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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라크 내전 소용돌이 안팎

    ◎“후세인,곧 비참한 최후 맞는다”… 소문 파다/반군·쿠르드족,남북부 장악 교전/후세인 강경진압령… 부녀자도 사살 이라크에 반후세인 폭등이 급속히 번지고 있다. 이같은 전국적인 소요사태는 후세인의 운명과 함께 패전후 이라크 집권세력 및 정치체제의 향방을 판가름할 최대변수가 되고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반정부 시위는 크게 3가지 부류로 진행되고 있다. 과격시아파 회교 반군들이 이라크 제2의 도시인 바스라시를 장악한데 이어 남부 7개 도시에서 정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고 소수민족인 쿠르드족은 북부 슐레이마니아 지역을 장악하는 등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수도 바그다드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는 보도까지 나오고 있다. 일부 이라크 군병사들까지 가세한 반군들은 교도소와 정부관서 차량 등을 탈취하고 바트당 관계자들을 비롯한 정부관리들을 공격하고 있으며 후세인의 장남인 우다이 바스라주 지사도 피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태가 악화되자 후세인은 터키국경에 배치했던 2개 기계화 여단을바그다드로 철수시켜 자신을 보호하는 한편,집권혁명평의회 부의장인 이자트 이브라힘을 소요지역 현지로 급파,동남부 군지휘관들에 대한 규합에 나섰다. 공화국수비대는 반후세인 시위대들에 대한 강경진압에 착수,탱크 등을 동원해 부녀자들에게까지 총격을 가하고 있으며 바그다드 라디오도 반후세인 폭동 발생사실을 최초로 언급,국민단합을 파괴하려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이같은 반후세인 폭동이 확산되는 이유는 후세인의 무자비한 철권통치에 대한 누적된 불만과 당장 끼니도 때우기 어려운 궁핍한 생활에 대한 불만이 겹치면서 이번 기회에 아예 무모한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 독재자를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인구구성은 수니파에 비해 35대 60으로 많으면서도 줄곧 수니파의 집권을 감수해왔던 시아파의 불만과 쿠르드족의 독립야욕,시리아 이란 등 인접국들의 복잡한 이해관계도 소요를 확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미 내전의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이라크의 내부폭동이 앞으로 어떻게 진전될지는매우 불투명한 상태다. 아직까지 전력상 우위를 보이고 있는 후세인의 정부군이 반군세력을 진압할 수 있을지,반군들이 후세인을 축출하고 이라크전역을 장악할 것인지,아니면 내전상황이 상당기간 지속돼 「제2의 레바논」이 될지를 예측하기는 이른 상황이다. 정부군진영서 빠져나와 반군에 가담하는 이탈자들이 늘어나 후세인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있고 반군들도 제각각 이해관계가 달라 후세인에 반대한다는 사실외에는 공통점을 찾아볼 수가 없는 실정이다. 미국 등 다국적군의 개입여부도 사태진전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이다. 미국측은 이라크내부의 소요사태로 인해 전쟁포로 송환 및 이라크 영토내에 진주해 있는 다국적군의 철수가 지연되지 않을까 우려하면서 『사태가 매우 심각해지지 않는 한 우리가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사태가 매우 심각해질 경우 미국이 어떠한 태도를 보일지는 미지수다. 이때문에 후세인 정권전복을 위해 다국적군의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는 이라크 반정부단체들은 동맹국들의 비위를맞추기 위해 자신들이 과격파가 아니라 자유선거를 지향하는 온건주의자들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라크남부 시아파 회교 반군세력의 배후조종 집단인 것으로 알려진 이란 테헤란에 본부를 두고있는 이라크 회교 혁명최고회의와 런던에 본부를 둔 회교 알 다와당 등은 『우리의 목표는 무력에 의해 회교 원리주의 정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유총선에 의한 민주정권 수립』이라고 계속 강조하고 있다. 쿠르드족 단체들은 자치권 확대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이라크 북부지역을 분리독립시키려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라크의 장래 및 망명정부 구성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오는 10일쯤 베이루트에서 열릴 전 이라크 반정부단체회의 참가그룹도 시아파와 쿠르드족,공산주의자,전 군부지도자,집권 바트당 이탈인사 등 워낙 이질적 요소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설령 후세인이 제거된다 하더라도 권력쟁탈을 위한 또다른 내전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단언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미국은 감정적으로는 부시 대통령이 후세인은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표현할정도로 후세인이 제거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 이라크가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제3의 레바논으로 전락,중동질서의 새로운 불안요인으로 대두되거나 세력구조 또는 인구구성 비상 가장 강력한 회교시아파 과격분자들의 손에 이라크가 넘어가 이란의 회교혁명 수출의 전진기지화하는 것도 결코 원치 않기 때문에 섣불리 정책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아무튼 이라크의 반후세인 폭동은 당분간 더욱 격화돼 후세인이 곧 축출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걸프전 이후 관련국 표정/소도 후세인 비난… 정권교체 지지/서방 보도진 26명 이라크서 실종 ○…암만의 서방관측통들은 이라크측이 3일 개전초 이래 처음으로 후세인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보좌관들과 전후복구문제를 협의하는 모습이 담긴 TV필름을 바그다드주재 외국기자들에게 공개한 것을 끊임없이 나돌고 있는 망명설과 관련,그의 건재를 입증해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휴전후 육로로 생필품 조달을 위해 요르단에 도착한 이라크트럭운전사들은 후세인이 하야하지 않을 경우 루마니아의 전 독재자 차우셰스쿠 처럼 비극의 종말을 고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고 전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외교자문인 바딤 자글라딘은 4일 사담 후세인 대통령의 이라크 정권이 확실히 테러리스트집단이며 이 정권이 교체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글라딘은 이날 자크 상테르 룩셈부르크 총리와 회담을 가진뒤 기자들에게 이같이 말하면서 그러나 후세인정권이 회교 원리주의자 정권에 의해 교체되는 것은 『전세계에 위협이 될 것이 분명하다』고 경고했다.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사드 마디 토마 국방장관과 그의 두 보좌관에게 걸프전쟁의 패배 책임을 물어 이 세사람을 처형했다고 영국에서 발행되는 아랍어 신문 알 아다스지가 4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정통한 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것이라면서 후세인 대통령이 이들에 대한 처형명령을 내려 이들은 지난달 28일 처형됐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후세인 대통령이 이들 세사람에 대해 임무를 다하지 못해 『미국과 영국 및 프랑스 군대가 이라크 내륙인 바스라주까지 진격하고 나세리야주까지 도달하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을 비난하면서 이같은 명령을 내렸다고 밝혔으나 두 보좌관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이라크는 지난해 8월2일 쿠웨이트 침공이후 쿠웨이트내에서 빼앗은 쿠웨이트 재산을 반환할 것이라고 바그다드 라디오방송이 5일 보도했다. 니코시아에서 수신된 이 방송은 『유엔결의에 따라 지난해 8월이후 압류한 쿠웨이트 재산을 돌려줄 것』이라고 보도했으며 이러한 결정은 지난 4일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주재한 이라크 집권 바트당과 혁명평의회의 한 회의에서 취해진 것이라고 전했다. 이 방송은 반환재산의 내역을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으나 이라크가 가져간 재산에는 쿠웨이트 정부재산과 사바왕가의 막대한 재산이 포함된다. ○…쿠웨이트 왕정은 반체제 민주인사들의 명단을 작성했으며 이들을 살해하기 위해 암살범들을 고용했다고 쿠웨이트의 저명 은행가인 압둘 아지즈 술탄 걸프은행장이 4일 주장했다. 쿠웨이트에서 두번째로 걸프은행의 총재인 그는 한 미 TV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사바왕가의 일부 왕족들이 쿠웨이트내에서 암살음모를 계획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아지즈 은행장은 미 ABC TV의 「나이트라인」 프로에 출연 『아랍 모국가에 머물고 있는 일부 사바왕족들이 자신들의 쿠웨이트인 민병대와 용병들을 구성하고 있으며 또 다른 왕정들은 민주인사들을 암살하기 위한 특수대원들을 파견하려 하고있다』고 밝혔다. ○…반후세인 폭동이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라크 남부배역에서 취재중이던 프랑스기자 15명 등 서방국기자 26명이 실종됐다고 미국과 프랑스 관리들이 5일 밝혔다. 리야드의 미군 관계자들은 지난 3일 쿠웨이트시를 출발,이라크 남부 바스라시로 향했던 11명의 기자들이 바스라 남쪽 40㎞ 지점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뒤 실종됐으며 이들의 생명이 무척 위험한 상태에 있다고 밝혔다. ○…해방된 쿠웨이트 시내에서는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쿠웨이트군과 사우디군의 박해가 노골화 되고 있다고 목격자들이 전했다. 목격자들은팔레스타인인들이 단지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유하나만으로 시내 검문소에서 차에서 끌어내려지고 있으며 통행이 저지된채 몇시간씩 기다릴 것을 요구당하고 있다고 설명. 또 50내지 55명의 팔레스타인인의 사우디군과 주둔지 부근의 미군순찰대에 발견되기도 했다.
  • 산유시설 피해실태와 정상화 전망

    ◎걸프 유정 3천곳 파괴… 복구에 12년 소요/30%가 연소중… 진화에만 1년/쿠웨이트/거의 전역… 연 2백40억불 손실/이라크 걸프전으로 파괴된 쿠웨이트와 이라크의 산유시설 피해가 국제원유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아직 정확한 피해상황이 집계되고 있지 않은 가운데 산유국을 비롯한 세계각국의 이들 국가의 원유공급중단이 가져올 국제유가변동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해 8월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점령한 뒤 전역에 있는 쿠웨이트 유정 및 저장탱크 등을 조직적으로 파괴해 왔다. 이와관련,쿠웨이트의 알 알메리 석유장관은 지난달 28일 영국의 알 하야트지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쿠웨이트의 5백여개 이상의 유정이 이라크군의 파괴나 방화로 불타고 있다』고 밝힌바 있다. 이는 쿠웨이트에 있는 1천8백개의 유정가운데 30% 가량을 차지하는 것이다. 미국측은 쿠웨이트의 피해유정이 5백17개에 달하고 있다고 밝혔다. 쿠웨이트는 이라크의 침공이후 거의 7개월동안 원유를 생산하지 못해 지금까지 70억달러에 달하는 원유수입 손실을 봤다. 또한 걸프전비로 2백억달러를 내놓았다. 이같은 엄청난 지출이외도 쿠웨이트는 파괴된 산유시설의 복구에 3백억달러 이상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 서방측의 진단이다. 쿠웨이트는 이미 파괴된 유정 등의 복구를 위해 미 벡텔사와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유정이 불타고 있어 유정복구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불타고 있는 쿠웨이트유정의 화재를 진압하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나아가 파괴된 석유시설을 완전복구하는데는 12년이 걸린다는 것이 쿠웨이트 망명정부측의 주장이다. 이라크의 침공 이전 하루 1백50만배럴을 생산하던 쿠웨이트는 그동안 원유를 전혀 생산하지 못해왔다. 이라크도 전쟁전에 하루 최고 3백50만배럴의 원유를 생산해왔다. 이라크는 재정수입의 90%를 석유수출에 의존해 왔으나 전쟁이후 수출길이 막혀 전후 재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라크는 이번 전쟁으로 2천5백개에 달하는 유정 및 산유시설의 대부분이 파괴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이라크원유의 41%는 이번 경제봉쇄조치에 참가한 다국적군측 국가에 수출해왔기 때문에 앞으로 경제제재조치가 풀리지 않는한 산유시설 복구자금 마련 등이 어려운 형편이다. 이라크의 경우 국제유가를 배럴당 20달러로 잡을 때 연간 원유수출로 벌어들이는 돈은 2백40억달러에 이르고 있다. 이 돈을 전부 유전피해 복구에 쓴다해도 여러해가 걸릴 것이란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이라크의 이번 전쟁피해 규모는 총 2천억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때문에 원유판매 대금으로 모든 산업시설도 복구해야 하는 이라크로서는 산유시설의 정상화를 위해선 10년 이상이 걸릴 전망이다. 이들 두 국가의 원유량 감산분(하루 4백여만배럴)은 그동안 사우디를 비롯,아랍에미리트·베네수엘라 등의 산유국이 보충해왔다. 사우디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후인 지난해 9월부터 하루 산유량을 8백50만 배럴로 늘려왔다. 이는 종전보다 무려 70%를 늘린 규모이다. 또한 다른 산유국들 역시 산유량을 크게 늘려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 이전인 지난해 7월보다 세계시장에서의 하루공급량은 전쟁시작전보다 오히려 1백50만 배럴이 증가한 2천3백만 배럴을 기록했다. 이 때문에 국제유가는 당초 전쟁발발후 폭등하리란 예상을 깨고 현재 지난해 7월의 배럴당 21달러 수준보다 5달러가 낮은 16달러 선을 유지하고 있다. 쿠웨이트와 이라크이 공급중단에도 불구,원유공급량이 넘치고 있는 실정이다. 사우디를 비롯,OPEC(석유수출기구) 13개 회원국들은 종전후 원유수급조절을 위해 감산을 서두르고 있다. 사우디는 현행 산유량을 하루 2백만 배럴을 중인 6백50만 배럴로 안정시킬 것으로 알려졌다. 석유전문가들은 쿠웨이트와 이라크의 유전피해 복구에 필요한 최소한 5개월 동안은 세계산유량이 현수준인 하루 2천만 배럴을 유지,수급에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 폭행 미군 한국 법정서 재판/검찰,법무부에 품의

    【부산연합】 부산지검 동부지청 정만진검사는 지난 12일 폭력과 공무집행방해 등 혐의로 경찰에 입건된 미 하야리아부대 장산레이다기지 소속 캐빈 코플만 하사(29)와 더스틴 슬론 일병(20) 등 2명에 대해 국내재판 관할권을 행사키로 하고 2∼3일내로 부산지검을 통해 이같은 의견을 법무부에 품의키로 했다. 정검사는 『이들 미군이 공무와는 무관하게 한국 민간인을 폭행해 한국 측에 1차 재판권이 있고 폭력추방을 염원하는 사회분위기를 감안,수사권을 행사키로 했다』고 밝혔다.
  • 이라크 쌀값 인상/식량난 심각한 듯/아랍 3국 곧 개전 협의

    【바그다드ㆍ다마스쿠스 AFP 로이터 연합 특약】 이라크는 11일 곡물공급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면서 쌀값을 인상할 것이며 투기꾼에 대해 엄한 처벌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라크 관영 INA통신은 이런 결정이 후세인 대통령이 이라크에 대한 국제적인 금수조치로 인한 경제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주재한 자리에서 채택됐다고 보도했다. 이 통신은 이어 『국가기관을 통해 모든 곡물이 시장으로 나오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라크의 국방부 기관지인 알 콰디시야지는 11일 『이라크는 영광스런 대결을 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다른 지역 분쟁에 대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은 불완전한 해결책을 거절한다』고 밝혔다. 한편 시리아의 알 하야트지는 사우디ㆍ이집트ㆍ시리아의 정상들이 곧 카이로에서 회동하여 전쟁 발발시 사우디주둔 이집트 및 시리아군의 역할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 평양 총리회담… 해외의 반응

    ◎“한반도에 「화해의 바람」 불기 시작했다”/김일성 “노대통령” 호칭… 「변화」 반영 미/정상회담 가능성 보인건 큰 결실 일/남북한 45년 긴장상태 대화통한 해결 기대 중 ▷미국◁ 워싱턴 포스트지는 19일 『북한의 김일성이 노태우 대통령과의 회담에 조건부로 동의함으로써 남북한간 해빙속도가 빨라졌다』고 보도했다. 포스트지는 그러나 총리회담의 선결실을 강력히 요구한 김의 주장은 남북한 정상회담을 지연시키려는 기도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포스트지는 『앞으로의 총리회담은 양측의 상이한 제안들을 융합시켜 남북한의 두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서명할 수 있는 공동문서로 만드는데 초점이 모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포스트지는 『이번 총리회담은 불협화음이 강했지만 양측 관리들은 만족을 표시했으며 공동성명은 12월 3차회담의 실질적인 성과를 예견했다』고 보도하고 특히 한국관리들은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이 노대통령을 지칭할때 공식직함을 사용한 사실을 들어 이번 회담에 만족을 표명했다고 전했다. 뉴욕 타임스지는 『이번 회담에서 남북한이 긴장완화에 관한 합의 도달엔 실패했지만 앞으로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이유가 있었다』고 보도하고 김일성이 강영훈총리에 대해 총리 호칭을 사용한 것을 중요하게 평가했다. 타임스지는 북한대표들이 한국정부의 정통성에 회의를 나타내기 위해 쓰지 않았던 총리 호칭을 세계 최장 집권독재자인 김일성이 개인적 위신을 무릅쓰고 썼다는 것은 아주 의미가 크다고 분석하고 이에 대해 한국관리들은 김이 개인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진전의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타임스는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의 정상회담 제의에 대한 김의 반응은 모호했다고 전했다. ▷일본◁ 제2차 남북총리회담은 비록 구체적인 성과없이 끝났지만 북한 김일성주석이 사상 처음으로 남한의 총리와 만났다는 사실 및 남북수뇌회담에 기대를 표명했다는 것 자체가 이번 회담의 최대 성과라고 일본에서는 보고 있다. 도쿄(동경)신문은 19일자 조간 1면 톱기사에서 『한국과 북한의 최고지도자의 회담은 분단이래 45년간 한번도 실현된 일이 없다』고 지적하고 『김주석이 이번 처음으로 한국총리와 만나 「총리회담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올린다면」이라는 조건을 달기는 했으나 직접 수뇌회담 실현에 기대감을 표명한 것은 예가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이것은 남북관계개선을 위한 남북당국자간의 대화 뿐만 아니라 일ㆍ북한관계등 아시아정세 전반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니혼 게이자이(일본경제)신문도 『표면상으로는 큰 진전은 없었으나 회담전망이 밝다는 것을 나타냈다』고 평가했다. 또 이번 회담에서 실질적으로 상호의 정권과 체제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높았다는 것도 전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김주석이 노태우 대통령과의 수뇌회담 개최에 의욕을 표명한 것은 총리회담에서 한국측의 양보를 강요하는 작전에 지나지 않는다는 냉정한 판단도 한국내에서 나오고 있다고 이 신문은 지적했다. 마이니치(매일)신문은 『김주석이 남북수뇌회담에 강한 의욕을 나타냈다는 사실은 앞으로의 한반도 긴장완화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하고 『이것은 국제적 고립화의 가운데 경제상태가 극히 악화되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김정일서기에게 안정된 상태에서 권력을 세습시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분석했다. 아사히(조일)신문 역시 북한의 유연성을 평가,오는 12월 제3차 서울회담에서 어떤 성과가 나올지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하면서 틈이 없지는 않으나 일단은 진전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했다. 학자들도 이번 회담의 성과를 대체적으로 「성공」이라고 평가했다. 게이오(경응)대학 오코노기 마사오(소차목정부)교수는 『한반도를 둘러싼 새로운 환경은 북한측도 의식하고 있다. 이번 회담에서 북한측이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는 견해도 있는데 이것은 북한측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회담에서의 북한측 「불가침선언」과 남한측 「남북 화해선언」은 그 내용이 비슷하며 상대방에 주도권을 주지 않으려는 것 뿐이다. 이 회담은 쌍방의 주장에 관한 도식을 부각시켰으며 중요한 제3차 회담에의 발판을 구축했다는점에서 성공적이었다』고 밝혔다. 규슈(구주)국제대 하야시 가즈노부(임일신)교수도 『이번 회담의 최대의 성과는 제3차 회담개최의 발판이 된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회담의 과정중에서도 재확인 되었지만 「2개의 조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북한측의 기본적 자세는 변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그것은 「남」으로부터의 여러계층의 대표단을 맞아들이는 대응의 차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홍콩◁ 홍콩언론들은 대부분 강영훈총리와 김일성주석이 악수를 하는 사진과 함께 남북한 총리회담 내용을 19일자 외신면 머리기사 등으로 비중있게 다뤘다. 친중국계 대공보는 평양발 신화사통신을 인용,김주석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처음으로 「대통령」이란 호칭을 사용한 점과 남북한 정상회담을 빠른 시일안에 갖자고 제의한 것 등을 강조했다. 성도일보는 강총리와 김주석의 만남이 남북상호간 우호관계의 시작인 것으로 풀이할 수 있으나 통일상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보다 깊은 상호이해가 병행돼야 할 것이라고 논평했다.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지의 경우 남북한 총리 2차회담에 관한 기사와 함께 한중 무역사무소 개설협약이 서울ㆍ평양의 잦은 대화를 뒷받침하는데 한 몫을 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오는 24일 중국측은 평양에 대표단을 보내 무역사무소개설에 따른 한중 관계밀착의 불가피성을 상세히 밝힐 것이라고 보도했다. 신만보는 비록 남북한이 40년이란 긴세월동안 정치군사면에서 대치해오긴 했지만 최근 양측 축구팀의 친선교환경기ㆍ통일음악회 등 일련의 우호적인 비정치적 행사가 이뤄지고 있는데다 점차 커지고 있는 한반도주민들의 통일열망과 주변 국제정세의 변화가 대치상태의 종식을 앞당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신문은 또 한반도통일이 아시아전체의 평화적인 분위기를 촉진시켜 이 지역 공동발전에도 적잖은 기여를 하게 될 것임을 강조했다. ▷중국◁ 중국관영 북경방송은 18일 평양에서 열린 제2차 남북고위급회담 1차회의(17일) 소식을 하루늦게 논평없이 보도했다. 이날 북경방송은 제2차 남북고위급회담 1차회의가 17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렸다고 전하면서 이 회의에서 북한총리 연형묵이 기조연설을 통해 「불가침선언」 초안을 내놓았으며 ▲쌍방간 유엔문제 합의도출이전 유엔 단독가입 반대 ▲팀스피리트훈련 중지 ▲방북인사석방 등을 주장했으며 이에 대해 한국의 강영훈총리는 『남북이 서로 상대측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쌍방간 관계를 개선하고 관계정상화를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산가족의 상호방문 ▲체신ㆍ경제분야에서의 협조 및 교류 등을 제의했다고 보도,남북총리의 기조연설내용을 똑같이 상세히 소개했다. 이 방송은 이어 쌍방간 18일 상오 비공개로 2차회의를 진행했다고 덧붙였다.
  • 동북아 새 질서 태동 진단(서울신문 광복45주년 특집)

    ◎한반도에도 데탕트 기류 가속화/하야시 다케히코 일본 동해대교수/「4강 역학」 어떻게 변화될까/평화공존 10여년 거쳐 통일정부 수립 가능성/GNP 1만불 육박땐 「5극체제」 출현 예상 지금 세계는 동·서 이데올로기 대립의 시대를 지양,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시대로 이행하려 하고 있다. 런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담에서의 선언과 미 휴스턴의 선진 7개국(G7)정상회담의 선언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및 그것과 표리일체를 이루는 공산주의의 좌절선언에 지나지 않았다(프랜시스후쿠야마 「세계를 말한다」 산경신문 7월31일). 38도선의 북쪽에 「아웃 사이더 국가」 즉 북한이 존재하고 있는 한반도도 그같은 세계변화의 큰 격랑속에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아웃 사이더 국가를 포기한다는 것은,대외적으로는 국제사회의 룰을 받아들이는 국가로 되는 것이며,대내적으로는 「남반부 해방에 의한 통일」이라는 혁명노선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다. 이상 세계정치의 본류를 우선 확인한 연후에 10년후 21세기초의 동북아시아 정세를 전망할 경우,가장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시점에서의 남북 분단의 극복 상황이다. 거기에는 3가지 케이스를 상정해 볼 수 있다. 제1은 북한이 언젠가는 닥쳐올 김일성주석의 죽음을 계기로 분단의 현상을 받아들여 평양정권의 존속을 꾀하기 위해 남북한 교차승인과 공존체제를 인정하고 그 결과로써 「1민족 2정부」의 상태가 도입되어 꽤 장기에 걸쳐 지속하는 케이스이다. 제2는 노태우대통령의 「한민족공동체통일안」에 따라 과도적으로는 남북 국가연합의 단계를 거쳐 통일국가의 형성을 지향하는 경우이다. 제3은 과도적 단계를 생략,동·서독일처럼 통일총선거를 선행시켜 일거에 통일정부를 발족시키려 하는 경우이다. 제1의 케이스는 72년 12월 국가간의 기본조약을 맺고 「1민족 2국가」의 체제를 작년 11월의 베를린장벽 붕괴로 연결시킨 동·서독일형의 전철을 밟게 되는 것이다. 동서독일형은 3월 실시된 동독의 총선거에서 대부분의 예상을 깨고 동독시민이 과도적인 국가연합단계를 생략,「독일의 재통일」을 희구하는 중도우파연합을 압도적으로 지지한결과였다. 다시 한번 3가지 경우를 앞으로 예상되는 10년간의 한반도의 내외 정세추이에 맞춰볼 때 남북한도 다시 동서독 같이 남북공존체제의 제1의 케이스를 거친 뒤 점차 실현성을 갖게 되는 통일에 대한 남북시민의 실현의지의 강도가 동서독같이 「국가연합」의 단계를 생략시켜 제3의 케이스를 지향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여진다. 남북 공존체제를 통해 북한의 주민·민중들이 곧 알게되는 것은 남북 양체제의 우열이다. 그 우열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가속화하는 세계의 흐름에 합치하는 것으로써 북한민중들도 동독시민들이 베를린의 벽을 「시대의 흐름」으로 붕괴시켰던 것처럼 군사분계선을 무너뜨리기 위해 움직이는 것은 자연의 추세일 것이다. 여기서 좀더 대담한 예측을 해 본다면 앞으로 10년을 거쳐 21세기의 초장을 맞는 한반도에는 수도를 서울로 하는 통일국가,통일정부를 수립해 문자 그대로 선진국에 들어서려는 국가가 출현할 것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즉 인구 7천만,국민 1인당 GNP 1만달러에 육박하는 국가의 출현이다. 인구 7천만이라고 한다면 정말로 재통일을 이루려는 90년대 초의 동서독인구 7천7백만명에 필적하는 것이며 인구 규모로서는 선진 7개국중의 프랑스 이탈리아(양쪽 5천만명대)를 능가한다. 90년 현재 한국의 국민 1인당 GNP는 5천달러,북한은 1천달러(추정) 수준이다. 한국의 경우 연간 7.2%의 성장률을 10년간 계속 확보한다면 1만달러 수준의 달성은 가능하다. 남북 공존체제는 북한경제의 개방체제를 더욱 촉진시켜 한국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남북 경제교류기금 2천∼3천억원의 운용과 북한합영법에 의한 남북 경제교류의 신장과 확대로 결국 남북통일에 앞서 북한경제의 한국형 경제에로의 수렴을 불가피하게 한다. 남북통일의 상징은 한국의 현대그룹이 계획하고 있는 시베리아의 천연가스 수송을 위한 파이프 라인이다. 야크츠크로부터 하바로프스크 블라디보스토크,나아가 평양을 거쳐 서울·부산까지 이어지는 4천㎞의 에너지 동맥이야말로 남북을 직결시키는 원동력이다. 파이프 라인 부설이 가져오는 주변의 경제개발이라는 파급효과도 시베리아·남북한을 통해 막대하다. 세계적 명산 금강산의 본격적인 관광개발사업도 남북 공동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며,그 공동사업이 초래하는 남북일체감 조성의 효과도 간과할 수 없다. 나아가 한국·일본·소련 사이에 최근들어 각광을 받기 시작한 「일본해=동해신시대」(조일신문 7월6∼14일 연재)는 남북공존시대의 시작과 더불어 북한이 참가하고 북한경유 「일본해=동해」를 연결하는 중국 동북부가 참여하게 됨으로써 21세기와 함께 동북아시아에 성립하게 되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경제적 측면을 대표하는 신경제권으로 될 것은 확실하다. 인구 7천만,국민 1인당소득 1만달러국가의 출현은 경제적으로는 중·소를 압도하는 경제국가의 출현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 기존의 미·소·중·일의 주변 4대국에 남북통일 한국을 첨가시켜 동북아시아에 5대국에 의한 오극구조시대가 대두한다는 것과 직결된다. 오극구조를 갖는 국제관계에 있어서 세력균형의 이상적 체제와 위치를 부여한 것은 키신저박사(전미국무장관)의 연구성과였다. 물론 21세기 초엽 동북아시아지역에 통일한국을 축으로 오극구조가 성립된다는 것은 현단계에서 거대한 가설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무조건 오극체제의 성립을 보증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극의 한귀퉁이를 중·소가 각각 맡기 위해서는 중·소 자신이 더욱 개방체제를 추진하는 가운데 국가적 안정과 발전을 꾀해야 한다. 이 지역에 역사적으로도 가장 활발한 이해관계를 갖는 중·소 양국의 안정적 발전없이는 동북아시아의 오극체제는 그림의 떡이다. 이것은 남북 통일국가의 출현없이는 있을 수 없는 신국제질서이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은 남북을 통한 한민족의 역량이며 영지이다. 제2차 세계대전후 45년,세계 격변의 시점에서 정말로 타의에 의하지 않는 민족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통일국가 실현의 지평을 여는 것이야말로 주변 4대국의 전면적인 협조와 협력체제를 가능케 하는 것이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동북아시아의 오극체제에 의한 안정적 신질서의 도래는 모든 것이 그 한가지 사실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윤병익 통일연수원 교수/「통일시나리오」를 엮어보면…/체제공존→동질성 회복→총선이 합리적 수순/「4강 지렛대」로 북녘 개방 적극 유도 바람직 해방 45돌을 맞았다. 우리의 민족해방은 국제정치적 희생물로서 강요된 45년의 민족분단사로 이어져 우리 민족은 남북한체제의 갈등 속에서 끝없는 고통과 국가발전의 제약을 강요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광복절은 국제적으로는 동·서 체제간의 긴장완화 추세,공산권전반의 개혁·개방정책,목전에 이른 독일통일,그리고 민족 내부적으로는 변화된 국제정세의 파장을 한반도에로 끌어들이려는 양국및 국민의 노력이 상승작용을 하여 통일을 앞당기려는 민족의 열망으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의 통일」은 어떻게 이루어 질 것인가,또 「국제정세와 남북한 체제발전추세의 맥락에서 한반도 평화통일의 예상모형을 어떻게 상정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은 민족통일운동의 방향모색을 위해서도,민족의 발전과 번영을 보장할 수 있는 올바른 통일실현을 위해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분단국문제의 해결방안을 생각해 본다면 분단쌍방체제간의 평화공존,교류·협력관계의 정착화를 통한 민족동질성의 회복 그리고 총선거를 통하여 국민이 선택하는 통일국가의 수립만이 합리적이며 현실적인 통일방안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 합리적이며 현실적인 통일방안을 북한당국이 체제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한사코 거부함으로써 한반도 통일문제 해결의 어려움이 있다. 북한당국은 통일로 가는 불가피한 과정인 남북한체제의 상호개방을 「사회주의 지상낙원」이란 북한통치명분을 위협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이른바 「조선노동당시대의 기념비적 건조물」로 꾸며진 평양은 개방할 수는 있으나 「미제의 식민지」아니면 「거지소굴」로 선전되어 온 「남조선」을 북한주민에게 개방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당국은 서독체제로 흡수·통합되는 독일통일 과정에서 남북한 체제개방의 결과를 예견하고 전율하고 있을 것이다. 북한은 이른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내세우면서 『남북의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그대로 두고연방제로 최종의 통일정부를 수립하자』고 내세우고 있지만 이것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간의 연방구성안이 아니며,「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이란 「선남조선혁명,후통일」전략의 일환이다. 따라서 진정한 통일방안이라기보다 전 한반도의 공산화 방안임이 분명하다. 남북한 체제공존을 북한체제 전복의 한 과정으로 생각하고 있는 북한당국으로서는 「연방제 통일」의 주장과 함께 대남통일전선전술을 구사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체제수렴론」이 한반도의 통일방안으로 수용되지 않고 있는 현상황하에서는 결국 국민에 의한 「체제선택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북한은 공산권 전반의 개혁·개방정책을 「사회주의 초급단계론」 「인간적인 민주적 사회주의」 등으로 위장을 하고 있으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체제적 한계성을 자인한 것임에 틀림없으며,따라서 우리는 아집이 아닌 인류문명사적 시각에서 민족통일을 위한 북한체제의 변화를 당당히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자유와 안정과 행복을 보장하는 통일국가의 수립을 표방하고 있으며 우리는 비록 마지막이 될지언정 공산권의 개혁·개방의 물결이 북한에도 와 닿을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숙청으로 점철된 북한정치사 속에서 반김일성·김정일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었을 뿐만 아니라,이른바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투쟁사」와 「주체사상」으로 세뇌된 신정체제하에서 조직적인 저항세력도 거의 전무하기 때문에 루마니아에서와 같은 인민봉기에 의한 체제변화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북한의 변화는 「위로부터의 변화」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북한당국은 남북한 경제발전의 격차를 의식한 나머지 1984년 합영법을 제정하여 대외개방경제정책을 제한적으로 시도하고,「경공업혁명」을 추진할 뿐만 아니라 비록 대남전략적 의도가 강할망정 종교활동을 선전하는등 제한적인 변화의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산권 전반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내경제체제와 정치체제의 개혁을 완강히 거부하면서 오히려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표방,체제수호를 위하여 역사의 흐름을 거역하고 있다. 따라서 민족통일을 위한 당면과업은 공산권 전반의 개혁개방의 물결을 어떻게 북한체제에 불어넣느냐의 문제로 압축된다. 우선 국제정치적 영향력을 활용하는 방법이 시도되고 있다. 미소등 한반도 주변강대국은 동·서 냉전체제의 마지막 유산인 한반도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남북대화를 강력히 종용하고 있으며 특히 미국은 북경 등지에서의 접촉과정을 통해 미국과 북한만의 평화협정 체결을 고집하는 북한에 분명히 거부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한국과의 경제교류·협력을 강력히 바라고 있는 소련은 남북한 평화공존관계를 위한 「두개의 한국정책」 추진을 위해 「김일성의 항일빨치산투쟁」의 허구성과 김일성·스탈린의 「한국전쟁」 유발책임을 폭로하고,한소수교를 가시화시킴으로써 대남혁명전략에 따라 「하나의 조선정책」을 고집하는 김일성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소수교는 궁색한 「정경분리원칙」을 고수하지 않을 수 없는 중국의 대한반도정책에도 정책선택의진폭을 넓혀주고 있다. 이런 배경때문에라도 북한은 「남북 고위급회담」등 남북대화의 마당에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체제공존을 지향하는 남북대화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대화의 자리에 나온다 하더라도 대남전략적 발상의 주한미군 철수,군축,한반도의 비핵·중립화 등 상투적인 군사문제 선결입장을 계속 제기하면서 당국,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를 통한 「고려연방제통일방안」의 관철을 주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한반도 상황은 남북한의 체제공존을 지향하면서 민족통일로 접근하려는 우리의 통일정책과 「남조선」의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을 지향하는 북한통일정책의 막판 승부의 장으로 급히 줄달음치고 있는 형국이다. 긴장완화와 공산권 전반의 개혁·개방정책으로 기울어진 인류문명사의 대세와 신정체제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북한체제간의 간격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또 북한체제가 고립화되면 될수록 북한당국은 더욱더 「남조선」 민중과의 「통일전선」 형성에서 탈출구를 찾으려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민족의 통일은 「남조선 혁명」 전략에 따른 북한의 대남 제의를 우리가 능동적으로 수용하여 오히려 북한사회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시점이 언제냐에 따라 가까워질 수도 있고 늦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 미 군속명의 오락실 수사/내국인상대 불법영업… 넷 입건

    【부산】 부산진경찰서는 5일 부산시 부산진구 부전2동 556 엔젤호텔 오락실대표 로버트 알티하리씨(44)와 부산진구 연지동 4035 하야리아 오락실대표 존슨 나니씨(56) 등 4개 오락실의 대표로 돼있는 주한미군부대 미국인군속 4명을 공중위생법 위반혐의로 불구속입건했다. 경찰은 또 자금을 대고 이들 오락실을 실질적으로 운영해온 엔젤호텔 오락실 관리인 오상수씨(34ㆍ부산시 중구 대창동2가 13) 등 내국인 2명을 같은 혐의로 입건하고 한모씨(40) 등 내국인 20명을 수배하는 한편,이들 4개 오락실의 오락기 1백20대를 증거물로 압수키로 했다. 경찰에 따르면 엔젤호텔 오락실의 경우 수배중인 한씨 등 4∼5명이 지난달 7일 5천만원에 현위치의 기존 성인오락실을 인수한후 주한미군부대 군속인 로버트 알티하리씨 명의로 미국재향군인회로부터 유기장영업면허를 얻어 슬롯머신 40대를 설치,주로 내국인을 상대로 불법영업을 해 지금까지 하루평균 1천8백여만원의 부당이득을 올려왔다는 것이다. 또 하야리아오락실의 경우도 수배중인 김모씨(40) 등 10여명이지난해 7월부터 자금을 대고 주한미군부대 미국인군속 존슨 나니씨 명의로 미국재향군인회로부터 유기장영업면허를 얻어 슬롯머신 30대를 설치,주로 내국인을 상대로 불법영업을 해왔다.
  • 방한 브루나이공주 일행/호텔 호화객실 40개 사용(조약돌)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가운데 하나인 동남아시아 브루나이의 텐지란 아낙 이스테리 텐지란 노르하야티공주(33)가 친구ㆍ경호원 등 일행 40명과 함께 1일 하오10시35분 전세기인 루프트한자 6386편으로 세계일주의 첫 방문국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경호원 7명을 대동하고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각국에 퍼져있는 친구 30명ㆍ왕족 3명 등과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공항에서 합류해 우리나라에 온 노르하야티공주는 2일부터 용인민속촌과 서울 롯데월드 등에서 관광과 쇼핑을 하고 전방ㆍ산업시찰을 한뒤 오는 5일 다음 방문지인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떠난다. 그녀는 브루나이대사관측에서 예약해둔 하루 숙박비 3백여만원에 1백40평짜리 서울 롯데호텔 로열스위트룸에 머물 예정. 친구와 수행원들도 이 호텔 28,29,33층 등 모두 40개방을 독방으로 사용.
  • “지자제·보안법 개정 적극수용”

    ◎국민·야 반대하면 내각제 개헌 않겠다/김영삼대표 회견 【부산=김경홍기자】 민자당의 김영삼대표최고위원은 21일 『야당과 국민이 반대하는 한 내각제개헌은 하지 않겠다』고 거듭 밝히고 『현재 당내에는 내각제개헌이 제안된 적도 없고 제안 움직임도 없다』며 13대 국회임기중에 내각제개헌이 추진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김대표최고위원은 이날 상오 부산 하야트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이같이 밝히고 『노태우대통령과 만나서도 국민과 야당이 반대하는 내각제개헌은 하지 않겠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고 이같은 생각은 김종필·박태준최고위원도 마찬가지 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대표최고위원은 지자제및 국가보안법 개정문제와 관련,『김대중 평민당총재와 만나거나 여야 협상기구를 만들 것을 거듭 제의한다』면서 『지자제에 있어서 정당공천제 도입여부등 모든 것을 선입견 없이 협상 테이블에서 다루겠다』며 대야협상에서 융통성을 보일 것임을 강조했다. 김대표최고위원은 또 『국가보안법·안기부법을 9월 정기국회에서 전향적으로개정하겠다』고 밝히고 『노대통령의 20일 대북제의는 세계사적 평화와 화해조류에 부응하는 획기적인 조치』라고 평가했다. 김대표최고위원은 이날 평민당의 보라매공원 집회등 장외투쟁에 대해 『의원직사퇴및 조기총선 주장은 헌정을 중단시키고 정국 파탄을 가져올 수 있는 무책임한 발상』이라고 비난하고 『따라서 야권은 사회혼란과 국민적 불안을 가중시킬 이같은 당리당략적 움직임을 즉각 철회하고 장외정치 역시 신중히 재고하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김대표최고위원은 임수경양등 북한에 갔다와 구속된 사람들의 석방을 노대통령에게 건의할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에 『국민화합적 차원에서 모든 가능한 일이라면 검토하겠다』고 말했다.〈관련기사2·3면〉
  • 윤보선 전대통령 영전에/이상돈 제헌ㆍ5ㆍ6대 의원

    ◎해위,그 민주의 발자취를 기리며… 해위선생. 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뜻밖의 부음을 듣고 만감이 교차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해위선생은 저와 동향이고 또 8ㆍ15 해방이후 같은 정당에서 모셨던 인연을 돌이켜 보면 새삼 그리운 마음과 함께 슬픔 또한 가눌길 없습니다. 비록 해위선생께서 93세라는 천수를 누리셨다지만 좀더 사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해위선생께서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개인으로서는 안일한 생활을 하실 처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식민지 통치하에서는 민족과 겨레의 해방을 위하여 해외 임시정부에 몸을 담는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하셨습니다. 8ㆍ15 해방후에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공산당과 싸우는 유일한 민족정당인 한국민주당의 발기인이 되셔서 당의 중책도 맡으셨지요. 또 이승만박사가 귀국하자 이박사를 모시고 해방후의 혼란한 정국에 물심양면으로 헌신하셨습니다. 정부수립후에는 이대통령의 명에 따라 상공부장관과 서울특별시장의 중책도 탁월한 능력으로 수행하셨습니다. 제3대 국회에서 서울종로구에서 당선되어 의정생활을 하는 동안 이대통령이 독재를 강화하자 지난달 이대통령과의 관계를 과감히 끊고 유일야당인 민주당에서 반독재투쟁에 앞장섰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사적으로는 이박사와 친했지만 공적 입장에서는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꿋꿋한 의지를 보이셨지요. 마침내 선생의 염원대로 자유당 독재정권이 붕괴되고 내각책임제하의 대통령으로 당선됐지만 불과 9개월이 못된 시점에서 박정희육군소장의 군사쿠데타로 매우 곤란한 처지에 서게 되셨습니다. 내각제하의 대통령이 비록 상징적인 존재였지만 일부 군인들의 헌법을 파괴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하는 태도가 마땅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선생께서는 국내의 혼란과 국군끼리의 충돌,공산집단의 무모한 행동을 우려하셔서 우유부단한 행동을 취하신 것으로 이해됩니다만 저 자신도 그 당시는 해위선생께서 단호히 군사혁명을 반대하고 나섰으면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해위선생께서는 마침내 일부 정치군인들의 행동에 회의를 느끼고 결코 타의나 압력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의신념에 따라 대통령직을 버리고 하야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모든 악조건을 무릅쓰고 민정당을 창당하는등 오로지 군정종식의 일념으로 싸우셨습니다. 5공화국 탄생이후에 해위선생은 박정희군사정권에 대한 냉혹했던 태도와 달리 중도적 입장에서 여생을 보내고자 했습니다. 국내정치가 또다시 정쟁에 휘말리기 보다는 안정을 희구했고 선생 또한 노령이었던 때문으로 이해됩니다. 같이 반독재투쟁 대열에 동참했던 후배로서 지금 고인이 되신 선생의 족적을 되돌아보니 일제시대와 해방후의 우리 정치와 민족사에 남기신 공적이 새삼 그리워집니다. 국회에서,또는 거리에서 반독재를 소리높여 외치시던 선생의 모습을 회고하니 비록 천수를 누리셨다고는 하나 추모의 염은 금할 길이 없습니다. 해위선생,명복을 삼가 빕니다.
  • 윤보선 전대통령 별세/어제 하오

    ◎지병 악화로 퇴원 직후… 향년 93세 해위 윤보선 전대통령이 18일 하오 8시50분쯤 서울 종로구 안국동 8 자택에서 9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윤 전대통령은 그동안 지병인 당뇨병으로 고생해오다 노환으로 인한 급성심근경색증세까지 겹쳐 지난 3월30일 서울대병원에 입원,치료를 받아왔으나 이날 하오부터 갑자기 혈압이 떨어지며 증세가 악화돼 하오 8시쯤 퇴원,자택으로 옮겨진 직후 곧바로 운명했다. ◎정부와 장례 협의 유족들은 장례절차에 대해 장지는 충남 아산으로 하며 가족장으로 5일장을 치르되 22일이 일요일인 점을 감안,월요일인 23일 상오 9시 고인이 다니던 안동교회에서 영결예배를 치르기로 희망하고 있으나 구체적인 장례절차는 총무처와 협의를 거쳐 19일 확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해위는 1897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영국 에든버러대를 졸업했다. 일제치하에서는 중국 상해의 대한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고 해방직후에는 미 군정청농상국 고문을 거쳐 정부수립이 되면서 초대 서울시장이 되었고 이어 상공부장관으로 영전됐다.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야당에 몸담은 그는 54년 3대민의원선거에서 종로갑구에서 출마,원내에 진출한 이래 4,5대때 잇따라 당선됐으며 6대때는 전국구로 진출했다. 60년 4ㆍ19이후 의원내각제의 민주당 정권출범과 함께 제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5ㆍ16군사혁명으로 이듬해 하야했다. 63년 5대 대통령선거에 민정당 대통령후보로 출마,박정희후보와 싸웠으나 고배를 마셨고 67년 6대 대통령선거때 신민당 후보로 다시 박후보와 한판승부를 겨뤘으나 패했다. 70년대에 들어서는 정치 2선으로 물러났으나 유신체제하에서는 재야의 중심인물로 반정부활동을 적극 펴기도 했다.
  • 5ㆍ16­유신등 헌정 굴곡 한몸에/윤보선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

    ◎군사혁명에 “올 것 왔다” 이듬해 퇴진/대권경쟁 2번 실패… 반 박정희 투쟁 93세의 일기로 타계한 해위 윤보선. 그는 고집의 거목정치인이었다. 그의 일대기는 40년 헌정사의 점철된 굴곡을 그대로 투영해 주고 있다. 이 나라 최후의 구 정치인 1세대의 보루를 지켜온 그는 해방후 손꼽히는 과묵한 선비형 정치가로 입신하다가 조병옥박사를 잃어버린 민주당구파가 그를 보스로 추대하면서부터 무섭도록 고집센 지도자가 되었다. 4ㆍ19혁명후 민주당정권시절 실권은 없지만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지위에 오른 그는 5ㆍ16군사혁명을 만나 고독한 몸부림으로 대처하다가 박정희씨와 두차례나 대권경쟁을 벌여 패했고 만년에 이르러서는 반독재의 강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1961년 5월16일 상오 9시30분 윤대통령은 혁명군지도자 박정희장군과 첫 대좌를 하게되자 그 유명한 『올것이 왔구나』하는 탄식을 지었다. 훗날 해위는 이 대목과 관련,군사쿠데타가 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온다고 걱정하던 일이 마침내 현실로 나타났구나』하는 탄식조의 말이었다고 해명했다. 그의 생애중 가장 긴 날은 5ㆍ16 새벽부터 17일 밤까지 40여시간이었다. 윤대통령은 매그루더 미8군사령관의 쿠데타군 진압작전의 승인요청에 『적이 집결하고 있는 휴전선을 눈앞에 두고 아군끼리 피를 흘릴 수는 없다』며 거절한 것은 유명한 얘기다. 그는 1897년 8월26일 충남 아산군 음봉면 신정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매우 부유했으며 그의 조부는 육군부장으로서 삼남도포사를 지내는등 무골의 집안이었다. 그는 조부를 따라 서울로 와 소학교를 마친 후 17살때 일본으로 건너가 현 경응대학 전신 중학부에 들어갔다. 20살때 몽양 여운형을 따라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의 실황을 알리는 진단보를 주보로 발간하기도 했다. 22살때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대로 유학을 가 3년동안 공부를 하면서 영국과 영국국민성을 배웠다. 그는 언제나 단추 3개가 달린 전통적인 영국식 신사복을 착용하기를 즐겨했는데 이같은 격식도 이때 몸에 익힌 것이라고 한다. 에든버러대를 졸업한 후에도 수년간을 유럽대륙등을 여행하며 세계정세를 살펴본 뒤 35살되던 해인 1932년 여름 16년만에 고국에 돌아왔으며 이때부터 침묵의 칩거생활을 시작했다. 1945년 8ㆍ15해방이 되자 아놀드소장이 군정장관으로 있는 미군정청 농상국고문으로 일했다. 48년 제헌국회의 5ㆍ10선거에 고향인 아산에서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고 이승만박사가 국회의 초대의장으로 당선되자 국회의장 비서실장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정부수립이 되고 이승만대통령이 조각을 하면서 서울시장에 그를 임명했는데 이는 그에 대한 이대통령의 각별한 신뢰감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일찍이 19세때 치렀던 민씨와의 혼인은 처음부터 결합이 되지 않았고 민씨에게 딸들이 있었으나 모두 출가시켰기 때문에 서울시장이 된 그로서는 매우 외로웠다. 그는 주위의 권유에 따라 지금의 공덕귀여사(당시 한국여자신학교 교수)와 연분을 맺었다. 서울시장을 6개월여 맡은 그는 다시 임영신장관 후임으로 상공장관으로 전임된다. 6ㆍ25동란중 국민방위군사건이 터지자 당시 대한적십자사 총재였던 그는 이대통령에게 그가 본 처참한 정경을 보고했으나 이대통령은 귀담아 듣지 않고 오히려 역정을 내자 이때부터 이박사와는 인연을 끊고 야당운동에 적극 나섰다. 그는 부산 정치파동을 계기로 야당인 민국당(한민당 후신)에 몸을 담고 54년 5월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 입후보하였다. 그는 종로갑구에서 박순천ㆍ주휘한ㆍ장후영ㆍ유석현씨 등 쟁쟁한 인물과 한판 승부를 겨뤄 윤씨이외의 12명 입후보자들의 득표수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표를 얻어 압승했다. 56년 5월 정ㆍ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이자 대통령후보였던 신익희씨가 급서하자 민주당은 당을 개편,조병옥박사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했고 이때 윤보선씨는 당내 구파이면서도 신파의 지지를 얻어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59년 가을 다음해에 있을 정ㆍ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은 후보자지명을 위한 전당대회를 개최,대통령후보에 조병옥박사,부통령후보와 대표최고위원에 장면박사를 선출했고 해위는 신파의 곽상훈ㆍ박순천씨와 함께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그는 구파보스인 조병옥박사가 대통령선거 한달을 앞두고타계하자 조박사의 정치적 유산을 이어받으면서 지금까지의 「과묵한 영국신사」에서 「행동하는 투사」로 변신하게 된다. 4ㆍ19학생의거와 이승만정권의 몰락으로 4대 민의원선거에서 민주당은 압승을 했고 신ㆍ구파간의 불꽃튀는 협상끝에 그는 60년 8월12일 민ㆍ참의원 양원합동회의에서 제2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국무총리지명을 하면서 신파의 장면씨 대신에 자신과 같은 구파이 김도연씨를 지명했으나 신파의 벌떼같은 반발로 과반수에서 3표미달로 인준안이 부결되자 하는 수 없이 2차에 장면씨를 지명했다. 그는 5ㆍ16군사혁명 사흘뒤 대통령직 사임을 결심,하야성명까지 발표했으나 이를 번의,이듬해 물러났다. 그는 63년 10월 5대 대통령선거에 민정당후보로 공화당의 박정희후보와 맞서 15만여표로 고배를 마셨으나 스스로를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면서 박정권과의 극한대결에 앞장섰다. 박정권이 65년 타결한 한일협정을 매국이라고 단정,흡사 「아파치족의 추장」처럼 싸웠고 같은해 한일협정 준비파동이 절정에 달할 무렵 의원직 사퇴에 미온적인 민중당 온건파와 손을 끊고 탈당,의원직을 사퇴했다. 67년 4월 6대 대통령선거에서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다시 박정희후보와 숙명의 대결을 벌였으나 1백10여만표차로 패배했다. 그후 그는 정치2선으로 물러났으며 박정권의 유신체제아래서 재야의 거두로서 박정권의 비정을 공격했다. 10ㆍ26으로 박정권이 붕괴되고 5공화국이 출범하자 그는 전직대통령의 위치에서 전두환대통령에게 이따금 조언을 하는등 박정권때와는 다른 우호적 태도를 보였고 노태우대통령의 6공정부에 대해서도 같은 자세를 취해왔다. 해위,그는 60년대 한국정치사에서 대여 극한투쟁의 화신이었다. 굳은 신념에 불퇴전의 강경노선을 견지한 그는 박정권과의 투쟁 당시 이렇게 말했다. 『정책대결이 정당정치의 원형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나 우리네와 같은 군사독재와 부정부패와 정보정치아래서는 무기력한 대안제시와 무원칙한 타협을 앞세워서야 야당의 사명이 말살되고 만다』 그는 훗날 또 이렇게 말했다. 『싸우는 게 최선이 아니고 싸우는 게 유일한방법일 때 싸워야 한다,정권을 무너뜨리는 게 민주투쟁은 아니다』
  • 필리핀 지진 사망 5백여명/학생등 1만여명 부상

    ◎건물더미에 1천명 매몰 추정/아키노,국가 비상사태 선포 【마닐라 AP DPA AFP 연합】 미타 파르도 데 타베라 필리핀 사회복지장관은 17일 필리핀 루손섬 전역을 강타한 지진으로 사망자수가 5백명에 달했다고 확인하고 1만명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아키노 대통령은 이날 상오 누에바 에시하 지역의 피해정도를 시찰한뒤 일부지역에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또한 필리핀 정부는 이날 이번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수가 1천명으로 늘어날지도 모른다고 추정하면서 혈액ㆍ의약품ㆍ의류ㆍ식품ㆍ금전상의 지원을 요청했다. 타베라 장관은 이어 이번 지진에 따른 재산ㆍ기간시설피해도 광범위하다고 밝히고 특히 지진의 진앙부근에 위치한 누에바 에시하지역과 바기오시의 피해가 심하며 바기오시의 경우 건물 42채가 파괴됐다고 설명했다. 또한 바기오시에서 가장 심각한 피해를 본 건물은 테라스형 프론트가 1층 로비로 무너져내린 하야트 호텔로 피델 라모스 국방장관은 이 호텔에서만 50명이 숨진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관리들은 또 바기오시에서 1천명의 주민들이 건물더미에 갇혔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는데 인구 11만 9천명의 바기오 시민중 대부분은 12차례의 여진이 엄습했던 16일밤 집밖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또한 바기오시의 특급호텔인 네바다호텔도 지진으로 건물 중앙에 커다란 균열이 생겼으며 일부 공장들도 대파됐고 바기오대학의 건물이 무너져 내려 23명이 숨졌다고 DZWT 라디오방송이 전했다. 관리들은 바기오시이외에 피해가 심한 지역은 마닐라북부 1백60㎞지점의 다구판시와 누에바 에시하주라고 말하고 구조대원들이 16일밤 철야로 누에바 에시하주의 주도에서 붕괴된 6층짜리 학교건물더미를 수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코라손 아키노 필리핀대통령은 이날 마닐라북부 1백㎞지점의 카바나투안시를 방문,크리스천 칼리지 건물 붕괴현장의 구조작업을 시찰한 뒤,희생자의 유족들에게 금일봉을 주며 위로했다. 카바나투안시에서는 이날 상오 현재 35명이 사망하고 1백54명이 부상했다고 병원관계자들이 말했으나 호노라토 페레스시장은 붕괴된 크리스천 칼리지 건물더미에 아직 30명이 갇혀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방비 대학생 선교회/피해자 1명도 없어 한편 필리핀 마닐라시에 1천5백명의 대학생을 파견하고 있는 한국대학생선교회(CCC)는 17일 하오 현재 우리 대학생들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밝혔다.
  • 전직대통령 「회고록」 나온다/최규하ㆍ전두환 전 대통령,출판 계획

    ◎「12ㆍ12」ㆍ「6ㆍ29」 등 주요사건 규명 기대/올해중 집필마무리… 95년쯤 출간할듯/최/하산이후 본격작업… 2∼3년뒤 탈고예상/전 국내에서도 오래지 않아 전직대통령들의 회고록이 출판될 것으로 보인다. 10대 대통령을 지낸 최규하씨가 회고록의 집필을 마무리한 상태에 있다. 백담사에 은둔중인 전두환 전대통령도 회고록 집필을 위한 자료정리를 끝내고 구성작업에 들어갔다. 두 전직대통령의 측근들은 『최 전대통령의 경우 워낙 잘 챙기는 성품이어서 전혀 외부의 도움없이 집필을 하고 있고 전 전대통령 역시 과거의 일들을 대부분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 알맹이 있는 회고록이 될 것으로 안다』고 전하고 있다. 회고록 집필은 역사의 공백을 메우는 작업에 비유된다. 특히 국정의 핵에 있었던 전직대통령의 회고록은 한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있어 주요한 사료로 취급되고 있다. 두 전직대통령이 재임했던 기간은 한국현대사의 격랑기이고 그같은 성격 때문에라도 역사적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규명된 부분보다 오히려 많다. 우리 헌정사에는 모두 5명의 전직대통령이 있었지만 제대로 된 회고록은 아직 나와있지 않다. 고 이승만대통령은 권좌에서 물러나 상당기간 미국 하와이에서 체류했으나 기억력 감퇴와 건강사정등으로 회고록을 남기지 못했었다. 3∼4 공화국의 주역이었던 박정희 전대통령 역시 재임중 비명에 갔기 때문에 자신의 과거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불가능했다. 제2공화국 당시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 전대통령은 모일간지에 재임중에 있었던 일을 기록으로 남긴 바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구술을 다른 사람이 문장화했고 권좌에서 물러난 지 20년이 넘은 뒤에야 이루어져 본격적인 회고록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많다. 최규하 전대통령은 80년대 중반부터 회고록을 집필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교관 생활을 오래한 경험때문에 직접 작성한 메모를 비교적 풍부하게 갖고 있는 편이다. 최 전대통령의 한 측근은 『치밀한 성격때문에 한가지 사건을 다루는 데 어떤 것은 1년이 걸린 것도 있다』고 말했다. 전 전대통령은 얼마전 자신의 일대기를 그린 「황강에서 북악까지」를읽고 『너무 치켜세운 부분이 많다』고 측근에게 밝힌 바 있다. 작가 천금성씨가 80년 당시 「개혁주도세력」의 자료협조를 얻어 집필한 「황강에서…」는 전 전대통령의 출생부터 대통령이 되기까지를 엮은 책이다. 이 책은 당시 집권세력에 의해 「홍보물」로 이용돼 널리 보급됐으나 정작 전 전대통령 자신은 백담사에 은둔한 이후에야 읽었다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전 전대통령은 『내가 쓸 회고록에는 절대 나를 미화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면서 자신이 육군사관학교 입교때 정식 합격생이 아닌 합격자 후보로 붙었다가 입교한 사실을 예로 들면서 모든 것을 있었던 대로 기록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고 한다. 전 전대통령의 회고록 본격집필은 하산과 함께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7년의 재임기간중에 대통령으로서 남긴 메모와 공보비서실에서 작성하는 「통치사료」를 모두 연희동사저에 옮겨 놓은 바 있다.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그의 약속대로 「사심없이」 회고록이 집필된다면 5공기간의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여겨지고 있다. 전 전대통령은 풍부한 자료외에 수치에 매우 밝은 것으로 알려져 회고록에 거는 기대를 크게 하고 있다. 한 측근은 그의 기억력에 대해 『사단장시절에 30만원의 관공비 모두를 참모와 운전병에 이르기까지 20명이 넘는 부하들에게 나누어준 것으로 말하는 데 언젠가 개개인에게 준 액수를 말씀하시길래 합해 보니까 정확하게 30만원이었다』는 예를 들고 있다. 두 전직대통령의 회고록이 출판될 경우 국회의 5공 청문회와 광주청문회를 통해서도 밝혀지지 않았던 80년대의 주요사건들의 실체와 배경이 공개될 것으로 기대된다. 최 전대통령이 정승화당시 계엄사령관의 연행을 뒤늦게나마 추인하게 된 배경,5ㆍ17 계엄확대조치의 경위,광주 5ㆍ18 발발배경과 발포문제,최 전대통령의 하야문제 등은 두사람의 회고록에서 공동으로 다루어질 사안들이다. 이밖에도 전 전대통령의 회고록에서는 6ㆍ29선언의 주체,최초의 평화적 정권이양과정과 갈등 일해재단설립과 정치자금조성의 전말이 다시금 조명될 것으로 보인다. 전 전대통령은 지난해 12월 국회 5공및 광주합동청문회장에서 『이 자리에서 밝히지 못하는 사실들을 회고록에서 밝히겠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나라처럼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전직대통령의 회고록 출판경험이 없다시피한 나라에서는 회고록의 출판자체가 커다란 사건이 될 수 있다. 최 전대통령은 측근들에게 『집필은 올해안에 마무리 하더라도 출판은 95년쯤에 가능할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최 전대통령이 95년을 꼽고 있는 것은 국가기밀이 주내용이 되는 전직대통령의 회고록인 만큼 15년쯤은 지나야 한다는 계산에서다. 미국등에서는 통상 국가외교비밀등은 20년을 시한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 전대통령이 계산한 15년은 우연찮게도 형법에 규정된 공소시효만기와 일치한다. 이 기한이 지나면 회고록에서 어떤 새로운 사실을 공개하더라도 소추를 면할 수 있다. 전 전대통령의 경우 올 여름부터 본격 집필에 들어갈 경우 92∼93년쯤이면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측근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그 출판시기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전망하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이 공개될 경우 언제나 손해를 보게 되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만큼 여러가지 출판에 대한 견제를 받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전 전대통령의 회고록은 90년대 후반기에나 출판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보물급 「미인도」 일 반출 기도/검찰,화랑대표등 넷 구속

    ◎경찰의 범행조작도 밝혀내/작년 고산 전시관서 도둑맞은 윤두서 작품 서울지검 동부지청 특수부(부장검사 조용국)는 20일 한국고미술협회 회장 공창호씨(42ㆍ서울 종로구 관훈동 공창화랑대표)를 장물취득 및 문화재보호법 위반혐의로,공씨의 동생 창규씨(34)와 부산 진화랑대표 진이근씨(41)를 문화재보호법 위반혐의로 각각 구속했다. 검찰은 또 문화재관리국 행정주사 김명식씨(38)를 직무유기혐의로 구속하고 강신태씨(37)를 같은 혐의로 입건하는 한편 미술품 중개인 박원방씨(63)를 수배했다. 공씨는 지난해 12월21일 공창화랑에서 문화재 전문절도범인 임관재씨(28ㆍ구속중)가 전남 해남에 있는 고산 윤선도 유품전시관에서 훔친 시가 3억∼5억원짜리 조선중기때의 미인도를 1천3백만원에 사들인뒤 진씨와 짜고 지난 1월 초순 수배된 박씨를 통해 일본인 미술품 중개인인 「하야시」라는 사람에게 넘긴 혐의를 받고 있다, 공씨는 이어 지난 1월18일 미인도를 훔친 임씨가 서울 강동경찰서에 붙잡힌뒤 자신도 경찰에 연행되자 평소 문화재관련 수사를 통해경찰관들과 친분이 있는 김씨 등 문화재관리국 직원 2명과 화랑대표 이모씨 등에게 부탁,『미인도를 밀반출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동생인 창규』라고 사건자체를 조작하도록 했다. 경찰은 문화재관리국 직원들의 부탁을 받고 형 공씨를 수사에서 제외한 뒤 조작된 수사기록을 토대로 동생 창규씨를 입건조사한 뒤 풀어줬다는 것이다. 수사가 시작되자 형 공씨는 일본에 연락,미인도를 국내에 되돌려 보내도록하고 경찰에서는 『동생이 일본에서 그림을 표구하기 위해 부산에 잠시 보관중이었다』고 거짓 진술을 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강동경찰서가 임씨 등 절도범들을 수사하면서 초동단계부터 사건을 고의적으로 조작했다는 제보를 입수,내사끝에 이같은 사실을 밝혀냈다. 검찰은 경찰이 공씨 등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뇌물을 받았는지 여부와 이 사건이 경찰간부의 묵인하에 조작은폐됐는지에 대해서도 수사하고 있다.
  • 시인 박봉우씨

    시인 박봉우씨가 2일 하오3시 전주시 경원동3가 26의1 자택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56세. 박씨는 지난 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후 「휴전선」「서울하야식」「겨울에도 피는 꽃나무」「4월의 화요일」「황귀의 풀잎」 등 시집을 냈다. 발인 4일 상오10시,장지미정. 연락처(0652)83­7417
  • 민정당 해체를 보며(사설)

    집권 민정당이 1일 전당대회를 열어 새 여당이 될 민주자유당에로의 통합 의결을 함으로써 사실상 간판을 내렸다. 스스로 소멸절차를 밟는 것을 바라보는 당원들의 감회야 남다르겠지만 일반국민들로서는 다소 얼떨떨한 기분이 뭔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등이 복합되어 있음직하다. 전례도 없는 일이고 너무 숨가쁘게 돌아가니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고 이것이 불안과 연결돼 반사적으로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생길 수밖에 없다. 사실 당총재가 권력의 핵심에서 건재한 상태에서 집권당이 해체되는 일은 우리의 정당사상 없었다. 이승만대통령의 하야로 자유당이 무너졌고 5ㆍ16군사혁명으로 장면내각과 함께 민주당도 사라졌으며 민주공화당 역시 박정희대통령의 변고이후에 문을 닫고 말았다는 점에서 민정당의 해체는 독특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의 문제일 뿐 사실은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여당으로 가기 위한 발전적 해체라는 측면이 강하다. 지난 9년간에 걸쳐 두차례나 대통령을 당선시켜 권력을 창출해낸 민정당이지만 6공 이후 그 위상이집권당으로서 다소 미흡했던 데서 결국 오늘의 해체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현실적으로 원내과반수 이상의 안정세력을 얻는데 실패함으로써 여야대결이라는 정치풍토 속에서 국정을 제대로 주도할 수 없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또 하나는 「5공청산」이라는 지난 2년 가까운 야당의 공세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민정당의 생성과정에서 여러 과와 비가 쌓인 것이 6공의 민정당에 커다란 부담을 주었다는 점이다. 「12ㆍ12」 이후 권력을 잡은 신군부세력에 의해 급조된 점이나 독선적인 권력행사로 빚어진 수많은 갈등,그리고 권력형 비리의 점철 등이 민정당의 짐으로 남아 정통성과 도덕성의 문제를 야기시켰던 것이다. 결국 노태우대통령으로서는 민정당의 발전적 해체로 민자당이라는 거대여당을 만들어 제도적으로 의회정치의 실을 확보하고 5공의 정치제도중 가장 중요한 정당의 틀을 깨어버림으로써 5공청산을 정치적으로 완결시키는 효과를 얻었다는 것이 정가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이제 노대통령은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급변하는 국내외의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미래지향의 국정을 이끌 수 있는 여건을 일단 마련했다. 이 여건은 지금의 해체결의가 보다 발전적이고도 생산적인 결과를 위한 것이라는 느낌을 갖는 민정당 구성원의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단단해질 것이다. 따라서 노대통령을 비롯한 민정당의 신당추진세력들은 이를 위한 노력을 특별히 기울여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대통령이 신당의 지도력을 확립하여 가장 큰 구심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구심점이 확실한 다른 두 정당과의 통합에서 민정당 구성원의 이탈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민정당의 공과 좋은 점을 신당에 이식시키기 위해서는 이 일이 필요하다. 과거 민정당 정권이 보여준 물가안정ㆍ국제수지흑자ㆍ고도성장 등 경제발전과 올림픽유치,평화적 정부이양 등 좋은 점과 정신을 계승함으로써 민정당 구성원이 자긍심을 갖고 신당에 참여토록 하는 효과는 적은 것이 아니다. 아울러 거대여당에 만족하기에 앞서 국민의 뜻을 두루 살피는 국정운영으로 민정당 해체의 참뜻을 살려나가야 할 것이다.
  • 전후 정국혼란 종식의 주역/“보수대연합의 모델” 일 자민당

    ◎진보파 결집에 자극… 민주­자유 합당/보ㆍ혁체제 형성… 정치안정으로 경제대국 키워 일본의 집권여당 자민당은 1955년 11월 창당,정권을 잡은 이래 35년간 「일당지배」체제를 계속하고 있다. 세계 정당사상 이처럼 오랜기간 일당지배가 지속되고 있는 경우는 서방 자유세계에서는 일본이외에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자민당은 그 정식 명칭 「자유민주당」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결성된 2개의 보수정당 자유ㆍ민주 양당이 통합해 탄생했다. 좌우 양파로 분열됐던 사회당이 합쳐진데 자극되어 자민당으로 결성된 「보수대연합」은 그동안의 다당제에 종지부를 찍고 보수 자민당과 혁신 사회당의 양극체제를 굳혔다. 일본의 「보수대연합」에는 사회당의 강화에 자극을 받은 재계의 압력과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이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자민당은 자유ㆍ인권ㆍ민주주의ㆍ의회제도의 옹호를 기본적인 강령으로 삼았다. 1955년 11월15일 창당대회에서 채택ㆍ발표된 「입당의 정신」은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자민당이 탄생하기까지 전후 10년간의 권력투쟁은 요시다 시게루(길전무)와 하토야마 이치로(구산일랑)의 싸움이었다. 일본 패전후 최초의 총선거였던 46년 5월 선거에서 자유당이 제1당이 됐으나 연합군사령부는 초대 총재인 하토야마를 전쟁협력자로 규정,공직에서 추방시킴으로써 주영대사를 지낸 외교의 명수 요시다가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됐다. 48년 가을부터 6년동안 패전의 그림자를 지우고 부흥의 기반을 닦은 요시다 총리 밑에는 일본을 고도성장으로 이끈 이케다 하야토(지전용인) 사토 에이사쿠(좌등영작)와 당료파인 오노 반보쿠(대야반목) 이시이미 쓰지로(석정광차랑),후임 총재가 된 오가타 다케도라(서방죽호)등 실력자가 즐비했다. 한편 공직에서 추방됐다가 해금된 하토야마 중심의 「반요시다」세력에는 이시바시 단잔(석교담산) 고노 이치로(하야일랑),개진당 총재인 시게미쓰 아오이(중광규) 마쓰무라 겐죠(송촌겸삼) 미키 다케오(삼목무부)와 기시 노부스케(안신개) 등이 집결,민주당을 결성했다. 54년말에는 결국 요시다 총리가 은퇴하고 하토야마 정권이 수립됐으며 55년 가을 미키 다케오의 집념으로 하토야마의 민주당과 오가타의 자유당이 합당,자민당이 탄생했다. 이때 당총재는 소속 중ㆍ참의원과 지방대의원으로 구성되는 당대회에서 공선키로 함으로써 파벌형성의 싹을 틔웠다. 하토야마가 집권한 지 1년만인 56년11월 소련과의 국교를 회복하고 은퇴를 선언함으로써 같은해 12월 후임을 둘러싸고 3명이 날카롭게 대립했다. 1차 투표에서는 자민당 발족당시 간사장이었던 기시후보가 수위를 차지했으나 과반수를 넘지 못했다. 이에대해 2위였던 이시바시와 3위 이시이가 연합전선을 펴는 바람에 결선투표에서는 이시바시가 기시를 7표차로 누르고 역전승했다. 이를 계기로 자민당 파벌 「8개 사단」이 사실상 형성,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시바시 정권은 발병으로 2개월만에 퇴진하고 57년 3월 기시가 단독으로 입후보,자민당의 3대 총재가 됐다. 창당이래 35년간 일관해서 정권을 담당해온 자민당 단일정당내에서 이루어지는 정권교체의 역사는 파벌의 경쟁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의 자민당내에는 최대 파벌인 다케시타(죽하)파를 비롯,아베(안배)파,미야자와(궁택)파,구 나카소네(중증근)파,고모토(하본)파 등 5개의 파벌과 니카이도(이계당) 그룹이 있다. 자민당은 중의원 5백 12석,참의원 2백52석 가운데 4백3석(중2백94ㆍ참1백9)을 차지하고 있는데,다케시타파가 1백5석,아베ㆍ미야자와ㆍ구나카소네파가 각각 80석내외,고모토파가 25석,니카이도 그룹이 14석을 점유하고 있다. 이같은 파벌주의는 국회를 공동화시키고 밀실ㆍ금권정치를 조장한다는 부정적인 면도 물론 크지만 인사배분 기구로서 또는 정책결정 기구로서의 역할도 크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공개적인 경쟁에 의해 정권을 창출해 낸다는 점에서 민주적인 제도라는 지적도 있다. 정치가가 정치 지도력에 의해 권력을 잡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의 뒷바침이기도 하다. 나아가 오늘의 초일류 경제대국 일본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보수연합의 일당중심체제에 의한 일관된 정책추진과 정치적 안정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견해도 있다. 현재 일본에는 집권자민당 이외에 지난해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여야 역전」을 주도했던 제1야당 사회당을 비롯,공명당ㆍ민사당ㆍ사민련ㆍ공산당 등 수많은 정당이 있으나 그 어느 것이나 정책수립ㆍ인물확보 등 여러면에서 자민당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 전 전대통령 특위제출 서면 답변내용

    ◎“「광주」발포 당시엔 보고 못받았다”/미 정부도 「5ㆍ17」 불가피성 이해했다/사북사태ㆍ학원소요가 계엄확대 원인 ▷다음은 전두환 전대통령이 서면으로 특위에 제출한 답변내용이다.◁ 본인이 당시 도청 앞 상황과 관련한 발포 건의를 받은 적이 있느냐 하는 문제는 국회의 청문회에서 증언한 바 있는 이희성계엄사령관,윤흥정 전교사령관 등이 「발포 사실조차도 상황이 진행될 때에는 보고받지 못했다」라는 증언내용에 비추어볼 때 당시 지휘계통에 있지도 않았던 본인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건의를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도청 앞에서의 이러한 발포사태는 상황이 종료된 이후 통상적인 정보보고를 통해 본인에게 보고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당시 본인은 즉각 이를 최규하대통령에게 보고하려 했으나 이미 계엄사령부를 통해 보고되었다고 하기에 중단한 바 있습니다. ▷미 정부역할◁ 광주사태를 전후하여 주한 미대사관을 포함한 미국 정부관리들은 한국의 제반상황에 대하여 우리측과는 어느 정도의 인식차이가 있었다고 보며 이러한 차이는 북한의 도발가능성에 대해 제3자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예민해 있는 우리의 현실로 보아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최근에 미국무성이 보내온 광주사태에 대한 석명서를 보면 당시의 한국 안보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묘사가 되어 있으나 이는 당시 미 정부가 광주사태를 계기로 취한 일련의 군사 외교적 조치들과는 모순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해 5월22일 미 국무성은 「불안한 사태가 계속되어 폭력사태가 과열된다면 외부세력이 위험한 오판을 할 위험성이 있다」고 북한의 도발책동을 우려하며 「한국사태를 방위조약에 따라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고 북한에 대해 경고한 바 있습니다. 또한 같은날 국무장관 주재로 한국사태에 대한 고위정책조정회의를 열어 항공모함을 위시한 기동함대와 조기경보기를 한국에 파견키로 하는 등 북한의 위협에 대비한 일련의 군사적 조치를 취했으며 당시 미 정부는 북한이 남침해 올 경우 미국은 즉각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경고를 제3의 외교경로를 통해 북한측에 통보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5월26일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의 여야 정치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글라이스틴대사는 『광주사태가 오래 계속된다면 배고픈 호랑이같은 북한이 이를 이용할 가능성이 없지 않으며 미국은 5ㆍ17조치의 배경과 불가피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고 본인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미 정부의 입장과 이번의 미 국무성의 석명서에 나타나 있는 입장은 상황 및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기본 입장에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내의 일각에서는 광주사태가 특별한 의도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주장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이는 전적으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누구라도 정권을 위한 치밀한 사전계획을 세웠다면 광주사태와 같은 커다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오히려 바랐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불행한 사태의 경위가 어떻게 되었든 그 구체적인 책임소재가 누구에게 귀속되건간에 본인은 당시 정부와 군의요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 책임의 일부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통령재임기간중에는 『상처는 아물기 전에 건드리면 다시 커져 치유가 어려워진다』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이 문제가 남긴 상처를 근원적으로 치유,해결하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은 반성과 자책을 느끼고 있습니다. ▷비상계엄 확대조치◁ 79년 10ㆍ26사태의 충격이란 절대권력의 돌연한 붕괴가 가져온 충격이었습니다. 이 충격에서 깨어나는 80년의 봄이 되면서 우리 사회에는 권력과 권위의 공동현상이 확실히 드러났고 거기에 발호하기 시작한 것이 혼란과 무질서였습니다. 빈발하는 학원소요와 노사분규는 그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4월의 사북사태는 며칠 동안이나마 그 지역에 관한 한 국가기능이 정지된 상태에 도달했고 5월 중순에 학원가두소요는 전국 곳곳에 넘쳐 지역계엄령하인데도 치안 마비상태에 도달하였습니다. 5월13일에서 15일에 걸쳐 절정을 이루었던 서울소요에서는 3일째 되는 15일 서울역에서 시청광장에 이르는 도심에 대학생을 중심으로 10만의 군중이집결되었고 경찰과의 충돌과정에서 당시로서는 예가 드물게 경찰차가 방화 당하고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1백13명이 부상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같은 혼란을 틈타 각종 범죄가 난무한 것은 물론,외국바이어들이 다투어 철수하고 조업에 지장을 일으키는 등 경제생활 전반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게되자 국민들의 불안심리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한편 10ㆍ26 이후 적화통일의 결정적 기회를 노리고 있던 북한은 이 시점이 되면서 대규모 기동훈련,전쟁물자 점검,전투태세 강화 등 심상치 않은 동향이 첩보사항으로 파악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국가 존망지추를 당했던 것입니다. 이같은 상황이 일일이 매스컴에 의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그나마 일반 국민의 동요를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위기상황에서는 그 당사자가 누구이든,국가는 국가 스스로의 자위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같은 국가의 자위조치의 당연한 귀결이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였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역비상계엄에서는 국방장관이 계엄업무를 지휘감독하고 전국 비상계엄하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지휘감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국비상계엄확대의 문제는 특정지역에 소요나 문제가 있다 없다의 기준을 넘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위기상황에 처하여 5월15일 신현확총리는 시위사태에 대한 우려와 함께 자제를 촉구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했고 그때에 진행중이던 제2차 석유파동속에서 원유 확보를 위하여 중동을 방문중이던 최규하대통령도 국내 사태의 급보를 받고 일정을 하루 앞당겨 5월16일 귀국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최 대통령 귀국 직후 국무총리 내무 국방장관 계엄사령관 그리고 본인 등이 참석한 시국대책회의에서 총리는 국내상황을 종합적으로 보고하였고 주영복국방장관은 이 자리에서 비상시국에 임한 군의 대책마련을 위해 다음날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보고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10ㆍ26 이후 우리 사회의 각부면의 권력과 권위가 퇴화,공동화되는 속에서 군만은 국가기능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서 사회와 국민의 막연하고도 암묵적인 기대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5월17일 개최된 전문지휘관회의에 참석한 지휘관들은 당시 사태의 심각성과 이에 대한 획기적 대책의 필요성에 의견을 같이하고 이를 위해 전국 비상계엄으로의 확대건의를 결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일각에는 학생소요를 옹호하며 전국 주요도시에서 대규모 군중궐기집회를 준비중인 세력도 있었고 5월16일에는 55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이 모여 5월22일을 시한으로 계엄의 즉각 해제와 정치일정단축 등의 요구를 내걸고 전면 투쟁태세를 굳히는 등 사태는 더욱 악화될 형세였습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전국 비상계엄확대 건의안은 결의되었고 국방장관과 계엄사령관은 이를 신현확총리에게 보고하여 동의를 받고 최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재가받았으며 이날 저녁으로 임시국무회의에서 의결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와서 당시 한국의 안보상황에 대해 미국의 인식이 어떻다고 말이 있습니다만 물론 한국의 안보에 대해 한국과 미국이 완전한 인식일치가 있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해도 당시 한국의 현존하는 안보위협에 대한 미국측의 인식과 대응의지를 과시하는 일환으로 5월13일과 14일 양일간 한미 합동군사훈련이 실시된 바 있음을 상기하기 바랍니다. 계엄확대를 전후한 5월14일부터 18일에 걸쳐 전국 주요시설과 방송국들에 경계경비를 위해 인근병력이 배치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국회가 개회중인데도 의원들의 동원이 저지된 것으로 압니다.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5ㆍ17비상계엄확대조치가 12ㆍ12를 주도한 이른바 신 군부세력의 쿠데타였다는 주장이 있습니다만 쿠데타가 국권을 탈취하기 위해 어떤 집단이나 개인이 국가를 치는 거사라 한다면 거기에 합당한 현상이 5ㆍ17시점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해두고자 합니다. 다만,오늘의 시점에서 5ㆍ17을 본다면 신 군부세력이라고 일컬어지는 무인들이 명확하고도 주관적인 의지는 결한 채로 시대적 상황과 국가의 요청에 밀려 덧없는 정치의 수렁으로 말려드는 계기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감회가 있습니다. ▷국보위 설치경위◁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는 전국 비상계엄하에서 대통령의 계엄업무에 대한 지휘감독을 보좌하기 위하여 계엄당국과 행정부간에 긴밀한 업무협조를 가능케 하여 조속하게 사회 안정기반을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대통령 직속하에 한시적인 자문보좌기관으로 설치된 것입니다. 80년 4,5월의 상황이 얼마나 위기상황이 되고 있었는지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한편으로는 혼란과 비례하여 소위 말하는 「정부의 영이 서지 않는」상황이 되어가고 있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무렵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비상한 상황이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극복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뜻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헤아릴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되어 있었고,당시 「정부의 영」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국민들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해했던 것입니다. 나라를 벼랑으로까지 몰고 간 위기상황은 전국비상계엄을 불러왔고 전국비상계엄은 무엇보다도 먼저 위기관리와 난국타개를 위해 정부기능을 보완적으로 강화할 수단을 찾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결과가 국보위설치로써 나타난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행정부의 기능을 계엄적으로 강화하는 매개 역할,이것이 국보위 기능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만일 군으로 구성된 계엄당국에게만 당시의 문제해결이 맡겨졌다면 국가가 그렇게 단기간에 위기탈출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국보위에는 계엄당국과의 매개역을 위해 군의 전문요원들도 차출되었으나 대부분은 행정부 요원ㆍ학자 및 각계 인사들로 구성되었던 것입니다. 상황이 긴박해지면서 나름대로의 비상대책안이 은연중에 우리 사회 여기저기에 거론되고 있었고 이같은 안들은 합수본부였던 보안사의 정보수렴과정에서 취합되고 있었으며 전국계엄으로 확대되는 것과 동시에 본인은 그동안의 정보보고를 상기하여 대책안의 구체적인 검토를 보안사 참모진에게 지시하였습니다. 그리해서 국보위는 설치되었고 그 책임상 본인이 상임위원장직을 맡았던 것입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용어가 누구의 착상인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분명치 않습니다. 비상기구의 연구검토초기에는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발동을 전제하여 기구를 설치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보다 합헌적이고 합법적인 근거를 가져야 제대로 작용될 수 있다는 결론에 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국보위는 정부조직법 제5조와 계엄법 제9조 및 제11조 등에 근거를 두고 조직되었으며 그 설치안은 5월27일 최규하대통령께 보고되었습니다. 같은 날 국보위 설치령이 국무회의에 제안되어 의결을 거친 후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5월31일 발족되었던 것입니다. 국보위가 발족됨으로써 군은 관련분야인 국방임무와 치안유지에만 전념하게 되었고 계엄업무의 일환으로서 군이 당연히 맡도록 되어 있는 행정ㆍ사법 사무에 대한 기획조정업무는 국보위가 맡게되어 대통령이 전국계엄을 효과적으로 지도감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국보위설치의 당위성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광주사태가 조작되고 유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이 있는 모양입니다만,이같은 역사인식이야말로 날조되고 왜곡된,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역사인식이요 본말전도도 유만부동입니다. 어떤 유능한 신이 있어서 광주사태의 전말을 연출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계엄확대에 의한 업무추진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 국보위는 설치되었던 것입니다. 국보위가 추진한 과외금지조치나 공직사회정화 등 일련의 충격적인 조치는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납득이 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로서는 국민들의 갈채를 받았고,그 때의 국가사회가 위기상황을 탈출하고 혼란과 무질서의 늪에서 벗어나는 데는 효과가 있었던 것을 여러분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국보위가 비상한 상황에서 의욕이 앞선 나머지 때로 무리한 수단을 동원하여 물의를 빚은 점은 아쉽고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1980년 8월 최규하대통령이 하야하게된 진정한 동기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이 있습니다만 본인으로서는 최 대통령께서 하야하시면서 발표하신 성명의 내용에 비추어 헤아려볼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다른 동기가 있었는지에 관해 저의 주관대로 추측해서 말씀드리기는 어렵다는 점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어떤 심판도 달게 받겠다”/전 전대통령,서면답변내고 백담사로

    ◎증언 소란끝에 중단,파행종결/「광주」 군 배치ㆍ이동 관여 안했다/정치자금 민정외엔 준일 없어/증언내용 전두환 전대통령은 구랍 31일 재임기간중 정치자금문제에 대해 『개인 또는 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을 기부받은 바 있다』고 말하고 『민정당 이외의 특정인에게 정치자금을 준 일은 없다』고 밝혔다. 전 전대통령은 이날 국회 5공 및 광주특위 연석회의로 열린 청문회에 출석,이같이 말하고 『이 문제에 대해 입을 열게 됨으로써 과거청산의 마무리가 아니라 청산의 새로운 시작이 되고 과거의 수렁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될까 두렵다』며 구체적인 정치자금 내역은 밝히지 않았다. 전 전대통령은 6ㆍ29선언에 대해 『6ㆍ29선언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어떻게 실현되고 추진돼 정치발전과 국가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지 경위나 배경을 들추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면서 『정치이면의 얘기는 현실정치에 민감한 영향을 주지 않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서는 훗날 회고록 등을 통해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전 전대통령은 광주사태에 언급,『초동 진압단계에서 계엄군의 강경진압과 악의적인 유언비어에 자극받은 일부 시민의 과격시위가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하고 『본인은 당시 군의 배치이동 등 작전문제에 대해 관여한 사실이 없다』고 말해 광주사태진압 및 발포와 무관함을 주장했다. 전 전대통령은 『본인은 광주 무력진압에는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겠고 시민 상대의 사태수습을 군작전 개념으로 한다는 것은 현명치 않다는 의견을 계엄사 지휘관들에게 전달한바 있다』고 말하고 『자위권행사 문제는 군인복무 규율에 따라 불가피한 상황하에서 행사된 것으로 판단되며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5월22일 자위권발동도 가능하다는 계엄사의 작전지침이 하달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전 전대통령은 『12ㆍ12사태는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수사도중에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을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사전에 준비된 병력출동 계획도 없었다』고 밝히고 『12ㆍ12사태는 시해사건에 대한 수사책임자인 본인이 주도한 것이며 그로 인해 야기된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본인에게 있다』고 말했다. 이날 청문회는 전 전대통령의 증언 부실 등을 이유로 여야간 야유와 고함ㆍ몸싸움이 속출해 8차례나 정회를 거듭한 끝에 민정당측과 전 전대통령이 불참한 가운데 야3당 의원들만으로 자정을 넘겨가며 파행적으로 진행되다 1일 0시50분에 산회됐다. 이날 저녁 7시30분 5차례의 정회끝에 속개된 회의에서 광주문제에 대해 증언하는 가운데 평민당의원들이 격렬하게 항의,민정당의원들과 격돌을 벌였고 정회가 선포되자 민주당 노무현의원이 전 전대통령을 향해 명패를 던지는 사태가 발생,민정당측이 서면사과를 요구했으나 야당이 이를 거부하자 민정당과 전 전대통령은 증언을 중단키로 결정했다. 이날 파행적인 청문회 결과 야당측이 위증시비를 제기하는 한편 부실답변을 계속 문제삼고 있고 특히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증언에 대해 평민당과 재야 등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있어 논란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전 전대통령은 이날 증언이 중단된 뒤 서류로 제출한 나머지 증언을 통해 광주에서의 발포건의를 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당시 지휘계통에 있지 않았던 입장에서 건의를 받을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고 부인하고 『광주의 책임소재가 누구에게 귀속되건 당시 정부와 군의 요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책임 일부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고 재임중 상처를 치유,해결하지 못한점에 대해 깊은 반성과 자책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최규하 전대통령의 하야 동기에 대해 『최대통령이 하야시 발표한 성명내용에 비춰 헤아려 볼 수 있을뿐 다른 동기가 있었는지에 관해 추측해 말하기 어렵다』고만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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