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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 이민 20대 한인여성/현지 사교집단에 피살/예수아멘 목회자

    ◎가주 경찰,한국계 포함 5명 검거 【에머리빌(미캘리포니아주) AP 연합】 미국 캘리포니아 경찰은 악마를 쫓는 의식을 행하다 한국에서 이민온 20대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예수아멘목회자」라는 소규모 종교집단의 소속원 5명을 체포했다고 16일 밝혔다. 경찰은 이날 최근 한국에서 이민온지 얼마 안되는 하경아씨(25)가 에머리빌의 한 아파트에서 구타당한 시체로 발견됐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살인혐의로 체포된 나화자(53),박은경(30),신등미씨(23) 등 한국계 3명과 2명의 러시아 이민자 등 5명은 나씨의 딸인 하씨의 몸에서 악귀를 쫓는 의식을 가졌었다고 경찰은 전했다.
  • 재산원한 집중 수사/이사장 피살/장남 거액대출 드러나

    금용학원 재단이사장 김형진씨 피살사건을 수사중인 서울 성동경찰서는 17일 숨진 김씨의 부동산 관리업자·학교법인 직원·건물 입주자 등 주변인물을 중심으로 집중수사를 벌였다. 경찰은 이날 김씨의 건물관리임대업체인 H기업 상무 김모씨,경기 용인군 H농원 관리인 이모씨 등 10여명을 불러 재산축적 과정에서의 원한관계가 있는지 여부와 채권·채무관계를 조사했으나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경찰은 이와함께 아들 성복씨가 지난해 11월 자신이 절반의 지분을 갖고 있는 덕암빌딩에 대한 근저당을 설정,수협에서 거액의 대출을 받은 사실을 확인하고 이 부분에 대해서도 조사키로 했다.
  • 외부인 청부살해 가능성 높다/학원이사장 피살 수사방향

    ◎“채취 3개지문 가족것 아니다” 판명/부검결과 “단한차례 급소 찔러 절명” 금용학원이사장 김형진씨 피살사건을 수사중인 경찰은 당초 내부자의 원한 또는 재산관련 범행에서 사건발생 나흘째가 되면서 외부자의 청부살인 가능성으로 수사 방향을 확대,다각도로 수사를 하고있다. 이는 이번 사건의 의문점이 해결되지 않아 경찰 수사가 혼선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의문점은 범인이 건물에 잠입한 시간과 도주경로.경찰도 범인이 낮시간에 사무실손님을 가장해 경비원의 눈을 피해 미리 빌딩옥탑에 잠입한뒤 안방옆 욕실창문을 뜯고 침입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보고 있다.그러나 불과 10여분이란 짧은 범행시간동안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출입구인 1층출입문을 경비원을 비롯해 사건발생당시 근무하고 있던 5층 S디자인회사직원들의 눈에 띄지 않고 빠져나갔다는 점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내부인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의문점은 범인이 흘린 것으로 보이는 안방욕실창틀에서 아들 성복씨방의 창틀까지 바깥쪽 베란다에떨어져 있는 6∼7방울의 핏자국. 아들 성복씨는 마루의 핏자국은 사건발생직후 어머니가 아버지의 상처를 타월로 감싸는 것을 보고 자기방으로 가서 이불을 갖고와 지혈시키는 과정에서 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하지만 바깥쪽에서 자신의 방 창틀까지 떨어진 핏자국과 자신의 방 벽지와 커튼에 튄 핏방울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15일 사건을 접수한 서울 성동경찰서는 재산관리를 둘러싼 상속을 노린 치밀한 준비에 의한 범행,원한관계에 의한 내부자의 소행등으로보고 수사에 착수했다.경찰은 15일 안방욕실창문틀,아들방 창문틀,5층에서 6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쇠창살문등에서 5개의 지문을 발견하고 숨진 김씨의 손톱에서 혈흔을 찾아내 수사는 급진전할 것으로 기대했다.그러나 16일 지문감식결과 5개의 지문중 3개는 가족들의 것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2개는 희미하게 찍혀 지문감식 자체에 실패하고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해 일단 전문청부살인업자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를 강화하고 있다. 안방욕실창문틀,아들방 창문틀,5층에서 6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쇠창살문등에서 채취한 5개의 지문 감식결과,가족들의 것이 아닌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외부인이 침입했을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16일 사체부검결과 범인은 김씨의 오른쪽 목부분 급소를 예리한 흉기로 단 한차례만 찔러 절명케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경찰 수사관계자들은 전문 청부살인업자의 소행이 아닌 일반인의 우발적인 살인일 경우 보통 여러군데의 찌른 상처를 남긴다고 말한다.
  • 외부인 범행 가능성/학교이사장 피살/가족외 지문3개 발견

    금용학원 재단 이사장 김형진(72)씨 피살사건을 수사중인 서울 성동경찰서는 16일 안방 욕실과 장남 성복씨의 방창문틀 및 5층에서 6층으로 올라가는 철제문 등에서 발견된 5개의 지문을 감정한 결과,이 가운데 3개가 가족들의 지문과는 다른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외부인의 침입에 의한 범행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경찰은 김씨가 재산을 축적하고 재단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마찰을 빚은 적이 있었다는 주변의 말을 중시,재산문제로 김씨에게 원한을 품은 제3자에 의한 범행일 가능성도 함께 수사하고 있다. 경찰은 지문감식결과를 토대로 금융학원 관계자를 비롯해 김씨와 평소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별적인 지문 대조작업을 벌이는 한편 김씨의 재산관리를 맡고 있는 재단관계자 최모씨(50) 등을 불러 재산증식 과정에서의 불협화음이 있었는지를 조사키로 했다. 경찰은 이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김씨 사체를 부검한 결과,오른쪽 목부분에 직경 2㎝ 깊이 10㎝가량의 예리한 흉기에 찔린 상처가 나 있었고 경동맥 5분의 4 가량이 잘려 있었으며 정맥은 완전 절단돼 있었다고 밝혔다.
  • 학교이사장 안방서 피살/금용학원 김형진씨

    ◎흉기 찔려… 원한·내부소행 수사 수백억원대의 재산을 가진 학교법인 금용학원 재단이사장 김형진(72)씨가 가족들과 함께 있던 자신의 집 안방에서 흉기에 찔려 병원으로 가던중 숨졌다. ▷발생◁ 14일 하오 11시 10분쯤 서울 중구 신당2동 422의 1 덕원빌딩 6층 김씨집 안방에서 김씨가 흉기에 목이 찔린 채 피를 흘리고 신음중인 것을 부인 김은옥(62)씨가 발견,서울대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숨졌다. 부인 김씨는 『남편이 하오 5시쯤 귀가한후 함께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다 하오 11시쯤 먼저 자기 위해 안방으로 들어갔는데 5분쯤 지나 안방에서 신음소리가 들려 들어가 보니 남편이 이불위에서 오른쪽 목부위가 예리한 흉기에 찔린 채 피를 흘리며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고 말했다. 사건 당시 집에는 부인외에 5분전쯤 귀가한 큰 아들 성복씨(43·S대 경제학과 교수)가 있었다. 이 빌딩 경비원 안기용씨(55)는 『평소 하오 11시쯤이면 입주자들이 대부분 귀가하는데 하오 11시 조금넘어 아들 김씨가 들어온 것말고는 출입구를 통해 들어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다. ▷현장◁ 숨진 김씨가 자고 있던 안방안에 있는 욕실에는 창문이 열린채 창문틀이 내려져 있었고 창틀에는 김씨의 혈흔이 묻어 있었다.안방 욕실안의 창문틀과 현관 오른쪽에 있는 아들 성복씨의 방 창문틀까지는 희미한 핏방울이 떨어져 연결돼 있었으며 거실바닥에도 핏자국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수사◁ 경찰은 숨진 김씨의 집이 6층건물 맨위층으로 1층 출입구를 통하지 않고는 건물안으로 들어갈수 없으며 안방과 연결된 욕실 출입문에 김씨의 혈흔이 발견된 점으로 미뤄 범인이 베란다와 화장실 창문을 통해 안방으로 침입,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또 금품이 전혀 없어지지 않았도 혈흔이 아들 방 창문 주변에서도 발견 됐으며 김씨가 반항한 흔적이 없다는 점을 중시,내부인의 범행이거나 범인이 2명 이상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사하기로 했다. 이와함께 부인 김씨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 아들이 귀가할 때 현관문을 열어줬다고 말했으나 아들 성복씨는 『현관문을 열쇠로 따고 들어왔다』고 말하는 등 진술이엇갈려 이들을 상대로 수사하고 있다. 또 숨진 김씨가 빌딩세입자들과 금전문제로 마찰을 빚은 적이 있다는 주변사람들의 진술에 따라 관련자들을 소환,조사할 방침이다. ◎김형진씨는 누구/단신월남후 수백억 재산 일궈 피살된 금룡학원이사장 김형진씨는 평양태생으로 평양의 5년제 광성중학교를 마친뒤 1·4후퇴때 단신으로 월남,포목상에서 거부가 된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김씨는 용인에 8만여평에 달하는 농장을 비롯,서울과 경기도 일대에 많은 부동산을 소유한 수백억원대의 재력가로 알려져 있다. 6·25때 유격대활동을 하기도 한 김씨는 전후 미군부대에서 무기운반원으로 일하면서 상술을 익히기 시작,전국을 돌아다니며 보따리 장사를 하는 등 억척스레 돈을 모은 뒤 기반이 잡히자 동대문시장에서 포목상을 경영,거부의 꿈을 키워갔다. 김씨는 이후 65년 동아상사대표,71년 금룡물산 대표,73년 동대문수영학원회장,74년 콤비전산대표를 지냈으며 83년 서울 종로6가에 부동산 관리업체인 해강기업을 설립,지금까지 운영해왔다. 부인 김은옥(62)씨와의 사이에 2남3녀를 둔 김씨는 가정생활에도 충실해 자식들도 모두 건실하게 성장해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맏아들 성복씨는 Y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유학한뒤 아직 박사과정(교육학)을 마치지 않은 부인과 아들 딸을 미국에 남겨두고 5년전에 귀국,서울 S 사립대 경제학과에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또 둘째 아들도 S대병원 레지던트로 근무하고 있으며 세딸은 모두 출가했다.
  • 부룬디 장관 피살/수도서 괴한에 피격

    【부줌부라 AFP 연합】 에르네스트 카부세메예 부룬디 에너지장관이 11일 수도 부줌부라에서 괴한의 총격을 받아 숨졌다고 아메두 오울드 압달라 유엔특사가 말했다.
  • 내무·검찰총장/불신임안 가결/러 하원

    【모스크바 로이터 AP 연합】 러시아 하원(두마)은 10일 빅토르 예린 내무장관과 알렉세이 일뤼센코 검찰총장대행에 대한 불신임안을0표결에 부쳐 각각 2백68대 5와 2백67대 19의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시켰다. 러시아 의회의 국무위원 불신임안 상정은 지난 1일(한국 시간 2일) 블라디슬라프 리스티예프 국영 오스탄키노 TV 사장이 피살된 데 따른 것이다. 러시아 선택당의 고위 관계자인 보리스 졸로툰킨씨는 이날 표결에 앞서 보리스옐친 대통령의 측근인 예린 내무장관과 일뤼센코 검찰총장대행이 적절한 시기에 범죄자들의 통제에 실패,이같은 범행을 막지 못했다고 이들을 비판했다.
  • 파키스탄서 미외교관 2명피살/카라치 영사관/출근도중 괴한 총격받아

    【카라치 AP AFP 연합】 미국 외교관 2명이 8일 아침 파키스탄 카라치 거리에서 무장괴한에 살해되고 1명은 부상했다고 미영사관 대변인이 밝혔다. 대변인은 이들 외교관 2명은 자동차편으로 영사관이 있는 카라치 동부로 향하던 중 살해됐으며 외교관 1명은 부상했다고 말했다. 파키스탄 경찰은 이들 미국 외교관 3명과 파키스탄인 운전사는 자동차를 타고 영사관으로 향하던중 도로상에서 신호대기하는 동안 한 무장괴한의 자동소총 공격을 받아 외교관 2명이 숨지고 1명은 부상했으며 운전사는 부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경찰은 또 피살된 외교관 2명의 이름은 즉각 밝혀지지 않았으나 부상한 사람은 카라치 영사관의 마이클 오웬스 부영사라고 밝혔다. 미국 외교관들에 대한 공격의 이유는 아직 분명치 않으며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미국 대사관 관리들은 이 사건에 대해 즉각 논평하지 않았다.
  • 모로크서 피살 선장/시신 유족인도 합의

    지난달 22일 모로코에서 피격된 애틀랜틱5호 선장 이원호(41)씨의 시신을 즉각 유족에게 인도하도록 모로코측과 합의했다고 외무부가 5일 밝혔다. 주모로코 한국대사관은 사고수습을 위해 모로코 다클라에 파견된 임근형 영사가 모로코 해군기지 부사령관을 면담,이선장 시신의 유족 인도에 합의했다고 외무부에 보고했다. 외무부는 이선장의 유해는 6일 라바트 또는 아가디르항으로 운반될 예정이며 나머지 한국인 선원 8명은 모두 건강하고 부당한 대우나 행동에 제약을 받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 임영사는 이날중 선원들로부터 사고경위진술서 작성등 조사를 벌인뒤 6일 해군기지 군사령관을 면담할 예정이라고 외무부가 밝혔다.
  • 멕시코 페소화도 급락/정치불안 영향/달러당 6.305… 사상 최저

    【멕시코시티 AP 연합】 멕시코의 페소화가 3일 사상 최저치로 떨어지면서 멕시코 경제위기가 한층 심화됐다. 많은 외환 딜러들은 지난해 멕시코 집권당 사무총장 피살사건과 관련해 카를로스 살리나스 전대통령의 형이 체포된뒤 터져나온 정치문제 때문에 페소화가 하락하고있는 것으로 보고있다. 페소화는 이날 외환시장 개장초기만 해도 달러당 6.025페소를 기록했으나 폐장때는 사상 최저치인 6.305페소까지 떨어졌다.페소화는 지난 1월 30일 달러당 6.30페소까지 폭락했었다. 멕시코의 한 외환딜러는 『이같은 사태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때문』이라고 진단했다.
  • 러 국영TV 사장 피살/옐친,검찰관·경찰책임자 해임

    ◎청부살인 추정 【모스크바 로이터 AFP 연합】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은 2일 공영 TV방송사장인 블라디스라프 리스티예프(39)의 살인사건과 관련,모스크바검찰관과 경찰책임자를 전격해임시키는 한편 「범죄와의 전쟁」을 강화시켜나갈 것을 다짐했다. 옐친 대통령은 이날 리스티예프가 재직하던 국영 오스탄키노방송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리스티예프살인사건의 책임을 물어 겐나디 포노마례프 모스크바검찰관과 블라디미르 판크라토프 경찰책임자를 해임했다고 발표했다. 옐친 대통령은 또 이 자리에서 『러시아가 경찰국가가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범죄조직과의 싸움을 강화시키지 못한 것 같다』면서 『이번 사건은 우리에게 또 다른 교훈을 준 것』이라고 말했다. 인기있는 대중스타이자 국영 오스탄키노프 TV책임자인 리스티예프는 지난 1일 저녁 그의 아파트에서 괴한에 의해 피살됐으며 당국은 이 사건을 청부살인업자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중이다.
  • 이종일 선생/3·1 독립선언서 인쇄 배포(이달의 독립운동가)

    ◎제작중 조선인 형사에 들켜 무산될뻔/제2만세 운동 좌절… 고문·옥고로 숨져 3·1운동 이틀전인 1919년 2월27일 밤.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1인인 옥파 이종일 선생(1858년 11월6일∼1925년 8월31일)은 천도교 소유 인쇄소인 보성사의 문을 닫아걸고 직원들과 함께 한창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언론·종교활동을 통해 민족구국계몽운동을 펼쳐온 선생은 3월1일 낭독·배포할 독립선언서 3만5천장을 찍던 중이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를 수없이 체포해 악명이 높은 일제 종로경찰서 조선인 형사 신철이 갑자기 들이닥치면서 애국심으로 뜨겁게 달궈져있던 인쇄소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냉각됐다.신철은 막무가내로 인쇄중이던 독립선언서를 빼앗으려 했다. 보성사 사장으로 인쇄를 총괄하던 이종일 선생은 『이것만은 안되오.이 일은 멈출 수 없는 일이오』라면서 신철 앞에 무릎까지 꿇으며 그를 설득했다. 일단 신철을 「잠시 기다리게」 한 선생은 곧바로 이웃 손병희 선생의 집으로 달려가 사정을 전했으며 손병희 선생은 거금 5천원을 신문지에 싸선생에 건네주었다. 선생은 이 돈을 들고 인쇄소로 뛰어와 신철에게 주자 그는 아무 말 없이 돈을 받아 나갔다. 기미년 3·1독립운동이 무산될 뻔한 위기를 간신히 모면한 것이다. 신철은 이후 만주에서 일경에 붙잡혀 조선으로 압송돼 오던중 열차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선인의 자존심을 세계에 알린 3·1독립운동은 선생 등과 같이 자신의 안위를 아랑곳 않은 독립지사가 없었으면 역사에 기록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3·1독립운동의 산파역을 맡았던 선생은 15세때 문과에 급제,관직생활을 하다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같은해 말 손병희 선생의 천도교에 입교한 선생은 민족의식 고취와 인재양성을 위해 신문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1898년 유영석 등과 함께 순한글의 「뎨국신문」을 창간했다. 여성들을 포함한 전국민 계몽지인 이 신문은 당시 소수 한자해독층을 대상으로 하던 황성신문과 대비됐다.주필은 이승만이 맡았다.이 신문은 경술국치를 당한 1910년까지 발행됐다. 그동안 수차례 필화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선생은 신문 폐간이후 1919년까지 10여년동안 동지들과 함께 천도교조직을 이용한 민중운동 전개,윌슨 미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 표명에 따른 민중시위 감행 계획 등을 추진했으나 시기가 성숙되지 않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선생 등은 1919년 1월 붕어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광무황제가 일제에 독살됐다는 소문에 힘입어 항일의식이 확산되자 전국 규모의 항일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했다. 선생은 이때 『육당 최남선과 선언문을 완료해 놓고 있다.2월28일 결행하자.생명을 걸고 독립선언서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마침내 3월1일 상오.선생은 집에 있던 선언문들을 주민들에게 배포하도록 동지들에게 지시하고 종로 태화관으로 향했다. 하오2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이 개최되자 선생은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을 선언하노라』라며 독립선언서를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선생 등 민족대표들은 이어 들이닥친 일경에 모두 체포됐으나 거리에서는 본격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 혈사」에 따르면 3월1일부터 5월말까지 3개월동안 국내 궐기횟수는 1천5백42회였다.이 과정에서 7천5백9명이 피살되고 1만5천9백61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4만6천9백48명이 일경에 검거됐다. 3년동안 옥고를 치른 선생은 출옥 직후인 1922년 3월1일 「3·1운동 기념식」을 갖고 제2의 만세운동을 추진했으나 일경에 의해 사전탐지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선생은 일경의 고문후유증 등으로 시달리다 1925년 8월31일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가운데 68세를 일기로 종로구 평동 초가에서 영양실조로 서거했다.
  • 캐비닛 살인범/회사동료 구속

    서울 강남구 논현동 유니통상 사무실 캐비닛에서 보름만에 파살체로 발견된 이 회사 직원 윤자승(24)씨피살사건을 수사중인 서울 강남경찰서는 19일 용의자인 같은 회사 직원 강신혁(27)씨를 붙잡아 범행일체를 자백받고 살인및 시체유기혐의로 구속했다.
  • 알제리서 시장 피살/회교과격파 소행추정/한주새 민간인 13명 희생

    【튀니스 로이터 연합】 알제리 북부에 있는 한 도시의 시장이 무장괴한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18일 밝혀져 이번 한주동안 알제리의 정치폭력으로 사망한 민간인이 13명으로 늘어났다. 알제리 일간지 「리베르테」는 정부에서 임명한 베르베르 카빌리시 시장이 지난 16일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회교 원리주의 무장단체들은 일반인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한편 보안군 살해에 대한 정부의 처형을 피하기 위해 최근 테러목표를 민간인들에게 맞추고 있다. 이에 앞서 주초에는 국립극장장·여성운동 지도자·학생운동 지도자 등이 살해됐으며 17일에는 게릴라들에 의해 친정부적인 인물로 간주되는 기자 1명이 희생됐다. 한편 알제리 APS통신 보도에 의하면 알제리 보안군은 이번주 3일간에 걸친 회교원리주의 게릴라 소탕작전을 통해 39명을 처형했다. 서방 소식통들은 지난 92년 정부가 회교 원리주의 정당의 승리가 확실시되던 총선을 중단시킨 이후 발생한 정치테러로 3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 「캐비닛살인」범인검거/30대 회사동료/“횡령문제 다투다 살해”자백

    서울 강남구 논현동 수출대행업체 유니통상 사무실 캐비닛에서 보름만에 피살체로 발견된 이 회사 직원 윤자승(24·서울 마포구 염리동)씨 피살사건을 수사중인 서울 강남경찰서는 18일 용의자 강신혁(30·서울 마포구 아현동 663의19)씨를 붙잡아 범행일체를 자백받고 19일중으로 살인및 사체유기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키로 했다. 경찰에서 강씨는 『지난 1월31일 상오1시쯤 사무실에서 공금유용문제로 다투다 홧김에 책상에 있는 과도로 윤씨의 옆구리 등을 여러차례 찔렀다』고 자백했다. 서울 H고교 동창인 이들은 강씨가 회사공금 1천6백만원을 유용한 사실을 윤씨가 퍼뜨려 회사로부터 고소를 당하자 이후 자주 다투다가 사건당일에도 사무실에서 함께 술을 먹으며 심하게 싸운 끝에 이같은 일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강씨는 술이 잔뜩 취한 상태에서 『동창끼리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지다가 범행을 저지른 뒤 사무실에서 한숨 자고 상오5시쯤 깨어나 윤씨가 숨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담요로 사체를 싼 뒤 다시 쓰레기봉투에 넣어 사무실 캐비닛에 숨겨놓고 달아나 그동안 도피생활을 해왔다. 한편 강씨는 이날 낮12시쯤 대전에서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사는 어머니 안모씨(58)에게 전화를 걸어 『대전에서 만나자』고 했으며 안씨는 곧 경찰에 이를 알렸고 마포경찰서 형사들이 안씨와 함께 대전에 가 동구 용정동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범인 강씨를 붙잡아 강남경찰서에 넘겼다.
  • 실종 회사원 캐비닛속 피살체로/서울 강남/16일만에 사무실서

    ◎4곳 찔린채 비닐에 싸여/경찰,10여일전 “핏자국” 신고 받고도 수사 소홀 설 전날 집을 나간뒤 소식이 없던 20대 회사원이 흉기에 찔려 자신이 일하던 사무실 캐비닛에 버려져 있다 16일만에 발견됐다. 더욱이 피살직후 사무실에 핏자국이 있다는 직원의 신고를 받고 두차례에 걸쳐 출동한 경찰이 현장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돌아간 것으로 드러나 경찰수사의 허점을 드러냈다. 16일 상오 9시15분쯤 서울 강남구 논현동 113 대림빌딩 5층에 있는 수출대행업체 유니통상 사무실에서 이 회사직원 윤자승(24·마포구 염리동 487)씨가 철제캐비닛안에 숨져있는 것을 직원 정찬국(25·서대문구 북아현동)씨가 발견,경찰에 신고했다. 윤씨는 사무실 구석의 캐비닛안에 오른쪽 배와 팔등 4곳을 흉기로 찔린뒤 손발을 묶이고 이불과 종량제수거용 비닐봉지 등으로 겹겹이 싸인채 쪼그려 앉아 있는 자세로 발견됐다. 정씨는 『윤씨가 설을 쇤 이후 줄곧 사무실에 나오지않아 짐을 정리해 집으로 보내주려고 윤씨의 캐비닛을 열어보니 숨진채 비닐에 싸여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에 앞서 지난 3일 회사측의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했으나 살해사실을 알지 못한채 그냥 돌아간 것으로 확인됐다. 이 회사 사장 윤필남(34)씨에 따르면 설연휴 다음날인 2월3일 상오11시쯤 관할 학동파출소에 『바닥에 핏자국이 있다』며 신고를 했으나 출동한 경찰은 『별것 아니니 청소나 잘 하라』고 말한뒤 돌아갔다는 것이다. 또 이 사실을 보고받은 강남경찰서 형사계직원들 역시 이날 하오1시쯤 현장에 나왔다가 단순폭력사건으로 처리했다. 학동파출소측은 『당시 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바닥에 핏자국만 있을뿐 살해당한 흔적은 발견할수 없어 단순폭력사건으로 생각하고 그냥 돌아왔다』고 말했다. 경찰은 1월31일 밤늦게 이후 윤씨가 같은 회사직원 강모씨(26)와 함께 나간뒤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가족들의 말에 따라 윤씨가 31일∼2월1일 사이에 살해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또 강씨가 지난달초 회사공금 1천6백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서울 송파경찰서에 고소되자 당시 경리를 맡아보던 윤씨에게 『고교동창인 네가 사장에게 일러바칠수 있느냐』며 심하게 말다툼을 벌였다는 직원들의 말에 따라 강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행방을 쫓고 있다. 한편 경찰은 윤씨의 소지품이 없어진 점으로 미루어 금품을 노린 단순강도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사를 벌이고 있다. 윤씨는 지난 89년 서울 H고를 졸업한뒤 안경점 점원생활등을 하다가 지난해 이 회사에 입사했으며 고교동창 강씨의 입사도 주선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 해방정국의 혼란(새로쓰는 한국현대사:6)

    ◎송진우,「건준」 맞서 「국민대회준비위」결성/여운형 내세운 우익의 「합작」노선 반대/“「임정」지지”표방… 고하 피살로 좌익 타격/하지, “「인공」은 소련과 밀접한 관계… 활동 중지”명령 1945년 해방정국은 아주 혼란스럽게 저물어갔다.당시 사회상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있다면 미 국무성이 J R 하지 중장에게 파견한 정치고문 H M 베닝호프의 보고서일 것이다.미군이 진주한 이후 9월15일에 작성한 이 보고서는 「조금만 불똥이 튀어도 폭발할 화약통,그것이 남한의 상황」이라고 기술했다. 그의 말대로 남한은 과연 화약통이었을까.어쨌든 1945년이 세밑에 다가선 12월30일 상오6시 송진우를 저격한 서울 원서동 76의 총성을 시발로 정치테러가 잇따랐다.뒷날 여운형·장덕수·김구로 이어진 암살사건은 해방정국의 혼란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송진우는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하자 이에 맞섰다.그래서 건준이 인공을 선포한 다음날인 9월7일 우익지도자 3백80명과 함께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아직 중국 중칭(중경)에서 돌아오지 못한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를 지지하고,국민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모임이었다.송진우의 죽음으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다만 건국대회준비위원회는 9월16일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 해방정국의 판도를 선점한 인공의 실체를 먼저 딛고 넘어가는 것이 당시 사회상을 돌아보는 수순이 될 것이다.인공이 병아리라면 달걀 격이기도 한 건준은 194508월15일 발족되었다.여운형은 8월14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으로부터 일본 패전소식을 들은데 이어 다음날 15일 아침에는 정무총감 엔도(원등륭작)의 방문을 받는다.행정권을 이양할 테니 맡아달라는 부탁을 해온 것이다.이를 수락한 여운형은 그날밤 자신을 위원장으로 하는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부위원장은 안재홍이 맡았다.이와 더불어 5개의 부서를 두고 2천여명의 청년·학생으로 건국치안대도 조직되었다. 건준에 송진우·장덕수등은 불참했으나 안재홍·김병로·이인등 우익및 중간노선의 인물과 박헌영계열의 좌익세력,정백 중심의 장안파 공산당계열이 들어왔다.말하자면 좌우합작성격을 띤 건준은 지방조직도 확대,8월말까지 1백45개의 지부조직이 이루어질 정도였다.그러나 건준은 건국에 실패하고 말았다.좌익계열이 재빨리 조직을 확대,건준을 장악하고 미군이 진주하기 이틀전인 9월20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한 것이다.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이후 9월12일 하지장군이 시공관에서 정치인들과의 대화를 모색할 때 33개 정당대표가 등록한 것으로 되어 있다.이렇듯 복잡다단한 정치상황은 하지의 정치고문 베닝호프가 9월15일 미 국무성에 보낸 보고서에 나타난다.그는 9월말에 가서 이들 정당을 두 집단으로 분류했는데,민주적 보수집단과 급진 또는 공산주의가 그것이다.특히 미군정은 급진주의 주요세력으로 인민공화국을 주목했다. 그래서 미군정은 인민공화국을 도전세력으로 간주하게 되었다.이는 공식명칭에 국가를 상징하는 「국」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유일한 정부를 표방했기 때문이다.더구나 인공은 1946년3월1일 총선거 실시를 골자로 하는 특별조치까지 마련해놓은 상태였다.이에 대해 군정장관 아놀드는 10월10일 한국언론과의 기자회견에서 『군정이 남한의 유일한 정부』라고 못박고 『군정은 다른 형태의 모든 정부를 통제할 권한을 갖는다』고 선언했다. 인공은 이에 맞서 11월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에서도 공화국명칭을 여전히 사용했다.하지는 맥아더에게 보낸 보고서(미 외교문서시리즈 제6·1945년)에서 「인공은 가장 강력한 공산주의 지지세력이고 소련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전했다.그리고 골수 공산주의자가 아닌 상당수의 좌익세력이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덧붙였다.인공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이 옳겠다고 판단한 하지는 맥아더에게 이 대목에 대한 평가도 구했다. 맥아더로부터 「어떠한 결졍을 내려도 지지할 것」이라는 회신이 돌아왔다.하지는 마침내 인공에 대한 활동중지명령을 내린다.이에따라 주한미군 방첩대(CIC)는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간판을 떼어버렸다.이렇듯 인공은 미군정 아래서 좌익세력규합 이외에 다른 의미를 거두지 못한 채 사실상 종말을 고한 것이다. 이승만과 김구는 인공중앙인민위간판이 내려지기 얼마 전에 귀국했다.이승만은 10월16일,김구는 11월23일에 각각 돌아왔다.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의 귀환문제,특히 이승만문제는 워싱턴·토쿄(맥아더사령부)·서울(미군정) 사이에 사전조율되었다(미 육군작전국문서 한국편 1945년10월).하지는 한국인의 정서를 고려,이승만·김구·김규식의 귀환을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다. 미 국무성은 중국 중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망명지로부터 귀환이 허가되었음을 통보하면서 어디까지나 개인자격 귀환임을 강조했다.여기에는 이승만도 포함되었다.미 국무성은 귀환자들에게 「38도선 이남지역에 머무는 동안 군정당국의 법과 규칙을 준수한다」는 서약서를 받도록 하는 조치도 잊지 않았다.이승만은 귀국 2주만에 반소(반소)논쟁을 벌였다.이에 국무성은 서약을 유의토록 환기시키면서 곧 소련과 가질 교섭을 어렵게 할 것이라는 반응을 즉각 보였다. 국제간에 이해가 엇갈린 정치전략은 변화무상한 것인가.철저한 반공주의자에다 항일운동가라는 점을 들어 서둘러 귀국시킨 미국이 이승만에게첫 제동을 건 것이다.김구 역시 이승만과 같은 이유로 여의도 군용비행장을 거쳐 조국땅을 밟았으나 그다음 12월2일 군산비행장에 내린 임정요인들은 고국의 산하조차 바라보지 못하는 미군 장갑차에 실려 서울에 왔다.이승만과 김구의 환국은 다른 정치판도의 변화를 예고하는 서막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이승만의 존재는 하지로 하여금 각양각색의 정치단체통합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겨주었다.당시 이승만의 명성은 대단해서 모든 정당이 거의 다 의장직 수락을 제의해올 정도였으니까….이승만은 귀국한 지 1주일도 안되는 10월23일까지 50여개 단체대표를 만났다.그 결과는 독립촉성중앙회 결성으로 나타났다.그러나 인공과 공산주의자들이 등을 돌려 좌우익 골은 더욱 깊어갔다. 한편 38도선 이북 소련군 점령지역 평양에서는 9월3일 국내파 공산주의 중심인물의 하나인 현준혁이 암살되는 것으로 정치투쟁조짐을 드러내고 있었다.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위원장 조만식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던 그의 죽음은 한반도 해방정국의 암살1호로 기록된다. 이에 앞서 소련군사령관 치스차코프의 명령에 의해 10월8∼10일 평양에서 북조선 5도대회가 열린데 이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설립(10월13일)되었다.그리고 김일성이 모습을 드러낸 평양시민대회(10월14일)가 열렸고,들러리정당 조선민주당이 창당되는등 소련의 의도대로 착착 돌아갔다. 역사에는 결코 가정이 없다고 한다.하지만 이런 명제를 무시하고 남북한의 많은 세력이 구심점을 갖추었거나 연합전선을 폈더라면 외세에 의한 분단이 없었을지도 모른다.해방정국은 건국의 옷을 입기는커녕 첫단추부터 잘못 끼우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뒤 「첫 정치희생자」는 현준혁/「사회장사진」국내 첫 발굴/「송진우 저격」 3개월여전 평양서 적위대에 피살/「9월3일 암살」 묘비서 확인… 「소관련」시사 논문도 우리는 해방정국에서 암살1호하면 45년 12월30일에 숨진 송진우를 흔히 떠올린다.그러나 사실상의 첫 희생자가 이보다 3개월이나 앞서 9월3일 평양에서 소련 민정당국과 결탁한 반대파에 암살된 공산주의자 현준혁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흔치않다. 그는 1906년 평남 개천의 소지주 집안출신으로 경성제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에서 교수를 지낸 인물.8·15해방을 서울에서 맞아 장안파공산당의 평안남도 책임자로 임명됐다.그달 18일 평양에 도착한 직후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와 적위대를 조직했다.소련군이 진주한 무렵 다른 공산주의 세력을 압도하고 8월27일 조직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될 정도였다. 당시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남의 공산주의 세력은 소련파·화요파·적색노조파등이 복잡하게 얽힌 형국.소련에 대해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곤 하던 그는 소군정과 관계가 좋지 못했고 이를 빌미로 반현준혁파들은 그를 반소분자나 부르주아로 몰아세웠다. 그가 심하게 마찰을 빚었던 상대는 평양 보안서장을 거쳐 평양시 적위대장에 임명된 송창겸과 일제때 포목조합 이사장을 지낸 장시우등 소련파.김일성 영입 계획을 추진하던 소련 민정당국은 결국 송창겸과 장시우등 친소적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현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9월3일하오1시 소련 민정사령부서 회의를 마치고 소련제 스리쿼터를 타고 돌아가다 적위대 복장의 괴한에게 총을 맞고 숨졌다. 그의 죽음에 대해 일본 도쿄대 와다 하루키(화전춘수)교수는 자신의 논문 「소련의 대북한 정책」에서 「암살범이 누구이든 현준혁의 죽음은 소련측으로는 좋은 일이었던 것 같다」고 기술했다. 현준혁의 암살날짜가 지금까지는 9월28일로 알려졌으나 최근 하와이대 서대숙교수가 평양에서 촬영한 묘비 기록을 통해 9월3일로 확인되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소련당국이 의도적으로 현준혁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러준 당시의 사진도 긴급 입수했다. 이날 암살에 대한 또 다른 설은 당시 민족주의 진영의 거목인 조만식 휘하의 반공주의자들의 거사란 주장도 있다.그러나 현준혁은 당시 조만식을 신뢰하는 사이었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하다는 반론이다.
  • 보훈요청 없이 경관 앞에서 피살/국가 배상책임 없다/대법

    경찰관이 보는 앞에서 살해됐다고 하더라도 피해자가 정식으로 신변보호요청을 하지 않아 살해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면 출동한 경찰관에게 손해배상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민사1부(주심 정귀호대법관)는 28일 경찰관들이 보는 앞에서 폭력배들에 의해 살해당한 김모씨(당시 36세)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이같이 판시,원고패소판결을 내린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신변보호요청이 아니라 단순히 「수배자를 잡아가라」는 신고만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으로서는 살인사건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기 힘든 정황』이라며 『출동 경찰관이 비록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잘못을 인정하더라도 이로 인해 피해자가 살해당한 책임까지 경찰관에게 물을 수는 없다』고 밝혔다.
  • 미 군정체제 확립(새로 쓰는 한국현대사:5)

    ◎“일인활용 불가피”속 행정권 장악에 석달/서울 입성뒤 「북쪽 접수」 주력… 개성 첫 점령/북의 소군은 2개월 앞서 「도인민위」 설치/인천입항 미군 환영길 한국인 2명 일경에 피살 미군이 인천에 첫발을 디딘 1945년 9월8일은 미 군정 3년을 포함해 이후 반세기동안 유지돼 온 한미간 특수 역사관계의 출발점이었다.그러나 한국인과 미군의 첫 만남은 그 시대상황을 상징이라도 하듯 비극적인 사건으로 얼룩졌다.미군을 환영하러 부두로 몰린 한국인들이 일본경찰의 총에 맞아 두명이 숨지고 십여명이 부상한 것이다. 인천은 서울과 가까운 근대 해항지여서 일찍부터 일본인 거주자가 많았고 그 세도 강한 항구도시였다.반면 부두노동자들이 조직한 노동조합이 활발히 움직이는등 반일세력도 만만찮았다.따라서 해방이 되자 인천시내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일본경찰은 재향군인 9천명을 급하게 모아 특별경찰대를 조직,각 파출소에 배치하는등 경비를 강화했으며 한국인들도 이에 맞서 치안유지회(보안대)를 결성해 대치하는 분위기였다. 「미군이 9월8일 인천항으로 상륙한다」는 소문이 며칠전부터 떠돌자 시민들은 「해방군」을 맞는다는 기쁨에 들떴다.이에 조선총독부는 9월5일 담화를 통해 『미군은 민중환영등 의례적인 행사를 희망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이어 8일에는 인천경찰서가 의사·산파·우편배달부를 제외한 사람의 외출을 금지한다고 공시했다.그리고 『이것은 미군의 지시』라고 못박았다. 8일 아침이 되자 인천시내 곳곳에는 미군을 환영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자연스레 하나의 무리를 형성했다.미군 함정이 부두에 도착한 하오2시쯤에는 거대한 물결이 되어 인천항쪽으로 나아갔다.인파가 현재의 인천우체국 자리를 지나 산업은행 앞에 이르자 일본 특별경찰대의 99식 소총이 불을 뿜었다.이 발포로 행렬에 앞장선 조선노조 인천중앙위원장 권평근(당시 45세)과 보안대원 이석우(20세 가량)등 2명이 숨지고 1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권평근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사는등 일생을 조국광복에 바친 독립운동가였다. 해방된 우리땅에서 독립운동가가 일본경찰에게 공공연하게 피살된,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떻게 일어났을까.이 사건에는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의 사전정보부족과 한국에 대한 그릇된 시각,일본측 농간들이 복합 작용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미군은 진주에 앞서 한국주둔 일본군사령관 우에쓰키(상월양부)와 연락,그로부터 『무장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를 듣자 「미군이 인수할 때까지」라는 조건으로 일본군의 치안유지권을 인정한다.이같은 미군의 입장은 권평근·이석우의 사망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장례식이 끝난 뒤 유족들이 미군에 발포경찰관등을 고발,이에 대한 군사재판이 13일 열렸다.이 자리에서 일본인인 인천경찰서장등은 『미군 지시로 환영·외출을 금지했는데 이를 어겼다』고 주장했고 법정은 이들의 행위를 「합법」이라고 판정했다.재심청구를 했지만 곧 기각됐다. 이 사건은 미국 신문에 즉시 보도돼 미국내에서도 비판여론이 크게 일었다.종군기자 리처드 E 라우터배크는 「뉴욕타임스」9월9일자 기사에서 『일본군이 환영군중에게 발포한 것은 미군사령부의 지시때문』이라고 공개했다.「뉴욕타임스」는 이어 11일자 사설에서 『우리는 일제 식민정책을 시행한 쓰레기들에게는 부드럽게 대하고 우리가 해방시킨 민중에게는 강경하게 대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심각하게 제기했다. 한국점령 임무를 맡은 미 제24군단 가운데 8일 인천을 통해 맨 먼저 들어온 부대는 7사단이었다.7사단은 인천에 17보병연대를 남겨놓고 9일 아침 서울로 향했다.당시 미국신문들은 거리풍경을 『흰옷을 입고 이상스런 검정모자(갓)를 쓴 한국인들이 길가에 죽 늘어서서 「만세」를 외치며 환호했다.「USA Army Welcome」이라고 쓴 환영아치도 가끔 눈에 띄었다』고 보도했다.한국인들은 대부분 순수한 마음에서 미군을 「해방군」으로서 환영했던 것이다. 이날 하오4시6분 서울 조선총독부 건물(현 국립중앙박물관)제1회의실에서 38선이남 일본군의 공식 항복행사가 열렸다.일본측 대표인 아베 노부유키(아부신행)조선총독,우에쓰키 주둔군사령관등이 먼저 들어왔고 이어 하지중장,킨케이드중장(제7함대사령관)등 미군대표가 자리를 잡았다.하지중장 뒤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X자로 세워져 있었다. 다음날부터 미군은 38선이남의 영토와 행정조직을 장악하는데 본격적으로 나선다.서울에 본부를 둔 7사단은 우선 북쪽지역에 주력해 12일 개성을 점령한 다음 소련과 연락할 전신장치를 설치했다.이어 그리고 미군정은 각 도에 군정지사를 보내 행정권을 장악했다.지사 발령날짜를 보면 ▲경기도 10월2일 ▲강원도 11월26일 ▲충북 11월8일 ▲충남 10월9일 ▲경남 9월28일 ▲경북 11월3일 ▲전북 11월20일 ▲전남 10월26일등이다.초대 군정지사들은 영관급 장교가 대부분이고 경남지사인 찰스 해리스가 유일하게 준장이었다. 미군이 지방에 분산 배치된 초기에는 군정 수행에 어려움이 많았다.군단위까지 확보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했고 특히 훈련된 행정요원은 턱없이 모자랐다.그런가 하면 현지실정을 몰라 한동안 일본인 관리를 활용해야 했으며,일부 지역에선 「조선인민공화국」이 임명한 관리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그러나 각 도에 군정지사를 파견해 자리잡음으로써 미군정은 1945년 11월 말쯤 전국적인행정체제를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한반도 진격속도가 빨랐던 북쪽의 소련군은 군정체제를 이루는데도 앞섰다.8월9일 참전한 소련군은 일부지역에서 일본군의 저항을 받긴 했지만 8월 말까지는 38선이북 지역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끝냈다.점령군은 제25군,그 사령관은 IM 치스차코프대장이었다. 치스차코프는 평양에서도 조만식이 주도하는 「평남 건국준비위」와 「공산당 평남도위원회」를 합쳐 「평남 인민정치위원회」를 구성케 했다.이 위원회는 비록 조만식을 대표로 내세웠지만 실제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에 들어갔다.소군은 이같은 방식으로 기존의 정치세력과 공산주의자들을 엮은 인민위원회를 9월 말까지 각 도에 구성했다. 미군이 남쪽에서 직접통치의 형태를 갖췄다면 소군은 자치적으로 보이는 「인민위원회」구성을 통해 간접통치하는 교활한 방식을 택한 셈이다. ◎해방된 내땅인데… 일경에 맞서다 피살/유족 최초 증언… 「권평근의 인천참사」/미군 의뢰 따른 일 통제에 강력 저항/20∼30년대 노조운동 통해 항일투쟁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던 날 일본경찰의 흉탄에 희생된 권평근(1900∼45년)은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였다.그는 1919년 「3·1운동」부터 45년 9월 숨질 때까지 독립운동에 앞장서 왔지만 아직 정부로부터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지 못했다.그에 관한 기록이 여러 문헌에 흩어져 있어 미처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나 본사 취재팀은 일본측 기록인 ▲삼전방부의 저서 「조선 종전□ 기록」(암남당서점) ▲1936년 조선총독부 경무국 자료인 「국외□어□□용응조선인명부」 ▲경성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에서 31년 9월 발행한 「사상월보」9월호들을 검토했다. 또 ▲서울경찰청이 1993년 6월9일 국가보훈처에 회신한 「권평근에 대한 지문조회」결과 ▲국가보훈처 소장 독립유공자공훈록 제5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기록 ▲조선일보 1931년 7월24일자,8월27일자,9월4일자 ▲동아일보 1931년 8월27일자,10월27일자 등 각종 자료와 가족으로부터 단독입수한 권평근의 미공개사진,증언들을 종합해 국내 언론계는 물론 학계에서도 아직 시도해 본 적이 없는 권평근의일생을 복원했다. 권평근은 경기도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배재학당에 다니던 그는 「3·1운동」때 고향에서 시위대열의 선두에 섰다가 3년동안 충청도로 피신한다.이어 26∼27년에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해외 반일조선인 명부」에는 그를 『배일사상이 농후한 요주의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권평근의 경력은 30년대에 빛난다.인천으로 이사해 노동조합에 투신한 그는 31년 7월 「일본인습격사건」의 주동자로 체포된다.당시 만보산사건이 일어나자 국내에서도 한국인과 중국인사이에 충돌이 잦았다.그러나 권평근 등은 일본이 한·중 양국을 이간질시키려고 사건내용을 과장한 것이라며 중국인을 공격하는 군중의 분노를 일본인에게로 돌렸다.이 사건으로 그해 10월26일 경성지법 형사제1부에서 징역3년을 선고받는다.당시 재판기록을 보면 권평근은 이해 5월1일,6월10일,7월5일 등 세차례에 걸쳐 반일시위를 벌이려고 구체적인 준비를 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복역을 마친 권평근은 노동조합을 통해 더욱 은밀하게 독립운동을 벌였고 해방당시에는 조선노조 인천중앙위원장이었다.총격 현장에서도 그는 일본경찰에게 『해방된 우리땅에서 웬 참견이냐.쏠테면 쏘라』며 가슴을 내밀었다고 한다.그의 장례식은 사회단체장(일부 기록은 시민장)으로 치러졌다. 딸 명숙씨(55·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742)는 아버지를 『6척 장신에 힘이 장사였다』고 기억했다.또 그리 어렵지 않은 살림인데도 자신은 하루 두끼만을 먹으며 어려운 이웃에게는 식량과 옷을 서슴없이 나눠줬다고 회상했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부국장급 ▲이용원 〃 ▲김성호 〃 ▲김경운 〃
  • 독립유공자 명예 20년만에 되찾아/화남 박장호선생 장손 박정훈씨

    ◎이웃주민이 서류조작 연금 받아와/법정투쟁끝 마침내 「조상찾기」 성공 구한말 독립운동가의 직계 후손이 20년동안 다른 사람에게 할아버지의 이름을 빼앗겼다가 26일 법원의 판결로 「조상찾기」에 성공했다.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화남 박장호(1850∼1922)선생의 장손인 박정훈(78·경기 파주군 적성면)씨는 이날 『국가가 62년 화남선생에게 추서한 건국공로훈장의 수령권자는 박씨임을 확인한다』는 서울고법의 승소판결을 받아냈다. 화남선생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강원도 홍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이들을 이끌고 만주에서 「대한독립단」을 결성,항일운동을 전개하다 22년 일본에게 매수된 한국인에게 피살된 독립운동의 「거봉」으로 정부는 62년 3·1절에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었다. 박씨가 엉뚱한 사람에게 빼앗긴 화남선생의 친손자 자격을 밝히기 위해 투쟁을 시작한 것은 75년부터. 해방직후 아버지를 따라 만주에서 귀국,58년부터 파주에서 생활해온 박씨는 정부가 화남선생에게 훈장을 추서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당시 이웃에 살던 P씨(72년 사망)가 6·25로 호적 등 자료가 없어진 것을 이용,박씨로부터 화남선생의 사진과 관련서류를 건네받아 69년 자기이름으로 신고하는 바람에 박씨는 유족 자격을 빼앗긴 줄도 모르고 있었다. 박씨는 곧 할아버지를 되찾는 작업에 착수,관계 당국에 수십차례 진정을 했으나 『양쪽이 모두 유족임이 틀림없다』 『ⓟ씨가 이미 유족으로 결정돼 기득권이 있다』는 말만 들었다. 박씨는 92년 11월 만주에 묻힌 화남선생의 유해를 경기 가평군 선영으로 이장하면서 소송을 통해 자격을 회복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93년 4월 소송을 냈다. 사건을 담당한 서울고법 특별7부(재판장 임대화부장판사)는 이날 『족보와 호적·사진등 관련기록을 볼때 원고가 화남선생의 친손자임이 확실하다』며 『실제 손자가 아닌 P씨를 유족으로 지정한 것은 잘못』이라고 판결,박씨는 해방 50주년을 맞아 마침내 애국지사의 유족으로 떳떳이 설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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