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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 왕궁 1000년의 비밀 풀리나

    신라 왕궁 1000년의 비밀 풀리나

    800년의 시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천년 왕국의 실체가 서서히 옛 모습을 드러낸다. 기원전 57년 탄생하고 935년 멸망하기까지 신라의 흥망성쇠를 묵묵히 함께했던 천년 궁성인 경북 경주 월성(月城) 발굴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심영섭)는 18일 오후 월성 시굴 성과를 공개하고 본격 발굴로 전환했다. 지난해 12월 시험 발굴에 착수한 지 55일 만이다. 연구소는 서울 풍납토성과 경복궁, 전북 익산 왕궁리유적, 강원 강릉 굴산사지 등 주요 국가 사적을 조사했던 베테랑 발굴 인력 100여명을 투입했다. 고고학계는 ‘단군 이래 최대의 발굴사업’이라는 표현까지 써 가며 흥분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높은 기대감을 보이고 있다. 표토층을 살짝 걷어내자 곧바로 옛 궁성의 흔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월성은 성곽의 모양이 반달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기단, 초석, 적심(積心·초석 아래 다짐돌) 등을 갖춘 건물터 6동과 담장터 12기 등 궁성의 유구(遺構, 건축물의 흔적)는 1000년 전 월성 안을 거닐던 신라인의 자취를 살짝 엿보게 했다. 건물터 중에는 정면 12칸, 측면 2칸 규모(길이 28m, 폭 7.1m)의 대형 유구도 모습을 드러냈다. 뒤쪽으로 담장이 길게 뻗어 있고 우측에 배수로도 있다. 1227년 몽골의 침략을 받아 불태워졌지만 그 흔적까지 모두 없애지는 못했다. 어창선 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발굴을 본격적으로 진행하면 건물 규모는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안압지와 같은 연못터도 보였다. 어 연구사는 “흙이 물의 영향을 받으면 회색의 고운 점토가 된다”며 “점토가 많아 연못터로 판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연못 둘레의 석축은 좀 더 땅을 파야 나올 것”이라며 “안압지도 지표 상층에선 석축이 나오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고배(高杯·굽다리접시), 병, 등잔, 벼루, 그릇, 어망추, 막새기와, 귀면기와 등 통일신라시대 유물도 다량 출토됐다. 토기엔 우물 정(井), 입 구(口) 자 형태의 음각 기호가 새겨져 있다. 월성의 해자와 안압지, 나정 유적 등지에서 발견된 ‘의봉4년 개토’, ‘習部’(습부), ‘漢’(한) 등의 글자가 적힌 평기와도 나왔다. 의봉(儀鳳)4년은 679년에 해당한다. 심영섭 소장은 “1914년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가 남벽 부근을 파헤친 지 100여년 만에 우리 손으로 실시하는 최초의 내부 조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경주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송파 “풍납토성 3권역 건축규제 완화 찬성”

    송파 “풍납토성 3권역 건축규제 완화 찬성”

    송파구가 풍납토성 보존에 대한 입장을 내놨다. 최근 문화재청과 서울시가 이 지역에 대한 보존 방안을 두고 이견을 보이자 실제 사업에 나서야 하는 구가 중재에 나선 것이다. 송파구는 22일 문화재 보존 관리는 무엇보다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전제로 문화재청의 건축규제 완화에 찬성했다. 특히 문화재청의 풍납토성 3권역 건축규제 완화에 대해서는 풍납동 주민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점을 감안해 찬성하는 입장이다. 더불어 지방채 발행을 통해 5년 안에 보상을 완료하는 서울시의 방안에도 지지를 표명했다. 송파구의 이 같은 입장은 이번 규제 완화를 풍납동 주민 다수가 환영했기 때문이다. 그간의 설문조사에서도 과도한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80%에 달할 정도로 주민들의 불만이 컸다. 이번 계획 변경이 이뤄지기 전까지 송파구는 풍납토성소위원회와 문화재청, 서울시 등 관계 기관과의 18차례에 걸친 회의에서 현재의 예산 규모로는 문제 해결이 어렵고, 과도한 규제로 인한 주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특별대책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특히 통합 개발이나 집단 이주 방안 등 도시계획적 지원 방안에 대해서도 서울시와 합동으로 용역을 수행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풍납토성 2권역과 3권역에 대한 보상을 완료한다 해도 4권역에 위치한 고층 아파트(12개 동 4167가구)로 인해 완전한 복원은 사실상 어렵다. 이에 구는 과거와 현재를 조화롭게 절충해 문화유산으로서의 최고 가치를 발현할 것인지를 관건으로 보고 있으며 문화재청과 서울시 역시 방법에서 약간의 이견을 보일 뿐 이러한 궁극적인 목표는 같다. 따라서 구는 올해를 주민과 문화재가 공생하는 ‘역사문화도시’ 조성을 위한 기반 구축 원년의 해로 정하고 풍납토성 전담팀을 구성해 명확한 미래 비전 정립과 문화재 정체성의 조기 규명을 할 계획이다. 그리고 풍성한 볼거리 및 주민 편의시설 설치, 환경 개선 사업, 문화재 인식 향상 사업 등 6개 전략별 사업을 정하고 24개 단위사업을 중점 추진할 계획이다. 박춘희 구청장은 “풍납동을 역사의 깊이와 문화의 향기가 살아 있는 ‘세계인이 찾는 명실상부한 2000년 역사문화도시’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씨줄날줄] 위기의 풍납토성/서동철 논설위원

    지난해 말 국립문화재연구소는 풍납토성의 축조 당시 높이가 13.3m에 이르렀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남은 토성의 높이는 5m 남짓이지만 백제시대에는 5층 높이의 타원형 성벽이 3.5㎞ 길이로 정연하게 쌓여 있었다는 뜻이다. 당나라 ‘통전’(通典)에 기록된 인부 한 사람당 작업량을 대입하면 수축에 연인원 138만명이 투입됐다는 계산이 나온다고 한다. 삼국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쌓은 토성의 규모가 생각보다 엄청나고, 투입된 인원도 상상을 뛰어넘는다. 축성 주체가 대역사(大役事)를 감당할 만큼 확고한 국가체제를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울 송파구 풍납동의 풍납토성은 오늘날 한성백제의 왕성으로 지위를 굳혀가고 있다. 그동안 여러 차례의 발굴 조사 및 연구로 더 이상 부인하기 어려운 증거가 확보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풍납토성을 백제와 연결시키는 학계의 목소리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왕성 외곽의 수비성인 사성(蛇城)이라는 학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던 시절이었다. 서울대 발굴조사에서도 하남 위례성과 같은 시기 축조된 반관반민적(半官半民的) 읍성으로 규정했다. 이런 고정관념을 뒤집고 ‘풍납토성은 곧 백제왕성’이라는 등식을 만든 주역은 고고학자인 이형구 선문대 명예교수다. 대만에 유학하던 시절 춘추전국시대의 제나라나 노나라 같은 고대국가의 도성(都城)이 대부분 강을 끼고 있는 평지에 진흙을 개어 켜켜이 쌓는 판축토성(板築土城)이었음을 확인했던 그는 비슷한 배경을 가진 풍납토성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풍납토성 내부에서 고층 아파트 건설공사가 벌어지던 1997년 신정 연휴기간 현장에 잠입해 기원 전후로 추정되는 백제시대 토기와 기와, 목재 더미가 파괴되는 현장을 확인했다. 풍납토성 내부에서는 어떤 공사도 발굴조사를 선행하는 규정이 생기는 계기였고, 결국 경당연립 재건축을 위한 발굴조사에서 초기 백제 유적과 유물이 대거 쏟아졌다. 이후 풍납토성은 장기적으로 내부 주민 전체를 외부로 이주토록 해 보존하는 것이 정부의 기본방침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최근 문화재청은 뜻밖에 이른바 ‘문화재와 주민의 공존’을 추진하는 내용의 ‘풍납토성 보존·관리 및 활용 기본계획’을 내놓았다. 한 마디로 토성 내부 지역도 층수 제한은 있지만 재건축을 포함해 개발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은 얼마 전 춘천 중도 유적에 ‘레고랜드’를 허용하면서도 ‘활용과 보존의 상생’을 내세웠다. 풍납토성의 ‘문화재와 주민의 공존’도 같은 논리일 것이다. 하지만 ‘보존과 개발의 조화’는 건설업자의 견강부회는 될 수 있을지언정 문화재청의 논리여서는 안 된다. ‘보존’에 목숨을 걸어도 시원치 않을 정부기관이 먼저 ‘활용’을 이야기하는 순간 ‘상생’이나 ‘공존’이 물 건너 간다는 것을 모르나.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울시·문화재청, 풍납토성 지역 개발 두고 ‘힘겨루기’

    ‘풍납토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두고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문화재청은 2조원의 보상비 부담으로 보존을 위한 개발 ‘불가’에서 ‘허용’ 쪽으로 태도를 바꿨다. 이에 등재 신청이 어려워진 서울시는 문화재와 주민 보호를 포기한 것이라며 문화재청의 입장 변화를 촉구했다. 서울시는 15일 기자설명회를 열고 문화재청이 최근 발표한 ‘풍납토성 보존·관리 및 활용 기본계획’ 변경의 철회를 강하게 비판하고 특단의 재원 대책으로 풍납토성 2·3권역의 주민들에게 조기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시는 한성백제의 왕궁터인 풍납토성을 오는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공주·부여·익산의 백제유적과 연계해 확장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풍납토성을 둘러싼 갈등은 문화재청이 지난 8일 풍납토성 내부 주민 전체를 외부로 이주케 하는 기존 정책 기조를 바꿔 건축물 높이 제한을 완화하는 등 주변 노후주택의 재건축을 허용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문화재 핵심 분포 예상 지역인 2권역의 주민만 이주하게 하고 3권역은 건축 높이 제한을 완화, 사실상 재건축을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의 발표대로라면 서울시의 풍납토성 유네스코 등재 신청은 사실상 물 건너가게 된다. 이에 서울시가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정부가 박원순 서울시장이 한양도성과 풍납토성의 유네스코 등재를 못마땅하게 여겨 ‘딴죽’을 걸고 있다는 게 아닌냐는 해석도 내놓는다. 시와 문화재청은 지금까지 3대7 비율로 500억원을 투입해 2·3권역에 대한 토지보상을 해왔다. 시는 5년 내 조기 보상을 하려면 총 2조원이 들며 이 중 6000억원을 부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재정이 부족하면 3000억원까지는 지방채까지 발행하겠다며 문화재청의 협조를 당부했다. 또 문화재청의 건축 높이 제한 완화 혜택을 받는 면적은 3권역의 5%에 불과하다며 ‘눈 가리고 아웅’ 식의 계획이라고 비판했다. 이창학 서울시 문화체육관광본부장은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고대사를 당장 예산 부족으로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면서 “주민들의 재산권과 문화유산을 동시에 보호하는 근본 대책은 조기보상밖에 없다”고 말했다. 홍혜정 기자 jukebox@seoul.co.kr
  • 백제의 기백 축제로 부활

    백제의 기백 축제로 부활

    송파구에 백제의 후손들이 찾아온다. 송파구에 따르면 2일부터 풍납토성 일대에서 열리는 ‘제14회 한성백제문화제’에 백제 후손인 부여 서씨 11명과 의령 여씨 15명이 참여한다. 이들은 ‘혼불 채화식’에 참석하는 등 축제의 의미를 더하게 된다. 구는 지난 3월부터 7월까지 삼국사기와 중국 역사서 등의 기록을 종합해 백제 성씨인 부여씨(扶餘氏)로 알려진 후손들을 찾았다.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도 서울 송파구부터 경북 문경시, 경남 하동군까지 다양하다. 구 관계자는 “참가자들이 기쁘게 즐길 수 있도록 일정을 꾸렸다. 주요 역사문화프로그램에 후손의 자격으로 참가하는 것은 물론 백제마을 입장권을 제공하고, 각종 행사 때 별도 좌석을 마련한다”고 말했다. 백제 후손 26명은 이번 축제기간에 한성백제 시대 의상을 입고, 과거로의 역사여행을 떠나게 된다. 2일 오전 10시, 2000여년 전 한성백제 왕성 터인 풍납토성(풍납1동 경당역사공원)에서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혼불채화식에 참가한다. 오후 4시엔 백제 전기 왕들에 대한 제사와 제례의식이 치러지는 ‘동명제’에 초대된다. 이어 오후 7시엔 서형유(10·오금동)군과 여연숙(61·역삼동)씨가 대표로 풍납토성에서 봉송된 혼불을 들고 개막 무대에 올라 박춘희 구청장과 함께 나흘에 걸쳐 축제를 밝힐 전등을 켜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긴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역사 살아 숨쉬는 우리 고장으로 시간여행 떠나요] 송파, 백제시대 생활상 체험하는 시간

    송파구는 제14회 한성백제문화제를 다음달 2~5일 올림픽공원 일대에서 개최한다고 24일 밝혔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등 백제의 숨결을 곳곳에 간직하고 있는 송파구는 한성백제 시대의 500년 도읍지였다. 축제는 2일 오전 10시 풍납동 경당역사공원에서 혼불채화식을 시작으로 칠지도 제막식(오전 11시, 몽촌토성역 앞), 동명제(오후 4시 평화의 광장), 한성백제 성곽 돌기(오후 6시 몽촌토성) 등으로 이어진다. 정식 개막식은 오후 7시 평화의 광장에서 열린다. 축제기간에는 백제시대 생활상을 실감 나게 재현한 ‘한성백제마을’이 몽촌토성역 앞 광장에 설치된다. 이곳에서는 백제시대 의상을 입고 한지공예, 활 만들기, 전통놀이 등 당시 생활상을 체험할 수 있다. 특히 옥사와 군영, 왕좌체험 등은 시민들에게 색다른 경험이 될 것으로 보인다. 3일과 4일 한성백제에 관해 OX퀴즈로 풀어보는 ‘도전, 한성백제 박사’도 평화의 광장에서 진행된다. 마지막 날인 5일에는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역사문화거리행렬이 손님을 맞는다. 8개 테마로 이뤄진 퍼레이드엔 역대 최다 인원인 1300여명의 전문 연기자와 관람객이 나선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산성(상)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산성(상)

    한국전쟁 최대의 심리적 트라우마는 ‘서울사수’를 외치던 이승만 정부가 전쟁발발 이틀 만에 서울을 버리고 피란길에 오르면서 한강 다리마저 폭파해 150만 서울시민을 적지에 버린 것이다. 이 대통령은 대전에 머물면서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라는 녹음방송을 내보내 국민을 속였다. 국회가 서울 사수 결의를 전달코자 했을 때 대통령은 경무대에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64년 전 그때 한강 다리를 넘지 못한 서울 사람들의 원한이 부동산 투기로 이어져 오늘의 강남 아파트공화국을 탄생시켰는지도 모른다. 몽진(蒙塵)의 역사는 길다. ‘서울 사수’는 한국전쟁 때 처음 나온 말이 아니다. 고려 이후로 역사를 좁혀도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 때 도읍 송악(개성)이 함락돼 현종이 나주로 몸을 피한 것을 시작으로 모두 9차례 일어났다. 조선 선조와 인조, 고종 등 3명의 왕이 5차례에 걸쳐 의주와 강화, 남한산성, 러시아공사관으로 각각 몸을 피했다. 인조는 강화, 남한산성에 이어 ‘이괄의 난’ 때 공주까지 도피한 비운의 ‘몽진 3관왕’이었다. 그 이전에 4명의 고려 왕(현종·고종·충렬왕·공양왕)이 거란과 몽골을 피해 강화, 안동 등을 30년 가까이 전전했다.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몽진이나, ‘도성을 떠나 딴 곳으로 간다’는 파천(播遷) 같은 왕에게만 쓰는 고상한 용어로 헛갈리게 하지만 이승만식 야반도주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도성수성론 대 서울사수론 1751년에 나온 영조의 ‘수성윤음’(守城綸音)은 봉건 전제군주의 폭탄선언이었다. 이제는 도성을 버리지 않겠다는 ‘도성수성론’(都城守城論)이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본격 거론된 것이다. 인조가 1637년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한 지 114년 만이고, 고종이 1896년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기 145년 전의 일이다. 사실 도성과 도성민은 방어의 대상이 아니었다. 외적이 침입해 도성에 접근하면 왕은 신속하게 피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 때 왜군은 부산상륙 18일 만에, 병자호란 때 청군은 압록강을 건넌 지 5일 만에 한양도성을 손에 넣었다. 유사시 왕의 안전을 담보하고자 별도의 보장처(피신장소)를 여러 곳에 마련해 두는 것을 동양 병법의 전통으로 여겼다. 보호해야 할 대상은 오직 왕뿐이었다. 개성, 강화, 화성, 광주 등 4곳에 유수부(留守府)를 두어 중앙관서로 삼았다. 왕이 도성 밖 행차할 때 머물던 행궁이자 피신처였다. 이 중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은 강화도, 수원 화성과 더불어 외침에 대비한 농성 장소였다. 1712년 북한산성 축성공사를 끝낸 숙종은 북한산성에 올라 “내 어찌 도성을 지키는 백성을 버릴 수 있으리”라는 기념시를 지었다. 외침이 있으면 이곳에 들어와 백성과 더불어 성을 지키겠다는 얘기다. 이때 19살이던 연잉군(영조)은 부왕을 부축해 산성에 올랐다. 도성민을 버리고 도망간다면 결코 인심을 얻을 수 없다는 도성 사수 의지가 가슴에 깃든 듯하다. 그러나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인가. 수성윤음이 무색하게 200년이 지난 한국전쟁 때 인민군 남하 3일 만에 대통령은 서울을 버렸다. 영조가 도성을 지키겠다는 결의를 다진 데에는 또 다른 배경이 있었다. 도성 방어 전략의 전환이 불가피한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17세기 말, 18세기 초엽 서울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위상은 임진년과 병자년의 양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도성의 인구가 30만명에 육박했고, 상공업의 발달로 서울은 거대한 소비도시가 됐다. 중세 유럽의 대도시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선비들의 낙향문화는 사라지고, 경화사족(京華士族)의 벼슬길 독점이 극심했다. 서울은 조선에서 유일무이한 대도시였고, 서울을 떠난 왕은 존재할 수 없는 시대를 맞은 것이다. 서울을 버릴 수 없는 속사정과 함께 이제는 중국과 일본을 향해 큰소리칠 때가 왔다는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했다. 숙종 이후 영조에 걸쳐 삼군부를 중심으로 도성 방어 군사체제를 정비하면서 이들 병력을 동원해 한양도성과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했다. 더불어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을 쌓으면서 도성 방어체제가 비로소 갖춰졌다고 본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서울 사수 방송은 대국민 사기극이었지만 영조가 직접 지어 반포한 도성 수성 의지는 탄탄한 국력의 과시이자 거듭된 환난에 고생한 대국민용 위로였다. ●북한산과 남한산,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조선 개국 이후 서울의 정식 명칭은 한성(漢城)이었다. 백성은 한양(漢陽)이라는 별칭을 즐겨 썼다. 삼국시대 이래 지역명 한주(漢州), 한산(漢山)의 맥을 이어받은 지명이다. 기원전 18년 한성백제가 터 잡은 이후 한강(漢江) 아래쪽 지금의 강남 땅이 중심이었지만 1392년 조선이 백악 아래 오늘의 사대문에 도읍을 정하면서 한강 이북으로 중심지가 북상했다. 한강을 중심으로 북쪽에 있는 산은 북한산(北漢山)이요, 산성은 북한산성(北漢山城)이다. 삼각산은 세 개의 뿔(백운대·만경봉·인수봉)을 이르는 신령스런 산이름이지만 한강 북쪽 산은 모두 북한산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본래 산이름이 희미해졌다. 한강 남쪽 산은 남한산(南漢山)이요, 성은 남한산성(南漢山城)인 점도 자연스럽다. 남한산성은 세계 최강 10만 청군의 공격을 45일간 버틴 금성탕지(城湯池)이자 난공불락의 철옹성(鐵甕城)이었다. 남한산성은 함락된 것이 아니다. 강화도 함락과 주사파와 주화파의 분열 그리고 식량이 떨어지자 왕이 스스로 걸어서 내려온 것이다. ‘성곽의 증축과 수리는 사전에 허락을 받을 것’이 6번째 항복조건일 정도였다. 남한산(522m)이 최고봉이고 산성은 일장산과 주장산 두 산 사이에 걸쳐 쌓았다. 우리에게 북한산은 산의 개념이 강하지만 남한산은 산성이라는 인식이 더 세다. 서울의 성곽축조 역사는 한성백제, 삼국의 한강 쟁패, 고려의 남경, 조선의 한양도성 등 크게 네 개의 시기로 나뉜다. 지금의 서울은 한성백제의 위례성, 고려의 남경, 조선의 한성 등 2000년 세월 동안 여러 왕조의 도읍지였기에 궁궐과 내성, 산성의 3중 체제를 두루 갖추고 있다. 한강 남쪽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강을 따라 중곡동·옥수동·삼성동·암사동 토성과 대모산성, 양천고성 등이 외곽방어 진지 역할을 했다. 아차산성·이성산성·금암산성·남한산성 또한 백제왕성의 방어기지로 파악된다. 한강 유역과 임진강 유역은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의 각축지였다. 한강권에서는 주장성, 이성산성, 아차산 고구려 보루성, 대모산성, 행주산성 등이 뺏고 빼기는 삼국의 격전지였다. 진흥왕이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를 세워 이곳이 신라 영토임을 알린 까닭이다. 임진강권에도 칠중성·호로고루·고모리산성·당포성·아미성·계양산성 등이 산재했다. 고려시대 성곽의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연흥전이라는 남경별궁을 세웠고, 최영 장군이 북한산성 자리에 중흥산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전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중국 랴오닝성 환인현 오녀산성이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졸본성이었다.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 북쪽 해발 820m의 솟아오른 암벽 위 조촐한 산성이 기원전 37년 고구려의 첫 둥지였다. 이처럼 우리의 왕성(도성)은 산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삼국시대 초기 산성과 왕성의 이원적 구조가 고구려 평양성과 백제 사비성에서 나타났지만, 후기 들어 산성과 왕성의 일체화가 정립되었다. 고려 송악에 이어 조선 한양 도성에도 이 같은 전통이 이어졌다. 중국에는 한국형 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산성은 자생적 문화유산이다. 평지의 도성과 산지의 산성이 짝을 이루는 조합은 고대 삼국 이후 한반도 도성 축조의 특징이다. 대부분의 성은 산등성이와 산기슭을 타고 쌓았다. 자연지형의 최고 경계점에 성곽을 쌓아 지형의 높낮이를 성곽으로 이용한 것이 중국이나 일본의 축조 기법과 다르다. ●홍지문과 탕춘대성 창의문을 나서 부암동 가는 산등성이가 내려가는 곳에 백석동천이 있고 산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세검정과 탕춘대 터가 있다. 도성 밖 북쪽을 지키는 군대(총융청)가 새로 생겼다고 하여 마을 이름이 신영동(新營洞)이다. 탕춘대 터에는 세검정초등학교가 들어서 있지만 본래 신라시대 장의사(藏義寺)라는 절터였다.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파랑과 장춘랑 등 두 화랑을 기리는 사찰이었으나 연산군이 이를 허물고 연희장으로 만들어 ‘질퍽하게’ 놀았다고 해서 탕춘대라고 이름 붙었다. 장의사 당간지주가 세검정초등학교 교정 한 귀퉁이에서 1400년의 역사를 뒤집어쓰고 서 있다. 장의사는 비록 사라졌지만 이름은 장의동으로 남았고, 서울의 북소문인 창의문을 장의동에 있는 문이라고 하여 장의문이라고도 불렀다. 인조반정 때 반군이 홍제원에 집결하여 세검정을 거쳐 창의문을 통해 들어와 반정에 성공하였으므로 창의문이 개선문인 셈이다. 풍수 최양선이 숙정문~창의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은 곳이니 길을 내어 지맥을 다치게 하면 안 된다고 하여 태종 때부터 폐쇄한 문을 인조반정 이후 열어 놓았다. 영조는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창의문 현판에 새겼다. 안동 김씨 중 이곳에 사는 권문세족을 장동 김씨라고 불렀다. 김정호의 경조 오부도 중 백악과 인왕산 사이에 그려진 성곽과 ‘서성(西城) 한북문(漢北門)’이라는 기록이 곧 오늘의 탕춘대성과 홍지문이다. 서성은 한양도성의 인왕산과 북한산 비봉을 연결하는 4㎞ 길이의 산성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처음에는 한성의 북쪽에 있는 문이라고 하여 한북문이라고 불렸으나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이라는 편액을 하사하면서 공식 명칭이 되었다. 탕춘대성 안에 전시 식량을 비축하는 곳간을 만들어 평창(平倉)이라고 하였는 데 평창동 지명이 여기서 유래했다. 서울은 도성을 중심으로 3개의 산성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북쪽에는 북한산성, 남쪽에는 남한산성이 있고, 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서쪽 산성이 탕춘대성이다. 원래 도읍은 궁궐과 내성 그리고 외성 등 삼중구조를 갖춰야 하지만 조선은 궁궐과 해자도 없는 도성만으로 버텼다. 외성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양란을 호되게 겪고서야 도성의 군사적 방어체계를 고쳤다. 이를 본 청화산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한양도성을 ‘온 나라 산수의 정기가 모인 곳’이라고 찬탄했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서울 양천고성터서 첫 삼국시대 석성 발견

    서울 양천고성터서 첫 삼국시대 석성 발견

    서울에서 처음으로 강서구 양천고성 터에서 삼국시대 석성(石城)이 발견됐다. 강서구는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한얼문화유산연구원이 사적 372호 양천고성 터를 조사한 결과 서울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삼국시대 석성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21일 밝혔다. 이번 조사에서 성곽 몸체인 체성부의 축조 기법과 성곽의 주요 구조물인 치성부(성벽 바깥으로 돌출된 부분), 수·개축부(처음 성을 쌓은 이후 보수하거나 다시 쌓은 부분)를 확인했다고 구는 설명했다. 또 성벽 내부와 바깥에서는 백제 유물로 추정되는 단각고배(짧은 굽다리 접시)와 통일신라시대 유물로 보이는 태선문(굵은금무늬) 기와 조각도 나왔다. 따라서 양천고성이 삼국시대에 석성 형태로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서울에는 한성도읍기 백제시대 도성으로 평가받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그리고 그 건너편 아차산성과 같은 고대 성곽이 남아 있지만, 통일신라시대 이전 흔적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양천고성은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확실한 삼국시대 첫 석성일 가능성이 커졌다. 손영식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은 “그동안 흙으로 쌓은 삼국시대 토성 등은 서울에서 발견된 적이 있으나 돌로 쌓은 석성은 양천고성 터에서 처음으로 발견됐다”면서 “완전한 형태의 치성부와 성벽 형태를 확인한 것도 큰 성과”라고 말했다. 구는 오는 9월부터 3차 조사를 진행하고, 이를 토대로 종합 복원계획을 수립해 시민 역사교육의 장소로 조성할 계획이다. 양천고성지는 가양동 궁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축성된 옛 성터로, 한강지역의 중요한 산성 유적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1992년 사적 372호로 지정됐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씨줄날줄]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서동철 논설위원

    남한산성을 대표하는 유적은 둘레 11.7㎞에 이르는 성곽 그 자체지만, 수어장대(守禦將臺)의 상징성 또한 적지 않다. 수어장대는 글자 그대로 전망이 트인 곳에 지은 장수의 지휘소다. 서장대(西將臺)에 해당하는 수어장대는 성 내부에서 가장 높은 해발 453m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수어장대 앞에 서면 잠실에서부터 훤히 트인 송파벌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송파벌은 병자호란(1636~1637) 당시 청군이 진을 쳤던 곳이고, 인조가 청황제에게 항복의 뜻으로 세 차례 절하고 아홉 차례 머리를 조아린 치욕의 현장이다. 훗날 영조가 장대를 2층으로 고쳐 지으며 ‘잊으려고 해도 잊지 못한다’는 뜻의 ‘무망루’(無忘樓)라는 현판을 내걸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정조도 즉위 3년째인 1779년 여주의 세종릉(英陵)과 효종릉(寧陵)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서장대에 올랐다. 그는 ‘선대왕이 경술년(1769) 이 장대에 들르셨고, 오늘 내가 또 여기에 왔다’면서 ‘병자년에 적병이 밤을 타서 널판지를 지고 성에 오르는 것을 아군이 발각하고 끓인 물을 부으니 모두 문드러져 물러갔다 하는데, 이곳이 그곳인가?’하고 물었다. 선대왕(先大王)이란 할아버지인 영조를, 병자년이란 호란이 일어난 인조 14년(1636)을 가리킨다. 영의정 김상철은 정조의 하문에 “인조대왕의 꿈에 온조왕이 적병이 성에 오른다고 알리는 모습이 나타났다. 임금이 놀라 깨어 정탐하게 했더니 그 말과 같아 격퇴하게 했는데 벤 적병이 매우 많았으므로, 환도한 뒤 특별히 명하여 온조묘(廟)를 세워 봄·가을로 제사하게 하셨다”고 답했다고 한다. 남한산성이 한성백제의 왕도였다는 주장은 고려시대에 처음 제기된 뒤 조선시대에는 자주 등장한다. 한성백제 왕성으로 가능성을 높인 한강변 풍납토성의 최근 발굴 성과를 당시에는 알 턱이 없었을 것이다. 정조는 이때의 기억 때문인지 인조가 세운 온조묘에 재위 19년(1795) 숭렬전(崇烈殿)이라 사액한다. 조선은 역대 왕조의 시조 사당에 숭(崇)자 돌림으로 이름을 붙이는 전통이 있다. 남한산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확정적이라는 소식이다. 6월 ‘제3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최종 보고와 승인 절차만 거치면 결정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남한산성은 도시계획과 축성술이 집약된 동아시아 군사유산으로, 지형을 이용한 축성술과 시대별 방어전술을 알 수 있는 초대형 포곡식 산성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한구석에 착잡한 마음도 든다. 남한산성이 국제사회에 알려질수록, 치욕의 역사를 극복하려는 우리의 노력 또한 더욱 치열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아파트 베란다 된장·고추장 담가 보세요

    “메주를 봤을 때 검은 곰팡이, 누런 곰팡이, 털 같은 곰팡이가 핀 것들은 다 좋아요. TV 같은 데서 매끈한 메주 봤죠? 보긴 좋을지 몰라도 속성으로 뜬 거라 장 담그면 맛이 없어요. 가장 주의할 것은 빨간 곰팡이에요. 발암물질이죠.”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주부 40여명이 눈 깜짝할 새 우르르 몰려들었다. 더러는 볼펜을 꺼내 메모하느라 바쁘다. 더러는 아예 스마트폰으로 동영상 촬영 중이다. 설명이 이어진다. “아파트는 건조한 데다 바람이나 햇볕이 적으니까 보통 물 30ℓ에 소금 9㎏ 정도를 기준으로 삼아요. 그런데 소금에 따라 달라지니까 염도측정계를 들고 18도로 맞추세요.” 25일 오전 11시 서울 송파구 풍납2동 주민센터 앞 주차장. ‘오늘은 장 담그는 날-장 담그기, 정 나누기’ 행사에서 서울시무형문화재 9호 박현숙(63)씨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된장 담그기’에 대해 설명했다. 박씨는 원래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던 전통 술 ‘향온주’ 기능 보유자.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 혹독하게 배웠다. 발효 문제를 다루다 보니 장에도 눈을 떴다. 슬슬 소문난 장맛의 비법엔 막걸리도 포함됐다. 입소문을 타니 주민센터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자극적인 입맛에 길들여진 아이들, 비만이나 아토피 문제로 고심하는 부모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는 박씨는 베란다에서 장 담그는 방법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주민센터 강좌를 통해 이 방법이 알음알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예 마을 잔치 수준으로 판을 키웠다. 전남에서 직접 재료를 구해 된장, 고추장을 담근 뒤 주민센터 옥상에서 보관하는 것. 담근 장은 주부들이 쓰기도 하고 이웃 돕기에 내놓는 등 다목적으로 활용한다. 이종호 풍납2동장은 더 큰 꿈도 그렸다. 그는 “풍납토성 때문에 개발사업엔 한계를 띨 수밖에 없어 장 담그기 행사를 ‘장이 익어가는 마을’이란 마을사업으로 키워 보고 싶다”고 말했다. 박씨도 이런 움직임에 적극적이다. 베란다에서 된장이나 고추장을 담그겠다고 신청할 경우 현장으로 달려가 장독대를 설치하고 비법도 귀띔한다. “마트나 홈쇼핑에서 일률적으로 만들어 파는 것을 계속 사먹다간 전국 모든 집의 음식맛이 다 똑같아질 겁니다. 건강도 건강이지만, 미감을 잃어버리는 거잖아요. 그 얼마나 큰 손실입니까.” 그러더니 속삭이듯 덧붙였다. “술은 어른 남자나 마시지만, 장은 온 가족이 다 행복해질 수 있는 음식이잖아요.”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커버스토리-디자인 서울] “서울의 역사성 로마에 꿀리지 않아… 그 결 그대로 살려서 디자인해야”

    [커버스토리-디자인 서울] “서울의 역사성 로마에 꿀리지 않아… 그 결 그대로 살려서 디자인해야”

    도시는 생물이다. 인간이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도시가 살아나고 죽는다. 그러나 보통 인간은 자본의 논리로 그것을 황폐하게 한 뒤 다른 곳으로 옮겨가 똑같은 일을 한다. 고서와 금석학의 거리였던 서울 종로구 인사동이 중국산 제품과 질 낮은 공예품이 판치는 국적 불명의 장소가 된 것이 대표적이다. 푸진 음식으로 서민의 주린 배를 달랜 종로 피맛골, 근대 역사를 품은 동대문운동장 등은 초고층 빌딩과 온갖 상업시설들에 잠식당했다. 600년 고도(古都) 서울은, 대체 어디까지 더 ‘세련’돼지기만 할 것인가. 권영걸(63·서울대 미술관장)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는 “서울은 역사문화 도시로 분명하게 자리 잡아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10일 인터뷰에서 권 교수는 서울의 역사를 먼저 훑었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의 풍납토성과 오륜동 몽촌토성 지역을 백제의 도읍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그는 “아주 겸손하게 잡아도 서울은 2000년 역사를 가진 도시로서, 유럽 어느 도시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다”고 했다. “로마나 아테네보다 훨씬 더 오랜 역사의 결이 켜켜이 쌓인 도시”라고 강조했다. ‘디자인 서울’을 내세운 오세훈 서울시장 시절 초대 디자인서울총괄본부장을 맡았던 그는 “서울시장은 행정가여야 하는데 역대 시장을 살펴보면 정치가 성향이 더 강했다”고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임기 초반에 뭔가를 보여 줘야 한다는 과잉 의욕이 디자인의 오남용을 불렀던 점이 없지 않았다. 서울이 역사문화도시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인식도 약간은 부족했다”고 고백했다. “고층빌딩을 세우고 지역 개발을 할 때 유적과 유물이 나오면 개발 방향을 틀고 설계 변경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권 교수는 “서울을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만들기 위해서 ‘개발’보다 ‘역사보존’을 앞세우고 문화재법을 지엄하게 여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제라도’라는 단어에 힘을 주면서 “공무원도, 자치단체장도, 중앙정부도 이제는 ‘유물이 나오면 개발을 중단한다’는 방향으로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 교수가 3년 만에 탈고해 내놓은 신간 ‘나의 국가디자인전략’ 역시 그런 기조를 깔고 있다. 책에서 그는 ‘공공성’을 바탕에 둔 88개 디자인 전략을 제안한다. “좋은 디자인은 공공성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디자인의 본래 가치는 자연의 도를 따르고 인간을 섬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 서울 송파 풍납토성에 백제왕성 공원 만든다

    서울 송파 풍납토성에 백제왕성 공원 만든다

    옛 한성백제 시기(기원전 18년~서기 475년)의 수도로 알려진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에 2만여㎡ 규모의 백제시대 왕성 공원(조감도)이 조성된다. 문화재청은 서울시, 송파구와 함께 ‘서울 풍납동 토성’(사적 제11호) 내 미래마을 부지에 ‘풍납 백제 왕성 공원’(가칭)을 만들기로 했다고 7일 밝혔다. 문화재청은 “풍납토성에 문화유적과 지역주민이 상생하는 새로운 형태의 역사문화공원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공원은 내년 3월 착공돼 12월 완공될 예정이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약 1700년 전 한성백제 시기의 도로를 축으로 ‘백제시대 도로 유구(흔적)’ ‘백제시대 건물터 유구’ ‘풍납토성 내성벽(內城壁)’ ‘백제시대 집자리 유구’ 등 기존의 발굴 유적들을 재현해 전시할 계획이다. 또 주민편의시설로 놀이마당, 운동시설, 행사마당, 화장실 등을 만들고 지상 4층, 연면적 1100㎡ 규모의 주민복합문화센터를 건립한다. 사업예산은 40억원(국비 70%, 지방비 30%) 안팎이다. 공원이 들어설 미래마을 부지는 당초 풍납토성 중앙부 서편에 단독주택과 상가가 조성됐던 곳이다. 주민들이 미래마을재건축조합을 결성해 아파트 신축을 준비하던 중 문화재 당국이 시행한 시굴조사에서 백제문화층이 확인되면서 2000년 개발이 중단됐다. 이후 지난해까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벌여 한성도읍기 백제 왕성과 관련한 고고학적 증거를 확인했다. 문화재청은 풍납토성의 합리적 보존과 관리를 위해 2011년 9월부터 문화재청·서울시·송파구 관계자와 문화재위원, 서울시의회 의원, 풍납동 주민대표 등이 참여하는 ‘풍납토성 보존관리 소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해 왔다. 이번에 추진되는 역사문화공원 조성사업도 이 소위원회의 논의를 거쳐 최종 결정됐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자원봉사 뭘로 하지? 주민센터에 물어봐!

    송파구는 8일 여름방학을 앞두고 34가지의 자원봉사프로그램을 공개한다고 밝혔다. 어떤 봉사활동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당장 9일부터 한달 동안 자원봉사센터, 동주민센터, 복지시설 등에서 봉사활동이 시작된다. 취약계층 대상 봉사, 환경체험, 지역사회 가꾸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평소 관심을 가져온 분야에서 활동을 벌일 수 있다. 동주민센터마다 특성에 맞는 봉사활동을 개발해둔 덕분이다. 가령, 가락본동과 방이1동은 ‘폐현수막을 활용한 환경주머니 만들기’, 거여1동은 ‘아름다운 동네 가꾸기’, 가락1동은 ‘우리는 도시농부’, 풍납동은 ‘풍납토성 역사 이해 및 환경정화활동’ 등이 마련됐다. 미리 예약하고 동주민센터 자원봉사캠프를 찾아가면 원하는 봉사활동, 봉사하면서 배울 수있는 프로그램을 골라 볼 수 있다. 봉사활동을 널리 알리기 위한 이벤트로 마련됐다. 20일 오후 2시 올림픽공원 평화의광장에서는 청소년봉사활동동아리가 총출동하는 ‘루리 잔치’가 열린다. 체험부스를 만들어 봉사활동이 어떠한지 경험하는 기회를 준다. 23일 천연미스트만들기, 25일 망가진 우산을 이용한 환경장바구니 만들기 등도 진행한다. 박춘희 구청장은 “학창시절 짧지 않은 여름방학기간 동안 관심분야 봉사활동에 참여해 사회경험을 넓히는 뜻 깊은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콘텐츠 시티’ 송파구 이번엔 뮤지컬 도전

    ‘콘텐츠 시티’ 송파구 이번엔 뮤지컬 도전

    이번엔 뮤지컬이다. 송파구는 2일 오후 1시 대학로 홍대아트센터 대강당에서 뮤지컬 ‘미스터 온조’ 제작발표회를 열었다. 자치구마다 나름대로 지역 특색을 살린 아이디어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송파구는 뮤지컬을 택했다. ‘온조’라는 제목에서 짐작하듯, 이번 작품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팩션 사극물. 뮤지컬의 뼈대는 널리 알려진 백제의 건국설화, 그러니까 고구려 주몽의 둘째 부인 소서노의 둘째 아들로 고구려를 떠나 한성백제에 도읍해 백제를 세우는 온조의 이야기를 다뤘다. 송파구가 뮤지컬을 택한 이유는 콘텐츠를 보강하기 위해서다. 내년 123층 롯데타워가 들어서고 석촌호수에 올림픽공원, 풍납토성 등 한성백제 시절 유적지까지 품어 하드웨어는 충분하다. 한편으론 한성백제문화제를 여는 등 문화사업을 벌이고 있지만 젊은이의 가슴을 미어터지게 할 킬러 문화 콘텐츠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결론은 뮤지컬이었다. 한성백제를 테마로 한 뮤지컬을 제작한 적은 있지만 아마추어 배우들을 기용해 열악한 음악과 조명 아래 만들다 보니 질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제대로 만들자고 마음을 다졌다. 공모를 통해 뮤지컬제작사인 MS뮤지컬컴퍼니를 끌어들였다. 프로의 손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송파구에서 2억원을 부담하는 등 제작비 15억원을 들였다. 캐스팅도 김민철, 박소연 같은 전문 뮤지컬 배우뿐 아니라 가수 홍경민, 아이돌그룹 익사이트의 멤버 민후, 그룹 쥬얼리의 박세미 등을 가미해 상품성을 강화했다. 대중문화적 접근이다 보니 온조 설화를 무미건조하게 반복하는 것보다 온조와 송파의 여인 달꽃무리 사이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도 녹여 담았다. 온조 역을 맡은 홍경민이 이날 제작 발표회에서 “카리스마 넘치고 위엄있는 왕보다는 감성적이고 인간적인 온조의 면모를 살려 보겠다”고 말한 까닭이다. 김면수 MS뮤지컬컴퍼니 대표는 “백제 건국 설화는 신비하다기보다는 아주 사실적이어서 백제 건국의 배경 무대인 송파에 무언가 숨겨진 애틋한 사연이 있었던 게 아닐까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공연장도 이왕이면 프로 공연에 걸맞은 곳을 섭외해 700석 규모의 홍대아트센터로 잡았다. 오는 26일부터 9월 1일까지 공연한다. 12월에는 올림픽공원의 K아트홀로 옮겨 한 달간 다시 공연한다. 지난 연말 시나리오와 음악, 안무를 다듬은 뒤 지난 1월 시연회까지 열어 수렴한 의견을 바탕으로 작품을 업그레이드한 결과다. 박춘희 구청장은 “내년 이후 연간 450만명의 관광객이 송파를 찾을 것인데 즐길 거리를 제공하는 동시에 한성백제 500년의 발상지가 송파라는 점을 각인시키는 작품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① 프롤로그-변천사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① 프롤로그-변천사

    우리에게 서울이란 무엇인가. 한강 기슭에 터 잡은 한성백제 이후 2000년의 역사가 어린 한민족의 고향쯤이기도 하고, 북악 아래 도읍을 정한 지 600년을 훌쩍 넘긴 조선의 심장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유린당했지만 정체성을 지켰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본은 민족정기 말살을 노리는 대못을 구석구석 박았다.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일제의 식민 경영에 의해 서울은 심각하게 왜곡됐다. 한국전쟁의 포연 속에서 서울시내 건물의 3분의1이 파괴됐다. 사대문 안 문화재는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전쟁이 끝났을 때 서울은 폐허에 가까웠다. 그런 서울이 ‘한강의 기적’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60년.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압축적인 성장과 변화가 휩쓸고 갔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 장기 개발독재와 불도저식 행정가의 밀어붙이기 도시계획에 따른 엄혹한 고통을 묵묵히 감내한 서울시민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견뎌 내지 못했더라면 인도의 뭄바이,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울은 진화 중이다. 진화는 상실을 수반한다. 기억하고 남겨야 할 가치마저 토건의 흙먼지 속에 숱하게 사라졌다. 개발 연대의 기록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숨가쁘게 달려온 길이 보인다. 험하고 불편했지만, 기억 속에서는 정겨운 시절이기도 하다. ‘서울 택리지’(擇里志)는 지금 우리 옆에 남아 있는 건물, 도로, 장소, 풍광의 생성과 소멸 그리고 재생 과정을 도시계획적 관점에서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잊고 지내 온 것들을 되새김하고자 한다. ■서울 2000년사 새로 써야 하나 미국의 도시설계가 케빈 린치는 “도시는 랜드마크(landmark)와 구역(district), 통로(path), 접점(node), 경계(edge)로 인지된다”고 ‘도시의 이미지’를 정의했다. 서울을 도시건축적 시각에서 보면 다섯 가지 키워드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본 서울은 만감이 교차하는 상념의 뿌리 같은 곳이다. 서울의 진짜 나이는 몇 살일까. 우리는 ‘서울은 600년 역사를 지닌 도시’라고 알고 있고, 서울을 소개하는 대부분 책에 그렇게 적혀 있다. 1978년 ‘서울 600년사’가 편찬됐고, 1994년에는 서울 정도 600년 행사를 성대하게 치렀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서울의 기원과 역사에 관한 정설은 흔들리고 있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는 2009년 ‘서울 역사 2000년’을 내놓으면서 서울의 공간을 확장했고, 역사도 1400년 늘렸다. ‘온조가 위례에 자리 잡았다’는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설화에 따라 서울의 기원을 기원전(BC) 18년으로 본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성백제시대 493년이 서울의 역사로 편입됐고, 한강 이남까지 영역이 확장됐다. 위례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겼으므로 백제 수도로서의 서울 역사는 500년 가까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석촌동 일대에는 백제 초기 적석총 10여 기가 남아 있는데 이 중 3호분을 13번째 왕 근초고왕(?~375)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곧 한성백제 493년에,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가 서울을 남경(南京)으로 삼은 기간까지 더하면 수도 서울의 역사는 물경 2000년에 이른다는 것이다. 로마, 아테네, 바빌론, 이스탄불, 다마스쿠스, 테베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의 반열이다. 900년 설도 있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18㎞ 사대문 안과 사방 십리(城底十里)를 의미하는데 위례는 경기도 지역으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울에 속한 곳이므로 역사적으로 전혀 다른 지역이라는 것이다. ‘오래된 서울’을 펴낸 최종현·김창희씨는 “서울의 기원을 위례에서 잡을 것이 아니라 고려 숙종의 남경 천도로 잡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숙종이 경복궁 근처에 남경행궁을 만들어 행차한 1104년을 서울의 기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서울의 역사는 919년이 됐다는 얘기다. 묵을수록 좋다고 하지만 서울의 나이를 무한정 늘리는 것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1392년 조선 건국과 한양 천도를 한민족 수도 서울의 주춧돌로 보는 것이 일반의 통설이다. ■고려 286년 동안 5차례 시도된 한양 천도 한양 천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얘깃거리가 많다. 고려 건국 후 서울은 양주(楊州)로 불렸으며 지방 호족이 할거했지만, 지정학적 중요성을 고려한 문종은 1067년 남경으로 승격시켰다. 개경(개성), 서경(평양)과 함께 고려의 3대 도시로 삼은 것이다. 한양 천도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 성공과 이에 따른 지배층 정리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역사 교과서는 소개하고 있지만, 천도는 고려 중기부터 끊임없이 시도됐음을 알 수 있다. 1308년 충선왕은 남경을 한양부(漢陽府)라고 고쳤다. 1357년 공민왕은 남경 천도를 본격화했다. 수도를 옮김으로써 국내외 혼란을 바로잡고자 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송도(개경)의 지덕이 다해 나라 안팎의 우환이 끊이지 않는다는 지리도참설이 도읍을 옮기도록 부추겼다. 1382년 우왕은 한양 천도를 단행했지만, 이듬해 개경으로 돌아갔다. 1390년 공양왕은 한양으로 옮기면서 백관들이 양쪽에서 나눠 근무하게 함으로써 6개월짜리 ‘반쪽’ 수도에 그쳤다. 천도는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지 3년 만인 1395년 6월 6일 한양부를 한성부로 바꾸면서 완성됐다. 고려의 한양 천도는 1104년 숙종 때 처음 시도된 이래 충선왕, 공민왕, 우왕, 공양왕 등 5명의 고려왕이 시도했지만, 무위로 돌아갔고, 결국 조선 태조에 의해 291년 만에 실행에 옮겨졌다. 고려왕조 476년의 절반을 넘는 286년 동안 고려의 마음은 개성을 떠나 한양을 기웃거렸다. ■‘서울특별시’의 탄생 비화 서울은 지명이 아니라 도읍을 이르는 용어다. 서울은 고려 때 한양으로 불렸으며 조선시대 공식 지명은 한성부(漢城府)였다. 중국이 지금까지 서울을 한성(漢城)이라고 호칭하는 까닭이다. 일제는 경성부(京城府)로 개칭, 경기도 내 행정구역의 하나로 깔아뭉갰다. ‘서울’이라는 지명은 1946년 8월 14일 미 군정청 특별발표에서 처음 등장한다. 손정목 전 시울시립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미 군정장관 아처 러치 소장이 광복 1주년 기념 선물로 서울을 경기도에서 독립시켜 특별시(영문 표기는 독립시)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서울특별시는 군정 법령의 효력이 발생한 1946년 9월 28일을 기해 공식 지명이 됐다. 서울 사대문 안이 미군의 무차별 공습에서 벗어나 문화재를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하게 된 비화도 전해진다. 한국전쟁 당시 주일대표부 전권공사를 지낸 김용주(1905~1985)는 ‘나의 회고록, 풍설시대 80년’에서 도쿄사령부로 맥아더 장군을 찾아가 설득한 경위를 밝혔다. 그는 5대 궁과 사대문을 포함하는 지역을 작전지도에 표시하면서 폭격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청했고, 맥아더는 “좋은 조언을 해 줘 대단히 기쁘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김용주는 후에 전남방직을 창업했고 경총회장을 지냈다. ■이중환은 ‘서울 택리지’를 어떻게 쓸까 나라에 사(史)가 있으면 고을에는 지(志)가 있다. 이것이 우리의 문화 전통이다. 지리지(地理志)는 지역의 역사, 지리, 인물, 풍속 등을 기록한 책이다. 지리지도 정사의 일부였다. 중국의 경우 반고는 한서(漢書)에 지리지를 포함했고, 삼국사기와 고려사도 각각 지리지를 갖추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이 펴낸 택리지(擇里志)는 동국여지승람과 함께 우리나라 지리지를 대표한다. 동국여지승람이 행정중심적 백과사전이라면 택리지는 생활권과 지역권의 시각으로 서술한 근대 지리학의 맹아라고 할 수 있다. 이중환은 30여년간 전국을 떠돌면서 살 만한 곳을 찾아 헤맸다. 공자가 논어에서 ‘군자는 살 만한 곳을 찾아 거한다(可居地)’는 그곳, 동양의 유토피아였다. 특히 사람이 살 만한 곳의 입지 조건으로 지리(地理)와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등 4가지를 꼽았다. 이중환은 살 만한 곳을 찾았을까? 택리지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신택리지’의 저자 신정일은 “끝내 살 만한 땅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서울은 살 만한 곳인가?’ 서울은 ‘연식’은 오래된 도시이지만 ‘마일리지’는 환갑을 넘지 못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다이내믹하게 변화한 도시다. 조선 말 20만명이 살던 도성은 해방 전후 100만명으로 늘어났고, 1990년 1000만명 시대에 접어들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것은 광적으로 서울에 몰렸다. 개발 연대기 서울 행정은 인구 분산과 교통난 해소, 택지개발, 아파트 건설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서울은 늘 만원이고, 늘 공사 중이었다. 개발의 와중에서 역사와 애환이 서린 ‘그때 그곳’은 보호받지 못했고, 달랑 표지석으로 남은 곳이 숱하다. 그런 서울이 사람 위주의 환경도시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개발 연대를 대표하는 청계고가의 철거와 청계천 복원이 터닝포인트였다. 2013년 서울은 수도권 주민 등 3000여만명이 드나들고, 대한민국 5000만 국민이 지향하며, 외국인 관광객 1000만명이 찾는 ‘동방의 메트로폴리스’가 됐다. 불과 반 세기 만에 일어난 경천동지할 변화다. 이중환이 현대 서울을 보았다면 택리지의 후편으로 ‘서울 택리지’를 집필했을 것이다. 그는 무엇이라고 쓸까. joo@seoul.co.kr
  • 풍납토성·석촌호수·가락시장…송파 3색 매력 관광특구로

    서울 송파구가 ‘국제관광도시’를 표방하고 나섰다. 구는 ‘글로벌 매력도시, 국제관광도시 송파’라는 비전을 담은 5개년 마스터플랜을 수립했다고 29일 밝혔다. 지난해 3월 강남권 최초로 잠실이 서울 최대 규모의 관광특구로 지정되고 2015년 초고층 롯데월드타워 완공이 예정됨에 따라 관광 진흥 기본방향을 제시하게 됐다고 구는 설명했다. 계획에 따르면 구를 3개 권역으로 나눠 북부는 문화체험, 동부는 역사체험, 남부는 쇼핑체험에 중점을 두도록 할 예정이다. 먼저 롯데월드와 석촌호수를 아우르는 ‘북부 문화체험관광권’은 기존의 관광자원에 문화와 예술을 입힐 예정이다. 호반에서 즐기는 친환경 야경과 걷고 싶은 유러피언 노천카페거리 조성 등의 7개 역점사업이 추진된다. 동부 역사체험관광권에서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등에 한성백제역사 체험단지를 조성하고 한성백제 문화유적 스토리를 조사·발굴하는 5개의 사업이 실시된다. 남부 쇼핑문화관광권은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과 문정동 로데오거리, 장지동 가든파이브 등을 연계해 식품·패션·종합쇼핑의 중심지로 육성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쇼핑문화특구 지정, 면세구역 형성, 우수쇼핑 인증점 확대 등 5개 사업을 추진해 쇼핑 관광의 활성화를 꾀한다. 김민희 기자 haru@seoul.co.kr
  • [씨줄날줄] 고구려 박물관/서동철 논설위원

    1977년 서울 구의동 한강변의 화양지구택지개발 현장에서 발굴 조사가 벌어졌다. 아파트 개발 예정지에 있던 해발 53m 언덕 정상에서 삼국시대 보루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보루란 군사가 주둔한 일종의 요새이다. 이듬해까지 이어진 발굴 조사에서 돌로 쌓은 직경 14.8m의 고구려 유적이 드러났는데, 내부에서는 건물터와 온돌 및 배수 시설이 확인됐다. 강 건너 백제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바라보이는 보루에서는 토기와 무기 등 3000점 남짓한 유물이 수습됐다. 발굴 당시 보루 내부의 아궁이에는 군사들의 밥을 짓는 철솥과 철항아리가 그대로 걸려 있어 이곳에 주둔한 부대는 기습 공격을 당해 전멸한 것으로 학계는 해석했다. 하지만 구의동 보루가 있던 언덕은 택지개발 공사를 강행하여 완전히 깎여 나갔고, 1983년 아파트가 들어섰다. 지금의 자양 한양아파트이다. 중국이 사실상의 ‘고구려사 왜곡 박물관’인 지린(吉林)성의 지안(集安)박물관을 새달 1일 개관한다는 소식이다.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중국의 지방사로 치부하는 이른바 동북공정의 결과물이다. 고구려가 AD 3년부터 427년까지 도읍한 지안시엔 1만 2000기를 헤아라는 고구려 고분이 있다. 광개토대왕비도 있다. 그럼에도 박물관은 글로 표현하지만 않았을 뿐 누구나 ‘고구려 역사는 중국 역사’라고 인식하도록 동북공정의 내용을 철저히 반영했다고 한다. 고구려가 수나라· 당나라와 맞붙어 대승을 거두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고구려가 지안에서 평양으로 천도한 뒤 668년까지 존속했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않은 것도 의도를 짐작하게 한다. 중국은 발해의 수도 상경이 있던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시에도 발해박물관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2003년부터 준비했다는 지안박물관 개관 소식을 듣고 ‘구의동 참사’를 떠올린다. 그들은 동북공정으로 만든 ‘시나리오’대로 박물관을 지어 ‘물증’을 제시하고 있다. 반면 우리는 분개만 했을 뿐 의식은 고구려 보루를 흔적도 없이 쓸어버릴 당시의 수준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고구려 박물관 건립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구려 유적이 있는 아차산을 사이에 둔 서울 광진구와 경기 구리시의 유치 경쟁이 과열되면서 오히려 진전을 막았다. 최근에야 고구려 박물관 건립을 위한 정부 차원의 첫 연구 용역 결과가 공표됐으니 아직도 갈길은 멀다. 그럴수록 고구려 역사는 이제부터라도 말보다는 행동으로 지켜야 한다. 지안박물관을 부끄럽게 할 ‘국립고구려박물관’의 출범이 그 첫 결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씨줄날줄] 풍납토성의 쓰레기/서동철 논설위원

    “며칠 전 박물관으로 옛 동기(銅器) 두 점을 팔러 온 사람이 있었다. 발견지로 가 보니 풍납리였는데, 큰물에 씻겨간 토사 단면에 커다란 항아리가 노출돼 있었으니, 동기는 항아리 속에 있었다고 한다. 주변 단층에 무수한 백제 토기가 출현하고 있으니 가 보면 어떤가.” 을축대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1925년 가을, 지금의 서울 송파구 풍납동인 경기 광주군 구천면의 풍납토성을 찾았던 일본인 형질인류학자 아오노 겐지가 남긴 탐방기의 일부다. 그는 우리 땅에서 문화재를 조사한 최초의 일본인으로 알려진 세키노 다다시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겐지는 ‘그날 세키노 박사의 의견으로는 이곳에는 성벽 흔적도 있으므로 백제 왕성 유적으로 생각된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이 옛 동기가 바로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청동 자루솥이다. 풍납토성은 풍납동이 서울시에 편입된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성벽 내부를 사적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이후 유적의 중요성이 부각되지 못하며 난개발이 이루어진 것이다. 풍납토성이 다시 한성백제의 왕성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한 고고학자의 용감한 도전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97년 토성 내부의 아파트 공사 현장에 ‘잠입’한 이형구 당시 선문대 교수가 파헤쳐진 흙더미에서 백제 초기 유물을 확인한 것이다. 이후 재건축 사업이 추진되던 경당연립터에서 발굴조사가 벌어졌고, 왕궁의 흔적으로 보이는 유적과 유물까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성백제박물관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도 풍납토성 발굴이 계기가 됐다. 지난해 개관한 박물관의 로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풍납토성의 성벽 단면이다. 박물관은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에 지어졌는데, 일찍부터 한성백제의 한강유역 지배와 깊은 관련이 있는 시설로 인정받은 몽촌토성의 내부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풍납토성이 한성백제박물관의 상징이 된 것은 그만큼 풍납토성이 백제 건국 초기의 도읍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풍납토성의 해자(垓子) 추정지에 수천t의 쓰레기가 매립됐다는 소식은 충격적이다. 그것도 왕성이라는 증거가 뚜렷해지며 유적 보호와 주민대책이 현안으로 떠오른 이후인 2006년 벌어진 일이라니 놀랍다. 해자란 적의 침입을 막고자 성 밖을 둘러 판 물길이다. 광주광역시 신창동이나 경주 안압지에서 보듯 저습지는 특히 목재 유물의 보존에 유리하다. 풍납토성 해자에도 초기 백제의 역사를 밝혀줄 유물이 간직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깝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송파에 ‘한류 원조’가 있다?

    지금의 송파구 일대를 도읍으로 삼았던 한성백제(BC 18~AD 475년)는 고대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 일대의 찬란한 문화를 전파했던 ‘한류의 원조’였다. 지금 이 일대에는 한성백제 유적으로 알려진 풍납토성, 몽촌토성, 백제고분군 등이 남아 당시의 숨결을 전해주고 있다. 한성백제로부터 이어진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송파구는 오는 22~23일 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한성백제와 서울의 역사를 한눈에 엿볼 수 있는 역사문화축제 ‘제12회 한성백제문화제’를 개최한다. 지난 3월 잠실관광특구 지정 이후 처음 개최되는 올해 한성백제문화제는 한류 열풍의 연장선에서 ‘세계인이 함께 즐기는 글로벌 축제’로 꾸며졌다. 본 행사는 22일 오전 10시 풍납토성 경당공원에서 열리는 혼불 채화식을 시작으로 막을 올린다. 이어 칠지도 제막식, 한성백제 청소년 음악 동아리 축제 등이 이어진다. 첫날 저녁 평화의 광장 특설무대에서 열리는 개막 축하공연에는 가수 2AM과 김덕수 사물놀이패 등이 출연할 예정이다. 둘째 날에는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역사문화거리 행렬이 벌어진다. 올림픽공원 옆 위례성대로 1.5㎞ 구간에서 진행되는 행렬에는 전문 연기자들과 주민, 학생, 기업체 직원, 외국인들이 총출동한다. 대취타를 앞세우고 백제의 건국, 정립, 함성, 중흥, 어울림 등 6개 테마로 꾸민 행렬이 거리를 메울 예정이다. 저녁 무대에는 가수 플라워, 윤수일밴드, 컬투 등이 오른다. 축제 기간 동안 평화의 광장에는 대형 칠지도 등이 전시되며 백제 군영 체험, 전통놀이 체험, 유물 발굴 체험, 토성 쌓기 등 다양한 이벤트 코너도 준비된다. 축제 전날인 21일에는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관련 국제학술세미나도 열린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500년 한성백제 유물 4만점 만나자

    500년 한성백제 유물 4만점 만나자

    한성백제부터 이어온 고도 서울의 역사를 조명하는 한성백제박물관이 8여년 준비 끝에 오는 30일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내에 문을 연다고 서울시가 23일 밝혔다. ●1만 4894㎡ 규모로 조성 1만 4894㎡ 대지에 지하 3층, 지상 2층 규모로 조성된 박물관은 인근 몽촌토성과 조화를 이룬 디자인으로 외관은 해상강국 백제의 배를 형상화했다. 3개의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야외전시공간 및 로비·편의시설 등을 갖췄으며, 총 4만 2311점에 달하는 유물들이 주제·시기에 따라 나눠 전시된다. 특히 전시실 곳곳에는 실물크기 모형, 디오라마, 매직비전 등 다양한 보조 자료를 전시해 흥미로운 유물 감상을 돕는다. 박물관은 또 시민 평생교육장 역할도 하게 된다. ‘한성백제 아카데미’, ‘야호! 박물관놀이터’ 등 연령별 교육·문화 프로그램이 마련됐으며, 주변 몽촌토성·풍납토성과 연계해 놀토 역사 현장체험 프로그램으로도 활용될 전망이다. 전자도서관도 설치돼 서울의 선사·고대사 정보를 접할 수 있다. ●연령별 교육·문화 프로그램도 박물관은 개관기념 특별전으로 9월 14일까지 ‘백제의 맵시- 옷과 꾸미개’전을 연다. 한성백제의 복식원단 9종, 복식 25종, 장신구 70여종을 전시해 당시 백제의 의복문화 전반을 소개한다. ●몽촌·풍납토성 연계 역사체험 이종철 한성백제박물관 건립추진단장은 “박물관 개관은 수도 서울 역사의 지평을 1080년으로 넓힌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며 “아직 진행률 10%에 그친 풍납토성 발굴을 이어가는 등 한성백제에 대한 역사 조명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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