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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벼랑에 선 공산주의/변혁물결 집중탐구:2

    ◎동구개혁은 「인민 민주주의」 퇴장의 서곡/불 제2혁명기의 「주권민주주의」 몰락과 상통/“인간의 생사 지배한 폭압”이 빚은 역사적 귀결 지난해 유럽대륙의 서부와 동부에서는 큰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서쪽 프랑스에서는 「혁명」 2백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거국적으로 거행되었고,동쪽에서는 보다 압도적인 광경들이 세계의 숨을 죽이고 있었다. 베를린에서 냉전의 장벽이 터져 나는가 하면,부쿠레슈티의 펠리스 광장은 대학살을 수반한 내전끝에 얻어진 국민의 정치적 소생으로 열기가 가득했다. 유럽대륙 양편의 그 사건들은 모두가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이는데 사람들의 눈과 귀는 주로 동쪽으로만 쏠리다시피 하였다. 동쪽에서 전개되는 일련의 사건들이 주는 놀라움이나 충격이 훨씬 큰것이었기 때문이리라. 프랑스 혁명 2백주년과 그 대단원의 막은 아직 내려지지 않은 상태인 동구의 드라마,그것은 서로 별개의 사건일까. 이 물음을 풀어보는 것은 동구의 변혁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의미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급진혁명논리 무장 「프랑스 혁명」은 흔히 유럽대륙에서 최초로 시민국가의 탄생을 가능케한 자유주의적 시민혁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알고 지나쳐 버릴수 없게 하는 면이 있어 보인다. 혁명의 전개과정이 단일한 이념이나 노선으로 시종 일관하고 있는 것이 아님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크게 두 단계로의 가름이 가능한데,그 첫단계를 헌법국가를 세우기 위한 혁명(1789∼1791)이라 규정한다면,그 다음단계는 헌법국가를 부정하기 위한 혁명(1792∼1794)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시기적인 구분을 한다면 전자는 제1차 혁명이 되고 후자는 제2차 혁명이 된다. 「제1차 혁명」은 인권의 기본이념이 되는 민주적 헌법국가의 건설이 그 과제였다. 당시 국민의회는 스스로 「제헌의회」임을 선언하고 봉건제도의 폐지,귀족과 시민의 법적 평등,귀족특권의 폐지를 의결하고(1789년8월5일) 인권선언을 채택했으며(1789년8월16∼26일),헌법심의와 문안작성에 2년을 투입한 끝에 1791년9월3일 헌법을 의결하였다. 18세기 정치적 계몽주의의 정수를 이루었던 인권과 권력분립과 민주주의가 이 헌법속에 담겨졌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유민주주의가 그 이념적 모태였다고 할수 있다. 이 헌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주권자의 존재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어느 일부의 국민이나 어느 일개인도 주권의 행사를 전유할수 없다」는 명문규정이 있기도 하려니와 권력분립이란 원리는 주권자의 존재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해서 국민주권을 부정한것은 아니었다. 「주권은 불가분,불가양이며 시효에 의하여 소멸하지 않는다. 주권은 국민에 속한다」 국민주권은 명시적으로 선언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권은 「헌법제정권력」이란 의미에 국한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일단 헌법이 제정되면 헌법속에 해소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국민은 주권의 담지자일뿐 그 행사자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 헌법은 1년도 채 안가서 도전을 받는다. 1792년8월10일 파리코뮨(파리시 평의회)에서 시작된 「제2차 혁명」이 발발한 것이다. 이 혁명의 주도자들(로베스피에르 그룹)은 인권과 권력분립에 기초한국법을 파기하고 인간의 절대적인 「해방」을 추구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관심사는 국가권력의 제한이 아니라 그것의 극복이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이 관철하려고 한 것이 곧 「주권적 민주주의」였다. 이것은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이라는 이상을 그 전제로 한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별이 없어지고 만인이 모두 지배자가 되는 경지가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대표」의 원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의 원리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고,완전한 자유는 이러한 동일성에서만 기대될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현실의 국가에서는 실천이 될 수 없는 이상이요 극단적인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동일성 또는 완전한 자치라는 것은 그것이 순수한 이상으로 고양될 경우 오히려 권력국가적 현실을 전체주의적 테러로까지 고양시키는 것도 허용하게 된다. 동일성이라는 목표가 성취될때까지는 거기에 이르는 도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또는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사람,곧 「진리의 엘리트」의 지도를 따라야 한다는 논리가현실을 규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재판소」(인민재판소의 일종으로 원고와 재판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의 설치(1793년3월10일),「공안위원회」의 구성(1793년4월6일),신헌법 발효의 연기(1793년7월),「용의자 법률」의 의결(1793년9월17일ㆍ이 법률에 의해 테러가 합법화됨) 등 일련의 조치들이 취해진 것은 바로 이러한 논리가 관철되어 나가는 표현들이었다. 1793년10월10일 국민공회는 마침내 「공안위원회」에 무제한의 권력(주권)을 부여하는 수권법을 정식으로 공포하기에 이른다. 1789년의 혁명으로 사라졌던 주권자가 명실공히 재등장한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혁명전의 주권자가 군주였었는데 비해서 이제는 민중의 「참이익」 옹호그룹이라는 것이다. 이듬해 6월10일 사형이 「혁명재판소」의 임의적인 권한에 속하게 되고 시민이 섬겨야할 「교리」까지 도입되었다. 「국민복지의 관리자」들은 생사여탈권 뿐만 아니라 생존자의 신앙문제를 결정할 권리까지 소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1789년 인권의 이름으로 시작된 대혁명이 그 인권의 절대적인대립물로 변화되고 만 셈이다. 국가가 진리와 인간의 생사와 신앙영역까지 마음대로 지배하기에 이르렀으니까. 이와 같은 야만성의 극치는 다름아닌 「주권적 민주주의」가 초래한 현실적 귀결인 것이다. 1794년7월24일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추종자들이 치열한 권력투쟁에 패하여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짐으로써 혁명은 일단 막을 내린다. ○“인민의 옹호자” 강변 「주권민주주의」는 프랑스 혁명의 대단원이 막을 내리면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인가. 동구사태를 눈여겨 보면 유럽지역내에 있어서 그것은 차우셰스쿠의 몰락이 분기점으로,말하자면 퇴장의 시작으로 인정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프랑스혁명의 저 급진적 시기의 혁명논리 위에 구축된 국가의 주권자였기 때문이다. 루마니아의 로베스피에르로서 그도 처형되는 순간까지 『인민의 이익의 옹호자』임을 주장했다. 2백년의 시간을 상거해서 발생된 역사적 사건이 이념사적 견지에서 동질성을 지닌 것임은 분명해졌다. 양자가 공히 주권자의 현존을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를 추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프랑스 「제2차 혁명」 시기의 「국민의회」는 오늘의 민주적 집중제(De­mocratic Centralism)에 있어서의 소비에트(평의회)의 모범이 된 것이고,「혁명재판소」와 「공안위원회」는 각각 인민재판소와 전위당(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전례가 된 것이다. 「노동계급과 모든 근로대중의 이익」이라는 상투어는 프랑스 제2혁명 그룹의 전가의 보도였던 「민중의 참이익」의 복사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2백년 전이나 오늘이나 좌파혁명의 그 주도자들은 「진리의 엘리트」임을 선전한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가 루소의 「국교」를 「도입」했듯이 레닌ㆍ울브리히트ㆍ차우셰스쿠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국교로 도입했다. 요컨대 프랑스 제2혁명기의 「주권민주주의」는 동구 공산권이 신봉해온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혹은 「인민민주주의」)의 원형이라 보아도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 발상지 파리에서 1871년 「파리코뮨」을 통해 50여일간 득세를 한 적이 있고 1917년의 러시아혁명을 계기로 해서 역사의전면에 다시 등장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새 현형 등장 주목 이렇게 보면 「프랑스대혁명」은 2세기동안 서로 각축하면서 현대사를 각인해 오다시피한 민주주의의 두 이념형의 최초의 경쟁이 시발을 본 사건이고,1989년의 동구의 변혁은 2백년에 걸친 이데올로기적 세계시민전쟁의 두 주역중의 하나가 드디어 힘이 부치기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징조로 보면 될것 같다. 그것이 금세기가 다 가기전에 현실적 생명력을 끝내 상실하고 정치이념서적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될것인지,아니면 모종의 새로운 현형을 등장시킴으로써 존속을 계속할 것인지 금후의 귀추가 주목된다. 현재 확실해지고 있는것은 폴란드ㆍ동독 혹은 체코등 인민들이 메시아주의적 전통의 멍에로부터 빠져나와 경험주의적이고 함리주의적인 방향으로 계몽과 성숙을 성취해 나가고 있는 나라들의 경우 「민중주권민주주의」는 주권자의 현존을 전제로 하는 경제체제(계획경제체제)를 대동하고 서서히,그리고 쓸쓸히 무대의 뒤로 사라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정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문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대학원 교육철학 및 정치교육학 연구(교육학 박사) ■서독 튀빙엔 대학 연구교수(정치교육학 연구) ■민주 이념연구소 소장 ■저서=▲민중과 혁명논리 ▲한국대학생의 실존적 좌절
  • 회교로 무장 무기한「성전」 전망/무력진압 뒤의 아제르바이잔

    ◎군투입이 오히려 민족감정 자극/사태 장기화땐 소 군부 반발 예상 소련연방정부가 아르메니아인 학살과 독립요구로 무정부상태에 빠진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시에 군병력을 투입,진압에 나선데 맞서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이 아프가니스탄식의 무장저항을 벌일 가능성이 고조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 주민들이 소련당국의 무력진압에 강력히 반발하고 나섬에 따라 고르바초프가 대지방정부 정치에서 상실한 지도력을 회복하는데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때문에 미국이 베트남에서,영국이 키프로스에서 당했던 것처럼 현재 종족분규지역에 투입된 소련군도 소수민족의 민족감정을 자극,호된 곤욕을 치를 것으로 소련관측통들은 전망하고 있다. 문제는 소련군이 얼마나 신속히 사태를 장악하고 아제르바이잔인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느냐의 여부다. 그렇지 못할 경우 정부군의 강경진압에 밀려 지하로 점적한 아제르바이잔의 과격 민족주의세력들은 정부군을 상대로 무기한 「성전」을 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제르바이잔이또하나의 아프간이 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게릴라화의 저변에는 무력진압을 바쿠시에서 먼저 감행함으로써 정부가 일방적으로 아르메니아인의 편을 들고 있다는 아제르바이잔인의 피해의식도 깔려있다. 소련정부의 무력진압이라는 강경조치는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표현처럼 「국가적 재앙」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위한 것이지만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군사작전은 쉽게 끝나겠지만 작전이 끝난 뒤에도 군사개입을 계속해야할 뿐더러 소련군은 전통적으로 국내치안문제에 개입하길 원치 않아온 전통 때문에 대군부 문제도 만만치 않다. 반면,아프간 내전때 처럼 사태를 질질 끌게되면 결국 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에 반기를 들어온 수구ㆍ보수파들이 이를 이용,개혁ㆍ개방의 물결을 역류시킬 가능성도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19세기 중엽 제정러시아가 이 지역을 차지하면서 러시아 이란 터키 3국에 의해 분할됐으며 현재 이란내에 약 5백만명,소련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에 6백80만명의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살고 있다.따라서 회교중에서 시아파에 속하는 아제르바이잔인들은 이번 기회를 빌려,이들 양지역에 분산돼 있는 동족들을 통합,독립된 이슬람 공화국 수립을 최종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소련은 이같은 분리 움직임은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입장이어서 지금으로선 무력에 호소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상태다. 만약 아제르바이잔을 잃었을 경우 소련이 입을 피해는 엄청나다.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는 카스피해의 최대항구이자 세계적 유전지대로 석유화학공업의 중심지다 이와함께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이란과의 외교분쟁도 예상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인은 터키계로 페르시아계 이란인과는 인종적으로 다르나 같은 시아파 회교국가인 아제르바이잔과 이란은 종교적 유대가 강하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 통합운동은 이란 북부지역의 분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란으로서도 결코 달가운 현상은 아니어서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되고 있다.
  • 당본부 에워싸고 진압군ㆍ수만군중 대치

    ◎반기 물결속 시내 곳곳에 시체 뒹굴어/탱크 1천대 앞세우고 어제 새벽 진공/아제르바이잔 분규 진압현장 ○주요 공공시설 탈환 ○…진압작전이 있은 직후인 20일 낮 소 외무부의 베스 메르트니크 제1차관은 모스크바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바쿠전역에 아직 긴장이 계속되고 있기는 하지만 『군이 거의 통제권을 장악했다』고 발표. 그는 발전소ㆍ상수원 등 주요시설에 군의 배치가 모두 완료됐으며 『상황은 군진입 이전보다 한결 좋아졌다』고 주장했다. ○…아제르바이잔 관영통신 아제르인폼의 편집인 바딤 코르시는 모스크바와의 전화통화에서 가장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진 바쿠시 민병대의 한 병영은 『피바다를 이루고 있다』고 말하고 바쿠공항으로 가는 길목에도 시체가 나뒹굴고 있다고 전언. ○…드미트리 야조프 국방장관이 직접 지시ㆍ감독한 정부군의 바쿠시 진입작전에는 1천대 이상의 탱크와 장갑차가 동원됐으며 아제르바이잔 민병대와 치열한 총격전을 벌임으로써 전쟁을 방불케 했다. 소 연방정부 진압군은 아제르바이잔 민병대가 도로곳곳에 설치해놓은 바리케이드를 탱크로 밀어붙이며 시내로 진입했으며 저항하는 민병대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벌거벗긴채 끌려가 ○…바쿠시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인 폭도들이 아르메니아인들의 집을 습격,가재도구를 길거리로 끌어내 부순뒤 가족들을 강제로 배에 태워 외지로 내쫓았다고. 주로 젊은이들로 구성된 폭도들은 특히 종족분규 초기인 지난 13,14 양일간 아르메니아인들의 아파트에 집중적으로 난입,폭력을 휘둘렀으며 길거리에는 벌거벗겨진 한 여자가 폭도들에게 끌려가며 담요로 몸을 가리려고 애쓰는 안타까운 모습도 보였다는 것. 사태가 악화되자 1만4천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이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을 탈출했으며 바쿠시에 살던 아르메니아인 세계 체스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도 무려 48명의 친척과 친구들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피신해왔다고. ○나히체반,탈소선언 ○…소련 아제르바이잔공화국 소속의 나히체반 자치공화국은 20일 연방정부군의 철수를 주장하면서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고 이란 관영 IRNA통신이 보도했다. ○소지도자 암살 경고 ○…지금까지 수십명의 터키 외교관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진 레바논내 아르메니아 지하조직 아살라(아르메니아 해방을 위한 비밀군)는 20일 소련이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학살을 막지 못할 경우 소련 지도자들이 다음번 암살 목표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란 거주 동족들,무기지원/새 회교공화국 설립 주장도 ○거룻배로 무기반입 ○…이란에 거주하는 아제르바이잔인들은 소련에 사는 동족들을 돕기 위해 무기와 기타 정치적인 지원을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됐다. 정부기관지 이즈베스티야는 19일 이란접경 나히체반,잘리라바드지역에서 소련과 이란에 사는 양측 아제르바이잔인 수천여명이 서로 국경을 넘어 상대방 지역으로 오갔으며 소­이란간 국경인 아라크스강에는 거룻배를 이어 만든 다리들이 놓여져 상당한 규모의 무기가 반입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탈소 반대자에 테러 ○…소련관영 타스통신은 19일 아제르바이잔인들 사이에서 소련정부의 무력전복과 소련내 아제르바이잔인들과 이란내 동족들이 합쳐 새로운 회교공화국을 수립하자는 요구가 나오는 등 종족분규가 더욱 민족주의적 양상을 띠면서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타스통신은 19일 열린 바쿠시 시위에서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을 소 연방으로부터 분리시켜 「단일 회교국의 깃발아래」 이란내 동족들과 합쳐 새로운 국가를 세우자는 요구가 나왔다면서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테러위협이 가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 공산당,격렬 비난 ○…일본 공산당은 20일 소련 진압군이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의 수도 바쿠에 무력진입한 것을 비난하고 실질적인 내전의 즉각적인 중단을 소련 공산당측에 요구.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이날 전문을 통해 아제르바이잔의 현 상황은 『스탈린시대 이후 실시돼 온 잘못된 민족정책』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지적.
  • 전남대생 격렬시위/경찰,헬기 동원 해산

    【광주】 전남대 조선대생 등 7백여명은 13일 하오2시쯤부터 전남대 5ㆍ18광장에서 전남지역 대학생대표자협의회와 광주ㆍ전남 민족민주운동단체 대표자회의 공동주최로 「기만적 5공청산 분쇄와 학살주범 전ㆍ노 처단을 위한 1차 시민대회」를 갖던 중 헬기까지 동원한 경찰이 교내로 진입해 강제해산에 나서자 교내 곳곳에서 화염병과 돌멩이 등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날 대회에는 광주ㆍ전남 민족민주운동단체 대표자회의 소속 재야인사 20여명도 참석했다. 경찰은 이날 하오1시쯤부터 7개 중대 1천여명의 정ㆍ사복경찰을 전남대 정ㆍ후문에 배치,철저한 검문검색으로 외부학생 및 재야인사들의 집회 참가를 막은 뒤 집회시작 40분만에 다연발 최루탄 발사차량 2대와 전남도경 헬기 1대를 동원,공중에서 해산작전을 벌였다. 경찰은 이날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이 일단 해산한 뒤 시내로 빠져나가 곳곳에서 산발적인 가두시위를 벌이거나 공공건물에 대한 기습시위를 벌일것에 대비해 주요지역에 대한 경비를 강화하고 있다.
  • 합법성 논쟁에 휘말린 「노리에가 재판」(특파원리포트)

    ◎김호준 워싱턴특파원 미 법률전문가,“선례없는 불법” 대정부 비난 파나마의 전실권자 마누엘 안토니오 노리에가에 대한 미국의 재판은 미국내에 거주하지 않는 외국지도자를 국외에서 체포,국내재판에 회부한 전례없는 처사라는 점에서 법적 정당성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미국의 많은 국제법 학자들은 미 정부의 처사에 대해 『역사상 선례가 거의 없으며 사후 법적논거만을 가진 거친 정치행위』라고 말한다. 일부 학자는 『그런 선례를 찾으려면 2천년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꼬집으면서 『노리에가 장군이 미국으로 압송도중 C­130 수송기내 유치장에서 수갑에 채는 모습은 고대로마를 연상케 했다』고 말했다. 고대로마인들은 사로잡은 정복지의 통치자들을 사슬에 묶은 채 로마로 데려와 원형경기장에 모인 시민들에게 내보였다. 노리에가는 체포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투항했다는 것이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미 정부 관리들은 노리에가의 투항이 강요된 것이 아니었다고 역설하지는 않지만 노리에가는 미군 비행기에탑승하기 전까지 체포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 변호사협회의 국제형법분과위원장인 브루스 자가리스는 『노리에가가 구금되고 자유를 박탈당했을때 그의 체포는 이뤄진 것』이라고 정부측 주장을 반박하면서 『미국의 노리에가 체포는 법적 근거가 약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미 정부의 이번 행위는 미국에 비우호적인 외국정부로하여금 해외여행중인 전직 미 관리의 체포를 정당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기했다고 지적했다. 플래처 법률ㆍ외교학교의 국제법 교수 알프레드 레빈은 『노리에가 체포는 아야툴라 호메이니가 「악마의 시」 저자인 살만 루시디를 회교모독 혐의로 영국 영토에서 체포해 이란으로 데려오라고 명령했던 것과 다를바 없다』고 말했다. 노리에가는 지난 4일 마이애미 법정에서 개시된 자신에 대한 심리에서 자신은 정치범이므로 미국 법원은 자신을 마약밀매혐의로 재판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 그의 법정대리인 프랭크 루비노 변호사는 『미국의 파나마 침공은 불법이며 노리에가는 국가원수로서 미국내 기소에 대해면책특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노리에가 재판을 둘러싼 법률논쟁에서 제기되고 있는 문제의 하나는 노리에가가 실제로 파나마의 통치자였느냐는 점이다. 부시정부는 지난해 5월 파나마 선거에서 길레르모 엔다라가 대통령으로 당선됐기 때문에 노리에가는 파나마의 진짜 정부수반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시카고 대학의 국제법교수인 기돈 고틀리에브는 『미국정부가 노리에가를 합법적인 지도자로 간주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는 국가수반에게 전통적으로 주어지는 소추면책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미 연방법원 판사들은 외국인 피고가 법정에 어떻게 불려나왔는지에 관해서는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노리에가를 외국영토에서 끌어왔다는 이유로 소송을 기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틀리에브 교수는 아돌프 아이히만 사건을 예로 들면서 미국이 국제법을 위반했다면 그건 파나마 주권에 대한 것이지 노리에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따라서 아이히만 사건에서 아르헨티나가 했던 것 처럼 파나마만이 항의를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60년 이스라에 정보원들은 나치 독일의 유태인 학살원흉인 아이히만을 피신중이던 아르헨티나에서 납치했다. 이스라엘은 아르헨티나의 국권 침해를 인정했지만 그것이 아이히만을 돕지는 못했다. 그는 전범으로 재판에 회부돼 결국 처형됐기 때문. 플레처학교의 레빈교수는 나치전범의 경우와 노리에가는 다르다고 말한다. 그는 『국제법에는 문명질서에 반하는 범죄로서 어느나라가 기소해도 무방한 보편적 범죄의 개념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그러나 마약거래와 자금 「세탁」은 그 범주에 들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 그레그,광주사태 미 책임 부인

    ◎“공수부대,한미연합사 지휘권 밖 광주 미 문화원은 상반기에 개원” 【광주=임정용기자】 도널드 그레그 주한미대사는 8일 『80년 5월 광주비극에 미국은 전혀 책임이 없다』고 밝히고 그점에 대해 광주시민의 이해를 요망했다. 그레그대사는 이날 하오 2시 광주 그랜드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당한 광주시민에게 조의와 애도를 표하기 위해 광주에 왔으나 미국이 이와 관련,사과성명을 내야할 만한 일을 한적이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레그대사는 80년 5월 광주에서의 미국의 입장과 역할에 대한 질문에 대해 『이 문제는 광주시민의 반미 감정의 핵심을 이루는 민감한 주제』라고 전제,『광주시민을 진압한 공수부대는 한미연합사 작전지휘아래 있는 부대가 아니고 20사단도 전년 12월 작전권이 한국측에 이양된 부대였다』고 밝혔다. 따라서 미국측은 광주의 비극을 그 사태 이후에야 알게 됐고 특히 『공수부대원이 20사단 유니폼을 입고 광주에 투입된 사실도 수개월후에야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지난해 5월잠정폐쇄한 광주 미문화원의 개원문제에 대해 『올 상반기중에 문을 열 계획으로 이전 예정지인 광주여성회관등을 둘러보았다』고 밝혔다. 2박3일 일정으로 지난 7일 부임후 처음으로 광주에온 그레그대사는 이날 상오 송언종전남지사를 예방하고 『최근 주한미군의 철수등 향방에 대해 워싱턴으로부터 서로 다른 견해들이 전해져 혼란을 초래하고 있으나 작년 2월 부시 미대통령이 말한 바와 같이 주한미군은 한국 국민이 원하는 한 이동등 부분적인 변화는 있을 것이지만 계속 주둔하게 될 것이다』고 밝혔다. 그레그대사는 8일 하오 전계량 5ㆍ18유족회장(55)을 비롯,명로근ㆍ송기숙전남대교수,조아라광주YWCA명예회장 등 재야및 문화계 인사들을 광주 미문화원장 공관에 초청,만찬을 가지려 했으나 전씨등 일부 인사들은 『5ㆍ18항쟁의 학살배후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이 관련없다는 변명만을 하는 것은 광주시민을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에 초청을 거절하겠다』며 참석치 않았다. 이에 앞서 그레그대사는 이날 상오 8시 그랜드호텔에서 김경천광주YWCA총무,남재희광주남동천주교회신부,변동현ㆍ이용일전남대교수를 비롯,광주지역 언론계 인사등과 조찬을 함께하며 자신의 광주방문의 배경 등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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