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피란
    2026-03-30
    검색기록 지우기
  • 유영
    2026-03-30
    검색기록 지우기
  • 전화
    2026-03-30
    검색기록 지우기
  • 학살
    2026-03-30
    검색기록 지우기
  • 타코
    2026-03-30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064
  • [주말 인사이드] “목어에서 은어까지 굴곡진 인생… 탱탱한 알 무기로 국민생선 도전!”

    [주말 인사이드] “목어에서 은어까지 굴곡진 인생… 탱탱한 알 무기로 국민생선 도전!”

    오도독… 오도독…. 입안 가득 알을 터뜨리며 담백한 맛에 반해 겨울철이면 사람들은 나를 즐겨 찾습니다. 비록 깊은 속살을 간직하지 못했고 폼 나는 일류 횟감도 아니지만 나는 한겨울 서민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는 국민 생선입니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주로 굽거나 조림 등으로 끓여서 먹지요. 특히 배에 가득 차 빨갛게 익어 나오는 알을 먹는 맛이 일품이라며 나를 먹을 때면 다들 엄지손가락을 치켜듭니다. 영양가도 풍부합니다. 소화 흡수가 잘되고, 불포화지방이 포함돼 성장기 어린이의 두뇌 발달과 성인병 예방에 도움을 준다니 어디 하나 버릴 것 없는 게 우리들입니다. 기름기 많은 흰 살 덕에 담백하고 구수한 맛이 일품이지만 수컷의 정소에는 세포를 재생시켜 주는 핵산이 많아 건강에도 좋다고 합니다. 이런 입소문을 타고 알이 있는 암컷만 찾던 사람들이 요즘에는 수컷도 많이 찾는다니 수컷들의 인기도 상종가 칠 날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습니다. 세월 따라 사람들 입맛도 변하는지 요즘에는 횟감으로도 제법 잘 나갑니다. 주문진 등 강원 동해안 항·포구 횟집 수족관에서는 내가 다른 고기들과 어울려 헤엄치는 모습도 가끔 보입니다. 최근 들어 횟감을 찾는 사람이 늘어서랍니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진풍경입니다. 제가 지체 높은 다른 물고기들과 함께 수족관에 들어가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요. 수년 전까지만 해도 밋밋한 맛 때문에 횟감으로 맛이 떨어진다고 외면받았지만 몇 년 사이 비늘이 없는 나를 뼈째 썰어 내는 일명 ‘세꼬시’로 즐기려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생긴 새로운 풍경이랍니다. 이래저래 국민 생선으로 인기가 갈수록 높아지게 생겼습니다. 한겨울이 시작된 요즘에는 항·포구 포장마차나 구이집마다 나를 굽는 구수한 냄새가 관광객들의 발길을 잡습니다. 그런 나는 한겨울 동해안의 명물로 자리 잡은 ‘도루묵’입니다. 나의 이름에 얽혀 전해져 오는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당초 나의 이름은 목어(木魚)였는데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피란길에 올랐던 선조 임금이 신하들이 구해 온 목어를 먹고 ‘맛이 좋다’며 은어(銀魚)라 부르라고 했답니다. 그 뒤 도성으로 돌아온 임금이 이번에는 맛이 없다며 ‘도로 목어라 부르라’고 해 ‘도로목 - 도루묵’이 됐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조 때 편찬한 고금석림(古今釋林)에는 고려시대 왕이 이 같은 말을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아무튼 기록에도 나오고, 수라상에서 이름이 정해진 생선은 내가 유일할 것입니다. 우리 도루묵들은 11월 초부터 12월 말까지가 제철입니다. 동해안 수심 200~400m의 모래가 섞인 개펄에서 살다가 11~12월 산란을 위해 육지가 가까운 연안으로 몰려갑니다. 연안의 수초에 알을 낳기 위해서입니다. 배들도 이때 집중적으로 그물을 이용해 우리를 잡습니다. 육지에서 20~30m 떨어진 수심 10~20m의 바다에는 배 속에 여문 알을 품은 도루묵들이 주로 살고 있습니다. 이보다 조금 먼 육지에서 1㎞ 안팎 떨어진 수심 70~100m의 바다에는 아직 알이 영글지 않은 도루묵들이 주로 서식합니다. 가까운 바다에는 1~1.5t급 작은 배들이 나가고 조금 먼 바다에는 2~3t짜리 배들이 나가 우리를 잡습니다. 어민들은 주로 낮 시간에 그물을 쳐 놓았다가 새벽 3~6시쯤 그물을 걷고 있습니다. 이후 새벽 시간에 항·포구에 도착한 배들은 그물에서 우리를 떼어 낸 뒤 곧바로 위판장에 올려 경매에 부칩니다. 그때마다 우리 도루묵들은 살아서 입을 쩍쩍 벌리고 지느러미를 펄럭거리며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만 우리를 산 중간상인들은 큰 삽으로 우리들을 ‘쓱쓱’ 쓸어 담아 자신들의 가게로 향합니다. 이런 와중에 몇몇 어민은 우리를 장화 신은 발길질로 툭툭 차며 알이 나오게 한 뒤 흘러내린 알을 줍기도 합니다. 구워 먹고 삶아 먹기 위한 것이지만 날것으로 주워 먹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부 어민들은 날것으로 알을 먹으면 비릿하면서 톡톡 터지는 맛이 색다르다며 이를 즐깁니다. 6·25전쟁 때 피란민들이 바닷가에 머물며 도루묵 알을 주워 연명했다는 얘기도 전해지니 예부터 우리 도루묵 알은 이래저래 인기였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우리를 잡기 위한 새로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민이 아닌 관광객을 포함한 일반인들이 항·포구마다 통발을 이용해 우리 도루묵을 잡으려고 북새통을 이룹니다. 우리 도루묵들이 알을 낳기 위해 육지 가까이 간다는 것을 안 사람들이 한 사람당 작게는 2∼3개에서 많게는 10여개씩의 통발을 바다에 던져 놓고 우리를 잡습니다. 우리들이 통발을 수초로 잘못 알고 안으로 들어가는 걸 이용해 잡으려는 것이지요. 참 어리석게도 우리들은 통발 1개에 보통 수십 마리씩 잡히고 있으니 사람들이 점점 재미를 붙이는 것 같습니다. 이런 풍경도 이달 말쯤이면 끝날 예정입니다. 해를 넘겨 1월이 되면 우리 도루묵 알들이 여물고 고무처럼 탱탱해져 상품으로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때쯤 되면 어민들은 우리를 잡는 대신 대게나 양미리잡이로 돌아섭니다. 우리 도루묵들은 하루빨리 그날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나는 수십 년 사이 천덕꾸러기 생선도 됐다가 귀한 대접을 받는 등 부침이 심했습니다. 1970~1980년대에는 너무 많이 잡혀 어민들이 리어카에 나를 가득 담아 골목길을 누비며 삽으로 퍼서 팔 만큼 값싼 생선으로 천대받았습니다. 당시에는 ‘말짱 도루묵’이란 말이 생겨날 만큼 어민들 사이에서는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며 환영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생선이었습니다. 이후 2000년대 들어 동해안 바닷속 서식 환경이 나빠지면서 어획량도 급격히 줄었지요. 바닷속 물이 수온 상승과 백화현상을 겪으며 수초들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냉수성 어종인 우리 도루묵들에게는 참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더구나 사람들이 치어까지 싹쓸이하면서 어획량은 더 줄었습니다. 1970, 1980년대에는 한 해 2만 5000t씩 잡혔지만 어려운 시절이던 2007~2009년에는 한 해 2720~3800t 생산에 그쳤습니다. 한때 동해안 어민들 사이에서는 우리 도루묵이 ‘사라지는 물고기’ 명태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7~8년 전부터 바닷속 수초에 알을 낳는 우리들의 습성을 이해한 사람들이 플라스틱 인공 어초를 심고 인공 수정된 치어를 방류하기 시작하면서 2, 3년 전부터 다시 개체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치어방류사업은 사람들이 우리 도루묵 알을 수거해 수조에서 부화시킨 뒤 바다에 방류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지난해부터 다시 많은 도루묵이 잡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이 잡혀도 문제인 것이 우리들 몸값이 떨어지고 판로에 어려움을 겪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지난해에는 ㎏당 6851원(20마리 1만~1만 5000원) 하던 우리들 몸값이 올해에는 더 떨어져 ㎏당 4618원(20마리 5000~1만원)까지 합니다. 어민들은 우리를 잡으면서 ‘출어 경비도 못 건진다’며 울상을 짓고 있습니다. 생산이 넘쳐나면서 요즘에는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내 우리 도루묵을 어묵과 구이, 동그랑땡 등 가공식품으로 개발하려 하고 있습니다. 천대받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 도루묵은 국민 생선으로 꾸준히 인기를 얻어 왔고, 앞으로도 영양이 풍부하고 맛 좋은 생선으로 자리 잡아 갈 것입니다. 모쪼록 우리 도루묵이 많이 생산되고 많이 소비되면서 어민들에게 환영받는 생선으로 자리 잡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글 사진 강릉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명인·명물을 찾아서] 문경새재

    [명인·명물을 찾아서] 문경새재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 사이에 있는 백두대간 옛 고개인 문경새재(642m)가 ‘사계절 국민 관광지’로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전국 네티즌이 국내 최고 관광지로 뽑으면서 관광객이 전례 없이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대설을 하루 앞둔 지난 6일 오후 문경시 문경읍 문경새재도립공원 입구. 비수기라서 한산할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다. 쌀쌀한 날씨의 평일임에도 관광객이 줄을 이었다. 도로변에 나붙은 ‘한국인이 꼭 가 봐야 할 곳 100선, 문경새재 1위’라는 내용의 플래카드가 무색하지 않았다. 이 현수막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최근 1년간 전국 네티즌들을 대상으로 처음 추진한 ‘한국 관광 100선’에서 문경새재가 1위에 오른 것을 기념하기 위해 문경시가 내걸었다. 양재율(58) 문경새재관리사무소장은 “예년 이맘때 같으면 관광객의 발길이 뜸했으나 올해는 전혀 그렇지 않다. 겨울철인 요즘도 평일 3000~4000명, 주말엔 1만명 가까이 찾고 있다”며 활짝 웃었다. 문경새재가 한국 관광 100선을 계기로 사계절 관광지로 떠올랐다. 특히 지난 10월에는 69만명의 유례없는 인파가 몰려 장사진을 이뤘다. 올 한 해 300만명 이상이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문경새재는 국내 최고나 최장 등 타이틀이나 딱히 대표할 볼거리가 없다. 그럼에도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유명 관광지들을 제치고 당당히 1위에 이름을 올린 비결은 뭘까. 조선시대 과거 길이란 역사성과 수려한 자연경관을 잘 간직한 길 덕분으로 여겨진다. 영주 죽령(696m), 영동 추풍령(221m)과 함께 조선시대 3대 고갯길 중 하나였던 문경새재는 역사적·민속적·생물학적 가치가 큰 옛길이다. 전국 유일의 길 전문 박물관인 ‘문경 옛길박물관’이 이곳에 터를 잡은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여기에 한국의 대표 아리랑으로 부각되고 있는 ‘문경새재아리랑’도 한몫했을 것이다. 문경새재는 2006년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과 2007년 옛길로는 처음 국가지정문화재(명승 제32호)로도 지정됐다. 문경새재 하면 먼저 조선시대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 과거 길을 오르던 유생들이 떠오른다. 선비들은 문경(聞慶)이란 지명이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 곳’이란 의미가 있다 해서 문경새재를 애용했다 한다. 죽령을 넘으면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47호로 지정된 ‘문경 조령관문’인 문경새재 공원 입구부터 제1~3관문까지 약 6.5㎞ 구간은 보기 드문 흙길이다. 1970년대 당시 국토개발을 진두지휘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문경새재 길은 포장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지시해 그대로 남게 됐다. 그래서 매년 5~10월 음력 보름을 전후한 토요일에는 남녀노소 구분없이 문경새재 옛길을 달빛 속에 맨발로 걷는 ‘문경새재 과거 길 달빛사랑여행’이 펼쳐진다. 공원 입구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나오는 제1관문(1708년)을 지나면 바로 왼편에 화려한 궁궐과 기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나타난다. 문경시가 72억원을 들여 만든 오픈 세트장. ‘태조왕건’, ‘대조영’, ‘대왕세종’ 등 인기 사극들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이곳에서 3관문까지 구간에는 볼거리가 즐비하다. 고려와 조선시대 숙식을 제공하던 국영여관인 조령원터, 조선 후기에 세워진 순수 한글비석인 ‘산불됴심’ 표석(경북도지정 문화재 제226호), 조선시대 경상 관찰사가 업무 인수인계를 하던 교귀정 등이 있다. 고려 말 공민왕이 피란을 가면서 머물렀다는 절 혜국사도 자리했다. 나그네가 쉬어 가는 주막, 성황당, 산신각, 선정비 등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멸종 위기의 동식물 서식지도 널리 분포됐다. 3관문을 통과하면 충북 괴산 땅이다. 문경새재에서는 철마다 문경전통찻사발축제와 문경사과축제 등이 열리는 축제의 공간이기도 하다. 인근에는 자연생태공원과 사계절썰매장, 새재스머프마을 등도 들어섰다. 양 소장은 “아리랑 고개인 문경새재 20리 길을 인생 열두 고개 테마길로 개발하고 국립 아리랑박물관을 유치하는 등 전국에서 으뜸가는 힐링 및 트레킹 코스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글 사진 문경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김광석 노랫말 흥얼거리며 이상화 시구 되뇌다 보니 어느새 발길은 골목길에…

    김광석 노랫말 흥얼거리며 이상화 시구 되뇌다 보니 어느새 발길은 골목길에…

    대구가 인물 마케팅에 나섰다. 지역 출신 문화·예술 분야의 유명인을 내세워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가객 고 김광석길이다. 2010년 ‘방천시장 문전성시 사업’의 하나로 4400만원을 들여 중구가 방천시장 골목길에 조성했다. 김광석(1964~1996)의 고향이 방천시장 인근이란 점을 활용했다. 350m 길이의 벽면을 따라 김광석의 모습을 그리고 그의 노랫말을 적었다. 골목 귀퉁이에 스피커를 설치해 거리에 그의 대표곡들이 흘러나오도록 했다. 매년 가을이 되면 골목길 일대에서 ‘김광석 노래 부르기 경연대회’를 열었다. 한산했던 골목길이 주말에 1000여명이 다녀가는 등 대구의 관광거점이 되고 있다. 중구 동산동 청라언덕에는 ‘동무생각’ 노래비가 세워졌다. 이 노래는 지역 출신 작곡가 박태준(1901~1986)의 곡이다. 박태준이 청라언덕 인근의 계성학교를 다니면서 등하굣길에 본 한 여학생을 짝사랑했고 이 사실을 안 이은상이 노랫말을 썼다. 대구의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불리는 청라언덕은 대구 근대골목투어의 필수코스로 포함되는 등 노래비와 함께 관광명소가 됐다. 박태준의 노래비는 지난해 10월 강원 춘천 남이섬에도 세워졌다. 시는 “이 노래비가 대구의 근대골목과 남이섬을 관광객에게 홍보하는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에는 근대문화 디자인개선사업의 하나로 이상화(1901~1943) 고택을 복원하면서, 당초 막혔던 계산성당과 이상화 고택을 연결했다. 연결된 골목길에서 관광객들이 이상화의 체취를 느끼고 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고갱’으로 불렸던 이인성(1912~1950)의 생가복원과 기념관 건립도 추진된다. 시는 내년 상반기 이 화백의 생가인 중구 북내동 16의 주택을 매입, 기념관으로 조성할 방침이다. 또 생가에서 계산오거리~동성로 등 3㎞ 구간을 ‘이인성의 길’로 명명하기로 했다. 이 일대는 이인성이 젊은 시절 창작활동을 펼쳤던 곳이다. 시는 이인성길을 인근 민족 시인 이상화 고택과 연계해 또 다른 관광투어 코스로 조성하기로 했다. 중구 신명고 교문 앞, 제일교회 경내에 현제명 노래비도 건립할 계획이다. 노래비에는 그가 작곡한 ’그 집 앞‘의 노랫말과 악보를 담는다. 시는 이와 함께 우리나라 근대 음악의 지평을 연 현제명에 대한 홍보활동을 펼치기로 했다. 동구의 경우 최근 완공된 아양철교를 관광명소로 만들기 위해 인근 금호강변 언덕에 패티 김의 노래비를 건립하기로 했다. 패티 김이 대구 출신은 아니지만 6·25 전쟁 때 동구 신암동에 피란와 잠시 거주했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이다. 시가 이처럼 인물마케팅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볼거리가 부족한 대구로 관광객을 불러모으는 데 상당한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시 관계자는 “유명 인물 자체가 브랜드”라며 “앞으론 경제인 등 다양한 방면의 유명인들도 발굴하겠다”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영도대교 부산 대표 관광상품 된다

    47년 만에 도개 기능을 복원한 부산 영도대교가 부산의 대표 관광상품으로 개발된다. 부산관광공사는 역사적 상징성을 가진 영도대교의 도개 장면을 보기 위해 국내외 관광객이 많이 찾을 것으로 보고 영도대교의 스토리텔링과 복고마케팅을 추진하는 등 영도대교의 관광상품화 방안을 마련, 시행한다고 3일 밝혔다. 관광공사는 우선 이날부터 부산역을 출발해 부산대교를 지나 영도로 들어가던 기존의 시티투어버스의 ‘태종대 순환형 노선’을 부산대교가 아닌 영도대교를 통과하도록 했다. 내년에는 영도대교 앞에 승강장을 설치, 관광객들이 영도대교를 걸어서 건널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내년부터는 관광해설사를 영도대교 도개시간(낮 12시)을 전후한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배치할 예정이다. 관광공사는 이와 함께 영도대교 콘텐츠 마련에도 나선다. 먼저 영도스토리텔링북을 발간하는 한편 영도다리 기념품을 제작할 계획이다. 특히 영도대교 관광의 주요 타깃 연령층인 60∼80대를 대상으로 1박 2일 체류형 관광코스 개발도 추진한다. 코스는 피란민의 애환이 담긴 영도대교 도개 관람을 시작으로 감천문화마을∼40계단 및 초량 이바구길∼부평야시장을 잇는 추억의 코스가 될 예정이다. 관광공사는 영도대교 관광상품화를 위해 이달 중순 서울 인바운드 여행사, 상품 기획자, 언론사 등을 초청해 팸투어를 가질 계획이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열린세상] 미국역사박물관에서 만난 한국의 슬픈 얼굴/박남기 광주교육대 교수

    [열린세상] 미국역사박물관에서 만난 한국의 슬픈 얼굴/박남기 광주교육대 교수

    미국 수도 워싱턴에는 박물관이 한데 모여 있는 박물관 몰이 있는데 전 세계로부터의 방문객이 연간 1000만 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미국역사박물관은 근현대사를 어떻게 꾸며놓고 있을까 하는 궁금한 생각이 들어 워싱턴에 간 김에 들렀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더라도 현재의 역사는 승자의 역사일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거의 몰살시키고 건국된 미국이어서 그러한지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내용은 배제돼 있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 덕인지 미국 흑인의 역사는 아주 상세하게 묘사돼 있었다. 1950년대 부분에서는 예상대로 미국인들이 ‘잊힌 미국전쟁’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6·25전쟁 당시 피란모습 사진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않게 2000년대 부분에 여자 아이 한복이 전시되어 있어서 반가움과 놀라움으로 다가갔다. 미국 역사에 한복이 소개될 정도로 미국 사회에서 한인의 위상이 높아졌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설명문을 읽었다. 그랬더니 기대와는 달리 2003년에 미국에 입양되었던 줄리아 하영 보쉬라는 아이가 입었던 한복을 양부모가 기증한 것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그 아래에 보니 미국이 1950년에 한국전쟁의 고아를 입양하기 시작한 이래 1990년대까지는 미국 입양아의 대다수는 한국아이였는데 그 이후 중국과 러시아 출신 입양아의 비중이 더 커졌다는 설명이 실려 있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부모의 품을 떠나야 했던 수많은 입양아들의 울음소리와 먼 땅에서 뿌리를 내려야 했던 그들의 힘들었을 삶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아무리 자기네 역사박물관이라고 하더라도 남의 아픈 부분을 꼬집어 꼭 전시해야 할까 하는 불편한 생각이 들어 자료를 조사해 보니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중국과 러시아가 자국 아동의 해외 입양을 엄격히 통제하고, 러시아는 아예 미국 입양을 금하여 한국 입양아의 비율이 다시 1위가 되었다고 한다. 미 국무부에 따르면 2010~11 회계연도 한국 입양아 수가 아프리카 출신 입양아를 합한 것뿐만 아니라 인도와 중국 입양아 수까지 더한 것보다도 더 많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로 바뀌어 개발도상국 지원을 위해 연 2조 411억원(2013년)의 국고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급속한 성장 과정에서 섬세하게 살피지 못해 아직도 곳곳에 후진국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해외 입양이다. 보건복지부의 노력으로 16만 5000명을 넘어선 해외 입양아에 대한 지원책은 조금씩 결실을 맺고 있다고 한다. 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 강화와 더불어 기아와 전쟁에 시달리는 아프리카보다도 해외 입양이 더 많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범사회적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할 것 같다. 해외 입양의 가장 큰 원인은 미혼모라고 한다. 교육계는 시대의 변화를 직시하여 중학생 이상의 학생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뿐만 아니라 논란 중인 피임교육 강화를 진지하게 검토함으로써 미혼모 방지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미혼모자에 대해 선진국에 걸맞은 사회인식 개선, 제도와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미혼모 양육권 포기 비율이 미국은 2%인데 우리는 67%나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미혼모에 대한 부정적 인식, 국가의 지원 부족이라고 한다. 부정적 인식은 하루아침에 고치기 어렵지만, 미혼모자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지원책은 국민 행복 증진을 위한 ‘손톱 밑의 가시’의 하나로 포함시켜 당장이라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하던 시절 오랫동안 국가를 대신해서 미혼모 시설을 운영해 오던 사설기관 중 일부가 이제는 기관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외 입양을 권장하는 것도 해외 입양 비율이 높은 한 원인이라고 한다. 여야 대치 정국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뜻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 대한 범사회적 공감, 복지부, 교육부, 외교부 등 관련 부처 간의 협력, 그리고 입법부의 더 높은 관심은 미국역사박물관에 홀로 서 있는 하영이의 한복이 살아 있는 슬픈 역사가 아니라 박제된 과거의 역사가 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정치적 돌파구 열리면 대북 경제지원 즉시 가능”

    “정치적 돌파구 열리면 대북 경제지원 즉시 가능”

    김용(54) 세계은행 총재는 지난 22일(현지시간) 북한에 대한 경제 지원과 관련해 “정치적 돌파구가 열릴 경우 신속한 지원활동을 벌일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총재는 곧 한국과 일본을 방문하기에 앞서 미국 워싱턴 세계은행 본부에서 한국·일본 특파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북한 지원과 관련, 가용한 모든 자료를 축적해놓고 있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그는 “부친이 6·25때 탈북한 피란민 출신으로 친척들이 아직도 북한에 남아있기 때문에 북한 문제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큰 사안”이라며 “북한이 세계은행에 가입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북한을 기꺼이 도울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세계은행은 2012년 말 현재 188개 회원국을 두고 있으며 북한은 쿠바 등과 함께 가입하지 않은 상태다. 그는 특히 “앞으로 정치적 돌파구가 열린 이후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한국개발연구원(KDI)이나 한국 내 다른 전문가들과 긴밀히 협력할 것”이라며 “현 시점에서 북한의 경제 상황을 정확히 평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나 북한의 인도적 위기 상황과 북한 주민들의 고통과 관련한 보고들을 매우 세밀하게 점검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의 경제 성장률과 관련해 “올해에는 2.8% 성장할 것으로 보지만 내년에는 3.7%까지 올라갈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그는 지난 5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함께 아프리카를 방문한 경험담을 소개하면서 “아프리카 각국의 지도자들, 특히 에티오피아 총리가 나에게 ‘새마을 운동’을 아느냐며 구체적 프로그램을 물어봤다”며 “이는 한국 기업들이 아프리카에 투자할 명분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의 교육 시스템을 거론하며 “과연 차세대 혁신가들을 훈련하기에 적합한지, 연구개발 투자는 충분한지를 한국은 스스로 반문할 필요가 있다”며 “핀란드의 교육 혁신은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모든 나라가 참고할 만한 모델”이라고 했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19) 강남(상)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19) 강남(상)

    “서울은 넓다. 아홉 개의 구(區)에 가(街), 동(洞)이 대충 잡아서 380개나 된다. 동쪽으로는 청량리 너머로 망우리, 우이동 동북쪽으로는 의정부를 지척에 둔 수유리, 서쪽으로는 인천가도 중간의 영등포 끝, 동남쪽으로는 한강 너머의 천호동 너머, 서남쪽으로도 시흥까지 이렇게 굉장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넓은 서울도 370만명이 정작 살아 보면 여간 좁은 곳이 아니다. 가는 곳마다, 이르는 곳마다 꽉꽉 차 있다. 집은 교외에 자꾸 늘어서지만 연년이 자꾸 모자란다….” 소설가 이호철이 1966년 2월부터 신문에 연재한 ‘서울은 만원이다’의 한 대목이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된 1967년은 우리나라에서 보릿고개가 사라진 역사적 전환기였다. 해방 전후 100만명 선을 유지하던 서울 인구는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팽창하기 시작해 1959년 200만명, 1963년 300만명, 1970년 550만명을 넘어섰다. 매년 큰 도시 한 개(30만명)씩 인구가 불었다. 서울 곳곳은 공식통계상 13만채, 비공식적으로는 20만채 이상의 볼썽사나운 판잣집으로 뒤덮였고 시민들은 교통지옥에 시달렸다. 택지난과 교통난 해결이 급선무였다. 서울은 폭발 일보 직전이었고 비상구가 필요했다. 한강 너머 ‘신대륙’ 진출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강남은 논밭과 과수원, 초가집이 어우러진 한갓진 농촌이었다. 서울 사람들이 먹을 과일과 채소를 공급하는 초식(草食) 농사가 주를 이뤘다. 손수레에 채소와 과일을 싣고 강을 건넌 뒤 돌아올 때는 배설물을 실어다가 거름으로 썼다. 뽕밭이었던 잠원동은 무가 자라기 좋은 모래 토질이어서 단무지 농사가 성황이었고, 서초동은 미군과 서울 사람이 사갈 화초가 만개한 꽃동네였다. 압구정은 배나무 과수원골, 도곡동은 도라지 특산지, 청담동은 물 맑은 청숫골이었다. 이때 강남 사람들은 강 건너 강북 사람을 ‘서울사람’이라고 부르며 마치 상전 모시듯 했다. 1963년 행정구역 개편이 ‘강남신화’의 틀을 제공했다. 서울은 종전보다 2배 이상 확장돼 오늘의 모양새를 갖췄다. 지금의 강남 지역과 중랑, 강북, 노원, 은평, 강서, 구로, 금천, 관악구가 서울시에 편입된 것이다. 양주, 의정부, 고양, 광주, 과천, 시흥 등 서울을 둘러싼 경기도의 알토란 같은 땅이 서울 품에 안겼다. 5·16 쿠데타 주도 세력으로 현역 육군 소장이던 윤태일 서울시장의 공이 컸다. 군복을 입고 다녀서 ‘군복시장’이라고 불린 그는 박경원 내무부 장관, 박창원 경기도지사와의 기 싸움에서 힘을 발휘했던 것 같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교수는 “이 구역 확장이 없었더라면, (만약) 구역 확장이 늦게 이뤄졌더라면 강남 개발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치 지지부진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오늘날 ‘강남’은 불과 50년 전 공중전화나 전신전화취급소조차 없는 ‘깡촌’이었다. 서울로 편입되고 나서는 남서울, 제2 서울, 새 서울 등으로 띄워졌지만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한때 강남 지역의 통칭은 영동이었다. 문희옥의 유행가 가사처럼 ‘여기는 남서울 영동’이었다. 강남이라는 지명은 1975년 성동구 언주출장소와 영등포구 신동출장소가 합쳐져 강남구가 생기면서 대세로 굳었다. 초창기 강남은 자체 지명을 갖기보다는 이웃과의 지리적 관계 속에서 존재했다. 영동은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행정편의적 작명이었고, 남서울은 단순히 ‘서울의 남쪽’이었다. 지금의 강남 지역을 이루는 광주군 언주면과 대왕면, 시흥군 신동면 등 옛 지명은 도로(언주로, 대왕 판교로)와 학교(대왕초·중교, 언주초·중교, 신동초교) 이름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서울의 초식 재배지였던 과거사를 가능하면 지우고 싶었던 모양이다. 오늘날 부와 권력의 정점을 이루는 강남이라는 지명에는 또 다른 차별적 통념이 존재한다. 강남은 최초 ‘한강의 남쪽’을 의미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강남구·서초구·송파구·강동구 등 4개 구로 범위가 좁혀졌다. 완전히 자리를 잡은 1990년대 이후에는 강남구·서초구·송파구 3개 구를 강남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아직도 강남구·서초구 2개 구나 강남구 1개 구를 ‘진정한 강남’이라고 여기는 시각이 엄연하게 존재한다. 강남이라는 화려한 이름 뒤에는 곡절이 많다. 화신백화점 재벌 박흥식의 1962년 남서울 신도시계획구상이 강남 개발의 첫발이었다. 1966년 1월 서울시가 내놓은 남서울계획이나 같은 해 8월의 새서울백지계획도 ‘박흥식 프로젝트’의 복사판에 그쳤다. 본격적인 강남 개발은 2년 뒤 영동지구 구획정리사업이 시작되면서 닻을 올렸지만 성공 가능성은 불투명했다. ‘서울=사대문’이라는 600년 묵은 등식이 그리 쉽사리 깨지지 않을 듯 보였다. 그러나 불과 20년 만에 ‘뜨는 강남, 지는 강북’의 시대가 ‘훅’하고 왔다. 강남은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다. 1969년 12월 한남동과 신사동을 잇는 한남대교(제3한강교)의 개통과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 개통이 결정타였다. 1964년 서독 방문길에 아우토반을 달려 본 박정희가 1967년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자 고도 경제성장의 혈류인 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한 것이다. 고속도로 편입 용지 매수비용이 문제였다. 정부가 용지 매입비를 줄이려고 고속도로의 기점인 제3한강교에서 양재동에 이르는 7.6㎞를 구획정리사업을 통해 무상확보토록 조치하면서 강남 개발의 물꼬가 터진 것이다. 영동1지구는 도로·학교·공원 등 공공용지 확보를 위해 세 차례나 구역 확장을 되풀이한 끝에 1971년 2월 최종적으로 1695만㎡(513만평)까지 늘어났다. 강남이라는 빈 땅을 부산~대구~대전~강남~한강~사대문에 연결함으로써 허허벌판의 개발 가능성이 활짝 열렸다. 영동2지구 개발계획은 1970년 11월 5일 발표됐는데 1206만㎡(365만평)의 엄청난 부지와 너비 70m에 길이 3.6㎞, 너비 50m에 길이 6.9㎞의 광폭 간선도로가 놓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첨단 격자형 가로계획이 선보였다. 대표적인 계획도시 미국 수도 워싱턴DC에서도 볼 수 없는 넓은 길이었다. 광화문길(세종대로)보다 70배나 긴 길이 강남 땅에 ‘쭉’ 그어진다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1, 2지구를 합쳐 2901만㎡(878만평)의 광활한 신천지가 개벽을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강남은 4개의 산(내사산)에 둘러싸여 더 뻗어 나갈 곳이 없는 사대문 구시가지의 더할 나위 없는 대안이었다. 구시가지를 대궐과 성곽이 살아 있는 역사문화도시로 남겨 두고 현대적 신시가지로 개발할 만한 여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역사적으로도 2000년 전 한성백제의 옛 도읍지이자 다가올 황해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현대화와 도시화가 판친 1970~80년대의 시대정신에 딱 맞았다. 한 건을 노리는 조급주의와 독재정권을 향한 충성 일변도 정책 그리고 정치자금 마련을 위한 부동산 투기의 흑막이 없었더라면 환상적인 도시가 만들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강남의 성공 배경에는 ‘말 못할 안보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전쟁 때 한강을 건너 피란길에 올랐던 서울 사람들에게 한강인도교 폭파와 강을 건널 수 없어 발을 구르던 기억은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 다리 건너편 강남은 다시 재현될지도 모르는 피란길의 두려움을 잠재우는 안도감을 제공했다. 남북 긴장 조성을 통해 권력 연장을 획책했던 박정희 정권이 강북 억제와 강남 이전을 부추긴 점이 작용한 것이다. 강남은 폭발했다. ‘말죽거리 신화’가 시작된 지 20여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세계 최대 규모의 아파트공화국으로 우뚝 섰다. 서울 거주자의 절반, 우리나라 전체 주거자의 절반이 아파트에 사는 아파트 시대가 이때 촉발된 것이다. 강남발 부동산 광풍으로 남한의 땅값 총액은 올 현재 5000조원이 넘는다. 남한 땅을 팔면 우리보다 42배 큰 미국의 절반을 살 수 있고, 100배 큰 캐나다를 여섯 개나 살 수 있다고 한다. 말죽거리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지하철 3호선 양재역 동남쪽 말죽거리가 강남 부동산 투기의 원조이자 온상이었다. 말죽거리는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도망가던 인조가 말에서 내릴 새도 없이 안장에 앉아 죽을 먹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1960년대 초 3.3㎡당 300~400원 하던 땅값이 10년이 지난 1970년 초 최고 50배 올라 2만원을 호가하더니 1970년대 말에는 1000배 이상 뛰어 50만원을 훌쩍 넘어섰다. 같은 시기 강북의 신당동과 후암동은 10배, 25배 올랐을 뿐이다. 강남 땅값은 2003년 1000만원을 넘어선 이후 현재 3000만원을 호가한다. 달랑 300원 하던 땅값이 무려 10만배 오른 셈이다. 강남은 세계에서 유례없는 군사작전식 초고속 압축성장의 유일무이한 모델이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축복과 국내 최대 규모의 판자촌인 구룡마을 재개발 논란에서 보듯이 부동산 투기의 그늘에서 비롯된 천민자본주의의 저주가 공존하는 곳이다. joo@seoul.co.kr
  • [손현주의 계절 밥상 여행] 부산 짚불 곰장어와 고갈비

    [손현주의 계절 밥상 여행] 부산 짚불 곰장어와 고갈비

    그때도 깊숙한 가을날이었지 싶다. 친구와 난 무작정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목표는 바다와 자갈치시장이었고, 더 큰 목표는 연탄불에 뭔가 냄새를 피우며 노릇노릇 굽는 것이었다. 젊은 우리 눈에 비친 부산은 생각보다 어수선하고 넓었다. 우산이 애매할 만큼 가랑비가 어설프게 뿌렸다. 버스를 타고, 걷고, 어렵게 찾아간 자갈치시장의 오후는 비린내가 진동했다. 기웃거리다가 인심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 포장마차로 숨어들었고, 우린 굶주린 짐승처럼 주문을 외치기 시작했다. “아지매, 곰장어도 굽고요, 고등어도 굽고, 오뎅 국물은 무료죠? 일단 소주 한 병!” 연탄불에 곰장어가 요동을 치고 연기는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둘이 소주를 두 병 동내며 말도 안 되는 스무살 갓 넘은 지지배들의 인생 얘기가 해운대 푸른 바다처럼 때론 가볍고 때론 심오하게 넘실댔다. 그런데 나이 들어도 그때 하얗게 피어올라 연신 기침을 불러내던 생선 굽는 연기가 잊히지 않았다. 그러니 음식은 향수인 것이 분명하다. 해서 작정하고 그 냄새의 근원을 찾아 떠난 가을날 부산 ‘노릇노릇 연기여행’. 부산은 이미 그때의 부산이 아닌 게 분명하다. 탄 기름에 튀겨내는 생선조차 그 맛이 아니고 곰장어는 가스불판 위로 올라간다. 하지만 여전히 부산은 몇 가지 코드로 미식가들을 불러 모은다. 짚불에 요란하게 던져 굽는 곰장어와 지금은 거의 사라진 고갈비 골목 생선구이, 과일향이 나는 밀면, 아침 해장으로 기막힌 돼지국밥과 비빔잡채, 어묵, 유부주머니, 단팥죽, 씨앗호떡 등 시장통 간식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970, 80년대까지 광복동 일대에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서민과 학생들이 고등어 한 마리 구워 소주잔을 기울이던 고갈비골목이 형성되어 있었다. 용두산의 그림자가 길어지면 청년들은 약속이나 한 듯 연기를 따라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갈비 대신 고등어를 뜯으며 시대의 울분을 토하고 호기를 사르던 애수의 골목이다. 지금은 ‘남마담’과 ‘할매집’ 단 2곳만 남아 있다. 1974년 문을 연 남마담 집은 7080세대에는 여전히 향수 가득한 청춘의 아지트다. 어머니는 타닥타닥 소리만 들어도 고등어 익은 상태를 안다. 큼지막한 고등어를 껍질은 바삭하고 속은 야들야들하게 구워내는 노련한 솜씨는 시대를 뛰어넘어 사랑받아 왔다. 흰 살점을 뜯다 보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달랑 미역냉국 한 가지로도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게 된다. 지금 고갈비집은 자갈치시장에 더 많다. 시장통 생선전으로 들어가면 고등어며 갈치, 빨간고기 눈뽈대 등을 수북이 쌓아 놓고 허기진 배를 유혹한다. 가격이 싼 편이 아닌 데다 기름이 깨끗하지 못하고 미리 구워놔 딱딱하니 맛과 만족도를 거론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불판에 빨갛게 구워주는 곰장어와 함께 허출한 시장통의 한 끼로는 제법 낭만적이다. 곰장어는 죽은 듯이 가만히 있다가도 손으로 집으면 꼼작꼼작 움직인다고 하여 이곳 사투리로 ‘곰장어’다. 여름부터 10월 중순까지 맛있는 철이라고는 하지만 사철 불판은 돌아간다. 어쩌면 날이 선선해지면서 ‘굽는’ 행위가 더 탄력을 받는지도 모른다. 해서 날 저물면 곰장어 애호가들은 기장 쪽으로 넘어간다. 불내 확확 번지는 짚불 곰장어 집들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기실 짚불 곰장어는 징그럽다. 손질하여 양념구이로 불판에 내오면 모른 체하고 여성들도 집어 먹지만, 짚불 곰장어는 살아서 날뛰니 경악한다. 구워서 둘둘 말아 내온 생김새를 봐도 영 눈과 손이 안 간다. 그래도 굽는 모습이 보고 싶어 주방을 기웃거리다가 들킨 강아지처럼 어색하게 ‘기장곰장어’ 주인 김영근씨와 마주쳤다. 김씨는 가문 대대로 120년간 곰장어 요리를 해 왔다며 자부심이 컸다. 그는 직접 구워 맛을 보여주겠다며 연기 그을린 부엌으로 안내했다. 예전에는 마당에 짚으로 모닥불을 피워 곰장어를 던져 구워냈다. 지금은 굽기 좋도록 석쇠를 얹은 전용 아궁이를 만들었다. 슬쩍 둘러보니 고무 대야에 곰장어가 한 가득이다. 짚가리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김씨는 능숙하게 볏짚을 내려 불을 붙였다. 대야에서 딱 먹기 좋다는 ‘돌돌 말아 한 입 크기’의 곰장어가 순식간에 김씨 손에 잡혔다. 불은 활활 타오르고 곰장어가 던져졌다. 요동을 친다. 지옥이다. 음식이라지만 차마 제대로 볼 수가 없다. 한소끔 불길이 지나가고 움직임이 멈췄다. 김씨는 애벌 익은 곰장어를 손으로 돌돌 말아 똬리처럼 모양을 잡았다. 그리고 다시 짚불을 붙여 더 익혔다. 새까맣다. 훈기로 익었다고 했다. 김씨가 한 마리를 잡더니 가운데를 툭 분지르듯 휜다. 슬쩍 당기니 껍데기가 고스란히 벗겨지고 속살이 나온다. 넋 놓고 있는 사이 곰장어 한 마리가 내 입으로 쑥 들어왔다. 엉겁결에 받긴 했는데 아찔하다. 눈을 꼭 감고 씹었다. 쌉싸래하고 해초의 짠맛이 입 안 가득 고인다. 오도독오도독 씹힌다. 정신없이 씹어 꿀떡 삼키고 나니 김씨가 “맛있죠” 하며 웃어 젖힌다. “곰장어는 생김새가 뱀을 닮았어요. 눈이 없고 몸 양 옆에서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흰 진액을 뿜어냅니다. 다른 생선이 곁에서 같이 살 수가 없어요. 흉물스럽다고 양반들에게 천대받았으니 오히려 서민들에게는 고마운 생선인 거죠.” 조선시대 말, 극심한 흉년이 들고 보릿고개가 찾아왔다. 서민들은 허기졌다. 생김새가 요상하여 부자들은 거들떠보지 않으니 곰장어는 고맙게도 그들 차지였다. 산과 들 아무데서나 볏짚에 불을 피워 곰장어를 던졌다. 껍질 벗겨 깨끗한 속살 서너 마리만 먹으면 탈이 나지 않고 며칠 굶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도 부산으로 피란 온 사람들 허기를 달래준 고기가 짚불 곰장어다. 삶아도 먹고 방아 잎을 넣어 된장국과 매운탕을 끓여낸다. 귀한 영양식이다. 불을 피워 연기를 내는 음식은 뭐든 맛있다. 건강에 안 좋다고 소란을 피우지만, 다 따지고 떼어내면 먹을 것 없는 세상이다. 아궁이 잔불 꺼내 시커먼 천일염 툭툭 뿌려 굽는 생선 맛을 어찌 외면할까. 연탄불이며 짚불이 주는, 적당히 태워진 음식이 주는 냄새는 과거로 이어지는 통로이며 우리를 다시 젊은 날로 돌아가게 하는 시간여행이다. 마침 부산에서 고등어축제가 열린다. 푸른 바다 한 잔 술 삼아 푸른 등 뒤적거리며 불을 피우러 부산에 가자, 당신과 나 단 둘이서. 글 사진 음식평론가 marrian@naver.com 여행수첩 →가는 길 전국을 일일 생활권으로 만들어 놓은 KTX는 당일치기 부산 여행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부산은 2박 3일 알차게 둘러봐도 볼 것과 먹을 것이 너무나 많은 도시다. 짝퉁과 불량식품이 혼재하는 시장과 다국적 거리들. 카메라 들고 감천마을 골목길을 둘러보는 재미도 좋다. 오는 25일부터 27일까지 사흘간 송도해수욕장 인근에서 고등어축제가 열린다. →제철 맛집(051) 남마담(246-2148, 고갈비구이), 기장곰장어(721-2934, 곰장어 짚불구이, 매운탕), 마산식당(631-6906, 돼지국밥)
  • 일본 태풍 위파, 간토 연안 접근…원전 오염수 누출 ‘위험’

    26호 태풍 위파가 강한 세력을 유지한 채 일본 간토(關東)지방 연안에 접근하고 있다. 대형으로 강한 태풍인 위파는 16일 아침 6시 현재 간토, 수도권, 도카이(東海) 지방에 많은 비를 뿌리면서 시속 60㎞의 빠른 속도로 간토 지방으로 접근중이며 이날 오전 중으로 간토 연안을 따라 태평양으로 빠져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태풍 길목에 위치한 이즈(伊豆)제도 오시마(大島)에는 800mm의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주택 3채가 떠내려갔으며 지바(千葉)현 등에서는 주민 피란 지시 또는 권고가 잇따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예수의 생애’ 연작 30점 11년 만에 다시 만난다

    ‘예수의 생애’ 연작 30점 11년 만에 다시 만난다

    ‘한복 입은 마리아’, ‘갓 쓴 예수’ 등 운보 김기창(1913~2001) 화백이 그린 ‘예수의 생애’ 연작 성화 30점이 11년 만에 공개된다. 17일 서울 종로구 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 개막하는 운보 탄생 100주년 기념전 ‘예수와 귀먹은 양’에서다. ‘예수의 생애’는 운보 사후 이듬해인 2002년 덕수궁미술관의 추모전이 마지막 전시였다. ‘바보 산수’로 유명한 운보는 일곱살 때 열병을 앓은 뒤 청력을 잃었다. 17세 때 승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의 권유로 이당 김은호(1892~1979)의 문하에 들어가 그림 수업을 받은 그는 6개월 만에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입선하는 등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전통적 기법과 새로운 실험으로 ‘바보산수’, ‘바보화조’로 대표되는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완성했으며, 한국 근대미술과 현대미술의 교두보 역할을 담당했다. ‘예수의 생애’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운보가 6·25전쟁 때 피란처인 군산에서 그린 조선시대 풍속화 양식의 성화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 민족의 고난이 예수의 고난과 유사하다는 생각에서 ‘예수의 생애’ 연작을 시작해 1년 반 만에 완성했다. 한복 입은 예수와 마리아 등 전통 한국문화를 배경으로 성서를 해석해 기독교의 토착화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작품으로 평가된다. 운보는 개신교 모태 신앙이었으나 아끼던 막내딸이 수녀가 되자 1985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전시 제목의 ‘귀먹은 양’은 평생 장애와 싸운 화가에 대한 상징이다. 이번 전시에는 ‘예수의 생애’ 연작 이외에 갑작스럽게 침묵의 감옥에 갇힌 운보가 마음의 한을 예술로 풀어 낸 대표작들을 조망한다. 서울미술관 이주헌 관장은 “운보의 ‘예수의 생애’는 한국 회화사와 세계 기독교 미술사를 통틀어 매우 독창적이며 중요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음 달 2일 오후 2시에는 미술평론가인 서성록 안동대 미술학과 교수의 무료 초청 강연회가 마련된다. 내년 1월 19일까지 성인 9000원, 초·중·고생 7000원. (02)395-0100.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태풍 위파 일본 관동지방 접근…원전 오염수 유출 우려

    태풍 위파 일본 관동지방 접근…원전 오염수 유출 우려

    태풍 위파 일본 관동지방 접근…원전 오염수 유출 우려 제26호 태풍 위파가 일본 간토(關東·관동) 지방을 통과할 것으로 예상돼 원전 오염수 유출 가능성에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26호 태풍 위파는 현재 강한 세력을 유지한 채 일본 간토지방 연안에 접근중이다. 대형으로 강한 태풍인 위파는 16일 오전 6시 현재 간토, 수도권, 도카이(東海) 지방에 많은 비를 뿌리면서 시속 60㎞의 빠른 속도로 간토 지방으로 접근중이다. 이날 오전 중으로 간토 연안을 따라 태평양으로 빠져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태풍 위파 이동 경로에 위치한 이즈(伊豆)제도 오시마(大島)에는 800mm의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주택 3채가 떠내려갔으며 지바(千葉)현 등에서는 주민 피란 지시 또는 권고가 잇따랐다. 특히 이날 태풍 위파가 후쿠시마 제1원전 인근을 지날 것으로 예상돼 원전 오염수 추가 유출이 우려되고 있는 상황이다. 네티즌들은 “일본 태풍 위파 무사히 지나갔으면”, “일본 태풍 위파 원전 오염수 또 흘러나가게 할까 불안하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동의보감 400주년… 약초 비빔밥 400인분 쏜다

    동의보감 400주년… 약초 비빔밥 400인분 쏜다

    강서구는 12~13일 가양동 구암공원에서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을 맞아 ‘의성(醫聖) 허준 축제’를 개최한다. 허준이 태어난 가양동엔 허준박물관과 동의보감 집필 장소로 널리 알려진 허가바위, 허준의 아호를 딴 구암공원 등이 있다. 12일 오전 10시~낮 12시 허준의 일대기를 그린 거리 퍼레이드가 공항대로에서 허준박물관까지 2㎞ 구간에서 펼쳐지며 행사의 시작을 알린다. 서낭당공원에서 공항대로~양천로~허준박물관을 잇는 행진에서는 서자로 태어나 어려움을 겪은 허준의 유년 시절부터 의원의 길, 임진왜란 피란, 동의보감 탄생까지 허준의 삶을 보여 준다. 청사초롱을 든 초등생 80명이 선두에 선다. 또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이라는 의미를 담아 황기와 오가피, 뽕잎, 당귀, 산야초 등 10여 가지 약초를 넣은 비빔밥 400인분을 즉석에서 만들어 주민들에게 나눠 준다. 허준 테마 그림이 그려진 400개의 이음연 날리기도 곁들여진다. 특히 오후 2시 한의사협회에서는 한국 의학의 자주적 기초를 마련해 준 동의보감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국제학술대회를 연다. 국가별 참여자가 ‘동의보감의 영향과 활용’을 주제로 동의보감이 나라별로 갖는 의미와 영향, 연구에 대해 발표한다. 13일엔 오전 10시 허준 추모 제례를 필두로 오후 1~4시 30분 ‘약선 요리 대전’이 펼쳐진다. 임현식과 이계인 등 연예인 7명이 출연해 동의보감에 나오는 재료의 효능을 바탕으로 7가지 약선 요리(전복 삼계탕, 오리부추 불고기, 매실 떡갈비, 토란탕 등)를 놓고 솜씨를 겨룬다. 오후 5~6시에는 허준의 일대기를 그린 마당극이 펼쳐진다. 가수 에일리·케이윌을 비롯해 백지영, 심수봉, 남진 등 인기가수 콘서트도 이틀간 무대를 빛낸다. 노현송 구청장은 “허준 축제는 선생의 역사적·사상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동의보감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도록 꾸몄다”면서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을 계기로 강서구가 한방 허브도시로 거듭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씨줄날줄] 홍시욱함(艦)/서동철 논설위원

    홍시욱 이등병조는 해군 첩보부대의 특수공작요원이었다. 그는 1950년 8월 24일 16명의 전우와 북한 치하의 인천 영흥도로 잠입했다. 이후 인천과 서울, 수원의 적진을 뚫고 적의 병력배치 상황과 화력 등 정보를 수집했다. 연합군에 전달된 이들의 정보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상륙작전 하루 전인 9월 14일 적인 북한군의 영흥도 공격에 일부 공작대 요원이 포위되고 말았다. 홍 이등병조는 소총으로 6명의 적을 사살했다. 마지막 한 발이 남자 그는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는 불과 스물 둘의 나이에 자결했다. 생포될 경우 기밀 유지가 어려울 것을 우려한 결단이었다. 이등병조는 현재의 중사에 해당하는 계급이다. 6·25전쟁의 영웅이지만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홍시욱 이등병조가 해군의 최신예 유도탄 고속함(PKG)의 이름으로 되살아났다는 소식이다. 방위사업청이 어제 유도탄 고속함의 11번째 함정인 ‘홍시욱’함을 해군에 인도했다는 것이다. 홍시욱함은 해군의 노후한 고속정을 대체하는 450t급 고속함이다. 함대함유도탄과 76㎜ 함포를 비롯한 최신 무기체계를 갖추고 최대 40노트(74㎞/h)로 연근해 초계임무를 수행하는 함정으로 알려진다. 함정의 이름은 그동안 철저하게 역사적 위인의 몫이었다. 3900t급 구축함은 광개토대왕함, 을지문덕함, 양만춘함이다. 고구려 영웅들이다. 4400t급 구축함은 이순신함과 문무대왕함, 대조영함으로 지어졌다. 7600t급 한국형 이지스함에는 세종대왕, 이이, 류성룡의 이름이 붙여졌다. 장보고급 잠수함은 임진왜란 당시 성웅 이순신(李舜臣) 휘하의 또 다른 이순신(李純信), 나대용, 이억기 장군의 이름을 땄다. 함정 이름은 2008년 유도탄 고속함 1호가 윤영하함으로 명명되면서 역사적 인물에서 탈피하기 시작한다. 윤영하함의 작명은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6명의 용사를 기리는 뜻에서 이루어졌다. 윤영하 소령은 당시 격전을 벌인 참수리호 정장이었다. 홍시욱함과 동시에 진수된 유도탄 고속함인 임병래함과 홍대선함도 전쟁 승리에 공헌한 이름 없는 군인들을 기억하자는 의미를 갖는다. 임병래 중위는 해군 특공대 조장으로 홍시욱 이등병조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홍대선 삼등병조는 1952년 1월 4일 옹진반도 순위도 주민의 철수작전 도중 피란민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북한군에 돌진해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고 한다. 왕후장상이 아닌 잊힌 작은 영웅들을 현실에 재진입시키는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해군의 진일보한 의식이 바탕이 됐을 것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주말 영화]

    ■철의 여인(EBS 일요일 오후 2시 30분) 스물여섯 살의 야심만만한 옥스퍼드 졸업생 마거릿은 세상을 바꿔 보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지방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지만 낙선하고 만다. 실망한 그녀를 눈여겨본 사업가 데니스는 특유의 유머와 따뜻함으로 그녀를 사로잡으며 평생의 후원자가 되기로 약속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마거릿은 꿈에 그리던 의회 입성에 성공하고, 곧이어 모두가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로 선출된다. 연거푸 3선에 성공해 ‘철의 여인’이라 불리며 세계적인 여성 정치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떨친다. 한편 그녀는 자신의 신념과 정책을 당당히 추진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이들과의 격렬한 대치가 이어지고 각료들은 그녀에게 11년간 지켜온 총리직에서 물러나라고 종용하기에 이르는데…. 20세기 후반의 굵직한 사건들을 모두 목격하고 경험했던 그녀의 인생은 실로 파란만장했다. ■독립영화관-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 2(KBS1 토요일 밤 12시 35분) 북조선 노동당을 지지하는 공산세력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에서 억울하게 죽은 약 3만명의 제주 도민들의 슬픈 삶이 뿌연 안개 속에서 슬프고도 잔혹하게 펼쳐진다. 군인들의 총격을 견디지 못해 결국 중산간 마을로 도망치는 주민들. 1948년 11월 제주 사람들은 ‘해안선 5㎞ 밖 모든 사람을 폭도로 여긴다’는 흉흉한 소문에 삼삼오오 피란길에 오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왜 어떻게 일어나는지, 영문도 모른 채 산속으로 피신한 마을사람들은 찐 감자를 나눠 먹으며 순진하게도 집에 두고 와 굶주릴 돼지나 장가갈 걱정 등 소소한 일상의 고민을 얘기하며 웃음을 잃지 않는다. ■존 말코비치 되기(EBS 토요일 밤 11시) 재능과 열정에 비해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인형조종술사 크레이그 슈워츠는 불경기에 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한 채 살아간다. 다른 직업을 찾아보라는 아내 로테의 조언에 신문을 뒤적이던 크레이그는 우연히 눈에 띄는 구인광고를 발견한다. 재빠른 손놀림으로 서류 정리를 도와줄 문서 정리원을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찾아간 회사는 기이하게도 건물의 7층과 8층 사이, 즉 7.5층에 있었다. 면접을 무사히 통과한 크레이그는 어느 날, 사무실 벽에 숨겨진 문 하나를 발견한다. 그것은 배우 존 말코비치의 뇌로 들어가는 입구였던 것. 타인의 몸에서 신기한 경험을 한 크레이그는 이 사실을 아내와 회사 동료에게 알린다.
  • [우리 동네 Secret 스토리] 용산구 용산동 2가 해방촌

    [우리 동네 Secret 스토리] 용산구 용산동 2가 해방촌

    “‘HBC’를 아시나요.” 단어만 들어도 어딘지 단박에 알아챘다면 당신은 트렌드 세터(trend-setter)다. 문학 마니아에겐 이범선의 소설 ‘오발탄’의 배경으로 익숙할 것이다. 젊은이들에겐 이태원에 이어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놀이와 데이트의 명소이고,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겐 다양함과 따뜻함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바로 용산구 용산동 2가 ‘해방촌’(HBC)이다. 남산 서쪽에 있는 마을로, 시내 전경이 한눈에 보이며 빼어난 야경을 뽐낸다. 해방촌은 1945년 광복 뒤 월남한 사람들이 터를 잡고 6·25전쟁 피란민들이 가세한 비탈 마을이다. 한때 서울에서 가장 낙후된 곳으로 손꼽히곤 했다. 그랬던 해방촌이 몇 년 전부터 달라졌다. 좁은 골목길의 낡은 담벼락엔 자원봉사자들의 정성이 담긴 벽화가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고, 이태원이나 한남동 등의 높은 임대료에 질린 외국인들이 하나둘 이곳으로 몰려들면서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낡고 쇠잔한 느낌은 어느새 해방촌만의 특별한 장점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됐고 입소문은 시간문제였다. 해방촌을 제대로 즐기려면 테마별 코스를 파악한 뒤 동선을 짜는 게 좋다. 나름대로 번화함을 자랑하는 해방촌 오거리에서 방사형으로 뻗은 다섯 갈래의 길은 저마다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 길을 따라 구경하는 것도 해방촌을 잘 즐기는 방법 중 하나다. 먼저 해방촌 마을을 알고 싶다면 108계단과 벽화 감상 코스가 제격이다. 후암동 버스 앞에서 올려다보면 단박에 눈에 들어오는 108계단은 종종 드라마의 배경이 될 만큼 유명세가 따르는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108개의 대리석 계단으로, 계단 중간에 예쁜 정원이 조성돼 있다. 108계단 맨 위에 올라서면 서울의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108계단 양옆으로는 1960~70년대 해방촌 상권을 장악했던 일명 ‘요코’(스웨터 가내수공업)의 흔적이 담긴 미싱가게들이 줄지었다. 해방촌의 근대사를 묘하게 느낄 수 있어 사진 마니아들에게 인기가 많다. 108계단을 따라 좁고 낡은 후미진 골목길을 누비다 보면 해방촌의 백미인 각종 벽화가 눈에 띈다. 야외 갤러리에 온 듯한 느낌이다. 보성여고 재학생과 서울대 건축학과 학생, 외국인 등 해방촌 주민들이 손수 작업한 벽화지만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을 뽐낸다. 산책을 원한다면 남산 소월길을 거쳐 해방촌을 찾는 길이 좋다. 해방촌에선 해외여행을 가지 않아도 다양한 국적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경리단길과 연결된 해방촌 골목길엔 이국적인 레스토랑, 카페, 펍이 줄지어 있다. 어느 집을 가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대부분 이름난 맛집이다. 김정은 기자 kimje@seoul.co.kr
  • [이슈&이슈] 부산 영도다리 도개기능 복원

    [이슈&이슈] 부산 영도다리 도개기능 복원

    “금순아~ 어디로 가서~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국민 가수 현인이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 가사 일부다.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어 ‘민족의 다리’로 불리는 부산 영도다리가 47년 만에 복원돼 다시 들어 올려진다. 부산시는 오는 11월 완공을 앞둔 도개교인 새 영도다리를 하루 한 차례 들어 올리기로 했다고 15일 밝혔다. 앞서 시는 지난 9일 중구 대교동 영도다리 재가설 건설현장에서 도개기능 시연행사를 가졌다. 새 영도다리에는 해체된 옛 영도다리 자재가 일부 사용됐다. 허남식 부산시장이 도개용 버튼을 누르자 거대한 다리 상판이 기계음을 내며 하늘로 치솟았다. 4차로에서 6차로로 확장된 영도다리의 전체 길이 215m 중 31.3m 부분(상판 무게 590t)이 2분 만에 75도 각도까지 들어 올려지자 이를 지켜보던 행인들이 탄성을 자아냈다. 일시정지했다 다시 내려오는 데 10분이 걸렸다. 1966년 도심 교통량 증가와 노후화로 도개 기능이 중단된 지 47년 만이다. 시는 2007년 7월 영도대교 보수·복원공사의 첫 삽을 뜬 지 6년여 만에 상부공(교각이나 기초공 위에 있는 상판) 가설을 모두 완료하고 도개교 시험운전을 했다. 다리 복원공사는 롯데건설이 맡았으며 사업비 1000억원은 롯데쇼핑이 전액 부담했다. 일제 강점기인 1934년 11월 개통된 영도다리는 중구에서 바다를 가로질러 영도를 잇는 우리나라 최초의 연륙교이자 최초의 도개교였다. 이 교량은 선박을 통행시키려고 교량의 본체를 움직일 수 있도록 설계한 다리로, 도개 기능이 중단될 때까지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길이 31m 상판이 하루 7차례 정도 올라가면서 그 아래로 배가 지나갔다. 다리가 들어 올려질 때를 맞춰 수많은 인파가 구경올 정도로 장관을 이뤘다 한국전쟁 때는 몰려든 피란민이 전쟁으로 인해 헤어진 가족 친·인척, 연인 등을 만나려고 다리 밑을 찾으면서 ‘우리나라 1호 만남의 광장’ 역할을 하며 근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산가족들에겐 하염없는 기다림의 장소이기도 했다. 가족들의 생사를 알고 싶어 역술인을 찾는 사람이 많다 보니 다리 밑에는 점집이 줄지어 들어서기도 했다. 2000년대 초 폐쇄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다리 주변은 추억의 사진을 남기려는 시민들로 장사진을 이루기도 했다. 시는 결국 4차로의 다리를 해체하고 도개 기능을 살린 6차로의 신설교량을 2007년 착공했다. 예전에는 도개를 위해 50마력짜리 유압식 전동기가 쓰였지만, 지금은 전기식으로 소음이 거의 나지 않는 215마력짜리 전동기 2대를 사용한다. 94개의 대형 톱니바퀴 기어로 1개가 돌아갈 때마다 1도씩 최대 94도까지 들어 올릴 수 있게 설계됐다. 현재 공정률 91%인 영도다리는 길이 215m, 폭 25.3m로 도개교 길이는 31.3m 규모로 복원됐다. 상부공 가설은 5개 블록으로 나뉘어 설치됐다. 시는 마무리 작업과 함께 도개교 시험운전을 몇 차례 더 한 뒤 11월 말쯤 정식 개통할 예정이다. 시민 이재웅(57)씨는 “어릴 때 부모 손잡고 영도다리가 올라가는 장면을 본 기억이 생생하다”며 “아련한 추억이 서린 영도다리의 상징적인 도개 기능이 복원된다는 소식에 가슴이 설렌다”고 말했다. 시는 이 다리가 완공되면 관광상품화해 하루 한 번씩 들어 올릴 계획이다. 시간대는 교통량이 많은 출퇴근 시간을 제외한 점심시간대 등을 고려하고 있다. 허 시장은 “관광객을 유치하려면 매일 특정 시간대에 다리를 들어올려야 하기 때문에 경찰과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는 영도다리의 옛 도개 기능 재현을 앞두고 해양관광도시 영도의 관문지역 경관을 한층 산뜻한 모습으로 바꾸는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시는 영도다리∼봉래교차로∼부산대교 1.55㎞ 구간을 대상으로 국비와 시비 56억원을 투입해 내년 말 준공을 목표로 영도다리 특화거리 조성사업, 영도 관문 상징가로 조성사업 등 3개 개선 사업을 추진한다. 이번 사업은 영도 관문지역의 무질서한 가로시설물과 보행공간에 토털 디자인 개념을 도입, 보행자 중심의 가로환경으로 조성된다. 영도다리 특화거리 조성사업은 영도경찰서 앞 ‘영도와 영도다리 스토리텔링 공간 조성사업’ 등이 주요 내용이며 영도 관문지역의 새로운 관광자원 역할을 하게 된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이슈&이슈] “개통식 역사적 문화축제로 부산의 관광 필수코스 될 것”

    [이슈&이슈] “개통식 역사적 문화축제로 부산의 관광 필수코스 될 것”

    “복원되는 영도다리가 부산의 새 관광명소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다양한 사업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허남식 부산시장은 15일 “영도다리는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어 ‘민족의 다리’로 불리는 소중한 유산인 만큼 새로 복원된 다리를 부산의 대표적 관광명소로 만들도록 하겠다”며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허 시장은 영도다리가 개통되면 부산을 찾는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관광객 유치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개통식 행사가 요란하지는 않지만 역사적인 의미를 기념할 수 있도록 전국적인 문화축제의 장으로 치를 계획”이라고 전했다. 특히 시민들의 관심사인 하루에 몇 번 다리를 들어 올릴지에 대해서는 하루에 한 번이 적당할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우선 영도다리가 개통되면 교통량과 관광객 등이 많이 찾는 시간대를 고려해 하루 한차례 10분 정도 들어 올리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에 따라 영도다리는 하루 한 차례, 교통량이 많은 출퇴근 시간대를 제외한 점심시간대에 들어 올려질 전망이다. 이와 함께 영도다리의 관광상품화를 위해 도개교량 상판 포장부는 부산을 알릴 수 있도록 부산시를 상징하는 디자인을 할 방침이다. 아울러 다리 주변 경관 개선 사업도 함께 추진해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겠다고 덧붙였다. 허 시장은 “영도다리 주변의 옛 도심인 중구, 영도구 주변의 자갈치 시장 등 관광지는 이미 크루즈 관광객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다”며 “영도다리가 역사적인 스토리텔링까지 살려 국내 유일의 도개교로 복원되면 관광의 필수코스로 자리 잡아 부산의 새로운 관광명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재즈 인생 50여년…국내 남성 재즈 보컬 1세대 김준

    [김문이 만난사람] 재즈 인생 50여년…국내 남성 재즈 보컬 1세대 김준

    전설의 재즈 뮤지션 루이 암스트롱에게 묻는다, 재즈가 무엇이냐고. “궁금해도 절대로 알 수 없을걸”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러면서 “생각하면 생각한 대로 비비디 바비디 부”라고 한다. 아마도 재즈가 느낌으로 전해져 오는 음악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재즈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 재즈는 원래 블루스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아프리카와 유럽 문화권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프랑스인과 흑인의 혼혈인 크레올들의 음악적 요소가 뒤섞이면서 탄생했다. 1800년대 후반 농장에서 불리던 노동요나 뱃노래 등이 발전해 1900년대 초반 블루스적 특징을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언제 재즈음악이 들어왔을까. 흥미롭게도 대한매일신보 기자를 지낸 바 있으며 ‘봉선화’ 등을 작곡한 홍난파 선생이 재즈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1930년대 미국에 유학해 재즈를 익혔던 그는 지금의 KBS 전신인 경성중앙방송국에서 관현악단을 만들어 재즈를 연주했다. 1940년대 재즈 스타일 곡들이 대중음악에 조금씩 섞이면서 박단마가 부른 ‘나는 열일곱살이에요’가 국내 최초로 스윙 사운드를 사용한 재즈 스타일의 곡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 광복 이후 미군 문화가 국내에 유입되면서 재즈가 클럽에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1950년대 루이 암스트롱이 각종 영화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면서 본격적으로 재즈가 등장했다. 1960년대 미8군 쇼 무대는 가수 지망생들의 생활의 터전이었고 경음악단들이 앞다퉈 재즈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가을바람이 선선해지는 계절, 이쯤 해서 음악을 얘기해 보자. 음악은 귀로 마시는 황홀한 술이라고 했다. 이는 음악이 즐거움을 주는 것과 동시에 일상사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재즈는 어떨까. 재즈 인생 50여년, 우리나라 남성 재즈 보컬 1세대로 알려진 김준씨를 지난 5일 오후 만났다. 장소는 경기 남양주 호평동에 위치한 김준 재즈클럽이다. 3층 건물에 1층은 한식당(부인이 운영)이고 2층이 김준 재즈클럽 공연장이다. 단체 예약이 있을 때만 김씨가 직접 출연해 여러 곡을 선사한다. 클럽에 들어섰더니 ‘시작은 그 끝과의 약속이다’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신뢰에 대한 겸허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피아노와 드럼이 있다. 벽에는 재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미국 흑인 가수들의 공연 사진이 붙어 있다. 잠시 우리나라 재즈 1세대 뮤지션들의 얼굴이 나타난다. 1970~1980년대 MBC에서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 ‘수사반장’의 배경음악을 담당했던 재즈 드러머 유복성씨, 미8군 무대에서 비밥과 쿨 재즈를 다지면서 ‘영자의 전성시대’ ‘어제 내린 비’ ‘겨울여자’ ‘깊고 푸른 밤’ 등의 영화음악을 맡아 명성을 떨친 정성조씨, 피아니스트 신관웅씨, 트럼펫 연주가 강대관씨 그리고 보컬리스트 김준씨 등으로 이어진다. 클럽 내부를 잠시 구경한 뒤 야외에 마련된 의자에서 마주 앉았다. 주변에는 푸른 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바로 앞에는 승마장이 있다. 자연의 치유에 대해 잠시 생각하면서 궁금한 것을 물었다. “여긴 언제 문을 열었나요?” “2002년부터 10년 동안 서울 평창동에 있다가 작년에 여기 왔어요. 재즈를 좋아하는 팬이 제공한 공간입니다.” “공연은 일주일에 몇 번 하는지요?”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는데 어떤 모임이 있을 때, 그렇게 모인 분들을 위해 재즈 한마당을 선사합니다. 재즈는 즉흥적이라 그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다 좋아합니다. 누구나 어울리기 좋지요.” “요새 한강에서 공연도 하고 있지요?” “여의도 쪽에서 합니다. 물빛무대라는 곳이 있는데 매주 수·금·토요일 저녁 7시에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예술총감독을 맡고 있습니다. 관객이 700~800명쯤 모이는데 남녀노소 구분 없이 찾아와 재즈를 즐깁니다. 한번 오세요, 이 가을에(웃음).” “재즈는 사계절 중 언제 가장 듣기가 좋습니까?” “사계절에 다 맞출 수 있습니다. 가을에는 가을대로 맛이 있고요.” “국내 재즈 1세대는 몇 명이나 있나요?” “(잠시 생각하더니) 10명쯤 되지요. 공연 때 가끔 만납니다.” “국내 재즈 뮤지션은 어느 정도 됩니까?” “한 200~300명쯤 됩니다. 미국파가 있고 유럽 유학파가 있습니다. 우리 같은 1세대도 있지만 현재는 30대 전후인 재즈 3세대로 교체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재즈란 무엇인가요?” 지체 없이 답이 나온다. “가장 자유스럽고 민주적이고 창의적인 음악입니다. 또한 가장 합리적이고 영적인 치유가 있는 음악이지요. 그래서 재즈는 영원할 겁니다. 혼이 담긴 음악, 흥이 녹여진 음악이라서 재즈만 가지고 있는 DNA가 있습니다. 재즈는 또 지구 상의 어떤 음악과도 협연이 가능합니다. 포용력이 있는 음악이지요.” 그는 재즈 보컬리스트 외에도 작곡가로 많은 활동을 했다. 그동안 무려 1000여곡이나 작곡했다. ‘사랑하니까’(패티김)를 비롯해 1984년 TBC세계가요제 금상 수상곡 ‘나 이제 여기에’(박경희), ‘내 마음은 풍선’(장미화), ‘그래도 설마하고’(임희숙), ‘청바지 아가씨’(박상민) 등이 대표적이다. 무엇보다 그는 남성 4중창단 ‘쟈니 브라더스’의 멤버(리드 김현진, 테너 양영일, 바리톤 김준, 베이스 진성만)로 그 유명한 ‘빨간 마후라’를 불러 히트시켰다. 잠시 당시 얘기를 해 본다. 평상시에는 각자 점잖은 의상의 노신사들이지만 무대의상만큼은 반드시 화려하고 밝은 색상으로 통일했다. 김씨는 데뷔 시절부터 의상, 액세서리 등의 코디를 도맡았다. 그들에겐 ‘빨간 마후라’가 잘 어울렸고 정겨운 화음은 세월을 뛰어넘어 중장년층으로부터 깊은 공감을 얻었다. 김씨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본다. 1940년 1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논밭 30만평을 소유한 대지주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탄 자전거 짐받이에 앉아 신의주 시내를 구경했다. 가죽 장화를 신고 허리에 긴 칼을 찬 일본 기마경찰의 모습도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러다 1945년 광복을 맞이했다. 소련군이 진주했고 조선 노동당이 들어섰다.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다. 아버지는 숙청 대상 1호로 낙인찍혔다. 가족들은 할 수 없이 진남포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월남했다. 남산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원주로 이사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강원 영월과 경북 문경 등으로 피란을 갔다. 이어 1·4후퇴 때는 목포를 거쳐 제주로 피란 갔다. 현재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 산방산 인근이었다. 사계초등학교 6학년을 거쳐 대정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미군 부대 전용 교회의 찬양대에서 활동했다. 도내에서 열리는 음악 콩쿠르에서 ‘가고파’ ‘고향생각’ ‘고향이 그리워’ ‘달밤’ ‘봉선화’ ‘바다로 가자’ 등을 불러 우승을 휩쓸었다. 대정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단거리 육상과 마라톤 시합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는 한편 음악 교사에게 피아노, 트럼펫, 바이올린 등을 배웠다. 합창단에서 바리톤도 맡았다. 1959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사관학교 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고등학교 교장 선생의 권유로 나간 ‘전국 남녀 고등학생 음악경시대회’(경희대 주최)에서 3위를 차지해 경희대 성악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의 음악 인생은 이때부터였다. 하지만 대학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4·19로 인해 잦은 휴강이 이어지다 결국 휴교령이 내려졌다. 갈 곳이 없었던 그는 종로2가 ‘뉴월드 음악감상실’에서 DJ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5·16 후에는 예그린가무단의 합창단원으로 강제로 뽑혀 갔다. 당시 가무단장은 김종필 전 국무총리였다. 그러나 1년여 만에 예그린합창단이 해체되면서 쟈니 브라더스를 결성하게 된다. 쟈니 브라더스는 1962년 당시 TBC에서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던 주말 프로그램 ‘쇼쇼쇼’에 전속 가수로 출연하면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방앗간집 둘째딸’ ‘니가 잘나 일색이냐’ ‘마포 사는 황부자’ 등의 히트곡을 쏟아냈다. 신영균이 주연한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제곡을 부른 것도 이때였다. 1968년 쟈니 브라더스가 해체된 이후 각자 솔리스트로 변신한다. 김씨는 멤버 중 가장 먼저 독립했다, 스탠더드 팝과 재즈 번안곡이 주를 이룬 음반을 발표하면서 솔로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1970년부터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음반을 발표하지 않은 해가 없을 정도로 ‘음악은 곧 인생’이라는 일관된 삶을 살아 오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솔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저는 재즈 뮤지션으로서 더욱 열정적으로 재즈 음악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앞으로 이뤄 나갈 꿈은 ‘김준 재즈 장학재단’을 만드는 것입니다. 재즈 아카데미, 재즈 박물관도 생각하고 있지요.” 헤어지면서 미소 짓는 그의 모습이 나이보다 젊게, 해맑게 느껴진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김준은 1940년 평안북도 신의주 출생으로 경희대 음대 성악과를 졸업했다. 1962~1968년 ‘쟈니 브라더스’의 일원이었으며 KJC(한국재즈모임) 창립 회장과 고문을 역임했다. 이후 수원여대 대중음악과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경기 남양주시 호평동에서 김준 재즈클럽을 운영하면서 극동방송 운영위원과 ㈔한국재즈협회 이사를 맡고 있다. 주요 공연으로는 ‘김준 디너콘서트’(1995년), ‘김준 재즈콘서트’(1996년), ‘서울 솔리스트 재즈 오케스트라 공연’(2007년), ‘아름다운동행 재즈콘서트’(2010년), ‘영화 브라보 재즈라이프 출연’(2010년), ‘브라보 재즈라이프 콘서트 출연’(2010, 2011년) 등이 있다.
  • 부산 영도다리 47년만에 다시 들려

    6·25전쟁 피란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어 ‘민족의 다리’로 불리는 부산 영도다리가 47년 만에 다시 들어 올려졌다. 9일 오전 부산 중구 대교동 영도다리 재가설 건설현장을 방문한 허남식 부산시장이 교량을 들어 올리는 도개용 버튼을 누르자 거대한 다리 상판이 미세한 기계음을 내며 하늘로 치솟았다. 허 시장은 오는 12월 개통을 앞두고 전동기와 기어방식이 혼합된 기계장치의 이상 유무를 확인차 이곳을 찾았다. 길이 31.3m, 무게 590t인 도개교는 큰 소음 없이 2분여 만에 75도 각도로 올라가 멈춰 섰다. 1966년 도심 교통량 증가로 도개 기능이 중단된 지 47년 만이다. 시는 2007년 7월 영도대교 보수·복원공사의 첫 삽을 뜬 지 6년여 만에 상부공(교각이나 기초공 위에 있는 상판)의 가설을 모두 완료하고 이날 도개교 시험운전을 했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11월 개통된 영도다리는 부산 중구와 영도를 잇는 우리나라 최초의 연륙교이자 최초의 도개교였다. 6·25전쟁 때에는 부산으로 몰려든 피란민이 전쟁 와중에 헤어진 이들을 만나려고 다리 밑을 찾으면서 ‘우리나라 1호 만남의 광장’ 역할을 했던 부산 근대사의 중요한 역사 자산이자 문화재이기도 하다. 이 교량은 선박을 통행시키기 위해 교량의 본체를 움직일 수 있도록 설계한 다리로, 도개 기능이 중단될 때까지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길이 31m의 상판이 하루 7차례 정도 올라가면서 그 아래로 배가 지나갔다. 현재 공정률 91%를 보이는 영도다리는 길이 215m, 폭 25.3m로 이전 왕복 4차로에서 왕복 6차로로 넓어졌고 도개교 길이는 31.3m 규모로 복원됐다. 상부공 가설은 5개 블록으로 나뉘어 설치됐다. 시는 오는 11월까지 마무리 작업과 함께 도개교 시험운전을 몇 차례 더 한 뒤 오는 12월 정식 개통할 예정이다. 허 시장은 “민족의 애환이 서려 있는 역사적 상징성을 지닌 영도대교의 도개 기능이 복원되면 부산의 새 관광명소로 각광받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교통량 등을 감안해 하루 몇 차례 올릴지 결정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보소, 올 한가위 고향 내려오믄 추억 총총 썰어, 인심 푹푹 끓인 시장통 국시 한그릇 먹으러 오소

    보소, 올 한가위 고향 내려오믄 추억 총총 썰어, 인심 푹푹 끓인 시장통 국시 한그릇 먹으러 오소

    시장에 가면 뭐가 좋을까. 우선 싸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조사에 따르면 올 한가위 차례상 비용(4인 가족 기준)은 전통시장이 18만 5125원, 대형유통업체는 26만 2941원으로 예상됐다. 전통시장이 30% 가까이 저렴했다. 지역경기 활성화에도 보탬이 되고, 여기저기 기웃대다 군것질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엇보다 인심은 한 되, 추억은 한 말쯤 챙겨올 수 있다. 이제는 명소가 된 각 지역의 전통시장을 정리했다. 한가위 귀성객들이 가볼 만한 곳들이다. ‘향수 어린 장터’ 장흥 토요시장 예부터 장흥시장은 나주 영산포의 홍어시장, 함평 학다리 우시장 등과 함께 전남 3대 시장으로 유명했다. 2005년엔 시설 보수작업을 거쳐 토요일에만 문을 여는 주말 관광형 시장으로 탈바꿈했다. 이게 주말시장의 효시가 됐다. 그렇다고 평일에 문을 닫는 건 아니다. 소고기집들이 늘어선 시장 뒤편으로 청과물과 해산물 등을 파는 전통시장이 형성돼 있다. 여기 정말 싸다. 그리고 싱싱하다. 올여름 장흥시장에서 3000원에 미나리 한 아름, 2000원에 시장바구니 한가득 콩나물을 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1만원의 가치’를 재확인해 보고 싶다면 꼭 장흥시장에 들러보시길. (061)864-7002, 860-0741. ‘콧등치기 국수’ 정선 아리랑시장 강원 정선 아리랑시장은 1966년 개설됐다. 지금은 ‘정선 5일장’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실제 5일장이 서는 날만 골라 정선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이 있을 정도다. 매월 2, 7, 12, 17, 22, 27일에 장이 선다. 강원도에서 나는 각종 산나물과 약초는 물론 곤드레나물밥, 콧등치기 국수 등 추억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특히 메밀전병, 메밀전 등 토속적인 먹거리는 반드시 맛보는 게 좋다. 시장 뒤 문화예술회관에선 장날마다 정선아리랑 창극 ‘신들의 소리’ 공연이 열린다. (033)563-6200. ‘아홉 번째 볼거리’ 단양 구경시장 충북 단양 구경시장은 상설시장과 전통 5일장이 공존하는 곳이다. 저 유명한 단양 8경에 더해 아홉 번째 자랑거리라는 상징적인 뜻을 담고 있다. 구경시장은 ‘동국문헌비고’에 1770년쯤 장이 개설됐다는 기록이 나올 만큼 연륜이 깊다.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자리를 옮겨 현재 단양군 도전리에서 운영되고 있다. 단양은 예부터 토양과 기후 여건이 마늘을 재배하는 데 맞춤하다고 알려졌던 곳이다. 단양육쪽마늘과 관련된 다양한 요리를 장터에서 맛볼 수 있다. 씹을수록 구수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인 단양 마늘순대와 양념이 독특한 흑마늘 닭강정 등이 별미로 꼽힌다. (043)422-1706. ‘마약 김밥·육회’ 서울 광장시장 1905년 문을 연 뒤 100년이 넘도록 종로를 지켜온 서울의 대표적인 전통시장이다. 특히 먹거리장터가 발달해 식객들의 발길로 하루 종일 분주하다. 꼬마김밥은 ‘마약김밥’, 돼지고추장구이는 ‘동그랑땡’으로 불리는 것도 재밌다. 서울 토박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빈대떡은 광장시장을 대표하는 먹거리. 신선해서 고소하기까지 한 육회와 큼지막해서 더 먹음직스러운 왕순대 등이 뒤를 잇는다. 여기에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을 곁들이면 스트레스가 한 방에 날아간다. 혜화문에서 흥인지문에 이르는 서울성곽을 한 시간 정도 걷고 광장시장에 가 보자. 적당한 허기에 각종 먹거리가 입에 착착 붙는다. (02)2272-0967. ‘부산 별미 집합소’ 부산 국제시장 해방 후 ‘도떼기시장’으로 출발해 부산 최대의 만물 시장으로 성장한 시장이다. 올해 10월 10일까지 부산관광공사에서 벌이고 있는 ‘부산 그랜드 세일’ 이벤트에 전통시장이 참여하면서 한층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됐다. 먹자골목이 특히 유명하다. 아리랑거리를 중심으로 비빔당면 골목(충무김밥을 함께 판다)과 팥빙수 골목, 떡볶이 골목이 밀집돼 있다. 밀면과 완당, 냉채족발, 유부전골 등 별미가 즐비하다. ‘1박2일’ 이승기 덕에 이름을 알린 BIFF 거리의 씨앗호떡도 늘 인기 상종가다. 이제는 쇠락한 광복동 고갈비 골목의 남마담집과 할매집에서는 여전히 옛날 추억의 맛을 팔고 있다. (051)600-4511. ‘200m골목 맛집들’ 수원 못골시장 경기 수원의 팔달문 인근에 있는 못골시장은 늘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북새통이다. 채 200m도 안 되는 골목에 87개 점포가 밀집해 있기 때문이다. 못골시장이 이름을 얻게 된 건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의 ‘문전성시 프로젝트’ 덕분이다. 못골시장에선 반찬, 정육, 생선 등을 주로 판다. 먹거리도 다양하다. 냉면보다 칼국수와 녹두빈대떡이 유명한 ‘냉면’집, 밤과 단호박, 서리태 등이 가득 든 영양 백설기가 맛있는 떡집 등이다. 인근에 통닭 골목, 수원 화성 등 돌아볼 곳도 많다. (031)246-5638. ‘서해 싱싱함 가득’ 서천 특화시장 충남 서천 특화시장은 2004년 문을 열었다. 수산물동, 일반동, 농산물동, 노점동 등으로 구성됐다. 수산물만 파는 곳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지는 않다. 입점한 상점 수로 따지면 청과류 매장이 수산물 매장보다 곱절 가까이 많다. 다만 지역 특성상 서천특화시장 하면 역시 수산물이 첫손 꼽힌다. 홍원항과 마량항, 장항항이 지척이니 늘 싱싱한 해산물이 넘쳐난다. 해산물을 맛보려는 이들의 발걸음도 끊이지 않는다. 시장 2층에 20여곳의 식당이 있다. 1층 시장에서 횟감을 사서 올라가면 돈을 받고 회를 떠준다. (041)951-1445. ‘서민의 삶과 낭만’ 춘천 낭만시장 강원 춘천 낭만시장은 서민의 삶과 낭만이 깃든 곳이다. 중앙시장에서 이름이 바뀌며 새 단장했지만, 전해지는 사연과 소박한 풍취는 예전 그대로다. 낭만시장은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과 인근 서민이 생필품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과 약사리고개를 넘어온 농산물이 모였던 곳이기도 하다. 50년을 넘어선 내장 골목, 닭집, 국숫집 등도 대를 이어 구수한 맛을 지켜간다. 최근엔 시장 구석구석에 벽화를 그리고, 콘서트를 여는 등 문화의 옷을 입기도 했다. 낭만시장에서 간식 골목을 거쳐 근대사와 예술가의 흔적이 서린 망대골목까지 산책에 나서는 것도 좋겠다. (033)250-3068.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