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life & culture] 마라톤 열풍
우리가 사회 곳곳에서 느끼는 급격한 변화의 물결은 공무원사회라고 예외가 아니다.시대가 바뀌고,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공직자들의 생활과 문화,사고방식에도 새로운 바람이 일고 있다.
권위주의로 무장하고,책상머리에 앉아 탁상공론을 일삼다 복지부동하던 고리타분한 공무원의 모습은 사라져야 하고,또 사라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국민의 심부름꾼으로서 열심히 일을하지만 틈틈이 운동도 하고 정서를 살찌우기 위해 취미생활과문화생활에도 열심이다.대한매일은 행정뉴스면을 통해 공직자들의 삶과 문화를 다양하게 조명하고 화제의 인물도 집중 발굴키로 했다. ***국민 곁으로 그들이 달려온다.
공무원들이 ‘복지부동’을 떨치고 지축을 박차고 달리고 있다.2∼3년 전부터 사회적 붐을 일으키고 있는 ‘마라톤 열풍’이서울 세종로와 과천 정부청사,각 지방자치단체로까지 번지고 있다.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공무원 생활의 애환을 닮아서 좋다는 이도 있고,뇌물에 대한 유혹을 뛰면서 해소한다는 공직자도 있다.
골프는 돈도 돈이지만 눈치가 보여서어렵고,다른 운동도 시간과 돈이 만만찮다.모든 일을 ‘조직적’으로 해야 하는 공직 사회 특유의 상명하복식 업무에 지친 공무원들에게 ‘고독한 러너’가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왔을 거란 분석도 제기된다.
지난 1월 현재 행정자치부 복지과에 공식 등록된 중앙부처 마라톤 동호회는 12개 277명.하지만 지난 5월 인천공항 개항 기념 마라톤대회때 이미 30여개가 넘는 기관이 참가를 신청하는 등공무원 마라톤 인구는 올 들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오는 11일로 예정된 중앙부처 마라톤대회에는 기획예산처·건설교통부·노동부·감사원·보건복지부 등 40여개 기관이 참가를 신청했다.외청까지 포함해 모두 55개 중앙기관의 70%가 넘는 참여율이다.
마라톤 동호회가 가장 활발한 부처는 기획예산처와 공정거래위원회.
예산처는 김병일 차관 주도하에 마라톤 동호회를 만든 뒤 자체 마라톤대회를 두 차례나 주최했다.
전체 직원 400명의 공정위는 마라톤 동호회원만 55명.일부 열성파 회원들은 자비를 들여 뉴욕마라톤에 참가하는 열의를 보였다.수십년 역사를자랑하는 등산회·테니스회도 회원 수가 30∼40명인데 생긴 지 1년도 채 안된 마라톤 동호회의 성장은 놀랍기만 하다.매주 수요일 퇴근 뒤 회원들은 인근 서울대공원의 2㎞ 순환코스를 다섯바퀴씩 돌면서 화합을 다진다.사정이 이렇다 보니 5㎞,10㎞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는 ‘선수급’ 동호회원이 속출하고 있다.최근 각 신문사 주최로 열린 마라톤 대회에는넥타이를 풀어헤친 공무원들이 42.195㎞를 완주한 사례가 속출했다.
지난달 21일 춘천마라톤에서 생애 첫 완주를 일궈낸 노동부 장신철(38)공보과장은 “35㎞ 지점에서 ‘사점(死點)이 찾아와 포기할 뻔했지만 완주하고 나니 세상이 달라보였다”고 소감을 털어놓았다.이날 마라톤에 참가한 8명의 노동부 직원중 4명이 풀코스를 완주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지난 5월 총리실 파견근무 시절 10㎞ 달리기에 도전해 공직생활 11년 만에 처음으로 ‘뛰어’본 장 과장은 이후 두 차례의하프코스 도전에 성공한 뒤 마라톤 마니아로 변신했다.생활이유독 불규칙한 공보관실 근무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1주일에 2∼3번씩 집 근처 보라매공원에서 5㎞ 야간 구보를 실시한다.요즘은 아예 사무실에 정장을 걸쳐놓고 퇴근은 뛰어서 한다.관악구 신림동 집까지는 13㎞.차로 가도 막힐 때는 1시간30분이 걸리는 거리지만 묵묵히 뛰어가다 보면 1시간 남짓이면 집에 도착한다.“정력을 엉뚱한 데 낭비한다”는 부인의 눈총이 성가시기는 하지만 “이제 뛰지 않고는 일을 못할 지경”이 돼 버렸다.
최고 기록 3시간14분을 자랑하는 공정위 최정열(47)하도급2과장은 벌써 풀코스 완주만 10번을 소화한 베테랑 마라토너.지난춘천마라톤에는 직원 45명과 함께 출전해 5명이 완주하는 ‘쾌거’를 이룩했다.최 과장은 “돈과 시간이 절약되고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마라톤은 공무원에게 가장 알맞은 운동”이라면서 “지난 5년동안 시간만 나면 달리다 보니 매사에적극적이고 업무에도 의욕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공무원 마라톤 마니아들은 “공무원이라고 해서 특별히 마라톤에 매료될 만한 이유를 찾기는 힘들다”면서도 “밖에서 보기보다 야근과 휴일 근무가 많아 시간이 없다는 점이 마라톤 인구가 느는 주된 이유”라고 분석했다. 이들은 “목표를 정해 놓고앞만 보고 뛰다 보면 지나온 생활도 정리되고,어느새 ‘공무원근성’이 배어 수동적이 돼 버린 내 모습을 털어 버릴 수 있다”고 마라톤 예찬론을 폈다.
류길상기자 ukelvin@.
■강계두 기획예산처 국방예산과장.
***“뛰고나면 몸은 녹초가 돼도 정신은 더없이 맑아져”.
“지구력과 전략,프로정신이 필요하고 목표지점이 확실하다는점에서 마라톤은 예산편성하는 일과 비슷합니다.” 기획예산처 국방예산과 강계두(姜啓斗·47)과장은 마라톤을 시작한 지 5개월밖에 안된 ‘초보’지만 누구 못지 않은 마라톤예찬론자가 됐다.
강 과장은 주말이면 예산처 마라톤 동호회 회원들과 양재천변을 달린다.잠실운동장까지 달려 갔다 돌아오면 가뿐하게 10㎞다.땀은 비오듯 흐르고 몸은 녹초가 되지만 정신은 더 없이 맑아진다.
과다체중인 강 과장을 괴롭혀온 허리 통증도 마라톤을 시작하면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가 마라톤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지난 6월 예산처에동호회가 조직되면서부터.
“체중 조절을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지만 혼자하려니 힘도 들고 몸에 무리를 느꼈습니다.전문적인 지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부내에 결성된 동호회를 통해 전문가의 지도를 받아가며 훈련하고 있습니다.” 한국체육대학 김복주 교수(86년 아시안게임 800m 금메달)가 시간날 때마다 동호회 모임에 나와 페이스 조절법과 달리는 요령을 지도해 준다.
동호회 총무를 맡고 있는 강 과장의 열성 덕분에 예산처 마라톤 동호회는 부처 가운데 가장 늦게 출범했지만 회원 수가 60명에 육박했다.오는 4일 열리는 중앙마라톤대회에는 강 과장을 포함,53명이 출전할 정도로 활발하다.강 과장은 이번 대회에서 10㎞에 도전한다.
“가장 짧은 시간에,가장 싸게,정신적·육체적으로 가장 높은효과를 거둘 수 있는 운동이 마라톤입니다.
체력의 한계를 극복하고 달리다 보면 성취감을 느낍니다.사고도 긍정적으로 바뀌고 동호회 활동을 통해 직원들간 화합도 자연스럽게 다져집니다.” 마라톤이야말로 모든 운동 가운데 ‘꽃’이라고 자신하는 강과장은“말로는 마라톤의 매력을 다 얘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큰 맘 먹고 마련한 마라톤화 끈을 단단히 조이고 바람처럼 달려 나가며 그가 남긴 한마디.“한번 달려 보세요.”함혜리기자 lo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