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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라엘, ‘팔청사’ 이틀째 맹폭

    [라말라·가자지구 AP AFP 연합]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스라엘이 공군기와 미사일 등을 동원,이틀연속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의 사무실,보안기관 건물 등을 공격,최소한 2명이 숨지고 어린이 수십명이다쳤다. 이스라엘은 4일 공격용 헬리콥터를 동원,요르단강 서안라말라에서 아라파트 수반의 사무실이 있는 본부 건물들을향해 미사일 3발을 발사했다.공습 당시 아라파트는 사무실에 있었으나 바로 옆 방이 미사일 공격을 받아 무사했다. 이스라엘 공군은 F-16전투기를 동원,가자지구 민간인 거주 지역 부근의 팔레스타인 보안기관 건물동에 3발의 로켓을 발사했다.이에 인근 초등학교 학생 수백여명이 공포에질려 피신하다가 부상하는 모습이 목격됐다. 이스라엘 헬기는 또 툴카렘에 있는 아라파트 수반의 경호부대 ‘포스17’ 본부와 살피트 마을의 팔레스타인 보안시설도 공격했으나 사상자가 발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베이트 라히아의 ‘포스17’사령부는 F-16기의 공격을 받아 건물 5개동이 파괴됐다. 가자시티 및 라말라에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은 내각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테러지원단체로 규정,군사작전을 강화하고 ‘포스17’과 파타운동의 무장단체인 ‘탄짐’은테러단체 명단에 올린다고 밝힌 지 수시간 만에 이뤄졌다. 이스라엘은 이런 조치와 함께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아라파트 수반의 권력을 상징하는 대상인 전용 헬리콥터 3대,헬기가 이륙하는 데 쓰이는 가자공항 활주로,아라파트 사무실을 공격,파괴했다.가자공항에 진주했던 이스라엘군은 활주로 파괴후 철수했다고 군 당국은 밝혔다.
  • [대한광장] 테러戰과 주한미군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에 대규모 지상군을 투입해야 할지를고민하고 있다. 부시 미 대통령은 북부동맹이 아프간 수도카불을 함락시키기 며칠전인 지난 6일 국제연대에 참여한동맹우방국들에 “단순한 지지가 아닌 행동을” 촉구하였으며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이 지상군 파견 준비를 완료한시점에서 한·미 실무자들이 한국군 전투병력 파견에 관해의견교환을 하였다는 보도가 나왔다.이러한 상황적 여건을종합해 보면 미국은 대테러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국제연대를 강화함과 동시에 대규모의 지상군을 투입해야 한다는전략적 의도를 드러내고 있으며,이에 따라 우리는 주한미군과 한국군 전투병력의 파견 문제를 미리 생각할 필요가 있다. 걸프전의 교훈에 따라 미국은 이번 대테러전쟁에서도 최첨단 무기와 정보망을 최대로 이용하고 있으나 대테러전쟁을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상당한 규모의 지상군을 투입하지않을 수 없을 것이다.빈 라덴과 탈레반 군사들이 이미 험준한 산악의 동굴,민간 병원,학교,민간 밀집 거주지역 등으로피신하였기 때문이다. 미국은이러한 대테러전쟁을 장기적으로 수행하지 않을 수없는 상황에서 해외주둔 미군 정책을 수정할 가능성이 있다.이미 부시행정부의 국방정책 담당자들은 선거과정에서도군사기술의 혁신(RMA)으로 인한 성과를 최대로 활용한다면해외주둔 미군을 감축할 수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이러한배경을 감안하면, 미국은 정보와 첨단무기를 중심으로 동맹우방국들에 대한 안보공약을 준수하고 대테러전을 수행하는지상군은 동맹우방국들과 공동으로 담당하는 이중전략을 추구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이중전략으로부터 주한미군도제외될 수 없다. 나아가 미국의 이러한 미래전에 대한 개념은 지난 9월말에발표한 국방검토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미 국방부는전략목표로서 ①동맹우방국의 안전 보장 ②미래에 예상되는군사적 경쟁국 대두 저지 ③미국의 국가이익에 대한 위협의 억제 ④억제가 실패하는 경우 침략을 ‘결정적으로’ 격퇴 등을 제시하였다. 이를 종합해 보면 첫째,미국은 미 대륙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하여 본토방위에 더 많은 전력을 투입할뿐만 아니라 “인도양에서 동북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의 관장에 필요한 전력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해외미군을 재배치할 가능성이 커졌다.둘째,보수적 성향을 지닌미 전문가들은 미국에 대한 테러공격이 발생하기 이전부터미군은 첨단무기와 정보력의 우월성을 최대로 활용함으로써 해외주둔 병력을 감축하고 대신에 유사시 분쟁지역에 쉽사리 병력을 수송할 수 있는 접근기지를 확보하는 정책을주장하였으며 여기에 동조한 많은 인사들이 부시 행정부에서 일하고 있다.셋째,미국은 9·11 테러사건 이후 해외주둔미군을 미래의 테러공격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방안으로이들을 일부 지역에 집중 주둔시키기보다는 광범위한 지역에 분산,배치하였다가 필요시 분쟁지역으로 수송하는 방안을 강구할 가능성이 크다.이러한 분석은 장기적으로 주한미군의 감축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또한 주한미군의 감축문제는 아프간전에 대한 한국군 전투병력의 파병문제와 연계되어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우리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먼저,주한미군 문제를 남북간 군사문제와 연계하여 한반도의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해결해야 한다.주한미군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한·미간의 문제이지만 현실적으로남북간 군사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우리는주한미군 문제를 수동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주도적 입장에서 미국측과 협상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둘째,한국군은 ‘미군이 없는’ 미래의 군사력 건설뿐만 아니라 군사전략을발전시켜야 한다.이를 위해서 전시 작전권의 환수문제에 대한 미국과의 협상을 서두를수록 좋다.셋째,이와 동시에 우리는 한·미 군사동맹을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우리가 어느 정도 자주적 군사역량을 확보함과 동시에 한·미간 포괄적 동맹관계로 승화시키는 것이 양국의 안보이익에 다같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백종천 세종연구소 소장
  • 예천경찰서, 요원회피제 운영

    경북 예천경찰서는 30일 ‘교통사고 조사요원 회피제’를도입,시행에 들어갔다. 이는 교통사고를 조사할 때 사고 당사자가 조사를 맡은 경찰 요원이 사고 상대방과 혈연·학연·지연 등을 이유로 조사 경찰관 교체를 건의하는 제도이다.조사 경찰관도 같은이유로 회피신청을 할수 있다. 경찰은 이같은 회피신청이 들어오면 ‘교통사고 회피신청심사위원회’를 거쳐 과반수 찬성으로 교체할수 있다. 예천경찰서 최종덕(崔淙悳)서장은 “농촌지역 특성상 경찰과 사고 당사자간의 친분 관계로 결과가 불신을 받는 등 부작용이 많았다”면서 “그러나 전국 처음으로 이 제도를 도입해 공정성 시비를 없애고 경찰의 신뢰를 높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예천 한찬규기자 cghan@
  • 나이지리아 이슬람·기독교 충돌

    파키스탄을 포함한 일부 이슬람권에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에 반대하는 시위가 폭력화하고 있는 가운데 나이지리아에서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간 충돌로 200명 이상이 숨진것으로 전해져 나이지리아가 이슬람교와 기독교간 본격적인문화충돌을 부를 도화선이 될지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나이지리아 보안 관계자들은 200명이 넘는 많은 인명피해에도 불구,아직은 문명충돌의 단계로까지 우려할 지경은 아니라고 말한다.나이지리아는 이미 지난해부터 강력한 이슬람법(샤리아법) 도입을 둘러싸고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간 충돌이 빚어져 수천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을 경험한 바 있다. 그러나 13일의 충돌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에 반대하는 시위 도중 빚어졌으며 양 종교간 긴장이 이미 충분히 고조됐다는 점에서 제2,제3의 충돌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힘든 것도 사실이다.이때문에 나이지리아 당국은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통행금지령을 선포하고 이를 어기는 사람에 대한 사살령을 내리는 등 양 종교간 충돌을 진정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13일 충돌에서 숨진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도들로 카노의기독교도들은 안전을 위해 군 병영이나 경찰서로 피신해 있다.그러나 흥분한 시위대가 기독교도들이 피신해 있는 경찰서를 습격하는 사태라도 벌어진다면 이슬람과 기독교간 문명충돌로 비화시킬 불씨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지도 모른다. 김상연기자 carlos@
  • 北 “美 테러사건 매우 유감”

    북한이 유엔 총회에서 미국 테러사건에 대한 공식유감을표명했으나 미국은 북한의 테러지원국 지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밝혔다. 리처드 바우처 국무부 대변인은 5일(현지시간) 일본 적군파(JRA)가 테러단체 명단에서 빠진 것과 관련,“테러단체지명과 테러지원국 지정은 별개의 정책”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바우처 대변인은 “70년 일본 항공기를 납치한 적군파 요원들이 지금도 북한으로부터 은신처를 제공받고 있다”며“적군파의 항공기 납치는 중대한 범죄행위이며 지금까지이들에게 피신처를 제공한 북한은 미국의 관련법률에 따라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될 충분한 사유가 있다”고 지적했다. 국무부는 ‘알 카에다’ 등 외국의 28개 테러단체 명단을발표하면서 일본 적군파의 경우 테러의 잠재적 가능성이있지만 지난 2년간 활동이 없다는 이유로 테러단체에서 제외시켰다. 미국에 의해 테러지원국 명단에 오른 나라는 대한항공 폭파사건으로 인한 북한을 비롯해 쿠바,이란,이라크,리비아,수단,시리아 등 7개국이다. 한편 이형철(李亨哲)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대사는 이날유엔총회에서 3분간 연설을 통해 “미국 테러공격은 국제사회를 놀라게 했으며 매우 유감스럽고 비극적인 것”이라고 밝혔다. 이 대사는 “북한은 모든 형태의 테러리즘과 이를 지원하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반대해 왔다”며 “테러의 근본원인을 파악하고 유엔을 통해 효과적이며 실질적인 대처수단을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러나 “국제관계에서 주권평등을 주장하는 독립국가에 테러국가라는 낙인을 찍어 군사개입과 점령,일방적압력 및 제재 등 주권을 유린하고 고통을 주는 행위도 국가적 테러행위로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고 미국의 테러지원국 지정을 강력히 비난했다. 워싱턴 백문일특파원 mip@
  • 美에 범죄인 인도 첫 결정

    미국에서 수십차례 강도·강간 행각을 벌이고 한국으로 도피해 궐석 재판으로 271년형을 선고받은 재미교포에 대해국내 법원이 범죄인 인도 결정을 내렸다. 서울고법 형사10부(부장 姜炳燮)는 25일 미국이 서울고검을 통해 요청한 강모씨(31·구속)에 대한 인도요청을 받아들였다.강씨가 낸 위헌법률 심판제청 신청에 대해서는 “인도결정에 대한 불복절차가 없다는 주장은 인도 여부에 대한 심리와 무관하다”며 각하했다. 강씨는 한국에서도 대마를 피운 혐의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복역중이어서 10월 형을 마치면 미국으로 인도된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피신청인이 저지른 범죄의 성격으로 볼 때 미국 인도가 비인도적이라고 보이지 않고 미국이비슷한 범죄에 대해서는 한국의 범죄인 인도청구에 응한다는 보증을 하고 있는 만큼 인도를 거부할 사유가 없다”고밝혔다. 이에 대해 강씨측 변호인은 “재항고는 물론 헌법소원까지 고려하겠다”고 말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
  • 부시 “美국력 총동원 테러응징”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일(현지시간) 국가 자원을 총동원,전세계에 걸쳐 있는 테러 세력을 응징하겠다고 선언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날 TV로 생중계된 상·하원 합동연설을 통해 “전세계 테러 네트워크를 궤멸하기 위해 전쟁무기를 포함,외교·정보·법률·재정상의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겠다”고 밝혔다. 부시 대통령은 이와 함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이슬람민병대가 오사마 빈 라덴에게 피신처를 제공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탈레반은 빈 라덴 조직내 모든 지도자들의 신병을 미국에 인도하고 테러 캠프를 폐쇄하라”고 촉구했다. 부시 대통령은 탈레반 정권이 이같은 요구들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테러리스트들과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사실상 전쟁상태를 선포했다. 미국의 이같은 요구에 대해 탈레반은 21일 빈 라덴을 결코 미국에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맞섰다. 탈레반은 이날 압둘 살람 자예프 파키스탄 주재 아프간대사의 기자회견을 통해 이같은 입장을 밝히고 미국의 공격에 맞서 성전을 전개할 것임을 거듭 천명했다. 한편 이날 연설에서 부시 대통령은 또 미국을 테러 공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방위조치로 각료급 기구인 ‘조국안보국’을 신설하고 초대 국장에 톰 리지 펜실베이니아 주지사를지명했다. 부시 대통령은 외국 정부들에 “우리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테러리스트들의 편에 설 것인지”를 선택하라며 강경한 어조로 협조를 당부했다. 부시 대통령은 앞서 이날 병력 재배치의 일환으로 특수부대와 크루즈 미사일을 탑재한 B52 폭격기의 출동명령을 승인했다.항공모함 키티호크도 21일 모항인 일본 가나가와(神奈川)현 요코스카(橫須賀)기지를 떠나 인도양으로 향했다. 한편 영국 국방부는 21일 “영국과 미국 전투기들이 ‘방어적’ 차원에서 이라크 남부의 방공 시스템을 공격했다”고발표했다.그러나 국방부는 이 공격이 지난 11일 뉴욕과 워싱턴에서 발생한 테러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밝혔다. 워싱턴 백문일특파원 mip@
  • “라덴 아프간 떠났다?”…이동설 부상

    빈 라덴의 행방과 관련,이미 그가 아프간을 떠났다는 관측이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파키스탄내 아프간 접경도시 페샤와르의 소식통들은 21일 빈 라덴이 성직자회의가 열리기 전인 지난 17일 이미 아프간을 떠나 제3의 비밀장소로 떠났다고 전했다. 인도의 뉴스 웹사이트 레딥 닷컴은 20일 “빈 라덴이 이미나흘 전에 아프간을 떠났다”고 보도했다.정보소식통들은 빈 라덴이 미국의 공격을 피해 파키스탄으로 향하는 수천 명의 아프간 난민들 틈에 끼어 있을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빈 라덴은 그동안 여러 테러사건의 배후로 지목돼있어 갈 수 있는 곳은 당초부터 제한돼 있다.게다가 이번 미 테러 대참사 이후 미국이 전 첩보력을 동원,그의 행방을 주시하고 있어 선택 폭은 상당히 좁아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미국은 20일 아프간 집권 탈레반에 대해 빈 라덴을 책임있는 당국에 인도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라덴과 비호세력인 알 카에다 지도자들을 인도하지 않으면 탈레반도 역시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아프간 집권 탈레반은 21일 빈 라덴을 결코 미국에넘기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혔다.압둘 살람 자예프 파키스탄주재 아프간 대사는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빈 라덴 인도는 불가능하며 그를 미국에 인도하거나 국외추방하는 일은 이슬람 교리에 어긋난다는 입장에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만약 빈 라덴이 자진해서 아프간을 떠났다면 그의 새로운은신처는 어느 곳이 될까? 현재 아프간 탈출설,국내 산악지대 피신설 등 각종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체첸이나 중앙아시아 지역도 유력한 은신지로 꼽힌다. 그러나 이들 국가가 미국의 대공격 및 각종 제재조치를 감수하면서 빈 라덴을 받아들일지 미지수다. 이동미기자 eyes@
  • 美 테러전쟁/ 이슬람 급진단체 현황

    서방 언론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유혈테러의 배후로항상 이슬람 급진단체를 꼽는다. 이들은 종교적인 신념으로무장하고 있는 탓에 자살테러를 성스러운 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준비중인 미국이 가장우려하는 것은 대규모 공습 이후 전세계에 점조직 형태로퍼져 있는 이슬람 단체들의 동시다발적인 보복 테러다.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 카에다는 34개국에 테러조직을 심어놓고 있다.미국 의회조사국(CRS)도 지난 10일 작성한 보고서에서 “알 카에다는 전세계에서 미국 시민과 국가안보 이익에 대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피의 보복 다짐: CRS는 이 보고서를 통해 “빈 라덴이 비이슬람 국가 제거 또는 이슬람 국가들의 영향력 확대라는공통목표의 달성을 위해 다양한 국적의 극단적인 급진 이슬람단체들의 연합체를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공격에 대한 ‘피의 보복’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이번 아프간 공격에 대한 신중론자들도 전체 이슬람 세계를자극하지 않는 범위에서의 응징을 제시하고 있다. 게다가 빈 라덴은 3억달러의 개인 금융자산을 갖고 있으며,이 금융자산으로 3,000명의 이슬람 과격분자들이 가담한한 테러망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장기전도 감내할 수 있는 규모의 자금력인 것이다. 팔레스타인계 저항운동단체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는 1980년대부터 대 이스라엘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1987년 창설된 하마스의 주활동 무대는 이스라엘 가자지구와 요르단강서안지구.하지만 이들은 친이스라엘 노선을 걷고 있는 미국에 대한 불만으로 결국에는 반미 유혈투쟁을 통한 독립쟁취로 나아가고 있다. 하마스는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자살테러 학교를 운영하고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슬람 지하드는 1980년 이란의 지원을 받아 최초로 설립된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다.역시 이스라엘 무장투쟁을 목표로 하고 있다.1981년에는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암살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다.지하드는 시리아와 이란으로부터 지난 20여년 동안 이스라엘 무장투쟁의 선봉장 역할을 해왔다. ■이스라엘 제거 주장: 지난 84년 레바논에서 이란에 의해창설된 레바논계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단체 헤즈볼라는 이스라엘군이 지난해 5월 레바논 남부에서 철수하기 전까지격렬한 대 이스라엘 투쟁을 전개했다.헤즈볼라는 그러나 레바논 이외 지역에서 발생한 테러 사건들은 자신들과 관계가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헤즈볼라는 또 빈 라덴에게 피신처를 제공한 탈레반에 대해서도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난 1969년 마르크스주의 테러단체로 조직된 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DFLP)은 1988년 팔레스타인 최초로 조직화된군사행동을 펼쳐 가자지구의 이스라엘군 거점 공격에 성공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은물론 왕정제 폐지 등 중동지역 공산혁명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슬람교도들은 종교분파,민족,계층의 차이를 떠나 대부분반미 정서를 공통으로 깔고 있다. 이에 대한 1차적인 원인은 미국의 친 이스라엘 정책이기도 하지만 최근에 와서는테러가 점차 과격화하면서 테러-보복-테러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강충식기자 chungsik@
  • 카불市 외곽 곳곳에 참호 구축

    미국의 전쟁 불사 의지 천명에 이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 14일 미국의 군사 공격에 항전하겠다고 밝히면서 아프가니스탄에 극도의 긴장이 감돌고 있다. 탈레반 최고 지도자인 물라 모하마드 오마르는 미국의 예상되는 공격이 아프가니스탄 체제 전복을 의미한다며 “어떤 대가도 치를 태세”임을 밝혔다.오마르 등 탈레반 지도부가 이미 수도 카불을 떠나 피신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카불 등지에서는 아프간 거주 아랍계 등 외국인들의 피란행렬이 잇따르고 있다.13일 유엔 관리와 외교관,비정부기구(NGO) 요원들이 수도 카불에서 철수했으며,시민들은 시외곽 곳곳에서 참호를 파는 등 미국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다. ◆카불 철수 행렬=미국의 대 아프가니스탄 군사공격 가능성이 고조되면서 13일 이곳에서 활동 중이던 유엔관리 등 서방 외국인들이 비행기 3대에 나눠 타고 수도 카불을 떠났다. 아프간에서 기독교를 선교한 혐의로 구속된 구호요원 8명의 재판을 감시하기 위해 이곳에 머물던 독일·호주·미국영사들과 친지들도 서둘러 카불을 떠났으며,5개 도시에서활동하고 있던 유엔 관리 80명 전원이 이날 오후 철수했다. 유엔측은 현지에서 고용한 유엔 직원에게 급료를 정산했으며 서류 등 비품 일체를 거둬갔다. 의료구호 활동을 하고 있던 국제적십자사를 제외한 NGO 요원 500여명도 파키스탄으로 대피했으며,특히 카불에서 취재 중이던 서방언론 기자들도 일단 파키스탄으로 철수한 것으로 밝혔졌다. ◆폭풍전야의 카불=CNN과 AFP 등 언론들은 수도 카불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유지되고 있으나 시민들의 표정은 공격에대한 불안으로 굳어지고 있다고 전했다.시민들은 탈레반 정권이 모든 TV 방송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라디오를 통해 대미 테러와 관련된 소식을 일부 듣고 있으며 ‘비행기가 납치됐다’ ‘뉴욕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붕괴됐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고 소개했다.그러나 카불의 아랍계 거주자들은속속 국경을 넘어 대규모 피란행렬에 나섰으며,시 외곽에서는 시민들이 참호를 파고 방호벽을 쌓는 모습이 목격되고있다. ◆탈레반 정권 대미 호소= 미국의 개전 의지가 점차 가시화되자 탈레반 정권은결사 항전을 다짐하면서도 라덴이 이번 사건과 관계없다면서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지 말 것을 미국에 호소하고 있다.와클리 아흐메드 탈레반 외무장관은 “이미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은 내전으로 큰 불행을 겪었다”며 미국의 신중한 수사와 군사 공격 자제를 촉구했다.탈레반 정권은 미국이 공격할 경우 수도 카불 48㎞ 밖에서 대치하고 있는 반군세력들이 득세,정권 전복으로 이어질 수도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 김수정기자 crystal@
  • 美테러 대참사/ 청와대·정부 후속조치

    미 동시다발 테러 사흘째인 13일 정부는 당초 흥분과 경악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현지 교민의 피해 상황과 실종자의 행적을 파악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특히 정부는 미국이 보복조치를 검토하고 있는 것과 관련,아프가니스탄과파키스탄 국경 근처의 교민들에 대한 대피를 긴급 지시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오전 상견례를 겸한 첫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하기에 앞서 이상주(李相周) 비서실장의 제의로 미국 테러 참사 희상자들에 대한 묵념을 했다. 김 대통령은 “실종상태인 교민들의 안위 파악 등 현지공관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다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이어 “세계 최고의 방위력을 가진 나라가 민간 여객기의 자폭전술 앞에 당했다”면서 “세계에 안전한 나라가 없고 전후방이 따로 없게 된 만큼 우리도 휴전선만 바라보던 안보태세에서 벗어나 전방위적인 안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책반은 이날까지 주뉴욕 총영사관과 한인회 등을 통해 실종자들에 대한 확인작업을 계속 벌였다.대책반장인 임성준(任晟準) 차관보는 이날 “실종자 수가 줄어들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면서 추가 생존자 파악에 분주했다. 또 붕괴된 세계무역센터 주변에서 업체를 운영하고 있는교민들의 재산피해 상황을 접수하고,복구 대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외교부는 이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미국뿐만 아니라 중동지역 공관에 전문을 보내 교민들이 불필요한 여행을 자제토록 유도하고 출타시 반드시 해당 공관에 신고하도록 당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정부의 한 당국자는 “아프가니스탄에 체류 중인 우리 국민은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다만 아프가니스탄 국경과 인접한 파키스탄 거주 교민들의 안전확보를 위해 피신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공군은 이날 오후 동해안 상공에서 C-130 수송기,KF-16 전투기 등이 참가해 테러범에 의한 민항기 공중납치 상황을 가상한 피랍 항공기 대응훈련을 실시했다. 이날 훈련은 공군 작전사령부 전구항공통제본부(TACC)에서 정상항로를 이탈한 민항기 1대에 대해 각종 정황판단을통해 공중납치됐다는 사실을 인지하고,곧바로초계비행 중인 전투기 2대에 추적을 지시하면서 시작됐다. 이어 인근 전투비행단에서 무장한 전투기 4대가 발진해최후 상황에 대비한 요격을 준비한 뒤 피랍기를 가까운 공항으로 유도했다. 공군은 민항기를 공군 비행장에 강제 착륙시키고 대기하던 헌병 기동타격대가 테러범들을 진압하는 것으로 훈련을끝냈다. 한편 김동신(金東信) 국방장관은 이날 국방부에서 말레이시아 출장을 마치고 복귀한 토머스 슈워츠 한미연합사령관의 예방을 받고 테러참사에 대한 한국군의 위로를 전했다. 슈워츠 사령관은 “오늘 오전 10시를 기해 부시 대통령의지시에 따라 대테러 방어태세인 ‘스레트콘 D’를 한 등급낮은 ‘C’로 바꿨다”고 밝혔다. 오풍연 박찬구 기자 poongynn@
  • 美테러 대참사/ 무역협회 파견 고대생 목격담

    한국무역협회가 해외 청년무역인력양성사업의 일환으로미국 뉴욕에 파견 중인 황성훈(黃聖薰·28·고려대 심리학과 4년)씨가 보내온 목격담을 소개한다. 아마 2,3분만 일찍 출근했더라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에요.8시 50분경이었습니다(1차 테러시간).오늘 E-train(고속열차)을 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역에서 내렸을 때도 세계무역센터 지하로 빠져 나오지 않고,약 두 블록 정도 떨어진 종점 출구에 내렸습니다.세계무역센터 1번 건물 바로 옆에 있는 검은색 건물 옆을 지나칠 때였습니다.갑자기 ‘쉭’하는 소리가 나서 하늘을 쳐다보니 비행기가 순식간에 1번 건물의 상단에 충돌,가운데로 파고 들더니 폭발했습니다(제 사무실이 정확히거기 있었습니다).마치 영화와 같았습니다.유리창이 깨지더니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물론 비행기 파편도마찬가지였습니다. 파편이 쏟아지자 오직 살아야겠다는 일념이었습니다.옆에있던 흑인여성 둘과 흑인남성 한명과 같이 바로 옆에 있던건물 뒤편으로 뛰어서 엎드렸습니다.모든 것이아수라장이었습니다. 80층에 있던 사무실에서 사람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살아있는 채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사람이 떨어질때마다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울부짖었습니다. 대략 7∼8명 정도가 추락사한 것 같았습니다.처음엔 가슴을 졸이며지켜보다가 너무 끔찍해서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세계무역센터 2번 건물에 다른 비행기가 충돌했습니다(9시 10분경).제트기 엔진 덩어리가 파편으로 날아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고 사람들은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모두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건물 입구에 들어가려는 순간 맞은편 건물에 비행기 엔진 덩어리가 떨어졌습니다.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많은 사람들이대피해 있었습니다. 건물 안은 우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다들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전화하느라 바빴습니다.현재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이 정확히 2001년 9월 11일 오전9시 55분입니다. 지난 주 수요일 날(9월 5일) 뉴욕에 처음 왔는데 모든게지옥입니다.9시 58분경 피신하는 도중에 뒤를 돌아보니 세계무역센터가 붕괴해 그 일대가 먼지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 80년대 DJ보호 포글리에타 美 前대사

    80년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군사정권의 탄압을 피해미국에서 지낼 때 김 대통령을 보호하며 우정을 쌓았던 미국의 토마스 포글리에타(73) 전 주(駐) 이탈리아 대사의 인권보호 정신을 기르는 모임이 결성됐다. ‘포글리에타 대사 공익봉사재단 추진위원회(위원장 송천은 원광대 총장)’는 지난 29일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에서포글리에타 전 대사를 초청한 가운데 발족식을 가졌다.국내 학계와 재미교포 인사 23명이 참가한 공익봉사재단 추진위원회는 포글리에타 전 대사의 뜻을 기려 앞으로 국내 인권활동과 장학사업,학술연구 사업 등을 펼칠 예정이다. 포글리에타 전 대사는 지난 80년 미 연방 하원의원 국제인권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하며 당시 미국에 피신중이던 김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이탈리아 이민 2세대로 미국 내 소수민족 문제 등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85년 김 대통령이 귀국할 당시 김포공항까지 따라와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던 김대통령을 보호했다. 이 인연으로 98년 김 대통령의 취임식에도 참석했고 그해경희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김 대통령은 지난해노벨평화상 수상식날 포글리에타 전 대사와 아침식사를 함께 하며 “대사의 도움이 없었다면 과연 이 자리에 내가 설 수 있었겠는가”라며 고마움을 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포글리에타 전 대사의 모교인 미국 필라델피아 세인트조셉 대학의 도서관은 김 대통령과 포글리에타의 인연을 담은신문기사,사진 등을 소장하고 있다.이 대학은 곧 ‘포글리에타학’도 개설할 예정이다. 그는 지난 3월 주이탈리아 미국 대사직을 끝으로 50년간의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류길상기자 ukelvin@
  • 동티모르 21세기 첫 독립국 눈앞

    동티모르가 오는 30일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총선을 실시함에 따라 21세기 세계 최초의 신생독립국 탄생을 목전에 두게 됐다. 현재 동티모르는 치안과 외교 등에 있어 건국 준비가 거의마무리된 상태다.지난해 10월2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한시적인 입법·사법·행정 권한을 갖는 동티모르과도행정기구(UNTAET) 설립을 승인하고 이후 UNTAET가 전세계 32개국에서 파견된 군병력 8,900여명과 군사고문단,경찰 등으로 구성된 사상 최대 규모의 다국적군을 이끌고 건국 준비에 본격 돌입한 결과다. [사법] 독립 영웅 사나나 구스마오가 이끌던 동티모르저항협의회(CNRT) 대표들은 국가자문위원회를 구성,UNTAET와 공동으로 과도통치에 적용할 임시법률을 마련했다.유혈사태 당시 잔학행위 단죄와 공공 치안질서 확보를 위한 ‘과도 사법위원회’도 공식출범했다. [외교] 국제사회 내 위상 제고와 건국 지원 유도를 목표로외교노력도 활발히 전개됐다.지난달 집권한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인도네시아 대통령도 독립 지원을 다짐했고 가시적인 조치로 지난 4월 자카르타에 동티모르 대사관이 개설됐다.지난해 7월 방콕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외무장관회담에 옵서버로 참가한 구스마오는 조기 가입의사를 밝혀 회원국들로부터 우호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치안] 신생국의 치안과 안보를 담당할 군대도 창설됐다.서티모르에 피신중인 난민 25만명중 15만명을 귀환시킨데 이어 민병대의 무장해제 작업도 거의 종료됐다.서티모르와 접경지역에 출입국관리소를 개설해 통관 및 이민 업무를 관장토록 했으며 우편업무도 재개됐다. [재정] 독립국 건설을 위한 핵심적인 재원도 확보된 상태다. 현지에 진출한 해외자본의 영업 허가와 외환 관리를 담당할중앙은행도 설립됐다.남쪽 바다 ‘티모르 갭’ 에 매장된 풍부한 석유와 천연가스를 호주가 개발,이익금의 90%를 2004년부터 20년간 넘겨받기로 협정을 체결했다. 동티모르는 제헌의회 구성이 완료되면 90일 내에 헌법을 제정하고 내년 초 대통령선거를 거쳐 독립국 탄생을 전세계에선포하게 된다. 각계 정파들이 연대해 반인도네시아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CNRT는 창립 24년만에해체돼 지난 15일부터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이동미기자 eyes@
  • 이, 팔 영토 장기 점령 태세

    [베이트잘라·예루살렘·워싱턴 AP AFP 연합] 이스라엘군이 28일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워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인 베이트 잘라 마을에 진입한 후 전략요충지에 진지를 구축하는 등 장기주둔 채비를 갖추고 있다. 특히 이에 맞선 팔레스타인측이 박격포 등 중화기를 동원,이스라엘측에 간헐적인 공격을 지속하고 있어 중동사태가 시가전 양상으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이스라엘의 맹방 미국이 28일 이스라엘군의팔레스타인 거주지역 진입행위를 두고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고 지적하면서 철군을 촉구하고 나서 귀추가 주목된다.그러나 이스라엘의 아리엘 샤론 총리와 비냐민 벨 엘리에제르 국방장관은 별도지시가 있을 때까지 베이트잘라 마을에 병력을 계속 주둔시키도록 했다고 이스라엘 라디오 방송이 보도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측이 베이트잘라의 언덕 정상에서 유대인 마을을 향해 총격을 해오고 있다는 이유로 베이트잘라를 점령했다.베이트잘라 마을의 대부분은 야간통행금지가 실시됐으며 주민의 상당수가 외지로 피신한 상태다. 베이트잘라에서 이스라엘 병사들은 팔레스타인 주민 거주아파트의 옥상이나 장갑차 등에 포진,경계태세를 갖추고 있으며 반면 팔레스타인 전사들은 몇블록 떨어진 곳에 은신한채 교전에 대비하는 등 양측 모두가 시가전에 대비하는 양상이다. 한편 리처드 바우처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이스라엘군의 베이트잘라 진입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안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이스라엘의 철군을 촉구했다. 또 잭 스트로 영국 외무장관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지역진입행위를 강력히 비난하면서 즉각적인 병력 철수를 촉구했다.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 (4)식민지 저항적 지식인

    근대 여성작가 중 가장 치마폭이 넓었던 최정희는 유파와연령을 초월하여 문우들과 교유했는데 그 중 소중한 것으로는 국제 입찰에 부칠만한 중량급 서간문도 포함되어 있다. 바로 김사량(金史良,본명 時昌,1914∼1950)의 편지이다.일본에서 더 유명한 김사량은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이 어떻게 살아야 했던가를 일깨워 준 근대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한전형으로 평가받고 있다.평양에서 1914년에 태어난 그는 평양고보 재학 중 배속장교와 일본인 교사 및 그들에 동조하는 조선인 교사 배척을 위한 동맹휴학을 주도해 퇴학처분을 받고는 형 시명(時明,교토제대 법학부 졸업 후 사법·행정 양과 합격,홍천·평창 군수,조선인 최초의 전매국장,8·15 후에는 중앙산림조합연합회 이사장 등을 지냄)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밀항했다.학창시절에는 연극에 관심이 많아 신협(新協)극단과 연계,장혁주(張赫宙)가 각색한 ‘춘향전’의모국 순회공연에도 참여하는 등 많은 활동을 펼치다 여러이유로 경찰에 자주 구금 당했다. 결혼 직후 하이네에 관한 논문으로 도쿄제대 독문학과를졸업(1939)한 그는 잠시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서울의 하숙집에서 출세작 ‘빛 속에서’를 썼다.이 무렵에 아마 서울의 잡지사와 문인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을것인데,최정희와의 인연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도쿄제대 대학원 입학허가를 받은 그는 6월 아내와 도일,일본과 한국 문단을 잇는 가교 역할을 맡게 된다.편지에서 김사량은 매우 조심스럽게 최정희의 ‘지맥’을 추천했으면 싶었으나,이미 일본의 다른 출판사(赤塚書房)가 추진하고 있던조선문학 선집에 관여하는 장혁주가 손을 댔기에 ‘흉가’로 하는 게 어떠냐고 묻는다.몇 차례 오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편지는 최정희가 자신의 소설을 일본에 소개되기를 희망한데 대한 답신 내용이 대부분이다. 장혁주는 누구였던가.김사량보다 먼저 등단한 그는 잡지사,문인 등을 후배에게 소개시켜 주는 역할을 했던 재일조선인 문단의 대선배였다.1905년 대구에서 출생한 그의 본명은 은중(恩重),창씨개명은 노구치 가쿠주(野口赫宙,첫 창씨명은 野口이었음)로,불륜사건에 연루되어 도일,본처와 이혼,일본여자와 재혼,8·15후 아예 일본으로 귀화해 버린 인물이다. 그는 초기의 민족적인 성향과는 달리 친일화 정도가아니라 아예 혈통까지도 일본인화 해야된다는 각오로 일본여자와 결혼을 감행한 친일문학인 가운데서도 발군의 활약을 보여주었다.1952년 10월,6·25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변장한 채 일본 ‘부인구락부’ 특파원 신분으로 입국하여 취재활동을 한 뒤 일본으로 돌아가 한국을 힐난하는 글을 써서 당시 문학단체가 법석을 떨게 했던 장본인이다.그는 아예 일본문학보국회에 가입하여 활동에 열을 올렸던 인물로한국을 영원히 등진 조국상실자가 되었다. 최정희의 ‘지맥’은 평론가 한식(韓植)이 번역을 맡은 것으로 드러나며,편지에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김사량은 ‘모던 일본’에다 이광수의 ‘무정’을 번역했는데,아마 이 사실은 고의로 언급하지 않은 것 같다.김사량은 ‘조광’에장편 ‘낙조’(1940.2∼1941.1)를 연재하면서 모국어 문제에 대하여 매우 겸허하게 최정희의 조언을 구하고 있지만사실 그는 ‘양국어 작가’로 손색이 없었다.그가 ‘삼천리’에 발표한 글로는 잡문 ‘조선문학과 언어문제’(1941.1)와 소설 ‘지기미’(1941.4)인데,이 두 사실을 편지에 대입해 읽으면 그와 최정희의 교유가 대략 1939∼1941년임을 알 수 있다.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짚고 넘어가자.‘문예춘추’는 1935년 일본최고의 아쿠다가와 (芥川)문학상을 제정했는데,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김사량이 이 상의 후보작으로 뽑혀 일약 일본문단의 유망주가 되었다(1940.2).1941년12월 9일 새벽 진주만 기습에 따른 사상범예방구금법으로감금당했고,유명세만큼 그에게 부하되는 역사적인 책무도커서 친일을 강요받았으나 거절했다. 일본 문학인들의 구명운동으로 이듬해 1월29일 석방된 그는 이내 귀향,조용히 지내려 했지만 강제동원을 피할 수 없었다.이효석(1942년 작고)이 있었던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사가 된 건 1944년 4월.강제 친일에 동원되면서도 일본문인들과의 술자리에서 격렬하게 식민통치를 비판하던 이투사는 1945년 2월 조선출신학도병 위문단으로 중국에 파견,일정을 마친 뒤 탈출,화북조선독립동맹에 참여하여 떳떳하게 해방을 맞았다.이때의 탈출 투쟁기는 ‘노마만리(駑馬萬里)’란 제목으로 남아있다. 1945년 11월 서울에서 그의 희곡 ‘호접’이 단성사에서 공연되는 등 광복 후 한국 좌익문단의 정화에 일조했던 그는이듬해 평양으로 돌아가 6·25때 종군작가로 참가,후퇴 도중 원주 부근에서 지병인 심장병으로 낙오된 채 행방불명된 게 그의 최후다(안우식 지음,심원섭 옮김 ‘김사량 평전’ 참고).김사량은 자신의 친일행각이 강제에 의한 것임을 문학인들에게 공공연하게 실토했던 점과 모험을 무릅쓴 극적인 탈출로 민족해방투쟁에 나섰던 문학인이었다는 점에서식민지시대 저항적 지식인의 전형으로 세계 저항문학사에손색이 없는 작가이다. 극적인 생애는 한설야(韓雪野)도 마찬가지다.기생 이름 같은 낭만적인 필명과는 달리 1900년 함주(함흥)에서 태어난그는 1976년 북한에서 사망할 때까지 영욕을 두루 겪은 비극적인 문학인의 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인물인데,유명한 한의학자 이제마(李濟馬)의 제자로,홍범도(洪範圖)등의 의병활동을 무마시키라는 일제의 강요를 거절코 고향을 떠나 피신했다.한설야는 경성제일고보에다니다가 서모(庶母)와 불화로 귀향,함흥고보로 전학,3·1운동에 관련되어 구금 체험을 한다.중국,일본 등지를 떠돌거나 유학 한 뒤 ‘조선문단’으로 등단한 그는 서울에 머물렀다가(1925∼1926),아버지가 많은 빚을 남기고 죽자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했다가 이듬해(1927) 귀국하여 카프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문학과 사상 연구회,‘한설야 문학의 재인식’).한설야가 조선일보에 입사한 것은 1932년경인데 함남지역에 특파됐다가 본사에 왔을 때는 경영권 문제로 매우 복잡 미묘할 때였다.창간 초기부터 경영진의 시국 순응 성향과 편집진의 민족의식 지향이 갈등관계를 유지했던조선일보는 계속 사주가 바뀌면서도 반일논조 때문에 정간과 필화가 잇따랐다.신간회(新幹會)운동으로 안재홍(安在鴻)사장이 구속되는 등 혼란을 틈타 고리대금업을 하던 채권자 임경래(林景來)가 조선일보 경영권을 주장하여 조병옥(趙炳玉)·주요한(朱耀翰)의 정통 편집팀과 대결,두 개의 조선일보 발행이라는 희극이 연출되다가 방응모(方應謨)가 참여,부사장을 거쳐 발행인이 된 것이 1933년 7월(사장은 조만식).이 혼란 속에서 한설야는 학예부에 근무하며 노동 현장소설의 신기원이란 평가를 받은 이북명(李北鳴)을 발굴하여 ‘질소비료공장’을 연재 중단 당하는 등 카프노선에 충실한 언론인으로 활동한 것 같다. 당시 정황을 한설야는 단편 ‘세로(世路)’에서 너무나 자세히 언급하여 한국언론사의 충실한 증인 역할을 해주고 있다.소설은 자신이 회사로부터 해직 통고서를 받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왜 그렇게 됐는가에 대한 자초지종을 회상하고있다.등장인물은 모두 실명이지만 사정상 이니셜을 썼는데,쉽게 알만한 인물들이 그대로 나온다.새 경영진은 기구와인사 개편을 통하여 그때까지 신문사의 주류였던 M일파(투옥 경력자 등으로 묘사)를 약화 시키는데,이 과정에서 인간적인 배신감과 사회적인 공분이 폭발한 한설야는 술자리에서 변절한 동료의 뺨을 후려친 게 화근이 되어 권고 사직을 당했다. 조선일보 사사(社史)에 의하면,1934년 1월 1일자로 대폭적인 인사이동이 있었는데,특히 이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가된 M(문석준)의 좌천도 바로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미뤄 볼 때 한설야의 퇴직도 이 무렵일 것이다.이 문석준은 1943년 함흥에서 한설야와 함께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한설야는 1944년 5월 석방) 당하는 주인공이다.1934년은 그에게 매우 불행한 한 해였다.해직 후 8월 그는 카프 2차사건으로 구속됐기 때문이다.달필인 한설야의 편지는 함흥에서보낸 것인데,아마 1941∼2년초 경 ‘삼천리’가 ‘대동아’로 개제하기 직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최정희가 한설야에게 잡지에 재수록할만한 짧은 작품을 추천해 달라는 청탁에 대한 회답 형식인 이 편지에서 그는 ‘강아지’와 ‘능금’을 천거했다.앞의 작품은 ‘한설야 단편집’에 실려 있는데,그게 1941년 7월에 나왔으며,뒤의 것은 1940년 간행 단편집 ‘귀향’에 게재된 것으로 볼 때,그리고 ‘대동아’개제가 1942년 3월부터였음을 감안하면 이 편지가 씌어졌던 시기는 밝혀질 것이다.이 무렵 그는 함흥에서 서점·극장·인쇄소 등에 손을 대는 등 생업과 창작에 전념하면서 해방의 날을 준비하고 지냈다.여담이지만 한설야는 광복 후북한에서 ‘김일성장군 전기’를 비롯한 여러 작품을 쓴 한편 소련(1947),평화옹호 세계대회 참석차 프랑스(1949) 등지를 방문하는 등 중추적인 역할을 하다가 1962년 비판당한 후 불행한 최후를 마치고 작품도 판금,아직도 전면적인 해금이 안된 상태에 있다. 임헌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 (1)김동환 가족사

    한 여인이,생신을 보름 남짓 앞둔 91세의 한 여인이 1993년 3월 18일 세상을 떠났다.‘백구 신원혜지묘(白鷗 申元惠之墓)’라는 묘비명만으로는 이 여인의 죽음이 한국 문학사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아리송할 것이다.그러나 그녀의 이름위에 있는 ‘파인 김동환(巴人 金東煥)’이란 각자(刻字)를 보노라면 ‘아,파인의 본처가 그때까지 생존했더란 말인가’라는 자못 회고조의 감탄사가 나올 법하다.1903년 원산에서 태어난 신원혜가 서울 정신여고를 졸업,블라디보스토크,간도,원산 등에서 중학교 교사로 있다가,서사시 ‘국경의밤’으로 이미 명성을 얻은 두 살 연상의 시인 김동환과 결혼한 건 1926년 3월 14일이었다. 가난한 시인의 아내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3남 1녀를얻은 그녀는 1942년 작가 최정희(崔貞熙)와 남편의 관계가알려지자 시인의 “우유부단한 처신을 안타깝게 지켜”보다가 기어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고 그 극심한 어머니의 분노를 이겨내지 못한 아버지는 끝내 여관으로 잠시의 거처를 정하였다”고 셋째 아들 김영식(金英植·68)은 회상한다.“그 후 어머니는 교회 일과 모교인 정신여고 동창회 봉사활동에 전념하면서 아픈 상처를 홀로 달래고” 지냈는데,나중 동네 아낙들에게 “아무리 남편이 속을 썩이더라도 집에서 나가 달라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김영식,‘아버지 파인 김동환-그의 생애와 문학’). 조혼이 아닌 어엿한 신여성과 연애를 거쳐 사랑이 그득한결혼을 했던 파인의 예기치 못했던 탈선이 문단에서는 가십이었으나 그의 고향을 비롯한 애독자들로부터는 마침 휘몰아친 친일문학과 함께 따가운 매도의 대상이었다.어쩌면 이 두가지 탈선은 오히려 동시에 수행되면서 인간과 민족의존재론적 본질을 벗어나 원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해준 도피처 역할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파인의 친인척과 고향 사람들로부터 동정과 애정을 받은 것은 정작 남편이 버린 여인 신원혜였다.아니,파인 조차도 그녀를 버릴 수 있었을까.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당한 직후인 1950년 7월 초 파인은 홀연히 귀가했다.피신 차 이뤄진 이산가족 상봉은 비록 짧았으나 단란했는데,이내 최정희의 자수 권유를 받고 나간(7.23) 뒤 그대로 납북,생사도 모르게 분단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앓은 게 이 일가족이었다.가족이랬자 두 아들은 일찍세상을 떠나버려,셋째 영식과 딸 영주(英珠·63)뿐이었다. 영식은 서울 경복고를 거쳐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대통령 비서실,주불 한국대사관 등에서 근무하다 정년을 맞았고,영주는 정신여고와 이화여대 국문과를 나와 시인으로 등단,캐나다 밴쿠버에 살고 있다. 이 한많은 여인이 죽음을 앞두고 마련해 둔 유품 속에는파인의 사진과 애증이 교차하는 몇몇 증빙 서류들,그리고자신이 묻힐 묘소와 묘비명이 포함되어 있었다.살아서 쫓아냈던 지아비를 죽어서야 한 문패 안으로 맞은 것이다.보따리 속에 파인이 보낸 편지도 한 묶음 있었다.파인은 맨몸으로 집을 나갔으니 여러 유품들은 저절로 신원혜가 간직했을 터여서 여간 소중한 자료가 아니리라는 기대에 부푼다.신원혜는 파인에게 보냈던 기라성같은 문인들의 편지를 그 격변의 역사를 헤치면서 고이 간직해 왔었다.신혼초 서울의정동,다동을 거쳐 종로구 돈의동 74번지로 호적을 옮긴 뒤,적선동(1927.5),인사동(1930.7),견지동(1933.12),필운동(1935.10),옥인동(1936.11),통인동(1938.1),효자동(1940.2)을전전하다가 1941년 6월 12일 적선동 183번지의 목조 기와집으로 이사,거기서 해방을 맞았다. 만주로부터 돌아온 피난민의 딱한 사정 때문에 방세도 안받고 그대로 살게 했던 이창규씨가 어느날 정전(停電)이 되자 성냥불을 켜들고 초를 찾다가 넘어져 석유난로에 점화,순식간에 집이 불타 버렸다.바로 1946년 12월 12일 오후 7시쯤,파인의 유품이,그리고 그가 ‘낭자 신원혜’에게 보냈던 달콤한 연애편지가 잿더미로 변해버린 순간이다.일가는창성동 자교(紫橋)교회 목사 사저에서 신세를 지다가 청운동(1948.5∼1953.2)으로 옮겨 6·25와 1·4후퇴를 겪으면서도 행여나 남편이 돌아오려나 싶어 몇 년간 이사도 하지 않았다.이제 파인과 신원혜는 갔고,사랑의 편지도 불타버렸다.그러나 1947년부터 납북당했을 때까지의 격랑을 헤치며 파인이 한 지아비와 육친의 정으로 아내 신원혜와 자녀에게보냈던 32통의 편지는 문단 비사의 차원을 넘어 가난했던글쟁이의 인생론적인 비애를 느끼게 한다. 중학생 아들(영식)과 초등생 딸(영주)을 아내에게 맡긴 빈털터리 시인 김동환은 이 무렵 최정희로부터 지원(1942년생),채원(1946년생) 두 딸을 가진,허리가 휘청거리는 아버지였다.최정희와의 보금자리였던 덕소에서 8·15를 맞은 파인의 심경은 실로 착잡했을 것이다.그의 뇌리에는 선비적 지조의 상징인 매월당 김시습의 18대 후손으로서 민족운동에투신했던 화려한 투쟁 경력들-민요 전설시의 거봉,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중앙위원,침략주의에 항거했던민완 기자,잡지 ‘삼천리(三千里)’의 폭발적인 성공과 민족의식이 강한 각종 출판물 간행,신간회 집행위원 등등이스쳤을 것이다.이런 경력 때문에 오히려 더 부정적으로 보였던 친일행위의 오점들은 그로 하여금 발빠른 자성과 회오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진흙 속에 빼앗긴 두 발 겨우 뽑고/오래 가뒀던 옛 날개 와락 펴 멀리 쳐다보니”(‘돌아온 날개’),“새나라 백성들은 이래서는 안된다/우리는소생하지 않으면 안된다”(‘소생’)는 참회와 함께 “올해엔콩팥을 맘대로 심어/천리객은 몰라도 십리의 벗 맞아들여/소찬에 약주라도 싫도록 대접할꺼나”(‘起耕’)라는 은인자중의 자세를 보여줬다.반민특위 때 그가 자수(1949.2.28)할 수 있었던 심리적인 배경도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그가 이승만 정권이나 한민당 추종이 아닌,조선민주당 대변인격으로 정당활동에 몸담았던 것(1946.2)은 나름대로의민족관을 지녔기 때문으로 풀이된다.혼란 속에서 숙원이었던 잡지 ‘삼천리’ 복간에 온 정력을 쏟았는데,민족 독립노선이나,문인으로 발 빠르게 자아비판한 채만식을 부각시킨 걸로 봐서 다분히 참회적인 자세를 취했다.을지로5가 여관에서 업무를 시작한 파인은 틈틈이 아내와 아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납득시키려고 난필의 쪽지를 보냈다.우편 배달이 아닌 사환이나 인편을 통해 직배시킨 경우가 많았던 시절이라 겉봉에는 ‘영식 모(英植 母)’ 혹은 아예 ‘영식 전(展)’이라 쓰고는 원고지나 적당한 백지에 절박한 용건만적어 보냈다.서른 두 통의 편지중 가장 빈도수가 많은 내용은 잡지 일로 인쇄소에 붙어 있어야 한다든가,당장 돈이없으니 우선 얼마만 보내고 며칠 뒤 더 보내겠다는 등등이다.신원혜의 이성적인 결벽과는 달리 어린 남매들이 아버지에게 귀가와 생활비를 독촉하는 전화를 했던 데 대한 회답으로 보인다. 이 역마살의 시인을 신원혜와 함께 묻고 딸 영주는 “기다리면 다시 올 사람인가/시를 만드시던/파인,내 아버지//하늘 밑을 파고/그를 묻었다.//그가 다니던 길도/함께 넣었다.//눈물도 못 내고/기어 가/나도 묻힌다.//아 아,내 아버지 파인”(‘아름다운 작별’)이라고 마음을 추스렸다.이렇게 담담해질 수 있는 시인으로서의 김영주와는 달리,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았던 딸로서의 김영주는 무척 신랄했다.“친일행동과 여자 문제로 부끄러운 아버지 책을 써서 알리는 것은 정말 내가 부끄러워요”라며,“아버지는 실패한 인간입니다.자신만 실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세상에서 천국의 모형을 이루어 살라고 주신 한 가정의 책임을 저버리므로 해서,어머니와 우리 자녀는 가장아픈 불행을 체험했으며,어머니의 고통과 수치와 배반에 대한 증오와 세상이 보내는 그 부끄러운 수근거림을 어떻게 감당하셨는지 놀라울 뿐입니다”(김영식,위와 같은 책)라고 통매했다. 그러나 파인의 애틋한 조각편지들은 실패한 인간의 자료로서가 아니라 역사의 멍에를 헤어날 길 없었던 인정미 넘치는 나약한 한 서정시인이 치러야만 했던 가정과 사랑과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상처일 것이다. “몸 무고히 학교에 잘 다니느냐.마음에 어느 날 잊은 적이 없었다”거나,“추위가 심하니,남대문 야미(暗)시장에 가서,영식이나 영주의 외투 한 벌 사서,한 아이라도 입히오”,“한방의 침술 운운하지만 큰 아이들 때(장남 영사는 16세로 1942년에,차남 영창은 17세로 1947년에 사망)에 보아도도무지 믿을 사람들이 못 되니 더 보이지 말고,내가 정초에 영식이를 데리고 전문 신의(新醫)들에게 보여 충분히 치료할 터이니,아이에게 겁나는 말을 일체 말고,내가 가기를 기다려 주오”라는 등등의 구절에 이르면 이 시인이 얼마나가슴으로 울었던가를 알법도 할 것이다.“내일 산소에 가는 일은 중지하고,5월 단오에나 가기로 하오”란 구절은 바로 두 아들이 묻혔던 미아리 공동묘지로,거길 가면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묘소에 절하라’고 말한 후 묵념을 했고,어머니는 쌍봉 무덤 앞에 엎드려 흐트러진 모습으로” 울부짖었다고 김영식은 회고한다.살뜰한 지아비와 부정(父情)이 넘치는 글이기에 오히려 다른 서간문에 못지 않게 돋보이는 이 글들을 쓴 주인공이 어째서 가정을 버릴 수 있었을까. 임 헌 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印尼 정국 ‘위기일발’

    인도네시아 국민협의회(MPR)가 23일 와히드대통령의 소환에 이어 24일 탄핵투표를 강행할 태세다.그러나 와히드 대통령은 이에 맞서 비상사태 선포 및 자신의 지지자들에 의한 폭력사태 가능성을 경고하고 나서 인도네시아 정국은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와히드 탄핵= MPR이 당초 내달 1일로 예정된 특별총회 개최시기를 앞당겨 실시한 21일 표결에는 와히드 대통령이 이끄는 민족각성당(PBK) 의원들은 불참했으나 38명의 군부 및경찰 직능 대표들은 찬성표를 던졌다. 와히드의 소환을 하루 앞둔 22일 메가와티 수카르노 푸트리 부통령과 MPR 주요정파 지도자들은 와히드 탄핵 준비를 위한 회동을 갖고 메가와티 부통령의 대통령직 승계에 대한 지지를 공식천명했다. 와히드 대통령은 23일 의회에 출석,집권 21개월간 드러난각종 국정 난맥상과 부패 스캔들 연루 의혹에 대해 해명연설을 해야 한다.와히드의 해명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되면MPR은 표결을 통해 탄핵을 결정한다.또 와히드가 소환에 응하지 않을 때에도 자동적으로 탄핵된다. 이르면24일 저녁최종 탄핵 결정이 이뤄지면 메가와티 부통령이 대통령직을승계한다. 와히드 대통령은 탄핵 절차 개시 및 소환이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라며 이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위기에 몰린 와히드가 비상사태를 선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없다. 와히드는 특별총회가 열린 21일에도 기자회견을 통해정적들에 반격을 가할 것임을 시사했다. ■폭력사태= 인도네시아 경찰이 20일 발령된 1급 비상경계령에 따라 삼엄한 경비에 돌입한 가운데 22일 수도 자카르타의 가톨릭 교회 두곳에서 폭발사건이 발생,40여명이 부상했다고 현지 TV방송이 보도했다.또 자카르타 거주 중국계 현지인들은 소요사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상가를 철시하거나 국내외로 피신는 등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이동미기자 eyes@. ◎와히드 탄핵추진 일지. ■2001년1월 국회 특별조사위원회,금융 스캔들에 와히드 연루 결론.와히드,조사 결과 부인. ■2월1일 특위 조사 결과에 대한 1차 해명요구서 발부 결의,탄핵 위한 수순 착수. ■4월30일 국회,와히드의 1차 답변 거부.한달 내 2차 답변요구.와히드,강력 반발. ■5월28일 와히드의 비상사태 선포 후 국회 해산 기도 좌절.와히드,메가와티 부통령에게 권력분점안 수용을 제의했으나 거부됨. ■5월29일 와히드,2차 해명요구서 답변 국회에 제출. ■5월30일 국회,2차 해명요구서 수용 거부.국민협의회(MPR)특별총회 8월1일 소집키로 결의. ■7월20일 와히드,경찰청장 해임.국회,특별총회 소집 시기앞당겨. ■7월21일 아미엔 라이스 MPR 의장,특별총회 소집.23일 와히드 소환 및 해명연설 요구.
  • 단병호위원장 퇴거 요구

    명동성당은 20일째 성당 안에서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민주노총 단병호(段炳浩)위원장에게 ‘퇴거요청’ 공문을보냈다고 18일 밝혔다. 성당측은 백남용(白南容)주임신부 명의로 된 공문에서 “성당에 피신한 지 한달 정도면 정부와의 대화나 타협,민주노총의 내부논의를 가질 충분한 시간으로 판단되는 만큼 오는 31일까지 퇴거해 달라”고 요구했다. 성당측은 또 “민주노총은 성당에서 기자회견 및 중앙집행위원회 등을 개최함으로써 성당이 투쟁지도부 역할을 하고있다”면서 “이는 우리가 피신처로 장소를 제공했던 처음의 취지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조현석기자 hyun68@
  • 방배동 비닐하우스촌 큰불

    18일 오후 6시30분쯤 서울 서초구 방배2동 남태령고개 전원마을 비닐하우스촌에 불이 나 주거용 비닐하우스 31개동가운데 13개동 2,000여평을 태운 뒤 7시54분쯤 진화됐다. 주민들은 급히 피신해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가재 도구등 3억5,000여만원의 재산피해와 90여가구 3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불을 처음 본 수방사 의무근무대장 윤상록 중령은 “남태령 고갯길 건너편의 비닐하우스촌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불길이 30∼40m 가량 솟아오른 뒤 급속히 번졌다”고 말했다. 경찰은 ‘펑’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는 목격자들의 말에 따라 일단 가스 폭발 등으로 불이 난 것으로추정하고 정확한 화인을 조사하고 있다. 이 비닐하우스촌은 지난 80년 남태령고개 근처 개발제한구역에 형성된 무허가 주거지로 180가구 443명이 살고 있으며 이번 불 말고도 93년 이후 네차례나 불이 났던 곳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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