줘서 핵 만든 거라니까. 아아 힘들게 살아온 건 아는데 아빠, 우리 가족이 등 따숩고 배부르게 살 수 있었던 건 아빠가 뼛골 빠지게 일해서야, 박정희가 아빠 등골 뽑아 먹어서라고. 제 인생사를 뉴스 속에 대입시켜 한국사를 연기하는 아빠와 달리 나는 퍽이나 객관적인 위치에서 온갖 뉴스 채널을 돌려 가며 한국사를 정리하는 편인데, 그 대부분의 거리들이 실은 사건사로 점철돼 있다. 좀 많은가, 이 나라의 갖가지 사건 사고 속에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좀 답답하고 억울한가, 끝끝내 그들이 왜 돌아올 수 없는지 밝혀 주지 못하는 상황들이. 어느 순간부터 내게 이 나라의 뉴스라 하면 내가 무사하여 듣게 되는 누군가의 참담한 상황으로 정의돼 버렸다. 그런데 연일 이 뉴스들 중 가짜들이 있어 속속들이 밝혀지는 중이란다. 진짜 가짜를 가려 내는 육감 적중 쇼도 아니고 설마하니 뉴스를 의심한 적 없이 살아온 아빠는 물론이고 매일같이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기사들을 읽기 바쁜 나도 멘붕이긴 마찬가지다. 보다 자극적이고 보다 강도가 센 얘깃거리들에 현혹돼 가는 우리들, 게다가 대선이라는 크나큰 현안 앞에 일명 아무말대잔치가 벌어지기도 한 이 마당에 아빠의 휴대폰에서 삐삐 메시지 알림이 울린다. 오늘도 아빠는 오늘의 뉴스를 초등학교 동창회 밴드에서 전해 듣는 모양이다.
  • 파주 임진각에 판다 800마리 등장

    파주 임진각에 판다 800마리 등장

    다음 달 5일 어린이날을 맞아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 판다 인형 800마리가 전시되는 등 ‘2017 DMZ 평화가족한마당’ 행사가 열린다. 경기도는 어린이날을 맞아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가족과 함께 평화통일을 꿈꾸며 다양한 공연과 체험을 즐길 수 있는 행사를 마련했다고 19일 밝혔다. 이날 행사에는 ‘판다의 세계여행 프로젝트’로, 자연보존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지향하자는 뜻에서 재활용 종이로 만든 800마리 판다 인형이 평화누리 곳곳에 전시된다. 판다 인형을 들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이 운영된다. 판다 인형은 프랑스 예술가 파울로 그랑종과 세계자연기금(WWF)의 협업으로 제작한 것으로, 현재 세계 각 나라의 관광명소를 여행 중이다. 다양한 공연과 체험 프로그램도 진행한다.오전 10시 30분 ‘제5회 파주 포크페스티벌’ 행사를 시작으로, 낮 12시 30분과 오후 3시 두 차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퍼레이드’, 오후 1시 코믹 뮤지컬 ‘피터와 늑대’, 오후 2시 어린이 창작뮤지컬 ‘한국전쟁 1950’ 등 공연이 펼쳐진다. 행사장 곳곳에는 통일을 염원하는 솟대 만들기, 1950년대 의상을 입어보는 6·25 의상 체험, 태극기 바람개비 만들기, 한지 등(燈) 만들기, 경찰·소방·군인 체험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도 관계자는 “다양한 공연과 프로그램으로 온 가족이 함께 추억을 쌓을 수 있도록 행사 준비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seoul.co.kr
  • 부영, 남미 수재구호금 20만 달러 지원

    부영, 남미 수재구호금 20만 달러 지원

    부영그룹은 지난달 집중 호우와 산사태 등으로 피해를 본 페루와 콜롬비아에 총 20만 달러의 수재구호금을 지원한다고 17일 밝혔다. 이날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은 서울 중구 부영빌딩에서 하이메 포마레다 주한 페루 대사와 티토 사울 피니야 주한 콜롬비아 대사에게 각각 수재구호금 10만 달러씩을 전달했다. 이 회장은 “자연재해로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은 페루와 콜롬비아 국민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면서 “한국전쟁 당시 물자지원국과 참전국으로 도움을 준 두 나라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페루는 지난달부터 수도 리마의 동부 지역에 지속된 집중 호우와 산사태로 270명이 사망하고 64만명이 넘는 이재민이 발생했다. 콜롬비아도 지난달 말과 이달 초 남서부 모코아 지역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홍수와 산사태가 발생해 314명이 숨지고 173명이 실종됐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사설] 中, 北의 철없는 장난 방치해 ‘불량 형제’ 될 텐가

    북핵을 주요 의제로 다룰 미·중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서 북한이 어제 동해상으로 탄도미사일 한 발을 쐈다. 이 미사일은 북한이 지난 2월 발사에 성공한 신형 중거리 탄도미사일 북극성 2호로 일본과 괌 미군기지를 사정권에 둔 전략무기로 추정된다. 북한이 발사 준비 시간이 짧고 탐지가 어려운 이 전략무기를 사용해 무력시위에 나선 것은 ‘무역과 북핵’을 고리로 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빅딜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대응 성격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에서 “중국이 (북핵을)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가 하겠다”며 중국을 압박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혹시 흔들릴지도 모를 중국에도 경고한 것이다. 북한은 그동안 체제 유지를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핵을 움켜쥐고 고비고비마다 벼랑끝 전술을 구사해 왔다. 국제사회에 핵보유국으로 인정해 달라며 생떼를 쓰고 있다.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이번 미사일 발사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북한의 이 같은 협박은 스스로를 옥죌 뿐이며, 한반도를 전화(戰火)의 위기로 몰아넣는 위험천만한 행위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번 미사일 도발로 북·미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군사행동을 포함한) 모든 옵션이 테이블에 올라와 있다”며 사실상 무력 충돌 가능성을 열어 놓은 상태다. 미·중 정상회담을 목전에 두고 전략을 가다듬는 시점에 뒤에서 미사일을 발사한 북한으로 인해 중국의 체면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협상에서도 수세적인 상황에 몰릴 수밖에 없다. 난처한 입장에 빠진 중국은 북의 미사일 도발에 대해 현재까지 이렇다 할 반응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비록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그동안 일관되게 유지해 온 ‘대화를 통한 북핵 해결’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었는지를 분명하게 확인했을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중국의 태도가 중요하다. 우리와 미국이 혈맹관계이듯 중국과 북한 역시 혈맹관계다. 한국전쟁에 참가해 전사한 마오쩌뚱의 아들이 북한에 묻혀 있고, 중공 정권 수립 후 어려울 때 북한으로부터 경제 원조도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북핵을 용인하거나 방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중국이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남으려면 북한의 불장난을 멈추게 해야 한다. 그것이 똑같은 ‘불량 형제’로 찍히지 않는 길이다.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면 유엔 대북 제재의 완벽한 실행은 물론 그동안 음으로 양으로 지원해 온 도움도 모두 끊어야 한다.
  • [손원천 기자의 호모나들이쿠스] 삼색 빛깔 부산, 넌 나의 봄이다

    [손원천 기자의 호모나들이쿠스] 삼색 빛깔 부산, 넌 나의 봄이다

    말뚝에도 푸른빛이 돈다는 봄입니다. 꽃잎과 연둣빛 이파리들이 차례로 밝은 기운을 전하는 이 계절에 부산을 다녀왔습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바다만 있을 것 같았던 부산에서 싱싱한 봄의 풍경과 만나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봄빛이 얼마나 맑던지 마음이 저절로 열리는 듯했습니다.덜 알려졌을 뿐 부산에도 벚꽃 명소는 있다. 대표적인 곳은 남천동 일대다. 광안리 바다 옆 삼익비치 아파트 단지 안팎으로 벚나무들이 빼곡하다. 수령이 얼추 40년을 헤아리는 늙은 나무들이다. 전체 길이는 700m 정도. 그리 길지는 않지만 오래된 나무들이 전하는 풍경은 여느 벚꽃 명소에 견줘도 뒤지지 않을 만큼 강렬하다. 게다가 조만간 사라질 운명이어서 더 아쉽고 애잔하다. 2~3년 안에 이 아파트 단지 전체가 재개발될 예정이다.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남천동 벚꽃거리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밤에는 조명꽃이 핀다. 부산의 야경이야 진작부터 알려져 있지만 이즈음에 잊지 말고 찾아야 할 곳은 단연 달맞이 고개다. 벚꽃들이 늘어선 길을 달과 함께 걷는 맛이 각별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밤 벚꽃놀이’다. 부산에서는 낮의 선탠에 빗대 ‘문탠 로드’라 부르기도 한다. 사실 카페 등이 늘어선 달맞이 고개가 너무 밝아 달은 잘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이 찾아 ‘문탠’을 즐긴다. 밀려드는 인파에 떠밀려 걸어야 할 정도다. 이 같은 상황은 낮에도 비슷하게 이어진다. 언덕 꼭대기 어름에 있는 전망대에 서면 오륙도와 동백섬, 광안대교 등의 원경이 근사하게 펼쳐진다. 벚꽃 드라이브를 즐기려면 황령산 벚꽃길이 제격이다. 산 전체를 에둘러 도로가 잘 정비돼 있다. 황령산 역시 부산 야경 감상의 ‘고전’으로 꼽히는 곳이다. 하얀 벚꽃과 도심 속 건물들의 반짝이는 불빛, 바다 위 광안대교의 늘씬한 조명까지 더해져 부산을 찾는 관광객의 필수 코스로도 여겨진다. 산 곳곳에 전망대가 마련돼 있다. 부산 전체가 한눈에 담기는 자리는 없지만 산 여기저기를 돌다 보면 부산시내 야경이 360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오래된 풍경을 찾는 이도 적지 않다. 감천동 문화마을 등 빈티지풍의 부산 여행지들이 각광받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감천동 문화마을 일대에도 벚나무가 꽤 많다. 다만 남천동 등 볕 좋은 곳들에 견줘 개화는 다소 늦다. 이번 주말부터 활짝 필 것으로 예상된다. 임시수도기념관 쪽에도 늙은 벚나무들이 있다. 특히 대통령 관저에 서 있는 처진벚나무가 인상적이다. 오래된 건물과 그럴싸하게 어울렸다. 대통령 관저는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이 머물렀던 공간이다. 1951년 1·4 후퇴 때 임시수도 부산에 내려온 이 전 대통령이 1953년 서울로 환도할 때까지 이 건물에서 국정을 살폈다고 한다. 당시 흔적이 잘 남아 있다. 오륙도를 전망할 수 있는 용호동 쪽엔 유채꽃이 흐드러졌다. 특히 ‘오륙도 스카이워크’ 일대가 압권이다. 오륙도 스카이워크는 2013년 조성됐다. 해안 절벽 위에 철제빔을 세우고 그 위에 유리판 24개를 말발굽형으로 이어 놓은 유리다리다. 길이는 15m 정도다. 오륙도 스카이워크가 세워진 해안가 절벽의 옛 지명은 ‘승두말’이다. 말안장처럼 생겼다는 뜻이다. 파도가 절벽에 부딪히는 모습을 투명한 유리다리를 통해 굽어보는 맛이 짜릿하다. 절정은 해맞이 공원 일대다. 오륙도 스카이워크 뒤편의 산자락에 조성된 작은 공원이다. 공원을 둘러싼 해안 절벽에 노란 유채꽃이 가득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일렁이는 유채꽃이 쪽빛 바다와 기막히게 어우러진다.부산에서 가장 긴 벚꽃길은 강서구와 사상구에 걸쳐 있다. 맥도생태공원~대저생태공원 사이의 무려 30리(12.4㎞)에 이르는 낙동강 제방 벚꽃길이다. 제방 양옆으로 3000여 그루의 벚나무가 늘어서 장관을 선사한다. 밤에는 경관조명이 켜진다. 알록달록한 불빛이 벚꽃과 화려하게 어우러진다. 이 일대는 전국 최대 규모의 유채꽃 단지이기도 하다. 구포대교 주변의 76만㎡(약 23만평) 부지가 죄다 유채꽃이다. 축구장 60여개 크기의 거대한 노란 바다다. 이리 휘고 저리 굽은 조형미는 없지만 규모로는 단연 으뜸이다. 이번 주말쯤 노란빛이 절정에 이를 듯하다. 15일부터는 부산낙동강유채꽃축제가 열린다. 한복, 승마 등 체험, 공연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이제 옛 대신공원을 말할 차례다. 이번 부산 여정에서 가장 인상적인 풍경을 안겼던 곳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공식 명칭은 중앙공원이다. 대청공원과 대신공원이 합쳐져 중앙공원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대신공원이라 부른다. 옛 대신공원은 호리병을 닮았다. 좁은 입구를 지나면 너른 편백숲이 기적처럼 뛰쳐나온다. 쭉쭉 뻗은 편백나무 사이사이엔 신록과 벚꽃이 숨어 있다. 거대한 수직세상 틈바구니에서 언뜻언뜻 드러내는 이들의 자태가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답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아 도착했을 때만 해도 사실 옛 대신공원의 첫인상은 형편없었다. 무심결에 육두문자가 튀어나올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뭐 이런 곳을 안내하느냐며 공연히 내비게이션만 타박했다. 사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한 곳은 옛 대신공원의 언저리였다. 진경은 예서 10분 정도 걸어가야 비로소 펼쳐진다. 옛 대신공원은 서구 서대신동에 있다. 넓이는 228만 3000㎡(약 70만평)에 이른다. 안내판에 따르면 옛 대신공원은 1900년경 구덕산(556m)과 엄광산(504m)의 계곡에 수원지를 만들면서 조성됐다. 편백나무와 삼나무, 벚나무 등이 이때 식재됐다. 하지만 수원지 보호를 위해 일반인의 출입은 통제됐다. 1968년 낙동강으로 수원지가 변경되면서 비로소 근린공원으로 바뀌었고 시민들의 출입도 허용됐다. 옛 대신공원의 으뜸 볼거리는 편백나무다. 수령 70년을 헤아리는 편백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편백숲 곳곳엔 벚나무, 단풍나무 등 활엽수들이 섞여 있다. 나무들은 이제 막 연둣빛 새순을 틔워 냈다. 편백나무 둥치 뒤로 빼꼼히 드러난 이파리들이 꼭 초록별을 보는 듯하다. 공원 정상은 옛 봉수대다. 부산항과 영도 일대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제1수원지 주변은 봄 풍경이 빼어난 곳. 아름드리 벚나무와 몇 그루의 삼나무 등이 작은 저수지와 어우러져 빼어난 풍경을 펼쳐 낸다.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51)→가는 길 : 부산의 봄꽃 여행지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동서 방향으로 2시간이 넘는 거리이기 때문에 안배를 잘해야 좀더 효율적으로 둘러볼 수 있다. 황령산과 광안리, 달맞이 고개 등은 동쪽 루트로 묶는 게 좋다. 오륙도 스카이워크도 이 루트에 포함될 수 있다. 서쪽 루트에는 감천문화마을, 임시수도기념관, 옛 대신공원, 대저생태공원 등이 속한다. 특히 강서구 쪽의 대저생태공원은 고속도로와 가까워 부산을 떠날 때 마지막 목적지로 잡는 게 좋다. →맛집 : 해운대시장 안에 붕장어구이집이 많다. 일반 횟집과 김밥, 떡볶이 등 주전부리 음식을 내는 분식집도 몇 곳 있다. 해운대 해변에서 한 블록 뒤에 있다. 중구청 바로 앞의 유명분식(463-8132), 해운대여고 인근의 에버그린 분식(742-3440), 영도 백설대학(404-5039) 등은 ‘쫄우동’으로 이름난 맛집이다. 이른바 ‘부산의 3대 분식집’으로 불린다. 쫄우동은 걸쭉한 우동 국물에 쫄면이 들어간 일종의 퓨전음식이다. 고추냉이 푼 간장에 찍어 먹는 유부초밥과 김밥도 맛있다. 광안리 옆 남천동 일대는 ‘빵천동’이라 불릴 만큼 빵집이 많다. 기호에 맞는 빵을 찾아 순례를 벌여도 좋겠다. 인근 광안리 해변의 갈삼구이(612-9266)는 갈미조개와 삼겹살을 함께 구워 먹는 ‘갈삼구이’로 이름난 집이다.
  • 4월5일 식목일은 쉬는날일까

    4월5일 식목일은 쉬는날일까

    4월 5일 식목일은 공휴일일까, 아닐까. 정답은 아니다이다. 한때 식목일이 ‘빨간 날’, 공휴일이었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공휴일에서 제외됐다.  식목일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불모지로 변한 산림을 다시 가꾸고 복원하자는 차원에서 1946년 처음 제정돼, 이후 1949년 대통령령으로 공휴일로 지정됐다. 그러다가 1960년 공휴일에서 제외됐다가 1961년 다시 공휴일로 재지정됐다. 1961년부터 계속해서 공휴일로 자리매김하다 2005년 ‘빨간 날’에서 제외됐다. 2005년 공공기관 주 40시간, 5일 근무제가 도입되며 근로일수 감소에 따른 생산성 저하 우려가 있다는 분석이 나오자 공휴일을 줄여야 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결국 식목일은 2006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됐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시론] 문제는 대통령제가 아니라 공직사회다/임승빈 한국지방자치학회장·명지대 교수

    [시론] 문제는 대통령제가 아니라 공직사회다/임승빈 한국지방자치학회장·명지대 교수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인 이상 ‘그때 그렇게 안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쉬이 든다. 시계 태엽을 거꾸로 돌려 보자. 한일병탄, 을사늑약, 을미사변, 청일전쟁, 강화도수교조약?. 그때 조선의 공직자들이 제대로 된 국가관과 세계관을 가졌더라면 일제 지배와 민족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 지금의 남북 대치도 없었을 것이다. 과거만의 일도 아니다. 청와대의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임명된 주일본 대한민국 외교관의 최근 언행을 보면 ‘강화도수교조약은 정당하며 지켜지는 것이 국제법상 옳다’고 주장하는 조선의 어떤 공직자를 보는 듯하다. 물론 조약은 지키는 것이 맞다. 그러나 상대가 교과서 문제 등 일방적으로 잘못하고 있는 것조차도 제대로 지적하지 못하는 외교관이 공직에 있으면서 우리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 통탄스럽다. 역량 부족을 사죄하고 책임을 지고 공관장을 스스로 사퇴하는 것이 옳다. 그렇지 않다면 외교부 장관이나 대통령 권한대행은 그를 소환시키는 것이 옳다. 이것이 제대로 된 공직관의 확립을 위해 정부가 할 일이다. 요즘 개헌이 필요하다고 요구하는 논자들의 주장을 보면 한결같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가 헌법에 기인한다고 지적한다. 헌법이 사람이라면 억울해서 죽을 지경일 것이다.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의 상징인 인사권을 제한하기 위해 ‘국민의 정부’에서 설립해 노무현 정부까지도 존치됐던 중앙인사위원회가 없어진 것은 이명박 정부 때다. 고위직 공무원에 대한 인사 권한을 청와대의 비서실장으로 가져간 것이 바로 박근혜 정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극도의 공직 문란에 의해 정권이 무너지는 비극을 맞게 된 것도 박근혜 정부의 인사 난맥 때문이다. 현행 헌법 그 어디에도 대통령에게 인사 권한을 전횡하라는 조항은 없다. 대통령과 국회가 법제도를 악용하는 행위가 문제다. 권력은 형식 논리가 아닌 기능 논리다. 권력은 운용하는 자의 몫이다. 지금의 정국 혼란은 국가 권력을 사유화했다는 데 있는 것이지 대통령제 헌법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의 개헌 논의를 들어 보면 국민의 기본권을 신장하기 위한 것이나 권력을 분권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의회와 대통령의 권한을 나눠 먹자는 식으로 들린다. 필자만의 생각일까. 앞서 외교관 사례나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처럼 문제는 청와대와 중앙정부에 쏠린 과다한 권한 집중이다. 제왕적 대통령제는 공안권력기구의 막강한 권한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헌법의 문제가 아니라 법률의 문제이며 법원과 헌재는 이를 견제하는 데 소홀했다. 그러므로 공직자가 정권이 아닌 국민을 바라보게 하려면 국가 공안기관의 분권화와 입법 권한에 대한 민주적·법적 통제를 강화하고 공무원 조직 내부의 분권적?법적 견제 장치가 필요하다. 필자는 새 정부가 무너진 공직사회뿐 아니라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는 공무원제도를 개혁할 수 있는 세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현재의 고위공무원단에 대한 임명 권한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주지 말고 인사와 조직을 통합한 합의제 형태의 독립된 조직에 부여할 것을 제안한다. 동시에 공안 권력의 분권화를 위한 조직 신설이 필요하다고 본다. 둘째, 중앙정부는 폐쇄적인 형태에서 정책을 수립하고 지방정부는 정책을 집행한다는 수직적 사고가 최근의 불행한 사태로 이어졌다. 이제는 집단지성의 시대다. 중앙과 지방은 수평적인 관계로 바뀌어야 하고 권력에 대한 통제를 국민과 주민이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과감하게 중앙의 권한을 지방정부로 이양하고 분권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셋째, 공무원 임용시험 방법을 바꿔야 한다. 젊은이들의 유일한 희망이 공무원이 되는 것이라면 이 나라의 미래는 없다. 현 시험 제도는 당일 단 한 번의 시험 성적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것에서 문제 은행을 통한 자격제로 바뀌어야 한다. 또한 고시제도를 폐지하고 공직사회가 창조적인 학습 사회로 변화하도록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 환갑 넘은 ‘서울대 구둣방’ 문 닫습니다

    환갑 넘은 ‘서울대 구둣방’ 문 닫습니다

    서울대에서만 60여년간 구둣방을 운영한 양화수선소 하용진씨가 지난달 31일 자신의 구둣방을 떠나기 전에 카메라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짓고 있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 이듬해인 1951년 19세로 입대해 북한군과 싸우다 왼팔을 다쳐 제대했고, 정부가 상이군인에게 직업을 알선해주는 프로그램으로 서울대와 인연을 맺어 수선일을 해왔다. 건강이 악화해 구둣방을 정리해야 한다는 하씨는 “많이 와줘서 밥 벌어 먹었고, 잘 있다 간다. 학생들에게 고맙다”고 전했다. 연합뉴스
  • [헌책방 주인장의 유쾌한 책 박물관] 친구네 집 월부책 많은 책을 어떻게…아저씨 부자세요?

    [헌책방 주인장의 유쾌한 책 박물관] 친구네 집 월부책 많은 책을 어떻게…아저씨 부자세요?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친구가 거의 없었던 초등학생 시절, 유일하게 내가 먼저 친구네 집에 찾아갔던 기억을 떠올린다. 이유는 오로지 책 때문이었다. 그 집 거실에는 커다란 책장이 있었고, 마치 학교 도서관처럼 많은 책이 높이를 맞춰 나란히 들어 있었다. 내 눈길을 단번에 잡아끈 것은 동서문화사에서 펴낸 동서추리문고였다. 열심히 헌책방을 돌아다니면서 모았다고는 하지만 보잘것없는 내 책장엔 그때까지 해문출판사의 애거사 크리스티 시리즈가 열 권 남짓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친구 집에는 그 유명한 동서추리문고 128권 전질이 잘 보이는 곳에 진열돼 있는 게 아닌가.그날부터 거의 매일이다시피 학교 숙제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친구 집에 가서 동서추리문고를 1권부터 섭렵했다. 책을 빌려 가는 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 있는 동안 최대한 빨리, 그리고 집중해서 읽어야 했다. 내 기억에 거의 반년 정도는 거기에 매달렸던 것 같다. 그 책이 얼마나 좋았던지 지금도 동서추리문고 앞부분 어느 정도까지는 목록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다. 제1권은 추리소설의 대명사인 셜록 홈스 이야기다. 2권은 ‘Y의 비극’으로, 엘러리 퀸의 대표작이다. 그다음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로 이어진다. 책을 읽는 것도 재밌었지만 몇 권을 읽었는데도 아직 100권도 더 남아 있다는 게 큰 즐거움이었다.●책장 메운 추리문고, 끝 없는 즐거움 ‘바벨의 도서관’ 같았던 그 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전집’이라는 것을 알았다. 추리소설을 읽느라 거기에 있던 다른 책들은 천천히 훑어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는데 지나고 생각해 보니 대부분은 전집류였다. 거기서 별별 책을 다 보았는데 명확하게 기억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책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가정판 세계문학전집’(도서출판 영·1982년)이다. 어째서 그걸 기억하고 있는가 하면, 한번은 그 친구 부모님께 이 책들을 전부 어디서 샀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친구의 아버지가 “전집이기 때문에 몇 십 권씩 한꺼번에 산다”면서 책장에 있던 가정판 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을 빼내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책을 사려면 얼마나 큰돈이 필요할까. 나는 책을 받아들면서 아저씨는 부자냐고 물었다. 이때 또 한번 신기한 것을 경험했다. 친구 아버지는 책을 한꺼번에 사려면 비싸지만 달마다 조금씩 나눠서 돈을 낼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책을 ‘월부 책’이라고 알려 줬다. 책이 많은 걸 부러워했던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우리도 ‘월부 책’을 사자고 졸랐다가 부모님께 적잖이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 어른이 된 후 용돈이 아닌 내가 번 돈으로 책을 사 모을 수 있게 됐을 때 가장 먼저 해 보고 싶었던 게 전집을 사는 것이었다. 탄탄한 하드커버 장정에 금색으로 칠한 제목을 달고 있는 책 수십 권이 내 책장에 반듯하게 진열돼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기분이 좋았다. 지금도 몇몇 출판사에서 세계문학전집을 펴내고 있지만 내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건 1960~1980년대 출판된 것들이다. 당시 나온 전집들 목록을 살펴보면 ‘잘 팔릴 만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명저’들을 찾아 번역하려 했던 노력이 엿보인다.●1958년 정음사서 국내 첫 전집 출판 우리나라에서 세계문학전집을 선보인 것은 1958년 정음사(正音社)판이 처음이다. 일제강점기를 벗어난 후 한국전쟁까지 거치면서 완전히 폐허가 된 이 땅에 출판인들은 문화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노력했다. 슬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강한 나라가 되려면 지식산업의 발전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정음사에 이어 을유문화사, 동아출판사도 비슷한 시기에 세계문학전집을 내놓았다. 물론 당시 출간된 전집은 일정 부분 일제강점기 때인 1927년 신초사에서 펴낸 목록에 의지한 면이 있다. 하지만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신구문화사가 열 권짜리 ‘세계전후문학전집’과 ‘세계전기문학전집’(전 12권)을 출간한 것을 포함해 문우출판사가 ‘러시아문학전집’(전 5권)을, 휘문출판사는 ‘흑인문학전집’(전 5권)을 펴내는 등 저마다 개성을 살린 세계문학전집을 선보였다. 전집류 유행은 1970년대까지 이어졌고 고도성장 시기를 거쳐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지식’과 ‘교양’에서 한발 더 나아가 ‘세계화’라는 그럴듯한 이름까지 더해져 출판 규모가 정점에 올랐다. 특히 1980년대에는 성인 남성이나 대학생을 독자층으로 겨냥해 출판하던 기존 흐름에서 벗어나 여성과 청소년이 좋아할 만한 전집류 기획도 많아졌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시 그 친구네 집에 ‘가정판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던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명화·작품 배경 사진 등 자료도 쏠쏠 가정판 세계문학전집은 1982년에 1차분 열두 권이 출간됐는데, 이름 그대로 가정에 한 질씩 구비해 두고 부모님과 자녀가 함께 볼 수 있도록 본문 편집에 주의를 기울인 것이 특징이다. 어렸을 땐 잘 몰랐는데 지금 보니 편집에 상당히 공을 들인 게 느껴진다. 책을 읽는 데 도움을 줄 만한 것이라면 영화의 한 장면에서부터 명화, 작가의 친필 원고, 작품 배경이 되는 곳의 실제 사진 등까지 자료를 본문 사이사이에 꼼꼼하게 배치했다. 내친김에 흐릿한 기억을 실마리 삼아 이 책 전질을 구해 보기로 했다. 다행히 얼마 전 일이 있어 전주에 갔을 때 한옥마을 근처 헌책방에서 한 권을 입수했다. 서울에 와서 이곳저곳 알아보니 이제 십여 권 정도 모이게 됐다. 전부 서른여섯 권이니까 절반 정도 찾은 셈이다. 그런데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난관이 닥쳤다. 책을 모으려면 당연히 목록이 있어야 하는데, 가정판 세계문학전집에는 목록이 따로 없다. 여느 전집류처럼 각 권마다 번호가 붙은 것도 아니라서 아직 찾아내지 못한 책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신문광고에는 1차분의 목록이 나와 있지만 1984년부터 펴낸 2차분에는 어떤 책이 들어 있는지 정보가 없다. 어쩌면 이 책 서른여섯 권을 지금껏 소장하고 있는 애서가도 어딘가 있겠지만 1985년까지 총 36권이 나왔다는 단순한 정보만 갖고 무작정 책을 찾으러 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마침내 모든 책을 다 찾아서 멋지게 책장 한곳에 진열해 놓을 생각을 하면 기운이 생긴다. 어떤 독서가가 말했듯이 책은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저 책장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돌아온 전집 유행… 번역 등 깔끔해져 세계문학전집 유행이 다시 찾아온 것처럼 서점에 가 보면 여러 출판사에서 펴낸 책이 많이 보인다. 예전에 비하면 번역도 매끄럽고 본문은 읽기 편하도록 잘 편집했다. 하지만 책 읽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라는 뉴스를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무겁다. 책을 읽지 않는 건 단지 사람들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책은 물건이기에 앞서 그 자체로 철학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둘러싼 철학은 그 옛날 ‘지식’, ‘교양’, ‘세계화’ 같은 말에서 조금도 밖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 [In&Out] 기술 개발보다 기술 인력 양성해야/황진택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장

    [In&Out] 기술 개발보다 기술 인력 양성해야/황진택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장

    인공지능(AI)이 사람을 대신하는 자율주행자동차, 알파고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의 파고는 벌써 우리 가까이에 다가왔다. 일본이 개발한 딥젠고는 지난 21~23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월드바둑챔피언십’에서 프로기사들과 기력을 겨루기도 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가장 큰 고민은 인공지능과 사람 간의 일자리 싸움이다. 인공지능은 대체로 효율적이고, 가성비도 높다. 그런 만큼 인간은 이 AI와의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새로운 기계, 자동화 그리고 기술혁신이 나올 때마다 대두되는 가장 오래된 논쟁이기도 하다. 기술 진보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이를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인류는 언제나 문제에 부닥치면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발전과 공존을 이끌어 냈다. 4차 산업혁명이 새로운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인공지능에 대한 투자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투자로 생각의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 시류에 편승하여 인공지능 분야의 인재를 집중 양성하는 방식이 아니라, 연관되는 각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인재가 고루 배출되는 교육으로 가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은 분야 간의 연결이고, 연결은 상호 간의 수용성이 전제되어야 그 가치가 발현된다. 이렇듯 사회 각 분야에서는 기술을 이해하고 연결할 수 있는 인재에 대한 수요가 많아질 것이다. 예컨대, 기후변화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에너지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데 도움을 주는 ‘스마트에너지디자이너’ 같은 직업은 어디서나 각광을 받을 것이다. 청정한 농장과 부엌을 연결하는 ‘요리사농부’, 어렵고 다양한 기술을 쉽게 설명해주는 ‘테크니컬라이터’, 이질감을 최소화하기 위한 ‘사용자경험디자이너’ 등 이질적인 직종 또는 지식을 연결하는 융합형 일자리는 끊임없이 등장할 것이다. 이와 같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등장하고 있는 융합형 직업과 관련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생각이 유연한 장인(匠人)형 인재, 즉 다양한 혁신의 주체를 키워야 한다. 그래야만 다양한 분야의 장인형 인재들이 모여서 산업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의 해결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장인형 인재양성을 위한 좋은 본보기 중 하나가 영국의 인재양성 프로그램인 학생맞춤형 박사과정 지원 센터이다. 33개 대학 7000명 이상의 학생이 지원을 받고 있고, 1100개 기업이 참여하고 있다. 성공 가능성은 낮지만 기대효과는 큰 다양한 기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다. 여러 명의 교수가 학생을 지도하여 자연스럽게 다양성을 흡수하여 맥락적(脈絡的) 접근 역량이 뛰어난 혁신 주체를 양성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4차 산업혁명시대에 요구하는 장인형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기술개발’ 관점이 아닌 ‘학생’ 중심으로 생각의 틀을 바꿀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유연하고 혁신적인 사고를 가진 인재를 육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 우수한 과학 인재를 외국에 유학을 보내는 인재육성정책이 우리나라를 경제규모 10위권에 올려놓았다. 제4차 산업혁명에 들어서고 있는 지금, 우리 선택은 우수한 과학 인재를 다양한 분야의 실험실에 불러들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 후, 생각이 유연한 장인형 인재를 양성하여 혁신 주체를 기업, 대학, 연구소에 진출시켜야 한다. 개인도 조직도 유연성이 경쟁력인 시대다.
  • 충북 영동서 한국전쟁 전사자 추정 뼛조각·군화 등 발견

    충북 영동서 한국전쟁 전사자 추정 뼛조각·군화 등 발견

    충북 영동군 영동읍 전선 지중화 공사장에서 30일 오전 11시 10분쯤 한국전쟁 전사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뼛조각과 군화, 실탄 등이 발견됐다. 공사장 관계자는 “굴착기로 땅을 파던 중 사람 뼈 등이 나와 경찰에 신고했다”고 말했다. 유해 등은 땅속 80㎝ 깊이에 묻혀 있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현장에서 대퇴부 뼈로 추정되는 유골 여러 점과 녹슬 실탄 100여발, 탄창, 수통, 군화 등을 발굴했다. 국방부와 경찰은 유류품 종류를 미뤄 한국전쟁 때 전사한 국군의 유해로 보고 있다. 국방부는 당시 병적기록 등을 토대로 유해의 신원 확인에 나설 예정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In&Out] 백두대간의 생태복원을 다시 생각하다/엄태원 상지대 생명과학대학 산림과학과 교수

    [In&Out] 백두대간의 생태복원을 다시 생각하다/엄태원 상지대 생명과학대학 산림과학과 교수

    민족정기의 상징인 백두산을 시작으로 금강산~설악산~태백산~속리산 등을 거쳐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가장 크고 긴 산줄기다. 우리 국토의 등줄기를 이루는 민족의 자부심일 뿐 아니라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자연 생태계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사실 백두대간은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훼손돼 왔다. 일제강점기의 수탈과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 상처를 입었고, 백두대간의 생태적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각종 골프장·스키장·광산·채석장·택지조성 및 고랭지 경작지 확대 등으로 대규모 산림 훼손이 이뤄졌다. 이는 국토경관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산사태 발생과 야생 동식물의 서식지 파괴 등 생태계에도 재앙이 될 수 있다. 훼손의 심각성이 대두되면서 생태계 복원을 위한 움직임이 10여년 전부터 이뤄지고 있다. 정부는 2003년 환경단체 등과 힘을 합쳐 ‘백두대간 보호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무분별한 개발 행위를 제한할 수 있는 제도적 근간을 마련했고 민간 단체를 포함한 ‘산림생태계 복원 포럼’ 등을 통해 다양한 이해 당사자들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하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백두대간 보호 지역을 여의도 면적의 100배에 달하는 30만㏊로 늘리고, 도로 건설 등으로 단절된 백두대간 마루금(능선)을 친환경적으로 연결하는 ‘생태축 복원’ 등에 나서고 있다. 생태를 공부하는 학자로서, 백두대간을 사랑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실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고민해 본다. 우선 복원 사업이 일회성 시행·준공으로 마무리돼서는 안 된다. 준공검사 이후 생태적으로 완전히 복원되는 단계까지 지속적인 관리·모니터링이 이뤄져야 한다. 적지 않은 사업비를 투입해 초기 식생 조성에 성공하고도 이후 적절한 관리가 이뤄지지 않아 식생이 자리 잡지 못하는 사례들이 발견되고 있어 사업 종료 후 관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사업 대상지 환경에 적응 가능한 자생식물 등의 소재를 미리 확보해 생태적으로 안정적인 식생 기반을 조성할 수 있는 현장 기술 개발도 요구된다. 훼손지별 유형과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일률적인 기술 적용은 생태 복원의 품질이 저하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 국내 복원 사업 사례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생태 복원에서는 산림 등 생태적 요소뿐 아니라 복원 사업지 주변의 지역 주민도 중요한 고려 대상이 돼야 한다. 지역 사회의 호응과 참여가 복원 사업 성공을 위해 중요하다. 브라질의 대서양 산림복원 사업에서 가장 큰 장애 요인은 나무를 심으면 가축 방목으로 파괴된다는 것이었다. 브라질 정부는 축산업 종사자들을 양봉, 생태관광 등으로의 전환을 유도해 생계를 보장함으로써 복원 사업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 정부 부처와 민간 전문가의 협력 체계 구축이다. 생태 복원이 단순히 나무를 심거나 산에 동물을 방사하는 단편적인 작업이 아니다. 여러 변수와 상호 작용을 고려해 종의 다양성, 생태적 순환, 건강성 등 훼손 이전 산림의 구조와 기능을 회복시켜야 하는, 복잡하고 인내심이 필요한 과정이다. 산림에 대한 전문성과 깊이 있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복원 사업의 설계와 시행·모니터링 과정에 전문성을 활용하는 것이 백두대간 생태계를 회복시키는 데 시행착오를 줄이고 성과를 높일 수 있는 길이다.
  • 미군 유해 ‘X-15904’ 67년 만에 고향 돌아가

    미군 유해 ‘X-15904’ 67년 만에 고향 돌아가

    한국전쟁 당시 전사했지만 신원 확인이 이뤄지지 않았던 미군 유해가 신원이 확인돼 마침내 그리던 고향에 67년 만에 돌아간다고 AP통신이 2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유해의 주인공은 19세의 나이로 1950년 한국전에 참전했다 전사한 줄스 호터먼 상병. 의무병으로 참전했다가 1950년 12월 2일 함경남도 장진호 전투에서 실종돼 전사자로 간주됐다. 유해는 1954년 발견됐지만 지난해까지도 신원이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하와이 호놀룰루 국립태평양 기념묘지로 옮겨진 1995년부터 그의 유해는 이름 대신 ‘X-15904’라는 일련번호로 관리됐다. 지난해 6월 마침내 유해의 신원을 확인했다고 미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POW/MIA) 위원회는 전했다. 유해는 29일 그의 고향인 매사추세츠 홀리오크로 옮겨지며 유해는 이 지역 성 제롬 묘지에 안장된다.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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