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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순사건 당시 교전 중 살해된 의용단원, 유공자 인정”

    “여순사건 당시 교전 중 살해된 의용단원, 유공자 인정”

    군인 신분이 아니더라고 현장 활동 중 적에게 피살됐다는 근거가 있다면 국가 유공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행정심판 결정이 나왔다. 국민권익위원회 소속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여수·순천 사건 당시 의용단으로 활동하다가 피살된 A씨를 현충탑 위패 봉안 사실과 국가기록원에 보존된 사료 등에 근거해 국가유공자로 등록해야 한다고 결정했다고 29일 밝혔다. 앞서 고인의 자녀는 ‘사건 당시 진압 활동 중 경찰로 위장한 적대세력에 의해 순국했다’며 보훈지청에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을 했으나 보훈지청은 고인이 비(非)군인 신분으로 전투 등에 동원된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고인의 자녀는 등록거부 처분 취소를 청구하는 행정심판을 중앙행심위에 제기했다. 이에 중앙행심위는 전국 순국반공 청년단 운동자 명부에 고인이 1949년 7월 여수·순천 사건 당시 의용단 활동 중 피살됐다고 기재돼 있는 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도 고인이 경찰 토벌대에 의해 총살됐다는 조사가 이뤄진 점을 고려해 등록거부 처분을 취소하도록 했다. 국가유공자법에 따르면 전시근로동원법에 따라 동원된 사람이나 청년단원·향토방위대원·소방관·학도병 등으로 전투나 교육훈련 중 사망한 사람은 전몰·순직 군경으로 보고 보상하도록 돼 있다. 권익위는 “비군인 신분으로 국가를 위해 희생했지만 이를 증명하기 어려워 국가유공자로 등록되지 못한 사람들의 권익을 구제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세종 박찬구 선임기자 ckpark@seoul.co.kr
  • 영덕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16일 정식 개관

    영덕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16일 정식 개관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도운 ‘성동격서(聲東擊西) 작전’인 경북 영덕 장사상륙작전을 기념하는 전승기념관이 정식 운영에 들어갔다. 영덕군은 16일 남정면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에서 준공식을 갖고 본격 운영에 나섰다. 준공식에는 장사상륙작전유격동지회원을 비롯해 기관단체장, 군 관계자, 주민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영덕군은 애초 9월 14일 장사상륙작전 70주년 전승기념식 때 준공식을 열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 사태로 연기했다. 장사상륙작전전승기념관은 길이 90m, 폭 30m로 지상 5층 연면적 4881㎡로 준공됐다. 군은 2012년부터 올해까지 324억원을 들여 남정면 장사리 해안에 장사상륙작전에 사용했다가 좌초한 LST문산호를 재현한 시설을 만들었다. 1∼2층에 자리 잡은 전시관은 작전 배경, 부대 결성, 출동, 작전 전개 순으로 전시물이 설치됐다. 3∼5층 갑판과 상부는 체험·휴게공간으로 70년 전 호국용사들의 희생으로 지킨 현재 장사리 해안 주변을 볼 수 있다.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인 1950년 9월 14일 북한군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편 군사작전이다. 투입된 병력은 대부분 대구와 경남 밀양에서 입대한 학도병이다. 6일간 벌인 전투에서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다쳤다. 39명은 구조선에 타지 못해 대부분 포로가 됐다.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채 장비와 보급 지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9월 19일 구조선인 조치원호를 타고 철수할 때까지 북한군 2군단 주 보급로를 교란하고 2개 연대와 전차 4대를 영덕으로 유인하는 등 큰 전공을 세웠다. 이들의 활약상은 1997년 참전 학도병들이 참전유격동지회를 결성하고, 좌초된 문산호로 추정되는 선체가 확인되면서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이희진 군수는 “정식 개관에 앞서 지난 6월부터 운영을 시작해 지금까지 7만명 정도가 다녀갔다”면서 “전승기념관 방문객들에게 참전용사들 희생과 공헌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 성역화 사업을 지속해서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영덕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시티투어버스 타고 과거로 시간여행…서울시, 투어+공연 무료 이벤트

    서울시가 도심 여행과 서울의 역사적 스토리, 문화·예술 공연이 결합된 이색 시티투어버스 프로그램 ‘2020 메모리즈 인 서울’을 4일부터 20일까지 총 3주간 운영한다고 3일 밝혔다. 참가비는 무료다. 시민들은 시티투어버스를 타고 덕수궁,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등 서울의 주요 명소와 역사적 장소로 이동한다. 각 장소에선 독립운동 등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한 연극, 마술, 무용, 팝핀 등의 다채로운 공연이 열린다. 시민들은 버스 안에서 관람할 수 있다. 서울시는 ‘과거로 떠나는 시간여행’이라는 테마 아래 총 3개 코스를 운영한다. 코스 별로 각기 다른 시대로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투사 이야기부터 1960년대 버스 안내방송을 담당했던 승무원 여차장까지 ‘도심고궁남산코스’와 ‘전통문화코스’에서 만날 수 있다. 덕수궁 대한문 등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이 밀서를 주고받으며 결의하는 모습의 연극이 펼쳐지고, 전쟁기념관 등에서는 학도병이 가족과 이별하는 장면을 현대무용으로 만날 수 있다. 두 개 코스에선 드라마 ‘임꺽정’으로 널리 알려진 배우 ‘김홍표’가 스토리텔러로 참여해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한다. 지난 2019년 글로벌 슈퍼스타 방탄소년단과의 협업으로 화제가 된 댄스팀 ‘로보트로닉 하모닉스’도 공연을 선보인다. ‘평화의 길 코스’는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서울을 넘어 파주DMZ까지 가는 코스다. 해설사와 함께 전쟁기념관과 임진각을 둘러보고, DMZ를 직접 투어한다. 서울시는 ‘2020 메모리즈 인 서울’을 통해 코로나19로 인해 지친 시민들에게 작은 여행을 선물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참여를 희망하는 시민은 오는 15일까지 공식 홈페이지(www.shnesquetour.com)에서 ‘서울, 버스, 여행’에 대한 자신만의 사연을 작성해 신청하면 된다. 시는 추첨을 통해 최종 탑승자를 선정할 계획이다. 이은영 서울시 관광산업과장은 “코로나19의 여파로 올 한 해 여행도, 공연도 자유롭게 즐기지 못했던 시민들에게 이번 시간여행 테마의 서울시티투어버스 프로그램 운영이 안전하고 의미 있는 ‘뉴 노멀 여행’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며 “앞으로도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발맞춰 새롭고 다양한 시도로 외국인 관광객은 물론 국내 여행객에게도 일상 속에서 훌쩍 떠나는 여행처럼 접근성 높은 문화관광 상품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잊혀진 어린 영웅’ 6·25 참전 인천학생 2000명의 못다한 이야기

    ‘잊혀진 어린 영웅’ 6·25 참전 인천학생 2000명의 못다한 이야기

    ●1996년 7월 ‘인천학생스승6·25참전사 편찬위원회’ 창립 70년 전 한국전쟁 때 국군에 자원입대했던 인천 지역 까까머리 중고생들의 참전 역사를 추적기록해 온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이경종(86)씨와 그의 장남인 이규원(58·이규원치과) 원장이 바로 그들이다. 이씨는 참전 중학생 중 한 명이다. 부자는 1996년 7월 ‘인천학생스승6·25참전사 편찬위원회’를 창립했다.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을 직접 찾아다니며 참전 과정을 육성 녹음했다. 흑백 사진과 관련 유물 등 증거가 될 만한 모든 것을 수집해 2004년 12월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을 전액 자비로 세웠다.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지역 학생 2000여명과 참전한 스승의 나라사랑을 기억하고 전사한 학생 208명과 스승 심선택(당시 24세) 소위를 추모하기 위해서다. 고위층 자녀들의 군 복무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 시대 부자는 이름 없이 잊히는 어린 전쟁영웅들의 이야기를 밝히고 알리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씨는 1995년에 전쟁 중 생긴 허리병 때문에 입원 중이었다. 누군가 가져다 놓은 신문에서 ‘정부가 6·25 참전 용사 증서를 준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리고 이듬해 7월 중·고등학교 졸업장 모양의 참전 증서가 정말 액자에 담겨 배달돼 왔다. 아직 어머니 가슴속이 그리운 솜털 뽀송뽀송한 청소년기 4년을 조국에 바친 보상이 50년이 지난 후 종이 증서 한 장으로 온 것이다. 참전하지 않은 중학교 동창들은 상당수 학업을 계속해 사회 지도층 인사가 됐지만, 이씨는 전역 후 생계가 어려워 곧장 취업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그래서 그의 학력은 ‘중졸’이다.●당시 수많은 또래들 인민의용군 끌려가 실종 “그들은 너무나 어려서 입대할 필요가 없었던 어린 중학생들이었습니다.” 참전 증서를 받아 들자 이씨는 1950년 12월 18일 인천을 출발해 20일 동안 부산까지 걸어가서 참전했던 옛일이 하나둘 주마등처럼 떠오르며 지나갔다. 이씨는 1950년 6월 전쟁이 발발했을 때 열여섯 살 중학교 3학년으로, 인천 동구 송림동 333번지에 살고 있었다. 당시 수많은 중학생 또래 청소년들이 인민의용군에 끌려가 대부분 실종되는 터라, 그는 용유도로 피란 가서 친척 집에 숨어 있었다. 9·15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인천이 수복되고 지역사회가 안정을 되찾을 무렵인 그해 10월 초 인천학도의용대가 창립됐다. 이씨를 비롯해 인천 지역 청소년 및 청년 수천명이 가입했다. 그들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게 되자, 인천이 다시 북에 점령되면 예전처럼 인민의용군에 끌려갈 것을 우려했다. 공포가 인천 전역으로 엄습해 오자, 중학생부터 대학생까지 4000여명은 1950년 12월 18일 인천 병사구사령부(현 병무청)에서 나온 국민방위군 관계자를 따라 동인천역 앞 인천 축현초등학교(현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를 출발해 경남 통영충렬초등학교에 있던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로 향했다. 이씨의 홀어머니는 그 어려운 시기에 어떻게 마련했는지 두 살 많은 형(기종)과 이씨에게 6000원(당시 80㎏짜리 쌀 10가마 상당)씩을 눈물을 흘리며 손에 쥐여 줬다. 옆집 살던 두 살 어린 조순범(당시 중학교 1학년) 등 중학생 50여명도 인천학도의용대 남동지대장이었던 최수보(당시 고려대 2학년) 선배를 따라 길을 나섰다. 출발지는 눈물바다를 이뤘다. 부모들은 전쟁 중에 어린 자식을 군에 보내야 하는 절절함이, 학도병들은 유난히 추웠던 그해 12월 통영까지 500㎞ 거리를 매일 25㎞씩 20일을 걸어야 하는 막막함이 겹치면서 모두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인천은 이듬해 1월 초 또다시 북에 점령당했다.1950년 12월 하순의 추위는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처음 인천에서 출발할 당시 4000여명에 이르던 행렬은 안양, 수원을 지나면서 절반으로 줄었다. 추위와 배고픔,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되돌아간 것이다. 칼바람을 맞으며 추풍령 고개를 지날 때에는 굶거나 얼어 죽어 가는 국민방위군 행렬을 만났다. 길가에 나뒹구는 국민방위군 시신이 허다했지만, 땅이 꽁꽁 얼어 묻어 줄 형편이 안 됐다. 국민방위군은 1950년 12월 40세 미만 제2국민병역으로 조직됐으나 운영이 미숙해 1·4후퇴 때 부산으로 걸어서 철수하다 아사자·동사자·병자가 약10만명이나 발생한 것으로 전해진다. 처참한 모습을 본 이씨 등 일행은 국민방위군 입소를 포기하고 해병이 되고자 마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중학교 4학년(현 고1) 이하는 체력검사에서 대부분 탈락했다. 할 수 없이 마산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이동해 1951년 1월 10일 천신만고 끝에 부산진초등학교에 임시로 문을 연 육군제2훈련소에 도착했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거부됐다. 우여곡절 끝에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는 편법으로 입대했다. 같은 달 31일 군사 기본훈련을 마친 이씨는 공병학교로, 조순범은 부산육군통신학교로 가면서 헤어지게 됐다. 이씨의 형은 해병이 됐으나, 얼마 안 돼 질병으로 귀가했다. 이씨는 1954년 12월 5일 만기 전역했다.●李씨, 장남 권유로 소년병 참전과정 기록 참전 증서를 받아 든 후 이씨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학생 소년병으로 참전했던 전우들이 그리웠다. 그러던 1996년 7월 어느 날 장남인 이 원장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챘다. 아들은 “아버지 제가 도와 드릴 테니 모두 만나 보고 그분들의 참전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 보시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그러면서 20만원이 든 봉투와 카메라, 수첩, 소형 녹음기를 내밀었다. “아버지는 아무도 관심 없는 인천 소년병에 대한 얘기를 더 늦기 전에 기록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6·25 참전 인천 학생들이 진술한 녹음테이프와 인터뷰 수첩, 참전 사진과 제대증, 교육필증 등 참전 관련 각종 공문이 점점 쌓이면서 이 원장은 때로 아버지와 함께 길을 나서기도 했다. 이 원장은 부친에게서 듣기만 했던 6·25 참전 인천 지역 학생들이 수천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전사자도 200여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밝혀낸 뒤에는 의무감마저 생겼다.●참전사 4권 출판… 향후 10권까지 계획 1951년 1월 31일 이후 소식이 끊긴 옆집 후배 조순범의 전사 사실을 알게 된 건 6·25 참전 학생인 변광선(인천상업중 4년) 선배가 제공한 자료에서였다. 1998년 4월 서울 국립묘지를 찾은 이씨는 조순범의 묘비를 쓸어 안고 “너는 전쟁터에서 죽고 나는 살아 돌아와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됐구나”라며 통곡했다. 이 모습을 바라본 아들 이 원장도 눈물을 쏟았다.인천학도의용대 남동지대장을 맡아 중학생 50여명을 이끌고 부산으로 내려갔던 최수보(별세)씨는 1997년 7월 7일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단 1명의 낙오도 없이 후배들을 데리고 부산통신학교로 갔다. 그는 대학생이라 훈련소 현지에서 장교 임관 제의를 받았으나 자신이 데려간 어린 후배들과 함께 사병으로 복무하며 그들을 안전하게 돌보기 위해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생전 이씨를 만난 자리에서 “당시 나의 마음은 어떻게 해서든지 어린 중학생 대원들을 잘 보호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회고했다. 50여년 세월이 흐른 뒤 참전 인천 지역 학생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작은 실마리만 있어도 무조건 달려갔다. 그곳에서 작은 정보라도 얻으면 그것으로 또 다른 연결점 찾기를 반복했다. 1996년부터 지금까지 약 20년 동안 발품을 판 결과 2500여점에 달하는 6·25 참전 인천학생들과 전사학생들의 흔적이 담긴 증서·인쇄자료·훈장증·전사 통지서 등을 모을 수 있었다. 이 원장은 이 자료들을 모아 2004년 12월 자신의 병원 건물 1~2층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을 열었다.●아들 李원장 “전후세대 전쟁 참뜻 이해했으면” 참전관은 추모기억추억 등 3개의 테마공간으로 이뤄졌다. 이 원장은 “참전관이 전쟁을 모르고 자란 세대가 전쟁의 참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역할을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다음달 중순 약 10억원을 들여 대로변 5층 건물 1·2층 연면적 660㎡ 규모로 확장 이전해 새로 문을 연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은 인천 학생 참전 역사 기록사업은 책으로도 펴낸다. 1996년 만든 편찬위원회가 2000여명의 참전 과정과 전사자 208명에 대한 모든 얘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2007년 첫 번째 책을 출판한 뒤 2013년 4권까지 나왔다. 앞으로 총 10권까지 제작할 계획이다. 오늘도 이씨는 이규원치과 1~2층에 마련한 인천학생 6·25 참전관에 들어선다. 먼저 출근한 아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아버지 오셨어요” 하면 이씨는 “감사합니다” 하며 자신의 소원을 들어준 장남에게 허리 굽혀 인사한다. 아들은 “에이, 아버지~” 하며 멋쩍어한다. 그런 부자를 바라보는 직원들과 주변 사람들의 얼굴엔 미소가 피어 오른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연희동 주택가에서의 처절한 전투…아름다운 서울의 평화를 선사하다

    연희동 주택가에서의 처절한 전투…아름다운 서울의 평화를 선사하다

    2005년에 출간한 장편소설 ‘신들의 황혼’을 쓸 때 나는 ‘연희고지 전투’ 장면에서 가장 가슴이 아팠다. 주인공은 겨우 스무 살이었다. 6·25 전쟁이 시작되고 사흘 만에 빼앗긴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연합군이 감행한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한국 해병대원. 불과 한 달 전에 입대한 학도병이었지만 그는 어느덧 죽음에 무감각해져 있었다. 오로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만이 남아 있었다. 포성과 화염에 휩싸인 인천항에서 상륙주정의 문이 열리자 무조건 앞을 향해 뛸 때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많은 인민군이 남쪽으로 내려간 상태에서 항공 폭격과 함포 사격을 퍼부은 뒤였으므로 인천에 상륙한 병사들에게 다가온 것은 전투가 아니라 시체 썩는 냄새였다. 적들이 버리고 간 각종 중화기 사이에서 뒹구는 인민군의 시체들, 불타버린 시체들…. 후퇴하는 적군과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면서 도달한 행주 나루에는 허옇게 불어터진 시체들이 물에 떠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오기 직전에 서울 진격의 교두보 확보를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증거였다. 수륙양용 장갑차를 타고 건너면서 내려다본 한강에는 인민군과 미군과 국군의 시체가 뒤엉켜 있었다.그러나 서울 서쪽 안산의 줄기인 연희고지 근처에 이르자 상황이 달라졌다. 눈앞의 104고지에는 인민군이 기관총과 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고지 앞을 흐르는 하천과 구릉은 적에게만 유리한 지형지물이었다. 게다가 나머지 땅은 엄폐물 하나 없이 트여 있는 개활지였다. 그의 소총 부대는 그 모든 것을 헤치며 나아가야 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훈련장이기도 했던 연희 104고지는 천연 요새이자 적의 최후 방어선이었으므로 서울 탈환을 위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교전의 회오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스무 살 청년은 정신없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동료들의 몸에서 피가 솟구쳐 오르고 곳곳에서 비명이 들려와도 무조건 나아가야 했다. 한국 해병 제1대대는 26명만이 생존했으나 104고지를 탈환함으로써 서울 수복 전투의 승기를 잡았다.바로 그곳, 연희 104고지 전적지를 찾았다. 지난 26일 서울신문과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이 함께하는 ‘2020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의 18번째 여정 ‘104고지와 안산’에서였다. 서울 수복 70주년 기념일을 이틀 앞둔 주말, 하늘은 높고 햇살은 투명했다. 6·25 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 수복을 이룬 것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1950년 9월 15일과 28일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서대문구 연희동, 이 평화로운 주택가가 바로 그 시기의 격전지였다. ‘연희104고지앞(구 성산회관)’이라는 이름의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눈앞에 보이는 대형 건물(구 성산회관, 현 지오영) 뒤의 낮은 산이 104고지다. 그곳으로 안내하는 표지판이 없어서 지도를 살펴 가며 주택가의 오르막길을 올라가니 작은 공원이 나타났다. 1982년에 세워진 ‘해병대104고지전적비’가 그곳의 주인공으로 높게 서 있다. 그러나 1958년에 처음 설치했다는 자연석 비석을 찾을 길 없어 둘러보니 전적비 맞은편 아래로 뒷모습의 윗부분만 조금 보였다. 그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있으나 표지판이 없었다. 지금은 ‘궁동 공원’으로 바뀐 104고지 정상이 아닌 산자락에 전적비가 설치된 까닭은 바로 이 비석 때문이었을 터인데,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1950년대에 비문을 새겼던 역사적인 바윗돌로 이끄는 표지판이 없는 게 아쉬웠다. 연희 104고지 전적지는 서울미래유산이자 현충시설이다. 70년 전에 이곳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젊음을 기리며 우리는 전적비 앞에서 묵념했다. 인민군은 최후까지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어린 병사들의 발목과 기관총을 쇠사슬로 묶어놓고 끝까지 저항하게 했다. 하지만 서울을 탈환하려는 아군의 의지는 그보다 강했다. 아군 전사자 178명, 인민군 사살자 1750명의 치열한 전투였다. 한미 해병이 안산 일대의 주요한 봉우리들을 모두 점령한 것은 9월 25일에 이르러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7일, 한국 해병대 청년들이 중앙청에 걸려 있던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게양했다. 전적비 옆에 있는 ‘해병대 수도 서울 탈환 작전’ 안내판에는 그 사진이 중앙에 가장 크게 게시돼 있다. 사진과 지도가 어우러진 설명문을 읽으며 6·25 전쟁을 이야기하다가 우리는 잠시 서울 시내를 내려다봤다. 안내판에는 ‘104고지 탈환 후 서울 시내를 바라보는 해병대’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 속의 서울은 포연에 휩싸인 폐허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서울은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104고지의 총성이 시작된 지 1주일 뒤 수도탈환기념식에 개선부대로 참석한 해병대 청년들처럼.우리는 연희동 주택가를 지나고 연세대 캠퍼스를 거쳐 안산 자락을 넘어 서대문 쪽으로 코스를 잡았다. 연세대는 당시 6일 동안 엄청난 포격전이 벌어진 격전지였다. 6·25 발발 직후에 인민군 사령부가 들어섰고 서울 수복 후에는 미군이, 1·4 후퇴 때는 중공군이 각각 진지를 구축해 전란 내내 군인들이 주둔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학생들의 자유와 교정의 평화가 가득하다. 1922년에 세워진 핀슨관 앞에서 우리는 잠시 숨을 고르며 멈춰 섰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남학생 기숙사였고 지금은 윤동주 기념관으로 쓰는 국가지정 문화재 건물이다. 윤동주 시인은 1938년과 1940년에 각각 이곳에 머물렀는데, 하숙집터로 알려진 종로구 누상동에서 등교할 때는 안산 자락을 넘어다니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우리는 캠퍼스 북쪽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온실을 지나자 안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쪽문이 나타났다.안산은 자락길이 잘 갖춰져 있지만, 그 길로 진입하기까지는 등산로의 숲길을 헤치며 가야 한다. 서울 수복을 위해 한미 해병대가 진격했던 길, 일제강점기의 윤동주 시인이 하숙집을 오갔던 길, 그 길을 가늠해 보면서 흙길을 밟아 오르다가 숨이 차오를 무렵 안산 자락길을 만났다. 휠체어와 유모차도 다닐 수 있게 조성한 순환형 무장애 숲길답게 주말을 맞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양한 종류의 숲과 여러 방향의 조망을 즐기며 걸을 수 있는 안산 자락길은 총 7㎞로 이어져 있다. 평탄한 데크 길을 걷다가 우리가 걸어온 연희동 쪽을 내려다보면서 앞선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자유와 평화라는 유산을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미래의 세대에게 어떤 유산을 물려줄 수 있을지 생각해 봤다. 자락길에 만발한 꽃무릇의 진홍색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올 무렵, 우리는 서대문형무소 쪽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의 하산길로 접어들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들과 독재정권 시절의 민주화 운동가들이 갇혀서 고통당했던 서대문형무소의 담벼락을 따라 걷는 동안, 우리의 현재는 앞선 세대가 물려준 선물 같은 유산이라는 생각이 거듭 들었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김광섭의 시 ‘독방 62호실의 겨울’과 심훈의 ‘그날이 오면’을 떠올리면서, 우리가 받은 이 선물을 미래에 어떻게 물려줄 수 있을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동안 독립공원을 지나 독립문 사거리에 이르렀다.독립문 건너편에 자리잡은 영천시장도 서울미래유산이다. 1960년대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재래시장으로 전쟁의 폐허를 딛고 자유 민주주의 사회를 발전시켜 나간 서민들의 생활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현장이다. 서울의 대표적인 골목형 전통시장인 영천시장을 통과하면 나타나는 석교교회도 서울미래유산이다. 조금 빠듯했던 일정을 따라 마지막 목적지인 석교교회에 이르자 1916년에 건립된 고딕 양식의 적벽돌 건물이 그 자체만으로도 대견하고 의미 있게 여겨졌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쟁의 폭격에도 무너지지 않고 모든 것을 지켜본 교회. 저 안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사연들로 기도했을까. 이것은 유형의 유산이지만 무형의 유산이기도 하다. 오늘 둘러본 모든 것들이 그랬다. 외형상 문화적 인공물에 해당하는 유산이라도 거기에는 문화적 행위와 이야기가 담겨 있고 물리적 배경이 존재한다.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유산은 어쩌면 유형과 무형으로 나눌 수 없는 우리의 삶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하루하루를 성실히 의미 있게 살아가다 보면 유·무형의 유산은 저절로 쌓여갈 것이다. 미래 세대에게 전할 100년 후의 보물을 둘러보는 서울미래유산 투어. 치열했던 전쟁의 결과로 얻은 자유와 평화의 길을 걸었던 여정의 마지막에서 맑디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연희고지 전투를 끝낸 뒤 피아의 구분 없는 시체더미 속에서 허탈한 마음으로 밤을 맞이했을 때, 동쪽 하늘로 한가위의 둥근 달이 떠올랐다고 했던가. 올해도 그 달은 어김없이 떠올라 우리를 비춰 줄 것이다. 100년 후의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글·해설 고은주 소설가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다음 일정 제19회 4·19민주묘지 ●출발 일시 10월 3일(토) 오전 10시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연희동 주택가에서의 처절한 전투…아름다운 서울의 평화를 선사하다

    연희동 주택가에서의 처절한 전투…아름다운 서울의 평화를 선사하다

    2005년에 출간한 장편소설 ‘신들의 황혼’을 쓸 때 나는 ‘연희고지 전투’ 장면에서 가장 가슴이 아팠다. 주인공은 겨우 스무 살이었다. 6·25 전쟁이 시작되고 사흘 만에 빼앗긴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연합군이 감행한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한국 해병대원. 불과 한 달 전에 입대한 학도병이었지만 그는 어느덧 죽음에 무감각해져 있었다. 오로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만이 남아 있었다. 포성과 화염에 휩싸인 인천항에서 상륙주정의 문이 열리자 무조건 앞을 향해 뛸 때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많은 인민군이 남쪽으로 내려간 상태에서 항공 폭격과 함포 사격을 퍼부은 뒤였으므로 인천에 상륙한 병사들에게 다가온 것은 전투가 아니라 시체 썩는 냄새였다. 적들이 버리고 간 각종 중화기 사이에서 뒹구는 인민군의 시체들, 불타버린 시체들…. 후퇴하는 적군과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면서 도달한 행주 나루에는 허옇게 불어터진 시체들이 물에 떠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오기 직전에 서울 진격의 교두보 확보를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증거였다. 수륙양용 장갑차를 타고 건너면서 내려다본 한강에는 인민군과 미군과 국군의 시체가 뒤엉켜 있었다.그러나 서울 서쪽 안산의 줄기인 연희고지 근처에 이르자 상황이 달라졌다. 눈앞의 104고지에는 인민군이 기관총과 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고지 앞을 흐르는 하천과 구릉은 적에게만 유리한 지형지물이었다. 게다가 나머지 땅은 엄폐물 하나 없이 트여 있는 개활지였다. 그의 소총 부대는 그 모든 것을 헤치며 나아가야 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훈련장이기도 했던 연희 104고지는 천연 요새이자 적의 최후 방어선이었으므로 서울 탈환을 위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교전의 회오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스무 살 청년은 정신없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동료들의 몸에서 피가 솟구쳐 오르고 곳곳에서 비명이 들려와도 무조건 나아가야 했다. 한국 해병 제1대대는 26명만이 생존했으나 104고지를 탈환함으로써 서울 수복 전투의 승기를 잡았다. 바로 그곳, 연희 104고지 전적지를 찾았다. 지난 26일 서울신문과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이 함께하는 ‘2020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의 18번째 여정 ‘104고지와 안산’에서였다. 서울 수복 70주년 기념일을 이틀 앞둔 주말, 하늘은 높고 햇살은 투명했다. 6·25 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 수복을 이룬 것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1950년 9월 15일과 28일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서대문구 연희동, 이 평화로운 주택가가 바로 그 시기의 격전지였다. ‘연희104고지앞(구 성산회관)’이라는 이름의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눈앞에 보이는 대형 건물(구 성산회관, 현 지오영) 뒤의 낮은 산이 104고지다. 그곳으로 안내하는 표지판이 없어서 지도를 살펴 가며 주택가의 오르막길을 올라가니 작은 공원이 나타났다. 1982년에 세워진 ‘해병대104고지전적비’가 그곳의 주인공으로 높게 서 있다. 그러나 1958년에 처음 설치했다는 자연석 비석을 찾을 길 없어 둘러보니 전적비 맞은편 아래로 뒷모습의 윗부분만 조금 보였다. 그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있으나 표지판이 없었다. 지금은 ‘궁동 공원’으로 바뀐 104고지 정상이 아닌 산자락에 전적비가 설치된 까닭은 바로 이 비석 때문이었을 터인데,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1950년대에 비문을 새겼던 역사적인 바윗돌로 이끄는 표지판이 없는 게 아쉬웠다. 연희 104고지 전적지는 서울미래유산이자 현충시설이다. 70년 전에 이곳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젊음을 기리며 우리는 전적비 앞에서 묵념했다. 인민군은 최후까지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어린 병사들의 발목과 기관총을 쇠사슬로 묶어놓고 끝까지 저항하게 했다. 하지만 서울을 탈환하려는 아군의 의지는 그보다 강했다. 아군 전사자 178명, 인민군 사살자 1750명의 치열한 전투였다. 한미 해병이 안산 일대의 주요한 봉우리들을 모두 점령한 것은 9월 25일에 이르러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7일, 한국 해병대 청년들이 중앙청에 걸려 있던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게양했다. 전적비 옆에 있는 ‘해병대 수도 서울 탈환 작전’ 안내판에는 그 사진이 중앙에 가장 크게 게시돼 있다. 사진과 지도가 어우러진 설명문을 읽으며 6·25 전쟁을 이야기하다가 우리는 잠시 서울 시내를 내려다봤다. 안내판에는 ‘104고지 탈환 후 서울 시내를 바라보는 해병대’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 속의 서울은 포연에 휩싸인 폐허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서울은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104고지의 총성이 시작된 지 1주일 뒤 수도탈환기념식에 개선부대로 참석한 해병대 청년들처럼.우리는 연희동 주택가를 지나고 연세대 캠퍼스를 거쳐 안산 자락을 넘어 서대문 쪽으로 코스를 잡았다. 연세대는 당시 6일 동안 엄청난 포격전이 벌어진 격전지였다. 6·25 발발 직후에 인민군 사령부가 들어섰고 서울 수복 후에는 미군이, 1·4 후퇴 때는 중공군이 각각 진지를 구축해 전란 내내 군인들이 주둔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학생들의 자유와 교정의 평화가 가득하다. 1922년에 세워진 핀슨관 앞에서 우리는 잠시 숨을 고르며 멈춰 섰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남학생 기숙사였고 지금은 윤동주 기념관으로 쓰는 국가지정 문화재 건물이다. 윤동주 시인은 1938년과 1940년에 각각 이곳에 머물렀는데, 하숙집터로 알려진 종로구 누상동에서 등교할 때는 안산 자락을 넘어다니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우리는 캠퍼스 북쪽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온실을 지나자 안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쪽문이 나타났다.안산은 자락길이 잘 갖춰져 있지만, 그 길로 진입하기까지는 등산로의 숲길을 헤치며 가야 한다. 서울 수복을 위해 한미 해병대가 진격했던 길, 일제강점기의 윤동주 시인이 하숙집을 오갔던 길, 그 길을 가늠해 보면서 흙길을 밟아 오르다가 숨이 차오를 무렵 안산 자락길을 만났다. 휠체어와 유모차도 다닐 수 있게 조성한 순환형 무장애 숲길답게 주말을 맞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양한 종류의 숲과 여러 방향의 조망을 즐기며 걸을 수 있는 안산 자락길은 총 7㎞로 이어져 있다. 평탄한 데크 길을 걷다가 우리가 걸어온 연희동 쪽을 내려다보면서 앞선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자유와 평화라는 유산을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미래의 세대에게 어떤 유산을 물려줄 수 있을지 생각해 봤다. 자락길에 만발한 꽃무릇의 진홍색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올 무렵, 우리는 서대문형무소 쪽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의 하산길로 접어들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들과 독재정권 시절의 민주화 운동가들이 갇혀서 고통당했던 서대문형무소의 담벼락을 따라 걷는 동안, 우리의 현재는 앞선 세대가 물려준 선물 같은 유산이라는 생각이 거듭 들었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김광섭의 시 ‘독방 62호실의 겨울’과 심훈의 ‘그날이 오면’을 떠올리면서, 우리가 받은 이 선물을 미래에 어떻게 물려줄 수 있을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동안 독립공원을 지나 독립문 사거리에 이르렀다.독립문 건너편에 자리잡은 영천시장도 서울미래유산이다. 1960년대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재래시장으로 전쟁의 폐허를 딛고 자유 민주주의 사회를 발전시켜 나간 서민들의 생활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현장이다. 서울의 대표적인 골목형 전통시장인 영천시장을 통과하면 나타나는 석교교회도 서울미래유산이다. 조금 빠듯했던 일정을 따라 마지막 목적지인 석교교회에 이르자 1916년에 건립된 고딕 양식의 적벽돌 건물이 그 자체만으로도 대견하고 의미 있게 여겨졌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쟁의 폭격에도 무너지지 않고 모든 것을 지켜본 교회. 저 안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사연들로 기도했을까. 이것은 유형의 유산이지만 무형의 유산이기도 하다. 오늘 둘러본 모든 것들이 그랬다. 외형상 문화적 인공물에 해당하는 유산이라도 거기에는 문화적 행위와 이야기가 담겨 있고 물리적 배경이 존재한다.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유산은 어쩌면 유형과 무형으로 나눌 수 없는 우리의 삶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하루하루를 성실히 의미 있게 살아가다 보면 유·무형의 유산은 저절로 쌓여갈 것이다. 미래 세대에게 전할 100년 후의 보물을 둘러보는 서울미래유산 투어. 치열했던 전쟁의 결과로 얻은 자유와 평화의 길을 걸었던 여정의 마지막에서 맑디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연희고지 전투를 끝낸 뒤 피아의 구분 없는 시체더미 속에서 허탈한 마음으로 밤을 맞이했을 때, 동쪽 하늘로 한가위의 둥근 달이 떠올랐다고 했던가. 올해도 그 달은 어김없이 떠올라 우리를 비춰 줄 것이다. 100년 후의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글·해설 고은주 소설가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다음 일정 제19회 4·19민주묘지 ●출발 일시 10월 3일(토) 오전 10시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재혼하면 국립묘지 합장 거부…수절 강요”에 법원 “정당한 거부”

    “재혼하면 국립묘지 합장 거부…수절 강요”에 법원 “정당한 거부”

    국가유공자가 사망한 뒤 재혼한 아내는 국립묘지에 합장하지 못하도록 한 현행 법규는 정당하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2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7부(부장 김국현)는 A씨가 국립서울현충원을 상대로 “국립묘지 배우자 합장 거부 처분을 취소해 달라”고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A씨의 아버지는 학도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유공자다. A씨의 어머니는 남편 전사 후 재혼을 했고, 2004년 사망했다. A씨는 국립묘지에 묻힌 아버지의 묘소에 어머니를 합장하고자 했으나 현충원 측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A씨는 현충원의 결정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냈다.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은 ‘국립묘지 안장 대상자가 사망한 후 다른 사람과 혼인한 배우자’는 합장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규정한다. A씨는 “재혼했다는 이유만으로 합장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수절을 강요하는 전근대적인 것”이라며 이 규정이 국가의 혼인 보장 의무를 규정한 헌법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 사건에서 국가가 보장해야 하는 혼인은 A씨 어머니의 초혼과 재혼 모두”라면서 “어머니가 두 차례 혼인하는 과정에서 자유를 보장받지 못했다고 볼 수 없다”면서 ‘수절을 강요했다’는 원고의 주장에 반박했다. 재혼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국립묘지에 합장할 지위를 잃는다는 것이 재혼 의사를 왜곡할 정도로 결정적 요소가 된다고 볼 수 없다”면서 “재혼으로 인해 초혼에서의 지위를 일부 잃더라도 이는 자유의사에 따른 선택의 문제”라고 판단했다. A씨는 전후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홀로 자식들의 생계를 꾸리기 어려워 재혼한 어머니를 합장 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헌법상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고도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국립묘지의 안장 범위를 정하는 것은 입법자가 여러 사정을 고려해 정책적으로 결정한 것”이라며 “누군가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행복추구권 침해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70년간 외면한 한국군 위안부 300여명…“아픈 과거사 직면할 때”

    70년간 외면한 한국군 위안부 300여명…“아픈 과거사 직면할 때”

    일본군 위안부는 한국군 위안부라는 또 다른 아픈 과거사로 이어졌다. 일본군 장교 출신의 한국군 장교들은 동족과 싸워야 하는 군인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고스란히 심었다. 일본 우익에서는 한국군 위안부를 두고 피장파장의 오류로 왜곡시키기도 한다. 1996년부터 한국군 위안부 문제를 연구한 김귀옥 한성대 사회학 교수는 이를 반박한다. 그는 “우리 정부가 한구군 위안부라는 아픈 과거사에 대해 진상조사하고 사과할 때”라며 “자국민에 대한 책임을 다하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에도 더 당당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1951년 5, 6월부터 전선이 지금의 휴전선 부근으로 교착되며 지난한 장기전이 시작됐다. 이에 한국군은 전선에서 조금 남쪽으로 떨어진 지역에 공식적으로 ‘특수 위안대’를 만들었다. 군의 공식 문서에 확인된 곳만 서울, 강원 강릉, 춘천, 원주, 속초에 이른다. 때로는 최전선에서 교대휴식하는 병사들에게 여성들을 출동시켰고, 섬에 있는 부대에는 따로 위안부를 배치했다. 당시 서울은 행정 복구가 덜 된 데다가 일제시대부터 있던 군부대 시설에 떨어져 있었기에, 서울에서 군 위안부는 민간인의 눈에 잘 띄지 않았다.그러나 군이 마을을 빼앗아 주둔하던 속초는 달랐다. 속초 주민들과 주둔하던 미군 폴 팬처는 “시청 인근에 있던 군 위안부 앞에 육군이 줄지어 서 있는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 이들은 부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낮에는 밥과 빨래 등 일을 노예처럼 하고, 밤에는 성착취를 당했다”고 증언한다. 위안부는 일반 병사들이 ‘총알받이’를 한다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제5 보급품’이었다. 고위 장교들은 북에서 데려온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성 포로를 ‘첩’으로 삼았는데, 병사들이 이를 좋게 볼리도 없었다. 납치된 이북 여성이나 북한군이 점령할 당시 부역했다는 죄목으로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됐다. 김귀옥 한성대 사회학과 교수는 “젊은 장교들은 일반 병사에게 너희들도 북에서 여성들을 데려와 같이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고자 했다”고 해석한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당시 우리 육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60여명을 1개 중대로 하는 위안부대 3, 4개를 운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예비부대로 빠지기만 하면 사단 요청에 의해 모든 부대는 위안부대를 이용할 수 있었다. 5연대도 예비대로 빠지기도 전부터 장병들의 화제는 모두 위안부대 건이었다.……우리 연대는 위안부대는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운 순서대로 티켓을 나눠줬고, 훈장을 받았다면 우선권을 줬다.” 한국군 위안부에 대한 육군과 장교들의 기록 한국군 위안부의 규모는 군 공식 기록을 통해 추산할 수 있다. 1956년 육군본부가 후방 지원 업무를 발전시키기 위해 ‘후방전사(인사편)’를 펴내면서 특수 위안대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서울 1개 소대와 강릉 3개 소대(총 79명)라는 기록과 서울 3개 소대와 강릉 1개 소대(총 89명)를 적은 표를 종합하면, 서울 3개 소대와 강릉 3개 소대에 약 128명의 한국군 위안부가 있었다. 김 교수는 “여기에 춘천, 원주, 속초 등의 위안부와 1953년 서울에 추가로 설치된 4개 소대를 합하면, 전국 위안부는 약 300명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또한 ‘후방전사’의 ‘특수위안대 실적 통계표’에 따르면 서울과 강릉의 4대 소대에서 위안부 89명이 1952년 한 해에만 20만명이 넘는 군인을 ‘위안’했다. 단순 계산하면 위안부 한 명이 하루 평균 6명 이상의 군인에게 성착취를 당한 것이다. 소대별로 들여다보면 서울 제2소대(중구 초동 105번지)가 그해 8월 1명의 위안부가 상대한 군인수가 한달 평균 269.6명(하루 8.7명)으로 가장 많았다. 1952년 4월과 8월 강릉 제1소대(강릉 성덕면 노암리)에서도 30명의 위안부가 1명당 한달 평균 266.7명(하루 8.6명)을 ‘위안’했다. 1954년 3월에야 특수 위안대는 없어졌다. 김 교수는 “이들은 직업 여성이 아니라 대부분 납치된 여성”이라고 주장한다. 목격자들이 “치장하지 않은 매우 어린 여성으로 보였다”고 증언하고, 한 북파 공작원은 김 교수에게 “자기가 살던 마을에서 여성을 납치해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고 리영희 교수도 1988년 첫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 ‘역정’에서 “낙산사 주변 방공호에서 사병들의 동물적 욕구를 해소케 하는 은전을 베풀었는데, 병사 한명이 자기 고향에서 흘러온 아가씨를 만나 눈물에 젖었다”고 적었다. 복수의 증언자의 소개로 김 교수는 한국군 위안부로 추정되는 여성들을 찾았다. 이들은 “나는 자식들을 키웠을 뿐”이라며 낯선 연구자에게 울음만 토해냈다. 다만 당시 의대생이던 정씨는 국군에게 부역자로 몰려 위안부가 될 뻔했다고 말했다. 피난을 가지 못한 학생들과 인민군을 치료했다는 이유에서다. 정씨는 “○○여대다. ○○여중생이다 하면 모두 빨갱이로 몰려 총살을 당했다. 국군들은 우리를 인민군에게 버림받은 찌꺼기로 여겼다. 친구 3명과 나는 부대 장교 4명에게 배정됐지만 한 군인(남편)의 부탁으로 빠져나왔다. (헤어진 친구 3명에 대해서는) 상상에 맡긴다. 못 다한 얘기는 가슴에 묻은 채 관에 들어가려고 한다”고 했다. “일본군 위안부 원류가 조선시대 기생제?” 한국군 위안부는 일본군 위안부의 연장선에 있다. 당시 특별 위안대의 설치·운영 책임자는 육군본부 후생감(휼병감)이다. 위안대가 만들어진 1951년 무렵 부임한 장석윤 후생감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10여년을 일본군, 만주국군에서 복무했다.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된 그의 뒤를 이은 김병길 후병감도 태평양 전쟁 당시 학도병 출신이었다. 김희오 장군은 회고록 ‘인간의 향기’에서 “우리 중대에도 주간 8시간 제한으로 6명의 위안부가 배정됐다. 이는 과거 일본군대 종군 경험이 있는 일부 연대 간부들이 부하 사기 앙양을 위한 발상을 한 것”이라고 짚었다.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의 “일본군 위안부의 원류는 조선시대 기생제”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김 교수는 정면 반박한다. 조선시대에는 군 위안부가 없었고 일제시기부터 생겨났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조선시대 전통적 기생은 예인에 가까웠다. 그러나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맺고 제물포(인천) 등지를 조차하면서 예인이 지워진 기생이 등장하고 러일전쟁 때 확산됐다. 김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가 없었다면 한국군 위안부는 만들어지지 않았다”며 역사 왜곡도 경계한다.장군들의 회고록에는 위안부에 대한 반성이나 문제의식을 찾기 쉽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1990년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공론화가 한국군 위안부의 ‘불편함’을 일깨웠다. 김 교수는 “상급 장교들은 ‘자신을 왜 일본군 취급을 하느냐’며 위안부에 대해 대답하지 않았다. 북한 여성을 납치한 군인은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는 일본인과 달리 정이 통한다’고 변명했다. 또 다른 군인은 ‘위안소를 이용하면 빨리 죽는다는 소문이 돌아 나는 이야기만 나눴다’고 했다”고 회상했다. 고 리영희 교수는 “사실 내가 강릉 부대에 있을 때 위안부를 만났다. 그때는 내가 인권 의식이 부족해서 전쟁 체험담으로 기록을 했는데, 부끄럽다”고만 할 뿐 말을 아꼈다. 군 당국은 한국군 위안부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김 교수가 2002년 연구 결과를 발표하자 외압도 이어졌다. 당시 재직하던 학교를 통해 청와대와 국방부는 ‘조용히 연구하라’고 전했다. 지금도 군은 한국군 위안부에 대해 함구하며 외면하고 있다. 육군 관계자는 서울신문에 “한국군 위안부 관련 진상조사는 한 적이 없다”면서도 “후방전사 인사편에는 특수 위안대 관련 일부 내용이 기술돼 있으나 지금까지 기술된 내용 외에 구체적인 사료나 자료가 없어 추가적인 사실 확인이 어렵다”고 답했다. 또한 “관련 희생자 위령사업 등에 대해 현재 별도의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일본군 경력이 있는 일부 한국군 간부들이 위안부를 설치·운영했다’는 “학계의 주장에 대해서는 육군에서 언급할 사항이 아니”라고 밝혔다. “아픈 과거사 진상조사해야…일본에도 더 당당히 요구할 수 있어”김 교수는 공개되지 않은 군 자료 가운데 진상의 실마리가 숨어 있을 것으로 본다. ‘후방전사’에 따르면 육군본부는 일본군 위안부처럼 한국군 위안부가 일주일 2회 군의관에게 성병 등을 검진받도록 했다. 기초 신상과 정확한 규모를 추정하는 단서가 기록됐을 것으로 본다. 발굴 작업은 김 교수의 은퇴 이후 연구 목표이기도 하다. 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한국전쟁 당시 벌어진 여러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사했지만 군 위안부는 다뤄지지 못했다. 전쟁 중 만연했던 성범죄도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 국민보도연맹 사건, 여순 사건 등 직권조사한 사건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피해자나 유가족이 신청한 사건을 조사했기 때문이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이 만들어지기 전 열린 국회 토론회에서 김 교수는 성폭력 사건과 한국군 위안부를 다루자고 제안했지만, 시기상조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김 교수는 지난 5월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연말쯤 꾸려질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기대를 걸고 있다. 김 교수는 “내년부터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6·25 참전 소년·소녀병도 국가유공자 되나

    6·25 참전 소년·소녀병도 국가유공자 되나

    강대식 의원 개정법안 대표발의재일학도병과 형평성 문제제기“헌신·희생에 합당한 예우해야”미래통합당 강대식(대구 동을) 의원이 6·25 전쟁 70주년을 앞두고 6·25 참전 소년·소녀병을 예우·지원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강 의원은 24일 6·25 참전 소년·소녀병을 국가유공자에 포함하는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국가유공자법) 일부개정법률안과 국가유공자단체에 6·25 참전 소년·소녀병전우회를 추가하는 ‘국가유공자 등 단체 설립에 관한 법률’(국가유공자단체법) 일부개정법률안을 각각 대표발의했다고 밝혔다. 6·25 전쟁 당시 병역의무대상이 아닌 17세 이하 소년·소녀들은 자원 또는 강제로 징·소집돼 대한민국 수호에 공헌했다. 그럼에도 비슷한 연령대인 재일학도의용군인의 경우 모두 국가유공자로 예우하고 있는 것에 비해 6·25 참전 소년·소녀병은 전사자·전상자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국가유공자로 인정하고 있어 형평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어왔다. 강 의원이 발의한 국가유공자법 개정안은 6·25 참전 소년·소녀병을 국가유공자에 포함해 보상 및 교육·취업·의료 지원 등에 있어 예우를 갖추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국가유공자단체법 개정안은 이들을 위한 위령제, 추모비 건립 등 보훈 활동을 지원하는 근거를 마련했다. 강 의원은 “6·25 전쟁 당시 꽃다운 나이에 목숨 바친 소년·소녀병들이 백발의 노인이 다 됐고, 이제 2000여명도 채 되지 않는다”며 “21대 국회에서는 이들의 헌신과 희생에 대한 합당한 예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여야가 한마음을 모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 의원이 대표발의한 국가유공자법·국가유공자단체법 개정안에는 곽상도, 김상훈, 김승수, 김용판, 류성걸, 서정숙, 신원식, 양금희, 유의동, 윤재옥, 윤창현, 이명수, 이종배, 전주혜, 조수진, 조태용, 추경호, 홍석준 의원이 공동발의에 참여했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노태우 정부 마지막 국무총리’ 현승종 별세

    ‘노태우 정부 마지막 국무총리’ 현승종 별세

    노태우 정부 시절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낸 현승종 전 총리가 25일 별세했다. 101세. 현 전 총리는 1919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태어나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서 1946년부터 1974년까지 고려대 법과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960년 4·19혁명 당시에는 고려대 학생처장으로서 ‘교수 데모’에도 참여한 바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2년 10월 한림대 총장으로 재직 중이던 현 전 총리를 중립내각 총리로 임명했다. 당시 대선을 앞두고 관권선거 의혹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웠고, 노 전 대통령은 민주자유당(민자당)·민주당·국민당으로부터 중립내각 구성을 일임받았다. 노 전 대통령이 당시 여당이던 민자당의 명예총재직을 내려놓고 탈당한 뒤 현 전 총리를 임명했다. 현 전 총리는 1999년 한 언론과의 3·1절 기념 인터뷰에서 일제 말 학도병으로 간 뒤 일본군 장교로 임관해 중국 팔로군(인민해방군)과 교전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당시 그는 “조부(현희봉)와 부친(현기정)이 의병과 독립운동가로 헌신했는데, 나는 일본군 소위였다고 차마 밝힐 수 없었다”고 말했다. 유족으로는 현군숙·현윤해·현춘해·현선해(성균관대 글로벌경영학과 교수)씨 등 자녀들이 있다. 발인은 27일,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9호실이다. 손지은 기자 sson@seoul.co.kr
  • “건강이 허락하는 한 100세까지 봉사하고 싶습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100세까지 봉사하고 싶습니다”

    1998년 등록 후 누적 봉사 3만 시간 돌파 복지회관 노인 600여명 점심·목욕 도와“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하면 건강에 좋아”“남을 위해 애쓰고 희생하는 봉사는 결국 나를 위한 일입니다. 90세 넘게 건강한 건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했기 때문입니다.” 21년째 경기 안양시 만안노인복지회관에서 자원봉사하는 신봉섭(91)씨는 4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신씨는 1998년 1월 자원봉사자로 등록한 이후 꾸준하게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경기도 내 최고령 자원봉사자로 지난해 누적 봉사시간 3만 시간을 돌파했다. 지난달 20일 현재 총 3만 500시간으로 경기도에서 누적 봉사시간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한다. 학도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신씨는 17년간 군 생활을 마치고 대위로 전역했다. 1998년 무릎 치료를 받기 위해 복지회관을 찾은 게 봉사를 시작한 계기가 됐다. 신씨는 “노인들이 먼저 치료를 받기 위해 2층 진료실로 뛰어 올라가는 위태로운 모습을 보고 직접 질서유지에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신씨는 오전 8시부터 주 5일 하루 8시간씩 봉사활동을 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교회 행사 때문에 빠진 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신씨의 봉사활동은 점심과 목욕, 머리손질, 교육 등을 위해 복지회관을 찾는 노인 600여명을 안내하고 도움을 주는 것이다. 신씨는 “홀로 사는 노인들에게 한 끼 1000원 하는 점심이 인기 있다”며 “식사하려고 오는 300여분을 안내하느라 오전에는 정신이 없다”고 했다.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안내한 뒤 프로그램을 선택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그는 “오랜 봉사로 차밍댄스, 웰빙댄스, 요가 등 건강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한글, 교양한문 등 교육과정 학습 내용을 모두 꿰뚫고 있다”고 넌지시 자랑했다. 신씨는 처음 복지회관을 찾는 노인에게 편안하고 자상한 안내자이자 복지회관에서 발생하는 다툼을 해결하는 중재자이기도 하다. 공무원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항의하는 노인들을 달랜다. 힘들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는 “오랫동안 계속해 온 일이라 몸에 배 괜찮다”며 환하게 웃었다. 이처럼 신씨가 오랜 세월 자원봉사를 할 수 있는 것은 건강 덕분이다. 신씨의 건강관리법은 규칙적인 생활과 감사하는 마음이다. 새벽 3시 30분 일어나 한 시간 동안 체조하고 가벼운 운동으로 몸을 푼다. 주 5일 15분 걸어서 복지회관으로 출근한다. 걸어서 퇴근한 뒤 음악을 틀어 놓고 한국무용 등을 추며 건강을 관리한다. 가장 큰 건강 비결로 신씨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봉사하며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라며 “스트레스가 쌓이면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섯 자녀를 둔 신씨는 장애 3급의 두 살 연하인 아내와 산다. 자녀들은 건강을 우려해 봉사활동을 만류하지만 신씨는 “나태해질 수 있어 봉사를 그만둘 생각이 없다”고 한다. 그의 새해 소망도 ‘봉사하기’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100세까지 봉사하고 싶습니다.” 글 사진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90대 자원봉사자 신봉섭 씨, 누적 봉사 3만시간 돌파…경기도 내 최고령

    90대 자원봉사자 신봉섭 씨, 누적 봉사 3만시간 돌파…경기도 내 최고령

    “남을 위해 애쓰고 희생하는 봉사는 결국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여태껏 내가 건강을 유지해 온 건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했기 때문입니다.” 21년째 경기도 안양시 만안노인복지회관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91세 신봉섭 씨는 4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1930년생인 신 씨는 1998년 1월 자원봉사자로 등록한 이후 21년째 봉사를 이어오고 있다. 현재 경기도 내 최고령 자원봉사자로 지난해 말 누적 봉사 3만 시간을 돌파했다. 2015년 경기도 자원봉사센터로부터 누적봉사 2만 시간 이상의 봉사자에게 주어지는 도자봉 인증패를 받은 지 6년 만이다. 지난 20일 기준 총 3만 500시간을 기록, 경기도 내에서 다섯 손가란 안에 든다. 90대 초반 고령에도 정정한 신 씨는 매일 이른 아침이면 걸어서 15분 거리의 노인복지회관으로 향한다. 주말을 제외하고 주 닷새 동안 하루 8시간 봉사활동을 20년째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교회 행사 때문에 빠진 것을 제외하곤 하루도 봉사활동을 거른 적이 없다”고 말했다. 7시 40분경 복지회관에 도착하면 잠시 숨을 고르고 8시부터 하루 봉사를 시작한다. 점심과 목욕, 머리손질, 교육 등을 위해 복지회관을 찾는 노인 600여명의 편의를 돕고 질서유지와 안내를 맡고 있다. 신 씨는 “주변에 홀로 사는 노인들에게 한 끼 1000원하는 점심은 음식도 좋아 인기가 높다”며 “매일 식사를 하려고 방문하는 300여분을 안내하느라 오전엔 정신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까지는 올해부터 유료화한 목욕탕 입장권을 나눠주기도 했다. 노인복지관에서 운영하고 있는 교육프로그램을 수강하려는 노인들에게 교육 안내도 담당하고 있다. 그는 “오랜 봉사로 차밍댄스, 웰빙댄스, 요가 등 건강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한글, 교양한문 등 교육과정 학습 내용을 모두 꿰뚫고 있다”고 넌지시 자랑한다. 처음 이곳을 찾는 노인에겐 신씨는 매우 편안하고 자상한 안내자이다. 또 복지회관에서 발생하는 온갖 다툼을 해결하는 중재자이기도 하다. 복지관 업무에 불만이 있어 공무원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항의하는 노인을 달래고 누그러뜨려 일을 원만히 처리하는 역할도 한다.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20여년 넘게 계속해온 일이라 몸에 배 괜찮다”며 환하게 웃는다.이처럼 신씨가 오랜 세월 하루 꼬박 자원봉사를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건강 덕분이다. 그는 먼 거리는 아니지만 매일 왕복 30여분을 걸어서 출퇴근하고 있다. 새벽 3시 30분 기상, 1시간 동안 체조로 몸을 풀고 가벼운 운동으로 하루일과를 시작한다. 퇴근 후에도 음악을 틀어놓고 홀로 댄스스포츠와 한국무용을 하며 규칙적으로 건강을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봉사하며 노인들과 교류하는 것이 가장 큰 건강비결”이라고 소개하며 “스트레스가 쌓이면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져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20여년전 퇴직 후 무릎이 아파 복지회관을 찾은 게 신 씨가 자원봉사를 시작한 계기가 됐다. 그는 “복지관을 찾은 노인들이 먼저 치료를 받기 위해 다투어 2층 진료실로 뛰어올라가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며 “관계자에게 이를 개선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상황이 바뀌지 않아 직접 질서유지에 나서게 됐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처럼 그가 모든 일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은 것은 오랜 군생활에서 얻은 올곧은 생활태도와 적극적인 성격 때문이다. 당시 중학교 5학년(현 고등학교 2학년)때 학도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장교시험을 거쳐 소위로 임관, 17년간 군생활을 마치고 대위로 전역한 참전용사다. 신씨는 자원봉사를 하면서 수많은 표창을 받았다. 국무총리 표창(2011년)을 비롯 도지사 표장(2003년), 안양시 자원봉사왕(2007년), 경기도 금자봉(2011년) 등을 수상했다. 게다가 억대 기부자로 안양시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안양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기부의 날을 제정해 해마다 행사를 개최한다. 신씨는 2014년 11월 3일 첫 안양시 기부의 날 행사에서 그동안 자원봉사한 공을 인정받아 억대 기부자로 감사패를 받았다. 당시 신 씨의 자원봉사 누적시간은 2만 756시간(2014년 9월 30일 기준)으로 최저임금(5210원)으로 환산하며 억대가 넘는 기부를 한 셈이다. 보람과 사명감이 있는 신 씨는 계속 자원봉사를 하려고 하지만 자녀들 걱정은 크다. 다섯 자녀를 둔 신씨는 장애 3급 판정을 받은 두 살 연하의 아내와 단둘이 살고 있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건강이 걱정돼,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보살피라며 자원봉사를 만류하고 있다, 하지만 신 씨는 “일을 그만두면 나도 아내도 나태해지고 게을러 질 수 있어 봉사를 계속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국가관이 남다른 참전용사 신 씨는 “60대부터는 나눠주고 90대부터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라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100세까지 봉사를 이어가고 싶다”고 새해 소망을 밝혔다. 글·사진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독립유공자 집안도 ‘병역명문가’ 포함

    올해부터 일제강점기 독립군 등 독립유공자 집안도 ‘병역명문가’ 선정 대상에 포함된다. 8일 병무청에 따르면 올해 봉오동·청산리전투 승전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로 등록된 모든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 가문을 새롭게 병역명문가 선정 대상에 포함하기로 했다. 병역명문가 제도는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3대 가족 모두가 현역 복무를 마친 가문 중에서 선정한다. 또 학도병 등 정규군이 아닌 신분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가문도 병역명문가로 인정한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포토] ‘류현진·펭수’도 함께 알린 새해맞이 ‘제야의 종 타종’

    [포토] ‘류현진·펭수’도 함께 알린 새해맞이 ‘제야의 종 타종’

    1일 새벽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열린 제야의 종 타종 행사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미하엘 라이터러 주한EU대표부 대사, 한국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여한 강영구씨, 신원철 서울시의회 의장, 이철우 5·18기념재단 이사장, 이수정 교수, 신다은 선수, ‘자이언트 펭TV’의 펭수, 류현진 선수 등이 함께 타종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박원순 ‘러브콜’ 펭수, 제야의 종 타종 나선다

    박원순 ‘러브콜’ 펭수, 제야의 종 타종 나선다

    EBS 자이언트펭TV의 인기 캐릭터이자 유투브 크리에이터인 펭수(10·사진)가 올해 12월 31일 제야의 종 타종 인사로 나선다. 펭수는 시민대표를 선정하는 온라인 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서울시는 내년 1월 1일 자정 보신각에서 시민들과 함께 펭수 등 11명의 시민 대표가 제야의 종 타종 행사에 참여해 33번의 종을 울린다고 26일 밝혔다. 앞서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25일 유튜브 방송 ‘박원순TV’에서 펭수를 언급하며 “서울시에 한번 나와달라”고 ‘러브콜’을 보내기도 했다. 시에 따르면 올해 타종 행사는 매년 정례적으로 참가하는 서울시장, 서울시의회의장, 서울시교육감, 서울경찰청장, 종로구청장 외에도 서울시 홈페이지 등을 통해 추천받은 다양한 분야의 대표 11명이 타종인사로 참석한다. 최다 득표를 자랑하는 펭수 외에도 이춘재·고유정 사건 등 다수의 강력범죄 수사에 참여하고 영국 BBC가 선정한 ‘100인의 여성’에 선정되기도 한 범죄심리학자 이수정(55·여) 교수, 서울시체육회 소속 선수로 제100회 전국체육대회 볼링 종목에서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를 수상한 신다은(20·여) 선수 등이 포함됐다. 1세대 벤처기업인 한병준(58)씨, 박미경(49·여) 한국여성벤처협회장, 2019년 서울시 복지상 대상 수상자 김동현(37) 변호사, 2017년 주한 유럽연합 대표부 대사로 부임한 미하엘 라이터러(65)도 이름을 올렸다. 평창 동계올림픽 VIP 수행 통역과 고려인 이동진료 통역 봉사 등으로 2019년 서울시민상 청년상을 수상한 이서윤(21·여)씨와 다문화가정의 가장으로 두 아이를 키우는 이하은(53·여)씨,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양동 작전인 장사상륙작전에 학도병으로 참전한 강영구(86)씨, 5·18기념계승사업에 앞장선 이철우(68)씨도 타종인사로 선정됐다. 이날 타종 행사는 tbs교통방송과 온라인방송인 라이브서울에서 생중계한다. 행사를 위해 31일 오후 10시 30분부터 내년 1월 1일 오전 1시 30분까지 종로, 우정국로, 청계천로 등 주변 도로는 차량 진입이 통제되고, 주변을 지나는 버스도 임시 우회한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비뚤어진 일제종족주의 어디서 왔나

    비뚤어진 일제종족주의 어디서 왔나

    일제종족주의/황태연 외 지음/넥센미디어/435쪽/2만 1000원일본군 ‘위안부’를 매춘부로 모욕하고, 일제의 한국인 강제징용을 허구라 주장하는 내용의 책 ‘반일종족주의’(미래사)를 반박하는 작업이 최근 활발하다. 오히려 이런 활동이 그 책에 대한 관심을 부른다는 지적도 있지만, 논쟁은 분명 필요하다. 신간 ‘일제종족주의’는 반일종족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을 이렇게 부르면서, 그 책의 내용을 반박한다. ‘민족’이 아닌 ‘종족’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차용해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일본제국주의를 추종하는 자들, 정확히는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반일종족주의’ 저자들을 겨냥했다. 황태연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총론을 쓰고, 나머지 5명의 필진이 일본군 위안부, 학도병, 강제징용, 식민지근대화론, 고종, 독도를 담당했다. 이영재 한양대 학술연구교수는 일본군 위안부를 ‘매춘부’라 주장한 이 전 교수의 주장에 대해 “일본 극우파의 이론적 스승으로 불리는 하타 이쿠히코가 주장한 ‘위안부와 전장의 성’(1999)에 대부분 기초했다”고 꼬집는다. 하타의 논리는 당시 공창제가 존재했고, 매춘은 공인됐으며 합법이기 때문에 위안소 역시 합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위안부들이 의지에 따라 일했고 고수입을 받았기 때문에 성노예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교수는 이를 위안부에 관한 유엔과 국제사회 보고서로 반박한다. 일본군 위안부를 성노예로 명명한 첫 번째 보고서이자 유엔인권소위원회에서 1996년 채택한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가 강압적으로 통제됐고, 국제법 위반에 해당하는 명백한 인권침해가 국제적으로 공인됐다고 주장한다. 또 1998년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배상, 책임자 처벌을 골자로 한 ‘맥두걸 보고서’로 일본의 책임을 묻는다. 이어 위안부 강제연행 실태, 당시 위안소 실태 등을 설명한다. 책은 ‘반일종족주의’를 그저 학술적으로 논박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총론을 쓴 황태연 교수는 “외국의 ‘역사 부정죄 처벌법’ 선례를 따라 ‘일제 식민통치 옹호 행위 및 일본의 역사부정에 대한 내응 행위 처벌 특별법’을 제정하자”고 주장한다. ‘반일종족주의’ 저자들과 같은 이들이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내세워 자신의 배를 채우고, 이들 때문에 발생하는 사회적 피해가 크다는 이유다. 책에는 다소 과격한 주장도 있고, 학술적 검토가 보충될 부분도 있다. 그러나 건전한 역사 논쟁이라는 측면에서는 책의 방향성은 긍정적이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 김명민 “메간 폭스와 호흡? 아쉬워”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 김명민 “메간 폭스와 호흡? 아쉬워”

    오늘(26일) 밤 방송되는 MBC ‘섹션TV 연예통신’에서는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로 돌아온 배우 김명민의 인터뷰가 공개된다.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은 평균 나이 17세, 훈련기간 단 2주, 역사에 숨겨진 772명 학도병들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투입되었던 장사상륙작전을 그린 작품이다. 학도병을 이끌었던 실존 인물 ‘이명준 대위’를 연기한 김명민은 “이분이 어떤 분인지 연구를 하려고 찾아봤는데 그 어디에도 사료가 없었다. (장사상륙작전이) 극비리에 진행된 작전이다 보니 남겨진 게 없더라”면서 “이번 영화를 통해 이 대단한 분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작품에 임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이어 같이 영화에 출연한 메간 폭스에 대해서는 “사실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며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김명민은 힘들었던 무명시절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리에 올 수 없었을 것이라며, 데뷔 전 VJ 선발 대회에 참여했던 일화도 공개했다. 그는 “‘물걸레 같은 남자, 김명민’은 저를 소개할 때 앞에서 어떤 분이 물걸레로 바닥을 닦고 있어서 만들어 낸 멘트였다”며 웃음 지었다. 또한 김명민은 톱배우로 정착하게 된 ‘불멸의 이순신’에 대한 에피소드를 털어놓기도 했다. 처음 캐스팅 제의를 거절했었다는 김명민은 “당시 유명 배우도 아니어서 (제안을 듣고) 저도 모르게 웃었다. 이순신 장군 역할이라 해서 못할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감독님이 시간을 주셨다”며 “이후 아내랑 얘기를 했는데, 우리나라의 위인을 연기한다는 게 아이한테 큰 자부심이다 해서 하게 됐다”고 전했다. 믿고 보는 배우 김명민의 특별한 인터뷰는 오늘 밤 11시 30분 MBC ‘섹션TV 연예통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104분 내내 납작한 캐릭터… ‘脫신파 시대’ 잊혀진 영웅에 대한 고민

    104분 내내 납작한 캐릭터… ‘脫신파 시대’ 잊혀진 영웅에 대한 고민

    대를 이어야 하는 오빠 대신 참전한 여동생, 어딘가 삐딱선을 타는 호승심 강한 캐릭터, 남과 북으로 나뉘어 총구를 겨누는 피붙이들까지. 영화 ‘장사리:잊혀진 영웅들’(장사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25일 개봉하는 곽경택 감독 영화 ‘장사리’는 한국전쟁 중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었던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인 1950년 9월 14일 양동작전으로 진행한 장사상륙작전 실화를 바탕으로 탄생했다.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해변에서 훈련 기간 2주, 평균 나이 17세의 학생 772명은 북한군의 이목을 돌리는 기밀작전에 투입됐다. 낡은 장총과 부족한 탄약, 최소한의 식량만을 보급받은 그들은 문산호를 타고 장사 해변에 상륙해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잊혀진 영웅들’이라는 제목처럼 영화는 기밀에 부쳐진 탓에 기억하는 이가 드문 그날의 인물들을 그리는 데 고군분투한다. “상륙과 터널 전투와 퇴각뿐”이라는 곽 감독 말처럼 영화는 비교적 이야기 구조가 단순하고, 규모 큰 전쟁신도 없다. 그러나 상륙 당시 태풍을 만나 좌초한 문산호, 크고 작은 유격전 등 이들에게 이어지는 난관은 추운 겨울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촬영하는 데 얼마나 어려움을 겪었을지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고가 무색하게 영화는 이름 없는 이들에게 이름 붙이는 일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전형적이고 납작한 캐릭터를 달막달막 비추는 카메라 탓에 관객은 각 인물들 사연에 몰입할 겨를이 없다. 전쟁영화치고 비교적 짧은 러닝 타임(104분)도 한몫한다. ‘신파 캐릭터’를 가까이라도 비췄다면 예정된 눈물이라도 흘렸겠지만, 도통 캐릭터들과 친해질 틈이 없다. 한국 영화에 처음 출연한 종군 기자 ‘매기’ 역의 메간 폭스가 등장하는 신은 한국군·미군 지휘부의 속사정을 보여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처음이라는 본인의 고백처럼 연기는 극과 자연스레 어울리지 못하고 겉돈다. 학도병을 이끄는 기간병 이명준 대위를 맡은 김명민의 연기는 ‘불멸의 이순신’을 본 듯 기시감이 든다. 지난달 개봉해 480만 관객을 동원했던 ‘봉오동전투’처럼 극장가에 우리 근현대사의 잊혀진 영웅들을 그리는 작업이 활발하다. 이들을 그리는 한편으로 ‘신파’를 피하는 일에 한국 영화가 골몰 중인데, 이를 위해서는 전에 못 본 캐릭터를 발굴해야 한다. 많이 보던 캐릭터를 마냥 다큐처럼 그리는 일은 능사가 아니다. ‘장사리’는 탈(脫)신파의 시대, 한국 영화가 한국전쟁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에 관한 본격적인 물음을 던진다. 12세 관람가.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장사리 : 잊혀진 영웅들’ 장사상륙작전 실화, 예고편 최초 공개

    ‘장사리 : 잊혀진 영웅들’ 장사상륙작전 실화, 예고편 최초 공개

    772명 학도병들의 장사상륙작전 실화를 바탕으로 탄생한 ‘장사리 : 잊혀진 영웅들’이 스틸 예고편을 최초 공개했다. 평균나이 17세, 훈련 기간 단 2주. 역사에 숨겨진 772명 학도병들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투입되었던 장사상륙작전을 그린 영화 ‘장사리 : 잊혀진 영웅들’(감독 곽경택, 김태훈)이 772명 학도병들의 치열한 전장의 순간을 포착한 스틸 예고편을 최초 공개했다. 공개된 스틸 예고편은 장사상륙작전의 시작을 담은 숨겨진 스토리와 772명 학도병, 그들을 이끄는 기간병들의 치열한 전쟁 과정을 보여준다. 영상으로 전투 현장을 리얼하게 담아낸 것은 물론, 작전에 투입된 캐릭터들과 긴박감이 넘치는 순간들을 흑백 스틸을 통해 담아내 당시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전달하며 몰입감을 높인다.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으로 9월 15일 새벽, 장사 해변에 상륙한 그들은 유격대 리더 이명준(김명민 분)의 지휘 아래 작전을 개시한다. 출중한 리더십과 판단력을 갖춘 이명준 대위와 함께 학도병들을 이끄는 일등 상사 류태석(김인권 분)과 중대장 박찬년(곽시양 분)의 활약도 눈길을 끈다. 위기의 순간마다 작전의 성공을 위해 앞장서는 모습으로 극의 무게감을 더한다. 이어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도 못한 채 참혹한 전쟁터로 내몰린 학도병들의 장면 또한 시선을 사로잡는다. 학도병 분대장 최성필(최민호 분), 에이스 기하륜(김성철 분) 그리고 사격에 능한 이개태(이재욱 분)까지, 저격 작전에 본격적으로 돌입한 캐릭터들이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모습은 현장의 생생함을 전달한다. 여기에 책임감 넘치는 국만득(장지건 분)과 가족을 위해 입대한 문종녀(이호정 분)까지, 생과 사가 넘나드는 역사의 한순간에서 치열하게 전투에 임해야 했던 인물들의 진정성 있는 스토리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마지막으로 학도병들이 한데 모여 밝게 웃는 이미지 아래, ‘기억되지 않은 역사, 그들이 바로 역사다’라는 카피로 끝나는 영상은 ‘장사리 : 잊혀진 영웅들’이 전달할 깊은 울림에 대한 기대감을 고조시킨다. 잊혀진 772명 학도병의 치열한 순간을 담은 스틸 예고편을 공개한 영화 ‘장사리 : 잊혀진 영웅들’은 오는 9월 25일 개봉한다. 사진 = 서울신문DB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 324억원 짜리 애물단지 ‘문산호 전시관’ 개관 청신호

    수년째 흉물로 방치된 경북 영덕 앞바다의 ‘문산호 전시관’이 머지않아 관람객들을 맞을 전망이다. 영덕군은 최근 문산호 전시관 설계사와 하자 보수공사에 합의했다고 27일 밝혔다. 문산호(2700t급)는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도운 ‘성동격서(聲東擊西) 작전’인 영덕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상륙함(LST)이다. 이 배는 1950년 9월 13일 부산항에서 학도병 772명과 지원요원 56명을 태우고 출항, 다음 날 오전 5시쯤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에 도착했다. 국군과 UN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북한군 주의를 돌리기 위해 상륙작전을 편 것이다. 그러나 문산호는 때마침 불어닥친 태풍으로 높은 파도에 좌초했다, 학도병들은 상륙 후 북한 정규군 보급로와 퇴각로를 차단하는 전투를 치렀다. 이 과정에서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했다. 수십명은 행방불명됐다. 경북도와 영덕군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2012년부터 영덕 장사리 해변에 문산호 복원·전시관 사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2015년 말 내부 전시작업까지 끝내고 2016년에 개관할 예정이던 문산호 전시관은 예산 324억원을 투입하고도 현재까지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안전에 결함이 드러난 데다가 영덕군과 건설사 간 준공기한을 넘긴 데 따른 지연배상금과 공사대금 관련 소송 때문이다. 문산호전시관은 2015년 여름 태풍과 겨울 너울성 파도로 배 뒤쪽 내부 철 구조물이 휘는 등 하자 16건이 발생했다. 이에 영덕군과 설계사, 시공사는 하자발생 등의 책임을 따지는 소송을 수년간 벌였다. 영덕군은 2년간 공방 끝에 공사지연 배상금 청구소송에서 이겨 시공사로부터 12억 3000만원의 배상금을 받았다. 반면 시공사는 공사대금 청구소송에서 이겨 11억 3000만원을 영덕군으로부터 받았다. 이와 별도로 2018년부터 하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진행 중이다. 이 때문에 문산호 전시관 개관이 4년째 표류하고 있다. 문산호 전시관이 장기간 방치되자 이희진 영덕군수가 고민 끝에 해결책을 제시했다. 문산호 개관을 위해 우선 공사를 진행하고 재판 결과에 따라 책임 범위를 정하자는 것이다. 이에 영덕군과 설계사 실무진이 우선 보수공사를 벌이기로 합의했다. 영덕군 관계자는 “설계사와 함께 하자 감정을 거쳐 9월 초에 착공해 6개월간 보수공사를 할 예정”이라며 “올해 말에 임시 개관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영덕군은 다음 달 개봉하는 영화 ‘장사리 : 잊혀진 영웅들’ 시사회와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식이 열리는 9월 6일까지 문산호전시관 주변에 홍보문자와 대형 태극기를 설치할 예정이다. 영덕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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