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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시각] ‘龍의 눈물’을 기다리며/송한수 국제부 차장급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뜨거운 사람이었느냐“(안도현·너에게 묻는다) 과연 선거 때가 맞기는 맞나 보다. 대통령 후보가 연탄을 나르는 모습이 떠올라서다. 그럴싸한 사진이 나오도록 누군가 후보 얼굴을 부러 새까맣게 칠했다는 얘기까지 들리는 걸 보면 흥행(?)이 된다고 해야 할 텐가. 이런 생각이 나는 까닭이 있다. 며칠 전 택시를 탔는데, 기사는 이렇게 말했다.“노무현 대통령도 한번쯤 재래시장에 나갔더라면…. 한번쯤 (사람들 살림살이만큼은) 잘못했다고 털어놨으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지금 대통령선거 후보라면 누구랄 것도 없이 경제를 살리겠다고 소리치는 것으로 보아 경제가 잘못됐다는 점을 금세 알 수 있다. 이 경우 경제란 물론 가계(家計)를 가리킨다. 그런데 ‘내 탓’이라는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양극화 해소를 가장 큰 목표로 내세웠던 참여정부에서도 마찬가지라 보통 국민들은 애탄다. 2005년 9월14일 늦은 밤 당시 서울시장인 이명박 후보가 동대문시장을 찾아갔다. 젊은이들 틈에 끼어 신촌 ‘인디밴드’ 공연을 관람한 뒤라 약간은 들뜬 분위기였다.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주로 의류 판매상들이다. “손님이 없어서 큰일 났네. 이거∼.”라는 서울시장의 말에는 간단찮은(?) 뜻이 담긴 것으로 여겨졌다. ‘경제 하나만큼은’ 하는 자신감이다. 물증 아닌 물증은 그 다음 대화에서 곧바로 나왔다. 한 상인은 “시장님이 경제를 살려주세요.”라며 펑펑 눈물까지 쏟았다. 그러자 그는 “서울시장이 힘 있어야지, 허 참.”이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야당 단체장으로 중앙정부와 사사건건 다투던 때라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속내를 털어놓은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벌써부터 대선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속삭였다. 다른 한쪽에서는 서울시장으로서, 차기 대권에 꿈을 품은 사람으로 일말의 책임감을 보였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의 소리도 새나왔다. 당시 서울시장 입장에서 최대 역점 사업으로 손꼽히던 청계천 복원현장 바로 옆에서 벌어진 일이어서 더더욱 그랬다. 또 하나 떠오르는 게 있다. 그해 10월4일 관훈토론에선 청계천 복원이 토목적 발상을 밀어붙인 결과라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이명박 시장은 “30대 최고경영자(CEO)로 한참 어른인 60대 사장들에게서 듣는 습관을 잘 배웠다.”고 맞받아쳤다. 특히, 정치권에서 자기들 속도와 비교해 (사업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말하는 듯하다고 그는 덧붙였다. 특정 후보를 꼬집자는 게 아니다. 당선되면 그뿐, 또 거시경제 그늘에 가려 정치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국민이 늘어나지 않을까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후보마다 검증목록인 ‘진정성’ 문제와 얽혔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국민들의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면 ‘전방위 불신’을 낳기 쉽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끝내 국가에 피해로 돌아오고 만다. 이는 참여정부가 과거사 청산 등 정신적(?)인 면에서 업적을 남겼으면서도 가혹하리만치 낮은 평가를 받는 까닭이기도 하다. 단 한명이라도 그늘 아래 신음하는 국민이 있다면 ‘내 탓이오’라고 말하는 지도자가 나오길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지금도 후보들은 모두 서민층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단다. 종류 불문하고 선거만 만나면 출마자들은 ‘서민형’을 자처하지만, 연탄 몇장으로 하루하루를 견디는 이웃들을 보며 한번이라도 눈시울이 뜨거워진 적 있는가 자문자답해 볼 일이다. “국가적 숙제가 쌓였어도 아르헨티나 젊은이들은 꿈을 가져야 한다.”며 울먹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 당선자의 말에서 작은 단서를 읽는다. 지금 우리 국민들은 겸손한 ‘용(龍)의 눈물’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송한수 국제부 차장급 onekor@seoul.co.kr
  • “정글속에서 시체처럼 생활”

    “정글 속에서 지칠 대로 지쳐 시체처럼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2002년 콜롬비아 대선에 출마했다가 좌익 반군인 무장혁명군(FARC)에 납치됐던 전 콜롬비아 대선 후보 잉그리드 베탕쿠르(47·여)의 비참한 인질 생활을 담은 편지와 동영상이 공개됐다. 2일 AFP, 르몽드 등 외신들에 따르면 이 편지는 콜롬비아 정부군이 최근 FARC로 추정되는 반군 3명을 체포하면서 비디오 테이프 5개와 함께 압수한 것이다. 베탕쿠르는 편지에서 “육체적으로 쇠약해졌고 식욕을 잃은 지도 오래됐다. 머리숱도 무더기로 빠지고 있다.”면서 “이곳 정글에선 모든 요구가 묵살돼서 무언가 해보려는 의욕이 다 사라졌다.”고 썼다. 그녀는 성경책이 소지하고 있는 유일한 사치품이라면서 “지적 호기심을 유지하기 위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요구한 지 3년이 지났지만 허사였다.”고 토로했다. 비디오 화면에서 그녀는 손이 쇠사슬로 묶인 채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초점 없는 시선으로 땅바닥을 응시하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생존이 확인된 것은 2003년 FARC의 지시로 비디오 성명이 발표된 이후 처음이다.0년째 정부와 대치 중인 FARC는 베탕쿠르를 포함한 인질 40명의 석방조건으로 정부측에 비무장지대를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콜롬비아 정부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9) 떠돌이 고아 출신 역관 (曆官) 김영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9) 떠돌이 고아 출신 역관 (曆官) 김영

    관상감은 천문과 지리를 비롯해 달력, 날씨, 시간 등을 맡아보는 관청인데, 영의정이 최고 책임자인 영사(領事)를 겸임할 정도로 중요한 관청이었지만 실제 업무는 중인들이 담당했다. 세조 때에는 관원 65명에 생도 45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영조 때에는 관원 150여명에 생도 60명으로 늘어났다. 경복궁 안과 북부 광화방에 관아가 있었는데, 청사와 함께 관천대(觀天臺)를 비롯한 관측시설이 있었다. 간의(簡儀)를 올려놓고 하늘을 관측하던 관천대는 첨성대(瞻星臺)라고도 불렸는데, 지금도 서울 계동 현대건설 앞에 남아 있는 관천대는 사적 제222호로 지정되었다. 경복궁이 불타버린 조선후기에는 창경궁에 다시 관천대를 만들어 보물 제851호로 지정되었다. ●이상한 별이 나타나면 관측해 기록하다 관상감의 관측제도는 ‘서운관지(書雲觀志)’ 권2 ‘측후(測候)’에 규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밤마다 5명이 숙직하며 관측해 기록했다. 지금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성변등록(星變謄錄)’에도 날마다 5명 관측자의 서명이 남아 있다. 성변(星變)은 별자리에 변화가 생겼다는 뜻. 혜성(彗星)이나 객성(客星)이 나타나면 천문학 관원들이 협의해 영사(領事)에게 알리고 관측을 시작했다. 혜성이 나타날 때부터 사라질 때까지의 움직임과 그 위치를 하루하루 관측하고 기록한 보고서를 성변측후단자(星變測候單子)라고 했으며 이 보고서들을 책으로 묶은 것이 등록(謄錄)이다. 이 보고서는 왕에게 보고되어 국정에 반영되었으므로, 관측자의 이름만 빼고 ‘승정원일기’에 거의 전문을 실었다. 현재 제대로 남아 있는 자료는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성변등록’뿐이다.1723년 9월21일 밤 1경에 여숙(女宿)에 나타난 혜성을 54명이 27일 동안 관측하였고,1759년 3월5일 밤 5경에 위숙(危宿)에 나타난 혜성을 35명이 25일 동안 관측하였으며,1759년 12월23일 밤 1경에 헌원(軒轅)자리에 나타난 객성을 21명이 11일 동안 관측하였다. 중인 출신의 천문학교수만으로는 부족해서 문관들도 많이 참여하였다. 이 가운데 1759년에 출현한 헬리 혜성에 대한 관측 기록은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사료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서울특별시에서 2007년 3월22일자로 ‘성변등록’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22호로 지정하였다. ●중인 역관(曆官)들의 계산에 의해 만들어진 역서 관상감은 천문학·지리학·명과학(命課學)의 3학으로 구성되었다. 이 가운데 천문학이 본학으로 가장 중요시되었다. 정성희 선생은 ‘조선후기 역서의 간행과 반포’라는 논문에서 “천문이나 역법에 대한 중요성이 높은 만큼, 그리고 전문성이 강조되었던 직책이던 관계로 관상감 관원의 실무(失務)에 대한 엄격한 처벌”이 따랐다고 하였다.“전통시대 천문학은 농사 절기에 대한 예보 기능 외에도 천인합일적(天人合一的) 성격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일식이나 월식, 오위(五緯 또는 5행성) 등 천문현상에 대한 정확한 예측과 예보가 중요했다.” “1710년에 관상감 관원이 월식 예보를 잘하지 못해 이를 감추려고 천변(天變)이라고 말했다가, 다시 월식으로 정정한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이 발각되자 숙종은 월식을 천변으로 보고한 자와 추산(推算)을 담당한 관원을 처벌하도록 했다.” 역서(曆書)도 관상감에서 만들었는데, 일반 백성들은 천문학보다 역서를 통해 관상감의 존재를 실감했다. 조선초기에 4000여건에 지나지 않던 역서(曆書)가 조선후기에는 1만5000축이 넘게 간행 보급되었다. 일부 계층이 사용하던 역서가 보다 생활 깊숙이 대중적으로 사용되었음을 뜻한다. 물론 관상감 관원들이 종이를 사서 개인적으로 인쇄하여 판매하는 숫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역서를 위조하거나 제멋대로 인쇄한 자는 사형에 처했는데, 실제로 정조 1년(1777)에 책력을 사조(私造)한 죄로 이동이(李同伊)가 사형을 언도받았다. 역서 간행을 주도한 관원은 성력(星曆)을 계산한 삼역관(三曆官)인데, 삼역관 선발시험에 1등하는 사람을 부연관(赴燕官)으로 임명해, 수시로 북경에 가서 천문기계나 천문서적을 구입하는 특전을 주었다. 관상감 중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천문학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삼역관을 거쳐야 했다. 다른 관상감 기술직은 음양과에 합격하지 않아도 능력이 있으면 선발했는데, 삼역관만은 음양과 출신만 선발할 정도로 전문성이 강조되었다. 정조가 천재 과학자 김영을 삼역관으로 승진시키려 하자, 우의정 윤시동과 여러 역관들이 반대한 이유도 그가 음양과에 합격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사도세자 현륭원을 옮기기 위해 김영이 발탁되다 김영(金泳·1749∼1817)은 농사꾼 출신인데, 어려서 고아가 되어 이리저리 떠돌다 서울에 올라왔다. 중인 신분도 못되는 데다, 말도 어눌하고 용모까지 꾀죄죄했다. 산술(算術)에 타고난 재주가 있어 스승도 없이 혼자 공부했다. 너무 골돌하다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산가지를 늘어놓고 계산하다가 ‘기하원본(幾何原本)’을 구해 읽고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 그의 제자 홍길주(洪吉周·1786∼1841)는 스승의 전기를 쓰면서 “혼자 ‘기하원본(幾何原本)’이라는 책 한 권을 가져다 읽은 뒤 그 이치를 모두 터득하여 산수에 있어서는 더 이상 익힐 것이 없게 되었다.”고 했다. 당대에 가장 이름 높았던 산학자 서호수가 관상감 제거(提擧·3품)로 있었는데, 김영의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몇 가지를 물어본 뒤에 자신의 실력보다 나음을 알았다. 그는 관상감의 책임자였던 영의정 홍낙성에게 김영을 추천해 관원으로 채용하였다. 김영은 그러한 인연으로 뒷날 홍길주의 집에도 드나들게 되었다. 홍길주는 김영이 관상감에 임용된 것은 “정조가 인재 등용하기를 좋아해, 남다른 재주로 이름난 자가 있으면 비록 지극히 미천한 자라도 남김없이 등용하던 시대 분위기 덕분”이라고 했다. 1789년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수원 화산으로 이장하는데 길일을 잡고 시각을 정하는 데에 문제가 생겼다. 중성(中星)의 위치를 측정한 지 50년이 지나 별자리의 위치가 1도 가까이 어긋나 있었고, 해시계와 물시계의 시간도 실제와 차이가 났다. 관상감사 김익이 8월31일 정조에게 아뢰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했다.“근본적으로 중성의 위치를 추산하여 그 궤도와 도수를 정해야 하는데, 만약 관측기구가 없으면 측정할 근거가 없습니다. 먼저 지평의(地平儀)와 상한의(象限儀) 및 새로운 해시계를 만들어 제대로 측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관상감의 감생 가운데는 제대로 추산할 수 있는 자가 매우 드무니, 역법(曆法)에 정통하다고 알려진 김영을 본감에 소속시켜 이 일에 참여하도록 한다면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음양과를 거치지 않았다고 관상감 관원들이 반대하다 세종대왕이 1434년에 만든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는 이름 그대로 솥 모양을 오목하게 파내고 영침(影針)을 세워 그림자가 변화하는 정도를 살펴 시각을 측정했다. 그런데 김영이 새로 만든 보물 제840호 지평일구(地平日晷)는 이름 그대로 해그림자를 받는 면을 평면으로 고쳐 만들었다. 중국의 지평일구(보물 제839호)가 수입되자, 그 원리를 이용하여 만든 것이다. 그래프 용지에 1㎝ 간격으로 동심원과 10도 간격의 방사선을 그어놓고, 그 중심에 막대를 세워 시간에 따른 그림자의 변화를 보는 형태인데, 반구형 모습의 해시계 앙부일구를 전개하여 평면에 옮겨놓은 것과 똑같다. 김영이 처음 만들어내자 그 이후에도 여러 개가 제작되었는데, 재료는 보통 대리석이나 오석(烏石)을 썼으며, 놋쇠로 휴대용도 만들었다. 정조가 김영을 특채하려고 하자 관상감 관원들이 심하게 반대했는데, 홍길주가 그 사연을 기록했다.“관상감은 천문학과를 두어 사람을 뽑기 때문에 천문학과를 통해 조정에 들어온 자가 아니면 역법(曆法)을 제정하는 역관(曆官)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임금께서 특명을 내려 김영에게 역법을 제정하게 하시면서 ‘김영같이 남다른 재주를 지닌 자가 아니면 이런 예에 해당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니, 김영이 크게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당시 관상감 사람들이 모두 김영을 질시했으며,‘이는 우리 관직의 규율을 무너뜨리는 일이다.’라고 따졌다. 그러나 임금의 명이 있었으므로 끝내 그 누구도 크게 떠들지는 못했다.” ●정조 승하하자 벼슬에서 쫓겨나 굶어 죽다 중인들은 혼인은 물론, 교육과 관직도 몇몇 집안이 주고받았는데, 중인 출신도 아닌 김영이 중인의 전유물인 역관이 되었으므로 반대가 심했다. 서호수가 죽고 정조도 승하하자, 김영은 다른 관직으로 좌천되었다가 벼슬에서 쫓겨났다. 1807년과 1811년에 혜성이 나타나자 조정에서 관상감에 명해 혜성의 운행 도수를 계산해 올리라고 했는데, 아무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김영을 다시 불러들였다. 계산이 끝나자 그는 다시 쫓겨났는데, 그의 전기를 쓴 서유본은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면전에 욕하고, 주먹으로 때리기까지 했다.”고 기록했다. 그가 남의 집 어린아이에게 글을 가르치다 굶어 죽자, 관상감 생도가 그의 원고 상자를 훔쳐갔다. 미처 간행되지 못한 몇 권의 책은 다 없어지고,‘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나 ‘칠정보법(七政步法)’ 같은 책 끝머리에 그의 이름이 붙어 있을 뿐이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기독교 음악은 무대가 너무 좁았어요”

    “기독교 음악은 무대가 너무 좁았어요”

    남자 배우들이 탐내는 작품 가운데 하나가 뮤지컬 ‘알타보이즈’다. 제목은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신부를 돕는 소년을 지칭하는 복사(腹事)라는 뜻. 저마다 고민과 사연을 가진 개성 강한 복사 5명으로 이뤄진 보이밴드의 콘서트와 더불어 이들의 갈등·화해를 담았다. 이 작품은 출연진의 특성상 여성팬들이 많다는 것 외에 남자만의 매력을 한껏 뽐낼 수 있어 웬만한 기성 배우도 눈독을 들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지금 왕성하게 활동하는 김무열, 최성원, 이태희 등이 ‘알타보이즈’를 통해 이름을 알렸다. 15일부터 대학로 문화공간 이다 1관에서 다시 막이 올라가는데 출연진 중 눈에 띄는 인물로 에녹(27·본명 정용훈)을 꼽을 수 있다. 뮤지컬 무대에서는 ‘초짜’지만 현란한 춤과 노래로 CCM(현대적인 기독교음악) 무대를 주름 잡아온 신성이다. 그가 지난여름 발표한 데뷔 앨범은 사뭇 파장을 일으켰다. 경건함과 거리가 먼 그의 노래에 대해 젊은 크리스찬들은 반색했지만 어르신들은 혀를 끌끌 찼다.“기쁜 마음을 신나게 춤추고 노래로 표현했지만 무대가 워낙 좁아서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요.” 때맞춰 지인이 대신 신청서를 넣어준 오디션에 덜컥 붙었고 그에게 반항아 ‘루크’ 역이 주어졌다. 차분한 인상에 나긋나긋한 말투, 모범생 같아 보이기만 한데 “내 안 어딘가에 있을 거친 이미지를 끄집어 내겠다.”는 각오가 대단하다.“작품의 내용이 제가 겪은 일들과 너무 비슷합니다. 특히 등장인물 가운데 정통 유대인으로 가톨릭을 믿는 ‘에이브’의 고민은 마치 제 이야기 같아요.”덕분에 감정이입은 어렵지 않은 일이 됐고 진심이 담긴 연기를 보여 주고 싶다는 욕심도 과욕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그동안 무대에는 많이 섰지만 온전히 일반인들을 상대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과연 제가 관객들과 어떤 교감을 나눌 수 있을까 무척 설렙니다.” 새로운 도전과 장르가 주는 매력에 흠뻑 젖어 하루하루가 즐겁고 감사하다는 그.‘알타보이즈’를 발판으로 더 욕심을 내볼 만도 한데 이 질문에 선한 미소만 짓는다. 그는 예명 이야기를 꺼냈다. 에녹은 평생 하나님께 순종하다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성경의 인물. 모든 걸 ‘하나님의 뜻´으로 돌린다는 의미다.(02)501-7888. 글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사진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 [오늘 본격 표몰이 나서는 ‘1강2중’] 鄭 “착한 대통령”

    “23일간의 전쟁이 시작됐다.”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26일 대선 레이스를 ‘전쟁’에 비유하며 본격적인 득표활동에 돌입했다. 공식 선거운동 하루 전이었지만 사실상 유세전의 시작이었다.27일 첫 공식 선거운동은 전남 여수에서 시작했다. 새벽 0시. 그는 공식선거일이 시작되자마자 여수 시청 앞에서 시민들과 엑스포 유치를 기원했다. 정 후보측 한 관계자는 “유동성이 커진 대선판에서 앞으로는 하루하루가 역전의 기로”라고 표현했다.“오늘부터 다시 심기일전하겠다.”고도 했다. 정체된 지지율로 고민하던 통합신당도 오랜만에 밝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통합신당 당직자들은 급여 10%씩을 떼어 만든 5000만원을 정 후보에게 전달했다. 소속 의원 보좌진이 모은 특별당비 2000만원도 함께 보탰다. 정 후보도 바쁜 하루를 보냈다. 트레이드 마크인 ‘몽골기병론’을 다시 선보이는 듯했다. 그는 “일정이 빡빡해 점심도 쫄쫄 굶었다.”고 토로했다. 정 후보는 이명박 후보를 겨냥한 ‘착한 대통령론’도 새 무기로 선보였다. 그는 당산동 당사에서 열린 중앙선대위 회의에서 “착한 후보, 착한 국민이 있다면 우리 정치의 미래도 양양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학창시절 공부는 썩 잘하지 못했지만 착하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다.”면서 “착한 대통령이 되도록 국민과 소통하겠다.”고 약속했다. 위장취업, 탈세 등 도덕성 시비에 휘말린 이 후보를 ‘나쁜 후보’로 몰아세우겠다는 의도다. ‘20대 핵심공약’도 발표했다. 그는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전국선대위원장 회의에서 “차별없는 성장을 통해 가족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다. 특히 ▲법인세 5% 인하 불가 ▲한반도 5대 철도망 건설 ▲비정규직 25%까지 감소 ▲대학입시 개혁 ▲노인기초연금 16만원 현실화 ▲공직부패·특권비리 척결 ▲위대한 한반도 시대 개막 등 7개 공약을 통해 이 후보와의 차별화를 시도했다.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연탄 ‘슬픈 호황’

    연탄 ‘슬픈 호황’

    “호황이라 좋기는 하지만 서민경기가 바닥인 것 같아 씁쓸하네요.” 서울에 하나뿐인 연탄공장인 동대문구 이문동 삼천리표 E&E공장은 주문량을 너끈하게 소화하던 지난해와 달리 이달 들어 10일치의 주문이 밀려 있다. 하루 40만장을 생산하는 이 공장의 설비를 감안하면 400만장의 공급이 부족한 셈이다. 삼천리표 연탄공장의 김성식(50) 영업전무는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어려워져 수요는 늘었지만 석탄량이 부족하고, 정부의 정책적 지원도 없어 공장을 새로 지을 엄두는 안 나요.”라며 씁쓸해했다. 고유가 행진 덕분에 연탄산업이 호황이다. 하지만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웃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언제까지 호황이 이어질지 모르는 데다 호황의 원인이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그만큼 서민들의 지갑 사정이 나빠졌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서울 종로구에서 대동연탄상회를 운영하는 조모(53)씨는 지난해 겨울에는 한달에 연탄 4만여장을 팔았지만 올해는 6만여장씩을 팔고 있다. 늘어나는 수요에 따라 연탄 값도 올랐다. 지난해 1개당 350원에서 올해는 400원으로 뛰었다. 연탄 난로 주문도 늘었다. 인터넷에서 연탄난로를 파는 구하니넷에서는 지난해 하루 100대씩 팔던 것을 올해에는 150대씩 팔고 있다. 호황이 따로 없다. 하지만 수요가 넘쳐도 생산은 늘어나지 않는다. 연탄공장에서는 유가가 언제 내릴지 몰라 라인을 증설하지 못하고, 소매업자도 언제 주문이 끊길까 전전긍긍한다. 연탄난로 생산업체인 K사도 하루 700∼800대의 주문량 중 100대씩만 만들 뿐 라인을 늘릴 엄두를 못내고 있다. 연탄을 사용하는 소비자들도 속이 편치 않다. 최근 들어 연탄을 쓰기 시작한 이들 대부분은 고유가에 타격을 받고 연탄난로로 교체한 자영업자들이다. 경기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에서 돈가스전문 식당을 운영하는 백모(44)씨는 1주일 전 울며 겨자먹기로 난방용 연탄난로를 들여놓았다. 한 달에 60만원의 기름값을 감당할 여력이 없어 20만원이면 너끈한 연탄난로로 대체했다. 백씨는 “있는 양반들은 겨울에도 반팔이라는데 하루하루 풀칠하는 서민은 연탄난로도 풍족하게 쓰지 못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돈가스 집에 난로가 어울리지도 않고 냄새도 나지만 식당을 그만둘 수도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며 고개를 떨궜다. 충북 보은군 속리산 자락의 식당가에는 지난달에만 20여곳 가운데 4곳이 연탄난로를 들여놓았다. 한식당을 운영하는 최모(55)씨는 “지난 몇 년간 겨울이면 계속 힘들었지만 올해는 정말 최악”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지난해 1400원대이던 휘발유는 현재 1600원대까지 치솟았고,936원 정도였던 보일러 등유도 1100원을 육박하는 상황이어서 연탄난로를 사용하는 이들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난 5년간 연탄 수요가 크게 늘어난 것은 고유가 탓도 있지만 결국 서민들의 실질소득이 오히려 줄었다는 의미”라면서 “참여정부 출범 이후 서민들의 체감경기는 바닥”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연탄난로로 바꾼 서민들은 비용절감 효과보다는 극심한 양극화의 박탈감을 더 크게 느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경주기자 kdlrudwn@seoul.co.kr
  • “검찰은 오직 명예밖에 없다”

    “검찰은 오직 명예밖에 없다”

    23일 퇴임식을 갖는 정상명 검찰총장이 “검찰은 유·불리를 따지지 말고 오직 국민을 바라보며 공명정대하게 수사하라.”고 강조했다. 정 총장은 22일 발간된 검찰신문 ‘뉴스 프로스’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30년간의 검사생활을 되돌아보며 이같은 소회를 밝혔다.‘이명박 후보의 주가조작 연루의혹’,‘삼성 비자금 로비의혹’ 등 굵직한 수사가 진행되는 점을 감안한 듯 “정치적 중립과 수사 독립을 지키는 데 최우선의 목표를 뒀다. 검찰은 실체적 진실을 규명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임무로 한다.”고 덧붙였다. 검찰 수장이 남긴 ‘말’은 의미심장했다. 그는 “눈앞의 조그만 이익을 탐내 잠시라도 눈을 감으면 원칙과 이익을 모두 잃게 된다.”면서 “사안의 본질이 무엇인지 집중하면 의외로 답이 간단한 경우가 많았다.”고 후배 검사들에게 조언했다.‘가장 힘든 순간’으로는 “조직의 명예가 손상되고 신뢰가 떨어지는 일이 생겼을 때”라며 “검찰은 오직 명예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의 ‘삼성 떡값 검사’ 명단 공개로 특별수사·감찰본부가 설치된 현 상황을 의식한 발언이다. 정 총장은 또 “지난 2년이 가시밭길은 아니었다. 하루하루를 총장 취임 첫 날처럼 시작하고 마지막 날처럼 후회 없이 정리하는 심정으로 생활했다.”면서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털어놨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I’m F 아직도 진행형”

    “I’m F 아직도 진행형”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결국 아버지 산소 앞에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수면제 300알을 먹었죠.” 1997년까지 인천에서 견실한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김학식(58)씨. 외환위기 사태가 터지며 사업은 힘들어졌고, 빚은 16억원으로 눈덩이처럼 늘었다. 빚 독촉에 시달리던 김씨는 결국 자살을 결심했다. “동네 주민이 발견해 목숨은 건졌지만, 수면제 탓에 한동안 기억상실증에 걸렸습니다. 집도 찾을 수 없었죠. 우연히 회사 동료를 만나 집을 찾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셨더군요. 천추의 한이 됩니다.” 우리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지 딱 10년이 된 21일. 시민단체 ‘금융채무자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연석회의’는 서울 명동 향린교회에서 구제금융의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 아픔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다. 행사의 첫 순서인 ‘만민공동회’에서는 김씨를 비롯한 50여명의 금융피해자들이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드러냈다. 공인중개사로 성실히 살아왔던 이세원(68)씨는 2002년 신용불량자가 됐다. 외환위기 직후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생활비를 위해 신용카드 ‘돌려막기’를 시작했다. “2002년이 되자 이자만 2300만원이 되더군요. 가족 앞에 설 염두가 안 났죠. 결국 노숙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은행은 이씨를 대신해 아들에게 압류 통보를 계속해서 날렸다. 이씨는 그 때 받은 스트레스로 뇌혈관의 50%가 막혔지만 여전히 치료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IMF가 제 인생을 망쳐놨습니다. 지금은 사정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저처럼 충격에 벗어나지 못한 사람도 많습니다.” 김태희(58·여)씨도 여전히 하루하루가 생지옥이다. 외환위기 직후 남편의 일자리마저 불규칙해져 벌이가 좋지 않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결국 김씨도 서울역에 노숙을 시작했다. 지금은 기초생활보호 대상자로 지정돼 한 달에 8만∼10만원씩 지원받아 13.2㎡(4평) 크기 방에서 근근이 생활한다. ‘만민공동회’가 끝난 뒤 피해자들은 ‘고(故) 빈곤’,‘故 고금리’,‘故 금융채무’,‘故 불법추심’이라는 글귀가 적힌 4개의 만장(輓章)을 들고 은행회관까지 행진했다. 발길은 오후 늦게 여의도로 이어졌다. “정부는 2001년에 IMF 빚을 다 갚았다며 샴페인을 터트렸지만 오히려 빈곤문제는 더 심각해졌습니다. 누구를 위한 샴페인인지 모르겠습다. 가계빚 700조원, 신용불량자 700만명이 해결되지 않는 한 IMF 사태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연석회의의 이혜경 활동가의 목소리가 칼바람에 흩어졌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20&30] 영·호남 그들은 왜 아직도 평행선인가

    [20&30] 영·호남 그들은 왜 아직도 평행선인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대선 후보에 대한 누리꾼의 설전(舌戰)도 뜨거워 지고 있다. 특히 후보에 대한 옹호 혹은 비난 의견에 대해 여지없이 따라오는 댓글이 있다.“너 전라디안(경상디안)이지?” 정치적 이념이 다른 상대방을 ‘경상디안’ 혹은 ‘전라디안’으로 표현하며 공격하는 새로운 형태의 비방전이 한창이다.‘경상도’와 ‘전라도’에 사람을 의미하는 영어 접미사 ‘∼an’을 붙여 만든 이 말은 지역감정에서 자유로워야할 20·30대 젊은층에게도 아직 지역감정의 깊은 골이 남아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영·호남 젊은 세대들이 서로의 어떤 면에 대해 서운함을 느끼고 있을까. 일상의 사례들을 통해 이들이 느끼는 지역감정을 들어보았다. ● “호남 아픔 이해 못하는 것 같아 서운” 어린시절을 광주에서 보낸 회계사 김모(32·여)씨는 1980년 ‘광주의 아픔’을 하나 갖고 있다. 당시 김씨의 집에도 계엄군이 쏜 총알이 쏟아지면서 장독대가 깨지는 등 하루하루가 무서움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김씨 집에는 피해자가 없었지만 그때 이후로 동네에서 늘 보던 주민 몇 명은 다시 볼 수 없었다. 부모님께 ‘그 아저씨·아줌마 어디 간 거냐?’고 물었다가 ‘다시는 그 일을 입 밖에 꺼내지 말라.’며 혼나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 서울로 전학 온 탓에 주변 사람들은 자신을 서울 토박이로 알아서일까. 간혹 영남 출신 동료나 선배들로부터 “전라도 사람들은….”이라는 식의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다. 대놓고 반박하지는 않아도 이들이 호남인들의 아픔을 잘 모르는 것 같아 서운하기만 하다. “‘전라디안이 어쩌고’하는 식의 인터넷 댓글을 보고 있으면 젊은 세대들도 아직 지역감정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요. 어떤 사람들은 ‘전라도 출신의 김대중 대통령과 호남 지지를 받은 노무현 대통령이 나왔으면 충분히 보상받은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하는데요. 피해자들은 아직도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고 있거든요. 정치인이 억지로 용서를 강요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이 ‘난 아직 아이를 죽인 가해자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왜 신이 먼저 용서를 했냐.’며 절규하는 상황처럼요.” ● “고속도로 한 번만 달려봐도 금방 알 텐데…” 자동차회사에서 일하는 오모(32)씨는 출장 때문에 경부고속도로를 다닐 때마다 고향인 전북 익산이 떠오른다. 대구부터 부산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공업단지의 굴뚝 행렬을 보고 있으면 광양 말고는 이렇다할 공업지역이 없는 호남과 비교가 된다. 오씨가 살던 마을도 수십년간 편도 1차선 도로에 의지해 살다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뒤에야 비로소 2차로로 확장됐다. 외환위기 당시 일부 정치인들이 “경상도 공장은 연기가 안 나는데 전라도 지역 공장 굴뚝에서만 연기가 난다.”는 주장에 큰 상처를 받기도 했다는 오씨는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를 한 번만 다녀보면 영·호남의 차이를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젊은 사람들도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부터 호남은 살기 좋아졌다면서요. 지금 경상도는 죽을 맛인데….’라고 말하기도 해요. 아직도 호남에 대한 오해가 많은 것 같아요. 영화에서도 경상도 출신 조폭은 의리있는 집단으로 그려지는 반면 전라도 출신은 배신자들로 묘사되곤 하잖아요.” ● “뜻밖의 환대에 고마워했던 적도” 반면 군산 토박이인 자영업자 이모(34)씨는 경상도에 대한 ‘특별한’ 지역감정을 갖고 있다.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투박한 경상도 아저씨에 대한 고마운 감정 때문이다. 몇 년 전 대구로 출장을 갔을 때였다. 당시만 해도 번호판에 차량등록지역이 표시되던 시절. 표지판을 보며 운전했지만 목적지가 나오지 않았다. 퇴근시간과 맞물리면서 옴짝달싹 못하게 된 상황이 되자 이씨는 옆차 운전자에게 목적지를 물어봤다. 운전자는 “반대로 가야 하는데…. 여기는 고속화도로라 유턴도 안 되는데. 대구는 길이 복잡해서 초행길이 어려운데 전라도서 여긴 뭣하러 왔노.”라며 쏘아붙이듯 말했다. 순간 이씨는 ‘내가 호남지역에서 왔다고 화를 내는 건가.’싶어 기가 죽었지만 곧바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그 운전자는 곧바로 차에서 내려 통행 차량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반대차선으로 건너가 오던 차들을 몸으로 막아 세우기까지 했다. 이씨의 차량이 유턴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주변 차량 운전자들이 “뭐하는 짓이냐?”며 욕설과 경적이 쏟아졌다. “마. 고마해라. 전라도 손님께서 초행길이라 길을 잘못 오셨단 말이다. 니들 손님 접대 그렇게 하라고 배웠나.”그러자 시끄럽게 울리던 경적도 곧 사그라들었다고.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라는 게 이런 거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죠. 영남 지역에 대한 오해 같은 것도 한순간에 사라졌고요. 경상도 분들도 전라도에 오시면 마찬가지로 잘 해드릴 수 있을 텐데요. 이렇게만 서로 돕고 살면 지역감정은 곧 없어지겠죠.”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광주서 부산 사투리 썼다가 봉변 당할 뻔” 신문사 기자로 일하는 김모(30)씨는 몇 년 전 광주에서 겪은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살아있는 지역감정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전라도 장흥에서 군 생활을 할 당시 고향인 부산에서 부모님과 친구가 면회를 왔다. 외박을 허가받은 김씨는 친구와 함께 부대 인근 광주로 나가 중심가인 충장로의 한 고기집에서 회포를 풀었다. 술기운이 돌자 둘은 자연스레 부산 사투리를 쓰며 그동안 쌓였던 이야기를 나눴다. 그게 화근이었다. 김씨 주변에서 술을 마시던 손님 몇 명이 김씨를 둘러싸고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경상도 자식이 와 있나?”“썩 너네 동네로 못 가나.”라며 윽박질렀다. 소리가 커지자 다른 손님들도 합세해 김씨를 위협했다. 김씨는 10분가량 실랑이를 하다 주인의 도움으로 자리를 피할 수 있었다. “단지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전라도 사람들이 그렇게 화를 낼 줄은 상상도 못했죠. 시비를 건 사람 중에 제 또래가 있었다는 것에도 놀랐고요. 아직까지도 지역감정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직접 느낄 수 있어 많은 생각을 했어요.” ● “지나친 ‘우리끼리’ 때론 서운해” 은행에서 일하는 대구 출신 정모(26·여)씨는 한때 절친했던 호남출신 친구와 관계가 소원해진 게 ‘지역감정’ 때문은 아닌가 싶어 지금도 안타깝다. 대학시절 자격증 시험준비를 위해 방학마다 서울에서 학원을 다니던 정씨는 같은 이유로 전주에서 상경한 동성친구 A와 금세 친해졌다. 같은 처지여서인지 서로를 잘 이해하게 된 둘은 불과 1주일 만에 공부와 식사는 물론, 자는 시간 이외에는 늘 서로 붙어다니며 막역한 사이가 됐다. 하지만 학원에 군산 출신 B가 나타나면서 둘의 관계는 급속도로 변했다.A는 동향 출신이라며 B를 크게 반겼고, 고향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A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정씨와 함께하는 시간을 줄여나갔다. 방학이 끝날 무렵 정씨는 자신 대신 B가 A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때는 A를 ‘영혼의 친구’라고까지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냥 일년에 몇 번 전화만 주고받는 ‘아는 사람’ 수준의 관계가 됐어요. 같은 고향 출신이라고 저를 멀리하면서까지 B를 반기던 그 친구를 보면서 남자들 말로 ‘의리’가 없어 보여 많이 서운하기도 했죠. 사조직을 철저히 금지하는 기업에서도 모 대학 동문회와 전라도 향우회는 못 없앤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잖아요. 혹시 저와 A를 갈라놓은 게 지나친 ‘우리끼리’의식 때문은 아니었는지 궁금하기도 해요.” ● “술자리서 ‘선생님’ 찾던 친구 생각나” 전자회사에 다니는 대구 출신 조모(31)씨는 ‘지역감정’ 이야기만 나오면 대학시절부터 가장 친한 한 친구와의 에피소드가 생각나 절로 웃음이 난다.“서울은 눈 뜨면 코 베어 간다더니 서울역에서 신림동까지 택시요금이 5000원이 넘는 거예요.”라며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마치 자신만 속고 있는 듯 울분을 토하던 광주 출신 동기 A를 신입생 환영회 자리서 만났다. 조씨는 ‘저 녀석하고는 뭔가 통하겠다.’는 호감에 곧바로 그 친구 옆으로 가 술잔을 기울였고 이내 친해졌다. 그런데 술에 취하자 A는 갑자기 울먹이면서 “선생님”을 연발했다. 조씨는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을 찾는 줄 알고 “그렇게 보고 싶으면 주말에라도 내려가서 만나라.”고 A를 다독였다. 그러자 A는 취중에도 “우리 선생님은 그렇게 한가하신 분이 아냐. 큰일 하시느라 바쁘신 분이 나 같은 놈을 왜 만나 주시겠니.”라고 되레 조씨에게 면박을 주었다. 알고 보니 A가 찾던 선생님은 조씨의 생각과는 ‘다른’ 분이었던 것. 그 뒤로도 A는 술만 취하면 “선생님도 꼭 한 번 대통령을 하셔야 하는데….”라는 레퍼토리를 늘어놓았다.A의 술버릇은 실제로 ‘선생님’이 대통령이 된 뒤에야 사라졌다. “97년 대선 때 하도 그 친구가 ‘선생님’ 찍으라고 사정을 해서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심정으로 저도 찍었다니까요. 그 친구는 지금도 ‘나라가 왜 이 모양이냐.’며 비판은 곧잘 하지만 그래도 선생님 뜻을 저버리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 친구나 저나 상대지역에 대한 나쁜 감정은 전혀 없는데도 선거에서만큼은 표심을 바꾸기가 쉽지 않은가 봐요.” 이경주기자 kdlrudwn@seoul.co.kr ■지역이 결혼에 미치는 영향 20·30 젊은 세대들에게도 과거 부모세대의 뿌리깊은 지역감정 의식이 남아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을 보여주는 한 결혼정보회사의 설문조사 결과가 있다. 조사에 따르면 영남지역과 호남지역 출신 미혼남녀 중 절반가량이 상대 지역 출신을 결혼 상대로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직까지도 부모세대의 해묵은 지역감정이 자녀세대까지 대물림되고 있는 셈이다. 결혼정보회사 ‘웨디안´(대표 손숙)은 ‘지역이 결혼에 미치는 영향´ 설문조사 결과를 최근 발표했다. 조사는 서울·수도권, 영남지역, 호남지역 지역별 미혼남녀 200명(남녀 각각 100명)씩 총 600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기간은 지난달 21일부터 이달 14일까지 25일간이다. 웨디안 손숙 대표는 “영남지역과 호남지역 젊은 세대들이 ‘상대 지역 출신과의 결혼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답한 비율이 각각 43%(86명)와 51%(102명)인 것으로 조사됐다.”면서 “‘지역감정´이 젊은 세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어 동서 융합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남지역의 경우 조사대상 200명 중 ‘배우자의 출신지역은 상관없다.´고 답한 비율은 53%(106명)였으며,‘서울·수도권 출신과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답한 비율은 4%(8명)에 불과했다. 호남지역 또한 응답자의 46%(92명)가 ‘배우자의 출신지역은 상관없다.´고 답했으며 3%(6명)만이 ‘서울·수도권 출신과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반면 지역감정과 무관한 서울·수도권 지역의 경우 응답자의 86%인 172명이 ‘배우자의 출신지역은 상관없다.´고 답했으며,8%(16명)와 6%(12명)의 응답자만 각각 호남지역과 영남지역 배우자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밝혀 영·호남과는 명확한 대조를 보였다.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미국 통제·아랍 독재에 문학적 저항”

    “미국 통제·아랍 독재에 문학적 저항”

    “나는 아랍을 위협하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에 맞서 싸웁니다. 동시에 아랍 민중을 억압하는 아랍 독재정권의 비민주성에도 맹렬하게 저항합니다.” 이집트 소설가 소날라 이브라힘(70)은 “나는 아랍작가며, 아랍작가여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미국의 정치·문화적 통제에 반대하는 ‘아랍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강하게 드러냈다. 이브라힘은 “나는 아랍의 독재정권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또렷이 힘줘 말했다. 아랍의 민주주의를 열망하며 온몸으로 싸웠고, 가장 매서운 언어로 독재정권의 비민주성을 폭로해 왔음을, 그는 “저항”이란 단어로 짧게 표현했다. ‘2007 아시아·아프리카 문학페스티벌’(AALF) 참석차 한국을 찾은 이브라힘을 8일 전북 전주 코아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프랑스를 제외한 서구 문학계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다. 외국문학을 서구문학과 동일시하는 한국 독자들에게 낯선 이름임은 물론이다. 반면 아랍 세계에서 그는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이자 ‘가장 논쟁적인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아랍에 드리운 미국의 막강한 정치·문화적 영향력을 비판·탐구해온 소설가이자, 부패권력의 전복을 꿈꾸다 투옥됐던 실천적 지식인이다. 그는 줄곧 정치적 메시지를 짙게 함의한 글들을 써왔다.“아랍 세계의 하루하루는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폭탄소리와 죽어가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그에게, 정치적 글쓰기는 일상을 살아가는 삶 그 자체다. ●아랍민족주의 비판하는 아랍민족주의자 한국을 처음 찾은 이브라힘은 이날 조금 피곤한 듯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세월이 쌓여가는 백발의 머리와 검은 뿔테 안경 속 형형한 눈매가 대조를 이뤘다. 1959년 나세르 정권은 비밀 정치조직원이란 이유로 그에게 7년형을 언도했고,5년 반 동안 강제노역에 처했다. 당시 그는 작가가 아닌 정치운동가였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감옥 안 최악의 경험들은 그를 ‘정치성 강한 소설가’로 변신시켰다. “독방에 혼자 있으면서 내 삶의 과거와 현재를 깊이 돌이켜 보게 됐고, 교수·학생·노동자·농민·언론인 등 나와 함께 갇혀 있는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게 됐습니다. 나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우리는 감옥에서 고문받아야 하는지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브라힘은 “우리는 미국의 위협에 대항하는 동시에 아랍의 독재정권에도 대항해야 한다.”고 했다.“독재에 대항하는 정치운동은 미국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이라고도 했다. 미국에 대한 저항과 아랍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을 함께 강조하는 것이 그와 그의 문학이 가진 독특한 가치다. 이브라힘은 아랍민족주의자면서도, 아랍민족주의에 대항해 싸워 왔다. 미국의 아랍 지배에 대항하는 아랍민족주의를 지지하면서도, 독재권력이 정권 유지를 위해 오용하는 아랍민족주의는 강하게 비판했다.“미국이 원하는 것은 아랍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아랍의 석유와 시장”이란 지적과 “최근 국회를 해산한 파키스탄 무샤라프 군부독재를 보면 이집트 무바라크의 26년 장기독재가 보인다.”는 지적은 쌍둥이처럼 따라 나왔다. ●‘미국화된 지식인의 위기’ 경고 반미·반독재 작가로서 이브라힘의 면모는 그가 수상과 참석을 거부한 문학행사에서 드라마틱하게 발현됐다.2002년 ‘베를린국제문학축제’에 초청받은 그는 “팔레스타인 점령 정책을 고수하는 이스라엘 대사관과 이스라엘을 전폭 지지하는 미국 대사관이 후원하는 행사엔 참석할 수 없다.”며 거부 시위를 선언했다. 이듬해 10월 카이로국제협회가 주는 ‘올해의 작가상’ 시상식에서는 “신뢰할 수 없는 정부로부터 상을 받을 수 없다.”며 수상을 거부한 채 단상을 내려와 이집트를 발칵 뒤집었다. 청중은 기립박수로 환호했고, 반정부 언론들은 ‘정부의 강압정치에 직격탄을 날렸다.’며 대서특필했다. 이후 그는 이집트 언론에 정치·사회적 견해를 담은 글을 쓸 기회를 박탈당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여성의 배를 갈라 뱃속 아이까지 죽이는 현실에서 문학축제는 축제가 아니란 사실, 이집트 국민을 고문하고 죽이는 무바라크 독재에 내가 항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디어 앞에서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브라힘은 지식인의 위기를 경고한다. 초강대국 미국의 입김에 휘둘리는 아랍 정권과 그 때문에 발생하는 국가적 혼란엔 ‘미국화된 지식인의 위기’가 자리잡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미국과 유럽의 문학이 세계 문학을 지배하고 있는 지금, 아랍작가는 아랍의 문화와 정치상황을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현실을 타개할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아시아·아프리카 문학페스티벌’이 뿌리박은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전주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103살노인이 홀로 산속에서 살아가는 사연

    100살이 넘은 노인이 문명과 담을 쌓고 심산 유곡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중국 대륙에 100살이 넘은 한 할아버지가 세상을 등지고 홀로 깊은 산속에서 은둔해 살아가고 있는 사실이 밝혀져 화제가 되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중국 남부 광둥(廣東)성 허위안(河源)시 동위안(東源)현 쩡톈(曾田)진 위후(玉湖)촌에 살고 있는 장둥라이(張東來·103) 할아버지.103살 생일을 맞은 지난달 30일 장 할아버지는 27년째 문명과는 담을 쌓아 아무런 걱정과 병이 없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상향)에서 생활하고 있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고 있다고 대양(大洋)망이 31일 보도했다. 대양망에 따르면 장 할아버지가 27년동안 도시 문명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사연은 이렇다.지난 1954년 10월29일,장 할아버지는 허위안시 둥위안현 쩡톈진 위후촌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사실 그의 원래 고향은 광둥성 자오칭(肇慶)시 위난(郁南)이고 본명은 후둥라이(胡東來)이다.젊었을 때 국민당군에 입대해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서 일본군과 싸워 혁혁한 전공도 세웠다.하지만 일본군과 전쟁중 포로가 돼 구메밥도 먹어야 하는 간난신고를 겪었다. 그러던 어느날 장 할아버지는 야음을 틈타 몰래 일본군 감옥을 탈출,동장허(東江河)를 따라 오다 심산유곡에 있는 둥위안현 쩡톈진 위후촌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됐다.당시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바람에 이곳으로 오다 기절을 해 마을 사람들이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장 할아버지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동네 주민들이 너무나 고마워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됐다고 한다.이때 원래의 이름을 ‘후둥라이’에서 자신을 구해준 마을 사람의 성을 따 ‘장둥라이’로 고쳤다. 위후촌에 살면서 그는 두차례에 걸쳐 결혼을 했다.첫번째는 40살 되던 해 같은 동네 처녀와 결혼을 했다.그러나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해 결국 헤어지게 됐다.두번째는 60살이 넘어 아이를 한명 데리고 온 과부와 다시 결혼했다.하지만 워낙 애옥살이 살림이라 두 사람을 부양하기 어려워 또다시 헤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이에 장 할아버지는 혼자 살기로 작정하고 산중으로 들어가 홀로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무릉도원’의 생활을 하게 됐다.그는 화전(火田)을 일구어 백그루 이상의 과일나무를 심고 집앞에 조그마한 호수를 만들어 각종 물고기도 길렀다. 이렇게 일하기를 20여년.장 할아버지의 집은 편안한 ‘낙원’으로 변모했고 개와 고양이,벌 닭 등도 키우며 아무런 걱정 없이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냈다.이 덕분에 100살이 넘은 나이이지만 그의 건강은 60대의 ‘젊은(?)’ 몸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목소리도 카랑카랑했다. 그러나 장 할아버지의 ‘무릉도원’생활도 이제 청산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최근들어 산속에 멧돼지 등 야생동물들이 출몰이 잦아져 다칠 위험이 있는 데다 지난 여름 대홍수로 집이 완전히 붕괴되는 바람에 거처할 곳도 마뜩치 않은 것을 본 동네 주민들이 마을로 내려와 같이 살자고 강력히 권하고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장 할아버지의 27년째 ‘산중 은거생활’도 곧 막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뉴스부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외환위기10년 그리고 미래] 해고 좌절딛고 막걸리공장 사장 우뚝

    [외환위기10년 그리고 미래] 해고 좌절딛고 막걸리공장 사장 우뚝

    외환위기 만 10년.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사장님이 한 순간에 노숙인 신세가 됐고, 평범한 사람들은 직장에서 쫓겨났다. 재기에 성공한 사람도 있지만 상처가 너무 깊어 재기할 기운조차 없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누구는 부지런하고 누구는 게을러서 그렇게 된 게 아니었다. 외환위기를 겪은 두 사람의 인생역정을 통해 양극화 현상을 짚어 봤다. “한국 전통술이 프랑스 와인보다 더 뛰어난 술로 해외에서 인정받는 것이 꿈입니다. 이제 작은 발걸음을 뗐을 뿐이지요. 앞으로도 어려움이 많겠지만 차근 차근 극복해 나갈 겁니다.” 10년 전 외환위기로 직장 생활을 그만 둔 박상기(41)씨는 막걸리 제조업체 ㈜우리술 사장으로 새출발했다. 경기 가평군에 있는 이 업체는 설립 당시 한달에 2000만원씩 적자를 냈으나 지금은 연 매출 25억원에 2억∼3억원의 흑자를 내고 있다. 박씨는 “큰 좌절 끝에 조그만 성공을 거두고 있다.”면서 “외국인들이 어설픈 한국말로 막걸리를 찾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월급쟁이에서 노조 위원장으로 그는 1993년 대학 졸업 후 지금은 없어진 재벌기업 계열사인 D생명에서 평범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충격은 평범한 영업 직원의 인생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내몰았다. 회사는 고통분담을 강요하며 직원들과 상의도 없이 임금 삭감과 정리해고를 강행했다. 그는 “당시 특별히 회사 상황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면서 “급여 체계가 상여금 위주로 돼 있어서 직원들이 받은 타격이 상당했다.”고 말했다. 박씨만 해도 연봉의 40%가 깎였다. 직원들은 노조를 만들었고 박씨는 위원장이 됐다. 노조에 참여한 직원들은 극심한 탄압에 시달렸다. 그는 “회사는 절대 노조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집에 전화해 ‘남편이 빨갱이 활동을 하고 있다.’고 협박하는 등 부당노동행위를 밥 먹듯이 했다.”면서 “회사 창고로 나를 납치해 반성문을 강제로 쓰게 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노조를 무력화시킨 뒤 회사는 “회사를 그만두면 노조를 인정하겠다.”고 회유했고 이미 지칠대로 지친 그는 1999년 말 ‘자의반 타의반’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물론 회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블랙 리스트’에 올라 동종 업계에선 그를 받아 주지 않았다. 일자리 자체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가평에서 막걸리공장을 하던 처남이 2000년 말 대리점을 서울에 냈는데 그때부터 2002년까지 제가 그걸 맡아서 하게 됐죠.” ●막걸리공장 사장, 고생문 활짝 봉고차를 타고 동네 가게마다 다니면서 막걸리를 팔았다. 기존 업체들이 선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경험도 없는 사람이 거래처를 뚫기가 쉽지 않았지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전 직장 동료들과 학교 동창들의 도움으로 조금씩 거래처를 넓혀 갔다.2003년 10월에는 함께 돈을 모아 ㈜우리술 법인을 만들었고 처남한테서 경영권을 넘겨 받았다.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설립 당시 한달에 2000만원 정도씩 적자를 냈다. 자산보다 빚이 더 많았다. 원료를 외상으로 사게 돼 웃돈을 줘야 했고, 원가가 높아지니 가격 경쟁력이 떨어졌다. 그는 “직원들 월급 주기도 힘들었고 빚독촉 전화에 엄청나게 시달릴 정도로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서울에 있던 전셋집도 처분해야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여전히 힘들지만 희망을 꿈꾼다 “그럴 때일수록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품질 향상에 주력하면서 납품업자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협조를 구했습니다. 발품을 팔아 대형 할인점에 물품을 납품하게 되고 2005년에는 수출도 시작했습니다. 지난해엔 10만달러어치를 수출했고 올해는 20만달러를 예상하고 있지요.” 박씨는 “외환위기를 극복했다고는 하지만 양극화가 너무 심해졌다.”고 우려했다. 특별취재팀
  • 그룹K2 보컬 김성면 뮤지컬 데뷔

    그룹K2 보컬 김성면 뮤지컬 데뷔

    ‘슬프도록 아름다운’‘그녀의 연인에게’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룹 K2의 가수 김성면(36)이 뮤지컬 배우로 선다는 게 뜨악할 법도 하다. 국립중앙박물관 내의 극장 용에서 11월16일 개막하는 ‘마리아 마리아’에서 예수 역을 맡은 그는 요즘 아침 10시부터 밤10시까지 연습벌레로 산다. 연습이 하루하루를 꽉 죈다. 그러나 김성면은 외려 담백한 얼굴이다. “가수들은 녹음할 때 가장 덤덤하게 불러야 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감정과 가사에 몰입해 불러요. 원래 록으로 가수 생활을 시작했던 터라 콘서트 때도 뛰어다니며 소리도 엄청나게 지르죠. 가수일 때는 감정을 죽이는 게 문제였는데 반대로 표출해야 하니까 오히려 맞는다고 해야 할까요.” 김성면에게 뮤지컬은 종합선물세트와 같다.2집 활동을 하던 10년전 콘서트를 하면서 뮤지컬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산가족의 아픔을 담은 ‘그들만의 슬픔’이라는 곡을 부를 때다. 그는 노래하기 전 대사를 하고 무대에 바람과 연기를 뿜어내는 장치를 썼다. 무대 전체에 커다란 태극기가 쏟아져내리는 장면도 시도했다. “저희 친척 중에 6·25 때 북에서 내려온 아주머니가 계세요. 그런데 배를 타고 떠나려는 순간 남편이 중요한 걸 집에 두고 왔다고 했대요. 남편이 돌아왔을 땐 이미 배가 바다 중간에 떠 있었죠. 그게 평생 이별이 됐어요. 제가 그 얘기를 가사로 옮길 때 그 아주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노래하면서 이런 사연을 다 보여줄 순 없을까 했어요. 뮤지컬적인 요소를 쓰고 싶었던 거죠.” 실제로 그에게 뮤지컬을 하자는 제안이 온 것도 그해였다. 여배우로 최절정을 구가하던 최정원도 캐스팅된 작품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가수’로 남고 싶어 고사했다. 생각이 바뀐 건 작년 프랑스 뮤지컬 ‘십계’를 보고나서였다. “가수들이 요즘 뮤지컬에 많이 출연하잖아요. 선뜻 못한다 했던 건 창법도 다르고 본래 목소리가 망가지는 경우도 많아서였어요. 그런데 클래식 전공자들의 성악 발성이 대부분인 국내 뮤지컬에 익숙하다가 음악 위주의 유럽 뮤지컬을 보니 저런 팝·록음악 발성이면 해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모험을 했다. 올 여름 개막 예정이었던 뮤지컬 ‘아킬라’의 무사로 나선 것. 그러나 작품은 공연 직전 무산됐다.2개월간의 연습이 날아갔다. 그러나 그때 쌓은 짧은 공력은 이번 작품의 무게를 덜어줬다. “태어나 연기를 처음 해보니 연출한테 혼도 많이 났죠. 그럴 땐 ‘내가 20년 동안 노래하면서 욕 한번 먹은 적 없는데 어린 애들 앞에서 욕 먹으며 왜 이걸 한다 했을까.’하는 생각도 스치더라고요.” 그는 이번 공연에서 14∼15곡을 혼자 부른다. 목소리의 음역대가 높아 남들은 낮추는 노래의 키를 오히려 높였다. 윤복희, 허준호, 박완규, 소냐 등이 거쳐간 뮤지컬 ‘마리아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를 만나 굴곡진 삶을 변화시키는 드라마. 김성면이 표현하는 ‘예수’는 체 게바라 같은 혁명가, 건강하고 열정적인 인간의 얼굴을 한 예수다. 뮤지컬계의 새 사람으로서 색다른 가능성을 보이고 싶다는 김성면. 내년 봄에는 프로젝트 밴드로 디지털 싱글 앨범을 발매하고 가을 무렵에는 솔로 앨범도 낼 계획이다. 연기에 내공이 붙으면 영화배우까지 해보고 싶다는 자신만만한 포부도 내보인다. 글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사진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 [서울광장] 대통령 하겠다는 분들이…/ 육철수 논설위원

    [서울광장] 대통령 하겠다는 분들이…/ 육철수 논설위원

    5년 전 서울시청에 출입할 때다.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선 이명박 당시 시장의 어릴 적 사연을 알고 목이 멘 기억이 있다. 기자로서 출입처 장(長)의 됨됨이를 파악할 필요가 있어 출입 첫날 그의 자서전을 구해 밤새워 읽었다. 그가 고교시절을 회상한 대목이었던 것 같다. 여동생과 자취할 때, 매달 양식이 모자라자 봉지 30개에 쌀을 나눠담아 하루하루 끼니를 때웠다고 한다. 배고픈 삶을 근근이 이어가는 오누이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라 그만 눈물이 맺히고 말았다. 그런 연유로 치열하게 살아온 이 전 시장을 모질게 비판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 빼곡하게 담겨 있을 과거사가 자꾸 떠오른 탓이다. 이 후보는 지금 대통령을 향해 정신 없이 뛰고 있다. 하지만 예전에 가까이서 지켜보니 그도 특별한 게 없었다. 가끔 함께 식사하다 보면, 그도 국물 흘리고 밥풀 떨어뜨리면서 밥을 먹었다. 말실수가 잦아 거슬릴 때도 있었고. 그런 그가 청계천 복원 때 주변 상인들을 수천번 만나 설득하고, 기어이 성공시켜 놓은 걸 보면서 보통사람하고는 뭔가 다르다고 느꼈다. 며칠전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도 인간승리의 표상이라 할 만하다. 형 넷을 전쟁통에 잃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으며, 시장에서 삯바느질한 어머니의 뒷바라지로 대학을 나왔다. 유신을 반대하다가 강제징집을 당하는 등 힘겨운 시절이 있었다. 스타 앵커에서 정치인으로 화려하게 변신한 이면에는 분명 이런 고난들이 밑거름이 됐을 것 같다. 민노당의 권영길 후보, 민주당 이인제 후보, 국중당 심대평 후보, 그리고 문국현·정근모·이수성·장성민씨 등 대통령이 되겠다고 바삐 움직이는 인물들도 직·간접적으로 평판을 듣고 있다. 다들 나름대로 열정적이고 성공적인 삶을 누려온 분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살고 점잖은 양반들이 대권 욕심에 상식 이하의 언동을 하는 것은 실망스럽다. 상대의 업적 폄하와 인신공격 발언이 지나쳐서 하는 얘기다. 공개 연설에서조차 상대 후보에 대한 호칭이 이따금 무례한 경우가 있다. 이름 석자 뒤에 ‘후보’라는 말을 붙이면 어디가 덧나나. 열세 후보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하나, 그래도 기본예의를 갖추는 게 상호존중의 출발점이다. 후보중 한 명에겐 머잖아 ‘대통령’이란 묵직한 직책이 따라붙는다. 서로 옆집 강아지 대하듯 함부로 부를 이름이 아니다. 영영 안 볼 것처럼 남의 공약을 헐뜯고, 여전히 지역가르기나 하는 행태도 역겹다. 후보별 공약 평가는 국민에게 넘기고 당사자들은 자신의 정책만 잘 챙기면 될 일이다. 박터지게 지지고 볶아도 끝나고 화해하면 된다고? 하지만 말이 쉽지 악감정을 걷어내기가 어디 쉬운가. 의혹이 있으면 확실한 근거로 공격하는 게 정도다. 과잉충성 국회의원들이 국감을 파행시키는데, 이들을 절제시키는 일도 결국 후보의 몫이고 책임이다. 대통령이란 하늘(민심)이 내리는 자리다. 앞으로 5년동안 대한민국을 빛낼 대표 브랜드이자 대표 상품이다. 품격이 변변치 않아도 중책과 국민 지지도, 언론으로 적당히 포장하면 카리스마가 절로 생길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선거과정에서 상처투성이가 된 대통령은 제대로 건사하기 어려울뿐더러, 세계무대에 내놓기도 머쓱할 것이다. 대통령 후보들은 국가의 핵심 지도자다. 나중에 어느 분처럼 “대통령으로서 말과 자세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소리는 제발 하지 말았으면 한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보셨나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집

    보셨나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집

    지난 7월 LA타임스는 ‘부자는 계속 부자가 되고, 재산은 갈수록 불어난다’는 제목으로 부동산 시장을 보도했다. 우리가 발 디딘 지구촌엔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버거운 사람들이 숱한 반면 한 채에 1000억원을 훌쩍 넘는 집에서 사는 이들도 있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16일(현지시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집은 미 캘리포니아주의 베벌리힐스 선셋대로 북쪽에 위치한 3층 빌라로 가격은 1억 6500만달러(1520억원)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옛 언론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1863∼1951)가 한때 여배우 매리언 데이비스와 함께 살았다. 데이비스 사망 뒤 32년째 변호사 겸 투자 전문가인 레오너드 로스가 소유하고 있다. 지난 8월 이사를 위해 매물로 내놔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베벌리힐스 전문 중개인인 제프 하일랜드는 “이 정도의 매물은 100년에 한 번쯤 나온다.”고 말했다. 이 저택은 1927년 건축가 고든 카우프만의 설계로 2만 6300㎡(약 7970평)에 H자 모양으로 지어졌다.6동의 건물 면적만 7000㎡(약 2200평)이다.29개의 침실과 40개의 욕실,3개의 수영장,1개의 영화관도 갖췄다. 허스트가 살던 당시 이 저택은 영향력이 큰 할리우드 인사들의 파티장으로 즐겨 쓰였다.72년 영화 ‘대부’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포브스에 따르면 세계에서 두번째로 비싼 집은 루마니아 브라쇼브에 있는 ‘브란 성(城)’으로 1억 4000만달러다. 루마니아의 블라드 왕자가 살았던 곳으로 절벽에 세워져 ‘드라큘라성’으로 더 유명하다. 대지는 8만 1000㎡(2만 4545평). 현재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지난해 1위였던 영국 윈즐즈햄의 업다운코트는 1억 3800만달러로 두 단계 내려앉았다. 침실 103개에 23만 5000㎡(약 7만 1200평)의 정원을 갖췄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20&30]한·일 남녀 젊은이들의 비슷한 결혼관

    [20&30]한·일 남녀 젊은이들의 비슷한 결혼관

    한국과 일본 20&30의 결혼관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한국 결혼정보회사 듀오와 일본 결혼정보회사인 오네트는 최근 두 나라의 24∼33세 미혼남녀 500명씩을 대상으로 ‘미혼관’,‘결혼관’,‘생활가치관’ 등 세 영역에 걸쳐 설문조사했다. 서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슷한 문화적 토양과 끈끈한 가족 중심주의 문화를 지닌 두 나라 젊은이들의 결혼관은 대체로 비슷한 결과를 나타냈다. 하지만 이상적인 남편감과 배우자에 대한 기대치에서 두 나라 여성들은 눈에 띄게 다른 생각을 드러냈다. 결혼에 대한 한·일 20&30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봤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다른 조건은 무용지물 김용진(32·회사원)씨는 30∼33살이 결혼 적령기라고 말한다. 이유는 간단한다. 빠르면 27살, 늦으면 30살쯤 취직하는 점을 감안하면 3년 정도는 모아야 대출을 받아서 전세라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는 12월22일 결혼식 날짜를 잡은 김씨는 “어릴 땐 돈 많은 여자가 좋더니 나이가 드니까 말이 통하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행히 그런 여자를 만나서 결혼하게 됐죠.”라고 털어놓았다. 취업 준비에 올인하고 있는 김모(27·여)씨가 생각하는 결혼 적령기는 29살. 김씨는 “백수라서 직장을 잡는 일이 우선이다. 한 1년 정도 직장에 적응하고 나서 좋은 짝을 만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일도 일이지만 부모님에게 최소한의 도리(?)를 하려면 축의금도 어느 정도 받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결혼 상대에 대한 특별한 기준은 없다. 연애와 다를 것도 없고, 무엇보다 ‘사람’이 좋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다만 “사람만 좋고 무능력하면 그것도 좀 문제있을 것 같네요.”라며 웃었다. 물론 ‘취직’이 아닌 ‘취집(결혼을 평생직장으로 여기는 것)’을 원하는 친구들은 아직도 여자 팔자는 남자 만나기에 달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지난달 결혼한 두살 터울인 언니에 대해 김씨는 “주위의 (성격) 좋은 남자들 뿌리치고 펀드매니저란 직업을 보고 형부를 택한 것 같다.”며 씁쓸해했다. 임수현(27·대학생)씨는 결혼 상대로 자신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랑도 중요하지만 서로 편하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힘들 것 같기 때문이다.“결혼은 심리적 안정감 때문에 하고 싶다. 젊었을 때는 일을 위해 최선을 다 하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다른 목적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가족’인 것 같다. 평생 혼자 산다면 나중에 공허해지지 않을까.” “집 앞 골목에서 불꺼진 내 방을 보면 정말 들어가기 싫다. 당장이라도 결혼하고 싶다.”는 황경우(27·대학원)씨는 “결혼의 조건은 무엇보다 생각이 잘 맞아야 한다. 얼굴 예쁜 것은 일년이면 끝”이라고 말했다. 황씨는 또 “결혼을 하지 않는 것도 나쁘지 않으나, 결혼을 통해 사회적 관계가 확장되는 것이 더 좋다.”고 덧붙였다. ●성격·경제력·외모 3박자 갖췄으면 이수진(29·여·회사원)씨는 “서른 정도가 적령기가 아닐까 싶다. 좌충우돌할 나이도 지났고 안정적으로 삶을 설계하고 준비하는 시기인 것 같다.”고 말했다. 결혼 상대를 고르는 기준으론 성격과 경제력, 외모 순으로 꼽았다. 이씨는 “성격은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다. 평생 같이 살 사람인데 이해하고 배려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경제력은 당연한 것이고, 외모는 매력포인트 하나 정도 있어야 되지 않겠나.”라고 설명했다. 이씨는 지금 당장 결혼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부모에게 기대지 않고 독립적인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란다. 때로는 미혼으로 남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이씨는 “주위를 둘러보면 이혼율도 높고, 헤어지는 커플을 보면 안 좋은 얘기들이 많이 들린다. 이럴 땐 차라리 미혼으로 남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살짝 귀띔했다. 교사 박경주(26·여)씨는 “남자의 결혼 적령기는 31∼33세, 여자는 26∼28세 정도라고 생각한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돈이다. 남자는 군대 문제로 사회에 늦게 진출하기 때문에 돈을 모을 수 있는 시간이 그만큼 늦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박씨는 결혼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사랑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사랑에도 유효 기간이 있으니 평생을 같이 살려면 적절한 지적 수준과 취미가 비슷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씨는 ‘결혼은 꼭 해야 한다.’는 주의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주위에서 ‘결혼도 못했다.’는 눈총을 받아야 하고 사회 제도도 가족 단위로 돼 있어 결혼을 못한 사람을 비정상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삶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논리다. ●결혼 꼭 해야 하는 거니? 하인성(27·회사원)씨는 스스로 ‘미혼(未婚)’이 아니라 ‘비혼(非婚)’이라고 소개한다. 하씨는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지만, 만약 생각을 바꿔 혼인을 한다면 마흔살쯤이 적당하지 않을까.”라면서 “마흔쯤 되면 집안이나 배경 같은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무엇보다 생각이 비슷한 사람과 같이 살고 싶다.”고 밝힌 하씨는 “예전에 생각이 다른 사람과 사귈 때, 내 생각이 흐트러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 결혼은 개인과 개인의 결합이 아닌,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기 때문에 당장 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하씨는 “사랑이 꼭 결혼이란 제도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 않냐.”면서 “일본인 친구가 상대 집안의 조건에 개의치 않고 결혼을 준비하는 모습이 부러웠다.”고 밝혔다. ●문화적 차이 있어도 배우자 기준 한·일 흡사 가전제품 매장 직원으로 일하는 아야 나카다와(24·여)는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 사랑없는 결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자는 일상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내가 개인적으로 로맨티스트 성향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결혼을 하거나 애인을 만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사랑, 그리고 느낌이다.TV를 같이 보면서 웃을 수 있고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들 것 같다.” 지하루 이마오카(27·여·요리사)는 “결혼 상대의 성품이 가장 중요하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한 가정을 이루는 일이 얼마나 어렵나.”라고 말했다. 그는 “내 직업을 인정해 주고 서로 배려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좋을 것 같다. 내 외모를 보고 좋아하는 사람도 좋지만 나를 이해해 주고 배려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남편감으로선 더 좋지 않을까.”라고 설명했다. 어렸을 때는 일찍 결혼하고 싶었다던 그는 “지금도 반드시 30살 전에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노부마쓰 다카마쓰(23·대학생)는 “남자라면 누구나 가정적인 여성이 아내였으면 하는 생각이 있을 거다. 너무 주장이 강한 여자는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면서 “성격이 밝았으면 좋겠다. 무뚝뚝한 여자랑은 단 5분도 이야기하기 지겹다. 늘 웃고 발랄한 성격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카야마 료(29·경비업체 직원)는 여성의 능력을 최우선 조건으로 꼽았다. 그는 “생각이 있고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하는 여자였으면 좋겠다. 또 자기를 가꾸고 늘 아름다움에 신경 쓰는 여자, 유머 감각도 있다면 더욱 좋다.”고 말했다. 어머니나 할머니 세대와 같은 여성상보다는 미국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의 미란다 같은 커리어우먼이 아내가 됐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그는 “결혼을 사실 내일이라도 하고 싶다.”면서 “한국과 일본인 사이에 분명 문화적인 차이는 있지만 배우자를 고르는 기준 등은 거의 비슷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치코 다카사시(27·여·회사원)는 30대 중반쯤 결혼할 계획을 세워놓았다. 하지만 또래 일본인 친구들은 25살 전에 결혼하고 싶어했다고 미치코는 귀띔했다. 결혼 상대의 조건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솔직히 돈”이라고 말했다.“돈이 없다면 자식들을 교육시키기도 어렵고 자식의 미래에도 좋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란다. 일본도 한국에서처럼 교육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경제적 압박을 피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임일영 류지영기자 argus@seoul.co.kr ■ 韓 “돈 많은 남자가” 日 “따뜻한 남자가” 한·일 두 나라의 미혼 남녀들은 배우자에게 어떤 것들을 원할까. 한국 여성은 경제적 능력을 갖춘 남성을 배우자로 가장 선호하는 데 비해 일본 여성은 따뜻한 성격과 애정을 가진 남성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한국 여성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일본 여성보다 훨씬 까다로우며 능력·성격·가족관계 등 여러 요소를 두루 갖춘 배우자를 바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와 일본의 오네트가 최근 한국과 일본의 미혼남녀 1000명(남·여 500명씩)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결혼 상대 선택시 고려하는 요인(복수응답)으로 한국 여성은 ‘능력’과 ‘장래성’(각각 99.6%)을 가장 중요하다고 꼽은 데 비해 일본 여성은 ‘성격’과 ‘애정’(각각 98.8%)을 선택했다. 이어 한국 여성은 ▲성격·애정(각각 99.2%)▲수입(99.1%) 등을 든 반면, 일본 여성은 ▲가치관(94.2%)▲건강(92.6%)▲가사능력(90.9%) 등을 꼽았다. 한국 여성이 일본 여성에 비해 배우자의 경제력을 중요시하는 셈이다. 특히 한국 여성은 건강(98.8%), 가족관계(98.4%), 자신의 일에 대한 이해(96.3%), 가사능력(95.9%), 가치관(95,5%) 등 배우자에 대한 기대치가 극단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일본 여성들은 종교 등 일부 항목을 제외한 나머지 분야 모두에서 한국 여성들보다 기대치가 낮았다. 특히 배우자 직업에 대해 한국 여성 중 93.0%가 ‘중요하다.’고 답한 반면 일본 여성은 67.4%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한국 여성들이 가치를 두는 학력(79.0%)과 키(68.7%) 또한 일본 여성(41.3%,28.1%)들은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일본 여성들이 경제력이 다소 떨어져도 따뜻하고 자상한 성격을 가진 남성을 선호하는 데 비해 한국 여성들은 능력에 외모, 성격까지 겸비한 ‘완벽남’을 원하고 있는 셈이다. 남성은 두 나라가 비슷한 성향을 나타냈다. 한국 남성들의 경우 배우자 선택의 요인으로 ‘애정’(97.6%)과 ‘성격’(97.1%)을, 일본 남성은 ‘성격’(97.0%)과 ‘애정’(96.2%)을 꼽았다. 이어 한국 남성은 ▲자신의 일에 대한 이해(95.1%)▲건강(94.7%) ▲가치관(92.3%) 등을 들었다. 일본 남성은 ▲가사능력(84.4%)▲자신의 일에 대한 이해(84.0%)▲외모(84.4%) 등을 꼽아 두 나라 남성들은 대체로 가정생활을 원만히 이끌어갈 수 있는 배우자 상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듀오 측 관계자는 “한국의 경우 경기 불황이 장기간 이어진 데다 여성들의 취업도 어려워 경제적인 어려움을 배우자를 통해 극복하려는 경향이 강한 반면 일본은 최근 경기 호황기에 접어들다 보니 ‘굳이 남자에게 경제력을 의지하지 않아도 충분한 돈을 벌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임일영 류지영기자 argus@seoul.co.kr
  • 부녀복서 가족의 방황과 분투

    1980년대 ‘탱크’라고 불리며 두 체급에서 한국 챔피언을 지냈던 우동구(46)씨. 하지만 세계 챔피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는데….20여년이 지난 지금 그의 꿈은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바로 딸과 아들을 통해서다.KBS 2TV 인간극장은 우씨의 핑크빛 꿈을 조명하는 ‘우동구전(傳)’ 5부작을 8일 오후 7시30분 첫방송한다. 우동구·우지혜씨가 한국 최초 부녀 복서로 이름을 날리기까지의 눈물겨운 과정과 세계 챔피언을 꿈꾸는 아들 병준이의 방황과 분투를 담는다. 현 세계 챔피언 우지혜(20)씨는 매서운 눈빛과 날렵한 잽이 꼭 아빠를 닮았다는 말을 듣는단다. 하지만 처음에는 맞으면서 싸워야하는 권투가 싫어서 절대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하지만 독불장군 아버지 앞에서는 꼼짝할 수가 없어 권투를 시작했고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이제 사각링 위에서 그는 이렇게 외친다. “예전에는 아빠를 위해서 싸웠지만, 이제 나를 위해서 주먹을 날린다.”고. 병준이는 자꾸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다.하지만 동구씨의 목표는 여전히 병준이도 세계 챔피언으로 만드는 것. 누나와 달리 그는 하루하루가 아버지와의 전쟁이다. 친구들과 마음껏 놀지 못하는 선수생활도 싫고 누나와 치고받는 스파링도 싫다. 하지만, 권투는 싫어도 아빠는 이해할 수 있다는 병준이.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현장 행정] 강서구청 공무원 자원봉사단

    [현장 행정] 강서구청 공무원 자원봉사단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올 추석처럼 연휴가 긴 명절은 외로움을 더하게 한다. 달력 속 빨간 날의 하루하루가 혼자임을 각인시키는 탓이다. 강서구청 공무원자원봉사단(사진)이 긴 명절 외로운 분들을 찾아 함께 시간을 보냈다. 구청직원 150명으로 구성된 봉사단은 지난해 2월부터 7개팀으로 나눠 매주 봉사활동을 진행 중이다. ●월세 5만원 주택의 소박한 리모델링 “미안해서 그러지…. 쌀쌀해지는데 그냥 불이나 좀 땔 수 있게만 해줘.” 26일 강서구 방화1동 한 무허가촌.7명의 강서구청 공무원자원봉사단이 방문한 안덕수(82) 할머니의 집은 이 동네에서 ‘검은 굴뚝집’으로 불린다. 물가비싼 서울에서 월세 5만원에 단독주택 한 채를 빌려 주니 오죽할까.60∼70년대에나 봤을 법한 얼기설기 얹은 슬래브 지붕사이로 언제 쓰러질지 모를 굴뚝이 옹색한 살림을 말해준다. 요즘 사람들에게 굴뚝은 생경스러운 풍경이다. 동사무소에서 봉사대상 독거노인을 찾던 중 알게 된 안 할머니의 집은 서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전통적인 아궁이 부엌이다. 말이 좋아 전통이지 겨울이면 건축공사장에서 버린 나무 등 땔감을 모아 난방을 한다. 땔감을 찾고 나르는 것 역시 온전히 할머니 몫이다. 이날 봉사단의 임무는 막히고 갈라진 굴뚝을 새것으로 교체하는 일. 숭숭 구멍난 굴뚝이 부식돼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회원들이 전기장판을 사드린다고 해도 “전기세를 감당할 형편이 못된다.”며 할머니가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봉사단은 어쩔 수 없이 대공사에 들어갔다. 총무과 길민수(43)씨 등 서너 명의 회원들은 바로 굴뚝구하기에 나섰다. 월세 5만원짜리 집의 소박한 리모델링은 이렇게 시작됐다. ●추석에 배달된 굴뚝선물 치수방재과 이원호(48)씨 등 남은 회원들은 집수리에 나섰다. 방안은 아궁이의 열기가 구들장 틈새로 뚫고 들어와 이미 장판이 검게 타들어간 상태였다. 불에 타 건드리기만 해도 뚝뚝 부러져나가는 장판을 모두 걷어내고 금간 구들장은 두껍게 깨냈다. 그대로 시멘트만 얇게 발랐다간 얼마못가 같은 곳이 깨져나갈 정도로 균열이 심한 탓이다. 솜씨 좋은 몇몇 회원 덕에 방엔 판판하게 새 구들장이 깔렸다. 오후 2시가 지나자 굴뚝을 사러 갔던 팀이 4m가 넘는 굴뚝을 어께에 메고 돌아왔다. 요즘 이만 한 굴뚝을 찾기도 힘들었지만 운반도 만만치 않아 길씨의 승용차 지붕이 고생 좀 했다고 한다. 굴뚝을 바로세우고 황토 흙과 시멘트를 발라 철사로 동여맸다. 오후 4시쯤 시범삼아 신문지를 아궁이에 넣고 태우니 연기가 시원스럽게 빨려나갔다. 굴뚝공사가 성공적이란 증거다. 먼지 구덩이 속에서 땀범벅이 된 회원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순간이다. 기획공보과 예산팀 최기웅(44)씨는 “저소득층이 많은 구에서 공무원들이 책상에 앉아 예산지원만 할 순 없다는 생각에 결성된 모임”이라면서 “명절에 부모님께 좋은 선물을 드린 것 같은 뿌듯한 하루였다.”며 미소지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사설] 소말리아 피랍선원도 우리 국민이다

    지난 5월15일 소말리아에서 피랍된 한국인 선원들이 억류된 지 130일이 넘도록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원양어선 마부노호의 선장 한석호씨와 선원 3명 등 피랍자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에 대해 들려오는 얘기조차 없다. 탈레반 피랍 사태 때 하루하루 국력을 쏟아붓다시피 석방교섭에 나섰던 때와는 대조적이다. 이러다 보니 추석연휴를 앞둔 그제 선원 가족들이 외교부를 항의 방문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우리는 피랍 선원 가족들이 이유 있는 항의를 했다고 본다. 마부노호가 한국 선적은 아니라지만,4명의 선원은 엄연히 한국민이기 때문에 정부가 이들의 안위를 책임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더욱이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 땐 국가정보원까지 나섰던 정부였지만, 유독 이 건에 대해선 미온적이란 가족들의 문제 제기도 일리가 있다. 피랍선원들에게 고기잡이는 생업이었지만, 국가경제에도 적잖게 기여하는 외화벌이 사업이었다. 정부가 말리는 데도 선교·봉사를 위해 아프간으로 갔다가 납치된 이들과 달리 대우를 받을 까닭이 없는 셈이다. 물론 내전상태인 소말리아 과도정부나 해적들을 상대로 석방교섭을 벌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와 국가가 그동안 소말리아 피랍선원들에게 너무 무관심한 게 아니었는지 자성해야 할 시점이다. 정부는 새우잡이 원양어선을 타고 멀리 아프리카까지 진출했다가 고초를 겪고 있는 선원들의 석방노력을 게을리 해선 안 된다. 그들이 이등국민 대접을 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 이주노동자 밴드 ‘워커스밴드’ 색다른 추석맞이

    이주노동자 밴드 ‘워커스밴드’ 색다른 추석맞이

    17일 밤 10시 안산역 근처의 한 컨테이너 박스.2평짜리 허름한 공간에서 윤도현 밴드의 ‘사랑2’가 흘러나왔다. 이 컨테이너 박스는 새달 7일 원월드뮤직페스티벌 출연을 앞둔 ‘워커스 밴드’의 연습실이다. 베이스를 맡은 다니(26)와 아구스(24), 드럼을 치는 에코(26), 보컬 은종(32)·아르손(32), 기타리스트 부디(34)·군도르(25), 보컬과 통역, 매니저 역할을 하는 에코(32). 이렇게 8명으로 이뤄진 ‘워커스 밴드’는 안산의 전자부품회사와 도금 공장 등에서 일하는 인도네시아 이주 노동자들이다. 한국에 온지 1∼3년 된 이들은 자기 돈을 들여 베이스, 기타, 드럼을 샀다. 부디의 유서 깊은 ‘잭슨’ 기타는 200만원짜리. 두 달치 월급이다.“두 달간 밥도 안 먹고 담배도 조금 피웠어요.”사뭇 우는 소리를 하면서도 부디는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다. “안산에는 안 좋은 일이 많아요. 술 먹고 다른 외국인과 싸우고 다치고…. 그래서 인정을 못 받아요. 우리는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우리도 좋은 일 할 수 있다, 그래서 밴드를 만든 거예요.”(다니) 그것이 하루하루 거두기도 바쁜 이들이 밴드를 결성한 이유다. ‘노동자 밴드’. 그룹 이름이 너무도 정직하다. 왜 굳이 벗고 싶은 멍에인 노동자를 팀 이름으로 내세웠을까.“한국에 와서 일이 고되어도 우리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다른 이름은 스스로 안 맞는 것 같았어요. 그게 우리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이름이라고 생각했죠.”(에코) ‘워커스 밴드’의 이번 추석은 예년 추석과는 다르다. 친구들과 하릴없이 동네를 돌아다니던 추석연휴가 연습 일정으로 빡빡해진 것. 쿠바, 브라질, 베트남, 미얀마 등 그간 주변부로 치부됐던 월드뮤직 음악인들의 축제, 원월드 페스티벌에 나가게 됐기 때문이다. 페스티벌 측은 지난 2일 안산 국경 없는 거리 ‘만남의 광장’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1000여명의 관객이 밴드에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는 걸 보고 이들을 축제에 초대했다.10월7일 마지막 순서의 손님으로 나가게 된 이 밴드는 40분 동안 8곡의 노래를 선보일 계획이다. “사람도 많고 준비하는 시간도 부족하니 연휴기간 어디도 못가고 연습해야죠. 애인도 없는데 어떻게 해….”라며 부디가 우는 소리를 냈다. 사실 큰 무대에 선다는 설렘보다 잘해야 된다는 부담이 더 크다. “우리 같은 근로자들을 위해 이번에 공연하는 거예요. 그들이 우리가 공연하는 동안만큼은 걱정 말고 즐거워했으면 좋겠어요.”(다니) “우리는 어디에서든 누구와든 평화를 만들고 싶어요. 우리 노래로 한국인들도 우리를 인정하고 우리도 한국인들을 인정하고 싶고요.”(부디) 평소 들국화의 ‘행진’, 윤도현 밴드의 ‘잊을게’ 등 한국 노래도 곧잘 하는 이들이지만 이번 무대에서는 인도네시아 음악을 소개할 예정이다. 인도네시아 음악은 어떤 음악이냐는 물음에 아구스가 대답 대신 기타줄을 튕겨보였다. 친근하고 서정적인 멜로디가 연습실 공기를 데웠다. ‘워커스 밴드’는 여느 밴드처럼 앞으로의 활동 계획을 말하지 못했다.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온 터라 언제까지고 한국에 머물지 못하기 때문. 밴드 결성 2년째지만 돈이 없어 앨범도 못 냈다. 고국에 8살 난 아들과 5살 난 딸을 두고 온 은종은 “돈 많이 벌어서 빨리 가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앞일을 기약할 수 없는 ‘워커스 밴드’지만 이번 공연 계획만큼은 한마음이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가 어우러지는 축제, 가사는 몰라도 좋은 멜로디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자는 것. 자정이 다 된 무렵, 연습실을 나서는데 활기찬 드럼 소리가 두둥 밤공기를 갈랐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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