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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도 7세 소녀 저주풀기 위해 개와 결혼

    인도의 한 7세 여자아이가 개의 신부가 됐다. 지난 19일 인도 비하르주 남부에서 7세의 여자아이가 악령을 쫓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떠돌이 개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신부의 부모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으며 개는 선글라스를 끼고 장식된 우산을 쓴 채 결혼식장으로 입장했다. 이 마을 원로는 “아이의 이 하나가 비정상적으로 크게 자라고 있다.”며 “개와 결혼하지 않으면 나쁜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는 이후 개와 이혼하는 절차 없이 남자와 다시 결혼할 수 있다. 한편 인도에서는 동물과 결혼하는 일은 악령을 물리친다는 미신에 따라 아직도 도시외곽에서 가끔 벌어지나 최근에는 문명화 되어 많이 사라진 풍습이다. 지난해에도 인도의 한 30대 남자가 15년 전 죽인 개 두 마리의 저주를 풀기 위해 개와 결혼해 화제가 된 바 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김하은 기자 haeunk@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엿장수 딸에서 하버드대 박사까지’ 희망전도사 서진규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엿장수 딸에서 하버드대 박사까지’ 희망전도사 서진규

    “아줌마 희망 한단에 얼마래요?” “희망유? 몰라유, 채소나 한단 사가슈∼선생님?” 장사익씨가 부른 소리판 ‘희망 한단’에 나오는 대목이다. 8년 전 어느날 미국에서 살던 한 아줌마가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는 화두를 던지며 고국땅을 밟았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엔 조용했지만 입소문을 통해 삽시간에 퍼지면서 점차 요란해졌다. 그가 펴낸 책은 한동안 각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방송국의 특별 프로그램 등에 초청됐고 언론지면을 통해 그의 삶이 종종 전해졌다. 까닭이 있었다. 잡초처럼, 지독하리만큼 억척스럽게 살아온 한많은 여인네의 삶 그 자체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절망으로 쓰러질 때마다 희망의 지팡이에 의지해 오뚝이처럼 일어선 생생한 경험담이 많은 감동을 선사했던 것. 그 어떤 영화 속의 주인공보다 더 찐한, 말 그대로 신선한 ‘희망의 메신저’나 다름 없었다. 파란만장한 인간 드라마의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1948년 경상남도 월내라는 어촌마을에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났다. 남동생 중 한 명은 미군 복무 중 사고로 요절했으며, 한 사람은 정신지체 장애인이다. 시골에서 세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서울로 올라와 군 장교인 큰아버지댁에서 살면서 풍문여고를 다녔다. 잡지판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충당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인 1967년 종로구에 있는 가발공장에서 사촌 언니와 같이 일했다. 얼마 후에는 관악컨트리클럽 캐디로도 근무했다. 그러던 1971년 친하게 지내던 미국 개신교 선교사가 식모를 구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행기삯 100달러만 달랑 가지고 미국으로 갔다. 식모일도 하고 한식당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틈틈이 영어공부를 했다. 1975년에는 한국인 태권도 사범과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남편의 폭력으로 얼룩졌으며, 이를 피하려고 미 육군 사병으로 입대했다. 일등병일 때 용산의 주한 미군 부대에서 군수업무를 맡았고 상등병 시절에는 고된 훈련을 무사히 거쳐 장교로 임관하는 끈기를 보여줬다. 이후 독일과 일본 등 주로 해외에서 근무하면서 여러 대학을 전전한 끝에 1987년 미국 메릴랜드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이어 마흔두살 때인 1990년 하버드대 석사과정에 입학했고,2년 뒤에는 하버드대 국제외교사와 동아시아 언어학 박사과정에 합격했다. 대위 때 하와이에서 패트리엇 미사일 장교로 근무하면서 공부에 매진했다. 1996년 11월 소령으로 전역한 그는 2006년 당당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러는 가운데 그의 딸도 어머니와 함께 하버드대학을 다녀 ‘하버드 최초의 모녀 재학생’으로 미국에서 화제가 됐다. 딸도 어머니의 뒤를 이어 하버드대 졸업 후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에서 교육 장교로 복무 중이다. 최근 그는 ‘서진규의 희망’이라는 3번째 책을 펴내 ‘희망전도사’로 전국 곳곳에 강연을 다니느라 분주하다. 또 한달에 한번꼴로 미국에 건너가 영어판 책자발간을 준비하고 있다. 세계적인 성공전략 컨설턴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잭 캔필드가 주도하고 있다. 잭 캔필드는 “미군과 하버드에서 살아남은 이 여성의 드라마틱한 인생 이야기는 우리들의 삶에 무한한 영감과 새로운 희망을 향한 동기를 부여하기에 충분하다.”며 영어판 발간은 물론 할리우드에서도 얼마든지 통할 만한 소재로 여긴다는 것. 이래저래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서 박사를 만났다. 명함을 받았더니 이름 밑에 ‘희망연구소 소장’‘박사’‘예비역 소령’이라는 직함이 보였다. 얼굴에는 나이답지 않게 가냘픈 소녀와 같은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저런 연약한 모습에서 어떻게 불굴의 정신이 나왔을까. 손에는 자신이 펴낸 자전적 에세이집 3권을 들고 있었다.‘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는 35만부,‘서진규의 희망’은 15만부 등 모두 50만부가 넘게 나갔다고 했다. 이어 자신의 딸 얘기가 나왔다. “딸은 구두닦이 생활을 하며 학교에 다녔어요. 동네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한 켤레에 2달러를 받고 구두를 닦았지요. 나중에는 특히 군화를 잘 닦는다는 입소문이 퍼져 동네에 사는 군인들이 우리집에까지 군화를 들고 왔을 정도였어요. 그러다 보니 딸의 아르바이트를 도와주느라 장교인 제가 퇴근 후 계급상 하급자들의 군화도 닦아주는 일이 많았습니다.(웃음)” 딸은 지금도 어머니에게 매달 100만원씩을 꼬박꼬박 보내 줄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다.ROTC로 임관할 때는 어머니한테 거수경례로 선서를 해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당시 하버드대측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의미부여를 했다. 서 박사는 이같은 사연과 함께 딸을 키운 이야기를 ‘희망은 또다른 희망을 낳는다’라는 제목으로 2000년 책으로 펴냈으며 지금까지 17쇄를 찍을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이 또한 올해 안에 미국에서 출판될 예정이다. 현지 출판사측에서는 “딸을 어떻게 키우면 딸이 부모에게 돈을 보내게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정하면 어떠냐.”는 농담 섞인 제안을 하고 있단다. 한국의 풍습과는 달리 미국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용돈을 주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요즘 출판일 때문에 매달 미국에 다녀오고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서 박사의 인생에는 영화가 몇 편 들어 있다. 미국사회에 충분히 어필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해요.” 국내에 있을 때는 주한 미군병원에서 C형간염을 치료하면서 각종 단체와 지방 등지에서 ‘희망강연’에 대부분 시간을 할애한다. 지난 설 직전에는 국군방송을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인간은 언제 어디서 태어날지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단 한번 주어지는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는 것은 자신의 선택에 좌우된다.”면서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 그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세상이 비웃고, 조롱하더라도 자신만큼은 스스로를 사랑하고 지켜줄 때 분명 꿈은 이루어진다고 강조했다. 처음 군입대했을 때 윗몸일으키기 한번 제대로 못해 겨날 뻔했으나 오직 ‘나 자신만’을 믿으며 이겨낸 일화도 소개했다. 오늘날의 서 박사를 있게 한 것은 척박한 그의 집안 환경이었다. 아버지는 엿장수, 어머니는 술 장사를 했다. 이런 여건탓에 주위로부터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이럴 때마다 반발심으로 ‘공부를 잘해야겠다’ ‘성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오히려 척박한 여건이 우물 안 개구리를 탈피할 수 있도록 강한 정신력을 심어주었다고 회고한다. 고등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했지만 오빠에게 밀려 대학 진학을 포기하면서 ‘아메리칸드림’을 꾸었다. 미국에 가면 창녀가 된다는 주위 비아냥에 “내가 창녀가 되면 반드시 장을 지진다.”고 단단히 결심했을 정도였다. 그는 두번의 이혼을 겪으면서도 그때마다 보다 멀리, 더 높이 도약하기 위해 새로운 목표를 정해 도전을 거듭하며 소중한 결실을 맺게 됐다. 그는 요즘 틈틈이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 왜냐고 했더니 “세계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려면 내 마음의 꿈이 커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이어 “미 대통령은 내각에 영웅을 필요로 한다.”면서 “책 잘 팔리고, 영화화되고, 미국에서 강연도 휩쓸고, 하버드에서 국제사를 전공했으니 외교역량도 있고, 장차 미 국무장관감으로 충분하지 않으냐.”며 웃는다. 그런 다음 여세를 몰아 노벨평화상과 맞먹는 ‘세계평등상’을 제정, 전세계인에게 꿈과 희망의 기회를 주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라고 했다.“희망은 꿈꾸는 자의 몫이기에 10년 내에 반드시 이룰 것입니다. 이민자 출신인 매들린 올브라이트와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들이 해냈듯이 말입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48년 경남 기장 출생 ▲67년 풍문여고 졸업. 가발공장, 골프장 캐디 등 근무 ▲71년 도미 ▲75년 미 육군 입대 ▲87년 미 메릴랜드대 경영학과 졸업 ▲92년 미 하버드대 석사 ▲96년 미 육군 소령 예편 ▲2006년 하버드대 국제외교사·동아시아언어학 박사 ■ 주요 저서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1999), 희망은 또다른 희망을 낳는다(2000), 서진규의 희망(2007)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5) 목욕터 풍경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5) 목욕터 풍경

    신윤복의 그림 ‘목욕하는 여인들’. 단옷날 여성의 목욕 장면을 그린 것이다. 왼쪽 아래에 젊은 여인 넷이 시냇물에 몸을 씻고 있다. 네 사람 모두 윗도리를 벗었고, 그 중 맨 왼쪽에 서 있는 여인이 치마를 걷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속옷도 아마 입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고, 씻으러 나온 것이 아닌가. ●조선시대 여성 목욕 장면 담은 유일한 그림 오른쪽 위에는 붉은 치마와 노란 저고리로 한껏 멋을 낸 젊은 여인이 그네를 뛰고 있고, 그 옆의 여성은 참으로 거창한 크기의 어여머리를 풀어 매만지고 있다. 두 여자의 옷은 고급스럽다. 저고리의 끝동, 깃, 곁마기, 고름을 모두 자주색으로 하면 삼회장이라 하여 가장 잘 차려입은 것으로 치는데, 그네를 타는 여자와 어여머리를 만지고 있는 여성은 모두 삼회장이다. 다만 맨 오른쪽의 여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흰 저고리를 입고 있는데, 필시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다. 오른쪽 아래의 보퉁이를 이고 오는 여자는 짚신을 신고 행주치마를 두른 것을 보건대 입성이 초라할 뿐만 아니라, 남들 노는 데 심부름이나 하고 있으니, 계집종임이 분명하다. 이고 온 보퉁이에 술병 모가지가 비쭉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옆에 보이는 물건 역시 안주를 담은 찬합일 것이다. 요컨대 단옷날 시내로 나와 목욕하는 여성들(기생으로 짐작된다)이 마시고 먹을 술과 안주를 날라 오고 있는 참이다. 이 그림은 놀랍도록 충격적이다. 조선조 500년에 걸쳐 유사한 그림은 없다. 그 충격의 이유는 여성의 나신을 드러내 놓고 있다는 것이다. 흰 피부에 진홍의 젖꼭지와 입술은 너무나도 선명하다. 특히 여성의 유방을 보라. 인터넷이 온갖 영상을 퍼 나르는 시대에 여성의 나신은 그다지 별스럽지 않다. 하지만 때는 유가의 도덕이 시퍼런 조선시대다. 어찌 충격이 아닐 수 있겠는가. 여성의 젖가슴이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이다. 그것은 성의 두 가지 기능과 관계된다. 인간에게 있어 성은 쾌락이면서 생식이다. 여성의 가슴 역시 그것에 대응한다. 가슴은 성적 쾌락의 도구, 곧 성기일 수도 있고, 또한 자식을 기르는 수유의 도구이기도 하다. 수유의 도구는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과거 여성들이 공개된 공간에서 자신의 가슴을 열어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것을 보고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것은 모성의 가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보퉁이를 진 여성의 젖가슴을 보라. 이 젖가슴은 신기하게도 성적 상상을 유발하지 않는다. 하지만 목욕하는 여성의 분홍빛 유두와 흰 가슴은 성적 쾌락을 상상케 한다. 저 숨어서 훔쳐보는 젊은 까까머리 스님들의 시선도 분명 성적 쾌락을 향해 있다. 이 그림이 또한 희한한 것은 여성의 조선시대의 목욕 장면을 형상화한 유일한 시각자료라는 것이다. 한국의 전통회화는 인간의 구체적 일상을 담은 그림이 참으로 희소하거니와, 이 그림 외에는 목욕이라는 재제가 등장하는 그림은 없다. 게다가 목욕 자체에 대한 문헌의 언급도 희소하다. 과거 기록에서 목욕은 온천과 관련하여 주로 등장한다. 눈병으로 고통을 겪었던 세종과 심한 피부병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세조는 자주 온천을 찾았다. 따라서 이들의 온천행과 관련된 목욕이란 어휘가 더러 등장한다.30년도 더 된 예전의 일이다. 나는 창덕궁에 갔을 때 궁궐 안에 있는 목욕탕을 보았는데, 그것은 신식이었다. 과거 사람들은 어떻게 몸 전체를 씻었던 것일까. 제사를 지내기 전에 목욕재계하라는 말이 허다하게 나오지만, 나는 정작 그 ‘목욕’재계가 이루어지는 공간과 방법, 도구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세종실록’ 7년 7월19일조를 보면, 세종은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습진과 같은 피부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는 보고를 듣고 선공감에 명하여 욕통(浴桶)을 만들어 지급하게 한다. 이 욕통이란 것이 조선시대의 목욕문화의 핵심일 것이다. 지금처럼 대중탕이나 혹은 집안에 따로 욕실을 만들지 않고, 욕통을 만들어 적당한 공간에 비치하고 물을 데워서 목욕을 하는 것이 목욕문화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것조차 일반적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보편적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 인구의 대부분이 소작농이거나 극히 적은 농토를 소유한 자작농이었으니, 삶의 수준이란 것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판에 집집마다 욕통을 갖추어 놓고 물을 데워 목욕을 할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20세기에 들어와서도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에는, 단독주택에 욕통을 비치할 공간을 거의 마련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린다면, 조선시대의 목욕문화를 대개 짐작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이 자신의 몸을 어떻게 청결히 했을까 하는 것은 더욱 궁금한 일이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도 아무런 문헌적 해답은 없다. 상상하건대 아마도 부엌 바닥에 물을 데워놓고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 몸을 씻지 않았을까. ●개울에서 목욕하는 것은 오랜 전통 다만 여성이 비교적 자유롭게 몸을 씻을 수 있는 곳은, 개울이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을 선택한다. 하기야 늘 그렇듯이 남성의 관음증은 여기서도 멈추지 않아, 훔쳐보는 사람(스님 둘)이 있기 마련이지만. 개울에서 목욕을 하는 것은, 오랜 전통이다.1123년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은 이렇게 말한다. 옛날의 역사책에 고려에 대해 실어놓은 기록에 의하면, 그 풍속이 모두 다 깨끗하다 하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고려 사람들은 늘 중국 사람들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그러므로 이른 아침에 일어나 반드시 먼저 목욕을 한 뒤 집을 나선다. 또 여름에는 날마다 두 번 목욕을 하는데, 거개 시내에서 한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내외를 하지 않고 의관을 모두 벗어 언덕에 던져두고 물가를 따라 벌거벗되 괴이한 일로 여기지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위쪽 부분이다. 고려 사람은 청결하고 중국인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는 말을 중국인 스스로 하다니 말이다. 서긍의 말에 의하면, 고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목욕부터 하고 외출을 하고, 여름에 하루 두 번 목욕을 한다 하니, 조선과는 사뭇 다른 풍습이다.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여름철 시내에서 목욕을 하되, 남자 여자가 내외를 하지 않고 나신을 드러내고 목욕을 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을 믿는다면, 고려시대에는 남녀의 분별이 없이 옷을 언덕에 벗어놓고 몸을 씻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위의 엿보는 선비도 이런 유구한 전통을 이어받았는지 모를 일이다. 각설하고, 이렇듯 자유롭던 개울가의 풍경이 바뀐 것은 조선조가 들어서면서부터이다. 조선조는 알다시피 양반-남성 국가다. 양반-남성의 국가는 여성과 남성의 성역할을 분할,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양반-남성은 ‘소학’의 규정대로 여성의 역할을 조리와 의복에 제한했다. 조리와 의복 마련은 조선에서도 여성이 맡아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고려와 달라진 것이 있었다. 조선의 국가이데올로기 성리학은 남성과 여성을 철저하게 분리하고, 여성을 오직 가정 내부에 유폐할 것을 요구했다. 여성은 밖으로 나다니지 말아라. 여성은 뜰 밖에 나와서도 안 된다. 이것이 양반-남성의 요구였다. ●감추라 하면 더욱 드러내고 싶은 인간의 본능 ‘고려도경’의 언급처럼 고려사회는 시냇가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남자와 여자가 옷을 벗고 목욕을 하는 것을 허락했다면, 조선사회에서는 그와는 정반대의 길로 치달았다. 몸을 가려라. 이것이 여성에 대한 주문이었다. 사대부가의 여성이 외출할 때면 장옷과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렸고, 처녀의 경우 비단보자기를 씌워서 업고 다니기도 하였다. 그럴 형편이 되지 않으면 할 수 없지만, 만약 형편이 된다면, 남성의 시선으로부터 여성의 신체를 완벽하게 차단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것이 도덕의 명령이었다. 하지만 감춘 것은 더욱 보고 싶은 법이고, 감추라 하면 더욱 드러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양반-남성의 도덕은 여자의 몸을 죄의 근원처럼 여겼다. 과연 그런가. 여성의 몸이 죄의 근원이라면 모든 인간은 죄의 근원에서 태어난 것이다. 이보다 더 큰 거짓이 어디 있겠는가. 혜원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가.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제주, 화장문화 급속 확산

    ‘제사는 안 지내도 조상묘 벌초는 꼭 한다.’는 제주의 뿌리깊은 매장 선호 풍습이 화장으로 급속히 바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주도는 2007년 제주도민 사망자 2870명 가운데 화장 방식으로 장례를 치른 사례가 1183건으로 41.2%의 화장률을 기록했다고 30일 밝혔다. 이는 전년의 화장률 38.2%보다 3.0%포인트 높은 것으로,10년 전인 1998년의 화장률 8.8%에 비해 무려 32.4%포인트나 뛰어 매장을 선호했던 제주 지역의 뿌리깊은 장례풍습이 급속히 바뀌고 있음을 보여줬다. 제주도화장장인 양지공원관리소는 “화장률이 10%대에서 40%대로 상승하는 데 전국 평균이 32년이나 걸렸으나 제주도는 10년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도는 그러나 현재의 화장률도 지난해 전국 평균인 56.5%보다 크게 밑돌아 아직도 매장 풍습이 강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보고 ‘화장 유언 남기기’ 등의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로 했다. 또 정부정책이 화장을 치른 뒤 납골하는 방식에서 자연장으로 전환하고 있음에 따라 제주시 어승생공설묘지에 자연친화적인 자연장지를 조성할 방침이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티베트 천장, 하늘로 가는 길/ 심혁주 지음

    어느 국가, 민족이든 고유한 문화의 스펙트럼을 갖게 마련이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로 상징되는 ‘불교문화’의 원형지 정도로 인식되기엔 티베트 문화에는 각별한 대목이 있다. 그것이 기물이나 기술 위주의 표층문화가 아니라 철저히 의식형태에 가치기반을 둔 고도의 심층문화라는 점이다. 세상이 티베트를 주목한 것은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중국정부가 허용하는 공식적이고 제한된 관광경로로만 표피적으로 그려졌을 뿐이다. 학문적 깊이와 고민으로 티베트를 전면 재인식할 수 있도록 배려한 책이 ‘티베트 천장, 하늘로 가는 길’(심혁주 지음, 책세상 펴냄)이다. 지은이는 타이완국립정치대학교의 민족연구소에서 티베트 불교사를 정식으로 공부했다. 논문을 쓰려 작정하고 티베트로 장기답사를 다녀온 저자의 시각은 깊고 날카롭다. 책은 티베트의 정신세계를 대변하는 문화가 곧 ‘천장’(天葬)이라고 보았다. 해발 4000m가 넘는 고원의 고립되고 척박한 장소성이 독특한 장례법을 낳았다. 화장(火葬)은 일부 지배계층과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선택의 여지없이 민중은 시체를 산과 들에 방치하는 원시 천장의 풍습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시신을 ‘천국의 사자’ 독수리가 뜯어먹게 하는 천장의 방식은 불교문화에 용융돼 1000여년이 넘게 이어져 왔다. 티베트의 토착종교인 본교( 敎)의식으로 시체를 분리하는 장례풍습이 시작돼 8세기쯤 전래된 불교 세계관에 힘입어 오늘의 형태에 이르렀다는 주장이다. 시체의 뼈를 잘게 조각내는 것은 천장사의 몫이다. 정성껏 발라낸 인육을 독수리에게 ‘보시’하고, 들판에 놓아둔 뼈는 곱게 자연풍화한다. 독수리를 통해 죽은이의 영혼이 자연스럽게 다른 육체로 인도된다는 인식이 투영됐다. 천장사의 해부현장을 옆에서 지켜보며 지은이는 “숨이 막혔다.”고 서문에 썼다. 정신문화의 원형을 잇는 의식에만 책의 시선은 머물지 않고, 중국 정부의 티베트 현대화 작업으로 인한 변화와 문제점까지 두루 담았다.1만 2000원.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태국전하와 사랑맺은 한국여인

    태국전하와 사랑맺은 한국여인

    유사(有史)이래 우리나라 여성이 타국의 왕실과 인연을 맺기는 고려(高麗)말엽 원순제(元順帝)의 제2왕후가 된 기(奇)씨가 최초. 이로부터 6백여년이 흐르는 오늘, 태국의 왕족과 결혼, 15년만에 모국을 찾은 박명복(朴明福) 여사(44)가 두번째의 여성이 될 듯-.「몸·박(朴)」이라는 왕족의 존칭을 받고 있는 이 화제의 주인공은? 사귈땐 왕족(王族)인줄도 몰라…남편은 국왕(國王) 할아버지뻘 태국은 1782년의「차쿠리」왕조 이래 입헌군주제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57년 결혼한 박여사의 부군「차오·조티시·데바쿤」씨(64·차오는 왕족 남자에 대한 존칭)는 9대째인 현「부미볼」태국왕의 할아버지뻘이 되는 근친. 『저의 시아버님께서는 4대국왕의 왕자였어요』 왕족 촌수를 풀이하는 박여사의 얘기다. 박여사와「조티시·데바쿤」씨가 부부의 인연을 맺기는 57년 서울에서. 『그때「언커크」태국 대표로 저의 주인이 한국에 나와 있었어요』 이화여대로는 제1회 영문과출신. 49년에 한국은행에 입행했다가 EAC로 옮겨 미국 유학을 마치고 54년에 귀국한 박여사에게 당시 WHO에 있던 태국인의 소개로 약1년간 교제끝에 태국왕족의 아내가 된 것. 처음 교제할 때는「전하」라는 칭호를 받고있는 왕족인 줄을 몰랐었다는 얘기. 『결혼은 서울서 간단하고 조촐하게 했어요. 저의 주인이 마침 미국 대사로 가시게 되어 몇 년간 미국서 살았지요』 “우리애들 모두 친한파(親韓派)죠…어머니 나라를 절대지지” 그후「유엔」대사를 역임, 태국 외무부국장 자리에서 4년전 정년퇴직, 현재는 조용히 가정에서「골프」를 즐기고 있다고. 현재 태국에 있는 한국인중 외국인과 결혼한「케이스」는 29가구. 부인이 태국인인 경우는 12, 남편이 태국인인 경우가 7, 남편이 미국인인 경우가 10가구인데 이중 남편이 태국인인 경우는 유일하게 박여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태국군인이 한국에 주둔했을 때 맺어진 것이라고. 15년만인 지난 4월 22일 3주간 예정으로 잠시 귀국한 박여사는 과거 주 태국무관이던 손장래(孫章來)준장 부인 정영자(鄭英慈)여사의 안내로 부산까지 관광하기도 했는데『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더니 정말 모국이 놀랍도록 변했어요』라고 탄성을 연발한다. 『이번에 우리 어린애들을 데리고 오지 못한 게 여간 섭섭하지가 않아요. 어머니 나라가 보고싶다고 여간 아닌데 말이지요…』 자녀는 1남1녀를 두고 있다는데 올해 14살인 딸은 왕족 학교에, 12살의 아들은「인터내셔널·스쿨」에 보내고 있다고. 『우리 아이들…어머니 나라 보지는 못했지만 한국이라면 열성이 보통 아닙니다. 아빠와 엄마가 정구를 해도 엄마가 이기라고 응원할 정도로-. 『저번 축구시합때 한국이 승리하니까 얼마나 좋아들 하는지 아버지가 우스갯 소리로 한국으로 추방하겠다고 말해 웃음바다가 된 일이 있어요』 처음 태국에 도착했을 때의 얘기를 묻자, 무지무지하게 더운 나라라는 것과「바나나」를 비롯, 풍족한 과일이 제일 먼저 눈에 띄더라고. 『내가 왕족과 결혼했다니까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걸로 알고들 있는데 사실은 그저 먹고 살 정도의 재산뿐입니다』 “부부함께 태국과 한국의 교량이 되고파” 아직도 변함없이 또렷한 모국어로 말을 잇는다. 현재 왕족으로서 받는 대우는 연4백「바트」의 국왕이 내리는 명목상의 은사금(恩賜金) 정도라고. 『계보상으로 저의 시댁 집안을 말하면 시아버지께서는 31명의「라마」4세 자녀중 내이시고 주인은 다음대의 11형제중 막내입니다』 불교의 나라 태국에서는 승려를 거쳐야만 지도자나 요직에 앉을 수 있기 때문에 박여사 가정은 철저한 불교신도들이라고. 시누이는 76세의 노처녀로 왕족학교의 교장직을 맡고 있다고 한다. 궁중 의식중 진기한 풍습은 높은 분 앞에 갈때는 저만큼서부터 무릎을 꿇고 기어가는 것. 『태국 국민들의 왕족에 대한 신뢰도는 보통이 아닙니다. 우상적인 존재로서가 아닌 정신적인 지주로 말입니다』 지금 태국에는 약 4백여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다는데, 모두 부유하게 잘들 지내고 있다고 교포들의 근황을 박여사는 말하고 있다. 『태국나라 국적을 얻는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태국 정부가 배정한 한국으로부터의 이민「쿼터」가 매년 5백명이었는데 금년엔 50명으로 줄었어요. 자기만 좀 부지런하면 살아가는데 아무 불편 없읍니다』 더위만 잘 참을 수 있다면 우리 한국인이 많이 태국에 건너와 살기를 희망한다고 말한다. 『주인과 저는 미력하나마 한국과 태국간에 하나의 교량적인 역할을 다할 생각입니다』 지금 태국에는 무역진흥공사가 나가 있는데 가장 인기있는 품목은 인삼과 모직물이란다. “한국여성의 긍지 지키려 각별히 언행에 조심해요” 태국에 있는동안 제일 먹고 싶었던게 김치였다고 말하는 박여사, 귀국하자마자 정여사에게 김치부터 찾았다고 웃는다. 『우리 한국 여성들, 이번에 와 보니까 더 세련되고 많이 예뻐졌더군요. 아주 유행에 민감한 것 같아요』 며칠전 미장원에 들러 태국은 지금「맥시·스타일」이 유행이라고 했더니 한국에선 벌써「맥시·스타일」이 한물 갔다고 해서 새삼 놀랐단다. -왕족이 외국인과 결혼하는걸 꺼리는 경향은 없나요? 『별로 그런거 없읍니다. 전 지금까지 태국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백안시한다거나 그런 경우를 당해 본 일이 없어요』 -왕족이기 때문에 특별히 받는 제약 같은 건 없는지요? 『옛날엔 격식도 갖추어야 했겠고 제약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런거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매사에 주의하고 있읍니다』 한국여성의 긍지를 끝까지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웃으며 한마디. 지금 박여사의 가장 큰 소망 하나가 있다면 태국에 멋진 회관 하나를 지어 양국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일이다. 이번에 다시 태국으로 가면 한 10여년 후에야 다시 모국을 방문하게될 것 같아 안타깝단다. 『그래서 지금 한국의 모습을 열심히 뛰어 다니며 보고 있읍니다. 다음에 올 땐 한국이 더 멋지게 발전되어 있기를 간절히 바라겠읍니다. 그리고 그때의 모습을 보는 재미로 기다리고 참겠어요』라고 동족애에 넘친 인사를 잊지 않는다. <承> [선데이서울 71년 5월 16일호 제4권 19호 통권 제 136호]
  • 중국 남녀 엿보기/에버리치홀딩스 펴냄

    중국 남성들은 ‘슈퍼맨’에 가깝다. 직장생활 하랴, 자녀 하교시키랴, 시장보고 저녁 준비하랴….24시간이 모자랄 판이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좀 과장해 말하면 퇴근 후 남편이 해주는 저녁 먹고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며 TV를 보면 끝이다. 이런 분위기 탓에 ‘가장’이라는 직권을 남용해 전횡을 일삼는 대발이 아버지의 ‘사랑이 뭐길래’가 중국 남성들에게 대리 만족을 주며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해박한 지식으로 중국 역사와 사회를 독창적으로 해석해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중톈(易中天) 중국 샤먼(廈門)대 교수.‘삼국지강의’‘중국 도시 중국 사람’ 등을 펴낸 저자가 이번에는 남녀평등을 넘어 여성상위의 중국 남녀 이야기를 들고 나왔다.‘중국 남녀 엿보기’(홍광훈 옮김, 에버리치홀딩스 펴냄)가 그것이다. 남녀 유형과 성생활, 결혼, 부부생활, 창녀와 매음, 바람 피우기, 음담패설을 가감없이 쏟아낸 이 저작은 ‘춘추좌씨전’이나 ‘사기’‘수호전’‘삼국지’‘홍루몽’ 등 고전소설부터 진융(金庸)의 ‘신조협려’까지 역사서와 문학작품, 무협소설에 등장하는 남녀의 사례를 종횡무진 끌어내 시종 경쾌한 읽을 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남녀유별과 현모양처 등의 개념, 결혼을 앞두고 중매를 서는 과정이나 첫날밤을 치르는 모습 등 중국의 풍습은 우리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저자는 ‘중국 남자 엿보기’ 편에서 우유부단하고 연약한 남성상을 다루며 중국 남녀관계의 실상을 밝힌다. 중국 문학작품들이 전통적으로 나약하고 여성화된 백면서생이나 여성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강호호걸이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도덕군자 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강함’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한다. ‘중국 여자 엿보기’편에서는 현모양처 되기가 지극히 힘든 만큼 그것이 못될 바에야 차라리 맹렬 여성이 될 수밖에 없는 ‘정황’을 살핀다.1만 6000원.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지구촌 새해표정

    |파리 이종수·도쿄 박홍기·베이징 이지운특파원|세계의 새해맞이는 나라만큼이나 다양했다. 그러나 새로운 희망에 대한 염원은 인종·문화를 떠나 한결같았다. 미국 뉴욕 타임스 스퀘어 새해맞이는 어김없이 이른바 ‘타임 볼’로 불리는 새해 공내리기 행사로 치러졌다.23m 높이의 지지대에 설치된 직경 1.8m의 공을 내리는 행사는 100주년을 맞아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켰다.31일 밤 11시59분부터 카운트 다운을 시작,1월1일 0시가 되자 “해피 뉴 이어”라는 함성 속에 새해를 상징하는 크리스털 공이 내려지자 주변 빌딩에서 세계 각국 사람들의 새해 소망이 적힌 1t분량의 오색 색종이가 뿌려졌다. 주변에는 100만명 정도가 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파리 도심에서는 ‘빛의 향연’과 함께 새해를 맞았다. 샹젤리제 거리의 가로수는 온통 전구로 치장, 화려한 야경을 연출했다. 세계에서 모여든 관광객을 포함, 수십만명의 인파들은 개선문에서 콩코르드광장까지 2.3㎞의 샹젤리제와 에펠탑, 센강의 퐁데자르·퐁네프 등 곳곳을 가득 메웠다. 일본인들은 새해 첫날 전국 사찰과 신사를 찾아 소망을 빌었다. 정월 초하루의 참배를 뜻하는 ‘하쓰모데(初詣)’라는 전통 풍습에 따라 대부분의 국민들이 가까운 절 등을 찾았다. 수많은 가족 단위의 인파들은 31일 도쿄 메이지신궁에서 새해를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참배를 시작했다. 메이지신궁측은 3일까지 예년처럼 310만명이 방문할 것으로 예상했다. 중국 베이징 시민들은 31일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하며 새해맞이를 했다. 베이징 올림픽조직위원회 등은 올림픽의 성공을 기원하는 축하 공연을 갖기도 했다. 특히 중국 최초의 달 탐사위성인 ‘창어(嫦娥)1호는 38만㎞ 떨어진 곳에서 ‘새해가 또 시작됐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우리와 함께 아름다운 생활을 노래하자.’라는 신년 축하 메시지와 함께 2곡의 가곡을 보내왔다. vielee@seoul.co.kr
  • 창녕고분의 금귀고리 주인은 ‘젊은 여성’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동 가야 고분에서 발굴한 금귀고리 차림의 인골(서울신문 12월21일자 17면 보도)은 키 135㎝의 젊은 여성으로 밝혀졌다. 창녕 송현동 15호분은 도굴이 이루어져 유물 대부분은 사라졌지만, 주인공의 시신이나 관을 놓는 시상(屍床)과 순장자 4구의 시신 및 토기를 비롯한 관련 부장품이 남아있었다. 특히 석실 남쪽 벽에 가까운 곳에 놓였던 주인공은 머리를 남쪽, 다리는 북쪽에 둔 데 비하여 반대편에 있던 순장자의 시신은 한결같이 머리를 동쪽에 두고 있었다. 순장자의 시신은 도굴 과정에서 훼손되어 두개골과 발뼈만 남긴 채 몸통 부분은 남아있지 않았는데, 금귀고리는 석실 북쪽에 가장 가까이 있던 인골의 왼쪽 귀에서 발견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기획과 서민석 박사는 15세 이후가 되면 닫히는 성장판이 닫혀 있었고, 치아상태와 골반뼈를 바탕으로 이 인골은 20∼30대 여성의 것이라고 26일 설명했다. 이 인골의 키는 135㎝로 머리나 발의 피부 등을 고려해도 137㎝가 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됐다. 한반도에 살던 고대인들의 키가 현재보다는 작았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적지 않지만, 그래도 성인여성으로는 작은 편이다. 가야문화재연구소는 “이번 발굴로 가야 시대 순장 풍습의 일단이 밝혀졌지만 방식의 전모를 파악하려면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사회 곳곳 그늘 찾아 연합봉사”

    오는 10일 오전 11시 서울 저동 영락교회에서는 3000여명의 목회자가 참여하는 뜻깊은 행사가 열린다. 기독교계가 교파를 초월한 대사회 목회자 봉사단체인 한국교회희망연대(한희연)를 발족해 이날 출범식을 갖는 것이다.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목회자들이 성도와 함께 봉사에 뛰어들기 위해 조직”한 단체. 교회와 목회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점차 확산되고 있는 반기독적 정서를 인식, 사회참여 측면에서의 책임의식을 적극적인 행동으로 보여주겠다고 벼른다.●10개 교단 120개 교회 목회자 참여 참여하는 교단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통합, 합동정통, 고신, 감리, 성결, 한국기독교장로회, 침례, 합신, 하나님의성회 등 10개 교단. 영락교회를 비롯해 여의도순복음교회, 제자교회, 종교교회, 은평성결교회 등 개신교계의 중대형 교회들이 대부분 들어 있다. 각 교단에서 12개씩 총 120개 교회의 목회자가 함께 하며 이들 말고도 대학생선교회를 비롯한 기관 사역단체와 초교파 교회, 해외교회도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희연’은 10일 출범식을 가진 뒤 세계선교·국제봉사·사회봉사·긴급재난·인재양성·외국이주민·국제조직위원회 등 7개의 위원회 체제로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할 예정. 최홍준(부산호산나교회), 박은조(분당샘물교회), 이윤재(분당한신교회), 피영민(강남중앙교회), 옥성석(일산충정교회), 박성민(한국대학생선교회), 권태진(군포제일교회). 정성진(거룩한빛광성교회) 목사가 위원회를 이끄는 책임자들이다.●오는 성탄절을 연합활동 첫 계기로 교회 대표들은 이와 관련해 지난달 19일 서울 도렴동 종교교회에서 발기인 준비대회를 열어 이철신(영락교회) 목사를 상임대표로, 정삼지(제자교회)·최이우(종교교회)·양병희(영안교회)·한태수(은평교회)·이영훈(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를 공동대표로 뽑아놓았다. ‘한희연’의 약칭은 구약성서 속 희년(禧年·50년마다 노예를 해방하거나 빼앗은 땅을 되돌려주던 유대 풍습)의 정신을 되살린다는 뜻에서 딴 것. 약칭과 관련, 참여 목회자들은 “우리 기독교계의 대사회 봉사가 대부분 개별 교회 차원에서 이뤄져 사회 전체를 아우르기엔 한계가 있었다.”며 “한희연은 그동안의 활동과는 달리 ‘연합’과 ‘봉사’를 핵심주제로 택해 사회 곳곳의 그늘진 현장을 직접 찾아가 활동한다.”고 밝혔다.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이 “한국교회의 머리가 아닌 허리” 역할을 강조하며 수평적인 사역 중심의 모임에 전격 뜻을 모은 ‘한희연’은 오는 성탄절을 연합활동의 첫 계기로 삼을 예정이다.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지방행정 혁신 우수사례] (3)투명성·조직혁신 분야

    [지방행정 혁신 우수사례] (3)투명성·조직혁신 분야

    ■대통령상 충북 증평군 ‘벨크로’ 충북 증평군의 ‘벨크로’는 공무원이 주민속으로 깊숙이 침투해 주민과 논의를 하면서 마을 발전을 만들어 가는 사업이다. 벨크로는 옷에 붙였다 뗐다 하는 소매 등 일명 ‘찍찍이’를 일컫는다. 경직성으로 상징되는 공직사회에서 유연성을 강조한 것이다. 첫 작품은 ‘청개구리’라는 군청 직원동아리. 이들은 셰르파 역할을 하면서 증평읍 송산리와 손잡고 마을이 먹고 살 것을 개발했다. 셰르파는 산을 등정할 때 돕는 현지인이다. 청개구리 셰르파는 송산리 주민과 한참을 고민한 끝에 ‘장이 익어가는 인삼마을’을 만들었다. 회원들이 주민들과 2개월간 자원조사를 했다. 자연과 옛 풍습이 송산리의 가장 좋은 자원이라는 결론을 짓고 마을에 테마관광관을 지었다. 마을에서 1400평의 터를 내놓았다. 초기에는 전통문화에 조예있는 공무원이 참여했고 건물을 지을 때는 토목·건축 전문 공무원들이 나섰다. 벨크로처럼 여기저기 참여해 주는 유연성을 보인 것이다. 테마관광관에서는 두레박으로 물푸기, 땔감으로 불지피기, 된장 담그기, 두부쑤기 등을 할 수 있다. 관광객들이 몰려 주민들의 소득으로 이어지고 있다. 송산리가 잘 나가자 주변 마을 주민들이 ‘군청은 왜 송산리하고만 노느냐.”고 시샘을 했다. 지금은 온새미얼팀과 증평읍 초중리 등 군청의 8개 팀과 마을이 자매결연을 하고 마을이 먹고 살 것을 함께 고민하고 있다. 셰르파팀이 마을에서 1박2일간 머물며 토론하기도 한다. 증평군은 2003년 괴산군에서 분리됐다. 공무원 1인당 주민수가 92명으로 전국 군 단위와 비교해 공무원이 두배 정도 적다. 이런 단점을 효과적으로 커버하기 위해 이 방법을 택했다. 권영이(47·여) 행정혁신담당은 “공무원과 주민들이 한 덩어리가 됐다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증평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국무총리상 충남 아산시 ‘하나로 클린’ 충남 아산시는 ‘하나로 클린시스템’을 통해 사업 착수부터 준공까지 감사실에서 심사하고 있다. 행정의 투명성이 높아지고 예산이 크게 절약된다. 심사하는 부문은 재정 및 설계 분야로 4단계에 걸쳐 이뤄진다. 사업·용역 및 물품구매 때 적용되고 있다. 타당성 심사는 어떤 계약 방법이 좋은지 등을 따져 조정한다. 두번째는 발주 심사로 사업수행 능력 여부를 살피고 공무 지침서를 따랐는지 등을 판단한다. 용역 심사는 공법이나 자재 선정이 제대로 됐는지 등을 따진다. 이를 심사하기 위해 기술직 공무원과 교수 등 전문가 10여명으로 태스크포스팀이 구성된다. 마지막 단계는 사후 평가로 사업 이행여부를 본다. 예전에는 담당 과장이나 계장이 이같은 역할을 해 행정이 불투명하고 부실했다. 또 뚜렷한 이유도 없이 설계를 변경해 예산이 크게 늘어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 제도는 강희복 시장이 “예산 규모가 커지면서 방만해질 수 있다. 대책을 찾으라.”고 지시,2005년 도입됐다. 처음에는 재정 심사만 하다 지난해부터 설계분야로까지 확대했다. 이를 통해 시는 예산 247억원을 절감했다. 명노헌 감사담당관실 설계심사계 직원은 “직원들이 교수 등 전문가들과 일하면서 업무능력이 크게 향상되는 효과도 있다.”면서 “‘업무편람’을 만들어 직원들이 체계적으로 일을 배울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아산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아쉬운 3위 강원도 ‘주민참여 감사제’ 강원도 ‘주민참여 통합 윈우(Eye Of Horus) 시스템’에서는 주민들이 직접 감사 업무에 참여한다. 다소 폐쇄적인 감사 분야에 ‘열린 행정’을 접목하겠다는 뜻이다. 주민의 신뢰도가 행정의 경쟁력과 직결된다는 인식을 함께 한 강원도 공무원들과 외부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안한 시스템이다. 사업은 3단계로 나눠진다. 모니터링 단계인 1단계는 감사를 하기 전에 주민과 신고센터, 행정, 언론기관이 정보 수집 홈페이지를 통해 다양한 감사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을 한다. 2단계는 감사 중에 주민들이 감사에 직접 참여하거나 인터넷을 통해 참여할 수 있다. 3단계 결과공개에서는 감사를 한 뒤 주민들이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전문을 100% 공개한다. 이때 결과에 따른 데이터 등의 자료도 함께 내놓는다. 지난 10일부터 강원도 홈페이지에 별도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춘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일요영화] 붉은 수수밭

    [일요영화] 붉은 수수밭

    ●붉은 수수밭(MBC 일요영화특선 오후 12시30분) 중국의 5세대 감독인 장이머우가 1988년 만든 데뷔작 ‘붉은 수수밭’은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까지 기구한 생애를 살아가는 여주인공을 그리고 있다. 광활한 수수밭을 배경으로 중국 특유의 대륙 성향을 가열차게 뿜어내는 화면이 인상적이다. 가난이 죄.18세의 추알(공리)은 나귀 한마리의 몸값으로 나이 쉰이 넘은 양조장 주인 리씨에게 팔려간다. 남편 얼굴도 모르는 채 가마를 타고 신랑집으로 향하면서 추알은 즐겁지가 않다. 그저 가마 가리개 사이로 젊은 가마꾼들의 우람한 상체를 엿보는 재미로 시집가는 시름을 달랜다. 예식을 올린 후, 풍습대로 사흘째 되는 날 아버지와 동행해 다시 친정으로 떠난다. 앞서 가던 그녀는 수수밭에서 누군지 모를 사내에게 끌려가고, 그가 바로 남몰래 훔쳐보던 가마꾼 유이찬아오임을 알게 된다. 추알이 남편에게 되돌아왔을 때, 남편은 살해당해 있다. 과부가 된 추알은 혼자 힘으로 양조장을 꾸려간다. 유이찬아오는 그녀와 동침한 사실을 소문내고 새로 빚은 술독에 오줌을 누면서 말썽을 피운다. 그리고 자신이 주인이라며 추알이 머무는 안채로 들어간다. 유이찬아오가 오줌을 눈 고량주는 맛있는 술로 유명해져 ‘18리 홍고량’이라는 이름으로 인기를 얻게 된다. 그리고 9년 뒤. 추알과 유이찬아오의 아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일본군은 군용도로를 건설하겠다며 마을사람들에게 수수밭을 훼손할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항일 게릴라에 가담했던 일꾼 라호안이 가죽이 벗겨지는 형벌로 죽자, 마을 사람들은 분노가 폭발한다. 유이찬아오와 일꾼들은 수수밭에 폭파장치를 설치하고 고량주에 불을 붙이며 일본군에 맞선다. 이 와중에 추알이 일본군의 기관총에 맞아 쓰러지고 만다. 온통 불길에 휩싸이는 수수밭. 화염인지 핏물인지 모르게 수수밭이 점점 붉게 물들어간다. 인고의 세월을 살아간 한 여인의 삶을 그린 ‘붉은 수수밭’은 원색톤의 화면과 절제된 전통음악으로 주제를 잘 형상화한다.1988년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 몬트리올 영화제 특별상, 이탈리아 듀브린 영화제 최우수상, 중국 백화상 작품상, 중국 금계상 작품상, 프랑스 낭트 영화제 촬영상 등을 수상했다.90분.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韓·印 IT합작으로 윈윈을”

    “한국은 정보기술(IT) 하드웨어 강국이고 인도는 소프트웨어 강국이므로 이를 합작하면 윈윈 게임이 될 것이다.” 나게시라오 파르타사라티(53) 주한 인도대사가 5일밤 서울 프레스센터 12층 한국언론재단 인도지역 전문가과정의 ‘인도의 경제성장과 한국과 인도와의 협력관계’란 특강에서 이렇게 말했다. 파르타사라티 대사는 “인도는 다양한 인종, 문화, 언어, 종교를 가진 10억여명의 인구가 있는 독특한 나라”라며 “200㎞마다 언어와 문화와 풍습이 다른 새로운 세계를 구경하게 된다.”고 밝혔다.이어 여러 이질적 요소로 뒤섞인 인도가 ‘하나의 나라’로 굴러갈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인도는 샐러드용기와 같다.”며 “여러 요소가 각각 다른 맛과 특징을 보여 주는 동시에 함께 잘 어우러져 빛을 발한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인도의 등록된 신문은 6만 2483개이며 22개의 공식언어가 있다. 일년에 약 2000개의 신문이 새로 생기고 있다. 2005년 9월 한국에 부임한 그는 인도에서 한국기업은 독보적인 존재라고 밝혔다. 삼성,LG, 현대, 대우 등 한국 기업들이 1990년대 중반 다른 나라 기업들이 주저하고 있을 때 인도시장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해서 인도 국민 누구나 한국 기업의 브랜드를 알 정도로 상당한 시장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소설가로도 유명한 그는 이미 인도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문제를 다룬 스릴러 소설 ‘망설이는 자객’을 발표했다.한국에서도 지난달 19일 가야국 시조 김수로왕과 결혼한 인도 공주인 슈리라트나(한국명 허황옥)의 생애를 그린 장편소설 ‘비단황후’를 펴냈다.최종찬기자 siinjc@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4)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4)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대표작인 ‘세한도(歲寒圖)’를 두고, 옛 그림 연구에 업적을 남긴 동주 이용희는 “일견 퍽 싱거운 그림”이라고 했습니다. 소나무가 있고, 엉성하게 보이는 집이 한 채 있을 뿐 아마추어가 보면 왜 좋은 그림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추사의 일생을 다룬 최초의 본격적인 비평서인 ‘완당평전’을 내놓은 유홍준도 “실경산수로 치자면 0점짜리”라고 거들었지요. 그럼에도 ‘세한도’를 추사 예술의 극치로 꼽는 것은 눈에 보이는 모습을 옮긴 것이 아니라 사의(寫意), 즉 뜻을 그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구도와 묘사력이 뛰어나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과 글씨, 글의 내용이 삼위일체를 이루어 좋다는 설명이지요. ‘세한도’는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된 지 5년째를 맞은 1844년 제자인 우선 이상적(1804∼1865)에게 그려준 것입니다. 중인 출신 역관인 이상적은 추사가 낙마하여 절해고도에 위리안치된 상황에서도 의리를 저버리지 않아 스승을 감격케 했습니다. ‘세한도’를 보면, 그림과 발문(跋文)이 각각 담긴 두 장의 종이를 이어붙이고 경계 부분의 아래쪽에는 ‘阮堂(완당)’이라고 새겨진 도장을 찍었습니다. 두 장으로 되어 있지만 하나의 그림으로 보아달라는 뜻이겠지요. 실제로 세상의 시비에 여간해서는 흔들릴 것 같지 않은 엄정한 필치의 발문이 없다면 ‘세한도’는 다소 심심한 그림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길이 108.3㎝짜리 ‘세한도’를 제대로 전시하기 위해서는 10m가 훨씬 넘는 쇼케이스가 필요합니다.‘세한도’ 두루마리에는 이 그림을 감상한 인물 20명이 직접 쓴 감회가 줄줄이 붙어 있기 때문이지요. 지난해 추사 서거 15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에서도 두루마리를 모두 펼쳐놓을 수 없었습니다. 이상적은 ‘세한도’를 전해받은 해 동지사 이정응을 수행하여 연경에 갔습니다. 그는 이듬해 정월 중국인 친구 오찬(吳贊)이 베푼 재회축하연에서 청나라 명사들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16명으로부터 제문(題文)과 발문을 받았지요. 이상적은 장목(張穆)의 제문을 표지삼아 그림과 제발을 한 축의 두루마리로 표구한 뒤 가져왔고 다시 제주도로 보내 추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상적이 세상을 떠난 뒤 이 두루마리는 제자였던 매은 김병선에게 넘어갔고, 그의 아들 소매 김준학이 물려받아 끄트머리에 감상기를 적어 놓았습니다. 이후 ‘세한도’는 민영휘의 집안이 소유했다가 일본인 추사연구가 후지쓰카 지카시오(藤塚隣)에게 팔아넘겼지요. 이것을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1944년 거금을 싸들고 현해탄을 건너가 3개월 동안 아침저녁으로 병석에 누운 후지쓰카를 문안한 끝에 받아들고 돌아왔다는 얘기는 유명합니다. 손재형은 1949년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위창 오세창과 대한민국 초대부통령 이시영, 독립운동가이자 국학자인 위당 정인보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글을 받아 두루마리에 이어붙였습니다. 그런데 훗날 국회의원에 출마한 손재형은 ‘세한도’를 저당잡히고 선거자금을 끌어다 썼지요. 하지만 낙선하여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자 그림은 미술품수집가 손세기에게 넘어갔고, 지금도 그의 집안에서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한도’는 1447년 그려진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 이어 두번째 많은 제문과 발문이 붙은 조선시대 그림이 되었습니다.‘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의 발문을 비롯하여 22명의 글 23편이 두루마리 두 축에 표구되어 있지요. 손재형은 오세창 등의 발문을 이어붙인 뒤에도 ‘세한도’ 두루마리에 90㎝ 정도의 공백을 남겼다고 합니다. 누군가 그림을 품평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을 만나면 발문을 받겠다는 생각이었겠지요. 하지만 발문을 이어붙이는 전통은 끊어지고 지금까지도 당시의 상태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림에 감상문을 붙여 후세에 물려주는 풍습은 서양의 캔버스 미술문화에서는 불가능한 두루마리 그림문화만의 특징입니다.‘세한도’처럼 그림 자체의 품격도 품격이지만 발문을 쓴 사람이 누구이고, 그 문장의 수준이 어떠한가에 따라 작품의 가치가 더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은 우리 그림이 갖고 있는 묘미의 하나일 것입니다. dcsuh@seoul.co.kr
  • [씨줄날줄] 성냥갑 아파트/구본영 논설위원

    19세기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는 신대륙인 미국의 필라델피아를 여행한 뒤 재미있는 인상기를 남겼다.“너무 따분해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는 게 요지였다. 당시의 필라델피아는 시원하게 뚫린 길과 반듯한 건물들로 채워진, 도시계획이 잘된 도시였다. 그럼에도 다채롭고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들어선, 꾸불꾸불한 런던 거리에 익숙한 디킨스에겐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라이터가 사치품이었던 시절 인기리에 팔리던 ‘유엔 성냥’이 있었다. 집들이나 개업식 때 팔각형의 ‘유엔 성냥’을 돌리던 풍습은 이제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직육면체의 휴대용 ‘유엔 성냥’엔 역시 얇은 직육면체의 단조로운 유엔본부 건물 사진이 박혀 있었다. 하지만, 실제 유엔본부는 저마다 모양과 높이가 다른 뉴욕의 마천루들과 어우러져 무척 아름다운 건물이다. 한강 유람선을 타본 외국인들은 두번 놀란다고 한다. 한강의 수려함에 탄성을 지르고, 천편일률적으로 늘어선 아파트 숲에 다시 놀란다고 한다. 서울 대부분의 아파트들이 한결 같이 성냥갑 모양인 탓이다.‘서울통계연보 2007년’에 따르면 서울의 아파트는 130만 7113채에 이른다. 디자인도 ‘붕어 빵’인 데다, 같은 단지에선 층수도 같다. 이러다 보니 서울의 스카이라인도 숨막힐 정도로 단조롭다. 서울시가 뒤늦게 그 심각성을 깨달은 것 같다. 내년 3월부터는 서울에서 같은 모양, 같은 층수의 아파트를 짓지 못하게 하겠단다. 이를 위해 서울시가 그제 ‘건축 심의 개선대책’을 마련했다고 한다. 다양한 층수에 새 디자인을 적용하지 않으면 아파트 신축을 규제하는 내용이 골자다. 살풍경하지 않은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겠다고 하니, 일단은 반길 일이다. 그러나 말만큼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과거 개발연대에 ‘불도저’ 시장들이 잠실의 뽕밭을 갈아 엎고 아파트촌을 조성할 때와는 환경 자체가 다른 까닭이다. 아파트 신축 가이드라인 설정과 집행과정에서 재산권 침해소지나 건축비 상승 등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할 것이다. 이밖에도 고려해야 할 사항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서울시와 오세훈 시장의 행정 역량이 이제 시험대에 올랐는지도 모르겠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주말탐방] 제주도의 별난 벌초문화

    [주말탐방] 제주도의 별난 벌초문화

    제주에서 조상묘의 벌초를 안하는 것은 ‘불효 중에 불효’로 친다. 객지에 나가 있는 사람들도 명절 제사에는 못 오더라도 벌초는 반드시 참가하는 것이 불문율처럼 전해진다. 제주에서는 외아들을 육지로 잘 보내지 않으려 하는 것도, 혈육이 끊긴 선친이 임종을 앞두고 ‘화장’을 해달라고 유언하는 것도 다 벌초 때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음력 8월 초하루가 되면 형제, 사촌 할 것없이 문중이 모여 조상의 묘를 찾아 반드시 벌초를 하는 것은 제주의 오랜 전통이다. 여기에 8촌 형제들까지 모여 증조와 고조부 등 4대조 묘까지 깨끗하게 손질한다. 이를 ‘모듬 벌초’라고 한다. 벌초하는 날이면 한라산 중산간 지역의 들녘 묘역에 벌초객들로 넘쳐난다. 평소에는 한가한 한라산 산간 도로가 밀려드는 벌초 차량으로 제주도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교통 체증이라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이때 조상 묘에서 벌초하는 자손들의 숫자로 가문의 세력을 나타내기도 한다. 추석때까지 벌초를 안한 묘소가 있으면 불효의 자손을 두었거나 조상의 대가 끈긴 묘라 해서 손가락질을 받는다.‘식께 안 헌건 놈이 모르곡 소분 안 한 건 놈이 안다.’는 제주 속담도 그렇게 생겨났다. 제사는 지내지 않아도 남이 모르지만, 벌초는 안하면 금방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이 속담은 제주 사람들이 벌초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보여 준다. 지난해 제주에서는 조상묘 벌초와 제사 등을 조건으로 큰아들(63)에게 재산을 물려준 80대 어머니가 아들이 이를 게을리한다며 재산을 되돌려 달라는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 있었다. 재판부는 “묘소 벌초와 조상 제사 봉행 등을 하지 않은 아들은 물려받은 재산을 다시 어머니에게 돌려 주라.”고 판결했다. 제주에서 조상 묘의 벌초가 갖는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이었다. 최주락 제주관광대 교수는 “제주의 특별한 벌초 풍습은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에서 기인하는 친·인척 중심의 혈족사회가 낳은 산물인 것 같다.”고 풀이했다. 음력 8월 초하루를 전후해 제주의 대부분 학교가 하루 ‘벌초 방학’을 한다. 이 날은 코흘리개 어린이들도 아버지의 손을 잡고 벌초 행렬에 따라 나선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어릴 때부터 조상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 주지시키고 장성해 객지에 나가 살더라도 반드시 조상 묘의 벌초는 해야 한다는 것을 교육시킨다. 대부분의 직장에서도 아무리 바빠도 벌초휴가만큼은 내준다. 공무원도 예외가 아니다. 수백명의 공무원이 한꺼번에 벌초휴가를 내기도 한다. 다른 지역 같으면 공무원이 개인 벌초 행사로 무더기로 자리를 비운다고 난리가 나겠지만 제주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친다. 제주도교육청 관계자는 “올해도 9월11일을 전후해 학교별로 자율적으로 벌초방학을 실시할 예정”이라면서 “자신의 뿌리를 돌아보고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벌초방학은 생생한 ‘효(孝)’의 현장 교육이라는 면에서 아주 의미있는 행사”라고 강조했다. 조상묘 벌초를 하지 않는 것을 ‘가장 큰 불효’로 여기는 탓에 벌초 때면 객지에 나가 살고 있는 제주 사람들이 벌초를 하기 위해 대거 고향을 찾는다. 일본에서도 제주 출신 교포들이 줄지어 제주를 찾는다. 벌초 귀향객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제주행 항공권 구하기가 힘들어지면 항공사들은 이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벌초특별기를 긴급 투입하기도 한다. 올해도 음력 8월 초하루를 전후해 제주행 항공기는 관광 비수기임에도 불구하고 예약이 거의 다된 상태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해마다 벌초 때가 되면 항공권을 구할 수 없느냐는 민원이 쏟아진다.”면서 “올해도 벌초 귀향객들의 추이를 봐가며 특별기 투입 등을 검토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119와 경찰도 ‘벌초주의보’를 발령하는 등 대대적인 벌초 지원에 나선다. 벌초객들에게 독버섯 식별법 등을 사전에 알리고 예초기 안전사고, 벌초후 음주운전 사전 예방활동을 벌인다. 한라산 산간 도로에는 교통 경찰을 배치, 벌초 차량의 소통을 돕기도 한다. 제주기상청도 벌초가 시작되는 음력 8월 초하루 전후의 날씨 예보에 각별한 신경을 쓴다. 제주시는 최근 클릭만 하면 공설묘지 조상 묘의 위치, 사진 등을 한 눈에 검색할 수 있는 묘지 정보시스템을 구축하기도 했다. 제주의 명당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장흥 마(馬)씨 강진파 입도조의 묘는 한라산 정상(1950m)에 가까운 해발 1600m에 있다. 장흥 마씨 후손들은 해마다 벌초때가 되면 어김없이 한라산 꼭대기까지 멀고도 먼 벌초길에 나선다. 묘지가 높다 보니 예초기는 엄두도 못내고 등산복 차림으로 낫을 한자루씩 들고 벌초에 나선다. 마희문(장흥 마씨 입도조)의 직계 4대손인 마원국(68·제주시)씨는 50여년 전부터 친척들과 함께 벌초를 다녔다고 한다. 묘소까지는 한라산 윗세오름 등산로를 따라 걸어서 무려 3∼4시간 걸린다. 벌초길 왕복 산행 7∼8시간에 벌초는 20분 정도면 끝난다. 마씨는 “자손들의 번창을 바라며 조부께서 이장을 하실 때 장정 7명을 동원, 비석과 돌하르방을 짊어 메고 이곳까지 올라 왔다.”고 전했다. 그는 “조상묘가 한라산 꼭대기에 있어 불편하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다.”면서 “오히려 즐거운 마음으로 1년에 한번씩 친척들이 모여 벌초 산행길에 오른다.”고 말했다. 조상묘 별초에 유별난 제주사람들에게도 작은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후손들이 벌초을 해야 하는 ‘매장’보다 ‘화장’을 선호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제주도가 올해 들어 만 20세 이상 성인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44.2%가 본인 사망시 장례 방법으로 ‘화장’을 선택했다.‘매장’은 17.8%로 상대적으로 적었다. 화장 선호 이유로는 ‘시대적 추세’(49.8%),‘장례절차 용이’(30.3%)에 이어 ‘벌초문제 때문’(16.3%)이라는 응답도 적지 않았다. 향후 기존 묘소 관리에 대해서는 ‘자식이 계속해 관리’(48%)와 ‘화장 후 납골당 안치’(47.6%)의 응답비율이 비슷했다. 제주도 관계자는 “전국적인 장례문화 변화 탓도 있지만 핵가족화로 벌초등 산소 관리의 어려움이 늘어나는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벌초 했수과(했습니까).”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이 한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곧 조상의 묘를 돌보는 벌초 행렬이 전국적에서 본격 시작된다. 독특한 ‘섬 문화’를 갖고 있는 제주지역에서는 어떤 성묘 문화를 이어오고 있을까. 제주에는 크게 보아 두가지 풍습이 있다. 하나는 ‘제사는 안 지내도 벌초는 꼭 한다.’는 유별난 벌초 문화다.‘벌초 방학’ ‘벌초 휴가’가 있을 정도다. 다른 하나는 신구간(신들이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이때 이사를 하면 집안에 액운이 없다며 절기상으로 대한 5일후부터 입춘 3일전까지 기간)에 이사를 하는 풍습이다. 따라서 추석을 앞둔 이맘 때부터는 제주사람들의 인사는 “벌초 했수과.”가 기본일 정도로 섬 전체가 벌초 열기로 들썩인다. 육지와는 사뭇 다른 제주의 특별한 벌초 풍습을 엿보았다.
  • (24) 에티오피아는 다민족 국가 ① 서로 다른 문화를 인정하는 사람들

    (24) 에티오피아는 다민족 국가 ① 서로 다른 문화를 인정하는 사람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이제 1년 앞으로 다가왔다. 베이징이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이 나던 때, 중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던 덕분에 대대적으로 여는 축하행사를 볼 수 있었다. 그때 천안문 광장에서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이 샴페인을 터뜨리는 것보다 더 볼 거리였던 건 바로 소수민족들의 축하공연이었다. 전체 인구를 약 13억으로 잡고 있는 중국은 대외적으로 자기 나라가 56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라고 소개를 한다. 이중 90% 이상이 한족(漢族)이고 나머지가 55개의 소수민족이다. 이 55개 소수민족에는 연변자치구의 조선족도 포함이 된다. 소수민족들은 저마다의 전통복색이 있고 그들만의 리듬과 춤이 있고, 또 신화를 간직하고 있다. 공연기획자가 특별하게 기획하지 않고 이들만 모아놓아도 56개의 서로 다른 퍼포먼스가 가능하다. 올림픽 개최지 결정을 축하하는 행사 말고도 다수의 국제행사 개막식을 중국에서 본 적이 있는데 이 소수민족들의 춤이 여지없이 등장했다. 늘 단일민족임을 자랑하는 한국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한 나라를 구성하는 민족이 다양하다면 장점이 많을까 단점이 많을까. 정치적으로는 통합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겠지만 국제화, 세계화를 외치는 오늘날에는 장점이 오히려 더 많을 것 같다. 색다른 피부, 다른 풍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늘 이웃에 두고 살았기 때문에 이들은 다른 문화에 대해 훨씬 개방적이다. 나는 이런데 저 사람은 왜 저러지, 가 아니라 나는 이렇고 저 사람은 저런 거야, 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중국이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라고 했을 때 우와, 이랬었는데 에티오피아는 서로 다른 종족이 무려 80개가 넘는다는 것 아닌가. 에티오피아의 소수민족들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종족 고유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 에티오피아는 대한민국의 5배 정도 되는 땅덩어리에 현재 약 7천7백여만 명이 살고 있다. 대표적인 민족은 오로모족, 암하라족, 티그레이족, 구라게족, 하라르족, 소말리족 등이다. 오로모족은 에티오피아의 남쪽지방(나자렛)과 현재의 케냐 지역에 사는 부족으로 전체 인구 중 가장 많은 비중(약 40%)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라틴어에서 차용한 오로모족의 문자(현지에서는 ‘오로미야’)를 사용하며, 오로미야 문화 보존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오로모족을 위해 오로미야로만 방송되는 라디오 프로그램도 있다. 암하라족은 에티오피아의 중심과 바하르 다르를 주 거주지로 삼았었는데 아디스 아바바(지도상으로 보면 대륙의 중심)가 수도가 되면서 세력을 확장해 그들이 사용하던 암하릭어는 에티오피아의 공용어가 되었다. 지금도 표준 암하릭어는 아디스 아바바가 아니라 바하르 다르 사람들이 쓰는 말이라고 한다. 암하라족은 전체 인구 비중으로 봤을 때 오로모족 다음(약 30%)으로 그 수가 많다. 현재 총리를 비롯해 정치적 실권을 잡고 있는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약 4~5%를 차지하고 있는 티그레이족이다. 그리고 전체 상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인구의 약 4%를 차지하고 있는 구라게족이다. 특히 구라게족은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민족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길거리에서 구두를 닦는 어린 꼬마나 차가 섰을 때 쏜살같이 뛰어가 화장지 꾸러미를 파는 청년들은 대부분 이 구라게족이다. 현지인들에게 왜 구라게족들 중에 부자가 많으냐고 물었더니 “구라게족들은 돈을 아끼면 돈이 쌓인다는 걸 알지만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생기면 바로 써서 가난하다”는 너무 당연한 답을 알려줬다. 남쪽에 사는 오모족의 경우 이마 오른쪽에 동전 크기의 패인 자국이 있어 쉽게 구분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에서 생긴 겉모습으로 한눈에 어느 민족인지 구분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티그레이족은 이마에서 눈으로 내려오는 가장 자리에 칼로 베인 자국이 있다. 지금의 멜레스 제나위 총리나 외교부장관도 똑 같은 자리에 제법 굵직한 상처를 가지고 있다. 이 둘은 티그레이족 출신인 것이다. 그러나 티그레이족 전부가 이런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구라게족의 경우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데 나이 많은 사람들은 눈의 쌍꺼풀 자리 정도에 가는 상처를 가지고 있다. TV 오지탐험에 자주 등장하는, 혀에 접시 같은 걸 끼운 사람들을 기억하는가. 에티오피아의 소수민족 중의 하나인 물씨족이다. 치아를 네개나 뽑아내고 그 공간에 이 쇠로 된 접시를 끼워 넣는데 이곳에서는 이게 미(美)의 기준이라니 어쩌겠는가. 남부에 약 5천명 정도가 살고 있다.       <윤오순>
  • 中 “차 번호판에 ‘4’자 못쓴다” 방침에 시끌

    中 “차 번호판에 ‘4’자 못쓴다” 방침에 시끌

    “차량번호판에서 재수없는 ‘4’자는 모두 지워라.” 하이난(海南)성의 항구도시 하이커우(海口)시가 최근 “자동차 번호판의 ‘4’자를 모두 삭제하겠다.”고 밝혀 시민들과 네티즌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다. 하이커우시는 “4자를 불길하게 여기는 민간 풍습과 국민의 편의를 위한 대책”이라며 “번호판의 숫자를 정할 수 있는 기회는 한 사람 당 10번씩 주어지며 ‘4’자가 들어간 숫자는 등록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 같은 소식을 보도한 포털사이트 쭝궈광보왕(中国广播网·www.cnr.cn)에는 격렬한 찬반의 글들이 쇄도했다. 한 시민은 “4자에 대한 잘못된 상식을 정부가 나서서 전파하고 있다.” 며 “중국 내 자동차 사용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추세에서 4라는 숫자를 못쓰게 하는 것은 결국 비효율적 대책이 될 것” 이라고 비판했다. 네티즌 ‘222.244.53’은 “4계절등 4자가 들어가도 행운인 단어들이 있다. 불필요한 법개정이다.”, ‘218.6.192’는 “4자를 못쓰게 한다면 신분증에도 4가 없어야 하고 초등학교와 대학교에도 4학년 과정이 없어야 한다.” 며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반면 ‘222.84.241’은 “불길한 숫자를 붙이고 달리는 것보다 잠시 귀찮은 것이 훨씬 낫다.”, ‘219.128.93’은 “중국의 문화를 반영한 중국만의 독특한 개성이다.”, ‘60.166.76’은 “시당국이 시민의 세세한 면까지 신경 써주고 있다.”는 긍정적인 반응도 있었다. 중국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뜻하는 한자 ‘스(死)’와 발음이 같은 숫자 ‘4’를 불길하게 여기는 풍습이 있다. 또 ‘돈을 벌다’를 뜻하는 한자 ‘파(发)’와 발음이 비슷한 숫자 ‘8’을 신성하게 여겨 자동차번호나 전화번호에 넣기 위해서 큰 돈을 주고 번호를 거래하기도 한다.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오지로 떠나는 시간여행] (25) 제주시 추자면 횡간도

    [오지로 떠나는 시간여행] (25) 제주시 추자면 횡간도

    섬의 모습이 마치 비껴서 길게 누워 있다 해서 ‘빗갱이’라고도 한다. 제주도 북쪽 끝머리에 위치한 횡간도(橫干島). 육지와 제주의 중간 거점이며 동서로 길게 뻗어 추자도로 불어대는 엄동설한의 북풍을 막아 주는 역할을 한단다. 목포에서 하루 한번 오가는 쾌속선을 탔다. 뱃길 곳곳에 들쑥날쑥 무인도가 나타난다. 하지만 자욱한 물안개 탓에 무려 38개나 된다는 무인도의 경관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추자도 선착장을 거쳐 행정선으로 횡간도에 도착하자 배에서 사귄 전옥분(78) 할머니가 마을까지 동행을 하겠단다. “본래 무인도였던 이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지는 한 200년 됐지라.” 할머니는 섬의 유래를 꽤 상세히 알고 있었다. ●달성서씨 가문 200년전 개척 조선시대 철종 때 달성서씨(達城徐氏)가 들어와 정착한 것이 시초란다. 마을까지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심하고 바위뿐이어서 행정선에 실려온 생필품을 운반하기 위한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있다. 마을 집들은 대부분 키보다 높은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바람이 심한 섬에서 바람막이로 만든 것인데 구불구불 이어진 것이 마치 영화 ‘천국의 아이들’에서 애들이 뛰어 다녔던 골목길을 연상시킨다. 담장에 붙어서 소담한 생명의 미소를 함께 나누는 담쟁이넝쿨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앞을 지나서자 마을에 하나뿐인 공동 우물가에 동네 아낙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다. 주민이라야 고작 15명뿐인 마을에서 식수로 쓰는 우물이다. 하늘의 허락을 얻어야 비로소 생명수를 취할 수 있다고 했던가. 주민들에겐 고맙다 못해 함부로 훼손하기 힘든 영물임에 틀림없다. 척박한 섬에서 물은 생명줄과도 같다. 생명줄을 타고 올라오는 두레박은 아낙들의 수다를 함께 퍼담는 듯 연방 곤두박질을 한다. 내친 김에 정상까지 가보기로 했다. 대문도 문패도 없는 집들을 지나 섬에서 제일 높은 곳에 올랐다. 여기서 나고 자랐다는 김금순(77) 할머니. “예전에 학교 자리였구먼유.” ‘추자국민학교 횡간분교’라는 녹슨 입간판이 폐건물에 걸려 있다. “우리 아그들도 모두 여서 배웠당깨.” 한때는 30명이 넘는 학생들로 북쩍거리고 교사도 3명이나 있었단다. ●이웃 추자도는 ‘닭´, 횡간도는 ‘지네´ 서너평은 됨 직한 교실엔 아직도 몇 개의 책걸상이 남아 있다. 양호실로 쓰였을 작은 방엔 반창고와 약병, 체온계가 아직 그대로 놓여 있다. 정상에서 거침없이 내려다 보이는 아득한 바다. 가늠하기 어려운 거리를 재다 보니 수평선 멀리 제주의 관문인 추자항이 아물거린다. 풍수지리학상 횡간도는 ‘지네’이고 추자도는 ‘닭’으로 비유된단다. 그런 연유로 두 마을 사람들끼리 혼인을 하면 여자가 청상과부가 된다는 속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섬은 행정구역이 전라도와 제주도로 몇 번씩 바뀌었다. 그래서인지 사투리와 풍습은 전라도와 흡사하다. 농사도 지을 수 없는 고령의 노인만 살아서인지 눈에 띄는 밭은 모두 버려져 있다. 황돔, 흑돔, 농어 등 어종이 풍부하여 연간 100여명의 낚시객이 횡간마을을 찾아온다. 배라곤 보트 2척밖에 없어서 주민들은 먼 바다까지는 나갈 엄두를 못낸다. 근해에서 잡고기와 해조류 등을 채취하는 것이 유일한 수입원이다. ●50년 장기집권(?) 이강설 이장 적막한 섬에 어둠이 밀려온다. 석양 속에서 아직도 물질을 하고 있는 해녀. 섬에서 맞이하는 초저녁 밤은 퍽이나 낭만적이다. 하루 몇 시간 발전기를 돌려 시간제로 불을 밝히는 탓에 적막하지만 멀리 고깃배들의 불빛과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들을 감상하는 것은 도시에서는 상상도 못할 체험이다. 모깃불을 피우며 야참을 내오는 이강설(72)씨는 이장일을 50년 동안 했단다. “제주 사는 아들놈이 모시고 살탱게 섬에서 나오라고 하지유.” 자식들의 권유에도 아랑곳 않고 부인과 둘만이 섬집을 지키는 이유가 있다. “부모님 산소도 돌봐야 허고….” 200년 동안 섬사람들은 평화와 생명의 고귀함을 품고 느끼며 살아 왔다. 횡간도 사람들이 지켜온 느린 시간은 이제 더 이상 ‘과거’가 아니다. 빠름에 지치고 공해에 찌든 사람들이 꿈꾸는 ‘미래’다. 사람 냄새가 그리운 절해고도(絶海孤島)이지만 인간의 여유만큼은 풍족하다. 인심 좋은 할아버지 얼굴에 배어 있는 넉넉한 웃음. 갓 잡은 소라와 함께 건네주는 막걸리 한잔. 고향의 향기가 스며나온다. 글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32) 유일의 ‘ㅡ’자형 영천 자천교회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32) 유일의 ‘ㅡ’자형 영천 자천교회

    경북 영천시의 보현산 자락에 자리잡은 한옥형태의 자그마한 자천교회(화북면 자천3리·경상북도지방문화재 문화재자료 452호). 남아 있는 유일의 ‘一’자형 교회로 교회건축사에선 빼놓을 수 없는 독특한 예배 공간을 갖추고 있다. 건축의 독특함에 얹어 영남지역 교회사에서도 중요한 교회. 교인이 고작 30명 남짓하지만 1903년 건립된 뒤 이 지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했던 신앙 요람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경동노회에 소속되어 한때 주일예배 때 300여명이 예배당에 모일 만큼 교세가 컸던 교회. 하지만 6·25전쟁 직후 인근의 상송교회가 분가한 데 이어 입석교회가 독립했고 1970년대 목회자의 신앙 문제로 화북교회(합동)로 또 한 차례 갈라진 상처를 갖고 있다. 오랜 풍상 속에 교세는 형편없이 사그라졌지만 경북 동부와 동북지방 복음의 씨앗을 싹틔운 신앙 요람으로 끊임없이 회자된다. ■ 신점균 자천교회 담임목사 “성장과 발전도 필요하지만 초심을 살린 신앙열정을 키워나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지난 2001년 자천교회에 부임해 6년째 신자들의 예배와 신앙을 묵묵히 이끌고 있는 신점균(52) 담임목사. 교인 30명의 작은 교회지만, 초기의 변함없는 모습과 믿음을 간직한 신앙 요람을 지키는 것에 매우 만족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지은 지 100년을 넘긴 교회가 400여개 있지만 옛 모습을 온전하게 지키고 있는 교회는 열 손가락을 꼽을 정도입니다. 이 교회들은 대부분 교세가 보잘것없이 쇠락했지요. 하지만 이 교회들이야말로 초기 교회의 신앙을 되살릴 수 있는 중추입니다.” “1907년 한국사회와 교회에 큰 변혁을 몰고왔던 평양대부흥운동의 큰 뜻은 회개”라고 거듭 강조하는 신 목사. 그는 대형화, 물량화로 치닫는 교회들은 선교에 앞서 개인적인 회개를 생각해야 하며 그 첨병역할을 ‘때묻지 않은 초기 교회’들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인들이 적어 교회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소외감을 느끼지만 반면에 자부심이 큽니다. 자천교회 같은 초기의 작은 교회들이 순수한 신앙을 토대로 교류한다면 기독교 문화와 영성 차원에서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100년을 견뎌낸 기와지붕 자천교회의 역사는 미국인 선교사와 서당 훈장의 우연한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주인공은 바로 ‘영남지방의 어머니교회’라는 부산 초량교회를 세운 미국 북장로교 소속 배위량(W.M.Baird) 선교사의 처남인 안의와(J.E.Adams) 목사와, 경주의 작은 마을 선비 출신인 자천교회 설립자 권헌중 장로. 배위량 선교사의 뒤를 이어 영남지역 선교 책임을 맡아 대구에 들어온 안의와 목사는 경북 동부와 동북지역 선교여행에 나섰다고 한다. 같은 시기 경주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서당 훈장 권헌중은 일제의 착취와 압박을 피해 고향을 떠나 대구로 가던 길이었다. 각자 다른 목적으로 길을 떠났던 두 사람이 만난 게 1897년 지금의 영천시와 청송군의 경계지인 노귀재에서다. 서당 훈장의 식견 때문이었을까. 권헌중은 상당히 열린 의식을 갖고 있었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안의와 목사에게 감화를 받아 대구로의 이사를 포기한 채 이삿짐을 내려놓고 영천 자천리에 초가삼간을 구입해 세운 게 자천교회의 모태이다. 초가 사랑방을 예배당겸 서당으로 써 낮에는 한문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성경을 공부했는데 당시 교인이라야 서당에 다니는 문동들과 권헌중을 따라온 노비와 머슴이 전부였다. 앞장서 상투를 자르고 데리고 있던 노비들의 문서를 불태워 자유의 몸으로 해방시키는 등 개방적이었던 권헌중에게 감화된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교회 건물을 키워야 했다.1903년 기와지붕을 얹은 목조 건물로 다시 세웠는데 지금의 자천교회는 당시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당시 다른 교회와 마찬가지로 주민들의 반대에 부닥쳐 교회를 세우기까지 여간 애를 먹은 게 아니었다. 결국 주민들에게 면사무소를 지어주고서야 교회를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기와지붕을 인 목조 예배당에 들어서면 일(一)자형 공간이 완연하다. 동네 목수들이 천장이며 보, 기둥들을 모두 만들었다고 하는데 울퉁불퉁한 목재들이 아주 투박하게 놓이고 이어졌지만 모양새와는 다르게 아주 탄탄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아치형 공간을 만들어 선교사석과 설교자석을 두고 바로 앞에 강대를 놓았는데 남녀가 따로 앉아 예배를 보도록 신자석 가운데 칸막이를 쳤다. 남녀 신자석을 갈랐던 초기 교회들에서 대부분 휘장으로 공간을 구분한 것과는 달리 아예 나무 칸막이를 만들어놓은 게 특이하다. 물론 남녀 신자들은 서로를 볼 수 없고 설교자만 남녀 신자들을 모두 볼 수 있도록 한 장치이다. 일제시대 철거된 채 예배가 진행되어 오다가 지난 2005년 복원공사를 거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출입문도 왼쪽은 남자, 오른쪽은 여자 신도가 따로따로 드나들도록 각각 냈는데 여자 신도 출입문을 2개나 만든 것은 당시 여 신도들이 더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 신자석 뒤쪽에 두 개의 방을 낸 것도 이 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 남녀 신자들이 따로따로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도 하도록 방을 낸 것인데 역시 일제시대 때 없어졌던 것을 2005년 발굴조사를 거쳐 복원해 놓았다. 교회 안에서 ‘남녀칠세부동석’의 풍습을 살리면서 신앙을 이어가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지금도 간혹 고령의 신자들은 부부가 함께 와서도 예배를 볼 때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앉는다고 한다. 예배당 지붕을 넓고 평평한 ‘우진각’ 형태로 얹은 것도 특이하다.‘우진각’ 지붕은 전통 한옥의 대문에 흔하지만 독립 건물에 쓰여진 것은 흔치 않다. 건물 네 면에 지붕면을 만들어 귀마루(내림마루)가 용마루에서 만나도록 한 것인데 일(一)자형 예배공간을 넓게 쓰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 같다. 영천지역은 6·25전쟁 중 격전지로 유명한 곳. 모든 집들이 포화를 맞아 폐허가 되다시피했는데 교인들이 평평한 교회 지붕에 올라 흰 횟가루로 십자가를 그리고 ‘CHURCH(교회)’라 표시해 폭격을 피했다고 한다. 당시 영천 화북면 지역에선 이 자천교회와 교회 바로 옆 한옥만 폭격을 받지 않은 채 지금까지 남아 있다. 예배당 건물과 골격은 옛 모습 그대로지만 초기 교회에 있었던 성물은 신자석 뒤쪽 방 한 귀퉁이에 보존해 놓은 작은 강대상이 전부.1930년대 영천군의 ‘세번째 부자’로 통했던 자천우체국장 김영대의 어머니가 헌금한 당시 돈 70원으로 일본에서 ‘야마하’ 대형 풍금을 들여와 찬송 반주에 썼다지만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당시 교인들은 이 풍금에 맞춰 ‘삼천리반도 금수강산’과 ‘만왕의 왕’이란 찬송을 즐겨 불렀다고 한다. 그 때만 하더라도 찬송가가 보급되지 않아 한지에 찬송을 붓글씨로 크게 써 흑판에 걸어놓고 불렀다. 마을에 찬송이 울려 퍼지자 ‘독립운동가들이 부르는 불온한 노래’로 여긴 일경이 금지곡으로 막아 이후 해방 때까지 불리지 못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서울의 한 신자가 헌금을 해 종과 종각을 지어놓았지만 일제의 강출로 모두 철거되었다. 노귀재에 우연히 뿌려진 한 알의 ‘복음씨앗’이 어려움 속에서 신앙의 꽃을 활짝 피워냈던 자천교회.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광풍에 휩싸여 교적부며 회의록 등 초기 교회의 모든 자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교회사에선 선 굵은 복음의 요람지로 우뚝 서 있다. 그렇게 이어진 신앙내력 때문일까.1930년대 교회에 풍금을 들여놓게 한 천석꾼 김영대의 아들(2007년 작고)이 2006년 교회 앞 한옥 4개동과 대지를 교회에 증여하는 역사가 생겼다.6·25전쟁 중 교회 앞에 있어 폭격을 피할 수 있었던 바로 그 한옥이다. 교회측으로선 여간 반갑고 은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 옆 텃밭을 더 매입해 예배당을 중심으로 한 문화재 관람과 수련장, 한옥체험의 장을 묶는 성역화 사업을 차분하게 진행하고 있다. kim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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