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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대통령 모스크바대학 연설 요지

    ◎냉전의 벽을 넘어,평화와 번영을 향하여/“한·소,불행한 과거 씻고 역사의 새 장 열 때” 나는 이 대학이 세계에 낡은 냉전체제를 종식시키고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새로운 물결을 일게 한 페레스트로이카의 기수였음을 생각하며 여러분 모두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로구노프 총장과 트로핀 부총장 그리고 교수 여러분과 이 대학이 새로운 사고를 이끌었으며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많은 개혁의 지도자들이 이 대학으로부터 배출되었습니다. 수많은 위대한 사람들의 예지와 영감이 숨쉬는 이 대학은 이 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의 진보를 이끌고 인류사를 풍요롭게한 지성의 요람입니다. 이 대학이 낳은 문호 곤차로프는 러시아인으로서 첫 한국견문록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그가 한국인의 특성을 이야기하는 속에서 오늘의 만남을 예견한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1854년 푸차친 제독을 수행하여 러시아인으로 처음 한국땅을 밟았던 그는 길에 깊이 패인 수레바퀴 자국들을 보고 한국인이 근면하고 생활력이 강한 것을 알았으며 신기하게도 가난한 사람까지 시를쓸만큼 학식이 있었다고 썼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인들은 그들에게 질문을 했을 때 진실을 말한다. 그들은 그 어느 것도 기탄없이 이야기한다…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 사람이라면 이런 일은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한국인들은 유럽에 무난하고 신속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한국이 이룬 급속한 발전의 원동력은 바로 그가 지적한 우리 국민의 높은 교육수준과 근면성,그리고 개방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야기한 한국인의 특성이 본격적으로 발휘되기까지는 한 세기를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한 세기동안 우리 민족은 강대세력의 침략과 냉전의 대결속에서 험난한 수난의 역정을 걸었습니다. 냉전은 1950년 한반도에서 전쟁으로 폭발했습니다. 3년 넘게 지속된 이 전쟁에서 모든 것이 폐허화되고 수백만명이 목숨을 잃고 피를 흘렸습니다. 1960년대 초 한국이 경제 사회개발을 시작했을 때 자원·자본·기술… 우리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 국민은 여기에서 일어섰습니다. 국민의 가슴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불을 지펴 모두가 국가건설에 나섰습니다. 그로부터 26년 뒤 서울에서 「인류화합의 큰 축제」가 열렸습니다. 30년 전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던 낙후된 농업국가가 세계 12위의 무역국가로 탈바꿈했습니다. 한국은 이제 진정한 민주주의의 시대를 열고 있습니다. 1백40년 전 문호 곤차로프가 한국인이 학식이 있다고 한 것은 우리의 오랜 교육전통을 말합니다. 한국의 가난한 농민들은 전쟁을 치른 어려움 속에서도 농토와 소까지 팔아 자녀를 대학에 보냈습니다. 가난의 세월을 그들의 세대에서 끝내겠다는 국민적 의지의 한 단면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대학은 여러분의 대학과 같이 진리와 학문,과학기술과 시대의 흐름… 모든 면에서 가장 앞서가려 합니다. 소련에 대한 관심과 연구도 그 좋은 예입니다. 한국의 대학은 이처럼 다양성을 꽃피우나 국가발전의 힘을 녹여내는 용광로가 되어왔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한국의 오늘은 자질이 우수하고 교육수준이 높은 국민들의 힘으로 이루어졌습니다.교수,학생여러분. 한국은 본격적인 개발계획을 추진해온 지난 28년간 연평균 8.6%의 빠른 성장을 거듭해왔습니다. 한국의 고도성장은 창의력 높고 부지런한 우리 국민의 노력이 정부의 효율적인 개발정책과 조화를 이루어낸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성공적인 개발로 2차대전 이후 외채를 줄여나간 유일한 개발도상국입니다. 한국은 아직 선진국도 아니며 강대한 나라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루려는 목표가 성취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도 많은 어려움과 도전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기안에 국민소득 1만5천달러 수준의 번영하는 선진국이 되는 소망을 이루려하고 있습니다.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어려움과 도전을 안고 있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장래에 대해 회의적이거나 비관적인 이야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나라보다 2백배가 넘는 광대한 국토와 여기에 무한한 자원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달과 우주를 정복하는 첨단의 과학기술과 세계 초강대국의하나가 된 국력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페레스트로이카를 승리로 이끌 모든 것을 갖고 있습니다. 소련은 지난 10월말 경제개혁안을 채택하여 시장경제로 방향을 설정했습니다. 나는 우리의 개발경험에 비추어 이와 같은 개혁이 소련경제의 밝은 앞날을 열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새로운 친구인 한국은 소련의 개혁을 지지하고 성원할 것입니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여러분의 위대한 선택은 소련을 자유와 번영의 길로 이끌 뿐 아니라 세계의 평화와 인류사회의 진보에 기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 뽀옴뉴 추우드노예 므그노 베니예 뻬레 더 므노이 야비일라시 뜨이 (나는 기적의 순간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국민은 우리 두 나라의 새로운 만남을 시인 푸슈킨이 노래한 「기적의 순간」처럼 경이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한 소 관계의 정상화는 우리 겨레에게 그토록 큰 고통과 비극을 가져다 준 냉전체제의 종막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쟁과 분단의 땅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의 시대를 재촉할 것입니다. 우리 두 나라간에는 지난 시대 86년간의 단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식민세력의 침략과 냉전체제의 대결 때문이었습니다. 2차대전이 끝날 즈음 미·소 두 나라는 한반도 허리를 가로지른 북위 38도를 따라 선을 그었습니다. 이 선이 남북의 우리 동포와 한·소 두 나라 국민 모두를 서로 가르는 냉전의 높은 벽으로 굳어졌습니다. 스탈린시대 나라를 불바다로 만든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1983년에는 소련 공군기에 의해 우리 민간여객기가 피격을 당했습니다. 한·소 양국은 어두웠던 지난날이 불행을 씻고 이제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합니다. 한·소간의 새로운 시대는 모든 나라,모든 국민이 화해와 협력으로 평화로운 세계를 이루려는 우리의 북방정책과 페레스트로이카가 합치하는 공동의 철학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만나며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평화와 번영… 인류가 가진 공동의 이상을 다함께 실현해 나갈 수 있다는 신뢰와 신념을 가집니다. 한·소 두 나라간에 선린우호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일은 부자연하고 비정상적인 과거를 청산하고 이성이 지배하는 역사,인간성을 회복하는 역사,현실을 현실로 인정하는 바탕위에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함께 실현하는 새로운 역사의 창조를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와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갖고 두 나라가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태평양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공동의 노력을 해 나갈 것을 밝혔습니다. 이것은 몰타 미 소 정상회담으로부터 「한 지붕속의 유럽(European Common House)」을 이룬 평화의 새 질서가 유라시아대륙의 동쪽으로 미쳐오고 있음을 말하는 의미깊은 진전입니다. 한국은 이제 이 지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았습니다. 한반도문제의 해결방향은 분명합니다. 현실을 인정하는 바탕위에서 남북한이 교류협력하는 관계를 이루면 같은 민족간의 화해는 빠른 속도로 진전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과 경쟁·대결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발전을 위해 협력하는 동반자의 관계를 이룩해 나가려 합니다. 우리는 북한의 고립을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소련이 우리와 좋은 관계를 발전시키는것과 똑같이 북한과 기존의 우호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를 바랍니다. 북한은 그들의 오랜 폐쇄노선으로부터 나와 우리는 물론 국제사회와 협력하는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 세계에 넘치는 개방과 개혁의 물결을 북한만이 거스를 수 없습니다. 이 새로운 질서에 참여하는 것은 북한이 그들의 발전을 위해서도 해야 할 일입니다. 특히 양국의 경제구조는 상호 보완적이어서 교역과 경제협력관계는 크게 확대될 것입니다. 한국 경제는 소련이 필요로 하는 많은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은 소련의 선진과학기술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소련의 앞선 기술을 상용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류협력의 증진은 비단 경제분야에 그치지 않고 모든 분야에 걸쳐 우리 모두에게 결실과 보람을 안겨줄 것입니다. 나는 양국의 대학이 적극적인 교류를 추진해 나가고 있는 것을 반갑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학문을 향상할 뿐 아니라 학자와 젊은 세대간의 이해와 우의를 증진하여 우리 모두의 더 밝은 내일을 약속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특히 모스크바대학을 중심으로 소련 학계가 한국에 관해 어느 나라보다 깊고 광범한 연구활동을 펼쳐오고 있는 것을 마음 든든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더욱 평화롭고 번영된 세계를 향하여 모두가 행복을 누리는 저 밝은 21세기를 향하여 손잡고 나가는 동반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스끄바,베치나야 찌베 슬라바(모스크바여,영광이 영원하여라)! 발쇼예 쓰빠시바(대단히 감사합니다).
  • 한·소,“한반도 평화정착 노력”/노대통령·고르바초프 모스크바선언

    ◎남북대화 지지·경협확대 합의/정상회담/고르비,방한초청 수락 【모스크바=이경형 특파원】 노태우 대통령은 방소 이틀째인 14일 상오 11시(한국시간 하오 5시)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에서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한소 정상회담을 갖고 한반도문제 해결에 군사력사용을 배제해야 하며 평화적인 대화를 통해 신뢰를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단계적인 협력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데 전적으로 의견을 같이했다. 이날 2시간15분간에 걸쳐 진행된 단독 및 확대 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이 남북한 문제와 관련,먼저 신뢰구축을 통해 단계적인 군축을 실현해 나가야 한다고 밝힌 데 대해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우리의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통일방안에 전적인 공감을 표시한 뒤 『통일문제는 기본적으로 남북한이 풀어나가야 할 문제이나 소련은 이에 도울 일이 있다면 적극 돕겠다』고 말하고 『남북 통일문제는 궁극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이수정 청와대 대변인이 발표했다. 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또 『한소 관계발전이 남북 관계개선에 도움이 된다』는 데 의견을 일치시키고 『유럽에서 긴장완화와 화해가 이룩되었듯이 아시아에서도 화해와 평화가 정착되어야 하며 특히 한반도의 평화는 아시아 평화의 관건이 된다』는 의견을 모았다고 이 대변인이 전했다. 노 대통령은 남북한 유엔 가입문제에 대해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이 한반도 평화정착은 물론 남북한간의 협력증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며 북한이 핵안전협정에 조속히 가입하는 것은 남북한뿐만 아니라 주변국에도 바람직하다』면서 북한의 조속한 핵안전협정 가입을 촉구하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유엔의 보편성원칙·핵확산의 반대 등 소련의 입장을 북한에 여러차례 전달했다는 뜻만 밝힌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안의 민감성에 비추어 더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를 유보키로 양국간에 양해한 것으로 전해졌다. 양국 대통령은 한소 쌍무 관계발전에 만족을 표시한 뒤 양국의 잠재성이나 경제적 상호 보완성에 비추어 더욱 심화될 것임을 다짐했으며 경협이 구체적인 내용은 내년 1월중순 양국 정부대표단의 회담을 통해 마무리 짓기로 했다. 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회담이 끝난 뒤 이날 합의내용을 바탕으로 한반도에서의 냉전종식과 평화정착을 위해 양국의 협력관계를 강화시켜 나가기로 하는 내용의 「한소 관계의 일반원칙에 관한 선언」을 채택,서명한 후 이를 발표했다. 이 모스크바 선언은 『무력에 의한 위협이나 무력의 사용,타국의 희생하에 자국의 안보 확보,또는 모든 관계 당사국간의 합리적 동의에 입각한 정치적 합의 이외의 방법에 의한 국제적·지역적 분쟁의 해결을 인정치 아니한다』고 분쟁해결 수단으로서의 무력 불인정을 천명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회담에서 한소간의 불행했던 과거사와 관련,6·25전쟁·KAL기 격추사건 등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지는 않은 채 『양국 관계는 과거 냉전시대의 불행했던 관계,불행했던 일을 청산하는 바탕 위에서 양국 선린우호시대를 열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고르바초프 대통령도 기본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 대통령은 이어 이날 하오 모스크바대학에서 가진 연설에서도 『스탈린시대 나라를 불바다로 만든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83년에는 소련공군기에 의해 우리 민간여객기가 피격당했다』고 상기시키고 『한소 양국은 어두웠던 지난날의 불행을 씻고 이제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이날 단독 정상회담이 끝난 뒤 공동기자회견을 가졌으며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공식으로 한국방문을 초청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밝히고 『노 대통령의 초청에 깊은 사의를 표명하고 방한시기는 추후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도 회견에서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한소 양국은 과거사를 청산하고 선린·우호협력관계를 증진시키기로 합의했다』고 말하고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회담에서 나의 방한초청을 수락했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이날 저녁 7시(한국시간 15일 상오 1시)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크렘린궁에서 주최한 공식만찬에 참석,답사를 통해 『나의 모스크바 방문기간중 양국간에 교류협력관계를 본격적으로 발전시킬 확고한 틀이 이루어지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방소 사흘째인 15일 상오(현지시간)에는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는다. 노 대통령은 이어 이날 낮 크렘린궁으로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예방,작별인사를 나누고 공식환송식에 참석하며 한소 경제인 및 학계대표들과 오찬을 함께 한 뒤 레닌그라드로 떠난다.
  • 외언내언

    일본에서 야쿠자라고 하는 폭력단체로 인한 피해는 크게 2가지. 조직폭력의 속성대로 이들이 유흥가를 지배하면서 마약밀매나 밀수·인신매내 등의 불법행위와 이권개입으로 사회를 멍들게 하거나 조직폭력간의 세력다툼을 위한 피의 전쟁으로 선량한 시민들이 해를 입는 것. ◆피의 전쟁은 지난 몇년 동안 일본내에서 치열하게 벌어져 왔다. 최대 조직인 야마구치(산구)파의 조장 다오카(전강일웅)가 지난 78년 피격당하면서 전쟁은 시작됐고 그 뒤를 잇는 조장자리를 둘러싸고 숱한 파벌 싸움이 있어 왔다. 지난 3년여 동안만을 보아도 3백17건의 「전투」에서 모두 95명이 죽었다. 주로 시내 한복판의 총격전이어서 인근 주민들의 불안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한창 때 언론은 총선거 뉴스보다 이 전투소식을 더 크게 보도할 정도로 관심의 대상. 동남아에서 젊은 여자들을 데려다 팔아넘기거나 마약·총기류를 밀반입,거래하고 자릿세로 일반시민을 괴롭히는 것은 이미 오래된 사회문제다. ◆그러나 이런 폭력조직에 대한 일본내의 대응도 만만치가 않다. 경찰은 폭력단 사무실에 드나드는 인물은 누구나 컴퓨터에 입력시켜 동향을 체크한다. 이들이 방뇨라도 한번 눈감아 줄 것도 연행해서는 조직상황을 캐묻고 벌을 준다. 행동을 철저히 제한하겠다는 의도. 또 범법자에 대해서는 끈질기게 추적하고 그 중에서도 두목이나 간부급의 범법행위는 사소한 것이라 해도 용납되지 않는다. 조직과 격리시키기 위해서다. 이에 못지않게 일반시민들의 폭력배 추방운동도 만만치가 않다. 시민단체들이 폭력배 사무실을 마을에서 몰아내고 있는 것. 은퇴한 노인·부녀자들이 앞장서고 있다. 지난 한해만 2백17개 사무실이 문을 닫았다. ◆그 야마구치파 소속 폭력배들이 대거 우리나라에 오고 있다. 이들에 대해서는 입국조차 못 하도록 원천봉쇄가 가장 바람직하다. 그것이 어려울 땐 국내에서의 활동이 제한되어야 한다. 조그만 범법행위라고 용서돼서는 안된다. 이들에 대한 대책을 서두를 때다.
  • 이스라엘인에 잇단 테러/관광버스등 피격… 수십명 사상

    ◎레바논선 자살공격도 【베이루트·예루살렘 AP AFP 로이터 연합】 대이라크 무력사용 결의안이 금주중에 유엔 안보리회의에 상정될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25일 중동지역에서는 이스라엘인들에 대한 공격이 잇따라 발생했다. 이날 상오 8시(한국시간 하오 5시)쯤 이스라엘 남단도시 에일라트와 인접한 이집트지역에서 한 남자가 이스라엘 영내의 관광버스에 총격을 가해 최소한 4명이 사망하고 24명 이상이 부상했다. 또한 레바논 남부 이스라엘 경비구역에서는 파드와 하산 가넴으로 밝혀진 한 젊은 레바논 여성이 순찰중이던 이스라엘 병사들에게 자살폭탄공격을 가해 이 여성과 수명의 이스라엘 병사들이 사망했다.
  • 공로명 주소 초대대사 인터뷰

    ◎“소의 기본정책은 남ㆍ북한 등거리외교”/“소련인의 대한관 수교이후 크게 달라져/정상 방문시기 계속 협의… 모든 업무 순조” 『능력과 경험이 부족한 본인이 초대 주소 대사로 임명돼 개인적으로는 커다란 영광이면서도 초대 대사로서의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7일 상오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주소 대사 신임장을 받고 오찬을 함께한 공로명 대사는 이날 외무부에서 기자들과 만나 겸손의 말로 말문을 열었다. 『한소 관계는 지난 6월4일 양국 정상회담(미국 샌프란시스코),지난 9월30일 양국 외무장관회담(뉴욕) 등 두가지 굵직한 행사를 통해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그동안의 경과를 설명한 공대사는 『양국 관계는 인접국으로서의 선린우호관계와 상호 보안적인 여건이 적절히 융합된다면 더욱 발전될 것으로 본다』면서 양국관계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수교이후에 소련 관리들이나 민간인들의 대한 인식이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달라지고 있다고 전한 그는 『최근 소련내 전파 및 인쇄매체에서 한국 관계기사가매일 등장하고 있다』고 밝히고 이는 단시일내에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룩한 한국에 대한 부러움에 기인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소ㆍ북한 관계에 언급,『소측은 한소 수교이후에도 북한과 균형된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기본입장을 누누이 밝히고 있다』면서 당분간 한반도의 대대적인 지각변동이 있기는 힘들다고 전망하고,『따라서 주한미군의 존재가 한소 관계개선의 장애요소가 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대통령의 연내 방소 가능성은. 『6월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을 통해 제2차 정상회담을 상호 편리한 시기에 갖기로 원칙적인 합의를 본만큼 구체적인 방문시기 및 절차 등 기술적인 문제만 남아있다. 그렇지만 소련측에서 이에 대한 확답을 하고 있지 않는 상황에서 언제라고 못박아 얘기할 수 없다』 ­항간에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내년 4월경 일본방문길에 한국을 방문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러한 시각도 있겠지만 구체적으로 뭐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지금 시점에서 추측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양국 정상의 방문시기에 대한 양국간 협의는 부단히 계속되고 있다고 부연했다) ­노대통령으로부터 한소 관계에 대한 중대지침이 있었나. 『양국 관계발전에 대한 기본적인 구상을 말씀하셨다』(이 대목에서 공대사는 더이상의 언급을 회피,묘한 여운을 남겼다) ­초대 주한 소련 대사는 언제 부임하는지. 『모스크바를 떠나기전 대사후보자를 선정,상부에 재가를 올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금명간 결정될 것으로 안다』 ­지금까지 소련 외무부는 타부처에 비해 대한 관계에 있어 북한을 의식,상당히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양국 수교이후 분위기가 달라졌는지. 『대부분의 외무부 당국자들은 수교로 인해 한소 관계개선의 장애요인이 일소됐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와의 업무협의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며 대단히 협조적이다』 ­수교가 된 마당에 한국전쟁 및 83년 KAL기 피격사건에 대한 소련측의 책임있는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는 지적이 있는데. 『이러한 문제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견으로는 소련이 신사고에 입각,대한 관계정상화를달성한 자체가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평가한다. 국교가 없는 상태에서 소국영 아에로플로트사나 대한항공간의 민간상무협정을 통해 서울∼모스크바간 직항편이 신설되고 대한항공의 다른 노선도 소영공을 통과한다는 사실이 소측의 대한 우호적 조치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몇마디의 「말」보다는 「행동」이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고르바초프 면담사실을 알았는지. 『내가 모스크바를 떠난 이후에 갑작스럽게 결정된 것 같다. 아마도 정회장의 「고르비 면담」은 대통령위원회의 메드베데브위원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소련측으로부터 앞으로 대북 관계를 변화시키겠다는 언질을 받은 적이 있는지. 『수교당시 공동코뮈니케에도 잘 나타나지만 소측은 북한을 의식,동북아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남북대화의 실질적인 진전과 유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즉 남북한 균형관계 지속이 소련의 기본정책이라 볼 수 있다』
  • 피격 KAL기 희생/일인 7명 배상합의

    【도쿄 연합】 지난 83년 9월 사할린 상공에서 발생한 소련 전투기의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사건 때 희생된 일본인 27명중 7명의 유가족 16명이 대한항공측과 처음으로 화해를 보았다.
  • 미 대통령 아들ㆍ딸들 “고뇌와 갈등” 언저리(세계의 사회면)

    ◎백악관의 2세들은 괴롭다/국민의 주시받아 행동제약/알콜중독ㆍ도박꾼 전락까지/「호기」보단 「도전」에 시달려 대통령의 자녀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국가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자녀들은 부모의 후광으로 늘 화려한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그 화려함 뒤에는 적지 않은 고뇌와 갈등도 있다. 특히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부처의 일거수일투족은 세계적인 뉴스가 되고 있으며 동시에 그들은 스타를 능가하는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 자녀 가운데 일부는 대통령 자녀라는 이유로 개인적으로 적지않이 고통을 겪고 있다. 부시의 셋째 아들인 닐 부시(35)는 금융스캔들에 휘말려 있고 고명딸인 도로(31)는 이혼의 아픔을 겪고 있다. 큰 아들인 조지 W(44)는 당초 계획했던 텍사스주지사 출마를 포기했다. 아버지의 정치적 후광을 업고 주지사에 선출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게 그의 변. 뉴욕에 있는 대통령연구센터의 고돈 학시소장은 『대통령의 자녀가 되는 것은 걷기에 불편한 신을 신고 걷는 격』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모든사람들이 그들을 감시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같은 대중의 관심에 대통령 자녀들은 적지 않은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대통령의 자녀들은 흔히 대중의 요구와 기대감,그리고 지나친 관심으로 일상생활에 많은 제약을 받고 일부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음을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존 애덤스 대통령의 아들인 찰스는 알콜중독자가 되었고 급기야는 아버지로부터 의절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의 의붓아들인 토드는 도박꾼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캘빈 쿨리지 대통령의 아들은 백악관 테니스코트에서의 불의의 사고에 의한 패혈증으로 사망했으며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아들인 퀘ㄴ틴은 육군항공사로 1차대전에 참전했다가 피격되어 사망했다. 바바라 부시여사는 대통령 당선이 그들의 결혼생활을 강화시켜 주었지만 자녀들에게는 많은 부담감을 주고 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특히 닐과 도로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닐은 지난 88년 12월 파산한 콜로라도주 덴버에 있는 덴버상호신용금고 이사로 재직시 특정인에게 특정대출을 해주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닐은 지난 84년 자신에게 10만달러를 빌려주었던 사업가 케네스 굿에게 90만달러를 대출해 주었는데 이같은 대출이 사적이해관계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 것이다. 5명의 자녀를 두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은 대통령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그것은 단지 「사치스러운 고민」에 불과할지 모른다. 인간적 고뇌를 가질 수 있겠지만 그들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며 선택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 이라크기 피격땐 미기에 테러 개시/PLO 과격파 경고

    【니코시아 로이터 연합】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한 과격파 지도자는 28일 이라크 항공기들이 손상을 입을 경우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 항공기들에 대한 테러를 개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라크관영 INA통신은 이날 지난 85년 지중해에서 이탈리아의 호화 여객선 아킬레 라우로호를 납치한 팔레스타인해방전선(PLF)의 지도자 아부 아바스의 말을 인용,『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공중이나 다른 어떤 장소에서 이라크 항공기에 대한 테러공격을 개시하면 세계 전역에서 그보다 더욱 잔인한 방법으로 유사한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 유가 31불선 또 돌파/쿠웨이트서 미국인 피격설 돌아

    【뉴욕ㆍ런던 AP AFP 로이터 연합】 국제유가는 6일 쿠웨이트에서 미국인 피격설이 전해진데 따른 중동위기 고조우려 및 조기해결 전망에 대한 비관론이 퍼져 또다시 배럴당 31달러선을 돌파,신고가에 육박했다. 미 뉴욕 상품거래소에서는 이날 서부 텍사스산 중질유 10월 인도분 가격이 전날보다 1.66달러 폭등,배럴당 31.43달러에 폐장됨으로써 5년만의 최고가를 기록했던 지난달 23일의 31.93달러보다 불과 50센트 낮은 선에서 가격이 형성됐다.
  • 8천만원 기탁 장학금/권정달씨,다시 찾아가(조약돌)

    ○…5공때 민정당창당 당시 사무총장을 지낸 권정달씨(54)가 지난83년 대한항공 피격사건으로 사망한 딸(당시 19ㆍ중앙대 공예학과 1년)의 보상금으로 받은 10만달러(8천만원)를 중앙대 장학금으로 기부했다가 최근 되찾아간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국회 내무위원장이던 권씨는 미국에 연수를 다녀오던 딸이 대한항공007기 피격사건으로 사망한 뒤 보상금으로 받은 10만달러 전액을 지난84년 6월 중앙대에 장학금 및 안성캠퍼스 야외휴게실건립 등에 써달라고 희사했다가 87년 재일교포 김희수씨(현 중앙대이사장)가 학교재단을 인수하자 이를 되찾아 갔다는 것이다.
  • 외언내언

    「귀축미영」(기치쿠베이에이). 태평양전쟁 때 일제가 미국·영국을 저주하면서 쓴 말이다. 이때의 국민학생들은 미군·영군을 그리는 그림에서 머리에 난 뿔을 잊지 않았다. 「귀축」이니 뿔이 났을 밖에. ◆「언어에 의한 공격」은 심리학에서도 다룬다. 첫째 배설물이나 성행위에 관계되는 표현은 세계가 공통된다. 우리도 금방 떠올릴 수 있는 욕설. 둘째는 벌받거나 죽거나 지옥에 가라는 식의 저주를 담은 표현이다. 셋째가 정당한 행위를 못하는 저능에 빗대거나 사람이 아닌 동물·괴물 등에 빗대는 표현. 물리적인 공격과 형태는 다르지만 그 또한 공격임으로 해서 가격자는 쾌감을 맛보고 피격자는 모욕·고통을 느낀다. ◆그렇긴 해도 언어에 의한 공격은 단어 선택이 저급할때 가격자가 야비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한동안 우리가 써온 「북괴」라는 표현도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북녘에서 우리한테 대고 쓰는 용어에 비하자면 「양반」. 그들은 교과서에까지 『미제의 각을 뜬다』같은 끔찍한 용어를 서슴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얼마전 한 홍콩지도 지적한 바가 있다. 평양시내 호텔에서 한국어 소개서를 살 경우 그 예문이 살벌하다는 것. 예컨대 『양키는 사람 탈을 쓴 늑대』같은 구절이 그것이다. ◆언어생활에서 그 용어 선택은 품위의 정도를 나타낸다. 그것은 용어뿐 아니라 말 전체가 풍기는 분위기 문제를 두고도 똑같이 얘기할 수 있는 것.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68년 이승복어린이가 무장공비한테 죽으면서 한 이 말은 사실이고 거기 공산당의 잔학성이 집약되어 생생한 반공교재로 쓰여오고도 있다. 물론 용어에 「원쑤」 「각을 뜬다」같은 살벌함은 없다. 그러나 그 표현의 분위기에는 증오심 섞인 반공에의 절규가 함축된다. 살벌한 용어보다 더 무서울 수도 있다. ◆국민학교 5학년 교과서에서 이 말을 없애기로 했다 한다. 잘하는 일이다. 이건 우리의 성숙성. 점철된 원한을 안아 삭인다는 관용성이기도 하다.
  • 여야,한ㆍ소 정상회담 논평

    ◎“한ㆍ소 협력의 새시대 진입 남북관계 개선에도 큰획” 여야는 5일 노태우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의 정상회담과 관련한 논평을 각각 발표했다. ▲박희태 민자당대변인=한소수교의 첫장이 열린 것이다. 해빙의 물결이 동서해에 넘치고 대륙과 반도에 가교가 놓여 협력의 새시대로 진입하는 감격적 순간을 목격하였다. 이제 우리는 모스크바를 통해 우리의 종착역인 평양에 도착,민족통일의 환희를 노래하고 자손만대에 평화의 유산을 물려주도록 해야한다. ▲김태식 평민당대변인=한국과 소련이 조속한 수교에 합의한점에 환영하며 약속대로 실현되기를 바란다. KAL기 피격사건사과요구등 우리가 해야할 말들을 다못한 점에 대해서 깊은 유감을 표한다. ▲장석화 민주당(가칭)대변인=한소정상회담에서 조속한 국교정상화와 한반도 정세안정을 위한 대북한개방공동노력 등에 원칙적인 합의를 이룬것은 한소간의 장래와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관계개선에 큰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한다. 북한을 지나치게 고립화시키지 않는 신중하고 일관된 북방외교추진을 촉구한다.
  • KAL기 피격 거론 않기로/한ㆍ소 정상회담때

    【워싱턴 로이터 연합】 노태우대통령은 오는 4일 미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한ㆍ소 정상회담에서 지난 83년에 일어났던 소련전투기의 KAL기 격추사건을 거론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미한국대사관측이 1일 밝혔다.
  • 정상회담 성사배경과 전망(한ㆍ소 새 시대:1)

    ◎한반도 냉전종식의 역사적 전기/북방ㆍ개혁정책 일치… 양국수교 “초읽기”/통일여건 조성에 큰 파급효과 예상 노태우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과의 6월4일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역사적인 한소 정상회담은 한소 수교임박이라는 양국관계에 뿐 아니라 냉전체제의 종식이라는 세계사적 시각에서 그 의의가 엄청나게 크다. 노ㆍ고르비회담은 우선 한소 수교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한소 양국간에는 지난해 4월 서울과 모스크바에 각각 무역사무소가 교환설치된 이래 1년도 채 못돼 금년 2월과 4월에 주모스크바 한국영사처,주서울 소련영사처가 설치되었으며 이번에 한소 정상회담이 예상을 뒤엎고 전격적으로 성사됨으로써 양국수교는 사실상 초읽기에 들어갔다. 노ㆍ고르비회담에서는 한소 관계정상화가 핵심적인 의제로 등장될 것이 틀림없으며 미수교국간의 정상이 회담을 갖는 사실 자체가 이미 수교에 대한 기분적인 인식이 일치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번 회담에서는 「조속한 시일내에 한소 관계를 정상화 한다」는 수교원칙에 합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같은 수교원칙을 토대로 양국 수교교섭단이나 양국 외무장관이 빠르면 7월중에 1∼2차에 서울과 모스크바 및 유엔본부 등을 오가며 수교에 따른 구체적인 문제를 논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한소 수교는 9월이전에 이뤄질 가능성도 없지 않으며 한소간의 관계긴밀화 발전속도에 따라서는 노대통령의 연말 방소,2차 한소 정상회담이 이뤄질 가능성도 없지않다. 한소 정상회담의 전격 성사배경에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장래를 경제적 번영으로 귀결시키려는 소련측의 실질적 욕구와 남북관계개선 방법을 「서울­모스크바­평양」이라는 우회적 방법으로라도 구사해야겠다는 우리의 입장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소련으로서는 신흥공업국인 한국의 건설ㆍ제조업분야 등을 유치,자국의 시베리아개발,일반국민들의 생필품수급확대 등 경제번영의 촉매가 되게하고 또한 한국경제의 소련진입이 경제대국 일본으로 하여금 소련경제부흥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동기를 유발하겠다는 계산이 깔린 듯하다. 한국으로서는 남북관계진전,나아가 민족공동체로서 남북 통일시대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북한을 개방으로 유도해야하나 북한이 한사코 폐쇄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북방외교를 통해 북한을 개방쪽으로 움직이게할 필요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북방외교의 관건인 「모스크바」를 평양으로 가는 우회징검다리로 활용하겠다는 전략이 바로 이번 노ㆍ고르비회담 추진의 결정적 배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소 정상회담의 또 하나의 의의는 남북한 관계에서 조명해 볼 수 있다. 소련의 개혁ㆍ개방물결이 베를린장벽을 허물고 동구에 자유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킴으로써 2차대전후 지속되어온 냉전체제의 급속한 붕괴가 이뤄진 최근의 세계적 화해 무드가 「분단 한반도」에 까지 불어닥친 것이다. 냉전체제의 최후의 산물인 남북한 분단의 해소없이는 진정한 데탕트가 이뤄질 수 없다는 인식이 고르바초프대통령에게 차 있었다면 소련과의 관계정상화 없이는 방북외교의 완결을 기할 수 없다는 판단이 노대통령에게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노ㆍ고르비회담은 북한에 대한 개방압력,남북통일 여건조성이란 면에서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소련은 이번 회담을 통해 「북한을 절대 고립시키지 않으며 그들의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을 것」이라는 노대통령의 솔직하고도 진지한 메시지를 확인한 뒤 이를 북한측에 전달하면서 남북대화재개 등을 종용하고 북한도 개방의 길을 걷도록 권고할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산이 소련의 충고를 끝내 거부할 경우에 구사할 수 있는 대북압력카드는 매우 다양할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이 폐쇄노선을 고수하면서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핵 개발관련 기술지원의 중단을 들 수 있다. 이미 소련은 북한의 핵개발을 공식비판한데 이어 소련핵기술팀을 철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북한의 고도무기체계가 소련무기체계로 이뤄져있는 점을 감안할때 군사적 압력이 용이하고 석유공급도 압력수단으로 구사할 수 있으며 북한외채의 80%가 소련채무인점도 충분한 영향력 행사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은 『비록 사회주의가 어렵더라도 자본주의방식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포기는 물론 사회주의가 얻은 전리품도 포기하는 것』(5ㆍ24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회의)이라는 폐쇄노선을 다짐했지만 결국은 소련의 압력을 점진적으로 수용해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중단된 남북대화나 인적ㆍ물적교류가 이번 노ㆍ고르비회담으로 다시 가동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으며 이러한 남북 관계진전은 통일시대 개막의 여건을 성숙시켜 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한소 관계발전이 가속화될 경우 시베리아개발에 한국의 자본ㆍ기술이 지금도 현지에 나가있는 것으로 알려진 북한의 노동력과 결합할 가능성이 있다고 볼 때 그같은 「결합」은 남북한 관계진전에 새 전기를 제공할 것이다. 한편 한소 정상회담→양국 관계정상화로 이어질 북방외교성취는 집권후반기를 맞고 있는 노대통령의 국내 정치적 위상제고에도 큰 영향을 줄 것으로 생각되며 내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외치로 보상하는 효과도 거둘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이번 노ㆍ고르비회담은 분단시대를 열게 했던 주역과 관계정상화를 통해 분단을 해소하고 청산해간다는 의미에서 북방외교의 완결이자 분단시대의 종식을 앞당기는 결정적 전기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한ㆍ소 최근 접촉 일지 ▲78년 4월=KAL기 소 무르만스크 남쪽 2백마일 빙판에 강제착륙 ▲〃 9월=한국각료로는 처음으로 신현확보사장관 세게보건기구총회참석자 소련입국 ▲79년 4월=한소 국제전화 개설 ▲83년 9월=KAL기 사할린부근 상공서 소전투기에 피격 ▲88년 1월=소련,서울올림픽참가 공식발표 ▲〃 8월=박철언대통령정책보좌관 극비방소,수교교섭 개시 ▲89년 3월=최호중외무부장관,방콕에서 아태 경제사회위원회 총회에 참석한 리가초프 소 외무차관과 접촉 ▲〃 4월=소 연방상공회의소 서울사무소 개설,대한무역진흥공사 모스크바사무소 개설 ▲〃 6월=김영삼민주당총재 방소 ▲〃 11월=한소 영사처 상호교환 개설 합의 ▲90년 2월=주모스크바영사처 개설 최호중외무장관 한소 외무장관회담제의 ▲〃 3월=공로명 초대 주소 영사처장부임,주한 소련영사처 개설,김영삼민자당최고위원일행 방한 ◎한ㆍ소관계 7백50년 약사/1884년한ㆍ노 수교조약… 공식외교 개시/무역사무소 작년 개설,양국관계 급진전 한국과 소련 양국은 서기 1246년 당시 고려 왕자인 왕준ㆍ왕전형제가 몽고 수도 카라코룸에서 몽고왕 정종즉위식을 계기로 러시아 수스달 공국의 제로슬라브대공과 솔란게스왕자와 첫 접촉을 가진 이래 이번 노태우대통령ㆍ고르바초프 소대통령간 정상회담성사까지 7백50여년간 공식ㆍ비공식관계를 유지해왔다. 한소 양국이 「뗄 수 없는 관계」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1861년 중로 북경조약체결로 연해주땅이 러시아영토가 됨에 따라 한로 국경이 두만강을 경계로 접하면서부터. 이후 부동함을 얻으려는 러시아의 남진정책으로 한반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1884년에는 한보 수교통상조약이 체결돼 양국간 공식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한국전쟁이후 한소 양국간 적대관계가 지속됐으나 70년대 들어 한국정부는 6ㆍ23선언등을 통해 소련을 포함한 비적성 공산국가와의 교류및 관계개선용의를 표명했다. 6공들어 한국정부의 적극적 북방정책추진과 함께 한소간 인적 교류가 증대되었으며 88년 8월 박철언 당시 대통령정책보좌관이 극비 방소,양국 수교교섭을 시작했다. 특히 88년 서울올림픽에 소련선수단이 참가함으로써 양국관계진전에 결정적 전기가 됐으며 한소 양국은 지난해 4월 서울과 모스크바에 각각 무역사무소를 교환개설했다. 이어 11월 공식관계의 시초라고 할 영사처교환설치에 합의,양국관계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에따라 지난 2월 주소 영사처가 개설되고 공노명대사가 초대 주소 영사처장으로 부임했으며 소련측도 3월 중순 시로추크를 영사처장대리로 임명,영사처업무를 정식개시했다. 이에앞서 지난해 6월 당시 김영삼민주당총재가 소련과학원산하 세계경제및 국제관계연구소(IMEMO)초청으로 소련을 방문했으며 3월에는 김영삼민자당최고위원과 박철언 당시 정무1장관 등 당정고위인사들이 소련을 또다시 방문,고르바초프등 소련측 고위인사들과 만나 한소 관계정상화에 합의했다. 이어 노대통령과 고르바초프간에 이를 뒷바침하는 친서가 교환됨으로써 양국은 1904년 국교단절이래 86년만에 다시 공식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평을 열었다.
  • 남중국해에 「민주여신호」 파고/천안문 주역들 승선… 항진 계속

    ◎공해상서 북경시민에 민주화촉구 방송계획/중국,사태진전에 촉각… 미ㆍ대만도 예의주시 중국당국은 지금 그들의 영해인 남중국해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한 척의 배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민주여신호」란 이름의 이 2천t짜리 선박은 지난달 프랑스 남부 라로셰항구에서 3만3천6백㎞의 긴 항해길에 올랐으며 현재 말레이시아 부근 공해에 다다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이 이 배의 접근에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것은 그 이름에서 알수 있듯 민주여신호가 「6ㆍ4천안문사건」 1주년을 눈앞에 두고 중국대륙안의 민주화운동을 부추기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선박은 지난해 발생한 6ㆍ4사건이후 해외탈출에 성공한 엄가기ㆍ오이개희등 민주운동인사들의 단체인 민주중국진선(FDC)이 모금을 통해 마련했고 프랑스 대만등지 민주단체및 언론사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항해에 나섰다. 배의 이름은 6ㆍ4사건때 민주화요구시위 군중들이 천안문 광장에 세웠던 민주여신상에서 따온 것이며 각종 현대식 방송시설을 갖추고 오는 5월4일부터 중국남부 공해상에서 대륙주민들을 향해 민주화 시위를 촉구하는 전파를 보낼 계획이다. 방송개시일을 다음달 4일로 정한 것은 이날이 북경의 대학생ㆍ시민들이 일본의 침략에 대항해서 민주애국을 외쳤던 「5ㆍ4운동」 71주년기념일이기 때문이며 방송기간은 6월말까지로 잡고 있다. 이 배는 이달말쯤 싱가포르를 거쳐 대만 북부 기륭항에 도착,모든 준비를 끝내고 남중국해에 접근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10개월 가까이 중국안에서 숨어 지내다가 얼마전 파리로 탈출한 천안문 시위주동자 채령(24ㆍ여)등이 외국기자들과 승선,방송활동을 벌이고 외국매스컴을 통해 이를 대대적으로 온 세계에 선전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같은 민주여신호의 정체와 계획에 대해 중국당국은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이 배의 활동을 지원하는 것은 중국정부전복을 꾀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행위로 간주하겠다』는 내용의 경고를 계속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배의 출현으로 중국 못지않게 긴장하고 있는 나라는 대만과 미국인 것 같다. 대만은 지난해 발생한천안문시위를 두손 높이들어 환호했으며 6ㆍ4사건 이후 대륙에서 탈출한 민주인사들을 초청하는 등 중국의 민주화운동을 적극지원해왔다. 따라서 이 배가 방송활동을 하다 중국해군에게 쫓겨 가장 가까운 대만영해에 들어 올 경우 보호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지만 자칫 잘못되면 무력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전전긍긍한다는 것이다. 또 현재 해외망명중인 중국민주인사들이 미국의 전함이 민주여신호를 호위해 주도록 요청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미측 입장도 난처하게 될 것 같다. 아무리 중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한다 하더라도 조그만 방송선 하나 때문에 대만이나 미국이 중국과 직접적으로 무력에 의한 충돌을 감행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짙게 깔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돼버린 이 배가 중국해군 함정등에 의해 피격되거나 배에 타고 있는 민주인사들이 체포되도록 내버려 둘 경우 대만등 인근관련국가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탄이 거세질 것은 분명할 것 같다. 이처럼 국제적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큰 예민한 상황속에서 민주여신호가 처하게 될 운명이 어떤 것인가는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대북한관계 큰 변화온다”/김영삼최고위원 방소 귀국회견 일문일답

    ◎“한ㆍ소 수교의 결정적 계기 마련/민자ㆍ공산당 수시로 상호초청”/동석 박정무,굳은 표정… “각료급 교류 합의 없었다” ○…소련방문을 마치고 도쿄를 거쳐 29일 하오 귀국한 김영삼민자당최고위원은 김포공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번 방소는 한소관계정상화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었으며 통일로 가는 문을 열고 우리 한민족의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을 획기적 계기가 될 것』이라고 자평. 김최고위원은 이날 하오 6시 대한항공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회견장으로 직행해 상기된 표정으로 미리 준비했던 도착성명을 10분간에 걸쳐 낭독한 뒤 기자들과 일문일답. ­멀지 않은 장래에 한ㆍ소국교가 수립된다는 데 이전에 KAL기 피격문제에 대한 소련측의 사과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이에대한 논의는 있었나. 『이 자리에서 소련의 지도자와 한 얘기를 전부 밝히지 못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국민들이 이해해주길 바란다』 ­소련정부기관지 이즈베스티야에서 김최고위원을 소개하며 차기 대권후보라 했는데 온당하다고 보는가. 『그같은 보도가 나간 경위를 내가 알 길이 없다. 소련기자가 자의로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방소 전부터 김최고위원과 박정무1장관이 동행ㆍ수행여부를 놓고 잡음이 일었고 소련에서도 친서문제로 다투고 경쟁적으로 회담에 임하는등 손발이 맞지 않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실제로 그러했나. 『이번 방소는 어디까지나 민자당 최고위원의 입장에서 당을 대표했다. 대표단은 전원 무사히 귀국했고 감사하는 것은 전체가 12일간의 출국기간 동안 하루 3∼4시간밖에 자지 못하며 열심히 노력했다는 점이다. 어느 누구도 소련에서 개별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불가능했다. 모든 사실은 내가 알았고 누구든 나와 의논을 했다.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가장 염두에 두었다는 점을 알아달라. 신문이 잘못 쓴 것 같다』 ­소련과의 수교가 가까웠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언제쯤 가능할 것 같나. 『소련측도 많은 것을 밝히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 분명한 것은 가까운 장래에 이뤄진다는 것이다. 내일 청와대에서 노대통령및 김종필 최고위원과의 오찬회동을 가질예정인데 거기에서 좀더 자세한 얘기를 나눌 예정이다. 고르바초프와의 면담내용 등은 모스크바를 떠날 때까지는 발표하지 않기로 약속했었다. 그동안 일부 내용은 기자들이 추측해서 쓴 것이 많다. 고르바초프와 만났을 때 그는 「우리들이 서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런 장애요인이 없다. 양국이 다같이 생동력있게 나아가자」고 말했다』 ­고르바초프와의 면담내용을 좀더 자세히 밝힐 수 없는가. 『나는 고르바초프의 대통령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했고 그도 나의 방문을 마음에서 우러나게 축하해 주었다. 나는 그에게 「한반도의 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당신이 추진하고 있는 페레스트로이카가 반드시 성공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노태우대통령의 안부를 전했다. 이에 대해 고르바초프도 노대통령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다』 ­이번 방소가 대북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하며 그곳에서 북한측 인사와 접촉한 사실이 있는가. 『대북관계는 매우 크게 변할 것이고 한반도 주변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우리 국민들도 전쟁에 대한 불안없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해도 좋게 될 것이다. 북한측 인사와는 어느 누구와도 만난 사실이 없고 다만 북한측 대사관으로부터 나의 일정을 묻는 전화는 많이 걸려 왔었다』 ­민자당과 소 공산당과의 정당교류는 어떤 형태로 이뤄지는가. 『수시로 우리 민자당의 초청에 소련집권당이 응하고 또 소련집권당의 초청에 우리가 응한다는 얘기다. 이것은 간단하게 보아서는 안되며 국교정상화로 가는 지름길이란 것을 생각해달라』 한편 이날 회견동안 박철언정무1장관은 시종 굳은 표정으로 김최고위원의 바로 옆에서 회견 장면을 지켜보았는데 회견이 끝난 뒤 『이번 방소가 한소관계개선에 플러스가 되었는지 마이너스가 되었는지 견해를 밝혀달라』는 질문을 받고 『언급하고 싶지 않다』고 답변해 불편한 심기를 노출. 박장관은 『한소 각료급 교류에 대한 소련측과의 합의가 있었느냐』는 질문에도 『전혀 합의된 바 없다』고 간단하게 답변. 박장관은 특히 김최고위원이 기자회견 도중 『고르바초프대통령과의 대화내용을 좀더 공개하겠다』며 미공개 내용을더 설명하려 하자『휴』하며 걱정스런 심경을 다시한번 노출. ○…이날 공항에는 김재광국회부의장,김동영총무,이병희ㆍ남재희의원 등 30여명의 민자당의원과 당직자,방소단가족등 2백여명의 환영객이 몰린 데다 내ㆍ외신보도진까지 취재경쟁을 벌여 북새통. 환영나온 의원들의 대부분은 민주계였으나 민정계에서 이긍규ㆍ조영장ㆍ박승재ㆍ서상목ㆍ신영순의원 등의 모습이 눈에 띄었는데 이들 민정계 의원들은 평소 박철언계로 알려진 의원들이어서 눈길.
  • 「반민족적 폭력사」로 얼룩진 35년(흔들리는 조총련:하)

    ◎“인도주의”앞세워 교포 9만여명 북송/대한 침투 전진기지 삼아 문세광사건등 테러 자행/「세습 반대세력」늘어 노선전개에 타격 조총련의 35년 행적은 「반민족적 폭력사」바로 그것이다. 당초 정치적 색채가 없이 재일 한인들의 권익옹호를 위해 결성됐던 조총련의 전신 조련도 집행부가 공산계열의 장악하에 놓이게 되면서부터 일본 공산당의 외인부대로 전락했다. 조련은 그후 북한에 김일성을 중심으로한 소위 인민공화국이 들어서게 되자 남로당계에서 북노당계로 기울어 더욱 전투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때의 좌익활동은 일본 공산당의 혁명노선에 의거,질서와 경제를 교란시킴으로써 일본 공산화 여건을 앞장서 조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자행하는 폭력과 파괴활동으로 인한 일본내의 사회적 비난과 여론의 화살은 재일 한인사회전체와 산하 단체가 뒤집어 쓰게 되었다. 한편 북한은 한덕수에게 지령을 내려 대남침투를 위한 주일특무부대인 조총련을 결성하도록 조종했다. 이에 따라 조총련은 ▲북한으로부터 직접 지령과 조종을 받는다 ▲대남적화정책에 추종하는 일본주둔 특무부대로서의 기능을 담당한다 ▲재일 한국인의 포섭과 좌익을 대표하는 단체로서의 역할을 맡는다 ▲한일,한미간의 외교적ㆍ경제적ㆍ문화적 교류를 저지한다는 기본노선에 맞춰 모든 활동을 전개했다. 조총련의 제1차 사업은 재일 한인의 북송사업이었다. 북한당국이 이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안 조총련은 1958년 8월15일 해방 13주년 기념대회에서 북송을 제의했다. 이와 함께 조총련은 「중앙귀국 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조직을 총동원했으며 일본내의 언론기관에 호소,북한의 모습과 귀국의 필요성을 선전했다. 이와 때를 맞춰 북한의 김일성은 그해 9월8일 건국10주년 기념대회에서 귀환동포를 적극적으로 환영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당시 북한은 전후복구사업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특히 일본에서 기술을 익힌 노동자의 귀환을 기대했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인도주의를 내세워 조국에 귀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선전공세를 폈다. 북한의 당시 속셈은 이를 계기로 자신들의 발전상을 일본에 선전하고 국제사회에 진출하는 발판으로 삼으려던 것이었다. 재일 한인들에 대해서는 북한은 세금을 내지않는 지상낙원이라고 꾀었다. 북한에 귀환하는 사람에게는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것은 물론 직장을 제공하고 아동들은 즉시 취학시키며 정착금으로 성인은 1인당 2만원,14세 이하의 아동에게는 1만원씩을 지급한다고 했다. 당시 북한이 선전과 일본인 협력자 매수 등에 들인 비용은 2조원에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같은 북한의 계략에 속아 북한에 송환된 북송자 숫자는 59년부터 82년사이 9만3천3백44명에 이른다. 북송사업은 한때 성공한듯 보였다. 59년 2천9백42명을 시발로,60년 4만9천36명,61년 2만2천8백1명으로 피크에 올랐었으나 이후 숫자가 격감했다. 68년부터 70년 사이에는 일시 중단된 적도 있었으며 그 이후는 몇백명ㆍ몇십명 단위였다. 니가타(신석)항에서 눈물을 뿌리고 떠난 북송자들은 그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일본에 남은 가족들에게 『헌것이라도 좋으니 의복이나 재봉틀,또는 라면을…』이라며 궁핍한 생활상을 편지속에 전해 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북한이 이들 북송자들을 인질로 잡고 조총련계 사업가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거둬가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조총련에 의해 자행된 대표적인 테러사건은 문세광 사건이었다. 1974년 8월15일 재일 한인 문세광(23)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국립극장에서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대통령은 위기를 모면했으나 부인 육영수여사가 피격,절명했다.일본경찰 조사에 따르면 문은 오사카(대판) 스미요시(주길)구에서 상고를 중퇴하고 한때 한청 이쿠노(생야)구 지부맹원으로 활약하던 자였다. 문은 민단자주수호위원회 사무국에서 일하던중 조총련 이쿠노 서지부 정치부장 김호룡에게 포섭되어 특별훈련을 받고 국내로 잠입,범행을 저질렀다.민단에서는 문의 거주지인 이쿠노 북지부에 「박대통령 저격사건 긴급대책분실」을 마련하고 「살인귀 김일성 집단타도」 「비인도적 조총련분쇄」등 입간판을 이쿠노구안에 수백개 설치했다. 그러나 이 입간판은 설치한지 3시간도 안돼 60여개가 조총련계 청년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를 전후해 민단계와 조총련 청년들사이에는 난투극이 빈발했다. 한국정부가 민단에 대해 장기적인 지원정책을 실시하고 조총련계 인사들에게까지 모국방문ㆍ추석성묘등 획기적인 포섭정책을 편 것은 바로 이때부터 였다. 조총련이 북한의 대남침투를 위한 전진기지가 되어 그동안 저질러 온 각종 악랄한 공작은 일일이 그 예를 들기 힘들 정도다. 지난해 3월 문익환목사 일행의 방북사건도 전민련­범민족대회­한통련으로 이어지는 조총련과 지하수맥이 닿는 선에서 주선되었다는 사실을 도쿄의 공안관계자들은 인정하고 있다. 지난 55년 결성된 조총련은 하부조직의 정비를 서둘러 지금은 49개 지방본부,4백19개 지부,2천7백여개의 분회,2백46개의 단을 둔 방대한 조직이 됐다. 산하단체로는 「재일본조선인 청년동맹」을 비롯한 15개의 단체와 「조선보사」등 18개의 주관 사업체를 갖고 있다. 조총련은 형식상 북한의 소위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의 산하단체로 철저하게 북한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이같은 조총련 조직을 뛰쳐나와 「김일성 독재체제타도 및 김정일 세습반대」를 부르짖고 있는 하수도씨등 반김일성세력은 조총련이 맹목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북한의 노선전개에 하나의 걸림돌이 될 것으로 도쿄 각계에서는 주시하고 있다.
  • KAL기의 시베리아항로 취항/한­소 긴장완화의 실례/모스크바 방송

    ◎“83년 피격은 냉전시대 마지막 희생” 【내외】 소련은 10일 대한항공기의 소련영공통과가 공식허용된 것에 대해 『긴장상태가 완화되는 또 하나의 실례』라고 평가했다. 소련관영 모스크바방송은 「한국여객기들의 소련경유」 제하의 논평프로서 지난 83년 KAL기가 소련 영공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소련 극동공군에 의해 격추된 사건과 비교,『그 항공회사가 소련상공을 통해서 자유롭고 안전한 비행을 하게된 사실자체가 긴장상태 완화과정의 또 하나의 실례』라고 보도했다. 모스크바 방송은 83년의 KAL기 피격사건에 대해 『2백69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이것은 냉전시기의 마지막 희생자에 속한다. 그들의 죽음은 아주 비극적이었다』고 술회했다. 한편 모스크바 방송은 대한항공기의 소련영공 통과를 계기로 한­소 항공사들은 금년 봄부터 이 항로의 「전통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외언내언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를 두고 『세계의 운명을 한손에 거머쥔 사나이』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너무도 엄청난 일들을 벌여놓았고 이 일들이 어떻게 되어 가느냐에 따라 세계의 운명이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온 세계의 이목이 그의 모든 것에 집중되고 있는 것도 너무도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5일의 세계주가 폭락 소동도 결국은 그러한 고르바초프에 대한 세계의 민감성이 빚어낸 해프닝이었다. 고르바초프가 국내 정치문제에 치중하기 위해 외국정치인들과의 모든 회담 일정을 취소했다는 보도가 도쿄ㆍ홍콩ㆍ유럽 증시를 강타,주가폭락 사태를 야기시킨 것. 뒤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서울 증시에선 한때 고르바초프 피격 뉴스로 증폭되기까지 했다. ◆증권시장엔 언제 어디서나 근거없는 뉴스ㆍ루머들이 많이 나돌게 마련. 그러나 정확한 정보가 가장 빠른 곳도 증시이며 근거없는 낭설도 언제나 그럴 듯하고 개연성이 높은 것 같은 경우가 많다. 고르바초프의 외국정치인 면담 일정 취소는 실각등 그의 신변이상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고르바초프의 실각ㆍ암살 또는 소 군부 쿠데타 가능성은 이미 세계적인 우려와 경계의 표적이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년 벽두의 이번 소동은 좀 불길한 조짐이 아닐 수 없다. 고르바초프는 밖에서 인기가 높지 안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개방과 개혁은 보수ㆍ진보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지 오래다. 비누ㆍ치솔ㆍ화장지 등 생필품은 점점 더 구하기 힘들어지고 위성국은 모두 떨어져 나갔으며 15개 공화국 1백여개 민족들의 분리독립 지향 민족주의는 소련제국의 붕괴를 재촉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고도 무사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세계의 우려다. 『그는 목적지는 알지만 그곳에 가는 방법을 모른다』 『개혁 용의만 표명했지 그의 힘으로 더이상 어쩔 수 없는 병든 체제 앞에서 그는 개혁을 원하는 루터와 반대하는 교황이 동시에 되려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그의 개혁은 그에겐 물론 반대자 그리고 온 세계의 「뜨거운 감자」가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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