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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시각] 당신들이 전쟁을 말할 때 우리는 몸서리친다/이두걸 금융부 차장

    [데스크 시각] 당신들이 전쟁을 말할 때 우리는 몸서리친다/이두걸 금융부 차장

    지난 추석 연휴 기간 미국 동부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하는 친척 동생이 귀국했다. 미국 친구들은 “추석을 맞아 한국으로 잠시 들어간다”고 안부를 전하니 다들 “의아하다”고 반응했단다.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데) 들어가도 괜찮겠냐. 위험하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전쟁이 나면 글로벌 경제는 경제 대공황급 위기에 빠진다. 미국이 ‘북한 폭격’ 카드를 꺼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분석을 들려줬다. 찜찜함이 가시지 않았다. 문제의 분석은 ‘정상적인 상황’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영국 소설가 켄 폴릿은 20세기 3부작 첫편인 ‘거인들의 몰락’에서 1차 세계대전 직전의 외교 상황을 독일 무관 발터의 입으로 묘사한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프랑스 등과 달리 독일은 주변국 영토를 탐내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전쟁을 벌여야 하나.” 전쟁 초기에는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을 중심으로 한 ‘국지전’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4년 동안 무려 900만명이 희생되는 세계 제1차 대전으로 확전할 것이라고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당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병사들에게 “낙엽이 지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할 정도였다. 글로벌 경제를 감안하면 북·미 간에 전면전이 벌어질 가능성은 적다는 분석은 합리적인 추론이다. 리서치 기관들은 글로벌 생산의 2% 정도를 차지하는 한국에 전쟁이 발발하면 전 세계 전자제품 가격은 최소한 2배 이상 폭등하면서 글로벌 무역 흐름이 붕괴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트럼프 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위원장 외에 다른 지도자들이 섣불리 전쟁 가능성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다. 하지만 호전적 정치인들은 ‘조국의 영광’ 따위의 미사여구를 앞세워 청년들의 손에 총을 쥐여 주곤 한다. 1차 대전 직전인 20세기 초반에도 지금 못지않게 주요국들의 무역 의존도가 높은 상태였다. 물론 정치 지도자들은 부담이 덜했을 것이다. 전장에서 포화에 맞아 몸이 찢겨 나갈 사람들은 제 자식들이 아닌 평범한 노동자나 농민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벼랑 끝 대치를 벌이는 미국과 북한 지도자들, 그리고 국내의 전쟁 불사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1차 세계대전의 유럽 상황은 지금의 동북아와 놀랄 만큼 닮았다. 호전적인 지도자들은 차고 넘친다. 주요국의 반목과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정치·외교 엘리트가 부재하다. 당시 세르비아와 마찬가지로 한반도는 전략적 요충지이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 한 세기의 간극을 뛰어넘는 공통점이다. ‘평화가 우선’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은 진심을 담고 있다. 맞다.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전쟁을 막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강경화 외교부 장관 등 외교전의 최전선에서 뛰어야 할 이들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건 심각한 문제다. ‘한국전쟁은 강대국 간 대리전’ 대목을 들어 소설가 한강을 두고 ‘역사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쏘아붙일 시간에 주변 강대국 외교관들과 전화 한 통 더 하는 게 생산적이다. 자칭 ‘친미 인사’들이 한반도 전쟁 방지를 위해 뭘 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1차 대전 직전에 백색 테러에 목숨을 잃은 프랑스 정치가 장 조레스가 던진 반전의 메시지는 지금도 유효하다. “나는 산 자를 부른다. 나는 죽은 자를 호곡한다. 나는 전쟁의 뇌성벽력을 깨뜨리리라.” douzirl@seoul.co.kr
  • 아이들과 비무장지대 가는 영등포

    서울 영등포구는 21~22일 이틀간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해 현장체험하는 ‘영등포 어린이 통일기원 한마당’ 행사를 개최한다고 19일 밝혔다. 초등학생과 학부모, 다문화가족 등 200여명과 함께한다. 참여자들은 이틀간 DMZ 내 ‘캠프그리브스 유스호스텔’(경기 파주)에 머물며 DMZ 체험, 레크리에이션, 생태문화교실 등의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첫째 날인 21일은 DMZ 1129(1129일간 지속된 한국전쟁 기간을 의미) 프로그램의 하나로 전쟁의 아픈 역사를 담은 제3땅굴과 북한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도라전망대, 국제역인 도라산역과 도라산평화공원을 견학한다. 둘째 날에는 DMZ생태문화교실을 열어 멸종위기에 처한 철새들을 알아보며 생태계의 소중함을 이해하게 된다. 조길형 영등포구청장은 “어린이들이 평화통일의 중요성을 느끼는 소중한 시간을 가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홍준표 “항공모함 감사”…영국대사 “그런 적 없다” 망신살 (영상)

    홍준표 “항공모함 감사”…영국대사 “그런 적 없다” 망신살 (영상)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주한 영국 대사를 만나 영국 정부의 대북 항공모함 급파설을 거론하며 감사한다고 했다가 면전에서 군사적 옵션이 행해지지 않는다는 답을 들었다.홍준표 대표는 지난 16일 오후 여의도 자유한국당 당사에서 찰스 헤이 주한 영국 대사를 접견한 자리에서 “최근 북핵이 극도로 위험한 상황에서 영국 정부가 항공모함도 한국에 급파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는 보도를 보고, 참으로 고마운 나라라고 생각했다”며 “정말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찰스 헤이 주한 영국 대사는 “영국은 한국전쟁에서 한국 영국 합쳐서 어려움을 극복했듯이 한국의 긴 시간 동안 계속돼 온 우정과 동맹국으로 생각하고 있다”면서도 “대표님께서 어떤 경로로 언론 보도를 접했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군사적인 옵션도 행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감사하고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를 두고 제1야당 대표가 정확한 출처 없는 보도를 섣불리 언급해 망신을 당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앞서 영국 대중지 데일리메일은 지난 9일(현지시간) 영국군이 북한과의 잠재적 전쟁에 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고 이를 국내 언론이 인용해 전했다.정치블로거 아이엠피터는 “홍준표 대표는 영국 대사와 만난 자리를 통해 ‘전쟁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안보 정치’를 하려고 했지만 무산됐다”면서 “한국 언론이 데일리메일의 뉴스를 인용하려고 했다면 출처를 검증했어야 한다. 데일리메일은 출처를 ‘고위 소식통’, ‘군사기획자’, ‘해군 소식통’ 등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외신 보도를 한국 언론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보도하면서 자극적인 전쟁 관련 제목으로 ‘공포감’을 조성했다”면서 “한국 언론사가 검증 없이 외신을 받아쓰고, 107명의 국회의원이 소속된 거대 야당 대표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주한 영국 대사 앞에서 말했다. 수준 낮은 정치와 언론은 국민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고 일침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강경화 “소설가 한강 NYT 기고문, 나였다면 안 올렸을 것”

    강경화 “소설가 한강 NYT 기고문, 나였다면 안 올렸을 것”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12일 소설가 한강의 최근 뉴욕타임스(NYT) 기고문과 관련 “작가로서 개인적인 생각이 있을 수 있지만 표현과 역사인식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강 장관은 이날 국회 외교통일위 국정감사에서 ‘한강씨의 마음은 알겠지만,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이 잘못됐다’는 국민의당 이태규 의원의 질의에 이같이 답했다. 앞서 한강은 지난 8일 NYT에 기고한 ‘미국이 전쟁을 언급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는 제목의 글에서 한국전쟁을 이웃 강대국의 ‘대리전’으로 평가하면서 국내외에서 화제가 됐다. 강 장관은 또 ‘청와대가 한강 씨의 NYT 기고문을 페이스북에 게재한 것이 외교 안보상 중대한 현시점에서 도움이 되느냐’는 이 의원의 질문에 “저와 협의했더라면 올리지 말라고 조언했을 것 같다”고 답변했다. 강 장관은 ‘한미동맹이 깨져도 전쟁은 안 된다’는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의 최근 발언에 대한 입장을 묻는 말에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 정부의 대북 군사회담 제안 시 렉스 틸러슨 국무부 장관이 강경화 장관에게 항의했다’는 문 특보의 지난달 발언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일축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손원천 기자의 호모나들이쿠스] 가을, 그리움에 물들다

    [손원천 기자의 호모나들이쿠스] 가을, 그리움에 물들다

    가을이 시나브로 깊어 갑니다. 북적대는 본격 단풍철보다 외려 요즘이 나들이하기에 더 낫지 싶습니다.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오지의 풍모를 가진 곳을 찾는다면 강원 횡성이 어떨까요. 봉황의 울음소리 들린다는 봉명폭포까지 짧은 산행을 즐겨도 좋겠고, 백덕산의 옛 42번 국도를 따라 산길 드라이브를 즐겨도 좋겠습니다. 안 가면 손해인 태기산, 물안개로 수채화 같은 풍경을 펼쳐내는 횡성호도 있지요.먼저 봉명(鳳鳴)폭포부터. 발교산 자락에 깃든 폭포다. 횡성에서 가장 큰 폭포라는데, 과문한 탓에 여태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 한자를 알면 이름 풀이는 쉽다. 계곡수 흐르는 소리가 봉황(鳳)의 울음소리(鳴)를 닮았다는 폭포다.●봉황 울음소리 닮았다는 봉명폭포… 걷다 보면 야생화 천지와 조우 폭포의 들머리는 고라데이 마을이다. 고라데이는 골짜기란 뜻의 사투리다. 오래전엔 한국전쟁도 모르고 지낼 만큼 오지였다는 마을이다. 이런 곳이 서울에서 불과 1시간 40분 남짓한 거리에 있다는 게 놀랍다. 도로가 사통팔달로 뚫린 요즘엔 알음알음 찾는 도시인을 상대로 화전민, 심마니 등 산촌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폭포로 오르는 길섶은 야생화 천지다. 벌개미취가 어린아이 이처럼 가지런한 꽃잎을 선보이고, 물봉선과 산괴불주머니 등도 뒤질세라 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숲에 들면 곧 휴대전화가 불통이다. 그러니 휴대전화 배터리를 아낄 요량이라면 숲에 들기 전에 전원부터 꺼 둘 일이다. 제비 닮은 명맥새가 슬피 울었다는 ‘명맥바위’를 지나면 길은 곧 계곡과 능선으로 갈라진다. 왼쪽은 계곡, 오른쪽은 능선을 따라 걷는다. 어느 곳으로 가도 봉명폭포에 닿지만, 계곡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게 다소 수월하다. 숲은 활엽수 일색이다. 늦가을이면 불붙는 듯한 단풍을 선보이지 싶다. 들머리에서 봉명폭포까지는 30분 정도면 족하다. 천천히 걸어도 그렇다. 이끼 낀 작은 폭포 몇 개를 지나면 곧 봉명폭포다. 멀리서 거대한 암벽을 타고 폭포수가 쉼 없이 떨어져 내린다. 횡성에서 가장 큰 폭포라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다. 작은 숲이 숨겨둔 폭포치고는 제법 기골이 장대하다. 폭포 옆으로는 불퉁한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쳤다. 암벽 표면은 초록빛 이끼 일색이다. 봉명폭포를 달리 이끼폭포라 부르는 건 저 모습 때문일 터다. 폭포의 높이는 30m 정도다. 폭포수가 3단으로 굽이치며 쏟아져 내린다. 수량은 많지 않다. 가을철 갈수기에 접어든 탓이다. 하지만 폭포수의 소리는 더없이 청량하다. 크지도 작지도 않게 숲의 나뭇잎들을 흔든다. 누군들 봉황의 울음소리 들어봤으랴. 저마다 마음에 담아 두는 게 봉황의 소리일 터다. 이제 가을이 내려앉은 횡성의 옛길을 찾아나설 차례다. 대표적인 곳 중 하나가 옛 42번 국도다. 옛길은 백덕산 자락에 남아 있다. 백덕산은 횡성과 평창, 영월 등 3개 군에 걸쳐 있다. 높이는 1350m. 제법 큰 산이다. 가을 단풍과 겨울 설경으로 이름난 산이기도 하다. 능선 곳곳에 단애를 이룬 기암괴석과 단풍이 제법 잘 어우러진다.●42번 국도 옛길 8㎞ 명품숲길선 소나무·낙엽송 어우러진 풍경 반겨 옛 42번 국도는 한때 강릉과 서울을 잇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더 이전엔 ‘관동대로’라 불리기도 했다. 안흥은 둘 사이의 중간쯤에서 번성했다. 지금은 안흥의 명물이 된 찐빵 역시 당시엔 여행자와 인근 주민들이 즐겨 먹던 먹거리였을 터다. 그러다 1975년 영동고속도로가 뚫렸고, 새 길에서 나앉은 안흥도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걸었다. 옛 42번 국도는 숲 사이에 겨우 명맥만 남아 있다. 이 길을 따라 한때 시외버스가 평창까지 오갔다는 게 좀체 믿기지 않는다. 그 흔적이 평창과의 경계 지역 고갯마루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옛길 중간쯤에 ‘명품숲길’이 있다. 상찬의 표현이 아닌 실제 이름이 명품숲이다. 산림청이 솔숲 사이 능선을 따라 조성했다. 숲길은 얼추 8㎞ 거리다. 대개 평탄한 길이어서 걷기는 수월한 편이다. 전 구간을 도는 게 가장 좋지만 초입까지만 가도 소나무와 낙엽송이 어우러진 빼어난 풍경과 마주할 수 있다. 횡성 동북쪽의 병지방 계곡 임도도 가을 산책에 딱 좋다. 각종 낙엽활엽수와 낙엽송 우거진 숲길이 줄곧 이어진다. 무엇보다 적요해서 좋다. 여름철이면 제법 많은 피서객이 계곡을 찾지만 임도까지 들어오는 이는 드물다. 들머리에서 2㎞ 남짓 들어가면 나무 위에 ‘마음이 다한 곳 나!!’라는 이정표가 매달려 있다. 여기를 반환점 삼는 게 무난하다.●오르기 수월한 태기산에서 만나는 ‘인생 풍경’ 해넘이 횡성에서 태기산(1261m)을 빼놓으면 손해다. 가을에는 더욱 그렇다. 일교차가 큰 가을 아침이면 태기산 주변으로 구름바다가 펼쳐진다. 넘실대는 구름을 뚫고 정상까지 솟구쳐 오르면 발아래로 강원의 산들이 섬처럼 떠 있다. 비 갠 오후라면 더 좋다. ‘인생 풍경’이라 할 만큼 멋진 해넘이 장면과 마주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좋은 건 오르기가 쉽다는 것이다. 국도 6호선 양두구미재에서 임도를 타면 정상까지 단박에 오를 수 있다. 거리는 약 4㎞다. 임도 곳곳에서 만나는 전망도 빼어나다. 태기산 주변으로 탐방로가 조성됐다. 올가을에 처음 선보인 길이다. 12.4㎞ 길이의 탐방로는 3개 구간으로 나뉜다. 풍력발전6호기에서 시작되는 1코스(2.5㎞) 청정자연체험 구간, 태기분교터에서 출발하는 2코스(4.5㎞) 역사문화체험 구간, 송덕사가 들머리인 3코스(6.9㎞) 자연명소 트레킹 구간 등이다. 구간마다 목재 데크를 깔아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데크 주변에 가을 야생화도 심었다.●물안개 어우러진 횡성호 산책 즐기기 딱 좋아 물안개와 호수가 어우러진 수채화 같은 가을 풍경과 만나려면 포동교를 찾으면 된다. 횡성호를 따라 놓여진 여러 다리 가운데 하나다. 가을 아침이면 거의 예외 없이 다리 주변으로 물안개가 영근다. 호수를 에두른 소로를 따라 산책을 즐기기 좋다. 포동교 인근에 ‘망향의 동산’이 있다. 횡성댐 수몰민을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횡성호 둘레길 가운데 가장 풍경이 빼어나다는 5구간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9세기 말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중금삼층석탑 2기도 이곳에 있다. 한 곳만 더 덧붙이자. 청일면 고시리에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2014) 촬영지가 있다. 다큐멘터리로는 드물게 480만여명의 관객을 모은 영화다. 주인공은 무려 76년 동안 해로한 고 조병만 할아버지와 강계열 할머니다. 노부부는 어딜 가든 ‘커플룩’(한복)을 입었고, 두 손 꼭 잡고 다녔고, 앞서거나 뒤처지지 않으며 걷는 모습으로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촬영지 풍경은 수수하다. 아마, 사랑도 그럴 것이다.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33) →가는 길:봉명폭포 들머리는 고라데이 마을(344-1004)이다. 이정표를 따르면 길 찾기는 어렵지 않다. 고라데이 마을에서 숙박 시설도 운영한다. 백덕산 옛 42번 국도는 상안리가 들머리다. 내비게이션에 횡성군 서동로상안10길이나 소나무낙엽송명품숲을 입력하면 찾을 수 있다. 옛 국도 주변으로 임도가 실핏줄처럼 나 있다. 주로 산악자전거 동호인들이 즐겨 찾는 산길이다. 사륜구동 차량이라면 도전해 볼 만하지만 임도가 워낙 길고 되돌릴 곳도 마땅하지 않은 만큼 초행자라면 옛 국도 주변만 편하게 돌아보길 권한다. 병지방 계곡 임도는 오토캠핑장 못 미처 시작된다. 이정표가 작아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임도가 매우 좁아 차는 주변에 세워 두는 게 좋다. →맛집:횡성 하면 역시 한우다.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은 횡성축협에서 운영하는 축협한우프라자다. 횡성 읍내의 본점(343-9908)과 새말점(342-6680), 둔내점(345-8888) 등이 있다. 운동장해장국(345-1770)은 한우 해장국을 잘한다. 횡성종합운동장에 있다. →축제:제11회 안흥찐빵축제가 13~15일 안흥면 안흥찐빵마을 일원에서 열린다. 찐빵을 주제로 안흥찐빵 주제관과 찐빵 만들기 체험, 찐빵 많이 먹기 대회 등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 놀거리를 준비했다. 안흥찐빵을 무료로 시식할 기회도 마련했다. 안흥찐빵은 막걸리로 발효해 차지고 구수하다. 특히 대부분 업소들이 여태 손으로 빚는 전통방식을 고수하고 있어 맛과 풍미가 깊다. 안흥찐빵축제위원회 340-2703.
  •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 ‘북한의 새로운 무기’로 떠오른 조교(朝僑)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 ‘북한의 새로운 무기’로 떠오른 조교(朝僑)

     “북한에 살고 있는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너무너무 즐겁고 행복해요.” 북한 신의주와 마주보고 있는 중국의 접경도시인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의 한 북한 식당에서 만난 20대 초반의 쑹톈위(宋天宇·가명)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따금 북한을 그리워하며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곤 한다.  쑹은 이른바 ‘조교’(朝僑·북한에 거주하는 중국인)로 불린다. 북한에서 태어난 그는 10대 후반에 그곳을 떠나 중국 단둥으로 건너와 생활하고 있다. 이곳으로 이사온 이유는 북한이 싫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군대에 가기 싫어서다. 북한 인민군의 복무 기간은 무려 10년이나 된다. 북한 남성이면 누구나 군 입대를 피할 수 없는 까닭에 하는 수 없이 중국 국적을 얻기 위해 단둥으로 이주해온 것이다. 조교는 북한과 중국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특수한 대접을 받는다. 중국 국적을 취득해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직 중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북·중 국경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조교의 ‘특권’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조교가 뉴스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미국 주도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강력한 대북 제재를 뚫어 북한 경제의 흐름을 도와주는 ‘핏줄’ 역할을 하는 북한의 새로운 ‘무기’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 등은 유엔 안보리의 강력한 대북 제재로 압박하는 엄중한 상황에서도 이들 조교가 두 나라 무역 및 중재자뿐 아니라 외부 세계와의 교량 역할도 하고 있다고 지난달 17일 보도했다. 조교는 두 나라 간 무역의 3분의1을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게 단둥에 있는 북·중 무역상과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칭화(淸華)-카네기 정책센터 북한 전문가인 자오퉁(趙通)은 “북·중 간 공식 무역 채널이 많이 닫힐수록 많은 북한 사람들이 조교 네트워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면서 “무역 통로 역할을 하는 조교가 그 어느 때보다 부각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중국 해관총서(海關總署·관세청)에 따르면 유엔의 대북 제재가 이행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중국의 지난 1~8월 대북한 수출액은 지난 해 같은 기간보다 25.3%나 증가한 22억 8241만 달러(약 2조 6000억원)에 이른다.  현재 북한에 거주하는 조교는 1만~1만 5000명으로 추산된다. 북한과 가까운 중국 지린(吉林)성의 투먼(圖們)과 훈춘(琿春), 단둥 등지에는 북한에서 이주한 조교 2만~3만여 명이 삶을 꾸려가고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한반도로 이주하기 시작한 시작한 화교는 1921년 중국 산둥(山東) 지방에 대기근이 발생하면서 이들의 ‘탈중(脫中) 행렬’이 초고점에 이르렀다. 이후 중·일전쟁과 1949년 중국 사회주의 정권 수립, 1950년 한국전쟁 등 간난신고(艱難辛苦) 속에서도 북한 지역에 터를 잡고 대를 이어 살아온 이들이다. 특히 김일성은 젊은 시절 중국에서 항일투쟁 독립군으로 활동한 만큼 중국과의 교역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중국 출신인 이들에게 상당한 자치권까지 부여하며 우대하는 이유다. 예컨대 당시에는 아주 귀했던 중국과 국제전화를 할 수 있는 전화기를 이들에게 허용할 정도였다. 애담 캐스카트 영국 리즈대 중국사 강사는 “조교는 사회주의 국제주의 시대의 최후의 잔존자(殘存者)”라며 “이들은 북한 체제 안팎에 일정 정도의 자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쑹은 할아버지가 중국에서 북한으로 이민을 와 터전을 닦은 이후 태어난 조교 3세대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북중국을 점령했던 1940년대에 식솔을 이끌고 중국 산둥(山東)을 떠나 신의주로 이주했다. 당시 중국은 공산당과 국민당 간의 국공내전으로 민초 들의 삶이 북한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쑹의 사촌도 비슷한 경우다. 그의 사촌은 할아버지가 항미원조(抗美援朝)를 내세운 인민지원군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뒤 북한에 눌러 앉았다.  이들 조교는 1980년대 북·중 협정에 따라 연 2회 중국 방문이 허용되면서 역할을 증대됐다. 이는 조교들이 돈을 버는데 커다란 ‘무기’로 작용했다. 중국 개혁·개방으로 경제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면서 중국의 상품을 북한으로 들여와 차익을 챙길 수 있는 ‘특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유로운 이동권을 바탕으로 조교의 상당수는 북한에 시장 거래가 불가능한 금을 ‘밀매’하거나, 중국의 공산품을 밀수해 큰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이런 돈 벌이는 자연스레 북한 당국의 고위 관계자들과 ‘결탁’으로 이어지게 됐다. 덕분에 이들 조교의 경제적 영향력은 점차 확대됐다. 더욱이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조교들의 돈 벌이는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북한 내부에서 소비재 생산이 사실상 중단됨에 따라 조교들이 들여온 중국제 소비재 상품들이 북한 장마당을 장악한 것이다.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로 북한이 고난의 행군이라는 처절한 사투를 벌일 때 조교들은 오히려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폭발적인 고도성장으로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바람에 수혜를 본 셈이다. 북한은 이때부터 중국과의 정치·외교적 예속은 크게 약화돼도 경제적 예속관계는 오히려 강화되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들이 ‘조교들의 위상’을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조교 역할은 2009년 원자바오(溫家寶) 당시 중국 총리가 북한을 방문한 이후 본격적으로 자리매김했다. 원 총리는 조교들이 북·중 교역에서 훌륭한 중재자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원 총리는 일반 중국인들은 북한의 국경을 넘기 위해서는 비자를 발급 받아야 하지만 이들 조교는 맘대로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조교들은 북한 신의주와 중국 단둥을 가르는 압록강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여권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조교들은 북한 내에서도 또다른 특수 대접을 받는다. 모든 북한 주민들이 빨간색 김일성 배지를 달아야 하지만 조교는 예외다.  쑹은 “올해 말 중국 국적을 취득하면 가장 먼저 자동차 면허를 딸 예정”이라며 자동차 면허를 따면 자동차를 몰고 신나게 달리면서 중국 일주여행을 하고 싶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태어난 북한에 강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조국은 중국이지만 모국은 북한이라고 생각한다. 쑹은 지금도 학창 시절을 같이 보냈던 북한 친구들과 교류한다. 주요 교류 수단은 휴대전화이다. 북한 친구들은 휴대폰의 SIM카드를 교체하는 것, 중국산 옷과 신발을 사는 것 등을 원한다. 쑹은 친구들의 부탁을 즐겁게 들어준다. 그는 이런 일을 ‘식은 죽 먹기’라고 표현했다. 쑹은 “사람들이 북한이 나쁜 나라라고 하면 화가 난다”고 말했다. 그는 “남들이 북한이 좋은 나라냐고 물어본다면 ‘그렇다’고 말하는데 약간 주저하지만 그래도 북한은 기본적으로 좋은 나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특히 북한 사람들이 좋다”고 강조한다.    쑹은 그러나 “많은 북한 주민들이 김정은을 싫어한다. 더욱이 200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더 싫어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친구들을 비롯해 2000년대 태어난 젊은이들이 북한을 떠나 중국에서 일하기를 원한다고 전한다. 그 이유는 미국 등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로 북한에서는 더이상 그들 자신을 발전시킬 기회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의 북한 친구들은 대부분 봉제공장이나 전자회사에서 일한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들에게 기회는 더욱 줄어들 전망이다. 유엔 대북 제재로 북한의 대중 섬유수출이 봉쇄됐기 때문이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위험 없는 선택 없어” “준비돼 있어야”… 美 군사옵션 장전하나

    “위험 없는 선택 없어” “준비돼 있어야”… 美 군사옵션 장전하나

    미국의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총장이 9일(현지시간) 동시에 대북 군사옵션을 강조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전 행정부들이 북한과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고 비판한 뒤 나온 발언이어서 주목된다. 미군은 2척의 미 핵 항모전단을 한반도 인근으로 이동시키는 등 대북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은 이날 워싱턴DC에서 열린 국제방산전시회 기조연설에서 “(우리는) 북핵 해결을 위해 경제 제재를 통한 외교적 해법에 노력하고 있다”고 전제한 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여러분도 나도 말할 수 없다. 미 육군은 한 가지를 할 수 있다. (군사옵션) 필요할 때 대통령이 활용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준비돼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교적 해법이 실패할 상황을 대비해야 함을 지적한 것이다. 이어 매티스 장관은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 제재를 위한 표결이 만장일치가 되는 것을 몇 번이나 봤느냐. 이번엔 두 차례 연속”이라면서 “미 육군은 준비돼 있어야 한다”고 거듭 밝혔다.●영국 신문 “英, 잠재적 北·美전쟁 대비” 마크 밀리 미국 육군참모총장은 이날 워싱턴DC에서 열린 미 육군협회(AUSA) 연례행사에서 대북 군사옵션과 관련, “위험이 없는 선택지는 없고, 그 위기를 해결할 시간도 무기한으로 주어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또 밀리 총장은 “한반도에서 전면전은 아무리 상상의 나래를 펴 봤자 끔찍할 것”이라면서 “그것에 대해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 결정은 합법적으로 선출된 미국의 대표자들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고 밝힌 뒤 “이것에 관한 일정표가 있다”고 전했다. 이런 가운데 미 해군은 지난 6일 루스벨트 핵 항공모함 전단을 태평양으로 발진시켰다. 이미 한반도 해역으로 발진한 로널드레이건 항모전단과 함께 한반도 해역에 두 척의 항공모함 전단이 머무를 예정이다. 이번 주말에는 핵추진 잠수함 미시간함(배수량 1만 8000t)이 부산항에 도착한다. 이례적으로 미국 정부가 한반도 주변에 2척의 핵추진 항모전단 등을 배치한 것은 북한의 추가 도발에 대한 경고와 더욱 강력한 대북압박에 나서라는 중국을 향한 메시지로 풀이된다. 매티스 장관은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낮추기 위한 미군의 역할을 묻자 구체적인 답변 대신 T R 페렌바크의 저서 ‘이런 전쟁’(This kind of war)을 읽어 보라고 추천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초기 미군의 패착과 작전 실패를 주로 다뤄 미군 지휘관들 사이에서 필독서로 여겨지는 전쟁사의 고전이다. 한편 영국도 잠재적 북·미 전쟁을 대비하고 있다고 현지 일간 데일리메일이 영국정부 소식통을 인용, 이날 보도했다. 영국 정부의 한 소식통은 “북한과의 전쟁이 일어나면 영국이 대응할 계획을 세우라는 지시를 받았다”면서 “올해 말에 영국 해군에 인도될 예정인 최신 항공모함 퀸엘리자베스호를 한반도 주변에 투입, 전투기 F35B 12대와 한반도 주변 미국 전함에 합류시키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濠 헬기 항모도 새달 동해서 연합훈련 호주의 헬기항모인 강습 상륙함 캔버라함(배수량 2만 7100t)도 11월 동해에 진입, 한국과 처음으로 연합 훈련을 가질 예정이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한강 NYT 글 美서 핫이슈

    한강 NYT 글 美서 핫이슈

    소설가 한강(47)이 ‘미국이 전쟁을 언급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는 제목으로 지난 8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에 기고한 글이 미국 내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NYT “한국인의 평화 갈망 다뤄” 기고문은 ‘전쟁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한국인들이 최근 북·미 간 긴장 고조로 또다시 한반도에서 전쟁 시나리오가 거론되는 요즘의 상황을 대면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다. NYT 선데이 리뷰 전면에 실린 기고문은 그날 온·오프라인을 통틀어 가장 많이 읽히고 논쟁의 중심에 오른 글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NYT는 9일 “한강은 60년 대치 상황에서 축적된 불안감에 순응한다는 게 곧 굴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한국인들이 평화를 강하게 갈망하고 있다는 점을 다뤘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정치 위해 긴장 높여” 한강의 글에는 수많은 댓글도 달렸다. 뉴욕 출신의 한 네티즌은 “누군가 이 글을 미국 정부의 모든 이에게 돌리고 그들이 위기로 내몰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한강의 글에 공감했다. 저지시티 출신의 라이오넬 후츠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정치적 이유로 긴장을 높이고 있다”면서 “한반도의 전쟁은 상상할 수 없는 비극으로 이어질 뿐”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전, 대리전 아닌 北 남침” 그러나 반론도 이어졌다. 특히 한강이 1950년 한국전쟁을 이웃 강대국의 ‘대리전’으로 평가한 것에 적극적인 반박이 잇따랐다. 워싱턴의 한 네티즌은 “한강 기고문은 아름답고 가슴을 울리지만 과연 김정은도 관심을 갖겠는가”라면서 “분명 한국전쟁은 (대리전이 아니라) 북한의 남침으로 터졌다”고 했다. 청와대도 지난 9일 페이스북에 한강의 글을 싣고 자세히 소개했다. 김민희 기자 haru@seoul.co.kr
  • 한강 NYT 기고문 美서 반향…“서울의 목소리 더 많이 들어야”

    한강 NYT 기고문 美서 반향…“서울의 목소리 더 많이 들어야”

    소설가 한강(47)이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에 기고한 글이 미국 내에서도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한강이 게재한 ‘미국이 전쟁을 언급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는 제목의 글은 뉴욕타임스 선데이리뷰(8일자) 전면을 장식했다. 뉴욕타임스는 북한의 호전적인 내부 분위기를 소개한, 고정 칼럼니스트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의 방북기와 나란히 배치해 대조를 이뤘다. 뉴욕타임스는 9일(현지시간) “한강은 60년 대치상황에서 축적된 불안감에 순응한다는 게 곧 굴복을 의미하는 게 아니며, 한국인들이 평화를 강하게 갈망하고 있다는 점을 다뤘다”고 평가했다. 한강의 기고문은 온·오프라인을 통틀어 가장 많이 읽히고 논쟁의 중심에 오른 글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이어 온라인에는 수많은 ‘장문’ 답글이 달렸다. 시애틀의 N. 아처는 “우리는 서울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들어야 한다. 매일 같이…”라는 댓글을 남겼다. 한국인들의 솔직한 심정을 보다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평가도 나왔다. 저지시티 출신의 라이오넬 후츠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정치적 이유로 긴장을 높이고 있다”면서 “한반도의 전쟁은 상상할 수 없는 비극으로 이어질 뿐”이라고 한강의 글에 공감했다. 그렇지만 북한 김정은 정권이 미국 본토까지 위협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강력히 경고하는 상황과는 맞지 않는 감성적인 접근이라는 반론도 적지 않다. 뉴욕의 피트는 “가슴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당신의 주장에 100% 공감할 것”이라며 “불행하게도 트럼프는 터프하게 보이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고 꼬집었다. 특히 한강이 1950년대 한국전쟁을 이웃 강대국의 ‘대리전’으로 평가한 부분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반박이 잇따랐다. 앞서 한강은 기고문에서 “우리는 바로 국경 너머에 있는 북한이 또 핵실험을 할까, 방사능이 누출될까 무섭다”면서 “우리는 서서히 고조되는 말싸움이 실제 전쟁으로 번질까 두렵다”고 적었다. 한반도 위기에도 짐짓 태연한 듯 지내는 한국인들에 대해서도 “이런 고요함이 한국인들이 정말 무관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 모두가 전쟁의 공포를 진실로 초월해냈을 것 같으냐”는 물음을 던지면서 절대 그렇지 않다고 밝혔다. 한강은 특히 “우리는 평화가 아닌 어떤 해결책도 의미가 없고, 승리는 공허하고 터무니없으며 불가능한 구호일 뿐이라는 걸 안다”고 강조했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美국방 “필요시 대통령 활용할 군사옵션 준비돼 있어야”

    美국방 “필요시 대통령 활용할 군사옵션 준비돼 있어야”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부 장관은 9일(현지시간)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강조하면서도 유사시를 대비한 군사 대응 준비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매티스 장관은 이날 워싱턴DC에서 미 육군협회(AUSA)가 주최한 국제방산전시회 기조연설에서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여러분도 나도 말할 수 없다. 미 육군은 한 가지를 할 수 있다. 그것은 필요할 때 대통령이 활용할 수 있는 군사옵션을 우리가 보유하고 있음을 보장하도록 준비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매티스 장관은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 제재를 위한 표결이 만장일치가 되는 것을 몇 번이나 봤느냐. 이번엔 두 차례 연속”이라며 “국제사회는 목소리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미 육군은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매티스 장관은 사회자가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낮추기 위한 미군의 역할을 묻자 구체적인 답변 대신 T.R 페렌바크의 저서 ‘이런 전쟁(This kind of war)’을 읽어보라고 추천했다. 한국전쟁 초기 미군의 패착과 작전 실패를 주로 다룬 이 책은 미군 지휘관들 사이에서 필독서로 여겨지는 전쟁사의 고전이다. 한국에서는 ‘한국전쟁’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미국이 전쟁 언급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

    “미국이 전쟁 언급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

    한국 작가 최초로 세계 3대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47)이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NYT)에 한반도 긴장 고조와 관련, 한국인들의 심정을 담은 글을 7일(현지시간) 기고했다. ‘미국이 전쟁을 언급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는 제목으로 전쟁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안고 사는 한국인, 북한이라는 존재의 복합성을 잘 알기에 애써 태연한 한국인들 앞에서 전쟁 시나리오를 들먹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자는 취지의 글이었다.그는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자 전쟁 우려 때문에 은행에서 돈뭉치를 찾아오다가 절도 피해를 본 노인의 사건을 시작으로 글을 풀었다. 한강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후부터 전쟁은 그 노인이 청소년기에 줄곧 겪어 온 체험이었을 것”이라면서 “나는 그 노인과 달리 한국전쟁을 겪지 않았다”며 전쟁 후 철저히 단절된 남북한의 실태와 그에 따른 한국인들의 인식을 소개했다. 그는 “전후 세대들에게 북한이라고 알려진 나라는 때로 모종의 비현실적인 존재로 느껴진다”면서 “물론 남한 사람들은 평양이 서울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이며 전쟁이 끝나지 않았고 휴전 중이라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한강은 한반도 위기가 고조되고 있음에도 태연한 듯 일상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을 향한 외신들의 시선도 주목했다. 그는 “이런 고요함이 한국인들이 정말 무관심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일까. 모두가 전쟁의 공포를 진실로 초월해 냈을 것 같으냐”는 물음을 던졌다. 절대 그렇지 않다는 답변이 바로 이어졌다. 한강은 “수십 년간 쌓인 긴장과 전율이 한국인들의 깊숙한 내면에 숨어 단조로운 대화 속에서도 갑자기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한강은 “우리는 서서히 고조되는 말싸움이 실제 전쟁으로 번질까 두렵다”고 말했다. 한강은 “여러 시나리오가 있다”, “우리가 이길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남한 사람들이 매일 2만명씩 죽는다”, “전쟁이 미국이 아닌 한반도에서 일어나니까 걱정하지 말라” 등 최근 전해진 자극적인 뉴스를 토막토막 소개하고 “우리는 평화가 아닌 어떤 해결책도 의미가 없고, 승리는 공허하고 터무니없으며 불가능한 구호일 뿐이라는 걸 안다”고 강조했다. 한강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한 촛불집회를 언급하며 기고를 마무리했다. 한강은 “우리는 촛불의 조용하고 평화적 방법으로 사회를 바꾸길 원했고 그것은 결국 현실이 됐다”면서 “누가 그들에게 평화가 아닌 다른 시나리오를 말할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김민희 기자 haru@seoul.co.kr
  • 국내 대표 억새꽃 축제 13일 포천 명성산서 개막

    국내 대표 억새꽃 축제 13일 포천 명성산서 개막

    경기 포천시는 ‘제21회 산정호수 명성산 억새꽃 축제’가 13~15일 열린다고 8일 밝혔다.축제가 열리는 해발 923m 명성산은 매년 가을이면 정상 부근 15만㎡ 규모의 억새밭이 장관을 이뤄 해마다 등산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명성산은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 망국의 한을 통곡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산 자락에 위치한 억새밭은 한국전쟁 당시 포탄을 맡아 민둥산이 된 곳이다. 산정호수 주차장에서 비선폭포와 등룡폭포를 거쳐 1~2시간 가량 오르면 억새 군락지에 도착할 수 있다.포천시는 억새꽃을 보러 방문하는 등산객의 편의를 위해 등산로에 데크 로드·포토존·전망대 등을 설치했다. 축제 기간 산정호수 일대에서는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려 등산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축제 이튿날인 14일에는 산정호수 특설무대가 마련돼 개막식과 축하공연, 불꽃 쇼가 열린다. 15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포천의 대표 먹거리인 막걸리 체험마당과 문화공연이 예정돼 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무대로 부활한 20세기 명작들

    무대로 부활한 20세기 명작들

    20세기 국내외 명작을 재해석한 작품들이 관객들을 만난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명작들이 끊임없이 무대에 불려 나오는 이유는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메시지가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일 터다. 올 가을 한국 대표 연출가들의 손에 의해 재탄생한 원작의 색다른 재미를 느껴보는 건 어떨까.연극 ‘서푼짜리 오페라-나는 깡패입니다’(5~15일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는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동명 서사극을 1960년대 부산을 배경으로 고쳐 쓴 음악극이다. 원작은 브레히트가 영국의 극작가이자 시인이었던 존 게이 대본의 음악극 ‘거지 오페라’에서 큰 줄기를 가져와 1928년 재구성했다.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은 원작의 배경인 영국 런던의 암흑가를 1960년대 초 부산으로 바꿨다. 1960년 5월 군사혁명재판소에서 조직폭력배, 윤락녀, 부랑자 등 102명이 유죄판결을 받은 사건을 모티브로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밑바닥 인생들의 꿈과 사랑, 배신과 용서를 그린다. 연희단거리패의 배우장 이승헌이 ‘아버지를 찾아서’에 이어 두 번째로 연출에 도전한다. 연희단거리패 젊은 배우들이 중심이 되어 부산·경남 지역을 바탕으로 활동하는 극단 가마골이 제작했다. 3만원. (02)766-9831.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 ‘유리동물원’ 등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대표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동명 작품을 원작으로 한 연극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18일~11월 5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는 문삼화 연출가가 재조명한다.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희곡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 작품은 1959년 리처드 브룩스 감독, 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됐다. 1947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퓰리처상을 받은 윌리엄스에게 1955년 두 번째 퓰리처상 수상의 영예를 안긴 작품이기도 하다. 65세를 맞이한 아버지 빅대디의 생일날 모인 아들 브릭, 브릭의 아내 마가렛 등 서로 간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가족들을 중심으로 허위 안에 갇힌 인간 군상을 조명한다. 3만~6만원. (02)580-1300.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이 1949년 발표한 마지막 걸작을 원작으로 한 연극 ‘1984’(20일~11월 19일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는 빅브라더의 감시 아래 모든 것이 통제되는 디스토피아를 생생하게 그린 작품이다. 영국의 차세대 극작가 겸 연출가인 로버트 아이크와 던컨 맥밀런이 각색한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사상경찰과 텔레스크린이라는 기술을 이용해 끊임없이 국민을 감시하는 당에 의심을 품는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를 중심으로 전체주의 체제에 반기를 든 개인의 심리와 그 최후를 냉철하게 그린다. 연출가 한태숙이 원작 속 통제 사회의 지배 시스템에 의해 일그러진 인간의 심연을 스산하게 그려낸다. 2만~5만원. 1644-2003. 한국 사실주의 희곡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차범석의 ‘산불’은 현대적인 창극으로 재탄생한다. 국립창극단은 오는 25~29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산불’을 공연한다. 원작은 1951년 지리산을 배경으로 전후 한국 사회의 현실을 담아낸 사실주의 희곡이다. 전쟁으로 노인과 과부만 남은 지리산 자락 촌락에 젊은 남자 규복이 숨어들면서 벌어지는 비극을 그린다. 이성열 연출가는 “사실주의의 정수로 알려진 원작을 비사실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연출 방향을 밝힌 만큼 원작이 지닌 한국전쟁이라는 사실적인 상황을 거둬내고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의 내면과 보편성에 초점을 맞춰 원작을 현대적으로 해석할 예정이다. 더불어 음악극 형식에 맞게 풍성한 요소를 도입해 비극성을 강조한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액자식 구조, 프롤로그 및 에필로그 도입 등을 통해 서사의 입체감을 더하고 죽은 남자들, 까마귀들, 점례의 남편 종남 등 원작에 없는 캐릭터도 등장시킨다. 2만~7만원. (02)2280-4114.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판소리부터 오페라까지... 미리보는 ‘공연예술 창작산실’ 라인업

    예술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 신작 공연이 올 12월부터 대거 무대에 오른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문예위)가 ‘공연예술 창작산실’ 사업 지원작으로 선정한 창작 공연 22편이다. 올 12월부터 내년 3월까지 연극, 뮤지컬, 무용, 오페라, 전통예술 등 5개 장르의 다양한 작품을 차례로 만나볼 수 있다. ‘공연예술 창작산실’은 2008년 시작된 문예위의 대표적인 공연예술 지원사업으로 대본과 기획안, 쇼케이스 심의를 거쳐 지원작을 결정한다. 올해는 전문가 심사위원단 평가 외에도 관객 평가단의 점수를 반영해 예술성뿐 아니라 대중성도 강화했다. 우선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명작을 재해석한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에 국악을 접목한 ‘오셀로와 이아고’와 영화로 잘 알려진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현대무용으로 표현한 ‘인생의 사계를 그리는 춤-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애란의 소설 ‘물속 골리앗’을 재해석한 무용 ‘물속 골리앗’ 등이다. 기존 공연 구성의 편견을 뒤집는 작품들도 있다. 전통예술 ‘완창판소리프로젝트 1’은 캐스터네츠와 아코디언, 하모니카 등 기존 판소리 공연에서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악기를 활용한다. 무용 ‘Perfect death’와 ‘가상 리스트, Virtual List’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에 라이브 영상을 접목했다. 연극 ‘깨비가 잃어버린 도깨비 방망이’는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조화시킨 무대를 선보인다. 이밖에도 고려인 이주 80주년을 기념한 다큐 콘서트 ‘아리랑, 삶의 노래 - 흩어진 사람들2’와 한국전쟁의 참혹한 현실에 연극 ‘햄릿’을 접목한 오페라 ‘1053’, 19세기 에펠탑 착공을 앞둔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로맨스 뮤지컬 ‘줄리앤폴’, 진실과 허구의 이분법을 깨는 극단 백수광부의 연극 ‘최서림, 야화순례기여행전’, 극단 목화의 대표 오태석 연출가의 신작 ‘모래시계’ 등이 무대에 오른다. 선정작들은 오는 12월 8일부터 내년 3월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과 대학로예술극장, 서울 강동구 강동아트센터 대극장 등에서 순차적으로 공연한다. 취향대로 골라볼 수 있는 ‘드림패키지’ 티켓은 오는 16일부터 문예위 예매페이지에서 구입할 수 있다. 문의는 (02)3668-0007.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오빠생각’ 고아성 “임시완 첫 인상, 너무 잘생겨서 낯설었다”

    ‘오빠생각’ 고아성 “임시완 첫 인상, 너무 잘생겨서 낯설었다”

    추석 특선영화 ‘오빠생각’이 화제인 가운데 고아성이 임시완의 첫인상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재조명되고 있다.과거 방송된 MBC ‘섹션TV 연예통신’에서는 영화 오빠생각에 출연한 배우 임시완, 고아성, 이희준이 인터뷰이로 참여하는 모습이 공개됐다. 당시 고아성은 임시완의 첫인상에 대해 “정말 잘생겨서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고아성은 이어 “임시완은 진지한 면이 있다. 그래서 가끔 세대차이도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이에 임시완은 당황하는 듯한 모습으로 웃음을 자아냈다. 한편, 6일 오후 12시 10분 KBS1에서 방영된 추석 특선영화 ‘오빠생각’은 한국전쟁 당시 실존했던 어린이 합창단을 모티브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전쟁터 한가운데서 시작된 작은 노래의 위대한 기적을 그린 작품이다. 사진=MBC ‘섹션TV’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헌책방 주인장의 유쾌한 책박물관] 인터넷 없던 시절 음악잡지… 문화의 과거~ 미래 담긴 보물창고

    [헌책방 주인장의 유쾌한 책박물관] 인터넷 없던 시절 음악잡지… 문화의 과거~ 미래 담긴 보물창고

    세탁소 옆에 딸린 작은 방 책상 앞에서 한 고등학생이 열심히 무언가를 적고 있다. 어딘가에 보내기 위해 엽서를 쓰고 있는 것이다. LP와 라디오를 통해 록음악에 심취해 있던 이 소년은 드디어 자신이 직접 록밴드를 만들어 보기로 결심하고 같은 또래를 대상으로 멤버 모집 광고를 내려는 중이다. 내용은 길지 않다. 몇 번이나 고쳐 쓴 후에 다음과 같이 최종 원고를 만들어 똑바른 글씨로 엽서에 적고 있다. “멤버를 모집합니다. 헤비메탈의 진정한 세계를 모험하실 분 중 키보드, 드럼, 기타, 베이스를 다룰 줄 아시는 분은 저에게 연락해 주세요. 사진을 동봉해 주시고 고 2의 남학생이어야 합니다.” 발신지 주소는 경기도 파주군 문산읍. 엽서 마지막엔 이름을 썼다. “윤도현.” 광고를 낸 사람은 바로 훗날 YB밴드의 리더가 되는 윤도현이었다. 광고는 월간잡지 ‘음악세계’ 1988년 10월호에 다른 독자들의 광고 여럿과 함께 ‘애독자 응접실’ 코너에 짤막하게 실렸다.과거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중문화 잡지만큼 그 시대를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매체는 드물다. 요즘에는 인터넷으로 세상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받아 볼 수 있지만 그런 게 없던 때라면 신문이나 잡지 등 활자 매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상당히 크다. 앞서 말한 윤도현의 경우처럼 같은 잡지를 구독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관심사도 비슷할 것이기 때문에 펜팔 상대를 구한다거나 구인광고 등을 실어서 자연스레 독자들끼리 커뮤니티를 만드는 역할도 했다. 지금부터 집중해 살펴볼 잡지 ‘음악세계’가 발행되던 1980년대는 ‘한강의 기적’과 ‘서울올림픽’이라는 두 가지 거대한 이미지가 사회를 지배하던 때다. 한국전쟁 이후 황폐해진 국가가 빠르게 산업화했고, 그 뒤를 이어 이제 우리나라도 선진국의 문턱에 가깝게 다가섰다는 인상을 드러내는 데 국가 역량이 집중됐다. 한쪽에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다른 편에선 세계화, 국제화라는 이름을 앞에 두고 축제의 장이 펼쳐졌다. 그 정점에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이 있었다. 윤도현이 밴드 멤버 모집 광고를 냈던 잡지 음악세계 1988년 10월호도 시류에 편승해 올림픽 특집으로 꾸며졌다. ●코리아나 2년마다 비자 갱신 국적 유지 지금처럼 다양한 대중문화 향유 매체가 없던 그때 음악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보물 창고였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누가 더 많은 음악 정보를 알고 있느냐에 따라서 은근히 서열이 나눠지곤 했다. 요즘이야 알고 싶은 정보가 있으면 곧바로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볼 수 있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인터넷이라는 것은 물론이고 휴대전화조차 상용화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라디오나 음악잡지가 전부였다. 그해 강변가요제에서는 여러 모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대상을 받은 참가자가 이상은이었는데 이 사람은 생긴 것에서부터 말투, 옷차림에 이르기까지 모두 특이했다. 게다가 부른 노래 제목은 ‘담다디’다. 신나는 멜로디에 재미있는 율동은 축제 분위기에 더없이 좋은 노래였다. 나 역시 강변가요제를 보면서 담다디가 울려 퍼질 때 ‘이 노래는 두고 볼 것도 없이 대상이다’ 하면서 앞으로 다가올 이상은의 인기를 예감했다.누구나 예상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음악세계 올림픽 특집호 표지는 무섭게 떠오른 신인 가수 이상은이 장식했다. 이상은을 인터뷰한 기사도 길게 실렸는데 갑자기 쏟아지는 관심 때문에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여름에 끝난 강변가요제 대상 수상 이후 불과 몇 개월 만에 쇼프로그램 출연, 영화 출연 섭외, TV광고 모델 발탁 등 숨쉴 틈 없이 바쁜 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뷰 중에 “이럴 바엔 한두 달 정도 숨어 버리고 싶다”고 속내를 털어놓고 있는데 실제로 이로부터 2년 후 이상은은 갑자기 연예계 생활을 접고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이상은과 함께 잡지에서 가장 크게 다루고 있는 부분은 역시 서울올림픽인데, 음악잡지답게 메인 기사는 역시 올림픽 공식 가요 ‘손에 손잡고’를 부른 그룹 ‘코리아나’의 밀착 동행 인터뷰다. 기자가 개막식 때 공연을 위해 입국한 코리아나 멤버를 며칠 동안 따라다니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인터뷰한 것으로 그만큼 공을 많이 들인 지면이다. 코리아나 구성원 넷은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룹 결성은 1970년대 한국에서 했지만 곧바로 해외로 나가 활동했기 때문에 이런 가수가 갑자기 나타나서 올림픽 공식 가요를 부른다는 걸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이미 자리를 잡아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그런 세계적인 뮤지션으로 하여금 올림픽의 공식 가요를 부르게 한다는 기획은 성공적이었다. 인터뷰에 따르면 코리아나는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 활동의 한 목표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20년 동안 외국에서 활동하면서도 2~3년에 한 번씩 취업비자를 갱신하는 방법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그대로 유지했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다.●부상당한 조용필 통원 치료 소식도 실려 1990년대 들어 댄스음악 열풍이 불고 아이돌 문화가 생겨나기 전까지 팔십 년대 후반은 그야말로 가요의 춘추전국시대였다. 음악세계 잡지 기사를 살펴보면 ‘돌아이 시리즈’에 출연해 영화배우로도 크게 성공한 가수 전영록의 근황을 다룬 페이지가 있는가 하면 당시만 해도 텔레비전이나 잡지에 거의 얼굴을 보이지 않았던 이문세를 찾아가 신작 앨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는 기사도 있다. 듀엣 ‘도시의 아이들’은 입산수도 훈련을 하고 있다는 재미있는 기사가 연출된 사진과 함께 실렸고 영원한 가왕(歌王) 조용필은 부상을 당해 통원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 역시 연출된 듯 조금은 어색한 사진에 대해져 잡지 한 부분을 차지했다.발라드나 댄스곡을 부르는 가수 이야기만 실린 것이 아니다. 잡지 후반부에는 국내외 록그룹들에 대한 정보도 정리해 기사로 만들었는데 주목할 만한 것은 해체된 ‘부활’의 멤버들에 관한 것이다. 우선 기타리스트 김태원은 1년 동안 준비한 끝에 5인조 그룹 ‘게임’을 만들었다. 부활의 다른 멤버인 서영진과 김성태는 재미교포 뮤지션 세 명을 영입해 ‘라디오’를 결성했다. 한편 부활에서 보컬을 맡았던 이승철은 기타리스트 손무현을 영입한 뒤 부활의 베이스 주자 정준교, 대학의 가스펠 메탈그룹에서 드럼을 연주한 조현우와 함께 ‘걸프렌드’라는 새로운 밴드를 선보였다. 개성시대라는 현재 아이돌 가수가 대세인 방송 프로그램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팔십 년대 우리나라 가요계의 모습이 훨씬 개성 넘치는 모습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3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살펴본 음악잡지 한 권은 단순한 추억을 넘어 하나의 문화 현상을 들여다보는 기회가 됐다. 세계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했던 서울올림픽 이야기를 시작으로, 더이상 가수가 출연할 수 있는 음악 프로그램다운 방송이 없다며 앞으로 TV 출연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전영록, 더 나중 일이 되겠지만 먼저 세상을 떠난 작곡가 이영훈의 재능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 이문세, 그리고 1990년대 중반이 돼야 존재감을 나타내게 될 윤도현의 고등학생 시절 모습까지 보았다. 어쩌면 지금의 그를 만든 첫 시작은 이 짧은 멤버 모집 광고 한 조각을 썼던 작은 용기였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자면 오래된 잡지 한 권은 그저 옛날이야기를 늘어놓은 흥밋거리 책이 아니라 문화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담고 있는 흥미로운 보물 창고인 셈이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 남북 이산가족 72년...이번 추석도 상봉은 저 멀리

    남북 이산가족 72년...이번 추석도 상봉은 저 멀리

    “개성에서 30리. 임진각 철조망에서 우리 평산 신씨의 묘가 보이는데 가지를 못하는게 기가 막힙니다.”이제는 북한 땅이 된 경기 장단군이 고향이라는 신현옥(75)씨는 명절이면 경기 파주의 임진각을 찾아 북녘의 고향땅을 바라본다고 했다. 신씨는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마당 앞 앵두나무 밑에 묻어두고 온 귀중품도 생각나고...”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신씨의 아버님과 형님이 살아계시다면 올해 나이 107세와 88세. 신씨의 아버님과 형님은 한국전쟁 때 고향에서 중공군에 납치됐다고 했다.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과 함께 부산까지 내려온 신씨는 1·4 후퇴 때 경기 평택으로 갔다가 문산, 일산 등지를 전전했다. 신씨와 함께 피난왔던 동생은 부산 피란 당시에 목숨을 잃었다. 신씨는 아버님은 몰라도 형님만은 살아계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한 해, 한 해 흐르는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다고 신씨는 눈물을 글썽였다. 신씨는 “어머님도 형님만 만나길 기다리시다가 돌아가셨다”며 “지금이라도 빨리 만나면 되는데”라고 발을 동동 굴렀다. 신씨와 같이 분단과 전쟁을 직접 겪으며 그 와중에 고향을 잃거나 가족과 흩어져 소식을 모른 채 살아온 실향민과 이산가족 1세대 생존자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북한에 있는 가족을 찾아 달라고 대한적십자사에 신청한 사람 약 13만 명 중 이미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그나마 생존자의 절반 이상은 80대 이상의 고령자다. 지난 9월까지 통일부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등록된 이산가족은 전체 13만 1221명으로, 그 중 사망자는 7만 1145명에 달한다. 생존자 6만여명 중 90세 이상은 19.4%인 1만 1668명, 80대는 42.9%인 2만 5775명, 70대는 23%인 1만 3841명에 달한다. 대한적십자사는 이들 미상봉 이산가족들을 위해 지난달 26일 한국철도공사와 공동으로 경기 파주 임진각 망배단에서 추석 망향대제를 지내고 도라산 일대를 돌아보는 이산가족 초청 ‘희망풍차 해피트레인’ 행사를 실시했다. 행사를 함께 찾은 한순영(81·여)씨와 한충길(78)씨는 남매지간으로 한국전쟁 당시 교사였던 큰형님이 출근한다고 나간 이후 월북했다는 소문만 들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공산군에 학살 당하고 이후 신원특이자로 분류돼 가족들이 고생도 많이 했다고 한씨는 전했다. 임진각을 처음 찾았다는 이들 남매는 이산가족임에도 월북이라는 이유로 어디 가서 터놓고 얘기도 못하고 살았다. 한씨는 형님 계시는 곳을 바라보기라도 하려고 친누나와 함께 행사에 처음 참여했다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한씨는 “이산가족은 어떠한 정치적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만나야하는데 현재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라며 “상봉이 당장 어렵다면 가족들 소식이라도 알고 지낼 수 있는 통로를 많이 마련해줬으면 좋겠다”고 이산가족의 절실함을 말했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정태원 군, 자넨 대학생이니 중학생인 우리 아들 잘 부탁하네”

    “정태원 군, 자넨 대학생이니 중학생인 우리 아들 잘 부탁하네”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4)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탈영병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인천 소재 치과 원장) 씨의 도움으로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 소위·24세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6·25 전쟁 발발과 심선택 선생님 나(정태원)는 일제 때 인천창영국민학교를 33회로 졸업하고,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를 졸업한 후 성균관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인천상업중학교에 다닐 때 야구선수였으며 6학년 때는 주장을 했었고 그때 야구부 코치는 해병 소위로 9·15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셨던 심 선택 선생님(본 참전기 3회 참고)이셨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갑자기 인천에 북한군이 쳐들어왔다. 얼마 지나 “인민의용군에 지원하라”면서 길에서 닥치는 대로 젊은이들을 잡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의용군으로 끌려가면 개죽음당한다는 걸 들었기 때문에 연수동 작은 할아버지 댁으로 도망쳐 숨었다. 그 해 지옥 같은 여름을 인민군 치하에서 보내고서 9월이 왔다.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민군이 물러나고 인천은 다시 자유를 찾았다. 우익학생들을 주축으로 인천학도의용대가 결성되었는데 대원들은 중학교 학생들이었고 간부들은 대부분 대학생으로, 연대장이 이계송(고려대 2학년)이었는데 이계송은 나하고는 인천상업중학교 동기동창이었다. 인천학도의용대 활동과 나와의 인연 나는 대학생이었고 인천상업중학교 동기동창생 이계송이 대장으로 있어서 인천학도의용대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가 단체로 남하한다는 소식이 내게 들려오는 것이었다. 나는 인민군 치하의 지옥 같은 생활이 기억나 또다시 인민군이 들어오면 더 이상 갈 곳도 없어서 인천학도의용대가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렬국교)를 향하여 남하할 때 같이 남하하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인천학도의용대 활동을 하지 않았던 중학생들도 많이 있었는데, 인천학도의용대를 따라 남하하려는 내 결심을 인천학도의용대 활동을 하지 않았던 동네 후배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형, 우리도 형하고 같이 가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축현국민학교까지 따라오신 고향 인천 신흥동의 동네 후배 부모님들은 “중학생인 우리 아들 잘 부탁하네”라는 간곡한 부탁의 말씀을 하셨다. 생전에 마지막으로 뵌 어머니 모습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 대원 약 2500명은 인천축현국민학교를 출발하였는데, 경동파출소 앞을 지나면서 보니까 어머니께서 경동파출소 정문에서 나를 보시고는 손을 흔드시면서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것이었다. 나는 행진하는 대열 속에서 손을 흔들면서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하였다. 이날 뵌 어머니 모습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뵌 모습이었으며 이듬해인 1951년 4월 15일 내가 진해에서 해병대의 포병대대 창설 요원으로 훈련 중일 때 어머니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우리들은 걸어서 행군하여 수원, 대전, 대구, 경산, 청도, 밀양, 삼랑진을 지나서 17일만인 1951년 1월 3일, 최종 목적지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렬국민학교)에 가까운 마산에 도착하였다. 인천에서 마산까지 17일간 걸어서 남하 행군하면서 우리들은 전쟁의 참상을 보고 크나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 중에도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되어 남하하던 많은 국민방위군 젊은이들이 굶거나 얼어 죽은 소문만을 들은 것이 아니라 버려져서 들판에 나뒹구는 국민방위군 시체를 보기도 했다.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 사건 전시에 신속한 병력 동원을 위해 1950년 12월 제정한 국민방위군법에 의한 예비군이었으나 1951년 1·4 후퇴 때 소집된 50만명의 국민방위군 중에서 약 10만명이 굶거나 얼어서 죽은 사건이 발생하여 관련된 장성 5명이 총살당했고 국민방위군은 1951년 5월에 해체되었다. 내가 고향 인천의 동네 후배 중학생 15명을 데리고 마산에 무사히 도착한 날은 인천을 출발한 지 17일째 되는 1951년 1월 3일이었다. 나는 국민방위군 사건을 보고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렬국교)로 15명의 고향 인천의 동네 후배 중학생들을 데리고 가는 걸 주저하고 마산에 머물러 있었다. 이튿날인 1951년 1월 4일, 고향 인천에서 같이 내려온 동네 후배 이의범(인천상업중 3학년)이 해병 신병 모집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같이 있었던 후배들을 데리고 해병 6기 신병모집소로 가서 그 신체검사에 응하였다. 1951년 1월 6일 진해에서 해병 6기 입소 다음날 1951년 1월 5일 아침에 해병 신병 신체검사 결과를 보러 해병신병 모집소에 가니 해병 신병 모병관이 “신병 모집에 지원한 사람들은 진해까지 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들은 진해를 향하여 창원고개를 넘어 진눈깨비를 맞아가며 야간행군으로 밤늦게 자정 넘어서 진해경화국민학교에 도착했다. 우리들은 전원 합격되어 옷을 벗고 새 미군 전투복으로 갈아입었다. 우리들은 1951년 1월 6일부터 해병대 신병 훈련에 들어갔다. 해병 6기(인천 기수) 대표로 입대 선서 6기 입대식은 1951년 1월 24일이었다. 6기 입대식 날 나는 신현준 해병대 사령관 앞에서 6기생 대표로 해병 입대 선서문을 읽었다. 흔히 해병 6기는 인천 기수라고도 말하는데 정말로 6기는 대부분 인천 지역 중학생들이었다. 1951년 2월 10일 해병대 6기로 신병교육을 마친 우리들은 보병과 포병으로 나뉘어 보병은 즉시 전방 전투지역으로 출동하게 되었고 포병은 그 날로 진해에 새로 생긴 제1포병대대에 배치 받았으며 당시 대대장은 고길훈(高吉勳)중령이었다. 당시 해병대에는 포병부대가 따로 없었으며 처음으로 창설된 해병대 포병대대에 인천 지역 중학생 출신 해병 6기생들이 포병대 창설 요원으로 선발된 것이었다. 해병대 제1포병대대 창설 요원으로 참전 해병대 제1포병대대가 창설된 지 얼마 후 우리 부대는 강원도 최전방으로 출동하여 펀치볼 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 후 우리 해병 포병대대는 서부전선 임진강 부근 장단 고랑포 쪽에 포진하여 장단지구 전투에도 참전하였다.나는 1950년 12월 18일 고향 인천의 동네 후배 중학생들을 데리고 마산까지 18일간 걸어가서 해병 6기로 자원입대하고, 사병으로 참전한 지 3년 9개월 15일이 되는 1954년 10월 20일 만기 제대하였다. 평생 잊지 못한 말… “우리 아들 부탁하네!” 1950년 12월 18일 인천을 떠날 때 고향 인천의 동네 후배 중학생들의 부모님들이 나에게 하신 “정태원 군, 우리 아들 잘 부탁하네!”라는 말을 아직도 나는 잊지 못하고 있다. 형으로서 고향 동네 후배 중학생 15명을 데리고 마산까지 18일간 걸어가서 같이 자원입대하고, 함께 사병으로 군복무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자부하며 나는 살아왔다. 그러나 15명 중에서 2명은 전사하였고 그 어린 고향 동네 후배 중학생들의 전사는 지금도 나의 가슴에 한으로 남아 있다. “함께 참전한 후배들에게 미안하다” 2500여명 인천학생들이 20일간 마산이나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하였고, 그중에서 208명이 전사했다는데 오늘까지도 인천학생들의 6·25 참전역사 기록이 없는 것을 형으로서 동네 후배들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아무쪼록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인천학생들의 6·25 참전역사 찾는 일을, 인천상업중학교 후배 이경종과 그 아들 이규원(치과 원장) 두 분 부자가 끝까지 잘 마무리하시기를 바라며, 인천학생들의 애국심과 애향심이 길이길이 후대에 전해지기를 빈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참전기 4회를 마치며 숲에서 시끄러운 소리 내면서 불어 나오는 바람이 지나간 뒤에 숲은 아무 소리 없이 조용하다. 정태원 님은 대학생이었지만 장교임관도 포기하고 고향 인천의 중학생 후배들을 데리고 국민방위군을 따라 18일간 걸어서 내려갔습니다.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되어 끌려간 50만여명의 젊은이 중 약 10만명이 얼거나 굶어 죽었습니다.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마산까지 무사히 이끌어 준 훌륭한 일을 했지만 누구에게도 자랑한 적이 없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섭섭해하지 않았던 형이 인천에 살았었습니다.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을 자랑스럽게 해 주신 정태원 님께 글로 나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규원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정태원 ▲해병대 6기 ▲성균관대학교 2학년 1930년 3월 15일 : 인천광역시 중구 유동에서 태어남. 1943년 : 6년제 공립인천상업중학교 입학·졸업. 1950년 12월 18일 : 성균관대학교 2학년생으로 고향 인천 신흥동의 동네 후배 중학생 15명을 데리고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렬국민학교)를 향하여 18일간 걸어서 내려감. 1951년 1월 4일 : 국민방위군 참상을 본 후 통영충렬국민학교(국민방위군 제3수용소)로 가는 길을 포기하고 인천에서부터 함께 내려온 동네 중학생 후배들과 마산에서 해병 6기 신병 모집에 지원함. 1951년 1월 24일 : 해병 제6기 입대식날 6기 대표로 입대 선서문을 읽음. (군번 9210161) 1954년 10월 20일 : 대학생이기 때문에 장교임관을 할 수 있었음에도 장교임관을 포기하고는 고향 인천의 동네 후배 중학생들과 같이 사병으로서 3년 9개월 15일을 군 복무하고 만기 명예 제대함. ■ 정태원 인터뷰 일시 1998년 7월 28일 장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이규원치과 3층) 대담 정태원 이경종(6·25 편찬위원) 이규원(6·25 편찬위원장·이경종 큰아들) ■ 이규원 인사말 안녕하셨습니까? 정태원 님! 저는 6·25 사변 때 인천학생 2500명이 부산이나 마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하고 208명이나 전사한 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꼭 기억해야 할 귀감이라 생각합니다. 고향 인천의 동네 후배 15명을 데리고 마산까지 18일간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정태원 님과 오늘 인터뷰는 인천학생들의 6·25 참전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1998년 7월 28일 오늘까지도 참전 기록이 전혀 없었던 6·25 참전 인천학생들의 마음속 응어리가 풀어지리라 생각합니다.
  • 반기문 “6·25 이후 가장 위험… 우발적 충돌 반드시 막아야”

    반기문 “6·25 이후 가장 위험… 우발적 충돌 반드시 막아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26일 최근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을 ‘한국전쟁 이후 가장 위험한 순간’으로 규정하고 우발적인 충돌만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건전한 상식 겁줘 쫓아내는 北 전술” 반 전 총장은 이날 오전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주최한 ‘북핵문제, 어떻게 풀어야 하나’ 특별대담의 기조연설을 통해 “10년간 유엔 사무총장을 하면서 북핵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지금처럼 위험한 수준에 이른 적은 없었다”면서 “6·25 이후 한반도에 많은 우여곡절과 위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고 말했다. 반 전 총장은 “북한과 미국이 서로 강한 발언으로 고도의 심리전을 벌이고 있는데,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을 겁줘 쫓아내려는 것이 북한의 전술”이라면서 “(한국 국민들은) 이에 굴하지 말고 정부를 믿고 동요 없이 경제에 몰입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역사상 전쟁은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일도 많았다”면서 “우발적 충돌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만큼 꼭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결의한 대북 제재안에 대해서는 “북한의 연간 무역 규모가 100억 달러에 불과한 사실 등을 고려할 때 과거 남아공이나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이고, 영향도 클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북핵 문제로 다른 모든 나라가 북한을 규탄하는데, 최근 서울 한복판에서는 반미,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반대 데모가 있었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체임버스 “북·미, 말싸움 톤 낮춰야” 이날 대담에서 존 체임버스 전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국가신용등급평가위원회 의장도 “현 상황은 매우 위험하다”고 우려했다. 그는 그러나 한반도 내 전쟁 발발 가능성은 낮게 봤다. 체임버스 전 의장은 대담에서 한반도 전쟁 가능성과 관련해 “과거에도 아웅산 사태, 대한항공기 폭파, 연평도 폭격, 천안함 폭침 같은 아주 도발적인 조치가 있었다”면서 “그때도 한반도는 벼랑 끝까지 갔지만 최종적으로 모두 철수를 했는데 지금도 그때와 비슷하다고 본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과 북한을 겨냥해 “말싸움의 톤을 보다 조금 낮춘다면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허창수 “한국 브랜드 제 평가 못 받아”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우리 국민과 기업이 어렵게 쌓아올린 가치 있는 대한민국 브랜드가 북한 리스크 때문에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인들이 요즘 북핵 문제 등으로 앞날을 예측하기 더 어려워졌다”면서 “북핵 사태로 기업 활동이 위축되고, 글로벌 투자자들이 한국시장을 외면한다면 우리 경제에도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밝혔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 네덜란드 참전용사 대한민국의 품에 ‘영면’

    네덜란드 참전용사 대한민국의 품에 ‘영면’

    한국전쟁 때 참전한 네덜란드 참전용사가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영면한다.국가보훈처는 6·25전쟁 때 유엔군으로 참전한 네덜란드 참전용사 고(故) 요한 테오도르 알데베렐트(Johan Theodoor Aldewereld)의 부산 유엔기념공원 안장식을 27일 오전 11시 거행한다고 26일 밝혔다. 알데베렐트의 유해는 지난 25일 오후 4시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들어와 서울현충원 봉안당에 임시 안치됐다. 고인은 1951년 8월 네덜란드 반호이츠부대 보병(일등병)으로 참전해 단장의 능선 전투, 평강 별고지 전투, 철의 삼각지 전투에 투입됐다. 1952년 7월 12일 전역한 뒤 네덜란드로 돌아가 사업가로 활동했다. 고인은 2016년 5월 네덜란드 횡성전투 65주년을 계기로 국가보훈처의 재방한 사업 초청으로 한국을 다녀갔다. 당시 동료 전우인 니콜라스 프란스 웨셀의 유해 봉환식과 유엔기념공원 안장식에도 참석했다. 고인은 네덜란드 참전협회에 동료들이 잠들어 있는 대한민국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지난 2월 4일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부산유엔기념공원의 유엔 참전용사 사후 개별안장은 2015년 5월에 처음 실시됐으며 이번에 여섯 번째로 안장식이 열리게 된다. 이날 안장식 행사에는 네덜란드 방한단과 국가보훈처 및 주한 네덜란드대사관 관계자, 군사정전위원회 대표, 유엔사령부 대표 등 30여명이 참석한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국가보훈처는 6·25 전쟁때 유엔군으로 참전한 네덜란드 참전용사 고(故) 요한 테오도르 알데베렐트(Johan Theodoor Aldewereld) 씨의 부산 유엔기념공원 안장식을 27일오전 11시 거행한다? <국가보훈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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