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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혼학칙으로 학교 떠난 ´원조 체조 요정´ 50년만에 이대 졸업

    금혼학칙으로 학교 떠난 ´원조 체조 요정´ 50년만에 이대 졸업

     기혼자의 재학을 허락하지 않는 ‘금혼학칙’ 때문에 아쉽게 학교를 떠나야 했던 ‘원조 체조요정’이 50여년 만에 졸업장을 가슴에 안게 됐다. 전직 기계체조 국가대표 출신 최영숙(69·여)씨가 그 주인공이다.  최씨는 1964년 도쿄올림픽, 1967년 도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남녀 국가대표 체조 선수로 동반 출전했던 강수일(73)씨와 1968년 9월 17일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화여대 재학생이었던 최씨는 기혼자에게 입학·졸업은 물론 편입학 자격도 제한돼있던 당시의 ‘금혼학칙’ 때문에 제적 통보를 받았다. 재일교포인 남편을 따라 일본에서 부족한 공부를 하기로 했지만 최씨는 아쉽고 허전한 마음이었다고 털어놨다. 결혼 후 일본으로 건너간 뒤에도 최씨는 체조를 잊지 않았다. 국제심판 자격증을 따서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리듬체조 심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2004년 이대의 금혼학칙은 폐지됐고, 최씨는 지난해 재입학을 했다. 졸업을 위해 필요한 8학점을 채우기 위해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틈틈이 강의를 들었고, 부족한 부분은 리포트로 보완했다. 학교 축제 때는 라인댄스 공연에 동참해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26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이대 교정에서 열린 학위수여식에서 최씨는 최고령 학부 졸업생으로 졸업장을 받게 됐다. 최씨는 “현역 시절 다른 상은 많이 타봤는데 졸업장은 이제야 받게 됐다”며 “행복하다”고 말했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서울포토] 졸업식에서도 ‘총장 사퇴’

    [서울포토] 졸업식에서도 ‘총장 사퇴’

    26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후기 학위수여식에 참석한 졸업생들이 ‘미래라이프 대학’ 사태와 관련해 총장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 ‘취업행’… 코스모스 졸업식에 걸린 현수막

    ‘취업행’… 코스모스 졸업식에 걸린 현수막

    25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에서 열린 2015학년도 후기 학위수여식에 참석한 한 졸업생이 영화 부산행을 패러디한 ‘취업생’ 현수막 앞을 지나가고 있다. 올해 들어 지난달까지 청년(15~29세) 실업률은 평균 10.6%로, 2000년대에 들어 처음으로 연간 실업률이 두 자릿수를 기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 [서울포토] ‘졸업이다~’

    [서울포토] ‘졸업이다~’

    25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에서 열린 2015학년도 후기 학위수여식에서 졸업생들이 졸업을 자축하며 학사모를 던지고 있다. 2016. 8. 25.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 [서울포토]서울대학교 70회 학위수여식

    [서울포토]서울대학교 70회 학위수여식

    26일 오후 관악구 서울대학교 체육관에서 열리 서울대학교 70회 학위수여식에서 성낙인 총장이 축사를 끝낸 서정화 총동창회장을 자리로 안내하고 있다.2016.02.16 강성남 선임기자
  • [서울포토]서울대학교 70회 학위수여식

    [서울포토]서울대학교 70회 학위수여식

    26일 오후 관악구 서울대학교 체육관에서 열리 서울대학교 70회 학위수여식에 졸업생과 가족들이 식장에 입장하고 있다.2016.02.16 강성남 선임기자
  • [서울포토]서울대학교 70회 학위수여식

    [서울포토]서울대학교 70회 학위수여식

    26일 오후 관악구 서울대학교 체육관에서 열리 서울대학교 70회 학위수여식에서 성낙인 총장이 식사를 하고 있다.2016.02.16 강성남 선임기자 snk@seoul.co.kr
  • [서울포토] 학사모 대신 히잡 쓰고 졸업식에

    [서울포토] 학사모 대신 히잡 쓰고 졸업식에

    26일 오후 관악구 서울대학교 체육관에서 열리 서울대학교 70회 학위수여식에서 외국유학생이 학사모 대신 히잡을 쓰고 학위수여식에 참석하고 있다.강성남 선임기자 snk@seoul.co.kr
  • 몽골인 서울대 졸업생 대표연설..“도전 함께 맞서자”

    몽골인 서울대 졸업생 대표연설..“도전 함께 맞서자”

    “2010년 한국에 왔을 때는 ‘김치’라는 단어밖에 몰랐지만,어렵게 돈을 벌며 공부해 2011년 장학금을 받아 서울대에 합격했다. 어려울 때 항상 좋은 것을 보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되새긴 덕”  이어 “동아리와 봉사활동을 하면서도 며칠 밤을 새워가며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이 보여주는 책임감을 바라보며 뜨거운 열정과 인간의 가능성을 알게 됐다”며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수많은 도전이 다가오겠지만 미래의 희망을 보고 꿈을 향해 함께 나아가자”고 말했다. 서울대 제 70회 전기 학위수여식의 졸업생 대표 연설자로 선정된 몽골 출신 정치외교학부 오강바야르(24)씨가 26일 이처럼 말했다. 2013년 서울대 외국인학생회장을 지낸 그는 한국에 연고가 없는 외국인 학생으로는 처음으로 서울대 졸업생 대표 연설자로 선정됐다.  그는 이어 “동아리와 봉사활동을 하면서도 며칠 밤을 새워가며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이 보여주는 책임감을 바라보며 뜨거운 열정과 인간의 가능성을 알게 됐다”며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수많은 도전이 다가오겠지만 미래의 희망을 보고 꿈을 향해 함께 나아가자”고 말했다. 이날 학사 2496명,석사 1786명,박사 688명 등 모두 4970명이 서울대 학위를 받았다.  성낙인 총장은 “우리가 선배들을 자랑스러워하듯 개교 100년,150년을 맞이하는 그날에 후배들이 우리를 자랑스럽게 여기게 하려면 발전을 위한 디딤돌을 착실히 쌓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성 총장은 셰익스피어 5대 희극인 ‘십이야’의 ‘위대함을 두려워하지 말라.어떤 사람은 위대하게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위대함을 성취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위대함이 맡겨진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졸업생을 격려했다.  그는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위대함은 몇몇 사람의 영웅적인 생각과 행동이 아닌 사회 각 분야의 여러 사람이 발휘하는 작은 위대함”이라고 강조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포토] 졸업식으로 북적이는 서울대학교

    [서울포토] 졸업식으로 북적이는 서울대학교

    26일 오후 관악구 서울대학교 체육관에서 열리 서울대학교 70회 학위수여식에 졸업생과 가족들이 식장에 입장하고 있다.강성남 선임기자 snk@seoul.co.kr
  • “서울대 공부벌레들과 생활… 외교관의 꿈 꼭 이룰것 같아”

    “서울대 공부벌레들과 생활… 외교관의 꿈 꼭 이룰것 같아”

    “한국도 몽골처럼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더라고요. 서울대에서 공부한다면 외교관의 꿈을 꼭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26일 열리는 서울대 제70회 학위수여식에서 졸업생 대표 연설을 하게 된 몽골인 유학생 오강바야르(24·정치외교학부 4학년). 그는 “한국의 공부벌레들과 정신없이 생활하다 보니 어느새 졸업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2013년 고려인 3세 홍야나(26·여) 이후 외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졸업생 대표 연설을 하게 된 오강바야르는 2010년 서울대 언어교육원에서 한국어를 배우며 서울대와 인연을 맺었다. 몽골에 있는 외국어중·고교에 다닌 것이 국제 문제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몽골은 면적이 한국의 7배에 이르지만 인구는 300만명밖에 안 돼요. 위로는 러시아, 아래로는 중국과 이웃하고 있으니 외교가 중요할 수밖에 없죠.” 유학생들은 교내외 활동에 소극적이기 쉽지만 오강바야르는 2011년 9월 서울대에 정식 입학한 이후 더 적극적으로 활동에 나섰다. 2013년 8월에는 인도네시아에서 해비탯(주거빈곤 퇴치사업) 봉사를 벌였고 지난해 12월에는 중국에서 사막화 문제를 살피기도 했다. 2014년 3월부터 서울대 외국인 학생회 회장을 지낸 그는 인권차별을 겪는 유학생과 인권센터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졸업 후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 내년에 국내에서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인 그에게 휴식 시간은 길지 않다. 그는 “한국으로 오는 몽골 친구들에게 따뜻한 선배가 되는 것도 제 목표”라며 한국과 몽골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 서울대학교 70회 학위수여식

    서울대학교 70회 학위수여식

    26일 오후 관악구 서울대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서울대학교 70회 학위수여식에서 성낙인 총장이 식사를 하고 있다.2016.02.16 강성남 선임기자 snk@seoul.co.kr
  • [서울포토]서울대학교 70회 학위수여식

    [서울포토]서울대학교 70회 학위수여식

    26일 오후 관악구 서울대학교 체육관에서 열리 서울대학교 70회 학위수여식이 열리고 있다.2016.02.16 강성남 선임기자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이영희 성균관대 교수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이영희 성균관대 교수

    깡촌 소작농의 아들 누나의 희생으로 진학 철도원으로 살다가 다시 주경야독육사에 붙고도 결핵으로 불합격그래도 내 결론은 도전박운상 선생님 덕에 물리학에 눈떠4년 만에 석·박사 탄소나노튜브 실험과 응용 연구나는 콧수염 학자 애벌레처럼 살 거야 “제가 원래 털이 빨리 자라는 편이에요. 철도원 생활을 하다가 스물두 살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공부를 오랜만에서 해서 그런가, 너무 재미가 있는 거예요. 공부에만 정신이 팔리니까 다른 일들은 다 귀찮아지더군요. 하루이틀 안 깎은 게 60이 넘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죠.” 콧수염의 역사를 묻자 이영희(61) 교수는 “사람들이 전공인 탄소나노튜브보다 이 털들을 더 궁금해하니 큰일”이라며 껄껄 웃었다. 경기 수원에 있는 연구실(성균관대 자연과학캠퍼스 물리학과)로 그를 만나러 간 지난 15일은 전국에 매서운 한파가 몰아친 날이었다.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물리구조연구단 단장을 겸하고 있는 이 교수는 7명의 교수, 30명의 박사후연구원 및 연구교수, 80명의 석·박사 과정 학생 등 120명에 이르는 대식구와 분주한 하루를 보낸다. “학생들 논문 지도 때문에 요즘 정신이 없다”며 약속 시간에 30분 늦은 데 대해 양해를 구했다. -1974년 2월의 어느 날 아침. 그날도 오늘처럼 추웠다. 기차를 타고 출근하며 메마른 창밖을 내다보는데 문득 ‘10년 뒤에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립철도고를 졸업하고 철도청에 들어간 지 한 달 정도 됐을 때였다. 인천 부평에서 누나 집에 얹혀살며 매일 근무지인 서울역으로 통근을 했다. 갑작스럽게 든 생각처럼 결론도 갑작스럽게 났다. ‘그래, 다시 공부를 하는 거야. 공부를 하다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리겠지.’ 그때 고민만 하고 끝났다면 지금쯤 난 한적한 시골역의 역장이 돼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그렇게 산 것도 나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중학교 때까지 전북 김제의 깡촌에서 자랐다. 논이 동네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누가 “이 동네에서 가장 못사는 집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누구라도 우리 집을 가리켰을 것이다. 부모님은 다른 사람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었다. 좀 더 정확히는 머슴에 가까웠지만. 그런 부모님을 보면서 초등학생 때 가진 꿈은 말을 타고 돌아다녀야 할 정도로 큰 농장을 갖는 것이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어린 사람에게까지 무시당하는 게 너무 싫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는 동네 형들하고도 주먹질을 할 정도로 괄괄한 ‘이씨네 말썽꾸러기’로 통했다. -원래 집안 사정이 안 좋기는 했지만 애들이 공부도 제대로 못 할 만큼 어려워진 것은 ‘딸깍발이’ 할아버지 탓이 컸다. 일제가 쳐들어와 양반들이 몰락하자 “왜놈들 세상에선 아무것도 안 한다”며 평생 돈벌이라곤 하지 않으셨다. 집 안에 먹을 게 다 떨어져 자식들이 굶고 있는데도 할아버지는 소신만 지키셨던 것 같다. 평생 힘들게 사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면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지금도 여전하다. 어려서 “할아버지 때문에 우리 집은 이게 뭐냐”고 대들다가 아버지나 삼촌들한테 맞은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 -가난한 집에 먹는 입은 많다고, 나는 3남 2녀 중 장남이었다. 바로 위 누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고 미안한 마음이 크다. 누나는 집안 사정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내가 이만큼이나마 된 것도 그렇지만 여동생과 남동생이 초등학교 교사와 공무원을 하고 있는 것도 누나의 희생을 바탕으로 가능했다. -부모님은 “우리 장남 영희는 중학교까지는 나와야지”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뒤집어 보면 중학교 졸업도 쉽지 않은 일이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남의 집 머슴일을 하면서 틈틈이 중학교 등록금을 모아 놓으셨는데, 어느 날 그 돈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중학교에 못 가게 될 상황이 된 거였다. 그때 이웃집 할머니께서 “사내놈이 중학교까지는 나와야 하지 않겠나”라며 여기저기 수소문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주셨다. 그게 나에겐 약이 됐다. 중학교 들어가서 정말 미친 듯이 공부만 했다. 한 초등학교 친구가 “영희가 미쳤다”고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 꿈은 없었다. 그냥 공부를 잘하는 걸로 만족이었다. -대학교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등학교는 마치고 싶었다. 집안 사정을 생각하면 인문계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러다 나라에서 세운 철도고에 들어가면 학비 대주고, 나중에 취업까지 시켜 준다는 얘기를 들었다. 딱 내 학교였다. 그렇게 철도고에 들어갔는데 철도원으로 인생의 방향이 정해지다 보니 별달리 꿈이란 게 생길 턱이 없었다. 머리건 몸이건 좀 더 써 보고 싶은데, 내 몸의 혈액과 호르몬들은 나에게 한계 상황까지 가 보라고 다그치는데 현실은 그저 ‘등교-수업-하교’가 전부였다. 그러다 유도를 시작했다. 먹고 자는 시간과 수업받는 시간을 빼고는 그것만 했다. 다른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멋지게 업어치고 메칠 수 있을까, 관심은 그것뿐이었다. -1974년 1월 5일 토요일에 졸업식을 하고 7일 월요일 서울역으로 첫 출근을 했다. 통신전자과 출신인 나에게는 통신기지국과 열차 간 송수신기에 문제가 없는지를 점검하고 열차 자동 정지장치를 수리하는 일이 부여됐다. 그렇게 정신없이 한달을 지내고 난 어느 날 아침, 불현듯 미래에 대한 고민이 들었던 것이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이 시작됐다. 딱히 어떤 대학, 어떤 학과를 가겠다는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공부가 하고 싶었다. 배움에 대한 갈증에 공부를 벌컥벌컥 마시고 싶었다고나 할까. 실업계 학교를 나왔으니 당연히 대학 입시 기초가 약했다. 서울 종로2가에 있는 종로YMCA에서 대학입시반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난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하는 국문학과가 어울릴까? 수학 문제를 풀 때가 제일 신나는데, 그리로 가 볼까?’ -물리학을 공부하기로 한 것은 학원에서 ‘분석물리’ 과목을 가르치던 박운상 선생님 덕이다. 입시 학원이었음에도 문제 풀이 요령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간단한 실험도구를 갖고 물리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모습을 보면서 “물리학도 문학만큼이나 세상을 아름답게 표현해 내는구나.” 거창하게 말하면 내 인생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맞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1975년 초 기관차 수리 공장이 있는 수색역으로 발령났다. 24시간 근무하고 24시간 쉬는 곳이라 공부하기엔 좋았지만 그러다 보니 체력은 바닥나고 업무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아 대입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결핵이라는, 당시로서는 꽤 중한 병을 얻었다. “고등학교 졸업해 번듯한 직장까지 얻었으면서 몸까지 상해 가면서 대학을 가려고 하느냐.” 아버지는 나를 꾸짖다가 “다 내가 못나서 널 제때 공부를 못 시켜 준 탓”이라며 통곡을 하셨다.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주고, 공짜로 공부시켜 주는 곳.’ 내가 가야 할 대학의 최우선 조건이었다.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 필기·실기시험에 모두 합격했지만 결핵 때문에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 그때의 상실감은 아주 컸다. 회사에 2개월 휴직계를 냈다. 머리까지 박박 밀고 고향집에서 2주 동안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부모님께서는 ‘얘가 죽으려고 하는 것 아닌가’ 걱정하셨단다. 방 안에 틀어박혀셔 ‘과연 나는 뭘 해야 할까’ 고민을 했다. 결론은 ‘일단 시작한 것, 원 없이 한번 도전해 보자’는 것이었다. -2개월 휴직 기간이 끝나니 김제에서 가까운 익산역으로 근무지가 바뀌었다. 직장 생활과 대학 생활을 병행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전북대 물리학과였다. 입학 성적이 좋아 장학금을 받고 76학번으로 입학했다. 함께 일하는 직장 선배가 눈감아줘 근무 시간에 전공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갔다. 그러기를 1년. 공부도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회사에 못 할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표를 냈다. -죽어라고 공부만 했다. 장학금 받기 위해서도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뤄진 공부가 쌓이자 내 평생의 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지도교수님께서 미국 켄트대를 추천해 주셨다. 입학 지원서를 냈는데 놀랍게도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고 했다. 1982년 8월 졸업이 예정돼 있었는데 가을 입학을 하라는 통보를 받아 7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유학 후 첫 학기를 끝낸 1월 갑자기 온몸이 아파 왔다. 이러다 죽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웬걸. 학교 보건소 의사는 타이레놀 한 알을 주더니 “푹 자라”고 했다. 다음날 거짓말처럼 멀쩡해졌다. 유학에서 비롯된 극심한 스트레스였다. -좋아하는 공부를 장학금 받고 해서 그랬을까. 석·박사 과정을 4년 만에 초고속으로 마쳤다. 박사 학위를 받게 됐다고 모교인 전북대 교수님께 말씀드렸더니 “마침 우리 학교에 교수 자리가 하나 났으니 지원하라”고 하셨다. 덜컥 합격했는데 그게 1986년 여름이었다. 7월 켄트대 학위수여식을 한 달 앞두고 모교에 돌아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박사 때까지 희한하게 다음 단계로 진행하는 과정이 순조로웠는데 외려 그것 때문에 나는 졸업식에 참석해 본 적이 없다. 그 흔한 학위 모자를 쓰고 찍은 사진이 없다. 아들내미와 딸내미가 아빠 학력 위조한 거 아니냐고 말한 적도 있었다. -반도체 물리학이 전공이었지만 다양한 분야에 항상 눈과 귀를 열어 놓고 있었다. 1991년 탄소나노튜브가 세상에 처음 소개됐다. 논문들을 읽다 보니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본 듯한 충격을 받았다. 무엇보다 기초연구이면서도 실험과 응용연구가 가능했다. 대단한 매력이었다. 물리학은 다른 학문과 달리 이론과 실험 두 분야를 동시에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렇지만 내게는 공고 출신이라는 남다른 이력이 있었다. 직장에서 열차 무전기를 고쳤던 경험 등 현장에도 익숙하다. 그래서 이론물리학을 전공했지만 실험과 응용연구에 두려움이 없었다. -일반 사람들에게 내 연구 분야는 아주 생소하다. 이름부터가 그렇지 않은가. 탄소는 뭐고, 나노는 뭐고, 거기에 튜브는 뭐란 말인가. 탄소나노튜브 연구가 잘 이뤄지면 요즘 많은 사람이 관심 갖는 전기자동차의 상용화를 앞당길 수 있다는 정도로 설명하면 이해가 쉬울까. 탄소나노튜브를 응용하면 고성능 에너지 저장장치를 만들 수 있고 이를 통해 전기차의 생명인 배터리 성능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 전자 소재로 응용될 경우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빠른 초고속 컴퓨터를 만들 수도 있다. 응용 분야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각국의 연구자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눈에 불을 켜고 책과 논문을 파고 실험을 하는 것이다. 탄소나노튜브의 기초이론을 보강하고 응용연구로 연결시키는 과정은 앞으로도 지난할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후배들과 함께 가야 할 길이다. -과학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자주 막다른 길에 부딪힌다.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은 물론 연구원들에게도 나는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에 나온 구절을 인용한다. ‘애벌레가 화려한 나비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은 중간에 포기하고 싶어질 정도의 시련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 최종 목표’를 묻는데 나는 그런 것이 없다. “내 최종 목표는 이거다”라고 정해 버리면 그것을 성취하고 난 다음에는 무슨 재미로 삶을 살겠나. 나도 알 수 없는 미지의 내 인생 최종 목표를 향해 이제 제대로 한 걸음 뗄 수 있는 준비가 됐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이영희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우리나라보다 해외 학계에서 더 유명하다.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물리구조연구단장을 함께 맡고 있는 그는 전 세계 대학 연구실과 산업 현장에 ‘탄소나노튜브’ 열풍을 일으킨 한국의 대표 물리학자 중 한 명이다. 차세대 신소재로 각광받는 단층 탄소나노튜브의 대량 합성과 성장 메커니즘 규명이 그의 성과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이론’과 ‘실험’ 가운데 하나를 골라 자기 주력 분야를 정한다. 그러나 이 교수는 탄소나노튜브 이론뿐 아니라 수소 저장, 투명전극, 복합체 연구 등 산업화 기술도 함께 개발해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누가 “기초과학은 투자 대비 성과가 적다”, “기초과학은 돈이 안 된다” 같은 말을 하면 질색을 한다. ‘기초과학을 통해 우리나라의 국가 경쟁력을 높인다’는 게 그가 제자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말이다. ▲1955년 전북 김제 출생 ▲1987년 전북대 물리학과 교수 ▲1989년 미국 에임스국립연구소 방문연구원 ▲1993년 IBM 취리히연구소 방문연구원 ▲2001년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2006년 한국물리학회 학술상 수상 ▲2006년 국가석학 선정 ▲2014년 수당상 기초과학분야 수상. 【탄소나노튜브 Carbon nanotube】 탄소 6개로 이뤄진 육각형 모양이 서로 연결돼 가늘고 긴 대롱 모양을 이루고 있는 신소재. 1991년 일본 이지마 스미오 박사가 처음 발견한 이 물질은 튜브의 지름이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1에 불과한 나노(10억분의1)급 크기여서 탄소나노튜브로 불린다. 탄소나노튜브는 구리보다 전기 전도율이나 열 전달률이 우수하고 강도도 강철보다 100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도체, 배터리, 초강력 섬유, 생체 센서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제가 원래 털이 빨리 자라는 편이에요. 철도원 생활을 하다가 스물두 살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공부를 오랜만에서 해서 그런가, 너무 재미가 있는 거예요. 공부에만 정신이 팔리니까 다른 일들은 다 귀찮아지더군요. 하루이틀 안 깎은 게 60이 넘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죠.”
  • 30년간 모은 1600만원 기부 할머니 숨진 딸에 명예졸업장

    부산대 다니다 세상을 떠난 딸을 그리워하며 30여년 간 어렵게 모은 1600만원을 기부한 80대 기초생활 할머니에게 대학이 딸의 명예졸업장을 수여한다. 부산대는 개교 70주년을 맞아 26일 열리는 2015학년도 전기 학위수여식에서 이 할머니에게 명예학사학위증서를 준다고 24일 밝혔다. 올해 82세의 이 할머니는 지난해 말 현금 1000만원과 유언장을 들고 부산대발전기금재단을 찾아와 장학금을 기부한 데 이어 최근 600만원을 추가로 기부했다. 부산대는 그동안 사회 유명인사나 석학들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한 적은 있으나, 명예 학사학위를 주는 것은 처음이다. 할머니는 지난해 말 교통사고를 당해 거동이 불편한데다 신분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 이날 학위수여식에는 참석하지 않는다. 부산대 관계자는 “할머니께 딸의 명예졸업장 학위수여식 참석을 권유했으나 ‘큰돈도 아니다’며 한사코 거절하셔서 참석하지 않으셔서 많이 아쉽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딸이 다녔던 부산대 역사교육과는 1600만원을 종자돈으로 최근 학과 장학기금을 설립했고, 교수와 동문들의 기금 출연이 이어지고 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한국전쟁 민간 희생자, 69년 만에 졸업장 받았다

    한국전쟁 민간 희생자, 69년 만에 졸업장 받았다

    “억울하게 죽은 병진이의 꿈을 후배들이 더 크게 펼쳐 줬으면 좋겠습니다.” 18일 오전 서울 중구 동국대 본관에서 친동생 고 이병진씨의 명예졸업장을 대신 받은 이병윤(94)씨는 “1947년 이 대학에 입학한 동생은 유쾌한 달변가였고, 정치에 꿈이 있어 정치와 법을 전공했다”며 “이제라도 졸업을 하게 돼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1925년생인 고인은 동국대 정치학과에 입학하면서 경남 진주에서 홀로 상경했다. 고인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북한 의용군에 징집됐다. 같은 해 9·28 서울 수복 직후 다시 서울로 돌아왔지만 우익 학생의 고발로 군경에 연행됐다. 인민군에 협조했다는 누명을 쓰고 고문을 받다 숨졌다. 동생이 사망한 지 60년이 지난 2010년 형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로부터 동생이 누명을 썼다는 사실을 인정받고 배상금 6000만원을 받았다. 이 돈을 지난달 전액 동국대에 기부했다. 학교도 고인의 학적을 복원해 이날 학위수여식에서 유족에게 명예 정치학사 학위를 전달했다. 입학한 지 69년 만의 졸업이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서울포토]졸업해도 취업길 막막…지난달 청년실업률 9.5%

    [서울포토]졸업해도 취업길 막막…지난달 청년실업률 9.5%

    18일 학위수여식이 열린 서울 시내 한 대학교에서 한 졸업생이 한 기업이 신입사원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서 걸어놓은 현수막 앞을 지나가고 있다. 지난 17일 통계청이 발표한 1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15~29세 청년실업률은 9.5퍼센트로 매년 1월 통계와 비교하면 11.0퍼센트였던 2000년 이후 16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 국제대학교 2015학년도 학위수여식

    국제대학교 2015학년도 학위수여식

     국제대학교(총장 장기원) 2015학년도 학위수여식(18회, 사진)이 17일 대강당에서 열렸다.  학위수여식에는 이사장과 장기원 총장을 비롯해 각급 보직교수와 학과장, 가족 등 3000여명이 참석했다. 이날 학위수여식에서는 1602명이 전문학사학위를 받았으며, 학사학위 전공심화과정 25명이 4년제 학사학위를 받는 등 총 1627명이 각종 학위를 취득했다. 학위수여식에서는 최우수공로상을 비롯해 우수공로상, 학과공로상, 특별공로상, 전체수석 및 학과수석상과 경기도지사상, 평택시장상, 해군사령관상,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장상 등이 시상됐다. 장기원 총장은 축사에서 “2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교정을 떠나는 졸업생 여러분의 앞날에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면서 “그동안 갈고 닦은 학문과 기예를 사회를 위해 선용하는 지혜와 용기를 갖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포토]졸업했지만 취업 어려운 대졸자들

    [서울포토]졸업했지만 취업 어려운 대졸자들

    18일 학위수여식이 열린 서울 시내 한 대학교에서 학사모를 쓴 한 졸업생이 취업정보게시판 앞을 지나가고 있다. 지난 17일 통계청이 발표한 1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15~29세 청년실업률은 9.5퍼센트로 매년 1월 통계와 비교하면 11.0퍼센트였던 2000년 이후 16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 강창희 전 국회의장 KAIST 명예박사

    강창희 전 국회의장 KAIST 명예박사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19일 열리는 학위수여식에서 강창희(왼쪽·69) 전 국회의장과 패트릭 애비셔(오른쪽·61) 스위스 로잔연방공대 총장에게 명예 과학기술학박사 학위를 수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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