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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린턴 “노근리사건 유감”

    한국과 미국 양국은 12일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노근리양민학살사건에 관한 공동조사 결과를 발표,“노근리 사건은 철수중이던 미군에의해 피란민 다수가 사살되거나 부상을 입은 사건”이라고 공식 규정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도 성명을 통해 “노근리에서 한국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은 데 대해 깊은 유감(regret)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유감의 뜻을 전했다.미국이 전쟁 중 발생한 미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의 실체를 인정하고 대통령 명의의 유감 성명을 발표한 것은 이번이처음이다. 하지만 양국은 노근리사건의 핵심쟁점인 미군측의 발포명령 여부와의도적인 살상여부,피해규모 등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지 못해 조사결과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특히 미국측은 피해주민들에대해서 어떤 보상 및 배상도 할 수 없다고 나서 해당자들과 관련 시민단체들이 반발하고 있다. 양국은 공동발표문에서 1950년 7월25일 미공군의 공중공격지침을 명기한 ‘로저스 대령 메모’의 핵심내용과 다음날인 26일 노근리지역공중공격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구체적 자료 ‘제5공군 항공작전 일일요약 보고서’ 외에 26일부터 29일 사이 노근리 쌍굴 등지에 있는 피란민에 대한 지상사격이 자행됐다는 내용을 담았다. 희생자 수는 영동군청에 신고된 피해자수 사망 177명,부상 51명,행방불명 20명 등 248명이라는 한국측 입장과,그보다는 적을 것이라는미국측 참전장병의 증언내용을 병기했다. 양국은 미국정부 예산으로영동군 또는 노근리에 100만달러 규모의 추모비를 건립하고,75만달러를 조성해 이르면 올 하반기부터 노근리 유족자녀 대학생과 지방대학생 등 30여명을 선정,장학금을 전달키로 했다. 한편 노근리 대책위는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미국정부가 노근리 사건이 학살에 의한 것임을 완전히 인정하지않았고 피해자 보상부분도 언급이 없었다”며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미국 정부 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 등 다각적인 법적 대응을 추진할것이라고 밝혔다. 워싱턴 최철호 특파원·서울 최광숙기자 bori@
  • 노근리 진상/ 클린턴 성명 전문

    본인은 미국을 대표해 1950년 7월 말 노근리에서 한국의 민간인들이목숨을 잃은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 지난 1년여 동안 실시한집중적인 조사는 전쟁의 비극과 전쟁이 사람들과 국가에 남긴 상처를뼈저리게 일깨워 주었다. 노근리에서 발생한 사건의 경과를 정확히 밝혀낼 수는 없었으나 한국과 미국은 인원을 확인할 수 없는 무고한 한국 피란민이 그곳에서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렸다.본인은 노근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한국인들에게 위로를 전한다.반세기가 지난 후에도 남아 있는 상실감과 슬픔을 이해하며 동정을 느낀다. 본인은 이들을 비롯해 전쟁 중 살해된 한국의 무고한 민간인들을 위해 미국이 건립하는 추모비가 어느 정도의 위안과 함께 사건의 종식을 가져오기를 진지하게 희망한다.우리가 추진할 추모장학기금은 그들을 기리는 생생한 조의가 될 것이다. 우리는 한국전쟁의 희생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고통이 이 분쟁의유일한 유산은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미국과 한국의 참전용사들은 혹독한 환경에서 자유를 위해 함께 싸워승리했다. 한국에서 진동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양국의 강한 동맹, 그리고 오늘날 양국민의 친밀감은 50년 전 함께 치른 희생을 입증하고 있다.
  • [사설] 노근리 ‘유감’ 이후

    12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이른바 ‘노근리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을 발표했다.한국과 미국 두 나라는 이날 한국전 당시 미군에 의한 양민 학살이라는 이 사건의 실체를 사상 처음으로 인정하는 공동발표문을 내놓았다.이는 지난 1999년 9월 AP통신의 보도이후 15개월간 양국 정부차원에서 공동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내린잠정 결론이다. 우리는 이 사건에 대한 확실한 법적 책임을 규명하지 못한 이같은잠정 결론에 대해 큰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당시 피란길에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의 원혼과 그 가족의 억울함을 달래기에는 미흡하다는 점에서다.이번 조사에서도 발포 명령이 있었는지가 제대로규명되지 않았고,미국측의 보상 또는 배상이라는 실질적 해법을 찾지못했다. 따라서 유족이나 시민단체의 반발이 이어지고 있는 점을 양국,특히 미국측은 직시해야 한다.노근리 사건이 이제는 역사 속으로사라졌다고 마음을 놓을 게 아니라 그 상흔을 치유하려는 후속 조치를 성실히 밟아 나가라는 뜻이다.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추모비 건립이나 노근리 또는 영동 지역민 대상의 장학사업 등 미국의 약속이차질없이 이행돼야 함은 물론이다. 우리는 50년 전에,그것도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의진상을 정확히 규명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인정한다.전쟁이 파괴하는것은 생명과 재산뿐만 아니라 진실 그 자체라는 경구도 있지 않은가. 더욱이 노근리 사건은 가해자와 피해자만 있고 제3자적 증언이 없는형편이다.그런 점에서 미국 국가원수가 직접 유감을 표명한 것은 상당한 성의 표시라고 본다.유족들의 한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차원에서만 아니라 양민 희생에 대한 미국측의 실체 인정 사실과 함께 유족들이 미국 정부를 상대로 보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는 데 유리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진선진미한 결과는 아니지만 노근리 문제가 클린턴행정부 임기내에 일단 정리된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다.50년 전의 불행한 사건이 양국의 오늘과 내일을 훼손해선 안된다는 맥락에서다.지난해 말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 개정 협상이 타결된 바 있다. 노근리 문제에 이어 조만간 미사일 협상 타결이 발표되면 양국간 3대현안이 매듭지어져 부시 차기 행정부와 한국의 새로운 협력관계 모색여건이 완비된다.앞으로도 한·미 양국은 과거사의 앙금을 털어내는추가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노근리 이외에도 한국전 때 일어난 유사한 양민 피해사건이 더 있기에 하는 얘기다.특히 클린턴 대통령의유감 표명은 상황종료 선언이 아니라 앞으로 희생자 가족들을 위무하기 위한 추가적 노력의 출발선이 돼야 할 것이다.
  • 노근리 진상/ 공동발표문 요약

    ◆조사경과. 노근리 사건에 대한 한·미 합동조사는 1999년 9월29일 AP통신의 보도를 바탕으로 양국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됐다.양국 조사반은 현장상황과 증언,문서 등을 충분히 공유했으며,50년이란 세월로 제한적인요소가 많았지만 주변 상황과 관련 사실을 철저하게 조사했다. ◆조사내용. ●사건배경,전투상황 한국전쟁 초기 한국에 투입됐던 미군들은 나이가 어렸고 전투경험이 없었다.그들은 북한군의 무기체계나 전술,북한군의 진격 속도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만한 사전 준비가 부족했다.미제7기병연대 제2대대는 영동에 도착한 직후 1950년 7월25∼26일 야간에 와해된 상태에서 노근리 주변지역으로 무질서하게 후퇴 중이었다. ●피란민 통제 1950년 7월20일 대전 전투 이후 피란민 이동 통제 문제는 한국군과 미군 작전의 주요한 고려 요소였다.1950년 7월 하순쯤한국정부와 미 8군은 긴밀한 협조를 통해 피란민과 한국군 및 미군을보호하고 도로로 이동하는 피란민들이 군작전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피란민 통제를 시작했다. ●임계리·주곡리주민들의 집결 및 이동 일부 한국측 증언자들은 1950년 7월25일 야간에 미군이 산속의 안전한 마을인 임계리에 있던 수미상의 피란민들을 주곡리를 지나 노근리 방향으로 인솔했다고 말했다.7월25일 주곡리에서 1.5㎞ 떨어진 하가리 근처 개활지에서 미군의명령에 따라 노숙할 때 피란민 1∼4명이 사살당하는 것을 목격했다고증언했다.그러나 이에 연루된 미군이 누구였는지, 이런 행위가 당시시행 중이던 피란민 통제정책을 위반한 것에 대한 대응조치였는지는확인할 수 없었다. ●공중 공격 다수의 한국 증언자들은 1950년 7월26일 정오쯤 미군 항공기가 피란민들에게 기총공격 또는 폭격을 했다고 증언했다.미 공군의 당시 기록 검토결과 1950년 7월27일 아침 일찍 노근리 주변의 미제7기병연대 제1대대 지역에 실제로 공중공격이 있었다.따라서 노근리 주변지역에서 1950년 7월26일 공중공격의 발생 가능성도 배제할수는 없다.공식 기록에 의하면 1950년 7월27∼29일 노근리 지역에서미군과 북한군 상호간에 야포 및 박격포 사격이 있었다.일부 한국측증언자들은미 지상군이 당시 보유 중이던 무전기를 이용,피란민에대한 공중공격을 요청했다고 증언했다.그러나 양국 조사반은 당시 미지상군 병력이 휴대한 무전기로는 미 지상군과 공군 전술항공 통제관이 직접 교신해 공중공격을 요청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지상사격 및 사격명령 여부 미 지상군은 노근리 사건 발생 기간 동안 노근리 주변에서 피란민을 향해 사격을 했다.1950년 7월26일과 29일 사이에 일부 미군은 쌍굴 내부를 포함하여 여러 지역에 있는 피란민을 향해 사격했다.미군들은 피란민의 이동을 통제하기 위해,또는피란민이 있던 곳으로부터 소화기 공격을 받았다고 생각해 사격했다. 그 결과 수 미상의 피란민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사격명령 하달 여부에 대한 증거는 증언자들의 증언 불일치로 찾지 못했다. ●사상자 수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을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전쟁중에 발생하였기 때문에 한국측 증언자들과 미 참전장병들의 증언 사이에는 노근리 주변지역에서 발생한 사망자나,부상 또는 실종된 인원에 대해 상당한 차이가있다.한국 피해자들은 확인된 숫자는 아니지만,사망·부상·실종된 인원을 248명이라고 영동군청에 신고했다.미참전장병들은 이보다 적은 인원수라고 증언했다. ◆결론. 절박한 한국전쟁 초기의 수세적인 전투상황하에서 강요에 의해 철수중이던 미군은 1950년 7월 마지막 주 노근리 주변에서 수 미상의 피란민을 살상하거나 부상을 입혔다.피해자들의 오랜 기간의 아픔과 미참전장병의 희생을 고려하면서,인권을 중시하고 민주주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양국 공동 협력의 표본이 될 것으로 믿는다.
  • [황석영의 맛따라 추억따라](28)제5장 사랑과 맛

    지나간 날의 사랑을 기억해내는 데 있어서도 남자와 여자는 차이가있다고 한다.즉 여자는 연장되지 않은 사랑의 대상에 대하여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현재의 사람에 관한 가까운 기억으로 대치 시킨다는것이며,그도 아니면 할머니나 삼촌이나 사촌 형제나 또는 어린 시절의 소꼽친구를 떠올리듯이 친근하고 일상적이던 추억을 간직한다.그에 비하면 남자들의 흘러간 사랑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이 퍼즐을 맞추어 놓듯이 여자와 가졌던 에로틱한 순간들을 모아서 간직하거나,좋고 나쁜 일에 대해서도 전체의 줄거리는 잊어버리고 어느 시간의 미세한 부분을 곰살스럽게 기억한다는 것이다. 흔히는 남녀가 그 반대일 것이라고 여기다가도 스스로 돌이켜 생각해보면 맞는 구석이 많은 것 같다.잠재된 욕정과 거친 세상으로부터 따로 떼어 놓은 감각적이고 부질없는 순간들이 오히려 남자들의 옛사랑에 대한 추억의 본모습이라니 어쩐지 수컷이 슬프게 여겨진다. 프로이트 선생의 말씀을 들지 않더라도 성욕과 식욕은 어릴 적부터잠재되어 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를 지배한다.남녀가 함께 밥을 먹으면 ‘정든다’는 우리네 속담은 일리가 있는 말이다.‘영혼의 집’으로 유명한 칠레의 작가 이자벨 아옌데는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와같이 먹었던 요리에 대한 얘기로 책 한 권을 쓸 정도였다. 어느 먼 산골이나 바닷가 어촌에서 두 사람이 먹던 음식의 맛은 지금아무데서나 다시 찾아 먹을 수 있는 흔한 먹거리라 할지라도 다시는되살려낼 수가 없다.또한 그네가 가끔씩 콧노래를 부르며 아침을 준비하던 달그락 거리는 그릇 부딪히는 소리와 식탁 맞은편에서 따뜻한눈빛으로 이편을 건너다 보던 날의 맛을 어디서 되살려 낼 것인가.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물처럼 지나간 시간은 자취도 없지만 그감각만은 생생하다. 전쟁 때,우리 식구는 지금은 경기도 광명이라고 부르는 괭메이에 피란을 갔었는데 농가의 외양간을 빌려서 여름 한 철을 보냈다.벽이 삼면만 있고 앞은 툭 터진 대신에 통나무 속을 파낸 여물 구유가 버티고 있었다.소는 전쟁 통이라 없어지고 더러운 건초더미만 쌓였는데쇠똥이며 짚덤불을 깨끗이 치우고나서 흙바닥 위에멍석을 깔고 기둥네 귀퉁이에 모기장을 쳐서 잠자리를 만들었다. 도회지 사람들의 피란살이라는 게 어디나 같아서 쓸만한 물건들을 식량 가진 촌 사람들에게 야금야금 내주며 버티기 마련이었다.재봉틀이없어지고 옷가지와 귀금속이 없어지고 자전거가 사라지는 식이었다. 나는 근처 개천에 가서 송사리도 잡고 개구리도 잡으면서 동네 아이들과 어울렸는데 지금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내 또래의 계집아이가 생각난다.당시의 시골 아이들은 여름철이면 그냥 고무줄 넣은 검은 무명 팬티 하나로 벌거숭이가 되어 뛰어 다녔는데 그래도 나는 어머니때문에 위에다 런닝은 걸쳐야 했다.우리 식구가 빌어 살던 집 건너편에 그 아이가 살았다.그 아이네 집에선 참외밭을 가지고 있었는데 집앞에 멍석을 펴놓고 함지에 가득 참외를 갖다 놓고 팔았다. 함지에는 참외나 찐옥수수가 있기 마련이고 아이의 할머니가 나와서앉아 있곤 했다.어느 저녁녘에 어머니는 나와 누나들을 데리고가서참외를 사주었고 계집아이를 알게 되었다.아이는 시골 아이 같지않게누나들처럼 간따후꾸(원피스)를 입고 있었다.그리고 작은 코고무신을신었던 것도 생각난다.할머니와 어머니가 주고 받던 먼 고장에 대한이야기들은 재미있고 신기했으며 모깃불이 타는 냄새와 별이 우수수쏟아질 것같던 밤하늘은 아주 가깝게 머리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멍석 위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계집아이와 북두칠성 찾기 내기도 하고 별똥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동네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데 그애가 나를 불렀다.그애는 한 손을 치마자락 안에 감추고 있다가 가까이 간 내게 내밀었다.그건 방금 솥에서 긁어낸 누룽지였다.아주 딱딱하게 탄 것이 아니라 거죽의 밥알과 덜 탄 누룽지를 함께 긁어내어 동그랗게 뭉친 것이다.사실은 그런 상태가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누룽지다.한입 베어물면 부드러운 밥알이 씹히면서도 속에서 바삭바삭 누른 쌀알이 씹힌다.아이가 작은 소리로 말한다.수남아,너만 먹어! 나는 누룽지를받아 먹으면서 어쩐지 좀 부끄러웠다.그리고 이상하게도 죄를 지은듯한 은밀한 느낌이 들었다. 하늘에 고추 잠자리가 가득히 날아다니던 날이었으니 팔월말 쯤이었을 것이다. 우리 식구는 그 무렵에 괭메이를 떠나 영등포로 돌아갔다.한낮이었는데 건너편 사립문 앞에서 그애가 나를 불렀다.마당으로 들어가니 집안에는 모두 들에 나갔는지 아무도 없었다.그애가 부엌에 들어가더니큰 쇠솥 안에서 찐 단호박 몇 토막을 들고 나왔다.우리는 마루에 앉아서 함께 먹었다.호박은 식었지만 말랑하고 단맛이 그만이었다.마당에는 장닭과 암탉들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벌레 사냥을 하던 중이었다.그애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면서 누워서 할머니처럼 배를 쓸어 달라고 했다.나는 참새의 가슴처럼 따뜻하고 쉴새없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그애의 배에 손을 얹었다.그리고 몇번인가 아래 위로 쓸어내리는중에 갑자기 멈추고는 화가 난 것처럼 얼른 일어나서 달아나버렸다. 고추가 갑자기 뜨겁고 아픈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Y를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집을 나가서 남도를 돌아다니다가 왔을 무렵이니까 자신이 이미 세상을 다 겪은 어른이라고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흑인 올페’라는 영화를 둘이서 보았던 생각이 난다.대학에 갔을때였는지 군대에 나갈 준비를 하던 해였는지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서해안의 어느 섬에 갔다가 태풍 때문에 며칠 동안이나 배가 끊겨서갇혀 있었다.몇가지 특별한 기억이 있다.민박을 하던 집의 뒷간은 마당 뒷편에 텃밭을 건너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는데 그냥 항아리를 묻고 소나무 가지로 나지막한 울타리를 세워 놓은 게 전부였다.Y가 밤에 뒷간엘 가려면 무섭다고 꼭 나를 데려가서 울 밖에 파수를 세워놓곤 했다.그러면 나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확실하게 보초를 선다는보증으로 노래를 불러 주어야 했다.날 저무른 하늘에 별이 삼형제 반짝반짝 정답게 지내이더니… 같은 노래였을 것이다.그건 누나가 변소에 간 나를 지키러 와서 저도 무서우니까 부르던 노래들이다.하여튼그 집에서 배가 올 때까지 몇날 몇밤을 지내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에 그댁 아주머니가 맛이나 보라고 굿떡을 했다고 보시기를 우리 문간방으로 건네 주었다.이게 웬 떡! 호박 시루떡이다. 늙은 호박 속을 길게 깎아서 말려 두었다가 쌀가루 한켜,검은 콩 한켜, 호박 한 켜를 차례로 깔아 시루에 쪄낸 것이다.어느 때에는 대추나 밤도 박아 넣는다. 호박의 단맛은 은근하고 너무 달지는 않아서 구수한 단맛이라고나 할까.우리는 뜨거운 떡을 호호 불면서 가끔씩 손가락에 달라붙는 찐득한 호박을 빨면서 떡을 먹었다.그래서 괭메이의 소녀를 기억해내게된 것일까,아니면 괭메이의 단호박을 떠올리다 그 섬에서의 민박을생각하게 된 것이었을까. 황석영
  • 사실상 결렬된 韓·美협상 2건

    ◆SOFA 개정. “높은 벽을 확인했다”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협상 우리측 참가자의 푸념이다. 양측은 빌 클린턴 미 대통령 임기 내 협상을 끝낸다는 심리적 마지노선을 긋고 지난 1일부터 회담을 끌어왔으나 결국 ‘작품’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협상 마지막날인 7일에는 미국측의 완강한 태도에 부닥쳐 회담이 중단되는 심각한 교착상태에 빠졌다. 워낙 팽팽히 서로의 입장이 맞섰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년 1월 퇴장을 앞두고 있는 미 협상단과 본국 정부의 약화된 입지도 한몫 한것으로 풀이된다. 송민순(宋旻淳) 외교통상부 북미국장과 프레데릭 스미스 미 국방부아태담당 부차관보를 수석대표로 하는 양측 대표단은 이날 점심만 같이 했을 뿐 회담은 갖지 못했다.형사재판관할권,환경,노무,검역,비세출자금기관 등 핵심 쟁점에서 입장차를 좁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측은 현재 형사재판관할권 분야에서 미군의 법적 권리 보장 방안과 재판권 행사 대상 범죄 조문화를,검역에서는 미군용 농산물에 대한 자체 검역을 요구하고 있다.환경 분야에선 ‘미·일공동선언문’과 같은 선언문형식을 고집하고 있다. 협상 분위기는 “협상이 재개될지도 불투명한 상황”이라는 외교부당국자의 말처럼 매우 어둡다. “양국이 협상타결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이제 협상대표 선에서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끝났다.우리측으로서는 미측 입장을 받아들이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당국자의 말로 미뤄,미국의 전향적인 입장 변화없이는 교착상태의 협상을 풀어나가는 실마리를 찾기는 힘들전망이다. 양측은 7일 심야까지 접촉,타결 가능성을 모색했으며 8일 협상 결과와 향후 일정 등을 최종 발표할 예정이지만 미국의 ‘정치적 결단’없이는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설사 클린턴 퇴임 전 한번 더 지금의 양측 대표단이 협상 테이블에서 마주하더라도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홍원상기자 wshong@. ◆노근리사건. 7일 노근리 사건의 성격과 책임 규명을 위한 한국과 미국의 막바지조율에서 양측 조사단의 최대 쟁점은 사격의 고의성 여부였다. 미측은 이날 전쟁 초기 북한이피란민 대열에 게릴라 투입 전술을사용하는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발포명령을 내렸다는 주장을 폈다.당초 미군의 발포명령자체를 부인하던 데서 다소 진전된 모습이다.그러나 피란민 강제인솔·피격·살상,전투기 폭격·기관총 사격,쌍굴·수로에서의 사흘간 무차별 사격은 완강히 부인했다. 50년전 사건의 고의성여부를 증명하는 작업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 문제에 대한 이견이 해소되지 않는 한 진상규명은 어려워진다. 선(先)진상규명,후(後)명예회복·사후보상을 요구하고 있는 우리측의처리방향과 일정에 차질이 예상된다.미국법에 의한 학살자처벌도 기대하기 어렵다.박찬운 변호사는 “책임자 처벌,피해보상은 미국정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거하거나 한·미가 특별법을 제정하는 방법으로만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측은 이날 일정 부분 진전을 봤다고 했으나 사격의 고의성 여부와 같은 핵심쟁점까지 합의한 것은 아니어서 추후 협상에서 난항이예상된다. 노주석기자 joo@
  • 美, 노근리 학살 공식 인정

    [워싱턴 연합] 미국 국방부는 노근리 학살사건에 대한 1년여의 조사에서 미군이 비무장 피란민들을 위협,사격을 가했다고 결론을 내렸으나 군이 민간인에게 사격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는지에 대해선 확실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워싱턴 포스트(WP)가 6일 보도했다.참전군인 100여 명의 인터뷰와 100만 페이지 이상의 서류를 재검토해 작성된 국방부 보고서 초안은 노근리 학살사건에 미군이 관련됐음을 처음으로 공식 인정하는 것이다.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은 AP 통신이 지난해 9월 노근리 학살사건을처음 보도한 뒤 이에 대한 조사를 명령했다.보고서 초안은 군 조사관들이 미군 제7기갑연대가 1950년 7월 26일 퇴각과정에서 북한군 침투를 우려해 피난민에게 발포했으나 이 과정에서 몇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는지는 정확히 밝혀낼 수 없었다고 밝혔다.
  • [외언내언] 영도다리

    40대 중반이나 후반쯤 된 사람들에게도 현인(玄仁)의 ‘굳세어라 금순아’는 명곡(名曲)으로 가슴에 남아있다.한국전쟁의 포향(砲響)이귓전에 남아있던 1953년 나온 노래다.〈금순아 보고 싶구나/고향 꿈도 그리워진다/영도다리 난간 위엔/초승달만 외로이 떴네〉 코흘리개시절 아버지, 삼촌의 흥얼거림을 물려받아 곧잘 부르기도 하고 대폿집에서 흘러나오는 땟국 절은 한복차림 ‘이모’의 쉰 목소리에 감동되기도 했다.노랫말 곳곳에 피란민의 애틋함이 담겨서일까.북에 가족을 두고온 세탁소집 아저씨는 술에 취하면 ‘이별의 부산정거장’만큼이나 가슴 뭉클하게 ‘굳세어라 금순아’를 불러제꼈다.‘바람 찬흥남 부두’에서 헤어진 금순이가 사랑하는 여인을 뜻한다는 사실은세월이 한참 더 흐른 뒤 알았다. 1·4후퇴 후 부산은 몰려드는 피란민으로 넘쳐났다.부산역 앞과 부두,남포동,광복동,국제시장은 날품을 팔려는 사람들로 득실거렸다.남녀노소가 없었다.기약없던 피란시절 영도다리는 용두산과 더불어 때론 위안을,때론 절망을 안겨준 만남과 흩어짐의장소였다.다리 주변은 피란민촌으로 변했다.“헤어지면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약속한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점쟁이들도 이곳으로 몰려 들었다.얼마나많은 사람들이 헤어진 가족, 전선(戰線)의 아들,형제의 생사를 묻기위해 이곳을 찾았을까.전쟁의 포연 속에도 다리를 거닐며 사랑을 속삭였던 젊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영도다리가 추억의 장소만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닌 듯싶다.한 실향민은 얼마전 “두고온 가족이 생각날 때면 영도다리와 용두산 공원을찾았다”고 말했다. 실향민에겐 지금까지 이산의 아픔이 살아 숨쉬는다리다. 영도다리가 머지 않아 헐린다고 한다.다음달 옛 부산시청 자리에 제2롯데월드가 착공되면 재건축에 들어간다는 것이다.왕복 4차선인 다리를 6차선으로 늘리기 위해서란다.이 소식에 서운함을 느끼는 이는부산피란 시절을 잊지 못하는 실향민 1세대들만이 아닐듯 싶다.일제때인 1934년 섬 영도와 육지를 연결하기 위해 건설된 이 다리는 하루에 두번 고개를 들어 명성을 더 얻었다.당시 신기함이란 이루 말할수 없었던모양이다.그러다 폭주하는 교통량을 견디지 못해 1966년멈췄다.시인 김광균(金光均)도 ‘영도다리’의 추억을 노래했었다.〈영도다리 난간 이슬에 젖도록/혼자서서 중얼거리니/먼-훗날 누가 날이곳에서 만났다 할까〉 영도다리는 이제 추억 속으로 사라진다.하지만 일제와 광복,한국전쟁의 아픔을 온 몸으로 받아온 다리의 이력을 담은 기념비라도 근처에 하나 남기면 어떨까.전쟁가요 ‘굳세어라 금순아’에 등장했던 다리로만 기억하기엔 너무 아쉽기 때문이다. 최태환 논설위원 yunjae@
  • ‘노근리 발포’ 상부명령 있었다

    무전 및 통신병으로 한국전에 참여했던 전직 미군 2명이 한국전 초기 미군은 상급 지휘본부로부터 노근리에서 피란민들에게 발포하라는명령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한국전 당시 미군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제2대대 대대본부에 배치됐던 로런스 레빈(72)과 제임스 크럼(72)의 이같은 증언은 상급부대 수준에서 민간인에 대한 발포 명령이 하달됐음을 최초로 입증하는것으로 북한군 침투에 대한 우려로 피란민들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받았다는 일부 참전용사들의 기억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들과 한국인 생존자들에 따르면 제7기병연대제2대대는 충북 영동군 노근리 철교 아래에서 수백명의 양민을 학살했으며 미 육군과 한국 정부는 이같은 양민학살 주장에 대한 1년간의진상조사 결과를 다음달 발표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상급부대로부터 민간인에 대한 발포 명령이 있었다는 크럼과 레빈의증언에 대해 육군은 그들이 어떤 증언을 했는지 알지 못하며 현재 진행중인 조사에 대해서는 어떤 논평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육군진상조사단의 최종보고서와 관련,하버드대학의 역사학자어니스트메이 교수는 “공정하고 정직한 보고서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면서도 미국 정부가 한국인 생존자들에게 보상을 할 가능성에대해서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 AP 연합
  • 국감 이색아이디어 만발

    국정감사 초반 의원들의 이색제안이 잇따랐다.반짝 아이디어에서부터 남북문제와 정책분야에서의 ‘건의성 아이디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반짝 아이디어 법사위의 민주당 천정배(千正培)의원은 광주 고·지법 국감에서 재판정의 자리를 ‘원탁회의’로 배치하고,판사들의 권위주의적인 검은색 법복을 부드러운 느낌의 옷으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천의원은 이밖에 ‘변호인과 피고인의 노트북 사용’ 등의 의견을내놓았다. 민주당 김옥두(金玉斗)의원은 행자위 경기도청 국감에서 러브호텔은업주들의 자진 폐쇄를 유도하고,매물은 자방자치단체가 매입, ‘도서관’‘병원’‘임대주택’ 등으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정무위 소속의 민주당 박병석(朴炳錫)의원은 고충처리위 국감에서 고충처리위 민원전화를 ‘고충처리’의 음을 따 ‘9772’로 하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남북 관련 문화관광위 민주당 심재권(沈載權)의원은 국립중앙박물관 국감에서 “진홍섭 전 개성박물관장의 방북을 주선하라”고 주문했다.심의원은 “진 전관장은 6·25때피란오면서 개성 인근에 직원4명과 함께 고려청자 등 문화재 100여점을 묻어두고 왔는데 현재 생존자는 진 전관장 1명뿐”이라며 이같이 제안했다. 국방위의 민주당 장영달(張永達)의원은 6·15 공동선언 후속조치의일환으로 연평해전을 야기했던 서해 NLL 일대를 ‘비무장 공동관리평화수역’으로 설정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정책 분야 ‘아이디어맨’인 보건복지위의 한나라당 김홍신(金洪信)의원은 보건복지부 국감에서 의약분업에 따른 야간진료 공백을 막기위해 ‘전국 동네의원의 당번제 운영’을 제안했다. 문화관광위 소속 한나라당 남경필(南景弼)의원은 문화관광부 국감에서 A4 용지 86쪽에 이르는 방대한 질의자료를 냈다.그는 한국 기부문화 활성화를 위해 ‘기부금품모집 규제법’ 개정방안을 제시했다. 재경위 소속 민주당 김근태(金槿泰)의원은 세무공무원의 사기앙양을위해 ‘세무공무원의 성과급제’를,교육위 소속 임종석(任鍾晳)의원은 ‘학교 주변 500m내 교육우선지역 설정’을 제안했다. 강동형기자 yunbin@
  • 北派공작원 366명 명단공개

    한국전 휴전협정을 전후로 남한이 북한에 파견한 공작원 가운데 일부의 명단이 처음 공개됐다. 국회 통일외교통상위 소속 민주당 김성호(金成鎬) 의원은 2일 북파공작원 양성·파견부대였던 HID(첩보부대) 소속 공작원 가운데 지난53년부터 56년까지 활동했던 HID 1∼3기 366명의 명단을 생존 공작원중 1명으로부터 입수,공개했다. 이 명단은 그동안 비공식적으로만 알려져 온 북파공작원의 실체를 처음 입증하는 물증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명단은 정보사령부가 ‘종결 공작원 명부’라는 이름으로 컴퓨터용지에 기록한 것으로,53년 처음으로 북파한 HID 교육대 1기생 150명,2기생 144명,3기생 72명의 명단이 수록돼 있다. 명단에는 공작원의 성명,생년월일,본적,공작형태,소속대,채용인,해고인등 북파공작원에 대한 기본적 신상명세 등이 구체적으로 기재돼있다.공작원의 평균 나이는 20대가 27%를 차지해 가장 많았지만 2기생중 이 모씨는 당시 나이가 14세에 불과했으며,김 모씨는 52세로 최연장자였다.공작원들은 전쟁고아,넝마주의,빈농 및 도시빈민 출신으로 소외계층이 대부분이었고,출신 지역별로는 이북출신이 전체의 77%를 차지해 초기 북파공작원들이 월남 피란민 위주로 편제됐음을 보여준다. 김 의원은 “지난 72년 7·4남북공동성명 전까지 북파된 공작원 가운데 실종,사망,생포돼 귀환하지 못한 공작원 수가 7,726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며 “우리도 북파공작원의 존재를 인정, 생존확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현진기자 jhj@
  • 北서 ‘생존 확인’ 서울 李春愛할머니 애끓는 사연

    “먼저 시댁에 가 있으면 곧 따라온다더니 그게 50년이 돼부렀어야…” 2일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남편 고광욱(高光旭·73)씨가 북에서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이춘애(李春愛·72·서울 종로구 창신동)씨는 너무 기가 막힌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스물둘 꽃다운 나이였던 50년 피란 길에 남편과 헤어져 재혼도 하지않고 오누이인 자식들만 바라보며 살아온 지 50년 만의 일이다. “도라꾸(트럭)에 기름만 채워놓고 금방 뒤따라 갈 테니 먼저 장성본가에 가 있으라고 해서…”이씨는 인천 상륙작전 뒤인 50년 9월27일 국군과 인민군의 밀고 밀리는 어지러운 싸움을 피해 신접 살림을 하던 전남 광주를 떠나 시댁본가가 있던 전남 장성으로 피란을 떠났다. 도청 공무원으로 마을에서 똑똑하기로 소문난 남편이었기에 곧 따라온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양복을 입고 손을 흔드는 남편을 뒤로 한 채 시아버지를 따라나선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열여덟 나이에 얼굴도 모르는 남편에게 시집간 이씨는 당시 뱃속에딸 재현(在賢·50)씨를 가진 임신 9개월 만삭의 몸이었다.아들 재정(在廷·52)씨는 두 돌을 하루 앞둔 갓난아기였다. 이씨는 “죽은 줄로만 알고 20년 전부터는 명절마다 차례도 지냈는데 이제야 찾는지 모르겠다”며 50년을 청상과부로 지낸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치는 듯했다. 시아버지는 운수업을 해서 큰 화물차를 몇대나 가진 갑부였다.그러나 장성 본가로 피란간 지 얼마 안돼 시댁은 국군과 빨치산의 싸움에모두 타버렸다. 시아버지도 폭격에 돌아가시고 그 많던 재산도 모두없어졌다. 이씨는 “태어난 지 1주일 된 핏덩이 딸은 업고 아들은 품에 안고초겨울 찬서리를 밟으면서 울며불며 산길을 며칠이나 걸어 광주로 돌아왔제”라며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지난날을 회고했다. 전쟁이 끝난 뒤 광주에서 포목점을 하던 이씨는 지난 57년 서울로올라와 친정 언니의 도움을 받으며 구멍가게 등에서 억척같이 일했다머리 속에는 ‘애들이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잘키우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들 재정씨는 H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건축회사 간부로 일하고 있다.딸 재현씨는출가해 어엿한 1남2녀의 어머니가 됐다. 이씨는 “만나면 왜 이제야 찾느냐고 따져야겠다”며 웃는지 우는것인지 모를 얼굴로 하늘을 쳐다봤다. 전영우기자 ywchun@
  • [오늘의 눈] 駐美대사의 신중치 못한 언행

    공인(公人)의 말은 천금과 같다.공인 중에서도 정부를 대표해 외국에 나가 있는 대사의 언행은 나라의 이익과 입장을 대변하기 때문에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부임(8월5일) 두 달을 갓 넘긴 양성철(梁性喆)주미대사의 말들은 국익을 앞세워야 할 대사로서 적절했는지,그가 대사의 자질은 갖추고 있는지 되묻게 한다. 한·미 안보연례협의회(SCM) 참석차 서울에 온 양대사는 지난 21일자 모 영자지 인터뷰를 통해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협상에서쟁점인 환경·노동 문제 등을 제외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노근리 사건에 대해서도 “(미군의 피란민 사살명령의)확실한 증거 확보가 불가능하며 목격자를 찾기도 어렵다”면서 “상호동의할 수 있는 선에서 해결방안을 찾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어안이 벙벙해질 얘기들이다. 미군의 독극물 방류로 촉발된 SOFA 개정 협상에서 환경조항 포기를시사하거나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에서 미군이 저지른 범죄라는 증거가 없다는 언급은 한국 정부의 주미대사가 아닌 미 국무부 당국자의입장이나 논평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뿐만 아니다.양대사는 미국이 고위급 인사를 북한에 보낼 것이라는비밀사항을 공개,미 정부로부터 항의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신중치 못한 언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지난달 14일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과 관련,빌 클린턴 미 대통령이 하지도 않은 말을 한것처럼 말해 미 외교가에 물의를 빚었다. 더 큰 문제는 정부 당국자들의 태도다.한 당국자는 “외교부나 청와대에서 문제삼을 분위기는 아니다”고 전했다.대수롭지 않다는 얘기다.문제 발언들이 민감한 한·미 현안이기 때문일까,아니면 양대사가정치인 출신이어서 그럴까.국민으로서는 그저 답답할 뿐이다.우리 외교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황성기 정치팀 차장]marry01@
  • [김삼웅 칼럼] ‘민주’ 없고 ‘나라’ 없는 정당행태

    집권 민주당의 전당대회가 열린 날 원내 제1당인 한나라당은 청와대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같은 날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는 제2차 남북장관급회담을 열어 투자보장협정과 경의선복원,경협을 위한 제도적장치 마련 등을 논의했다.남북화해와 남남대결의 어처구니없는 진풍경이 한반도에서 동시에 벌어진 것이다. 6·25한국전쟁이 한창인 1952년 7월 피란수도 부산에서는 이승만의권력연장을 위한 정치파동이 일어났다. 발췌 개헌파동이다.1592년 임진왜란으로 군신(君臣)이 의주로 피란을 가서도 동인과 서인들은 왜란의 책임을 물어 상대방 탄핵에 열을 올렸다.와중에서 유성룡은 이항복의 비호로 겨우 살아남아서 전란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정치가 국난극복과 민생보호가 아닌 자신들의 권력싸움,이해다툼의방편이었음을 말해준다.지난 2년 동안 IMF환란 극복과정에서 우리 정치가 보인 행태도 임진왜란과 6·25전란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귀화한 한 외국인은 한국인을 ‘독 속의 게’에 비유했다.독 속에게를 한 마리만 넣어두면 혼자 힘으로 빠져나오는데여러 마리를 넣어놓으면 서로 올라가는 놈의 발목을 잡기 때문에 결국 한 마리도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참으로 부끄러운 일면을 지적했다.상생과화합을 내세우면서도 공생보다 독생,밖(外)보다 안(內)에서 싸우길좋아한다. 9월1일 평양에서 끝난 2차 장관급회담의 성과로 이산가족 서신교환,군사긴장 완화 및 군 직통전화 개설을 위한 군 당국자회담,쌀 차관공여,3차 장관급 제주회담,임진강 수해방지공동추진,경협제도화 등 전방위 남북교류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이러한 남북한간 긴장완화로 한반도를 둘러싼 4강간에 영향력 유지를 위한 미묘한 신경전이 활발해지고 있다.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최근호는 “궁극적으로는 통일로 이어질 남북간 화해는 환영받을일이지만 동시에 이해 관계자들을 매우 동요시켜 미국은 한국과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문제를 재검토하게 하고 중국·일본·러시아간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둘러싼 경쟁관계에 다시 불을 붙이게 될 것”이라 내다 봤다. 한반도 주변의 움직임이 이렇다.국가(민족)의 미래를 내다보고 걱정하는 정치인(정당)이라면 급물살을 타고 있는 남북관계를 뒷받침하기위해 주변 4강 문제를 심도있게 연구하고 국회(또는 정당)에 4강과친선협회 등을 강화하여 정부의 입지를 도와야 할 것이다.이때의 ‘정부’는 정권이 아닌 국가와 동의어이다. 의원외교라면 너도나도 미국으로만 몰려가 관광인지 외교인지 구분할 수도 없는 일정을 보내다가 귀국하는 한심한 행태는 시정돼야 한다.미국 외교도 중요하지만 못지 않게 중국·러시아·일본과의 외교적 뒷받침도 남북화해-통일로 가는 길목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2차대전후 오스트리아 정치지도자들은 네 토막으로 쪼개진 나라를 초당파적인 외교력으로 신탁통치를 종식시키고 통일국가를 수립했다. 우리 정치인들도 나라의 장래를 위해 전문성을 바탕으로 친미파·친중파·친일파·친러파로 나뉘어 국익외교에 나서야 한다.그래야 4강에 둘러싸인 반도국가가 안전과 통일을 기약할 수 있다.한말 매국노들처럼 그들의 앞잡이가 되란 말이 아니다. 대미외교를 강화하되 다른 3강과의 관계도 소흘히 해서는 안된다는주장이다.그런 역할은 정부의 외교력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국회가 담당해야 한다.다른 나라들도 다 그렇게 한다.외교문제가 너무 ‘벅차’다면 내정이라도 성실하게 챙겨야 할 것 아닌가. 폭우와 태풍으로 수많은 이재민이 가족과 재산을 잃고,중국산 농수산물 파동으로 국민이 불안에 떨고,몇달째 계속되는 의사들의 집단파업으로 의료기능이 마비되고,산불피해·구제역·저소득층 보호를위한 추경 등 산적한 현안이 오로지 정치문제로 발목이 잡혀있다.여름 임시국회에 이어 정기국회까지 파행을 거듭하더니 야당은 장외투쟁을 벌인다. 민주당에 ‘민주’ 없고 한나라당에 ‘나라’ 없다는 세간의 지탄을면하려면 민주당은 날치기 등 비민주적 행태를 버리고,한나라당은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대권욕에만 빠져있는 당노선을 바꾸어야 한다.386세대 등 정치개혁을 내걸고 당선된 개혁성향 의원들이 앞장서 정기국회부터 정상화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무노동무임금’원칙이라도지켜라. 김삼웅 주필
  • 남북이산상봉/ 北 국어학자 류렬씨

    “어디보자,내 딸 인자야.돌아가신 네 어머니를 참 많이 닮았구나” “아버지.얼마나 보고 싶었다구요” 북한 국어학자 류렬씨(82)와 딸 인자씨(59·부산시 연제구 연산동)는 부녀를 갈라놓았던 반세기 세월에 대한 원망을 씻어내기라도 하듯서로를 부둥켜 안고 목놓아 울었다. 인자씨는 “아버지 얼굴을 잊지 않으려고 보고 싶을 때면 한장 밖에남지않은 사진을 보고 또 봤어요. TV를 통해 아버지 얼굴을 본 후 제정신이 아니었어요”라며 반세기 동안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를거듭 불렀다. 류씨는 딸에게 “내 일생을 엮은 TV영화가 있는데 봤느냐”면서 북한에서 국어학자로서 유명세를 떨친 자신의 삶에 대해 말했다. 이어 인자씨가 여든을 넘긴 부친의 건강을 걱정하며 “아버지 오래사셔야해요”라고 하자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는데 영양관리하면 아흔살까지는 살 수 있다고 하더라”며 자신감을 보였다.6·25당시 홍익대 교수로 재직했던 류씨가 딸과 헤어지게 된 것은 1·4후퇴때.외삼촌에게 딸려 딸 인자씨를 피란시킨 후 인민군에 입대,월북했다. 특별취재단
  • 한민족 하나로 남북離散 상봉/ 선물꾸러미에 절절한 사연 담아

    북의 혈육을 찾아가거나 맞이하게 될 남쪽의 이산가족들은 애끊는사연과 정성이 담긴 선물을 한아름씩 마련했다. 북에 있는 막내아들 김병길씨(54)를 만나러 가는 서순화씨(81·여)는 두꺼운 운동화를 가방 가장 깊은 곳에 챙겼다.살을 에는 듯이 추웠던 50년 겨울 다 해진 나막신에 버선발로 피란 길에 올랐다 헤어진 막내아들 생각에 그동안 밤잠을 제대로 못잔 기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서씨는 “아직도 꽁꽁 언 발로 대동강을 건너면서 발이 시렵다고 칭얼대던 병길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취로사업으로 근근이 혼자 살아가는 이몽섭씨(75·경기도 안산시 반월동)는 북에서 만날 부인,아들,딸을 위해 여자용 속내의와 손목시계 3개를 마련했다.이씨는 “없는 살림에 남들처럼 많은 선물을 준비하지 못해 아쉽지만 취로사업으로 받는 20만원 중에서 담배와 술값을아껴 선물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막내동생 상흔식씨(56)를 만나러 북에 가는 상환식씨(74)는 자신이이제껏 살아온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가족사진,집안 사진,직장시절의 사진 등을 준비했다.상환씨는 “동생을 만나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맨 먼저 물어보고 싶다”면서 “가져 가는 사진이 못난 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북에서 오는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파크텔에 모인 남측 이산가족들의 손에도 선물 꾸러미가 가득했다. 동생 조재린씨(67)를 만나는 조재익(78),재하(74)형제는 용인에서부터 힘겹게 메고 온 짐가방에서 소중한 선물을 하나 꺼냈다.바로 가족들의 사진을 담은 사진첩이다.가족들이 모여 값비싼 선물을 준비하려고도 했지만 살아온 모습을 선물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둘째아들 이춘명씨(70)를 서울에서 만나는 최인자씨(95)는 아들과헤어진 뒤 부터 50년 동안 끼고 있던 은반지를 아들에게 전할 예정이다. 형 심규황씨(65)를 만나는 순황씨(63)는 형의 가족이 얼마나 되는지 몰라 손목시계를 8개나 준비하고 고급 라이터도 10개를 마련했다.순황씨는 신발,전자계산기,속옷,화장품,영양제 등이 가득한 선물꾸러미를 풀어 보이면서 “지금까지 모은 전 재산을 다 형에게 주고싶지만 선물과 현금의 액수가 정해져 아쉽다”고 말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 *한국통신 徐容熙본부장. “한치의 오차도 없는 만반의 준비로 반세기 만에 성사된 남북 이산가족들의 뜨거운 만남을 돕겠습니다” 8·15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통신망 준비를 총괄하고 있는 한국통신 서용희(徐容熙·54)네트워크본부장은 역사적인 행사를 하루앞둔 14일 통신망 구축 상황을 최종 점검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Y2K기술문제대책반과 4·13총선,남북 정상회담 등 굵직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통신기술 설비를 총괄해온 베테랑이지만 이번 행사만큼 가슴이 설렌 적은 없었다.분단 반세기 만에 처음 이루어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기 때문이다. 서 본부장이 상봉 준비작업에 들어간 것은 지난달 말.남북 정상회담 이후 이산가족들의 상봉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통신지원대책반을 구성했다. 연인원 2,000여명을 동원,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달린 끝에 보름 만에모든 준비를 마쳤다. 행사 준비기간 동안 퇴근한 날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상봉일에 맞춰 통신망을 구축하느라 하루하루가 힘들었지만 이산가족들이 한맺힌가슴을 달래줄 수 있다는 기쁨에 피곤함도 잊었다. 서 본부장은 “우리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뜻깊은 행사를 준비하게돼 힘들지만 보람을 느낀다”면서 “전 세계에 우리 통신 수준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인 만큼 최선을 다해 행사를 마무리짓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서 본부장은 체신고와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나왔다.64년 한국통신에 입사한 뒤 경영기획실 사업대책국장과 경영전략실 사업대책총괄실장,무선사업본부장 등을 지냈다. 김재천기자 patrick@. *자원봉사 日여대생 가네마루씨. “50년이나 가족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마음 아픈 일입니다” 8·15 이산가족 상봉의 남쪽 가족들이 묵게 될 서울 올림픽파크텔에는 일본인 여대생 가네마루 가요(金丸佳大·25·도야마대 언어학과 3년)씨가 안내도우미로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가네마루씨는 한국인 도우미 4명과 함께 빨간색 치마에 남색 저고리 차림의 한복을 입고 1층 엘리베이터앞에서 남쪽 이산가족들에 대한 안내를 맡고 있다.지난 4일 여름방학을 맞아 한국을 찾은 그는 이호텔에 묵고 있다가 이산가족 상봉 행사 소식을 듣고 자원봉사를 자청했다.처음 계획했던 열흘간의 여행 일정도 1주일 더 늘려 잡았다. 가네마루씨는 “한국 사람들은 정이 많은 민족인데 오랫동안 이산의 비극을 겪고 있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느냐”고 서툰 우리말로말했다. 지난 97년 9월 한·일 대학생 친선 소프트볼대회에 출전,한국과 인연을 맺은 그는 “한국에 올 때마다 한국 사람들이 너무 친절하게 대해 준 데 감격해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다”면서 “평생 이렇게 좋은 삶의 경험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가네마루씨는“생이별한 가족들의 뼈아픈 만남이기에 진심으로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나를 외국인으로 보지 않고 한국인처럼 대해 줘 고맙게 생각하지만 한국말이 서툴러 안내를 제대로 못하는 게 아쉽다”고 털어놓았다. 그는“앞으로 한국에서 공부도 계속하고,한국 사람과 결혼할 생각도 갖고 있다”면서“오는 18일까지 이산가족들을 위해 성심성의껏 봉사활동을 하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김경운기자 kkwoon@
  • 월남후 재혼 李善行·李松子부부 방북길에

    “여보,나는 괜찮으니까 기쁜 마음으로 북에 두고온 부인과 자식들을 만나요” “고맙구려,당신도 그렇게 그리워하던 의식이를 만날 수 있다니 잘됐구먼” 북한에 가족들을 남겨놓고 각각 월남한 이선행(李善行·80·서울 중랑구 망우2동),이송자(李松子·81)씨 부부가 이산가족 방문단에 모두 포함돼 오는 15일 나란히 방북길에 길에 오르게 됐다. 4일 대한적십자사가 확정한 방북 이산가족 인선 최우선 기준인 ‘부모,배우자,자녀가 생존해 있는 사람’에 이씨 부부가 모두 해당되기 때문이다. 평안북도 영변이 고향인 이선행씨는 지난달 27일 북에서 보내온 가족 생사확인 명단에서 아내 홍경옥씨(78)와 아들 진일(58),진걸씨(55)가 살아있음을 확인했고 함경남도 문천이 고향인 이송자씨는 아들 박의식씨(60)의 생존을확인하고 방북단에 포함되기를 손꼽아 기다려 왔다. 이선행씨는 “전쟁 당시 청천강 이북에서 중공군이 밀려온다는 소문에 모든 가족이 피란길에 나섰다가 대동강 철교가 끊기면서 생이별을 하게 됐다”면서 “당시 처는 임신중이었다”고 회상했다. 부인 이씨는 1947년 아들 형제를 북에 두고 서울에 있던 남편을 찾아 내려왔다가 38선이 막히면서 자녀들을 볼 수 없는 신세가 됐다. 남편의 아내를만나면 ‘살아 있어서 고맙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는 이송자씨는 “이번 방문에서 두 가족이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남편 이씨는 “아내를 두고 옛 아내를 만나는 것이 쑥스럽기도 하지만 아내가 이해해주니 고마울 뿐”이라면서 “명절과 어버이날이 찾아오는 것이 가장 두려웠을 만큼 외롭던 우리 부부에게 갑자기 너무 많은 자식이 생겼다”며 즐거워했다. “손자,손녀는 몇이나 될까,혹시 증손자가 있을지도 몰라…아들에게는 돋보기,손자에게는 양복,증손자에게는 장남감이 어울릴까” 이선행씨는 벌써 후손들의 선물 챙기기에 바빴다. 이송자씨도 “우리 아들들도 백발이 성성하겠구려,손주들에게는 탐스럽게익은 앞 마당의 복숭아를 따다 주는게 어때요”라며 화답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
  • 노근리 희생 양민 합동위령제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희생된 양민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합동위령제가 26일 사건 현장인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앞 경부선 철도 쌍굴에서생존자 및 유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노근리 미군 양민 학살사건 대책위원회(위원장 鄭殷溶·77) 주최로 열린 이날 위령제는 헌화 분양과 경과보고,위령 및 추모사,추모 공연 순으로 진행돼 50년전 피란길에서 억울하게 숨져간 영혼들의 넋을 위로했다. 정위원장은 이날 위령사에서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하게 숨져간 영혼들을달래기 위해 사건발생 50주년을 맞아 위령제를 마련하게 됐다”며 “한·미양국의 진상조사가 이뤄지고는 있으나 무참히 학살된 영혼을 달래기에는 너무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한편 대책위는 미국정부에 대해 ▲외신이 보도한 피란민 살상명령에 대한견해 ▲사건 당시 인지 여부 ▲조속한 진상조사 ▲사건의 본질 훼손·축소의도 중단 ▲한국정부의 적극적인 사건 해결 등을 요구하는 5개항의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영동 김동진기자 kdj@
  • [마음은 북녘 고향에](7)함남 삼호면 출신 박충희 할머니

    “내 고향 삼호에 가면 제일 먼저 섭죽을 먹고 싶습네다” 함경남도 홍원군 삼호면 신중리가 고향인 박충희(朴忠姬·73·여·서울 송파구 광장동)씨는 7일 “남쪽 사람들은 섭죽을 잘 모를 테지만,홍합으로 끓인 죽”이라고 설명했다. 박씨의 고향은 함흥에서 80리쯤 떨어진 작은 어촌 마을.아버지가 어업조합이사로 지내 넉넉지는 않았지만 6남매가 부러움 없이 자랐다.막내인 박씨는마을 앞 바다에 있는 ‘전초섬’에 목선을 타고 가 놀곤했다.마을 사람들은섬 주변 바다에서 잡은 홍합으로 죽을 쑤어 밥처럼 먹었다. 마을 뒤편에는 ‘두넘’이라고 부르는 동산이 있었다.동산에 오르면 푸른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함흥의 반룡산에는 벚꽃나무가 많아 봄이 되면 눈처럼 새하얗게 장관을 이뤘다. 정월 대보름에는 주머니에 잣과 해바라기씨를 가득 넣고 성천강을 건너며 먹었다.마을 사람들은 대보름날 이 강을 건너면 시집 못간 노처녀가 시집을 가고,아픈 사람은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 장터가 열리는 신중리는 삼호면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박씨는 “장이열리면 ‘아마이(할머니)’들이 수수전병을 쭉 늘어놓고 팔았다”며 먹거리에 대한 추억을 떠올렸다.어릴 적 할머니에게 가자미식해를만들어 달라고 조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살이 오돌오돌 돋은 큰 멸치를 소금에 절인 멸치젓,겨울이면 집집마다 명태를 수십마리씩 잡아서 아침마다 끓여먹는 명태국도 별미였다. 박씨는 삼호여자중학교를 거쳐 홍원고급중학교에서 교사로 있던 1951년 1·4후퇴때 북한체제에 반대하는 학도호국단 학생 10명과 함께 목선을 얻어 타고 고향을 떠났다. 박씨는 “고향을 잠시 떠나 있을 것으로 여겼지,이렇게 긴 세월 동안 부모형제들과 헤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눈물을 글썽였다.나중에 따로 피란온 큰 오빠를 경북 포항에서 만났을 뿐 나머지 형제는 북에 남아 있다. 박씨는 함흥에서 하숙을 하며 함흥실과여학교를 다녔다.김흥수(金興洙)화백은 당시 미술을 가르치던 교사였다.모윤숙(毛允淑)시인의 동생인 모월천씨는 국어교사였다.김 화백은 엄격한 총각 선생님이었지만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박씨는 “남북 정상회담으로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길이 트여 너무 벅차고두려워 고향방문단 신청을 다음 번으로 미뤘다”고 말했다. 김경운기자
  • 백악기 공룡의 무용담 ‘다이너소어’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최고 밑천은 뭐니뭐니해도 3D기술.월트디즈니는 번번이 진일보한 CG(컴퓨터그래픽)화면으로 이전 기록을 스스로 깨가는 재미에 흠뻑 빠져있다.백악기 공룡의 무용담을 그린 ‘다이너소어(Dinosaur)’는 마치애니메이션의 마지막 코스를 답사하고 있는 듯한 영화다. 지난 5월 미국에서 개봉해 1억5,000만달러(약 1,650억원)를 걷어들인 이번영화는 거의 실사처럼 만들었다.라이브 액션으로 찍은 장면에 CG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시도는 공룡의 실룩거리는 미세근육까지도 잡아냈다.기원전 6,500만년 백악기.평화로운 이구아노돈(백악기에 번성했던 초식공룡)의 삶터가 외부침략으로 초토화되는 와중에 알 하나가 극적으로 사지를 벗어난다.산따라물따라 흘러다니던 작은 알은 여우원숭이 ‘야르’ 가족의 품에 안착해 부화하고,‘알라다’라는 이름을 얻는다.공룡과 작은 털북숭이 원숭이들의 평화로운 동거는 그러나 유성이 빗발쳐내리는 대재앙으로 위기를 맞는다.피란길에 나선 알라다 일행은 다이너소어 무리를 만나 낙원을 함께 찾아나서지만,무리를 이끄는 대장 ‘크론’의 독단과 전횡에 부닥친다. ‘타잔’에서 모티브를 따왔음직한 익숙한 줄거리는 끝까지 관객의 상상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예상대로 영화는 해피앤딩이다.분열 위기의 다이너소어들에게 협동심을 일깨워 그들을 위협하는 카노타우르떼를 무찌르고 낙원을찾아주는 것 역시 알라다 몫이다. 디즈니가 특유의 장기를 빼놓았을 리 없다.다음 장면들을 상상할 재미 대신걸리적거릴 만큼 자주 직설적인 교훈을 깔아놓았다.크론의 독재논리에 맞서‘민주주의 승리’란 메시지를 얻어내는 것까진 좋지만,내면적 갈등을 단 한번도 겪지않는 알라다의 캐릭터는 흡인력이 떨어진다. 첫 기획이래 12년이 걸려 탄생한 영화는 디즈니 자체에 극비 스튜디오를 만들어놓고 애니메이션 기술팀에만 350명을 따라붙였다.덕분에,달리는 공룡무리가 일으키는 먼지나 여우원숭이의 털을 클로즈업한 장면 등은 ‘테크놀러지의 승리’를 그대로 웅변하고 있다.감독은 ‘포카혼타스’의 스토리 아티스트였던 랄프 존닥.15일 개봉. 황수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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