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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계사년 정월 스무나흗날/심재억 문화부 차장

    이수광의 ‘지봉유설’을 읽자. 임진왜란 때 서울에 갓 입성한 왜군은 어찌된 일인지 약탈은 하면서도 살육만은 피했다. 남부여대 피란길에 올랐던 백성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주뼛거리며 다시 몰려들면서 도성은 이내 사람으로 북적였다. 그러나 그것은 기만책이었다. 조명(朝明)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고 일로 한양으로 짓쳐 내려오자 왜군은 마각을 드러냈다. 한 날, 왜군은 느닷없이 성안의 백성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아예 조선 사람의 씨를 말리겠다는 듯 집마다 불을 지르고, 축생까지도 목숨이 붙은 것은 남김없이 무찔렀다. 이 때 도성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100명 중 1명도 되지 않았고, 시체가 곳곳에 쌓여 산을 이뤘다. 이 후 해마다 그 날이 되면 슬프고 음산한 기운이 도성에 가득찼으니, 모두 속절없이 죽어간 조선 백성의 원통한 기운이 서린 탓이었다. 그 날이 바로 임진년 이듬해인 계사년 정월 스무나흗날이었다. 이웃을 두고 호놈 해야 하는 심사가 편치 않지만, 그 날 이전에도, 이후에도 우리가 그들을 ‘왜놈’이라 부를 이유는 너무나 많다.‘때리는 놈보다 맞는 놈 죄가 더 크다.’는 조선 속담을 그들이 알까 모르겠다. 심재억 문화부 차장 jeshim@seoul.co.kr
  • 서울에도 집성촌 10여곳 있다

    서울에도 집성촌 10여곳 있다

    특별시에 집성촌?서울 양원리등 10여곳 수십 가구씩 오순도순 유영규(42·대구시 남구 대명동)씨는 어려서 자신보다 나이는 적지만 항렬이 높아 아저씨뻘 되는 아이에게 ‘꿀밤’을 먹였다가 집안 어른들로부터 꾸지람을 들은 적이 있다. 이어 눈을 피해 이 아이를 또 혼냈다가 들통이 나는 바람에 더 큰 야단을 맞기도 했다. 유씨로서는 어린 마음에 억울한 일이 줄을 이었다. 시골지역의 집성촌(集姓村)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 아직도 ‘아랫집은 사촌 형님, 윗집은 숙부, 옆집은 조카, 앞집은 당숙’ 하는 식으로 친인척끼리 옹기종기 모여 살아가는 마을이 10여곳 있다는 것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러한 집성촌들은 그린벨트로 묶이고, 세태의 변화에 밀려 점차 사라지고 있다. 서울 중랑구 망우1동 259 일대에는 서울이라고는 얼른 떠올려지지 않는 ‘양원리’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에는 동래 정씨들이 38가구나 모여 산다. ●조선 태조가 하사한 땅 이 마을 정수선(71·새마을금고 운영)씨는 “조상님들이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가 서울을 도읍으로 정한 1394년보다도 3년 전에 이곳에 터를 잡아 살기 시작했으니 벌써 610년을 넘겼다.”고 말했다. 정씨 말대로 이성계가 고려 말 역성혁명에 성공하자마자 일등공신인 정구(鄭)에게 이 일대의 토지를 하사한 인연으로 지금까지 24대째를 내려오고 있다. 마을 이름도 태조와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다. 태조가 자신이 묻힐 무덤자리를 보러 가는 길에 고개를 넘으면서 모든 근심을 잊었다고 해서 망우(忘憂), 고갯마루에서 쉬다가 마신 우물물의 맛이 너무 좋았다고 해 양원리(養源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아무래도 개발제한이 풀리면 집성촌 유지가 어렵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마을사람들이 내놓는 대답은 ‘천만에’였다. ●사라져가는 집성촌 정씨는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이는 바람에 건물을 못 짓고, 땅값이 주변의 10분의1밖에 안되는 등 불이익(?)에 따른 불만도 불만이지만, 무엇보다 건물을 짓지 못하는 불편 때문에 후손들이 고향을 떠나고 있다.”고 허탈해했다. 개발이 늦어져 오래 모여 살아오기도 했지만, 똑같은 이유로 세월에 떠밀려 사라질 위기에 놓인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수선씨는 또한 “집을 팔고 이사하는 바람에 다른 성씨가 10가구 들어와 집성촌이라는 명맥은 이어가지만 이미 순수혈통 마을에서는 약간 벗어난 게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는 이어 “한 핏줄끼리 옹기종기 모여 산다는 자부심도 있긴 하지만….”이라며 씁쓸해했다. 정씨는 슬하에 7남매를 뒀다. 막내아들 민섭(28)씨를 빼면 모두 서울에 살고 있지만 집성촌에서 나와 사실상 ‘타향 살이’를 하고 있다. 민섭씨 또한 아버지의 마을금고 사업을 도와주려고 머무는 것이니 ‘동거’는 그리 길지 않을 것으로 여기는 눈치다. ●“죄다 믿음이 간다오” 정씨의 집 앞에는 7촌 조카, 그리고 바로 옆에는 6촌 동생이 살고 있어 “이곳이 과연 집성촌이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망우동이 서울로 편입되기 전인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九里面)일때는 집성촌이 10개나 있었다. 현재 구리시로 한 단계 뛰어오른 구리면은 망우·상봉·중화·묵·신내·교문·토평·갈매·수택리 등 9개 마을로 이뤄졌는데, 바꿔 말하면 한 마을에 두 가지 성씨의 집성촌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 마을에서 북부간선도로를 가로질러 자동차로 10분쯤 가면 구릉산 아래로 신내1동 산6 일대에 경주 임(林)씨 30여가구가 모여 사는 능말(큰 능이 있다고 해서 붙은 능마을의 준말)이 나타난다. 임씨 집성촌이 처음으로 들어선 것은 선조 36년인 1603년쯤이라는 기록이 전해진다.400년 남짓한 전통으로 정씨네 집안에는 ‘한끗발’ 뒤지지만 결코 녹록하지 않은 역사를 갖고 있다. 대부분 직장인들인 양원 마을과는 달리 전체의 절반인 15가구가 아직도 이 지역의 특산물인 ‘먹골배’를 생산하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종친회 총무 임현만(59)씨는 “하루 온종일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서 “조상들의 묘를 지키며 오랫동안 ‘모여 사는 정’에 익숙해져 좀처럼 외지로 나가기가 힘들었다.”고 귀띔했다. 함께 사는 임씨의 아들 준성(29)씨도 “아무래도 집안 어르신들과 가까이 지내다 보니 예의범절이 절로 몸에 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예의 범절 저절로 배워요” 강동구 강일동 ‘벌말’ 청송 심(沈)씨네는 50여가구가 모여 사는 서울에서 가장 큰 집성촌이다.410여년 전인 조선시대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중에 충청도 예산에서 피란온 선조들의 후손이다. 벌말이란 벌판에 마을이 섰다고 할 정도로 너른 땅을 말한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어 지명에는 평촌(坪村)이 있다. 벌말에서는 나이는 어려도 항렬이 높은 이에게 존칭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함부로 호칭하다가 혼이 나는 일도 적지 않다. 서로 새해인사를 하는 경우 나이는 자녀뻘이지만 항렬이 높은 이에게 머리를 숙여야 한다. 강동구의회 의장을 지낸 25대손 심재풍(69)씨는 “10대 할아버지께서 정착한 이래, 마을 규범 때문에 가끔 다투기도 하지만 성씨가 같아서인지 금방 화목을 되찾는다.”며 마을 자랑을 빼놓지 않았다. 그는 이어 “최근 다른 성씨들이 마을로 들어오고 10촌 이상 촌수가 벌어지면서, 명절이면 친척들이 모두 모여 집집이 옮겨다니며 차례를 지내는 데만 하루 종일 걸리는 옛 풍습이 사라져 아쉽다.”고 말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무슨 사연·어떤 자랑거리 있나 서울 시내엔 10여가구가 모여 작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 모두 6곳이 있다. 도봉구 방학4동 ‘원당마을’에는 파평 윤(尹)씨, 강서구 외발산동 ‘광명마을’에는 경주 최(崔)씨, 강동구 강일동 ‘가래여울’(한강으로 흘러드는 두 여울이 갈라져 흐르는 곳이란 뜻)에는 남평 문(文)씨 집안이 있다. 또 창녕 조(曺)씨들이 대대로 일군 서초구 염곡동 ‘염통골’(마을 생김새가 염통 모양)과 경주 김씨의 내곡동 ‘능안마을’에다 아예 성씨를 따 ‘홍씨 마을’이라고 부르는 남양 홍씨 집성촌이 있다. 집성촌 속에는 깊은 역사만큼이나 자랑거리도 수두룩하다. 먼저 도봉구 방학동 원당마을에 있는 서울시의 보물덩어리가 된 830살짜리 은행나무가 손꼽힌다. 서울시 지정 보호수 1호다. 높이가 24m, 둘레는 9.6m나 된다. 관악구 신림동 산112의1에 있는 굴참나무(천연기념물 271호·수령 1010년)와 종로구 삼청동 106 총리공관 등나무(천연기념물 254호·수령 920년)에 이어 ‘수령’이 서울에서 세 번째다. 원당마을 은행나무는 옛날부터 스스로 몸에 불을 질러 나라의 큰 변고를 알리는 등 신통을 지녔다고 전해지고 있다. 예컨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직전 이 나무에 까닭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나 소방차가 출동, 진화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해마다 2월 중순이면 이곳에 30여명씩 모여 떡과 술을 놓고 나라의 안녕을 비는 ‘행목대신제’(杏木大神祭)를 올리고 있다. 은행나무 옆에는 조선시대 비운의 임금인 연산군(1476∼1506년)의 묘가 있다. 이 무덤이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의 유배지였던 강화도에서 옮겨오면서 파평 윤씨들이 뒤따라와 정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록으로 찾아볼 수 없어 언뜻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원당마을 윤주현(71)씨는 “정치적으로 억울하게 죽은 연산군의 경우 3족이 멸문지화를 당했고,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비(尹妃)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 외척들이 돌봐야 한다고 여겨 이 곳으로 온 게 아니냐는 추측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 곳엔 또 마을과 역사를 함께 해온 ‘원당천’이라는 우물이 있다. 태조가 물맛을 본 뒤 칭찬했다는 망우동 양원마을 우물과 비슷한 사례다. 피란민이 숨어들었을 정도로 외진 곳이어서 자연부락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청송 심씨들의 마을에도 흥미 넘치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심재익(67)씨는 “옛날 한 백성이 산에서 도적을 만났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화를 면했다.”고 운을 뗐다. 그는 이어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로 앞 바위의 모양이 호랑이와 똑같이 생겨 그 사건 이후에 그 바위가 마을을 지켜주는 산신령이라고 믿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해마다 음력 7월 초하루에서 사흘 사이에 길일(吉日)을 가려 ‘큰말(벌말의 딴 이름으로, 큰 마을이란 뜻) 산신제’를 지낸다. 앞산 꼭대기에 올라 집집마다 추렴한 쌀로 떡과 술을 빚고 소머리를 제단에 올린다. 서울시내에서 행하는 유일한 산신제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9)근대 문화유산의 보고 군산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9)근대 문화유산의 보고 군산

    군산은 식민 수탈의 가장 전형적인 공간이었다. 식민공간답게 전통과 근대가 공생하고, 강요된 근대의 기형적 뒤틀림이 강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일제시대 군산은 오쿠라, 이와사키 등 수많은 일본 토지재벌들이 지배했다. 그들은 고리대금업도 겸했으니,‘허리에 권총 차고, 손에 망원경 든’ 무장상인, 바로 약탈자였다.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시가지) 하나가 올라 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한국문학사의 금자탑인 채만식의 탁류는 이렇게 시작된다. 채만식 문학관은 소설 대목처럼 금강이 끝나면서 황해와 만나는 그 곳에 서있다. 문학관에서 조금만 서쪽으로 내려가면 ‘째보선창’이 나온다. 소설 속의 정주사는 서천땅을 처분한 뒤 똑딱선을 타고 째보선창으로 건너온다. 하지만 쌀 현물을 가지고 투기하는 미두장에서 돈을 다 날리고는 선창에서 자살을 기도한다. ●‘탁류’ 속 정주사 자살시도했던 ‘째보선창’ ‘째보선창’은 지정학적으로 ‘옆으로 째졌다.’고 해서 붙은 이름. 실제로 백마강과 금강이 합수하면서 바다로 흘러드는 길목에 자리잡아 Y자로 째진 곳이다. 구한말까지도 삼남의 농수산물이 이곳에 집산했다가 서울로 보내지던 중요한 선창이었다. 채만식 시절까지만 해도 제 몫을 다하던 선창이 금강하구언이 축조되면서 쌓일 대로 쌓인 퇴적물 때문에 항구 기능을 거의 상실해 문화원이 세운 입간판만이 그 역사를 말해줄 뿐이다. “탁류는 당연히 픽션이지만 역사적 전형성을 고스란히 획득하고 있지요. 두벰이산 정상에 있는 정주사 집터, 한창봉 쌀집, 콩나물고개 같은 소설 속의 역사현장을 짚어가면 식민지시대 군산의 풍경이 오롯이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군산 지킴이’ 이복웅 군산문화원장의 증언이다. 세종실록지리지 만경현조에 ‘군산은 병선을 정박시킨 곳으로, 섬이 둘 있는데 군산도와 망입도가 있다.’고 했다. 군산진은 본디 군산도(현재의 선유도)에 있었다. 그 후 군산진을 오늘의 군산시 영화동 해변의 진포로 옮기면서 이름도 따라와 군산으로 확정됐으며, 과거의 군산진은 고군산이 되었다. 그러니 고군산열도는 본디 군산의 원적지인 셈이다. 1899년 개항과 더불어 전혀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기 시작한다. 당시의 군산은 산으로 둘러싸이고, 갈대밭이 무성한 비좁은 곳이었다. 일제는 이 갈대밭을 매립하고, 시가지를 일본식 마치(町)체계로 바꾸었다. 본정통, 명치정, 강호정 따위가 그것이다. 메이지(明治), 에도(江湖) 같은 이름에서 식민지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일제는 군산을 강제로 개항시킨 뒤 대규모 항만시설을 서둘러 건설한다. 당시의 항만 흔적은 ‘뜬다리’같은 유적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수탈의 신작로’ 전주~군산가도 일제는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만경평야의 곡식을 군산항에 모았다가 일본으로 실어냈다. 전주~군산을 잇는 ‘전군가도’가 벚꽃으로 유명한 이유는 이런 역사적 연원을 지닌다. 일직선으로 뻗은 신작로는 수탈을 위한 토목공사의 증거였다. 오죽하면 당대 민중들이 ‘아깨나 낳는 년 갈보짓하고, 힘깨나 쓰는 놈은 목도질한다.’며 식민의 애환을 읊조렸을까. 일본 영사관이 설치되고 일본 거류민단이 세력을 확장해 갔다. 수탈은 금강을 거슬러서 상류인 부여 위쪽의 부강까지 미쳤다. 추수철이면 충청도와 전라도의 이 황금 곡창지대에서 개땅쇠처럼 일만 했던 소작인들은 피땀흘려 거둔 알곡을 바리바리 싣고 지주집으로 향했다. 소작 떼일 것을 걱정한 작인들은 굶주리면서도 정성껏 엿을 고와 받쳐야 했으니, 참으로 ‘엿 같은 세상’ 아니었을 것인가. 조선인 지주는 일본인 지주에 비하면 수나 양 모두 ‘별것’ 아니었다. 전국에서 전북처럼 일본인 농장이 많은 곳은 없었다. 전북은 일본의 기업형 농장이 가장 많이 진출한 일본 식량조달의 거점이었다. 금강, 동진강, 만경강 3대 강 유역에 펼쳐진 30만 정보의 대평원, 그 곡창의 문호인 군산 일대를 오쿠라, 이와사키 등 수많은 토지재벌들이 지배했다. 그들은 땅만 소유한 것이 아니라 고리대금업도 겸했으니,‘허리에 권총 차고, 손에 망원경 든’ 무장상인, 바로 약탈자였다. 폭력적 토지겸병 과정을 보노라면 사무라이 낭인집단의 건들거리는 풍경이 되살아난다. 가령,1904년에 이곳에 들어온 가와사키는 옥구군 서수면 일대를 자신의 향리인 일본 니가타현 모형으로 일본화할 계획을 가지고 온 골수 국수주의자였다. 일본 고향의 지주들을 서수면에 불러들여 농장설치를 권유했는가 하면 서수에는 신사까지 세웠다. 그리하여 가와사키농장이 모체가 된 이엽사농장이 탄생하는데, 이엽사는 전주의 삼례, 익산의 황등, 옥구의 서수면 일대에 논 1000정보, 밭 200정보, 소작인 1700여명을 거느린 대농장주로 군림하게 된다. 이들이 농장을 순찰할 때는 말을 타고, 승마복에 권총까지 찬 채 말채찍을 휘두르며 다녔다고 한다. 봉건시대의 영주와 다를 바 없었다. 그리하여 군산과 옥구·김제 등의 농민들은 대부분 소작인으로 전락했으며, 일본인 농장에 가족들까지 예속되어 노예 같은 삶을 이어나갔다. 보릿고개 때는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으며,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해 북간도 허허벌판으로 야반도주하는 사례도 속출했다. 아니면 소작쟁의를 벌여 죽기살기로 저항하는 수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34년 통계를 기준으로 무려 200만섬 이상의 쌀이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반출됐다.1930년대 일본 농업공황을 계기로 조선은 완전한 일본의 식량 공급기지로 전락했다. 황금쌀은 일본으로 나가고 조선사람들은 만주에서 들여온 콩 같은 잡곡, 일제 말기에는 그것도 모자라 기름 짜고 버린 깻묵으로 연명했다. 일본인들이 끊임없이 수탈을 감행하는 동안 ‘멍청한’ 조선인 지주들은 미두장에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공인 도박장 격인 미두장에서 실의에 빠진 조선인 지주들과 자본가들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유산과 토지를 탕진했다. 탁류의 정주사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한 쪽에서는 거대한 기선에 수천 섬의 쌀이 실려나가는 동안 다른 한 쪽에서는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이 빈 밥그릇에 멍한 눈길을 주던 곳, 바로 군산이다. ●일본인은 평지 살고 조선인은 산동네 살고 일본인들이 평지에 살고 조선인은 산동네에 얹혀 살았다.‘언덕 비탈에 의지해 오막살이가 생선비늘 같이 들어박힌 개복동 그 중에서도 산꼭대기에 올라앉은 납작한 토담집, 방이라야 안방 하나 건넌방 하나 단 두 개뿐인 것을 명임이네가 도통 5원에 집주인한테서 세를 얻어가지고 건넌방은 먹곰보네한테 2원씩 받고 세를 내주었다.’고 채만식은 묘사했다. 군산은 식민 수탈의 가장 전형적인 공간이었다. 식민공간답게 전통과 근대가 공생하고, 강요된 근대의 기형적 뒤틀림이 강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전 세계적으로 개항장은 제국주의의 의도가 적나라하게 관철되는 시험장이었다. 네덜란드가 건설한 바타이유 같은 해양 식민도시처럼 일본이 건설한 목포·군산·마산·원산 등이 그랬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이 곳은 숫자조차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숱하게 징용 나간 이들의 눈물이 넘치던 항구였다는 점이다. 쌀만 수탈당한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 수탈당한 곳이다. 해방 직후 군산항에서 노무자들의 퇴직금 요구와 귀화 노무자의 착취에 대한 격렬한 보상요구 투쟁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근자에 다시금 문제가 되고 있는 한·일협정 과정에서의 반민족적인 협상으로 그만 영구 미제사건으로 덮이고 말았다. 재미있는 점은 조선에서 살다가 8·15 후 일본으로 되돌아간 일본인들은 ‘인양자(引揚者)’라며 일본에서도 차별대우를 받았다는 점이다. 실로 아이로니컬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식민지를 체계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경찰, 군대, 식민 경영기관, 거류민단, 금융기관 등이 필요하다 보니 으레 항구에는 이런 흔적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군산도 예외는 아니어서 당시로서는 거대했을 조선은행 건물, 번듯한 세관건물이 지금도 남아있으니 가히 근대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뒷골목에는 이른바 왜정시대의 적산가옥도 즐비하다. ●방치된 수탈의 흔적들… 박물관 재활용해야 그러나 어쩌랴. 극장식 카바레로 쓰이던 조선은행 건물은 방치돼 있다. 안될 일이다. 식민지 시대를 비판하는 것과 별개로 그 시절의 흔적을 이런 식으로 방치해서야 되겠는가. 식민지의 역사적 교훈을 위해서라도 말끔히 복원하여 박물관이나 자료관 등으로 재활용할 일이다. 군산항의 역할은 일제시대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군산 수용소에는 진남포에서 LST를 타고 내려온 무려 5만여명의 피란민이 수용되었다. 이곳 미군기지와 공군비행장은 전쟁의 흔적을 고스란히 증명해 준다. 항구는 이처럼 사회변동의 축소판이다. 군산은 더 이상 화려한 곳이 아니다. 서해안시대를 부르짖지만 침체한 경기는 살아날 기미가 없다. 영화롭던 영화동에는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항구는 먼 외곽의 신항으로 밀려났고 토사가 쌓이는 본래의 군산항은 그저 자그마한 배들만 오갈 뿐이다. 예로부터 백제의 도읍지인 부여 길목에 자리잡아 대중국 전진기지였던 천년 역사의 군산은 그렇게 정중동의 움직임만 보이고 있다. 건너편 장항에 오래된 제철소만 남아 옛날의 영화를 증명할 뿐. 개항 100년을 기념하는 백년광장에서 우리는 과연 개항 백년의 기념비적 의미를 제대로 챙기고 있는가 자문하게 된다. 또 좋든 싫든 근대 100년의 음지와 양지를 모두 지닌 군산항의 21세기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말로만 서해안시대를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군산 같은 항구에서부터 그 해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 [뒷골목 맛세상] 탑골의 따뜻한 맛집들

    [뒷골목 맛세상] 탑골의 따뜻한 맛집들

    지난 해 11월에 열린 민족문학작가회의 30주년 기념식에서는 약간 색다른 공로상이 발표되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한 술집 주인에게 공로상을 주기로 한 것이었다. 이 공로상은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아 끝내 시상을 하지 못하고 말았는데, 기념식에 참석한 문인들은 한결같이 안타까운 빛이 역력했다. 공로상의 주인공은 한복희라는 이로 탑골이라는 카페의 주인이었다. 카페 탑골은 이름 그대로 탑골공원 뒤편 골목에 자리해 있었는데,1980년대부터 주로 문인들을 위시한 예술인들이 마치 제집 안방처럼 무람없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탑골을 드나들던 문인들로는 위로는 시인 신경림·민영·김지하, 작가 황석영을 비롯해서 시인 이시영, 작가 박범신·김성동이며 나를 거쳐 아래로는 시인 강형철·이영진·박철·김사인, 작가 김영현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작가회의에 적을 둔 문인들로서는 한두 번 이곳을 드나들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술집 주인에 공로상… 한가닥 미안한 마음 달래 미처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문인들이 드나들었다고 해서, 작가회의가 굳이 탑골 주인에게 공로상까지 마련한 것은 아닐 터이다. 지금에 와서도 1980년대의 탑골시절을 돌이키면, 저 암흑 같은 시절을 과연 탑골이 없이 제대로 견딜 수 있었을까 하고 의구심이 들고는 한다. 이를테면 탑골이야말로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져 허우적대는 문인들에게는 참으로 제집 안방처럼 아무 때나 무람없이 찾아들어 술이며 안주로 배를 채우고, 더 나아가 지친 몸을 기대고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15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 문인들이 한낱 술집 주인에 불과한 한복희씨에게 기꺼이 공로상을 주기로 한 데에는, 너나없이 그이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한 가닥 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랬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주머니가 넉넉하지 못한 문인들이 얼마든지 외상으로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고, 게다가 술청의 아무데나 쓰러지는 식으로 잠자리까지 해결할 수 있는 곳은 탑골 말고는 달리 없었으리라. 탑골이 문을 닫은 후에, 오죽하면 문인들 때문에 결국 탑골이 망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을까. 1980년대의 탑골 풍경에 대해서는 시인 이시영이 ‘김사인의 흰고무신’이라는 산문시에서 다분히 해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날 밤은 모든 것이 예정된 것처럼 보였다. 폭우 속을 뚫고 김사인이가 왔었고 흰고무신을 신고 있었고, 새로 막 시작된 술자리가 새벽으로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천둥소리 속에 밖에서 누가 희미하게 나무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설연이가 귀를 쭝긋 세우고 달려가 문을 열었더니 송기원과 나의 처가 거센 빗줄기 속에서 기세등등 들이닥치고 있었다.“복희년 나오라고 그래!” 바로 그때였다. 나와 송 사이에서 묵묵히 고개를 떨구고 있던 사인이가 갑자기 일어나 문밖으로 내빼는데 흰고무신 신은 발이 비호처럼 빨랐다. 그리고 빗속을 번개처럼 가르며 사라졌다. 복희씨가 졸린 눈을 뜨기도 전에, 송과 나의 처가 시퍼렇게 걷어붙인 팔을 풀기도 전에 일어난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 1980년대라면 개인적으로는 30대에서 40대로 접어든 언저리의 나이이다. 그리고 이미 살아낸 삶은 물론이려니와 또한 앞으로 살아내야 할 적잖은 부피의 삶이 너무 무거워서 비단 술에 취하지 않아도 거의 날마다 어쩐지 걸음이 비틀거리던 나이이다. 그렇듯 비틀거리는 걸음은 때로는 지극히 퇴폐적인 행태로, 때로는 황폐한 스캔들로 나타나 탑골 주변에 숱한 에피소드를 남겼다. 그러나 스스로 돌이켜보면 그렇듯 퇴폐적이고 황폐한 나이에 내가 그나마 사람냄새를 풍길 수 있었다면 그것은 순전히 탑골 덕분이었다. 나의 사람냄새 속에는 분명히 탑골의 따뜻하고 넉넉한 분위기와 주인되는 이의 너그러운 품성이 깃들어 있을 터이다. ●골목 어느집이든 2000~3000원이면 한끼 해결 기이하게도 탑골공원 주변에는 카페 탑골 비슷한 분위기의 식당들이 적지 않다. 이를테면 돈을 버는 장사라고 여기기에 앞서, 우선 배고픈 손님에게 자신이 만든 음식을 베푸는 즐거움이 앞서는 식당들이다. 탑골공원 담벼락을 끼고 돌아 낙원상가가 시작되는 어름에서 카페 탑골로 들어가는 바로 입구에 있는 유천식당(02-764-2835)은 아예 간판에 ‘봉사하는 마음으로 영업합니다’ 하고 무슨 구호처럼 써놓았다. 식당에 들어가서 한 그릇에 2500원짜리 설렁탕이나 돼지머리국밥을 시켜보면 그 구호가 결코 빈말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있다. 설렁탕이며 돼지머리국밥은 양도 양이지만 맛 또한 여느 5000원이나 6000원짜리 식당보다 뒤지지 않는다. 게다가 한 그릇으로 양이 부족한 이라면 시쳇말로 얼마든지 리필이 가능하다. 밥보다 술이 우선인 손님이라면 한 접시 수북이 쌓아올린 3000원짜리 돼지고기에 소주 한 병이나 막걸리 한 주전자면 충분하다. 이 유천식당이 탑골공원 뒷골목에 한 그릇에 1500원짜리 추어탕의 소문난추어탕집이나 2000원짜리 황태해장국의 황태식당이나 2000원짜리 선지해장국의 고향집 등을 있게 한 원조격이다. 유천식당의 주인되는 문용춘씨는 80이 가까운 나이인데, 여전히 정정한 몸으로 주방을 맡고 있다. 벌써 40년이 넘게 한 자리에서 설렁탕과 돼지머리국밥만으로 식당을 해온 그이는 평안남도 덕천에서 1·4후퇴때 월남한 피란민 출신인데, 어릴 적부터 하도 배고프게 자라서 자신만이 아닌 남들까지 실컷 배불리 먹이는 것이 소원이었고, 그 소원이 자연스럽게 식당을 하게 했다. 일찍이 할아버지로부터 비롯하여 자신은 물론 자신의 아들까지 벌써 4대째 독실한 천도교 집안인 그이는 자신이 만드는 음식 속에는 ‘사람이 하늘이다’는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사상이 들어있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그이로서는 식당을 처음 열었을 때 한 그릇에 500원이었던 설렁탕 값이 4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2500원으로 오른 것이 못내 마음 한 구석에 찜찜한 모양이었다. 그런 그이는 평생토록 집 한 채 마련해본 적이 없이 지금도 일산의 백석동에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다. ●10년동안 가정식 백반 한상에 2500원 고수 지하철 5호선 종로3가역에서 내려 4번 출구를 나와 낙원오피스텔 쪽으로 20m쯤 걸어오면 길 건너편에 낙원장모텔과 세느장모텔 골목이 있다. 이 낙원장모텔 골목을 굽어돌면 수련집이니 찬미식당이니 남양식당이니 하는 난데없는 2500원짜리 가정식백반집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 끝에 바로 이 골목에 2500원짜리 가정식백반집이 있게 한 원조격인 부산집(02-744-2331)이 숨어 있다. 부산집 또한 돈 버는 장사에 앞서 배고픈 손님에게 자신의 음식을 베푸는 즐거움이 우선인 집인 것은 마찬가지다. 가정식백반에는 병어조림이며 조기조림에서부터 미역무침, 김, 콩나물, 갓김치, 배추김치 같은 반찬들이 수북수북 나오고 미역국에 고봉밥까지 곁들여 한 상을 이루는데, 이 푸짐한 한 상에 2500원이라는 사실이 전혀 믿어지지 않는다. 이 집 또한 밥이며 반찬이 손님의 양에 따라 얼마든지 리필이 된다. 부산집에는 가정식백반 이외에도 3000원짜리 돼지갈비탕이 있는데, 만일 몸은 물론 마음까지 함께 허한 이라면 마땅히 돼지갈비탕을 권하고 싶다. 돼지갈비탕도 반찬은 가정식백반으로 나오는데, 주인의 인정이 함께 전해 와서 허한 마음이 저절로 채워질 터이다. ●국수보다 해물이 더 많이 들어간 칼국수 얼핏 주방을 올려다보면 전통 한옥의 대청마루에 떠억 하니 자리잡은 주방 한 가운데에서 주인되는 이영자씨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어온다.“뭐 좀 더 드려?” 환갑 언저리에 이른 그이의 넉넉한 자태와 반말 비슷한 말투가 어쩐지 마음 한 쪽에 따뜻하게 스며오는 것을 느끼며 수저를 들면, 자칫 목이라도 멜 것 같은 기분이 되고 만다. 그이는 10년 전에 이 골목에 2500원짜리 가정식백반집을 차린 후에 단 한번도 값을 올린 적이 없이 그대로 지켜내고 있는 고집불통이기도 하다. 모르기는 해도 단골손님들의 이제 그만 밥값을 올리라는 주문은 한마디로 내칠 것이다.“올려서 뭐하게?” 역시 지하철 5호선의 종로3가역 4번 출구를 나와 낙원오피스텔 앞으로 오면 건너편에 희망상회가 있는데, 바로 그 골목에 찬양집(02-743-1384)이라는 칼국수집이 있다. 찬양집 또한 돈 버는 장사에 앞서 배고픈 손님에게 자신의 음식을 베푸는 즐거움이 우선인 것은 당연하다. 주인되는 김옥분씨는 환갑 언저리에 이른 고운 자태인데, 어쩌다 반가운 단골손님이라도 오면 처녀같은 수줍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진한 표정이기도 하다. 나로서는 카페 탑골 시절부터 비롯하였으니 20년 가까운 단골이기도 한데, 나보다 오랜 단골손님들 중에는 800원부터 시작한 칼국수값이 지금 3500원으로 올랐다는 것에 대해 누구 하나 토를 다는 이가 없다. 오히려 칼국수 한 그릇에 국수보다 더 많이 들어가는 듯한 갖은 해물들을 대하다 보면, 이것을 정말로 3500원만 받아도 장사가 될까 하는 걱정을 앞세울 뿐이다. ■사랑의 칼국수 ‘찬양집’ 찬양집에 가면 1990년대 초에 내가 어느 일간지 칼럼에 썼던 이 집에 대한 기사가 그대로 스크랩되어 벽에 걸려있다. 이제 노랗게 빛이 바래 글씨조차 제대로 알아보기 힘든 기사를 힐끔거리다 보면, 비틀거리던 40대 언저리의 내가 그대로 되살아오는 기분이기도 하다. ‘종로3가에서 낙원상가로 빠지는 한옥 뒷골목에 내가 잘 가는 칼국수집이 있다. 좁은 공간을 최대한 살리느라고 벽을 빙 둘러가며 송판을 붙여 탁자를 대신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행인들이 지나다니는 골목길에까지 탁자를 마련하였다. 내가 이 칼국수집을 다니기 시작한 지도 5년 남짓 되었다. 주로 몇 십년을 다니는 이 집의 단골들의 경력에 비하면 나는 어쩌면 단골이랄 수도 없을지 모른다. 내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병적인 감정 중의 하나로, 이따금씩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싫어서 못 견디는 순간이 있다. 한편으로는 어디 발길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에라도 정을 쏟고 싶은 마음 여린 순간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이 칼국수집을 찾는다. 그리하여 칼국수가 마련되는 동안 주인아주머니가 밀가루반죽을 밀어 칼국수를 만드는 것을 구경하다가 마침내 칼국수를 먹는다. 그렇게 칼국수를 먹으면서 이따금씩 한두 방울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나는 언제 그렇듯 못견뎌 했냐 싶게 기분이 좋아져 있다. 스스로는 역시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고까지 생각한다. 물론 칼국수 만들기에 바쁜 주인아주머니는 손님에게서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터럭만큼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나 혼자서 칼국수 한 그릇에 그렇듯 감동을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 집이 지니고 있는 선의(善意)이다. 자, 우선 칼국수 한 그릇에 들어가는 재료 좀 보아라. 화학 조미료는 일체 사용하지 않은 채 멸치를 끓여 우려낸 국물에는 커다란 대합 한 마리에, 맛살조개에, 미더덕에, 미역에, 호박에, 감자에, 깻잎에, 김가루에… 이런 건더기들이 오히려 수제비보다 많을 지경이다. 그리고 2000원만 내면 양은 먹을 수 있는 한두 그릇도 좋고 세 그릇도 좋다. 독실한 신앙인인 주인아주머니는 살아가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죽을까 하던 어느 날 기도 중에 예수님이 나타나 바로 칼국수집을 해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일렀다는 것이다. 나 같은 무신론자 비슷한 사람에게도 이런 경우 예수는 참 재미있는 분이다.’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전국노래자랑’ MC 송해

    한도 많고 팔자도 어지간히 드세다.‘굳세어라 금순아’의 주인공처럼 모질게도 살아왔다. 풍각쟁이면 어떻고 딴따라면 어떤가. 늘 구수하고 마음씨 넉넉한 이웃집 아저씨, 다들 ‘젊은 오빠’라고 부른다. 맞다. 이게 행복이요, 큰 부자가 아닌가.‘국민과 함께 딩동댕 25년’, 최고령 현역 방송 MC, 그뿐이랴. 지역갈등, 고부갈등, 남북갈등을 해결하는 전도사로 전국을 쉼없이 누비고 있다. ●현역 최고령 방송 MC ‘국민 MC’ 송해(78). 본명은 송복희(宋福熙)다. 그러나 6·25때 피란 도중 바닷물로 밥을 지어먹어 이름을 ‘바다 해(海)’로 바꿨다. 그는 25년째 KBS ‘전국노래자랑’ 프로그램을 이끌어오면서 전국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방송 스케줄 때문에 일주일에 사흘 이상은 집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한다. 녹화 일정이 없을 땐 한국원로연예인 상록회(서울 종로3가)에서 동료들과 못다한 얘기를 나눈다. 상록회는 원로연예인의 사랑방격으로 12년 전 송씨가 사재를 털어 설립했다. 늙어가는 처지끼리 따뜻한 동료애를 나누자는 취지에서다. 지난주 상록회 인근의 한 카페에서 송씨를 만났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러니까 말예요,25년이 후딱 넘어갔어요. 아마 공개방송 사상 처음일 거요.”라는 특유의 구수한 말투로 ‘전국노래자랑 MC 25년’의 소감을 피력했다. 팔순을 앞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방송을 매끄럽게 이끌어가는 저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했다.“일이 아니고 유람이지. 녹화 전날 현지에 내려가 명소도 찾아보고, 주지스님도 만나 얘기도 나누고, 그게 다 보약이지 뭐.”라며 웃는다. 이어 “전국 구석구석 안 가본 데가 없어. 세월이 지나면서 기존의 작은 시(市)가 광역시에 편입되고, 그러다보면 새로운 행정구역이 자꾸 생겨나요. 무진장(무주·진안·장수)은 무진장 다녔지.”라고 하면서 “춘향제가 열리는 남원에도 가장 많이 갔어요. 이래저래 전국 군단위까지 아마 열두바퀴 정도는 돌았을 거요.”라고 부연했다. 송씨는 방송녹화 하루 전에는 반드시 주변 취재를 꼼꼼히 하는 버릇이 있다. 대상은 주로 시장바닥과 대중목욕탕. 그는 “시장에 가면, 많은 재산이 있거든. 그 고장의 분위기, 유행, 또 알리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풍물 얘기를 귀담아듣고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또 목욕탕에 가면 별의별 얘기가 다 나와. 발가벗고 뒤지는데 아무려면 재미없을라고.”라며 또한번 웃는다. ●예심에 2000여명 몰려 15명만 본선에 뿐만 아니다. 전국노래자랑 예심에는 대개 1500∼2000명이 몰린다. 이중 15명 가량 본선에 오른다. 사법시험 경쟁률과 엇비슷하다. 송씨는 예심부터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본다. 또 본선에 오른 사람들과는 일대일로 만나 무대 위에서 무슨 얘기를 주고받을지 미리 상의한다. 송씨는 요즘들어 더욱 젊어진 기분이다. 호칭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 처음에는 ‘송해 선생님’ ‘송해 아저씨’라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한결같이 ‘젊은 오빠’나 ‘송해 오빠’로 통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렇게 부른다. 소위 ‘만년먹기 오빠’인 셈이다. 그러다보니 에피소드도 다양하다.20대 아가씨에서부터 60∼70대 할머니한테 기습 뽀뽀를 당하는 것은 예사. 얼굴에 스타킹을 씌워 뱅뱅 돌리는 사람, 행진시키는 사람 등등. 하지만 송씨는 아무리 짓궂은 상황도 부드럽고 재치있게 받아넘겨야 한다. 눈물겨운 사연도 많다.3대째 대장장이가 출연해 직업에 대한 경시풍조를 타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경우, 지역감정을 없애기 위해 경상도 출신 며느리가 전라도 시어미니와 함께 출연해 많은 박수를 받은 일, 앞을 못보는 장애인이 ‘노래가 곧 눈’이라며 관객들을 울린 일 등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한다. 문득 궁금해지는 것 하나. 김인영 악단장과의 관계였다. 송씨는 이에 대해 김 단장과는 TBC라디오 시절부터 알고 지내는 친숙한 사이로 녹화가 끝나면 소주를 마시며 뒤풀이를 한다.”고 귀띔했다. 이때 출연자에게 선물받은 특산물이 안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송씨는 지금도 소주 2병 정도는 거뜬히 마신다.) 송씨는 또 노래자랑에 출연했던 사람끼리 만나 결혼하는 커플도 많아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아울러 동호회를 만들어 불우이웃을 위한 공연활동도 펼치고 있다고 덧붙였다. ●출연자 최연소 3세·최고령 103세 “25년 전 화면을 보면 트로트풍 등 추억의 노래였지만 요새는 매우 다양해졌어요. 최연소 출연자가 세살, 최고령 출연자가 103세, 연령폭이 무려 한 세기에 달해요.” 송씨는 연백평야가 있는 황해도 재령에서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당시 부친은 상업에 종사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51년 1·4후퇴 때 혈혈단신 월남했다. 송씨는 이 대목에서 ‘굳세어라 금순아’는 자신을 위해 만든 노래라며 잠시 회상에 빠진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해주항에서 그는 해군 상륙정(LST)을 탔다. 포성을 뚫고 피란길에 나섰다. 바닷물로 밥을 지어먹으며 가까스로 인천항에 도착했다. 이때 나이 스물넷. 인천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군에 입대한다. 전쟁을 피해 월남했지만 결국 전쟁 깊숙이 뛰어들게 된 것. 그는 야전부대가 아닌 통신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뒤 통신부대에 배치됐다. 근무지는 대구 육군본부. 여기에서 3년8개월 동안 근무하게 된다. 군 얘기가 나오자 “내가 말예요, 전쟁종식을 가장 먼저 타전한 사람이오. 또스똔똔 하는 모스부호로 말예요.”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휴전협정 당시 육본 암호실에서 근무했다. 때문에 휴전협정 사실을 암호화한 뒤 전 육군에 타전했고, 곧 이어 전언통신문을 통해 역사적인 ‘전쟁종식’을 알린 것. 그는 군복무 시절에 1급비밀을 취급하는 통신사(하사)여서 영외거주가 가능했다. 대구 민박집에서 출퇴근할 때 선배의 여동생을 우연히 알게 됐고, 결혼에 이른다. ●55년 창공악극단서 가수로 데뷔 55년 제대를 하자마자 ‘창공악극단’에서 가수로 데뷔했다. 이후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야간열차를 타고 새벽 4시에 부산역에 도착하면 석달 동안은 집을 비우는 등 유랑극단처럼 떠도는 생활이 계속됐다. “40대초반이었지요. 몸이 몹시 안 좋았어요. 일가친척도 없지, 기둥뿌리 하나 없지, 술이라는 힘으로 달랬던 시절이었어요.3개월 동안 병원에 버려지다시피 지냈지.” 그는 “차마 얘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데….”라며 잠시 창 밖을 응시한다. 이어 “젊은 마누라도 있고 내가 왜 장애인처럼 지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자 병원을 뛰쳐나왔지.”라고 회상했다. 당시 송씨는 장충동에 살고 있었다. 집에서 남산 팔각정까지 30분 정도 걸렸다. 하루에도 몇번씩 팔각정까지 산책을 하며 마음을 다져먹고자 했다. 하지만 밀려오는 고독, 절망감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러던 하루는 산책로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내던지고 말았다. 천만다행으로 소나무 가지숲에 걸려 목숨을 구했다. 이후 그는 새삶의 길로 들어선다. 송씨는 요즘들어 생사를 알 수 없는 부모형제의 얼굴을 떠올리는 경우가 부쩍 잦아졌다. 또 대학 2학년때 사고사를 당한 아들의 얼굴도 눈앞에 자주 아른거린단다.(원래 송씨 슬하에는 두딸과 외동아들이 있었다.) 건강비결은 음식을 안 가리고, 아무와도 격의없이 만나 웃는 것이란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송씨는 지나는 행인들과 악수를 나눴다. 사람들은 “아이고, 우리 송해 오빠.”하면서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이 세상에 송해만큼 부자가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요. 사람 많이 아는 것이 최고의 부자 아니겠습니까.”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27년 황해도 재령 출생 ▲6·25 직전까지 북한 해주예술학교에서 성악공부 ▲51년 1월 월남 ▲55년 육군통신부대 만기제대 ▲55년 ‘창공악극단’가수 데뷔 ▲74년 KBS라디오 DJ ▲76년 MBC라디오 코미디쇼DJ ▲80년 전국노래자랑 MC ▲99년 제6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특별공로상 ▲2001년 제8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대상 문화훈장 ▲2002년 MBC 명예의 전당 ▲2003년 제15회 한국방송프로듀서상, 보관문화훈장 ■ 작품 송해 옛노래집,KBS고전유머 극장,KBS코미디 하이웨이
  • [이사람] 작곡가겸 대금연주자 김영동 씨

    [이사람] 작곡가겸 대금연주자 김영동 씨

    “풍각쟁이로구먼!” 1973년 어느 날 선술집에서 시인 김지하는 연극 음악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던 대금연주자 김영동을 소개받자 대뜸 이렇게 일갈했다. 김영동은 선배인 김지하가 조심스러워 속으로만 대꾸했다고 한다.“글쟁이로구먼!” 선술집에는 우리 식의 마당극을 염두에 두고 판소리에 빠져 있던 임진택과 탈춤운동에 한창이던 채희완도 앉아 있었다. 글쟁이와 탈놀이패, 광대가 한데 어울린 자리에서 풍각쟁이란 당시 민중문화운동에 뛰어든 ‘먹물’ 예술인들에게는 자부심이자 존칭인 셈이었다. ●70년대 김지하·임진택과 문화운동 하지만 김지하를 중심으로 한 동아리에서 김영동의 존재는 조금 특별했을 것이다. 축제 기획가로 활동하는 임진택이나 부산대 교수 채희완 등이 책에서 읽은 지식을 바탕으로 이론을 정립해가며 기능을 익혀나갔다면, 김영동은 처음부터 전문연주자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0여년, 인사동의 밥집에서 만난 김영동(54)씨는 ‘이론가’가 되어 있었다. 그의 명함에는 ‘세계생명문화포럼 경기 2005 조직위원장’이라는 직함이 새겨져 있다. 그는 9월에 열리는 포럼의 취지를 “문화에서 새로운 메시지를 만들어 환경파괴와 전쟁으로 생명의 위기를 겪고 있는 세계에 발신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씨는 지나간 몇년 동안 “우리 음악정신의 원류를 찾고, 음악과 음악이론을 연결하는 구체적 원리를 파악하기 위해 고심했다.”고 근황을 전했다. 생명문화포럼도 민족 정통사상을 구체적으로 공부하여 세계적 보편성을 띨 수 있는 비전을 만들어내자는 일종의 문화운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 2학년 때부터 음악감독 맡아 그는 성공한 음악가다. 그가 작곡가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서울대 국악과 2학년 시절인 1971년. 오태석이 연출한 전무송의 모노 드라마 ‘이식수술’의 음악을 맡았다. 이듬해부터 ‘초분’,‘태’로 잇따라 무대음악가로 존재를 부각시켜 나갔다. 1974년 허규 연출의 ‘한네의 승천’은 출세작이라고 할 만하다.‘한네의 이별’처럼 귀에 잘 들어오는 노래들이 이때부터 쏟아져 나왔다.1978년에는 ‘개구리 소리’와 ‘누나의 얼굴’ 같은 국악동요를 발표했는데, 대중적이면서도 의미있는 작업을 하는 작곡가라는 이미지를 심는 계기가 됐다. 이후 ‘땡볕’ ‘태’ ‘어둠의 자식들’ ‘씨받이’ ‘아다다’ 같은 영화음악으로 이름을 날린다.‘어둠의 자식들’에 나오는 ‘어디로 갈거나’와 TV드라마의 주제음악으로 만든 대금연주곡 ‘삼포가는 길’은 지금도 음반시장의 스테디셀러로 꼽히는 ‘히트곡’들이다. ●음악계 질시 비웃듯 대한민국 작곡상 수상 대중적 성공은 ‘작곡을 제대로 공부하기는 했느냐.’는 음악계의 질시를 낳기도 했다. 그는 대편성 국악관현악을 위한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는데, 출발점은 다름아닌 ‘오기’였다고 한다. 황석영의 ‘장산곶 매’를 소재로 한 표제음악 ‘매굿’은 그에게 1981년 대한민국 작곡상을 안겨주었다. 김씨가 처음부터 음악에 뜻을 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피란지였던 충남 홍성 광천초등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올라와 용산초등학교를 다녔다. 중학 입시에서 낙방한 그에게 당숙은 재동주유소 자리에 있던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를 소개했다. 그는 실기시험이 없는 국악사양성소에 필기시험만으로 합격했다.2학년에 올라가면서 피리를 불기 시작했고,3학년이 되자 전공으로 대금을 선택했다. 인간문화재 김범수 선생의 대금 정악 소리가 좋았기 때문이다. 김병호 선생으로부터 가야금과 아쟁도 배웠다. 대금 산조의 명인 한범수 선생의 아현동 집으로 찾아가기도 했다. 김씨는 “산조를 배운 적이 없으니 흉내만 좀 냈더니 선생이 쌍골죽 대금을 내놓더라.”면서 웃었다.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었다. 그가 “정악과 민속악의 중간역할을 하는 사람이 나”라고 말하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83년 독일 유학 “정말 재미없었다” 국립국악원에서 일하던 그는 1983년 독일로 건너간다.“음악깨나 한다는 사람들이 죄다 독일로 가는 이유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괴팅겐대학에 머무는 4년 동안 공부한 비교음악학은 “내 공부가 아니라 그들이 필요로 하는 동양음악을 대신 연구해주는 것이었다.”면서 “정말 재미없었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김씨는 ‘귀소’ ‘산행’ ‘화(和)’ 등을 펴내면서 명상음악가로도 이름을 날리고 있다. 악보 없이 즉흥적으로 연주한 ‘화’에는 특별한 애착이 있다. 그는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지휘자로 재직하며 많은 곡을 쓰고, 또 연주했다. 그러다 보니 서양악보인 오선보로 작곡하고 연주하는 데 짜증이 났다고 한다.‘화’는 오선보에 대한 반동인 셈이다. 연장선상에서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는 ‘예술가의 자기중심 찾기’다. 그는 동양음악은 음양사상을 바탕으로 한 동양적 수(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은 물론 그동안 취급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나의 필생의 작업은 주역(周易)을 음악화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음악이 동양철학과 협력하여 우리 식의 작곡법을 체계화하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당장은 ‘쉬운 음악의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고 본다. 국악가요나 동요, 명상음악 등 부담없이 들을 수 있는 음악도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구체적인 구상이 있는 듯 “결과는 빨리 나올 수도,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여운을 남겼다. ●올 가을 관현악·명상음악·동요 섞어 음악제 올 가을에는 3∼4일에 걸쳐 ‘김영동 음악제’를 열 생각이다. 그동안 만든 작품이 소품까지 100여곡. 관현악·명상음악·대중음악·동요 등을 하루씩, 혹은 묶어서 연주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할 일 많은 그에게 음악가로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는지 물었다. 김씨는 대답 대신 “그동안 서양음악에 손님대접을 잘 해주었으니 이제 우리 것 좀 대접해 주었으면 좋겠다.”면서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에 우리가 찍소리 못하는 이유도 여기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김씨는 “그렇지만 세상이 어떻게 대접하느냐에 따라 예술가가 흔들리겠느냐.”면서 “앞으로도 어디에도 휩쓸리지 않고 꿋꿋하게 나의 작업을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서동철기자 dcsuh@seoul.co.kr
  • [우리동네 이야기] 송파구 문정동

    [우리동네 이야기] 송파구 문정동

    문정동(文井洞)은 서울에서 성남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다.‘문정동 로데오거리’로 대표되는 ‘패션 타운’이다. 그러나 동부 지원 및 지검, 송파구청·구의회가 들어서는 2008년에는 ‘법조·행정타운’으로 탈바꿈한다. 문정동의 전체 면적은 2.76㎢. 인구는 3만 6500여명이다. 송파구의 남쪽에 있으며, 가락동, 장지동, 강남구 수서동 등과 맞닿아 있다. 동 이름의 뿌리는 병자호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으로 피란가다가 이곳에 쉬면서 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좋아 이 마을에 사는 문씨 성을 따서 문정(文井)이라고 지칭한 데서 유래한다. 마을의 지형이 연꽃처럼 생겼다 하여 연화동(蓮花洞)이라고도 불렸다. 1963년 경기도 광주에서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됐다.1975년 강남구,1979년 강동구를 거쳐 1988년 송파구 관할이 됐다. 행정동인 문정1,2동으로 이뤄져 있다. 문정동은 송파구의 대부분의 지역처럼 서울의 대표적인 베드타운이다.88서울올림픽 때 선수촌으로 사용된 훼밀리아파트를 비롯해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교통도 편리하다. 지하철 8호선을 비롯해 남부순환도로와 송파대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수서 분당간 고속화도로 등 굵직굵직한 도로가 주위를 감싸고 있다. 문정동의 얼굴은 문정동 로데오거리. 지하철 8호선 문정역 1번 출구에서 나와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다. 훼밀리아파트 사거리에서 가락1차 현대아파트 사거리까지 500m 양쪽에는 각종 브랜드 숍들이 줄지어 있다. 로데오거리의 장점은 1년 남짓 지난 상품을 절반 가까운 가격에 살 수 있다는 점이다. 브랜드 업체들이 아웃렛 매장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기획용’ 상품도 만날 수 있다. 여성 의류매장으로는 멀티숍 덤프(dump), 콜렉티드(collected), 모즈 아웃렛(mods outlet) 등을 꼽을 수 있다. 멀티숍인 엔스테이션에서는 유명 상품인 빈폴의 모든 브랜드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밖에도 게스, 폴로, 리바이스 등 유명 외국 브랜드는 물론 지오다노 등 국내 브랜드숍도 자리잡고 있다. 동부지원·지검은 송파구 문정동 334 일대 37만여평 문정지구의 북쪽에 들어선다. 송파구는 2008년까지 2만 5000여평에 지원과 지검이 들어서는 법조단지를 조성할 계획이다. 나머지 2만평에는 구청과 구의회 등 종합행정타운도 건설된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儒林(273)-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73)-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다른 성리학자들이 공자의 사상을 다만 학문으로만 연구하고 발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조광조는 공자의 사상을 현실정치에 접목시키려고 애를 쓰다 목숨을 잃었던 순교자였다. 격랑의 역사를 온몸으로 부딪쳐 유가의 도를 실현하려다 산화한 순교자였던 것이다. 종착역이던 안동역까지의 소요시간은 무려 6시간, 아침을 거르고 나온 나는 열차를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파는 승무원에게 도시락을 샀다. 도시락으로 아침을 때우면서 나는 격세지감을 느꼈다. 열차의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예전 그대로의 산야였고, 어쩌다 스쳐가는 강과 계곡은 의구하였지만 피란기차와도 같았던 열차의 내부는 마치 위생적인 병원의 복도처럼 정갈하였고 승무원이 파는 도시락 역시 훌륭하였다. 아침을 먹고 나서 뜨거운 물을 마시며 나는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평일이었으므로 승객들은 만원이 아니었지만 마침 봄이라 드문드문 등산객과 관광객 차림의 사람들이 서로 마주보도록 의자의 방향을 바꾸어 앉아서 즐겁게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철도노선에는 소백산이나 태백산, 치악산 같은 명산들이 있어 산행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아직 조춘(早春)이라 산야에는 벚꽃들이 만개하지는 않았지만 가장 먼저 피는 진달래나 개나리와 같은 성미 급한 봄꽃들이 홍역을 앓는 어린아이의 몸에 돋아난 붉은 발진처럼 울긋불긋 피어나 있어 그런대로 신열(身熱)이 오른 나른한 봄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내가 일부러 중앙선열차를 타고 단양까지 가고 있는 것은 참혹했던 청춘의 옛 추억을 반추해 보려는 낭만적인 생각보다는 지난 1년 동안의 역사추적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정리해 보고 싶은 생각 때문이라는 사실이 느껴졌다. 그렇다. 나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조광조로부터 시작된 역사추적은 2500년 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공자로까지 이어졌었다. 조광조가 그토록 실현하고 싶어 했었던 공자의 유교식 개혁정치, 즉 왕도정치가 무엇인가를 나는 공자의 생애를 더듬어봄으로서 살펴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작업을 통해 나는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조광조가 유가사상을 현실정치에 접목시키려고 애를 쓰다 실패하였던 정치가라면 공자역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현실정치에 접목시키려고 무려 13년 동안이나 주유천하를 하였지만 마침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빈손으로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실패한 사상가였던 것이다. 두 사람은 실패한 정치가란 점에서는 한 개의 수정란에서 태어난 일란성 쌍생아처럼 닮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광조는 어째서 공자의 정치적 주유천하가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조선시대의 낡은 풍습과 사상을 공자의 유교식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개혁정치를 펼치다 역시 실패하여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던 것일까. 어째서 조광조는 이미 실패로 끝난 공자의 왕도정치의 철학을 개혁정치의 신 이데올로기로 맞아들인 것일까. 그렇다면 조광조의 유교적 개혁정치는 처음부터 실패로 끝날 것임이 예정되어 있음이 아닐 것인가. 공자의 왕도정치. 그것은 우선 군주와 힘을 가진 권력자들의 높은 윤리의식과 엄격한 도덕주의가 요구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듯이 절대 권력자들이 인·의·예·지의 유교적 이념을 철저히 실천하여 군자가 되는 것이 바로 공자의 지치주의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 [논술이 술술] 엔트로피 글쓴이/제러미 리프킨

    클라우지우스가 1865년에 열역학 법칙을 발표한 뒤,‘엔트로피’는 근대 과학의 기조와는 사뭇 다른 개념의 속성 때문에 과학 이외의 영역에서 가장 많이 주목하고 다루어진 과학 개념으로 자리잡아 왔다. 수많은 인문, 사회학적 저작들에서 ‘엔트로피’는 근대 물질 문명의 한계를 비판하기 위한 주요한 개념으로 인용돼 왔으며, 특히 현대에 와서는 생태계의 위기, 과학기술의 한계와 관련, 더욱 주목받고 있다. 열역학 법칙은 두 개의 법칙으로 구성돼 있다. 제1법칙은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해서 생성하거나 소멸될 수 없고 오직 형태만이 바뀔 뿐이라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이에 따르면 에너지는 계속 사용하더라도 고갈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예를 들어 석탄을 태우면 에너지 총량에는 변화가 없을지 모르지만 에너지는 탄산가스와 그밖의 기체로 변하여 공기 중에 흩어진다. 에너지의 손실은 없지만 태워서 일을 얻을 석탄은 다시 얻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물질 세계의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 법칙이다. 이에 따르면 에너지와 물질의 형태 변화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이뤄진다.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부터 사용할 수 없는 형태로, 질서가 있는 상태에서 무질서가 증가하는 상태로만 변할 수 있으며, 그 되돌림은 불가능하다. 이 때 사용 불가능한 형태로 바뀌어 있는 에너지의 총량을 ‘엔트로피’라고 한다. 곧 엔트로피란 더 이상 일로 바꿀 수 없는 에너지의 양에 대한 척도이며, 엔트로피의 증가는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감소를 뜻한다. 최근 우리에게 ‘노동의 종말’이나 ‘접속의 시대’ 등의 저작으로 친숙해진 미국의 사회비평가 제러미 리프킨은 이러한 ‘엔트로피’ 개념을 바탕으로 현대의 자원 고갈과 생태계의 위기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근대 이후 인간은 ‘발전이란 더 많은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는 것이고,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의해 세계는 더욱 질서있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왔다. 그러나 오늘날 에너지 자원의 고갈과 심각한 환경 위기는 기술의 발전이나 생산 효율의 증가가 에너지의 추출이나 흐름을 더욱 빠르게 하고, 결국 이것은 에너지 분산이나 세계의 무질서를 촉진시킬 뿐임을 드러내고 있다. 리프킨은 이러한 상황에서 근대 이후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벗어날 것을 강조하며, 현재와 같은 고(高)엔트로피적 사회를 저(低)엔트로피적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재생 가능한 에너지로의 이행이 불가피하다. 생태계의 조화 및 재생 능력의 한계 안에서 경제적 생산과 사회적 소비를 절제하는 방식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엔트로피’법칙은 난폭한 약탈자로서의 지금까지 인간의 역할에 대한 반성과 현대 물질문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지금의 인류 문명이 총체적 위기에 빠져 있으며, 대량 생산 및 대량 소비에 익숙해진 현재의 생활상을 유지하면서 그러한 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은 없다는 사실이 날이 갈수록 명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니드림 대학입시연구소(www.unidream.co.kr) ●독서지도시 참고사항 -대상 학년:고1∼고3 -관련 교과:고등 사회, 과학, 윤리와 사상, 사회문화, 한국지리, 경제지리 -함께 읽어 볼 책과 고전:가이아(제임스 러브록·김영사), 우리 공동의 미래(세계환경발전위원회·새물결), 작은 것이 아름답다(슈마허·범우사), 인류의 위기(로마 클럽·삼성미술문화재단) -기출논제:1997·1999학년도 이화여대 자연계 모의 논술,1996학년도 연세대 정시 자연계 논술,1998학년도 경희대 정시 인문계 논술,2000학년도 한양대 정시 논술 ●생각해보기 -‘엔트로피’의 개념과 의의는? -쓰레기나 교통 문제 등을 예로 들어 ‘엔트로피’적 관점에서 그 원인과 궁극적인 해결 방안을 써보자. -석유에 기초한 현대 문명이 석유의 고갈로 심각한 위기에 빠지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 방안을 써보자.
  • 儒林(271)-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71)-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청량리를 출발한 무궁화호 열차가 단양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 40분쯤이었다. 아침 6시 50분에 기차가 출발하였으니 거의 4시간 가까이 걸린 셈이었다.4시간이라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소요시간인데, 충청북도의 경계역인 단양에 4시간가량 걸린다는 것은 지금은 볼 수 없는 거의 완행열차의 속도수준이었다. 과연 기차는 웬만한 역은 모두 섰다. 지금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열차가 생겨나 2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는 광속(光速)시대에 역이면 역마다 서고 한없이 느리게 가는 열차의 속도는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무슨 피란열차를 탄 느낌이었다. 느림의 미학. 속도의 무한경쟁시대에 있어 요즘 유행되고 있는 화두, 느림의 아름다움. 나는 그 느림의 아름다움을 오랜만에 맛보기 위해 승용차를 타지 않고 신새벽에 일어나 청량리 역으로 나아가 무궁화호열차를 탔는지도 모른다. 청량리역. 청량리역에 대한 추억은 아득한 옛 기억과 맞닿아 있다. 고등학교 때의 무전여행을 떠날 때에 군용배낭에 쌀 한줌과 마른 건빵 같은 비상식품을 싣고 지도 속에서만 보던 낯선 역을 찾아 무작정 떠날 때의 두려움과 또 한편의 기대 같은 것. 그것은 마치 흔들거리는 이를 빼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불안감과 쾌감 같은 것이었다. 새벽녘 근처에는 항상 사창가에서 나온 할머니들이 슬그머니 다가와 이렇게 유혹하곤 했었지. “젊은이 놀다가, 좋은 색시 소개해 줄게.” 군대에 있을 무렵에도 휴가 나왔다 돌아가던 곳이 청량리역이었다. 그 무렵 버스의 여차장들은 이렇게 소리를 지르곤 하였었지. “청량리 중랑교가요.” 그 소리를 잘못 들으면 이렇게 들려오곤 했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요―차라리 죽는 게 나요― 차라리 죽는 게 나았던 청량리, 청량리역. 그 역의 이름은 저 암울했던 50,60년대의 청춘시대와 연결된다. 아직 6·25전쟁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았던 참혹했던 전후의 계절, 차라리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싶은 심경으로 무전여행을 떠나고 시골 간이역에 기차가 멎을 때면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무임승차를 하였었지. 항상 사람들로 넘쳐나고, 냄새나는 변소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꼬박 밤을 새우던 완행열차. 한참을 자다 눈을 떠도 경기도를 벗어나지 못한 석가여래의 손바닥 안이었지. 때로는 휴가병 열차이기도 했었다. 새벽에 나왔다가 30분정도 시간이 남으면 사창가의 노파 손에 이끌려 판잣집에 끌려가 군화 끈을 풀지도 않고 혁대를 끄르고 엉덩이를 내린 후 눈 깜짝할 사이에 번개 같은 섹스를 했었지. 그럴 때면 지금은 할머니가 되었을, 아니 이미 죽었을 무성영화에 등장하는 엑스트라와 같은 여인들이 내 엉덩이를 때리며 이렇게 놀려댔었지. “아따 급하기는, 번개 불에 콩을 튀겨먹었나.” 요강에 오줌을 누고 도망치듯 달려가는 청량리역사. 그때 내 가슴에 줄곧 이런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요. 청춘시절의 잠재된 기억은 평생을 가는 것일까. 몇 십 년 만에 중앙선열차를 타는 청량리역은 옛날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는 초호화판의 현대식 건물이었고, 사창가가 있던 건물은 눈부신 상가로 급변해 있었지만 여전히 내 귓가에는 버스차장의 목쉰 절규소리가 아득히 들려오고 있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요. 차라리 죽는 게 나요―.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5)겨울 동해 별미, 도루묵·양미리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5)겨울 동해 별미, 도루묵·양미리

    사람들은 왜 기를 쓰고 ‘고급 어종’만 찾을까. 고급 어종만이 고급화한 스스로의 미각을 만족시킨다고 믿는 것일까. 평범 속에 진리가 있듯, 흔하디 흔한 물고기들이 외려 우리의 미각에 들어맞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장구한 세월, 그 맛의 유전자가 혀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동해에서 겨울철 진미를 찾아 나섰다. 동해안 겨울 진미는 단연 명태다. 그러나 이곳 명태잡이는 ‘사형선고’를 받은지 오래다.‘북양태’와 ‘일본산’이 득세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만만치 않은 어획량을 유지하면서 서민들에게 가깝게 다가선 ‘도루묵’과 ‘양미리’에 자꾸 눈길이 간다. 그런데 정작 도루묵과 양미리에 관한 일반인의 지식 수준은 의외로 낮다. ●미끈한 생김새에 비린내도 없는 ‘도루묵’ ‘실컷 일을 해놨더니 망조가 들어 그르치는 상황’을 일컬어 ‘말짱 도루묵’이라고들 한다. 도루묵이 오죽 하찮게 보였으면 속담에서조차 이렇게 허투루 비교되고 비하될까. 일설에는 전쟁통에 피란가던 임금이 이걸 먹고는 너무 맛이 있어 은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다. 그 후 전쟁이 끝나 환궁해서 그 맛을 다시 보려고 이걸 청해 먹었는데 옛날 그 맛이 아니었다. 그래서 “도루 물리라.”고 한 데서 도루묵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그 임금이 선조라는데,‘믿거나 말거나’이다. 그렇지만 이제 더 이상 ‘말짱 도루묵’은 없다. 값이 비싸져 ‘도루묵이나 먹자.’는 말도 쉽게 할 수 없다.‘도루묵을 먹다니….’정도로 바뀌어야 격에 맞게 됐다. 도루묵은 깔끔한 신사 같다. 비린내가 거의 없다. 말쑥하게 차려입고 외출에 나선 미끈한 멋쟁이 같은 생김새다. 맛도 외모를 닮았다. 비린내를 풍기면서 뭉기적거리는 생선이 아니라선지 일본인들은 이 도루묵을 보면 군침을 삼키며 달려든다. 더군다나 알 밴 도루묵은 금값이다.2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도루묵은 상당량 일본으로 수출됐다. 도루묵 값이 비싼 것은 바로 일본 수출 때문이다. 정의철 동해수산연구관은 “우리 수산물 값은 일본으로의 수출 여부가 좌우하는 측면이 있다.”고 해석했다. 그 후 일본 수출길이 막히자 값도 눅어졌다.2년 전쯤의 일이다. 도루묵은 일본 시마네현 쪽에서도 많이 잡힌다. 우리 바다의 도루묵이 산란한 뒤 일본쪽으로 회유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생태 조건을 가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기호도가 높은 만큼 일본 학자들의 도루묵에 대한 관심은 높다. 점착성 침성란을 가진 도루묵은 연안 저층성 어종으로 보통 수심 200∼300m 사이에서 서식한다.2003년 연간 생산량은 1900t이었다. 지난 70년대 초반만 해도 해마다 2만 5000t까지 잡혔으나 요즘은 1500∼5000t 정도가 고작이다. ●서해안 전통어법 동해안에서도 행해져 도루묵은 산란기가 가까워지면서 딱딱해진 알을 듬북 같은 해초에 잔뜩 산란해 놓는다. 바람이라도 불 양이면 파도에 밀려온 도루묵알이 거품일 듯 해변을 뒤덮는다. 알을 주워다 파는 일은 불과 얼마전까지 흔했던 해변 풍습. 아예 유리상자로 물 속을 들여다 보며 작업하는 ‘창경바리’로 해초에 붙은 알을 채취해 내다팔기도 했다. 이 모든 게 흘러간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조업 반경은 고성으로부터 속초, 양양, 강릉 등 강원 북부다. 물고기마다 제 집과 고향이 있듯 강원 북부가 도루묵의 원적지쯤 된다. 그 밑에서도 잡히기야 하지만 양도 적고, 맛도 덜하다. 속초항에서 만난 어부 노만선(52)씨는 “예전에는 개도 안 물어갔다.”고 회고한다.‘말짱 도루묵’이란 표현은 그만큼 흔하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으리라. 도루묵은 유자망(흘림그물)이나 기선저인망으로 잡는다. 그런데 강릉 사천진의 김덕중 어촌계장이 재미있는 증언을 했다. 산란을 위해 연안으로 몰려온 놈들을 ‘주벅’으로 잡았단다. 고문헌에 ‘주박(柱泊)’으로 표현되는 우리의 전통 정치망이 동해에서 확인되는 순간이다. 굵은 말뚝을 박고, 그물을 걸쳐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고기를 잡던 전통적인 서해안 어법이 동해안에서도 행해졌다는 새로운 발견. 사천진에서는 ‘물밑 주벅’이라고 하여 닻을 물밑에 고정시켜 그물을 놓았다. 대략 35년 전까지 행해지다 사라진 어법이니, 잊혀지기 전에 이를 기록해 둔다. 주벅으로 잡던 시절에는 부둣가에 가마니를 깔고 잡힌 도루묵을 산처럼 쌓아 뒀다. 오늘날은 기선저인망으로 100m가 넘는 바다 밑을 샅샅이 훑고 다니니 어족고갈은 불보듯 뻔하다. 도루묵 조리법은 의외로 다양하다. 찌개와 구이, 찜은 익히 알려져 있고, 살짝 말려서 볶기, 그리고 뼈째로 토막낸 도루묵회도 별미다. 도루묵회는 도시인들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먹어보니 담백하기 이를 데 없다. 통통하게 알이 밴 도루묵을 석쇠에 올려놓고 노릇노릇 구워 ‘톡톡’ 알터지는 소리를 음미하며 먹는 미각이야말로 겨울철에 동해를 찾아온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별미 중의 별미가 아닐까. 예전처럼 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획 어종인 도루묵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주는 이 없으니, 이른바 ‘고급 어종’이라는 무식한 선별 기준의 비객관성에 대하여 일침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 흔해서 대접 못 받는 ‘양미리’ 이곳의 또 다른 별미 양미리도 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속초 청초호변의 ‘삼숙이 생선구이집’을 찾았다. 주인장 이름이 삼숙이란다. 생선 장사 수십년에 ‘창피한 줄도 모르고’ 자신의 이름을 쓴 간판을 내걸었다. 그녀의 생선장사 스케줄을 보면 동해 어종의 생활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5월 초에 시작한 산오징어 장사가 추석 전까지 이어진다. 추석이 지나면서는 양미리 장사를 하고, 이어 11월20일을 전후해 양미리 성어기가 되면 서서히 도루묵이 잡히기 시작한다. 도루묵 장사는 양미리보다 일찍 시작해 일찍 끝난다. 도루묵 장사는 11월에 시작해 12월 중순이면 대충 끝나며 그 이후에 파는 것들은 모두 냉동 도루묵이다. 양미리 장사도 12월이면 ‘종을 치며’ 그 후로는 냉동 양미리를 말려서 시장에 낸다. 양미리가 제 대접을 못 받는 이유는 단 하나, 너무 흔하기 때문이다. 양미리는 동해안 전역에 세력을 펼친다. 그렇게 흔해선지 사람들은 양미리의 진가를 제대로 모른다. 말려서 볶거나 구워먹기도 하며, 날것으로 김치찌개를 끓이기도 한다. 그런데 양미리를 추어탕처럼 곱게 갈아서 탕으로 끓여먹는 조리법은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수입 미꾸라지탕을 둘러싼 논란이 많은 처지에 동해에서 지천으로 잡히는 100% 국내산 양미리탕에 아무도 관심을 돌리지 않는 게 이상하다. 필자가 음식 장사라면 반드시 염두에 둘 건강식 메뉴다. 확실히 우리는 우리 해산물에 관한 활용도와 이해도가 실망스러울 만큼 저급할 뿐더러 보수적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식해도 만들어 먹는다. 가자미식해처럼 좁쌀을 사용해 시원하게 담가 먹는다. 해산물 요리에 관한 고정관념을 이제는 깨끗이 버릴 일이다. ●양미리는 본디 ‘까나리’가 맞아 동해안 수산연구 전문가인 동해수산연구소의 양용수 박사는 우리들이 잘못 알고 있는 상식을 완전히 까뒤집는다. 그에 따르면 양미리는 본디 까나리가 맞다. 양미리는 동해안에서 붙인 이름일 뿐이다. 양미리가 까나리라면 그 누구도 선뜻 동의하기 어려우리라. 까나리답게 양미리는 여름잠을 잔다. 모래밭에 기어 들어가 시원한 여름잠을 즐기는 별난 족속이다. 이 즈음에는 먹이를 먹으려고 잠시 외출했다가 잡히곤 한다.‘발치기’라고 해서 해저의 모래바닥에 그물을 깐 뒤 잠수부가 들어가 발로 모래밭을 밟으면 양미리들이 놀라서 튀어나오는데 이걸 잡아들인다. 산란 전까지는 계속 모래 속에서 살다가 산란기가 가까워 ‘외출’이 시작되면 이 때부터는 ‘누인 그물’이 아니라 ‘세운 그물’로 잡아들인다. 물고기의 삶과 이에 대응하는 인간의 교묘한 머리싸움이 이처럼 어법까지 발달시켰으리라. 그 양미리 값은 얼마나 될까.20마리 1두름에 2000∼2500원 선이다.1마리에 200원꼴이니 이보다 값이 눅은 생선이 있을까. 전국에서 양미리가 가장 많이 건조되는 주문진의 덕장을 찾아가니 줄에 엮는 작업을 하는 아주머니들의 두름당 인건비가 고작 300원이란다. 손이 날랜 이가 200두름, 즉 하루에 4000여마리를 엮고서 6만원 정도를 받는다. 평균은 이보다 못해 고작 100여두름을 엮어 일당 3만원 정도를 번다. 한달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해봐야 100만원 벌이도 안된다. 낮은 양미리 가격이 이처럼 어촌의 저임금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양미리는 명태를 비롯한 각종 낚시미끼로 팔려 나간다. 양식장에서는 광어 등을 시장에 내기 전에 보신용으로 양미리를 먹인다. 그만큼 영양가가 높고 먹을거리로서도 종합적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증거이다. ●도루묵·양미리에서 평범 속의 진리 깨달아 한가한 ‘생선타령’이나 하려고 양미리와 도루묵에 얽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이 아니다.‘고급 어종’ 운운하며 그릇된 상식으로 해산물에 관한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들 밥상문화를 뒤집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말짱 도루묵’은 더 이상 없다. 마리당 불과 200원에 지나지 않는 양미리, 아니 동해까나리의 전방위적 품격과 용도에서 평범 속의 진리를 깨닫는다. 겨울 별미를 찾아 떠난 동해 여행에서 양미리와 도루묵을 살폈으니, 그 새로운 재발견의 기쁨을 어찌 홀로만 즐길 수 있으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였거늘, 관해의 즐거움 중에는 먹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니 하찮은 먹을거리 하나도 제대로 알고 먹을 일이다.
  • 80년 인생 회고록 펴낸 김광수 대한교과서 회장

    “문예월간지 ‘현대문학’을 50여년 동안 발행해 오면서 한번도 흑자를 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문단의 발전을 위한다는 신념 하나로 이끌어 왔지요.” ‘대한교과서’하면 우리나라 교과서 출판역사의 대명사처럼 통한다. 특히 최근에 ‘현대문학 600호’를 발행할 만큼 문단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60년대에는 현재 40∼50대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추억의 어린이 잡지 ‘새소년’을 발행했다. 대한교과서의 김광수(80) 회장은 최근 이같은 ‘역사’를 담은 회고록 ‘나의 뜻, 나의 길’(대한교과서刊)을 펴냈다. 그는 “원래는 회고록 발간을 생각하지 않았다.”면서 “하지만 현대문학 50년, 나이 팔순, 또 대한교과서 창립 60주년을 앞둔 상황에서 기록으로 남겨 달라는 주위의 권고가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고 피력했다. “6·25때 인민군에 의해 문을 닫았던 일, 부산에 피란 가 교과서를 찍어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전쟁 중에도 교육은 멈출 수가 없지요.” 그는 1925년 전북 무주군 무풍면 증산리 삭골(沙洞)마을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1938년 무풍공립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혼자서 ‘중학 강의록’을 공부하다가 가출, 서울로 올라왔다. 이때 우석(愚石) 김기오 선생을 만나 부자의 연을 맺었다. 대한교과서는 1948년 양아버지 우석에 의해 설립됐다. 김 회장도 이때 대한교과서 창립사원으로 참여했다.6·25로 서울이 함락되자 ‘대한교과서’ 기능이 중단됐고 김 회장은 의용군으로 끌려가던 중 가까스로 탈출, 위기를 모면했다. 이후 국민방위사관1기로 임관, 참전했으며 육군경리학교 보급장교로 제대했다.52년 해군 당국의 도움을 받아 부산에 교과서 공장시설을 세워 부활했다. 서울로 돌아온 창업자 우석은 54년 ‘현대문학사’를 설립한다.1961년 김 회장은 창업주의 뒤를 이어 대표이사 회장에 올랐다. 이어 ‘어문각’사장,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한국잡지발행인협회 이사장 등의 직함을 가졌다.64년에는 ‘새소년’을 창간했다. 당시 ‘새소년’은 어린이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는 출판 인생 외에 국회의원을 다섯 차례나 지내 정계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73년 무소속을 시작으로 15대 국회의원까지 5선의원을 지내면서 한국국민당 부총재, 자민련 부총재 등을 역임했다. “정치가에서 욕심을 훌훌 털어버리고 초심의 각오로 다시 대한교과서 자리에 돌아왔지요. 앞으로 대한교과서를 상장할 계획입니다. 이제 기반을 닦아 놓았으니 출판계를 리드하는 것은 후배들의 몫이지요.” 그는 “나이 80을 넘는 동안 출판과 정치라는 험난한 두 길 가운데 부끄러움과 오욕의 흔적을 남겨왔다.”면서 ‘요가수련’이 건강유지의 비결이라고 귀띔했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故현인 가요제 부산서 열린다

    부산출신 국민가수인 고 ‘현인’선생을 기리는 가요제가 부산에서 열린다. 한국연예인협회 석현(60) 이사장과 현인씨의 미망인 김미정(73)여사 등은 14일 부산시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현인가요제’를 부산에서 매년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연예인협회는 현인가요제를 전국 규모의 가요제로 열고 예선을 거쳐 본선에 입상한 참가자에게는 연예인 회원증을 교부할 방침이다. 연예인협회는 “전국에 중계방송하는 등 규모있게 치르기 위해서는 5억원 정도가 필요하다.”며 부산시의 예산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부산시는 올해는 가요제 예산이 미리 확보돼 있지 않은 만큼 8월1일부터 4일까지 열리는 ‘부산바다축제’의 폐막행사로서 송도해수욕장 앞 바다에 특설무대를 만들어 현인가요제를 개최할 방침이다. 시 관계자는 “내년부터 별도 조직위원회를 구성해 가요제 규모를 확대하겠다.”말했다. 고 현인 선생은 부산출생으로 경성제2고보(현 경복고교)와 일본 우에노음악학교(현 동경예술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1943년 악단 ‘신태양’을 조직해 중국 상하이에서 음악활동을 하다 1946년 귀국해 ‘신라의 달밤’과 ‘굳세어라 금순아’ 등 1000여곡을 발표했으며 최근 ‘20세기 부산을 빛낸 인물’에 선정됐다. 부산 영도다리에는 부산을 배경으로 피란시절의 애환을 그린 ‘굳세어라 금순아’노래와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43)‘마산아구찜’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43)‘마산아구찜’

    날씨가 쌀쌀해지고 있다. 겨울 기운이 느껴진다. 술꾼들은 퇴근길에 소주잔을 걸치면서 화끈한 안주거리를 찾기 마련이다. 여기에 아귀찜이 제격이다. 점심식사나 가족 회식에서도 인기다. 시뻘건 아귀찜에 밥을 비벼 먹거나 아삭아삭한 콩나물을 씹으면 없던 입맛도 돌아온다. 이 글의 방향을 짐작했겠지만, 결론부터 말한다면 본디 아귀는 ‘비료’ 정도로나 썼던 바닷물고기다.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흰살 생선, 즉 조기나 명태, 민어 등을 선호했다.‘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듯’ 못생긴 해물은 기피했다.‘몬도카네’처럼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것 같지만 한국인들의 수산물관은 보수적이며, 선택과 집중을 선호하는 형식을 보여 왔다. ●못생긴 아귀 처음엔 안먹고 버려 뱀장어도 일본의 ‘우나기’에서 전이됐으며, 예전에는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먹장어(꼼장어) 식용도 근래의 일. 복어도 독이 있어 다루기 까다롭다 하여 그대로 버렸다. 동해안 해장국의 별미인 토속어 ‘삼순이’도 아예 잡으려 들지 않았다. 남해안 어판장에 자주 등장하는 못생긴 물메기도 7∼8년 전까지는 잘 먹지 않다가 미용에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갑자기 수요가 폭증했다. 아귀도 못생겼으니 당연히 먹지 않는 어류 반열에 속했다.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먹을 때면 덤으로 내주던 복국이나 아귀탕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인들은 아직도 아귀를 먹지 않아 전량 한국으로 수출한다는 점.‘아직’이란 단서에 유의할 것이, 김치의 매운맛에 길들여진 일본 관광객들 사이에 서서히 아귀로 젓가락을 옮기는 이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개불도 징그럽다고 먹지 않다가 건강식으로 인기를 끌고 있음을 보면, 먹지 못하는 모든 해산물에 ‘아직’이란 단서를 붙여야 할 성싶다. 워낙 ‘원조타령’이 심한 사회이므로 아귀찜의 원조 역시 분간하기 어려우나 역시 마산이 아닐까. 마산 아귀찜과 군산 아귀찜이 쌍벽을 이루는 인상이지만 역시 원조는 마산 쪽이 맞는 것 같다. 마산에서는 아귀가 ‘아구’로 불린다.1980년대 초반부터 갑자기 매스컴을 타면서 수요가 급증했다. 제한적으로 잡히던 아귀 물량이 딸리자 2∼3미에 18만∼25만원을 호가했다. 그러다 중국 수입산이 쏟아지면서부터 가격이 안정을 찾게 됐다. 예전에는 서민, 정확히 말하면 하층민 음식이었다.1000∼2000원에 한 마리를 사서 무를 넣고 푹 끓여 온 식구가 배불리 먹었다. 겨울의 속풀이거나 빈속을 채워 주는 고기였다. 아귀찜이 마산에서 본격적으로 사회화되는 과정에는 한국전쟁이란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아귀의 문화사적 배경이라고나 할까. 우선 마산이란 항구도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많은 도시전문가들이 입에 침을 튀기면서 설명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절반’의 진실만을 담보한다. 뉴욕대 역사사회학 교수인 리처드 세넷이 ‘육체의 경험으로 풀어본 도시의 역사’란 부제가 달린 ‘살과 돌’(flesh and stone)에서 언급하였듯, 코를 자극한 냄새는 무엇이며, 어디서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차려 입는지, 언제 목욕을 했는지, 그러한 ‘도시의 육체’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면 항구도시들의 ‘육체’는 무엇일까. 역시나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먹을거리다. 우리는 도시와 음식의 기질론 혹은 풍토론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어디 가면 어느 집의 무엇이 맛이 있다.’라는 식의 음식점 순례기가 우리의 지적 수준이다. ●‘매운 음식’·‘화끈한 기질’ 궁합 맞아 아귀찜도 항구도시의 기질 풍토를 교묘하게 반영하고 있으니, 마산의 살아 있는 육체라고나 할까. 맵고 강력한 아귀찜같이 기질이 강한 음식은 음식궁합으로 볼 때 ‘태양’에 속한다. 마산이란 도시의 육체에서 아귀찜은 궁합이 대단히 잘 맞는다. 마산 자체가 한마디로 ‘화끈’한 곳이기 때문이다. 당대적 화끈함에 역사적 화끈함까지 가미돼 아귀찜 같은 먹을거리를 탄생시킨 것이다. 어느 항구치고 격동의 세월을 겪지 않은 곳이 있을까만 마산항은 변화 정도가 극심했다. 대충 손꼽아 보아도 몽골족이 주축인 원나라의 군사적 요충지, 왜구들의 주요 침입로, 임진왜란의 전투지, 개항장, 일본인 집단거류지, 미군 군수물자 하역항,4·19와 부마항쟁의 진원지, 마산수출자유지역과 창원공단 등 역사적 격변상만도 단숨에 세기 어려울 정도다. 규슈(九州)의 오랜 국제무역항 하카타(博多) 연안에는 장장 20㎞에 걸친 해안 성벽이 있다. 원나라의 침입에 대비해 가마쿠라 시대에 쌓았다고 하여 일명 원구방루(元寇防壘)라고 부르니, 그 진원지가 바로 마산이다. 세기의 대격돌이 마산에서 시작된 것이니, 역사적·운명적으로 태생부터 국제적이었다. 고려 충렬왕 때 4만 여원(麗元) 연합군이 일본 정벌에 나섰을 때 오늘의 마산인 합포를 출진기지로 삼았다. 규슈 북부 해안의 하카타만에 이르러 폭풍으로 말미암아 2회의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때부터 합포가 남해를 아우르는 전략 요충지임이 내외에 알려졌다. 마산항의 본류인 마산포는 조용한 어촌만은 아니었다. 조선 후기에 마산창이 설치되면서 차츰 커지기 시작했다. 시장이 번성하면서 수산물 반입이 활발해져 동해 원산, 서해 강경과 더불어 3대 수산물 집산항으로 손꼽혔다. 만기요람 재용편에 경상도 정기시장으로 오로지 창원 마산장 하나만을 들고 있을 정도다. 조선시대 이후 일제시대를 거치는 동안 남해안의 거제도와 통영·고성 등에서 잡힌 어류는 대개 마산항에 모였다. 구한말에 벌써 이곳에 30여호의 객상이 즐비했으니 그 번창함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3대 수산물 집산항 명성 1899년에 개항하면서 1905년부터 일본집단촌(속칭 지바촌)이 건설된다. 경찰서·재판소·형무소 등이 설치되고, 시가지는 혼마치(本町)·교마치(京町) 등 일본식으로 바뀌었다. 옛 사진을 보면 게다짝을 끌고 돌아다니는 일본인들이 많이 보인다. 일본식 집이 즐비하다. 미곡 적출항으로서 정미업, 조면업, 인쇄업, 조선, 철공, 제빙, 방적, 기타 제조업이 모두 성했다. 빼어난 자연적 기후조건과 양질의 쌀, 맑은 물이 주류와 장류에 적합해 일찍부터 양조산업이 시작됐으니, 마산의 명물 무학소주나 몽고간장 등이 여기에서 비롯됐다.1개 항구도시에 양조장이 20곳이나 되던 곳은 마산뿐이었다. 해방이 되자 이곳에 거주하던 6000여명의 일본인이 모두 돌아갔고 2만여명의 동포가 귀국했다. 이런 ‘인구교체’ 역시 마산의 독특한 변수가 됐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후방 병참기지였다. 소개령으로 시민들이 떠난 마산의 거리는 온통 카키색의 도시로 변해 있었다. 시가지가 온통 미군 일색이었고 마산 제1부두는 전쟁물자의 집산지였다. 한꺼번에 밀려온 피란민들로 전에 없던 특미가 생겨났다. 재래의 마산 특미라면 단연 ‘대구깡다구찜’과 ‘미더덕찜’이었다. 그물에 잡히면 재수없다는 속설 때문에 많은 아귀들이 구마산 선창가에 그대로 버려졌다. 그 아귀를 인근 농부들이 가져다가 비료로 사용했다. 이 천대받던 아귀가 피란민의 공짜 반찬거리로 변하면서 아귀를 말려서 각종 양념을 넣어만든 아귀찜이 탄생한 것이 아닐까. 수입산이 아닌 자연산 아귀는 마산 근해에서 ‘고데구리’로 훑어온다. 해저 밑바닥을 기면서 사는 저서류라 불법 어획도구인 ‘고데구리’가 보편적으로 사용돼 왔고, 어찌 보면 맛있는 아귀를 다량으로 먹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마산 시내에는 아예 아귀찜 골목이 따로 있다. 아귀찜은 이곳에서 아귀찜집을 경영하는 김삼연(57)씨의 ‘초가할매집’에서 출발했다. 나이 스물에 시집와 38여년 동안 아귀찜만 만들었다. 시어머니에게 전수받은 기술을 이제 며느리에게 물려주었다. 애초에는 두 집이었다. 과거에는 아귀를 무쳐 조림으로만 팔았다. 말린 아귀가 너무 딱딱해 여기에 콩나물을 푸짐하게 넣고 조선된장을 풀어 담백한 맛을 살려내고 여기에 맵싸한 고춧가루·콩나물이 궁합을 이뤄 오늘의 마산아귀찜이 탄생했다. 마산에서 다량 소비되면서 전국의 아귀가 마산항으로 모여들었다.‘아귀는 무조건 마산에 가야지만 팔 수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내장을 걷어내고 씻어서 태양볕에 20여일을 꼬득꼬득 말린다. 이때 1년치를 갈무리하는데, 겨울에 말려야지 여름에는 벌레가 생길 뿐더러 냄새가 나서 말리기가 적당하지 않다. 크기도 중간짜리라야 건조도 잘되고 살집이 말랑말랑해 먹기 좋다. 아귀는 탕, 수육, 해물볶음, 불고기전골, 불갈비, 해물찜 등으로 속속 조리법이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중심은 아귀찜. ●아귀 뱃속엔 온갖 생선이 가득 마산 어시장의 터줏대감 격인 권철주 보현수산 대표의 말을 빌리면 “아귀는 정말 ‘아귀’처럼 처먹는다.”뱃속을 따보면 온갖 생선이 수북하게 쏟아져 나온다. 이런 ‘속것’이 너무 많아 김삼연씨는 아예 ‘아귀속젓’을 개발하기도 했다. 갈치 전갱이 꽁치 오징어 장어 돔 도다리 등 아귀의 반을 차지하는 이 ‘속것’들을 버리기 아까워 그걸 모아 젓갈을 담근 것. 그는 “온갖 것이 다 들어 있으니 이 젓갈이 바로 동의보감”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마산 아귀찜은 국물이 걸쭉한 서울 것과는 맛도, 모양도 다르다. 잘 말린 아귀 냄새, 비린내를 없애는 조선된장, 통통하지 않게 기른 콩나물에다 태양초를 빻아 쓰되 매운 것과 덜 매운 것을 섞어 쓰며, 여기에 마산명물인 ‘진동 미더덕’을 곁다리로 넣어 마산 아귀의 오미(五味)를 이뤄낸다. 겨우내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서 눈을 맞혀야 제 맛이 든다는 말을 듣자니, 진부령 황태가 여느 북어와 맛이 다른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아귀찜 하나의 문화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데도 많은 지면이 필요하니, 우리 해산물 모두를 설명하자면 ‘천일야화’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는가.
  • [문학이 머문 풍경]현기영 ‘지상에 숟가락 하나’

    [문학이 머문 풍경]현기영 ‘지상에 숟가락 하나’

    현기영(玄基榮)의 자전적 장편소설인 ‘지상의 숟가락 하나’는 현기영만의 문학세계를 있게 한 그의 유·소년기의 총체다. 작가의 성장과정에서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상처깊은 곳을 서사구조로 엮은 이 책은 그가 4·3작가로, 저항작가로, 민족작가로 일컬어지게 된 것이 그의 유·소년기의 시대상황이나 성장배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의 고향 척박한 땅, 화산도 제주는 아득한 수평선으로 둘러싸인, 오래전부터 귀양섬으로, 외세 강점기에 수탈의 섬으로 천대받아온 오지 변방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질곡마다에서 민초들이 억압과 수탈에 맞서 분연히 들고 일어나 ‘이재수의 난’,‘해녀항일운동’,‘4·3항쟁’의 섬이기도 했다. 1941년 1월생인 그는 이 섬에서 해방기부터 6·25때까지의 격동기 파란을 몸소 겪으며 유·소년기를 보냈다. 특히 2만 5000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1947년 4·3당시는 일곱살 나이로 고향인 제주시 노형동 ‘함박이굴’에서 해변마을인 삼도2동 ‘무근성’ 외가댁으로 피란가야 했고 그가 직접 접한 봉화봉기, 가택수색, 토벌작전…, 그리고 ‘함박이굴’의 초토화와 살육 등이 그의 어린 눈에 여과없이 수렴되면서 후일 그의 작품세계의 근간이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작가는 소설 ‘지상‘에서 “고향마을의 초토화 장면은 검게 타버린 폐허를 배경으로 한 완벽한 구도의 목탄화로 내 의식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술회하면서 “인간의 경험, 상상력을 훨씬 능가해 버린 그 엄청난 살육과 방화를 놓고 어떻게 무자비하다, 잔인무도하다 하는 따위의 빈약한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라고 부연하고 있다. ●4·3작가, 저항작가로 그의 글쓰기는 70년대,80년대,90년대로 옮겨 오면서 유사하지만 각기 다른 고랑을 일군다.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아버지’가 당선되면서 등단한 그는 얼마 동안 현대 도시인의 좌절감 등을 일반화한 모더니즘적 경향을 보이다 78년 제주 4·3사건을 소재로 한 중편 ‘순이삼촌’을 발표하면서 저항작가로의 옷을 갈아입는다. 이 소설로 제주도 민중사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문제작가로 주목받아,‘필화’의 고통까지 겪었으나 결국 이 글은 1970년대 최고의 문제작으로 평가받으면서 향후 4·3작가로 자리매김하는 단초가 됐다. 그는 계속해서 ‘도령마루의 까마귀’‘해용 이야기’‘길’‘어떤 생애’ 등 4·3을 화두로 한 작품들을 잇달아 냈고 제주4·3연구소장과 제주사회문제협의회장 등을 역임하는 등 4·3과 관련한 사회활동도 왕성히 펼쳤다. 그의 제주 민중사에 대한 탐구정신은 80년대 들어서도 계속돼 ‘이재수의 난’을 다룬 장편 ‘변방에 우짓는 새’와 인간의 꿈이 역사의 힘 앞에 무참히 좌절되는 단편 ‘마지막 테우리’를 잇달아 발표했고 서사와 서정이 조화를 이룬 글 ‘지상에‘로 1989년 만해문학상,1994년 오영수문학상에 이어 1999년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현기영은 80년대부터 민족문학작가회의에 관계해 오다 지난해 2월 지금의 제11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으로 발탁됐다. ●개운치 않은 변화들 그래도 소설 ‘지상에‘는 휴전 이듬해 한라산 금족령이 풀릴 때까지 그가 여전히 해맑은 소년의 자리에 있었음을 그리고 있다. 밀기울범벅과 고구마를 식사 대용으로 삶아 먹는 궁핍 속에서도 오줌싸개였고,‘땜통’과 ‘똥깅이’라는 별명을 가진 개구쟁이였고, 신주머니를 곧잘 잃어버리는 철부지였고, 팽나무와 먹구슬나무를 사랑했던 순돌이였다. 이제 그의 생가가 있던 ‘함박이굴’은 4·3으로 불타 없어졌지만 고향 노형동은 제주 최고의 상권지로 우뚝 커졌고 그가 친구들과 벌거숭이로 물장구치던 병문천은 지금 말끔히 복개돼 왕복 5차선도로와 상가 주차장으로 변했다. 다이빙질을 하던 용연에서는 매년 음력 4월 보름 ‘용연야범 축제’가 열리고, 내년 2월까지는 동에서 서로 현수교식 구름다리도 놓아질 참이다. 친구들과 탄피 주우러 다녔던 도두봉까지의 현무암 해안길은 어느새 야간 조명시설까지 갖춘 해안도로로 단장돼 영화나 TV에 나올 정도로 세련된 카페촌으로 둔갑했다. 그러나 작가의 속내는 이런 치장들이 도저히 편하고 개운치 않다. 작가는 이 책에서 그 이유를 “아름다운 풍광의 배후에 아직도 진혼되지 않은 수만 원혼들이 음산한 기운으로 깃들어 있고, 그 검은 현무암지대가 그 시절의 초토화 불길에 타버린 숯더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제 나는 용두암 근처 현무암의 바닷가에서 부산스레 들락날락하는 호사한 관광객 무리를 밀어내고 거기에서 놀던 옛 아이들을 다시 등장시켜 놓아야 하겠다.”고 넋두리한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39)속초 아바이마을의 삶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39)속초 아바이마을의 삶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도 보고, 찾아도 봤던 그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피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나홀로 왔다.’던 무수한 그 ‘아바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속초시의 바닷가 마을 청호동의 이른바 ‘아바이마을’로 더 유명한 ‘함경도촌’을 찾아가면 그네들이 살아온 삶의 내력을 엿볼 수 있다. 속초에서 서울로 오자면 미시령을 넘게 마련인데, 그 고갯목에 차를 세우고 굽어보면 속초 시내와 동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왼쪽의 영랑호, 오른쪽의 청초호, 그 뒤편으로 동해가 배경막처럼 놓여져 산과 바다와 호수의 동네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토록 아름답던 청초호의 길이 1㎞, 너비 80여m 남짓한 백사장에 함경도 피란민들이 처음 피란선의 닻을 내렸다. 그럭저럭 살다보면 돌아갈 수 있으려니 생각했으나 영영 불귀의 몸이 되어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1세대 세상은 거의 막을 내렸고,2세대도 이제는 거의 중년을 넘겼다. 그렇게 50여년을 청초호 바닷가에 뿌리 내리고 살았다. 속초는 본디 자그마한 읍내였다. 속초면이 속초읍이 된 시점이 1942년, 해방 이후는 38선 이북에 포함되어 있었다. 설악산을 병풍처럼 끼고 있고, 석호가 그야말로 그림같이 펼쳐져서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관동팔경의 하나이다. 주민들은 어업보다 주로 농업에 종사했다.1930년대, 정어리떼가 청초호로 몰려들어 배들이 새까맣게 닻을 내렸을 때도 정작 속초배들은 별로 없었다. 전쟁은 중앙의 역사만이 아니라 지역사도 송두리째 바꿔 놓았으니 속초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업에 종사하는 피란민이 원주민보다 많아지면서 급속도로 어업 중심지로 바뀌었다. 종전 이후에도 연고를 찾아 몰려드는 연쇄 이동이 맞물렸다.‘일가 친척 없는 몸’들이 고향 사람을 찾아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5만여명이 배를 타거나 육로로 내려와 이곳에 여장을 풀었다. 선단을 이룬 이들은 청초호 모래톱에 배를 댔다. 육로로 내려온 이들은 학사평(지금의 공설운동장 쪽)에 ‘해방촌’을 꾸렸으나 차차 흩어져서 도시 속에 녹아들었다. 반면, 본디 어업에 종사하던 청호동 사람들은 강인한 단결력을 과시하며 지금껏 버티고 있는 중이다. ●쌀로 빚은 가자미식해·북청 사자놀이 일품 함경도, 그 중에서도 함경남도 사람들이 7할 정도 차지한다. 정평 이원 영흥 단천 흥원 신창 신포마을 등 청호동 집단취락명은 이네들이 내려와서도 응집력을 갖고 살아왔음을 웅변한다. 이 중에서도 단천과 신포마을이 헤게모니를 쥐고 살았다. 속초에는 지금도 함남도민회, 원산시민회, 함흥시민회, 북청군민회 등등 무수한 ‘월남 조직’이 있어 ‘피란민 도시’의 면모를 보인다. 이들이 석호의 모래톱에 불과한 청호동을 선택하게 된 동기는 무엇보다 국가 소유 해빈(海濱)인지라 무단 정착이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밥벌이 기술’인 어업을 지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분단기에 이북 어민들이 전국 해안에 뿌리를 내리면서 ‘어업의 장기지속성’을 보여준 사실에 대한 연구는 본격적으로 이뤄진 적이 없다. 그러나 전국을 돌아보면 해안 곳곳에 이들이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서해안 덕적도 진리포구는 황해도민이 집단 거주하며, 화성의 마산포같이 작은 포구에도 황해도촌이 존재한다. 인천시 화수부두에도 유별나게 황해도민이 많았으니, 김금화같은 무당들이 인천을 거점으로 배연신굿을 하는 토대도 바로 이곳이다. 전쟁때 선단을 통한 대대적인 피란과 정착이 이뤄졌음을 말해준다. 모진 해풍이 불어닥치는 낯선 바닷가에 당도하여 고생고생한 대목은 필설로 이루 말하기 어렵다. 한 마디로 분단의 비극이었다. 미군부대의 철조망 주변에 널린 레이션 박스를 주워 오고, 부서진 배 등을 엮어서 집이랄 것도 없는 집을 지었다. 겨울이 오면 흙을 발라서 흙집이 되었다. 구겨진 드럼통을 펴서 지붕을 얹기도 했고, 주변에 돌아다니는 모든 물건들을 주워 모아 청호동을 만들어 나갔다. 남해안의 여수, 거제 등으로 피란 갔던 이들, 경상도의 후포, 구룡포, 강원도의 양양, 대포 등에도 이들은 몰려 들었다. 나중에는 이른바 ‘반공포로’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이곳으로 찾아 들었다. 참으로 모진 세월이었다. 청호동에서도 모래톱 맨끝에 형성된 신포마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신포는 오늘날 북한 최대의 수산사업소가 있는 어업 전진기지이며, 일제시대에 함경도 어업의 최대 거점이었다. 한마디로 신포사람들은 동해안에서 가장 뛰어난 어민들이었으니, 이들의 저력이 모여 강원도 유수의 어항 속초를 만드는 힘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포는 남쪽으로 봉화반도가 뻗어 나왔고, 서쪽과 북쪽에 산이 있어 바람을 피하기 좋다.‘한국수산지’(1905)에 따르면, 호수 300, 인구 1360여명이었으며 명태 집산지로 이름 높았던 곳이다. 당시에 인구 1000명이 넘는 포구라면 상당한 규모다. 식민지로 접어들자 시가가 번창하며 기선 출입이 잦고 일본인 거주자가 증가했다. 건너편 북청으로 정기선이 다녔으며, 성진 원산 부산 등지로 연안 회항선도 다녔다. 1905년 당시에 이미 일본인 거주자는 수비대, 헌병대를 제외하고도 남자 31, 여자 23명이 살았으며, 직업도 무역상 기선업 잡화상 매약상 여인숙 음식점 과자상 우육상 등 다양했다. 신포 바로 앞의 마량도 출신인 박임학(79)옹의 증언.“북청군 신포읍 마량도가 고향이지요. 지금 경수로 만드는 곳까지 포함해 신포시가 되었어요. 신포 앞 섬, 거기가 내 고향 마량도지요. 신포 읍내에서 마량까지 수로로 10리 밖에 안되요. 연락선이 있었는데, 하루에 세번씩 다녔지요. 마량도는 12개 마을(리)로 되어 있었습니다. 소방서, 주재소, 그리고 국민학교도 있고,300여 호가 살았지요. 평지 대신 산이 많았고….” 지도를 펼쳐볼 필요가 있다. 신포와 홍원 사이의 마량도가 바로 코앞이다.12개의 마을이 형성될 정도의 크기이니 동해안에 섬이 없다는 우리들의 통념을 깰만 하다. 밑으로는 함흥이 있고, 함흥만 아래에 원산이 있어 천혜의 산란장이다. 이른바 한반도의 허리라고 하는 바로 그곳이다. 신포사람들은 청호동에 정착한 이래 한 시도 배를 떠나지 않았다. 함경도 명태잡이 기술이 이곳에 고스란히 전파되었다. 피란민을 통한 어업기술의 전파가 이루어진 것. 당연히 ‘아바이 말씨’와 음식도 함께 와 뿌리를 이어갔다. 덕분에 지금도 청호동 골목길에는 아바이순대를 비롯하여 함흥냉면 간판 등이 줄지어 서있다. 단천 출신으로 단천식당이란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윤복자(63)씨는 함경도 음식 중에서 해산물로 명란젓 창란젓 아가미젓 꽁치젓 메가리젓 오징어젓 등의 젓갈류를 꼽았는데, 그 중 가장 함경도적인 것으로 가자미식해(食)를 내세웠다. 생선을 소금에 절이면 염장어가 되고, 발효시키면 식해 또는 어장(魚醬)이 되는 것이니, 이런 유의 음식은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다. 생선식해는 이른바 ‘감주’식혜와는 다른 것이지만, 발효시킨다는 뿌리는 같다. 곡식과 생선을 섞어 발효시킨 것이 가자미식해이니, 동해안의 원래 주인공인 동예(東濊)나 발해인들이 바로 이 식해를 먹었을 것이다. 곡식과 생선을 버무려서 발효시켜 저장하는 기술은 선사시대 이래의 식생활이니 가자미식해는 한반도에 흔치않게 남아있는, 그 자체가 바로 살아있는 무형의 문화유산 아니겠는가. ●명태잡이 어업기술 고스란히 전파 사실 동해안에 가자미만큼 흔한 고기도 없다.“왜 식해를 만들때 수많은 생선 중에서 가자미를 쓰느냐.”는 질문에 “뼉다구가 날래 물르기(빨리 삭기) 때문”이란다. 덧붙여 “가재미 식해는 뼈가 물러야지 좋으니까.”라고 사족을 단다. 재미있는 것은 조밥 대신에 쌀밥을 쓴다는 점.“경상도 사람들이 조밥을 넣지, 여기서는 그리 안해요.”이런 습속은 다른 곳도 같아 강릉시 사천면 진리 일대 등 여타 강릉시 일대에서도 흰 쌀밥을 이용해 식해를 만든다. 조로 만드는 것과 비교해 맛이 어떠냐고 묻자 “조밥보다 쌀밥이 더 맛있어요. 예전에는 값도 쌀이 비쌌지요. 삼척 넘어가고 경상도 가니까 다 조밥 넣데요. 그러나 이 인근은 모두 쌀밥으로 해요.”우리가 알던 ‘조밥 가자미식해’와는 다르다. 반백년쯤 지나다보니 아바이들의 삶도 서서히 변해 갔다.2세대들은 강원도 원주민과 많이 결혼했으며,3세대들은 학교, 직장 문제 등으로 외지로 나가 사는 경우도 많아 ‘아바이마을’의 정체성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속초시는 낙후된 이 일대를 대대적으로 ‘개선’하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지금도 드라마 ‘가을동화’에 등장한 ‘갯배’라는 독특한 도항 수단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새 다리가 완공되면서 거대한 교각에 마을 경관이 눌린 꼴이 되고 말았다. ●취락지 보존 ‘아바이박물관’으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차피 2세,3세로 내려가면서 피가 섞이고, 함경도적 정체성도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청호동 바닷가 취락지를 보존해 ‘살아있는 아바이박물관’ 정도로 했으면 하는 희망이다. 분단시대의 박물관이자 분단의 균열 속에서도 고향의 응집력을 지니고 반백년을 살아온 그네들의 삶은 그 자체가 ‘역사자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양문화사적으로 그들의 어업기술사는 이북의 신포와 마량도 어업사를 고스란히 옮겨온 경우에 해당된다. 옛 사진첩에 1950년대의 북청사자놀이가 확인되니,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훨씬 이전부터 고향의 춤과 노래를 계속 이어왔다는 증거 아닌가. 쌀밥으로 빚은 가자미식해와 북청사자놀이의 호탕한 대륙적 음악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아바이 삶’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다. 시신을 화장하여 속초 바닷가에 뿌리면서 바닷물을 통해서라도 고향으로 되돌아가길 기원하는 아바이들이 존재하는 한, 청호동은 지켜지고, 또 살아 남으리라.
  • [이집이 맛있대] 주문진 선착장 인근 ‘어부촌’

    [이집이 맛있대] 주문진 선착장 인근 ‘어부촌’

    11월 제철음식중 별미로 추천할 만한 것 중의 하나가 도루묵이다.11,12월 두달동안 동해안에서 주로 잡히는 도루묵은 요즘이 산란철이다. 이때 잡히는 놈들은 하나같이 배가 불룩한데, 맛도 있고 먹을 것도 많다. 예전엔 ‘말짱 도루묵’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하찮은 생선으로 여겨졌지만 요즘은 어획량이 줄면서 값이 비싼 편. 더구나 도루묵 알이 백혈병 예방과 원폭 피해자들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돼 한동안 알배기는 맛보기 어려웠다. 도루묵이란 이름이 있게 된 이야기 하나. 조선조(고려 때란 설도 있음) 어느 임금이 외침을 피해 동해안으로 왔을 때 먹을 것이 궁하자 한 어부가 자신이 먹던 ‘묵’이란 생선을 바쳤다. 시장이 반찬이었는지 너무 맛있게 먹은 임금은 ‘은어’(銀魚)란 그럴듯한 이름까지 지어주고 돌아왔다. 이후 궁안에서 입맛이 없자 피란시절 맛있게 먹었던 ‘은어’를 가져오게 해 먹었는데 그 맛을 찾을 수 없어 ‘도로 묵이라 하여라’고 했고, 이후 도루묵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올해는 도루묵이 예년보다 많이 잡힌다는 소식이다. 가격도 주문진 등 동해안 어항에 가면 스무마리에 1만 5000원 정도 주면 그날 잡힌 싱싱한 도루묵을 살 수 있다. 도루묵은 대개 찌개나 조림, 구이를 해먹는다. 주문진 선착장 인근의 ‘어부촌’은 도루묵 요리 잘하기로 소문난 곳. 찌개는 시원하면서 담백한 맛이 특징이다. 무를 썰어넣고 한차례 끓인 뒤 도루묵과 쑥갓 등 몇가지 야채와 양념을 넣고 한번 더 끓인다. 도루묵 조림은 반쯤 건조시킨 도루묵을 말려 무와 고춧가루, 간장 등을 넣고 자작하게 조려서 만든다. 입맛 없을 때 밥반찬으로 그만이다. 구이는 술안주로 그만이다. 갓 잡아올린 도루묵에 왕소금을 뿌려 석쇠에 노릇노릇하게 구워낸다. 익으면서 살집이 터지며 알이 비져나온다. 고소한 알 맛도 일품이지만 수컷에서 터져나오는 유백색의 곤지(도루묵 정소)의 는질거리는 맛을 좋아하는 이도 많다. 서울 광화문 인근에도 도루묵을 내는 집이 있다. 교보빌딩 뒷길을 가다보면 ‘영덕대게집’(02-3210-1379)이란 간판이 붙어 있는데, 이달부터 과메기와 함께 도루묵을 낸다. 강릉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36)꼼장어같은 생명력, 자갈치 아지매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36)꼼장어같은 생명력, 자갈치 아지매

    ●바다서 나는 것은 없는 것이 없다 꼼장어가 꿈틀거린다. 파껍질을 벗겨내듯 훌러덩 가죽을 벗겨내자 시뻘건 속살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러나 꼼장어는 여전히 살아있다. 징그러운 생명력이다. 꼼장어만큼이나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시장판이 있다. 바로 부산의 자갈치다. 부산을 찾은 외지인이 자갈치를 건너뛰어 갔다면 부산에서 ‘헛것’만 보고간 셈이다. 광복과 전쟁, 격동의 도가니는 항도 부산에 자갈치라는 들끓는 용광로 하나를 탄생시켰다. 자갈이 많아 자갈치로 불린 이곳의 일제시대 지명은 남빈정. 옛 사진을 보니 해변에서 해수욕들을 즐기고 있다. 자갈치시장이 예전 파도에 닳아 예쁜 자갈이 넓게 깔린 청정해역이었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광복이 되자 일본 귀환 동포들이 먹고 살기 위해 이 자갈밭에 몰려들어 좌판을 놓기 시작했다. 여기에 한국전쟁 때 팔도의 피란민들이 가세했다. 본디 자갈치는 남포동 영도다리 밑에 길게 늘어진 갯가의 부산 어패류처리장을 이르던 말이다. 이곳 가건물들을 철거,1974년에 재개장했으나 지난 85년 대화재로 모두 소실돼 이듬해 재개장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시장이 확대되면서 신동아어시장, 건어물시장, 노점 등을 모두 아우르게 됐다. 이곳은 다른 어시장과 다르다. 수산물에 관한 한 종합백과사전에 준하는 집합처이며, 역사적 뿌리와 양적 규모로 볼 때도 일본 도쿄의 쓰키지(築地)어시장과 더불어 가히 세계적 수준이다. 해마다 열리는 자갈치축제의 슬로건인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처럼 연신 손님을 불러대는 활기찬 목소리, 퍼덕이는 물고기로 엄청난 활력을 자랑하는 이만한 시장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그 자갈치를 제대로 알자면 두말할 것 없이 ‘자갈치아지매’들부터 만나야 한다. ‘자갈치아지매봉사단’을 이끌고 있는 주순자(58)씨를 만났다. 아지매는 1970년 10월의 시린 새벽을 34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정확히 기억한다.‘반찬값이라도 벌려고’ 새벽에 자갈치시장에 나섰다. 좌판을 벌여놓고도 아는 사람을 만날까 두려워 고개를 숙이고 반년간 장사를 했다. 그러다 장사에 재미가 붙자 ‘안면몰수’하고 팔을 걷어붙였다. 젊은 새댁은 그렇게 서서히 자갈치아지매로 변신해 갔다.17년 전에 암으로 남편과 사별하고도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듬직하게 키워냈다. 무려 34년간 외길로 꼼장어 한 종류만 취급해 와 자갈치시장에서도 알아주는 ‘꼼장어박사’가 됐다. ●자갈치아지매 3000명 ‘부산의 힘’ “어패류조합이 있는 원래의 자갈치시장에만 우리 봉사단 회원이 300여명 있지요. 바깥까지 전부 치면 3000여명이 활동하고 있습니다.”‘아지매’만 3000명이면 엄청난 숫자 아닌가. 부산의 힘은 ‘자갈치아지매’들에게서 나온다는 말이 낭설이 아니다. 이 아지매들은 전부 단일 품목만 장사한다. 전복, 갈치 등 세분화되어 전문화된 도매시장을 꾸리고 있어 자기 분야에 관한 한 모두가 ‘박사’들이다. 자정 무렵에 출근하거나 새벽4시에 출근하는 등 일과는 각자 일에 따라 다르게 돌아간다. 주씨는 20여년간 새벽 3∼4시에 출근, 밤 12시를 넘겨 집으로 들어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고작 3∼4시간 자고 집에서 나와야 하는 고달픈 일인지라 새벽잠 자보는 게 소원이었다. 십여년전부터 ‘단호하게’ 출근 시간을 아침으로 정해 삶의 패턴을 바꾸었단다. 자갈치시장의 ‘백수’로 노닐다가 하루 아침에 대형 유통회사의 후계자가 된 ‘필승’의 인생역전을 그린 KBS드라마 ‘오 필승 봉순영’같은 이야기는 ‘자갈치아지매’들과는 사실 별 관계가 없다. 조반석죽(朝飯夕粥)으로 끼니를 때우며 엄동설한에도 길거리에 좌판을 벌여놓고 밤낮없이 일하는 아지매들에게 무슨 일확천금이 있겠는가. ‘올빼미’ 도시민들이 한창 잠에 취해 있을 꼭두새벽에 어판장의 불이 환하게 켜진다. 불법으로 잡는 ‘고데구리’배들도 슬며시 뱃머리를 들이밀고는 ‘서민적이면서도 재미있는’ 어획물들을 잔뜩 쏟아낸다. 공식 위판은 오전 6시. 동중국해 같은 먼 바다에서 들어오는 고등어선망(旋網) 어판이 가장 규모가 크다. 바다에서 나는 것은 모두 자갈치에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지금은 산지직송하지만 예전에는 일단 모든 어패류가 자갈치에 집결했다가 소비지로 나갔다. ●“연줄·돈줄 좋아야” 신용 떨어지면 ‘헛방’ 시장판을 거닐다 보면 스물쯤 되어보이는 젊은 층부터 팔순까지 아지매들의 층도 넓다. 그래도 주축은 30∼40대. 부모에게 장사터와 수완을 물려받은 이들이 절반을 넘는데, 타인들은 고된 장사 일을 배겨내질 못해 물려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단다. 수산물 거래란 ‘물고 들어오는 것’이라 판로, 물건공급 등에서 ‘연줄이 좋고 돈줄이 좋아야’ 한다. 이곳에서는 신용 떨어지면 ‘헛방’이다. 주문을 받으면 어떤 식으로든 구해 줘야 한다. 가게 임대료도 위치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IMF 이후에는 자갈치 경기도 ‘영 아니다’고 한다. ‘꼼장어아지매’에게 청해 ‘꼼장어 특강’을 받았다. 전문 수산학자의 수준을 뛰어 넘는다. 자갈치의 명물인 꼼장어는 제주도 남쪽이나 일본 해역에 많다. 대마도 가까운 수심 80∼130m의 바다는 물론 멀리 도쿄만의 수심이 300여m나 되는 곳에도 있다.100여t급 어선이 출어하여 통발로 잡아 활어로 들여온다. 꼼장어는 먹장어, 입이 뾰족한 하모는 갯장어, 아나고는 붕장어, 뱀장어는 민물장어를 말한다. 꼼장어는 상어 가오리 홍어 등과 함께 하등동물인 연골어류로 분류한다. 반면에 붕장어, 갯장어, 뱀장어는 뼈가 있는 경골어류. 번식률이 낮고 자원관리도 잘 안된다. 펄에 살다가 다른 동물의 몸에 상처를 내서 살을 녹여 뜯어먹는 흡착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양식 뱀장어와 달리 양식 꼼장어는 없기 때문에 서서히 가격차가 좁혀져서 뱀장어 가격을 능가할 판이다. 꼼장어는 양념구이나 소금구이, 찜, 회로 먹는다. 꼼장어도 처음에는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그랬던 꼼장어가 부두노동자들이 피워놓은 화톳불에 집어던져 놨다가 꺼내 껍질을 벗겨 먹으면서 지금같은 먹을거리가 됐다. 일상적으로 먹기 시작한지는 10여년 전에 불과하다. 기장에는 유명한 ‘짚불꼼장어집’도 있어 지푸라기 태운 재로 꼼장어를 구워내고 있다. 일본인들은 ‘아나고’나 ‘하모’, 특히 ‘우나기’는 좋아하지만 꼼장어는 거의 먹지 않는다. 우리가 아귀찜 등으로 즐겨먹는 아귀도 아예 먹지 않는다. 그래서 아귀와 꼼장어는 전량 한국 수출품이다. ●美시애틀 꼼장어 우리것과 맛 비슷 꼼장어는 자연산이라 늘 물건이 달린다. 외국에서도 꽤 많은 양이 들어오는데 주씨의 노련한 입맛으로는 캐나다에 가까운 미국 시애틀 근방의 꼼장어가 우리와 맛이 비슷하단다. 꼼장어의 본디 집산지는 부산과 충무. 최근에는 베트남 것도 들어오는데 맛이 없고, 일본산은 큰 것만 골라서 들여오므로 맛은 좋은 대신 값이 비싸다. 본디 기장에서도 동해로 8∼9시간 가량을 배타고 나가 3일씩 조업하는 식으로 많은 꼼장어를 잡아 들였으나 이렇게 7∼8년을 남획하다 보니 아예 씨가 마를 지경에 이르러 이제는 거의 잡히지도 않는다. 어류전문가 고정락(국립수산과학원) 박사의 안내로 시장 나들이에 나섰다. 전복 소라 고둥 개조개 가리비 키조개 재첩 대합 꼬막 피조개 굴 등의 패류, 김 미역 다시마 파래 돌가사리 고장초 갈래곰보 꼬시래기 톳 쇠미역 등의 해조류, 고등어 방어 문어 연어 돔 물메기 아귀 갈치 장어 개불 새우 해삼 멍게 미더덕 우럭 광어 멸치 복어 주꾸미 한치 게 가오리 바닷가재 등이 좌판과 수족관마다 빼곡하다. 이곳을 유심히 지켜보면 우리 수산물의 흥망성쇠가 보인다. 예컨대 자갈치시장에서는 맛조개를 볼 수가 없다. 본래는 부산 근역에도 맛조개가 많았으나 매립 등으로 모래가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바다생물 공부를 하려면 도감을 찾을 필요도 없이 자갈치시장을 돌아다니면 된다. ●지글지글 장어구이에 소주한잔, 세상시름 싹~ 명성에 걸맞게 먹을거리가 풍성하여 곳곳에 난전이다. 횟감, 구이, 찜 등이 지천이다. 그야말로 ‘그 옛날 50년대식’으로 연탄불에 석쇠 올리고 장어를 구워파는 좌판에 앉아 소주 한잔을 곁들이니 싼 가격에 푸짐한 인정이 절로 느껴진다. 고 박사가 재미있는 곳으로 잡아끈다.“예전에는 잡히지 않던 남방산 참다랑어가 잡히고 있어요. 수온 1도 차이가 물고기에게는 엄청난 변화지요. 한반도를 둘러싼 해역의 아열대화가 흔치 않던 물고기들을 자갈치시장에 부려놓고 있어요.”정말 좌판 나무상자에 참다랑어가 그득하다. 참다랑어는 북방 참다랑어와 남방 참다랑어가 있는데, 주로 고등어선망에 잡힌다.1∼2m짜리 1마리 위판가격이 무려 1200만원을 호가한다.1척당 5마리까지 잡고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한번 출어에 5000만∼6000만원은 거뜬하다. 참다랑어를 잡으러 대마도로 출어한다. 참다랑어는 맛이 다르다. 살 속에 기름이 점점이 박힌 게 마치 꽃등심을 보는 듯하다. 전량 일본으로 나간다. 사실 우리는 캔으로 먹는 가다랑어, 황다랑어를 참치의 모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참다랑어는 이런 것과는 맛과 격조에서 비할 바가 아니다. 10여년 전에 사라진 ‘쥐치’도 보인다. 고 박사는 “남획으로 사라졌던 쥐치들이 중국이나 일본, 베트남산이 수입되는 동안 다시 살아나고 있다.”고 한다. 수입 수산물의 양적 확대가 자연보호에 일조하는 또 다른 측면도 있다는 설명이다. 펄펄 뛰는 생선만큼이나 활력있는 자갈치아지매들의 은근과 끈기야말로 한국인의 저력 그 자체가 아닐까. 그 생활 근거지가 번성하려면 물고기가 번성해야만 한다.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자율어업을 강조하고 있다. 어민들 스스로 자제하는 자율어업만이 자갈치시장의 종다양성을 보장하는 길이다.‘없는 것이 없다.’는 자갈치시장의 좌판에 놓인 어물들을 10년,100년 뒤에도 보려면 종다양성을 지켜내겠다는 우리의 인식이 보다 단단해져야 하지 않을까.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34)18년만의 시화호 외출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34)18년만의 시화호 외출

    최후를 목격하는 일처럼 불행한 경우가 있을까. 낡은 사진첩과 답사노트를 뒤지면서 시계바늘을 18년 전으로 되돌려본다. 시화호가 망가지기 직전을 목격하는 자리에 서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시에 찍었던 사진을 사회적으로 공개할 의무감을 느낀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틈만 나면 시화호에 가서 살았다. 당시에는 시화호란 명칭도 없었고 그저 화성이나 안산 앞바다로 일명 ‘반월만’이었다. 물론 갯벌을 둘러싼 환경운동이나 갯벌환경에 관한 인식조차 공론화되지 않던 시절.1987년 6월10일, 역사적인 시화호 방조제공사가 시작되었다. 엄습해오는 예감이라고나 할까. 시화호 내의 음도나 형도, 어도, 아니면 화성의 송산면이나 서신면, 우정면 등의 마을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면서 민중생활사의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흔적없이 사라진 계명산 봉화대 저울섬이라 불렀던 형도는 물이 썰면 송산면 독지리 쪽에서 30여분만에 쉽게 걸어들어갈 수 있었다. 독지리 사람들은 봄에는 가무락·동죽·대합·피조개·소라·낙지를 잡고, 여름에는 맛, 가을에는 낙지·쭈꾸미 등을 채취하였다. 물고기는 숭어·농어·민어·새우·꽃게·전어를 잡았다.1988년, 독지리 사람들은 보상 문제에 골몰하였다. 오래 살아온 1등급은 호당 900여만원, 분가한 이들은 2등급으로 호당 850만원, 심지어 최저 100만원 정도를 받는 이도 있었다. 배 보상도 이루어져 작은 배는 서신면의 용두리, 궁평리 쪽으로 팔려나갔으며, 큰 배는 소래포구로 팔렸다. 형도에는 30여가구 120여명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낙지와 바지락·굴·피조개·숭어, 새우, 농어 등을 잡았다. 본디 어부들의 살막만 있던 무인도였는데 기미년(1919) 만세운동으로 쫓겨온 이들이 정착하여 어업에 종사하다가 한국전쟁 이후에 피란민이 밀려들어와 마을이 커졌다. 형도 복판의 계명산을 허물어 바지선으로 돌을 실어날라 방조제를 막았다. 그래서 형도 동쪽 해변에는 중동에서 퇴직한 중장비들이 대체 일감을 찾아 빼꼭하게 들어차 있었다. 계명산 정상을 올라가니 봉화를 올리던 석축봉화대가 완형으로 보존되어 있었다. 계명산을 신성한 신으로 모시고 있었으며, 봉화대 밑에는 바위가 겹쳐진 동굴이 있어 이 역시 신성시되었다. 마고할매가 쌓은 봉화대라고 했다. 동굴은 비단실 열꾸러미를 넣어도 바닥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고 했다. 호기심이 동하여 동전을 던져보았더니 실제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관해기’를 쓰기 위하여 다시 찾았을 때, 동굴도 없어졌으며 봉화대도 사라졌다. 쉽게 말하여, 문화유산을 깔아뭉갠 것. 음도는 형도와 달라 지명유래처럼 소가 누워 있듯 나지막한 섬이다. 파평 윤씨가 사화 때 역적으로 몰려서 낙향하여 개척한 섬으로 알려져 있다. 인구밀도가 높아서 160여명이 살고 있었으며 어업이 주종이었다. 섬 북쪽 선착장에서 뱃길로 안산시 사리포구쪽으로 빠지거나 화성의 독지리와 고정리 사이에 위치한 목섬을 거쳐서 걸어들어갔다. 형도 가는 길과 달리 음도는 멀어서 무려 한 시간여를 걸었다. 물 때를 잘못 맞추면 걸어가다가 조류에 휩쓸려 죽는 이도 많았던 섬이다. 갯벌을 걸어가면서 굴따는 ‘자세’로 지천으로 널린 굴을 까먹으면서 지루함을 달랬다. 음도 사람들은 섬 정상의 숲속에 소당이라 부르는 신당을 모셨다. 조기잡이의 신인 임경업 장군, 각시, 소댕애기씨, 말구중 등 무속신을 모시고 있었다. 선착장 갯가에는 당나무가 서있고 바위가 쌓인 곳은 군웅당이라고 했다. 고정리 쪽 갯가의 돌출바위는 각시당(일명 나락부리당)이라 불렀다. 밀물 때는 보이지 않고 썰물에만 모양이 나타나는 각시당은 갯벌 복판에 서있어 갯벌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지켜준다고 하였다.18년 뒤의 음도에도 여전히 신당 건물은 숲속에 남아 있다. 우거진 가시덤불을 헤치고 다시금 신당문을 여니 그림들은 간곳이 없다. 찾아온 길손에게 낙지를 거저 주면서 연신 술잔을 권하던 어민들도 사라지고 쥐죽은 듯 고요하다. 옛사람들이 일부 살기는 하지만 예전의 떠들썩함은 찾을 길이 없다. 초등학교를 찾아가니 아직도 건물은 의연한데 주인 잃은 그네는 줄이 끊어진 채로 시간이 멈춰섰다. 마산포에서 걸어들어가던 어도는 음도나 형도와 달리 당시에도 시멘트 포장이었다. 마산포구에는 횟집이 번성하고 있었고 물이 나면 쉽게 어도로 들어갔다. 포도밭을 지나 언덕배기를 내려가면 어도 가는 길목의 해변 초입에 해안초소가 있고 터주가리처럼 생긴 신당이 바위 위에 모셔져 있었다. 고포리의 마산포는 반월만의 어업전진기지로서 형도·어도·선감도·탄도·불도와 연계되었다. 일제시대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인천 가는 연락선이 대부도와 영흥도를 거쳐서 다녔다. 따라서 대부도 사람들은 마산포를 거쳐서 사강장을 보았으며, 이곳의 생활권도 뱃길로 인천과 서울로 이어졌다. 이제 대부도와 영흥도는 시화호로 연결되어 4차선 도로로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고포리 어촌계는 당시에 224호에 도합 1000여명에 달하는 조합원을 거느리는 대단위 조직이었다. 고포리의 굴은 알이 작은 대신에 맛이 뛰어났다. 갯벌에서는 맛이 지천으로 잡히고 있었고, 봄·가을에는 숭어, 여름에는 농어, 그 외에 꽃게와 게장용 박하지가 많이 잡혔다. 오랜만에 찾아가본 시화호는 정말이지 예전이 아니었다. 상전벽해는 이를두고 말함이렷다.‘남양인천’으로 불릴 정도로 큰 외항이었던 비봉면 유포리(일명 버들무지)는 예전에는 남양관아로 연결되던 중요한 포구였다.1960년대까지는 조기잡이 중선배가 있어 연근해어업을 다녔다. 가리맛의 주생산지였으나 건너편에 반월공단이 들어서면서 어업은 일찍이 막을 내렸다. 우정면 호곡리를 들어서니 예전에 없던 어시장이 들어섰다. 호곡리는 범아지라 불렀으며 바닷가를 백년거지라 했다.‘백년을 거처할 수 있는 좋은 곳’이라는 뜻. 범아지의 바닷가로 돌출한 산에는 당할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그런데 백년거지는커녕 화옹호에 가려졌다. 수산물이 어획되지 않는 동네에 웬 어시장일까. 거개가 수입산이나 외지에서 들여온다는 솔직한 답변이다. ●물고기 쫓겨난 시화호는 사막일 뿐 물새가 노닐던 해변이 갈대밭으로 덮이면서 아예 ‘우음도 갈대축제, 갈대보러 오세요’ 그런 글이 인터넷에 떠있다. 해초 대신에 갈대라! 문전옥답인 바다밭은 갈대밭으로 변하고, 아직도 죽은 조개껍질들이 하얗게 뒤덮고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갯벌에 관한 한 한국사회의 인식은 지난 20여년간 변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이다. 시화호 출신 해양생태학자로서 국회로 진출한 제종길 의원은,“갯벌문제는 간단히 보면 해양생태 보존과 개발론의 싸움이지만, 지역감정은 물론이고 지역정치를 포함한 한국사회의 총체적 문제점들이 모조리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풀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새만금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고 시화호도 끝나지 않았다. 시화호가 미완의 장인데 바로 코밑에서 화옹호를 기어이 막았다. 세인들은 간척의 문제점은 인정하면서도 갯벌문제만 나오면 이제는 지겨워한다.‘듣기 좋은 노래도 자주 들으면 지겹다.’(歌曲雖艶 恒廳斯厭)는데 불길한 예언만 쏟아져나오니 아무리 취지가 좋은들 약발이 덜 먹힌다. 간척론자들은 호재를 부른다. 결코 사회 공공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자원공사를 비롯한 간척주도집단의 ‘밥벌이’를 위해서 간척이 계속되고 있다는 주장은 대단히 설득력 있다. 문제점 투성이인지라 종합성적이 낙제점 이하인데도 책임을 지는 이는 아무도 없다. 잘못한 이들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불감증사회’답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나름대로 생태계가 되살아나고 물고기도 돌아오고 심지어 돌고래까지 돌아오고 있다는 밑도끝도 없는 낭설이 진실처럼 떠돌기도 한다. 시화호에서 돌아오기 전, 예전에 늘 드나들던 송산면 옛바닷가로 나갔다. 갯벌로 가던 언덕배기를 넘자 한가로운 오솔길 대신에 신작로가 나타났고 조개를 캐던 갯벌터에 농구골대도 들어섰다. 배는 사라지고 연습용 경비행기들이 마중한다. 물고기가 부려지던 선착장은 흉물스럽게 콘크리트더미만을 남기고 있고 죽어버린 따개비만이 ‘여기가 예전에는 잘나가던 포구였소.’라는 무언의 항거를 하는 듯하다. 물고기가 쫓겨난 시화호는 사막일 뿐이다. 해수유통이 되면서 한결 나아졌고, 온갖 철새들이 몰려오고, 옛갯벌은 갈대밭이 되어 야생동물의 보고로 변하고 있으며, 공룡알들이 발견되었다고 아우성이지만 어찌 이토록 무정하게 ‘무단가출’했던 오염된 바다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으랴. 해결책은? ‘무식과격’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동안 투자한 그 모든 것이 아깝더라도 눈 딱감고 방조제를 허무는 길 뿐이다. ●새만금 운명도 시화호의 전철 못벗어날듯 오랜만의 시화호 외출에서 느낀 소감이 이러하니, 현재 진행되는 새만금의 운명 역시 시화호의 전철에서 한치도 못 벗어날 것 같다. 과거를 거울 삼아 오늘의 현실에 살리자는 감고계금(鑑古戒金)의 전범이 시화호일진대, 새만금은 시화호에서 충분히 배웠음에도 아직도 수업료가 부족한 것일까. 성호 이익은 ‘관가에 일이 없으면 촌동네도 조용하다.’(公府無事 村巷方安)고 하였다. 관청에서 불필요한 간척 같은 일을 벌이지 않으면 살 만하다는 뜻이거니와,‘지도가 바뀐다.’‘5000만평 땅을 건지다.’ 등등으로 국민을 현혹하면서 8000억원 이상의 돈을 들이고도 건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국민대사기극’, 시화호에 해당되는 말이 아닌가싶다.
  • [부동산 in]수도권 전철 개통 오산 호재

    [부동산 in]수도권 전철 개통 오산 호재

    경기도 오산지역이 각종 개발 호재로 지역 발전에 가속이 붙으면서 아파트 분양 물량이 관심을 끌고 있다. 부동산포털 닥터아파트(www.DrApt.com)에 따르면 오산지역에서 연내 분양예정인 아파트는 3곳,1805가구에 달한다. 오산은 미군부대 이전 및 국제평화 신도시 건설에 따라 생활편의시설의 대단위 유입이 예상된다.파급효과가 가장 클 경부선 병점∼천안간 복복선 공사도 현재 공정률 95%여서 올해말이나 내년초쯤 개통되면 전철로 서울 출퇴근이 대중화된다. 오산에 대한 수요자들의 높은 관심을 입증하듯,대림산업이 현재 분양중에 있는 오산원동 e-편한세상은 2368가구 모집에 총 3568건이 청약접수,1.5대 1로 마감됐다.사전예약자도 3600여명에 달했다. 분양예정인 단지는 오산 고현 현대아이파크 32∼40평형 667가구,오산 누읍 이수브라운스톤 24∼45평형 602가구,오산 양산 쌍용스윗닷홈 32평형 536가구 등 총 1805가구.오산 원동 푸르지오,오산 대동타워피란체 등은 선착순 분양중이다. ●고현 현대아이파크 현대산업개발은 오산시 고현동에 32∼40평형 667가구를 12월중 선보일 예정이다.오산 인터체인지(IC)에 인접해 서울과 수원,화성 등 주변지역으로의 진출입이 쉽다. 특히 병점∼천안간 경부선 복복선전철이 개통되면 교통망은 더욱 편리해질 전망이다.원동초등,성호중,성호고,운암고 등이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고,오산대,한신대 등이 인접해 있어 학군이 양호한 편이다. ●양산 쌍용스윗닷홈 쌍용건설은 오산시 양산동 일대에 32평형 536가구를 12월중에 모두 일반 분양한다.갤러리아,뉴코아,킴스클럽,농수산물 시장 등이 인접해 있고 수원의 생활기반시설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는 수원 생활권이다.단지 주위에 한신초등학교와 한신대학교가 위치해 있어 교육여건도 좋다. ●누읍 이수 브라운스톤 이수건설이 오산시 누읍동 일대에 이수브라운스톤 24∼45평형 602가구를 분양한다.분양시기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1번 국도,오산IC 등이 가까워 고속도로 진입이 쉽다.병점∼천안간 복복선전철 오산역(2005년 초 개통예정)도 걸어서 이용이 가능하다. 단지 인근에 오산초등,신설초등이 있어 걸어서 통학 가능하며 오산중,오산고,오산대학 및 수원지역 대학들이 인접해있다.롯데마트와 오산시청,서울종합병원,오산체육공원 등이 가깝다. ●대우 원동·대동 오산동 선착순 분양 대우건설이 오산 원동 푸르지오 32평형 839가구 가운데 10여 가구를 선착순 분양하고 있다.경부고속도로 오산IC 바로 옆에 위치해 경부고속도로 및 1번국도 이용이 쉽다.인근에 경부선 복복선전철 오산역이 개통될 예정이다.평당 분양가가 550만원선으로 동탄신도시보다 약 180만원 싸다.2005년 8월 입주 가능하며,계약금 10%에 중도금 4회 까지는 잔금으로 이월해 준다.나머지 5,6회는 무이자 융자를 해주고 있다. 대동건설이 오산시 오산동에 짓고 있는 주상복합 대동타워피렌체 12∼37평형 169가구 가운데 12평형,25평형 30여 가구를 선착순 분양하고 있다. 내년 초 개통예정인 경부선 복복선 전철이 걸어서 7분여 거리인 오산역을 경유하고 동탄신도시까지 차로 5분 거리다.롯데마트 및 종합시장이 인접해 있고 초·중·고교도 걸어서 5분 가량 걸린다. 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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