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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는 우리에게 무엇인가/참전·전후세대 좌담

    ◎“통일의지 가다듬는 「역사의 거울」삼아야”/「상잔의 비극」 잊으면 제2불행 초래/“젊은층 북한 몰라… 통일 접근 신중히”/깨어있는 젊은이 많아야 한반도 앞날 밝아 6·25동란 42돌을 맞았다.전쟁이 일어난뒤 강산이 네번이나 바뀌고 당시 태어난 사람들은 이제 장년이 되어 사회각분야에서 중견으로 활약하고 있다.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아직도 동족상잔의 비극이 생생한데 젊은 세대에게는 6·25가 한낱 역사속의 「사건」으로만 여겨져 가고 있다.인공기가 내걸리고 북한의 상투적인 구호가 그대로 외쳐지는 현실에서 우리는 6·25를 어떻게 해석해야하며 또 무엇을 배울것인가.전쟁을 겪은 세대와 전후세대가 한자리에 모여 6·25의 참뜻을 되새겨본다. ▷참석자◁ ▲배명오씨(63·전 국방대학원 교수) ▲김용승씨(53·월간 「한사랑」 주필) ▲박현정양(21·동덕여대 의상학과 3년) ▲배명오교수=전쟁의 비참한 날들이 아직 생생하고 6·25의 상처가 다 아물었다 할 수 없는데 벌써 42년이 흘러갔습니다.저는 서울대 3학년 재학중 6·25가나 바로 육군종합학교에 입학했다가 참전했습니다.숱한 격전을 치르며 살아남은게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해마다 6월만 되면 가슴이 답답합니다.6·25가 역사 속으로 묻혀가며 잊혀지는게 섭섭하고 우리 국민의 80%나 되는 전후세대들이 북한을 너무 모르는게 안타깝고 국민들의 성급한 통일욕구가 불만스럽기 때문입니다. ▲김용승주필=저는 국민학교 6학년때 전쟁을 맞았습니다.지긋지긋했던 피란살이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전후세대가 들으면 「또 고리타분한 이야기하는구나」하며 외면할지 모르지만 저는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자』는 것을 강조합니다.누가 누구를 위해 피를 흘린 것인가를 생각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개인이 잘 되려면 웃어른을 잘 모셔야 되듯 나라도 공세운 유공자들을 위해야 잘되는 것입니다.이 말은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로부터 대접받자는 뜻이 아닙니다. 요즈음은 축구만 잘해도 국가가 예우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참전세대는 어림잡아 1백59여만명 되는데 이 가운데 47만명이 생존해 있습니다.특히 전쟁부상자 1백10명은 보훈병원에서 40여년을 보내고 있습니다.이들의 영예를 선양해 줄 때 국민적 구심점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박현정양=저는 솔직히 이런 자리가 어색해요.부끄러운 말씀이지만 6·25에 대한 인식도 매우 적었습니다. 과연 6·25를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지 저는 당혹스럽습니다.대학생활을 하면서도 이데올로기의 홍수에 혼돈을 느끼고 있습니다.난롯불에 직접 손을 덴 사람과 그저 막연히 「아,뜨겁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과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국민학교때에는 학교에서 「상기하자,6·25」라며 표어를 만들고 포스터를 그리기만 했을 뿐입니다.그리고 대학에 들어와선 그런 막연한 개념들을 자연히 잊어버렸습니다. ▲배교수=지정학적으로 우리나라는 대륙과 해양세력의 중간에 위치,항상 그 영향을 받게 돼있습니다.우리가 한반도에서 생존하는 한 현재는 물론 2000년 이후에도 전쟁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항상 있습니다.이 때문에 우리는 6·25전쟁을 망각해선 안됩니다. 서울을 보십시오.「세계적 대도시」라고들 합니다만 그게 자랑거리가 안됩니다.많은 안보전문가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너무 밀집되어 있습니다.그리고 자본주의의 좋은 점보다도 취약한 요소들이 도처에 많습니다. 안보·국방은 더욱 투철히 해두어야 하는데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김주필=통계에서 보면 우리민족이 9백여차례나 외국으로부터 침략을 받았다고 합니다.여기에서 우리는 더이상 전쟁이 되풀이 되어선 안된다는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자신의 과거를 설명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또 과거를 되풀이할 수 밖에 없다』는 인도속담은 우리에게 던지는 경구입니다.우리민족의 역사의식은 유감스럽게도 매우 약합니다.전쟁이 끝난지 불과 39년입니다.그런데 현재 우리국민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원자폭탄이 떨어진 일본 히로시마 평화의 집앞에는 이런 비문이 있습니다. 「그들을 용서할 수는 있어도 잊을 수는 없다」무서운 경구입니다.평화를 지키는 힘도 중요하지만 역사를 망각하지 않는 국민의식이 더욱 중요합니다. ▲박양=두분께서 저희 젊은 세대에 대한 지적을 많이 해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자본주의의 영향탓인지 물질만능에 젖어 정신적인 것을 많이 잃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젊은이들은 깨어 있는 정신을 갖고 있다고 자부해요.각자 개인들이 작은 일부터 질서를 지키고 건전한 시민의식을 갖고 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교수=좋은 말입니다.민족혼을 갖고 있는 젊은 세대들도 많다고 봅니다.박수갈채를 보낼만한 훌륭한 젊은이들도 많아 한편으로는 마음든든합니다. 그들의 의식이 깨어 있는 한 우리민족의 통일에 대한 미래는 꽤 긍정적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통일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갖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국민들을 공연히 들뜨게 해서는 안되겠지요. 그러나 최근 우리의 통일정책은 너무 양보하는게 아닌가 하는 느낌과 너무 성급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주필=통일 문제를 논의할 때 우리 국민의 교육열이 높다는 사실도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높은 교육열을 잘만 활용하면 통일문제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접근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또 최근 우리 것을 찾자는 움직임이 각계에서 번지고 있는 데 이것도 제대로 방향을 잡아주면 민족통일문제와 접목을 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양=역사는 항상 되풀이된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6·25는 우리에게 역사적인 거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젊은 세대들이 불행했던 과거를 배우고 익혀서 다시는 민족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것 찾기,우리 물건쓰기운동도 한창인데 이럴때 애국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시키면서 국민의 정신력을 한데 모으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6·25가 우리에게 건전한 의식을 갖게 해주는 역사적 거울로 우리에게 다가설 수 있다고 봐요. ▲배교수=통일문제와 관련해 최근 우리 체제만을 고집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어 유감스럽습니다.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론을 제기하고픈 생각이에요.우리의 현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한반도에서의 통일은 대한민국 주도하에 이뤄져야 하며 체제와 이념은 자유민주주의에 바탕을 둬야 할 것입니다.▲김주필=우리에게 있어서 내부의 갈등이 더 큰 문제일 수 있습니다. 이 점 겸손하게 받아들이면서 내부의 갈등을 해소하고 순화시키는 노력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한 방법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배교수=젊은이들은 남북고위급 회담차 서울에 온 북한 대표단들의 미소와 유연한 자세를 보았을 것입니다.그러나 그 온화한 미소뒤에는 지난 5월22일 군사분계선을 넘어 비무장지대에 침투한 북한 무장침투조의 양면성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박양=동족상잔의 전쟁은 다시는 없어야 합니다.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힘의 축적이 필요하다고 보며 경제성장과 함께 정신적 가치관의 확립이야 말로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내가 겪은 「1950년여름」/윤남경 작가

    ◎인공기 보면 아직도 떨리는 이가슴… 『아직도 옛말 삼기는 멀다』 몇해전까지만 하더라도 6·25가 돌아오면 나는 이 말을 되뇌이곤 했었다. 6·25 당시 부산으로 피란을 간 뒤에도 『언제쯤 이런 생활을 옛날얘기삼아 우리 후손들에게 들려줄 수 있을까.마치 우리가 3·1운동 얘기나 임진왜란때 이야기들을 할머니에게 듣듯이 말이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우리 후배들은 공산당 얘기를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숫제 인민공화국 깃발을 흔들며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을 볼때 나는 꺄악하고 소리라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을뻔 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런 극단으로밖에 사물을 판단못하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40여년전 대학기숙사에서 한가롭게 노래를 하고 있는데 우리 귀에 난데없는 대포소리가 쿵쿵하고 울릴 때 우리는 그저 국군의 훈련소리라고만 믿고 있었다.그러나 며칠뒤 사감선생님이 속히 집으로 돌아가거나 지방 학생들은 연고자를 찾아가라고 다급하게 말할때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고 부산이 집이었던 J는 이미 길이 막혀 이리저리 걸식하다시피 살면서 그 시절을 지냈다.영문도 모르고 집에 가 있는 내 귀에 모교인 K여고에서 인민재판을 연 결과 사형선고가 내려진 몇사람 속에 내가 끼었다는 소문을 듣고는 즉시 이모님댁으로 몸을 피했다.그때 기독학생회장과 훈육부장을 겸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모양이다. 그러나 이모님댁에도 밤마다 내무서(경찰서)원들이 집을 뒤지며 젊은 남자는 인민군으로,젊은 여자는 의용군이나 간호원으로 끌고가는 바람에 거기도 못 있고는 땀띠의 투성이 얼굴로 골방에서 뛰쳐나와 집에 가서 식구들 얼굴을 한번만 보고 어디론가 가리라 하고 집에 가보니 모두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인민군이 후퇴하기 직전에 몇몇집식구들은 다 죽이고 가는데 우리집도 그중의 하나라는 것이다.그러니까 빨리 피하라고 누군가가 귀띔을 해주었다.그들은 종적인 명령계통은 잘 서 있지만 횡적인 연락에는 둔하니 장소만 바꾸면 된다는 것이다. 결국 큰고모님네와 작은아버지 식구들하고 한 20여명이 성북동에 있는 작은 고모님댁으로 갔으나 가자마자 누군가가 찔렀다면서 내무서원들이 들이닥쳐 아버지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며 『네가 상공장관인 아무개지?』하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할머니가 질겁을 하며 권총을 부여잡고 그애는 장관의 동생이라고 소리치시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한 일도 있었다. 결국 노인과 어린이만 빼놓고는 우리를 굴비엮듯이 엮어 끌고가니 그것을 본 동네사람들이 혀를 차며 『어제도 몇십명을 잡아다 뒷동산에서 죽이더니 오늘도 또 저렇게 죽이는구나』하는 말이 들렸다.어머니 친구분중 한사람은 잡혀 갈때 검정고무신과 흰고무신을 한짝씩 신고가면서 내가 죽거든 이 고무신을 보고 찾으라고 하며 끌려갔는데 정말 그들이 도망간 뒤 삼청동 산 웅덩이속에서 얼굴은 썩어 분간할 수가 없었으나 고무신때문에 찾은 일도 있었다. 우리를 끌고간 그들은 한사람 한사람씩 밤새도록 심문을 했으며 새총인지 무슨 총인지를 들고 공연히 사람들 얼굴에 겨냥하며 쏘는 시늉도 해보고 어디서 훔쳤는지 길다란 일본 사무라이 칼을 빼서 사람을 후려치는 흉내도 내보고 갖은 악독한 짓을 다하며 사람을 밤중까지 묶어 두었다.내게는 어디 다니느냐고 하기에 정직히 대학생이라고 말하니까 갑자기 표정이 잔인해지더니 『흥! 난 인민학교도 못나왔소.당신 나를 업신여기기요?』하고 대드는게 아닌가.업신여기다니 내 목숨을 쥐고있는 사람인데라고 생각했으며 『이승만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등 몇가지 이상한 질문을 던지더니 자기들도 사람 죽이는데 진력이 났는지 다음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그때 풀어주는 것은 정말 기적중의 기적이라고 모두 말했다.그대신 자기들을 욕하면 또다시 잡아들인다고 협박도 했다. 인민군이 내려오자 멋도 모르고 환영하며 협력했던 사람들도 뒤에 알고보니 대부분 쫓겨났거나 숙청당했다는 것이다.이유는 서울에서 이북으로 도망가지 않고 그대로 살고 있었으니 반동분자라는 것이다.결국 이용할대로 이용해먹은 뒤에는 발길로 걷어차버리는 것이 그들의 속성인 줄 알기 때문에 그들이 무슨 달콤한 말을 하더라도 속지 않으리라는 것이 그당시 우리들의 심정이었다. 그 더운 복중에도 솜이불을 뒤집어 쓰고 라디오를 들으면(들키면 사형이니까 목숨걸고 듣는 단파 라디오였다)미국의 소리방송에서 『여러분 오늘도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하고 나올때 정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오늘 하루도 죽지않고 살았구나하는 실감때문이었다. 쌀을 구경못하는 배고픔에다가 전쟁전에 먹었던 군것질거리 생각이 나서 참기 어려웠지만 그보다도 사람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 가장 괴로운 일이었다.그들은 자식이 부모를,이웃이 이웃을 모두 못믿고 감시하고 서로 내무서에 일러바치는 자들만이 영웅이라고 가르친 까닭에 정말 누구하고 마음놓고 이야기할수 없었다. 그러나 북쪽사람도 우리 부모요 형제들이다.우리는 하루속히 통일이 되어 사람을 속삭이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그러나 공산주의,김일성주의에 물들은 사람들하고는 아직도 마음놓고 흉금을 털어놓지 못한다는게 솔직한 내 심정인 것이다.
  • 외언내언

    민족분쟁지역들의 피란민과 체르노빌방사능 오염지대로부터의 이주희망자,동구로부터 철수한 군인과 경제개혁에 따른 실업자등을 모두 흡수해 극동으로 이주시키는것이 어떻겠는가.미국이 서부를 개척했듯이 러시아도 극동을 새로운 프론티어로 개척하자는 발상이다.구소련과학아카데미 연구원들의 제의였다.◆비참한 강제이주의 스탈린시대완 달리 자발적이고 꿈에 부푼 이주일 수 있다는 것.하바로브스크·블라디보스토크·아무르지방등을 거점으로 처음 5년간 4백만을,그리고 최종적으로 1천만을 이주시킨다는 것이다.한일등의 기술·자본·경험의 적극지원만 있으면 러시아전체 GNP의 20%를 생산할 수 있는 「극동판 러시아」의 탄생이 가능할 것이라는 주장.◆허황되게 들릴지도 모르나 21세기를 바라보면 그렇게만 생각할 수도 없을 것 같다.러시아의 극동은 이미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조짐이다.극동의 수도라할 수 있는 블라디보스토크가 새해 1일부터 40년만의 개방을 했다.모스크바보다 한일등 아시아 중시를 강조하는가하면 극동의 샌프란시스코를꿈꾼다며 의욕 만만이다.◆러시아의 이런 움직임은 21세기의 동해가 극동의 지중해가 되고 중심경제권으로 부상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인지 모른다.2월26일부터 두만강지역개발회의가 서울에서 열린다.남북한과 중국·러시아·몽골에 미일 등까지 참여하는 유엔중심의 지역개발회의다.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미리 생각하고 대응해 가야할 시점이다.◆러시아거주 한인들의 극동 한인자치주 움직임도 주목거리다.독립국가연합의 43만여 한인이 중심이 된 연해주 2만㎦의 고려인 자유경제특구설치 계획이 러시아의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고 한다.통일이 되거나 북한이 민주화공존에 호응하면 극동 연해주와 중국 연변,그리고 한반도의 한인은 거대한 극동 한인경제권을 이룰 수 있을것이다.「21세기 동해시대」의 주역이 되지말라는 법도 없다.
  • 대만/동북아 새 기류에 동승 포석/대북한 직교역 해금 안팎

    ◎한·중 급속접근에 대한 불만도 큰 몫/북한 외화 바닥나 실익확보엔 의문 대만정부가 북한과의 직교역 금지조치를 해제키로 결정한 것은 「더이상 국경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경제의 추세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긴 하지만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한반도주변의 국제정치환경이 이같은 결정을 앞당게 했다고도 볼수 있다. 대북한 직교역 허용에 대해 대만은 정치와는 별도로 이뤄지는 경제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대만은 중국의 입김으로 국제정치무대에서 한때 고립 일보직전까지 몰렸었다.그러나 최근 국제조류가 경제위주로 바뀌면서 다시 국제무대복귀를 위한 다각적 노력을 펴왔다.대만이 동구권국가들(88년)에 이어 소련·알바니아(90년)와의 직교역을 허용했고 이제 북한에까지 영역을 확대시킨게 이런 맥락에서이다. 따라서 북한과의 직교역을 허용으로 대만이 고립탈피란 측면에선 어느정도 목적을 이뤘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북한과의 직교역으로 대만경제가 실제로 얻을수 있는 이득이 클것 같지는 않다.이는 외화보유고가 거의 바닥난북한과의 사이에 구상무역외에는 교역이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경없는 경제활동」에 따른 결정일 뿐이라는 대만의 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론는 충분히 납득되지 않는 면도 있다.최근 한반도주변의 빠른 국제정치 변화는 대만에 이같은 변화의 흐름에 동승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위기감을 갖게 했다.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직교역금지조치를 해제했고 이는 대북한 정책변화의 시작일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북한의 핵사찰수락 여부를 둘러싸고 진통이 계속되곤 있지만 북한·일본간의 수교회담이 5차례나 열렸고 미국도 북경에서 북한과의 접촉을 유지하고 있으며 최근엔 6자회담추진등 새로운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더욱이 한국은 소련과의 국교수립에 이어 중국과의 관계정상화도 빠른 속도로 추진,동북아의 급속한 변화속에서 대만만 제외돼온 실정이다.이같은 상황에서 탈피,대만도 변화의 흐름을 타야겠다는 의지가 대중국 관계정상화 추진에 따른 한국에의 불만과 겹쳐 이같은 결정이 내려진 것으로 볼수 있다. 한편북한으로선 부족한 국내소비재 수요의 충당을 위해 교역국이 늘어나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최대의 지원국인 중국을 의식하지 않을수 없어 대만과의 관계개선엔 어려움이 있을것 같다.대만 역시 북한과의 외교관계 개선가능성은 부인하고 있다.그러나 대만과의 직교역은 폐쇄사회 북한에도 서방의 물결이 스며들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재인자
  • 미 싱글로브장군 회고록/위험한 임무:3

    ◎해저 케이블 극비 절단… 중공군 큰 타격/“중국본토 공격” 맥아더의 도전 실패로/중공군까지 밀리자 소,돌연 휴전제의 내가 도쿄의 극동사령부를 경유,함흥에 도착한 것은 50년 11월30일이었다.각부대에 특공중대의 배치및 활용등에 대해 협의하기 위해서였다.그러나 그 무렵에는 이미 중공군의 대공세가 여기저기서 확인되고 있었다. 서부전선에서는 8군단 소속 2사단과 1기갑사단의 한 연대가 청천강을 따라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받고 있었다.이른바 군우리(편집자주:평안남도 개천)전투로 알려진 청천강변의 전투에서 2사단은 엄청나게 우세한 중공군의 공세에 의해 참패했으며 뿔뿔이 흩어진 병력들은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얼어죽거나 포로로 잡혔다.이 때문에 다른 8군병력에게도 중공군 조우와 관계없이 후퇴명령이 내려졌다. ○산동∼대련 통신끊겨 동부전선의 중공군 공세 역시 야만적인 것이었지만 10군단의 대응은 다소 달랐다.압록강을 향해 전진배치돼있던 7사단은 지형관계로 소규모부대 단위로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었다. 10군단사령부는 함흥 교외의 옛 일본비행장 부근 눈덮인 벌판에 여러개의 텐트촌으로 형성돼 있었으며 포위공격을 받을 경우에는 인근의 어항인 흥남에서 철수토록 돼있었다.나는 한국에 있는 미군중에 중국의 전술에 대하여 잘아는 몇안되는 장교중의 하나였다.중공군은 미군이 보다 효율적으로 싸운다면 물리칠수 있을것 같았다.중공군은 한밤중에 소규모 단위로 이동하는데 이는 매복에 약하고 인해전술 공격은 위치선정이 잘된 포병의 공격에 취약했다. 나는 얼마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함흥을 떠나 몇시간 후에 서울에 도착해보니 서울은 어지러운 상황이었고 남쪽으로 향하는 길은 피란민들로 뒤덮여 있었다.서울은 불과 6개월만에 공산군에 의해 두번째 점령당하게 됐으며 유엔군사령부는 반공시민들에게 남쪽으로 피란할 것을 권장하고 있었다. 나는 그후 6개월동안 노스캐롤라이나의 베닝기지에서 특공중대 훈련에 또다시 열중하고 있었다.한국전쟁은 상호 처절한 시소게임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워커 8군사령관은 서울북부에서 교통사고로 죽고 서울은 51년1월4일 공산군에 의해 다시 점령된채 매슈 리지웨이장군이 후임 8군사령관을 맡고 있었다.유엔군의 전선은 서울남쪽에서 불과 60마일 떨어져 형성돼 있었다.유엔군은 1월말부터 다시 공세를 강화,3월달에 서울은 재탈환되었다. 그러나 이해 봄 더 큰 사태진전은 군사적인 것이 아니고 정치적인 것에서 발생했다.4월11일 트루먼대통령이 맥아더원수를 극동군사령관직에서 갑작스레 해임한 것이다.그 후임에는 리지웨이장군이 임명되었으며 8군사령관으로는 제임스 밴 플리트장군이 맡게 됐다.맥아더장군의 해임은 불행하게도 필연적인 것이었다.사실 그의 임무는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이 시작됐을때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당시 한국에서의 미국정책의 목표는 군사적 대립상태를 안정시키고 남한을 재건하는데 있었다.군인의 임무는 그가 신병이건 맥아더와 같은 노련한 5성장군이건 본국정부의 명령은 어리석다 생각되더라도 합법적인 것은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맥아더장군은 그같은 명령을 묵살하고 의회와의 연계를 통해 지휘계통도 무시했던 것이다.그의 목표는 중공을 무찌르는 것이었고 그같은 목적 수행을 위해 그는 중국본토에의 공습과 지상공격을 요청했다.그는 또 압록강을 잇는 다리들과 남만주의 중국 비행장들을 모두 폭파할 것을 주장했다.그러나 맥아더장군의 이같은 변칙적 작전주장은 그가 이 전쟁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입지를 높이는데 더 목적이 있는듯이 보였다.그는 결국 도박을 했고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그해 여름부터 리지웨이와 밴 플리트의 지휘를 받는 연합군은 중공군에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 그들을 38선 이북으로 다시 몰아내고 있었으며 그렇게 되자 소련은 마침내 유엔에 휴전을 제의하게 됐다.이에따라 38선 근처의 도시인 개성에서 종전을 위한 예비회담이 개최되게 됐다. 워싱턴에 있는 CIA본부로 불려간 것은 51년 12월이었다. ○북 청년 게릴라 자원 나를 만난 빌 디퓨이대령과 리처드 스틸웰대령은 미국정부는 특히 한국전에 참전하고 있는 중공군의 통신망을 교란시키는등 중국본토에서의 게릴라활동을 지원함으로써 중국 공산당정권에 압력을 넣기로 결정했다고 직설적으로 말했다.그들은 이 작전은 일본에 신설된 지역본부에서 맡게되며 수송기편대와 연안상륙정부대의 지원을 받게된다고 설명하면서 육군에서는 그같은 임무를 맡아줄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내가 한국에 다시 돌아간 것은 52년 새해였다.한국전은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가운데 교착상태에 빠져있었다.중공군 교란작전의 이름은 JACK(Joint Advisory Commission Korea)이라고 명명됐고 서울에 새본부를 만들었으며 동래에 있는 벤 반더부르트대령의 지휘를 받았다. 우리는 우선 북한 서부해안의 여러개 섬에 비밀 정보망을 구축했으며 원산 앞바다의 여도를 장악,전초기지로 삼았다.이같은 작전에는 중무장된 쾌속함이 동원됐다.우리의 주된 임무는 한국인 정보원들을 공중 또는 해안으로 침투시켜 군사정보를 빼내오는 일이었다.이 일에는 북한으로부터 피란온 많은 젊은이들이 용감하게 자원하고 나서 사람을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미 목표는 남한 재건 우리가 해낸 한국에서의 가장 큰 작전은 황해바다 한가운데를 지나 중국본토산동반도와 만주 대연을 잇는 해군 케이블선을 절단한 것이었다.그 케이블선은 한국에 침공중인 중공군사령부와 북경을 연결하는 라인으로 중공군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그후 중공군사령부의 북경과의 연락은 무선전화를 이용하게 됐는데 대부분이 우리 측에 도청됨으로써 휴전협상과정에서 우리측은 중공군의 정보에 대해서는 항상 앞설 수 있었다. 우리의 주된 해상공격은 주로 동해의 여도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그곳에서는 육상이나 해상침투는 물론 원산항에 입항하는 모든 선박까지 체크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적의 후방교란과 함께 유엔군측의 전투수행에 큰 도움을 주었다.
  • “선행 37년”… 「오장동 냉면할머니」 별세

    ◎50년12월 월남… 실향민의 지주로 한몫/어렵게 모은 재산 장학사업등에 “선뜻” ○…「오장동 냉면 할머니」 한혜선씨(76)가 고혈압·당뇨등 숙환으로 2일 상오 별세했다. 한씨는 1·4후퇴 직전인 지난 50년 12월 고향인 함경남도 흥남에서 남편 문존덕씨(73년 작고)와 함께 월남,경남 거제에서 피란생활을 한뒤 54년 서울로 올라와 냉면장사를 시작해 함흥냉면의 독특한 맛을 선보였다. 한씨는 이듬해인 55년 중구 오장동 지금의 자리로 옮긴뒤 37년간 이북 사람들의 향수를 달래주었고 이남 사람들에게는 별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한씨는 돈과 명성을 얻기 시작하면서 틈만나면 양로원·고아원과 군부대를 방문하고 불우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주는등 선행을 베풀었지만 주위사람들은 물론 가족들조차 눈치채지 못할만큼 남모르게 해왔다. 한씨는 20년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문성준씨(44)등 2남2녀와 함께 냉면가게를 꾸려오면서 흥남시 장학회이사를 맡는등 실향민들의 정신적 지주로서도 한몫 해왔다. 한편 한씨는 박준병민자당의원이 육군 제3하사관학교장으로 재직할때 학교를 방문,후보생에게 냉면을 한그릇씩 돌리는등 인연을 맺기도해 박의원이 중구 신당2동 상가에 직접 조문을 하기도 했다. 발인은 4일 상오 장지는 경기도 모과면 서경리 가족묘지이다.
  • 노 대통령 후버연구소 연설(요지)

    ◎한·미,새로운 세계질서를 위해 공동노력/한국은 민주주의 향해 흔들림 없이 전진 오늘 미국과 세계를 이끌어온 수많은 석학과 지도자를 배출한 스탠퍼드대학을 방문하고 세계적인 권위와 명성에 빛나는 이곳 후버연구소에서 미국의 각계 지도자와 친구 여러분을 만나게 된 것은 큰 기쁨입니다. 21세기를 앞두고 인류는 지금 새로운 혁명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립과 유혈의 혁명이 아니라 평화를 가져오는 혁명입니다. 동중부유럽으로부터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행복의 희생을 강요해온 체제는 잇따라 붕괴되었습니다. 자유와 행복을 향한 인간의 열망은 한 국가 안에서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역사를 바꾸는 거대한 흐름이 되고 있습니다. 초강대국들은 보다 나은 미래를 창조하려는 노력으로 대결로부터 협력으로 그 관계를 전환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미래는 인류가 그 속에 항구적인 평화를 누리며 자유롭고 행복스럽게 살 새로운 질서를 어떻게 설계하고 어떤 모습으로 그것을 구체화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세기는 태평양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많은 석학들의 예언이 있어왔습니다. 이를 상기할 필요도 없이 미래의 세계는 새로운 태평양에 의해 그 운명이 좌우될 것입니다.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각료회의(APEC)에 참가하고 있는 12개 국가에서만 유럽공동체의 2배가 넘는 세계 총생산의 50%가 창출되고 세계 교역의 40%가 이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시아태평양지역은 전후 이 세계의 발전을 이끄는 새로운 축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최근 이 지역 국가간에는 냉전시대의 관계를 재조정하는 활발한 움직임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강택민 총서기의 모스크바방문이 말하는 중소 관계,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일본방문이 말하는 일소 관계와 특히 북방정책의 성공에 따른 한소 관계의 진전 등이 그것입니다. 북한도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과 수교교섭을 벌이고 있으며 그들의 완강한 태도를 전환하여 우리와 함께 유엔에 가입할 의사를 밝혔습니다. 소련·중국은 물론 몽고·베트남·북한에 이르는 사회주의경제국가들은 번영을 구가하는 태평양국가와의 교역,경제협력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들 국가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시장경제국가와의 협력체제 안에 참여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기의 세계를 눈앞에 보며 나는 태평양시대를 향한 협력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큰 방향으로 진전되어나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아시아태평양지역에도 냉전체제의 대결을 종식하고 안정의 확고한 기틀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 지역 국가들은 아시아태평양의 안정을 위해서는 미국의 주도적인 역할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아시아태평양국가로서 그 역할을 감소할 경우 그 공백은 불안으로 메워질 것이며 그것은 또다른 재앙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의 긴장은 이 지역의 안정을 저해하는 핵심적 요인이 되어왔습니다. 아시아태평양의 협력증진을 위해서도 한반도의 냉전종식이 가속화되어야 합니다. 둘째 아시아태평양의 번영이 개방을 통한 교역과 경제협력의 증대를 통해 지속되도록 해야 합니다. 시장을 제공하는 것이 미국이나 특정한 나라만의 부담이 되어서는 안 되며 모든 역내국가들이 그들의 발전단계와 경제력에 상응하여 서로의 시장을 개방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민족과 문화는 물론 경제구조와 발전단계가 서로 다른 이 지역 국가의 다양성을 조화하고 융합하는 협력을 촉진해나가야 합니다. 나는 이를 위해 모든 나라가 합치된 노력을 기울인다면 이 지역 경제의 활력과 협력증대의 추세에 비추어 아시아태평양지역은 남북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세계의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넷째 이제는 아시아태평양의 공동체의식을 바탕으로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협력의 틀을 진전시켜나가야 합니다. 그들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을 포괄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지역을 분할하는 소지역권의 형성은 보호무역 추세를 강화하거나 대립과 마찰의 소지를 넓힐 우려가 크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맥락에서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각료회의(APEC)가 이 지역에서 공동번영을 실현하는 훌륭한 모체로 발전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강대국도,번영을 누리는 선진국도아닌 한국이 이 새로운 시대를 이루기 위해 어떤 기여를 해왔으며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나갈지… 우리는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실천해나가고 있습니다. 나는 한국이 겪어온 독특한 역사적 경험과 그 속에서 이룬 성취가 한국으로 하여금 변화하는 세계에서 참으로 의미있는 역할을 할 수 있게 할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남북문제에 있어 한국은 최빈국의 단계에서 불과 한 세대의 기간에 역동적인 신흥산업국가를 이룩함으로써 가난한 개도국도 노력하면 선진국 진입이 가능하다는 모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전후 부흥을 이룩한 독일·일본과 달리 전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으며 그나마 모든 것은 한국전쟁의 불길 속에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세계가 서울올림픽을 통해 본 것은 전쟁이 몰고온 허기진 어린이와 피란민의 긴 행렬이 아니라 활력에 넘친 새로운 나라였습니다. 우리들의 성취는 더욱이 나라의 분단과 그로 인한 과중한 국방비의 부담 위에서 이룬 것입니다. 한국은 이러한 소중한 경험을 결코 우리의 것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우리의 이웃과 모든 개도국과 폭넓게 나누어 공동번영에 기여할 것입니다. 우리의 정치·경제적 역량에 대한 자신감에 바탕한 북방정책은 한국 외교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을 뿐 아니라 남북한 관계의 개선과 동북아시아의 긴장완화를 촉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는 9월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이 한반도의 오랜 교착상태를 타개하는 긍정적 시발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북방정책으로 태평양과 북방대륙을 잇는 길은 더욱 넓게 열렸으며 이를 통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신선한 숨결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나의 6·29선언 이래 한국은 지난 4년간 인권과 자유언론·자유선거와 삼권분립,다원적 민주주의의 이 모든 원칙을 실현하는 민주화를 급속히 진전시켜왔습니다. 이제 굳건한 국민적 합의의 바탕 위에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올해 두 차례 선거를 통해 지방자치가 실시됨으로써 민주주의가 온전한 제도로 이루어졌습니다. 전후 독립을 쟁취한 나라로서 한국과 같이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는 이지상에 드물 것입니다. 한국의 오늘이 있기까지 언제나 미국이 곁에 있었다는 것을 한국국민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두 나라는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하며 서로에 도움을 주는 긴밀한 동반자가 되고 있습니다. 두 나라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위해 공동의 노력을 경주해나갈 것입니다. 우리 두 나라의 동반자관계는 평화로운 하나의 세계와 번영하는 태평양시대를 이루어나가는 데 중추적인 힘이 될 것입니다. 세계는 자유 속에 새로 탄생하고 있습니다. 공동의 이상을 나누는 우리 두 나라는 이제까지 살아온 세계로부터 우리 모두가 소망하는 세계로 함께 전진할 것입니다.
  • 당시 중대장 이대용씨의 회고:「내가 겪은 6·25」 하

    ◎혹한속 중공군 6개 사단의 포위 돌파/평양서 재편성… 「인해전술」과 싸우며 남하/51년 7월 대대장으로… 금성·금화서 공방전/저격능선 「고지쟁탈」 전투중 미 유학 명령 1950년 10월28일 하오 6시45분.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여서 벌써 어둠이 깔렸다. 제7연대 제1중대는 5대의 트럭에 분승,주둔지인 압록강변을 떠나 초산읍으로 철수했다. 다음날인 29일 새벽 5시쯤 제1대대 수색대를 태운 군용차 한 대가 초산읍에서 다시 남쪽을 향하여 떠났다. 제1대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하여 북한공산군의 출몰이 염려되는 구용동 남쪽 고개를 수색·점령·확보하기 위해 먼저 떠난 것이다. 그날 아침 6시30분쯤 제7연대 제1대대는 군용트럭을 타고 초산읍을 출발,남쪽으로 내려가 고장에서 연대본부와 합류했다. 이때 중공군은 고장 남쪽에 있는 풍장 일대에서 아군이 남하하는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제2대대와 제3대대는 이들 중공군을 일제히 공격,돌파작전을 개시했다. 우리 공군 전폭기들이 중공군 진지를 강타하면서 제7연대의 돌파작전을 근접지원해주었다. 중공군은 남으로 좀 밀려나는 듯했으나 그들의 두꺼운 포위망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달이 없는 어두운 밤이 됐다. 지형은 폭이 50∼1백50m 가량 되는 좁은 계곡이 길게 남북으로 놓여 있고 계곡 양쪽의 산줄기들은 가파르고 높았다. 이날 밤 12시 정각,중공군은 야간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의 야간전투는 혀를 찰 만큼 아주 능숙했다. 얼마 안가서 제7연대의 전방부대가 무너지고,전방에서 흩어진 연대병력은 하나밖에 없는 자동차도로를 따라 북쪽을 향하여 달아나고 있었다. 후방으로 멀리 떨어져서 재편성을 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방에서는 이미 다른 중공군 부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숨 돌릴 새없이 달려들었다. 재차 흩어져서 다시 더 먼 후방으로 달려가 보아도 그곳에서도 전황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우리 제7연대는 중공군 제40군예하 1개 사단과의 첫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다. 중공군은 우선 병력면에서도 우리 제7연대의 약 3배나 됐다. 군용트럭 수백 대와 사단포병 야포 6문,대전차포,기타보급품을 버린 채 제7연대는 낭림산맥의 지맥인 유령산맥 깊은 산중으로 이리저리 흩어져 들어갔다. 중공군은 이 분산병력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악착같이 우리 부대를 추격하며 남쪽으로 통하는 길목을 모두 차단하고 있었다. 중공군과의 싸움에 들어가기 전 필자의 지휘하에 있던 병력은 제1중대원 약 1백60명,배속된 중기관총반원 약 10명,귀순 동화된 북한공산군 포로 남녀 약 25명,간호학생 2명,한국청년단원 약 10명 등 모두 2백명이 넘었으며 이 중 여자 등 비무장인원을 제외한 전투가능 인원은 약 1백85명 정도였다. 필자는 이 전투가능병력 중에서 약 60명을 잃은 채 잔여인원을 이끌고 유령산맥으로 들어갔다. 높은 산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그곳은 벌써 깊은 겨울이어서 뜯어 먹을 풀조차 없었다. 중공군을 만나면 싸우기도 하고 피해 달아나기도 하면서 남으로 남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포위망을 계속해서 뚫어봐도 눈에 보이는 것은 중공군뿐이고 아군은 도대체 전혀 보이질 않았다. 중공군과 만나 교전이 이루어질때마다 아군의 병력은 자꾸 줄어만 들었다. 중공군 6개 사단의 포위망을 뚫는 데서 우리 제7연대의 인명피해는 엄청났다. 당시 제7연대에는 8명의 영관급 장교가 있었는데 이 중 6명의 손실이 있었다. 부연대장 최영수 중령,제2대대장 김종수 중령,제1대대 부대대장 조현묵 소령,연대정보주임 김재강 소령 등 4명은 포로가 됐고 제3대대장 조한섭 소령은 전사했으며 연대작전주임 조윤재 소령은 무참히 학살당했다. 포위망을 뚫고 용케도 살아나온 사람은 연대장 임부택 대령과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 두 사람 뿐이었다. 그러나 김용배 중령은 그후 전사했다. 더욱이 장병들의 손실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내가 덕천지방 동쪽 송정리에서 대동강을 건너 남중리의 적군과 최후의 교전을 갖고 포위망을 뚫은 뒤 제6사단 사령부에 도착,사단장 장도영 준장에게 신고를 한 것은 그해 11월9일 오후 3시경이었다. 나는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나와 사단장에게 첫번째로 신고식을 갖는 장교가 된 것이다. 군악이 울려 퍼졌다. 군인 20명을 3렬 횡대로 하여 세워놓고 마지막에 서울적십자병원 간호학생 2명을 세웠다. 중대장인 나는 3렬횡대의 6보 앞 중앙에 섰다. 나는 사단장에게 다음과 같이 신고했다. 『경례! 바로! 제7연대 제1중대장,이대용 대위는 적포위망을 돌파하고 사병 20명,민간인 간호학생 2명을 지휘하여 1950년 11월9일 사단사령부에 도착했기에 이에 삼가 신고합니다. 경례! 바로!』 사단장의 위로와 격려사가 있었다. 군예대 여자 가수가 나의 목에 하늘색 머플러를 걸어주었다. 사단사령부에서 할당해주는 민중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서울적십자병원 간호학생 박태숙·정정훈양에게 하사관 1명을 딸려 서울로 떠나 보냈다. 깨끗이 보호하고 온 처녀들이 도중에서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든든한 하사관을 경호원으로 배정,서울까지 가게 한 것이다. 11월22일까지 제7연대장 임부택 대령과 김용배 중령이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왔고 후방에서 신병들과 육군종합학교 출신 신임 소위들이 보충돼 제7연대는 11월25일 재편성을 했다. 병력숫자로는 제7연대가 제대로 모습을 갖춘 셈이었다. 재편성이 끝나기가 바쁘게 제7연대는 덕천 남쪽 북창으로 이동하여 중공군과 대결하게 됐다. 북창과 가창 사이에 있는 미럭고개에서 큰 접전이 벌어졌으나 신병들인 아군이 중공군의 공격을 견뎌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중공군의 진격은 계속되었고 우리 제7연대는 평양 상원 서흥 시변리 삭녕 전곡을 거쳐 다시 38선에 배치되었다. 북한공산군이 남침한 1950년도 저물어 갔다. 그해 12월31일 밤이었다.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린 제7연대 제1중대는 동두천 의정부를 거쳐 서울 북방 창동에 배치되었다. 해를 넘겨 1951년 1월6일 경기도 광주를 거쳐 백암리로 가는 도중에 나는 제1대대 부대대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대대장 대리로 제1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영하의 매서운 바람이 살을 에듯이 불어댔다. 1·4후퇴라고 일컬어지는 설상의 피란민대열이 남으로 남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중공군도 각종 보급품들이 달리고 장티푸스까지 만연하자 지칠 대로 지친 모양이다. 중공군은 양지리 북쪽에서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제7연대는 그동안 중공군과 싸우면서도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처음엔 대단한 적군으로 생각했으나 나중에 알고보니 그들도 별것이 아니었다. 절대로 불패의 군대가 아니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그들과 싸워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약 2개월간 제1대대를 지휘하고 나서 대대장이 새로 부임함에 따라 부대대장 직책을 수행하게 되었다. 용문산지구 전투,춘천지구 전투,구만리지구 전투,풍산리지구 전투,백암리지구 전투를 끝으로 나는 그해 7월9일 제7연대를 떠나 제2사단 제32연대 제1대대장으로 부임했다. 같은 해 10월27일에는 제32연대 제3대대장으로 보직이 변경됐다. 금화지구 파조봉­이실골 전투,금성지구 전투를 하면서 제32연대 제3대대는 금성 바로 앞산인 424고지까지 1개 소대를 진출시켰다. 여기서 중공군과 매일같이 폭격전과 수색전으로 투덕거리며 한겨울을 보냈다. 미군과 교대하고 금화 쪽으로 빠져나왔다. 제32연대는 제3대대는 금화 동북방에 있는 저격능선에 배치됐고 한국군에도 임시계급제도가 도입되어 일선 보병대대장들에게는 1952년 3월부터 모두 육군중령 계급이 부여됐다. 저격능선은 지형상 항상 긴장상태에서 적과 공방임무를 수행해야 했달. 그러던 중 나는 미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2년여의 전진을 씻고 부산항에서 미국행 군용수송선을 탄 것이 1952년 9월2일이다. 이때의 군복은 카키색 군복이고 모자도 카키색 군모였다. 6·25가 일어났을 때,내가 춘천도서관으로 가던 때의 군복도 카키색 군복,모자도 카키색 군모였다. 카키색 군복으로 맞이한 나의 6·25는 카키색 군복으로 막을 내렸다.
  • 당시 중대장 이대용씨의 회고:「내가 겪은 6·25」중

    ◎낙동강서 대반격… 두달 뒤 압록강 진격/“남북통일 축원” 강물 담은 수통 이 대통령에/국경 도착 이틀 만에 “중공군 침입”… 후퇴 명령 1950년 6월28일. 북한 공산군이 남침을 개시한 지 불과 4일 만에 수도 서울은 적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공산군은 빠른 속도로 남으로 물밀듯이 쳐들어왔다. 무방비상태의 국군은 후퇴를 거듭해야만 했다. 서부전선의 아군 방어선을 조정하기 위해 중부전선의 제6사단을 남으로 철수시키는 육군본부의 작전명령은 계속해서 하달되고 있었다. 내가 지휘하는 제7연대 제1중대는 홍천의 삼마치고개,원주의 신림고개에서 남진하는 북한 공산군을 맞아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의 장갑차 5대를 파괴하거나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저들의 뛰어난 화력에는 어쩔 수 없었기에 결국 7월4일에는 전국과 멀리 떨어진 충주로 이동해야 했다. 우리가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피란민들의 행렬은 홍수를 이루며 지나갔다. 이를 바라보고 있던 제7연대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이렇게 탄식했다. 『군인된 몸으로 송구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군. 우리 연대 작전과에 있던 여자 타자수가 조금 전에 이 앞을 지나갔어. 춘천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모양이야. 그래도 짐보따리를 짊어지고 있어 정말 피란민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군. 그저 죄송할 따름이야』 그의 얼굴 표정은 군인의 국가에 대한 책임,국민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충주농업학교 교실에서 하룻밤을 지낸 나는 7월5일 아침 일찍이 제1대대 제1중대장으로 부대를 지휘하여 음성으로 이동했다. 기름고개를 향하여 북쪽으로 전진하던 중 마침 북쪽에서 내려오던 북한 공산군과 조우하게 됐다. 전투가 시작됐다. 아군의 사기는 그런대로 중천하여 그들을 격파했다. 기름고개를 넘어서자 적군이 줄지어 다가왔다. 우리 부대는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해 적 대부대를 깨끗이 섬멸하고 계속 전진했다. 이때 나는 적탄에 맞고 쓰러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 몸 아홉군데에 총알이 박혔다. 중상중에 중상을 입은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살아났나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헐렁한 팬츠 하나만 걸친 채 담요에 둘둘 싸여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워낙 부상이 심해 결국 부산에 있는 제5육군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 4층에 있는 중환자실에 눕혀졌다. 대소변도 받아내는 형편이었다. 의정부가 고향이라는 간호장교 최 소위가 이를 맡아 해냈다. 입원 3일 만에 군의관 이경룡 대위의 집도로 수술이 시작됐다. 내 몸에 박힌 직사 포탄조각을 여러 개 빼냈다. 수술 후의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했다. 그때마다 간호장교 최 소위는 지극한 정성으로 나를 돌봤다. 고맙기 그지없었다. 나이팅게일의 정신이 아무리 투철하다 해도 최 소위의 헌신은 참으로 감사했다. 먼훗날 그녀가 수녀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까닭없이 그리고 한없이 가슴에 와닿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내가 제5육군병원을 떠난 것은 입원한 지 달포가 더 지난 8월24일이었다. 다시 나는 제7연대 제1대대 후방지휘소로 갔다. 8월26일 저녁 제6사단 지휘소에는 적의 박격포탄이 비오듯 날아왔다. 신령역 부근에도 적의 박격포탄이 무수히 떨어졌다. 북한 공산당이 낙동강 교두보의 일각을 뚫고 화산 일대를 점령한 뒤 퍼붓는 포탄들이었다. 제6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제7연대 제1대대를 연대에서 빼내 사단직할로 하여 화산의 적을 공격케 했다. 이때 나는 제7연대 제1중대장으로 복귀하여 화산지구 탈환임무를 맡았다. 제1중대장으로 복귀해보니 내가 병원에 있었던 50여 일 동안에 중대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내가 부상을 당할 때 함께 적군과 싸웠던 소대장들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제1소대장 한도선 중위는 내가 제1중대를 떠나자 나의 후임이 되어 중대를 지휘했으나 문경새재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후임으로 제2소대장 강구석 중위가 중대장이 되었으나 그는 곧 부상을 입어 후방으로 빠져나갔고 다시 그 후임으로 제3소대장 손종구 소위는 낙동강전투에서 가슴에 적탄을 맞고 후송 도중 숨을 거뒀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제1중대에 장교가 한 명도 없어서 중대 선임하사관 이한직 상사가 중대장대행이 되어 부대를 지휘,전투를 했으나 또한 낙동강전투에서 전사했다. 다시 그 후임으로 제1중대장에 부임한 도진환소위는 내가 중대장으로 복귀하면서 제1소대장이 되었으나 며칠 후 화산전투에서 전사했다. 2개월도 채 안 되는 기간중에 제7연대 제1중대는 4명의 중대장이 전사하고 1명의 중대장이 중상을 입는 손실을 가져왔다. 세계 전쟁 역사상 불과 2개월 동안에 4명의 중대장이 전사한 예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1개 중대에서 중대장들의 소모가 이렇게 격심했으나 사병들의 소모는 말할 수 없이 대단했다. 이는 또 한국전쟁 기간중 가장 치열했던 격전기간은 1950년 6월부터 그해 9월 중순까지의 기간이었음을 입증해주는 전사자 통계숫자의 일부이기도 하다. 화산 옛 성터 일대에서 숨박히는 격전 끝에 우리는 북진을 시작했다. 문경 원주 홍천 춘천 화천 김화 평강 복계 세포 회양 원산 양덕 성천 순천 개천 희천 회목동 고장 초산을 거쳐 압록강변 신도장마을에 우리 제1중대를 선두로 제7연대 제1대대가 도착한 것은 1950년 10월26일 하오 2시15분이었다. 만주에 연결된 뗏목다리 위에는 수백 명의 피란민들이 가득히 차 있었다. 이미 만주로 건너간 수백 명은 줄지어 중국 마을 통천구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초산읍에 본부를 두고 재편을 시도하던 북한 공산군 제8사단은 사단장 오백룡 지휘하에 주로 위원읍 방향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모두 만주땅을 바라보면서 감개무량해했다.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의 지시로 나는 남북통일을 축원하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압록강 물을 수통에 떴다. 그리고 제1대대에 배속되어 있는 57㎜ 대전차포 철갑탄으로 만주와 연결되어 있는 뗏목다리를 끊어버렸다. 강물에 군화를 적시고 손도 씻다가 하오 4시경 압록강에 먼저 도착한 제1중대를 제외하고 제1대대 전병력은 약 10리 서남쪽에 있는 초산읍으로 내려갔다. 나는 이장원 소위가 지휘하는 제1소대를 신도장분주소(경찰지서) 일대에 배치하여 위원읍으로 통하는 자동차도로를 차단한 뒤 만주로 건너가는 뗏목다리를 화력으로 엄호케 했다. 김덕출 소위가 지휘하는 제2소대는 제1소대 좌일선에 연결하여 강물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며 강기슭에 길게 배치하고 박상호 상사가 지휘하는 제3소대는 제2소대에 연결되어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며 강 기슭에 배치했다. 중대 선임장교 직책을 겸하고 있는 서근석 소위의 화기소대 본부와 제1중대 본부는 제2소대지역내에 위치시켰다. 결국 제7연대 제1중대는 강건너 중국대륙을 바라보며 약 1천6백m에 달하는 거리에 늘어서서 국경 경비임무에 들어갔다. 1910년 8월29일. 격변하는 세계정세에는 눈을 감은 채 나라 안에서만 우물 안 개구리처럼 권력싸움에 눈이 멀던 우리 조상들. 병들고 무력해질 대로 무력해진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이 왜놈들에게 나라를 뺏기고 국경 경비의 권리를 그들에게 넘겨준 35년간,그 후 남북한 화합을 못 하고 이념의 갈등을 겪으면서 국토가 양단되어 5년,통틀어 40년의 세월을 한을 안은 채 고통 속에서 지내야만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통의 족쇄가 풀리는 첫날이다. 남북을 통일한 배달의 남아들이 압록강 국경선에서 타국땅을 바라보며 보초를 서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가슴은 감격에 벅찰 수밖에 없었다. 고요한 국경선에서 또 하룻밤을 자고 나니10월28일이 되었다. 이날 하오 5시경 초산읍에 있는 제1대대 본부로부터 제1중대에 다음과 같은 청천벽력과 같은 작전명령이 하달됐다. 『온정일대에서 제2연대가 중국군에게 패하여 후퇴중에 있다. 이를 구출하기 위하여 제1대대는 연대의 일부로서 온정으로 남하한다. 제1중대는 10월28일 하오 7시 초산읍에 집결하라』
  • 외언내언

    일본의 도쿄에 처음 간 한국사람으로 좀 놀라는 일이 있다. 시가지를 까미귀가 날아다니며 깍깍거린다는 것. 이것 저것 잘 주워 먹어선지 살도 쪘다. 초대왕 진무(신무)가 구마노(태야)에서 야마토(대화)로 나오는 길안동을 했다는 것이 까마귀. 산신으로 모시는 풍습도 있고 신사로 모시는 신사(진자)도 적지 않다. ◆그건 그 나라의 일. 한국의 경우 까마귀는 흉조로 치면서 싫어한다. 그러나 사촌뻘인 까치는 좋아하는 편. 그래서 「까치의 알림」인 작보란 말은 길조의 뜻으로 쓰인다. 옛사람들은 자기집 앞 나무에 까치가 둥지를 틀면 벼슬이 오른다고 생각했고 그랬다는 기록을 남기고도 있다. 또 까치가 울면 외지에 나간 자식의 소식이라도 오나보다 기다리기까지 했고. 실패한 것 같지만 서울시가 그 옥상에 까치를 키워보았던 것도 길조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까치이므로 익조로 알려져 온 것이 통상적인 생각. 한 백과사전에도 그렇게 씌어 있다. 『… 쥐 따위 작은 동물이나 곤충과 나무열매·국물·감자·고구마 따위를 먹는다. 임목의 해충을 잡아먹는 익조이기도 하다』(조류학자 원병오 교수 집필). 북한의 「과학,백과사전 출판사」가 펴낸 「백과전서」(권5) 또한 마찬가지. 『… 아름답고 리로운 새이므로 많이 퍼지도록 보호한다』고 적어놓고 있다. ◆이 북한의 백과사전은 한시바삐 개정판을 내야 하게 되었다. 「위대한 령도자 김일성 수령」이 까치를 해로운 새라고 교시하여 지금 그 박멸운동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지상보도가 되었지만 지난달 31일 밤 KBS텔레비전의 「남북의 창」에도 그 화면이 비쳤다. 「게걸스러운」 까치는 다른 익도를 해치고 곡식에 피해를 주므로 소탕해야 한다는 것. 김주석은 조류학자이기도 한 모양이다. ◆둥지를 부수고 알을 깨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으니 바야흐로 북한 까치의 수난시대. 1.4후퇴 때의 피란민 대열 같은 『가자,남으로!』의 까치비행이 이어질지 모르겠다. 정말로 까치는 박멸해야 할 만큼 얄미운 해조인 것인지.
  • 유엔 구호대,이라크 첫 도착/쿠르드 난민촌 운영권 인수 착수

    ◎이란 피신 난민은 대규모 귀국 【실로피(터키) AFP 연합】 의약품과 식량을 실은 유엔 호송대가 30일 이라크의 자코지역에 도착함으로써 유엔이 처음으로 이라크 북부지역에 주둔하게 될 것이라고 다국적군 관리들이 29일 밝혔다. 관리들은 이 호송 트럭들이 바그다드로부터 도착할 예정이며 터키를 통해 도착할 2차 구호단과 합류하게 될 것이라고 밝히면서 이는 걸프종식 이후 유엔이 이라크에 최초로 기지를 설치하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유엔이 쿠르드족 난민촌 운영을 넘겨받기 위한 첫 조치이다. 유엔 요원들은 이에 앞서 지난달 반후세인 소요가 실패한 이후 이라크에서 도망나온 70만∼80만명의 쿠르드족들이 머물고 있는 이라크­터키 국경의 터키 쪽 영토에서 이미 활동을 벌여왔다. 한편 구호작전의 최고사령관인 미국의 존 살리카슈 빌리 장군은 지난 28일 다국적군의 안전지대 확장을 승인했다고 영국군 대변인이 밝혔다. 【테헤란 AFP 연합 특약】 이란에 대피했던 이라크의 쿠르드족 난민들이 대규모로 귀국하기 시작했다고 이란 관리들이 29일 말했다. 『하루에 1만 내지 1만5천명의 쿠르드족 난민들이 매일 이란북부 피란샤르에 있는 국경초소를 통해 귀국하고 있다』고 이 지역 책임자인 모하마르 지아이가 말했다.
  • EC,후세인 퇴진 촉구/정상회담/「쿠르드족 안전지대」 설치 제의

    【룩셈부르크 로이터 AP 연합】 유럽공동체(EC)는 8일 특별정상회담을 통해 쿠르드족 난민을 위해 이라크내에 유엔이 관장하는 특별 「안전지대」를 설치할 것과 사담 후세인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했다. EC 정상들은 이날 회담에서 또 2백여 만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쿠르드족 난민을 위해 1억8천만달러 가량의 긴급 지원을 제공키로 합의하는 한편 이라크군의 무자비한 쿠르드족 반란진압방식을 규탄하고 이의 즉각적인 중지를 아울러 요구했다. 이번 EC정상회담을 주재한 룩셈부르크의 자크 상테르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후세인 대통령이 권좌에 남아 있는 한 EC는 이라크가 문명사회의 일원으로 재합류할 수 있을 것으로 볼 수 없다』면서 후세인 대통령의 하야를 강력히 촉구했다. 이 결의안을 제안한 존 메이저 영국 총리는 이라크측의 승인여부에 상관없이 유엔이 이라크 북부지역에 쿠르드족 난민을 위한 피란처를 설치하라고 촉구하면서 『이 제의의 목적은 일단 쿠르드족과 기타 이라크 난민들이 산에서 내려와 안전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것이며 이어 2단계에서 이들 난민들이 귀향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쿠르드족이 주로 거주하는 이라크 북부의 일부 대규모 마을지역이 모두 특별구역화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이번 EC정상회담에서는 지난주 유엔 걸프종전결의에 규정된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 계속방침을 지지하고 제재조치가 이라크측의 정책변화가 있을 때까지는 지속되어야 한다고 천명하는 한편 무기금수원칙도 재확인했다.
  • 이란,쿠르드난민에 국경폐쇄/“50만 이미 유입… 수용 한계”

    ◎미·영·불 등선 본격 구호작업 착수 【니코시아 로이터 연합】 이란정부는 7일 50만명 이상의 쿠르드족 난민이 이미 국경을 넘어 이란으로 피신했다고 밝히고 이제 난민수용이 어려운 형편이기 때문에 국경을 폐쇄한다고 밝혔다. 이란 내무부는 테헤란 라디오방송을 통해 발표한 코뮈니케를 통해 『수십만 명의 난민들이 국경을 넘기 위해 기다리고 있으나 식량 등이 부족해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앙카라·런던 로이터 연합】 이라크정부의 탄압을 피해 피란에 나선 이라크 난민들이 터키·이란 등 인근 국가로 대량 유입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영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들은 이들 난민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다. 한 미군 관리는 7일 미 공군의 허큘러스 C­130기 4대가 이날 낮 12시(현지시간) 남부 터키의 인키리크 공군기지를 출발,하오 1시30분 이라크 북부 산악지대의 이라크 난민들에게 식량과 기초의약품들을 공륜했다고 말하고 8,9일에도 계속 구호작전을 펼칠 것이라고 말했다. 미 수송기들은물과 미군용 레이션 등 구호식품을 낙하산에 매달아 쿠르드 난민주변에 떨어뜨렸다. 또 영국 남부 린네햄 공군기지의 한 대변인은 텐트·담요·식료품 등 최소한 30t의 구호품을 실은 3대의 영국공군기가 이날 아침 터키 인키리크 공군기지를 향해 출발했다고 말했다. 또 프랑스와 독일은 수송기 7대,1백20t의 구호물자를 파견키로 약속했다.
  • 중국/전인대서 떠오른 3인의 개혁파

    ◎상해 개방 이끈 “중국의 고르비” 주용기 부총리/개혁·보수 조화,발전계획 완수 추가화 부총리/「천안문」 이후 외교고립을 타개 전기침 국무위원 1일 중국 제7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제4차 회의에서 부총리로 지명된 주용기 상해시장과 추가화 국가계획위원회 주임 및 국무위원에 지명된 전기침 외교부장은 앞으로 중국의 개혁정책을 이끌어갈 새로운 개혁지도자들로 주목을 끌고 있다. 성도만보와 월드 TV 등은 중국 국무원 총리 이붕이 이날 하오 제7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4차회의에 이 같은 정부고위인사안을 공식적으로 제출했다고 밝히고 이 같은 임명안에 대한 전인대의 인준절차는 오는 8일에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3인의 프로필과 약력은 다음과 같다. ▲주용기=항상 새로운 아이디어와 소신을 가지고 상해지역의 경제개발과 개혁정책의 시행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여 「중국의 고르바초프」란 별명을 얻게 된 그는 이미 89년 6·4사태 후 당과 정부의 인사공백을 메울 때부터 고위직에 기용될 것이라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최고지도자 등소평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는 그는 당중앙고문위 주임 진운,국가주석 양상곤 및 전 전인대 상무위원장 팽진과 같은 보수파 원로지도자들로부터도 깊은 신임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소식통들은 등소평이 주용기를 이른바 「제2단계」 개혁 계획의 총지휘자로 삼기 위해 그를 일약 부총리로 기용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1928년 호남성 장사에서 출생한 그는 어려운 가정환경을 극복하고 면학하여 47년 청화대학 전기학과에 입학했으며 재학중 반국민당 계열의 학생운동에 가담했다. 82년 국가계획위원 겸 기술개조국장으로 증진하는 그는 국가경제위원회 상무 부주임직 등을 역임한 후 88년 상해시 당부서기와 식품생산 공응조장직을 맡았으며 수개월 후에는 다시 상해시장으로 발탁됐다. ▲추가화=국가경제기획담당 부총리 요의림(74)이 작년에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을 때부터 추가화가 연로하고 병약한 요의 후임자로 국무원 부총리로 기용될 것이라는 추측이 끈질기게 나돌았기 때문에 그의 부총리 승진은 이번 전인대가 열릴 때부터 기정사실로 되어 있었다. 8차 5개년계획과 10년계획의 실무총책으로 일하면서 등소평을 비롯한 개혁파 지도자들과 보수파 원로지도자들로부터 각각 상당한 압력을 받았으나 당내 개혁 및 보수세력의 입장을 적절히 조화시켜 나가면서 대임을 무난히 수행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26년 상해에서 출생한 그는 국·공 대립으로 37년 상해로 전쟁의 불꽃이 번지자 모친을 따라 홍콩으로 피란와서 중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85년 병기공업부 부장으로 정부각료가 된 그는 다시 86년 국가기계공업위 주임이 됐으며 88년에는 국무위원으로 승진했고 이듬해 12월에는 국가계획위 주임석을 겸임하기에 이르렀다. ▲전기침=89년 천안문사태 후 중국이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 국제적 영향력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받아 부총리로 기용될 것으로 추측되었으나 이번 전인대에서 국무위원직을 겸임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다년간 외교부에서 소련과 동유럽관계 직책을 맡아 「소련통」으로 불리고 있는 그는 러시아어는 물론 영어와 불어에도 능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1928년 천진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14세 때부터 공산당 지하운동에 참가,당선전활동에 종사했으며 49년 공산정권 수립 후에는 공산청년단(공청단)에서 봉직,50년대초에 공청단 중앙판공청 소속 연구원으로 일했다. 54년 모스크바로 파견되어 소련중앙당학교에서 연수를 받은 그는 이듬해 소련 주재 중국대사관 2등서기관으로 발령을 받음으로써 외교관 경력을 쌓게 됐다. 72년 소련 주재 대사관 참사관과 기니 주재 대사를 거쳐 77년 외교부 신문사(공보국) 사장이 된 그는 82년 외교부 부부장으로 승진했으며 88년 다시 외교부장으로 승진했다.
  • 풀뿌리와 새싹과…/이재근 논설위원(서울칼럼)

    우리에게 근대적 의미의 지방자치제도가 도입된 것은 정부수립 이듬해인 49년 7월 지방자치법의 제정이 시초가 된다. 그러나 정작 그 실시는 국내치안 상태의 불안과 6·25전쟁 등으로 연기되다가 52년에야 기초선거를 통한 지방의회가 구성되게 되었다. 이처럼 가까스로 시작된 지자제도 법제도적인 측면에서 허술하기 짝이 없었고 그나마도 61년 5·16으로 중단되게 된다. 52년 3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돌연 한강이남 지역에 지방의회선거를 실시키로 결정하고 4월25일에는 시·읍·면의회,5월10일엔 도의회의원 선거가 각각 실시돼 그 구성을 보게되었다. 지자법 제정에도 불구하고 그 실시를 유보했던 정부가 하필이면 피란 수도 부산에서 선거실시를 공포한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민주주의의 학교」를 세워 의회주의 원리를 구현하자는 게 아니라 이승만의 재집권기반을 확보하자는 정략적 선택이었던 것이다. 의도가 그러했으니 그 뿌리가 제대로 내릴 수는 없었다.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도의회」는 그 무렵 1953년의 얘기다. 남쪽지방이었다. 도의회는 사사건건 도당국과 대립했다. 지방살림을 논의하는 것인지,중앙의 국정과 권력구조에 관해 토론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어느 땐가 도정내용을 추궁하던 의원들은 관계국장과 당해 군수를 부정공무원으로 몰아 파면을 건의했다. 평소 도의회를 탐탁찮게 보아온 도지사는 물론 도청 산하기관들은 도의회의 감사를 거부하고 예산심의 때는 관계국장이 「일부러」현장에 나갔다며 배석하지 않았다. 파면이 건의됐던 간부들은 거꾸로 영전이 되었다. 그것을 빌미로 하여 회의장에 재떨이가 날아다니고 화가 난 한 의원은 부지사의 따귀를 올려붙이기도 했다. 부지사도 지지않고 이 의원을 명예훼손 및 폭행죄로 고발했다. 37년 후 오늘날 우리 국회의 축소판이었다고해도 좋다. 국회가 국정을 심의하고 권력의 개편이나 진퇴를 논의하는 중앙권력기관이라면 지방의회는 주민생활상의 문제를 다루는 봉사·협의기관이라 할 수 있다. 일찍이 제임스 브라이스가 지방자치제를 놓고 「민주주의의 학교」라고 했는데 이는 지역주민들이 중앙에 의해서가 아니라스스로 자기들의 문제를 주민 모두의 의사를 수렴하면서 풀어간다는 의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지방의회 의원자리는 무보수에 명예직이다. 회기중 수당에 해당하는 일비를 받지만 말 그대로 「거마비」에 불과하다. 그렇게 보면 지방의원들은 아무런 혜택이나 대가없이 내고장을 위해 발벗고 나서는 동네일꾼일 뿐이다. 그 구성원들이 명예직에 무보수인 만큼 지방의회는 꼭 매일 대낮에 열필요가 없다. 구미제국의 지방의회들은 통상 밤이 이슥해서 열린다. 의원들이 낮에는 생업에 매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직업으로 보면 농민·상인·자유업자에다 전직으로는 공무원·교수·대학총장·은행간부·언론인·국회의원까지 지방의원이 되어 낮에는 자기벌이하고 밤에 지역의사당에 모여 때로 밤새워 고장살림을 의논한다. 국회의원이나 지방의원의 공통점은 그들 모두가 유권자의 손으로 직접 선출되고 함께 지역주민을 대표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국회의원이 국방·외교·경제 등 국가적인 기본정책과 광범위한 입법·청원·국정감사활동에 나서는데 비해 지방의원은 그 지역주민의 일상생활과 직결되는 일을 돌본다. 국회의원보다 전문성은 덜하지만 보다 지엽적이고 구체적인 일들이 바로 지방의원들 몫이다. 그러니까 지방의원은 보다 덜 정치적이지만 보다 더 인간적이고 사교적이어야 한다. 이상적으로 말하면 지방의회의원들은 「정치인」이기보다 「충실한 이웃」이어야 하는 것이다. 지방의회가 중앙무대를 닮겠다고 정치성이나 권력성을 띠려한다면 지방의회 존립의 목적과 의의가 퇴색되고 만다. 정확히 얘기해 지방의원의 역할은 정치적·권력적인 업무수행에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지방의원을 무보수·명예직으로 한 가장 합리적인 명분은 의원직을 생계수단으로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도덕성을 유지토록 하고 그로써 주민의 신뢰와 존경을 받도록 하게 하자는 점이다. 그 직무활동과 관련해서는 금전적인 대가보다는 지역민의 신뢰와 존경에 더 큰 가치를 두어 그들로 하여금 지역발전과 주민봉사에 최선을 다하다록 여건을 조성해 주자는 취지이다. 기초단위 지방의회인 시·군·구의회의원 선거가 눈앞에 닥쳤다. 우리가 거듭 이번 지방자치선거의 의미와 선거주체들의 열의와 정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혼탁하고 오염되고 불공정해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의식과 애정이 제대로 꽃필 수 없기 때문이다. 구태여 풀뿌리라는 표현을 들추지 않더라도 지자제는 아래로부터 위로 오르는 민주주의 정치를 정착시키는 정초과정이다. 기초가 흔들리면 기둥이 설 수 없고 대들보와 서까래와 기와가 오를 수 없다. 이번 선거에서 선거주체들 모두가 깊은 관심과 열의를 갖고 반드시 공명선거를 해야 함은 기초가 흔들려 기둥이 무너지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이다. 30년만에 부활되는 지방자치제도이다. 그것은 주민자치권의 회복이자 정치민주화의 시험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더구나 언제나 본말이 바뀌어 있고 실체와 형식이 늘 구겨져 있는 듯한 이 나라 의회민주정치를 회생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기 위해 지방자치시대의 전개는 더없이 소중하다. 역사적 전기이기도 하다. 그 토대를 다지기 위하여는 또다시 하늘아래 둘도 없는 지방의회가 아니라 모두가 모범이 될 수 있는 지방의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소중한 민주주의의 학교가 또다시 별 수 없이 지역사회 졸부와 정치건달들의 담화장이 되어서는 안된다. 물론 지역유권자들이 애정을 갖고 지켜보는 한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 투르드반군,터키접경 장악/모술시도

    ◎시아파선 정부군 탱크 15대 격파 【니코시아 로이터 AP 연합】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전복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이라크 반군들은 15일 북부의 쿠르드족 반군이 이라크 제3도시 모술과 이라크∼터키간 주요 국경 통과 지점인 하부르강 지역을 점령,쿠르디스탄의 이라크지구 95%를 장악하는 등 새로운 승리를 거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쿠르디스탄 민주당(KDP) 대변인은 파리에서 터키와 접경하고 있는 북부 두호크주의 모든 이라크 정부군이 무기를 갖고 투항했으며 KDP가 그 제휴세력과 함께 이라크의 쿠르디스탄지구 95%를 장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테헤란 방송은 이라크 남부에서는 시아파 이슬람교도 반군이 이라크 제2의 도시 바스라로 진격중인 정부군의 탱크 공격을 격퇴,15대의 탱크를 격파했다고 피란민의 말을 인용,보도했으며 반군 대변인은 바스라 근처에서 약 2천명의 정부군 공화국수비대가 반군에 투항했다고 전했다. 한편 미국은 이날 처음으로 쿠르드 반군이 터키와 접경하고 있는 이라크 북부의 수개 지역을 장악하고 있음을 확인했다.걸프전 이후 이라크 영토의 20%를 통제하고 있는 미국주도의 다국적군은 이라크군 헬기가 이라크군중들에게 기총소사를 하고 있다는 보도에 따라 국민들을 상대로 전투용 비행기를 사용하지 말도록 이라크 당국에 경고했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이날 노먼 슈워츠코프 미사령관이 이라크당국에 비행중인 고정익 전투용 항공기는 모두 피격의 대상이 될 것이란 점을 통보했다고 보도했다.
  • 외언내언

    「남의 집 불구경 하듯 한다」는 말이 있다. 나와는 상관이 없고 재미있는 구경거리라서 걱정하는 체 하면서도 불이 꺼지면 얼마간 아쉬운 기분도 드는 묘한 인간심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금 걸프전쟁을 보는 세계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 그런 심리가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니지. ◆「더이상 피할 곳 없는 이라크인들」이라는 제목의 외신기사를 읽으며 6·25 당시를 생각한다. 피란을 못가고 적치하에 남아 적군과 함께 3∼4개월씩 미군기들의 집중적인 공습을 당하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던 그때의 참상을 지금 기억하는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살아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가 구분이 안되는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그 전쟁이 하루라도 빨리 끝나기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모른다. ◆피폭 20일을 넘기고 있는 이라크인들의 참상이 어떨지 보지 않아도 알것 같다. 세계최강 군사대국들의 최첨단 전폭기와 미사일들이 총동원된 폭격이다. 전폭기들의 출격횟수가 5만회에 달하고 있다. 집계된 보도가 없어서 그렇지 군인은 물론 민간인 사상자도 엄청나게 많을 것이 틀림없다. 이런 상황에선 「민족주의」도 「반미」도 「성전」도 소용이 없다. 살아남는 것만이 지상의 과제일 수밖에. ◆이라크 땅 안에서는 안전한 곳이 없다면 많은 사람들이 탈출하고 있다. 그들이 전하는 참상은 더욱 충격적이다. 『나는 안과의사인데도 부상자의 팔·다리 절단수술을 포함하는 외과치료를 했다. 하루 3시간밖에 자지 못하면서』 바그다드를 탈출한 의사의 말이다. 시민들의 탈출방지를 위해 휘발유의 판매를 금지하고 있다고도 한다. 비행기도 안보이는 상태에서 폭탄은 터지는데 어디서 어디로 떨어지는지를 모르니 불안이 극에 달해 있다고 한다. ◆『매일 새벽4시를 1인당 다섯숟갈분의 식사와 빵 한쪽,그리고 약간의 물을 주는 것이 하루 배식의 전부다』 쿠웨이트 전선에서 탈출한 이라크군 병사의 말이다. 이 엄청난 희생을 무릅쓰면서 후세인이 지키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지도자 잘못 만난 나라의 불행이 어떤 것인지를 보는 것같다.
  • 일,의무관 파견도 검토/가이후총리 국회답변

    【도쿄연합】 일본 정부는 걸프전쟁에 자위대 의무관의 파견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가이후 총리는 29일 하오 중의원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는 가운데 자위대항공기 파견에 따른 방위 의무관의 파견과 관련,『보건·위생·의료 종사를 주목적으로 하는 자위대원의 파견문제를 방위청에서 검토중』이라고 밝혀 자위대 항공기 파견과 동시에 자위대 의무관의 파견 계획도 추진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가이후 총리는 또 자위대기 파견과 해외파병의 상호관계에 대해 『해외 파병은 무력행사의 목적을 지니고 무장부대가 타국의 영토·영해에 들어가는 것이고 피란민을 수송하는 것은 인도적인 것이기 때문에 혼잡한 틈을 이용,해외에 파병하는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 걸프전 추가부담 절충의 안팎

    ◎전비지원 “자청”… 명분·실리 동시 겨냥/“소극참여로 실기땐 잃는 것 많다” 판단/전후 원유수급·복구참여 대비한 포석 정부가 30일 걸프전에 참가하고 있는 미군 등 다국적군에 2억8천만달러를 추가지원하고 군수송기 및 조종사 등 수송단을 파견키로 결정,발표한 것은 걸프사태에 최소로 참여함으로써 최대의 성과를 겨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부의 추가지원 결정은 지난해 9월 1차 분담금 결정때와는 달리 미국 정부의 요청이 없는 상황에서 순전히 자발적으로 이뤄졌다는 데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지난 1차 분담금 부담결정이 유엔 안보리의 결정과 국제여론에 따라 명분을 위해 취해졌다면 이번 추가지원 결정은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노린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다시 말해 한국전 이후 전세계가 처음으로 결속,침략국을 응징해야 한다는 세계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마당에 한국으로서도 뭔가 동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걸프전이 발발되자 일본이 90억달러,독일 55억달러,네덜란드 1억8천만달러 등을 각각 추가 제공하고 있으며 다국적군의 막대한 전비를 국제사회가 분담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고 있는게 사실이다. 또 다국적군에 대한 참여 및 지원에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같은 추가지원은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신장된 국력을 다시한번 확인시켜 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걸프전쟁에서는 매일 5억달러 정도의 전쟁비용이 든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의 지원은 아주 미미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상당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할 수 있다. 또한 종전후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되는 국제원유 수급질서의 재편,중동지역 복구사업참여 및 한미 통상마찰 등이 자발적인 추가지원을 결정하게된 요인인 것으로 관측된다. 원유도입량의 대중동 의존도가 75% 이상일 뿐 아니라 전후 복구사업으로 인한 건설경기호황이 예상되는 만큼 종전후 원유도입선 확보 및 건설수주 참여과정에서 우리 지분을 높이기 위해서도 추가지원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도널드 그레그 주 한미대사도 이와 관련,『이번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누가 우리를 돕고누가 돕지 않았는지를 분명히 알게될 것』이라고 말해 걸프전쟁 참여 및 지원정도에 따라 전후 「전리품」을 차등분배할 것임을 강력히 시사했다. 외교·안보적 측면에서 한국의 추가지원 등 세계적인 공동보조에 따라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략에 대한 다국적군의 「응징」이 성공할 경우 한반도에서 무력도발 가능성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으며 한미간 신뢰증진을 통해 양국 안보협력 및 우호관계를 강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국전 당시 유엔의 도움을 받은 우리로서는 대이라크 공동제재라는 유엔결의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추가지원 결정에 작용한 것이라고 관측된다. 이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소극적인 지원을 계속할 경우 미국의 불만은 통상압력 등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외교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일본과 독일도 각각 90억달러,35억달러를 추가 부담하는 등 전쟁발발 이후 각국이 추가지원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소극적 지원은 미 의회와 정부의 대한여론을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따라서 자발적인 결정은 지난 87년 이후 증폭되고 있는 한미 통상마찰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릴수 있는 효과도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정부가 발표에 앞서 지난 29일 추가지원방침을 그레그대사에게 통보하자 그레그대사는 『고맙다』 『미국이 먼저 요청하기에 앞서 한국이 그같은 결정를 먼저 해준데 대해 국무성도 좋은 반응을 하리라 생각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부의 결정과정에서 국민의 여론수렴 과정없이 비밀스럽게 이뤄졌다는 일부 지적도 있다. 1차 지원금 2억2천만달러를 포함,모두 5억달러의 지원금을 제공키로 결정한 것은 적어도 하루 전비인 5억달러 정도(최근엔 7억∼10억달러로 증가추세)는 지원해야되지 않느냐는 정부내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지난 17일 전쟁발발 이후부터 청와대·안기부·외무부·경제기획원·국방부 등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3∼4차례 갖고 추가지원 문제를 본격 협의했는데 추가파병문제에 대해서도 상당한 이견을 나타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국방부 등은 수송기 및 수송단 파견 등을 통해 지원금 규모를 줄이자는 주장이었던 반면 외무부 등은 군병력 추가파견 보다는 현금 및 군수물자지원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보였다는 것이다. 지난 24일 의료단 파견에 이은 군수송기 및 수송단 1백50여명 파병을 결정함으로써 사실상 한국은 세계에서 29번째 다국적군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트럭·방독면·군복 등 비살상용 군수품 1억7천만달러어치는 국방부 재고품인 만큼 우리의 안보력에 별다른 영향을 미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순수하게 정부예산에서 사용될 1억1천만달러의 현금 및 수송비용은 추가경정예산으로 뒷받침하되 시간적으로 촉박할 경우 정부가 한국은행으로부터 차입형식을 취할 것으로 알려졌다. ◎군수송단 임무와 주둔지/난민·부상자후송·병참등 후방지원/스커드 사정권밖 사우디영내 주둔 C­130 수송기 1대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조종사·항법사·정비사·관제사·수송관 등 최소한 15명이 필요하며 2교대로 운영한다고 할때 30명이 적정전이다. 이번에 파견되는 1백50명의 수송단은 5대의 수송기운영을 위한 탑승요원의 최소치이다. 이들은 다국적군의 지상서비스를 받으며 급유·이착륙·물자·인원수송·하역작업을 펼것으로 보인다. 한국공군수송단은 앞으로 걸프전 피란민 수송과 부상자 후송·병참지원 등 후방업무를 맡게 될 것이며 또 이미 파견되어 있는 국군의료지원단의 본국과의 연락업무와 교체병력 수송 등도 전담할 예정이다. 수송병력 1백50명의 현지수당과 근무연한은 의료지원단처럼 이등병 45만원,대령 1백20만원,근무기간 3배수 인정 등 해외근무 인사규정이 적용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이 주둔하게 될 막사와 식품·유류 등 보급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지원하며 우리 수송단은 개인화기 등 기본무장과 통신시설만 갖추고 무장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국방관계자는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수송단 주둔지는 사우디아라비아내로 하되 미국과 협의하에 결정될 것이며 경비 및 경계는 미국군이 맡게 된다고 밝혔다. 한국측은 공군수송단의 주둔지역은 ▲이라크의 스커드미사일 사정권 밖으로 하고 ▲미국의 동형기종이 주둔하는 지역으로정비·통신·유지·보급을 받을 수 있는 기지 ▲부대숙영과 여가시설을 활용할 수 있을 곳 ▲긴급시 교민수송 등의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것 등을 미측에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C­130제원 ▲항속거리=4천㎞ ▲속도=시속 6백21㎞ ▲적재량=70t·장병 70여명 ▲활주거리=1천1백m ▲착륙거리=5백33m ▲길이=15.7m ▲너미=3.1m ▲높이=2.8m ▲제작사=미 록히드사 ▲개발연도=70년대 후반 ▲도입연도=90년도
  • 이라크,요르단접경 4일만에 개방/「화공」으로 번진 중동전 이모저모

    ◎“미 지상공격 빨라야 2월중순 가능”/애,“완전철군땐 후세인과 협력 용의” ○세계 곳곳 「걸프테러」 ○…걸프전쟁 이후 반 이라크 국가들을 겨냥한 테러사건이 늘어나고 있다. 26일 밤(현지시간) 베이루트 주재 이집트 대사관에서 소형 폭탄이 폭발했으나 인명 및 재산피해는 아직 보고되지 않았다고 베이루트경찰이 27일 발표했다. 이는 반이라크 전선에 가담한 아랍국에 대한 첫번째의 테러사건이다. ○터키 일 항공사도 피습 ○…터키 수도 앙카라의 중심가에 위치한 일본항공(JAL)과 에어 프랑스의 사무소 바깥에서 27일 상오 폭탄 2개가 터져 사무실 유리창이 박살났으나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터키의 반관영 아나톨리안 통신이 보도했다. 이 통신은 보안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이날 폭발로 인근에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국영항공사의 사무소도 다소 파손되었다고 전하고 그러나 아직까지 이번 폭발사건이 자신의 소행임을 주장하는 측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라크는 27일 요르단과의 국경을 4일만에 다시 개방,피란민과 원유수송 트럭들이 국경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요르단국경 관리들은 왜 이라크가 국경을 다시 개방했는지 이유는 알수없다고 말했다. 최근 이라크는 모든 외국인들에게 출국비자를 받고 출국토록한 방침을 변경,아랍국적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출국비자를 받도록 결정한 바있다. ○아지즈,케야르 맹비난 ○…이라크는 27일 타리크 아지즈 외무장관의 공개서한을 통해 걸프전쟁을 일으켜 무고한 민간인들을 죽게만든 책임이 케야르 유엔사무총장에게 있다고 성토. 바그다드 라디오방송을 통해 방송된 이 공개서한은 다국적군의 공습으로 민간인과 비군사적 목표들이 파괴되고 있다고 말하고 『이러한 범죄행위가 유엔 안보리 결의란 미명하에 자행되고 있다는 것은 크나큰 수치』라고 주장. ○이란에 또 「검은 비」 ○…쿠웨이트 유전 화재로 인해 이란 남부지역에는 27일 검은색의 스모그 현상이 나타났으며 일부 도시에서는 이틀째 「검은비」가 내렸다고 이란관영 IRNA 통신이 보도했다. 이 통신은 「검은 스모그」가 라레스탄의 콘즈 지역 상공에 펼쳐져 있으며동쪽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전하면서 『지난 25일 이 지역에는 검은 비가 쏟아져 검은 물의 시냇물을 이뤘다』고 밝히고 만일 이같은 현상이 확산된다면 이 지역 주민들에게 식수를 제공하고 있는 호수들을 오염시킬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집트는 후세인이 제거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이라크가 쿠웨이트서 완전히 철수하면 후세인대통령과 협력할 것이라고 부트로스 갈리 이집트 외교담당 국무장관이 27일 말했다. 갈리장관은 또 쿠웨이트가 해방되는 즉시 미군주도 다국적군도 이 지역에서 물러나고 아랍국들이 평화유지군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 한편 이날 에스마트 압델 메기트 이집트 외무장관은 걸프전쟁에 관한 무바라크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부시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출발. ○인도서 유혈반미시위 ○…인도의 수도 뉴델리 인근 지역에서 발생한 친이라크 시위가 힌두교­회교도 간의 폭동사태로 돌변,5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부상했다고 목격자들이 27일 말했다. 한편 파키스탄에서도 사담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가 발생했으며 이 시위는 이슬람 종파들간에 총격전으로 번져 3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하는 유혈참사를 빚었다고 파키스탄의 관영 APP 통신이 보도했다. ○…다국적군의 이라크군에 대한 지상공격작전은 빨라도 2월 중순이나 돼야 시작될 것이라고 영국의 주간 선데이타임스지가 미국과 영국 정부 소식통들을 인용,27일 보도. 선데이타임스지는 지상전이 2월15일 이후로 연기됐으며 사우디 배치 다국적군 지휘관들은 미 국방부에 대해 2월 중순이 돼야 다국적군이 진격 태세를 갖출 수 있다고 보고한 것으로 전했다. ○…다국적군은 26일 밤 이라크의 바스라항에 대한 폭격을 재개,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으며 인접 이란에서도 폭발이 감지됐다고 이란의 IRNA 통신이 27일 보도했다. 이 통신은 이라크와의 변경도시인 호람샤르 발신 기사에서 이라크 제2의 도시에 대한 폭격이 자정후에 개시돼 6시간 동안 계속됐다고 전했다. ○수십만명 반전시위 ○…걸프전쟁이 10일째로 접어들고 있는 26일 세계각국의 군중 수십만명이 시가지로 몰려 나와 대대적인 반전시위를벌였다. 이날 독일의 본에서는 반미시위에 대한 정부의 비난에도 불구,약 15만명의 독일인이 집결,지금까지 독일에서 열린 걸프전 반전 집회 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를 벌였다. ○…다국적군 사령관들은 이라크군 포로들의 신문에서 이라크군의 사기저하 징후를 발견했다고 말하고 이것이 지상군 전투시 과다한 인명피해가 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를 바라고 있다. 한 해병 장교는 『다국적군 사령관들은 많은 이라크 군인들이 항복해 올 것으로 추측하면서 그때는 우리가 곧장 진격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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