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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 사적 지정

    ‘부산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 사적 지정

    부산시는 6일 한국전쟁 때 대통령 관저로 사용된 ‘부산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현 임시수도기념관)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46호로 지정됐다고 밝혔다.부산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는 일제강점기인 1926년 8월 조선총독부가 지은 관사로 서양식과 일본식이 절충된 목조 2층 건물이다. 1920년대 남한 지역에 들어선 최대 규모의 도지사 관사로서 유일하게 남아 있다. 한국전쟁 시절 부산이 피란수도로 선정되자 이승만 대통령이 관사에 기거하면서부터 ‘대통령 관저, 경무대’로 불렸다. 전쟁이 끝나고 수도가 서울로 환도한 이후 경남 도지사 관사로 사용됐다. 1983년 7월 경남도청이 창원시로 이전하면서 부산시가 인수했다. 부산시는 1984년 6월 건축물의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살리고자 한국 전쟁 시절 피란수도 유물을 전시하는 임시수도기념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2002년 5월에는 부산시 지정 기념물 53호로 지정됐다. 부산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는 한국전쟁 시절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장소이다. 피란 수도 시기 이 건물에서 국방, 외교, 정치, 행정 등 긴박하고 중요한 정책들이 결정됐으며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외교 사절을 접견하는 등 피란 수도의 주요 업무들이 행해졌다. 부산시는 그동안 부산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가 건축사적 가치와 희소성이 높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지정을 요구해 왔다. 부산시 관계자는 “이번 부산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의 사적 승격으로 앞으로 세계유산 등재 추진 사업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한다”고 말했다. 이로써 부산시는 동래 패총, 금정산성, 동삼동 패총, 복천동 고분군, 연산동고분군 등 모두 6개의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을 보유하게 됐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고노 일본 외무상 “징용 판결, 국제 사회에 대한 도전…한국 정부가 해결할 문제”

    고노 일본 외무상 “징용 판결, 국제 사회에 대한 도전…한국 정부가 해결할 문제”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이 일본 기업에 대한 징용 피해를 배상하라는 우리나라 대법원 판결에 대해 “국제 사회에 대한 도전”이라고 비난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고노 외무상은 4일 군마현 다카사키시에서 열린 자민당 의원 모임에서 한 강의에서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국제법을 뒤집는 듯한 이야기”라면서 이처럼 주장했다. 고노 외무상은 “한국 정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라면서 우리나라 정부 차원에서 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를 해결할 것을 재차 요구했다. 그는 전날 가나가와현에서 가진 연설에서도 한일청구권 협정을 거론하며 “(협정은) 한국 정부가 책임지고 한국 국민에게 보상과 배상을 한다는 결정”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한국에 필요한 돈을 모두 냈으니 한국 정부가 책임지고 (징용 피해자에게) 보상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고노 외무상은 또 자민당 의원 모임 강의에서도 북한 비핵화를 둘러싼 북미 협상에 대해서도 “한국전쟁 종전 선언을 비핵화 조치보다 먼저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전선언으로) 전쟁이 끝난 것이 되면 (한국 등에 주재하는) 미군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북한으로부터) 나오게 될 것이 뻔하다”고 강조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일본 외무상 “징용배상 판결, 국제사회에 대한 도전” 주장

    일본 외무상 “징용배상 판결, 국제사회에 대한 도전” 주장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4일 일본 기업에 대해 징용피해를 배상하라는 우리나라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국제사회에 대한 도전”이라고 주장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그는 이날 군마현 다카사키 시에서 열린 자민당 의원 모임에서 한 강의에서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국제법을 뒤집는 듯한 이야기”라며 이같이 말했다. 고노 외무상은 “한국 정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라고 밝혀 우리나라 정부 차원에서 징용 피해자 배상문제를 해결할 것을 재차 요구했다. 그는 전날 가나가와 현에서 가진 연설에서도 한일청구권 협정을 거론하며 “(협정은) 한국 정부가 책임지고 한국 국민에게 보상과 배상을 한다는 결정”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한국에 모두 필요한 돈을 냈으니 한국 정부가 책임지고 (징용 피해자에게) 보상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고노 외무상은 또 자민당 의원 모임 강의에서 북한의 비핵화를 둘러싼 북미 협상에 대해서도 “한국전쟁 종전선언을 비핵화 조치보다 먼저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전선언으로) 전쟁이 끝난 것이 되면 (한국 등에 주재하는) 미군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북한 측에서) 나오게 될 것이 뻔하다”라고 덧붙였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산청·함양 민간인 희생사건 67주년 합동 위령제

    산청·함양 민간인 희생사건 67주년 합동 위령제

    경남 산청군은 2일 한국전쟁 중에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산청·함양지역 민간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제67주기 산청·함양사건 양민희생자·제31회 합동위령제와 추모식’이 이날 산청군 금서면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에서 열렸다고 밝혔다.이날 합동위령제 및 추모식에는 박정준 산청 부군수와 서춘수 함양군수, 각 기관·단체장, 산청·함양사건 양민희생자 유족회(회장 정재원), 지역주민 등 600여명이 참석했다. 산청·함양사건은 거창사건과 함께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2월 국군이 공비토벌 작전을 하는 중에 벌어진 양민 희생사건이다. 당시 산청군 금서면 가현마을과 방곡마을, 함양군 휴천면 점촌마을, 유림면 서주마을 등에서 주민 705명이 통비분자로 몰려 집단 학살됐다. 거창군 신원면에서도 산청·함양 사건과 비슷한 과정으로 719명이 사살됐다. 1996년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면서 금서면 방곡리 일대에 합동묘역사업이 조성됐다..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은 사건 당시 희생된 영령들을 모신 합동묘역이다.위패봉안시설, 위령탑, 회양문, 합동묘역, 역사교육관 및 영상실 등이 설치돼 있는 추모공원은 참배객과 방문객 역사 교육장으로도 활용된다. 산청군에 따르면 올해 위령제는 거창사건 유족과 산청·함양사건 유족들이 배상관련 특별법안을 병합 심의하기로 최근 합의한 뒤 열린 첫 위령제다. 두 유족회는 관련 법률안이 국회에서 제정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 산청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억압이 부른 트라우마 중독 사회로 내몰았다

    억압이 부른 트라우마 중독 사회로 내몰았다

    중독의 시대/강수돌·홀거 하이데 지음/개마고원/292쪽/1만 7000원중학교 때 뉴질랜드에 이민 갔던 친구가 성인이 돼 다시 한국에 왔다. 서울에서 1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한 그는 “사람들이 모두 지독하게 일만 한다. 그 스트레스를 술(회식)로 푸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야 한국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말에 그는 웃으며 반박했다. “그래 봤자 집 한 채 사기도 어려워. 그리고 그렇게 성공해서 뭐할 건데?” 그는 그러면서 내게 되물었다. “한국, 한국인은 왜 자신을 망가뜨리는 걸까?” 그가 던진 질문은 10여년 동안 유령처럼 내 머릿속을 떠돌고 있다. 나라는 부유해졌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어렵게 사는 것일까. 강수돌 고려대 교수와 그의 스승인 홀거 하이데 전 브레멘대 교수가 함께 쓴 ‘중독의 시대’는 이 질문에 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바로 ‘중독’이라는 개념을 통해서다. 저자들은 한국에서 나타나는 여러 사회 문제가 중독 상태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며 한국을 ‘중독사회’로 규정한다. 여기서 중독사회란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알코올 중독자처럼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은 일·알코올·마약·도박·섹스·게임·스마트폰·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중독에 빠져 있다. 전체 사회구조와 시스템 차원에서도 중독의 특징이 나타난다. 중독이란 인간적 욕구 충족에 실패한 경우 대리만족에 강박적으로 의존하는 병리적 행위를 가리킨다. 대체물이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할수록 더 많이 원하게 된다. 한국이 더 많은 자본을 요구하고, 더 큰 경제 성장을 요구하게 될수록 개인은 더 일해야 한다.저자들은 이런 중독의 원인을 현대사 밑바닥에서 끌어올린다. 책 표지에 ‘대한민국은 포스트 트라우마 중독사회’라고 적힌 것처럼, 현대사에서 겪은 트라우마가 지금의 중독사회를 만들었다는 의미다. 사회가 식민지 억압이나 전쟁, 군사독재, 보릿고개와 같은 죽음에 가까운 경험을 집단적으로 겪으면 집단 트라우마로 이어진다. 식민지 시대를 벗어나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개발독재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빈곤을 이겨 냈다. 그러나 경제성장에 취한 채 외환위기(IMF)를 맞았다. 레드 콤플렉스, 빈민 콤플렉스, 정리해고 콤플렉스 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신자유주의 물결과 성장의 구호에 파묻혀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다. 이런 일들이 결국 사회를 중독으로 내몰았다는 분석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사회를 중독으로 내몬 이들은 누굴까. 저자들은 ‘재벌·국가 복합체’를 든다. 앞서 외환위기 등을 거치는 동안 국가가 재벌을 길들이면서 ‘국가·재벌 복합체’가 생겨났는데, 1980년대 후반부터 1997년 IMF 구제 금융까지 약 10년 동안 권력이 재벌로 이동하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지난해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장충기 삼성 사장 문자메시지는 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저자들은 재벌의 철저한 관리로 정부 고위 관료들이 재벌에 충성을 다하고, 퇴직한 뒤엔 삼성 사외이사로 다시 수억원을 받는 ‘삼성맨’이 된다고 꼬집는다. 정경유착이 심하다는 폭로가 나왔을 때 건강한 조직이라면 공식 사죄를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쇄신한다. 그러나 중독된 조직은 달리 반응한다. 언론과 학계를 단속하고, 검찰을 동원해 문제 제기자를 색출한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 보인 박근혜 정권의 모습도 유사하지 않았던가. 중독 조직의 전형적인 특성을 보이는 이들은 숨기고 억압하기에만 급급했다. 중독은 내면의 두려움을 회피하거나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한다. 저자들은 사회 구성원들이 생존을 위해 억지로 내면의 두려움을 억압하면서 폭력을 행사하는 체제나 강자의 논리에 동일시하는 현상을 보인다고 지적한다. 누군가가 문제점을 지적하면 ‘너무 이상적인 말이다’, ‘너무 먼 이야기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관행이잖아’, ‘난 그저 내 일만 열심히 할 뿐이야’, ‘먹고살려니 어쩔 수 없어’라고 한다. 저자들은 이런 중독 사회를 깨뜨리려면 그저 그런 해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소득주도 성장, 부동산 정책 같은 ‘과감한 조치’ 이전에 아예 사회 체질을 바꿀 ‘과감한 발상 전환’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온 구절은 지금 한국에 가장 필요한 격언일지 모르겠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에게 하나의 세계다. 새로 태어나려는 생명은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북녘의 향기 그리워 고향의 온기 그리다

    북녘의 향기 그리워 고향의 온기 그리다

    인민군·국군으로 살아야 했던 미술학도 6·25전쟁의 아픔 잿빛 화폭에 담아 통일 염원은 화려한 색채로 그려내 매번 다른 상상 속 어머니 담은 작품도“젊은 사람들은 잘 이해가 안 되겠지만서도….”고향을 떠올리던 여든여섯의 화가는 말 중간중간 젊은 기자들의 눈치를 봤다. 이동표 화가의 고향은 황해도 벽성군 동운면 주산리. 고향 땅 저수지를 떠올리며 비슷한 풍경의 경기도 양평 땅에 자리잡았다는 화가다. 해방 소식도 고향 저수지에서 멱 감다가 봤다는 화가는 한국전쟁 이래 이날 입때껏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2일까지 열리는 이동표 초대전 ‘달에 비친’전. 북녘에서 태어나 해방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60여년 실향민으로 살기까지, 노 화가의 삶이 오롯이 담긴 전시는 대한민국 현대사 그 자체다. 그는 오랜 시간 어머니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화가의 어머니는 그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산후병으로 저세상 사람이 됐다. 어머니와 일면식도 없는 그는 오로지 상상에 의지해 어머니를 그렸다. 아이를 보듬는 어머니의 손이 유독 크고 두껍다. 화가는 “자식과 차마 헤어지지 못하겠는 마음에 손이 이렇게 커졌다고 누가 그러대”라고 했다. 화폭 속 어머니는 그날그날 상상에 따라 조금씩은 다른 모습이다. 미술학도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6·25전쟁을 소재로 한 역사화는 유독 잿빛이다. ‘일인이역 골육 상쟁’(2000) 속 국군과 인민군은 모두 화가 자신이다. 1947년 해주예술학교 미술과에 입학해 그림을 그리던 소년은 1950년 6·25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참전했다. 1·4 후퇴 때 월남해 수용소 생활을 거친 후 이번에는 국군으로 입대해 신산한 삶을 이어 갔다. 머리에 지게에 짐을 이고 지고 떠나는 ‘6·25전쟁과 피난 행렬’(2004), 총부리를 앞에 두고 부르짖는 ‘고향에 가고 싶다’(2005)는 모두 그때의 기억에서 비롯됐다. 10년 전서부터는 톤이 좀 바뀌었다. “6·25만 그리면 뭐하냔 말이야. 집에 가야 하는데.” 칠순 중반에 얻은 깨달음이었다. ‘통일이다. 고향 가자’라는 제목의 연작 시리즈는 색채부터가 빨강, 주황 일색으로 화사하다. 인물들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하다. ‘다함께 모여 옛집 찾아가세’, ‘만세 부르며 이날을 기뻐하세’ 등 깨알같이 글귀도 많다. “습관적으로 그러는데, 평론가 김윤환 선생이 보고 ‘더 표현하고 싶은 말을 글로 했다’고 하더라고. 내 마음을 더 쏟아내고 싶은데 (그림만으론) 한계가 있잖아.” 통일이 코앞인 양 일견 다급함도 느껴지는 그림. 최근의 남북 해빙무드가 화가의 마음을 더 들뜨게 한 걸까. “예술가들은 뭐 어느 시기에도 좋고 나쁘고가 없어. 그냥 있는 그대로 고향 가는 길목에서 한 거지 뭐.” 화실 한켠에 고향 땅을 확대한 구글 어스 지도를 두었다는 그. 생전에 고향 땅에 갈 수 있을 것 같냐는 질문에 화가는 말했다. “어쩌면 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지금이라도 가면 늦지 않잖아. 건강하고 그러니까. 실은 (꿈에서) 엊저녁에 고향집에 갔어. 집은 없는데 석류가 이렇게 큰 게 있어 가지고 가서 까먹고….” 고향의 추억이, 실향의 아픔이 그에겐 현재 진행형이었다. 그런 그가 눈치를 보게 하는 젊은 사람이라는 게 되레 미안해졌다. 글 사진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글로벌 In&Out] 허위 문서 ‘그로차르 요강’ 폐기와 북한사의 재해석/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글로벌 In&Out] 허위 문서 ‘그로차르 요강’ 폐기와 북한사의 재해석/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지난 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이 능라도 체육관에서 평양 시민을 향해 연설했다. 전대미문의 일이었고 남북 관계사에서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 ‘능라도 연설’에서 문 대통령은 “이번 방문에서… 북녘 동포들이 어떤 나라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지 가슴 뜨겁게 봤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북한이 나라를 건설해 왔는지 알고는 있을까?일부의 북한 연구자들은 소련의 북한 진주 직후 대북한 정책을 소개할 때 1945년 9월 14일 소련군 사령부 정치부원 그로차르가 발표했다는 ‘독립조선의 인민정부수립요강’이라는 문서를 많이 언급한다. ‘그로차르 요강’이라 부르는 문서에서 소련군은 북한에서 노동자 농민정권 수립, 즉 소비에트화를 원조하고 있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어 소련 정부는 한반도 문제에서 다른 연합국 지도자들과의 논의를 진행하기도 전에 이미 정책 노선을 결정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이 사실은 유명한 북한 역사 연구자인 브루스 커밍스가 1981년에 쓴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책에 의해 널리 알려지고 한국의 연구에도 많이 사용되어 왔다. 특히 최근 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 나온 크고 두꺼운 책 ‘북한의 역사 1’에도 그대로 인용되었다. 이런 주장의 허위성을 드러내는 점 두 가지가 있다. 일단, ‘그로차르’(일부 연구에는 ‘그로치코’)라는 소련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소련 측 사료이다. 1990년대 소련 문서보관소 개방에 따라 북한 주둔 소련군의 활동을 밝히는 자료가 대량으로 발견되어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한 국내 단체에 의해 수집·공개되었으며, 그중 ‘그로차르’가 발표한 ‘요강’의 출처를 밝히는 소련군 비밀문서들도 발견되었는데, 새로 발견한 자료를 가지고 이 사건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한반도가 일제의 멍에로부터 해방되었다. 미국의 ‘일반명령 제1호’를 받아들인 소련은 북한 지역을 점령하고 미군의 남한 진주와 한국 문제에 대한 협상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동시에 남북한에서 정치활동이 자유로워졌고 다양한 성향의 정당 간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특히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자가 석방되면서 이영을 수반으로 하는 ‘장안파’와 박헌영의 ‘재건파’ 등 2개의 공산당이 조직되어 경쟁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남측 공산주의자들은 ‘해방자’의 이미지를 가진 소련의 지원을 얻어야 정통성을 확보하고 경쟁자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북측을 점령했지만 구체적인 정책을 발표하지 않았다. 이에 남측의 일부 좌익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희망을 담은 이 ‘요강’을 발표하였다. 이 문서는 이영이 방북해 제출한 자료들 중 하나로 소련군이 처음 발견하고 러시아어로 번역하면서 ‘그로차르 요강’이 되었다. 이영은 트로츠키주의자이고 분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고 박헌영과의 노선투쟁에서 졌고, 오랫동안 북한 건국사 연구에 악영향을 미친 가짜 문서 ‘그로차르 요강’의 작성자가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져 있지 않다. 물론 가짜 문서 ‘그로차르 요강’이 드문 사례는 아니다. 1945년의 북한사만 봐도 김일성의 현준혁 암살 배후설, 1945년 10월 소련군에 의한 북한 경찰인 보안대의 공산화, 신의주 사건 규모의 지나친 과장 등 잘못 알려진 수많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남한의 연구자 중에도 이 허위 문서을 믿고 소군정 시기의 북한사를 미화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남북 평화와 번영, 전쟁 없는 한반도를 원한다면 산더미처럼 쌓인 편견을 버리고 사료로 북한 현대사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 ‘그로차르 요강’의 폐기와 북한사의 재해석

    ‘그로차르 요강’의 폐기와 북한사의 재해석

    지난 9월 19일 평양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능라도 체육관에서 평양 시민을 향하여 연설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 시민들 앞에서 이렇게 연설하는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고 남북관계사에서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 연설에서 문 대통령은 “이번 방문에서… 북녘 동포들이 어떤 나라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지 가슴 뜨겁게 봤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북한이 어떤 나라이고 북한 사람들이 어떠한 역사를 갖고 그런 나라를 건설해 왔는지 알고는 있을까?대한민국에서 북한의 이모저모를 연구하는 학문분야는 ‘북한학’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일부 대학에는 북한학과나 그에 해당하는 학부가 설치되어 있고 석·박사 과정을 제공하는 북한학 대학원도 따로 있다. 뿐만아니라 북한학과가 없는 대학에도 북한의 역사, 문화, 법률 등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이 있으며 북한학의 각 하위분야에 관한 학위논문만 매년 수백 개 이상 나오는 것이다.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 정보에 의하면 매년 나오는 러시아 관련 학위 논문의 수를 훨씬 뛰어넘는 수치이고 국내 학술지에 실린 논문의 수를 비교하면 차이가 더욱 확연하다. 수적으로는 우세하지만 질적으로도 과연 우세한가?필자는 북한 건국의 역사를 10년동안 연구해온 사람으로서 북한학의 기본 중에 기본인 역사 연구가 현재 심각한 위기에 있다고 판단한다. 그 원인은 많고 다양하나 북한 연구에 악영향을 제일 크게 미치는 것은 잘못된 사실의 유포이다. 이 기사에는 소련군의 북한 점령과 관련된 한가지의 잘 못 알려진 사실에 대하여 언급하고 싶다.일부 북한 연구자들은 소련의 북한 진주직후 대북한 정책을 소개할 때 1945년 9월 14일 ‘소련군 사령부 정치부원 그로차르’가 발표했다는 “독립조선의 인민정부수립요강”이라는 문서를 많이 언급한다. 이 문서에는 소련군은 북한에서 노동자 농민정권수립, 즉 소비에트화를 원조하고 있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고, 소련 정부는 한국 문제에 대하여 다른 연합국 지도자들과의 논의를 진행하기도 전에 이미 정책 노선을 결정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이 사실은 유명한 북한역사연구자인 브루스 커밍스가 1981년에 쓴 ‘한국전쟁의 기원’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한국의 연구에도 많이 사용되어 왔으며 특히 최근 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 나온 크고 두꺼운 ‘북한의 역사 1’이라는 책에도 그대로 인용되었다.그러나 이 문서가 허위임을 드러내는 점이 2가지 사실이 있다. 일단, ‘그로차르’ (일부 연구에는 ‘그로치코’라고도 함)라는 소련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소련측 사료이다. 1990년대 소련 문서보관소의 개방에 따라 북한 주둔 소련군의 활동을 밝히는 자료가 대량으로 발견되어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한 국내 단체에 의해 수집·공개되었으며, 그 중 ‘그로차르’가 발표한 ‘요강’의 출처를 밝히는 소련군 비밀 문서들도 발견되었는데, 새로 발견한 자료를 가지고 이 사건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한반도가 일제 멍에로부터 해방되었다. 미국의 ‘일반명령 제1호’를 받아드린 소련은 북한 지역을 점령하고 미군의 남한 진주와 한국 문제에 대한 협상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동시에 남북한에서 정치 활동이 자유로워졌고 다양한 성향의 정파가 치열하게 경쟁했다.특히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자와 석방되면서 이영을 수반으로 하는 ‘장안파’와 박헌영의 ‘재건파’ 등 2개의 공산당을 조직이 경쟁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한국의 공산주의자에게 있어 ‘해방자’라는 이미지를 가진 소련의 지원을 얻는 것이 곧 정통을 확보하고 경쟁자들을 물리치는 기회였다. 소련은 북한을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정책을 발표하지 않았는데, 일부의 한인 정치가들이 이 공백을 메우려고 좌익들의 희망을 담긴 이 ‘요강’을 발표하였다. 이 문서는 이영이 방북할 때 제출한 자료 중에 소련군에 의해 처음 발견되고 러시아어로 번역되면서 ‘그로차르 요강’으로 둔갑했다. 이영은 결국 트로츠키주의자이고 분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고 박헌영과의 노선투쟁에서 졌으나 오래동안 북한 건국사 연구에 악영향을 미쳐온 가짜 문서인 ‘그로차르 요강’을 작성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밝혀져 있지 않았다.물론 ‘그로차르 요강’은 드문 사례가 아니다. 1945년의 북한사만 봐도 김일성의 현준혁 암살 배후설, 1945년 10월 소련군에 의한 북한 경찰인 보안대의 공산화, 신의주 사건 규모의 지나친 과장화를 비롯해 잘못 알려진 수많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물론,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남한의 연구자 중에도 위와 같은 허위 사실에 대응하면서 소군정 시기의 북한사를 미화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남북 평화와 번영의 새 시대를 열고 전쟁이 없는 한반도를 만드는 것을 진심으로 원한다면, 그동안 산더미처럼 쌓인 편견을 버리고 사료를 들고 북한 현대사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필자가 확고히 믿고 있다.글 사진 제공: 바실리 블라디미로비치 레베데프(고려대 사학과 석사)
  •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16회] “인천 제자들을 이끈 신봉순 선생님…호국정신의 혼 영원히 기억”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16회] “인천 제자들을 이끈 신봉순 선생님…호국정신의 혼 영원히 기억”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9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故 신봉순 ▲공립인천상업중학교 교사 ▲부산육군통신학교 교육대장 “고 신봉순 대장… 6·25 참전 인천 학생들과 남하 여학생들의 영원한 스승” 1922년 12월 1일 : 경기 부천 소사읍 송내 출생 1947년 7월 : 동경전자 통신대학 졸업 1947년 9월 : 공립인천상업중학교 교사 발령 1949년 1월 : 공립인천상업중학교 교사 사직 1949년 3월 : 육군사관학교 8기 졸업, 소위 임관 1951년 1월 : 부산 육군통신학교 유선교육대장 1965년 3월 : 육군 중령으로 예편 1998년 10월 10일 0시 04분 : 작고고 신봉순 선생님을 추모하며… 20년 전 1998년 10월 10일은 6·25 참전 인천 학생들과 남하 여학생들의 영원한 스승님이신 부산육군통신학교 신봉순 교육대장님이 돌아가신 날입니다. 이제는 저의 아버지도 85살로 신봉순 선생님을 추모하는 글을 새로 쓰시기는 어렵습니다. 20년 전 1998년 11월 3일 날, 신봉순 선생님을 추모하며 저의 아버지께서 쓰셨던 “고 신봉순 선생님을 추모하며…”라는 글을 신봉순 선생님 20주기 추모사로 게재합니다. 이규원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추모사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계절에 홀연히 돌아가신 신봉순(申鳳淳) 선생님의 영전에 이 한편의 글을 올립니다. 캄캄한 밤의 횃불이셨던 선생님 1996년 7월 15일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인천학생 6·25 참전 역사 찾기를 하기 위하여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를 구성 출범해 놓고,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나 하고 고심하고 있을 때 선생님을 만난 것은 저희 2부자에게는 크나큰 행운이었으며 그 후 이어진 선생님의 가르침은 저희에게는 캄캄한 밤의 횃불이셨습니다. 뜻한 바 있어 군인 되신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6·25 사변이 나기 전에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인천고교와 상인천중의 전신)에서 학생들에게 물상을 가르치시던 중 뜻한 바 있으셔서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하시어 임관 후에는 6·25에 참전하셨습니다. 인천 제자들을 통신병으로 이끌어 1951년 1월 초에 인천에서 부산까지 20일간 걸어서 내려온 인천 학생들을 통신병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인천에서 가르친 제자들이 지휘관 옆에서 근무하는 통신병이 되는 것이 좀 더 나은 군 생활이 될 거라 생각하시며 통신학교로 입교하게 인도하셨습니다.남하한 여학생들을 돌봐 인천학도의용대 여학생 대원 120여명이 남학생들과 똑같이 부산까지 20일간 걸어서 남하하였습니다. 남하 여학생들이 갈 곳이 없어서 고민을 할 때 선생님께서는 선뜻 부산육군통신학교 행정 보조 업무를 맡김으로써 갈 곳 없었던 여학생들을 몇 달간 데리고 있다가 인천이 수복되자 돌려보내 준 일도 하셨습니다. 첫 인터뷰·녹음해주신 선생님 선생님과 저와의 첫 만남은 1997년 5월 31일 부평중앙회관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께서는 제 손을 꼭 잡으시고 “다시 한번 꼭 만나자!”며 크나큰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 후 1997년 6월 4일 첫 번째 인터뷰녹음을 하기 위해 부천시 송내동에 있는 선생님 댁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날 선생님께서 하신 강조의 말씀은 “6·25 때 제자들이었던 인천 학생들과 남하한 여학생들과의 부산에서 만남을 통하여 확인된 나라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인천학도의용대의 나라 사랑 정신은 반드시 우리 후손들이 기억하여야 할 유산이다!”라고 하시며 일러주신 말씀을 바탕으로 역사 기록을 찾고 있습니다. 그 후로도 선생님께서는 틈만 나면 “6·25 참전 역사 편찬의 진전이 어떤가?” 하시며 걱정해 주셨으며 육군본부와 통신학교 등으로부터 자료를 알아보시고 알려주시기를 여러 번 하셨습니다. 이렇게 저희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의 등불이셨던 선생님께서 금년 1998년 봄에 “자꾸 몸의 기력이 빠진다”고 걱정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후 금년 1998년 10월 9일 갑자기 선생님께서는 부천중앙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는 말을 듣고 급히 찾아가 보니까 선생님께서는 야윈 모습으로 병상에 누워 계셨습니다. 선생님께 마지막 이별 인사를 저는 선생님 곁으로 다가가며 속으로 “6·25 인천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저렇게 누워 계시면 안 되는데…” 하면서 선생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인자하신 선생님 손길은 온기가 하나도 없으셨습니다. 그때 선생님께 “선생님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라고 물으니 선생님께서는 제 얼굴을 보시더니 고개를 끄떡이시며 손짓으로 글씨를 쓰시는 시늉을 하셨습니다. 그때 얼른 볼펜하고 종이를 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종이 위에 “학도의용대”라고 써주셨습니다. 학도의용대라는 마지막 글을 남기시고 그로부터 몇 시간 후 1998년 10월 10일 0시 4분에 선생님은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셨습니다.선생님께서 마지막으로 쓴 ‘학도의용대’ 지금 생각해 보니까 선생님께서 마지막으로 써주신 글씨 ‘학도의용대’는 인천학도의용대 역사편찬 일을 끝까지 잘 마무리 지으라는 말씀으로 지금도 생생히 들리고 있습니다. 1998년 10월 11일에는 편찬위원장과 함께 선생님 영전을 찾아뵙고 선생님 명복을 빌면서 하직 인사를 드렸습니다. 또한 편찬사업을 끝까지 잘 마무리 지을 것도 맹세하였습니다. 1998년 10월 12일 선생님께서는 부평화장장에 가셨습니다. 저는 그날 선생님을 따라가서 마지막 하직 인사를 드렸습니다. “인천학도의용대 혼이 살아있었구나!” 이제는 선생님과 이별하여 점점 세월이 무심히 흘러갈 뿐입니다. 그러나 처음 만나던 날 선생님께서 해주신 그 한 말씀 “아~ 역시 인천학도의용대 호국 정신! 그 혼이 살아 있었구나!”라며 제 손을 꼭 잡아주시던 따스한 손길은 저의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부평에서 소림사로 가시어 잠시 머무르시던 선생님은 1998년 10월 30일 이제는 영원히 누워 계실 국립대전 현충원(묘역 7-2768)에 안장되셨습니다. 제가 갈 길과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신 선생님, 이제는 모든 시름 다 잊으시고 편히 주무십시오. 그리고 선생님께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이끌어주신 인천학생 6·25 참전 역사 편찬사업을 계속할 수 있게 지켜주시는 수호신이 되어주시리라 저는 믿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기리며 이 가을 푸른 하늘을 눈이 시리도록 쳐다봅니다. 1998년 11월 3일 인천상업중학교 제자 이경종이 삼가 추모의 글을 올립니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알리는 말씀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는 저의 아버지(6·25 참전 학생 이경종)께서 1997년 6월 4일 날 6·25 참전 스승 신봉순(부산육군통신학교 교육대장)님과의 인터뷰녹음을 처음 시작한 후 199명의 6·25 참전 학생을 일일이 만나 인터뷰녹음을 하고, 집에서 녹음기를 틀어 종이에 글로 옮긴 다음에 아래아 한글 프로그램을 배워 직접 한글자씩 타이핑해 한글 파일로 만든 것을 제가 고유명사가 틀린 것만을 교정하였기 때문에 맞춤법이 틀린 부분이 많습니다. 독자께서는 이 점 널리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추모사에 맞춤법이 틀린 부분이 있어도 많은 이해를 바랍니다.” 이규원(이경종 큰아들)
  • 포로수용소에서 펼쳐지는 흥겨운 탭댄스…‘스윙키즈’ 예고편

    포로수용소에서 펼쳐지는 흥겨운 탭댄스…‘스윙키즈’ 예고편

    ‘과속스캔들’, ‘써니’ 강형철 감독의 신작 ‘스윙키즈’ 1차 예고편이 공개됐다. ‘스윙키즈’는 1951년 거제도 포로수용소, 오직 춤에 대한 열정으로 뭉친 오합지졸 댄스단 ‘스윙키즈’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공개된 예고편은 영화 ‘독전’의 예고편을 제작한 영국 엠파이어사와 협업으로 탄생했다. 예고편은 각각 리듬 편과 스윙 편으로 구성됐다. 전쟁 한복판 포로수용소 안에서 펼쳐지는 흥겨운 탭댄스 장면이 담긴 예고편은 한국전쟁과 탭댄스라는 상반된 소재가 만나 신선함을 자아낸다. ‘과속스캔들’, ‘써니’, ‘타짜-신의 손’ 강형철 감독의 네 번째 작품으로 도경수, 박혜수, 오정세, 김민호, 그리고 브로드웨이 최고의 탭댄서인 자레드 그라임스가 출연해 기대를 모은다. 영화 ‘스윙키즈’는 2018년 12월 개봉 예정이다. 영상팀 seoultv@seoul.co.kr
  • 역사의 아픔 보듬는 거제!

    역사의 아픔 보듬는 거제!

    ●한국전쟁 흔적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거제는 우리 역사의 아픈 상처를 되돌아보는 ‘다크 투어리즘’ 공간이기도 하다. 이순신 장군의 연전연승에 가려 주목받지 못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에게 대패한 칠천량 해전의 아픔이 서린 곳이다. 6·25 이후엔 북한 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를 수용했던 포로수용소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고현동 거제시청 인근에는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이 있다. 6·25 전쟁 초반 낙동강까지 밀리는 열세를 딛고 북으로 전진하면서 포로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전국 곳곳에 임시 수용하던 포로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대규모 시설이 필요했고 1951년 고현동 일대에 28개 수용동이 들어섰다. 당시 육지와 연결되지 않은 섬이었고 주변이 산과 바다로 둘러싸여 포로 관리에 유리한 지형이었던 탓이다. 인민군 15만명, 중공군 2만명 등 17만 3000여명이 이곳으로 이송됐다. 수많은 포로를 관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52년 5월에는 수용소 사령관이었던 돗드 미군 준장이 반란을 일으킨 포로들에게 납치되는 일이 발생했다. 한편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 사이에 갈등의 골이 점차 깊어지면서 포로들 간의 폭력이 잦아졌다. 친공 포로가 많은 구역에서는 인민재판이 횡행했고 수백명의 포로가 희생됐다. 폭동과 대립이 끊이지 않자 이념에 따른 포로 분리작업이 진행되기도 했다. 소란스러웠던 거제포로수용소는 휴전을 계기로 끝을 맞는다. 1953년 8월 5일부터 33일간 포로 송환 업무가 진행됐고 수용소는 곧 폐쇄됐다. 대규모 산업단지와 주거지 개발로 옛 수용소는 대부분 사라졌지만 유적공원 내부와 인근에 잔존유적이 일부 남아 있다. 공원 내 탱크전시장, 포로생활관, 유적박물관 등 여러 전시관에는 전쟁 발발부터 포로 송환까지의 역사를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가 전시돼 있다.●전투 과정 한눈에 ‘칠천량해전공원’ 거제도 중심부의 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차를 타고 30여분 북쪽으로 달리면 또 다른 아픔의 현장을 만난다. 거제도 부속섬 중 가장 큰 칠천도 남쪽 중앙부에 위치한 칠천량해전공원이다. 칠천량 해전은 임진왜란·정유재란 가운데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이다. 1597년 조선을 다시 침범한 일본은 임진왜란이 실패한 것은 이순신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이간책을 꾸몄다. 당시 임금인 선조는 이간책을 눈치채고도 이순신을 하옥하고 원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원균은 삼도의 수군 160여척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해 왜군의 본진이 있던 부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탐지한 적의 교란작전에 고전했고 가덕도에서 기습을 받아 400여명의 군사를 잃었다. 황급히 칠천량으로 후퇴했지만 거푸 기습을 당했고 여러 장수들이 전사했다. 육지로 탈출한 원균도 결국 추격을 받아 전사했다. 해전공원전시관은 당시 조선과 일본 수군의 전력과 전투 전개 과정 등을 보여 준다. 공원 중앙에는 바다를 향해 평온하게 앉아 있는 아이 형상의 설치물이 평화를 염원하고 있다. ●여행가방 →거제포로수용소 입장료는 어른 7000원이다. 계룡산 모노레일 탑승요금(왕복 1만 2000원)을 낸 경우 2000원에 수용소 관람을 할 수 있다. 칠천량해전공원전시관은 지난해 11월부터 무료입장으로 바뀌었다. →잘 곳 : 한화호텔앤드리조트가 지난 15일 거제시에 문을 열었다. 거가대교를 건너면 금세 만날 수 있는 농소몽돌해변 인근에 자리잡았다. 거제의 바다와 해변, 웅장한 거가대교 전망과 함께 럭셔리 리조트의 호화 서비스를 즐길 수 있다. 총 470실의 객실은 일반고객도 예약 가능한 벨버디어와 회원 한정인 프리미엄으로 나뉜다. 프리미엄 객실 이용객은 21층에 조성된 바다 전망 풀을 이용할 수 있다. ‘바운스 트램펄린파크’, ‘뽀로로 키즈카페’ 등 국내 최대 수준의 키즈 엔터테인먼트 존을 갖춰 가족 투숙객에게 추천할 만하다. ‘양지바위횟집’, ‘다리집’ 등 거제 맛집 8곳을 입점시킨 푸드코트도 눈길을 끈다.
  • 추상미 “유산 충격으로 영화 공부 시작해” 배우→감독 귀환

    추상미 “유산 충격으로 영화 공부 시작해” 배우→감독 귀환

    ‘아침마당’에 추상미가 출연해 배우에서 감독으로 변신하게 된 계기를 전했다. 23일 방송된 KBS1 시사 교양 프로그램 ‘아침마당’은 ‘화요초대석’ 코너로 꾸며진 가운데 추상미가 출연했다. 이날 추상미는 “2008년 미니시리즈를 끝으로 활동을 접었다 10년 만이다. 잠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가장 큰 이유는 결혼 후 4년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몸도 약했다. 몸을 만들면서 쉰 이유가 가장 컸다”며 “아이는 잘 자라고 있다. 초등학교 1학년이다”라고 밝혔다. 또 추상미는 “영화감독 공부는 제가 아이를 가지려고 쉬다가 2009년에 임신이 됐는데 유산이 됐다. 그 충격이 컸다. 충격을 잊는 가장 큰 방법이 공부였다. 영화감독은 오래된 꿈이었다. 마흔이 되기 전에 공부를 시작해야겠다 싶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대학원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두 편 단편영화를 만들어 경쟁부문에도 출품했다. 그러다 덜컥 임신이 돼서 휴학했다”고 전했다. 추상미는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의 연출자로 관객을 만난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1951년 폴란드로 보내진 1500명의 한국전쟁 고아와 폴란드 선생님들의 비밀 실화, 그 위대한 사랑을 찾아 남과 북 두 여자가 떠나는 치유와 회복의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추상미가 극영화를 준비하던 중에 캐스팅한 탈북 소녀 이송과 함께 폴란드 프와코비체로 향해 전쟁고아들을 돌봤던 교사들과 만나 직접 당시의 이야기를 듣는다. 오는 31일 개봉.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이슈 플러스] “교육은 한국의 중요한 자원… ‘교육코인 A+’로 더 큰 가치 실현”

    [이슈 플러스] “교육은 한국의 중요한 자원… ‘교육코인 A+’로 더 큰 가치 실현”

    대한민국은 한국전쟁의 폐허 이후 70년 만에 세계적인 나라가 되었다. 그 역동적 성장의 숨은 공로자 중 하나가 ‘교육’이다. 자원 빈국의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 IT(정보기술) 기적을 이룬 힘의 배후가 교육이다. 그런 교육이 출세와 발전의 도구적 가치로 편향되면서 전인교육보다는 과열된 경쟁교육 일변도로 내달려 왔다. 한국 사회가 몸살을 앓는 것 중 하나다. 반면에 95% 이상의 학생과 학부모들이 소위 3~5% 명문대 입학을 위한 경쟁 지옥에서 신음하며 만들어낸 콘텐츠부터 직업교육과 전문교육 프로그램들이 디지털 콘텐츠화가 되었다. 무한복제까지 가능해졌다. 이영조 교육코인 A+ 대표가 주목한 바다. 그는 교육코인 A+면 글로벌 교육서비스 산업 발전으로 한국 교육의 가치실현을 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의 직관과 사업수완, 비전을 들어보자. 편집자 주→‘교육코인 A+’란 무엇인가요. -A+는 최고학점, 최고점수로 최고등급에 속합니다. 대한민국 최고점수 중 하나가 교육입니다. 그런데 교육이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몰락하고 있어요. 그래서 ‘최고학점 A+ 코인’은 교육서비스 산업의 가상화폐로서 새로운 최고의 교육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겁니다. 인증기관의 평가원으로 새로운 모색을 하겠다는 것이죠. A+코인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 교육상품과 서비스를 평가하는 평가원이 되는 겁니다. 세계적인 글로벌 평가기관이자 교육콘텐츠 산업의 허브, 바로 교육코인 A+입니다. →‘교육코인 A+’ 사업을 하시게 된 계기라 할까요. 배경은 무엇인가요.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디지털 4차 산업혁명 준비가 잘 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전 국민이 0%에 가까운 문맹률입니다. 온갖 교육프로그램들이 디지털콘텐츠로 완성돼 있는 디지털 강국입니다. 여기에 100세 노인까지 최첨단 단말기를 휴대 사용하고 있습니다. 디지털콘텐츠에 휴대용 단말기는 교육서비스산업의 근간입니다. 역설적으로 교육은 여전히 미래 한국의 서비스산업으로 세계 경제의 선도자로 부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자원이자 자산입니다.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한국사회의 역동적인 성장의 원동력은 교육이라고들 합니다. 자원 빈국 대한민국이 한강 기적과 정보화 기적을 이룬 숨은 힘이 교육입니다. 그런데 위기라고 합니다. 과열된 경쟁교육으로 학생과 학교, 학부모가 신음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경쟁의 한편으로 다른 나라들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성과 효율성이 극대화된 콘텐츠를 양산해 가지게 했습니다. 온갖 교육프로그램들이 디지털화되고 네트워크를 이루게 된 겁니다.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교육 전체를 서비스산업의 자원과 자산으로 봐야 하는 이유죠. 그래야 한국교육의 문제가 인류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재탄생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육의 가치를 자원화하자는 발상이시군요. -한국은 교육의 힘으로 작지만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 교육의 힘을 되살려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넘치는 교육기관들이 저출산 영향으로 줄어드는 학생 수를 탓해야 합니까. 가령 한국에서 꼴찌하는 대학교가 아프리카에서도 꼴찌일까요. 동남아에서는 어떨까요. 세계 10대 경제선진국 입장에서야 뒤에서 1등부터 60등 대학교를 없애도 되는 시설이고 교수들이고 할 수 있겠지만 후진 개발도상국 입장은 다르지 않겠습니까.→위기의 한국 교육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요. -한국 교육은 대학부터 부실정리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줄어드는 학생들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뒤처져 정리해야 하는 지금을 기회로 삼아 교육서비스 산업을 글로벌 자원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리해야 할 대학 캠퍼스에는 교육시설과 교구재들, 실험시설과 기숙사, 지역 인프라까지 있습니다. 줄어드는 학생들로 위기를 맞은 그 대학캠퍼스에 ‘글로벌 + 로컬비즈니스’를 연계하는 겁니다. 중진국·후진국, 개발도상국들의 국립대학 한국캠퍼스로 1:1 매칭시키는 겁니다. 60개국을 고르면 60개, 100개국과 매칭하면 100개 대학의 숨통이 열릴 겁니다. →사업예산 등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꼭 선진국과 연결하는 것만이 글로벌 네트워크의 핵심은 아닙니다. 중·후진 개발도상국들과 연계해 지원 프로그램과 공적개발자금(ODA)의 교육적 활용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학과 공적개발자금, 그리고 글로벌 교육 네트워크를 구축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학교와 교육시설, 교수진, 행정직, 기타 인프라들을 해당 나라로 옮겨서 가르쳐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통역과 학생들을 데리고 와서 교육으로 가득 채우고 가르쳐서 보내야 합니다. 이런 비용은 투자입니다. 중·후진 국가의 미래 지도자들에게 대한민국이 투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한국자원으로, 한국 교구재로 한국식으로 배운 세계 각국의 중·후진 개발도상국 미래 지도자들은 한국상품과 한국문화, 한국의 경제적 파트너가 될 겁니다. 그들은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을 아름다운 모범국가’로 생각하고, 미래 파트너가 될 겁니다.→사회적 합의를 통한 정책적 배려와 지원이 가능할 것으로 보십니까. -교육서비스산업에 투자하라고 하고, 일자리 만들자고 하면 다들 무리라고 합니다. 교육을 서비스산업의 자원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너무나 쉬운 것이 중·후진 개발도상국 입장에서는 너무 어렵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교육 정보화를 통해 쌓여진 디지털콘텐츠와 한류문화, 그리고 지금 버려야 할 위기에 처한 교육자원들이 중·후진 개발도상국들에는 절실히 필요한 것들입니다. →정부 당국자들에게 하실 말씀이 많을 것 같습니다. -‘블록체인은 육성하고 암호화폐는 안 된다’는 게 정부 입장인 것 같습니다. 자동차와 철도도 산업혁명기에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영국 동인도회사에서는 일확천금을 찾아 투기 붐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의 국부를 일군 서부개척에 골드러시도 그랬습니다. 암호화폐 공개(ICO)에 대한 거부감은 투기와 사기로 함축됩니다. 사람을 죽이는 총과 총알, 대포와 전투기를 파는 군수산업도 육성하면서 투기와 사기에 대한 걱정 때문에 수백 개의 ICO, 코인이 해외로 나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떠나 싱가포르·스위스·에스토니 아벨로루스 등 ICO를 장려하는 나라들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지금은 초기니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지만, 부(富)의 신대륙을 찾는 미래기업들은 계속 출현할 겁니다. 혜안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교육코인 A+의 사용처는 어떻습니까. -온·오프라인의 교육 콘텐츠와 이를 인증하는 네트워크 시스템입니다. 교육 등의 콘텐츠 프로그램 서비스산업, 온라인·오프라인 쇼핑과 교역 거래 서비스, 취업 정보 서비스, 교구재와 온갖 무역상품교역 등이 학교를 중심으로 지역사회에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육코인 A+의 비전은 무엇인가요. -세계 최고의 글로벌 교육 정보 네트워킹은 한국을 넘어 중·후진 개발도상국을 기반으로 궁극적으로는 세계 최고의 교육 전용 유틸리티 코인, 세계적인 암호화폐 생태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교육코인을 통해 만들어지는 글로벌 교육 디지털 인프라 산업체인은 곧 인증 사업을 통해 글로벌 시장개척의 창구가 됩니다. 세계의 돈이 한국으로 들어오게 하는 겁니다. 미래 파트너들의 생태계를 갖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한국이 세계의 교육 서비스 산업을 기반으로 경제 패러다임에서 한국이 중심이 될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존경받는 한국, 아름다운 모범국가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A+의 목표와 비전은 글로벌 교육계의 기축통화가 되는 것입니다. 교육 분야는 광범위하고 폭넓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통용되는 교육과 인증 관련 암호화폐 하면 A+의 상징성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상징적인 교육과 인증의 세계적인 플랫폼을 만들어 세계 각국 교육의 ‘코인달러’가 되는 것입니다. A+의 시작은 작지만 시대는 A+의 편이라고 확신합니다. 한국만의 교육 콘텐츠를 바탕으로 A+ 코인이 세계 시장에 교육암호화폐로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의료와 교육은 한국의 장점을 살려 인류에 기여하는 분야입니다. 중·후진 개발도상국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하면서 한국 100년의 먹거리를 구축하는 것, 존경받는 한국인이 되는 것. 홍익의 큰 뜻이 A+입니다. 서원호 객원기자 guil@seoul.co.kr
  • “아시나요, 北전쟁고아 키워 준 폴란드 교사들을”

    “아시나요, 北전쟁고아 키워 준 폴란드 교사들을”

    오는 31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한국전쟁 중 폴란드에 보내졌다가 다시 북한으로 송환된 전쟁고아와 이 아이들을 돌본 폴란드 교사들의 자취를 좇는다.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 이야기는 배우이자 단편 영화 두 편을 연출한 추상미(45) 감독에 의해 관객들과 만나게 됐다.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된 ‘잊혀진 역사’를 세상에 꼭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다는 추상미.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만난 그는 “북한과 미국이 서로 으르렁거릴 때만 해도 이 작품이 세상에 못 나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면서 “최근 시국이 기적적으로 바뀌면서 전 국민 중 가장 기뻐한 사람이 나였을 것”이라며 웃었다.추상미는 4년 전 지인이 일하는 출판사에 갔다가 누군가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끝내 몰랐을 이야기에 마음이 사로잡혔다. 1951년 북한이 한국전쟁 중 고아가 늘어나자 동유럽 국가에 아이들을 돌봐 줄 것을 요청했고, 그중 1500명이 폴란드 남서부의 작은 마을 프와코비체의 한 양육원에 보내졌다. 아이들 몸에서 발견된 기생충 서식지를 조사한 결과 1500명 중 절반은 남한 출신이었다. 전쟁 중 전선이 이동할 때마다 북한이 수시로 점령 지역의 고아들을 데려갔기 때문이다. 생김새도 쓰는 말도 달랐지만 양육원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헌신적인 사랑으로 돌봤다. 아이들 역시 새로운 가족의 정을 느끼며 새 삶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8년 뒤인 1959년 교사들과 아이들은 갑작스럽게 이별한다. 북한이 경제 발전 운동인 ‘천리마운동’을 본격화하면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이 아이들에 대한 송환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추상미는 이를 소재로 한 폴란드 소설 ‘천사의 날개’와 폴란드 국영방송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김귀덕’, 관련 논문 등을 보며 조사를 시작했다. 폴란드 전쟁고아 중 희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북한 소녀 김귀덕을 소재로 한 장편 영화 ‘그루터기들’을 만들기로 결심한 추상미는 시나리오를 완성하기 위해 2016년 폴란드로 떠났다. 준비 과정 중 당시 아이들을 돌본 교사 300여명 가운데 살아 있는 사람은 단 10여명이고 생존 교사들의 나이도 80~90대라는 소식을 접한 추상미는 그들의 육성과 증언이 담긴 다큐멘터리를 먼저 선보이게 됐다.“유제프 보로비에츠 양육원 원장님이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난생 처음 보는 까만 머리, 까만 눈의 동양 아이들인데도 그 아이들이 자신의 유년시절의 일부 같았다’고요. 실제로 당시 양육원 교사 중 상당수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고아 출신이더군요. 교사들은 선행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복하기 위해 혈육의 정을 나눈 거죠. 이분들의 상처가 다른 나라 아이들을 사랑하는 데 선하게 쓰였던 반면 우리는 증오의 프레임을 만들고 이데올로기를 견고하게 만드는 데 사용한 것 같아요. 이 작품을 통해 우리의 상처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하고 싶었어요.”추상미는 ‘그루터기들’의 배우로 캐스팅한 탈북민 출신 배우 지망생 이송씨와 함께 폴란드로 갔다. 평소 적극적이고 활발하지만 자신의 상처나 북한에 대해 이야기하길 꺼리던 이씨는 폴란드에서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송이는 평소에 ‘북한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런 송이가 폴란드 교사들을 만나면서 마음의 빗장을 풀더라고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폴란드 선생님들이 자신을 꼭 안아 주니까 어찌나 울던지요. 남한에선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이상하게 쳐다봐서 북한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안 했대요. 폴란드에서 처음으로 북한에서 태어난 사실에 자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을 때 참 인상 깊었어요.” 2009년 드라마 ‘시티홀’ 이후 한동안 연기를 쉬었던 추상미는 “오래되고 낡은 꿈”이었던 연출을 하면서 배우 이상의 재미를 느끼고 있다고 했다.“유년 시절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셔서 상처가 컸어요. 그래서인지 전 늘 상처에 관심이 많았죠. 감독이 되니 개인의 상처가 사회의 상처나 문제로 확장되더라고요. 전쟁고아들을 돌본 선생님들처럼 모성이 사회의 분열과 상처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모성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경기연구원, 한강하구 복원과 활용 위해 ‘남북 지역협의회’ 구성 제안

    남북관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고 있는 가운데 한강하구의 성공적이고 효율적인 복원과 활용을 위해서는 한강하구와 접해있는 지방자치단체가 참여 주도하는 ‘한강하구 거버넌스’와 ‘남북 지역협의회’의 구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경기연구원은 한강하구 복원과 활용을 위한 주요 과제와 거버넌스 구축방안을 제시한 ‘한강하구의 복원과 활용: 경기도의 주요 과제’ 보고서를 발표했다고 21일 밝혔다. 한강하구는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파주시 탄현면 만우리에서 강화군 서도면 말도까지 총 연장 67km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정전협정 제1조 제5항에서 한강하구는 “쌍방의 민용 선박의 항행에 개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의 군사적 대치 상황으로 인해 지난 60여년간 한강하구의 정상적인 이용과 활용은 불가능했다. 2007년 ‘10.4 남북공동선언’을 통해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기로 합의, 한강하구의 활용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으나 이후 10여년 간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관련 논의가 전면 중단됐다. 하지만 2018년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한강하구 공동이용을 위한 군사적 보장대책을 강구하기로 합의했다. 김동성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강하구는 남북한이 복원과 활용에 상호 협력할 경우 남북 모두에게 상당한 이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지역”이라며 “경기도는 남북관계의 변화와 개선 국면을 맞이해 한강하구의 복원 및 남북 공동 활용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구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주요 사업으로서 한강하구 공동 조사 및 준설, 한강하구 보호구역 유지 관리 강화 및 확대 재설정, 남북 물-에너지-식량 연계 체계 구축 , 한강하구 포구 및 옛 뱃길 복원, 한강 수상관광 확대 및 내륙 문화·관광 거점시설 활성화, 경인운하 레저관광 복합지구 개발, 남북한 보행길 및 나루 뱃길 연결 등 추진을 제안했다. 특히 김 위원은 한강하구에 연접한 지방자치단체 간의 ‘한강하구 거버넌스’ 구축을 제안했다. 한강하구에 접한 기초자치단체들이 ‘지역협의회’를 결성하여 사업을 추진하고, 광역자치단체들은 ‘광역협의회’를 결성하여 지역협의회를 지원 및 조정하는 역할이다. 이와 더불어 한강하구의 남북 공동 활용과 남북협력을 위한 남북 간의 협의체로서 ‘남북 지역협의회’를 구성하여 운영할 것을 제안했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열린세상] 아베 일본 총리 3선에 부쳐/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열린세상] 아베 일본 총리 3선에 부쳐/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3선에 성공함으로써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일본 역사상 최장수 총리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남의 나라 총리가 최장수를 하든 말든 상관할 일이 아니지만, 일본 자위대의 헌법적 지위를 위한 헌법 개정을 목표로 삼는 인물이니 한국으로서는 강 건너 불 보듯 할 일은 아니다.자위대는 어떤 실체인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됨으로써 결국은 1945년에 항복하게 되었고, 맥아더 원수가 군정을 하면서 다시는 군국주의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평화헌법 제9조를 만들어 군사력을 아예 갖지 못하게 헌법에 못박았었다. 그런데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군사물자 조달 등 일본의 도움이 필요했고 한국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에 자위대라는 이름으로 군대가 부활했다. 미국으로서는 태평양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바라다본 서태평양 끝자락 일본은 전략상 요충지 중의 요충지였기에 일본에 미군을 주둔시키며 자위대 군사력 증강을 부추기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본의 보수 우익은 그들 나름대로 미국을 등에 업고 헌법을 위반해 가며 ‘국제사회에의 평화공헌’이라는 명목하에 첨단 군사력을 증강시켜 왔다. 2018년 10월 19일 현재로 첨단무기 측면에서 아시아에서 일본의 무기를 당해 낼 나라는 없다. 첨단무기의 전시장이라 불릴 만큼 최첨단 무기들로 무장한 일본이다. 이런 일본에 그나마 군사력 증강에 제동 혹은 족쇄가 되었던 헌법 제9조를 개정하려는 아베 총리이니 통한의 식민지배를 당했던 한국으로서는 관심을 두어야 한다. 아베 총리는 1차 총리를 할 때 방위청이었던 정부기구를 장관급의 방위성으로 승격시켰던 인물이어서 평화헌법의 개정 의지가 높은 인물이다. 방위청이 방위성으로 승격되던 날, 필자는 방위성 연병장에서 자위대의 사열을 받던 아베 총리를 직접 보았다. 축사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가 맡았고 일본의 군사력 증강은 ‘청년 장교’로 불리던 나카소네에 이어 아베 총리로 계승되고 있다. 일본의 헌법 개정 과정은 중의원과 참의원 3분의2 찬성이 필요한데 이런 의결 정족수라는 것은 어느 나라나 쉽지 않은 매우 높은 조건이다. 그만큼 헌법을 개정하는 일은 그 어느 나라도 어려운 조건이 붙어 있다. 일본이 한 선거구에서 3명 내지 5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중선거구제하에서는 다수의 정당이 난립하는 구조여서 집권 자민당이 공명당 등과 연립을 해도 3분의2의 정족수를 채우기 어려웠다. 그러나 일본의 보수 우익들은 선거구제를 중선거구제에서 1개 선거구에서 1명을 뽑는 소선거구제로 바꾸면서 집권 자민당이 공명당 등과 연립하면 3분의2는 거뜬히 마련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고 있다. 마지막 장벽은 국민투표인데 과반수의 찬성을 얻으면 되는데 여론 조사를 볼 때 아직은 때가 아닌 듯하다. 그러나 외국 즉 북한이나 중국의 위협이 커지면 즉각 단결하는 일본 국민이라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그러면 아베 총리에게 한국은 무엇을 희망사항으로 요청할 수 있는가? 아베 총리는 군사력 증강에 아까운 국가예산을 펑펑 쓰지 말고 중국과의 군비경쟁을 피하면서 동북아 평화체제의 출범을 한국과 함께하는 일에 동참하기를 기대한다. 동북아시아에서 그나마 민주주의의 경험을 함께해 온 한국과 일본이 주도하여 무기 사들이는데 돈을 적게 쓰고 그 돈으로 자국민들의 복지를 늘리는 데 서로 머리를 맞대어야 할 것이다. 군사력 증강에 엄청난 돈을 쓰는 중국을 설득해 군비 축소라는 대화의 장을 같이 만들어 나가는데 아베 총리가 함께하기를 희망한다. 일본 국민은 군사력을 늘리는 일에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 그들도 군국주의 침략전쟁에 휘말려 수백만명이 목숨을 잃었던 악몽을 갖고 있다. 거의 모든 일본 국민의 가족 중 적어도 1명 이상이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죽어 나갔다. 3선의 총리에 선출된 아베 총리가 군사력을 증강하는 헌법 개정에 골몰하지 말고 동북아 평화체제를 같이 만들어 나가는 일에 동참하기를 기대한다. 동북아의 평화를 만드는 중차대한 일에 한국과 일본이 앞장서야 한다.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광복 73년…서울 한복판 ‘일제 명의 건물들’ 말이 됩니까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광복 73년…서울 한복판 ‘일제 명의 건물들’ 말이 됩니까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은 지 올해로 73년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일제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과 일본기관이 소유했던 동산과 부동산을 광복된 이후 사람들은 ‘적산’(敵産)이라고 불렀다. 적산은 적의 재산이라는 뜻이다. 적산은 미군정법령 제33호에 따라 조선 군정청으로 귀속되기 시작했다.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로 귀속 주체가 이관됐다. 한마디로 적산은 모두 국가로 귀속되는 게 대원칙이었다. 하지만 광복 이후에도 친일파의 득세가 이어지면서, 친일파 재산은 물론 적산 환수도 난항을 겪었다. 한국전쟁까지 발발하자 토지대장 상당수가 소실됐고, 일본인 명의의 토지 ‘적산’ 가운데 상당수의 땅은 소유권이 묘연해졌다. 아직도 등기 말소 등 행정절차를 밟지 않아 일본인 이름으로 된 건축물과 토지들이 전국 곳곳에 산재한다. 일본인이 소유했던 재산의 소유주를 명확히 바로잡는 것은 일제강점의 흔적을 지우는 것은 물론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도 의미 있는 일이다. 일제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에 앞장선 두 명의 공무원을 만났다.●사대문 안 일제 잔재 없애라 김영균(53) 서울시 중구청 지적행정팀장은 건축물대장이나 등기부상에 일본인 명의로 기재돼 있는 건축물에 대해 주인을 찾아 주는 작업을 한다. 1989년 서울시에 입사한 김 팀장은 2015년 중구로 발령이 나자 이 일을 시작했다. 그는 “건물 소유주도 모르게 일본인이 이중 등기되어 있어서 건물을 처분하지 못한다는 사연과 등기말소를 하려고 해도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주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알고 일본인 재산 등기말소 작업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일제는 1912년 한반도 지배·수탈을 위해 들여온 기존 등기와 연계해 건축물대장 기초자료를 구축했다. 해방 후 ‘가옥대장’으로 불렸던 건축물대장은 1962년 건축법 시행과 함께 도입됐다. 때문에 건축법 시행 이전에 지어진 건물들은 소유권 변동, 철거 등의 변화가 있어도 건축물대장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고 일본강점기 때 자료가 그대로 남았다. 예를 들어 서울 충무로에 있는 한 단층 건물은 1979년에 지어져 공장과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건축물대장에는 1933년 사용 승인이 난 일본인 소유 목조주택과 함께 등재돼 있다. 목조주택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건축물대장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는 셈이다. 건축물의 실소유주는 소유권 이전, 금융권 대출, 신축 등의 경우가 아니면 말소 절차도 번거롭고 비용도 들어 이를 정리하기보다는 그대로 두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사정들 탓에 ‘일본인 소유 건축물’이라는 기록이 현재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2015년 이후 소유자 신청에 따라 일본인 명의 건축물대장과 등기를 말소한 것은 101건에 불과했다. 김 팀장은 “특히 중구는 서울 사대문 안에 있기 때문에 이런 사례가 많다”면서 “일제 흔적을 지우고 행정정보의 신뢰도를 높이고자 전국 최초로 일제청산 작업을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적행정팀원들과 함께 준비과정을 거쳐 지난 4월부터 건축물대장에 올라 있는 관내 건물 11만 3509곳에서 일본인 명의 건물 627곳을 찾아냈다. 건축물대장 97건과 등기부 530건이다. 이런 건물은 을지로와 충무로에 198곳이 집중돼 있다. 오장동 84곳, 묵정동 41곳으로 뒤를 이었다. 이 밖에도 예관동, 남대문로, 남창동 등 대부분 사대문 안에 모여 있다. 김 팀장은 직원들과 함께 일본인 명의 건물이 있는 627곳에 대한 현장조사를 벌였다. 육안 확인을 비롯해 항공사진 판독, 재산세 납부 여부 등으로 건축물 존재 여부를 가려내는 등 청산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건물이 없는 경우 직권으로 건축물대장을 정리하고 법원에 등기말소를 의뢰할 예정”이라면서 “등기에만 존재하는 건물은 소유자가 법원에 등기말소 신청을 하도록 안내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구는 말소 신청을 한 소유자를 대상으로 촉탁의뢰 등 이후 절차를 무료로 대행할 계획이다. 김 팀장은 “구 방침이 알려지자 민원인 한 분이 26건을 신청하기도 했다”면서 “하나의 지번에 없어져야 할 건물등기가 26건이나 있었던 셈인데 법무사에게 위임했으면 건당 10만원 정도로 최소 260만원의 비용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인 명의의 건축물이 지금까지 존재하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라면서 “부동산 공적장부 일원화를 통해 일제 흔적을 지우고 행정정보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작업이라 사명감을 느낀다”고 말했다.●숨겨진 일본인 재산 찾아라 일본인 명의 토지 즉 ‘적산’에 대한 관리와 환수는 1945년 광복 이후 오랜 기간 부실했다. 정부가 적산 청산을 제대로 못 해 여전히 토지대장상 땅 주인이 일본인으로 돼 있거나, 전쟁으로 인해 토지대장이 없어졌거나, 시스템 미비 탓에 소유권이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토지 소유권을 정리하고자 3차례에 걸쳐 ‘부동산 소유권 이전 등기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하 특별조치법)을 실시했다. 하지만 1·2차 특별조치법 시행 당시 정부는 이·동별로 보증인 3~6명을 위촉한 뒤, 보증인들이 토지 소유주에 대한 보증만 해 주면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해 주는 방식을 취했다. 대부분 현장 조사조차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정체가 모호한 ‘적산’들이 국고로 귀속되지 않고 정체가 불분명한 사람들에게 넘어갔다. 조달청이 2015년 일본인 명의 은닉재산, 즉 ‘적산 의심 토지’의 환수작업에 착수한 이유다. 주 담당자로 송명근(50) 국유재산기획과 사무관이 뽑혔다. 동국대 전산통계학과 출신인 송 사무관은 정보통신 자격증을 소유한 정보통신 사무관이어서 ‘친일파 재산 환수’ 등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대형국책사업 업무를 맡아 국무조정실에 1년간 파견됐다는 이유로 2016년 조달청에 돌아오자마자 국유재산 환수 작업에 투입됐다. 송 사무관은 업무를 맡자 6개월간 자료 분석에 매달리는 한편 관련 서적 읽기에 몰두했다. ‘친일인명사전’ 3권을 여러 번 숙독한 것을 비롯해 ‘한국근대사 산책’과 ‘친일파와 일제시대 토지’, ‘일제의 한반도측량 침략사’, ‘창씨개명’, ‘창씨개명 법제연구’ 등 일본인 토지와 재산과 관련한 서적 20여권을 탐독했다. 환수 작업을 원활히 하려면 역사적 맥락을 알아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이제는 아예 충남대 대학원 북한통일학과에 진학해 일제강점기는 물론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학구열을 불태울 정도로 적산 환수작업에 진력하고 있다. 송 사무관은 팀원들과 함께 지난 7월 말까지 귀속재산과 부당하게 사유화된 일제강점기 일본인 명의 재산(은닉재산) 3373필지, 228만 9805㎡(토지 가액 848억원 상당)를 국유화했다. 여의도와 거의 맞먹는 면적이다. 이 중에는 조선총독부(310필지), 동양척식주식회사(26필지), 일본법인(88필지) 및 일본인 개인(1201필지) 소유지 등 일본 정부 및 법인 명의 재산도 포함됐다. 이들 재산 중 특별조치법 시행과정에서 불법으로 취득한 무단 점유자가 자진 반환을 거부하면 소송까지 불사해야 한다. 실제로 70필지가 소송을 통해 국가 소유가 됐다. 현재도 1만 필지에 대해 조사나 소송이 진행 중이다. 환수작업은 쉽지 않았다. 송 사무관은 “일부 적산에 대한 조사와 환수가 광복 이후 70년이나 지나 너무 늦게 진행된 탓이었다”면서 “토지 조사는 매매 계약서 존재 여부, 주변인 진술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은닉재산 국가환수는 일본인 명의 재산을 불법으로 취득한 개인 소유의 재산을 국유화하는 과정으로, 재산을 빼앗기는 상대를 조사해야만 한다”면서 “재산소유자가 면담에 불응하거나 불만을 강하게 표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힘이 들 때가 많다”고 토로했다. 조사과정에서 “‘몇십년 동안 땅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이제 와서 땅을 환수하느냐’는 협박에도 시달려야 했다. 송 사무관은 “저를 비롯해 여성 직원들은 ‘밤길 조심하라’거나 ‘앞으로 가족을 제대로 챙겨야 할 것”이라는 등의 협박을 들었다. 여성 직원들이 눈물을 흘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jrlee@seoul.co.kr
  • [이종락의 재계인맥 대해부](23) 아이스하키 경영의 전도사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

    [이종락의 재계인맥 대해부](23) 아이스하키 경영의 전도사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

    정몽원 회장, IMF 위기 딛고 한라그룹을 재계 38위로 키워아이스하키의 도전정신을 경영에 접목, 만도 다시 찾아와만도의 과도한 현대차그룹 의존은 해결 과제  한라그룹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바로 아래 동생인 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이 1962년 10월에 세운 현대양행에서 비롯됐다. 정 명예회장은 일본 아오야마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1947년 동아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형 정주영 회장의 권유로 현대건설에서 일하게 된다. 현대건설 대표이사를 15년간 맡은 뒤 1962년 현대양행을 창업했다. 그러나 1980년 중화학공업의 난립을 재편하겠다는 신군부로부터 현대양행 창원공장(현재의 두산중공업)과 군포공장을 빼앗기는 시련을 겪었다. 남아있던 안양공장 상호를 ‘만도기계’로 바꾸고 굴지의 대기업으로 키웠다. 만도는 ‘인간은 할 수 있다’(man do)와 ‘1만가지 도시’(萬都)의 두 가지 의미를 지닌 뜻으로 정 명예회장이 직접 지었다. 정 명예회장은 1997년 장남 몽국(65)씨가 아닌 차남 몽원(63)씨에게 한라그룹 경영권을 넘겨줬다. 그러나 정 회장 취임 1년도 안된 12월 6일 한라그룹은 IMF 외환위기와 한라중공업 사업 확장에 따른 자금위기로 부도 처리됐다. 한라그룹의 주요 계열사가 1999년 JP모건 등에 매각됐다. 정 명예회장은 2006년 작고하기전 “만도만은 다시 찾으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결국 정 회장은 각고의 노력끝에 풋옵션을 행사해 2008년에 만도를 JP모건 계열 사모펀드사인 썬세이지로부터 되찾았다. 정 회장은 기업인으로 최고의 순간을 물으면 “2008년 만도를 찾아왔을 때”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만도 인수뒤 그룹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다. 2012년 10월 만도 경영진에서 물러난 지 5년만인 지난해 대표이사로 복귀했다. 정 회장은 만도를 세계적인 자동차 부품업체로 육성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국내 3위 자동차 부품업체인 만도는 한라그룹 매출 60% 이상을 책임지고 있다. 주력 제품인 조향·현가·제동장치와 자율주행기술에서 국내 부품회사 중 가장 기술력이 앞선 회사로 평가받고 있다. 무엇보다 자율주행차 핵심으로 꼽히는 ‘ADAS’(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했다. 2016년 1분기 흑자전환에 성공한 뒤 지난해에는 ㈜한라(구 한라건설)까지 실적개선을 이뤄 한라그룹은 매출 9조 1400억원으로 재계순위 38위에 랭크됐다.하지만 여전히 불안요소도 있다. 만도의 매출 절반 이상이 현대·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 현대위아 등에 자동차 제동장치와 조향장치 등을 납품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글로벌 완성차시장에서 고전하고 있는 현대차그룹의 실적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라그룹은 제너럴모터스(GM), 중국 로컬 업체들과의 매출을 지속적으로 늘리는 등 매출 편중구조 탈피를 위해 다방면으로 거래처를 확보하는 등의 대책을 세워놓고 있다. 올해부터 3개년 계획을 세워 경쟁력 강화에 나선다. ‘제대로, 미래로’라는 슬로건도 내걸었다. 연구·개발(R&D)에 매출액의 5% 이상을 투자하고 있다. 해외 우수인력 유치를 위해 미국 디트로이트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연구소를 설립했다. 서울고와 고려대 경영학과,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정 회장은 ‘아이스하키 마니아’이기도 하다. 1994년 만도기계 사장이었던 정 회장은 김치냉장고 ‘딤채’와 ‘위니아’ 에어컨 홍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직원의 제안에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이스하키팀을 창단했다. 2013년 1월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에 오른 뒤 숙원사업이었던 평창올림픽 본선진출권을 사상 처음으로 따내며 한국 아이스하키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다. 매년 한라팀과 아이스하키 대표팀을 포함한 협회 운영에 각각 50~60억원, 15억원을 지원한다. 정 회장은 “아이스하키를 통해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도전정신을 배웠다”고 회고한다. 그는 기업 경영과 아이스하키의 유사점으로 스피드, 팀워크, 디테일 등 세가지를 든다. 아이스하키는 팀의 약점을 파악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이 기업 경영과 연결된다고 믿는다. 정 회장은 부인 홍인화(61)씨를 교회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를 나온 홍씨는 jtbc의 전신격인 동양방송(TBC) 아나운서 출신이다. 홍씨는 약사인 부모밑에서 자랐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3선 국회의원인 서상목(71) 전 국회의원의 누나다. 정 회장은 지연(36), 지수(23) 두 딸이 있다. 지연씨는 2012년 이재성(66) 전 현대중공업 회장의 아들인 이윤행씨와 결혼했다. 지연씨는 미국 최초 여대인 마운트 홀리오크대를 나와 뉴욕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남편 이씨는 미 존스홉킨스대를 졸업하고 조지타운대 법학대학원(로스쿨)을 졸업했다. 지연씨는 만도에서 부장으로 근무하다 지금은 육아휴직중이다. 둘째딸 지수씨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라홀딩스에서 사원으로 근무중이다.  이종락 논설위원 jrlee@seoul.co.kr
  • 조선 군주 세조의 ‘얼굴’을 만나다… 국립고궁박물관 ‘세조 어진 초본’ 첫 공개

    조선 군주 세조의 ‘얼굴’을 만나다… 국립고궁박물관 ‘세조 어진 초본’ 첫 공개

    화가 이당(以堂) 김은호(1892~1979)가 1935년에 그린 세조 어진(御眞·왕의 초상화) 초본이 처음 공개된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세조 어진 초본과 더불어 세조 관련 유물 및 사진·영상 자료 30여점을 선보이는 테마전 ‘세조’를 22일부터 내년 1월 13일까지 궁중서화실에서 연다고 18일 밝혔다. 2016년 국내 경매에 출품된 세조 어진 초본을 구매한 고궁박물관이 2년 만에 일반에 처음 공개하는 자리다. 세조 어진 초본은 1935년 화가 김은호가 1735년 제작한 세존의 또 다른 어진을 모사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그린 밑그림이다. 어진 초본의 크기는 가로 131.8㎝, 세로 186.5㎝로 우측 하단에 김은호의 인장이 찍혀 있다. 한국전쟁을 피해 부산국악원 창고로 옮겨 보관되었던 조선시대 어진 대다수가 1954년 11월 용두산 화재로 소실된 상황에서 이 초본은 세조의 모습을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전시에는 세조 어진 초본 외에도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에 형인 문종의 지시로 육지에서 벌이는 전투의 진을 짜는 방법을 모아 편찬한 책 진법(陳法), 세조 10년(1464)에 불교 서적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을 번역해 펴낸 ‘선종영가집언해’, 세조를 비롯한 역대 왕들의 글씨 탁본을 모아 놓은 ‘열성어필’ 등이 나온다. 조선시대 세조 어진에 대한 보수와 모사 작업 내용을 기록한 등록(謄錄)도 소개한다. 등록에 따르면 세조 어진은 그가 묻힌 남양주 광릉 옆 진전(眞殿·어진을 모신 전각)에 보관한 덕분에 임재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보존되어 일제강점기까지 전승됐다. 전시는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 ‘세조의 왕위 찬탈과 단종 복위 사건의 그늘’, ‘나라를 다시 세운 왕으로 숭배된 세조’, ‘세조의 왕릉, 광릉’ 등 7개 주제로 구성된다. 전시실에 설치된 화면 속 세조 어진 초본에 색을 입히는 영상 체험, 세조 어진 초본 따라 그리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과 강연도 마련된다. 고궁박물관 측은 “이번 전시가 피의 군주이자 치적 군주라는 양면적 평가를 받는 세조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미래유산 톡톡] 긴 역사만큼이나 갖은 사연 품은 광진교

    지난 13일 투어단이 찾은 광나루 일대의 서울미래유산은 천호대교와 강변테크노마트, 한국점자도서관 등 3곳이었다. 점자도서관은 탐방했지만 코스 사정상 천호대교와 테크노마트는 광진교 쉼터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한국점자도서관은 1969년 시각장애인 육병일 선생이 사재를 털어 종로5가에 설립한 게 모체이다.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979년 지금의 장소로 이전했다. 당시 문교부에 등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점자도서관이다. 1980년대 찾아가는 이동도서관, 시각장애인들의 사회 참여를 위한 정부간행물 보급, 인터넷 전자도서관 개관 및 디지털 토킹 북을 도입했다. 1985년부터는 중도실명자를 위한 상담도 했으며 시각장애인뿐 아니라 촉각도서와 점자라벨 도서를 활용해 독서에 지장이 있는 사람을 위한 서비스도 제공한다. 시각장애인의 특성상 방문객은 거의 없고, 대부분 전화 문의 후 우체국 무료 택배로 도서를 대출받고 반납한다. 이곳을 예약 방문하면 점자와 녹음도서의 제작 과정을 볼 수 있다. 역사사료관에서 점자관련 기기 관람도 가능하다. 점자를 발명한 프랑스의 루이 브라유(1809~1852)는 5살 때 시력을 잃은 뒤 15세 때 6개의 점으로 알파벳을 고안해 점자체계를 완성했다. 우리나라도 브라유 점자를 도입, 1926년 박두성 선생이 ‘훈맹정음’을 만들었다. 그는 맹인들의 세종대왕이다. 광진교가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되지 못한 이유가 궁금하다. 1936년 준공된 광진교는 광진구 광장동과 강동구 천호동을 잇는 다리다. 광나루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걸맞게 서울에서 한강대교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다리이지만 한국전쟁 때 폭파됐다가 1952년 복구됐다. 1994년 철거된 뒤 2005년 새로 지었다. 서울에서 유일한 보행전용도로를 지향했으나 차량통행이 없는 보행자 전용다리가 되지 못하고 차량보다 사람이 우선하는 자리로 자리를 잡았다. 잠수교를 제외한 서울의 모든 다리에 ‘대교’라는 호칭이 붙었지만 광진교는 제외됐다. 서울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광진교 8번가를 비롯, 이 다리가 품고 있는 사연만큼은 미래유산에 손색이 없는 것 같다. 서울미래유산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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