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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자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공직에 진출한 우리 보며 탈북인에 대한 편견 날려 버렸으면”

    [탈북자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공직에 진출한 우리 보며 탈북인에 대한 편견 날려 버렸으면”

    이경희·방금철씨 등 140여명 근무 “통일 준비에 힘 보탤 수 있어 보람” “통일 준비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라고 정부가 저를 이 자리에 앉혔다고 생각합니다. 능력껏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난해 11월 통일부의 정규직 공무원이 된 이경희(43·여·9급)씨는 “적지 않은 나이에 합격해 앞으로 정년까지 17년 정도 공직에서 일하게 됐는데 그사이에 통일을 보게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함경북도 청진이 고향으로, 2005년 한국에 들어왔고 현재 경기 안성의 제1하나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통일부는 이씨를 포함해 탈북자 5명을 처음으로 정규직 공무원으로 선발했다. 통일부 관계자는 “한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탈북자의 수는 통일 준비의 바로미터가 된다”며 “통일 이후 남북의 경제적·정서적 장벽을 허무는 등 원활한 통합을 위해서는 탈북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때 뽑힌 5명 중 이씨와 방금철(31·9급)씨는 실명을 공개하는 데 동의했지만 황모(여·7급), 박모(여·7급), 김모(여·9급)씨는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게 누가 될 수 있다며 이름과 나이를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현재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에는 140여명의 탈북자가 일하고 있지만 대부분 계약직이거나 행정 지원 업무 정도만을 보고 있다. 이들 중 김씨는 “2008년 한국에 들어온 뒤 민간기업에 취업하려 했지만 탈북자라는 편견의 벽에 부딪혀 늘 좌절했다”고 말했다. 탈북자에 대한 차별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공직 사회에 탈북자들이 진출한 것이 탈북자에 대한 선입견과 차별을 넘어서는 데 보탬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아직까지 공직 사회만큼 탈북자를 편견 없이 능력으로 봐주는 조직은 드문 것 같아요. 앞으로 능력 있는 탈북자들이 공직은 물론 민간 분야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했으면 합니다.” 박씨는 다른 정부 부처에서 정규직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지난해 공채시험을 다시 봐서 통일부로 왔다. 그는 “2007년 한국에 들어와 대학에 다녔고 지금은 가정을 꾸리고 아이도 낳았다”며 “학업, 세금, 육아 등 한국에서 생활하는 탈북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다”고 밝혔다. “탈북민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원보다는 자립·자활 쪽에 대책이 집중돼야 합니다.” 방씨는 2002년 8월 북한 어선을 타고 귀순한 보트피플 가운데 한 명이다. 당시 그는 고교생이었다. 그간 자동차공업사 등에서 일하며 공무원의 꿈을 키웠다. 황씨는 탈북민 정착 지원 및 상담 업무를 맡고 있다. 그는 2007년 한국에 들어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원까지 졸업했고 그동안 지자체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했다. 황씨는 “통일이라는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며 “같은 처지의 탈북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공무원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탈북자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상) ‘조선족’보다 먼 이름, 탈북자

    [탈북자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상) ‘조선족’보다 먼 이름, 탈북자

    국내에 정착한 탈북자 수가 3만명에 근접하고 있다. 목숨을 걸고 가족과 고향을 등진 그들. 하지만 대부분의 탈북자는 그토록 꿈꿨던 ‘남측에서의 행복한 삶’이 허상임을 오래지 않아 깨닫게 된다. 자신들을 이방인으로 보는 지독한 편견과 선입견에 좌절하고 만다. 탈북자들은 말한다.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이 되고 싶다고. 그들이 놓여 있는 차가운 현실을 짚어 보고 개선을 위한 대안을 모색해 본다. “사람들이 내 남편에 대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게 됐어요. 남자가 오죽 못났으면 탈북한 여자와 결혼을 했겠느냐는 거죠. 제가 차라리 베트남이나 필리핀 출신이었으면 남편이 이런 소리를 덜 들었을까요.” 2004년 탈북해 2009년 한국 남성과 결혼한 유선아(32·여·가명)씨는 “여섯 살 된 아이와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은 여전히 꺼려진다”며 “이사를 하면 탈북자라는 것을 알리지 않았는데도 옆집 사람들이 어떻게든 알아내 입방아를 찧어 댄다”고 말했다. 31일 통일부에 따르면 지난해 말까지 입국한 전체 탈북자 2만 8795명 중 2만 292명이 여성이다. 10명 중 7명꼴이다. 1998년까지 12%에 불과했던 연간 탈북자 중 여성의 비율은 2002년 55%로 절반을 넘어섰고 지난해 처음으로 80%가 됐다. 남북하나재단 관계자는 “90년대 이후 식량 배급이 무의미해지면서 배고픔에 지친 여성들의 탈북이 급격히 늘고 있다”며 “특히 국경지대의 경우 남성은 체제 순응적인 데 반해 여성들은 가정경제를 책임지기 위해 중국에서 경제활동을 하다가 시장경제에 눈을 떠 탈출을 결심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여성 비중이 높다 보니 선입견이나 차별 등 탈북자들이 겪는 어려움의 상당 부분이 여성 문제에 집중돼 있다.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연애와 결혼이다. 남성들의 외면이 주된 이유다. 탈북여성이 남한 출신 남성과 결혼할 확률은 동남아 출신 여성보다 낮다는 얘기까지 돈다. 상당수 탈북여성이 ‘혼포자’(혼인포기자)가 되는 이유다. 탈북자 출신인 남영화 미래한반도여성협회 회장은 “탈북여성 중 일부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다가 결국 유흥업소나 성매매 업소로 빠지기도 한다”고 전했다. 2009년 탈북한 이연희(34·여·가명)씨는 북한 억양 때문에 지난해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남자친구가 ‘내 친구들과 만날 때 말하지 말고 앉아만 있으라’고 했어요. 이유를 물었더니 제가 북한 출신인 게 알려지면 망신당한다는 거예요. 같은 한국말을 쓰고 외모도 같은데 외계인 취급을 하는 거죠.” 탈북여성에 대한 차별적 인식은 음성적인 경로로 진행되는 국제결혼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한 중개업체 관계자는 “북한 출신 여성을 만나는 비용은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여성과 비슷한 1200만~1500만원 정도지만 북한 여성을 찾는 남성은 거의 없다”며 “탈북여성과 결혼하면 우리나라 정보 당국의 감시를 받거나 북한에 동조하는 것으로 비치는 것 아니냐고 물어보는 남성들도 있다”고 말했다. 업신여김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폭력’에 시달리는 경우도 적잖다. “때려도 말할 곳이 없을 거야. 신고하는 방법이나 알겠어”라고 생각하는 한국 남성이 꽤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2010년 탈북한 김애선(36·여·가명)씨는 “한국에서 처음 만난 남자를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며 “하나원 교육을 받은 직후 사귀었는데 3개월 만에 손찌검을 하거나 강제로 스킨십을 했다”고 밝혔다. 이후 ‘기분 나쁘게 쳐다본다’,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등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잦은 구타가 이뤄졌다. “경찰에 신고해 봤자 탈북자 말을 누가 믿겠느냐는 그 사람의 말 때문에 아무것도 못했고 다른 탈북자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헤어졌어요.” 남북하나재단의 2014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아직은 탈북여성이 탈북남성과 결혼하는 경우가 45.2%로 가장 많다. 하지만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탈북자의 성비 불균형 때문에 이마저도 어려워지고 있다. 사정이 이러니 아예 결혼을 포기하는 탈북여성도 늘고 있다. 한국에 정착한 지 1년이 채 안 된 김예정(27·여·가명)씨는 “다른 언니들처럼 한국 남자에게 무시당하고 사느니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데려오기 위해 돈이나 벌려고 한다”며 “최근에는 탈북여성을 무시하는 한국 내 사정이 많이 알려져 들어올 때부터 결혼은 포기하는 사람도 많다”고 전했다. 남 회장은 “기존의 일반적인 여성상담센터들은 탈북자의 특수성에 대한 인식 등이 부족해 고통받는 탈북여성들을 위한 적당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며 “탈북여성이 2만명을 넘어선 현실을 감안해 정부 차원에서 전문 상담센터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탈북자 지원 기존 전입자 중심으로 바뀐다

    국내에 입국한 북한이탈주민(탈북민)이 급격히 줄어드는 추세에 맞춰 탈북민 지역사회 정착 시스템이 신규 전입자 위주에서 기존 전입자에 대한 맞춤형 지원으로 대거 개편된다. 통일부는 21일 “탈북민 지역 적응 교육 기관인 하나센터를 내년부터 전국 29곳에서 23곳으로 통폐합하고, 서비스 공백을 막기 위해 25개 지역협력사무소를 신설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입국한 탈북민 수는 모두 977명으로 월평균 98명 수준이다. 정부는 올 한 해 동안 입국할 탈북민의 수가 1200명을 조금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하나센터가 처음 설치된 2009년 입국한 탈북민(2914명·월평균 242.8명)의 3분의1을 조금 넘는 수다. 이에 따라 하나센터의 기능을 신규 전입자를 위한 초기 정착 교육 위주에서 지역사회에 이미 정착한 탈북민에 대한 맞춤형 지원 위주로 조정할 필요성이 생겼다는 게 통일부의 설명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하나원 수료 후 전입한 탈북민에 대해 현재는 3주간 지역 적응 교육을 하고 1년간 사후 지원을 하고 있으나 지역 적응 교육 기간을 2주로 줄이는 대신 취업 지원과 심리·정서적 지원을 강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신장 기증 원해도… ‘절차’ 발목 잡혀 눈물 흘리는 탈북자

    신장 기증 원해도… ‘절차’ 발목 잡혀 눈물 흘리는 탈북자

    2011년 6월 홀로 탈북해 한국에 온 손모(48·여)씨는 하나원(북한이탈주민 정착 지원 사무소)에 입소해 알게 된 탈북자 주모(40·여)씨와 친자매처럼 친해졌다. 손씨는 주씨가 지난해 11월부터 혈액 투석을 받아도 점점 건강이 악화되자 자신의 신장을 기증하기로 했다. 손씨는 지난달 26일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 신장 기증 등록을 한 뒤 병원 건강검진 결과 등 증빙 서류도 질병관리본부 장기이식관리센터에 제출했다. 하지만 손씨는 다음날 질병관리본부로부터 수술 승인이 거부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개인이 특정인을 지정해 신장 기증을 신청할 경우 가족 등 보호자의 동의가 없이는 기증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손씨는 “내가 성인이고 자유의사에 따라 기증하기로 한 것”이라며 “북한에 돌아가 가족 동의라도 받아 오라는 말이냐”며 눈물을 흘렸다. 손씨 사례는 2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됐다. 질병관리본부는 손씨가 신장 기증과 관련한 가족 동의를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손씨와 주씨가 타인 관계라는 점도 승인 불가 사유로 제시했다. 하지만 김동엽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기획실장은 “손씨가 하나원에서 퇴소한 뒤 톨게이트에서 일을 하면서도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된 주씨에게 매달 20만~30만원씩 제공했고, 일관되게 신장 기증 뜻을 표한 만큼 ‘장기 매매’ 등 순수성을 의심할 일은 전혀 없다”면서 “현행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상 ‘살아 있는 사람으로 16세 이상의 장기(신장, 간장, 골수, 안구 등) 기증자는 이식 대상자를 선정할 수 있다’는 내용의 조항이 있는 만큼 수술을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씨의 경우 사실상 장기 등의 기증을 동의한 뇌사자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장 이식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만 국내에 약 1만 4000명인 반면 장기 등 기증에 동의한 뇌사자는 한 해 평균 400명 수준에 그치는 실정이다. 살아 있는 사람끼리 장기를 주고받은 건수는 2012년 1942건에서 2013년 1836건, 지난해 1858건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사망자로부터 각막을 기증받은 건수는 2012년 50건에서 2013년 36건, 지난해 32건에 그쳤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공무원이 들려주는 공직이야기] 통일부

    [공무원이 들려주는 공직이야기] 통일부

    ‘공무원이 들려주는 공직 이야기’ 11회에서는 대북정책을 비롯해 남북교류협력, 북한이탈주민 지원, 통일교육 등을 담당하고 있는 통일부 소속 공무원을 소개한다. 통일부의 역할과 업무를 살펴보고 새내기 공무원에게 공직 적응기와 시험 준비 과정 등을 들어 봤다. 통일부는 중앙행정기관으로 대북정책을 총괄·조정하고 중장기 통일정책을 수립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아울러 남북장관급회담을 비롯한 경제·군사·인도적 지원 등 다양한 분야의 남북회담을 총괄하고 개성공단 사업을 비롯한 남북 경제협력 사업도 담당한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추진도 통일부가 담당하고 있는 업무다. 통일부는 오는 20~26일로 예정된 이산가족 상봉과 관련해 이산가족 상봉 후보자의 생사 확인 결과가 담긴 회보서를 북측과 교환하고 이산 상봉을 위한 금강산 시설에 대한 점검을 진행하고 있다. 이 밖에도 통일부는 북한인권과 북한이탈주민 정착 지원, 북한정보 수집 및 분석, 국민을 대상으로 한 통일교육, 남북 간 출입관리 등의 업무도 맡고 있다. 1969년 국토통일원으로 시작한 통일부는 이후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하나원), 남북회담본부, 남북출입사무소 등 소속기관이 늘어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통일부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는 국가직 5급 공무원시험 행정직군 혹은 7, 9급 공무원시험 행정직군에서 최종 합격의 관문을 넘어야 한다. 5급 민간경력공개채용, 7급 지방인재육성 등 경력채용과 함께 북한학 석사를 대상으로 하는 특별채용을 통해서도 공무원을 선발한다. 통일부에서 일하고 싶다면 일반적으로 국가직 공무원 공개채용에서 일반행정직에 응시해야 한다. 5, 7, 9급을 막론하고 우선 필기시험, 면접시험 등의 과정을 거친 이후 부처를 선택하게 된다. 특히 통일부는 국방부, 행정자치부 등과 함께 세종시로 이전하지 않고 서울에 남아 있는 부처이기 때문에 최근 들어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7급 국가직 시험에 합격해 올해 공직에 입문한 김은애(29·여) 주무관은 “2년이라는 수험 기간 동안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은 규칙적인 생활과 건강관리였다”며 “이미 시중에 나와 있는 여러 가지 공부방법 가운데 자신에게 가장 맞는 학습법을 선택하고 이에 맞춘 체력관리는 필수”라고 조언했다. 이어 “공무원은 직렬도 다양하고 맡고 있는 업무 역시 부처마다 큰 차이가 있다”며 “단순히 선발인원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적성이나 성향 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낭패를 볼 것”이라고 강조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공직에 첫발을 내디딘 김 주무관은 현재 통일부 통일정책실 통일문화과에서 근무하고 있다. 통일정책실은 통일정책 수립, 통일기반 조성, 이산가족 상봉 사업 및 북한이탈주민 정착 지원 등을 담당하고 있다. 김 주무관이 근무하는 통일문화과는 통일방송 운영, 민간단체와의 협업, 박람회 개최 등 통일문화 확산과 기반 조성을 위한 업무를 맡고 있다. 김 주무관은 통일문화과의 주간업무보고와 직원들의 출장관리 등 서무 업무도 맡고 있다. 그는 출근과 동시에 북한 관련 언론보도를 스크랩하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동향을 파악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후 주간업무나 통일문화주간 및 통일박람회 관련 회의를 준비하고 행사 협조를 위해 민간단체와 수시로 전화를 주고받는다. 최근에는 통일문화주간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낸다고 한다. 통일문화주간에는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평화통일 문화예술축제가 진행되고 백두대간 사진전 등이 열린다. 그는 “통일에 대한 필요성을 알리기 위한 행사”라면서 “사진전 등 작은 업무를 맡고 있지만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만큼 많은 국민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서울신문이 만난 사람] 한국의 머더 테레사 박청수 원불교 교무

    [서울신문이 만난 사람] 한국의 머더 테레사 박청수 원불교 교무

    ‘원불교는 몰라도 박청수 교무는 안다.’ 원불교 교직자인 교무들이 우스갯소리로 자주 입에 올리는 말이다. 한평생을 종교와 정치, 국경의 경계 없이 지구촌 그늘진 곳곳을 다니며 막힘없는 봉사로 삶을 불태웠던 ‘한국의 머더 테레사’ 박청수(78) 교무. 1981년 스스로 개척해 국내 최고의 교당으로 우뚝 세운 서울 강남교당을 후배에게 넘기고 2007년 은퇴한 뒤에도 그의 봉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얼마 전 출간된 자서전 ‘박청수-원불교 박청수 교무의 세상 받든 이야기’(열화당)에서 ‘한국의 머더 테레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쉼 없이 길쌈을 했던 여인이었다.” 원불교 창교 100년을 맞아 그의 아담한 보금자리 겸 박물관인 경기 용인의 ‘삶의 이야기가 있는 집’을 찾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공교롭게 원불교 창교 100년 되는 해 자서전을 내셨습니다. 소감이 남다를 것 같은데. -자서전 같은 것을 펴낼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삶의 이야기가 있는 집’ 박물관을 둘러본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일을 했어요”라고 말하면서도 제 삶을 꿰뚫어 아는 이가 없다는 것을 느꼈어요. 원래 ‘삶의 이야기가 있는 집’ 소장품 도록을 준비하던 중 우연히 만난 열화당 이기웅 대표가 먼저 제의하셨어요. 제가 쓴 책 6권의 내용을 추린 데다 최근 일과 미처 적어 두지 못한 일들을 원고지 400매 분량으로 써서 보탰어요. 큰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자서전 서문 첫머리의 “나는 쉼없이 길쌈을 했던 여인 같다”는 감회가 인상적인데. -55개국을 다니며 사람들을 돕는 일이 간단한 건 아니잖아요. 남에게 도움을 주려면 돈을 모아야 하고 그 절차도 복잡해요. 지금 무비자로 한국인이 입국할 수 있는 나라가 무려 172개국이나 된다고 해요. 지난 시절을 돌아보면 외국 들어가는 일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어요. 국교 단절이 됐던 캄보디아에 특별국가방문허가서를 받아 들어갔던 적도 있었어요. 50년간 앉으나 서나 늘 그 일에 매달려 고민하고 산 지난 인생이 밤낮 없이 길쌈하는 여인의 삶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직장에서 퇴근하면 가족들과 식사도 같이하고 이야기도 나누겠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잖아요. TV 드라마 한 편도 여유 있게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웃음). →봉사 인생을 시작하게 된 배경은요? -30대였던가요? 사직교당 교무 시절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책을 8년간 공들여 만든 적이 있었어요. 한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큰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뒤 한센병 환자 돕는 일을 시작으로 55개국을 다니며 많은 일을 하며 살았군요. 해외 봉사의 첫 시작은 1970년 12월 코스모스백화점에서 동파키스탄 이재민 돕기 자선바자회에 2만 4000원을 모금해 원불교 서울사무소에 낸 게 처음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오랜 세월 쉼없는 봉사를 가능하게 한 힘은 무엇인지요. -‘너른 세상으로 나가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일하라’는 어머니의 당부가 컸지요. 좌고우면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결단성도 적지 않은 요인이었고요. 회의를 해 본 적이 없어요. 혼자 생각하고 일단 좋은 일이라 생각하면 해내야 직성이 풀렸으니까요. 좋은 분들의 도움도 컸지요.“나는 이기적으로 살았으니 박 교무에게 돈을 줘야 상쇄가 된다”면서 매년 연말 돈을 보내주신 박완서씨는 정말 잊지 못해요. 저에게 돈을 주면 엉뚱한 데 안 간다면서 도와주시던 박완서씨의 기부금이 봉사의 종잣돈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당부를 되돌아볼 때 후회없는 삶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나요. -그렇습니다.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어요.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걷겠어요. →종교계 인사들과의 폭 넓은 교류가 유명합니다.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과의 각별한 인연이 회자되는데. -제가 맨 처음 쓴 책 ‘기다렸던 사람들처럼’(1989년)을 보내 드렸더니 법정 스님이 ‘세상 구경 시켜 줘서 고맙다’는 글을 전해 오셨어요. 법정 스님에게 10년간 편지를 보냈습니다.그렇게 편지를 보내고 나면 근심 걱정이 줄어드는 것 같았어요. 제가 하는 일에 늘 격려해 주셨던 고마운 분이지요. 캄보디아에 갔을 때 배에서 떨어져 고생하던 무렵 홍화씨를 보내 위로하신 일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이번 자서전 제목의 글씨체도 법정 스님이 보내주신 편지 속에서 딴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라자로 마을 나환자 돕는 일을 하면서 만나 뵈었어요. 추기경 선종 때 각 종교 대표들이 추도사를 썼는데 원불교에선 제가 썼습니다. 그분들이 모두 떠나신 지금 문득문득 외딴집에 홀로 사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출가하신 지 59년이 됐습니다. 출가자로서 늘상 마음에 새긴 정신이라면. -청빈과 실력, 그리고 투명한 실천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원불교 교리에는 종교나 사상이 달라도 대중적으로 공인된 지도자를 공경하라는 ‘공도자 숭배’가 있어요. 온정의 저수지가 마르지 않게 하려면 자력의 인격이 필수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어요. 자신을 잘 다스려야 그 영혼이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는 법이지요. 평생 제 발 뿌리를 눈 부릅뜨고 보면서 살아왔습니다. →한 달 용돈은 얼마나 쓰시나요? -원불교에서 공식적으로 받는 돈은 23만 6000원이 전부입니다. 개인적으로 돈 쓸 일이 뭐 있겠습니까. 먹고사는 데 전혀 부족하지 않아요. 차도 없고 비서도 없어요. 직접 밥도 짓고 빨래도 합니다.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종교를 걱정한다고 합니다. 요즘 세태에 한 말씀 하신다면. -철없는 사람, 불쌍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 뒤처진 사람 뒷바라지를 하는 게 종교인의 사명 아닐까요. 종교의 높은 가치인 청빈, 맑은 가난을 지켜야 스스로 청정하고 혼탁한 세상도 맑힐 수 있습니다. 설교나 설법 시간에 했던 좋은 말씀을 매양 스스로 실행하고 실천해야 비로소 사람들이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좋은 말씀들이 공허할 뿐이겠지요. →종교인 못지않게 정치인들을 향한 세간의 불만이 적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에게 당부하실 말씀이라면. -정치인이라면 모두 큰 뜻을 세우고 그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에 입문했을 것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어떠한 경우에도 그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심만 없어도 나름대로 성공한 정치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인은 대중이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마련입니다. 도덕성이 허약해지지 않도록 어떠한 유혹도 뿌리치고 항상 자기 자신부터 다스려야 하지요. 욕심을 버린다면 제 역할에 더 충실할 것이란 생각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공도자라면 청문회 가서 혼쭐날 일도 없지 않을까요. →2010년 노벨평화상 최종 후보 10인에 오르셨습니다. 평화의 참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람을 살육하던 전쟁의 총성이 멎는 것이지요.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 마음에 분노가 있으면 평화를 잃는 것입니다. 내면의 자성이 충만한 사람이 행동할 때 고통을 녹이는 평화의 빗방울이 될 수 있습니다. →경색된 남북관계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막힌 관계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대립 국면을 푸는 데 이해와 아량은 절대적이지요. 지금 남북 관계를 보면 양쪽 모두 다른 쪽이 숙이고 들어오길 바라는 것 같아요. 우리가 북한보다 30배쯤 잘산다고 하지요. 강자가 너그러울 필요가 있습니다. →원불교 100년을 어떻게 보시나요. -신흥 민족종교 가운데 이렇게 교세가 확장된 교단이 없는 것 같아요. 교직자들이 모두 열심히 살았어요. 커다란 흠결 없이 맑은 종교란 평가를 받는 게 가장 흐뭇합니다. 나라의 발전이 원불교의 성장에 큰 요인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어요. 작은 나무가 올곧게 자라 거목이 됐으니 걸맞은 사회적 역할을 담당해야 합니다. →최근 원불교 교세의 정체를 우려하는 시각이 있는데. -원불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가 비슷한 상황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종교가 갖는 위상의 변화도 무시할 수 없고 종교 본연의 역할 축소도 이유일 수 있습니다. 원불교의 경우 이제 더 큰 도약을 위한 잠깐의 정체를 맞은 게 아닐까 합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무슨 일을 하고 싶습니까. -다시 태어나도 원불교 교무로 지금까지 살았던 것처럼 다시 살 것입니다. 이렇게 너른 세상을 살았는데 한 가정의 어머니와 아내로 살 수 있을까요(웃음). 은퇴하고 이곳에 들어올 때 주변 사람들에게 느낌이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했어요. 한평생 너무 많은 돈 걱정을 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 흔적이 내 얼굴에 남을까 걱정했어요. 지금 산 속에서 하늘도 올려다보고 새 소리도 들으면서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글 사진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박청수 교무는 1937년 전북 남원시 수지면 홈실 마을 태생. 원불교 교도였던 어머니의 바람을 따라 출가, 평생 정녀로 살았던 원불교 스타 교무다. ‘한국의 머더 테레사’, ‘머더 박’이란 별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 집의 울타리에 머물지 말고 너른 세상으로 나아가 더 많은 사람을 위해 일하라.’ 아홉살 때부터 자장가처럼 귀에 박히도록 들어온 어머니의 말씀이 평생 맑은 종교인, 그리고 희생하는 삶을 살게 한 으뜸의 기준이었다고 한다. 전주여고를 졸업한 해인 1956년 출가해 사직교당·원평교당·우이동 수도원 교당·강남교당에서 교무로 봉직하고 2007년 퇴임했다. 특히 강남교당은 박 교무가 개척해 원불교 최고, 최대의 교당으로 세웠으며 그 시절 추진했던 숱한 지역사회 봉사와 헌신의 일화들이 지금까지 회자된다.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한센병환자촌 성라자로 마을에 쏟은 열정과 도움의 궤적은 한국 종교계에서 유명하다. 현직에서 31년간, 은퇴 후 9년간 40년간 성라자로 마을을 도왔다. 라자로 마을에 집을 짓고 한센병 환자를 돕기 위해 15년간 엿을 팔기도 했다. 북인도 히말라야 라다크, 캄보디아, 스리랑카, 아프가니스탄,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지구촌 곳곳에 박 교무의 손길과 봉사의 땀이 배어 있다. 55개국에 무지와 빈곤, 질병 퇴치의 흔적이 스며 있다. 나라 안팎에 9개의 학교를 설립했고 히말라야 라다크, 캄보디아 바탐방에 병원을 세웠다. 미얀마와 캄보디아의 270개 마을에 공동 우물을 파거나 식수 펌프를 묻었다. 2010년 노벨평화상 최종 후보 10인에 올랐다. 이웃 종교 교류와 북한 돕기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 국제연등불교, 프랑스 길상사, 성북동 길상사 지장전, 성공회 봉천동 나눔의 집, 기독교 사랑의 쌀 모으기 등에 힘을 보탰고 경기도 안성 하나원 옆에 북한 이탈 청소년들을 위한 한겨레 중·고등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2007년 26년간 봉직했던 강남 교당을 후배 교무에게 넘기고 은퇴한 뒤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직만 갖고 경기 용인 헌산중학교 경내 ‘삶의 이야기가 있는 집’에서 기거하고 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일어나라 한국경제] 하나금융그룹, 탈북민 정착 지원… 통일로 동행

    [일어나라 한국경제] 하나금융그룹, 탈북민 정착 지원… 통일로 동행

    하나금융그룹이 북한 이탈주민의 사회 적응을 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 하나금융은 최근 북한 이탈주민 지원재단인 남북하나재단에 3억원의 기부금을 전달하는 등 탈북 새터민 정착사업에 적극 관심을 보이고 있다.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은 “앞으로 다가올 통일 시대의 주역이 될 새터민들이 우리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정착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도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나금융이 탈북 새터민 지원에 본격적으로 나선 건 1년 전부터다. 하나금융은 지난해 10월 새터민과 함께하는 어울림한마당을 후원하면서 새터민과 일반 시민이 어울릴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지난해 11월에는 모두하나데이를 맞아 새터민과 함께 김장행사를 열었다. 또 새터민 대학생과 일반 대학생이 참여하는 DMZ평화통일대장정 행사를 후원하기도 했다. 하나금융은 올해 남북하나재단과 함께 청소년 장학사업과 의료비 지원에 나선다. 특히 미래 통일 시대를 준비하는 통일 리더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만들어 100명의 대학생 통일 인재를 양성한다는 계획이다. 새터민이 교육을 받는 하나원에서는 탈북 아동 및 청소년을 대상으로 총 4회에 걸쳐 ‘하나 어린이 경제뮤지컬’을 공연한다. 하나금융은 지난 5월 통일부와 ‘탈북민 자산형성 지원을 위한 협약’을 맺기도 했다. 새터민의 근로소득 중 저축금액에 대해 정부가 동일한 금액을 지원하는 미래행복통장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그린에서 만난 사람] 탈북자 캐디 1호 리영미씨

    [그린에서 만난 사람] 탈북자 캐디 1호 리영미씨

    “골프를 처음 봤을 때요? 뭐 저런 걸 갖고 경기를 하나 싶었습니다.” 9일 경기 안성의 골프존카운티 안성W 컨트리클럽에서 만난 북한이탈주민 리영미(29·가명·여)씨의 표정은 화창한 6월 하늘만큼이나 밝았다. 리씨는 골프전문기업 골프존이 지난 3월 선발한 북한이탈주민 캐디 교육생 1기다. 12주 동안의 교육을 모두 마친 지난주 정식 캐디가 돼 처음으로 그린을 밟았다. “한국에 와서야 골프를 알게 됐어요. 북한에서 아는 운동이라곤 축구와 아이스하키뿐이었거든요.” 그의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이다. 겨울이면 영하 40도까지 내려가 아이스하키가 가장 인기가 많다. 학창시절 선수로도 활동했던 그는 “하키채 휘두르듯 하면 될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 어렵더라”며 까르르 웃었다. 그가 한국땅을 밟은 건 2009년이다. 고향에 부모님을 남겨둔 채 겨울에 홀로 두만강을 건넜다. “한국 드라마를 봤다는 이유로 노동단련소(수용소)에 끌려갔어요. 하루 종일 일을 하고 3평 남짓한 공간에서 열댓 명의 사람들과 무릎을 꿇은 채 잠을 자야 하는 곳이었죠.” 한 달 반 정도 지났을까. 어느 날 엄마가 찾아왔다. 딸에게 따뜻한 밥 한 끼 해주고 싶었던 엄마는 없는 돈을 긁어모아 경비에게 건넸다. 하지만 그는 그 길로 국경을 넘었다. 뒤에서 총성이 울렸다. 바로 옆에서 배가 뒤집히며 사람이 죽었지만 리씨는 살아 남았다. “한국에 가기만 하면 드라마에 나오는 2층 집에 살 수 있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하나원에서 나온 첫날, 천장을 바라보며 엉엉 울었다. 외로움과 막막함이 밀려들어왔다. 한국은 자기가 한 만큼 가져가는 사회였다. 그는 몇 년간 하루에 한 시간만 자면서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평소 옷을 좋아했던 그는 폴리텍대학 패션디자인과에 진학해 직접 디자인한 옷을 동대문에 내다 팔았다. “앞이 보이지가 않았어요. 디자인으로 돈을 벌려면 백(배경)도 있어야 되는데 저는 그런 것도 없고….” 다시 4년제 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한 그는 3학년이던 지난해 복지관에 취업했다. “하루 종일 일해도 월급이 130만원이 채 안 됐어요. 어떻게든 돈을 모아 북에 계시는 부모님을 모셔 오고 싶었습니다.” 당시 멘토 역할을 해 주던 교수가 캐디에 지원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었다. 떨어지면 다시 복지관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떠올리며 지원한 그는 5대1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 4명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쉬운 일은 없었다. 교육기간 동안 합숙을 하면서 생소한 골프용어와 규칙 등 모든 것을 빨리 배우고 습득해야 했다. 게다가 하루 종일 골프장을 헤매고 다니는 거리가 10㎞ 안팎. 밤이면 무릎까지 시큰거렸다. 안 그래도 아이스하키 훈련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골다공증에 시달렸다. “제 자신이 이것밖에 안 되나 실망스러웠어요. 하루에 열두 번씩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북한 출신은 어쩔 수 없나 보다’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이를 악물고 버텼습니다.” 그렇게 혹독한 트레이닝을 거쳐 캐디가 됐다. 처음 캐디를 도우미 수준으로 생각했던 그도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골프는 매너 게임입니다. 잘 치기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패션부터 모든 걸 다 갖춰야 게임이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캐디도 그것의 한 부분이고요.” 올해 만으로 스물아홉인 그에게 결혼 계획을 물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국에 와서 한번도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어요. 머릿속에 늘 하루빨리 돈을 모아서 북에 계신 부모님을 모셔 와야 한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아요.” 그는 “안 그래도 내가 북한에서는 상당히 노처녀에 속한다”며 웃었다.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에서 13명이나 한국에 들어왔어요. 얼마 전 동창회에 갔는데 네가 뭘 아느냐며 애나 보라고 저를 무시하더라고요(웃음). 하지만 잘사는 사람들보다는 힘들게 사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아요. 아직까지는 일에 치중하고 싶어요.” 그의 최종 꿈이 캐디는 아닐 것 같았다. 한참을 뜸들이다 그는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돼서 탈북자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하지만 아직 꿈만 크죠”라고 되물으며 서둘러 필드로 향했다. 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 어느 국군포로 탈북 아들의 죽음

    어느 국군포로 탈북 아들의 죽음

    ‘너를 만나 잘 살고 하였는데 내가 인구실(사람 구실) 못 하는구나, 미안하다. 앞으로 잘 살고 아프지 마라.’ 북한 아오지탄광에서 국군 포로의 아들로 태어나 천신만고 끝에 탈북했지만 남쪽에서 아버지는 6·25전사자일 뿐이었다. 살아 보려고 발버둥 쳤지만 쉽지 않았다. 아버지의 명예 회복과 법적 자녀의 권리를 부르짖었지만 메아리조차 없었다. 결국 50대 탈북 남성은 아내에게 이별을 암시하는 문자메시지를 남기고 세상을 등졌다. 지난 26일 주락철(53)씨의 빈소에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한영복 6·25국군포로가족회(가족회) 회장의 조화 2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같은 처지인 가족회 관계자들을 제외하면 조문객도 찾아오지 않았다. 주씨는 1962년 함경북도 은덕군(아오지)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으로 강제 이주당한 북한 여성과 결혼한 아버지는 탄광에서 일하다 다이너마이트 발파 과정에서 시력을 잃고 ‘봉사지기’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아들 주씨에게는 ‘남조선 괴뢰군 새끼’라는 손가락질이 늘 따라다녔다. 북한에서 최하층에 속한 주씨 가족은 다른 많은 탈북민처럼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에 살아남기 위해 중국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서울 영등포구 한강성심병원 빈소에서 만난 아내 김모(52)씨는 주씨가 헤이룽장(黑龍江)성과 몽골, 태국을 거쳐 2005년 3월 부산에 들어왔다고 전했다. 김씨와는 한국으로 들어온 지 6개월 만에 가족의 연을 맺었다. 김씨는 “남편이 북에 두고 온 딸과 아들이 보고 싶어 힘들어했다”며 “2008년까지는 브로커를 통해 가족과 연락을 했는데 딸이 ‘꽃제비’로 먹을 것을 찾아 떠돌아 다닌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는 잠도 제대로 못 이뤘다”고 말했다. 주씨는 하나원을 나온 뒤 아버지의 고향인 전북 전주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물론 ‘남쪽’에서의 삶은 팍팍했다. 일터에서는 국내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주씨를 이주노동자 대하듯 했다. 일용직 노동으로는 한달에 70만~80만원을 벌기도 빠듯했다. 탈북 뒤 이국을 떠돌며 생긴 상처들은 고스란히 병이 돼 주씨를 괴롭혔다. 식당 일을 하려고 경북 구미로 떠난 아내와도 떨어져 살았다. 주씨는 가족회 시위에 동참하기 위해 지난해 7월 상경했다. 주씨를 비롯해 가족회 회원들의 요구는 국군 포로 지위를 인정하고 가족들에게 제대로 된 배상과 보상을 해 달라는 것이다. 또 생존 국군 포로를 귀환시키고 북한에 묻혀 있는 유해를 국내로 들여오기 위해 정부가 노력해 달라는 것이다. 주씨 아버지를 비롯해 국군 포로 중 상당수는 현재 전사자 신분이다. 정부는 미귀환 국군 포로들을 참전국가유공자로 인정하기는 했지만 호적상으로는 전쟁 중에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탈북 국군 포로 자녀들은 부모의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가 없어 유공자 자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주씨는 청와대 앞 1인 시위에 매일 참석했다. 회원들이 생계를 위해 각자 집으로 돌아갔지만 주씨는 홀로 서울 중구의 가족회 사무실에서 지냈다. 힘이 들 때마다 멀리 떨어져 지내는 아내에게 연락해 “아버지 명예를 찾기 위해 끝까지 잘해 보겠다”고 했다. 그러던 중 주씨는 지난 13일 가족회 인터넷 카페에 올라온 속기록을 통해 국회에서 국방부 관계자가 ‘국가적 책무에서 국군 포로는 제외해야 한다’고 발언했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경숙 가족회 총무는 “주씨가 속기록과 관련해 분노를 표출하는 글을 커뮤니티에 올리기도 했다”고 전했다. 주씨는 지난 25일 가족회 사무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가족회는 신경안정제를 과다 복용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주씨의 시신을 부검했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가족회는 주씨 발인일인 27일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방부 군비통제 관계자는 책임지고 고인과 가족회 회원들에게 공식 사과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들은 주씨 시신을 실은 운구차를 몰고 와 노제를 지냈고, 국방부 측의 유감 표명을 들은 뒤에 화장터로 이동했다. 한줌 남짓한 주씨의 유골은 경기 고양시 예원추모관에 봉안됐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기획][단독]“오빠! 올 설에도 미역죽 먹습네까”

    [기획][단독]“오빠! 올 설에도 미역죽 먹습네까”

    “북쪽에서 당한 일을 생각하면 끔찍하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묻히셨고, 행복했던 추억들이 있는 고향이잖아요. 지척에 두고 설에 못 간다고 생각하니 서글픕니다.” 수도권의 한 고속도로 톨게이트 요금수납원으로 일하는 김춘화(41·여·가명)씨는 국내에 들어온 지 3년째를 맞는 탈북민이다. 마지막 탈북 이후 7년 만인 2012년 3월에야 한국 땅을 밟았다. 설 연휴를 하루 앞둔 17일, 일터에서 만난 김씨에게 고향 얘기를 먼저 물었다. 그는 “(힘든 기억이니)말도 마라”며 손사래를 쳤다. 3남 1녀 중 막내인 김씨는 2살 때와 9살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었다. 고교 졸업 이후 망설임 없이 군복무를 택했다. 잠자리와 끼니가 해결되기 때문이었다. 7년 만에 제대한 연씨는 33만명이 굶어 숨진 것으로 알려진 ‘고난의 행군’과 맞닥뜨렸다. 김씨는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죽을 바에야 마지막까지 노력은 해봐야지’ 싶었다”며 탈북 배경을 설명했다. 목숨을 걸고 처음으로 두만강을 건넌 건 2000년. 살아남기 위해 중국인 남성과 결혼해 아들(14)도 낳았다. 하지만 중국 공안에 체포돼 2003년 송환을 당했다. 1년간의 수감 생활은 고문의 연속. 겨우 목숨을 부지할 만큼 음식이 제공됐다. 운이 좋게 인민무력부 보위국 간부와 줄이 닿아 뇌물을 건네 풀려났고, 곧 두만강을 헤엄쳐 건넜다. 하지만 2005년 또다시 공안에 체포돼 북송됐고, 우여곡절 끝에 4개월 만에 탈출에 성공했다. 2012년 3월 한국에 들어온 김씨는 톨게이트에서 첫 직장을 얻었다. 탈북민 사회정착 지원기관 하나원에서 소개해줬다. 남한사회에 적응을 해갈 무렵, 이번에는 위암 판정을 받았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해 1년간 치료에 집중한 결과 완쾌됐다. 일을 다시 시작한 지는 1년 4개월째다. 돈 계산에 서툴렀던 그도 제법 고참이 됐다. “이번 설은 남들처럼 설답게 보내고 싶다”는 연씨는 북한에서 ‘광명성절’(2월 16일·김정일 국방위원장 생일)에나 먹던 두부밥, 인조고기밥, 절편 등을 먹으며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랠 계획이다. 김씨는 “추석, 설 때마다 톨게이트에서 선물 보따리를 차에 싣고 고향에 가는 가족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울적해진다”며 “악몽같은 기억에 떠올리기도 싫다가도 ‘그래도 내가 태어난 곳’이란 생각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공존한다”고 털어놨다.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졌다. 3명의 오빠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둘째 오빠 생각에 잠도 못이룬다고 했다. 2년 전 어렵사리 번 돈으로 브로커를 통해 오빠네 형편을 확인한 이후부터다. 김씨는 “물 한 잔 떠마실 컵이 없고, 미역죽으로 끼니를 떼운다고 들었다”며 눈물을 쏟았다. 이어 “이번 설 미역죽이나 제대로 먹을수 있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살아남은 피붙이가 우리 둘뿐인데, 남과 북으로 갈려 못 만나니 이보다 가슴 아픈 일이 또 있을까요”라고 김씨는 되물었다. 통일부에 따르면 2010년 처음 2만명을 넘어선 탈북자는 지난해 말 현재 2만 7518명으로 집계됐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김주혁 선임기자의 가족♥男女] 무지개청소년센터

    [김주혁 선임기자의 가족♥男女] 무지개청소년센터

    ‘무지개 JOB아라’ 제3기 수료생들이 교사 등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무지개 JOB아라’수료식장에서 레인보우스쿨 재학생들이 축가를 부르고 있다. ‘저셰넨이거런 펑예꿔위예저우…펑유이썽이취저우’(이 몇 년간 나 홀로 바람도 맞고 빗속을 걷기도 했어…친구여 평생을 함께 하자꾸나…) ●‘무지개 JOB아라’ 진로 교육·직업 체험 최근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무지개청소년센터(이주배경청소년지원재단·이사장 김교식 아시아신탁 회장)에서는 ‘펑유’(朋友·친구)란 중국 노래가 구슬프면서도 힘차게 울려 퍼졌다. 중도입국 청소년들을 위한 취업 진학 등 진로 지원 프로그램인 ‘무지개 JOB아라’ 제3기 수료식장에서 수료생 9명을 위해 한국어 등 초기적응 지원 과정인 레인보우스쿨 재학생 16명이 불러준 축가다. 예전에 안재욱이 ‘친구’란 제목으로 부른 바 있어 멜로디가 낯설지만은 않은 이 노래의 가사는 낯선 땅에서 불투명한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힘겹게 손잡고 나아가는 중도입국 청소년들의 상황을 말해주는 듯하다. ‘JOB아라’는 직장생활 한국어와 함께 컴퓨터, 경제 등 진로 교육과 정보 및 직업체험의 기회를 10주 전일제 과정으로 제공한다. 3기는 13명으로 시작했으나 비자 등의 이유로 4명이 그만둔 가운데 수료생 9명 중 3명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했고, 6명은 바리스타 등 취업을 준비 중이다. 예전에는 대학에 진학한 수료생들도 있다. 유일하게 개근상을 받은 이선화(22·여·중국)씨는 “기쁘지만은 않은 마음으로 얼마 전 입국한 뒤 처음에는 막막했고 한국어가 부족하지만 컴퓨터, 경제 등을 배우며 취업에 자신감이 생겼다”면서 “패션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열심히 하겠다”고 수료 소감을 밝혔다. 그는 한국인과 결혼한 중국인 어머니와 함께 산다. 중국인 부모를 뒤따라 지난해 9월 입국한 이정(19·여)씨는 “삶이 고단해도 웃음으로 극복해 가자”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내년 3월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무지개청소년센터는 이주배경청소년의 조속한 사회 적응과 건강한 성장을 지원하기 위해 2006년 정부가 설립한 비영리 재단법인이다. 초기적응 및 성장 지원과 소통 촉진 프로그램, 편견·차별 탈피 교육 등을 담당한다. 이주배경청소년은 다문화가족의 청소년이나 외국인근로자 가정 자녀, 중도입국 청소년, 탈북 청소년 등을 뜻한다. 그 중 중도입국 청소년은 국제결혼가정의 자녀 중 외국인 부모의 본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온 청소년이나 재혼한 외국인 부모를 따라 한국에 온 청소년, 외국인 부모와 함께 한국에 온 청소년을 말한다. ●대학생·직장인등과 멘토링 프로그램 운영 레인보우스쿨은 9~24세의 중도입국 청소년들에게 초기적응 지원으로 상·하반기 4개월씩 주 5일 한국어 등을 가르친다. 오전 4시간은 말을 배우고 오후에는 한국생활문화 체험을 한다. 간단한 인사말과 기초적 의사소통을 하는 정도 수준이다. 그 후에는 학교에 가거나 취업 준비를 한다. 부산 양정청소년수련관 등 전국 11개 위탁기관과 무지개청소년센터에서 전액 무료로 운영된다. 지난해 837명이 수료했다. 지난 6월 중국에서 입국해 이 과정에 다니는 한 청소년은 “한국어가 어렵지만 재미있어요”라고 서툰 말로 소감을 말한다. 한국어교육 담당 임정문씨는 “중도입국 청소년들이 대부분 학교 정규수업을 충분히 받지 않아서 4시간 수업도 부담스러워한다”면서 “말이 잘 안 통해 힘들기는 하지만 오래 함께 지내다 보면 그래도 적극적으로 표현하려고 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탈북 청소년들은 하나원 교육 후 사회 진출에 앞서 이곳 레인보우체험학교에서 대중교통 이용과 주민자치센터 및 대학 탐방, 물건 구입 등 비교문화 체험학습을 1박 2일 동안 받는다. 신국균 초기지원팀장은 “이주배경청소년들은 준비가 너무 안 돼 자리 잡기가 힘들지만 도움을 주면 바로 성과가 나타나는데 한국사회에 적응할 중요한 시기임에도 그 중요성을 잘 몰라서 안타깝다”면서 “한국에서 오래 살 생각이 있고 한국인이 될 가능성이 높은 친구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다”고 말한다. 성장 지원 프로그램으로 맞춤형 상담과 부모교육을 한다. 지난해 상담은 3500건에 이른다. 부족한 공부를 보충하고 정서적 지지를 받도록 멘토링도 운영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주배경 청소년 멘티와 대학생 직장인 등 멘토 100쌍이 9개월 동안 주 1회 2시간 이상씩 만난다. 무연고 탈북 청소년 인생 멘토링도 전·현직 교수 등 모범적 인사 중심으로 운영한다. 탈북 청소년 30여명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성장하고 있다. 이 밖에도 이주배경청소년과 일반 청소년이 함께하는 2박 3일 통통통 캠프와 청년 활동가 양성 프로젝트 등 소통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인종과 출신국이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리거나 차별하지 않도록 초·중등 학생 및 교사를 대상으로 다문화 감수성 증진 프로그램도 실시한다. ●현대차 지원으로 심리정서 치유 프로젝트 외부사업으로는 현대자동차가 지원하는 이주배경청소년 심리정서 치유 프로젝트 ‘다톡다톡’을 운영한다. 전국 5곳에서 운영되는 다톡다톡 카페는 편안하게 모여 차도 마시고 바리스타 교육도 이뤄진다. 상담실은 별도로 있다. 심각한 수준의 아이들도 많다고 한다. 해체가정 이주배경청소년을 위한 맞춤형 진로지원사업인 친친무지개 프로젝트는 포스코의 지원으로 운영된다. 어머니와 함께 탈북해 중국 등을 거쳐 2003년 한국에 도착한 정모(25·D대 호텔조리학과)씨는 현대차 기프트카 캠페인의 지원 대상으로 선정돼 이동식 북한 전문음식점 개업을 준비하며 ‘음식으로 통일’을 꿈꾼다. 이 캠페인은 차량을 활용한 창업의지가 있는 저소득·취약계층에게 맞춤형 창업지원으로 자립 기회를 제공한다. 이금순 여성가족부 청소년자립지원과장은 “어려운 처지의 이주배경청소년이 늘어나는 데도 지원 예산과 프로그램이 부족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happyhome@seoul.co.kr
  • [대북전단과 탈북자] 국내 최대 탈북자 거주지 인천 논현지구

    [대북전단과 탈북자] 국내 최대 탈북자 거주지 인천 논현지구

    우리나라에 정착한 북한이탈주민 2만 5000명의 살아가는 방식이 서서히 진화하고 있다. 정착 초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다소 쭈뼛거리던 것과는 달리 점차 국내에 적응하는 방식을 체득해 가면서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대북전단 살포 등 남북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도 주저 없이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인천 남동구 논현택지개발지구 12, 14단지는 국내 최대의 북한이탈주민 집단 거주지다. 4일 남동구에 따르면 지역 내에 거주하는 탈북민은 모두 1620명(남 461명, 여 1159명)으로 이 가운데 1349명이 논현지구에 살고 있다. 탈북자 사회의 축소판처럼 그들만의 타운이 형성돼 있는 것이다. 12단지 800가구 중 60%가량이 북한에서 온 주민이며 14단지에도 30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이들을 이곳에 모이게 한 것은 국민임대아파트와 인근 남동공단의 일자리였다. 2000년대 말까지만 해도 정착지원금이 제법 돼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었지만 탈북자가 늘어나면서 지원이 줄어들었고 요즘은 일하지 않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상당수는 식당·가게·공사장 등에서 잡일을 한다. 조모(42)씨는 “힘들지만 날이 갈수록 보조금이 줄어들어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7년 전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두 아들과 함께 왔다는 정모(62·여)씨는 “자식들이 힘겹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 어떨 때는 고향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생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인지 이곳 주민들은 술·담배를 많이 하는 편이다. 부모형제를 두고 남쪽으로 왔다는 죄책감과 고단한 삶을 술로 달랜다. 12단지 경비원 김모(67)씨는 “재활용 수거를 한 다음날에도 술병이 수북이 쌓인다”면서 “한때 이곳 부부싸움은 요란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탈북민들의 공식적인 모임은 없다. 생사의 고비를 넘어 남쪽으로 왔다는 공통점으로 끈끈한 유대가 형성돼 있을 것 같지만 그 흔한 친목모임조차 없다. 단지 내 다른 주민들과도 말을 잘 섞지 않는다. 이모(35·여)씨는 “이곳에 4년 살았지만 어린이집에서 새터민 학부모와 아이들 얘기를 잠시 나눈 것 외에는 특별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나마 친하게 지내는 건 정착교육을 함께 받은 하나원 동기생들이다. 그래서 ‘탈북자 최대 인맥은 하나원’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상담사 김씨는 “고향이나 출신 학교, 과거 직업 등을 물으면 어색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쉽고 편하게 묻는 게 ‘하나원 몇 기세요’라는 질문”이라고 했다. 탈북 여성이 남성보다 3배 가까이 많은 것도 특이하다. 최모(49·여)씨는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중국 등을 오가며 장사를 하다 탈출한 여자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탈북주민들의 미래에 대한 열정은 남한 주민에 뒤지지 않는다. 자격증을 따면 정착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낮에 일하고 밤에는 요리·미용·컴퓨터학원 등을 다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자식과 함께 탈북한 주민들이 늘어나면서 자녀교육 열기도 상당하다. 멋을 부리는 것에도 익숙해져 간다. 14단지 관리사무소 김모(42) 과장은 “북한 출신 주민들은 민감하고 자존심이 센 데다 자기 주장이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밝혔다. 자존심이 더러는 피해의식으로 나타난다고도 한다. 어쨌든 이들의 공통점은 대한민국 사람으로 당당하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김 과장은 “원래 한국 사람인 이들이 한국인처럼 취급받기를 원하는 상황은 시대가 낳은 난센스”라면서 “우리 사회가 이들을 껴안고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 “때론 주치의, 때론 중매쟁이… 탈북민과 情부터 쌓아야죠”

    “때론 주치의, 때론 중매쟁이… 탈북민과 情부터 쌓아야죠”

    지난 27일 서울 관악경찰서 5층 강당. 탈북민 대안학교인 ‘우리들학교’가 남북 청소년의 소통과 화합을 위해 3년째 열어 온 ‘투원(남북이 하나 된다는 의미) 페스티벌’이 한창이었다. 남북 청소년으로 구성된 9개 팀이 댄스와 합창, 밴드 공연을 선보였고 서울시립교향악단 공연 등이 이어졌다. 장소 섭외에 어려움을 겪던 페스티벌이 이곳에서 열린 것은 김중혁(43) 경사를 비롯한 관악서 관계자들의 각별한 관심 덕분이다. 탈북민들이 하나원·하나센터(통일부 산하 탈북민 사회 정착 지원 기관) 출소 후 가장 먼저 만나는 ‘남한 사람’ 중 한명인 김 경사는 ‘탈북민 신변보호관’이다. 관악서에서 2년째 보안업무를 맡아 온 김 경사는 “신뢰를 쌓아야 보호도 할 수 있다”며 “일주일에 3~4번씩 연락하고 만난다”고 말했다. 탈북민들이 아플 때 곁을 지키는 것도 신변보호관의 몫이다. 탈북민 A씨는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태국 수용소에서 3년간 감옥 생활을 한 탓에 심각한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김 경사는 “병원에 함께 갔더니 간염과 갑상선 질환이 있는 등 성한 데가 없었다”고 말했다. 때론 중매쟁이로 변신하기도 한다. 관악서 보안계장으로 재직할 때 탈북 여성 3명을 시집보내 ‘탈북 여성의 대모’로 불린 조경숙(현 한강로파출소장) 경위에 이어 김 경사도 30대 아들을 둔 한 어머니로부터 북한에서 내려온 아가씨를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 적당한 신붓감을 찾아냈다. 김 경사는 “남쪽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던 탈북 청소년과 청년들까지 모처럼 페스티벌을 즐기는 것 같아 기쁘고 보람차다”며 환하게 웃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북한 주민 귀순…부자지간 민간인 강화군 교동도로 헤엄쳐 해병대 초병들에 귀순

    북한 주민 귀순…부자지간 민간인 강화군 교동도로 헤엄쳐 해병대 초병들에 귀순

    ‘북한 주민 귀순’ 북한 주민 귀순 소식이 전해졌다. 북한 주민 2명이 14일 인천시 강화군 교동도로 헤엄쳐 넘어와 귀순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관계자는 이날 “오늘 새벽 북한 주민으로 추정되는 민간인 2명이 강화군 교동도로 귀순했다”면서 “새벽 3시 40분쯤 경계근무 중이던 해병2사단 장병이 교동도 앞에서 미상의 인원이 이동하는 것을 관측했고, 이후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귀순을 유도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들은 50대와 20대의 부자지간이라고 한다”면서 “관련 기관에서 조사중으로, 아직 정확한 신원은 밝혀진 것이 없다”고 말했다. 다른 정부 소식통은 “50대와 20대 남성 2명이 교동도로 헤엄쳐 오는 것을 해병대 초병들이 발견했다”며 “(발견 당시) 이들은 ‘살려달라,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고 밝혔다. 교동도에서 가장 가까운 북한 해안까지는 2·5㎞의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정부 관계기관은 해병대로부터 이들의 신병을 넘겨받아 정확한 신분과 월남 경위 등을 조사하고 있다. 이들이 북한 주민으로 확인되고 귀순 의사가 확실하면 일정 기간 조사를 거쳐 하나원에 입소해 국내에 정착할 수 있게 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뉴스 플러스] 탈북자 父子 2명 헤엄쳐 귀순

    북한 주민 2명이 14일 인천 강화군 교동도로 헤엄쳐 넘어와 귀순 의사를 밝혔다. 이들은 부자 관계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당국자는 이날 “오늘 새벽 4시께 50대와 20대 남성 2명이 교동도로 헤엄쳐 오는 것을 해병대 초병들이 발견했다”며 “이들이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해서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관계기관에 인계했다”고 밝혔다. 교동도에서 가장 가까운 북한 해안까지는 2.5㎞인 것으로 알려졌고 이들은 이 해역을 헤엄쳐 넘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관계기관은 해병대로부터 이들의 신병을 넘겨받아 정확한 신분과 월남 경위 등을 조사하고 있다. 이들이 북한 주민으로 확인되고 귀순 의사가 확실하면 일정 기간 조사를 거쳐 북한이탈주민 정착 지원 시설인 ‘하나원’에 입소해 관련 교육을 수료한 뒤 국내에 정착할 수 있게 된다.
  • 귀순 북한 주민 강화 교동도로 직접 헤엄쳐 와 “살려달라. 귀순하겠다” 밝혀

    귀순 북한 주민 강화 교동도로 직접 헤엄쳐 와 “살려달라. 귀순하겠다” 밝혀

    귀순 북한 주민 강화 교동도로 직접 헤엄쳐 와 “살려달라. 귀순하겠다” 밝혀 북한 주민 2명이 14일 인천시 강화군 교동도로 헤엄쳐 넘어와 귀순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소식통은 이날 “오늘 새벽 4시께 50대와 20대 남성 2명이 교동도로 헤엄쳐 오는 것을 해병대 초병들이 발견했다”며 “이들은 ‘살려달라,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고 밝혔다. 교동도에서 가장 가까운 북한 해안까지는 2·5㎞의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정부 관계 기관은 해병대로부터 이들의 신병을 넘겨받아 정확한 신분과 월남 경위 등을 조사하고 있다. 이들이 북한 주민으로 확인되고 귀순 의사가 확실하면 일정 기간 조사를 거쳐 하나원에 입소해 국내에 정착할 수 있게 된다. 올해 들어 동·서해에서 북한 주민들의 귀순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달 3일에는 북한 남성 1명이 목선(전마선)을 타고 서해 백령도로 넘어와 귀순을 요청했다. 또 지난 5월 31일 울릉군 관음도 북방 0.8㎞ 해상에서 엔진 고장으로 표류 중이던 어선이 발견된 것을 비롯해 표류하던 북한 어선 3척에 탄 어민 9명이 잇따라 구조돼 이 가운데 3명은 귀순하고 나머지는 본인들의 뜻에 따라 북한에 송환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북한 주민 2명 귀순 “50대와 20대, 부자지간” 2.5km 직접 헤엄쳐와

    북한 주민 2명 귀순 “50대와 20대, 부자지간” 2.5km 직접 헤엄쳐와

    북한 주민 2명 귀순 “50대와 20대, 부자지간” 2.5km 직접 헤엄쳐와 북한 주민 2명이 14일 인천시 강화군 교동도로 헤엄쳐 넘어와 귀순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관계자는 이날 “오늘 새벽 북한 주민으로 추정되는 민간인 2명이 강화군 교동도로 귀순했다”면서 “새벽 3시 40분쯤 경계근무 중이던 해병2사단 장병이 교동도 앞에서 미상의 인원이 이동하는 것을 관측했고, 이후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귀순을 유도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들은 50대와 20대의 부자지간이라고 한다”면서 “관련 기관에서 조사중으로, 아직 정확한 신원은 밝혀진 것이 없다”고 말했다. 다른 정부 소식통은 “50대와 20대 남성 2명이 교동도로 헤엄쳐 오는 것을 해병대 초병들이 발견했다”며 “(발견 당시) 이들은 ‘살려달라,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고 밝혔다. 교동도에서 가장 가까운 북한 해안까지는 2·5㎞의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정부 관계기관은 해병대로부터 이들의 신병을 넘겨받아 정확한 신분과 월남 경위 등을 조사하고 있다. 이들이 북한 주민으로 확인되고 귀순 의사가 확실하면 일정 기간 조사를 거쳐 하나원에 입소해 국내에 정착할 수 있게 된다. 올해 들어 동·서해에서 북한 주민들의 귀순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달 3일에는 북한 남성 1명이 목선(전마선)을 타고 서해 백령도로 넘어와 귀순을 요청했다. 또 지난 5월 31일 울릉군 관음도 북방 0.8㎞ 해상에서 엔진 고장으로 표류 중이던 어선이 발견된 것을 비롯해 표류하던 북한 어선 3척에 탄 어민 9명이 잇따라 구조돼 이 가운데 3명은 귀순하고 나머지는 본인들의 뜻에 따라 북한에 송환됐다. 네티즌들은 “북한 주민 2명 귀순, 대단하다”, “북한 주민 2명 귀순, 최근에 귀순하는 사람이 많네”, “북한 주민 2명 귀순, 북한에 무슨 일이 있나”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북한주민 귀순 “강화 교동도로 직접 헤엄쳐 넘어와” 도대체 왜?

    북한주민 귀순 “강화 교동도로 직접 헤엄쳐 넘어와” 도대체 왜?

    북한주민 귀순 “강화 교동도로 직접 헤엄쳐 넘어와” 도대체 왜? 북한 주민 2명이 14일 인천시 강화군 교동도로 헤엄쳐 넘어와 귀순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소식통은 이날 “오늘 새벽 4시께 50대와 20대 남성 2명이 교동도로 헤엄쳐 오는 것을 해병대 초병들이 발견했다”며 “이들은 ‘살려달라,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고 밝혔다. 교동도에서 가장 가까운 북한 해안까지는 2·5㎞의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정부 관계 기관은 해병대로부터 이들의 신병을 넘겨받아 정확한 신분과 월남 경위 등을 조사하고 있다. 이들이 북한 주민으로 확인되고 귀순 의사가 확실하면 일정 기간 조사를 거쳐 하나원에 입소해 국내에 정착할 수 있게 된다. 올해 들어 동·서해에서 북한 주민들의 귀순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달 3일에는 북한 남성 1명이 목선(전마선)을 타고 서해 백령도로 넘어와 귀순을 요청했다. 또 지난 5월 31일 울릉군 관음도 북방 0.8㎞ 해상에서 엔진 고장으로 표류 중이던 어선이 발견된 것을 비롯해 표류하던 북한 어선 3척에 탄 어민 9명이 잇따라 구조돼 이 가운데 3명은 귀순하고 나머지는 본인들의 뜻에 따라 북한에 송환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귀순 북한 주민 강화 교동도로 헤엄쳐 와 “도대체 무슨 일?”

    귀순 북한 주민 강화 교동도로 헤엄쳐 와 “도대체 무슨 일?”

    귀순 북한 주민 강화 교동도로 헤엄쳐 와 “도대체 무슨 일?” 북한 주민 2명이 14일 인천시 강화군 교동도로 헤엄쳐 넘어와 귀순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소식통은 이날 “오늘 새벽 4시께 50대와 20대 남성 2명이 교동도로 헤엄쳐 오는 것을 해병대 초병들이 발견했다”며 “이들은 ‘살려달라,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고 밝혔다. 교동도에서 가장 가까운 북한 해안까지는 2·5㎞의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정부 관계 기관은 해병대로부터 이들의 신병을 넘겨받아 정확한 신분과 월남 경위 등을 조사하고 있다. 이들이 북한 주민으로 확인되고 귀순 의사가 확실하면 일정 기간 조사를 거쳐 하나원에 입소해 국내에 정착할 수 있게 된다. 올해 들어 동·서해에서 북한 주민들의 귀순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달 3일에는 북한 남성 1명이 목선(전마선)을 타고 서해 백령도로 넘어와 귀순을 요청했다. 또 지난 5월 31일 울릉군 관음도 북방 0.8㎞ 해상에서 엔진 고장으로 표류 중이던 어선이 발견된 것을 비롯해 표류하던 북한 어선 3척에 탄 어민 9명이 잇따라 구조돼 이 가운데 3명은 귀순하고 나머지는 본인들의 뜻에 따라 북한에 송환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판문점 통해 송환되는 북한 주민

    판문점 통해 송환되는 북한 주민

    지난달 31일 동해 상에서 표류하다 우리측에 구조된 북한 주민 3명 중 북한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힌 남성이 3일 오전 11시 15분께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돌아가고 있다. 정부는 나머지 2명은 귀순의사를 밝혀 정부 당국의 조사가 끝나는 대로 북한이탈주민 적응 기관인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도록 할 방침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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