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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0) 현대판 정본 정감록의 배후를 찾아라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0) 현대판 정본 정감록의 배후를 찾아라

    일본인 호소이 하지메의 손끝에서 이른바 현대판 ‘정본(正本) 정감록’이 탄생했다(연재 19호 참조).1923년 이후 출판된 정감록은 예외 없이 호소이의 동경판 정감록에 실린 25종의 비결을 사실상 그대로 옮겨 싣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호소이는 과연 어디서 무얼 보았기에 감히 정감록의 정본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을까? ●정본 정감록의 대본은 규장각에 1980년대 중반 이민수는 정감록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에는 정감록의 원본이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좀더 정확히 말해,‘감결(鑑訣)’‘동국역대기수본궁음양결(東國歷代氣數本宮陰陽訣)’‘역대왕도본궁수(歷代王都本宮數)’‘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記)’ 등 네 편의 비기가 규장각에 있다고 했다. 나는 동경판 정감록의 대본을 찾기 위해 규장각으로 달려갔다. 그 때가 1997년 8월이었다. 필사본 ‘정감록’이 도서번호 12371번으로 분류돼 있었는데 이민수가 말한 바로 그 책으로 보였다. 그의 말대로 방금 말한 4종의 비결이 한 권으로 묶여 있었다. 그 내용을 자세히 비교해 보았다. 호소이의 동경판과 거의 일치했다. 나는 규장각의 필사본 정감록이 동경판의 대본에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슬며시 일어난다. 이 필사본은 언제 어떤 경로를 거쳐 규장각에 들어왔을까? 알다시피 규장각은 명군으로 알려진 정조가 대궐 안에 세웠다. 그것도 즉위하던 1776년에 말이다. 다른 기능도 가지고 있었지만 규장각은 일차적으로 왕립도서관의 구실을 했다. 만일 문제의 필사본이 처음부터 규장각에 비치된 문서였다면 그야말로 충격적인 일이 된다. 조선후기 왕실이 정감록을 소장했다는 뜻이 되고 그러면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들도 읽었을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조바심을 억누르며 필사본 정감록의 겉장을 들추었다. 첫 장 윗부분에 큼직한 도장 하나가 찍혀 있다.‘조선총독부도서지인(朝鮮總督府圖書之印)’이라고 했다. 잠시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 상황을 미루어 짐작했다. 이 필사본은 본래 식민지시대 조선총독부가 소장했단 뜻이 틀림없지 싶다. 필사본 정감록은 일단 조선후기 왕립도서관 규장각과는 직접 인연이 없는 것으로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총독부 도서가 어떻게 해서 규장각 도서로 변신했을까? 필사본 첫 장 왼쪽 머리 부분에 또 다른 인장 자욱 두 개가 선명한데 거기 답이 있다.‘경성제국대학도서장(京城帝國大學圖書章)’과 ‘서울대학교도서(大學校圖書)’라는 인장 말이다. 연달아 찍혀 있는 도장의 내용으로 미루어 이 필사본의 역사는 대강 이러했다. 처음엔 조선총독부의 도서로 등록됐다. 호소이가 동경판 정감록을 출판한 것은 1923년, 그 때만 해도 이들 필사본은 조선총독부의 소장 도서였다. 그 뒤 1926년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었고 필사본은 어느 해엔가 대학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그리곤 1945년 해방을 맞아 경성제대의 후신인 서울대학교로 주인이 바뀌었다. 현재 규장각 도서를 자세히 살펴 보면 호소이가 참고한 또 다른 비결들이 있다. 이민수가 언급한 4종의 필사본 외에도 나는 또 다른 4종의 비결들을 찾을 수 있었다.‘남사고비결(南師古訣)’‘도선비결(道宣訣)’‘무학비기(無學記)’및 ‘북창비결(北窓訣)’이 그것이다. 물론 모두 필사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용이 호소이의 동경판 정감록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 규장각에 보관되기까지 경위도 이미 앞에서 말한 필사본 정감록과 똑같다. 이런 식으로 이른바 정본 정감록 25종 가운데 8종의 정체는 확인된 셈이다. 요컨대 1923년 동경판 정감록을 출간할 당시 호소이는 조선총독부에 소장되어 있던 필사본을 대본으로 사용했다고 봐야 한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 이런 일은 총독부와 긴밀한 협의가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본다. 그럼 규장각에 남아 있는 8종의 비결은 그렇다 하더라도 나머지 17개의 비결은 또 어떤 유래가 있을지 궁금해진다. ●호소이의 동경판 정감록의 원고를 찾아서 호소이가 참고했을 법한 비결 책들을 찾느라 나는 한 동안 규장각을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마침내 그러던 어느 날 중요한 문건이 또 하나 발견됐다. 호소이의 동경판과 표지 제목이 똑같은 ‘비결집록’이란 필사본이었다. 전통적인 책자 형태로 장정된 이 필사본은 본래 경성제국대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것이었다. 거기엔 비결 25편이 수록되어 있었다.‘감결’‘동국역대기수본궁음양결’‘역대왕도본궁수’‘삼한산림비기’‘무학전’‘오백논사’‘오백논사비기’‘도선비결’‘정북창비결’‘남사고비결’‘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서산대사비결’‘두사총비결’‘피장처’‘화악노정기’‘북두류노정기’‘구궁변수법’‘옥룡자기’‘경주이선생가장결’‘삼도봉시’‘무제’‘서계이선생가장결’‘토정가장결’‘이토정비결’및 ‘갑오하곡시’가 차례로 나와 있다. 나는 이 필사본을 한 장씩 넘겨 보다가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이 필사본은 제목도 편집 순서도 그리고 내용까지도 호소이가 펴낸 동경판 정감록과 조금의 오차도 없이 완전 일치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필사본에 무슨 글자를 썼다가 나중에 고친 부분들이 간행본에는 고쳐 쓴 모습 그대로 인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도 있는가? 혹시 이 필사본은 동경판 정감록의 원고라도 되었단 말인가? 동경서 나온 정감록의 원고가 어떻게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보관됐을까? 미스터리의 연속이다. 여러 날 나는 이 문제로 골치를 썩였지만 끝내 의문을 다 풀지 못 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해 보였다. 이 필사본은 호소이의 원고일 가능성이 무척 크단 점이다. 이미 지난 호에서 알아본 대로 1923년 호소이는 동경에서 정감록을 간행했다. 그 당시 한국 유일의 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이 그 책을 구입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동경판을 베껴 필사본으로 간수해야 될 어떤 이유도 나는 발견하지 못한다. 뿐인가. 필사본엔 원고를 수정한 흔적이 역력하고 수정된 사항이 인쇄본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 기막힌 일이다. 그래도 아직 단정을 내리기엔 이르다. 이 필사본엔 동경판에 부록으로 실린 10편의 비결들이 하나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정감록에 대한 호소이의 비판이 빠져 있다. 그러면 이 원고는 역시 동경판 정감록의 발췌본이란 이야긴가? 그렇게 보기는 아무래도 어렵다. 제국대학 도서관이 왜 하필 본문만 애써 옮겨 쓴 필사본을 소장한단 말인가? 아직 호소이가 부록과 서문을 작성하기 전에 편집한 본문 원고로 보면 문제는 풀린다. 나의 이런 짐작이 옳다면 위에 열거한 25편의 비결은 무엇인가 공통점이 많아야 한다. 본문이 부록과 구별되는 점은 무엇인가? 비결의 내용이 문제일 수도 있다. 비결의 수집 또는 편집 주체를 기준으로 삼았을 수도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총독부가 소유한 텍스트는 본문, 그렇지 않고 개인이 소장한 비결은 부록이란 구분도 있을 법하다. 나의 짐작은 맞았다. 뒤에 보듯 본문에 실린 25개의 비결은 모두 총독부가 관리하던 것이었다. 알고 보면 호소이의 동경판은 아유가이의 원고를 베낀 것이다 그렇다 해도 두어 가지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다. 조선총독부가 25종의 비결을 입수하게 된 것은 과연 언제였으며, 이 비결들을 편집 또는 변형시킨 장본인은 누구인가? 이런 문제가 해결돼야만 비로소 동경판 정감록의 비밀이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 끝에 나는 우리나라 주요 도시에 있는 도서관들을 순방하기로 했다. 천안, 대전, 대구, 부산, 전주, 광주를 둘러 보았다. 그러나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하나도 찾지 못했다. 다시 서울의 도서관들을 뒤졌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뜻밖의 문서가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두웠다. 또 하나의 필사본 ‘정감록’이 발견된 것이다. 그 첫머리에는 호소이의 정감록 비판은 오간 데 없었고, 대신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란 일본인의 해제가 첨부되어 있었다. 그 일본 사람이 해제를 쓴 것은 1913년(大正2년) 2월. 호소이가 동경에서 정감록을 간행하기 10년 전 또 다른 일본사람이 정감록을 편집했던 것이다. 일제 초기부터 한 일본인이 서울에서 정감록을 연구하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아유가이 후사노신은 누구인가? 그는 러일전쟁(1904∼1905)이 끝나자 공로가 인정되어 훈장을 받은 일본제국의 ‘애국자’였다. 이미 1884년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학’을 공부했고 학교를 마치자 바로 한국에 건너왔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했으니 우리 입장에서 보면 ‘원수 같은 왜놈’이다. 그런 아유가이는 경부철도부설 등에 종사해 벼락부자가 됐고, 그 돈으로 한국의 고미술품과 서적을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일찌감치 1902년 오오에 타쿠(大江卓), 마에마 교우사쿠(前間恭作) 등과 더불어 학회를 조직하여 한국문화를 ‘연구’했다.‘어리석은 한국인을 지도 계몽’할 목적이었다. 아유가이는 조선총독부가 사적을 조사할 때 위원이 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여러 주제에 대해 글도 많이 썼다. 일본의 대표적인 어용학자 아유가이가 정감록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럼 언제였을까? “내가 메이지 초년(明治 1868∼1911)에 한국으로 건너왔을 당시부터 이미 여러 차례 귀에 익숙하게 예언설(讖言)이 들렸다.”고 하였다.1880년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아유가이는 정감록에 주목했던 것이다. 당시 한국에는 각종 예언이 유행하였기 때문이다.“성세(聖歲, 경술년 1910년)에 한양(조선왕조를 상징)의 운수를 보니 옮겨서 붉은 해(紅日, 일본) 아래로 간다(일본에 망한다는 뜻).”는 예언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913년 아유가이가 편집한 정감록은 ‘감결’‘동국역대기수본궁음양결’‘역대왕도본궁수’‘삼한산림비기’‘무학전’‘오백론사’‘오백론사비기’ 등으로 되어 있다. 흥미롭게도 그가 편집한 정감록은 필사본 ‘비결집록’과 순서도 똑같고 내용도 같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두 필사본의 편집 형태마저 동일하단 점이다. 각기 맨 앞에 실린 ‘감록’을 보면 한 쪽이 10줄로 구성돼 있고 줄마다 20자씩으로 되어 있다. 두 필사본은 모든 글자의 위치가 완전히 일치한다. 이러한 몇 가지 사실로 미루어 호소이의 동경판 정감록은 총독부가 소장했던 비결을 대본으로 했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10년 전에 편집된 아유가이의 원고를 베끼다시피 했다고 본다. 아유가이는 왜 호소이에게 출판을 양보했을지 의문이다. 당시 아유가이는 학자로서 이름이 꽤 난 편이었다.‘고명하신’ 학자께선 정감록 따위의 잡서에 관한 일로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좀더 ‘싸구려’인 언론인 출신의 호소이에게 양보했다? 자세히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현대판 ‘정감록’은 아유가이로부터 시작되었다? 혹시 아유가이야말로 당시 조선총독부가 소장했던 여러 종류의 비결을 수집 정리한 사람이 아닐까? 아유가이의 필사본 27쪽 왼쪽 가장자리에 이런 메모가 있다.“(총독부) 학무과 분실에 있는 ‘정감록’에는 정말 이렇게 기록돼 있다.”고 되어 있다. 그 다음 쪽 오른편 가장자리에도 “학무과 분실에 있는 무학기에는 (이하 대여섯 자 해독불가) 무학전, 오백론사, 오백논사비기의 세 책이 포함돼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이 명백해진다. 첫째,1910년대 초반 총독부 학무과에는 아유가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노력을 통해 이미 많은 비결이 수집 정리돼 있었다. 둘째, 이것을 토대로 아유가이는 현대판 정감록을 편집했다. 정리하면 본래 총독부 도서였다가 우여곡절 끝에 현재 규장각으로 이관돼 있는 비결들은 아유가이가 참조했던 문서들이었다. 아유가이가 이용한 총독부 소장본 가운데 뒷날 ‘감결(鑑訣)’로 알려진 비결이 실은 1910년대 초반까지는 ‘정감록’으로 불렸다. 이런 사실은 현재 남아 있는 연대 미상의 한글 필사본 비결에서도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한글판 비결의 제목은 정감록이라 돼 있는데 내용과 구성 면에서 보면 한문본 ‘감결’과 대강 같다. 따지고 보면 아유가이가 총독부 소장문서를 참조해 ‘정감록’을 편찬하던 당시에는 ‘감결’이란 이름이 아직 없었다. 감결이란 명칭은 아유가이의 창안품이었다. 그는 총독부가 소장한 다양한 비결을 하나로 묶으면서 ‘정감록’이라고 했다. 그 때 한국의 예언서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감록이었기 때문이다. 책 이름을 이렇게 정하고 나자 여러 종류의 다른 비결들과 본래의 정감록을 구분할 필요가 생겨났다. 아유가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감의 비결’이라는 의미로 ‘감결’이란 새로운 제목을 만들었다. 그러면 아유가이는 무슨 이유로 정감록을 편찬했는가? 항상 그가 군국주의 일본제국의 입장에 서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그러면 대답은 명료해진다. 일제의 입장에서 보면 정감록은 정치 사회적 혼란의 진원지였다. 그들은 정감록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 나아가 정감록의 파괴력을 소멸시킬 방도를 찾아야 했다. 일본제국으로부터 훈장까지 받은 아유가이가 그 일에 앞장섰다. 그는 이미 총독부 학무과가 수집, 정리 그리고 변조해 놓은 여러 종류의 비결을 재정리했다. 그가 필사본 가장자리에 남겨 놓은 메모를 보더라도 증명되는 사실이다. 그의 메모를 자세히 살펴 보면 20세기 아유가이가 편집한 현대판 정감록의 특징이 뚜렷이 드러난다.1910년대 초반까지 ‘정감록’은 아유가이가 ‘감결’이라 명명하게 되는 바로 그 비결이 본체에 해당했다. 거기에 세편의 부록이 추가됐다.‘동국역대기수본궁음양결’‘역대왕도본궁수’및 ‘삼한산림비기’가 덧붙여진 것이었다. 당시엔 중요한 비결이라면 본문과 몇 개의 부록으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무학비결도 그런 경우였다. 유명한 비결은 본문과 부록으로 편성되게 마련이었다는 점은 1923년 호소이가 내놓은 동경판에서도 증명된다. 호소이는 정작 서문에서 그 점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목차를 보면 본문과 부록의 차이가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예컨대 ‘무학전’이라는 비결 제목에 이어 좀더 자잘한 활자로 한 칸 낮추어 ‘오백론사’와 ‘오백론사비기’라는 제목이 적혀 있는 식이다. 이처럼 비결들 상호간에는 주종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부록과 본문을 구별하는 태도는 김용주가 편찬한 한성판부터 점차 애매해진다. 김용주는 총 51편의 비결을 7편으로 나누어 수록하였는데 본문과 부록의 구별이 없었다.1930∼1940년대에 출간된 경성판에 이르러서는 전체를 몇 개의 편으로 나누는 관행조차 사라졌다. 이 책에 수록된 모든 비결은 정감록이라는 새로운 인식이 경성판에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이러한 현병주의 입장은 해방 이후 출간된 모든 정감록 번역서들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한 마디로 요약해서, 정감록에 대한 인식은 일제시기인 1910년대부터 달라졌다. 그 변화는 총독부의 비호와 사주 아래 어용학자인 아유가이가 주도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우리가 ‘정감록’이라 하면 아유가이나 호소이의 정감록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일제는 정감록을 독립운동을 비롯한 ‘사회 혼란’의 기폭제로 경원시했던 것인데 알게 모르게 그 잔재가 여태 남아 있다. 문득 씁쓸한 생각이 든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9) 1923년 일본인들의 정감록 처형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9) 1923년 일본인들의 정감록 처형

    ‘대일본제국의 애국적 지식인’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호소이 하지메란 일본인이 있었다. 그는 한일합병(1910년)을 전후해 ‘동경아사히신문’과 ‘한일전보통신사’ 기자로 다년간 한국에 체류했다. 갓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편입된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호소이는 흥미를 느꼈고 나름대로 많은 ‘연구’도 했다. 그런 호소이에게 1919년의 기미독립운동은 전혀 뜻밖의 사태였다. 무지렁이로 보였던 한국인들이 수백만 명씩이나 길거리로 뛰쳐나와 독립을 요구할 줄 그는 미처 몰랐다. 한낱 정치군인에 지나지 않는 조선총독이 그걸 짐작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당한 한국전문가 호소이 자신도 사태를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독립만세운동이 좌절되자 한국엔 예언서 ‘정감록’이 더욱 인기를 끌었다. 대한독립이 박두했다는 둥, 신천지가 열릴 거라는 둥 갖가지 소문과 예언이 한반도를 뒤덮을 지경이었다. 특히 1921년부터는 계룡산을 중심으로 숱한 신흥종교단체들이 등장해 위세를 떨쳤다. 겉으론 종교를 표방했지만 은연중 독립을 향한 열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파악한 조선총독부는 정감록 비상이 걸렸다. 1922년 겨울, 호소이는 비공식적인 통로를 통해 조선총독부의 부탁을 받았다. 예언서 정감록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동경의 자택 서재에 틀어박혀 호소이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한반도는 우리 대일본제국에 무엇인가. 제국의 용맹스러운 장졸(將卒)들이 목숨 바쳐 강적 청나라도, 러시아도 연달아 무찌른 다음 어렵게 얻어낸 제국의 새 영토가 아닌가. 저 버러지 같은 한국 놈들은 천황폐하의 신민이 된 영광을 모른다. 놈들은 감히 독립을 바라고 있다. 훈련된 군대도 총칼도 없이 맨주먹으로 일어서려는 무지막지한 저들의 맨주먹을 쇠뭉치로 둔갑시키는 것은 독립에 대한 부질없는 열망이다. 거기 불 붙이는 부싯돌이 바로 정감록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든 정감록을 처단할 것이다. 나 호소이로 말하면 천황폐하의 뜻에 언제나 기꺼이 순종하고 순수한 대일본제국 신민의 고귀한 혈통에 무한한 자긍심을 느끼는 위대한 제국의 충량한 신민이 아닌가. 우리 대일본제국으로 말하면 단일하고 순수한 혈통이 천만대를 두고 이어져온 아름다운 나라. 그에 비할 때 이른바 저 한국 놈들은 어떤가. 놈들은 우선 생리학적으로 열등하다. 혈액만 하더라도 한국 놈들의 피는 ‘거무칙칙하고 더럽다.’ 그렇기 때문에 이조 500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당쟁이 일어나 수많은 인명이 살상됐지만 나라꼴은 늘 엉망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한국 놈들은 유전인자 자체가 불순하고 열등하다. 따라서 놈들에게 밝은 미래란 있을 수가 없다. 오직 천황폐하의 자애로운 품속에 있을 때만 그들은 행복을 바랄 수 있다. 이런 점들을 나는 이미 두 권의 저서에서 명확히 입증했다.‘조선문화사론(朝鮮文化史論)’과 ‘조선 문제의 근본적 해결(朝鮮問題の根本的解決)’이 그것이다. 한국에 대한 나의 전문적인 연구는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해 바쳐질 것이다. 실용성이 없는 학문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 대일본제국의 발전을 위해, 무지하고 악랄한 한국 놈들의 순화를 위해 나의 저술은 두고두고 쓰일 만한 것이다. 탁상공론으로 걸핏하면 양심을 들먹이는 비겁하고 위선적인 놈들이 있어 훗날 나 호소이를 대일본제국의 어용학자(御用學者)라고 불러도 좋다. 제국의 영예를 위한 나의 일편단심은 그럴수록 더욱 밝게 드러날 것이다. ●정감록을 죽이는 묘책 호소이는 묘안을 찾기 위해 좀더 생각했다.‘도무지 정감록이란 무슨 책이냐. 조선시대 위정자들도 몹시 두려워했던 책이 아니냐. 위정자들은 정감록을 소지하거나 퍼뜨리는 일체의 행위를 범법 행위로 간주했다. 그런데 혹독한 금압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감록은 널리 퍼져나갔다. 지금 반도의 덜떨어진 한국 놈들이 감히 독립을 바라는 것도 다 그놈의 정감록 때문이다.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공개하라. 그렇다, 금단의 예언서 정감록을 죽이는 방법은 공개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감록은 신비함을 잃게 된다. 신비성을 잃어버린 정감록이라면 이미 반쯤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또 하나. 기왕에 공개할 바엔 정감록의 정본(正本)을 만드는 거다. 바로 이 호소이가 대일본제국의 정치적 이익에 봉사할 정감록의 정본을 결정한단 말이다. 총독부에서 수집해 놓은 정감록의 이본들을 자세히 살펴 그 가운데서도 정치적 선동성이 별로 없는 텍스트를 골라 공개하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그 텍스트에 살짝 손을 댈 수도 있다. 아주 심하게 손을 대면 조작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영악하고 의심 많은 한국 놈들을 상대로 하는 일인 만큼 더욱 주도면밀해야 한다. 나는 정감록을 순화시킬 뿐이다. 이것은 변조나 개작이 아니다. 나는 대일본제국과 천황폐하를 위해, 한반도와 한국 놈들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정감록을 편집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잊지 말아야 될 일이 또 있다. 이렇게 교묘한 수단을 부려 김을 빼놓더라도 한국 놈들은 순화된 나의 정감록을 다시 개악하거나 제멋대로 해석할 우려가 있다. 놈들은 워낙 피가 더럽기 때문에 제멋대로니까. 그들의 망령된 행위를 막기 위해 내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없을까. 그래, 예방주사를 놓자! 정감록은 이래서 진짜 믿을 것이 못 된다. 이런 식으로 계몽적인 비평을 잔뜩 써 가지고 독자 놈들의 배를 채우는 것이다. 정감록의 대가 호소이가 만든 정감록 정본의 맨 앞에 실린 비판을 읽게 하자. ●동경판 정감록에 대한 불만 대일본제국의 충량한 신민 호소이는 이미 수집된 정감록 이본들을 널따란 책상 위에 펼쳐놓고 수술을 시작했다. 일제는 이미 오래 전에 광개토대왕비문까지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변조했다. 정본이 따로 존재할 리도 없던 정감록을 개작하는 것쯤이야 호소이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그의 솜씨와 애국심은 참으로 대단해 불과 몇 달 만에 ‘정감록비결 집록’이란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한국인들에겐 억압의 상징인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정감록을 죽이기 위한 음모가 결실을 맺은 날은 1923년 2월15일이었다. 이것이 사상 최초의 정감록 인쇄본이다. 도쿄판 정감록은 인기가 대단했다. 초판으로 몇 부를 찍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출간된 지 약 보름 만에 제3판을 제작할 정도였다. 도쿄판은 아마 일본에서도 상당히 팔렸겠지만 주로는 ‘식민지 조선’에서 소비됐을 것이 뻔한 이치였다. 호소이가 바란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도쿄에서 만든 정감록으로 한국의 정감록 세계를 평정한다는 목표는 어쩌면 단시일 내에 달성될 듯도 하였다. 도쿄서 들어온 정감록이 잘 팔려 나가자 한국의 출판계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정감록을 찍어내면 돈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일각에선 호소이의 민족성 비판에 강한 불만이 제기되었다. 내놓고 맞싸울 형편은 안 되었지만 정감록까지도 ‘그 잘난’ 일본인의 손으로 다듬어진 책을 봐야 되는가 하는 강력한 반발이 없지 않았다. 동경판의 뚜껑을 열어본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경악했다. 호소이는 무지한 한국 사람을 계몽한답시고 무려 50쪽이나 되는 정감록 비평을 썼다. 정감록의 허구를 낱낱이 파헤치고 나아가 한국 사람의 타고난 ‘야만성’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 논지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 한국인들은 태초부터 불합리한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련한 한국 민족의 정신적 미성숙은 그들이 정감록과 같은 미신에 맹목적으로 빠져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된다. 이렇게 유치하고 야만적인 성격이 한국민족의 본성이다. 국제적으로 저열한 한국의 민족성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한반도의 역사 및 지리적 조건이 빚어놓은 결과다. 당시 유행하던 지리적 결정론을 빌려 호소이는 ‘미개한’ 한국인을 질타했다. 귀신을 숭배하고 점치기를 좋아하는 풍습은 당시 일본사회에서 더욱 성행했다. 그러나 일본민족의 위대성을 맹신한 호소이의 눈에는 그런 현상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야만적’인 한국인까지도 호소이는 마음속 깊이 사랑했던 것일까. 그는 하루바삐 정감록 신앙에서 한국인을 구출하여야만 된다고 믿었다. 합리적이고 발달된 현대 일본사회의 참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 한국인은 정감록 신앙을 포기해야 된다. 이것이 호소이의 변(辯)이었다. 그러나 1923년 동경판 정감록을 간행한 진짜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대일본제국의 번영을 위해 정감록이라는 정치적 폭탄에서 뇌관(雷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동경판이 제3판에 돌입한 지 보름 정도 지난 1923년 3월19일 김용주가 편찬한 정감록이 독자들에게 선을 보였다. 편찬에 나선 김용주는 호소이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그는 정감록의 내용에 대해 아무런 비평도 보태지 않았다. 딱히 정감록을 옹호하지는 않았으나 이것은 호소이에 대한 무언의 항변이었다. 굳이 김용주가 정감록을 신앙하였다거나, 민족주의자였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정감록에 대해 아무런 비평을 가하지 않은 데는 호소이의 지나친 악평에 대한 반발심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밖에도 김용주에게는 정감록을 비판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첫째, 당시 많은 한국인들은 정감록의 내용을 틀림없는 예언으로 믿고 있었다. 식민지의 힘없는 지식인에 불과했던 김용주로서는 대중의 그러한 열망에 굳이 찬물을 끼얹을 이유가 없었다. 설사 그가 남다른 애국심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대한독립이 된다고 믿고 있는 동포들의 기대심리를 비난할 필요는 없었다. 둘째, 단순히 책을 많이 팔기 위해서라도 잠재적인 독자들의 희망을 꺾어서는 안 됐다. 김용주의 편집 태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호소이에 대한 반감을 비롯해, 독립에 대한 기대와 상업적 목적이 골고루 다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김용주는 정감록의 신빙성에 대하여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또 하나의 정감록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것은 한성판이라 불릴 만했다. 한성판엔 매우 흥미로운 점이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동경판과 공통되는 부분도 상당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 적지 않았다. 두 판본이 내용 면에서 차이를 보이게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매사를 곧이곧대로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민간에 퍼져 있던 허다한 비결 가운데 어느 것은 호소이만, 또 다른 것은 김용주만 수집해서 자연히 그렇게 됐다고 할 것이다. 실제 정감록은 수백 년 동안 필사본으로 암암리에 전파되었기 때문에 각자의 수집본이 서로 다를 수가 있다. 그렇다면 동경판과 한성판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비결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야 물론 좀 더 널리 퍼져 있던 유명한 예언서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전국 어디에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누구나 손쉽게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그런 대표적인 예언서 말이다. 나는 이런 입장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동경판을 편집한 호소이가 매우 국수주의적이었단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수집된 정감록을 모두 출판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 일본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 달리 말해 진인출현이나 대한독립의 메시지가 약한 ‘순화된’ 비결만을 선별적으로 알리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그는 ‘고약한’ 내용의 예언까지 인쇄에 부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김용주는 달랐다. 그는 도쿄본의 상당수를 답습하면서도 도쿄본에 실리지 못한 다른 비결들을 많이 포함시켰다. 김용주는 호소이가 정감록의 정본을 만들려고 한 의도를 정확히 꿰뚫어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도쿄판이 정감록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진짜 정감록은 훨씬 더 위험한, 폭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정감록을 출간하지는 못했다. 총독부의 검열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결국 호소이의 뜻대로 되다 당연히 김용주의 정감록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것은 조선총독부의 의도와 배치된다. 일본인들이 보기에 김용주의 한성본이 딱히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눈에 거슬리는 점이 없지 않아 조만간 도태되어야만 될 책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식민지 한국의 정세는 한결 경색됐다. 이른바 전시총동원체제가 작동돼 비상시국이었다. 엄격한 사상통제와 감시가 일상화되는 가운데 정감록에 대한 통제도 한 단계 더 나갔다. 그 무렵 새로운 정감록이 나왔다. 현병주의 ‘비난정감록진본’이었다. 마침 경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를테면 경성본이라 부를 만하다. 그런데 해명돼야 할 문제가 있는 책자였다. 우선 표면상 출간연도가 미상이란 점이 문제다. 책의 간행지를 ‘경성(京城)’이라고 표기해 놓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식민지시기 서울에서 나온 것은 틀림없다. 경성본이 나온 시기를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내기 위해 나는 본문의 표기법을 자세히 분석했다. 문장의 구조와 맞춤법이 현대의 격식에 가깝다. 그런 이유로 나는 경성본의 간행시기를 1930년대 중반 이후로 확신한다. 경성본은 내용면에서도 앞서 간행된 한성본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경성본은 정감록이 사실무근의 허망한 책자라는 논설을 싣고 있다. 편자 현병주는 정감록의 가치에 대해 직접적인 판단을 보류한 김용주와는 달랐다. 하지만 현병주가 단순히 일본인 국수주의자 호소이를 추종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는 정감록의 허구성을 비판하였을 뿐 문제의 궁극적인 원인을 한국인의 저열한 민족성에서 찾지는 않았다.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점은 현병주가 비결의 내용 중에서 자신이 동의하지 못하는 대목에 대해 일일이 비판을 가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비결의 본문에 길지(吉地)에 피난을 가더라도 피난 시기에 따라 생명을 건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부분이 있다. 현병주는 바로 그 구절의 끝에 괄호를 치고는 “생명을 건지는 땅 중에도 종종 생명을 건지지 못하는 곳이 있다.”고 비꼬는 투로 주석을 붙였다. 이와 같이 조목조목 정감록의 내용을 비판함으로써 현병주는 정감록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려 했다. 호소이의 정감록 말살 의도는 현병주에 이르러 더욱 공교해졌다. 나는 현병주가 친일파였는지 여부를 알지 못한다. 다만 정감록에 대한 총체적 불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정감록을 출간했다는 점에서 현병주는 호소이의 완벽한 후배다. 현병주는 좀더 중요한 점에 있어서도 호소이의 전통을 계승했다. 나는 지금 경성본에 실린 비결의 내용을 문제로 삼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 호소이는 35종의 선별된 비결을 공개했다. 김용주는 그보다 16종이 더 많은 51종을 간행했다. 그런데 경성본에는 25종만 실려 있다. 현병주는 호소이의 동경본과 김용주의 한성본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비결로 한정했다. 결과적으로 말해 그는 호소이가 간행한 비결의 일부만이 정감록의 정본이라는 인식을 심는 데 기여했다. 호소이가 공개한 35개의 비결 가운데 25종은 광복 이후 간행된 여러 정감록에도 빠짐없이 등장한다.20세기 후반부터 한국사회에서 정감록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호소이의 비결을 정본으로 대접하게 됐다. 그렇게 된 줄이나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식탁으로 돌아온 연어

    식탁으로 돌아온 연어

    고급 음식점에서나 애피타이저로 몇점씩 맛보던 연어. 그 연어 요리가 우리의 일상 식탁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값비싼 어종이라는 오해 때문에, 혹은 요리하기가 쉽지 않다는 이유로 연어는 식탁에 자주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웰빙 바람과 함께 연어 요리가 점차 대중화되고, 우리 입맛에 맞춘 다양한 요리 방법이 소개되면서 요즘 부쩍 주목받고 있다. 고향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하는 ‘삶이 아름다운 물고기’. 미각을 돋우는 고급스러운 연어의 맛에 푹 빠져보자. 강한 회귀 본능과 모성의 상징인 연어.‘삶이 아름다운 물고기’ 연어가 최근 부쩍 주목받고 있다. 깔끔하게 진열된 연어는 짙은 빨간색에서부터 연한 주황색까지 색깔도 참으로 예쁘다.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돌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고등어나 갈치 같은 생선과는 달리 주부들이 선뜻 장바구니에 담기가 꺼려진다. 노르웨이나 알래스카 등지가 원산지인 만큼 혹시 그 ‘이국적인’ 맛이 우리 입맛에 맞지 않을까하는 우려에서다. 그러나 연어가 새삼스럽게 우리 식탁에 오른 것은 아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함경도 고원군의 덕지천은 연어가 많이 잡히기로 유명하며 그 고기잡이로 얻는 이득이 함경도에서 가장 높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후기 실학자 서유구는 난호어묵지에서 “연어는 비늘이 잘고 푸르며 살색은 담적색이다. 알은 밝고 구슬 같고 색은 분홍이지만 소금에 절이면 빨갛게 되는데 서울 사람들이 매우 좋아한다.”고 적고 있다. 동의보감에는 “연어는 고기 맛이 달며 독이 없다. 진주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알은 분홍색이며 맛이 매우 좋다.”고 전한다. 강수경(35) 양양연어연구센터 연구사는 “연어는 찬물에 사는 어종이어서 갈치나 고등어보다 더 맛이 담백하고 깔끔하다.”고 말했다. 동해안 주민들은 과거 한꺼번에 많이 잡힌 연어의 내장을 제거하고 꾸들꾸들하게 말렸다가 찜이나 조림으로 식탁에 올렸다. 질좋은 단백질, 필수 아미노산을 비롯해 비타민 A·D·B2·B6·E, 무기질인 칼슘·철·아연·인·마그네슘 등을 상당량 포함하고 있는 연어는 소화가 쉬워 어린이와 노약자에게도 좋다. 연어에 특히 풍부한 것은 오메가-3지방산. 이는 심장병·염증 및 암의 발병 위험을 낮춰 주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또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 주며 류머티즘성 신경통 환자들에게 효과적이라는 연구결과도 나와 있다. 이같은 이유에 웰빙 바람까지 타고 연어는 웰빙 ‘레드푸드’로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연어 살코기가 붉은 이유는 카르티노이드 색소를 함유한 크릴새우 등을 먹기 때문이다. 알래스카나 노르웨이산은 대개 훈제 연어다. 때문에 특유의 향이 배어 있다. 이에 익숙지 않은 사람은 싫어할 수도 있다. 에드워드 먼터 JW메리어트호텔서울 총조리장은 “훈제연어를 요리한 다음 레몬이나 허브를 얹고 레몬즙을 뿌리면 고유의 스모크 향이 약해진다.”고 들려줬다. 그는 또 “연어를 백포도주·레몬주스·올리브기름(또는 식용유)를 섞어 하루 정도 재워두면 훈제 향이 옅어진다.”고 설명했다. 시중에서 파는 연어는 대개 뼈를 제거한 살코기 토막. 아가미나 눈을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좋은 연어를 고르려면 훈제향이 적당히 배어 있고, 손으로 만져봐 살에 탄력이 있어야 한다. 또 붉은색과 오렌지색 사이의 선홍색을 띤 것이 좋다. 요리연구가 음유선씨는 “훈제가 안 된 냉동 연어를 한국식으로 요리할 경우 비린내를 잡기 위해 맛술과 마늘·생강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고 말했다. 또 지방이 많기 때문에 기름기를 줄이는 요리법이 더 잘 어울린다고 덧붙였다. 요즘은 강에서 부화한 어린 연어가 바다로 나갈 때. 양양 연어연구센터는 해마다 양양·삼척·울진 등에서 1000만마리의 새끼 연어를 방류하고 있다. 연어는 북태평양 베링해와 오호츠크해까지 1만㎞를 돌며 3∼4년 살다가 강물을 필사적으로 거슬러 태어난 하천으로 다시 돌아와 알을 낳고 죽는다. 이같은 연어의 일생은 한편의 대서사시라 할 만하다. 바다로 내려가지 못하고 일생을 담수에서만 사는 연어가 바로 산천어다. 백화점이나 할인점은 물론 동네의 작은 생선코너에까지 나와 있는 연어. 연어의 새로운 요리법에 도전해 보자. ● 감귤향의 신선한 연어 재료 연어 85g, 소금 11g, 흑설탕 19g, 레몬즙·오렌지 주스 각 5g, 라임 주스 2g, 잘게 다진 생강·케이퍼 각 5g, 고수·다진 샤롯 각 7g, 잘게 다진 레몬 1g, 케이버(장식용) 4g-연어는 뼈를 제거하고 랩으로 덮었다가 오렌지·레몬즙·라임 주스를 섞어 연어의 양쪽면에 바른다. 생강과 고수는 연어에 가볍게 문지르고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해 냉장고에 둔다.12시간마다 연어를 뒤집어 간이 배게 한다(두세번 지속적으로 한다). 냉장고에서 꺼낸 연어에서 설탕·소금·후추·고수를 제거하고 헹군다. 페이퍼 타월로 살짝 물기를 제거하고 잘게 다진다,과카몰리(멕시코소스·아보카도 1/4개, 신선 레몬즙 7.5㎖, 껍질을 제거한 다진 토마토 7.5g, 다진 차이브 3.75g, 소금·후추 약간씩-아보카도는 스푼으로 으깬후 나머지 재료들을 넣어 섞는다),레몬오일(절인 레몬 7g, 레몬즙 15㎖, 포도씨 기름 41㎖, 올리브 기름 10㎖-모든 재료를 블랜더에 넣고 섞어 퓨레로 만든다. 체에 걸러 찌꺼기를 제거한 후 미지근하게 식힌다),차이브 오일(차이브 1.7g, 식용유 4.6㎖, 소금·후추 약간씩-차이브를 살짝 데쳐 페이퍼 타월로 물기를 제거한 후 나머지 재료와 함께 블랜더에 간다),와사비와 마스카폰 크림(마스카폰 치즈 3.5g, 고추냉이(와사비) 0.5g, 생크림 0.84㎖, 소금·후추 약간씩) 만드는 법 (1)연어는 틀을 이용하여 모양을 만든 후에 캐비어와 고추냉이 크림을 넣는다.(2)과카몰리는 접시에 넣고 마지막으로 레몬 오일과 차이브 오일을 살짝 뿌린다. ● 미소된장에 절인 연어 바비큐 소스(말리부 럼 6㎖, 다진 고수 6g, 잘게 다진 생강 뿌리 3g, 라임 주스 6㎖, 흑설탕 6g, 간장 1㎖, 칠리 소스 3㎖, 소금 약간, 케첩 3㎖-바비큐 소스를 냄비에 넣고 끓여 불을 줄인후 양이 반이 될 때까지 졸인다.) 미소소스(미소 48g, 흑설탕 9g, 정종 12㎖, 미림 12㎖, 연어 스테이크 200g-미소, 흑설탕, 정종과 미림을 넣고 2분간 끓인 후 식힌다. 연어는 미소 소스를 발라 12시간정도 절인다.) 야채재료(청경채 20g, 버터 2g, 소금·후추 약간씩-잘게 다진 홍고추 (가니시) 10g ● 삼나무판에 구운 연어 스테이크 재료 신선 연어 115g-1인치 두께로 준비한다, 당근 2개, 레드 피망 4개, 서양호박 2개, 붉은 고추 2개, 버섯 2개, 레몬주스 1작은술, 올리브 기름 1작은술, 소금 1/2작은술, 후추 1/4작은술, 다진 파슬리 1/2작은술, 신선레몬즙 1개, 레몬 1조각, 버터 1작은술, 간 마늘 1/4작은술-연어는 조리하기 2∼12시간 전에 소금과 후추간을 하여 냉장고에 보관한다. 삼나무 연어 시즈닝(레몬 후추 2작은술, 마늘·사철쑥(타라곤)·바질·파프리카·소금 1작은술씩, 흑설탕 2작은술-재료를 브랜더에 넣고 간다. 만드는 법 (1)삼나무 중간에 연어를 놓는다.(2)그릇에 야채, 레몬 주스, 올리브 기름, 파슬리, 소금과 후추를 넣고 섞는다.(3)양념된 야채들은 연어 주위에 놓고 레몬을 뿌린다.(4)오븐은 375도로 예열,. 연어는 오븐에서 10분 정도 굽다가 뒤집어 10분정도 더 굽는다.(5)오븐에서 꺼낸 연어에 버터를 얹는다. ● 페퍼를 곁들인 연어 연어 재료(홍고춧가루 2작은술, 주니퍼 베리 2작은술, 올리브 기름 1/2컵, 연어 315g, 양파 1/2개, 소금·후추 약간씩-(1)홍고춧가루와 주니퍼를 그라인더에 넣고 간다.(2)연어에 올리브 기름을 바르고 (1)의 양념으로 30분간 재어 둔다.(3)재운 연어 위에 양파와 대파를 올려놓고 소금과 후추간을 하여 오븐에서 1시간정도 익힌다. 상추와 조개재료 (올리브 오일 1작은술, 다진 대파 1/2개, 상추 1/2개, 모시 조개 6개, 버섯 4개, 생선 육수 2작은술, 소금·후추 약간씩) 만드는 법 (1)팬에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파와 상추를 넣고 볶아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다.(2)(1)의 생선 육수와 조개를 넣어 조개 입이 벌어질 때까지 익힌다.(3)연어와 조개를 접시에 넣고 양념을 위에 약간 뿌려 장식한다. ■ 도움말 양양연어연구센터(033-672-4180), 알래스카주정부 주한대표부 글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에드워드 먼터씨는 JW메리어트호텔서울(6282-6759)의 6개 음식점과 바의 맛을 책임진 총주방장. 대학 재학시절 학비를 벌기 위해 음식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했던 인연으로 전문 조리사의 길을 걷고 있다. 조리사와 영양사 자격증을 두루 갖춘 그는 세계 2800여 메리어트호텔 조리사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평가에서 올해의 요리사·최우수 조리사·얼음조각대회 1위 등을 차지하는 등 다재다능한 조리사다.
  • 쌀 국조 첫날 ‘영어 공방’

    쌀 국조 첫날 ‘영어 공방’

    국회는 12일 ‘쌀 관세화 유예협상 실태규명을 위한 특별위원회’ 첫 회의를 열고 쌀협상 이면의혹 등에 대한 35일간의 쌀협상 국정조사에 돌입했다. ●한덕수 부총리등 증인 31명 선정 특위는 한덕수 부총리 겸 재경부장관을 비롯한 증인 31명과 참고인 5명을 각각 선정했다. 그러나 첫날부터 날카로운 설전이 펼쳐지면서 향후 조사에서 불꽃 튀는 논쟁을 예고했다. 특위는 여야간 치열한 신경전 끝에 외교문건 등 비밀문서 열람은 국회의원들만 가능하도록 했고, 필요시 교섭단체별로 전문가 1명씩을 배석할 수 있도록 했다. 원칙적으로 복사나 필사는 허용치 않기로 했다. 전문가 배석 문제엔 교섭단체인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오랜만에 한편이 됐고, 반면 비교섭단체인 민주노동당이 외롭게 대항했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교섭단체에만 전문가 배석을 허용하도록 합의하자 비교섭단체 의원 중에 유일하게 특위에 포함된 민노당 강기갑 의원이 발끈했다. 강 의원은 “핵심은 비밀문서인데 이를 제한할 수 있느냐.”면서 항의했다. 이어 “영어도 못하고….”라며 현실적 어려움까지 토로했다. 비밀문서 메모 여부도 논란거리가 됐다. 한나라당 김재원 의원은 “열람만 허용하고 메모를 허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조 위원장이 “복사하거나 필사하지 못하도록 간사회의에서 결정했다.”고 반박하며 맞섰다. 결국 ‘양심에 따라’ 메모는 허용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이면 계약’ 존재여부 핵심 쟁점 특위는 오는 26∼27일 외교부, 농림부, 해양수산부 등 3개 부처의 기관보고를 받은 뒤 다음 달 13∼14일 이틀간 청문회를 열기로 했다. 특히 쌀 관세화 유예연장 협상을 하면서 정부가 중국 등 상대국과 이면합의를 했느냐의 여부를 놓고 논란이 예상된다. 박준석기자 pjs@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8) 18세기 유랑지식인들 정감록을 퍼뜨리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8) 18세기 유랑지식인들 정감록을 퍼뜨리다

    ‘정감록’이 역사의 표면으로 떠오른 것은 1730년대였다. 그것도 차별의 땅 서북지방에서였다. 정감록은 조선왕조의 멸망을 예고해 조야(朝野)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것인데, 금지령 속에서도 재빨리 전국 각지로 번져 나갔다. 누가, 왜 정감록을 퍼뜨렸는가? 그들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이번 호에선 18세기 황해도 출신 술사(術士)인 박서집을 만나 이 문제를 집중 검토하려고 한다.1731년 해주에서 태어난 그는 이미 어린 시절 한글본 정감록을 읽었다. 나중엔 예언에 빠져 정든 고향을 등진 채 홀로 충청도 진천으로 이주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1782년 정감록 사건에 연루돼 처벌된 사람이다. 박서집과의 대화는 물론 가상 대담이다. 하지만 그가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만은 아니다. 필자가 여러 종류의 역사자료를 읽으며 재구성한 것이다. ●술사 박서집 정감록을 발견하다 백:서북지방에서 출현한 정감록이 남부지방에 전파된 것은 대강 언제쯤이었을까요? 박:그건 좀 생각을 해봐야 알겠어요. 하지만 내 경우엔 이랬어요. 난 사실 어렸을 때 집에서 정감록을 읽었어요. 우리 집은 양반은 아니라도 선친께서 까막눈은 아니었지요. 그렇다고 한문에 능통하셨단 얘긴 아니고 그저 ‘명심보감’과 ‘소학’ 정도는 동네 서당에서 배우셨지요. 이유야 자세히 모르겠지만 하여간 우리 집엔 정감록이 있었어요. 백:술사님이 태어난 해가 1731년(영조 7년)이었다지요. 그렇다면 아홉 살 되던 1739년(영조 15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정감록이 문제가 됐습니다. 술사님은 그때 벌써 정감록을 읽으셨나요? 박:아니지요. 열두 살 때 읽었어요. 지금도 그때 기억이 아주 선명해요. 내가 여덟 살 때부터 서당을 다녔으니까 글은 제때 배운 셈이지요. 읍내 서당에서 ‘사서’(四書)도 좀 읽고 해서 문리는 제법 나 있는 편이었어요. 그래도 한문 책 읽기는 늘 까다롭게 느껴졌지요. 그런데 그해 한여름에 설사가 심해 집에서 쉬다 심심해서 벽장을 뒤졌어요. 벽장 깊이 감춰둔 정감록을 발견했어요. 한글로 된 필사본이라 단숨에 읽어 버렸어요. 너무 재밌어 그 뒤에도 가끔씩 꺼내 읽었어요. 백:첫눈에 정감록에 반하신 것 같습니다. 무엇이 술사님을 그렇게 매료시켰나요? 박:아까부터 자꾸만 ‘술사, 술사’ 하고 부르는데 듣기에 별로 안 좋아요. 그건 나를 좀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에요. 기왕이면 도사(道士)라든가 거사(居士) 같은 칭호로 부르는 게 좋겠어요. 이래 봬도 내가 실은 못하는 것이 없어요. 아픈 사람에게 약을 처방해 주지, 땅도 좀 볼 줄 알아서 지관(地官)이라고 대접하는 이들도 많았고 점도 칠 줄 알거든요. 백:죄송합니다. 그럼 거사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요새 사람들은 거사님이 살던 18세기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서당에 다닌 사람들은 유교 경전만 읽는 줄로 알고 있어요. 박:틀린 생각이지요. 서당에선 천문이나 풍수에 관한 책을 전혀 가르치지 않지요. 그러나 서당에서 배운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다들 그런 책들을 읽게 되는 거죠. 훈장님들도 실은 의술이나 풍수에 관한 지식이 풍부해 마을 사람들의 자문에 자주 응하곤 했어요. 나도 한때는 훈장소리까지 들었던 사람이지만 말예요. 백:몰라 뵈었습니다. 훈장님! 그러면 훈장님은 주리론(主理論)이니 주기설(主氣說) 같은 복잡하고 어려운 성리철학을 훤히 다 아시겠군요. 대단하십니다. 박:솔직히 말해 난 그런 건 잘 몰라요. 관심도 별로 없고, 실상 배운 적도 없어요. 내 특기라면 조금 전에 말한 대로 잡학이었어요. 대개 시골훈장들이 다들 그랬어요. 백:아마도 평민 출신 훈장님이라서 더욱 잡학에 강했다는 말씀인가 보군요. 그런데 훈장님은 52세 되던 1782년(정조 6년) 정감록 사건 때 충청도 진천에서 체포되셨잖아요. 어떻게 된 일인가요? ●서북의 술사들 남쪽으로 향하다 박:그때 그 이야길 여기서 꼭 해야 되나요?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군요. 당시 난 관가에 불려가서 아주 경을 쳤어요. 그건 그렇다 치고 내 본업이야 잡술(雜術)을 파는 사람이었지 어디 점잖은 훈장이라 할 수 있나요. 날 훈장이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거사라고 불러 주시오. 백:그래요, 거사님. 그런데 거사님은 왜 정든 고향을 떠나셨지요? 박:솔직히 말해 나와 같이 먹물 든 사람이 무슨 낙으로 농사를 짓겠어요? 속이 답답해 절대 안 되지요. 그렇다고 내 처지에 과거에 급제해 무슨 벼슬이라도 하겠어요? 그 역시 아니었어요. 차별 받는 서북지방 그것도 평민 출신인 나로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어요. 정말 답답한 이야기지만 나 같은 사람은 도무지 마땅히 마음을 쏟을 만한 일이 거의 없었어요. 나이 스물을 넘기자 난 점점 노골적으로 사회질서에 불만을 품게 됐어요. 그런 내 모습을 보는 게 서글펐지만 하는 수 없는 노릇이었어요. 물론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고 봐요. 차별이 심한 세상에서 저항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어요. 내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았어요. 백:거사님의 말씀이 이해가 돼요.20세기의 일입니다만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킹 목사는 백인들의 가혹한 차별정책에 맞서 “나에게는 꿈이 있다.”라며 소수자의 꿈과 희망을 부르짖었어요. 일제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이나 1970년대 유신정권 아래서 철저히 소외됐던 특정 지역 사람들도 아마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 같아요. 똑같은 맥락에서 남성 위주의 사회구조 속에서 희생을 강요당해온 여성들의 고통도 마찬가지 일 거예요. 누구든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막다른 길목에 서면 절망하기 십상이겠지요. 박:고통스러운 내 삶에 희망을 안겨 준 것이 정감록이었지요.‘양반 놈들의 조선’이 끝나야 뭐가 돼도 제대로 될 거라는 생각뿐이었어요. 처음에 난 황해도 평안도를 두루 돌아다녔지만 마흔 살 무렵엔 아예 남쪽지방으로 이주했어요. 정감록이 약속한 구원의 땅은 남쪽에 주로 많았거든요. 난 계룡산 언저리를 배회하기도 했고, 삼남지방의 십승지며 수많은 길지를 찾아 일일이 답사했지요. 그렇게 여러 해를 지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됐어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더군요. 백:거사님이 남하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군요. 거사님이 남쪽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도 혹시 서북 출신의 술사들이었나요? 박:그러니까 1770년대였어요. 정감록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지요. 바로 내가 관련된 1782년 12월의 정감록 사건만 해도 실은 그 증표가 아닐까 해요. 사건 관련자들은 대부분 서북 출신의 술사들이었어요. 예컨대 반역죄로 죽은 문인방 선생님만 해도 평안도 양덕 출신이었지요. 함께 죽은 문 선생님의 제자 백천식도 참 불쌍해요. 문 선생님은 천문과 점술의 대가였어요. 우린 모두 선생님의 말씀대로 정감록이 예언한 새날이 곧 밝아올 줄로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시기상조였던가 봐요. 백:1782년 내란음모 사건의 주모자 문인방을 선생님이라고 깍듯이 대접하는 걸로 보아 거사님도 그 부하가 분명하군요? 박:문 선생님은 당시 충청도 진천의 산골에 머물렀어요. 진천은 마침 계룡산에서 별로 멀지 않은 데다가 그곳이 십승지로도 손꼽히는 길지랍니다. 특히 목천이 아주 좋아요. 뿐더러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 해서 진천이야말로 살기에 가장 좋단 말도 있잖아요. 게다가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 장군이 잉태된 곳이라지요. 그 서기가 아직 남아 있는 곳이라 문 선생님과 제자들은 진천 땅에 머물렀던 거지요. 백:정리하면 문인방과 거사님은 서북 출신으로 정감록을 충청도에 퍼뜨린 전도사였다는 말씀이 되는군요. 박:우리 말고도 여러 명이 있었어요. 황해도 평산 사람으로 지관을 업으로 삼았던 권택인이란 친구가 마침 기억나는군요. 그 친구는 신형하란 젊은이와 친했는데 정감록을 가르쳐 준 일이 있었대요. 한데 이 신형하란 친구가 1780년대 초반엔 이미 전라도로 내려와서 활동 중이었지요. 나나 문 선생님과 함께 연결이 돼 있었지요. 어쨌거나 우리가 삼남지방에 처음 내려갔을 적만 해도 거기 사람들은 정감록이란 이름만 들었지 내용은 다들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더군요. 그러다 보니 우리가 움직이는 곳마다 정감록이 차츰 퍼져나갔어요. 우린 길지도 살필 겸 직업이 풍수와 점술이라 각지를 떠돌며 돈도 벌 겸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어요. 그런데 꼬리가 길면 밟힌단 말이 있잖아요. 전국의 길지를 배회하며 정감록을 선전하는 우리에게 혐의를 둔 사람들이 있었어요. 우린 마침내 관가에 고발을 당했지요. 문 선생님이나 나나 굴비 두름처럼 한데 묶여 역모죄로 엄한 처벌을 받았어요. 우리에겐 세상을 바꿀 뜻이 있긴 했어요. 하지만 역량이 부족해 무엇 하나 변변히 준비한 것은 없었어요. 한데도 반역자란 누명을 쓴 채 관헌에 붙들려가 죽게 됐으니 참 기막힌 노릇이었지요. 백:참 딱한 말씀이네요. 어쨌거나 거사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해지네요. 요컨대 거사님을 비롯한 서북 출신 술사들이 정감록을 전국 각지에 유행시킨 주인공이었단 점은 틀림없군요. ●유랑 지식인들의 사회적 생리와 정감록 박:지금 생각해 보면 나 같은 사람들은 유랑 지식인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 같아요. 경제적인 기반이 없이 ‘글을 팔아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거나 ‘혀를 놀려서 먹고 사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라 늘 떠돌아 다녔어요. 이런 사람들이 미약하나마 하나의 사회세력을 이룬 것은 역시 18세기가 아니었을까 해요. 우리들 가운데 일부는 이른바 몰락한 양반이었지요. 그러나 대다수는 서얼이나 평민이었다고 봐요. 문인방 선생님이나 나는 틀림없는 평민이지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가난한 하급지식인으로서 연명할 수 있게 된 것은 서당과 같은, 이를테면 사설 교육기관이 전국 어디나 많이 생겼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훈장 목숨은 파리 목숨 같았어요. 요새 말로 고용이 불안정해 늘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고요. 백: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 정약용(丁若鏞·1762∼1836)도 18∼19세기 한국사회에 서당이 많이 늘어난 것을 냉소적으로 기술한 적이 있더군요.“군현에는 각 면마다 수십 개 마을이 있고, 대략 네댓 마을에 반드시 서당 한 개 씩은 있다. 서당마다 한 훈장이 앉아 있는데 글을 잘못 가르치는 시골의 무식한 훈장인 주제에 아이들을 수십명이나 거느린다.”라고 했어요. 박:정약용의 말이 좀 지나친 감은 있어요. 그래도 전국 어디서나 초보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서당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말은 분명히 맞아요. 이런 상황이 지속돼 평민이나 서얼 출신의 중하급 지식인이 대량으로 배출됐던 거지요. 바로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았단 이야긴데 우리들은 애초부터 과거에 붙기도 어려웠고, 요행으로 시험에 붙었댔자 벼슬길에 나갈 가능성도 거의 없었죠. 신분과 지역이란 이중의 벽을 좀체 넘어설 수가 없었다는 말이지요. 사정이 그렇고 보니 먹고 살길이 막연해 유랑의 길로 나서는 경우가 아주 많았지요. 이를테면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지식인들이라서 현실 비판적이었고 자연히 정감록을 애호하는 핵심적인 부류가 됐어요. 백:그렇군요. 남부지방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정감록을 퍼뜨린 문인방이나 거사님이야말로 18세기에 등장한 유랑 지식인의 전형이었군요. 자력으로는 당면한 정치 및 사회적 불만은 물론이고 생활고조차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거사님과 같은 분들은 정치적 예언에 실낱 같은 희망을 걸었던 거죠. ●정감록 사건에 대한 집권층의 대응조치 박:정감록을 빌미로 역모를 꾀한다는 고발이 있기만 하면 조정은 잔뜩 긴장했던 것 같아요. 정감록을 모두 압수해 불태워 버리자든가 정감록의 출처를 끝까지 조사하자는 의견이 있었거든요. 백:그러나 미봉책을 편 것도 사실이었어요.1739년 정감록이 처음 나왔을 때도 국왕 영조는 함경도 경성에 살던 유학자 이재형 부자를 한직에 등용해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어요. 조선왕조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이 높았는데도 초야에 묻혀 있던 한두 명의 선비를 발탁한다고 상황이 해결될 수 있었을까요? 박:아마 국왕은 민간에 퍼져 있던 정감록을 모두 거둬들이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해요. 정감록을 유포한 장본인을 체포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겠죠. 공연히 소란을 피웠댔자 민심만 자극될 테니 어떻게 하겠어요? 차라리 미봉책을 펴는 게 상책이란 판단을 한 걸 테죠. 백:그 말씀이 그럴 듯하군요. 거사님이 처벌 받은 지 한 해 뒤 해주에서 또 정감록 사건이 일어났어요. 거사님의 고향 해주에서 말이죠. 그런데 국왕 정조의 처분은 매우 관대했어요.“‘정감록’이 안필복의 집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 집사람들이 저술한 것은 아니다. 큰 죄는 아니다.”라면서 관련자들을 모두 풀어주라고 했어요. 예언서라는 게 허무맹랑한 내용뿐이므로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말했지요. 박:그러나 국왕 정조는 정감록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이상한 일이 황해도에서 발생할까 염려한다.”고 했다는 점을 기억해야죠. 국왕은 정감록을 이용해 왕조에 대한 반역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실제로도 ‘정감록’을 빙자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지 않아요. 백:해주 사건이 터진 지 2년 지나서였죠.1785년 서울을 비롯해 각지의 인사들이 두루 가담한 이른바 이율과 양형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래서겠지만 같은 해에 전라도 구례 화엄사의 윤장(允藏) 스님은 절간에 ‘정감록’을 숨겨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적발돼 흑산도로 유배됐어요. 그렇게 본다면 1783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석방된 안필복의 경우는 오히려 예외로 생각되기도 하는군요. 박:1785년 이후에도 ‘정감록’ 사건은 계속 발생했어요. 신분차별과 지역차별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봐요. 백:조선의 통치자들은 유교적인 이데올로기를 심화시킴으로써 정감록의 유행을 차단하려 했지만 그렇게 간단하진 않았다는 결론이 나오는군요. 늦어도 1780년대엔 ‘정감록’이 전국 각지로 퍼져나간 게 틀림없어요. 정감록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평민 출신의 유랑 지식인들 특히 서북 출신 술사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네요. 거사님은 바로 그 주역이지요. 박:내가 죽은 지 200년도 더 지났지만 이렇게 회포를 풀 수 있어서 퍽 다행이었어요. 이젠 정말 편히 잠들겠어요. 나라의 평안을 축수합니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사라져가는 생활유물 한자리에

    의복·식기·침구·지도 등 사라져가는 생활유물들이 한자리에 전시된다. 국립민속박물관(관장 김홍남)은 지난 1993년 서울 경복궁터로 자리를 옮긴 뒤 10여년간 수집한 유물 6만점 중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170여점을 선보이는 ‘유물수집 10년(1995∼2004)’특별전을 11일부터 개최한다. 다음달 27일까지. 민속박물관은 지난 1945년 ‘국립민족박물관’으로 설립인가된 뒤 수차례의 이름 변경과 이전을 거쳐 현재 자리까지 왔다. 그러나 경복궁 복원계획에 따라 또다시 이사해야 할 처지다. 따라서 이번 특별전은 박물관이 지난 10년을 결산함과 동시에 새 시대를 준비하는 의미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특별전은 의·식·주와 사회생활·과학기술 등 5가지 주제로 나눠 분야별 대표적인 유물들을 엄선해 선보인다. 의복·장신구를 비롯, 식기·도자기·가구·침구·침선구 등과 함께 관혼상제·놀이·교통통신·천문·풍수지리 관련 다양한 유물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특히 구한말 남녀 예복이 전시돼 조선 후기와 비교해 달라진 복식을 살펴볼 수 있으며, 함경도 지역에서 사용된 ‘석간주항아리’, 혼례에 사용되던 목안보와 가마, 바둑판, 약저울 등도 흥미롭다. 이와 함께 독도가 우리 땅으로 명확히 표시돼 있는 고지도 2점이 공개돼 눈길을 끈다. 지난 1822년 제작된 ‘해좌전도’(海左全圖)에는 독도가 ‘우산(于山)도’로 표시돼 있으며, 대마도도 조선 영토에 포함된 것으로 묘사돼 있다. 또 18세기 실학자 위백규가 편찬·간행한 필사 채색본 ‘환영지 조선팔도총도’는 울릉도와 지금의 독도인 우산도를 명기하고 있을 뿐 아니라 경상도 동남쪽에 대마도, 거제 등이 표시돼 있다. 김홍남 관장은 “전시되는 유물 모두가 대표성을 띠고 있으며, 급속히 사라져 가는 생활유물을 살펴보고 향후 유물 수집방향을 모색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강기훈 유서대필’ 진상 밝혀질까] 진상규명 쟁점은

    강기훈씨 유서대필 사건의 쟁점은 강씨가 전민련 동료였던 고 김기설 당시 사회부장의 유서를 대필했느냐의 여부다. 당시 검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모두 12차례의 문서감정을 의뢰했다. 국과수가 감정대상으로 정한 문서들은 당시 언론에 공개된 유서와 김씨가 누나에게 선물로 준 책표지에 기재된 글자, 김씨의 주민등록증 분실신고서, 전민련이 제출한 업무일지, 취업이력서 등과 강기훈씨의 집에서 압수한 화학노트, 강씨가 필사한 운동권 문건들이다. ●강씨 옥중편지 수사과정 제외 왜? 문서감정 과정에서 김씨의 정자체와 속필 감정, 강씨와 김씨의 문서동일 여부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다. 박연철 민변 부위원장은 “유서와 전민련 수첩 필체가 동일인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유서와 강씨의 진술서는 다른 글씨라는 것이 육안으로 쉽게 판별된다.”며 수사 과정에서 강씨의 옥중편지가 사본이라는 이유로 제외됐던 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전민련 사회국 업무일지도 사건의 진상을 쥐고 있는 핵심적인 자료다. 당시 업무일지는 세 사람이 작성한 것으로 밝혀져, 검찰이 그 가운데 한 사람인 임무영씨를 유서대필범으로 수사한 것을 두고 대책위측은 강씨가 유서대필범이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책위측은 검찰이 강씨의 유죄를 인정한 뒤 전민련 등 관계기관이 수집한 30여점의 증거자료를 법원에 제출, 그중 김씨가 남긴 14점의 필적에 대해 증인들이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원이 오로지 국과수 감정인의 감정에만 매달렸다는 부분도 석연치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서대필 경위도 꼭 밝혀야할 사안 유서대필 경위도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지난 1991년 4월27일쯤부터 5월8일 사이 서울 모처에서 강씨가 김씨의 유서를 작성해주었다는 것이 검찰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수사를 총지휘했던 강신욱(대법관) 당시 서울지검 강력부장은 “유서대필 사건은 절차상 아무런 하자도 없었다.”면서 “강씨의 변호인이 20여명이나 되고 변호인이 수시로 강씨를 면회했는데 사건 은폐가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7) ‘정감록(鄭鑑錄)’이 정감록인 까닭?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7) ‘정감록(鄭鑑錄)’이 정감록인 까닭?

    예언서는 예언가의 이름을 빌려 제목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단군조선 때의 ‘신지’, 후삼국의 ‘도선’, 조선의 ‘남사고’와 ‘이토정’은 유명한 예언가였다. 그들의 이름을 딴 ‘신지비사’‘도선비기’‘남사고비결’‘토정비결’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인용한 예언서였다. 대부분 내용은 위작으로 보이지만 신지비사는 이미 자취를 감췄고, 나머지 책들은 아직 남아 있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정감록’은 어떠한가? ‘영조실록’에 보면 ‘정감의 참서’라고 돼 있어 예언가 정감이 쓴 책으로 보아야 옳다. 아닌 게 아니라 현전하는 정감록을 읽어 보아도 예언가 정감이 중요하다. 정감은 누구인가? 그는 실존 인물이었는가? 만약 가공 인물이라면 하필 왜 정감인가? 그리고 무슨 이유로 ‘정감비기’ 또는 ‘정감비결’이 아니라 ‘정감록’인가? 역사상 최초로 문제가 됐던 정감록은 어떻게 생긴 책이었을까? 나는 정감록이 정감록인 까닭을 좀더 정확히 알고 싶다. 이번 호에서 검토될 사항들은 지금까지 한번도 다뤄진 적이 없는 새로운 내용이다. 지난 호와 마찬가지로 이번 호에서도 정감록의 기원을 밝히려는 나의 새로운 시도는 계속된다. ●실존 인물 정감이 정감록의 저자?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면 17세기 초반에 정감(鄭鑑)이란 관리가 있긴 했다. 그는 흔히 소과(小科)라 불리는 생원진사시험에 합격한 뒤 추천을 받아 관리가 됐다. 실록엔 형조 정랑(正郞)이란 중견관리로 나와 있다. 관리로서 제법 성공한 편이다. 그는 당시의 도덕적 기준에 어긋난 행위를 많이 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광해 8년(1616) 5월 국왕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사헌부는 정감의 치부를 샅샅이 들춰냈다. 그는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도 말썽을 일으켜 처벌된 사실이 있다고 했다. 일가친척이 성관계를 가진 여성을 데려다 첩으로 삼았다고도 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의 독직(瀆職) 행위였다. 고위층의 청탁 유무와 뇌물의 많고 적음으로 판결을 내린다 했다. 사헌부의 주장대로 정감은 부도덕한 부패 관리의 전형이었을까? 강경한 사헌부의 처벌 요구와는 달리 국왕이 정감에게 내린 처벌은 그야말로 솜방망이 처분이었다. 광해군은 정감의 벼슬을 바꾸는 소극적인 조치를 취했을 뿐이다. 불법 행위에 대한 사헌부의 고발이 한낱 풍문에 근거한 것이라 중벌이 가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정감을 애써 두둔할 생각이 내겐 없다. 내 관심은 17세기 전반 형조정랑을 지낸 정감이 1739년 서북지방에서 출현한 ‘정감의 참서’와 무슨 관계인가 하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아무 관계도 없었다. 형조정랑 정감은 생전에든 사후에든 단 한번도 예언서 ‘정감록’의 저자로 간주된 적이 없었다.1782년 정감록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사건 피의자 박서집의 진술이 참조된다. 그는 정감록의 유래에 대해 “그것이 처음 나온 것은 고려 왕조 때라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박서집의 이런 진술을 취조관들도 문제삼지 않았다. 요컨대 정감록의 저자 정감은 가공 인물이었던 것이다. ●정씨가 조선왕조의 대안? 가공 인물 정감이 하필 정(鄭)씨인 이유는 무엇인가? 250개나 되는 한국의 많은 성씨들 가운데서 굳이 ‘정’을 가공의 예언자에게 준 까닭은 무엇일까? 역사적 사실에 눈을 돌려보자. 조선 왕조가 출범한 14세기 말부터 정감록이 출현한 18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정씨 성을 가진 여러 사람들이 반 왕조적인 인물로 큰 역할을 담당했다. 첫째, 정몽주(鄭夢周)를 빠뜨릴 수 없다. 그는 고려 말의 대표적 유신(儒臣)이었다. 충의(忠義)를 다하기 위해 그는 조선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의 회유를 끝까지 물리쳤다. 결국 태종 이방원이 보낸 자객의 손에 의해 개성의 선죽교(善竹橋)에서 무참히 격살(擊殺)됐다. 흥미롭게도 ‘정감록’에 보면 정감이 정몽주를 후손이라 부르고 있다. 둘째, 정도전(鄭道傳)도 거론해야 옳다. 그는 조선 개국의 중심인물이었다. 조선의 수많은 제도가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런 까닭에 현대 역사학자들 중에는 정도전을 ‘조선왕조의 설계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도전은 정말 유능한 인물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들의 갈등에 관련돼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셋째, 정여립(鄭汝立)이 있다. 재능과 학식이 탁월했던 그는 선조 연간에 불붙기 시작한 당쟁에 휘말려 국왕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향리에서 세월을 보내던 정여립은 끝내 반역자로 낙인 찍혀 관군의 추격을 받게 된다. 그는 도주하던 끝에 깊은 산골로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람들은 그가 정감록을 지었다고 보기도 하고 그의 비참한 운명을 애달파하기도 했다. 이밖에 영조 때 역모를 일으켰다가 죽은 정희량(鄭希亮)이 주목된다.1728년 그는 이인좌 등과 함께 남부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처음엔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지만 그는 거창에서 관군에 붙잡혀 사형 당했다. 그런데 그가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정희량이 아직 살아 있고 머지않아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 온다는 유언비어가 각지에 유행할 정도였다. 그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기인(奇人)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며 민중의 기림을 유독 많이 받았다. 알다시피 역사상 반왕조적인 인물로 지목된 사람은 결코 한둘이 아니었다. 이씨와 김씨를 비롯해 여러 성씨가 골고루 뒤섞여 있었다. 그럼에도 위에서 언급한 몇몇 정씨는 민중들의 기억에 깊이 각인된 존재였다. 정여립과 정희량의 일생은 특히나 비극적이었고 신비한 부분도 적지 않았다. 민중들은 그들에 관한 추억을 더듬으며 더욱더 정씨를 이씨 왕조의 대안으로 삼게 된 것도 같다. 물론 민중의 이러한 역사인식이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정성진인’에서 ‘정감’까지 16세기 말 정여립이 죽고 나서부터였다. 다음은 정씨 왕조가 들어설 차례란 생각이 민중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이런 생각이 차츰 영글어 17세기엔 이른바 ‘정성진인(鄭姓眞人)’이 민중들 사이에 새로운 화두로 등장했다. 달리 말해 정씨 성을 가진 완벽한 인간이 출현해 민중을 도탄에서 구해낼 거란 믿음이었다. 그런 인식이 널리 퍼진 가운데 18세기 전반 정희량이 붙들려 죽었다. 그는 군사를 일으켰을 때 자신에게 유리한 ‘정성진인설’을 적극적으로 사방에 유포하지 않았을까 짐작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정희량은 현실에선 실패했다. 그럼에도 민중의 뇌리엔 ‘이씨 왕조를 대체할 이는 정씨뿐이다.’라는 믿음이 더욱 굳어졌다.18세기에 등장한 정감록은 민중의 그런 생각에 확신을 불어넣어준 것으로 봐야 한다. 정감록의 핵심 내용은 정씨가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예언이었기 때문이다. ●감(鑑)이란 이름의 뜻은? 좀더 생각해 보면 정감록에 예언가의 이름을 ‘감(鑑)’이라 설정한 이유도 무척 궁금하다. 그것을 일부 이본엔 ‘감(堪)’이라고도 했다. 예언가의 이름에 무슨 뜻이 숨어 있는지 따져 보고 싶다. 가공 인물을 대단한 예언가로 부각시키려 했을 때 우선적으로 고려될 점은 이름에 담긴 상징성이었을 것이다. 고도의 상징성을 가진 이름이라야 예언서의 독자들 그리고 민중을 설득해 믿게 만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바로 이러한 숙고의 결과가 ‘감(鑑)’ 또는 ‘감(堪)’이란 글자의 선택이었다고 본다. ‘감(堪)’은 감여(堪輿) 즉 풍수지리를 뜻한다. 달리 표현하면 ‘감’은 천도(天道),‘여’는 지도(地道)라고도 한다. 감이란 글자를 이름으로 쓴다면 본인이 풍수가 또는 예언가임을 이미 천명한 셈이 된다. 현전하는 정감록은 풍수지리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감(堪)’은 책의 성격에 적합한 이름이다. 하지만 내가 본 정감록의 대부분은 ‘감(鑑)’을 주인공으로 정해 두고 있다.‘거울 감(鑑)’자엔 도대체 무슨 깊은 뜻이 담겨 있어 그런가? 고대로부터 한국에선 거울이란 사물은 매우 특별한 존재로 인식돼 왔다. 거울은 과거, 현재 및 미래를 비추는 마술적인 존재로 주목돼 왔다. 청동기 시대에 제작된 다뉴세문경은 당시 최고지배층이었던 제사장들이 소유했던 특수한 물건이었다. 주술을 비롯한 종교적인 목적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대에도 거울의 마술적 속성은 여전하다. 무당들은 누구나 명도(明圖)라는 거울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 명도를 이용해 집을 나간 사람을 찾거나 잃어버린 물건의 행방도 점친다. 무당들은 명도 거울이 신(神)의 영력(靈力)을 상징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바로 그 거울이 있어서 인간의 미래를 투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거울이 국가의 운명을 예언하는 데 동원된 적도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아직 궁예의 부하로 있던 시절, 낡은 청동 거울에 새겨진 예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궁예의 몰락과 왕건의 즉위, 그리고 후삼국의 통일을 예언한 것이었다. 중국 고대에 ‘은감불원(殷鑑不遠)’이라는 말도 있었다. 은(殷)나라의 거울은 먼 데 있지 않다는 말이다. 부연하면 주(周)나라 왕은 바로 앞선 시기에 존재한 은나라의 역사를 돌이켜보란 뜻이다. 다른 사람의 실패를 거울로 삼으란 것이다. 이 경우 거울이란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정감록의 주인공 정감 역시 역사의 교훈을 알려준다. 하지만 좀더 중요한 강조점은 다른 데 있었다. 정감록은 거울이란 이름을 가진 정감을 저자로 내세워 거울이 가진 주술성을 빌리고자 했다. 한마디로 말해 거울의 신비한 힘에 의존한 정감록은 결코 한 자도 틀리지 않는 예언서란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려 했던 것이다. ●‘록(錄)’은 조선후기에 등장한 예언서 따지고 보면 예언서 ‘정감록’의 제목이 ‘록(錄)’자로 끝나는 것도 범상한 일은 아니다. 이게 웬 말인가 되물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려고 역대 예언서의 이름을 모두 조사해 봤다. 놀랍게도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 전기에 발견된 예언서 중에 ‘록’자로 제목이 끝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15세기까지 우리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한 예언서들은 그 제목이 무슨 무슨 비기(秘記), 비사(秘詞)’ 또는 유훈(遺訓)이라 돼 있었다.‘기’와 ‘사’는 한문학의 장르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의 예언서는 은연중에 문학성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짐작은 실제로 예언서를 검토해본 결과와 일치한다. 한시와 같은 분위기를 가진 운문(韻文) 형태의 예언서들이 많았다. 그에 비해 ‘훈’자를 예언서 제목으로 삼은 경우는 도덕적인 명령을 내세우려는 의도가 뚜렷하다. 고려시대에 나온 ‘해동고현유훈(海東古賢遺訓)’이 대표적인 예다. 이 ‘유훈’도 문장의 표현 방식은 역시 운문이었다. 조선 후기에 출현한 ‘정감록’은 그 제목부터 새롭다.‘록’은 ‘실록’을 연상시킨다. 수사의 멋과 맛을 중시하는 과거의 예언서와 달리 앞으로 일어날 사실을 묵묵히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태도와 정신이 엿보인다. 예언서 정감록은 서술양식도 과거의 운문에서 벗어나 산문(散文)이 되었다. 한문학을 대표하는 시문(詩文)을 버리고 역사책의 전형인 편년체(編年體)를 택하거나 유교 경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화체를 선택했다. 정감록은 기왕의 예언서와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서술방식을 채택했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18세기의 정감록은 한글본이었다! 정조 6년(1783) 1월에 발생한 정감록 사건의 연루자 안필복은 자기가 읽은 정감록에 대해 상세히 진술했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그가 집에 소장했던 정감록은 책자의 길이가 52∼62㎝, 두께는 4㎝,200장 정도 분량이었다. 정감록은 형태와 크기에 있어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여느 한적(韓籍)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사실은 정감록이 백지에 한글(諺文)로 적혀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필사본이었다. 안필복의 진술이 있기 한 해 전에도 정감록 사건이 있었다. 그때 피의자 박서집은 정감록에 대해 “저는 어렸을 때 단지 한글로 된 ‘정감록’을 보았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박서집의 출생 연도를 감안하면, 그가 정감록을 읽은 시기는 1740∼50년대에 해당한다. 아마도 1739년 최초로 조정의 관심을 끌었던 정감록은 박서집이 읽은 한글본 정감록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런데 그 당시 유행한 ‘정감록’은 오늘날 남아 있지 않다. 비록 그렇기는 해도 정감록이 본래 한글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다. 20세기에 와서 정감록을 집대성한 여러 편찬자들뿐만 아니라 정감록을 연구한 학자들도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정감록이라 하면 한문으로 된 ‘감결(鑑訣)’을 원본으로 간주하는 게 일반적이었다.20세기 초 ‘비난정감록진본(非難鄭鑑錄眞本)’을 편찬한 현병주는 ‘감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본장의 기록문자가 즉 정감록의 원본이다. 본장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전 사회를 통하여 오백년간의 시선이 집주(集注)하던 정감록의 편명이 성립된 것이다.” 그 뒤의 다른 연구에서도 정감록이라면 으레 한문본을 염두에 두었을 뿐이다. 이 한문본은 18세기의 한글본 정감록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을까? 이것은 반드시 규명해야 할 장래의 과제다. ●새 예언서의 출현은 조선후기 사회문화의 변화를 반영해 정감록의 등장은 조선 후기 사회에 일어난 사회문화적 지각변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선 글을 읽고 쓰는 것이 더이상 극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은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시기엔 내면의 미묘한 감정이나 사물의 복잡다단한 성격을 상세히 서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서사적인 글쓰기가 유행하게 돼 정감록과 같은 편년체 또는 대화체 서술이 일반화된 것이다. 책이 흔해진 것도 주목할 만하다. 종이 생산량도 늘어났고 소비도 활발해 정감록과 같은 필사본 예언서가 유행했다. 그런가 하면 상층 지식인들 사이에선 실사구시(實事求是) 즉 사실에 입각해 진리를 추구하는 지적 분위기가 유행했다. 정감록을 향유한 하층 지식인과 민중들도 사실성을 강조하는 시대적 담론에 그 나름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구태의연한 ‘정감비결’이나 ‘정감비기’가 아니라 하필 ‘정감록’이 된 데는 다 그만한 시대적 이유가 있었다. 정감록이 한글본이었다는 점도 중요한데 지식의 생산과 소비는 더이상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정감록과 더불어 새 시대의 동은 터 오고 있었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그 영화 어때?]영화 ‘하와이,오슬로’-우리… 아는 사이였던가요?

    [그 영화 어때?]영화 ‘하와이,오슬로’-우리… 아는 사이였던가요?

    노르웨이 오슬로 밤거리를 한 남자가 달리고, 그 뒤를 다른 남자가 뒤쫓는다. 아기와 부모를 태운 구급차 한대가 어둠을 뚫고 돌진하던 중 달리던 남자를 치어 숨지게 한다. 지나던 사람들이 사고 현장으로 모여든다. 에리크 포페 감독의 노르웨이 영화 ‘하와이, 오슬로’(Hawaii,Oslo·7일 개봉)는 불행한 이 사고 현장에 낯선 사람들이 어떻게 모여들게 됐는지를 추적해간다. 크게 네 가지 이야기가 영화속에 퍼즐처럼 짜맞춰져 녹아있다. 모든 이야기는 레온(얀 군나 뢰이스)이란 남자의 생일날 벌어지며, 이야기속 모든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가 스치고 얽혀 연결고리를 만들어 나간다. 꿈에서 본 장면이 반드시 현실로 이뤄지는 ‘예지몽’을 꾸는 비다르(트론 에스펜 세임). 그는 그가 돌보는 환자 레온이 구급차에 치여 숨지는 꿈을 꾼 뒤 그의 죽음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레온은 마음이 불안하면 달리는 습관이 있다. 오늘은 그가 11년전 헤어진 옛 사랑 오사를 만나는 날. 레온은 오사가 나타나길 바라면서도 초조한 마음에 무작정 거리를 내달린다. 무장강도로 복역중인 레온의 형 트리그베는 동생 레온의 생일을 맞아 외출 허가를 받고 나오지만, 또 범죄를 저지르고 하와이로 달아나려 한다. 프로데와 밀라는 희귀병에 걸린 아기를 미국으로 가 치료를 해주고 싶지만, 큰돈이 없어 애를 태운다. 여기에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거리를 배회하는 두 소년, 그의 어머니로서 자살을 기도하는 전직 가수, 그 여가수를 흠모하는 구급차 운전사 등 영화는 후반부로 치달으면서 이 모든 사람들을 마치 꼬인 실타래를 풀듯 하나하나 재배치하고, 또 하나의 이야기 줄기로 수렴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비다르의 꿈에서 예고된 것처럼 레온은 거리를 달린다. 프로드 부부는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아기와 함께 구급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한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들은 어김없이 서로 충돌해 사고 현장에서 산자와 죽은자로 만날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작지만 큰 기적 하나를 선택한다.‘KBS 프리미어’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작품.12세 이상 관람.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김근태 “혁신 마인드 없는 직원 트레이드”

    김근태 “혁신 마인드 없는 직원 트레이드”

    보건복지부에 ‘혁신’ 불호령이 떨어졌다. 김근태 장관이 지난 2일 열린 복지부 월례조회 자리에서 ‘직원 트레이드’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이같은 김 장관의 의중을 파악하느라 분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장관은 정책 추진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 뒤 “스스로 판단해 정책 업무보다 집행적 업무가 더 맞다고 생각되는 분들은 적성이 맞는 곳으로 가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고 밝혔다. 여기서 집행적 업무란 예산 배분이나 복지시설 관리 같은 단순 반복성 일을 뜻한다. 정책개발 같은 창조성이 결여된 분야다. 혁신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격 미달자’에 대해서는 특단의 인사조치를 강구하겠다는 경고로 해석된다. 김 장관은 또 “국민들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 수 있도록 복지부가 변해야 한다.”면서 “앞으로 팀제 도입 등을 위해 철저히 준비할 것이나 군살을 빼고 효율적으로 일을 하자는 것인 만큼 동요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복지부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기획능력과 정책능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한 직원은 “직원들 사이에 불안감이 팽배하지만 도태되지 않기 위해선 필사의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강충식기자 chungsik@seoul.co.kr
  • [사설] 수사권 논란 검찰이 결단할 때다

    검찰이 사면초가에 놓여 있다. 공직부패수사처 신설,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과 더불어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검찰의 피의자 신문조서 증거능력 제한과 법정 피고인 신문제도를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검찰이 전례없는 변혁 국면에 직면해 있다.20여일 전 취임 일성으로 인권검찰을 강조했던 김종빈 총장이 ‘사회질서 우선’으로 돌아선 것도, 긴급 검사장회의 소집에 이어 전국 검찰의 의견을 수렴하기로 한 것도 검찰이 느끼는 위기감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검찰은 권력층 수사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수사권까지 경찰에 일정부분 할애해야 하는 상황에서 미국식 공판중심주의 방식으로 형사소송 절차가 바뀌면 소송만 대행하는 ‘공판검사’ 수준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검찰에 대한 역풍은 검찰 스스로가 불러들인 측면이 적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이 법무부 업무보고 때 지적했듯이 시대변화를 거부한 채 ‘과거의 제도’에 안주해왔던 게 사실이다.‘정치검찰’이라는 오명도 검찰의 무소불위의 권력에서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검찰이 정치적인 수사를 동원하며 무작정 반발하는 것은 잘못이다. 수사권 조정문제도 해묵은 경찰자질론으로 맞불작전을 펴는 것은 올바른 접근법이 아니다. 중요 범죄 이외에는 수사주체로서 경찰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검찰은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각오로 먼저 결단해야 한다. 그것이 검찰이 사는 길이다. 그리고 국민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수사 관행을 바꾸려면 목표를 설정한 뒤 단계적으로 접근하는 게 옳다고 본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끝장 토론’식으로 결론낼 사안이 아니다.
  • 과속에 무너진 ‘철도강국’ 자존심

    |도쿄 이춘규특파원|어처구니없는 열차사고가 잇따르면서 일본의 ‘열차 안전신화’가 무너지고 있다.‘철도 대국’이라는 일본인들의 자존심도 구겨졌다.25일 효고현 열차 탈선 사고에 앞서 도쿄시내 전철 건널목에서는 열차가 진입하는데도 간수가 차단기를 올려 행인들이 사망하는 어이없는 사고도 발생했다. 지난해 10월 니가타현 지진 때는 신칸센도 탈선했다. ●사고순간, 승객 일제히 공중에 떠 이날 사고는 승객이 가장 많은 출근·통학 시간에 일어나 인명피해가 더욱 컸다. 생존자들에 따르면 사고 순간 승객들은 일제히 공중에 뜬 뒤 앞으로 날아가거나 처박혔다고 한다. 승객들은 “가가강…”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객차가 흔들린 뒤 순식간에 굉음이 들리며 아수라장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한 승객은 “속도가 꽤 됐다. 순식간에 유리창이 깨지고 몸이 회전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다.”고 사고순간을 전했다. 승객들은 열차가 전 역을 예정보다 조금 늦게 출발하면서 “늦어서 미안하다.”는 방송을 한 뒤 속도를 올렸다고 말했다. 열차가 들이받은 맨션의 6층에 사는 여성(26)은 “지진인 줄 알고 일어났더니 밑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면서 “한신대지진 때보다 진동이 더 컸다.”고 전했다. ●“지옥 같은 참사현장” 사고 현장 부근에는 “살려달라.”는 구원요청이 빗발치고 울음과 신음소리가 곳곳에서 어지럽게 들렸다. 비릿한 피 냄새도 진동했다. 사고로 처참하게 깨진 문이나 창문으로 필사적으로 탈출하는 승객들도 적지 않았다. 맨앞 차량에 타고 있던 여학생(18)은 “정신을 차려 보니 밖으로 튕겨나와 있었다.”고 말했다. 학생은 “주위에는 여럿이 넘어져 있었다. 부서진 펜스가 매달려 있어 그걸 잡고 밖으로 올라왔다.”고 덧붙였다. 구조작업은 경찰과 소방서·자위대원과 자원봉사대 등이 속속 현장에 도착, 긴박하게 이뤄졌지만 희생자는 점점 늘고 있다. ●과속·과실로 인한 인재 가능성 정확한 사고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본 언론들은 초보기관사와 과속, 낡은 설비 등이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사고로 이어졌을 것으로 분석했다. 열차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남성 회사원(47)은 “사고현장 직전에 완만한 커브가 있다. 평상시에는 감속했지만 오늘은 그대로 달렸다.”며 과속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회사측은 “계산상으로는 커브길에서 시속 133㎞ 이상으로 달리면 탈선한다.”고 설명했다. 열차를 운전한 기관사는 올해 23세로 입사한 지 11개월밖에 안된 초보자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 NHK는 사고 선로의 자동 브레이크 시스템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구형이어서 사고를 막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이밖에 1990년대 이후 철도 회사들이 비용절감과 절전 차원에서 차량을 철에서 가벼운 알루미늄이나 스테인리스로 바꾼 게 결과적으로 희생을 키웠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현재 운행 중인 일본내 열차차량의 절반 이상이 경량 차량이다. 도시 전철은 물론 신칸센도 마찬가지다. 사고 열차는 스테인리스제의 차량이었다. 제조·유지관리 비용, 전력 소비량을 줄이고 소음도 낮추는 효과가 있다. 이처럼 효율은 높였지만 측면의 충격에는 약하다는 문제를 노출했다. taein@seoul.co.kr
  • [길섶에서] 어린이 귀족/심재억 문화부 차장

    소싯적, 종아리가 터져라 회초리를 맞는 나를 감싸며 어머니가 “그만하면 알아 듣겠다.”고 말렸다가 “‘호로자식’을 만들려느냐.”는 아버지 호통에 그만 뒷걸음질치던 일이 생각난다. 그렇듯 천덕꾸러기와 다를 바 없이 자라 고작 농노와 다름없는 일을 할 뿐인 필자 같은 부류에게 “한국에도 머잖아 ‘어린이 귀족’이 나올 것”이라는 한 외국 기업인의 전망은 여간 입맛 쓴 것이 아니다.‘지금도 모자라서….’하는 생각 때문이다. 사실, 그런 전망 이전부터 우리 주변에는 과잉보호 속에서 세상을 오로지 자기 눈으로만 보고, 자기 방식으로만 해석하려 드는 ‘귀족적 어린이’가 넘쳐났다. 그들은 ‘존경’보다 ‘냉소’에 익숙하고,‘배려’ 대신 ‘배제’를 택한다. 그렇게 자라 그런 것만 봐왔으니 도리가 없다. 그 ‘어린이 귀족’이란 바로 중국의 ‘소황제(小皇帝)’ 그것이다. 단언할 일은 아니지만, 귀족처럼 먹이고 입힌다고 다 귀족이 되는 건 아닐 것이다. 의무에는 애써 무관심하면서도 권리는 필사적으로 부풀리는 세태, 끓기도 전에 넘치기부터 하는 ‘얼치기 귀족’이 어떻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알겠는가. 심재억 문화부 차장 jeshim@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4) 변산 태진스님과 정감록 사건(中)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4) 변산 태진스님과 정감록 사건(中)

    뜻밖에도 ‘정감록’에 경도됐던 사람들 가운데는 부자가 적지 않았다. 영조 때 남원의 부자 김영건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평소 유복해 보였던 김씨 일가가 비결에 쏠리게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남원의 벽보 사건을 좀더 밀도 있게 그려보면 그 답이 보일 것 같다. ●남원성에 나붙은 벽보 영조9년 7월 하순. 그믐날이 가까워 달빛조차 희미한 깊은 밤, 김영건의 두 아들은 괴문서를 남원성벽에 붙였다. 장남 원팔이 문서를 내거는 동안 아우 원하가 망을 보았다. 출입이 가장 빈번한 남문 근처에 한 장의 대형 벽보를 붙이는데 실제 소요된 시간은 극히 짧았지만, 그들 형제에게는 견딜 수 없이 긴 시간이었다. 당시 남원은 호남 굴지의 대도회라서 날마다 성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수백 명이 성안을 드나들었다. 그들의 눈에 띈 벽보 내용은 삽시간에 호남 일대로, 그리고 지리산 너머 영남 지방으로도 퍼져나갈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튿날 오전 남원부중은 괴문서 이야기로 들썩였다. 그날따라 몸이 불편해 좀 늦게 출근한 최정도 이방(吏房)은 이미 사령들이 수거해온 벽보를 훑어본 다음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조정대신을 강도 높게 비난한 구절도 그랬지만 ‘자미진주(紫微眞主)’ 운운한 것이 영락없는 반역자의 소행이었다. 이방이 알기로, 자미성(紫微星)은 자미원(紫微垣)에 속한 큰 별이다. 그것은 북두칠성의 북쪽에 있는데 천제(天帝) 또는 국왕을 상징한다. 그런데 벽보에 ‘진주’라고 했으니 한양성안 구중궁궐에 엄숙하게 앉아계신 상감께선 왕도 아니고, 자미성 정기를 받은 진짜 왕이 곧 나온다는 얘기다. 벽보엔 상감이 무도하다는 둥 동궁(사도세자)이 미쳤다는 둥 흉악한 언사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핀 이방은 새파랗게 질렸다. 잠시 후 어느 정도 마음을 가다듬은 이방은 도호부사 조호신에게 긴급사태를 보고하는 한편, 많은 정탐꾼을 풀어 성 안팎에 떠도는 온갖 소문을 즉각 수집토록 했다. 평소 성품이 침착하고 판단력이 있는 이방이었다. 그는 엄하기로 이름난 이 형방, 실무경험이 가장 풍부한 박 호장 등과 함께 수사본부를 구성했다. 그들은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소문들을 비교 종합해 믿을 만한 것을 추려내어 계통별로 분류했다. 범인을 바로 잡아들이지 않으면 어떤 변고가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라, 수사는 신속히 진행돼야 했다. 최 이방은 진행중인 수사에 관해 남원부의 우두머리인 조 부사에게 여러 차례 보고했다. 그러나 서울 명문대가 출신인 부사는 실무에 워낙 어두워 한숨만 내쉴 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많은 정보를 비교분석해 보니 성안에 거주하는 김영건과 세 아들이 용의선상에 떠올랐다. 이방은 사령들을 급파해 우선 그들을 잡아들이고, 김씨 집안에 소장된 모든 문서(文書)를 철저히 수색했다. 그날 해질 무렵 김씨의 문갑에서 두 장의 수상한 문서가 발견됐다. 큰아들 원팔의 필체가 분명했는데, 놀랍게도 벽보의 초안이었다. 두 장 가운데서도 큰 종이에 적힌 문건은 벽보보다 언사가 훨씬 과격했다. 반역자만이 쓸 수 있는, 대역무도한 ‘불온문서’였다. ●정 노인이 일으킨 해프닝 김영건에 대한 남원 사람들의 평판은 무척 좋았다. 그는 성품이 부드럽고 공손하고 단정한 데다 재산도 많았다. 여느 부자와는 달리 가난한 이웃은 물론, 집 앞을 지나는 거지들에게까지 후했다. 최 이방은 소문으로 그런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기 때문에 섣불리 김영건에게 혐의를 둘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문수사 결과를 무시할 수 없어 망설이다가 사령들을 내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영건의 집에서 결정적인 단서가 나오는 바람에 이방은 기가 막혔다. 김영건에게는 김원팔, 김원하, 김원택 등 세 아들이 있었는데 셋 다 글 잘하고 글씨도 잘 쓴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모두 아버지를 닮아 인물도 훤칠했다. 특히 큰아들 원팔은 과거시험에도 여러 차례 응시했을 정도다. 그는 남원은 물론 호남의 수부(首府) 전주를 비롯해 각지의 선비들과 두루 사귀고 있었다. 최 이방은 사실 김영건 일가와 친한 편은 아니었지만, 마음속으론 늘 김영건의 유복함을 부러워했다. 그런데 김영건 일가에게는 말 못할 고민이 하나 있었다. 수사에 동참한 이 형방이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김영건의 ‘근본’ 즉, 신분을 둘러싼 의혹이 있다고 했다. 형방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나서 이방은 여러 해 전에 있었던 정 노인 사건을 다시금 뇌리에 떠올렸다. 하루는 남원 성 밖에 사는 가난한 양반 정 노인이 읍내에 시장구경을 나왔다가 만취한 상태에서 김영건을 노비의 자손이라고 비방하는 시비가 벌어졌다. 그러나 문제의 정 노인은 평소 행동거지가 단정하지 못해 세인의 평판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인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그 뒤 정 노인은 다시 그런 ‘망령된’ 말을 꺼내지 않아 사건으로 비화되진 않았다. 기억력이 비상한 최 이방조차 이 사건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게 된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그때 정 노인이 입을 다문 것은 김영건이 적절한 조치를 취해서 그런 것이었다. 영건은 노인과 다투지 않고 도리어 그를 살며시 회유했다. 그는 노인을 정중히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서 약주를 대접했다. 싫은 노릇이었겠지만 그 뒤에도 길가에서 노인을 마주치면 먼저 반색을 했다. 남원 사람들의 눈엔 마치 도량 있는 김영건이 철없는 주정뱅이 노인을 너그러이 용서한 것으로 보였다. 이 사건은 영건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몇 년 뒤에 일어났는데, 적어도 아들인 그만은 진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김영건의 비밀 사실 김영건은 노비나 별 다름 없이 천한 사람이었다. 남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상도 함양에 노씨 성을 가진 한 양반이 살았는데, 그 집에 막산이란 사내종이 있었다. 그 아내는 이름을 분금이라 했다. 본래 가난한 농사꾼의 딸이었다. 그리고 김영건으로 말하면 분금의 아들이 분명했다. 분금은 어릴 적부터 유달리 영리했고 행실도 조심스러웠다.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그녀의 미색이 너무 뛰어났다는 점이다. 노씨네 행랑것이었던 그녀를 주인양반은 물론 그 집에 드나든 여러 양반들이 다투어 탐을 냈다. 분금은 물론 영건도 이런 집안내력을 꽁꽁 숨기며 살았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영건은 어머니가 세상을 뜨기 직전에야 그 내력을 알게 됐다. 종 막산은 영건이 아직 젖먹이였을 때 돌림병에 걸려 갑자기 죽었다. 그러자 양반들은 아예 마음 놓고 분금에게 집적거렸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대체로 취미삼아 그런 불륜을 저질렀다. 분금은 자신이 노리갯감으로 전락하는 것이 너무 원통했다. 엄밀히 말하면, 분금은 본래 노씨 집안의 여종이 아니었으므로 종살이를 계속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공공연히 노씨네 종으로 간주되는 실정이었다. 한탄으로 나날을 보내던 분금은 남편을 묻은 지 1년 만에 젖먹이 영건을 등에 업고 몰래 주인집을 빠져나와 지리산 쪽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이틀 동안 산길을 헤매던 분금은 지리산의 서쪽 자락에 있는 운봉을 지나 대도시 남원성으로 들어갔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옛말도 있지만, 뼈대 있는 양반집에서 수년 동안 종 아닌 종살이를 한 분금은 양반들의 예의범절에 거의 통달한 편이라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녀는 질병으로 온 가족이 몰살한 어느 한미한 시골선비의 청상과부라고 했다. 영건의 성은 김씨가 됐다. 마침 그 얼마 전 역질이 남원성을 강타했던 탓에 성안엔 주인 없이 텅 빈 집이 여럿이었다. 분금은 그 가운데서도 시장 쪽으로 얌전히 앉은 초가집 하나를 골라 거처로 삼고서 오직 삯바느질에만 매달렸다. 분금은 나이 일흔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시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원체 부지런해 해마다 조금씩 재산이 늘어났다. 과부 허리춤엔 은이 서 말이란 속담 그대로였다. 영건이 스무 살쯤 됐을 때 어머니 분금은 논을 네댓 마지기나 장만했다. 영건은 어려서 서당을 몇 년 다녀 까막눈은 아니었다. 그는 홀로 고생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안타까워 일찌감치 공부를 그만두고 농사일에 전념했다. 잘 모르는 것은 이웃의 경험 많은 노인에게 물었고, 가끔 시장에 들러 쌀, 콩, 면화, 무명 등의 가격을 조사해 비망록에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만일 콩 한 되라도 팔라치면 반드시 시세가 가장 비쌀 때 내놓았다. 이런 식으로 살림을 하다 보니 영건은 곧 동네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됐다. 그런 아들인데도 늙은 어머니는 영건에게 늘 하는 말이 있었다.“누구에게든지 공손해라! 가난한 이웃을 잘 보살펴 주고,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가 이만큼이나 살게 된 것은 모두 부처님의 크신 원력 덕택이다. 절간에 시주를 게을리 하지 말라!” 영건은 그 가르침을 묵묵히 따랐고, 이웃사람들이 모두 영건을 존경했다. 어머니는 세상을 뜨기 전날 밤, 아들을 머리맡에 불러 앉혀 놓고 나직이 말했다.“지금까지 네 아버님의 기일(忌日)이라 믿어온 것이 실은 함양 양반 노씨네 종 막산의 제삿날이다. 나는 그 아내 분금이다. 네 아버지는 경상도 하동 사는 김 선비인데, 이름도 모르고 아무 것도 더는 모른다. 부디 죄 많은 이 어미를 용서해라. 이제 비밀을 네게 털어놓으니 내 가슴이 후련하구나!” ●김영건과 예언서의 만남 김영건은 아무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말할 수가 없어 혼자 그저 답답한 심정이었다. 그랬는데 정 노인 사건까지 터져 마음을 안정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천도를 핑계 삼아 절간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는 평생 동안 뭐든 그저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살아왔던 것인데, 갑자기 하늘이 무너진 것도 같고 인생과 세상에 대한 회의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나는 과연 전생에 무슨 큰 죄가 있어 평생 아버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는가. 종 아닌 종이 되어 제 근본을 숨기고 가슴을 졸이며 살아야 되는 내 인생은 도대체 얼마나 불쌍한가. 언젠가 이 비밀이 세상에 알려질 경우 자식들의 장래는 또 어찌 될 것인가. 이 놈의 세상이 아주 송두리째 바뀌어야 한다. 나같이 천한 사람도 가슴 펴고 떳떳이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와야 된다. 도무지 세상이 원망스럽기만 하구나!” 김영건이 제기한 질문들은 누구도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 노인 사건 이후 영건은 사람이 달라졌다. 그의 왕성했던 식욕은 오간데 없어졌고, 일할 마음도 사실은 거의 사라졌다. 세상이 허무하다는 한 생각만이 온종일 영건의 머리에 가득했다. 영건은 그런 자기의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지 못해 더욱 고민이었다. 그나마 큰 다행은 그가 가끔은 절간에 들러 스님들과 문답을 나눌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영건은 태연한 척 여러 가지 사소한 질문을 던졌다. 스님들 가운데는 더러 영건의 깊은 고민을 눈치 채는 경우도 없지 않아 찻잔을 마주한 승방 문답이 해질 때까지 오래 이어지기도 했다. 절간을 오가는 횟수는 점점 많아졌고 영건은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인연설은 물론 장차 미륵부처가 다스릴 용화세계가 지상에 실현된다는 신기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밖에 승려 태진이 소지했던 것과 같은 ‘남사고비기’라든지 ‘정감록’에 관해서도 말을 많이 들었다. 정말 그 비결의 내용처럼 세상이 뒤집어져 상놈이 양반도 되는 그런 세상이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 해도 좋았다. 하지만 과연 그런 세상이 올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당시 조정에선 일체의 ‘위험한’ 비결의 독서, 소장, 유포 및 출판을 엄금했다. 금지가 심할수록 비결은 더욱 유행해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내용을 알게 됐다. 영건도 절간에서 객승이 소지한 ‘남사고’를 한두 번 구경한 적이 있었다. 영건은 비결을 베껴 곁에 놓고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강렬해졌다. 그는 점차 비결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비결을 직접 소장하지 못했고, 비결대로 세상을 바꾸려는 ‘불온한’ 사람들의 무리에 섞이지도 못했다. 그러기엔 영건의 성격이 너무도 소극적이었고 그는 이미 늙었다. 하지만 큰아들 원팔은 달랐다. 영리한 아들은 아버지의 불안과 고민을 대강 눈치 채고 있었다. 아들에겐 최봉희란 약빠른 친구도 있었는데, 그 친구는 이미 ‘남사고’를 소장하고 있었다. 아들은 최의 책을 필사해가지고 아버지에게 드렸다. 아들은 위험천만한 ‘비결’ 조직에 점차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남원 양반 이유성의 문제제기 김영건 일가에 정체성의 위기가 다시 찾아온 것은 1733년이었다. 이미 칠순에 접어든 정 노인과 다시 문제가 생긴 것인데, 정확히 말하면 정 노인의 외손녀사위인 이유성과 다툼이 벌어졌다. 어느 날 술 취한 정 노인이 이유성이 듣는 데서 김영건의 비천한 출신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정 노인의 친구 가운데는 젊은 시절 분금을 유독 탐낸 양반이 하나 있었다. 그 양반이 참으로 우연히 남원 읍내 길가에서 이미 노인이 다 된 분금을 마주친 것이 화근이었다. 친구로부터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정 노인은 김영건을 노씨네 종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김영건의 비밀을 들은 이유성은 반드시 그것을 폭로하겠다고 별렀다. 스스로 양반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혈기 방장한 양반 이유성에게는 신분이 뒤섞이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근본을 뒤흔드는 범죄행위였다. 그는 가짜 양반 김영건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이유성의 적의를 느낀 김영건 일가는 극도로 긴장했다. 양측의 대립은 갈수록 심각해져 마침내 상대방을 관가에 고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제출된 양측의 문건을 검토한 이 형방은 그들의 주장에 애매한 점이 많은 데다, 시급히 처리해야 할 다른 사건들이 많은 관계로 그에 대한 심리를 뒤로 미뤄놓고 있었다. 김영건의 큰아들이 남원성벽에 붙인 벽보에는 게시자가 이유성의 아버지 이여매라고 적혀 있었다. 김씨들은 자기들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이유성 집안에 역모 죄를 뒤집어씌울 계산이었던 모양이다. 정말 그런 단순한 계산에서 김원팔 형제는 위험천만한 벽보를 붙였을까. 아니면 혹시 어떤 비밀집단이 그들의 배후에서 벽보사건을 기획했던 것일까. 도승 자명과 변산 승려 태진, 최봉희, 김원팔 등의 관계는 정확히 무엇인가. 다음 호에서 따져볼 것이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盧대통령 北비판 안팎…당국자대화 재개 압박

    현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들로부터 ‘북한을 싸고 돈다.’는 지적을 받아왔던 노무현 대통령이 11일 베를린 동포간담회에서 북한을 강한 톤으로 비판하고 나서 관심을 모았다. 노 대통령은 이날 북한에 ‘쓴소리’와 ‘원칙론’을 들면서 이례적으로 비판했다. ‘얼굴을 붉힐 때는 붉혀야 한다.’는 노 대통령의 언급은 그동안 주변 역학관계상 주로 힘센 상대를 겨냥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2000년 남북관계의 전환점이 된 베를린 선언을 했던 곳이고, 노 대통령의 ‘제2의 베를린 선언’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같은 발언이 나왔다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끈다. 노 대통령의 발언이 대북 정책기조 변화가 아니냐는 섣부른 관측이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은 “대북정책 기조의 변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면서 “북한의 대화테이블 복귀를 거듭 강하게 촉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 대통령의 발언이 나온 상황을 보면 작심한 것 같지는 않다.6·15 남북 공동선언 5주년과 광복 60주년을 맞아 남북간 평화선언이라도 추진하는 게 어떠냐는 한 동포의 건의를 받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발언들이다. 오히려 노 대통령 발언의 무게중심은 비료회담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노 대통령은 남북대화에는 조건도 없으며, 문이 열려 있다고 지적하면서 “비료지원 문제는 북한이 공식 대화창구에 나와서 지원을 요청하는 게 도리”라고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남북 당국간 비료회담을 언급했다. 노 대통령은 남북관계에 대해 답답해 보인다고 희망이 없는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즉,“남북간에는 꾸준히 대화하고 있고 저는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3) 변산 태진스님과 정감록 사건(上)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3) 변산 태진스님과 정감록 사건(上)

    기왕 변산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조선 영조 때 태진(太眞) 스님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서 빠뜨릴 수가 없다. 그는 남원에서 발생한 불온 벽보 사건에 연루됐었고 그 사건은 조선왕조의 정사(正史) ‘왕조실록’에 비교적 자세히 나온다. 이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반역죄인을 취조한 기록을 엮은 ‘추안급국안’이란 책자에도 상세하다. 태진은 반역에 관한 혐의로 엄중한 조사를 받았던 것인데,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월명암은 월출암의 다른 이름? ‘실록’ 등엔 태진이 부안 변산에 있던 월출암(月出菴)의 승려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찾아본 부안 지방의 고문헌에는 월출암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절의 스님이 역모사건에 관련됐던 관계로 폐찰(廢刹)이 되고 만 게 아닐까 짐작되기도 하지만, 꼭 옳은 짐작일지는 모르겠다. 그런 식이었다면 역사상 큰 절치고 문 닫지 않고 배겨날 절이 하나도 없을 것 같다. 달리 생각해 보면, 절의 이름이 잘못 적혔을 가능성도 없지 않고, 또 그런 불미스러운 사건을 계기로 절 이름이 다소 바뀌었을 수도 있겠다. 대역부도 사건 등이 발생한 다음엔 고을의 명칭이 바뀐 사례가 많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참조된다. 그런 점에서 일단 혐의를 둘 만한 암자가 하나 있는데 월명암(月明菴)이 바로 그 경우다.‘달이 뜬다.’는 뜻을 가진 월출(月出)이나 ‘달이 밝다.’는 월명(月明)은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 변산의 제2봉인 쌍선봉(498m) 중턱에 자리한 월명암은 경관이 수려하다. 월명암 뜰에 서면 변산의 수많은 봉우리를 발아래 깔고 있는 듯이 느껴지고, 암자 뒤 낙조대(落照臺)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면 점점이 늘어선 고군산군도의 뭍섬들이 아름답다. 이 절의 이름이 하필 월명(月明)인 것도 잘 생각해 보면 그 일대에서 목격되는 달 뜨는 정경 또한 기막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월명암은 월출암의 다른 이름일 가능성이 충분하다. 월명암은 본래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호남의 명승(名僧) 진묵대사(震默大師·1562∼1633)가 중건하였다. 그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암자에선 허다한 고승들이 배출됐다. 선가(禪家)에선 대둔산 태고암, 백양산 운문암과 함께 도인을 많이 키워낸 3대 성지로 손꼽힌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태진 역시 당대의 ‘명승(名僧)’으로 존경받던 스님이었다. 여느 스님들과는 달리 그는 양반가 출신이었는데 참선수행을 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 정치현실에 대해서도 예리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화근이 돼 태진은 결국 조정으로부터 엄벌을 받았다. 어쩌면 그가 몸담았던 불교계조차 그를 영구히 추방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정말 있었다 해도 나는 태진을 비난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 오히려 거꾸로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태진은 부조리한 18세기 조선의 현실을 변혁시킬 꿈을 꿨다. 그런 점에서 그는 뒷날 같은 목적을 가지고 월명암을 찾았던 강증산, 소태산, 백학명 등 근대 종교계의 큰 별들과 일맥상통했고, 그가 연루됐던 사건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영조가 직접 심문 나선 ‘괘서’ 사건 때는 영조9년(1733) 음력 7월 말이었다. 한여름 불볕더위가 조금씩 수그러들고 아침저녁으론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와 구중궁궐에 계신 영조임금부터 강원도 두메산골 김첨지네 복슬강아지에 이르기까지 다들 살맛을 되찾아 가고 있던 차에 불길한 사건이 터졌다. 그것도 서울에서 700리나 떨어진 전라도 남원에 괴문서 한 장이 나붙은 거였다. 먼 시골 도시 성벽에 밤새 어떤 사람이 종이 한 장을 붙였기로 그게 무슨 큰 야단이라고들 호들갑인가, 현대를 사는 우리로선 납득이 잘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괘서’(요즘말로는 벽보) 사건은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는다. 문제의 벽보는 우선 그 내용이 ‘매우 흉악했다.’ 지엄하신 상감마마와 동궁을 저주할 뿐만 아니라 이제 세상이 곧 뒤집어진다는 믿기 어려운 소리가 가득했다. 역모의 혐의가 명백하게 느껴지는 ‘불충한’ 글이었다. 더구나 이 괘서의 상당부분은 이미 4년 전에 진압된 ‘무신란(戊申亂·경종의 독살설을 주장하며 소론과 남인들이 일으킨 반란)’의 주동세력이 각지에 퍼뜨린 소문이나 선동적인 구호와 일치했다. 영조로선 두 번 다시 생각하기도 끔찍한 ‘무신 잔당’의 부활을 입증하는 증거로 의심해볼 만했다. 영조는 몹시 긴장했으며, 그를 보좌해 국정을 이끌던 조정대신들 역시 마음이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시급히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 역모사건을 전담하는 의금부며, 사건발생지역의 수장인 전라감사, 그리고 조정에서 현지로 파견된 관리인 남원부사 등이 열흘 이상 이 사건에만 매달리다시피 했다. 피의자에 대한 고문과 취조가 날마다 계속되었고 그동안 영조는 몸소 수사를 진두지휘하다시피 했으며, 직접 신문에 나서기도 했다. 일반에는 문예부흥기로 알려져 있지만 영조와 정조 때는 실상 이런 역모 사건들이 그 어느 때보다 빈번하게 발생해 조정을 긴장으로 몰아넣었다. ●월출암 승려 태진이 소장했던 ‘남사고 비결’ 이 사건의 발단이 된 예언서는 ‘남사고 비결(南師古秘訣)’이었다. 태진이 가지고 있었던 그 책은 갑자년을 기점으로 해마다 일어날 사건들이 예언돼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편년체 예언서였다. 이 책엔 역모사건으로 정국이 뒤숭숭했던 무신년에 대해서 “또한 좋지 않다.”든가 “피가 흘러 내를 이루고 길이 막히며 민호에 연기가 끊긴다.”는 예언이 적혀 있었다. 실제 영조4년(1728) 무신년엔 하3도(충청, 전라, 경상)에서 반역사건이 있었으나 곧 진압됐었다. 그러므로 ‘남사고’의 예언은 그런대로 잘 들어맞은 셈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남사고’도 역시 편년체로 돼 있다. 그러나 예언서의 시작은 갑자년이 아니라 경인년으로 돼 있어 태진이 소장했던 ‘남사고’와는 분명히 다르다. 위에서 예로 든 무신년에 대해서도 “제갈량(諸葛亮)이 이미 죽었으니 어떤 성 한쪽에 금성(錦城)이 피폐하구나. 경시(更始)는 자리를 긁고 범증(范增)은 등창이 나는구나.”라고 했다. 자구상 표현은 전혀 다르지만 그 해의 운이 무척 나쁘다고 본 점에선 우연히 일치한다. 그밖에도 태진이 소장한 ‘남사고’엔 백저 안답(白猪按答), 봉목 장군(蜂目將軍), 승입병도(僧入丙都), 노색연절(路塞煙絶), 만가여일(萬家如一) 등의 표현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글귀는 현재의 ‘남사고’엔 전혀 없다. 책의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지만 그 내용은 똑같지 않은 줄을 미루어 짐작하겠다. 평소 태진이 소지했던 ‘남사고’에는 무신년 이후로도 여러 해 동안 나쁜 일이 계속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돼 있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남사고’도 역시 그런 내용이다. 예컨대, 무신년으로부터 4∼5년이 지나면 “세상일이 이미 끝이로다.”라고 했다. 그 참상은 “백 가호에 소가 한 마리요, 열 계집에 한 남편이로다.”라는 구절에 가장 잘 압축돼 있다. 요컨대, 세상은 최후를 맞이하고야 만다는 것인데, 햇수를 따져보면 영조9년이 바로 그 말세운이었다. 영조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로선 이런 ‘남사고’의 예언을 그저 웃으며 지나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조정의 금지명령을 비웃기라도 하듯 ‘남사고’를 비롯한 ‘정감록’의 대중적 인기는 갈수록 높아져 조정은 속수무책일 뿐이었다. 태진이 ‘남사고’를 손에 넣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는 전국의 명산을 두루 유람했는데, 충남 보령의 오서산(烏棲山·791m)에 들른 적도 있었다. 거기서 그는 도승(道僧) 자명(自明)을 만났다고 했다. 태진은 그것이 기유년(1729)의 일이라고 회상했는데 그 기억이 정확한지는 확인할 수 없다. 어쨌거나 태진은 오서산에 이틀 동안 머물렀고 그 때 자명이 가진 ‘남사고’를 처음으로 구경했단다. 태진이 이 책에 큰 관심을 보이자 자명은 필사해 주었다. 태진은 평소 세상사에 관심이 많은 편이어서 어딜 가나 늘 ‘남사고’를 휴대했다. ‘남사고’의 예언은 현실로 입증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이 태진의 변함없는 믿음이었다. 어서 빨리 세상이 바뀌어 현세가 미륵세상으로 바뀌기를 그는 열렬히 바랐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변화를 알리는 예언서를 무척 좋아했다. 더욱이 변산은 한국 미륵신앙의 출발점이었고, 태진은 그런 사상적 전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자기가 믿을 만하다고 판단한 사람들에게 ‘남사고’의 내용을 들려주었고, 그 예언을 시세에 맞게 적절히 풀이해주는 것을 직업으로 삼다시피 했다. 그러다 보니 태진의 주위에는 ‘남사고’를 베껴 나눠 갖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태진, 남원 양반 최봉희를 사귀다 태진은 기회가 되는 대로 속세의 여러 사람들과 사귀었다. 때론 산사를 찾아온 양반들과도 자연스레 친교를 맺었다. 그는 그런 사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유년(1729) 10월, 전북 진안의 팔공암(八公菴)에 있을 때야. 그 암자가 경치 좋고 한가한 곳이란 소문이 있어 찾았던 게지. 내가 그곳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지. 젊잖아 뵈는 세 양반이 그 절간엘 들렀어. 무슨 약초를 캐러 왔던 모양 같아. 한 분은 이름을 최봉희라 했는데 남원서 온 가난한 양반이었고, 또 한 분은 윤징상이라고 했지 아마. 그리고 또 정원덕이라는 분이었을 거야. 이 양반들은 서로 친구사이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팔공암의 노스님을 모신 승방에 들어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참 진지하게도 나누었지. 부처님의 법이 공자의 가르침과 과연 다른 것인가, 사람이 죽으면 무엇이 되는가, 부모에게 효를 다한다는 것은 결국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등등 얼핏 철학적으로 들리지만 실은 매우 현실적인 주제를 폭넓게 다루었어. 승방 한담이란 게 흔히 그러하듯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화제가 자연 정치 문제에 미쳤지. 무신년(영조4년 1728)에 있었던 난리에 대해 또 한참을 이야기하게 됐어.‘그때 참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많다.’는 게 중론이었어. 난 빙그레 웃기만 하고 별 말을 안 했지. 그래도 영 암말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는 좀이 쑤셔, 내가 소장하고 있던 ‘남사고’에 관해 몇 마디만 들려주었어. 그 이튿날 세 양반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분이 글쎄 날더러 ‘남사고’를 보여 달라는 거야. 암자에 계시던 노스님도 한 번 보여주라고 자꾸 권하셔서 나중엔 바랑에서 그 책자를 꺼냈어. 다들 눈이 휘둥그레지더군. 이 왕조의 끝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눈치 챘던 모양이야.” 그날 오전 최봉희가 일행을 대표해 태진에게 이렇게 물었다.“선사(禪師)께선 양반 자제로 불가(佛家)에 입문하셨고 덕이 높아 평소 많은 불자들이 대사(大師)라 부른다 들었습니다. 옛날 강원도에 머무실 때는 여러 지방관들이 선사께 서찰(書札)을 보내 시문(詩文)을 구하느라 야단법석이었다고도 하더군요. 시사(時事)가 장차 어찌 될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남사고’의 예언을 가지고 계신단 말씀을 잠깐 들었습니다만, 저희는 시골의 무식한 선비라 아직 그런 책을 한 번 읽어보지도 못했습니다. 혹시 선사께서 아시는 대로 설명을 좀 해 주실 수가 없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극진한 예의를 갖춰 간청해 마지않는 세 양반들의 겸손한 태도에 태진은 거의 감격했다. 그는 평소 가슴에 조용히 담아둔 몇 마디 말을 꺼냈다.“이런 말세(末世)를 당해서 백성이 보존될 수 있는 곳은 산림(山林)뿐인데, 선비님들께선 야지(野地)를 버리고 산협으로 들어오셨으니 진실로 살 길을 얻으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윤징상이 ‘백성이 보존될 수 있는 곳이란 산림이다.’라는 말씀은 어느 책에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러자 태진은 마치 그 말이 있기를 기다렸단 듯 ‘남사고’에 그런 말이 나온다며 한참 동안 설명했다. 태진의 말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양반은 최봉희였다. 최는 가문은 매우 훌륭했으나 이미 가세가 기울 대로 기울어 가엾은 시골의 한사(寒士)에 불과한 처지였다. 서글픔 속에서 끼니 걱정을 하고 지내는 최봉희인지라 세상에 대해 유난히 불평불만이 많아 보였다. 마침내 최는 젊은 정원덕의 도움을 받아 ‘남사고’ 한 벌을 베낄 수 있었다. ●김원팔, 최봉희의 ‘남사고’를 베끼다 남원으로 돌아온 최봉희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남사고’ 자랑을 한껏 늘어놓았다. 김원팔과 김원하 형제, 김태기, 김중기 등 7명이 필묵계(筆墨契)를 맺어 서로 절친하게 지냈는데, 김원팔 등은 최봉희의 이야기를 듣자 ‘남사고’를 구경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들은 ‘남사고’를 ‘무신년 난서(亂書)’라고도 불렀다. 무신란에 대한 예언이 기막히게 잘 들어맞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여러 계원들 중에서도 최봉희와 특히 친했던 사람은 김원팔 형제였다. 원팔의 아우 김원하는 마침 논밭이 최의 집 근처라 매일 같이 만나는 형편이었고, 김원팔은 당시 전주(全州)에 살고 있어 평소 여행을 좋아하는 최봉희의 입장에선 우정을 핑계대어 출입이 잦은 편이었다. 최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수상쩍은 소문을 수집해다 친구들에게 퍼뜨렸다. 김원팔은 그 점을 예를 들어가며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해(영조8년) 10월 최봉하가 내 아우 김원하(金元河)를 찾아가서 중국 서쪽의 양만족들이 전쟁을 일으켜 청나라 측이 조선에 청병(請兵)했다고 말했고, 물가가 급등한다는 등 쉽게 믿을 수 없는 말을 많이 했다. 심지어는 북부 지방에선 소가 기린(麒麟)을 낳았으므로 이제 성인(聖人)이 나올 차례라고도 했다. 하여간 남원 제일의 소식통은 최봉희다.” 남원의 선비들 가운데는 최봉희를 통해 세상사를 알아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가 들려주는 황당한 이야기에 왠지 가장 솔깃해하는 사람은 김원팔과 그 아버지 김영건이었다. 원팔은 최봉희를 줄기차게 졸라 가지고 ‘남사고’를 모두 필사했다. 그런데 그 당시엔 좀 신기하다 싶은 남의 글이나 책자를 베끼는 일은 보통이었다. 아들로부터 책을 전해 받은 김영건은 한문을 제대로 읽을 만한 실력이 없어 그 책을 그저 무신란의 실상을 묘사한 것으로 짐작하는 정도였다. 김원팔이 아버지에게 바친 책자엔 ‘남사고’ 외에도 ‘요람(要覽)’이란 예언서가 포함돼 있었다.‘요람’의 주인 역시 최봉희였는데, 김원팔은 양반의 서얼인 이서방(李書房)에게 위촉해 책의 대부분을 필사하게 했다. 그러나 그 책의 마지막 대목만은 원팔이 자필로 베꼈다. 이쯤에서 나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에 봉착한다. 김원팔 부자는 태진 등이 소장했던 예언서를 구해다 도대체 무엇에 이용할 생각이었을까? 그들은 과연 역모를 계획하고 있었던 걸까? 또는 누군가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예언서를 필요로 한 것일까? 태진 사건과 관련해 여러 가지 의문이 고개를 드는데 자세한 것은 다음호를 기약한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영화속 수능잡기] 제이콥의 거짓말

    [영화속 수능잡기] 제이콥의 거짓말

    ‘사실이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 사실 대신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환상을 좇아도 좋은가.’ 프랑스 대입시험인 바칼로레아의 논술 문제다.3개월밖에 살 수 없는 시한부 인생이 있다고 하자. 이제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시간이 3개월뿐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그를 불편하게 한다. 문제는 이같은 상황에서 위안을 주는 환상을 좇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묻고 있다. 영화 ‘제이콥의 거짓말’에서 팬케이크를 만들어 파는 장사꾼 제이콥은 동료에게 우연히 라디오를 통해 들은 소련군의 진군 소식을 말하게 된다. 그런데 이 일은 나치들이 소유를 금지한 라디오를 그가 가지고 있다고 와전되어 퍼진다. 라디오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형에 이르는 중죄다. 그러나 라디오가 없다고 밝혀지면 오히려 절망하여 죽을 사람이 더 많아지게 될 상황에 이르자 제이콥은 모두를 위해 희망적인 뉴스를 만들어낸다. 그는 수용소 안의 유태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끊임없이 거짓말을 만들어 낸다. 희망적인 뉴스는 현실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거짓된 뉴스’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것은 언제 처형될지 모른다는 불안과 절망뿐이다. 그 불안과 절망을 이기지 못해 수용소 안의 유태인들은 목을 매어 자살하기도 한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이었다.‘사실’은 그들을 절망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만약 인간이 사실만을 말해야 하고, 사실만을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라면 세상에는 절망과 불안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하는 사람의 숫자가 부지기수일 것이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인간이 운명과의 싸울 힘을 잃지 않는 것은 희망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실현 가능성이 있을 때 인간은 희망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싸움의 의지를 철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절망만이 기다리고 있는 현실에서라면 어떨까. 과연 인간은 묵묵히 패배의 운명을 수락하게 될까. 천만에. 인간은 거짓된 환상을 만들어서라도 삶에 매달린다. 바로 그것이 인간의 가열찬 삶에의 의지다. 살아보겠다는 삶에의 의지가 거짓된 환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환상은 절망에 빠진 인간에게 희망을 준다. 그러나 실현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환상이 마술의 한 장면처럼 현실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 바로 삶의 불가해함이다. 제이콥의 거짓말이 거짓말에 불과하다고 믿은 사람, 우리 앞에는 오직 죽음의 현실만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은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 목을 매어 자살을 했다. 그러나 희망에 매달린 사람들에 희망은 현실이 되었다. 영화 감독, 피터 카소비츠는 말했다.‘희망에 대한 굶주림은 배고픔보다 나쁘다.’ 우리는 빵 없이는 살 수 있어도 희망 없이는 살 수 없다. 희망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랑이다. 거짓의 희망을 만들어서라도 내 동료를 살려야겠다는 제이콥의 사랑, 바로 그 사랑이 있는 곳에서 환상은 마법처럼 현실로 뒤바뀌기도 한다. 피터 카소비츠 감독, 로빈 윌리엄스, 테일러 고든 주연,1999년작. 김보일 서울 배문고 교사 uri444@empal.com
  • [주말화제] 삼국지 장수중 누가 가장 셀까

    [주말화제] 삼국지 장수중 누가 가장 셀까

    ‘삼국지’에서 가장 싸움을 잘하는 장수는 누구일까. 삼국지를 학술적 차원에서 연구해 일명 ‘삼국지연구소’라고 불리는 인하대 한국학연구소의 조성면(39) 연구원은 “단순 무력으로만 봤을 때는 여포가 최고”라고 말했다. 이어 관우-장비-조자룡-마초-황충-위연 등의 순이다. 그러나 종합적인 장수적 자질에 있어서는 관우를 최고로 꼽았다. 연구소측은 또 지략이 뛰어난 책사(策士)를 제갈량-방통-사마의-육손-순욱 순으로 평했다. ●인하대 삼국지硏 ‘국내본 300종’ 분석 인류의 영원한 고전 삼국지가 해부된다. 연구소는 지난해 9월 학술진흥재단으로부터 2년 기한으로 ‘삼국지 역본 및 서사변용 연구’라는 색다른 책무를 부여받은 뒤 조선 중기부터 지금까지 발간된 400여종의 삼국지 한국어 번역 판본을 발굴·조사 및 해석하는 작업을 펴고 있다. 정학성 인하대 국문과 교수와 중문학과 국문학 등을 전공한 5명의 연구원이 맡고 있다. 현재 수집한 삼국지 판본 300종에 대한 학술적 해제작업에 치중하고 있으며, 내년에 연구성과를 논문과 단행본 등으로 발표한다.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역사서에 삼국지 이야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 선조 2년(1569년)으로 성리학자 기대승의 상소문에 “삼국지가 널리 읽혀 풍속의 괴란이 우려된다.”는 문구가 나온다. 이때 이미 삼국지가 유행했다는 증거다. 당시 원본을 손으로 옮긴 필사본을 비롯해 목판본·납활자본 등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청나라에서 석판본이 수입됐다. ●지략은 제갈량·방통·사마의·육손順 조선 정조 이후는 삼국지가 상업적 측면에서 출간되다가 1904년에 근대화 판본인 구활자본이 박문서관에서 간행되었다.1929년에는 양백화에 의해 최초로 신문(매일신보)에 연재되었으며,1945년에 현대화된 판본인 ‘박태원 삼국지’가 등장했다. 해방 이후에는 삼국지 출간이 본격화돼 지금까지 370여종이 발행됐으며, 삼국지 처세학·경영학·논술 등 실용서도 50여종 등장했다. 최근에는 비디오·컴퓨터게임·애니메이션 등 ‘읽는’데서 ‘보고 즐기는’ 형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1800여년 전의 일이 첨단 문명시대를 사로잡는 ‘삼국지 신드롬’에 대해 윤진현(37) 연구원은 “삼국지 만큼 인물적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작품이 세계적으로 드문데다 전문가들의 영역이었던 역사연구에 일반인의 접근도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근대 이후에 발간된 삼국지 판본은 중국 ‘모종강류’와 일본 ‘요시가와 에이지류’가 양대 산맥이다. 모종강은 1494년 나관중이 펴낸 ‘삼국지연의(삼국지 원전)’를 소설 성격으로 완성시킨 장본인이다. 삼국지연의가 서기 285년 진나라 역사가 진수가 3부 65권으로 펴낸 정사(正史) ‘삼국지’를 참고하고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종합정리한 것이라면 모종강은 서사적 구성을 완결지었다. 우리나라의 박태원, 최영해, 박종화, 김구용 등이 쓴 삼국지가 모종강류인데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소설적 묘미를 살린 것이 특징이다. 반면 김동리, 김광주, 양주동 등이 쓴 삼국지는 1939년 요시가와 에이지가 현대적 기법으로 재창작한 것을 그대로 번역한 수준이다. ●7은 사실,3은 허구 삼국지 최대의 논란은 역사적 사실과의 괴리. 내용 가운데 70%는 사실이고 30%는 허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 견해나 오히려 허구가 더 많다는 분석도 있다. 대부분 성인군자로 묘사하고 있는 주인공 유비에 대해 연구소측은 “유비는 ‘쪼다’이면서도 ‘음흉’한 측면을 지닌 이중인격자였다.”고 주장한다. 제갈량은 비바람까지 부르는, 신에 가까운 전략가로 등장하지만 실제론 재정 등 내치를 담당하는 참모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여포는 정원과 동탁 등 양아버지를 잇따라 죽이는 ‘배신’의 상징으로 그려졌지만 여포가 정통 한족이 아닌 색목인(위구르족)이었기에 상대적 폄하를 받았다는 시각도 있다. 조 연구원은 “삼국지는 중국인 특유의 과장과 ‘촉한 정통론’의 시각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사실(史實)과 부합되지 않는 대목이 적지 않다.”면서 “작가의 의도가 많이 가미됐다는 것을 알고 읽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시아보 사망’ 美 안락사논쟁 재점화

    그녀는 갔지만 논쟁의 불씨는 남아있다.15년간 식물인간으로 지내온 테리 시아보(41)가 법원 판결로 영양공급 튜브가 제거된 지 13일만인 31일 오전(현지시간) 끝내 숨을 거뒀다. 사망 직후 플로리다주 파이넬러스파크의 요양원에는 그녀의 생명 연장을 호소해왔던 200여명이 ‘어메이징 그레이스’와 찬송가를 부르며 영면을 기원했다. ●“편안한 영면”…부모 임종 거부당해 법적 보호권을 갖고 있는 남편 마이클은 딸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싶다는 부모의 희망마저 외면했다. 하지만 형제들은 시아보가 눈 감기 15분전 병실에 들어가 잠깐 그녀를 보았지만 남편의 요청으로 병실을 떠났다. 부모들은 싸늘한 시신으로 변한 다음에야 곁에서 기도를 올릴 수 있었다. 마이클은 그녀가 꽃으로 둘러싸인 병실에서 자신의 팔에 안긴 채 “조용하고도 편안하게” 죽음을 맞았다고 마지막 순간을 전했다. ‘삶을 지지하는 목회자 모임’ 대표인 프랭크 파본 목사는 마이클을 “가슴이 없는 잔인한 인간”이라고 비난하며 “단순한 죽음이 아닌 명백한 살인이며 우리 조국이 이를 용인했다는 점을 개탄한다.”고 말했다. ●죽을 권리 둘러싼 논쟁은 이제부터 남편과 부모가 합의한 대로 그녀의 뇌가 얼마만큼 손상됐는지 확인하기 위한 부검이 곧 실시된다. 부모들은 시아보가 언젠가 뇌사에서 깨어나 회복될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남편은 그럴 리 없다고 맞서왔다. 시아보가 숨지기 전날 연방 대법원은 급식 튜브를 재연결하게 해달라는 부모의 청원을 또 기각했다. 이번 기각은 이 법원에서만 지난 2001년 이후 여섯번째이며 일주일새 두번째였다.7년동안 20여차례의 소송에서 부모들이 패배, 급식튜브가 제거되자 급기야 상·하 양원과 조지 W 부시 대통령까지 뛰어들어 그녀의 생명연장을 위한 사상 유례없는 특별법이 제정됐다. 그러나 법원은 2주간 필사적으로 매달린 부모 등의 노력에도 불구, 편안한 죽음을 맞을 권리에 손을 들어주었다. 부시 대통령은 이날 “모든 미국인이 가치있게 여기고 보호할 의무가 있는 삶의 문화를 건설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톰 딜레이 하원의원과 젭 부시 플로리다 주지사 등도 법원이 명백한 살인을 저질렀다며 목청을 높였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검찰총장 청문회 공수처 논란

    검찰총장 청문회 공수처 논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30일 김종빈 검찰총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열어 후보자의 자질과 검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의지 등을 검증했다. 이날 청문회예서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서울 배재고 교사 답안지 대필사건 때 관련 학생의 아버지인 정모 전 검사가 담임인 오모 교사와 수십 차례 통화를 하는 등 대필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당시 검찰 수사 과정에서 이같은 사실을 밝혀졌는데 검찰이 축소·은폐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추궁했다. 앞서 정 전 검사는 “관련 내용을 전혀 몰랐다.”는 주장이 인정돼 아들의 편입을 위해 위장전입한 혐의로 징역 1년을 구형받았다. 이에 김 후보자는 “검사가 대필 자체를 몰랐다고 검찰이 발표한 것은 아닌 것 같다.”면서 “앞으로 검찰 내부의 비리는 법과 원칙에 따라 철저하게 수사하겠다.”고 답변했다. 앞서 김 후보자는 법사위에 제출한 답변서를 통해 공수처 설립에 대해 “공직자의 부정부패를 없애야 한다는 취지에는 공감한다.”면서도 “수사기관으로서 중립성 논란, 업무중복으로 인한 비효율성, 수사경쟁으로 인한 부작용, 기타 법리적 문제 등 여러가지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다.”고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날 여야 의원들은 공직자부패수사처(공수처) 설치와 국가보안법 등을 놓고 다른 입장에서 질의했다. 열린우리당 최용규 의원은 “검찰이 자체 감찰이나 자정작용을 통해 고위공직자의 부패를 처벌하겠다는 것은 신빙성이 없다.”며 공수처 설치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반면 한나라당 김성조 의원은 “공수처는 검찰을 효과적으로 통제해 검찰을 길들이려는 수단으로 검찰의 독립을 수포로 돌리겠다는 발상”이라고 맞섰다. 김 후보자는 이에 “검찰이 권력형 부패에 대처하기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도 “법안이 국회에 제출돼 있으니 의원들이 판단해달라.”고 에둘러 답변했다. 또 김 후보자는 ‘사형제 폐지’에 대한 질의와 관련,“여러가지 폐단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강력 범죄가 빈발하고 국민들이 사형제 폐지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폐지는 시기가 빠르다고 생각한다.”고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이어 검찰 독립에 대해서는 “검찰총장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검찰수사를 정치적 외압으로부터 지켜내는 일”이라고 말했다. 법사위는 이날 청문회 결과를 바탕으로 31일 전체회의에서 경과보고서를 채택한 뒤 국회의장에게 보고한다. 이종수 박지연기자 viele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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