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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비를 얼굴로 표현한 조각 [으른들의 미술사]

    변비를 얼굴로 표현한 조각 [으른들의 미술사]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얼굴만 보면 꽤 심각하다. 미간은 잔뜩 찌푸려졌고 눈은 거의 감겨 있으며 입술은 꾹 다물고 있는 힘껏 힘을 주고 있다. 어찌나 힘을 주었던지 목과 턱 주변의 근육까지 일그러진 모습이다. 이 초상 조각이 왜 이렇게 얼굴에 잔뜩 힘을 주고 있는지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그런데 작품의 제목을 알고 나면 바로 이해되는 작품이다. ‘변비로 고통받는 남자’다. 1775년 제작된 이 조각은 프란츠 자버 메세슈미트(1736-1783)의 캐릭터 두상 연작 가운데 30번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변비를 어떻게 얼굴로 표현할 생각을 했을까? 메세슈미트는 바로 그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시도했다. 가스가 가득 찬 배를 보여주지도 않았고 화장실에 앉은 모습을 표현하지도 않았다. 대신 온몸의 고통이 얼굴에 집중되는 순간을 포착했다. 표정 하나만으로 인간의 신체 상태를 상상하게 만든 것이다. 이 때문에 작품은 초상 조각이라기보다 온몸 전체를 조각한 것과 진배없다. ●얼굴은 감정의 통로 메세슈미트는 1736년 태어나 빈에서 활동한 조각가로, 궁정과 귀족뿐 아니라 의사와 과학자 등 당대의 인물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1770년 무렵부터 제작하기 시작한 캐릭터 두상은 기존의 품위 있고 권위 있는 초상 조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벨베데레 미술관은 이 연작을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인간의 개성과 얼굴 표정에 대한 관심이 커지던 흐름 속에서 등장했다고 보았다. 즉 메세슈미트의 기괴한 얼굴들은 단순한 괴짜의 작품이 아니라, 인간의 표정과 감정을 관찰하고 표현하려 했던 당대의 문화적, 과학적 관심에서 태어난 작품들이다. 한때는 이 두상 조각들을 메세슈미트의 정신질환이나 기이한 성격과 연결해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벨베데레는 이러한 병리학적 해석만으로 작품을 설명하는 것은 지나치게 좁은 시각이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얼굴이라는 신체 부위를 통해 감정, 지각, 인간의 내면을 탐구한 작품으로 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당시에는 얼굴 표정과 감정의 관계를 연구하고 분류하려는 관심이 많았다. 메세슈미트는 그 연구를 논문이나 의학서가 아니라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조각으로 보여준 셈이다. ●제목에 변비가 붙게 된 이유 흥미로운 것은 제목이다. 오늘날의 관람객에게 ‘변비로 고통받는 남자’라는 제목은 조금 당황스럽다. 또한 식사를 앞둔 독자에겐 미안할 따름이다. 위대한 조각가가 왜 하필 변비라는 추한 주제를 선택했을까. 사실 이 작품의 제목은 메세슈미트가 직접 붙인 것은 아니다. 메세슈미트는 생전에 이 두상들에 개별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메세슈미트 사후 그의 캐릭터 두상 작품들은 판매 과정에서 번호가 매겨지고 제목이 붙었다. 1793년 빈에서 열린 첫 공개 전시 때 안내서 작성자가 작품의 표정을 임의대로 해석해 ‘변비에 걸린 사람(Ein mit Verstopfung Behafteter)’이라는 제목을 붙였고 이후 이 제목으로 통용되었다. 그런데 작성자가 ‘변비’라는 판단을 내린 구체적인 근거를 설명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당시에는 관상학적 사고가 유행했던 만큼, 이 명칭 역시 얼굴에 나타난 극도의 긴장과 찡그림을 특정 신체 상태와 연결한 것으로 추정할 따름이다. 메세슈미트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의 사후에 붙은 이 제목이 공식 제목이 된 셈이다. ●예술은 때로 아주 사적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 앞에서 변비라는 제목을 지워버리기도 어렵다. 제목을 알고 보면 얼굴의 압도적인 긴장이 한눈에 이해되기 때문이다. 영웅의 고뇌도, 성인의 성스러운 순간도, 비련의 주인공의 슬픈 순간도 아니다. 변비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하고도 난처한 신체적 고통이다. 메세슈미트는 비애, 공포, 전율과 같은 인간의 위대한 감정만 조각하지 않았다. 인간이 점잖은 모습을 유지하기 어려운 순간까지 예술의 대상으로 끌어들였다. 18세기인들도 변비는 참기 힘든 문제였다. 그래서 이 조각은 묘하게 웃긴 동시에 놀랍도록 사실적이다. 18세기의 조각가는 인간은 아무리 근엄한 얼굴을 하고 살아도, 결국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변비로 고통받는 사람들이라면 화장실에서 시원한 쾌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 어쩌면 이 작품 앞에서 웃음이 나는 이유도 그것이다. 예술은 때때로 인간을 가장 위대하게 만들지만, 가끔은 어쩌나 싶은 순간까지 너무 솔직하게 남겨놓았다.
  • 200년 버틴 슈베르트 선율… 시적 몸짓일까 인간의 욕망일까

    200년 버틴 슈베르트 선율… 시적 몸짓일까 인간의 욕망일까

    슈푹 ‘일곱 번째 파랑’… 아시아 초연음악, 부분만 흐르면서 춤과 조화“한국 무용수, 배움 목마른 듯 질문”에크만 ‘선인장’… 위계적 평가 풍자속도감·진지함 속 인간 과시욕 직시“의미 찾는 자신 발견하고 웃게 돼” 올해는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의 현악4중주 14번 ‘죽음과 소녀’를 초연한 지 200주년이 되는 해다. 창단 2년이 된 서울시발레단은 200년을 버틴 선율에서 갈라져 나온 두 세계를 한 무대에 올린다. 오는 14~16일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선보이는 더블 빌(한 주제로 두 작품을 묶은 공연) ‘죽음과 소녀’에서 크리스티안 슈푹(왼쪽)의 ‘일곱 번째 파랑’(Das siebte Blau·2000년 초연)과 알렉산더 에크만(오른쪽)의 ‘선인장’(Cacti·2010년 초연)을 나란히 놓았다. 독일 베를린 슈타츠발레단을 이끄는 슈푹은 ‘죽음과 소녀’를 처음 들었던 기억을 먼저 떠올렸다. 여덟 살 무렵 여름방학에 우연히 들은 음악이 살아가는 내내 자신에게 되돌아왔다고 했다. 최근 서울 용산구에서 기자들과 만난 슈푹은 음악에 대해 “죽음에 두렵다는 느낌보다 아름답다는 감각을 주는 시적인 작품”이라면서 “음악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춤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 음악에 대한 존중을 드러내는 원칙이었다”고 소개했다. 음악이 전곡이 아니라 장면에 따라 부분만 흐르면서 “음악과 안무가 서로 대화하는 구성”을 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다소 우울”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밝은 부분을 보여주는 부분을 지나 마지막 순간은 재미있게 표현하고자 했다”며, “누구나 각자의 시간과 삶이 있고 그 안에서 감동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고 부연했다. ‘일곱 번째 파랑’이라는 제목은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나왔다. 무용수가 몇 명이냐(일곱 쌍), 좋아하는 색이 무엇이냐(파랑)는 물음이 그대로 남았다. 26년간 여러 발레단을 거치면서 정확한 재현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안무는 “박물관의 박제처럼 다루는 것”도, “정해진 답”도 아니라 “새로운 답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무용수들에 대해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질문하며, 배움에 목말라 있더라”면서 “내 춤을 추는 그들에게 내가 어떻게 화답할지, 무엇을 바꾸고 수용할지 기대된다”고 했다. 이번 공연은 아시아 초연이다. 에크만의 ‘선인장’은 예술을 규정하려는 태도를 겨눈다. 서면으로 만난 에크만은 “당시 소수의 평론가가 하룻밤 사이에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상처받은 취약함에서 출발했지만 나 자신을 포함한 시스템 전체를 웃어넘기고 싶었다”고 떠올렸다. “사람들이 의견을 갖는 건 당연하다”고 전제한 뒤 “예술적 경험처럼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고 규정하기 어려운 것까지 전문성을 내세우면서 위계를 만들고 확신을 과시하는 인간의 욕구를 직시했다”고 했다. 이어 16년이 지난 지금 그 권위는 사라진 게 아니라 흩어졌다고 진단하면서 “누구나 즉각 반응을 올리지만 무엇이 보일지는 알고리즘이 정한다. 때로는 알고리즘이 가장 강력한 비평가”라고 말했다. 무대 위 선인장에 대해서는 해석을 사양했다. 작품의 의도대로 선인장의 의미를 찾으려는 태도는 “함정이라기보다 거울”이라며 “공식적인 의미를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웃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철저한 진지함 속에 유머”를 두고, 공연은 “빠른 속도감과 강한 리듬”으로 무장하는 게 그의 작업 방식이다. 스마트폰에 매몰된 현대인을 풍자한 ‘해머’(지난해 11월), 집단적 최면과 광기를 그린 ‘한여름 밤의 꿈’(6월)으로 국내 관객에게 보여준 그의 작품 철학은 이번에도 이어진다. ‘일곱 번째 파랑’에는 강효정 드레스덴 젬퍼오퍼발레단 수석무용수와 임수정 취리히발레단 솔리스트가 무대에 오른다. ‘선인장’에는 이상은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 리드 수석과 리앙 시후아이 서울시발레단 발레마스터가 함께한다. 이번에는 콰르텟21과 엘랑콰르텟이 ‘죽음과 소녀’를 연주한다.
  • AI·문학 품은 클래식… ‘여기 그리고 지금’ 오늘을 듣다

    AI·문학 품은 클래식… ‘여기 그리고 지금’ 오늘을 듣다

    고전과 이 시대의 음악 현장 결합카프카 일기·편지, AI영상과 선봬보스트리지, 말러 실내악으로 편성버넷 남매, 윤이상 ‘투게더’ 등 연주 현악오케스트라 세종솔로이스츠의 ‘힉엣눙크! 뮤직 페스티벌’(힉엣눙크!)이 오는 25일 아홉 번째 막을 올린다. 2017년 도심형 여름 음악 축제로 시작한 ‘힉엣눙크!’는 라틴어 ‘여기 그리고 지금’을 뜻하는 이름대로 동시대 음악 현장을 짚어 왔다. 이번 페스티벌은 기술과 창작의 결합을 보여주는 비주얼 아티스트 데이비드 사우더의 ‘AI(인공지능) 살롱’으로 개막해 9월 3일까지 아티스트 44명이 다양한 형식의 공연을 펼친다. 26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는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와 세종솔로이스츠가 2023년 국내 투어 이후 3년 만에 다시 함께 무대에 선다. 구스타프 말러의 ‘소년의 이상한 뿔피리’와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를 실내악 편성으로 부른다. ‘소년의 이상한 뿔피리’를 가장 사랑하는 곡으로 꼽는 그는 2018년 음반 ‘레퀴엠: 전쟁의 연민’에서 뿔피리 연작의 군대 가곡을 파고든 이력이 있다. 그의 목소리와 해석에 집중할 수 있는 현악 앙상블 버전 앞뒤에 말러가 편곡한 루트비히 판 베토벤 ‘세리오소’와 로베르트 슈만 현악 사중주 1번이 감싼다. 이날 공연은 지휘자 윤한결이 맡는다. 올해 100세를 맞은 헝가리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죄르지 쿠르탁의 ‘카프카-프라그멘테’를 융복합 공연으로 풀어낸다. 프란츠 카프카의 일기와 편지에서 추린 단문 40개를 짧은 악장으로 구성했다. 소프라노와 바이올린만으로 60분간 지탱하는 이 곡은 1987년 독일 비텐 초연 이래 극한의 기교로 이름나 있다. 이번 공연은 소프라노 서예리와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나드 푸의 연주에 사우더의 AI 영상과 안무가 캐롤 아미티지의 연출을 덧댔다. 27일 서울 강남구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 공연한다. 9월 1일 서울 용산구 일신홀에서 열리는 ‘젊은 비르투오소’는 바이올리니스트 데이비드 버넷과 더블베이시스트 니나 버넷이 꾸미는 듀오 리사이틀이다. 한국인 어머니와 폴란드인 아버지를 둔 남매 연주자로, 데이비드는 포르모사 콰르텟 단원으로 세계 주요 무대에서 활약하고, 미국의 클래식 상인 에이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를 수상한 니나는 현재 스토니브룩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남매 연주자는 바이올린과 더블베이스를 위한 곡인 윤이상의 ‘투게더’,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의 콘체르탄테, 조반니 보테시니의 그랑 듀오 콘체르탄테 등 클래식에서는 드문 바이올린-더블베이스 곡을 연주한다. 이 외에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인벤션 2·8·13번, 로베르트 슈만의 아다지오와 알레그로 작품번호 70 등 다채롭게 구성했다. 9월 2일에는 미국 줄리아드 음대 교수인 피아니스트 이소연이 클로드 드뷔시의 ‘비노의 문’, 로베르트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 작품번호 16번,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로미오와 줄리엣’ 등을 연주한다. 2024년 세계 초연했던 파올라 프레스티니 ‘어머니 달의 노래’를 아시아 초연으로 선보인다.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에서 공연한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 살롱 음악회에서 영감을 받은 살롱콘서트(8월 30일), 영유아 콘서트 ‘어머니께서 가르쳐주신 노래’(9월 2일)는 매진됐다. 두 차례에 걸친 사회공헌 프로그램 ‘찾아가는 음악회’를 진행하는 ‘힉엣눙크!’는 3일 이소연의 마스터클래스로 축제를 닫는다.
  • 황금빛 성채, 그 밀실 제단에 똬리 튼 오컬트적 탐욕

    황금빛 성채, 그 밀실 제단에 똬리 튼 오컬트적 탐욕

    유럽 영주의 성을 본떠 올린 최상류층 빌라 ‘프린츠하우스’, 출입구 양 옆에는 “굽실거리는 머리카락에 그윽하게 눈을 내리뜬 잘생긴 청년”과 “민머리에 눈썹이 희미하고 입술마저 얇아 섬뜩한 기운이 느껴지는 노인” 형상을 한 부조물이 자리한다(9쪽). 364㎡(약 110평) 규모 집 안에는 비상용 공간인 패닉룸이 있다. 쓸모없어 보이지만 거주자들에겐 “평당 1억원의 공간마저 낭비할 수 있는 여유”의 상징이기도 하다. 부모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혼자 남아 4층을 홀로 쓰는 선우는 세입자를 들이기로 했다. “눈 허연 광어 같은 죽음의 냄새”(18쪽)를 풍기는 ‘너’가 들어오면서 선우의 일상에 실금이 간다. 강지영의 신작 ‘프린츠하우스’는 전작 ‘살인자의 쇼핑몰’과 ‘심여사는 킬러’로 보여준 이야기꾼의 면모에 오컬트 호러의 문법을 더해 시선을 붙잡는다. 일상의 유채색 공포를 채집해온 교보문고 출판 브랜드 북다의 ‘앙스트(ANGST)’ 시리즈 세 번째 책이다. 선우 집의 이전 집주인 딸이던 세입자 ‘너’는 기괴하기 짝이 없다. 벽지 안에 있던 부적을 발견하더니 천주교 신자라며 십자가, 묵주, 성모상 등 온갖 성물을 탁자 위에 올려놨다. ‘너’의 가족사를 듣고 돌아온 선우는 성물이 부서지고 난장판이 된 집을 발견했다. 심상찮은 일을 겪은 선우는 친한 형님인 무당 한신에게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너’의 실체는 고독(蠱毒), “독을 가진 생물을 독 안에 모아 서로 다투고 죽이길 기다렸다 살아남은 한 마리로 강한 저주를 걸 수 있는 영적 무기”(91쪽)다. 원과 한을 응축시킨 “최종형의 고독은 본래의 외형을 잃어”(92쪽) 무엇으로든 변신한다. 그 본거지가 되어준 곳이 프린츠하우스다. 작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고독은 탐욕을 상징하는 마몬이 되고, 무속의 부적은 라틴어 구마경으로 번역된다. 한국식으로 읽으면 부정한 뜻이 되는 이름을 물려받은 구마사제 이사악이 등장하면서 ‘동서양이 만나는 오컬트 호러’(서미애 소설가의 평)가 된다. 패닉룸의 용도, ‘너’와 한신의 본체, 프린츠하우스 거주자들의 역할, 출입구에 놓은 두 조각상의 의미 등 곳곳에 뿌려놓은 소재를 하나하나 건져 올리며 초자연적인 공포를 완성한다. 성욕, 지배욕, 돈과 계급을 향한 권력욕 등 온갖 욕망을 발화하는 프란츠하우스는 퇴마와 굿으로 정화되는 듯 보인다. “불티가 튄 집과 불티를 품은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발아”(276쪽)하는 법. 소설이 말하는 공포의 근원은 책장을 덮은 뒤에 비로소 제 얼굴을 드러낸다.
  • 세계의 K별들 돌아온다… 8월 발레 극장 설렘 경보

    세계의 K별들 돌아온다… 8월 발레 극장 설렘 경보

    한 무용수를 위해 맞춤 제작한 작품에는 각별함이 있다. 몸의 쓰임과 감정 연기까지 살핀 안무가가 애정으로 빚어낸 결과라 그렇다. 지난주말 서울 예술의전당과 나루아트센터에서는 해외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무용수를 위한 세계 초연작이 나란히 무대를 채웠다. 2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막을 내린 ‘우리 시대 에투알 2026’은 파리오페라발레(POB) 에투알(수석무용수) 박세은의 큐레이션에 이탈리아 라스칼라발레단 에투알 니콜레타 마니, 미국 뉴욕시티발레 수석무용수 타일러 펙 등이 합류한 무대다. 문을 연 ‘달빛’은 POB 전 에투알이자 안무가인 장 기욤 바르가 박세은에게 헌정한 솔로 무용작으로, 클로드 드뷔시의 음악에 피아니스트 손정범이 라이브로 함께했다. 박세은이 “숨을 쉬면서 편안하게 출 수 있는 춤”이라 소개한 대로, 테크닉 대신 음악의 결을 따라간 솔로는 뒤이은 화려한 파드되들과 온도 차를 선명하게 만들었다. ‘호두까기 인형’과 ‘백조의 호수’, ‘춤 모음곡’에 ‘라바야데르’로 이어지면서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발놀림의 프랑스, 테크닉의 기준이자 드라마의 정석인 이탈리아, 속도와 음악성을 앞세운 미국 신고전주의라는 세계 발레의 세 축을 한 무대에서 견줄 수 있었다. 나루아트센터에서 열린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에선 독일 드레스덴 젬퍼오퍼발레단 세컨드 솔리스트 정서현이 ‘원 플러스 원’을 초연했다. 그를 가장 잘 아는 같은 발레단 리허설 디렉터 겸 안무가 허용순은 토슈즈를 벗은 정서현의 표현력이 어디까지 뻗는지를 경쾌하게 드러냈다. 두 공연으로 시작한 8월, 발레의 밀도는 한층 높아진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선 서울시발레단 창단 2주년 기념작 ‘죽음과 소녀’(14~16일)가 오른다. 한 주제로 두 작품을 묶은 더블빌로, 올해 초연 200주년을 맞은 프란츠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를 공통분모 삼아 크리스티안 슈푹의 ‘일곱 번째 파랑’(아시아 초연)과 알렉산더 에크만의 ‘선인장’을 교차한다. 젬퍼오퍼발레단 수석무용수 강효정이 주역을, 취리히발레단 솔리스트 임수정이 특별 출연을 맡는다. 같은 날 유니버설발레단과 예술의전당이 공동 기획한 ‘백조의 호수’가 막을 올린다.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음악에 마리우스 프티파·레프 이바노프의 안무를 얹은 정통 판본으로, 11회에 여섯 커플이 오페라극장을 장식한다. 마린스키발레단 퍼스트 솔리스트 전민철이 16·19일 객원 주역으로 홍향기와 짝을 이룬다. 21~23일엔 한예종 무용원 개원 30주년 기념 공연 ‘리: 무브 에라(RE : MOVE ERA)’가 해오름극장에서 이어진다. ‘백조의 호수’를 마친 전민철이 마린스키 선배이자 수석무용수 김기민과 나란히 선다. 모나코 몬테카를로 수석무용수 안재용, 워싱턴발레단 이은원,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 솔리스트 한성우·박선미도 재학생과 함께한다. 현대무용과 한국 창작춤으로 채운 22~23일 무대까지, 예약 서버를 마비시킬 만큼 관심이 쏠렸다. 안재용은 앞서 8일 강동아트센터 소극장 드림에 선다. 개관 15주년 기획 ‘최태지의 발레 오픈 리허설-를르베: 다시, 무대 위로’에서 국립발레단을 거쳐 같은 발레단에서 뛴 윤혜진과 몬테카를로의 대표 레퍼토리 ‘도베 라 루나’를 춘다. 한국발레협회 ‘K발레월드’는 예년보다 한 달 앞당겨 25~30일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열린다.
  • ‘백조 왕자’부터 ‘극장의 마법사’까지…강동아트센터에서 채우는 8월

    ‘백조 왕자’부터 ‘극장의 마법사’까지…강동아트센터에서 채우는 8월

    강동문화재단이 가족 관객을 위한 공연과 전시로 8월의 극장을 채운다. 8월 8일 서울 강동구 강동아트센터 소극장 드림에서 ‘최태지의 발레 오픈 리허설’ 첫 번째 무대로 ‘를르베(Relevé): 다시, 무대 위로’가 오후 3시와 6시 두 차례 열린다. 시연과 토크를 곁들여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예술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기획으로 지난해 첫선을 보인 공연은 전석 매진되며 큰 관심을 끌었다.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를 지낸 발레리나 윤혜진이 첫 게스트로 나선다. 윤혜진은 몬테카를로 발레단 안재용과 장크리스토프 마이요의 ‘도베 라 루나’를 선보이고, 국립발레단 이영철·조연재, 전 스페인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이은수가 이영철이 안무한‘소성(燒成)’ 등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8·9일 대극장 한강에선 와이즈발레단 ‘백조 왕자’를 공연한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를 옮긴 국내 창작 초연으로, 마녀의 저주로 백조가 된 여섯 오빠를 구하려 침묵의 맹세를 지키는 막내 엘리제의 이야기다. 가족애와 희생, 용기를 발레의 움직임으로 풀어내고 프란츠 슈베르트의 현악 5중주, 중세 유럽풍 무대와 의상을 더했다. 양일 오후 3시에 공연하며, 48개월 이상 관람 가능하다. 독립운동가 박덕배의 시간을 따라가는 극단 명작옥수수밭의 연극 ‘세기의 사나이’가 14일 오후 7시 30분, 15일 오후 3시에 대극장 한강에 오른다. 3·1운동부터 한국전쟁까지 훑는 작품으로, 웹툰을 넘기는 듯한 만화적 상상력이 특징이다. 2018년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초연했고 2026년 제4회 서울예술상 연극 부문 스팍 포커스상을 받았다. 21~23일 소극장 드림에서는 접근성 뮤지컬 ‘극장의 마법사’를 초연한다. 갈라파고스 거북이를 이야기하며 감동을 준 ‘해리엇’에 이어 두 번째로 제작한 접근성 공연이자, 강동아트센터 곳곳을 누비며 극장을 이해하도록 한 ‘극장의 도로시’ 세계관을 잇는 스핀오프다. 신인 배우 도로시가 조명·음향·영상 등 극장의 ‘마법사’들을 만나는 여정을 수어통역과 한글 자막, 음성해설로 전달한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무장애 문화향유 활성화 지원사업 선정작이다. 22·23일 오후 5시 대극장 한강에서는 주소연 음악감독의 첫 단독 콘서트 ‘주소연의 디어 마이 뮤직(Dear My Music)’이 열린다. ‘어쩌면 해피엔딩’, ‘번지점프를 하다’, ‘키다리 아저씨’ 등의 넘버를 11인조 오케스트라와 밴드 편성으로 들려준다. 정욱진, 유주혜, 홍지희, 신재범, 이봄소리 등 뮤지컬 스타들이 게스트로 나선다. 이탈리아 그림책 작가 쥬세뻬 비탈레의 ‘동물의 세계’ 전시는 23일까지 아트랑에서 열린다. 원화와 드로잉, 조형물에 미디어아트와 참여형 프로그램을 더했다. 작품들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강동문화재단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책꽂이]

    [책꽂이]

    극우의 신화 일본(호사카 유지 지음/책이라는신화) 윤석열·김건희 부부와 가까운 무속인 전성배 씨를 수사하다 전 씨가 일본의 신 ‘아마테라스’를 모신다는 게 밝혀지면서 구설이 돌았다. 한일 관계를 심도 깊게 연구해온 호사카 유지 고려대 특임교수가 일왕가의 기원이자 일본이라는 나라의 탄생을 상징하는 아마테라스와 일본 극우와의 관계를 파헤쳤다. 호사카 교수는 지금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를 비롯한 극우 세력이 1945년 패전 이전으로 돌아가려 시도 중이며, 한국을 군사적으로 이용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356쪽. 2만 2000원. 우리는 혼자 늙지 않는다(봄봄 지음/낮은산) 2003년 2월 전주 여성의전화 비혼 여성 소모임에서 출발한 공동체 ‘비혼들의비행(비비)’의 지난 20년 발자취를 담았다. 여성단체 활동가, 공무원, 회사원 등 30대 여성 직장인 6명에서 출발한 비비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오해를 받았는지 등을 비비의 일원으로 살아온 저자가 솔직하게 적었다. 자기 돌봄에서 시작해 서로의 삶을 지지하며 함께 나이 들어가는 여성들의 주거·돌봄·노년 공동체가 갈 길 잃은 비혼 여성들의 이정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56쪽. 1만 8000원. 엘리베이터에 갇힌 고고학자(테오도로스 파파코스타스 지음/강경이 옮김/교양인)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두 명의 남성이 갇혔는데, 그중 한 명이 수다스러운 고고학자였다. 혼인하러 이집트로 떠나는 미노아 공주, 영웅들의 모험을 노래하는 호메로스, 만물의 변화를 통찰한 헤라클레이토스, 진리를 묻던 소크라테스를 거쳐 세계사의 경로를 바꾼 알렉산드로스 대왕,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 문화가 뒤섞여 고전주의 양식 탄생까지. 엘리베이터가 정상 작동할 때까지 고고학자가 350만 년 전 선사시대부터 로마제국까지 유머러스하게 풀어냈다. 384쪽. 2만 2000원. 피아노로의 여정(류이치 사카모토 지음/황국영 옮김/프란츠) 2023년 3월 타계한 세계적인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가 작고 전인 2021년 음악 학자들과 함께 피아노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았다. 1부 ‘피아노라는 악기와 음악을 이야기하다’에서는 사카모토가 어떤 피아노곡과 함께 성장했는지, 피아노와 어떠한 시간을 보내왔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2부 ‘피아노의 기원을 찾아서’에서는 사카모토와 음악학자가 국립음악대학 자료관을 방문해 피아노의 전신에 해당하는 악기들을 연주하고, 피아노 탄생의 역사를 되짚어 본다. 296쪽. 2만 3000원.
  • 뉴욕 현대음악 무대와 국악 프로젝트 잇는 작곡가 김정현, 미국에서 활동 이어가

    뉴욕 현대음악 무대와 국악 프로젝트 잇는 작곡가 김정현, 미국에서 활동 이어가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 중인 작곡가 김정현(Junghyun Kim)이 현대음악 공연과 국악 프로젝트, 영화 음악 작업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커리어를 구축하고 있다. 그는 40년의 역사를 지닌 뉴욕 현대음악 단체 ‘컴포저스 콘코던스(Composers Concordance)’에서 활동하며 진 프리츠커(Gene Pritsker), 댄 쿠퍼(Dan Cooper) 등 미국의 대표적인 현대음악 작곡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뉴욕의 상징적인 공연장 Drom NYC에서는 조쉬 워커(색소폰), 프란츠 하클(트럼펫), 로렌스 골드만(베이스) 등 현지 정상급 연주자들과 함께 자작곡 ‘Blue City’와 ‘Hennessey in New York’을 선보이며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 세계를 보여주었다. 타 예술 장르와의 융합 프로젝트에도 참여해 왔다. 화가 마크 코스타비(Mark Kostabi)의 시각 예술 작품을 음악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참여했으며, 금융가 출신 시인으로 알려진 로버트 C. 포드(Robert C. Ford)의 시 세계를 음악적 사유로 풀어내는 작업을 진행하며 사운드 아티스트로서의 영역을 넓혀 왔다. 국내외를 잇는 국악 현대화 작업도 이어가고 있다. 현대 국악 앙상블 굿모리(Good-Mori) 및 작곡가 권은실과의 협업을 통해, 전통 국악기에 현대적인 질감과 입체적인 음향 효과를 입히는 사운드 디자인 및 음향 아키텍처 설계를 총괄하고 있다. 최근 이집트에서의 공연 프로젝트에 참여한 데 이어, 미국과 한국 간의 온라인 협업 체계를 구축하여 오는 10월 정기공연을 준비 중이다. 아울러 그가 음악과 음향을 총괄한 단편영화 ‘메러비안의 법칙’은 플랫폼 무비블록에서 관객상을 수상하며 대중과의 교감 능력을 보여주었다. 김 작곡가는 뉴욕주립대학교 퍼체이스 캠퍼스(SUNY Purchase)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으며, 영화음악 프로그램으로 알려진 컬럼비아 컬리지 시카고(Columbia College Chicago)에서 전문 과정을 마쳤다. 이론과 실무, 순수 예술 역량을 갖춘 그는 현재 로스앤젤레스(LA)로 활동 기반을 확장했으며, “그간 쌓아온 음악적 훈련과 시도를 바탕으로 영화 및 미디어 분야에서 현대적인 사운드 디자인과 한국적 감성을 접목한 밀도 높은 음악 작업을 이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 여름에 만나는 ‘겨울 나그네’…괴르네·선우예권 “외로운 시대를 위한 노래”

    여름에 만나는 ‘겨울 나그네’…괴르네·선우예권 “외로운 시대를 위한 노래”

    오는 2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59)와 피아니스트 선우예권(37)이 프란츠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1827)를 연주한다. 실연의 아픔을 겪는 젊은이의 방황과 고독을 그린 빌헬름 뮐러의 시에 곡을 붙인 24개 가곡으로 완성한 ‘겨울나그네’는 낭만주의 음악의 정점으로 여겨진다. 18일 그랜드 하얏트 서울에서 만난 괴르네는 ‘겨울나그네’에 대해 “전 세계 어디에서든, 어떤 문화와 언어를 갖든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 청중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주제와 이야기를 담은 위대한 작품”이라고 칭송했다. “슈베르트와 뮐러는 인간 내면에서 지성과 영혼을 발견하게 만드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던 것 같다”면서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매우 혁명적”이라고 덧붙였다. 괴르네는 “독일 가곡의 선도적인 해석가”(시카고트리뷴), “어둡게 매혹적인 목소리”(뉴욕타임스)를 가진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성악가 중 한 명”(보스턴글로브)으로 평가받는다. 국제클래식음악상(ICMA), 디아파종 도르, 그라모폰상, 에디슨 클래식상 등을 수상했고 미국 음악상인 그래미상에도 여러 차례 후보에 올랐다. 클라우디오 아바도, 크리스토프 에센바흐, 마리스 얀손스, 파보 예르비 등 거장 지휘자들과 협업했다. 특히 ‘겨울나그네’로는 가히 독보적인 이력을 쌓고 있다. 영국 클래식 음반 레이블인 하이페리온이 오랜 기간 제작한 슈베르트 성악곡 전곡 앨범 ‘슈베르트 에디션’에 참여했고, 이 시리즈 중 ‘겨울나그네’는 1997년 타입지가 선정한 ‘올해의 베스트 음반’에 꼽혔다. ‘백조의 노래’로 에디슨상을, ‘마왕’으로 국제클래식음악상을 품에 안았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참여한 ‘2026 여름에 듣는 겨울나그네’ 공연은 한세예스24문화재단이 2024년부터 추진한 ‘한세 클래식 리트’(고전 가곡) 프로젝트로 선보이는 자리다. 2년 전 같은 형식 공연에서 바리톤 벤야민 아플과 피아니스트 사이먼 래퍼가 젊은 예술가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면 이번에는 노련함과 깊이를 더한다. 다섯 살 무력 처음 슈베르트 음악을 접했다는 괴르네는 “바흐 다음으로 중요한 장곡가”라며 “슈베르트가 없었다면 성악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 했다. 지금까지 250회 넘게 불러왔는데 오늘날 더 절실하다고 말했다. “거대한 사회를 이루고 살지만 너무 많은 일과 부족한 소통 탓에 우리는 외롭습니다. 한 식탁에 앉은 가족이 저마다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더군요. 인공지능은 우리를 더 침묵하게 만들 겁니다.” 비록 작품은 겨울의 고독과 어둠을 그리지만 “악몽 같은 어둠”이 아니라 “저 멀리 보이는 빛을 향해 걸어가는 어둠”이라고 했다. 마지막 곡 ‘거리의 악사’는 방랑자가 연주하는 늙은 악사와 함께 떠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의 주인공은 물속으로 뛰어드는 결말을 선택하는 것과 비교하며 “이 곡의 주인공은 죽음을 택하지 않는다. 끝내 누군가를 만나리라 믿는다”고 희망 섞인 설명을 덧댔다. 그러면서 “37년간 이 노래를 불러왔지만 해석의 방향을 바꾼 적은 없다. 대신 세월과 경험의 층을 한 겹씩 더해갈 뿐”이라고 부연했다. 괴르네와 선우예권은 지인의 소개로 만나 교류해오다 처음 한 무대에 서게 됐다. 올가을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과 미국 투어도 한다. 이날 동석한 선우예권은 “오래 존경해온 음악가의 섬세한 뉘앙스와 다이내믹을 바로 곁에서 듣는 일이 큰 축복”이라면서 “수십 년간 이 곡을 탐구해온 연륜을 느낄 수 있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가곡에 대해 “시와 음악이 만나는 가장 친밀하고 내면적인 장르”라며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는 독주와 달리, 곁에서 함께 호흡하며 나누는 대화 같아 더 가슴에 와닿는다”고 덧붙였다. 괴르네가 “단발성 공연이 아니라 100살이 될 때까지 함께 공연하고 싶다”고 하자 선우예권은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두 사람은 아끼는 곡으로 21번 ‘여인숙’을 꼽았다. 괴르네는 묘지를 떠올리게 하는 코랄 선율을 들어 “마침내 쉬려 하지만 자리가 없어 다시 길을 나서는 장면”이라 짚었고, 선우예권은 “화성의 진행과 반음계의 연결이 마음을 움직인다”고 했다. 괴르네는 좋은 협연의 비결로 ‘자유’를 꼽았다. “피아니스트가 찰나에 내 호흡을 읽어낼 때 큰 해방감을 느낀다”는 그는 “프로끼리는 음악을 말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함께 만들어갈 뿐이다”라고 협연에 대한 기대감을 설명했다. 선우예권도 “서로 유연성을 갖고 작업하기 때문에 늘 굉장히 다른 음악들이 나오는 것 같다. 이번 공연에도 어떤 노래와 음악이 흘러나올지 굉장히 기다려진다”고 거들었다. 24곡 전곡을 연주하는 공연은 인터미션 없이 100분간 이어진다. 지연 입장은 허용되지 않는다.
  • 차악을 선택한 영웅, 약소국의 총독이 제국의 칼이 된 이유 [한ZOOM]

    차악을 선택한 영웅, 약소국의 총독이 제국의 칼이 된 이유 [한ZOOM]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 그 중심에 위치한 ‘반 옐라치치 광장’은 언제나 생동감이 넘친다. 광장 앞을 지나는 푸른색 트램, 노천카페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가운데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한 남자의 기마상이 있다. 그는 크로아티아의 국민적 영웅, ‘반 요시프 옐라치치(1801~1859)’ 백작이다. 당당하게 칼을 거머쥔 모습은 영락없는 영웅이지만, 역사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그 칼끝에 서린 고독하고도 잔인한 리더의 고뇌가 읽힌다. 그는 약소국의 생존을 위해 ‘제국의 칼’이 되기를 자처했던 현실적인 리더였다. ●‘마자르족만의 자유’ 크로아티아의 소멸 위기 1848년 프랑스에서 시작된 2월 혁명으로 전 유럽에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물결이 퍼져 나갔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마저 흔들었다. 이 혼란을 기회로 헝가리에서는 ‘코슈트 러요시(1802~1894)’를 중심으로 독립혁명이 일어났다. 그 명분은 분명 헝가리의 자유주의 혁명이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총독 옐라치치의 생각은 달랐다. 그에게 헝가리 독립혁명은 그들만의 허울 좋은 명분일 뿐 크로아티아를 집어삼키려는 의도가 보였다. 실제로 헝가리 혁명정부는 자신들의 독립을 외치면서도 정작 제국 내 자신들의 영토에 속해 있던 크로아티아의 민족주의는 철저히 탄압했다. 헝가리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강요하는 ‘마자르화’ 정책을 고수했고, 크로아티아의 자치권조차도 인정하지 않았다. 정리하면 옐라치치에게 헝가리의 자유주의란 ‘마자르족만의 자유’이며 동시에 ‘크로아티아의 소멸’을 의미했다. ●제국의 칼이 된 총독의 선택 결국 옐라치치는 실리적 결단을 내렸다. 당시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독립혁명 세력이 아니라, 구시대를 유지하고자 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손을 잡았다. 비유하자면 헝가리라는 포식자를 막기 위해서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더 큰 포식자의 사냥개가 되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1848년 9월 옐라치치는 크로아티아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 영토로 진격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빈디슈그레츠’ 장군과 연합하여 헝가리 독립혁명군을 격퇴하는 선봉장이 됐다. 크로아티아를 지키기 위해 독립혁명을 방해한 사냥개라는 오명을 감당하는 차악(次惡)을 택한 고독한 결단이었다. ●토사구팽 그는 목숨을 바쳐 헝가리 독립혁명군으로부터 합스부르크 왕가를 구해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온 청구서는 가혹했다. 오스트리아 제국 신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대군을 파병한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1세에 대해서만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크로아티아의 희생과 헌신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나아가 내무장관 ‘알렉산더 폰 바흐’를 앞세워 오스트리아 제국 전체를 하나의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로 묶어버렸다. 합스부르크 왕가를 구해낸다면 그 보답으로 자치권을 일정 부분 인정받을 것이라는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오히려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방적인 통제를 받는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유럽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확산이라는 ‘명분’을 버리고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동맹을 맺는 ‘실리’를 선택했으나, 상대가 더 거대한 강대국일 때 약소국의 리더가 마주해야 하는 외교적 한계이자 비극적인 결말을 맞닥뜨린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헝가리에게는 원수가 됐고, 오스트리아에게는 철저히 이용만 당한 셈이다. ●꺼뜨리지 않은 불씨 그렇다면 옐라치치의 선택은 과연 실패한 리더십이었을까. 결코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비록 결말은 씁쓸했지만 크로아티아는 그때부터 역사적 기반을 다졌다. 그는 신분제 의회인 ‘사보르’를 근대적으로 개혁하고 총선거를 도입하여 민중의 목소리를 제도화했으며, 봉건적 농노제를 전격 폐지하여 민중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또한 크로아티아어를 공용어로 정착시켜 민족의 근간을 지켜냈다. 거대한 제국들의 싸움 속에서 다음 세대가 살아남아 훗날 독립을 도모할 수 있는 불씨를 지켜낸 그는 크로아티아의 국부(國父)로서 존경받고 있다. 이것이 이곳 자그레브 광장의 활기차고 생동적인 기운 가운데서 칼을 들고 있는 옐라치치의 기마상을 보는 것이 가볍지만은 않은 이유다. 오늘날 우리는 매 순간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명분과 실리, 가치와 생존을 각각 저울에 두고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에 따라 자신과 가족, 나아가 민족의 생존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고독한 선택을 해야 할 수도 있다. 기마상 위에 앉아 있는 옐라치치가 되살아나 묻는 것만 같다. “그대는 생존을 위해 어디까지 고독해질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선택의 무게를 감당할 준비는 되어 있는가.”
  • “오래 살고, 젊게 죽을 것”… ‘영원한 청춘’ 첼로 거장의 40년 한국 사랑

    “오래 살고, 젊게 죽을 것”… ‘영원한 청춘’ 첼로 거장의 40년 한국 사랑

    “韓 관객 놀라워… 올 때마다 기대자녀와 함께 연주, 젊어지는 기분제자 장한나, 뭐든 110% 할 사람음악가 차이는 겉모습 아닌 실체” 세계 클래식계에서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78)는 자신을 끊임없이 ‘젊은 사람’이라고 했다. 클래시컬 브릿지 국제 음악 페스티벌 참여차 한국을 찾은 그는 지난 2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기자들과 만나 “훌륭한 음악을 훌륭한 음악가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나 좋다”며 2년 만에 다시 방한한 이유를 소개했다. 그는 “한국에 처음 온지 40년쯤 된 듯한데, 올 때마다 정말 기대되고 다음 연주와 방문은 더 기대된다”면서 “한국 관객들은 놀랍다”고 부연했다. 2018년 미국 뉴욕에서 출범한 페스티벌은 서울, 프랑스 파리와 보르도에서 열리며 도시와 음악가를 음악으로 이어왔다. 수십년 경력을 지닌 거장과 성장하는 젊은 연주자가 한 무대에서 세대를 가로지르는 대화를 나누는 게 페스티벌의 핵심이다. 마이스키는 4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아들 사샤(바이올린), 딸 릴리(피아노)와 함께 프란츠 슈베르트의 ‘가곡의 밤’ 시리즈, 요하네스 브람스의 피아노 삼중주 1번을 연주하며 페스티벌의 문을 연다. 7일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에서는 마이스키와 오귀스탱 뒤메이(바이올린), 리다 첸(비올라), 리드 테츨로프(피아노), 에드가 모로(첼로) 등 세대가 어우러져 브람스의 현악 6중주 1번, 피아노 4중주 3번을 공연한다 세대를 넘나드는 협연에 대해 그는 “젊은 음악가들과 연주할 때마다 편안한 느낌과 함께 내가 무척 젊어지는 기분이 든다”면서 “외모야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마음만큼은 변함없이 젊다”고 웃으며 말했다. 젊은 음악가들에게 하는 조언도 “젊게 살아라”라고 했다. “내 꿈은 ‘오래 사는 것, 그러나 젊게 죽는 것”이라는 농담 같은 거장의 한마디는, 평생 음악과 함께해온 그의 삶의 태도를 압축한 말이기도 하다. 마이스키는 최근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부임한 첼리스트 장한나의 스승이기도 하다. 장한나는 열 살 때부터 마이스키에게 배웠고 2년 후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장한나도 자신의 삶을 바꾼 사건으로 마이스키를 만난 일을 꼽는다. 마이스키는 장한나에 대해 “다재다능하고 무엇이든 110%를 해내는 사람”이라며 새로운 도전을 응원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훌륭한 첼리스트이니 첼로 연주도 계속 들려주었으면 한다”는 바람도 남겼다. 화려한 첼로 케이스에 시선이 집중되자 그는 “이건 외적인 요소일 뿐”이라며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들어있는 악기, 그리고 그것을 연주하는 일”이라고 거장다운 설명을 덧댔다. “음악가도 마찬가지예요. 차이를 만드는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그 안의 실체입니다.”
  • “음악 안에서 모두가 어린아이”…세대·문화 잇는 ‘클래시컬 브릿지 페스티벌’

    “음악 안에서 모두가 어린아이”…세대·문화 잇는 ‘클래시컬 브릿지 페스티벌’

    6월 4~12일 서울과 고양에서거장과 신예 예술가 한 무대에 국경을 넘나들고 세대를 연결하는 클래시컬 브릿지 국제 음악 페스티벌이 여섯 번째 시즌을 맞는 올해는 서울 예술의전당과 롯데콘서트홀, 고양아람누리 등에서 관객들을 만난다. 오는 4일부터 12일까지 21명의 아티스트가 7회 공연을 펼친다. 피아니스트 클라라 민 예술감독은 2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세대와 세대 간의 연결, 다른 문화 간의 연결, 그리고 음악과 다른 비즈니스 영역 간의 연결까지 생각해서 ‘브릿지’라는 이름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2018년 미국 뉴욕에서 출범한 페스티벌은 서울, 프랑스 파리와 보르도에서 열리며 도시와 음악가를 하나의 음악적 언어로 이어왔다. 수십 년의 경력을 지닌 거장과 성장하는 젊은 연주자가 한 무대에서 세대를 가로지르는 대화를 나누는 게 페스티벌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번 페스티벌 공연에는 피아니스트 미하일 플레트네프, 바이올리니스트 오귀스탱 뒤메이,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등 거장들이 첼리스트 고티에 카퓌송과 에드가 모로, 바이올리니스트 다니엘 로자코비치 같은 젊은 세대와 한 무대에 선다. 오랜 세월 세계 무대에 서 온 마이스키는 이 무대에 대해 “훌륭한 관객 앞에서 훌륭한 연주자들과 음악을 나누는 것은 연주자에게 매우 특별한 기쁨이다. 그래서 이 초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고 답했다. 2024년 서울에서 열린 페스티벌에서도 한국 관객을 만난 그는 “한국은 조금은 미스테리하고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되는 나라”라고도 표현했다. 이날 간담회에 함께한 비올리스트 리다 첸은 한국 클래식 관객 특유의 활기를 거론하며 “세계 어디서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은 아니다”라고 거들었다. 이어 세대를 연결하는 페스티벌을 소개하며 “나이 들어 종종 잊어버리는 것이 바로 장벽 없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인데 젊은 음악가들은 그것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어린 연주자들에게서 놀랄 만큼 많은 것을 배운다”고 부연했다. 마이스키, 아들·딸과 개막 공연마이스키는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아들 사샤(바이올린), 딸 릴리(피아노)와 공연하는 리사이틀로 페스티벌의 문을 연다. 프란츠 슈베르트의 ‘가곡의 밤’ 시리즈와 요하네스 브람스의 피아노 삼중주 1번을 연주한다. 5일에는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에서 뒤메이, 알리사 마르굴리스, 에릭 실버거(이상 바이올린), 윤진원(비올라), 모로, 클라라 민, 다비드 카두시(피아노)가 무대에 올라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3번, 모리스 라벨 ‘어미 거위 모음곡’, 로베르트 슈만의 피아노 5중주를 선보인다. 다음날 같은 장소에서 이창형(더블베이스), 조동현(클라리넷) 등이 합류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병사의 이야기’,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3중주 2번, 프란츠 슈베르트 피아노 5중주 ‘숭어’를 합주한다. 이어 7일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에서는 마이스키와 첸, 뒤메이, 모로 등 세대가 어우러져 브람스의 현악 6중주 1번, 피아노 4중주 3번을 공연한다. 첸의 아들 다비드 첸은 10일 예술의전당 인춘아트홀에서 루카 시시와 폭넓은 피아노 레퍼토리를 선사한다. 슈베르트, 프레데리크 쇼팽, 페루초 부소니,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새뮤얼 바버 등 여러 작곡가의 피아노곡을 프로그램에 담았다. 다비드에게는 한국 데뷔 무대이기도 하다. 플레트네프가 이끄는 라흐마니노프 인터내셔널 오케스트라와 다니엘 로자코비치(바이올린)는 11일 롯데콘서트홀, 1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시 ‘바위’와 플레트네프가 작곡한 ‘라흐마니아나’를 연주한다. 12일 공연에는 카퓌송, 엘렌 메르시에(피아노)도 함께하며 베토벤 3중 협주곡을 연주한다. 첸의 피아니스트 아들도 한국 무대에전설적인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딸이기도 한 첸은 “모든 것이 잘 진행된다면 올해 안에, 아마도 대만에서 어머니, 제 아들과 3대가 공연하게 될 듯하다”면서 “어머니와 아들이 프란시스 풀랑크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을 연주하고 제가 지휘할 예정”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자녀와 함께 연주하는 음악가는 많지만, 손주와 함께 연주하는 경우는 드물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민 예술감독은 페스티벌에 동참하는 음악가들에 대해 “실력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이 서로에게 열린 마음과 진정성”이라면서 “실내악은 서로를 들어줘야 하는 음악이기 때문에, 음악 안에서 겸손해지는 마음을 가진 이들과 함께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음악 안에서는 모두 아이들이고, 넓은 의미에서 친구들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클라라 민 예술감독이 그리는 미래는 단순한 음악회를 넘어선다. 그는 “클래시컬 브릿지를 문화 플랫폼으로 만들고자 한다”며 “예술과 비즈니스가 융합된 형태로, 내년부터는 칸을 중심으로 한 여름 페스티벌과 9월부터 6월까지 여러 도시에서 열리는 미니 버전을 병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여든, 한곳만 바라본 거장…여기, 한결같이 지킨 관객

    여든, 한곳만 바라본 거장…여기, 한결같이 지킨 관객

    80번째 생일·데뷔 70년 리사이틀나직이 담아 낸 슈베르트·브람스절제할수록 더 또렷해지는 음색“이젠 피아니스트라 말할 수 있어관객 한 분 한 분이 나의 수호천사” 앞서 달리지도, 무언가에 이끌리지도 않는 노(老)연주자에게서 예술을 대하는 태도를 배운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형식에 집중한다. 차분한 리듬과 또렷한 음색으로 내면의 시(詩)를 소리로 표현한다. 그렇게 완성된 음악은 어딘지 영적인 구석이 있다. 무한을 향한 고조, 우주적인 떨림. 지난 10일 80번째 생일을 맞은 ‘건반 위의 구도자’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같은 날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다. 팔순의 연주자에게서는 버거운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다만 피아노 앞에 앉아 평생에 걸쳐 탐구했던 음악이 어떤 것이었는지 나직이 들려줄 뿐이었다. 백건우의 선택은 슈베르트 그리고 브람스였다. 프란츠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3번’(1부)과 ‘피아노 소나타 20번’(2부) 그리고 요하네스 브람스 ‘4개의 발라드’(1부)가 연주됐다. 슈베르트의 작품이 두 곡이나 포함됐다. 백건우는 공연에 앞서 올해 탄생 80년과 데뷔 70년을 기념해 슈베르트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왜 슈베르트였을까. 백건우 자신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늘 내 안에 있었던 것, 내가 곡을 선택한 게 아니라 곡이 나를 선택했다”고 밝힌 바 있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3번’이 시작됐다. 아주 잠깐 들었을 뿐인데도 명징하고 우아한 음색의 힘이 느껴진다. 우수를 표현하는 것 같으면서도 대단히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또렷하게 다가올 뿐이었다. 감정을 완벽하게 통제한 예술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브람스 ‘4개의 발라드’에서 백건우는 형식과 감정의 관계를 질문하게 했다. 예술은 형식과 감정의 조화지만, 우리는 때때로 감정에 휩쓸린다. 백건우의 연주는 마치 ‘그럴 땐 형식에 집중해 봐’라고 말하는 듯했다. 인터미션 이후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0번’이 시작됐다. 한마디로 ‘쓸쓸함으로 충만했던’ 역설적인 연주였다. 절제된 연주 속에서 오히려 진한 감정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2악장에서 영혼을 건드리는 듯한 나직한 선율을 들려줬다면 3악장에서는 약동하는 생명의 힘을 느끼게 했다. 마치 새와 나비의 날갯짓에 질서를 부여하는 듯했다. 새삼 그의 별명이 ‘건반 위의 구도자’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의 연주는 한없이 차분하지만, 한발 한발 영적인 고양을 향해 나아가는 느낌을 줬다. 공연이 끝나고 앙코르 대신 조금 특별한 시간이 마련됐다. 커튼콜 중 열렬한 환호와 박수를 받은 백건우의 품에 꽃다발과 함께 편지가 주어졌다. 그는 자신의 ‘팔순 잔치’에 초대된 관객들에게 전할 말을 미리 준비한 듯했다. 백건우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소개할 때 늘 어색했는데, 오늘로서 팔십이 되니까 이제 ‘피아니스트 백건우’라고 해도 될 것 같아요. 80년은 짧고도 긴 시간입니다. 개인도, 나라도 겪어야 할 것도, 겪지 말아야 할 것도 많이 겪었지요. 우리는 늘 선택의 순간 앞에 서 있지요. 혹시 여러분은 수호천사를 믿습니까? 제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건 소리 없이 나타나지 않으면서 저를 지켜준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수호천사는 바로 여기에 계신 여러분 한 분 한 분입니다. 감사합니다.”
  • “리스트는 넘어야 할 산… 피아노로 노래하고 싶었죠”

    “리스트는 넘어야 할 산… 피아노로 노래하고 싶었죠”

    베를린 성당서 녹음… 11곡 수록“기교 너머의 서정 보여 주고 싶어” 피아니스트 선우예권(37)은 헝가리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1811~1886)를 “넘어야 할, 넘어서고 싶은 산”처럼 느낀다고 했다. 중학생 때는 기교를 보여줄 수 있어 많이 쳤지만 20대에 들어서는 오히려 너무 과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거의 치지 않았다. 30대가 돼 다시 리스트를 찾았다. “리스트의 화려한 곡들 속에 담긴 인간적인 목소리와 서정성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서울 영등포구 신영체임버홀에서 기자들과 만난 선우예권은 3년 만에 내는 새 음반 ‘리스트’에 대해 “새로운 발견”이라는 표현을 꺼냈다. 음반 수록곡 ‘리골레토 패러프레이즈’와 ‘헌정’을 연주한 그는 “피아노로 노래를 한다는 주제 안에서 많이 고민하며 프로그램을 구성했다”고 소개했다. 이번 음반은 그가 데카 레이블에서 발매한 세 번째 앨범이다. 첫 앨범 ‘모차르트’(2020)는 열다섯 살에 미국 유학을 떠나 첫 스승에게 배운 작곡가에 대한 헌정이었고, 두 번째 ‘라흐마니노프, 리플렉션’(2023)은 당시 감정 표현에 가장 자신 있던 작곡가에게 바친 결과물이었다. 세 번째 리스트는 “지금 내가 내는 소리, 터치, 색채와 가장 잘 맞는 작곡가”다. 음반에는 ‘사랑의 꿈’, ‘위안’, ‘헝가리안 랩소디 제2번’ 등 익숙한 리스트의 대표곡과 주세페 베르디 오페라를 바탕으로 한 ‘리골레토 패러프레이즈’, 로베르트 슈만의 ‘헌정’ 편곡, 프란츠 슈베르트 가곡을 편곡한 ‘물레 돌리는 그레첸’과 ‘물방앗간 청년과 시냇물’까지 총 11곡을 수록했다. 곡 배열에도 주제를 뒀다. 1~3번 트랙은 회상과 명상, 4~6번 가곡은 친밀한 속삭임, 7~8번은 유혹과 사랑의 감정, ‘리골레토’와 ‘메피스토’를 편곡한 9~10번은 “오페라 요소가 두드러진 악마적인 환상곡”이라고 설명했다. 마지막 곡 ‘헝가리안 랩소디’는 앨범 전체를 끌어안는 피날레다. 녹음은 독일 베를린의 한 성당에서 했다.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녹음 작업을 했던 공간으로도 알려진 곳이다. 그는 “교회 특유의 적절한 울림과 공간감이 살아 있었다”면서 “성당의 경건한 분위기가 오히려 집중력을 높여줬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고심 끝에 낸 음반 수록곡으로 15일부터 전북 익산예술의전당을 시작으로 대구, 경기 성남시, 경남 창원시·양산시, 울산, 서울에서 리사이틀 투어를 한다. 2017년 한국인 최초로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세계 무대에서 입지를 다져온 그이지만 “투어를 앞두고 긴장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다”며 의외의 모습도 보였다. 공연에선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슈베르트와 리스트를 한 무대에 올린다. 그는 “슈베르트는 ‘노래’라는 앨범 주제와 맞닿아 있고, 리스트는 그 누구보다 슈베르트의 가곡을 깊이 이해한 작곡가”라면서 두 작곡가의 공통점과 대비를 함께 짚었다. 이어 “슈베르트가 내면의 순수한 감정을 노래한다면 리스트는 그 노래를 드라마틱하고 다채로운 색감을 펼쳐낸다”며 “상반된 두 결이 한 무대에서 만나면 오히려 더 흥미로울 거라고 봤다”고 부연했다. 서정과 기교, 명상과 폭발을 오가는 이번 음반은 선우예권의 자화상에 가깝다. “어떤 분은 제게 서정적인 곡이 잘 어울린다고 하고, 또 어떤 분은 화끈하게 몰아치는 연주를 좋아하시죠. 이번 음반도 그런 감정이 공존합니다.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궁금하지만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변신, 굴레를 벗으려는 몸짓… 하지만 외롭고 불온한 시도 [오경진의 폐허에서 무한으로]

    변신, 굴레를 벗으려는 몸짓… 하지만 외롭고 불온한 시도 [오경진의 폐허에서 무한으로]

    카프카는 ‘변신’을 말했다출장 가는 일상이 너무 싫은 주인공벌레로 변한 건 운명 거부하는 욕망삶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 모습일까악뮤는 ‘변신’을 노래했다돌아갈 곳 없이 그저 쏟아지는 난민우리 삶도 똑같이 소박한 여행일 뿐결국 세계는 온통 난민들 축제의 장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침대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철갑처럼 단단한 등껍질을 대고 누워 있었다. 머리를 약간 쳐들었더니 불룩하게 솟은 갈색 배가 보였고 그 배는 다시 활 모양으로 흰 각질의 칸들로 나뉘어 있었다. 둥그런 언덕 같은 배 위에는 이불이 금방이라도 주르륵 미끄러져내릴 듯 가까스로 덮여 있었다. 몸뚱이에 비해 형편없이 가느다란 수많은 다리가 애처롭게 버둥거리며 그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프란츠 카프카, ‘변신’ 부분) ‘변신’의 첫 문장을 읽었을 때, 우리는 단순하면서도 거대한 질문에 사로잡힌다. 왜? 그레고르 잠자는 도대체 왜 벌레가 돼야 하는가. 프란츠 카프카는 소설 어디에서도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이 매력적인 건 이 때문이다. 부조리한 존재의 실상은 악몽의 논리로만 포착할 수 있다. 이유 없이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 우리는 목적을 모른 채 이 땅에 태어나 고통받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벌레가 된 잠자의 상황은 다소 극단적이지만, 그리 낯설지는 않다.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다. 삶은 우연과 파국의 정수, 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주어진 삶을 살아내야 한다. 벌레로 변신한 잠자의 첫 번째 걱정이 ‘출근’이라는 사실은 퍽 의미심장하다. “그는 서랍장 위에서 째깍거리고 있는 탁상시계 쪽을 건너다보고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하느님 맙소사!’ 여섯시 반이었다.”(카프카, ‘변신’) 변신은 몸(身)을 바꾸는(變) 것이다. 결국 몸에 관한 이야기다. 몸,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장소.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감옥. 타고난 그곳이 유토피아라면 좋겠지만, 그런 행운은 좀처럼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변신은 ‘매혹적인 악몽’이다. 어째서 매혹인가? 영원히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악몽인가? 낯선 것으로 향하는, 되돌아올 수 없는 여정이라서 그렇다. 일본어와 독일어, 이중언어 작가로서 ‘낯섦’에 관해 치밀하게 사유한 소설가 다와다 요코는 한 강연에서 ‘변신’을 도발적이고도 흥미롭게 해석하고 있다. “카프카의 ‘변신’에서는 그레고르 잠자가 변신한 이유가 결코 밝혀지지 않습니다. 다프네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그레고르 잠자가 더 이상 출장을 가지 않으려고 갑충으로 변신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되죠. 그렇다면 변신은 그렇게 변하지 않고서는 벗어날 수 없는 치명적인 생활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해방적인 행위인 셈입니다.”(다와다 요코, ‘변신’ 중 ‘물고기의 얼굴 또는 변신의 문제’ 부분) 다프네 신화를 경유한 다와다는 잠자의 변신을 주체적 결단이자 해방의 계기로 독해한다. 다프네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태양의 신 아폴론의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구애에 쫓기다가 월계수로 변신하는 요정이다. 원치 않는 사랑의 희생양이 될 바에는 누구의 소유도 아닌 식물이 되겠다는 다프네의 선택. 이것이 카프카의 소설에서 잠자의 변신과 겹쳐 있다는 게 다와다의 생각이다. 잠자의 직업은 ‘출장 영업사원’이다. 정해진 자리 없이 끝없이 떠돌아다녀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잠자는 극도로 혐오한다. “나는 어쩌다 이런 고달픈 직업을 택했단 말인가! 허구한 날 여행만 다녀야 하다니. 회사에 앉아 원래의 업무를 보는 일보다 스트레스가 훨씬 더 심하다.”(카프카, ‘변신’) 카프카가 유대인이라는 점을 떠올렸을 때 이는 고향을 상실한 디아스포라의 슬픔으로 읽히기도 한다.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잠자의 욕망이 그를 벌레로 만들었다. 이렇게 본다면 변신은 강력한 의지의 소산이다. 전통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의 관성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선언. 나를 넘어선, ‘다른 존재 되기’를 적극적으로 감행하는 것. 하지만 이는 외로운 길이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벌레가 된 잠자가 가족의 무관심 속에 죽음을 맞이했던 것처럼. 이질적인 몸은 세상이 요구하는 정상성의 바깥에 있다. 내 몸에서 탈주하려는 시도는 불온하다. “밤이 깊었고 난민들이 오네/ 누울 곳을 위하여/ 떠나온 우리는 누구 하나/ 쫓아낼 명분이 없지// 해가 저물고 난민들이 오네/ 고독함을 피하여/ 저들은 지난날의 나였고/ 오늘 밤 아낄 게 없지// 난민들이 오네/ 난민들이 오네 절름발이로/ 난민들이 오네/ 난민들의 축제가 열렸네”(악뮤, ‘난민들의 축제’ 가사 부분) 변신이 위태로운 자유가 된 공간에서 우리는 우리 안의 타자들을 만나게 된다. 저기, 밀려오는 난민들. 돌아갈 곳 없이, 돌아갈 생각 없이 그저 이쪽으로 쏟아지는 난민들. 그러나 과연 저들이 타자일까. 음유시인 악뮤(AKMU)는 명랑하게 지적한다. ‘저들’이 실은 ‘지난날의 나’였음을. 세상 어디에도 자신의 근거가 없는 자를 난민이라고 한다. ‘누울 곳’을 찾아 끝없이 이동하는 난민들의 저 무한하고 역동적인 물결. 거기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우리는 하나 깨닫게 된다. 내가 발 딛고 선 이곳이 과연 나를 위한 땅일까. 언젠가, 삶의 어느 순간에 이르러 우리는 반드시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음을. 아니, 애초 이 땅에서 살아가는 자체가 작고 소박한 여행에 지나지 않음을. 나는 난민으로 변신하고, 난민은 나로 변신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난민이다. 세계는 한바탕 난민들의 축제가 벌어지는 거대한 장이다. 우리는 그곳에 우리의 흔적을 아로새긴다. 무엇으로 새기는가? 몸으로 새긴다. 우리의 가장 처음이자, 가장 마지막에 지닌 그것으로.
  • 모차르트 선율 탄 ‘현의 노래’… 서울의 봄을 피우다

    모차르트 선율 탄 ‘현의 노래’… 서울의 봄을 피우다

    82명 참여… 실내악의 정수 선보여 김연아·김정아 등 샛별들도 주목앙상블오푸스 ‘오중주…’ 세계 초연클래식 애호가들에게 봄은 ‘실내악의 계절’이다. 현악기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선율이 봄의 절정과 함께 피어난다. 봄이 실내악의 계절로 불리는 것은 올해로 21주년을 맞은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SSF) 덕분이다. 서울을 기반으로 한 세계적인 음악 축제를 만들기 위해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예술감독과 서울시가 기획한 SSF가 다음달 21일 개막한다. 개막 공연을 시작으로 5월 3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축제에는 총 13회 공연에 82명의 연주자가 서울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아트스페이스3 무대에 오른다. 올해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탄생 270주년이 되는 해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모차르트 음악 행사인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보헤’(모차르트주간)의 70주년이기도 하다. 올해 SSF의 주제가 ‘모차르트와 영재들’인 이유다. 프랑스와 수교한 지 140년이 된 점을 고려해 프랑스 레퍼토리도 함께 선보인다. 21일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에서 열리 개막 공연은 이런 축제의 기획 의도를 십분 반영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모차르트의 걸작인 ‘현악5중주 제5번‘으로 문을 연다. ‘프랑스의 모차르트’로 불린 카미유 생상스의 ‘덴마크와 러시아 선율에 의한 카프리스’, 클로드 드뷔시의 ‘플루트·비올라·하프를 위한 소나타’, 세자르 프랑의 ‘피아노와 현악을 위한 5중주’로 장식한다. 강 감독과 바이올리니스트 박재홍, 클라리네티스트 채재일, 피아니스트 문지영, 아레테 콰르텟이 무대에 오른다. 과거와 현재의 영재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도 마련됐다. ‘구세계의 영재들’(4월 29일) 공연에선 천재들이 극찬했던 라이네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요하네스 브람스, 프란츠 리스트 등의 실내악곡이 연주된다. ‘가족음악회: 영재들’(5월 2일) 공연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 김연아, 첼리스트 김정아, 클라리네티스트 이도영 등 ‘K클래식의 샛별’들이 선배들과 호흡을 맞춘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은 다음달 4일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2026 서울시향 체임버 클래식스: 슬라브’를 무대에 올린다. 네덜란드 바이올리니스트 시모네 람스마가 서울시향 단원들과 함께 러시아의 화학자이자 작곡가였던 알렉산드르 보로딘의 ‘현악4중주 제2번’과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현악6중주 ‘피렌체의 추억’을 선보인다. 슬라브 음악 특유의 ‘강인함 속에 깃든 정겨움과 슬픔’을 들려줄 예정이다. 다음달 3일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에서 열리는 실내악단 앙상블오푸스의 공연 ‘오중주의 서랍’은 모차르트 ‘현악5중주 제5번’과 함께 류재준의 ‘색소폰과 현악4중주를 위한 오중주’를 세계 초연으로 선보인다. 류재준은 앙상블 오푸스의 예술감독이자 동시대 주목받는 작곡가다. 그의 작품은 현악기를 중심으로 이뤄진 고전적인 편성에 관악기인 색소폰을 더해 ‘5중주’ 편성이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 가능성을 찾는다. 마지막으로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오중주’를 통해 20세기의 실내악이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살핀다. 바이올리니스트 송지원·타케자와 쿄코·최정민 그리고 비올리스트 김상진·서수민, 첼리스트 이정란·이재리, 색소포니스트 브랜든 최 등이 무대를 꾸린다.
  • “미군 대신 우리가 가겠다”…쿠르드군 이란 국경 집결, 트럼프에 ‘하늘 열어달라’ [핫이슈]

    “미군 대신 우리가 가겠다”…쿠르드군 이란 국경 집결, 트럼프에 ‘하늘 열어달라’ [핫이슈]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이란 군사작전이 3주째 이어지는 가운데 이라크 북부에서 활동하는 쿠르드 무장세력이 이란 국경을 넘는 지상작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혀 중동 정세의 새로운 변수로 떠올랐다. 이들은 미군이 공중에서 지원만 해주면 국경을 넘어 작전에 나설 수 있다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미국 USA투데이는 15일(현지시간) 이라크 쿠르드 자치지역 에르빌 인근의 한 쿠르드 기지를 방문해 이란계 쿠르드 무장세력의 움직임을 보도했다. 현지 지휘관들은 이미 이란 침투 작전을 염두에 둔 준비를 진행 중이며 미국의 지원 여부를 지켜보고 있다고 전했다. ◆ “미군 대신 지상전?” 쿠르드군 이란 국경서 작전 대기 쿠르드 분리주의 단체 쿠르디스탄 자유당(PAK)의 지휘관 레바즈 샤리피는 USA투데이 인터뷰에서 “우리가 국경을 넘는 순간 미국이 하늘을 지켜주기만 하면 된다”며 “지상군이 필요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작전이 시작되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겠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속한 쿠르드 전투 조직은 ‘페쉬메르가’(peshmerga)로 불린다. ‘죽음을 마주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일부 전투원들은 이미 이란 국경 인근에서 대기하며 작전 개시를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현지 긴장 상황도 상당하다. USA투데이 기자가 쿠르드 기지를 방문하기 직전 이란 드론 한 대가 기지 주변 농지에 떨어졌지만 폭발하지 않은 채 발견됐다. 전투원들은 이란이 사용하는 ‘샤헤드’ 자폭 드론 공격 흔적을 보여주며 최근 공격 상황을 설명했다. 샤헤드 드론은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으면서도 속도가 빠르고 목표물에 충돌하는 방식으로 공격하는 무기다. 반환을 전제로 하지 않는 공격 방식 때문에 흔히 ‘자폭 드론’으로 불린다. ◆ “우리에게 친구는 산뿐”…쿠르드의 배신 역사 쿠르드 무장세력은 오랫동안 중동 정치의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살아왔다. 쿠르드족은 전 세계적으로 약 3600만~4500만명 규모로 추정되는 중동 최대의 ‘국가 없는 민족’이다. 튀르키예와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 여러 국가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독립 국가를 갖지 못했다. 이 때문에 쿠르드 사회에서는 “우리에게 친구는 산뿐이다”라는 말이 널리 알려져 있다. 강대국과 지역 강국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이용당하고 버려졌다는 역사적 경험을 반영한 표현이다. 1970년대 미국과 이란은 이라크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쿠르드 반군을 지원했다가 정치적 합의가 이뤄지자 지원을 중단했다. 1991년 걸프전 당시에도 미국이 사담 후세인 정권에 맞서 봉기를 촉구했지만 이후 적극적인 지원을 하지 않으면서 쿠르드 봉기가 진압되기도 했다. 2019년 시리아 내전 당시 미국이 쿠르드 세력을 보호하다가 미군을 철수시켜 튀르키예의 공격에 노출됐다는 비판이 제기된 일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이번 문제를 두고 엇갈린 메시지를 내놓고 있다. 그는 지난 5일 기자 질문에 답하면서 쿠르드군의 이란 공격 가능성에 대해 “그들이 그렇게 하길 원한다면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틀 뒤에는 “전쟁은 이미 충분히 복잡하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 댓글 3300개 폭발…“쿠르드 또 버림받을 수도” 이번 소식이 야후 뉴스에 전해지자 온라인에서도 격렬한 논쟁이 이어졌다. 기사에는 약 8시간 만에 33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리며 쿠르드의 역할과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둘러싼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특히 “미국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쿠르드를 이용한 뒤 버렸다”는 회의적인 반응이 많았다. 한 이용자는 “쿠르드는 미국에 최소 몇 차례나 버림받았다”며 “이번에도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일부 이용자는 쿠르드 세력이 과거 이슬람국가(IS) 격퇴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미국이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쿠르드 무장세력이 실제 전쟁에 뛰어들 경우 튀르키예와의 갈등이 격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군사 전문가들은 쿠르드 무장세력이 실제로 이란 내부까지 진격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쿠르드 전투원들은 대부분 소형 화기를 중심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중화기와 군수 체계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미국 싱크탱크 민주주의수호재단(FDD)의 분석가 세스 프란츠먼은 “설령 미국이 무기와 장비를 지원하더라도 전투 체계를 갖추고 작전을 수행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미국은 중동 긴장이 고조되자 해병대 약 2500명을 추가로 파견하며 군사 태세를 강화하고 있다. 압바스 아라그치 이란 외무장관은 최근 인터뷰에서 “미군 지상군이 들어온다면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며 강경한 태도를 밝혔다. 쿠르드 무장세력이 실제로 이란 국경을 넘을 경우 이번 전쟁은 대리 지상전 양상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튀르키예의 반발과 미국의 정치적 판단, 쿠르드 내부 분열 등 여러 변수 때문에 실제 작전이 실행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는 평가가 많다.
  • 몸짓에 담아낸 혁신과 클래식

    몸짓에 담아낸 혁신과 클래식

    지난해 1059개 무용작(서양·한국·대중)이 2064차례 무대를 장식했고 75만여명이 공연장을 찾았다(1월 14일 기준). 공연예술통합전산망을 통해 나타난 흐름을 보면 무용 공연은 2021년 671회, 2022년 834회, 2023년 875회, 2024년 900회로 완만한 상승선을 그리다가 지난해엔 가파르게 증가했다. 해외 인기작들을 불러오면서 관객층을 넓힌 것이 주효했다. 올해도 관객들의 눈높이를 더욱 높일 작품들이 펼쳐진다. ●양대 발레단의 레퍼토리 대결 국립발레단은 ‘백조의 호수’(4월 7~12일)로 올해의 문을 연다. 낭만 발레의 정수 ‘지젤’(10월 13~18일), 드라마 발레 ‘카멜리아 레이디’(11월 10~15일), 연말 스테디셀러 ‘호두까기인형’(12월 12~27일)까지 다채롭게 준비했다. 모두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한다. 현대 발레 두 작품을 묶은 ‘더블 빌’(5월 8~10일·서울 GS아트센터)에선 영국 로열발레단 상주안무가인 웨인 맥그리거의 ‘인프라’와 현대 발레의 상징적 레퍼토리로 꼽히는 ‘봄의 제전’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발레곡 ‘봄의 제전’(1913)은 바슬라프 니진스키(초연 안무)부터 모리스 베자르, 케네스 맥밀런, 피나 바우슈 등 당대의 안무가들이 한 번쯤 도전한 작품이다. 국립발레단은 2014년 한국 초연을 한 글렌 테틀리 버전(1974)을 공연한다. 유니버설발레단의 2026년은 ‘한국 창작발레의 역사부터 클래식 대작까지’로 정리된다. 한국 창작 발레의 상징으로 꼽히는 ‘심청’(5월 1~3일 예술의전당)이 창작 40주년을 맞아 기념 공연으로 돌아온다. 국립극장 초연 이후 꾸준히 무대에 오른 ‘심청’은 한국 고전과 서양 발레를 조화시키며 전 세계 12개국 40여개 도시에서 공연했다. 예술의전당과 공동기획으로 준비한 ‘백조의 호수’(8월 14~23일)에 이어 ‘고전발레의 교과서’로 불리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10월 2~4일)도 명단에 올렸다. 마린스키 스타일의 화려하고 정교한 연출로 13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랑받는 작품이다. 천재 안무가 모리스 베자르(1927~2007)의 베자르 발레 로잔(BBL)이 25년 만에 서울을 찾아 상징적 작품 ‘볼레로’, ‘불새’와 함께 아시아 초연작 ‘햄릿’(4월 23~24일 GS아트센터) 등을 선보인다. 명문 몬테카를로 발레단은 고전 발레 ‘백조의 호수’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 버전으로 국내 초연한다. 5월 16~17일 예술의전당 공연을 전후해 화성예술의전당과 대전예술의전당에서도 공연한다. ●현대무용 ‘아이콘’들의 내한 현대 무용에선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혁신의 아이콘’들이 연이어 내한해 무용애호가들을 설레게 한다. 웨인 맥그리거는 국립발레단과 선보이는 ‘인프라’에 앞서 자신의 무용단과 ‘딥스타리아’(3월 27~28일 GS아트센터)를 공연한다. ‘웨인 맥그리거 시리즈’를 기획한 GS아트센터는 최첨단 기술을 무용, 시각예술과 결합한 ‘딥스타리아’와 함께 몸과 기계의 교감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운영한다. GS아트센터는 이어 조각가 코헤이 나와와 안무가 다미앵 잘레가 협업해 장르의 특징을 응축한 ‘플래닛[방랑자]’(6월 25~26일)를 올린다. 28일에는 신작 퍼포먼스도 선보일 계획이다. LG아트센터 서울은 ‘관객들이 놓쳐서는 안 될 세계 최고 수준의 작품을 시차 없이 소개한다’는 모토에 걸맞게 눈에 띄는 작품들을 세웠다. 독보적인 무용 언어를 구축해온 크리스탈 파이트가 지난해 영국 올리비에상 최우수 무용작품상을 받은 ‘어셈블리 홀’(6월 5~7일)로 첫 내한 무대를 연다. 인간의 내면, 권력과 폭력 같은 주제를 정밀한 군무로 구현했다. 지난해 한국 무용계에서 최고의 화제작으로 꼽힌 ‘해머’의 안무가 알렉산더 에크만이 ‘한여름 밤의 꿈’(6월 12~14일)을 들고 다시 방한한다. 북유럽 백야를 배경으로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축제를 현대 발레극으로 펼쳐냈다. 2015년 로열 스웨덴발레 초연 당시 건초 더미 위에서 펼쳐지는 폭발적인 군무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며 ‘발명가이자 혁신가’라는 극찬을 받았다. 에크만은 세종문화회관·서울시발레단 초청으로 ‘선인장(Cacti)’도 올린다. 프란츠 슈베르트의 현악사중주 ‘죽음과 소녀’를 공통분모로 ‘캣티’와 크리스티안 슈푹의 ‘죽음과 소녀’(8월 15~16일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를 ‘더블 빌’로 묶었다. 에크만의 작품이 유머와 풍자가 어우러졌다면 슈푹의 작품은 특유의 시적인 연출과 음악의 정서가 녹아들어 있다. ●신진 안무가들의 실험적 작품도 국립현대무용단은 신진 안무가 정록이와 정재우의 ‘더블 빌: 머스탱과 개꿈’(4월 3~5일)으로 올 시즌을 시작한다. 여러 작품에서 실력을 입증해온 김보라 안무가의 ‘내가 물에서 본 것’(6월 12~14일)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관객을 만난다. 지난해 한국 초연한 윌리엄 포사이스 안무가의 ‘하나의 편평한 것, 복제된’을 이재영 안무가의 ‘메커니즘’, 정철인 안무가의 ‘비보호’와 엮어 ‘트리플 빌’(10월 2~4일)로 올린다. 두 작품 모두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무대에 오른다.
  • 돼지가 태평양을 건넌 이유, 알고 보니 [사이언스 브런치]

    돼지가 태평양을 건넌 이유, 알고 보니 [사이언스 브런치]

    1859년 영국의 박물학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는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사이에 생물 지리학적 경계선이 있다고 주장했다. 생물학자인 토머스 헨리 헉슬리가 ‘월리스선’이라고 이름 붙인 이 경계선을 기준으로 양쪽에 서식하는 야생 동물은 서로 경계를 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표범과 원숭이는 아시아 쪽에서 발견되지만, 유대류와 화식조는 주로 오세아니아 지역에 한정돼 분포한다. 그런데, 이 월리스선을 무시하는 동물이 하나 있다. 바로 돼지다. 돼지는 월리스선 양쪽 모두에서 분포하며, 동남아시아를 넘어 뉴칼레도니아, 바누아투, 멀리 떨어진 폴리네시아에서도 발견된다. 돼지는 생태학적으로 매우 효과적인 외래 침입종이며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물이다. 그런데, 돼지는 어떤 방식으로 확산했고, 돼지의 확산에 인류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 과학자들은 의문을 품어왔다. 영국 런던 퀸 메리대 생물·행동과학부를 중심으로 프랑스, 스웨덴, 독일, 호주, 덴마크, 베트남, 네덜란드, 필리핀, 벨기에, 인도네시아, 뉴질랜드, 미국, 브루나이, 스리랑카, 바누아투, 아이슬란드 17개국 49개 대학과 연구 기관이 참여한 국제 공동 연구팀은 유전체 분석을 통해 수천 년 동안 태평양 섬들을 가로질러 이뤄진 인류의 이주가 어떻게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역에 외래종인 돼지가 유입되는 결과로 이어졌는지를 규명했다고 5일 밝혔다. 이 연구 결과는 과학 저널 ‘사이언스’ 1월 1일 자에 실렸다. 연구팀은 현재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지역에 서식하는 돼지와 고고학적 표본을 포함해 700마리 이상의 돼지 유전체를 정밀 분석했다. 연구팀은 이를 통해 동남아시아 전역에 돼지가 이동한 과정을 재구성하고, 돼지가 특정 섬에 도착한 시기와 토착 돼지 종들과 어떻게 교배됐는지를 추적했다. 그 결과, 연구팀은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다양한 돼지 종을 이동시켰다는 점을 발견했다. 가장 초기 증거는 약 5만 년 전에 최초의 동굴 벽화를 남긴 것으로 알려진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에 거주했던 인류를 지목한다. 이들은 미래 식량 자원 확보를 위해 인도네시아 토착종인 수염돼지를 멀리까지 데리고 이동하고 벽화에 묘사하기도 했다. 이렇게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퍼져나간 돼지는 약 4000년 전 초기 농경 공동체가 가축화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데리고 가면서 급속히 확산했다. 인류는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북부를 거쳐 월리스선을 넘어선 파푸아뉴기니, 바누아투, 폴리네시아 먼 외딴섬들까지 이어졌다. 대항해 시대 이후 동남아시아가 유럽 식민지일 때는 유럽 돼지들까지 유입된 것으로 확인됐다. 또, 유입된 외래종 돼지 중 상당수는 탈출해 야생화되고, 토착종들과 교배하기도 했다. 이런 혼혈 돼지 종들은 현재 멸종 위기종인 코모도왕도마뱀의 주요 먹이원이 되기도 한다. 인류가 이동할 때 식량이나 자원으로 가축을 데리고 다녔다는 점에서 돼지 유전자를 분석해 문자가 없던 선사 시대 인류가 정확히 언제, 어디서, 어디로 이동했는지를 볼 수 있는 인류 이동의 ‘살아 있는 정교한 지도’를 볼 수 있다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가 생태계 보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기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지역에서 돼지들은 각기 다른 지위와 영향력을 갖고 있다. 어떤 섬에서는 영적 존재로 추앙받고, 다른 곳에서는 유해 동물로 간주하며, 또 다른 지역에서는 현지 생태계에 너무 깊이 동화돼 토착종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전통 보전 생물학에서는 ‘원래 그 땅에 살던’ 토착종만 보호하고 ‘외부에서 유입된’ 외래종은 제거 대상으로 본다. 하지만 5만 년 전에 인간이 데려온 돼지가 코모도왕도마뱀처럼 토착종의 먹이가 되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를 외래종이라고 해서 제거 대상으로 봐야 하는가와 같은 철학적 질문까지 던진다고 연구팀은 밝혔다. 연구를 이끈 로랑 프란츠 영국 퀸 메리대 교수(고생물유전체학)는 “이번 연구는 돼지의 DNA 분석을 통해 월리스선이라는 자연 경계 중 하나를 넘어 동물을 이동시켰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준다”며 “고대와 현대 개체군의 유전체 서열 분석으로 동물의 확산과 인류의 사회적 진화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 충남도, 해외 투자 유치·지역 기업 협력 통한 성장 모델 구축

    충남도, 해외 투자 유치·지역 기업 협력 통한 성장 모델 구축

    충남도가 해외 기업의 투자·수출뿐 아니라 지역 기업과 연계해 동반 성장할 수 있는 선순환 체계 구축을 지원한다. 김태흠 충남지사는 26일 도청에서 손일수 지앤티 대표, 빌리 프란츠 독일 프레틀그룹 최고경영자(CEO)와 투자 협력 의향서를 체결했다. 지역 스타트업인 지앤티는 도의 지원을 받아 프레틀그룹과 4600억원 규모의 수출 계약을 맺었다. 컨버터 등 친환경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지앤티는 본사와 연구소를 천안에 두고, 아산 호서대에 공장 건립을 추진 중이다. 의향서는 지앤티와 프레틀이 아시아에서 새로운 협력 사업 추진 계획을 담고 있다. 프레틀은 충남에서 비상용 긴급 발전 장비 생산과 공동 개발을 위한 투자 의향을 밝혔다. 지앤티는 아시아에 프레틀의 발전 장비를 공급하고 서비스센터도 운영할 계획이다. 도는 프레틀의 발전 장비 구매 의사와 두 기업 간 협력 사업 수행에 필요한 행정적 지원을 하기로 했다. 도는 투자 협력이 현실화하면 지역 기업의 사업 확장과 수출 증진 등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김 지사는 “독일의 첨단 기술과 충남의 역동적인 산업 생태계가 결합해 시너지 효과가 기대되며 프레틀과 지앤티의 협력이 그 마중물이 될 것”이라며 “지역의 산업과 일자리가 만들어지면서 또 다른 기회가 만들어지고 추가 투자로 이어질 수 있게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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