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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소보의 안네’ 아도나 생존 확인

    ┑뉴욕 연합┑유고 코소보주의 ‘안네 프랑크’가 살아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클리 고교생 피네간 하밀(16)에게 수개월동안 E-메일을 통해 현지의 참상을 전한 동갑내기 코소보 소녀 아도나가 지난달 29일 전화로는 처음으로 하밀과 통화,자신의 근황을 알렸다고 CNN방송이 보도했다. 지난 1월부터 피네간군과 E-메일통신을 해오던 아도나양은 지난 달 나토군의 유고공습 이후 소식이 끊겨 그동안 많은 이들이 생사여부를 걱정했다. 피네간은 “아도나가 전화를 받았을 때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정말 기뻤다”며 “E-메일로만 만나던 아도나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 정말 뻤다”고 통화성공의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첫 통화인지라 잠시 어색했으나 곧친숙해졌다는 피네간군은 전화가 도청되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도나는 전쟁과 폭격에 관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으려 하는 등 매우 조심스러웠다고 전했다. 아도나양은 가족들이 모두 집안에 숨어지내고 있으며 상황은 갈수록 악화돼 전기는 끊겼고 물도 없는 적이 많으며 식량도 1주일치밖에 남지 않았다고말했다. 식구들이 가능한 한 빨리 피란길에 나서길 원하기 때문에 앞으로 더 통화할 수없을 것이라고 밝힌 아도나는 조그만 창문을 통해 보는 것과 주위에서 전해 듣는 것말고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E-메일을 통해 가족들과는 무슨 일이 있어도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밝힌 바 있는 아도나는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너무 악화돼 피란길에서 필요하다면가족들이 흩어지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전했다.
  • 유고,코소보 알바니아계 추방 혈안

    코소보내 알바니아계에 대한 유고군의 ‘인종청소’가 본격화되면서 조직적인 강제추방작전이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외신들은 1일 일제히 코보소내에서 자행되고 있는 유고군의 노골적인 강제추방을 전하며 하루에도 수천명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국경너머로 내몰리고 있다고 밝혔다. 유엔난민고등판문관(UNHCR)의 크리스 자놉프스키 대변인 역시 “지난 며칠동안 코소보에서는 16만명 이상이 고향에서 쫓겨나 이웃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등으로 향하는 난민행렬에 합류했다”며 특히 이들의 행렬은 제2차 세계대전때 수십만명이 ‘피란길’에 올랐던 참혹한 광경을 그대로 연상시키고 있다고 비유했다. 목격자들은 공습전 인구 20만명에 달하던 코소보의 주도 프리슈티나가 이제는 주민 한명도 남아있지 않은 텅빈 유령도시가 됐다고 전했다. 세르비아 민병대를 포함한 유고의 군경은 알바니아 주민들의 집과 차량 현금 등을 몰수한뒤 이들을 강제로 마케도니아행 기차에 태워,국경밖으로 내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실제 강제추방된 주민들은 외신들과의 인터뷰에서한결같이 마스크와 제복차림을 한 이들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다’는 위협을 받았었다고 밝혀,강제추방이 계획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증언했다. 한편 유고측의 노골적인 추방작전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유고 대통령이 구사하고 있는 일종의 ‘난민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나데시다 미하일로바 불가리아 외무장관은 “밀로셰비치가 대규모 코소보 난민추방으로 발칸지역 국가들에 불안을 유발한데서 나아가 궁극적으로 유럽전체의 안정을위협하려 하고 있다”고 밝혔다.
  • ‘어머니’ 27일부터 정동극장서

    어머니라는 말은 아늑함과 가슴 찡한 느낌을 동시에 떠오르게 한다.시대가어려울 수록 복합적인 감정의 울림이 커진다.지난 17일 ‘어머니’(이윤택작·연출)의 연습장인 서울 정동극장.마냥 포용하는 모성의 넉넉함은 난방이 없는 무대를 훈훈하게 덮혀준다. “어머니는 영원한 테마잖아요.자식 키우는 에미로서 내용이 가슴에 와닿습니다”.정동극장과 20년 장기공연 계약(본지 1월15일자 보도)을 맺은 손숙씨의 말엔 27일부터 시작되는 공연에 대한 ‘흥분’이 실려 있다. 내로라하는 여배우를 설레게 한 ‘어머니’의 삶에는 찢어질 듯한 가난,일제시대와 해방기의 혼란,한국전쟁의 상흔 등 우리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다.연극은 일순(손숙)의 현실과 회상을 넘나들면서 펼쳐진다. 일순은 사사건건 논리적으로 따지는 신식 며느리(송정화)와 마찰이 잦다.그래도 방송작가 아들(김학철)에 거는 기대와 토끼같은 손자 손녀의 재롱에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어느날 죽은 남편 돌이(원용부)를 꿈에서 만나면서 한많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낸다.만약 “글만 배웠더라면 ‘노베르(노벨)상’도 떼어놓은 당상일기막힌 내용”들이다.징용으로 끌려간 첫사랑 양산복(김경익).논 서마지기에 팔려온 결혼생활.밖으로만 내돌며 집안일은 아랑곳 하지 않는 남편.무뚝뚝하지만 ‘핍박받는 여성’이라는 공통점으로 속내를 터놓고 지내는 시어머니와 주렁주렁 달린 자식들이 유일한 낙이었다. 피란 중 학질에 걸려 죽은 아들(첫 사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을 놓고통곡하는 장면은 눈물의 절정.온몸으로 흐느끼는 일순의 아픔은 손숙씨의 것으로 체화된다.“연습 때마다 눈물로 범벅이 되는 진지한 모습에 다른 연기자들이 모두 숙연해진다”고 김학철은 귀뜸한다. 그렇다고 눈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경남 밀양지방의 설화와 민요,옛날 시골아이들의 놀이와 창가를 재현해 볼거리가 풍성하다.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도재미를 키운다.절로 입가에 미소를 띄우게 한다.연출을 맡은 이윤택은 익숙한 풍경을 참신하게 조리해낸다.환상과 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특기를 맘껏 펼쳐 극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깔끔하고 재미있는 작품입니다.현실과 회상을 따로 놔두면 지루해지는데이를 피하기 위해 꿈과 안보이는 세계를 섞었습니다.연극적 재미라는 점에무게를 두었습니다”. 그는 일순과 남편 영혼의 대화 장면에서 배경음악과 사투리의 운율을 맞추느라 핏대(?)를 올린다.2∼3차례 되풀이하자 대사와 음악이 3박자 운율을 갖추고 감칠 맛 나게 태어난다. 가슴에 와닿는 사연의 힘은 이윤택의 체험에서 비롯된다.연극 속 일순의 원형은 그의 어머니였다.나아가 30∼40대 성인들 모두의 어머니일지도 모른다. 거친 세파를 건너온 어머니를 모신 아들에겐 정동극장 무대가 반가울 것이다.모든 어머니의 가슴 속에 맺힌 매듭을 잠시나마 풀어 드리기에 제격인 연극이다.4월25일까지.평일 오후 7시30분,주말 오후 4시·7시30분,화·금 쉼.(02)773-8960李鍾壽 vielee@
  • 백범 41년 7월 2차대전 미국 참전 예견

    “박신애 누이 보시요.그간에 편지를 하랴고 하였지만 년전에 알튼 각기가발작이 되여서 고생을 하고 둘제(둘째)로는 중경에 공습이 심하여서 방공동(방공호)으로 피란하러 다니고 또는 더위가 백여도까지 더워서 잇때까지 집필을 못하였소…” 백범 金九 선생 서거 50주기를 앞두고 선생이 중경(重慶)임시정부 시절 하와이 거주 재미동포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이 처음 공개됐다.‘박신애 누이 보시오…’로 시작하여 ‘오라비 金九’로 맺고 있는 이 편지는 백범이 평소 남매간처럼 가깝게 지낸 지인에게 보낸 사신(私信).그러나 이 편지에는 당시 중경의 전황(戰況)과 재미교포사회의 이야기 등도 담고 있어 사료적 가치도 우수하다. 1941년 7월 25일자로 작성된 이 편지에서 백범은 “지난 유월 오일 중경에서 큰 불행한 사건으로 숨이 막혀죽은 수 천명의 송장뎅이를 친히 봤소”라고 적고는 “이제 미국이 참전하는 날이면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날이니 세계낙원 하와이 동포들도 우리와 같이 방공동 생활을 하시리라 생각하오”라며 “공습 피난명령이 내리면 명령대로 꼭 피하시오”라는 ‘오래비’의 당부의 말도 잊지않고 있다.편지에서 백범이 언급한 ‘불행한 사건’은 일본군이 41년 6월초 ‘중원(中原)작전’이란 이름하에 일본해군 항공대가 중경을 8차례나 맹폭한 것
  • 번역극작가 申定玉(이세기의 인물탐구:184)

    ◎英美 희곡 재창조 ‘번역의 셰익스피어’/40년 외길… 펴낸 작품 200편 넘어/탁월하고 충실한 언어구사력 ‘독보적 존재’/“번역이란 충실할수록 아름답고 아름다울수록 충실해야 한다” 타탄무늬의 주름진 스커트에 어깨엔 숄더백,손에는 또 다른 대형 가방을 든 申定玉은 하루 종일 학교로 도서관으로 바쁘게 뛰어다닌다.10년 전이나 그 이전에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변치 않은 모습이다.그의 학구적 자세는 그동안 200여편의 희곡을 번역했고 250여 극단이 1년 내내 돌아가면서 그가 번역한 희곡을 공연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그래선지 그가 쉬고 있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다. 공부 외에 다른 재주가 있다고도 생각되지 않는다.공연장에 자주 나타나는 것은 그의 번역 희곡이 공연되고 있다는 증거다.문자 그대로 공부만이 취미이고 인생의 전부인 ‘공부벌레’다. 특히 셰익스피어 작품을 번역하면서 ‘드넓은 우주 속에서 한낱 미소한 존재인 인간의 성격을 예리한 면도칼로 베어내듯이 도려낸 작가의 명징성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가 이 땅의 연극발전에 크게 영향을 끼쳤음을 깨닫자 ‘셰익스피어 한국에 오다’를 집필하여 작가의 한국에서의 수용(受用)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이고 있다. 그는 하나의 연구에 파고들기 위해 우선 자료탐색에 심혈을 기울인다.지난 94년에 출판된 ‘한국신극(1930∼60년)과 서양연극’ 집필을 위해서 신문사의 조사자료실을 샅샅이 뒤졌고 잡지와 개인일기,논문과 관련저서를 인용하는등 20여년간의 착실한 준비기간을 거쳤다. 책의 서문에서는 ‘이 작업은 험난한 대장정(大長征)’이었다고 밝히고 ‘한강에서 조리를 들고 금조각을 캐내는 것’같은 뼈저린 고통의 시간이었음을 돌아본다. 그는 셰익스피어 외에도 유진 오닐,테네시 윌리엄스와 현대작가인 피터 셰퍼에 이르기까지 영·미희곡을 망라하는가 하면 지난 90년 체호프 탄생 130주년 기념으로 ‘체호프의 한국 수용에 관한 연구’와 러시아·독일연극의 한국수용과정을 완벽하게 마무리짓고 있다. 지난 85년 ‘한국연극’지가 100호 기념으로 수여하는 ‘최다집필상’ 수상은 그의 방대한 작업량을 단적으로 대변해주는 예이다. 오전 9시면 옥수동집을 나와 서초동에 있는 집필실에서 요즘은 ‘한국연극’의 60년대 이후를 집필중이다. 그가 셰익스피어에 눈뜨게 된 것은 경북대 3학년때 ‘맥베스’ 2막 2장중 환청 장면에서 셰익스피어만의 독창성과 천재성,절륜의 상상력에 매료되면서 부터다. 그러다가 57년 이대 대학원시절에 번역한 ‘한여름 밤의 꿈’이 이화여대 연극회를 통해 무대에 올려진 것을 계기로 30여년을 한결같이 셰익스피어라는 ‘신(神)’을 신봉해왔다. 89년까지 200자 원고지 1만7,000장 분량의 번역을 완성,전 40권의 이 완역본은 셰익스피어 전 생애에 걸쳐 펴낸 장막희곡 37편 외에 장편시,소네트 등으로 지금까지 23권이 전예원에서 출간됐다. 셰익스피어 전집은 지난 64년 휘문출판사와 정음사가 발간한 적이 있으나 번역문이 딱딱한 산문투인데 비해 그의 번역은 셰익스피어 특유의 시적운율을 그대로 살려낸 것이 특징이다. 평론가 유민영씨에 의하면 ‘셰익스피어 대사에서의 감격조와 영탄조,번뜩이는 해학과 풍자의 묘미는 더 이상의각색이나 윤색없이 그대로 무대에 올려도 손색이 없다’는 평이다. 그는 비평가·언어학자·연출가·시인등 4개의 얼굴을 갖추면서 ‘신성(神聖)에 가까운 언어의 천재성’을 파헤쳤고 여기에다 작가 본연의 사상과 언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한 지속적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잘못 쓰여진 책은 실수이나 좋은 책의 오역은 죄악’이라는 것과,희곡번역은 ‘제2의 창조’라는 신념에서 셰익스피어가 언어의 연금술사이듯이 항상 ‘듣는 연극’‘무대에 맞는 번역’을 고집하며 공연중에도 ‘잘못된 번역’을 찾아내는가 하면,가장 근접한 표현을 위해 수많은 문학작품 섭렵을 마다하지 않는다. 폴 발레리는‘번역이란 원문에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덜 아름답고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덜 충실하다’고 했지만 그는 ‘번역이란 원문에 충실할수록 아름답고 아름다울수록 충실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킨다.연극계에서는 그런 그를 가리켜 ‘무상(無償)의 정열을 지닌 교수’로 지칭한다. 큰 공적에 비해 그가 적정한 보상을 바라지 않는 것은 번역작업이 그에게 있어 행복한 학문의 연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함남 정평 태생으로 부친 申雄浩씨와 林南秀씨의 1남4녀중 장녀.수도여의전과 한일병원장을 지낸 부친을 비롯,남동생과 여동생들이 모두 의사지만 그는 문학쪽에 더 관심을 갖고 숙명여고 졸업후 대구 피란지에서 경북대 영문과에 진학했다. 부군 李遠台씨는 주택공사 부사장을 거쳐 미륭건설사장을 역임,그의 공부하는 자세를 아끼고 사랑하면서 공연 때문에 귀가가 늦으면 밖에 나와서 기다려준다. 자녀는 MIT 경영학박사인 장남 순철씨(홍대 교수)와 차남 윤철씨(株 미수원사장). 경결하면서도 무구한 성격탓에 번거로운 교분을 트기보다 극단 여인극장의 대표이자 연출가인 강유정씨를 믿고 만나는 정도다. 약삭빠른 사람은 학문을 경멸하고 단순한 사람은 그것을 숭배하며 현명한 사람은 그것을 이용한다면,그는 단순하면서도 원후(圓厚)하고 겸허하면서도 현명한 사람일 뿐이다. 따라서 공부가 취미이고 인생의 보람이며 만약 공부할 일이 없었다면 ‘신정옥 다운 인생은없었을 것’이라는 강유정씨의 말은 그를 두고 진리다. □그의 길 1932년 함남 정평 출신 1951년 숙명여고 졸업 1955년 경북대 영문과 졸업 1957년 이대 대학원 영문과 졸업 1964∼73년 이대 외국어대 강사 1973∼98년 명지대 영문과 교수 1976년부터 실험극장 ‘에쿠우스’를 필두로 희곡 200여편 번역 1979∼80년 국무총리실 정부시책 평가교수 1981년 국무총리정책자문위원 교수 1987년 한국외국어대 대학원 영문학 박사학위 1989∼현재 오닐학회 이사 1996년 명지대 외국어교육원 원장 현재:명지대 명예교수,한국 셰익스피어학회 회장 저서:‘20세기의 미국연극‘(72년·문예출판사),‘현대영미희곡’ 전 10권(76­84년·예조각),‘셰익스피어 4대비극집’(93년·전예원),‘한국연극과 서양연극’(94년·새문사) 등 50여권 외 셰익스피어전집 전 40권 수상:실험극장 ‘에쿠우스’ 장기공연 공로상(76년),한국백상예술대상 특별상(80년),한국연극협회공로상·‘한국연극’ 100호기념 최다집필상(85년),91’연극영화의 해 사랑의 연극잔치 최우수 번역상,동랑연극상(96년)
  • 비로봉(시조시인 李根培씨 답사기:5·끝)

    ◎내금강에 우뚝 솟은 봉우리 내년 봄 오를 날 왔으면… ●왜 터져나오는 울음인가 정말 금강산을 본 것일까.내금강은 처음부터 예정에 없었으니 먼 눈으로 비로봉의 눈덮인 봉우리를 올려다보는 것으로 끝내야 했지만 외금강도 사흘가지고는 주마간산이 아니었던가.그러나 금강산 가는 길이 열리자마자 첫 산행에 나선 이들은 금강산의 장엄과 신비를 발로 딛고 눈으로 받아들이는 일보다는 반세기 넘게 바라만 보고 살아온 그 분단의 벽을 넘어서는 데에 더 큰 의미를 가슴에 담고 있었다. 금강산이라는 병풍 속에 담긴 단 하나의 그림 국토,민족,역사,동족상쟁,부모형제,이산가족,고향의 낱말이 그것이다.고향이 해주인 원창성씨(70·남)는 산길에서 만난 북측의 젊은 미화원이 꼭 조카만 같아 껴안고 눈물을 흘리자 그 젊은이도 따라서 눈물을 흘리더라며 무언가 손에 쥐어주고 싶었지만 젊은이가 한사코 뿌리쳐서 그냥 돌아왔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뜻을 알겠노라고 했다. 장전항이 고향인 한일환씨(63·남)에게 “이제 고향땅을 밟으셨으니 통일을 만난거나 다름없네요”했더니 “그렇지요.내게는 통일이 반은 된 셈이지요”한다.금강산 관광 안내에서 이미 북한 주민과의 접촉을 삼가달라는 부탁을 받았음에도 산행에서 겨우 한 두번쯤 만나게 되는 북측 미화원(신분과 직함을 확인할 수 없지만 손에 대로 만든 빗자루를 들고 있었으므로)을 붙잡고 피란 오기 전의 주소와 가족 이름들이 적힌 종이를 손에 쥐어주며 “내년 봄에 꼭 올 테니 그때까지 안부를 알아달라”고 통사정을 하는 모습을 보는 일행들은 손수건을 꺼내야 했다. 만물상에서,구룡폭포에서 과일 몇개에 술잔을 올리거나 아니면 얼음 박힌 땅에 엎드려 통곡하는 이들에게 저렇게 울 수 있는 자리라도 마련해준 세월이 한편으로는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원창성씨는 “내가 금강산을 본 것이 아니지요.꿈을 꾼 것이지요”했고 97세의 심재린 할아버지는 “피눈물로 금강산을 올랐다”고 했다. ●비로봉 오를 날을 기약하며 밀리고 밀리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곧 다시 돌아올거라고,전쟁은 그리 길지 않을 거라고 이웃집 마실이라도 가듯 어머니와아들,아버지와 딸,아내와 남편,형과 아우가 그렇게 헤어졌다가 반세기를 넘긴 사람들.사람이 백발이나 200살쯤 살 수 있다면 모르거니와 생사를 확인할 것도 없이 이미 수명을 다했을 부모에 대한 자식들의 심경을 겪어보지 않고서는 다 안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겨울 개골산(皆骨山)에 왔던 이들은 다시 봄에 오겠다는 말을 한다.적어도 봄,여름,가을,겨울 산의 이름이 바뀌듯이 그 다른 산을 보겠다는 욕심도 들어있지만 더욱 고향이 금강산 가까운 곳이거나 북녘인 사람들은 이제 내디딘 발걸음이니 한 번이라도 더 그리던 땅을 밟아보겠다는 생각에서이리라. 내금강 비로봉구역은 비로봉 정상에 올라 구름의 바다,돌의 바다,물의 바다를 굽어보며 동해 일출을 보는 일말고도 월출봉 일출봉 영랑봉들의 절경을 놓칠 수 없고,만폭동구역에서는 청록감 백록담 흑록담 비파담 진주담 등 폭포와 팬 돌에 솟구치는 물보라와 바위들을 봐야겠고,백운대구역 명경대구역 구성동구역의 장관인들 어찌 빼놓을 것이냐. 내 봄이 오면 다시 가서 비로봉에 오르리라.돌 하나물 하나,나무 하나,흙하나 다시 와서 그 낱낱의 얼굴에 볼 부비고 감추고 있는 말들을 꺼내서 시로 쓰리라.노래부르리라.
  • 이웃과 함께 하는 한가위(사설)

    이제 내일 모레면 우리 민족 최대명절인 추석(秋夕),한가위다.오늘 부터는 민족대이동의 장관이 이뤄지는 연휴가 시작된다.우리,예년같으면 얼마나 가슴 설레고 부푼 기대로 맞는 이 때이던가.1년 내내 땀흘려 가꾼 오곡백과(五穀百果)를 거둬들이는 풍요의 계절에,그리운 가족과 친지들이 오랜만에 만나 정(情)을 나누는 우리의 명절이 아닌가.그래서 한 해를 시작하는 정월의 설과 풍요를 기원하는 오월의 단오(端午)와 함께 3대 명절이면서 한가위를 으뜸으로 여기며 그토록 고된 귀성길도 마다하지 않고 고향을 찾는 것이다.외국인들도 우리의 이 행렬을 바라보면서 처음에는 이해를 못하다가 그 아름다운 뜻을 이해하고는 부러워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올해 우리가 맞는 이 한가윗 날 달은 그렇게 밝게 비치지 않을 것 같다.이번 한가위 때는 전국 대부분의 날씨가 맑을 것이라는 기상청의 예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그것은 고향을 찾지 못하는 수많은 실업자와 노숙자들의 아픔이 있고 대풍(大豊)을 눈 앞에 두고 기대에 부풀어 있다가 예상치도 못했던 제9호 태풍 ‘얘니’에 꿈을 날려버린 들녘의 농심이 울고 있기 때문이다.여기에 우리가 한시도 잊지 못하는 실향민들의 피눈물이 있다.특히 올해는 ‘금강산 관광이다’,‘통일 소다’하면서 잔뜩 기대에 부풀게 하더니 결국 돌아온 것은 실망뿐이다.비록 금강산이 고향은 아니지만 이번 한가위 때는 태어나 자란 곳과 조금이라도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라며 기다리던 실향민들의 아픈 마음을 어떻게 달래줄 수 있을 지 걱정이다.‘잠시 피란갔다가 며칠만에 돌아오겠다’며 피붙이와 헤어진 지 반세기가 지나도록 그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의 형제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번 연휴기간이 시작되면서 해외 관광을 떠나는 사람들의 행렬도 장사진을 이루고 있고 고급 백화점의 선물코너에는 값비싼 물품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고 한다.제 돈 들여 하는 일을 막을 수는 없지만 주변을 한번쯤은 돌아보고 떠나기 바란다.갑갑한 뉴스만 전해지는 요즘 ‘사랑의 시튼수녀회’ 주최의 장애아동 돕기 자선행사나 ‘사랑의 국민운동본부’ 주최의 ‘이웃 사랑 대행진’행사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정성을 나누고 중간고사가 끝난 중학생들이 양로원과 고아원으로 달려가 그들과 함께 훈훈한 시간을 보냈다는 소식은 신선하다.그렇게 자신을 던져 불우이웃과 함께하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다.그래서 우리는 또 살 맛이 나는 것이다. 그렇다.실의와 아픔에만 짓눌려 있지말고 서로 보태고 나누어 보자.무엇보다 당장 고향으로 달려가 벼이삭 하나라도 일으켜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
  • 淸貧 법관/崔弘運 논설위원(外言內言)

    지난 93년 사상 처음으로 법관들의 재산이 공개됐을 때 국민들은 깜짝 놀랐다.청빈(淸貧)의 상징인 법관들의 재산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대법관들의 평균재산이 15억 2,000여만원으로 당시 장관 평균액 10억 8,000만원 보다 훨씬 많았다.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의 경우는 이보다 더 많은 22억 9,000여만원에 달했다.판사들이라고 해서 재산이 없으란 법은 없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상식선을 넘는다면 분명 지탄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상속이나 재력을 갖춘 처가의 도움,또는 변호사 시절 번 재산이라는 답변들이었지만 궁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독한 성직(聖職)’으로 일컬어지는 법관들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얼마나 높은 지를 반영한 사례라 할 수 있겠다. 그런 가운데 方順元 대법관 같은 이는 대법원장이 예산집행을 하고 남은 돈을 대법관들에게 나눠주자 재량권 남용이라며 되돌려 주었다.그는 평판사시절 도배할 돈이 없어 신문지로만 도배할 정도였다.어느 날 쌀이 떨어져 부인이 동료판사 집으로 쌀을 꾸러 갔더니 그 집에도 쌀이 없어 부인끼리 부둥켜안고 울었다는 일화는 너무 유명하다.초대 대법원장 街人 金炳魯 선생은 6·25 전쟁으로 부산으로 천도하게 되자 “정부가 피란가는 판에 마누라를 데리고 다닐 수 없다”며 부인을 고향인 전북 순창에 내려보내 결국 인민군에게 학살당하게 했다.그같은 삶의 자세가 반드시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법관들의 경제적인 수준이 어느 정도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 경우라 하겠다. 30년 동안 고향을 지킨 부산지법원장 趙武濟 판사가 사법부의 성좌(聖座)라 일컬지는 대법관에 내정됐다고 해 화제다.‘사시 4회 선두주자’‘사법제도 개혁의 선구자’등 언제나 최고임을 표현하는 수식어가 따르지만 재산상태만은 항상 꼴찌여서 이토록 세인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그만큼 요즘 보기 드문 ‘대쪽 판사’의 지조를 지키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지난 93년 재산공개 때 재산이 25평 아파트 한 채와 부친 명의의 예금 1,075만원 등 모두 6,434만원이었으며 지금도 7,200여만원에 불과하다.나라 예산을 절감해야된다는 생각으로 5급 비서관 없이 여직원만 방을 지키게 하며 판공비와 수당은 받아본 적이 없다.판공비 290만원과 재판연구활동비 120만원은 총무과장이 관리하다 어려운 일을 당한 직원들을 위해 쓴다는 것이다.법조개혁이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한 지금 ‘조판사 이야기’는 시원한 청량제와도 같다.
  • 추기경의 歸去來/崔弘運 논설위원(外言內言)

    천주교에서 사제(司祭)를 양성하는 신학교를 ‘못자리’라고 표현한다. 라틴어로는 SEMINARIUM이다. 이 못자리에서 다 자란 ‘모들’은 이 세상 곳곳으로 흩어져 신앙의 씨앗을 옮겨 심으며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된다. 한국 최초의 못자리는 프랑스인 신부 푸르티에가 1855년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 베론에 세운 성요셉신학당이다. 이 학교는 1866년 대원군의 병인대박해 때 폐교되고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1885년 10월 28일 강원도 원주시 부흥골에 예수성심신학교로 재탄생된다. 이 학교가 이듬해,오늘의 성심여고 자리인 서울 용산구 원효로로 옮겼다가 1942년 일제의 탄압으로 다시 폐교된 뒤 해방이 되던 1945년 오늘의 동성중·고교 뒤편 낙산 기슭에 가톨릭대학 교의 전신인 경성천주공교신학교 즉,성신신학교로 모습을 드러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이던 金壽煥 추기경이 28일 바로 이곳,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사제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제 13대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된 鄭鎭奭 대주교의 착좌식이 있기 하루 전의 일이다. 지난 30년 동안 교구장으로 재직하며 기거하던 명동성당 구내 교구청 사제관을 떠나는 마음이야 이루말할 수 없이 섭섭하겠지만 새로운 기대와 설레임이 가득할 것으로 여겨진다. 金추기경으로서는 실로 48년만에 되돌아가는 못자리며 본가(本家)이기 때문이다. 이 곳을 떠나 그야말로 할 일을 다하고 귀가하는 노사제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 지,궁금하기만 하다. 金 추기경은 지난 41년 소신학교 과정인 동성상업학교 을반을 졸업하고 일본 상지대 철학과에 재학중 학도병으로 끌려가 동남아전선에서 여러 차례 사선(死線)을 넘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이 곳 성신대신학교에서 6·25전쟁이 나던 50년까지 사제수업을 받은 뒤 피란 길에 올랐다가 51년 9월 15일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그러니까 金 추기경에게 혜화동 성신교정은 자신을 사제로 키워준 못자리며 언제나 변함없는 고향 집인 셈이다. 金 추기경은 지난 19일부터 교구사제와 수도자,평신도들과의 송별 감사미사를 잇따라 올리며 명동을 떠날 채비를 했다. 추기경은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저는 점점 작아지고 제 뒤에 오시는 분은 점점 더 커지길 기원한다”고 했다. 후임자에 대한 깊은 애정의 표현이다. 비록 현직에서는 떠났지만 언제나 우리 곁에 남아있을 큰 어른의 모습임에 틀림없다.
  • 살아남은 이가 할 일(任英淑 칼럼)

    ‘풀 몬티’와 ‘3백원의 행복’을 보고 울었다.‘풀 몬티’는 해고당한 영국 철강노동자들의 절망과 희망을 다룬 영화이고 ‘3백원의 행복’은 한 주부가 남편이 실직한 후의 생활을 쓴 책이다. 이혼한 전 부인에게 양육권을 빼앗겨 아들을 만날 수 없는 사람,해고된 사실을 아내에게 감추고 거리를 헤매는 사람 등이 영화 ‘풀 몬티’의 주인공들이다.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남성 스트립쇼단을 조직하고 우여곡절 끝에 성공적인 공연을 갖는다.그 과정은 배꼽 잡게 하는 코미디의 연속이다.그러나 영화가 끝난 후 경쾌하게 일어서는 젊은 관객들속에 곧바로 합류해 영화관 문을 나설 수 없었다.충혈된 눈을 들킬까 겁나서였다.웃음 속에 숨겨진 주제­더 이상 잃을 것 없는 상황에서 위선(옷)을 벗어 던짐으로써 자유로워지고 당당해질 수 있다­가 감동적이긴 했다.그러나 나를 울린 것은 이 영화를 보았을 실직자들의 마음이었다.그 영화를 보도록 권유한 사람은 실직한 옛 동료였다.그는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3백원의 행복’은80년대 영국을 무대로 한 ‘풀 몬티’보다 더 직접적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중산층의 삶을 살다가 하루 아침에 “단단하다고 믿었던 땅이 펄로 변해 서 있을 수도,그대로 주저앉을 수도 없는 현실”에 처한 실직가정의 참담한 모습을 보여준다.신문 끊고,우유 끊고,학습지 끊고,시장 가는 발걸음 끊고,모임도 끊고 살면서,중학생 아들 급식비 마련을 위해 주머니란 주머니는 다 뒤지고 온 집안의 책갈피란 책갈피는 다 뒤지고,결국 친지란 친지에겐 다 도움을 청하게 되고,집에 있어도 외딴 섬에 홀로 앉아있는 것 같은…. 실업자가 벌써 200만명을 넘어 섰다고 한다.실업자 한 사람이 평균 4인 가족을 부양한다고 보면 우리 국민 6명중 1명이 실직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다.실업은 이제 더이상 남의 문제가 아닌 셈이다.정부가 갖가지 실업대책을 마련하고 있고 종교·시민단체들이 나서 실업자 구제활동을 하고 있지만 개인 차원에서도 실직자들에게 관심을 보여야 할 듯 싶다. 영화 ‘풀 몬티’의 한 주인공 롬퍼는 자신의 자살 기도를 막은 가즈와 데이브가 “우린 친구야”라고 말하자 무표정하던 얼굴에 비로소 웃음을 띤다.‘3백원의 행복’의 저자 윤지원 주부는 “저와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과 고통을 나누고 눈물을 닦아 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고 말한다.지난해 직장을 그만둔 한 친지는 ‘살아 남은 자의 도덕적 의무’로 전화하기,밥사주기,격려하기,일자리 찾아주기 등을 들었다.그는 “완전히 버려진 느낌”이라면서 “요새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는 전화라도 가끔 하는 이들이 참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직장에서 살아 남은 이들도 불안하긴 하다.정리해고로 인원이 줄어 들어 업무량이 두배 이상 늘어나 허구한 날 야근에 휴일도 반납하고 상여금은 없어졌고 봉급도 깎였다. 그래도 누구하나 불평도 못하고 동료끼리 경쟁자가 돼 살벌한 분위기속에서 일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아직 일자리가 있는 사람은 벼랑 끝에 내몰린 실업자들보다는 휠씬 나은 형편이다.상대적으로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배려하는 것은 인간사회의 미덕이다.우리 옛 어른들은 가난한 이웃에게 기름진 냄새 풍기는 것조차 삼갔다.실직자가 “완전히 버려진 느낌”을 갖지 않도록 아픔을 함께 나누는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 사회가 파국을 맞지는 않을 것이다.
  • 명성황후 피란 일화(비록 남가몽:4)

    ◎뱃사공에 금반지 빼주고 한강 건너 피신/경기도 광주땅 지나는데 아낙네들 험담/“중전때문에 이 고생… 군졸에 밟혀 죽었다”/두달후 환궁 “아낙네마을 없애 버려라” 1882년 6월의 임오군란으로 민비는 실각하고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됐다. 대원군으로서는 실각한지 8년만의 일이었으니 참으로 감개무량했을 것이다. 대원군이 운현궁에서 창덕궁까지 가는데 여덟 사람이 메고 가는 가마(팔인교)를 탔고 앞뒤에는 파초선을 든 하인들이 그를 인도했다.대원군의 공복 등에는 거북 등(구배)이 붙어 있어 사람들은 그가 곱추처럼 보여 아니꼽기만 했다.더욱 가관인 것은 그동안 운현궁 사랑방을 출입하던 문객,즉 가신들을 중앙과 지방의 요직인 각 도 감사(도지사)와 유수(시장) 그리고 군수직에 임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난을 피해 한강을 건너가던 민비는 전혀 다른 처지에 놓여 있었다.그러니 그야말로 절치부심 이를 갈며 복수심에 불타 있었다. “중전이 나루터에 서서 급히 사공을 불러 배위에 올라타니 수레바퀴같은 붉은 해는 비웃듯이 솟아 오르고삼각산의 뜬 구름도 즐겁기나 한 듯 뫼 위에서 피어나고 있었다.삼국지에 보면 옛날 한나라 환관 십상시의 난에 개똥벌레가 한소제를 북망산천으로 인도하였고 채모 장군이 추격함에 유비가 말을 타고 단계천을 뛰어 건넜다고 하는데,그 쓸쓸한 모습이 옛날이나 지금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드디어 뭍에서 내려 길을 가다가 얼마후 깨끗한 여관에 들어가니 아침밥을 지어 바치는데 한나라 광무황제가 호타하에서 먹던 보리밥처럼 꿀맛과도 같았다.그러나 비록 이같이 배고프고 목마른 가운데서도 단맛을 느끼지 못하였다.도로를 왕래하는 사람이 시끄럽게 자주 서울의 군란소식을 전하여 주었는데 들어보니 곤궁(민비) 전하가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알지 못하겠고 혹은 서거하였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는 것이었다.그 밖에 흉흉한 설은 이루 다말하기 어려웠다. 듣기를 마치고 드디어 수레를 타고 수행원의 보호를 받으며 바로 충주 옛고을로 향하여 편안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 잠시 화를 피하였다. 며칠이 지나 잠깐 조보에 발표된 내용을 보니 ‘민중전이 군란의 와중에서 서거하여 백성은 부모를 잃은 것 같이 슬퍼하고 모두 흰옷을 입었고 온 나라는 악기를 일체 연주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생국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명성황후가 여주로 피난할 때 남긴 일화가 많다.한강을 건널때 사공이 민비를 건네줄 수 없다고 버티었다고 한다.한강을 차단하라는 긴급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사공의 주장이었다.이에 민비는 즉각 금가락지를 빼어 사공에게 던져 주었고 사공은 뇌물을 받고서야 순순히 배를 저었다는 것이다. ○대원군,시신없이 국상 채비 한강을 건너 충주로 가는 도중에도 괘씸한 일이 일어나 민비의 가슴을 쥐어짰다.경기도 광주땅을 지나가다가 교자꾼들이 가마를 길에 놓고 잠시 술을 마시고 있는데 길가던 아낙네들이 “이렇게 어여쁘신 아가씨가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다. 민비는 재치있게 “서울에서 충주로 피난가는 길이요”라고 대답했다.그러자 아낙네들이 “중전인가 무엇인가 하는 것 때문에 이렇게 예쁜 아가씨까지고 생하는 구려” 하면서 “중전은 군졸들에게 짓밟혀죽었다고 합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괘씸한 생각이 들었겠는가.민비는 이들의 말을 잊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가 두달 후 서울로 환궁하자 곧 아낙네들이 사는 마을을 없애버리라고 명령했다.또 수행원들이 “한강의 뱃사공은 어떻게 하오리까” 하고 묻자 민비는 “그대로 두라”고 했다 한다.그도 그럴것이 사공이 뇌물을 거절하고 한강을 건네주지 않았던들 민비는 잡혀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서울에서는 대원군이 민비의 국상을 서둘렀다.시신이 없어 국상을 치를 수 없다는 반대가 강했다.그러나 이런 반대를 무릅쓰고 대원군은 민비의 옷을 시신으로 삼아 염을 한뒤 관에 넣고 뚜껑을 덮었다.그리고는 장례식부터 치러 민비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려 했다.생사를 확인하지도 않고 장례식부터 치르려 한 대원군의 심사 또한 정상이 아니었다 할 것이다.그래서 그런지 대원군은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청국군에게 납치되어 머나먼 중국땅으로 끌려가고 말았고 민비는 살아 돌아왔다.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 몇 개월이 지났다.고종과 세자는 아득하게 소식을 알지 못하여 마음이 슬프고 애통할 뿐이었다. 이 때에 군란의 소요가 가라앉자 곤궁 전하는 고종에게 소를 올려 ‘신은 죽지 않고 지금 충주 장호원 등지의 민가에서 피란하고 있으며 처분이 어떠하신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고종 부자분은 소를 자세하게 살펴본 뒤에 심신이 황홀하여 꿈결도 같고 술에 취한 것도 같았다.즉시 궁궐로 돌아오라는 뜻을 담은 교를 내려 조처를 취하니 하늘의 해가다시 밝았고 땅의 바람이 일어나 솟아오르는 듯하였다.안으로 3천명의 관료와 밖으로는 800명의 관료가 축하하여 일시에 만세를 부르니 남산과 북악의 초목과 곤충들도 모두 정채가 감돌았다. 우선 급무는 공로가 있는 자에게 시상하는 건이었다.무슨 벼슬로 상을 줄것인가.양주목사 자리이다.양주목사를 누구에게 줄 것인가.이번에 충주까지 수레를 태워주고 수행하여 보호하는 일을 맡은 홍태윤(홍계훈의 잘못)이었다.” ○한때 ‘육백팔흑’ 유행 임오군란으로 민비가 자취를 감춘 것이 6월이요,돌아온 것이 8월이었으니 불과 두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당시 사람들은 6월에 흰 옷을 입고 울었다가 8월에 검은 갓을 쓰고 살아돌아온 국모를 환영했다 하여 육백팔흑이란 말이 유행했다 한다. 명성황후를 업고 나온 공으로 양주 군수로 발탁된 홍계훈 이외에도 서울에서 충주로 가는데 필요한 여비 500궤미(말을 판 돈이었다)를 댄 조충희는 전남 영광군수로 임명되었다.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북청 물장수 출신의 이용익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서울과 충주를 왕래하면서 중앙의 정세 변동을 민비에게 보고하였으니 그 뜨거운 충성심과 추종을 불허하는 건각은 역사상 유례없는 것이었다.홍계훈은 뒷날 동학란 토벌대장으로 이름을 날리며 이용익은 대한제국의 탁지부대신을 맡아 이른바 광무개혁을 주도하게 되는 것이다. 임오군란은 개항 6년만에 국고가 바닥이 나 군인들이 들고 일어난 대사건으로 조선왕조가 망해가는 첫걸음이었다.그러므로 민비와 대원군 사이의 사전쟁 이상의 것이었다.이 군란으로 청나라 군대가 들어와 서울이 분탕질을 당하고 일본군이 인천항에 상륙하여 열강에 의한 내정간섭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 “스위스도 유태인 강제 노역”/미 역사학자 연구보고서

    ◎나치탈출 난민 수용소 60곳에 억류/노역 불만자 게슈타포에 넘기기도 【로스앤젤레스 AFP 연합】 나치자금 은닉 등 2차대전 당시의 불미스런 행동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스위스가 이번에는 나치독일을 탈출한 유태인들을 수용소에 억류,강제노동을 시켰다는 주장으로 궁지에 몰렸다. 스위스정부는 1939년 나치독일의 박해를 피해 탈출한 유태인 난민들을 수용소에 몰아넣고 열악한 조건 속에서 무보수 또는 소액의 임금으로 노역을 강요했다고 유태인기구인 시몬 위젠탈 센터의 의뢰로 작성된 보고서가 폭로했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미 역사학자 앨런 모리스 스콤씨는 ‘원치 않는 손님들:스위스판 강제노동수용소’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재소자들중 불만자들은 별도의 응징수용소로 보내졌고 나머지 유태인들은 프랑스 비시정권 경찰 또는 게슈타포에게 넘겨졌다고 그는 밝혔다.궁극적으로 10만명 이상의 유태인들이 독일로 송환돼 대부분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그는 말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1933년부터 1945년까지 20만명 이상이 스위스에 망명했으며 이중 2만8천명이 스위스내 60여개 수용소에 분산수용됐다. 스콤 보고서는 “불행하게도 스위스 사회는 악의적 반유태주의 편견에 깊이 물들어 있었고 때로는 그 지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스위스에 입국한 유태인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남자들은 엄혹한 노동현장으로,여자들은 청소부로 파견됐다고 이 보고서는 말했다. 스위스가 작지만 용감한 ‘무장 중립국’으로 나치의 위협에 맞서 난민들에게 피란처를 제공했다는 종전의 이미지를 뒤엎는 보고서들이 최근 속속 공개돼 왔다.
  • 사진 영상의 해(외언내언)

    사진이 발명됐을 때 프랑스 화가 폴 들라로쉬는 “오늘부터 회화는 죽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스케치 대신 사진을 이용하는 화가들이 있지만 1839년 루이 다게르가 사진을 발명한 이후 초기 사진가들은 대부분 화가 출신이었다. 따라서 19세기 사진에 대한 최상의 찬사는 “그림 같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진의 회화에 대한 이같은 종속성은 격렬한 비난을 초래하기도 했다. 시인 보들레르는 “사진공업은 모든 가짜 화가와 재능이 없거나 게을러서 업적 하나 완성시키지 못한 화가들의 피란처”라고 쏘아 붙였다. 20세기에 들어서부터 사진은 회화적 규범에서 벗어나 독자적 미학을 정립하기 시작한다. 소형카메라의 개발과함께 사실의 기록과 전달에 치중하는 보도사진의 전성시대가 1936년 창간된 라이프지와 더불어 열린다. 카르티에브레송,유진 스미드,로버트 카파,에리히 잘로몬등은 그 대표적인 작가. 이들에 의해 사회적,공적,외향적 특성을 지닌 다큐멘터리 사진이 꽃 핀다. 1960년대 이후 사진영상은 개인적,심리적,내향적 경향으로 바뀌면서 화면의조형성,외형적 아름다움은 사라진다. 구도와 빛,때로는 초점마저 맞지 않는,종전의 인식으로 보면 실패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사진이 ‘해방된 영상’으로 등장한다. 즉 과거의 사진이 생동하는 현실의 평면적 번역이 었다면 현대예술사진은 현실의 입체적,감각적 표현을 보여준다. 사진이 예술인가 아닌가는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돼왔지만 이제는 예술로서 확고한 인정을 받고 있다. 사진을 발명한 나라 프랑스는 1860년부터 사진작품을 국립미술관에 제출하는 것을 의무화했다.미국에서는 메트로폴리탄 등 주요미술관과 대학미술관이 사진의 오리지널 프린트를 수집한다. 유명한 사진작가의 오리지널 프린트는 10만달러 이상 호가하기도 한다. 올해는 문화체육부가 정한 ‘사진영상의 해’다. 사진박물관 건립 등 각종기념행사가 준비되고 있다. 한국사진작가협회에 가입된 회원이 3천500여명에 이르지만 우리 문화예술중 가장 변방에 놓인 사진예술이 올해를 계기로 크게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 장롱속 금 활용하자(사설)

    경제난국 돌파에 일조하기위한 장롱속 김모으기 운동이 방송사와 민간단체,그리고 검찰,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전개되고 있다.위기를 맞아 퇴장돼 있는 자원을 적절히 활용한다는 점에서 금모으기 운동은 전국민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당국 추계에 따르면 국내 보유 금은 2천700t 규모.산업용이나 유통분을 뺀 2천t이 장롱속에 사장돼 있다. 국제가격으로 따지면 국제통화기금(IMF)융자 총액의 3분의1 가량인 2백억달러에 해당하는 금이 낮잠을 자고 있는 셈이다.김괴는 국제시장에서 바로 달러로 바꿀 수 있어 사장된 금을 내다 팔면 외환위기 극복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해마다 60억 달러가 넘는 금 수입을 줄여 외화를 아낄 수도 있다.금을 내놓은 사람은 한화나 외환통장으로 보상을 해주는 방법이 가능할 것이다. 이같은 점에 착상,최근 검찰이 금반지 금팔찌 행운의 열쇠 등 금붙이 수집·매각운동에 들어갔고 새마을부녀회 중앙연합회도 ‘애국 가락지 모으기 운동’을 시작했다.경기도청과 대전시 서구청도 이에 동참했으며 김대중 대통령당선자도 소비자단체 대표들과의 간담회에서 이같은 운동의 의미를 강조했다. 우리 민족은 귀금속중 특히 금을 선호한다.금반지 금목걸이 등은 돌,결혼 등의 특별한 ‘추억’을 담은 기념품인 경우가 많다.또 6·25세대는 피란시절식량과도 쉽게 바꿀 수 있었던 금의 용도에 강한 미련을 갖는다.일부 계층은 투자용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려운 경제상황을 감안할때 조그만 아쉬움,희생은 감내할 수 있다고 본다.십시일반으로 모은 장롱속 달러가 3억2천여만 달러나 돼 적잖은 도움이 됐다.금 모으기도 부족한 외화를 보충하여 외채를 빨리 갚을수 있게 하는 외에 국민이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공동체 의식을 높이는 차원에서도 의미있는 운동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 IMF 입대(외언내언)

    군대에 간 아들이 신병훈련을 마치고 휴가를 나왔다.집에 온 아들은 어머니가 자신의 편지를 두 종류로 나누어 분류해 놓은 것을 보았다.평소 정리·정돈을 잘 하는 어머니는 아들에게 편지를 그렇게 나눈 이유를 설명했다.“이쪽은 네가 음식에 대해 불평한 것들이고,이쪽은 음식이외에 다른 것들에 대해 불평한 편지란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소개된 미국의 이야기다.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군대란 비슷한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주는 우스개다.지난 대통령 선거때 병역문제가 쟁점이 됐던 것도 자유분방한 젊은이들에게 군대란 불평할 것 투성이인 곳으로 비쳐지고 가능하면 병역의무를 회피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 우리 대학생들이 앞다투어 입영신청을 하고 있다 한다.올들어 지난 9월말까지 ‘재학생 입영원’을 낸 대학생이 11만7천757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5% 증가했고 4·4분기에는 그 숫자가 더욱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한 지방병무청에는 10월부터 12월 사이에 지난해보다 무려 5배이상 많은 입영원이 접수되기도 했다.이와 관련해 대학의 등록률도 감소하고 있다 한다. 이런 현상은 사상 최악의 취업난과 국제통화기금(IMF) 찬바람에서 기인한 것으로 분석된다.앞으로 한동안 취직이 힘들 것이므로 군대에 일찍 가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다.전역을 앞둔 학군 및 학사장교들이 복무연장을 신청하는 사례가 급증한다는 것도 같은 맥락의 일이다.IMF시대에 군대가 가장 안정된 직장으로 떠 오른 셈이다. 보릿고개가 있었던 50∼60년대에도 군대는 가난한 사람들의 피란처였다.어려운 살림에 한 입(식구)이라도 줄이기 위해 군대에 가는 장정들이 당시엔 많았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 시대로 후퇴했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군대는 훌륭한 교육기능을 지니고 있어 말썽꾸러기 아이가 군대에 갔다 와서 사람됐다는 경우도 많다.대학 도서관에 제일 늦게까지 남아 있는 학생은 대부분 제대한 복학생이기도 하다.부모 세대와 달리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우리 젊은이들에게 IMF 한파는 오히려 심신을 단련하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을듯 싶다.
  • 국경도시 흑하의 애환(흑룡강 7천리:13)

    ◎69년 소련군 침공… 주민들 공포의 한달/지금도 흑룡강 국경엔 러 순시선 왔다갔다 제정 러시아군에 의해 초토화되었던 흑룡강성 애휘진은 오늘날 작은 촌락에 불과했다.1천여 가구가 사는 애휘진은 100여년전 흑룡강장군이 주둔했던 시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국경지대의 중요 거점이기는 했으나 지금은 1개중대 병력이 주둔하고 있다.7련소속인 이들 병력은 중소긴장이 해소된 탓에 평화스러워 보였다. ○예휘진 1개중대 병력 주둔 그래서 지역봉사와 영농활동에 나서는 병사들이 많았다.애휘역사진열관을 방문했을때 진열관 뜰에서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전사들을 만났다.오정양 관장은 이들이 윤번으로 매주 한 차례씩 와서 봉사활동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그렇다고 군에 사기가 떨어진 것은 아니라고 했다.부대에서 실시하는 정신교육과 더불어 주민을 돕는 봉사활동을 통해 오히려 병사들은 인민의 전사라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최근 들어서는 러시아 원동군의 방문도 자주 이루어지고 있다.지난 1992년 초겨울에는 골바프중장이 이끈 러시아 원동군 대표단이 애휘진에 와서 7련 산하 여러 부대를 시찰했다.그렇듯 중국과 러시아의 군사관계는 호전되었지만,국경은 여전히 존재할 수 밖에 없다.흑룡강성에 걸친 중러국경은 3천45㎞.국경선 18개 현·시·구(구·현급 행정구역)를 지나갔다. 국경경비는 5련이 최북단 낙고하 초소를,7련과 8련은 애휘초사와 흑하초소를 각각 맡고 있다.이 가운데 조선족출신 연장은 5련을 지휘하는 최광일 대위(31)밖에 없다.흑룡강성 밀산시에서 자란 그는 목단강 조선족중학교를 거쳐 대련군관학교를 나왔다.그 말고도 5련에는 조선족 한 사람이 더 복무한 적이 있으나 지난해 대퇴(제대)했다.최태건이라는 계동현 사람인데,그는 군에서 나와 지금은 막하향우전국에 근무하고 있다.최광일 대위는 스스로 복받은 세대의 군인이라고 했다.지난 세대의 군복무에 비하면 요순시대를 사는 것과 다름 없다는 것이다.자신이 실제 체험한 것은 아니나 국경부대에 두고두고 전해오는 80년대이전의 병영생활을 실감나게 이야기했다.그의 말을 들으면서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시 한번 꼽씹었다.“흑룡강 군인들은 시대별로 전혀 다른 병영생활을 체험했디요.60년대는 옛 소련군과 총뿌리를 겨누어야 했던 전시를 살았다 말입네다.기리고 70년대는 길을 닦고 철도를 깔아야 했디요.말이 군인이었디 실은 노동자였슨다.순라가 주임무였던 80년대도 고달프기는 매한가지였다고 기래요.흑룡강이 얼면 강 한복판 얼음위에다 널빤지 하나를 달랑 깔고 보초를 섰답네다.오죽 추웠겠습네까.기온이 영하 50도까지 떨어지는 날씨에 연속 8시간씩 보초를 선다고 생각해 보시라요” 흑하시 강변의 왕숙공원을 산책하노라면 순라병들과 함께 달리는 군견을 만날수 있다.주둥이가 몽툭하고 허리가 잘쑥한 잘 생긴 개들이다.그 군견을 모는 순간 중소국경분쟁이 일어났던 시절에 보도되었던 기사 하나가 얼핏 떠올랐다. 기사는 70년대 어느 겨울 얼음이 언 흑룡강 빙판위를 중소 순라병이 서로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그런데 중국군 군견은 수놈이고,옛 소련군 군견은 암놈이었다는 것이다.우수리강 진보도 국경분쟁에 따른 전투를 겪고난 터라 여차하면 서로 총을 갈겨댈 그런 때였다.순라병들 끼리는 서로 스치고 나면 행여 뒤에서 총질을 하지 않을까 싶어 모골이 송연했는데,양쪽 군견은 뒤를 돌아 보면서 사랑의 눈길을 주었다. 그런 어느날 소련군 군견이 중국군 초소 군견우리에 불쑥 나타났다.중국쪽 초소는 발칵 뒤집혔다.적의 군견이 나타났으니 필경 소련군이 강을 건너왔을 것이라는 성급한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이는 곧 심양군구에 보고되었다.그리고 동북군은 일급 전쟁태세를 갖추었다.그럴 즈음에 소련군쪽에서 군견을 찾아달라는 통보를 해왔다.긴장국면은 바로 풀렸지만 사랑을 찾아 강을 건너온 군견으로 해서 전쟁이 일어날뻔 했다. 무고한 사람들의 삶을 앗아가는 전쟁의 참화는 1969년 겨울 진보도국경분쟁으로 일어난 중소전쟁에서도 나타났다.문화대혁명 당시 반동분자로 몰렸다가 간신히 풀려나왔던 흑하시 한정순씨(64)는 그 전쟁현장을 목격한 조선족이다. ○조선족 지휘관 최광일 대위 “모두가 피란을 가노라 법석을 대다 흑하시가 텅 비었디요.집 사람도 애들을 데리고 떠나자고 졸라댔지만,나는 거절을 했수다.조선전쟁(한국전쟁)에 참가한 경험이 있어서 민간인들을 어찌 하겠냐는 생각으로 버텼디요.도망질은 문화혁명에 앞장을 섰던 극렬분자들이 먼저 칩데다.전쟁은 근 한 달만에 끝나고 사람들도 돌아왔으나 얻은 것은 하도 없었디요.맨 잃은 것 뿐이었다 말입네다” ○70년대 군견으로 전쟁위기 전쟁은 사람들 정신까지도 빼앗아갔다.중국 군인들은 소련군 탱크 앞에 빨간 비닐 표지를 씌운 ‘모택동 어록’만을 흔들었다.‘남이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남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귀절을 외웠던 중국군들은 총을 겨누기 커녕 어록만을 흔들어 댔던 것이다.그렇다고 중국군은 소련의 탱크 T62를 때려잡을 무기를 보유한 것도 아니었다.중국군은 탱크 격파용 포는 물론 철갑탄도 만들지 못했던 시절이다. 중국군 수뇌부는 다급했다.그래서 엽검영원수는 역사논쟁에서 밀려 노동개조를 받고 있는 신세로 전락한 무기전문가 유광지 박사를 부랴부랴 불러들였다.결국 탱크 격파용 포와 철갑탄을 개발했으나,소련은 인공위성을 통해 이를 감지했다고 한다.어떻든 중소관계는 1979년 중국이 월남을 침공한 잠깐 동안의 전쟁을 마무리한 이후 지금까지 호전되는 기미를 보여왔다.이번 여행에서 흑룡강 강심을 가른 유람선을 타보았다.마침 러시아 순라선이 군기를 펄럭이며 지나갔다.관광객들이 손을 흔들자 순라정 이물에 섰던 러시아 수병이 부동자세를 취했다.그리고 거수경례를 부쳤다.흑룡강에 정녕 평화는 오는 것일까….
  • 발레리나 최태지(이세기의 인물탐구:143)

    ◎예술혼 담긴 춤사위 ‘호수의 백조’/기쁨의 율동엔 환희가,슬픔의 몸짓선 눈물이…/30대 최연소 국립발레단장… 한국발레의 기수 최태지는 변화가운데 발전을 추구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예술가다.변화하기 위해서는 설득력을 잃은 낡은 전통에 더이상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차이코프스키의 야심에 찬 ‘백조의 호수’는 마리우스 프티파에 의한 대작이지만 지난 87년 마츠에크가 개작하여 파리 데아트르 드라빌에서 초연했을 때는 더 이상 가냘프고 아름다운 백조는 아니었다.왕자가 백조를 들어올리는 ‘파드되’조차 다리의 근육을 이완시켜 덜렁거렸고 튀튀는 입었지만 맨발로 비상하여 파리시민들을 경악시켰다. 그외 자유분방(Fancy free)의 제롬 로빈스, 스펙터클한 모리스 베자르, 민족적 제재를 사용하는 지리 킬리안을 보고 배운 세대가 최태지라고 할 수 있다.특히 모리스 베자르에 경도된 그는 ‘무대는 사람이 자신의 영혼의 정확한 크기를 발견할 수 있는 이 세상 마지막 피란처’라는 말에 적극 공감한다. ○일본 교토서 태어나 그의 나이는 60·70대의 기라성같은 대선배들이 도열한 무용계에서는 어쩌면 신세대이지만 발레의 연륜이 다른 무용보다 짧다는 점에서 지금 최정상과 절정에 서있는 위치다.클래식발레의 규격화된 미감에 머물지 않고 매력적 연기를 가미한 드라마틱 발레를 추구하는 것도 그렇다. 그는 국립발레단 창단이후 처음으로 현대무용가를 트레이너로 초청하여 단원들에게 몸의 표정을 살리는 방법을 훈련시켰고 지난 7월에는 이스라엘 칼미엘 축제에 초청되어 이집트의 저명한 모하메드 알 에자비로부터 ‘동양에는 동양의 문화가 있고 한국에는 한국의 전통문화가 있다.그러나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알려진 발레가 색다른 고급예술로 한국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호평을 받아냈다. 최태지는 일상생활에서도 꾸밈없이 시원하고 솔직해서 상대방에게 어떤 긴장감도 주지않는 성격이다.무대에서는 튀튀를 입고 현대적인 해석으로 스토리를 끌고 가지만 고도의 문학성과 철학성을 살려 발레 본연의 격조에 미세한 흔들림도 주지 않는다.국내 발레사상 최연소단장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발레단을 능란하게 운영하는 것을 본 전단장 김혜식은 ‘최태지의 행복하기만한 모습 저변에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어쩔수 없는 고뇌의 흔적이 침잠되어 있다’고 말한다.그래서 그의 기쁨의 율동에서는 환희가 우러나오고 슬픔의 몸짓에서는 눈물방울이 흘러내린다. 최태지는 여러가지 특이한 주변환경을 지니고 있다.첫째 그는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레미콘 회사를 경영하는 부친 최태병씨와 김명림여사의 2남4녀중 막내. 교토 마이즈루(경도부 무학시)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집앞에 있던 마이즈루무용학원에 다녔다.마치 그의 운명이 춤추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그가 태어난 도시는 ‘춤추는 학’이란 뜻의 ‘마이즈루’였고 그는 ‘발레없이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고 말할만큼 춤에 빠져들었다.그리고 자연스럽게 무대에 오르기 시작하여 만16세가 되기전에 ‘코펠리아’의 스와닐다로서 ‘마주르카’와 ‘밀 이삭춤’‘차르다즈(Czardas)’와 그랑 파드되를 추었고 17세때에는 가이타니발레단 제국(제국)극장공연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솔리스트로 뛰었다.다음해 ‘잠자는 미녀’로 일본의 발레계가 주목하면서 민족차별을 극복했고 국비장학생에 선발되어 프랑스 프랑케티발레학교에 유학했다. 83년,가이타니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과 일본 문부성이 주관한 ‘한여름밤의 꿈’에서 전일본신문이 대대적으로 호평한 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의 국립발레단이 그를 ‘백조의 호수’에 초청, 2년후 국립발레단에 정식 입단하면서 모든 레퍼토리의 주역을 휩쓸었다.이후 뉴욕에서 회계학을 전공한 최두원씨를 만나 결혼,자녀는 딸만 둘.양재동에 자택이 있고 시부모는 근처에 함께 산다. 그는 ‘발레는 고도의 서커스같은 기술만으로는 안된다’고 말한다.‘드라마틱 발레로서 예술성을 성취했을 때만이 발레로서의 아름다움이 보석처럼 빛나게 된다’고도 했다.그의 꿈은 네오클래시시즘에서 모던발레를 거쳐 드라마틱 발레의 완성을 이룩하고 싶은 것이며 세계 최고의 안무자인 존 노이마이어의 ‘카멜리아 레이디’(춘희)를 위해 바로 혼신의 무대를 만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백조의 호수’ 주연 ‘발레는 현실이며 환상의 예술이 아니라는 것’과 ‘관객의 가슴을 채워주지 못하는 발레는 더이상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그리고 관객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선 얽매인 룰과 규격에서 벗어날수 있는 열린 사고가 어느때보다 절실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진보적 예술이란 변화가운데 질서를 유지하면서 예술의 내부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일때만 비로소 가능해진다.그때 인간의 춤,관객과 호흡을 함께 하는 살아있는 춤,예술이 들여다보이는 최상의 춤으로 그는 최고의 비약을 꾀하려는 것이다. □연보 ▲1959년 일본 경도 출생 ▲1975년 가이타니발레단 도쿄 제국극장공연 ‘코펠리아’전막외 ‘삼각모자’ ‘스프링’ 주역 ▲1978년 일본 동무학고교 졸업, 뮤지컬 ‘한여름밤의 꿈’ 출연,NHK방송국 발레의 밤 ‘사계’ 등 주역 ▲1981∼82년 파리 프랑케티발레학교 유학 ▲1983년 한국국립발레단 객원 ‘세하라자데’ ‘백조의 호수’ 주역 ▲1987년 국립발래단입단,88년 문화예술축전 ‘왕자호동’ 주역 ▲1991년 ‘춤의 해’에 ‘올해의 무용가’ 선정 ▲1993년 국립발레단 지도위원,국립발레단부설 문화학교강사,예술의 전당개관기념 ‘백조의 호수’ 주역 ▲1994년 뉴욕 아메리칸 발레시어터·뉴욕 시티발레컴퍼니 발레연수 ▲1996∼현재 국립발레단 단장 및 예술감독 ▷대표작◁ ‘레파티누르’ ‘로미오와 줄리엣’ ‘해적’ ‘동키호테’ ‘바이올린소나타’ ‘에스메랄다’ ‘고려애가’ ‘레퀴엠’ ‘삼차원’ 등 주역 다수
  • 캄 난민 3만여명 태 피란/훈센군,라나리드측 최후 거점 총공세

    【방콕 연합】 라나리드에 충성하는 군대가 18일 밤부터 그들의 마지막 보루인 태국과의 접경 오스맛을 훈 센 군대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필사의 저항을 계속하면서 새로운 난민이 발생,20일 현재 3만5천명의 캄보디아인들이 태국 접경으로 몰려들어온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태국군은 캅 청 지구의 총촘 통로를 개방,오스맛으로부터 탈출한 난민 1만명을 받아들인데 이어 전투가 격화되면서 또 다른 2만명이 수린으로 밀려들었다고 밝혔다. 이는 프놈펜정부가 파일린을 점령하기 위해 크메르루주 게릴라와 전투를 벌여 약8만명이 피난길에 올랐던 지난 94년 이래 태국으로 들어온 최대규모의 캄보디아 난민이다. 이같은 대량 난민 유입사태는 태국과의 접경에서 3∼4㎞ 떨어진 삼롱지구 올 폭마을의 교량부근에서 양적대 세력들이 야포와 기관총을 동원,교전을 개시하면서 발생했다. 훈 센 군대는 밤새 이 마을을 점령하고 이어 오스맛이 내려다 보이는 프놈 스루압에 공세를 가했다.
  • 성악가 박수길(이세기의 인물탐구:141)

    ◎미성과 볼륨 지닌 바리톤의 선도자/독특한 가창법엔 철학적 예술성 가미/오페라도 40여편 출연·연출한 재주꾼 위대한 인물중에서 피나는 노력없이 정상에 오른 사람은 없을 것이다.또 노력하지 않은 천재가 일찍이 사회에 공헌한 일이란 드물다.바로 바리톤 박수길이 걸어온 역경의 뒤안길은 한낱 흘러간 추억일 수 없는 진한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준다.어둡고 외롭고 험란한 가시밭길을 걸어왔으나 그의 얼굴은 햇살처럼 밝고 항상 즐거움에 넘쳐있다.극단적인 아픔을 이겨낸 노래 또한 증류수와도 같은 청정이 깃들어 그가 슬픈 노래를 부르면 심장이 울리고 기쁨에 찬 노래는 환희의 감동을 전달해준다. ○함흥서 출생 1·4후퇴때 월남 지난 68년 ‘사랑의 묘약’을 첫 오페라로 그는 ‘라보엠’의 마르첼로역만 6차례,‘아이다’ ‘리골렛토’ ‘라트라비아타’ 등 40여개의 오페라에서 주역과 조역을 해냈다.그중에서도 그의 노래의 백미는 슈베르트 가곡인 ‘겨울 나그네’와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전곡연주를 들 수 있다.특히 지난날을 자전적으로 읊조리는 듯한 ‘겨울 나그네’의 ‘얼어붙은 눈물’은 마음속으로 쓰는 시와 마음속으로 흘러내리는 차가운 눈물을 느끼게 한다. 그는 오페라 가수로서 자신의 역할에 도취하여 역할의 성격들을 철저히 표현해 내는가 하면 피부에 스며드는 음악성을 엘레지아코(비가조)로 살리는데 혼신을 다한다.가곡을 부를때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도 중요하지만 풍부한 성량을 가지고 어떻게 소리를 내느냐에 치밀하게 접근한다.지금도 50대 중반의 예술가로서 사고의 여백과 서정적 시정을 담아 함축성있는 창법이 한층 내공화하는 시기다. 음악평론가 김형주는 ‘한국의 명연주가 집중연구’에서 “인간미 넘치는 표정뒤에는 음악에 대한 인내와 집념이 숨어있고 감미롭고 특이한 가창법과 유려한 가요성은 그만의 매력”이라고 평한다.더구나 그의 탁발한 창법은 오랜 연주생활 경험에서 얻어진 ‘철학적인 예술성’을 발휘하여 오성적인 인식이 고도화된 경지다.‘온화하고 차분한 학자적 풍모’가 있는가 하면 ‘옳다고 판단된 일은 끝까지 밀어부치는 고집과 행동력’ 또한 만만치가 않다. 박수길은 어쩌면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곤두박질치는 인생의 전환을 겪은 예라고 할 수 있다.그는 함남 함흥에서 신교육을 받은 박영록씨의 3남2녀중 장남.그러나 6·25의 와중에서 1·4후퇴때 외조모를 따라 먼저 피란을 내려온 것이 지금까지 이산가족으로 남게된 동기가 된다.어릴때는 부친이 아코디언을 켜는 가정환경에서 풍족하게 자라났고 초등학교에 들어가기전부터 노래에 뽑혀다니는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외삼촌댁이 있는 전라도 이리에서 동산초등학교에 다니다가 중학교시절은 서울에 있는 백부댁에서 기식,친척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동성고를 졸업했으나 대학진학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오히려 노래실력이 뛰어난 그를 안타깝게 여긴 친구들이 음대진학을 권유해 주었고 친구들의 도움으로 연세대교수이던 황병덕씨를 소개받아 생전 처음으로 발성법이며 창법 호흡법을 배울수 있었다.그리고 60년,연세대 성악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그러나 등록금이 없어 한달만에 자퇴해 버렸고 그로부터는그의 인생의 길은 터널속처럼 멀고 암담하기만 했다.무엇에도 희망을 걸 수 있는 실마리란 없어보였다.생계해결을 위해서 시계모형을 만드는 공장에 들어가 철판을 자르는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단지 그는 절망이나 포기대신 언젠가는 자신이 무엇인가가 되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해 가을,한양대가 설립되었고 당시 한양대 음대학장인 오현명씨와 총장인 김연준씨의 배려로 전학년 장학생으로 발탁되었다. ○한양대 음대 장학생 발탁 그는 오페라에서 어떤 역할을 맡든 작품이 갖는 내용의 주제와 시가 갖는 운율을 남보다 전달하는 노력이 투철하다.이는 ‘인간에 대한 심오한 사랑이 내부에 도사려있기 때문’이며 ‘젊은 날의 방황과 고통이 음악적으로 양성됐기 때문’일 것이다.그의 음역은 베이스의 깊은 음색과 테너의 화려함을 동시에 지닌 테너 바리톤으로 인생의 쓸쓸함과 순수한 청춘의 아름다움을 거침없이 넘나든다. 음악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지난 61년 서울에 와서 독창회를 연 독일의 세계적인 바리톤 게르하르트 휘시의 연주를 보고나서부터다.당시 휘시는 60을 넘긴 나이였으나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싸늘하게 식어버린 아침이슬’처럼 불러주었고 그후 슈베르트 가곡을 부를때마다 그는 휘시의 음유적인 음악세계를 되살려 노래의 참맛과 멋에 빠져들수 있었다. 최근에는 오페라연출에도 손대어 ‘피가로의 결혼’과 지난해 ‘사랑의 묘약’을 연출했고 요즘은 국립오페라단의 하반기공연인 ‘섬진강 나루’를 지휘감독하면서 오페라단 운영,연출의 새로운 모색 등 오페라발전을 위한 여러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탐색을 게을리하지 않는다.69년에 바이올린을 전공한 부인 김진희씨와의 사이에 남매. 그동안 그를 둘러싼 수많은 호평이 있었으나 그중에서도 음악평론가 이유선씨가 ‘독일 리트의 사전인 카를로 베르곤지의 미성과 볼륨을 가진 한국 바리톤의 일인자’로 지적해준 것과 78년 뉴욕 카네기홀 데뷔때 뉴욕타임스가 ‘장래가 촉망되는 감명깊은 노래’로 평해준 것이 그의 음악생애에 커다란 힘이 되어 주었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연출 그는 명실공히 한국 오페라와 가곡을 이끄는 리더의 입장에 서있다.이제 그가 할 일은 그가 두고온 고향산천과 그리운 부모,삶의 축적을 희로애락으로 담아 늙어서도 청중의 심금을 울리는 눈물의 가곡을 전생애적으로 노래부르는 ‘진실한 예술의 혼’으로 존재하고 싶은 것이다. □연보 △1941년 함남 함흥 출생 △1964년 한양대 음대 졸업 △1968년부터 오페라 ‘사랑의 묘약’ ‘순교자’출연 △1972년 국립극장 독창회 △1978년 뉴욕 매네스 음대 졸업,뉴욕데뷔 독창회(카네기 리사이틀홀) △1978∼84년 성심여대 음대 부교수 △1979년 귀국독창회(국립극장) △1982년 슈베르트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전곡 우리말번역연주,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첫연출 △1984∼현재 한양대 음대 교수 △1987년 슈베르트와 슈만가곡의 밤(호암아트홀) △1989년 국립합창단 ‘독일진혼곡’ 협연(나영수 지휘) △1995∼현재 국립오페라 단장 △1997년 9회 독창회(국립극장) ▷오페라 출연◁ ‘아이다’‘리골렛토’‘파리앗치’‘일트로바토레’‘세빌리아의 이발사’‘오델로’‘호프만의 뱃노래’‘마담 버터플라이’‘춘향전’‘파우스트’‘탄호이저’‘논개’‘카르멘’‘원효’‘결혼’‘돈파스칼로’‘원술랑’‘돈카를로’‘돈조반니’‘심청’‘무당’ 등 40여편,현재 한양대 교수·국립오페라단 단장·예울음악무대 대표,‘섬진강 나루’제작 예술감독(8월19일부터 국립극장)
  • 캄,대만대표부 폐쇄명령/“라나리드군에 기금전달 등 내정간섭”

    ◎북부지역 전투재개/난민 태국접경 집결 【프놈펜·도쿄 외신 종합 연합】 캄보디아 경찰은 내정에 개입했다는 이유를 들어 프놈펜 주재 대만 경제·문화대표부에 대해 폐쇄명령을 내렸다고 22일 밝혔다. 혹 롱디 캄보디아 경찰총장은 대만 경제·문화대표부가 자국 종교단체가 보낸 자금을 노로돔 라나리드측 군사령관인 니엑 분차이에게 전달하는 등 내정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캄보디아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는 대만 경제·문화대표부를 폐쇄시키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캄보디아의 실권자인 훈 센 제 2총리도 대만대표부 폐쇄결정을 확인했다. 한편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의 캄보디아 사태 중재노력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훈 센군과 축출된 노로돔 라나리드 추종 병력간에 캄보디아 북부에서 전투가 재개됐으며 이로 인해 수만명의 피란민이 태국 접경으로 몰려들었다. 태국 군당국은 21일 약 2만명의 캄보디아 피난민이 태국 동부의 캅 초엥 맞은편 캄보디아 국경마을인 올 사메드 주변에 집결해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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