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피란
    2026-04-01
    검색기록 지우기
  • 해명
    2026-04-01
    검색기록 지우기
  • 원전
    2026-04-01
    검색기록 지우기
  • 축적
    2026-04-01
    검색기록 지우기
  • ICT 기업
    2026-04-0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064
  • 사라진 지명 새이름 짓는다/국립지리원,1980곳 심의착수

    ◎시흥 「현장」 부락 신흥동으로/2백44곳은 기존지명 변경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의 「새말」 마을의 이름이 행정구역 이름으로 인정된다.경기도 시흥시 신천동의 「현장」 부락은 「신흥동」으로 바뀐다.새말은 서울 홍릉의 철거민들이 이주,새 마을을 이루며 생긴 이름이다.반면 신흥동의 신흥은 새롭게 흥한다는 뜻으로 6·25 이후 피란민들이 개간한 탓에 현장마을로 불리다 바뀌는 지명이다. 건설부 국립지리원은 오는 29일 중앙지명위원회를 열어 그동안 국토개발 등으로 없어졌거나 다르게 쓰이는 지명을 찾아내 현재 부르는 이름대로 바로잡기로 했다.이름에는 역사와 땅모양이 있고 생활과 옛말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회의에서는 홍씨들이 많이 살아 「홍촌」으로 불리다가 도시계획으로 없어진 경기도 과천시 홍촌 마을처럼 이미 사라진 이름은 공식 지명에서 뺄 계획이다. 분당,일산,평촌,중동 등 수도권 신도시의 경우 대단위 도시건설로 과거 그 곳에 있던 「중간말」,「능골」 등 대부분의 지명이 없어지고 대신 「양지마을」「장미마을」 등 새로운 지명이 생겨났으나 상당기간 시간이 흐른 뒤 자연적인 지명으로 자리를 굳힐 때 반영하기로 했다. 이번에 심의에 올라가는 지역은 모두 1천9백80건으로 행정구역 이름이 없다가 새로운 지명이 붙여지는 곳이 1천7백36건,기존 지명을 바꾸는 곳이 2백44건이다.새 이름이 붙여지는 곳은 경기도가 1천4백44건으로 가장 많고 다음이 ▲강원도 1백36건 ▲광주 1백12건 ▲서울 39건 등이다.종류별로는 부락이 1천5백9건,고개 1백15건,산 1백1건,기타 11건 등이다.
  • 덕수궁/월산대군사저… 임란후 궁으로/궁궐:8(서울6백년만상:45)

    ◎고종퇴위후 거주… 전기·전화 최초가설/일제 1933년 시민공원으로 개방 덕수궁은 궁궐이라기보다는 공원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 정도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등 현존하는 3대궁궐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우선 정문인 대한문을 들어서면 세종대왕동상이 앉아있고 분수대가 물을 뿜고 있으며 매점등 편의시설이 즐비하다.점심시간대에는 인근 회사원들에게 산책 코스로 각광을 받고있는 여느 도심공원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단지 대한문을 필두로 중화전 즉조당 함녕전등 몇 안되는 전각들과 스피커를 통해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우리 가락이 이곳이 궁궐이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을 뿐이다. 덕수궁은 원래 세조의 큰아들이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으나 정궁이 된 배경은 임진왜란과 을미사변등 국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임진왜란의 발발로 신의주까지 피란갔다 서울로 돌아온 선조는 경복궁과 창덕궁이 타버려 어쩔 수 없이 덕수궁에 거처를 정했다. 이때는 궁궐의 이름도 없이 그저 정릉동행궁이라 불리다 광해군이 즉위 3년만에 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이라고 지어 처음으로 궁궐의 반열에 섰다.그러나 불과 7년만에 인목대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광해군이 대비를 이곳에 유폐하면서부터 경운궁은 서궁으로 격하됐다. 광해군을 이어 덕수궁 즉조당에서 즉위한 인조는 경운궁을 명례궁으로 부르다 1623년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덕수궁은 별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2백70여 성상이 흐른 광무 원년(1897)을미사변의 와중에서 러시아공관으로 파천했던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되찾았고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곳에 칩거하면서부터 궁의 이름에 고종의 존호를 사용,덕수궁이라고 불렀다. 고종이 이곳으로 옮긴뒤 두차례에 걸친 대규모 축조공사로 함녕전 보문각 선원전 중화전 관명전이 새롭게 태어나 궁의 모습이 일신됐다. 이때 덕수궁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대한문은 원래 중화전의 문인 대안문을 옮겨놓았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2년뒤에 중건,대한문으로 이름을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수궁은 서울의 다른 궁궐들과 마찬가지로 일제에 의해 크게 훼손됐다. 원래는 경희궁(옛 서울고자리)과 연결돼 있을 정도로 규모가 방대했으나 열강들의 각축이 벌어지면서 조금씩 떼어내 외국공관으로 사용케 해 규모가 줄어들다가 고종이 승하한뒤 빈 궁궐로 남아 있자 일제가 기다렸다는 듯이 궁의 서쪽 선원전을 통과하는 도로를 뚫은뒤 1933년 시민공원으로 개방했다. 지금의 대법원과 새문안길을 잇는 이 길이 바로 60∼70년대 서울의 연인들이 낭만을 즐겼던 「덕수궁 돌담길」이다. 일제는 도로 서쪽으로 떨어져 나간 궁궐의 전각들을 헐고 경기여고를,그리고 도로 동쪽 제사준비소터에 덕수국민학교를 세웠다.또 동쪽 언덕을 밀어내고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국을 지어 궁궐이 반쪽으로 줄어들었다. 광무10년(1902)궁내에 발전소가 완성돼 전기가 들어오고 궁내부전화가 설치되는등 신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기도 했던 덕수궁은 구한말 격동의 시기에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며 수많은 애환을 간직하고 있다.
  • 그의 잔영은 여전히 잔인하다/몽상적 독재자 김일성의 저승길을 보며

    ◎광신적 오열행렬에 피란짐보다 더 무거운 슬픔이…/“미망이 저런건가”… 통일로 가는길 먹구름 보는듯 불과 열흘전 한반도에서는 82세로 그 인생을 마감한 헛된 몽상가의 죽음이 있었다.필자는 그 죽음의 소식을 남쪽으로가는 여행길의 휴게소에서 들었다.그리고 두가지의 충격을 받았다.그 첫째는 물론 김일성의 물리적인 죽음이었고,다른 한가지는 백여명을 헤아리는 그 휴게소 여행객들이 보여준 의연한 침묵이었다.그러나 그 무표정에 묻어 흐르고 있는 일말의 아쉬움 또한 필자는 읽을 수 있었다.죽기 전에 남북정상이 서로 만나 허심탄회하게 회담을 갖자 하던 그의 결심이 진정한 조국애에서 비롯되었기를 바란 것이었기에 그 죽음의 아쉬움은 우리 가슴에 진한 구두점을 찍어준다.분단 50년의 포한을 풀려 한 것이 진정이었다면,하필이면 이 찰나에 불귀의 객이 되었는가에 대한 아쉬움이고 미련이다. 그러나 그 몽상가는 그 유례를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정치문맹이었다.그는 이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스탈린의 추종자였다.스탈린이 그러했듯인민을 그의 수하에 두었고 인민을 그의 이념구현의 도구로 삼았다.그는 2천5백만 인민을 울타리속에 가둬두고 필요에 따라 동원하고 배급으로 울게 만들었다.그가 일으킨 전쟁으로 말미암아 이 좁은 땅위에 살던 군인과 민간인 2백58만명이 초개와 같이 죽거나 실종되었고,무려 5백50만여명이 미망인·불구자·고아등으로 비참한 전쟁후유증을 겪었다.그 전쟁은 게르만민족의 대이동보다 더 많은 민족의 이동을 불러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란한 남북이산가족이 1천만명에 이르러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전쟁의 깊고 깊은 상흔은 가시지 않고 민족적인 비극으로 남아 있다.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말끝마다 나가라고 외치고 있는 미군은 그가 일으킨 전쟁으로 이 나라에 들어왔고,소련군대와 중공군까지 불러들여 동족을 살상하고 국토를 초토화시키는 일에 이용했다.설혹 물리적인 피해는 당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가 일으킨 전쟁으로 말미암아 우리 겨레의 가슴에는 피맺힌 슬픔이 자리잡고 말았다.그 폐단의 상흔 역시 우리의 진솔한 삶의 그롯속에 아직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가 전쟁을 일으켰을 때 필자는 11살,산골국민학교 5학년 시절이었다.먼 산자락을 뒤흔들던 포성소리가 가까워지자 어머니는 새우잠을 자고 있던 우리 어린 두 형제를 깨웠다.문 바깥은 한치 앞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의 칠흑같은 어둠,동생을 들쳐업은 어머니는 포성을 등뒤로 하고 허둥지둥 발걸음을 떼어놓았다.11살의 나이로는 엄두조차 못낼 무거운 피란봇짐을 등에 진 필자 역시 경황없이 어머니의 뒤를 무작정 따라야했다.동이 트기 시작하는 어느 산기슭에선가 우리는 벌써 쇠파리가 들믿는 국군의 시체를 보았고,그 곁에 인민군에 포위된 채 매복하고 있는 국군을 보았다.남하의 피란길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우리는 산협의 낯선 농가의 추녀 아래서,그리고 빗물이 새어드는 움집에서 병고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살아남아 그 모욕적인 전쟁이 먼발치로 떠나가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그로부터 40여년이 흘러간 작년 여름,필자는 중국의 집안에 있는 선착장에서 작은 배를 타고 그 맞은편에 있는 만포의 강안을 스쳐간 적이 있었다.우리가 탄 배가 북한의 만포연안을 서행으로 거슬러 올라갈제 40여년전 필자 나이 또래였던 헐벗은 아이들이 몰려와서 담배를 달라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필자 곁에 있던 일행중 한사람이 담뱃갑을 던질듯 포즈를 취하다가 그만두자 그 천진난만해야 할 아이들은 배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돌팔매질을 사양 않던 그 철부지들의 단도직입적인 호전성을 목격하면서 자리잡은 충격적인 슬픔은 11살의 나이가 감당하기엔 무거웠던 40여년전의 피란짐보다 훨씬 무거웠다.집권 49년을 그는 북한 인민을 일사불란하게 동원하였고,그 인민은 동원의 미망속에 살고 있다.그 인민은 미망속에 살면서 언제 어디서든 수령의 명령만 떨어지기를 기다려왔다.그들은 스스로 창조하려는 몸부림보다 식량배급표를 쥐고 있는 수령의 명령과 교시만을 따르려 하였다.그런 바탕위에서만 우리는 북한의 그 엄청난 오열의 행렬을 이해한다.울먹이는 목소리로 독재자의 죽음을 알리고 있는 북한 아나운서의 슬픈 가슴을 이해한다.냉정한 검증을 거쳐가는 역사에 참여되고 있는 민족이 아닌한 독재자의 신격화에 동원되었던 인민의 미망을 슬픈 시선으로 바라보면서,우리는 또 다른 무게로 등을 덮치는 인내와 기다림의 시간과 마주서야 한다.우리는 통일의 열쇠가 이제 우리와 유명을 달리한 독재자 김일성의 손에 달려 있었다는 미망과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우리가,그리고 우리겨레가 한마음으로 바라고 있는 그 통일의 열쇠는 공교롭게도 바로 백성으로 이름되는 우리 모두의 이해와 용서와 화합에 달려 있다.그렇기에 그에 대한 냉정한 검증없이는 국민의 이해와 용서는 구걸조차 어려울 것이다. 고달픈 인생살이에는 필경 눈물이 많은 법이고 가슴을 에는 듯이 통렬한 예배의 대상을 둠으로써 심정적 위안을 획득한다.우리가 북쪽에 있는 동포에게 보내고 있는 슬픔이 바로 그런 모습들에 있다면 그들이 겪고 있는 비참한 궁핍에서 벗어나고 자기개발과 창조의 길이 무엇이라는 것을 터득시켜 그들이 겪고 있는 미망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도록 주선하는 아량과 노력이 통일을 위한 정치적 담판과 병행되어야 할 줄 안다. 2년전 겨울 필자는 중국의변경에 있는 어느 해관(세관) 식당에서 중국의 친지방문을 위해 방금 북한땅에서 건너온 어떤 모녀의 점심식탁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그 두사람의 식탁은 너무나 빈약해서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애옥살이를 견디고 있는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삶의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은,죽은 자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닐 것이고,전쟁도 아니고 핵을 개발하는 데도 있지 않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미숙한 아이들도 알고 있는 일이다.그것은 바로 남북한간의 화합과 용서,그리고 그 다음에 오는 통일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든 이제 한시대는 물러났다.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한반도의 북쪽에서 가장 야만적인 모습으로 군림하던 독재자는 사라졌다.그러나 그 잔영은 너무나 진하게 우리앞에 남아 있음을 또다시 목격하게 된다.그가 살아 있을 때와 조금도 다름아닌 비방과 이간질의 현실이 북한땅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 아침 신문에서도 우리는 읽고 있다.아연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통일로 가는 길위에 놓인 고통과 갈등을 예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 실향민마을/“분단원흉 사라졌다” 막걸리파티

    ◎속초 아바이마을·철원 대마리 르포/“「일부국민 실망」 보도 도저히 이해안가”/“이제 멀잖아 고향방문길 열릴것” 기대 「내 잠시 다녀오지요」라는 한마디만을 남긴채 어스름 달빛을 밟고 고향땅을 떠난지 어언 반세기­한치라도 고향가까이에 머물고 싶은 비원을 안고 휴전선을 따라 만들어진 실향민촌 주민들의 얼굴마다에는 김일성이 죽었다는 소식에 한평생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한이 조금이라도 풀리는듯 감회어린 표정이 역력했다. ▷속초아바이촌◁ 1·4후퇴때 원산과 함흥항을 떠나 피란길에 올랐다가 끝내 고향가는 길을 잃어버린 함경도 실향민들이 대거 몰려 살고 있는 강원도 속초시 청호동 속칭 「아바이」마을의 실향민들은 전날에 이어 10일에도 노인정에 모여 「김일성 사망」을 축하하는 막걸리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함경도 북청이 고향으로 1·4후퇴때 부모님,아내와 4남매를 고스란히 두고 부산으로 왔다가 아바이촌에 정착했다는 조일랑할아버지(78)는 『김일성이 죽었다가 고향에 두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더 솟구친다』며 멀리북쪽하늘로 시선을 모았다. 함경도 영흥이 고향이라는 아바이마을의 최연장 이춘섭할아버지(92)는 『하루에도 몇번씩 김일성을 저주해왔는데 하느님이 이제야 소원을 들어 주었다』며 『10살이나 아래인 김일성이 먼저 죽은 것은 「천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산가족들의 고향방문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돌파구가 마련될지도 모를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인지 「또 고향가는 길이 물거품이 되는게 아니냐」는 탄식도 적지 않았다. 전날 정오뉴스에서 김일성 사망 소식을 처음듣고 고향사람들과 모여 만년한을 쏟아내기라도 하듯 통곡을 했다는 함경도 북청출신의 박춘심할머니(66)는 『김일성이가 죽어 혹시나 했던 이산가족의 고향방문길이 또 막히는게 아닌지 모르겠다』고 울먹였다. 할아버지를 아바이라고 부른다해서 흔히 「아바이」로 통하는 이들 함경도출신 실향민 대부분은 『그래도 민족분단의 원흉이 죽었으니 고향에 돌아갈 날도 시간문제 아니겠느냐』며 이구동성으로 한결 마음은 가볍다고 말했다. 갈대만이 아무렇게 자라던 바닷가를 억척스레 보금자리로 탈바꿈시켜놓은 함경도 실향민들은 파도소리에 고향소식이 실려올까 해서 북풍한설을 마다하지 않고 창문을 북쪽 바닷가쪽으로 내놓고 살고 있다고 했다. ▷철원 대마리◁ 『진작 죽었어야할 위인이…』 혀를 끌끌차는 70대 촌로의 얼굴에 가득한 주름살이 분단반세기 인고의 아픔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김일성주석 사망」소식 이틀째인 10일 낮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1,2리. 민통선 바로 남쪽 널따란 철원평야 한쪽에 자리잡은 아담한 이곳 마을주민들의 감회는 사뭇 남달랐다. 모두 2백여가구 1천여주민들 가운데 휴전선이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이 60여가구 4백여명.일부는 지금도 눈에 잡히는 철책선 바로 너머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피란을 내려와 조금이라도 고향 가까운데 자리를 잡았다가 못돌아간 이들이 모여사는 곳이다. 『내 살아생전 김일성이 죽는 것을 보고 싶었다』는 이동윤옹(75)은 고향 함경남도 고산이 불과 40여리 지척이지만피란때 못모시고 내려온 어머니 생각을 잊은 적이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휴전과 함께 빤히 바라보면서 못가는 고향에 더욱 속을 태운 김동래씨(50)는 『수년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가르쳐준 조상님의 산소 위치가 이젠 가물가물할 뿐』이라고 말한다. 『어렵사리 합의한 남북정상회담이 불투명하고 김일성사망에 일부 국민들이 실망한다는 보도를 우리는 의아스럽게 생각합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장마비를 맞으며 논물을 보러 나가던 실향민 이인성씨(64)는 『한반도 분단과 6·25전쟁의 원흉이 죽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 그대 홀로 가는 배/박기원 지음(화제의 책)

    ◎작곡가 고이진섭씨의 아내가 쓴 「사부곡」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으로 시작하는 노래「세월이 가면」에 곡을 붙인 고이진섭선생은 작곡가이자 희곡·시나리오 작가,칼럼니스트였다. 극작가 한운사씨가「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라 불렀던 그가 간지 11년,아내인 소설가 박지원씨가 그와의 사랑을 회고하는「사부곡」을 내놓았다. 지난 49년 봄 서울신문사 선후배 기자로서의 첫만남에서 부터 피란지 부산에서의 조우,그리고 30년동안의 결혼생활에서 주고받은 사랑의 모습들이 때로는 담담하게,때로는 격렬한 필체로 그려져 있다. 또 이진섭선생의 예술가적 기질과 그에 따른 기행등 진면목도 소개했다.지순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청산 5천4백원.
  • 궁궐:3/“경복궁 싫다”태종이 창덕궁 창건(서울 6백년만상:40)

    ◎임진왜란·인조반정·순조때 대형화제/세임금 폐출된 곳… 후원으로 비원 조성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태종은 서울 천도를 결심한다.태종은 경복궁은 창건때부터 좋지 않은 일이 잇따라 정궁을 다시 지으려했다.그러나 선왕 태조가 창건한 경복궁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조준등 중신들의 반대여론에 밀려 이궁으로 지은 것이 창덕궁이다. 정궁은 아니면서도 가장 많은 임금이 정사를 살폈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리는등 수많은 궁중 비사를 간직한 창덕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태종 4년(1404) 10월 경기·충청·강원에서 군병력과 승려 농민들을 동원,공사에 들어간 창덕궁은 이듬해 10월 완공됐다.규모는 경복궁에 비해 작은 편이었다.태종은 창덕궁에 든지 6년만에 거처를 경복궁으로 옮긴뒤에도 계속해서 정전과 누각을 지어 12년에는 정문인 돈화문을 건립했다.그리고 세종 원년(1419) 인정전이 완공돼 비로소 궁궐의 모습을 갖출 수있었다. 단종과 연산군이 폐출되는 비사를 간직한 창덕궁은 임진왜란발발로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피란에서 돌아온 조정은 경복궁의 터가 불길하다고해 가장 먼저 창덕궁 중건에 착수,광해군 원년(1609)에 완공했다.이후 창덕궁은 경복궁이 중건(1867)될때까지 「조선의 정궁」으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경운궁에 거처하던 광해군은 창덕궁이 완공된 뒤 「선왕의 상중」이라고 이런저런 핑게를 둘러대며 궁에 들기를 꺼려했다.그러나 마지못해 창덕궁으로 이어한 뒤 20일만에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당시 이의신이라는 술사의 말에 의존하던 광해군은 창덕궁에서 노산군(단종)과 연산군이 폐출됐기 때문에 창덕궁에 들기를 꺼려했던 것으로 「광해군 일기」는 전하고 있다. 중건 5년만에 중신들의 성화에 못이겨 창덕궁에 든 광해군은 8년뒤 인조반정으로 노산군·연산군과 마찬가지로 창덕궁에서 쫓겨나는 비운을 맛봐야했다. 광해군은 창덕궁을 창건하면서 조성됐던 후원을 재정비했는데 이곳이 오늘날의 비원이다.비원은 북악에서 뻗어나온 완만한 산기슭 6만여평에 정자와 연못을 만들어 이룩한 조선조 정원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비원 연경당 뜰에는 괴석들이 석분에 담겨 눈길을 끄는데 이들 석분은 광해군 일기에 『기화·이목·괴석을 널리 모아 동산을 만들고 정자를 지어 소요해 그 화려함이 일찍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광해군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조반정이 있던날 창덕궁엔 두번째 큰 불이 나 인정전등 몇 전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됐다.이에 따라 인조 25년 6월 (1647) 광해군이 공들여 지었던 인경궁의 전각을 헐어 창덕궁 재건공사를 시작,그해 11월 복구공사는 완료됐다. 이후에도 크고작은 화재가 발생했으나중창은 없었다.그러나 순조 3년(1803)12월에 또 다시 대형화재가 발생,인조반정때 실화를 면했던 인정전등 주요전각이 모두 소실됐다.이듬해 완공된 인정전은 국보 2백25호로 지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번에 걸친 대화재로 중건과 재건을 거듭한 창덕궁은 19세기에 접어 들면서 역사의 거센 소용돌이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 김 주석,역사앞에 서라/이재근(서울광장)

    『과거사를 돌이키면 북한이 폭력전략의 경력을 갖고있는게 사실이다.그러나 지금 북한은 변했다고 봐야한다.독선적인 판단으로 착오와 실수를 하는일은 있어도 마지막 순간에 멸망의 길을 피할줄 아는 지혜는 가졌을 것이다.요즘 세상에 죽음을 각오해 수단방법을 가리지않고 전쟁을 일으킬 나라가 있겠는가.평양의 지도자는 자기가 먼저 방아쇠를 당기면 자살행위가 될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 계제인데 아직도 무슨 전쟁얘기냐고 할지 모른다.하나 이것은 내 의견이 아니다.「조선전쟁」의 일본인 저자 가미야 후지(신곡불이·전 경응대교수)가 내비친 최근 한반도정세관이다.북핵제재문제를 둘러싸고 팽배했던 「한반도 전쟁위기론」은 하구라는 것이다.북의 전쟁도발 가능성에 대한 소박한 반대논거도 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다.그것이 바로 「평화의 하구성」이다.전쟁은 예고되지 않는다.전쟁은 그것이 일어나기 전에는 언제나 부정되고 애써 회피되는 괴물이다.전쟁은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만이 알고있다.쌓이고 쌓이다가 어느날 하루아침에 폭탄처럼 터져버린다.그것이 전쟁이다.그러니 상대국가의 두 정상이 만나서 얘기하거나 어쩌면 아예 터놓고 살고 있다하더라도 한쪽이 전쟁을 하려들면 전쟁은 터지는 것이다.44년전 6·25동족전쟁이 그러했다.요즘 남북예멘전쟁이 또한 그것이다. 이상하게도 이해 6월의 세상살이 주제는 온통 남북의 「전쟁과 평화」뿐이었다.카터 전미대통령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더니 언뜻 남북정상회담을 끌어냈다.사태는 반전해서 이제는 그 위기론의 근거가 북한핵이라는 사실은 저만큼 잊고 남북정상회담이 모든것의 시작이요 끝인양 얘기들하고 나섰다.카터의 거중내용도 그러하지만 현실적으로 북한핵제재요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말이다.한마디로 북한핵의 「과거사」규명에 관한 국제여론은 침묵속에 들었다. 이 단계에서 성급히 단언한다면 남북문제의 전과정에 있어서 정상회담이란 그것이 성사되더라도 다만 시작에 불과하며 크고 깊숙한 주제속 각론의 한 대목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중요한 것은 북한주석 김일성의 두주먹속에 북핵의과거가 꽁꽁 숨어있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다.기실 북한핵문제는 지금까지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해왔다는 의혹에서 시작된 것이다.북핵문제 2년이 바로 그에대한 진상규명의 과정이었다.국제사회의 근거있는 우려대로 북한이 이미 핵폭탄을 만들기에 충분한 플루토늄을 보유했거나 2∼3개의 핵폭탄을 갖고있는데도 현재를 위해 과거를 불문에 부친다면 그것이 평화란말인가.과거 핵규명이 전제되지않은 정상회담은 또…. 저쪽의 의심되는 평화제스처는 또 있다.『북핵위기는 끝났다』고 장담한 카터는 귀국후엔,남북한 병력을 각 10만으로 줄이고 비무장지대(DMZ)로부터 완전 철군하자는 등의 제의를 북주석 김일성이 내놨다고도 했다.괴이쩍게도 카터씨는 김일성의 평화주의적 「대인풍」면모를 소개하는데 심혈을 기울이는듯했다.그 10만감축 제의를 『생각건대 매우 의미있고 역사적인 것』이라고 마음대로 평가하는가 하면 한국전 실종미군유해 송환논의때 김주석은 반대했지만 그의 부인 김성애가 부추기자 결국 동의했다고 전하기도 했다.『그것은 멋진 장면이었고 그녀는 매력적인 여자였다』고 회고한 카터였으니 무엇에 잔뜩 홀렸는가 의심이 안가는바도 아니다. 이른바 10만 감군의 위장평화제의가 언제적 얘기였는가 따져볼 일이다.과거핵이 의심스럽고 현재핵의 투명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10만감축제의는 전혀 자신의 「폭력의 역사」를 망각한 또 하나의 평화제스처일뿐이다. 사실말이지 무기를 갖고는 어느 누구도 평화를 운운하지 못한다.맨손의 인간만이 평화를 만든다.평화는 헌장이나 협약 또는 정상회담으로 보장되지 않는다.사람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려야한다. 그래서 전쟁과 평화를 얘기할적에 「좋은 전쟁」이니 「나쁜 평화」니 하는것은 의미가 없다.전쟁은 전쟁이고 평화는 그냥 평화일뿐이다.돌아간 카터씨가 감군과 미군유해송환 「미담」을 전했을때 우리 주변에서 들린 얘기들이 『이제 평화다.남북한 정상이 만나고 군대가 줄고 미국과 북한이 잘 나가는데 무슨 전쟁인가』였다.사실이 그렇다면 나쁘지않다.그런데 그것이 바로 또다른 하나의 「평화의 허구」이다. 이데올로기의 전쟁속에서 살아남기위해 삶이 얼마나 처절해야하고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하는 인간의 변신과 고민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6·25전야의 텔레비전드라마는 말해줬다.한 젊은 대학강사가 피란을 가지못하고 서울에 남아 전쟁의 참상을 기록한 내용을 다시 꾸민 「역사 앞에서」가 그것이다.역사는 무엇이며 사람들은 왜 역사앞에 서야하는가를 알려준다. 카터씨를 만났던 북한주석이 정상회담을 전후해서 할일이 있다.양쪽에 움켜쥐고있을 수 있는 핵주먹을 활짝 펴보이라는 것이다.44년전에 일으킨 전쟁의 죄과를 시인하고 사과한다면 더욱 당연하다.다시 역사앞에 서라는 것이다.
  • 6·25 44돌… 학도병 참전 용사들의 회고 특별대담

    6·25때 홍안의 미소년으로 전장을 누볐던 학도병들은 몇차례 강산이 바뀌는 세월속에서 이제 이순을 넘긴 노년의 옛전사로 변했다.하지만 이들의 가슴속에는 동족상잔의 아픔이 지금도 어제일처럼 살아있다.포연의 전장에서 불퇴전의 용기로 살아남은 유성덕 서울대광고교장(63)과 정년탁대한학도의용군회 총본부 전회장(63)의 대담을 통해 그날을 되새기고 오늘날 젊은이들이 가져야할 자세등을 되짚어본다. ◎“펜대신 총으로…” 5만여명 구국전선에/조국사수 일념에 사격훈련만 받고 전투/곳곳서 맹활약… 포항선 71명 장렬한 산화/“자유만끽” 요즘 젊은이들,기성세대의 체험 곱씹어 보아야 ▲유교장=사실 저는 의식적으로 6·25를 기억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하지만 또 한시도 기억에서 떨쳐버리지 못하는게 바로 6·25지요.중학6년(18세)때 학도병으로 자원해 나갔다가 온 몸을 크게 다쳐(왼쪽 손가락 4개와 오른 손가락 2개,양쪽 발가락절단,발뒤꿈치 골수염) 지금도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하는 불편한 상태입니다.하지만 해방이후 북쪽의공산당이 싫어 평양에서 단신으로 내려와 학도의용병으로 참전해 죽을 고비를 넘긴끝에 이렇게 자유로운 세상에서 교육자로 평생을 지내고 있으니 그래도 행복한 편이라 생각합니다. 6·25발발 직후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할 당시를 생각하면 우리 남쪽은 정말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이었지요.북한군에 밀려 대구와 부산만 겨우 남아 있었으니까요.피란지인 부산에서 중학교 영어 실력이지만 미군부대에서 일하다 학도의용군을 모집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50년 8월 초쯤으로 기억됩니다.어린 나이였지만 「펜대신 총을 들어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자」고 모두들 나서는 분위기였습니다.전투에 나가 더이상의 북한의 공세를 막아야한다는 생각에 미군부대에 보고도 않고 곧바로 의용병모집 장소로 달려갔습니다.함께 지원한 2백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경주에서 3일동안 사격훈련을 받고 안강전투에 참가했지요.갑자기 모집한 학도병이고 보니 복장도 교복차림에 군복,미군작업복등 각양각색이었어요.우리가 배속된 부대가 김석원준장(작고)이 이끄는 수도사단이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당시 학도병들은 일정지역에 모아 부대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지역별로 모이는대로 그때 그때 전투지역으로 보냈지요.그만큼 병력은 부족하고 전황은 다급했다는 이야기지요.정회장도 학도병에 자원할 당시 중학생이셨지요. ▲정전회장=저는 중3때 광주지역에서 학도병으로 참가했어요.사실 호남지역에는 6·25이전에 이미 빨치산등 좌익세력이 적지않았어요.학교에도 좌익에 물든 사람이 꽤 있었던걸로 기억합니다.학생은 물론 선생까지 좌우로 갈라져 있었어요.어린 눈에 좌익분자들이 사람을 백주에 죽이는것을 보고 까무러쳤습니다.좌익학생들의 연대파업등을 수없이 보았습니다.그래서 전쟁이 발발하고 학도병을 모집한다고 하니까 공산당의 폐해를 피부로 경험한 학생들이 너나없이 몰려나갔지요.4일동안 간단한 사격훈련등을 받고 12사단에서 배속돼 주로 태백산과 노령산 일대에서 전투를 했었죠.훈련받을 때 총이 모자라 인민군의 딱총도 함께 사용했던 기억이 납니다.어릴때 공산당의 잔학상을 보아왔던 때문인지 사람이 죽는다는걸 별로 무섭게 느끼지도 않았던것 같아요.안강전투는 대단했다면서요. ▲유교장=지금생각해도 정말 대단했습니다.우리로서는 더이상 밀리면 부산·대구까지 내주어야 하니까 몸으로라도 끝까지 사수해야하는 마지노선이었어요.죽거나 부상당해 후송되는 학생들 말고는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었습니다.당시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학도의용병의 사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지요.학도병들의 용기는 현역병을 훨씬 능가했습니다.살아남겠다는 생각없이 그야말로 물불을 가라지 않고 싸웠다는 표현이 꼭 들어맞을 겁니다.지금생각해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나 싶어요.형산강을 피로 물들이고 일주일여 사투를 벌이니까 북한군이 물러서기 시작하더군요.이후 포항탈환작전에 참가,시가전을 벌였고 고성,함흥등 북으로 북으로 올라갔습니다.포항 시가전에 참가했을때 어느 중학교에는 인민군과 우리 군과 학도병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기도 했습니다.결국 그들을 포항에서 물리친 것이지요.북진이 계속되고 김일성이 다급해지니까 중공군에 도움을 요청,이른바 중공군의인해전술이 시작돼 우리는 다시 남으로 밀리게 됐지요. ▲정전회장=교장선생님도 지적하셨지만 당시 학생들의 전의는 대단했습니다.군대 안가려고 일부러 손가락까지 자르던 일부 징집대상 젊은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피끓는 울분을 토로했던 기억이 납니다.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에서 언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한마디로 애국심으로 똘똘 뭉쳤지요.죽음을 초월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이런일도 있었어요.태백산자락 어느 전투에서 북한군과 밀고 밀리는 전투를 벌였어요.어느 지점을 며칠만에 지나는데 태극기로 자신의 얼굴을 덮고 반듯이 누운 한 젊은이를 발견했어요.죽은 줄알고 다다가 보니 목숨이 붙어있더군요.전투중에 실종된 학도병이었습니다.이 친구는 부상을 당해 낙오가 되고 기력이 떨어져 움직일 수 없게되자 가지고 있던 총을 인민군이 사용할 수 없도록 완전히 분해해 버리고 태극기로 얼굴을 가리고 죽음을 기다린 것이지요. ▲유교장=당시 학병들의 참전은 아군의 전투력증강에 상당한 보탬이 된것으로 압니다.정회장은학병모임일도 보신걸로 알고 있는데요. ▲정전회장=대한 학도의용군회 회장을 여러해 맡았습니다.학도의용군은 50년 6월 전쟁발발때부터 51년 4월 이승만대통령이 복교령을 내리기 직전까지 전쟁에 참여했던 학생들로 중학생과 대학생들로 구성됐었습니다.50년 6월28일에 피란가던 서울시내 각대학 학도호국단 간부 2백여명이 수원에서 합동비상학도대를 조직한 것이 시발이었습니다.이후 각 군소재지 학교에서까지 이들이 결성돼 눈부신 활약을 벌였어요.군번도 없고 계급도 없이 말입니다.5만여명 정도가 참전했고 7천여명이 전사했습니다.당시 정규군병력이 15만에도 못미치는 상황이었으니 규모면에서도 대단한 것이지요.그중에서도 중학생이 가장 많았습니다.1·4후퇴때는 북한에서 2천여명의 학생들이 넘어와 참전했었고 부산지역의 학생 7백여명은 유엔군에 편입돼 일본에서 훈련을 받은뒤 다시 돌아와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었죠.가장 비참했던 전투는 포항전투로 1기로 참전했던 3사단 학도의용군 71명 전원이 이름없는 고지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역사적으로 학생들의 애국심이 이처럼 높았던 나라는 이스라엘과 우리나라외에는 없다고 외국전문가들도 이야기합디다. ▲유교장=학병들의 정신은 지금도 면면이 내려온다고 생각됩니다. ▲정전회장=그렇습니다.지금도 국립묘지에 가보면 6·25당시 어린 나이에 나라를 지키겠다고 참전했다가 목숨을 잃은 학도의용군들의 묘역이 있습니다.지금도 당시 같이 전투에 참가했던 동료들을 만나면 그때의 이야기들을 하곤 합니다.당시 장성들을 만나도 학도병들의 애국심과 용기를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제가 보기에 학생운동의 맥은 일제시대의 광주학생운동과 해방직후 반탁반공운동,4·19의거,그리고 6·25때의 바로 이 학도의용군으로 이어지지않았나 생각합니다.역사속에 면면이 흐르고 있는 피끓는 젊은이들의 애국심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은 당시 절박했던 상황이나 목숨을 초개같이 던진 선배들의 정신을 너무 모르는 것같아 안타깝습니다.세계적인 변화속에서 반공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것도 어딘지 모르게 안쓰럽고요. ▲유교장=독사에게 물려본 사람만이 독사가 무서운 줄 알듯 전쟁을 겪은 사람만이 전쟁의 고통과 공포를 알 수 있지요.자유역시 마찬가집니다.자유를 빼앗겨본 사람만이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습니다.요즘 젊은이들은 민주화 민주화하면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지만 진정 자유가 박탈된 상태,전쟁이 주는 공포는 체험해 보지 못했습니다.기성세대의 뼈아픈 체험을 한번쯤은 곱씹어 보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기성세대를 무조건 이해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가슴에 담고 올바른 생각을 갖고 자신들의 포부를 펴나가라는 것이지요.일제와 6·25를 겪으며 고난의 역정을 걸어온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에게 부인의 대상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열어나가는 좌표로 인식돼야합니다. 학생들이 사회의 모든 일에대해 지나치게 간여하거나 간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정치는 정치인에게 국방은 군에 맡기고 학생은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다해주길 바랍니다.또 국민역시 각성해야 할 부분이 적지않다고 봅니다.지난 현충일 연휴때 나들이 인파로 주요도로가 모두 만원을 이뤘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날의 어려움을 모두 잊지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전회장=지금 북한의 변화는 김일성의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니라 주변국들의 정세에 맞춰 겉모습만을 바꾼 것뿐입니다.그런데도 학생들이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고 폭력시위를 벌이는 것을 보면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나름대로 애국심을 가진 행동이라고 주장할지 몰라도 북한과 김일성을 찬양하는 학생운동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시대에 맞게 어른들과 선배들의 충고에도 귀기울일줄 알아야죠.통일에 대한 문제는 각계각층의 의견을 고루 반영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6·25」 3년1개월간 인명·재산피해

    ◎군인·민간인 258명 사망·실종/장애자·미망인·고아 등 전재민 5백망/항만1백곳·교량 3백12㎞ 완전 파괴/주택·학교·병원·공장 등 63곳 초토화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1개월동안 계속돼 막대한 인명·재산피해를 냈다. 남북한군은 물론 연합군등 수백만명과 민간인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거나 한 부상을 입어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또 산업·생산시설이 모두 파괴돼 휴전뒤 남북 주민들이 헐벗고 굶주리며 전쟁복구에 땀흘려야만 했다. 우선 군인의 피해를 보면 한국군은 전쟁중 14만9천5명이 전사하고 71만7천8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3만2천2백56명이 실종됐다. 또 포로로 붙잡힌 사람은 9천6백34명으로 한국군 전체의 인명피해는 1백만여명에 이른다. 또 한국군을 돕기 위해 참전한 유엔군은 5만7천6백15명이 전사하고 11만5천3백1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실종과 포로는 8천8백97명으로 집계돼 유엔군의 피해는 18만여명에 달했다.이중 대부분은 미군으로 전사 5만4천2백46명을 비롯,부상 10만3천2백84명과 실종·포로 5천5백29명등 16만여명이다. 공산측의 피해는 더욱 커 북한군은 29만4천명이 전사하고 부상 22만6천명,포로 11만2천명등 모두 63만2천여명이나 되고 중공군은 전사 18만4천명,부상 71만6천명,포로 3만1천명등 93만1천여명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산가족 1천만 이같은 군인피해에서 사상자수만 따로 떼어내 보면 유엔·한국·북한·중국군을 통틀어 사망 41만4천여명,부상 1백77만4천여명등 모두 2백18만8천여명이다. 6년동안 계속된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사상자가 일본 6백46만명,미국 1백7만명이었고 14년간 계속된 월남전에서 1백90만명의 사상자가 생긴 것과 비교했을 때 3년여의 비교적 짧은 기간에 치러진 한국전쟁이 다른 전쟁과 상대적으로 비교해 얼마나 치열했었나를 입증하고 있다. 민간인들의 희생과 피해는 더욱 엄청나다. 남한의 경우 민간인 사망 24만4천여명,학살 12만8천여명등 37만2천여명이 귀중한 목숨을 잃었고 부상 22만9천명,납치 8만4천명,행방불명 30만명등 모두 99만1천여명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집계됐다. 또 전재민 3백62만명과 미망인 50만명,불구자 33만명,결핵환자 1백만명,전쟁고아 10만명등 무려 5백55만여명이 전쟁후유증으로 고통을 겪었다. 당시 2천50만명 정도였던 남한인구의 4분의 1정도가 직접적인 전쟁피해를 입은 것이다. 특히 6·25전쟁은 「게르만민족의 대이동」보다 더많은 민족의 이동을 불러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란한 남북이산가족이 1천만명에 이르는 등 지금까지도 전쟁의 깊은 상처가 가시지 않고 민족적인 비극으로 남아있다. 서울의 경우 49년 6월 1백43만명이던 인구가 52년 3월 67만명으로 추계돼 전쟁으로 76만명이 피란살이를 떠나 돌아오지 않았거나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남한의 총인구는 55년 1천8백92만여명으로 전쟁전보다 1백만명 이상 감소됐다. ○재산피해 40조원 6·25전쟁으로 인한 재산피해는 50년도 불변가격으로 약 4천억원이었으며 이를 93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무려 4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계산됐다. 당시 재산피해 내용을보면 민간가옥 61만호,각급학교 4천23개교 15만4천여동,경찰관서 1천9백여곳,행정관서 2천7백여곳,의료기관 1천5백여곳,금융기관 1천1백여곳,종교단체 8백여곳,생산업체 1만3천여곳이 파괴됐다. 또 기간시설을 보면 항만은 1백개소가 파괴됐고 철도 3백29㎞,교량 3백12㎞,전선 61㎞등이 끊겨 전국토의 도로망과 통신이 완전 초토화 되었다. 이같은 사회간접시설등의 파괴로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전쟁발발 당시 56달러에서 전쟁이 끝난 53년에는 67달러로 겨우 11달러가 증가하는데 세계최빈국 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또한 전쟁통에 물가는 천정부지로 솟구쳐 예를들면 전쟁직전 5백30원하던 어떤 물건의 경우 51년 그 값이 2천1백28원으로 4배나 껑충 뛰어올랐고 52년에는 다시 2.5배 오른 5천2백43원으로,53년에는 7천6백18원으로 급상승했다. 전쟁전과 종전직후를 비교하면 물가는 3년만에 무려 14배가 오른 셈이다. 그러나 이같은 물가상승은 휴전협정이 체결된뒤에도 계속돼 54년에는 73%,55년에는 57%등의 놀랄만한 인플레율을 보인 바람에 민생고가극에 달했다. 당시 주요 공업생산규모를 보면 면직물은 50년 1백34만필생산에서 전쟁이 끝난 53년 생산량이 27만필로 4.9배가 줄었고 시멘트는 1만t에서 2천여t으로 4.3배,전깃줄은 1백78t에서 50t으로 3.6배나 줄어들었다. ○담배소비만 급증 그러나 담배만은 유일하게 생산량이 늘어 연간 4백11만개비보다 무려 1백76배 급증한 7억9백53만개비를 생산,생활고와 전화에 시달린 나머지 국민들이 엄청나게 담배를 피워댄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만일 제2차 한국전쟁이 발발할 경우 최신무기의 엄청난 파괴력으로 미루어 인명과 재산피해는 이루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다시는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은 한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절대명제이다.
  • 백령도에선 지금/이기백(데스크시각)

    인천에서 1백73㎞,평양에선 1백40㎞­.서해 최북단 백령도는 북한 옹진곶의 월래도와 육도,북의 해군기지 구미포가 12㎞앞 지척에 보이는 실향민의 섬이다. 더욱이 북한의 전진기지인 풍천비행장에서 미그 23기가 떴다하면 2∼3분안에 도달하기 때문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곳이다. 우리로서는 서해 최북단 전략지역이지만 북한으로서는 자기네 안마당에 버티고 서서 안방과 사랑방의 동정을 엿보는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다. 한참 북한핵문제로 전쟁발발의 위기감이 나돌아 뭍에서는 식량과 연료 사재기 바람이 일던 지난 주말 전쟁이 나면 북한이 제일 먼저 「본때」를 보여줄 이 섬을 찾았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주민들과 해병장병의 얼굴에서는 불안·동요나 긴장감을 찾아 볼수 없었다.너무 태연한 일상생활에 실망감이 들 정도였다. 마침 이곳 특산물인 까나리 어획철이라 주민들은 해변에서 삼삼오오 어망을 손질하고 잡아온 까나리에 소금을 뿌려 젓갈 담는 작업에 열중했다. 섬 10시방향 두무진포구 모래사장에선 어부 10여명이 북쪽바다를가리키며 목청을 높였다.『간밤에 중국어선들이 어망을 끊고 달아났습니다.이젠 고기잡이도 못해 먹겠습니다』 1·4후퇴때 풍천에서 피란와 주저물러 앉았다는 이원배씨(57·두무진 1048)는 『기자선생,어떻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라며 하소연을 한다. 정말 답답하다.남북상황이 긴박하면 중국어선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해상분계선을 줄타며 말그대로 어부지리를 한다.물반 고기반 어장에 남북한 어부들이 접근할 수 없는 현실을 악용,고기들을 마구 퍼담는다. 「백령도의 명동」이라 불리는 진천리는 섬 인구 4천3백여명중 1천7백여명이 사는 제법 갖출것 다 갖춘 평범한 읍내.주민들의 속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오가는 몇사람을 붙들고 「삶」을 물어 보았다. ­고속 여객선도 좋지만 데모크라시호로 인천까지의 편도 요금 3만6천원은 너무 비싸다. ­유일한 병원인 적십자 병원이 연 2억원의 적자를 핑계로 곧 문을 닫는 다는데 그래도 되는가. ­무공해 지역에 최근 관광객이 늘면서 공해문제가 심각한데 도시인들은 나갈때 가지고 온 물건과 쓰레기도갖고 나가야 합니다. 이들의 목소리는 진솔한 「삶」의 문제들일 뿐 전쟁 공포심을 엿볼 수 없었다.주민들의 60%가 장단·연백등 황해도 출신 피란민인데다 90%가 기독교신자들이라 이들의 안보태세는 확고했다.조그만 섬에 교회가 12곳,성당이 2곳이나 된다.주민들 대부분이 해방후 기독교인에 대한 북한의 탄압에 저항,1·4후퇴때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곳에 정착한 6·25 청교도들이라고나 할까. 『백령도 방어는 사수개념입니다.전쟁이 나면 적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될테고 더 이상 피할데가 없는데다 개전초에는 뭍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어 이 섬에서는 민과 군이 공동운명체 입니다』 이곳 방어를 책임지고 있는 해병여단장은 『유사시 민간인들까지 군방어 진지에서 함께 버틴다는 「민관사수」개념때문에 뭍에서의 사재기 현상이나 평화무드란 없다』고 설명한다.처변불경이 일상생활화 돼 있는 이곳의 분위기는 뭍에서 온 사람에게 많은 생각을 나게했다. 인천으로 가는 해군 고속순찰함을 향해 손을 흔들어 배웅하는 해병들의 얼굴에는 「필사즉생,필생즉사」의 충무공 정신이 넘쳐 흘렀다.이들이 이곳에 있는한 뭍사람들의 전쟁 공포심은 기우일 뿐이리라….
  • 1994년6월 서울과 평양/황병선(데스크 시각)

    『서울에 별일 없습니까?』 북핵사태로 하루에도 수차례 국제부 데스크에 국제전화를 걸어 상황보고 또는 기사 송고를 하는 파리의 특파원이 오늘아침에는 보고에 앞서 다급한 목소리로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현지 TV에 서울시민들이 슈퍼마켓에 몰려들어 쌀·라면·휴지등 온갖 생필품들을 사재기하느라 난장판을 이룬 모습이 방영됐다는 얘기였다. 이번엔 워싱턴특파원의 보고다.CNN­TV가 서울과 평양의 「대조적」 분위기를 보도하고 있는데 북한당국으로부터 어렵사리 입북허가를 받아낸 때문인지 평양거리는 전쟁과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평화적인 모습이라고 화면없이 전화 현장리포트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이어 TV화면은 서울로 옮겨져 15일의 민방위훈련을 앞두고 14일 서울역앞 대우빌딩에서 있었던 예비훈련모습을 생생하게 비추고 있다는 것이다. 연막탄들이 요란스레 터지고 빌딩에서 시민들이 대피하고 또 일부는 들것에 실려 후송되고 하는 모습은 매우 조용하다는 평양의 리포트 분위기와는 대조를 이뤄 마치 한국쪽이 전쟁을 부채질이라도 하고 있는양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이 워싱턴특파원의 보고였다. 언제는 조용하기만한 서울의 모습,한국민의 전쟁위기 불감증이 놀랍다고 호들갑을 떨던 미국,서구언론들이 이번엔 상황의 본원적 문제보다 피상적 분위기에 앵글을 맞춰 다시 한번 요란을 피우고 있는것 같다.그럴테지.생필품 사재기나 화생방훈련 같은 장면들이야 말로 TV화면용으로 제격이 아니겠는가.그들에겐 적정규모의 전쟁이라도 터져준다면 더 좋은 그림감이 되는 셈이다. 한민족이 어쩌다 이렇게 모질게 맞대거리를 해가며 세계의 구경거리,두통거리 노릇을 하게됐는지 한탄만 하고 앉았을 수도 없는 일이다.보스니아·르완다,그리고 남북예멘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보도에 이어 이제 한반도가 세계뉴스의 초점이 될만큼 긴박한 상황에 놓인 것은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일의 주역은 물론 정부당국일수 밖에 없다.그러나 현대전은 총력전이라는 점에서 민의 역할은 결코 소홀히 취급될 수 없다.그런데 외국언론에 비친 일부의 사재기 장면,그와는 정반대인대다수의 지나칠 정도의 태평스런 모습,양쪽 모두의 저변에는 현상황에 대한 민의 처절한 불안감·무기력감이 깔려있음을 보게된다. 최악의 경우 정말 전쟁이 터지는 것이나 아닌지,그럴 경우 당장 피란이라도 가야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현대병기가 동원될 전쟁양상이 6·25때와는 판이하게 다를텐데 무슨 피란.이런 상념끝에 스스로 『김일성이 미치지 않고서야 전쟁을 일으키려고』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아예 무대책으로 현실을 외면해버린 민의 얼굴도 보인다. 이래서는 안된다.지나친 위기의식이 국민들을 패닉상태로 몰아가지 않을까를 우려하는 것은 당연하다.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현재 상황을 냉정하게 국민들에게 알리고 최악의 경우까지도 상정하고 흔들림없이 대비하는 정부의 모습을 보여주어 신뢰감을 확보해야 한다.그런뒤 비상시에 민쪽에서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할 일들을 미리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알려주어야만 한다.그래서 만약의 경우 군과 민이 효율적으로 힘을 모을수 있도록 대비해야 한다. 외신에 평화스럽게 비친 평양은 주민들의 전시동원체제가 생활화 돼있어 조용할수 있는 것이다.반면 연막탄과 들것,그리고 구급차등 요란스럽게 비쳐진 서울의 실질적 대비수준은 어느 정도일지.그동안 전화번호부 뒷구석신세였던 「전시국민행동요령」이 반상회를 통해 국민들에게 전달될 예정이다.그러나 솔직히 반상회자리가 수박겉핥기식인 형식적으로 끝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6·25 44주년을 열흘 앞둔 15일 「북핵무더위」속에 요란스레 사이렌이 울리고 10분만에 민방위훈련이 끝나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행인들을 지켜보며 이것이 실제상황이라면 그들이 그뒤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상상해본다.10분만에 끝날 전쟁은 없다.지구상의 어떤 자유민주주의 국가도 안보는 항상 최악을 상정해 철저하게 대비한다.
  • 「비상시 행동요령」 알아둡시다/27일 반상회때 책자배포

    ◎집에서 방송듣고 정부지시 따라야/생필품 사재기말고 배급제 활용을 「장거리미사일개발과 차량홍수로 무작정 피란은 오히려 화를 자초하니 유사시엔 집에서 방송을 들으며 정부의 안내에 따라 행동하여야 한다」 「식량·연료등 생활필수품의 사재기를 하지 않고 배급제실시에 적극 협조하여야 한다」 내무부는 15일 최근 북한의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탈퇴등으로 남북간 긴장상태고조와 관련,「비상시 국민행동요령」을 마련키로 했다. 지난 83년 전쟁을 가상해서 만든 「전시국민행동요령」을 근간으로한 새로운 「비상시 국민행동요령」은 20쪽(표지포함)짜리 소책자로 6·25때의 참상사진과 만화를 곁들이게 된다. 내무부는 이 소책자를 2만여부를 제작,전국 공공기관등에 비치하고 주요 내용을 발췌,요약한 유인물 1천여만장을 오는 27일 6월 정례반상회에서 각 가정마다 한장씩 배포키로 했다. 「우리의 현실」과 함께 ▲전쟁이 일어났을때 상황 ▲비상시 국민행동요령 ▲비상시에 대비하여 준비해야 할 물자등 크게 4항목으로 되어 있는 이번 새로운「비상시국민행동요령」은 화생방전에 대한 행동요령이 크게 보강됐다. 새 행동요령은 「핵폭발시는 웅덩이·담벽등 엄폐물을 이용해 핵폭발 반대방향으로 신속히 엎드려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핵폭풍이 완전히 멈춘후 일어나고 낙진이 예상되면 방독면을 착용하되 가급적 실외활동을 금한다」고 명시했다. 종전에는 전쟁이 일어났을때 「모든 국민은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국군을 도와 적과 싸우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다」고 명시했었으나 최근 차량홍수를 의식,「6·25때와 같은 무작정 피란은 안된다」고 못박았다. 「국민행동요령」은 비상용물자를 생활필수품,가정용 비상약품,화생방전 대비물자,공동준비물자등으로 나눠 자세히 소개하면서도 「생필품사재기를 하지 않고 배급제실시에 적극 협조하여야 한다」고 명시,최근 일부층의 사재기를 경계하고 있다.
  • 북핵긴장속 안보불감증 진단 긴급 좌담

    ◎“위기상황 치밀·냉정하게 대처를”/시민생활 평온,안보의식 해이와 달라/국민적 자신감·유사시 결집력 믿어야/과도한 압력땐 북,우발적 오판 가능성/냉철한 정세파악·최악상황 대비 필수/언론의 전쟁시나리오 보도 자제… 정확한 정보 제공을 □참석자 홍성유씨 작가 하용출씨 서울대교수·외교학 송정숙씨 전보사장관·서울신문 고문 북핵제재문제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고 전쟁위기설까지 제기되는 상황에서 우리 국민들이 「설마 전쟁이야 일어나겠느냐」며 행락을 즐기고 태평스럽게 보내고 있는데 대해 걱정하는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6·25를 경험한 「비극은 없다」의 작가 홍성유씨,전후세대인 서울대 하용출교수(외교학),서울신문 고문인 송정숙 전보사부장관의 좌담을 통해 이러한 「안보 불감증」에 대해 진단하고 어떻게 대비하는 것이 바람직스러운지 의견을 들어보았다. ▲송정숙고문=핵문제로 유엔안보리에서 대북제재 방안이 논의되는 등 국제사회의 움직임이 긴박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6·25 44돐이 11일 앞으로 다가온 이시점에서 전쟁위기설마저 감도는 현 상황을 보는 우리의 민심동향을 점검하고 소망스러운 국민적 자세는 어떤 것인지 한번 짚어보는 것은 퍽 의미있는 일일 것 같습니다. ▲홍성유씨=저는 대학 3학년 때 6·25를 맞았습니다만 지금 운위되고 있는 안보불감증이 그 때도 있었습니다.38선을 경계로 한 산발적인 무력 충돌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6·25가 터진 아침에도 흔히 있어온 그러한 충돌이려니 생각할 정도로 해이해져 있었던 것입니다.더욱이 당시 정부도 전쟁이 터지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고 호언해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우리가 금방 이길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습니다.그러나 막상 전쟁이 나자 2·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습니다. 요즈음 우리 국민들은 그런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국민 다수가 안보불감증에 빠져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송고문=북한핵 문제가 심각한 국면에 접어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 국민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자신감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요,아니면 그만큼 해이해진 결과로 봐야 할까요. ○6·25때도 안보불감 ▲하용출교수=저는 그 문제를 논하기 전에 우선 안보의식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따져봐야 한다고 봅니다.흔히 안보의식이 해이해졌다고 하는 분들은 6·25의 참혹상을 떠올리면서 미리 대비하지 않고 설마하고 있다가 급습을 당했다는 생각과 더불어 국제적 냉전 상황에서 체질화된 것처럼 군사차원에서 긴장감속에 한눈을 팔아서는 안된다는 식의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그러나 지금은 안보의식 개념 자체가 변화하고 있습니다.국내적으론 경제성장의 결과로 과거 20여년동안 우리가 북한보다 우세하다고 정부가 강조 해 왔기 때문에 국민들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국제적으로도 탈냉전이 5∼6년 지속되어 왔습니다. 새로운 상황에 맞는 안보관이 형성되지 못한 과도기에 북한핵 문제로 어려움을 맞고 있습니다만 아무리 안보의식을 강조하더라도 과거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따라서 안보의식이 해이해졌다고만 할 게 아니라 새로운 안보관부터 정립할 때라고 생각합니다.안보논리만 무작정 주장하기보다는 경제적 변화에 맞는 안보논리를 갖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홍씨=동감입니다.저는 그 방면의 전문가는 아닙니다만 경제문제가 우위에 서면 국방력도 자연적으로 강화되리라 생각합니다.또 안보의식이 해이해졌다고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은 6·25 때도 그랬습니다만 막상 닥치면 맨주먹으로라도 일어서는 국민성을 갖고 있습니다.정치적으로 잘한 일이라고 하는 얘기는 아니기 때문에 오해가 없기 바랍니다만 과거 평화의 댐 건설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아이들까지 저금통을 털었던 것을 보았지 않았습니까.때문에 국민들이 요즈음 연휴다 해서 놀러들 다니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보면 그것은 일상생활을 그대로 하는 것이고 막상 위기가 닥치면 그렇게까지는 하지않으리라 봅니다. ○동요 징후없어 다행 ▲송고문=미국 등 외국에선 오히려 한국 여행을 않으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일부 유학생을 둔 집에서는 별일이 없겠느냐는 국제전화도 받곤 한다는 얘기도 들리는데 국내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태평스럽게 생각해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하지만다른 한편으로는 이렇다 할 동요도 없고 사재기하지도 않는 것을 보면 다행스럽게 여겨집니다.세대간 안보의식에 어떤 차이점은 없습니까. ▲하교수=안보의식의 해이를 너무 세대차이로 몰고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흔히들 신세대는 6·25나 경제적 궁핍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안보의식이 해이해졌을 것이라고 보지만 대부분의 젊은층은 강한 민족주의의 바탕 위에 서 있으면서도 북한체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안보관을 정립하는 데는 국민의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고 국내적 갈등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사회분위기와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선결 과제입니다.그런 바탕 위에서 정부는 북한이나 주변 국제정세에 대해 깊고도 정확한 정보를 공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언론의 역할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이같은 관점에서 북한핵 제재와 관련해 언론이 외국의 한반도 전쟁 시나리오를 여과없이 보도하고 있는 것이 바람직스러운지 적지않은 의문이 생깁니다.또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가 가장 큰 피해자가 될텐데 과연 우리의 이익을 대변하는 메시지를 외부로 내보내는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반성할 대목입니다. ▲송고문=안보의식을 세대간의 문제로 얘기해선 곤란하다는 지적에 공감합니다.하지만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상처를 더 아프게 기억하게 마련이라는 점에서 전쟁 등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세대와 달리 기성세대가 북한에 대해 복합적인 감정이나 노파심을 더 갖고 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물론 정치적으로 어두었던 시대에 안보의식을 국내정치에 악용했던 전례가 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위기상황을 강조하면 의구심을 갖는 국민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하지만 지금은 과거와는 다르므로 정부도 그런 의식을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전쟁예상 시기상조 ▲하교수=북한핵과 관련한 현상황이 협상단계에서 제재국면으로 넘어간만큼 대단히 심각한 상황인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전쟁 가능성을 내다볼 수 있는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홍씨=저는 고립된 북한에 대해선 너무 몰아붙이면 우발적인 오판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더욱이 북한의 인민들도 워낙 극한상황에 몰려 있기 때문에 『이러다 죽는거나 저러다 죽는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최악의 상황이 와선 안되겠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해 만반의 대비는 하고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송고문=북한이 모든 제재는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겠다고 호언한 이후 국민들 일각에서 불안감이 일고 있는 것 같습니다.물론 제재가 실행되더라도 단계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지금은 위기를 느낄 상황은 아니라는 지적이 있었습니다만 예측 논리의 허점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닐까요.과거 이라크가 전쟁을 벌였을 때도 이론적·논리적 분석에 따르면 도저히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상황이었음에도 어쨌든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하교수=우리는 겉으로는 여유를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단단히 대비하는 양면대응의 경험이 없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전쟁이 일어나면 남북이 모두 어려운 상황을 맞을 게 뻔하므로 전쟁을 기본적으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당위론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그러나 남북간에 상호불신이 있는한 나름대로 대비를 하고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그러나 대비상황을 너무 밖으로 강조하다보면 부작용만 노출되므로 냉정하고 평온하게 대비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홍씨=전쟁이 일어나면 어차피 남북이 모두 쑥대밭이 될텐데 예전처럼 제주도나 부산으로 피란가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그런 차원에서 저는 주가도 폭락하지 않고 국민들이 평상시처럼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슬기롭게 대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송고문=참된 안보의식을 확립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가 항상 국민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신뢰를 주는 것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을 것입니다.그러나 얼마되지 않는 소수의 학생들입니다만 한총련과 같은 국민적으로 합의되지 않는 분열된 주장을 펴는 집단이 있는데 이는 어떻게 설명해야 될 까요. ○대부분 학생은 건전 ▲홍씨=그런 집단이 있는 것은 사실이입니다.그러나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지도층이나 정치권에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옹호하고 두둔하는 세력들이 침투해 있다는 것입니다. ▲하교수=저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건전하고 캠퍼스 분위기도 급속도로 향상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때문에 정부가 북한핵문제로 빚어진 상황이나 보수적 분위기를 이용해 이들 극소수의 학생들을 몰아붙이려 한다면 오히려 부작용이 생길 것으로 우려합니다.독일에 나치당이 다시 부활하고 일본에 극우세력이 존재하듯이 어떻게 보면 반체제 세력이 존재하는 것이 민주사회의 상징일 수도 있습니다.따라서 비상시국이든 아니든 정상적인 법테두리 안에서 모든 사람이 납득할 수 있도록 법집행 절차를 밟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송고문=우리 국민이 일단 유사시에는 슬기로운 역량을 발휘한다는 데 공감대가 이뤄진 것 같습니다.정부도 이같은 슬기로움을 잘 이끌고 갈 수 있도록 필요하고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제공하고 올바른 방향도 제시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다만 북한핵 문제로 인해 우리가 위기상황을 맞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만큼 우리 국민의 합의된 생각이 단단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대북 전략상 바람직 할 것입니다.그런 의미에서 조금은 근신해 우리의 생활을 자제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지적할 수 있을 듯 합니다.
  • 주한 미민간인 등 소개훈련/「NEO」 참가 30% 늘어 관심

    ◎성조지,5월훈련 결과 보도 북핵문제로 한반도에 위기의식이 감도는 가운데 주한 미국인들이 최근 유사시 철수훈련에 큰 관심을 나타내 시선을 모은다. 미국방부에서 발행하는 「성조지」(스타즈 앤드 스트라이프즈) 최근호에 따르면 주한미군 주최로 열리는 「NEO」(비전투원 소개작전)라는 훈련은 전쟁이 발생할 경우 미국인들을 다른 나라로 피란시켜 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6개월 마다 실시돼 온 것이다. 지난 5월 셋째주(16∼21일) 열린 네오훈련에는 과거보다 무려 30% 이상 많은 미국인들이 참가하고 미상공회의소는 용산 집합지에 처리부서를 따로 설치하는등 어느 때보다 열성을 보였다. 훈련 담당 윌리엄 레이드 상사는 『언론에서 이곳의 위기상황을 강조한 것이 미국인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 같다』면서 『보통 훈련때는 주로 미군가족들이 참가하지만 이번에는 일반인들의 참여가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네오훈련은 남한 전역에서 실시되며 14개 집합장소에 미국인들을 소집한다. 옷가방을 들거나 짐을 싣는 등의 모습은 전혀볼 수 없고 대신 실제 피란 명령이 떨어질 경우 어느 곳으로 가야할 지를 적은 종이쪽지를 받는 것 뿐이다. 20∼30분 정도 걸리는 짧은 훈련이지만 미국인들의 위기감을 어느 정도 완화해주는 효과가 있으며 미군들은 이 훈련으로 그들이 담당해야 할 사람들의 수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미군측 추산으로는 한국에 있는 미국인들은 사업가·선교인·여행가·교사등 총 3만여명 정도이며 이 가운데 2만5천여명이 서울에 몰려 있다.미국대사관측은 다른 외국인들의 안전문제도 책임지겠다고 합의한 바 있어 4만여명이 추가된다. 실제 상황이 닥치면 피란민들은 다양한 교통수단을 통해 남부지방으로 옮겨진 뒤 그곳에서 항공기로 다시 안전한 나라로 옮겨진다.3만여명의 미국인들이 모두 다른 나라로 피란하기까지는 3일이 걸리며 외국인을 합하면 6일정도라 한다.
  • 르완다 정부·반군 휴전협정 시작/격전지속… 임정 해외도피

    【키갈리(르완다) 로이터 AFP 연합】 르완다 정부와 반군은 30일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수도 키갈리의 유엔 사무소에서 휴전협상을 시작했다. 정부 대표인 마르셀 가친지 준장과 반군의 프랑크 무감바게 대령은 이날 협상에서 즉각적인 적대행위 중지를 요구하고 있는 유엔르완다지원단(UNAMIR)의 휴전안을 논의한다. 【키갈리·제네바 AFP 로이터 연합】 르완다 임시정부는 수도 키갈리를 장악한 반군이 피란처인 인근 남부지역으로 진격할 태세를 갖춤에 따라 서부 국경지역과 국외로 도피했으며 40여만명의 난민이 피란길에 나섰다고 외교관들이 29일 밝혔다. 외교관들은 정부각료와 고위관리들이 28일 헬기와 육로를 이용,그동안 임시정부청사로 사용해 오던 키갈리남부 40㎞ 지점의 기타라마에 있는 구공무원대학을 떠나 자이르인근의 서부도시인 키부예와 남부의 부타레 등지로 이동했다고 말했다. 【키갈리(르완다) 로이터 AFP 연합】 르완다정부군과 반군이 30일 수도 키갈리의 유엔사무소에서 휴전협상을 시작한 가운데 반군측은 지타마라마을 인근의 정부군기지를 점령했다고 밝혔다. 르완다반군은 이날 라디오방송을 통해 지타마라마을 인근의 나얀자기지에 있던 정부군을 몰아내고 이 기지를 장악했다고 발표했다.
  • 르완다반군,키갈리 봉쇄/임시수도 연결로 차단… 후투족 고립

    ◎안보리,평화군 5천여명 파병 결의 【나이로비 AP AFP 연합】 르완다의 투치족 반군이 16일 대규모 공세를 재개해 수도 키갈리와 임시정부의 잠정수도 기타라마를 잇는 도로를 봉쇄함에 따라 키갈리는 고립 위기에 처해있다. 이에따라 키갈리와 이곳에서 40㎞ 떨어진 기타라마를 연결하는 고속도로에는 반군의 보복학살을 우려해 피란길에 오른 후투족난민들이 갇혀 있다. 키갈리에 머무르고 있는 유엔대변인 압둘 카비아는 이날 『키갈리는 고립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기타라마로 가는 도로는 반군인 르완다애국전선(RPF)의 공격에 노출돼 있다』고 말했다. 카비아대변인은 RPF가 세갈래 방향에서 키갈리에 대한 완전한 봉쇄에 들어가 수도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고 있으며 기타라마와의 도로를 차단했다고 말했다.
  • 대구 덕산국교 담임 이의환옹과 6학년 1반 「어린이들」

    ◎6·25때 스승에 “재회 카네이션”/9“28 수복때 헤어졌다 90년 극적해후/팔순스승­초로제자 야산수업등 회상 『선생님 부디 오래오래 사십시오』 팔순을 넘긴 옛 국민학교 담임선생님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는 50대중반 초로의 제자들 눈가에는 어느덧 기쁨의 눈물이 맺혔다. 서울에서 피란온 학생들로 구성됐던 대구덕산국민학교 6학년1반 동창 20여명은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둔 14일 저녁 서울 강남구 K한식집에서 당시 담임이던 이의환옹(81)을 모시고 재회를 기뻐했다. 『나보다 빨리 머리가 희어지는 녀석은 내년부터 나를 만날 생각은 아예 말거라』 이옹의 우스갯소리 한마디에 좌중은 금방 웃음바다가 됐다. 이에 뒤질세라 학급의 익살꾸러기였던 강대영씨(56·성림감정원대표)가 그시절 오락시간마다 불러 인기를 모았던 노래 한곡을 불렀다. 『구야 구야 담방구야 어디메서 놀고가냐…』 한명 두명 따라부르다 결국 이옹까지 콧소리로 박자를 맞춘다. 43년전 6·25동란의 와중에서 선생님도 어린 학생들도 모두 헐벗었던 대구 피란시절.모두가일생중 가장 어렵던 때였지만 당시의 스승과 제자들이 만난 이 자리에서 만큼은 모든 기억이 즐거운 화젯거리로 변한다. 경성사범을 졸업하고 서울 매동국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이옹은 피란지 대구에서 서울지역 피란학생들을 모아 만든 덕산국민학교 서울피란분교의 6학년1반 담임을 맡았다. 말만 분교였지 교실조차 마련돼 있지 않아 대구 대봉동의 옛 육군관사자리에 가교사를 짓기전까지는 인근 야산에서 수업을 해야만 했다. 『책상 대신 화판을 무릎에 대고 전쟁터에서 주워온 M1소총과 칼빈소총의 탄약통이 책가방겸 의자역할을 했지만 언제나 소풍나온 기분이었죠』 이제는 모두 장성한 자식들을 둔 가장이 되고 사회적으로도 안정된 기반을 갖춘 초로의 제자들은 그때 일을 되새기며 미소짓는다. 『추우나 더우나 검게 물들인 군복 하나만을 입고 다니면서도 항상 웃음띤 얼굴로 우리들을 가르치던 선생님의 당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당시 반장을 맏았던 김시형씨(55·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의 말에 모두들 잠시 숙연한 표정이었다.서울 염창국민학교 교장직을 끝으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40년동안을 교직에 몸담았던 이옹은 퇴직한 교직자들의 모임인 삼락회에 나가서도 이들 서울피란 대구덕산국민학교 제자의 얘기로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살 때가 많다. 서울 환도전까지 대구의 연합중학교에 같이 진학했던 제자들은 9·28수복후 뿔뿔이 흩어지고 이옹과의 연락도 끊겼다. 그러다 덕산국시절부터 기억력이 뛰어나고 사람이름 외는데 천재라고 소문난 박종필씨(56·사업)가 여기저기 수소문해 당시의 급우들을 찾아내 82년 덕산회를 만들었다. 모임이 결성되자마자 어려운 시절 자신들을 이끌어준 이의환선생님을 찾아나선 제자들은 4년전 총무 장덕진씨(56·맥산산업사장)가 옛 담임선생님을 찾아내 오랜 그리움을 풀었다. 이후 해마다 스승의 날이면 이처럼 스승과 제자들은 한자리에 모여 웃음꽃으로 밤을 지샌다.
  • 운전자의 인격/진형준(굄돌)

    직접 차를 몰고 출·퇴근을 시작한지 이제 채 반년도 안되었으니 나는 운전에 관한한 아직 영락없는 초심자이다.서툰 초심자가 더 생각이 많은 법인지 차를 몰다보면 운전이라는 것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된다.그중 가장 큰 화두가 차와 사람의 한몸 되기 혹은 자동차 인격화시키기이다. 사람을 깜짝 깜짝 놀라게 하는 난폭운전을 목격하거나 서로 멱살을 잡고 티격태격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사람이라는 인격체가 자동차라는 기계속에 숨어버림으로써 거꾸로 평상시에는 드러내지 않았던 동물적 욕망이나 본능을 쉽게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사람들은 자동차라는 기계 안에 숨어버림으로써 일종의 철면피가 되는 것이다. 철면피란 무엇인가? 그것은 얼굴 피부위에 두터운 한 겹의 가면을 덧씌운 상태를 말한다.그 가면을 씀으로써 인간이라는 얼굴을 가지고는 차마 못하던 일을 마구 행하는 일이 가능해진다.그 두터운 가면은 인간으로서의 얼굴을 가짐으로써 그 얼굴 뒤에 숨어있던 동물적·이기적 욕망을 제멋대로 발휘하게 한다. 우리는 성숙된 자동차 문화를 어떻게 정착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나는 교통법규를 정확히 준수하는 습관이 일반화되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자동차라는 것을 그안에 들어가 숨을 수 있는 은닉처,나를 감출 수 있는 가면으로 생각하지 말고 내 몸의 일부분,나의 얼굴 모습의 하나로 인격화시키는 일도 한 편으로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너무 막연한 이야기가 된 감이 있지만 자주 차창 밖으로 자신의 얼굴을 내보인다거나 옆으로 다가오는 자동차의 운전자를 보행중 맞부닥친 사람처럼 좀 친근한 기분으로 찬찬히 살피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우선 문제되는 것은 나 자신이다.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나 자신도 하루에 몇 번씩 그 철가면을 썼다 벗었다 하기 때문이다. 철가면을 쓰고 스스로 위험한 동물적 본능의 화신이 된 채 다른 자동차에 대고 삿대질을 하는,정녕 쑥스러운 스스로의 모습을 벗어버리려는 나 자신의 노력이,솔직히 말하면 급선무이다.
  • 고향/손정박 한국스포츠TV 감사(굄돌)

    요즈음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면 교통문제가 꽤나 화제에 오른다.울분과 비탄,규탄으로 치닫다가 서울의 고속확산,이상비대까지 이르면 자조적 체념이랄까,제풀에 지쳐 슬그머니 딴 얘기로 옮겨가는 게 순서로 돼있다. 얼마전 약속시간에 늦은 친구가 변명삼아 또 그 얘길 꺼냈다.60년대초 대학시절로,50년대 중학시절까지.그러다가 기억 아슴아슴한 6·25전까지 이른다.이쯤 되면 교통이니 뭐 그런건 이미 염두에 없고 눈 가물가물 꿈같은 어린시절 더듬으며 마음 아릇아릇해진다. 그 친구 왈,『나는 고향을 잃었다.5대째 서울토배긴데,서울이 어디있어』물론 타임머신속에서 19 48년경의 서울 정경을 되살리며 하는 소리다.원래 수표교가 놓였던 그 근방 송사리 잡던 얘기며,뗏목 즐펀하던 왕십리 넘어 그 어느곳,수유리 연산군묘를 다녀 온 건 긴 여행이었다는 둥. 그렇다.시멘트 덩이에 덮여 사라진 청계천과 함께 그런 서울은 다시 없다.문득 전쟁통에 떠나게 된 내고향 춘천을 떠올리며 혼자 생각.나도 고향을 잃었을까,서울처럼 천지개벽하듯 바뀌진 않았는데.멱감고 물새 알 줍던 그곳이 의암호 수면 밑에 잠겨버리긴 했지만. 또 한곳,피란살이 정든 통영. 큰 가마솥 가득 무 숭숭 썰어 알배기 통대구국. 갯가로 튀어 올라 달빛 받아 허옇게 펄떡이던 멸치떼. 그런건 감자바위에겐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우리에겐 곱고 애틋한 추억이 일그러지긴 했지만 아무때나 확인할 수 있는 형해로는 남아 있다. 비록 그 고향땅은 아닐지라도 마음따라 언제라도 찾을 수 있는 곳에 할머니 어머니가 묻혀 있다. 몇년전 추석때 시골 우리집에 불청객 여러명,북녘땅 두고 온 부모님들 제사 모시고 성묘갈 곳 따로 없어 무작정 왔단다. 그런분들께 우리의 헤설픈 고향타령은 얼마나 슬프고 음울한 넋두리일까.슬픔 더 담을 수도 없이 검게 탄 속,더 상할 것도 없는 사람들에게 괜한 얘기 꺼내 죄스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고향땅 가까운 철조망 보이는 어느곳에 젖은 솜처럼 엎드려 억장 무너지고 또 무너져 삭정이 다 된 마음,울 기력마저 탈진된 당신들 곁에서 눈 욱질러 감고 마음 가득 눈물 채우며 손잡아 체온 나눌 수는 있다고.
  • 동굴탐험/수억년 세월이 만든 기암괴석 장관

    ◎다양한 모습 종유석·희귀동물에 놀라/울진 성류굴등 전국 14곳 관광객 놀라/울진 성류굴 등 전국 14곳 관광객 밀물/습도 높고 미끄러워 방수복·등산화 등 갖춰야 꽃샘추위가 옷깃을 여미게하는 요즘 동굴관광이 색다른 체험으로 즐거움을 주고있다. 최근 스키·스케이트등 겨울 레포츠시즌이 사실상 끝나면서 전국의 천연동굴마다 하루평균 7백∼3천여명의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천연동굴은 사시사철 바깥기온과는 무관하게 섭씨 10∼15도를 유지,「만년 봄」의 기온으로 태고의 신비와 천년의 비경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수천길 땅속에서 배어나오는 싱그러운 공기,기암괴석 사이로 구슬같이 괴어 흐르는 물방울,화려한 빛깔로 단장한 석순 석화 석주 등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또 동굴안은 빛이 없는 세계여서 눈이 퇴화된 박쥐와 노래기등의 투명생물도 서식하고 있어 동굴여행은 단순한 볼거리관광이 아닌 천연박물관을 관찰하는 「시간탐구여행」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제주도가 용암동굴일뿐 나머지 대부분 지역이 석회동굴이다.석회동굴은1년에 0.2㎜정도 밖에 자라지않는 종유석과 석순이 특징인데 이들이 수억년에 걸쳐 만들어진 것임을 짐작케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1천여개의 천연동굴이 있으나 일반에 공개된 곳은 14개소에 불과하다. 동굴에서는 두꺼운 옷은 필요없지만 습도가 높고 미끄러워 방수복과 면장갑·등산화나 운동화등을 준비해야하며 안전사고에 대비,랜턴이나 형광램프·호루라기등 간단한 통신장비도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일반인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동굴을 소개한다. ■성류굴=경북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에 위치한 이 동굴은 굴앞에 있었던 성류사라는 사찰에서 이름이 유래됐다.길이 4백70㎞,역사가 2억5천만년에 달하는 이 동굴은 「삼국유사」에도 기록될 만큼 일찍이 세상에 알려진 곳.천연기념물 1백56호로 5개의 크고 작은 연못과 천장높이가 35m나 되는 웅장한 광장등 12개의 넓은 공간도 있어 「지하금강」이라고도 불린다(입장료 어른 1천1백원). ■고수동굴=충북 단양읍에서 동쪽 2㎞지점인 고수리에 위치.천연기념물 2백56호로 길이 1.3㎞의 오밀조밀한종유석동굴이다. 주굴은 6백m이며 3층구조로 이뤄져 나선형 통로를 따라가다보면 숱한 지하절경을 보게된다.희귀종유석 「아라고 나이트」를 비롯,사자바위·천불동·촛대바위등이 대표적인 볼거리다. 70년대 후반 일반에 개방된 이래 연간 80만명이상의 내방객이 몰리는 인기동굴로 자리잡았다(입장료 어른 1천4백30원). ■고씨동굴=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진별리에 위치.임진왜란때 인근마을의 고씨들이 피란했던 곳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천연기념물 2백19호로 총길이 3㎞,주굴 길이 1.6㎞에 달하는 대형 동굴이다. 고씨동굴에는 적철광의 영향을 받은 암갈색의 종유석을 비롯,연보라색·황색등의 형형색색을 이룬 퇴적 석회암이 풍부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 준다(입장료 어른 1천원). ■만장굴=제주도 북제주군 동금령리 남쪽에 있어 제주도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한번쯤 들르는 대표적인 관광명소.천연기념물 98호이고 동굴의 총길이는 6천8백여m로 세계적인 규모이다.특히 입구에서 1천m지점의 용암석주는 높이 7.6m,지름 8m로 세계최대 를 자랑한다.동굴안에는 2만여마리의 박쥐와 가재벌레등이,굴 주변에는 30여종의 희귀식물등이 서식하고 있어 자연학습장으로도 손색이 없다(입장료 어른 1천원).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