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피란
    2026-05-29
    검색기록 지우기
  • 소진
    2026-05-29
    검색기록 지우기
  • 모자
    2026-05-29
    검색기록 지우기
  • 원형
    2026-05-29
    검색기록 지우기
  • 정조
    2026-05-2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074
  • [김삼웅 칼럼] 최익현과 ‘얼빠진’ 지식인들

    충남 청양에 모덕사(慕德寺)란 사당이 있다.해방후 환국한 백범이 임정요인을 이끌고 이곳을 찾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환국고유제(還國告由祭)를 지낸 곳이다. 고유제란 임정주석이 휘하 요인들과 함께 ‘정부가 조국땅에 돌아왔음’을 아뢰는 의식을 말한다.6·25전쟁후 피란지에서 서울로 환도한 국회의장 신익희도 국회의원들과모덕사를 찾아 ‘환도고유제’를 지냈다. 모덕사가 어떤 곳이기에 나라를 되찾은 임정 주석과 서울을 수복한 국회의장이 고유제를 지냈을까.“대한민국 28년(1947년)4월23일 후생 김구는 삼가 맑고 깨끗한 술을 따르고 향을 지피어 제사를 올리며 아뢰오니,춘추의 대의시며일월같이 높은 충절이었습니다”로 시작된 백범의 ‘환국고유제문’을 더 들어보자. “외로운 소자(小子)는 어렸을 때 스승의 가르침에 선생의 말씀을 받잡고 내내 잊지 못하였습니다.나라잃고 안팎의 난리속을 헤매다가 지쳐 쓰러질 때마다 선생의 위대한훈업에 격려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선생이시어!이제야 저의 힘을 다하여 산넘고 물건너서 여기선생의봉롱(封瓏)가까이 왔사옵고 산같이 높으신 뜻을 받들고 조촐한 차림으로 모시옵니다” ‘고유제문’의 주인공은 면암(勉庵) 최익현이다.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키고 극심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을사조약후 8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킨 의병대장,일본군에 체포돼 쓰시마(대마도)에 끌려가서도 단식으로 저항했던 지사,순국 뒤에 돌아와 묻힌 곳에 세운 사당이 바로 모덕사이다. 국적(國賊)을 포살한 안중근의사가 최후진술에서 “실로만고에 얻기 어려운 고금 제일의 우리 선생이다”,매천 황현은 “재상과 유림이 모두 한몸에 맺혀지니 해동(海東)천년에 공의 말만 있으리다”,중국의 원세개는 “굴원(屈原)과 개자추(介子推)를 합한 절의(節義)”라고 격찬했던 분이 면암선생 아닌가. 한말과 왜정시대에 자진(自盡)하거나 창의(倡義)한 분이많거늘 유독 면암의 사당에서 고유제를 지낸 까닭은 을사조약 후 전국 의병장의 9할이 그의 문도 출신이란 이유다. 이는 곧 “면암이 의병장을 낳고 의병장은 독립군을 낳고독립군은 항일투사를 낳고…” 독립운동사의 요람인 셈이다. 국민의 기억에서 멀어진 모덕사의 사연을 꺼낸 것은 면암을 지식인의 사표처럼 받들어온 우리 근대 지성 풍토가 너무나 크게 변질되고 있기 때문이다.과거 행적으로 보아 ‘사회원로’로 대접받기 어려운 사람들까지 포함된 지식인들이 급조단체를 만들고 “옛 역사의 ‘낡은장부’를 뒤적이면서 적과 동지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가르는”운운하는시국성명을 발표했다.매명주의 속성의 지식인들은 탈세언론의 비호에 나서고,평양 8·15통일축전에 참석했던 또다른 지식인들은 돌출행위로 남남갈등을 촉발시킨다.이래저래 지금‘얼빠진 지식인’의 공해가 심각하다. 족벌언론의 탈세를 꾸짖고 색깔론 따위의 시대착오를 질책하고 남북화해를 기피하는 북측의 태도를 비판하면서,사회정의와 민족화합을 주도하는 것이 ‘원로’나 지식인의도리이고 책무이다.친일도,헌정파괴도,탈세도,곡필도,용공음해도 묻어두자는 무책임한 반지성의 목소리야말로 “적과 동지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가르는”‘칼춤’이 아닐까. 진실을 밝히고 양심세력을 옹호하고정의를 수호하는 것이 지식인의 본령일진대 칼 뺄 때와 붓 잡을 때를 분별하지 못하고,선악시비도 가리지 못하면서,먹구름 덮이면 단시론(單是論),햇볕들면 양비론,안개끼면 양시론을 펴는 허명의 군상들이 날뛴다.면암의 선비 정신을 아는가 모르는가. 위당 정인보는 왜정시대 다수 지식인들의 정신상태를 ‘얼빠진 상태’라 규정하면서 “얼을 남이 빼앗아가는 것이아니라 자기 자신이 스스로 잃는 것이라”지적했다. 그렇게 ‘얼빠진’지식인의 전통이 지금도 활개치는가. 김삼웅 주필 kimsu@
  • 안견 ‘고잔도장축도’는 진품?

    진위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조선 초기 화가 안견의‘고잔도장축도’(古棧道長軸圖)가 과연 진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이 그림의 진품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안견연구회(회장 이건환)는 8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 수운회관에서 열린 고잔도장축도 전시회에서 “한국전각학회가고잔도장축도에 찍혀있는 안견의 낙관 ‘池谷’(지곡), ‘安氏得守’(안씨득수) 2개를 감정한 결과 낙관이 안견의것으로 여겨진다는 감정서를 보내왔다”고 밝혔다. 이 감정서는 “자외선 촬영에 의해 나타난 안견의 낙관을,일본의 낙관 사전인 고화비고(古畵備考)및 한국의 낙관사전인 근역인수(槿域印藪)에 등록돼 있는 것과 비교할 때날인 상태의 애매함으로 확인에 어려움은 있지만 자법(字法),장법(章法)등이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사료된다”고밝혔다. 이 그림의 진품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는 안휘준 서울대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이 인장이 위조된 것같다고 본다. 안교수는 “안견의 그림은 일본 텐리(天理)대에 있는 ‘몽유도원도’가 유일하다”고말해왔다. 현재 학계에서는 허영환 성신여대 교수(전 문화재위원)가화풍, 구도,제발(題跋·앞머리와 말미에 적어 놓은 글)등7가지 항목을 거론하며 고잔도장축도가 진품임을 주장하고있으나 학계는 안교수의 주장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고잔도장축도는 당 현종이 안녹산의 난(755년)을 피해 험난한 산길과 잔도(棧道)를 넘어 피란가는 모습을 비단에그린 두루마리 작품.잔도는 절벽과 절벽 사이를 잇는 나무로 만든 도로이다. 이 그림이 진품으로 확인될 경우 ‘몽유도원도’보다 6년앞선 1441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잔도장축도는 소장자 이원기씨가 지난해 10월 처음 공개했다. 이씨와 이회장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낙관을 호암미술관에서 자외선 촬영한 결과,안견의 호인 ‘池谷’과 어릴때 이름인 ‘安氏得守’가 확인됐다고 여러차례 밝혔다. 이와 관련,호암미술관의 한 관계자는 “고잔도장축도에찍혀있는,눈으로 보이지 않는 낙관의 글자를 자외선 카메라로 촬영해 낙관에 쓰여있는 글자를 나타나게 한 것은 사실”이라면서 “그러나 낙관이누구의 것인지 언제 낙관을찍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전시회에서는 흥선 대원군의 ‘석파도인유란도첩’(石坡道人幽蘭圖帖)이 진품임을 확인해 주는 중국 문물국(우리의 문화재청에 해당)의 감정서도 함께 전시됐다. 이 회장은 “한국전각학회의 감정 결과 작품이 진적(眞蹟)이라는 우리의 주장이 더 큰 힘을 얻게 됐다”며 “이번전시를 통해 이 작품의 진위가 엄정하게 가려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날 전시회에는 한국미술사학회 회원과 문화재위원,고미술 소장가 등이 몰려들어 이 작품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였다. 유상덕기자 youni@. ■조선초 최고 산수화가 ‘안견’. 안견(安堅)은 조선 초기인 15세기의 궁중 화가이다.문예부흥기인 세종부터 문종,단종,세조 4대에 걸쳐 화원으로활약했다. 특히 세종의 아들로 풍류객이며 열렬한 문예 후원자였던안평대군과 가까이 어울리면서 중국 고화들을 섭렵,자신의화풍을 이룩했다. 산수,인물,말 그림 등에 능했다.성현(成俔)은 용재총화에서 “고래의 명적(名籍)을 많이 보고연구해 그 요체를 터득하고 고금명가의 장점을 규합,절충해자기 것으로 소화했으며 산수화가 빼어나다”고 그를 평가했다. 호는 현동자(玄洞子)·주경(朱耕)·지곡(池谷),자는 가도(可度)·득수(得守)이다.
  • [씨줄날줄] 영도다리 보존

    부산의 명물인 영도다리를 철거하느냐,보존하느냐를 놓고부산시와 지역 문화·시민단체 사이에 몇달째 논란이 끊이질 않는 모양이다.부산시는 다리가 낡아 제 구실을 못하는 데다 안전성에도 문제가 있으므로 헐고 새 다리를 놓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론을 든다.반면 문화·시민단체들은 다리의 문화적·역사적 가치가 크므로 보존하는 게 당연하다고 맞선다.결론은 부산시민들이 총의를 모아 내릴 테지만 “영도다리는 역시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부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지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가수 조용필씨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꼽거나 특정 정치인의 이름을 드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형체가 있는 상징으로서는 영도다리와 오륙도,갈매기를 말하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영도다리는 1934년 개통해 연혁이 비교적 짧은 편이다.그렇더라도 한국 현대사의 한 부분을 말해 주는 건축물로서 그가치가 충분하다.한국전쟁이 불러온 가족·연인·친지의 헤어짐과 만남을 영도다리처럼 극명하게 보여주는공간은 따로 찾기 어렵다.전쟁 와중에,또 전후 복구기간에 영도다리는전국 팔도에서 모여든 피란민들에게 자연스런 ‘만남의 장소’였다.아울러 부산시가 팔도민이 모여 현재의 발전을 이룩한 도시임을 감안하면,영도다리는 국민에게 추억의 장소이자 부산시의 상징물로서 손색이 없다. 부산시는 영도다리 철거의 이유로 ‘실용성’이 없음을 들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오래된 건축물의 철거·보존여부를 판단할 때 그 기준은 보존가치가 어느 정도인가에 달린 것일 뿐 실용성은 이미 논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예컨대국보 제1호 남대문(숭례문),보물 제1호 동대문(흥인지문)을보존·관리하는 이유는 그것이 관문으로 기능해서가 아니라문화적·역사적 가치가 높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다. 부산시도 일단 영도다리 보존을 전제로 하고,교통량 증대에 따른 대책은 별도로 마련하는 게 바람직하다.일부에서 제의한 것처럼,인근에 다리를 새로 놓거나 해저터널을 뚫는 방법 등 보완책도 있을 것이다.다리의 차량통행을 금지하고 옛날처럼 일정한 시간에 양쪽으로들어올려 배를 통과시킨다면영도다리는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되살아나리라 믿어 의심치않는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
  •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 민속연 제작 배무삼씨

    어렸을적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싶은 마음으로 누구나 한번쯤 날려봤을 연(鳶).옛날엔 정월 대보름날 연에 송액영복(送厄迎福)이란 글을 써서 연줄을 끊어 하늘높이 날려보내곤 했다. 연은 1,300여년 전인 신라 진덕여왕 원년(서기 647년)에김유신 장군이 비담과 염종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이후 고려말 최영 장군,세종대왕때 남이 장군,임진왜란때이순신 장군이 화공법이나 작전지시 수단으로 사용하다가영조대왕(1724년)때 궁중놀이인 연날리기를 민중에게 장려하면서 민간에 파고 들어갔다. 이런 내력을 지닌 연이 자취를 감추고 있지만 아직도 고집스레 매달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부산민속연보존회 이사장 배무삼(裵武三·58)씨.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지금도 방 한칸을 작업장삼아 한지를 손질,문양을 그려넣고 대나무를 다듬어 붙여 명주실로 병잡기(무게중심잡기)를 하고 있다.하루 많이 만들면방패연으로 4∼5개. 그가 연과 인연을 맺은 것은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가 주최한 부산국제친선연날리기대회에 출전한 74년.연만드는손재주를 당시 보존협회 어른들로부터 인정받은 것이 계기였다. 그는 동구 초량동 집에서 동래구 온천동 보존협회까지 틈만 나면 걸어가 연만드는 법과 띄우는 법을 배웠다. 당시엔 동래가 민속연 만들기에서 가장 앞서 있었다.6·25 전쟁으로 전국 피란민들이 모이면서 제작기법이 한단계높아졌기 때문.연 제작법과 날리기대회의 규칙 등도 이때전국적으로 표준화됐다. 연의 모든 것을 전수받은 배씨는 87년 부산공동어시장을그만뒀다.“돈도 되지 않는 일을 한다”는 부인(53)의 만류도 뿌리쳤다.이후 연날리기대회도 별로 없고 연을 찾는사람도 없어 입에 풀칠조차 어렵게 됐다. 배씨가 제작한 방패연은 1만4,000원,가오리연 7,000원,얼레 1만5,000∼5만원이다. 그럼에도 평생 배운 기술을 묵히기 아깝고 연을 널리 보급하고 싶은 욕심도 있어 아직 계속하고 있다.94년엔 부산민속연보존회도 만들었다.연 전시 박물관과 함께 항상 연을 날릴수 있는 공간확보가 여생의 꿈. “연은 단순한 듯하지만 자유자재로 조종이 가능한 비행물체이기 때문에정교한 과학”이라고 강조하는 배씨는 94년 부산시 무형문화재 지정을 신청했으나 보류됐다.연락처 (051)554-6475. 글 부산 이기철기자 chuli@
  • 타계한 경제거목 왕회장 정주영씨/ 일대기

    정주영은 격동의 현대경제사의 산증인이자 역사 그 자체다.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근대화의 거목(巨木)이었고,옛소련과 중국의 경제 교류를 이끌어낸 민간 외교관이었다. 서울올림픽을 유치,성공적으로 치른 체육인이면서 사회사업가이기도 했다.누구도 엄두내지 못했던 ‘소떼 방북’으로 금강산 관광을 이끌어낸 이도 그였다.‘소떼 방북’은지난해 6월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밑거름이 됐다.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로 자신의 퇴진 여부가 도마에 올랐던 지난해 5월에는 ‘3부자 동반 퇴진’이라는 승부수를 띄웠던정주영.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그의 자서전 제목만큼이나 그의 인생 역정은 위기와 시련,극복의 연속이었다. ■소년 정주영 1915년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의 산골짜기에서 빈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그의 호 아산도 고향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어려서부터 남달리 야심이 많았던 그에게“농사일을 하라”는 부친의 말은 성에 차지 않았다.가난은 야심찬 통천 산골의 소년을 잡아두지 못했다. 신천지를 꿈꾸며 세번씩이나 가출을 시도했던 정주영은 19살때 아버지가 소 팔아 모아 둔 70전을 훔쳐 들고 네번째‘탈출’에 성공, 드넓은 세상으로 나온다.그러나 기다리는 것은 냉엄한 현실뿐.막노동판을 전전하다 다다른 곳이서울 신당동 쌀 가게였다.황소처럼 우직하게 일한 그에게운이 따랐다.그의 성실성에 탄복한 주인이 그에게 쌀 가게를 넘겨줘 일약 점원에서 사장으로 올라앉게 된다.‘경일상회’라는 상호로 자신의 간판을 내단 것은 고향을 떠난지 4년 만의 일이다.보통학교(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그에게 ‘안되는 일은 없다’는 불굴의 의지가 생긴 것도 이무렵이다. ■사업은 탄탄대로 40년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에 자동차수리공장인 ‘아도써비스’를 창업하면서 본격적인 사업의길로 들어선다. 이후 46년에는 중구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47년에는 현대건설 모태인 현대토건을 세우며 사업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손대는 일마다 성공했다.그에게 ‘두려움’이란 존재하지 않았다.머리 속은 ‘도전’ ‘성공’이란 단어들로만 가득찼다.반세기에 걸친 ‘현대 역사’의 시발점이었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잠깐 부산으로 피란 길에 올랐던 그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복구사업에 뛰어든다.단일 공사로는최대였던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맡아 일약 대형 건설업체로 부상한 것도 57년이다.62년부터 본격 추진된 경제개발계획때는 한국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65년에는 태국의 파타니 나라와소 고속도로공사를 따내면서 국내 최초로 해외에 진출하는 개가를 올렸다.68년엔 박정희(朴正熙)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사업을 성공리에 마친다.세계 최단 시간 완공이라는 기록까지남긴 이 공사는 ‘정주영’을 불세출의 인물로 각인시킨대역사였다. 70년대 후반은 중동 붐을 타고 대규모 건설공사를 수주,현대를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시키는 또 다른 계기가 됐다. 사업 절정기는 80년대.76년 최초의 국산 모델 ‘포니’승용차를 만들어 미국 수출 길을 닦았다.86년에는 포니의 후속 모델인 엑셀이 미국 수입시장 소형차 판매 1위를 차지,‘엑셀신화’를 만들어냈다.엑셀신화는 후속 모델인 엑센트,베르나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결단의 승부사 그의 ‘신화 창조’는 초인적 의지와 도전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그의 삶은 위기와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그때마다 특유의 뚝심으로 승부를 걸었다.결과는 늘 적중했다. 고비때마다 결단은 더욱 빛났다.한국전쟁 당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한겨울에 유엔군 묘지에잔디를 깔라는 미군측 요청에 보리밭을 떠다가 푸른 잔디로 바꿔 현대건설이 미군 공사를 독점한 일화는 두고두고회자된다.조선소 도크도 없이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내밀어 영국에서 조선소 건설 차관을 따낸 일,일본나고야를 제치고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일은 아마도 그가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984년 2월 서해안 서산 간척지의 물막이공사는 정주영의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준 사례다.양쪽에서 쌓아온 방조제의 끝 사이를 막아 조류를 차단하는 당시 공사는 유속이너무 빨라 난공사 중 난공사였다.정주영은 때마침 외국에서 들여온 고물 유조선 한 척을 활용하는 ‘기발한 발상’으로 물막이공사를 완벽하게 해낸다.후일 ‘정주영공법’으로 불렸을 정도다. 그런 그에게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다.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대통령에 출마해 떨어진다.대가는 비쌌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쓰라린 실패로 기록된 이 사건으로 그는 현대그룹 일선에서 물러났고,건강도 극도로 악화되는이중고(二重苦)를 겪어야 했다. 회사도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문민정부 5년간 각종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일 욕심은 물론 명예욕도 컸던 그가재벌의 정치 참여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을 계산하지 못해무리수를 둔 결과였다. ■마지막 불꽃,대북사업 금강산에 가졌던 그의 애착은 남달랐다.그에게 통천에서 가까운 금강산은 바로 고향이었다. 98년 6월 ‘소떼 방북’을 추진하면서 “아버님의 소판돈 70전을 갖고 집을 나선 뒤 긴 세월 동안 저는 묵묵히일하는 소를 ‘성실과 부지런함의 상징’으로 삼고 인생을걸어왔습니다. 이제 그 빚을 갚기 위해 한 마리의 소가 1,000마리가 되어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갑니다”라며벅찬 감회를 표현했다. 발이 부르트도록 방북 길에 올랐던 그의 노력은 헛되지않았다.‘3부자 동반 퇴진’과 함께 대북 총수 자리를 아들 정몽헌(鄭夢憲)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에게 물려줬지만대북사업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금강산 관광에 이어 개성공단을 따낸 것도 성과 중의하나다. 지난해 6월28일에는 막걸리를 싣고 방북,김 위원장이 지방 순시 중인 원산까지 날아가 대북경협을 담판짓는 지칠줄 모르는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주병철기자 bcjoo@. * 자식들엔 엄격 손주들엔 자상. 아버지 정주영은 자식들에겐 매우 엄격했다.잘못을 저지른 아들에겐 용서를 허락하지 않았다.아들들은 아버지 앞에서는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고 고백하곤 했다. 92년 총선 전후까지만 해도 자식들을 한데 모아 아침을같이 먹고 계동사옥으로 출근할 정도로 가부장적인 면을지니고 있었다.자식들과는 달리 손자·손녀들에게는 정이많은 할아버지였다.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손자·손녀들을 자주 찾곤 했다. 이렇듯 위세당당하던 그도 나이는 이기지 못했다.말년에몽구(MK)와 몽헌(MH) 두 아들이 싸우면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데 몹시 속상해 했다고 한다. 일 벌레로 비쳐진 그에게도 멋진 풍류가 있었다.‘아침이슬’을 곧잘 불러댔고,한번 마이크를 잡으면 ‘가는 세월’ ‘고향의 봄’ ‘고향무정’ 등 3∼4곡을 불러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노래를 좋아했다.시간이 날 때면 작가와화가를 만나 문학과 예술을 논하는 면도 있었다. 외지와의 회견에선 “120살까지 살겠다”고 장담했던 정주영.그러나 그도 불로초를 구할 수는 없었다.매순간 승부로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대사업가 정주영은 이승에 ‘왕(王)회장’이란 이름 석자를 남기고 끝내 이 세상을 떴다.사업가로 첫 발을 내디딘 지 63년,47년 현대건설 전신인 현대토건을 설립한 지 꼭 54년 만의 일이다. 손성진기자 sonsj@
  • 北아버지 눈물로 쓴 편지에 끝내 울어버린 남녘 3남매

    “잠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너희들에게 편지로라도 소식을 전하니 금시라도 너희들을 만난 것 같다.” 인천시 주안2동에 사는 한정구(韓正九·56)씨는 16일 아버지 인기(仁基·84)씨가 보내온 편지를 받는 순간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 끝내 서러운 눈물을 쏟아냈다. “아버지가 행방불명된 뒤 평생을 눈물로 살아온 어머니가 살아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인기씨는 6·25전쟁 1·4후퇴시 부인 최순례씨와 3남매를 처가인 강화로 먼저 피란보낸 뒤 인천 집에 남아 짐을 꾸리다 인민군에 징집당했다.가장이 갑자기 사라져버리자 최씨는 장사와 공장일을 해가며 어린 자식들을 키워야만 했다. 72년 최씨가 72세로 사망하자 자식들은 한씨도 이미 사망한 것으로 보고 제사를 함께 지내왔다. 인기씨는 편지에서 자신은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새로 결혼해 5남매를 두고 있으며 기업소 직맹위원장을 지내다 퇴직했다고 밝혔다. 인기씨는 “통일이 되면 마주앉아 몇밤이고 지새우며 못다한 얘기를 나누자”며 자식 상봉에 대한 희망을 접지 않은 채 50년만의 편지를 마무리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
  • 민족대표·애국지사 55인 위패 봉안

    82주년 3·1절을 맞아 기미년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과 애국지사 22인 등 모두 55인의 위패가 부산의 한 사찰에 봉안됐다. 1일 오전 부산시 동구 초량동 대한불교 원효종 금수사(주지법홍스님)에서 손병희·한용운선생 등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과 안중근의사와 김좌진장군 등 순국선열22인의 위패 봉안기념식이 열렸다.민족대표와 애국지사의 위패가 금수사에 봉안된 것은 법홍스님이 한국전쟁때 피란온 초대 부통령 이시형 박사(1869∼1953)와의 인연 때문이다. 금수사는 한국전쟁때 피란민들에게 거처를 제공하는 등 도움을 주면서 이름이 알려졌고, 이시형 박사가 법홍스님을 만나애국지사의 위패를 모셔달라고 간곡한 부탁을 했다. 또 청산리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 전 국회의원이 김 장군의 제사와 위패를 모셔줄 것을 부탁했고,법홍스님은 이때부터 항일운동으로 순국한 윤봉길 안창호 안중근의사 등 애국독립지사 22인의 위패를 모시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손병희·한용운선생 등 기미년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의 위패까지 모시게 됐다. 부산 이기철기자 chuli@
  • [대한광장] 영도다리를 아시나요

    얼마전 어느 여성작가의 소설에서 부산을 매우 시끄럽고 살벌한 동네로 그려 놓은 걸 보고 기분이 언짢았던 적이 있다. 낯선 도시에서 받는 첫인상은 좋고나쁨의 차원이 아니라 색다른 것에 대한 외경심이 되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산이 도시 전체 면적의 70%를 차지하는 부산의 열악한 도로율이나,싸우는 말투와 정감을 표현하는 말투가 잘 구분되지 않는 억센 사투리가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부산을, 바다 산 강을 품은 삼포지향이라고들 하지만 그런자연조건이 도시 이미지를 서정적으로 가꾸는 데 큰 도움이된 것 같지는 않다.그보다는 6·25전쟁 당시 임시수도로서최후의 보루 역할을 한 경험과,국제항구와 산업도시로서의활달한 분위기가 주로 각인되어 있다.그런 조건들 때문에 제대로 도시계획을 세울 겨를도 없이 중구난방으로 솟아오른도시여서 겉핥기로 보면 어지럽고 소란스러운 느낌을 가질만도 하다. 최근 옛시청 자리에 들어설 부산 제 2롯데월드의 예상되는교통량 때문에 영도다리를 허물고 새 다리를 놓겠다는 부산시의 계획이 발표된 바 있다.거기에 일부 시민단체들이 반발해 주목을 끄는데,개항 백년의 우리나라 제2도시에 걸맞은전통적인 상징물들이 하나하나 자취를 감추어 버린 그간의사정을 감안하면 그들의 주장은 충분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고풍스러운 르네상스식 벽돌건물인 부산역사를 화재로 잃은점이나 적벽돌과 화강암 위로 솟은 뾰족탑이 멋지게 어울린부산세관,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한 벽산상회,영주동 조흥은행과 같이 아름다움과 역사적 가치를 지닌 건물들이 무차별 철거된 기억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그런 것들을 재고할만한여유가 그동안 어디 있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진정한유산을 남겨두지 못한 개발은 사상누각이나 다름없다.황량한마천루만 솟은 도시에서 신세대의 피폐해진 인간성과 몰역사성을 비판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기나 하겠는가. 영도다리가 가진 가치 역시 그런 역사성과 무관하지 않다.1934년 11월에 완공을 본 이 다리는 오전과 오후에 각각 세번씩 육중한 몸을 들어올려 큰 선박들을 지나가게 했다.개통식때는 이 진풍경을 보기 위해 6만명의 구경꾼들이 전국에서몰려들었다고 하는데 그당시 부산 인구가 18만명이었던 점을감안하면 큰 관심이 모아진 셈이다. 또 동란 당시 피란길에오른 사람들은 가족 친지와 이별하며 너나없이 영도다리에서만날 것을 약속했고 타향살이의 막막함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의 투신자살이 이어져 다리 양쪽에는 ‘조금 기다려라’는팻말과 함께 감시 경관이 고정 배치되기도 했다. 동란 직후유행한 여러 편의 유행가 속에서도 영도다리는 자주 등장하는데 ‘굳세어라 금순아’도 그중 하나다.‘일가친척 없는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이네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지만/금순아 보고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영도다리 난간 위에초생달만 외로이 떴다’는 가사가 그 시절의 애환과 시련을잘 전해준다. 자갈치시장과 남항동 태종대에 이르는 해변의 낭만을 구가해온 전후세대에게도 영도다리의 의미는 각별하다.거친 해양성 기질을 다독이고 보듬어내는 하나의 가교로서 영도다리가준 서정적 이미지는 단순한 교량의 가치를 뛰어넘는 것이었다.소주 몇 잔에 거나해진 기분으로이 다리 난간을 따라 걷다 보면 답답하고 울적한 심사가 말끔히 가시곤 했다. 오래된 다리가 주는 위안과 사랑의 감정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애수’‘퐁네프의 연인들’과 같은 영화에서도아름답게 표현되는데 영화도시 부산을 상징하는 구조물로 꾸며서 관광상품으로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아울러 도개교 방식을 복원하여 보행자 전용의 문화 풍물거리를 조성하고 아래로는 해저터널을 뚫어 교통난을 해결하면 후대에 물려줄값진 유산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부산의 문화계 인사와 시민들이 다수 참여한 ‘영도다리를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youngbr)이 펼치는영도다리 보존운동은, 더 이상 부산이 천박한 도시로 대접받지 않기를 바라는 가치 있고 중요한 지역사랑 운동이다.식민지의 수난과 동란의 상처,산업화의 음양을 고스란히 안은 영도다리 관련 자료를 모아 책을 내고 전시회를 열 준비를 하는 이들의 움직임에 전국적인 관심이 모아졌으면 한다. 최영철 시인
  • 세 ‘겹’의 民譚…틀을 깼다

    젊은 소설가 김영하의 장편소설 ‘아랑은 왜’(문학과지성사)는 액자의 네 틀을 깨부수면서 스스로 틀을 잡아가는 예쁜 그림과 같다. 1968년생으로 95년에 등단한 작가는 최근 이삼년간 파격적이고 신선한 작품을 잇달아 발표해 독자들로부터 큰 주목을받았다.많은 평자들은 그를 신세대 작가군의 대표주자로 앞세우곤 한다.작품의 소재나 내용이 전에 없던 새것이고 이색적이라서 파격적이란 뜻은 아니다.대부분의 소설에서 건들수 없는 ‘생’기초로 받들어지는 세계 자체가 구멍이 뚫려있거나 뒤집혀져 있는 것이다.세계와 리얼리티가 괴상한 만큼 이야기,소설의 보통 형식이 온전할 리 없다.5년만에 내놓은 이번 장편이 특히 그러하다. 사람 이름으로 보이는 ‘아랑’에다 의문사가 살짝 붙어 고개를 가웃뚱거리게 하는 이 작품은 사람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이야기 자체가 주제이기도 하다.‘하늘 아래 어디 새로운 이야기가 있겠느냐.있다면 이야기하는 방식이 새로울 뿐이다’라는 작가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아랑은 왜’는 세 ‘개’가 아니라 세 ‘겹’의이야기를,유식한 말로,비(非)유클리드적으로,4차원적으로 합성한 소설이다. 첫째 겹.조선시대 때 부임하는 사또마다 첫날밤을 넘기지못하고 죽어나가는데 배짱좋은 새 사또가 아랑이라는 처녀귀신과 대면해 원통한 사연을 듣고 원한을 풀어준다는 민담. 둘째 겹.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식 비틀기.작가는수백년동안 어린아이도 한마디 설명없이 알아들어온 이 민담을 현재의 대학원생 의식으로 해체·변형한다.이 아랑의 민담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단순해 조선시대 신분사회의 ‘못마땅한’폐해와 모순을 하나도 담지 못한 만큼 사회경제적 진상이 담기도록 변형시켜야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김영하는 이십여년 전부터 많은 국내외 소설가들이 에코를 본따 하듯 이 민담의 근대적인 ‘이본(異本)·비본(秘本)’을 출현시킨다. 세번째 겹.김영하는 아랑 이야기의 액자틀을 에코식 알류미늄제로 교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틀 자체를 떼내버린다.즉극작가가 무대 위에 버젓이 올라 오락가락하는 배우 옆에서“이 사람은 배우에 지나지 않고,이 이야기는 연극에 불과하다”고 틈있을 때마다 관객한테 일러주는 피란델로나 브레히트 식 파격을 취한다.작가는 이렇게 저렇게 민담을 변형시킬수 있을 것이라고 독자에게 까놓고 말할 뿐 아니라, 바로 이런 내용을 소설로 쓰는 현대의 소설가를 같이 소설화해보자고 독자들을 다독거리는 것이다. 나아가 작가는 아랑 민담의 의식화된 변형과 자신의 파격적인 틈입을 같이 섞어버린다.독자들은 이같은 고차원적 합성의 이야기 방식에 머리가 빙빙 돌곤 한다.그러나 독자들은민담의 변형이 역사인식에서 계몽되었다고 생각하는 자신의입맛에 맞다고 여기며 새롭고 파격적인 이야기 방식에 끌려들어간다.김영하의 액자 깨진,예쁘장한 그림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김재영기자 kjykjy@
  • 北 2차 생사확인 의뢰 최고령 백상기씨 부인

    “도무지 믿어지질 않아요.살아있던 사람이 그동안 왜 연락 한번 주질 않았는지…” 9일 북측 생사 확인 의뢰자 가운데 최고령인 백상기씨(82)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백씨의 부인 임귀례씨(79·부천시 원미구 춘의동 141의5호). 감기몸살로 병원에 입원한 손자(22)의 간병을 하던 임씨는남편의 생존소식에 흘러간 세월을 야속해하면서도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아들 백덕현(白德鉉·53·부동산중개업)씨도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은 뒤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남편과 같은 고향인 충남 부여군 임천면에서 17살에 결혼,딸 정자(60),아들 덕현씨 남매를 둔 임씨는 아들이 두살 때인 50년 6·25가 터지자 그해 겨울 피란길에 나서 남편과 헤어지고 말았다. 졸지에 가장이 된 임씨는 농사로는 도저히 생계를 꾸리기힘들자 서울로 이주,마포에서 하숙과 장사 등을 하면서 어린 남매를 키웠다. 고향에서는 상기씨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아 주위에서 재혼하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자식을 키우는 일에전념했다. 남편의 생존 소식만을 애타게 기다리다 결국 68년 사망신고를 했다. 임씨는 “죽은 줄로 알고 제사까지 지냈는데 남편이 정말살아 있냐”고 되묻고는 이내 눈물을 훔쳤다. 한편 아들 덕현씨는 “북쪽에서 보낸 생존자 확인명단에 어머니 이름이 ‘규녀’라고 잘못 적혀 있다”고 말했다. 부천 김학준기자 kimhj@
  • 노근리 진상/ 클린턴 성명 전문

    본인은 미국을 대표해 1950년 7월 말 노근리에서 한국의 민간인들이목숨을 잃은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 지난 1년여 동안 실시한집중적인 조사는 전쟁의 비극과 전쟁이 사람들과 국가에 남긴 상처를뼈저리게 일깨워 주었다. 노근리에서 발생한 사건의 경과를 정확히 밝혀낼 수는 없었으나 한국과 미국은 인원을 확인할 수 없는 무고한 한국 피란민이 그곳에서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렸다.본인은 노근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한국인들에게 위로를 전한다.반세기가 지난 후에도 남아 있는 상실감과 슬픔을 이해하며 동정을 느낀다. 본인은 이들을 비롯해 전쟁 중 살해된 한국의 무고한 민간인들을 위해 미국이 건립하는 추모비가 어느 정도의 위안과 함께 사건의 종식을 가져오기를 진지하게 희망한다.우리가 추진할 추모장학기금은 그들을 기리는 생생한 조의가 될 것이다. 우리는 한국전쟁의 희생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고통이 이 분쟁의유일한 유산은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미국과 한국의 참전용사들은 혹독한 환경에서 자유를 위해 함께 싸워승리했다. 한국에서 진동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양국의 강한 동맹, 그리고 오늘날 양국민의 친밀감은 50년 전 함께 치른 희생을 입증하고 있다.
  • [사설] 노근리 ‘유감’ 이후

    12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이른바 ‘노근리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을 발표했다.한국과 미국 두 나라는 이날 한국전 당시 미군에 의한 양민 학살이라는 이 사건의 실체를 사상 처음으로 인정하는 공동발표문을 내놓았다.이는 지난 1999년 9월 AP통신의 보도이후 15개월간 양국 정부차원에서 공동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내린잠정 결론이다. 우리는 이 사건에 대한 확실한 법적 책임을 규명하지 못한 이같은잠정 결론에 대해 큰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당시 피란길에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의 원혼과 그 가족의 억울함을 달래기에는 미흡하다는 점에서다.이번 조사에서도 발포 명령이 있었는지가 제대로규명되지 않았고,미국측의 보상 또는 배상이라는 실질적 해법을 찾지못했다. 따라서 유족이나 시민단체의 반발이 이어지고 있는 점을 양국,특히 미국측은 직시해야 한다.노근리 사건이 이제는 역사 속으로사라졌다고 마음을 놓을 게 아니라 그 상흔을 치유하려는 후속 조치를 성실히 밟아 나가라는 뜻이다.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추모비 건립이나 노근리 또는 영동 지역민 대상의 장학사업 등 미국의 약속이차질없이 이행돼야 함은 물론이다. 우리는 50년 전에,그것도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의진상을 정확히 규명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인정한다.전쟁이 파괴하는것은 생명과 재산뿐만 아니라 진실 그 자체라는 경구도 있지 않은가. 더욱이 노근리 사건은 가해자와 피해자만 있고 제3자적 증언이 없는형편이다.그런 점에서 미국 국가원수가 직접 유감을 표명한 것은 상당한 성의 표시라고 본다.유족들의 한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차원에서만 아니라 양민 희생에 대한 미국측의 실체 인정 사실과 함께 유족들이 미국 정부를 상대로 보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는 데 유리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진선진미한 결과는 아니지만 노근리 문제가 클린턴행정부 임기내에 일단 정리된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다.50년 전의 불행한 사건이 양국의 오늘과 내일을 훼손해선 안된다는 맥락에서다.지난해 말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 개정 협상이 타결된 바 있다. 노근리 문제에 이어 조만간 미사일 협상 타결이 발표되면 양국간 3대현안이 매듭지어져 부시 차기 행정부와 한국의 새로운 협력관계 모색여건이 완비된다.앞으로도 한·미 양국은 과거사의 앙금을 털어내는추가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노근리 이외에도 한국전 때 일어난 유사한 양민 피해사건이 더 있기에 하는 얘기다.특히 클린턴 대통령의유감 표명은 상황종료 선언이 아니라 앞으로 희생자 가족들을 위무하기 위한 추가적 노력의 출발선이 돼야 할 것이다.
  • 노근리 진상/ 공동발표문 요약

    ◆조사경과. 노근리 사건에 대한 한·미 합동조사는 1999년 9월29일 AP통신의 보도를 바탕으로 양국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됐다.양국 조사반은 현장상황과 증언,문서 등을 충분히 공유했으며,50년이란 세월로 제한적인요소가 많았지만 주변 상황과 관련 사실을 철저하게 조사했다. ◆조사내용. ●사건배경,전투상황 한국전쟁 초기 한국에 투입됐던 미군들은 나이가 어렸고 전투경험이 없었다.그들은 북한군의 무기체계나 전술,북한군의 진격 속도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만한 사전 준비가 부족했다.미제7기병연대 제2대대는 영동에 도착한 직후 1950년 7월25∼26일 야간에 와해된 상태에서 노근리 주변지역으로 무질서하게 후퇴 중이었다. ●피란민 통제 1950년 7월20일 대전 전투 이후 피란민 이동 통제 문제는 한국군과 미군 작전의 주요한 고려 요소였다.1950년 7월 하순쯤한국정부와 미 8군은 긴밀한 협조를 통해 피란민과 한국군 및 미군을보호하고 도로로 이동하는 피란민들이 군작전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피란민 통제를 시작했다. ●임계리·주곡리주민들의 집결 및 이동 일부 한국측 증언자들은 1950년 7월25일 야간에 미군이 산속의 안전한 마을인 임계리에 있던 수미상의 피란민들을 주곡리를 지나 노근리 방향으로 인솔했다고 말했다.7월25일 주곡리에서 1.5㎞ 떨어진 하가리 근처 개활지에서 미군의명령에 따라 노숙할 때 피란민 1∼4명이 사살당하는 것을 목격했다고증언했다.그러나 이에 연루된 미군이 누구였는지, 이런 행위가 당시시행 중이던 피란민 통제정책을 위반한 것에 대한 대응조치였는지는확인할 수 없었다. ●공중 공격 다수의 한국 증언자들은 1950년 7월26일 정오쯤 미군 항공기가 피란민들에게 기총공격 또는 폭격을 했다고 증언했다.미 공군의 당시 기록 검토결과 1950년 7월27일 아침 일찍 노근리 주변의 미제7기병연대 제1대대 지역에 실제로 공중공격이 있었다.따라서 노근리 주변지역에서 1950년 7월26일 공중공격의 발생 가능성도 배제할수는 없다.공식 기록에 의하면 1950년 7월27∼29일 노근리 지역에서미군과 북한군 상호간에 야포 및 박격포 사격이 있었다.일부 한국측증언자들은미 지상군이 당시 보유 중이던 무전기를 이용,피란민에대한 공중공격을 요청했다고 증언했다.그러나 양국 조사반은 당시 미지상군 병력이 휴대한 무전기로는 미 지상군과 공군 전술항공 통제관이 직접 교신해 공중공격을 요청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지상사격 및 사격명령 여부 미 지상군은 노근리 사건 발생 기간 동안 노근리 주변에서 피란민을 향해 사격을 했다.1950년 7월26일과 29일 사이에 일부 미군은 쌍굴 내부를 포함하여 여러 지역에 있는 피란민을 향해 사격했다.미군들은 피란민의 이동을 통제하기 위해,또는피란민이 있던 곳으로부터 소화기 공격을 받았다고 생각해 사격했다. 그 결과 수 미상의 피란민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사격명령 하달 여부에 대한 증거는 증언자들의 증언 불일치로 찾지 못했다. ●사상자 수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을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전쟁중에 발생하였기 때문에 한국측 증언자들과 미 참전장병들의 증언 사이에는 노근리 주변지역에서 발생한 사망자나,부상 또는 실종된 인원에 대해 상당한 차이가있다.한국 피해자들은 확인된 숫자는 아니지만,사망·부상·실종된 인원을 248명이라고 영동군청에 신고했다.미참전장병들은 이보다 적은 인원수라고 증언했다. ◆결론. 절박한 한국전쟁 초기의 수세적인 전투상황하에서 강요에 의해 철수중이던 미군은 1950년 7월 마지막 주 노근리 주변에서 수 미상의 피란민을 살상하거나 부상을 입혔다.피해자들의 오랜 기간의 아픔과 미참전장병의 희생을 고려하면서,인권을 중시하고 민주주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양국 공동 협력의 표본이 될 것으로 믿는다.
  • 클린턴 “노근리사건 유감”

    한국과 미국 양국은 12일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노근리양민학살사건에 관한 공동조사 결과를 발표,“노근리 사건은 철수중이던 미군에의해 피란민 다수가 사살되거나 부상을 입은 사건”이라고 공식 규정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도 성명을 통해 “노근리에서 한국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은 데 대해 깊은 유감(regret)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유감의 뜻을 전했다.미국이 전쟁 중 발생한 미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의 실체를 인정하고 대통령 명의의 유감 성명을 발표한 것은 이번이처음이다. 하지만 양국은 노근리사건의 핵심쟁점인 미군측의 발포명령 여부와의도적인 살상여부,피해규모 등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지 못해 조사결과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특히 미국측은 피해주민들에대해서 어떤 보상 및 배상도 할 수 없다고 나서 해당자들과 관련 시민단체들이 반발하고 있다. 양국은 공동발표문에서 1950년 7월25일 미공군의 공중공격지침을 명기한 ‘로저스 대령 메모’의 핵심내용과 다음날인 26일 노근리지역공중공격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구체적 자료 ‘제5공군 항공작전 일일요약 보고서’ 외에 26일부터 29일 사이 노근리 쌍굴 등지에 있는 피란민에 대한 지상사격이 자행됐다는 내용을 담았다. 희생자 수는 영동군청에 신고된 피해자수 사망 177명,부상 51명,행방불명 20명 등 248명이라는 한국측 입장과,그보다는 적을 것이라는미국측 참전장병의 증언내용을 병기했다. 양국은 미국정부 예산으로영동군 또는 노근리에 100만달러 규모의 추모비를 건립하고,75만달러를 조성해 이르면 올 하반기부터 노근리 유족자녀 대학생과 지방대학생 등 30여명을 선정,장학금을 전달키로 했다. 한편 노근리 대책위는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미국정부가 노근리 사건이 학살에 의한 것임을 완전히 인정하지않았고 피해자 보상부분도 언급이 없었다”며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미국 정부 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 등 다각적인 법적 대응을 추진할것이라고 밝혔다. 워싱턴 최철호 특파원·서울 최광숙기자 bori@
  • [황석영의 맛따라 추억따라](28)제5장 사랑과 맛

    지나간 날의 사랑을 기억해내는 데 있어서도 남자와 여자는 차이가있다고 한다.즉 여자는 연장되지 않은 사랑의 대상에 대하여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현재의 사람에 관한 가까운 기억으로 대치 시킨다는것이며,그도 아니면 할머니나 삼촌이나 사촌 형제나 또는 어린 시절의 소꼽친구를 떠올리듯이 친근하고 일상적이던 추억을 간직한다.그에 비하면 남자들의 흘러간 사랑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이 퍼즐을 맞추어 놓듯이 여자와 가졌던 에로틱한 순간들을 모아서 간직하거나,좋고 나쁜 일에 대해서도 전체의 줄거리는 잊어버리고 어느 시간의 미세한 부분을 곰살스럽게 기억한다는 것이다. 흔히는 남녀가 그 반대일 것이라고 여기다가도 스스로 돌이켜 생각해보면 맞는 구석이 많은 것 같다.잠재된 욕정과 거친 세상으로부터 따로 떼어 놓은 감각적이고 부질없는 순간들이 오히려 남자들의 옛사랑에 대한 추억의 본모습이라니 어쩐지 수컷이 슬프게 여겨진다. 프로이트 선생의 말씀을 들지 않더라도 성욕과 식욕은 어릴 적부터잠재되어 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를 지배한다.남녀가 함께 밥을 먹으면 ‘정든다’는 우리네 속담은 일리가 있는 말이다.‘영혼의 집’으로 유명한 칠레의 작가 이자벨 아옌데는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와같이 먹었던 요리에 대한 얘기로 책 한 권을 쓸 정도였다. 어느 먼 산골이나 바닷가 어촌에서 두 사람이 먹던 음식의 맛은 지금아무데서나 다시 찾아 먹을 수 있는 흔한 먹거리라 할지라도 다시는되살려낼 수가 없다.또한 그네가 가끔씩 콧노래를 부르며 아침을 준비하던 달그락 거리는 그릇 부딪히는 소리와 식탁 맞은편에서 따뜻한눈빛으로 이편을 건너다 보던 날의 맛을 어디서 되살려 낼 것인가.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물처럼 지나간 시간은 자취도 없지만 그감각만은 생생하다. 전쟁 때,우리 식구는 지금은 경기도 광명이라고 부르는 괭메이에 피란을 갔었는데 농가의 외양간을 빌려서 여름 한 철을 보냈다.벽이 삼면만 있고 앞은 툭 터진 대신에 통나무 속을 파낸 여물 구유가 버티고 있었다.소는 전쟁 통이라 없어지고 더러운 건초더미만 쌓였는데쇠똥이며 짚덤불을 깨끗이 치우고나서 흙바닥 위에멍석을 깔고 기둥네 귀퉁이에 모기장을 쳐서 잠자리를 만들었다. 도회지 사람들의 피란살이라는 게 어디나 같아서 쓸만한 물건들을 식량 가진 촌 사람들에게 야금야금 내주며 버티기 마련이었다.재봉틀이없어지고 옷가지와 귀금속이 없어지고 자전거가 사라지는 식이었다. 나는 근처 개천에 가서 송사리도 잡고 개구리도 잡으면서 동네 아이들과 어울렸는데 지금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내 또래의 계집아이가 생각난다.당시의 시골 아이들은 여름철이면 그냥 고무줄 넣은 검은 무명 팬티 하나로 벌거숭이가 되어 뛰어 다녔는데 그래도 나는 어머니때문에 위에다 런닝은 걸쳐야 했다.우리 식구가 빌어 살던 집 건너편에 그 아이가 살았다.그 아이네 집에선 참외밭을 가지고 있었는데 집앞에 멍석을 펴놓고 함지에 가득 참외를 갖다 놓고 팔았다. 함지에는 참외나 찐옥수수가 있기 마련이고 아이의 할머니가 나와서앉아 있곤 했다.어느 저녁녘에 어머니는 나와 누나들을 데리고가서참외를 사주었고 계집아이를 알게 되었다.아이는 시골 아이 같지않게누나들처럼 간따후꾸(원피스)를 입고 있었다.그리고 작은 코고무신을신었던 것도 생각난다.할머니와 어머니가 주고 받던 먼 고장에 대한이야기들은 재미있고 신기했으며 모깃불이 타는 냄새와 별이 우수수쏟아질 것같던 밤하늘은 아주 가깝게 머리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멍석 위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계집아이와 북두칠성 찾기 내기도 하고 별똥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동네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데 그애가 나를 불렀다.그애는 한 손을 치마자락 안에 감추고 있다가 가까이 간 내게 내밀었다.그건 방금 솥에서 긁어낸 누룽지였다.아주 딱딱하게 탄 것이 아니라 거죽의 밥알과 덜 탄 누룽지를 함께 긁어내어 동그랗게 뭉친 것이다.사실은 그런 상태가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누룽지다.한입 베어물면 부드러운 밥알이 씹히면서도 속에서 바삭바삭 누른 쌀알이 씹힌다.아이가 작은 소리로 말한다.수남아,너만 먹어! 나는 누룽지를받아 먹으면서 어쩐지 좀 부끄러웠다.그리고 이상하게도 죄를 지은듯한 은밀한 느낌이 들었다. 하늘에 고추 잠자리가 가득히 날아다니던 날이었으니 팔월말 쯤이었을 것이다. 우리 식구는 그 무렵에 괭메이를 떠나 영등포로 돌아갔다.한낮이었는데 건너편 사립문 앞에서 그애가 나를 불렀다.마당으로 들어가니 집안에는 모두 들에 나갔는지 아무도 없었다.그애가 부엌에 들어가더니큰 쇠솥 안에서 찐 단호박 몇 토막을 들고 나왔다.우리는 마루에 앉아서 함께 먹었다.호박은 식었지만 말랑하고 단맛이 그만이었다.마당에는 장닭과 암탉들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벌레 사냥을 하던 중이었다.그애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면서 누워서 할머니처럼 배를 쓸어 달라고 했다.나는 참새의 가슴처럼 따뜻하고 쉴새없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그애의 배에 손을 얹었다.그리고 몇번인가 아래 위로 쓸어내리는중에 갑자기 멈추고는 화가 난 것처럼 얼른 일어나서 달아나버렸다. 고추가 갑자기 뜨겁고 아픈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Y를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집을 나가서 남도를 돌아다니다가 왔을 무렵이니까 자신이 이미 세상을 다 겪은 어른이라고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흑인 올페’라는 영화를 둘이서 보았던 생각이 난다.대학에 갔을때였는지 군대에 나갈 준비를 하던 해였는지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서해안의 어느 섬에 갔다가 태풍 때문에 며칠 동안이나 배가 끊겨서갇혀 있었다.몇가지 특별한 기억이 있다.민박을 하던 집의 뒷간은 마당 뒷편에 텃밭을 건너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는데 그냥 항아리를 묻고 소나무 가지로 나지막한 울타리를 세워 놓은 게 전부였다.Y가 밤에 뒷간엘 가려면 무섭다고 꼭 나를 데려가서 울 밖에 파수를 세워놓곤 했다.그러면 나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확실하게 보초를 선다는보증으로 노래를 불러 주어야 했다.날 저무른 하늘에 별이 삼형제 반짝반짝 정답게 지내이더니… 같은 노래였을 것이다.그건 누나가 변소에 간 나를 지키러 와서 저도 무서우니까 부르던 노래들이다.하여튼그 집에서 배가 올 때까지 몇날 몇밤을 지내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에 그댁 아주머니가 맛이나 보라고 굿떡을 했다고 보시기를 우리 문간방으로 건네 주었다.이게 웬 떡! 호박 시루떡이다. 늙은 호박 속을 길게 깎아서 말려 두었다가 쌀가루 한켜,검은 콩 한켜, 호박 한 켜를 차례로 깔아 시루에 쪄낸 것이다.어느 때에는 대추나 밤도 박아 넣는다. 호박의 단맛은 은근하고 너무 달지는 않아서 구수한 단맛이라고나 할까.우리는 뜨거운 떡을 호호 불면서 가끔씩 손가락에 달라붙는 찐득한 호박을 빨면서 떡을 먹었다.그래서 괭메이의 소녀를 기억해내게된 것일까,아니면 괭메이의 단호박을 떠올리다 그 섬에서의 민박을생각하게 된 것이었을까. 황석영
  • 사실상 결렬된 韓·美협상 2건

    ◆SOFA 개정. “높은 벽을 확인했다”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협상 우리측 참가자의 푸념이다. 양측은 빌 클린턴 미 대통령 임기 내 협상을 끝낸다는 심리적 마지노선을 긋고 지난 1일부터 회담을 끌어왔으나 결국 ‘작품’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협상 마지막날인 7일에는 미국측의 완강한 태도에 부닥쳐 회담이 중단되는 심각한 교착상태에 빠졌다. 워낙 팽팽히 서로의 입장이 맞섰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년 1월 퇴장을 앞두고 있는 미 협상단과 본국 정부의 약화된 입지도 한몫 한것으로 풀이된다. 송민순(宋旻淳) 외교통상부 북미국장과 프레데릭 스미스 미 국방부아태담당 부차관보를 수석대표로 하는 양측 대표단은 이날 점심만 같이 했을 뿐 회담은 갖지 못했다.형사재판관할권,환경,노무,검역,비세출자금기관 등 핵심 쟁점에서 입장차를 좁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측은 현재 형사재판관할권 분야에서 미군의 법적 권리 보장 방안과 재판권 행사 대상 범죄 조문화를,검역에서는 미군용 농산물에 대한 자체 검역을 요구하고 있다.환경 분야에선 ‘미·일공동선언문’과 같은 선언문형식을 고집하고 있다. 협상 분위기는 “협상이 재개될지도 불투명한 상황”이라는 외교부당국자의 말처럼 매우 어둡다. “양국이 협상타결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이제 협상대표 선에서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끝났다.우리측으로서는 미측 입장을 받아들이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당국자의 말로 미뤄,미국의 전향적인 입장 변화없이는 교착상태의 협상을 풀어나가는 실마리를 찾기는 힘들전망이다. 양측은 7일 심야까지 접촉,타결 가능성을 모색했으며 8일 협상 결과와 향후 일정 등을 최종 발표할 예정이지만 미국의 ‘정치적 결단’없이는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설사 클린턴 퇴임 전 한번 더 지금의 양측 대표단이 협상 테이블에서 마주하더라도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홍원상기자 wshong@. ◆노근리사건. 7일 노근리 사건의 성격과 책임 규명을 위한 한국과 미국의 막바지조율에서 양측 조사단의 최대 쟁점은 사격의 고의성 여부였다. 미측은 이날 전쟁 초기 북한이피란민 대열에 게릴라 투입 전술을사용하는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발포명령을 내렸다는 주장을 폈다.당초 미군의 발포명령자체를 부인하던 데서 다소 진전된 모습이다.그러나 피란민 강제인솔·피격·살상,전투기 폭격·기관총 사격,쌍굴·수로에서의 사흘간 무차별 사격은 완강히 부인했다. 50년전 사건의 고의성여부를 증명하는 작업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 문제에 대한 이견이 해소되지 않는 한 진상규명은 어려워진다. 선(先)진상규명,후(後)명예회복·사후보상을 요구하고 있는 우리측의처리방향과 일정에 차질이 예상된다.미국법에 의한 학살자처벌도 기대하기 어렵다.박찬운 변호사는 “책임자 처벌,피해보상은 미국정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거하거나 한·미가 특별법을 제정하는 방법으로만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측은 이날 일정 부분 진전을 봤다고 했으나 사격의 고의성 여부와 같은 핵심쟁점까지 합의한 것은 아니어서 추후 협상에서 난항이예상된다. 노주석기자 joo@
  • 美, 노근리 학살 공식 인정

    [워싱턴 연합] 미국 국방부는 노근리 학살사건에 대한 1년여의 조사에서 미군이 비무장 피란민들을 위협,사격을 가했다고 결론을 내렸으나 군이 민간인에게 사격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는지에 대해선 확실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워싱턴 포스트(WP)가 6일 보도했다.참전군인 100여 명의 인터뷰와 100만 페이지 이상의 서류를 재검토해 작성된 국방부 보고서 초안은 노근리 학살사건에 미군이 관련됐음을 처음으로 공식 인정하는 것이다.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은 AP 통신이 지난해 9월 노근리 학살사건을처음 보도한 뒤 이에 대한 조사를 명령했다.보고서 초안은 군 조사관들이 미군 제7기갑연대가 1950년 7월 26일 퇴각과정에서 북한군 침투를 우려해 피난민에게 발포했으나 이 과정에서 몇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는지는 정확히 밝혀낼 수 없었다고 밝혔다.
  • [외언내언] 영도다리

    40대 중반이나 후반쯤 된 사람들에게도 현인(玄仁)의 ‘굳세어라 금순아’는 명곡(名曲)으로 가슴에 남아있다.한국전쟁의 포향(砲響)이귓전에 남아있던 1953년 나온 노래다.〈금순아 보고 싶구나/고향 꿈도 그리워진다/영도다리 난간 위엔/초승달만 외로이 떴네〉 코흘리개시절 아버지, 삼촌의 흥얼거림을 물려받아 곧잘 부르기도 하고 대폿집에서 흘러나오는 땟국 절은 한복차림 ‘이모’의 쉰 목소리에 감동되기도 했다.노랫말 곳곳에 피란민의 애틋함이 담겨서일까.북에 가족을 두고온 세탁소집 아저씨는 술에 취하면 ‘이별의 부산정거장’만큼이나 가슴 뭉클하게 ‘굳세어라 금순아’를 불러제꼈다.‘바람 찬흥남 부두’에서 헤어진 금순이가 사랑하는 여인을 뜻한다는 사실은세월이 한참 더 흐른 뒤 알았다. 1·4후퇴 후 부산은 몰려드는 피란민으로 넘쳐났다.부산역 앞과 부두,남포동,광복동,국제시장은 날품을 팔려는 사람들로 득실거렸다.남녀노소가 없었다.기약없던 피란시절 영도다리는 용두산과 더불어 때론 위안을,때론 절망을 안겨준 만남과 흩어짐의장소였다.다리 주변은 피란민촌으로 변했다.“헤어지면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약속한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점쟁이들도 이곳으로 몰려 들었다.얼마나많은 사람들이 헤어진 가족, 전선(戰線)의 아들,형제의 생사를 묻기위해 이곳을 찾았을까.전쟁의 포연 속에도 다리를 거닐며 사랑을 속삭였던 젊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영도다리가 추억의 장소만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닌 듯싶다.한 실향민은 얼마전 “두고온 가족이 생각날 때면 영도다리와 용두산 공원을찾았다”고 말했다. 실향민에겐 지금까지 이산의 아픔이 살아 숨쉬는다리다. 영도다리가 머지 않아 헐린다고 한다.다음달 옛 부산시청 자리에 제2롯데월드가 착공되면 재건축에 들어간다는 것이다.왕복 4차선인 다리를 6차선으로 늘리기 위해서란다.이 소식에 서운함을 느끼는 이는부산피란 시절을 잊지 못하는 실향민 1세대들만이 아닐듯 싶다.일제때인 1934년 섬 영도와 육지를 연결하기 위해 건설된 이 다리는 하루에 두번 고개를 들어 명성을 더 얻었다.당시 신기함이란 이루 말할수 없었던모양이다.그러다 폭주하는 교통량을 견디지 못해 1966년멈췄다.시인 김광균(金光均)도 ‘영도다리’의 추억을 노래했었다.〈영도다리 난간 이슬에 젖도록/혼자서서 중얼거리니/먼-훗날 누가 날이곳에서 만났다 할까〉 영도다리는 이제 추억 속으로 사라진다.하지만 일제와 광복,한국전쟁의 아픔을 온 몸으로 받아온 다리의 이력을 담은 기념비라도 근처에 하나 남기면 어떨까.전쟁가요 ‘굳세어라 금순아’에 등장했던 다리로만 기억하기엔 너무 아쉽기 때문이다. 최태환 논설위원 yunjae@
  • ‘노근리 발포’ 상부명령 있었다

    무전 및 통신병으로 한국전에 참여했던 전직 미군 2명이 한국전 초기 미군은 상급 지휘본부로부터 노근리에서 피란민들에게 발포하라는명령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한국전 당시 미군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제2대대 대대본부에 배치됐던 로런스 레빈(72)과 제임스 크럼(72)의 이같은 증언은 상급부대 수준에서 민간인에 대한 발포 명령이 하달됐음을 최초로 입증하는것으로 북한군 침투에 대한 우려로 피란민들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받았다는 일부 참전용사들의 기억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들과 한국인 생존자들에 따르면 제7기병연대제2대대는 충북 영동군 노근리 철교 아래에서 수백명의 양민을 학살했으며 미 육군과 한국 정부는 이같은 양민학살 주장에 대한 1년간의진상조사 결과를 다음달 발표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상급부대로부터 민간인에 대한 발포 명령이 있었다는 크럼과 레빈의증언에 대해 육군은 그들이 어떤 증언을 했는지 알지 못하며 현재 진행중인 조사에 대해서는 어떤 논평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육군진상조사단의 최종보고서와 관련,하버드대학의 역사학자어니스트메이 교수는 “공정하고 정직한 보고서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면서도 미국 정부가 한국인 생존자들에게 보상을 할 가능성에대해서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 AP 연합
  • 국감 이색아이디어 만발

    국정감사 초반 의원들의 이색제안이 잇따랐다.반짝 아이디어에서부터 남북문제와 정책분야에서의 ‘건의성 아이디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반짝 아이디어 법사위의 민주당 천정배(千正培)의원은 광주 고·지법 국감에서 재판정의 자리를 ‘원탁회의’로 배치하고,판사들의 권위주의적인 검은색 법복을 부드러운 느낌의 옷으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천의원은 이밖에 ‘변호인과 피고인의 노트북 사용’ 등의 의견을내놓았다. 민주당 김옥두(金玉斗)의원은 행자위 경기도청 국감에서 러브호텔은업주들의 자진 폐쇄를 유도하고,매물은 자방자치단체가 매입, ‘도서관’‘병원’‘임대주택’ 등으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정무위 소속의 민주당 박병석(朴炳錫)의원은 고충처리위 국감에서 고충처리위 민원전화를 ‘고충처리’의 음을 따 ‘9772’로 하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남북 관련 문화관광위 민주당 심재권(沈載權)의원은 국립중앙박물관 국감에서 “진홍섭 전 개성박물관장의 방북을 주선하라”고 주문했다.심의원은 “진 전관장은 6·25때피란오면서 개성 인근에 직원4명과 함께 고려청자 등 문화재 100여점을 묻어두고 왔는데 현재 생존자는 진 전관장 1명뿐”이라며 이같이 제안했다. 국방위의 민주당 장영달(張永達)의원은 6·15 공동선언 후속조치의일환으로 연평해전을 야기했던 서해 NLL 일대를 ‘비무장 공동관리평화수역’으로 설정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정책 분야 ‘아이디어맨’인 보건복지위의 한나라당 김홍신(金洪信)의원은 보건복지부 국감에서 의약분업에 따른 야간진료 공백을 막기위해 ‘전국 동네의원의 당번제 운영’을 제안했다. 문화관광위 소속 한나라당 남경필(南景弼)의원은 문화관광부 국감에서 A4 용지 86쪽에 이르는 방대한 질의자료를 냈다.그는 한국 기부문화 활성화를 위해 ‘기부금품모집 규제법’ 개정방안을 제시했다. 재경위 소속 민주당 김근태(金槿泰)의원은 세무공무원의 사기앙양을위해 ‘세무공무원의 성과급제’를,교육위 소속 임종석(任鍾晳)의원은 ‘학교 주변 500m내 교육우선지역 설정’을 제안했다. 강동형기자 yunbin@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