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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장모님의 보물

    사진에는 항상 추억의 행복이 묻어난다.빛바랜 옛날 사진일수록 그 행복의 진폭은 더 크다.우러나오는 해묵은 잔상(殘像)들이 보는 사람에게 잔잔한 미소를 선물한다. 얼마전 처가를 아내와 함께 찾았다.여든을 넘긴 장모님이 액자틀 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진 한장이 눈에 들어온다. 15∼16년전에 찍은 12명의 친손자·외손자들의 모습이었다.어느 땐가 외국에 있는 친손자·외손자 4명이 방학을 맞아 한국에 왔을 때 처가 식구들이 모였던 모양.맘껏 폼을 잡았지만 설익은 품새는 어쩔 수 없다. 조카들의 장난기 어린 옛 모습이 순식간에 스쳐간다.유난히 고집이 셌던 놈,얄밉게 앙탈부리던 놈….어느덧 그 중 5명이 장성해 가정을 꾸리고 있는데도 추억은 당시에 멈춰선다.장모님은 아련한 그런 추억들을 생(生)의 동력으로 삼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장모님의 보물은 패물함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모든 할머니들이 그러하듯이 손자 녀석들이 바로 보물이었다.세월이 사진의 색깔을 바래게 할지언정 장모님의 손자 사랑만은 어쩌지 못할 것 같다. 이건영 논설위원
  • “배우는 물… 그릇엔 신경 안써요”/ 16일 개봉 와일드카드 고참형사役 정 진 영

    좋은 배우는 ‘물’이어야 하는지 모른다.마음 먹은 대로 모양을 만들어낼 수 있는 유연한 속성.그런 배우에겐 담길 그릇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괘념할 일이 못 된다.16일 개봉하는 ‘와일드 카드’(제작 씨앤필름·유진E&C)에서 직업의식 투철하고 동료애 넘치는 형사로 나오는 정진영(39)에게도 그 이치는 들어맞는다. ●감독과 2년전 술자리서 출연 약속 “김 감독,제가 밥먹게 해준 사람이에요.물론 술도 먹게 해줬고(웃음).” ‘달마야 놀자’ 이후 1년만의 선택이 왜 ‘와일드 카드’였냐는 물음에 대답이 싱겁다.그런데 사실이다.‘약속’으로 배우대접을 받게 해준 김유진 감독이 2년전 술자리에서 “형사 이야긴데 같이 찍자.”고 한마디 건넸고,그냥 받아들였다.덮어놓고 감독을 신뢰해서였다.또 한가지.어디에든 담길 수 있는 스스로의 근성을 믿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계약이기도 했다.“영화에 대한 사전정보가 뭐 필요합니까.어차피 연기는 책(시나리오)을 받는 순간부터 (배우가) 만들어가는 건데.” 양동근과 투톱으로 끌어가는 형사이야기에서 그는허구한 날 잠복근무를 하는 강력반 고참형사 오영달 역이다.다혈질의 후배형사를 다독이는 품새에선 진짜 맏형같은 여유가 엿보인다.“영화는 속임수”라는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거짓말꾼이다.이력을 따져보면 더 분명해진다.무슨 역할이었건 그 바닥에서 족히 10년은 굴러먹었을 법한 노련한 캐릭터를 맡아왔다.보스에게 충성을 바치는 의리파 깡패(‘약속’),오합지졸의 죄수세계에 질서를 만드는 사형수 ‘빵장’(‘교도소 월드컵’),절을 지키려 조폭단에 맞서는 겁없는 스님(‘달마야 놀자’)이 그랬다. 정박자 연기의 이미지를 확 뒤집는 파격을 시도해본 적은 없냐고 물었다.“선택의 여지가 그리 많은 배우는 못 됩니다,제가.이번 영화가 흥행한다고 해도 저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쓰는 일은 없을 거예요.그건 한석규나 송강호,설경구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죠.” 겸사가 많다.인터뷰가 아주 더디게 가열되는 건 이런 신중 일변도의 답변 방식 때문이다. ●서울대 졸업… 조감독에서 배우로 서울대 국문학과(그는 이 간판을 끔찍이도 부담스러워 한다.)를 졸업하고 연극무대를 거쳐 발을 들인 영화판.97년 ‘초록물고기’의 조감독이었다가 촬영현장에서 배우로 데뷔했다.“한석규의 극중 형으로 연기 한번 해보라.”고 등떼민 건 이창동 감독이었다. 느린 호흡의 일이라면 뭐든 자신있다.“워낙 순발력이 떨어져 TV드라마는 맞지 않다.”고 스스로를 평가한다.방송물로는 SBS 시사프로 ‘그것이 알고 싶다’만 진행하는 것도 그래서다.영화는 호흡이 길어서 편안하다.하나뿐인 딸아이의 자는 얼굴만 들여다볼 정도로 격무에 시달리는 ‘현장’의 거친 형사를 연기하면서도 특별히 사전공부는 하지 않았다.자기확신 때문이었다.“시나리오를 열심히 읽다보면 감독의 의도를 꿰뚫어볼 수 있고 그 의도를 따라가다 보면 인물이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조만간 ‘황산벌' 김유신 장군으로 주인공을 맡았다고 해서 흥행부담 같은 건 없다.시위를 떠난 화살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딴 생각할 겨를도 없다.조만간 시대코믹극 ‘황산벌’(감독 이준익)에서 신라의 김유신 장군으로 지방을 누벼야 한다.사투리 때문에 백제와 전투를 벌이는 설정이라,경상도 사투리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해야 하는 웃기는 장군이다. “인생의 목표를 정한다는 건 부질없는 짓”이라고 그는 말한다.배우가 된 것도 생의 한 과정이지 목표는 아니었다.다만 꿈은 있다.이번엔 정색을 한다.“꿈은 누구나 꿔도 되는 것 아닌가?” 그의 먼 꿈은 감독이다.“그렇지만 이룰 수 있다고는 안 본다.” 정색한 얼굴에서 순식간에 긴장을 걷고 느물느물 웃는다.어느 쪽이 진짜인지 모를,배우의 얼굴이다. 황수정기자 sjh@ ■‘와일드 카드' 어떤 영화 ‘와일드 카드’는 적어도 두번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영화다.‘아직도 형사를 소재로 할 이야기가 남았나?’ 이건 부정적인 편견이다.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재료(형사물)만으로 걱정할 일이 아니었네.’ 닳고 닳은 소재로 신통하게 완성도를 높여가는 영화에서 중견감독의 범상찮은 관록이 느껴진다.김유진(54) 감독은 전작 ‘약속’에서 호흡을 맞춘 이만희(50) 작가에게 다시 시나리오를 맡겼다. 격무에 시달리면서 위험에 노출된 형사세계를 축으로 한 영화는,‘한물 간’ 조폭이야기도 양념으로 섞었다.베테랑 형사인 오영달(정진영)과 행동이 앞서 늘 위태로운 신참형사 방제수(양동근)가 주인공.퍽치기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해 두 형사가 의기투합하는 이야기다. 전체 분위기는 이렇다할 특색이 없다.‘투캅스’와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요령껏 섞은,적당히 익숙한 맛의 칵테일이라고 할까.영화의 묘미는,주인공은 물론이고 주변인물 각각의 이야기들이 다양하고 생생하게 살아 씨줄날줄을 엮는다는 것.인정많은 김 반장,무조건 몸싸움을 피하는 소극적인 장 형사,골칫덩어리 전과범이지만 사건해결에 도움을 주는 안마시술소 사장 도상춘 등이 저마다의 에피소드를 펼치되 어느 한 지점에서 절묘하게 고리를 건다. 카메라가 앵글을 맞춘 건 형사들의 애환이다.범인에게 총을 쏴 과잉수사 혐의로 감찰반의 추궁을 받는 오영달,젊은 시절 국경일에만 집에 들어가 ‘국경일’이라 불리는 김 반장 등을 통해 그려지는 형사에는 사람냄새가 진하게 풍긴다.과장된 액션이나 대사없이 진지한 것도,한국형 형사액션의 편견을 뛰어넘는다.컴퓨터그래픽도 일절 쓰지 않았다. 실제 형사들을 모델로 시나리오가 쓰여진 덕분에 생생한 현장의 용어들이 많다.그 예 하나,퍽치기와 아리랑치기의 차이.술취한 사람의 주머니를 터는 좀도둑이 아리랑치기라면,퍽치기는 살인도 서슴지 않는 강도다. 황수정기자
  • 새영화/휘파람 공주-美, 김정일 딸 납치하자 남북 힘 합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숨겨진 딸을 납치하려는 미국에 남과 북이 힘을합쳐 맞선다는 내용으로 최근 반미감정과 맞물려 화제가 된 영화 ‘휘파람공주’(25일 개봉·제작 마로엔터테인먼트).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소문처럼 코미디영화가 아니라 코미디·드라마·액션이 뒤섞인,장르를 알 수 없는 영화였다. 남북정상회담 20일 전 평양예술단의 일원으로 내려온 북한 최고지도자의 숨겨진 딸 지은(김현수)은 답답한 생활이 싫어 호텔방에서 도망쳐 우연히 3류록밴드 노펜스와 만난다.그럴싸한 연습실 하나 없는 이들에게 지은은 매니저를 자청해 집세도 내주고 연습실도 구해준다.하지만 밴드의 리더 준호(지성)는 돈을 흥청망청 쓰는 지은이 못마땅하다.여기까지 영화의 호흡은 코미디.남한 물정을 모르는 지은의 예측 불가한 행동에 초점을 맞추며 웃음을 유발하려 애쓰지만,좀처럼 큰 웃음이 터지지 않는 게 흠이다.하지만 실망이 깊어지기 전 영화는 드라마와 액션으로 새롭게 호흡을 가다듬는다. 우선 음악 때문에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원망하는 준호와,숨겨진 딸로 자란 지은이 서로를 이해하면서 서서히 사랑이 싹트는 멜로 드라마를 씨줄로 펼쳤다.그 위에 지은을 납치해 분단을 공고히 하려는 미국 CIA의 음모에 맞서, 지은을 지키려는 국가정보원 요원 석진(박상민)과 북한 요원 상철(성지루)의 쫓고 쫓기는 액션을 날줄로 엮어냈다.실감나는 난투극에 총격전·폭발 신까지 나오니 제법 액션영화의 품새를 갖춘 셈이다. 유치함에 가까운 도입부보다는 뒤로 갈수록 흥미진진해지지만,복잡한 이야기를 여러 장르로 섞다 보니 영화는 방향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한다.화끈하게 웃기지도,가슴을 졸일 만큼 긴박하지도,눈물을 훔칠 만큼 애절하지도않은 채 그 주변만을 맴도는 느낌이다. 그래도 사소한 일로 치고받고 싸우는 남북 요원의 모습으로 대치상황을 희화화하고,분단으로 이익을 챙기는 미국을 비판하는 시각 자체는 신선하다.발랄하고 깜찍한 김현수의 연기는 남성 팬들을 설레게 하고,몸을 던져 지은을 지키는 성지루의 묵직한 연기도 가슴을 울린다.CF감독 출신 이정황 감독의데뷔작. 김소연기자 purple@
  • 새영화/엑스 VS 세버’-화끈하게 때려부수는 액션물

    화끈하게 때려부수는 액션물을 보고 싶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엑스 vs 세버’(Ecks vs Sever·13일 개봉)는 폭파신 하나만큼은 시원한 액션대작.하지만 품새는 영락없이 B급이다. 미국 국방부 소속 첩보기관인 DIA 국장의 10살짜리 아들이 괴한에게 납치된다.범인은 전직 요원인 미모의 여인 세버(루시 사우).세버는 DIA에서 비밀리에 양성된 인간병기다.FBI는 아내의 죽음 뒤 은퇴한 엑스(안토니오 반데라스)에게 아내가 살아 있다는 미끼를 던져 수사를 맡긴다. 베일에 가린 세버의 정체와 엑스 아내의 알 수 없는 실종 등 음모를 모락모락 지피는 영화의 초반부는 흥미진진하다.푸른 비를 맞으며 상념에 잠긴 엑스와,붉은 화염에 휩싸인 차폭파 신을 번갈아 편집한,스타일리시한 장면도압권이다. 하지만 영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옆길로 샌다.이야기 매무새는 흐트러지고화려한 폭파 신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조였다 풀었다 하는 긴장감에는 신경을 끄고,무차별 폭격만으로 화면을 어지럽힌다.별 이유 없이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세버의 모습은 멋있다기보다는 어이가 없다. 비주얼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사연은 영화 전체에 녹아들지 못한다.엑스의 아내가 국장의 아내로 둔갑한 기막힌 사연이 그냥 대사로 줄줄 설명되는 걸 듣다 보면 짜증이 날 정도. 그래도 오락실에서 총을 쏘듯 스트레스를 푼다고 생각하면 참고 볼 만하다.총탄 세례,폭발,칼싸움,무술 등 모든 것을 동원해 화려한 액션 신을 연출하니 말이다.메가폰을 잡은 카오스는 태국 출신의 28세 젊은 감독. 김소연기자 purple@
  • 드라마 ‘별을 쏘다’로 안방극장 돌아온 전도연 “평범한 역할 너무 하고 싶었어요”

    “전도연의,전도연에 의한,전도연을 위한 드라마다.” SBS 새 드라마 ‘별을 쏘다’의 지휘봉을 잡은 이장수 PD는 아예 공언을 한다.실제로 최상급 출연료인 회당 700만원을 받고 5년만에 돌아오는 전도연(29)을 위해 ‘별을 쏘다’는 모든 구성과 배경,스토리 등을 바닥부터 갈아엎었다. 그러나 정작 ‘차린 밥상’을 받는 그녀의 심정은 처녀출연 때처럼 떨리기만 한다.무엇이 무서운 것일까. “전도연이요.” 그녀는 머뭇거리면서 말한다.“한국 최고의 여배우라는 타이틀이 부담됩니다.주위의 기대도요.하고 싶은 실험은 많은데,마음껏 시도못하는 부자유가 싫어요.‘전도연’이라는 높은 위치에서 내려오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런 ‘약한 모습’에 속아서는 안된다.전도연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바리로 소문난 배우이기 때문이다.역시나 인터뷰 중에도 ‘1주일 정도 밤새우는 것은 예사’라는 둥,‘원하는 시청률은 40%대’라는 둥 일에 욕심 많은 본색을 드러내 버린다. 그녀의 목표는 아직도 지난 97년 영화 ‘접속’ 때 밝힌 그대로다.‘모든 색깔의 연기를 소화할 수 있는 색깔 없는 연기자’그를 위해 전도연은 변신을 거듭하며 제 색깔을 지워버리려고 노력했다.즉 색깔 강한 역만을 골라 맡으며 계속 원래 색깔에 덧칠을 해나간 것. 그러나 색은 덧칠할수록 결국 강렬한 검은 색에 가까워지는 법이다.아이로니컬하게도 지금 전도연의 이미지는 ‘색깔 강한 성격파+연기파’ 배우다(본인은 육체파라고 주장한다). 그래서일까.전도연은 이제 슬슬 연한 색들도 시도해 보고 싶다.이번에 맡는 역은 평범한 영화배우 매니저인 소라.실수도 많고,내숭도 잘 떠는 데다가 푼수끼까지 있다.상대역인 조인성은 “소라는 ‘천생 여자구나 하는’느낌을 주는 사랑스러운 성격의 소유자”라고 평한다. 그동안 전도연이 맡아온 바람난 주부(해피엔드),악만 남은 여깡패(피도 눈물도 없이),선생님을 사랑하는 늦깎이 학생(내 마음의 풍금)에 비하면 오히려 튀는 역이다.“평범해 보이는 역,사랑에 빠진 멜로물이 너무 하고 싶었어요.” 물론 ‘일 안하면 스트레스를 받는’ 전도연은 천생 여자인 소라가 너무 답답하다.“자아가 없던 여자예요.남자와의 결혼이 꿈인 여자가 일을 통해 자기정체성을 찾아가죠.역시 일이라니까.” 그렇게 일이 좋으면 왜 1년에 한 작품 정도만 하면서 긴 휴식기를 가지는 것일까. 우문에 현답이 돌아온다.“휴식기는 없습니다.일과 일 사이에는 다음 일을 준비하는 시간이 있을 뿐이죠.” 과연.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마지막으로 전도연의 승부 근성을 엿볼 수 있는 문답 한자락.같은 시간대의 쟁쟁한 라이벌 드라마들에 대해 ‘승산’을 묻자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온다.“‘장희빈’이 선정적이라서 눈길을 끈다고요? ‘별을 쏘다’에는 제가 변기에 앉아 있는 신이 나와요.안 밀린다니까요.”지기 싫어하는 품새가 그야말로 전도연답다.물론 맵씨있는 마무리는 기본이다.“그런데 사실 몸매에서 비교가 안 되잖아요? 그냥 다른 걸로 승부하면 안 될까요?” 채수범기자 lokavid@
  • [2002 길섶에서] 청둥오리

    경기도 분당의 후미진 곳에 자리잡은 율동호수공원.야트막한 산 모퉁이를 타고 내비치는 햇살에서 온기마저 느껴지지 않는 저녁 무렵,청둥오리 3마리가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호수에 몸을 담근 채 졸고 있다.멀리서도 초록빛이 감도는 흑갈색 깃털과 하얀 목테가 또렷하다. 겨울철새 도래지인 충남 서산의 천수만에는 겨울 초엽에 들어서야 수만 마리가 무리를 지어 날아든다는데,이 녀석들은 벌써 시베리아 보금자리에서 쫓겨난 것일까.어쩌면 유난히 호수의 얼음이 두껍게 얼었던 지난 겨울 얼음 속에 몸을 파묻고 모진 한파를 견뎠던 놈들일지도 모르겠다. 행여나 얼어죽지 않았을까 조바심하는 마음으로 안타깝게 바라보던 인간들에게 자신들의 건재함으로 알리기 위해 한발 먼저 달려온 듯하다.사람들의 눈이 자주 머무는,야산의 단풍을 유난히 투명하게 담아내는 곳에 자리잡은 품새에서 녀석들의 뿌듯한 자부심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올 겨울 칼날 같은 바람에 온몸을 맡긴 채 눈덮인 호수를 지키는 녀석들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우득정 논설위원
  • 11일 개봉 ‘비밀’-아내의 영혼이 딸의 몸속에 있다면…

    아내의 영혼이 딸의 몸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상한 상상은 금물.선정적인 문구를 전면에 내세운 일본영화 ‘비밀’(11일 개봉)은 전혀 야하지 않은 영화다.그렇다고 이루어질 수 없는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것도 아니다. ‘비밀’의 외양은 전형적인 일본 코믹영화의 품새를 지녔다.아빠와 딸이 겪는 난처한 상황을 디테일하게 잡아내면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것.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외모와 생활환경이 변했을 때 인간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관찰이다. 평범한 가장 헤이스케(고바야시 가오루)의 아내 나오코(기시모토 가요코)와 딸 모나미(히로스케 료코)가 버스 추락사고를 당한다.아내가 숨을 거두는 순간 그녀의 영혼이 딸의 몸으로 옮겨간다.남편은 몇마디 대화로 모나미가 아내임을 안다.이제 이들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과연 나오코는 헤이스케의 아내로 남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유심론과 유물론의 고전적인 논쟁과 맞닿아 있다.인간의 정신이 먼저일까,몸이나 환경이 우선일까.정신은 나오코지만 몸과 환경은모나미인 인간이 어떤 길을 선택할지,이 어려운 문제를 영화는 다양한 상황에 놓고 풀어간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스파이스 존스 감독의 ‘존 말코비치 되기’와 닮았다.‘존…’의 주인공들은 존 말코비치의 뇌 속으로 들어가 그의 육체로 세상을 보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마찬가지로 ‘비밀’의 나오코도 모나미의 몸으로 살아가면서 결국 다른 인간이 된다. 다시 여고생으로 돌아가 열심히 공부해 의대생이 되고,이어 요트부에 들어가 젊음을 만끽하는 나오코.남편은 그런 아내의 모습에 질투를 느끼고,걸려오는 남자친구 전화에 안절부절 못한다.아내의 남자친구에게 “우린 외계인이다.”라며 훼방을 놓기도 한다.영화의 웃음은 이 남편의 각종 해프닝에서 비롯된다.하지만 헤이스케는 결국 나오코의 새로운 삶을 존중한다. 영화는 관념론자들이 껍질에 불과하다고 믿는 인간의 육체와 환경이,얼마나 정신과 활동에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을 충실히 따르는 것. 원작은 1998년 일본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이다.부인과 딸 역을 능청맞게 소화한 ‘철도원’의 배우 히로스케 료코의 연기도 주요 감상포인트. 인간의 정신과 육체라는 어려운 문제에 굳이 신경쓰지 않더라도,적당한 웃음과 감동이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영화다. 김소연기자 purple@
  • 스필버그와 함께 ‘턱시도’ 만든 성 룡/“다음 세대를 위해 잔인한 영화 그만 만들어야죠”

    ””어젯밤 영화 재미있었어? (고개를 끄덕이자)정말?” 먼 이국땅 할리우드에서 대뜸 한국어로 반말을 하는 성룡(48)을 만나는 건,잘 키운 자식이 성공하는 걸 보는 것만큼 반가운 일이다.스타들의 손과 발을 본뜬 부조로 유명한 맨스 차이니스 극장에서 영화 ‘턱시도’의 시사회를 가진 다음날인 20일,그는 한국 기자라는 말에 반색을 하며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1978년 ‘취권’을 시작으로 ‘폴리스 스토리’‘쾌찬차’ 등을 거치며 80년대 아시아 최고 스타로 군림한 성룡.어쩌면 우리에게는 저무는 스타일지 모르지만,이곳 할리우드에서는 그의 표현대로 떠오르는 스타(new star)였다. 할리우드에서 찍은 영화 가운데 최초로 성룡만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 ‘턱시도’.하지만 ‘성룡표 영화’라고 하기에는 품새가 좀 다르다.컴퓨터그래픽이 많이 들어갔고,액션보다는 연기에 초점을 맞췄다. 스타일이 달라졌다고 말하자 “‘폴리스 스토리’1∼3,‘러시아워’1·2….여러분들은 즐거웠겠지만 맨날 비슷한 영화로 지쳤다.”면서 “이제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같은 드라마나,‘식스 센스’ 같은 호러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대답했다.그리고는 한국말로 “예전엔 돈 없어,이젠 돈 많아.”라고 덧붙여 인터뷰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갑자기 ‘피우∼’하며 쿵푸 손동작을 하는 성룡.“어느 누구도 로버트 드니로나 톰 행크스를 보며 이런 액션연기를 상상하지는 않는다.나도 진정한 연기자로 거듭나고 싶다.” 이번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제안으로 시작했다.“어느날 스필버그가 나를 불렀다.떨리는 마음으로 갔다.그런데 그가 사인을 부탁해왔다.아이들이 내 팬이라면서.난 스필버그에게 어떻게 그런 공룡을 만드느냐고 물었다.버튼만 누르면 된다고 했다.오히려 내게 어떻게 빌딩에서 뛰어내리냐고 물어서 ‘롤링·액션·점프면 끝난다.’고 대답했다.” 그날 스필버그는 가족용 액션영화를 함께 만들자고 제안했고,성룡은 스필버그를 믿고 손을 잡았다. 20여년 전 처음으로 할리우드에 갔을 때와는 대접이 달라진 셈이다.“그 때 할리우드 스타가 400만달러를 벌었다면 난 홍콩달러로 400만달러를 벌었다.”아시아의 빅스타로 미국을 정복하려던 꿈은 80년 ‘캐논 볼’의 실패로 무너졌지만,오랜 노력 끝에 96년 ‘홍번구’로 화려하게 재입성했다. “예전에는 몇시간씩 영어공부를 해서 할리우드에 나를 맞추려고 했다.지금은 ‘재키 찬 잉글리시’로도 통한다.못 알아들으면 ‘미안하지만 그건 당신 탓’이라고 말한다.” 이제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당당하게 할리우드에 섰다. '턱시도’에서는 성룡의 액션뿐만 아니라 춤솜씨도 볼 수 있다.성룡이 상대역인 제니퍼 러브 휴잇에게 액션을 가르쳤고,휴잇은 그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쳤다.휴잇에게 어느 쪽이 더 어려웠느냐고 묻자 “춤을 가르치는 것”이라는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성룡은 “스텝을 기억하면 가사를 잊고 가사가 생각나면 스텝이 엉키고 정말 악몽같았다.”면서 “막상 영화에 나온 걸 보니까 기분은 좋았다.”며 웃었다. 아시아인으로서 할리우드에서 일한다는 것의 의미를 물었다.“미국에서는 날 미국인으로 대해준다.호주에 갔더니 날 호주인이라고 하더라.(그의 양친은 61년 호주로 이민갔다.)난 아시아인이라기보다 모든 사람의 재키 찬이라고 생각한다.세계는 하나니까.” 갑자기 거창한 주제로 빠져든 성룡은 한술 더 떠서 “전세계의 평화·환경·인간을 생각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영화를 만들어 놓고 제 아이들에게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다음 세대를 위해서 더이상 잔인한 영화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는 대스타답게 다양한 제스처와 말투로 사람을 사로잡는 마력이 있었다.홍콩 경극학교의 어눌한 학생에서 스턴트맨과 액션배우를 거쳐 아시아의 스타로,그리고 이제는 할리우드의 스타까지.가파른 계단을 하나하나 딛고 올라서다 보니 나이 50을 바라보게 됐지만,여전히 “변하고 싶다.”고 말하는 그에게 나이는 의미없어 보였다. 로스앤젤레스 김소연특파원 purple@ ■‘턱시도'는 어떤 영화/ 우연히 입은 턱시도 알고보니 비밀병기? 영화 ‘턱시도’(11월1일 개봉)의 진정한 주인공은 성룡이 아니라 턱시도다.성룡의 팬이라면 마법의 턱시도에 맞춰 꼭두각시가 된 듯한 성룡의 액션연기에 실망할 수도 있을 듯. 하지만 굳이 ‘성룡표 액션’을 따지지 않는다면 재미 있다.오히려 액션을 직접 하면서도,제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닌 것처럼 능청맞게 연기하는 성룡의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다. 뉴욕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택시 운전사 지미 통.환상적인 운전솜씨로 비밀첩보국 요원 클라크 데블린의 운전기사가 된다.우연히 사고를 당한 데블린 대신 그의 턱시도를 입게 된 지미.알고 보니 턱시도는 전자동 방어시스템을 갖춘 살아 있는 비밀병기였다.이제 물을 오염시켜 물장사를 하려는 악당에 맞서 지미의 대활약이 시작되는데…. 영화는 한편의 광고처럼 군더더기 없이 속도감으로 밀어붙인다.경쾌한 음악에 맞춰 신나게 운전하고 싸우는 성룡을 지켜보다 보면 어느새 90여분이 후닥닥 지나간다.잔인한 장면이 거의 없어 가볍게 시간을 때우는 가족용 오락영화로 손색이 없다. 할리우드가 이 아시아 스타를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꼼꼼히 살펴본다면 더욱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다. 소심하고 어리버리하지만 제 일에 성실한 한 이방인이,턱시도를 통해 당당히 주류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은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상징으로 읽힌다.광고계 출신인 케빈 도너번이 감독을 맡았다. 김소연기자
  • “용어·품새 달라도 한민족임을 느꼈어요”

    “처음 가본 곳이지만 우리랑 똑같이 생긴 사람들 앞이라 떨리지는 않았어요.또 용어와 품새는 달랐지만 같은 민족임을 금방 느꼈어요.” 지난 14일부터 3박4일간 평양에서 한국의 태권도를 소개하고 돌아온 대한태권도협회 시범단 50여명 가운데는 고누리·우리(12·서울 미동초등학교 6)쌍둥이 자매가 포함돼 북한 동포들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쌍둥이 자매는 태권도를 시작한 지 올해로 6년째인 유단자(3품).태권도 선수인 오빠(고성곤·19)의 권유로 처음 도복을 입었다.어려서부터 방과 후나 주말마다 도장에서 땀 흘리는 오빠를 보며 자연스레 태권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자매의 부모도 “운동 하나쯤은 해 둬야 한다.”며 훈련하고 있는 학교 도장에 음료수와 햄버거를 싸 들고 종종 들를 정도로 열성적이다. 자매는 이번 시범단에 참여하기 위해 학교 태권도팀에서 세차례나 테스트를 받았다.북한에 가게 됐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떠나기 이틀 전인 지난 12일.처음에는 남한과 전쟁을 치른 나라에 가는 게 약간 겁나기도 했단다.하지만 막상 가 보니 북한 사람들이 친절하고 다정다감하게 대해 줘 돌아올 때는 “좀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방북 마지막 날인 지난 17일 오전에 들른 주체사상탑의 규모가 인상적이었다는 자매는 “만경대 학생소년소녀궁전을 방문했을 때 들은 어린 아이의 민요를 서울에서 다시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어른스러운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자매는 또래의 북한 친구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고 말했다.동생 우리는 “예술단 공연이 끝나고 예술단원들과 인사할 기회가 있었어요.근데 제대로 말 한 마디 나누지 못했어요.이메일 주소라도 알았다면 편지를 보낼 수 있었을 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쌍둥이지만 언니 누리가 우리보다 훨씬 크다.한 뼘 이상 차이가 난다.동생인 우리에게 이유를 묻자 “글쎄요,어릴 때부터 이랬는데요.”하고 배시시 웃는다.성격도 대조적이다.누리는 내성적인데 비해 우리는 대단히 활달하다.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누리는 장래 희망이 초등학교 선생님,우리는 태권도 국가대표 선수다.하지만모두 “북한 선수들과 함께 태권도를 세계에 알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이두걸기자 douzirl@
  • 남북 태권도 어떻게 다른가

    남북 태권도시범단 교류에 대한 일정이 확정됨에 따라 남·북한 태권도의 차이점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남·북 태권도는 소속 국제기구와 장비,체급,경기내용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발전과 보급에서는 북한이 먼저 출발했지만 현재 세계 태권도의 주도권은 남한이 쥐고 있다. 북한은 친북 인사로 남한에서 군 장성과 말레이시아 대사 등을 지낸 뒤 지난 72년 정치적 이유로 캐나다에 망명한 고 최홍희씨를 통해 본격적으로 태권도를 보급했다.최씨는 지난 6월 평양에서 사망하기 전까지 지난 66년에 자신이 설립한 국제태권도연맹(ITF) 총재로 있으면서 북한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및 사회주의 국가에 태권도를 전파했다. 남한 태권도도 현재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인 김운용씨가 지난 73년세계태권도연맹(WTF)을 세우고 전세계로 세력을 넓혀 갔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공인까지 받아 ITF에 비해 우위를 지키고 있다. 경기 내용면에서는 남한 태권도가 전시성을 가미한 측면이 강한 반면 북한태권도는 철저하게 실전 위주로 상당히 격렬하다.남한태권도는 머리,가슴,낭심 보호대를 착용하고 맨발로 경기하지만 북한 태권도는 보호대 없이 경기용 장갑을 끼고 신발을 신은 채 대련을 벌인다.또 남한에서는 손으로 얼굴을 가격할 수 없고 발기술 위주로 공격을 펼치지만 북한에서는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할 수 있다. 사용 용어에도 차이가 있다.북한 용어로 품새는 틀,겨루기는 맞서기,호신술은 특기,격파는 위력 등으로 불린다.체급 구분에서도 남한은 남녀 각 8개 체급,북한은 남녀 각 5개 체급을 두고 있다. 최병규기자
  • 13일 개봉 연애소설 여주인공 - 이은주·손예진

    13일 개봉 연애소설 여주인공 - 이은주·손예진

    여배우에게 멜로영화는 언제든 걸치면 기분 좋아지는 날개옷과도 같은 거다.20대 초반의 ‘이쁜’ 여배우에게 풋풋하고 싱그러운 청춘멜로라면 더더구나…. 영화 ‘연애소설’(제작 팝콘필름·13일 개봉)의 첫 기자시사를 앞둔 날 여주인공 이은주(22)와 손예진(20)은 똑같이 밤잠을 설쳤다. 젊음이라는 밑천을 빼고 보탤 것 없이 ‘생’으로 보여주는 연기.이은주의 말마따나 “기대감과 알 수 없는 불안이 뒤범벅돼 묘한 흥분을 일으키는 것”이 멜로연기라서 일까.시사회장을 나온 지 몇시간이 지났는데도 둘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다. “우리도 오늘 처음 영화를 봤어요.떨리는 마음으로 봤는데 정말 행복해지네요.내가 찍은 사랑이야기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눈물을 다 찍어냈다니까요.”이은주가 넉넉하게 운을 뗀다. 질세라 손예진이 말을 거든다.“주인공을 처음 맡아봤으니 제겐 데뷔작이나 마찬가지예요.덜익은 연기로 영화를 망치면 어쩌나 걱정 많이 했는데…한시름 놨네요.” 방송카메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한적한 카페에서 둘은 어깻죽지가 빠지도록 한바탕 긴 기지개부터 켠다.“지금 카메라 없죠? 긴장 좀 풀고 앉을게요.”(이은주) 내숭이 발칙(?)했다 싶게 금방 자세들이 흐트러지더니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는 빠르게 탄력을 붙여간다. ‘연애소설’은 이뤄지지 못해 더 애틋해지는 젊은날의 사랑이야기다.둘의 극중 역할은 세상에 다시 없는 단짝.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치병으로 서로를 분신처럼 의지하며 살다,한 남자(차태현 분)와 우정과 사랑을 나눈다. 시나리오의 어디가 맘에 들었냐고 물어봤다.“목젖이 보이도록 화사하게 웃어보고 싶었어요.나이보다 성숙하다는 말을 주위에서 듣는 건 지금까지의 고정된 역할이미지 때문이었거든요.이젠 소원 풀었어요.영화 찍으면서 이렇게 크게 웃어본 적도,맘껏 애드립을 해본 적도 없었으니까.”(이은주) “언니만큼 폼나게 할 말은 없지만….솔직히,원없이 예쁘게 보일 수 있는 청춘멜로를 세상 어느 여배우가 마다하겠어요?”(손예진) 이은주에게는 네번째 영화다.‘송어’ ‘오!수정’ ‘번지점프를 하다’를 거치며 쌓아온 정적인 이미지를 털어보는 게 목표다.극중 의상을 히피스타일로 고집한 것도 그래서였다.손예진은 ‘취화선’에서 쪽진 머리로 장승업의 여인으로 나왔던 게 영화이력의 전부.그런 그에겐 지금 모든 게 즐거운 ‘실험’이고 ‘탐색’이다. 여배우 둘을 한자리에서 인터뷰하는 건 기자에게도 갑절이나 재미나는 일이다.똑같은 질문에도 되돌아오는 답변의 색깔은 번번이 다르다.손뼉치며 맞장구를 치다가도 슬쩍슬쩍 서로를 곁눈질로 견제하기도 하는 품새들이 천상 배우다. 영화가에서 나이가 믿기지 않게 여유있기로 소문난 이은주가 제 자랑을 꺼낸다.그런데 밉지 않다.“차태현씨와의 키스신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음악을 제가 연주했어요.음대진학이 원래 꿈이라 피아노 실력은 꽤 괜찮거든요.” 손예진에게도 언니다운 덕담을 빼놓을 리 없다.“예진이 노래실력은 또 어떻고요.들국화의 ‘내가 찾는 아이’를 직접 불렀는데 다들 놀랐다니까요.” 끝으로 팬들을 향한 한마디를 부탁했다.“첫눈에 반한 사랑이 극중 모티브가 된 것처럼 첫눈에 반하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네요.” 완벽한 의견일치다. 다음 순간,그러나 또 갈 길이 다르다. “지금 양수리로 가요.공포영화(하얀방) 촬영이 좀 남았거든요.영화 다 찍고나면 도망갈 거예요.엄마랑 같이 강원도 산골에라도.”(이은주) “연말 방영될 SBS 사극 ‘대망’을 찍고 있어요.남장여인인데요,번쩍번쩍 다리 들어올리는 무술까지 한다니까요.”(손예진) 황수정기자 sjh@ ■’연애소설’은 어떤 영화 누구에게나 스무살 시절은 있다.이한 감독의 데뷔작 ‘연애소설’은 스무살 언저리에 있음직한 아슴푸레한 기억을 스크린으로 끄집어낸 청춘멜로물이다.제목이 일러주듯 그 기억이란,풋풋해서 한점 사심없는 젊은날의 사랑이다. 선배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대학생 지환(차태현)은 손님으로 찾아온 수인(손예진)에게 첫눈에 반한다.수인의 단짝 친구 경희(이은주)가 지켜보는 앞에서 용기백배해 수인에게 마음을 고백하지만 화답이 없다.이 즈음에서 밀고 당기는 삼각관계 드라마를 예상하겠지만,영화는 그런 익숙한 갈등고리를 엮지 않는다. 지환은 불쑥 꺼낸 사랑고백이 먹히지 않자 친구가 되자고 제안한다.선머슴같은 말투에 웃음이 많은 경희,다소곳한 미소가 편안한 수인,서글서글한 성격에 유머감각 만점의 지환.이제 셋은 그냥 친구다. ‘엽기적인 그녀’의 차태현에 편견을 갖는다면 지금부터는 코믹멜로여야 한다.그러나 작은 에피소드들을 지루하게 풀어놓던 영화는 한참 뒤에야 경희와 지환의 우정이 사랑으로 커가는 과정에 무게중심을 슬며시 옮겨 놓는다. 별 생각없이 떠났던 여행길에서 잠든 경희에게 입맞춤하고 싶어지는 지환,지환이 했던 말을 저도 몰래 자꾸만 되뇌는 경희,둘의 감정변화를 조금씩 읽어내는 수인.맥락없이 순진하게 사랑과 우정 사이를 오가던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분위기를 일신한다.흔하디 흔한 멜로가 될 뻔했으나,아슬아슬하게 오해로 어긋나는 사랑에 어느새 코끝이 찡해진다. 영화는 지환의 5년 전 기억을 통해 재구성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신세대대표 배우들을 내세웠을 뿐,작법은 다분히 고전적이다.불치병과 죽음이란 설정에 기대어 연민을 자극하는 것도 썩 개운치는 않다.관객의 나이에 따라 감상의 편차가 있겠다.20대의 여린 감수성에 정조준한 탓에 중년관객에게는 풋내가 날 듯도 싶다. 황수정기자
  • 美입양아가족 ‘태권도 문화 축제’ 왔다

    한국 어린이를 입양한 미국 부모와 입양아 두명이 충북 청주 등에서 열리는 ‘세계 태권도 문화축제 2002’에 참가해 눈길을 끌고 있다. 스테판 카디(48·건축가·캘리포니아주 네파)·로시오 카디(46·여) 부부와 한국인 입양아인 아들 카일 리 홍 카디(9),딸 다니엘 김 한 카디(7)는 태권도 문화축제 미국 서부지역 선수단의 일원으로 지난달 27일 방한했다. 이들은 1일 개막된 세계 태권도 문화축제에 참가했고,2일 진천군 공설운동장에서 열리는 ‘제4회 무예 태권도 국제대회’소년부 품새부문에 출전할 예정이다. 또 3∼5일 청주에서 열리는 ‘제5회 코리아오픈 국제태권도대회’를 참관한 뒤 6일에는 미국 선수단과 함께 국기원에서 태권도 연수를 받을 계획이다. 지난 96년과 98년 다니엘과 카일을 입양한 이 부부는 아이들이 모국을 잊지않도록 한국 부모들의 성(性)을 넣어 이름을 지었으며,한국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한글학교에 가족이 함께 다니고 있다. 특히 자녀들에게 모국의 문화를 이해시키기 위해 지난해 초부터 태권도장‘해룡관’에 등록,태권도를 배우도록 하고 있으며 이번에 직접 한국을 방문했다. 스테판 카디는 “아이들이 태어난 뿌리를 잊지 않고 생활할 수 있도록 태권도와 모국어를 가르치고 있다.”며 “한국을 처음 방문한 아이들이 너무 즐거워 해 기쁘다.”고 말했다. 청주 이천열기자 sky@
  • ‘세계최초’를 일군 선구적여성들

    어린이들에게 흔히 읽히는 여성 전기는 국내외를 통털어 그 대상이 한정돼 있고 내용도 빈약하다는 지적을 적지않게 받고 있다.대부분 남성 위주의 시각에서 접근한 탓에 여성의열악한 입장과 역경 극복 등의 대목들이 소홀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런 차원에서 아이세움이 총 5권으로 기획한 ‘여성인물이야기’ 시리즈 가운데 1차분으로 내놓은,우리나라 최초의여성 변호사 이태영 편(박정희 글,오영아 그림)과 최초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 수잔B. 앤터니 편(박정희 글,김주리 그림) 등 2권은 지금까지의 것들과는 차별화돼 눈길을 끈다. 동화같은 톤에 삽화를 곁들여 어린이들이 부담없이 읽을 수 있도록 썼지만 출생부터 성장,그리고 뜻을 이루기까지 과정에서 일관되게 여성들의 입장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태영(1914∼1998)편에선 어릴적 “넌 변호사가 되어야겠구나” 라는 오빠의 말 한마디를 꿈으로 간직한채 난관을 뚫고 뜻을 이루어내는 품새가 생생하게 담겼다.32세의 나이로서울법대에 입학,삼남매의 어머니로 자식들과 늙은 시어머니를 건사하면서 결국 사법고시에 합격한 뒤 37년간 굴하지 않고 가족법 개정을 위해 투쟁한 역정이 풀어진다.수잔 B.앤터니(1820∼1906년)편 역시 학교에서 여학생들에게 나눗셈을가르치지 않는 남녀차별에 눈떠 결국 미국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안겨주기까지의 헌신적인 노력을 강조한다. 여성인물이야기 시리즈는 최초의 여성 유엔 인권위원장 엘리너 루스벨트,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최초의 대서양 횡단 여성 비행사 아멜리아 에어하트 편이 순차적으로 이어진다.각권 7,500원. 김성호기자 kimus@
  • 2001 길섶에서/ 호박넝쿨

    도심의 주택가,매연에 찌든 향나무에 늙은 호박 하나가 힘겹게 매달려 있다.시골 살다가 아들 성화에 못이겨 서울로 온 노친네가 심은 것이리라.호박을 매달고 있는 가냘픈 넝쿨이 낭떠러지에서 자식의 손목을 붙들고 있는 어머니 손목처럼 애처롭다. 출근 길,아슬아슬하게 매달린 호박을 발견한 것은 추석 무렵이었다.옹색한 곳에 자리잡았다가 바람에 나무가 심하게 흔들려서인지,아니면 자신의 무게 때문에 어디서 미끄러졌는지 매달려있는 품새가 금방이라도 툭 떨어질 것처럼 불안해 보였다.그러나 한달 남짓 지난 뒤,이파리들이 누렇게 말라버리고 호박을 붙들고 있는 넝쿨도 까실까실 탄력이라곤 없어 보이지만 호박은떨어질 것 같지 않다.눈에 익숙해진 탓인지 오히려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굳어 그대로 화석이 돼버린 것같은 호박넝쿨을 보면서 마지막 남은 치약을 짤 때 대학 다니는 손주보다 훨씬 힘이 세신 어머니의 손 힘을 떠올려 본다.그렇다.저 질긴 힘 속에 세상이 유지되는 비밀이 있다. 김재성 논설위원
  • ‘봄날은 간다’ 허진호 감독·주연 이영애

    나이 서른에 한국 최고의 여배우로 우뚝 선 이영애.‘8월의 크리스마스’로 사람들의 눈물샘을 건드려놓고는 소리소문없이 3년을 보낸 허진호 감독(38). 나란히 앉은 두사람은 꼭 오누이같다.한참을 뜸들여야 내놓는 어눌한 대답하며,답이 궁하면 소리없이 웃고마는 숫기없는 품새 하며….새 영화 ‘봄날은 간다’(28일 개봉·제작싸이더스)에서 둘이 만나게 된 건 우연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기자가 슬쩍 농을 던져본다.“말수 적기로 소문난 유지태씨까지 가세했으니 촬영장 분위기 참 썰렁했겠어요.” 이영애는 농담도 조용조용 진담처럼 받는다.“아뇨,재미있었어요. 촬영현장에서 작품 얘기 하다보니 시간가는 줄 몰랐는걸요. 셋이서 의견을 나누면 뭐든 못 만들어낼 게 없다 싶었구요.” 그러고 보니 영화는 감독과 남녀주인공의 차분한 이미지를쏙 빼닮았다.아주 느린 호흡의 사랑을 담아낸 멜로.지방 라디오방송국 PD인 은수(이영애)와 녹음기사 상우(유지태)의만남에는 처음부터 왁자한 진동같은 건 없다.숙명이니 운명이니 하는 묵직한 의미가 끼어들지도않는다.소리 채집을 하느라 함께 다니던 남자와 여자는 장난처럼 사랑에 빠진다.그리고 불꽃처럼 열정을 키웠다가,다가가고 머뭇거리는 서로다른 사랑법에 혼돈스러워 한다.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던 사랑이 어느 순간 변하고 그래서 힘들어지고,그런 일상의 감정들을 표현해보고 싶었죠.처음부터 배우들의 본래 색깔을 자연스럽게 끄집어내 보일 작정이었어요.두 주인공의 분위기가 극중 캐릭터와 실제로 많이 닮았지요.그 점,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감독) “한가지 설정만 갖고 덤벼들었어요.은수는 한번의 이혼경력과 이전에 한 남자를 열렬히 사랑했던 상처를 가진 여자라는 것.사랑하다가 어느날 싸늘히 돌아서는,극단적이고 복잡한 캐릭터를 살려내는 게 힘들면서도 흥미로웠어요.장면이바뀔때마다 대사톤을 바꿨을 정도였거든요.”(이영애) “맞아요.영애씨나 지태씨에게 특별히 어떻게 연기해달라고 주문한 적이 없었으니까.”(감독) 주거니 받거니 두사람의 얘기에 가속이 붙는다.그럴만도 하다.“자고 갈래요?”(은수)-“같이 있으니까 참 좋다”(상우)로 시작된 사랑이 “헤어지자”(은수)-“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상우)로 안타까운 매듭을 짓는 영화다.단선적인 대사들로 만남과 이별의 감정선을 일궈내는,까다로운 작업이었다. 5개월을 매달린 작품에 두사람 모두의 기대가 각별하다.‘공동경비구역 JSA’,‘선물’로 잇따라 흥행작을 터뜨린 이영애는 부담도 적지 않다.“촬영분의 90% 정도를 강릉에서 찍으며 한뎃잠을 잤어요.이제 좀 쉬어야겠다,그런 생각이 드네요.” 부담스럽기는 허감독도 마찬가지.‘8월의 크리스마스’와비슷한 느낌이 난다는 지적들에는 특히 그렇다.“다르게 만들고 싶었는데,같은 사람이 찍다보니 그랬나 봐요.(웃음)” 하지만 감독이나 배우나 똑같이 자신있어 하는 대목이 있다.“‘눈으로 듣는’ 영화”라고 매력포인트를 찍어낸다.소리 채집 여행에 나선 영화속 남녀의 풍경에는 언제나 꿈결같은 소리들이 함께 한다.바람부는 대숲,눈내리는 뜨락,풍경소리 그윽한 절집,봄바람에 서걱거리는 보리밭….“소리의 느낌에 반해 찍은 영화였어요.” 이영애의 커다란 눈망울이 영화속에서처럼 가늘게 감겼다 떠진다. 황수정기자 sjh@
  • 공동육아조합 ‘우리 어린이집’

    “나도 할래,나도 하고 싶어” “차례를 지켜야지,조금만 기다려” 5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성산동 ‘우리어린이집’ 1층 주방은 아이들의 소리로 떠들썩하다.다른 방에서 나는 꼬마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까지 보태져 ‘쏴’하는 비소리도 묻힐정도다. 우리어린이집은 공동육아를 꿈꾸는 부모 60여명이 지난 94년 450만원씩을 출자해 설립한 국내 최초의 공동육아협동조합 어린이집이다.2층 주택을 임대해 꾸며진 이곳은 현재 39가구 아이 41명의 보금자리다.교사 9명은 모두 별명으로 불린다.아이,부모,교사가 동등한 인격체라는 이념에 따라 서로 반말을 쓴다. 아이들이 주방에서 만들고 있는 것은 점심 때 반찬으로 쓰일 계란말이.먹거리는 모두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것이다. 음식은 교사의 안내에 따라 아이들이 직접 만든다.‘꽃다지’ 이경의 교사(26·여) 옆에 앞다퉈 달라붙어 앉은 경진이(6·여),진영이(6·여),한결이(6·여),윤재(6),준현이(6),힘찬이(6),서윤이(6),재희(5),권범이(5)는 서로 자기가 계란을 풀겠다고 난리다. 아이들이 아웅다웅하는 사이경진이는 능숙한 솜씨로 호박과 당근을 썬다.잘게 썬 호박과 당근을 칼로 그릇에 담는품새가 여섯살배기로는 보이지 않는다. “재희야 이번엔 계란을 말아볼까?하나,둘,셋 하면 조금씩 달걀을 말아 올려.하나,둘,셋!” “히히,잘 안돼” “괜찮아,다시 한번 하나,둘,셋!” “야,됐다.이번에 됐어!” 한쪽에 앉아 구경만 하던 재희도 프라이팬에서 노릿노릿익어가는 계란을 마는 것이 재미있는 모양이다. “너무 크게 썰면 안돼” “이렇게?” “그렇지,아주 잘 하네” 돌돌 말려진 계란말이를 아이들의 입에 알맞은 크기로 써는 것은 준현이가 맡았다.아이들과 장난만 치더니 꽤 익숙한 솜씨로 칼을 놀린다. “자,다 됐다.이번엔 방으로 음식을 날라야지” 아이들은 한아름이나 되는 음식 접시를 가슴에 가득 안고낑낑대며 2층 방으로 나른다.방에서는 가윤이(4·여)와 기웅이(4)가 잽싸게 상을 편다. 꽃다지가 아이들을 상 주위로 빙 둘러 앉힌 뒤 노래를 부르자 모두들 까르르 웃으며 합창을 한다.노래가 끝나자 아이들의 눈은 된장국 배식을 맡은 오늘의 ‘국도우미’ 힘찬이에게 모인다. “서윤이 나와,경진이 나와,예림이 나와,예빈이 나와…아저씨두 나와!” 힘찬이가 이름을 부르자 귀를 쫑긋 세웠던 아이들은 차례로 줄을 선다.순서를 두고 다투는 법은 없다.커다란 접시에 자기가 먹을 만큼 밥과 계란말이,김치볶음 등을 담아 자리로 와 먹기 시작한다. “야,내거야.왜 니가 먹냐?” “좀 먹으면 어떠냐!” 이내 시끌벅적해진다.서로 꼬집고 때리기도 한다. “오늘 설거지 당번은 의연이와 준현이지?” 아이들이 깨끗이 비운 자신의 밥그릇을 1층 주방으로 나르자,한결이와 서윤이가 아이들의 키에 맞도록 낮게 만들어진 싱크대에서 부지런히 설거지를 한다.아이들이 처리하기에벅찬 큰 그릇은 이날 아마(아빠+엄마) 봉사자인 ‘하마’손용태(孫龍泰·41)씨의 몫이다. 손씨는 성준이(4)의 아버지다.설거지가 끝나자 당번에게는상으로 포도 주스 한잔씩이 주어진다. 원감 ‘그대로’ 정영화(鄭榮花·34·여) 교사는 “공동육아협동조합은 말 그대로 내 아이가 아닌 ‘우리 아이’를‘우리’가 키우는 영·유아 보육기관”이라면서 “날마다오전에는 성미산이나 한강둔치 등으로 나들이를 나가 아이들이 자연 안에서 마음껏 뛰놀도록 한다”고 설명했다. ‘우리어린이집’은 자연친화적인 교육방법을 가장 중시한다.계절마다 바뀌는 자연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한다. 강강술래,딱지치기,투호놀이,긴줄넘기,사방치기,비석치기등 우리 고유의 놀이도 함께 한다.한글이나 수학,영어 등은 일절 가르치지 않는다. 빗소리도 잦아들 즈음 방 곳곳에서는 아이들이 평화스러운 표정으로 낮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전영우기자 anselmus@. ■ 정병호 한양대 교수“남의 아이 행복이 내 아이 행복”. “내 아이만 잘 키운다고 그 아이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국내 공동육아 운동을 이끌어온 한양대 정병호(鄭炳浩·46·문화인류학) 교수는 “‘내 아이’도 ‘남의 아이’와 함께 살아가야 하므로 ‘우리 아이’를 잘 키워야 행복한 삶에 이를 수 있다”며 이같이 반문했다. 정 교수는 “산업화와 도시화를 통해 잃어버린 공동체의복원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시급히 이뤄야 할 목표”라면서“공동육아를 통해 부모들이 네트워크를 형성,자기 동네와지역사회에 관심을 갖게 되고 ‘시민적 참여’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공동육아 운동의 의의를 강조했다. 특히 아버지들이 육아와 집안일에 적극 참여하게 돼 가정이 더욱 화목해지는 부수적 효과도 있으며 아이들의 ‘대안적 사회화’와 어른들의 ‘건전한 재사회화’도 이뤄진다는게 정 교수의 설명이다. 공동육아로 키운 아이들이 취학 뒤 학업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우리 사회에서 일반화된 과잉 조기교육이야말로 어린이의 인권을 유린하는 것”이라면서 “발달 단계에 맞는 교육을 받아야 지적 호기심을 유지,공부에대한 흥미를 잃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한글이나 숫자를 제대로 모르고 들어간 아이들이 초등학교에서 높은 학업 성취도를 보이는 사례가 많다”고 덧붙였다. 정 교수는 “공동육아가 유일한 대안은 아니며 지금도 계속 제도권 교육의 폐해에 대한 다양한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중”이라면서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이 따뜻한 마음씨와 탐구정신을 지닌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금이라도국가와 사회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 ■공동육아란…부모가 교육에 직접 관여 . 요즘 젊은 부모들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공동육아란 공동체 이념에 입각해 취학 전 아동이나 초등학생들을 여러가족이 함께 기르고 가르치는 ‘대안’ 교육방식이다.내 아이,남의 아이를 가리지 않는 ‘확대 가족’을 지향한다. 지식이나 인지능력 발달을 중시하는 기존의 유아교육과는달리 자연친화적인 교육 방법 등을 통해 나이에 걸맞은 건전한 인격의 발달을 1차적인 목표로 한다.아이들이 마음껏뛰어놀 수 있도록 배려함으로써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사고와 함께 주위사람들과 강한 정서적 유대를 가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 보육기관 설립·운영 방식은 협동조합과 품앗이 방식 등여러가지가 있다.협동조합 방식은 부모들이 수백만원씩을출자,보육기관을 운영할 장소를 임대하거나 구입해 직접 운영한다.품앗이나 두레 형태로 자신들의 집을 개방,돌아가면서 아이들을 돌보는 조금 저렴한 방식도 있다.공동육아협동조합,품앗이공동육아,희망세상 어린이집 등이 공동육아를실천하는 대표적인 곳이다. 공동육아의 가장 큰 특징은 교사가 중심이 되는 기존 제도권 교육과는 달리 부모들이 교육에 직접 깊숙이 관여한다는 것이다.직접 교사로 나서는 학부모도 있다. 학부모들이 이사장을 비롯,교육·홍보·생활문화·조직·시설·회계 등의 이사를 맡아 운영을 책임진다.부모들은 최소한 한 부문에 참여해야 한다.매월 한번씩 청소 등 노력봉사를 해야 하고,교사들과 함께 토론을 거쳐 구체적인 교육프로그램도 짜야 한다. 지역별로 30세대 안팎이 공동육아협동조합을 구성,운영하고 있는 어린이집은 전국에 걸쳐 37개로 1,000여명의 어린이들이 다니고 있다.최근에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방과후 프로그램도 확산되고 있으며,내년에는 정원 10명 안팎의 대안초등학교도 설립될 전망이다. 그러나 협동조합식 운영 방식은 초기에 수백만원의 출자금을 내야 하고,매월 들어가는 교육비도 30만원 안팎이어서“중산층 이상을 위한대안이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되고있다. 공동육아연구원 손이선(孫利瑄·33·여) 사무차장은 “공동육아는 아이들의 교육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안 초·중등학교를 통해 잃어버린 사회의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려는데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면서 “별도의 기금을 조성,전국에 저소득층을 위한 4개의 ‘방과후’ 프로그램을 운영중이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자신의 출자금을 저소득층과 탈북자,편부모 등에게 기증하는 운동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영우기자.
  • 국립국악원 해외음악학자 초청 워크숍

    “낙양동천 이화정,얼쑤!”가뭄끝에 단비가 내리던 지난 18일 오후.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예악당 1층 춤연습실이부산하다.그런데,더듬더듬 혀짧은 발음이 심상찮다.춤사위도 어째 영 어설프다.다리를 들었다 내렸다,팔끝의 한삼자락을 탁탁 뿌리는 품새가 ‘왕 초보’수준이다. “오늘 처음 탈춤이란 걸 배워봅니다.너무 너무 재미있어요.텍스트에서만 봐오던 한국춤을 이렇게 직접 온몸으로 체험해 보다니요.”신이 난 수강생들은 ‘벽안의 교수님’들이다. 한국국제교류재단과 국립국악원이 공동주최하는 ‘해외 음악학자 초청 국악워크숍’에 세계 7개국 민속음악 전문가15명이 찾아왔다. 지난 4일부터 오는 30일까지 진행되는 워크숍은 각별한 의의가 있다.엇비슷한 워크숍은 심심찮게 있어왔지만,이론교육을 겸한 프로그램은 이번이 처음이다. 외국인 국악교실을 이미 5차례 열어온 국악원이 이론이 뒷받침되지 않은 실기교육의 맹점을 보완한 것.이론서 1권과실기영상을 담은 CD 1장을 따로 마련했다. 수강생의 대부분은 현재 대학에 몸담고 있는 민속학 전문가들이다. 8명이 교수.나머지 7명도 박사과정에 있거나 음악감독,현지 한국학 강사다.국적으로는 미국인이 9명으로 압도적이다. 교육과정도 눈에 띄게 알차다.오전 3시간 동안은 집중적인이론교육. ‘음악으로 본 과거와 현재의 한국’‘동아시아와 세계속의 국악’‘무속신앙과 음악’등의 수준높은 프로그램으로 꽉 찼다.매일 오후 2시간 동안의 실기시간에는장구,단소,무용,판소리 등을 다양하게 배운다. 보름동안 장구,단소,무용실기를 체험한 수강생들의 호응은놀랍다. 미국 UCLA 음악학과 강사이자 민속음악 연주가로 남편과함께 온 안나 장(60)은 “현지의 전문가들로부터 습득한이론을 강의에 연결시킬 수 있어 무엇보다 유익하다”고말한다.“미국에서는 일본음악을 아시아음악으로 동일시하는 경향인데,체계적 홍보만 받침되면 한국민속음악도 얼마든 지평을 넓혀갈 수 있을 것”이라는 지적도 덧붙였다. 미국 메사추세츠대 민속음악과 교수 로얄 하티겐(54)은 그의 남편.재즈드럼 전문가이기도 한 하티겐은 “당장 다음달로 예정된 중국 공연에 장구를 들고나갈 것”이라고 한다. 이들을 가르치는 짠 이병원 교수(60·미 하와이대)는 “미국에서 한국음악 관련 학과가 개설된 곳은 하와이대가 거의 유일한 실정”이라면서 “이번 워크숍 참가자들 중 몇몇은 귀국 후 학과개설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고 귀띔했다. 황수정기자 sjh@
  • 한국에 산다/ 코넬리아 노이먼 독일인학교 교사

    코넬리아 노이먼(25·여)의 꿈은 올림픽에 출전,태권도에서금메달을 따는 것이다. 올해로 3년째를 맞는 그의 한국생활은 바쁘기만 하다.서울문래동의 한 체육관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일할뿐 아니라 독일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또 대학의 태권도 강좌에도참가해 ‘영어로 배우는 태권도’라는 이름으로 수업을 진행한다.4개월 전부터는 한국어 배우기에 한창이다.일주일에4번씩 한국어학원에 다니고 한국인 친구에게 따로 과외도 받는다. 독일 노이반덴부르크 출신인 그는 통독 이후 현지에 들어온한국인 사범의 무료 태권도 강좌에 참가한 것이 계기가 돼14세에 태권도에 입문했다.이미 중국 쿵후,일본 유도등도 익혔던 그는 곧 태권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태권도는격파와 품새,격투 등 모든 무술이 종합된 하나의 예술같았다”는 게 그 이유다. 만능 스포츠우먼인 코니는 1년만에 노란띠를 땄고 99년엔마침내 유단자가 됐다.이런 실력을 아까워한 사범은 몇차례그에게 한국행을 권유했고 98년 여름,2주간 경주,대전 등지에서 훈련을 받은 뒤 곧 한국행을 결심했다. 99년 7월 한국에 도착한 그의 생활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몇달간은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숙식을 해결했다.아는 한국말도 ‘안녕하세요,감사합니다’와 ‘앞차기·뒷차기’같은 태권도 용어가 전부였지만 하루에 10시간씩 태권도 연습을 하며 낯선 땅에 적응했다.지난해초 현재 사범으로 일하고있는 체육관으로 터전을 옮겼다. 일차 목표는 체육대학교 태권도학과에 입학하는 것.이 때문에 최근엔 밤잠을 설치며 태권도 훈련과 한국어 공부에 더욱열심이다. 이동미기자 eyes@
  • 남북 태권도 만난다

    남북한이 국기인 태권도를 통해 본격적인 스포츠 교류에 나설 것으로 기대된다. 북한의 조선태권도위원회 황봉영 위원장은 12일 대한태권도협회 김운용회장 앞으로 전화통지문을 보내 “태권도 시범단교환을 위해 국장급을 책임자로 한 실무 접촉을 새달 12∼14일 금강산에서 갖자”고 제의해왔다고 통일부가 밝혔다. 이는 지난 1월 제4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남북한이 태권도시범단 교한을 위해 태권도 단체들 사이의 접촉을 권고하기로 합의한데 따른 것이다. 이에 대해 주무부서인 문화관광부와 대한태권도협회는 “매우 고무적인 일”로 평가하고 관련사항 준비에 착수했다.이번 남북 교류가 성사되면 태권도는 축구와 농구에 이어 한국에서 선보이는 북한의 3번째 스포츠 종목이 된다. 태권도협회 성재준 사무국장은 “남북 교류에 대비해 벌써부터 만전을 기해왔다”면서“당장이라도 국가대표 시범단을파견할 수 있다”고 큰 기대감을 나타냈다. 88서울올림픽을계기로 구성된 국가대표 시범단은 모두 70∼80명으로 해외각국을 순회하며 기술과 품새,묘기·호신술 등으로 태권도의우수성을 알려왔다. 북한도 내용은 다르지만 시범단이 활동하고 있다. 체육계의 한 관계자는 “태권도 교류가 성사되면 남북 스포츠 교류가 전 종목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민수기자 kimms@
  • 중국서 막바지 촬영 영화 ‘무사’여주인공 장즈이

    “말이 위치를 잡고난 다음엔 움직이지 말란 말야!” 지난 28일 영화 ‘무사’(싸이더스우노 제작)의 막바지 촬영이 한창인 중국 요녕성흥성.북경에서도 6시간은 더 들어가야 하는 오지 해안가 토성 세트장이 ‘다혈질’ 김성수 감독의 고함에 대번 썰렁해진다.계속된 NG때문이다.그러나 잠시뿐.고삐를 틀어잡고 제법 다부진 품새로 말을 타고있던 장즈이(章子怡·20)가 주위를 쓱 둘러보고는 배시시 웃는다.볼우물이 쏙쏙 패이는 말간 웃음.썰렁해진 세트장 분위기도,영하 10∼20도를 밥먹듯 오르내리는 맹추위도 순식간에 달래놓는다. 다시 큐사인.시치미 똑 떼고 그새 위엄넘치는 명나라 공주로 돌아가더니 불호령을 친다.“(중국어로)여기서 내가 목숨끊는 것을 보겠느냐? 아무도 나서지마.혼자 나갈거야!”[포위당한 성안에서 혼자 원나라 병사들에 맞서러 나가며]‘무사’에서의 역할은 원나라와의 대결 와중에 적군에 납치되는 명나라 공주 부용이다.한족 피난민을 이끌고 대륙을 횡단하는동안 고려의 무사 여솔(정우성),최정(주진모)과 삼각관계가 된다. “제일 힘든 거요? 말도 못하게 추운 날씨요.다음은 무서운 감독님이구요”촬영에 합류한 것은 지난 9월초부터다.그날 이후 쉬는 날이라곤 단사흘뿐이었다.그런데도 한점 피곤한 기색이 없다.일일이 통역이 따라붙는 인터뷰에도 인상 한번 구기는 법이 없고. 이력으로 따지자면 그는 아직 솜털 뽀송뽀송한(?) 병아리 배우다.데뷔작은 올해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받은 장이모우 감독의 99년작 ‘집으로 가는 길’.국내에선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에서 저우룬파(周潤發)의 상대역으로 나와 얼굴이 알려졌다.최근엔 쉬커(徐克)감독의 ‘촉산정전’도 찍었다.김성수 감독이 “총명한 배우”라고 침이마르게 칭찬하더니,당차긴 당차다.기라성같은 감독들을 놓고 또박또박 작업스타일을 품평까지 한다.“보통 감독들은 머릿속에 미리 그림을 그려놓고 거기에 꼭 들어맞는 연기를 주문해요.그런데 김성수 감독은 달라요.그때그때 현장에서의 디테일을 중시하고 배우들의 감정변화를 존중하더라구요.연기자 입장에서 볼때 배우와 상의할 줄 아는 감독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그가 캐스팅된 건 지난해 말쯤이었다.북경을 들른 싸이더스우노 차승재 대표가 ‘집으로 가는 길’을 보고난 뒤였다.귀띔하자면,그의 몸값은 1억6,000만원.왜 한국영화를 선택했는지,불쑥 물어봤다.준비하고 있었던 듯 태연히 되돌려주는 대답.“많이 배울 수 있다는 게 이유였죠.다양하고 폭넓은 영화를 찍고싶다고 늘 생각해왔으니까.지난봄 북경전영학교에서 한국영화 특별전이 열렸는데,거기에 김감독의‘태양은 없다’가 폐막작으로 상영됐어요.폭발력과 힘을 느꼈고 마음을 정했죠”북경 출신인 그는 현재 중국 국립연기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다.한국스태프들과 한솥밥을 먹고 지낸지 석달여.“불고기를 질리도록 많이먹었다”고 엄살피우는 얼굴위로 ‘리틀 공리’란 별명이 오버랩돼지나간다. 종일 불어대는 바닷가 흙바람,토성 사이로 듬성듬성 자라난 풀,멀리막사에 나부끼는 찢어진 깃발.세트장 주변이 온통 모노톤으로 황폐한 느낌인데,천연색으로 도드라지는 건 딱 두가지.유난히 파란 하늘과장쯔이의 미소다. 중국 흥성 황수정기자 sjh@. * ‘무사’어떤 영화인가. 김성수 감독의 ‘무사’는 촬영과정에서부터 여러 기록을 만들고 있는 스펙터클 무협액션이다.현장에 동원되는 스태프가 많게는 300여명.대륙을 횡단하는 중국 올로케이션에는 촬영용 차량이 50대가 동원되고,100여마리의 말이 한꺼번에 등장하기도 한다. 중국의 유명 스태프들이 손발을 맞추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시네마스코프(가로·세로의 비율이 2.35대1)화면으로 선보일 영화는 볼거리가 풍성하다.3개월에 걸쳐 만들어진 흥천의 해안토성 세트는그중에서도 압권.실제 오래된 토성을 옮겨놓은 듯한 세트는 미술을책임진 중국의 후오팅샤오 감독 덕분이다.그는 ‘현위의 인생’ ‘패왕별희’ ‘시황제 암살’ 등에서 미술을 맡았다. ‘패왕별희’의 여성 프로듀서 장시아가 무려 10개월동안 발굴한 촬영지들도 영화의 스케일을 키운다.내몽고밑 회족 자치구에서 사막과황무지,협곡,구릉,석산,갈대숲 등이 장대한 화면을 만든다.음악은 ‘에반겔리온’의 일본인 작곡가 사기스 시로우 작품이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원이몰락하고 명이 건국되던 혼란기인 14세기.명나라 사신으로 간 고려의 아홉 무사가 원·명의 갈등에 휩쓸려 역경을 헤쳐나가는 줄거리다.장중한 액션 사이사이로 멜로적 색채가 가미된다.총제작비는 52억원.이달 20일쯤 크랭크업되는 영화는 내년 상반기에 개봉될 예정이다. 황수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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