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영웅의 몰락과 강박/임창용 문화부 차장
재작년 말 개봉 전 엄청난 화제를 불러모았으나, 정작 흥행엔 실패한 영화가 하나 있다. 일본에서 영웅으로 떠받들어졌던 한 프로레슬러의 삶을 그린 작품 ‘역도산’이다.
110억원이라는 거액의 제작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마치 작정한 듯 관련 기사를 쏟아냄으로써, 영화 홍보에 기여했던 언론매체들, 블록버스터 영화에 최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매력적인 소재. 그럼에도 영화는 흥행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다.
그 요인으로는 ‘휴먼드라마적 정통 액션물’일 거라는 기대와 달리, 지나치게 드라마적 요소만 강조했다는 점, 그것도 지나치게 진지해서, 경박단소(輕薄短小)로 설명되는 요즘 세상에 맞지 않았다는 점이 흥행 실패 후에야 분석되었다.
그러나 만일 이 영화가 요즘 개봉됐다면 어떨까? 대박은 몰라도 참패는 면하지 않았을까? 이같은 추측은 순전히 황우석 사태 때문이다. 주의깊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영화가 역도산이라는 인물을 통해 영웅의 심리, 그로 인한 몰락의 과정을 진지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사건의 성격이나 두 인물의 진정성이 완전히 다르지만, 영웅의 심리적인 측면에서만은 분명 일맥상통하고 있다. 그것은 성공에 대한 영웅의 강박(强迫)이다. 종전후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일본인들은 미국 레슬러를 때려눕히던 역도산에 열광했다. 하지만 영웅으로 떠오른 뒤부터 역도산의 삶은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후원자를 잡기 위해 거짓말을 일삼고, 상대 선수에게 뒷돈을 건네기도 한다. 이는 영웅적 삶을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그는 오히려 서서히 추락한다.
황 교수 또한 이같은 강박의 포로였다. 그의 기자회견 모습을 보면 사실 애처로울 정도이다. 서울대 조사위원회 발표를 반박하는 자리에서 그는 ‘대한민국’이란 단어를 무려 여덟번이나 썼다고 한다. 기자회견이나 인터뷰를 할 때마다 거짓말이 하나씩 드러나면서도 그는 끝까지 ‘대한민국’이란 강박의 끈을 놓지 않았다.
자신의 성공은 곧 대한민국의 성공이요, 자신이 잘못되면 대한민국이 잘못된다는 비뚤어진 신념, 그래서 자신의 성취는 결코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훼손될 수 없다는 오만함에서 그의 강박은 최고조에 달한 것 같다. 그러나 역도산이 그랬듯, 성공에 대한 강박은 결국 무리수로 이어지고, 황 교수는 이제 끝모를 몰락의 시간만 기다리고 있다.
며칠전 고려대 최장집 교수는 황우석 사태를 ‘유사 파시즘’이라고 진단했다. 민족주의·애국주의가 동원되면서 진실과 비판이 억압되는 유사 파시즘적 분위기에서 벌어진 사건이라고 분석했다. 파시즘이라는 것이 결국 강박적 애국이나 민족주의에서 나오듯, 강박은 황우석 사건의 씨앗이라고 볼 수 있다.
황우석 사건은 황 교수 자신의 성공에 대한 강박뿐만 아니라, 언론과 국민의 강박이 맞물려 일어났다. 대부분의 언론은 문제를 제기하는 일부 용기 있는 자들에게 ‘매국노’란 낙인을 찍으려 했고, 국민들은 기업들에 광고중단이란 폭력을 요구했다.
불과 두어달 전까지만 해도 황 교수가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로부터 입은 상처에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오류는 애써 외면하던 사람들이 히틀러의 손을 잡고 눈물짓던 이들과 완전히 다르다고 부인할 수 있을 것인가?
생명공학이 대한민국의 운명을 쥐고 있을 것이라는, 즉 과학을 신성화하려는 강박은 결국 파시즘적 권력으로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일찍이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분석 학자 빌헬름 라이히가 주장했듯 대중들은 이같은 파시즘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는 “자신의 성격구조 속에 파시스트적 감정과 생각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성격분석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며 “파시즘은 언제나 인민대중에 의해 탄생되고 대변됐다.”고 역설한 바 있다.
강박은 파시즘을 불러오고, 파시즘적 권력 또한 강박 때문에 몰락한다는 교훈을 역사는 가르쳐준다. 히틀러가 대중을 속였다기보다는 대중이 기꺼이 속아주었다는 라이히의 대중심리 분석은 이 시대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하지 않을까? 지금 중요한 것은 황우석에 대한 질타를 넘어 우리 모두 강박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임창용 문화부 차장 sdragon@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