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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S, 성탄절 맞춰 기독교인들 10명 참수 “알바그다디 복수”

    IS, 성탄절 맞춰 기독교인들 10명 참수 “알바그다디 복수”

    “세계 기독교인에 메시지…알바그다디 사망에 대한 보복” 주장알바그다디, 미군 특수부대 급습에 자폭트럼프 “개처럼, 겁쟁이처럼 죽었다”외신 “IS 성탄절 범행으로 관심 극대화”극단적 이슬람 무장세력 IS 재건 노려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가 성탄절에 맞춰 기독교인 10명을 무참히 살해하는 영상을 공개했다. 그들은 이번 살해 자신들의 수장인 바크르 알바그다디를 위한 복수라고 밝혔다. 27일(현지시간) BBC방송, AFP통신 등에 따르면 IS는 전날 선전매체인 아마크 통신을 통해 나이지리아의 특정되지 않은 야외 장소에서 1명을 사살하고 10명을 참수하는 56초 분량의 동영상을 전날 유포했다. 희생자들은 남자 기독교인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영상에서 복면을 쓰고 나타난 남성은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고 의미를 주장했다. IS는 희생자들을 나이지리아 북동부 보노 주에서 지난 몇주 동안 붙잡았다며 이번 살해가 자신들의 우두머리이던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를 위한 복수라고 밝혔다. IS 선전매체의 한 조직원은 “알바그다디와 (IS의 대변인이던) 압둘하산 알무하지르를 포함한 우리 지도자들을 죽인 데 대한 보복”이라고 밝혔다.알바그다디는 지난 10월 시리아 은신처에서 미군 특수부대의 작전으로 체포될 위기에 몰리자 자폭해 숨졌다. 살해를 집행한 조직원들은 ‘IS 서아프리카 지부’(ISWAP) 소속이라고 외신들은 보도했다. BBC방송은 IS의 이번 발표가 크리스마스 축제에 시점을 맞춘 정황이 뚜렷하다며 이는 관심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이라고 지적했다. 무함마두 부하리 나이지리아 대통령은 IS의 만행을 규탄했다. 부하리 대통령은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독교인들이 무슬림들을 향해 등을 돌리도록 하는 테러리스트들의 수법에 넘어가 갈라지면 안 된다”면서 “야만적인 살인자는 이슬람을 대표하지 않고 전 세계에서 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다른 무슬림 수백만 명을 대표하지도 않는다”고 강조했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0월 백악관에서 발표한 대국민 성명에서 IS의 수장 알바그다디가 미군의 급습 작전 도중 사망했다고 발표했다.트럼프 대통령은 “IS를 만든 조직의 리더 알바그다디는 울면서 달아났으며 개처럼 죽었다. 겁쟁이처럼 죽었다”면서 “미국은 전세계 테러 지도자 1순위를 심판했다. 알바그다디는 사망했다”고 밝혔다. 그는 IS에 대해 “전 세계에서 가장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단체였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상황실에서 작전 진행 과정을 직접 지켜봤다고 설명하며 “미군 병력이 그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알바그다디는 자신의 자녀 3명과 터널이 있는 쪽으로 도망치다가 자살폭탄 벨트를 터뜨렸다”고 급습 작전 동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IS는 이슬람 수니파에서 율법을 자의적, 급진적으로 해석해 과격한 폭력을 일삼는 극단주의 무장세력이다. 이들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종교관이 다른 무슬림, 종교와 관계가 없는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도 전 세계에서 테러를 일삼고 있다. IS는 거점이던 시리아, 이라크에서 패퇴해 잠복했으나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북아프리카, 서아프리카 등지로 세력을 확장하며 재건을 노리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이번에 참수 만행이 발생한 나이지리아에서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보코하람에서 한 분파가 2016년에 알바그다디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ISWAP를 결성한 바 있다. ISWAP는 이달 초에 나이지리아 북동부에서 납치한 구호단체 요원 4명을 살해했다. 이들은 부르키나파소, 카메룬, 차드, 니제르, 말리 등 주변 국가들에서도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유엔에 따르면 나이지리아 동북부에서는 지난 10년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무장봉기 때문에 3만 6000명이 살해되고 200만명의 피란민이 발생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별이 된 박완서 길이 되다

    별이 된 박완서 길이 되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5차 서울의 문학5-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편이 지난 21일 서대문구 현저동과 종로구 무악동·사직동·필운동 일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 40여명은 이날 오전 10시 독립문역 4번 출구를 출발, 현저동 가파른 언덕배기에 올랐다. 박완서 작가가 어린 시절 놀던 길과 매동보통학교(매동초등학교) 등굣길을 연상하는 코스였다. 독립문~옥살이 골목~무악현대아파트~인왕산 순성길~종로도서관~매동초등학교로 이어진 코스는 단출했지만 명작의 힘은 위대했다. 꼬불꼬불한 골목 귀퉁이마다 작가의 숨결이 느껴졌다. 한 참가자는 “작품 속 등굣길이 궁금했고, 그대로 따라 걸어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꿈이 이뤄졌다”는 감동적인 소감을 남겼다. 올해 최종회인 이날 코스에서 서울미래유산은 영천시장이 유일했다. 해설을 맡은 심흥식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서울문학의 현장을 차분하고 깊이 있게 전달했다.박완서(1931~2011)는 서울과 서울사람을 탐구한 대표적 작가이지만 서울 토박이와는 거리가 멀다. 경기 개풍군 박적골에서 태어나 조부모 슬하에서 자라다 8살 때 극성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온 이주민이다. 사대문 밖 대표적 빈촌지대 현저동 46-418번지는 ‘제2의 고향’이었다. 숙명여고를 다니다 개성 호수돈여고로 전학 갈 때까지 6년간의 성장기를 이곳에서 보냈다. 광복 후 몇 차례 행정동 개편을 통해 의주로 남서쪽은 서대문구 현저동으로 남고, 북동쪽은 종로구 무악동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지금의 무악동 아이파크아파트가 있는 산 중턱이 옛 집터쯤으로 추정된다. 현저동을 벗어나서는 잠시 신혼살림을 차린 종로구 충신동과 성북구 돈암동 신흥주택 개발지구에서 살았다. 강남개발 이후 주저하지 않고 잠실 장미아파트로 이주, 강남문학을 선보인 이유도 서울의 사대문 안과 사대문 밖을 구분 짓는 앙상레짐이 싫었기 때문이다. 40세 늦깎이 데뷔작 ‘나목’((1970년)에서 거주지를 북촌 계동으로 설정한 것도 현저동 달동네를 벗어나고픈 의도였다.현저동은 박완서의 문학세계에서 가장 특별한 장소다. 현저동이라는 사대문 밖에 둥지를 틀었지만 언젠가는 사대문 안에 입성하기를 갈망했다. 사대문 안과 밖이라는 분리주의는 남북 분단과정에서 빚어진 오빠의 죽음이라는 가족의 비극과 닮았다. 50~51세에 발표한 ‘엄마의 말뚝1~2’는 분리와 분단의 세계에 세운 작가의 깃발이다. ‘박완서 산문집6: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애수(문학동네 2015)’에서 “그러나 막상 내가 도달한 어머니의 서울 살림은 형편없이 궁색한 것이었다. 평지의 반듯반듯한 기와집 동네를 다 그냥 지나쳐 꼬불꼬불한 돌사닥다리 길을 한없이 기어올라가 깎아지른 듯한 축대 끝에 제비집처럼 매달린 초가집의 우중충한 문간방이 어머니 서울 살림집이었다. …서울에서의 첫날밤…나는 이불 속에서 소리를 죽여가며 울었다”는 구절은 8살 박완서가 서울살이를 시작한 현저동 달동네 어느 문간방의 1938년 풍경이다.세월이 흘러 현저동 산기슭엔 아파트단지가 빼곡하다. 소설에서 “골목은 깎아지른 듯한 층층다리로 변했다, 집들도 층층다리처럼 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곧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이상한 동네였다”고 묘사된 곳이라곤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미끈하게 변했다. 현저동은 물이 좋아서 악박골(약박골)이라고 불렸다. 이광수의 ‘흙’에 “…소화불량이 심하기나 해야 악박골 약물에나, 그것도 다른 사람들 오기 전에 이른 새벽에 다녀올까…”라는 대목이 나오고, 심훈의 ‘상록수’에서 주인공 영신과 동혁이가 나누는 대화에서도 “그럼 목두 마른데 악박골루 가서 약물이나 마실까요?”하고 독립문 편짝을 향해서 앞장을 선다. “참, 악박골이 영천이라구도 하는 덴가요?”라고 나온다. 약수로 유명한 이 동네의 진면목과 다양함은 박완서의 작품에 의해 사실화되고 구체화된다. 박완서의 연작 자전소설은 장장 15년 만에 마무리된다. 50세에 쓴 ‘엄마의 말뚝’에 나타난 자전적인 서사를 62세 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다듬었다. 이 작품에는 ‘소설로 그린 자화상’이라는 부제까지 붙어 있다. 65세 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로 드디어 3부작을 완성했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저서 ‘서울문학기행’에서 “이들 자전적 연작소설을 보면 박완서 가족에게 서울은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부역과 전향에 얽힌 가족사 때문에 전쟁 속의 서울이 작품의 주무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풀이했다.작가가 경험한 서울은 전쟁의 도시인 동시에 사랑의 도시였다. 해방과 전쟁, 피란살이가 중첩된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살았다. 현저동 ‘괴불마당집’은 서울에 입성한 작가에게 ‘지상의 방 한칸’이었다. 서울사람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이자 작가의 길을 마련해준 이야기보따리였다. “우리 세 식구가 처음으로 서울에 장만한 내 집인 현저동 꼭대기 괴불마당집에서의 첫 겨울은 가혹했다. 추위도 예년에 없이 혹독했지만 여름철 장마처럼 눈이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몇 날 며칠 계속됐다. …물보다는 불 걱정이 훨씬 더 심각했다”고 ‘엄마의 말뚝’에서 현저동 시절을 추억했다. ‘엄마의 말뚝’이란 소설 제목은 현저동에 입성했을 때 “드디어 서울에 말뚝을 박았구나”고 안도하는 어머니의 말에서 따왔다. 엄마의 말뚝은 서울의 말뚝이었다. ‘서울탄생기’의 저자 송은영은 “이 말뚝은 드디어 서울에 정착했음을 알게 해주는 장소이다. 말뚝은 지식과 주체성을 갖춘 새로운 여성상에 대한 지향과 그것을 딸에게 투사한 어머니의 욕망을 담고 있다”고 해석했다. 어린 박완서는 등굣길 인왕산 산록에서 싱아를 애타게 찾아다녔다. “나는 불현듯 싱아 생각이 났다. 우리 시골에선 싱아도 달개비만큼 흔한 풀이었다. 산기슭이나 길가 아무 데나 있었다. 그 줄기에는 마디가 있고, 찔레꽃 필 무렵 줄기가 가장 살이 오르고 연했다. 발그스름한 줄기를 꺾어서 겉껍질을 길이로 벗겨 내고 속살을 먹으면 새콤달콤했다. 입안에 군침이 돌게 신맛이, 아카시아 꽃으로 상한 비위를 가라앉히는 데는 그만일 것 같았다. …간절하게 산속을 찾아 헤맸지만, 싱아는 한 포기도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나는 하늘이 노래질 때까지 헛구역질을 하느라 그곳과 우리 고향 뒷동산을 헷갈리고 있었다.”박완서의 작품에서 현저동은 ‘바닥 상것들’이 사는 ‘쌈박질이 그치지 않는 동네’로 묘사되고 있다. 현저동의 삶은 ‘서울살이의 법도라기보다는 셋방살이의 법도’부터 익혀야 하는 궁핍한 삶이었다. “오줌과 밥풀과 우거지가 한데 썩은 시궁창 물”이 흐르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박완서는 현저동에서 작가의 길을 찾았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고 썼다. 현저동은 박완서 문학을 잉태한 산실이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 한국미술사 새로 쓴 김환기 ‘우주’… 예술성·희귀성에 132억 ‘韓 최고가’

    한국미술사 새로 쓴 김환기 ‘우주’… 예술성·희귀성에 132억 ‘韓 최고가’

    한국 추상미술 선구자 김환기(1913∼19 74) 화백의 대표작 ‘우주’(Universe 5-IV-71 #200)가 8800만 홍콩달러(약 131억 8750만원)에 낙찰되며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구매 수수료까지 포함하면 거래가는 153억 4930만원에 이른다. 지난 23일 홍콩컨벤션전시센터(HKCEC)에서 열린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 나온 ‘우주’는 가장 귀한 작품을 소개하는 20세기&동시대 미술 이브닝 경매 하이라이트 작품 중 하나였다. 1971년 완성된 후 경매 시장에 처음 나온 데다 예술성, 희귀성을 모두 갖춰 관심이 집중됐다. 1971년작 푸른색 전면점화인 ‘우주’는 김 화백 작품 가운데 가장 크다. 254×127㎝짜리 그림 두 점을 합친 전체 크기는 254×254㎝로, 유일한 두폭화이기도 하다. ‘환기 블루’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파란색은 김 화백을 대표하는데, ‘우주’에는 이 빛깔이 특히 광범위하게 쓰였다. 그는 1970년대 들어 얇은 서예 붓으로 수묵화를 그리듯 점을 찍는 기법(전면점화)을 작품에 활용했다. 대부분 화가들이 이젤에 캔버스를 세워 그림을 그렸지만 김 화백은 캔버스를 내려다보면서 한 점씩 찍어 나가는 작업을 했다. 이로 인해 척추신경이 손상될 정도였다. 특히 그의 기량이 최고조에 이른 말년 뉴욕 시대에 그린 ‘우주’는 자연의 본질을 담아내려고 한 그의 예술 사상과 미학의 집성체로 평가된다. 작품은 김 화백의 후원자이자 친구, 주치의였던 김마태(91) 박사가 소장하고 있었다. 둘은 1950년대 초반 부산 피란 시절 우연히 만나 각별한 우정을 쌓았다. 각자 미국과 프랑스로 유학을 가면서 헤어진 뒤 1963년 김 화백이 미국으로 넘어가면서 재회했다. 김 박사는 ‘우주’ 이외에도 김 화백의 작품을 많이 구매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박사가 40년 만에 ‘우주’를 내놓기로 하고 지난여름 여러 경매사 중 크리스티를 선택하자 에블린 린 크리스티 홍콩 아시아 20세기&동시대 미술 부문 부회장은 “‘우주’를 큰 무대에 내놓는 날을 오래도록 꿈꿨는데 이뤄졌다. 운명적이었다”고 당시 감격을 전했다.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낙찰자는 크리스티 뉴욕을 통해 경매에 참여한 외국 컬렉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한국 미술작품의 직전 최고가는 김 화백이 1972년에 그린 붉은색 전면점화 ‘3-II-72 #220’으로, 지난해 5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 낙찰가가 6200만 홍콩달러(약 85억 3000만원)였다. 린 부회장은 한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우주’는 경매시장에 등장할 때마다 늘 새로운 기록을 남길 것이다. 이 작품만이 김환기 기록을 다시 깰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이젠 놓아줄까 봐, 시린 바람이 찾아왔거든…같이 올라볼까 봐, 지친 마음도 내려놓거든

    이젠 놓아줄까 봐, 시린 바람이 찾아왔거든…같이 올라볼까 봐, 지친 마음도 내려놓거든

    언덕 마을 꼭대기에서 본 노을의 잔상을 뒤로하고 기차를 탑니다. 아른거리던 따뜻한 빛이 시린 손끝으로 전해져 대전을 선연(鮮姸)한 도시로 기억합니다. 대전은 하루 여행만으로도 마음을 유연하게 해 주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전은 물과 산, 그 사이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시입니다. 자연과 도심 풍경 모두 품고 있는 여행지이기에 심심할 틈이 없습니다. ‘한밭’이라는 옛 이름처럼 드넓은 땅에 중간중간 솟아오른 산들이 대전을 더욱더 아늑하게 만듭니다. 대청호(大淸湖), 이름처럼 크고 맑은 호수는 금강에서 흘러나온 물줄기입니다. 대전시와 충북도에 드넓게 걸쳐 구불구불 이어져 있습니다. 부드러운 물길을 따라 즐기는 드라이브는 마음을 탁 트이게 합니다. 삼국시대에 지어진 계족산성에 올라 둥그런 풍경을 바라보며 초겨울을 실감합니다. 가을의 끝자락, 자연휴양림에선 숲과 조금 더 가까워집니다. 도심 속 옹송그리듯 자리한 언덕 동네를 올라 일몰을 바라보며 여행을 마무리합니다. 오늘 하루 천천히 걸었던 대전에서 차가운 겨울을 보낼 유연한 힘을 얻습니다.부드러운 호수가 머무는 도시, 크고 넓은 밭을 이르는 한밭이라 불리는 대전(大田)은 경부와 호남 철도, 도로가 만나는 우리나라 교통의 중심지다. 약 40년 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흐르는 금강은 대청호라는 드넓은 호수에 머무른다. 대청호는 충주호와 청풍호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번째로 드넓은 호수다. 이 호반을 중심으로 오백리길이 이어져 있다. 대청오백리길은 대전과 충북을 거쳐 21구간으로 조성된 길이다. 대전에는 1~5, 21구간 등 총 6구간의 길을 걸을 수 있다. 호수 주변으로 산과 숲이 펼쳐져 있어 드라이브나 산책길로 유명하다. 걷기 좋은 길은 고운 모래사장과 은빛 물결이 일렁이는 억새, 싱그러운 숲 등 수려한 자연이 곁에 있다.●대청호 청아함 따라 흐르는 ‘계절의 연가’ 대청댐 바로 아래 금강을 따라 마련된 데크를 걸으면 백로가 먹이를 찾는 유유자적한 풍경을 발견할 수 있다. 드라마 ‘슬픈연가’를 촬영했던 S자 갈대밭도 만날 수 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대청호오백리길 위엔 옛 풍경을 간직한 작은 마을도 여전히 자리한다. 4구간 호반낭만길 위 주산동 전망대에선 반짝이는 물빛이 청아하다. 물 위로 동동 떠다니는 오리 떼에 마음을 뺏긴다. 차를 세워 두고 그림 같은 풍경 속에 잠시 빠져 보자. 추동습지 부근은 근사한 뷰포인트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데크 곁으로 곱게 물든 단풍과 억색, 갈대밭이 감성적인 운치를 자아낸다. 이정표에도 ‘전망 좋은 곳’이라 쓰여 있다. 21구간 대청로하스길에는 대청공원과 대청댐물문화관 그리고 메타세쿼이아 숲이 있어 사색하며 혹은 이야기 나누며 머물기 좋다. 특히 숨어 있는 왕버들 군락지가 볼만한데 저녁 무렵 물안개와 노을이 내려앉으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낸다. ● ‘피톤치드 맛집’ 최대 메타세쿼이아 숲길 ‘가을의 산책은 늘 마지막 같아서/ 한 발자국에도 후드득’ 성동혁 시인의 구절이 생각나는 풍경이다. 붉게 물든 메타세쿼이아 잎들이 가득한 숨겨진 단풍 명소 장태산자연휴양림이다. 1970년 초 국내 최초의 독림가(篤林家) 고 임창봉 선생이 가꾸기 시작한 휴양림은 그 정성을 거대한 나무들이 정직하게 보여 준다. 입구에 들어서자 숲의 냄새가 진하다. 숲의 냄새를 만들어 내는 ‘테르펜’이란 성분은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 주고 건강을 회복하게 해 정상적인 생체리듬을 찾게 해 준다. 이곳은 ‘피톤치드 맛집’임이 분명하다. 장태산자연휴양림의 하이라이트는 키다리 메타세쿼이아와 나란히 걸을 수 있는 길이다. 하늘길이라 부르는 ‘스카이웨이’를 걸으면 나무의 허리쯤에서 눈높이를 같이하게 되는데, 나무와 더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스카이웨이를 걷다 보면 스카이타워가 등장한다. 잔잔한 바람에도 흔들림이 느껴지는 달팽이관 같은 스카이타워를 올라가면 숲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 높이 27m에 이르는 스카이타워에 서면 숲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14.5㎞ 산성 황톳길, 땅의 기운 오롯이 계족산(鷄足山)은 닭의 다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높이 429m에 이르는 나지막한 산을 즐기는 방법은 14.5㎞로 이어져 있는 황톳길을 자분자분 걷는 것. 황토가 말랑해지는 봄, 가을엔 맨발로 자연의 속살을 느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2006년 충청권에서 소주를 만들고 있는 맥키스컴퍼니에서 매년 2000여t의 황토를 깔고 관리하고 있다. 조웅래 회장이 우연히 황톳길을 걸어 보고 편안한 숙면과 머리가 맑아지는 경험을 한 후 모두가 함께 즐기자는 의미에서 만든 길이다. 겨울 무렵엔 황톳길이 아니어도, 계족산성에 오를 만하다. 단풍이 떨어진 사이사이로 스미는 따사로운 볕 아래 가뿐한 산행을 즐기기 좋다. 해발 420m에 있는 계족산성(사적 제355호)은 삼국시대 때 신라의 침입을 방어하는 관문 역할을 했던 중심 산성이다. 정동삼림욕장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오르면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황톳길을 따라 나지막한 산길을 걷다 보면 산성으로 향하는 가파른 계단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대전은 산성의 도시다. 서구 월평동 구릉에 위치한 월평산성, 성치산 정상부를 빙 두른 성치산성 등 크고 작은 30여개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 대전은 교통의 요지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전장의 요충지였다. 이들 중 가장 가볼 만한 곳은 계족산성이다. 그 규모는 물론 복원을 마쳐 산성의 모습을 관찰하기도 좋다.산행의 끝은 계족산성에서 가장 높은 산등성이에 있는 서문터다. 서문은 필요할 때 문을 내려 통행할 수 있는 현문(懸門)으로 만들어졌다. 서문터 바깥벽은 2.5m 높이로 덧대 성벽이 밀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쌓았다. 동벽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벽은 외벽은 돌로 쌓고, 성 안쪽은 흙을 정교하게 다져서 쌓는 내탁공법(內托工法)으로 지었다. 서문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연꽃무늬 수막새기와, 돗자리 무늬가 새겨진 평기와 조각 등이 출토돼 삼국시대에 쌓은 성임을 알 수 있었다. 산성 성벽은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만들어 유연하게 굽어 있다. 계족산 산봉우리에 머리띠를 두르듯 돌로 차곡차곡 쌓은 산성의 둘레는 1037m에 이른다. 성벽은 대부분 무너졌는데, 1992년부터 복원해 문터와 건물터, 봉수대, 우물터 등을 짐작할 수 있다. 산성의 중간 지점에서 볼 수 있는 집수지가 독특하다. 국내에서 확인된 집수지 중에서 가장 크다고 전해진다. 산성 안의 군사들이 마실 물과 화재 때 불을 끌 물로 사용하고, 홍수 때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의 속도를 줄여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것이다. 계족산성에서는 9개 건물터가 확인됐다. 고려 시대 청자 조각과 토기 조각들이 나온 것으로 보아 그 시대에도 성의 역할을 굳건히 했음을 알 수 있다. 갈대와 들꽃, 구불구불한 대청호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숨겨진 뷰포인트도 빼놓을 수 없다.●127m 언덕마을, 로맨틱한 대전의 밤과낮 한눈에 한국관광공사 대전충남지사에서 강소형 잠재관광지로 선정한 대동하늘공원은 동구 대동에 자리한 마을 꼭대기에 있다. 대동은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모인 마을로 아기자기한 벽화가 그려져 있어 다정하고도 따스하다. 2007년 공공미술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조금씩 변신을 거쳐 온 마을은 느리게 산책하기 좋다. 긍정적인 이야기를 담은 알록달록한 벽화에서 걸을 때마다 위로를 받는다.약 127m 높이에 위치한 대동하늘공원에 오르면 대전 도심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다. 쌍둥이처럼 서 있는 한국철도시설공단과 한국철도공사 건물이 가장 눈에 띈다. 맑은 날엔 보문산과 도솔산, 계룡산도 볼 수 있다. 이곳은 일몰이 아름다운 곳으로, 또르르 떨어지는 해를 배경으로 사진찍기 좋다. 밤이면 은은하게 빛나는 풍차와 주변 조명 덕분에 더욱 로맨틱해진다. 동네 벽화를 따라 걷다 보면 소소한 가게들이 자리한다. ‘머물다 가게’는 대전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과 소품을 위주로 꾸며 놓은 곳으로 여행기념품을 살 수 있다. 예능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등장해 더욱 반가운 복합문화공간 ‘대동단결’도 핫플레이스. 오래된 동네의 빈티지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글 사진 박산하 여행작가 ■여행수첩(지역번호 042) →대전과 충북 대청호 물길을 따라 21구간으로 조성된 대청호오백리길에 대한 정보는 홈페이지(www.dc500.org)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이 겨울 수변에 펼쳐진 억새와 갈대를 만날 수 있는 4구간 호반낭만길을 추천한다. 대동하늘공원이 있는 대동벽화마을은 주민들이 생활하는 터전이다. 일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다녀야 한다. 마을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거나 지도를 구하고 싶다면 ‘머물다 가게’(070-8098-6634)에 들러 보자. 운영 시간이 유동적이기 때문에 미리 연락할 것. 아기자기한 여행기념품을 득템하기도 좋다. →보통 두루치기 식재료로 돼지고기를 많이 쓰지만 대전에서는 두부를 자박하게 끓여낸 두루치기가 유명하다. 부드러운 두부를 큼지막하게 썰어 육수에 넣고 고춧가루와 간장, 마늘, 참기름 등 매운 양념을 더한다. 오징어를 넣기도 하는데 두부가 식감이 보들보들하고 고소하면서도 매콤해 중독성이 강하다. 자작하게 졸인 국물에 면 사리를 비벼 먹으면 매콤함이 한결 순해진다. 광천식당(226-4751)과 진로집(226-0914) 등이 맛집으로 꼽힌다. 대전은 칼국수의 도시로 봄이면 칼국수 축제를 연다. 한국전쟁 이후 호남선과 경부선 철도가 만나는 곳이라 구호물자가 모였는데, 그중 밀가루가 많았다. 대전에는 칼국수집이 많이 있는데 그중 신도칼국수(253-6799)는 사골 육수에 보드라운 면발을 맛볼 수 있다.
  • 함포사격으로 무너진 건물… 고향후배 입대한 지 3개월만에 세상 떠나

    함포사격으로 무너진 건물… 고향후배 입대한 지 3개월만에 세상 떠나

    일시 1998년 2월 8일 장소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규원 치과 3층) 대담 박종근(인천학도의용대 5대대 부대대장) 이경종(인천학생6·25 참전관 설립자) 이규원 치과원장 (이경종 큰아들)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나다 1950년 6·25 사변이 일어났을 때, 나는 인천공업중학교 5학년생이었다.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전에 전국학생연맹(우익 학생 조직)으로 같이 학생운동(學生運動)을 하던 이기관, 정연옥 등과 함께 전(全)인천학생의용대를 조직하였다. 처음 전(全)인천학생의용대를 조직했던 장소는 신흥국민학교 옆 답동 로얄 아파트자리에 있었던 일본식으로 지은 일본 절터였고 우리들은 이끈 의용대장은 인천상업중학교 출신 이계송 형으로 당시 고려대 2학년이었다. 1950년 7월 3일 6·25 사변이 발발하고, 전(全)인천학생의용대를 조직하여 며칠간 정신없이 활동하는 중에도 7월 3일이 닥쳐왔다. 1950년 7월 3일 이날 오후 늦어서인가 숭의동 쪽에서 포 소리가 나면서 인민군 탱크가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그때 알아보니까 경찰은 이미 철수했는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충청남도 공주까지 피난 가서 친척집에 몰래 숨어서 지냈다. 그러던 중에 인민군 치하에서 많은 중학생들이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가서 실종되었다는 가슴 아픈 소식을 들었다. 1950년 9월 15일 친척 집에 숨어서 지내기를 2달이 지나자 인천에서 9·15 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그래서 나는 즉시 답답하게 숨어 지내던 도피 생활을 끝마치고 인천으로 올라왔다. 7월 3일 인천을 허겁지겁 떠난 지 2개월 반 만이었다. 인천학도의용대 창설 이렇게 어려웠던 피란에서 돌아와 수복된 고향 인천에 돌아와 보니까 인천 시가는 미군이 쏜 함포사격으로 건물들이 무너져 엉망이 되어 있었다. 당연히 시민들의 살림살이도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우리가 활동했던 멤버들은 다시 모여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우리 학도의용대가 부활 됐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는 각 지역에 지대(支隊)를 설치하고 지대 안에 분대(分隊)를 두었다. 이때 나는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 5대대 부대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12월 18일 중공군의 참전과 국군과 UN군의 후퇴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가 인천을 철수하여 남하(南下)하는 날이 닥쳐왔다. 나는 1950년 12월 18일 인천축현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제5대대 대원들과 합류했다. 곧 남녀 대원들과 같이 인천에서 출발했다. 우리는 우선 안양을 거처서 수원까지 가게 되었다. 나는 인천학도의용대 제5대대 대원들을 인솔하여, 먼저 부산을 향하여 남하(南下)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대구를 거처 결국 마산에 도착하였다. 인천학도의용대 대원들 자원입대 후 참전 마산에 도착해서 구마산 삼일여관에 여장을 풀고 그곳을 인천학도의용대 제5대대 본부로 정하고 연대본부와 연락을 취하면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때 인천학도의용대 이계송 연대장은 대구 육군본부에 인천학도의용대 진로 관계로 출장 중이어서 마산에는 없었다. 그때 해병대에서는 해병 모집을 하였는데 인천학도의용대에서 많이 지원하였다. 처음 지원한 대원들 50여명은 해병대 제5기 특채로 입대하였으며 나중에 지원한 대원들 600여명은 해병대 제6기생들이었다. 그래서 6기생들은 인천기수라고 불리기도 한다. 통영으로 가서 방위군 수용소에 며칠 지내다가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부산에서 육군 제2 훈련소에 입소 후 훈련을 마치고 정식 군인이 된 후 나는 통신학교로 가서 무선통신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후 571부대 화랑중대 4소대에 배치되었고 1953년 5월 23일 나는 군에서 제대를 하였다.6·25 전사 인천학생 김길태 1934년 인천 동구 송림동 122번지에서 출생해 인천해성중학교(현 인천 남중학교, 인천남고등학교의 전신) 3학년 재학 중에 인천에서 출발하여 부산진국민학교(육군 제2훈련소)까지 걸어가서, 1951년 1월 10일 자원입대해, 1951년 4월 15일 참전 3개월 만에, 16세로 전사하였다. 남기고 싶은 말 9·15 인천상륙작전 후 인천학도의용대는 호국(護國) 활동하다가, 1950년 12월 18일 남하하여 자원입대해서 고향(인천)을 위하여 피 흘리며 6·25 전쟁을 치렀다. 이제는 70에 가까운 노령인데, 아직도 인천학도의용대 역사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기록을 남기지 못한 일이 마음 아팠다. 고향 송림동 후배 김길태는 과묵하고 심성이 곧아서 장래가 촉망되었던 우리 동네의 인재였다. 그런데 나와 같이 자원입대한 후, 참전을 하게 되고 입대한 지 겨우 3개월 만에 전사하여 많이 울었던 생각이 난다. 지금도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프다. 늦었지만 다행히 ‘인천학생스승6·25참전사편찬위원회’ 라는 참전자들의 가슴에 와 닿는 문구를 보고 이제야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가 빛을 찾나 싶어 반갑기 그지없다. 이경종, 이규원 2부자(父子)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오늘 내 증언이 도움이 되길 바라며, 좋은 열매를 거두시기를 빌 뿐이다. 글 사진 제공 :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관박종근 ▲인천학도의용대 5대대 부대대장 1932년 8월 19일 인천 동구 송림동 출생 1950년 6월 25일 전인천학생의용대를 이계송,이기관, 정연옥 등과 창립 1950년 9월 20일 인천학도의용대 제5대대 부대대장으로 활동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을 향해 20일간 걸어서 내려감 1951년 1월 10일 부산 육군 제2훈련소 입소 1951년 1월 20일 부산 육군 통신학교 입교 군번 : 0241045 (통신병) 1953년 5월 23일 명예 제대
  • 전쟁의 비극·고단한 삶…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恨 많은 고개’

    전쟁의 비극·고단한 삶…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恨 많은 고개’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8차 서울의 대중가요3(단장의 미아리고개)’ 편이 지난 2일 강북구 미아동과 성북구 길음동·돈암동 일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 40여명은 이날 오전 10시 우이신설선 솔샘역 1번 출구에 집결했다. ‘미아리’라는 지명을 낳은 신라의 고찰 미아사~송천동성당~옛 미아리공동묘지~옛 미아리 유해업소를 거쳐 미아리고개예술극장에서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이해연 노래의 1950년대 명곡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를 만났다. 최근 송가인이라는 트로트 가수의 등장으로 사람들의 입에 다시 오른 구성진 노랫가락의 위력을 새삼 느꼈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미아리 점성촌이 마지막 코스였다.돈암동에서 길음동으로 넘어가는 미아리고개에는 절절한 슬픔이 뱄다. 너무 가팔라서 넘나들기 고달팠고, 병자호란과 한국전쟁의 서울 침공로였으며, 공동묘지가 있던 시절엔 상여길, 조문길이었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끌려가던 가족을 향해 울부짖던 비극의 장소이기도 했다. 지금 그 ‘창자를 끊는’ 미아리고개에는 미아리하늘고개다리와 노래비 그리고 미아리고개예술극장이 무심하게 서 있을 뿐이다. 이날 해설을 맡은 강영진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늘 스쳐 지나가기만 하던 미아리의 애사를 두 발로 직접 느낄 수 있도록 안내했다.서울 동북부의 관문 미아리의 역사는 2002년 서울시 시범 뉴타운 지정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개발의 속도와 규모는 전광석화 같았다. 10여년 만에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된 미아리의 잔상은 오간 데 없고 거대한 아파트 숲이 하늘을 가린 채 즐비하다. 1894년 갑오개혁 때 미아리의 행정구역은 한성부 동부 숭신방 동소문외계 미아리였다. 동소문 밖 성저십리(성 밖 십리)에 속했다.‘조선성시도’와 ‘한양도’ 등 옛 지도에는 오랑캐 적(狄), 넘을 유(踰), 고개 현(峴)자를 써서 적유현이라고 적었다. 한양에서 강원도나 함경도를 오가는 길손은 동소문(혜화문)~적유현~수유현~양주 길을 지나다녔다. 사람들은 이를 쉽게 병자호란 때 되놈(청나라군)이 넘어온 되너미고개라고 말하고, 이를 한자로 돈암현이라고 옮겼다. 또 길음동이라는 지명은 ‘기리묵골’ 또는 ‘기레미골’이라는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바꾼 것이다. 미아리고개 북쪽 정릉천 골짜기의 물소리가 맑고 고와서 길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비가 오면 땅이 질퍽해 ‘질음골’이라고도 불렸다. 1792년 광릉으로 행차하던 정조는 미아리고개에 이르자 말에서 내려 잠시 머문 뒤 ‘야차제만장봉’이라는 시를 남겼다. 이때 이곳의 지명이 미아리(美阿里)라고 적혀 있어서 현재의 미아리(彌阿里)와는 한자가 다름을 알 수 있다. 길음1동의 옛 돌산(신안아파트)은 건축용 석재를 채취하던 채석장으로, 나머지 지역은 왕실의 매장 터로 쓰였다. 1911년 경성부 지도에 미선리, 미하리라고 표기됐으나 1930년대에 인쇄된 경성부 관내도에 비로소 미아리(彌阿里)라는 표기가 정착됐다. 청량사에서 청량리가 유래했듯 원효대사가 세운 불당골(미아7동)에 있던 미아사가 미아리라는 지명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차 종점이 있던 돈암동은 시내, 고개 너머 미아리는 시골로 인식했다. 이후 경기 고양군 숭인면 미아리(1914년)에서 성북구 미아리(1949년)로 변경되면서 미아1·2·3동과 길음동, 인수동, 송천동, 삼양동 등 우리 귀에 낯익은 이름이 생겼다. 인수동은 삼각산(북한산) 인수봉, 삼양동은 삼각산 아래 양지바른 동네라는 뜻이다. 송천동은 샘이 솟는 소나무 숲 마을이었다. 1973년 도봉구에 속했다가 1975년 다시 성북구로 회복됐다. 1995년 강북구가 분구되면서 길음동은 성북구, 미아동은 강북구로 갈라졌다.장소인문학에서 말하는 미아리의 정체성은 일제강점기 1930년에 완공된 공동묘지 조성으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미아리 공동묘지는 1912년에 만들어진 19개 공동묘지 중 한국인 전용 공동묘지였다. 1937년에 모두 1만 6000기의 무덤이 있었다. 주택난과 매장지 부족으로 1933년 망우리, 1958년 파주 용미리, 벽제로 각각 이전했다. 이상, 이육사, 유관순, 한용운, 최학송, 나석주, 이중섭 등이 묻혔다가 망우리 등으로 이장됐다. 또 도시빈민들의 이주로 정릉천변과 공동묘지 주변에 토막촌과 무허가주택촌이 형성됐다. 미아리는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인민군의 격전지였다. 전쟁이 끝난 뒤 북으로 끌려가던 북송인사 때문에 ‘한 많은 미아리고개’ 별칭이 붙었다. 1958년 미아리공동묘지가 벽제와 망우리로 이장하면서 이재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길음동의 대표적 공영주택 백호주택은 1962년 입주 신청을 받았는데 당시 분양가구가 100호였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호당 50평 안팎의 대지에 12평짜리 벽돌기와집을 지었다. 당첨자는 땅값을 내고 건축비 14만 2500원은 25년 분할 상환했다. 미아리는 인수로, 삼양로, 미아로 등 세 가닥 큰 길이 주축을 이룬다. 정릉천 물길인 인수로는 정릉천에서 길음동 돌산에 이르는 도로명이다. 인수로 좌우에는 거대한 무허가 간이주택이 천변동네를 형성했다. 본래 좌우제방을 도로로 이용하다 세 번에 걸쳐 복개돼 도로가 됐다. 뉴타운개발 후 길음시장과 역세권을 제외하고 아파트가 들어섰다. 1960년대 후반 청계천 복개와 종로3가의 집창촌 ‘종삼’이 철거되면서 하월곡동 88 정릉천변 일대로 이주, ‘미아리 텍사스’라는 오명이 따라붙었다. 2000년대 길음 재개발로 대부분 헐려 나갔다. 삼양로는 길음역4거리에서 수유동 쪽 길이다. 1962년 미아초등학교 앞쪽에 백호주택이 들어선 뒤 위쪽을 잇는 도로가 생겼다. 수유동에서 미아리고개를 넘어가는 미아사거리는 본래 미아삼거리였다. 장위동으로 나가는 길이 확장되고 입체교차로가 들어서면서 사거리가 됐다. 백화점과 할인마트, 극장 등이 들어와 길음동과 미아동, 삼양동 일대 상권의 중심지가 됐다. 1997년 미아리 텍사스가 정비되고, 1999년 내부순환도로 완공, 2002년 길음뉴타운 지정으로 이 일대는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개벽했다. 미아로, 미아리고개, 미아리하늘다리, 미아사거리 등 미아리가 붙은 지명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준다는 이유로 지명을 바꾸려던 한때의 시도가 무색하다.가슴 저미는 노랫말로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린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우리나라 대중 가요사에 한 획을 그었다. 작사자 반야월은 가요 사상 가장 많은 작사, 가장 많은 히트곡, 가장 많은 노래비를 남긴 인물이다. 작사가 반야월은 작곡가 박시춘, 가수 이난영과 함께 ‘한국 가요계의 3대 보물’로 꼽혔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반야월은 미아리고개 너머에 살았다. 혼자 피란을 떠난 부인이 5살짜리 어린 딸을 등에 업고 미아리고개를 넘다 숨진 딸을 길섶에 묻은 비극적인 가족사를 노랫말로 만들었다. 미아리는 문학작품의 단골 소재였다. 미아리 사람들의 생활사가 서민의 삶을 대변했다. 소설가 김소진의 대표작 ‘장석조네 사람들’에서 “한 지붕 아래 아홉 개의 방이 한 일자로 늘어서 있어 사람들이 기차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장석조네 집터는 옆의 행길보다 석 자 정도는 높게 다져져 있었다”라는 대목은 1970년대 돌산 아래 ‘열차주택’을 묘사한 장면이다. 소설가 조정래의 장편소설 ‘한강3’에서도 미아리 무허가 판자촌과 구불구불한 비탈길이 나온다. 신경림의 시 ‘길음시장’과 박완서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는 미아리의 불법 매장 풍경이 그려졌다. 1986~1994년 방영된 인기 TV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에도 열차주택 풍경이 등장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제29차 효창공원 ■집결 장소: 11월 9일(토) 오전 10시 효창공원역 1번 출구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미래유산 톡톡] 시각장애 극복한 역술인들 밀집 ‘미아리 점성촌’

    [미래유산 톡톡] 시각장애 극복한 역술인들 밀집 ‘미아리 점성촌’

    옛 서울의 북쪽 관문인 혜화문을 나서면 돈암동 로터리를 지나 의정부로 가는 길목인 고개가 있다. 바로 ‘미아리고개’다. 지금도 언덕이 높아 통행하는 차들이 한 번쯤 액셀러레이터를 더 밟아야 고개를 넘어가는 높이인데 그 옛날에는 얼마나 험하고 높았을까. 오죽하면 고개 넘기가 너무 힘들어 중간에 밥을 한 번 더 먹어야 넘을 수 있다고 하여 ‘되넘이 고개’라고도 하고, 병자호란 때 되놈이 넘어왔던 고개라고 ‘되넘이’라고 불렸던 고개다. 1950년 새벽 한국전쟁이 발발해 소련군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이 6월 28일 이 고개를 넘어 서울로 들어왔다. 같은 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3개월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동족상잔의 비극,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인민위원회에 끌려간 남한의 많은 사회지도층 인사와 예술인, 학자, 법조인, 교육자 등 1500여명이 강제로 북한으로 끌려가게 됐을 때 가족들은 미아리고개를 넘지 못하고 눈물의 이별을 해야만 했던 바로 그 고개다. 고개 꼭대기에 한국 대중가요사의 보물 반야월 선생의 노래비 ‘단장의 미아리고개’가 서 있다. 노랫말을 읊조릴 때마다 반야월 선생의 5살 딸아이가 피란 중 굶어 죽어 길가에 묻은 뒤 시신을 찾지 못한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과 처참한 풍경이 그려진다. 또 돈암동에서 미아리고개를 오르는 미아리 고가 양쪽으로는 2014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미아리 점성촌’이 있다. 번성할 때는 100호가 넘는 점집들이 성업했고 지금은 40호 넘게 영업 중이다. 한국전쟁 전 종로3가에 집단 거주하던 점술가들이 전쟁과 함께 남산 근처로 생활 터를 옮겼고 남산 정비로 흩어진 후 1960년대 말부터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곳의 점술가는 모두 시각장애인이며, 역학에 근거한 점을 본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대한맹인복지회가 연합해 성북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1년 단위의 역술강의 프로그램을 개설해 역술인 양성을 하고 있다. 장애를 극복한 맹인들이 역학으로 인생의 길흉을 점치는 점성가 밀집지역으로 외국 관광객들까지 찾아온다고 한다. 강영진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원
  • 文 대통령 “아베와 대화 시작될 의미있는 만남 가져”

    文 대통령 “아베와 대화 시작될 의미있는 만남 가져”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 참석차 방콕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5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대화의 시작이 될 수도 있는 의미 있는 만남을 가졌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2박 3일간의 태국 방문 일정을 마치고 방콕을 떠나기 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에서 이같이 밝혔다. 앞서 전날 문 대통령은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가 열린 노보텔 방콕 임팩트 호텔의 정상 대기장에서 아베 총리와 11분간 단독 환담을 했다. 즉석에서 이뤄진 약식 만남이었지만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별도 만남을 가진 것은 지난해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 계기 당시 정상회담 이후 13개월여 만이다. 한일 정상은 환담에서 ‘양국 관계의 현안은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문 대통령은 “이번 태국에서의 아세안+3, 동아시아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은 그동안 협력으로 여러 위기에 함께 대응해온 것을 높이 평가했다”며 “앞으로도 테러, 기후변화, 재난관리, 미래 인재양성 등에 긴밀히 협력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어 “아시아의 가능성은 전통에 있다”면서 “사람과 자연을 함께 존중하는 정신은 기후환경 문제를 해결할 해법을 제시하고 상부상조의 나눔과 협력 정신은 포용으로 이어져 지속가능한 미래를 제시한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아시아의 협력은 서구가 이끌어 온 과학기술 문명 위에서 사람 중심의 새로운 문명을 일으키는 힘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문 대통령은 이번 방문 기간 인도를 제외한 15개국이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협정문을 타결한 것을 두고 “세계 최대 규모의 자유무역 시장을 열고 서로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협력하는 경제 공동체의 길을 보여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세안 정상들을 만나 이달 말 부산에서 열리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와 한·메콩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협력을 요청한 문 대통령은 “두 회의의 성공과 아시아가 열게 될 미래를 위해 국민께서도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또 문 대통령은 모친상에 위로의 뜻을 밝혀준 정상들에게 일일이 감사 인사를 했다고 밝혔다.문 대통령은 전날 로버트 오브라이언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만난 자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위로서한을 전달받은 것을 언급하며 “어머니가 흥남철수 때 피란 오신 이야기를 기억해 주셨다”고도 했다. 한편 문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독도 인근 해상에서 환자를 이송 중이던 소방헬기가 추락해 희생자가 발생한 데 대해 “환자를 이송하던 우리 소방대원들은 용감하고 헌신적으로 행동했다”고 말했다. 이어 “고인이 되어 돌아온 대원들이 너무나 안타깝다”면서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최선을 다해 대원들과 탑승하신 분들을 찾겠다고 약속한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응급구조 헬기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하며 돌아간다”면서 “국민과 함께 동료, 유가족의 슬픔을 나누겠다”고 덧붙였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한국전쟁 때 美 포격으로 사망… 재심서 국가배상 판결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포격으로 숨진 민간인의 유족이 재심 끝에 국가 배상을 받게 됐다. 과거사 사건에 대해 민법상 소멸 시효를 적용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지난해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른 판결이다. 3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민사7부(부장 김종호)는 방모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48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방씨는 1950년 9월 경북 포항의 송골 해변에서 미 해군 ‘헤이븐호’의 포탄에 아버지와 동생을 잃었다.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방씨의 아버지와 동생이 ‘포항 미군함포 사건’의 희생자라고 결정했다. 이에 방씨가 소송을 냈지만 1심은 사격 명령을 내리고 실시한 주체가 모두 미군이라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2심은 포격이 “피란민에 북한군이 섞여 있다”는 이유로 국군이 요청한 결과라며 방씨 손을 들어 줬다. 상고심은 소멸시효 완성을 이유로 판결을 뒤집었고 이는 2016년 파기환송심을 거쳐 확정됐다. 그러나 헌재는 지난해 8월 민법상 소멸시효를 과거사 피해자의 국가배상 청구권에도 적용하는 것에 대해 위헌 결정을 했다. 결국 방씨는 법원에 재심을 청구해 승소했다. 헌재의 결정이 법 조항(단순 위헌)이 아닌 법률상 해석(한정 위헌)에 대한 것이라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하던 국가는 이 판결에 불복해 상고한 상태다. 나상현 기자 greentea@seoul.co.kr
  • [이슈있슈] 작은 빈소·빠른 복귀…현직 대통령의 조용한 모친상

    [이슈있슈] 작은 빈소·빠른 복귀…현직 대통령의 조용한 모친상

    부산 작은 병원 일반실에 지냈던 강한옥 여사국정업무에 지장 없게…청와대 즉시 복귀 결정 현직 대통령이 임기 중 모친상을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모친 강한옥 여사는 지난 29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문 대통령은 같은 날 오후 부산으로 향해 강 여사의 임종을 지켜봤다. 문 대통령은 장례기간 동안 가족장을 강조하며 빈소 방문과 조문을 정중히 거절해왔다. 문 대통령은 장례 3일째인 31일 장례미사에 이어 장지인 경남 양산 하늘공원에 모친을 안장한 뒤 곧바로 청와대로 복귀한다. 청와대 측은 이날 빈소 앞에서 기자들에게 “대통령은 오늘까지 3일 간 (조사휴가를) 사용할 예정”이라며 이렇게 밝혔다. 국가공무원법 복무규정상 선출된 정무직 공무원으로 5일의 조사휴가가 부여되지만 문 대통령은 참모진에게 ‘모친상 때문에 국정업무에 지장이 생기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신신당부했던 것 만큼 즉시 복귀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최소한의 청와대 인력이 수행 기간 연차를 사용해 장례를 수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문 대통령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어머님의 신앙에 따라 천주교 의식으로 가족과 친지끼리 장례를 치르려고 한다”며 “많은 분들의 조의를 마음으로만 받는 것을 널리 이해해주시기 바란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평생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셨고,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처럼 고생도 하셨지만 ‘그래도 행복했다’는 말을 남기셨다”고 모친의 마지막 모습을 전했다. 문 대통령의 모친은 소천하기 전 부산 지역 내 작은 규모의 병원 일반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부산 기반으로 활동하는 유튜브 채널 미디어 공감은 29일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모친 강한옥 여사는 평소 대통령의 모친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생전 다니던 부산가톨릭 의료원 메리놀병원 의사들조차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대통령 모친이 메리놀 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가 병원에 알려진 것도 지난 16일 문재인 대통령이 부마항쟁 기념식에 참석한 뒤 병원을 찾은 뒤였다. 미디어 공감 편집장은 “공정이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아도 생활에 실천하는 모습이 아닐까”라고 촌평했다.메리놀병원에 입원한 가족을 돌보고 있다는 한 네티즌은 “아내와 같은 병원에 대통령 모친이 입원해 계셨다는 걸 저녁 뉴스 화면을 보고 알았다”며 “다른 대통령 모친이었다면 2차 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는 일이 있었겠냐”고 놀라워했다. 고 강한옥 여사와 문 대통령의 부친 고 문용형씨는 모두 함경남도 흥남 출신의 실향민이다. 두 사람은 한국 전쟁이 발발한 1950년 흥남철수 때 피란민을 구출한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내려왔다. 고인은 문 대통령이 어릴 때부터 집안 생계를 책임진 것으로 전해졌다. 문 대통령은 저서에서 어머니가 생계를 위해 시장 좌판에 옷을 놓고 팔거나 연탄배달을 했다고 밝혔다. 강 여사는 문 대통령이 청와대 사회문화수석으로 재직 중이던 2004년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당시 북측에 있던 동생 병옥 씨를 만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9월 추석특별기획 방송에 출연해 “제가 아마 평생 어머니에게 제일 효도했던 것이 이때 어머니를 모시고 갔던 게 아닌가 싶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현직 대통령 첫 모친상…靑 “가족들과 차분히 장례 치를것”

    현직 대통령 첫 모친상…靑 “가족들과 차분히 장례 치를것”

    문재인 대통령의 모친 강한옥 여사가 29일 별세했다. 92세. 현직 대통령 임기 중 모친상을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춘추관 브리핑에서 “문 대통령의 모친 강한옥 여사께서 92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고 밝혔다. 이어 “고인의 뜻에 따라 장례를 가족과 차분하게 치를 예정이며, 조문과 조화는 정중히 사양하겠다는 뜻을 전하셨다”고 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청와대는 가족·친지를 제외한 외부 조문을 최소화할 계획이며 장례식장과 장지 등도 공개하지 않았다. 고인은 노환에 따른 신체기능 저하 등으로 최근 부산의 한 병원에 입원했고, 오후 7시쯤 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생을 마감했다. 문 대통령은 수원에서 열린 ‘2019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에 참석한 뒤 전용헬기 편으로 병원으로 이동했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 26일에도 모친의 위독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았다. 초유의 일이지만 청와대는 국정공백을 최소화한다는 방침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현지에서도 긴급상황 보고가 필요한 경우에 대비해 공간 확보 등 조치를 취해 놓은 상황”이며 “청와대는 비서실장 중심으로 평상시와 똑같은 근무를 서게 되고, 단체 조문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문 대통령은 오늘부터 특별휴가를 시작하며 규정에 의하면 5일까지 휴가를 쓸 수 있지만, 며칠간 쓸지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따라 31일 ‘공정사회를 향한 반부패정책회의’는 연기될 전망이다. 하지만 다음달 3∼5일 태국에서 열리는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 일정은 예정대로 소화할 것으로 보인다. 함경남도 흥남 출신인 강 여사는 1950년 12월 문 대통령의 아버지인 문용형(1978년 작고)씨와 젖먹이이던 큰딸 재월(70)씨와 함께 ‘흥남철수’ 때 월남했다. 1953년 1월 피란지인 거제도에서 장남인 문 대통령을 얻었다. 남편이 장사를 하다가 부도가 난 뒤 강 여사가 일곱 식구의 생계를 오롯이 꾸렸다. 시장 좌판에서 구호물자 옷가지를 팔거나 연탄 배달을 했다. 1975년 문 대통령이 유신반대 시위로 구속되면서 옥바라지를 했다. 문 대통령은 “호송차가 막 출발하는 순간, 어머니가 차 뒤를 따라 달려오고 계셨다. 팔을 휘저으며 ‘재인아! 재인아!’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며 “마치 영화장면 같은 그 순간이 지금까지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장면이다”고 떠올린 바 있다. 2004년 청와대 사회문화수석이던 문 대통령과 함께 금강산에서 열린 제10차 이산가족상봉에서 고향에 두고 온 막내 여동생 병옥(당시 55)씨와 재회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9월 추석 특집프로그램에서 “제가 아마 평생 어머니한테 제일 효도했던 게 어머니 모시고 (이산가족 상봉) 갔던 거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참여정부에서 아들은 ‘노무현의 친구’이자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고, 2012·17년 대선후보로 나선 유력 정치인이었지만 강 여사는 늘 몸가짐을 조심스러워했다. 2017년 대선 직전 강 여사는 한 인터뷰에서 “아들이 힘든 일 하니까 조용히 있는 게 또 도와주는 거라. 가짜 진주로 된 쪼만한 목걸이 하나 있는 것도 안 차고 다녀요. 시계·반지도 안 하고. 말 나올까 봐”라고 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궂은 일로 문대통령 뒷바라지한 92세 모친 별세

    궂은 일로 문대통령 뒷바라지한 92세 모친 별세

    1950년 흥남철수 때 피란한 실향민2004년 금강산 상봉에서 동생 만나靑 “가족장 예정…조문·조화는 사양”문재인 대통령의 모친 강한옥 여사가 29일 9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고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이 밝혔다. 현직 대통령이 재임 중에 모친상을 치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고 대변인은 “문 대통령은 고인의 뜻에 따라 장례를 가족과 차분하게 치를 예정이며 조문과 조화는 정중히 사양하겠다는 뜻을 전하셨다”고 말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고인은 노환에 따른 신체기능 저하 등으로 최근 부산의 한 병원에 입원했고 이날 저녁 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고 강한옥 여사와 문 대통령의 부친 고 문용형씨는 모두 함경남도 흥남 출신의 실향민이다. 두 사람은 한국 전쟁이 발발한 1950년 흥남철수 때 피란민을 구출한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내려왔다. 경남 거제에 정착한 지 2년 만에 문 대통령이 태어났다. 고인은 남편의 장사가 잘 풀리지 않은 탓에 문 대통령이 어릴 때부터 집안 생계를 책임진 것으로 전해졌다. 문 대통령은 저서에서 어머니가 생계를 위해 시장 좌판에 옷을 놓고 팔거나 연탄배달을 했다고 밝혔다. 2012년 초 한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문 대통령은 중학교 1학년 학생일 때 어머니가 자신을 데리고 기차 암표 장사를 하러 나갔다가 끝내 암표를 팔지 못하고 그냥 돌아온 이야기를 전한 바 있다.문 대통령은 1975년 4월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검찰로 이송되는 날 호송차를 따르던 어머니의 모습을 생생히 묘사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어머니가 팔을 휘저으며 ‘재인아! 재인아!’ 내 이름을 부르고 차 뒤를 따라 달려오고 계셨다”면서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멀어지는 호송차를 바라보고 계셨다”고 떠올렸다. 강 여사는 문 대통령이 청와대 사회문화수석으로 재직 중이던 2004년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당시 북측에 있던 동생 병옥 씨를 만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9월 추석특별기획 방송에 출연해 “제가 아마 평생 어머니에게 제일 효도했던 것이 이때 어머니를 모시고 갔던 게 아닌가 싶다”라고 말하기도 했다.문 대통령은 이날 수원에서 열린 2019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에 참석한 뒤 곧바로 모친이 입원한 병원으로 이동했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 26일에서 모친의 위독 소식을 듣고 헬기를 타고 부산에 다녀오기도 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미얀마군, 로힝야족 남성 조직적 성폭력…피해자 “수치심에 말도 못해”

    미얀마군, 로힝야족 남성 조직적 성폭력…피해자 “수치심에 말도 못해”

    2년 전 미얀마에서 탈출한 로힝야족 남성들과 소년들이 군인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성폭력을 당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알자지라는 28일(현지시간) 이러한 소식을 전하면서 남성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를 털어놓지 못한 채 고통받고 있다고 전했다. 41살의 한 로힝야족 남성은 알자지라 인터뷰에서 “(미얀마 군인들이) 계곡 근처 야외에 나를 끌고 가서 심하게 구타를 하기 시작했다”면서 “그러고 나서 나를 마치 여성에게 하는 것처럼 강간했다. 새벽 4시까지 거기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날의 기억은 나를 극심한 우울감에 빠지게 한다”면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고통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더는 견딜 수가 없다”고 덧붙였다. 45살인 또 다른 로힝야족 남성은 2006년 미얀마군에 의해 성폭력을 당해 지금까지 만성적인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군인들은) 나를 벌거벗기고 나서 막대기로 내게 성폭력을 가했다”면서 “이후 국경 경찰 중 한 명이 나를 강간한 뒤 교도소로 보냈다”고 털어놨다. 그는 “정의가 있다 하더라도 나의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면서 “오직 죽음만이 나를 이 고통에서 해방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불과 며칠 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미얀마군은 2017년 8월 로힝야족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펼쳤다. 당시 70만명 이상의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로 대탈출을 감행했다. 피란민의 상당수는 콕스 바자르에 있는 쿠투팔롱 난민캠프에 머물고 있다. 난민캠프 측은 “캠프 내 성폭력 피해 남성이 있는지 여부는 파악하지 못했다”면서도 “분명 그러한 일이 발생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고 답했다. 유엔은 지난해 로힝야족 남성과 소년의 성폭력 피해 여부를 조사했다. 조지 맥레오드 국제이주기구 대변인은 “조사 대상이 광범위하지는 않지만 응답자의 14.3%가 성폭력 피해자로 드러났다”면서 “이는 매우 극명한 결과”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응답자들이 개인적 경험을 털어놓지 못할 것을 감안해 89명의 남성과 소년들을 개별적으로 인터뷰하기도 했다. 그 결과 이들 중 3분의 1이 성폭력 피해를 입은 남성과 소년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미얀마에 있는 미국여성난민위원회에서 진행한 연구도 이를 뒷받침한다. 연구는 “로힝야족이 미얀마에 있을 때 남성과 소년들을 대상으로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성폭력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인권운동가들은 국제형사재판소에 로힝야족에 대한 성범죄 혐의를 조사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촉구하고 있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일상 품었던 읍성, 일상 지켜준 도성

    일상 품었던 읍성, 일상 지켜준 도성

    경기 광주시 청량산 일대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본성과 외성까지 포함한 성곽의 총길이가 1만 2335m, 면적 220만 9270㎡에 달하는 국내 최대 산성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남한산성은 안쪽은 낮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해서, 청나라 군사들이 처음 왔을 때 병기라고는 날도 대보지 못했고, 병자호란 때도 결코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했다. ●병자호란 피란수도, 남한산성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군사 반정으로 즉위한 인조는, 이듬해인 1624년 이괄의 반란으로 한양을 뺏기고 공주로 피란하게 된다. 혹독하게 고생한 그해 임금의 입보와 조정의 파천이 가능한 남한산성을 수축하게 된다.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옮겨 45일간 수성으로 침략을 버틴다. 화력과 기동력에서 열세였던 조선군 1만 3000여명으로 수십만의 최정예 청군을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산성의 견고함 때문이었다. 결과는 일방적인 패전과 치욕적인 항복이지만 산성이 함락된 것이 아니라 원군과 물자의 결핍으로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 용골대가 통역 정명수에게 말했다. -단단해 보인다. 산골나라에는 저런 성이 맞겠어. -조선은 성안이 허술합니다. -허나 성벽은 날카롭구나. 깨뜨리기가 쉽지는 않겠어. -바싹 조이면 깨뜨리지 않아도 안이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그리 보느냐. 듣기에 좋다. (김훈의 ‘남한산성’에서)산성의 위치는 절묘하다. 서울의 동쪽 흥인지문을 나와 살곶이다리로 중랑천을 건너 광진나루에 다다른다. 배로 한강을 건너 평야지대를 지나면 남한산성에 입성할 수 있다. 빨리 걸으면 대략 8시간, 한나절 거리다. 병자년 12월 9일 압록강을 넘은 청나라의 기병들은 빛의 속도로 남하해 12월 14일 개성에 도착했고, 바로 그 시간 인조는 궁궐을 떠나 당일 남한산성에 입보할 수 있었다. 남한산성은 평균 고도 450m의 고지에 떠 있는 천혜의 요새다. 봉우리와 능선을 연결해 약 10㎞의 본성을 쌓았다. 청량산 일대에는 신라시대 쌓았던 주장성이 폐허로 남아 있었다. 인조 대의 남한산성은 대략 기존 주장성의 흔적을 따라 돌로 견고하게 쌓은 것으로 추정한다. 이처럼 대규모의 산성을 2년이라는 단기간에 완성하기 위해 택한 나름 현명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때 완성한 본성은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성 밖에 있는 벌봉이나 남한봉은 안의 봉우리들보다 40여m 높아 성안을 들여다보는 고지였다. 중장거리포로 무장한 청군은 이곳에 화포를 설치해 산성 안을 무차별 공격할 수 있었다. 이 결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후대에 벌봉을 감싸는 봉암성을 쌓고, 남한봉과 연결하는 외성인 한봉성을 쌓게 된다. 또한 성 밖의 능선을 확보하기 위해 남문 근처에 3개 옹성을 덧붙여 쌓았다. 완벽한 방어용 산성으로 보완됐지만 이후에는 재래식 외침도, 재래식 수성도 없었다.●산성수축론에서 산성거주론까지 한국과 같은 산악 국가는 곳곳에 산성을 쌓고 이를 거점으로 방어망을 형성하는 것이 전통적인 군사전략이었다.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라 할 정도로 수많은 견고한 산성을 경영했다. 인구 2만명의 안시성이 당나라의 수십만 대군을 물리치지 않았던가. 특히 수도 방어를 위해 국내성 인근에 환도산성을, 평양성 뒤에 대성산성을 쌓았다. 평상시에는 평지 도성에서 일상을 영위하지만, 유사시에는 배후 산성에 입보해 침략으로부터 지켜 냈다. ‘평성과 산성’이라는 2성제는 백제와 신라는 물론 후속 왕조인 고려도 채택한 전통적인 도성 방어체계였다. 조선 왕조는 군사용이 아닌 한양성만 쌓았을 뿐 도성 방어용 산성을 만들지 않았다. 대국인 명나라나 야만국인 일본이 수도를 함락할 정도로 전면 침략할 리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발발 20일 만에 수도가 함락되고 조정은 국경인 의주로 파천했다. 전시 재상인 유성룡은 무기력한 조선의 방어체계를 개탄하며, 유사시에 대비해 튼튼한 산성을 마련하자는 산성수축론을 주장하게 된다. 남한산성은 산성수축론이 실현된 본격적인 예다. 산성은 수축과 관리에 막대한 자원이 소요된다. 또한 산성 수호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성 밖의 백성과 재산을 지키지 못하니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산성무용론을 펼친 실학자 유형원은 평소 생활 터전인 읍성의 방어 능력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읍성보강론을 주창했다. 이 주장은 설득력을 가져 여러 지방의 읍성을 마치 산성과 같이 방어용으로 개축하게 된다. 읍성보강론은 결국 1797년 수원화성 건설로 결실을 맺었다.그러나 아무리 튼튼해도 읍성은 지리적 한계로 인해 방어력이 떨어진다.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던 강항은 산성에 인구를 유입하고 거주 기능을 높이자는 산성거주론을 주장했다. 군사적인 산성 안에 본격적인 생활기능을 담을 수 있다면 거주와 방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높은 곳의 산성은 지리적 접근이 어렵고 내부 토지도 좁아 인구 유입에 한계가 많다. 산성 거주를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1683년 남한산성에 광주유수부를 설치하게 된다. 유수부란 수도권의 광주, 강화, 개성, 수원에 둔 군사·행정을 통합한 특별 통치 단위였다. 광주유수부에는 6000명이 넘는 군인과 수백명의 지방 관료와 그 가족들이 이주했다. 또한 세금 감면과 경작지 제공 등 혜택을 줘 1000호, 4000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산성도시가 됐다. 남한산성의 진정한 가치는 이 높은 분지에 도시가 이뤄졌고, 유수부가 폐지된 1917년까지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 번성이 유지됐다는 사실에 있다.●상황 따라 기능 달라지는 이중적 도시 구조 이 산성도시는 평시에 일반적인 읍성과 같이 기능하지만, 유사시엔 임시 도성이 되는 이중적 성격을 가졌다. 도시의 뼈대 역시 이중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남문·북문을 이루는 간선도로의 중앙에 동문으로 통하는 중심도로가 접속한, 丁자형 가로를 이룬다. 그 교차점에 종각이 있고, 그 뒤에 행궁을 뒀다. 동서 관통로인 종로에 남대문로가 접속한 한양의 도로체계와 유사하다. 또한 행궁과 경복궁의 위치도 비슷하다. 지형에 따라 방위만 바뀌었을 뿐 한양 도시체계를 축소 반복한 임시 도성의 모습이다. 일반적인 읍성의 중심은 객사다. 행궁 남쪽에 객사인 인화관을, 그 뒤로 관청들을 뒀다. 동문로에는 큰 물줄기가 흐르는데, 물줄기 양쪽에 나란히 두 개의 도로가 놓였다. 한 길은 행궁으로 통하고, 다른 한 길은 객사로 통한다. 다시 말해 하나는 도성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읍성의 길이다. 두 길 사이의 공간에는 장터와 군사훈련장, 공공 정원인 지수당 연못을 둬 공공 지역으로 설정했다. 지수당 연못은 원래 3개로 경관용인 동시에 저수지 역할까지 했는데, 현재는 2개만 남아 있다. 연무관 앞의 훈련장과 장터는 세계유산센터와 주차장, 일반 음식점들이 어지럽게 들어서 흔적이 없어졌다.행궁의 규모는 비록 작지만 왕궁의 격식을 따라 외전과 내전을 중첩시켰다. 눈에 띄는 것은 행궁 뒤 북쪽 산 옆에 자리한 좌전이라는 건물군이다. 도성의 종묘에서 역대 임금들의 위패를 가져와 모시는 임시 종묘인 셈이다. 행궁의 남쪽 지역에는 우실이라는 사직단을 뒀다고 한다. 제왕이 있는 도성이 되려면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단을 설치해야 한다는 이른바 ‘좌묘우사’의 원칙을 충실히 따른 결과다. 공공 지역과 시설 주위로 자리한 1000여호의 민가에서는 수천명의 주민이 농사뿐 아니라 수공업과 상업 등에 종사하며 다양한 도시적 일상을 살았다. 한창때는 효종갱이라는 아침 죽을 한양까지 배달할 정도로 여러 특산물의 산지였다. 남한산성 400년의 역사에서 병자호란 45일은 비일상적인 특수한 기억일 뿐이다. 대부분의 시간은 산성도시로 번성했고, 천주교의 순교지이자 구한말 의병운동, 일제 독립운동과 애국계몽의 근거지였다. 해방 후 남한산성은 수도권의 중요한 관광지로 여전히 번성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국제적인 명소가 됐지만 성곽만 부각될 뿐이어서 늘 아쉽다. 특별하고 의미 있는 도시 구조가 재건된다면 명실상부한 산성도시가 될 것이다. 성곽은 이미 날카롭다. 내부의 산성도시가 건강하게 살아난다면 남한산성은 영원히 마르지도, 깨지지도 않을 것이다.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쉿! 우리 동네 핫플레이스

    쉿! 우리 동네 핫플레이스

    베테랑 여행자들은 여행지에서 현지인을 먼저 찾는다. 그들만 아는 특별한 여행지를 귀동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운 좋게 보석 같은 풍경과 마주하기도 한다. 한국관광공사에서 11월에 가볼 만한 곳을 선정했다. 테마는 ‘토박이들이 권하는 우리 동네 명소’다.①버림받은 것들의 반란… 충북 충주 오대호 아트팩토리 오대호 아트팩토리는 2007년 폐교한 옛 능암초등학교에 문을 연 정크아트 갤러리이다. 정크아트는 쓰레기와 잡동사니를 의미하는 ‘정크’(Junk)와 ‘예술’(Art)의 합성어로 폐품을 활용해 제작한 예술작품을 가리킨다. 전시장엔 오대호 작가의 작품 1300여점이 전시됐다. 전시관은 주제에 따라 모션갤러리와 키즈갤러리, 어린이체험장으로 나뉜다. 모션갤러리는 간단한 조작을 통해 작품을 직접 움직여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코코몽, 둘리, 뽀로로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는 키즈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다. 재생골판지를 이용한 에코봇 만들기와 아트컬러링은 오대호 아트팩토리만의 특화된 체험이다. 기상천외한 자전거를 타고 운동장을 신나게 달리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②풍차가 빛나는 언덕 위 벽화마을… 대전 대동하늘공원 대전역에서 멀지 않은 대동하늘공원은 낮에는 알록달록한 벽화를 구경하고, 밤에는 반짝이는 풍차와 대전 야경에 빠지는 감성 충만한 여행지다. 한국전쟁 때 피란 온 사람들이 모여 살던 달동네는 예쁜 벽화들이 그려지면서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밝고 화사한 여행지로 변신했다. 이 마을 언덕에 조성된 대동하늘공원은 작은 동네 쉼터이지만 도심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보물 같은 전망을 품고 있다. 인근의 소제동 철도관사촌도 젊은 감각과 감성으로 채운 카페, 식당들이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풍경이 독특하다. 한밭수목원을 거닐며 가을 정취를 즐겨 보는 것도 좋다. 수목원과 이어진 천연기념물센터와 ‘효’를 테마로 꾸민 뿌리공원도 이색 여행지다.③바닷길이 열리면 웅도行… 충남 서산 웅도어촌체험마을 이름에서도 짐작하듯 웅도는 곰을 닮은 섬이다. 그 유명한 진도와 무창포처럼 웅도 역시 하루 두 번 바닷길이 열린다. 바닷길이 열리면 웅도 주변으로 거대한 갯벌이 모습을 드러낸다. 웅도여행의 중심지는 웅도어촌체험마을이다. 바지락 캐기, 낙지잡이, 망둥어 낚시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다. 깡통열차를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경험도 색다르다. 웅도는 밖에서 바라봐도 아름답다. 웅도 맞은편 대로리의 카페와 캠핑장 등에서 느긋하게 전망을 즐기거나 특별한 하룻밤을 지내도 좋다. 지곡면에는 조선시대 화가 안견의 기념관이 있다. 걸작 ‘몽유도원도’ 모사본과 그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다. 폐교를 리모델링한 서산창작예술촌에선 수준 높은 서예아카데미와 다양한 장르의 전시물을 감상할 수 있다.④과거와 현재의 유쾌한 만남… 경북 의성 금성산 고분군 드넓은 초원 위에 봉긋 올라온 금성산 고분군은 옛 조문국의 흔적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마음 편한 풍광까지 안겨준다. 역사탐방을 좋아하는 어르신과 인생사진을 남기려는 젊은이들이 한자리에서 만나, 과거를 상상하며 현재를 만끽한다. 조문국은 삼한시대 부족국가 중 하나다. 금성산 고분전시관에서 조문국의 장례 문화를 엿보고, 의성조문국박물관에서 찬란했던 조문국의 문화를 살핀다. 인근의 제오리 공룡발자국화석지에서는 선명하게 남아 있는 중생대 공룡발자국 화석을 볼 수 있다. 국보 제77호인 탑리 오층석탑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빙계계곡도 놓치면 안 된다. 여름에는 얼음이 얼고 겨울에는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빙혈과 풍혈이 있다.⑤산책하기 좋은 도심 속 힐링 명소… 광주호 호수생태원 광주호 호수생태원은 물가와 숲속을 거닐며 한가로운 늦가을 오후를 만끽하기 좋은 곳이다. 생태연못, 호수 전망대, 메타세쿼이아길, 버드나무 군락 등 볼거리가 풍성하고 포토 존이 많아 나들이와 데이트 코스로 인기가 높다. 휠체어와 유모차도 어렵지 않게 이용할 수 있다. 가사문학의 산실인 전남 담양과 가까워 소쇄원, 식영정 등 가사문학 관련 유적과 연계해 즐기기에도 제격이다. 무등산 자락의 의재미술관과 증심사, 광주의 근대가 집약된 양림동 역사문화마을,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도 가볼 만하다. 특히 의재미술관은 전시된 허백련의 작품 외에도 건물 자체가 예술 작품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중 한 명인 조성룡 선생 등이 설계한 건물 외관이 매우 빼어나다.⑥전망, 그 이상의 재미가 있다… 울산 울산대교 전망대 울산대교 전망대는 자동차, 조선 등 국내 대표 산업단지와 태화강 국가정원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어우러진 ‘팔색조 도시’ 울산의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울산대교 전망대는 해발 203m의 다리 위에 조성됐다. 실내 전망대, 야외 테라스, VR체험관 등을 갖췄다. 360도 통유리로 이뤄진 3층 실내 전망대가 하이라이트. 낮에 보는 풍경은 활기차고 밤에 내다보는 전망은 낭만적이다. 특히 공장들이 빚어내는 화려한 야경은 ‘울산 12경’ 중 하나다. 인근의 대왕암공원에서는 해송이 우거진 숲길을 걷고 울산 울기등대 구 등탑과 신 등탑, 호국룡이 됐다는 문무왕비의 전설을 품은 대왕암을 볼 수 있다. 울산대교 너머의 장생포 고래문화마을과 장생포고래박물관은 울산과 고래가 쌓아 온 오랜 이야기를 들려준다. 글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사진 한국관광공사
  • 문학을 천명으로 알고 외길 걸어온 중산 이운룡 시인

    문학을 천명으로 알고 외길 걸어온 중산 이운룡 시인

    “팔순의 나이지만 저는 현재진행의 시인이고 문학평론가라고 자부합니다” 전북 문화계의 큰 어른 중산 이운룡(82) 시인은 “문학은 나의 인생이고 나의 인생이 문학이었다”며 50여년 동안 올곧게 걸어온 문학인으로서의 삶을 회고했다.등단 이후 1334편의 시를 발표한 그는 지칠줄 모르는 열정과 성취욕으로 오로지 ‘시인의 사명’에 삶의 의미를 부여했다. 한평생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담금질하며 옆걸음 치거나 유유자적하지 않았다. 이운룡 시인을 ‘문학을 천명으로 알고 살아온 외골수’, ‘향토문화계의 산증인’으로 부르는 이유다. “시란 대상을 미의식으로 표현한 언어예술, 인간을 위해 차려진 진·선·미의 진수성찬입니다. 존재의 인식임과 동시에 미적 진실을 추구하는 산물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운룡 시인은 “우주론적 인식을 함축성이 강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시의 생명이고 예술의 진수”라며 “나의 시는 감각적 묘사 보다는 세계정신을 담아내기 위해 진화와 변모를 계속하고 있다. 모든 욕망으로부터 해방되니 이제야 시가 쉽게 나온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운룡 시인과 일문일답. -향토 문화계의 큰 어른이다. 문학인생을 뒤돌아 본다면. “문학을 천명으로 알고 살아왔다. 문학은 나의 인생이고 나의 인생이 문학이었다. 나와 시, 시와 나는 분리할 수 없는 일원적 일체유심으로 보편적 인생관으로부터 시작됐다. 중학생 때부터 팔순까지 지칠 줄 모르고 전심전력 시에 몰두했다. 문학을 위해, 나를 위해 한평생 담금질했다. 무쇠가 칼과 괭이가 될 때까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목적에 전념했다. 나의 삶은 정도(正道), 직선과 긴장의 질주였다. 옆걸음 치면서 타인의 어깨 너머를 넘보지 못하였고, 유유자적 느림의 미학도 탐할 수 없었다. 시작하면 끝장을 내고 그 향내를 맡아야 직성이 풀렸다. 그렇게 철두철미했고, 외곬이었고, 성취욕이 강했다. 작품 집중력도 그랬다. 완벽주의 성격은 창조적 상상을 위해 쉼 없이 전력투구하였다. 이제야 숨돌리고 인생과 문학을 정리할 때가 왔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불청객 세월이 가르쳐준 결과다”-시인으로서 문학인으로서 폭 넓은 활동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열정의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가. “어린 시절부터 적극성, 탐구심, 승부욕, 성취감 등이 나를 키운 동기였다. 농촌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성공적인 인생을 찾아 꾸준히 매진한 노력과 집념으로 시적 성취와 위상을 확립할 수 있었다. 팔순 중반의 나는 아직도 현재 진행의 시인이고 문학평론가라고 자부한다” -역사적 혼란기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시와 인연을 맺게 된 동기는. “한국전쟁 때이다. 고향집으로 피란 온 옛 친구의 완산초등학교 교지를 읽고 감동을 받았다. 특히 동시에 매료됐다. 난생 처음 읽어본 아름다운 글이었다. ‘하늬바람 불어오면/전깃줄은 쓰르렁 피리 불고요’라는 구절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6학년 때 학급 문집에 동시 ‘달밤’이 수록됐다. 내 생에 최초의 정서가 녹아든 언어였다. 사실 그 시절 내 꿈은 제트기 조종사가 되는 것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양돈사업가 꿈을 꾸기도 했다. 고등학교 입학 후에는 시인으로 희망이 바뀌었다. 중학교 시절 카네기의 ‘인생독본’, 이광수의 소설 ‘사랑’을 읽은 영향이 컸다. 제트기 조종사와 양돈사업의 꿈은 짧은 기간에 지워졌다” -등단하기까지 과정은. “1958년 전북대 국문학과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등록금이 없어 포기했다. 대신 무주괴목초등학교 강사로 발령받아 교단에 서게됐다. 이듬해 마을 독지가 이홍의 어르신의 도움으로 전북대 국문학과에 진학했다. 1학년 때 ‘신영토’ 동인에 참여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1962년 군 복무를 마치고 2학년에 복학, 3학년까지 한국문단 최고의 명교수들로부터 강의를 받는 행운을 얻었다. 서울에서 초빙된 시인 김현승, 문학평론가 조연현, 언어학자 이숭녕 교수들의 강의였다. 김현승 교수의 시론과 시창작론 강의를 받는 동안 시의 눈이 번쩍 뜨이는 개안을 의식했다. 이후 나의 시는 환골탈태하기 시작했다. 2학년 시절 1962년 10월 경북대 주최 제5회 전국 대학생 문예작품 현상공모에 ‘기도’가 당선됐다. 이후 4학년 졸업반이던 1964년 ‘현대문학’에 ‘방황의 시간’이 1회 추천시로, 1965년에는 ‘아침에‘가, 1969년에는 ‘가을의 어휘’가 3회 추천 완료시로 발표됐다. 시를 개인지도 해주신 이철균 은사, 고향의 이홍의 어르신, 김교선 교수, 김현승 교수, 구상 교수 다섯 분이 가난을 극복하고 문학의 앞길을 열어주신 나의 큰 어르신들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세계정신과 전인격적 인생, 존재의 총체성을 내포한 감정을 토해내는 과정이다. 좋은 시를 쓰려고 고뇌했던 혈기는 과거의 열정과 의욕이었다. 인생을 숙고하고 성찰하면서 우주에 충만한 존재 문제에 천착하려는 시정신과 시작 태도가 나이든 시인의 소명임을 늦게야 깨달았다. 이제야 시가 쉽게 나온다. 모든 욕망으로부터 해방된 거침없는 자유의지,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시의 본질을 정의한다면. “시란 존재의 인식임과 동시에 미적 진실을 추구하는 산물이다. 나의 시는 언어와 미와 철학 또는 역사의식과 그 융합에 있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생의 의미와 가치를 미적으로 인식하려는 정신에서 시가 태동한다. 시의 근저에 깔려있는 관념은 명상과 체험을 통해 인식된 원관념과 언어 감각을 결합하는 보조관념이 주제의식을 담아낸 것이다” -시작 과정은. “시인은 시를 찾는다. 시는 도처에 있다. 명상하고 숙고한다. 긴장의 끈을 졸라맨다. 그 다음부터는 주제의식에 따라 언어를 구조화하면서 첨삭을 거듭한다. 시상을 더 정확하고 풍부하게 표상하기 위해서다. 이때가 바로 대상의 본질 탐색을 위한 집중력과 철학적 안목, 시정신의 심화 확충, 밀도 높은 치밀한 언어를 필요로 하는 단계이다. 신중하고 꾸준한 지속성 가운데 새로운 변모를 추구, 내면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하면서 한편, 한편의 시를 위하여 전심전력 언어의 형상화에 투신한다. 마음 속에 무르익은 시를 쓰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에서 정리해놓고 한참 잊어버리고 있다가 다시 몇 번을 수정한다. 끄쯤 돼야 후회하는 일을 덜어낼 수 있다” -시가 소설, 수필 등 다른 장르와 구별되는 매력은. “시란 대상을 미의식으로 표현한 언어예술이다. 모든 예술의 근원은 진·선·미에 있다. 진·선·미는 인간이 존재해야 할 근본이고 누려야 할 지상 목표다. 시는 인간을 위해 차려놓는 진·선·미의 진수성찬이다. 우주론적 인식을 함축성이 강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시의 생명이고 예술의 진수다. 압축된 언어는 절체절명의 부단한 추구와 탐색의 정신력에 의해 성취된다. 생의 근원적 숙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소설, 수필이라는 산문과 다른 점이다. 그림으로 말하면 산문은 구상화이고 시는 추상화라고 할 수 있다. 동작으로 비유하면 산문은 보행이고 시는 무용일 것이다. 보행은 목적 행위의 동작이지만 무용은 동작 그 자체가 예술인 점에서 서로 다르다” -지금까지 발표된 시와 발간된 저서는. “등단 이후 올 10월까지 1334편의 시를 썼다. 단행본 시집은 ‘가을의 어휘’를 비롯해 15권이다. 내년부터 해마다 5권의 시집을 더 발간할 예정이다. 문학이론서 및 시비평서는 ‘시창작 이론과 실제’, ‘한국시의 의식구조’ 등 12권이다”-수많은 작품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시가 있다면. “나의 모든 시는 살아있는 나의 영혼이다. 한편, 한편 다 애착이 간다. 대표시를 물어오면 나의 모든 시가 대표시라고 대답한다. 어버이가 어떤 자식이 제일 예쁘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까? 그와 같은 심정에서다” -문학도 역사와 함께 변화하고 진화한다. 시의 흐름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 “내 시의 진화와 변모의 실상은 의도적인 추구정신과 탐구력이 반영된 것이다. 더 깊고 정확한 심층적 탐색, 치밀한 구상과 명쾌한 표현을 위한 자아 혁신의식이 나를 옥죄기 때문이다. 나의 시와 시대별 변화 과정은 5단계로 집약된다. 제1단계는 1964년 이후 등단 초기로 자연 사물의 대상에 관한 즉물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 즉 관상에 의한 사물 형상의 순수서정이 시의 주조였다. 제2단계는 70년대 이후 암울한 정치적 시대상과 급격한 산업사회로의 과도기 불협화음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부조리한 현실에 반기를 들고 풍자와 비판의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래도 감수성과 언어의 예술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제3단계는 1990년 이후 시의 중력이 사회현실이나 타인으로부터 나 자신의 내면세계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시기다. 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한 시기다. 인간의 삶과 개별성에 천착하여 존재 문제에 탐닉, 본질적 의미와 가치, 미의식을 표현하고자 했다. 제4단계는 2012년 이후다. 시정신이 견고해짐에 따라 순수 가치에 대한 재인식, 인간 존재와 사물의 본질 해명, 삶에 대한 성찰 등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존재의 내면을 투시하려는 데 집중한 시간들이다. 제5단계는 2017년 이후 오늘날까지 쓴 시가 이에 속한다. 고뇌와 정진의 자세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찾자, 좋든 좋지 아니하든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자고 마음을 정리했다. 이후 아주 수월하게 시상이 줄을 서서 잡혀 나왔다. 나 자신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시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시의 품격을 저해하는 노년기 푸념이 자꾸 개입하여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제지할 능력이 없다보니 그냥 쓸 수밖에 없다” -창작 활동은 언제, 어떤 마음으로 하는지. “나는 원고를 청탁받았다고 해도 아무 때나 시를 쓰지 못한다. 오랜 체험과 사유의 과정이 넘쳐날 때 문득 시 한구절 또는 한 토막의 제재가 떠올라야 쓴다. 그러한 긴장감을 유지하려고 고뇌에 찬 밤낮을 보낸다. 몇 주일, 몇 달을, 근래에는 한두해까지 이어간다. 2018년과 2019년이 그러했다. 평생의 시작생활에서 가장 빛나는 노년기의 시 쓰기였다” -시의 소재는 어떻게 찾는가. “시의 소재는 때와 장소를 구별하지 않는다. 어디에나 있고 무엇이든 소재가 된다. 다만 어떻게 보느냐는 시각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일상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대상을 탐색하다 보면 소재가 아닌 것이 없다. 영감에만 의존하지 않고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탐구하면 자신의 내면에 시의 소재는 얼마든지 살아있다”-문단 활동은 어떻게 하시는지. “활발한 편이다. 지역에 국한된 문학행사지만 충실한 시인, 문학평론가가 되려는 심정에는 변함이 없다. 한국문인협회, 한국현대시인협회, 미당문학회 고문으로 활동중이다” -문학도들을 위해 많은 배려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동기는. “문학회 창립은 열악한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앙과 지방의 연결고리를 맺고 창작열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시창작 교실을 개설해 만 22년 동안 시창작 이론과 작품을 지도했다. 열린시문학회 시창작교실은 전북지역 문인 배출의 산실이었다. 최근까지 2370명이 수료했다. 신춘문예 당선자 19명, 문예지 신인상 당선 101명, 기성시인 120명을 배출했다. 전국 단위 문학상 수상자도 100명이 넘는다. 지방에서도 중앙을 능가하는 문예지를 만들기 위해 표현문학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중산문학상을 매년 시상하고 있다. 의미와 향후 계획은. “세 자녀가 아버지 문학상을 제정하자고 의견을 모아 지원하고 있다. 2012년부터 1인을 선정해 창작지원금 500만원을 시상하고 있다. 고마울 뿐이다. 제정 목적은 자연과 사람의 존엄성을 문학작품으로 구현, 문학의 사회적 위상, 작품성, 한국문학 발전에 기여한 문인을 찾아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문학상은 좋은 작품을 발표하려는 의욕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문단에서는 필요불가결한 견인차 역할을 한다. 문단사회의 꽃은 문학상이다. 작은 상이지만 지역 문학풍토가 활기차고 희망적으로 발전하는데 이바지하길 바란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터키, 쿠르드 민병대 철수 전제로 시리아 북동부 닷새 휴전에 합의

    터키, 쿠르드 민병대 철수 전제로 시리아 북동부 닷새 휴전에 합의

    시리아 북동부의 쿠르드족을 공격한 터키가 쿠르드 민병대(YPG)가 철수할 시간을 주기 위해 닷새 동안 군사작전을 중단하기로 미국과 합의했다. 17일(현지시간) 터키 수도 앙카라를 방문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을 만난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은 회담 후 두 나라가 닷새 휴전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펜스 부통령은 미국 대사관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쿠르드 민병대원들이 안전지대에서 철군한 이후 터키가 시리아 북부에서 완전히 군사작전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며 “터키의 작전은 완전히 중단될 것”이라고 말했다. 단 YPG가 터키가 설정한 안전지대 밖으로 철수하는 것이 조건이다. 펜스 부통령은 “터키 측은 YPG가 안전지대 밖으로 철수할 수 있도록 120시간 동안 군사작전을 중단할 것”이라며 “YPG의 철수가 완료된 뒤 모든 군사작전은 종료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미 YPG가 주축을 이룬 시리아민주군(SDF)과 접촉 중”이라며 “그들은 철수에 동의했고 이미 철수하는 중”이라고 전했다. 마줄름 코바니 YPG 사령관은 라스 알아인과 탈 아브야드 등 접경 마을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과 터키가 발표한 공동성명에 따르면 안전지대의 관리는 터키군이 맡게 된다. 이것은 지난 8월 두 나라가 안전지대 설치에 합의한 이후 터키가 요구해온 조건을 미국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터키 정부 관계자는 로이터 통신에 “미국과의 회담에서 정확히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말했다. 터키는 쿠르드족이 장악한 시리아 북동부와 터키 국경 사이에 길이 480㎞, 폭 30㎞에 이르는 안전지대를 설치하고 터키군이 관리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안전지대에 주택 20만채를 건설해 자국 내 시리아 난민 100만명 이상을 이주시킬 계획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 “터키에서 대단한 뉴스가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감사한다. 수백만 명의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적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9일 터키가 시리아 북동부에서 군사 활동을 개시하자 14일 터키 제재를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한 데 이어 터키와 쿠르드의 휴전 중재를 위해 펜스 부통령을 대표로 하는 고위급 대표단을 터키에 급파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날 앙카라 대통령궁에서 1시간 30분 펜스 부통령과 일대일로 만난 후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으로 구성된 고위급 대표단과 회담했다. 2011년 내전 발발 이후 시리아 북동부를 장악한 쿠르드족은 수니파 극단주의 테러조직 ‘이슬람국가(IS)‘ 격퇴전에 참여해 미국의 동맹으로 입지를 다졌다. 터키는 YPG를 자국의 쿠르드 분리주의 테러 단체인 ‘쿠르드노동자당’(PKK)의 시리아 분파로 보고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여겨왔다. 터키는 지난 9일 시리아 북동부에서 쿠르드족을 몰아내기 위해 ‘평화의 샘’ 작전을 시작해 중화기와 제공권을 앞세워 탈 아브야드와 라스 알아인 등 시리아 북동부의 요충지를 점령했다. 터키의 공격으로 궁지에 몰린 쿠르드족은 사실상 ‘독립국 건설’의 꿈을 접고 지난 13일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이 이끄는 시리아 정부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 뒤 양측은 유프라테스강 서쪽의 요충지 만비즈에 병력을 집결하며 대치해왔다. 아흐레의 교전으로 시리아 북부에서 민간인 218명이 숨졌으며, 650명 이상이 부상했다. 전쟁의 참화를 피해 살던 곳을 떠난 피란민은 3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영국 런던에 본부를 둔 시리아 내전 감시단체 ‘시리아인권관측소’에 따르면 SDF의 185명이 전사했으며, 친(親)터키 반군 연합인 시리아국가군(SNA) 164명, 터키군 9명이 사망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흥미진진 견문기] 성균관판 생활기록부 ‘원점’… 땡땡이 본능은 여전

    [흥미진진 견문기] 성균관판 생활기록부 ‘원점’… 땡땡이 본능은 여전

    가을이 성큼 다가온 토요일 아침. 하늘은 파랗고 상쾌한 바람이 불며 햇살은 따스했다. 센스 만점 임정화 해설사께서 성균관 유생 복장을 하고 오셔서 해설에 더욱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성균관 주변을 반촌이라고 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반촌에는 두 줄기의 물길이 있었다고 한다. 성균관을 중심으로 서쪽에서 흐르는 물을 서반수, 동쪽에서 흐르는 물을 동반수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로니에 공원 앞에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개울물이 서반수와 동반수가 합류해서 흐르는 흥덕동천을 재현해 놓은 것이라고 했다. 일행은 동반수가 흐르는 길을 옆에 두고 골목길을 걸어 성균관으로 들어갔다. 성균관에는 지금의 대학처럼 교실, 기숙사, 학생식당이 모두 구비돼 있었다. 성균관 유생들의 생활상을 들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원점이야기였다. 성균관에서는 하루에 두 끼를 유생들에게 제공했는데, 한 끼를 먹으면 반원을 찍어 주고, 나머지 한 끼를 먹으면 반원을 마저 찍어 주어 1원점을 주었다고 한다. 원점이 모아져야 시험 볼 자격을 주었다고 한다. 학생들의 성실한 학교생활을 얼마나 강조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 보면 성균관에 입학하기가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입학하면 학교생활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방증 같아서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은 땡땡이를 좋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났다. 유생들이 공부했던 명륜당을 지나 공자를 위시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으로 이동했다. 병자호란 때 대성전의 위판을 모시고 피란을 갔던 두 명의 수복 이야기도 감동적이었다. 성균관의 정신적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성현들의 위판을 성균관의 선생도, 학생도 아닌 노비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결과인가. 명륜동 일대를 걸으며 오래된 이발소와 서점을 둘러보았다. 조선을 거쳐 근대를 지나 지금 우리에게 이르는 시간의 길을 걸었다. 박정아 서울도시문화지도사, 교육학 박사
  • 펜스·폼페이오 터키 급파에도… 에르도안 “휴전은 결코 없다”

    펜스·폼페이오 터키 급파에도… 에르도안 “휴전은 결코 없다”

    쿠르드족, 시리아 요충지 탈환 ‘반격’ 터키-시리아軍 북동부서 확전 위기 유엔 “최소 16만명 민간인 피란길에”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터키의 시리아 쿠르드 공격에 대한 책임론에 경제제재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제재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사이 시리아 북동부의 확전 가능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15일(현지시간) AP통신에 따르면 에르도안 대통령은 아제르바이잔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휴전 선언을 하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결코 휴전을 선포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날 터키 제재를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한 데 이어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을 포함한 대표단을 터키에 급파해 휴전 중재에 나서겠다고 밝혔음에도 기존의 입장을 고수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제재가 충분치 않으며 오히려 에르도안 대통령의 입지를 강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터키산 철강에 대한 관세율을 25%에서 50%로 인상하고, 터키와 진행해 온 1000억 달러(약 118조 8800억원) 규모의 무역합의 협상을 즉각 중단키로 했다. 그러나 지난해 미국인 목사 투옥 문제로 터키산 철강에 50% 관세를 부과했을 때 터키의 대미 철강 수출이 줄어들 대로 줄어 다시 관세율을 올린다고 해도 터키 철강 산업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할 것으로 관측된다. 양국 간 무역협정 계획도 당초 규모가 부풀려진 감이 있어 폐기되더라도 악영향은 크지 않을 전망이다. 노디아자산운용사의 선임 거시경제 전략가 세바스티안 갈리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터키의 중앙은행과 시중은행에 기축통화인 달러 거래를 어렵게 만드는 조치를 가하면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는 트럼프 대통령의 미온한 정책이 오히려 에르도안 대통령으로 하여금 자국의 경기 침체와 불안한 경제 여건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게끔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민주당뿐 아니라 공화당으로부터도 동맹을 버렸다는 비난에 직면한 트럼프 대통령이 의회에서 더 강력한 제재안이 통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실효성이 떨어지는 제재안을 제시한 것일 수도 있다고 봤다. 실제 미 하원은 트럼프 대통령의 시리아 철군 결정을 규탄하는 초당적 공동 결의안을 16일 표결에 부칠 예정이다. 이런 가운데 터키군의 공세에 밀리던 쿠르드족이 시리아정부군과 손을 잡은 뒤 요충지인 라스 알아인을 탈환하는 등 반격에 나섰다. 현지 사정에 밝은 미 관료들은 FP를 통해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에 맞서던 쿠르드군은 기발한 전략으로 명성이 높다”면서 “요충지의 지하 터널망을 이용한 공격을 준비중”이라고 전했다. 한편 유엔은 적어도 16만명의 민간인이 고향을 떠나 피란길에 올랐다고 전했다. 시리아인권관측소는 그 수가 25만명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약 200명의 쿠르드족은 국경을 넘어 이라크 북부 쿠르드 자치지역으로 피했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쿠르드 손잡은 시리아 정부군 북부로 진격… 터키와 충돌 임박

    쿠르드 손잡은 시리아 정부군 북부로 진격… 터키와 충돌 임박

    트럼프 미군 1000명 철수 명령 현실화 국경 남쪽 난민촌 전투로 IS 포로 탈출 쿠르드 전사 440명 사망·13만명 피란길 ‘토사구팽’ 위기에 처한 쿠르드족과 손을 잡은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독재정부 군대가 미군이 철수한 북부 국경마을에 속속 진입하고 있다. 쿠르드를 겨냥해 공격을 계속하고 있는 터키와의 충돌이 임박했다. AP통신에 따르면 14일(현지시간) 시리아 정부군은 버스와 픽업트럭을 타고 락까 북부지역에 도착했다. 유프라테스강 너머 동쪽의 탈타메르에도 정부군이 진입했다. 알아사드 정부군이 들어선 것은 내전에서 이 도시를 반군에게 빼앗긴 2013년 이후 처음이다. 한 시리아 고위 관리는 “우리 군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왔다”고 말했다. CNN, BBC 등은 전날 쿠르드 자치정부 당국과 시리아 정부가 북부 국경지역에 정부군을 파견하기로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쿠르드족은 ‘적’이었던 시리아 정부와의 ‘동맹’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주 미군 철수 결정으로 이 지역을 공격하려는 터키군에게 사실상 길을 열어 줬기 때문이다. CNN 보도에 따르면 쿠르드 민병대인 시리아민주군(SDF) 총사령관인 마즐룸 코바니 장군은 지난 10일 미국 고위 외교관인 윌리엄 로벅을 만나 “당신들은 우리를 팔아 버렸다. 이는 부도덕한 일”이라고 날을 세웠다. 그는 이 자리에서 미국이 터키의 공격을 제지하지 않으면 시리아 정부 및 러시아와 협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AP통신은 미국이 시리아 북부에 남아 있던 모든 영향력을 알아사드 대통령과 그의 최대 후원자인 러시아에 양도했으며 이로 인해 터키와 시리아 양국이 충돌하고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망령이 부활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미군의 대규모 철군도 현실화됐다. 앞서 미국은 철수 규모가 1000여명 중 50명 수준에 불과하다며 논란을 진화하는 데 나섰지만 이날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은 시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대부분을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키겠다고 시사했다. 외신들은 1000여명 전부 철수할 것이며 이미 이동을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현역 중령이자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참전용사인 공화당 애덤 킨징어(일리노이) 하원의원은 대통령의 철군 조치에 관해 “우리는 그들(쿠르드족)을 늑대들에게 맡긴 것”이라며 “이것이 전 세계 우리 동맹들에 보내는 메시지는 정말로 나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국경 남쪽 약 35㎞ 지점에 있는 난민촌 인근에서 격렬한 전투가 일어났고 이를 틈타 IS 포로들이 탈출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쿠르드 자치정부는 이날 성명을 통해 IS 지지자 785명이 경비병을 공격하고 탈출했다고 밝혔다. 북부 도시와 마을에선 적어도 13만명이 피란을 떠났다. 터키 측은 지난 9일 작전 시작 뒤 쿠르드 전사 440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며 SDF는 56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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