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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 달러 위조도 혁명사업인가(박화진 칼럼)

    극단적으로 말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것이 자본주의라 할 수 있다.독일의 베를린장벽 붕괴당시 동베를린사람들은 무너진장벽 조각들을 기념품으로 관광객에게 팔고 수출한 적도 있다.동베를린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배우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그것은 쓰레기청소를 하면서 폐품이용도 하고 돈도 버는 1석3조의 자본주의장사의 시작으로 서방매스컴의 환영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공산권의 자본주의도입이 세계를 휩쓰는 오늘의 시대적 특징이 되고있다.러시아·동구의 자본주의경제는 말할 것없고 아시아의 중국 베트남도 「사회주의시장경제」,이른바 「붉은자본주의」실험에 열을 올리고 있다.돈벌이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공산세계의 이같은 변신은 자본주의가 좋아서라든가 완전무결한 이념이요 제도라서가 아님은 물론이다.자본주의 없이는 돈을 벌 수(경제성장)없고 돈없이는 자본주의세계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으며 사회주의이념과 체제는 물론 나라도 민족도 지킬 수 없다는 때늦은 각성 때문인 것이다.그러나 불행히도오늘의 세계에서 이같은 공산세계의 각성을 유일하게 거부하고 있는 것이 북한공산정권이다.그들은 성장도 돈도 필요없는 정말 세계유일의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같다.우리와 일본 미국등의 그많은 구호식량과 자금·물자제공에도 불구하고 유엔에 식량추가지원을 공식요청하고 있다.경제파탄은 오래전의 일이고 에너지난등으로 중요공장들이 문을 닫고있는 형편이다.돈과 경제성장이 누구보다 절실하고 시급한 북한인 것이다.제일먼저 양팔을 걷어붙이고 개방개혁과 자본주의도입의 돈벌이에 나서야할 북한인 것이다. 최근 캄보디아에서 적발된 달러위조사건은 북한도 돈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으며 수단·방법을 가리지않는 돈벌이(?)에 나서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역설적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돈이되는 일이라면 무슨일이든지 한다」는 원시적 천민자본주의를 북한이 실천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외국어를 배울땐 욕부터 배운다는 말도 있지만 불행히도 북한은 좋은 자본주의는 외면하고 가장 나쁜 자본주의부터 배우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북한은 부인하고 있으나 북한과 긴밀한 캄보디아에서 북한으로 피신했던 일본여객기납치범이 북한여권을 소지하고 북한대사관승용차로 위조달러를 운반하다 체포된 정황등으로 미루어 북한의 국가적 달러위조 주도 내지 관여는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이미 홍콩·중동등지에서 북한외교관관련 위조달러사건이 여러차례 적발된바 있다.목적을 위해선 수단방법을 가리지않는 북한이다.외화고갈의 북한에게 달러위조는 매력적인 국가사업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달러위조 말고도 북한은 외화벌이로 여러가지 세계적인 범죄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대표적인 것이 「마약사업」이다.개성 평양등 전국각지에 약1천2백80만평의 양귀비농장이 있으며 양귀비를 원료로 만든 마약을 각국 주재대사관과 연락하는 비밀외교행낭등을 통해 온세계에 밀수출하고 있다는 것이다.김정일의 직접지시를 받는 「중앙당39호실」과 그 산하 「대성총국」의 주도로 각종 마약을 제조하는 가공공장까지 운영하는 「마약산업」을 국가산업으로 집중육성하고 있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화폐위조와 마약밀매가 인간사회의 가장 사악한 범죄행위라는 것은 보편적인 국제상식이다.북한은 그것을 죄악시하기는커녕 외화획득수단의 하나로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동시에 혁명투쟁의 효과적인 방편의 하나로 삼고있기까지 하다는 것이다.아편재배와 밀매는 적은비용으로 많은외화를 벌 수 있는 수단인 동시에 마약을 퍼뜨림으로써 자본주의사회의 혼돈을 가중시키는 1석2조의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북한당국은 믿고있을 것이며 달러위조의 경우에도 비슷한 논리가 적용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달러위조와 마약밀매로 한·미·일등 자본주의세계를 상대로 혁명투쟁 내지 혁명수출사업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최근 심각해지고 있는 우리사회의 마약확산이나 연이어 발견되고 있는 위조달러사건들이 북한의 마약산업확대나 달러위조사업강화등과 무관할 수 없다.미사일협상이나 관계개선도 좋지만 우리는 물론 미·일정부도 이 점을 잊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심의·논설위원〉
  • 노군 피신 인쇄소 주인 최종두씨(인터뷰)

    ◎“인쇄소안 학생­경찰 충돌 없었다”/진입하려는 경찰 학생들 몸으로 막아/“불쬐라” 건드리자 노군 옆으로 쓰러져 다음은 숨진 노수석군을 최초로 발견한 인쇄소 대현문화사 최종두 사장(36)과의 일문일답이다. ―언제 노군이 들어왔나. ▲하오 6시20분쯤 인쇄소 담을 넘어 제일 먼저 들어왔다.뒤따라 10여명의 학생이 들어왔다. ―경찰과의 충돌은 없었나. ▲경찰 10여명이 학생들을 뒤따라 쫓아왔다.흰색 헬멧을 쓰고 진압봉을 들고 있었다.진압봉을 휘두르지는 않았다.들어오려는 경찰을 학생들이 몸으로 막았다. ―학생들은 언제 떠났나. ▲10여분간 몸싸움을 하다가 경찰이 나오라고 소리쳤다.내가 『남의 집에서 무슨 짓이냐』고 항의하자 곧 모두 나갔다. ―노군을 처음 보았을 때의 상태는. ▲함께 있던 아내가 다리를 뻗은 채 고개를 떨군 노군을 발견하고 『불을 쬐라』고 몸을 건드리자 스르르 옆으로 쓰러졌다.입에서 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밖으로 뛰어나가 학생들을 불렀고 이때 한양대 이창호군(기계공학 2년)과고려대 김기수군(경영 2년)이 달려와 인공호흡을 했다.별다른 반응이 없어 119 구급대에 연락했다. ―노군이 왜 숨졌다고 생각하나. ▲담을 넘어들어올 때 충격도 없었고 인쇄소 안에서의 몸싸움도 없었다.외부 충격이 전혀 없었다.침을 흘리고 있어서 간질병인 줄 알았다.〈김경운 기자〉
  • 대만 총통후보 4명 프로필

    ◎국민당 이등휘/72년 관계 입문… 부총통 등 요직 거쳐 현 대만총통이자 집권 국민당 주석.1923년 대북에서 출생한 기독교 신자다. 농업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모교인 국립 대만대학에서 교수를 지냈으며 72년 각료직을 맡으면서 관계에 입문한뒤 대북시장,대만성장,부총통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88년 장경국 총통이 사망하자 총통직을 계승했으며 90년 임기 6년의 총통으로 재선출됐다. 대만의 국제적 지위 향상과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현재 1만2천달러) 달성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73세. ◎무소속 임양항/사법원장 등 역입… 대만독립은 반대 ▲임양항 무소속 출마를 발표하기 전까지 집권 국민당 부주석,총통 자문위원,내정부장,행정원 부원장,사법원장 등을 역임. 대만출신임에도 불구,본토에 대한 정치적 입장은 이등휘 총통보다 유화적이어서 대만독립에 반대하는 한편 중국과 대만의 중국연방 수립을 정강정책으로 삼고 있다. 대만 억양이 강한 표준 중국어를 사용한다는 점이 전체 국민의 85%를 차지하는 대만 출신들로부터 좋은 인상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68세. ◎민진당 팽명민/한때 옥고 치룬 대표적 반체제 인사 ▲팽명민 제1야당인 민진당소속으로 「대만 독립운동의 대부」란 별명이 붙을 만큼 대표적 반체제 인사다. 국립 대만대 정치대학원장 역임.1960년대에는 대만독립을 주창하다 선동혐의로 옥고를 치렀으며 중국의 지원을 받는 세력들로부터 살해위협을 받기도 했다. 그후 사면돼 1970년 미국으로 피신한뒤 23년 동안 요시찰 인물로 지목돼오다 1992년 현정부의 초청을 받고 귀국. 대만 출생이지만 해외에서 오래 거주한데다 정부직책을 한번도 맡은 적이 없어 상대 후보들로부터 정치경험이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72세. ◎무소속 진리안/진성 부총통 아들… 지명도 높지 않아 ▲진리안 감찰원장과 국방부장과 경제부장을 역임한 무소속 후보. 고 진성 부총통의 아들로서 한때 학벌과 집안이 좋은 젊은 정치인들의 모임인 「4공자」중 한명으로 꼽혔으나 지명도는 높지 않은 편. 독실한 불교신도로 이번에 출마한 4명의 후보중 가장 이미지가 좋다는 평가를 얻고 있으며 특히 불교도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양안긴장 개선을 정치적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58세.
  • 「무기선고」46년만의 재심/7순 할머니「빨갱이」몰려 24년 복역

    ◎판결 불복 94년 청구… 26일 예비심리 6·25 때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모함을 당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4년간 복역한 김복련 할머니(78·서울 노원구 중계동)의 「한」은 풀릴까. 김할머니가 지난 94년 6월11일 제기한 재심청구 사건의 예비 심리가 무기징역 선고 46년만인 오는 26일 서울지법에서 열린다.담당은 형사 7단독 김동환 판사. 김할머니에 따르면 지난 50년 6월29일 인민군에 쫓기던 국군 5사단 3연대 소속 김현호 일병(69·당시 23세·전남 장성군 부기면)이 서울 종로구 인의동 자신의 집 창문을 넘어들어와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빨래줄에 널려있던 이웃집 양모씨의 옷을 입혀 피신시켰다. 그러나 이웃 김모씨와 양씨가 내무서에 이를 신고,김할머니는 반동 혐의와 함께 경찰관이던 남편 전영석씨의 소재까지 추궁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다행히 같은 해 7월9일 밤 경기도 양주군 백성면 조태훈씨(65) 집으로 달아났다. 서울이 수복된 직후인 50년 10월10일 아들과 함께 인의동 집으로 돌아왔다.하지만 양씨와 김씨 일가는 자신들의 부역사실이 두려워 오히려 김할머니가 부역했다고 신고했다. 김할머니는 종로경찰서로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고 같은 해 12월 2일 서울지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24년간 복역했다.이 과정에서 아들 전학철씨(51·당시 5세·경남 장승포시 능포동)와도 생이별했다. 김할머니는 지난 93년 6월20일 TV에 출연해 억울함을 호소,그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한 당시의 김일병,「부역시점」인 50년 7월30일에 경기도로 피신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조모씨를 찾았다.〈박상렬 기자〉
  • 중 “대만 무력점령 불변”/외교부 대변인

    ◎「불침공 약속설」 부인/대만,중 훈련 대응 전비상태 격상 【북경 로이터 AP 연합 특약】 중국은 16일 필요할 경우 무력으로 대만을 점령한다는 방침이 변하지 않았다면서 중국이 대만을 공격하지 않기로 미국에 대해 약속했다는 미국관리들의 말을 부인했다. 심국방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국영TV와의 인터뷰에서 『그같은 보도는 근거없는 것』이며 『대만동포들을 직접 겨냥하지는 않더라도 무력사용 포기를 결코 약속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심대변인은 「평화통일」과 「1국 2체제」라는 대만에 대한 기본정책이 변하지 않았다면서 『그러나 대만이 독립을 선언하거나 외국세력이 침입한다면 중국은 주권과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심대변인의 이같은 발언은 오는 23일 대만총통선거일을 전후해 대만해역 인근에서 또 한차례의 군사훈련을 실시할 것이라는 15일의 중국측 발표에 뒤이어 나온 것이다. 한편 대만은 중국의 군사훈련에 대응,지금까지 「상황3」이던 전쟁준비상태를 「상황2」로 격상시켰다.또대만 TV는 이날 복건성에서 불과 10여㎞ 떨어진 대만 최전방 주민들중 상당수가 본섬으로 피신했으며 현지 당국은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각급학교에 내주부터 휴교하도록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 독립운동가 양세봉 장군(압록강 2천리:27)

    ◎재만조선군 총사령… 20년대 항일전 주도/노구대전투 등 승리 이끌어… 군관학교도 설립/해방직후 평야서 유해모셔… 서울선 훈장 추서/조선족은 요령성 신빈현에 흉상 건립해 추모 요령성 신빈현 왕청문향 조선족학교 운동장에는 항일독립운동가 양세봉(1896∼1934년)장군의 석상이 서 있다.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생애를 마감한 그의 석상은 지난 1989년8월29일 낙성되었다.신빈현과 왕청문 지방정부,북경과 동북3성의 50여개 단체대표 5백여명이 낙성식에 참석했다.중국 인민대표대회 대표이자 중국인민해방군 전 40집단군 정위였던 정순주소장,중국 공안부 심계실장 서세명의 아들 서철 등 굵직굵직한 조선족 인사들이 나왔다. 장군의 동상은 중국 전역에 흩어져 사는 조선족의 모금으로 세워졌다는 점에서 큰 뜻을 지닌다.석상 건립을 발기한 사람은 신빈현문화관 전정혁(41)씨인데,그는 자전거를 타고 장군의 활동무대였던 옛 흥경땅 신빈현 일대를 모두 누볐다.석상건립을 제의하면서 장군의 항일운동사료도 함께 수집했다.그 결과 신빈현 당위원회 전 부서기 최선죽(63)선생 같은 조선족이 발벗고 나섰다.요령조선문신문,길림신문,국가민족사무위원회,연변대학,연변조선족사학회,흑룡강조선말방송,민족출판사가 후원을 자청했다. 조선족의 의견이 집약되자 공직에서 정년퇴직한 노년층 조선족이 주동이 되어 모금운동에 뛰어들었다.동북3성은 물론이려니와 북경 천진 등지를 메주 밟듯 누볐다.침대차 한번 타지않고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고 대합실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신빈현 조선족문화관 전 관장 김순화 선생이 무순시 제1조선족중학교에서 양세봉장군의 독립투쟁업적을 강연하고 돌아온 이후 학생들이 2천8백87원을 모아 보냈다.중국 전역의 50여개 조선족단체와 1천4백여명의 개인들이 석상 건립비로 맡겨온 돈도 10만원에 달했다. ○3·1운동직후 독립군 투신 중국의 조선족 뿐 아니라 중국에 와 있는 한국인도 성금을 내놓았다.중국에 주재한 한국한화집단 북경판사처(대표 신영수)와 동북농업대학 초빙교사(교환교수)인 한국 사진작가 유은규선생과 그의 일본인 부인 도타이쿠코여사도 동참했다.그럭저럭 모두17만5천원이 모금되어 심양 노신미술학원 조각학부 주임 전금택선생에게 조각을 맡겼다.그래서 기단을 포함한 높이 5·4m의 양세봉장군 흉상이 제막되었던 것이다. 양세봉장군은 평안북도 철산 출신이다.서봉,윤봉이라고도 불렀는데 호는 벽해다.1919년 3·1운동 직후 평안북도 삭주 천마산을 근거로 한 천마산대 독립군에 첫발을 들여놓았다.다음해 압록강을 건너가 광복군총영을 거쳐 1923년 육군주만참의부에서 소대장과 중대장으로 활약했다.1929년 재만 각 단체가 통합하여 국민부를 조직했을 때는 국민부 소속 독립군 조선혁명군 제1중대장이 되었다.그리고 조선혁명군을 개편하여 총사령이 되어 일본군이 차지한 영릉가성과 흥경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는 혁명군을 보충하기 위한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노구대전투와 쾌대모자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1932년 일본경찰의 밀정 박창해의 계략에 빠져 두도구에서 일본군에 포위되어 치열한 전투끝에 전사했다. 그의 부인과 자녀들은 해방이후 북한 당국이 평양으로 데려갔다.한국에서는 그의 빛나는 독립운동의 업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고 한다.장군의 직계 가족들은 평양으로 갔지만 동생 양시봉의 부인과 자녀들은 지금 요령성 청원현 북삼가촌에 살고 있다.양시봉의 부인이자 장군의 계수인 김화실(85)할머니는 시숙 양세봉의 행적을 어제 일이나 되는 것처럼 똑똑히 기억해냈다.열세살 나던 1924년에 양씨 가문으로 시집을 온 할머니는 아직도 총기가 대단했다. ○일 밀정 계략에 빠져 전사 『흥경 진코우츠로 시집을 왔디요.위로 시할머니와 시어머니에다 청춘과부가 된 시숙모가 아들 둘을 데리고 얹혀 삽데다.그리고 시숙 양세봉장군은 독립운동을 하느라 집에 계시지 않고 큰 형님만 함께 사셨디요.거기에 둘째 시숙 내외·시누이·우리 내외를 합해 열두 식솔이 우굴댔단 말입네다.강지주네 밭 닷새갈이를 소각했지만 입에 풀칠하기 바빴디요.그 잘난 살림에 독립군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몰래 들락거렸으니 사는게 말이 아니었습네다』 양씨 일가의 집은 당시 독립군의 연락처이자 비밀숙박처였고,믿음직한 후방 기지였다.독립군이 묵는 날이면 없는 살림에 한 끼니라도 더 따뜻하게 대접할 요량을 대고 삼동서가 애를 썼다.맏시숙 양세봉은 모처럼 집을 찾을 때면 의레 걸레 같은 양말을 한짐씩 가지고 왔다.며칠을 몇밤을 새워 꼬매 다시 보내곤 했다.매년 겨울철에는 반입한 무기를 산골짝에 감추었다가 해동하면 독립군부대로 보내는 일도 양씨 일가가 맡았다. 그런 어느 날 양세봉이 느닷없이 집에 들렀다.만주 사변이 일어난 1932년 일이었는데,가족이 여러패로 나누어 빨리 피신하라고 재촉했다.양세봉이 편지를 써주어 청원현 소산성에 사는 이영준을 찾았다.그의 도움으로 소산성에 자리를 잡았으나 그해 양세봉장군은 전사했다.전사 소식을 들은 동생 양시봉은 명주 20자를 사가지고 흥경으로 가서 형의 시신을 고구려산성 기슭에 고이 묻었다.일본군이 장군의 아들을 인질로 잡으려고 또 눈에 쌍심지를 켜 양씨 일가는 40원에 소를 팔아 종손을 일본으로 빼돌렸다. ○일군 묘파고 시신 목잘라 고구려산성 기슭에 양세봉장군의 시신을 모셨을 당시 정황을 기억하는 노인한분이 아직도 생존해있다.신빈현 왕청문향 고려산촌의 김효순 할머니가 그분이다.독립운동가 김두선의 딸인데 아버지는 양세봉장군의 휘하에 있었다고 술회했다. 『나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독립군 연락을 자주 다녔디요.양세봉장군의 장례를 치르고 얼마 안되어 일본놈들이 들이닥치더구만.그놈들은 아버지를 나무에 매어놓고 장군의 묘소를 대라고 족쳤디요.아버지가 말을 듣지 않으니끼리 어머니한테도 매를 댔수다.결국은 알아내어 묘를 파서 장군의 시신을 끄잡아 냈습네다.기리고 아버지더러 도끼로 시신의 목을 치라고 다그칩데다.아버지는 막무가내를 댔디요.하는 수 없는지 놈들이 제손으로 목을 쳐서 보자기에 싸가지고 내려 가면서 아버지에게 총질을 했지 뭡네까.아버지도 비명에 돌아가셨디요』 양세 봉장군의 유해는 지금 고려촌 고려산성 기슭을 떠났다.해방 이후 북한에서 모시겠다고 파갔다.김효순 할머니 증언대로 두개골이 없는 유해였다고 한다.이제 양세봉 장군의 살아 생전 모습을 본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야 손가락 몇개를 꼽을정도가 되었다.얼마전 개주시 쌍천안촌에서 만났던 양세봉장군의 비서 박윤걸 노인도 이번 여행길에서는 만나지 못했다.그토록 출간을 기다렸던 「양세봉 장군 회고록」을 손에 쥐지 못한채 지난 91년 눈을 감았다는 것이다.
  • 대만주민 생필품 사재기 바람/중 미사일 발사 강행 이모저모

    ◎이총통,국민들에 “용기있는 대응” 촉구/미 달러화 바닥… 전세기로 긴급수송작전/녹색당 당원 10여명 1주일간 해상 반중시위 돌입 ○…대만 국영TV 등 방송들은 8일 중국의 미사일 발사 소식과 대만정부의 대응 움직임을 시시각각 보도하며 『평온을 유지하고 냉정해 지는 것이 미사일 훈련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며 국민에 대한 설득에 주력. TV들은 또한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정부의 통계자료를 인용,석유·소맥·쌀 등을 비롯한 생활필수품의 비축량 등에 관해 상세히 보도.그럼에도 불구 일부 시민들은 슈퍼마켓 등에 들러 쌀 등 식품을 중심으로 한 생필품을 한 바구니씩 사재기 하는 등 불안한 심정을 드러내기도. ○…일본항공(JAL)과 전일공(ANA)은 중국의 미사일 실험기간 동안 동남아시아 노선을 변경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들 항공사측은 8일부터 15일까지 일본∼동남아간 비행기 노선을 일부 바꿀 계획이나 비행시간이 10분 정도밖에 늘어나지 않아 운항스케줄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전언.이에 앞서 대만 항공당국도 중국의 미사일 훈련 기간동안 하루 18편에 달하는 항공기의 항로를 변경키로 결정. ○…이등휘 대만총통은 8일 국민에게 중국의 미사일훈련에 대해 용기있게 대응할 것을 촉구했다. 이총통은 오는 23일 역사적인 총통선거를 앞두고 이날 동부 핑퉁에서 가진 유세에서 『우리는 단결해야 하며 미사일훈련문제를 적절히 잘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만의 대부분 은행에서는 8일 고객의 미국 달러화 매입주문이 폭주하면서 달러화가 바닥나는 사태가 빚어졌으며 미국은행인 아메리카은행은 전세기를 동원,현금 긴급수송작전에 나서기도 했다. 이에 따라 달러화가 아직 남아 있는 시티은행과 국영 창화(창화)상업은행 등 일부은행은 1인당 매입한도를 1천∼2천달러로 제한했으나 멀지않아 달러화가 동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주 들어 폭락세를 보이던 주가는 중국 미사일이 목표지역에 정확하게 떨어진 데 대한 안도감으로 오히려 1.14% 반등했다. ○…대만의 외국기업과 외국인학교들은 중국의 미사일발사실험에도 불구하고 대만의 안정을 확신하고 있으나 만약의 사태에 대비,긴급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대만 녹색당 당원 10여명은 이날 중국 미사일의 목표지점중 하나인 기륭 인근해역에서 1주일간의 반중시위를 시작했다. 평화를 상징하는 깃발을 단 2개 선박에 나눠 탄 이들 당원은 중국이 훈련을 마치는 오는 13일까지 해상시위를 계속할 예정이다. 또 대만 최대야당인 민진당도 오는 12일 대만 북부해역에서 해상시위를 벌일 계획이다. ○…기륭시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대피시설을 준비하고 있다고 대만 연합보가 보도했다. 현지 경찰은 유사시 시내에 있는 97개의 방공호와 약 6천개의 지하실에 93만명이 피신할 수 있다고 밝히고 특히 방공호는 당장이라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만 TV방송 소속 기자 2명이 중국의 복주시에서 중국 공안당국에 체포됐다고 대만 TV방송 관계자가 8일 말했다. 그는 이 회사의 수이 안 테기자와 카메라기자인 추앙 치 웨이가 중국측에 체포된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이번에 체포된 대만 기자들은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만을 마주보고 있는 복주시에서 중국의 군사훈련을 취재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중 M9미사일 차원/소제스커드 개량한 이동식… 사정600㎞/저동유도장치 장착… 핵탄두도 탑재 가능 중국이 8일 대만해역에 발사한 M9 지대지 미사일은 88년 소련제 스커드 미사일을 모델로 중국이 개량한 단거리 미사일로 사정거리 6백㎞에 자동유도장치가 장착돼 있어 목표로부터 3백∼6백m 이내 지점에 명중시킬 수 있는 정확도를 자랑하고 있다. 로켓 추진으로 지상에서 수직 발사되는 이 미사일은 이동식이지만 설치에 40분 밖에 걸리지 않으며 5백㎏의 재래식 탄두를 탑재하고 있으나 필요에 따라 화학탄두나 핵탄두로 교체할 수 있다. 목표지점에 지름 20m,깊이 14m의 구멍을 낼 수 있는 파괴력을 갖고 있어 폭격기에서 투하하는 폭탄 2천파운드의 위력에 해당한다.제원은 길이 9.1m에 무게 6천2백㎏,직경은 1m.
  • 성혜림씨 국내 입국설/송통일원차관 줄곧 “성혜랑씨 일행” 표현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성혜림씨 서방 탈출사건에 대해 정부 일각에서 성혜림씨 대신 줄곧 「성혜랑씨 일행」이란 표현을 사용해 이들의 소재와 관련,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송영대통일원차관은 15일 하오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가 끝난뒤 회의결과를 발표한 자리에서 최근 서방으로 탈출한 김정일전동거녀 「성혜림씨 일가」를 「성혜랑씨 일행」이라고 지칭해 눈길을 끌었다. 송차관은 「회의에서 성씨 문제가 논의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미리 준비해온 타자로 친 답변자료를 꺼낸 뒤 『성혜랑씨 일행이 제3국에 피신중…』이라며 성씨에 대한 정부입장을 일목요연하게 발표했다. 송차관은 뒤이어 기자들이 성혜림씨와 접촉이 되고 있는지 또 성혜림씨가 안전한 지 여부에 대한 질문이 계속되자 「성혜림씨」대신 「성혜랑씨 일행」이라고 계속 호칭하며 신변안전의 중요성을 되풀이 강조해 관심을 증폭시켰다. 송차관은 특히 「이들이 금주중 한국에 올 것이라는 보도가 있다」는 질문을 받고 『말한 것을 음미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며「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일문일답을 마친뒤 기자들이 「성혜림씨에 대해서는 언급않고 성혜랑씨에 대해서만 언급한 이유가 뭐냐」고 다그쳐 묻자 송차관은 답변을 회피하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일부에서는 이를 놓고 성씨 자매중 그동안 한국망명을 희망해 온 성혜림씨가 이미 비밀리에 국내에 들어왔거나 곧 도착할 예정이며,성씨 자매가 망명희망지를 둘러싼 이견으로 헤어진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 경주∼울릉도 화상연결 첫 영상재판 이모저모

    ◎울릉도법정 판사자리엔 대형모니터/“잘 들리고 잘 보입니까…” 장비 점검부터/“도박벌금 1만원” 어민 “정말 편리해졌다” 『지금부터 원격영상재판방식으로 민사조정사건 95머 1577호 보증채무금사건의 심리를 시작하겠습니다.울릉도등기소에 계신 신청인과 피신청인 두분은 경주지원에 있는 재판장의 모습이 잘 보입니까.목소리도 잘 들립니까』 『예.잘 보이고 들립니다』 9일 상오 대구지법 경주지원 3호법정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경주와 울릉도를 화상으로 연결하는 영상재판이 열렸다. 경주지원 김원종판사는 8천7백만원의 보증금지급을 구하는 신청인 박모씨와 피신청인 김모씨를 울릉도등기소에 마련된 임시법정에 앉혀놓고 재판을 시작했다. 1만1천여 울릉도주민이 민사조정사건이나 즉결심판 같은 비교적 간단한 재판을 받으려면 종전까지 사나흘에서 1주일을 허비해야 했다.4시간의 거친 뱃길을 헤쳐 포항까지 간 뒤 다시 관할법원이 있는 경주까지 버스로 가야 했다.날씨가 나쁘면 배편이 결항되기 일쑤였다. 법정에는 신청인과 피신청인의 자리에 20인치짜리 모니터가 자리잡았다.울릉도등기소에 있는 소송당사자 앞에도 법복을 입은 근엄한 판사 대신 52인치짜리 초대형모니터가 설치됐다.또 다른 방청객용 모니터도 있었다. 모니터 이외에도 중계카메라와 마이크,그리고 서류전송장비 등이 갖춰졌고 참여계장 1명이 울릉도에서 보내는 소송관련 서류를 전송받고 장비를 다뤘다. 첫 화상재판의 선고는 벌금 20만원형이었다.김판사는 노래방에서 소란을 피우다 즉심에 회부된 회사원 김모씨(30)에 대해 『죄질이 나쁘지만 우발적인 행위임을 감안해 벌금 20만원을 선고한다』고 밝혔다.화면에서도 반성하는 김씨의 표정이 역력했다. 도박을 하다 즉심에 회부돼 벌금 1만원형을 받은 어민 최모씨(45)는 재판이 끝난 뒤 『정말 편리해졌다.그동안 경주까지 가서 재판을 받느라 생업에 지장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심리적 거부감과 생소함 때문에 화상재판이 어색하리라고 예상됐으나 일반재판과 마찬가지였다.주위가 산만한 일반재판보다 오히려 집중감과 긴장도가 더한 것 같았다. 재판이 끝난 뒤 김판사는 『얼굴을 맞대지 않아서인지 처음엔 서먹서먹하기도 했으나 금방 적응됐다』고 말했다.법원측은 용모와 목소리를 고려해 비디오형인 김판사를 첫 화상재판의 판사로 선택했다고 한다. 대법원은 9억여억원을 들여 영상재판시스템을 설치했으며 오는 27일에는 춘천지법 홍천군법원에서 강원도 인제·양구간에 두번째 화상재판을 갖는 등 도서벽지 주민에게 편리한 사법서비스를 늘려갈 방침이다.
  • 철령의 성주 이씨들(압록강 2천리:24)

    ◎임란때 출병한 이여송은 성주 이씨 후손/부친 이성량은 요동일대 최고 군수권자/15세손 이영 홍무때 망명,철령에 터잡아/1994년 한국종친회서 소둔촌에 비석 세워 우리는 이여송(?∼1598년)이라는 역사인물을 기억하고 있다.명나라 제독으로 방해어왜총병관이 되어 군사 4만을 이끌고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한 무장이다.그런데 왜 이여송을 새삼스럽게 이야기하려는지 더러 의문을 가질 것이다.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가 조선의 성씨인 성주이씨의 후손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 성주 이씨들은 지금 요령성 철령시소둔촌에 많이 몰려 살고 있다.그리고 해마다 조상의 묘역에서 제사를 올리는데 추모 대상은 이여송과 그의 아버지 이성량(1526∼1615년)등이다.한반도에서 대대로 살아온 성주 이씨의 한 갈래가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 온 것은 명나라 연호로 홍무(1368∼1398년)연간이었다.성주 이씨 15대손 이영이 죄를 짓고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철령으로 피신해왔다는 것이다. ○소둔촌 주민 거의 이씨 이영의 망명 이후 제5대손이 이여송의 아버지이성량이다.이성량은 집안이 가난하여 선조들이 세운 군공을 계승하지 못한 채 한 시절을 백면서생으로 살았다.그러다 입신의 기회를 얻어 요동 험산참장이 되었다.또 융경원년(1567년)에는 한 난리를 평정한 공으로 요동부총병의 자리에 올랐다.그 후에 몽골과 여진족을 쳐서 승진을 거듭한 끝에 만력2년(1574년)에는 요동 최고 군사지휘자인 요동총병 지위를 차지했다. 이성량 사후에는 여송,여백,여정,여장,여매등 네 아들이 총병관을 지냈고 다른 네 아들은 참장에 이르렀다.이 가운데 여백과 여매는 임진왜란 때 여송과 함게 조선에 출병하여 전공을 세웠다.그렇듯 이씨 가문이 거머쥔 병권은 대단하여 그들을 모함하는 글발이 황제에게 전해지기도 했다.그들은 실제 도읍의 한 변방을 호령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 틀림 없었다. 이씨 가문의 권세가 당시 어떠했는가는 요령성 철령시 소둔촌 이성량의 묘소에서 확인되었다.소둔촌에서 약간 떨어진 산기슭 그의 묘소 입구에는 돌조각 사자상이며 석인상이 두 줄로 가지런히 늘어섰다.규모는 비록 작아도 북경 팔달령에서 정릉으로 가는 사이에 자리한 선도를 연상케 했다.선도처럼 보이는 길이 끝나는 지점에 비석이 있다. 이성량을 기린 대리석 비석은 지난 1994년 한국의 이씨종친회가 세운 것이다.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지위가 오늘날 같이 높지 않았더라면 과연 비석을 세우도록 허락했을까.여기 사는 이씨들도 한국이 보잘것 없는 나라였다면 조상에 대해 별 집착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2백여 가구 1천여명의 주민들 가운데 70∼80%가 이씨라는 이 소둔촌에서 만난 사람들은 거의가 성주 이씨를 자청했다.그러면서 비록 한족으로 살아가지만 한국의 발전이 자랑스럽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철령현 당시 부현장 자리에 있다가 퇴직한 이유한(67)노인도 성주 이씨라고 했다.그래서 철령 이씨종친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그는 떳떳하게 성주 이씨를 내세울 수 있게 된 오늘의 처지를 고맙게 여겼다. ○누루하치와 사돈지간 『나 자신도 그동안 뿌리를 숨기고 살았습네다.그저 한족으로 행세한 거디요.집안 노인들이 가끔 이성량을 이야기하면서 성주가 본이라고떠들면 핀잔을 줬지 뭡네까.그러다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부터는 술자리에 앉기만 하면 절로 한국과 성주란 말이 튀어나옵데다.그 전엔 창피스럽던 것이 자랑스러워지더란 말입네다.그래서리 퇴직하고 나서 좌상들과 상의해서 종친회를 꾸몃디요』 소둔촌 이성량의 묘소는 어엿했다.봉분도 제법 커서 이성량이 묻혀있는 무덤이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그런데 선뜻 납득할 수 없는 몇가지 의문점이 머리를 스쳤다.이씨들이 조상에 관심을 둔 것도 근간의 일이고 역사적으로 청나라를 일으킨 누루하치가 이성량의 무덤을 파엎었다는 설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성량은 살아 생전에 누루하치와 떨쳐버릴 수 없는 악연을 맺었다.이성량이 요동총병관으로 제수되었을 때 누루하치는 15세 소년이었다.그런데 이성량은 자신의 수하장군이었던 누루하치의 할아버지 창안과 아버지 타거를 부하의 밀고로 죽여버렸던 것이다.그 해가만력11년(1583년),누루하치는 21세의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있었다.천명3년(1618년)반기를 들고 마침내 명나라를 뒤엎은 누루하치는 「7대 원한」을 갚겠노라 선언했다.이성량이 첫째로 꼽힌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씨 가문과 누루하치는 사돈간이었다.이성량의 둘째아들 여백이 바로 누루하치의 조카딸을 첩으로 들였던 것이다.그러나 원한이 사무친 누루하치는 천명4년 철령성을 함락하고 이성량 일가를 붙잡아들였다.당시 해를 당한 이씨들 가운데 역사에 기록된 인물만도 24명에 이른다.누루하치 복수의 그물에 든 사람들은 죽고 더러는 도망쳤다.그래서 산동성 임저지구와 광동성 번우지구,사천성,북경 등지에도 성주 이씨들이 지금 살고있다. ○상당수 요직에도 진출 누루하치는 오늘의 중국 동북지방 쪽을 우선 통일하고 나서 수단을 바꾸었다.성주 이씨들을 등용하기 시작한 것이다.그 결과 강희(1662∼1722년)말년 청나라 왕조에서 7품 이상 벼슬을 한 성주 이씨는 자그마치 1백여명이나 되었다.요동시단의 삼노의 한 사람인 이개는 많은 시를 썼고 「상서」등의 역사책을 편찬했다.그의 저서들은 강희말년에 나온 거서「사고전서」에 수록되었다.그리고 태원지사를 지낸 이청서는 서예에 조예가 깊어 그의 「고보현당법서」네권은 지금도 중국 서법의 모범이 되고 있다. 성주 이씨들은 수 백년이 흐른 지금도 만만치 않은 존재이다.철령지구의 경우 현급 간부 14명,국급 간부 13명,과급 간부 18명이 성주 이씨로 되어있다.이들은 지난 1991년에 성주이씨 종친회를 조직하고 한국의 성주이씨 대종회와 정상적인 교류를 해왔다.그리고 「철령성주이씨보계」,「이성량종족역사기년」,「한국성주이씨중국파굴기」등을 펴냈다. 그래서인지 요령성 북령시에는 중국에서 성주 이씨를 명문으로 일으킨 이성량의 흔적이 그런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이성량과 같은 봉건 착취계급의 유산이 문화혁명과 같은 난세를 견디어냈다는 사실이 의아스러울 정도였다.그 하나가 명나라 신종이 명하여 만력8년(1580년)에 세운 공적비 석방이다.높이 9m,너비 13m의 누각형인데 「진수요동총병겸 태자태보령원백 이성량」이라는 글발 등이 들어있다.그리고 용문을 뛰어넘는 잉어,여의주를 굴리는 용,사슴과 꽃 등을 새겨 석방은 호화롭기 그지 없다.명나라 때 중국대륙 동북방에는 분명히 「이성령의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유적이기도 했다.
  • 중 강진 사망자 2백여명으로 늘어/운남성 참사현장 이모저모

    ◎여진 150차례… 주민들 추위·공포속 야영대피/진흙집 많아 희생 커… 수색 계속땐 피해 늘듯 ○…3일 하오 7시14분(한국시간 8시14분) 중국 운남성을 강타한 강진으로 4일 현재 2백28명이 죽고 3천7백명의 중상자를 포함,1만4천여명이 다쳤으며 수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고 신화통신이 보도. 신화통신은 그러나 아직 외국인 사망자나 부상자는 없다고 부연. ○…진앙 부근에 있는 여강현의 관리들은 지진이 일어난 시간에 주민들은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관리들은 집밖으로 피신한 주민들은 다시 지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영하에 가까운 날씨 속에서 야영을 했으며 외국인 여행객들도 호텔에서 나와 모닥불을 쬐며 밤을 새웠다고 전언. ○…중국 당국은 2천여명의 인민해방군과 경찰,수백명의 의료진을 여강부근으로 보내 무너진 건물 사이에서 생존자를 수색에 들어갔다. 운남성 정부의 한 관리는 성도인 곤명에서 전화 회견을 통해 『구조반원들의 수색 작업이 계속되면 사망자는 더 늘어날 것』이라고 설명. 현장에 있던 한 관리는 『우리에게는 수혈할 피와 의약품 및 의료 장비,담요 등이 절실하다』며 『집을 잃은 사람외도 무서워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데다 날씨마저 추운데 텐트가 충분치 못하다』고 한숨. ○…AFP통신은 4일 지진의 참화로 뒤덮인 여강에서는 전날 있었던 지진보다 더 큰 지진이 엄습할 것이라는 루머가 나돌아 극도의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보도. ○…관리들은 진흙으로 지은 집이 지진에 쉽게 무너지는 바람에 상당수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전하고 현재 여강현에서는 가옥의 10% 정도가 파괴되고 수도와 전기의 공급이 끊겼다고 말했다. 한편 운남성 적경장주 자치구에서는 강진이 지나간 뒤 1백50차례나 여진이 있었으며 이중 18차례는 리히터 규모 4.0이상이었다고 이 관리들은 덧붙였다. ○…대만의 연전 행정원장은 4일 국영 TV에 출연,『우리의 관심을 표시할 적절한 채널을 갖고 싶다』며 중국 운남성의 지진 피해 복구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뜻을 피력. ○…몽골과의 국경에서 가까운 산간지방인 여강은 눈덮인 산 등 풍경이 좋아 많은 관광객이 찾아드는 지역이라고. 당국은 여강이 새로운 관광지로 떠오름에 따라 지난해 이곳에 공항을 새로 짓는 등 관광객 유치 노력을 적극적으로 펼쳐왔다.
  • 미 뒤퐁화학 상속자 살인후 경찰과 대치

    【뉴타운스퀘어(미국 펜실베이니아주) AP 연합】 미국 뒤퐁화학의 상속자 존 E 뒤퐁(50)이 26일 오후(현지시간) 전올림픽 레슬링 선수 1명을 사살한 뒤 필라델피아교외의 자택에서 경찰과 대치 중이라고 당국이 발표했다. 경찰은 「뒤퐁 화학」 설립자의 고손자인 존 뒤퐁이 자택에서 2㎞ 가량 떨어진 차도에서 38구경 권총으로 올림픽 레슬링 선수 출신의 데이브 슐츠(36)의 팔과 가슴에 두 발의 총탄을 발사한 뒤 자택으로 피신해 경찰과 대치중이라고 밝혔다. 슐츠는 병원에 옮겨졌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 이데올로기의 희생양 기구한 삶 오학증씨(압록강 2천리:21)

    ◎북한으로 피신… 강제송환돼 감옥생활 11년/79년 출옥후 개가한 아내 수소문해 재결합/독립군 출신 부친도 반동으로 몰려 개죽음 요령성 단동시 조선족소학교 아파트에서 신경질환으로 만년을 보내고 있는 오학증(64)선생은 기구한 운명을 산 사람이다.그 격변의 대륙에서 조선족 누구인들 정치이데올로기에 휘말려 모진 삶을 살지 않았을까만,그의 인생역정은 남달리 불행했다.그의 일생은 대륙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비극의 드라마 그것이었다. 『제 아내와는 두 번을 장가 든 셈이디요.그래서리 아이들도 제대로 못 키우고….이자 나같이 사는 사람들이 다시 없도록 평안한 세상이 돼야 합네다.지난일들을 생각하면 다가 악몽이야요』 한 아내에게 두 번을 장가갔다는 말이 의아스러웠다.그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는데,자신이 반우파로 몰려 감옥살이 하는 동안 아내가 살길이 없어서 한족 홀아비한테 개가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그가 1979년 1월 감옥에서 나왔을 때 아내는 이미 남이 되어 있었다.개가한 아내가 사는 곳을 수소문해서 한족영감에게 애걸복걸했다.그렇게 찾아온 아내다.그는 우파누명이 벗겨져 본래의 자리인 소학교로 돌아와 정년을 넘기고 지금은 학교가 내준 아파트에서 아내와 함께 다시 살고 있다. 그는 요령성 환인현 사전자 태생이다.부친은 평북 구성 사람인 오성오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가 1930년대 독립군 해산과 더불어 관전현 보달원에서 교편을 잡았다.해방이 되자 부친은 교장 자격으로 손수 학교를 꾸리면서 일본 메이지대 출신 전봉천을 초빙해와 같이 일했다.그무렵 팔로군이 보달원에 들이닥쳤다.그리고 나서 이내 미국식 현대무장을 갖춘 국민당 군대가 밀고 들어왔다.부친이 교사로 초빙한 전봉천은 국민당 편에 서서 한국교민회를 조직했다. 『제 부친께서는 장래의 시국을 예견하신 것 같았습네다.국민당에 붙어서 보달원에 출장온 전봉천선생에게 이런 말을 했디요.이 사람아 자중하게.국민당이 기세당당하게 왔디만 조만간 팔로군이 또 올 것이라고….아니나 다를까 1947년이 되면서 국민당이 꺾이고서리 농촌 전체가 공산당 일색이 되고 토지개혁을 착수했디요.나도 당시 아동단에 참가하지 않았겠습네까.팔에 빨간천을 두르고 목창 개지고 보초도 서고…』 ○통화사범학교 진학 오씨네 일가의 비극은 이 때에 닥쳐왔다.공산당은 국민당과 가까운 사이였던 부친의 독립군 경력과 반동 전봉천과의 관계를 문제삼았던 것이다.『아무개가 반동이다.죽이는 것을 동의하는?』라고 물으면 반대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서슬 시퍼런 시대였다.부친은 공산당에 체포되어 몽둥이를 맞고 세상을 떴다.마을사람 김희묵은 빈농이었지만 억울하게 죽었다.옷을 깨끗이 차려입고 나온 통에 그를 부농으로 착각한 공산당이 조리질을 돌려 죽여버렸다. 그러한 상황이었으니 오학증선생의 어린시절은 불우할 수밖에 없었다.중학교 입학자격마저 잃었다.철저하게 계급을 따진 공산주의사회는 가갸 뒷다리도 모르는 빈농의 자식들 위주로 신입생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그러니 학교 꼴이 말이 아니었다.공산당도 할 수 없이 중학교 시험제를 채택하게 되어 어린 오학증에게도 중학입학의 길이 열렸다.밭에서 가을일을 하다 학교로 달려가 시험을 치러 홍광중학에 들어갔다.한국전쟁이 터져 거의가 지원군으로 나갔지만 나이가 어려 면제를 받고 통화사범학교에 진학했다. 사범학교 졸업이후 첫 부임지는 지금의 단동인 안동시 북광소학교.학교 당조직에서 자신이 중점 육성대상자가 될만큼 열심히 일했다.그러다가 1957년 반우파투쟁이 일어났다.교육정책을 바꾸어 한족과 조선족의 연합교육을 실시하는 바람에 교육의 질이 형편없게 떨어졌다.곧은 성질을 가진 오학증선생은 이를 시정해야 된다고 건의했다.그 건의가 화근이 되어 우파로 낙인찍힌 것은 물론 부친의 청산을 암암리에 보복하기 위한 의도적 행위라는 모략까지 따라 붙었다. ○당국에서 이혼 강요 그에게 내려진 일종의 형벌은 혹사를 통해 정신을 바로잡게 하는 이른바 노동개조.월급은 취소되고 하루 1원57전을 받는 건축공사장에 끌려다녔다.1957년 1월에 결혼하고 신접살림을 차린 지 다섯달이 안되어서 일이다.비단공장에 들어가기로 되어있던 아내의 일자리도 취소되고 말았다.죽지못해 살기를 4년여 성상,1961년 우파 너울이 벗겨져 교사로 다시 복직되었다.그러나 비극은 끝나지 않고 1966년 문화혁명이 기다리고 있었다.그해가 중반에 접어든 6월22일 출근길에 자신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보았다.그러지 않아도 신경쇠약에 걸려있던 터라 병원진단서를 붙이고 학교를 쉬었다.그런 어느날 학교에 들어온 군대표로부터 중요한 일이 있으니 다음날 학교에 꼭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아무래도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사진관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다음날 관전현으로 올라가 압록강을 건넜다.북한으로 탈출한 것이다. 그가 북한으로 도망친 것을 눈치챈 학교는 이를 당국에 고발했다.곧 북한당국에 연락되어 1주일간 신의주에서 구류를 살았다.그리고나서 중국으로 강제송환된 그는 15년형을 받았다. 『아내가 감옥으로 면회를 왔습데다.아들 둘 하고 세 돌이 난 딸애를 업고 왔디요.철딱서니없는 어린 딸이 제가 먹던 싸구려 과자를 쥐고 쇠창살 사이로 넣어주는데 고만 눈물이 쏟아집데다.두번째 면회때는 아내가 혼자와서 이혼을 제기하길래 거절했더니 대성통곡을 하고 애들의 앞날을 봐서리 이혼해달라는 것이었디요.그후에 감옥소 소장이 저를 대신해서 이혼장에 도장을 찍어 강제 이혼하고 말았수다』 아내 김성란(61)씨도 평북 벽동 사람이다.시집을 가면 죽어도 그 집에서 귀신이 되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란 터라 도리를 모를 까닭이 없었다.아이가 학교에 가면 새끼반동이라고 따돌리고 당국에서도 이혼을 강요해 별 도리가 없었다.막상 이혼을 하고 났더니 문화혁명 이후의 관행대로 산골로 내몰았다. 열세살과 일곱살짜리 아들.세살짜리 딸과 함께 내팽개쳐진 곳은 한족들만이 우글거리는 봉성현 백기공사산하 지리대대.살길이 아득했다. 그의 아내는 고생으로 살아서인지 나이보다 훨씬 늙었다.남편옆에 앉아 훌쩍훌쩍 울기를 여러차례하고 나서 겨우 말문을 열었다.그 표정은 부끄럽기도 하고 후회스럽기도 한 것이었다. ○신경질환으로 고생 『제가 못된 여편네디요.아이들 하고 죽지 못해 한 일이디만….기래도 두 해를 버티다 한족 홀애비 백국영을 만나 재혼했습네다.저녁이면 아이들을 재워놓고 한참씩 울다가는 한족 영감옆에 누어잤디요.그런데 11년만에 무죄석방된 저 양반이 그 산골을 찾아왔디 뭡네까.저는 간염에 걸려 다 죽어가는 터디였디요.저 양반이 하루를 살더라도 복혼하자고 그럽데다.저도 한 마음이었수다.한족 영감도 인생들이 가여웠던지 저를 놔 주었디요』 그들이 재결합한 지도 어언 19년이 되었다.이산부부의 후유증은 아물지 않아 자신은 신경질환을 앓고 큰아들은 뇌종양으로 병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대륙의 몇차례 큰 바람은 이들 가족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었는지도 모른다.
  • 해외도피사범 검거 총력/경찰청,인터폴과 공조 강화

    경찰청 외사관리관실은 12일 국내에서 범죄를 저지른 뒤 해외로 달아나는 범죄자가 해마다 급증세를 보임에 따라 1백76개국 인터폴회원국과 공조수사체제를 강화,이들을 강제송환하는 등 해외도피사범검거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특히 현재 11명에 불과한 인터폴요원을 15명으로 늘려 세계적인 수사망을 갖고 있는 미연방수사국(FBI)과 협조체제를 강화할 방침이다. 경찰은 FBI가 오는 7월 서울에 한국지부를 설치할 계획이어서 그동안 범인송환에 가장 어려움을 겪던 미국과도 공조체제가 이루어져 미국으로 피신한 범죄자 83명을 검거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 미용실 모녀살해 전직경찰관 자살

    【수원=조덕현 기자】 경기도 군포시 미용실 여주인모녀 살해용의자로 경찰의 추적을 받아오던 수원남부경찰서 형사계소속 전직 경찰관 한태열(35·수원시 권선구 구운동)씨가 16일 상오11시쯤 충남 천안시 신부동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서울기점 84㎞지점) 옆 야산 건축자재 야적장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한씨의 웃옷주머니에는 운전면허증·수배전단과 함께 『아내에게 미안하다.장모님 먼저 갑니다』라고 적힌 수첩이 있었다.또 주위에서 한씨가 마신 것으로 보이는 농약병과 소주병이 발견됐다. 경찰은 한씨가 범행직후 피신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있다.
  • 「12·12」·「5·18」 수사 이모저모

    ◎“최규하씨 조사불응 뾰족한 대책 없다”/“계좌추적 공표로 승부 불가피” 분석도 12·12 및 5·18 사건 특별수사본부는 16일 최규하 전대통령에 대한 방문조사가 무산된데 이어 최전대통령이 대 국민성명까지 발표하자 마땅치 않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최전대통령의 성명이 발표되자 검찰은 『이제 검찰과 최전대통령이 정면으로 부딪히는 게 아니냐』면서도 『별로 뾰족한 대책이 없다』며 갑갑해 하는 분위기.더욱이 이날 검찰이 최전대통령의 예금계좌를 추적하고 있는 사실마저 공표돼 검찰과 최전대통령의 「한판 승부」가 불가피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대두. 하지만 검찰은 끝까지 최전대통령에 대한 강제구인이나 자금추적 사실에 대해 함구해 최전대통령의 심기를 직접 자극하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검찰 관계자들은 『강제구인이나 내사 등 주변에 압력을 아무리 가해도 최전대통령의 입을 강제로 열게 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입을 모아 곤혹스런 입장을 표출. ○…이에 앞서 이날상오 최전대통령의 법률고문인 이기창 변호사는 서울지검 기자실에 들러 『검찰의 조사에 응하지 않겠다는 것이 최전대통령의 확고한 생각』이라면서 『최전대통령의 집에 번거롭게 오시지 말라고 검찰에 당부했다』고 전언. 이변호사는 특히 최전대통령이 신군부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한 민주당 강창성 의원의 발언과 관련,『보안사령관을 지낸 사람이 정치인이 되더니 권총으로 최전대통령을 위협했다는 주장을 한 김광해씨처럼 사실을 확인도 않은채 멋대로 말하고 있다』고 맹렬하게 비난. ○…최전대통령의 부인 홍기여사 명의의 예금계좌에 대해 검찰이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은 사실이 이날 하오 알려지자 특별수사본부 주변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분위기.하오 1시30분쯤 기자들의 확인 요구를 받은 이종찬 본부장은 당황한 표정으로 『아는 바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이본부장은 거듭되는 요청에 『알아보겠다』고만 답변하다가 지쳤는지 1시간30여분 뒤인 하오 3시쯤 청사 밖으로 피신. 한편 12·12 당시 국무총리였던 신현확씨는 이날 상오 9시50분쯤 여유있는 모습으로 검찰에 출두하면서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려고 할 때 반대했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뒤 『검찰에서 모든 것을 밝히겠다』고 말하고 조사실로 직행. ○…수감 2주째 단식을 계속하고 있는 전두환 전대통령은 16일 급격한 체력 저하와 함께 현기증 증세까지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낮 12시20분쯤 동생 재용씨와 함께 면회를 하고 나온 아들 재국씨는 전씨 건강에 대해 『말할 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발음을) 정확히 알아 듣지 못할 정도로 목소리가 작아지셨다』면서 『혈압도 낮아지고 어지러움 증세도 좀 있는 것 같았다』고 설명.
  • 「12·12」 관련 검찰소환 4인의 행적

    ◎유학성씨 최 대통령에 정 총장 연행 재가 요구/조홍씨 수도권 핵심지휘관들 격리·체포/노재현씨 정 육참총장 연행 사후재가 중개/성환옥씨 총장공관서 총격… 총장연행 실행 12·12 및 5·18 특별수사본부가 지난 4·5일 잇따라 소환한 노재현 당시 국방부장관과 조홍 수경사 헌병단장,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와 성환옥 육본 헌병감실 기획과장 등의 사건 당시 행적에 새삼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핵심 관련자인 유씨는 당시 국방부 군수차관보(중장)로 수경사 30경비단 「경복궁 모임」에 적극 가담,12·12를 주도한 인물중의 한명이다.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승화 육참총장 연행에 대해 요청한 재가를 최규하 대통령이 사실상 거부하자 황영시 1군단장 등과 함께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집단으로 몰려가 최대통령에게 재가를 요청했다.육참총장 석방을 요구하는 장태완 수경사령관에게 신군부측에 가담하도록 회유하기도 했다. 3군사령관을 거쳐 대장으로 예편,전두환씨의 후임으로 중앙정보부장에 올랐다.85년 12대 총선 때 민정당 전국구의원으로 원내에 진출,13·14대 총선 때 경북 예천에서 여당 공천을 받아 내리 당선됐다.문민정부 출범후 공직자 재산 공개 때 축재사실이 드러나 의원직을 사퇴했다. 조홍 수경사헌병단장(대령)은 5·6공 시절 주요 직책을 맡지는 못했지만 당시엔 중요한 두가지 역할을 했다.전 보안사령관의 지시를 받고 신군부 핵심이 30경비단에 모이는 시각에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장태완 수경사령관,김진기 헌병감 등 수도권 핵심지휘관들을 격리하는 역할을 맡았다.『전보안사령관이 초대했다』며 하오 6시 30분쯤 장수경사령관 등이 연희동 요정에 모이자 『합수부장이 대통령보고 때문에 총리공관으로 갔는데 하오 8시까지 오기로 했다』며 거짓말을 하며 하오 7시35분까지 1시간 남짓 붙잡아 둔다. 이어 윤성민 육군 참모차장 등의 체포에도 핵심 역할을 맡는다. 육본 헌병감을 거쳐 82년 준장으로 예편,재향군인회 사업국장,도로교통안전협회 감사,손보협회 회장을 지냈다. 참고인으로 소환된 노재현 당시 국방부장관은 신군부측이 정승화총장의 연행과 관련,최대통령으로부터 사후재가를 받는데 중개자 역할을 했다. 정전총장이 연행된 12일 하오 7시10분쯤 총장공관쪽에서 총성이 나자 인근 단국대 체육관으로 가족들과 함께 피신한뒤 여의도에 있는 이경률 당시 합참 작전국장의 집에 가족들을 데려다 놓고 하오 9시30분쯤 육본 B2벙커로 돌아온다.1공수여단의 국방부진입 소식을 듣고 국방부 건물 지하실 계단밑에 피신한다.13일 상오 3시50분쯤 보안사 요원들에게 발견된 뒤 연행돼 신군부측의 강압에 못이겨 정총장의 연행을 사후 결재했다.5시15분쯤엔 총리공관에서 최대통령을 만나 신현확 국무총리,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 등이 배석한 가운데 『사태가 더 확대되지 않도록 결재하는게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최대통령의 사후재가를 받도록 했다. 그 뒤부터 지금까지 특별한 대외활동을 하지 않았다. 성환옥씨는 허삼수·우경윤 대령 등과 보안사 수사관 및 수경사 33헌병대 1개중대 등 60여명으로 하오 7시10분쯤 육참총장 공관에 도착,이재천 총장수행부관과 경호장교에게 총격을 가한뒤 정총장 연행에 성공했다. 85년 준장으로 예편한뒤 86년대통령경호실 차장,90년 감사원 사무총장을 지냈다.
  • 헌소제기서 취하까지 전말/7월이후 4건 접수… 모두 원점으로

    헌법재판소에 제출된 검찰의 5·18 불기소처분 취소에 관한 헌법소원은 모두 4건이었다. 검찰이 지난 7월18일 「공소권 없음」의 결정을 내린 직후인 7월24일 정동년씨 등 3백22명이 「5·18 민중항쟁 국민위원회」명의로 낸 불기소처분 취소와 이신범 민자당 부대변인 등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관련된 「5월 민주동지회」18명이 제출한 불기소처분취소,그리고 국민회의 김근태 부총재 부인 인재근씨 등 5·18 여성피해자 20명이 낸 불기소처분 취소 등이다.여기에 민주당의 장기욱의원과 이부영 전의원이 지난 20일 헌법소원 심판청구 건을 접수시켰으나 재판관들이 아직 본안심리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다.따라서 이날 모두 취하절차를 밟긴 했지만 헌재가 30일 최종 선고를 앞두고 있던 사건은 3건이었다. 이들이 주장한 내용은 대동소이하다.검찰의 「공소권 없음」의 결정은 자의적 처분이라는 것이다.또 검찰이 최규하전대통령의 하야시점인 80년 8월16일을 내란죄 공소시효 기산점으로 잡은 것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국보위의 마지막 회의인 25차 본회의가열린 81년 4월10일,또는 전두환씨가 대통령에 취임한 80년 9월1일까지는 내란행위가 계속된 것으로 봐야한다는 주장이다. 헌재의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 5·18 관련단체들은 「검찰의 결정은 잘못된 것」이라며 서울 등지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고,서울대·연세대·고려대등 대학교수 6천4백여명도 특별법 제정 촉구성명을 발표했다. 헌재는 그러나 8차례의 전체평의를 거쳐 검찰과 마찬가지로 최전대통령의 하야시점을 공소시효 기산점으로 잡아 내란죄에 대한 공소시효는 만료됐고,12·12 군사반란은 전·노씨에 한해 공소시효가 계속된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이러한 사실이 정치권에 알려지자 국민회의와 민주당은 28일 헌재에 최종선고 연기를 요청했다.이를 논의하면서 불기소처분 사건 대리인인 천정배·유선호변호사 등 민변 일부변호사들이 『재판부 기피신청도 함께 제출하자』는 의견을 개진했으나,국민회의 변정수고문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며 「소취하」로 방향을 틀었다.29일 상오 당차원에서 이를 협의하기 위해 신기하총무가 민주당 이철 총무와 접촉했고,같은 5월동지회 회원인 민자당 이신범 부대변인과 국민회의 설훈 부대변인도 비슷한 시간에 전화로 소취하문제를 협의했다.결국 최종합의에 이르러 헌재에 이날 하오 소취하 서류를 접수시켰다.
  • 헌재·검찰 “희비교차”/「헌소취하」 관련기관 표정

    ◎“정치논리로만 판단” 허탈·불만 표출­헌재/「공소권 없음」 결정 뒤집힐 부담 덜어­검찰 5·18사건 고소·고발인들이 헌법재판소의 최종 판결을 하루 앞둔 29일 전격적으로 소취하서를 제출함에 따라 5·18특별법 제정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헌법재판소◁ ○…5·18사건 고소·고발인의 대리인인 유선호·박주현 변호사,장기욱 변호사(민주당 국회의원),고소인인 정동년씨는 이날 하오4시 헌법재판소 현관앞에서 만나 10여분만에 사건접수실에 소 취하장을 접수. 이들은 「불구속 기소처분 취소 헌법소원 심판 청구 취하서」라는 소 취하장에서 「이 사건에 관하여 청구인들은 이건 전부를 취하합니다」라고 단 한 줄로 취하내용을 명시. ○…변호인들은 소 취하서를 제출한 뒤 기자회견을 갖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내려질 경우 공소시효 논쟁으로 불필요한 국력의 낭비가 예상되고 특별법 제정에 미묘한 혼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소 취하배경을 설명. 이들은 헌재의 불편한 심기를 고려한 듯 『결코 헌법재판소의 권위를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없다』고 거듭 밝히고 『국민 대다수의 뜻에 따르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 정동년씨는 『헌재의 결정을 연기토록 신청하고 재판부 기피신청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소 취하서를 내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하루전인 28일부터 소취하를 논의해 이날 상오 소취하를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며 소를 제기한 3백60명이 모두 동의한 것이라고 부연. ○…헌재 관계자들은 이날 하오 5·18사건의 고소·고발인들이 소를 취하할 것으로 알려지자 일손을 놓고 삼삼오오모여 허탈감과 함께 불만을 토로. 한 연구관은 『모든 것을 정치논리로 판단하려는 것 같다』면서 『헌재의 결정이 있더라도 현행 헌법의 테두리안에서 얼마든지 5·18사건을 재조사할 수 있을 텐데…』라며 아쉬움을 표시. 그는 특히 『법을 무시하고 힘으로 집권한 사람에게는 법의 무서움을 알려주어야 하는데 또다시 법적 절차보다는 힘의 논리로 풀어가려는 것 같다』고말하고 『고소·고발인을 대리하고 있는 변호사들도 법을 모르기는 마찬가지』라고 주장. 일부관계자는 고소·고발인들이 소취하를 한 것은 사실상 언론의 보도 때문이라고 언론에 화살. 한 관계자는 『영국에서는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특정 사건에 대해 법원의 확정 판결이 있을 때까지는 언론이 전혀 보도하지 않는게 관례』라면서 『미국에서도 법원의 판결이 있기 전에 보도를 하려면 미리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 ▷검찰◁ ○…헌법재판소의 「공소권 없음」 취소결정이 나오는대로 즉각 5·18재수사에 착수키로 하고 13만쪽에 이르는 방대한 관련자료를 점검하는 등 준비를 해왔으나 헌법소원 취하 소식에 일단 한숨을 돌리는 모습. 지난 7월 「공소권 없음」결정을 내렸던 서울지검 공안1부는 홀가분해 하는 기색이 역력. ○…최병국 대검공안부장은 이날 하오 기자들과 만나 『헌재에서 심사각하에 대한 동의를 구해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물음에 『헌법소원 취하는 검찰의 결정을 청구인들이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아니냐.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설명. 그러나 검찰주변에서는 『헌법소원 취하가 5·18관련자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해 포괄적으로 처벌하기 어렵게 됐다는 청구인들의 판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인데도 검찰이 이를 곡해,지나치게 견강부회하는 것이 아니냐』며 눈총. ○…최공안부장은 소취하가 알려지기 전인 이날 상오에도 기자들과 만나 5·18수사가 전제되지 않고 12·12에 대한 재수사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피력. 최공안부장은 『12·12사태에 대한 검찰의 기소유예처분에 대해서는 이미 헌재가 합당한 것이라고 판결을 내렸다』면서 『5·18과 연장선상에 있는 12·12에 대해서는 5·18수사가 전제되어야만 미진한 부분의 재수사가 가능하다』고 설명.
  • 김용준 헌재소장 기피신청/5·18 헌법소원 청구인 3백22명

    5·18 헌법소원사건 청구인인 정동년씨 등 3백22명은 28일 『헌법재판소가 정치적 독립성과 중립성을 상실한채 이 사건에 대한 최종결정을 내릴 우려가 있다』며 김용준 헌법재판소장에 대한 기피신청을 헌재에 냈다. 정씨 등은 박연철 변호사 등을 통해 제출한 신청서에서 『헌재가 내란죄의 공소시효가 만료된 것으로 결정,대통령 재직기간 시효가 중단되는 군사반란죄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만 처벌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알려졌다』면서 『이는 최근 정부가 두 전직대통령 등 주모자만 처벌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점에 비춰 정부와 사전교감 아래 짜맞춘 결정으로 단정짓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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