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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칩거 끝내고 다시 풍수 연구 나선 최창조 前서울대 교수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칩거 끝내고 다시 풍수 연구 나선 최창조 前서울대 교수

    “올해는 ‘호랑이 똥침’을 꼭 줘야 합니다.” 한 풍수의 대가가 간절하게 내뱉는 말이다. 웅비하는 한반도를 소망하는 마음이 담겼다. 그렇다면 ‘똥침’의 위치는 어디일까? 원래 ‘풍수가’는 지관(地官) 또는 지사(地師)라고 하며 하늘과 땅의 이치를 통달한 사람을 뜻한다. 따라서 예부터 나라의 도읍을 정하는 일이나 집안 가족의 묏자리와 집터를 정할 때 유명한 풍수가의 자문을 자연스럽게 여겼다.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정치 또는 사업에 야망을 둔 사람들은 풍수이론에 근거해 조상의 묏자리를 옮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관계인사들 또한 진급을 앞두고 이사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수맥이 밑으로 흐르는 곳에 거처하면 온갖 병이 생긴다는 이론이 만만치 않게 제기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명산이나 좋은 묘터, 명당으로 소문난 터는 여전히 높은 값에 거래된다. 이처럼 풍수는 첨단문명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우리 일상과 상당히 밀접해 있다. 삶이란 논리보다는 이해와 느낌으로 살아간다는 이치에서다. 최창조(56) 전 서울대교수. 풍수학자이면서 우리나라의 풍수대가로 잘 알려져 있다.‘한국의 풍수지리’ 등 관련 단행본만 10여권 냈다. 행정수도 이전 논란때 ‘천도불가론 아홉가지 이유’를 발표, 주목을 받았다.1992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시절 “풍수도 학문이라고 가르치냐.”라는 비아냥이 나오자 타고난 결백성으로 그냥 문을 박차고 홀가분하게 나와버렸다. 이후 칩거하다시피 지내다 얼마전 ‘풍수잡설’‘닭이 봉황되다’라는 책을 발간하는 등 풍수연구에 다시 나섰다. 한 단계 더 득도한 스님처럼. 설날 직전, 서울 신도림역 인근에 위치한 최씨 자택(아파트)을 찾았다. 근황도 궁금했고 또 풍수학적으로 우리나라는 올해 어떤 형국인지 묻고 싶어서였다. 최씨는 아파트단지 입구까지 마중나와 해맑은 소년처럼 환하게 웃으며 반긴다. “선생님, 언제 이사 오셨죠?” “봉천동에서 살다 온 지 꼭 2년 됐습니다. 처음에는 경기도 과천을 생각했으나 가격을 맞추다 보니 여길 선택했지요.” “그렇다면 풍수 고수가 정한 자리여서 당연히 명당이겠네요?” “명당은 마음속에 있지요. 수맥만 아니라면, 사랑해주면 자연 명당이 됩니다. 조용하고 아주 살기 좋아요.” 바로 옆에 대형 할인점 공사 현장이 눈에 들어온다. 최씨는 “저것 덕분에 아파트값이 올라가 주민들이 좋아하니 아마 명당자리인 것 같아요.”라고 하면서 빙그레 웃는다. “아파트에도 풍수가 있나요?” “묘터나 집터잡기에는 (풍수가)일상사가 됐지요. 상식선을 벗어나지 않으면 됩니다. 수맥을 제외한 사랑과 믿음이 가는 곳이면 되지요.” 또한 남향이면서 햇볕이 들고 주위에 산이 있으면 아파트로서는 좋은 곳이라고 했다. 아울러 모든 풍수가 현장 위주여야 하듯 집을 살 때에도 직접 발품을 팔아 주위를 꼼꼼하게 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귀띔해 준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올해 우리나라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 국토는 호랑이가 잔뜩 웅크리고만 있어요. 이놈을 깨워야 합니다. 똥침을 주어 깜짝 놀라게 해야지요. 그래야 웅비합니다.” “똥침의 위치는 어딘가요?” “영일만쪽이지요. 그 일대에서 남쪽까지는 풍수학적으로 금계포란(金鷄包卵)형입니다.” “알을 품은 금닭인가요?“ “예, 맞습니다. 그 아래로 바다건너 제주도가 바로 금란(金卵), 즉 금닭의 알이지요.” 최씨의 이론을 해석하면 그동안 영남일대에 여러 인물들이 나왔지만 이치에 맞는 똥침을 제대로 주지 못해 아직까지 웅크린 형국이라는 것. 따라서 올해 한반도가 새로운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는 설명이다. 또한 제주도는 비록 똥침과는 거리가 멀지만 ‘금닭의 알’로서 가치가 무궁무진하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최씨는 “제주도는 정말 살기좋은 자연의 혜택을 받았지요. 특별자치도가 되면 타도 사람들은 아마 입도료를 내야 할 걸요.”하면서 웃는다. 화제를 돌렸다. 정재계 인사들과 흥미로운 일화에 대해 슬쩍 물었다. 정계쪽에는 별로 관심없지만 일부 재계 인사와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다음은 최씨가 들려주는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과의 일화. 92년 여름 최씨가 서울대 교수직을 그만둔 직후였다. 최 회장 측근에서 한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최씨는 ‘산소 자리나 봐달라는 것이겠지.’ 하면서 거절했다. 며칠 후 손길승 SK그룹 경영기획실장실 사장과 김수길 부사장이 서울 봉천동 집으로 불쑥 찾아왔다. 자연스럽게 술자리가 이루어졌다. 최씨가 술 몇잔을 들고 나서 “최 회장이 왜 나를 보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손 사장은 “우리는 사업하는 사람으로 물건을 파는 입장이다. 알다시피 우리나라 사람은 키도 작고 영어도 잘 못한다. 때문에 우리의 우수한 것을 돕겠다는 게 최 회장의 뜻이다.”고 대답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최씨가 “그렇다면 명분을 주시오.”라고 했다. 손 사장은 이에 “좋은 생각이 있다. 한달에 한번 사장단 회의가 있으니 그때 강연을 하면 되지 않겠소.”라며 거듭 제안했다. 결국 최씨는 얼마후 SK그룹 사장단 회의장에서 ‘풍수일반론’을 강의했고 최 회장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됐다. 이 자리에서 최 회장은 “나는 풍수를 안 믿는다. 하지만 그냥 순수하게 돕고 싶다.”는 말로 최씨를 설득했다. 그래서 한달 300만원을 받기로 하고 1년 동안 연구계획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후 충북 보은 등 지방에 칩거허면서 풍수관련 연구를 하게 된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청와대와도 인연이 있다. 하루는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불러 청와대에 들어갔다. 관계자는 북악산 요새와 청와대 경내의 오래된 정자를 치워도 되느냐고 물었다. 최씨는 “풍수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문화적 가치는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이어 침식된 산, 양쪽으로 노출된 암반, 파인 계곡 등의 지세(地勢)를 보아 청와대는 원래 사람이 살던 땅은 아니었다고 귀띔했다. 이로부터 얼마후 경내의 일본식 건물이 철거되고 요새화 작업으로 파인 곳곳을 깨끗이 메웠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최씨는 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집터와 관련된 소문에 휘말리기도 했다. 서울대 교수직을 그만둔 직후였다. 대통령 관저가 북악산의 기맥을 압박하고 있어 좋지 않다는 주장을 해온 최씨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자택은 풍수학상 좋지만 노 대통령의 자택은 그렇지 않다.”고 말해 괘씸죄로 서울대 교수직에서 잘렸다는 것. 이에 대해 최씨는 “그런 얘기를 한 기억이 없는데 일본인 노자키 미쓰히코(오사카시립대 교수)가 쓴 ‘한국의 풍수사들’(94년 출간)이란 책에서 우연히 접해 알게 됐을 뿐”이라고 했다. 최씨는 평소 북악산이 주산(主山)이 아니기 때문에 독불장군형이라고 주장해 왔다. 좌로 인왕산, 우로 둔덕이 둘러치고 전방으로만 확 트여 있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대통령으로서는 자연스럽게 독선과 자만감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아울러 2004년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 풍수학적으로 불가한 여덟가지 이유를 내놓는 등 중대 사안 때마다 이래저래 자의반 타의반 엮여져 왔다. 서울 출생인 그가 풍수와 인연을 맺은 것은 경기고 재학 시절. 우연히 망우리 공동묘지에 찾아가면서였다. 시인도 있고 독립투사도 있으며 정치범으로 사형당한 사람의 무덤이 있는 그곳에 가면 왠지 평등을 느꼈고 평정심을 얻었다. 이때 한 중년 사내를 만나 풍수를 배우면서 최면처럼 빠져들었다. 그래서 서울대 지리학과에 진학했고 교수시절에도 항상 현장 위주의 풍수학을 강조해 왔다. 요즘 건강을 다시 찾은 덕분에 관악산 등 주변 산을 찾아 땅과의 대화를 나누는 재미를 만끽한다. “이제는 땅을 보면 사람처럼 여겨집니다. 전에는 경험과 이론을 동원해 땅을 해석하려 했지만 지금은 만나는 순간 어떤 느낌을 갖지요. 땅을 사랑하려면 정을 주어야 합니다.” 주말매거진WE팀장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50년 서울 출생 ▲68년 경기고 졸업 ▲73년 서울대 지리학과 졸업, 동대학 석사(91년) ▲77년 경북대 지리학 강사 ▲79년 전남대 지리교육과 강사, 국토개발연구원 주임연구원 ▲81∼88년 전북대 지리교육과 교수 ▲88∼91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92년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 삼성생명 자문위원 ▲주요 저서 풍수에 대한 지리학적 해석(78년), 한국의 풍수사상(84년), 풍수사상에서 본 통일한반도의 수도입지선정(89년), 터잡기의 예술(92년), 한국의 풍수지리(93년), 땅의 눈물 땅의 희망(2000년), 풍수잡설(2005년) 등 15권.
  • 과메기 고장 호미곶 포항

    과메기 고장 호미곶 포항

    포항과 구룡포는 동해안 중에서도 가장 먼저 해돋이를 관찰할 수 있는 곳이다. 파란 하늘과 출렁이는 쪽빛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겨울 바다를 보고 있노라니 세상 시름이 씻은 듯 사라지고 제철을 맞은 과메기의 고소함에 입 또한 즐겁다. 주머니가 가볍다고 망설일 필요없다. 포항과 구룡포의 파란 바다는 세상 모든 이의 것이며 과메기 또한 1만원 내외로 ‘딱’ 우리 수준이다. 또한 미리 예약만 하면 무료인 포스코 역사박물관, 등대박물관 등 아이들의 산교육장으로도 손색이 없는 곳이 포항이다. 자, 이 겨울에는 대구~포항간 고속도로 개통으로 더욱 가까워진 포항으로 나들이하면 어떨까. 글 포항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겨울 호미곶 포항 나들이 “과메기 하면 구룡포 과메기지요. 한번 먹어보이소.”라며 초장을 듬뿍 찍어 내미는 마음씨 좋은 할머니,“불포화 지방산과 단백질이 많고 숙취해소에 그만입니다. 소주 한 잔과 같이 먹어도 술이 취하지 않아요.”라는 김승식(45·대구 서구)씨. 요즘 고소하고 쫀득쫀득한 맛이 끝내주는 과메기가 한창이다. 마른 김에 파, 배추를 놓고 초장을 듬뿍 찍은 과메기 한점 올리면 그 맛이야 어찌 말로 표현하겠는가. 여기에 소주 한잔과 맘에 맞는 사람들이 있다면 무조건 ‘고’다. # 겨울의 진객, 과메기 과메기의 고향이라는 경북 포항 구룡포 바닷가 양지바른 곳이면 어김없이 과메기가 걸려 있다. 구룡포에서 처할머니의 대를 이어 50년째 과메기 덕장을 운영하는 일출과메기(054-284-7555)의 장영수(53)사장은 “예전에는 청어를 꼰 새끼에 끼워 부엌의 살창에 걸어 두었다가 밥을 지을 때 솔가지의 연기가 빠져 나가는 살창에 걸어 두면 외풍으로 자연스럽게 얼었다 녹았다 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며 먹었다.”면서 “1960년대 이후엔 포항 앞바다에서 청어가 잡히지 않아 꽁치를 대신 쓴다.”고 한다. 또한 부엌의 살창이 아니라 해풍이 잘 드는 바닷가에서 과메기 말리는 틀인 ‘대차’에 걸어 얼렸다가 말린다. 요즘은 말리는 방식에 따라 ‘찌거리’와 ‘역거리’로 부른다. 역거리는 꽁치를 통째로 말리는 것을 일컫고, 배를 갈라 뼈와 내장을 추려내고 말리는 것은 찌거리라 부른다. 요즘은 먹기가 편한 찌거리가 주를 이룬다. 과메기는 자연에 노출된 상태이기 때문에 위생이 무척 중요하다. 도로 옆에는 차가 뿜어내는 매연과 먼지때문에 별로 좋지않다. 그래서 일출과메기 덕장은 야트막한 야산에 구룡포가 내다보이는 공기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솔향이 나는 맛난 과메기를 만들기 위해 죽염과 솔잎액 엑기스를 뿌려 비린 맛을 없고 예전 맛이 살아 있어 인기란다. 또 과메기를 맛있게 먹으려면 덕장에서 주문해서 먹는 것이 가격도 싸고 좋다. 보통 3일 이내에 과메기를 먹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는데 보통 음식점에서는 유통기한을 지키지 않아 쫄깃하고 고소한 맛을 느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일출과메기로 전화하면 택배로 다음날이면 과메기를 받아 볼 수 있다. 가격도 싸다. 찌거리는 20마리 기준으로 8000원선이다. 또 포항시내 웬만한 음식점에선 과메기를 내놓고 있다. 그 중에서도 토박이들은 옛 삼성생명 자리, 남빈동 하나은행 뒷골목의 해구식당(054-247-5801)을 최고로 친다. 주인 지영자씨가 31년 동안 꽁치 과메기만 팔아 왔다.“아들이 죽천쪽에서 식당에 쓸만 큼만 과메기를 말리고 저와 동생이 주방을 담당하고 있으니 다른 식당들 비해 음식에 정성을 쏟는 것은 당연지사지요. 그래서 손님들이 많이 찾는 것 같아요.” 해구식당으로 전화주문을 하면 초장과 야채, 과메기를 바로 먹을 수 있게 포장해 신속하게 택배로 보내준다.1만 3000원. 이밖에 동국대병원 맞은편의 ‘다락방’(054-283-1915)과 그 인근에 소문난 ‘막창 과메기’(054-275-6410)도 유명하다. # 이것도 맛보세요. 포항에선 물회와 고래고기도 유명하다. 물회는 예전부터 포항 앞바다에서 고기가 너무 많이 올라와 뱃사람들이 젓가락질 할 시간이 없어 고추장에 비벼 먹던 것에서 유래됐다. 포항시청옆 선린병원 건너편에 있는 오대양물회식당(054-244-7164)이 맛있다. 이곳 물회는 다른 지방과 다르다. 신선한 광어나 도다리 등 생선과 야채를 고추장에 비빈 다음 기호에 맞게 물을 넣고 먹는다.“이렇게 해야 생선에 양념이 맛있게 배어 진짜 물회의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라고 사장 박정출(42)씨가 강조한다. 커다란 물회 한 그릇, 매운탕, 밥식혜 등 간단한 밑반찬과 함께 나오는 물회밥이 1만 1000원. 또 고속버스터미널 후문쪽의 ‘코리아물회’(054-274-0574)와 죽도시장 가는 길목의 ‘새포항물회’(054-241-2087)도 들를 만한 곳이다. 고래고기는 포항지역에서만 먹을 수 있는 별미지만 처음 먹는 사람들은 고래 특유의 향 때문에 좀 거북스럽다. 죽도시장 안쪽의 ‘할매고래집’(054-241-6283)과 옆집의 ‘왕고래집’(054-247-2552)은 고래육회와 수육이 유명하다. # 서울에선 여기가 맛있어요 서울 수서구 일원동 먹자골목(삼성병원 맞은편)에 옥이 이모(02-459-9339)는 제대로 된 과메기를 먹을 수 있는 곳. 주인의 고향이 구룡포여서 친척들이 보내주는 질 좋은 과메기를 사용한다. 또한 포항산 돌문어는 입에서 살살녹는 맛이 그만이다. 돌에 붙어사는 돌문어는 포항 구룡포앞 20㎞정도의 청정 해역에서만 잡을 수 있는 구룡포의 특산물. 서울 광교의 조흥은행 본점 뒷골목에 있는 ‘광교과메기’(02-720-6075)도 유명하다.1992년부터 단 한차례도 메뉴판에 손을 대지 않아 가격이 그대로인 집이다. 과메기를 비롯 생굴, 고갈비가 5000원. 고래고기 2만원이다. 강남구 역삼동의 ‘고래불’(02-556-3677), 충무로 중구청 부근에 ‘영덕회식당’(02-2267-0942)도 맛있다. ■ 지친발길 적셔주는 하얀포말…떠도는 일상 정박시키는 항구 ‘포항’이 여행지로 각광을 받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얼핏 호미곶의 해맞이 광장만이 유명하지만 구석구석 살펴보면 볼 것도 먹을 것도 많은 곳이 포항이다. # 겨울 바다에서 세상 시름을 잊고 포항에서 구룡포로 향하는 925번 국도에 들어서면 세상 시름이 잠시 잊혀진다. 굽이굽이 돌아서서 옆을 보면 파란 얼굴을 내밀며 끝없이 따라오는 겨울 하늘, 낯선 이방인의 방문에 화가 나서일까 거친 숨을 뱉어내듯 끝없이 출렁이는 파도, 그 위를 맴도는 한 무리의 갈매기들. 감성이 메말라 버린 40대 아저씨의 입에서도 ‘아∼ 아름답다.’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2차선 국도의 옆에 차를 잠시 세웠다. 그러고는 차가운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가슴이 시원해진다. 다섯시간이 넘는 운전으로 인한 피로가 한꺼번에 싹 날아간다. 무섭게 밀려오는 파도는 끝내 하얀 거품을 이루며 사라지고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이 한적한 마을에는 어김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가는 인생들이 있었다. 다만 도시에 사는 사람에겐 너무나 낯선 풍경일 뿐. 추위는 잊혀진 지 오래다. 그냥 이대로가 좋다고나 할까. 바다와 멀어졌다가는 다시 만나고,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수차례 반복하며 한 시간여 달리자 호미곶 해맞이 공원이 나온다. 우리나라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가 7번 국도였지만 지금은 공사로 인해 예전의 아름다운 맛이 없어져 아쉬웠는데 포항에서 구룡포로 향하는 925번 도로야말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해안 드라이브 코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우리나라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뜨는 곳 호미곶(虎尾串)이란 조선의 풍수지리학자 남사고(南師古)가 쓴 ‘동해산수비록’에서 한반도는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모양으로 백두산은 코, 이곳을 꼬리에 해당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바로 이곳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해가 뜬다고 하여 항상 1월1일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또한 ‘상생의 손’이라는 8m가 넘는 거대한 손이 버티고 있다. 오른손은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왼손은 바다에서 육지를 바라보고 있다. 말로만 들었을 때와는 다르게 그 거대함에 몸도 마음도 압도 당한다. 육지의 손 밑에는 사시사철 꺼지지 않는 성화대 불씨 등도 볼 만하다. 또 바다에 있는 왼손 사이로 아침 태양이 떠오른다고 새벽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 인기 장소다. 호미곶의 명물 국립 등대박물관(www.lighthouse-museum.or.kr,054-284-4857)은 우리 마음의 안식처로, 그리움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던 우리나라 등대의 역사와 변천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문 박물관이다. 예전 등대원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등대원 생활관을 비롯해 등대 유물관, 등대 과학관, 배들의 변천과정과 바다지도인 해도 제작에 관한 자료 등이 전시된 해양수산관, 등대원의 하루와 등대의 역사를 주제로 만든 영상물 ‘아름다운 등대’를 감상할 수 있는 영상실 등이 있다. 또한 야외에는 전망대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등대들의 축소 모형을 전시하는 테마 공원 등 다양한 전시물도 아이들에게 인기다. 입장료도 저렴하다. 아이들은 무료, 어른은 700원. 미리 신청하면 1시간 30분가량 안내 도우미의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개관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 여기도 좋아요. 포항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포항제철 ‘포스코’다. 도대체 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제철소 견학과 한국 철강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포철 역사관 견학은 아이들과 함께라면 꼭 들러야 할 곳. 제철소 견학은 설 연휴, 추석 연휴를 제외한 매주 토·일요일 오전 10시, 오후 2시. 하루에 두번. 또 역사관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볼 수 있으며 일요일이나 공휴일은 휴관이다. 두 곳 모두 견학 희망일을 기준으로 최소 3일전까지 전화나 인터넷으로 예약해야 한다.www.posco.co.kr나 (054)220-7720. 비용은 무료. 또 포항의 심장과 같은 죽도시장도 둘러볼 만하다.
  • 백두산 일출을 보다

    백두산 일출을 보다

    낯선 남녀가 서로 만나 100번째 되던 날, 대부분 조촐한 기념식을 하겠지요. 더욱 사랑하자는 뜻에서 말입니다.‘주말매거진 We’가 이번호로 독자와 만난 지 꼭 100번째가 됐습니다. 하여 어떤 좋은 선물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문득 눈덮인 백두산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혹 가고 싶어도 여유가 없어서 못가는 독자 여러분에게 간접 체험이나마 선사하려는 뜻에서이지요. 아울러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백두’의 기(氣)를 흠뻑 느껴 보자는 취지이기도 하지요. 정말이지 하얀 눈보라가 휘날리는 겨울 백두산은 똑바로 서서 걷기조차 힘들 정도의 바람과 영하 30∼40도의 차가운 날씨였습니다. 이런 까닭에 쉽게 오르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간단한 장비만 갖추면 등산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됐습니다. 백두산 북쪽 천문봉에서 만주벌판을 향해 솟구쳐 오르는 신천지 새벽의 붉은 태양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습니다. 또한 드넓은 얼음평야처럼 꽁꽁 얼어 버린 천지의 장엄함 앞에서는 절로 머리가 숙여지더군요. 자 함께 가보실까요. 백두의 계곡으로 말입니다. 글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백두산은 정말 춥데.”,“겨울에 백두산은 못간데.”라는 사람들의 걱정을 뒤로 하고 속초에서 배를 타고 출발했다. # 백두로 향하다 백두산에 가는 방법이 몇 가지 있는데 이번에는 속초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가 훈춘에서 연길로 해서 가는 방법을 택했다. 속초에서 러시아 자루비노항구까지는 585㎞이며 1만 4000t급 동춘호로 무려 열여섯 시간이 걸린다. 처음에는 배에서 장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동춘항운 김세광 과장은 “말이 열여섯 시간이지 금방 지나갑니다. 오후 3시에 출항해 짐 풀고 저녁 먹고 한잠 자면 러시아에 도착해요. 어쩜 아침에 씻고 짐 챙기느라 바쁩니다.”라고 안심시킨다. 정말이지 막상 타고 보니 배의 위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멀미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을 배정받았다.4인실.2층 침대 2개와 TV, 화장실까지 설치돼 있었다. 추운 동해의 바람을 맞으며 멀어지는 속초를 바라보았다. 김 과장의 말대로 저녁을 먹고 카페에서 맥주를 한잔 마시고 TV를 보다가 잠이 들었는데 어느새 아침이 밝아왔다. # 전혀 다른 세상에 갑판에서 사진을 찍었다. 난생 처음 보는 러시아. 낡은 배, 녹슨 공장의 굴뚝, 눈덮인 야산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과 가장 다른 것은 ‘기온’이다. 부는 바람이 차가운 것이 아니라 콕콕 바늘로 찌르는 듯한 동통(冬痛)이 느껴진다.‘우와 추워!’ 정말 1분 이상 갑판에 서 있지 못할 지경이다. 이윽고 배가 접안했다. 자루비노항에서 동춘항운의 셔틀버스로 중국 훈춘의 장영자 세관으로 이동했더니 버스로 약 2시간 걸렸다. 하얀 눈이 덮인 불모의 땅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끝없이 이어진다. 오고 가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마주 오는 차도 거의 없었다. 어느덧 버스 유리창에 서리는 차가운 얼음장으로 변해 버렸다. 밖의 기온은 영하 25도란다. 러시아 군인들이 지키는 크라스키노 세관에서 러시아 출국수속을 마치고 드디어 중국 장영자 세관에 도착했다. 장영자는 ´긴고개 들로 이어진 끝´이란 뜻의 마을 이름이다. 연변 지역은 고구려, 발해시대의 먼 조상들이 말 달리며 지배했던 땅이고 일제시대에는 많은 항일 독립투사들이 조국 독립의 꿈을 키웠던 곳이어서 새삼 감회에 젖어본다. 연길 등을 거쳐 백두산의 관문인 이도백화(조그마한 시골 마을)까지 약 300㎞. 버스로 꼬박 5시간이다. # 민족의 영산을 마주하며 우리나라는 백두산에서 일어나 지리산에서 마치고 그 세는 물(水)을 근본으로 하고 나무(木)를 줄기로 한다고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은 말했다. 또한 백두산은 우리 국토의 시작이며 백두대간을 품고 있는 민족의 영산이 아닌가. 또 한민족의 발상지인 단군신화를 잉태한 가장 성스럽고 고결한 산이다. 오는 길이 멀고 힘들다 할지라도 우리 민족의 시작점에 설 수만 있다면 그 정도 수고는 감내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을까. 날씨가 구름 끼고 추운 탓인지 이도백화에서 그 모습이 보이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가슴속에 느껴지는 맑고 성스러운 기운이 온몸에 짜릿한 전율로 다가온다. 새벽 3시에 일어나 호텔을 나섰다. 강원도청 환동해 출장소 직원들과 현지 가이드를 포함해 우리 일행은 모두 16명. 환동해 출장소 직원들은 동해바다의 어업과 해로를 관리하기 위해 강원도청에서 파견됐다. 이들과 함께 백두산의 일출을 보기 위해 지프에 나누어 타고 어둠 속을 달렸다. # 민족의 아픔을 간직하고 자고로 백두산에서 일출을 본 사람은 별로 없다. 특히 영하 30도, 체감온도를 측정할 수 없는 그런 겨울에는 더욱 그렇다. 그래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조금만 부지런하면 된다. 한겨울에도 백두산 천문봉까지 차가 다닌다. 물론 일반 승용차는 아니고 중국에서 특수하게 불도저를 개조해서 만든 특수 버스인 ‘설령차’를 타면 천문봉 입구까지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다. 새벽 5시, 장백산(張白山)이라고 써 있는 아치형 문을 통과한다. 이제 정말 백두산의 품에 들어왔다. 하지만 무엇인가 석연치 않다. 장백산이라니. 이 산에 숨쉬고 자라고 있는 풀 한 포기, 나무 하나 우리 조상의 손길과 정성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건만 어찌하여 이곳을 장백산이라 부르며 내 나라를 거치지 못하고 남의 땅을 밟아야 이곳에 도착할 수 있는가. 반쪽짜리 나라의 아픔이 전해진다. # 찬란하다, 백두여 설령차에 올랐다. 이미 중국인 관광객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얼어서 닫히지 않는 창문 틈 사이로 무서운 백두산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하다.‘휘잉∼잉 휘∼잉’하며 눈보라가 칠 때면 앞이 보이지 않는다. 간혹 새벽 달빛 사이로 백두산의 자태가 스친다. 목도리, 마스크, 귀마개, 장갑 등으로 온몸을 칭칭 둘렀건만 손끝과 발끝에는 여전히 한기가 느껴진다. 아침 6시가 넘어서자 동녘 하늘에 붉은 기운이 조금씩 올라온다. 마음이 조급해진다.‘이렇게 어렵게 올라가는데 혹시 해가 불쑥 나와버리면 어떡하나, 빨리 가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앞선다. 굉음을 내며 설령차는 계속 백두산을 오른다.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차문이 열리면서 내렸다. 다행히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 백두산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거세게 몰아치는 눈보라에 앞이 보이지 않는다. 기상대가 있는 주차장에서 천문봉까지는 걸어서 10여분. 일행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천문봉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중학생을 둔 주부 홍복순(46)씨, 겨울산이 난생 처음이라는 정준호(47)씨도 고개를 숙인 채 천문봉을 향해 기어오른다. 만주벌판 저쪽 흐린 하늘이 점점 붉게 물든다. 대륙의 저쪽에서 시작된 차고 거친 바람은 백두의 16개 봉우리를 타 넘어 천지에 부딪치고 솟구치며 눈과 함께 얼굴을 강타한다. 그래서 눈썹에는 하얀 고드름이 생기고, 덜덜 떨린다. 어느 누구 하나 바람과 추위를 피해 내려가자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발 아래 천지는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눈보라가 소용돌이치며 우리의 아픈 역사를 뱉어내고 또 뱉어냈다. 모두 천문봉에 손을 잡고 섰다. 갑자기 누군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어느덧 차가운 백두의 머리끝에서 하얀 입김을 뿜어내면서 모두가 한마음으로 애국가를 불렀다. 장엄하게 펼쳐지는 백두대간의 첫머리에서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붉은 태양을 기다리며 우리의 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추위 속에서 그 애틋한 기다림 끝에 먼 구름 사이로 거짓말처럼 붉은 덩어리가 솟는다. 자신의 몸을 열어 고귀한 생명을 품듯 시뻘건 태양이 나타난다. 숨이 멎고 맥이 풀린다.‘와’하는 탄성조차 지를 수 없는 신성함에 고개가 먼저 숙여진다. 이날 백두의 아침은, 아니 한반도의 신새벽은 이렇게 찬란하게 시작했다. 광활한 붉은 바다를 향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내려왔다. 뜨거워진 가슴으로 추위조차 느껴지지 않는다는 박욱기(33)씨, 추위의 고통이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날아갔다는 김남순(39)씨, 평생에 잊지 못할 아침을 맞았다는 김용국(45)씨. 함께했던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저마다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한 채 백두산 천문봉을 내려왔다. # 하얗게 변한 천상의 호수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 천지를 보러 나섰다. 산장 주변에는 일반인들을 위해 옷, 신발, 장갑 등을 빌려준다. 아이젠이 달린 털장화와 털점퍼는 각각 3000원,4000원에 빌려주며 마스크는 1000원, 장갑은 3000원에 판다. 그러니 장비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백두산 온천지역에서 장백폭포를 거쳐 천지까지 왕복 3시간이 걸린다. 매표소 입구부터 백두산의 이름이 실감난다. 산 정상 부위가 화산활동으로 인한 부식토로 하얗게 뒤덮여 ‘머리부분이 하얗다’해서 붙여진 이름처럼 순백으로 변한 백두산은 입구부터 아름답다. 10여분을 오르자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매달린 거대한 얼음 사이로 굉음을 내며 물줄기가 떨어진다. 이름하여 장백폭포. 이렇게 추운 겨울에도 거의 물이 얼지 않고 흐른다. 장백폭포 산장을 지나자 터널이 시작된다. 터널 속 ‘가파른 천 개의 계단’을 올라야 천지를 만날 수 있다. 문을 열고 터널로 들어섰다. 좀 답답하다. 하지만 차디찬 눈보라를 맞지 않고 천지까지 갈 수 있다는 데야 어디 문제인가. 천지로 가는 터널은 관광객을 위해 한국인이 5년여 걸친 공사 끝에 2003년에 완성했다고 한다.35년간을 사용하고 중국측에 기부채납을 한단다.‘참 우리나라 사람은 불가능을 모르는 민족이야. 이렇게 가파른 곳에 터널을 만들 생각을 했으니.’ 가파른 천 개의 계단은 40분 정도면 오를 수 있다. 차가운 바람이 느껴지지 않아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등산을 하는 기분이 든다. 어느덧 터널의 끝쪽 문에서 휴식을 한다. 밖의 기온이 낮아 몸에 난 땀을 식히고 나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다. 문을 열고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친다.‘역시 쉽게 발길을 허락하지 않는구먼.’ 하지만 난간 옆으로 물이 흐른다. 참 대단하지 않은가. 영하 30도에도 얼지 않고 이렇게 물이 흐르다니. 바로 이 물이 천지에서 흘러 ‘승사하’를 이루고 중국 송화강의 출발점이다. 승사하를 지나자 본격적인 백두의 품이다. 양쪽으로 깎아지르는 용문봉과 천문봉이 우뚝하고 곳곳에 작은 바위들이 시베리아의 벌판을 연상케 한다. 세찬 눈보라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나타나는 잊지 못할 광경에 연신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 정상에 이런 거대한 봉우리들과 천지라는 커다란 호수를 품고 있으니 경이롭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거센 눈보라를 맞으며 20여분 걷자 공룡 동상이 나온다.“와∼천지다.”하며 모두가 하얀 얼음판으로 뛰어든다. 맞다. 바로 여기가 백두산 천지, 하늘의 연못이라는 이곳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무려 둘레가 14.4㎞, 최대 너비가 3.6㎞, 최대 깊이가 384m인 연못. 어떻게 이런 산 정상에 커다란 호수가 있다고 누가 상상을 할 수 있겠는가. 모두 천지에 뛰어들어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아예 드러누운 장희순(39)씨는 “만세 만세”를 외치며 “여기가 천지예요.”라며 북받쳐 오르는 감격에 말을 잇지 못한다. 바람에 연신 눈을 비비며 “한번이라도 더 봐야지. 내가 평생에 언제 다시 여기를 밟아 볼 수 있겠어요.”라는 유현진(53)씨의 눈에는 이슬이 맺힌다. 친구들과 함께 중국 여행을 한다는 천안 나사렛대 문성진(21)씨는 “남쪽의 산들과 달리 웅장하고 위엄있는 모습에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라며 “좀 춥지만 정말 오지 않았으면 너무 후회할 뻔했습니다.”고 감격스러워했다. 이렇게 다들 백두산의 정기와 천지의 성스러움은 우리를 감동에 빠지게 했다. # 색다른 백두산의 별미 백두산의 또 하나 명물은 온천이다. 온천물의 온도가 섭씨 82도로 아주 뜨거워 계란을 담가 놓으면 자동적으로 삶아진다. 이렇게 삶은 계란은 정말 특이하다. 손으로 계란의 반을 잘라보면 흰자위는 반숙, 노른자위는 완숙이다. 먹기가 부드럽고 좋다. 온천수의 효능 때문이란다.3개에 1000원이다. 아주 맛있다. 주변에는 온천장이 몇 개 있다. 입장료는 1만원. 비싸다고 생각하지 말고 들어가면 정말 색다른 경험이 기다린다. 물이 좋은 것은 기본이고 노천으로 나가보라. 고드름과 흰눈이 쌓인 탕에 몸을 담그고 백두산의 이름 모를 봉우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1분도 안 돼 머리카락이 얼어버린다. 그러면 탕에 얼굴을 담가 녹이면 된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하얀 눈가루가 탕을 휘감아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이 정도면 겨울 백두산의 참맛을 만끽했다고 할 것이다. # 민족의 혼이 서려 있는 연변 예전에 만주로 불렸던 연변지역에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다. 곳곳에 항일 독립투사들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으며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땅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이 지역에는 우리 조선족을 위해 간판에 모두 한글과 중국어가 병행 표기돼 있어 외국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한국 돈’이 거의 모든 식당과 상점에서 통용이 될 정도로 한국적인 곳이다. 다만 거리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나라 70년대를 보는 듯하다. 훈춘 주변에 안중근 의사 유적지는 안중근 의사가 한달 동안을 머무르며 거사를 준비했던 집이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마당에 유적비도 있다. 연길 근처인 용정에는 우리 가곡 ‘선구자’의 일송정과 해란강을 만날 수 있다. 연길에서 용정으로 가는 길 오른쪽으로 보이는 야트막한 산 위에 자리잡은 조그만 정자가 바로 일송정. 전에는 늠름한 자태의 소나무가 서 있었다고 하나 일제에 의해 고사당하고 지금은 작은 소나무 한 그루와 정자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또한 민족시인 윤동주가 다녔던 대성중학교가 있다. 현재 용정 제일중학교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현지 학생들이 공부를 한다.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구관 앞에는 윤동주 시비가 세워져 있고 건물 2층에는 사진, 화보, 책자 등 윤동주 시인의 기념전시관이 꾸며져 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남양시와 중국 도문을 연결하는 도문대교, 북한의 나진 선봉과 훈춘을 연결하는 권하대교 등이 있어 멀리서나마 북한땅을 바라볼 수 있다. 지금은 훈춘시청으로 쓰이는 간도 일본총영사부는 ‘토지’드라마에서 길상이가 폭파하려고 했던 건물이다. 밀강 민속마을에 강운학(79) 박옥선(80)씨 노부부의 집은 60년 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함북 흑룡군과 연결된 사만자대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구소련군 폭격으로 끊어진 채로 있었다. 이처럼 백두산을 가는 길에 둘러볼 만한 유적지와 역사적인 흔적이 많아 산 교육장으로도 손색이 없다. #백두산 관광의 선두는 동춘항운은 2000년 4월 28일 우리나라의 속초에서 러시아의 자루비노 항을 경유하여 중국의 훈춘시를 연결하는 최초의 해륙을 연계한 카페리 항로.즉 ‘백두산항로’라는 이름 아래 매년 여객 및 컨테이너 화물 등을 운송한다.또한 2003년 11월 6일부터 러시아 연해주의 수도이자 물류의 중심지인 블라디보스톡항까지 연장 운항을 하고 있다. 동춘항운 부설 준여행 에서는 이 카페리를 이용해 중국 백두산과 러시아 등을 여행하는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겨울철에 중국 연변지역 관광과 백두산을 오를 수 있는 6박7일 상품이 39만9000원,백두산을 서쪽에서 북쪽을 종주하는 5박6일 상품이 68만원,러시아 블라디보스톡과 하바로프스크 등을 열차로 여행하는 6박7일 상품이 79만원 등이다.www.dongchunferry.co.kr ,(02)720-0271
  • 영암에 고대문화 다시 꽃핀다

    ‘옹관묘 공원에서 바둑 공원까지’ 봄이면 10리 벚꽃 길 따라 열리는 왕인문화축제의 고장 전남 영암군이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영산강 유역 고대국가였던 마한 문화공원이 공정률 95%로 마무리 중이고, 가야금과 바둑 공원은 기본설계에 들어갔다. 또 왕인박사 유적지 확장과 도선국사가 살았던 도갑사 대웅전도 복원을 서두르고 있다. 또 월출산 자락에 걸린 달빛을 배경삼아 펼쳐지는 달맞이 국악공연은 벌써 27번을 마쳐 농촌의 문화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시종면 옥야리 일대에 들어서는 마한 문화공원에는 전시관과 생활문화·농경 체험장, 고분탐사관, 전망대 등이 갖춰졌다. 망루·움집·족장집·동물사육장 짓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마한은 3∼6세기 삼국시대와는 다른 고대국가였음이 대규모 유적(옹관묘)으로 입증됐다. 군서면 구림리 성기동 왕인박사 유적지에서는 왕인박사 일대기 전시관을 새로 지었고 왕인학당, 전통찻집, 정자도 다시 짓고 있다. 또한 구림 전통마을 명소화 사업으로 전통 종이공예 전시관을 건축 중이고 신라 말 풍수지리학의 대가로 군서면 구림리 출신인 도선국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도갑사 대웅전과 극락전·성보전을 발굴 자료에 따라 복원한다.여기에 신북면 갈곡리 갈곡들소리 전승관도 새단장했다. 이 들소리는 모내기를 하면서 다함께 부르던 흥겨운 노랫가락으로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 모찌기 소리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전승되는 농요다. 한편 영암군 덕진면 출신인 조훈현 국수를 기념해 바둑공원을, 영암읍 회문리 일대에 가야금 산조 김창조 선생을 기리는 가야금 공원을 만든다.영암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7) 정치적 예언의 집대성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7) 정치적 예언의 집대성 ‘정감록’

    한국에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정치적 예언이 있었다. 그것은 주제에 따라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풍수설에 입각해 새 왕조가 일어난다는 내용이 있었는가 하면, 미륵불이 지상에 내려와 이상세계가 열린다는 예언도 있었다.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이 서로 교대할 거라는 주장도 있었다. 다종다양한 예언이 역사상 한꺼번에 존재한 적은 오히려 드물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나씩 나타나기도 하였고, 서로 다른 종류의 예언이 혼합되기도 했다. 역사상 존재한 한국의 정치적 예언서는 실개천들에 비유된다.‘정감록’은 그 냇물들이 한데 모여들어 이뤄낸 호수라고 볼 수 있다.18세기 전반, 조선 영조 때 역사의 무대 위로 처음으로 등장한 ‘정감록’은 지난 200∼300년 동안 더욱 내용이 풍부해졌다. 이제 ‘정감록’은 민간에 유행하는 예언서를 모두 일컫는 일반명사가 되어 있다. ‘정감록’의 핵심은 정감과 이심 및 이연 등 3인의 대화다. 이를 ‘감결’이라고도 하는데 이본이 많다. 길이가 가장 짧은 한글 본은 약 2430자, 가장 긴 한문본은 6030여자나 된다.‘정감록’에는 ‘감결’을 비롯해 여러 종류의 예언서가 속해 있다.‘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화악노정기(華岳路程記)’,‘구궁변수법(九宮變數法)’,‘동국역대본궁음양결(東國歷代本宮陰陽訣)’,‘무학비결(無學秘訣)’,‘도선비결(道詵秘訣)’,‘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징비기(徵秘記)’,‘토정가장비결(土亭家藏秘訣)’,‘경주이선생가장결(慶州李先生家藏訣)’,‘삼도봉시(三道峰詩)’,‘옥룡자기(玉龍子記)’ 등이 그것이다. ‘정감록’이 예언서의 집성이 되는 이유는 말 그대로 한국 역사상 등장했던 모든 예언서가 그 이름 아래 묶였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진짜 이유는 여러 예언서에서 탐지되는 중요한 특징이 모두 ‘정감록’에 살아있어서다. ●삼국통일 무렵 예언이 문자로 처음 기록돼 삼국시대 초기에는 예언서라고 일컬을 만한 것이 아직 하나도 없었다. 문자로 기록된 예언서가 출현하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쳤다. 처음에는 성스러운 왕의 탄생을 알리는 신기한 전설이 있었을 따름이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탄생설화를 비롯해 신라의 탈해왕과 김알지, 가야의 김수로왕의 등극을 알리는 설화가 나온다. 이처럼 위인의 탄생을 예감하게 하는 자연현상이나 태몽 등은 고대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에는 물론이고, 서양 고대의 문헌에도 보인다. 이웃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대 한국인들은 이상한 동물의 출현과 예외적인 천문현상 및 자연계의 이변을 정치적 변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삼국사기’ 등에는 이에 관한 기록이 수백 군데나 있다. 고대 한국에는 국가의 위기를 미리 알려주는 자명고 같은 물건이 있었다고도 한다. 신라에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이란 신기한 피리도 있어, 불기만 하면 적군이 저절로 물러나고 질병도 사라졌다고 한다. 정치적 예언이 문자로 처음 기록된 것은 삼국시대 말인 7세기 후반이다.“백제는 달 바퀴와(月輪)와 같고 신라는 초승달(月新)과 같다.” 백제는 망하고 신라는 흥하리란 정치적 예언인데, 이런 내용이 거북 등에 적힌 채 백제의 왕궁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 짤막한 문장은 한국 최초의 정치적 예언서였다. 이것이 발견되고 얼마 안 돼서 이번엔 고구려의 멸망을 예고하는 ‘고려비기’가 발견되었다. 요컨대 신라의 삼국통일을 전후해 정치적 예언이 문자로 정착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구두로만 전해오던 예언이 글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것은 외래문자인 한자가 통치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최초의 예언서는 길이가 극히 짧고 시적이었으며 비유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신라말 최치원이 썼다고 하는 예언서 역시 그랬다. 그는 “계림은 누런 이파리요 곡령(송악)은 푸른 소나무”라는 시구를 고려 태조에게 보냈다고 하는데, 비유법이 눈길을 끈다. 이와 같은 특징이 10세기 초 철원에서 나온 ‘고경참’에서도 재차 확인된다. 140여자로 구성된 ‘고경참’은 왕건이 궁예를 꺾고 개성에 새 나라를 세우게 된다고 했다. 고려는 12대 360년간 유지된다고 예언되었다. 이 예언서는 단군신화나 주몽설화를 연상시키는 대목도 없지 않다. 그러나 왕건 같은 ‘성인’이 결국 최종적인 승자가 되리라고 예언한 점에서 ‘정감록’의 원형이다. 고려의 국운을 처음부터 끝까지 개관한 점에서도 ‘정감록’의 선구가 된다. ●풍수지리설 고려시대에 접어들어 풍수지리설이 유행했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의 장래를 예언한 글이 많이 등장했다. 풍수설은 ‘정감록’의 경우에도 중추적인 역할을 맡는다. 미래의 수도를 계룡산, 가야산, 전주 및 개성으로 예언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풍수설에 기초한 것이다. 아울러 십승지설을 비롯해 전국의 길지를 따져본 것도 풍수설의 영향이다. 풍수설을 대표하는 고려의 예언서로는 도선(道詵·827∼898)의 저술로 알려진 몇 가지가 있다. 아울러 ‘신지비사(神誌秘詞)’라고 하는 것이 또 있다.‘신지비사’는 고조선의 예언가 신지가 저술했다고 하는데, 후대에 조작된 것이 틀림없다. 도선의 저술이라고 알려진 예언서들도 위작일 가능성이 결코 적지 않다. 두말할 나위 없이 도선은 풍수설의 대가였다. 다만 고려태조와 가까운 사이였음을 직접적으로 증명하기는 어렵다. 태조와 긴밀했던 것은 그의 제자 경보(慶甫·868∼948)였고, 그로 인해 역사책에는 도선과 고려 왕실의 관계가 과장되었다. 11세기 중엽, 고려 문종 때부터 이른바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이 널리 유행했다. 땅 기운은 일정하지 않아 때로 약해지나 적절한 방법을 쓰면 다시 회복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이 이론을 토대로 수도 이전 논의가 활발했다. 처음에는 평양이 길지로 각광을 받았지만,13세기 고종 때부터 한양이 길지로 떠올랐다.14세기에는 한양천도가 기정사실로 취급될 정도였다. 결국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는 한양을 새 수도로 삼았다. 한양 천도론은 현실이 되고 만 것이다. 그 당시 천도론을 이끈 예언서는 도선의 저술이라 하는 ‘도선비기(道詵秘記)’,‘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등이었다. 앞서 말한 ‘신지비사’는 논쟁에서 보조기능을 담당하였다. 아직 예언서 형태로 자리매김된 것은 아니나 7세기 후반 고구려에서도 풍수설이 위력을 발휘한 적이 있다. 당나라가 파견한 도사(道士)들이 풍수설을 이용해 고구려의 국운을 연장시키겠다며 소란을 피웠다. 도사들은 평양에 새로 성을 쌓거나 바위를 부숨으로써 고구려의 국운을 늘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때 고구려에 수입된 풍수설은 점차 부동의 위치를 확립했고, 도선과 그 제자들의 손을 거쳐 고려 이후 줄곧 예언서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정감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선천 후천설 고려 때는 점성술에 입각한 예언서도 유행했다. 고려 인종이 즐겨 인용한 ‘고현유훈(古賢遺訓)’을 이같은 예로 들 수 있다. 거기에는 머지않아 역사의 새 출발이 가능하다고 했다.‘정감록’에 암시된 선천과 후천의 교대설은 그 싹이 바로 ‘고현유훈’에 있었다.‘고현’이란 옛날의 현인 즉, 과거의 뛰어난 예언가다. 여기서 말하는 ‘고현’은 특히 천문과 역법에 밝았던 사람이다. 책에는 이렇게 주장돼 있다 한다.“천지가 생긴 지 수만 년이 지나면 동지(冬至)가 갑자일이 되는 때를 만나리라. 그때가 되면 해와 달 그리고 (수 화 목 금 토) 다섯별이 모두 정북(正北)에 모여들 것이다. 이를 상원(上元)으로 삼고, 이 날로 달력의 기원을 삼아야 된다. 이때 천지가 열리고 성인(聖人)의 도가 행해질 것이다.” 당시 인종은 묘청과 백수한 등 예언전문가들에게 정치를 전적으로 의지하다시피 했다. 왕은 묘청의 권유로 ‘고현유훈’을 읽어 보았음 직한데 특정한 날이 되면 역사의 무대가 새로 펼쳐져 이상정치가 가능하리란 희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물론 터무니없는 망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천체의 운행을 인간사회의 변화에 직결시킨 점에서 동양 고대의 우주관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런 관념은 19세기말까지도 민간에 널리 통했다. ‘고현유훈’의 기초가 되는 점성술은 운수설과 결합되기도 한다. 그 결과, 한국역사에는 아홉 번에 걸쳐 새 왕조가 등장한다는 취지가 담긴 예언서도 나왔다. 조선 초기 식자층이 읽은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가 그런 식의 책이다.‘정감록’에도 역대 왕조의 운수가 밝혀져 있고, 계룡산시대 이후의 도읍지가 예언돼 있다. 그와 동시에, 머지않아 선천이 끝나고 후천 이상세계가 펼쳐지리라는 꿈이 깃들어 있다. ●미륵하생설 선천 후천설을 불교적인 입장에서 편 것이 미륵하생설(彌勒下生說)이다. 미륵이 이 세상에 내려와 이상세계를 연다는 믿음이 한국에는 널리 유행했다. 스스로를 미륵의 화신으로 간주한 사람도 여럿이었다. 이미 죽은 지 천년도 더 된 궁예를 일부 지방에서는 여전히 미륵불로 믿는다는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경기도 포천시 구읍리 반월성터에 있는 궁예 미륵상이나 경기도 안성시의 국사봉에도 궁예 미륵은 민간의 신앙 대상이다. 고려 말에 경상도 고성 출신 이금은 스스로 미륵이라 주장했다. 그는 다가올 미륵 세상의 모습을,“내가 조화를 부리면 풀에서 파란 꽃이 피며 나무에 곡식이 열릴 것이다. 그리고 한 번 씨앗을 뿌려서 두 번 거두게 되리라.”고 묘사하였다. 수고를 들이지 않고서도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다고 예언한 점에서 그의 설명은 ‘미륵하생경’의 내용과 일치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금을 따랐다 한다. 이금을 추종하는 신앙 집단은 우선 규모가 컸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일부 고위관리들까지 신도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국가의 탄압을 받아 이금 일파가 송두리째 제거되었다. 그 뒤에도 자칭 미륵불이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고려 우왕 때 개성에서 미륵불을 일컫는 승려가 나타났다. 이번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진짜 미륵불로 믿고 쌀과 베를 앞다퉈 바쳤다. 사노(私奴) 무적도 미륵불의 화신이라 주장하다 관헌에 체포되어 목숨을 잃었다. 14세기 후반 고려는 거듭된 왜구의 침입과 정치 불안정으로 인해 총체적인 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 때문에 말세 의식이 만연해, 어서 미륵불이 내려와 이상세계를 펼치기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자칭 미륵이 속속 등장했다.17세기 후반 조선 숙종 때 승려 여환은 미륵을 자처하며 무리를 모아 조선왕조를 전복시키려 했다. 사전준비가 미흡했던 탓에 그의 무모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여환은 추종자 11명과 함께 사형을 당했다. 여환이 사라진 뒤에도 미륵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영조39년(1763) 10월2일자 ‘실록’을 보더라도,“지난번 황해도에서 미륵불이라고 일컫는 자가 있었기에 어사(御史)를 보내 법으로 다스렸다.”는 기록이 있다.19세기 말 증산교를 창립한 강일순(姜一淳·1871∼1909)은 자신을 천자 미륵이라고 일컬었다. 임종 때 그는 말하기를,“나는 미륵이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 미륵불을 보라.”고까지 했다. 자칭 미륵불들은 다들 그 나름으로 예언을 일삼았는데, 강일순은 다가올 미륵세상을 이렇게 설명하였다.“세상 사람이 하늘에 올라가고 밤과 낮이 막힘없이 환하게 통하고 100가지 곡식을 오래도록 거두어들이고 만 가지 과일이 굵고 크며 풍성한 음식이 저절로 생기고 아름다운 옷이 스스로 이른다.” 이러한 견해는 ‘미륵하생경’과 대체로 일치한다. 미륵이 세상에 내려오기를 바라고 믿는 미륵하생신앙은 고대 중국과 티베트를 비롯해 동양 여러 나라에서 인기를 끌었다. 특히 한국인들은 금강산을 법기도량(法起道場)으로 믿어, 내세불인 미륵불이 반드시 한국에 출현하리라는 기대가 컸다. 예부터 예언서나 도참(圖讖) 또는 노래를 빌려 이 점이 늘 강조됐다. 자연히 ‘정감록’에도 미륵신앙이 깊이 스며들어 불법이 다시 부흥하리라는 예언을 낳았다. ●정성진인 또는 해도진인설 조선후기 예언서에서 미륵은 진인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때로 진인은 미륵세상을 맞이할 세속군주 전륜성왕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승려 여환 사건 때도 이미 ‘정성인(鄭聖人)’이 등장한다.18세기부터는 각종 반란이나 대규모 민란 때마다 ‘진인(眞人)’이 거의 늘 등장했다. 이지서의 괘서 사건에서도 그랬고,19세기 초 서북인의 차별에 항거해 들고 일어선 홍경래의 난 때도 진인이 언급됐다. 진인은 ‘정감록’에도 큰 발자국을 남겼다. 새 세상을 열 미래의 왕이 다름 아닌 ‘정성진인(鄭姓眞人)’이거나 ‘해도진인(海島眞人)’이었다. 그 성씨가 정이고, 그가 세상에 나오기 전 섬에 숨어 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정감록’을 가탁한 민중운동은 갈수록 증가했다. 심지어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여러 민란이나 그때 창궐했던 화적들은 “이재궁궁(利在弓弓·이로움이 궁궁에 있다)”을 구호삼아 외치는 형편이었다. 도적의 우두머리도 진인을 자처하였다. 진인의 시대가 열리고 보니, 그의 사주(四柱)까지 조작되었다. 진인은 기사년 무진월 기사일 무진시에 태어난다. 그의 사주는 뱀이 변하여 용(龍)이 되는 것이라 크게 길하다 했다. ●‘정감록’의 질적 변화 조선후기부터 ‘정감록’에 약속된 새 날의 도래를 믿고 많은 사람들은 고향을 등졌다. 그들은 곧 진인이 섬에서 나와 계룡산에 천도할 줄로 철석같이 믿고 가산을 탕진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정감록’ 신앙의 영향 아래 여러 신종교가 출범했다. 동학, 증산교 및 원불교가 그 대표적인 것이지만 개중에는 민중의 금전과 노동력을 갈취하려는 사교 집단도 비일비재했다. 사교 집단은 ‘정감록’을 빙자해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일부 신종교에서는 ‘정감록’ 해석에 차원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정성진인이 오기만 기다리며 계룡산에 들어가 아무 일도 안 하고 지내는 ‘정감록’ 신앙을 혹독하게 비판했다.“계룡산에 정씨 왕이 난다는 것은 닭이 울면 날이 새고 바른 법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원불교의 개조(開祖) 소태산 대종사의 말이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정성진인은 실상 정법(正法)일 뿐 인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 소태산은 앞서 도적들이 되뇌던 ‘정감록’의 한 구절 “이재궁궁”에 대해서도 색다른 의견을 내놓는다.“세상에는 구구한 해석이 많이 있으나 글자 그대로 궁궁은 무극(無極) 곧 일원(一圓)이 되고 을을은 태극이 되나니 도덕의 본원을 밝힘이라. 이러한 원만한 도덕을 실천하여 남과 다투지 않고 살면 이로운 것이 많다는 뜻이다.” 한국 역사상 숱하게 많았던 예언서들이 ‘정감록’ 호수에 이르기까지 그 길은 거칠고 아득했다.‘정감록’이 도달한 종점엔 천만다행으로 살벌한 투쟁이 아닌 상생(相生)이 웃으며 우리를 기다린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1) 경주이선생 가장결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1) 경주이선생 가장결

    “지난 60년은 그만두고 양류목운(楊柳木運)의 해에는 갑자기 군대가 소요를 일으켜 여(女)군주가 도망을 칠 것이다. 만일 동남쪽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나그네가 도리어 주인 행세를 하게 되리라. 나라의 태공은 푸른 바다에 외로운 그림자가 되어 신세가 처량해질 것이나 아무도 찾지 않을 것이다. 살아 있는 백성들은 달아나 숨기 바쁘니, 삼강오륜이 끊어지도다. 하늘 재앙 혹독해 벌레의 독을 무어라 형언하랴. 부자가 먼저 죽나니 후회해도 소용없도다.”(경주이선생 가장결) ‘정감록’의 일부로 돼 있는 ‘경주이선생’의 첫 대목이다. 정치적 격변을 알리는 끔찍한 예언이 쏟아져 나온다. 그 내용을 일일이 살피기에 앞서 우선 거기에 보이는 연도 표기방식이 특이해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양류목운’이라고 했다. 음양오행설에 입각해 임오년과 계미년의 운세를 말한 것이다.‘경주이선생’은 조선 후기에 정착된 편년체 예언이 분명한데, 특히나 음양오행설로 육십갑자를 푼 셈이다. ●한국의 운세를 나무에 빗대는 이유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한국이란 나라의 운세는 나무 운세(木運)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점이다. 까마득히 먼 옛날부터 그랬다. 다들 우리나라를 나무(木)로 상정했다. 그 기원은 지금부터 약 650년 전인 고려 공민왕 6년(1357)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때 음양오행에 달통해 사천소감 벼슬에 있던 우천흥이란 일관(日官)이 있었다. 그는 공민왕에게 올린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도선국사가 지은 ‘옥룡기’(玉龍記)란 예언서를 보면, 우리나라의 지맥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난다고 했습니다. 그 지세가 물(북쪽)은 뿌리요, 나무(남쪽)는 줄기가 됩니다.” 우천흥은 도선이 한 말이라며 자신의 견해에 권위를 부여하려 애쓴다. 과연 이 주장이 도선에게서 비롯됐는지는 증명할 길이 없지만,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는 백두산을 뿌리로 삼아 지리산까지 줄기가 뻗친 한 그루의 나무로 이해된 사실만은 틀림없다. 역사 기록을 좀 더 살펴보면 그보다 200년쯤 앞서 고려 인종 때도 비슷한 인식이 존재했음이 증명된다. 알다시피 묘청은 도읍을 서경으로 옮기자고 주장했는데, 그 역시 고려란 나라를 한 그루 나무로 보았다. 묘청이 서경에 새 궁궐터로 잡은 곳이 ‘대화세’(大華勢), 즉 큰 꽃봉오리 형상의 명당이었다. 그는 나라 전체를 커다란 나무로 인식했고, 그 중에서 지세가 강한 여러 명당을 꽃으로 간주했다. 대화란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꽃 즉, 최고의 길지를 뜻했다. 한국이 음양오행으로 보면 나무에 해당한다는 주장은 고대 중국에서 비롯된 듯하다. 한반도는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동쪽에 위치하는데, 나무가 바로 동쪽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먼 옛날부터 중국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동국(東國)’ 또는 ‘진단(震檀)’이라 불렀다. 동쪽 나라를 뜻하는 ‘동국’이야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진단’의 진(震) 역시 팔괘의 하나로 동쪽을 가리킨다. 단(檀)은 우리나라의 시조가 단군이라서 덧붙여진 것이다. 우리나라를 동쪽 나라라 하고 그래서 나무 운세로 보는 것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 표현된 것이다. 지구가 둥근데 하필 우리나라를 동쪽으로 볼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정약용이나 홍대용과 같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마침내 지구가 둥글다든가 자전하는 줄을 알게 돼 중국적 세계관에 본격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우리나라를 동쪽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 인습의 뿌리는 정말 끈질기다. 빠뜨릴 수 없는 또 한 가지 이야기가 역시 ‘고려사’에 실려 전한다. 한국 고대 풍수지리의 아버지라 할 도선국사가 고려 태조 왕건이 태어날 집터를 정할 때의 전설이다. 그 때도 나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도선은 왕건의 아버지 왕륭과 함께 곡령 고갯 마루에 올라 지맥을 두루 살폈다. 위로 천문을 보고 아래로는 시수(時數)를 살핀 다음 그는 이렇게 말했다.“이곳 지맥은 임방(壬方:북쪽)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물을 어머니(水母)로 삼은 나무(동쪽)가 줄기인데, 말머리 명당에 이르러 멈춰선 형세입니다. 공 역시 물의 운명이오니 마땅히 물의 대수(大數·물의 수는 1과 6으로 6이 대수다)에 따라 집을 지어야 합니다. 대수인 6에 6을 곱하면 36구가 되는데 이것이 천지의 대수에 부응합니다. 제 말대로 하시면 내년에는 반드시 성스러운 아들(미래의 임금)을 낳게 될 것이오니 이름을 부디 왕건이라 하십시오.”(고려사 세계 7) 도선은 태조 왕건의 운세를 나무로 보고, 그 아버지는 나무를 살리는 물이라 여겼다. 마찬가지로 송악 명당이 있게 한 뿌리는 백두산인데 북쪽의 임방에 위치하므로, 오행으로 풀이해 물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비해 송악 명당을 낳은 금강산과 태백산 등 백두대간은 송악에서 바라보면 동쪽에 위치해 나무로 간주됐다. 따지고 보면 송악 역시 그 나무의 꽃 또는 열매에 해당해 근본적으로는 나무로 파악됐다. 도선의 머릿속에서 송악과 고려 태조 왕건은 나무로 동일시되었다. 나무인 왕건이 태어나서 자랄 집은 당연히 물이라야 하므로 대수 36구가 길하다는 결론이 나왔으며, 송악에는 푸른 소나무가 많아야 한다는 것이 도선의 처방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의 운세는 늘 나무로 파악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壬午와 癸未가 楊柳木이 되는 이유 오행상생설로 보면 나무를 살리는 것은 다름 아닌 물(水), 죽이는 것은 불(火)이다. 따라서 나무인 한국에게 물의 해는 길하고 불의 해는 흉하다는 식의 운세 풀이가 나오게 된다. 흉한 해 즉, 불(火)로 정의되는 해는 말(午)의 해요, 그 뒤를 이은 양(未)의 해도 좋지 않은 것으로 점쳐진다. 그런데 한국의 운세는 말과 양 등 십이간지(十二干支)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육십갑자를 구성하는 열 개의 천간(天干)이 또 있어서다. 나무에 해로운 불은 병정(丙丁) 둘이며, 이로운 물이 또 두 가지이다. 임(壬)과 계(癸)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임과 계년이라면 나라 운세가 보통은 아주 좋다. 하지만 십이간지인 말과 양의 해가 나무와 상극인 관계로 임오년과 갑신년의 운세는 상생과 상극이 맞부딪쳐 어정쩡해진다. 비유하자면 어린 나무(柔木)다. 역술가들은 임오년과 계미년의 국운을 흔히 양류목(버드나무) 운세라 부른다.‘경주이선생’도 예외가 아니어서 버드나무 운세라는 말로 두 해의 운세풀이를 시작한다. 하고 많은 나무 가운데서 버드나무란 또 무엇일까? 옛 사람들은 버드나무라면 으레 생명력이 끈질기다고 생각했다. 조선의 명유(名儒) 하서 김인후는 귀양 가는 친구에게 뜰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주기도 했는데, 버드나무가 정든 임을 상징하기도 했지만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버드나무는 가늘고 긴 가지가 특별하다. 축 늘어진 모양은 마치 미인이 긴 머리를 풀어헤친 듯도 하려니와 하늘하늘한 여인의 허리를 연상케 한다. 낙락장송의 꼿꼿한 기개는 아닐지라도 유려함과 생명의 활기가 느껴지는 나무다. 버드나무는 봄이 오면 가장 먼저 물이 올라 푸르름을 선사하기도 한다. 부드러움 속에 강인한 생명력이 깃들어 있다. 따라서 ‘양류목’ 운세는 다소 불리한 가운데도 끝내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날 가능성을 가진다. 말과 양의 해라면 나무가 죽을 수이고, 특히 큰나무가 해를 많이 입을 운이다. 다행히 임과 계년이라서 다 죽지는 않는다. 산불 때 그렇듯 큰 나무는 힘없이 쓰러지되 작은 나무는 도리어 살아남을 운세다. ●임오군란과 양류목운 다시 맨 앞에서 인용한 ‘경주이선생’의 첫 대목을 상기해보자. 고종19년(1882) 임오년의 정세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참 많다. 첫째, 군대의 소요가 일어난다는 예언이 있는데 그 해에는 실제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당시 정국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가 개화파와 대립하는 형세였다. 개화파는 사실상 국왕 고종과 명성황후가 손수 이끌다시피 했다. 왕이 개화를 지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개화파 관료가 점차 조정에 많이 임용되었다. 고종18년(1881)에는 신식군대인 별기군까지 창설되었는데, 소외감을 느낀 구식 군인들은 그것을 왜별기(倭別技)라 부르며 분통을 터뜨렸다. 과거 대원군이 집권하던 시절만 해도 구식 군인들에 대한 대우는 좋았다. 하지만 개화정책이 추진되면서 사정이 많이 달라져 그들은 봉급이 13개월치나 밀리는 등 어려운 처지로 내몰렸다. 재정을 담당하는 선혜청 당상이자 병조판서였던 민겸호야말로 이런 사태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이 구식 군인들의 믿음이었다. 마침 그해 6월, 전라도에서 올라온 세미(稅米)가 서울에 도착하자 구식 군인들에게도 1개월분의 급료가 지불되었다. 그런데 선혜청 담당 관리들의 농간으로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이 지급되자 구식 군인들은 분노를 참지 못해 무장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평소 불신하던 민겸호의 집에 난입했고, 장차 민씨 일파의 보복이 있을까 염려한 나머지 반대파인 대원군에게 의지했다. 대원군은 몰래 심복을 보내 구식 군인들을 통솔했고 이 사태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자신의 재집권을 꾀했다. 그 바람에 구식 군인들의 폭동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군인들은 무기고를 털어 무장을 강화한 뒤 명성황후의 측근들과 개화파 주요 관리들의 집을 차례로 습격했다. 대원군의 밀명에 의해 그들은 친왕적이고 개화정책에 우호적이던 대신들을 죽이거나 다치게 했다.“부자가 먼저 목숨을 잃는다.”는 ‘경주이선생’의 예언처럼 부와 권세를 부리던 사람들이 상해를 입었다. 개화파의 군사적 기반인 별기군 병영도 무사하지 못했다. 구식 군인들은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를 살해했고, 일본 대사관에도 침입해 13명의 일본인 목숨을 빼앗았다. 둘째, 예언서 ‘경주이선생’에는 여 군주가 도망친다고 돼 있는데, 실제로 실권을 행사하던 명성황후가 충주로 도피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구식 군인들은 돈화문을 통해 창덕궁 궐내로 난입했다. 그들은 개화파의 우두머리라며 명성황후를 제거할 계획이었다.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수구파의 우두머리인 대원군의 조종을 받은 것이었다. 목숨이 위급해진 왕후는 무예별감 홍재희의 도움을 얻어 충주 장호원에 있던 친척집으로 피신했다. 셋째, 국태공이 납치된다는 예언도 적중해 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되었다. 국왕인 고종은 임오군란으로 벌어진 정치적 난맥상을 진정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해 일단 대원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다시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대원군은 왕의 의지에 상반된 조치를 연달아 취했다. 대원군은 그동안 실시돼온 개화정책을 거의 모두 파기했다. 별기군을 혁파하고 구식 군대인 5군영을 복구하였으며, 신식 정부기관인 통리기무아문을 없애고 3군부를 설치했다. 대원군은 최대의 정적인 명성황후의 실종을 서둘러 사망으로 단정하고 국상을 치렀다. 개화파로서는 큰 타격이었다. 그러자 개화파는 톈진(天津)에 주재하던 영선사 김윤식을 통해 청나라에 군사적 후원을 부탁했다. 청나라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 오장경(吳長慶)이 이끈 청나라 군대 4500명이 서울로 급파됐다. 그는 군대를 앞세워 한국의 내정에 직·간접으로 간섭하였고, 자신을 찾아온 대원군을 불법 체포해 톈진으로 압송했다. 한국 내에서 청나라의 입지를 강화시킬 방안에서였다. 이로써 나는 새도 떨어뜨릴 듯하던 ‘호랑이’ 대원군은 권좌에서 영원히 축출되었다. 예언대로 되고 만 것이다. 이밖에도 ‘양류목운’의 예언은 적중했다.“손님이 주인행세를 할 것”이라 했는데 과연 오장경이 지휘하는 청나라 군대가 멋대로 주인행세를 한 것이 사실이었다. 한마디로, 임오년은 ‘경주이선생’이 말하듯 숱한 사건이 터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나라가 아주 망하지는 않았다. 일단은 충주로 피난한 명성황후도 무사했고, 불시에 청나라로 붙잡혀간 대원군도 다시 귀환할 수 있게 된다. ●갑신정변까지 ‘경주이선생’에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경주이선생’에는 고종21년(1884)에 일어난 갑신정변도 정확히 예측돼 있다.“정중수운(井中水運)은 자미(북두성) 자리에 저녁 무지개가 뜬 형국이다. 그러다 다시 동쪽으로 달아나리라. 나라에 변고가 일어나 죽음이 참혹하구나. 남북 군사들이 부딪쳐 화가 점차 심한 불길처럼 번져나갈 것이다.”자미성이라면 천자 또는 임금을 가리킨다. 그 자리에 무지개가 뜨는 것은 무척 흉하다. 무지개는 하늘에 보이는 벌레로 해석되기 때문에 변란이 일어난다는 예언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다고 한 것도 불길하며, 변란의 주체가 동쪽으로 달아난다고 한 것도 심상치 않다. 더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남과 북의 세력이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대립한다고도 했으므로 후환이 두렵다. 이 예언대로 한 해가 흘러갔다 해도 지나침이 없다. 김옥균과 박영효를 비롯한 개화파 청년 인사들이 그 해 10월17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들의 정변은 일단 성공했으나 지지기반이 미약했던 탓에 정권이 오래 가지 못했다. 겨우 사흘밖에 집권하지 못해 ‘삼일천하’란 다소 비웃는 듯한 표현까지 등장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는 크다. 한국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위로부터의 근대적인 개혁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김옥균 등 정변의 주체세력은 그들 스스로가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 양반 출신이었지만, 오랜 사회적 악습으로 남아 있던 문벌 타파를 실천하고자 했다. 개화당 인사들은 능력 본위로 인재를 등용하자며 평등권을 부르짖었다. 아쉽게도 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후유증도 심각했다. 서울에 와 있던 청나라 장수 위안스카이의 무력 공세에 밀린 김옥균과 박영효 등은 후일을 기약하며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 사건 이후 한국은 일본과 청나라의 세력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불쌍한 처지에 놓인다. 청·일 양국은 그 이듬해인 1885년 4월 18일, 톈진조약을 체결해 장차 한국에서 중대 사건이 발생할 경우 두 나라가 동시에 군대를 파견하기로 약속하기에 이른다. 과연 갑신정변이 일어 난지 정확히 10년 뒤인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그러자 청·일 두 나라는 톈진조약에 의거해 한국에 동시 출병했고, 마침내 한국을 독점하기 위해 청·일전쟁을 벌인다. 이 전쟁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로써 일본은 장차 한국을 병합할 기초를 다진다. 불행의 씨앗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되고 있었다. ●더 이상 안 맞는 ‘경주이선생’ 갑신정변을 분기점으로 잘 맞아 들어가던 ‘경주이선생’도 틀리기 시작해, 고종 23년(1886) 이후의 예언은 완전히 빗나간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유는 무척 간단하다. 맞고 틀리고는 ‘경주이선생’이 저술된 시기와 직접 관계가 있다. 나는 이 예언서가 1884년 갑신정변이 끝나자마자 쓰였다고 본다. 이미 다 알고 쓴 것이라서 1880년대 초반의 일은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정도로 딱딱 들어맞는다. 하지만 듣지도 보지도 못한 1886년 이후를 무슨 수로 맞히겠는가? 맞는 예언서는 이미 예언서가 아니다. 그것은 술사를 비롯한 민중의 역사적 인식이 기록된 일종의 역사서일 뿐이다. 그 때 있었던 모든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민중의 주된 관심사만을 한데 주워 담은 역사 말이다. 예언은 사실 미래를 대상으로 한 것인데, 뜻밖에도 거기에 민중의 역사적 기억이 집적돼 있다.‘경주이선생’에는 특히 민중이 바라본 정치와 경제 이야기가 많다.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도 우리는 밥상머리에서 권력과 돈의 향방을 따진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백승종 정감록 산책] (39)민족적, 유교적 천문예언과 오윤부

    [백승종 정감록 산책] (39)민족적, 유교적 천문예언과 오윤부

    구한말 대표적인 애국계몽 운동가요, 항일운동가인 단재 신채호는 우리역사를 깊이 연구했다.‘조선 상고사’처럼 널리 알려진 연구서가 있는가 하면,‘꿈하늘(夢天)’ 같이 소설 형식을 취한 것도 있다.‘꿈하늘’은 일종의 팬터지 문학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작가 신채호는 천상에 올라 ‘임’을 좌우에 모신 여러 영웅호걸을 만난다. 이순신과 세종대왕이 있고 철학자 화담 서경덕도 보인다. 도술의 달인 전우치도 함께 자리한다. 예상 밖인 것은 오윤부(伍允孚)라는 생소한 인물이다. 그는 성력(星曆)의 대가라 했다. 우선 성씨부터 낯선 오윤부. 좀 더 알고 보면 그는 ‘고려사’ 열전에 소개될 정도로 완전히 무명은 아니었다. 천문예언 전문가라고 했다. 섣부른 짐작과는 달리 고려시대에는 천문예언이 무척 중시됐다. 이름난 유학자 박상충의 전기에도 “성명(星命)에 밝아 사람들의 길흉을 점치면 많이 맞혔다.”는 대목이 나올 정도다. 중국에서는 13세기 이후 사주명리학이 예언이나 점의 핵심이었다. 고려는 경우가 달랐다. 풍수지리와 더불어 천문예언이 늘 예언의 중심축이었다. 인간 만사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 그리고 산줄기를 타고 흐르는 땅의 기운과 직결된다는 믿음이 고려인들의 정서에 부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천문은 조선후기에 출현한 ‘정감록’에서도 큰 역할을 한다. 정조9년(1785) 정감록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그랬다.“이른바 하늘이 낸 사람이라는 것은, 그 성씨가 김가이고, 이름은 자세히 모릅니다만, 금년에 군사를 일으킨다고 들었습니다. 유가는 정미년에 군사를 일으키고, 정가는 무신년에 군사를 일으켜, 세 집안사람들이 장차 백 년 동안 서로 싸웁니다. 그 증거로, 객성(客星)이 남방에서 이미 서울로 들어왔습니다.”(실록, 정조 9년3월1일 경술) 조선은 장차 3국으로 분할돼 오랜 세월 다투게 된다는 예언이다. 객성이 남쪽에서 출현해 서울 쪽으로 들어왔다는 천문현상이 증거로 제시됐다. 나라의 운명은 별이 결정한다는 민중의 믿음이 읽힌다. ●대대로 별점을 본 오윤부 고려 충렬왕 때 일관(日官)으로 활동한 오윤부야말로 별점의 대명사였다. 그의 본관은 황해도 배천(白川), 한 때 부흥(復興)으로 불리기도 한 곳이다. 일제시대의 성씨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엔 배천 오(伍)씨가 없다. 오윤부는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는 이야기만 전해 내려온다. 그 조상은 대물림을 해가며 고려의 수도 개성에 살았다. 배천오씨들은 자자손손 별점을 보며 태사국(太史局)을 지켰다.(오윤부의 전기는 ‘고려사’, 권 122를 참조) 고려는 귀족사회였고, 모든 신분이 세습되었다. 심지어 군졸 노릇만 하는 집안, 아전과 서리를 배출하는 집안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일관 오윤부 일가는 귀족은 아니었으나, 일반 농민이나 상인보다는 훨씬 지위가 높았다. 오윤부는 용모가 초라했고 말수가 적었다. 여간해서는 좀체 웃지도 않았다. 그는 첫눈에 호감을 살 만큼 붙임성 있고 구변 좋은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문을 익혔다. 장성해서는 일관에 임용되어 여러 관직을 거친 뒤 판관후서사(判觀候署事)라는 고위직에 올랐다. 말년에는 천문도(天文圖)를 그려 왕에게 바쳤다. 후배 일관들이 그 천문도를 모범으로 삼았다니 그의 실력을 짐작할 만하다. 오윤부의 특기는 뭐니 뭐니 해도 별점이었다. 타고난 재주도 재주였지만 그는 무척 부지런했다. 밤을 새워가며 하늘을 수놓은 수 백 개의 별들을 샅샅이 살폈다. 날씨가 제아무리 춥거나 덥더라도 그는 늘 성실했다. 오윤부의 먼 후배 격인 조선시대 일관들은 5개 팀으로 나뉘어 하루 24시간 내내 하늘을 관측했다. 그들은 관측 대상을 23종으로 나눠 정상적인 현상과 비정상적인 것으로 구별했다. 해, 달, 흰무리, 지진, 혜성, 새별(新星) 그리고 28수로 요약되는 주요 별자리를 모두 점검했다. 일관들은 특히 새별과 흰무리 등의 모양, 정도, 자리, 바뀌는 모습을 낱낱이 기록해 ‘성변측후단자’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서운관지’) 이 보고서에 천체 약도가 첨부돼 날마다 임금님에게 제출됐다. 조선시대 일관들이 남긴 일지는 당시로선 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천문 보고서였다. 그 일부가 아직도 남아 천문 강국의 역사를 입증한다. 고려시대의 일관들은 그와 비슷한 활동을 했고 그것이 ‘고려사’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특히 오윤부는 이상한 천문 현상을 해석하는 데 뛰어났다. 어떤 별이 천준(天樽)을 범하자 “이번에 올 중국사신은 술꾼이다.” 고 예언했다. 천(天)은 중국, 준(樽)은 술통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또 어떤 별이 여림(女林)을 범하자, 중국 사신이 와서 소녀들(童女)을 데려갈 것이라며 걱정했다. 모두 사실로 드러났다. 이런 식의 해석이 현대인의 눈엔 너무 단순해 보일 수 있다. 하늘이 꼭 중국이어야 될 이유가 없다.‘여림’을 두고 공녀(貢女)하라는 것으로 해석할 까닭도 없다. 그러나 그 때는 원나라의 횡포가 가장 큰 문제였다. 오윤부는 그런 현실을 감안해 모든 천문현상을 풀이했다. 그의 별점은 잘 들어맞았고 소문이 원나라 황제의 귀에까지 들렸다. ●원형 민족주의자 오윤부 고려 후기에는 원의 수시력과 같은 중국역법이 수입되기도 했다. 오윤부는 그 방면에도 상당한 전문가였다. 그는 달력을 고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고려의 제일(祭日)을 중국과 비교했다. 고려에서는 봄가을의 가운데 달인 음력 2월과 8월의 마지막 무일(遠戊日)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으나, 중국에선 이미 오래 전부터 첫째 무일(近戊日)을 제삿날로 삼았음이 확인됐다. 오윤부는 조정에 건의해 중국의 예를 따르게 했다. 그러나 그가 항상 중국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긴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의미로 그는 고려인이었다. 충렬왕은 즉위 직후 선왕인 원종의 신위를 종묘에 모셨다. 새 위패를 선대왕들의 신위와 합설하기 위해 원종의 시책(諡冊 시호를 아뢸 때 쓴 글)을 올릴 차례가 되었다. 충렬왕후는 원나라 공주였는데, 왕비로서 그 행사에 참여하기로 돼 있었다. 마침 오윤부가 이 행사를 주관했다. 그는 난색을 표하며 공주의 참여를 가로막았다. 선대왕들의 신령이 계신 곳에 원나라 공주가 술잔을 올리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실 원나라는 과거 수십 년간 고려를 침략했기 때문에, 고려인들은 원을 미워했다. 오윤부는 이런 반원의식이 강했다. 원나라 공주는 종묘 제사에서 제외됐다. 많은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통쾌해 했다. 알려진 대로 원종 이후로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간섭이 더욱 노골화됐다. 고려국왕은 대대로 원나라 황실의 사위가 되었다. 왕은 죽어서도 원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시호에 표기해 “충○왕”이 되었다. 고려왕실에 시집온 원나라 공주의 위세는 때로 왕권을 능가하는 경우가 있었고, 오윤부는 이 점을 못마땅해 했다. 그는 천문 현상을 빙자해 공주를 압박했다.“천문을 살펴 보니 괴이한 현상이 자주 나타납니다. 요즘은 심한 가뭄까지 닥쳤습니다. 청컨대 궁궐을 짓거나 고치는 공사를 중지하고 덕을 닦으십시오. 그래야 재변이 멈춥니다.” 원나라 공주는 오윤부의 제지를 받자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원나라 공주에 대한 오윤부의 공격은 계속됐다. 공주는 고려에 시집온 뒤에도 여러 차례 본국을 오갔다. 그 때마다 막대한 비용이 국고에서 지출되었음은 물론이다. 그것도 감당하기 어려운 판인데 공주는 원나라로 여행을 떠날 때마다 자기가 없는 동안 궁궐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라고 지시했다. 언젠가 한 번은 재상들을 불러 모아 놓고 좋은 날을 택해 아예 새 궁궐을 지어 놓으라고 졸랐다. 다들 불평은 있었지만 드러내놓고 반대는 못했다. 이 때도 오윤부가 발 벗고 나섰다.“금년에 토목공사를 일으키면 임금님께 불리하므로, 신하인 저는 절대 택일을 못하겠습니다.” 원나라 공주는 분노에 치를 떨며 오윤부의 벼슬을 빼앗았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려 매로 때리려 했으나 마침 그 장면을 목격한 어느 재상이 애써 말리는 바람에 매 맞는 것만은 간신히 피했다. 그 일로 분이 안 풀린 공주는 오윤부를 왕에게 고자질했다. 왕은 공주의 청을 어기지 못해 오윤부를 매질하게 했다. 그는 매를 맞으며 이렇게 변명하였다.“날을 가리는 것은 흉(凶)을 피하고 길(吉)을 맞으려는 것입니다. 신하를 협박하여 억지로 가리게 한다면 차라리 가리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신은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임금님의 뜻에 아첨할 수가 없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궁궐을 짓는 공사가 겨우 시작됐는데, 화성이 달을 삼키는 변이가 일어났다. 왕은 반승(飯僧 스님들에게 밥을 공양함)을 실시해 이 문제를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다. 반승은 사소한 재앙이 예측될 때마다 되풀이된 고식적인 해결책이었다. 오윤부는 동료인 문창유와 함께 왕에게 간언을 바쳤다. 화성이 달을 삼키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다. 스님들에게 밥을 주고 부처님을 공양한다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런 값싼 보시를 그만 둬야 한다. 진정한 길은 불필요한 토목공사를 중지하는 것이다. 사실 그 말이 맞는 말이었다. 왕은 반대여론을 의식해 궁궐 짓는 일을 그만뒀다. ‘고려사’에 실린 전기 기록을 검토해 보면 오윤부의 간언은 전문분야인 천문에 구애되지 않았다. 시사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한 번은 오윤부가 전법총랑(典法摠郞 법률의 집행을 담당) 박인주에게 전법사의 사무가 자꾸 지연되는 까닭을 물었다. 원나라 공주의 명령과 임금님의 명령이 한없이 쏟아져,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왕과 공주는 각기 소송 사건에 비공식적으로 개입해 일처리를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오윤부는 이런 일이 자기 소관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따졌다. 이런 식으로 일관 오윤부는 가끔씩 왕과 의견충돌을 보였다. 그러나 원나라 공주에 대해 대들거나 비판하는 경우는 더욱 많았다. 그는 공주 보기를 마치 원나라 침략군을 대하듯 했던 것 같다. 오윤부는 일종의 원형(proto) 민족주의자였다. ●백성을 대변한 오윤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전혀 안 그럴 것 같지만 천문에는 변이가 많다. 그럴 때마다 오윤부는 이를 정밀하게 살펴 고려왕실의 미래 운명과 관련지었다. 그는 특히 고려백성의 편에서 국왕 내외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천문현상을 활용했다는 혐의가 있다. 천문에 이상이 있을 경우 과거의 일관들은 기도를 권하거나 굿을 하라는 권고를 주로 했다. 다분히 미신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오윤부는 달랐다. 그가 제시한 해결방법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정치적이었다.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백성의 원망이 없다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 두 곳에 파견한 왕지별감(王旨別監 왕의 특사)을 소환하고, 여러 곳에 설치된 공주식읍(公主食邑 원나라 공주에게 준 토지와 백성)을 폐지하면 되겠습니다.” 이런 권고를 듣자 왕은 한동안 망설였지만 마침내는 공주에게 줬던 식읍을 폐지하였다. 거기서 거둔 세금을 나라의 창고에 배속시켜 백관의 봉록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사실 원나라 공주는 왕을 졸라 각처에 농장을 마련해 호사가 극에 이르렀다. 그 뒷바라지를 하느라 수만 명의 백성들은 한숨을 짓고 있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오윤부는 백성들의 의사를 대변해 식읍의 혁파를 주장했다. 하늘뿐만 아니라 자연계의 변동도 오윤부는 마찬가지로 이용했다. 언젠가 한번은 궁궐 연못에 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산소부족이었든지 아니면 약물에 의한 중독이었을 것이다. 허옇게 배를 드러낸 채 물위로 떠오른 고기떼를 두고 오윤부는 충렬왕을 몰아쳤다.“갑술년(충렬왕 즉위년 1274)에 대궐 동편 못에서 이런 괴변이 일어났고 선왕이신 원종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청컨대 임금님께서는 덕을 닦으시고 스스로를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궁궐의 물고기가 죽든 살든 그것이 왕의 목숨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나 일관 오윤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칫하면 국왕이나 원나라 공주의 진노를 사게 될 거였지만 개의하지 않았다. 예언가 오윤부의 성공비결은 고려사회에 만연했던 반원적인 정서를 잘 이용했다는 점이다. 조정 대신들 가운데도 원나라의 정치노선에 반대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어찌 보면 충렬왕 역시 친원과 반원의 두 노선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했다. 그 틈을 비집고 오윤부는 한결 같이 자주노선을 지켰다. 그런 점에서 그는 묘청과 백수한의 후예였다. 그러나 오윤부는 묘청 등을 뛰어넘었다. 그는 일관으로서 하늘의 뜻을 왕에게 정확히 인식시켜야 될 임무가 있다고 확신했다. 만일에 왕이 자기의 ‘충언’을 듣지 않으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끝까지 졸라댈 정도였다. 오윤부의 해석은 유교의 재이론(災異論)에 가까웠다. 묘청 등이 불교적이고 무속적인 세계에 기울어 있었다면, 오윤부는 다가올 성리학 시대의 천문해석에 근접해 있었다는 말이다. 유교적인 천문예언가 오윤부의 고집불통에 충렬왕은 때로 두통을 일으켰다. ●충렬왕이 졌다! 왕은 오윤부를 골탕 먹일 생각까지도 했다. 원 나라 세조가 요동을 정벌하게 되었을 때다. 왕은 상국의 명령으로 마지못해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까지 나가게 됐다. 우선 유청신을 황제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그 때 오윤부가 별점을 쳤다.“아무 날 유청신이 반드시 돌아옵니다. 임금님께서는 요동까지 가실 필요 없이 말머리를 서울로 돌리게 되십니다.” 그러나 그 날이 됐는데도 유청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오윤부를 체포했다. 점괘가 틀렸으니 벌을 받으라 했다. 하지만 오윤부는 해가 아직 저물지 않았다며, 좀더 기다리자고 했다. 과연 얼마 안 있어 먼데서 먼지를 휘날리면서 달려오는 말 한 필이 있었다. 유청신이 타고 있었다. 예언이며 점이 설마 그렇게까지 용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천문현상은 그저 자연계의 변화를 알릴 뿐이다. 그것이 인간 세상에 복을 불러들일 리 만무하고 화를 초래할 수도 없다. 오윤부의 사고방식은 이런 현대적 인식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시대적 한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윤부는 늘 나라와 백성을 위해 천문을 살폈고, 그 때문에 민중은 그를 사랑했다. 신채호가 그를 가장 뛰어난 천문예언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그 때문이다. 다시 조선 정조 때 일어난 ‘정감록’ 사건으로 돌아간다. 이 사건의 공범인 평민 지식인 주형채도 오윤부처럼 별점을 보았다. 주형채는 말했다.“작년 섣달 초7일, 초8일, 초9일에 위성(危星), 실성(室星), 벽성(壁星) 앞에 20여 개의 별이 벽을 쌓고 늘어섰습니다. 그 속에 붉은 기운이 있었습니다. 장군성과 태백성이 서로 싸운 지 3일 만에 서로 1도(度) 거리로 떨어졌으며, 태백성이 어깨로 장군성을 떠밀어 여러 번 물러가고 나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정조,9년3월22일 신미) 주형채는 국가의 녹을 먹는 일관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윤부처럼 밤하늘의 별자리를 많이 알고 있었고 밤새워 별을 보았다. 별자리의 이동을 1도 2도로 따질 만큼 전문적인 지식을 갖췄다. 고려시대에는 오윤부 같은 특수 계층만 그런 지식을 독점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평민지식인들도 서적을 통해 공유하게 됐고, 그래서 주형채와 같은 평민도 직접 별을 바라보며 민중의 희망을 찾아 나섰다. 자유로운 지식은 곧 우리들의 희망이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서울이야기(23)] 도심의 열린 문화쉼터

    [서울이야기(23)] 도심의 열린 문화쉼터

    올 여름도 무더운 날의 연속이었다. 간혹 소나기가 더위를 식혀 주기도 했지만, 비가 그치자마자 무더위는 계속되었다. 한창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에 개장한 ‘서울숲’을 최근 방문했다. 햇살이 따가운 한낮의 공원에 의외로 놀이동산처럼 많은 시민들이 있었다. 언뜻 생각하기에 놀이동산과 공원이 비슷하게 인식되지만, 놀이동산에서는 각종 프로그램 및 놀이기구로 분주하게 순회하는 것이 상례이고, 공원에서는 자연 속에서 거닐거나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자연환경을 즐긴다. 한낮의 더운 날씨 탓이기도 하지만, 서울숲은 넓고 다양한 경관을 가지고 있어 자전거로 구경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자전거 전용도로를 따라 공원을 선회하다보니 바닥분수에서 물을 즐기는 어린이들, 스케이트 보드로 묘기를 부리는 청소년들, 자연체험학습을 하고 있는 단체, 시냇물처럼 조성된 곳에서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 공연준비로 분주한 사람들 등 예전의 도심공원에서 볼 수 없었던 모습들이었다.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노래방, 빨래방, 놀이방,PC방,DVD방, 찜질방,…. 또 아파트, 빌딩, 상가건물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도시는 수많은 방이 얽히고설킨 복잡한 집합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온라인 방까지 가세, 한국은 말 그대로 방의 도시다.” 2004년 제 9회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에서 한국관은 ‘방의 도시’(City of bAng)라는 작품으로 참가했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방’을 영어의 ‘room’과 차별시하여 한국의 고유명사로 정의하고 있다. 즉, 다양한 이름의 방들, 방들을 담고 있는 건축물이 일상에서 생겨나고 퍼지는 것을 특유한 한국적 상황으로 설명한 것이다. 한국전시를 총괄한 정기용씨도 “한국의 방을 모르면 한국 도시의 미래를 알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오늘날, 이런 방들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발견되며, 개인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지라도 이미 친숙한 공간이다. 노래방, 빨래방, 놀이방 등 복합어의 명칭으로도 알 수 있듯이 각각의 방들은 고유한 기능을 가진 공간이다. 이들 공간은 개별적이며, 외부공간과 무관하게 기능변화, 수평적, 수직적 조합이 무한히 가능하다. 작품처럼 방의 무한한 변용 및 조합, 디지털문화의 가능성으로 역동적인 한국 도시의 현주소와 미래를 전망할 수 있지만, 여전히 그 익명성과 폐쇄성에 대한 질문이 남아 있다. 유럽도시의 매력을 언급한다면, 역사적 기념비, 고풍스러운 건물, 미감이 있는 가로시설물 등 물리적 환경 이외에도 시민들의 생활상을 빼놓을 수 없다. 거리의 작은 카페에서 담화하는 사람들, 광장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음악연주를 하는 사람들 등 도시 곳곳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이 도시를 한층 더 아름답게 한다. 혹자는 이러한 외부경관이 기후적 조건으로, 생활방식의 차이로 동양도시에서 발달하지 못하는 것으로 설명하지만, 사실은 기능위주의 현대도시로 급성장하는 과정에서 상실된 것이다. 일본건축을 세계화하는 데 큰 공헌을 한 기쇼 구로카와(黑川記章)는 서양과 구별되는 동양적 공간을 ‘마루’와 같은 건물외부와 내부 간의 중간영역으로 여기고, 자연환경에 열린 전통공간의 가치를 지적하면서 도시에서 인간과 자연간의 공생관계를 회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동양도시는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자연과의 유대감을 상실했다. 동양도시는 본질적으로 주변의 자연환경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사상적으로 인간과 일원론적인 자연관을 지니고 있기에, 풍수지리설과 같은 자연과 합일된 구성을 도시이론으로 가지고 있다. 서울의 자연경관이 수려한 것도 이런 자연관과 도시이론에 기인하며, 시민들의 자연친화적인 생활은 당연한 귀결이다. 동양의 산수화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이 붓으로 일획을 긋는 듯한 기법의 신비함에도 그 이유가 있지만, 서양화처럼 투시도적 구도화가 아닌 자연에 자신의 감정을 인입하는 상상화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다시 말해 화가의 정신과 삶이 깃들어진 자연과의 대화가 작품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산업도시에서 문화도시로 서울이 새로이 변모하고 있다. 아니, 서울이 제 모습을 찾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산이 자신의 모습을 찾고, 청계천에 물이 다시 흐른다. 또한, 세운상가는 종묘에서 남산을 잇는 새로운 녹지축으로 바뀔 예정이고, 복개하천의 복원사업이 곳곳에서 추진 중에 있다. 서울의 생태성이 회복되고,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며, 도심에서의 생태관광이 언급된다. 한강시민공원, 선유도 공원, 월드컵 공원, 서울숲, 서울광장은 Hi Seoul Festival, 강변 물 축제, 좋은 영화 감상회 등의 각종 문화행사와 더불어 이미 시민들의 휴식처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시민 휴식처로서의 자연은 도시위생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인 행위를 유발한다. 이제 도시는 자연환경에 적극적으로 열린 시민공간을 제공하고자 변화할 것이다. 원활한 교통을 위해 주거지와 한강과의 관계를 절단했던 도로체계는 시민들의 용이한 접근을 위해 개편되고, 개인적인 조망에 중점을 두었던 아파트 개발은 강에서 바라보는 공공의 도시경관 측면으로 수정되려 한다. 도심광장은 권위주의적, 관료주의적 상징이 아닌 시민들의 쉼터가 되고 즐거움이 되면서 ‘문화서울가꾸기’에 동참한다. 비단 서울의 대표적인 공간이 아닐지라도 하천을 따라 조성된 산책길, 자전거길, 산과 습지대에서의 생태공원 등 생활주변의 자연환경이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시민들을 위해 열린다. 도시의 공간구조뿐만 아니라, 주5일 근무제 실시로 도시생활이 변화하고 있다. 매주 짧은 휴가를 맞이하게 된 격이라 자극적인 ‘밤의 문화’보다는 자연환경에서 여유로운 휴식을 취하는 ‘낮의 문화’가 선호될 것이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다가 간만에 갖게 된 짧은 휴식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자극적이고 일탈적이기 쉽다. 주5일 근무제 이전에 야간유흥업소가 더욱 성행했음을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충분한 휴식은 순간적인 쾌락보다는 지속적인 음미가 요구되고, 자신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가족과 공유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공공장소에서 다양한 여가활동이 활성화된다. 이젠 주말에 가족이 있는 사람에게 예기치 않은 전화를 하는 것조차 ‘센스’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서울이 산업도시에서 벗어나 문화도시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산업도시의 단계에서는 인원수에 시간을 곱하면 성과물이 양적으로 산출되지만, 문화도시에서는 물리적 측정이 불가능하다. 성과물의 양보다 질이 중시되고, 질은 문화의 성숙도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화가 성숙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문화적 체험이 선행되어야 한다. 문화체험이란 이례적인 일탈이 아니라, 일종의 여가활동처럼 일상의 연속이며, 일상생활 속에 배어난다. 문화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서울시의 노력만으로 부족하다. 시민들의 적극적이고 자연스러운 참여가 요구된다. 서울시는 문화도시를 위한 여건을 조성하고, 시민들은 ‘도시만들기’의 주체가 된다. 개인의 이익으로 인해 공공에 대하여 폐쇄적인 자세를 취하기보다는 공익이 개인의 이익이 될 수 있는 공동체의식과 방안이 필요하다. 문화도시의 성패는 개인의 능력으로 평가되기보다 총체적인 평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파리 센 강변의 카페가 개인의 명칭으로서가 아니라, 그 장소가 지니고 있는 분위기에 의미를 부여받고 있음을 상기할 수 있다. 또한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것에 대한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명품을 이식하고 늘 새롭게 단장하기보다는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웃과 공유하면서 가치를 키워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지금 한창 진행중인 서울시의 문화행사들은 문화도시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할 전제조건이 된다. 문화도시를 완성시키는 것은 시민의 몫이다. ●쉼터 나들이 파란 하늘, 짙은 녹음, 쾌적한 날씨, 어느덧 무더운 여름은 지나가고 완연한 가을이다. 멀리서 이색성을 찾기보다 주변에 있는 자연환경을 다시 둘러보고 계절을 만끽해보자. 가을정취를 느끼기에 한강시민공원의 코스모스 단지(이촌지구)나 메밀꽃 단지(양화지구)도 괜찮을 듯하다. 자전거를 타고 생태기행을 해도 좋다. 자전거 도로는 한강변뿐만 아니라 자연생태하천으로 복원된 안양천, 철새로 이름난 중랑천 등의 지천에도 연결돼 있다. 어린 자녀가 있다면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길동 자연생태공원에서 생태체험학습을 하거나, 올림픽공원 내의 몽촌토성, 아차산 생태공원에서 자연과 역사문화를 동시에 체험하기를 권한다. 작물재배를 직접 체험하고자 한다면, 서울외곽 곳곳에 있는 주말농장에서 ‘텃밭 가꾸기’를 할 수 있다. 도시의 가치가 물리적, 경제적으로 설명되기 전에 자연과 개인적인 관계를 지니는 산수화처럼 자신과의 교감으로 이해될 때, 어느덧 문화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백승만 서울시정개발연구원 도시계획설계부 부연구위원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8) 천문은 ‘정감록’의 기둥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8) 천문은 ‘정감록’의 기둥

    예언서 ‘정감록’을 한 채의 기와집에 비유하면, 정면 기둥은 풍수지리와 미륵신앙이 아닐까 한다. 얼핏 눈에 잘 띄진 않으나 집의 뒷면에도 기둥은 있는 법이다. 천문과 역법이 그에 해당하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풍수와 미륵에 대해선 그동안 제법 자주 이야기를 해온 셈이다. 하지만 천문과 역법에 관해선 따로 말할 기회가 없었다. 한꺼번에 많은 이야기를 다 털어놓자니 어려운 점이 적지 않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선 천문사상이 ‘정감록’에 남긴 흔적을 더듬어 보았으면 한다.‘정감록’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혜성이 진성(軫星) 머리에서 나타나 은하수로 들어간 뒤 다시 자미(紫微)를 범하고 두미(斗尾)로 옮았다가, 두성(斗星)을 거쳐 남두(南斗)에서 멈출 것이다. 그러면 대중화(大中華)와 소중화(小中華)가 일시에 멸망하리라.”(감결) 이것은 정감의 예언이다. 그는 여러 별자리에 괴변이 일어나면 중국(대중화)과 한국(소중화)이 동시에 망한다고 했다. 요모조모 ‘정감록’을 잘 뒤져보면 비슷한 내용이 자꾸 눈에 띈다.“진성(軫星) 머리에서 혜성이 나와 몇 달 동안 없어지지 않네. 그 뒤 별들이 남극(南極)에서 싸우고 흰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었네. 하늘 길이 한번 트이니 하늘 북이 두 번 울리네.”(삼도봉시) 조선건국의 주역 정도전이 지었다는 예언시의 일절이다. 실제로는 위작이 분명한데 이 시에 등장하는 천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좀더 새겨봐야겠다. 비록 그렇다 해도,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다. 하나만 더 예를 들어보자.“자미(紫微)에 저녁 무지개가 떴네. 다시 들러서 동쪽으로 나뉘니, 나라에 변괴가 있고, 상사가 참혹하네.”(경주이선생가장결) 역시 천문을 살펴 자미성에 이상한 징후가 일어날 경우 나라에 변괴가 있다고 예언하였다.‘정감록’에서 이와 엇비슷한 예언을 찾아내 일일이 언급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나라의 운명을 관장하는 별과 혜성 고대로부터 동아시아 사람들은 28수(宿)를 중시했다. 이것은 황도(皇道)에 가까운 별자리들이었다. 황도란 지구에서 태양의 운행괘도를 일년간 연속적으로 관찰할 때 하늘에 그려지는 하나의 원이다.28수는 황도의 동서남북에 각기 7개씩 배치돼 있다. 그 가운데서도 한국 사람들이 비교적 많은 관심을 표했던 별자리는 기성(箕星·궁수좌), 벽성(壁星·페가수스좌), 익성(翼星·바다뱀좌) 그리고 진성(軫星·까마귀좌)의 4개였다. 특히 진성에 대한 관심은 아주 유별났다. 이 별자리를 이른바 “청구칠성”이라 하여 청구 또는 한반도의 운명을 주관하는 것으로 보았다.‘정감록’에서도 진성의 머리에서 혜성이 나오면 나라가 망한다는 식으로 예언한 것은 그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 뿌리를 캐 보면 진성은 신라의 국운을 담당하는 별자리였다. 헌덕왕 7년(815)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단초를 발견한다. 그 해 서쪽 변방에 큰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그러자 도적 떼가 연달아 일어나 조정에서는 군대를 파견해 토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런 변고를 예언케 하는 천문 현상이 있었고 문제의 별이 등장한다.“큰 별이 익성과 진성 사이에서 나타나 서쪽을 향해 뻗어 갔다. 그 빛의 길이가 여섯 자쯤 되고 너비가 두 치나 되었다.”고 하는 기록이 그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큰 별은 혜성이다. 만일 아니라면 별의 길이와 너비가 그처럼 컸을 턱이 없다. 혜성이 서쪽으로 움직여 가자 천문을 담당하는 신라의 관리들은 반란의 진원지가 서쪽임을 알게 되었다. 하필 혜성이 익성과 진성 사이에서 시작된 것은 두 별자리가 28수 가운데 서로 이웃해 있기 때문이다. 익성과 진성은 이른바 남방주작(南方朱雀)에 해당한다. 황도의 남쪽에 있어서 그런 명칭이 붙었다. 방금 말한 두 개의 별자리 말고도 정(井), 귀(鬼), 유(柳), 성(星), 장(張)의 다섯 별자리가 더 있다. 통일신라 이후 한반도의 운명은 진성에 달린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엔 사정이 달랐다. 고구려의 운명은 서쪽 하늘의 별들이 맡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중국 측의 역사기록에 나와 있다. 고구려 보장왕 27년(668) 4월, 필(畢)과 묘(昴) 사이에서 혜성이 관측되었다. 그러자 허경종(許敬宗)이 보고하기를,“혜성이 거기 나타난 것은 고구려가 장차 멸망할 징조입니다.”(‘삼국사기’, 권 22)라고 하여 당 태종을 기쁘게 하였다. 허경종은 천문에 능한 당나라 관리였다. 그 역시 ‘정감록’이나 ‘삼국사기’와 똑같은 방식을 써서 고구려의 비참한 종말을 예언했다. 필성과 묘성은 모두 황도 서쪽의 별자리들이다. 묘성(황소자리)은 누(婁) 및 위(胃)와 더불어 호랑이 새끼 3마리로 여겨졌고, 필성(오리온자리)은 호랑이의 입으로 이해되었다.‘정감록’을 전파한 조선후기의 술사들은 되도록이면 고구려의 전통을 따르고자 했다. 그런 그들도 고구려의 별인 백호를 저버리고 주작(진성)을 국운의 상징으로 간주했다. 통일신라 이후 천년 동안 내리 지속돼 온 전통의 무게를 감당하기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미, 남북두성, 그리고 남극성에 숨은 뜻 변란을 알리는 혜성은 ‘정감록’에 객성(客星) 또는 요성(妖星)으로 나온다. 혜성은 때로 자미를 침범하거나 북두칠성, 남두육성도 쳐들어간다. 심지어 남극성을 유린하기까지도 한다. 이들 별자리는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 자미는 이른바 북쪽 하늘을 셋으로 쪼갰을 때 그 가운데 하나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태미(太微), 천시(賤視) 및 자미를 삼원이라고 했다. 달리 말해, 자미는 북두칠성의 북쪽에 위치한 별로 천자 또는 임금의 운명을 관장하는 별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일찌감치 백제 기루왕 9년(85) 4월에 이미 객성이 자미를 침범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왕위를 찬탈하려는 시도가 있으리라는 예언이었다.‘정감록’은 18세기에야 등장했다고 할 때, 최소한 그보다 1600년이나 앞서 반역에 관한 천문예언이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밤하늘을 수놓은 숱한 별자리 가운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다 아는 것이 북두칠성(北斗七星)이다. 그 반대편인 남쪽 하늘엔 남두육성(南斗六星·궁수좌)이 있다. 이 별들은 상징하는 바가 다르다.7성은 죽음을 관장하는 별로 먼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섬겨왔다. 그에 비해 6성은 삶의 세계를 맡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오늘날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6성은 서양식 명칭으로는 궁수좌인데,28수의 하나인 기성과 중복되기도 한다. 그 옛날 고구려 사람들은 별자리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고구려 고분벽화들을 보더라도 틀림없이 그랬다. 지금까지 모두 22개나 되는 고분에서 다양한 별자리 그림들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도 북두칠성은 19개의 고분에 등장하고 있으며, 남두육성 역시 최소한 10군데서 확인되었다.6성이 발견된 고분벽화에는 7성이 어김없이 짝을 이뤄 나타난다. 고구려인들은 두 별자리를 함께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요컨대, 생과 사를 주관하는 별자리가 6성과 7성이었다. 그런데 혜성이 그 별들을 모두 침입한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전란, 굶주림, 또는 질병으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될 조짐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정감록’은 한국 고대의 천문 전통에서 이런 예언 방식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기성(箕星)이 희어질 무렵 피가 흘러 절구공이가 떠내려가고, 천리가 한 책상이 되니 갑옷에 두 뿔이 나는구나.”(정북창비결)라는 구절이 있다. 남두육성으로 볼 수도 있는 기성은 태풍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이 별자리가 풍해를 막아준다며 받들기도 한다. 최근 미국 남부지방을 강타한 허리케인도 기성과 연관해 생각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피가 강물을 이뤄 민가의 절구공이가 떠내려갈 지경이라면 단순히 자연재해로 간주하기 어렵다. 전란의 피해로 봐야 옳을 것도 같다. 인용문의 뒷부분에 갑옷이 등장한 점으로 볼 때 더욱 그렇다. 흉조라는 점에선 남극성(노인성이라고도 함)을 당해낼 별이 없다. 통일신라의 마지막 왕이던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기로 결심한 것도 남극성을 보았기 때문이라 한다. 경순왕 8년(934) 9월 그 별이 나타나자 왕은 고심했고, 이듬해 10월 마침내 항복문서를 바쳤다.(‘삼국사기’ 권 12) 때로 남극성은 태평성대의 상징으로 풀이된다. 남극성이 빛을 발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그렇게 긍정적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더구나 ‘정감록’에서 보듯 혜성이 남극성을 침범하는 경우라면 기성 왕조가 완전히 붕괴되고 만다는 예언으로 풀이된다. 혜성뿐만 아니라 무지개가 별을 꿰뚫을 경우도 흉조로 해석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백홍(白虹·흰 무지개)이 해를 꿰뚫고 지나간다는 예언이다. 이것은 국왕이 바뀔 징조로 여겨졌다. 예컨대 고려 현종 5년(1013)에도 “흰 무지개가 관일(貫日)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오는데,‘정감록’에도 유사한 표현이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오성의 변괴 이밖에도 ‘정감록’엔 오성 즉, 목성, 화성, 금성, 수성 및 토성의 변화에 대한 언급이 제법 많다. 물론 국가의 운명이 그와 직결된다는 전제 아래 끔찍한 예언이 도처에 숨겨져 있다. 우리 역사를 잘 살펴보면 오성은 사실 고대로부터 큰 관심거리였다. 고구려 차대왕 4년(149) 5월에 이런 일이 있었다. 오성이 동쪽하늘에 모였다. 목성(세성 歲星), 화성(형혹 熒惑), 금성(태백 太白), 수성(진성 辰星) 및 토성(진성 鎭星)이 한자리에 늘어선다는 것은 정말 희귀한 일이지만, 그것은 실상 흉조였다. 그러나 담당관리인 일자(日者)는 왕이 화낼까 걱정돼 거짓말로 둘러댔다.“이는 임금님의 덕이요, 나라의 복을 뜻합니다.” 왕은 그 말에 만족하였다.(‘삼국사기’ 권 15) 고구려는 일찍부터 천문이 발달한 나라였다. 고분벽화마다 별자리를 그려놓을 정도였으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미 국초부터 조정에 천문을 담당하는 특수 직책이 설치돼, 별을 보고 국운을 점치는 관리가 존재했다. 오성에 관한 예화에서 보듯 가끔은 담당관리가 국왕을 속이는 일도 있었다. 예언이라면 고려나 조선시대처럼 풍수가 아니라 천문이 근간을 이뤘다. 그런데 오성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길조로 해석될 때도 있었다. 고려 인종 10년(1132) 11월 동짓날, 오성은 물론 해와 달까지, 그러니까 칠요(七曜)가 정북방향에 모여들었다. 인종은 이 같은 길조가 예언서에 이미 예고돼 있다며, 국정을 일신할 중요한 계기로 삼겠다는 뜻을 밝혔다.(‘고려사’ 권 16) 칠요가 한 곳에 모이는 것은 신라 때부터도 길한 징조로 받아들여졌다.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은 칠요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기 때문에, 등에 칠성을 뜻하는 점이 있었다 한다. 영웅이 될 기상을 가진 그에게는 어려서부터 기이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삼국유사’) 본래 칠요란 개념은 서양 고대에 있었던 것이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별의 신들이 인간세상을 관장한다고 보았다. 성신(星辰) 신앙이라고 할 만하다. 별의 신들은 전쟁, 흉년, 지진, 가뭄과 홍수를 마음대로 하며, 모든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어졌다. 특히 행성인 오성과 해와 달을 합한 칠요는 더욱 중요시 됐다. 칠요의 신들은 시공을 뛰어넘어 모든 인간사를 맡아본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칠요신앙은 실크로드를 따라 동양에도 전파된 것 같다. 김유신이 태어난 7세기에는 한국에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한국 고대에 칠요신 특히 그 가운데서도 오성의 신들이 열렬한 신앙대상이 돼 있었다는 점은 다른 역사기록에서도 확인된다. 태봉의 발풍사란 사찰에는 석가여래상 앞쪽에 토성(塡星 또는 鎭星)의 신을 새긴 조각이 봉안돼 있었다 한다.(‘고려사’ 권 1) 궁예 왕은 토성의 신을 예언서 ‘고경참’의 저자로 믿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오성과 칠요의 신은 한국 민중의 뇌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잔영은 ‘정감록’에 여전히 남아 있다.“계축년에 세성(歲星·목성)이 바다에 잠기니 왕자가 섬으로 도망친다.”(오백론사)라고 했다. 목성은 천문학상 매우 중요한 별이다. 그 공전궤도를 12등분해 목성이 처한 위치에 따라 한 해의 이름을 다르게 불렀을 정도다. 이를 세성기년법(歲星紀年法)이라 하는데, 목성에 일어난 자그만 변화도 개인이나 국가의 운명을 뒤바꾸는 징조로 이해됐다. 화성의 변화도 중요한 조짐으로 받아들여졌다. 고려 때 달이 형혹성(熒惑星·화성)을 침범하자 일관(日官)은 “귀인이 죽을 것입니다.” 라고 풀이하였다. 최근 발견된 ‘송하비결’에도 화성에 관한 예언이 실려 있다.“형혹성이 기성을 범하리니 북쪽 문에서 천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누런 용이 여의주를 얻으리라.” 혹자는 화성이 목성을 침범했으므로 한반도엔 전쟁에 버금갈 만한 큰 변고가 일어난다고 풀이하기도 했다. 화성은 화란 또는 전쟁의 징후를 알려주는 별이고, 목성은 가득차거나 이지러지거나 또는 변화가 멈춘 현상을 보여주는 별이라서 그렇다 한다. 목성은 나라의 명운을 예고하기에 적합한 별이라는 것이다. 이런 목성을 화성이 쳐들어갔다는 것은 나라에 병란이 일어난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마련이다. 여기서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정감록’엔 금성과 수성에 관계되는 흉한 예언도 많은 편이다.‘삼국사기’를 비롯한 역사기록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일 차이가 있다면 역사에는 오성의 길조가 꽤 많이 언급됐다는 사실이다. ●복성이란 존재 ‘정감록’에도 천문에 관한 예언이 길조로 나타난 경우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면,“산의 동쪽과 삼남(三南)에 복성(福星)이 두루 비친다.”(서계이선생가장결)라고 한 대목이다. 복성은 녹성(祿星) 및 수성(壽星)과 더불어 삼성이라 일컬어진다. 보통은 북두칠성의 왕별인 무곡성을 복성으로 믿고 있다. 조선후기의 유명한 고소설인 ‘토끼전’에선 복덕성(福德星)으로 간주해 목성으로 본다. 복성에 관해 한 가지 재밌는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 때 변도탄이라는 선비가 살았는데, 그는 천문에 밝았다. 군량미를 관리하는 관원으로 일하던 중 어느 날 우연히 천기를 보았더니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역력했다. 그는 국난에 대비해야 된다고 상소했으나, 인심을 흉하게 만든다며 도리어 관직만 빼앗겼다. 변 선비는 낙향을 결심했는데 어느 날 밤 복성(福星)이 남쪽으로 밝은 빛을 내뿜는 것을 보았다. 그는 평소 저장했던 양식을 소달구지에 싣고 복성의 빛을 따라 발길을 재촉했다. 그러기를 여러 날 동안 하다 전북 장수군 번암면의 한 골짜기에 도착했다. 복성의 인도를 따른 것이다. 과연 얼마 안 되어 왜적이 침입해 온 나라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변 선비가 터를 잡은 곳은 아무 일도 없었다. 7년에 걸친 전쟁이 끝나자 조정에서는 미리 앞을 내다 본 변 선비의 뛰어난 지혜와 충성심에 감탄해 상을 내려주었다. 그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침내 복성(福星)마을을 이루게 됐다 한다. 복성을 따라 피난처를 구했다는 전설이나 복성을 보고 길지를 찾을 수 있다 한 ‘정감록’ 예언은 ‘성경’에 나오는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를 연상하게 만든다. 그들 역시 별빛의 인도로 먼 길을 걸어 아기 예수에게 경배할 수 있었다 했기 때문이다. 이제 도시의 하늘에선 더 이상 별빛을 보기 어렵다. 별을 봤댔자 어느 별이 어느 별인지 구별도 못할 만큼 현대인들은 천문에서 멀어졌다. 별은 더 이상 우리의 현재도 미래도 아니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占 즐기는 일본인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占 즐기는 일본인

    일본의 ‘경로의 날’ 휴일인 지난 19일 오후 도쿄 이케부쿠로의 세이부백화점 7층에 있는 5개의 점(占)집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여성 고객들의 모습은 이채로웠다. 긴자·신주쿠 등 번화가에서는 때론 수십명의 거리점술가인 ‘가이센(街占)’이 손님들을 맞는다. 늦은 밤 시장통에서도 거리의 역술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점집들은 주택가에도 산재한다. 점은 일본인들의 일상생활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도쿄 이춘규특파원|계층을 떠나 점을 즐기는 사람들. 점치기는 일본인들의 생활이다. 새해 첫날 주변의 신사를 찾아 참배를 한 뒤에는 일년 점을 친다. 대형 서점에 가면 대부분 점 관련 전문서적 코너가 마련돼 있고, 베스트셀러도 많다.TV방송들은 아침 출근시간 전 하루 운세를 다투어 방송한다. 민영방송의 점술 관련 프로그램들은 시청률 1위일 정도로 유행이다. ●점치기로 새해를 맞는 일본인들 일본 당국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인의 3분의2 정도가 새해 연휴에 신사를 찾아 참배한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100엔 정도를 내고 ‘오미쿠지’라는 것을 산다. 거기에는 1년이나 평생운수가 깨알 같은 글씨로 적혀 있다. 대부분 “말년 운이 좋다.”는 등의 덕담들이 담겨 있다. 신사참배는 휴가 때나 여유가 생기면 한다. 그때마다 점을 친다. 점치기는 일상생활에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도쿄 동부의 이바라키현 쓰쿠바산 정상 부근에 ‘솥바위’라는 것이 있다. 그 바위의 벌어진 틈에 돌을 던져 들어가면 운수가 좋다는 말이 퍼지면서 산을 찾는 사람들 사이에 인기다. 이케부쿠로 세이부백화점에 점집들이 입주해 있는 것도 이채롭다.7층의 점집들에는 연간 1만 5000여명의 시민들이 점을 치러 온다고 한다. 점 보기가 붐을 이루자 최근 이 백화점에는 또 다른 ‘점코너’가 생겼다. 도쿄 시내 주택가에 가면 어디서든 쉽게 ‘占’이라는 간판들을 볼 수 있다. ●유명한 점술사들은 사회 저명인사 요즘 일본의 최고 유명인사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아니고, 점술가 호소키 가즈코(67·여)라는 말이 있다.TBS의 화요일 황금시간대 등 여러 민방에서 그녀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이 요즘 인기 절정이다. 그렇다 보니 방송사들간 ‘호소키 모시기’ 경쟁이 뜨겁다. 그녀는 방송에 출연, 유명인사 등의 점을 현장에서 봐준다. 그녀가 의상비로만 2억엔 이상을 지출한다는 얘기도 있다. 출연만 했다 하면 시청률이 급상승하고, 방송에 입고 나온 옷은 순식간에 유행한다고 한다. 서점에서도 호소키 열풍은 대단하다. 대형 서점 입구에는 내년도 운세를 알리는 호소키의 각종 저서와 큼지막한 사진이 걸려 있다. 그녀의 무료 점보기 사이트도 대인기다. 관련 웹사이트만도 수만개다. 이처럼 인기를 끌면서 “호소키가 지나치게 상업적인 점보기를 유행시킨다.”는 우려도 있다. ‘신주쿠의 대모’로 유명한 구리하라 스미코(75)는 지난 48년간 신주쿠의 유명 백화점 옆에 있는 점집에서 무려 250만명의 점을 봐준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녀의 점은 ‘심리카운셀링’ 효험이 큰 것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방송에서도 인기다. 지금도 하루 8시간 ‘영업’을 하는 그녀는 20대 중반에 젖먹이 외아들을 친정에 놔두고 상경, 점쟁이가 된 것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점을 봐주고 있어 효험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점 배우기 열풍 도쿄 시내에는 많은 역술 학원들이 있다. 도쿄역점학원의 경우 기학(氣學)·역학(易學) 기초과정 12회 수강에 입학금이 3만엔, 수강료 4만 950엔, 교재료 5250엔, 친목회 교류비 6000엔 등 모두 8만 2200엔(약 82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이 들지만 인기가 높다. 중등·고등·전공과로 이어지고 통신코스도 개설돼 있다. TA라고 밝힌 42세의 여성은 현재는 취미로 점술을 배우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서양철학보다는 동양철학에 관심이 있었고, 동양철학을 배우는 일환으로 일하는 틈틈이 학원에 다닌 것이 벌써 3년6개월이다. 앞으로도 계속 학원에 다닐 생각이며, 언제든지 점술사가 될 수 있다는 매력에 푹 빠져 있다고 말했다. 학원에 다닌 뒤 직업점술가로 나선 경우도 많다. 이 학원의 주임교사 하세가와 료세이(56)는 출판사에 다니면서 10년간 밤시간에 역술학원에 다녔다. 사주팔자와 풍수에 강하다. 지금부터 십수년 전 역술인으로 전업, 강의도 하고 학원과 집에서 점도 친다. 개업운 등 그에게 점을 보려면 1시간에 3만엔을 내야 한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설명이다. 외교문제도 점을 친다고 말했다. 한국 역술인과도 교류가 깊다. ●요즘은 그저 점을 즐긴다 일본인들은 점에 관대하다. 전직 회사원 와시모리(55)는 과거에는 일본인들이 사업이나 금전운 등을 점치는 점보기가 성행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저 즐기는 점이 유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젊은이들은 심심풀이로 점을 즐긴다고 했다. 회사원 다카하시(39)도 새해 초 신사에 가서 오미쿠지로 그해 운수를 점치는 정도다. 실제 그가 점을 보기 위해 역술가를 찾은 경우는 없다. 주변 사람들도 비슷하다고 한다. 고독한 현대인들이 익명성이 보장되는 역술가를 찾아가 심리상담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전했다. 이들의 말처럼 대형서점에 가면 알코올·도박, 담배·마약 등의 중독이나 의존증에 대한 연구서적은 많지만 점 의존증에 대한 연구서적은 찾기가 어려웠다. 대신 점을 즐기는 방법에 관한 책들만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점의 부작용이 크지 않다는 방증도 된다. 한 여론조사에서 일본인 여성 75.6%, 남성의 56.5%가 점 보기에 관심이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직접 점을 본 응답자 중 70% 이상이 점이 맞지 않았다거나, 점으로 도움을 받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결과에는 신경쓰지 않고, 즐길 뿐이라고 덧붙였다. taein@seoul.co.kr ■ 도쿄 역점학원 야가키 기누코 대표|도쿄 이춘규특파원|다양한 점술을 가르치는 도쿄역점(易占)학원 대표 야시키 기누코는 “일본인들은 기본적으로 점 보기를 즐긴다. 하지만 사회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다.”고 말했다. ▶이 학원에서는 무얼 가르치나. -역학, 관상학, 풍수지리, 사주팔자, 인상학, 수상(手相)학, 성명학은 물론 서양 점성학도 가르친다.27년째 이곳에서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학생은 몇 명이고, 어떤 사람들인가. -학생 수는 300여명이다. 매우 다양하다. 가정주부, 술집주인, 증권사 임원, 대학 교수도 있다. 초보자가 많지만 6년 이상 다닌 사람도 있다. 오전에는 주부들이, 밤에는 직장인들이 주로 배운다. 낮에는 프리랜서들이 많다. 미국에 유학한 주부(30대 초반)가 미국에 돌아가 역술가로 활동하기 위해 배우기도 한다. ▶어느 정도가 직업 역술가로 나서나. -20∼30%가 직업 역술가가 된다. 취미로 하는 사람도 많다. 프로로 전향해도 성공 확률은 낮고, 매달 20만∼30만엔 벌기가 힘들다. ▶일본내에 이런 학원은 많은가. -도쿄시내에만도 큰 학원이 많다. 거대 언론사 문화센터에 역술 강의가 있는가 하면 자택에서 개인 교습도 열린다. 학원에 따라 신용도 차이가 나 학원이나 선생들의 책임의식이 매우 높다. ▶일본인의 점에 대한 생각은. -기본적으로 즐긴다. 점괘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심리상담 수준으로 생각한다. 사회적 문제까지는 아니다. 이성·가족·친구·회사 동료관계 등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심리적 안정을 위해 점을 친다. 신앙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 점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인의 종교관과도 연관이 있다. ▶점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 때문에 생기는 문제는 없나. -그 정도는 없다. 예를 들어 몇년 뒤에 집을 살지, 돈을 어떻게 버는지 등 지나치게 상업적인 것은 가르치지 못하게 한다. 그런 것을 가르친다는 소문이 나면 학원은 망한다.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호소키류의 점교육은 시키지 않는다. ▶그럼 심리치료 기능을 하나. -과거에는 돈을 번다든가, 집을 산다든가, 개업 등의 운을 점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요즘은 심리상담 기능으로 바뀌고 있다. 따라서 이런 경우는 비용도 싸다. 복채는 대개 건당 1000엔이며, 보통 15∼20분간 건강과 운세 등 3건 정도의 점을 치고 3000엔을 지불한다. ▶장기불황 뒤 점 보는 남성들이 늘었나. -학원생 10명 중 2명 정도가 남성이다(실제 한 강의의 경우 학생 11명 중 2명이 남성). 구조조정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점을 보러 다니거나, 이런저런 문제로 역술학원에 다닌다. 직장에 다니며 장래에 대비하는 남성들도 있다. 새 일에 도전하고, 정보교환도 하기 위해 학원에 다니기도 한다. ▶언제부터 점이 대유행하고 있나. -주기가 있다. 지금이 대유행의 절정기다. 휴대전화 점이나 인터넷 점이 생기면서 점이 더 유행을 타는 것 같다.(야후재팬 등의 점 보기는 매출이 전년 대비 4∼5배 급신장 중이다.)왕씨 성의 중국인도 점을 배우고 있으며, 서양 사람도 외국에서 (일본어로) 전화를 걸어와 점을 보는 경우도 있다. taein@seoul.co.kr
  • [토요일 아침에] ‘결실의 땅’ 한반도/최미숙 증산도 부산당리도장 수호사

    며칠 전 태풍 나비가 한반도 동남 해안을 쓸고 지나갔다. 다행히 한반도를 바로 덮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위력이 대단했었다. 일본의 피해는 컸다고 하는데 이웃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일본은 우리에게 잔인하고도 잦은 침략을 일삼아 왔지만, 공교롭게도 자연재해에 있어서는 방풍림처럼 우리를 막아 온 것도 사실이다. 풍수지리에서 혈(穴)이 되는 자리는 모름지기 좌로는 청룡, 우로는 백호를 끼게 되어 있다. 이때 백호는 만첩백호(萬疊白虎)라 하여 그 산맥이 첩첩이 겹쳐질수록 좋은 상이고, 청룡은 비상청룡(飛翔靑龍)이라 하여 쭉 뻗어나가는 것을 좋은 지세로 본다. 우리나라는 좌로는 일본열도가 비상청룡의 상을 취하여 쭉 뻗어 한반도를 감싸고, 우로는 중국과 동남아시아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만첩백호가 우리나라에 마치 순복(順伏)하듯 옹위하고 있다. 따라서 태평양 일원에서 시작되는 태풍이 북상하여 올라 온다고 하더라도 중국 타이완 일본에 의해 꺾여, 한반도를 바로 타격하는 태풍은 그리 많지 않은 연유도 그런 까닭이다. 동북아시아 끝자락에 매달린 이 한 많고 작은 땅덩어리가 어떤 역활이 있길래 국제적 이목을 집중시키고 풍수지리적으로도 천혜의 요새로써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일까? 역학으로 한반도의 방위는 간(艮)에 배속된다. 간방이란 동북방(東北方)을 말한다. 또한 간은 열매를 뜻하기도 한다. 즉 한반도는 동북방의 결실의 땅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 인류의 발상지로 지목되는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에서 시작된 우리 선조는 고향을 등지고 신령스러운 간방의 땅 한반도로 장구한 시간 이동하여 한과 시련 속에서도 오늘의 문명의 꽃을 피워왔다. 위로는 백두산의 천지로부터 아래로는 한라산의 백록의 영산정기가 한반도를 보호하여 왔고, 그 중간에 위치한 강화도 마니산은 단군시대부터 천상의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던 곳이다. 그뿐인가. 백두대간의 줄기에서 결인(結咽)된 세계의 공원, 금강산 1만 2000봉의 영기는 신비로움을 넘어서서 영험스럽기까지하다. 중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던 시황제가 불로초를 찾아 동남동녀 500인을 보냈던 동방의 신선의 나라 조선. 광명을 숭상하여 눈처럼 흰 옷을 즐겨 입었던 백의의 나라. 이웃이 서로 정을 나누며 한 가족처럼 살았지만, 국난에 이르러서는 선비와 승려, 아낙과 노인 할 것 없이 모두 분연히 일어서 지켜온 나라였다. 며칠 전 정말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너무도 비극적인 참사가 빚어지고 있는 미국 뉴올리언스에 우리 동포들의 눈물겨운 사랑의 나눔이 그것이다. 어느 민족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정. 내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고 서로를 돌봐주는 봉사정신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종교와 국경을 초월해서 면면히 이어져 오는 우리네 민족정신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캐나다의 어느 교과서에는 국가 표시도 되어 있지 않고 주변 강국의 역학관계로 분단되고 왜곡돼 현재는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한반도. 이런 우리에게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를 필자에게 묻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둔 밤이 지나면 반드시 밝은 아침이 오는 것처럼 밝고 희망차다고 말하겠다. 공자는 설괘전에서 간(艮)을 만물지소성종이소성시야(萬物之所成終而所成始也)라 하였다. 모름지기 만물은 간(艮)에서 매듭을 짓고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열매가 한철의 수확을 마무리함과 동시에 다음철 파종을 대비하는 이치와 같이.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정신에는 가히 지금까지의 문명을 매듭짓고 다가올 후천의 새 문명을 열어갈 저력이 도도한 강물처럼 흐르고 있음을 확신한다. 최미숙 증산도 부산당리도장 수호사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5) 고대의 비결 ‘고경참’은 ‘정감록’의 모태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5) 고대의 비결 ‘고경참’은 ‘정감록’의 모태

    서기 10세기경이 되자 천년을 버텨온 신라 왕조도 명이 다했던지 온갖 문제가 터져 나왔다. 국정은 기강을 잃었고 각지에는 호족들이 들고 일어나 국토가 분할되었다. 생산에 종사하던 대다수 민중의 마음도 신라 왕조를 저버렸다. 한반도는 수습하기 어려운 총체적 위기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이때 지방에서 봉기한 여러 영웅호걸들 가운데 두 사람이 두각을 나타냈다. 북쪽에 태봉을 세운 궁예와 남서쪽에 자리한 후백제의 견훤이었다. 시국이 어지러웠던 만큼 여러 종류의 예언이 난무했다. 당시만 해도 예언의 힘은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강했다. 특히 918년 봄, 궁예의 조정에 보고된 ‘고경참’은 태봉의 신하 왕건이 고려라는 새 왕조를 건립하는데 추동력으로 이용할 정도였다. 우리 역사에 ‘고경참’(古鏡讖)이란 예언서가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등극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하는데, 왕조교체를 예언하는 전통의 시작이었다. 이런 전통은 조선 후기에 등장한 ‘정감록’까지 죽 계속되었다. ‘고경참’은 두 권의 역사책에 실려 있다.‘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나오는데 ‘고려사’의 기록이 훨씬 더 충실하다. 이 예언서는 우선 발견된 경위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중국 당나라의 상인 왕창근(王昌瑾)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철원에 와서 상업에 종사했는데, 정명4년(918) 3월 철원 시장에서 기이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얼굴이 매우 잘 생겼고 수염이며 머리카락이 온통 새하얗다. 승복 차림에 옛날 관을 썼으며 고대의 복장을 하였다. 노인은 왼손에 세 개의 도마를 들었는데, 오른 손에는 사방 한 자쯤 되는 낡은 거울 하나를 높이 들고 있었다.(‘삼국사기’에는 노인이 왼손에 사발을, 오른 손에는 거울을 들고 있었다고 했다.) 그 이상한 노인이 중국인 왕창근에게 “내 거울을 사겠는가?”라고 물어왔다. 왕창근이 쌀 두 말을 주고 얼른 그 거울을 샀다. 그러자 노인은 쌀을 길가에 있던 거지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급히 사라졌다. 왕창근은 신비한 그 거울을 자기 가게의 벽에 걸어두었다. 잠시 후 햇빛이 거울에 비치자 거울에 쓰인 작은 글씨가 은은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왕창근은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거울을 가져다 궁예 왕에게 바쳤다. 궁예로 말하면 당시 한반도의 최강자 가운데 하나였다. 궁예 왕은 담당 관리에게 명령해 왕창근을 데리고 그 노인의 행방을 찾아보게 하였다. 그들은 한 달이 넘도록 노인을 찾아 헤맸으나 끝내 알아내지 못하였다. 이 때 동주(東州)의 발풍사란 절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절엔 여래상의 앞에 전성(塡星 또는 鎭星이라 함)의 신을 본뜬 오래된 조각이 있었다. 우연히도 그 모습이 문제의 노인과 같았다. 전성의 신 역시 왼손엔 도마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거울을 들고 있었다. 영락없는 그 노인이었다. 왕창근은 기뻐하며 궁예 왕에게 이런 사실을 그대로 알렸다. 궁예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신기하게 여겼다. 기대에 들뜬 궁예는 거울속의 예언이 궁금해졌다. 왕은 휘하의 담당 관리들에게 해석을 부탁했다. 술관들이 풀어 보니 천만 뜻밖에도 ‘고경참’의 내용은 궁예 왕의 부하 왕건이 등극해 삼국을 통일한다는 예언이었다. 술관들은 만약 사실대로 왕에게 보고할 경우 살아남기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이 예언서의 등장을 계기로 왕건의 추종자들은 쿠데타를 서둘렀다.“왕창근이 얻은 예언서가 그와 같은데 왜 가만히 앉아 있다 못된 궁예 왕의 손에 죽으려고 하십니까?” 이 말을 듣고 마침내 왕건은 혁명의 칼을 뽑았다 한다. ●고경참의 내용은 영웅 일대기 같아 ‘고경참’의 내용을 좀더 정확히 알아보자.‘고려사’에 한문으로 적힌 그 내용을 우리말로 풀어 보면 무슨 뜻인지 알쏭달쏭한 대목이 적지 않다. 영웅의 일대기와도 같은 ‘고경참’의 내용을 주제별로 나눠보면 이렇다. 1. 영웅의 하강을 읊은 부분이 눈에 띈다.“삼수 중 사유(四維)로 내려간다.(三水中四維下) 상제가 아들을 진(辰)과 마(馬)에 내려 보내는 것이다.(上帝降子於辰馬)” 그런데 그 영웅이 누구인지를 알아보기는 어렵다고 했다.“자취를 어지럽히고 성명을 감추리라.(混跡遁名姓) 뉘라서 진(眞)과 성(聖)을 알까.(誰知眞與聖)”라고 말한 것은 그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뱀해에 두용이 나타난다.(於巳年中二龍見)”고 말해 영웅의 출현 시기는 밝혀졌다. 문제는 출현할 영웅이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란 점이다.“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리라.(一則藏身靑木中) 다른 하나는 검은 금(金) 동쪽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一則現形黑金東)” 그렇더라도 두 명의 영웅 가운데 마지막 승자는 한 사람이다. 그에 대해 “한 용은 성하고 다른 용은 쇠하리라.(或見盛或視衰)”라고 했다. 2. 영웅의 특별한 능력이 서술되어 있다.“밤이면 하늘에 오르고 낮이면 땅을 다스릴 것이다.(暗登天明理地)”라고 했다. 이 영웅은 “쥐해가 되면 큰일을 일으킨다.(遇子年中興大事)”고 했고,“법을 떨치고 뇌성이 진동하며 신령한 번개가 번쩍이리라.(振法雷揮神電)”라고 했다. 3. 영웅은 혼란기를 극복하고 드디어 나라를 통일한다고 했다.“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잡으리라.(先操鷄後搏鴨) 이를 일컬어 셋을 하나로 만들 운수라 한다.(此謂運滿一三甲)”라고 말한 것이 그러하다. 물론 모든 일을 영웅 혼자서 다 해내는 것은 아니다.“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쏟으면서 사람들을 데리고 정벌하리라.(興雲注雨與人征)”라고 하였듯, 많은 사람을 동원하는데 영웅의 참된 능력이 있다. 마침내 영웅이 왕위에 오르면,“사유(四維)는 소의 해에 망하게 되어 있다.(此四維定滅丑)” 했고,“바다를 건너 여러 나라가 항복해 오기는 닭의 해이다.(越海來降須待酉)”라고 한다. 주변 국가들은 소해와 닭해에 정복된다고 보았다. 4. 끝으로, 영웅이 일으켜 세운 왕조는 오랫동안 지속된다고 했다.“이 용의 아들 삼사(三四)가,(此一龍子三四) 대를 바꾸어 여섯 갑자에 걸쳐 왕위를 이으리라.(遞代相承六甲子)” 얼핏 보아서는 정확히 계산이 안 되지만,6갑자라고 했으므로 나라의 수명이 360년은 된다는 것이다. ●왕창근·궁예왕은 그 뜻 파악못해 대강 이런 내용의 ‘고경참’을 처음 읽어본 왕창근이나 궁예 왕은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왕은 예언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및 허원(許原) 등에게 연구해서 풀이하라고 명령하였다. 술관들은 궁리 끝에 이런 식으로 해석했다. 삼수는 삼면이 바다란 뜻이니 한반도다. 그 가운데인 사유(四維)는 신라의 ‘라’(羅) 자를 파자한 것이다. 요컨대 영웅이 신라 땅에 태어난다는 것이 첫 구절이다. 그 다음 구절에 나오는 ‘마진’(辰馬)은 진한과 마한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옥황상제가 아들을 진한과 마한에 내려 보낸다고 보았다. 신라는 바로 옛날의 진한과 마한 땅이었다. 이어서 두 명의 영웅이 한 시대에 패권을 둘러싸고 다툴 것인데, 한 명은 ‘푸른 나무’ 즉 소나무가 많은 송악산 기슭에 태어난다는 예언으로 보았다. 술관들이 검토해 보니 송악 사람으로 이름을 용(龍)자로 지은 사람이 있었다. 왕시중(王侍中) 즉 왕건 장군이었다. 왕건은 본래 임금님 될 만한 관상이라 그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 명은 ‘검은 금’이라 ‘쇠 철’ 자로 시작되는 곳, 철원 동쪽에서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석했다. 태봉의 도읍 철원에 궁예가 즉위한 것을 상징했다. 처음에는 궁예 왕이 융성했다가 나중에 가서는 위태로워져 결국 왕건 장군에게 멸망당할 것이란 예언으로 받아들여졌다. 예언 가운데 “먼저 닭을 잡는다 했다. 나중에 오리를 잡으리라고 했다.”고 말한 부분은 이렇게 해석됐다. 닭은 계림을 상징하므로 신라, 오리라면 압록강을 뜻해 북부지방으로 여겨졌다. 요컨대 왕건 장군이 왕이 되면 먼저 신라를 무너뜨리고 나중에 압록강 지역을 거둔다는 뜻으로 짐작됐다. 세 사람의 술관은 ‘고경참’에 담긴 예언을 곧이곧대로 궁예 왕에게 보고할지 상의했다.“궁예 왕은 시기심이 많은데다가 걸핏 하면 아랫사람을 잡아 죽인다. 만일 사실대로 알린다면, 왕건 장군이나 우리나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런 염려가 들어 술관들은 거짓말로 적당히 둘러대 왕을 속였다.(‘고려사’, 권 1) ●‘고경참’의 서술 전통은 ‘정감록’에 이어져 짧은 내용이지만 ‘고경참’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대여섯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첫째, 한국에는 천신숭배(天神崇拜)의 전통이 뚜렷하다는 점이다. 옥황상제가 아들을 이 땅에 내려 보낸다고 했고, 천신의 아들이 “밤이면 하늘에 오르고 낮이면 땅을 다스린다.”고 한 것이 그 증거다. 이런 내용은 단군신화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이규보가 쓴 주몽신화와 일맥상통한다. 둘째, 불교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법을 떨치고 뇌성이 진동하며 신령한 번개가 번쩍이리라.” 했는데, 여기서의 “법”은 불법을 가리킨다. 예언서에 등장하는 신비의 동물 “용” 역시 불교에서는 호법(護法)의 상징이다. 셋째, 후삼국의 통일뿐만 아니라 새 왕조의 수명이 예언되어 있다.“이 용의 아들 삼사(三四)가 대를 바꾸어 여섯 갑자에 걸쳐 왕위를 이으리라.”라고 했다. 왕건의 자손이 12대 360년간 왕 노릇을 한다고 풀이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왕조의 수명을 예언한 것은 ‘정감록’에도 자주 발견된다. 넷째, 해외의 여러 국가들이 새 왕조에 조공을 바치게 된다고 했다.“바다를 건너 여러 나라가 항복해 오기는 닭의 해이다.”라고 한 대목이 그것인데, 고려 시대에 등장한 여러 편의 예언서에서도 외국의 조공이 논의된다. 현대의 ‘정감록’ 신앙에서도 이런 전통이 남아 있다. 다섯째, 예언서의 표현 방식이 다분히 운문적 성격을 띠고 있다. 표현 방식에는 “사유”(四維)라든가 “흑금”(黑金) 따위의 파자(破字)와 상징이 채용되어 있다. 이런 것들은 고려 때 등장한 예언서들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정감록’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여섯째,‘고경참’의 원래 저자를 사찰에 안치된 전성(土星과 같음)의 조각으로 간주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불교와 습합된 성신(星神) 신앙의 일단이 드러난다. 신라 경순왕 8년(934)의 기록을 보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성신을 신앙대상으로 삼았다.‘삼국사기’의 그 해 기록에는 “노인성(老人星 즉,南極星)이 보였다.”고 했고, 그 이듬해 경순왕은 시랑(侍郞) 김봉휴에게 명령하여 국서를 가지고 가서 고려 태조에게 항복을 청하게 하였다(‘삼국사기’, 권 12). 중국 고대의 기록을 살펴 보면 남극성이 나타나면 기존의 왕조가 전복된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점은 ‘정감록’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고대 고구려인들이 남긴 벽화에서도 감지되듯 한국인들은 성신이 인간의 운명을 주관한다고 믿었다.10세기만 해도 토성의 신이 ‘고경참’을 통해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흥기를 예언한 것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정리하면,‘고경참’의 서사 구조와 문체에서 확인되는 몇 가지 특징은 그 뒤 한국사회를 움직인 예언서에 대부분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점이다.‘정감록’의 원형은 ‘고경참’에까지 소급된다. ●태조 왕건과 역대 고려왕들은 비결을 믿어 실상 ‘고경참’의 예언은 역사적 사실과 거의 일치하지 않았다. 궁예와 왕건이 등장한 시기는 뱀해가 아니었고, 닭해에 외국이 조공을 바쳐온 적도 없었다. 신라가 소해에 망하거나 고려가 12대 360년만에 멸망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예언은 들어맞았다. 왕건이 등극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다는 예언이 현실로 나타났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고려왕실은 대대로 ‘고경참’을 신성시했다. 역사 기록을 살펴 보면, 태조 왕건은 ‘고경참’뿐만 아니라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영향을 받아 풍수설에 입각한 예언을 무척 중시했다. 심지어 후손들을 위해 지었다는 ‘훈요십조’에 왕건은 예언설에 관한 조항을 세 개나 끼워둘 정도였다. 우선 제2조에선 도선의 풍수지리설을 따라 그가 미리 지정한 곳 이외에는 절대로 절을 짓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제5조에서는 서경(西京)의 풍수가 좋기 때문에 철마다 한 번씩 순행하여 지기(地氣)와 수덕(水德)을 지키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제8조에서는 풍수지리설에 따른 예언을 믿으라고 말했다. 여기서 보듯 태조 왕건은 단순히 민심을 선동하기 위해 풍수지리를 비롯한 각종 예언설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예언을 굳게 신봉했던 것이 분명하다. 고려의 역대 왕들도 예언서를 맹종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예종 같은 이는 예언에 빠져있다시피 했다. 그는 ‘해동비록’(海東錄)이라는 종합적인 예언서를 편찬하도록 조치했고, 상당수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경에 용언궁(用堰宮)을 지어 분사(分司)제도를 확립했다. 한참 세월이 지난 뒤 고려 왕실은 ‘고경참’에서 한 가지 고약한 대목을 발견했다. 고려의 운수가 12대 360년에 그친다고 돼 있어, 여러 왕들이 불안에 떨게 되었다. 이의민과 같은 무장은 자기의 정치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고려왕조는 12대에 끝난다. 뒤이어 이씨가 새로 일어난다(龍孫十二盡 更有十八子).”는 예언을 조작해 냈다. 이의민은 경주에서 일어난 반란군과 몰래 야합했으나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어 목숨을 잃었다. ●근현대에도 위력을 떨친 비결 어느 책을 보았더니 현대 한국의 집권자들도 비결에 솔깃했던 모양으로 돼 있다. 전두환 대통령이 아직 집권하기 전에 유명한 지관 한 사람이 그에게 비기(記)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귀의삼보(歸依三寶)나 삼이후예(三耳後裔)라. 입왕이십환(入王二十煥)이요,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니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귀의삼보”란 불교에 귀의한다는 뜻이다.“삼이후예”란 전(全)씨란 말이다. 시조의 이름이 섭(攝) 자인데 그 글자엔 이(耳)가 세 개나 들어 있어 그렇다.“입왕이십환”은 전두환 대통령의 이름을 파자(破字) 법으로 쓴 것이다. 요컨대, 전두환 장군은 대통령이 돼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이며, 본래 불교와 인연이 깊다는 말이다. 이 예언이 적중한 바람에 그 지관은 이름을 떨치게 됐다는 말이 있다. 믿을 말인지 모르겠으나, 박정희 대통령도 간혹 예언에 귀를 기울였다고 전한다. 그런가 하면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게 됐을 때도 여러 종류의 예언이 나돌았다. 그 중에는 일제가 민심을 굴복시키기 위해 조작한 것도 있었다. 종묘 정문인 ‘창엽문(蒼葉門)’을 두고, 창(蒼)을 “이십 팔 군”(二十八君)으로, 엽(葉)을 “이십 팔 세”(二十八世)로 파자해 조선은 28임금(28대)만에 망한다고 했단다. 오늘 일도 모르거늘 하물며 내일 일을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그러다 보면 예언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서재응·김병현·최희섭 키운 광주일고 허세환 감독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서재응·김병현·최희섭 키운 광주일고 허세환 감독

    ‘꿈의 무대’라고 했다. 처음엔 영화나 소설속에서나 접했다. 그래서 먼 나라, 남의 나라 얘기였다.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와도 무척 가깝다. 내로라하는 세계 톱스타들이 모이는 메이저리그 야구, 언제부터인가 한국 선수들이 야금야금 접수했다. 박찬호(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서재응 김병현 최희섭 김선우(콜로라도 로키스)…. 이른바 ‘한국인 빅리거’들이다. ●세명이 50회 청룡기 우승 일궈 잠깐, 여기에서 꼭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미국에 진출한 ‘빅리거 5명’ 중 3명이 같은 고교 출신이라는 사실. 메이저리그에서 같은 고교 출신 3명이 동시에 활약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일단 흔치 않은 일이다. 주인공은 서재응을 비롯해 김병현 최희섭 모두 광주일고 출신이다. 흥미로운 것은 1995년 6월 제50회 청룡기대회 결승에서 한 유니폼을 입고 우승을 일궜다는 점이다. 이때 3학년 서재응은 3루에서,2학년 김병현은 투수로,1학년 최희섭은 1루를 굳건히 지키며 금자탑을 세웠다. 이쯤되면 영화 소재거리가 아닌가. 또 있다. 이들을 키워낸 의지의 한국인 허세환(45) 광주일고 야구감독이다.‘한국인 빅리거의 스승’이라는 찬사가 늘 뒤따른다. 아울러 세 선수 모두가 허 감독의 뛰어난 안목과 지도력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주시 북구 누문동 광주일고 운동장. 광주일고 야구부 선수들이 허 감독의 지시 아래 열심히 연습 중이었다. 수비 위주의 기본기 훈련이었다. 잠시 후 비가 갑자기 쏟아졌다. 이때였다. 약속이나 한 듯이 선수들은 축구 대형을 갖춘다. 아니 야구선수들이 축구를? 이유를 물었더니 허 감독은 “순발력 향상에는 축구가 더없이 좋다.”면서 다들 축구실력도 훌륭하다고 웃는다. 서재응이나 김병현도 이 운동장에서 축구를 썩 잘했으며, 최희섭은 농구를 무척 좋아했다고 귀띔했다. 점입가경이다. 이어 허 감독은 선수들에게 “이봐 기다리면 공이 오나. 뛰어, 그래 슛이야 슛!”을 연발했다. 도대체 야구감독인지 축구감독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빅리거를 키워낸 비결이 무엇이냐고 했다. 지체없이 “야구나 모든 스포츠는 기본이 가장 으뜸이 아니냐.”면서 “선수들에게 항상 열심히 하라, 최선을 다하라, 스스로 인성을 길러라.”는 말을 늘 강조한다고 했다. 즉 기본기 체력 인성 등 세 가지를 갖춰야 앞으로 경쟁에서 이겨나갈 수 있다는 정신자세를 심어주는 것이 감독이 할 일이라고 했다. 다행히 선수들도 자율적으로 알아서 열심히 따라준다고 했다. 후배들도 자연스럽게 선배를 본받으려고 한단다. 미국에 진출한 빅리거 트리오도 똑같이 그런 과정과 환경 속에서 스스로 성장을 잘 해줬다고 대견스러워했다. ●TV중계 반드시 챙겨 가족들에 소감전해 허 감독은 이들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TV중계를 반드시 본다고 했다. 시합이 끝나면 광주에 사는 가족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소감을 전해준다. 요즘에는 셋 다 경기내용이 좋아 칭찬하기에 바쁘다고 했다. 허 감독은 빅리거 트리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서재응(28·뉴욕 메츠):낙천적이며 아주 외향적인 성격이다. 노래도 잘 부른다. 이역만리 타향에서도 향수병 없이 잘 견디고 있다. 원래 직구 최고 구속은 시속 150㎞. 하지만 직구 위주에서 요령껏 구질 개발에 성공했다. 광주 충장중학교 때 3루수였다. 공 던지는 자세가 너무 좋아 광주일고 입학 전부터 투수감으로 점찍었다. 입학 후 본격 조련을 받으며 후배 김병현과 함께 광주일고 마운드를 지켰다. 김병현(27·콜로라도 로키스):악바리다. 내성적이면서도 꼼꼼하고 승부근성이 뛰어나다. 광주 무등중학교에서 유격수였다. 수비능력도 좋고 손목 힘이 뛰어나 유격수로만 쓰기에 너무 아까웠다. 본인도 투수를 원했다. 그래서 투수 연습을 시켜보니 가능성이 있었다. 체구가 작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밤마다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시켰다. 체구가 작고 빨라 수비 반경이 넓었다. 공을 던질 때 손목으로 채는 힘이 좋아서 빠른 공을 잘 던진다. 평소 영화감상을 좋아한다. 최희섭(27·LA 다저스):대인관계가 원만하다. 붙임성도 좋고 순박한 시골총각이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귀엽기까지 하다. 원래는 서재응과 김병현 졸업 이후 투수로 키울 생각이었다. 우선 큰 체격과 왼손잡이라는 점이 투수로서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타자로 대성할 체격조건과 기량을 발견했다. 그래서 고3 때부터 타자로 바꾸도록 했다. ●선동렬 감독과 동창 유격수로 활동 “이들 셋은 모두 3학년때 팀 주장을 맡을 정도로 리더십도 뛰어났습니다. 자랑스럽죠.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만큼 부와 명예를 잘 이루기를 바랄 뿐이죠.” 허 감독은 어렸을 때부터 시멘트 부대로 야구 글러브를 만들어 야구를 즐겼다. 광주일고 56회 졸업생인 그는 선동열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 감독과 고교 동기동창. 광주일고 당시 유격수 출신의 잘나가던 1번타자였다. 선동열과 함께 80년 대통령배 우승의 주역으로 이 대회에서 5관왕을 차지할 정도로 초일류급 고교야구 스타였다. 이같은 실력으로 인하대에 스카우트됐다. 대학 졸업식 때 선후배들과 친선 축구대회를 하다 그만 인대를 다쳤다. 해태 타이거즈의 1차 지명도 있었지만 의사의 만류 등으로 인생의 진로를 바꿨다.84년부터 실업팀 포항제철에서 8년간 선수생활을 했다. 이후 92년 모교인 광주일고 코치로 부임하면서 지도자의 길을 걷는다. 당시 광주일고는 이종범(기아)이 활약했던 88년 청룡기 우승 이후 침체된 분위기. 허 감독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선수들의 정신무장과 팀 정비에 나섰다. 그 결과 부임 2년 반 만에 빅리거 트리오와 함께 95년 청룡기대회의 우승컵을 안았다.98년까지 광주일고를 맡았고, 이후 충장중학을 거쳐 2002년 12월 다시 모교인 광주일고로 돌아왔다. “원래는 체육교사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야구란 인생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홈에서 출발해 홈으로 돌아오거든요. 남의 도움으로 1루에서 2루로 갈 수도 있고 또 뜻하지 않은 실책으로 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런 기구함의 연속이 아닌가요.” ●부와 명예는 노력에서 얻는 것 광주일고가 어떻게 해서 야구명문이 됐을까. 허 감독은 “광주지역에 초등학교 7개팀, 중학교 4개팀, 고교 3개팀 모두가 전국 상위권”이라고 했다. 풍수지리적인 이유도 있을 법했다. 광주일고 운동장에서 멀리 무등산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 허 감독은 무등산의 정기와 학교의 터가 풍수적으로 잘 맞아떨어지면서 좋은 선수를 키워낸다며 웃었다. 이어 운동장 한 편에 있는 학생운동 기념탑을 가리킨다.“바로 저기가 일제시대 때인 1929년 11월3일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의 시발점”이라고 했다. 선수들은 연습 전에 항상 탑을 향해 묵념한다고 했다. 예전에도 학교를 여러 차례 이전하려고 했지만 이 탑이 늘 마음에 걸려 옮기지 못했다는 얘기도 곁들였다. 조상들이 광주일고 출신 선수들이 해외에서 국위선양하도록 힘을 보태주고 있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허 감독은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 아니냐.”면서 선수 각자의 눈물나는 노력이 없다면 오늘날의 명예도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빅리거 트리오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각자의 인생에서 잠시 자신을 만났을 뿐 스스로가 앞길을 잘 헤쳐가고 있다며 무등산쪽을 바라본다. 이윽고 축구시합을 하는 선수들을 보면서 “움직여. 기다리면 공이 오나.”라고 다시 크게 소리친다. 그에게 “저들 중에 당장이라도 메이저리그에 갈 선수가 있나요.”라고 질문했다.“암요, 있지요 1∼2명 정도는 충분합니다.”라며 자신감에 넘쳤다.“누구냐고 물으면 답을 안 해주겠지요.”라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또 다른 빅리거 탄생이 머지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61년 광주 출생 ▲광주 남초등·동신중·무등중학교에서 야구선수로 활약 ▲81년 광주일고 졸업 ▲84년 인하대 졸업 ▲84년 12월∼92년 12월 포항제철 선수 ▲92년 2∼10월 광주일고 야구 코치 ▲92년 10월∼98년 11월 광주일고 야구감독 ▲99년 광주 충장중학교 야구감독 ▲2002년 12월 광주일고 야구감독 ■ 수상경력 80년 대통령배에서 타격상, 타점왕, 수훈상, 최다안타상, 도루상 수상, 황금사자기 준우승.82년 백호기 우승.93년 광주일고 감독을 맡아 청룡기와 황금사자기 3위 입상.94년 1회 무등기 우승, 전국체전 3위 입상.95년 청룡기 우승(서재응 김병현 최희섭 출전).96년 전국체전우승(김병현 출전).97년 황금사자기 준우승(최희섭 출전).2003년 무등기 우승, 봉황기 준우승.2005년 황금사자기 우승, 봉황기 준우승 등.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4)김위제로 소급되는 ‘정감록’의 기원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4)김위제로 소급되는 ‘정감록’의 기원

    ‘정감록’은 어디서 왔을까? 그 뿌리를 한참 파다 보면, 역사의 삽질이 고려 숙종 때에 부딪힌다. 술관 김위제(金謂 )가 문제의 인물이다. 그는 풍수지리의 대가로 예언에 능했다. 숙종 원년(1096)엔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에 임명됐고, 한참 뒤인 예종 때는 그보다 하급 직책인 주부동정(注簿同正)을 지냈다. 관직은 기껏해야 중하급에 그쳤지만 김위제는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는 숙종에게 글을 올려 남경(조선시대의 한양, 지금의 서울)으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김위제는 새로운 예언서들을 발굴해 인용했고, 결과적으로 왕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숙종은 연이은 자연재해로 정치적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흉년과 실정이 겹치는 바람에 고려의 민심은 국가를 이반했다. 숙종은 정치적 돌파구가 필요했고, 궁지에 처한 왕을 돕기 위해 김위제는 남경천도론을 제시했다. 이런 근본적인 배경과는 무관하게 그의 천도론에는 ‘정감록’의 기원에 해당하는 여러 가지 요소가 숨어 있다. 참고로 말하면, 김위제가 한동안 몸을 담았던 위위시(衛尉寺)는 풍수지리와 직접 관계가 없는 부서였다. 이 관청은 의장(儀仗)에 사용되는 예기(禮器)와 병기(兵器)를 관장하였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통령 경호실과 유사한 기관이었다. 위위승은 이 관청의 중간 정도 벼슬이었다. 김위제는 술관이라 본래 이 관청과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하지만 숙종 원년 그는 남경천도론으로 직무상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이를 표창하는 뜻에서 왕은 위위승동정 벼슬을 주었던 것 같다. ●김위제의 예언서 독법은 아직도 유효 김위제는 통일신라 말기 풍수지리설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한 도선국사(道詵國師)에게 학연을 댔다. 그는 도선국사가 저술한 여러 권의 예언서를 손에 넣었다고 한다. 과연 누구를 통해 그가 그런 책들을 접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정말 도선국사가 여러 편의 예언서를 남겼는지도 실은 모를 일이다. 그야 어쨌거나 김위제는 도선국사의 저술을 통해 풍수와 예언을 배웠다고 주장했고, 많은 사람들은 그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숙종에게 올린 글을 보면, 김위제는 ‘도선기’(道詵記)와 ‘도선답산가’(道詵沓山歌)를 주로 인용했다.‘도선기’는 삼경설(三京說)을 주장한 예언서였다. 그것은 고려가 건국된 지 160년 뒤에는 개경의 지기가 쇠해진다, 그 때가 되면 서경(평양)과 남경에 서울을 설치하라, 그래야만 고려의 국운이 다시 회복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도선답산가’는 남경으로 천도하는 것이 옳은 해결책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남경을 수도로 삼으면 천하가 고려에 조공을 바치게 된다고 예언했다. 두 권의 예언서는 남경의 풍수지리적 조건을 높이 평가한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 보면 내용상 큰 차이점도 있다.‘도선기’는 남경을 3경의 하나로 보고 있지만,‘도선답산가’는 남경이야말로 개경을 대체할 다음 번 수도로 예언했다. 여기서 확인되듯 이들 예언서는 도선국사 한 사람의 저술로 보기 어렵다. 도선국사는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저술했거나, 또는 이들 예언서와는 아예 무관했다고 봐야 한다. 김위제를 비롯한 고려의 술관들은 옛 문헌에 대해 비판적인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들은 걸핏하면 도선국사를 저자로 둘러댔고 그런 주장이 잘 먹혀들었다. 인종 때 서경천도론을 폈던 묘청만 해도 도선국사의 후계자를 자청했다. 만일 그들의 견해를 액면 그대로 인정한다면, 도선국사는 3경설, 서경천도론, 남경천도론을 동시에 폈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논리상 모순투성이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약점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고려의 왕과 신하들은 예언서를 대할 때 지나칠 정도로 관대했다고 할까. 이런 전통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진다.‘정감록’ 신봉자들은 예언서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차이점에 대단히 둔감하다. 그 이유가 궁금하지만 정확히 짚어내기란 쉽지 않다. 이것은 한 가지 억측에 불과하지만, 예언서의 신봉자들은 자기가 원하는 답을 책에서 발견해 내는 데만 관심을 두기 때문인 것 같다. 비유하면 예언서란 온갖 색깔의 사탕이 섞인 사탕봉지와 같다. 노랑사탕을 먹고 싶은 사람은 그것이 손가락에 잡힐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골라낸다. 그것으로 그만이다. 중간에 파랑사탕이나 빨강사탕이 몇 개나 나왔지만 그것은 그 사람에게 아무 문제도 안 된다. 이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언서를 상대하는 공통된 관점이다. ●‘삼각산명당기’는 묘청에 앞선 ‘정감록’의 기원 남경천도론을 펼 때 김위제는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란 새로운 예언서를 인용해 관심을 끌었다. 이 예언서는 모든 구절이 7자씩 돼 있어 칠언율시(七言律詩)를 연상케 하는데 배율(排律 12행)보다 더욱 길다. 엄밀한 의미에서 시는 아니지만 그 비슷한 느낌을 준다. 고려시대의 귀족들은 유달리 한시를 즐겼다. 그런 까닭에 예언서마저도 시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달리 말해,‘삼각산명당기’는 고려중기 귀족문화의 산물이다. 신라 말에 저술된 예언서로 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내용상으로 보더라도, 이 예언서는 고려 때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삼각산명당기’를 이용해 김위제는 남경천도의 긍정적인 효과를 뚜렷이 부각시키려고 했다. 그는 삼각산의 지세를 검토한 결과 명당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물샐틈없이 방어되고 있으므로, 이곳에 왕궁 터를 정하면 절대 반역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했다. 또한 청룡과 백호의 모양으로 점쳐 볼 때 신하들 사이에도 파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안과 바깥의 장사꾼이 각기 보배를 바쳐” 왕실의 재정도 풍부해진다고 보았다. 사방의 인재들이 조정에 가득차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이치이고,“재상(輔國)과 바른 임금(匡君)이 모두 한 마음”이 되어 국정운영이 순조롭다고 예언했다. 김위제는 남경천도의 시기도 못 박아 두었다.“임자 년에 만일 궁전 지을 공사를 시작하면, 정사 년에는 성스러운 아들을 얻으리라.”고 하여 성군(聖君)이 출현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삼각산에 의지하여 황제의 서울을 지어라. 아홉 해만에 사해가 조공을 바쳐 온다.” 했다.(‘고려사’, 권122) 지난 호에선 묘청의 서경천도론을 다루었다. 그것이 ‘정감록’에 예언된 계룡산천도론의 모태가 된다는 점을 밝혔다. 그런데 이제 알고 보니 김위제는 묘청보다 한 세대 앞서 천도론을 폈다. 물론 묘청의 주장은 좀더 새로운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국태민안(國泰民安)과 사해조공설(四海朝貢說·천하가 고려에 복종한다는 뜻)을 폈던 점에서 묘청은 김위제의 남경천도론을 계승한 셈이다. 국운상승의 힘을 천도론에서 찾은 점에서 김위제는 ‘정감록’의 보다 심원한 뿌리였다. ●‘삼각산명당기’는 풍수설의 인기를 반영 김위제가 찾아냈다는 ‘삼각산명당기’의 내용을 자세히 뜯어 보면, 고려시대에 풍수지리설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돼 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단편적인 기록이긴 하지만 고려초기에는 형국론(形局論·명당의 모양이 닭, 소, 말 등과 닮았다는 설)의 우세를 반영하는 사례가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삼각산명당기’는 좌향론(坐向論·용맥이나 명당의 방향을 중시하는 풍수설)에 기울어 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눈을 들고 머리를 돌려서 삼각산의 모습을 보라. 북북서(壬)를 등에 지고 남남동(丙)을 향하니 이가 곧 신선의 자라(仙鼇 명당)다. 음양의 꽃이 서너 겹으로 피었구나.” 인용문에서 보듯, 명당의 위치와 주변 조건이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마치 한 편의 풍수지리 교과서마냥 ‘삼각산명당기’는 명당의 성립조건을 하나씩 세부적으로 거론했다. 우선 삼각산을 에워싼 외청룡과 외백호의 형상에 대해 “친히 한쪽 옷소매를 벗고 산을 떠메면서 수호에 임하는구나.”라고 했다. 한쪽 옷소매를 벗는 것은 정중하게 예의를 갖춘 모양을 상징한다. 스님들이 가사를 입은 모양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명당의 조건에 대한 이해가 좀더 정밀해졌다는 점이다. 단순히 용맥(龍脈)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산세에 대한 종합적인 관찰이 강조되었다. 예컨대 명당 앞을 막아선 안산(案山)과 조산(朝山, 안산의 남쪽에 자리한 산), 그리고 현재의 풍수서적에서는 찾아보기도 어려운 “고모부산”까지 자세히 언급했다. “안산 앞으로 조산이 대여섯 겹이다. 고모부와 부모산이 용솟음친다. 안팎의 문을 각기 개 세 마리가 지키고 있다.” 삼각산의 본 줄기에서 갈라져 나간 여러 산들을 친족의 호칭을 써가며 세분하고, 이들 산자락이 믿음직하게 명당을 호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삼각산명당기’는 풍수설을 구체적으로 전개한 점에서 이채를 띤다. 이것은 그 이전 시기의 역사에 보이는 여느 예언서와도 다른 점이다. 그만큼 고려시대에는 풍수설이 크게 유행했다는 증거다. 조선시대에도 풍수설은 더욱 인기를 끌어 ‘삼각산명당기’는 ‘정감록’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감결’에 보면,“곤륜산(崑崙山)의 내맥(來脈)이 백두산에 이르고, 그 원기가 평양(平壤)에 이르렀다. 그러나 평양은 이미 천년(千年)의 운수가 지나 그것이 송악(松嶽)으로 옮겨졌다.”는 구절이 있다.‘삼각산명당기’만큼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용맥의 줄기를 마디마다 더듬은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정감록’의 일부가 되어 있는 ‘북두류노정기’(北頭流路程記) 역시 ‘삼각산명당기’를 닮았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자세하다. 잠시 인용해 보겠다.“평강읍(平康邑)으로부터 우량장(右梁場)에 이르러 20리를 가면 우량(右梁)이요,(중략) 태산의 긴 골짜기를 따라 40리를 들어가면 태산이 앞을 가로막는다. 그곳에 두어 칸 불당(佛堂)이 있고, 천장폭(千丈瀑)이 있다.” 이런 방식으로 ‘북두류’는 명당 찾아가는 길을 친절하게 일러준다. 조선 후기에 등장한 ‘북두류’에 언급된 명당은 실제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고려 때의 ‘삼각산명당기’를 실제적인 목적에 맞게 변형시킨 것처럼 여겨진다. 요점을 정리하면,‘삼각산명당기’는 풍수지리의 유행을 타고 후대의 예언서인 ‘정감록’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겠다.‘감결’처럼 명당의 용맥을 더듬어 간 것이 있는가 하면, 길지의 소재를 세세하게 묘사한 ‘북두류노정기’ 도 있다. ●‘신지비사’와 국토 유기체설의 시작 ‘정감록’의 ‘십승지설’엔 국토 유기체설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묘청이 주장한 ‘대화세’(大華勢)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연원을 좀 더 깊이 추구해 보면 그 줄기가 김위제에게로 이어진다. 그가 역사상 맨 처음으로 인용한 ‘신지비사’(神誌詞)의 내용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신지비사’는 멀리 고조선 때 저술되었다 한다. “한 나라의 서울은 비유해서 말하면 저울대(枰), 저울추 및 저울머리(極器)와 같다. 저울대는 부소의 기둥이다. 저울추는 오덕(五德)을 갖춘 땅을 말하며, 저울머리란 백아(白牙) 언덕이다.”(‘고려사’, 권 122)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국토의 요충지를 저울대와 저울추 및 저울머리로 나눠서 상정한 것은 틀림없다. 이런 유기적 관계를 잘 유지하면, 달리 말해 저울의 머리와 꼬리가 수평을 이루게 되면 “70나라들이 조공을 바치고 항복해올 것이다. 땅의 덕에 힘입고 신령의 보호를 입으리라.”고 했다. 나라의 융성과 평화를 보장하는 힘은 땅의 기운에 달려 있으며, 특히 저울추, 저울대 그리고 저울머리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했다. 김위제는 이 예언에 언급된 저울추 등에 대해 좀더 알기 쉽게 풀이해 준다.“송악(개경)은 부소산이 있어 예언서에 언급된 저울대에 해당합니다. 서경(평양)은 백아 언덕이라 하겠고, 따라서 저울머리에 비유됩니다. 삼각산 남쪽에는 오덕을 갖춘 언덕이 있어, 비유하면 저울추가 됩니다. 오덕 가운데 하나는 중앙의 면악(面嶽 북악산)으로서 둥근 모양을 이루므로 토덕(土德)에 해당합니다. 북쪽에 있는 감악(紺嶽)은 구부러진 모양이라서 수덕(水德)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가 하면 남쪽에 위치한 관악(冠嶽)은 뽀족한 모양이라 화덕(火德)이 되고, 동쪽에 있는 양주 남행산(南行山 아차산)은 수직으로 서 있어 목덕(木德)에 해당됩니다. 끝으로, 서쪽에 위치한 수주(수원) 북악(北嶽)은 네모난 모형이라 금덕(金德)이라 하겠습니다.” 얼핏 보면 고려의 3경을 설명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가운데서도 남경의 풍수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개경과 서경은 고려초기에 이미 알려진 명당이었으나 남경은 새롭게 부상한 길지라서 그랬을 것이다. 여기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5덕이란 개념이다. 김위제는 명당의 조건으로 그 주위에 오덕이 조화롭게 배치돼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좌향론과는 성격이 좀 다르지만, 이 역시 고려시대 풍수설의 주요 개념이었다. 그런데 ‘정감록’에서는 길지를 논할 때 5덕을 자세히 따지는 경우가 없다. 풍수설에도 시대에 따른 변천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도의 풍수를 전체 국토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살핀 것은 ‘정감록’도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김위제가 인용한 ‘70개국 조공설’ 같은 것은 묘청의 ‘36국조공설’을 거쳐 현대의 ‘정감록’ 신봉자들에게도 계승되었다. ●김위제, 단군조선에 대한 관심 높아 참고로 여기서 한 가지 밝혀둘 사항이 있다.‘신지비사’의 저자에 관해서다. 예언서의 저자 신지(神誌)는 실존인물이 아니라, 단군을 도와 고조선을 함께 다스렸다는 전설적인 존재다. 두 말할 나위 없이 고조선 때는 ‘신지비사’에 보이는 풍수지리설이나 음양오행설 등이 아직 형성되지 못했다.‘신지비사’는 후대의 위작이 분명하다. 그것은 아마도 김위제 자신이나 그 주변 인사들이 조작한 것으로 믿어진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하필이면 김위제가 고조선의 전설적인 예언가를 빌렸다는 점이다. 그밖에 다른 역사기록이 없어 함부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11세기 후반부터 고조선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깊어졌던 것이 아닐까? 서경이 지배자들의 정치적 관심을 끌게 되면서 과거 평양성에 도읍한 고대 여러 왕조의 역사에 관해 지식인들이 주목하게 된 것 같다. 고구려, 낙랑 및 고조선의 역사를 연구하는 풍조가 일어나서 결과적으로 ‘신지비사’가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고 보면 훗날 일연(一然)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지을 때 단군의 전설을 삽입한 것도 한낱 우연은 아니었다. 김위제 등 선배 지식인들이 고조선의 역사를 연구한 덕택에 가능했던 것이다.‘정감록’은 고대사에 관해 술관 김위제가 세운 통을 이어받았다. 일례로 ‘구궁변수’를 보면, 고대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조의 운수를 풀이해 놓은 대목이 따로 있다. ●‘정감록‘ 유포 반체제로 인식 국가서 통제 김위제의 생각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져 ‘정감록’의 모태가 된 것 같다. 그러나 김위제의 입장은 조선후기 술사들과 견주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김위제는 국가의 보호를 받아 전문직종에 종사한 관리였다. 그의 예언서 조작 또는 예언서 해석은 고려왕조를 위한 것이었고,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달리 말해, 고대로부터 예언은 국가의 통제 아래 놓여 있었고, 김위제처럼 탁월한 술관도 국가권력에 철저히 예속돼 있었다. 그러나 조선 각지에 ‘정감록’을 유포시킨 조선후기의 술사들은 국가를 전복시킬 뜻을 품고 있었다. 한 마디로 반체제지식인들이었다. 체제수호적인 김위제의 예언 해석이 그와 정반대 입장에서 저술된 ‘정감록’에 녹아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우리가 알면 알수록 인간의 역사는 이 같은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3)묘청은 ‘정감록’의 숨은 뿌리였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3)묘청은 ‘정감록’의 숨은 뿌리였다

    조선 광해군 때였다. 술관 이의신이 상소하여, 경기도 교하현(현재는 파주군 교하)으로 서울을 옮기자고 주장했다. 한양의 지기가 쇠했기 때문이라 했다. 당파싸움과 청나라 세력의 등장으로 골치아파하던 광해군은 이의신의 천도론에 솔깃해 했다. 그러자 예조 판서 이정구는 이의신의 천도론을 거세게 공격했다. 풍수설은 유교 경전과 거리가 먼, 한낱 방술(方術), 아무 근거 없는 낭설이라는 거였다. 이 때 이정구는 멀리 고려 때의 일을 들먹였다.“요승 묘청(妙淸)이 음양가의 설을 빌려 임금을 현혹했습니다.‘송경은 왕업이 이미 쇠하였는데, 마침 서경에 왕기가 있으니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 하여 서경의 임원역(林原驛)에 새로 궁궐을 짓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변란이 일어났던 것입니다.”(실록, 광해 4년 11월 15일 을사) 이정구의 이 같은 주장으로 이의신의 천도론은 무너졌다. “요망한 승려” 묘청을 연상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한국 역사상 묘청만큼 천도문제를 개혁과 맞물려 철저하게 내세운 이는 없었다. 그는 국정을 쇄신하고 종속적인 기왕의 대외관계를 청산하기 위한 방편으로 천도론을 폈다. 잘 따져 보면 묘청의 천도론은 ‘정감록’과 일맥상통한다. 정감록의 주요 골자는 계룡산에 도읍해 세 세상을 열자는 것인데, 묘청의 생각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예언가 묘청의 비극 묘청은 서경(평양)의 승려다. 그는 인종 5년(1127) 검교소감(檢校少監) 백수한의 천거로 조정에 알려졌다. 서경의 천문 지리 관계 분사(分司)를 이끌던 백수한은 묘청의 제자였다. 이후 8년 동안 묘청은 인종의 신임을 받으며 국정을 좌우하다시피 했다. 그 무렵 내외정세는 무척 혼란했다. 권신이 날뛰고 북방의 금(金)나라가 압력을 가해오는 상황이었다. 인종은 수도 개경 출신의 귀족들을 억제할 생각이 없지 않았다. 혹시 금나라가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라 그에 대한 대비책도 강구해야만 되었다. 묘청은 인종의 이런 고민을 잘 헤아렸다. 묘청이 제시한 해결책은 서경천도였다. 인종7년(1129) 묘청의 강력한 추진력에 힘입어 서경에 신궁이 낙성되었다. 이 기회를 빌려 묘청 일파는 칭제건원(稱帝建元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세움)을 주장했다. 금나라에 대한 선제공략도 건의했다. 실로 국가의 명운을 건 과감한 시책이었다. 인종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묘청은 풍수지리설을 비롯해 여러 도참설을 이용하였다. 신비한 이적을 조작하기도 했다. 예컨대 인종이 신축된 서경의 궁궐에 처음으로 자리를 잡는 순간 공중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온다고 허풍을 친 일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서경 한 가운데를 흐르는 대동강에 상서로운 기운이 나타났다고 야단이었다. 신룡(神龍)이 침을 토해 강물에 오색빛깔이 영롱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신이한 현상에 대해 묘청 측은 위로 천심에 따르고 아래로 인망을 잃지 않은 결과라며 장차 고려는 동북아 최강의 패자로 급부상하던 금나라도 제압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공중에서 풍악소리가 저절로 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환청 같은 것에 불과했다. 대동강물에 서기가 비친 것도 역시 조작된 것이었다. 묘청 등은 남몰래 큰 떡을 빚어서 속을 빼내고 볶은 기름을 채운 뒤 구멍을 뚫었다. 그런 다음 이 떡을 대동강에 가라앉힌 것이었다. 떡에서 나온 기름방울이 햇빛에 비쳐 오색을 뿜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고려사’, 권 127) 처음에 인종은 묘청의 개혁안에 적극 찬동하였다. 그러나 왕은 결국 묘청과의 약속을 배반했다. 본래 왕의 성격이 우유부단한데다 개경의 구 귀족들이 벌인 반대공작이 큰 역할을 했다. 당시 묘청과 대립한 개경파의 거두는 김부식이었다.‘삼국사기’의 저자로도 유명한 김부식은 문무를 겸전한 인물이었다. 그는 개경의 구 귀족 세력을 결집시켜 우선 인종과 묘청을 이간시키고, 이어서 묘청을 비롯한 서경파를 완전히 제거할 생각이었다. 인종13년(1135) 묘청은 더 이상 인종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자력으로 개혁을 추진하기로 결심해 평양에 새 나라를 세웠다. 국호를 대위(大爲)라 정하고 연호를 천개(天開)라 했다. 묘청의 군대는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 하늘이 보낸 충의로운 군대)이라 불렀다. 그러나 김부식이 이끌던 고려군의 전술적 능란함을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묘청은 한 때 그의 충실한 부하였던 조광에게 암살되었다. 이로써 묘청의 개혁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조선말까지도 유학자들은 묘청을 단죄해 왔다. 앞에 예로 든 이정구처럼 유학자들의 눈에 비친 묘청은 한갓 요망한 승려에 불과했다. 예언과 이적을 빌려 나라를 망치려 든 역적이란 것이다. 이런 악평을 처음으로 뒤집은 이는 아마도 단재 신채호(1880~1936)일 것이다. 그는 묘청과 김부식의 대결을 한국사에 있어 자주노선과 사대노선이 격돌한 일대사건으로 보았다. 신채호에 따르면, 묘청의 실패는 한 개인의 패망이 아니라 한민족의 주체성이 외세의존적인 세력에 완전히 무릎을 꿇고만 중대사건이었다. 나는 신채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묘청의 행적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도 없다는 생각이다. 예언가 묘청은 개혁의 웅지를 품었던 역사상의 일대 거인이었기 때문이다. ●서경 궁궐터와 36국 조공설 ‘정감록’을 신봉하는 이들은 흔히 이런 말을 한다.“정씨가 계룡산에 도읍하면 나라의 수명은 6백 년이요,36국의 조공을 받게 된다. 사실상 세계 통일 정부가 한반도에 출현할 시운이 오는 것이다.” 지리산 청학동 골짜기에 있는 어느 신종교의 본부 건물에 부착된 주련(柱聯)에도 비슷한 구절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세계의 운이 돌고 돌아 이제 동방의 작은 나라로 들어오리라.”는 것이다. 36국이라면 적은 숫자가 아니다.36이란 숫자는 자연수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전통적인 지리 관념에 따르면 이 세상은 동, 서, 남, 북의 4방으로 나뉜다.4통8달이란 말도 있지만 4방은 다시 여럿으로 세분화된다.12 간지를 모방해 지관의 나침반에서 보듯 4방은 다시 12로 나뉜다. 이것이 36으로 더욱 미세하게 갈라지기도 한다. 요컨대 36은 온 세상을 포괄하는 상징적 표현이다. 장차 한국이 36국으로부터 조공을 받게 된다는 말은, 다시 말해 한국이 세계의 중심 국가로 등장한다는 뜻이다. 물론 세상 모든 나라가 한국에 굴복할 거라는 기대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알다시피 고대로부터 중국대륙에는 강대한 정치세력이 연이어 들어섰다. 그들 나라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엔 독특한 세계 질서가 형성되었다. 조공체제란 것이다. 한 편엔 당연하다는 듯 조공을 받는 문명한 큰 나라가 있고, 다른 한 편엔 조공을 바칠 의무를 걸머진 여러 개의 미개한 나라들이 있다고 보는 위계적인 세계관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은 여진과 유구 등 몇몇 나라의 조공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남의 나라에 조공을 바쳐야만 되었던 경우가 좀더 많았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한국 사람들은 언젠가 다른 나라들에서 조공을 받는 날이 오기를 꿈꾸게 되었다. 근원을 헤아려 볼 때 ‘정감록’ 신봉자들이 36국 조공설을 주장하는 것은 민중의 오랜 갈망을 드러낸 것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조공 자체에 비중을 둔 것 같지가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립적이고 주체적인 새 국가의 건설을 바랐던 염원으로 봐야 옳지 않을까 한다. 36국 조공설을 처음으로 편 사람은 다름 아닌 묘청이었다. 그것도 서경천도론을 펴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인종 6년(1128) 고려 수도 개경의 인덕궁과 남경(뒷날의 한양)에 있던 궁궐이 연이어 화재를 입었고, 이 무렵 묘청은 이렇게 주장했다.“서경에 있는 임원역의 지기를 살펴 보았습니다. 이 곳이 음양가에서 말하는 이른바 대화세(大華勢)입니다. 만약 그곳에 궁궐을 세우고 수도를 옮기신다면 천하를 아우를 수 있습니다. 금나라가 조공을 바치게 되고 저절로 항복해올 것입니다.36국이 모두 조공을 바치게 될 것 입니다.”(‘고려사’, 권 127) 이 말에서 보듯 묘청은 한국의 지세를 하나의 유기적인 조직체로 인식했다.“대화(大華)”란 대화(大花)다. 국토를 한 그루의 나무로 볼 때 가지마다 크고 작은 꽃이 핀다. 이것이 각지의 길지 또는 명당이다. 이들 명당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명당이 큰 꽃이다. 그 자리가 평양 임원역에 있으므로, 그곳에 궁궐을 지으면 나라가 가장 융성하게(大華) 된다는 것이다. 인종은 묘청의 36국 조공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동안 개경의 귀족들에게 억눌려 지내온 자신의 처지를 일거에 개선하고, 나아가 쇠약해진 국운을 개척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왕은 묘청의 건의에 따라 서경에 궁궐을 지은 뒤, 개혁의 꿈을 이렇게 담아냈다.“해동 선현(海東先賢 옛날의 어진이들 즉, 예언가들)이 말하기를,‘대화세(大華勢)에 궁궐을 창립하여 나라의 운명을 연장할 것이다.’고 했다. 이제 이미 그 터를 잡아 새로 궁궐을 지었다. 나는 때때로 그곳을 순회하여 은혜와 덕택이 안팎에 고루 미치게 하려 한다. 이를 기념하여 죽을죄를 범한 자는 감하여 유배형에 처하고, 유배 형 이하의 죄를 지은 자는 모두 용서하겠다.”(‘고려사’, 권 16) 인종이 내린 글에서 보듯, 묘청은 ‘대화세´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앞 시대의 예언서에서 찾아 놓고 있었다.‘해동선현’이 했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런 예언이 묘청 일파에 의해 조작됐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어쨌거나 인종은 서경에서 발견된 대화세 명당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당시 조정 대신들 가운데서도 문공인과 임경청 등 일부 인사들은 묘청을 추종했다. 그들은 묘청을 “성인(聖人)”이라며 떠받들었다. 묘청의 제자 백수한 역시 그들에겐 존경의 대상이었다. 문공인 등은 왕에게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모든 국가의 일을 묘청과 백수한 두 사람에게 일일이 자문한 뒤에 시행하십시오. 그들의 견해를 따른다면 나라가 다스려져 평안할 것입니다.”(‘고려사’, 권 127) 이 말대로 인종은 한동안 묘청의 말이라면 무조건 다 좇았다. 그러나 의심 많고 나약한 왕은 결국 묘청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왕은 신하들이 “성인”이라 추앙하는 묘청의 종교적 카리스마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훗날 조선조의 중종이 개혁파 조광조를 중용하다가 겁을 내어 처단한 것과 마찬가지로, 고려 인종은 본래 자기의 적이었던 송경의 귀족들을 앞세워 묘청을 제거했다. 묘청의 죽음과 더불어 36국 조공설은 끝장났다. 하지만 그 꿈은 민중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았다. 묘청이 죽은 지 900년 가량 지난 오늘날에도 ‘정감록’ 신도들은 여전히 36국 조공설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묘청의 팔성당과 십승지 묘청이 국토를 한 그루의 나무로 인식했다는 점은 이미 앞에서 말했다.‘대화세´로 집약되는 묘청의 풍수 이해 가운데서 나는 ‘정감록’에 언급된 십승지의 원형을 본다. 이런 짐작은 인종9년(1131) 묘청이 인종에게 올린 글에서 더욱 뚜렷이 확인된다. 그는 궁궐 안에 “팔성당”(八聖堂)을 설치하자고 제안하였다. 국토의 수호신인 여덟 성인을 위해 사당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이들 여덟 성인은 풍수지리와 관계가 깊었다. 동시에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기도 했다.“팔성”에 관한 묘청의 말은 이랬다. “첫째는 호국(護國) 백두악(白頭嶽 백두산) 태백선인(太白仙人)인데 실체는 문수사리보살(文殊舍利 菩薩)입니다. 둘째는 용위악(龍圍嶽 금강산으로 추정) 육통존자(六通尊者)로 실체는 석가불(釋迦佛), 셋째는 월성악(月城嶽 경주 남산으로 추정) 천선(天仙)으로 실체는 대변천신(大變天神), 넷째는 구려(駒麗) 평양선인(平壤仙人)으로 실체는 연등불(燃燈佛), 다섯째는 구려(駒麗) 목멱선인(木覓仙人 목멱은 남산)으로 실체는 비파시불(毗婆尸佛), 여섯째는 송악(松嶽) 진주거사(震主居士)로 실체는 금강색보살(金剛索菩薩), 일곱째는 증성악(甑城嶽 속리산으로 추정) 신인(神人)으로 실체는 륵차천왕(勒叉天王), 여덟째는 두악천녀(頭嶽天女 이른바 지리산 聖母)로 실체는 부동우파이(不動優婆夷)입니다.”(‘고려사’, 권 127) 묘청의 주장은 ‘정감록’의 십승지설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그가 거론한 지명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백두산을 비롯해 백두대간의 주요 마디가 중시되었다. 백두산, 금강산, 속리산 및 지리산을 비롯해 송악산과 서울 및 경주의 남산 등이 언급되었다.‘정감록’에 언급된 길지들이 이들 여러 산과 관련이 있다는 점은 이미 여러 차례 말했다. 얼핏 보기에 ‘정감록’과 전혀 다른 점도 눈에 띈다. 전국 8대 명산의 실체를 도교의 신선이자, 불교의 불보살로 인식한 점이다.‘정감록’에는 이런 종교적 관점이 쉽게 감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없지는 않다. 부안의 변산이나 보은 속리산처럼 미륵불교의 성지가 십승지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일례로 ‘정감록’의 핵심 예언서에 해당하는 ‘감결’을 살펴보더라도 불교 최고의 성지 금강산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마음속에는 불교의 성지가 바로 최고의 명당이요, 국가의 운명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었다. 이런 믿음이 풍수지리사상과 결합해 팔성당이나 십승지라는 관념을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에는 불교의 위세가 많이 위축되었다.‘정감록’에는 불보살의 존재가 그저 간접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더욱이 ‘정감록’을 전국에 전파시킨 술사들이 유교적 교양을 갖춘 평민 지식인들이고 보니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묘청이 팔성당의 건립을 주장했을 당시만 해도 사정은 아주 달랐다. 왕은 화공을 시켜 팔성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당대 최고의 명문장 정지상은 팔성의 덕을 이렇게 찬양했다.“오직 천명(天命)만이 만물을 제어할 수 있고 오직 땅의 덕(土德)만이 사방에 왕 노릇을 하게 돕는다. 이제 평양 한 가운데 대화(大華)의 지세를 골라서 궁궐을 새로 짓고 음양의 이치에 순응하여 팔선(八仙)을 모시노라. 백두산을 받들어 우두머리로 삼으니 밝은 빛이 어리누나.” 묘청은 한국 풍수지리의 비조(鼻祖) 도선국사의 정맥(正脈)을 이었다고 했다. 도선의 후예답게 그는 팔성당 이론을 폈고, 이는 훗날 십승지설로 다시 피어나게 될 운명이었다. ●묘청의 새 상원(上元)과 후천개벽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정감록’의 이면에 간직된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사상도 실은 묘청에 기원을 두었다는 점이다. 인종10년(1132) 왕이 반포한 글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옛 가르침(예언서)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천지가 생긴 뒤 수만 년이 지나면 반드시 동지(冬至)가 갑자일이 되리라. 그때가 되면 해와 달 그리고 수화목금토 다섯별이 모두 정북(正北,子)에 모여든다. 이 때를 상원(上元)으로 삼아 일력의 출발점을 삼으라. 천지가 열린 뒤 성인(聖人)의 도(道)가 이때부터 행해질 것이다.’(‘고려사’, 권 16) 하늘을 수놓은 일곱 개의 주된 별이 정북에 모이는 동짓날이 되면 후천이 개벽된다는 예언이었다. 이런 예언에 생명을 불어넣은 이는 묘청이었다. 그는 그해 동짓날을 기점으로 후천개벽이 시작된다며 왕에게 정치의 혁신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왕은 결국 묘청의 제안을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그건 그랬지만 한국 민중은 묘청이 한 번 싹을 틔운 이상세계의 꿈을 끝내 접지 않을 것이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알림 지난 18일자에 게재된 정감록 32회 기사중 경북 울진 ‘불영사’의 한자 표기는 ‘不影寺’가 아닌 ‘佛影寺’이기에 바로잡습니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1)중국인 술사 두사총과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1)중국인 술사 두사총과 ‘정감록’

    ‘정감록’엔 중국인 술사 두사총(杜師聰)이 썼다는 ‘두사총비결’(杜師聰秘訣)이 포함돼 있다. 외국인의 이름을 빌린 예언서란 점에서 이채를 띤다. 자세히 알고 보면, 때로 중국 술사들이 한국에서 활동한 적이 없지 않았다. 특히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를 따라 중국의 술사들이 많이 왔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는 조정의 후대를 받았다. 위세를 부리다 못해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조선왕조실록’에 그런 내용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돼 있다. 뒷날 한국 민중은 그런 몹쓸 중국 술사들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민중들이 칭찬하는 중국 술사도 없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존재가 두사총이다. 이상하게도 조선왕조의 공식 기록에는 그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두사총은 민간설화와 함께 민중의 기억 속에 길이 간직되었다. 그가 저술했다는 ‘두사총비결’은 늦어도 19세기 말부터는 ‘정감록’의 일부가 되었다.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에 가면 묘라리(妙羅里)란 마을이 있다. 그곳 사람들은 이 마을 이름을 처음 지은 이가 바로 두사총이었다고 기억한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따라 조선에 온 두사총은 중국 군대를 따라 전국 각지를 누볐다. 한 번은 이곳을 지나게 됐다. 두사총은 이곳의 지세를 자세히 살핀 다음 ‘풍취라대’(風吹羅帶)라고 결론지었다. ●술사 두사총은 명나라군대의 일원 비단 허리띠가 바람에 펄럭이는 모양이란 이야기다. 비단 띠는 고관대작이나 두르는 귀한 물건이라, 장차 이 마을 사람들은 부귀를 누리게 된다는 풍수예언이었다. 그런 뜻을 새겨 두사총은 마을 이름을 ‘묘라’(妙羅 매우 고운 비단)라고 했다. 훗날 묘라리는 번영을 누렸고, 묘라, 후리, 두무동 등 3개 마을로 발전했다. 따지고 보면, 두사총은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군대의 일원이었다. 그에겐 조선의 지세를 자세히 염탐해 중국에 보고할 사명이 있었을 것이다. 만일 조선에 어마어마한 명당이 있다면 그 맥을 끊어 땅 기운을 약화시킬 임무를 띠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두사총은 그런 일에 종사한 흔적이 없다. 그는 전국을 유람하다 좋은 자리가 나오면 스스럼없이 조선 사람들에게 알려줬다. 조선에 명당이 있다면 그 복은 당연히 조선 사람들이 누려야 한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이런 두사총의 마음은 한국 민중에게 전해졌고, 민중은 그를 자기들 편으로 믿게 됐다. 두사총의 행적에 관해 많은 설화가 남아 있는 까닭이 바로 거기 있다. 경상북도 문경시 동로면에도 한 가지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진다. 생달리란 마을 입구에 ‘마총’(馬塚)이란 비석이 서 있고, 깊은 곡절이 있는 말 무덤이 있다. 경상도까지 살펴보게 된 두사총은 이곳에서 ‘연주패옥(連珠佩玉)’이라 불리는 대명당을 발견했다. 구슬을 꿰고 옥을 단다는 뜻의 이런 명당에 묘를 두면, 그 집안에 금관자·옥관자를 단 정승 판서 벼슬이 수없이 나온다고 한다. 이 천하제일의 명당을 두사총은 정탁(鄭琢·1526~1605)에게 전해줄 생각이었다. 정탁은 지조 높은 선비였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 곽재우(郭再祐) 및 김덕령(金德齡)과 같은 명장을 발탁해 나라를 구하려고 애쓴 문신이었다. 정탁은 자기 한 몸의 안락보다는 국가의 안위를 위해 노심초사했다. 두사총은 정탁이야말로 장차 이런 명당의 주인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몰래 정탁의 하인에게 그 명당 터를 일러줬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정탁이 세상을 떴다. 정탁의 아들은 아버지가 묻힐 명당을 찾아 하인과 함께 생달리까지 찾아왔다. 그런데 그들 일행이 생달리 동구 밖에 도착했을 때 불행히도 그 하인은 말 뒷발에 차여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아들은 몹시 억울하고 분심이 치밀어 올라 그 자리에서 말을 칼로 베어 죽였다. 생달리의 마총에 관한 전설에서 거듭 확인되듯 중국 술사 두사총은 ‘우리 편’으로 기억되었다. 전설 속의 그는 정탁과 같은 충신을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조선 최고의 명당을 조선 최고의 신하에게 전해주려고 했다. 이것이 과연 역사적 사실이었는지 누구도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이 있다. 민중은 중국인 술사 두사총을 의리 있고 믿을 만한 지관으로 손꼽았다는 점이다. 두사총은 국적을 떠나 도선 및 무학대사 등과 더불어 한국 민중이 가장 존경하는 풍수의 대가였다. 사실 임진왜란 때는 다수의 중국인 술사들이 전국을 훑고 다녔다. 명나라 군대가 가는 곳마다 그들이 보였고 그 기세도 높았다. 조선 사람들은 중국 술사들에 대해 깊은 혐의를 두고 있었다. 그들 술사는 아무래도 중국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일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중국인 술사들에 대한 불신이 깊어가는 가운데 민중은 그 반대편에 선 인물을 찾고 있었다. 민중이 보기에 진정 훌륭한 지관이라면 조선의 길지를 조선인들에게 돌려줘야 마땅했다. 위에서 살핀 두사총과 정탁에 관한 설화는 이런 민중의 바람을 형상화한 것이다. ●호종단이란 나쁜 중국인 술사 두사총과는 영 딴판인 중국인 술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악질적인 인물로 기억되는 이가 호종단(胡宗旦)이다. 그는 멀리 중국 송나라 때 인물로 제주도에 파견돼 명당기운을 해칠 사명을 띠었다 한다. 당시 세상엔 한 가지 소문이 횡행했다. 제주도엔 13개의 명당이 있어 천하제일의 인재들이 쏟아져 나와 세상을 주도하리라는 것이었다. 이 소문을 듣고 중국 황제는 무척 당황했다. 황제는 압승지술(壓勝之術 명당기운을 억누르는 기술)의 대가 호종단을 제주도로 보내 13혈(穴)을 찾아 침질을 하게 했다. 비밀리에 호종단은 북제주군 표선면 의귀리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이어 서귀읍 서홍리로 옮겨 혈을 죽이려 했다. 이렇게 13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지기(地氣)를 억눌렀다. 제주도 동부지방에는 샘이 별로 없고 서쪽에는 샘물이 많은 편인데, 그것은 호종단의 소행과 관련이 있다 한다. 더러 호종단의 뜻대로 된 곳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대개는 천지신명의 방해로 호종단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서둘러 일을 끝낸 호종단은 중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가 탄 배가 북제주군 한경면 고산리 앞바다의 한 섬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한 마리 날쌘 매가 배 위로 날아왔고 그러자 사나운 폭풍이 일어나 배를 물속에 가라앉혔다. 호종단은 물고기 밥이 되고 말았다. 제주도 사람들의 해석이 재미있다. 호종단의 횡포에 분노한 한라산신이 매로 변해 복수했다는 것이다. 호종단의 귀로를 차단했다는 뜻에서 사람들은 고산리 앞바다의 그 섬을 차귀섬(遮歸島)이라 부른다. 호종단의 활동과 죽음에 관한 설화는 과장된 것이 분명하다. 역사상 제주의 풍수지리를 염탐할 목적으로 외부에서 술사들을 파견했을 법은 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제주도의 어느 지역에선 샘물이 메마르고 인재의 배출이 멎었을 리는 없다. 도리어 사태는 그와 반대로 진행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정 지역에서 샘과 인재가 메마르자 그것을 호종단과 같은 악질적인 술사들의 행위 탓으로 돌렸다고 생각된다. 때로 민중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두려움의 근본적 원인을 외부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점에서 호종단은 민중이 공동의 기억 속에 불러들인 가공인물일 수도 있다. 그 점은 민중의 희망을 대변하는 두사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극히 선한 것과 극히 악한 것은 역사적 실체가 없는 기억의 창조물일 가능성이 많다. ●망각된 중국 술사 섭정국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당시 국왕 선조는 명나라에 술사의 파견을 요청하기도 했다.“특별히 방술에 정통한 사람을 보내 주시어 지리를 명백히 살피게 하여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실록, 선조 26년8월8일 기축) 조선 측은 왜란이 터지자 수도 이전을 비롯해 궁궐과 능묘의 이전을 검토 중이었다. 국내엔 이처럼 큰일을 감당할 마땅한 전문 인력이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중국 측에 도움을 구했던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명나라 군대를 따라 조선에 들어온 술사들이 여러 명이었다. 김상(金上), 풍중영(馮仲纓), 왕종성(王宗盛), 양문성(楊文成), 이문통(李文通), 유원외(劉員外 이름은 미상)가 이를테면 그 대표적인 존재였다. 그들 가운데 풍중영과 왕종성은 수도 한양의 풍수를 논하기도 했다.“건국된 지 2백년 만에 재액(災厄)이 있겠으나 그 뒤로는 무사하다.”(선조 26년8월10일 신묘) 1392년에 건국된 조선은 1592년 임진년에만 한 차례 난리를 겪을 뿐 운수가 무궁하다는 일종의 덕담이었다. 선조는 그 말에 무척 감격해했다. 중국의 여러 술사들 가운데서 가장 각광을 받은 이는 섭정국(葉靖國)이었다. 그는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와 가까워 왕실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풍수에 관한 일이라면 모두 관여했다. 선조비(宣祖妃)의 능을 정하는 문제에도 깊이 간여했다. 외국인이 조선 왕비의 능묘를 정하는 일에 뛰어들자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설사 섭정국 같은 이가 풍수에 능해 길지를 얻는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쓰는 격국(格局)과는 다르다. 그는 심지어 길가의 낮은 지역과 집 뒤의 조그마한 동산을 가리키며 가장 좋은 곳이라 하니, 무슨 증거로 그 말을 믿겠는가?”(선조33년7월14일 을묘) 본래 풍수지리에 관한 이론은 고대 중국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한·중(韓·中) 두 나라의 풍수 보는 법은 상당히 달랐다. 각 시대마다 새로운 풍수지리설이 등장하기도 했고, 지역마다 유행하는 이론도 달라 서로 일정할 수가 없었다. 당시 한국에는 김여견(金汝堅), 김덕원(金德元), 송건(宋健) 및 이의신(李懿信), 박상의 등이 술사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조선인 술사들의 능력을 불신했다. 결과적으로 섭정국의 활동영역은 하루가 다르게 확대되었다. 서울에 관왕묘(關王廟)를 건립하는 것까지도 그의 견해를 참고할 정도였다(선조32년4월29일 무인). 자기의 능력을 과신하게 된 섭정국은 남대문에 벽보를 붙여 명나라의 도망병들을 불러 모아 독자적인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는 조선 측에 물자 공급을 독촉하면서 관리를 구타하고, 도망병들을 거느리고 못할 짓이 없었다 한다. 선조는 풍수설(風水說)에 현혹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은 섭정국의 터무니없고 괴이한 주장을 맹신해 왕비를 장사지내는 일정을 몇 달씩이나 지연할 정도였다. 그러나 섭정국은 거만을 피우며 도리어 조선왕조의 관리와 백성들을 마음대로 때리고 짓밟는 등 만행을 자행했다. 얼마 후 섭정국은 명나라로 송환되었으며 한국 민중은 그를 깡그리 잊었다. 민중은 사기꾼 같은 섭정국이란 존재를 오래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두사총비결’에 담긴 뜻 두사총은 조선의 중앙 정치무대에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 민중은 그를 무척 친근하게 여겼으므로, 예언서의 저자로 둔갑시켰다. 섭정국의 경우와는 확연히 달랐다. 크게 보아 ‘두사총비결’의 요지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어떤 곳이 길지며, 어느 곳이 흉한 땅인가를 밝혀 놓은 것이다. 이런 논의는 ‘정감록’에 실린 다른 예언서들과 공통되는 점이 대부분이다. 물론 ‘두사총’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한 주장도 전혀 없지 않다. 길지에 관한 ‘두사총’의 견해를 살펴보면 우선 “태백산과 소백산은 백두산에서 갈려 내려와서 산맥이 나뉘었는데 본래부터 왕성한 기상이 있어 화기(和氣)가 넘쳐흐른다.”고 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영천의 백운산, 동주, 용해를 먹을 것이 풍족해 대를 이어 길이 보존할 땅으로 보았다.‘정감록’은 어느 것이나 태백산과 소백산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두사총’ 역시 예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좀 더 부연하면 ‘정감록’은 백두산에서 시작돼 지리산까지 뻗어나간 백두대간의 주요 명당을 무척 중시한다.‘두사총’도 그런 입장이다.“화산, 가야산, 지리산, 두류산과 삼풍의 네 평야는 곧 어진 정승이나 좋은 장수가 계속해서 나올 곳으로서 땅은 기름지고 풍속은 순후해서 오래 갈수록 더 좋으나 누가 주인이 되겠는가?” 그밖에 영가의 백운산, 화약산, 대아산, 도성산, 명주(강릉), 소양의 기린산과 낭읍의 대미산을 길지로 손꼽은 것도 백두대간에 대한 깊은 신앙심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두사총’은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의 명산을 꽤 중시하는 편이다. 오서산과 성주산, 강화의 마니산, 약수산을 “병화(兵火)가 들어가지 않고, 간사한 것이 침입하지 않는다”고 했다.“태령의 수양산과 곡산의 밝고 아름다움은 재앙과 어지러움이 이르지 않아서 길이 복된 땅이 될 것이오”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들 여러 산은 ‘정감록’에서 말하는 이른바 십승지(十勝地)에 속하지 않으며 ‘두사총’에만 길지로 나와 있다. 그런데 누구나 길지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한다.“덕을 쌓고 오랫동안 어진 일을 한 집이 아니면 어떻게 여기에 살 수가 있겠는가?” ‘두사총’은 이렇게 반문한다. 이런 자격 검토도 실은 ‘정감록’ 요소요소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메시지다. ‘두사총’의 개성은 흉한 땅에 대한 주장에서 좀더 뚜렷이 부각된다.“호남의 산은 등을 돌리고 달아난 것이 많아서 좋지 못한 일이 많이 생긴다. 이것은 내버려두고 말할 것이 없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호남의 지세를 배역(背逆)으로 본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일례로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가 그렇다. 그와는 달리 ‘정감록’에는 부안 변산, 무주, 운봉, 해남 등지를 길지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웬일인지 이런 전통을 ‘두사총’은 따르지 않는다. 그 대신 “신안 몇 고을은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으리라.”고 하여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어쨌거나 호남을 푸대접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흔히 길지로 취급하는 경기도 양근의 용문산 등에 대해서도 ‘두사총’의 평가는 몹시 부정적이다.“양근 용문산과 유양산은 안으로 세 가지 안목의 정교한 것이 없으면서도 오로지 깊고 궁벽한 것을 숭상하여, 이 때문에 사람들이 다투어 여기에 산다. 그러나 용문산 기운은 삼각산에 빼앗겼으니 이는 아마도 헛된 꽃이요 죽은 굴혈일 것이다. 게다가 산 안의 형세도 돌아서서 버리고 끌고 나갔다. 지각 있는 군자라면 내 말이 없더라도 알 것인즉 삼가고 삼가라.” 인용문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용문산으로 들어와 피란하고 있었음이 밝혀져 있다. 그런데 이것은 19세기 말의 사정이었다. 앞에서 말하기를,‘두사총’은 충청도와 경기도 일원의 새 길지를 언급한 점에 한 가지 특색이 발견된다고 했다. 그에 덧붙여 19세기 말 경기도 용문산 일대의 형편도 사실적으로 기술돼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를 종합해 보면,‘두사총’은 19세기 말 경기도를 비롯한 중부지방에서 저술되고 읽혔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것도 임진강 동쪽, 철령 이남을 이상향으로 상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한 것으로 봐야 옳겠다.“임진강 서쪽과 철령 북쪽은 무엇을 족히 의논하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서북 지역은 극히 흉한 땅이란 얘기다. 굳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는 주장이다. 어찌 보면 새로운 듯하면서도 ‘두사총’은 ‘정감록’의 상궤를 그리 멀리 이탈하지는 못한 것이 틀림없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풍수지리 마케팅’ 바람

    첨단을 달리는 산업계에도 풍수지리 바람이 불고 있다. 아파트 입지를 정하는 데 풍수지리를 따지는 것은 오래된 일이고 가전업계 대리점의 제품 진열은 물론 백화점 명품관 배치까지 알게 모르게 풍수지리를 접목하고 있다. 업계는 그동안 상품에 접목한 풍수지리를 일부러 드러내 놓지 않았으나 마케팅 수단으로 이어가면서 태도가 바뀌고 있는 추세다. ●아파트부터 백화점까지 아파트 마케팅에 풍수지리를 접목해 재미를 톡톡히 본 곳은 서울 종로구 주상복합 아파트인 경희궁의 아침. 왕궁의 터에 아파트를 짓는다는 컨셉트로 분양 ‘대박’을 터뜨렸다. 용산구 청암동에 짓는 아파트는 이승만 박사 별장 터를 앞세워 투자자들을 끌어모으기도 했다. 우림건설은 경남 진해와 대전 대덕테크노밸리에 우림루미아트를 분양하면서 풍수지리 전문가에게 자문해 입지 홍보에 적극 활용했다. 현대건설 부산 민락동 하이페리온, 삼성물산 성남 금광지구 래미안, 대우건설 금호동 푸르지오,SK건설의 부산 용호동 SK VIEW, 방배동 아펠바움 등도 풍수지리 마케팅을 도입한 아파트다. 포스코건설과 세창건설 등도 각각 풍수지리 전문가에게 자문해 아파트 입지를 정했고 이를 마케팅에 활용하고 있다. 풍수지리 접목은 아파트에 끝나지 않고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 풍수지리 전문가를 영입, 삼성 디지털 플라자 점포 인테리어와 상품 배치에 관한 의견을 듣고 있다. 점포 입지분석 등은 해당 지역 상권과 고객 접근성 등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하지만, 내부 인테리어 등은 고객을 편하게 유도하기 위한 차원에서 풍수지리 전문가의 조언을 참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싸고 고급 제품을 파는 점포일수록 풍수를 따지는 곳이 많다. 한 디자이너는 “백화점 명품관은 오래전부터 풍수지리를 따져 배치하고 있다.”면서 “좋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점포 경쟁을 벌이고, 풍수지리가 좋은 곳은 보증금이 상대적으로 비싸다.”고 말했다. ●사무실 공간구조 배치 등 생활풍수 유행 풍수지리가 새로 태어나고 있다. 무턱대고 음덕이나 복을 비는 맹신이 아니라 과학적인 통계로 접근하려는 노력이 시도되고 있다. 접목 범위도 가족 대소사에서 산업계로 넓어지고 있다. 미신이나 고리타분한 잔소리 정도로 받아들이지 않고 생활 풍수로 받아들이는 경향도 짙다. 대표적인 것이 사무실 공간구조 배치 풍수. 한국풍수지리연구원 전항수 원장은 “사무실 가구, 조명, 창문 배치 등을 묻는 기업체들이 많다.”면서 “부동산·건설업은 물론 제조업, 유통·서비스업, 대기업 외국 지사 사무실까지 다양하다.”고 말했다. 공공기관도 풍수지리를 응용하고 있다. 무주군은 태권도 공원 후보지를 고르면서 ‘하늘이 내려준 천생연분의 땅’으로 치켜세웠다. 민족 성전인 태권도 공원의 터전으로 최적의 조건을 갖췄고 무술인의 표상이 되는 땅으로, 태권도 공원의 입지로 최적이라고 소개했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8) 토정 이지함과 ‘토정가장결’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8) 토정 이지함과 ‘토정가장결’

    ‘토정비결’(土亭秘訣)을 굳게 믿는 친구가 있다. 그는 해가 바뀔 때마다 자기 자신의 일년 신수는 물론 가족과 친지들의 새해운수도 일일이 챙겨준다. 실은 그 친구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엔 그런 이들이 참 많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1517~1578년)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토정은 매월당 김시습, 북창 정렴과 함께 조선의 3대 기인으로 손꼽힌다. 놀랍게도 ‘정감록’가운데는 토정이 지었다는 ‘토정가장결’이 포함돼 있어 관심을 끈다. 더욱이 이 예언서는 여러 대 동안 비밀리에 전해졌다고 하므로 더욱 호기심이 일어난다. 그런데 ‘토정가장결’에 무슨 사연이 담겨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친숙한 이름이긴 하지만 실상 우리가 잘 모르는 토정 이지함의 비극적인 생애를 알아보자, 이 기회에 그가 후세에 남겼다는 ‘토정비결’과 ‘토정가장결’, 그리고 ‘정감록’의 관계를 정리해보면 좋겠다. ‘토정비결’(土亭秘訣)을 굳게 믿는 친구가 있다. 그는 해가 바뀔 때마다 자기 자신의 일년 신수는 물론 가족과 친지들의 새해운수도 일일이 챙겨준다. 실은 그 친구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엔 그런 이들이 참 많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1517~1578년)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토정은 매월당 김시습, 북창 정렴과 함께 조선의 3대 기인으로 손꼽힌다. 놀랍게도 ‘정감록’가운데는 토정이 지었다는 ‘토정가장결’이 포함돼 있어 관심을 끈다. 더욱이 이 예언서는 여러 대 동안 비밀리에 전해졌다고 하므로 더욱 호기심이 일어난다. 그런데 ‘토정가장결’에 무슨 사연이 담겨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친숙한 이름이긴 하지만 실상 우리가 잘 모르는 토정 이지함의 비극적인 생애를 알아보자, 이 기회에 그가 후세에 남겼다는 ‘토정비결’과 ‘토정가장결’, 그리고 ‘정감록’의 관계를 정리해보면 좋겠다. ●토정은 대단한 기인(奇人) ‘조선왕조실록’엔 토정의 풍모를 전해주는 몇 가지 기록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지함을 토정이라 불렀다. 이지함이 거처하던 곳이 토정(土亭)이었기 때문이다. 토정은 일찍이 한양의 마포 항구(麻浦港口)에 흙을 쌓아 언덕처럼 만들어 놓고 그 아래 굴을 팠으며 위에는 정자를 지었다. 그런데 큰물이 졌을 때도 토정이 만든 흙 언덕은 언제나 그대로였다(실록, 선조 수정 11년 7월1일 경술). 토정은 여느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어 보이는 큰 키에 건장한 체격이었다. 특히 발이 무척 컸다고 한다. 토정의 얼굴은 둥글고 검은 편이었고 눈빛이 강렬했다. 목소리는 우렁차고 맑아 상쾌한 느낌을 주었다. 토정은 보통 선비들과는 차림새도 확연히 달랐다. 그는 짚신을 신고 죽립(竹笠)을 쓴 채 걸어 다녔다고 한다. 초립(草笠)에 나막신을 신은 구부정한 모습이었다는 진술도 있다. 그 당시 선비들은 당연히 조랑말이라도 타고 다녀야 되는 줄로 알았고, 항시 의관을 정제했다. 고급스러운 말총으로 꾸민 큰 갓을 쓰고 가죽신을 착용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토정은 이런 풍습을 도외시했으므로, 그가 길거리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며 비웃기 마련이었다. 담화를 나눌 때도 토정은 수수께끼나 농담을 즐겼고, 점잖지 못한 모습을 보일 때도 많았다(실록, 선조 수정 6년 5월1일 경진). 한마디로, 토정은 격식을 초월했다. 혼례를 치른 다음 날에도 의외의 행동으로 가족과 친지들을 놀라게 했다. 모처럼 새로 지은 도포를 입고 외출한 토정은 어느 다리 밑을 지나다가 추위에 떨고 있는 세 명의 거지아이를 만났다. 토정은 입고 있던 새 도포를 벗어 세 폭으로 찢어서 그 아이들에게 입혀주었다. 그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종일 바깥에서 일을 보았다. 토정은 이처럼 호방한 성격이었다. 도인의 면모를 보인 적도 많았다. 그는 열흘 정도는 굶어도 거뜬했다. 무더운 여름철에도 냉수 한 모금 마시는 일이 없었다. 요즘의 건강상식에 크게 어긋난 행동이었다. 토정은 간혹 천리 길을 걸어 어딘가를 바람처럼 다녀오기도 하였다. 배를 타고 방랑하기를 좋아해 제주도를 여러 번 찾았다는데 태풍이 불거나 파도가 거센 날을 용케 피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간혹 여행 중에 기생들이 별의별 수단을 다 써 유혹했으나 한 번도 넘어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토정은 정욕마저 완전히 끊어버린 이를테면 속세의 신선이었다는 이야기다.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설화도 그래서일까. 토정에겐 앞일을 내다보는 예지 능력이 있었다. 젊은 시절 그는 장인에게 화가 닥칠 것을 미리 알았다 한다. 명종 초년의 일이다. 하루는 토정이 그 부친에게,“아내의 가문에 불길한 기운이 있어 집을 떠나지 않으면 장차 화가 미칠 것입니다.” 라고 아뢴 뒤 식구들을 이끌고 서둘러 한양을 떠났다. 바로 그 다음 날, 토정의 장인은 사화에 연루돼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까지 용했을까 하는 일말의 의문이 없지 않다. 어쨌거나 ‘실록’은 토정의 예언 능력을 무척 칭찬한다. 한 번 사람을 만나보면 그 성품은 물론, 앞날의 길흉까지 환히 알아 맞혔다 한다. 토정은 이미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오래 전에 사태를 예언했다는 구비설화가 남아 있다. 만년에 그는 조선 팔도를 두루 유람했다고 한다. 당연히 천하명산 금강산에도 들렀다. 하루는 날이 기울자 토정은 지친 몸을 이끌고 암벽 위에 서 있는 초라한 암자를 찾아갔다. 워낙 피곤해서 제대로 자리를 펴고 누울 겨를도 없이 방안에 들어가 한 쪽 벽에 기대어 깜빡 잠이 들었다. 조금 있다가 꿈속에 스님 두 분이 나타났다. 그들은 병풍과 자리를 깔며 부산을 떨었다. 토정은 스님들에게 그 까닭을 물었더니, 여러 산의 산신령들이 모여 장차 다가올 난리를 의논할 거라는 답변이었다. 과연 전국 명산의 산신령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회의를 열었다. 여러 주장이 난무했다. 그러자 금강산 산신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왜놈들이 동방예의지국 조선을 침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최선을 다해 놈들을 물리치자고 주장했다. 놀란 토정은 퍼뜩 깨어났다. 조금 전 기대어 잠을 청했던 암자는 오간 데 없었다. 암벽 위엔 한 그루 늙은 소나무만 외롭게 서 있었다. 이런 일을 겪고 나서 토정은 왜란이 일어날 줄을 짐작했다. 이것은 한낱 설화다. 토정을 뛰어난 예언가로 간주하게 된 후대의 민중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수가 있다. 역사 속에서 믿고 따를 만한 인물을 재발견하는 것이 민중들로선 익숙한 일이었다. 그들은 본래 토정이 특이한 선비인 줄 알고 있었으므로, 이런 설화를 덧붙여 민중의 스승으로 이상화했다고 풀이된다. 왜란에 관해선 또 다른 이야기가 토정의 문집에 실려 있다. 일찍이 그는 상중(喪中)에 있던 제자 조헌(趙憲)을 조문하였다. 그날 혜성(彗星)이 밤하늘에 뻗쳐 조헌이 그 조짐을 물었고, 토정은 이 혜성이 천하에 큰 난리가 일어날 조짐이라며 그때에 대비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했다 한다(실록, 영조 30년 11월27일 임인). 스승의 말을 가슴에 새긴 조헌은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돼 금산에서 북상하던 왜적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문집의 기록은 사제간의 문답을 확대 해석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토정이란 인물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기도 한다. 그는 일상적인 일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국가의 장래를 염려했던 것이다. 토정은 다분히 도가적(道家的)이었지만 본질적으론 유가(儒家)의 선비였다. ●사화에 얽혀 불우했던 토정 사실 토정은 국가경영에 관심이 컸다. 평상시 그는 이런 말을 자주 했다.“내가 일백 리 되는 고을을 맡아 다스리게 되면 가난한 백성을 모두 부자로 만들고 야박한 풍속을 돈독하게 바꿀 것이다.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아 나라의 평안을 지킬 것이다.” 그러나 토정은 벼슬에 나아갈 기회를 얻지 못했다. 명종5년(1549년) 토정이 33세 되던 해에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토정의 장인이 역모사건에 연루돼 사형을 당했고, 연좌법에 걸린 토정은 벼슬길이 막혔다. 설상가상으로 죽마고우(竹馬故友) 안명세(安名世)마저 필화를 입고 죽었다. 사관(史官)으로 이름이 높았던 안명세는 명종 연간 을사사화(1545년)에 관련해 윤원형과 이기 등 소윤(小尹)이 윤임 등 대윤(大尹)을 모함해 몰살했다고 적었다. 윤원형 일파는 몰래 사초를 들여다보았고, 자기들에게 불리한 기사를 쓴 안명세를 제거한 것이다. 이후 토정은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기인(奇人)으로 처세하게 됐다. 지지난 호에 소개한 정렴은 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의 아들이라 스스로 세상을 피했던 데 비해, 토정은 억울하게도 세상에 용납되지 못해 기벽(奇癖)을 갖게 됐다고 해야 맞다. 어찌 보면 세상을 원망하고 자포자기하기가 참 쉬웠을 텐데, 토정은 절망하지 않고 학문에 힘썼다.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및 의학에도 발군의 실력을 보였고, 조헌과 이산보를 비롯해 여러 제자를 키웠다. 조정이 토정에게 벼슬길을 열어준 것은 한참 지나서였다. 을사사화의 주도세력이 조정에서 물러난 선조 초년이었는데, 그 사이 토정은 이미 늙어버렸다. 그는 60이 가까운 나이에 사실상 초임이나 다름없는 아산군수 자리에서 세상을 떴다. 평생 닦아온 선비의 웅지를 펼칠 겨를도 없었다. 토정이 남긴 글은 뒷날 ‘토정유고’(2권1책)로 정리됐다. 이와는 별도로 민간에서는 ‘토정비결’과 ‘토정가장결’, 주역(周易)에 관한 ‘월영도’, 풍수지리를 다룬 ‘농아집’ 등을 토정의 저술이라 일컫는다. 그런데 실상 ‘토정유고’에는 위에 언급한 어떤 책자도 거론되지 않고 있다. 만일 실증주의의 입장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토정비결’이나 ‘토정가장결’ 등은 토정의 저술이 될 수 없다.‘토정유고’외에는 이지함의 저술로 단정할 만한 결정적인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모두 후대의 위작으로 볼 것인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토정비결의 매력 물론 어느 쪽도 단언하긴 어렵다. 그러나 다른 책은 몰라도 ‘토정비결’만은 토정의 붓끝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토정은 의학과 점에 능통했기 때문에 그를 찾아와 운수를 묻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일반의 그런 요구가 많아지자 토정은 아예 한 권의 책을 지어 일상의 번거로움에서 해방되기를 도모했을 법도 하다. ‘토정비결’은 주역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주역과는 다르다. 주역의 기본 괘는 48개인데 비해 ‘토정비결’은 32개다. 괘를 짓는 방법도 달라 이른바 사주 가운데 시(時)를 뺀 년(年), 월(月), 일(日)을 사용할 뿐이다. 조선시대 민간에는 시계가 없어 시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편의를 도모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토정비결’은 주역을 이용하면서도 조선의 특성을 십분 고려했다. 그러다 보니 점괘의 총수도 주역과는 다르게 됐다. 주역에는 총 424개의 괘가 있으나 ‘토정비결’은 총 144개뿐이다. 훨씬 간편하다고 말할 수 있다. 토정 이지함처럼 기발하고 독창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토정비결’은 열두 달의 운수를 시구(詩句)로 적어 놓았다.“동쪽에서 목성을 가진 귀인이 와서 도와주리라.”,“관재수가 있으니 혀끝을 조심하라.”는 식이다. 간단명료한 글귀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은 점괘다. 각 항목마다 길흉이 적절한 비율로 배합돼 있어 낙관도 실망도 하기 어렵게 돼 있다. 결과적으로,‘토정비결’은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며, 일마다 조심스럽게 정성을 다해 처리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토정비결’은 운수를 판별하는 데 중점이 있다기보다 일반 민중들에게 삶의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토정비결’은 단순히 점을 봐주고 금품을 요구하는 직업적인 점쟁이의 저술로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내 눈엔 그것이 점을 통해 점을 치는 사람들이 점에만 의존하지 않게 유도하는 기능이 숨겨진 반점술서(反占術書)로 보인다. 토정 이지함과 같이 점에 능통하면서도, 본질적으론 유가(儒家)의 철학을 신봉한 큰선비가 남겼을 법한 저술이다. ●그럼 ‘토정가장결’은? 정리하면, 토정은 살아생전에 이미 기인, 도사 그리고 큰선비로 세상에 유명했다. 더욱이 후세에는 ‘토정비결’과 같은 명저의 지은이로 민중에게 더욱 친숙한 이름이 됐다. 그가 만일 무수한 개인의 운명을 점칠 수 있다면, 나라의 운수인들 모를 까닭이 있었겠느냐는 의견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맴돌았음이 틀림없다.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선 토정이 남긴 예언서가 어디선가 발견돼야만 했다. 이것이 조선후기 ‘토정가장결’이 탄생한 문화적 배경이다. 분명한 사실은 ‘토정가장결’에 앞서 ‘정감록’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조선왕조가 망하고 진인 정씨가 새 나라를 세운다는 ‘정감록’의 예언을 참작해 ‘토정가장결’이 쓰였다.“내 비록 재주 없으되 우러러보고 굽어 살피며 수년 간 별의 숫자로 헤아려 보니 한양이 500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토정가장결’은 이런 식으로 조선왕조의 멸망을 점쳤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수년 간 별의 숫자로 헤아려” 본 결과, 조선왕조의 운수를 짐작하게 됐다고 했다. 천문에 중점을 두고 예언을 했다는 점이 ‘토정가장결’의 특징이다.‘감결’을 비롯해 다른 예언서들이 풍수지리에 의존해 국운을 점친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참고로, 천문 점의 전문가들은 서북지방에 많았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의 천문지식은 중국 사람들도 감탄할 정도였다. ‘토정가장결’에 보이는 두 번째 특징은 압록강 이북의 요동이 중시된다는 점이다. 이 점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잠시 비결을 인용하겠다.“장류수(계사) 운은 푸른 옷과 흰 옷이 서쪽, 남쪽에서 침략한다. 이때 전읍(奠 , 즉 鄭姓 眞人)이 바다 섬의 군사를 이끌고 방성, 두성의 장수와 함께 갑오년 섣달 즉시 금강을 건너면 다시 천운이 커질 것이다.(중략) 곽 장군이 요동 군사를 이끌고 방씨, 두씨 장수와 함께 왜적 및 서남 오랑캐를 무찌르며, 청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돕는다. 정씨를 편들고 이씨를 공격하면 이씨는 제주로 들어갈 것이니 4,5년간의 운수에 지나지 않는다.” 요약하면, 계사년에 외침이 있는데 만일 그 때 요동의 곽 장군이 나서서 정씨를 도우면 동아시아의 정치질서가 재편된다고 했다. 곽 장군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확립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는 것인데, 곽 장군은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 사람으로 상정되었다. 늦어도 19세기 후반엔 고구려의 옛 땅이던 만주가 가난에 쫓겨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간 상당수 민중들의 손길로 개발되고 있었다.‘토정가장결’에 등장하는 곽 장군은 아마도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 인물로 해석된다. 달리 말해, 간도에 진출한 빈농들이 이상적인 지도자로 여겼을 법한 가상인물이다. 셋째,‘토정가장결’은 난세의 피란지로 전혀 새로운 장소를 거론했다.“만약 요동 간방으로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라면 반드시 삼척부 대소궁기를 향하여 부지런히 힘을 기울여 곡식을 쌓을 일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정감록’은 주로 삼남 지방에 십승지 또는 길지를 설정해두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경상도의 풍기, 충청도 공주 및 전라도 운봉이었다.‘토정가장결’은 이를 정면에서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요동과 삼척이란 뜻밖의 장소를 최고의 길지로 내세운다. 확실히 새로운 변화였다. 여기서 나는 ‘토정가장결’이 출현한 시기를 좀더 정확하게 짐작해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간도로의 ‘불법이민’이 본격화된 19세기 후반에 이 예언서가 창작된 것은 아닐까. 참고로, 삼척이 길지로 대두된 이유를 헤아려 보겠다. 토정에 관한 구전설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한때 토정은 삼척에 머문 적이 있었다는데 거기서 스님 행색으로 위장한 왜놈 첩자를 붙들었다. 이 일로 임진왜란 때 왜군은 토정이 살던 삼척에는 아예 얼씬도 못했다는 설화가 있다. 신기하게도 구전설화는 예언서의 내용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 모양이다. 물론 거꾸로 됐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토정은 정치적으로 무척 불우한 재사였다. 그래서 그는 기인이자 도사가 되기도 했고,‘토정비결’ 같은 책을 지어 고난 받는 민중의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으려 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토정은 민중의 스승으로 자리매김돼 ‘토정가장결’의 저자로도 둔갑됐다.‘토정가장결’은 ‘정감록’의 논리를 존중하면서도 19세기 후반의 변화된 사회현실을 그대로 투영한다.“알 자는 알리라.” (푸른역사연구소장)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7)무학대사와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7)무학대사와 ‘정감록’

    ‘정감록’엔 이른바 삼절운(三絶運)이 예언돼 있다. 조선왕조의 운수가 세 번 끊길 위험에 처한다는 것인데,“이씨의 운에 세 개의 비밀스러운 글자가 있으니 소나무, 집, 그리고 밭이라(李氏之運 有三秘字 松家田三字也)”고 한 구절이 그것을 집약하고 있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소나무, 집, 그리고 밭이 최적의 피란처란 뜻이다. 소나무(松, 명나라 장수 李如松) 덕택에 임진왜란을 넘길 수 있었으며, 병자호란은 겨울철에 일어난 전쟁인 데다 단기간의 전쟁이라 집에 조용히 머문 사람은 무사했고 멀리 피란간 사람들은 도리어 혹한을 만나 얼어 죽었다는 이야기다. 밭이 피란처가 되는 것은 세 번째 위기가 닥쳐올 때라고 했다. 위기가 닥쳐올 시기에 대해 “해를 헤아려보면 세 번의 전쟁은 원숭이, 쥐 또는 용해에 일어난다.(考基年數 則兵在申子辰)”고 했다. 임진(辰)·병자(子)는 이미 역사적 사실로 입증됐기 때문에 원숭이해가 언제인가로 초점이 모아졌다. 조선 후기 기득권층은 그 해가 언제냐며 전전긍긍해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왕조의 종말을 바라던 사람들은 이 예언에 큰 희망을 걸었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도 이 예언을 남긴 사람은 무학대사(無學大師)라고 했다. 무학이라면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로 한양 천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조선왕조의 멸망 시기를 예언했다니 갑자기 어리둥절해진다. 무학은 정말 조선 왕조의 멸망을 예언했을까. 만일 그런 일이 없었다면, 언제 누가 왜 무학의 이름을 판 것일까.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사실 태조 이성계는 무학에게 정신적으로 적잖이 의지했다. 이 점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확인된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실세로 등장하자 이성계는 왕위를 버리고 고향땅 함흥으로 낙향했다. 이것은 태종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의 표현이었고, 따라서 태종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정치적 부담이었다. 태종은 부왕을 다시 서울로 모셔오지 않으면 안 됐고, 그래서 여러 차례 함흥으로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항간에는 태조가 함흥으로 내려온 사신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고도 한다. 어딜 가서 아무 소식도 전하지 못하는 경우 ‘함흥차사’(咸興差使)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유래는 태종 때의 복잡한 사정을 반영한다. 태조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태종은 마침내 무학대사를 함흥으로 보냈다. 평소 태조는 무학을 한없이 공경하고 믿었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라면 태조의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태종2년 11월9일 무자). 과연 무학의 설득은 효과가 있어 얼마 후 태조는 다시 서울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 만큼이나 태조는 무학을 존경했고 인간적으로 신뢰했다. 몇 년 뒤 무학이 타계하자 태조는 아들 태종에게 부탁해 무학에게 묘엄존자(妙嚴尊者)라는 시호를 내리게 하였다(태종 10년 7월12일 정축). 마지못해 태조의 뜻을 따르기는 했지만 태종은 실상 무학을 우습게 여겼다. 태종의 눈에 비친 무학은 한낱 평범한 승려에 불과했다. 조선 초기의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무학은 설법(說法)에 뛰어나지 못했다 한다. 한 번은 궁중에서 선(禪)에 관해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무학은 불교의 종지(宗旨)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그 자리에 있던 여러 스님들의 애를 태웠다는 것이다(실록, 태조 1년 10월11일 기미). 그 자신 선승(禪僧)이었지만 참선에 관해 별로 많이 알지 못했다는 악평인데, 물론 이것은 태종을 비롯한 일부 인사들에 의해 왜곡된 평가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태조는 무학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태조는 무학이 머무는 회암사(檜巖寺)를 찾아가 숙식을 함께 하기도 했고,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계(戒)를 받고 심지어 대사의 생활방식을 본 떠 일체 육식을 끊어버리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질문을 제기된다. 무학의 어떤 점이 태조를 그렇게까지 매료시켰을까. 역사적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두 사람이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큰 구실을 담당한 것은 풍수지리에 관한 무학의 전문적 지식이었다. 태조는 즉위 초 계룡산 천도를 검토했다. 당시 무학은 태조의 측근에서 계룡산의 풍수지리를 검토했다. 결국 그는 천도를 반대하게 되었고(실록, 태조 2년.2월11일 병술), 계룡산 천도도 무위에 그쳤다. 그 뒤 한양이 새 수도의 후보지로 떠올랐고 그 때도 태조는 무학의 의견을 물었다.“이 곳은 사면이 높고 수려(秀麗)하며 중앙이 평평하므로,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실록, 태조 3년.8월13일 경진) 이러한 무학의 찬동에 태조는 무척 만족했다. 왕은 정도전·하륜·이양달 등에게도 명령해 천도문제를 함께 결정짓게 했다. 무학은 북한산에 올라 한양의 풍수를 살폈다. 그 때 무학이 미래의 도성 풍경을 조망한 곳은 삼각산의 하나인 만경대(萬景臺)였다. 거기서 한양 쪽을 내려다보면 만 가지 모습이 한 눈에 보인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학이 나라의 도읍터를 살폈기 때문에 국망봉(國望峰)이라고도 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 때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을 좌청룡(左靑龍), 목멱산(남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정도전(鄭道傳) 등이 강력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북악이 주산이 되었다 한다. 무학은 정도전 등과 더불어 한양 천도의 일등 공신이었다. 도읍을 옮기는 문제는 가벼운 일이 아니었지만 태조는 이를 서둘렀다. 그는 고려 말 갑자기 중앙정계에 등장한 신흥세력이었기 때문에, 고려의 수도 개성에 포진한 해묵은 귀족 세력들이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무학은 왕의 그런 심중을 정확히 헤아려 한양천도를 적극 도왔다. 이로써 무학은 태조와 하나가 되었다. ●무학대사는 갈수록 높이 평가돼 무학은 실제로 풍수지리에 능통했다. 그런데 후대로 갈수록 풍수 및 예언에 관한 그의 능력은 더욱 미화되었다.17세기 중반 대신(大臣) 송시열(宋時烈)은 효종 임금 앞에서 조선시대의 3대 풍수지사를 거론하는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첫 손가락에 꼽힌 사람은 무학(無學)이었다. 나머지 둘은 이의신(李懿信)과 박상의(朴尙毅)라고 했다.(‘실록’, 현종 개수 즉위년 7월3일 임술). 이것은 아마도 당대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평가로 봐도 좋을 것이다. 후대 사람들이 무학을 높이 평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조선왕조의 기틀이 확고해지면서 건국의 주역들이 신성화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태조 이성계는 신성한 왕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런 가운데 태조를 가까이서 보좌한 무학은 신인(神人)으로 기려졌다. 태조와 무학의 특별한 관계를 상징하는 설화도 많이 생겨났다. 예컨대, 무학이 스승 나옹화상과 함께 왕후(王侯)가 배출될 명당과 장상(將相)이 나올 명당을 봐두었는데 무학이 이성계에게 이를 알려주었다는 이야기다. 이성계는 무학의 말을 듣고 아버지 이자춘의 묘를 잘 써서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왕건 가문과 도선의 관계를 꾸민 설화를 연상케 한다.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나이를 고려할 때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둘째, 수도 한양이 명실공히 모든 분야에서 조선왕조의 중심이 됨에 따라, 도읍을 정하는 데 기여한 무학의 능력이 과장되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왕십리에 관한 설화도 탄생했다. 한양에 도읍하려고 했을 때 무학은 왕십리 자리에 궁궐을 지으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았으므로, 이런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설화에 따르면, 무학은 왕십리에서 검은 소를 타고 지나가던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소를 때리면서 무학만큼이나 미련하다고 꾸짖었다. 이에 무학이 노인에게 가르침을 청했고 십 리를 더 가라는 깨침을 얻어 왕(往)십리라는 지명이 생겼다 한다. 어떤 설화에서는 그 노인이 신라의 고승 도선 국사였다고 한다. 물론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그렇긴 해도 이 설화에는 한두 가지 숨은 뜻을 담고 있다고 본다. 한양의 궁궐터를 정하기가 쉽지 않았던 사실이 암시되어 있고, 풍수지리의 대가였던 도선과 무학은 죽음의 세계를 뛰어넘어 서로 통한다는 믿음이 보인다. 그런가 하면, 이런 신이한 우여곡절을 통해 얻은 도읍인 만큼 한양은 최고의 수도라는 뜻도 있는 것같다. 이런 주장과 믿음은 조선시대 일반 민중의 의식세계를 반영한다. 그것이 정말 옳으냐 그르냐하는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셋째, 풍수지리에 관한 무학의 능력이 점차 과장되면서 그가 생전에 발휘하지 못한 다른 능력까지도 재평가되었다. 해몽을 잘해 이성계의 즉위를 미리 알아 맞혔다는 전설은 그 가운데 하나다.(‘대동기문’) 인왕산 선바위에 얽힌 전설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무학은 애초 조선왕조가 5백년 뒤 망할 줄 알았기 때문에 나라의 수명을 늘리려고 선바위에 와서 천일기도를 하였다는 것이다. 만일 선바위가 한양도성 안에 포함되면 그것이 가능하다는 신령의 계시를 받았으나, 정도전의 주장에 밀려 무학의 주장은 관철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그러자 무학은 장차 불교가 유교에 억눌려 지내게 되고, 나라의 수명도 500년에 불과하게 되었다며 통탄했다. 선바위에 관한 전설 역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무학의 예언 능력이 조선후기 민중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은 유교사회가 된다는 예언은 실제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해 꾸민 이야기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국운이 500년에 그친다는 예언은 많은 민중의 희망이기도 했다. 그들은 한 편으로 조선왕조와 수도 한양의 번영을 바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조선사회의 각종 모순이 해소된 새 나라를 꿈꾸었다. 이런 소망은 왕조의 종말에 관한 예언 설화를 낳았고, 그 중심에 무학이 자리잡게 되었다. 무학의 신이한 예언 능력을 소재로 한 설화는 전국 여러 곳에 있다. 부평의 원통골이나 부산의 강선대(降仙臺)의 지명 설화는 해당 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설명하면서 무학의 예지능력을 강조한 경우다. 그밖에 서산의 나무 설화는 특정한 나무를 대상으로 해 세상의 운명을 예언한 것이다. ●무학은 예언과는 거의 무관한 고승 역사적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무학은 예언가가 아니었다. 경남 합천 삼가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 원나라의 수도에서 인도승려 지공(志空)을 만나 불법을 배웠고, 뒤에 고승 나옹(懶翁)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태조의 두터운 신임으로 왕사(王師)가 되어 한양천도를 도왔다. 그러나 세상사에 깊이 관여한 흔적은 없다. 무학은 주로 회암사에 조용히 머물다가 태종 5년(1405) 금강산 금강암에서 세수 78세, 법랍 62세로 입적하였다. 비록 풍수에 능통하긴 했지만, 사사건건 세상일에 관심을 두었다고 볼 근거는 조금도 발견되지 않는다. ●무학을 둔갑시킨 술사들 하지만 후대에 이르러 무학은 풍수지리와 예언의 대가로 부풀려졌다.16세기 후반, 무학이 타계한 지 약 180년쯤 지났을 때, 불현듯 그가 저술했다는 ‘도참기’(圖讖記)가 한양에 등장했다. 그 때는 고질적인 당쟁이 시작된 데다 일본과의 관계가 경색되기 시작해 안팎으로 무척 어수선하였다. 이런 판국에 누군가 무학의 명성을 빌려 국가의 장래를 논하였다고 하겠다. 무명의 술사가 실은 ‘도참기’의 저자였을 것이다. ‘도참기’는 임진왜란을 전후해 상당히 널리 퍼졌다. 그런데 처음에는 누구도 그 내용을 명확히 해석하지 못했다. 그만큼 난삽했다. 예컨대, 임진년에 대해 “악용운근(岳聳雲根) 담공월영(潭空月影) 유무하처거(有無何處去) 무유하처래(無有何處來)”란 구절이 적혀 있었다. 이 구절은 한바탕 왜란을 겪은 뒤에야 명료해졌다. 결론적으로 말해, 신립(申砬) 장군이 충주에서 패전해 그 군사들이 월낙탄(月落灘)에서 몰사한다는 내용으로 풀이되었다. 왜 그런가. 첫 구절의 ‘악’(岳)은 곧 ‘유악강신’(維岳降申)이므로 신(申)이다.‘용’(聳)은 ‘입’(立)과 같은 뜻이라 입(立)이다. 그리고 ‘운근’(雲根)은 돌(石)이다. 따라서 ‘악용운근’(岳聳雲根) ‘신립’의 이름이다. 다음 구절인 ‘담공월영’(潭空月影)은 ‘달이 여울에 떨어지다.’(月落灘)는 뜻이다. 달리 말해,‘물에 빠져 죽는다.’는 말이다. 마지막 두 구절은 ‘도성의 백성들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피란 간다.’,‘왜구가 입성(入城)한다.’는 말로 해석된다(실록, 선조 25년 4월30일 기미) 물론 이런 해석은 사후 약방문이었다. 억지스러운 면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무학의 예언가적 능력에 새삼 주목했다. 실제로는 어느 술사가 무학의 이름을 빌려 저술한 ‘도참기’였을 텐데 그 위력에 힘입어 예언가 무학의 명성은 더욱 빛났다. 역사에는 이런 아이러니가 있다. 서양 중세의 도서관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저자로 내세운 위서(僞書)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하지 않은가. 한 때 장안의 화제가 됐던 ‘도참기’는 남아 있지 않다. 워낙 알쏭달쏭한 내용이라 해석이 어려워 임란과 함께 수명을 다한 것 같다. 그 대신 오늘날에는 ‘정감록’의 일부로 돼 있는 ‘무학비결’이 전한다. 눈을 부릅뜨고 ‘무학비결’에서 ‘도참기’의 흔적을 살폈으나 허망한 노릇이었다. ‘무학비결’은 조선왕조의 멸망에 초점을 맞춰 말세의 징후를 논의한 예언서다. 주요한 내용은 ‘정감록’에 실린 다른 예언서들과 대체로 일치한다. 조선왕조의 국운을 약 400년으로 봐 “앞의 360년” 즉 18세기 말까지는 국정이 비교적 순탄할 것으로 예상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그 뒤 56년은 물과 불이 서로 살아주기 때문에 백성들이 난리를 깨닫지 못하고 재상은 쓸모없는 글만 숭상하니 가히 풍요롭고 태평하나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은 위에서 도둑질하고 아전과 군교(軍校)는 아래에서 약탈을 일삼으니 백성들이 불안하여 들에 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18∼19세기의 실제 상황과 대체로 일치한다. 그 사실로 미루어 보면 ‘무학비결’이 저술된 시기는 그 때가 아니었을까 한다. 조선의 운명이 다할 무렵에 대해선 “신인(神人)이 두류산(頭流山)에서 도읍을 옮기는 계책을 세우고 200년이나 국운을 연장시킬 것”이라고 했다. 두류산 즉, 지리산에서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지만 그것은 매우 서서히 진행된다고 보았다.“때에 무(武)는 강하고 문(文)은 약하여 가히 임금이 임금이 아니요 신하 또한 신하가 아니라 슬프도다.” 조선의 마지막은 무인정권이 장식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내용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무학비결’이 저술된 시기를 좀더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다. 새로 오군영이 설치되어 수도 방어가 강화되던 18세기 말 이후, 외세의 침입이 노골화되기 직전인 1860년대까지 저술되었다고 추측된다. 누누이 말했듯 18∼19세기엔 술사와 그들에게 협력한 승려들이 다양한 예언서를 생산 유포했다. 그들은 새로운 예언서들에 근거해 때로 반란을 획책했다.‘무학비결’은 바로 그런 예언서의 일종이었다. 고승 무학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지만, 풍수와 예언으로 이미 명성이 높아진 무학의 이름을 빌려 술사들은 민중을 포섭하려 했다. 그러잖아도 민중들은 설화 속의 무학같은 신승(神僧)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무학비결’의 창작은 사회적 여망에 부응하는 행위였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36번국도-국토를 가로지른다

    36번국도-국토를 가로지른다

    국토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는 아직 없다. 그래서 충남 보령∼경북 울진을 잇는 36번 국도에는 멋과 맛이 남아있다. 시발점은 보령, 점점이 박힌 섬과 아스라한 낙조에 누구에게나 고향같은 푸근한 곳이다. 숨가쁘게 내달린 36번 국도가 내륙의 바다 충주호에서 긴장을 푼다. 푸른 하늘을 담은 충주호를 따라 단애절벽의 절경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연이어 36번 국도는 국토의 등뼈 백두대간으로 내달린다. 클라이맥스는 봉화. 인간의 발길에 의해 유린되지 않은 자연의 순수를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은 석천계곡,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 계곡과 바위를 굽이치며 휘돌아 백두대간을 넘은 36번 국도는 울진 불영계곡을 따라 동해로 곧장 치닫는다.289㎞ 대장정은 환호성을 내지르다, 자연의 경외에 고개를 숙이게 되고 결국엔 겸허한 인간의 자세까지 가르친다. ■ 초록이 넘실대는 보령·충주 ●대천해수욕장과 다보도 무더운 한여름이면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대천해수욕장이 기다린다. 서해안에서 백사장 길이(3.5㎞)가 가장 길다. 특히 조개껍데기 가루가 모래와 섞인 패각해수욕장이 자랑거리다. 석양이면 백사장이 반짝반짝 빛난다. 해수욕장앞 4㎞쯤에 있는 무인도인 다보도는 바다낚시터로 이름난 돌섬. 유람선이 2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대천해수욕장에는 생선회와 꽃게탕, 홍합구이 등으로 유명한 충남수족관(041-933-8077)과 부산횟집(041-933-9898) 등이 있다. ●성주사지와 보령냉풍욕장 성주산은 석불과 최치원, 신도비와 성주사지, 백운사, 휴양림, 활공장 등 보고 즐길 거리가 많다. 한낮에도 깜깜할 정도로 울창한 산림과 맑고 깨끗한 화방골, 삼연동계곡 등이 어우러진 절경이다. 성주사는 백제 법왕 때 창건돼 신라시대에는 9대 선문 가운데 하나로 번창하였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지금은 석탑, 석등, 돌계단 등만이 옛날을 말해준다. 인근의 보령냉풍장(041-934-8154)은 폐광을 이용한 것으로 한여름에도 섭씨 영상 12도의 찬바람이 불어나와 땀방울을 식혀준다. ●칠갑산과 한치고개 보령에서 36번 국도를 따라 쉬엄쉬엄 한 시간가량 나오면 칠갑산이다.‘충남의 알프스’로 불린다. 칠갑산자연휴양림(041-943-4510)은 맑은 공기와 울창한 숲이 자랑이다. 휴양림에서 7㎞ 남짓 떨어져 있는 냉천계곡은 아무리 더운 여름날에도 발을 담그면 채 5분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시원하다. 청양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한치고개는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 주통로였다. 꾸불꾸불한 옛길을 따라가는 드라이브코스로 그만이다. 산책하기에도 좋다. 정상에는 구한말 의병장 만암 최익현선생과 콩밭 매는 아낙네 상이 있다. 별미로 칠갑산장(041-942-3298)에서 멧돼지 숯불구이를 먹을 수 있다. ●충주호 남한의 중심부에서 굽이치는 산줄기를 따라 나라의 강줄기 맥이 모인 곳이다. 백두대간의 장엄한 산자락과 유유한 물줄기가 잠시 긴장을 놓는 곳이다. 충주호는 청명한 하늘을 담고 푸른 산을 닮아 더없이 푸르다. 낙조 하면 서해를 떠올리지만 충주호 유람선에서 맞는 일몰도 그만이다. 하늘에 맞닿은 산자락을 붉게 물들이고 강물을 고스란히 붉게 물들이다가 슬며시 사라지는 해를 품는다. 대형 유람선을 타고 뱃길을 따라가면 옥순봉, 구담봉, 만학천봉, 제비봉 등 호수를 둘러싼 수많은 기암괴석들이 굽이굽이 펼쳐진다. 충주호는 충주, 제천, 단양을 연결한다. 면적은 97㎢. 국내에서 담수 면적이 가장 넓다. 댐 나루터에서 운행하는 쾌속관광선을 이용해 단양권을 관람할 수 있다. 이런 까닭으로 충주호의 수상관광을 즐기는 이들이 끊이질 않는다. 충주호유람선(043-851-5771) ●단양팔경 단양군 남쪽에 위치한 상·중·하선암을 비롯해 사인암 등 8곳의 절경이 영동의 관동팔경과 쌍벽을 이룬다. 으뜸은 한폭의 동양화와 같은 도담삼봉. 예부터 시인묵객들이 많은 시와 그림을 남겼다. 단양에서 북쪽으로 12㎞지점에서 남한강 수면을 뚫고 솟은 세 봉우리.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이 이곳에서 은거하며 도담삼봉에서 자신의 호를 본떠 삼봉이라고 했다고 한다. 삼봉 중에서 가운데 봉이 남편봉이고 그 옆에 다정한 작은 봉이 첩봉, 좀 떨어진 곳에 딸들을 품에 안고 돌아앉듯 자리한 봉이 처봉이란다. 남편이 딸만 낳은 아내를 내쫓고 첩과 다정히 앉아 있는 모습이라는 옛날이야기도 전한다. 단양관광협회(043-423-5044,421-7114). ●탄금대 신라 진흥왕 때 가야에서 망명한 악성 ‘우륵’이 망국의 한을 달랬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충주에서 서북쪽의 3㎞에 있으며 달천이 남한강과 합류하는 곳에 있다.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배수진을 치고 왜적과 격전을 벌였던 곳. 탄금대의 12대는 당시 계속된 전투로 뜨거워진 활의 열기를 식히고자 12번이나 오르내렸다는 바위들이다.30∼40분 발품을 팔면 모두 둘러볼 수 있다. ■ 절로 넘어가는 봉화·울진 ●석천계곡과 닭실마을 36번 국도를 타고 들어가 봉화읍에서 조금만 빠져가면 석천계곡이다. 울창한 소나무 원시림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이 맑고 시원하다. 기암괴석으로 자연경관은 수려하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물소리, 산에서 부는 솔바람소리에 잡념이 확 씻기는 듯하다. 계곡 입구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바로 옆에서는 봉화의 춘양목(금강송)으로 조선 중종때 문신 청암 권동보(1518∼1592)가 지은 석천정자가 계곡과 절경을 이루고 있다. 석천계곡을 들어서면 바로 나오는 절벽 바위에 신선이 사는 곳 이란 뜻의 ‘청하동천(靑霞洞天)’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석천계곡에서 나와 36번 국도를 따라 울진방향으로 2㎞정도 가다보면 왼쪽에 단아한 한옥마을이 나온다. 마을이 풍수지리상 금닭이 알을 품은 형상 즉 ‘금계포란’이라 하여 닭실마을(酉谷里)로 불린다. 닭실마을의 압권은 청암정. 충재가 도학연구에 몰두했던 곳으로 특이하게도 머리가 동쪽으로 향한 거북 형상의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청암정을 지어 방에 불을 넣자 바위가 울었단다. 지나던 스님이 “거북 등딱지 위에 불을 피우면 거북이 죽는다.”며 “거북에겐 물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그뒤 아궁이를 모두 막고, 둘레에 인공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정자에는 퇴계 이황의 글도 남아있다. 닭실마을엔 이외에도 유적지와 박물관도 있다. 개인 박물관인 까닭에 잠긴 경우가 많다. 한국전쟁때 집안에 전해오던 각종 자료들을 항아리에 넣어 땅속에 몰래 묻어 보관해왔던 것들이다. 박물관과 청암정 등을 들어가는 입장료는 없다. 닭실마을에는 식당은 없다. 하지만 가을이나 겨울에는 전통방식대로 만드는 한과를 살 수 있다. 여름철엔 한과가 쉬 눅눅해져 만들지 않는 게 아쉬움이다. 봉화문화원(054-673-2350) ●청량사와 청량산 봉화에 갔다면 들를 만한 곳으로 청량산을 들 수 있다. 봉화읍에서 40분 정도 걸린다.918번 국도를 따라 가는 드라이브 코스도 그만이다. 논길을 가다가 운곡천을 따라간다. 운곡천이 깨끗해 수달이 사는 수달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계곡이 낙동강과 만나는 곳은 천애절벽의 장관이 파노라마친다. 청량산은 12개 봉우리들이 있다. 정상에서 거대하게 솟아오른 암봉으로 수려한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일명 ‘소금강’이라고도 부른다. 청량산 일주 산행은 4시간 정도. 청량사 일주문을 지나자 나오는 청량폭포가 시원하기 그지없다. 청량산도립공원(054-679-6321) 봉화에서 꼭 맛봐야 할 음식인 재래종 검은 돼지로 만드는 돼지구이. 봉성면 가는 초입에는 돼지구이를 하는 집이 20여집 몰려있다. 이 가운데 원조는 아니지만 현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 상봉숯불회관(054-672-9783)이다. 숯불구이(180g·5000원)는 돼지고기에 소금만 뿌리고 솔잎을 얹혀 찌듯이 구워냈다. 기름기가 쪽 빠지고 솔향이 은근히 배였다. 텃밭에서 기른 야채에다 돼지구이를 싸 먹으면 정말 일미다. 매콤한 맛을 원한다면 양념구이(6000원)도 괜찮다. 이외에도 봉성숯불식당(054-672-9130)도 유명하다. 불고기가 조금 곁들여 나온다. ●불영계곡과 불영사 36번 국도 위에서 내려다보는 불영계곡이 아찔하다. 올려다 보면 천애 같은 절벽과 그 위에 곧게 뻗은 소나무가 위태위태해 보인다.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하다. 물은 너무 차서 발이 금방 시려진다. 더위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불영계곡이 끝날 즈음이면 불영사(054-783-5004)가 나온다. 진덕여왕 5년(651년)에 의상대사가 세운 고찰이다. 대웅전 앞 연못에 부처님의 그림자가 비친다고 하여 불영사라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뒤로는 오밀조밀한 경관이 펼쳐져 있다. ●소수서원과 부석사 봉화를 조금 못미친 영주시 풍기에서 시간이 있다면 유·불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소수서원과 부석사가 있다. 울창한 숲속의 소수서원(054-633-2608)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이곳 출신 유학자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주세붕이 세운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입장료는 어른은 3000원, 어린이는 1000원. 주차료는 없다. 소수서원에서 10분 남짓이면 부석사(054-633-3464)에 닿는다. 풍기에서 30분 정도 걸린다. 우리나라 전통 건물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한 사찰.‘부석’이란 돌이 떠 있다는 뜻으로 무량수전 뒤편에 실제로 땅과 약간 떨어져 있는 바위인 뜬돌 즉 부석이 있다. 글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사진 최해국기자 seaworld@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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