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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李根安‘수사기법’책 준비했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李根安·61) 전 경감이 도피기간 중 자서전을 준비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을 수사중인 서울지검 강력부(文孝男 부장검사)는 이씨가 지난 96년쯤 자신의 소년기 및 대공수사 경험담을 중심으로 쓴 미완성 수기를 지난달29일 이씨의 용두동 자택에서 압수수색을 통해 찾아냈다고 밝혔다. ‘소년기의 6·25 동란’이란 제목의 이 자서전은 200자 원고지 87장 분량으로 1권 50장은 완성되고 2권은 37장만 기술된 채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으며 이씨가 후배경찰관에게 대공수사관 시절의 경험담을 전수하기 위해 준비했다고 검찰은 전했다. 주병철 이종락기자 bcjoo@* 李根安수기 어떤 내용 ‘고문경관’ 이근안(李根安)이 도피생활중에 집필한 ‘자서전’은 200자원고지 87장 분량으로 전반부만 작성된 상태이다. 그는 ‘소년기의 6·25동란’이라는 소제목으로 된 자서전에서 가족과 함께 충남 금산으로 피란가면서 겪은 고생담과 전쟁의 비참함을 담담하게 적었다.당시 대전 대흥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중이던 이씨는 피란 도중 노천에서 잠을 자고 누이동생이 말라리아에 걸려 고생을 한다.또 북한군과 마주치고 대전 수복후 귀향해보니 부역자가 처형된 일도 떠올린다. 이씨가 자서전을 6·25전쟁으로 시작한 것은 자신의 반공의식이 이러한 성장과정을 통해 싹텄음을 변명하려 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친형이 육군 중위로 복무중이어서 9살된 여동생을 제외하고 가족 모두가 인민군의 처형자 명부에 올랐다는 사실을 소개한 것에서 이러한 의도를 읽을수 있다. 검찰조사과정에서 은신중에 개와 어울리며 무료함을 달랬고 자수 당시에도진돗개 1마리를 기르고 있다고 진술한 이씨는 자서전에서도 개에 대한 애정을 표현해 눈길을 끈다.6·25 당시 집에서 기르던 개 ‘메리’에 대한 회상을 적어 자신의 감수성을 웅변하는 듯 보이지만 고문경관으로서 인권을 유린한 부분에 대해서는 반성하는 대목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이종락기자 j
  • 美NBC취재팀과 인터뷰

    [로스앤젤레스 연합]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현장에 있었던 한국전 참전 미군이 이달 말 한국을 방문,피해자들과 만날 예정이다. 50년 7월에 발생한 사건 당시 미 육군 제1기갑사단 제7연대 2대대 중화기중대 소속 기관총 사수(상병)였던 에드워드 L.데일리(68·테네시주 클라크스빌 거주)씨는 26일(이하 미국시간)“NBC방송의 주선으로 오는 31일부터 1주일간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데일리씨는“NBC-TV의 유명 앵커인 톰 브로코와 함께 방한할 예정”이라면서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사건 현장에서 당시 상황 등에 관해 NBC팀과인터뷰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데일리씨는 당시 상황과 관련,“여자와 어린이가 있었기 때문에 사격명령이 확실하냐고 상관에게 반문했으나 변함이 없었다”며“피란민들을 향해 정조준하지 않고 노근리 굴다리 큰크리트벽을 향해 총을 쐈다”고 말했다. 데일리씨는 다음달 8일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소재 미국교회협의회(NCC)본부에서도 노근리사건 피해자 및 유가족 대표단을 만나 증언과 함께 화해를 모색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 [대한광장] 대한민국의 침묵

    한국전쟁 발발 직후 피란지 대전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무초 주한미대사를만났는데 이 자리에서 무초는“각하,이제 전쟁은 당신들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의 전쟁이 되었습니다”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곧이어 7월12일 한국전쟁의 작전권은 미 극동사령관 맥아더에게 이관되었고,이승만은“대한민국에 있어서 UN의 공동 군사노력에 있어 한국 내 또는 한국 근해에서의 작전중인 유엔군의 모든 부대가 귀하에게 통솔되고 귀하가 그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어 있는 사실을 감안하여 본인은 현재의 작전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일체의 지휘권을 위촉함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결국 ‘대한민국’은 전쟁의 실질적인 주인공이었으면서도 주인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어정쩡한 상황에 계속 직면하였다.유엔군 병력의 반수 이상을 차지한 한국측은 부사령관 지위도 얻을 수 없었고,38선 수복 후 북으로의 진격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는 휴전선을 어디에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에서도 완전히 배제되었다. 전쟁 중 마셜 미 국방장관이 내한하였으나 대통령은 물론 육군참모총장도만나지 않은 채 미 8군의 벤플리트 장군과 요담하고 떠난 일도 있다.이 사건을 두고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은 “섭섭하다 못해 배신당한 느낌마저 들었다”고 말하면서 “원조받는 입장의 참모총장이 겪어야 했던 이 섭섭함은 지금껏 커다란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다”고 토로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 민초들은 군지휘관이 입은 정신적 상처와는 비할 수도 없는 고통을 이후 겪게 되었으며 ‘우방’이라는 논리 속에서 그들이 겪었던 ‘이해할 수 없는’ 상황만큼 무초의 말을 실감케 해주는 일은 없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1949년 6월21일에 이미 미 극동군사령부는 유사시에대비하여 480명의 미 군사고문단을 포함한 2,000여명의 재한 미국인 철수계획을 미리 짜놓고 있었다.‘한국전쟁’에서 스톤은 자신이 만난 보좌관이 남한의 미군 장교 가족들과 그외의 사람들을 후송하기 위한 선박들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증언을 한 사실을 중시하였다. 실제 미국은 전쟁이 발발하자 단 3일 동안에 1명의 실종자만 냈을 뿐 전원을 일본으로 무사히 철수시켰다.26일부터 29일까지 도합 2,000여명의 미국인이 수송기와 배편으로 한국을 떠났다.미 CIA 요원을 지낸 박 하리마오는 이러한 철수가 아주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물론 자국민 보호를 위한 미국의 이러한 조치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그리고 전쟁 중미군 3만명이 전사한 일을 가볍게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노근리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우방’인 미군의 총탄에 수많은 국민들의 목숨을 내맡기고도 지금껏 제대로 목소리 한번 내지 못한 우리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형식상으로 한국전쟁은 한국과 유엔,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국과 미국의 확고한 동맹 속에서 치러진 전쟁이었다.그러나 사실 ‘우방’,‘동맹’이라는것은 냉엄한 국제질서 속의 대등한 지위에 있는 국가간의 관계에서나 성립할 수 있는 개념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무초를 비롯한 미국인들은 애초부터 솔직하게 한국전쟁이 자신들이 주도한 전쟁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생각된다.오직 한국정부만이 그러한 주장을 ‘천기 누설’이라도 되는 것처럼 억제해온 것이다.그렇다면 역대 정부가 피학살자들의 ‘진상규명’요구를 ‘국가안보’ 혹은 ‘한·미우호’의 명분으로 금기시해온 사실이야말로 여전히 ‘진실’을 두려워하는 세력이 한국 정치를 압도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뒤늦게나마 미국측에 의해 확인되고 있는 도처에서의 양민학살건과 한국인을 사실상 적으로 취급한 그러한 행동이 한국인에 대한 멸시와 ‘인종적 편견’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 확인되고 있는 지금 미국은 양심과 정의라는 또 한번의 강자의 포용력을 과시하면서 한국전쟁을 뒷수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우방’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어 무고한‘국민’의 희생에 대해 항의 한번 해보지 못한 한국의 시계는 50년 동안 멈추어 서있다.침묵의 세월은 너무나 길었다.한국정부가 이 긴 침묵을 거두고 당당하게 나서서 사건의 진상규명에 앞장설 때만이 한·미간에 진정한‘우리’의 관계가 수립될 수 있으며,지금도 ‘청심환을 먹어야 잠을 이룰 수 있는’ 피해자들이 국가의 품안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김 동 춘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 [독자의 소리] 적군색출 명분 미군의 피란민학살 규명을

    노근리사건을 계기로 다른 대량 양민학살도 밝혀야 한다는 김삼웅칼럼을 읽고 또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50년말 6·25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압록강까지 진격했던 국군의 후퇴가 시작됐다.이때 자유대한의 품에 안기려고 국군을 따라 피난하는 피난민 대열속에 평복차림의 인민군이 침투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미군이 사리원에서 피란민대열을 막고 황해선을 따라 서진시키다가 해주 가까이에와서 갑자기 미군기가 나타나 피난민을 향해 무차별 기총소사를 했다.미군기는 폭탄까지 투하했고 여기서 우리가족도 희생됐다.목숨이 붙어있던 다른 사람들과 어린이들은 후송되지 않아 추위에 얼어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 참상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을 통해 실향민 사이에 알려진 일이지만 그 지역이 북한이다보니 오늘까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졌다.노근리사건을 계기로 잊혀진 해주피해자들도 기억해주길 실향민들은 바라고 있다. 황현성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세류2동]
  • 고령 ‘득성교 폭파’ 참가 美장병 인터뷰

    [뉴욕연합] “미안할 뿐이다.그러나 당시는 전쟁상황이었고 어쩔 수가 없었다” 미 제14전투공병대대 출신으로 지난 50년 8월3일 경북 고령군의 득성교 폭파에 참가했던 캐럴 킨즈먼(71·미시시피주 고티어시)씨는 14일 전화회견에서 폭파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득성교 폭파 당시의 상황은. 미 21사단으로 생각되는데 폭파준비를 마치고 마지막 미군 병력이 다리를건너기를 기다렸다.다리 위에 많은 피란민 행렬이 있었지만 미군 병력이 다리를 건너자마자 폭파명령이 내려졌다. ■누가 명령을 내렸는가. 당시 현장에 대령이 나와 있었다.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마지막 순간까지기다리다 폭파명령을 내렸다. ■득성교 위에는 얼마나 많은 피란민이 있었는가. 나는 250여명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다리 위가 꽉 찬 것으로 보였으며 500∼1,000명까지 추정하는 동료도 있었다.다리를 폭파한 뒤 곧바로 트럭을 타고 현장을 떠났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피란민이 죽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다리 위에 있던 피란민들이 모두 죽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리를 폭파한 것이 필요한 조치였다고 생각하는가.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한다.적의 진격을 막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라도 폭파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다리 폭파 직전에는 멀리서 북한군의 T-34 탱크 굉음이 들렸었다.한국어 통역을 통해 ‘다리가 곧 폭파되니 뒤로 물러서라’고피란민들에게 경고하고 머리 위로 위협사격을 했지만 필사적으로 다리를 건너려 했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당시 나이와 계급은. 21세였으며 상병이었다.한국전에는 50년 7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11개월간참전했다. ■이 사건과 한국전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좋지 못한 일이지만 역사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미군 부대 PX에 일하던 한한국여성으로부터 “우리나라를 구해줘 고맙다”는 참전에 대한 감사의 말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전쟁이었고 적이 한국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했으며 우리는 한국을 돕기 위해 그곳에 갔다.
  • 美軍, 왜관·고령교 폭파 왜했나

    [워싱턴 AP 연합] 1950년 8월초,당시 미 제1기갑사단장으로 부임한지 불과며칠밖에 안된 호바트 게이 장군은 민간인으로 위장한 북한군 게릴라들의 격퇴 방안을 고심하던 중 3일 저녁 15마일 서쪽에 북한군 집결 보고를 받고 미리 폭약을 설치한 왜관교 폭파를 지시했던 것으로 밝혀졌다.미군은 경고사격을 통해 한국인 피란민들에게 되돌아갈 것을 요구했으나 피란민 행렬은 계속 왜관교를 통해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는 바람에 희생자가 많았다고 참전용사들은 전했다.지난 83년 작고한 게이 장군은 훗날 미군 전사에 기록된 글을통해 “그 다리엔 수백명의 난민들이 있었기 때문에 폭파명령을 내리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결단이었다”고 술회,희생자가 많았음을 시사했다. 제1기갑사단의 지난 50년 전황일지에는 희생자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지난60년 발간된 미군 전사에는 게이 장군의 말을 인용,왜관교 희생자들에 대한기록이 남아 있다. 또 제14전투공병대대 하사관 출신의 캐럴 킨즈먼은 고령교 폭파와 관련,“미군이 밀려드는 피란민 머리 위로 총격을 가해 다리가 폭파될 것이라는 사실을 경고하려 했으나 피란 물결은 그칠줄 모르고 계속됐다”면서 “그런 와중에 당일 오전 7시1분 상부에서 폭파 명령이 내려왔다”고 말했다.고령교폭파로 인한 희생자 발생에 관한 보도는 최초로 나온 것이다. 킨즈먼과 루돌프 지아넬리 등 일부 참전병사들은 고령교 폭파 희생자가 수백명에 달한다고 증언한 반면,이포크 등은 30∼40명의 난민을 목격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재향군인들은 그러나 고령교 폭파 지시를 내린 지휘관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밝혔으며,제14공병대 기록에는 고령교 폭파와 관련,‘작전,멋지게 완료’라고 적혀 있다. 유진 헤슬먼과 로버트 러셀은 “난민들을 제거하라는 지시를 받고 그들을전멸시켰으며,미군은 모험할 처지가 아니었다”면서 “사망자들 중에는 위장한 북한군 10명 정도가 끼여 있었다”고 말했다.
  • 美軍 왜관-득성교 폭파 6.25피란민 수백명 숨져

    [워싱턴 AP 연합]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이 ‘노근리 학살사건’ 1주일쯤후인 지난 50년 8월초 낙동강의 전략요충인 왜관교와 득성교(현재 구 고령교) 2개를 폭파,수백명의 한국 양민을 사망케 한 사건이 미군 자료와 미군 참전병사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됐다. 미군전사(戰史),비밀해제된 미국방부 문서 등의 기록과 미 재향군인,한국피난민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전 발발 6주 후인 50년 8월3일 북한군3개사단에 밀려 낙동강을 따라 후퇴하면서 1기갑사단장 호바트 개이 소장과장교들이 북한군을 낙동강 이북에서 저지할 목적으로 그같은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미군들은 왜관교와 득성교를 폭파했으며 이 과정에서 어린이와여성 등 피난민 다수가 숨지거나 익사했다. 참전 미군병사들은 당시 북한군들이 피난민을 가장해 미군을 공격하는 사례가 적지 않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고 회고했으며,교량폭파로 인한 피살자수는 왜관교의 경우 수백명,득성교의 경우 수십∼수백명에 이른다고 증언했다.
  • 6·25참전 美軍증언

    [워싱턴 AP 연합] 1950년 8월 3일 미군은 왜관교와 고령교를 폭파하면서 수백명의 양민도 함께 숨지게 했으며,이 일이 있기 전에도 피란민들에게 총격과 포격을 가해 숨지게 했었다고 미 참전병사들은 증언했다. 제대군인인 에드워드 L.데일리는 왜관교의 경우 북한 인민군의 남진으로 밀려드는 피란민들을 저지하기 위해 피란민 머리 위로 경고 사격을 했지만 별도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피란민의 남하를 저지하는데 실패한 미 1기갑사단 사령관 호바트 게이 소장의 지시로 왜관교에 장전한 폭약을 터뜨렸으며,폭발과 동시에 불길이 치솟았고 교량 지지대들이 산산조각났다고 데일리 등 다른 병사들이 전했다. 왜관교에서 40㎞ 하류에 위치한 길이 195m의 고령교 폭파도 이보다 약간 앞서 일어났으나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 육군 공병이었던 조지프 이포크는 “나는 ‘사람들이 있다’고 외쳤지만 다른 병사들이 ‘폭파해야 한다.달리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제14 전투공병대 병장 출신의 캐럴 킨즈먼은 “제 14 공병대가 이틀간에 걸쳐 3,000㎏의 폭약을 설치한 뒤 당일 오전 7시 1분에 폭파 명령이 떨어졌으며 이어 폭발과 함께 다리가 산산조각났다.당시 다리에는 피란민들이가득했다”고 말했다. 앞서 1기갑사단 병사들은 다리 폭파가 있기 하루 전인 2일 수십명의 다른군인들과 함께 낙동강으로 퇴각중이었으며,이들 뒤를 80명 가량의 흰옷 입은 한국인 피란민들이 뒤따르고 있었다고 참전병사들은 전했다.그런데 오후 민간인으로 가장한 5명의 인민군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당시 상황을 에드워드 데일리는 “북한군이 발포하자 즉각 사살했다”고 말한 반면,유진 헤슬먼은 “인민군들이 항복해 끌려갔다”고 엇갈린 증언을 했다.헤슬먼은 “인민군들이 피란민 사이에서 나왔다고 생각됐기 때문에 우리는 피란민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대부분 사살했다”고 말했다. 이보다 1주일 전쯤에도 서울에서 남동쪽으로 160㎞ 떨어진 철길을 따라 걷던 피란민 수백명에 대해 미군의 박격포 공격이 이뤄졌다고 1기갑사단 재향군인들은 회상했다. 제임스 맥리어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대령이 포대에 무전을 보내 그들이 남하하지 못하도록 죽이라고 지시했다”면서 “포탄이 떨어진 뒤 팔다리,몸뚱이가 어지럽게 널렸다”고 덧붙였다.
  • 현지주민 당시 회상

    6·25 당시 미군이 경북 칠곡군 왜관교와 고령군 득성교(구 고령교) 폭파과정에서 많은 피란민을 학살했다는 미국 AP통신의 보도가 전해지면서 현지 주민들의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당시 고령중 4학년이었던 고령군 6·25참전용사 전우회장 유석렬(兪石烈·70)씨는 “50년 8월3일 오전 6시쯤 1㎞가량 떨어진 지점에서 다리가 폭파되는소리를 들었으며 1시간후 현장에 도착해 보니 다리가 완전히 파괴됐고 여러사람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주민 김복수(金福壽·69·성산면 삼대리)씨는 “2일 밤 고령교를 건너 달성군 논공면 위천리에서 고령교 폭파를 목격했다”며 “외지에서 피란을 온 사람들이 많이 희생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 왜관읍장인 이상천(李相千·69)씨는 “왜관지역 주민들은 당시 피란갔다가 50여일 뒤 마을로 복귀해 왜관교 폭파현장을 보지 못했다”며 “그러나마을로 돌아온 뒤 ‘미군이 총을 쏘며 계속 이어지는 피란민들의 접근을 저지한 뒤 다리를 폭파,일부 피란민의 희생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말했다. 왜관읍장백환기(白煥基·60)씨는 “칠곡군 약목면 일대 주민을 비롯한 피란민들이 왜관교를 건너려 했지만 북한군이 섞여 있다는 이유로 미군이 피란행렬에 마구 발포해 우리 일행은 도하를 포기했지만 이를 무시하고 왜관교와강을 건너던 피란민들은 거의 대부분 미군의 폭격과 총에 맞아 죽었다” 고회고했다. 칠곡 한찬규기자 cghan@
  • [외언내언]‘노근리’에는 왜 갔나

    6·25동란때 미군에 의해 양민이 대량학살된 충북 영동 ‘노근리사건’을조사하기 위해 지난 5일 현장을 방문한 국회의원들의 행태가 그곳 주민들은물론 국민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노근리 양민 대학살사건 대책위’정은용위원장이 국회의원들에게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고 있는데 국회의원중 누군가가 “미군이 오인사격(誤認射擊)을 한 건 아니냐?”고 질문을 했다.정위원장이 “절대 아니다”고 답변하는 순간 의원들 가운데 누군가가 “에이…그럴리가 없어”라는 말이 흘러나왔다.“별거 아닌데 그만 가지”라는 말도 이어졌다. 놀란 유족들이 발언자를 살폈으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확인되지 않았다.이뿐 아니다.자민련 박신원(朴信遠)의원은 “우리 고향에서는 2,000명이 미군에게 죽었다”고 했다.유족들이 ‘그정도 가지고…’라는 뉘앙스로 듣고 항의하자 박의원은 “유사 사건이 9건이나 있다는 의미였다”고 해명했다.유족들이 “그동안 정부가 진상규명을 외면한 것도 모자라 국회의원들까지 이럴 수 있느냐”고 항의했다.그러나 의원들의 반응은 엉뚱했다.“농담삼아 던진 이야기를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느니,“의원들끼리 한 이야기인데(유족들이)쌓인 게 많아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는 식이었다. 국회 행자위 2반 소속 이들 국회의원들이 이날 보인 행태는 민족의 상처를뒤늦게나마 씻어주겠다는 우리나라 국회의원이 아니라 제3국 국회의원들의그것이었다.제3국 의원들이라고 무고한 양민이 대량학살당한 현장에서 그런태도를 보였겠는가.그렇다면 국민들은 “노근리에는 왜 갔는가?”그들에게묻지 않을 수 없다.AP통신이 ‘노근리양민학살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던 때 국내신문도 보지 않았다는 말인가.“그들(피란민들)을 적군으로 대하라-Treat them(refugees) as enemy”라는 비밀해제된 당시 군 작전명령의 원문(原文)까지 나와 있었다.‘오인사격’은 무슨 얼어죽을 ‘오인사격’인가.게다가 ‘의원들끼리 던진 농담’이라는 말은 또 무슨 소리인가.거액의 출장비를 받고 농담이나 하려고 노근리에 갔다는 말인가.아녀자까지 포함된 무고한 주민 200여명이 학살당한 노근리사건이 ‘별것’아니라면,얼마나 많은 양민들이 떼죽음을 당해야 ‘별것’이 된다는 말인가.“나라가 참으로 큰일이다”라는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장윤환 논설고문
  • [문명자 회고록 내가 본 朴正熙와 金大中](1)

    대한매일은 미국 US 아시안뉴스 서비스 주필인 문명자씨의 미공개 회고록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을 단독입수,내용 가운데 일부를 발췌하여 연재합니다.문씨는 지난 73년 ‘김대중납치사건’을 국내에 보도한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껴 미국에 정치망명을 선언한 이후 30여 년간 미국서 활동해온 현역언론인입니다.그동안 그는 국내에서 접할 수 없는 한국관련 고급정보를 목격하고 기록해 왔으며 이번 회고록은 이같은 내용들을 토대로 한 것 입니다.회고록에는 한국현대사의 ‘미스터리’는 물론 한·미관계의 이면사를 처음 공개한 것도 상당수 포함돼있어 ‘역사적 기록’으로서도 큰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73년 4월 15일 대만대학에 박사학위를 받으러 간다며 한국을 빠져나온 전중앙정보부장 김형욱(金炯旭)이 며칠후 미국에 나타났다.그것은 영락없는 도망길이었다. 5·16 쿠데타의 주동인물중 하나였던 그는 그후 출세가도를 달렸다.63년 5월 제4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한 김형욱은 박정희를 위해 별명처럼 ‘곰’같은 충성심을 발휘하는 한편 자기자신을 위해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치부를 했다.이같은 김형욱이 미국으로 도망온 이유는 자명했다.수십년간 충성해온 수하들을 하루 아침에 내치고 잡아넣는 박정희의 냉혹성에 대한 공포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미국에서 김형욱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71년 공화당 전국구 의원 신분으로 남미를 방문하고 뉴욕에 들렀을 때였다.그때 나는 MBC 워싱턴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유엔 취재차 뉴욕에 있다가 당시 컬럼비아대학 연수생으로 와 있던 동아일보 기자 이웅희(李雄熙·현 무소속 국회의원)와 함께 김형욱과 뉴욕의 한 한국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다. 김형욱이 미국으로 도망온 이후 나는 그와 수 차례 만난 적이 있다.73년 11월 내가 미국에 정치망명을 선언한 후 그는 내게 “문 여사,용감한 결심을존경합니다.우리는 뜻을 같이 하는 동지입니다”라며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그는 내가 망명을 선언한 후 부쩍 자주 전화를 걸어왔는데 “김대중 납치범 명단을 내가 다 가지고 있는데 때가 되면 가르쳐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77년 1월 김형욱은박 정권의 미국 의회 부정로비사건 조사를 위해 구성된프레이저위원회에 증인으로 채택되어 있는 상태에서 아들과 함께 유럽여행을한 적이 있다. 그는 뉴욕 케네디공항을 통해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여기서 낯뜨거운 사건이 발생했다.김형욱이 달러를 밀반입하다가 세관원에게 걸린 것이다.내가 그 사건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한 유태인 친구의 제보 때문이었다. 세관원은 오리걸음(덕 워킹)으로 걸어 들어오는 동양남자가 뭔가 숨긴 것이틀림없다고 확신,김형욱을 멈춰 세웠다.꼭 아편쟁이같이 생겨 마약밀수를 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헤이,유,스탑”(여보,좀 멈춰요). “미?”(나요?). “예스,유”(예,당신말이오). 더욱 한심한 일은 세관원이 그를 불러 세워 몸수색을 하려 하자 김형욱은 한국식으로 세관원을 협박했다고 한다.“내 몸을 수색해서 아무것도 안나오면너 그냥 두지 않겠다”.“오케이”.세관원은 보안관에게 명령했다. “데려가 발가벗겨”. 보안관이 김형욱을 방으로 데려가 발가벗겼는데 그는 무려 7만5,000달러의돈뭉치를 다리에 붕대로 둘둘 감고 그 위에 여자 타이즈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79년 10월 7일 김형욱이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후 나는 교토통신의 요코가와 워싱턴특파원과 함께 처음으로 뉴저지에 있는 그의 저택을 방문한 일이있다.그의 부인 신영순(申英順·在美)에게 주소를 물어 찾아간 그의 집은 웬만한 미국 부호의 집 못지않게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실종 직전 김형욱은 이른바 ‘회고록’ 출판문제로 박 정권과 막판 거래를하고 있었다.박 정권은 김형욱에게 “회고록을 출간하지 않는 대가로 500만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하고 이미 100만∼150만 달러를 먼저 지불했다고 한다.김형욱은 그 나머지 돈을 받으러 파리에 갔다가 결국 실종되고 만 것이다. 김형욱이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우선 중앙정보부가 파리에 온 김형욱을 납치,살해한 후 센강에 버렸다는 설도 있었고,또 산 채로 짐짝처럼 포장해 KAL기에 실어 서울로 데려갔다는 설도 있다. 그 무렵 우리 사무실에 프랑스어로 된 익명의 편지가 날아들었는데 그 내용은 김형욱이 KAL기 짐칸에실려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미국의 한 항공사 화물부에 문의를 해보았다.“사람을 짐짝처럼 싸서운송하는 것이 가능합니까?”.“산소가 부족해 호흡이 곤란하고 온도·습도가 낮아 사람이 짐칸에서 파리∼서울간 15시간을 버틴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이래저래 취재는 벽에 부딪쳤고 나는 김형욱의 사인규명을 거의 포기했다. 그런데 80년대초 나는 뜻밖의 루트를 통해 김형욱의 사인에 대한 상당히 정확한 정보에 접하게 되었다.발설자는 정일권(丁一權) 전 국무총리였다.그는유럽을 여행하던 중 파리에서 자신이 신뢰하는 모 인사(본인의 요청으로 신분을 밝힐 수 없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잔인하다 잔인하다 했지만 박정희가 이렇게 잔인할 수 있나.잘못했다고비는 김형욱이를 자동차에 실어 그대로 폐차장에 밀어넣어 버렸다네”그의 말에 따르면, 산 채로 서울로 납치해간 김형욱을 차지철이 경복궁에서청와대로 이어지는 지하벙커를 통해 박정희 앞에 대령했는데 김형욱이 박정희에게 “잘못했습니다.죽여주십시오”하고 빌었다는것이다. 정일권의 말대로라면 김형욱은 폐차장 압착기 아래서 최후를 맞았다는 얘기가 된다.정일권의 입장에서 보면 김형욱은 자신을 대통령으로 옹립하려던 ‘이북파 최측근’이었으니 분개할만도 했을 것이다. 나는 이같은 사실을 정일권 본인을 통해 거듭 확인한 바 있다.지난 86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하얏트호텔에서 정일권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물어보았다. “김형욱이가 서울로 잡혀와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으시다는데 사실인가요?”“예,내가 그런 애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그것은 사실입니다”. 정일권은 말년에 암에 걸려 고생하다가 94년 타계했는데 내가 그를 본 것은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정리 정운현기자 jwh59@ -文明子씨 일문일답 ■회고록을 출판하게 된 동기는. 역사를 위한 기록이다.한국사회는 가치의 혼돈시대를 맞고 있다.이대로 한세기만 지나면 한국사회에는 박정희를 미화하는 기록만 남을 것이다. 오랫동안 미국의 권부를 가까이서 취재하면서 나는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사실들을 많이 보고 들었다.우리 후손들의 역사인식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바람으로 그동안 보고 들은 박정희의 모든 것을 기록했다. ■회고록의 제목은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인데 박정희 전대통령에 관한 부분이 70% 정도를 차지하는 있는 것 같은데…. 61년 5·16쿠데타 때부터 시작해 82년 김대중씨가 사형수에서 사면을 받고워싱턴에 왔을 때까지를 기록했기 때문이다.박정희씨는 이미 관 뚜껑에 못을박은 사람이고 김대중씨는 아직 활동하는 현역 정치인이 아닌가. 김대중씨에대한 기록은 또다른 기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문 주필의 박정희 전대통령 비판에 대해 일각에서는 주관적이라는 지적이나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박정희에 대해서 나는 한 언론인으로서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있다.그러나독자들은 나의 책에서 사실만을 보면 된다.1961년 4월이후 현재까지 워싱턴에서 벌어진 한국정치 관련사건들을 사실에 입각해 기록했다.사실에 대한 해석과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문 주필의 회고록에는 특정인들의 실명이 거침없이 거론되고 있는데…내가 실명을 거론한인물들은 한국정치사에서 책임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다.그들은 공직에 취임함으로써 이미 역사의 심판대 위에 스스로 올라선것이다. 나는 그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남겼을 뿐이다.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국언론의 익명문화다.육하원칙의 가장 첫번째 요소가 ‘누가’이지 않은가.한국의 언론인들은 혈연·지연·학연의 인간관계 속에 깊이 편입돼 있어 실명을 거론하지 못한다. 퇴직후에도 그 인간관계 속에서 살길을 찾아나가야 하므로 ‘익명의 문화’는 극복되지 않는다.내 경우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사회에서 떨어져 40년을 살아왔기 때문에 거칠 것이 없다. ■그동안 ‘반한인사’ 또는 ‘친북인사’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는데 이에대한 본인의 견해는? 유신정권때인 70년대까지는 ‘반한인사’로 불렸는데 80년대말 남북 고위급회담이 본격화된 후 북한취재에 나서면서 ‘친북인사’로 호칭이 바뀌었다. ‘반한인사’,‘친북인사’란 중앙정보부가 만들어낸 용어로 전혀 타당하지않다.굳이 말하자면 ‘반박정희 인사’나 ‘반유신인사’라고해야 옳다.‘친북’도 그렇다.남북은 같은 민족이다.서로가 ‘친북’도 하고 ‘친남’도해야 한다.‘친미’나 ‘친일’,‘친중’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94년 김일성 주석 사망후 ‘100일설’부터 ‘3년설’까지 북한붕괴론이 대단했다.내가북한에 가보고 와서 북한은 붕괴하지 않는다고 했더니‘친북인사’라고 했다. 한반도 남북에 사는 사람들은 분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보는 시야도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스스로 외눈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두 눈으로 보는 사람이 편파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정운현기자] -文明子씨는 인가 문명자(文明子·70)씨는 38년째 미국 권부의 상징인 백악관을 출입하고 있는 현역 재미교포 언론인이다.73년 11월 당시 보도금지 사항인 ‘김대중납치사건’을 보도한 후 중앙정보부의 체포위협을 피해 미국에 ‘정치망명’을한 전력으로 그동안 국내에선 그의 활동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80년 중국 덩샤오핑(鄧小平)의 초청으로 미국 여기자단 단장으로 중국을 방문,덩샤오핑을 인터뷰했으며 90년 남북고위급회담 이후방북취재를 시작한이후 92,94년 두차례에 걸쳐 김일성 주석을 인터뷰했다. 30년 대구 출생인 문씨는 숙명여고 졸업후 연세대 영문학과 1학년 재학중 6·25를 맞아 피란지 부산에서 일본으로 유학,메이지대 경제학부·와세다대국제법 대학원을 졸업했다. 61년 조선일보 워싱턴특파원을 시작으로 동아일보,경향신문,MBC 워싱턴특파원을 역임한 그는 73년 미국에 정치망명한 후 미국인 동료기자들과 함께 US아시안뉴스 서비스(통신사)를 설립,국제정치담당 주필로 일하고 있다. 동양통신 초대 워싱턴특파원을 지낸 남편 최동현(崔潼鉉)씨와 사이에 1남 1녀.그의 미국이름 주리 문(Julie Moon)은 ‘대지’의 작가 펄 벅 여사가 지어준 것이다. [정운현기자]
  • [김삼웅 칼럼] 다른 양민학살도 밝히자

    6·25한국전쟁 발발 다음날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이 저지른 양민학살만행이 반세기 만에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나는 1995년 이맘 때 ‘해방후 양민학살사’란 책을 쓰면서 현지를 취재한적이 있다.50년 6월 25일 영동군 일대와 대전지역에서 피란온 많은 사람이노근리 부근 금광굴에서 피란생활을 하고 있었다.26일 한낮이 되자 미군이일본인 통역을 대동하고 나타나 주민들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명령하여 주민들은 내키지 않는 피란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피란민이 경부선 열차의 철길을 따라 노근리에 당도했을 때 미군들의 무전연락을 받은 미군 전투기 2대가 나타나 피란민들을 향해 무차별 기총사격을 가하는가 하면 인근의 미군들도 일제히 총을 쏘아댔다는 것이 생존 주민들의 증언이었다.4월혁명이 나던해 11월 유족들은 미국정부가 피해보상을 해준다고하여 서울에 개설한 소청사무소에 배상을 청구했다.그러나 소청사무소는 “법정기한이 경과한 후 제출한 것이기 때문에 심의할 권한이 없다”는 답변으로 유족들의 요구를 외면하고 곧 5·16쿠데타가 일어나 이 사건 역시 다른 양민학살사건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졌다. 불행한 한국 현대사는 수많은 양민학살의 비극을 겪어왔다.양민학살은 우리시대의 아물기 어려운 비극이고 상처이다.결코 덮어둔다고 아물 수 없는 상처인 것이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인민군이나 외국군에 의한 양민학살도 심했지만 우리군과 경찰, 우익단체들에 의해 자행된 양민학살도 수없이 많았다.학계는 45년 해방에서 공비토벌이 끝나는 10여년 동안에 6·25전쟁으로 인한 군인·군속 등 전쟁 관련 희생자를 제외하고도 줄잡아 100만 명으로 추산한다.희생자대부분이 이데올로기 문제로 죽어갔지만 막상 당사자들은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고한 양민들이었다. 이들은 좌익척결의 이름으로,공비토벌의 명분으로,통비분자라는 혐의로,용공이적·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어갔다.6·25전쟁의 와중에서 발생한 양민학살 사건으로는 남원·문경·부산·해남·완도·고양·함평·임실·고창·순창·무주·산청·함양·거창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제14대 국회는 ‘거창 양민학살사건 관계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제정한 바 있고 현 국회는 ‘제주 4·3양민학살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여활동중이다. 또 고양시 금정굴 양민학살과 전북 함평지역에서도 진상조사위원회가 활동한 바 있다. 우리 민족처럼 망자(亡者)에 대해 정성을 다하는 민족도 흔치 않다.그런데무고하게 죽은 100만 혼령의 대부분이 유골 수습도 제대로 안되고 진상규명도 안된 가운데 반세기를 보내고 있다.이것은 사자에 대한 도리가 아닐 뿐더러 문명국가의 수치스런 일이다. 양민학살 실태에 대한 전국적인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더 이상 미루다가는학살실태를 밝혀줄 공공기관의 자료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당시의 참상을 증언할 목격자들이 급격히 줄어들어 영구미제로 남게 된다.행자부에 따르면 거창사건은 위령비 건립 등이 추진중이며 함양·산청사건도 진상규명이 끝나명예회복이 추진중이라 한다.여타지역의 사건도 조사에 나서야 한다.4월혁명후 세상이 바뀌면서 진상규명 작업이 봇물처럼 터져나왔지만 군사정권은 유가족과 사회단체들이 유골을 찾고 위령비를 세우고 진상을 청원하는 행위를‘용공’으로 몰아 탄압했다. ‘국민의 정부’는 과거 정권과 달라야 한다.국회가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전국적 조사에 착수하고 정부가 뒷받침해야 한다.그리하여 유골을 수습하여 영원한 안식처를 만들고 위령탑을 건립하고,명예회복과 위령제를 지내용서와 화해의 기회를 갖도록 해야 한다. 미국 남북전쟁때 남·북군 4만여명이 숨진 게티스버그에 링컨이 세운 국립군사공원,프랑코가 스페인 내전때 ‘전몰자의 계곡’에서 사망한 수십만명장병들의 혼령을 위로하는 대사원을 세운 것에서 우리는 배울 바가 있어야한다.양민학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미래에 그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못하도록 하는 역사 교훈으로서도 중요한 것이다. 김삼웅 주필
  • ‘노근리 사건’ 풀리지 않는 의문들

    [뉴욕 AP 연합] 한국판 ‘킬링 필드’ 노근리 사건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많은 의문들로 가득차 있다.미 국방부 내부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피란민들에게 발표 명령을 내린 지휘관은 누구인가.피란민들이 미군에게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는가.미군 지휘계통의 어느 선까지 노근리의 진상이 보고됐는가. 육군 진상조사단은 이와 같은 풀리지 않은 의문들의 답을 구하기 위해 참전용사들로부터 보다 상세한 증언을 확보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그러나 이 모든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확보한다 해도 국방부가 왜 노근리 사건의 기초적인 사실들을 더 이전에 적발할 수 없었는지에 대한 답변은 국방부만이 할수있다. AP통신은 지난달 말 수개월간에 걸친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10여명의 참전용사들로부터 한국전쟁 초기인 50년 7월말 미 육군 제1기갑사단 제7연대가노근리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을 향해 기관총을 쏘았다는 증언을 얻어내 보도했다.일부 제7연대 출신 참전용사들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중대장이었던 멜번 챈들러 대위가 현장에서 “모두 없애버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증언했다. 그러나 이들은 챈들러 대위가 무전을 통해 연대본부와 사전협의를 했을 것으로 믿고 있으며 한 참전용사는 대대 수준의 장교가 발포 명령을 하달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말했다.그렇다면 더 윗선의 지휘계통,예를 들어 제7연대와 제1기갑사단 지휘부는 과연 노근리 사건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같은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는 그리 용이하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현장 지휘관이었던 챈들러 대위는 70년 숨졌고 다른 대대 장교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챈들러 대위의 상급 대대를 지휘했던 허버트 헤이어 대령은 88세 고령인데다 병을 앓고 있고 “학살사건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말하고 있어 육군 조사관들이 그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새로운 사실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제1기갑사단 복무규정은 피란민을 포함,방어선을 넘으려고 시도하는 그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장병들이 발포할 수 있다는 규정을 담고 있다.다른 이웃 사단에서는 한 장군이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당시 한국 전선을 책임지고 있었던 미8군 사령관 월튼 H 워커 중장이,나아가서 도쿄에 체류하면서 한국 전쟁을 총괄했던 2차대전의 영웅 더글러스 맥아더장군이 그같은 불법적인 명령을 재가했는지 여부가 핵심 쟁점으로 대두된다.또한 사후보고도 어느 선까지 올라갔는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노근리 피란민 학살사건 규명에 나선 미 육군은 증언 확보에 앞서 먼저문서 검토를 통해 스스로에 대해 잘못은 없었는지를 엄정히 물어야 한다.
  • 피난 민간인 敵간주 발포명령

    ?워싱턴 AP 연합? 지난 50년 7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충북 영동군 노근리 부근에서 한국 양민을 살해한 ‘노근리 학살 사건’이 미 정부 공식 문서와 미군의 증언을 통해 확인됐다.미 제1기갑사단,육군 25사단 사령부 명령서 등 미군 공식 문건 2건과 참전 미군 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미군은 7월26일 당시 노근리 부근에서 발견되는 민간인들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쟁 발발 5주째인 당시 북한군이 농민 옷차림으로 위장,피난민 대열을 통해 미군 방어선으로 침투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며 미군 병력이 이에따라 어린이·여성 등을 포함,피난민 수백명을 살해했다.참전 병사들은 7월과 8월 두 차례 이와 유사한 피란민 학살 사건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미 육군 25사단장 윌리엄 B 킨 소장은 7월26일 야전 지휘관들에게 보낸 명령서에서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모든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또 제1기갑사단 사령부도 명령서에 “전선을 넘어오는 자에게 발포하라”고 전했다.제1기갑사단에 근무했던 6명의 참전 장병들은 민간인을향해 발포했으며 또다른 6명은 대량학살을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미군 병사들은 사건 발생 시간·장소나 희생자 중에 여성·어린이·노인들이 많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참전 미군병사들은 피살자 수가 100∼200명 또는 수백명에 이른다고 말했다.굴다리 부근에 있었던 참전 병사들은 사망자 수를 200여명으로 추산했으며 그밖에 상당수가 공군기의 기총소사로 숨졌다고 말했다.노근리 학살사건 배상을 요구하는 한국 생존자들은 300명의 주민들이 노근리 다리 부근에서 살해됐으며 또다른 100명이 미군의 공습으로숨졌다고 말했다.사건 발생 당시 일본에서 한국전선으로 3일전 투입돼 우왕좌왕한 1기갑사단 7연대 2대대 소속 660명의 병력은 북한군이 침공해 오자인근 마을에서 피란민들과 만나게 됐다.한국 생존자와 몇몇 참전 병사들은미군기들이 피란민들이 있던 지역으로 갑자기 저공비행을 한 뒤 기총소사를하면서 학살이 시작됐다고 증언했다.미 공군 기밀 해제 보고서에 따르면 조종사들이 위장한 북한군이 피란민 대열에 있는 것으로 의심해가끔 민간인들을 고의로 공격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민간인들에 대한 이같은 사살명령은 명백히 불법이다.참전 용사들은 중화기 중대장이었던 멜번 챈들러 대위가 상급자와 연락을 취한 뒤 굴다리 입구에기관총을 설치하고 발포할 것을 지시했다고 말했다.미 국방부는 AP통신의 이같은 추적 보도 내용에 대해 군 공식 기록에는 그같은 주장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고 밝혔으며 학살사건에 관한 육군당국의 공식기록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기밀 해제된 군 문서를 토대? 병력 이동상황을 재구성한 결과 제1기갑사단 4개 대대가 학살사건 당시 그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 러, 체첸 대공세…전쟁 재발 우려

    체첸공화국에 대한 러시아군의 공세가 강화되며 제2의 체첸전쟁 발생 우려가 점차 높아가고 있다. 러시아의 공군기들은 28일까지 6일 연속 체첸 공화국 수도 그로즈니 부근의 정유소와 저유소,발전소등 에너지 인프라를 집중 폭격했으며 잉구셰와 다게스탄을 통해 중무장 병력을 체첸쪽으로 집결하고 있다.체첸 남부의 반군기지두곳은 완전 파괴했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400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보도됐으며 수천명의 체첸인들이 폭격을 피해 잉구셰 등 이웃 공화국으로 피란했다.CNN 등 서방언론들은 5만∼6만명이 국경을 넘었다고 보도했으나 체첸측 관리들은 난민숫자를 1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러시아측의 입장은 매우 단호하다.이고르 세르게예프 국방장관은 “반군이완전 소탕될 때까지 공습을 계속하겠다”고 잘라 말하고 있다. 94년 전쟁때와는 달리 국민들의 지지도 확고하다.최근 체첸 반군이 러시아병사를 권총이나 도끼,칼 등으로 무참히 살해하는 장면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가 공개되면서 러시아 국민들의 체첸공습 지지는 확고해지고 있다. 의회도 군작전을 든든히 받쳐주고 있다.두마(하원) 국방위 소속 로만 포프코비치는 “마스하도프(체첸대통령)가 민간인 외에 아무도 없다고 선언할 때까지 타격해야 한다”고 할 만큼 의회의 공습지지는 대단하다. 러시아측은 체첸반군의 완전소탕을 위해 지상군 투입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그러나 일부 관리들은 “그것은 전면 침공보다는 특공작전이 될 것”이라고 말해 전면적 지상전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느끼고 있음을 시사했다. 러시아 경찰의 단속도 강화되고 있다.경찰은 이달 초부터 계속된 연쇄폭발사건의 배후로 체첸 테러리스트를 지목하고 그간 암호명 ‘소용돌이’라는작전을 벌여 100여명을 체포하고 520t의 폭발물을 압수했다. 체첸은 지난 91년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뒤 94∼96년까지 전쟁을 벌인이후 최근까지 사실상의 독립국가 지위를 누려왔다. 한편 쿠바를 방문중인 이고르 이바노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28일 “체첸측이 폭력을 포기하고 테러리스트 지도자를 넘겨줄 경우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해 경우에 따라 이번사태의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될 여지가 있음을시사했다. 박희준기자 pnb@
  • ‘인종청소’ 피해 20만명 피란길

    [딜리(동티모르)워싱턴 자카르타 오클랜드(뉴질랜드) 외신종합] 동티모르사태의 끝이 보이질 않는다.계엄령 선포에도 살육과 주민 강제추방은 이어지고 있으며 국제평화유지군 파병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9일 인도네시아 B.J.하비비 대통령의 하야 임박설까지 나돌면서 더욱 꼬이기 시작했다.호세 오소리오 아빌리오 소아리스 동티모르 지사는 인도네시아당국이 주민투표 결과를 비준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피난길에 오른동티모르주민은 전체주민의 25%인 20만명으로 늘었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포럼에 참석중인 20개국 대표들은 이날 동티모르 폭력사태 해결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긴급회의를 했으나 국제 평화유지군 파병 합의에 실패했다.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결정할 문제라는 이유가가장 컸다. 그러나 호주,영국등은 군병력을 파견하겠다고 밝혔다.반면 미국은 무력개입 대신 경제제제 의사를 표명했다.존 하워드 호주 총리는 이날 빌 클린턴 미대통령이 동티모르에 파견될 다국적 평화군을 위한 지원을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고 밝혔다. 앞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도 8일 긴급회의를 열고 인도네시아가 조속히 치안상황을 호전시키기 않을 경우 ‘후속행동' 을 검토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구체적 방안은 언급하지 않았다.상임 이사국 중 중국은 무력개입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인도네시아는 하비비 대통령이 동티모르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임할 것이라는 설이 강력히 나돌면서 통화가치가 폭락했다. 달러당 루피아화는 이날 오전 달러당 8,700 루피아로 지난 6일에 비해 1,200루피아나 하락했다. 한편 동티모르에서는 이날 아침에도 인근 섬으로 피신하기 위해 4,000명의주민들이 딜리 부두로 몰려들었다.저항단체인 팔린틸은 10만명에 이르는 동티모르 주민들이 현재 민병대의 공격을 피해 동티모르의 구릉지대로 피신해숨어 있다고 밝혔다. 이날 독립반대파 민병대의 공격으로 바실리우 두 나시멘투 주교가 부상을입은 것을 비롯,사제 3명 등 100명 이상이 숨졌다. 위란토 국방장관 겸 총참모총장은 이날 키키 샤흐나크리 육군소장을 동티모르 치안회복작전(SRO)사령관에 임명했다.그는 계엄령선포이후 상황이 진정되고 있다고 반박했다.
  • [외언내언] 잠옷행상 할머니

    옷로비 청문회가 한창인 24일 서울대병원에서는 수수한 양장 차림의 김선용(金善鏞·71)할머니가 평생 모은 10억원을 돈없는 환자를 위해 써달라며 전달하는 행사가 조촐하게 열려 한가닥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다. 평양 출신인 김씨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생계를 잇기 위해 피란지인 부산에서 잠옷행상을 시작했다.당시 잠옷이 유행하는 바람에 돈을 모아 국제시장에 옷가게를 차려 돈을 벌었으며 60년대 상경,목욕탕업과 상가 임대업으로 10억원대의 재산을 일궜다. 당뇨와 위장병으로 병원을 자주 찾았던 김할머니는 “돈 없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로 마음을굳혔다”며 “내가 번 돈은 내 개인의 것이라기보다 사회가 베풀어 준 것이기 때문에 그 것을 되돌려 주었을 뿐”이라고 전달식 내내 고개를 숙이고 쑥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학교가 아닌 병원에 재산을 기증한 것도 이유가 있다.남편이 병사하고 외동딸도 건강이 좋지 않아 외손자와 함께 사는 김할머니로서는 가족들의 병치레에 이력이 들어 돈없이 아픈 사람에 대한 연민(憐憫)의 정이 남달랐다고 하니 그 뜻을 알만도 하다. 김할머니의 결단은 최근 일부 사모님들의 화려한 나들이와 재벌들의 변칙상속이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는 분위기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주기에 충분하다.일부 상류층 부인들의 커피숍 회동,고급의상실 쇼핑,단체회식,일류급 대중가수 쇼 관람 등이 지금 청문회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하지만 우리 사회에 김할머니처럼 근검절약해 살아 가며 돈을 어떻게 모으고 써야할 줄 아는 사람이 있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과 보람이 있다. 김할머니의 이야기는 친족들에게 한푼의 유산을 남기지 않은데다 상속권자들도 할머니와 뜻을 같이하고 적극 동조했다는 점에서 더욱 감명을 준다.최근 재벌들의 부(富)의 변칙상속 방법이 다양해져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고육지책으로 이를 방지하기 위한 방안이 당국에 의해 마련되기도 했다. 재벌의 변칙상속이 문제가 되는 것은 기업 이윤은 결코 사적(私的)인 것이아니고 소비자가 주는 보수이며 기업의 사회적 공헌에 의한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따라서 기업의 이윤은 근로자·소비자·경영자가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존경받을 수 있는 자본주의경제 사회의 경영자 상(像)이다. 재벌은 아니지만 김할머니는 재벌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평생 모은 재산을값있게 사용할 줄 알았으며 가족들도 이에 적극 협조했다는 점이 돋보인다. 김할머니가 사회에 환원한 재산은 10억의 몇백배 가치
  • 쇼팽 150주년 기념 연주회…김주영씨 녹턴-폴로네즈 전곡 연주

    ‘피아노의 시인’쇼팽 서거 150주년을 기념하는 연주회가 줄을 잇는 가운데젊은 피아니스트 김주영(29)이 쇼팽의 녹턴(야상곡)과 폴로네즈 전곡을 연주한다. 1일 오후7시30분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 녹턴과 폴로네즈는 쇼팽의 피아노곡 중에서 가장 대중적이어서 그의 음악세계를 쉽게 보여주지만 두 장르의 성격은 아주 다르다.녹턴은 부드럽고 세련된 느낌을 주는 반면 폴로네즈는 폴란드에서 궁정 행진곡 용으로 사용된 음악답게 남성적이다.자긍심이 강한 폴란드 민족의 기질도 그대로 드러난다. 프로그램은 전반부에 녹턴,후반부 폴로네즈로 짜여있다.연주곡은 ‘세 개의녹턴 작품 9’‘두 개의 녹턴 작품 62’‘두 개의 녹턴 작품 40’,‘폴로네즈 11·12·14번’과 ‘안단테 스피아니토와 그랜드 폴로네즈 작품 22’등이다.특히 폴로네즈 11·12번은 쇼팽이 7∼8세때 작곡한 것으로 국내에서는 처음 연주된다. 김주영은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뒤 러시아 모스크바음악원 대학원에서 쇼팽의 권위자인 이그나체바에게 배웠다.지난 94년에는 아스피란트(연주박사 과정)를 마쳤다.95년 프로코피예프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1위없는 2위를 차지하는 등 만만치 않은 수상경력도 있다.김주영은 오는 9월2일 문화일보홀에서,쇼팽의 서거일인 10월17일에 영산아트홀에서도 각각 연주회를 갖는다.10월17일 연주에서는 쇼팽이 마지막으로 작곡한 ‘마주르카 64번’을 들려줄 계획이다.(02)585-5750. [강선임기자 sunnyk@]
  • 제2공화국과 張勉(28)-金대통령 특별회고(상)

    대한매일은 ‘정직한 역사 되찾기’의 일환으로 지난 2월부터 ‘제2공화국과 張勉’시리즈를 주 2회 1개 면씩 연재해 왔다.지난번 27회의 ‘장면의 정치 역정과 생애(하)’로 연재는 사실상 일단락되었다.이번 28회는 당시 민주당정부의 당 대변인으로 활약했던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회고를 상·하로나눠 그 전반부를 싣고 29회는 후반부를 싣게 된다.마지막 30회는 이번 연재물을 총정리하는 의미에서 제2공화국을 평가하는 대담으로 엮어진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구술하여 녹취한 답변은 ▲장면(張勉)전총리와의인연 ▲그를 만나 가톨릭 영세를 받은 과정 ▲장면정부의 경제제일주의 평가 ▲민주당 신파 출신으로서의 자부심 ▲장면 총리와 윤보선 대통령에 대한평가 ▲제2공화국 및 장면정부 평가 등 여섯 항목으로 이뤄져 있다.다음은김 대통령이 ‘장면 전총리와의 인연’을 중심으로 하여 술회한 내용이다. ?藜圄? 박사와의 인연 1956년 장면 박사가 부통령으로 출마했을 때 무소속이던 제가 장 박사 지지를 선언한 것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장 박사가 그 사실을 알고 고맙게 생각하면서 저와 장면 박사의 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본격적인 인연은 다음해 제가 가톨릭 영세를 받을 때 장 박사가 대부가 되어주면서 부터입니다. ?嵐适獵? 입당 저는 민주당에 입당해 중앙상무위원으로 일했습니다.민주당중앙상무위는 33명의 국회의원과 50명의 원외 당원으로 구성된 지금의 당무위원회 같은 것입니다.저는 젊은 나이에 발탁되었고 정책심의 등에서 상당히 주목받는 의견을 제시한 기억이 있습니다. 또 하나 당시 민주당 내에는 신·구파의 큰 대립이 있었는데 저는 신파를 대변하는 입장에서 많은 발언을 했고,그런 저에 대한 장 박사의 신임이 매우두터웠습니다.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 역사에 ‘3·15부정선거’라고 기록된 60년 3월15일 정·부통령선거때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趙炳玉)박사가 돌아가시고 부통령 후보인 장 박사만 남아 선거를 치렀는데 주로 장 박사 계열의 신파가중심이 되어서 선거를 했습니다.저는 강원도 당무위원장으로서 강원도의 험준한 지역을 돌면서 일선에서 선거운동에 임했습니다. 전국적으로 행해진 ‘3·15부정선거’에 대해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저는 인사동 중앙당사 앞에 인산인해를 이룬 시민들 앞에서 마이크를 걸고부정선거를 규탄했습니다.그리고 4월6일 민주당이 중심이 된 시위가 있었습니다.시청 앞에 모여 을지로4가와 종로,그리고 파고다공원(지금의 탑골공원)과 광화문을 거쳐 다시 시청 앞으로 돌아오는 시위였습니다.그때만 하더라도 학생들의 시위는 거의 없었습니다.고등학생 일부가 부정선거를 규탄했고 대학생들은 아직 나서지 않던 때였습니다.그 시위에서 저는 앞장서 휴대용 마이크로 구호를 선창하는 입장이었고,정부에서는 내무장관 포고령으로 발포도 불사한다는 위협을 했습니다.지금 생각해도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던 비장한 심정이었습니다. 시위가 시작되자 정부는 방침을 바꾸어 진압보다는 시위대가 군중과 합세하지 않도록 격리하는 데만 주력했고,파고다공원 앞에 오자 학생들이 시위대에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시위대가 광화문까지 오자 학생들은 경무대(지금의청와대)쪽으로 가려고 해 시위를 주도하는 우리와 약간의 실랑이까지 벌이게 되었습니다.이렇게 전개된 그날의 시위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襤逅? 민주당 대변인 민주당정권이 들어섰을 때 당 대변인인 조재천(曺在千)선생이 법무장관으로 입각하게 되었습니다.저는 부대변인을 했는데 조재천 선생이 “비록 김대중씨가 원외(院外)지만 그 이상 대변인을 해낼 사람이 없다”며 강력히 추천하고 장 박사도 그 말이 옳다고 동의함으로써 제가 여당의 대변인으로 선임되었습니다. 당시 신문에 많이 보도가 되었지만 저는 대변인으로서도 여당 입장을 잘 방어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그때는 매일같이 여야 대표들이 학교나 명동에있던 시공관 등지에서 연설을 했는데 저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연설로 시민들에게서 많은 호응을 받았고,이로 인해 총리인 장 박사로부터 칭찬을 받은일이 몇번 있습니다. ?藍? 박사의 민주정신 저는 대변인으로서 매일 장 박사를 찾아가 몇가지 지시를 받고 제 의견도 말씀드리면서 아주 가깝게 지내게 되었습니다.하루는장 박사가 제게 “이 자리에 오래있는 것보다는 여야간 정권교체가 한번 되어야 이 나라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온다”는 이야기를 아주 진지하게 했습니다.그 말씀에 저는 ‘참,이 어른에 대해 사람들이 약하다고 그러는데 또 약한 말씀을 한다’는 그런 생각밖에 못했습니다.그러나 박정희(朴正熙)정권의 장기 집권을 겪고나서야 저는 그 말씀이 바로 민주주의의 요체였다는 사실을 아주 깊이 깨닫게 되었고 정말 그 훌륭한 민주정신에 대해서 새삼스레 감복한 기억이 있습니다. 장 박사는 정국을 끌어나가는 데 아주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구파가 정권을 차지하는 것에 실패하자 그냥 당을 깨고 나가 야당을 만들었습니다.그것은참으로 불행한 일이었습니다.그때 저는 “이렇게 해서 정국을 불안하게 하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만일 조병옥 박사님이 아직 생존해 계셨다면 적어도 정부를 1∼2년은 안정시켜 놓고 분당을 해도 했을 것이다”라고 한 적이있는데 그것이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襤ㅁ? 흔든 당내 소장파 장 박사가 제일 크게 고생한 것은 당내 소장파들이 조직을 따로 만들어 정부가 하는 일을 일일이 비판한 것이었습니다.‘중석불사건’이라고, 6·25 부산 피란 시절에 중석불 부정불하사건이 있었는데 장 박사가 또다시 중석불 부정을 저질렀다고 소장 의원들이 들고나선 적도있습니다.5.16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 정당성으로 중석불사건 등 부정부패를 지적했는데 군사정권에서 조사하고 재판한 결과 사실무근이라는 것이 밝혀진 바 있습니다. 장 박사는 제게 당내 소장파들의 움직임을 걱정하고 개탄하고 염려한 일이여러번 있었습니다.저는 장 박사에게 소장파 대표를 중요한 각료직에 등용해 정부에서 같이 일하도록 하면 그런 문제가 수습될 것이라고 건의를 드렸는데 이 방안은 당내 노장 중진들의 반대로 잘 안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fi?襤ㅁ? 타도 외친 혁신계 그리고 혁신계가 당시 참으로 사려깊지 못한 일을 했습니다.과거 이승만(李承晩)시대에 완전히 용공으로 몰려 숨도 크게 못 쉬고,감옥에 가고,심지어 조봉암(曺奉岩)씨의 경우는 사형까지 당하고 하던 혁신계는 4·19 이후 민주당정권 아래서 완전히 해방이 되어 자유롭게 활동하게 되었습니다.그런 혁신계가 장면정권 타도를 내세우고 공세를 취했습니다.신문에도 보도된 것이지만 그때 저는 “지금 혁신계가 장면정권을 이렇게 괴롭히지만 만일 장면정권에 불행한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큰 타격을 받는 것은 혁신계다.‘입술이 있으면 이가 답답하게 생각하지만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불행하게도 5·16 후제 말 그대로 되었습니다.혁신계는 그후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탄압과 고초를 겪었습니다.저는 민심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 세력들한테 불씨를 주는 행동은 참으로 위험천만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藍躍溶ㅁ? 망친 3신(新) 사실 당시 신문도 문제가 있었습니다.모두가 나서서 정부를 매일같이 공격했습니다.심지어 정부기관지라는 신문까지 나섰습니다.결국 정부를 국민 앞에 완전히 불신의 대상으로 만든 것입니다.5·16 후‘3신(新)’이 장면정권을 망쳤다는 말이 유행을 했는데 ‘3신’이란 신문(新聞),혁신계(革新系) 그리고 당내 소장파 모임인 신풍회(新風會)가 그것이었습니다. 장면 박사는 본질적으로 독재자는 아니었지만 강력한 지도자도 아니었습니다.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지도자였는데 그런 분이 당내와 언론과 혁신계로부터의 협격으로 힘도 제대로 못쓰게 되었습니다.그런 불안정한 상황이 일부군인들에게 마치 나라가 공산화되어 가고,나라가 붕괴 직전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 원인이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정리 이용원기자 - 金대통령 회고 이모저모 현직 대통령이 일간지의 현대사 연재물에 증언을 해준 것은 대한매일이 연재하고 있는 ‘제2공화국과 張勉’이 처음이다.제2공화국 당시 민주당정부의 집권당 대변인을 맡았던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본보의 증언 요청에 흔쾌히 응했다. 지난 2월부터 시작된 이 연재물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많은 독자들로부터 “민주당 대변인을 맡았고 장면 박사와 돈독한 관계에 있었던 김 대통령의 얘기가 왜 없느냐”는 등의 성화가 잇달았다. 독자들의 재촉에 못이겨 지난달 하순 서면으로라도 증언을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제대로 된 답변이 오리라고는 사실 기대하지 않았다.당시 개각에 이어차관급 인사가 있었고 곧바로 러시아·몽골 순방이 예정된 대통령의 일정상‘한가롭게’ 40년 전 기억을 더듬을 틈이 없으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러시아 방문길에 오르기 전날인 지난달 26일 밤 대한매일이 서면으로 회고를 요청한 6가지 질문에 대해 소상히 구술했다.청와대 관계 비서관이 이를 녹취하여 다음날 서면으로 옮긴 결과 A4용지 10장 분량이었다.200자 원고지로 34장에 해당하는 상세한 내용이었다. 해외 순방을 앞둔 노(老)대통령은 늦은 밤 질의서를 한장한장 넘겨가며 옛날 일을 되새겼다.대통령의 회고에는 이 땅에 최초의 민주주의 꽃을 피운 제2공화국의 역사가 우리 현대사에 정직하게 기록되어야 한다는 진지함으로 가득했다.또한 그후 역대 군사정권에 의해 폄하된 장면정부가 새롭게 재조명되어야 하며 동시에 제2공화국의 실패를 거울삼아 오늘의 진로를 모색하는 밑거름으로 삼아야 한다는 간곡한 메시지도 회고의 행간에 읽을 수 있었다.이밖에 내각책임제에 대한 진솔한 평가와 집권자로서 정치권에 갖는 바람(29회 게재 예정) 등 김 대통령의 정치관을 다각도로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했다. 이용원기자ywyi@
  • [포커스 투데이]유엔난민고등판무관 오카타 사다코

    “난민들이 스스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지만 중요한 것은 돌아가서 이들이 안심하고 살수있도록 해주는 겁니다”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이 대거 피란길에 오르면서 오카타 사다코 유엔 난민고등판무관(72)은 세계에서 가장 바빠진 사람중 한명이 됐다. 지난달 24일 나토군의 공습 시작 이후 그녀는 본부가 있는 제네바와 난민들이 모여드는 알바니아,마케도니아 국경지대를 오가며 코소보 난민 현황 파악과 대책 수립을 총지휘하며 50만에 육박하는 난민들 구호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오카타 여사가 일본인으로선 드물게 유엔 ‘난민 전문가’가 된 것은 90년말.유엔 총회서 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사령탑으로 선출된 뒤 지금까지 9년간 재임하고 있다. 보스니아 르완다 사태 등 굵직한 국제분쟁 때마다 발생한 대량난민을 기민하고 헌신적으로 구호한 공로를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아 내리 3선째 연임이다.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정치학박사를 받고 일본 국제기독대학 교수로 학자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78년 국제아동기금(UNICEF) 상임위원회 의장을 지내면서 국제사회에 얼굴을 내비쳤다. 같은 시기 주 유엔본부 일본 전권대사도 겸임하면서 활동영역을 넓혔다. 유고공습이 확대되자 눈코뜰새 없어진 여사는 각국 정부의 아낌없는 지원을 호소하는 한편 코소보 난민의 국제적 인식을 높이는데 힘쓰고 있다. “코소보 난민들을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다짐하는 오가타 여사는 “20세기가 끝나면서 무고한 시민들이 대량으로 내쫓기는 일도 종언(終焉)을 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黃性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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