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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협,특별검사제 도입 촉구/5·18 불기소관련

    ◎광주선 」특별법 제정」서명운동 대한변협(회장 김선)은 20일 5·18 고소·고발사건에 대한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과 관련,공소시효연장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특별검사제도를 도입해 철저히 재수사할 것을 촉구했다. 대한변협은 이날 성명에서 『80년 비상계엄 확대조치부터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에 이르는 일련의 헌정파괴행위들은 검찰의 이번 판단처럼 과거와 다른 통치조직이나 헌법질서의 창출을 위한 새로운 질서의 형성이 아니라 형법상으로 내란및 내란목적살인의 범죄행위에 지나지 않으므로 사법심판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했다. ◎오늘부터 무기농성 【광주=최치봉 기자】 광주·전남의 1백36개 재야 및 학생 단체로 구성된 「5·18 학살자 기소관철을 위한 공동 대책 위원회」(공대위)와 민주당 광주시 지부는 20일 하오 6시 광주공원에서 학생과 시민 등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5·18 학살자 처벌 범시민 궐기대회」를 갖고 특별법 제정과 특별검사제 도입을 촉구했다. 공대위는 21일부터 민주당 광주시지부 당사에서무기한 항의 농성과 함께 광주우체국과 광주YMCA 앞 등에서 특별법 제정과 특별검사제 도입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시작하고 오는 28일 쯤 서울에서 대규모 집회를 갖기로 했다.
  • 일 “불 핵반대안 유엔 상정”/10월 총회때

    ◎항의선 실험해역 파견도 추진 【도쿄=강석진 특파원】 프랑스의 남태평양 산호초 핵실험 재개결정과 관련,일본은 오는 10월 개최되는 유엔총회에 프랑스의 핵실험 중지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한다는 방침을 정하는 한편 항의선을 파견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이 19일 보도했다. 요미우리신문은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총리,고노 요헤이(하야양평) 외상,다케무라 마사요시 대장상(무촌정의) 등 연립여당 수뇌부가 핵실험 중지를 요구하는 국회결의를 채택키로 결정한데 이어 정치권에서 보다 확실하게 항의 의사를 표하기 위해 실험해역에 항의 선박을 파견하자는 의견이 검토되고 있다고 전했다. 무라야마 총리는 또 이날 히로시마 기자회견에서 사회당이 호주와 뉴질랜드의 노동당과 연대해 항의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발표했다. 한편 일본정부도 정치권에서 프랑스의 핵실험에 대한 항의 움직임이 경쟁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것과 관련,프랑스 정부에 2차로 항의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 정권창출 행위의 규범력 인정/「5·18」수사­사법적 판단

    ◎법질서 단절·정치혼란 방지 목적/관련자 「내란죄」 여부 판단은 유보 검찰이 「5·18」사건 관련자에게 「공소권 없음」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에 대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당초 예상과는 달리 「혐의 없음」도 아니고 관련자들을 아예 사법적 심사의 대상에서 제외했기 때문이다. 검찰은 물론 기소 편의주의에 따라 피의자를 기소할 수도,안할 수도 있다.기소에 관한 한 모든 재량권을 검찰이 쥐고 있는데 따른 것이다. 검찰은 이번 수사를 하면서 별도로 법률검토팀을 구성,국내외의 입법례 등을 모조리 뒤지는 열성을 보였다. 검찰은 우선 『새로운 정권이 출범한 현실을 인정하고 그 정권 형성의 기초가 된 사실행위에 대해 사실의 규범력을 인정해,사후 법적 인증을 해야 한다』는 법철학 이론을 내세워 이들에게 「공소권 없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정치적 변혁이 성공해 새 질서가 실효적으로 되면 새 질서가 법률질서로 되며,이는 근본 규범의 변동으로 새로운 정부가 법정립의 권위로 인정되는데 따른 것으로,만약 정치적 변혁이 실패해 새질서가 실효적이 되지 못한 때에는 헌법정립이 되지 못하고 일련의 행위는 범법행위를 구성한다』는 한스 켈젠의 「순수법학」도 검찰이 판단하는데 거들었다. 이밖에 『재래의 실정법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법질서가 수립된 경우에는 법적 안정성의 요구에서 이러한 사태가 법의 기초가 돼 법적 효력을 인정받게 된다』는 독일 법철학가 구스타프 라트브루흐의 이론 역시 검찰결정에 큰 몫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검찰은 이러한 이론들을 종합,『무너진 구헌정 질서에 근거해 새로운 정권과 헌법질서의 창출을 위한 행위들의 법적 효력을 다투거나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으며 결국 사법심사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12·12사건」의 연장선상에서 놓고 볼때 「성공」(?)한 쿠데타는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런 점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집권과정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최규하 전대통령이 하야한 시점은 80년 8월16일.전 당시 국보위상임위원장은 8월27일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돼 9월1일 취임한다.또 같은달 29일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고 국보위에 대해 국회기능을 대행토록 하는 내용의 5공화국 헌법을 공고,10월22일 실시된 국민투표에 의해 헌법을 개정한다.이어 이듬해 2월25일 개정헌법에 따른 선거인단 선거를 거쳐 3월3일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전전대통령은 국민적 심판을 거쳐 새 정권을 창출하고 새 헌법질서를 형성한다는 시나리오이다. 이와 함께 비상계엄의 전국확대,김대중씨 등 여야 정치지도자와 재야 인사등의 체포·연행·연금,정치활동의 금지와 임시국회의 소집 무산,국보위의 설치 운영등 이 사건에서 문제되고 있는 일련의 조치나 행위는 정치적 변혁과정에서 기존 통치질서를 대체하고 새로운 헌법질서를 형성하는 기초가 됐고 그후 새 헌법에 의해 헌법질서 속으로 수용된 것으로 해석했다. 검찰관계자는 이날 『이와같은 헌정질서의 연속성과 관련된 일련의 정치적 사건에 대해 사법기관이 사법심사의 일환으로 그 위법 여부를 판단할 경우,자칫 새 정권 출범이후 새 헌법이나 법률에 의해 실효성을부여받아온 헌정질서와 법질서의 단절을 초래,정치적·사회적·법률적으로 중대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비록 문제점을 많이 내포하고 있더라도 국민적 심판을 거쳐 형성된 정치적 판단과 결정을 사후에 사법적으로 번복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얘기다. 이밖에 국가보위 입법회의의 설치 운영도 헌법에 의해 국회의 권한을 대행하는 과도 입법기구의 입법행위로 사법적 심사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검찰은 따라서 이 사건 주모자격인 전전대통령을 비롯,관련자들의 행위가 내란죄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형식판단 우선법리」에 따라 모두에게 「공소권 없음」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공소권 없음」이란/검찰서 재판권 청구않는 불기소 처분 일종/사면·공소시효 만료·피의자 사망때 적용 검찰이 「5·18사건」 피고소·고발인에게 내린 「공소권 없음」이란 결정은 검찰이 법원에 대해 형사재판권을 청구하지 않는 불기소처분 유형 가운데 하나다. 검찰 사건사무 규칙 52조는 ▲형 확정 판결이 있는 경우 ▲사면이 있은 경우 ▲공소의 시효가 완성된 경우 ▲범죄후 법령의 개폐로 형이 폐지된 경우 ▲법률의 규정에 의해 형이 면제된 경우 ▲피의자에 관해 재판권이 없는 경우 등에 한해 「공소권 없음」결정을 내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동일사건에 관해 이미 공소가 제기된 경우 ▲친고죄 및 공무원의 고발이 있어야 논하는 죄의 경우 고소 또는 고발이 없거나 그 고소 또는 고발이 무효 또는 취소된 때 ▲반의사 불벌죄의 경우 처벌을 희망하는 의사표시가 철회된 때 ▲피의자가 사망하거나 피의자인 법인이 존속하지 않게된 때도 「공소권 없음」에 해당한다. 이 결정은 흔히 교통사고 처리과정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간의 합의가 이뤄진 때 가장 많이 활용되고 있으며 간통 등 친고죄의 경우 상대방이 처벌을 원하지 않을 때도 자주 인용된다.
  • 5월20일/시위진압때 4명 총격 사망/검찰수사로 재구한「5·18」

    ◎휴교항의 전남대생 18일 공수단과 첫 충돌/21일 무장시민군 도청 접수… 최소 38명 희생/시민군 23일 “무기회수”… 군27일 도청점령 “끝” 상오10시 전남대앞에서 휴교조치에 항의,시위를 벌이던 대학생들과 7공수여단 33대대 병력간에 충돌.하오2시40분쯤 학생·시민들이 금남로로 진출,진압에 실패한 경찰이 군병력 출동을 요청해 7공수 33·35대대가 시위진압에 나섬.이 과정에서 첫사망자 발생.시위대 2천여명으로 불어 시내 중심가에서 산발적 시위.하오5시50분 11공수 61대대 진압에 투입됨. 대검을 착검한 공수부대원들의 강경진압에 분노한 시민·학생들 금남로 일대에서 화염병·투석 시위.상가대부분 철시한 상태에서 11공수 61·62·63대대 학생·시민들을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연행함.하오2시 광주지역 기관장회의서 과격진압항의및 연행자 전원석방요구.하오5시 11공수63대대 장교가 M16소총으로 시위대에 첫발포.하오11시 육본이 3공수 5개대대에 추가투입명령. 전남도교위 광주시내 중고교에 임시휴교조치.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17정을 시위대가 탈취.하오4시 금남로일대에 시위군중 2∼3만명 운집하고 택시·버스·트럭 등 차량이 시위에 합세.하오9시45분 진압상황 보도요청을 거부한 광주문화방송국 방화.하오10시30분 진압군에 실탄지급.M60등으로 공포사격.하오11시 전남도청을 제외한 광주전지역을 시위대가 장악.광주역일대 진압과정에서 4명이 총격사망. 20사단 61·62연대 추가투입.시위대들이 광산·영광·함평·화순·나주 등지로 진출,나주경찰서등에서 총기4천9백여정·실탄13만여발·수류탄2백70여발 탈취해 무장.정오 전남대·도청등지에서 수만명의 시위대들이 무장시위 벌임.하오1시30분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향해 집단발포.하오1시35분 광주 외곽도로망 차단하고 진압군 자위권 발동.하오4시30분 전남도청·도경을 시민군이 접수.최소 38명이 총격사망. 광주외곽지역 총격전으로 수십명 사망.상오9시 지역유지와 학생들을 주축으로 시민수습대책위원회 구성.하오3시 도청분수대 앞에서 시민궐기대회개최. 상오9시35분 수습위 시민군들 상대로 무기회수 시작.상오10시 11공수 62대대 병력이 매복한 주남마을 부엉산아래 광주∼화순간 국도에서 미니버스에 타고있던 여고생등 10여명 총격사망.하오3시 도청앞 광장에 5만시민이 운집해 민주수호시민궐기대회 개최. 상오9시55분 호남고속도로 광주인터체인지 부근에서 전교사 예하 기갑학교 병력이 부대복귀중이던 31사단 96연대 3대대 병력을 시위대로 오인,진압군끼리 총격전을 벌여 사병3명 사망.하오1시55분 효천역 부근에서 전교사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이 11공수63대대 병력을 시위대로 오인,총격전을 벌여 9명 사망. 강경학생·청년들이 수습위를 대신해 무력대항결의.무기반납도 백지화.상오4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광주재진입작전계획인 「상무충정작전」수립지시해 작성됨.하오5시30분 최규하 대통령 광주방문,담화문발표. 상오10시30분 소준렬 전교사령관 주재로 진압작전 지휘관회의 개최해 27일 새벽 작전개시키로 결정.하오6시 전남도청에서 최후항쟁 주장하는 강경파 2백여명이외에 시위대 해산함. 상오4시 3공수여단 11대대 1지역대 병력이 전남도청 후문으로 들어가 1시간21분만에 도청점령.7공수33대대 8·9지역대 병력도 상오5시6분 광주공원 점령.11공수61대대 4중대 병력은 상오4시46분 도청주변 주요건물 점령.20·31사단은 상오7시15분쯤 광주시내 진입완료하고 10분만에 모든 작전완료.계엄군의 광주재진입작전과정에서 시위대 16명,계엄군 3명 총격사망. ◎고소·고발인 향후 대응방향/「검찰 결성」 불복땐 어찌될까/항고·재항고 기각땐 헌법소원내야/헌법재판소서도 「결정번복」 힘들듯 1년2개월 가량을 끌어온 「5·18」 고소·고발사건이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으로 일단 마무리됐지만 고소·고발인들이 검찰의 결정에 불복하고 있어 앞으로 전개될 법률적 대응이 주목된다. 현행법상 고소·고발인들이 취할 수 있는 법률적 대응방안은 3단계로 구분된다. 우선 해당 검찰청인 서울지검을 통해 상급청인 서울고검에 항고하는 것.항고가 기각되면 대검에 재항고를 할 수 있으며 재항고마저 기각될 경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청구하는 길이 열려 있다.그러나 이 사건의 경우 고검이나 대검이 1차 결정 당사자인 서울지검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사전조율결과 도출된 결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항고·재항고는 헌법소원을 내기 위한 요식절차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건이 헌법재판소로 넘어간다해도 고소·고발인들의 주장이 관철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 비록 헌법재판소가 헌법소원을 받아들여 「인용」 결정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인용결정이 곧바로 검찰의 기소결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뿐더러 헌법소원을 통해 검찰의 결정을 뒤엎기에는 여러가지 면에서 무리라는 것이다. 우선 검찰은 수사결과 발표를 통해 『사안이 사법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에 공소시효가 언제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공소시효에 대한 판단자체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헌재가 검찰의 결정을 번복하려면 공소시효부분에 대한 판단을 먼저 내린 뒤 시효만료일 이전에 재기수사명령을 내려야 하는데 고소·고발인들이 주장하는 내란죄의 공소시효(15년)는 오는 8월15일에 만료돼 27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법조계의 지배적인 견해인 점으로 미루어 시간상 공소시효와 본안에 대한 판단을 함께 내릴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번 사건이 헌재에서 다뤄질 경우 검찰이 유보한 「대통령의 통치행위에 대한 사법적 판단」여부에 대해서도 심판해야 하므로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된다.종래 통치행위는 검찰이나 법원의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으나 헌재의 헌법판단대상이라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헌재의 인적 구성이나 12·12사건 당시 보인 소극적 자세 등을 감안할 경우 헌재가 8월초쯤 헌법소원이 제기되면 공소시효부분에 대한 판단여부로 시간을 끌다가 결국 『소의 실익이 없다』는 이유로 각하결정을 내릴 공산이 크다. 따라서 고소·고발인들의 향후 법적대응은 실익보다는 검찰의 사법적 판단에 대한 「불복」차원에 그칠 것이라는 것이 법조계의 중론이다. ◎장윤석 공안부장 일문일답/“어떤 비판 제기돼도 최선다한 결정”/고소인 주장 입증할 증거 발견못해/양민학살한 계엄군 처벌도 어려워 「5·18」고소·고발사건의 주임검사인 장윤석 서울지검 공안1부장은 18일 하오 수사결과를 발표한 뒤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가졌다.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에 대해 상당한 국민적 반발과 파장이 예상되는데. ▲시를 쓰는 것은 시인이 해야할 고유의 일이지만 시를 감상하고 비평하는 것은 국민의 몫이다.어떤 비판이 제기되더라도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80년 8월 최규하 전대통령 하야과정과 발포경위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 「입증자료가 없다」고 발표한 것은 검찰수사력의 부족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 아닌가. ▲충분한 자료수집과 검토를 했지만 고소인들의 주장을 입증할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최전대통령이 정권에서 물러날 시기를 전후해 강압과 불법행위는 정말 없었는가. ▲전두환 전대통령은 답변서를 통해 강압이 없었다고 진술했으며 최전대통령은 서면질의서에 대한 답변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를 설명할 자료가 전혀 없었다.또 세간에는 이 과정에서 김정렬 전총리가 깊숙이 개입했다는 것이 정설로 돼있는데 김씨 역시 사망해 강압여부에 대해 확인할 수 없었다. ­80년 4월 권정달·허삼수·허화평씨 등이 모여 국보위 설치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정권찬탈등의 의도가 있었다는데. ▲조사결과 4월 당시 그런 논의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80년 8월 최전대통령이 하야하고 간선제를 통해 전전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두사람간에 강압이 없었다는 말인가. ▲최전대통령이 답변서를 제출하지 않아 알 수가 없었으며 전전대통령의 경우 「당시 최대통령이 스스로 결단했을 것」이라는 답변서만을 냈다. ­광주시민등 양민학살 부분의 책임자들에 대한 개별적 처벌은 가능하지 않은가. ▲공수부대가 광주 외곽지역에서 총격을 가해 주민 2명을 사망케 한 일이 있었으나 발포자와 구체적 경위에 대해 특정되지 않는등 행위자를 가리기 어려워 처벌이 어렵다. ­12·12사건 때는 군형법상 반란죄등 혐의를 인정했는데 5·18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12·12 사건의 경우 소장급 장성이 별넷인 장성을 제거하려 한 것이므로 군형법상 반란죄 인정이 가능했지만 이번 사건은 통치권 찬탈을위한 사전의도가 있었다고 보기 어려웠으며 당시 전씨가 모든 과정에서 부단히 최전대통령의 재가를 받으려고 노력했으므로 전혀 다른 성격이다. ­계엄군에 의한 주민학살만이라도 처벌할 수 없는가. ▲공소시효 5년이 지난 것으로 알고 있다.군형법상 군지휘계통을 들어 책임자를 처벌하기도 어렵다.구체적 행위자등 기본적 사실관계 파악이 어렵기 때문이다. ­집권을 위한 시나리오가 있었다는데 입수했나. ▲입수는 했지만 당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계획서였을 뿐 정권찬탈 음모는 보이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 전·노씨 대상 「공소권 없음」 결정­검찰/「5·18」수사 발표

    ◎“정권창출 과정 사법심사 대상 안돼”/관련자 58명 전원 불기소 처분 「5·18광주 민주화운동」 고소·고발사건을 수사해온 검찰은 18일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포함한 이 사건 피고소·고발인 58명 전원에게 「공소권없음」 결정을 내리고 이들을 모두 불기소 처분했다고 발표했다. 서울지검 공안1부(장윤석 부장검사)는 이날 최종 수사결과 발표문을 통해 『지난 80년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시작으로 본격 전개된 일련의 사건과정은 당시 구 헌정질서의 붕괴로 인한 극심한 소요발생 등 국가적 위기상황을 수습하고 새 정권을 창출하기 위한 정치적 활동이기 때문에 사법기관이 그 적법성 여부를 따질 심사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로써 우리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5·18사건은 수사개시 1년 2개월만에 마무리됐으나 검찰의 결정에 불복하는 고소·고발인 등 피해 당사자 및 재야단체 등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어 향후 정치권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적지않은 파장을 몰고올 것으로 예상된다. 검찰은 이날 『5·18당시일련의 사건전개는 혼란상황에 놓인 국가전체를 지도하고 총괄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정치적 활동의 일환으로 판단되며 계엄법 등 당시의 법률적 논거를 기초로 행해진 조치라는 점에서 고소·고발인들이 주장해온 내란혐의와 관련한 위법성여부를 판단할 증거자료 및 진술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밝히고 고도의 정치적인 행위에 대해 사법적 판단을 유보할 수 있다는 법률적 근거로 새로운 정권과 헌법질서의 창출을 위한 행위들에 대해 법적 효력을 다투거나 법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 국내외 헌법학자들의 법이론인 「통치행위론」를 제시했다. 검찰은 이와 함께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조작여부에 대해 사건조작 주장은 물론 위법성의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발표했다.또 내란죄성립여부와 관련,핵심쟁점이 돼온 보안사의 집권시나리오 및 신군부의 최전대통령에 대한 강압여부에 대해서는 최전대통령의 방문조사 거부로 구체적인 진술을 확보치 못한 상태에서 관련자들의 진술과 관련자료를 종합해 「사실무근」으로 판단내렸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와 함께 5·18사건의 공소시효를 최전대통령이 하야한 80년 8월16일을 기점으로 본다고 밝혀 이번 사건의 공소시효는 오는 8월15일에 만료된다.이에 따라 고소·고발인들은 앞으로 27일안에 항고·재항고·헌법소원 등의 검찰결정 불복절차를 밟아야 한다. 검찰은 지난해 5월 13일 광주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 정동년씨등 광주 지역피해당사자 3백22명이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등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혐의로 고소한이후 그동안 고소인 10명과 피고소인 58명을 비롯,참고인등 모두 2백69명에 대한 소환 또는 서면조사를 벌여 왔다.
  • “정치적 결론”… 평가는 역사에/「5·18」수사­포괄적 의미

    ◎5·6공 신군부 세력에 사실상 「면죄부」/기소땐 법적 논쟁 계속… 국론분열 감안 검찰이 18일 「5·18」 사건 관련자 전원에게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리고 불기소 처분함으로써 이 사건은 사건발생 15년 2개월 만에 일단락됐다. 우리 현대사에 있어 가장 가슴아픈 일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건의 사법적 판단이 마무리된 셈이다. 앞으로 고소·고발인측의 항고·재항고·헌법소원 등의 절차가 있기는 하지만 서울 지검의 이번 결정이 번복되기는 힘들 것이라는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검찰이 이같은 결정을 내리게 된 데는 법률적 판단과 함께 정치적 고려도 깔려 있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번복되기 어려울듯 이보다 앞서 김영삼 대통령은 93년 5월 특별담회를 통해 「광주의 희생은 이 나라 민주주으를 위한 것이었고 오늘의 정부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광주민주화 운동을 평가하면서 「진상규명과 관련해 미흡한 부분은 훗날의 역사에 맡겨야 하며 보복적 한풀이가 돼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는 당시 김대통령이 이 사건의 정치적·역사적 성격을 규정한 것으로 불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무엇보다 한 시대의 역사를 정리한다는 점에서 「역사성」과 「기록성」이 무시될 수 없다. 어느 정권도 광주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서는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수 없고 역사의 정통성 또한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문민정부 이전에는 이 사건 관련자들이 통치권을 쥐고 있어 이 문제를 드러내 놓고 제기할 수 없었던 게 사실이다. 수면하에서 잠복했던 셈이다. 이 사건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지난해 5월에서야 비로소 수며누이로 부상했다.정동년 광주민주 운동연합 상임의장등 이 사건 피해자 3백22명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에 의한 살인혐의로 정식 고소하면서 시작됐다. 내란죄의 공소시효(15년)를 불과 1년여 남겨두고 법률적 판단을 호소했던 것이다. 검찰은 그러나 「정치적 변혁의 주도세력들이 새로운 정권창출에 성공,국민의 정치적 심판을 받아 새로운 헌정질서를 수립해 나간 경우에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법 논리를 내세워 고소인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노 전 대통령등의 행위나 조치가 구체적으로 내란죄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림으로써 5·18 사건을 역사적 판단에 맡긴 셈이다. 다만 사건의 발단이 됐던 ▲비상계엄 전국확대전 시국상황 ▲광주시위의 진압 ▲최귀하 대통령의 하야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집권 등 전모가 밝혀져 사건의 전말과 성격을 규명하는 데는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 함께 전·노 전대통령 등 「5·6공 세력」은 이번 결정으로 완전히 법률적 「면죄부」를 받게 됐으며 당시 정권도 「합법성」을 인정 받은 셈이다. 「12·12사건」과 함께 이들 신군부 세력의 「아킬레스건」이었던 「5·18사건」의 사법적 판단이 마무리된 결과다. 이에 앞서 검찰은 지난해 10월 「12·12사건」으로 피소됐던 전·노 전대통령을 포함한 신군부측 인사 34명에게 모두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들을 「군사쿠데타」의 주범으로 보고 군사반란 혐의를 적용하되 기소만 하지 않았다. ○신군부측 족쇄 풀려 이번 결정에 따라 그동안 정치를 하지 않았던 신군부측 군출신 인사들도 새로운 당을 창당하거나 기존정당을 선택하는 등 보다 더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이사건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일각에서는 「5·6공」세력의 결집을 막기 위해 이들을 기소할지도 모른다는 풍문이 나돌았었다. 검찰이 이 두 사건 관련자에게 「공소권 없음」이나 「기소유예」 처분을 내린 것은 이들을 법정에 세움으로써 파생되는 손익계산서를 충분히 고려했을 것으로 분석된다. 만약 이들을 기소해 법정에 세우면 과거사가 반복 거론되고 법적논쟁이 계속돼 국론분열과 대립양상을 재연함으로써 불필요하게는 고도의 정치적 판단도 감안했을 것이란 해석이다. 5·18을 사법적으로 일단 마무리한 것은 사실이나 광주 등 호남권이 주축이 된 김대중씨의 신당 창당 등 새로운 정치적 변수등에 비추어 정치권에서의 논란까지도 잠재울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 역사의 심판에 맡길수 밖에(사설)

    검찰이 5·18 광주민주화 운동 고소고발사건의 피고소·피고발인 58명 전원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림에 따라 이 사건에 대한 사법적 판단이 사실상 종료되고 역사의 판단만 남게 됐다.이로써 1년2개월에 걸친 수사가 마무리됐으나 검찰 결정에 대한 반발과 고소인들의 항고,재항고,헌법소원등 불복절차가 예상돼 논란의 소지는 남아 있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등 신군부 세력이 무력을 동원해서 최규하 전대통령을 하야시킴으로써 내란죄를 범했는가의 여부를 가리는 것이었다.그리고 검찰의 결정은 「5·18사건은 극심한 소요발생등 국가적 위기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서 내란죄 여부의 사법심사 대상이 되지 않아 공소권이 없다」는 것이다. 검찰은 국민적 감정을 고려하여 「고뇌에 찬 결론」을 내린 흔적이 역력하다.공소권이 없다는 검찰의 결론은 국민감정 내지 정서에 앞서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는 법형식적 판단을 내린 것이라고 하겠다.역사적이고 정치적이며 지나간 사건에 대해 검찰이 법적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검찰이 이번 사건에 대해 「공소권 없다」는 법적 결정을 내림으로써 이미 「군사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돼 기소유예 처분된 12·12사태와 5·17사건을 포함,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사건들에 대한 사법적 판단들이 모두 마무리되었다.이번 사건의 공소시효도 오는 8월15일까지로 한달도 안남았다.훗날의 역사적인 심판에 맡기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제 검찰의 법적판단이 내려짐에 따라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부 갈등이 재연될 소지가 있다.그러나 이 문제는 훗날 역사의 평가에 넘기고 미래지향적인 민주발전과 국력집결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국민적 지혜를 보여주어야 하겠다.
  • 「새로쓰는 한국현대사」 속의 두거인 재조명

    ◎이승만·김구의 우정과 갈등/황해도출신 한살산… 상해 임정활동 공통점/해방후 우남은 「군정」·백범은 「협상」을 추구 조선왕조 끝시기로부터 오늘날 남북대립시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치지도자들이 배출됐다.그 가운데 우남 이승만과 백범 김구는 앞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우남은 18 75년에,백범은 18 76년에 태어났다.모두 황해도 출신으로 사실상 동년배지만 백범은 우남을 평생동안 형님으로 모셨다.어려서 한학을 공부한 우남은 성장하면서 서양문물에 눈을 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하버드대학,프린스턴대학 등에서 국제정치와 국제법을 전공했다.그리고 일찍 기독교 정신문화를 받아 들였다.이와는 달리 토착적 성장의 길을 걸은 백범은 서당 글공부가 교육의 전부였다.또 토착종교 동학에 가담해 왜병과 싸우는 등 민족적 정열을 불살랐다. 두사람은 1919년 3·1운동 직후 시차를 두고 상해 임시정부를 통해 연결고리를 맺는다.우남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백범은 마지막 주석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 일선에 나섰던 것이다.그러나우남과 백범은 임정과의 연결에서 질적 차이를 드러냈다.백범은 임정을 떠나지 않은 채 그 간판을 해방의 시점까지 지킨데 비해 우남은 미국을 무대로 외교 선전 측면의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들은 해방된 조국에 환국해서는 독립정부 수립운동에 앞장 섰다.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한반도 문제에 관한 미·소·영·중 4개국 외무장관 합의 의정서」가 발표되었을 때는 손을 맞잡고 싸웠다.그러나 두 지도자 사이에는 차츰 노선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우남은 강력한 반소·반공론에 입각해 남한의 단선·단정노선을 제기하고 나섰다.이 노선에 반대한 백범은 이데올로기보다 민족을 앞세웠다. 1947년에 공식화된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은 미국으로 하여금 우남이 주장해온 단선·단정론을 지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그리하여 미국의 주도아래 국제연합은 19 48년 5월10일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해 대한민국을 건국시키는 일을 서두르게 됐다.남한의 단선·단정은 분단체제의 고착은 물론 동족상잔의 비극을 불러 일으키게될 것이라고 비판한 백범은 남북협상을 추진했다.백범은 김규식과 함께 1948년 평양 남북정치지도자 연석회의에 참석한다.그러나 북한은 곧 세워질 공산정권의 합법성을 쌓는데 두 애국지도자의 충정을 이용했을 뿐이다. 5·10총선거에 따라 대한민국 제헌국회가 성립됐다. 국회의장에 선출된 우남은 헌법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5·10총선을 거부했던 백범은 자신이 이끌던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통일운동을 벌였다. 백범의 통일운동은 고귀했으나 외로웠다.결국 1949년 6월26일 육군대위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지고 말았다.통일된 독립국가 수립을 꿈꾸던 그의 숭고한 사상은 오늘날 까지도 우리의 지표가 되고 있다. 우남은 건국 초기에 험난한 길을 걸었다.특히 1950년6월25일 북한의 전면 남침을 맞아 미국과 국제연합 지원아래 싸워서 국가를 수호했다.대한민국의 건국과 수호는 확실히 그의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사사오입개헌과 1960년 3·15부정선거는 그에게 오명을 안겨 주었다.그는 전 국민을 분노시킨 4·19혁명에 의해 하야할 수 밖에 없었다. 돌이켜 종합해 생각해 보건대 백범 두분 모두 우리 배달겨레에게 소중하게 기억된다. 우남은 건국과 국가수호라는 업적을 남겼으며 백범은 분단상황에서 민족의 통일을 잊지 않게 하는 정신적 자산을 남겼다.두분은 훌륭한 저술가이기도 했다. 우남의 「독립정신」과 「일본내막기」는 그의 뛰어난 국제정치 안목을 보여 주고 백범의 「백범일지」는 그가 민족의 자유와 자존을 얼마나 존중했는지 말해 준다.
  • 벚꽃과 일본 장례풍습/강석진 도쿄 특파원(오늘의 눈)

    나라꽃은 곧잘 그 나라 「국민성」과도 비교되곤 한다.일본의 경우 화사하게 피었다가 함박눈처럼 한꺼번에 져 내리는 벚꽃의 모습이 일본인들의 행동과 닮았다고 말하는 논자도 있다.그 말에 수긍하느냐 여부는 각자 나름이지만 여하튼 일본인들은 피고(살고) 지는(죽는)데 독특한 점이 있는 듯하다. 자민당총재인 고노 요헤이(하야양평)외상 부인 다케코여사가 13일 숨을 거두었다는 부음을 접하면서도 「역시 일본인은…」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다케코여사는 수년전부터 지병으로 앓아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초까지 부군인 고노외상과 동행해 외국을 다녀오는 등 꼿꼿하게 내조해 왔다. 올해 53세인 그녀가 결정적으로 무너진 것은 지난 5월.6월들어서 재입원한 뒤에는 의식불명 상태가 계속됐다.그동안 고노외상은 선진7개국 회담에 참석하랴,오는 23일 참의원선거에 대비하랴,자민당총재와 외상의 업무로 영일이 없으면서도 출근전과 퇴근시 병원을 들러왔다고 한다. 하지만 참의원 선거가 점점 불을 뿜게 되면서 고노총재는 13일 다케코여사의 비보를유세현장인 다카마쓰시에서 들을 수 밖에 없었다.예정을 앞당겨 비행기편으로 귀경하면서도 주위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그동안 고노외상이 부인의 지병으로 쓰라린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자민당의 모리간사장등 불과 몇명 뿐이었다고 한다.무라야마 총리도 7월 들어서야 고노집안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해진다. 다케코여사는 지난 6일 잠깐 의식이 돌아왔을 때 참의원 지원유세에 오르는 부군에게 「힘내세요」라고 오히려 격려했다.상주가 된 고노총재는 14일 상중에도 불구하고 후쿠오카와 구마모토 유세를 예정대로 강행했다. 지난 1월 한신대지진때를 비롯해 각종 사고시 일본인들은 가족이 죽어도 울고불고 쓰러지기 보다는 손수건으로 눈물 한 두방울 찍어내고는 곧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은것 같다.장례식장에서 장례식을 치를때 유족들이 밤샘을 하지않고 집으로 돌아가 쉬는가하면 커다란 무덤을 만들지 않는 장례풍습등을 보면서 「꽃이 지는 모습」이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 「5·18 내란」 무혐의/검찰,불기소 결정/권력찬탈 의도 없어

    ◎공소시효 기산점 8월16일로 「5·18」고소·고발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지검 공안1부(장윤석 부장검사)는 6일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을 비롯한 이 사건 관련자들의 내란혐의에 대해 「혐의없음」등 불기소처분 결정을 내릴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같은 내용의 수사결과를 빠르면 다음주 안에 발표할 예정이다. 검찰관계자는 이날 『내란죄의 범죄구성 요건은 국헌을 문란할 목적의 폭동이 있고 무엇보다 권력찬탈 의도가 입증돼야 한다』면서 『고소·고발된 사안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때 내란죄를 적용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와 관련,『보안사의 「집권계획서」라는 문건 자체의 존재여부도 확인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허화평·허삼수·권정달씨 등 당시 보안사 핵심간부들에 대한 조사결과 「5·18비상계엄 확대조치와 군투입은 시국수습을 위한 대책의 일환으로 계엄법 등 실정법에 근거한 조치였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 등으로 미뤄 당시 신군부측의 권력찬탈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검찰은 또 이 사건 공소시효의 기산점은 80년 5월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로 결국 최전대통령이 하야한 같은 해 8월16일로 잡는 게 타당하다고 설명했다.이에 따라 이 사건은 오는 8월15일 내란죄의 공소시효 15년이 만료된다. 고소·고발인들은 검찰의 이같은 결정에 대해 불복할 경우 항고·재항고를 거쳐 헌법소원을 낼 수 있으나 남은 기간은 1달에 불과한 실정이다. 검찰은 지난해 12월부터 피고소·고발인 58명에 대한 소환 또는 서면조사를 모두 끝냈지만 핵심 참고인인 최전대통령에 대해서는 최전대통령의 조사거부로 조사하지 못했다.
  • 미­일 마지막「차담판」/제네바/“개방”­“방어” 맞서 타결 불투명

    【제네바 AP AFP 연합】 미키 캔터 미무역대표는 25일 밤 미국은 자동차 분규와 관련해 일본과 완전한 타결을 보지 못하면 일본에 대해 무역제재를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캔터 대표는 미국의 무역제재를 앞두고 일본의 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낭) 통산상과 26일 마지막 장관급 회담을 하기위해 제네바에 도착한 뒤 이같이 밝혔다. 캔터 대표는 타결전망에 대해 언급을 회피한 채 『우리는 현시점에서 모두 현실적인 입장에 있다』면서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일본시장을 개방하는 방도를 모색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라고 나에게 지시했다』고 밝혔다. 26일 하오 제네바에 도착한 하시모토 통산상은 25일 도쿄의 자민당 집회에 참석해 캔터 대표와 회담하면서 일본의 이익을 강력하게 방어하겠다고 말했다. 하시모토 통산상은 이번 회담에서 최선을 다하겠지만 나중에 후회할 만한 사항을 타협하지는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지지통신은 전했다.이 통신은 이와함께 하시모토 통산상이 제네바로 출발하기전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 총리와 고노 요헤이(하야양평) 외상을 만났다고 보도했다.
  • 김용순 월내 방일

    【도쿄 연합】 북한의 대외정책 책임자인 김용순 노동당 비서가 일본 연립여당 초청으로 빠르면 이번달 일본을 방문할 것으로 23일 알려졌다. 일·북한 관계 소식통은 양측이 쌀 제공문제에 정식 합의한 뒤 김용순 비서가 일본을 공식 방문해 고노 요헤이(하야양평) 부총리겸 외상(자민당 총재) 등 정부 고위층과 회담을 가질 것이라고 밝혔다.
  • 쌀 5만t 주내 북송 개시/남북차관급 북경회담

    ◎북 요구 15만t중 1차분/무상지원­해상수송 유력/북 “우성호 선원·시신 무조건 인도”/합의문 오늘 서울·평양 등 동시 발표될듯 정부는 17일에 이어 18일 열린 북경 남북당국자간 쌀회담에서 북한에 제공되는 쌀의 규모와 공여절차 등에 대한 협상이 대체적으로 매듭됨에 따라 이번 주중 북한에 보낼 쌀 1차분의 선적을 시작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정부는 북한측이 요청한 것으로 알려진 15만t의 쌀을 가급적 무상으로 전량지원하되 1차적으로 5만t정도를 보내고 나머지는 남북관계의 진전을 보아가면서 단계적으로 전달한다는 내부방침을 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는 그러나 북한이 북경회담에서 정부 대 정부의 무상공여에 대해서는 「자존심」을 이유로 거부반응을 보임에 따라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와 북한의 삼천리공사간 민간차원의 구상무역형식으로 북한에 쌀을 보내는 방안을 놓고 북한측과 막바지 절충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또 북경 남북쌀회담이 최종타결되면 나웅배부총리 주재로 통일관계장관회의를 즉각 소집해 유관부처간 협조방안을 비롯한 범정부차원의 후속지원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한편 대북 곡물지원경로로 정부는 「주해로종육로」방식을 고려하고 있으나 북측의 희망에 따라 목포·인천∼남포,부산·포항∼언산·청진항을 이용한 해로수송이 유력시되고 있다. 【북경=이석우 특파원】 남북한 대표단은 18일 대북한 쌀제공과 관련한 이틀째 회담을 갖고 제공규모와 방법·시기절차등에 대해 거의 합의,19일중으로 합의문에 서명한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날 북경의 모처에서 이석채 재정경제원차관고 전금철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수석대표로 열린 남북한 차관급 회담에서 양측은 북한에 대한 15만t규모의 대여와 1차분 5만t의 무상공급원칙에 대한 의견접근을 본후 구체적적인 전달방법등에 대해서도 대체적인 합의를 보았다고 북경의 한 외교소식통이 전했다. 양측은 인천을 통해 남포항으로 인도하는 방식과 판문점을 통해 육지로 수송하는 복수방안을 놓고 논의했으며.해상운송의 경우 제3국선박으로 인도하는 방식으로 논의했으나 구체적인 합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번 회담에서 양측은 지난달 30일 중국에서 귀환도중 북한에 피랍된 제86우성호 선원과 숨진 선원의 사체등을 한국측에 무조건 인도한다는 원칙에 잠정합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회담에서 북한측은 대남경협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부 대기업등의 대북투자등에 대해 한국정부가 제한하지 말하야 한다며 강한 불만을 제기했으며 이에 대해 우리측은 기업인의 방북인사에 대한 신변보장안전등 정부차원의 문제점을 더욱 보완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고 북경의 친북한 실업인들이 전했다.
  • 남한쌀 받는게 남북관계 도움(해외사설)

    북한 국제무역촉진위원회의 이성록위원장이 일본을 방문,지난 3월 북한방문단 단장으로 평양을 방문했던 와타나베 미치오(도변미지웅)전외상과 회담했다. 이 위원장은 이회담에서 북한의 식량부족을 처음으로 공식인정하며 쌀을 대여해달라고 요청했다.일본측이 84만t의 쌀재고가 있다고 설명하자 이 위원장은 『전부도 좋지만 80%정도라도 대여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그는 장마가 시작되기전 쌀원조가 실현될 수 있도록 서둘것을 요청했다. 북한은 4,5년전부터 냉해와 농업정책 실패로 심각한 식량난을 겪고 있다.그런 가운데 나타난 북한의 쌀지원 요청은 쌀부족이 매우 절박한 상황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같다.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총리는 이와관련,『인도적 차원에서 실현될수 있도록 노력하기 바란다』며 구체적인 검토를 지시했다.그러나 북한에 대한 쌀지원이 실현되려면 우선 대여방법과 한국의 이해를 구하는 두가지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 고노 요헤이(하야양평)외상은 『국가와 국가의 거래는 국교가 없으면 어렵다』며 난색을 표시했다.그점에 대해서는 그러나 인도적 조치라면 국제적십자사나 유엔식량농업기구(FAO)등을 이용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일본정부로서는 쌀대여를 양국관계개선과 연계시키는 노력도 필요하다. 이 위원장은 이번에 『한국으로부터도 쌀의 원조나 대여 제의가 있으면 검토하고 싶다』고 밝혔다.지금까지 한국은 여러차례 인도적 식량원조를 제안해왔다.그러나 북한이 이를 거부했다.한국은 「북한이 일본에 대해 원조를 요청하는 것은 한·일관계를 악화시키려는 저의가 있다」며 일본의 신중한 대응을 요청해왔으나 이번에는 유연한 대응 방침을 시사하고 있다. 한반도안정에는 남북한 관계개선이 필수적이다.이때문에 북한은 먼저 한국의 원조를 받기 바란다.국제기관을 통해 남북한이 협력하는 방법도 있다. 인도적 원조는 신속히 실행할 필요가 있다.그렇지만 간단치 않은 것은 북한의 핵문제등이 국제사회의 불신을 사고 있는등 북한이 외교적 고립에 빠져있기 때문이다.북한은 그러한 점을 잘 생각하여 쌀의 지원을 받을수 있는 조건을 정비하기 바란다.
  • 옴교 간부 10여회 방북/일 신진당의원 주장

    【도쿄 연합】 일본 신진당의 히라노 사다오(평야정부)참의원 의원은 24일 국회에서 옴 진리교의 하야카와 기요히데(조천기대수·교단 「건설상」)용의자가 북한을 십수차례 방문했다고 주장했다.
  • “독가스 공중살포도 계획”/옴교/당초 헬기·박격포 동원 추진

    ◎체포신도들 진술 【도쿄 AFP 연합】 도쿄 지하철에 독가스를 살포한 혐의로 수사받고 있는 옴진리교단은 지하철에 독가스를 살포키로 결정하기 전에 독가스 공중살포를 계획했다고 산케이(산경)신문이 23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옴진리교단은 당초 무선조종되는 헬리콥터·박격포·비행기등을 이용해 독가스를 살포할 계획이었으나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와 그의 참모들은 여러차례 회의를 거쳐 결국 도쿄 지하철을 공격키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신문은 체포된 옴진리교단 부속병원 의사인 하야시 이쿠오를 비롯한 교단 관계자들이 독가스 공중살포 계획을 시인했다고 보도했다.
  • 옴 신도10명이 사린 살포/일경,독가스 수사/5대열차에 분승,범행

    【도쿄 교도 연합】 지난 3월 20일 발생한 도쿄 독가스 테러사건을 수사중인 일본경찰은 옴 진리교의 과학기술성 대신인 무라이 히데오가 5명의 신도들에게 범행을 지시했음을 밝혀냈다고 경찰 소식통이 21일 전했다. 소식통은 무라이가 사건 전날인 3월 19일 5명의 신도에게 구체적으로 범행을 지시했으며 범인들은 범행에 앞서 도쿄의 한 은신처에서 다른 신도 6명과 함께 모여 최종 범행을 모의한 것으로 체포된 치료성 대신 하야시 이쿠오가 진술했다고 말했다. 소식통은 이어 범인들은 도쿄 시부야의 한 은신처에 모여 범행에 대한 최종모의를 했으며 이 자리에는 옴 진리교 내무대신 니이미 토모미쓰를 포함한 5명의 다른 신도들이 참석했다면서 사건 당일 10명의 신도들이 히비야,지요다,마루노우치선을 운행하는 5대의 열차에 사린을 갖다 놓기 위해 도쿄지하철역으로 떠난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 일 자민당내 우익의원 단체/“부전결의 채택 보류” 결의

    ◎중·참의원 60%이상 가입… 논란 예상 【도쿄 연합】 종전 50주년에 즈음한 일본 국회의 부전결의 채택에 반대하고 있는 자민당의 「종전 50주년 국회의원연맹」(회장 오야성량)은 17일 총회를 열어 국회결의 채택을 보류시키기로 결의했다. 총회는 『국회결의는 모든 교섭단체가 만장일치로 채택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국론이 분열돼 정치혼란을 가속시키는 상황에서는 결의를 보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자민당은 의결기구인 총무회 간담회를 열어 국회결의 문제에 대한 당론을 논의할 예정이나 중·참의원 전체의 3분의2이상이 가입하고 있는 이 의원단체가 「보류」를 결의함으로써 앞으로 의견수렴에 적지않은 진통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의원연맹은 결의에서 『일방적으로 침략행위나 식민지지배를 반성하고 사죄하는 결의를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단죄를 시인하는 것』이라고 늘어놓았다. 의원연맹은 앞서 사회당위원장인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 총리가 자민당총재인 고노 요헤이(하야양평) 부총리겸 외상,사키가케 대표인다케무라 마사요시(무촌정의) 대장상에게 「국회결의에 침략적행위와 식민지배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있다는 내용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밝힌데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다.
  • 한림대과학원 국제학술심포지엄

    12∼13일 한림대 한림과학원(원장 현승종) 주최로 서울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열린 국제학술 심포지엄은 21세기의 한국이 선택할 이념과 정책 및 동북아시대의 한·미·일 3국의 「경쟁과 협조」관계를 집중 조명했다.이번 심포지엄에 참여한 와다 하루키(화전춘수)도쿄대교수와 이정걸중국사회과학원 동구중아연구소 부소장이 각각 「일본의 대한 정책 이념」및 「중국의 대외정책과 한중관계」라는 주제로 발표한 논문을 간추려 본다. ◎전후일본의 대한정책 변화/과거 한반도진출 비판세력 늘어/와다 하루키 일 동경대학교 교수 전후 일본정치의 흐름은 보수와 혁신의 정치조류로 크게 나눌 수 있다.문제는 보수의 내부,혁신의 내부의 차이를 구별하는 일이다. 전후 일본의 보수본류는 요시다 시게루(길전무)가 개척했다.자유당총재로서 총리대신과 외무대신을 각각 5차례 역임한 요시다는 전후 개혁기에서 부터 강화 독립에 이르기까지 일본정부의 중심이었다.요시다는 재일한국인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과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요시다의 보수본류는미일관계의 처리에 모든 주의를 집중한 반면 조선 한국 대만에 대해서는 어떤 반성도 없이 낡은 관념에 기초한 나머지 사무적인 대응을 보였다. 보수방류의 대표는 기시 노부스케(안신개)다.기시는 57년 총리대신과 외무대신을 겸직했으며 59년에는 관방장관이 되었다.기시는 구보타(구보전관일낭)발언을 철회했고 한일회담의 재개에 합의했다.기시는 그러나 재일한국인을 줄이자는 취지에서 한국정부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재일한국인의 북한행을 허가했다.기시에 이르러 보수본류는 경제주의로 경도되었다.그리고 보수본류의 경제주의는 시나 에쓰사부로(추명열삼낭)의 아시아주의와 결부해 한일회담을 타결시켰다. 보수본류측에서 생겨나고 있는 흐름을 주도하는 사람으로는 미야자와 기이치(궁택희일) 전총리대신을 들 수 있다.미야자와는 82년 관방장관으로 있을 때 일본의 교과서문제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비판에 대한 담화에서 「반성과 결의」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다.종군위안부에 대한 문제도 미야자와내각에서 비로소 제기됐다. 호소카와 모리히로(세천호희)는 총리대신이 된 뒤 최초의 기자회견에서 「침략전쟁」,「잘못된 전쟁」이라고 발언했다.호소카와는 곧 좌절했으나 그의 위치는 신보수 리버럴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오자와 이치로(소택일낭)는 또 다른 신보수의 흐름을 대표한다.오자와는 33년에 낸 「일본개조계획」에서 「보통국가가 되자」라는 슬로건을 주창했다.여기에 대해 신당 사키가케(선구)를 창당한 다케무라 마사요시(무촌정의)는 일본은 어디까지나 비군사적인 형태로 국제사회에 공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보수적 지식인 가운데서도 도쿄대 문학부장과 총장을 역임한 하야시 겐타로(임건태낭)와 교토대교수를 지낸 이노키 마사미치(저목정도)처럼 과거 일본의 진출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중국 대외정책과 한중관계/선린우호관계 개혁추진에 큰 도움/이정걸 중 사회과학원 부소장 중국의 대외정책은 일정한 이론에 의해 지도돼왔다.이 이론은 중국 지도층의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과 국가이익에 대한 이해에 바탕을 두고 결정됐다. 중국의 대외정책은 50년대에는 좌익 일변도의 정책이었고 60년대는 반미반소 정책,70년대는 범세계적 반소 통일정책,80년대이후에는 각국 자주독립 평화 외교정책으로 발전돼왔다. 50년대 중국의 대외정책 이론은 소련을 우두머리로 하는 사회주의 진영의 이익과 승리만을 위한 정책노선이었다. 중국은 이에 따라 50년대초 조선전쟁에 지원군을 파견했으며 이는 자신의 안전 확보는 물론 미국의 「전쟁정책과 침략정책」을 반대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중국의 이같은 정책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련패권주의에 반대한다는 기치 아래 제3세계와 함께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것으로 전환됐다. 당시 중국은 한국을 제3세계로 분류했으나 조선반도의 특수한 정세와 한국·대만간 외교관계 때문에 양국관계는 정상화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새로운 외교노선이 수립된 이후 중국의 한국에 대한 적개심은 분명히 감소되기 시작했고 중국의 한국에 대한 견해도 변화되기 시작했다. 중국은 80년대들어 다시 대외정책을 조정,중국 외교정책의 최우선 목표를 「국내의 개혁과 발전을 위해 국제환경특히 주변환경을 평화스럽고 안정되게 창조하고,사회제도나 이데올로기의 같고 다름을 이유로 우적관계를 논하지 않으며,평화공존의 원칙위에서 모든 국가와 우호·협력관계를 발전시키고,자본주의가 발달한 국가가 이룩해낸 모든 선진문명의 결과를 흡수·이용하는데 적극적인 입장을 취한다」는데 두었다. 이제 한국이 중국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살펴보면 최소한 다음 3가지를 확언할 수 있다. 첫째 한국은 중국의 중요한 인접국이기 때문에 양국이 선린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국으로 하여금 국내개혁을 도모하고 평화적이고 안정된 주변환경을 조성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된다는 점이다.두번째는 한국은 신흥공업국가로서 경제·과학기술상 잠재력이 크기 때문에 중국의 대외개방추진에 있어 중요한 합작대상이 되고 마지막으로 한국의 문화·역사·전통등이 중국과 유사해 한국 현대화의 성공은 중국에 특수한 귀감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중양국이 선린우호관계와 상호협력관계를 발전시킬 것이라는 전망에는 전혀 변화가 없을것이다.
  • 2차대전중 일 잔학행위 사과/3당당수,국회결의 합의

    【도쿄 로이터 연합】 일본 연립정권 3당 당수들은 8일 회담을 갖고 오는 6월 18일에 끝나는 국회 회기 중에 전후 50주년과 관련,그동안 논란을 빚어온 2차대전중 일본의 잔학행위를 사과하는 국회결의를 하기로 합의했다.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 총리(사회당 위원장)는 이날 자민당 총재인 고노 요헤이(하야양평) 외상과 사키가케 대표인 다케무라 마사요시(무촌정의) 대장상 등 연정 파트너들과 당수 회담을 갖고 이같이 결정했다. 그러나 국회결의에 반대해온 연정내 강경파 의원들은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사과 결의를 방해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고,연립여당의 한 관계자도 합의는 됐지만 무라야마총리가 결의안을 통과시킨다는 보장은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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