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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석경의 문화읽기] 바이러스 시대의 신한류, 한국 드라마의 재발견

    [홍석경의 문화읽기] 바이러스 시대의 신한류, 한국 드라마의 재발견

    언제부터인가 한국 대중문화의 좋은 소식은 대부분 외국으로부터 전해지고 있다. 봉준호 감독과 BTS의 일등 먹기 성과가 너무 커서 5년 전이라면 화들짝 놀랄 만한 성공담마저 눈에 차지 않는 상황이 돼 버렸지만, 지금 블랙핑크나 SM의 스타들도 수많은 나라의 차트를 지배하고 있고, 한국 영화도 한국 드라마도 놀라운 인기를 얻고 있다. 특히 지금 넷플릭스가 선두인 글로벌 영상서비스(VOD)들을 통해 그야말로 전 세계에 제공되고 있는 한국 드라마는 감히 신한류라고 부를 만한 새로운 단계로 ‘한드’의 국외 수용 현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공중파가 매개한 2000년대 초반의 동아시아 한류나 인터넷을 통한 전 세계 한류 팬덤의 형성과는 매우 다른 단계로의 진입이다. 유튜브와 각종 인터넷 콘텐츠 포털이 지배적 영향을 미치던 이 환경에 새롭고 강력한 플레이어인 글로벌 VOD의 등장은 다음과 같은 새로운 한류 수용 현상을 전개하고 있다. 넷플릭스가 바이러스 시대 한국인들이 본방 때 놓친 ‘나의 아저씨’와 같은 좋은 드라마에 제2의 전성기를 가져다준 것처럼 세계의 시청자들은 ‘킹덤’과 같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화제작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한국 드라마 모두를 동등한 경쟁 상태에서 접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의 넷플릭스 시청자들 사이에서 ‘응답하라 1988’가 대성공이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태원 클라쓰’가 인기이며, 브라질의 어느 50대 시청자에게는 한국에서 잊힌 2011년 작 ‘천상의 화원 곰배령’이 한국 드라마 최고작이고 개인의 인생 드라마인 수용 현상이 진행되는 중이다. 이것은 그동안 누적된 한국 드라마들이 우수한 인터페이스로 잘 매개되면 해외시장에서 좋은 2차 시장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을 하게 만드는 사실들이다. 늘 그렇지만 여러 이유로 전수조사가 불가능한 수용 현상을 전망할 때 과도한 일반화가 아닌지 여러 가지 기준으로 평가해야 하는데, 지금 적어도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다. 팬데믹 상태가 강제하는 실내에서의 긴 시간 인류는 열심히 뭔가를 보고 있는데, 이 중 하나가 한국 드라마다. 한국 시청자는 ‘이태원 클라쓰’ 속에서 이 시대 한국 사회의 다문화와 다양성의 문제를 어떻게 일상적 스토리에 포괄할 수 있는지를 보지만, 세계의 시청자들은 이와 더불어 동아시아에서 이런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것은 열린 사회 한국뿐이라고 이해한다. 또 드라마가 보여 주는 이태원 거리의 젊고 활기찬 모습과 남산타워가 보이는 전형적인 서울의 배경을 통해 팬데믹 이후를 꿈꾼다. 거기가 세계인의 나쁜 기분을 폭파해 버리려고 BTS가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서 투척하는 곳이기도 하고. 넷플릭스로 처음 한국 드라마를 보게 된 브라질의 50대 시청자는 ‘디어 마이 프렌즈’를 보고 추천 시스템이 제시하는 선택 중 ‘천상의 화원 곰배령’을 보게 됐다. 브라질 시청자에게는 매우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자연경관 속에 펼쳐지는 진솔한 이야기와 사람들 사이의 상호 배려가 과도한 폭력과 선정으로 찬 자국의 팬데믹 현실과 텔레노벨라(TV 소설)를 탈피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이 어떻게 미국 시청자들을 움직이는지는 왜 미국에서 BTS가 인기인지를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과제다. ‘기생충’과 BTS 성공담의 짠내 나는 현실이 어려움에 부닥친 미국인들의 마음이 내면을 향하고 따스한 인간관계를 열망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수용 현상들은 한류가 지금까지의 세계 속 팬덤 패러다임에서 대중문화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무엇보다 세계의 시청자들은 한국 드라마를 미학적 대상으로 인정하고 한국 드라마를 보는 이유가 잘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과거에 일본의 ‘겨울연가’ 인기가 드라마의 질적 수준이 아닌 다른 수용의 맥락이 작동한 것이었다면, 신한류라고 감히 부를 만한 지금 떠오르는 한국 드라마 인기의 원동력은 질적 우위다. 일본 시청자가 한국 드라마는 수작이라 일본 드라마와 차이가 난다고 할 때, 프랑스 시청자가 한국 드라마의 조명과 연출과 연기에 대해 칭찬할 때, 그동안 한국 드라마가 걸어온 먼 길을 생각한다.
  • [열린세상] ‘극성스러운’ 나라/김세정 바르샤바 SSW 프래그마틱 솔루션스 변호사

    [열린세상] ‘극성스러운’ 나라/김세정 바르샤바 SSW 프래그마틱 솔루션스 변호사

    딱 지난해 요맘때 일인데, 서울에서 국제변호사대회가 열려서 서울에 있었다. 콘퍼런스 및 회의 등에 참석한 각국의 변호사들이 한국 변호사로서 유럽에서 일하는 나에게 한국의 예의범절이나 특성들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했다. 소위 ‘동방예의지국’ 아닌가 말이다. 서양식으로 행동하다가 예의 따지는 한국인들의 비위를 거슬릴까 걱정이 됐던 것이다. 한국인들이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이런저런 지점들에 대해 설명을 해 주다가 반대로 한국인들이 별 생각 없이 하는 행동들에 대해 당신들이 무례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예를 들어 몸에 손을 대는 행동. 한국인들은 모르는 상대의 몸을 잘 건드린다. 어깨를 툭툭 치기도 하고 팔을 잡기도 한다. 부딪치거나 스쳐 지나가는 것 정도는 잘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외모에 대한 언급. 가까운 사이라면 으레 첫 인사말로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살쪘네, 살 빠졌네, 예뻐졌네, 젊어졌네, 피곤해 보이네 등등. 심지어 잘 모르거나 초면인 경우에도 대화 초반에 외모를 언급한다. 젊어 보이신다, 미인이시다, 체격이 좋으시다 등등. 외모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하는 게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영국에서라면 대개 날씨 이야기를 많이 한다. 오는 길에 교통 상황이 어떻더라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요즘이라면 단연 코로나 상황에 대한 걱정이나 정보 교환, 희망 섞인 의견 등을 가볍게 이야기할 것이다. 외모 이야기를 하는 것은 꽤나 이례적이고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일이다. 듣고 있던 외국인들이 한국은 예의를 따지는 사회 아니냐, 그런데 왜 그렇게 행동을 하느냐고 물었다. 일단 한국에서 따지는 예의범절은 상하관계에서 적용되는 것이다, 즉 말이나 인사나 명함 주고받기에서 주로 윗사람을 공손하게 대하는 법에 주목하는 것이니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의라는 것이 좀 다른 것이지 무례하게 굴려고 하는 건 아니라고 설명을 해 주고 나서 생각을 해 보니 저 윗사람을 모시는 법 말고는 뭐 그리 서로 간 예의에 대해 고려를 깊이 하거나 예의 바른 사회인지는 잘 모르겠더라. 과연 한국에서 타인에게, 나이 든 사람이 더 어린 사람에게 예의를 지키겠다는 생각이 일반적으로 있는가. 사람 간 기본적인 예절이라는 건 갑이 을에게도, 가족 사이에서도 지켜야 하는 것인데, 그런 사이에서도 말이고 행동이고 조심하는가. 그러니 뭐 그리 ‘동방예의지국’이라고까지 스스로 일컬을 바는 없지 않나 싶었다는 거다. 한국인이 스스로를 일컫는 호칭이 또 뭐가 있더라. ‘고요한 아침의 나라.’ 뭐 그리 고요한 것 같지는 않다.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 역사적으로 전쟁을 많이 일으킨 건 아니라는 주장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사이버상에서 서로 편을 갈라서 맹렬히 싸워 대면서 타협이란 없다는 기세로 맞서고 있는 것을 보면 평화를 사랑한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가 없을 듯하다. ‘한(恨)의 정서’는 또 어떤가. 이건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잘 와닿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뭔가 당하면 반드시 보복해 주겠다는 기세는 있는 것 같다. 이들 묘사는 한국인들이 스스로를 정적이고 조용하고 수동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일견 그렇게 보이기도 하는 모양이다. 어떤 외국인 변호사는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다 평온해 보인다고도 했다. 이 이야기에 웃을 수밖에 없었는데, 웃고 한국인들의 표정에 아직 익숙지 않아서 그럴 것이라고 대답해 줬다. 표정은 저래도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고 있다니까. 사람은 날씨를 닮는다고들 하지 않나. 한국은 여름이면 섭씨로 영상 40도에 육박하는 폭염에, 겨울이면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혹한에 시달리는 나라다. 이런데도 어른들은 긴 시간 노동을 하고, 아이들은 공부를 잔뜩 하고, 더워도 추워도 일상생활을 거의 똑같은 패턴으로 유지한다. 나는 사실 한국인들은 감정적이고 무엇보다도 매우 극성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코로나바이러스도 그렇게 초전박살의 기세로 때려잡는 것 아니겠나. 그때 만난 외국 변호사들이 한국에서 정말로 질색한 것은 재채기를 “에이취” 소리 내며 크게 해 버린다는 것이었다. 코로나 시절 설마 이건 사라졌겠지. ‘다이내믹 코리아’ 아닌가. 바뀌는 것도 빠른 나라다.
  • [글로벌 In&Out] 종전 75주년과 소련군의 만주공세작전/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계연구과 박사과정

    [글로벌 In&Out] 종전 75주년과 소련군의 만주공세작전/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계연구과 박사과정

    올해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5주년을 맞는 해이다. 1945년 9월 2일 일본 대표들이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때문에 미국, 러시아, 중국 등에서는 9월 2일과 3일이 대일 승전기념일로 알려져 있으며 매년 각종 기념행사가 진행된다. 하지만 올해는 특별하다. 미중 간 갈등이 고조되고 미러 관계가 악화되는 가운데 대일 승전 75주년을 계기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축전을 교환하며 양국이 제2차 세계대전 역사 왜곡을 바로잡는 데에 협력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러시아와 중국에 가장 중요한 공동 기억은 1945년 8월 소일전쟁과 만주지역의 해방이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는 대일승전일을 기념해 ‘당연한 최후’라는 제목으로 소일전쟁 관련 사료를 공개했다. 1945년 2월 소련은 미국에 독일 패전 후 최대 3개월 이내에 대일참전할 것을 약속했다. 5월 독일이 항복하자 소련은 군대를 유럽에서 극동으로 운송하고 개전준비를 서둘렀다. 8월 3일 극동군사령관이 8월 5일부터 대일작전을 개시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으나 절호의 시기는 10일이라고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따라서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하기도 전에 소련군 공격 개시 날짜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8월 6일 원폭 투하 직후 스탈린은 공격개시를 2일 앞당기고 8월 8일로 정했다. 일본은 소련의 참전이 시간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한 후에야 있을 일이라고 봤다. “스탈린은 서둘러 대일전에 나설 만큼 바보가 아니다”라는 당시 전쟁지도를 맡은 참모부 제12과장 사무대행 다네무라 수케타카 대좌의 발언이 유명하다. 8월 8일,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했고 나가사키 원폭 투하 몇 시간 전인 9일 새벽 4시 30분에 공격을 개시했다. 소일전쟁의 가장 중요한 작전은 만주전략공세작전이었다. 목적은 관동군을 격파해서 만주와 한반도를 해방하는 것이다. 소련의 자바이칼전선군, 제1·2극동전선군은 동서북 3방향에서 맹공격을 시작했다. 그중 태평양함대의 지원하에 제1극동전선군의 일부 부대가 한반도 주둔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고, 주력은 만주 해방에 집중했다 소련군의 만주 공세는 결코 쉽지 않았다. 지리적으로 만주의 동서북 3면은 산과 숲이, 서쪽에는 해발 1900m에 이르는 대싱안링 산맥이, 내몽골 지역은 반사막 지대가 있어 통행이 극히 어려웠다. 일본군은 지리적 조건을 활용해 복잡한 방어시설망을 구축했고 결사대를 조직해 소련군에 완강히 저항했다. 독소전쟁에도 참전한 소련군인의 회고록에는 ‘독일인들은 장교가 있으면 강한데 장교를 죽이고 포위하면 항복한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장교가 없어도 끝까지 싸웠던 경우가 많아 차원이 다른 적이었다’란 평가도 있다. 그러나 유럽전선에서 단련된 소련군의 진격속도는 일본군의 상상을 초월했다. 중공의 팔로군 등과 협력한 소련군은 난공불락이던 관동군의 방어선을 일주일 만에 완전 돌파했다. 8월 15일 일황의 항복선언에도 전투를 계속하던 일본군은 18일에야 항복하기 시작했다. 패전에 직면한 일본군은 민간인도 학살했다. 러시아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8월 17일 왕예먀오에 진출한 소련군은 일본군에 사살당한 500여명의 민간인 시신, 부상한 26세의 한국 여성과 36세의 일본 여성, 그리고 갓난아이 1명을 발견했다. 구출된 여성들의 증언에 따르면 후퇴하는 일본인 부대가 소련군의 복장을 하고 민간인들을 모아 총살했고, 총으로 죽지 않은 사람들은 칼로 죽였다고 했다. 소련군의 만행으로 위장해 민간인들이 소련군에 저항하도록 만들려고 했단다. 하지만 소련 측 사료에 따르면 소련군이 점령한 도시에서 중국인과 한국인들이 이들을 해방자로 환영했고 은신한 일본군인과 관료의 색출, 각종 정보 제공, 파괴된 시설의 복구 등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고 한다.
  • 한국인, 코로나 걱정 세계 최고… 10명 중 9명 “중대 위협”

    한국인, 코로나 걱정 세계 최고… 10명 중 9명 “중대 위협”

    한국인들이 코로나19에 대한 걱정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여론조사업체 퓨리서치센터는 9일(현지시간) 한국과 미국, 독일, 영국, 일본 등 14개국 1만 4276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한국인의 89%가 `코로나19 확산’을 국가의 중대한 위협으로 꼽았다고 밝혔다. 조사 대상국 중에서 코로나19에 대해 걱정하는 비율이 가장 높았다. 일본(88%)과 미국(78%), 영국(74%), 캐나다(67%) 등이 뒤를 이었다. 퓨리서치센터는 “정부가 유행병에 잘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전염병 확산을 주요 위협으로 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퓨리서치센터는 코로나19 사태 외에도 기후변화와 테러, 해외 사이버 공격, 핵무기 확산, 세계 경제 상태, 빈곤, 국가나 민족 간 오랜 갈등, 대규모 이주 등 9개 항목에 대해 각국 국민이 얼마나 큰 위협이라고 생각하는지 해마다 추적 조사했다. 이 중 한국은 코로나19를 비롯해 해외 사이버 공격(83%), 글로벌 경기(83%), 국가나 민족 간 갈등(71%), 대규모 난민 이주(52%)를 중대한 위협으로 보는 비율이 14개국 중 가장 높았다. 핵무기 확산의 경우 10명 중 8명(79%)이 주요 위협으로 봤는데 이는 일본(87%)에 이어 두 번째다. 조사 대상 14개국 중 유럽 국가 대부분은 가장 큰 걱정거리가 기후변화였다. 벨기에와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스웨덴은 코로나19로 큰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있지만 여전히 기후변화를 가장 큰 위협으로 꼽았다. 이들은 코로나19가 주요 위협 요소라는 점에는 공감하면서도 역대 가장 높은 비율로 기후변화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 코로나19 확산에 대한 우려는 소득이나 교육 수준에 따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남성보다 여성의 관심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한국인 입시차별’ 대학에 日정부 “문제 없다”…이사장은 아베 친구

    ‘한국인 입시차별’ 대학에 日정부 “문제 없다”…이사장은 아베 친구

    지난해 일본의 한 사립대학이 한국인 입시 응시자들을 면접시험에서 전원 0점 처리해 물의를 빚은 사건과 관련해 일본 정부가 최종적으로 “문제 없음” 결론을 내렸다. 8일 교도통신에 따르면 일본 문부과학성은 오카야마이과대(에히메현 이마바리시) 수의학부 추천전형 입시에서 한국인 수험생을 부당하게 차별했다는 의혹에 대해 “부적절한 입시가 실시됐다고 볼 수 없다”고 결론냈다. 오카야마이과대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미국 유학 시절 친구인 가케 고타로가 이사장으로 있는 학교법인 가케학원 산하 대학이다. 시사주간지 주간문춘은 오카야마이과대 수의학부가 지난해 11월 16일 입시 면접에서 한국인 지원자에게 일괄적으로 0점을 주어 전원 불합격시켰다는 의혹을 지난 3월 제기했다. 대학 측은 수의학부 ‘추천입시A’ 전형 면접시험에서 전체 지원자 69명 중 한국인 7명에 대해 0점을 줬다. 그 결과 한국인 수험생은 한 명도 최종 합격자 24명에 들지 못했다. 특히 불합격된 한국인 수험생 중 1명은 필기시험에서 최고 성적을 받는 등 한국인 5명이 필기 상위 20위 이내에 들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학 측은 “한국인들의 일본어 회화 능력에 문제가 있어 면접에서 0점을 준 것”이라고 의혹을 시인했지만 일본인 수험생 중에도 0점을 받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차별은 아니라고 강변했다. 이전에 합격했던 한국인 학생들이 일본어를 제대로 못해 학교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지난해 가을 입시부터 면접시험을 도입했다는 게 대학의 주장이었다. 이와 관련해 문부과학성은 대학 방문 조사 등 결과 “문제가 될만한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고, 대학의 설명에도 불합리한 점이 없었다”며 부적절한 전형이 이뤄졌다고 볼 수 없다고 결론을 냈다. 그러나 국적을 이유로 일률적으로 면접 성적을 0점 처리했음에도 문부과학성이 학교 측 주장을 일방적으로 수용, 경위 조사를 서둘러 마무리한 데 대해 비판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오카야마이과대 수의학부는 2016년 정부가 신설을 허가한 것 자체만으로도 2017~2018년 큰 파문을 불렀다. 수의사 과잉공급 우려 등을 이유로 앞서 52년 동안 대학 수의학과 신설을 한번도 허가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베 총리의 지인에 대한 정권 차원의 특혜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글로벌 In&Out] 전화위복과 거리두기 2.5단계/알파고 시나씨 아시아엔 편집장

    [글로벌 In&Out] 전화위복과 거리두기 2.5단계/알파고 시나씨 아시아엔 편집장

    지난 1년간 MBC에브리원의 ‘대한외국인’이라는 퀴즈 예능방송에 출연 중이다. 기자 출신이라서 시청자들이 많은 기대를 했지만 기대만큼 문제들을 그렇게 잘 풀지 못하고 있다. 특히 사자성어와 관련된 질문들이 그렇다. 맞힌 적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최근 사자성어 공부를 하고 있다. 사자성어 공부 중에 내 인생과 제일 관계가 깊은 사자성어를 알게 돼 매우 기뻤다. 그 사자성어를 카카오톡 프로필에 올렸다. 바로 ‘전화위복’이다. 필자는 2010년 터키 최대 민영언론사의 한국 특파원으로 취직하면서 외신기자로 제2의 삶을 시작했다. 서울외신기자클럽에 회원 등록을 한 후 한국 언론계에서 좀 알려지자 각 방송국 뉴스룸에서 종종 중동 이슈에 대한 논평을 요청하곤 했다. 같은 시기 많은 예능프로에서도 출연섭외가 왔다. 소속 언론사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기자적 정체성에 지나치게 애착이 있어 예능프로 출연은 늘 거절했다. 그러던 중 2016년에 터키에서 쿠데타 기도가 있었다. 터키 정부는 쿠데타 위협을 무산시켰으나 이를 기회로 반정부적 언론사들을 강제폐쇄했다. 한국에서 외신기자로 있다가 갑자기 백수가 됐다. 더구나 반정부 언론인으로 찍혔으니 터키로 가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이 엄청난 위기는 어마어마한 기회로 변신했다. 백수 시절을 극복하려고 스탠드업 코미디 장르에 도전한 것이다. 외신기자로 활동하면서 일부지만 한국사회의 문제들을 누구보다 더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이런 문제들을 재미있게 전달만 하니까 웃음과 깨달음이 동시에 발생했다. 4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이름을 알렸고, 예전보다 사회적 메시지를 더 크게 전달할 수 있는 환경이 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대한외국인’에서 아는 분야가 아닌 모르는 분야에서 출제된 문제들을 맞히지 못해 “패배의 아이콘”이 된 것도 필자에게는 일종의 전화위복이다. 이를 계기로 집중적으로 사자성어 공부를 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긴 도입부는 코로나 방역 현상에 대해 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3월 말에 입국했는데 며칠 후부터 코로나 방역이 진지해졌고, 해외여행이 불가능해졌다. 한국에 입국하면 ‘14일 필수격리’가 해외에 나가는 것을 말리게 했다. 그러다 보니 거의 한국인들이 해외에 안 나가게 되었다. 이 위기에 무슨 기회가 있는지를 한 지상파에서 리포터로 일하다가 보게 되었다. 리포터로 취재하러 지방에 가 보니 지방관광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그동안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아무리 지역의 관광산업을 발전시키려고 해도 한국인들은 주로 해외로 휴가를 떠나니 큰 효과가 없었다. 지방관광지의 상인들도 국제적인 시장을 고려하며 장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코로나 시대에 한국인은 물론 국내 체류 외국인까지 휴가를 보내러 지방에 간다. 요즘은 제일 많이 공유하는 ‘여행 꿀팁 블로그 포스팅’들이 다 국내 여행 아이템이다. 특히 외국인들의 소셜미디어 활동을 보면 이제는 뻔한 광화문, 남산, 남대문 시장 등 수도권 중심 포스팅을 하지 않고 지방의 오지를 더 깊이 소개하는 게시물들이 많아졌다. 이를 계기로 수도권 중심이었던 한국 관광업이 이제는 전국적으로 굳건해졌고, 특히 코로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나면 한국의 관광시장이 국내외적으로 대약진할 것이라는 게 지금부터 예상된다. 이제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이다. 이러한 조치 때문에 또 불편한 사람들이 너무 많을 것이다. 물론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의 제일 큰 목적이 코로나 감염 확산을 막는 것이다. 나는 이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또 다른 분야에서 전화위복이 될 거라고 본다. 우리의 삶이 방역조치 탓에 힘들어져도, 참고 보면 전화위복의 구멍은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 구멍들을 찾아 기회를 늘려야 한다.
  • [열린세상] 이번 장마는 기후위기?/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

    [열린세상] 이번 장마는 기후위기?/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

    이번에도 칼럼 주제가 바뀌었다. 원래는 얼마 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 대해 쓰려고 했다. 나는 ‘죽음학’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보고 싶었다. 죽음학의 입장에서 보면 이 사건에는 자살과 유족에 대한 돌봄(care)이라는 큰 주제가 관련돼 있다. 죽음학 교과서에는 이 두 주제가 2개의 장에서 따로 다룰 정도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된다. 그중에서도 나는 돌봄의 문제에 집중하고 싶었다. 한국 사회는 사별을 겪은 유족에 대한 관심이 너무 미약하다. 장례식까지 마치면 그다음에 가장 유념해야 할 대상은 유족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족들의 슬픔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번 사건처럼 가족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경우 유족들은 훨씬 더 많은 고통을 느낀다. 유족들이 강한 자살 충동을 느낄 수 있어 더 위험하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은 장례만 치르면 자신들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한국에는 이런 가족들을 효율적으로 돌볼 수 있는 기관이나 사람이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사건은 해당 가족이 떠맡기에는 너무도 위중해 사회가 동참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코로나 균의 재만연과 장마가 최장으로 길어지자 기후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번 비는 장맛비가 아니라 기후위기로 불러야 한다는 견해가 마음에 들었다. 내가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 중반이었다. 1972년에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선구자적으로 알린 ‘로마클럽’의 보고서가 소개되면서 그 관심이 촉발됐다. 이 책은 문고판으로 번역됐는데 그때 그 책을 소개해 준 장익 신부님과 토론하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장 신부님은 장면 총리의 아드님으로 최근에 영면하셨다. 또 ‘북회귀선’이라는 센세이셔널한 소설을 썼던 헨리 밀러가 했던 말도 생각난다. 그는 어느 티베트 고승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번 인류는 가망이 없다’고 했는데 이 발언이 1960년대에 있었다고 하니 이 고승의 안목은 남달랐던 모양이다. 나도 이 의견에 동의하는지라 그 뒤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위 사람들에게 ‘어서 우리 인류가 각성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반응은 이 환경 문제는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는 투였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나 혼자만이라도 생활을 바꾸어야겠다는 생각 아래 작은 실천을 시작했다. 이번 기후위기의 핵심은 인류가 생활 유형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에 있다. 쉽게 말해 소비를 대폭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각자가 생활하면서 발생하는 소비물을 가능한 한 줄여 조금 더 편하게 살려는 욕망을 거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인류는 쓸데없는 것을 너무나 많이 만들고 소비하는 바람에 공장들이 과잉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 결과 지구를 온실로 만드는 가스가 지나치게 많이 배출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차는 진즉에 없앴고, 육식도 가능한 한 줄이고, 일회용품도 대폭 줄이고, 에어컨도 덜 켜고, 샴푸류는 절대 사용하지 않고, 물 같은 물자도 가능한 한 아껴 쓰는 등등이 그것이다. 물론 나 혼자 해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않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후변화를 잡으려면 산업구조가 대폭 바뀌어야 한다. 온실가스를 덜 배출할 수 있는 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이 일은 정치가가 아니면 다루기 힘들다. 시민운동으로 이 엄청난 일을 감당할 수 없다. 너무나 큰 개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관심을 두는 정치가는 별로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유권자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금 정치가 중에 환경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환경 문제를 들고나와 봐야 국민들이 관심이 없으니 표만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이 문제에 천착할 리 없다. 그런데 시간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과학자들도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간은 앞으로 30여년밖에 안 남았다고 역설한다. 게다가 한국은 ‘기후 악당’ 국가로 불린다고 하니 책임이 더 크다. 어서 우리도 기후 문제에 진정으로 관심을 가진 정치인을 배출해야 한다.
  • [화제] 생활방역 위한 고양시 식사예절 다룬 영상물 ‘인기’

    [화제] 생활방역 위한 고양시 식사예절 다룬 영상물 ‘인기’

    박순영 영상홍보팀장은 25일 “수저를 이용해 반찬이나 찌개를 함께 먹는 한국인들의 평소 식생활이 코로나19가 유행하고 있는 요즘 얼마나 위험한 지 알리고, 앞접시에 덜어먹는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영상물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1분22초 짜리 짧은 이 영상에는 식사 전 손 씻기, 반찬 및 찌개 개인접시에 덜어먹기, 같은 그릇에 수저 넣지 않기, 식사 중 대화 삼가기, 식사 후 마스크 꼭 쓰기 등이 담겼다. 지난 22일 유튜브 채널에 올려진 이후 고양지역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 퍼지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유튜브 채널] https://www.youtube.com/user/freelancerlim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일제 초기 최대 섬유업체 경성직뉴/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일제 초기 최대 섬유업체 경성직뉴/손성진 논설고문

    민족 산업은 일제 지배 초기에 태동했고 섬유산업이 주도했다. 광고 속의 경성직뉴 주식회사는 일제 초에 한국인이 설립한 제조업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회사이며, 직조 분야에서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주식회사이기도 하다. 국내 최초의 주식회사는 1896년 설립된 조선은행이라고 한다. 경성직뉴는 1910년 서울 병목정(현 중구 쌍림동)에서 섬유 가내수공업자인 이정규, 김성기 등이 합명회사로 설립했다. 이듬해 신문에 주식 모집 광고를 내고 주식회사로 바꾸면서 회사 규모도 커졌다. ‘뉴’(紐)는 끈을 의미하는데 직뉴는 끈 중에서도 기계로 짠, 즉 제직(製織)한 끈을 말한다. 당시 한국인들이 많이 쓰던 허리끈, 대님끈, 주머니끈, 갓끈 등을 주로 생산했다. 1912년 5월 주식회사 경성직뉴의 사장이 된 윤치소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아버지이자 이승만 대통령 비서실장과 초대 내무장관을 지낸 윤치영의 형이며 귀족원 의원으로 친일 활동을 했던 윤치호의 종제(從弟)다. 윤치소의 아버지 윤영렬은 구한말 내무 참의와 안성군수 등을 지낸 관료였다. 윤치소는 이재(理財)와 경영에 밝아 일찍이 여러 사업에 손대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1909년 서울 종로에 ‘혁신점’이라는 제화점을 열었고 대한천일은행 감사, 분원자기 감사, 광업주식회사 사장을 지냈다. 경성직뉴의 경영 상태는 대체로 좋았다. 서울 전체 끈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했던 1917년에 직공이 500여명에 이르렀고, 직뉴기를 400여대 보유하고 있었으며, 상당한 이익을 냈다고 한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으로 닥친 경제 불황과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는 서양 복식의 도입으로 그 이후 경영난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1917년에 경성직뉴는 경성방직의 설립자인 김성수에게 경영권이 넘어갔다. 윤치소는 회사 경영으로 번 돈을 농업에 투자하고 토지를 대량 매입했다. 윤치소가 보유한 땅은 200만평에 가까웠는데 윤보선이 광복 후 장안의 10대 지주라는 말을 들은 것은 부친의 덕이었다. 김성수는 1918년 경성직뉴에 신식 직기를 도입해 모시와 면포를 생산했다. 1922년에는 고무 제품을 생산하는 등 제품 다양화를 꾀했고, 1925년에는 회사명을 중앙상공주식회사로 바꿨다가 1944년에 경성직뉴를 경성방직에 합병했다. 공장 내부 사진을 보여 주면서 증축 소식을 전한 광고는 김성수가 경성직뉴를 인수한 다음해 게재한 것이다. 경성방직은 현재 경방그룹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성수의 여동생과 결혼한 고 김용완 전 명예회장이 경영권을 넘겨받았고, 현재 그의 두 손자인 김준·김담 형제가 그룹을 이끌고 있다.
  • 日 우에노 닌자박물관 도둑 들어 1120만원 훔쳐 달아나

    日 우에노 닌자박물관 도둑 들어 1120만원 훔쳐 달아나

    일본 중부 우에노(上野) 시에 있는 이가류 닌자(伊賀流 忍者) 박물관에 도둑이 들어 100만엔(약 1121만원) 이상을 훔쳐 달아났다. 박물관 측은 지난 17일 새벽 1시 30분 경보가 울려 경찰이 출동했으나 이미 도둑이 출입문을 쇠지렛대를 이용해 열고 들어와 150㎏ 나가는 금고를 통째로 들고 달아난 뒤였다고 20일에야 뒤늦게 밝혔다고 영국 BBC가 전했다. 금고 안에는 1100명 정도가 가입비로 낸 돈이 보관돼 있었다. 이 박물관은 코로나19 감염병이 번지기 전에는 닌자들이 쓰던 무기 사용법을 배우고 써보며 닌자 쇼를 관람하는 곳으로 제법 인기를 끌었다. 국내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도 호기심에 이곳을 다녀온 한국인들이 적지 않다. 닌자는 둔갑술을 활용해 스파이 활동을 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가마쿠라(鎌倉) 시대부터 에도(江?) 시대까지 어지러웠던 일본에서 전국 다이묘(??大名)나 영주를 섬기는 스파이 활동, 파괴 활동, 암살 활동 등에 종사했다. 수많은 닌자 집단 가운데 이가류 닌자가 가장 유명하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한국서 흑인은 영화 속 이미지” 샘 오취리, BBC 인터뷰

    “한국서 흑인은 영화 속 이미지” 샘 오취리, BBC 인터뷰

    英 BBC “샘 오취리, 韓 인종차별에 저항하다” 아프리카 가나 출신 방송인 샘 오취리(29)가 영국 BBC 방송에서 한국사회의 흑인 인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20일 화제를 모은 오취리의 BBC 인터뷰는 지난 13일(현지시간)에 나온 내용으로 오취리는 인터뷰에서 “내가 한국의 학교를 다닐 때 캠퍼스에서 거의 유일한 흑인이었지만 최근 몇 년 새 라이베리아·가나·우간다 등 아프리카 대륙에서 온 사람들이 많다”며 “아프리카인들은 한국을 잘 모르고 한국인들은 아프리카 문화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적기 때문에 서로에게 상대의 문화를 알려주기 위해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종사하게 됐다”고 말했다. 오취리는 최근 경기 의정부고등학교 학생들이 흑인분장(블랙페이스)으로 졸업사진을 찍은 것을 비판했다가 논란이 일자 “경솔했다”며 사과한 바 있다. BBC는 오취리를 ‘한국에서 인종차별에 맞서고 있는 흑인’이라고 소개했다. “한국서 흑인 정체성은 영화 속 이미지” 오취리는 ‘흑인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이 어떤가’라는 질문에 “아프리카 대륙엔 엄청 다양한 나라가 있지만 한국인들에게 그런 다양성에 대한 노출이 부족하다”면서 “때문에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것들을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다”고 답했다. 이어 “한국 친구들에게 ‘무엇이 흑인에 대한 아이덴티티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가’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대부분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접한다’고 한다”며 “즉 거기에서 흑인을 어떻게 묘사하느냐가 흑인에 대해 이해하고 생각하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러나 이런 경향은 한국인들이 특별히 인종차별적이라기보단 다른 모든 나라에서도 적용되는 얘기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학생들 비난할 의도 없어…패러디 제대로 하려 했다는 의도 안다” 오취리는 인터뷰에서 의정부고 학생들의 흑인 패러디와 관련한 이슈를 언급하며 “많은사람들은 내가 학생들을 비난할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오해”라며 “난 학생들이 누군가를 해치고자, 조롱하고자 한 게 아니라 단지 패러디를 제대로 하려 했다는 의도였단 걸 안다”고 말했다. 이어 “사건 초반 내가 문제를 제기했을 때 몇몇 한국인들과 나 사이에선 매우 의미 있는 대화가 오고 갔다”면서 “하지만 어딜가든 맥락 없이 공격만 하는 ‘불편러’들이 있고 부정적인 것들이 더 큰 소리를 내기 마련이라 논란거리가 된 것”이라고 생각을 밝혔다. ‘한국인들이 블랙페이스가 모욕적이라는 걸 이해하는 것 같나’라는 물음엔 “한국인들이 블랙페이스에 대한 역사를 몰랐기 때문에 그게 왜 모욕적인지 모른다”며 “그래서 본질적인 내용을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패러디인데 왜 그러느냐고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 안에 얽힌 진짜 이야기를 알려고 하는 이들도 있었기에 내가 지금 이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것”라고 답했다.기자가 ‘일각에선 당신이 과거 방송에서 아시아인 인종차별로 여겨지는 눈을 찢는 행위를 한 것을 두고 당신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한다’고 하자 오취리는 “스페인의 못생긴 얼굴 대회 이야기가 나왔을 때 단지 얼굴을 최대한 일그러뜨리려고 한 것”이라며 “난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데 왜 한국인을 비하하겠는가”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이게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안 좋게 받아들였다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겠다”고 덧붙였다. 오취리는 ‘Black Live Matter(흑인의 삶도 소중하다)’ 캠페인이 한국에서도 지지를 받은 데 대해 “한국에서 흑인과 관련한 움직임이 이렇게 큰 반응을 얻은 건 거의 처음이라 기분 좋게 놀랐다”며 “10년 전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하면 지금과 같은 반응이 나왔을지 의문이라는 점에서 내가 몇 년 동안 노력한 일이 결실을 맺은 것처럼 보였다”고 강조했다.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 1세대 안경디자이너의 쇼핑팁 “안경에 담긴 스토리를 보세요”

    1세대 안경디자이너의 쇼핑팁 “안경에 담긴 스토리를 보세요”

    “안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물건입니다. 시력을 교정해 주는 것은 물론 그것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똑바로 보고, 지식을 더 쌓게 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안경이 계몽, 나아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상징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종필 디자인샤우어 대표는 대한민국 1세대 안경 디자이너다. 안경 디자이너라는 직업 자체가 생소했던 1996년 덜컥 이 세계에 뛰어든다. 지금은 없어진 회사인 서전안경이 주최한 안경 디자인 공모전에서 대상을 탔던 것이 계기였다. 이후 25년간 ‘안경 외길’을 걷고 있는 그를 지난 7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공방에서 만났다. ‘김종필안경’은 철저한 수작업으로 만들어진다. 처음에는 단순히 ‘돈이 없어서’ 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공장에 맡기려면 최소 100개 이상은 찍어 내야 하는데, 그럴 돈은 없었다고 한다. “디자인을 하니까 다양한 제품을 하나씩 만들어야 했어요. 공장에서는 안 만들어 주니 제 손으로 만들 수밖에요. 다행히 대학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해 손기술이 있었죠. 이후 수공예품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어요.” 그가 존경하는 디자이너는 프랑스의 필리프 스타르크(1949~)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오징어처럼 생긴 레몬즙 짜는 기구 ‘주시 살리프’로 유명해졌다. “그의 디자인에는 ‘위트’가 있어요. 위트는 예술을 일상의 것처럼 편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주죠. 안경은 일상품입니다. 안경이 마치 미술관에 있는 것처럼 현학적이고 어려워서는 안 돼요. 사석에서 하는 농담처럼 위트 있는 안경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는 한국의 안경산업이 위태롭다고 걱정했다. 그간 제조업 관점에서 안경산업에 접근했지만 중국에 따라잡혔다. “자국에 공장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경쟁력을 갖춘 이탈리아, 프랑스 모델을 고민해야 합니다. 늦었지만 결국 브랜딩, 기획력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뜻이죠. 한국인들은 머리가 좋아서 금방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는 요즘 ‘업사이클링’ 트렌드에 관심이 많다. ‘환경문제 해결에 동참한다’는 가치를 안경에 더하기 위해서다. 그는 안경이 더 나은 세상을 은유하고 있는 만큼 안경이 사회문제를 논한다는 것에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어떤 안경을 써야 하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품에 담긴 스토리를 보길 바랍니다. 요즘 안경 품질은 다 좋아져 거기서 거기입니다. 어떤 회사가 안경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지, 제품에 담긴 스토리를 좇다 보면 안경을 고르는 재미도 더 쏠쏠할 겁니다.”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집값 20~40%만 내면… 서울에 내 집 ‘연리지’ 열린다

    집값 20~40%만 내면… 서울에 내 집 ‘연리지’ 열린다

    20~30년간 4년마다 지분 추가로 취득주택담보대출 가능… LTV 40% 적용2028년까지 1만 7000가구 공급 목표5060세대 연금형 주택 ‘누리재’ 추진도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가 8·4 대책에서 발표한 지분적립형 분양주택의 브랜드를 ‘연리지홈’으로 정했다. SH공사는 12일 3040세대를 위한 연리지홈과 더불어 5060세대를 위한 연금형 주택 ‘누리재’, 2030세대를 위한 청년창업자 지원 도전숙 ‘에이블랩’을 발표했다. 8·4 대책에서 새로운 공공주택 모델로 공개된 지분적립형 분양주택은 2028년까지 1만 7000가구를 공급하는 게 목표다. 분양가의 20~40%로 내 집을 마련한 후 20~30년간 4년마다 지분을 추가로 취득하는 구조다. 남은 공공 지분만큼 임대료를 내야 한다. 김세용 SH공사 사장은 “기존에 소득 1∼4분위를 대상으로 임대주택, 7분위 이상을 대상으로 일반 분양을 공급했는데 지분적립형은 그동안 빠졌던 5∼6분위를 대상으로 한다”고 설명했다. SH공사는 지분적립형 분양주택도 주택담보대출이 가능하도록 만들겠다고 밝혔다. 천현숙 SH도시연구원 원장은 “주택담보대출을 할 때 주택담보대출비율(LTV) 40%를 최초 취득한 지분에 적용할 것”이라고 했다. 분양가의 40%를 취득하면 16% 수준까지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설명이다. 이어 “한국인들이 생애 최초 주택을 마련할 때 대출받는 비율이 38% 정도라는 통계가 있다”며 “반대로 60% 정도는 자기 돈으로 부담한다는 뜻이므로 초기 지분 부담이 과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지분적립형 분양주택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빠르면 10월쯤 사업 대상지와 모델이 결정된다. 김 사장은 추첨제와 가점제 여부, 사업장으로 고려하는 부지, 초기 취득 지분 비중과 관련한 질문에 국토교통부와 협의를 거쳐야 한다면서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50~60대 장년층을 위한 누리재는 자율주택정비사업에 참여하는 노후 주택을 가진 집주인이 주택을 공공에 매각한 후 살면서 매각 대금에 이자를 더한 돈을 10~30년간 연금으로 수령하는 것이다. 2억 7700만원짜리 주택의 경우 보증금과 월임대료를 공제한 후 월 66만~77만원을 받을 수 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씨줄날줄] 샘 오취리의 ‘절규’/김상연 논설위원

    [씨줄날줄] 샘 오취리의 ‘절규’/김상연 논설위원

    샘 오취리의 지적이 없었다면 나도 그 사진을 보고 그저 ‘킥킥’ 웃었을 것이다. ‘녀석들, 준비 많이 했네’라며 짓궂었던 고교 시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올해도 의정부고 학생들은 재미난 졸업사진들을 찍었다. 지난 3일 페이스북에 올린 ‘관짝소년단’ 패러디 사진도 그것이다. 관짝소년단은 아프리카 가나의 한 장례식에서 상여꾼들이 관을 들고 유쾌하게 춤을 추는 영상이 세계적으로 퍼진 이후 한국에서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BTS)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의정부고 3학년생 5명은 올해 졸업사진에서 해당 영상에 나온 관짝소년단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 냈다. 완벽한 모방을 위해 얼굴에 검은 칠도 했다. 그 사진이 나온 직후 일각에서 ‘블랙페이스’(black face)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블랙페이스는 흑인을 흉내 내기 위해 얼굴을 검게 칠하는 것으로, 1960년대 미국 인권 운동 영향으로 중단됐고 현재도 인종차별로 금기시된다. 논란은 가나 출신 연예인 오취리가 가세하면서 폭발했다. 오취리는 6일 인스타그램을 통해 “저희 흑인들 입장에서 매우 불쾌한 행동입니다”라고 비판했다. 그러자 ‘한국인’들은 오취리의 과거 행실까지 끄집어내며 “니네 나라로 가라”고 들고 일어났다. 역풍이 거세자 오취리는 7일 “물의를 일으킨 점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그의 사과문을 보면서 승리감보다는 열패감이 들었다. 그를 비판했던 한국인들도 마냥 속시원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 찜찜함은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 사실 오취리는 맞는 말을 했고, 우리는 우리의 아픈 곳을 찔려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우리’ 중 일부는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해야 겠는데 그의 메시지 자체는 틀린 게 없으니 그가 말하는 태도를 지적하고 나서기도 했다. 오취리가 한글 메시지와 함께 올린 영어 메시지를 끄집어 낸 뒤 거기에 담긴 무지(ignorance)라는 단어가 한국인을 비하하려는 의도였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무지는 문맥상 한국인이 어리석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행위가 인종차별인지에 대해 한국 사람들이 별로 관심이 없고 잘 모른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결국 오취리의 주장은 한국 사람들이 인종차별을 좀더 민감하게 여겨 달라는 호소, 그리고 자라나는 아이들이 무심코 그런 행동을 하지 않도록 어른들이 잘 가르쳐달라(educate)는 호소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한국에 살면서 한국 사람들의 인기를 먹고 살아야 할 외국 출신 연예인이 무슨 이득이 있어서 한국 사람들을 대놓고 비하하겠는가. 우리 사회는 학력차별, 지역차별, 성차별에는 민감하지만 인종차별에는 둔감하다. 오랫동안 ‘단일 민족’ 국가였기 때문이다. 반면 선진국에서 인종차별은 가장 심각한 차별로 간주된다. 미국에서 경찰에 의해 사망한 흑인 한 명(조지 플로이드)을 위해 아무런 관련도 없는 유럽의 축구장이 애도를 표할 정도다. 우리가 못 먹고 못살 때는 인종차별적 행위를 해도 외국에서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강국에 케이팝 등 문화강국으로 선진국 대접을 받는다. 길거리에서 쉽게 외국인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국제화됐다. 모두가 주목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오취리의 지적을 꼭 기분 나쁘게 들을 필요는 없다. 우리를 선진국으로 간주하면서 우리에게 선진국 국민다운 수준 높은 매너를 요구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취리의 비판을 “이번 기회에 인종차별에 대해 경각심을 갖자”며 쿨하게 받아들였으면 어땠을까. 오취리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한국 사람들,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네.´ carlos@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셰익스피어 작품 최초 소개 광고

    [근대광고 엿보기] 셰익스피어 작품 최초 소개 광고

    ‘영국 대문호 사옹(沙翁) 만년 대저(大著) 사극 마구베스.’ 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를 극장 ‘유락관’에서 공연한다는 1917년 7월 11일자 매일신보 광고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이 국내에 제대로 소개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광고 속의 맥베스는 1917년 미국 존 에머슨 감독이 만든 무성영화다. 셰익스피어는 1616년에 사망했으니까 사후 301년 만이다. 1906년에는 새뮤얼 스마일스의 ‘자조론’ 번역본에서 ‘세이구스비아’로 처음 언급됐다고 한다. 이후 셰익스피어는 ‘索士比亞 (색사비아)’, ‘酒若是披霞(주약시피하)’ 등으로도 표기됐다. 유락관은 1915년 9월 경성 중구 본정(本町) 1정목(一丁目), 지금의 명동 밀리오레 자리에 세워진 일본인 전용 상설영화관이었다. 남촌으로 불리는 당시의 명동과 충무로 지역은 일본인 거주지이자 상권의 중심지였다. 이 광고가 한글과 한자로 제작된 것을 보면 특정 계층의 한국인들도 유락관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광고에 설명자, 즉 변사 3명이 소개되어 있는데 모두 일본에서 활동하던 일본인이다. 관람료는 1등석 2원, 2등석 1원, 3등석 50전이다. 당시에 쌀 한 가마니 가격이 5원 안팎이었다. ‘200만 원의 작품을 사소한 50전으로 관람할 수 있다’고 과대 홍보하고 있다. 제작비가 200만 원이었까. 倫敦(윤돈·런던)에서 최저 2파운드, 紐育(뉴육·뉴욕)에서 최저 10달러, 도쿄 제국극장에서 5원의 관람료를 받는 작품이라고도 했다. 일본인 극장은 두 개가 더 있었다. 한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인 경성고등연예관은 1910년 현재의 서울 을지로 옛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 들어섰는데 1915년 세계관으로 개칭됐다. 다른 하나인 대정관은 지금의 중구 인현동 1가에 있었다. 대정관을 세우고 운영한 일본의 니타상회가 나중에 경성고등연예관을 사들이고 유락관까지 세워 세 극장을 모두 운영했다. 유락관은 관객 정원이 1000여명에 이르던 남촌의 대표 극장이었다. 1918년부터는 희락관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영화를 상영했고 1945년 광복 직후 소실돼 없어졌다. 지금도 밀리오레가 있는 땅의 지가가 전국에서 가장 비싸듯이 희락관이 있던 곳은 당시에도 입지가 가장 좋은 곳이었다. 길 건너 남산 기슭은 왜성대라고 불리던 곳으로 경복궁 자리로 옮겨가기 전까지 조선총독부 청사가 있었다. 그 주변 예장동 일대는 일본인의 집단 거주지여서 일인들에게 접근성이 좋은 곳이었다. 부산에도 유락관이 있었다. 일본인 전관거류지(全管居留地·일본인이 모여 사는 마을)가 확대되면서 1922년 동구 좌천동에 유락관이 들어섰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금요칼럼] 역사 갈등의 끝판/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금요칼럼] 역사 갈등의 끝판/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며칠 전 누군가 내게 물었다. “교수님, 한일 양국의 역사 문제는 언제쯤 해결될까요?” 답답하기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골똘히 생각하는데 20년 전 대학생들과 함께 만든 책 한 권이 떠올랐다. ‘아버지, 난 누구예요’(궁리, 2000). 지금은 중년이 된 그 당시 청년들이 두 나라의 역사적 갈등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알려 주는 글도 여럿이었다. 책에서 어느 학생은 자기 집안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의 큰아버지가 일본으로 징용을 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비극이었다. 한 시골 마을에 일제의 파출소(‘지서’)에서 심부름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는 상부의 명령대로 일본어를 아는 사람들의 명단을 만들었다. 얼마 후 그 명단에 이름이 적힌 사람은 모두 일본으로 끌려갔다. 학생의 큰아버지도 그렇게 군수공장으로 잡혀갔단다. 세월이 흘러 해방은 왔으나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하필 그가 탄 귀국선이 침몰했단다. 얼마 전까지도 가슴 저린 이런 이야기를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책에서 다른 학생도 동의했듯,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일본의 악랄한 침략 행위를 고발하는 슬픈 이야기가 너무 많아 한국 사람이 일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했다. 동시대 일본의 시민들은 강점기에 한국인이 겪은 부당한 고통을 과연 짐작이나 했을까. 우리 책에는 서울로 유학 온 일본 학생도 등장한다. 그는 그런 역사를 한 번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그 유학생은 대중매체를 통해 한국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이 전부였다며 매우 충격적인 한 가지 기억을 상세히 소개했다. 1990년대 초반 텔레비전에서 본 장면이었다. ‘위안부’ 문제로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에서 항의하던 시민들이 이토 히로부미의 초상화가 그려진 1000엔짜리 일본 화폐를 불태우고, 이토의 얼굴을 짓밟았다. 지폐에 초상화가 등장할 정도면 대단한 위인인데 한국인들이 저렇게 함부로 모욕해도 되는가 싶었단다. 이렇듯 20년 전 한일 양국의 청년들은 역사적 기억을 공유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 그들이 미래에 거는 기대만은 똑같았다. 일본인 유학생은 과거사를 언급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불쾌감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양국이 공동의 역사 인식을 토대로 관계를 개선하기 바란다는 소망이었다. 한국 대학생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 역시 한일 양국 시민이 역사적 진실을 공유하게 되기를 소망했다. 세월은 흘러 우리 책이 나온 지 20년이 지났다. 그사이 양국 관계는 더 나빠졌다. 진실을 왜곡하며 양국의 화해를 가로막는 사람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근자에 서울의 교수 한 사람이 일본의 우익 잡지에 글을 실어 물의를 빚었다. 그는 징용 간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자원한 경우가 태반이라고 했다. 또 위안부도 취업 사기를 당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과연 역사의 진실이라는 말인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본에도 양심적인 역사연구자가 상당수 있다는 사실이다. 위안부 문제만 해도 일제강점기의 정치·사회적 배경을 고려해야 본질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2015년 5월, 16개의 일본 학술단체가 공동성명서를 발표해 위안부의 강제연행은 이미 실증된 사실이라고 밝혔다. 정말 딴 세상의 이야기지만 요하네스 라우 독일 대통령의 20여년 전 발언이 주목된다(1999년 12월 17일). “독일 국가와 기업은 과거의 범죄행위에 대해 연대책임을 져야 합니다.” “저는 오늘 독일의 지배 당시에 노예노동, 강제노동을 강요당한 모든 사람을 기억하며 독일 민족의 이름으로 용서를 빕니다.” 라우 대통령은 나치 독일이 폴란드에 저지른 죄악을 고백하며 화해를 청했다. 언제쯤이면 일본에도 이처럼 용감하고 책임감 있는 지도자들이 등장할 것인가.
  • 한인대상 미 여론조사 “한미동맹은 양국 이익”…일방 보호의 시대는 끝났다

    한인대상 미 여론조사 “한미동맹은 양국 이익”…일방 보호의 시대는 끝났다

    미 싱크탱크 CCGA, 한국인 설문조사한미동맹 양국 모두 이익 응답 64%미국 이익 25%, 한국 이익은 7%뿐“일방적인 주한미군 철수발표 한다면미국이 한국 방어한다는 신뢰 약화”한국인들은 한미동맹을 양국 모두 이익이라고 인식하는 것으로 여론조사 결과 나타났다. 미국이 한국을 대가없이 보호해주는 시대는 지났다는 의미다. 또 미국이 일방적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발표한다면 대미 신뢰 약화로 이어질 것으로 분석됐다. 미국의 여론조사 전문 싱크탱크인 시카고국제문제협의회(CCGA)는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원으로 지난 6월 23~25일 한국 성인 1000명을 조사해 지난 3일(현지시간) 설문결과(신뢰도 91%·표본오차 ±3.1%)를 발표했다. 우선 ‘한미동맹을 지지한다’는 응답은 90%로 직전 조사(2019년 12월)의 92%와 비슷했다. ‘한미동맹을 반대한다’는 응답도 7%에서 8%로 변해 큰 변화는 없었다. 한미동맹의 성격에 대해서는 ‘양국 모두에 이득이 된다’는 응답이 64%로 가장 많았다. ‘대부분 미국에 이익’이라는 응답이 25%로 ‘대부분 한국에 이익’(7%)이라는 답변보다 3배 이상 많았다. ‘양쪽 모두 이득이 안된다’는 답변은 2%였다. 직전 설문과 비슷한 결과로, 과거에 주로 미국에서 한미동맹에 대해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베푸는 관계라고 생각했다면, 현재 한국에서는 양국이 서로 이익을 주고 받는 개념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한국의 국력이 성장했다는 의미기도 하다. 미국에서도 한미동맹에 대한 개념이 ‘양국 공통의 이익’으로 변화하는 추세다. 지난 4월 미국 상원의 민주당 의원들은 “한국과의 건강하고 튼튼하며 굳건한 동맹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안보 이익을 위한 린치핀(linchpin·핵심축)”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같은 맥락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상식 이상의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한국 입장에서는 주한미군의 주둔이 한국만의 이익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이번 설문에서 주한미군의 장기 주둔에 대해 ‘지지한다’는 응답은 74%였다. CCGA는 “미군의 한국 장기주둔에 대한 지지가 꾸준하다”며 “미국에 의한 일방적이고 조율되지 않은 미군 철수 발표는 미국이 한국을 방어할 것이라는 신뢰와 약속에 대한 확신을 침식시킬 수 있다”고 분석했다. 워싱턴 이경주 특파원 kdlrudwn@seoul.co.kr
  • 고관대작 집이었다는데… 옹기종기 한옥은 ‘조선 건축왕’ 항일의 상징

    고관대작 집이었다는데… 옹기종기 한옥은 ‘조선 건축왕’ 항일의 상징

    호기심이 없으면 질문이 없고, 질문이 없으면 새로운 발견도 있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낯익은 것을 낯설게 보기 위한 시도는 새로운 앎과 그걸 통한 성찰의 필수 조건이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20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0회 ‘삼청동’ 편이 지난 1일 삼청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이번 투어는 잘 알려진 곳을 대상으로 했다. 지극히 평범하기에 그래서 더 놀라운 발견이 가능한 곳, 굳이 서울 사람이 아니어도 모르는 이 없는 서울 북촌이 이번 대상지였다. 맹사성 대감의 집터를 포함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한옥 등 조선 시대의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전통문화를 이어 왔다고 알려진 서울 북촌. 과연 북촌은 그렇기만 한 곳일까.장맛비가 내리는 가운데 진행한 이번 투어는 이동은 최소화하되 공간의 맥락은 조금 더 깊게 살펴볼 수 있도록 코스를 잡았다. 시작점은 북촌의 터줏대감 격인 정독도서관. 유심히 살펴보면 현관에 한자로 ‘正讀圖書館’(정독도서관)이라고 걸려 있는 글씨체가 어딘가 낯익다.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다. 놀랍게도 서울도시계획의 대전환과 관련 있는 흔적이다. 1968년은 그야말로 남북 갈등의 최정점을 찍던 해였다. 그해 1월 21일 김신조 등 30여명으로 구성된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 초입까지 잠입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바로 이틀 뒤엔 원산 앞바다에서 작전 중이던 미 해군 함정 푸에블로호와 북한군 간에 교전이 벌어진 끝에 1명의 사망자를 포함한 83명의 승조원 모두가 납치돼 끌려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더욱이 그해 말에는 울진과 삼척에 100명이 훌쩍 넘는 무장 공비가 들어와 쑥대밭을 만들어 버리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남북 충돌이 전방만이 아니라 청와대 앞에서, 그리고 경북 지역에서까지, 심지어 미군과의 사이에서도 벌어진 것이었다.●美 남북 충돌에 무관심… 자력갱생 계기로 문제는 미국의 반응이었다. 당시 한국은 미국을 위해 연인원 30만명이 넘는 장병을 베트남에 파병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미국은 한반도에서 벌어지던 이 극한 대결의 순간에 별다른 제스처를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이었는데 주요 쟁점이 베트남전에서 가능하면 빨리 발을 빼는 것이었다. 베트남전 조기 종식을 내걸고 당선된 리처드 닉슨 입장에서는 유권자들의 의지를 거슬러 섣불리 확전을 결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을 비롯해 한국민들은 국제 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1968년이면 6·25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15년 정도밖에 안 됐을 때다. 서울 시민의 뇌리에 각인돼 있던 전쟁의 기억 중 가장 강렬했던 것은 도강할 수단이 만만치 않다 보니 피난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던 현실이었다. 그런 면에서 1968년에 연이어 벌어진 일련의 사태들은 시민사회에 분노와 함께 공포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결국 정부가 나서서 시작한 것은 행여 있을지 모를 전쟁과 피난에 대비해 서울 인구의 상당수를 미리 한강 이남으로 분산시키는 것. 당시 영동지구라 불렀던 지금의 강남 개발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다만 문제는 누구도 강남 이주를 원치 않았던 데 있었다. 개발 도상에 있던 나라의 특성상 중산층을 중심으로 자녀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마련해 주기를 염원하고 있었기에 명문고가 있는 강북을 떠나 강남으로 이주하기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바로 그때 나선 게 박 전 대통령을 위시한 정부와 서울시였다. 당시 최고의 명문고로 이름 높았던 경기고 관계자들을 설득해 지금의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겨 가는 데 동의를 얻어 냈고, 이후 휘문고와 서울고를 비롯한 명문고들이 강남 일대로 이전해 가게 된다. 그 뒤 벌어진 것은 누구나 아는 이른바 ‘말죽거리 신화’. 한국 사회가 걸어온 남북 대결의 역사를 소리 없이 웅변하는 증거물인 정독도서관이 바로 옛 경기고의 본관 건물이고, 그런 공간이기에 박 전 대통령의 글씨가 남은 것이다. 서울의 경우 평균적으로 지가가 높은 강남과 목동 등이 기본적으로는 학군의 문제와 직결돼 있는 듯하지만, 동시에 남북 분단이라는 현실에서도 자유롭지 않음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다.●1968년 김신조 트라우마로 생긴 연막탄 지주 정독도서관에서 발걸음을 조금 옮기면 또 다른 흔적도 만날 수 있다. 삼청로를 건너 팔판길 16과 30, 31을 연이어 지나다 보면 전봇대처럼 보이지만 전봇대는 아닌 구조물을 만나게 된다. 북촌과 청운동 등 청와대 주변 골목 사이에 있는 연막탄 지주들이다. 대통령 경호와 청와대 경비를 위해 낮에는 연막탄 발사대 지주로, 밤에는 조명탄 발사대 지주로 이용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시설물들이다. 총 68개의 연막탄 지주가 확인됐는데 그중 북촌 일대에 산재한 12개의 지주가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됐다. 물론 1968년의 트라우마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혈맹이라고 늘 혈맹일 수 없음을 인식한 한국은 스스로 힘으로 일어서야 했고, 그 과정에서 장교들을 양성하기 위해 제2, 제3사관학교를 개교했고, 후방에서의 군사적인 대응을 위해 제대한 군인들에게 지역 방위를 맡기는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여성들을 중심으로 반상회를 조직했으며, 교련이란 이름의 교과목을 만들어 학생들도 전쟁에 대비하게 했다. 평상시에는 차량 소통의 목적으로 쓰지만, 유사시엔 각각 십수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방공호 성격의 남산 1, 2호 터널을 팠고, 북쪽 주요 교통로와 하천에 대전차장애물을 설치했으며, 국방과학연구소를 설립해 직접 신무기 개발에 나섰다. 남북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언제 벌어져도 하등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준비한 응전의 증거물들이 북촌 한옥마을 사이사이에 박혀 있을 줄이야. 낯익은 것을 낯설게 보려 할 때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새로운 발견들이다. 그러고 보면 북촌의 한옥도 자세히 한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몇 안 되는 한옥을 제외한 한옥들이 너무나 비좁아 보이지는 않는가. 북촌로5나길 84 정도의 위치에 서서 한옥 지붕들을 조망하거나 한옥 카페나 식당에 들어가 보면 그야말로 다닥다닥 옹기종기 밀집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고관대작의 주거지로 이름 높았던 북촌이라고 들었는데 그들이 살았던 한옥이 이렇게 작다? 사실 북촌뿐만 아니라 서울 시내 한옥 대부분은 근대의 유산들이다. 북촌로11가길 41 일대를 비롯해 계동길 100-8 일대의 한옥 밀집 지역이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돼 있는데, 이들 역시 일제강점기였던 1930~40년대의 한옥들이다. 물론 일제강점기의 한옥이라고 해서 중요성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통의 멋스러움과 근대적인 재료와 기능이 결합해 탄생한 새로운 양식으로서 의미가 있다. 나아가 한옥이 이렇게 작아진 연유를 알게 되면 오히려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애초 대형 한옥들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 북촌에 이렇게 작은 한옥들이 많아진 것은 정세권(1888~1965)이라는 부동산 개발업자가 내린 고민의 결과다. 그는 단순히 사업 수완만 좋았던 게 아니라 물산장려운동에 앞장서고 조선어학회에 건물을 지어 기부하는 등 민족정신도 지닌 인물이었다. 그에게 걱정은 대대로 조선인들의 공간이었던 북촌에까지 일본인들의 주거지가 확장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거대 한옥 부지를 사들여 필지를 쪼갠 뒤 상대적으로 빈약한 조선인의 경제력으로도 살 수 있는 소형 한옥을 지어 파는 것이었다. 그 노력의 흔적이 북촌 일대를 포함해 익선동과 성북동, 창신동, 행당동, 왕십리 등 서울 전역에 펼쳐져 있는 근대식 한옥들이다.●1987년 6·10 민주항쟁으로 헌법재판소 탄생 이번 투어의 종착점은 대통령 탄핵 사건을 거친 뒤 한국인이라면 그 존재를 모르는 이가 없을 헌법재판소였다. 과연 지극히 현대적인 건물이자 기관인 헌재가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된 까닭은 무엇일까. 한국은 광복 이래 삼권 분립을 한다고는 했으나 늘 대통령에 의한 독재가 횡행했던 게 사실이다. 남북 분단의 상황에서 늘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힘이 쏠렸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독재 정권에 힘없이 협조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를 거쳐 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인권 신장과 개인의 자유 증진을 위한 민주화운동이 한시도 멈춘 적이 없었다. 그렇게 피나는 노력의 결과 결국 1987년 6·10민주항쟁을 통해 쟁취해 낸 게 지금의 헌법이다. 또 그 헌법을 토대로 법치주의를 실현해 나가며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을 최종적으로 견제하고 심판하기 위한 기구로서 출범시킨 게 헌재였다. 광복 후 남북 분단이라는 뜻하지 않은 상황이 잉태한 부조리들 속에서 각종 모순을 극복하고자 쉼 없이 달려온 지난 70여년…. 보통 역사 답사를 위해 헌재를 찾을 때면 재동 백송에 시선을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의 오늘과 내일의 민주주의와 관련해 헌재가 갖는 의미를 이해한다면 북촌 투어의 마지막 방문지로 삼을 만하지 않을까. 일상에 매몰되면 내 일상 그 이상도 이하도 보이지 않는다. 또 낯익은 것을 낯익게만 대하면 그 어떤 새로운 지식과 성찰도 불가능하다. 휴가철이라고 해서 꼭 멀리 떠날 게 아니라 내게 익숙했던 공간을 낯선 시각으로 보려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동안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고민과 숙고의 순간을 맞이한다면 그만큼 훌륭한 여행도 없을 듯싶다. 글 권기봉 ‘다시, 서울을 걷다’ 저자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다음 일정: 제11회 서울의 영화(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 ●출발 일시: 8월 8일 오전 10시 마로니에공원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미국보다 안전할 것 같아 한국행, 2주간 격리 경험해보니”

    “미국보다 안전할 것 같아 한국행, 2주간 격리 경험해보니”

    미국이 한국만큼 안전하지 않아 14일의 호텔 격리쯤은 감수하겠다며 한국행을 결행한 미국 젊은이가 한국의 격리 생활 관리가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26일 비즈니스 인사이더 닷컴에 따르면 음악인 피치(19)가 미국을 떠나기로 마음 먹은 것은 코로나19 감염증이 전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인종차별 항의 시위가 잠잠해지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지난달 시위 도중 경찰들과 여러 차례 맞닥뜨렸는데 통금인데도 귀가 길을 막는 등 정나미가 떨어지게 했다. 거리에 나가면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여러 모로 한국이 미국보다 안전할 것 같았다. 하던 일 때문에 한국인 몇 명을 만나야 했던 것도 한국행 결심을 굳히게 했다. 그렇게 관광 비자로 체류할 수 있는 3개월 머무를 심산으로 출국했다.처음에는 아이슬란드를 생각했는데 미국인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서울에 가면 2주 동안 격리돼야 해 호텔에서의 격리 비용을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뉴욕 공항에서부터 격리되는 비용을 본인이 부담하고 나중에 귀국해서라도 문제 삼지 않겠다는 각서를 쓴 뒤에야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2000달러쯤 된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격리를 끝내고 나서 지불한 돈은 1500달러였다. 대한항공 여객기를 탔는데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옆 좌석에는 아무도 앉지 않게 자리가 배정돼 있었다. 인천공항에 착륙한 뒤 서류를 작성하고 어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 받아 매일 증상이 발현되는지를 체크하게 했다. 한국인 후견인이 있어야 한다며 서울의 친구 전화번호를 적게 했다. 당국 요원은 공항에 있는 동안 그 친구와 통화까지 해 맞는지 확인했다. 피치는 “격리된 매일 증상이 나타나면 기록을 남기라고 하고 작은 온도계를 줘서 체온을 측정하게 한 뒤 결과를 보내도록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엄청 빨리 곧바로 전화를 걸어왔다”고 말했다. 공항에서 격리 호텔로 오는 버스 안에는 4명이 더 있었다. 15분을 달려 호텔에 도착했다. 영종도의 호텔이 아닌가 싶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바이러스 검사를 했는데 음성 판정이 내려졌다. 모두가 의료장구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방호복 비슷한 차림을 갖추고 매우 주의깊게 일처리를 한다는 느낌을 줬다. 그는 “그들이 모든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이런 일은 사람들이 “정부 말을 믿지 않는” 미국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객실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그렇게 참담하지 않았다. 세 끼니 식사와 넉넉한 주전부리를 문 앞에 갖다 줬고 와이파이와 음악 등 소일거리를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음식 맛은 별로였지만 양은 충분했다. 음악을 만들고 한국어를 배우고 가상공간에서 친구들을 사귀고 넷플릭스 영화를 즐겼다. 여행을 갈망한다면 그는 객실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자신이 충분히 즐기고 감당할 수 있겠는지 따져보라고 조언했다. 피치는 또 틱톡에 자신의 격리 생활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올려놓아 다른 이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에서의 격리 생활이 나쁘지 않았고 틱톡을 통해 확인한 다른 이들도 비슷했기 때문에 한국은 여행할 만한 나라란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한 소녀는 인천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호텔에서 격리 생활을 견뎠는데 정부가 의무적으로 실행하는 격리란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고 털어놓았다. 지난 2월 첫 한국 방문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는데 틱톡에 브이로그를 재개했다. 사람들이 질문하면 그는 답을 해줬다. 그는 한국이 대다수 나라보다 안전한 나라라고 생각하지만 당장의 안전 위험과 격리 비용 때문에 모든 이들이 즉각 여행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했다. 솔직히 그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아이디어를 주고 싶지 않다. 사람들에게 여기 오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여기 한국이 ‘약간 천국’이라고 해서 모두가 자기 나라를 떠나 이곳에 오라고 부추길 수는 없다. 모두가 여기 오는 게 좋은 생각이라고 보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미국보다 안전할 것 같아 한국행” 뮤지션 피치의 2주 격리 결산

    “미국보다 안전할 것 같아 한국행” 뮤지션 피치의 2주 격리 결산

    미국이 한국만큼 안전하지 않아 14일의 호텔 격리쯤은 감수하겠다며 한국행을 결행한 미국 젊은이가 있다. 26일 비즈니스 인사이더 닷컴에 따르면 음악인 피치(19)가 미국을 떠나기로 마음 먹은 것은 코로나19 확산이 전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인종차별 항의 시위가 잠잠해지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지난달 시위 도중 경찰들과 여러 차례 맞닥뜨렸는데 통금인데도 귀가 길을 막는 등 정나미가 떨어지게 했다. 거리에 나가면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여러 모로 한국이 미국보다 안전할 것 같았다. 하던 일 때문에 한국인 몇 명을 만나야 했던 것도 한국행 결심을 굳히게 했다. 그렇게 관광 비자로 체류할 수 있는 3개월 머무를 심산으로 출국했다. 처음에는 아이슬란드를 생각했는데 미국인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서울에 가면 2주 동안 격리돼야 해 호텔에서의 격리 비용을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뉴욕 공항에서부터 격리되는 비용을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으니 나중에 귀국해서라도 문제 삼지 않겠다는 각서를 쓴 뒤에야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2000달러쯤 된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격리를 끝내고 나서 지불한 것은 1500달러였다. 대한항공 여객기를 탔는데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옆 좌석에는 아무도 앉지 않게 자리가 배정돼 있었다. 인천공항에 착륙한 뒤 서류를 작성하고 어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 받아 매일 증상이 발현되는지를 체크하게 했다. 한국인 후견인이 있어야 한다며 서울의 친구 전화번호를 적게 했다. 당국 요원은 공항에 있는 동안 그 친구와 통화까지 해 맞는지 확인했다. 피치는 “격리 내내 매일 증상이 나타나면 기록을 남기라고 하고 작은 온도계를 줘서 체온을 측정하게 한 뒤 결과를 보내도록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엄청 빨리 곧바로 전화를 걸어왔다”고 말했다. 공항에서 격리 호텔로 가는 버스 안에는 4명이 더 있었다. 15분을 달려 호텔에 도착했다. 영종도의 호텔이 아닌가 싶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바이러스 검사를 했는데 음성 판정이 내려졌다. 모두가 의료장구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방호복 비슷한 차림을 갖추고 매우 주의깊게 일처리를 한다는 느낌을 줬다. 그는 “그들이 모든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이런 일은 사람들이 “정부 말을 믿지 않는” 미국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객실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그렇게 참담하지 않았다. 세 끼니 음식과 충분한 주전부리를 문 앞에 갖다 줬고 와이파이와 음악 등 소일거리를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봉지 안에 쓰레기를 담아 문 앞에 놔두면 가져갔다. 음식 맛은 별로였지만 양은 충분했다. 음악을 만들고 한국어를 배우고 가상공간에서 친구들을 사귀고 넷플릭스 영화를 즐겼다. 여행을 갈망한다면 그는 객실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자신이 충분히 즐기고 감당할 수 있겠는지 따져보라고 조언했다. 피치는 또 틱톡에 자신의 격리 생활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올려놓아 다른 이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에서의 격리 생활이 나쁘지 않았고 틱톡을 통해 확인한 다른 이들도 비슷했기 때문에 한국은 여행할 만한 나라란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한 소녀는 인천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호텔에서 격리 생활을 견뎠는데 정부가 의무적으로 실행하는 격리란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고 털어놓았다. 지난 2월 첫 한국 방문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는데 틱톡에 브이로그를 재개했다. 사람들이 질문하면 그는 답을 해줬다. 그는 한국이 대다수 나라보다 안전한 나라라고 생각하지만 당장의 안전 위험과 격리 비용 때문에 모든 이들이 즉각 여행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했다. 솔직히 그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아이디어를 주고 싶지 않다. 사람들에게 여기 오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여기 한국이 ‘약간 천국’이라고 해서 모두가 자기 나라를 떠나 이곳에 오라고 부추길 수는 없다. 모두가 여기 오는 게 좋은 생각이라고 보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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