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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꽂이]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안병길 지음, 동녘 펴냄) 부제가 ‘대통령도 모르는 자유민주주의 바로 알기’다. 한국 현대사에서 보수우익단체 등의 오용으로 인해 심각하게 일그러져버린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개념부터 시작해서 이를 우리의 일상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 합리적 선택 이론, 게임이론, 맞대응 전략 등을 통해 약자가 강자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한다. 저자는 자유민주주의의 적은 권위주의라고 못박는다. 1만 4000원. ●시장미술의 탄생(심상용 지음, 아트북스 펴냄) 애초 미술 작품은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사용 가치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투자의 대상, 교환 가치로서 더욱 각광받는 시대로 바뀌었다. 미술평론가인 저자는 현대 미술이 ‘과도하게 시장화됐다.’고 진단하며 ‘돈되는 작가’ 중심으로 미술 시장이 재편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투기에 노출된 현 미술 시장의 흐름이 오히려 예술의 가치를 되살릴 수 있는 기회임을 강조한다. 1만 6000원. ●안중근, 하얼빈의 11일(원재훈 지음, 사계절 펴냄) 일종의 문학적 다큐멘터리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저자는 의거를 전후해서 하얼빈에서 머물렀던 11일 동안 안중근을 뒤따른다. 마치 몇 걸음 옆에서 지켜보듯 섬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했다.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의거를 감행할 수밖에 없던 상황,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그가 주창한 동아시아 평화론의 실체도 함께 엿볼 수 있다. 1만 3000원. ●불평등의 경제학(이정우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성장과 분배의 조화로운 추구를 일관되게 주장해온 경제학자이자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을 지낸 저자가 30년 동안 강단에서 다져온 내용을 철학, 역사, 정책 등과 함께 고르게 소개하고 있다. 소득과 부에 대한 실증적이고 통계적인 연구 자료의 제시를 통해 분배의 왜곡, 성장의 모순 등을 설명한다. 성장 지상주의의 틀에 갇힌 정치, 강단, 현실에 새로운 문제의식을 던지고 있다. 2만 3000원.
  • 이승훈 지난해 쇼트트랙서 전향 모두가 안된다고 했지만…

    이승훈 지난해 쇼트트랙서 전향 모두가 안된다고 했지만…

    │밴쿠버 조은지특파원│상기된 표정으로 남은 선수의 레이스를 살피던 청년은 은메달이 확정되자 껑충껑충 뛰며 김관규 감독의 품에 안겼다. 스피드 스케이팅 이승훈(22·한국체대). 쇼트트랙 국가대표에서 탈락한 아픔을 극복, 종목을 바꾼 끝에 그토록 꿈꿔 왔던 올림픽 메달을 따낸 순간이었다. 스피드 장거리 종목에서 아시아 최초로 따낸 메달이라 기쁨은 더 컸다. 육상 100m에 견줄 만큼 아시아 선수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을 무너뜨린 것. 1992년 알베르빌 김윤만(은), 2006년 토리노 이강석(동)에 이은 세 번째 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메달이기도 했다. 이승훈은 14일 캐나다 리치먼드 올림픽 오벌에서 열린 대회 남자부 5000m에서 6분16초95로 결승선을 통과, 한국에 밴쿠버올림픽 첫 메달을 안겼다. 올림픽 기록으로 금메달을 거머쥔 스벤 크라머(네덜란드·6분14초60)에게 2초35 뒤진 훌륭한 기록이었다. 동메달은 이반 스코브레프(러시아·6분18초05) 차지. 막판 스퍼트가 빛났다. 인코스 이승훈은 봅 데 용(네덜란드·6분19초02)과 12조로 출발했다. 상대는 올림픽에서 금·은메달을 한 개씩 목에 건 세계적인 선수. 워낙 베테랑이라 쫓아만 가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줄곧 앞섰다. 1800m 기록은 2분18초80으로 5위였고, 3000m(3분48초56)에서 2위로 치솟은 순위는 끝까지 이어졌다. ‘다크호스’ 축에도 끼지 못했던 이승훈의 역주에 다른 나라 감독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설을 맞아 큰집에서 새벽잠을 설치며 경기를 본 어머니는 “이게 웬일이냐.”고 울먹였다. 여자친구는 “승훈이 네가 이런 사람이었냐.”고 깜짝 놀랐다. 이승훈은 지난해 2월 하얼빈 동계유니버시아드 쇼트트랙 3관왕에 오른 기대주였다. 하지만 4월 올림픽 대표선발전에서 탈락, 고심 끝에 변신을 택했다. 그나마 남의 스케이트화를 빌려 시작했다. 그는 “믿기 힘들 정도로 편안했다.”고 회상했다. 지난해 7월 캘거리 전지훈련 때였다. 주변 반응은 “결국 흐지부지될 거다.”라며 차가웠다. 대한체육회도 잘해야 5위권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팀에서는 ‘무서운 아이’로 통했다. 박성현 빙상연맹 전무는 “이승훈을 주목해라. 큰일을 낼 것”이라고 예고했고, 김관규 감독도 “탈 때마다 기록이 줄어든다. 근성 있는 선수”라고 했다. 동료 이종우(24·의정부시청)는 “소화할 수 없는 운동량을 소화한다.”고 혀를 내둘렀다. 결국 이승훈은 ‘유쾌한 사고’를 쳤다. “아시아에서 한 획을 긋는 선수가 되겠다.”던 출사표 그대로였다. 이승훈은 “모두가 안 된다고 한 것을 이뤄 영광이다.”면서 “이젠 1등을 해 보고 싶다.”고 큰 눈을 끔뻑거렸다. 이승훈은 24일 10000m, 27일 팀추월에서 또 한 번 ‘짜릿한 반란’을 꿈꾼다. zone4@seoul.co.kr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사진 보러가기]
  • [밴쿠버 동계올림픽 개막] 우리는 이미 꿈★을 이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 개막] 우리는 이미 꿈★을 이뤘다

    │밴쿠버 조은지특파원│올림픽은 가진 자들만의 잔치가 아니다. 메달보다 더 중요한 건 ‘메이저’가 아니면서도 스포츠의 감동을 가감 없이 전해주는 ‘소수자’들의 진하디진한 몸짓들이다. 메달 종목의 그늘에서 빛을 보지 못하던 그들.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썰매에 바퀴를 달고 땀 흘리며 달리던 그들. 지구촌 최대 ‘눈과 얼음의 축제’인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그들은 세계를 향해 외친다. “올림픽은 마이너리티들에게도 활짝 열려 있다.”고. 13일 오전 11시, 17일간의 열전의 막을 올리는 캐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엔 그동안 그다지 눈길을 받지 못했던 비인기 종목 선수들이 갈고닦은 실력을 뽐내겠다고 벼르고 있다. 영화 ‘국가대표’를 떠올리게 하는 실제 주인공들이다. 스키점프 한국 대표팀은 그야말로 출전 자체가 영화에 가깝다. 국민들의 관심은 고사하고 실업팀 하나 없어 막노동으로 비용을 대며 운동했다. 선수층 역시 얇다고 말할 정도도 못 된다. 한 팀이 1993년부터 18년째 동고동락하고 있다. ●한국 스키점프 ‘메달은 옵션’ 그러나 지난해 중국 하얼빈 동계유니버시아드에서 금 2, 은 1, 동메달 1개로 개인·단체전을 석권했고 국제스키연맹(FIS)컵에선 금메달과 동메달을 따냈다. 강원 평창에서 열린 콘티넨털컵에서도 1, 2위를 차지했다. 13일 노멀힐과 20일 라지힐에서 개인전 10위권 진입이라는 목표 아래 모든 채비를 마쳤다. 연습장도 없이 잔디밭에 레일을 깔고 모형 썰매를 끌었던 봅슬레이 대표팀도 결의는 굳다. 대표선발전마저 일본의 연습장에서 치렀던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USA’라고 적힌 봅슬레이를 50만원에 빌려 출전한 2008년 국제봅슬레이연맹(FIBT) 월드컵에서 국제대회 첫 메달을 따내는 저력을 발휘했다. 27일 예선에 들어간다. ●아프리카 나홀로 대표팀 눈길 대회에 참가한 5대륙 84개국 가운데 ‘나홀로 대표팀’도 눈길을 끈다. 눈이라고는 구경조차 힘든 에티오피아에서는 크로스컨트리 남자 15㎞에 로벨 테클레마리암(35)이 코치도 없이 참가했다. 아디스아바바 태생으로 아홉살 때 미국으로 이민, 뉴햄프셔 대학을 졸업한 그는 2006년 이탈리아 토리노 동계올림픽에 에티오피아 사상 처음으로 출전하는 감격을 누렸다. 당시 크로스컨트리 15㎞에서 83위를 차지했다. 그는 “개막식에서 국기를 들고 입장해 감회가 깊었다.”고 말했다. 가나의 알파인 스키 대표팀 웨임 은크루마 아체암퐁(36)은 ‘밴쿠버판 쿨러닝’이다. ‘눈 위를 달리는 표범(Snow Leopard)’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나는 결코 멈추지 않는 열차”라고 선언한 그는 토리노 대회 때 예선에 참가하기 위해 탄 비행기가 불시착하며 입국 불발로 출전을 포기하기도 했다. 가나에서 동물원 가이드를 하다가 2002년 영국으로 옮겨 스키센터 직원으로 일하며 스키와 인연을 맺었다. zone4@seoul.co.kr
  • [월드 뉴스라인] 中, 日731부대 세계문화유산 추진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과 하얼빈(哈爾濱)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관동군이 온갖 생체 실험을 자행했던 731부대 유적지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시키는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고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 한국총영사관이 7일 밝혔다. 헤이룽장성과 하얼빈시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건의서를 중앙정부에 제출했다.
  • 의사로 박제된 안중근 영웅으로 부활

    그의 이름 뒤에 으레 따라붙는 호칭은 ‘의사’(義士)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또 다른 누군가는 진지하게 “그분이 혹시 의대를 나오셨냐?”는 말을 내뱉는 어이없는 일까지 벌어진다. 그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쏜 안중근이다. 그는 대한의병 참모중장이었으며, 선각적인 동양평화론을 펼쳤던 사상가이기도 했다. 올해는 일본이 이땅을 집어삼킨 지 꼬박 100년, 안중근의 순국 역시 100년이 되는 해다. 소설가 이문열은 안중근 삶의 궤적을 묵묵히 따라가는 소설 ‘불멸’(전 2권, 민음사 펴냄)을 내놓으며, 그를 역사 속 ‘의사’로 박제화된 인물에서 현재적 의미를 가진 인물로 부활시켰다. 이문열은 “지금 와서 안 의사를 한 번 다시 돌아보는 일은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며, 세상이 변해서 안중근의 민족주의가 용도폐기된다 하더라도 지금 한 번쯤 이 사람을 돌아보는 것은 중요한 대업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자기의 실존적 가치에 자신을 던져서 불멸을 얻은 사람, 실존이라고 생각했던 가치와 더불어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불멸의 사람”이라고 안중근을 평가했다. 역사 속 인물을 다루는 소설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주된 사실(史實)을 줄기로 하고 픽션을 덧입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면서 역사적 사실 이면에 감춰진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며 영웅화하는 것이 공식과도 같다. 그러나 ‘불멸’은 거의 안중근 평전에 가깝다. 이문열이 “인간적인 사생활, 행실에서 일탈 같은 것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인간적인 부분을 되도록 많이 끌어내 우리와 가까이 있는 영웅을 만들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고 털어놓을 정도였으니 이미 범접하기 어려운 영웅의 풍모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소설은 갑오년 일본군에게 처참하게 학살된 동학농민군을 목도한 열여섯 청년 안중근부터 시작해 1909년 하얼빈역 의거와 이듬해 3월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15년 동안의 궤적을 담고 있다. 이문열이 2008년 10권으로 완간한 ‘초한지’를 제외하면 국내를 무대로 한 소설로는 정치적 견해로 논란이 일었던 ‘호모 엑세쿠탄스’ 이후 3년 만에 내놓는 작품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소를 산채로 호랑이에?…中동물원 논란

    돈을 받고 살아 있는 동물을 호랑이 우리에 넣어 먹는 모습을 공개하고 있는 중국 동물원이 동물 학대 논란에 휩싸였다. 헤이룽장성 하얼빈에 있는 시베리아 호랑이 공원(Siberian Tiger Park)는 멸종 위기에 처한 호랑이들이 보호를 받고 있는 세계 최대 시베리아 호랑이 동물원이다. 최근 해당 동물원은 동물 학대 논란에 휩싸였다. 동물원 측이 돈을 낸 관광객들에게 호랑이 먹이감으로 줄 산 동물을 선택하도록 한 것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은 것. 외국인 관광객 크리스 제디스는 “살아있는 소가 우리에 들어가자 시베리아 호랑이 3마리가 순식간에 달려들어 소를 죽였다.”면서 “중국인 관람객들은 끔찍한 광경을 보고 사진을 찍거나 박수를 쳤다.”며 놀라워 했다. 실제로 이 동물원은 살아 있는 소와 닭 등 호랑이의 먹잇감에 대한 메뉴판을 만들어 관람객들에게 제공한다. 관람객이 돈을 지불하면 직원이 살아 있는 동물을 싣고 호랑이 우리에 밀어 넣는 방식이다. 동물원 측은 “호랑이의 야생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항변했으나 돈벌이를 위해서 살아 있는 동물을 고통스럽게 죽이고 그런 모습을 공개한다는 점에서 명백한 동물 학대라는 주장도 만만찮다. 한 영국인 네티즌은 “포식자인 호랑이가 소를 사냥해 잡아먹는 건 야생에서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인간이 돈을 받고 동물을 산 채로 포식자 우리에 밀어 넣는 건 잔인한 행동”이라고 꼬집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흰 돌고래들의 ‘키스’ 묘기 눈길

    중국 하얼빈의 대형 수족관인 ‘폴라랜드’에서 흰돌고래들이 ‘천사의 키스’라는 제목으로 환상적인 시범 공연을 펼쳐 화제다. ‘천사의 키스’ 공연에서는 돌고래들이 서로 다정스럽게 입을 맞추거나, 입에서 하트 무늬의 거품을 만드는 등 일반 돌고래쇼에서 볼 수 없는 모습들을 선보인다. 다정하게 입을 맞춘 돌고래들은 이곳에서 수 년 간 함께 산 ‘절친’으로 알려졌으며, 이 묘기를 위해 수 백 번 이상 입을 맞추는 연습을 해 왔다. 특히 거품으로 특정한 모양을 만드는 묘기는 매우 난이도가 높아, 1년 이상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돌고래들만이 할 수 있다. 조련사들은 “돌고래는 지능이 높아 어려운 묘기를 습득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면서 “입을 맞추거나 거품을 이용한 묘기는 이곳 돌고래의 장난을 지켜보던 조련사들이 우연히 발견한 돌고래만의 장기”라고 소개했다. ‘천사의 키스’ 공연에 참가하는 돌고래들은 춘절(중국의 설 명절)을 맞아 몰려드는 관광객을 위해 1년간 준비했으며, 수족관 관계자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거품묘기를 펼치는 돌고래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벤쿠버 별을 향해 뛴다](8)스키점프 맏형 최흥철

    [벤쿠버 별을 향해 뛴다](8)스키점프 맏형 최흥철

    “할 게 많이 남았는 걸요. 아직 목 말라요.” 벌써 네 번째 올림픽이지만 열정으로 가득 찬 스키점프팀의 최흥철(29·하이원)은 뜨거웠다. ‘끊임없는 도전’과 ‘성공의 환희’를 말했다. “난 아직 배고프다.”고 말했던 거스 히딩크 전 축구대표팀 감독을 연상시켰다. 한 살 터울로 줄줄이 있는 점프팀 최용직(28)·김현기(27)·강칠구(26·이상 하이원)의 든든한 큰형님인 최흥철은 올림픽을 보름 남긴 현재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단체전 출전 좌절 아쉬우나 최선을 떨리지 않냐고 하자 “릴랙스~. 점프는 아등바등한다고 되는 종목은 아닌 것 같아요. 최대한 즐기는 마음으로 할래요.”라고 답한다. 올림픽이 익숙한 ‘베테랑’의 관록이 묻어난다. 밴쿠버올림픽에 나서는 각오는 조심스럽다. 가장 주력으로 삼았던 단체전 출전이 좌절돼 죄송하단다. “(강)칠구 본인이 가장 힘들겠지만, 나도 괜히 미안하네요.” 그나마 관심이 많을 때 좋은 성적을 내고 싶다. 혹시 잘 안 돼도 격려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생사 오가는 아찔한 쾌감 즐겨 최흥철이 스키점프를 시작한 건 1991년이었다. 처음엔 스키점프가 뭔지도 몰랐다. 무주리조트가 1990년 야심차게 문을 열었고, 동계올림픽 개최를 목표로 꿈나무를 모았다. 인근 초등학생 열댓명이 스키점프대에 몰렸고 그 중엔 구천초등학교 4학년 최흥철도 있었다. 그렇게 모인 꼬마들은 5m와 15m점프대를 보고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여름·겨울방학을 이용해 체코에서 온 코치들한테 2~3주씩 훈련을 받았다. “첨엔 그냥 구경 갔어요. 외국인 코치도 신기하고 점프도 신기해서 해보고 싶더라고요.” 처음엔 당연히 무서웠다. 출발 신호를 받아도 발은 출발점에서 한 발짝도 떨어질 줄 몰랐다. “91년 겨울인가 92년 여름인가 15m 점프대에서 뛰었는데 좋으면서도 무서워서 눈물이 질질 나더라고요.” 15m가 적응되면 30m, 그게 익숙해지면 40m, 그리고 지금 120m까지 단계를 올릴 때마다 긴장감은 매번 반복됐다. 무서움이 커질수록 멋지게 착지했을 때의 쾌감도 커졌다. 덕분에 온몸은 만신창이였다. “발목, 무릎인대도 다쳤었고, 쇄골도 나갔었고, 목도 삐어 봤어요. 단기기억상실증도 있었고요.”라며 사건사고(?)를 줄줄 읊는다. 95년에는 60m에서 뛰고 얼굴로 착지했다. “덜덜덜 얼굴이 갈리면서 멈췄는데 일어나니까 병원이더라고요. 그 사건 전후 1주일이 아직도 기억 안 나요.”라며 호탕하게 웃는다. 그래도 생사를 오간 아찔한 순간이 어찌 마냥 즐거운 무용담이겠나 싶어 가슴이 싸하다. 체중조절도 필수. 근육뿐인 탄탄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다이어트를 달고 산다. 최흥철은 “한창 살을 뺄 때는 바나나에 요플레 부어서 먹어요. 그거 진짜 맛있는데요?”라며 애써 태연해한다. ●철저한 자기관리로 굵직한 성적 거둬 철저한 자기관리 덕분인지 열악한 환경에서도 굵직한 성적을 거둬 왔다. 2003년 이탈리아 타르비시오 동계 유니버시아드 개인전·단체전의 금메달을 시작으로 지난해 2월 하얼빈 유니버시아드에서 개인전·단체전 금메달까지 꾸준하게 전 세계 하늘을 날았다. 올림픽 최고 성적은 2002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 때 단체전 8위. 단체전 출전이 좌절된 이번엔 개인전 톱10이 목표다. 무엇이 이 청년을 점프에 미치게 만들었을까. “해냈을 때의 쾌감”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만두고 싶을 때면 보란 듯이 성적을 냈다. “그만둘 수가 없어요. 세계정상이 손에 잡힐 듯한데 어떻게 그만둬요.” 하늘을 나는 기분 또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단다. 어차피 누가 알아주길 바라서 시작한 운동도 아니었다. 점프팀은 28일 미국으로 떠나 최종 담금질을 하고 새달 8일 결전지인 휘슬러에 도착한다. 당당한 ‘미남새’들의 비행에 가슴으로 박수 칠 준비만 남았다. 글 사진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벤쿠버 별을 향해 뛴다] (7) 알파인스키 정동현

    [벤쿠버 별을 향해 뛴다] (7) 알파인스키 정동현

    올림픽 무대를 밟는 것은 강원도 고성군 두메산골 소년의 꿈이었다. 걸음마를 뗄 무렵인 세살 무렵부터 스키를 배웠다. 농사를 지으시던 아버지는 겨울이 되면 집 앞에 있는 알프스스키장으로 항상 소년을 데리고 나섰다. 소년은 아버지와 형을 따라 나서는 게 마냥 즐거웠다. ●초등학생 사상 첫 동계체전 MVP 한국 알파인스키 정동현(22·한국체대2) 얘기다. 그가 본격적으로 스키를 탄 것은 광산초등학교 흘리 분교에 입학하면서부터. 20여명 안팎에 불과한 전교생이 모두 스키선수였다. 타고난 체격과 스피드에 침착함까지 겸비한 그는 초등학교 내내 대회 1위를 놓친 적이 없었다. 6학년 때인 2001년 동계체전에서는 초등학생 사상 첫 체전 MVP로 뽑혀 주위를 놀라게 했다. 정동현의 꿈은 한결같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것이었다. 생애 첫 올림픽 출전기회는 예상보다 일찍 찾아왔다. 고교 1학년 겨울, 처음 나간 국제 성인대회였던 일본 오타루 알파인스키대회 회전 부문에서 1등을 한 것. 올림픽 출전 기준인 세계랭킹 500위보다 한참 높은 320위에 오르면서 처음으로 2006 토리노올림픽 출전 자격을 얻었다. “그때 기분은 날아갈 것 같았죠. 올림픽에서 뛰고 있을 제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어요.” ●출전자격 박탈·부상 등 악재 이겨내 하지만 그는 한번의 실수로 기회를 날렸다. 학업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대표팀 차출을 거부한 것. “대표팀이 되어야만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는 걸 몰랐어요. 랭킹 순위 안에만 들면 누구나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 오산이었죠.” 결국 그는 그 일로 2년간 국제 종합대회 출전 자격을 박탈당하는 징계까지 받았다. 누구 하나 알려주는 이가 없었던 것이 억울했다. 잠시 스키를 그만둘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일생을 함께 해온 스키를 버릴 수는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부상까지 겹쳤다. 중3 때부터 있었던 허리디스크 때문에 고3 졸업할 당시 종아리 근육에 마비가 와 결국 수술대에 올랐다. 6개월을 쉬었다. 지난해 1월에는 대표팀 훈련 도중 손목 부상을 당해 5개의 핀을 박는 대수술을 견뎌내야 했다. 한달 간 운동을 쉬면서 경기감각도 많이 잃었다. 하지만 끊임없는 반복 훈련으로 모든 악재를 이겨냈다. ●“나가노올림픽때의 허승욱 넘어설 것” 태극마크는 고교를 마치면서 달았다. 고교 졸업 뒤 1년간 학업을 쉬며 실업팀 하이원에서 뛴 정동현은 지난해 중국 하얼빈에서 열린 동계유니버시아드에서 사상 첫 5위를 차지, 유망주로 떠올랐다. 국내대회를 횝쓸다시피하며 1인자로 떠오른 그는 마침내 꿈에 그리던 올림픽 무대를 밟게 됐다. 정동현의 목표는 1998년 나가노올림픽에서 알파인 스키 사상 처음으로 20위에 올랐던 한국 알파인스키의 대명사 허승욱을 넘어서는 것이다. 정동현은 “개인적인 목표는 밴쿠버올림픽에서 사상 최초로 15위에 드는 거예요. 2014년 소치에서는 꼭 메달권에 진입하고 싶어요.”라며 야심찬 포부를 밝혔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밴쿠버 별을 향해 뛴다] (4) 스노보드 첫 올림픽 출전 김호준

    [밴쿠버 별을 향해 뛴다] (4) 스노보드 첫 올림픽 출전 김호준

    앳된 얼굴이지만 눈빛부터 다르다.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한국인 최초로 동계올림픽 출전권을 따낸 스노보드 국내 1인자 김호준(20·한국체대1). 그의 월드컵 랭킹은 34위(올림픽 출전권은 40위 이내)로 안정권이다. 12일 미국 덴버에서 전지훈련을 막 마치고 돌아왔지만, 2~3일간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미국으로 훈련을 떠난다. 김호준에게 스노보드 11년 인생 얘기를 들어봤다. 항상 최고를 꿈꿔온 그는 국내대회를 휩쓸다시피 했다. 하지만 세계무대의 벽은 높았다. 지난해 1월 강원도 횡성에서 열린 세계스노보드선수권대회. “40등에만 들면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며 쉽게 여긴 게 화근이었다. 최종 성적은 충격의 43위. 목표였던 16등에는 멀어도 한참 멀었다. ‘항상 내가 1인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일주일간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하지만 중국 하얼빈에서 열리는 동계유니버시아드가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올림픽을 위한 중요 관문이었다.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도 모르게 아침마다 체력훈련을 시작했다. 이 대회에는 세계랭킹 3위인 고쿠보 가즈히로(일본) 등 유명선수들이 많이 참가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중국에서 메달 못 따면 보드 인생을 접자.’ 목숨을 걸고 훈련한 그는 대회 당일 비장한 각오로 점프를 했다. 놀랄 정도로 높은 점프가 나왔다. 한국인 최초로 동계U대회 은메달을 목에 건 순간이었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그에게 더이상 장애물은 없었다. 스키숍을 운영하는 아버지 덕에 4살 때부터 스키를 시작했다. 스노보드를 시작한 건 9살 때. 스노보드를 수입해온 아버지의 권유였다. 원래 수영선수였던 김호준은 스노보드의 매력에 푹 빠져 중2 때 수영을 그만뒀다. 이후 스노보드 주니어국가대표를 놓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겨울이 아니면 국내에서 훈련은 불가능했다. “외국선수들은 여름에도 한창 훈련 중이라는 생각을 하니 화가 치밀 정도였죠.” 결국 자비로 중학교 때부터 해외훈련을 나가기 시작했다. 협회의 지원은 미미했다. 그는 열악한 환경을 딛고 중3이던 2006년 세계주니어선수권 결선에 진출했다. 처음으로 한국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시련도 있었다. 중3 때 국가대표팀 선발전을 앞두고 훈련하던 중 무리해 발목 인대가 끊어진 것. 진통제를 먹고 시합을 뛰었다. 결국 수술을 받았고, 1년 동안 무의미한 세월이 흘러갔다. 고1 때엔 동계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나간 이벤트 대회에서 착지하던 중 어깨인대를 다쳤다. 무려 8개의 핀을 박는 수술을 했지만, 재활에 전념한 끝에 다시 부활했다. 김호준은 이 모든 악재를 뚫고 2008년 스위스 레이즌에서 열린 유럽컵에서 생애 첫 국제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인터뷰 막판 그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김호준플립’을 꼭 성공할 거예요.” 스노보드 기술에는 한계가 없다. 새로운 기술을 시도해 성공하면 그 기술에는 ‘김호준’이라는 이름 석자가 붙는다. 3년 전부터 연마해온 최고 기술인 1080도 스핀(공중 3회전 돌기)은 올림픽 대비용으로 이미 완성 단계다. 근성을 지닌 만큼 욕심도 많다. “올림픽에서 1등하는 게 제 인생 최대 목표예요. 항상 최초이고 싶어요.” 앞으로는 전세계 스노보드 선수들이 ‘김호준플립’에 도전하기 위해 수백번을 구르고 뒹굴며 연습할 것이다. 그 날이 머지않았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토의 ‘대동아공영론’

    [한·일 100년 대기획]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토의 ‘대동아공영론’

    고희를 눈앞에 둔 노회한 정치인은 왜 그 먼 만주땅까지 여정을 떠났을까. 이토의 ‘동양 평화론’의 실체는 무엇이었나. 또한 ‘안중근의 평화론’은 무엇이었기에 그를 쐈을까. 그의 의거는 1910년 8월 한일병탄과 어떤 관련이 있었을까. 이토는 마지막 만주 시찰에서도 ‘동양 평화’를 운운했다. 메이지 정부 초기 급진적인 한국 병합론자들과 달리 그는 점진적인 한국 병합론을 강조했다. 또한 틈만 나면 ‘한국의 독립과 영토를 보장한다. 황실의 안녕을 보장한다.’는 발언을 내뱉곤 했다. 이토가 일본 내에서 합리적인 비둘기파 정치인으로 통하는 이유다. 하지만 그는 제국주의적 입장에서 만주와 한반도를 점령하는 데 최선봉, 최핵심의 역할을 했다. 그의 평화, 그의 대동아공영론은 강한 군사력을 갖고 주변국을 침략해 일본의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일본만의 평화’와 다름이 없었다. 원로사회학자인 이시다 다케시(石田雄) 도쿄대학 명예교수는 이토의 평화론에 대해 “동양평화를 주장했지만 그 평화의 주체는 일본이라는 생각에서 탈피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얼빈역에서 의거를 마친 안중근의 총에는 여전히 한 발의 총알이 남았다. 이미 이토를 처단했기에 굳이 무고한 생명을 더 앗아갈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또한 대한의군 좌익장 시절에는, 처참하게 처형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일본군 포로를 석방해줄 정도로 인도주의적 만국공법을 준수하고 평화를 사랑했던 안중근이었다. 그는 ‘동양평화론’의 서문에서 자신의 의거를 ‘동양평화의전(東洋平和義戰)’이라고 명시하며 평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내비쳤다. 신속한 사형 집행으로 사상가로서 안중근의 면모를 속속들이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웅대한 뜻은 서문에서 충분히 확인되고 있다. 안중근의 평화론 요체는 한·중·일이 서로 주권을 인정하는 가운데 약육강식이 아닌 보편적인 도덕을 통한 평화였다. 또한 자주독립된 각 나라 국민들이 협력하여 서구 제국주의를 막아 동양 평화를 완성하는 것이다. 반면 이토는 자신의 만주행을 ‘개인적 여행’이라고 말했지만 러시아와 만주 철도에 대한 분할 지배를 못박기 위해서였고, 또한 일본의 한국 병합에 대한 러시아의 의중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에 대해 동아시아 평화세력을 대신한 안중근이 총탄을 날린 것임을 정확히 증명하고 있다. 일본은 물론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은 국내 일부 사학자조차 ‘안중근이 이토를 살해했기에 한국 병합이 앞당겨졌다.’는 시각을 갖고 있으나, 이토는 만주로 떠나기 여섯 달 전 도쿄 자신의 집에서 몇몇 핵심 관료들과 함께 이미 한국 병탄을 결정했다. 노구를 이끌고 삭풍이 몰아치는 러시아를 둘러봐야 할 핵심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한일병탄 100년을 맞아 ‘의사(義士) 안중근’으로 박제화된 안중근을 선각적 평화론을 구상한 ‘사상가 안중근’으로 되살릴 때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한·일 100년 대기획]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꼬박 100년이 흘러갔다. 아시아의 평화와 대한 독립을 간절히 원했던 안중근은 옥중에서 미완성 수고(手稿) ‘동양 평화론’을 쓰다가 형이 집행됐다. 머리말과 목차만을 남겼을 뿐이다. 일련의 상황들은 얼핏 역설 또는 가치의 전복에 가깝다. ‘동양 평화’ ‘대동아공영’을 주창했던 일본의 정치인 이토 히로부미를, ‘동양 평화를 원하던’ 안중근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총살했으니 말이다. 안중근의 의거 10개월 뒤인 1910년 8월 일본은 한국을 병탄(倂呑)한다. 100년이 지났건만 평가는 엄정하고, 치밀해야 한다. 새로 오는 100년을 준비하기 위해서 더더욱 냉철하고, 정확한 평가가 필요하다. 또한 지난 역사의 평가작업으로서 제기되는 몇몇 의문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필요하다. #장면 1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10분 중국 하얼빈 기차역. 일본의 전 총리이자 조선 통감부 제1대 통감(총독)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탄 기차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러시아 군복 스타일의 옷을 입은 한 청년이 대합실에서 일어나 천천히 플랫폼으로 걸어나갔다. 만 서른 살의 청년,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 안중근이다. 이토는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68세의 노정객 이토는 기차 안에서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20분 남짓 대화를 나눈 뒤 모습을 드러냈다. 안중근은 러시아 사열병 바로 뒤쪽까지 다가섰다. 신문기자로 위장했기에 접근에 어려움은 없었다. 이토가 사열병 앞으로 다가서는 순간 안중근은 앞으로 뛰쳐나가 품 속에서 권총을 빼내 세 발은 이토에게 명중시키고, 나머지 세 발은 수행원들을 쐈다. 그리고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우레 코레아!(한국, 만세!)”를 외쳤다. 이토는 30분 뒤인 오전 10시 사망했다. 현장에서 붙잡힌 안중근은 일본 법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개인자격이 아닌 대한의군 사령관으로서 처형하였다.”고 밝힌 뒤 사형을 선고받았고, 항소를 포기하며 죽음을 선택했다.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뤼순(旅順) 감옥에서 형이 집행됐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였다. 뤼순 감옥 뒷산에 묻힌 그의 유해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찾지 못했다. 지난해 9월 동상으로나마 돌아온 안중근은 여러 논란 속에서 제자리를 못 잡다가 두 달 가까이 지나서야 경기 부천 안중근 공원(구 중동공원)에 어렵사리 정착할 수 있었다. #장면 2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일방적 을사늑약 체결, 1906년 조선 1대 통감으로서 펼친 각종 조선 말살 및 식민지화 정책,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등 일제가 벌인 동아시아 침략에 주도적 역할을 맡는 등 씻을 수 없는 죄과를 남긴 인물이다. 크고 작은 저항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 그는 안중근에 4년 앞서 또 다른 대한제국 청년의 의거로 중상을 입었다. 이토는 초대 통감으로 부임(1906년 3월)하기 직전 수원으로 사냥 나들이를 나서는 등 여유 있는 한때를 보냈다. 해 저물녘 안양을 들러 서울행 기차를 타기 위해 자리에 앉았는데 을사늑약 체결에 비분강개하던 스물 세 살 원태우가 돌멩이를 여러 개 던져 유리창을 깨뜨렸고, 이토의 얼굴에는 파편 여덟 개가 박혔다. 원태우는 징역 2개월에 장형(곤장 100대)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과 일본 역사 안에서의 평가는 또 다른 극점에 놓여 있다. 그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격(格)으로 평가받는다. 빈농의 아들에서 출발한 그는 일찍이 영국 런던대학으로 유학해 화학을 전공하는 등 서구 문물과 근대 교육을 받아들였고, 일본 메이지 헌법의 초안을 마련했으며, 내각제 등 일본 정치제도의 근간을 만들었다. 초대 총리와 5·7·10대 총리를 지냈고, 추밀원 의장, 귀족원 의장을 맡는 등 36년 동안 일본의 최고 핵심권력에 있었다. 하지만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총리에서 몸을 한껏 낮춰 조선의 초대 통감을 자처했으니, 일본에서는 개인의 욕망보다는 겸손하게 대의에 충실한 인물, 동양 평화를 추구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토의 장례는 1909년 11월4일 히비야공원에서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1963년 발행된 일본의 천엔(円)권 화폐 속 인물이 됐을 정도로 지금도 국민적 추앙을 받고 있다.
  • [밴쿠버 별을 향해 뛴다] 스피드스케이팅 장거리 샛별 이승훈

    [밴쿠버 별을 향해 뛴다] 스피드스케이팅 장거리 샛별 이승훈

    “더 놀라운 일을 하고 싶어요. 스피드 스케이팅 역사에 한 획을 긋겠습니다.” 스피드 스케이팅 장거리의 샛별로 떠오른 이승훈(22·한국체대)이 이야기하다 말고 갑자기 진지해졌다. 아이돌 부럽지 않은 잘생긴 외모에, 몇 마디 만에 기자를 ‘누나’라고 부르는 싹싹함을 갖춘 막내동생 같은 그였다. 올림픽 다녀오면 인기몰이 좀 하겠다는 농담에 “팬클럽이 있긴 있어요.”라며 수줍어하던 모습은 ‘꿈’을 말하는 순간 깡그리 사라졌다. ●쇼트트랙에서 스피드 국가대표로 “아시아에서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승훈이 주력하는 5000m는 그동안 서양선수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종목. 이승훈은 작년까지 쇼트트랙 선수였다. 2005년 대표팀 막내로 세계쇼트트랙선수권에 출전, 세대교체의 선봉에 섰다. 2009 하얼빈 동계유니버시아드에서는 한국에 금메달 3개(1000m·1500m·3000m)를 안겼다. 하늘이 또 다른 재능을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이승훈은 지난해 4월 쇼트트랙 대표선발전에서 탈락했다. 충격적이었다. “선발전 첫 경기에서 넘어졌어요. 이건 꿈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더라고요. 하늘이 무너진다면 바로 이런 느낌이겠다 싶었죠.” 대표선발전이 끝나고 세 달 동안 마냥 쉬었다. 너무 간절했던 태극마크였기 때문에 스케이트를 신을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절망했다. 대표가 되려면 꼭 1년 뒤인 4월 선발전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기엔 너무 힘들었다. 올림픽에 꼭 나가고 싶었다. 방황하는 이승훈에게 새 기회가 찾아왔다. “주변에서 스피드 대표선발전이 10월에 있으니까 그냥 운동하는 셈 치고 스피드를 타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7월부터 쇼트트랙하고 스피드 스케이트를 번갈아 신으면서 마음을 비우고 훈련했죠.” 처음엔 이렇게 잘할 줄 몰랐다. “국가대표만 되자는 마음이었어요. 근데 대표가 되니, 올림픽에 가고 싶은 거예요.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니, 꿈이 더 커지더라구요.” 내심 메달권도 기대한다는 소리. 갈 데까지 가 보자는 심정이란다. ●탈 때마다 역사가 된다 실제로 이승훈의 신기록 행진은 멈출 줄 모른다. 지난해 10월 월드컵 파견선수 선발전에서 대회기록(6분49초78·2006년 최근원)을 1초78 앞당기며 화려하게 태극마크를 달았다. 이후 2009~10시즌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스피드 스케이팅 월드컵 시리즈에서 무려 세 개의 한국신기록을 갈아치웠다. 한 달간 월드컵 시리즈를 치르면서 6분29초99였던 기록이 6분14초67까지 줄었다. 월드컵 1차 대회 직후 디비전A로 승격해 이후 3개 시리즈 연속 ‘톱10’에 들었다. 단거리에선 이규혁(32·서울시청)과 이강석(25·의정부시청)이 1위를 다투지만, 5000m에서 아시아선수가 ‘톱10’에 든 건 이승훈이 최초. 아시아 선수에게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치부되는 장거리를 선택한 이유는 뭘까. “가진 게 체력뿐이다.”라며 겸손을 떨었다. 작은 트랙을 쉴 새 없이 도는 쇼트트랙에서 다져진 몸이 스피드에서도 통한다나. “쇼트트랙을 하다 보니 코너워크에서 훨씬 유리하다. 악명 높은 체력훈련을 해온 것도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는 설명. ‘첫사랑’ 쇼트트랙이나 ‘현 애인’ 스피드 스케이팅 중 하나만 선택하기는 힘들단다. “쇼트트랙은 상대선수를 제치고 나가는 쾌감이 있다면, 스피드는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 정정당당하고 신사적이라는 것이 편안하다.” ‘첫사랑’에 대한 미련이 진하게 남아 있지만, 이젠 “스피드 장거리에서 이례적인, 아시아에서 다시는 찾기 힘든 선수가 되고 싶다.”는 야망을 품었다. “저보다 잘 타는 선수를 정신없이 쫓아가다 보면 기록이 줄어 있던데요.”라고 웃는 모습은 마냥 천진난만하다. 한바탕 얼음을 질주하고도 팔팔한 이승훈의 기록행진이 밴쿠버까지 쭉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 글 사진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탐사보도-2009 마약리포트] “中서 마황 2만5000원어치 250억대 필로폰으로”

    [탐사보도-2009 마약리포트] “中서 마황 2만5000원어치 250억대 필로폰으로”

    중국산 ‘필로폰’(히로뽕)이 넘쳐난다. 유흥가나 집창촌을 벗어나 주택가, 길거리 등 일상생활 공간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투약층도 과거 유흥업소 종사자나 일부 연예인, 고위층 자녀들에서 가정주부·회사원·의사·변호사·교수 등 전 계층으로 확대됐다. 10대부터 60대 이상 노년층까지 연령을 가리지 않고, 투약 장소도 클럽·DVD방·PC방·유흥업소·공원·여관(모텔)·심야 고속도로 휴게소·가정집 등 다양하다. ●선양·단둥 등 조선족 많은 농촌서 제조 중국산 필로폰은 선양·단둥·다롄·하얼빈 등 조선족들이 많이 사는 농촌지역에서 주로 밀조된다. 이들 지역은 1990년대 국내에서 치러진 ‘마약과의 전쟁’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간 한국인 제조책들이 비법을 전수한 곳이다. 국내에는 마약제조기술책, 연결책, 구입책, 밀반입책, 유통책, 판매책 등의 경로를 거쳐 밀반입돼 유통된다. 서울 지역의 한 판매책은 “대구 등 지역별 판매책들이 유통책에게 약을 받아 그들이 관리하는 판매책들에게 나눠준다.”며 “판매책은 철저한 점조직으로 운영된다. 물건을 받는 상선(윗사람) 한 명만 알 뿐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한 명의 판매책 밑에는 여러 명의 소매 판매책이 있다. 최종 구매자까지 최소 3단계 이상을 거친다. 유통 과정이 갈수록 은밀해지고, 단속됐을 경우 도마뱀 꼬리자르듯 할 수 있다.”고 전했다. 유통책은 보통 판매책 5~10명에게 필로폰을 대고, 판매책들은 적게는 10~50명, 많게는 100~300명의 투약자를 관리한다. ●중국산 순도 낮아 2~3배 더 투약 가격은 지역마다 다르다. 인슐린 주사기 한 대(마약계통에서는 ‘고사바리’, ‘환사키’로 통함)에 들어가는 양은 보통 1g이다. 이 기준으로 인천 30만원, 서울·부산 각 100만원 등에 판매된다. 최종 소비자들의 1회 투약분인 0.03g은 통상 10만원에 거래된다. 단속이 심해지면 가격은 오른다. 인천 지역의 한 판매책은 “마약 판매 기준가격은 없다. 여유 있는 사람이나 초짜, 어리숙한 이들에게는 비싸게 판다.”고 했다. 중국인 제조자들은 양을 늘리기 위해 필로폰에 백반 등 비슷한 이물질을 섞는다. 국내 반입 필로폰의 순도가 떨어지는 이유다. 이들은 최상품인 ‘북한산’ 필로폰을 구입해 이물질을 섞기도 한다. 한 판매책은 “국내 유통 필로폰은 80~90%가 저순도의 중국산”이라며 “과거 한국과 일본에서 만든 것에 비해 순도가 40% 정도밖에 안 된다. 때문에 요즘은 한 번 투약할 때 0.03g이 아닌 0.07~0.1g 정도를 한다.”고 귀띔했다. 오리지널 북한산은 중국, 홍콩 등을 거쳐 국내에 유입된다. 중국산의 2배 가격에 거래된다. 경찰 관계자는 “삼합회 등 중국 폭력조직이 전문적으로 밀반입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책이나 인형 같은데 넣어오다 적발되곤 한다.”고 했다. 한 판매책은 “웃돈을 준다 해도 북한산은 구하기 어렵다. 마약계통에 오래 몸담은 이들만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상품’ 북한산 값은 중국산의 2배 국내에서도 필로폰 제조는 가능하다. 필로폰은 마황(한약재)에서 각성제 성분인 에페드린을 추출해 만든다. 한 판매책은 “마약 제조법은 외국 인터넷 사이트에 자세히 나와 있다. 대학 화공학과 정도의 지식만 갖추면 만들 수 있다. 제조 과정에서 나는 냄새만 차단하면 경찰에 적발되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이어 “외국인 제조책들이 원료물질을 구입해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으로 밀수출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국내 판매책들이 중국으로 넘어가 제조한다. 중국이나 타이완에서는 마황을 쉽게 구할 수 있어서다. 한 판매책은 “판매책 3~4명이 중국으로 건너가 원료를 구입, 제조한다.”며 “중국에서 마황 2만 5000원어치를 사면 250억원어치의 필로폰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중국은 마약 50g 이상을 소지하면 사형이지만 형식일 뿐 1000만원 정도 주면 풀려난다.”고 덧붙였다. 탐사보도팀
  • 충북도의원 단체외유 추진 논란

    정부와 여당의 세종시 수정으로 충청권이 강력 반발하는 가운데 충북도의원들이 단체 외유를 추진해 논란이 일고 있다. 10일 충북도의회에 따르면 전체 도의원 32명 가운데 20명이 자매결연 도시인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에서 열리는 빙등축제를 관람하기 위해 새해 1월5일부터 7일까지 2박3일 일정으로 중국 여행을 갔다 올 예정이다. 경비는 1인당 50여만원으로 도의원들이 매달 적립하고 있는 상조회비로 쓸 예정이다. 이번 방문은 헤이룽장성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적절치 못한 처신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세종시 무산저지 충북비상대책위원회 이두영 집행위원장은 “충남 지방의원들은 세종시를 지키기 위해 사퇴를 결의하고 있다.”며 “충북도의원들은 이제라도 외유계획을 백지화하고 세종시 원안 추진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촉구했다. 도의회는 교류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헤이룽장성의 초청이라 외교 관례상 거절할 수 없었다며 이해해 달라고 하소연하고 있다. 이대원 도의회 의장은 “가는 날과 오는 날을 빼면 중국 일정은 사실상 하루뿐”이라며 “이번 방문은 사비를 들여 가기 때문에 사적 영역으로 봐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청주 남인우기자 niw7263@seoul.co.kr
  • [문화마당] 그들은 과연 죽어서 살았는가/장유정 극작·연출가

    [문화마당] 그들은 과연 죽어서 살았는가/장유정 극작·연출가

    뮤지컬 ‘영웅’이 지난주 막을 올렸다. 5년여간의 오랜 제작과정이 곳곳에 묻어나는 보기 드문 수작이었다. 특히 야마카시를 통해 구현한 독립군과 일본군의 추격 신은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실험적인 장면으로 무대 위에서도 사실적인 액션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 역 거사엔 실제 사이즈의 기차가 등장했는데 영상과 조명 그리고 세트가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 그림만으로도 긴장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순국하기 직전 교수대 밑에서 마지막 아리아를 부를 때에는, 밀려오는 감동에 눈물을 흘리는 관객도 더러 있었다. 창작뮤지컬의 진일보를 보여준 작품이라 할 만했다. 뮤지컬 ‘남한산성’은 어제 막을 내렸다. 오픈한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예매율 1위를 선점했던 이 작품은 김훈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것이었다. 공중에 위태롭게 매달아 놓은 말 모형과 청군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안무 등 남성적이며 파워풀한 무대연출이 돋보였다. 클라이맥스 부분인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장면은 침묵 속에서 이뤄졌다. 위압적인 복장을 한 청군이 인조의 머리를 무대바닥으로 내리치는 순간, 삼전도의 치욕이 되살아나는 듯 극장 전체가 엄숙해졌다. 두 작품은 역사 속에 목숨을 내던진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다. 시종일관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를 고뇌하던 오달제와 오직 나라의 독립을 위해 온 힘을 다했던 안중근을 연기한 두 배우는 훌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근과 오달제란 인물 그 자체는 살도 피도 없이 박제된 동상처럼 느껴졌다. 왜일까? 병자호란이나 대한제국은 고등학교 시험에 자주 나왔던 단답형 주관식의 답으로만 기억할 뿐, 깊이 있는 이해는 없다. 당연하다. 국사는 암기과목이니 단어와 그 의미만 제대로 짝짓기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 속에 스러져간 인물들은 말 그대로 이름만 남았다. 애국지사들에 대한 예우는 국기에 대한 경례 뒤에 붙는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 때 몇초간 머리를 숙이는 것으로 대체된다. 요새는 그나마도 애국가와 함께 생략된다. 연습실이 약수역 근처라 필자는 요즘 매일같이 전쟁기념관 앞을 지나간다. 평일 낮에도 주말 오전에도 그 곳은 한산하다. 마치 짓다가 만 유령 아파트처럼 뭔지 모를 서늘한 느낌까지 든다. 남산에는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있고 파주에는 인조왕의 장릉이 있다. 두 장소 역시 썰렁하기는 마찬가지다. 무엇이 그들을 잊게 만든 것일까? 몇 해 전 러시아를 여행하던 중 연극사의 중요 인물 중 한 명인 스타니슬라프스키 기념관에 간 적이 있었는데 얼마나 방문객이 없었는지 건물 앞에 잡초가 무성했고 전기도 끊어져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먼지 낀 햇살을 의지해 그가 남긴 자료와 사진들을 보는데 왠지 남의 일이 아닌 듯했다. 뮤지컬 ‘영웅’을 보고 온 다음날, 사람 없는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둘러보던 중 먼 타국의 연출가 기념관이 기억났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요즘은 목숨 걸고 지킬 명분이나 상황이 별로 없다. 어찌 보면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편안한 세상 덕에 그 가치마저도 사라지는 듯하다. 이렇게 뮤지컬 안에서나 다시 사는 그들, 과연 그들의 바람처럼 죽어서 산 것일까? 식상한 이야기일지는 모르나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안녕도 없었을 것이다. ‘영웅’의 극중 인물 링링이 품고 죽는 제비꽃의 꽃말처럼 ‘나를 잊지 말라’는 그들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한 가을이다. 100년 전, 안중근이 이토를 기다리던 하얼빈 역에도 오늘처럼 싸늘한 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는 안중근의 유해를 생각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장유정 극작·연출가
  • [뮤지컬 리뷰] 영웅

    [뮤지컬 리뷰] 영웅

    어둠속에서 점점 커지는 기차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일곱 발의 총성. 스크린에 하나씩 새겨지던 총탄 자국은 북두칠성이 되어 빛을 발한다. 역사적인 하얼빈 의거로 우리 민족의 별이 된 안중근의 운명을 상징하는 뮤지컬 ‘영웅’(연출 윤호진)의 첫 장면은 공교롭게도 2시간40분간 관객이 공연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의 변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1막에서 살짝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차곡차곡 인물과 사건을 전개해 나가던 공연은 2막에서 안 의사의 저격과 법정 장면으로 숨 돌릴 틈 없이 시선을 사로잡더니 죽음을 앞둔 안중근(류정한·정성화)이 ‘장부가’를 부를 땐 끝내 총격을 맞은 듯 강한 전율을 느끼게 했다. 객석에선 대형 창작뮤지컬의 신성(新星)탄생을 축하하는 아낌없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안중근 의거 100주년 기념일에 맞춰 지난 26일 LG아트센터에서 개막한 ‘영웅’은 지금까지 한국 창작뮤지컬이 거둔 성과를 최대한으로 집대성해 완성도 높은 공연을 선보였다. 실물과 영상을 결합해 만주 벌판을 달리는 기차를 무대위에 재현하고, 독립군과 일본 경찰이 건물 사이를 누비며 긴박한 추격전을 벌이는 장면 등이 돋보였다. 안중근과 동료들이 간절한 소망을 담아 부르는 ‘그날을 기약하며’와 ‘장부가’를 비롯한 뮤지컬 넘버들은 전염성이 강했다. 중국, 일본, 러시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다층적인 사건들은 조명과 미닫이문을 활용한 무대 분할로 효과적으로 형상화됐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성취는 무엇보다 과도한 애국주의나 평면적인 선악 구도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안중근을 무결점의 완벽한 영웅으로 묘사하거나 이토 히로부미를 천인공노할 악의 화신으로 그리지 않았다. 감옥에 수감된 안중근과 죽은 이토 히로부미의 환영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긴 여운을 남긴다.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허구의 인물인 설희와 링링은 드라마를 풍성하게 하는 데 필요한 요소이긴 하나 아직 캐릭터가 충분히 무르익지 않은 느낌이다. 이 부분이 좀더 매끄럽게 보강된다면 1막의 지루함과 어수선함이 상당히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12월31일까지. 4만~12만원. 1588-7890.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안중근의사 의거 100주년 서울·하얼빈 등서 기념식

    26일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아 국내·외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날 서울과 중국 하얼빈 현지에서는 각각 기념식이 열렸고 하얼빈에서 철거돼 국내를 떠돌던 안 의사의 동상도 경기 부천에 자리잡았다. 예술의 전당에서는 안 의사가 생전에 남긴 글씨와 그림을 모아 특별전을 개최했다.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앞 광장에서 ‘백년의 애국, 천년의 번영’이라는 주제로 열린 기념식에는 정운찬 국무총리와 정부 관계자, 시민 등 1200여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는 안연호(72·손녀), 토니 안(46·증손자), 황은실(81·외손녀·이상 미국거주)씨와 황은주(78·외손녀·국내 거주), 김영금(71·외조카·중국거주)씨 등 안 의사의 유족 17명도 자리를 함께 했다.행사 참석자들은 기념식을 마친 뒤 남산의 ‘안중근의사기념관’ 건축 현장을 둘러보고 공사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기념관은 공사비 150억원을 들여 지상 2층, 지하 2층의 전체면적 3800㎡ 규모로 건립되며 내년 10월 완공된다.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서울광장]안중근! 우린 아직 그를 모른다/김종면 논설위원

    [서울광장]안중근! 우린 아직 그를 모른다/김종면 논설위원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당시 이런 글을 안 의사에게 바쳤다.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백세의 삶은 아니나 죽어서 천추에 빛나리.” 그런가 하면 저우언라이 전 총리는 “중국과 한국이 함께 벌인 항일투쟁은 바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하면서부터 시작됐다.”며 안 의사를 높이 평가했다. 세계의 시선은 물론 그와 같지 않았다. 일본은 ‘야만적인 테러’로 봤고 러시아는 ‘경거망동’으로 규정했으며 미국은 ‘강압에 대한 복수’로 간주했다. 테러리스트의 범주에서 접근한 것이다. 하얼빈 의거를 공동의 적을 응징한 사건으로 본 중국 또한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안중근을 민족주의적인 애국 영웅의 표상으로 그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안중근 인식은 어떤가. 최근 연극, 뮤지컬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안중근은 우리 곁에 바싹 다가왔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은 그를 조선침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영웅 정도로 기억한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의 지적대로 이는 “중대한 민족적 과오”가 아닐 수 없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를 주창한 혁명적 사상가요,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활약한 의병장이요, 국채보상운동을 이끈 경세가였다. 하얼빈 의거 100주년, 나라 안팎에 안중근 동상이 세워지고 유묵(遺墨)전이 열리는 등 전례 없이 부산하다. 안중근 재평가 작업도 활발하다. 키워드는 ‘동양평화론’이다. 안중근이 옥중에서 쓴 미완의 논설 동양평화론은 한·중·일 3국이 공동은행과 화폐를 사용하는 하나의 경제공동체를 통해 영구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구체적 해법을 담고 있다. 작금의 동아시아공동체론과도 가닥이 통할 만큼 선구적인 사상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우리 학계의 안중근 연구는 90년대 중반 들어서야 본격화됐다. 변변한 평전 하나 없다.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에서 근대국가를 설계한 영웅으로 1000엔권 화폐인물에 올랐고 출간된 전기만도 수십종에 이르는 것과 대비된다. 기억하고 보존하기에 늦어 버린 역사란 없다. 이제라도 ‘사상가’ 안중근을 바로 세워 나가야 한다. 얼마 전 만난 한 원로작가는 요즘 학교에서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말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입시교육에 치여 애국의 가치를 일깨우는 국민교육이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난 것은 잘못이라는 얘기다. 공무원이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외면하고 애국가 부르기를 거부하는 게 현실이고 보면 그의 말에 일리가 없지 않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안중근 유묵이야말로 더없이 맞춤한 국민정신교육 텍스트란 생각이 든다. 안중근은 사형언도를 받고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40여일 동안 200여점의 묵서를 썼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이 50여종 된다. 안중근은 유묵으로 말한다.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누가 눈앞의 이익을 보고 의를 먼저 생각하고 나라가 위급할 때 목숨을 바칠 수 있으리오. 안중근 유묵에 담긴 의미만 제대로 새겨도 우리는 금강처럼 단단한 정신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대한국인(大韓國人)의 영예를 누릴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전 국민 안중근유묵따라배우기 운동을 제안한다. 무명지를 끊으며 대한독립의 의지를 불태운 도저한 의인의 정신, 죽어서도 조국 땅에 묻히지 못한 100년의 한(恨)이 지금 안중근 열(熱)로 달아오르고 있다. 식지 말아야 한다. 저마다의 가슴에 ‘안중근 정신’의 성소(聖所)를 마련해야 한다. 김종면 논설위원 jmkim@seoul.co.kr
  • [안중근의사 의거 100주년] 안 의사 동양평화론 재조명

    │하얼빈 박홍환특파원│안중근 의사의 핵심 사상인 ‘동양평화론’이 1세기를 앞선 혜안으로 새삼 주목받고 있다.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 동북아평화공동체 등 유사한 주장들이 잇따르는 가운데 때마침 정권교체가 이뤄진 일본에서도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이 제기됐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1910년 2~3월 중국 뤼순 감옥에서 집필됐다. 그 해 3월26일 일본 정부의 사형집행으로 당초 구상했던 원고를 완성하지 못했지만, 그는 ▲한·중·일 3국 간의 상설기구인 동양평화회의체 구성 ▲동북아 3국 공동은행 설립과 공용화폐 발행 ▲동북아 3국 공동평화군 창설 등을 역설했다. 의거 100주년을 맞아 국내외에서 그의 동양평화론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다. 지난 21일 오전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유이궁(友誼宮)에서는 하얼빈 사회과학원 주최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재조명하는 국제학술토론회가 열렸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은 “안 의사는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는 지역 간의 평화체제를 구상했다.”며 “유럽연합(EU)이 그의 구상과 같은 방식으로 통합을 이뤄낸 것을 보면 그는 1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는 안목을 가졌던 위인”이라고 평가했다. 오페라 ‘안중근’의 극본을 집필한 왕훙빈(王洪彬) 하얼빈시 전 문화국장은 “안 의사의 사상이 한국은 물론 중국과 세계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며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그가 바랐던 동양평화, 나아가 세계평화의 길을 구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안 의사나 그의 총에 사살된 이토 히로부미 모두 동양평화를 주장했지만 결론은 달랐다. 안 의사는 이토를 동양평화를 위협하는 위험인물로 간주, 서슴없이 총을 빼들었다. 이후 전개된 일제의 침략전쟁은 그의 생각이 정확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안 의사는 재판 과정 및 동양평화론에서 이토 사살을 ‘동양평화를 위한 의로운 전쟁’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사형집행 직전에도 동양평화를 외쳤다. 안 의사는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협력하는 길을 통해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아시아를 공동방어할 때 동양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얼빈 사회과학원 관계자는 “사실 지금까지 중국에서는 안 의사의 의거 외에 동양평화론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다.”며 “동아시아의 평화공존에 대한 안 의사의 혜안이 놀라울 뿐”이라고 말했다. stinge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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