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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 식량난/일서도 엇갈린 평가

    ◎관방장관 “위기상황… 지원 필요”/실무담당부서 “그정도 아니다” 북한의 식량사정에 대해서 서로 엇갈리는 정보가 난무하고 있다.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일본 정부안에서도 북한 식량사정에 대한 판단은 일치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부대변인인 노사카 고켄(야판호현) 관방장관은 지난 27일 『수확기가 지나 당장은 위기적 상황은 아니지만 내년 6·7월이 되면 대단히 위기적인 상황이 될 것』이라는 인식을 표명했다.이에 앞서 대북한 접촉창구역을 도맡다시피하고 있는 가토 고이치(가등굉일) 자민당간사장도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 발언한 바 있다. 그러나 외무성이나 식량청등 실무 담당부서의 일부에서는 다른 판단도 흘러 나오고 있다. 북한이 홍수로 피해를 보았지만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식량지원으로 홍수에 따른 피해는 메웠다는 것이다.북한이 해마다 만성적인 식량부족을 겪고 있지만 올해가 특별히 어려워 위기에 봉착했다고 볼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이런 판단에는 지난 19일 중국을 방문한 고노 요헤이(하야양평)외상에게 전기침 외교부장이 『이번 여름에 북한이 대규모 수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 바로 위기적인 상태가 발생할 상황은 아니다.북한의 농업은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듯하다』고 언급한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외교소식통은 『북한이 2백만t정도의 식량이 부족한 것은 늘 그랬던 것』이라면서 『이런 상황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홍수피해등으로 극단적 상황을 맞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 『위기상황이라는 이야기는 국제기구나 미국쪽에서 많이 흘러나오지만 다소의 의도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지적했다. 한편 북한이 일본의 2차 쌀지원분 가운데 5만t가량만 실어간채 나머지 부분의 수송을 늦추고 있는데 대해서도 배경설명은 여러갈래.우선 홍수로 인해 철도와 창고등이 타격을 입어 운송보관이 어렵기 때문이라는 관측으로부터 북한이 연료부족으로 수송선을 보내지 못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또 다른 외교 소식통은 『쌀 수송선의 귀환 연료와 항만사용료는 조총련계의 한해운회사가 지불해 왔으나 소형선박으로 자주 오고가는 데 대해 이 회사가 대형선박으로 바꿔 줄 것을 요구하는 등 마찰이 있었다』면서 『이로 인해 늦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 교토­오사카 교포사회(세계속 한인촌 탐방:5·끝)

    ◎20∼30대 배우자 80%가 일본인/서툰 한국말… 다다미 깐 일본집서 한국식 제사/차별 줄어들고 고학력화… 관리·사무직 늘어나/어렵게 일군 삶의 터전 소유권분쟁에 휘말리기도 해방50년.재일동포의 삶은 일본사회의 차별과 무관심속에 고난의 길을 걸어왔다.하지만 지문날인 철폐운동등 피어린 투쟁과 일본인의 차별의식 약화,한국의 국제적 위상 제고 등으로 뒤늦게 나마 빛이 들고 있다.소외자에서 이제는 「끼여들기」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재일동포는 앞으로 어떻게 삶을 정립해 나갈 것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 묻고 있다.이 물음은 한반도에 거주하는 한국인,한국정부도 모두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문제다.한국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 정립이 시간이 갈수록 점차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재일동포의 빛과 그림자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지역중의 하나가 교토(경도)시 부근 우지(우치)시에 있는 우토로지역이다.그곳을 취재하기 위해 교토를 찾아 「우토로 토지대책위원회」초대 사무국장을 지낸 교토민단 남지부 감찰위원장 김소도씨를 만났다. ○일제 패망전 강제연행 뜻하지 않은 손님을 맞게 된 김위원장은 귀찮아 하는 기색없이 교토역앞 중국요리집으로 약속장소를 정했다.그곳에서 열리는 「오카모토(오본)」가와 「하야마(엽산)」가의 결혼식장에서 접수를 보고 있겠다는 것이었다. 그 결혼식은 일본이름에도 불구하고 재일동포끼리의 결혼식이었다.결혼식은 피로연에만 손님이 초대되는 일본식.피로연은 사회자의 일본어 인도에 따라 먼저 일본말 축가등이 불려지고 있었다.1백50명정도의 하객이 모여 성황인 그 자리에는 기모노를 입은 여성이 1∼2명 눈에 띄었다.양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인도 참석한 것이다.그러나 상당수는 한복 차림이었다.우토로주민들이었다.이들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인 기자에게도 음식을 마음좋게 자꾸 권했다. 1시간여 지나 아리랑과 새타령,돌아와요 부산항에 등이 경쾌한 템포로 흘러나오자 분위기가 일변.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일본인의 결혼식에서는 보기 어려운 광경이다.신부 어머니가 낯 모르는 기자를 대하면서 한국말이 서툴러 미안해 할 정도지만 마음속의 신명은 그대로였다.덩실 춤은 1시간이나 계속됐다. 피로연이 파할 무렵 김위원장과 우토로지역으로 향했다. 이곳은 일제가 패망전 한 회사를 만들어 그 회사로 하여금 비행장을 만들도록 하던 곳이다.강제연행돼 오거나 막노동꾼으로 흘러들어온 재일동포를 부려 비행장을 건설하다가 패망했다.그들은 조선인 노동자를 방치했다.보상은 커녕 귀국여비조차 지급하지 않았다.조선인은 건설현장 한구석 「함바(반장·노무자 합숙소)」에서 새로운,그러나 고달픈 삶을 개척해 나갈 수 밖에 없었다.이제는 6천4백평 대지위에 모두 재일동포인 80가구 3백80명이 살고 있다.고다쓰(각로)와 다다미를 깐 일본식 새 집을 지은 우토로의 동포들은 한국식으로 제사를 지내며 살고 있다. 그 회사는 지금 닛산자동차 계열회사인 닛산샤다이(차로)다.그런데 땅값이 치솟던 거품경제의 절정기인 88년 6월 돌연 한 부동산회사가 토지를 명도할 것을 요구했다.닛산샤다이로부터 우토로토지를 매입했다는 것이다.재일동포 주민에게는 큰 충격이었다.힘겹게 닦아놓은 삶의 보금자리를 억울하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지금은 소유권을 둘러싼 재판이 진행중이다.김위원장은 『끌어다가 고생시키고 내팽개치더니 죽을 고생해 이제 살만하게 만드니까 나가라고 한다』고 분노한다. ○한국명절때 시장 북적 우토로는 불완전한 전후처리를 상징한다.해방후 헌 신발짝처럼 내팽개쳐진 동포들이 제법 터전을 일구고 일본사회에 끼여들고 있지만 아직도 식민통치로 입은 상처가 아물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또 교묘하게 민사화됨으로써 제3자가 개입하기 어려운 전형적인 차별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재일동포가 받는 차별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취직도 예전보다는 쉬워졌다.일본사회에 끼여들게는 되고 있는 것이다.하지만 여전히 취직도 일본인보다는 상당히 어렵고 진급은 더 어렵다.이와관련,김세택 오사카총영사는 『사람이면 사람 대접 받아야 한다.이름도 제대로 쓸 수 없다면 동포들이 겪는 어려움을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몇년전 귀화해 오사카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이와미 히데노리(암견영헌)씨도 『귀화한 뒤 사업을 해 보니 세무서와의 관계,은행융자에 있어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말한다. 오사카 조센이치바(조선시장).입구에는 「태백산에서 10년동안 기도한 도사」라고 한글로 써놓은 선전문구를 땅바닥에 펴 놓은 한국인 여자 점쟁이가 동포를 상대로 일본말로 손금을 봐주고 있다.이곳에서 2대째 덕산물산이라는 튼실한 상점을 운영하고 있는 홍여표씨는 『50년대까지만 해도 추석과 설 명절 때 조선시장은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면서 『요즘도 한국명절이 되면 붐비지만 예전 같지는 않다』고 말한다.홍씨는 『해외교포가 자랑할 수 있는 민족교육이 아쉽다』고 토로한다. 주재원을 제외한 순수 재일동포는 94년 현재 57만명 수준.1세대는 5% 내외이고 2·3·4세들은 한국말과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 상태에서 차별을 통해 강요되는 일본동화를 피하지 못하고 있다.재일동포가 돈을 갖고 조국을 떠난 것이 아니다.차별과 생활고의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국적을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나라사랑도 각별해 올림픽은 물론 나라의 기쁘고 슬픈 일에 꽤 많은 성금을 마다하지 않았다.경제발전 초기단계에 재일동포의 기여는 높이 평가돼야 한다.나라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하다.참정권운동을 벌이고 있는 2세 김정규(코리아 투데이발행인)씨는 『올림픽은 정말 감동적이었다』면서 『재일동포가 생활은 스스로 한다.나라가 잘되는 것이 가장 고맙다』고 말한다. ○생활고 불구 성금 쾌척 그러나 지난 84년 64만명이었던 숫자가 귀화자가 연간 7천명 안팎으로 늘면서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최근 재일동포 자녀들의 결혼상대는 80%가 외국인,바꿔말해 일본인이다.동포들의 주요 업종은 빠찡꼬,야키니쿠(불고기)집,막노동등이다.최근 들어서는 관리직·판매업·사무직등 종사자가 늘고 있다.이들 3업종 종사자는 74년 4만8천6백여명이었으나 94년에는 10만5천명으로 늘어났다.직업별 구성비는 일본사회 전체 비율에 근접하고 있다.고학력화의 결과다.통계로 보나 동포들의 실생활을 보나 예전보다는 나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진전의 이면에서 그들은 아이덴티티 정립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벌써 한국말이 불편한 2·3세들이 머리가 허옇게 센 노·장그룹이 되고 있다.교토민단 김재하(의사)단장은 『한국인으로 살 것인지,한국계 일본인으로 살 것인지,일본인으로 살 것인지 한국정부도 깊이 생각하고 어떤 방향이 결정된다면 그에 맞는 정책이 수립돼야 할 것』이라면서 『한국민이라면 국민으로서의 교육을 받을 권리가 동포에게도 있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김총영사는 『재일동포도 국민임을 재일동포 뿐 아니라 정부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면서 『서울의 국민과 같이 대우해줘야 한다.독일이나 미국이 일본에 자국민이 60만명이상 거주한다면 우리처럼 방치했겠는가.교육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김총영사는 특히 재미동포는 다수 기용되면서도 어려움속에 조국사랑이 남달랐던 재일동포가 본국정부에 아무런 목소리를 갖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 했다. ◎적극적 사회참여로 권리 찾아야/재일동포 사회 이끌 전문가양성이 가장 중요/미야쓰카 도시오 산리학원대학 교수·재일동포 전문가 재일동포에 대해서는 일본사회가 대체적으로 공헌을 하고 있다기보다는 짐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다.하지만 빠찡꼬산업을 예로 들어보면 서민의 오락으로 자리잡은 빠찡꼬산업을 일으킨 것은 재일한국인·조선인들이다.일본에 우체국이 1만8천곳 있고 슈퍼마켓이 4만5천여곳인데 빠찡꼬 점포는 1만8천곳이다.빠찡꼬 업소경영자의 70%는 재일한국인·조선인이다.폭력단과의 연계,탈세 등이 문제되고 있지만 국가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이만큼 발전시켰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이제 이들에게 햇빛을 주어야 한다.최근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이 줄고 있지만 일본국가가 재일동포에게 무엇을 했는지를 생각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없다. 재일동포는 일본 전체인구의 1%도 안되는 적은 숫자다.재일동포에 대해서 일본인들은 왜 일본에 재일한국인·조선인이라는 사람들이 있는지 역사적 배경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한반도의 분단과 민단·조총련의 분열도 일본인들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주고 있다.재일동포에게 불행한 시절이 있었지만 미래는 밝게 개척하지 않으면 안된다.다만 현재의 재일동포의 상황으로는 문제가 잘 풀릴지 의문이다.일본사회의 차별은 금방 없어지지 않는다.재일한국인·조선인 3세 정도면 거의 일본인화돼 있다.이제는 일본정부에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일본사회에 참여하면서 권리를 획득해야 한다.빠찡꼬와 불고기집이 지금까지의 동포들의 대표적인 산업이었다면 이제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빠찡꼬나 불고기집 경영자만이 아니라 과학자,기업가,교육·문화계 인사가 나와야 한다.이런 사람들이 재일동포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
  • 「12·12」 기소이후 「5·18」 수사 전망

    ◎전씨 내란·수뢰혐의 곧 추가기소/최씨 하야까지의 정권찬탈 과정 규명/관련자 새달 중순 일괄 사법처리할듯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이 12·12 사건과 관련해 21일 군사반란 등의 혐의로 기소됨으로써 앞으로 12·12 및 5·18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종찬)의 수사는 5·18과 전씨의 비자금 사건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물론 12·12 사건에 대한 보강수사는 계속된다.12·12 사건은 5·18에 이르기까지 「다단계 쿠데타」의 첫 단추에 해당하기 때문이다.당시 최규하 대통령이 신군부측에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연행을 재가한 과정 등이 보강 수사의 한 예다. 검찰이 5·18 사건 피고소·고발인들을 소환해 집중적으로 조사할 부분은 ▲80년 4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 겸직 경위 ▲5·17 비상계엄 확대 경위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병력 출동 경위 ▲광주에서 진압군 발포 명령 하달 및 양민학살 경위 ▲80년 8월16일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 과정 등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12·12에서부터 5·18과 최전대통령의 하야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이 신군부의 정권 찬탈 계획에 따라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이미 기소되기는 했지만 전·노씨에 대한 수사도 계속된다.지금까지는 주로 12·12 군사 반란혐의에 대해서만 조사했기 때문이다.다만 전씨가 계속해서 식사를 거부하면 수사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게 될 수도 있다. 검찰은 신군부에 대한 조사를 내년 1월 중순쯤 마무리하고 일괄 사법처리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전씨측은 21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특별법에 대해 위헌소송을 내겠다고 밝히고 있다.대통령 임기중에는 공소시효가 정지된다는 것,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나머지 관련자들도 소급 처벌하겠다는 것이 헌법에 위반된다는 주장이다.따라서 특별법에 근거한 5·18 재수사 자체가 위헌시비에 휘말릴 소지도 없지 않다. 그러나 검찰은 이같은 위헌 시비를 피하기 위해 5·18 사건 공소시효의 기산점을 81년 1월24일 비상계엄 해제일로 잡는다는 방침이다.그로부터 15년이 되는 내년 1월23일까지 기소하면 특별법에 대한 위헌시비에 상관없이 관련자들을 처벌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와 함께 검찰은 전씨 비자금 사건에 대한 수사에도 힘을 기울여 이달말쯤 전씨를 특가법상의 뇌물수수혐의로 추가 기소한다는 계획이다.예상과는 달리 이날 검찰이 전씨를 뇌물수수혐의로 기소하지 않은 것은 잔액규모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현재 검찰이 밝혀낸 전씨의 비자금 조성 규모는 3천억원,보유 잔액은 3백억원 가량이다. 비자금 수사는 기소 후에도 계속된다.이종찬 본부장은 물론 수사 실무진도 『전씨 친인척과 측근들의 것으로 보이는 1백83개 계좌의 자금을 추적하려면 최소한 2∼3개월은 걸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검찰은 전씨 비자금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핵심 측근들의 부정축재 등 비리가 드러나면 모두 사법처리한다는 방침이다.
  • 최후까지 가능조치 총동원 태세/강경대응 치닫는 전씨측 기류

    ◎단식·위헌소송·법리공방 전략 확고 전두환 전대통령의 병원이송 이후 전씨주변 기류가 더욱 강성으로 치닫고 있다.5·18특별법 제정으로 운신의 폭은 좁아졌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법적·현실적으로 가능한 모든 조치를 동원할 태세다.5공의 「정통성 사수」라는 전략에도 변함이 없다. 전씨측이 구사할 카드는 대략 석장 정도로 압축된다.첫째는 전씨의 신병문제다.전씨는 21일 상오 병원을 찾은 법률고문 이양우 변호사에게 『나는 괜찮아』라고 말했다.링거주사를 거부한 채 손가락으로 염주만 굴렸다는 것이다.의식을 잃어 강제로 영양제 주사를 맞을 때까지 단식은 계속될 것이 뻔하다.비자금수사로 전씨의 도덕성에 흠집은 가겠지만 동정여론이 퍼질 가능성도 있다.전씨는 이를 노린듯 하다. 두번째 카드는 헌법재판소에 5·18특별법의 위헌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다.재판부를 통해 위헌신청을 할 수도 있다.정호용 허화평 허삼수의원 등 관련 피고소인들도 위헌소송에 동참키로 했다고 이변호사는 전했다.시기는 법률 공포직후로 예상된다.그는 위헌소송이나 신청 자체가 재판절차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는 재판부에 달려 있다고 언급했다.그러나 노림수는 따로 있는 것 같다.전씨 구속과정에서 절차의 적법성 시비를 최대한 부각시켜 현정부에 도전해 보겠다는 숨은 의도가 엿보인다. 세번째 카드는 재판과정에서의 법리 공방이다.이변호사를 포함한 변호인단은 법정에서 5·18특별법이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한 형법불소급의 원칙에 정면으로 저촉되는 소급입법이자 정치보복이라는데 변론의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공소시효에 대해서는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한 지난 80년 8월16일부터 기산,지난 8월15일 만료됐다는 점을 강력하게 주장할 예정이다.이미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 내란이나 군사반란과 관련된 판례들을 구해 분석작업중인 것으로 알려졌다.구체적인 본안에서는 『12·12에서 5·18에 이르는 과정이 사전 모의에 의한 다단계 쿠데타였다』는 검찰측 논리에 사안별로 일일이 반박한다는 전술을 짜놓았다.88년 광주청문회 후 4∼5년에 걸쳐 1백여명에 이르는 관련자 증언을 토대로 6백50여쪽 분량의 변호자료를직접 작성했던 이변호사는 『법정공방에 관한 한 자신있다』고 틈만 나면 강조한다.
  • 북 식량부족 사태 위기상황 아니다/전기침 주장

    【도쿄 연합】 전기침 중국외교부장은 올여름 홍수피해에 따른 북한의 식량부족 사태가 위기상황은 아니라는 견해를 제시했다고 일본의 지지통신이 19일 보도했다. 전부장은 이날 북경에서 고노 요헤이(하야양평) 일본외상과 가진 회담에서 『북한의 홍수피해가 큰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당장 위기적 사태가 발생할 상황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가족 전재산 20억 안넘어”/「뉴스피플」 최규하씨 2남 인터뷰

    ◎1차조사서 핵심내용 모두진술/재임당시 주요면담기록도 보관 최규하 전대통령은 지난 12일 검찰의 1차 방문조사 때 지난 80년 대통령 하야 등 신군부와 관련된 핵심내용을 모두 진술한 것으로 20일 밝혀졌다.또 최전대통령은 대통령 재임당시의 주요내용을 메모형식으로 기록해 보관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같은 사실은 최전대통령이 지난 16일 검찰의 2차 방문조사에 불응하는 대국민성명을 발표한 다음날 이기창 고문변호사·최흥순 비서관 등과 함께 대책회의를 가진 최전대통령의 둘째아들 종석(45·회사원)씨가 최근 발간된 서울신문의 자매지 「뉴스피플」과의 단독인터뷰에서 밝힌 것이다. 최종석씨는 『아버님은 누가 하라,하지 말라고 해서 마음이 움직이실 분이 아니다』라며 『강압으로 대통령을 그만뒀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강조했다.그는 『검찰의 1차 조사 때 「정사」에 관련된 내용은 모두 언급했으며 당시의 면담기록도 보유하고 있다』며 『그런데 야사까지 답변을 요구했기 때문에 거부한 것』이라고 밝혔다. 최씨는 또 80년 5월 최전대통령의 중동방문이 신군부의 압력에 따른 출국이라는 주장에 대해 『오일비축량이 27일분에 불과한데다 때마침 사우디에서 현대근로자 난동사건까지 발생,아버님은 무척 당황해 하셨다』며 『대통령특사를 보내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72년 1차 오일파동때 대통령특사로 사우디 등을 방문한 경험이 있어 자진해서 중동을 방문,오일문제를 해결했다』고 전했다. 그는 최전대통령에 대해 계좌추적을 하더라도 가족의 전재산이 결코 20억원을 넘지는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전두환 전대통령으로부터 1백75억원을 수수했다고 주장한 민주당의 강창성 의원 등을 명예훼손혐의로 고발하겠다고 밝혔다.
  • 5·18특별법 제정후 검찰 재수사 수순

    ◎「다단계 쿠데타」 입증… 내란죄 추가기소/12·12핵심­광주투입 지휘관 모두소환/관련자 1월 중순까지 일괄 사법처리 검찰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군사반란 혐의로 21일 기소하기로 한데 이어 5·18 사건 관련자들의 내란 혐의를 규명하는 수순에 들어갔다. 검찰은 20일 5·18특별법에 근거해 지금까지 비공식적으로 진행해 오던 5·18사건 수사를 표면화시켜 관련자들을 소환하는 한편 법리 검토 작업도 계속했다. 지난번 5·18수사 때에는 「성공한 내란은 처벌할 수 없다」는 사법심사 배제론을 근거로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을 뿐,내란과 내란 목적살인 등 혐의에 대해서는 사실상 판단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환 서울지검장은 이와 관련,『신군부측이 합법적인 외양을 갖추기 위해 세심한 배려를 한 것은 사실』이라면서 『그러나 법 운영 이면에는 불법적인 저의가 상당 부분 드러나고 있다』며 내란 혐의의 입증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검찰은 우선 5·18 피고소·고발인 53명 가운데 전·노 두전직대통령을 비롯,이미 소환 조사를 마친 28명 이외의 나머지 피고소인들을 조사하는데 주력할 방침이다. 조사를 받은 피고소인에는 전·노 두 전직대통령과 황영시 전1군단장,허삼수 전보안사 인사처장,박준병 전20사단장 등 12·12사건과 연관된 핵심관련자 13명 중 11명이 포함되어 있다. 검찰은 당시 20사단 61연대장이었던 김동진 합참의장과 20사단 62연대 2대대장이었던 유효일 소장 등 5·18 당시 일선 지휘관 자격으로 광주에 투입된 현역 군인 9명에 대해서는 군검찰에 수사를 맡겼다. 이처럼 5·18 관련자들을 재소환하는 이유는 이른바 「다단계 쿠데타론」을 입증,내란 혐의를 적용하기 위해서다.물론 지난번 수사 기록도 최대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이는 12·12사건으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측이 정권 찬탈을 목적으로 4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서리겸임­5·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5·18 광주사태 무력진압­5월20일 임시국회저지­5월30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80년 8월16일 최규하 전대통령 하야­9월1일 대통령선출­81년 1월24일 비상계엄해제­3월3일 대통령취임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행동이 사전 계획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한 것이다. 검찰은 또 위헌 시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이 사건의 공소시효 기산점을 최전대통령 하야일인 80년 8월16일에서 비상계엄해제일인 81년 1월24일로 늘려 잡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는 1월 중순까지는 5·18 관련자들을 사법처리한다는 계획 아래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여기에다 검찰은 피고소·고발인들의 개개인들에 대한 구체적인 혐의를 확증하기 위한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즉,12·12 및 5·18사건에서 핵심 역할을 한 보안사 4인방,경복궁 모임 가담자 10여명,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한 신군부측 인사 등 가운데 사법처리 대상자를 선별,내년 1월 중순 일괄처리할 예정이다.
  • 방중 고노 일외상 과거사 직시 다짐

    【북경 AFP 연합】 북경을 방문 중인 고노 요헤이(하야양평)일본 외상은 19일 일본과 중국이 선린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전쟁중 과거사를 「올바른 자세」로 바라보겠다는 일본 정부의 다짐을 재확인했다. 중국 외교부의 진건 대변인은 고노외상이 전기침 중국 외교부장과의 2시간30분에 걸친 회담에서 『일본과 중국 관계의 발전이 일본 외교정책의 최고 목표』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 12·12­5·18 진상규명 가속화/「특별법」제정이후 검찰행보

    ◎“시효 걸림돌 해소” 관련자 소환 박차 5·18특별법이 19일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5·18에 대한 검찰의 재수사가 본궤도에 오를 전망이다.특별법의 제정으로 재수사의 법적 틀이 새로 마련된데다 공소시효라는 걸림돌도 제거됐기 때문이다.12·12 및 5·18 특별수사본부는 이날 가능한 빠른 기간안에 이 사건에 대한 수사를 끝내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검찰은 지난달 30일부터 12·12사건을 재수사하면서 군형법상 군사반란혐의에 대한 공소시효가 남아 있는 전두환 전대통령을 전격구속했다.비자금사건으로 구속기소된 노태우 전대통령에 대해서도 군사반란죄를 추가하겠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12·12사건 당시 정승화 전육군참모총장을 강제연행하는 등 군권장악에 참여한 핵심관련자들은 군사반란 등에 대한 공소시효가 만료돼 처벌할 수 없었다. 5·18사건도 마찬가지.공소시효의 기산점을 최규하 전대통령의 하야일인 80년 8월16일이나 전전대통령의 11대대통령 취임일인 9월1일로 잡아야 한다는 의견이 재·조법조계에서는 다수를 차지했다.이 경우 전·노씨를 제외한 나머지 관련자에 대한 공소시효는 이미 만료됐으며 전·노씨에 대해서도 내란 관련혐의는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해석이 뒤따랐다. 이같은 상황에서 특별법은 「헌정질서파괴범죄를 저지른 뒤 대통령이 되었거나 대통령 재임중 이같은 범죄를 범한 자에 대해서는 재임기간중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될 뿐만 아니라 다른 공범자에 대해서도 효력을 미친다」라고 규정,수사에 따른 법적 장애를 일거에 해소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특별법은 12·12와 5·18사건을 재수사할 수 있도록 법적인 사정변경사유를 마련해준 셈』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특별법이 소급처벌규정을 담고 있어 위헌소지가 있지만 법을 집행하는 검찰로서는 수사의 진행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검찰은 적극적으로 반대해온 특별검사제가 채택되지 않은 데 대해서도 안도하고 있다. 따라서 검찰은 12·12와 연관지어 5·18에 접근하던 예비수사단계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5·18의 진상규명에 나서겠다는 자세다. 금명간 정호용 전특전사령관·소준렬 전전투병과교육사령관을 비롯,5·18당시 광주 과잉진압 등에 참여한 관련자들을 본격적으로 소환,조사할 계획이다. 검찰은 특히 이미 참고인자격으로 불러 조사한 허삼수·허화평·권정달·이학봉씨 등 신군부 핵심관련자를 앞으로는 특별법에 의거,피의자로 조사하겠다는 방침이다.지금까지의 조사만으로도 충분히 사법처리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특별법 제정 및 이에 따른 검찰의 5·18수사에 대해 우려의 소리도 적지 않다.박모변호사는 『특별법이 공소시효가 지난 과거의 범죄를 처벌할 수 있도록 제정되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위헌시비가 일고 법적 안정성을 해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면서 『검찰의 수사에 대해 합법성 여부를 따지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 일본인 가슴에 달아준 훈장/이도운 정치부 기자(오늘의 눈)

    18일로 한일기본조약과 부속협정이 발효된지 30년이 지났다. 광복 50년,국교정상화 30년이라는 숫자의 마력 때문에 올해초만해도 양국은 어두운 과거를 딛고 미래지향적 관계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기도 했다.그러나 올해가 저물어가는 현시점에서 그런 기대는 이미 퇴색된지 오래다. 오히려 올들어 양국관계는 국가원수가 나서서 상대를 비난하고 예정됐던 정상회담이 취소될 뻔 할만큼 악화됐다.아마도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총리,고노 요헤이(하야양평)외무장관,에토 다카미(강등륭미)총무청장관등 일본 정부지도자들이 줄지어 과거사에 대한 망언을 해댄 것이 관계 악화의 가장 큰 이유가 됐을 것이다.또 이들 망언에 대한 우리정부의 대응도 이전의 정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울만큼 단호하고 강경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와중에서 공로명 외무부장관과 고노 장관은 수교30주년을 맞은 이날 아침 전화를 통해 양국간의 지속적인 협조관계를 다짐했다.또 과거사 정리를 위한 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운영방안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했다. 이날 눈길을 끌만한 기념행사는 도쿄의 주일 한국대사관에서 열렸다.한국정부가 4명의 일본인에게 훈장을 수여한 것이다.총리를 지낸 다케시타 노보루(죽하등) 일한의원연맹회장에게는 수교훈장 광화대장이,하라 분베(원문병위) 전참의원의장과 하구라 노부야(우창신야) 일한경제협회장에게는 수교훈장 광화장이,이가라시 코죠(오십람광삼)중의원에게는 수교훈장 흥인장이 수여됐다.정부는 훈장수여의 구체적 공적사항은 밝히지 않았다.단지 양국관계 발전에 공헌이 컸다고만 밝혔다. 외교의 기본원칙이 상호주의라지만 일본정부가 수교 30주년을 맞아 한국인에게 훈장을 준다는 얘기는 아직 들리지 않는다.『그렇다면 뭣 때문에 우리정부만 일본인에게 훈장을 주느냐』는 비판이 반사적으로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속좁은」 비판은 일단 접어두자.다만 일본인들이 우리가 가슴에 달아준 훈장을 바라보며 지난 30년과 50년,그리고 그 이전의 모습을 진실하게 돌아보는 계기로 삼기를 바랄 뿐이다.
  • 일 외상 새달 방한

    고노 요헤이(하야양평) 일본 외상이 내년 1월 방한한다. 고노 외상은 18일 상오 한·일기본조약 발효 30주년을 맞아 공로명 외무장관과 전화통화를 갖고 양국의 역사문제등 현안에 대해 협의하기 위해 내년초 방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고노 외상의 방한에 앞서 양국은 오는 26일 아주국장회의를 열어 역사공동연구위원회 구성에 관한 실무협의를 벌일 예정이다.
  • 9사단 서울진입 집중추궁/검찰/안병호·김진선·최광수씨 조사

    ◎「5·18」핵심관련자 내일부터 환문 12·12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종찬서울지검 3차장)는 18일 12·12당시 9사단 작전참모 안병호씨와 수경사 작전처보좌관 김진선씨등 2명을 피고소인자격으로,최규하 전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최광수씨를 참고인자격으로 각각 소환,조사했다. 검찰은 19일 국회에서 5·18특별법이 통과되면 5·18당시 특전사령관 정호용씨 등 핵심관련자들을 빠르면 20일부터 본격 소환할 방침이다. 검찰은 이날 안씨를 상대로 12·12당시 노태우(노태우)9사단장의 지시에 따라 병력을 동원,서울로 진입하게된 경위 등에 대해 집중추궁했다. 검찰은 또 김진선씨에게 수경사 33헌병대가 수경사령관실에 모여있던 장태완 수경사령관,윤성민 육참차장 등 육본측 장성을 강제연행한 과정과 상황 등을 신문했다. 검찰은 최광수씨를 상대로 12·12당시 정승화 육참총장의 연행에 대한 사후재가와 5·17 비상계엄확대조치,80년8월16일 최규하대통령의 하야 등 일련의 과정에서 최전대통령이 취한 조치와 신군부측의 움직임 등에 대해조사했다.
  • 과도정부와 제2공화국(새로쓰는 한국현대사:48)

    ◎과도정부­통치권 한계… 과거청산·개혁에 실패/제2공화국­시위 잇따라 사회 대혼란… 「5·16」 초래 1960년 봄 이승만대통령의 하야로 종말을 고한 제1공화국에 이어 과도정부가 탄생 했다.그러나 과도정부는 개헌을 통해 제2공화국을 출범시켰지만 국민들이 열망한 과거청산과 정치혁신을 실현하는데 실패 했다.그래서 약체 정권으로 출범한 제2공화국은 군에 정권을 빼앗기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1960년 4월 21일 제1공화국의 운명이 황혼을 맞고 있을 때 이승만대통령은 자신이 평소 신뢰감을 갖고 있던 전 서울시장 허정을 만났다.이승만은 정부의 권력을 이양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외무부장관직을 수락하도록 부탁 했다.당시 장면은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하면서 부통령직을 사퇴한 상태였다.대통령이 사임할 경우 부통령이 없는 상황에서 허정이 자연스럽게 대통령직을 맡을 수 밖에 없었다.자유당 세력들도 특별한 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허정이 수반을 맡아주기를 사실상 희망하고 있었다. ○허정 내각제 개헌 추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다음날인 4월27일 대통령서리에 취임한 허정 외무부장관은 우선 내각제 개헌을 떠올렸다.이 내각제 개헌은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린 시민·학생들의 강력한 요구였고 민주당의 오랜 강령이기도 했다.허정은 취임초 첫 기자회견에서도 이 내각책임제 개헌실현의지를 밝혔다.허정은 이 회견에서 내각제 개헌을 다짐하면서 개헌을 이루어낸 뒤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를 실시하겠다고 공약 했다.국회는 4월29일 민주·자유 양당 4명씩과 무소속 1명으로 개헌특위 기초위원회를 구성했다. 국회에 개헌특위가 구성되면서 공법학회는 개헌초안을 만들어 국회에 보내오기도 하고 개헌특위 주최로 공청회를 열어 각계의 의견도 들었다.마침내 개헌특위는 5월9일 개헌요강 작성에 대체로 합의한 뒤 6월10일 본회의에 상정했다.전문 103조로 돼 있던 제1공화국의 헌법중 무려 52개 조항을 고친 이 개헌안은 재적 2백11명중 찬성 2백8표,반대 3표로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에 앞서 허정 과도정부는 5월2일 첫 국무회의를 열고 혼란상태의 정국 수습과 경제위기 타개책을 내놓았다.부정선거 관련자 엄중처벌및 경제사범 엄단,경제적 민주화 지향,중소기업 육성의 재정적 뒷받침,악질 세무관리 엄단등이 그것이다.그러나 조직적 권력을 갖고있지 못했던 과도정부의 통치권에는 한계가 뒤따랐다.특히 군부의 부패 척결과 관련해 허정은 미국과 주한미군사령부의 견제 탓에 끝까지 숙군작업에 손을 대지 못했다.미8군 사령관 C B 매그루더는 허정에게 『한국군의 재편은 현존하는 불안정과 혼란이 종식될 때까지 연기돼야 한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숙군에 제동을 걸었다. 4·19가 요구한 문제점에 대해서도 명쾌한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선거부정의 주요 음모자로 9명의 전직 각료와 15명의 자유당 간부를 3·15선거에서의 불법행위로 구속하는 것으로 그쳤다.이어 자유당에 선거자금을 불법 제공한 은행장들도 구속하고 정치·문화계 인사들에 대한 테러를 자행한 정치깡패의 두목들도 우선 잡아들이기는 했다.그러나 자유당 정권과 연결돼 있었던 이들의 처리문제는 다음 정권과 군사정권으로 넘어갔다. 과도정부는 부정축재에 대한 처벌방침도거듭 밝히고 개인 18명과 기업가 66명의 명단을 공개했지만 제2공화국 출범 때까지 아무것도 매듭지은 것이 없다.결국 당시의 정치구도나 법적 기본구조를 깨뜨릴 의지도,능력도 없었던 과도정부는 다음 정권에도 큰 부담을 주었던 것이다. ○부정축재 84명 처벌못해 제4대 국회는 내각제 개헌을 끝으로 해산 했다.그리고 나서 새 헌법의 절차에 따라 19 60년 7월29일 실시한 제5대 민의원 선거와 초대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일단 권력을 잡았다.민주당은 민의원 2백33석중 1백75석,참의원 58석중 31석을 차지했다.나머지 의석은 민의원의 경우 무소속 46석,사회대중당 4석,자유당 2석,한국사회당 1석 및 기타 군소정당 5석 순이었다.참의원의 경우는 무소속 20석,자유당 4석,사회대중당과 한국사회당·민족진보연맹이 각각 1석등이었다. 그러나 무소속 당선자 가운데 상당수가 민주당 공천 탈락자이고 이들 중 다수가 국회개원과 동시에 민주당에 재입당 했다.민주당은 명실공히 실세가 됐다.하지만 선거과정에서 분당론까지 제기됐던 민주당 계파는 여전히 복잡했다.당선자 1백75명 가운데 장면 중심의 신파 78명,그에 반대하는 구파 83명,중도파 14명등 팽팽한 구도를 보이자 신·구파가 각각 당선자대회를 갖는등 치열한 집권경쟁을 벌였다. ○장면내각 민주신파 일색 우여곡절 끝에 8월19일 민의원에서 장면총리 인준투표가 실시됐다.결국 찬성 1백17표,반대 1백7표,기권 1표로 신파일색의 장면내각이 출범했다.장면총리는 구파측에 대해 5명 정도의 인선을 제의했지만 구파의 거절에 부닥쳐 8월23일 신파측 일색의 불안정한 새 내각이 출범했던 것이다. 장면 내각은 이전의 과도정부와 마찬가지로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우선 자유당 시절 부정부패의 원흉들을 처벌하는 작업에 착수했다.집중적인 지탄을 받고있던 경찰에 먼저 화살을 돌려 81명의 경찰서장을 포함한 2천2백13명의 경찰관을 파면시켰다.그 결과 독재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경찰의 기능을 상당기간 약화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 이상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미국은 설상가상으로 61년 1월 한국정부에 대해 환율인상을 요구해왔다.장면 내각은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여 61년 1월 달러당 6백50환이었던 환율이 1천환으로 평가절하 됐다.이어 2월에 1천3백환으로 다시 평가절하된 판에 미국은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을 받아들이도록 종용하고 나섰다.그 대가로 장면정권은 3천5백만달러의 원조를 받았지만 이 협정은 미국 원조자금이 전체예산의 52%를 차지하던 한국 정부예산에 대한 미국의 통제권 행사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한국주재 미국인 교육자와 기술자들도 모두 한국정부로부터 외교관의 지위를 부여받았다.미국은 이것 말고도 61년 1월 「외자도입촉진법」 제정을 채근했다.이 법은 국내에 투자하는 외국자본에 대해 연간 20%의 수익을 보장해주는 동시에 이 투자회사들은 한국내의 보유자산에 대해 아무런 세금을 내지않도록 하는 것이었다.이에따라 미국자본의 한국진출이 러시를 이루었다. 장면 정권은 이무렵 「데모규제법」등의 제정을 추진했는데 1960년 7·29총선에서 참패한 사회대중당을 비롯한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반대투쟁을 벌였다.이는 극도의 사회 혼란상을 초래 했다.그리고 국민의 기본적 의무보다 권리를 더 중시하는 각종 시위가 꼬리를 물었다.이와 맞물려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주역을 담당했던 학생들은 5월13일 평화통일 구호를 내걸고 「남북학생회담 환영및 통일촉진대회」를 열었다. 1961년 시국위기설이 끊임없이 나도는 가운데 이 학생집회가 열린 것은 민주주의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놓은 5월16일 군사 쿠데타 3일전의 일이었다.물론 제2공화국이 약세의 틈을 보여준 데서 비롯한 쿠데타로 평가되지만 국민들에게도 얼마간은 책임이 돌아가야 할 것이다. ◎군사자문단 「국가팀 회의자료」/“미군철수땐 한반도 적화” 예측/북의 혼란책동 선전공세 면밀 분석/팸플릿 제작 등 심리전 대응책 제시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장면정권 시절 주한미군의 대북 대응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회의자료를 미국 케네디대통령 기념도서관에서 입수했다.이 자료는 19 60년 12월22일 서울에서 열린 한국합동군사원조자문단(JMAAGK)의 국가반(Country Team)회의자료로 당시 혼란을 틈타 고조된 북한의 선전에 대처하기 위한 주한미군사령부의 대처방안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회의자료에 따르면 이날 회의에는 일상적인 참석자 외에 주한미군 참모장인 에머리 워첼중장과 본드 장군등이 이례적으로 참석했다.회의주제는 「북한의 선전효과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가능한 대처방안 강구」.회의에서 주한미군측은 『북한측의 선전공세가 매우 교묘하기 때문에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다』고 보고 『대한민국 정부는 경제정책 실패와 자신감 결여,혼란·판단불능 때문에 공산주의선전에 대해 적절히 대처하기 어려운 형편』이라고 판단했다.워첼장군은 『군사적인 견지에서는 이승만 정권보다 상황이 더욱 악화돼 있다』면서 『필요하다면 남한의 군사적·경제적 소유물에 대해 통제를 해야한다』고까지 발언했다. 회의자료에는 미군이 철수하면 공산주의자들이 전 한국을 장악할 것으로 예상한 대목도 들어있다.워첼장군은 『미군이 철수하면 전한반도를 공산주의자들이 석권할 수 있을 것인데 왜 북한인들이 자유선거 실시에 동의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고도 말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결국 미국공보원(USIS)의 전문가 팀이 대한민국 정부와 공동으로 북한의 선전위협에 대응하는데 적극 노력해야 한다는 결론에 동의했다.자료에 따르면 미국공보원은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사령부가 함께 북한선전에 대응하는 팸플릿을 만들고 양국 정부가 이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조치를 요구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특히 주한미군사령부는 공산주의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인원과 기구정비를 준비했는데 이는 한국군의 정치개입을 초래했을 가능성을 함축했다.
  • 일 외무,한일기본조약 발효 30년 맞아 본지 회견

    ◎“일­북 수교 한반도 안정 원칙서”/협상 재개시기 아직 미정/한·일 협력 국제무대서 중요성 더해 【도쿄=강석진 특파원】 한일 우호협력관계는 탈냉전시대를 맞아 동북아시아지역과 유엔 등 국제관계에 있어 더욱 중요해지고 있으며 따라서 일본정부는 양국의 긴밀한 관계 구축에 전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고노 요헤이(하야양평) 일본외상이 17일 밝혔다. 고노외상은 한일기본조약 발효 30주년(18일)을 앞두고 본지와 가진 단독회견에서 또 양국간 마찰을 빚어온 과거사의 인식문제와 관련,『역사를 직시하고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과거를 직시한 위에 미래지향의 한일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해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위해 과거사 인식문제의 해결이 긴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북한과의 국교정상화 교섭 재개에 대해 『일본의 한반도정책 기조는 한국과의 우호협력관계의 증진』이라면서 『현재로서는 교섭 재개의 시기 등이 결정돼 있지 않다』고 말해 국교정상화 교섭의 재개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임을 시사했다. 한편한일간 무역불균형문제에 대해선 최근 한국으로부터의 반도체 수입 급증 등을 들어 다소 낙관적 시각을 보이면서 『일본도 규제완화 및 시장접근의 개선을 진척시키는 한편 한국에 대한 직접투자 촉진과 산업기술협력을 추진해 한일 양국간 무역이 순조롭게 확대·발전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일본으로서는 한일간의 문화교류가 보다 자연스럽게 자유로운 형태로 발전해 양국 국민간의 상호이해가 보다 깊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해 한국정부가 일본 대중문화의 공연에 전향적 자세로 나아가주기를 기대했다.
  • 「국교정상화 30년」고노 일 외무 본지 특별회견

    ◎“미래지향 한일관계 구축 전력”/한국상품 수입 늘어나 역조시정 낙관/대중문화 개방 이해증진에 도움될 것 한국과 일본은 금세기들어 수천년 역사에 있어 가장 최악의 상태를 맞았었다.해방 뒤에도 20년동안 양국은 정상적 관계를 맺지 못했다.1965년에야 양국은 기본조약을 맺고 국교를 정상화했다.18일은 기본조약이 발효된지 정확하게 30년이 되는 날,즉 국교정상화 30주년이다.그러나 양국은 올해에도 망언파동 등을 둘러싸고 여러차례 마찰음을 냈다.국교정상화 30주년을 맞아 고노 요헤이(하야양평) 일본외상과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인터뷰가 시작되자마자 『양국 국교정상화 30주년은 기념할 만한 뜻깊은 일』이라면서 『본래대로라면 서울에 가서 함께 이 기념할 만한 날을 맞고 싶었는데…』라고 말문을 연 고노 외상은 18일은 일본으로서는 56년 유엔에 가입한 날일 뿐 아니라 종전 50주년을 맞는 정부의 기념식도 있어 여러가지로 뜻깊은 날이라고 설명했다. ­탈냉전시대를 맞고 있는 때 양국관계의 미래를 전망한다면. ○기본적 가치공유 ▲한·일양국은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라고 하는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또 안전보장상의 이해를 함께 하고 있다.양국의 우호협력관계는 양국만이 아니라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중요하다.더 나아가 유엔과 아시아 태평양경제협력체(APEC)와 같은 국제사회의 무대에서 한·일양국의 협력이 날로 중요성을 더해 가고 있다.이같은 상황에서 양국간의 긴밀한 관계 구축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고 이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나가고 싶다. ­국교정상화 30주년을 평가하면. ▲65년 국교가 정상화한 이후 30년동안 한·일관계는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발전해 왔다.지금까지의 한·일관계 발전에 힘을 기울여온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고 싶다.전후 50주년이자 한·일국교정상화 30주년인 올해 지난 30년동안의 한·일관계를 되돌아보면서 과거를 직시한 위에 미래지향의 관계를 구축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싶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다. ­전후처리의 마지막 과제로 북한과의 국교정상화 문제가 활발하게 거론되기도했는데. ▲11월14일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총리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도 분명하게 밝힌 것처럼 일본의 한반도 정책 기조는 한국과의 우호협력관계의 증진에 있다.이런 기본정책 아래 일·북한 국교정상화교섭에 대해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북한간의 비정상적 관계를 바로잡으면서 동시에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이바지한다고 하는 두가지 관점에 입각,계속해서 한국과 긴밀하게 제휴해가면서 대응해 나간다는 생각이다.지난 3월 여3당대표단의 북한방문시 북한의 노동당과 연립여당 대표단이 국교정상화 교섭의 무조건 재개에 합의하기도 했지만 현재로서는 재개 시기 등에 대해 결정돼 있지 않다.상대가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전망 등을 명확하게 말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일본으로서는 앞서 말한 방침에 기초해 대응해 나갈 것이다. ○직접 투자 늘릴터 ­한국은 지난 30년동안 한번도 대일무역흑자를 기록하지 못했다.한국의 책임도 적지 않지만 일본으로서도 개선책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가. ▲양국간 무역불균형은 한국의 산업구조 및 한국의 고도성장등 요인에 의한 점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최근에는 반도체등을 중심으로 한국으로부터의 수입도 급증하고 있어 밝은 변화의 조짐도 나오고 있다.일본으로서도 계속해서 내수주도형의 경제운영에 힘써 규제완화 및 시장접근을 개선시키려 하고 있다.또 동시에 한국에 대한 직접투자의 촉진과 산업기술협력을 추진해 앞으로도 한·일양국의 무역이 순조롭게 확대 발전되도록 노력해 나가고 싶다.김 등 농수산물의 수입규제완화등에 대해서는 종래부터 양국간에 협의가 행해지고 있다.특히 올해는 김에 대해서는 양국 민간간의 조정의 결과 수입이 실현됐다.앞으로도 이같은 협의의 장에서 충분히 대화가 이뤄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한국은 대중가요,연극,영화등 일본의 일부 대중문화 공연을 제한하고 있는데. ▲현재 한국에서는 일본의 이른바 대중문화를 해금하는 데 대해서 여러가지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일본으로서는 이같은 논의를 거쳐 한·일간의 문화교류가 보다 자연스럽게 자유로운 형태로 발전해 나가 양국 국민간의 상호이해가 깊어지기를 기대한다.일본정부로서는 일본문화의 여러가지 측면을 한국민 여러분에게 소개해 폭넓게 이해가 깊어지도록 다양한 문화교류사업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이런 의미에서 지난해 가을 서울에서 열렸던 「일본문화통신사」사업에서 일본어 뮤지컬이 상연되는 등 새로운 시도가 받아들여져 호평을 받은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이런 자연스런 문화교류의 흐름이 한층 더 촉진되도록 한국측의 협력을 기대한다. 올해 한·일양국간 어려운 장면도 여러차례 만났던 고노 장관은 언제 가장 힘들어 했을까.직접 물어 보았다. 『일본국,일본정부의 생각은 지난 8월15일 총리담화에 담긴대로다.무라야마 총리의 담화는 각의에서 논의돼 이해를 얻어 각의의 결정 위에 담화로서 발표된 것이다.무라야마내각의 생각이자 곧 일본의 생각이다.그러나 한 나라에는 여러가지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모두 하나로 생각할 수는 없으나 대다수 사람은 총리의 생각과 같다.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은 사람의 발언도 있었고 양국 사이에 첨예한 감정적 마찰이 일어나 나로서는 대단히 괴로웠다.일본정부의 생각이 정확히 이해됐으면 좋았을텐데라고 생각했었다』라고 말해 에토 다카미(강등륭미) 전총무청장관의 망언파동을 직접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상당히 고통스러웠음을 시사했다. ○대한우호가 우선 30년을 넘어가는 때 한국민에게 하고 싶은 말을 부탁했다. 『지난 14일 TV로 클린턴 미대통령이 보스니아 평화협정 조인식에서 연설하는 것을 들었다.클린턴 대통령은 「우리는 과거는 바꿀 수 없다.그러나 미래는 변화시킬 수 있고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나 역시 전적으로 동감이며 우리에게도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했다.역사를 직시하고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최근 공로명 외무장관과 오사카에서 만나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외무장관으로서 협력해 양국관계가 더욱 발전되도록 전력을 기울이고 싶다』고 미래지향적 양국관계를 강조하면서 총총히 자리를 떴다.
  • 최 전 대통령 비자금 수사/검찰/부인명의 2계좌 자금출처 추적

    ◎전씨계좌 입출금 경로 조사/「일해」 경리담당 환문… 안현태씨 곧 소환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종찬 서울지검3차장)는 16일 전두환 전대통령의 비자금에 대한 수사와 더불어 최규하 전대통령의 비자금에 대해서도 수사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은 이를 위해 최전대통령의 부인 홍기여사 명의의 한일은행 계좌 2개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15일 발부받아 본격적인 자금추적에 나섰다. 이 가운데 지난해 6월1일 한일은행 본점 영업부에 개설된 일련번호 003­355346­22­003 개발신탁계좌에는 3천만원이 입금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 지난 86년 5월 한일은행 서교동 지점에 개설된 068­111398­23­001 가계금전신탁계좌는 지난 10월14일 전액이 인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최전대통령의 법률고문인 이기창 변호사는 이날 상오 10시 서울지검에서 기자들과 만나 『민주당의 강창성 의원이 얼마전 국회에서 최전대통령이 지난 80년 하야할 때 전전대통령으로부터 1백75억원을 받았다고 주장한 이후 검찰이 최전대통령의예금계좌를 추적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검찰은 이날 상오부터 상업은행등 27개 금융기관에서 전씨의 1백83개 비자금 계좌에 대한 압수수색을 시작했다. 검찰은 압수 계좌서류를 근거로 입출금 경로를 추적하는 분석작업도 벌이고 있다. 검찰은 이날도 기업총수 2∼3명을 소환,제3의 장소에서 전씨에게 돈을 건넸는지를 조사했으며 일해재단 경리관계자 한두명도 소환해 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전씨 비자금을 조성하는데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안현태 전청와대경호실장도 조만간 소환,조사할 방침이다.
  • 「12·12전 최 전대통령 조사」 자료 내용

    ◎“김재규에 「계엄」 알려줘 내란방조” 추궁/“시해범 체포지시 왜 안했나” 압박­신군부/약점잡혀 정 총장 연행 재가→하야­최씨 최규하 전대통령이 12·12사건이 일어나기 12일전인 79년12월1일 신군부측에 의해 내란방조혐의로 처음 조사받았다는 사실은 최근 최전대통령의 「진술거부」와 관련,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해 6월과 8월 2차례 검찰에서 소환조사를 받은 이학봉 전의원의 피의자 신문조서내용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측의 정권탈취음모가 이때부터 이미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된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사상 유례가 없는 피의자조사는 그 이후의 12·12 정승화 육참총장연행 재가강요,80년 4월14일 전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 겸직발령 실현 등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12·12사건의 실체와 그 성격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검찰은 전씨를 비롯한 핵심측근들의 내란죄 성립을 지난해 파악하고도 군사반란죄부분만 혐의를 인정한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문조서에서 신군부측은 최전대통령에게 시해범 김재규 체포를 지시하는 등 조치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다음 날 새벽 4시부로 계엄이 선포된다는 사실을 김재규에게 알려 주는 등 내란을 방조한데 대한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따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따라서 결정적인 약점을 잡힌 최전대통령이 이후 12월12일 정승화 육참총장의 연행재가와 5·17비상계엄확대 등 신군부측의 계속된 강압적 요구에 이끌려다니다 결국 하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지금까지 신군부측이 최전대통령을 피의자신분으로 조사한 사실이 공개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검찰의 12·12 및 5·18사건발표에도 아예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12·12사건 재수사가 막바지에 이른 지난 14일 민주당 강창성의원이 『최전대통령은 80년3월12일 전 당시보안사령관·이 당시보안사대공처장겸 합수부 수사1국장에 의해 대통령집무실에서 박대통령시해사건의 방조혐의로 4시간동안 조사받았다』고 폭로했으나 근거를 대지는 못했다. 따라서 최전대통령의 조사를 직접 담당한 이학봉전의원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의 공개로 강의원이 주장한 것보다 무려 석달전에 신군부가 최전대통령을 직접조사한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그렇다면 검찰이 이같은 사실을 지난해 12·12사건조사당시 밝혀 놓고도 공개하지 않고 은폐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엇갈린다.우선 당시 「조사의 한계」를 안고 있던 검찰이 이 사건을 불기소처분하기 위해서는 신군부측의 내란죄 입증에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최대통령조사사실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검찰은 이같은 질문을 이학봉·장세동·유학성·허삼수·허화평씨 등 전씨의 핵심측근 5명에게 모두 던졌으나 이씨만 구체적으로 답변했을뿐 나머지 4명은 『모른다』고 잡아뗀 것으로 피의자신문조서에는 기록돼 있다. ◎최규하 전대통령 성명서 요지 친애하는 국민여려분.작금의 상황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국민앞에 본인의 입장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게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88년 국회광주특위 이래 지난 7월 검찰에서의 12·12와 5·18고소·고발에 이르기까지 국회와 검찰에서는 본인에 대한 증인 또는 참고인 조사를 요구하였으며 본인은 그때마다 당국요구에 그대로 따르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온 바 있습니다.보도를 통해 다 아시겠지만 이를 다시 요약하면 『대통령 재임중의 공적인 행위,즉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책무에 따라 처리된 국정행위에 대해 일일이 조사를 받아야 한다면 국정은 소신대로 처리할 수 없으며 조사를 받는다는 것은 전례를 남기는 것이고 또 그러한 전례는 앞으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정치적으로 이용될 소지마저 없지 않아 이러한 전례는 앞으로 수많이 탄생할 대통령들의 직무수행에 두고 두고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 예상되는 바 전직대통령으로서는 후임 대통령들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전례를 남겨 부담을 줄 수 없다는 점과 비록 일시적 비난의 화살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국가의 정통성과 계속성을 유지함과 아울러 대통령직의 독립성을 지키는 것이 전직 대통령으로서 택해야 할 최소한의 덕목』이라고 생각하여 왔고 지금도 그 소신과원칙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소신 때문에 본인이 검찰에 직접 진술은 하지 않았으나 진실규명의 협조차원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진상이 알려지도록 노력한 바 있습니다.12·12사건 조사에 있어서도 그날 밤을 같이 지새며 공관접견실에서 사태에 대처한 국무총리와 재임시 보좌하던 분들이 이미 참고인 자격으로 대통령에 관한 사항까지 소상히 진술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5·17사태의 조사 경우에도 그동안 검찰은 본건과 관련하여 80년 당시 국무총리·관계장관·측근보좌관·각군 사령관·관계 공무원 및 기타 장병들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참고인들의 진술을 청취하여 당시 상황이 파악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10·26사건이라는 우리 역사상 유례없는 국가적 비극과 비상사태에서부터 1980년 여름에 이르는 격동기는 첨예한 남북간 군사적 대치상황 속에서의 안보문제의 심각성 뿐만 아니라 제2차 석유파동의 엄습에 의한 경제적 난국,극심한 사회혼란 등 참으로 예측불허의 국가적 위기였으며 본인과 정부는 이 일련의 위기상황을 극복하는데나름대로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습니다. ◎검찰 2차방문 조사 시도 안팎/최씨 평소 생각 전달한 듯/최씨측근 전언/“금품수수설엔 진노” ○…서울 서교동 최규하씨의 사저에는 이날 하오 3시 28분쯤 김상희부장과 이문호검사 등 수사팀 3명이 도착,대기중이던 최흥순비서실장 등의 안내로 최씨를 2차 방문. 김부장과 이검사는 질문자료가 담긴 파란색 봉투를 들고 차에서 내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최비서실장과 악수를 나눈 뒤 『오랜만입니다』라고 짧게 인사말을 건네고 부속실로 직행. ○…최비서실장은 『최씨가 전두환씨로부터 1백75억원을 받았다는 민주당 강창성의원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검찰수사가 끝나면 밝혀질 것인데 왜 미리 지레 짐작등을 하느냐』고 반문. 한 측근은 『이기창 변호사와 평소 친분관계가 있던 강의원이 서교동측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금품수수설을 제기해 어르신이 몹시 분노했다』면서 『명예훼손혐의로 소송을 제기키로 하는 등 법적대응을 신중히 검토한 것으로 안다』고 전언. ○…검찰수사팀이 2차 방문한지 1시간여만인 이날 4시30분쯤 최비서실장과 이검사가 최씨 집을 나와 검찰수사가 끝난 것이 아니냐는 분위기가 팽배.그러나 검찰조사가 이루어졌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최비서실장이 『아니야』라고 답해 검찰수사가 순조롭지 못함을 간접 시사. ○…최전대통령에 대한 2차 방문조사를 마친 검찰수사팀은 하오 4시50분쯤 최씨 집을 나서면서 『수사가 잘 됐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최씨는 검찰의 수사에 응했다.다만 질문내용에 대해서는 종전 입장과 같이 국민과 국익을 위해 아직 밝힐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면서 답변을 회피. 최씨 측근들은 기자들과의 전화통화에서 『최 전대통령이 검찰의 2차방문 조사에서는 나름대로 평소생각을 전달한 것 같다』고 전언,1차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조사가 진행됐음을 시사.
  • “최씨,전씨돈 1백75억 받았다”/민주당 강창성·장기욱 의원주장

    ◎“80년 8월 하야전후 3차례 걸쳐” 민주당의 강창성·장기욱 의원은 14일 최규하 전대통령이 지난 80년 8월 퇴임을 전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세 차례에 걸쳐 거액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당내 「5·6공 부정부패 진상조사위」위원장인 강의원은 이날 의원총회에서 『최전대통령이 전씨에게 거액을 받았다는 제보를 최근 입수했다』면서 『다음주 중 검찰에 관련자료를 제공한 뒤 돈의 규모 등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강의원은 『제보자에게 이같은 사실을 직접 공개하도록 설득하고 있다』면서 구체적인 제보내용을 밝히지 않았으나 당시 최전대통령이 받은 돈은 모두 1백75억원이며 제보자는 최전대통령의 측근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강의원은 이날 회의에서 『최전대통령은 지난 80년 3월12일 청와대 집무실에서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방조혐의로 4시간에 걸쳐 전사령관과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으로부터 피의자 신문조사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최씨측 전면 부인 한편 이에 대해 최전대통령의 최흥순비서관은 『전혀 터무니없는 주장으로서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고 수수사실을 부인했다.
  • “최씨 입열게 할 묘책없나”고심/검찰「증언거부」대응책 다각 모색

    ◎추가방문­측근조사 「압박작전」 병행/「공전 증인신문」 비상수단도 검토 최규하 전대통령이 방문조사에서도 진술을 거부하자 검찰은 최전대통령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한 묘안을 짜내느라 고심하고 있다. 검찰이 최전대통령의 조사에 매달리는 것은 12·12 및 5·18사건의 성격 규정에 그의 진술이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끝내 진술을 받아내지 못하더라도 지금까지의 수사만으로 내란죄 등을 입증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그렇지만 기왕 재수사에 나선 마당에 최전대통령의 진술까지 곁들여 「완전한 작품」을 만들겠다는 것이 검찰의 생각이다. 검찰의 고위 관계자는 이와 관련,『최전대통령을 조사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수사의 기본틀은 완전히 갖추었다』면서 『그러나 역사적 사건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보다 철저한 수사를 위해 최전대통령의 조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정승화 전육군참모총장의 연행 재가에서부터 대통령직 돌연 하야등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서 신군부측의 군사반란혐의와 정권찬탈의도를 반박의 여지 없이 입증하려면 최전대통령의 진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검찰은 수사초기부터 최전대통령을 직접 조사한다는 원칙 아래 최전대통령의 측근 등을 통해 다각도로 줄다리기를 하다 지난 8일 급기야 최전대통령에게 출두요구서를 보냈다. 최전대통령이 이에 불응하자 검찰은 11일 성과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방문조사를 강행했다.그러나 최전대통령은 『대통령 재임시 경험한 일로 퇴임 후에 조사를 받는 선례를 남길 수 없다.이같은 나의 생각은 일시적인 감정에서 나온 일이 아니다』라는 논리를 거듭 내세우며 진술을 거부했다. 최전대통령을 만난 김상희 부장검사는 『내 나름대로 평가를 내렸다』면서 앞으로의 조사방안에 대해 복안을 마련 중임을 시사했다. 실제 검찰의 한 고위 관계자도 『삼고초려하든가 읍소라도 해야지』라고 밝혀 우선 한두차례 방문조사를 더 시도할 방침임을 내비췄다. 검찰은 당시 최전대통령의 의전수석비서관 정동열씨,비서실장 최광수씨등 최전대통령 측근들에 대한 조사를 통해 최전대통령에게 심경의 변화를 주기 위한 「압박작전」도병행하고 있다. 이같은 방법이 통하지 않을 경우 검찰은 마지막 비상수단으로 공판전 증인신문제도라는 강제조사방안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이는 진실규명을 위해 꼭 필요한 증인이 법정증언을 거부할 것으로 예상될 때 검찰이 법원의 허락을 받아 공판전에 증인을 불러 법정에서 증언을 듣는 방법이다. 그러나 최전대통령을 법정까지 불러낸다 해도 입을 열지 않는 한 아무 소용도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피고인이 아닌 참고인인 최전대통령이 진술거부권이나 묵비권을 행사하면 검찰로서는 속수무책이다. 한쪽으로는 설득하고 다른 쪽으로는 압력을 가하는 「양동작전」마저 통하지 않으면 검찰은 결국 최전대통령을 포기하는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최규하씨 방문검사에 한말/“「재임때 일 퇴임후 조사」 전례 남길수 없다/강제구인·법정증언 호응 상상조차 안해 12·12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의 김상희 부장검사가 12일 하오4시30분 최규하 전대통령을 방문,1시간여동안 나눈 대화는 「조사에 응해달라」는 검찰과 「조사에 응할 수 없다」는 최전대통령의 응답으로 요약된다.다음은 김부장검사와 최전대통령의 대화내용. 김부장=편찮으시다는 말을 들었는데 건강은 어떠신지요. 최전대통령=작년 10월경부터 요각통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우리 내자(홍기여사)는 나보다 더 심합니다. 김=검찰이 토·월요일중 편리하신 시간에 출석을 요구했으나 출석하지 않아 부득이 방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최=…(잠시 생각하다)온다는 이야기를 비서관을 통해 듣고 만나서 직접 입장을 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방문을 승낙했습니다. 김=신문이나 TV를 보시는데 지장은 없으신가요. 최=너무 오래 보면 눈물이 나 가끔 보지요….내용은 비서관이 정리,보고해 알고 있습니다(보도를 통해 검찰수사내용을 상당히 알고 있다는 뜻). 김=국민과 역사 앞에 진실을 밝히신다는 신념으로 재임시 경험하셨던 일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최=지난번 서한대로 대통령 재임시 경험한 일을 퇴임 후에 조사를 받는 전례를 남길 수 없습니다.이러한 나의 생각은 일시적인 감정에서 나온 게아닙니다. 김=(완곡한 표현으로)강제구인이나 법원의 증인신문절차 등의 방법으로 한다면 조사에 응하시겠습니까. 최=(허허)김부장이 나를 강제구인하겠다고 신문에 나왔더구만요.강제구인이나 법원에 의한 절차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해본 일이 없습니다. 김=(재수사의 취지를 설명한 뒤)검사가 개인의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국민을 대신해서 묻는 것인데 국민을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대화도중 간간이 수사질문사항을 언급). 최=김부장이 노력하시는 입장을 충분히 이해합니다.내 입장을 고수하는 것도 나 나름대로 국익이 무엇인지 생각했음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이제 그런 얘기는 하지 맙시다. 김=또 방문해도 되겠습니까. 최=개인적으로 오는 것은 환영합니다.조사목적이 아니라면.내 입장이 변할 때까진….(최전대통령은 몸이 불편한 탓인지 줄곧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 최 전대통령 진술 거부/검찰 방문조사 실패

    ◎정호용·신현확씨 금명 소환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종찬·서울지검3차장)는 12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최규하 전대통령의 자택을 방문,조사를 벌이려했으나 최 전대통령은 진술을 거부했다. 최 전대통령은 이날 하오 4시30분쯤 자택을 방문한 특별수사본부의 김상희 부장검사와 이문호 검사에게 『대통령 재임중 일어난 공적인 사건에 대한 조사에 일일이 응하는 것은 헌정사에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뜻을 밝히고 조사에 응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김부장검사등은 1시간15분만인 하오 5시45분쯤 철수했다. 검찰은 이날 최 전대통령에 대한 조사에 대비,▲신군부측의 12·12 사전모의를 알았는지의 여부 ▲정승화 전육군참모총장의 연행 재가 과정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중정부장서리 겸직 경위 ▲5·17비상계엄 전국 확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압상황 보고 경로 ▲대통령직에서 돌연 하야한 경위 등 1백여개의 질문항목을 준비했다. 검찰의 한고위관계자는 『최 전대통령에 대한 방문조사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앞으로도 최 전대통령측과 추가조사 방안을 절충해 나가는 한편 최 전대통령의 비서실장 최광수씨 등을 소환,조사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어 『최 전대통령으로부터 민족스런 답변이 나오지 않으면 공판전 증언신문절차를 밟아 강제로 참고인진술을 받는 방안도 검토중』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이날 12·12 때 최 전대통령 의전수석비서관 정동열씨를 소환,정 전육군참모총장의 연행을 재가하는 과정에서 신군부측이 권총을 휴대했는지 등 당시 상황에 대해 조사했다. 검찰은 또 당시 「경복궁 모임」의 핵심인물인 30경비단장 장세동씨를 비롯,합수부 수사국장 백동림씨,정병주 특전사령관 전속부관 정범주씨 등을 피고소인과 참고인 등 자격으로 소환·조사했으며 정승화 전육참총장도 재소환 했다. 특히 장세동씨를 상대로 12·12사건 전개과정에서의 구체저인 역할과 전두환 전대통령의 비자금 조성 규모·경위,5공의 각종 의혹사건 등에 대해 추궁했다. 한편 검찰은 12·12 당시 50사단장이던 정호용 신한국당의원과 국무총리를 지낸 신현확씨를 금명간 소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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