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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30)

    ◆前한성은행장 韓相龍2,3년전 평소 알고 지내는 고서점에서 일제말기에 출간된‘창남수장(暢楠壽章)’이라는 문집 한 권을 구입한 적이 있다. 문집 이름에 ‘수(壽)’자가 들어간 것은 흔히 문집 주인공의 환갑잔치를 기념하여 만든 것이 보통이다. 일제 당시 환갑잔치에 문집까지 낼 정도라면 고관대작이나 후학이 많은 거유(巨儒) 정도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다. 이 문집 역시 그런 정도로 생각하고 첫 장을 넘겨 보니 당시 미나미(南次郞)총독의 축하 휘호가 나타나더니 뒤 이어 일본인 육군대장의 글씨와 궁내부대신을 지낸 민병석(閔丙奭)의 서문이 곁들여져 있었다. 다시 축하시 모음란에는 당대의 명사들이자 유명한 친일파들이 대거 운집해있었다.황족 친일파인 윤덕영(尹德榮)·좌옹 윤치호(尹致昊)·후작 이항구(李恒九·李完用 아들)·중추원 참의 김사연(金思演)·은행가 민규식(閔奎植)등등. 이런 수준의 인물들이 문집 주인공의 환갑잔치를 위해 시를 보낼 정도였다면 그의 수준·성향도 짐작이 간다.알고 보니 문집의 주인공은 일제당시 경제계의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한상룡(韓相龍·1880∼?)이었다. 한때 ‘조선 금융계의 황제’로 불렸던 한상룡은 1880년 규장각 부제학 출신 한관수(韓觀洙)의 3남으로 태어났다.17세때 관립외국어학교 입학을 계기로 신학문에 눈뜬 그는 미국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밀항을 하였으나 외숙 이윤용(李允用)의 주선으로 대신 사립 성성(成城)학교에 입학(1899년)하면서군인의 길을 택하였다. 이듬해 그는 한국정부의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장티프스로 학업을중단하고 1901년 귀국하였다.귀국후 그는 사립 중교의숙(中橋義塾)의 영어교사로 일하다가 이 해 경부철도 기공식에서 고종의 종형인 이재완(李載完)의영어통역을 담당한 것이 인연이 돼 공직(평식원 총무과장)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의 공직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그는 자신을 둘러싼 ‘좋은 여건’을 배경으로 야심을 키워가고 있었다.당시로선 근대문물에 대한 견문과 영어·일어 구사능력을 갖춘 인재였던데다 그의 뒤에는 당대 제일의 권력자인두 외숙(이윤용·이완용 형제)이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903년 12월 그는 한성은행(漢城銀行) 총무 취임을 계기로 금융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한일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이 은행의 전무취체역으로 취임한 그는 일제당국에 로비를 하여 당시 조선인 합방공로자에게 지급한 은사공채(恩賜公債)를 흡수,자본금을 300만원으로 10배나 증자하면서 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성은행이 조선 귀족들의 은행이라는 소문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3·1의거 당시 민중들의 표적이 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이 무렵 그는 40여년 동안 일본 제일은행의 최고책임자로서 일본 재계의 거두로 군림해온 시부자와(澁澤榮一)를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었다. 그는 정치에서는 이토(伊藤博文),경제에서는 시부자와,건설에서는 통감부시절 재정고문을 지낸 메가타(目賀田種太郞)를 ‘조선에서 영원히 기억해야할 3대 은인’이라고 하면서,특히 시부자와에 대해서는 ‘일본은 물론 동양에서 공전 절후의 위인’이라고 극찬하였다.그는 시부자와의 좌우명 ‘일생일업(一生一業)’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기까지 했다.그가 대부분의 친일파들 처럼 정계로 나아가지 않고 실업계로 진출한 것은 시부자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매국에 가담한 친일파들에게 준 공채를 토대로 발전을 도모한 한성은행은 1923년 그가 두취(頭取,현 은행장)로 취임한 직후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관동대지진의 여파에 이어 영업부진·경영악화가 계속됐다.이듬해 총독부는 이 은행을 정리대상으로 지목하였으며 28년 마침내 조선식산은행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나의 한성은행인가,한성은행의 나인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한성은행에서 나고,자라고 그로써 거기에서 죽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애착을 가졌던 한성은행을 잃게 되자 그는 병석에 눕고 말았다.식민지 예속자본의 말로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밖에도 그는 한성은행 재직시절 금융계 내에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조선내 각종 기업·회사 설립에 중개자로 참여하였는데 실권은 전혀 가지지 못한채 명목상의 감투만 여럿 쓰고 있었다.이런 그를 두고 정신문화연구원 김경일 교수는 “‘한상룡의 경력은 반도 재계사의 축도(縮圖)’라는 표현처럼그는 제국주의 권력과 식민지 예속경제 사이에서 일종의 브로커 역할을 했던 정상배”였다고 평가했다.금융계에 평생을 바치고자 했던 그의 포부는 한성은행의 경영권 양도와 뒤이어 신탁회사 운영에서 배제되면서 날개를 접고 말았다. 한편 그의 친일이 겉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그가 한성은행에서 물러나 사회활동을 본격 시작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우선 그는 조선에 업적(?)을 남긴 주요 일본인들의 동상·기념비 건립을 시작으로 친일대열에 본격 합류하였다. 첫 사업은 통감부시절 재정고문을 지낸 메가타의 동상을 제작,1929년 10월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제막식을 가졌으며,이 해 12월에는 이토(伊藤博文)기념회의 조선측 발기인 총대를 맡기도 했다.33년 2월에는 평소 자신이 숭배해온 시부자와의 기념비 건립을 추진,12월 장충단에서 제막식을 가졌는데 이는 전적으로 한상룡의 발의와 주동에 의한 것이었다. 또 35년 5월에는 ‘조선개화의 은인이자 일한합병의 공로자’인 데라우치(寺內正毅)의 동상건설회 발기인 및 실행위원으로 참여하여 총독부 청사내홀 우측에 그의 동상을 건립하였으며,이듬해 2월 소위 ‘2·26사건’으로 사이토(齋藤實) 전조선총독이 사망하자 부민관에서 추도회를 개최하고 39년 4월 그의 동상을 총독부 청사내 홀 좌측에 건립하였다.이밖에도 그는 러일전쟁 당시 한국주재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정무총감 출신의 시모오카(下岡忠治) 등의 동상건립에 참여하면서 식민통치자들의 업적 찬양에 열을 올렸다. 한편 한상룡이 군국주의 일제통치하에서 40여년간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보다 군부와 밀월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한성은행에서 물러난 후 그는 군부관련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다.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조선내 각지를 돌면서 강연·담화 등을 통해 그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였다. 또 33년 4월 경성국방의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한 것을 비롯해 조선국방의회연합회 설립준비위원 및 감사(34.4),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 고문(34.12),해군협회 조선본부 창립위원(35.4)등을 맡아 활동하였다.37년7월 중일전쟁 발발 직전에는 관동군사령부 사무촉탁(칙임관 대우,근무기간 37.7.1∼40.7.1)으로 임명돼 군사령부를 방문,조선실업구락부 및 자신의 명의로 국방헌금을 하였다. 당시 그는 후방 전쟁지원단체인 경기도군사후원연맹 부회장이자 경성군사후원연맹 고문으로 있으면서 ‘애국금차회’ 창립을 주도,조선여성들에게 전쟁물자로 노리개 금붙이마저 내놓으라고 강요하였다.41년 태평양전쟁 개전으로일제의 인력·물자동원이 거세지자 그는 이 역시 전면에 나서서 협력하였다. 특히 43년 징병제가 실시되자 그는 ‘훌륭한 군인이 되자’라는 글에서 “반도에 불타는 애국심과 적성(赤誠)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약진 반도의 통치사상에 획기적인 징병제도가 실시되었다”며 조선청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27년 중추원 참의(칙임관 대우)에 첫 임명된 이래 해방 때까지 그는 만18년 4개월동안 줄곧 중추원의 참의·고문을 지냈다.해방 1년전인 44년 4월 그는 윤치호·박중양(朴重陽·중추원 참의)·이진호(李軫鎬·총독부학무국장)·이기용(李琦鎔·황족·백작) 등과 함께 일본 귀족원 의원에 선임됐는데 마지막까지 일제에 협력한 결과이자 끝까지 일제에 끌려다닌 형상이라고도 할 수있겠다. 그는 한성은행 경영권 양도를 비롯해 일제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의도적 배제를 당했지만 그 때마다 변신과 일관된 친일노선으로 버텨냈다.한마디로 일제하 그의 생존논리는 철저한 예속과 굴종이었다.그를 ‘친일 예속 자본가의 전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해방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鄭雲鉉 jwh59@
  • 대보름 달빛축제 풍성

    오는 3월2일은 정월 대보름.한 해중 가장 밝고 큰 달을 맞아 소원과 평안을 비는 명절이다.놀이동산과 각급 호텔에서는 쥐불놀이 달집태우기 등 민속놀이와 대보름맞이 행사가 다양하게 열린다. ▒한국민속촌28일부터 3월2일까지 세시풍속과 공연행사 위주의 프로그램을 마련한다.송파답교놀이 보존회를 특별초청해 민속촌의 홍예교 등 다리를 돌면서 올해의 무사태평을 비는 답교놀이를 연출한다.또 정월대보름 행사중 가장 웅장한 달집태우기 행사와 함께 각 가정이 한해 풍농을 비는 풍농기원 볏가릿대 세우기,각 마을을 돌며 만복을 비는 지신밟기 등도 펼쳐진다.행사마다 막걸리 시루떡 등 먹거리가 차려지며 특히 오곡밥 귀밝이술 부럼 등 보름음식을 시식할수 있다.(0331)283-2106▒드림랜드 대보름 전야제로 3월1일 오후5시부터 10시까지 공원 앞 광장에서 잊혀져 가는 세시풍속을 모은 ‘시민한마당대축제’를 꾸민다.농악대 사물놀이,제기차기,윷놀이,가족 줄넘기,대나무 불꽃놀이,엿장수 공연 등 가족단위로 직접 참여하는 민속놀이를 마련한다.노래자랑과춤 경연대회도 열리며 땅콩 호도 막걸리 등 먹거리도 즐길 수 있다.(02)982-6800▒에버랜드27일부터 3월1일까지 ‘대보름맞이 불꽃축제’를 연다.27·28일 오후7시30분 포시즌스가든에서 모두 27종 1,054발의 폭죽을 터뜨리는 대형 불꽃놀이가펼쳐진다.유러피안광장에서는 27일부터 3월1일까지 깡통과 불씨를 이용한 쥐불놀이,3월1일 오후6시 달이 뜰 때 대나무를 넣어 달집을 태우는 달집태우기 등 민속행사를 즐길 수 있다.3월1일 오후1시·4시 두차례 빅토리아극장에서 극단 미추의 ‘토생전’ 공연도 열린다.(0335)320-5000▒그랜드하야트호텔3월1일 하루 아이스링크에서 대보름 전야제로 다양한 행사를 마련한다.‘한복입고 스케이트 타기’ ‘연 높이 날리기대회’ ‘액막이 연날리기’ ‘팽이돌리기대회’ ‘팽이 돌리기대회’ 등을 열어 숙박권 식사권 등 상품과 함께 부럼을 나눠준다.(02)799-8112
  • 엔화 수직폭락 가속

    □도쿄 黃性淇 특파원□22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화 가치가 달러당 122엔대까지 하락했다. 엔화는 오전 한때 122.55엔까지 떨어져 지난해 12월 1일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엔 가치 하락세가 이어진 것은 지난주말 선진 7개국(G7)회의에서 엔 약세를 용인한데다 하야미 마사루(速水優) 일본은행 총재가 “엔 하락은 일본 경기를 회복시키는 데 바람직하다”고 거듭 지지의사를 밝힌 데 따른 것이다. 전문가들은 120∼125엔대가 일본으로선 바람직하다면서 125엔대 이하로 내려갈 경우 미·일 무역마찰이 심화되고 중국 위안화 절하압력이 높아지는 등 세계경제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내다봤다. marry01@
  • 日 저금리 경기회복 지렛대

    ┑도쿄 黃性淇 특파원┑일본정부의 저금리정책을 통한 경기회복의지가 서서히 실효를 거두고 있다.17일 도쿄시장에서 주가가 전날까지 연속 상승했고,엔은 사흘째 급락했다.일본 경제가 모처럼 활기를 띠는 분위기다. 대장성과 일본은행이 치솟는 장기금리에 제동을 걸겠다고 팔을 걷어부쳤기때문이다.지난 1일 2%대에 진입한 장기금리는 대장성이 국채매입 재개를 발표한 16일 1.999%를 기록,보름만에 1% 이하로 떨어졌다. 금리하락에 자극받아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은 전날보다 2.93엔이나 급락했다.17일에도 ‘달러 사기 엔 팔기’ 흐름이 이어져 1엔 이상 떨어진 118엔대에서 거래됐다.118엔대는 지난해 12월10일 이후 처음이다. 일본정부가 장기금리를 낮추려는 이유는 고금리가 기업 설비투자를 위축시키고 있는데다 주택융자 금리마저 높여 건설경기 부양책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게다가 선진7개국회의(G7)를 앞두고 저금리정책을 통한 경기회복 및 정부의 엔 약세 용인 의지를 과시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하야미 마사루(速水優) 일은총재는 16일 “(단기금리가)제로가 될 수 있다면 제로라도 좋다”고 말했다. 지난주 일은이 0.25%인 단기금리 설정목표를 0.15%로 낮추기로 한 가운데나온 하야미 총재의 ‘0% 금리’ 발언은 금리하락을 부채질할지 주목된다.그러나 시장에선 정부의 ‘개입’을 일시적으로 보고 금리하락의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 ‘아니메’ 관련서적 출간 봇물

    ‘아니메(애니메이션을 뜻하는 일본어)’관련서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엄청난 파급력 때문에 지난해 정부의 일본문화 1차 개방 대상에서는 빠졌지만일본 애니메이션이 국내에 들어오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이에 따라 그동안막연히 동경하거나,혹은 애써 외면해오던 일본 애니메이션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최근 번역출간된 데즈카 오사무의 저서 ‘어머니는 나에게 하고 싶은 일을하라고 하셨다’(누림)가 대표적인 예.데즈카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신(神)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그의 사망 10주기였던 지난 9일 일본 각지에서는 마니아 동호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추모행사가 치러졌다. 일본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한국인에게도 그는 각별하다.그의 이름은 모르더라도 그의 분신인 ‘철완 아톰’,‘밀림의 왕 레오’를 모르는 이는 드물 테니까.이 책은 그가 어떻게 신의 자리에 오르게 됐는지,또 일본 애니메이션이 어떻게 디즈니를 누를 수 있었는지를 자세히 다룬다. ‘아니메를 이끄는 7인의 사무라이’(황의웅 지음,시공사)는 데즈카를비롯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7명의 작품세계와 예술관을 조명한다.‘미래소년 코난’‘원령공주’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알프스소녀 하이디’‘빨강머리 앤’의 타카하타 이사오,‘아키라’의 오토모 카츠히로,카와지리 요시아키,오시이 마모루,그리고 ‘신세기 에반겔리온’으로 널리 알려진 안노 히데아키가 그들이다. 만화평론가 박인하씨 등 4명이 쓴 ‘아니메가 보고싶다’(교보문고)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변화와 다양한 면면을 살핀 책.1917년부터 1963년까지 일본애니메이션 초기 역사를 간략히 정리하고 이어 데즈카 오사무,60∼70년대 TV아니메,로봇,마법소녀에 이르기까지 일본 애니메이션 전반을 설명한다.이밖에 ‘미소녀 게임의 세계’(예솔)도 일본 컴퓨터게임 속에 등장하는 미소녀를 통해 애니메이션의 흐름을 훑어보고 있다.시류에 영합한다는 일각의 지적도 있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을 다각도로 분석하는 것은 국내 애니메이션 발전에 자극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 요르단 왕세자 父王 전권승계

    ┑암만 AP AFP 연합┑후세인 요르단 국왕이 생명연장장치로 생명이 유지됨에 따라 압둘라 이븐 후세인 왕세자가 6일 내각에서 섭정 왕세자로 공식 지명돼 섭정에 들어갔다. 나세르 주데 요르단 공보장관은 후세인 국왕이 국왕으로서 더이상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국왕 주치의들의 결정을 받아 들여 내각이 섭정 지명을 단행했다면서 압둘라 왕세자는 지금부터 국왕의 모든 권한과 책임을 보유한다고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한 소식통은 왕세자의 섭정은 국왕의 사촌을 비롯해 파예즈타라우네 총리와 6명의 전직 총리 등이 참석한 가운데 5일 열린 한 회의에서 결정됐다고 말했다. 압둘라 왕세자는 현재 임파선 암치료를 받은 후 임종상태나 다름없는 후세인 국왕의 사망이 공식 선언될 경우 왕위를 자동으로 계승하게 된다. 압둘라 왕세자는 이날 알-하야트지(紙)와의 회견에서 중동평화 추진 및 이라크에 관한 요르단의 ‘전통적인 정책’을 계속 유지하고 민주개혁을 추진해 나갈 것을 약속했다. 압둘라 왕세자는 또 후세인 국왕이 서거하면 ‘조용하고 원만한’ 왕위계승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면서 자신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평화달성 노력을 후원함으로써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지지해 왔다고 말했다. 한편 왕실의 한 관계자는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는 후세인 국왕의 상태가 더이상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을 경우 그를 자택으로 옮길 수도 있다고 밝혔다. 미국에서 골수이식 수술에 실패한 뒤 5일 귀국한 후세인 요르단 국왕은 현재 뇌기능과 일부 내장기능이 멈춰 “임상적으로 사망한 상태”에 빠져 있다.
  • 日초등교에 울려퍼진 애국가

    “동해무루가 백두산이 마루고 다루토로…” 일본에 3년간 살다가 지난해 봄 돌아온 서울 강동구 대명초등학교 4학년 金 炫錫군(11)은 지난 8일 귀국후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과거 다녔던 도쿄 분쿄 구 하야시초 초등학교를 찾았다.교장선생님께 인사드린 뒤 교실로 들어가는 순간 갑자기 흘러나온 애국가에 깜짝 놀랐다.35명의 급우들은 현석이의 놀라 는 모습에 신이 난듯 카세트 녹음기 반주에 맞춰 더 힘차게 애국가를 불렀다 .일본 급우들은 사회과목에 ‘도쿄를 알아보자’는 단원이 있는데 그 단원을 실감나게 배우기 위해 ‘현석이가 다시 도쿄를 찾았을 때 잘 안내해 주는 방법’으로 단원을 공부했다.또 조를 나누어 실제 답사했다는 말과 함께 반 학생 전원이 쓴 편지 문집과 비디오를 보내 현석이를 초청했다.게다가 친구 들은 애국가까지 준비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애국가가 끝난 뒤 담임 선생님 신자와 에리코(新澤えり子)씨는 “현석이가 3년 동안 일본 국가격인 기미가요를 불렀는데 이번에는 우리가 한국의 국가 를 불러주고 싶다는 생각에 어렵게악보와 테이프를 구해 2학기 내내 연습했 다”면서 현석이에게 애국가의 뜻을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현석이는 애국 가의 가사를 일본말로 칠판에 써내려 갔고 친구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공책에 받아 썼다.뜻을 알게 된 일본 친구들과 현석이는 모두 함께 다시 한번 애국 가를 큰 목소리로 힘차게 불렀다. 姜錫珍 sckang@ [姜錫珍 sckang@]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7회)-일본문학보국회원 장혁주

    한국 문학사전보다는 일본 현대문학사전에 더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 작가 장혁주는 식민지 시대 때 일본문단으로 등단한 최초의 한국인으로 문명을 떨 쳤던 인기작가였다.1932년 ‘아귀도’(餓鬼道)란 사회성 짙은 작품이 일본의 유명한 ‘개조’(改造)지 제5회 현상공모에 당선된 후 그는 일·한 두 나라 에서 두 언어로 민족의식이 짙은 작품활동을 하여 금서 조처를 받는 등 아나 키즘적 경향이 짙은 작가로 주목을 받았다. 1905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장은중(恩重)이고,창씨개명은 노구치 가쿠주(野口赫宙),일본인으로의 귀화명은 노구치 미노루(稔)이다.그가 쓴 단편 ‘다른 풍속의 남편’은 일인칭 소설로 ‘나’는 작가이다.모국(한국) 에서 간통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피신,본처와 헤어지고 일녀 게이코와 결 혼하여 겪게 되는 서로 다른 풍속의 부부생활 중 아내로부터 온갖 수모와 학 대를 견디면서도 일본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각오를 다지는,말하자면 단순한 ‘친일’의 차원이 아니라 혈연적인 일본인화의 표상이다.자전적 요소가 짙 은 이작품처럼 그는 일본문단으로 등단한 이후 일녀 노구치 게이코(野口桂 子)와 결혼,아내의 성을 자신의 성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한국 근대문학사에서는 ‘무지개’ 등의 작가에다 문단 페스트균의 논쟁 유발자로 여전히 장혁주란 이름으로 남아있는 노구치의 친일행적은 임종국이 ‘친일문학사’에서 간략히 밝혔고,광복 이전 일본에서의 활동은 하야시 고 지(林浩治)의 ‘재일 조선인 일본어 문학론’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숱한 친일문인을 제치고 새삼 장혁주를 거론하는 까닭인 즉 그가 친일을 위하여 조선문인보국회가 아닌 일본문학보국회 회원으로 맹활약했었기 때문이다. 두 저서가 다 광복 이전의 ‘친일’행적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에 해방 후의 활동은 묻혀 있었는데,장혁주가 일본인으로 귀화했던 1952년 전후에 취했던 그의 태도는 가히 충격적이다.그는 구태여 해방된 조국을 버리고 일본으로 귀화한 이유를 “한국 조야가 자기를 환영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반역자 취급 을 하고 있기 때문”(조선일보 1952.10.14)이라고 밝혔다. 귀화 직후인 10월 19일부터 28일까지 열흘 동안 일본 잡지 ‘부인구락부’ (婦人俱樂部) 특파원 자격으로 한국전쟁을 취재한 그의 행위를 ‘서울신문’ 은 ‘민족반역자 장혁주 변장가명으로 불법입국’(1952.11.2)이란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격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수난의 조국을 배반하고 일신의 영화를 누리기 위하여 스스로 일본국에 귀화한 민족의 반역자 장혁주가 .....그 더러운 발자국을 유엔 종군기자라는 복장에 감추어 극비리에 이 땅에 들여 놓고 다시 돌아갔다는 사실이 일본의 신문보도로써 이제 밝혀졌다.....그는 10일간이란 체류 기간에 서울을 비롯 하여 그의 더러운 눈으로 본 한국의 그릇된 일편을 일본 요미우리(讀賣)신문 에 게재케 하여 결국 일본에 귀화함으로써 왕도낙토(王道樂土)를 얻었다고 술회하였다......그는 이번 여행을 극비밀리에 계획하여 유엔군 병사의 복장 을 빌려 입고 심지어는 변장을 위하여 검은 안경에 안대까지 하여 유엔종군 기자의 패스포트로써 이 땅의 눈을 속여 가면서 온갖 곳을 돌아 다녔다는 것 이다.” 이어 ‘서울신문’은다음날 ‘장혁주 등의 비국민 행위를 규탄’이란 기 사에서 “친일작가 장혁주가 자기의 과거를 돌아보아 그 잘못을 회개하지 못 하고 아직도 8.15 해방 전과 꼭 같은 죄과를 범하고 있다”고 서두를 쓴 뒤 “조국에의 반역을 감행하고 조국을 팔아 외국인의 안목을 현혹하게 하며 민 족의 위신을 떨어뜨리게 하는 일은 우리가 그대로 묵과할 수 없다.위정당국 은 하루 빨리 이 자를 체포해 오게 하여 국민의 엄정한 심판을 받게 해야 된 다”고 역설한다.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행동했던 재능있는 이 작가의 초상은 역사와 문학을 다시 진지하게 생각토록 만들기에 충분한 자료가 될 것이다. 任軒永(문학평론
  • 친일의 군상:19/을사5적 李根澤 일가(정직한 역사 되찾기)

    ◎代이어 日帝에 충성한 을사 5적 집안/한때 친러파… 大勢 기울자 日에 영합/을사조약 체결 앞장 공로로 요직 역임/충주로 피신한 명성왕후에 생선 잡아바치며 환심 사/왕후 死後 고종에 접근 경찰·군부 실력자 부상/을사조약 체결 과정 자랑 곁들여 설명/부엌서 듣고있던 하녀 식칼내던지며 “흉적” 호통 반민특위가 해산을 1개월 정도 앞둔 49년 7월 하순 어느날.당시 공주중학교 현직교사 한명이 반민특위로 붙잡혀 왔다.이름은 李元九,나이는 37세,죄명은 반민법 제4조 2항 위반.그는 부친 李昌薰이 일제로부터 받은 자작(子爵)작위를 물려받았다는 것이다.그러나 조사결과 그의 부친 이창훈은 해방후인 1947년 4월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따라서 그가 일제때 부친의 작위를 습작하였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결국 그는 불기소로 풀려났다. 벌써 50년도 넘은 이야기다. 지난 가을 ‘공주갑부 金甲淳’ 취재차 공주를 방문한 기자는 우연히 공주에서 이들 부자(父子)를 만나게 되었다.두 사람 뿐만 아니라 이창훈의 부친을 비롯해 이 집안 4대를 한꺼번에 만났다.그리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후손이 제법 잘 단장한 자리에 차례대로 모두 누워 있었다. 그러면 이 집안의 ‘자작 벼슬’은 원래 주인공이 누구인가? 이창훈인가? 그의 부친인가? 그의 부친이다.‘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인 이근택이 바로 이창훈의 부친이자 자작의 주인공이다.부자가 자작을 지낸 이 집안의 친일내력을 더듬어 보자. 李根澤(1865∼1919)은 원래 충북 충주사람으로 집안은 대대로 무인가문이었다.본관은 전주(全州).이근택이 출세 줄을 잡은 계기는 좀 특이하다.그가 아직 서울로 올라오기 전인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터지자 민비(명성왕후)는 고향인 충주로 피난을 갔다.마침 이근택은 민비의 친정 이웃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매일 민비에게 생선을 잡아다 바쳤다.당시 피난생활을 하고 있던 민비로서는 이 일을 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환궁후 민비는 이듬해 그를 파격적으로 발탁,‘남행선전관’에 임명하였다.1884년 무과에 합격한 이후 그는 10년간 지방관으로 근무하면서 중앙무대 진출을 모색하였다. ○명성왕후 유품 우연히 얻어 이근택이 대한제국기에 중앙무대에서 요직을 역임하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 고종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다.한번은 그가 우연히 일본상점에 들렀다가 비단으로 만든 띠(帶) 하나를 발견하였다.화려한 수를 놓아 만든 것이 첫 눈에 보아도 기품이 있어 보였는데 군데군데 검붉은 흔적은 핏자국이 완연했다.순간 그는 이 허리띠가 민비의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거금 6만냥을 주고 사서 고종에게 바쳤다.고종과 태자는 비명에 간 민비를 다시 만나기라도 한듯이 반가워 했다.이 일로 그는 고종의 총애와 신임을 독차지하였고 날로 벼슬은 높아졌다.대한제국기에 그는 경무사·경위원 총관·헌병사령관·원수부 검사국장 등을 지내면서 경찰·군사부분에서 최고의 실력자로 행세했다. 한편 대한제국 초창기 이근택은 친러파에 속하는 사람이었다.우선 출세의 은인인 민비를 일본사람들이 시해했기 때문에 일본과는 개인적으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또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은 러시아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본 까닭도 있었다.조선내에 친일세력부식에 혈안이 돼 있던 일본측으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급기야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내 친러파 대신들을 매수·회유키로 방침을 세웠다.여기에 제일 먼저 걸려든 사람이 ‘한일의정서’ 체결 당시 외무대신 서리였던 李址鎔이었다.그는 단돈 1만원에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에게 매수돼 궁중의 비밀을 낱낱이 하야시에게 보고하는 첩자노릇을 했다.일제는 회유와 협박이 통하지 않은 李容翊을 일본으로 납치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산이 보이자 한국내에서 그들의 기세는 갈수록 당당해졌다.정부대신들 가운데서도 일본쪽으로 기우는 자가 하나 둘씩 늘어갔다.이근택 역시 친러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일본세력을 의식하기 시작했다.그는 대세가 기울고 있다는 감을 잡고 이를 틈타 또다른 출세를 계획하였다.당초 친러파였던 그는 친일파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하였다. 그는 일본공사관으로부터 기밀비로 30만원을 받고 그 댓가로 궁중의 기밀사항을 정탐하여 이를 일본측에 제공하였다.1905년 9월 ‘을사조약’ 체결을 앞두고 그는 군부대신직에 올랐다.이무렵 그는 완전한 친일파가 되어있었다. 마침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그 공로로 이듬해 일본정부로부터 훈1등(勳一等)과 태극장을 받았다. ○잠자다 자객에 피습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퇴궐한 이근택은 집안식구들을 불러모아놓고 조약체결 광경을 설명하면서 “내가 오늘 을사5조약에 찬성을 했으니 이제 권위와 봉록이 종신(終身)토록 혁혁(赫赫)할거요”라고 자랑하였다.순간 부엌에서 식칼(饌刀)로 도마를 후려치는 소리가 나더니 한 계집종이 마당으로 뛰쳐나오며 호통을 쳤다.“이 집 주인놈이 저렇게 흉악한 역적인 줄도 모르고 몇 년간 이 집 밥을 먹었으니 이 치욕을 어떻게 씻으리오”하고는 그 길로 집을 나가버렸다.계집종이 집을 나가자 이어 오랫동안 같이 지내오던 침모(針母)도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대한매일신보’,광무 9년 11월 25일자·제86호). 일개 계집종이 이러했을 진대 민중들의 분노는 말할 것도 없었다.조약체결 이듬해 2월 그는 취침중 자객들의 습격을 받고 13군데나 자상(刺傷)을 입었으나 겨우 목숨은 건졌다.거의 회를 쳐놓다시피 한 그를 한성병원에서 한 달만에 살려낸 것이다.그를 치료한 주치의는 나중에 2등 태극장을 받았다. 한번 친일로 들어선 그의 친일행각은 1910년 ‘한일병합’때까지 지속됐다. 병합후 일본정부는 공로자들에게 공적에 따라 작위와 ‘합방은사금’을 공채(公債)로 주었다.이근택은 같은 을사오적인 權重顯·朴齊純 등과 함께 훈1등 자작(子爵,4등급)과 매국공채 5만을 받았다.병합후 그해 10월 중추원 고문으로 취임한 그는 1919년 12월 17일 사망하였다.그의 작위는 장남 李昌薰이 이듬해 2월 20일 습작(襲爵),해방때까지 유지하였다.그 역시 일제하 몇몇 친일단체에서 활동했는데 말하자면 대(代)를 이어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된 셈이다. ◎’3형제 매국노’/李根澔­李根澤·李根湘/日帝시대 통틀어 최초/죽은뒤 자식이 작위 습작 이근택은 형 李根澔와 동생 李根湘 등 3형제가 ‘한일합병’후작위를 받았다.이근택은 자작,형과 아우는 각각 남작을 받았다.일제시대를 통털어 3형제가 작위를 받은 경우는 이 집안이 유일하다.또 이들의 사후 작위는 모두 자식들이 습작하였다. 이 집안의 ‘스타’는 단연 이근택이다.이근택이 출세길에 들어서자 형제들이 뒤이어 벼슬길에 올랐다.1892년 진사에 급제한 동생 이근상은 군부 주사를 거쳐 1906년 궁내부 대신이 되었다.다시 시종원경과 구한국 중추원 부의장을 지낸 그는 ‘한일병합’때 훈2등 남작 작위를 받았다.일제하에서는 중추원 고문과 식산은행 감사를 지냈다.1920년 1월 사망하자 그의 작위는 장남 李長薰이 그해 5월 10일자로 습작하였다. 이근택의 형 이근호는 1878년 무과에 급제하여 경무사,충청·전라·경기 감사,교육참모장,법부대신을 역임하고는 1906년 시종무관장을 지냈다.병합때 훈1등 남작을 받았다.그의 작위는 아들 李東薰이 습작하였다.습작자까지 포함하면 한 집안에 귀족이 6명이나 나온 셈이다. ‘조선귀족열전’을 편찬한 오무라(大村友之丞)는 이들을 두고 “3형제가 모두 왜목림(倭木林) 가운데 3회(會)로서 대신에 올라 일문의 성망을 현양하고 권세를 장악했으니 영광이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고 했다.그러나 당시 세인들은 나머지 두 형제를 포함해 이 집안 5형제를 ‘5귀(鬼)’라고 불렀다고 한다.
  • 국제/대한매일 선정 1998년 10大 뉴스

    ◎아시아 경제의 몰락 아시아 각국이 금융경제위기의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6월 엔화가 폭락하고 중국 위안(元)화의 평가절하 압력이 가중되며 각국이 기업 도산과 실업자 양산의 악순환을 겪었다. 중국과 타이완(臺灣)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시아국들이 사상 초유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예정이다. 그나마 한국과 태국이 내년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선다는 전망이 나와 위안을 주고있다.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테러로 얼룩진 98년에 한가닥 빛과 같은 사건. 수천명의 희생자를 내며 30여년간 지속된 북아일랜드 피의 역사를 마감시키는 낭보였다. 4월 협정체결에 이어 6월 협정에 따른 연합의회가 탄생됐고 세계는 평화협상의 주역 존 흄 사회민주노동당(SDLP)당수와 데이비드 트림블 얼스터 통일당(UUP)당수에게 98노벨평화상을 수여,평화를 향한 여정에 힘을 보탰다. ◎러 모라토리엄 선언 8월17일 러시아는 400억달러가 넘는 단기국채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루블화 평가절하를 단행,사실상 국가부도를 냈다. 아시아를 도화선으로 타들어오던 금융위기가 러시아에서도 터진 것이다. 국내적으로 환율 폭등,살인적 인플레등에 건강악재까지 겹친 보리스 옐친 정권은 최대 위기에 빠졌고 돈을 물린 국제사회도 곤욕을 치렀다. 특히 루블 환투기를 일삼아온 서방 헤지펀드들이 비틀거리면서 여파가 국제시장으로 확산됐다. ◎피노체트 영국서 체포 런던 병원에서 치료받던 칠레 전 독재자 피노체트(82)가 스페인 사법부의 자국민 살해·고문 혐의 기소에 따라 영국 경찰에 체포된 것이 지난 10월17일. 이때만 해도 피노체트가 스페인행 판결에 처하리라고 내다본 관측통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영국은 면책특권 불인정,스페인 송환 절차 개시등 잇따른 ‘법대로’ 판결로 전세계 인권기구의 갈채를 한몸에 받으며 ‘반인권 독재자에 공소시효 없다’는 새로운 판례를 창출했다. ◎美 이라크 군사공격 미국과 영국이 합동으로 16∼19일 나흘간 4차례에 걸쳐 이라크 군사거점에 미사일 400여발을 퍼부었다. 작전명 ‘사막의 여우’. 이번 군사공격에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유엔 무기사찰을 훼방한 이라크 응징이란 명분을 붙였으나 러·중 및 아랍권의 강한 반발과 탄핵 모면용이라는 내부 비판에 직면했다. 대차대조표는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국내입지를 더 굳힌 반면 클린턴은 하원서 탄핵돼 클린턴 적자로 나타났다. ◎인도 파키스탄 핵실험 인도가 5월 11일,13일 핵실험을 한데 이어 50년 앙숙지간인 파키스탄이 국제사회의 경고에도 아랑곳 않고 같은 달 28일 보복 핵실험을 강행했다. 국제사회는 핵실험 도미노 불안에 휩싸였고 미 시카고대 핵과학회는 지구종말의 시계를 자정 14분전에서 9분전으로 앞당겼다. 양국은 더이상 핵실험을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서남아 지역은 세계의 핵화약고로 떠올랐다. ◎성추문 클린턴 탄핵 1월 불거진 빌 클린턴 미 대통령과 백악관 인턴직원 모니카 르윈스키양과의 성추문. 이 사건으로 인해 클린턴 대통령은 미역사상 연방대배심에 선 최초의 대통령,하원에서 탄핵받은 두번째 대통령이란 불명예를 안았다. 르윈스키와의 성관계를 적나라하게 담은 ‘스타보고서’(9월)가 공개돼 전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고 이제 세계의 이목은 새해초 열리는상원의 판결결과에 쏠려있다. ◎지구촌 기상이변 지난해까지 극심한 가뭄을 유발했던 엘니뇨가 올해는 라니냐와 바통터치하면서 전 지구촌을 또한번 기상재앙속으로 몰고 갔다. 중국의 양쯔강은 폭우로 올여름 내내 범람하며 최악의 ‘홍수사태’를 만들어냈고 대형 허리케인 ‘미치’가 휩쓸고간 중남미 각국은 수천명의 인명피해와 함께 각 지역이 초토화됐다. 유럽에선 이상한파로 수백명의 노숙자가 얼어죽었고 동남아에선 극심한 물난리를 겪어야 했다. ◎비아그라 열풍 지구촌 뭇 ‘고개숙인 남성’들의 열광적인 호응에 힘입어 올 최대 히트의약품으로 등극한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가 3월 미국에서 첫선을 보였다. 이후 전세계로 전파되며 부작용으로 수십명이 사망했지만 여전히 세계 각국이 비아그라 밀수로 몸살을 앓을 만큼 인기가 식지 않고 있다. 제조사인 화이저사의 주식폭등으로 대주주인 영국 성공회가 뜻밖의 ‘비아그라 횡재’를 얻는 등 화제도 많이 낳았다. ◎印尼 수하르토 하야 32년간 인도네시아를 철권통치한 수하르토 대통령이 5월시민시위에 굴복해 물러났다. 경제난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지만 수하르토 일족의 부패한 족벌정권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말레이시아도 안와르부총리가 민주개혁을 요구하자 마하티르총리가 동성애 혐의등 20여개의 죄목을 씌워 그를 구금해 버렸다. 이후 그의 석방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 뜨는 별 지는 별(그래픽 진단 ’98세계:2)

    ◎뜨는 별/슈뢰더­총선서 콜 격침 독일 새 조타수로/부시2세­주지사 재선… 착 대선 선두주자/후진타오­21세기 중국 이끌 차세대 지도자/음베키­만델라 오른팔… 국정 사실상 장악 ▷슈뢰더 독일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54)는 지난 9월 치러진 총선에서 변화를 갈망하는 독일 국민에게 실용적 개념을 도입한 새로운 좌파이념을 불어넣음으로써,독일 통일과 유럽 통합의 초석을 놓은 ‘거함’ 헬무트 콜을 침몰시키고 통일 독일의 조타수로 등장했다. ▷美 조지 부시 2세◁ 조지 부시 2세(52)는 지난 11월 실시된 미국 중간선거에서 텍사스주지사로 재선돼 2000년 대선의 선두주자로 떠올랐다. 미국 CNN방송이 보도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부시 2세가 그의 강력한 라이벌인 앨 고어 부통령과 차기대선에서 맞붙었을 경우 57% 대 39%로 우세한 것으로 나타나 ‘부자(父子) 대통령’의 영광을 누릴 가능성이 커졌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부주석◁ 21세기 중국을 이끌 차세대 주자인 후진타오(胡錦濤·56) 중국 국가부주석은 지난 15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정상회담에 주룽지(朱鎔基) 총리를 제치고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을 대신해 참석,그의 위상을 다시 한번 대내외에 과시했다. ▷소냐 간디 인도 야당 당수◁ 인도의 명문 네루·간디가의 며느리인 소냐 간디 인도 국민회의당 당수(51)는 지난 11월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둬 차기 총리 후보로 부상,91년 암살당한 라지브 간디 전 총리에 이어 ‘부부 총리’ 탄생에 한걸음 다가섰다. ▷타보 음베키 남아공 부통령◁ ‘만델라의 오른팔’로 불리며 남아공의 국정을 사실상 이끌고 있는 타보 음베키 남아공 부통령(55)은 지난 17일 넬슨 만델라 대통령으로부터 공식 후계자로 지명돼 99년의 비상(飛翔)을 준비하고 있다. ◎지는 별/클린턴­20세기 가장 치욕적인 대통령/수하르토­민주화 요구로 하야… 씁쓸한 노후/옐친­러시아를 국가보도 사태로 몰아/콜­총독 일궈내고 정치무대 명예퇴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52)은 성추문사건으로 지난 1868년 앤드루 존슨 대통령에 이어 사상 두번째로 하원의 탄핵을 받는 바람에 ‘20세기 가장 치욕적인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그는 사임하지 않겠다고 강력히 밝혔지만 상원의 탄핵 ‘화살’을 피한다 해도 레임덕 현상은 불가피하게 됐다.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전 대통령◁ 32년 동안 철권통치해오던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전 대통령(77)은 비동맹세계 지도자로 또 경제개발로 명성을 날렸지만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굴복, 지난 5월 하야했다. 최근 재임기간 중 각종 부패·축재혐의로 조사를 받는 등 씁쓸한 노후를 맞고 있다. ▷헬무트 콜 독일 전 총리◁ 독일 통일을 일궈낸 헬무트 콜 전 총리(68)는 지난 10월 ‘연부역강(年富力强)’한 슈뢰더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통일의 영광을 남긴 채 조용하고 당당하게 정치무대를 명예 퇴진했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67)은 건강악화 탓인지 냉전시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러시아를 ‘국가부도사태’까지 몰아넣었으며 ‘정치적 식물인간’으로 전락했다는 비난 속에서도 끈질기게 대통령직을 버티고 있다.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 ‘아시아적 가치’를 주창하던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73)는 정권 유지를 위해 자신의 후계자였던 안와르 전 부총리를 동성애 등 20개 이상의 죄목을 씌워 투옥시키는 강수를 던졌으나 시민들의 열화 같은 민주화 요구로 ‘제2의 수하르토’가 될 처지에 놓였다.
  • 황무지 개간권과 항일논조(대한매일 秘史:9)

    ◎일 50년간 토지사용 요구 강력 비판/영구 식민지화 속셈 폭로에 유생들도 궐기/개간권 확보 실패하자 대한매일 탄압 시작 대한매일은 창간직후부터 강력한 항일민족지로 발행되었다.그러나 항일논조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비판하면서 부터였다.일본이 한국의 황무지 개간권을 얻어내어 이를 영구적인 식민지로 만들려는 공작에 착수한 것은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1월부터였다.일본은 처음에는 태국(Siam)의 땅을 얻어내려 했다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한국으로 눈을 돌렸다.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한 표면상의 인물은 일본 대장성의 관방장을 역임한 나가모리(長森藤吉郞)였다.나가모리는 개인 자격으로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는 듯이 가장했지만 사실은 일본 정부의 치밀한 계획 아래 진행된 것이었다. ○전국토 3분의 2가 넘어갈판 일본이 요구한 내용은 한국에서 명백하게 이용,경작하고 있는 토지 이외의 국토를 모두 개간하고 정리·개량·척식하는 권리와 그를 이용하고 이익을 거두는 모든 경영권을 우선 50년 동안나가모리에게 위임하라는 것이었다.일본은 한국에서 현재 경작하고 있지 않은 땅에 대한 사용권을 얻어서 50년 동안 이를 개간하여 경영하되 50년이 지난 뒤에는 사용기간을 또다시 연장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이러한 계약이 체결되는 경우에 일본측이 차지할 수 있는 ‘황무지’가 얼마나 될것인지 정확한 넓이가 계산된 것은 아니었지만 외부협판 윤치호는 전 국토의 3분의 2가 일본측에 넘어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일본의 입장에 호의적이었던 주한 영국공사 조단은 적어도 경작 가능한 토지의 3분의 1은 될 것으로 추산된다고 본국에 보고했을 정도였다.일본이 황무지 개간권을 차지한다면 한국의 광대한 토지는 영구히 일본의 점령하에 놓이게 될 것이며 한국은 자연스럽게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 운명이었다. 이같은 사태에 직면하여 당시 양대 일간지였던 황성신문과 뎨국신문 등이 이를 폭로하였고 주로 유생(儒生)들이 중심이 되어 격렬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황성신문은 7월6일자 논설을 비롯하여 7월7일부터는 3회에 걸친 연속논설을 게재하여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의 부당함을 비판했다.대한매일이 창간된 것은 러일전쟁 직후의 불안한 사회 분위기에 일본의 부당한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운동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인 7월18일 이었다.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국민적인 운동을 대한매일이 외면할 수는 없었다. 대한매일은 창간 4일후인 22일자에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윤치호의 글을 게재하였다.이때부터 대한매일은 일본의 부당한 요구를 비난하기 시작하였다.황무지 개간권 문제는 일본에서 발행되는 일본어 신문과 영어신문에도 논란이 일어났으므로 대한매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일본에서 발행되는 친일논조의 영어신문 재팬 메일과 고베 해럴드와는 논전을 벌이면서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대한매일의 일본에 대한 비판은 9월2일부터 5회에 걸쳐 연재된 「한국에 일본위력이라」는 논설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났다.이 논설은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래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정책을 낱낱이 들춰내면서 실례를 들어 일본을 공격하였다.특히 마지막부분에서는 주한 일본 공사관의 대리공사였고 침략외교의 선봉장이었던 하기와라(萩原守一)를 신랄하게 비난했다.하기와라는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林權助)와 함께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했던 일본 공사관의 제2인자였다.하기와라는 동경제대 출신으로 외교관의 경력이 화려했으며 본국에서는 정치적인 배경도 튼튼한 야심에 넘치는 젊은 외교관이었다.그는 하야시와 함께 한국침략 정책에 있어서는 늘 강경파였다. ○배설추방… 신문발행 중단 공작 대한매일을 비롯한 민족진영의 반대로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는 실패로 돌아갔다.그러나 하기와라는 대한매일에 직접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하기와라는 배설의 일본 공사관 출입을 금지시키고 배설을 한국에서 추방하고 신문발행을 중단하도록 하는 공작을 시작한 것이다.대한매일은 더한층 항일적인 논조를 강화하였고 고종을 비롯한 민족진영은 대한매일을 더욱 뜨겁게 후원하였다.
  • 이순신과 독도/愼鏞廈 서울대 교수·사회사(특별기고)

    ◎日 고문헌도 독도는 한국영토로/日서 시마네현 소속 결정은 국제법상 실효적 점유권 위반 올해 12월의 문화인물은 이순신 장군이다. 일본이 1592∼98년 한국을 침략한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 장군의 해군이 일본 수군단과 싸워 연전연승해서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바다를 지켜 주었기 때문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자기나라에 15만명의 병력과 무기 및 식량을 더 준비해 놓고도 해로를 이순신 장군에 차단당하여 결국 한반도만 초토화시켜 놓고 패퇴했다. 이순신 장군이 바다를 지켜 나라를 구한 것이었다. 그 바다에서 독도 영유권 문제가 일고 있다. 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가 된것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이 우산국(于山國)이 신라에 병합된 서기 512년 이래 일관된 것이었다. 15세기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나,1808년 ‘만기요람’ 군정편에서는 ‘울릉도와 우산도(독도)가 모두 옛 우산국 영토였다’고 기록했다.그 이후 독도가 한국영토라는 한국측 고문헌 기록은 매우 많다. 일본측의 고문헌기록은 어떠할까?일본정부는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주장하여,1953년 10월3일 ‘독도’를 기록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고문헌으로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를 들었다. 이 책은 일본 출운(出雲)국의 관리가 영주의 명령을 받고 1667년에 은기도(隱岐島)를 시찰하여 보고들은 것을 보고한 책이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울릉도와 독도를 고려영토라고 쓰고,일본의 서북경계는 이 ‘은기도’에서 끝난다고 기록하였다. 일본 최고의 고문헌도 독도를 한국영토라고 기록한 것이었다. 그 이후 일본의 모든 고문헌과 고지도들이 독도와 울릉도를 모두 한국영토로 기록했다. 예컨대 일본의 대실학자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1785년에 그린 ‘삼국접양지도’와 ‘일본전도(日本全圖)’에서는 한국을 황색,일본을 녹색으로 채색했는데,울릉도와 독도에 어떤 색깔을 칠했을까? 울릉도와 독도에 한국색깔인 황색을 칠하고,그래도 혼돈이 있을까봐 ‘조선의 것’이라고 문자로 기록했다. 메이지유신 때에는 일본정부 공문서들까지 모두 울릉도와 독도를 한국영토라고 명백히 기록했다. 일제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후 동해에서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기 위한 해군망루를 울릉도와 독도에 세우게 되었는데,독도를 아에 일본영토로 침탈 편입해 버릴 ‘야욕’이 생기었다. 그리하여 1905년 1월28일 일본 내각회의는 독도가 주인이 없는 무주지(無主地)라고 주장하고 이를 일본에 영토편입하여 ‘다케시마(竹島)’라는 이름으로 시마네(島根)현에 부속시킨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국제법상 물론 불법이었다.왜냐하면 독도는 1905년 1월 당시 무주지가 아니라,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 한국영토였기 때문이다. 일본이 1945년 8월 항복하자 연합국최고사령부는 일본제국이 침략 야욕으로 이웃나라에서 빼앗은 땅은 모두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일본의 정의(definition of Japan)’ 판정을 내리게 됐다. 연합국최고사령부지령(SCAPIN) 제677호는 원주인 한국에 돌려주어야할 대표적 섬으로 ‘제주도·울릉도·독도’를 지명했으며 그 결과 1946년 1월29일 한국에 독도 등이 반환됐다. 현재 한국의 배타적 독도영유는 역사적 권원과 실효적 점유에의거한 것만이 아니라,SCAPIN 677호의 효력에 의해 국제법상 완벽하게 보장·보호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먼저 SCAPIN 677호의 효력을 소멸시키는 성격을 가진 협정을 당사자 한국과 체결하여,국제법과 국제사회에서 독도에 대해 대등한 지위를 확보함을 제1단계 목표로 하고,그 다음에 제2단계로 독도를 실효적으로 점유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 배설과 장지연(대한매일 秘史:7)

    ◎배설 출옥 기념 상해파티서 조우/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으로 구속/대한매일 용기 찬양·석방 요구 인연 배설이 출옥하자 상해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그의 출옥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었다.우연하게도 이 자리에는 황성신문 사장이었던 장지연(張志淵)이 참석했다.장지연과 배설은 3년전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때에 잊을 수 없는 인연이 있었다.장지연은 1905년 11월20일자 황성신문에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였음을 통렬히 비판하는 명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썼다가 구속되자,대한매일신보는 그 용기를 크게 찬양하면서 석방을 요구하였고,문제가 된 논설을 영역하여 호외로 발행하여 국내외에 이를 알린 일도 있었다.이같은 인연의 배설과 장지연은 멀고 먼 이국땅 상해에서 우연히 만나 밤새 통음(痛飮)하며 나라의 운명을 걱정했던 것이다. ○두사람 나라 걱정하며 통음 장지연은 1909년 5월1일 배설이 서울에서 사망한후 그의 공적을 기리는 사람들이 세운 묘비의 비문을 지었는데 비문에 이때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 일찍이 상해에서 그를 만나 날이 새도록 함께 통음할 적에 비분강개 하야 그 뜻이 매우 격렬하더니 이제 공의 묘를 위하여 글을 쓰게되매 허망한 느낌을 이기지 못하겠도다.이제 명(銘)하여 가로되 드높도다 그 기개여 귀하도다 그 마음씨여,아! 이 조각돌은 후세를 비추어 꺼지지 않을 지로다.” 1905년 11월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된 소식을 들은 장지연은 20일자 황성신문에 우리 언론사에 가장 빛나는 논설로 손꼽히는 유명한 ‘이 날에 목놓아 통곡하노라(是日也放聲大哭)’를 실어서 그 통분함을 천하에 토로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이 논설에서 장지연은 보호조약의 체결로 동양 3국의 평화가 깨어지게 될 것임을 지적하고 조약 체결의 부당함을 비판하였다.또한 일본의 강압에 굴복하여 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개돼지만도 못한 자들이라고 힐책하였다.그 일부를 현대문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장지연 배설 사망후 묘비문 작성 “…우리 대황제 폐하의 강경하신 뜻으로 거절해 마지않으셨으니 이 조약이 성립되지 못할 것은 이등박문 스스로가 알아 파기할것으로 생각했는데 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이 사사로운 영화를 바라 머뭇거리고 으름장에 겁먹어 떨면서 매국의 역적 됨을 달갑게 여겨서 사천년 강토와 오백년 종묘사직을 남의 나라에게 바치고 이천만 동포를 몰아 남의 노예로 만드니 저 개돼지만도 못한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과 각부 대신은 깊이 나무랄 것도 없지만 명색이 참정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상으로 단지 부(否) 자(字)로 책임만 때우고서 명예를 구하는 밑천으로 삼을 계획이었던가.김청음(金淸陰)처럼 항서를 찢고 통곡하지도 못하고 정동계(鄭桐溪)처럼 칼로 배를 가르지도 못하고서 뻔뻔스럽게 살아남아 세상에 다시 섰으니 무슨 낯으로 강경하실 황상 폐하를 다시 뵈올 것이며 무슨 낯으로 이천만 동포를 다시 대할 것인가.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남의 노예된 우리 이천만 동포여,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단군 기자이래 사천년을 이어온 국민정신이 하루 밤사이에 갑자기 멸망하고 말 것인가.원통하고 원통하도다 동포여 동포여.” 인용문 가운데 고딕체는 본문(4호) 보다 한 호가 더 큰 활자인 2호 활자를 사용하여 강조하는 편집기법을 활용하였다.위기에 처한 나라의 운명을 독자들에게 시각적인 효과를 더하여 강조한 것이다.장지연은 이 논설과 함께 ‘오건조약(五件條約)청체전말(請締顚末)’이라는 기사를 실었다.역시 4호 본문에 2호 활자로 중요한 부분을 강조한 편집이었다.이등박문이 11월10일 경부철도편으로 서울에 도착하여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한 전말을 소상히 폭로한 내용이었다.이날짜 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과 을사조약 체결에 관한 기사는 검열 당국의 손에 들어갔다면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장지연은 일본군의 검열을 받지 않은 채 이 신문을 배포하였다. 주한 일본헌병사령부는 1904년 2월 러일전쟁 직후부터 한국 언론에 사전검열을 실시하고 있었다.일본은 이해 7월 군사경찰 실시를 한국에 통고하였다. 작전상 한국의 치안유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일본의 군과 경찰이 한국의 치안을 담당하겠다는 것이 이유였다.한국은 이를 거절했으나,일본은 군사경찰 실시를 일방적으로 강행하였다.
  • 印尼 수하르토 사법처리

    ◎“부패·정실인사 혐의로 조사” 대통령령 발표/내년 6월7일 총선·8월29일 새 대통령 선출 【자카르타 AP AFP 연합】 인도네시이아 정부는 수하르토 전 대통령에 대한 사법처리를 하기로 했다.또한 내년 6월7일 총선을 실시,새 대통령을 뽑기로 했다. B.J.하비비 대통령과 주요 각료 및 국회 지도자들이 3일 국회에서 만나 정치개혁 문제를 논의한 뒤 이같이 밝혔다고 아크바르 탄융 국무장관이 말했다. 하비비 대통령은 부패,정실인사 등의 혐의를 받고 잇는 수하르토 전 대통령에 대해 즉시 사법조치를 취해 조사를 하도록 하는 대통령령을 발표했다고 탄융장관은 설명했다. 이는 지난 달 12일 최고입법기구인 국민협의회(MPR)를 통과한 정치개혁법이 부패,정실인사,공모 등을 척결하기 위해 갈리브 검찰총장에게 ‘효과적이고 유효한’ 조치를 취하도록 한데 따른 것이다. 갈리브 총장이 이끄는 수사팀은 이에 따라 외국계 은행 8개를 포함,모두 72개 은행에서 수하르토 전 대통령 명의의 예금 230억루피아(310만달러)를 찾아냈으며 수하르토 전 대통령이이끄는 7개 재단이 4조1,00억루피아(5억4,670만달러)어치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탄융장관은 덧붙였다. 한편 하르모코 국회의장은 이날 하비비 대통령과 의회에서 향후 개혁일정을 논의한 뒤 내년 6월7일 총선을 실시하는데 합의했으며 새 의회가 소집되는 8월29일 새 대통령을 선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앞서 하비비 대통령은 지난 5월21일 수하르토 하야이후 대통령직에 오르면서 내년에 총선을 실시하고 내년말까지 정·부통령을 새로 선출하겠다고 약속했었다.
  • 구의동 사진박물관(생활속의 박물관·미술관:14)

    ◎한컷 한컷에 깃든 추억… 인생… 역사/1826년 세계 첫 작품부터 첨단 홀로그래피까지 한눈에/한말 풍물 등 희귀자료 즐비 각양각색 카메라도 볼만/내년 새 전시관으로 이전 영상정보산업 메카 기대 신촌과 대학로·압구정동은 서울의 대표적인 ‘젊은이의 거리’다.신세대들의 다양한 젊음의 문화가 거리의 풍속도를 바꾸어가고 있다.신세대 문화의 급속한 변화 속에 새로운 젊음의 공간이 만들어진다.그중의 하나가 광진구 구의동에 있는 테크노마트다.지상 38층의 이 건물은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모든 것을 모아놓은 새로운 ‘젊은이의 광장’이 됐다.활력 넘치는 ‘젊은이의 광장’으로 등장한 테크노마트 안에 한국 최초의 사진박물관이 만들어졌다. 지난 9월10일 문을 연 300여평의 아담한 박물관은 연인들의 새로운 데이트장소로 옛일을 회상해 보는 추억의 장소로 이미 화제의 공간이 됐다.사진이 누구에게나 익숙한 것처럼 사진박물관은 여느 박물관보다 더욱 친근함을 느끼게 한다. 우리에게 너무 친근한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기에 관람객들은 사진이 과연박물관에 전시될 유물이냐는 가벼운 의문부호 하나쯤은 가지고 박물관 문턱을 넘어선다.그러나 오밀조밀 사진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박물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보고 느끼고 체험하다 보면 1시간 남짓의 관람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질 만큼 가치있는 작품들이 전시돼 있음을 알게 된다. 사진박물관에서 우선 눈여겨 봐야할 것은 세계 최초의 사진으로 1826년 프랑스의 발명가 니엡스가 8시간이나 걸려 찍었다는 희미한 정원의 모습이다. 그리고 염화은을 코팅해서 사진의 효과를 낸 초기 사진인 은판사진(다게레오 사진)과 그후 등장한 유리판 사진,최첨단 사진 홀로그래피 등 사진의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다양한 사진이 전시돼 있다.국내 사진으로는 처음 사진이 소개된 120년 전의 풍물과 사람들의 모습,정부수립 50년을 총망라한 역사의 현장 등이 전시돼 있다. 가슴을 드러낸 조선시대 서민들 모습과 풍물을 비롯 일본 공사관에 초대된 외교사절들의 모습이 담긴 귀한 자료사진들도 공개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사 김규진 코너도 만들어져 있다.1907년 소공동에 문을 연 천연당사진관의 광고가 8월16일자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 전신)에 실렸던 자료도 눈에 띈다. 사진박물관에서는 카메라의 역사도 배울 수 있다.주름상자를 조절해서 피사체의 각도를 수정할 수 있는 뷰 카메라와 옛 소련에서 만든 초기의 주름카메라,국내 한 대뿐인 로라이 마린 수중카메라,자연 풍경사진으로 유명한 앤젤 아담스가 사용했던 디오도르프 카메라와 같은 종류의 카메라,특수카메라,소형카메라 등 여러가지 사진기가 골고루 갖춰져 있다. 필름이 필요없는 디지털 카메라로는 직접 촬영,프린트까지 해 볼 수 있도록 해서 관심을 끌고 있다.일명 바늘구멍사진기로 불리는 카메라 옵스쿠라를 통해 빛이 바늘구멍을 통하면 벽면에 화상이 거꾸로 맺히는 원리를 관찰할 수도 있다. 사진박물관은 현재 3만여장의 사진과 자료를 보유하고 있지만 전시공간만이 아니라 자료를 발굴하고 역사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는 역할까지 할 예정이다.사진은 바로 역사이기 때문이다. 사진박물관은 특히 한국의 근세사를 정리하기 위해사진자료를 찾는 작업에 들어갔다. 대한매일이 주관하는 ‘전국민 사진자료찾기운동’으로 이름한 이 행사는 각 가정에 보관중인 사진 중에 가치있는 자료를 찾기위한 것이다.이렇게 발굴된 사진은 전직 사진기자들의 분류,정리과정을 거쳐 박물관에 있는 다른 사진과 함께 ‘한국사진자료백서’도 구축된다. 희귀하고 가치있는 대한매일에 보도된다. “사진찾기 행사로 현대사의 한 페이지는 새로 써야할 지도 모른다”며 귀중한 자료 사진 찾기에 기대를 거는 吳岡錫 관장(49)의 말에는 자신감이 배어나온다.그도 그럴 것이 일본 외무성과 협조,일본 NHK에서 한국관련 옛 사진찾기운동을 동시에 전개하게 됐기 때문이다. 사진박물관의 소식만 듣고도 벌써 자료들이 모여들고 있다.대한제국 말기 관료들의 회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뉴질랜드 교민이 보내왔는가 하면,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 일본섹션에서 한국의 경치를 담은 사진첩 ‘조선국진경(朝鮮國眞景)’을 안동대 김희곤 교수가 발견,슬라이드에 담아 왔다.‘조선국진경’의 사진들은 일본에도 남아 있지 않은 귀한 자료다.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조선주재 일본 공사관원이던 하야시 타케이치(林武一)로 일본인의 눈을 통해본 청일전쟁 직전의 조선 풍광과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한국 사진기자와 작가들의 염원으로 만들어진 이 사진박물관은 내년 말이면 서대문구 연희3동 53의 1,공원부지에 1,300평의 독립건물로 옮겨간다.카메라를 닮았고 최첨단 스틸하우스로 외관만으로도 화제가 될 사진박물관은 역사기록의 현장이자 영상정보산업의 메카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스티커 사진이 신세대들에게 최고의 히트상품으로 떠올랐듯 사진은 역사의 기록만은 아니다.사진박물관을 둘러보면 21세기는 사진으로 말하는 영상이미지 시대가 될 것이라는 예상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미래사회의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될 사진과 친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이 될 것이란 吳관장의 귀띔은 사진박물관을 다시 한 번 둘러보게 한다. 미래의 사진은 어떻든 사진은 개인에겐 소중한 추억이다.까까머리 고교시절로 돌아갈 수도 있고,이젠 흙으로 돌아간 지 오랜 할아버지도 찾을 수도있다.한 가정의 기록이며 또 역사의 기록이다.사진은 한 치의 거짓도 인정되지않는 투명한 역사이다.역사의 귀중함과 과학의 경이로움도 느낄 수 있다. 역사가 존재하고 미래의 영상을 예상할 수 있는 곳이 국내 유일의 사진박물관이다. ◎대한매일 주관 사진찾기운동 참여/사진박물관 주인 되어보세요 ①전국민 사진자료 찾기운동에 참여한다. 집안 구석구석에 숨겨진 사진을 찾아 사진박물관에 기증하면 박물관에 기증자로 남는다.엄청난 역사적 사료가 아니래도 좋다.시골집 창고 속의 낡은 사진도 귀중한 자료가 될 수도 있으니 이 기회에 한 번 뒤져 보자.이렇게 모여진 사진은 전직 사진기자들의 분석과 고증을 거쳐 대한매일에 소개되고 내년 4월,사진전시회에 출품된다.그리고 사진박물관에 영구 전시된다. ②서대문구 연희동에 설립될 사진박물관에 건축기금을 낸다. 10만원 이상의 건축기금을 내면 1층 벽면에 얼굴 사진이 영구히 보존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얼굴 사진은 12㎝×9㎝ 크기의 특수세라믹으로 제작된다.유명인들과 나란히 얼굴이 전시될 흔치 않은 기회.단 1만명으로 제한되어 있으니 서두르는 편이 좋다. 사진박물관 사무국 전화 02­3424­1291 ◎이렇게 가세요 서울 광진구 구의동 631의 1.테크노마트 9층에 있다. 지하철 2호선 강변역에 내리면 39층의 최첨단 테크노마트 건물이 보인다. 지하철 역에서 걸어 3분거리.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매월 1,3주 화요일은 쉰다.관람료는 성인 1,000원.어린이는 700원.단체관람료는 30% 할인된다.
  • 사장 배설의 재판:4(대한매일 秘史:4)

    ◎‘日 강압에 못이겨 고종 퇴위’ 호외/裵說 “舊한국군대 해산 당시 참상 목격” 증언 대한매일은 전날에 이어 1907년 7월19일에도 호외를 발행하였다. 「조칙과 대리」라는 제목의 이날자 호외는 고종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순종에게 양위한다는 조칙(詔勅)을 발표했다는 역사적인 내용이었다. 고종의 조칙은 통한에 사무친 어조였다. 4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려왔으나 자주 환란을 겪으매 “다스리는 것이 뜻과 같지 못하여 혹은 사람을 잘못 써서 소동이 날로 심하고,정사가 많이 어그러져 어려운 근심이 급박하야 백성의 곤란과 나라에 위태한 것이 이때에서 더 심함이 없으니 두려운 마음이 깊은 물을 건너고 옅은 얼음을 밟는 듯 한지라…”로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광무신문지법’ 공포 언론탄압 ‘칼날’ 대한매일은 고종의 조칙을 게재한 다음에 이는 고종의 뜻인지 아닌지 일반인민이 주목할 일이라고 의미심장한 촌평을 가했다. 고종의 양위는 일본의 강핍(强逼)과 내각 대신들의 위협에 못이긴 때문임은 세상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다. 그러나고종은 차라리 양위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을사조약에 도장을 찍지는 않겠다는 마음에서 이런 결심을 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대한매일은 비운의 황제 고종은 비록 황제의 자리를 내놓을지라도 끝까지 을사조약에 날인하지 않았음을 강조한 것이다. 일본의 협박에 못이긴 황제의 퇴위,한해 전에 체결되었던 을사조약도 고종은 결코 승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대한매일이 호외라는 긴박하고도 극적인 수단으로 보도하자 국민들의 감정은 더욱 들끓게 되었다. 대한매일은 7월17일자와 18일자 논설을 통해서도 일본의 침략을 맹렬히 비판했다. 일본이 한국 황실을 강핍하고 대신을 종으로 부리며,백성을 짐승으로 여기는 행동이 극도에 달했기 때문에 원통한 마음을 품은 한국인들의 반발이 어떤 식으로 일어날지 모르며 각국의 공론도 일본의 잔학한 흉계를 더욱 폭로할 것이라고 말했다. 7월20일 하야시는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몰아낸 뒤에 24일에는 한국의 내정과 사법권을 완전히 탈취한 「한일협약」과 이의 실행에 관한 비밀각서에 강제로 조인했다. 언론탄압을목적으로 ‘광무신문지법’을 제정 공포한 것도 같은 날이었다. 러일전쟁 직후부터 일본 헌병사령부는 강제로 한국 언론에 검열을 실시하고 있었다. 신문 인쇄 전에 미리 조판된 대장(臺帳)을 헌병사령부에 가지고 가서 검열을 받은 뒤에 신문을 발행하는 것이었다. 한국 침략에 방해가 되는 기사는 모조리 삭제하도록 강요하였으므로 삭제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이른바 「벽돌신문」이 매일같이 발행되고 있었다. 벽돌신문이란 기사가 깎인 자리가 마치 검은 벽돌을 쌓아놓은 것 같다는 뜻에서 부르기 시작한 이름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이완용 내각으로 하여금 광무신문지법을 공포하도록 하여 언론통제의 근거를 제도적으로 마련한 것이다. ○대한매일에 의병들 격문 밀물 사태는 더욱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8월1일,마침내 일본은 구한국의 군대를 해산하였다. 군대를 해산 당한 나라가 어찌 독립국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에 저항하는 구한국 군대가 일본군을 공격하자 큰 충돌이 벌어져 양측에서 많은 인명 피해가 났다. 대한매일의 사옥은 대한문 건너편현재의 시청 앞에 있었기 때문에 역사의 현장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3층 건물에서는 고종의 거처였던 덕수궁으로 밀고 들어가려는 군중과 이를 막는 일본군의 충돌 현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일본 군인과 순사가 시위군중을 향해 총을 쏘면서 진입을 가로막는 생생한 현장이었다. 배설은 이날 군대해산 당시의 참상도 직접 목격하였다고 재판정에서 증언하였다. 일본군은 서소문 안에 있던 구한국 병영을 급습하였다. 졸지에 공격을 당한 군인들은 도망쳤으나 죽은 사람도 많았다. 배설은 미국 의사 에비슨과 함께 현장에 찾아가서 부상당한 사람을 병원으로 실어보냈는데 한 사람은 총검에 찔린 상처가 18군데나 되었다. 이때 도망한 사람들 가운데는 대부분 의병이 되어 일본군에 항전하였다. 의병활동을 보도하는 대한매일의 기사와 논설은 마치 의병대의 창의문(倡義文)처럼 격렬했다. 의병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대한매일이라고 일본은 주장했다. 대한매일을 읽은 의병들이 더욱 격렬한 항일투쟁을 벌인 것은 사실이었다. 배설은 의병들이 대한매일에 보낸 격문들을 재판장에 들고 나오기도 했다. 그 내용들은 너무도 격렬하여 신문에 그대로 실을 수 없는 것들도 많았다. 각지에서 들어온 투고의 종류도 다양했다. 이등박문과 주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에게 보내는 항의문,각 도민들을 향한 격문,주한 각국 영사들에게 보내는 청원서,의병들에 대한 고시(告示),일본 물품의 배척,한국의 고관들을 공격하는 글 등도 많았다. 대한매일은 국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민족언론인 동시에 항일운동의 총 본산이었던 것이다.
  • 정국 혼미 더해가는 인도네시아/수하르토 하야 再版 되는가

    ◎유혈사태후 反政 시위 6개도시 확산/위란토 해임·민주화 완결 투쟁 다짐/하비비 최대위기… 野 정권교체 가능성 인도네시아 정국이 수하르토 하야 당시의 재판(再版)이 돼가고 있다. 한번 피를 본 군중들이 비등점을 넘어섰는데 정부당국은 여전히 강경하다. 또다시 국가적 유혈사태로 치달을 듯 격앙된 분위기다. 지난주 16명의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한 뒤 시위대는 19일 다시 끓어 올랐다. 이날 대학생 3,000여명이 자카르타에서 항의 집회를 연데 이어 여섯군데 이상 지방 도시에서 시위가 잇따랐다. 희생자 부검 결과 실탄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20일에는 500여명이 최대의 유혈참극 현장 아트마 자야 카톨릭 대학에서 추모미사를 올렸다. ‘무하미디야’ 이스람교도 등 수백명은 국립기념관에서 대통령궁까지 행진도 펼쳤다. 학생들은 발포 책임자 위란토 통합군 사령과 해임, 민주화 완결 등이 이뤄질 때까지 스크럼을 풀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이번 사태를 촉발한 것은 인도네시아 입법기구 국민협의회(MPR). 지난 13일 내년 5∼6월 총선,군부 정치참여 비율축소,수하르토 축재조사 등을 규정한 12개항의 정치개혁법을 통과시켜 즉각 총선 실시,군인의 정치 참여금지,수하르토 처벌 등 국민들의 요구를 저버렸다. 군중들은 MPR의 정통성부터 하비비 대통령 하수인으로 춤춘 이번 개혁법 처리까지를 문제삼고 있지만 하비비는 정치 개혁법 없이 개혁도 없다며 굽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정치 분석가들은 지난 5월 군 발포에 따른 대학생 사망이 수하르토 퇴진을 촉발시켰다는 점으로 볼때 사태 진전 여하에 따라 하비비 정권에 최대 위기를 안겨줄 수도 있다고 보고있다. 일각에서는 민주당의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당수를 내세워 정권교체 시도를 가시화 하고 있다.
  • 애니메이션(문화산업을 키우자:2)

    ◎美 앞지르는 기술력… ‘세계정복’ 앞날 밝다/문제점­30여년간 ‘하청’에 치중 수출액 꾸준히 늘었지만 부가가치 창출 거의 못해/현황­최첨단 기술 ‘철인사천왕’.1,000만弗 유치 등 ‘파란불’.정부서도 본격지원 움직임/과제­기획·마케팅력 낙제점.창의력 있는 인재 육성.치밀한 시장 분석 현재 상영중인 드림웍스의 ‘개미’를 본 관객이라면 3차원 디지털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가능성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펜과 종이 대신 컴퓨터만으로 작업하는 이같은 100%디지털 극장용 장편애니메이션은 일본을 비롯해 몇몇 국가에서 시도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미국에서만 ‘토이스토리’‘벅스라이프’등을 선보였을 뿐이다. 그런데 내년 1월이면 우리나라가 그 두번째 자리에 오르게 된다. B29엔터프라이즈가 제작하는 ‘철인사천왕’이 그것. 극장판에 이어 TV시리즈로도 제작될 ‘철인사천왕’은 기존의 디지털 애니메이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디지털과 셀 애니메이션의 장단점을 상호보완한 ‘디지셀’(digi­cell)이라는 신기술로 제작되고 있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해외 투자자를 끌어들였다는 점. 지난주초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미국 ‘라이트포인트’사와 북미 배급독점권을 조건으로 3년내 1,000만달러를 투자하기로 조인서에 서명했다. 이밖에 미국 ‘FOX­TV’,일본 ‘KANSAI­TV’와도 해외 수출 및 배급에 대한 상담을 진행중이다. ‘철인사천왕’외에도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모티브로 한 미래형 SF물 ‘셀마’(한스글로벌C&A),진돗개를 주인공으로 한 ‘백구’(프로젝트 백구2000) 등도 곧 디지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될 예정이다. 질적 완성도는 차치하고라도 96년 ‘아마게돈’의 실패이후 주춤하는 듯 했던 애니메이션산업이 다시 붐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반가운 일이다. 애니메이션이 21세기 고부가가치산업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미녀와 야수’‘라이온 킹’등 월트디지니의 애니메이션이 전세계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천문학적 수치에 달한다는 사실 또한 더는 얘깃거리가 안된다. 문화관광부가 이번 국정감사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97년 애니메이션 수출액은 약 9,800만달러에 이른다. 96년 9,200만달러,95년 8,300만달러로 해마다 꾸준히 늘고 있다. 그러나 이 수치는 역설적으로 한국 애니메이션산업의 왜곡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시나리오와 기획은 미국,자본은 일본,캐릭터디자인은 프랑스,그림은 한국’이라는 제작공식이 있을 정도로 지난 30년간 국내 애니메이션산업은 단순 하청작업에만 치중해왔다. 수출액이 거의 1억달러에 육박하지만 그이상의 부가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심하게 말해 죽은 산업인 셈이다. 업계 내부에서도 이런 현실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90년대 중반 들어 ‘블루시걸’‘붉은 매’‘헝그리 베스트5’‘의적 임꺽정’‘또또와 유령친구들’등이 의욕적으로 제작됐다. 그러나 시나리오와 캐릭터가 뒷받침되지 않은 탓에 ‘아기공룡 둘리’를 제외하곤 참패를 면치 못했다. 업계 일각에서는 이에 대해 “치밀한 사전준비없이 무작정 의욕만 앞세운 탓에 오히려 막 떠오르던 애니메이션산업에 대한 대기업과 투자자들의 관심을 저하시키는 부작용을 유발했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애니메이션산업이 발전하려면 무엇보다 기획능력을 갖춘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국애니메이션학회의 李元馥 회장(덕성여대 산업미술과교수)은 “TV용에 강한 일본과 극장용을 장악한 미국 애니메이션에 대항하려면 틈새시장을 노릴 수밖에 없다”며 “일본의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대중심리에 대한 섬세한 분석력을 바탕으로 차별된 작품을 만들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문인력에는 기획뿐만 아니라 마케팅 전문가도 포함된다. 만들어진 제품을 해외시장에 수출할 뿐 아니라 해외의 자금을 유입받아 글로벌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해낼 수 있는 시장 전문가도 필요하다. 최근 몇년새 한국종합예술학교 등 4년제 대학 5곳,전문대 7곳 등 12곳에 만화 관련학과가 생기고,영화진흥공사가 애니메이션 아카데미를 설립한 것은 뒤늦게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현재 국내 애니메이션계에는 총 200여개업체,2만여명이 종사하고 있다. 자금이 많이 들어가는 극장용보다는 TV물부터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 나가는 단계적인 접근도 필요하다. 한국애니메이션제작자협회 李敎正 사무국장은 “제작업체의 노력과 함께 정부의 지원책도 절실하다”며 “국산 만화영화 TV상영 쿼터제 도입과 공익자금 지원 등 정부가 방송영상 산업진흥책의 일환으로 업계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준 것은 이제 막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한국 애니메이션산업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철인사천왕’ 제작자 金赫/“고유 시나리오 캐릭터 개발하면 21세기 주도산업 가능성 무한대” ‘철인사천왕’제작사인 B29엔터프라이즈의 金赫대표(34)는 스스로를 ‘굴러온 돌’이라고 표현한다. 그럴만 한 것이 그의 애니메이션 경력은 이제 겨우 3년. 방송작가로 일하다 만화가 이현세씨와 인연이 닿아 지난 96년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아마게돈’을 기획하면서 이 분야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엄청난 기대속에 30억원의 제작비를 쏟아부은 첫작품은 아쉽게 실패했다. 의욕만 앞섰지 시나리오도 부실하고 정확한 마케팅 타깃도 없는 등 허술한 구석이 많았기 때문. 국내 최초의 디지털 애니메이션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철인사천왕은 그같은 뼈아픈 경험을 발판삼아 그가 직접 기획하고 제작하는 두번째 작품이다. 철인사천왕은 중국 고전 ‘서유기’를 바탕으로 삼장법사에 의해 봉인됐다 풀려난 여덟 요괴와 지구인들이 만들어낸 4전사의 대결을 그린 공상과학물. 제작발표회에서 선보인 5분짜리 데모버전으로는 작품적 완성도와 상품성을 속단하기 이르지만 일단 화려한 기술력은 인정할 만하다. 두달동안 투자문제로 실랑이를 벌여온 라이트포인트사의 마크 카일사장도 데모버전을 보고는 “정말 당신들이 만들었느냐”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金대표는 “하청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현실이자 비극”이라고 지적했다. 30여년간 하청만 해온 탓에 창의력이 생겨날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문화산업과 산업은 명확히 구분돼야 한다. 하청은 단지 산업일 뿐이다. 이제는 거기에 ‘문화’라는 외투를 입혀야 한다” 그는 “한국은 애니메이션산업 인프라가 구축된 세계 10여개국 가운데 하나다. 문화적 특성을 살린 고유의 시나리오와 캐릭터 개발에 주력한다면 애니메이션은 21세기 문화종주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한국 영상산업의 전략적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 순국선열 기념일(金三雄 칼럼)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웅변가 소대(蘇代)의 글에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木偶人)와 흙으로 만든 허수아비(土偶人)의 대화가 전한다. 어느날 목우인이 토우인에게 “너는 어찌 얼굴이 두루뭉수리로 생겼나. 더구나 비가 오면 상판이 모두 풀어져 눈도 코도 분간 못하게 될 것 아니냐”고 조롱하였다. 토우인 껄껄 웃으며 말하되 “나는 네 말대로 비가 많이 오면 얼굴과 몸뚱이가 젖어 모습마저 풀어질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흙으로 뭉쳤다가 흙으로 풀어져서 이 땅에 있는 것이라 언제고 다시 뭉치면 새 모습으로 지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고 웃으면서 반문했다. 토우인 다시 “그래 네 생각에는 네가 제법 눈 코가 똑똑하게 생긴 줄로만 알겠지! 그렇지만 너야말로 큰 물이 지면 물결에 둥둥 떠서 강을 타고 바다로 나가 북방으로 갈지 남방으로 갈지, 그래 어디가서 네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냐”하자 목우인은 부끄러워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한다. 국난에 처했을 때 국가를 지키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궐기한 의병 독립군 항일지사의 대부분은 토우인같은한국사람들이었다. 목우인처럼 잘나고 영악한 자들은 외세에 영합하거나 앞잡이가 되었다. ○임정의 기념일 제정 뜻 오늘(17일)은 순국선열기념일이다. 이날이 기념일이 된 데는 까닭이 있다. 그러니까 1905년(을사년) 11월 17일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사실상 송두리째 빼앗고자 이른바 ‘을사조약’을 날조한 날이다. 이날을 기해 전국에서 의병의 봉기가 시작되고 일제의 학살과 탄압이 자행되어 순국선열이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날을 순국선열 공동기념일로 정하면서 ‘결정문’ 을 채택했다. “순국선열을 기념할 필요에 대하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다만 순국한 이들을 각각 일일이 기념하자면 자못 번거한 일일뿐더러 무명선열을 유루없이 다 알수 없으므로 1년중 1일을 정하야 공동히 기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인(認)하는 바이요, 이제 11월17일을 기념일로 정한 이유에 대하여는 대개 근대에 있어서 순국한 이들로 말하면 우리의 국망을 전후하야 그 수가 많고 또 그들은 망하게 된 나라를 구하기 위하야 혹은 망한 국가를 다시 회복하기 위하야 비분 또는 용감히 싸우다 순국하였으므로 국가가 망하던 때의 1일을 기념일로 정하였으니, 우리나라가 망한것으로 말하면 경술년 8월29일의 합방발표는 그 형해만 남았던 국가의 종국을 고하였을 뿐이요, 그 실은 을사년 5조약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운명이 결정된 것인고로 그 실질적 망국조약이 측결되던 11월17일을 순국선열기념일로 정한 것임”(임시의정원 제31회 정기의회 의사록) 1895년부텨 1945까지의 50년동안 항일전선에서 순국한 선열은 30만명이 훨씬 넘는다. 의병투쟁 의열투쟁 3·1항쟁 애국계몽운동 무장투쟁 학생운동 지하투쟁과정에서 무명선열 무후선열 및 유후선열과 애국지사를 합친 숫자이다. 이들 중 극소수는 국립묘지의 임정묘역이나 효창동, 수유리 또는 가족묘지 등에 안장되었지만 대부분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순국선열 유업 제대로 토우인처럼 조국강산과 이역에서 흙이 되고 넋이 되었다. 정부의 서훈 여부와 관계없이 국권회복전선에서 희생된 모든 순국선열을 위로하고 추모하는, 지난해부터 부활된 이날의 의미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1919년부터 이날에는 정화수 떠놓고 앞서간 선열을 추념했고 이날만은 찬밥을 먹으면서 국권회복을 다짐했었다. 그들의 희생으로 독립한 우리가 각종 기념행사때에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정도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 순국선열의 유훈이 잊혀지고 유족들이 기한에 떨고 의병기념관, 임정주석기념관 하나 짓지 못하는 오늘의 우리 처지가 이날을 부끄럽게 만들지는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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