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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초대 기상 통보관 지낸 김동완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초대 기상 통보관 지낸 김동완씨

    날씨처럼 인생과 밀접한 것이 또 있을까. 흥미로운 속담도 많다.‘장마는 나이 많은 아내의 잔소리다.’‘봄비가 많이 오면 아낙네의 씀씀이가 헤프다.’‘더위 먹은 소는 달만 봐도 헐떡거린다.’ 올 여름에는 100년 만의 더위가 찾아온다는 얘기가 있어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온다면 어떤 더위일까.‘무더위’는 ‘물더위’에서 유래됐다. 습도와 온도가 매우 높아 후덥지근하다. 끓는 물과 같다는 ‘가마솥더위’나 ‘찜통더위’도 비슷하다. 또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따가운 ‘불볕더위’도 있다. 어쨌든 여름손님(더위)이 있어야 가을손님(열매)도 온다고 했다. ●날씨는 하루에 서른여섯번씩 변해 추억의 방송멘트가 있다.“여우가 시집가는 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영국의 한 과학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날씨는 하루에도 서른여섯번씩 변한다고 합니다. 봄날씨는 최소한 하루에 세 번 변합니다. 아침은 썰렁하고 점심은 덥고 저녁에는 바람이 붑니다. 돌아오는 길에 여벌의 옷차림에 신경을 써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기상대에서 김동완 통보관이었습니다.” 맞다. 이른바 우리나라 초대 기상통보관을 지낸 김동완(71)씨. 특유의 비유법과 정감 있는 목소리로 많은 인기를 누렸다. 나이 30대 이상은 적어도 하루 한번씩 김씨의 목소리를 들었을 정도다. 지금도 ‘프리랜서 기상해설가’로 활동 중이어서 45년 동안 ‘날씨해설 인생’이라는 흔치 않은 길을 걷고 있다. 에피소드 #1. 어린이날이었다. 아침방송에서 김씨는 “오늘은 어린이 얼굴만큼이나 해맑은 날씨가 되겠습니다.”라고 마무리 멘트를 했다. 이어 방송국을 나오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김씨는 비를 피하기 위해 다시 방송국 안으로 들어갔다. 비는 계속됐다. 이때였다. 방송 자막을 통해 ‘오늘 효창공원에서 열리기로 한 어린이날 행사는 우천관계로 무산됐습니다.’라고 알렸다. 이를 보는 김씨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에피소드 #2. 봄날 일요일이었다. 부부동반으로 고향 친구들과 등산을 갔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산밑 음식점 등으로 비를 피했다. 하지만 김씨는 혼자 떨어져 초라하게 비를 맞아야 했다. 사람들과 맞닥뜨릴 경우 얼굴이 알려진 그에게 무슨 얘기를 할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날 아침 김씨는 “지역에 따라 한차례 소나기가 내리겠습니다.”라고 예보했다. ●올 100년만의 무더위, 그때 가봐야 지난주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에 위치한 기상청에서 김씨를 만났다. 기상예보 역사의 산증인이나 다름없기에 인터뷰 장소를 기상청으로 정했다. 뒤뜰 의자에 앉자마자 다가올 여름 더위의 안부(?)부터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100년 만의 더위라는 말은 미 항공우주국(NASA)의 한 박사가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 큰 더위가 올지 안 올지 아직은 미지수”라면서 “다만 요즘 계절의 변화를 볼 때 예년보다 10여일 이른 이달 하순부터 여름이 시작될 것으로 본다.”고 대답했다. 또한 “우리나라는 본래부터 더운 나라”라고 전제한 뒤 “예부터 겨울을 ‘동장군’(冬將軍)이라 하고 여름을 ‘염제’(炎帝)라고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면서 “그래서 겨울철에는 방한(防寒)이고 여름철에는 피서(避暑)라는 말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아울러 우리나라는 대륙성 기후지만 여름철에는 열대성 기후여서 매년 열대야 현상이 20∼30일, 낮기온이 섭씨 30도 이상인 열대일 현상은 57일가량 이어진다고 덧붙였다. “우리 조상들은 더위를 극복하려는 지혜가 많았습니다. 복(伏)날은 농업 위주의 전통적 생활환경에서 유래됐지요. 한여름철의 낮길이가 가장 길다 보니 노동시간이 자연히 많아지고 대신 휴식은 짧았습니다. 때문에 땀흘려 일했던 머슴들은 온·습도의 상승으로 왕성해진 병원체에 감염돼 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나라에서 복날을 정해 영양을 보충하고 하루를 푹 쉬게 했던 것이지요.” 하지(6월21일)에서 셋째 경일(庚日)을 초복, 넷째 경일을 중복, 입추 후 첫 경일을 말복날로 정해 하루를 쉬며 개장국 등으로 기력을 보충했다는 것이 김씨의 설명이다. 또한 머슴들은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먹는 일이 그림의 떡이었기에 집집마다 흔하게 키우는 개고기로 대신했다는 자료가 전해온다고 부연했다. 결국 복날은 노동자의 보건일로 경륜이 높은 정치가가 노동자를 위해 베푼 선정에서 비롯됐다고 강조했다. “속담에 ‘여름손님은 호랑이보다 무섭다.’고 할 만큼 옛조상들은 나돌아다니지 않았습니다. 마을정자에 앉아 부채질 하나로 무더위를 이겨냈지요. 반면 지금의 우리들은 냉장고와 에어컨 등 냉방기구들을 잔뜩 갖추어 놓고도 여름철에 휴가를 떠납니다. 하지만 교통지옥 등으로 진이 다 빠져버리지요.” 지금의 여름철 휴가풍습은 북유럽 바캉스에서 유래됐으며 우리나라 기후로 볼 때 5월이나 10월 중에 휴가를 떠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권유했다. 또한 사람은 섭씨 20도부터 더위를,30도부터는 고통을 느끼며 더위는 빙과류로, 고통은 차가운 음료수로 해결하고자 하는 습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부부싸움 많은 여름엔 말조심을 무더운 여름을 지혜롭게 지내기 위해서는 날씨에 순응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불쾌지수가 높다고 하지 말고 상쾌지수가 약간 낮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 또한 여름철에는 부부싸움이 많기 때문에 각자 말조심하는 것도 가정에 도움을 준다고 귀띔한다. 여성의 의상과 온도관계에 대해 흥미롭게 풀이한다. 예를 들어 겨울철 실외온도가 섭씨 0도일 경우 무릎위 20㎝가량 올라간 미니스커트를 입었다면 체감온도는 영하 4도라는 것. 또 1㎝씩 올라갈 때마다 체감온도는 0.5도씩 더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반면 청바지를 입었을 경우 영상 6도의 체감온도를 느낀다고 한다. 따라서 겨울철에 미니스커트를 자주 입는 여성은 생리적 부담으로 임신했을 때 순산하기가 어렵다는 분석도 있다고 전했다. 김씨는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전두환 전 대통령과 같은 대구공고를 졸업했다. 전씨와의 인연에 대해 “(전씨가)백담사에 머물 때 처음 만나 ‘(24회)선배님 26회 김동완입니다.’고 했더니 어깨를 툭치며 ‘(청와대)재임기간에 한번 오지 그랬느냐.’고 하며 무척 반가워했다. 하지만 곧 ‘그랬으면 지금쯤 청문회에 불려다니겠지.’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서울 연희동의 전씨 자택에서 고교 선후배간으로 몇차례 만났다고 귀띔했다. 김씨는 원래 공군 조종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대구공고 3학년때 공군사관학교 입학시험에 응시, 합격했다. 그러나 최종 선발과정에서 탈락했다. 이어 조종간부후보생 시험에도 합격했으나 기초군사훈련 중 또 탈락했다. 어쩔 수 없이 공군하사관학교를 나와 조교로 공군복무를 마쳤다. 조종사의 꿈이 무너지자 그는 수학선생이 되려고 마음을 먹었다. 서울대 사대 원서를 접수하러 가던 중 우연히 국립중앙관상대 모집 공고를 보게 했다. 결국 발길을 돌려 관상대 시험에 응시,15대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이때가 58년 12월. “사무관 시절 날씨 해설을 할 때 ‘기상대의 김동완 사무관입니다.’라는 어감이 안 좋아 편의상 ‘통보관’을 사용하기 시작했지요.”이후 중앙기상대 예보분석관-통보관-예보과장 등을 거치면서 TV와 라디오 등에서 방송해설을 꾸준히 맡아 기상캐스터의 대명사가 됐다.1남4녀를 둔 그는 요즘 날씨와 관련된 원고를 써주기도 하고 각종 단체와 기업체 등에서 초청강의를 하느라 분주하다. 주말에는 주례를 보느라 더 바쁘다. 지금까지 어림잡아 1000여쌍의 주례를 봤다며 웃는다. 그는 평생동안 날씨에 대해 한번도 짜증을 낸 적이 없다. 이는 곧 자연에 대한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란다. ■ 그가 걸어온 길 ▲1935년 김천 출생 ▲55년 대구공고 기계과 졸업 ▲59년 중앙관상대 공채8기, 국립기상기술원 양성소 1기 수료 ▲59년∼82년 예보분석관, 통보관, 예보과장 ▲63년 국제대학 법학과 졸업 ▲82년∼92년 문화방송 보도국 보도위원 ▲92년∼현재 프리랜서 활동 ▲97년∼99년 한국일기예보회장 ▲2000년∼2001년 자민련 김천지구당 위원장 ▲2000년∼2002년 기상정보 케이블TV웨더뉴스채널의 김동완 기상뉴스 진행 ■ 저서 날씨 때문에 속상하시죠(좋은벗,1998년) km@seoul.co.kr
  • [22일 TV 하이라이트]

    ●신비한TV 서프라이즈(MBC 오전 10시50분) 1925년 선교활동을 위해 중국의 작은 마을로 온 미국인 선교사의 아름다운 희생 이야기. 영국의 형사 톰 엔더슨이 10년 전 금고털이 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제리를 잡은 이야기, 홍콩의 결혼식 풍습인 숨바꼭질로 찾은 진정한 사랑 이야기 중 어느 것이 진실이고 또 거짓일까? ●인사이드 월드-브라질의 토지개혁(YTN 오전 10시25분) 세계에서 10번째로 큰 경제규모를 가진 브라질이지만 빈부 차가 가장 심한 나라이기도 하다.50%의 농토가 전체 인구의 1%에 집중돼 있다. 정부는 농지 소유주에게 대금을 지불한 뒤 이 땅을 농지가 없는 사람들이 구입하도록 하는 토지 대여계획을 도입했다. ●삼색토크 여자(EBS 오후 8시) ‘레드코너’에서는 자기 손으로 직접 웨딩드레스를 만드는 여자들을 찾아간다. 여자라면 누구나 입고 싶어하는 ‘결혼식의 꽃’ 웨딩드레스를 만드는 여자들은 결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그녀들이 웨딩드레스에 담고자하는 결혼의 꿈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눈다. ●토지(SBS 오후 8시45분) 두메는 두수와 함께 서희를 납치하지만, 길상이 그들을 막아서며 두메에게 진실을 말한다. 길상은 두메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한다. 두수가 길상을 죽이겠다고 산으로 올라가자 한복은 그를 말리려고 함께 간다. 두수는 영호가 숨어 있는 움막을 발견하지만, 밀정으로 몰려 그만 세상을 마감한다. ●부모님 전상서(KBS2 오후 7시55분) 헤어짐이 너무나 허탈한 성미, 형표에게 잘 대해주지 못했던 일들이 후회가 되면서, 결혼을 위해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다. 성실은 요리사가 되겠다며 수제비를 만드는 준이가 기특하지만 한편으로는 전화 수다가 길어진 수아 때문에 걱정이다. ●불멸의 이순신(KBS1 오후 9시30분) 조정에서 이순신을 잡아들이려 한다는 소식이 분조를 이끌던 광해군에게까지 전해진다. 광해군은 당장 의주로 달려가 지금 믿을 수 있는 장수는 이순신뿐이라며 전라좌수영에 이순신을 설득할 조정 대신을 파견할 것을 제의한다. 이에 윤두수가 전라좌수영에 급파되어 내려가는데….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9) 1923년 일본인들의 정감록 처형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9) 1923년 일본인들의 정감록 처형

    ‘대일본제국의 애국적 지식인’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호소이 하지메란 일본인이 있었다. 그는 한일합병(1910년)을 전후해 ‘동경아사히신문’과 ‘한일전보통신사’ 기자로 다년간 한국에 체류했다. 갓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편입된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호소이는 흥미를 느꼈고 나름대로 많은 ‘연구’도 했다. 그런 호소이에게 1919년의 기미독립운동은 전혀 뜻밖의 사태였다. 무지렁이로 보였던 한국인들이 수백만 명씩이나 길거리로 뛰쳐나와 독립을 요구할 줄 그는 미처 몰랐다. 한낱 정치군인에 지나지 않는 조선총독이 그걸 짐작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당한 한국전문가 호소이 자신도 사태를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독립만세운동이 좌절되자 한국엔 예언서 ‘정감록’이 더욱 인기를 끌었다. 대한독립이 박두했다는 둥, 신천지가 열릴 거라는 둥 갖가지 소문과 예언이 한반도를 뒤덮을 지경이었다. 특히 1921년부터는 계룡산을 중심으로 숱한 신흥종교단체들이 등장해 위세를 떨쳤다. 겉으론 종교를 표방했지만 은연중 독립을 향한 열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파악한 조선총독부는 정감록 비상이 걸렸다. 1922년 겨울, 호소이는 비공식적인 통로를 통해 조선총독부의 부탁을 받았다. 예언서 정감록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동경의 자택 서재에 틀어박혀 호소이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한반도는 우리 대일본제국에 무엇인가. 제국의 용맹스러운 장졸(將卒)들이 목숨 바쳐 강적 청나라도, 러시아도 연달아 무찌른 다음 어렵게 얻어낸 제국의 새 영토가 아닌가. 저 버러지 같은 한국 놈들은 천황폐하의 신민이 된 영광을 모른다. 놈들은 감히 독립을 바라고 있다. 훈련된 군대도 총칼도 없이 맨주먹으로 일어서려는 무지막지한 저들의 맨주먹을 쇠뭉치로 둔갑시키는 것은 독립에 대한 부질없는 열망이다. 거기 불 붙이는 부싯돌이 바로 정감록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든 정감록을 처단할 것이다. 나 호소이로 말하면 천황폐하의 뜻에 언제나 기꺼이 순종하고 순수한 대일본제국 신민의 고귀한 혈통에 무한한 자긍심을 느끼는 위대한 제국의 충량한 신민이 아닌가. 우리 대일본제국으로 말하면 단일하고 순수한 혈통이 천만대를 두고 이어져온 아름다운 나라. 그에 비할 때 이른바 저 한국 놈들은 어떤가. 놈들은 우선 생리학적으로 열등하다. 혈액만 하더라도 한국 놈들의 피는 ‘거무칙칙하고 더럽다.’ 그렇기 때문에 이조 500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당쟁이 일어나 수많은 인명이 살상됐지만 나라꼴은 늘 엉망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한국 놈들은 유전인자 자체가 불순하고 열등하다. 따라서 놈들에게 밝은 미래란 있을 수가 없다. 오직 천황폐하의 자애로운 품속에 있을 때만 그들은 행복을 바랄 수 있다. 이런 점들을 나는 이미 두 권의 저서에서 명확히 입증했다.‘조선문화사론(朝鮮文化史論)’과 ‘조선 문제의 근본적 해결(朝鮮問題の根本的解決)’이 그것이다. 한국에 대한 나의 전문적인 연구는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해 바쳐질 것이다. 실용성이 없는 학문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 대일본제국의 발전을 위해, 무지하고 악랄한 한국 놈들의 순화를 위해 나의 저술은 두고두고 쓰일 만한 것이다. 탁상공론으로 걸핏하면 양심을 들먹이는 비겁하고 위선적인 놈들이 있어 훗날 나 호소이를 대일본제국의 어용학자(御用學者)라고 불러도 좋다. 제국의 영예를 위한 나의 일편단심은 그럴수록 더욱 밝게 드러날 것이다. ●정감록을 죽이는 묘책 호소이는 묘안을 찾기 위해 좀더 생각했다.‘도무지 정감록이란 무슨 책이냐. 조선시대 위정자들도 몹시 두려워했던 책이 아니냐. 위정자들은 정감록을 소지하거나 퍼뜨리는 일체의 행위를 범법 행위로 간주했다. 그런데 혹독한 금압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감록은 널리 퍼져나갔다. 지금 반도의 덜떨어진 한국 놈들이 감히 독립을 바라는 것도 다 그놈의 정감록 때문이다.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공개하라. 그렇다, 금단의 예언서 정감록을 죽이는 방법은 공개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감록은 신비함을 잃게 된다. 신비성을 잃어버린 정감록이라면 이미 반쯤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또 하나. 기왕에 공개할 바엔 정감록의 정본(正本)을 만드는 거다. 바로 이 호소이가 대일본제국의 정치적 이익에 봉사할 정감록의 정본을 결정한단 말이다. 총독부에서 수집해 놓은 정감록의 이본들을 자세히 살펴 그 가운데서도 정치적 선동성이 별로 없는 텍스트를 골라 공개하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그 텍스트에 살짝 손을 댈 수도 있다. 아주 심하게 손을 대면 조작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영악하고 의심 많은 한국 놈들을 상대로 하는 일인 만큼 더욱 주도면밀해야 한다. 나는 정감록을 순화시킬 뿐이다. 이것은 변조나 개작이 아니다. 나는 대일본제국과 천황폐하를 위해, 한반도와 한국 놈들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정감록을 편집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잊지 말아야 될 일이 또 있다. 이렇게 교묘한 수단을 부려 김을 빼놓더라도 한국 놈들은 순화된 나의 정감록을 다시 개악하거나 제멋대로 해석할 우려가 있다. 놈들은 워낙 피가 더럽기 때문에 제멋대로니까. 그들의 망령된 행위를 막기 위해 내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없을까. 그래, 예방주사를 놓자! 정감록은 이래서 진짜 믿을 것이 못 된다. 이런 식으로 계몽적인 비평을 잔뜩 써 가지고 독자 놈들의 배를 채우는 것이다. 정감록의 대가 호소이가 만든 정감록 정본의 맨 앞에 실린 비판을 읽게 하자. ●동경판 정감록에 대한 불만 대일본제국의 충량한 신민 호소이는 이미 수집된 정감록 이본들을 널따란 책상 위에 펼쳐놓고 수술을 시작했다. 일제는 이미 오래 전에 광개토대왕비문까지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변조했다. 정본이 따로 존재할 리도 없던 정감록을 개작하는 것쯤이야 호소이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그의 솜씨와 애국심은 참으로 대단해 불과 몇 달 만에 ‘정감록비결 집록’이란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한국인들에겐 억압의 상징인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정감록을 죽이기 위한 음모가 결실을 맺은 날은 1923년 2월15일이었다. 이것이 사상 최초의 정감록 인쇄본이다. 도쿄판 정감록은 인기가 대단했다. 초판으로 몇 부를 찍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출간된 지 약 보름 만에 제3판을 제작할 정도였다. 도쿄판은 아마 일본에서도 상당히 팔렸겠지만 주로는 ‘식민지 조선’에서 소비됐을 것이 뻔한 이치였다. 호소이가 바란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도쿄에서 만든 정감록으로 한국의 정감록 세계를 평정한다는 목표는 어쩌면 단시일 내에 달성될 듯도 하였다. 도쿄서 들어온 정감록이 잘 팔려 나가자 한국의 출판계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정감록을 찍어내면 돈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일각에선 호소이의 민족성 비판에 강한 불만이 제기되었다. 내놓고 맞싸울 형편은 안 되었지만 정감록까지도 ‘그 잘난’ 일본인의 손으로 다듬어진 책을 봐야 되는가 하는 강력한 반발이 없지 않았다. 동경판의 뚜껑을 열어본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경악했다. 호소이는 무지한 한국 사람을 계몽한답시고 무려 50쪽이나 되는 정감록 비평을 썼다. 정감록의 허구를 낱낱이 파헤치고 나아가 한국 사람의 타고난 ‘야만성’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 논지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 한국인들은 태초부터 불합리한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련한 한국 민족의 정신적 미성숙은 그들이 정감록과 같은 미신에 맹목적으로 빠져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된다. 이렇게 유치하고 야만적인 성격이 한국민족의 본성이다. 국제적으로 저열한 한국의 민족성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한반도의 역사 및 지리적 조건이 빚어놓은 결과다. 당시 유행하던 지리적 결정론을 빌려 호소이는 ‘미개한’ 한국인을 질타했다. 귀신을 숭배하고 점치기를 좋아하는 풍습은 당시 일본사회에서 더욱 성행했다. 그러나 일본민족의 위대성을 맹신한 호소이의 눈에는 그런 현상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야만적’인 한국인까지도 호소이는 마음속 깊이 사랑했던 것일까. 그는 하루바삐 정감록 신앙에서 한국인을 구출하여야만 된다고 믿었다. 합리적이고 발달된 현대 일본사회의 참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 한국인은 정감록 신앙을 포기해야 된다. 이것이 호소이의 변(辯)이었다. 그러나 1923년 동경판 정감록을 간행한 진짜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대일본제국의 번영을 위해 정감록이라는 정치적 폭탄에서 뇌관(雷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동경판이 제3판에 돌입한 지 보름 정도 지난 1923년 3월19일 김용주가 편찬한 정감록이 독자들에게 선을 보였다. 편찬에 나선 김용주는 호소이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그는 정감록의 내용에 대해 아무런 비평도 보태지 않았다. 딱히 정감록을 옹호하지는 않았으나 이것은 호소이에 대한 무언의 항변이었다. 굳이 김용주가 정감록을 신앙하였다거나, 민족주의자였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정감록에 대해 아무런 비평을 가하지 않은 데는 호소이의 지나친 악평에 대한 반발심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밖에도 김용주에게는 정감록을 비판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첫째, 당시 많은 한국인들은 정감록의 내용을 틀림없는 예언으로 믿고 있었다. 식민지의 힘없는 지식인에 불과했던 김용주로서는 대중의 그러한 열망에 굳이 찬물을 끼얹을 이유가 없었다. 설사 그가 남다른 애국심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대한독립이 된다고 믿고 있는 동포들의 기대심리를 비난할 필요는 없었다. 둘째, 단순히 책을 많이 팔기 위해서라도 잠재적인 독자들의 희망을 꺾어서는 안 됐다. 김용주의 편집 태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호소이에 대한 반감을 비롯해, 독립에 대한 기대와 상업적 목적이 골고루 다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김용주는 정감록의 신빙성에 대하여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또 하나의 정감록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것은 한성판이라 불릴 만했다. 한성판엔 매우 흥미로운 점이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동경판과 공통되는 부분도 상당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 적지 않았다. 두 판본이 내용 면에서 차이를 보이게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매사를 곧이곧대로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민간에 퍼져 있던 허다한 비결 가운데 어느 것은 호소이만, 또 다른 것은 김용주만 수집해서 자연히 그렇게 됐다고 할 것이다. 실제 정감록은 수백 년 동안 필사본으로 암암리에 전파되었기 때문에 각자의 수집본이 서로 다를 수가 있다. 그렇다면 동경판과 한성판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비결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야 물론 좀 더 널리 퍼져 있던 유명한 예언서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전국 어디에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누구나 손쉽게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그런 대표적인 예언서 말이다. 나는 이런 입장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동경판을 편집한 호소이가 매우 국수주의적이었단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수집된 정감록을 모두 출판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 일본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 달리 말해 진인출현이나 대한독립의 메시지가 약한 ‘순화된’ 비결만을 선별적으로 알리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그는 ‘고약한’ 내용의 예언까지 인쇄에 부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김용주는 달랐다. 그는 도쿄본의 상당수를 답습하면서도 도쿄본에 실리지 못한 다른 비결들을 많이 포함시켰다. 김용주는 호소이가 정감록의 정본을 만들려고 한 의도를 정확히 꿰뚫어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도쿄판이 정감록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진짜 정감록은 훨씬 더 위험한, 폭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정감록을 출간하지는 못했다. 총독부의 검열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결국 호소이의 뜻대로 되다 당연히 김용주의 정감록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것은 조선총독부의 의도와 배치된다. 일본인들이 보기에 김용주의 한성본이 딱히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눈에 거슬리는 점이 없지 않아 조만간 도태되어야만 될 책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식민지 한국의 정세는 한결 경색됐다. 이른바 전시총동원체제가 작동돼 비상시국이었다. 엄격한 사상통제와 감시가 일상화되는 가운데 정감록에 대한 통제도 한 단계 더 나갔다. 그 무렵 새로운 정감록이 나왔다. 현병주의 ‘비난정감록진본’이었다. 마침 경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를테면 경성본이라 부를 만하다. 그런데 해명돼야 할 문제가 있는 책자였다. 우선 표면상 출간연도가 미상이란 점이 문제다. 책의 간행지를 ‘경성(京城)’이라고 표기해 놓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식민지시기 서울에서 나온 것은 틀림없다. 경성본이 나온 시기를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내기 위해 나는 본문의 표기법을 자세히 분석했다. 문장의 구조와 맞춤법이 현대의 격식에 가깝다. 그런 이유로 나는 경성본의 간행시기를 1930년대 중반 이후로 확신한다. 경성본은 내용면에서도 앞서 간행된 한성본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경성본은 정감록이 사실무근의 허망한 책자라는 논설을 싣고 있다. 편자 현병주는 정감록의 가치에 대해 직접적인 판단을 보류한 김용주와는 달랐다. 하지만 현병주가 단순히 일본인 국수주의자 호소이를 추종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는 정감록의 허구성을 비판하였을 뿐 문제의 궁극적인 원인을 한국인의 저열한 민족성에서 찾지는 않았다.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점은 현병주가 비결의 내용 중에서 자신이 동의하지 못하는 대목에 대해 일일이 비판을 가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비결의 본문에 길지(吉地)에 피난을 가더라도 피난 시기에 따라 생명을 건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부분이 있다. 현병주는 바로 그 구절의 끝에 괄호를 치고는 “생명을 건지는 땅 중에도 종종 생명을 건지지 못하는 곳이 있다.”고 비꼬는 투로 주석을 붙였다. 이와 같이 조목조목 정감록의 내용을 비판함으로써 현병주는 정감록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려 했다. 호소이의 정감록 말살 의도는 현병주에 이르러 더욱 공교해졌다. 나는 현병주가 친일파였는지 여부를 알지 못한다. 다만 정감록에 대한 총체적 불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정감록을 출간했다는 점에서 현병주는 호소이의 완벽한 후배다. 현병주는 좀더 중요한 점에 있어서도 호소이의 전통을 계승했다. 나는 지금 경성본에 실린 비결의 내용을 문제로 삼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 호소이는 35종의 선별된 비결을 공개했다. 김용주는 그보다 16종이 더 많은 51종을 간행했다. 그런데 경성본에는 25종만 실려 있다. 현병주는 호소이의 동경본과 김용주의 한성본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비결로 한정했다. 결과적으로 말해 그는 호소이가 간행한 비결의 일부만이 정감록의 정본이라는 인식을 심는 데 기여했다. 호소이가 공개한 35개의 비결 가운데 25종은 광복 이후 간행된 여러 정감록에도 빠짐없이 등장한다.20세기 후반부터 한국사회에서 정감록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호소이의 비결을 정본으로 대접하게 됐다. 그렇게 된 줄이나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유림 속 한자이야기] (71) 奔喪(분상)

    儒林 (322)에는 ‘奔喪’(달릴 분/잃을 상)이 나오는데,‘먼 곳에서 부모가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감’을 이르는 말이다. ‘奔’자의 金文(금문) 자형을 보면 사람이 팔을 휘젓고 있으면서 그 아래에는 발을 뜻하는 ‘止’(지)자가 세 개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會意字(회의자)이다. 用例(용례)에는 ‘奔忙(분망:매우 바쁨),奔放(분방:규칙이나 규범에 구애받지 않고 제멋대로임),奔走(분주:몹시 바쁘게 뛰어다님)’ 등이 있다. ‘喪’자는 뽕나무 한 그루와 그 가지에 걸린 대바구니들을 본뜬 글자로, 원래 뜻은 ‘뽕잎을 따다’였다. 그런데 뽕나무는 다른 나무와 달리 누에의 먹잇감으로 잎을 모두 잃어버린다. 여기서 착안하여 喪에서 ‘잃어버리다’‘죽다’의 뜻이 派生(파생)되었다고 한다.用例에는 ‘喪明(상명:아들의 죽음을 당함. 자하가 아들의 죽음에 너무 상심하여 실명한 고사에서 나온 말),喪心(상심:근심 걱정으로 맥이 빠지고 마음이 산란하여짐),喪妻(상처:아내가 죽음)’ 등이 있다. 상례란 사람이 殞命(운명)하여 땅에 묻힌 다음,大祥(대상)을 지내고 吉祭(길제)를 지내고 脫喪(탈상)까지의 一連(일련)의 의식 절차를 말한다.近代化(근대화)의 물결과 함께 각종 傳統意識(전통의식)이 退色(퇴색)되고 있는 실정이지만 상례에 관한 풍습만큼은 여전히 전통적인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 전통 상례의 節次(절차)의 대강만을 거론하더라도,“臨終(임종:운명이라고 하는데 원래 사람이 장차 죽을 때를 말함)-皐復(고복:生時(생시)에 입던 저고리를 왼손에 들고 지붕에 올라서거나 마당에서 북쪽을 향해 이름을 부르는 일)-設奠(설전:死者(사자)를 생시와 같이 섬기기 위해서 매일 한 번씩 음식을 드림)-小殮(소렴:시신을 옷과 이불로 싸는 것을 말함)-大殮(대렴:소렴이 끝난 뒤 시신을 입관하는 의식)-成服(성복:大殮이 끝난 이튿날,五服(오복)의 사람들이 각각 그 복을 입고 조곡을 하며 조상함)-遷柩(천구:영구를 상여로 옮기는 의식으로 발인 전날 행함)-발인(發靷:영구가 장지를 향해 떠나는 것을 말함)-成墳(성분:흙과 회로 광중을 채우고 흙으로 봉분을 만드는 일)-虞祭(우제:神主(신주)를 위안시키는 제사로 초우는 葬日(장일) 당일 집에 돌아와 지낸다)-卒哭(졸곡:삼우 종료 후 3개월이 경과한 剛日(강일)에 지냄)-小祥(소상:초상을 치른 지 만 1년이 되는 날 지내는 제사)-대상(大祥:초상 후 만2년만에 지냄)-吉祭(길제:담제를 지낸 직후 택일하여 지냄)” 등 매우 복잡하다. 다음 奔喪의 설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내용 또한 까다롭다.“무릇 服(복)을 입어야 할 親戚(친척)의 喪(상)이 났으나 다른 곳에서 訃音(부음)을 들었으면 神位(신위)를 설치하고 哭(곡)을 한다. 만일 奔喪을 해야할 경우라면 그 집에 도착하여 成服(성복)을 하고,奔喪이 어려우면 나흘만에 成服을 한다.” 이렇게 喪禮(상례)의 절차를 까다롭게 規定(규정)해 놓은 것은 哀悼(애도)의 뜻을 충분히 표현하기 위한 制度的(제도적) 裝置(장치)이기도 하지만 슬픔을 적절히 調節(조절)하여 喪主(상주)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크다. 김석제 경기 군포교육청 장학사(철학박사)
  • [우리동네 이야기] 도봉구 방학동

    [우리동네 이야기] 도봉구 방학동

    방학동(放鶴洞)에는 진짜 학이 살았을까. 도봉구 방학동의 이름에 관한 전설은 크게 두 가지로 추려진다. 조선조 왕이 도봉서원의 터를 정하려 도봉산 중턱에 앉아 있다가 학이 평화스럽게 많이 앉아 노는 모습을 보고 ‘방학굴’이라고 불렀다는 전설과 이곳 지형이 학이 알을 품고 있는 것 같아 방학이라 정했다는 설이다. 그러나 학과 관련된 전설은 한자로 방학리(放鶴理)란 지명이 붙여진 후 생긴 이야기로 추정되고 있다. 방학동이란 명칭이 정식으로 명명된 것은 1963년 서울시 성북구에 편입되면서 부터다. 이후 도봉구 관할이 되면서 방학 1∼4동으로 나뉘었고, 현재 면적 4.08㎢에 9만 3000여명이 터를 잡고 있다. 북쪽과 서쪽지역은 대부분 북한산 국립공원에 속하며, 북한산 자락에는 왕실과 귀족들의 묘소나 문화재가 많이 있다. 그 중 연산군묘와 왕비였던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가 대표적인데, 특히 연산군 묘역이 있는 산기슭 앞에는 수령이 1000년 정도 된 높이 24m, 둘레 9.6m의 은행나무(서울지정보호수 1)가 있다. 이 나무는 나라에 큰 변이 있을 때마다 불이 난다는 전설로 유명하다. 오래 전부터 연초가 되면 이 은행나무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는데, 산업화가 진행되고 동네 사람들이 흩어지면서 이 풍습도 맥이 끊겼다. 그러다 10여년 전, 동네 청년들이 중심이 돼 다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방학동에서 태어나 50여년을 살았다는 한 주민은 “어렸을 때 어른들이 돼지머리를 놓고 제사를 지내다가 1970년대부터 없어졌다.”면서 “어르신들께 풍습을 돌려주자는 의미에서 30∼40대 청·장년들이 제사를 부활시켰고, 지금은 정월대보름마다 경로 잔치를 겸해 무속인까지 불러 더 크게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노인을 공경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인지, 방학동은 서울에서 노인 복지가 가장 잘 돼 있는 동네로 꼽힌다. 방학 2동에는 만 60세 이상 주민 전용 컴퓨터교육실, 바둑실 등이 갖춰져 있는 노인복지센터가 자리를 잡고 있으며, 지난 4월에는 치매노인 전문 요양원인 도봉실버센터가 방학 3동에 문을 열었다. 도봉구청 문화체육과 최병우씨는 “방학동 주민뿐만 아니라 타 지역 사람들의 문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 방학동의 명소로 방학천 인근 ‘발바닥 공원’이 있다. 이곳에는 200m의 지압보도가 있다. 방학천 주변 무허가 주택을 헐고 지난 2002년 만들어졌으며, 서울 시내 59곳의 지압보도 가운데 길이가 가장 길다. 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전통소재로 아이들 관심끌어 성공”

    “전통소재로 아이들 관심끌어 성공”

    베스트셀러 동화작가. 그림동화 ‘똥떡’을 쓴 이춘희(39)씨에게 근 2년째 따라붙어 다니는 ‘행복한’ 수식어다. 그런데 정작 작가는 손사래를 친다.“기쁜 건 잠시였을 뿐, 오히려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책이라 원고지를 메울 때면 두려운 마음이 몇 배나 더 크다.”고 말했다.“아이들이 (내 책을)많이 찾는다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한 글자 한 글자 쓰는 일이 조심스럽다.”고 덧붙였다. 동화작가 이력으로 치자면 이씨는 새파란 ‘신인’이다. 지난 2003년 5월 출간하자마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간 ‘국시꼬랭이’ 시리즈(언어세상 펴냄)의 첫째권 ‘똥떡’이 데뷔작. 잊혀져 가는 자투리 문화를 소재로 삼은 이색기획에 어린 독자들의 호응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똥떡’ 이후 9권 ‘눈다래끼 팔아요’까지 출간됐는데, 지금까지 15만부가 팔렸다. 괜찮은 동화책 한 권의 판매량이 1년 평균 3000부쯤 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놀랄 만한 수치다. 덕분에, 짧은 이력에도 그는 창작동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보인 주인공으로 통한다. “요즘 아이들은 대개 네댓살이면 한글을 다 배우잖아요? 10여년 전하고만 비교해도 독서경험을 엄청나게 빨리 시작하는 셈이죠. 양질의 독서환경이 그만큼 중요해지는 건 말할 것도 없는 것이겠지요.” 작가 책의 인기비결은 전통문화 가운데서도 민간에서 전래돼온 자잘한 풍습이나 놀이 등을 소재로 삼았다는 대목이다. 아이들에겐 호기심을, 책을 고르는 학부모들에겐 향수를 자극하는 데 주효했다. 예컨대 똥떡이란 재래식 화장실에 빠진 아이를 위해 액땜용으로 떡을 해서 돌렸던 민간풍속의 하나. 요즘 아이들에게는 딴 나라 얘기같이 낯선 소재다. 하지만 외국동화에 길들여진 아이들에게 전통문화도 얼마든 흥미로울 수 있음을 보여주며 호기심을 발동하게 만들었다는 평가들이다. “어린이 독자들은 스스로의 여과기능 없이 책을 빨아들이므로 어떤 독자층보다 더 정확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그는 “단 몇 장짜리 원고지를 메우기 위해 몇 달씩 도서관을 뒤지고 다니기 일쑤”라고 고충을 밝혔다. 최근 8권 ‘논고랑 기어가기’를 내면서도 그랬다.“‘논흙’의 특성을 부연설명하는 짧은 글을 책 뒷부분에 싣기 위해 몇 달 동안 흙 연구가를 찾아 헤매야 했다.”고 말했다. 경북 봉화 산골 출신으로 안동대 국문과를 졸업한 그는 오랫동안 방송작가로 일했다. 우연히 전통문화에 관한 방송글을 쓰면서 ‘언젠가는 전통을 소재로 한 동화를 써보리라.’ 마음먹었다고 했다. “좋은 독자가 좋은 작가를 만든다.”고 전제한 그는 “서점에서 동화를 고르는 엄마들이 독서경험이 많은 386세대라 작가로서도 더욱 긴장하고 분발하게 된다.”고 말했다.“좀 막연하게 들리겠지만, 아이와 어른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책이 가장 좋은 동화일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고구려·고려 국보급유물 10점 선봬

    고구려·고려 국보급유물 10점 선봬

    14일부터 경기도 분당 한국토지공사 청사내 토지박물관에서 열리는 공사 설립 30주년 특별전에 문화재 애호가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앞서 공개된 3세기 고구려시대의 벽비(壁碑·서울신문 4월12일자 보도) 이외에도 고구려와 고려시대의 국보급 유물들이 10여점이나 새로 선보이기 때문이다. 이중 가장 눈길을 모을 것으로 기대되는 것들은 고려시대에 청동으로 제작한 ‘미니어처’ 9층탑과 개성 공민왕릉에서 출토된 금술잔, 고구려시대의 도용(陶俑)과 불상, 인장 등이다. 우선 고려시대 청동 9층탑은 높이가 98㎝에 이르고, 세부묘사가 정밀할 뿐만 아니라 보존 상태가 매우 정밀하다. 전문가들은 “황룡사 9층목탑이 불타 없어진 것이 13세기 말인 점을 감안할 때 이 청동9층탑이 어떤 방식으로든 황룡사탑의 양식을 반영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등에 ‘晉永和乙巳年’(345년)’의 연대와 ‘大兄’(대형)이란 관직이 새겨진 고구려 도용은 중국 도용들과 달리 속이 꽉 차 있고 등에 명문이 있으며 붉은 색의 고운 점토로 구운 것이 특징이다. 좁은 소매가 달린 점무늬옷을 입고 꿇어앉아 다소곳이 두 손으로 공양물을 받쳐들고 있는 모습이다. 고구려시대의 부장풍습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진흙을 빚어서 구운 고구려 인장(印章)은 손잡이 부분에 동물문양을 빚어 올렸고 앞뒤 다리 사이로 끈을 매달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바닥면에 가로선과 세로선으로 구획을 나누고 ‘高句驪東邑百戶封印’이라고 하는 9자의 명문을 새겼다. 국내성에서 출토된 청동인장 중 이와 유사한 것이 있다. ‘고구려금니여래입상’은 흙으로 만든 불상으로 높이가 13㎝ 정도다. 진흙 표면에 옻을 칠하고 그 위에 금박을 입혀 전체적으로 옻칠한 검은색이 보이는 가운데 상호와 동체, 대좌, 전후면 곳곳에 금색이 보인다. 흙으로 빚은 니조불은 1930년대 평안남도 평원군 덕산면 원오리절터에서 출토된 것이 있으나 이같은 금니불은 삼국 전 시대를 통해 유일한 자료이다. 무덤의 주인공을 위해 부장된 흙베개도 눈길을 끈다. 흙으로 구웠기 때문에 ‘도침(陶枕)’이라고 한다. 붉은색의 니질토로 빚은 이 도침은 비천도와 연화문, 주작도가 음각되어 있고, 청룡과 백호가 부조형태로 양각되어 있다. 전면에 14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서체나 간지 등을 고려할 때 고구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도 공민왕릉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순금잔과 고려시대의 범종, 금동 경갑 등은 고려시대 금속공예 기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한편 토지박물관은 지난해 개성공단 발굴조사 내용을 중심으로 북한지역에서 출토된 유물 100여점도 전시할 계획이다. 단 개성공단 유물의 경우 아직 북한과 대여협상이 끝나지 않아 당분간은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전시는 10월29일까지 계속된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일요영화]

    [일요영화]

    ●딥 블루 씨(SBS 오후 11시45분) ‘클리프 행어’‘다이하드2’‘드리븐’ 등을 만든 레니 할린 감독의 1999년작. 유전자 조작으로 인해 인간 이상으로 머리가 좋아진 식인 상어들이 인간을 공격한다는 내용의 공포영화. 이 영화에서는 배경 세트, 로봇 상어와 컴퓨터그래픽 상어, 실제 상어의 모습을 적절히 합성해 식인 상어의 움직임을 사실감 있게 그려냈다. 바다 위에 떠있는 수상연구소 아쿠아티카(Aquatica). 수전 매켈레스터 박사(새프런 버로스)를 비롯한 연구팀은 의료사의 새로운 장을 열 비밀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지구상의 동물 중 가장 빠르고 가장 완벽한 살상무기인 상어를 이용, 인간의 손상된 뇌 조직을 재생시킬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 하지만 수전은 연구 중에 금지된 실험에 손을 댄다. 바로 상어의 DNA 유전인자를 조작하는 것. 유전인자가 조작된 상어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지능이 높고, 더 빠르고, 훨씬 더 무서운 완벽한 살상 괴물로 변한다. 어느날, 연구비를 제공하던 투자사가 연구 지연을 이유로 자금 지원을 중지하고 연구소를 폐쇄하겠다는 통보를 해온다. 수전은 투자사에서 나온 검시관 러셀 프랭클린(사무엘 잭슨)의 감시 아래 상어 중 가장 큰 놈의 뇌조직을 떼내는 실험에 착수한다. 그러나 성공적으로 뇌조직을 떼어낸 순간, 실험 중이던 상어가 마취에서 깨어나 한 연구원의 팔을 물어 뜯는다. 그 때부터 상어들은 자신의 뇌조직을 떼낸 인간들에게 무자비한 보복을 하기 시작하고, 연구소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고 만다. 급기야 연구소는 바다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하고 열대지역 폭풍우 때문에 외부로의 도피조차 불가능해진다. 이에 연구소에 갇힌 사람들은 그 살상 괴물들과 생존을 위한 결투를 벌여야 하는데….123분.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천국의 맞은 편(KBS1 밤 12시20분) 1954년부터 1957년까지 통가에서 선교활동을 펼친 모르몬교도 존 H 그로버그의 실화를 영화화했다. 실제 선교활동 경험이 있는 미치 데이비스 감독이 존의 ‘태풍의 눈’이라는 책을 읽고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모르몬 선교사 이야기이지만 모르몬교보다 일반 관객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만큼 종교적 색채나 종교 문제 등은 그리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장면은 쿡 제도의 라로통가에서 촬영됐다. 존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해에 여자친구 진을 두고 통가로 선교활동을 떠난다. 통가는 가는 데만 83일이 걸리는 남태평양의 외딴 섬. 존은 도착 후 말도 모르고 풍습도 서툴러 큰 고생을 겪는다. 하지만 존의 진실된 마음이 주민들에게 전달되고 점차 말도 배워간다.110분.
  • 18일부터 교황선출회의 이틀새 100만여명 조문

    |파리 함혜리특파원 외신|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을 이틀 앞둔 6일(현지시간) 성베드로 대성당과 광장이 전세계 추모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교황을 뽑는 추기경단의 비밀회의인 콘클라베가 18일부터 열린다. 교황청은 교황의 유언을 개봉했으나 내용은 7일 발표키로 했다. 유럽 각국의 가톨릭 신도들은 특별열차와 전세 여객기, 버스, 배 편으로 8일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끊임없이 로마로 향하고 있다. 지난 이틀 동안 교황의 시신을 대면한 신도들은 약 100만명으로 추산되며 장례식 전까지는 최대 200만명이 더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장례 미사에는 200만∼400만명이 몰릴 것으로 추정된다. ●교황청 대변인은 이날 바티칸에 모인 추기경단이 사흘째 회의를 열어 ‘콘클라베’ 개시 날짜를 18일로 잡았다고 밝혔다. 교황 선출권이 있는 추기경단의 수는 필리핀 출신의 추기경 제이미 신(76)이 신병 악화로 불참을 통보,116명으로 1명이 줄었다. 교황청은 추기경단이 이날 회의에서 폴란드어로 쓰여진 교황의 유언을 읽었으나 상세한 내용은 7일 폴란드어와 이탈리아어 번역본으로 공개될 것이라고 밝혔다.15쪽의 유언에는 교황이 2년전 지명한 비밀 추기경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가톨릭식 표현으로 암시만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각에서는 중국인 추기경이라는 관측이 제기됐다. ●파리의 엠마뉴엘회와 ‘요한 바오로 2세 추모회’과 는 교황 장례식에 참석하길 원하는 사람들의 요청이 급증하자 6일 밤 특별 열차편과 전세기편을 준비했다. 스페인의 이베리아항공은 로마행 여객기를 보잉 747로 대체하기 위해 당국의 허가를 기다리고 있으며 독일 철도공사 도이체반은 로마행 철도의 수용인원을 10∼20%까지 늘리기로 했다. 교황의 고국인 폴란드에선 200만명이 교황청을 찾을 것으로 알려졌다. 로마행 열차 4000석의 예매를 받은 폴란드의 한 인터넷 사이트는 15분 만에 100만건이 접속, 다운됐다. 폴란드인이 해외에 매장될 때 고향의 흙을 함께 묻는 풍습에 따라 폴란드 11개 지역의 흙이 담긴 주머니가 이날 교황청에 보내졌다. ●교황청은 새 교황이 선출되면 그동안 하얀 연기만 피웠으나 이번부터는 종을 함께 쳐 교황의 탄생을 알리기로 했다고 피에로 마리니 교황청 전례(典禮) 담당 대주교가 밝혔다. 또한 콘클라베에 참석하는 추기경단은 과거 시스티나 성당에 감금되다시피 했으나 앞으로는 바티칸 시티안에서는 자유로운 이동을 허용했다. 다만 외부와의 통신연락은 계속 금지된다. 마리니 대주교는 교황의 시신이 ‘땅속에 묻히고 싶다.’는 고인의 요청에 따라 성베드로 대성당 지하에 안장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 교황의 신체 일부가 고향인 폴란드에 묻힐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교황청은 일축했다. ●교황의 서거 이후 시신 주변을 지키는 경호원들이 주목받고 있다. 이들은 스위스 근위병으로 지난 500년 동안 바티칸의 경비는 물론 교황의 침실 경호까지 도맡았다. 이들이 처음 교황의 경호를 맡은 것은 1506년 1월. 이후 1527년 스페인 군대의 교황청 공격 때부터 1798년 나폴레옹 군대의 로마 침략과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로마 진격에 이르기까지 500년간 교황과 교황청을 지켰다. ●세계 정상들의 조문 외교장이 될 교황의 장례식장 좌석 배치를 놓고 신경전이 한창이다. 바티칸측이 마련한 좌석 배치도에 따르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악의 축’으로 지칭한 이란의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 근처에 앉게 돼 두 정상의 ‘어색한 조우’가 새삼 관심이다. 장례식이 열리는 동안 바티칸의 상공은 비행이 금지되고 교황청 주변에는 경비 차원에서 미사일도 배치하기로 했다. ●교황의 사망 시점을 놓고 교황청 주변에선 댄 브라운의 베스트셀러 ‘다빈치 코드’를 연상시키는 음모론이 나돌고 있다.5일 영국 텔레그래프 인터넷판에 따르면 교황은 바티칸 발표보다 하루 앞선 1일 사망했으나 바티칸이 보수파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사망날짜를 조작했다는 내용이다. lotus@seoul.co.kr
  • [교황 서거] 장례 및 차기교황 선출 절차

    [교황 서거] 장례 및 차기교황 선출 절차

    교황 서거가 발표된 뒤 바티칸 궁무처장은 옥새는 물론, 교황이 생전에 손가락에 끼고 있던 ‘어부의 반지(페스카토리오)’를 빼내 파기한다. 위조를 막기 위해서다. 곧바로 교황 처소 등 바티칸의 주요 장소가 봉쇄되고 서거 이튿날엔 9일간의 공식 애도기간이 선포된다. ●세례명 세번 불러 서거 확인 관례대로 궁무처장인 에두아르도 마르티네스 소말로(78) 추기경은 교황의 세례명인 ‘카롤’을 세 차례 불러 응답이 없음을 확인했다. 예전에는 은으로 만든 손망치로 교황 이마를 두드려 확인했는데 지금도 이 방식이 사용되는지는 분명치 않다. 서거 확인 후 궁무처장은 옥새뿐 아니라 교황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는 페스카토리오를 파기하고 새 반지 제작에 들어간다. 고대 로마의 풍습에 따라 애도기간은 9일로 설정되고 시신은 성베드로 대성당 안에 있는 클레멘타인 소성당으로 옮겨진 뒤 재위기간과 이름이 적힌 납관 등 3중 관에 입관된다. 이르면 4일 오후 바실리카성당으로 다시 옮겨져 일반 참배객들 앞에 전시된다. ●3중 관에 모셔져 참배객들 앞에 전시 1996년 제정된 규정에 따라 장례식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사후 4∼6일 안에 성베드로 광장에서 치러진다. 최근 수세기 동안 대다수 교황들은 성베드로 대성당 지하에 묻힐 것을 선택했다. 교황의 관은 장례 미사 후 대성당 주(主)제대(祭臺)의 왼쪽에 있는 ‘죽음의 문’을 통해 운구된다. 이때 종이 한 번 울리고 무게 500㎏의 관은 대리석관 안으로 옮겨진 뒤 거대한 석판으로 덮여진다. 교황이 장례에 대해 어떤 희망을 피력했는지 교황청은 밝히지 않고 있다. 생전에 고향인 폴란드 크라쿠프에 있는 바벨 대성당에 묻히길 원했다는 소문도 있으나 전문가들은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보고 있다.19세기 말까지는 교황의 심장만 떼내 고향에 안치하기도 했다. ●필체 위장까지 서거 후 15∼20일 사이에 시스티나성당에서 열리는 콘클라베(교황선출 추기경회의)는 엄격한 비밀 엄수 의무를 강요받는다. 추기경들은 필적을 알아볼 수 없도록 위장하라는 권고를 받게 된다. 추기경들은 첫날 저녁 한 차례 투표를 제외하고는 매일 오전과 오후 각각 두 차례씩 투표하게 된다. ‘나는 교황을 뽑는다.’라고 적힌 직사각형의 투표 용지에 지지 후보의 이름을 적은 뒤 두번 접어 길이 62㎝의 황금 성배에 넣는다. 투표자와 용지 수가 일치할 때만 개표에 들어가고 숫자가 맞지 않으면 소각한다. 3분의2 이상 득표자가 나올 때까지 투표가 계속되며 오전과 오후 투표 결과 차기 교황이 나오지 않으면 투표용지를 벽난로에 넣어 태운다. 교황을 선출한 경우 마른 재를 넣어 투표가 완료됐음을 알린다. 사흘째에 오전 투표결과 실패하면 오후에는 묵상과 토론의 시간을 갖는다.12일동안 30차례 투표에도 교황이 나오지 않으면 절대 과반수로 규칙이 바뀐다. ●즉위명 스스로 선택 교황이 선출되면 추기경단 단장은 수락 여부를 묻고 즉위명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알린다. 하얀 연기가 솟은 뒤 2시간 동안 교황은 흰색 교황복으로 갈아입고 시스티나성당에서 추기경 각자로부터 경배와 복종의 서약을 받는다. 그후 추기경단 단장은 바실리카성당 중앙 발코니에 나와 라틴어로 “하베무스 파팜”이라고 외치면서 새 교황의 이름을 알리고 새 교황은 전세계에 축복을 내린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1920년대 조선의 민담·풍습 오롯이

    1920년대 조선의 민담·풍습 오롯이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 깊은 애정을 가졌던 한 외국인의 기록을 본지가 입수, 소개한다.20세기 초 20여년간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독일인 선교사 안드레 에카르트가 독일 귀국후인 1923년에 발간한 조선어교제문전(朝鮮語交際文典·이하 문전). 건국대 명예교수인 류태영(69) 박사가 이스라엘에서 입수해 본지에 제공한 것으로, 원래는 조선인과 독일인 모두가 쓸 수 있는 어학교재용으로 만든 책이다. 그러나 지금은 독일인 눈에 비친 조선의 이런저런 민담과 풍습이 오롯이 남아 있다는 점이 더 관심을 끈다. 문전은 책 구성에서부터 조선인과 독일인 모두를 위한 어학교재라는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선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양 부분은 독일어와 한국어로 씌어져 있다. 한국어 부분 역시 물론 에카르트가 직접 쓴 것이다. 또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됴션언문(朝鮮諺文)’에서는 한글자모의 발음을 로마자(羅馬字)로 설명하는 등 문자체계에 대한 설명도 보인다. 그리고 45개의 조선어로 된 이야기들로 본문을 구성했다. 부록으로는 사서삼경 중 하나인 ‘대학’의 일부가 실려 있고 독일어 번역을 위한 짧은 연습문 45개도 있다. 책 마지막에 저자 이름으로 ‘옥락안(玉樂安)’이라는 에카르트의 한국식 이름이 표기되어 있고 ‘정가금오원’과 ‘불허복제’라는 가격과 저작권 보호 표시까지 붙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본문 내용이다. 에카르트는 서언(緖言)에서 본문의 45가지 ‘니야기’(이야기)는 “조선 13도를 통하야 방방곡곡을 천답(踐踏)하며 연구에 연구를 가한 결과”라고 밝히고 있다. 에카르트의 성실한 노력 덕분에 교재를 읽다보면 어떤 이야기들이 1920년대 당시 조선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는지 엿볼 수 있다. ●만담과 해학 산을 넘다 육혈포(권총)를 가진 도적을 만나 주인양반의 돈을 다 빼앗긴 하인이 “오늘 길에서 도적을 만났다하면 그 양반이 내 말을 곧이 아니 듣고 나를 의심하겠으니 당신 가진 육혈포로 내 옷에 구멍을 뚫어주면 그 보람으로 주인 양반에게 빙거(憑據·증거를 대다)하겠다.”고 도적에게 부탁한다. 그런데 미련한 도적은 그만 “철환(총알)이 없다.”고 대답해버렸다.‘헛총만 가진 것’을 안 하인은 빼앗긴 돈을 되찾고 도적을 흠뻑 두드려주고 간다.(세번째 이야기 ‘도적을 속인 진담’) 이처럼 문전에는 만담류의 우스갯소리가 20여개로 가장 많다. 그냥 만담으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판소리풍의 걸죽한 입담 역시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땡볕에 김매는 팔자에 울상짓던 아내한테 괄시받은 한 농부는 벼슬하겠다며 서울로 훌쩍 올라간다. 이 농부 어찌어찌 벼슬얻어 풍악을 울리며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는데 이 풍악소리를 듣고 내뱉는 아내의 말이 감칠맛이다.“우리 양반인지 닷돈 세뭉치인지, 벼슬인지 닭의 벼슬인지, 군수인지 국수인지, 감사인지 곳감인지 한다고 시골인지 서울인지 가더니 아니오니 이 노릇을 장차 어찌하잔 말이냐.” ●조선의 풍습 조선의 풍습에 대한 글도 찾아볼 수 있다. 풍습에 대해서는 에카르트의 세심한 관찰과 묘사가 잘 드러난다.‘조선에서 혼인하는 법’에서는 에카르트가 마치 결혼식을 옆에서 지켜본 듯 신랑·신부의 행색부터 결혼식까지의 전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또 조선의 풍습을 잘 모르는 외지인과 조선사람간의 대화체로 꾸며진 ‘귀신을 위하는 이야기’에서는 성주·터주 등 전통신앙에서부터 종묘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제사 풍습에 대해 순차적으로 설명해준다. ●피할 수 없는 시대상황 어학교재인데다 각 지방의 얘기들을 채록하는 형식이다보니 정치나 사회문제 같은 민감한 소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은근슬쩍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서울구경’편은 강원도 산골에 사는 김 생원이라는 사람의 서울 유람기가 담겨져 있다. 하루는 김생원이 임금 사는 곳을 보겠다며 경운궁으로 가는데 당시 경운궁에 유폐돼 있던 태황제(고종)를 두고 한 경인(京人)과 나눈 대화가 이렇다.“그러면 국사를 시방 누가 상관하오.”라고 김 생원이 묻자 “예 일본 통감부에서 모든 정사를 다 상관합니다.”라고 대답한다. 다시 “그러면 그전보다 국민간에 모든 정사가 밝게 됩니까.”라고 묻자 “예 그 전보다 백성들이 참 평안히 살고 국사가 개명하게 됩니다.”라고 대답한다.‘아무 것도 모르는’ 것으로 설정된 한 촌부의 질문이 묘한 느낌을 준다. 또 임진왜란 당시 피란길에 올랐던 선조가 겪는 고초도 ‘임금이 피란함’편에 상세히 실려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에카르트 신부는 안드레 에카르트는 1909년 천주교 베네딕트선교회 선교사 자격으로 조선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조선어를 익힌 뒤 경성제국대학에서 언어와 미술사를 강의했다.1928년 독일로 돌아간 에카르트는 20여년에 이르는 체류경험을 바탕으로 뮌헨대 한국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조선의 언어, 미술, 음악, 무용, 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다양한 글을 남겼다. 한국인 제자도 많이 길러냈는데 비운의 천재로 불리는 전혜린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에카르트의 저작 가운데 1929년 쓴 ‘조선미술사’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책은 조선 미술에 대한 최초의 통사 형식 서술이었고 한국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아직도 한국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책으로 꼽힌다. 그는 이 책에서 거대하지만 실속은 없는 중국미술, 오밀조밀하지만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인 일본미술과 달리 한국 미술은 단아하고 소박한 자연미가 살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에다 개개의 예술작품을 통해 한국의 미를 추출해내는 접근법을 쓰고 있어 책에 실린 500여점 도판은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에카르트는 그다지 기억에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선미술사가 2003년에서야 열화당에서 번역되어 나왔다는 것이 단적인 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이스라엘 유학중 ‘…文典’ 입수한 류태영박사 국내에서 이스라엘 전문가로 손 꼽히는 류태영 박사는 이 문전을 1973년 이스라엘 유학시절 히브리대 중앙도서관 서고에서 처음 접했다. 히브리대 중앙도서관은 이스라엘 국립도서관 역할을 하는 곳이다. 당시에는 에카르트가 누구인지도 몰랐단다. 류 박사는 “독일 선교사인데도 또록또록한 한글로 재미있는 얘기를 너무 잘 풀어내서 ‘한국에 있었던 선교사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라며 읽었었다.”고 말했다. 그는 공부하다 골치가 아프면 머리를 식힐 겸해서 이 책을 자주 읽다가 아예 복사본까지 마련해뒀다. 귀국한 뒤 이 내용을 주변 사람들한테 얘기해줬더니 “재미있다.”는 반응이 많아 최근에는 복사본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돌리기까지 했다. 유 박사는 “출판사에 물어보니 펴낸 지 80년이 넘어 저작권에 문제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틈나는 대로 현대문으로 풀어내 출간도 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히브리 도서관에는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세계 각지에 흩어 살던 유대인들이 기증한 자료가 많다.”면서 “이 때문에 한국 관련 자료도 엄청난데 한글을 아는 사람이 없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다.”며 아쉬워 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씨줄날줄] 대마도/육철수 논설위원

    우리 민족이 선비정신을 기렸다면 일본 민족혼의 핵심에는 ‘사무라이 정신(武士道)’이 있다. 이 정신은 쇼군(將軍)을 정점으로 한 무사들이 국가통치권을 휘둘렀던 12세기 바쿠후(幕府)시대 이후 8∼9세기 동안 이어진 일본의 통치이념이요, 국민정신이나 다름없다. 사무라이 정신은 근대화의 초석인 메이지유신을 이끌었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으며, 패전국 일본을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았을 때도 늘 일본인의 심장 한가운데 있었다. 일본인들이 이 정신에 자부심을 갖는 것은 충절·희생·예의·용감·신의 등 명예를 중히 여기는 신사도(紳士道) 때문일 것이다. 일본 시마네(島根)현이 독도를 자기들 땅이라고 우기는 조례를 만들어 우리 국민을 극도로 분노시키는 가운데 “대마도(쓰시마)를 한국영토라고 주장하라.”는 주문이 인터넷 등에 쇄도하고 있다. 그런데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근거에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생떼와는 달리 명명백백한 사실(史實)이 있어 고민스럽다. 대마도는 거제도에서 직선거리로 49.5㎞ 떨어진 곳으로, 울릉도 10배 넓이(709㎢)에 4만 2000명이 살고 있다. 두 개로 나뉜 본섬 외에 109개 섬이 있고 5개가 유인도다. 옛날에 우리가 ‘두 섬’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쓰(두)시마(섬)’의 어원이 됐다. 조선 초 이후 한반도와 공식·비공식 교류가 활발해 정치·경제적으로 완전히 종속된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조선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받는 ‘수직왜인(受職倭人)’ 제도는 조선과 군신관계였음을 말해주는 증거다.18세기 우리 고지도 ‘도성팔도지도(都城八道之圖)’와 15세기 중국의 ‘조선팔도총도(朝鮮八道總圖)’에는 이 섬이 우리 땅이라고 표시돼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관리를 보내 지배했다기보다는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는 선린관계였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그들의 말과 음식, 풍습이 우리와 다른 걸 보더라도 그게 맞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대마도를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을 터이고, 그 깊은 심정을 일본은 알아야 한다.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진정 우리와 친구가 되고 싶다면 지금처럼 삼류 무사들의 ‘배째라(BJR)’식 사이비 사무라이 정신을 버리고 정정당당하고 예의바른 본연의 사무라이 정신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씨줄날줄] 남근형 백제 木簡/이용원 논설위원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두고 요즘 생떼를 쓰지만 그 영토욕이 현재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저들은 고대에도 한반도 남부를 일정기간 통치했다고 주장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임나일본부’설이다. 일본의 야마토 왕국이 4∼6세기 임나(가야)에 관부(官府)를 두어 직접 통치했다는 이 주장은, 그러나 지금은 일본 학계에서도 대부분 외면한다. 그런데도 일부 극우세력은 ‘임나일본부’ 환상을 버리지 못해, 최근 역사 왜곡으로 지탄받는 후소샤의 검정신청판 교과서에는 임나에 거점을 마련한 야마토 정권이 군사력으로 고구려 남하를 막았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다만 그들도 ‘임나일본부’라는 거짓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다. 딱한 것은, 일본이 제 아무리 어거지를 써도 고대 한·일관계에서 무게 중심은 명확히 한반도 쪽으로 기울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일제가 우리땅을 35년 강점한 동안 그들은 방방곡곡을 뒤졌지만 ‘임나일본부’를 입증할 유물은 나온 게 없다. 반면 한국의 4국(고구려·백제·신라·가야), 특히 백제가 일본에 끼친 영향은 지금도 일본의 국보에, 지명에,‘일본서기’를 비롯한 역사서에 넘칠 정도로 남아 있다. 그 목록에 하나가 덧붙었다. 충남 부여 능산리에서 2000년 출토된 남근(男根)형 백제 목간이 그것이다. 이 목간은 형태가 특이한 데다 거기에 쓴 ‘道緣立(도연립)’이라는 문구를 해석하지 못해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난 14일 국립부여박물관을 찾은 고대 목간의 전문가, 히라카와 미나미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교수의 해석으로 궁금증이 풀렸다.9세기 일본에는 왕이 거주하는 도성으로 사악한 귀신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남근형 제물을 성 입구에 걸어두는 도성제(都城祭) 풍습이 있었으며, 이후 민간에 퍼져 현재도 일부 지방에 남아 있는 도조신(道祖神)신앙으로 이어졌다는 것. 히라카와 교수는 ‘道緣立’이란 문구는 길가에 세운다는 뜻이어서, 형태와 문구상 백제의 남근형 목간이 일본 도성제의 원형임에 틀림없다고 강조했다. 이웃해 사는 한·일 양국간에 역사·영토 분쟁이 없을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 역사를 분명하게 알수록 일본의 생떼가 통할 여지는 좁아진다는 사실이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서울에도 집성촌 10여곳 있다

    서울에도 집성촌 10여곳 있다

    특별시에 집성촌?서울 양원리등 10여곳 수십 가구씩 오순도순 유영규(42·대구시 남구 대명동)씨는 어려서 자신보다 나이는 적지만 항렬이 높아 아저씨뻘 되는 아이에게 ‘꿀밤’을 먹였다가 집안 어른들로부터 꾸지람을 들은 적이 있다. 이어 눈을 피해 이 아이를 또 혼냈다가 들통이 나는 바람에 더 큰 야단을 맞기도 했다. 유씨로서는 어린 마음에 억울한 일이 줄을 이었다. 시골지역의 집성촌(集姓村)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 아직도 ‘아랫집은 사촌 형님, 윗집은 숙부, 옆집은 조카, 앞집은 당숙’ 하는 식으로 친인척끼리 옹기종기 모여 살아가는 마을이 10여곳 있다는 것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러한 집성촌들은 그린벨트로 묶이고, 세태의 변화에 밀려 점차 사라지고 있다. 서울 중랑구 망우1동 259 일대에는 서울이라고는 얼른 떠올려지지 않는 ‘양원리’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에는 동래 정씨들이 38가구나 모여 산다. ●조선 태조가 하사한 땅 이 마을 정수선(71·새마을금고 운영)씨는 “조상님들이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가 서울을 도읍으로 정한 1394년보다도 3년 전에 이곳에 터를 잡아 살기 시작했으니 벌써 610년을 넘겼다.”고 말했다. 정씨 말대로 이성계가 고려 말 역성혁명에 성공하자마자 일등공신인 정구(鄭)에게 이 일대의 토지를 하사한 인연으로 지금까지 24대째를 내려오고 있다. 마을 이름도 태조와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다. 태조가 자신이 묻힐 무덤자리를 보러 가는 길에 고개를 넘으면서 모든 근심을 잊었다고 해서 망우(忘憂), 고갯마루에서 쉬다가 마신 우물물의 맛이 너무 좋았다고 해 양원리(養源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아무래도 개발제한이 풀리면 집성촌 유지가 어렵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마을사람들이 내놓는 대답은 ‘천만에’였다. ●사라져가는 집성촌 정씨는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이는 바람에 건물을 못 짓고, 땅값이 주변의 10분의1밖에 안되는 등 불이익(?)에 따른 불만도 불만이지만, 무엇보다 건물을 짓지 못하는 불편 때문에 후손들이 고향을 떠나고 있다.”고 허탈해했다. 개발이 늦어져 오래 모여 살아오기도 했지만, 똑같은 이유로 세월에 떠밀려 사라질 위기에 놓인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수선씨는 또한 “집을 팔고 이사하는 바람에 다른 성씨가 10가구 들어와 집성촌이라는 명맥은 이어가지만 이미 순수혈통 마을에서는 약간 벗어난 게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는 이어 “한 핏줄끼리 옹기종기 모여 산다는 자부심도 있긴 하지만….”이라며 씁쓸해했다. 정씨는 슬하에 7남매를 뒀다. 막내아들 민섭(28)씨를 빼면 모두 서울에 살고 있지만 집성촌에서 나와 사실상 ‘타향 살이’를 하고 있다. 민섭씨 또한 아버지의 마을금고 사업을 도와주려고 머무는 것이니 ‘동거’는 그리 길지 않을 것으로 여기는 눈치다. ●“죄다 믿음이 간다오” 정씨의 집 앞에는 7촌 조카, 그리고 바로 옆에는 6촌 동생이 살고 있어 “이곳이 과연 집성촌이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망우동이 서울로 편입되기 전인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九里面)일때는 집성촌이 10개나 있었다. 현재 구리시로 한 단계 뛰어오른 구리면은 망우·상봉·중화·묵·신내·교문·토평·갈매·수택리 등 9개 마을로 이뤄졌는데, 바꿔 말하면 한 마을에 두 가지 성씨의 집성촌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 마을에서 북부간선도로를 가로질러 자동차로 10분쯤 가면 구릉산 아래로 신내1동 산6 일대에 경주 임(林)씨 30여가구가 모여 사는 능말(큰 능이 있다고 해서 붙은 능마을의 준말)이 나타난다. 임씨 집성촌이 처음으로 들어선 것은 선조 36년인 1603년쯤이라는 기록이 전해진다.400년 남짓한 전통으로 정씨네 집안에는 ‘한끗발’ 뒤지지만 결코 녹록하지 않은 역사를 갖고 있다. 대부분 직장인들인 양원 마을과는 달리 전체의 절반인 15가구가 아직도 이 지역의 특산물인 ‘먹골배’를 생산하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종친회 총무 임현만(59)씨는 “하루 온종일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서 “조상들의 묘를 지키며 오랫동안 ‘모여 사는 정’에 익숙해져 좀처럼 외지로 나가기가 힘들었다.”고 귀띔했다. 함께 사는 임씨의 아들 준성(29)씨도 “아무래도 집안 어르신들과 가까이 지내다 보니 예의범절이 절로 몸에 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예의 범절 저절로 배워요” 강동구 강일동 ‘벌말’ 청송 심(沈)씨네는 50여가구가 모여 사는 서울에서 가장 큰 집성촌이다.410여년 전인 조선시대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중에 충청도 예산에서 피란온 선조들의 후손이다. 벌말이란 벌판에 마을이 섰다고 할 정도로 너른 땅을 말한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어 지명에는 평촌(坪村)이 있다. 벌말에서는 나이는 어려도 항렬이 높은 이에게 존칭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함부로 호칭하다가 혼이 나는 일도 적지 않다. 서로 새해인사를 하는 경우 나이는 자녀뻘이지만 항렬이 높은 이에게 머리를 숙여야 한다. 강동구의회 의장을 지낸 25대손 심재풍(69)씨는 “10대 할아버지께서 정착한 이래, 마을 규범 때문에 가끔 다투기도 하지만 성씨가 같아서인지 금방 화목을 되찾는다.”며 마을 자랑을 빼놓지 않았다. 그는 이어 “최근 다른 성씨들이 마을로 들어오고 10촌 이상 촌수가 벌어지면서, 명절이면 친척들이 모두 모여 집집이 옮겨다니며 차례를 지내는 데만 하루 종일 걸리는 옛 풍습이 사라져 아쉽다.”고 말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무슨 사연·어떤 자랑거리 있나 서울 시내엔 10여가구가 모여 작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 모두 6곳이 있다. 도봉구 방학4동 ‘원당마을’에는 파평 윤(尹)씨, 강서구 외발산동 ‘광명마을’에는 경주 최(崔)씨, 강동구 강일동 ‘가래여울’(한강으로 흘러드는 두 여울이 갈라져 흐르는 곳이란 뜻)에는 남평 문(文)씨 집안이 있다. 또 창녕 조(曺)씨들이 대대로 일군 서초구 염곡동 ‘염통골’(마을 생김새가 염통 모양)과 경주 김씨의 내곡동 ‘능안마을’에다 아예 성씨를 따 ‘홍씨 마을’이라고 부르는 남양 홍씨 집성촌이 있다. 집성촌 속에는 깊은 역사만큼이나 자랑거리도 수두룩하다. 먼저 도봉구 방학동 원당마을에 있는 서울시의 보물덩어리가 된 830살짜리 은행나무가 손꼽힌다. 서울시 지정 보호수 1호다. 높이가 24m, 둘레는 9.6m나 된다. 관악구 신림동 산112의1에 있는 굴참나무(천연기념물 271호·수령 1010년)와 종로구 삼청동 106 총리공관 등나무(천연기념물 254호·수령 920년)에 이어 ‘수령’이 서울에서 세 번째다. 원당마을 은행나무는 옛날부터 스스로 몸에 불을 질러 나라의 큰 변고를 알리는 등 신통을 지녔다고 전해지고 있다. 예컨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직전 이 나무에 까닭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나 소방차가 출동, 진화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해마다 2월 중순이면 이곳에 30여명씩 모여 떡과 술을 놓고 나라의 안녕을 비는 ‘행목대신제’(杏木大神祭)를 올리고 있다. 은행나무 옆에는 조선시대 비운의 임금인 연산군(1476∼1506년)의 묘가 있다. 이 무덤이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의 유배지였던 강화도에서 옮겨오면서 파평 윤씨들이 뒤따라와 정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록으로 찾아볼 수 없어 언뜻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원당마을 윤주현(71)씨는 “정치적으로 억울하게 죽은 연산군의 경우 3족이 멸문지화를 당했고,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비(尹妃)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 외척들이 돌봐야 한다고 여겨 이 곳으로 온 게 아니냐는 추측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 곳엔 또 마을과 역사를 함께 해온 ‘원당천’이라는 우물이 있다. 태조가 물맛을 본 뒤 칭찬했다는 망우동 양원마을 우물과 비슷한 사례다. 피란민이 숨어들었을 정도로 외진 곳이어서 자연부락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청송 심씨들의 마을에도 흥미 넘치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심재익(67)씨는 “옛날 한 백성이 산에서 도적을 만났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화를 면했다.”고 운을 뗐다. 그는 이어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로 앞 바위의 모양이 호랑이와 똑같이 생겨 그 사건 이후에 그 바위가 마을을 지켜주는 산신령이라고 믿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해마다 음력 7월 초하루에서 사흘 사이에 길일(吉日)을 가려 ‘큰말(벌말의 딴 이름으로, 큰 마을이란 뜻) 산신제’를 지낸다. 앞산 꼭대기에 올라 집집마다 추렴한 쌀로 떡과 술을 빚고 소머리를 제단에 올린다. 서울시내에서 행하는 유일한 산신제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열린세상] ‘해외입양 반대’에 반대하는 이유/ 서홍관 국립암센터 금연클리닉 책임의사

    벌써 여러 해 전 일이다. 해외연수를 위해 1년간 미국에 체류할 기회가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둘째 아이가 어느 날 말하기를 독서 시간에 자기를 도우러 오는 5학년 누나가 있는데 한국 사람 같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한국말을 전혀 못한다고 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담임교사를 만나서 물어 보니 미국 학교는 학생들에게 남을 돕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상급생이 하급생을 돕는 프로그램들을 운영하는데, 마침 한국인 입양아가 있어서 일부러 우리 아이를 맡도록 배려했다는 것이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로렌이었고, 우리는 그 아이를 집으로 초대했다. 우리 아이들이 로렌과 노는 동안 우리는 같이 온 백인 양엄마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로렌의 엄마는 남편과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는데도 만 두 살 된 로렌을 입양했다고 했다. 로렌의 엄마는 로렌에게 ‘너는 한국인’이라고 알려주고, 한국에 대해서 알려주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고 했다. 보스턴 지역에는 한국인 입양아 부모들을 위해 한국식 음식과 풍습을 소개하는 날이 있었는데 그곳에 로렌을 데리고 가 한국음식도 먹고, 한국의 공예품들을 구경하기도 했다고 했다. 그녀는 영어로 씌어진 로렌의 한국 이름을 가지고 왔는데 ‘Jung Soon Kim’이라고 씌어 있었다. 한글로 ‘김정순’하고 적어주었더니 그 이름을 꼭 껴안고 “이 이름이 바로 진짜 우리 딸 아이의 이름이냐?”하면서 감격하는 것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로렌은 다른 평균적인 미국 아이들보다도 더 좋은 교육을 받고 있었다. 무용과 피아노를 배우고, 전직교사인 엄마의 지도 아래 책도 많이 읽고, 행복해 보였다. 나는 로렌을 통해서 미국인들의 입양에 대한 태도를 단편적이나마 알게 되었는데, 우선 이들은 입양 사실을 숨기지 않고 아이에게도 ‘너는 입양되었다.’는 것을 당당히 밝힌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입양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입양아가 외국인일 때는 그 나라의 문화와 관습과 언어를 가르쳐주려고 애를 쓴다는 사실이다. 과연 그들은 무슨 이유로 인종도 다른 입양아들을 위해 그렇게 정성을 바칠 수 있을까? 미국에서는 입양을 받으려면 재산 정도나 품성에 대해 꽤 엄격하게 심사받아야 하고 적지 않은 돈까지 지불해야 한다. 그런 귀찮은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무얼까? 이들은 아이를 키우고 사회에 내보내는 기쁨을 가질 뿐이다. 내가 키워주었으니까 나를 위해 뭘 해달라는 것도 없다. 이런 사실은 우리나라의 혈족주의에 물들어 있는 나에게는 대단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로렌이 미국에 입양을 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영아원 같은 시설에서 자라지 않았을까? 그러한 시설에서 자란다는 것은 자신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어주는 사람이 많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극성스러운 부모들은 자녀들이 고아와 노는 것조차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도 있으며, 훗날 결혼이라도 할라치면 더 서러운 편견에 시달리게 된다. 국내 입양의 기회도 워낙 없지만 혹시 운 좋게 입양이 된다 해도 주변 사람들의 눈치에 어느 날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서로들 쉬쉬하는 것이 마음의 병이 되어 어릴 때나 청소년 시기에 정서적으로 방황하게 된다. 그러나 차라리 해외에 입양되어 나가면 편견이 적은 사회에서 성장할 수 있고, 적절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주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인데 ‘고아 수출국’으로 오명을 남기고 있다고 해외 입양을 반대한다. 그러나 자신이 그들을 입양해서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다면 그 아이들이 겪게 될 고통의 무게도 잘 모르면서 국가체면만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일이다. 우리나라에도 입양하는 문화가 형성되어야 하지만 그보다 시급한 것은 이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먼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로렌의 엄마한테서 로렌이 지금도 가끔 지구본을 돌려보며 한국은 몇 시냐고 묻는다고 편지가 왔다. 언젠가 로렌의 결혼식 청첩장이 우리 집으로 날아온다면 비록 우리가 그곳까지 가진 못하더라도 축하한다고, 행복하게 지내라고 축전이라도 쳐줄 생각이다. 서홍관 국립암센터 금연클리닉 책임의사
  • 儒林(290)-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90)-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이처럼 신분과 풍습을 초월하여 인간에 대한 휴머니즘으로 가득찬 이퇴계가 두향이가 한갓 미천한 기생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그녀를 길가는 사람 보듯 하지 않았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퇴계와 두향의 로맨스는 과장된 헛소문이 아니라 분명한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그때였다. 짧은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군청에 전화를 걸었던 선원이 내게 다가와 말하였다.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그는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말하였다. “선생님을 모시고 두향의 무덤까지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선착장에는 비상용으로 작은 쾌속정 한 대가 구비되어 있었다. 배를 타기 전 나는 매점에서 간단하게 소주 한 병과 술을 따를 종이컵, 그리고 간단한 안줏감을 사 들었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배에 올라타시지요.” 배에 올라타자 사내는 배가 요동치지 말라고 묶어둔 밧줄을 풀었다. 어느 정도 배가 선착장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려 발동을 걸었다. 이내 투투타타― 하는 엔진소리가 터지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배가 출발하였다. 배는 빠른 속도로 사선을 따라서 호수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물의 수면을 떠올라 빠르게 전진하고 있었으므로 물보라가 일었다. 봄이었지만 호수 주위는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으므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었다. “두향의 무덤 앞에는 원래 커다란 바위가 있었습니다. 강선대라고 불리던 바위지요.” 강선대(降仙臺)라면 문자 그대로 선녀들이 내려와 노닐던 바위라는 뜻이 아닐 것인가. “수몰되기 전에는 어른이 수십명 앉아 놀 수 있을 만큼 넓고 큰 바위가 그대로 보였지요. 그러나 지금은 물에 잠겨 볼 수가 없습니다.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겨울가뭄 때문에 수량이 많지 않아 바위가 드러나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이퇴계 선생과 기생 두향이가 주로 이 강선대 위에서 거문고를 타고 노닐었다고 합니다.” 사내는 엔진소리를 이기기 위해서 소리를 높여 내게 말하였다. “따라서 두향의 무덤은 원래 강선대 바로 위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충주댐으로 인공호수가 생기자 물에 잠길 것을 마을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산 중턱으로 이장하였다고 하지요. 만약 이장하지 않았다면 수중무덤이 되었을 것입니다.” 나는 팔짱을 끼고 호수를 바라보았다.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어찌하여 나를 낳은 조국의 산야는 이처럼 금수강산인가. 누더기와 같은 역사와 넝마와 같은 혼란 속에서도 조국의 강산은 어찌하여 이토록 절세(絶世)인가. 순간 내 머릿속으로 이곳을 찾아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던 추사 김정희의 시가 한 수 떠올랐다. “명필의 붓처럼 천둥번개에 몰아치듯 뛰어난 운치, 그윽한 정, 먼 물가에 흩어졌구나. 천리 밖에 한 조각 돌 주워가지고 책상 위에 놓으면 이 봉우리는 언제고 푸르리.” 추사의 시는 정확하다. 이 절경의 모습은 천둥번개를 몰아치듯 뛰어난 운치로 창조주가 붓을 움직여 그린 신필(神筆)인 것이다.
  • 儒林(288)-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88)-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며느리의 갑사저고리는 소매끝부분인 끝동과 겨드랑이와 접촉이 되는 곁막음 부분과 옷고름과 깃부분은 노랑저고리의 빛깔과는 달리 분홍색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퇴계가 분홍빛깔의 깃을 직접 자름으로써 이이(離弛)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퇴계는 남의 눈을 피해서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낸다. 마지막으로 작별의 큰절을 올리는 며느리에게 퇴계는 다시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주 멀리 멀리 떠나거라. 그리고 아들딸 많이 낳고 행복하게 살거라.” 퇴계의 이러한 인간적인 면모는 ‘퇴계언행록’에 기록된 다른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1554년, 퇴계가 예천에 들렀을 때 어느 먼 일가의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매우 딱한 사연을 호소해 온 적이 있었다. 퇴계는 평소에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고 있었으므로 관청에 사사로운 일을 부탁하는 것을 금기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직접 군수에게 부탁하여 과부를 도와주었던 것이었다. 이때 퇴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언행록은 전하고 있다. “내게 있어서는 비록 먼 일가라고는 하지만 선조로 보면 똑같은 자손이니 내 어찌 길가는 사람 보듯 하겠는가.(彼之於牙 雖曰疎遠 以先祖之 一般子孫也 豈敢視若路人)” 먼 친척을 대하며 자기를 기준으로 보아 멀다고 여기지 않고 선조의 입장에서 보면 똑같은 자손이라는 의식은 퇴계가 지닌 위대한 휴머니즘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찮은 먼 일가의 과부 한사람까지도 ‘길가는 사람’으로 보지 아니하고 한 핏줄로 본 퇴계가 한순간 생과부가 되어버린 새 아기에 대해서 풍습을 타파하고 자유의 몸으로 풀어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퇴계의 에피소드는 여기에 그치지 아니한다. 그로부터 몇 년 뒤 퇴계가 선조의 부르심을 받고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상경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종자 하나만을 데리고 한양길에 오른 퇴계는 도중에 날이 저물자 어쩔 수 없이 하루 묵을 집을 찾게 되었다. 다행히 작지만 깨끗한 인가를 발견하여 젊은 집주인에게 하룻밤 묵고 갈 것을 허락받게 되었는데, 퇴계의 신분을 확인한 집에서는 대접이 융숭하였다. 퇴계가 짐을 풀고 피곤한 몸을 쉬려고 할 때 밖에서 젊은 주인이 말하였다. “어르신, 비록 없는 반찬이지만 저녁식사를 준비하였습니다.” 퇴계가 방문을 열자 젊은 주인이 상을 들고 서 있었다. “집사람이 내외를 심히 하는 편이라 쇤네가 가지고 왔나이다.” 퇴계는 밥상을 보자 깜짝 놀랐다. 시골 한촌에서는 볼 수 없는 성찬이었던 것이었다. 퇴계는 육식보다는 가지나물과 산나물과 같은 채식들을 좋아하고 있었는데, 상위에 오른 반찬들은 한결같이 퇴계가 평소에 좋아하는 음식들뿐이었다. 특히 나물국이 차려져 있었는데, 한 숟갈 떠먹은 퇴계는 간이 입에 딱 맞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니 어떻게 내 입맛에 이렇게 딱 맞을까. 꼭 우리 집 음식을 먹는 것과 같구나.” 다음날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아침 일찍 아침상이 들어온 것이었다. 민폐를 싫어하여 일찍 먼 길을 떠나려던 퇴계의 방으로 어젯밤과 같은 성찬의 밥상이 들어 온 것이었다.
  • [토요일 아침에] 겨울 그리고 봄,또…/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설 연휴인지라 일주일가량 산중 암자로 가서 여유있는 시간을 보냈다. 근데 도심에 살다가 오랜만에 산으로 가니 정말 추웠다. 지난번에 내린 눈은 아직도 얼어 있는데 그 위로 다시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게다가 상수도마저 꽁꽁 얼어붙어 물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추위를 무릅쓰고 털모자를 눌러쓰고서 잰걸음으로 밖으로 나가 물을 바가지로 통에 퍼담아 와서 밥을 해 먹고 세수를 해야 했다. 물을 길어다 먹고 또 데워서 발을 씻으니 별로 산골도 아닌 이곳이 진짜 문명의 혜택이 전혀 없는 오지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산속으로 오니 진짜 겨울인 줄 알겠다. 이래서 옛사람들이 참으로 봄을 기다렸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섣달그믐이라 마당의 비질은 평상시와 반대로 했다. 즉 대문 쪽에서 집 안쪽으로 쓸면서 들어왔다. 복을 집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바람을 행동으로 표현한 옛어른의 지혜를 본받기 위함이다. 그러고 나서 방과 부엌·헛간 등 집안 곳곳에 불을 밝혔다. 한 해가 바뀌어 가는 것을 지켜본다는 수세(守歲)의 세시풍습을 이어가기 위한, 어찌 보면 또 다른 역사적인(?) 계승작업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경청 선사가 말한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복을 여니 만물 모두가 새롭다.’는 덕담으로 한 해를 열고 싶은 내 개인적인 기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절집 말고는 음력을 별로 사용하지도 않는다. 양력으로 보신각 제야 종소리를 기억하고 신년 해맞이로 새해 다짐을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까치설날’이다. 진짜 ‘우리우리 설날’은 음력 정월 초하루인 것이다. 하지만 달력은 이미 한 장이 넘어가 버린 상태다. 현실과 이상은 또 이렇게 다른 것이다. 어쨌거나 봄을 기다리긴 하지만 겨울이 없다면 봄의 귀함을 제대로 알 수가 없을 것이다. 보리는 얼리는 춘화(春化) 처리를 하지 않으면 싹이 돋지 않는다고 한다. 얼리는 것을 춘화라고 하니 그것도 참으로 그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이름을 붙여 놓은 것 같다. 사실 추위라고 하는 것은 더위가 모자라는 것일 뿐이다. 어둠은 밝음이 부족한 것일 뿐이다. 고구마는 가을에 거두어 들이면 열매이지만 봄이 되어 밭으로 나가게 되면 씨앗이 된다. 열매이면서 동시에 씨앗인 것이다. 그래서 씨앗 속에 열매가 포함돼 있고 열매 속에 이미 또 씨앗이 들어 있는 것이다. 겨울 속에는 봄이 내재돼 있고 어둠 속에는 이미 밝음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 각각 분리돼 존재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래서 설날이 지나가면 평범한 사람들도 모두가 겨울 속에서 봄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생활 속에서는 시작의 약속된 출발점은 있어야 한다. 공자님은 ‘하루의 계획은 아침에 있고 한 해의 계획은 봄에 있다.’고 했다. 입춘도 거의 설날과 절기가 비슷하다. 모두가 시작의 의미다.‘입춘대길’이라는 큼직한 글씨를 대문에 써붙이는 것도 한 해의 시작을 잘해 보리라는 스스로의 다짐을 밖으로 나타내는 또 다른 삶의 지혜라 할 것이다. 이제 봄이다. 모진 겨울이 길다고는 하지만 때가 되면 부드러운 봄기운에 밀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봄 역시 항상 봄일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당나라 때 지현후각 선사는 이런 시를 남겼나 보다. 꽃 피니 가지 가득 붉은색이요 꽃 지니 가지마다 빈허공이네. 꽃 한송이 가지 끝에 남아 있지만 내일이면 바람 따라 어디론지 가리라. 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 문신, 예술이냐 혐오행위냐

    문신, 예술이냐 혐오행위냐

    ‘개성을 표현하는 예술인가, 불법 의료행위인가.’온라인 상에서 문신(文身)작가 100여명이 버젓이 활동하고, 신체의 한 부위에 문신을 한 사람이 50만명을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신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 그러나 의사가 아닌 사람이 문신을 시술하는 것은 불법이다. 문신작가들의 합법화 주장과 문신에 대한 편견, 외국의 사례와 문제점 등을 살펴본다. “조금 아프죠.” “…아니요. 참을 만한데요.” “오른쪽 종아리에 유난히 신경세포가 쏠려 있네요.1시간만 더 하면 끝나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16일 오후 서울 시흥동 문신작가 이모(28·여)씨의 스튜디오.3시간째 ‘윙’ 하는 문신 기계 타투건의 굉음이 경쾌한 랩 음악과 함께 인체해부도와 탱화들 사이로 날아다니고 있다. 대학생 홍모(24)씨가 비스듬히 누워 있는 수술대 옆에는 잉크와 피가 섞인 검붉은 솜이 수북하게 쌓였다. 잠시 뒤,‘넓고 진실되게 살겠다.’는 뜻의 ‘진홍(眞弘)’이라는 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작업을 마친 이씨는 소독약과 바셀린으로 소독을 끝낸 뒤 ‘작품’을 랩으로 쌌다.“내가 몸과 마음의 주인으로 다시 태어난 기분이에요.” “그럼 제가 대모(代母)가 되는 셈이네요.” 10평 남짓한 스튜디오는 홍씨와 이씨의 웃음으로 가득찼다. 홍씨가 문신을 새기기로 결심한 것은 1년 전.‘편협한 자아를 버리고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삶을 지향하겠다.’는 신조를 평생 간직하기 위해서였다. 이씨를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지난해 봄에 인터넷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문신은 지우기 어렵다. 그래서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으며 문신의 형태와 시기를 조율했다. 결국 지난 연말 초안이 탄생했다. 홍씨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기성세대와는 달리 젊은 세대는 스스로의 신조와 의지를 드러내는 데 익숙하다.”면서 “문신이 적절한 수단”이라고 말했다. ●문신 인구 50만명 넘을 듯 문신은 보건범죄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5조와 의료법 제25조에 ‘의료인이 아니면 의료행위를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문신은 이미 일반인들 가까이에 있다. 온라인에서만 100명이 넘는 문신작가가 활동하고 있다. 문신 인구도 꾸준히 늘고 있다.5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싸이월드(cy world.com)에는 100여개의 문신 관련 미니홈피가 개설돼 있을 정도다. 문신은 몸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행위다. 그만큼 종류도 다양하다.▲명암의 차이를 극대화한 ‘블랙앤그레이’ ▲파란색과 주황색 등 보색의 대비를 극대화한 ‘뉴스쿨’ ▲빨강과 노랑, 파랑 등 원색을 주로 사용하는 ‘올드스쿨’ 등 10가지가 넘는다. 가격은 손바닥만 한 크기가 20만원선. 등에 하는 큰 문신은 수백만원대를 호가한다. 그러나 문신 기법이 세밀할수록 가격은 올라간다. 기간도 문신의 크기와 기법에 따라 짧게는 서너시간에서 길게는 십수년까지 걸린다. 문신작가는 보건범죄특별법으로는 무기 또는 2년 이상의 징역과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의료법으로는 5년 이하의 징역과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정도로 과중한 형벌이 뒤따른다. 그러나 이에 대한 검·경의 단속은 전혀 없다. 경찰청 지능범죄수사과 관계자는 “지난해 구속된 문신작가는 단 한 명도 없다.”면서 “대부분 구속 사안도 아니어서 단속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불법 의료행위인가 예술인가. 문신이 사회적인 이슈로 떠오른 것은 지난 2003년 6월 김건원(본명 김유미·30·여)씨가 구속되면서부터다. 이후 연세대 사회학과 조한혜정 교수, 가수 신해철씨 등 많은 이들이 탄원서를 내고 ‘타투법제화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지난해 추진위는 의료법과 보건범죄특별법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헌법재판소는 올해 안으로 결정을 내릴 것으로 보여 또다시 관심을 끌 것으로 보인다. 추진위가 주장하는 것은 ‘의료행위’의 개념이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헌재에 낸 의견을 통해 “문신은 국소 마취한 채 색소침윤술로 색소를 피부에 착색하는 의료행위”라고 밝혔다. 추진위는 이에 대해 문신은 마취를 하지 않고, 색소침윤술이 의료행위라면 머리카락의 염색도 의료행위에 해당한다고 반박한다. 범죄와 형벌을 법률에 규정해야 한다는 죄형법정주의에도 반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고도의 전문성을 가진 의사만이 문신을 할 수 있다.’는 보건복지부의 입장은 여전히 단호하다.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과 최경일 사무관은 “문신이 의료행위가 아니라는 사회적 통념이 굳어지고, 헌재에서 그런 결정이 나면 모르겠지만 다른 대안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합법화 전망 밝지 않아 문신이 합법화될 전망은 지금으로서는 밝지 않다. 헌재가 ‘소수’의 ‘문화적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보다는 의료계 ‘다수’의 ‘공중 보건’에 손을 들어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문신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일반’의 통념도 걸림돌이다. 이에 대해 많은 문신연구자들은 별다른 단속도 안 하면서 문신을 금지하기만 하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외국처럼 일정한 위생 기준을 마련하고, 자격이 있는 시술자에게 면허를 부과하는 게 표현의 자유와 공중 위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대안이라는 설명이다. 문신연구가 조현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법으로 묶어둔다고 해서 문신이 안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의사들이 현재 문신 시술을 하는 것도 아니다.”면서 “문신 시술가들에게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추게 해 양성화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 외국선 어떻게 문신(tattoo)은 말 그대로 몸에 글씨나 그림, 무늬 등을 새겨넣는 행위를 말한다. 피부나 피하조직에 상처를 내서 물감을 넣는다는 점에서 단순히 그리기만 하는 보디페인팅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기능이 아닌 예술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성형 문신과도 구별된다. 문신은 종교의 기원과 그 궤를 같이한다. 원래 주술적이면서도 전투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는 청동기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오래된 문신은 1991년 알프스 산에서 냉동된 채 발견된 사냥꾼에서 확인됐다. 기원전 3300여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이집트에서 번성한 문신은 크레타 섬을 통해 유럽으로, 페르시아를 통해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으로 전파됐다는 게 통설이다. 우리 민족도 예외는 아니다. 삼한시대에 문신의 풍습에 대한 기록이 있을 정도다. 문신이 부정적으로 낙인찍힌 것은 기독교의 등장과 관련이 있다. 기독교는 공식화되자마자 민간 신앙에서 널리 행해지던 문신을 ‘악마의 상징’으로 배척했다. 구약성서 레위기 19장 28절에 “너희 몸에 먹물로 글자를 새기지 말라.”고 기록됐을 정도다. 이후 문신은 폴리네시아와 북미 지역을 제외하고 노예나 중범죄자들에게나 행해지는 치욕의 상징이었다. 문신이 다시 등장한 것은 17세기 이후. 다른 대륙 ‘원주민’들과의 접촉이 계기가 됐다. 이후 직업적 타투이스트들이 등장하고,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가 문신을 받을 정도로 어느 정도 보편화됐다. 일본에서는 17세기 말 이후 범죄자들 사이에서 장식용 문신이 유행하면서 퍼졌다.‘조폭=문신’이라는 등식도 여기서 나왔다. 현재 문신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국가는 거의 없다. 문신은 유럽뿐 아니라 일본, 중국 등 아시아에서도 예술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미국에서도 사우스 캐롤라이나와 오클라호마 등 2개 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합법화돼 있다. 뉴욕주 등 11개 주는 면허제도와 위생 기준 등으로 규제를 하고 있고, 나머지 주들은 제한을 전혀 두고 있지 않다. 미국공중보건부(DPH)나 미국식품의약청(FDA) 등 위생당국에서도 문신이 위생적으로 이뤄지면 에이즈나 B형·C형 간염 등에 감염될 위험이 “매우 적다.”고 밝히고 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오곡밥으로 대보름 풍성하게

    오곡밥으로 대보름 풍성하게

    정월 대보름에는 보름달만큼 음식도 풍부하다. 대보름에 먹는 음식에는 한해를 건강하게 지내려는 기원이 담겨있다. 대보름 전날 저녁에는 오곡밥을 지어 아홉 가지 나물과 함께 먹는다. 이웃의 아홉집 음식을 아홉번 먹는 풍습도 있다. 보름은 설의 연장선상에 있는 명절에다 농한기인만큼 이웃끼리 나눠 먹고, 함께 즐기는 놀이도 많다. 아홉가지 나물은 전년 봄부터 제철 나물을 따다 햇볕에 말린 묵은 나물, 진채(陳菜)다. 김수진(F&C코리아 대표)씨는 “값싼 제철 나물을 찬바람과 햇볕에 말리면 겨울에도 먹을 수 있는 좋은 저장식품이 된다.”면서 “묵은 나물은 비타민과 무기질이 풍부하고 특히 통변에 매우 좋다.”고 말했다. 겨울을 나는 동안 부족해지기 쉬운 섬유소 섭취에도 나물은 큰 도움이 된다. 궁중음식연구원의 정길자 교수는 “봄에는 고사리, 가을에는 호박고지와 시래기를 햇볕에 말렸다 겨울에 불려서 먹으면 씹는 맛이 아주 좋아진다.”고 말했다. 요즘은 비닐하우스에서 여러 나물이 나오지만 제철 나물을 갈무리해 먹는 것은 웰빙이라고 강조했다. 쌀, 수수, 조, 콩, 팥을 한데 섞어 짓는 오곡밥은 음양오행설에 입각, 쌀밥에 부족한 영양상의 문제점을 해결해준다. 흰쌀밥에 비해 오곡밥은 비타민과 섬유소가 풍부하다. 최근엔 대보름처럼 굳이 오곡을 갖추지 않더라도 콩이나 팥·조 등을 섞은 잡곡밥을 지어 먹는 사람이 많다. 잡곡밥은 처음엔 모래를 씹는 것처럼 까칠하게 느껴지지만 계속 씹을수록 고소하면서 깊은 단맛이 난다. 보름날 아침에는 복쌈을 먹는다. 쌀밥을 김 또는 아주까리, 취나물 이파리를 펴서 싸먹는다. 귀밝이술(耳明酒)에 담긴 뜻은 진짜 귀가 밝아진다기보다 일년 내내 좋은 소리만 들으라는 의미다. 잣, 밤, 호두, 은행, 땅콩 등의 견과류는 보름날 밤에 부럼으로 까먹는다. 사실, 견과류는 몸에 좋은 불포화지방산이 풍부해 건강음식으로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꿀물에 경단을 띄운 원소병은 대보름달을 닮은 음식이다. 대보름 음식의 특징은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 제사음식에도 고추를 쓰지않는 것처럼 주술적 의미에다 맑고 담백한 음식으로 한해를 시작한다는 뜻도 있다. 푸드 스타일리스트 김혜선씨는 “나물 아홉가지를 만들려면 손이 많이 갈 것 같지만 기본양념이 비슷해 어렵지 않다.”며 “오곡밥과 나물로 가족들끼리 보름달만큼 풍성한 정을 나눠보라.”고 권했다. ■ 촬영협찬:F&C코리아(02-362-6704) 글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사진 이종원기자 jongwon@seoul.co.kr ■ 나물 여기서 맛보세요 대보름에 아홉가지 나물을 하기가 번거롭게 느껴진다면 정성스레 나물 반찬을 내놓는 곳을 찾아가보면 어떨까. 사찰 음식의 대가인 선재 스님의 자문을 받은 채근담(02-555-9173)에서는 채식 한정식을 맛볼 수 있다.10년째 궁중 한정식을 만들고 있는 ‘한미리’에서 바로 옆에 3년전 문을 연 곳이다. 서형철 팀장은 “가락시장이나 경동시장에서 묵은 나물을 사다 소금과 들기름만으로 간을 한다.”고 말했다. 사찰 음식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자극적인 오신채(마늘·파·부추·달래·무릇)는 쓰지 않는다. 피마자, 고추나물, 건취, 묵나물, 원추리, 고사리, 취로 구성된 나물 반찬은 특히 담백하고 한국적인 맛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다. 값은 정식이 일인당 2만 1000∼5만 7000원이다. 자하문(02-396-5000)에서는 코스별 한식을 맛볼 수 있다. 코스별로 10∼15가지 요리와 토속적인 반찬, 절임류가 나온다. 특히 강된장과 대나무 통밥이 별미.1만 9000원짜리 기본 코스요리인 ‘우의정’을 주문하면 게살전병, 단호박찜, 생선모듬초회, 묵은 김치와 한방제육, 매생이탕 등 각 지역의 향토 별미와 10가지 토속 찬, 영양대나무통밥을 내놓는다. 메뉴판닷컴에서 추천한 마천동 남한산성 등산로의 탑골집 시골밥상(02-449-9599)은 육류를 전혀 쓰지 않은 밥상이 맛있다. 입맛을 돋우는 부드러운 녹두죽이 먼저 제공되는 시골밥상(1만원)은 비타민C가 살아 있는 마른 나물, 오이소박이, 젓갈, 김치 등 일상적 반찬 하나하나에도 신선함과 정갈함이 가득하다. 산채보리비빔밥(5000원)의 초록빛을 입안 가득 느끼면 웰빙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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