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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력·직업 父傳子傳시대”

    급속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부모·자녀 세대간의 교육과 직업의 세습정도가 강화된 것으로 조사됐다. 14일 한국노동연구원이 한국노동경제학회와 공동으로 개최한 ‘제2회 한국노동패널학술대회’에서 ‘부모·자녀세대간의 사회적 지위세습 정도 및 추이’라는 주제발표에서 이같이 밝혔다. 한국노동연구원 방하남 연구조정실장이 전국 5,000가구를 대상으로실시한 1,2차(89년,99년) 한국노동패널 조사 결과 부친의 학력이 자녀의 교육수준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정도는 43%에 달했다.부친의 직업이 자녀의 직업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정도는 7%인 것으로 나타났다. 방실장은 “지난 30∼40년간 경제개발의 열매가 공평하게 분배되지못하고 새로운 사회적 불평등 체계로 이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노동연구원 황덕순 연구위원도 ‘도시 취업자의 세대간 계층이동과세대내 유동성’ 주제발표를 통해 “부모가 생산직인 경우 자녀가 최초에 생산직으로 취업할 가능성이 높고,부모가 사무직인 경우 아들은 사무직으로 취업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세대간 계층이동의 주요 매개변수인 교육기회가 계층간에 균등하게주어져야 한다는 대안이 제시됐다. 오일만기자 oilman@
  • 김민수씨 향토문화연구 대상

    향토사학자들의 학술대회인 제15회 전국향토문화연구발표회에서 김민수 서울 광진문화원 향토사분과위원장이 ‘아차산에서의 고대사의 제문제’로 대상인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전국문화원연합회(회장 이수홍) 주최로 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발표회에서 최우수상인 문화관광부장관상은 논문부문에서 김영섭 서울 동대문문화원장,사료부문에서 백이성 부산 북구 낙동문화원장이 수상했다.
  • 12월의 문화인물 吾園 장승업

    조선조 회화를 마지막으로 꽃피운 오원(吾園)장승업(張承業·1843∼1897)이 1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됐다.장승업은 어릴 때부터 그림을 능숙하게 그려 이름을 날렸는데 강렬한 필법과 묵법을 특징으로 하는작품에는 쉽게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그의 자유로운 성격이 잘 배어있다는 평을 듣는다. 산수·인물·영모·사군자 등을 두루 다뤘지만 전체적으로 격조 있는문기(文氣)보다는 뛰어난 기량을 더 인정받고 있다.그의 화풍은 제자 안중식(安中植)조석진(趙錫晋)에게 전해져 근대회화의 토대를 이루었다.고종의 어명으로 궁중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며 대표작으로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삼인문년도’‘산수도‘‘귀거래도’‘기명절지도’등이 있다. 문화관광부는 그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자 관련단체와 협조해 기념학술대회(9일 정신문화연구원)‘장승업 특별전’(20일 서울대박물관)등기념사업을 벌인다. 서동철기자 dcsuh@
  • 신채호선생 탄생 120주년 기념 학술대회

    단재(丹齋)신채호선생의 탄생 12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 ‘신채호사상의 현대적 조명과 그 과제’가 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컨벤션센터에서 열렸다. 주제발표에 나선 역사학자들은 언론인이자 애국계몽운동가·독립운동가로서,특히 ‘한국 근대역사학을 창시한 학자’로서 그의 사상을 이시대에 재조명했다. 이 대회는 한국사연구회 한국역사연구회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사학사학회 등 다섯 학회가 1년여 준비해 연 것이다.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는 기조강연에서 “단재는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하면서 논객의 명성을 얻은 뒤 ‘독사신론(讀史新論)’으로 역사학계에 나선 우리 근대 지성의 대변자”라고 평가했다.또 “독립운동의 방향과 이론을 정립하고 스스로 실천했다”면서 “단재는 역사에편승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만들며 살았다”고 칭송했다. ‘신채호의 재중 독립운동’을 발표한 한기형 학술진흥재단 전문위원은 단재가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경계를 넘어 한반도 평화가 동아시아 평화의 요체임을 입증했다”고 주장하고 말년에그가 민중적 관점으로 돌아선 사실은 오늘날 진보적인 민족주의를 건설하는 데 많은시사점을 준다고 강조했다. 이 대회에서는 지난해와 올해 발굴된 잡지 ‘천고(天鼓)’에 관한 연구 결과 발표가 잇따랐다.단재가 1921년 베이징에서 발행한 이 한문잡지는 7호까지 나왔는데 현재 1∼3권만을 찾은 상태이다. 최광식 고려대교수는 “‘천고’에는 독립운동에 관한 논설이 대부분이지만 고대사 논문도 한편씩 실어 사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면서“수록한 논문들이 중국·일본·만주·몽골의 자료를 두루 이용하고10여년 유적을 답사한 끝에 나온 것”이라고 분석했다.따라서 단재의고대사 인식이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뒷날 ‘조선상고문화사’와 ‘조선상고사’저술의 토대가 되었다고 그 가치를 높이 샀다. ‘일제강점기 신채호의 언론활동’을 발표한 최기영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은 ‘천고’가 순한문으로 발행된 까닭을 “중국인이 주독자층이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최실장은 ‘천고’의 내용이 ‘조선독립과 동양평화’(1호)‘중국이 한중친우회를 꼭 설립해야 하는이유’(2호)등으로 채웠음을 근거로 들었다.결국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한국의 독립운동과 역사를 중국인들에게 알려 지원을 요청하자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외언내언] 고인돌의 실종

    게르만족 일파인 반달족은 게르만 대이동 때 로마로 몰려들어가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그래서 문화재 파괴 행위를 반달리즘이라고 이른다.반달족이라 해서 다른 게르만족보다 유달리 더 야만적이었을 리없겠건만,쳐들어간 데가 서양문명 중심지인 로마라서 악명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어찌 됐든,반달리즘은 오늘날도 살아 있고,우리 주변에서 너무 자주 볼 수 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전라남도 진도군내의 고인돌이 10여년 사이에 200여기(基)가 사라졌다.1987년 361기였던 것이 이제 120기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대부분 경작지 정리나 도로 개설 때 없앤 것으로보고 있다. 이웃나라에서는 있지도 않은 선사시대 유물을 허위로 땅에 묻었다가 캐내기까지 하고 있는 판에 우리는 있던 것도 없앴다니한심하다. 경제개발 제일주의에 고인돌인들 어찌 무사할 수 있었으랴.진도군내만 아니라 고인돌의 수난은 다른 지역에서도 있었다.경제개발이라는깃발 아래 자행되는 현대의 반달리즘에 깨지고 부서지는 것이 고인돌만도 아니다. 고인돌로 말하면,한국은 매우특별한 나라다.세계에 7만여기가 있고그 가운데 절반이 넘는 4만여기가 한반도에 있다.수백기씩 떼를 이루고 있는 곳도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다.다른 나라로 가면 가장많이 밀집해 있다는 것이 50기 정도다.우리 고인돌은 형태도 북방식,남방식,개석식(蓋石式)으로 다양하다.한국은 세계 학계가 주목하는고인돌 집합소며 표본관이다.고인돌의 기원에 관해서는 북방기원설과남방기원설이 있지만,독자기원설도 주장된다. 이러니,선사시대 거석문화의 중요한 유물인 고인돌에 관한 연구도한국이 주도적으로 하는 것이 당연하다.1999년 2월 세계거석문화협회가 서울에서 창립됐다.이 해 7월에는 세계 거석문화 국제학술대회가이 협회 후원과 강화군 주최로 열렸다. 고인돌에 관심이 높아진 것은 10년 안쪽의 일이다.지방자치단체가고을의 자랑거리로 고인돌을 내세우면서부터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강화군과 고창군이 고인돌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리려고 애쓰고 있다.고창군은 세계 최고의 고인돌 밀집지역이고 관리도 가장모범적이다.그렇건만,관심을 가지기 전에 이 지역에서 사라진 고인돌이 1,000기를 넘으리라고 한다. 이번에 뒤늦게나마 전남대가 실태를 조사하고 진도군과 진도문화원이 고인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다행이다.이제라도 반달리즘에맞서 고인돌 종주국의 체통 지키기에 힘써야 한다. 그리고,고분군을 뚫고 고속도로를 내겠다는 반달이나 유서깊은 옛성을 헐고 집 짓겠다는 반달도 막아야 한다.이 시대에 산 우리 전체가싸잡혀 후손에게 욕먹지 않으려면. ■박강문 논설위원pensanto@
  • 최근 각계 추모·기념사업 활발

    남북 화해시대를 맞아 해방공간의 이데올로기 갈등 와중에서 희생된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1886∼1947) 선생의 추모·기념사업이각계에서 다채롭게 추진되고 있다. 첫 사업으로 27일 오후 3시 몽양의 고향인 경기도 양평에서 양평문화원과 양평 백운신문사 공동주최로 추모강연회가 열린다. 이날 강연회에는 여철연(몽양추모사업회장)·운혁(몽양의 6촌 동생)·명구·원구 등 몽양의 친척과 이문구,윤후명,김주영·백시종 등 문인,민병채 양평군수,김인옥 양평경찰서장 등 관내유지들도 참석할 예정이다. 이날 강연회의 초청강사는 암살 당시 몽양의 수행비서였으며,현재남측 생존인물 가운데 몽양과 가장 근접거리에 있었던 원로시인 이기형씨(84·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이씨는 ‘몽양 여운형 선생,탄생과 생애,그리고 정치사상’을 주제로 한 강연회에서 “숭고한 민족지도자 몽양 선생에 드리워진 역사의 그늘,소위 ‘빨갱이’의 낙인이 어디서 비롯되었으며,어떻게 조작되었는지를 낱낱이 밝힐 터”라고 말했다. 이번 강연회는 본격적인 ‘몽양 기념사업’의 신호탄인 셈인데,몽양의 역사적 비중에 견주어볼 때 뒤늦은 감이 있다. 몽양은 일제하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상해거류민단장,조선중앙일보 사장 등 요직을 역임했으며,국내파로서 해방때까지 독립운동을한 인물이다. 또 해방후 정부수립 직전 국민여론조사에서는 이승만과 거의 동률의지지율을 획득했었다.이만큼 해방공간의 지도적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이렇다할 추모·기념사업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중도 좌파로 활동한 몽양에 드리워진 ‘사상적 굴레’가 가장큰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그간 몽양의 기념사업이 고향주민들 사이에서 간간이 거론될 때마다 몽양에 대한 이념적 편견이 장벽으로작용해오다가 최근 남북관계 개선으로 서서히 물꼬가 트이고 있는 것이다. 몽양 기념사업에 앞장서고 있는 신승한(67) 양평문화원장은 “현재몽양의 생가는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인해 전소됐으며,생가터 250평만 남아있을 뿐”이라며 “생가복원 및 기념관 건립을 서두르지 않으면 앞으로 선생의 고향인 양평에서조차 선생의 흔적을 찾기가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몽양의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또다른 한 축은 민족문학작가회의를 중심으로 한 문인들이다. 그간 왜곡된 역사인식을 바로잡는 데 앞장서온 작가회의는 몽양이 남북 양측에서 민족지도자로 추앙받고 있음을 주목하여 남북공동으로기념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사단법인 형태로 추진될 가칭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문구)는 내달중 단체를 설립하여 내년 2월,6월,10월 등 모두 세 차례에걸쳐 학술대회를 개최할 계획인데 10월 행사는 평양에서 여는 방안도 추진중이다. 또 몽양의 3녀이자 북한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인 여원구씨도 이 사업에 참여시킬 방침이다.기념사업회는 또 양평군 신원1리 소재 몽양의 생가복원과 양평군내 기념관 건립과 함께 ‘평전’ 등 책자를 간행해몽양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을 계획이다.기념사업회의 백시종(57,소설가) 상임이사는 “몽양에 대한 올바른 평가,우리 현대사에 대한 올바른 진단만이 남북동반시대의 진정한 기틀을 구축할 수 있을것”이라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박 세르게이 KNK 기술대표

    “러시아의 우수한 과학기술을 한국의 산업기술과 접목시키면 세계적으로 경쟁력있는 제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러시아 우주기술의 국내 이전으로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에 앞장서고 있는 KNK테크놀로지 기술대표 박 세르게이(66·한국이름 朴雲鶴)박사. 함경남도 북청 태생으로 14세때 단신으로 러시아로 건너간 이후 지금까지 러시아인으로 살아 온 그는 아직 한국말도 서툴고,자본주의체제도 낯설다.하지만 옛 소련 붕괴 이후 고급 기술들이 해외로 속속 빠져 나가는 것을 보고 이왕이면 조국에 ‘좋은 기술’을 전수하자는 생각에서 반세기만에 한국에 둥지를 틀고 지난 봄 벤처를 창업했다. 복합반도체 및 박막센서 분야의 권위자인 그는 “미국과 견주어 전혀 뒤지지 않는 옛 소련의 우수한 우주개발 기술들이 개방 이후 사장되고 있다”면서 “한국이 러시아의 핵심 우주기술들을 응용,산업화하는데 주력하면 기초과학이 약하고 부존자원이 부족한 단점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첫 작품으로 내놓은 한·러 합작품은 우주정거장 미르호에 사용되는‘프레즈넬 렌즈기술’과 올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러시아 IOFFE연구소의 복합반도체 박막구조기술을 접목한 태양전지. 모스크바 국립종합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 그는 시베리아 반도체과학연구소 부교수,카자흐스탄 국립종합대 교수를 거쳤으며 옛 소련의TT-044비밀 우주연구소와 러시아 자연과학원에서 ‘수호이’ 전투기첨단센서와 로켓·우주선·우주정거장 등 각종 우주개발연구에 참여했다.박막필름 및 센서 분야에서 23개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 그는지난해 러시아 자연과학원 백과사전에 이름이 등록되기도 했다.지난93년 고려대에서 열린 학술대회 때 처음 한국땅을 밟았고,97∼98년엔 명지대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함혜리기자
  • ‘일본판 쉰들러’ 후세 변호사 재조명

    일본인으로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고,전후에는 재일조선인들의 차별대우 철폐에 앞장선 후세 다쓰지(布施辰治·1880∼1953) 변호사를 재조명하는 국제학술회의가 13일 국회 의원회관 소강당에서열렸다.학술대회에서는 한일 양국 학자 등 7명이 후세 변호사의 한국인 독립운동 후원 등에 관한 주제논문을 발표했다.후세 변호사의 직손인 오오이시(大石 進) 일본평론사 사장도 행사에 참석했다. 일본 미야기현 태생으로 메이지법률학교 졸업후 검사 대리를 거쳐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후세 변호사는 일생을 피압박민족·피차별자등 소수 약자를 위해 바쳤다.그는 일본군국주의에 맞서 사법개혁·평화운동 등 민주주의운동을 벌이다 변호사 자격박탈 3회,두 차례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1919년 재일조선인 유학생들이 주도한 ‘2·8독립선언’을 비롯해 ‘박열(朴烈)의사사건’,‘의열단사건’ 등에 관련된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였으며,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학살문제를 일본정부에 항의,고발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그는 일제의한국인 토지몰수에 맞서 실태조사,고발에 앞장섰으며,‘형평사(衡平社)운동’등 신분차별 폐지운동을 지원하기도했다. 그의 한국·한국인 사랑은 일제 패망후에도 계속됐다.1946년 그는피압박민족의 신헌법을 구상,‘조선건국헌법초안사고(私稿)’를 발표하였으며,한국전쟁중인 1953년 3월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 주최 행사에서 남북통일의 열망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그는 재일조선인들의 차별철폐운동에 일생을 투쟁하였다. 한편 후세선생기념사업회는 이번 학술대회를 시작으로 후세 변호사의 어록비 건립,한일합작 영화제작,그리고 정부의 훈장추서를 추진할 계획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외규장각 도서 반환협상 원점으로

    프랑스를 상대로 벌이는 외규장각 도서 반환협상이 원점으로 돌아갈가능성이 커졌다.한국쪽 협상대표인 한상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이지난 9일 가진 기자회견은 ‘제4차 협상의 연기’를 발표한다는 겉모습에도 불구하고,사실상 ‘협상 결렬’을 선언하는 자리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두 나라는 지난 7월 파리의 어람용(御覽用)유일본과 서울의 비(非)어람용 복본(複本)을 장기임대 형식으로 맞바꾸기로 합의했다.이어 김대중대통령과 시라크 프랑스대통령이 지난달 19일 정상회담에서 이합의를 구두로 다시 확인했다.이런 상황에서 ‘결렬 선언’은 눈길을끌기에 충분하다. 한원장은 이날 “문서로 약속한대로 의궤에 관한 정보를 보내달라고수차례 독촉했는데 아직 오지 않았다”고 프랑스측의 무성의를 맹비난했다.그러면서 “9·10일 파리에서 열릴 예정이던 제4차 협상의 주요 아젠다(의제)는 유일본 교류 원칙”이라고 말해 ‘정보를 보내지않았기에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했다. 이어 질문에 관계없이 “지난해 10월 파리에서 열린 2차 협상 당시 12권의 의궤를 볼 수 있었다”고 운을 뗀 뒤 “절반은 표지가 상했고,품질도 좋지 않은 천으로 씌워놓았더라”고 말해 알려진 것과는 달리프랑스가 의궤 보관에 무성의하다는 점을 부각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역력했다. 한원장은 나아가 협상 결과를 평가하고 대응전략을 모색하는 공개토론회를 20일 오후1시30분 서울 대한상의 국제회의실에서 가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는 지난 3일 역사학회 등 11개 학회의 이름으로 협상중단을촉구하는 등 비판에 앞장선 학자들까지 참여시켜 ‘의도된 비판의 장’을 만들려는 것처럼 보인다. 토론회에서 불거질 프랑스에 대한 비판은 지금도 소극적인 그들의 협상자세를 전향적으로 바꾸기는 커녕 문을 더욱 굳게 닫도록 만들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한원장의 기자회견은 ‘협상 결렬’을 기정사실화한 상황에서모든 책임이 프랑스쪽에 있음을 분명히하는 ‘명분축적용’임에 분명하다. 한원장의 자세변화는 무엇보다 협상 자체는 성공적으로 이끌었지만,실익은 전혀 없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인 것 같다.국민 대다수가 수긍하지 못하는 결과라면 차라리 협상을 하지않느니 만도 못했다는 견해가 적지 않다. 협상 결과가 국민에게 환영받았다면 현재 그의 임기 연장을 놓고 내부에서 ‘반대서명’을 하는 등의 잡음이 없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런만큼 ‘최종 임명권자’에 대한 정치적 부담도 무시할 수 없는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20일의 공개토론회는 협상 결과를 비판하는 데 힘을 빼기보다는,백지상태로 돌아가 프랑스 해군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고문서를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을 모아야 한다는 지적이일고 있다. 서동철기자 dcsuh@. *외규장각 도서 반환협상 경과. 한국과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 반환문제를 놓고 접촉을 시작한 때는1992년이다. 이태진 서울대 규장각관장과,국제법을 전공한 같은 대학백충현교수가 그 전해부터 당시 외무부에 ‘반환협상’을 요청한 결과였다. 프랑스는 해외문화재 반환의 기폭제가 될 것을 우려하면서도,경부고속전철 사업자 선정에 테제베(TGV)를 들고 뛰어든 상황이어서 이를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미테랑 프랑스대통령은 93년 9월 한국을 찾아김영삼대통령과 외규장각 도서의 ‘상호교류 및 대여’ 원칙에 합의하고,의궤 가운데 1책을 돌려주었다. 문제는 이 모호하디 모호한 ‘상호교류 및 대여’라는 원칙이었다.당시 청와대는 미테랑대통령의 화려한 수사에 말려들어 이를 ‘비슷한게 많은 골동품을 몇가지 성의표시로 넘겨주면,프랑스는 영구대여 방식으로 외규장각 도서를 돌려준다는 뜻’으로 해석했다.언론도 확실한 검증없이 그대로 국민에게 전달하여 ‘희망’을 주었다. 이후 97년 5월까지 3차례에 걸쳐 ‘상호교류’에 필요한 우리쪽 문화재 목록을 프랑스에 제시했다.그러나 프랑스는 일관되게 ‘등가등량(等價等量)’을 고집했다.우리 외무부는 ‘외규장각 도서는 국제법상불법적으로 약탈한 문화재’라는 기본인식에 따라 뜻을 굽히지 않았다. 교착상태에 빠진 협상은 98년 4월 김대중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시라크 프랑스대통령이 전문가 협상을 제의함으로써 돌파구를 열었다.한국은 한상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을,프랑스는 자크 살루아감사원최고위원을 각각 협상대표로 선임했다. 두 사람은 99년 4월부터 지난 7월까지 3차 회담을 가졌고,그 결과 지난달 19일 한불 정상회담이 ‘프랑스가 갖고 있는 어람용 유일본 의궤를 우리가 소장한 비어람용 복본 의궤와 교환하기로 합의하는 결과를 문서로 이끌어냈다. 그러나 프랑스는 지난 9월 열린 ‘병인양요’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의궤에 관한 정보도 보내주지 않는 등 약속을 계속 파기했다.국내에서도 협상 결과에 대한 비판여론이 비등한 가운데 지난 3일에는 ‘협상 중단’을 촉구하는 11개 학술단체의 공동성명까지 나오자 한상진원장이 결국 ‘4차 회담의 연기’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서동철기자
  • 이응노미술관 14일 문연다

    ‘한국화단의 풍운아’ 고암 이응노 화백(1904∼1989)의 예술혼을가까이서 호흡할 수 있게 됐다.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자리잡은 이응노미술관(관장 박인경)이 14일 문을 연다.이에 맞춰 ‘42년만에 다시보는 이응노 도불전’이라는 제목의 개관기념전이 12월 29일까지 열린다. 지난해 고암 10주기를 맞아 출범한 이응노기념사업회(회장 윤범모)가 모태가 돼 건립된 이응노미술관은 건평 150평 3층 건물로 고암 작품의 연구와 전시,학술,출판사업 등을 통해 고암의 진면목을 알리는역할을 하게 된다.고암이 타계할 때까지 살았던 파리 근교 보 쉬르센에 있는 기념관 ‘고암서방’과 함께 고암의 생애와 예술을 조명하는 공간이 두 나라에 나란히 생긴 것이다.이응노미술관은 일련의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곤욕을 치뤘던 고암이 사후에나마 고국의 품에안길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됐다는 점에서 적잖은 의미를 지닌다. 미술관 개관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것은 ‘42년만에 다시 보는 이응노 도불전’이다.이번 전시에는 고암이 1958년 3월 도불을 앞두고 서울 소공동 중앙공보관에서 열었던 ‘도불기념전’때의 작품 61점중 30점이 나온다.자유분방한 선묘의 추상화 ‘해저(海底)’,잭슨 폴록의드리핑 작업을 연상케 하는 ‘생맥(生脈)’,수묵의 맛을 듬뿍 안겨주는 ‘자화상’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고암은 한국전쟁 중에도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피난민’같은 작품을 발표하는 등 쉼없이 화필을 잡아 생전에 수천점의 작품을 남겼다.이 작품들은 대부분 고암서방에 보관돼 있다.미술관측은 이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면 연중전시가 가능하다고 밝힌다. 충남 홍성 출신인 고암은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문인화를 배웠다.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청죽’으로 입선하며 화단에 나왔다.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남화(南畵) 2대가 중 한명인 마쓰바야시 게이게쓰에게 사사받았고 혼고(本鄕)연구소 등에서 서양화를 연구하는등 근대적인 미술교육을 받았다.1945년 해방을 맞은 고암은 김영기,장우성 등과 함께 ‘단구(檀丘)미술원’을 조직해 식민잔재에서 벗어나 새로운 한국회화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암은 1958년프랑스 평론가 자크 라센의 초청으로 파리로 건너갔다.이듬해 독일에서 순회전을 가진 뒤 1960년 파리에 정착했으며 앵포르멜 운동을 주도한 파케티화랑과 전속계약을 맺어 1961년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그러나 그후 ‘동백림사건’(1967년)으로 옥고를 치른 데 이어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치미수사건(1977년)에 연루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고암은 77년 서울 문헌화랑의 ‘무화(舞畵)전’을 끝으로 작고할 때까지 국내활동을 하지 못했다.정치적 탄압에직면한 그에게 80년광주민주화운동은 새로운 화제(畵題)를 안겨줬다.고암은 군중이 외치는 자유의 의미를 종이 위에 옮겼다.그리고 그작품에 ‘통일무(統一舞)’란 이름을 붙였다.그는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한편 미술관측은 ‘고암 이응노의 예술세계에 대한 재평가’란 주제로 학술대회를 마련,고암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12월 2일 이화여대 박물관에서 열리는 이 행사에는 홍선표(이화여대),정형민(서울대),최태만(서울산업대)교수 등이 발표자로 나선다.고암 연구자를 양성하고 한국근대미술연구를 활성화하기 위한 고암학술논문상도 제정해 현재 공모(15일 마감)중이다.(02)3217-5672김종면기자
  • 이봉창의사 재조명 국제학술대회

    1932년 1월8일 관병식을 마치고 환궁하던 일왕의 마차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李奉昌)의사의 독립투쟁 정신을 재조명하는 국제 학술행사가 2일 단국대에서 열렸다.이날 행사에는 오랫동안 일본 내 독립운동관련 자료를 발굴해온 최서면(崔書勉)국제한국연구원장을 비롯해 국내 연구자,일본·대만의 학자,언론인 등이 주제발표 및 토론자로 참여했다. 최 원장은 기조강연에서 “지난 94년 광복 50주년을 앞두고 평소 존경해오던 이 의사에 대한 자료 수집에 나섰다”면서 “당시만 해도국내 학계는 기본적인 자료조차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최 원장에 따르면 기존 국내의 저작·연구물은 오류 투성이다.우선이 의사가 만선(滿鮮)철도에 근무했다거나,1932년 만주국 황제가 방일해 관병식에 일왕과 같이 참석했다는 부분,또 통감부 외교고문 스티븐스의 한자 표기인 ‘수지분(須知分)’을 ‘잘 알려진 바’로 번역한 것 등은 중대한 잘못이라는 것이다.최 원장은 “이는 원본 자료를 확인하지 않고 잘못 번역된 일본 자료를 맹신한 탓”이라고 지적했다.한편 주제발표에서 한시준(韓詩俊)단국대 교수는 ‘이봉창 의사의일왕 저격 의거와 그 의의’를,호춘혜(胡春惠)중화민국 국립정치대교수는 ‘이봉창의거가 중국에 미친 영향’을,야마시타(山下靖典)아사히신문 문화기획부장은 ‘이봉창 의사에 관한 일본 자료 현황’등을 각각 발표했다.이번 학술회의는 단국대 개교 53주년 및 이봉창 의사 장학회 창립기념 행사로 마련됐다. 정운현기자 jwh59@
  • 북한 식량부족량 1년간 386만t

    올해 11월부터 내년 10월까지 북한의 식량부족량은 최소 353만8,000t에서 최대 386만t으로 추정됐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김운근 북한농업연구센터장은 1일 서울 중구 태평로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북한 농업개발을 위한협력방안 모색’이라는 주제의 국제학술대회에서 “2000·2001년도북한의 식량 수급사정은 총소요량이 629만t인 데 비해 총생산량은 243만∼275만t에 그쳤다”며 이같이 추산했다. 그러나 김 센터장은 “국제사회의 지원량을 고려할 때 부족량은 세계식량계획(WFP)의 권고량(1인 1일 공급량 700g) 기준시 201만2,000t이 부족하게 되고 ‘유엔기준 최소 영양권장량’(1일 1일 458g) 기준으로 할 때는 6,000t 정도가 부족하게 된다”고 밝혔다. 학술회의에서 다우드 칸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아·태담당관은 “북한의 식량사정은 96·97년의 식량위기에 비해 완화됐다”며 “농촌개발을 위해 수리사업,전력공급,영농기계화,축산,농지개량 등에 대해 투자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석우기자
  • 작고 20년 동원학술 전국대회

    국립중앙박물관 지하 1층에는 ‘동원(東垣) 전시실’이라는 100여평짜리 전시공간이 있다.동원 이홍근(李洪根)선생이 기증한 유물 가운데 명품들을 모아놓은 곳이다.동원선생이 남긴 뜻을 아는 사람들은이 방앞에 설 때마다 옷깃을 여미곤 한다. 올해는 동원선생이 작고한지 20주기가 되는 해이자,4,941점에 이르는 ‘동원 컬렉션’을 기증한지 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이를 기념하여 28·29일 중앙박물관 강당에서는 ‘동원학술 전국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선 진홍섭 전이화여대 박물관장의 ‘동원기증 유물의 중요성과 의의’라는 기조강연에 이어 유옥경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관의 ‘16세기 후반 기영회도(耆英會圖) 고찰(考察)’ 등 미술사 논문과 ‘경주박물관내 공동구부지 발굴조사 개요’ 등 고고학적 발굴 성과들이 발표됐다. 동원선생이 기증한 유물은 국보 175호 연꽃과 당초무늬를 새겨넣은백자(白瓷象嵌蓮唐草文鉢)를 비롯하여 정선·김홍도·장승업·김정희·강세황·대원군의 작품 등 지정문화재급이 수두룩하다.사실 동원컬렉션은 호암미술관·간송미술관과 함께 3개 컬렉션으로 꼽혔다.그만큼 동원선생이 서거한 뒤 후손들이 생전의 뜻을 따른 것도 결코 쉽지 않았던 일로 평가받고 있다. ‘개성갑부’로 동원산업 대표이사를 지낸 동원선생의 문화재 사랑은적지않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한번 사들인 문화재를 결코 되팔거나다른 것과 바꾸지 않았다.일본의 재벌총수가 동원이 소장한 도자기한점을 어떤 값에라도 사겠다며 3일 동안 간청했는데도 거절한 것은유명한 얘기다. 동원선생의 뜻이 전시실과 수장고에만 머물지 않고,학술대회로 확대재상산되고 있는 것은 문화재 컬렉션과 함께 고고학 및 미술사 연구기금으로 시중은행주식 7만여주를 남겨놓았기 때문이다.‘동원학술전국대회’는 이 기금으로 세워진 한국고고미술연구소(이사장 지건길국립중앙박물관장)가 해마다 마련하고 있다. 서동철기자
  • 인문학교수 200여명 선언서 “정부는 인문학 육성 지원을”

    ‘인문학의 위기 타개’를 부르짖는 인문학 관련 대학교수들이 ‘대정부 선언서 채택’이라는 ‘단체행동’을 하고 나섰다. 지난 20∼21일 안동대에서 열린 전국대학인문학연구소협의회(회장권기호 경북대교수)가 마련한 학술대회가 계기가 됐다. 이 자리에는 전국 560개 대학의 인문학 관련 교수 200여명이 참여했다. 인문학자들이 채택한 선언서의 제목은 ‘인문학 육성지원을 촉구하는 우리들의 결의’.이들은 인문학 위기의 가장 큰 원인으로 ‘인문학의 실용성은 오히려 인문학의 본질에 가장 충실할 때 극대화된다는사실을 간과하고 시장논리를 대학사회까지 확산시킨 대학정책 당국의정책적 오류’를 지목하며 지원정책의 활성화를 촉구했다. 그러나 비판에만 머무르지 않고 인문학이 본질에서 벗어나 위기를 자초한 데대한 깊은 반성과 중심학문으로 위상을 다시 확립하는데 앞장서겠다는 각오를 함께 담았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참여학자들은 무엇보다 ‘인문학자의 위기’가 ‘인문학의 위기’를부추기고 있는 현실을 강조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1996년부터 시행된 있는 학문후속세대 지원및 1999년부터 시행된 보호학문지정의 범위가 강화되어야 하고,구체적인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현재 전국대학의 시간강사가 6만 3,000명이고,박사과정에 있는 예비학자도 수만명에 이르는 만큼 보호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전국 100여 대학에 설치되어 있는 인문학 관련 연구소가 연구인력 및 예산의 부족이 심각한 상황이므로 세재상의 혜택 등을 통하여기업의 지원을 유도함으로서 유급연구원이나 연구교수로 적극 채용하여 인문학 연구를 활성화시키는 방안도 제시했다. 나아가 대학이나 대학연구소 뿐 아니라 비제도권에 대한 지원의 활성화도 촉구했다.대학 밖에서는 인문학강좌가 부흥하고 있는 만큼 인문학자가 활동할 공간을 넓히는 것은 물론 시민교육을 강화하는 차원에서도 제도적 지원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인문학자들은 이와 함께 영상문화 매체를 분석 비평하는 작업을 새로운 인문학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는데 필요한 지원 및 인문·사회과학 및 과학기술 분야 연구결과의 공유체계를 확립하고 파급장치를 시급히 구축하는 방안을 요청했다. 서동철기자
  • 이대순이사장 “한미 문화교류가 양국 이해 높일것”

    “한국과 미국의 교육·문화 교류를 더욱 활성화시켜 양국 국민의이해를 높이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한미교육문화재단 이대순(李大淳)이사장은 20일 오후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개최되는 미국 풀브라이트 교육프로그램과의 협약 체결 50주년 국제학술대회의 의미를 이같이 밝혔다. 특히 이번 대회에서는 북한도 풀브라이트 교육프로그램의 혜택을 받도록 추진할 계획이다. 이돈희(李敦熙)교육부장관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축하 메시지를대독하고, 제임스·T·레이니 전 주한 미국대사와 김경원(金瓊元) 전주미대사가 기조연설을 할 예정이다. 고(故) 풀브라이트 미국 상원의원의 제창으로 설립된 풀브라이트 교육프로그램은 미국과 교육·문화를 교류하는 국가들에게 재정 지원을하는 재단이다. 우리나라와는 1950년 4월 협약을 맺었으나 6·25 전쟁으로 제대로 교류를 하지 못하다 60년 정부 차원의 한미교육위원단이 설립되면서 교류가 본격화됐다. 우리측에서는 그동안 1,400여명이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았다. 이중에는 총리를 포함한 국무위원 13명,국회의원 10명,대학총장 23명,교수 600명,법조인 50명 등 많은 인사들이 포함돼 있다.미국측에서도1,000명이 입국해 강의 또는 연구를 했다. 박홍기기자 hkpark@
  • [외언내언] 유럽알기

    프랑스영화 홍보기관인 ‘유니프랑스’가 프랑스영화 감상소감을 유럽인들에게 물었다.‘비교적 활동적’인 영국인은 “내면적이고,지적이지만 지루하다”고 평가했다.‘상대적으로 차갑고 미남,미녀도 적은’독일,노르웨이 등 중·북유럽인들은 “아름답고 코믹하며,감동적”이라고 말했다.따뜻한 남부적 기질이 강한 스페인,이탈리아인들은프랑스영화의 지루함과 복잡함을 불평했다. 기업문화도 나라마다 다르다.독일기업 종업원들은 의사결정에 많이참여한다.프랑스기업에서는 엘리트주의가 강하다.영국기업은 규칙을중시하지만 대놓고 칭찬과 비판을 하길 꺼린다. 프랑스,독일,영국,이탈리아와 스페인 등 30여개 이상의 독립국가가있는 유럽은 국가별 또는 지역별로 독특한 문화와 풍습을 갖고 있다. 그저 공통점이라면 전통존중과 문화적 깊이라고나 할까.서유럽은 물론이고 공산치하에 있었던 체코 프라하나 헝가리 부다페스트도 문화재를 잘 보존해 아름답다. 국내 한 종합상사 관계자는 “유럽은 미국과 틀리다.유럽을 단일시장이라고 하지만 각국의 관습에많은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전문가를 양성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실제 우리의 유럽지식은 한심하다.첫 해외여행은 유럽으로 나가고 싶어하지만 유럽사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박사학위는 미국에 편중되어 있다.환란후 영국,프랑스와 독일에 나가있던 국내기업 지점은 대부분 없어지거나 단일 ‘유럽본부’로 통합됐다.언론사 특파원들도 유럽에서 대부분 철수,미국과 일본 편중구조를 유지하고 있다.유럽이 어떻게돌아가는지는 겨우 미국 통신사와 신문을 통해서 아는 실정이다.지식과 정보의 미국편식(偏食)구조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이그나시오 라모데 주필은 ‘미국의 세계독재’를 우려했다.“미국은 지난 10년간 노벨 물리학상 26개 중 19개,의학상 24개 중 17개를 휩쓸었다.미국의 할리우드 작품은 세계 시장을 휩쓸고 있으며 미국은 사이버 최강국이다.미국경제의딸꾹질에 세계가 전율한다”고 지적했다.‘상징의 지배자’로까지 등장한 미국을 경계한 말이다. 물론 과거 유럽의 식민지였던 동남아 국가들로서는 유럽이나 미국모두 초록동색(草綠同色)으로 보이겠지만 우리로서는 서구 문화의 다양한 섭취를 위해서도 유럽에 대한 관심을 높일 필요가 있다.또 지난해 외국인의 대한(對韓) 투자 중 유럽연합(EU)이 40%에 달하는 등 경제관계상 유럽을 꼭 알아야 할 때이다.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기간 중 열리는 각종 행사가 유럽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프랑스박람회 2000’,서울유럽영화제,유럽문화학술대회를 기웃거려 보고 유럽국가 정상들의 연설도 들어볼만하다. 이상일 논설위원 bruce@
  • ‘8~9세기… 신라의 위상’ 학술대회

    이른바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치고 신라를 삼국의 패자로 만든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그러나 통일 이후 국제사회에서 신라의 지위를 깊이 생각해 본 사람은 많지않을 것 같다. 한국사학회와 백산학회가 6∼7일 경주에서 가진 ‘8∼9세기 아시아에 있어서 신라의 위상’학술대회는 그런 점에서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경주세계문화엑스포 행사의 하나로 열린 이 대회에 일본과 중국의 학자가 참여하여 다양한 시각을 보여준 것도 뜻깊었다. 이기동(李基東) 동국대교수는 9세기 일본 승려 엔닌(遠因)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를 바탕으로 당시 중국 도처에 깔려있던 신라인의눈부신 활약상을 강조했다.실제로 미국 하버드대교수 출신으로 케네디행정부 시절 주일대사를 지낸 에드윈 라이샤워가 지적한대로,당시일본인들이 중국을 왕래하려면 신라상인의 배편을 이용하지 않고는불가능했을 만큼 신라인들은 동아시아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윤명철(尹明哲) 동국대교수도 “통일신라인은 고구려와 백제의 개척정신과 해양능력을 계승하여 부를 창출하였고,당연히 국제환경속에서 정치 외교적 위치도 비중있게 격상됐다”면서 “동아지중해가 완벽하게 지중해적 성격의 기능을 발휘한 시대가 이 시기”라고 신라의지위를 높이 평가했다. 나아가 변인석(卞麟錫) 아주대교수는 “그동안 서안(西安)과 종남산(終南山) 일대를 답사한 결과 적지않은 신라의 사적을 찾아냈다”면서 “신라인들이 당나라가 이룩한 국제적 문화창출에 큰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적극적 해석을 하기도 했다. 반면 첸샹솅(陳尙勝) 중국 산뚱대교수는 “현재의 산뚱성에 설치됐던 신라원을 신라 교민활동의 결과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당나라가신라승려들의 구법활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책을 썼음을 증명해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면서 “신라관은 당 조정이 신라에서 온 조공사절단이 묵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전용여관일 뿐”이라고 국내학자들과는 다른 시각을 내놓았다. 서동철기자
  • 극동국립대 베르홀락 “이해 폭 넓힐 활발한 문화교류 바람직”

    “한·러 양국은 아직 서로 잘 모르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앞으로각자의 입장을 이해하면 협력의 길이 더욱 다져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6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국립대에서 만난 극동국립대 한국학대학장 블라디미르 베르홀락은 한·러 수교 10주년을 맞아 한·러 관계를 이같이 전망하고 “서로 간의 잦은 왕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베르홀락 학장은 지난 5일대한매일과 한국언론재단이 공동주최한 한·러수교 1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끝나 한숨돌리게 되자 인터뷰를 가졌다. “한국 사람과 러시아 사람은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이 달라 자칫오해나 불만이 생기기 쉬워요.” 그는 그래서 한·러 교류에서 문화교류가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경제교류가 활발해질수록 문화교류가 심화돼야 합니다.그런 면에서 이번과 같은 학술교류는 매우 바람직합니다.정보도 나누고 서로를이해하는 첩경이 되지요.”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관광사업의 확대라고 지적한다. “와서 보고느끼고 배워야 서로 불신을 털어낼 수있어요.블라디보스토크는 사실한국 독립운동의 근거지 아닙니까.테마 관광지로는 가장 적합한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극동국립대 한국학대학만 해도 ‘장도빈기념관’으로 명명돼있다. 독립운동가 장도빈 선생의 아들인 장치혁 고합회장이 5년전 150만달러를 내놓아 한국학대학을 지은 것.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었던장도빈 선생은 1912년 독립운동을 위해 연해주로 이주,3년 동안 머물면서 독립운동단체인 ‘권업회’ 기관지인 ‘권업신문’의 주필을 맡았다. 극동국립대는 한국학대학이 설립된 이후 러시아내 한국학 연구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고 있다.“학생들의 인기도 굉장히 높아요.학생들은중국이나 일본보다 한국에 훨씬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베르홀락 학장은 한국과의 교류가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은아니라고 밝힌다.“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것이다.“역사·경제·언어 등 각 분야의 학술회의가 더욱 많아야 합니다.한국학자들도 러시아학자와 자주 만나는 게 좋습니다.그래야 서로 정보를 주고 받을 수있잖습니까. 또 지금껏 공동연구가부족했는데 이 부분도 활성화돼야합니다.”[블라디보스토크(러시아)박재범 특파원 jaebum@]
  • “서학은 주자학에 포섭되었다”

    유학자들은 대체로 서학을 이질적인 종교문화적 전통으로 본다.그럼에도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조선 후기 한 무리의 유학자들이 서학에경도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형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는 “서학은 유학에 도전한 것이 아니라 주자학의 신학에 포섭됐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그런 점에서서학은 별개의 무엇이 아니라 조선 주자학의 전개에 있어서 한 계기혹은 발전으로 보아야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다산과 서학-주자학의 연속과 단절’이란 제목의 한교수 논문은 ‘다산의 공부론과 지식론’을 주제로 지난달 30일 열린 다산학술문화재단(이사장 丁海昌)의 제2회 학술대회에서 발표됐다.한교수는 “오해를 무릅쓰고 말한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주자학은 신학의일종”이라고 말한다.주자가 말하는 이(理)는 초월이면서 내재의 양면성이 있지만,인간이 있기 이전에 있었고 또 이후에도 영속할 절대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한교수는 무엇보다 “주자의 형이상학이 갖고 있는 신학적 지평이라는 전통의 기반이 없었더라면,서학은18세기 일급의 주자학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아울러 다산의 창조적인 작업 또한 기약하기 힘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교수는 “실제 다산의 경학에서 어디까지가 유학이고,어디까지가서학인지를 확인하기 어려운 대목에 자주 맞닥뜨린다”면서 “다산은유학과 서학을 창조적으로 접목한 사상가라도 해도 좋을 것”이라고말한다. 서동철기자
  • 오늘 단기 4333년 개천절 되짚어 본 단군

    ‘단군은 단순히 민족주의적 신화의 우상인가 아니면 역사적 실체인가’최근 언론사 사장단과 문화계 인사 등 남측 인사들의 잇따른 북한 단군릉 방문을 계기로 강단 학자와 재야 사학자들의 논쟁이 다시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또 단군학회는 2일 단기4333년 개천절을 앞두고 단군을 중심으로 한 상고사 관련 교과서 개정을 위한 대규모 학술대회를 열어 학계 안팎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최근 가열되는 단군논쟁은 지금까지와는 색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단군이 신화적 존재든 역사적 사실이든 그 실체를 규명해야 하며 그것이 민족구심을 위한 사상정립의 대안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그요체다. 우선 실체 규명의 차원에서 일고있는 단군실재론 재조명론은 주류학계의 입장을 강하게 비판한다.현행 초·중·고교 국사교과서에 반영되고 있는 주류 학계의 고조선 건국과 단군조선의 기원,강역에 대한 기술이 수정돼야 한다는 주장이다.이들은 ▲초·중학교 교과서가단군의 건국과 관련 “곰이 웅녀가 돼 환웅과 결혼해 단군을 낳았다”는 신화화된 내용만을 싣고 있고 고교 교과서에선 ▲고조선의 실재를 인정하면서도 단군을 신화적 인물로 규정하며 ▲한반도의 청동기를 기원전 10세기로 보면서 단군 건국은 기원전 24세기(2333년)로 적고 있음은 모순이라고 말한다.기원전 2500년경의 역사를 입증하는 고조선의 고고학적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는데도 이같은 기술이 나오고있는 것은 주류 학계가 일제의 황국사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재야학자들 사이에선 단군조선의 세력범위에 대해서도 만주·한반도 일대에서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있다. 이같은 논의는 최근 북한의 접근방식과 맞물려 더욱 확산되고 있다. 북한의 학계는 단군이 민족의 시조임을 부정했으나 단군릉에서 5,011년 전의 단군유골이 출토됐다며 93년 단군릉발굴보고를 내고,94년 단군릉을 대대적으로 재건,공개했다.이후 관련유적과 기념물을 정비하면서 매년 전 학계를 동원해 단군과 상고사 학술회의를 개최해오고있다. 남측 학계는 이에대해 “정치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는 시각이주류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남북간 관련정보를 공유하고 양측 주장을 검증할 공동연구의 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적지않게 제기되고있다. 또다른 논의는 단군의 역사적 실체를 재해석,민족통일과 세계의 미래에 기여할 보편적인 담론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단군은 학파와 종교를 초월해 공유할 수 있는 민족 정체의식을 확립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같은 단군의 실체규명에 대한 논의는 더욱번져나갈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최근 논의가 ▲학문으로의 기본요건에 충실해야하고 ▲단군의 모습을 시대과제에 맞게 재해석,민족성원들을 실천의장으로까지 이끌어내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동력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즉 민족에 대한 애정은 덕목이 될 수있지만 그 애정이 과학적 엄격성을 약화시키는 명분이 돼선 안된다는것이다. 한말·일제기의 단군은 저항민족주의의 요구에 부응했지만지금은 다르다는 지적이다. 현재 단군에 대한 인식은 혼란 그 자체다.강단 학자들 간 뿐만 아니라 ‘강단학계’와 ‘재야학계’,그리고 국민들의 편차가 너무 크다. 실제로 최근 월간 ‘뉴휴먼丹’이 전국의 18세 이상 성인 5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선 54%가 단군을 역사속의 실존인물,34%가 신화속의 인물이라고 답했다.종교별로도 개신교신자는 32%만이 실존인물이라고 한 반면 비개신교 신자는 50∼68%가 실존인물로 보고있는 것으로 나타나 큰 편차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영훈 교수(정치학)는 “지금의 단군연구는 전체적으로 만연한 혼란상 정리를 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며 “학계는 엄격한 사료를 근거로 다양한 가능성들에 대해 문을 여는 개방적인 자세로 공동연찬의 장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호기자 kimus@. *교과서에 나타난 단군. “1970년대 시험문제를 1990년대 교과서 내용에 근거해 채점한다면정답이 바뀌거나 문제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것도 적지않다.지난 20∼30년 동안 국사교과서의 무책임성을 교정하지 않고 되풀이 한다면 언젠가는 이 문제로 소송이 벌어지는 사태도 올 것이다” ‘한국 상고사의 쟁점-국사교과서 개편방향과관련하여’를 주제로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개천절 기념 학술토론회에서 정영훈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의 주제발표 내용 가운데 일부다. 우리나라는 국사교과서를 1974년부터 국정으로 편찬하고 있다.정교수의 지적은 그동안 우리 국사교과서가 다루어 온 상고사의 문제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문제점은 고조선 및 단군에 대한 기술에서도적지않게 나타난다. 인문계 고등학교 교과서를 보면 고조선의 중심지를 놓고 74년판은“고조선의 옛 지역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면서 지도에 낙랑을 평양지역에 표기함으로써 중심지가 평양지역임을 나타냈고,이런 서술은 82년판까지 이어졌다.90년판부터 “고조선은 랴오닝(遼寧)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인접한 군장사회들을 통합하면서 한반도까지발전하였다”고 하여 중심지가 이동해왔음을 밝혔다.96년판부터는 “초기에는 요령지방에 중심을 두었으나,후에 대동강 유역의 왕검성을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면서 발전하였다”고 이를 분명히했다. 단군이 고조선의 건국자인가 하는문제를 놓고도 미묘한 차이가있다.74년판은 그저 단군신화가 존재했고 단군신화가 고조선사회를이끌어가는 세계관의 구실을 했다고만 언급했다.그러나 82년판에 단군왕검은 제정일치 시대의 족장이었다고 적음으로써 고조선의 건국자가 단군일 수 있음을 암시했다.기원전 2333년이라는 건국연대를 소개했다는 것은 상당한 진전으로 평가되지만,단군왕검을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 해석함으로써,고조선의 건국시조로 분명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이같은 서술경향은 90년판과 96년판에도 이어지고 있다. 서동철기자 dcsuh@. *북한 단군릉 답사기. 98년 11월 첫 방북취재 중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 기슭에 위치한 단군릉을 방문했다.북에 오기 전에 사진으로 보기는 했지만 능입구에 도착한 순간 그 규모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눈부신흰색 화강암 계단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고,그 정상에는 피라미드를연상시키는 단군릉이 우뚝 솟아 있었다.그런데 능 입구에 모서리 일부가 떨어져 나간 오래된 비석이 하나 서 있었다.높이는 2m 정도.1936년에 세워진 ‘단군릉 기적비(紀蹟碑)'였다.비석에는 수많은 한자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일제가 이 곳에 위치한 단군릉을 파괴하자 이에 분노한 뜻있는 조선인 인사들이 단군릉 수축기성회(修築期成會)를 조직,단군릉을 보존 관리하기 위한 기금을 모았는데 성금을 기부한사람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는 내용의 비문이 적혀 있었다.기자는다시 한번 놀랐다.그러면 일제하에서도 이 곳에 단군릉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는 말인가.해설 강사는 일제하 뿐만이 아니라고 했다.조선시대에 간행된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평양의 단군릉에 대한 기록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숙종·영조·정조 조에 강동의 단군묘를 수리,관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는 것이다.또한 단군릉 주변의 지명도 대박산(밝은 산),단군호,단군동,아달동 등 단군과 관계있는 것들이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북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평양 단군릉의 실재 여부를 두고 논쟁이 많았는데 김일성 주석이 단군릉으로 알려진 강동군의 작은 무덤을 실제로 발굴해 진위를 과학적으로 밝히라는 교시를 내렸다. 역사학자들이 발굴을 시작한 결과 사람의 뼈가 나왔는데 남자의 것으로 추정되었다.유럽의 전문 연구기관에 의뢰해서 전자스핀공명법으로 뼈의 연대를 추정한 결과 5011년전(오차 267년)의 것이라는 결과가 나와 이 뼈를 단군의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해설 강사의 설명을 들으며 화강암 계단을 올랐다.계단은 무려 279개.돌계단 중간에는 선돌을 연상시키는 돌기둥이 대문처럼 세워져 있었고 양쪽 끝으로는 단군의 네 아들과 여덟명의 신하상이 능을 호위하듯 서 있었다.모두 눈부신 흰색 화강암들이었다.279개의 계단을 다오르자 한 변이 50m, 높이 22m,9층 계단식 무덤인 단군릉이 위용을드러냈다.1994년에 준공되었음을 기념해서 모두 1,994개의 화강암 돌로 짜맞추었다고 했다.이처럼 숫자에 의미를 부여해 건축하는 것은북의 건축물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단군릉의 모양은 광개토왕릉으로 추정되는 퉁거우의 장군총을 본뜬것이라 했다.무덤의 네 모서리에는 코끼리 만한 돌호랑이상이 세워져있었고, 그 앞에는 높이7m의 비파형 동검이 서 있었다.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의 대표적 무기다.능 뒤쪽에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있었다.안으로 들어가보니 이곳에서 발굴된 86개의 단군과 그아내의 뼈가 나무관 내부의 밀폐된 유리관 속에 보존되어 있는데 빛과 습기·공기로 인한 손상을 막기 위해 유골은 참관시키지 않는다고했다. 평양 단군릉에 대해서는 실재성에 대한 근거도 있고,또 그에 대한반론도 있다.이 문제는 앞으로 남북의 역사학자들이 합동연구로 밝혀내면 될 일이다.또한 북이 ‘민족의 시조' 단군릉을 그처럼 거대하게개건한 것은 ‘평양'이 아니라 ‘민족'을 내세우기 위함이라고 보는 편이 보다 합리적인 시각일 것이다. 평양 신준영기자 jun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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