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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마당] 평양냉면/신동호 시인

    [문화마당] 평양냉면/신동호 시인

    스승을 모시고 냉면 여행을 떠났다. 경기 가평에서 양평으로, 다시 강원 평창을 거쳐 경주까지. 메밀밭을 지나면 해바라기가 뙤약볕 아래에서 허리를 곧추세웠고 굽이굽이 산길에는 아카시아 향내가 자꾸 추억 속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한여름 아버지는 고사리손을 잡고 냉면집을 찾았다. 그 밍밍한 맛이 이제야 가슴에 박혀온다. 가끔 우리네 삶도 거친 메밀을 감싼 육수처럼 투명해지고 싶었을까. 스승의 뿌리는 평양, 한때는 버드나무가 많다 해서 유경이라 불리던 곳의 안골. 안골은 만경대 부근으로 북쪽 사람들은 그곳을 혁명유적지로 잘 관리하고 있다. 스승은 양평의 막국수 집에서 ‘다대기’를 건져낸다. 물 위에 떠 흘러 다니는 부레옥잠. 스승은 땅 한 평, 집 한 채 마련할 수 없었던 실향의 마음을 이에 비유하곤 했는데 그걸 잠시라도 위로해준 것이 냉면이었다고. 어머니를 모시고 냉면집을 가는 건 자주 반복되던 일상이었고 가끔 막국수 집에서 어머니는 다대기를 건져내셨다는 말씀. “다대기만 건져내면 평양냉면이야.”라는 말에 덩달아 양념 없는 밍밍한 맛에 빠져들었다. 어처구니없게도 평창동계올림픽이 확정되던 밤, 내게 떠오른 건 냉면이었다. 거칠고 건조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 불량한 환경에서도 스스로 강하게 자라나는 메밀. 강원도 사람들의 성품같이 불평도 별로 없이, 되도록 남 탓하지 않으면서 꼭 필요한 영양분을 전해주는 메밀. 이 메밀을 가루로 내서 약간의 녹말을 섞어 반죽하면 평양냉면의 면발이 된다. 쓱쓱 면을 뽑아 갖은 양념을 더해 손으로 막 담아내면 그건 막국수다. 막국수의 기본 원료도 물론 메밀. 스승은 산허리를 돌아가면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말씀하신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산골에서 볼 수 있는 아찔한 풍경. 달의 숨소리를 듣는 건 과연 가능할까. 메밀밭가에서 달을 보며 빌었던 강원도의 꿈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자연과 동화되면서, ‘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은 당나귀와 함께 늙어갔고 이 짐승을 결국 자신과 동일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 모두가 화해하면서, 허생원은 젊은 장돌뱅이 동이를 만나 옛 인연과 따뜻하게 해후했다. 충북 제천까지 가는 길목의 주막에서 이들 앞에 주모는 시원한 냉면 한 그릇을 내놓았을 것이다. 아주 밍밍하게, 아버지와 아들은 꼭 속내를 꺼내지 않고도 인연을 확인했을 터이다. 둘은 동시에 왼손으로 젓가락을 들어 국수를 집어 올렸을 것. “평양냉면집의 남방한계선은 경주”라는 스승의 말씀은 메밀과 관련되어 있다. ‘내부수리중’이라는 안내판을 뒤로하고 아쉽게 발길을 돌렸지만 경주의 냉면집도 평양냉면을 전문으로 한다는 걸 확인은 했다. 북위 70도까지 자란다는 메밀이 경주를 기점으로 재배되지 않는 탓으로 부산에는 밀면이 발전했다 하신다. 부산으로 피란 온 실향민들이 메밀 대신 밀을 갖고 만든 냉면이 바로 밀면이다. 한국전쟁이 낳은 역사적 음식이 아닐 수 없다. 평양냉면에서 빠질 수 없는 건 제육이다. 때론 냉면맛보다 기름기가 쏙 빠진 돼지고기 맛으로 냉면집을 선택하기도 한다. 냉면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새우젓을 찍어 김치에 싸서 먹는 제육 맛도 일품이지만 역시 메밀면에 제육을 척 얹어 먹는 맛은 평양냉면의 백미다. 강원도 화천의 한 막국수 집은 이런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 아예 면 위에 가득 제육을 담아내기도 한다. 육수를 내고 남은 돼지고기의 순하고 편한 맛. 이것이 메밀과 섞이면 여름의 짜증을 한번에 날리고도 남는다. 스승은 돌아오는 길에 “평양 옥류관에 가서 냉면을 먹고 싶다.” 하신다. “버드나무 우거진 보통강가도 걷고 싶다.” 하신다. 면발처럼 긴 이 인연은 얼마나 질긴가. 결코 끊어질 수 없는 이 인연을 평창동계올림픽으로 확인해 보면 어떨까. 한 세대가 저물기 전에 이산가족들이 만나 함께 냉면을 먹고, 고향땅 성묘를 주선하면 얼마나 좋을까. 밍밍하게, 과거는 턱 덮어두고 면발 위의 고명들처럼 고만고만하게들 어울려서.
  • [6·25 전쟁 61주년] “난리통에 여자가 무슨 군입대냐며 가족들 반대도 많았죠”

    [6·25 전쟁 61주년] “난리통에 여자가 무슨 군입대냐며 가족들 반대도 많았죠”

    “그러니까 열여섯 살 때였지요. 전쟁 중이었지만 여자도 뭔가 해야 한다는 결의가 아주 높았습니다.” 원로 성우 고은정(75)씨는 해마다 이맘때면 6·25전쟁 당시를 잠시 추억한다. 지난 20일 서울 서초동 자택 인근에서 고씨를 만났다. 1950년 11월 서울 수도여중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고씨는 학생들 사이에 ‘국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고, 금방 통일된다.’는 소문을 들었다. 고씨는 “서울고와 용산고 학생들도 학도의용군에 뽑혀 북진 대열에 합류한다.”고 말하면서 여학생이라고 가만히 있으면 되겠느냐고 했더니 동의하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결국 며칠 뒤 고씨는 단짝 친구 3명과 함께 여자의용군에 자원입대했다. 서울 충무로의 일신초등학교에 훈련막사가 설치됐다. 한성여고 밴드부와 동덕여고 무용반 학생들도 와 있었다. 여기에서 ‘여자의용군 예술대’가 결성된 것. 고씨의 군번은 0995862. 훈련은 주로 아침 일찍 남산을 한 바퀴 돌아오는 것이었다. 20일쯤 지나자 잠시 외출을 나가게 됐다. 집에 갔더니 가족들이 “난리 통에 여자가 무슨 군입대냐.”며 귀대하지 말라고 붙잡았다. 고씨는 “어떻게 외출 나왔다가 안 들어가느냐.”며 부대로 돌아갔다. 그런데 동료 3분의1이 귀대하지 않았다. 남은 예술대원은 20여명. 이튿날 예술대원들은 부산으로 떠나기 위해 겨울용 잠바와 담요 한 장씩을 들고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수백 명의 남자군인 틈에 끼여 무개화차에 막 오르려는 순간 신성모 국방장관이 나타나 “왜 여자들을 지붕 없는 차에 태우느냐.”고 호통을 쳤다. 할 수 없이 다음 날 트럭을 이용해 인천항을 거쳐 상륙함정(LST)을 타고 3일 만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후 예술대원들은 영도초등학교의 임시막사에서 지냈다. 그러던 중 고씨는 발을 다쳐 의무실 신세를 지게 됐다. 이때 한 목사의 도움으로 책 몇 권을 얻었다. 예술단원으로 병원 위문을 가기 위해서는 책이 필요했다. 1951년 2월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면서 휴가를 떠나게 됐다. 하지만 딱히 갈 곳이 없어 도움을 받았던 목사와 함께 제주도에 있는 피란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제주도로 향했다. 고씨가 제주 오현중학교에 설치된 피란민 학교에서 중학교 졸업장을 받게 된 것도 이런 까닭이다. 여기에서 그는 육군 제대자로 처리됐다. 고씨는 “당시 동료들과 가끔 만나 추억담을 나누기도 했지만 지금은 세월이 지나서인지 그러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백선엽 장군 등 6·25 참전 군인들에 따르면 여자의용군은 당시 김현숙 소령이 최초 여군단장을 맡아 500여명으로 조직됐다. 처음 여자의용군을 모집할 때 3000명 이상 몰렸을 정도로 지원율이 높았다. 지원 자격은 18~25세의 미혼 여성으로 중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으로 엄격한 필기시험과 신체검사를 거쳤다. 여군은 후방지역에서 주로 행정·경리·통신 분야에서 복무했지만 일부는 전방 전투사단에 배치돼 정보수집, 수색활동, 선무활동에 참가했다. 특수교육을 받은 일부 여군들은 적진에 투입돼 첩보수집 임무를 수행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암호명 ‘래빗’(토끼)으로 미군 첩보부대의 훈련을 받은 미모의 첩보요원들도 비밀리에 임무를 펼쳤다. 간호장교들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사방이 포위됐을 때에도 끝까지 부상병을 돌보다가 많은 희생을 당했다. 제주에서는 최초의 여자 해병대 126명이 모집돼 40여일 동안 훈련을 받고 일선에 배치됐다. 여기에는 미혼인 학교 선생도 여럿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전선이 교착되는 상황과 함께 전투가 소강상태에 이르면서 여군은 새로운 체제로 재정비된다. 1951년 11월 여군의 인사관리 등을 담당할 지휘기관으로 여군과가 육군본부 고급 부관실 내에 설치돼 각 군 감실 및 부대에 배속된 여군의 인사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 “반값 등록금에 보태주세요”

    신분을 밝히기를 거부한 70대 원로 교육자가 학생들의 ‘반값 등록금’에 보태라며 모교에 5억원을 선뜻 내놓았다. 건국대 발전기금본부(SKARF)는 23일 건국대를 졸업하고 특수학교를 운영하는 등 40년 넘게 교육자의 길을 걸어온 70대 교육자가 평생 모은 5억원을 학교 발전기금으로 기부했다고 밝혔다. 지난 21일 그가 건국대를 찾았다. 그는 “학교에 기부를 하고 싶다.”며 5억원이 예금된 통장과 도장을 꺼냈다. 그는 기부 사실을 끝까지 익명으로 해 줄 것을 신신당부 했다. 그는 “최근 반값 등록금을 외치며 학생들이 길거리로 나선 모습이 안타까워 전 재산을 기부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내가 누릴 수 있었던 기회와 축복을 교육에 되돌려 주는 게 기쁘다.”며 “뭐니뭐니 해도 교육이 힘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이 마음 놓고 학업을 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지원하고 더 좋은 교육 시설을 만드는 데 보태 달라.”고 당부했다. 건국대 관계자에 따르면, 6·25 전쟁과 피란 시절의 어려움 속에서도 배움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던 그는, 1960년대 건국대를 졸업하고 특수학교를 운영하는 등 줄곧 교육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 역시 재학시절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그만둘 뻔한 고비가 많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대학 측은 기부의 뜻을 기리기 위해 장학회를 설립하고 학생들에 장학금을 지급하는 한편, 기부자 예우를 위해 이번에 새롭게 도입한 ‘기부클럽’에서 최고 수준의 멤버십을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영준기자 apple@seoul.co.kr
  • 파키스탄 자폭테러 34명 사망

    중동에서 피의 보복은 지난 주말에도 계속됐다. 몇 달째 시위와 무력진압의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시리아와 예멘에서는 정부군과 시위대, 무장세력 간의 충돌로 수십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파키스탄 탈레반의 근거지인 북서부 페샤와르 시내에서 11일(현지시간) 두 차례의 폭탄 테러가 발생, 34명이 사망하고 100여명이 다쳤다. 이번 공격은 리언 패네타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과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의 이슬라마바드 방문과 공교롭게 겹쳐 파키스탄과 미국 당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현지 경찰과 병원 관계자 등은 이날 페샤와르의 한 주상복합단지내 슈퍼마켓과 호텔 주변에서 4분 간격으로 두 차례 폭발이 발생했다고 전했다. 경찰은 호텔 화장실에 설치돼 있던 시한폭탄이 터진 뒤 한 남성이 오토바이를 탄 채 호텔 인근에서 자살 폭탄테러를 감행했다고 밝혔다. 두 번째 폭발이 훨씬 강력했으며 이 과정에서 파키스탄 기자 2명이 숨지고, 독일 dpa통신 특파원 1명과 현지 언론인 다수가 부상했다. 예멘 남부 아비안주 로데르와 진지바르에서는 11일 정부군이 이 지역들을 장악하고 있는 수백명의 이슬람 무장대원들과 교전을 벌였다. 예멘 국방부는 이 과정에서 알카에다 소속으로 추정되는 무장대원 21명이 사살됐다고 밝혔다. 아비안 지방정부 관계자는 정부군 19명도 사망했다고 말했다. 아비안주 주지사의 자문관인 압델 하킴 알사라히 장군은 이번 충돌의 배후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알리 압둘라 살레 예멘 대통령의 음모가 있다고 주장했다. 알사라히 장군은 “살레 대통령이 (알카에다에 대한) 서방의 우려를 자극하고 예멘 국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려고 이슬람 무장세력이 남부 5개주를 장악하도록 방치했다.”고 말했다. 한편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시리아 정부의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강경 무력진압은 계속되고 있다. 시리아군은 지난 10일 터키와의 국경 마을 지스르 알수구르에서 대대적인 유혈 진압작전을 펼쳐 수십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현지 국영TV와 로이터통신 등 외신들이 전했다. 현지 국영TV는 이날 시리아군이 터키 접경 마을에 병력 1만 5000명과 탱크 40대, 장갑차 등을 배치하고 무장대원들에 대한 체포작전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수천여명의 시위대는 정부군을 압박하며 경찰서 등에 불을 질렀고, 시리아군이 발포하면서 최소 32명이 숨졌다고 인권단체 관계자들이 전했다. 시리아 정부군의 공격을 앞두고 이 마을 주민 수천명이 터키로 피란을 떠나면서 국경 근처에는 난민 캠프들이 잇따라 세워지고 있다. 김균미기자 kmkim@seoul.co.kr
  • “뭍에서 건너온 관심 덕분에… 우리 집이 호텔 됐네”

    “우리 집이 호텔이 됐네!” 지난 21일 오후 인천시 옹진군 연평도 새마을리. 35㎡(약 10평) 남짓한 김현선(76)씨의 집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40년을 넘긴 낡은 주택이 새집으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불과 몇 시간 전, 김씨의 집 안방 벽 이곳저곳에는 곰팡이가 가득했다. 먼지도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하지만 ‘인간성회복운동추진협의회’(인추협) 소속 자원봉사자들이 벽지를 걷어내고 새로 도배를 하자 벽은 곧 새하얗게 변했다. 페인트가 벗겨지고 여기저기 금이 갔던 외벽도 하얀색 페인트로 뒤덮였다. 이 집은 김씨가 1960년대 말 연평도에 들어올 때 직접 지었다. 당시 함께했던 10가구의 이웃 사람들 이름을 천장 한귀퉁이에 적어 놨다고 김씨는 말했다. 이웃들이 하나 둘 뭍으로, 외국으로 떠나도 꿋꿋이 지켰던 소중한 집이다. 깔끔하게 변신한 집을 둘러보던 김씨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다. 인추협은 지난 21~22일 연평도에서 ‘연평도, 희망의 씨앗 심기’라는 이름의 주거환경개선 봉사활동을 펼쳤다. 어르신들이 사는 집의 낡은 벽지와 장판을 교체하고 페인트칠도 새로 해줬다. 김용주 언론중재위원회 사무총장 등 법조인, 김경회 성신여대 교수· 김정탁 성균관대 교수 등 학자, 언론인과 대학생 등 50여명이 참여했다. 인추협은 지난 3월 처음으로 연평도의 6가구를 대상으로 주거환경개선 활동을 벌였다. 고진광 인추협 상임이사는 “이번 봉사활동은 3월에 수리해 주지 못한 7가구를 대상으로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이모(70·여)씨의 집은 거실과 천장 벽지에 곰팡이가 피어 얼룩져 있었다. 이씨 가족이 지난해 11월 북한의 포격 이후 김포의 임시거주지로 피란갔다가 올 초 섬에 돌아와 보니 집이 이렇게 변해 있었다. 이씨는 “집에 도배와 장판을 새로 하고 싶어도 뭍에 나가 재료를 사오는 것이 힘든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런 도움은 생각지도 못했다. 고맙다.”며 활짝 웃었다. 페인트칠을 담당한 전성민(42) 변호사는 “우리가 주민들의 걱정을 덜어 드릴 수는 없지만,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주민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미소지었다. 인추협은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 6개월이 지나면서 마을이 갈수록 황폐화되는 것을 우려해 이번 활동을 기획했다고 밝혔다. 권성(언론중재위원장) 인추협 이사장은 “연평도는 대한민국의 최전방에서 우리나라를 지키는 섬”이라면서 “연평도가 국민들의 관심 속에 평화의 섬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연평도 김진아·김소라기자
  • [지방시대] 산복도로를 아십니까?/김형균 부산시 창조도시본부장

    [지방시대] 산복도로를 아십니까?/김형균 부산시 창조도시본부장

    국어사전에도 잘 나오지 않는 독특한 곳이 부산에 있다. 산복도로가 바로 그것이다. 시내 전역 산비탈 65㎞에 걸쳐 있는 이 산복도로는 부산의 지형 특성과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발달해 왔다. 부산이 산을 등지고 바다와 마주보고 있는 ‘배산임해’(背山臨海) 지형이어서 산등성이에 주거지역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으로 멀리는 식민지시대 부두노동자들의 거주지로, 가깝게는 한국전쟁기에 전국에서 모여든 피란민들의 거처로 쓰이면서 종횡으로 넓게 주거지가 발달했고, 이들 지역을 좌우로 연결하려고 도로가 형성됐다. 부산역에서 바다를 등지고 산을 올려다 보면 언덕배기에 촘촘히 들어선 집들을 볼 수 있는데, 이처럼 원도심의 산복도로는 연장 35㎞에 4개의 큰 산을 둘러싸고 이어져 있다. 이 원도심 산복도로 주변에는 30여만명의 주민이 가파른 계단과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낡은 집들을 의지해 살고 있다. 영락없는 고지대다. 혹자는 ‘서민의 마천루’라 부르며 그 궁박함을, 또 다른 사람은 ‘항구도시의 성채(城砦)’라 부르며 경관적 특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부산사람 누구도 이 산복도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일부 토박이를 제외하고 1960~70년대 대규모 이농으로 부산으로 전입한 많은 세대의 첫 거주지가 대부분 산복도로 주변인 경우가 많았다. 아마 집값이 싸고 텃세가 비교적 덜하기 때문이었으리라. 또, 한국의 산업화를 부산이 이끌던 시절에 부산으로 몰려든 수많은 신발·봉제공장의 근로자들의 부담 없는 주거지가 바로 이 산복도로 언저리였다. 도심으로 내려와서 이것저것 해 보다가 잘 안되면 다시 이곳으로 올라오기도 했다. 그래서 산복도로를 노래한 어느 시인은 “부산사람의 시작이자 끝이 산복도로”라 했다. 이 산복도로는 이제 지난 60여년 동안 한국전쟁, 근대화, 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서민들을 넉넉히 품고 애환을 달래주던 그 역할에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한 조사에 의하면 이곳 사람들은 가파른 계단, 낡은 집, 방범문제 등을 호소하고 있으면서도 이웃 간의 인정, 공동체 유대감 등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산복도로 르네상스’가 시작되고 있다. 르네상스가 복고와 인간성의 결합적 의미라면, 이곳이야말로 르네상스가 절실히 필요하다. 나라가 어려웠던 시절, 헐벗고 굶주리며 전국에서 피란 온 사람들을 넉넉히 품어 안았던 그 시절의 포용력을 다시 떠올려 사람들이 몰려오는 곳으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또 이곳에도 예외 없이 재개발의 바람이 불고 있지만 원주민을 내모는 방식보다는, 아직 끈끈한 이웃 간의 정을 살리는 인간중심, 마을중심의 도시 재생을 해 보자는 것이다. 공간, 문화, 생활재생을 기치로 한 주민중심의 마을 만들기다. 이제 이 지역 주민을 중심으로 스스로 일어서려는 ‘자력수복형’의 르네상스 사업에 국가는 진지하게 답해야 한다. 부산은 국가존망의 위기 때 국가와 피란민을 감싸안았다. 그러나 그로 인해 도시계획은 엉망이 되고, 원도심의 쇠락은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국가는 이를 잊지 말아야 한다. 부산의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과 주민중심의 마을만들기 운동에 국가가 대답해야 할 명백한 이유다.
  • “아파트가 좋다고? 고향땅 밟으니 아픈 몸도 금세 다 나았어”

    “아파트가 좋다고? 고향땅 밟으니 아픈 몸도 금세 다 나았어”

    포격으로 폐허가 됐던 연평도 곳곳이 눈에 띄게 깨끗해졌다. 깨져 널려 있던 유리 파편이 사라지고, 거리마다 나뒹굴던 쓰레기들도 말끔히 치워졌다. 피폭으로 집을 잃은 주민들에게는 잠시나마 묵을 수 있는 보금자리도 생겼다. 연평초등학교 운동장에 지어진 임시가옥이 그곳이다. ●“내 마을 내가 돌보니 정말 좋아” 4일 오전 10시. 연평도 남동쪽에 위치한 해경파출소 옆에서는 ‘취로사업’에 참여한 남부리 주민 99명이 부서진 건물 잔해 등 주변 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다. 취로사업은 지난달 24일부터 시작됐다. 사업은 5월까지 이어진다. 인천시가 행정안전부로부터 20억원의 예산을 배정받아 연평도 주민들을 대상으로 벌이는 사업이다. 한 사람당 기본 5만원에 식대를 더해 5만 3000원을 일당으로 지급한다. “아파트든 뒤파트든 그게 무슨 소용이야. 고향 돌아오니까 이렇게 좋은데. 아프던 몸도 금세 다 나았어.” 취로사업에 참여한 조연화(81) 할머니가 밝게 웃으며 동료 할머니들에게 농담을 건넸다. 옆에서 일하던 윤선비(74) 할머니가 “내 고향 내가 치우고, 돈도 벌고, 얼마나 좋아.”라고 말을 받았다. 인천의 찜질방을 전전하다 없던 병을 얻고, 두고 온 집 걱정에 한시도 편하게 잠을 청한 적이 없었던 할머니들이 고향에 돌아오자 기운이 솟는 모양이었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조 할머니는 6·25 때 연평도로 피란 와 연평도에서 지금은 돌아가신 남편을 만난 뒤 자식들을 낳아 길러 뭍으로 내보냈다. 60년 넘게 연평도에서만 살았다. 조 할머니는 “처음엔 아파트라고 해서 좋은 줄만 알았지. 그런데 가서 보니 남의 집에 산다는 게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야.”라고 말했다. ●“임시가옥이지만 친구들 있어서 행복해” “임시가옥에서 살아도 연평도에 오니 좋아요.” 지난 3일 오전 11시, 연평초등학교 4학년이 된 고성현(10)군이 인천연안부두에서 연평도행 코리아나익스프레스 여객선에 혼자서 탔다. 사흘 전부터 연평도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계속되는 기상악화로 인천에 더 머물러야 했다. 연평도 포격으로 피란길에 오른 후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어려서 부모가 따로 사는 탓에 할아버지·할머니 품에서 자랐지만 구김살이 없었다. 되레 맑고 검은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친구들 보러 빨리 가고 싶어요.” 성현이는 새 교과서, 새 담임 선생님과 새 교실에서 공부할 생각에 한껏 기대가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돌아갈 집이 없다. 포격으로 몽땅 파괴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현이는 가족들과 당분간 연평초등학교 운동장에 설치된 임시주택에서 살아야 한다. 할아버지·할머니·큰아버지·성현이 그리고 강아지 ‘가을이’까지 다섯 식구를 하나로 묶어 주는 소중한 거처다. 전국재해구호협회가 국민 성금으로 지은 임시주택 39채에 포격으로 집을 잃은 32가구 69명이 입주했다. 머리를 감으려면 화장실 문을 열고 엉덩이를 쭉 빼야 할 만큼 좁고, 둘만 누워도 몸을 뒤집지 못할 정도로 협소하지만 성현이 가족은 오히려 감사했다. 할아버지 고영선(72)씨는 “우리를 위해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 마련해 준 집인데 어떻게 불평할 수 있겠느냐. 감사하다.”고 말했다. 오후 3시. 성현이가 연평도에 도착한 지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다. 성현이는 연평마트 앞 인조잔디 축구장으로 나가 반 친구들과 축구를 하며 뒤엉켜 놀았다. 구김 없이 큰소리로 떠들고 까불었다. ‘남의 동네’인 인천에서는 할 수 없었던 ‘놀이’였다. 올해 성현이의 가장 큰 소망은 빨리 새집이 생기는 것이다. 새집이 마련되면 아빠가 새 책상과 침대를 사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아빠도 다시 볼 수 있다. 성현이는 “빨리 새집이 생겼으면 좋겠다.”면서 눈을 반짝였다. ●“가슴의 상처 빨리 치유됐으면…” “이웃들이 돌아오니 내 마음이 부자가 된 거 같아요.” 4일 오전 8시 30분 남부리 연평교회 맞은편. 이기옥(51·여)<서울신문 2010년 12월 22일자 1면>씨가 집을 나섰다. 요즘 매일 아침 9시면 두꺼운 점퍼를 세 겹이나 껴입고 집을 나선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되는 취로사업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이씨는 “내 마을을 내 손으로 다시 세운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면서 “사람들 모두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는 큰데 상처는 여전히 깊게 남아 있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북한의 포격 후 100일 동안 그에게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기쁜 일은 해병대 연평부대에서 복무하던 아들 성기림(24)씨가 돌아온 일이다. 성씨는 포격으로 숨진 고(故) 서정우 하사의 해병대 입대 동기로, 지난달 10일 만기제대했다. 그간 이씨는 아들을 지척에 두고도 연평도 사태 이후 계속되는 비상근무로 얼굴을 보지 못해 속을 끓였다. 이씨는 “아들이 가족 품으로 돌아온 게 지난 100일 동안 내게 일어난 가장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라면서 다시 빗자루를 들며 웃었다. ●주민들에 매달 5만원씩 지원 연평도 복구작업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날도 한국전기안전공사가 직원 11명을 파견해 연평도 곳곳의 전기선로 교체작업을 벌였다. 연평면사무소에 따르면 창문·창틀 교체작업은 99%, 대문·방문 교체작업도 98% 끝났다. 상수도도 수리를 신청한 228가구 중 199가구, 보일러는 171가구 중 160가구가 공사를 마쳤다. 난방용 기름도 차질 없이 공급돼 추위를 덜 수 있게 됐다. 또 올 1월 시행된 ‘서해 5도 지원 특별법’으로 인해 이달부터 6개월 이상 거주한 주민은 매달 5만원씩 정주지원금을 받는다. 여기에다 올 7월 ‘서해 5도 종합발전계획’이 확정되면 노후주택 개량지원, 생필품 구매대금 지원 등 추가 지원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연평도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 “떼쓰는 모습 안된다는 쓴소리에 복귀한 주민들 고맙죠”

    “떼쓰는 모습 안된다는 쓴소리에 복귀한 주민들 고맙죠”

    조윤길(61) 인천 옹진군수에게 지난해는 잊고 싶은 한해로 남았다. 백령도와 연평도에서 천안함 폭침사건, 북한군 포격사건 등이 잇따라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는 백령도와 연평도를 11차례나 다녀왔다. 뱃길로 총 3650㎞에 이르는 거리다. 특히 연평도 사건 때에는 주민들이 직접 피해를 입은 탓에 조 군수가 온몸으로 사태를 수습해야만 했다. 발품 못지않게 수습에 밑거름이 된 것은 조 군수의 직선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면모. 목소리가 큰 주민대책위원회 사람들이 호통을 듣고도 순순히 뜻을 따를 만큼, 그는 주민들의 신뢰를 듬뿍 받고 있다. →최근 연평도를 둘러봤는데. -육지로 피란 갔던 주민들이 대부분 돌아와 정상화되고 있다. 보일러, 상·하수도, 창문 등에 대한 보수작업도 거의 마무리됐다. 환경정비를 위한 특별취로사업이 실시돼 하루 400∼500명의 주민이 참가하고 있다. 한·미 연합훈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다에서는 굴 캐기 작업이 한창이다. →일부 주민들이 육지에 더 머물게 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런 얘기가 있었지만 섬에 하루빨리 들어가서 생업에 종사하는 것이 정상화를 앞당기고 국민의 성원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설득했다. ‘떼쓰는 모습으로 비쳐서는 안 된다.’ ‘주민 없는 연평도는 더 이상 연평도가 아니다.’라는 쓴소리도 했다. 섭섭하게 느낀 주민들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이 서둘러 복귀한 것에 대해 고마움을 느낀다. →사건을 수습하면서 아쉬웠던 점은. -주민들에게 더 많은 보상을 해주고 싶었지만 위로금 형식 이외에 별도 보상을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 위로금으로 33억원을, 생활안정지원금으로 37억원을 지급했다. 특히 선원처럼 연평도에 거주하면서도 주민등록이 안 돼 있어 위로금마저 받지 못한 경우는 안타깝다. 다른 지역 사고를 검토한 결과 모두 주민등록자 위주로 보상이 이뤄졌기에 어쩔 수 없었다. →복구비용은 어떻게 분담하나. -국비 80%와 지방비 20%가 가이드라인으로, 국비 717억원은 이미 내려왔다. 지방비 101억원은 인천시와 옹진군이 절반씩 부담한다는 것이 시의 방침이지만 군은 부담할 능력이 없다. 시와 군이 7대3 비율로 분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정부가 제정한 ‘서해 5도 특별지원법’에는 만족하는지. -서해 5도민에게 정주수당 지급, 학자금·물류비 지원 등을 골자로 하는 특별법은 섬 주민 정주 의식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다만 대형 여객선 도입, 소연평도 등 작은 섬에 거주하는 학생에 대한 특례입학 등이 배제된 것이 아쉽다.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내년엔 아흔, 그래도 캔버스 앞에만 서면 가슴이 뛴다”

    “내년엔 아흔, 그래도 캔버스 앞에만 서면 가슴이 뛴다”

    “제사 지내려면 병풍이라도 있어야 했으니 동양화 쪽은 그래도 먹고살 만했는데 서양화는 참 어려웠어.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 간 이중섭(1956년 작고)은 국제극장 뒤에서 점심으로 만날 호떡을 얻어먹었지. 그땐 호떡이 제법 커서 한끼로 때울 만했거든. 가격은 생각 안 나는데, 그렇게 비싸지도 않았어. 그런데 그 호떡 하나 사먹을 돈조차 없어 늘 쩔쩔맸지. 그러니 주인장이 불쌍해서 돈 조금만 받고도 주고, 공짜로도 주고 그랬어. 미안하고 고마웠던 이중섭이 할 줄 아는 거라곤 그림이니, 그림 하나를 정성껏 그려서 줬어. 주인장도 그걸 받기는 했는데 참 난감한 거야. 나중에 보니 그걸 장독 뚜껑으로 쓰고 있더라고. 유화물감이니까 기름기가 있어서 물기를 잘 막아주거든. 자존심이 무척 강했던 이중섭이지만 제 눈으로 그걸 보고도 아무 말 못했지. 그땐 시절이 그랬어.” “아깝네요. 그거 하나 잘 갖고 있었으면 지금 몇억원은 할 텐데.” “예술가의 삶이란 게 그런 거 같애. 내가 프랑스에서 살던 곳이 페뢰야. 빛이 좋아 화가들이 좋아하는 곳이지. 고흐가 살던 오베르하고 가까운 곳이기도 해. 언젠가 오베르에 갔더니 그곳 주민들이 이런 얘기를 해. 고흐가 권총자살하는 데 잘못 쐈대. 즉사한 게 아니라 한 3~4일 앓다가 죽은 거지. 장례가 골치 아팠어. 이름 없는 가난뱅이 화가인 데다, 그런 방식으로 죽었으니 다들 꺼림칙한 거지. 겨우겨우 이웃의 도움을 받아 장례를 치렀는데 이번엔 삯으로 줄 돈이 없는 거야. 그래서 그림 하나씩 가져가라 그랬대. 그런데 아무도 안 가져갔다는 거야. 그때 아무거나 하나 골라 집었어 봐…. 어휴.” 지난 3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백영수(89) 화백을 만났다. 이중섭·김환기·장욱진·유영국·이규상 화백 등과 더불어 1950년대 신사실파 화폭을 개척한 대표적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신사실파는 일본을 통해 유입된 서구의 후기인상파적 화풍을 뛰어넘기 위해 이들이 결성한 단체다. 동인 중 유일한 생존 작가가 백 화백이다. 한국 근대미술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1977년 프랑스로 떠났다가 올 1월 34년 만에 영구귀국했다. 따뜻한 느낌의 ‘모자(母子) 시리즈’로 국내는 물론, 유럽 화단에도 상당히 이름이 알려져 있다. 롯데호텔에서 백 화백을 만난 것은 영구귀국 뒤 첫 전시가 롯데호텔 1층 롯데갤러리 재개관전이어서다. 롯데호텔 전신은 1956년 세워진 반도호텔이다. 이곳 1층의 반도화랑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갤러리다. 롯데갤러리 재개관을 맞아 백 화백을 비롯, 김종화(93), 권옥연(84), 황용엽(80), 윤명로(75) 등 원로 작가 다섯 명의 작품을 모았다. 백 화백은 ‘모자 시리즈’와 더불어 ‘여백 시리즈’를 내놓았다. 그런데 원로 작가들의 명성에 비해 호텔 로비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갤러리가 어째 좀 옹색해 보인다. 내걸린 작품 수도 그리 많지 않다. 백 화백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에이, 이것만 해도 엄청난 거지. 반도화랑은 더했어. 그 시절 화랑이란 게 일종의 기념품 가게였거든. 반도호텔 맞은편에 미국공보원이 있었고 옆에는 국립도서관이 있었지. 거기다 최고의 요지였던 명동이 곁에 있었고…. 그러다 보니 드나드는 외국인들이 많았는데 이 사람들이 반도화랑에서 작품들을 사갔어. 이때 박수근(1965년 작고)이 그린 그림이 조선 풍속화야. 외국인 눈에 맞춘 거지. 덕분에 미군 부대 초상화가에서도 벗어났고….” 반도화랑에서 일을 배운 박명자(67) 회장이 나가서 살림 차린 곳이 바로 현대화랑(지금의 갤러리 현대)이다. 박수근 화백도 반도화랑 전시를 통해 화단에 본격 데뷔했다. “그땐 반도호텔이 9층인가 해서 주변에서 제일 높았어. 그림 그린답시고 몰려다니면서 명동에서 막걸리 한잔 마시고 9층 칵테일 바에서 분위기 내고 그랬지. 반도화랑을 열었던 이대원(2005년 작고)이 오며 가며 이런저런 일거리도 줬고….” 당시 서양화 위상은 볼품없었다는 게 백 화백의 회고다. 심지어 이념 장벽까지 있었다. 장욱진(1990년 작고) 화백은 땅과 황소를 벌겋게 그렸다고 기관원에게 끌려갔단다.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추궁당하던 시절, 이중삼중 생활고에 시달렸다. “나도 무지하게 일했어. 서울신문사 뒤에 코오롱 아케이드 있지? 그게 1969년에 지어졌는데 그 지하 아케이드 디자인을 내가 했어. 그것만 했겠어? 국립극장이 생긴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무대미술 작업도 내가 했지. 문예잡지나 시집 같은 책에다 삽화며 도안 그려넣는 일도 숱하게 했어. 그런데 그건 비교적 사정이 나은 거였어. 그나마 (작가) 이름값이 있으니 얻을 수 있는 일거리였거든. 이름 없는 작가들? 그냥 마냥 굶는 거지 뭐. 이중섭도 그렇게 굶어 죽은 거지.” 당시 작가들이 ‘괜찮은 일거리’로 꼽았던 것이 백화점 전시였다. 그런데 이것도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백화점 전시라는 게 지금처럼 멋지게 하지 않았어. 맨 꼭대기층에 전시해 두면 사람들이 내려오면서 보고 상품을 사라고 해둔 거지. 일종의 미끼 상품이야.” 그렇게 자존심에 상처 받아가면서도 뭐가 좋아 그렇게 그림에 매달렸을까. “그냥.” 허무한 답이다. 말이 이어진다. “하얀 캔버스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있으면 그냥 좋아. 이번엔 내가 또 뭘 만들어낼 수 있을까, 막 설레. 얼마 전에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에 갔는데 마네 그림이 너무 좋은 거야. 여러 번 본 건 데도 너무 좋더라구. 나도 저렇게 멋진 거 하나 그리고 싶다, 이 생각밖에 안 들어.” 젊었을 때도 그 생각만으로 버텨냈다고 한다. “내 젊었을 때만 해도 샤갈, 미로, 피카소, 달리가 살아 있을 때였어. 수입된 유럽잡지를 통해 그 그림을 보면 너무 부러운거야. 나도 저런 작가가 되고야 말테다, 그 희망 하나로 버틴 거지.” 실은 한가지 이유가 더 있단다. “좋아하는 일인 데다 늙어 죽을 때까지 할 수 있잖아. 마티스는 아흔 넘어 손에 힘이 떨어지니까 가위로 종이를 오려서 작품을 만들어냈어. 르누아르는 말년에 골다공증이 오니까 몸에다 붓을 묶어서 그림을 그렸어. 그걸 보면서 그림이란 게 평생 할 수 있는 직업이구나, 하는 계산도 했지.” 그렇게 지켜온 게 바로 한국 현대미술이라는 자부심이 강하게 묻어나온다. 1977년 프랑스로 건너간 것은 파리의 한 화랑이 백 화백의 진가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초대전으로 프랑스에 불러 들이더니 아예 주저앉혔다. 10년 넘는 활동기간 동안 큰 개인전만도 22차례, 이런저런 전시회까지 합치면 100회 넘게 전시를 열었다. ‘한국에서 건너온 뛰어난 화가’라는 명성이 쌓였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1989년 교통사고를 당하더니 1994년 위암 선고까지 받았다. 한동안 붓을 놓을 수밖에. 몸을 추스린 뒤 더 이상 비행기를 타기 싫어 영구귀국을 결심했다. 원래 살던 경기 의정부 집으로 고스란히 되돌아왔다. 하지만 창작 의욕만큼은 왕성하다. 아직도 주머니에 종이와 연필을 넣고 다니면서 눈을 사로잡는 장면은 재빨리 스케치한다. “아직 더 그릴 수 있어. 언젠가 프랑스 한인회에서 경로잔치 같은 걸 해 주겠다길래 펄쩍 뛰었지. 아직도 하얀 캔버스 앞에만 서면 가슴이 뛰는데 무슨….” 속으로는 고민도 있다. “미술가란 남이 안 하는 모양이나 색깔을 찾아내야 하니 스케치를 계속 모아두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 중에 작품으로) 뽑아내야지. 그리는 시간 자체보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더 필요해.” 오는 10월쯤 신작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글 사진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백영수 화백이 걸어온 길 ▲1922년 경기 수원 출생 ▲1945년 일본 오사카미술학교 졸업 ▲1945년 전남 목포고등여학교 미술교사 ▲1947년 서울 화신백화점 개인전 ▲1952년 해군 종군화가 미술전 ▲1953년 신사실파전(국립미술관)▲1973년 국립현대미술관 60년전 ▲1977년 프랑스행 ▲1978년 소시에테 나쇼날 보졀 그랑파레(파리) ▲1981년 프랑스 주재 한국작가전(파리), 프랑스현대작가전(도쿄도미술관) ▲1983년 살롱 도톤느 그랑파레(파리) ▲1985년 AAM전(파리) ▲1986년 프랑스 작가 초대전(일본, LA), 국제현대미술전(모나코) ▲2007년 신사실파 60주년(서울) ▲2011년 영구 귀국
  • 연평도의 봄

    연평도의 봄

    “봄이 돼야 뭐가 좀 달라지겠지. 아직은 힘들어….” 설 일주일 전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던 공혜순(80) 할머니는 봄을 기다렸다. ‘봄(春)’. 연평도 사람들에게 봄은 무슨 의미일까. 어떤 변화를 담았을까. 다시 찾았다. 여객선 코리아나익스프레스호가 당섬선착장에 도착할 때까지 온갖 상념이 떠나지 않았다. 지난 3일 오후 1시 30분 연평도 당섬. 북풍이 세차다. 영상 1.8도라지만 체감온도는 영하권이다. ‘두두두두두두….’ 정신이 번쩍 든다.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 이후 뚝 끊겼던 고깃배들의 엔진소리다. 출항을 준비하는 ‘생명음’과 다름없다. 확실히 달라졌구나. 변화가 확인되는 순간 발걸음은 빨라졌다. 오후 2시. 통발어선 길영호 선원들이 오전 내내 건져 올린 통발을 고압세척기로 씻어내고 있다. 통발 안에는 불가사리, 죽은 물고기, 쓰레기만 가득했다. 100일 넘게 통발을 건지지 않아 생긴 일이다. 어찌 보면 쓰레기 처리다. 하지만 30년 경력의 베테랑 선원 오미석(49)씨는 풍어(豊漁)의 꿈을 놓지 않는다. “한해 농사를 시작하려면 피할 수 없잖아요. 100일 넘게 건지지 않았는데….” 정상조업하려면 며칠은 ‘쓰레기 처리’를 해야 한단다. 그 옆으로 올해 첫 조업을 나가려던 안강망 어선 만선호도 엔진에 문제가 생겼다. 선주와 선원 7명이 근심스러운 표정이다. 손질이 끝난 색색의 그물들이 배 위에 올려져 있다. 선원 윤동환(50)씨는 “그물 손질은 끝냈는데, 기관실 손질을 못해 생긴 일”이라며 “조만간 기관실 정비를 마치고 조업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기관실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연평로 해안 쪽에는 꽃게닻자망 어선인 광미8호 선원 6명이 천막 아래서 꽃게잡이 어구를 손질하고 있었다. 선주 신형근(44)씨는 ‘조업을 준비하는 거냐.’고 묻자 “조업준비라고 해봤자 철망(그물 철거) 작업밖에 없다.”면서 “4월 10일에나 정상조업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씨는 “정부가 정한 상반기 꽃게잡이 기간은 4월 1일부터 6월 30일인데 이렇게 되면 10일을 까먹게 된다.”며 “대책 마련을 위해 선장과 선주들이 이날 어민회관에서 회의를 했다.”고 밝혔다. 금어기(禁漁期)는 해양수산법에 규정된 사항이다. 회의에서는 7월 10일까지 조업기간 연장을 건의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신씨는 “예전에는 5월 말에서 6월 초가 꽃게철인데 지금은 연평도 바다도 수온이 낮아져 6월 말에서 7월 초는 돼야 꽃게가 많이 잡힌다.”고 말했다. 그는 “작년 상반기에는 2억원을 벌었는데 5억원은 벌어야 그물값 메우고 선원 월급 주고, 나도 먹고산다.”고 풍어를 기대했다. 변화는 바닷가뿐이 아니다. 이튿날인 4일 오전 8시 연평초등학교 앞. 활기가 느껴진다. 3학년 김세웅(9)군이 파란색 자전거를 타고 숨을 헐떡이며 교문으로 들어섰다. 이날 연평 초·중·고등학교에 따르면 초등학생 82명, 중학생 27명, 고등학생 22명 등 등록된 학생 전원이 이상 없이 등교했다. 오후 1시 어린이집 놀이터. 연평초등학교 2학년 단짝인 방서준(8)·박상열(8)군이 뒤엉켜 그네를 타고 있다. 서준이는 “연평도에 돌아오니까 좋아요. 마음이 편해요. 상열이랑 마음껏 놀 수 있어 좋아요.”라고 밝게 말했다. 닫혔던 상점들도 문을 열었다. 서부리에서 장춘상회를 운영하는 방춘자(59·여)씨가 가게 앞을 쓸고 있었다. 피란 가던 당시를 상기시키며 “안 돌아온다면서요.”라고 농담하자 방씨는 환하게 웃으며 “삼촌아. 넘(남)들 다 돌아왔잖아.가게 문 닫고 있으면 되나.”라고 되받는다. 서부리의 한 호프집 문엔 참으로 오랜만에 ‘오픈’(open)이라는 팻말이 걸렸다. 연평도가 다시 숨쉬고 있는 것이다. 연평도 김양진·김소라기자 ky0295@seoul.co.kr
  •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 ‘자유일기’ 첫 공개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 ‘자유일기’ 첫 공개

    임시정부의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백산 지청천(1888~1957) 장군이 직접 쓴 ‘자유일기’(自由日記)의 내용이 최초로 공개됐다. 일기에는 광복 전후 격동의 삶을 산 독립운동가의 고뇌가 절절히 배어 있다. 27일 서울신문이 단독 입수한 백산 지청천의 자유일기는 1951년 5월부터 백산이 타계하기 한달 전인 1956년 12월까지의 육필 기록이며, 국한문 혼용체로 되어 있다. 백산의 외손자인 이준식(55) 전 친일재산조사위원회 위원은 “독립운동을 위해 1919년 만주로 건너가면서부터 일기를 쓰셨는데 한국전쟁 당시 피란 가는 과정에서 분실했다.”며 “1951년부터 다시 쓰신 광복 후의 기록으로 총 7권으로 되어 있다.”고 밝혔다. 자유일기는 백산 사망 이후 막내딸인 지복영 여사가 관리해 왔으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이 많아 살아 생전 공개를 하지 않다가 지 여사 사망 후 서울신문을 통해 공개됐다. 자유일기에는 당시 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인 백산의 모습이 잘 투영돼 있다. 경회루에서 열린 제2대 대통령 취임식 연회에 불참한 이유를 ‘만민이 기아 지경인데 30억원(圓) 비용을 들여서 (연회를) 거행함은 찬성할 수 없으며, 호화롭다(1952년 5월 2일 자유일기).’고 지적했다. 우당(이승만의 호)의 용인술도 가차 없이 비판했다. ‘국정감사 보고를 보면 법망이 해이돼 제2의 장개석 정부를 답습하는 것 같다. 이는 애국자, 혁명가를 기피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용인법 때문(1951년 5월 1일 자유일기)’이라고 질타했다. 제헌의원과 2대 의원을 지낸 백산은 3대 의원 선거에 불참한 이유로 ‘모략과 협잡의 정치에 염증이 났고’ ‘솔직히 고백해 선거비용 조달이 막연하기 때문(19 54년 5월 1일 자유일기)’이라고 털어놓았다. 대표적인 우파 독립운동가였던 백산이 1954년 전면적 자유시장 경제 도입을 위한 헌법 개정에 반대했고, 노동문제·노동자의 복리보호를 세계 평화의 관건이라며 진보적 시각을 보인 점도 눈길을 끈다. 김좌진, 홍범도, 이동녕, 이시영, 김백범 등 함께 독립운동을 한 동지들을 그리워하던 백산은 1956년 12월 11일 조선혁명총사령으로 있을 때 자신의 직계 부하였던 정이형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애국자를 애지중지할 줄 모르는 세태를 한탄했다. 백산은 한달 후인 1957년 1월 15일 숨을 거뒀다. 김동현기자 moses@seoul.co.kr
  • 연평도 초·중·고 北 포격 3개월만에 합동 졸업식

    연평도 초·중·고 北 포격 3개월만에 합동 졸업식

    “밝고 티 없이 자라야 할 아이들이 폭탄 소리에 놀라고, 눈총을 받아가며 외지 학교를 떠도는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1일 오전 10시 인천 옹진군 연평초등학교에서 열린 연평도 초·중·고교 합동 졸업식. 학부모 대표인 최재숙(44·여)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최씨는 육지로 피란 간 연평 학생을 당시 다른 학교들이 수용하지 않으려 하자 “이곳마저 거부하면 우리 아이들은 갈 곳이 없다.”며 영종도 운남초등학교에 눈물로 호소해 임시학교를 개설하게 만든 주인공이다. 졸업식에는 면장, 우체국장, 농협장 등이 단골 멤버인 여느 시골 학교 졸업식과 달리 교육부장관, 해양경찰서장, 부교육감까지 참석해 무게감을 더했다. 하지만 흥겨운 ‘지역 잔치’로만 치러질 수 없었다. 지난해 11월 발생한 북한군 포격 사건이 잊을 수 없는 충격과 고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축사를 위해 연단에 오른 인사들은 잇따라 지난 일을 거론하며 어려움 속에서도 무사히 학업을 마친 학생들을 격려했다. 피란 생활을 마치고 3개월 만에 본교를 찾은 재학생과 졸업생이 뒤엉켜 그동안 못다 한 얘기를 나누면서 숙연했던 졸업식장 분위기는 활기를 띠었다. 이 학교 박안수 연구부장은 “학생들이 태어나 살아 온 섬에서 졸업식을 치르게 돼 다행”이라며 “오늘 졸업식이 연평도가 주민들의 터전으로 다시 자리 잡기 위한 첫 단추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재학생 대표로 연단에 선 5학년 이인영(12)군은 “지난겨울은 너무나 아프고 슬펐지만 지금 마을 어귀에는 파란 싹이 돋고 있다. 우리 마을도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1시간 30분 동안 비교적 차분하게 진행된 졸업식이 끝나자 학생들은 졸업식 때 흔한 ‘자장면 외식’조차 없이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섬에 식당들이 아직 영업을 재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지로 배움터를 옮겨 가면서도 학업을 계속한 학생들이기에 이날 무엇보다 값진 졸업장을 받았다. 졸업생은 초등학교 12명, 중학교 10명, 고등학교 7명 등 모두 29명. 초·중학교 졸업생은 연평도에 있는 중·고교에 진학하며, 고교 졸업생은 전원 육지에 있는 대학교 입학이 결정됐다. 최영호(49) 교사는 “대학 입시를 앞둔 민감한 시기에 6·25전쟁 당시 천막 교실을 연상케 하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대학에 합격한 우리 아이들이 자랑스럽다.”고 강조했다. 김민지양은 편부인 아버지가 지난해 대장암으로 타계하는 슬픔과 이어진 피란 생활 속에서도 숙명여대 한국어문학부에 당당히 합격했다. 유한대 기계과에 진학하는 이정석군은 북한군 포격 이후에도 계속 섬에 남아 시각장애 1급인 아버지를 돌봐 이날 효행상을 받았다. 이군은 “앞으로 육지로 나가면 아버지는 여동생이 모시겠지만 조금은 걱정된다.”고 말했다. 서울호서전문대 애견동물관리과에 합격한 염현아양은 “한때 너무 힘들었지만 졸업해서 행복하다. 뛰어난 애견미용사가 되겠다.”며 밝게 웃었다.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식당 다시 여는데 제맛 날지… 허허”

    “식당 다시 여는데 제맛 날지… 허허”

    20일 오후 인천시 옹진군 연평도 남부리 마을의 한 식당. 주인 문주애(51·여)씨가 마당에 솥을 걸고 나무로 불을 때며 두부를 만들고 있다. 남편(54)과 시동생(45)도 옆에서 굴을 까고 반찬을 만드는 등 분주하게 손을 놀린다. 문씨는 “내일부터 다시 식당을 여는데 그동안 문닫고 놀아서 제맛이 날지 모르겠다.”며 활짝 웃었다. 섬의 유일한 PC방에서는 뽀얗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청소가 한창이다. 주인 최정식(55)씨는 “다행히 포격에 컴퓨터가 부서지지 않아 곧 PC방을 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불벼락 포격으로 공동체 기능이 마비됐던 ‘연평도의 봄’은 주민들의 분주한 손놀림 속에서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바다 쪽은 회복이 더 빨랐다. ‘거문여’와 ‘용디’ 갯벌에서는 아낙네 50여명이 굴을 따느라 쉴 새 없이 손을 놀리고 있다. 특히 이날은 1년 중 바닷물이 가장 많이 빠진다는 날(한사리)이어서 장사를 하는 주민들까지 호미를 들고 나섰다. 박현수(56·여)씨는 “한동안 굴을 따지 않은 덕분인지 알이 굵다.”면서 “오늘 딴 것은 육지에 피란갔을 때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먼저 보내려고 한다.”고 말했다. 섬을 떠났던 주민들이 김포 임시거처 계약이 만료된 지난 18일 전후로 대거 돌아옴에 따라 슈퍼마켓, 세탁소, 철물점, 정육점, 잡화점 등이 잇따라 문을 열고 있다. 이날 주민은 804명. 장흥화 연평면 부면장은 “섬 인구는 1361명이지만 평소 겨울철에는 거주민이 1000명에 못 미쳤던 만큼 돌아올 사람은 거의 다 들어온 셈”이라고 했다.인천의 임시 학교에 다니던 아이들도 섬으로 돌아와 여기저기서 뛰논다. 한 주민은 “아이들 돌아다니는 것을 정말 오랜만에 본다.”며 “이제 사람 사는 곳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집집마다 부서진 창문을 교체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육지에서 온 15명의 작업팀이 작동하는 드릴 소리가 요란하다. 인부 윤경순(47)씨는 “빈집에 많아 함부로 작업을 할 수 없었는데 주민들이 들어온 이후 하루 10여곳의 창문을 교체하고 있다.”며 웃었다. 그러나 그 옆에 흉하게 망가진 집이 아픈 기억을 되살린다. 주부 박지은(42·여)씨는 “피격 당시가 떠올라 가슴이 벌렁거린다.”면서 “당국이 천막으로라도 덮어놓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연평면사무소 관계자는 “주민들의 귀향이 늦어져 주택 복구가 지연됐지만 주민들이 대부분 돌아왔으니 이제 본격적인 복구가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연평도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연평도 주민들 줄줄이 귀향

    지난해 11월 북한군의 포격으로 육지로 피했던 연평도 주민들의 귀향이 일주일 사이에 러시를 이루고 있다. 이런 현상은 임시 거처인 경기 김포 LH 아파트 계약이 만료되는 오는 18일 이후에나 주민들의 연평도행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른 것이다. 복귀 주민들이 늘어남에 따라 피격 직후 공동체 기능이 마비됐던 섬이 다시 활기를 띠며 사람 사는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16일 옹진군에 따르면 연평도 피란민 869명은 지난해 12월 19일 김포 임시 거처에 112가구로 나눠 입주했으나 이 가운데 절반가량이 최근 연평도로 돌아왔다. 귀향 주민은 11일 42명, 13일 119명, 14일 79명, 15일 75명, 16일 120명에 달해(12일은 배 결항) 현재 연평도 주민은 534명이다. 피격 직후 섬 잔류민이 19명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상전벽해다. 육지를 잇는 여객선이 하루 한 차례 드나드는 연평도 선착장은 복귀 주민들로 나날이 붐비고 있다. 나머지 주민들도 곧 귀향 행렬에 합류할 것으로 보인다. 16일 섬에 복귀한 이모(58)씨는 “어차피 돌아가야 할 집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서둘렀다.”면서 “다소 불안하긴 해도 내 집이 제일 낫지 않으냐.”고 말했다. 최철영 연평면 상황실장은 “일부 주민들이 김포 입주 기간 연장을 요구하는 등 분위기가 심상찮아 복귀에는 시일이 좀 더 걸릴 것으로 봤는데, 빨리 돌아와 다행”이라며 “주민들과 함께라면 복구에 한층 탄력이 붙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살던 집이 포격으로 파괴돼 섬 복귀 후 임시 조립주택에 입주한 주민들은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 조립주택 39채 가운데 22채에 복귀 주민들이 입주한 상태. 박모(67)씨는 “집이 새로 지어질 때까지 임시로 살 집이라지만 성냥곽처럼 좁은 데다 수도가 얼어붙어 밥을 지어 먹을 수 없다.”고 말했다.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지방시대] 부산 중앙동의 부활 실험/김형균 부산시 창조도시본부장

    [지방시대] 부산 중앙동의 부활 실험/김형균 부산시 창조도시본부장

    어느 도시든 중앙동이라고 불리는 지역은 그 도시의 번영과 쇠락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부산 중앙동도 예외가 아니다. 부산의 정치 1번지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예전 시청을 중심으로 관공서가 즐비한 가운데 수많은 가게와 점포들이 지역경제를 이끌며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한국전쟁기 피란시절의 문화적 흔적과 자부심이 곳곳에 배어 있어 문화 중심지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했다. 곳곳에 있던 화랑과 사랑방 등에서 경향 각지의 문화예술인을 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1998년 부산시청이 이전하고 해운대 등 외곽지역의 주거단지가 개발되면서, 인구는 빠져나가고 상권 위축에 따른 원도심의 쇠락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중앙동을 끼고 있는 중구만 하더라도 번성기인 1978년에 10만 7000명이던 인구가 2009년의 경우 4만 9000명으로 53%나 줄어들었다. 고령화율은 16%에 육박했다. 부산지역 평균보다 5% 이상 높다. 이러다 보니 주거지역 곳곳에 폐·공가가 늘어나고, 상업지역도 활기를 잃게 되면서 폐 상가와 빈 사무실이 늘어났다. 이런 중앙동에 최근 두 가지 큰 변화가 생겼다. 하나는 폐 상가와 빈 사무실 곳곳에 문화 창작공간이 들어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근 옛 시청부지에 큰 백화점이 들어선 것이다. 문화 창작공간은 ‘또따또가’라는 이름으로 부산시와 예술인단체가 힘을 합쳐 운영하고 있는 공간이다. 원도심 빈 공간의 문화적 활용 결과다. 현재 36실의 빈 사무실에 46명의 상주 작가가 둥지를 꾸리고 있다. 또한 화가, 문화기획자 등 다양한 문화예술가들을 포함한 22개 단체 321명을 포함해 총 367명의 예술가들이 빈사무실을 예술공간으로 변화시켰다. 창작활동으로 중앙동에 문화적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점심시간을 활용해 직장인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 공연과 독서카페 운영 등 다양한 문화적 실험이 지금 이곳 중앙동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인근에 들어선 큰 백화점은 엄청난 규모와 대단한 집객력을 자랑한다. 이러한 중앙동의 두 모습은 많은 것을 일깨워준다. 지역 재생을 위해서는 백화점 같은 대규모 인프라가 갖는 흡인력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특정 장소가 생명력과 문화적 응집력을 갖기 위해서는 문화적 전략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백화점이 큰길의 전략이라면, 문화공간은 골목길의 전술이다. 대형 소비공간이 동맥이라면, 문화시설은 실핏줄이다. 원도심이 살아나려면 이처럼 동맥과 실핏줄이, 전략과 전술이, 경제와 문화가 동시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이곳 중앙동은 생생히 말해주고 있다. 20세기 최고의 르네상스인으로 평가되는 루이스 멈퍼드는 ‘내면적 삶과 외면적 생활의 통합’을 통해 도시의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를 함께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지금 부산의 중앙동은 백화점이라는 거대 소비 공간과 또따또가라는 문화창작 공간의 공존을 통해 새로운 원도심의 부활을 실험하고 있다. 이 실험을 통해 이전의 원도심의 영광을 되찾는 기적을 이룰 것인지 관심있게 지켜볼 일이다.
  • 혹한에 또 피멍… “이웃도 봄도 언제 오나”

    혹한에 또 피멍… “이웃도 봄도 언제 오나”

    25일 오전 인천시 옹진군 연평도. 지난해 11월 23일 북한군의 포격 이후 불안과 공포를 피해 떠났던 주민들이 한명 한명 돌아오고 있지만 그들의 낯빛은 여전히 어둡다. 꽃게·주꾸미철 포구를 달구던 활력이나 흥분을 기대하기는 아직 이른 걸까. 강요하지 않은 지독한 침묵만이 주민 사이에 흐른다. 포격에 한번, 혹한에 또 한번.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불어닥친 한파는 매서운 해풍이 되어 수도도, 보일러도 가만 놔두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게 없다는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골목길 쌓인 눈은 그대로 두꺼운 얼음이 됐고, 그 위를 노부부가 곡예하듯 아슬아슬하게 지났다. 설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 왔지만 명절분위기는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87세 할머니 장례식… “20여일 찜질방 생활로 병” 연평도 뒷산. 23일 세상을 뜬 송납재(87·여) 할머니의 장례식 발인이 진행됐다. “살아도 연평도에서 살고 죽어도 연평도에서 죽겠다.”고 말하던 송 할머니. 지난달 앰뷸런스에 실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살겠다고 인천으로 피란갔지만 20여일 찜질방 생활이 치명타였다. 한 주민은 “노인네들이 찜질방 생활을 하면서 병이 많이 났다. (송 할머니도) 거기서 얻은 병으로 돌아가신 것”이라며 눈물을 훔쳤다. ●수도·보일러 얼어… 나무로 불때 지난 18일 섬에 돌아온 이명애(44·여)씨는 얼어터진 수도와 보일러를 새것으로 갈았다. 다시 뭍으로 나갈 계획이었던 그는 마지못해 연평도를 지키고 있다. 이씨는 “날이 너무 추워서 수도가 언제 또 얼지 몰라. 해마다 친지들과 인천에서 설을 쇠었는데 올해는 여기서 쇠려고….”라고 말했다. 이날 연평면사무소에 접수된 보일러 고장 신고는 71건, 수도파손 신고는 24건이었다. “돌아오지 않은 주민을 감안하면 동파와 고장건수는 이보다 2~3배 많을 것”이라고 면사무소 직원이 귀띔했다. ●“10월에야 집… 임시거처서 어찌 사나” 오후 2시 연평초등학교 운동장. “누가 입주한다고 했어. 저런 데서 어떻게 살라고.” 고성이 터져나왔다. 전국재해구호협회에서 국민성금으로 지은 임시주택 완공식이 열렸지만 주민들은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완공된 주택은 39동. 다음 달 18일 김포 양곡지구 임대아파트 사용기간이 끝나는 대로 주택이 완전히 파손됐거나 살기 힘들 정도로 망가진 주민 60~70여명이 이곳 임시주택에서 살 계획이라고 옹진군 측은 설명했다. 하지만 입주 예정자들은 한사코 들어가지 않겠단다. 북한 군이 쏜 포탄으로 집이 박살난 김영길(48)씨는 “오는 10월이나 돼야 새 주택이 지어진다.”면서 “지어 준 정성은 고맙지만 저런 임시주택에서 몇 개월씩 살라고 하는 건 너무한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기문(90)·공혜순(80·여)씨 부부가 사는 집에선 방아 찧는 소리가 울렸다. 적막한 연평도에 설을 알리는 소리라 반가웠다. ●주민 20%만… “그래도 설인데” 하지만 이씨 부부의 집은 보일러가 얼어 터져 방 세칸 중 두칸은 냉골이다. 공씨는 “봄이 돼야 뭐가 좀 달라지겠지 아직은 힘들어….”라고 연평도의 봄을 기다렸다. 임시주택에 몸을 의지한 최도화(75·여)씨는 “처음엔 큰 관심을 갖더니 금세 연평도 주민들을 잊는 것 같아.”라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현재 연평도에 남아 있는 주민은 426명, 포격 전 주민의 20% 수준이다. 연평도의 봄은 언제 오는 걸까. 연평도 김양진·김진아기자 ky0295@seoul.co.kr ■동영상은 28일 오후 7시30분 케이블채널 서울신문STV의 ‘TV쏙 서울신문’에서 방영됩니다.
  • 부산의 ‘산토리니’ 골목길 일일 투어

    부산의 ‘산토리니’ 골목길 일일 투어

    골목길엔 중독성이 있는 듯합니다. 뭐 볼 게 있을까 싶으면서도, 이름깨나 날리는 골목길이라면 불원천리 찾아가 걷게 됩니다. 필경 ‘지지고 볶으며’ 사는 동안 골목길에 켜켜이 쌓여진, 요즘은 쉬 보기 어려워진 사람의 온기를 좇는 여정이기 때문이겠지요. 부산 사하구 감천2동 문화마을은 그런 곳입니다. 레고 블록처럼 수많은 집들이 오종종히 붙어 있는데, 여간 이국적이지 않습니다. 골목길은 여전히 남루합니다. 하지만 오가는 주민들의 표정과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진 듯합니다. 그것은 곧 골목길 어귀마다 희망이 움트고 있다는 것과 맥이 통하겠지요. 이어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 들러 옛것들의 향기에 취해도 좋겠습니다. 여기에 최근 개통된 거가대교까지 돌아 본다면 모자람 없는 부산 여행이 될 겁니다. ●문화마을-美路가 迷路처럼 펼쳐진 곳 산동네에 부는 겨울 바람이 아이들 웃음소리를 실어 나른다. 웃음소리는 골목길 여기저기 부딪치고 굽이치며 넓게 퍼져 나간다. 감천2동 문화마을의 한낮 풍경이다. 울긋불긋 단장한 마을은 무척 이국적이다. 옥녀봉과 천마산 사이 비탈면을 따라 원색 페인트를 곱게 칠한 사각형 집들이 오종종히 붙어 있다. 하나같이 지붕 낮은 집들이다. 집집마다 옥상에 원통 모양의 파란 물통을 이었다. 사각형과 원통형이 적당히 어우러지며 절묘한 구도를 이룬다. 부산의 산토리니, 마추픽추 등으로 불리는 이유다. 장난감 블록들이 모여 있는 것 같다 해서 레고마을이란 별명도 얻었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여느 골목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된 삶의 흔적이 켜켜이 쌓였다. 사람이 떠난 집들도 250여채나 된다. 홍보전시관 ‘하늘마루’ 관계자는 문화마을 전체 건물이 4500여채 된다고 했다. 대략 5% 정도가 빈집인 셈이다. 감천2동 문화마을의 유래에 대해서는 1950년대 초 한국전쟁 피란민들이 몰려 들어 생겼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사하구청이 펴낸 ‘사하구지’는 “신흥종교인 태극도를 믿는 사람들 4000여명이 모여 집단촌을 이룬 마을”이라 적고 있다. 인근 주민들이 문화마을은 잘 모르지만 ‘태극도마을’이라면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거치며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것을 제외하면 마을은 당시 모습 그대로다. ‘골목길 투어’는 산복도로 위 하늘마루를 들머리 삼는 게 좋다. 2009년 ‘꿈을 꾸는 부산의 마추픽추’와 지난해 ‘미로미로프로젝트’ 등을 통해 다양한 조형물들이 산복도로 주변에 설치됐기 때문이다. 위에서 아래로 훑어 내려가는데, 지번을 따라 골목을 차례로 돌아볼 생각은 버리시라. 그저 막연히 헤맨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다. 골목길은 길다. 그리고 비좁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정도다. 행여 맞은 편에서 사람이라도 온다면, 영락없이 ‘외나무 다리’가 된다. 서로의 숨결마저 맞닿을 것 같은 이런 골목에서 가벼운 눈인사 없이 지나치는 게 되레 어려운 일일 게다. 문을 열면 곧 골목인 탓에, 골목길은 곧 마당이고, 놀이터이며, 거실이다. 골목길은 ‘ㄹ’자 형태로 이어져 있다. 끝이 있을까 싶다. 신기하게도 골목길은 막힌 곳 없이 서로를 잇고 있다. 이 골목은 저 골목의 입구이자 출구다. 골목 마다 예쁜 이정표와 조형물들을 설치해 뒀다. ‘서울 사투리’를 써서 그런지 외지인에 대한 주민들의 응대가 따스하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다녀갔기 때문이다. 예전엔 주민들과 여행객 사이에 싸움이 빚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골목길을 한 바퀴 돌다 보면, 주민들의 따스함이 금방 전해져 온다. 골목길 계단 모서리를 눈여겨 보시라. 각진 부분을 깎아 둥글게 만들었다. 필경 누군가를 향한 배려일 터다. 골목길 투어는 2시간이면 넉넉하다. 다소 된비알도 있지만, 그리 품이 드는 편은 아니다. 전망 포인트는 감정초등학교와 하늘마루, 나라사랑교회 등이 꼽힌다. 다시 산복도로에 선다. 멀리 사하구쪽 바다가 보인다. 말 그대로 ‘오션뷰’다. 어디 여기뿐일까. 장독대나 옥상, 어디건 마찬가지다. 햇살도 넉넉하다. 뒤편 산자락으로 해가 질 때까지 꼬박 볕이 든다. 문화마을은 겨울 햇살이 참 좋다. ●보수동-헌책들이 뿜는 세월의 향기 내친 걸음, 보수동 책방골목까지 둘러 보는 게 좋겠다. 문화마을에서 30분 남짓 자박자박 걸으면 닿는다. 가는 길에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됐던 임시수도기념관이나 동아대 부민캠퍼스 내 정부청사 건물 등 유적지와 만나는 것도 쏠쏠한 재미를 안겨준다. 보수동은 1960~70년대 부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한번쯤 기웃거렸을 추억의 골목. ‘보수동’이란 이름만큼이나 ‘케케묵은’ 향기가 풍기는 곳이다. 최근 KBS 예능프로그램 ‘1박2일’에 소개되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보수동 책방골목(www.bosubook.com)은 1950년대 초, 그러니까 당시 미군들이 보고 난 잡지와 학생들의 참고서 등을 몇몇 헌 책방들이 모아 팔면서 형성됐다고 전해진다. 이후 부산에 각 대학의 분교가 들어서고 피란민들이 헌책을 내다 팔면서 급격히 책방도 늘었다. 책방의 규모는 다양하다. ‘전문분야’도 다르다. 헌책은 상태가 좋을 경우 반값 정도, 싼 것들은 2000~3000원에도 살 수 있다. 신간도 20% 안팎 할인된다. 지난해 12월엔 8층짜리 ‘책방골목 문화관’도 들어섰다. 책박물관과 북카페 등으로 꾸며져 쉬어가기 맞춤하다. 남포동 국제시장 입구 대청로 사거리 건너편을 보면 보수동 방향으로 난 사선골목이 보인다. 골목 입구에 책모양 이정표가 걸려있어 찾기 어렵지 않다. 남포동 PIFF광장에서도 걸어서 15분 정도 걸린다. ●거가대교-풍경화 속을 달리다 오래된 것들의 눅진 향기를 훌훌 털고 싶다면 거가대교로 갈 일이다. 지난해 12월 개통되면서 부산의 새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곳. ‘산 넘어 산’에 견줘 ‘다리 건너 다리’라고 해도 좋을 만한 풍경들이 늘어서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교량, 부산 신항만 등의 거대한 풍경과 거제도의 넉넉한 섬 풍경이 다리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 놀랍다. 거가대교는 부산 가덕도와 경남 거제 장목면을 교량과 해저터널로 잇는다. 길이는 8.2㎞. 정확히는 바다 위를 달리는 구간이 4.5㎞, 바닷속을 달리는 구간이 3.7㎞다. 사장교 부분이 거가대교, 바다 밑 터널 부분은 가덕해저터널이지만, 보통 두 구간을 합쳐 거가대교라 부른다. 거가대교를 타려면 우선 부산 녹산공단에서 가덕도를 잇는 가덕대교에 올라야 한다. 1.6㎞의 가덕대교와 눌차도, 가덕터널(1410m) 등을 줄줄이 지나면 요금소다. 통행료 1만원을 내고 요금소를 나서면 곧 가덕휴게소다. 휴게소 전망대에 서면 가덕해저터널 입구와 거가대교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장쾌한 풍경이다. 거대함을 숭배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입이 벌어질 만한 규모와 조형미를 동시에 갖췄다. 휴게소 한 켠엔 거가대교의 모든 것을 담은 전시관도 마련해 뒀다. 휴게소를 나서면 가덕해저터널이다. 길이 180m, 무게 4만 5000t짜리 콘크리트 박스(함체) 18개를 바닷속에서 이어 만들었다는 곳. 최대 수심 48m의 바닷속을 지난다. 하지만 워낙 깔끔하게, 그리고 ‘터널스럽게’ 조성돼 있어 바다를 지나고 있다는 느낌이 외려 반감된다. 해저터널 벽면에 인근 바닷속 풍경 등을 그려두면 살풍경하다는 느낌은 다소 지울 수 있지 않을까. 해저터널을 나와 중죽터널을 지나면 2주탑 사장교다. 교량의 중간 지점이 부산과 경남의 경계다. 여기서 저도를 관통하는 저도터널을 통과해 거가대교 3주탑 사장교를 지나면 거제시 장목면이다. 장목면에서는 상유마을부터 둘러 보는 게 좋겠다. 고즈넉한 마을 풍경도 좋고, 다리 바로 아래에서 거대한 거가대교를 바라보는 맛도 각별하다. 거가대교에서 상유마을로 향하는 램프로 빠지면 된다. 상유마을 초입 언덕엔 거가대교를 한 눈에 굽어볼 수 있는 전망대도 조성돼 있다. 글 사진 부산·거제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가는 길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경부고속도로→대구부산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백양터널요금소→태종대·수정터널 방면 고가도로→수정터널→좌천삼거리→부민사거리→토성동역→감천2동 문화마을. 감정초등학교 아래 공용주차장이 넓게 조성돼 있다. 하늘마루 (070)4219-5556. ▲맛집 보수동책방골목 안에 ‘30년 전통’을 자랑하는 ‘우진스넥’이 있다. 고로케와 도넛, 팥빵 등을 파는 분식집으로, 지역 신문에 크게 소개될 만큼 명물로 통한다. ▲기타 문화마을 지도는 하늘마루와 마을안내소에 비치돼 있다. 스탬프 6개를 모두 찍어 올 경우 하늘마루에서 무료 사진인화 서비스를 해준다.
  • 연평도 주민의 새해 맞이

    연평도 주민의 새해 맞이

    <“빨리 돌아가 굴 따야 하는데…” 김포 LH아파트 피란 김영길씨> 연평도 포격 이후 경기 김포에서 피란생활을 하고 있는 김영길(48)씨 가족은 시름 속에 새해를 맞았다. 지난달 19일 인천 찜질방에서 김포 LH아파트로 주거지를 옮겼지만 생활은 달라진 게 없다. “먹고사는 게 제일 큰 걱정이죠. 타지에서 새해를 맞는 게 좋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 매년 텔레비전으로 챙겨 보던 보신각 타종 행사도 올해는 생략했다. 떡국도 먹지 않았다. 이웃과 함께 떡국을 나눠 먹고, 아이들 손잡고 동네 어르신들 찾아 세배를 했던 지난해를 그리워하며 새해를 맞았다. 피란 생활이 길어질수록 김씨의 주름살도 깊어지고 있다. 연평도에는 언제 돌아갈 수 있는지, 보상은 어떻게 되는 건지 누구도 답변을 해주지 않아 답답할 뿐이다. 김씨는 “연평도 관련 뉴스가 나올까봐 매일 텔레비전 뉴스만 본다.”면서 “미래를 알 수 없으니 막막하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김씨의 유일한 희망은 두 자녀다. 찜질방에서 생활할 때 무척 우울해하던 아이들이 김포로 옮긴 뒤부터 차차 안정된 모습을 보여 그나마 위안이 된다. 김씨는 “어른들 눈치 보지 않고 신나게 놀 수 있어서인지 아이들의 표정은 밝아졌다.”면서 “형편이 넉넉지 않아 맛있는 걸 사줄 수 없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김씨는 요즘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딱히 하는 일 없이 텔레비전을 보며 지내고 있는 김씨는 “연평도로 언제 돌아갈지 모르니 일자리가 가장 걱정”이라면서 “정부가 일자리를 마련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른 주민들도 분위기는 비슷하다. 새해를 맞았어도 차분하게 가라앉은 모습들이다. 김씨의 유일한 새해 소망은 연평도로 하루 빨리 돌아가는 것. 네식구의 가장인 김씨는 “유일하게 바라는 건 연평도 집으로 돌아가 두발 쭉 뻗고 잠 한번 자는 것”이라면서 “예전에 하던 굴·조개잡이도 하고, 뭐든 다 할 것이다. 돌아가서 일을 해 돈을 벌어야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다. 소원은 오직 그것뿐이다.”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민영·김소라기자 min@seoul.co.kr <“평화로운 섬 되게 해달라 기도” 섬 잔류 박미경씨> “새해에는 평온한 가운데 떠났던 주민들이 모두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제 아이들도 또래 친구들과 즐겁게 학교 다녔으면 좋겠고요.” 인천 옹진군 연평도 주민 박미경(42·여)씨는 2일 본지 기자와의 통화에서 한달 넘게 가슴 속에 묻어뒀던 작은 소망을 털어놨다. 그는 새해가 찾아왔지만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열지 않아 아이들에게 맛난 음식조차 장만해 주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도 전하는 말에서는 여유와 푸근함이 물씬 배어났다. 연평장로교회 목사인 남편과 두 아들 등 단란한 네 가족은 새해 첫날, 이웃 주민들이 가져다 준 굴로 음식을 만들고 떡국을 끓여 먹으며 한마음으로 “연평도가 앞으로 살기 좋은 섬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박씨는 “지난해에는 북한의 추가 포격이 있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는데 이제 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면서 “새 학기에는 둘째 아들의 건강이 좋아져 어린이집에 들어가고, 첫째도 초등학교에 입학해 학교 생활을 잘할 수 있다면 더 큰 바람이 없다.”고 말했다. 특히 최근 몰아친 강추위와 폭설 때문에 지연된 마을 복구공사가 빨리 마무리되도록 정부가 힘을 더 실어달라고 부탁했다. 박씨에 따르면 연평도는 갈수록 굴 따는 주민들이 늘어나는 등 점차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다. 꽃게철은 지났지만 230여명의 주민이 섬으로 돌아오면서 깨진 창문을 갈아끼우고 대문을 고치는 등 복구작업도 한창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웃 분들이 ‘집에 돌아오니 편안하다’ ‘웬만하면 나가지 않고 살겠다’고 하셔서 마음은 편하다.”고 밝은 목소리로 전했다. 그는 정부와 정치인들에게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연평도를 만들어 달라.”는 바람을 전했다. 박씨는 “국가에서는 서해 5도를 요새화한다고 말하지만 거창한 것보다 주민들이 ‘이제 안심하고 살아도 되겠다’라고 하는 신뢰감부터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정현용·최두희기자 dh0226@seoul.co.kr
  • [연평도사태 한 달] 연평주민 김영길씨 끝나지 않은 피란기

    [연평도사태 한 달] 연평주민 김영길씨 끝나지 않은 피란기

    연평도에서 빠져나오고 한달 동안 김영길(48)씨 가족은 이삿짐을 네 번 쌌다. 연평도 중부리 방 두칸짜리 단독주택에서 행복하게 살던 네 식구는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 모른 채 기약 없는 피란 생활을 이어 가고 있다. 김영길씨의 목소리로 지난 한달을 되돌아봤다. 찜질방에서 여관으로, 친척집으로, 임시 거주지로 옮겨 오는 동안 김씨의 가족은 만신창이가 됐다. 김씨의 피란 생활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11월 23일 오전까지만 해도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바닷가에 나가 굴·조개를 캤다. 일이 없을 땐 육지로 나가 막일도 한다. 그렇게 해서 버는 돈이 한달에 150만~200만원. 네 식구 살기에는 빠듯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있으니 행복하다. 폭격으로 지붕이 내려앉고, 유리창이 다 깨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11월 26일 10살 난 딸아이와 8살 난 아들 녀석이 유난히 힘들어한다. “아빠, 집에 가요.”, “아빠, (연평도) 학교 가고 싶어요.” 찜질방에서 생활한 지 3일째인데 나도, 아내도, 아이들도 모두 감기에 걸렸다. 아내와 상의 끝에 내일은 여관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12월 11일 인천 용현동에 있는 하루 3만원짜리 작고 허름한 여관. 벌써 15일째다. 소음이나 먼지 걱정은 없지만 돈이 문제다. 벌써 45만원…. 그동안 저금해 놓은 돈을 쓰고 있는데 거의 바닥이 났다. 주안동에 사는 처형이 선뜻 오라고 해 줘서 고마울 뿐이다. -12월 16일 친척네 집이니 아이들이 마음 편해하는 것 같지만 어른들은 그렇지 않다. 더할 나위 없이 잘해 주지만 마냥 신세 지는 것도 미안하다. 아내와 다시 의논했다. 결국 찜질방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12월 17일 찜질방에 오자마자 아이들은 다시 기침을 시작했다. 병원에 가도 차도가 없다. “뛰지 마, 얌전히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주면 안 돼.”라고 꾸짖으면 “왜 못 돌아다니게 해요? 우리 집으로 가요.”라고 보채며 운다. 아이들이 점점 말수가 없어지고 울적해한다. 먹고 싶은 걸 사줄 수 없는 미안함도 크다. 치킨, 피자가 먹고 싶단다. -12월 19일 김포 임시 거주지인 LH 아파트로 들어왔다. 나는 낯선데, 아내와 아이들은 좋은 눈치다. 애들은 오자마자 신이 나서 뻥튀기 과자를 먹으면서 놀고 있다. 이웃들의 배려로 방 세칸짜리 아파트에서 가장 큰 방을 우리 가족이 쓰게 됐다. 욕실도 따로 딸려 있어 아내도 맘에 들어한다. 걸레를 들고 방을 닦는 모습을 보니 살짝 미소가 걸려 있다. -12월 21일 김포로 온 지 벌써 이틀째다. 하룻밤 자고 나니 익숙해졌다. 찜질방, 여관이랑 다르게 일단 ‘집’ 같은 느낌이 들어 마음에 든다. 공기가 좋아서 아이들 감기도 조금씩 낫는 것 같다. 두 달 후면 연평도로 돌아가야 하는데 당장 벌이가 걱정이다. 집은 어떻게 될지…. 막막하다. 인천 이민영·김소라기자 min@seoul.co.kr
  • [CEO 칼럼]국민 안보의식 강화해야 한다/정성욱 금성백조주택 회장

    [CEO 칼럼]국민 안보의식 강화해야 한다/정성욱 금성백조주택 회장

    ‘북측 연평도 포격!’ 지난달 23일 방송 속보를 보면서도 눈을 의심했다. 그동안 남북한의 충돌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한국전쟁 이후 북한군이 영해가 아닌 영토에 직접 공격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군은 북한이 포격을 시작한 지 13분 뒤 북한 개머리와 무도 해안포 기지를 향해 대응사격을 했다. 1시간여 긴장감이 이어지다 상황은 종료됐다. 북한군의 이번 도발로 소중한 해병대원 2명의 목숨을 잃고 말았다. 민간인도 2명이나 사망했다. 많은 가옥이 포격에 파손되고 불에 탔으며 산불도 발생했다. 평화롭던 연평도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돌변한 것이다. 연평도 주민 1700여명 중 대부분은 육지로 나와서 북한의 추가 도발과 앞으로의 삶을 걱정하고 있다. 일부는 다시 섬으로 돌아갔지만 그날의 충격을 잊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무너진 가옥 앞에서 생계 걱정으로 막막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번 도발은 북한의 철저한 계획 아래 실시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3대 후계 승계 등에 다목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얘기다. 군사지도자로서 후계자 김정은의 역량을 과시하고 우라늄 농축시설 공개에 따른 대화 시도 실패를 더 강한 도발로 만회하려 했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이번 사건은 우리 국민에게 안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됐다. 낮은 안보의식을 지적받던 젊은 세대들에게 민간인 희생과 주민들의 피란 행렬은 전쟁의 단면을 보여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안보의식 강화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반짝’ 나타났던 긴장감이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아직도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상황이 불안하지만 불안이 증폭되지는 않을 것이란 믿음이 넓게 퍼져 있는 게 사실이다. 일시적인 불안감으로 사람들의 안보의식이 근본적으로 바뀐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반도를 바라보는 국제적인 시각에서도 이런 경향은 드러난다. 국가별로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주요 해외 바이어와 투자자들은 예정대로 한국에 대한 거래와 투자를 진행했다. 단기적인 변동에 영향받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번 사건이 한국 경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란 판단은 그동안 반복된 북한과의 분쟁 속에서 얻어진 학습효과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런 인식은 국내 경제에는 도움이 되지만, 국민들이 같은 생각을 갖는 것은 곤란하다. 안보불감증 심화는 50여년의 휴전기간 속에서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국민이 증가한 데 따른 현상이다. 1970년대까지는 북한을 대결의 상대로 인식해 반공교육에 치중했다. 1980년대에는 남북대화가 추진되면서 북한을 대결과 동시에 대화의 상대로도 인식했다. 통일·안보 교육으로 전환한 것이다. 1990년대에는 남북관계와 통일환경이 급격하게 변화됨에 따라 진취적인 통일교육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청소년들은 안보의식이 엷어졌다. 연평도 피격이 이뤄질 때 일부 네티즌들은 “전쟁 나면 백화점 털러 갈까.”라는 글을 온라인에 띄우기도 했다. “북에서 우리 아빠 생일을 축하하는 축포인가.”라는 글도 올라왔다.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는 듯한 태도는 우리 안보교육의 현실을 극단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북한의 도발 수위가 점점 높아지는 시점에서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도 시급하지만 국민들의 안보의식 강화 또한 중요하다. 한반도가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임을 기억하고 국가 안보의식을 재점검해 단합된 국민의식을 가져야 한다. 안보의식은 그 자체로 국가를 지키기 위해 중요하다. 특히 기업을 경영하는 경영자의 입장에서 우리 국가경제의 보호와 발전을 위해서도 안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국가의 안전이 위협받지 않아야 경제도 튼튼히 뿌리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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