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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가는 5월/박건승 논설위원

    5월의 밤은 소동파에게 ‘훈풍이 산들산들 불어와 달빛마저 몽롱해지는 밤, 꽃향기에 마음이 들떠 그냥 잠을 청하기가 차마 아까운 밤’이었다. 그런데 올 이 시절 초 우리 날씨는 왜 그리 변덕이 죽 끓듯 했던가. 맑은 하늘에선 뜬금없이 우박이 쏟아지고 천둥 번개가 만만불측(萬萬不測)했다. ‘꾼’들의 ‘입’ 또한 고약했다. 남북 정상회담 앞뒤로는 “세상이 미쳐 가고 있다”는 말이 나왔다. ‘창원 빨갱이’란 듣도 보도 못한 황당한 허구가 나돌았다. 세상이 미쳐 가고 있다고? 5월의 말본새치고는 참으로 막되고 괴이하고 섬뜩하다. 피천득은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라고 했다. 노천명은 ‘머루순이 벋어 나오던 길섶 어디메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활나물 젓가락나물 참나물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라고 했다. 그 맑고 순결한 5월이 정점으로 치닫는다. 그런데 어찌하랴. 더러운 입들이 자꾸 분탕질하는 이 5월을. 눈이 아프고 가슴이 먹먹하다. 속절없는 세월이다. ‘계절의 여왕’은 예를 갖추지 못한 그 누구도 탓함이 없이 지나가고 있으니. 박건승 논설위원 ksp@seoul.co.kr
  • “어머니와 아침 먹듯… 평범한 삶 속에 행복이 있다”

    “어머니와 아침 먹듯… 평범한 삶 속에 행복이 있다”

    “여든여섯의 어머니와 아침을 함께 먹을 때, 출근하기 전 어머니와 포옹을 하면서 볼에 입을 맞출 때, 고부 갈등 없이 어머니 곁에 있어 준 아내를 마주할 때 더없이 기쁩니다. 헤아릴 수 없이 큰 행복이죠. 좋은 직장, 좋은 자동차, 좋은 집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아요. 사람과 마음을 주고받고 더불어 사는 삶을 향하는 길 곳곳에 행복이 있습니다. 삶은 생각보다 그렇게 복잡하지 않답니다.”‘평범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교양지’를 표방하는 샘터는 1970년 창간한 이후 48년간 단 한 권의 결호 없이 발행해 온 ‘국민 잡지’다. 샘터의 창립자이자 아버지인 김재순(1923~2016) 전 국회의장의 뒤를 이어 1995년부터 샘터를 이끌어 온 김성구(58) 대표는 2003년부터 선보인 ‘발행인 칼럼’으로 한 달에 한 번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잡지에 실렸던 칼럼 80여편을 새롭게 엮은 첫 산문집 ‘좋아요, 그런 마음’(샘터)을 펴낸 김 대표는 10일 “지난 20여년간 평범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올곧게 살아온 사람들을 통해 배운 인생의 진리가 이 책에 배어 있다”고 설명했다.책 속에는 부제처럼 ‘서툰 마음이 괴로울 때 흔들리는 마음을 붙들고 굳은 마음을 풀어준 좋은 마음’에 대한 조언이 담겨 있다. 김 대표는 인생은 마냥 좋지도 마냥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기에 매순간을 즐겁게 살자고 응원한다. 특히 차분히 자신을 돌아보면 마음의 샘에 평화가 고이는 행복의 순간을 마주할 수 있다고 귀띔한다. “북한산에 오르면 찾아가는 산벚나무가 있어요. 꼭 안고 있으면 마음도 편안하고 따뜻해지죠. 그 나무 아래에 있는 널찍한 바위를 보고 있으면 어떨 땐 힘든 나를 위해 울어 주는 것 같아 위로를 받기도 하고요. 스님이나 수도자처럼 사막이나 산속에 가거나 동굴에 파묻혀야만 깨달을 수 있는 건 아니죠. 나의 주변과 그리고 길가에서도 삶의 진리를 깨칠 수 있습니다.”김 대표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해보고 싶은 일은 끝까지 해내는 열정이야말로 인생에 몰두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패러글라이딩, 마라톤, 검도, 골프, 합기도 등 이것저것 다 해봤어요. 스킨스쿠버는 자격증도 따고요.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배워야 해요. 우리나라 어르신들은 나이가 들면 어느 순간 배우는 것을 포기하는데 그건 혈관의 피가 통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새로운 물이 끊임없이 흘러야 그 물에 모난 돌도 다듬어지는 법이죠.” 김 대표는 샘터를 통해 만난 아동문학가 정채봉, 소설가 최인호, 영문학자이자 수필가인 장영희 등의 작가를 비롯해 법정 스님, 이해인 수녀 등 종교계 인사들과도 깊은 친분을 나눴다. 특히 가족 다음으로 가깝게 지낸 수필가 피천득(1910~2007) 선생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선생님께 새해 인사를 드리러 갔어요. 다른 분들은 세뱃돈으로 1000원, 5000원을 주셨는데 선생님은 양말 한 켤레, 미제 초콜릿을 주시더라고요. 돈보다 이상하게 거기에 마음이 갔어요. 그때 이후 매년 새해면 선생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여쭸죠. 40여년간 선생님을 알고 지내면서 제가 들었던 가장 인상 깊은 말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버려도 자기 자신만은 버리지 말라’는 거예요. 자존감을 잃지 말라는 선생님의 이 말씀은 제 삶의 지표가 되었습니다.” 1979년 지어진 이래 대학로의 대표적인 건물로 사랑받은 옛 사옥을 매각한 이후 지난해 10월 혜화동 인근으로 터전을 옮겼다. 샘터 사옥은 2년 전 김 대표의 아버지가 별세한 뒤 상속세 부담이 커지면서 매물로 나왔고 이후 부동산 투자회사 공공그라운드가 인수했다. “상속세 부담에 현실적으로 건물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었어요. 건물도 중요하지만 샘터사의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엄마 같은 존재가 되는 거죠. 아무 걱정 없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는 샘터를 만들기 위해 더 좋은 계기를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엔 임대료를 받았지만 이젠 임대료를 내야 하는 상황이잖아요(웃음). 맨땅에 헤딩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죠. 앞으로 공격적으로 사업을 펼쳐야 하니까 더 재밌지 않을까요.”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김응교 교수 작가의 탄생] 고독하지 않은 혁명은 없다.

    [김응교 교수 작가의 탄생] 고독하지 않은 혁명은 없다.

    세계문학전집이라 하면 늘 서양고전만 생각하는 밉상스러운 관념이 있지요. 아시아·아프리카·남미문학이나 우리 문학은 숫제 취급도 안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자신 있게 김수영 시인(1921~1968)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올해가 그의 50주기라는 까닭 이전에 김수영이라는 이름 석 자는 이 시대 작가들에게 한 번쯤 거쳐야 할 문사(文士)의 훈련소입니다. 세계에 알려야 할 세계문학 작가이기도 합니다.새해가 오면 올해 성취하고 싶은 저마다의 꿈을 나눕니다. 무수한 개인의 꿈이 모여 공동체의 꿈이 됩니다. 삭막한 이 나라 사람들이 함께 꿈꾸는 염원은 무엇일까요. 통일이나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오래된 꿈이며, 정치적 무의식이겠죠. 신년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염원 1위는 적폐청산입니다. 민주화의 염원을 담아 사랑받는 영화 ‘1987’에서 연희(김태리)는 호소합니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 가족들 생각은 안 해요. 그날 같은 거 안 와요. 꿈꾸고 살지 말아요.” 과연 꿈을 포기해야 할까요. 김수영은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는 시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실패한 개혁의 꿈을 지적합니다.1960년 4·19학생혁명이 일어나고 두 달 정도 지나 쓴 작품입니다. 4월 19일 정오 무렵부터 거리에서 투석전이 있고, 총소리가 들리던 오후 2시 50분쯤 김수영은 라디오를 들으며 “우라질 놈들”이라고 분노하기도 하면서 혁명이 성공하기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12년 만에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던 날, 김수영은 너무나 기뻐 도봉동 어머니 집으로 뛰어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기뻐했던 건 처음이에요. 그냥 일 없이 도봉동집으로 왔죠. 집에 들어올 때 오빠가 좋아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그랬는데 점점 실망이 깊어지는 것을 곁에서 보았지요. 그다음에는 무슨 행사 시를 쓰라고 하니까, 아, 내가 행사 시나 쓰는 사람이냐, 하고 벌컥 화를 내던 일이 기억나요.”동생 김수명 여사는 그 무렵 김수영 시인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증언합니다. 아쉽게도 4·19는 성공한 혁명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 이유를 시인은 노고지리를 들어 이야기합니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하는 어떤 시인은 셰익스피어다, 셸리다, 피천득이다라는 등 여러 논의가 있습니다만, 하늘을 나는 노고지리를 보고 그저 ‘자유로워 보이는군. 멋있어’라고 피상적으로 보는 것은 틀렸으니 “수정되어야 한다”고 시인은 지적합니다. 노고지리는 종달새를 말합니다. 참새처럼 생겼는데 참새보다는 조금 커서 16~18㎝쯤 되고, 북위 30도 이북의 유럽과 아시아에 분포하는 새입니다. 동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종달새처럼,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흔한 존재입니다. 노고지리 대신 나 혹은 우리 자신으로 읽을 수도 있단 말이죠. 노고지리가 쉽게 날 수 있을까요. 알에서 나오자마자 들짐승에게 잡히는 경우도 많겠죠. 종달새 새끼를 씹고 피 묻은 부리로 입맛을 다시는 살쾡이도 있겠죠. 날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 파닥이며 연습해야 할까. 언덕에서 굴러떨어지기도 하고, 뭣 모르고 절벽을 뛰어내린 종달새는 많이 죽을 겁니다. 자유롭게 날려면 오랜 시간 처절하게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한 마리 노고지리는 자유롭게 날기까지 “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깨닫는 겁니다. 자유를 위하여 푸른 하늘의 푸른 색과 대비되는 붉은 피를 흘려야 하는 겁니다. “자유를 위해서/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라는 구절로 이제 사람 이야기로 바뀝니다. 노고지리 노래가 행복한 것 같지만, 그 노래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습니다. 무수한 날갯짓으로 피눈물 삼키며 가까스로 허공에 떠오릅니다. 이 피는 혈액의 의미를 넘어 더욱 근원적이고 치열한 고독의 투쟁을 뜻합니다. 니체가 “나는 피로 쓴 글을 좋아한다”고 했듯이, 피는 근본적인 각성(覺醒)을 말합니다.박두진은 시 ‘푸른 하늘 아래’(청록집·1947)에서 푸른 하늘을 해방조국에 비유했어요. 김수영에게 푸른 하늘은 혁명조국입니다. 박두진과 김수영 시에서 ‘푸른 하늘’이라는 이미지는 모두 자유의 표상입니다. 이쯤에서 시인은 직언을 꽂아 넣습니다. “혁명은/왜 고독한 것인가를//혁명(革命)은/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혁명이라 하면 흔히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생각합니다. 혁명을 뜻하는 영어 ‘레볼루션’(revolution)은 라틴어 ‘revolutio’가 어원으로, ‘회전하다’, ‘바뀐다’, ‘반전하다’라는 뜻입니다. 정치적인 변화만 혁명이라고 하지는 않아요. 산업혁명, 디지털혁명처럼 새로운 체계가 시작할 때 혁명으로도 표현합니다. 혁(革)이라는 한자가 죽은 짐승에게서 벗겨낸 가죽을 펼쳐 놓은 상형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짐승이 죽으면 살은 금방 썩습니다. 가죽을 쓰려면 빨리 벗겨내 안쪽에 붙어 있는 고기를 떼고 물에 잘 씻어 한참 두들겨 부드럽게 무두질합니다. 혁에는 무두질이라는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여기서 왜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이라고 썼을까요. 고독이란 뭘까요. 김수영은 일기(1960년 6월 16일)에 이렇게 썼어요. “이 고독이 이제로부터의 나의 창조의 원동력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너무나 뚜렷하게 느낀다. 혁명도 이 위대한 고독이 없이는 되지 않는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혁명이란 위대한 창조적 추진력의 복본(複本·counterpart)이니까. 요즈음의 나의 심경은 외향적 명랑성과 내향적 침잠 혹은 섬세성을 완전히 일치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졸시 ‘푸른 하늘을’이 약간의 비관미를 띄우고 있는 것은 역시 격려의 의미에서 오는 것이리라.” 김수영은 정치·사회혁명과 시인의 내면혁명을 따로 생각하지 않아요. “나의 심경은 외향적 명랑성과 내향적 침잠 혹은 섬세성을 완전히 일치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구절에서 보듯, 외향적 명랑성(정치적 혁명)과 내향적 침장 혹은 섬세성(내면적 고독)을 일치시키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혁명도 이 위대한 고독이 없이는 되지 않는다”는 말은 자기혁명 없이 사회혁명은 없다는 말이죠. 철저히 자기혁명의 고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타인, 타국의 힘을 빌리는 순간, 그것은 이미 혁명이 아닙니다. 혁명은 철저히 나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철저히 자기혁명을 이룬 고독한 단독자들의 연대, 그것이 없다면 내면혁명, 외면혁명은 모두 실패한 것입니다. 고독하다는 것은 사사로운 인간관계와의 결별을 의미합니다. 적폐라는 과거와 결별한 절대고독에서 혁명은 가능합니다. 많은 사람이 민주주의를 위해 해직당하고, 가족과 이별하고, 고문받고, 감옥에 가고, 자살하고, 타인에 의해 죽었습니다. 혁명을 이루려면 국민 한 명 한 명이 고독한 노고지리처럼 피의 결심을 하고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합니다. ‘1987’의 주인공은 그 시대를 살았던 깨달은 단독자들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검사에서 기자로, 기자에서 교도관으로, 교도관에서 연희로, 연희에서 광장의 수많은 사람으로 바뀝니다. 역사를 변화시킨 주인공들은 깨달은 국민이라고 영화는 말합니다. 고독한 깨달음의 릴레이야말로 혁명을 이루기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4·19의 실패를 두 달 만에 예견한 이 시는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1967), 고은의 ‘화살’(1978)을 연상시킵니다. 국민 한 명 한 명이 홀로 피 흘리는 노고지리의 심정으로 매일 고독한 내면혁명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역사혁명은 절대 일어나지 않죠. 묵언정진하는 단독자들의 연대에 의해 혁명은 가능합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바꾸는 것만으로 혁명은 성공하지 않습니다. 내 안은 물론 과거의 적폐까지 몰아내려는 고독한 날갯짓을 할 때 우리는 푸른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비상(非常)한 때, 우리가 비상(飛上)하려면, 고독한 혁명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인·숙명여대 교수푸른 하늘을 제압(制壓)하는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부러워하던어느 시인(詩人)의 말은 수정(修正)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노고지리가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어째서 자유(自由)에는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혁명(革命)은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革命)은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김수영 ‘푸른 하늘을’(1960.6.15,)
  • [제25회 공초문학상] “이슬을 진주알로 만드는 詩… 혼돈의 시대 헤쳐가는 힘”

    [제25회 공초문학상] “이슬을 진주알로 만드는 詩… 혼돈의 시대 헤쳐가는 힘”

    “아침 이슬은 햇빛이 닿으면 스러지죠. 하지만 시인은 그 이슬을 부서지지 않는 진주알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빛을 보내면서요. 문학은 현실 세계에선 힘이 없어 보이죠. 그러나 문인들은 삶의 아픔과 희망을 작품으로 일깨우며 사람들이 혼돈의 시대를 헤쳐 가게 합니다.”김후란(83) 시인은 시란 ‘말 없는 등불’이라 믿는다. 현란하고 감각적인 이미지를 펼치는 대신 고요하고 깊은 숨결로 인간의 길을 일깨우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좋은 시란 침묵의 그늘을 거느린다’는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말을 겹쳐 보게 한다. 고아한 언어와 정제된 정서로 독자들에게 ‘침묵의 그늘’을 드리워 주는 그의 시가 제25회 공초문학상 수상작이 됐다. 올 2월 펴낸 시집 ‘고요함의 그늘에서’(시와시학)에 들여보낸 ‘지는 꽃’이다. “일회성으로만 허락된 인간 삶의 허허로움과 덧없음을 꽃에 빗대 쓴 시죠. 만개한 꽃의 눈부신 빛깔과 향기에 매료되지만 정작 지고 나면 허무하잖아요. 때문에 보이는 것을 좇기보단 진지하고도 겸허하게 사람과 사회와 어떻게 교감하며 살아야 할지 고민해 봐야 하죠. 그건 인간으로서의 사랑의 길이어야 하겠지요.” 결국 ‘어떻게 살아야 삶의 폭과 높이를 가치 있는 쪽으로 고양시킬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건청 시인)은 김후란 시를 관통하는 고민이자 주제다. 시인은 베트남전 종군기자로 눈앞에서 목격한 참상이 시 세계를 일구는 뼈아픈 거름이 됐다고 돌이켰다. 1967년 서울신문 기자로 일하던 시절, 그는 한국일보 이영희, 동아일보 박동은 등 여기자 2명, 최정희 소설가와 함께 전장에서 취재 활동을 벌였다.“사이공(현 호찌민)에서 최북단 추라이까지 각 부대를 순방하며 우리 병사들과 포로로 잡힌 베트콩들, 시신들을 봤죠. 시신을 일일이 수습할 수 없어 손톱 하나, 머리카락 하나가 유품으로 남은 것을 보면서는 얼마나 괴롭던지요. 아군, 적군 가릴 것 없이 그저 미안하고 눈물겨웠어요. 그들 하나하나가 가족에겐 귀한 젊은이들 아닌가요. 인간의 존엄과 생명을 짓밟는 전쟁이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걸 사무치게 실감했죠. 그때의 경험이 제 문학 세계를 평화 지향의 생명 존중 정신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은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로 일하던 시절, 문화부장인 신석초 시인의 추천으로 1960년 ‘현대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인은 1955년부터 1980년까지 네 개 언론사를 거치며 기자 생활과 시업(詩業)을 병행했다. 이후에도 한국여성개발원 원장, 생명의 숲 국민운동이사장,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한국문학관협회 회장 등 문단 안팎을 넘나드는 사회 활동을 이어 갔다. “어느덧 제가 오상순 시인을 만난 마지막 세대가 됐네요. 등단 직후 신석초 시인을 따라 명동 청동다방에 갔는데 오상순 시인이 반갑게 손을 잡아 주셨던 기업이 납니다. 문화부 기자로 일하면서 박목월, 서정주, 황순원, 구상, 조병화 등 우리 문학의 고전이 된 문인들과 교감하며 살아온 그 시절은 정신적으로 참 풍족하고 행복했어요. 기자 생활이나 사회 공직 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문학의 길에서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인으로서의 자긍심으로 두 길에 더욱 성심을 다했지요. 시인이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 정신적 의지가 강한 존재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웃음).” 이런 시인을 두고 수필가 피천득은 ‘그는 따스한 정서와 아울러 예리한 관찰력과 원숙한 지혜를 가졌고 그 정서와 지혜가 원만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의 본질은 정서 풍부한 시인’(김후란 시인의 첫 수필집 추천사에서)이라고 추어올렸다. 흔들림 없는 보폭으로 시인의 길을 걸어온 지 어느덧 반세기를 훌쩍 넘겼다. 지금도 시인의 침대 머리맡에는 메모지와 펜이 늘 자리해 있다. 시상이 떠오르면 언제든지 기록해 두기 위해서다. 새 시집을 낸 지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시인의 머릿속에선 벌써 다음 시집 구상이 한창이다. “이번 시집에선 김소월, 박두진, 윤동주, 정지용, 이육사 등 존경하는 선배 시인 10명의 대표 시에서 한 줄을 가져와 그들의 인간적 면모와 작품 세계를 아우르는 시 10편을 선보였어요. 이미 과거가 된 분들이지만 그들이 남긴 시와 더불어 살고 있다는 게 값지다고 느껴져서요. 그래서 30명을 꼽아 같은 방식으로 시를 써 시집 한 권으로 모아 보려 해요. 이들이야말로 독자들 마음에 빛을 심어 준 예술가들이니까요.”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김후란 시인은 ▲1934년 서울 출생 ▲1953년 서울대 사범대 수학 ▲1955~1980년 한국일보·서울신문·경향신문 기자, 부산일보 논설위원 재직 ▲신석초 시인 추천으로 196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1968년 현대문학상 ▲1997년 국민훈장 모란장 수훈 ▲1998~2000년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2004~2013년 한국문학관협회 회장 ▲2009년~현재 대한민국예술원 문학분과 회원 ▲2010년 서울대 사범대 명예졸업 ▲2014년 문화예술 은관문화훈장 수훈 ▲현 문학의 집·서울 이사장
  • 영원한 소년, 그의 생애·문학을 보다

    영원한 소년, 그의 생애·문학을 보다

    올해 10주기를 맞은 금아 피천득(1910~2007)은 대중의 사랑과 문단의 평가에 괴리가 있는 문인이다. 시인이자 수필가, 번역가로 아흔일곱 평생을 산 그는 각각 100여편의 수필과 시를 남겼다. 과작인 데다 간결하고 청아한 문장, 단순한 내용 탓에 ‘쉽다’고 재단해 버리는 평가가 우세했다. 타계 10년 만에 첫 평전이 나온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테다.최근 ‘피천득 평전’(시와진실)을 펴낸 제자 정정호 중앙대 영문학과 명예교수는 “‘쉬워서 깊이 읽을거리가 없다’는 불평은 겉모습에 속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제자가 돌아본 스승의 100여년 생은 ‘순수한 동심, 고매한 서정성을 간직한 채 삶과 문학을 일치시킨’ 여정이었다. 때문에 정 교수는 “피천득 삶과 문학의 최종 목표인 ‘지혜’란 심층을 들여다보기 위해선 깊고 넓게 사유하며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서울 정도로 절제된 그의 언어와 서정성은 비루한 시대 우리 삶을 치유한다는 의미 부여와 함께.닮은꼴이었던 고인의 문학과 삶은 제자의 회고대로 ‘나이를 잃은 영원한 소년’으로 요약된다. 5월에 태어나 5월에 세상을 떠난 그의 문학은 수필 ‘오월’의 한 구절과도 꼭 닮아 있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 가락지다. (중략)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수필 ‘오월’에서) 책은 그의 생애(1부)와 문학(2부), 사상(3부)으로 짜였다. 저자는 나라를 빼앗긴 해에 태어나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열 살에 어머니를 잃은 상실의 트라우마가 그의 문학적 뿌리가 됐다고 지적한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그는 어른으로서의 성장을 멈추고 ‘영원한 소년’이 됐고 이런 고아 의식이 ‘어린이 되기’라는 특유의 문학적 지향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단순과 소박, 겸손과 온유, 순수와 가난이란 추상 명사들을 일상에서 동사(動詞)로 작동시켰던” 고인의 행보는 생명의 근원을 빚어내는 ‘나무 되기’라는 결론에 이른다. 나무의 말 없는 사랑의 실천이 피천득이 자연에서 가장 닮고자 했던 철학이기 때문이다. 고인의 10주기 추모 행사도 잇따라 열린다. 1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흥사단 2층 강당에서는 문학 세미나가, 19일 오후 3시에는 중구 문학의집 서울에서 ‘음악이 있는 문학마당’이 열려 고인의 문학세계를 반추한다. 기일인 25일 오후 4시에는 경기 남양주 모란공원에서 추모식이 치러진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클럽 메카 홍대?… 이젠 ‘책의 도시’ 마포

    클럽 메카 홍대?… 이젠 ‘책의 도시’ 마포

    홍대입구역 경의선숲길공원에 간이역 산책로 걸으며 사색도 주변엔 독립서점·북카페 많아 “마포가 원래 책의 도시라는 것 아세요?” 27일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 옛 경의선 철길에서 만난 박홍섭 마포구청장은 생소한 질문을 했다. 마포 하면 클럽이나 인디밴드의 공연, 주점과 음식점, 카페 등 먹고 마시는 문화가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박 구청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마포가 교통이 편리한 데다 1960~70년대만 해도 임대료가 싸서 출판사나 인쇄업체가 여럿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문학과지성사 등을 비롯해 출판·인쇄업체 3909곳이 마포에 근거를 뒀는데 이 중 1047곳이 홍대에 몰려 있다. 최근에는 1인 출판사와 독립서점, 북카페 등도 많이 들어서 명소가 됐다. ‘책의 도시’로 입지를 굳힐 만한 명품 쉼터가 마포에 문을 연다. 구는 홍대입구역 6번 출구 앞 너른 터를 ‘경의선 책거리’로 조성해 28일 개장한다. 자치단체가 책을 소재로 테마 거리를 조성하는 건 처음이다. 이 터는 원래 경의선 폐철선을 공원으로 꾸민 ‘경의선숲길공원’의 한 구간으로 250m 길이다. 책거리는 산책로와 나무, 벤치, 책 부스 14개 등이 어우러져 조성됐다. 열차 모양의 부스 안에는 문학과 인문, 문화, 아동, 여행 등 주제별로 읽어볼 만한 책이나 새로 나온 책을 꽂아 놔 시민들이 빼 본 뒤 마음에 들면 바로 살 수 있도록 했다. 작은 서점인 셈이다. 또 녹슨 철판에 읽어볼 만한 책 100권의 이름을 새긴 조형물을 와우교 인근에 설치했다. 권장도서는 전문가와 주민이 머리를 맞대고 심사해 정했다. 백석의 ‘귀머거리 너구리와 백석 동화나라’, 피천득의 ‘인연’,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등이다. 산책로 주변으로는 벚나무와 홰나무 등을 심었다. 옛 서강역을 되살린 듯한 간이역 모양의 앉을 공간도 마련했다. 박 구청장은 “세상이 바쁘게만 돌아가는데 주민들이 책거리에서 느리게 걸으며 사색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책거리 조성 아이디어는 독서광인 박 구청장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그는 “2025년이면 국가별로 4차 산업혁명의 성패가 갈린다고 한다”면서 “지식혁명에 성공하려면 책을 가까이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는 책 읽기 편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성산동 옛 마포구청 터에 마포중앙도서관을 건립 중이다. 내년 8월 주민들에게 개방된다. 마포구 관계자는 “책거리 부지는 한국철도시설공단이 무상으로 내놨고 홍대복합역사를 건설 중인 ‘마포애경타운’이 공공기여 차원에서 33억 8000만원을 들여 건립했다”면서 “민관이 협력해 이색적인 주민 쉼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평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유흥의 메카’ 홍대, 책의 메카로 거듭난다…경의선 책거리 개관

    ‘유흥의 메카’ 홍대, 책의 메카로 거듭난다…경의선 책거리 개관

    “마포가 원래 책의 도시라는 것 아세요?” 27일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 옛 경의선 철길에서 만난 박홍섭 마포구청장은 생소한 질문을 했다. 마포 하면 클럽이나 인디밴드의 공연, 주점과 음식점, 카페 등 먹고 마시는 문화가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박 구청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마포가 교통이 편리한데다 1960~1970년대 만해도 임대료가 싸서 출판사나 인쇄업체가 여럿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문학과지성사 등을 비롯해 출판·인쇄업체 3909곳이 마포에 근거를 뒀는데 이 중 1047곳이 홍대에 몰려 있다. 최근에는 1인 출판사와 독립서점, 북카페 등도 많이 들어서 명소가 됐다. ‘책의 도시’로 입지를 굳힐만한 명품 쉼터가 마포에 문을 연다. 구는 홍대입구역 6번 출구 앞 너른 터를 ‘경의선 책거리’로 조성해 28일 개장한다. 자치단체가 책을 소재로 테마 거리를 조성하는 건 처음이다. 이 터는 원래 경의선 폐철선을 공원으로 꾸민 ‘경의선숲길공원’의 한 구간으로 250m 길이다. 책거리는 산책로와 나무, 벤치, 책 부스 14개 등이 어우러져 조성됐다. 열차 모양의 부스 안에는 문학과 인문, 문화, 아동, 여행 등 주제별로 읽어볼 만한 책이나 새로 나온 책을 꽂아놔 시민들이 빼 본 뒤 마음에 들면 바로 살 수 있도록 했다. 작은 서점인 셈이다. 또, 와우교 인근에 녹슨 철판에 읽어볼 만한 책 100권의 이름을 새긴 조형물을 설치했다. 권장도서는 전문가와 주민이 머리를 맞대고 심사해 정했다. 백석의 ‘귀머거리 너구리와 백석 동화나라’, 피천득의 ‘인연’,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등이다. 산책로 주변으로는 벚나무와 홰나무 등을 심었다. 옛 서강역을 되살린 듯한 간이역 모양의 앉을 공간도 마련했다. 박 구청장은 “세상이 바쁘게만 돌아가는데 주민들이 책거리에서 느리게 걸으며 사색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책거리 조성 아이디어는 독서광인 박 구청장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그는 “2025년이면 국가별로 4차 산업혁명의 성패가 갈린다고 한다”면서 “지식혁명에 성공하려면 책을 가까이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는 책읽기 편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성산동 옛 마포구청 터에 마포중앙도서관을 건립 중이다. 내년 8월 주민들에게 개방된다. 마포구 관계자는 “책거리 부지는 한국철도시설공단이 무상으로 내놨고 홍대복합역사를 건설 중인 ‘마포애경타운’이 공공기여 차원에서 33억 8000만원을 들여 건립했다”면서 “민관이 협력해 이색적인 주민 쉼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평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열린세상] 대북 제재 중에도 통일 준비는 계속해야 한다/이호령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

    [열린세상] 대북 제재 중에도 통일 준비는 계속해야 한다/이호령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

    5월의 신록은 너무나 신선해서 가슴에 활기를 주는 청춘과 같다며 청춘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라는 천상병의 ‘오월의 신록’이나,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는 피천득의 ‘오월’의 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시인과 작가들은 계절의 여왕 5월을 찬미해 왔다. 5월은 희망과 꿈, 그리고 도전이라는 단어들의 조합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래서인지 5월은 많은 기념일이 빼곡히 차 있는 달이기도 하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 그리고 5월의 마지막 주에 개최되는 통일 박람회에 이르기까지 기념할 날과 큰 행사들이 집중돼 있다. 그런데 5월의 남북 관계를 들여다보면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싱그러운 신록과 정반대로 가고 있다. 지난 5월 6일 36년 만에 개최한 7차 당대회에서 북한은 남북 관계의 회복과 발전을 향한 비전보다는 사회주의 강국을 조속히 건설해 나가기 위해 핵·경제 병진노선을 항구적인 전략노선으로 택하고, 2012년 헌법에 이어 2016년 당 규약에도 핵 국가임을 표기했다. 북한은 핵 문제 해결에 대한 의지는 전혀 보이지 않은 채 북한 비핵화를 국제 비핵화로 대체하고, 남북 관계 개선의 절박성을 언급하며 과거 ‘통미봉남’에서 ‘통남봉미’ 전략으로 선회하고 있다. 북한은 이례적으로 7차 당대회에서 남북 군사회담을 우선적으로 개최할 것을 표명한 이래 당대회가 종료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난 20일에는 국방위원회 공개 서한, 21일에는 인민무력부 통지문, 그리고 22일에는 원동연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국장 담화를 통해 3일 연속 군사회담을 제안했다. 우리가 비핵화에 대한 입장을 표명할 것을 요구하자 이에 대한 답변도 없이 또다시 동일한 내용으로 군사회담을 제안하고 있다. 심리전 중단과 전단 살포 중단을 위한 남북 군사 당국자 회담을 열자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와 안정의 주요 걸림돌인 핵 문제보다는 김정은의 권위를 약화시킬 수 있는 ‘최고 존엄’ 문제가 시급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권위의 문제는 북한 당국이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지 남북 간의 상호 긴장을 완화하고 안정과 평화를 회복시키는 조치와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 북한이 공세적으로 제안하는 군사회담은 북한의 통일 정책과도 연계돼 있다. 북한은 지난해 1월 신년사에서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어 나가자는 구호를 제시한 이래 이번 7차 당대회 사업총화 보고에서는 ‘하루빨리 분열의 장벽을 허물고 조국 통일의 대통로를 열어 나가야 한다며, 우리대에 반드시 조국을 통일’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통일 준비와 관련해서는 비평화적 방법에 의한 통일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남북 관계가 악화되고 교착 상태에 이른 것을 우리 탓으로 돌리며, 북한은 우선적으로 군사회담을 개최하고 이후 상호 관심 사안에 대한 각급별 대화와 협상을 전개해 나가는 ‘민족통일 대강’을 내세우고 있다. 즉 5월의 공세적인 북한의 군사회담 제안은 ‘통일’을 앞세운 남북 간 대화 국면을 재개하기 위한 공세적 전략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의 이러한 행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우리가 놓치고 있는 점은 없는가를 잘 살펴봐야 할 것이다. 즉 북한 비핵화의 전망이 밝지 않음에 따라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와 남북 관계의 경색이 장기화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은 어느새 ‘통일’의 화두를 희미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점이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 통일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낮아진 걸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통일에 대한 열정과 관심, 그리고 통일 준비는 남북 관계의 경색 여부에 따라 양은 냄비처럼 금방 달아올랐다가 식는 것이 아니라, 화롯불처럼 은근히 지속되는 것이다. 어쩌면 통일 준비는 지금처럼 소리 없이 조용히 그리고 쉼 없이 준비해 나가는 것이 더 맞을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5월 27일부터 29일까지 광화문 광장에서 개최되는 ‘통일박람회 2016’은 왜 우리가 통일을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해 준다. ‘온 국민이 함께하는 통일 축제의 장’이 ‘남북이 모두 함께하는 통일을 기념하는 축제의 장’이 돼 참으로 즐겁다고 말하는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려 본다.
  • [씨줄날줄] 시공을 초월한 사랑/이동구 논설위원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와 ABC뉴스 등은 최근 93세의 미국 남성과 88세 영국 여성의 사랑 이야기를 실어 화제를 모았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영국 런던의 템스 강둑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키웠지만 부대의 미국 본토 복귀로 둘은 서로 다른 배우자와 가정을 꾸렸다. 71년 동안 둘은 서로 먼저 세상을 등진 것으로 알고 추억만 간직한 채 지냈다. 하지만 부모로부터 과거의 연인 이야기를 자주 들었던 양쪽의 자녀들이 부모의 옛 연인을 찾아 나섰고, 인터넷 등의 도움으로 결국 성공했다. 미국과 호주에서 서로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영화 같은 이야기가 현실이 된 것이다. 태평양과 71년이란 세월을 넘어 옛사랑을 다시 만나는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을까. 전쟁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애틋한 사연들은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들에게서도 흔하다. 지난달 금강산에서 이뤄진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도 눈물 없이 볼 수 없었던 만남이 여럿 있었다. 그 가운데 65년 만에 만난 부부의 사연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리게 하고 있다. “살아 있어 고마워.”, “미안하고 고맙소.”, “오래 사슈.”, “잘 가시게…, 여보….” 뱃속에 잉태되었던 아기가 60세가 넘은 노인이 되고서야 다시 만난 부부였지만 또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생이별 장면은….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애틋함은 동양이든 서양이든 다를 게 없을 게다. 체코 프라하의 카를교 다리 밑이나 서울 남산공원 등지에 수없이 걸려 있는 ‘사랑의 자물쇠’는 이별의 아픔보다 결혼이라는 영원한 사랑을 바라는 애절함 때문일 것이다. 초원의 빛, 위대한 캐츠비 등의 할리우드 영화와 피천득의 인연을 비롯한 수많은 문학작품 등을 통해 못다 이룬 사랑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함께 공감하며 살아가고 있다. 반면에 젊은 날 사랑을 이루는 데 성공한 부부가 세월을 거듭할수록 미움을 쌓게 되는 경우도 많다. 전쟁과 평화 등 위대한 작품들을 남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82세의 나이에 아내와의 가정불화를 견디지 못하고 눈 내리는 날 집을 나섰다가 얼어 죽은 채 발견됐다고 한다. 최근엔 나이 지긋한 노부부들의 이혼이 늘어나고 있다. 이른바 황혼 이혼이다. 법원 행정처가 최근 발간한 2015 사법연감에 따르면 20년 이상 결혼생활을 해오다 지난해 이혼한 황혼 이혼 건수는 3만 3140건에 이른다. 전체 이혼 건수의 28%를 넘는다고 한다. 신혼 때가 아니라 오래 살면 살수록 이혼 확률이 점점 더 높아지는 세태가 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성격 차이, 남편의 외도가 황혼 이혼의 주요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다니 젊음이 오래 유지되는 장수시대의 새로운 그늘이 아닌가 싶다. 이동구 논설위원 yidonggu@seoul.co.kr
  • 양띠 해 맞아 ‘행복을 부르는… ’ 특별전

    국립민속박물관은 매년 새해 띠 동물의 역사와 문화를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특별전을 열어 왔다. 올해엔 을미년 양(羊)의 해를 맞아 ‘행복을 부르는 양’이라는 주제 아래 양띠 해 특별전을 마련했다. 특별전엔 양과 관련된 역사·생활 자료, 근현대 문학작품 등 76점이 전시된다. 양은 유목문화에서 익숙한 동물이다. 농경문화인 우리나라에선 20세기 이전엔 거의 볼 수 없었다. 열두 띠 동물들 가운데 다른 동물들에 비해 기록이나 유물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이유다. 우리 문화에서 말하는 양은 요즘 우리에게 익숙한 면양(綿羊)이 아니라 산양(山羊)이나 염소였다. 양의 외형과 습성, 생태는 상(祥), 선(善), 미(美), 희(犧), 의(義) 등 좋은 의미를 담은 글자로 이어졌고, 이런 특성들이 상징화돼 생활문화에선 길상(吉祥)의 소재로 사용됐다. 전시는 도입부와 3부로 나눠져 있다. 도입부에선 면양, 산양, 염소의 개념과 특성을 여러 자료로 설명해 양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 1부 ‘십이지(十二支) 동물의 양’에서는 시간과 방위 개념의 십이지와 각 방위의 수호자 역할을 하는 십이지 동물들을 소개하며 해시계, 십이지번, 정미기 등을 통해 십이지 동물로서의 양의 역할을 알아본다. 2부 ‘길상을 담은 양’에서는 동자가 흰 양을 타고 있는 ‘기양동자도’(騎羊童子圖), 왕실 제사에 사용하던 ‘양정’(羊鼎) 등을 통해 양에 담긴 의미와 상징성을 살펴본다. 3부 ‘생활 속의 양’에서는 피천득의 시 ‘양’을 비롯한 근현대 문학작품, ‘양털저고리’ 같은 양과 관련된 복식과 생활용품 등 양의 이미지와 쓰임새를 소개한다. 또한 ‘양의 탈을 쓴 이리’ 같은 속담과 ‘양두구육’(羊頭狗肉) 등의 사자성어, 양띠 해에 태어난 인물, 양띠 해 주요 사건 등도 소개한다. 전시는 오는 2월 23일까지 국립민속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다. (02)3704-3114.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축구 자료 4만여점 수집 이재형 축구역사문화연구소장

    [김문이 만난사람] 축구 자료 4만여점 수집 이재형 축구역사문화연구소장

    피천득 선생은 생전에 2002년 월드컵 승리를 기원하며 ‘붉은 악마’라는 시를 지었다. ‘붉은 악마들의/끓는 피 슛! 슛! 슛 볼이/적의 문을 부수는/저 아우성! 미쳤다. 미쳤다/다들 미쳤다 미치지 않은 사람은/정말 미친 사람이다.’ 그랬다. 2002년 6월 18일이다. 이탈리아와 16강 연장전에서 안정환 선수가 환상적인 헤딩골을 터뜨려 온 국민을 환각상태에 빠뜨리게 했던 광경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다면 당시 그 볼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2003년 어느 날이다. 한 TV방송에서 월드컵 1주년을 맞아 특집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그러면서 한국과 이탈리아전에서 주심을 맡았던 에콰도르의 바이런 모레노와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왔다. 당시 모레노 주심은 거친 플레이를 일삼는 이탈리아 공격수 토티에게 레드카드를 꺼내 퇴장시켰다. 이로 인해 유럽에서는 ‘편파 판정, 홈팀 봐주기’라고 맹비난했다. 방송사는 모레노 주심을 만나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지 다시 물었고 모레노는 공명정대한 판정이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면서 ‘당시 안정환 선수가 넣은 골든볼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지켜보던 한 남자는 심장이 멎을 듯한 전율을 느꼈고 ‘저 공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찾아와야 한다’고 다짐했다. 축구역사문화연구소 이재형(53) 소장이 바로 그 남자다. 이 소장은 그날부터 혼자서 안정환의 골든볼을 찾아오는 작전에 들어갔다. 우선 수소문 끝에 모레노의 주소지를 파악한 다음 모레노에게 줄 선물을 마련했다. 그냥 달라고 하면 선뜻 내주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월드컵 사진집에서 가장 잘 나온 모레노의 사진을 골라 서울시내의 한 동판 제작사를 찾았다. 되도록 최고급으로 만들어줄 것을 부탁했다. 마침 제작사 사장이 축구를 좋아했던지라 이 소장의 뜻을 전해듣고 원래 가격보다 좀 싸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얼마 후 동판이 완성되자 이 소장은 동판 제작과정을 촬영한 연속사진과 월드컵 기념 히딩크 넥타이, 2002년 한·일 월드컵 사진집, 월드컵 기념 공 등 네 가지 선물을 꾸린 보따리를 들고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로 날아갔다. 이때가 2004년 2월 3일이었다. ‘키토 0203 작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름대로 반드시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다짐에서 작전명을 세웠던 것이다. 지난 13일 서울 동대문구 보문동에 위치한 연구소에서 이 소장을 만나 당시 내용을 들었다. “모레노의 집에 도착했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틀 전 업무차 미국 마이애미로 떠나 20여일 후에나 돌아온다는 것이었습니다. 허탕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더군요. 고민 끝에 현지에서 봉제업을 하는 교포에게 부탁했습니다. 모레노가 오는 즉시 ‘골든볼을 꼭 기증해 달라’는 간곡한 내용의 편지와 함께 선물을 맡기고 귀국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한국에 돌아와 연락을 애타게 기다린 지 20여일 지나자 골든볼을 기꺼이 기증하겠다는 대답을 듣게 됐고 며칠 뒤 공무차 귀국하는 주에콰도르 대사관 직원을 통해 인천공항에서 전달받았다. 또한 모레노가 보낸 보따리에는 골든볼뿐만 아니라 당시 이탈리아 선수 토티를 퇴장시킨 레드카드와 자신이 입었던 주심 유니폼, ‘대한민국 국민이 이 볼을 보면서 월드컵의 감격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이재형 소장에게 영구히 기증한다’는 내용의 서신까지 담겨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한·일월드컵 16강에서 터뜨린 안정환의 골든볼은 현재 수원월드컵박물관에 기증돼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그의 노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다음에는 스페인전에서 패널티킥으로 4강 신화를 쏘아 올린 ‘홍명보의 볼’이었다. 월드컵조직위원회, 대한축구협회 등에 수소문했으나 어느 누구도 공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여러 자료를 뒤진 끝에 ‘2002 FIFA 공식보고서’를 통해 한국과 스페인전 주심이 이집트의 가말 알 간두르라는 사실과 이집트축구협회를 통해 연락처를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즉시 간두르에게 이집트에 갈 일이 있을 때 꼭 만나보고 싶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고 그렇게 해도 좋다는 답신을 받았다. 이 소장은 2006년 8월 3일 작전명을 ‘0803’이라고 정하고 카이로행 비행기에 올랐다. 3일 뒤 마침내 가이드와 함께 간두르의 집에 도착했다. 자연스럽게 한·일월드컵 당시의 상황이 화제가 됐다. 모호한 판정으로 스페인 축구팬들로부터 협박을 받았던 일, 그래서 학교 다니는 딸에게 1년간 경호원을 붙였던 일 등을 털어놨다. 이어 간두르는 4강볼을 보여주었다. 볼에는 당시 4강 신화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여러 사인들이 있었다. 주심과 부심, 감독관 등의 친필 사인이었다. 경기가 끝났을 때 간두르는 심판들에게 “현역 심판복을 벗는 마지막 월드컵 무대에서 4강을 결정지은 공을 보관하고 싶다”고 말해 각자 공에 사인을 해주었다는 사실도 고백했다. 그러나 간두르는 기증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밝혔다. 이 소장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설득했다. 4강볼이 이집트에 있으면 한 개인의 영광이겠지만 한국에 가면 한 나라의 영광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때 저녁 8시부터 자정까지 계속 얘기를 했습니다. 4강볼은 한국축구 100년사에 길이 빛날 역사적 증거자료로 빛을 발할 것이며 박물관에 영원히 보관하면서 가말 알 간두르란 이름으로 명패를 새겨 공과 함께 당신의 명예가 영구히 보존되도록 할 것이라고 몇번이고 말을 했지요. 언제든 가족과 함께 볼 수 있도록 초청하겠다고도 했습니다. 그러자 간두르는 마음이 흔들렸던지 잠시 가족회의를 열고 나서 ‘대한민국 국민에게 이 공을 바친다’는 편지와 함께 4강볼을 건네줬지요.” 이 소장의 끈질긴 설득과 축구 열정에 감동해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됐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이틀 후 대사관에서 공식 전달식이 열렸다. 간두르가 대사에게 기증하고 이 소장이 공을 전달받는 형식을 거친 뒤 귀국했다. 이러한 사실은 곧 국내 언론에 보도됐다. 일부에서는 ‘홍명보의 4강볼’이 경매시장에 내놓으면 22억원 정도는 받을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이 소장은 간두르와의 약속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 이처럼 한국 축구의 보물을 찾으러 다니기도 했지만, 그가 세계 40여개국을 다니면서 꾸준히 모은 축구자료는 통틀어 모두 4만여점에 이른다. 그가 사는 아파트는 온통 축구자료로 가득하다. 한국축구 100년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각종 사진자료, 1954년 월드컵 때부터 입었던 유니폼 등을 비롯해 축구대회 포스터, 축구화, 축구공, 국내외 축구스타 사진, 엠블렘 등 말 그대로 축구에 관한 한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모은 것들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펠레가 무명시절에 찼던 축구공이다. 가죽 조각을 일일이 이어붙인 다갈색의 수제품으로 펠레의 친필사인과 브라질축구협회의 인증서도 있다. 2003년 브라질 상파울루의 한 골동품 경매장에서 경매물건으로 나왔다는 지인의 연락을 받고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직접 구입했다. 펠레를 세계적 스타로 만든 귀한 공을 수집한 후 펠레 관련용품만 100여점을 모았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때 입고 출전한 등번호 10번의 유니폼, 펠레 관련 서적들, 펠레 모형의 인형, 기념우표, 초상화 등이 대표적이다. 펠레와 함께 세계축구사에서 전설로 통하는 포르투갈의 에우제비우의 공도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경매장에서 입수한 뒤 2004년 리스본에서 에우제비우를 만나 직접 사인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가 축구에 관심을 가진 것은 초등학교 때 축구선수를 하면서였다. 계속 축구를 하고 싶었으나 부모님의 반대에 축구부가 없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축구와의 인연이 끊어졌다. 축구선수가 되지 못하자 보상심리가 발동돼 축구관련 자료수집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 서울 돈암동의 한 은행에서 받은 축구공 모양의 플라스틱 저금통이 최초의 수집품이다. 이후 시간이 날 때마다 축구장을 찾았고 여러 자료들을 모아나갔다. 대학에서 금속학을 전공한 그는 국내외 축구자료들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위해 다니던 첫 직장을 그만두고 ‘월간축구’(현 베스트일레븐)라는 축구잡지 기자를 지원했다. 이때부터 경기를 관람하고 좋아하는 축구선수들과 만나는 것이 일이자 취미가 됐다. 그렇게 바삐 지내다 보니 아직 결혼을 못했다. 그는 자료수집뿐만 아니라 주말이면 어김없이 축구장에 나가 직접 선수로 뛴다. 이때마다 공격수로 평균 두세 골씩 넣곤 했는데 축구황제 펠레의 통산 1300골보다 더 많은 4000골을 넣었다며 웃는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축구복합문화센터, 축구박물관을 짓는 일”이라고 대답한다. 인터뷰를 마친 이틀 후 그는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브라질로 향했다. 어떤 귀중한 자료를 수집해올지 궁금해진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이재형은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동기계공고와 인하대 금속학과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축구선수였으며 중학교 때부터 축구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2004년 3월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린 ‘안정환의 골든볼’을 에콰도르에서 찾아냈다. 2006년 8월에는 한·일월드컵 때 4강 신화를 쏘아 올린 ‘홍명보의 4강볼’을 이집트에서 찾아내기도 했다. 지금까지 40여개국을 다니면서 귀중한 축구 관련 자료 4만여점을 모았다. 그동안 소장전을 몇 차례 가졌다. 현재 축구자료 수집가로 활동하면서 축구역사문화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축구잡지 ‘베스트일레븐’ 이사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22억짜리 축구공’이 있다.
  • [어린이 책꽂이]

    [어린이 책꽂이]

    자전거(피천득 지음, 권세혁 그림, 현북스 펴냄) 25일 타계 7주기를 맞는 피천득 작가가 1959년 시문집 ‘금아시문선’에 실은 동화를 그림책으로 옮겼다. 커다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가게 심부름꾼 칠성이가 부러웠던 남이. 세발 자전거만 타다 위태로운 두발 자전거에 처음 몸을 실은 남이의 모험은 무사히 마무리될 수 있을까. 1만 2000원. 문학 속의 지리 이야기(조지욱 지음, 사계절 펴냄) ‘메밀꽃 필 무렵’에서 강원도 산지에 메밀밭이 펼쳐져 있는 이유는 뭘까. ‘15소년 표류기’에서 뉴질랜드 바다에 있는 요트를 첼리의 무인도로 끌고 간 해류는 무엇일까. 고교 지리 선생님이 특정한 자연과 사회 속에 놓인 인간을 그린 문학 속 지리 이야기로 ‘공간의 인문학’을 들려준다. 1만 3800원. 나도 커지고 싶어!(조너선 벤틀리 지음·그림, 홍연미 옮김, 주니어RHK) ‘다리가 기린처럼 기다랗다면, 입이 악어처럼 커다랗다면’ 형, 누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늘 커지고 싶은 아이의 심리를 앙증맞고 고운 스케치만큼이나 섬세하게 그려냈다. 1만 1000원.
  • “자존심 지키는 멋진 어른이 되길” 성북구청장, 자선다이어리 참가

    “자존심 지키는 멋진 어른이 되길” 성북구청장, 자선다이어리 참가

    시설 퇴소 청소년을 돕는 사회 명사 다이어리 전시회에 서울시 기초지방자치단체장 25명 가운데 김영배 성북구청장이 유일하게 참여해 눈길을 끈다. 7~26일 서울도서관 생각마루에서 ‘열여덟 어른의 자립정착 꿈’ 캠페인을 지원하기 위해 열리는 ‘100인의 다이어리전’이다. 지난해 12월 교보문고 전시회가 자리를 옮겨 2차 전시회를 갖는 것. 아름다운재단 등이 부모가 없거나, 집안의 경제적 사정 등으로 보육원이나 공동생활 가정 등에서 보호받다가 18세가 돼 시설을 떠나게 된 청소년을 돕기 위해 마련했다. 시설 퇴소 청소년들은 자립 정착금으로 300만원을 지원받지만 대부분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다. 재단은 유명 캘리그래퍼 강병인씨가 재능기부로 ‘꿈 활짝 피어나다’라는 글씨를 새긴 다이어리를 제작, 일반에 판매해 얻은 수익금으로 시설 퇴소 청소년 자립을 돕는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또 소설가 조정래, 만화가 윤태호, 뮤지션 장기하 등 사회 각계각층 명사 100명의 친필 사인과 꿈에 대한 메시지를 새긴 다이어리를 1권씩 특별 제작해 전시하고 있다. 이 다이어리는 추첨을 통해 캠페인 참가자에게 기념품으로 제공된다. 김 구청장의 경우 공적 영역에서 진정성을 갖고 연대와 호혜의 가치를 펼치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은 재단이 적극 섭외했다는 후문이다. 그의 저서 ‘동네 안에 국가 있다’도 함께 전시된다. 김 구청장은 피천득 시인의 ‘인연’을 인용하며 “자존심을 지킬 줄 아는 멋진 어른이 되길 응원한다”고 적었다. 재단 상임이사를 지낸 박원순 서울시장도 전시회에 참여한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춤으로 읽는 피천득 ‘인연’·황순원 ‘소나기’

    춤으로 읽는 피천득 ‘인연’·황순원 ‘소나기’

    교과서에 실려 국민의 가슴 속에 아련한 감흥을 남긴 피천득의 수필 ‘인연’과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가 아름다운 춤으로 재탄생한다. 정신혜(신라대 무용학과 교수)무용단은 두 작품을 1, 2부로 엮은 창작춤 ‘소녀’를 오는 22, 23일 이틀간 오후 7시 30분 부산 해운대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에서 공연한다고 밝혔다. ‘소녀’는 창단 16년을 맞은 정신혜무용단이 기획한 ‘춤으로 읽는 문학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 정신혜·이태상 신라대 무용학과 초빙교수, 김예리, 배강원 등 한 무대에서 만나기 힘든 최고의 무용가 4인을 비롯해 무용수 30여명과 설치미술, 라이브연주, 의상, 조명, 분장 스태프 등을 포함한 70여명이 대거 참여해 종합예술인 무용의 신명과 화려함을 선사한다. 안무자인 정신혜 교수는 20대 때 자신의 이름을 내건 무용단을 만들어 각종 상을 휩쓴 차세대 대표 한국무용가로 1부 ‘인연’ 공연 때 주연인 소녀로 나선다. ‘소나기’의 여자 주역 김예리(예명 한예리)는 정 교수로부터 춤을 배우고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춤꾼으로 영화로도 활동 영역을 넓혀 지난해 인기를 끈 영화 ‘코리아’에서의 열연으로 2013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받았다. 남자 주역 배강원은 젊은 남성 한국무용가를 대표하는 춤꾼이다. 정 교수는 “‘소녀’는 우리들의 아련한 옛 추억과 향수, 시간을 버무려 아름다운 무용 대작으로 꾸민 것”이라며 “원초적 몸의 움직임과 설치미술작품, 라이브 음악 연주 등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공연을 통해 그리움을 되돌아볼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을 선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베트남 얼굴 기형 어린이 17년째 무료수술 백롱민 분당서울대병원 교수

    [김문이 만난사람] 베트남 얼굴 기형 어린이 17년째 무료수술 백롱민 분당서울대병원 교수

    동심이다. 생각할수록 가슴 설렌다. 옥구슬 굴러가듯 영롱하다. 하여 누구나 불렀다. ‘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우리가 자라면 나라의 일꾼~’ 굳이 설명이 필요없다. 동요의 아버지 고(故) 윤석중 선생이 남긴 ‘어린이날 노래’이다. 지천에 꽃이 피고 나무와 들판에는 온통 푸름으로 가득하다. 앵두와 어린 딸기의 계절이다. 그래서 고 피천득 선생은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라고 읊었다. 두 밤만 자면 어린이날이다. 세상에서 어린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만, 어린이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얼마나 될까. 더구나 한결같이 어린이를 위하고 많은 업적을 남기기란 쉽지 않다. 백롱민(54) 분당서울대병원 교수는 기형 얼굴을 가진 어린이만 17년째 무료로 수술해 주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서 매년 봉사활동을 펼쳐 그동안 3000여명의 기형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삶과 희망의 미소를 선물해 오고 있다. 우리나라 어린이에게도 이러한 무료 수술을 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요즘에는 몽골과 우즈베키스탄 어린이에게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백 교수는 의학계에서 구순구개열 수술 분야의 권위자로 잘 알려져 있다. 구순구개열은 입술, 입천정, 코 등의 기형을 동반하는 것으로 최근에는 출산율 감소로 줄어드는 추세이지만 아직도 가장 흔한 선천성 얼굴 기형 중 하나다. 이러한 얼굴을 가진 어린이들은 마음의 상처로 웃음을 잃은 채 살아가기 마련이다. ●40여명의 의료진과 봉사활동 중 어린이날을 며칠 앞둔 지난달 30일 오전 분당서울대병원에서 백 교수를 만났다. 부원장 직책을 맡고 있어서 그런지 바쁜 회의 도중 잠시 짬을 내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 자리에 앉으면서 백 교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라는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나누고 사랑하고 베푸는 만큼 세상은 더 환해집니다’라는 부제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저자 이름이 특이했다. ‘세민얼굴기형돕기회’(Smile For Chidren)였다. 이에 대한 설명이 적힌 글을 살짝 들여다봤다. ‘세민얼굴기형돕기회는 우리나라 성형외과의 살아 있는 전설 백세민 박사가 주축이 되어 선천적 얼굴 기형 어린이들에게 무료로 수술을 해주기 위해 결성한 단체. 1989년 전국 순회 진료를 통해 국내의 얼굴 기형 어린이 환자에 대한 무료 수술을 시작한 이래 1996년부터는 베트남 의료봉사를 시작해 그동안 3000여명의 얼굴 기형 환자에게 희망의 미소를 선물했다.’ 백 교수는 백세민 박사의 친동생으로 현재 40명의 의료진과 함께 기형 어린이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래서 베트남과 몽골 등지에서는 백 교수를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책 이야기부터 나왔다. 잘 팔리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동안 일해 왔던 것을 한번 모아보자는 의견이 있어서 지난해 말 발간했는데 1만부 이상은 나간 것 같아요. 아마 많이 팔리면 봉사자금 마련에도 도움이 되겠지요. 세민얼굴기형돕기회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4600명이 넘는 얼굴 기형 어린이의 진료를 지원했으며 그중 1150여명은 수술비를 지원받아 환한 웃음을 되찾았거든요.” ●환자집 수소문해서 찾아 가기도 세민얼굴기형돕기회에 대한 설명이 다시 이어진다. “처음에는 자연발생적으로 의료진들이 모여 봉사활동을 시작해 오다가 1995년 사단법인으로 등록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벌이게 됐다.”면서 “이 모임에 가입된 회원은 1000명 정도”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떤 계기로 베트남 어린이들과 인연을 맺게 됐을까. “1989년부터 국내 어린이들 위주로 활동을 해 오다가 법인이 결성되면서 조금 여력이 생겼습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로도 눈을 돌리자고 했지요. 우리보다 열악한 환경에 처한 나라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주한 베트남 대사를 만나게 됐고, 또 그 대사가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면서 베트남 의무사령부 관계자를 소개하면서 베트남 현지에서 수술활동이 이루어지도록 편의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백 교수는 처음에는 현지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고 했다. 왜냐하면 당시 유럽 국가나 미국 등에서도 비슷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의료진도 그러려니 하는 선입견이 작용했던 것.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성심성의껏 임하는 자세에 베트남 사람들도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현지 반응 썩 좋지 않아 “우리 한국 사람들은 원래 부지런하잖아요. 정신없이 일했지요. 다른 나라 사람들과는 달리 관광할 생각도 안 하고 노는 날도 없이 일했습니다. 처음 200명의 어린이들 수술이 끝나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베트남 사람들이 다음에도 꼭 와달라고 간절이 바라더군요. 처음에는 오래 활동할 생각이 없었는데 오늘까지 계속 인연을 맺게 됐어요.” 베트남 활동은 하노이에서 처음 시작해 50개 지방자치 단체를 돌면서 계속됐다. 그러나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결코 쉽지가 않았다. 교통편 등 여러 가지 열악한 환경도 있었지만 환자를 찾는 데 어려움이 많았던 것. 얼굴 기형을 가진 환자들 대부분이 밖으로 안 나오고 집에 숨어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수소문해서 찾아가는 수술방식도 병행했다. 백 교수 팀은 입국한 날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쉼 없이 강행군한다. 보통 한 번 갈 때마다 200명 정도 수술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7일 동안 머무를 경우 하루에 30명씩 수술을 한다. 따라서 밤늦게까지 수술이 계속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수류탄을 가지고 놀다가 터져 목과 손이 붙어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얼굴과 상체 대부분이 화상을 입은 어린이를 봤습니다. 마취조차 안 되는 상태를 보고 마음이 매우 아팠지요. 유일한 방법은 내시경 마취였는데 베트남에는 그런 장비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한국으로 초청해 내시경으로 마취한 뒤 1차 수술을 했고 그 다음 베트남에서 두 번 수술한 끝에 그 어린이는 새 희망을 찾게 됐습니다. 얼마 전 편지가 왔는데 일자리도 얻었고 곧 결혼하게 됐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가장 마음이 아팠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일로 남아 있지요.” 2001년 호찌민 다오175병원에서 구개열 수술을 받은 바우쫑(당시 8세)이라는 여자아이는 입천장이 벌어진 채로 태어났지만 부모들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수술받을 형편도 못 됐지만 그가 사는 곳 주변에 수술해줄 병원이나 의사도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한국 의료봉사단이 무료수술을 해준다는 얘기를 듣고 120㎞를 달려와 수술을 받고 밝은 모습을 찾았다. 이를 본 바우쫑의 부모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2006년 하노이에서 차로 세 시간 정도에 있는 남딘에서 134명의 환자를 수술할 때였다. 두옹(당시 14세)은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구순구개열이 심해서 어렸을 때부터 음식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한 탓이다. 두옹은 그동안 베트남 병원과 미국 자선단체 지원으로 세 번이나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 두옹 부모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백 교수 팀을 찾았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입도 다물어지고 무엇보다 정상적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됐다. 1년 뒤 두옹은 친구들도 많이 생기고 삶의 자신감까지 얻어 행복하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많은 어린이들에게 먹는 것은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제대로 먹지 못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본인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이런 아이들에게 수술은 인생 전체를 바꾸어주는 기적이나 다름없지요.” ●하루에만 30명씩 수술 강행군 백 교수는 베트남에 갈 때마다 기금을 모아 장비와 소모품, 마취기계까지 필요한 의료장비를 구입한다. 그리고 치료를 마치고 난 후에는 현지 병원에 기증하고 돌아온다. 매번 가서 직접 치료해 주는 것보다 베트남 의사들을 교육해서 그들이 계속 환자를 돌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의료봉사를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보다 열정과 봉사정신을 가지고 수술에 임해준 한국 의료진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동안 아무런 사고 없이 베트남 아이들에게 희망의 미소를 찾아줄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또한 요즘에도 이에 동참하려는 의사들이 늘고 있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다음 달 23일부터 30일까지 베트남 빈롱 지역으로 봉사를 떠나 또 다른 200명의 얼굴 기형 어린이에게 희망의 미소를 찾아줄 예정이다. 그에게 앞으로의 꿈을 물었다. 그랬더니 “의사로서 돕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앞으로는 북한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삶을 찾아주고 싶다.”면서 “이를 위해 그동안 평양에 두 번 다녀왔는데 아직 진척이 안 되고 있다.”고 말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한국의 슈바이처’ 백롱민 교수는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산 동아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동 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성형외과학), 분당서울대병원 과장을 거쳐 현재 진료부원장을 맡고 있다. 1995년부터 사단법인 세민얼굴기형돕기회를 결성, 지금까지 베트남 얼굴 기형 어린이 3000여명, 국내 얼굴 기형 어린이 1000여명 등에게 무료수술을 해 오고 있다. 이 밖에 대한의학레이저학회 이사장, 대한두개저외과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한두개안면성형외과학회 상임 이사, 대한안면윤곽성형연구회 회장, 미국성형외과학회(ASPS), 미국 국제미세수술학회(WSMS) 회원으로 있다.
  • [씨줄날줄] 경춘선/임태순 논설위원

    지난 주말 문상차 춘천을 다녀왔다. 승용차로 함께 가자는 친구의 말을 뿌리치고 상봉역으로 가 혼자 전철에 올라타는 청승을 떨었다. 조금 지나니 도심을 벗어나 전원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대성리, 청평, 가평, 강촌 등을 지나자 북한강을 낀 수려한 풍광이 연이어 펼쳐져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동료들보다 먼저 춘천에 닿고 눈까지 호사했으니 내심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에 쾌재를 불렀다. 경춘선은 도시인들의 영원한 로망이다. 열차에 몸을 실으면 금세 혼잡한 도시를 벗어나 한적한 시골과 마주친다. 경춘선의 탈서울 기능은 숙명이었던 것 같다. 일본 특파원 미즈시마 겐도 1939년 개통 당시 ‘경춘 철도 시승기’를 쓰면서 “나직하고 작게 멀어지는 경성의 거리, 그 거리의 하늘에 우뚝 솟아 있는 프랑스 교회의 첨탑이 묘하게 빛난다.”고 했다. 경춘선에는 또 추억과 낭만이 남아 있다. 대학생 시절 인기 MT 장소이자 연인과 떠나는 기차여행지로 사랑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경춘선에는 애틋한 마음을 갖고 있다. 경춘선이 오랫동안 남다른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차창 밖 경치도 절경이지만 도시화의 때를 덜 탄 요인도 크다. 서울·인천의 경인 축과 서울·수원의 경수 축이 도시 연담화(連擔化)로 거대도시가 된 것과 달리 경춘 축은 인구 유입이 적어 한적한 시골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피천득의 명수필 ‘인연’도 경춘선과의 인연이 없었으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학에 강의를 하기 위해 춘천을 자주 오가던 그는 “그리워하면서도 한번 만나고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서로 아니 만나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번 만났다.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고 토로하면서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라고 했다. 경춘선에 어제부터 ‘ITX-청춘’이 추가 투입돼 기존의 전동차와 함께 복수 운행에 들어갔다. ITX-청춘은 KTX 다음으로 빠른 준고속 열차로 최고속도가 시속 180㎞에 이른다. 서울 용산과 춘천을 69분에 달려 기존의 전동차보다 운행시간이 30여분 단축된다. ITX-청춘이 투입됨으로써 경춘선은 세번째 변신을 하게 됐다. 일제시대인 1939년 사설철도로 첫출발한 경춘선은 1946년 국유화된 뒤 무궁화 열차로 운행되다 2010년부터 상봉~춘천 복선전철이 개통되면서 수도권 전철이 됐다. 피천득이 살아 있었다면 경춘선의 세번째 인연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EBS FM 모닝스페셜 ‘재키브편’

    EBS FM 모닝스페셜 ‘재키브편’

    24일 오전 8시 EBS FM 모닝스페셜은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피 재키브를 초대한다. 수필가 피천득 선생의 외손자로 널리 알려진 재키브는 2009년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연주앨범으로 한국 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얘기를 들어본다.
  • “노숙자도 클래식 즐길 권리 있기에 무료공연 고수”

    “노숙자도 클래식 즐길 권리 있기에 무료공연 고수”

    자고 나면 몇 개씩 클래식 연주단체들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곳이 미국 뉴욕이다. 최소 3년 정도는 지속적인 활동을 펼쳐야 주(연방) 정부나 기업 후원을 기대할 수 있다. 신생단체가 주목받기는커녕, 생존도 쉽지 않다는 얘기다. 지난해 만들어진 뉴욕클래시컬플레이어스(이하 NYCP)에 눈길이 가는 까닭이다. 100% 무료공연을 펼치면서도 10만 달러가량의 기부를 끌어내는 등 성공적인 데뷔 시즌을 마무리한 것. ‘무료공연’이라고 하면 아마추어들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NYCP는 다르다. 다쑨 장(더블베이스·텍사스주립대 교수) 등 실력파 연주자들은 물론 음악감독을 맡은 지휘자 김동민(39)이 중심을 잡고 있다. 뉴저지에 머물고 있는 김 감독을 24일 전화 인터뷰했다. 김 감독은 기억이 미치지 못하는 나이부터 음악을 듣고 자랐다. 현악기 장인 김현주(71)씨가 그의 아버지다. 국내 두 사람뿐인 바이올린 마이스터(독일 정부가 최고 기능인에게 주는 자격증) 김동인(42)씨가 형이다. 연세대에서 비올라를 전공한 김 감독은 인디애나주립대로 유학을 떠나 비올라와 지휘를 복수전공했다. NYCP의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린 것은 2년 전. “인디애나의 공공도서관을 갔는데 홈리스(노숙자) 행색의 흑인 할아버지가 세상의 모든 걱정을 초월한 듯 두 시간쯤 클래식 음악을 듣는 모습을 봤다. 이후로도 3일 연속 오더라. 당장 생계가 급할 텐데, 그 이상의 무언가를 얻는 것이다. 처음으로 음악을 해야 하는 이유와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후 인터넷을 검색하다 교회나 학교 강당에서 무료공연을 하는 실내악단 홈페이지를 발견했다. 씨줄과 날줄이 엮이는 순간이었다.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뉴욕의 젊은 연주자들이 의기투합했다. 인디애나주립대 동문이자 10년 지기인 콘트라베이시스트 다쑨 장이 그랬다. 김 감독은 “음악을 접하는 데 어떤 이유로도 소외되는 분들이 없도록 하자는 게 NYCP의 설립 취지다. 굳이 링컨센터나 카네기홀에 오지 않더라도, 혹은 갈 수 없는 사람도 음악을 즐길 권리가 있다. 통상 미국의 전문 연주단체는 연간 예산의 35%를 티켓 판매로 충당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부분을 포기하고서라도 원칙을 지켜 나갈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때문에 NYCP의 공연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옆 교회나 학교 강당 등에서 관객들을 맞이한다. 2011~2012시즌에는 도약을 꿈꾼다. 확정된 공연만 10회. 3회 정도 더 늘릴 계획이다. 미국 내 투어와 레코딩도 준비 중이다. 클래식 아이돌 ‘앙상블 디토’의 멤버 스테판 피 재키브(바이올린)가 10월 1~2일 시즌 오프닝 공연에 협연자로 나선다. 고(故) 피천득 수필가의 손자로도 유명한 그는 2012~2013 시즌부터는 NYCP의 상임연주자로 연 1회 이상 함께 무대에 선다. 김 감독은 “한국에서도 기회가 있다면 공연하고 싶지만, 막 걸음마를 뗀 상태라 NYCP의 인지도를 쌓아올리는 게 우선”이라면서 “섣불리 (한국에) 갔는데 아무도 안 찾아주면 곤란하지 않겠나.”라고 농담 속에 진심을 내보였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故피천득 ‘인연’ 수필 아닌 소설”

    “故피천득 ‘인연’ 수필 아닌 소설”

    수필가로 알려진 고(故) 금아 피천득의 대표작 ‘인연’은 수필이 아닌 소설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아울러 ‘인연’에 등장하는 ‘아사꼬’라는 여인은 금아가 애타게 보고 싶어했던 연인이 아니며 단지 소설 속에 등장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인연’은 교과서에 등장할 만큼 유명했으며 여주인공인 일본의 아사꼬와는 세번 만나면서 연민의 정을 흠뻑 담은 자전적 수필로 묘사됐다. 스승의 날과 오는 25일 금아의 작고 4주기를 앞두고 그의 수제자 석경징(75) 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선생님의 대표적 수필 ‘인연’은 문학사적으로 소설로 분류되어야 마땅하다.”면서 “아사꼬의 상대역인 그 청년(피천득)은 약간 치졸하고 질투심 많은 것으로 돼 있는데 어디까지나 허구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석 교수는 이렇게 된 까닭에 대해 “1959년 모 출판사에서 ‘금아문선집’을 발간할 때 시가 아닌 작품은 모두 수필로 분류하면서 소설로 쓴 ‘인연’도 그렇게 됐다.”고 해명했다. 또한 그는 “선생님 생전에 ‘인연’을 소설로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드렸지만 선생님은 웃으시면서 성격상 그냥 넘기셨다.”고 말했다. 석 교수는 서울대 영문과 재학시절 ‘금아문선집’ 출간 때 금아의 원고를 교정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또 금아의 수필로 알려진 ‘수필은 청자연적이요~’하는 것은 시로 분류되어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새달부터 국내외 투어 나서는 해금 연주가 강은일 교수

    [김문이 만난사람] 새달부터 국내외 투어 나서는 해금 연주가 강은일 교수

    수필가 고(故) 피천득 선생은 5월에 대해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모란의 달이다.’라고 노래했다. 여기에다 아카시아가 짙어지는 계절을 덧붙여 본다. 휘영청한 달밤의 그 향기는 목소리가 곱다던 꾀고리마저 기절시킨다. 천지 사방이 농염하게 유혹하는 계절이다. 그렇다면 5월의 소리를 어떻게 들어볼거나. 딱히 생각이 안 나거들랑 해금을 떠올려 보자. 왼손의 마디에서 심장을 타고 흘러 오른손 마디로 전해진다. 하여 가슴을 후벼 판다. 그래서 ‘어찌 해(奚)의 금(琴)’이다. 최근 들어 새롭게 창작된 퓨전음악과 대중음악 중에서 국악기를 사용하는 곡이 늘어나 해금의 소리가 자주 등장한다. ‘동이’와 ‘추노’ 같은 인기 드라마나 영화, 광고에서도 그렇다.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자유로운 음악적 조율도 있지만, 감정을 자극하는 음색이 단연 압권이다. 애절함이 있는가 하면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처럼 시원함도 갖추고 있다. 한의 눈물도 담겨 있다. 바야흐로 21세기는 해금의 시대다. 고려 시대인 1116년에 해금이 처음 등장한 이래 현대에 이르러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다. 한 여인이 있다. 손마디가 갸냘프다. 하지만 활대질(Bowing)은 천년의 한을 토해 낸다. 열정의 소리가 가슴 가득한 아카시아 향기로 울려 퍼진다. 듣는 사람의 마음을 송두리째 쥐락펴락한다. ●감정을 자극하는 음색이 압권 국악계에서 가장 개성 넘치는 해금 연주가로 손꼽히는 강은일(44)씨. 요즘 뜨고 있는 신세대 해금 연주가 꽃별의 스승이기도 하다. 현재 서울예술대학 교수이자 해금 솔리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그가 푸른 5월을 시작으로 해금을 들고 국내외 투어 공연에 나선다. 5월 20일 경북 울진 공연을 시작으로 26일 경기 고양, 6월 24일 경북 문경, 26일 서울, 8월 27일 경북 울주로 국내 공연이 이어진다. 또 9월 미국, 10월 터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의 해외 공연도 줄줄이 예정돼 있다. 6월에는 4집 앨범 ‘해금 랩소디’까지 나온다. 강씨는 자신이 이끄는 소리 그룹 ‘해금플러스’를 비롯해 미국의 가수 바비 맥퍼린, 일본의 전통 악기 샤미센 연주자인 요시다 형제, 일본 NHK체임버오케스트라, KBS국악관현악단 등 국내외 유명 연주자 및 오케스트라, 국악관현악단 등과 많은 협연을 해 오고 있다. 또한 영화감독 김기덕, 일본의 피아노 연주자 유키 구라모토 등과의 작업을 통해 해금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 가느다란 두줄의 활대 움직임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아지경의 소리를 추구하면서 말이다. 지난 26일 오후 서울 포이동 연습실에서 강씨를 만났다. 우선 5월 공연의 의미를 물었다. “싱그러운 5월입니다. 생동감 있고 재미있는 주제로 관객들과 만날 예정입니다. 솔리스트인 저를 비롯해 ‘해금플러스’ 단원들과 함께 국악과 서양 악기가 합쳐진 동·서양의 크로스오버 음악을 선보일 계획입니다.” 무대에 등장하는 악기들은 해금 외에 가야금, 장고, 꽹과리, 건반, 드럼, 기타 등이다. ‘해금플러스’는 창단 12년째다. ●장르를 넘나드는 국악기로 인정 받아 “요즘 들어 해금이 많이 대중화되고 있습니다. 공연할 때마다 찾아 주시는 관객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지요. TV드라마에서도 그렇고 그림이나 사진 등에서도 해금이 자주 등장합니다. 장르를 넘나드는 국악기로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해금 연주가의 한 사람으로서 많은 보람을 느끼고 있지요.” 1986년 국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한양대에서 해금을 전공했으니 올해로 해금 인생 25년째를 맞는 셈이다. 대학에서는 4년 동안 장학생으로 다녔고 졸업 후 KBS국악관현악단을 거쳐 프로 솔리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88올림픽과 2002월드컵 등의 굵직한 행사에서 기념 공연을 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해금이란 무엇일까. “처음에는 갸냘픈 두줄의 해금이었다가 지금은 ‘해금플러스, 그리고 무엇’을 창출해 낼 수 있는 위대한 악기로 존재합니다. 해외에 나가면 나갈수록 더욱 소중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해금은 천변만화(千變萬化), 즉 천번을 변하고 만번을 이룬다고 합니다.” 1990년 ‘타악기의 천재’로 불리던 음악인 김대환(2004년 작고)씨와 함께 한 일본 공연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매년 10여 차례 해외 공연을 가져 일본과 유럽에서는 그의 팬클럽까지 생길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중동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 차례 이상씩 공연을 해 왔다. 강씨는 김씨를 추억하면서 “나의 멘토였다. 흑우(黑雨)라는 음반도 같이 냈다.”고 말했다. 해외 공연 때의 에피소드도 많을 터. 한두 가지만 얘기해 달라고 하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일본에서 바로크시대의 음악을 연주하는 텔레만 앙상블과 협연할 때였지요. 공연 시작 한 시간을 앞두고 연습하다가 줄 부분이 깨져 무척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부랴부랴 수소문해서 재일본 조선인 총연합회 관계자가 운영하는 상점에서 해금을 급히 구해 무대에 올랐지요. 그 사정을 관객들에게 미리 얘기해 주었고, 공연이 끝나자 한 관객이 다가와 혈관을 타고 흐르는 전율이 너무 감동적이었다고 말하더군요. 사할린 공연 때는 관객들에게 ‘어떤 좋은 자동차라도 돈으로 살 수 있지만, 해금의 소리는 절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어 기분이 좋았습니다.” 프랑스 리옹오페라극장과 벨기에 유럽의회에서의 공연, 미국 디즈니홀 공연과 일본 도쿄돔에서 인기 배우 배용준과 함께한 공연 등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정악과 산조, 창작 음악으로 대별되는 전통 기악에서 그동안 해금의 위상은 보잘 것 없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5년 들어 해금의 가능성은 확 달라졌습니다. 무용, 문학, 영화, 클래식, 재즈, 세계 민속음악 등과 접목해 세계화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고 있지요.” ●창작곡 위주로 관객과 소통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공연 때마다 주제를 정한다. 예를 들어 ‘오래된 미래’ ‘불광불급’(不狂不及) ‘미래의 기억’ ‘활의 노래’ ‘나비가 되어’ ‘고요한 아름다움 愛’ ‘멘토’ 등이다. 그때그때의 관객층과 계절, 공연 장소에 맞는 음악적 특색으로 차별화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객과의 소통이라는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 창작곡 위주의 공연이다. 우리의 전통 음계인 ‘황 태 중 임 남’을 통해 애간장을 녹이는 온갖 오묘한 소리로 신들린 듯 연주하면서 관객들과 무아지경에서 만난다. 원래 그는 연극을 좋아했다. 그러다가 가야금을 배우고 싶어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입학 성적에 따라 차등적으로 적용되는 가야금 과목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러자 선생님이 부르더니 “그러면 해금이나 하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만큼 당시에는 해금을 배우려는 학생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야금보다 더 선호하는 인기 종목이 됐다고 말한다. 18~19세기에 거문고, 20세기에 가야금이었다면 21세기에는 ‘해금이 대세’라며 웃는다. 이는 강씨와 같은 해금 연주가들이 전국을 돌며 대중들과 부지런히 만나 온 결실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그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해금 소리를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한다.”며 보람을 찾는다. 2000~2003년에는 모색 단계였다면 2003년부터 크로스오버 등을 통해 본격적인 대중화와 세계화에 나섰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에는 강사준 선생님을, 대학 때에는 김천흥과 심인택, 이기설 선생님 등을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지금 박사 과정에서는 김영재와 이기설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그에게 꿈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망설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국의 파가니니가 되는 것입니다. 연주도 하고 작곡도 하면서 해금의 예술적 지평을 꾸준히 넓혀야 한다는 그런 소명으로 말입니다.” 편집위원 km@seoul.co.kr >>강은일 교수는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6년 국립국악고등학교를 나와 1990년 한양대 국악과를 졸업했다. 1990~1998년 KBS국악관현악단 단원, 경기도립국악단 해금 수석을 역임했다. 2006~2010년 숙명여대, 경희대 겸임교수로 있었으며 지난해 9월부터 서울예술대학 교수로 있다. 1998년 동아국악콩쿠르 일반부 대상을 수상했으며 2004년에 국회 대중문화&미디어대상과 KBS국악대상 등을 받았다. 또한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6년), 문화예술위원회 올해의 예술상(2005년), 기독교 문화예술원 ‘기독교문화대상’(2009년) 등을 수상했다. 주요 앨범으로는 ‘오래된 기억’ ‘미래의 기억’ ‘선물’ 등이 있으며 그동안 미국, 유럽,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지에서 180여회 순회 및 초청 공연을 가졌다. 올해 들어서는 문화체육관광부 초청 공연으로 신년음악회를 열었고 지난달에는 대만국립극장에서 초청 공연을 했다. 다음 달 20일 울진 공연을 시작으로 전국 투어를 하며 미국, 멕시코, 온두라스, 터키, 에스토니아 등에서도 공연할 예정이다. 아쟁과 사물놀이 연주 실력도 수준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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