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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인사동 재개발/손성진 수석논설위원

    서울 인사동이 화랑과 필방(筆房), 골동품 거리가 된 것은 연유가 있다. 조선의 왕실 그림을 그리던 화원들의 일터인 도화서는 인사동 옆 견지동에 있었다. 안국동 사거리에서 종각역 쪽으로 100m쯤 가다 보면 오른쪽에 갑신정변의 발화지인 우정총국이 있고 그 앞에 도화서 터 표지석이 있다. 도화서는 숙종 때에 중구 수하동 옛 청계국민학교 자리로 옮겨갔고, 그래서 을지로 입구에 도화서 터 표지판이 하나 더 있다. 20세기에 들어서 도화서가 폐지됐지만, 인사동이 미술 거리가 된 것은 자연스럽다. 골동품 상가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다. 인근 북촌 양반가에서 흘러나온 고서화나 골동품들을 이곳에서 일본인과 미군들이 사고팔면서 상권이 형성됐다고 한다. 종로2가에서 안국동 사거리에 이르는 길이 0.7㎞, 너비 12m인 인사동길은 1984년 11월 7일 길이름이 처음 제정되었다. 서울 시내 골동품상과 화랑 열 곳 가운데 네 곳이 이곳에 있다. 특히 필방은 90%가 인사동에 몰려 있다. 가장 오래된 서점인 통문관도 인사동에 있다. 인사동 골동품상들은 가짜 고서화사건, 금당살인사건 등으로 1970년대 말 장안동 등지로 많이 빠져나갔다. 대신 토속음식점과 전통찻집 등 유흥음식점이 들어섰다. 인사동의 명칭은 조선시대 한성부의 관인방(寬仁坊)과 대사동(大寺洞)에서 가운데 글자를 한 자씩 따서 지은 것이라 한다. 인사동에는 역사적 유산들이 많다. 태화빌딩 자리는 조선 초 태화정과 부용당이 있던 곳으로, 인조가 어릴 때 자란 잠저(潛邸,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였다. 태화정은 헌종 때 후궁 경빈 김씨의 사당으로서 순화궁(順和宮)이 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 매국노 이완용의 소유가 되었다. 그 후 1918년 마당에 있던 고목이 벼락을 맞아 쪼개지자 놀란 이완용이 유명한 기생집 명월관의 주인 안순환에게 팔았고 순화궁은 태화관이라는 요정으로 바뀐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이 바로 태화관이다. 인사동은 3·1운동의 발상지인 셈이다. 그러나 도시 재개발로 태화관은 헐려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학자인 이율곡과 조광조, 조선 말기 박영효와 지석영의 집도 인사동이나 그 근처에 있었다. 민영환 자결 터, 서북학회 터, 승동교회, 탑골공원 등 근대 문화유산들도 즐비하다. 이런 점 때문에 1978년 도심재정비 구역으로 지정된 뒤 35년간 개발이 제한됐던 인사동의 재개발 계획이 확정됐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발을 하더라도 유산을 훼손하지 않고 잘 보존하는 일일 것이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⑧ 1950~60년대 : 파괴와 재건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⑧ 1950~60년대 : 파괴와 재건

    “도시는 기억으로 살아간다”(The city lives by remembering)고 미국의 시인 랠프 왈도 에머슨은 읊었지만, 서울은 600년 고도의 기억이 별로 없다. 마치 신흥도시 같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통에 불타고 약탈당했으며, 일제강점기 도읍에 대한 자취는 강제적으로 지워졌다. 조선총독부-경성시청-남산 조선 신궁을 상징 축선으로 하는 식민 도시로 치장됐다. 한국 전쟁통에 그나마 남은 것 대부분이 파괴됐다. 1960년대 이후 개발독재시대의 무지막지한 개발 광풍을 타고 또 한 번 뭉개졌다. 역사의 향기는 흩어졌다. 한강 이남으로 영역을 확대한 서울은 사실상 한국전쟁 이후 새로 건설된 신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대문 안에는 표지석만 어지럽게 남았을 뿐이다. 전쟁과 대사건은 도시를 재건한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 폭격을 앞둔 맥아더는 “원래 도시란 천재지변이나 전쟁을 겪고 나면 그전에 비해 몇 곱절 더 크고 좋은 새 도시로 부흥된다. 미국이 재건을 도울 것이니 서울은 앞으로 이상적인 현대 도시로 탈바꿈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실제 1644년 대화재로 도시의 80%가 타 버린 영국 런던은 옥스퍼드대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 교수에 의해 오늘의 런던으로 재건됐다. 일본 도쿄도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잿더미가 됐지만 탁월한 도시계획가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도쿄시장의 주도로 세계 도시계획 사상 유례가 없는 시가지 개조를 통해 새로 태어났다. 런던과 도쿄는 세계대전으로 또 한 번 타격을 입었지만, 옛 도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서울의 재건은 성공작일까? 서울을 역동적인 현대 도시로 평가할 수는 있지만, 역사 도시로 평가하기엔 머쓱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서울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은 꽤 혼란스럽다. 서울은 네 번 결정적인 상처를 입었다. 16세기 일본과 중국 군대에 의해 약탈당했으며, 근대 일제강점기엔 성곽을 허물고, 상징 축을 강제로 바꾸는 방법으로 도시 형태가 조작됐다. 한국전쟁기 유엔군과 한국군의 청야(淸野)작전(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농작물이나 건물 등 지상에 있는 것들을 말끔히 없애는 작전)을 통해 철저하게 파괴됐다. 1960~70년대 우리 손으로 남은 문화재를 헐어서 치워 버렸다. 맥아더의 말처럼 기회는 있었다. 1952년 전후 복구 차원의 첫 도시계획안을 마련하면서 세종로 등 39개의 큰길을 확장하거나 신설하고, 광화문광장·서울시청광장·남대문광장 등 19개의 광장을 만드는 과감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재정부족 등을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처럼 구도심(사대문 안)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사대문 밖이나 강남 신시가지를 개발하겠다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이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 ‘광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서울 집중이 기회를 날려 버렸다. 집중을 막으려고 온갖 정책을 동원했지만 약효가 듣지 않았다. 해방 전후 100만명대였던 서울 인구는 1966년 380만명, 1970년 540만명을 넘어서더니 1990년 1000만명을 돌파해 버렸다. 수도 서울 행정은 집 지을 땅을 확보하고, 도로를 넓히고, 교통수단을 늘리고, 수돗물을 공급하고, 쓰레기를 치우는 것에 매달렸다. 만약 그때 인구의 서울 집중을 막을 수 있었더라면 서울은 한가롭게 전차가 다니며,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정겨운 기와집이 빼곡한 도시로 남았을 것이다. 한강과 북한산이 주는 자연의 세례를 맘껏 누리는, 풍광이 뛰어난 성곽 도시로 유지됐을 것이다. 1950년대 서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손정목 전 시립대 교수의 ‘서울도시계획이야기’를 기본으로 사대문 밖 풍경을 상상해 보자. 동쪽으로 동대문을 나서면 신설동 큰 길가까지 집이 들어 차 있지만, 바깥은 논밭 천지다. 신당동에 집이 드문드문했을 뿐 금호동·옥수동 일대는 산이었다. 왕십리를 지나 한양대 일대는 미나리꽝이었고 성동교의 나무다리가 삐꺽거렸다. 남쪽 한강대교에 이르는 동빙고동과 서빙고동 주민은 1000명 안팎이었고, 원효로 일대는 대부분 논밭이었다. 노량진, 상도동, 대방동, 영등포는 큰 길가조차 목가적인 전원 풍경을 연출했다. 서쪽으로 신촌을 지나 마포 전차 종점을 벗어나면 벌거숭이 산과 논밭이 펼쳐졌다. 동북쪽은 미아리고개, 서북쪽은 독립문과 현저동이 경계였다. 지금의 강남·서초·송파·강동·강서·관악·구로·금천·도봉·노원·은평구 등은 모두 경기도였다. 서울의 고층 건물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최고층 건물은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8층짜리 반도호텔이었다. 이웃 조선호텔과 한국은행 모두 일제가 남긴 건물이었다. 1955년에 종로 사거리에 2층짜리 신신백화점이 신축됐고, 1957년 광화문 사거리와 을지로 1가에 3층짜리 국제극장과 5층짜리 개풍빌딩이 각각 들어섰다. 1958년 남대문에 7층짜리 그랜드호텔이 문을 열자 구경 인파가 몰렸다. 당시 서울 도심부의 평균 층 높이는 2층이 채 되지 않았다. 도심부를 고층화하려고 주요 간선도로변의 건물 높이를 3~5층 이상으로 정할 정도였다. ‘한강의 기적’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62년부터 약 20년간의 고도성장기를 일컫는다. 이 기간 서울은 경천동지할 변화를 겪는다. 서울의 공간 변화는 1966년부터 1980년까지 15년간 거의 이뤄졌다. 주택지·도로·상하수도·지하철 등 현대 서울의 하부구조가 이때 거의 갖춰졌다.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절대권력자의 ‘분부’를 이행한 김현옥·양택식·구자춘이라는 3명의 ‘충복’ 서울시장이 재직한 기간과 일치한다. 서울의 얼개는 박 대통령의 구상과 지시에 의해 거의 결정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6년 서울도시기본계획안이 세워졌다. 서울의 균형 발전을 꾀하려고 사대문 안에 집중된 입법·사법·행정부의 기능을 분산시키려는 계획이 눈에 띈다. 입법부는 남서울(강남·서초구), 사법부는 영등포, 행정부는 용산 일대, 세종로 지역은 대통령 관저 및 직속기관 배치 지역으로 정했다. 지금 와서 보면 입법부와 사법부의 입지가 맞교환됐고, 서울시청이 용산으로 옮겨가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교통계획을 보면 서울역~청량리(1호선), 서소문~을지로~성동(2호선), 갈현동~종로2가~을지로2가~퇴계로~천호동(3호선), 우이동~종로4가~퇴계로~말죽거리(4호선) 등의 지하철 4개 노선 건설계획이 잡혀 있다. 10년 뒤 구자춘 시장에 의해 2호선이 을지로와 영등포~영동을 잇는 순환선으로 변경되는 등 엄청난 노선 변화가 일어났지만, 지하철 4개 노선에 대한 기본 구상이었다. 이 밖에 4개 순환선과 14개 방사선을 간선도로망으로 7개의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계획과 노면 전차는 철거하고 광화문 사거리와 시청 앞 광장에는 지하차도를 만들고, 시청 앞 광장 지하는 지하도시화한다는 계획도 포함돼 있다. 도심 재개발과 강남·송파 등 남서울개발, 뚝섬·창동·망우 등 동서울개발, 불광·성산·김포·시흥지구의 서서울개발 등 신시가지개발 계획이 들어 있다. 1년 예산이 170억원에 불과한 서울시가 20년 앞을 내다보고 인구 500만명을 예상해 3235억원의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한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언론으로부터 ‘즉흥계획’ ‘실현성 없는 독단’ ‘재무계획 없는 무지개’ 등등 융단폭격을 맞았다. 그러나 격변의 15년 중 7년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기획관리실장 등을 지내며 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한 손정목 전 교수는 “꿈도 환상도 아니었다. 최초의 기본계획이었다는 점, 도심부 재개발이니 고도지구, 미관지구 개념이 도입돼 일반에 공개됐다는 점, 70~80년대 전국 모든 도시가 수립한 도시계획의 모델이 됐다는 점 등에서 의미가 있다”고 회고했다. 불완전하나마 서울시 장기계획의 틀이 된 것이 사실이다. 일제 말기인 1940년부터 1965년까지 서울은 잠자는 도시였다. 1937년 중·일 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이 터져 건축자재를 구할 수 없었고, 한국전쟁이 이어지면서 건축 행위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건물이 목조건물 수명 30년을 다한 상태였다. 장충동, 신당동 일대와 남대문로, 충무로, 을지로 등 일본인 주거지에 정원이 딸린 일본식 저택과 주택이 밀집해 있었다. 가회동·명륜동·동숭동·북아현동 일대에는 한옥촌이 빼곡하게 형성돼 있었다. 마포, 왕십리, 동대문을 벗어난 지역은 논밭이었다. 사대문 안과 독립문, 신촌, 신설동, 돈암동, 신당동, 용산이 서울의 전부였다. 노면 전차 노선을 기준으로 보면 동쪽으로 청량리·왕십리, 남쪽으로 노량진·신길동·영등포, 서쪽으로 마포·신촌, 서북쪽으로 독립문, 동북쪽으로 돈암동 전차 종점까지가 서울이었다. 지방에서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의 주거인 무허가 판잣집이 도심에서 가까운 하천변이나 산비탈을 차지했다. 1966년 당시 13만여채의 판잣집이 서울 곳곳에 달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서울은 개발행 특급 열차가 출발하기 직전의 폭풍전야였다. joo@seoul.co.kr
  • 日 불교종단, 부산서 군국주의 사죄 비문 제막식

    日 불교종단, 부산서 군국주의 사죄 비문 제막식

    일본의 군국주의와 위안부 문제를 사죄하는 비석이 부산에서 제막됐다. 일본 불교의 대표 종단인 ‘조동종’(曹洞宗) 소속 스님과 신도 10여명은 26일 부산 동구 서중학교 인근에서 ‘일본조동종부산포교소 총선사지 사죄 비문 제막식’을 열었다. 가로 95㎝, 세로 50㎝ 크기의 비석은 한국어와 일본어로 일제의 군국주의 만행을 사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비석 건립은 일본 아오모리현의 운상사 주지 이치노혜쇼고 스님이 주도했고, 건립비용은 일본 불교계가 부담했다. 이치노혜쇼고 스님은 “일제 식민 시대 ‘심전(心田) 개발’ 운동 등 황국신민화 공작에 앞장서 한국인에게 엄청난 고통을 초래한 것을 깊이 참회하면서 이곳에 표지석을 남긴다”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지방행정연수원 새달 완주서 ‘제2 출발’

    “여러분은 이제 새로운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18일 경기 수원 지방행정연수원 본관 앞에 건립된 ‘지방행정연수원 옛터’ 표지석 제막식에 참석한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은 “수원 시대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완주’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7월 말 혁신도시 이전 대상 기관으로, 전북 완주로 이전하는 지방행정연수원은 이날 표지석 제막식과 함께 수원에서의 마지막 교육을 진행했다. 유 장관은 이날 ‘성숙한 자치 구현을 위한 지방공무원의 역할’을 주제로 특강을 하며 “모든 정부 정책이 지방행정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명심해 달라”고 주문했다. 1978년 서울 도봉구 쌍문동에서 경기 수원으로 이전한 지방행정연수원은 35년 만에 ‘수원 시대’를 마무리하게 됐다. 전북 혁신도시 이전 대상 12개 기관 가운데는 첫 이전이다. 대한지적공사와 농촌진흥청 등은 올해 말부터 이전할 계획이다. 임채호 지방행정연수원장은 “첫 이전 기관이기 때문에 타 기관에서도 관심이 높다”면서 “연수원이 혁신도시 이전의 바로미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반기 교육이 8월 12일 시작되기 때문에 한 달이 안 남은 기간 동안 이전과 신청사 개관 등으로 어느 때보다 분주하다고 연수원 측은 설명했다. 신청사 교통 및 정주여건 조성을 위해 대중교통 노선을 신설하고 출퇴근 시간에 차량을 집중 배차하도록 전북도 등과 협의를 마쳤다. 교육생을 위한 기숙시설도 기존의 150실에서 230실로 확대했다. 특히 연수원은 기관 비전을 ‘개방과 협력으로 신뢰받는 창의적 지방자치 리더 양성’으로 새롭게 바꾸는 등 완주 이전을 새로운 출발로 인식하고 있다. 임 원장은 “동영상과 강의 자료, 강사 현황 등 교육 현황을 모두 외부에 공개하는 등 새로운 기관으로 재탄생하겠다”고 설명했다. 완주에서 근무하는 인원은 안행부 소속 직원으로 100여명이다. 신순녀 연수원 국제교육팀장은 “개도국 등에서 오는 해외 연수생들을 위해 중앙과 지방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교육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과거보다 더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안석 기자 ccto@seoul.co.kr
  • 朴대통령 “中서부 대개발 참여… 중국군 유해 360구 송환”

    朴대통령 “中서부 대개발 참여… 중국군 유해 360구 송환”

    박근혜 대통령은 방중 마지막날인 30일 산시(陝西)성 성도 시안(西安)에 삼성전자가 건설 중인 반도체공장 현장을 방문해 우리 기업의 중국 서부 대개발 참여와 중국 내수시장 진출 확대를 독려했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최근 산시성이 중국 경제의 핵심으로 부상하는 만큼 앞으로 한국은 산시성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서부지역에 더 많은 관심과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앞서 박 대통령은 전날 베이징의 명문 칭화대(淸華大)에서 연설하기 직전 이 대학 출신 류옌둥(劉延東) 부총리와 10분간 환담하면서 경기도 파주 공동묘지에 안장돼 있는 중국군 유해 360구를 유족들에게 송환하겠다는 입장을 전격적으로 밝혔다. 박 대통령은 “그동안 한국 정부가 (중국군 유해를) 잘 관리해 왔는데 중국의 유족이나 가족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마음이 있을 것 같다”며 유해 송환 의사를 전달했다. 박 대통령은 베이징에서 시안으로 이동해 자오정융(趙正永) 산시성 당서기와 면담 및 만찬을 갖고 “194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이 시안의 창안(長安)구 두취(杜曲)진에 주둔한 바 있고, 우리 정부가 2009년부터 그곳에 광복군 유적지 표지석 설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소개하면서 사업 허가를 요청했다. 자오 서기는 긍정적 검토를 약속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29일 방영된 관영 중국중앙(CC)TV와의 인터뷰에서 “우선 (북한과의) 대화가 진정성 있는 대화가 돼야 한다”며 “진정성 있는 대화를 통해 한반도의 비핵화, 그 다음에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고 그것을 실현해 나가는 목표를 갖고 있다”고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구상을 밝혔다. 박 대통령은 지난 27일부터 중국을 국빈 방문, 첫날 베이징에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단독·확대 정상회담을 가진 데 이어 28일에는 리커창(李克强) 총리, 장더장(張德江)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과도 만났다. 박 대통령은 29일 시안으로 이동해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건설현장을 시찰하고, 진시황릉 병마용갱을 방문한 뒤 30일 오후 귀국했다. 시안 오일만 기자 oilman@seoul.co.kr
  • [朴대통령 訪中] 해결 가능한 역사 걸림돌부터 제거… 류옌둥 “한·중 한단계 더 발전”

    [朴대통령 訪中] 해결 가능한 역사 걸림돌부터 제거… 류옌둥 “한·중 한단계 더 발전”

    박근혜 대통령은 중국 국빈 방문 중에 중국과의 역사 공조에도 역점을 뒀다. 6·25전쟁 당시 사망한 중국군 유해 송환 및 중국 내 항일 유적지 보존 문제 해결에 나선 것이다. 그동안 한·중 간에 체제가 다르다는 이유로 난항을 겪었던 역사 문제 중 해결 가능한 것부터 걸림돌을 제거하며 양국 간 신뢰를 쌓아 가자는 의미다. 박 대통령은 경기 파주시 공동묘지에 안장돼 있는 중국군 유해 360구를 유족들에게 송환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역사 공조의 손을 내밀었다. 지난 29일 베이징의 칭화대(淸華大) 연설 직전 칭화대 출신 류옌둥(劉延東) 부총리와 환담하는 자리에서다. 박 대통령은 “이번 방중의 슬로건을 ‘심신지려’(心信之旅)라고 정했는데 그만큼 취지에 맞게 신뢰를 갖고 두 나라 간에 우의를 다진 것에 대해 굉장히 감명받았다. 그런데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께 말씀드리려 했는데 빠진 게 좀 있다”며 중국군 유해 송환 입장을 전격적으로 전했다. 이에 류 부총리는 “대통령께 너무 감사하다”면서 “한국 정부의 특별한 배려와 대통령의 우의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됐다”고 감사를 표했다. 류 부총리는 이어 “중국에는 ‘비가 떨어지는 것처럼 멀리 가더라도 반드시 조국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속담이 있다”며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시 주석께 보고드리겠다. 한·중 관계가 한 단계 더 발전하는 뜻깊은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재 파주의 공동묘지 내 적군 묘에는 6·25전쟁 당시 사망한 중국군과 북한군 묘가 있다. 우리 정부는 망자들에 대한 예우로 묘를 관리해 왔으며, 중국 측은 그동안 일부 중국군의 유해를 북한을 거쳐 가져갔다. 1997년 이후 북한이 인수를 거부해 송환이 중단되면서 현재 360구가 남아 있다. 청와대 김행 대변인은 “중국인이나 한국인이나 모두 동양인이고 유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가족과 조상을 중시하는데 이들의 유해가 계속 이국 땅에 묻혀 있도록 방치하는 건 유족이나 후손에게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유해 송환 배경을 설명했다. 박 대통령은 또 같은 날 산시(陝西)성 성도 시안(西安)에서 자오정융(趙正永) 산시성 당서기와 면담 및 만찬을 가진 자리에서 194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이 시안의 창안(長安)구 두취(杜曲)진에 주둔한 바 있고, 우리 정부가 2009년부터 그곳에 광복군 유적지 표지석 설치 사업을 추진한다고 소개하면서 사업 허가를 요청해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에 앞서 박 대통령은 지난 28일 시 주석과의 특별 오찬 자리에서는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역의 안중근 의사 의거 현장에 기념 표지석을 설치하는 것과 과거사 관련, 중국 정부의 정부기록보존소 기록 열람 협조를 요청했고, 시 주석은 유관기관에 이를 잘 검토하도록 지시하겠다고 화답했다. 베이징·시안 오일만 기자 oilman@seoul.co.kr
  • [朴대통령 訪中] 시 주석 ‘한·중관계 발전’ 의미 서예작품 선물

    [朴대통령 訪中] 시 주석 ‘한·중관계 발전’ 의미 서예작품 선물

    박근혜 대통령은 중국 방문 이틀째인 28일 수행 경제사절단과의 조찬을 시작으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펑리위안(彭麗媛) 여사 부부와의 오찬에 이어 리커창(李克强) 총리와의 만찬 등 총 8개의 공식 일정을 소화했다. 한·중 경제 협력을 강조하며 ‘비즈니스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에 초점을 맞췄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1시 25분까지 시 주석, 펑 여사와 특별 오찬을 함께 했다. 이로써 박 대통령은 시 주석과 전날 단독·확대 정상회담과 국빈 만찬까지 합해 모두 7시간 30분을 함께하며 한·중 정상 간 우의를 과시했다. 이날 박 대통령은 시 주석으로부터 ‘한·중 관계의 발전’을 의미하는 시구(詩句)가 담긴 서예 작품을 선물 받았다. 시 주석의 선물은 중국 당나라 때 시인인 왕지환(王之渙·688∼742)의 한시 ‘관작루에 올라’(登觀雀樓) 두 구절이 쓰인 서예 작품과 법랑 화병 수공예품 한점으로 양국 간 인문 교류 확대를 염두에 둔 듯했다. 박 대통령은 시 주석에게 찻잔 세트와 주칠함(朱漆函)을 선물했다. 박 대통령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 현장에 기념 표지석을 설치하는 문제와 과거사 관련 정부의 정부기록보존소 열람 관련 협조를 요청했고, 시 주석은 유관기관에 이를 잘 검토하도록 지시하겠다고 화답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후 리 총리와의 면담에서 “한·중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 내실화를 착실하게 이행해 양국 국민의 이익은 물론 지역 및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에도 더욱 이바지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양측은 한·중·일 3국 정상회의를 연중 적절한 시기에 개최하기 위해 협의하기로 합의했다. 박 대통령은 리 총리와의 면담에 앞서 인사말을 통해 “리 총리는 ‘미스터 리 스타일’이라고 굉장히 국내외적으로 호평을 받은 것으로 들었다”면서 “오늘 뵙자마자 왜 호평을 받는지 느낄 수 있었다”고 덕담을 건넸다. ‘미스터 리 스타일’은 유머와 위트를 섞은 솔직한 언행과 거침없는 행보 등 전임자들과는 다른 리 총리의 모습 때문에 붙은 표현이다. 이에 리 총리는 “(박 대통령의) 이번 방문은 양국 관계를 격상시키기 위해 새로운 원동력을 불어넣어 줄 것”이라고 화답했다. 박 대통령은 또 장더장(張德江)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을 만나 북한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권고해 달라는 취지로 발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대통령은 이날 베이징 국가올림픽체육중심체육관에서 열린 한류 팝스타들의 K팝 공연장을 ‘깜짝’ 방문, 소녀시대와 2PM, 슈퍼주니어 등 한국의 K팝 스타들과 중국의 팝그룹 즐샹리흐어 등을 만나 격려한 뒤 40여분간 공연을 관람했다. 베이징 오일만 기자 oilman@seoul.co.kr
  • [최동호 새벽을 열며] 태산의 옥황상제와 풍진세상

    [최동호 새벽을 열며] 태산의 옥황상제와 풍진세상

    세상이 답답하다. 쉽게 풀리는 일은 거의 없고 일마다 첩첩산중이다. 경제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다 앞길이 난망하다. 남북문제만 하더라도 잘 풀릴 것 같더니 다시 자물쇠가 잠겨 있다. 지난 5월 하순 중국 산둥성 태산에 올랐다. 공자의 고향 곡부에 들렀다가 태산을 오르기로 했다. 오전에는 비가 조금 내리고 하늘은 음울했다. 운무가 휘도는 하늘 거리를 걸어 정상으로 향했다. 대개 6000계단을 올라야 한다는 말이 있었지만 수많은 사람의 발걸음이 한 곳을 향해 있었다. 청제궁(靑帝宮) 문을 넘어서니 태산의 진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과연 태산의 정상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중국 진시황을 필두로 역대의 황제들이 봉선 의식을 했다는 현장에 서게 된 것이다. 우선 한 무제가 세웠다는 무자비가 눈에 들어왔다. 대략 2m 높이의 무자비는 천하를 평정하고 태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한 글자도 새기지 않았다는 무언의 전언이 수천의 글자보다 더 많은 의미를 느끼게 했다. 한 무제는 다섯 번이나 태산에 올라 제사를 지냈고, 청나라 건륭제 또한 열 번이나 태산에 올랐다고 한다. 모두 자신의 공적을 하늘에 고했다고 했으나 아마도 자신의 공적을 헤아려 보고 잘못을 돌아보면서 백성에게 하늘의 명을 받아 자신이 천하를 다스리고 있음을 알리는 정치적인 의미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 왜 이렇게 황제들이 태산에 올라 하늘에 제를 지내려고 했을까. 태산은 도교의 중심이며 민간 신앙의 정점에 자리 잡고 있는 상징적인 오악지존의 산이라고 한다. 수많은 중국인이 지금도 태산에 오르는 것은 소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일 것이다. 태산의 정점에는 중심에 옥황상제를 모시는 옥황정이 있고 좌우에 이를 보좌하는 전각이 있었는데 동쪽은 관일정, 서쪽은 망하정이라 한다. 동쪽은 일출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고 서쪽은 황하를 바라볼 수 있다고 하니 이 같은 명당이 더 있을 수 있겠는가. 옥황정 앞마당에는 태산극정(泰山極頂)이라는 표지석 중심으로 동심건(同心鍵)이라는 열쇠가 석책에 무수히 쌓여 있었다. 이 열쇠는 언제 어디서나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다는 약속을 의미한다고 한다. 어떻든 태산의 중심에 옥황상제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의 이야기나 교과서에 수록된 시조에서 익숙하게 들어온 태산의 정점에 옥황상제가 있다는 것은 동양인 상상력의 중심에 민간 신앙의 최고 신격으로 그가 존재한다는 것이었고 하나의 충격이었다. 역대 중국의 황제들이 봉선 의식을 행한 것도 바로 민중의 마음속에 있는 하늘의 신에게 제사를 드린 것일 터이다. 동악 태산 옥황정의 기둥에 새겨진 편액의 글씨가 건륭제의 필체임을 확인했을 때 건륭제의 소망 또한 얼마나 간절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공자 또한 태산에 올라 ‘등태산이소천하’(登泰山而小天下)란 말을 남겼다고 맹자가 전하는 글귀를 새긴 바위가 있었다. 태산을 등정하고 돌아 내려 오는 길에 산하를 굽어보니 천하의 절경이란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오전에 비가 내린 탓인지 하늘은 맑고 가끔 일어나는 운무가 선선한 바람을 몰아와 더욱 풍치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이 절경이 절경뿐이겠는가. 한국에 돌아와 보니 지금의 답답한 국내외 정세를 풀기 위해 다시 한 번 태산에 올라 그 답답함을 옥황상제나 하늘의 신에게 고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마침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을 국빈으로 방문한다고 한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물론 하늘의 신에게라도 새로운 대화의 문을 열어달라고 기원해 볼 필요가 있다. 국제 정세는 숨 가쁘게 돌아가는데 남북의 문은 굳게 닫혀 있으니 진퇴양난의 길에 가로막혀 일찍 다가온 여름이 더욱 답답하다. 동북아의 질서 개편이 시동되어 새 역사의 시대가 한층 임박한 상황에서 ‘태산이 높다 하되 못 오를 리 없다’는 옛 시조를 다시 한 번 읊조리며 풍진 세상의 여름을 맞는다.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① 프롤로그-변천사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① 프롤로그-변천사

    우리에게 서울이란 무엇인가. 한강 기슭에 터 잡은 한성백제 이후 2000년의 역사가 어린 한민족의 고향쯤이기도 하고, 북악 아래 도읍을 정한 지 600년을 훌쩍 넘긴 조선의 심장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유린당했지만 정체성을 지켰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본은 민족정기 말살을 노리는 대못을 구석구석 박았다.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일제의 식민 경영에 의해 서울은 심각하게 왜곡됐다. 한국전쟁의 포연 속에서 서울시내 건물의 3분의1이 파괴됐다. 사대문 안 문화재는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전쟁이 끝났을 때 서울은 폐허에 가까웠다. 그런 서울이 ‘한강의 기적’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60년.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압축적인 성장과 변화가 휩쓸고 갔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 장기 개발독재와 불도저식 행정가의 밀어붙이기 도시계획에 따른 엄혹한 고통을 묵묵히 감내한 서울시민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견뎌 내지 못했더라면 인도의 뭄바이,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울은 진화 중이다. 진화는 상실을 수반한다. 기억하고 남겨야 할 가치마저 토건의 흙먼지 속에 숱하게 사라졌다. 개발 연대의 기록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숨가쁘게 달려온 길이 보인다. 험하고 불편했지만, 기억 속에서는 정겨운 시절이기도 하다. ‘서울 택리지’(擇里志)는 지금 우리 옆에 남아 있는 건물, 도로, 장소, 풍광의 생성과 소멸 그리고 재생 과정을 도시계획적 관점에서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잊고 지내 온 것들을 되새김하고자 한다. ■서울 2000년사 새로 써야 하나 미국의 도시설계가 케빈 린치는 “도시는 랜드마크(landmark)와 구역(district), 통로(path), 접점(node), 경계(edge)로 인지된다”고 ‘도시의 이미지’를 정의했다. 서울을 도시건축적 시각에서 보면 다섯 가지 키워드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본 서울은 만감이 교차하는 상념의 뿌리 같은 곳이다. 서울의 진짜 나이는 몇 살일까. 우리는 ‘서울은 600년 역사를 지닌 도시’라고 알고 있고, 서울을 소개하는 대부분 책에 그렇게 적혀 있다. 1978년 ‘서울 600년사’가 편찬됐고, 1994년에는 서울 정도 600년 행사를 성대하게 치렀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서울의 기원과 역사에 관한 정설은 흔들리고 있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는 2009년 ‘서울 역사 2000년’을 내놓으면서 서울의 공간을 확장했고, 역사도 1400년 늘렸다. ‘온조가 위례에 자리 잡았다’는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설화에 따라 서울의 기원을 기원전(BC) 18년으로 본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성백제시대 493년이 서울의 역사로 편입됐고, 한강 이남까지 영역이 확장됐다. 위례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겼으므로 백제 수도로서의 서울 역사는 500년 가까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석촌동 일대에는 백제 초기 적석총 10여 기가 남아 있는데 이 중 3호분을 13번째 왕 근초고왕(?~375)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곧 한성백제 493년에,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가 서울을 남경(南京)으로 삼은 기간까지 더하면 수도 서울의 역사는 물경 2000년에 이른다는 것이다. 로마, 아테네, 바빌론, 이스탄불, 다마스쿠스, 테베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의 반열이다. 900년 설도 있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18㎞ 사대문 안과 사방 십리(城底十里)를 의미하는데 위례는 경기도 지역으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울에 속한 곳이므로 역사적으로 전혀 다른 지역이라는 것이다. ‘오래된 서울’을 펴낸 최종현·김창희씨는 “서울의 기원을 위례에서 잡을 것이 아니라 고려 숙종의 남경 천도로 잡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숙종이 경복궁 근처에 남경행궁을 만들어 행차한 1104년을 서울의 기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서울의 역사는 919년이 됐다는 얘기다. 묵을수록 좋다고 하지만 서울의 나이를 무한정 늘리는 것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1392년 조선 건국과 한양 천도를 한민족 수도 서울의 주춧돌로 보는 것이 일반의 통설이다. ■고려 286년 동안 5차례 시도된 한양 천도 한양 천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얘깃거리가 많다. 고려 건국 후 서울은 양주(楊州)로 불렸으며 지방 호족이 할거했지만, 지정학적 중요성을 고려한 문종은 1067년 남경으로 승격시켰다. 개경(개성), 서경(평양)과 함께 고려의 3대 도시로 삼은 것이다. 한양 천도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 성공과 이에 따른 지배층 정리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역사 교과서는 소개하고 있지만, 천도는 고려 중기부터 끊임없이 시도됐음을 알 수 있다. 1308년 충선왕은 남경을 한양부(漢陽府)라고 고쳤다. 1357년 공민왕은 남경 천도를 본격화했다. 수도를 옮김으로써 국내외 혼란을 바로잡고자 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송도(개경)의 지덕이 다해 나라 안팎의 우환이 끊이지 않는다는 지리도참설이 도읍을 옮기도록 부추겼다. 1382년 우왕은 한양 천도를 단행했지만, 이듬해 개경으로 돌아갔다. 1390년 공양왕은 한양으로 옮기면서 백관들이 양쪽에서 나눠 근무하게 함으로써 6개월짜리 ‘반쪽’ 수도에 그쳤다. 천도는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지 3년 만인 1395년 6월 6일 한양부를 한성부로 바꾸면서 완성됐다. 고려의 한양 천도는 1104년 숙종 때 처음 시도된 이래 충선왕, 공민왕, 우왕, 공양왕 등 5명의 고려왕이 시도했지만, 무위로 돌아갔고, 결국 조선 태조에 의해 291년 만에 실행에 옮겨졌다. 고려왕조 476년의 절반을 넘는 286년 동안 고려의 마음은 개성을 떠나 한양을 기웃거렸다. ■‘서울특별시’의 탄생 비화 서울은 지명이 아니라 도읍을 이르는 용어다. 서울은 고려 때 한양으로 불렸으며 조선시대 공식 지명은 한성부(漢城府)였다. 중국이 지금까지 서울을 한성(漢城)이라고 호칭하는 까닭이다. 일제는 경성부(京城府)로 개칭, 경기도 내 행정구역의 하나로 깔아뭉갰다. ‘서울’이라는 지명은 1946년 8월 14일 미 군정청 특별발표에서 처음 등장한다. 손정목 전 시울시립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미 군정장관 아처 러치 소장이 광복 1주년 기념 선물로 서울을 경기도에서 독립시켜 특별시(영문 표기는 독립시)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서울특별시는 군정 법령의 효력이 발생한 1946년 9월 28일을 기해 공식 지명이 됐다. 서울 사대문 안이 미군의 무차별 공습에서 벗어나 문화재를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하게 된 비화도 전해진다. 한국전쟁 당시 주일대표부 전권공사를 지낸 김용주(1905~1985)는 ‘나의 회고록, 풍설시대 80년’에서 도쿄사령부로 맥아더 장군을 찾아가 설득한 경위를 밝혔다. 그는 5대 궁과 사대문을 포함하는 지역을 작전지도에 표시하면서 폭격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청했고, 맥아더는 “좋은 조언을 해 줘 대단히 기쁘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김용주는 후에 전남방직을 창업했고 경총회장을 지냈다. ■이중환은 ‘서울 택리지’를 어떻게 쓸까 나라에 사(史)가 있으면 고을에는 지(志)가 있다. 이것이 우리의 문화 전통이다. 지리지(地理志)는 지역의 역사, 지리, 인물, 풍속 등을 기록한 책이다. 지리지도 정사의 일부였다. 중국의 경우 반고는 한서(漢書)에 지리지를 포함했고, 삼국사기와 고려사도 각각 지리지를 갖추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이 펴낸 택리지(擇里志)는 동국여지승람과 함께 우리나라 지리지를 대표한다. 동국여지승람이 행정중심적 백과사전이라면 택리지는 생활권과 지역권의 시각으로 서술한 근대 지리학의 맹아라고 할 수 있다. 이중환은 30여년간 전국을 떠돌면서 살 만한 곳을 찾아 헤맸다. 공자가 논어에서 ‘군자는 살 만한 곳을 찾아 거한다(可居地)’는 그곳, 동양의 유토피아였다. 특히 사람이 살 만한 곳의 입지 조건으로 지리(地理)와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등 4가지를 꼽았다. 이중환은 살 만한 곳을 찾았을까? 택리지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신택리지’의 저자 신정일은 “끝내 살 만한 땅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서울은 살 만한 곳인가?’ 서울은 ‘연식’은 오래된 도시이지만 ‘마일리지’는 환갑을 넘지 못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다이내믹하게 변화한 도시다. 조선 말 20만명이 살던 도성은 해방 전후 100만명으로 늘어났고, 1990년 1000만명 시대에 접어들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것은 광적으로 서울에 몰렸다. 개발 연대기 서울 행정은 인구 분산과 교통난 해소, 택지개발, 아파트 건설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서울은 늘 만원이고, 늘 공사 중이었다. 개발의 와중에서 역사와 애환이 서린 ‘그때 그곳’은 보호받지 못했고, 달랑 표지석으로 남은 곳이 숱하다. 그런 서울이 사람 위주의 환경도시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개발 연대를 대표하는 청계고가의 철거와 청계천 복원이 터닝포인트였다. 2013년 서울은 수도권 주민 등 3000여만명이 드나들고, 대한민국 5000만 국민이 지향하며, 외국인 관광객 1000만명이 찾는 ‘동방의 메트로폴리스’가 됐다. 불과 반 세기 만에 일어난 경천동지할 변화다. 이중환이 현대 서울을 보았다면 택리지의 후편으로 ‘서울 택리지’를 집필했을 것이다. 그는 무엇이라고 쓸까. joo@seoul.co.kr
  • [서울신문 ·서울시의회 공동 4월 의정모니터] “2호선 ‘내선·외선’보다 역이름 안내를” “역사적 명소, 사진도 함께 설치했으면”

    [서울신문 ·서울시의회 공동 4월 의정모니터] “2호선 ‘내선·외선’보다 역이름 안내를” “역사적 명소, 사진도 함께 설치했으면”

    서울신문과 서울시의회가 함께하는 4월 의정모니터에 접수된 모니터 요원 399명의 의견이 시정에 반영될 수 있도록 서울시와 산하기관에 전달됐다. 심사를 통해 7건이 우수 의견으로 선정됐다. 김혜진(31·양천구 목5동)씨는 “지하철 2호선을 타다 보면 종착지 방향과 함께 ‘외선’과 ‘내선’ 열차가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오는데 이용할 때마다 혼란스럽고 초행길에는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면서 “주요 역의 이름을 이야기해 주면 더 편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의견을 냈다. 신정이(33·은평구 불광1동)씨는 “지하철 계단이 대부분 대리석으로 돼 있어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굉장히 미끄러워 낙상 사고 우려가 크다”면서 “장마철을 앞두고 지하철 계단에 미끄럼 방지시설을 모두 설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최순화(43·도봉구 방학동)씨는 “서울시와 자치구에서 각종 행사 때마다 시민들에게 기념 티셔츠를 나눠 주는데 홍보 문구가 너무 크게 들어가 있어 입지 않게 된다”며 “작게 넣거나 문구 스티커를 행사 종료 후 떼어낼 수 있도록 하면 평상복으로도 자유롭게 입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수희(39·구로구 오류2동)씨는 “시청에 들어선 서울도서관이 싸이 뮤직비디오 촬영 등으로 서울의 명소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데 도서관 이용객이 불편하지 않을 만한 로비나 복도 등에 관광객이 기념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포토존을 만들면 서울시 홍보도 할 수 있어 좋을 것 같다”고 밝혔다. 한종수(44·마포구 공덕동)씨는 “서울에는 역사적인 장소가 많아 표지석을 세우고 있지만 획일화돼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한다”면서 “사진을 확보할 수 있는 근현대 유적이나 인물과 관련된 표지석 옆에 사진 모형 등을 함께 설치하면 인상 깊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현석 기자 hyun68@seoul.co.kr
  • 서산 용유지… 늦바람 난 벚꽃

    서산 용유지… 늦바람 난 벚꽃

    호수가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물안개 피어오르고 신록과 봄꽃들이 주변을 예쁘게 장식합니다. 그 자태가 단풍 물든 가을 못지않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전국의 유명 호수들은 밀려드는 사진작가들로 몸살을 앓습니다. 충남 서산의 용유지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른 봄 풍경만 놓고 보자면 자태가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빼어나다는 곳이지요. 이맘때 용유지는 딱 그림 병풍입니다. 둥글고 얕은 구릉들이 사위를 감쌌고 벚꽃은 곳곳에 흐드러졌습니다. 쭉쭉 뻗은 메타세쿼이아와 편백나무들이 수직 세상을 펼쳐 놓으면 둥글게 휜 왕버들과 관목들이 어느새 균형을 맞춰 놓지요. 서산은 여느 지역에 견줘 벚꽃 개화가 늦습니다. 수종도 다양해 5월 중순까지 여기저기서 벚꽃이 피고 또 집니다. 시점만 잘 맞춘다면 늦바람 난 벚꽃에 흠뻑 취할 수 있습니다. 용유지의 봄 풍경에 매료된 이들은 한결같이 경북 청송의 주산지나 전남 화순의 세량제에 견줄 만큼 빼어나다며 상찬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도시인들이 절정에 이른 용유지를 보기란 쉽지 않다. 우선 벚꽃 개화 시기가 해마다 조금씩 다르다. 신록으로 물드는 시기도 마찬가지. 날씨도 변수다. 바람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물살이 일지 않아 명경지수가 펼쳐지고 주변의 모든 풍경들이 물 위로 수렴되는 진기한 장면과 조우할 수 있다. 해 뜰 무렵과 저물녘에 바람이 잦아들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절대적이진 않다. 이런 여러 조건들이 맞아야 명불허전의 용유지와 마주할 수 있다. 그러니 도시의 월급쟁이들이 몇년 내리 겨냥만 하다 포기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용유지는 흔히 용비지라 불린다. 표지석에 분명히 ‘용유지’(龍遊池)라고 음각돼 있지만 용비지란 이름이 더 흔하게 쓰인다. 용유지는 인위적으로 조성됐다. 저수지 주변에 자작나무와 메타세쿼이아, 편백나무, 벚꽃 등이 조화롭게 식재돼 있다. 다만 언제, 왜 축조됐는지는 불분명하다. 김재신 서산시 문화관광해설사 등에 따르면 1960년대 김종필 전 총리 주도로 삼화목장(현 농협 한우개량사업소) 등이 조성되면서 함께 축조됐을 거란 견해가 일반적이다. 강원 횡계의 대관령 목장을 닮은 이국적인 구릉지대가 운산면 일대에 형성된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야산의 나무를 베 초지대로 만들었고 산자락 중턱엔 “권력자의 별장으로 추정되는 건물”도 세웠다. 용유지 주변에 메타세쿼이아와 주목 등을 식재한 것도 별장이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용유지 또한 당시 나라를 쥐락펴락하던 ‘용’(龍)들이 ‘노닐기’(遊) 위해 지금의 모습으로 꾸며졌을 거란 추정이 설득력을 갖는다. 호수는 아름답다. 주변을 에두른 벚꽃이 절정의 자태를 뽐내고 자작나무와 편백나무, 삼나무 등도 신록의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연초록 초지대도 싱그럽다. 그 풍경들이 고스란히 물 위에 반영된다. 그야말로 기쁨 두 배다. 호수 주변을 자박자박 걸을 수도 있다. 눈엔 풍경을, 가슴엔 치유를 담는 산책로다. 호수는 출입이 금지된 영역이다. 소들이 풀을 뜯는 목장 안에 있기 때문이다. 구제역이 돌 때면 목장은커녕 마을 입구에도 발을 디딜 수 없다. 전염병이 돌지 않을 땐 출입 제한 조치가 상대적으로 완화된다. 문은 잠갔으되 문 옆 공간으로 사람이 들어가는 것은 막지 않는다. 이제 2~3년 내에 마음 편히 용유지를 볼 수 있게 될 전망이다. 현지 관계자는 “벚꽃이 피는 봄철에만 용유지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호수 주변에 관목 등으로 울타리를 쳐 방목 한우를 관광객들로부터 격리시킨다는 계획이다. 사실 한우개량사업소는 국내 씨수소의 정자 95%가 생산되는 곳이다. 김 해설사의 표현처럼 “주변에 암소가 있어야 수소의 정자가 잘 ‘영근다’ 해서 암소 축사를 따로 조성”할 만큼 공을 들이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소들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국내 한우 개량 사업도 막대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방문객의 세심한 주의가 요구되는 대목이다. 서산은 내포(內浦·충남 서북부) 불교문화의 성지와 같은 곳이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많은 절집과 불교 문화유산들이 늘어서 있다. 부처님오신날에 맞춰 서산을 돌아볼 예정이라면 단연 개심사가 첫손에 꼽힌다. 절집의 명물, 진분홍 왕벚꽃이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을 전후에 활짝 피기 때문이다. 여미리도 둘러보는 게 좋겠다. 지역의 향토 자원을 문화 공간으로 리모델링해 관광 자원화한 곳이다. 마을 정미소 자리엔 갤러리가 들어섰고 디미방에선 지역 특유의 맛깔스러운 음식을 내놓는다. 노란 수선화가 흐드러진 유기방 가옥과 고려시대 세워진 여미리석불입상, 300년 동안 마을을 굽어본 비자나무 등 볼거리도 많다. 서해안고속도로 서산 나들목을 나와 647번 지방도로를 타고 개심사·해미 방향으로 달리다 문수사 입구를 지나 첫 번째 마을에서 좌회전해 들어간다. 마을회관을 지나 11시 방향으로 난 농로를 따라 곧장 가면 용유지 제방이 보인다. 서산마애삼존불상, 개심사, 해미읍성 등이 다 이 지역에 몰려 있다. 가족들이 묵기 좋은 숙박업소를 찾는다면 최근 개장한 ‘백제의 미소’ 펜션(663-0890, 이하 지역번호 041)이 추천할 만하다. 너른 대지에 다양한 형태의 한옥들로 구성됐는데, 별채 형식의 독립된 공간에 황토방과 찜질방이 결합돼 있다고 보면 알기 쉽다. 요금은 인원에 따라 8만원부터다. 서산시 초입의 향토(668-0040)에선 서산의 전통음식인 우럭젓국과 꽃게장, 게국지를 세트 메뉴로 즐길 수 있다. 꾸덕꾸덕하게 말린 우럭에 무와 청양고추 등을 넣고 짭조름하게 끓여낸 우럭젓국, 말린 감태에 밥 한술 얹어 찍어 먹는 비릿한 꽃게장이 일미다. 서산시청 뒤 진국집(664-4994)은 토속 음식 게국지로 소문났다. 글 사진 서산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 설악산 대청봉은 양양땅!

    행정구역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던 강원 설악산 대청봉이 양양군 산1번지로 최종 승인됐다. 강원도는 22일 양양군을 비롯해 인제군과 고성군, 속초시가 인접한 경계지점에 있어 그동안 설악산의 주봉이며 상징인 대청봉이 양양 오색리 산1-24였음에도 행정구역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아 새롭게 지번을 변경, 승인했다고 밝혔다. 대청봉 임야는 그동안 각종 개발사업 등으로 토지가 분할되면서 지번이 불합리하게 설정돼 주변 자치단체들이 서로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에 따라 도는 논란을 잠재우고 토지 정보 제공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양양군의 지번 변경을 받아들였다. 이 같은 조치로 양양군은 명실상부한 설악산 대표 지자체로 자리를 굳혀 청정 환경을 강조하는 이미지 구현 사업은 물론 각종 브랜드 개발과 농특산물 통합브랜드에도 활용해 나갈 계획이다. 또 이번에 지번이 변경된 만큼 지번 내 16건의 사용허가지에 대해서는 정리된 지적공부를 교부하고 건축물대상이 존재하는 중청대피소는 소관부처인 환경부와 협의해 정리해 나갈 방침이다. 설악산 대청봉은 양양 8경 중 제2경으로 지정돼 있고 1986년 설치된 ‘양양이라네’라는 글자가 새겨진 표지석은 관광객들의 포토존으로 활용되고 있다. 양양군 관계자는 “불합리한 지번 변경을 요구하는 주민들의 건의가 받아들여진 만큼 군민들의 역량을 모아 양양군이 설악을 무대로 다시 한번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양양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봄과 겨울 사이-가평 보납산·북한강

    봄과 겨울 사이-가평 보납산·북한강

    설리춘색(雪裏春色). 봄은 이미 눈 아래 당도해 있다는 뜻이랍니다. 엄혹했던 계절이 지나고 봄이 발 아래까지 차오른 이맘때를 일컫기 적합한 표현이겠습니다. 경기 가평의 보납산(寶納山·330m)을 다녀왔습니다. ‘뒷동산급’의 높이에 ‘국립공원급’의 풍경을 매달고 있는 산이지요. 푸름은 아직 일러 당도하지 않았지만, 그 산에서 본 북한강엔 봄빛이 완연했습니다. 눈 녹은 물 흘러가는 가평천의 버들강아지는 꽃망울을 틔웠고, 나무들마다 봄물 올라 불그레해진 가지를 매달고 있었습니다. 가평은 산이 많다. 경기도 최고봉인 화악산(1468m)을 비롯해 명지산(1267m)과 석룡산(1147m) 등 높고 빼어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종종 ‘녹색백화점’이라고 불리는 것도 그런 이유다. 청평, 대성리 등 중·장년층이 청춘의 기억을 묻어둔 여행지들도 즐비하다. 전철도 놓였다. 상습적인 교통정체를 피할 수 있게 된 것. 가평 관내 여행지를 촘촘하게 잇는 경춘선은 요즘 ‘인기 폭발’이다. 주말이면 객차 안은 행락객들로 발디딜 틈을 찾기 쉽지 않다. 하지만 여럿이 부대낀들 어떠랴. 길 위에서 시간을 버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보납산은 낮다. 북한강과 가평천의 합수머리에 불쑥 솟았다. 산을 즐기는 이들의 시선에서 보자면 딱 마을 뒷산이다. 가평 주민들도 곧잘 운동 삼아 오르내릴 정도다. 한데 정상에서 보는 조망만큼은 국립공원 뺨친다. 굽이쳐 흐르는 북한강의 자태는 물론 마루금을 좁힌 주변 산자락들의 위세도 남다르다. 산행 들머리는 가평역이다. 북한강을 휘휘 돌아 보납산으로 향하는 코스다. 승용차라면 보납산 입구까지 쉬 가겠지만, 그 차이는 불과 한 시간 남짓이다. 특히 북한강변을 자박자박 걸으며 맞는 봄의 훈풍은 값으로 따질 수 없다. 가평역에서 내려 물안길, 이른바 ‘가평 올레길’에 오른다. 가평읍 주변을 에두르는 길이다. 그 가운데 1코스로 방향을 잡는다. 해마다 재즈 축제가 열리는 자라섬을 돌아보는 길이다. 자라섬은 줄달음치던 북한강이 춘천 끝자락, 그러니까 가평 초입에 이르러 숨 한 자락 내쉬며 만들어 놓는 반달모양의 예쁜 섬이다. 자라목처럼 생겼다 해서 이름지어졌다. 이름과 달리 뭍과 연결돼 있어 고립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예전엔 ‘중국섬’이라고 불렸다. 해방 이후 중국인 몇 명이 이 섬에서 농사를 지었기 때문. 그 이전에는 이름조차 없었다. 이웃한 남이섬보다 전체 면적은 넓지만 많은 비가 내리면 섬 일부가 물에 잠긴다는 단점 때문에 그동안 버려지다시피 했다. 그러다 2004년 국제재즈페스티벌이 열리면서 가평의 랜드마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자라섬은 동도, 서도 등 4개 섬으로 이뤄져 있다. 서도에는 오토 캠핑장이 조성돼 있다. 캐러밴사이트, 오토캠핑 등 하루 최대 1500여명이 머물 수 있는 시설을 갖췄다. 또 다목적 운동장과 인라인장, 자전거대여소 등의 놀이시설도 마련돼 있다. ‘오토캠핑의 성지’다운 풍모다. 자라섬 초입의 자연생태테마파크 ‘이화원’(二和園)도 둘러볼 만하다. 국가 간(한국·브라질), 지역 간(수도권, 영호남, 지방) 화합을 꾀한다는 큰 화두가 이름에 담겼다. 경남 하동의 녹차나무, 전남 고흥의 유자나무 등 영호남의 식물과 커피나무 등 브라질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수목들이 온실 속에 식재돼 있다. 자라섬 강변길에서 맞는 바람이 싱그럽다. 바람 끝에 머물던 겨울의 결기는 사라졌고, 그 자리에 촉촉한 봄내음이 가득 찼다. 북한강물은 장판을 깐 듯 잔잔하다. 주변의 모든 풍경들이 물 위에 수렴된다. 그야말로 명경지수다. 봄날의 수채화를 그린다면 딱 이런 모습일 게다. 자라섬을 나와 가평교를 건너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은 가평천 산책로, 오른쪽은 보광사로 향하는 길이다. 어느 길로 가도 보납산 정상에 오를 수 있지만, 가급적 보광사 코스를 이용하길 권한다. 산길이 완만하고 한결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왼쪽 길을 따르는 사람들도 많다. 정상으로 곧바로 오르는 급사면의 지름길이다. 종종 심술궂은 코스와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고도 차에 따른 조망의 변화는 빼어나다. 보납산을 말할 때 조선 최고의 서예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한석봉을 빼놓을 수 없다. 등산로 안내판에 따르면 한석봉은 선조 32년(1599년) 가평군수로 내려와 보납산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한석봉은 유난히 보납산을 아꼈다고 한다. 그의 호인 석봉(石峯)도 전체가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보납산에서 따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보납산이란 이름도 그가 가평을 떠나며 아끼던 벼룻돌과 보물을 산에 묻은 데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후대에 ‘스토리텔링’이 덧씌워졌다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한때 그가 묻었다는 벼루 등을 찾겠다며 사람들이 찾아오는 등 작은 소동이 일기도 했단다. 보광사 초입에서 오른쪽 산길로 방향을 잡는다. 이리저리 휘고 굽은 산길이 제법 가파르다. 밭은 숨 몇 번 내쉬고 나면 정상이다. 노송 몇 그루가 벼랑 위에 매달려 있고, 주변에 목재 데크를 깔아 전망대를 조성해 뒀다. 예서 맞는 풍경이 장관이다. 봄빛 머금은 북한강이 물돌이동처럼 돌아가고, 강줄기 너머로 강원의 산들이 마루금을 좁히고 섰다. 노루의 뿔처럼 솟은 물안산이 손에 잡힐 듯하고, 삼악산과 굴봉산도 아련하다. 오래전 유행했던 광고문구처럼 ‘작은 산 큰 기쁨’이다. 전망대에서 정상 표지석까지는 10m 남짓. 예서 보는 풍경도 빼어나다. 가평천과 북한강의 합수머리, 가평 시가지, 자라섬, 그리고 유명산 등 가평 이남의 산들이 한눈에 들어찬다. 보납산은 정상 조망을 즐긴 뒤 원점회귀하는 가벼운 산행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자주 등산을 즐기는 이들에겐 싱거울 수 있다. 마루산(425m)이나 북쪽 물안산(443m)으로 이어지는 능선 종주를 즐기는 산꾼들이 느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앙상한 나뭇가지 너머로 검푸른 북한강과 동행할 수 있다는 건 이 계절만의 호사일 터. 야트막하게 이어진 잣나무 숲길을 따라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영화 ‘밀러스 크로싱’(1990)의 도입부를 떠올리게 하는 숲길이다. 겨우내 푸르렀을 잣나무 아니던가. 언제든 곁을 내주는 나무가 새삼 고맙다. 글 사진 가평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지역번호 031) →가는 길 서울 용산역, 청량리역에서 ITX-청춘을 타고 가평역까지 간다. 40분 안팎이면 닿는다. 서울 지하철 7호선 상봉역 또는 국철 망우역에서 경춘선으로 환승해 갈 수도 있다. 가평역에서 보광사 입구까지는 택시로 10분가량 걸린다. 승용차로 갈 경우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퇴계원나들목→46번 국도→가평, 또는 올림픽대로→팔당대교→45번 국도→샛터삼거리→46번 국도→가평순으로 간다. →맛집 가평과 청평, 설악 등 가평 관내 곳곳에 있는 한우명가는 가평축협에서 직접 운영하는 음식점이다. 1등급 이상의 가평 한우만 사용한다. 584-4220. 특산물 잣을 이용한 요리집도 많다. 명지쉼터가든(582-9462)은 잣국수, 잣손두부집(584-5368)은 두부 요리로 많이 알려졌다.
  • [기고] 독서당의 복원을 바란다/고재득 서울 성동구청장

    [기고] 독서당의 복원을 바란다/고재득 서울 성동구청장

    수백년 전 우리나라에는 요즘 직장인들에겐 꿈 같은 이야기로 들릴 제도가 있었다. 나라에서 관료들에게 길게는 2년 이상의 휴가를 주며 책을 읽게 한 것이다. 책 구입 비용, 의복, 음식, 어주(御酒)까지 내리며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경치 좋은 한적한 곳에서 조용히 책을 읽으라며 공간까지 따로 마련해 줬다. 안식년의 효시인 셈이다. 15세기 세종은 집현전 소속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줘 독서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하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실시하고, 관료들에게 삶의 지혜와 국민의 마음을 이해하는 통찰력을 책을 통해 배우게 했다. 흔한 ‘자기계발서’ 수십 권을 읽는 것보다 훨씬 마음에 와 닿는 제도다. 성종 때는 사가독서제를 바탕으로 인재들이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을 설치했다. 바로 독서당(讀書堂)이다. 조광조, 성삼문, 서거정, 기대승 등 조선을 이끈 걸출한 인물들은 모두 독서당을 거쳤다. 독서당은 그 존재만으로도 왕들이 독서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21세기 지식기반사회를 이끄는 핵심은 창의력과 사고력이며, 이를 갖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바탕은 독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지난해는 정부가 정한 독서의 해였지만 실제 성인 독서량은 2007년 이후 계속 떨어지고 있다. 2011년 기준 국민 독서량은 연간 9.9권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다. 주요 선진국에 비해 극히 낮은 수준인 공공도서관(759개)도 더욱 확충하고 실질적인 정책을 세워 지식기반사회의 핵심 인재를 기르는 데 힘써야 할 때다. 330년의 역사 독서당 복원은 큰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인재 양성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긴 또 다른 국립도서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대 흐름에 맞춰 독서당을 새로 세워 공공기관을 비롯, 민간 기업의 인재들까지 책을 통해 창의적 사고력 획득뿐만 아니라 재충전의 기회를 갖도록 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성동구에는 중종 때 옥수동 한강 어귀에 세운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 있었다. 1989년 서울시에서는 ‘독서당 표지석’을 설치했다. 구청은 2009년 표지석을 새롭게 정비해 뜻을 기리고 있다. 지난해에는 최초의 호당(湖當) 권채의 후손 80여명이 독서당 복원을 간곡히 촉구하는 청원서를 보내오기도 했다. 그러나 문화시설의 건립은 정부가 주체가 돼 적극 나서줘야 실현 가능하다. 물론 성동구도 적극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을 계획이다. 현재 전문가 중심으로 독서당 위치에 대한 정확한 고증 등 세부계획을 마련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중요한 인재양성기관이었던 독서당이 새로 들어선다면 지식기반사회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옛 선조들의 역사성과 교육성을 되새겨 국민의 자긍심을 높이고 인재 육성의 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계사년 새해 벽두에 희망한다.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30·끝) 전북 전주 권삼득路

    [길을 품은 우리 동네] (30·끝) 전북 전주 권삼득路

    전북 전주시 완산구 권삼득로에는 예술과 문화의 맥이 흐르고, 전주와 전북 젊은이들의 긍지와 활력이 넘쳐난다. 전주고와 전북대 등 인재의 산실이자 판소리와 창(唱)의 고장, 전주의 진면목를 보여주는 도립국악원과 예술회관이 이 길을 따라 있고, 전주의 주요 공연장 중 하나인 삼성예술회관도 위치해 있다. 지난해 새로 지어진 전북대 박물관도 권삼득로에 붙어 있다. 전주와 전북의 주요 교육기관과 문화·예술 공연시설들이 이 길을 따라 포진해 있는, 교육·문화·예술의 메카다. 총연장 4662m. 10리도 넘는 길인 만큼 구간구간 성격도 다르다. 중노송동의 전주고에서부터 덕진동 2가 전주천 앞의 호반촌까지 남북으로 뻗어 있다. 새 주소길로 다시 이름 붙여지기 전까지는 남북로라고 불린 것도 이 때문이다. 전주 동부지역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주축 도로인 기린로 동쪽에 위치해 있다. 권삼득로는 기린로와 철로의 양축을 이루듯 나란히 남북을 횡단하며 구도심의 측면을 잇고 있다. 4차선이라 해도 될 너비의 2차선으로 시작되지만 오르내림을 거듭하다가 전주사람들의 대표적인 휴식처인 덕진 공원에 이르게 될 무렵에는 4차선으로 넓어진다. 폭이 넓다고 하기 어렵지만 길이는 주축도로인 기린로에 못지않게 길어 이용량과 통행량이 적지 않고 활기차다. ●10리도 넘는 길… 구간구간 성격 달라 ‘호남 인재의 산실’ 전주고 앞에서 시작되는 길은 금암초등학교, 옛 KBS전주 총국 등을 지난다. 백제대로가 동서로 가로지르기 직전인 전북은행 본점 앞까지 권삼득로의 전반부는 주거지와 상가가 뒤섞여 있는 구시가지의 여느 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서민들의 애환이 담겨 있다. 주택들과 함께 건축자재점, 점집, 목욕탕, 모텔, 광고대행사, 조경업체, 꽃집 등이 아무런 연관성 없이 늘어서 있다. 안덕원길과 사거리를 이룬 뒤 권삼득로는 전주의 두 번째 큰 재래시장인 모래내시장 옆을 비켜 간다. 지안, 완주, 고산, 소양 등 전주 주변의 촌사람들이 산야채며 농산물 등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 내다 파는 정겨운 서민들의 교류지다. 백제대로를 넘어 전북대 교정을 서쪽으로 끼고 종단하면서 이 길은 확연한 교육과 문화, 예술의 길 성격을 드러낸다. 전북대 박물관, 삼성예술회관 등으로 진행된다. 전북대 옛 정문 앞으로는 전주의 대학로인 명륜길이 젊음과 열정을 뽐내며 권삼득로와 조우한다. 밤에도 삼삼오오 짝지어 다니는 학생들도 가득찬 이곳에는 커피숍, 책방, 휴대전화 상점, 미용실, 잡화점, 음식점 등이 밤을 잊은 채 불빛을 빛내고 있었다. 전북대 옛 정문을 따라 북쪽으로 길을 재촉하다 보면 4·19 혁명 때 전북대생들의 피끓는 열정을 기억하는 기념 표지석이 서 있고, 반대편에는 전북보훈회관(권삼득로 285번) 등이 나타난다. 이어 덕진 공원, 도립국악원, 덕진예술회관이 모여 있는 지역에 이르면 이 길은 판소리의 고장, 예향 전주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국악원과 예술회관을 지나노라면 어느 예인의 노랫소리인지 궁금케 하는 판소리 가락들이 흘러나오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네들과 노인들의 분주한 발길과 접하게 된다. 목요 상설공연 등 해마다 100회 이상의 각종 공연을 실시하고 있다는 도립국악원은 판소리와 멋의 고장 전주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는 자부심이 넘치고 있었다. 덕진 공원과 국악원 블록을 지나면 이름있는 부촌이던 호반촌이 나온다. 권삼득로의 막바지에는 지난 9월에 문을 연 도립문학관이 정읍사와 서동요의 고향임을 일깨우고 있었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를 기리는 혼불문학공원도 지척에 있었다. 문학관 부지는 1980년대 대통령이 내려와도 묵고 갈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하게 지어졌던 도지사 관사가 있었던 곳이다. 한때 전북예술회관 분관과 전북외국인학교로 이용되다가 도립문학관에 자리를 내줬다. ●후백제·조선 등 유구한 역사의 배후지 권삼득로란 이름이 새주소 사업으로 붙여지게 됐지만 이 길을 둘러싼 주변 지역에는 유구한 역사를 증언하는 명소가 널려 있다. 견훤의 후백제와는 뗄 수 없는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다. 전주고 남측 담을 경계로 물왕멀 마을이 펼쳐지는데 견훤이 쌓았던 내성과 도읍지가 있던 곳이다. 전주고와 전주동초등학교 사이의 물왕멀은 물왕마을의 준말로 무랑물, 무랑말, 수왕촌(水王村) 등으로 불렸다. “견훤이 물 좋은 물왕멀의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궁궐을 짓고, 방어선을 쳤다.”고 사서들은 전했다. 지금도 후백제 시대 와당 파편이 발견되고 있다. 지금은 비어 있는 금암동 옛 KBS전주 총국 입구에는 거북모양의 커다란 화강암 바위가 보인다. 견훤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이 바위는 30여년 전만 해도 지역 수호의 상징이자 민간신앙의 대상이었다. 두툼한 돌거북이 산을 타고 올라가는 형상이다. 사신신앙(四神信仰)에서 북현무(北玄武)는 왕권의 상징이며 사방수호의 의미를 갖는다. 전주 북쪽의 ‘금암동 돌거북’은 견훤의 역사와 함께 전주를 지키려는 고인들의 바람이 담겨 있다. 조선시대 왕실 유적과 사연들도 권삼득로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덕진 연못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작은 연못을 이씨 왕실의 발원지인 전주의 북서방향의 지기가 허하다고 해서 제방을 쌓아 물을 늘려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 ‘완산팔경’의 하나였던 덕진 연못은 덕진 공원의 중심부를 이룬다. 단옷날 연못 부근 덕진교 아래에 부녀자들은 부끄러움도 잊은 채 웃옷을 벗고, 몸을 씻고 머리 감는 보기 드문 장면이 펼쳐졌던 곳이다. 공원 후문 건너 건지산 줄기에는 전주이씨 시조묘를 모신 조경단 등 왕실과 관련된 자취들이 남아 있다. 과거 왕실의 기를 북돋는다는 의미로 지어졌던 승금정(勝停)은 지금은 전주 이씨 종친회 건물로 쓰이는 화수각(花樹閣)으로 바뀌어 공원을 굽어보고 있었다. 글 사진 전주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도움말:김진돈 전주문화원 사무국장·이강식 전주시청 도시과 주무관
  • 낡은 길에서 만난 강릉의 겨울

    낡은 길에서 만난 강릉의 겨울

    “너무 빨리 달리면 경치만 놓치는 것이 아니다. 어디로, 왜 가는지도 놓치게 된다.” 중앙고속도로 안동휴게소의 한 액자에 담긴 글입니다. 빨리 달리기 위해 만들어진 고속도로에서 듣는 역설입니다. 요즘 힐링이 유행이지요.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치유하자’(Heal the World)고 노래한 이후 가장 많은 이들의 입을 통해 가장 자주 듣는 단어가 된 듯합니다. 힐링에 왕도가 있을라고요. 일상을 구속했던 빠름을 버리고 느린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게 첫 단추 아닐까요. 그래서 이번엔 낡은 길을 택해 강원도 강릉으로 향합니다. 초록빛 생명력을 잃고 을씨년스럽게 변한 안반데기(강릉 왕산면 대기리의 고랭지 재배단지)를 자박자박 걸어 보고 건장한 사내들이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신작로’ 뒤편의 황태덕장에도 기웃대 봅니다.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구간을 구불구불, 느릿느릿 오가는 맛도 각별합니다. 그 길에서 만난 자작나무의 수피는 참 화사했지요. 그리고 마주한 강릉 바다. 그 시리도록 파란 바다 앞에 서면 저절로 색안경을 벗게 됩니다. 맨눈으로 세상을 볼 시간도 많지 않은데 선글라스를 끼고 보기엔 세상의 빛이,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기 때문일 겁니다. 낡은 길을 택하면 종종 뜻밖의 풍경과 마주하는 행운도 생긴다. 한때 강릉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던 영동고속도로가 그 예다. 요즘은 그 지위를 새로 난 고속도로에 내주고 지방도로 ‘경강로’로 내려앉았다. 이름은 바뀌었으되 대관령을 구불구불 내려가는 모양새는 그대로다. 예전에 견줘 오가는 차량도 확 줄었으니 그야말로 적막한 시골 산길이다. 굳이 서둘러 강릉에 도착할 이유가 없다면 이번 여행길엔 옛 영동고속도로를 택하는 건 어떨지. ●넉넉한 풍경을 선사하다 영동고속도로 횡계나들목을 나와 용평리조트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목적지는 ‘안반데기’(안반덕)다. ‘안반(案盤)덕’의 사투리가 정식 이름으로 굳어진 특이한 이력을 가진 마을이다. ‘안반’은 떡메로 반죽을 내리칠 때 쓰는 오목하고 넓은 통나무 받침판, ‘덕’은 고원의 평평한 땅을 뜻하니 우묵한 고지대에 터를 잡은 마을이란 의미다. 안반데기는 1100m 산자락에 독수리처럼 날개를 펼쳤다. 대표 아이콘은 배추밭. 한여름 출하 시기엔 마을 북쪽 고루포기산에서부터 남쪽 옥녀봉에 이르는 198만㎡(약 60만평) 산자락이 배추로 가득 찬다. 태백의 매봉산 풍력단지에 견줄 만한 풍경이다. 그 덕에 ‘구름 위의 땅’이란 예쁜 별명까지 얻었다. 초겨울 안반데기 풍경은 을씨년스럽다. 배추가 출하돼 푸른 빛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엔 황톳빛만 남았다. 그늘진 자리엔 채 녹지 않은 첫눈의 흔적이 어지럽다. 그런데 그게 나쁘지 않다. 생동감은 자취를 감췄으나 대신 적막감을 얻었다. 안반데기에서 횡계 읍내를 되짚어 나와 옛 영동고속도로로 향하는 길. 양편에 대관령 특유의 풍경이 펼쳐진다. 소나무 한두 그루 서 있는 야트막한 산들은 죄다 누런 겨울옷으로 갈아입었다. 거친 외모의 사내들이 한겨울 장사를 위해 황태덕장을 손보는 모습에선 겨울 정취가 물씬 풍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자작나무 숲이다. 초겨울 파란 하늘과 백색의 수피가 기막히게 잘 어울린다. 옛 영동고속도로를 따라 대관령 넘어가는 길은 강원도 굽이길의 진수다. 어찌나 지대가 험한지 대굴대굴 굴러간다 해서 ‘대굴령’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 길에서 맞는 풍경이 장쾌하다. 강릉 시가지가 아련하고 그 너머로 동해가 넓고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오래 묵은 길이라야 선사할 수 있는 빼어난 풍광이다. 대관령 표지석이 있는 옛 대관령 하행휴게소 주변, 그리고 대관령 옛길과 옛 영동고속도로가 만나는 반정에 전망대가 조성돼 있다. 강릉 초입에서 옛 영동고속도로는 7번 국도와 만난다. 우리나라의 등줄기를 잇는 7번 국도 주변에 기막힌 풍경들이 널려 있다는 건 이제 상식에 속한다. 언제 가서 어떻게 풍경을 즐길 것인지가 다를 뿐이다. 그 가운데 겨울이면 유난히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는 곳이 정동진이다. 사계절 많은 이들이 즐겨 찾지만 한 해가 마무리되는 연말이면 더욱 분주해진다. 정동진의 상징과도 같은 해돋이 풍경과 만나기 위해서다. ●시리도록 파란 정동진의 바다 온 나라가 도보길 천지인데 강릉이라고 없을까. 낭만가도, 해파랑길, 바우길 등 이름만 달리한 여러 길이 강릉 해안을 지난다. 그 가운데 정동진을 출발해 옥계시장에서 끝나는 멋진 길이 있다고 했다. 한 사설 단체가 강릉의 산과 바다를 묶어 만든 ‘바우길’이다. 정동진~옥계 구간은 그중 ‘바우길 9코스’에 해당한다. 9코스는 ‘헌화로 산책길’이라 불린다. 정동진역을 출발해 모래시계공원→기마봉 초입 소방파출소→곰두리연수원 입구→심곡항→금진항→한국여성수련원→동해고속도로 옥계나들목→옥계시장 순으로 간다. 거리는 14㎞. 6~7시간 정도 소요된다. 들머리는 정동진 해변이다. 명불허전의 해돋이 풍경과 마주한 관광객들로 이른 아침부터 해변 전체가 부산하다. 모래시계공원과 해양파출소 등을 줄줄이 지나면 기마봉 등산로가 있는 소방파출소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제법 가파른 산길이 시작된다. 전신주나 나무 등 도보꾼들의 시선이 머물 만한 곳에 바우길 고유의 표지판이 붙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지루하게 이어지던 산길은 심곡항에서 끝난다. 심곡항은 조용하고 작은 포구다. 고개 너머 번잡한 정동진에 견줘 믿기지 않을 만큼 소박하다. 마을 끝자락에 전망대가 조성돼 있다. 노송이 사방을 감싼 틈새로 동해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초겨울에 걸맞은 잉크빛 바다다. 만지면 묻어날 것 같은 파란색에서 차다 못해 시린 결기마저 느껴진다. ●꽃을 사랑하는 여인·꽃을 꺾는 사내 심곡항에서부터 헌화로 산책길의 진수 ‘헌화로’가 시작된다. 심곡항과 금진항을 왕복 2차선으로 잇는 도로다. 거리는 2㎞ 남짓. 한쪽은 기암절벽, 다른 한쪽은 파란 바다와 접해 있다. 바다와 워낙 가까워 파도가 거센 날이면 진입이 통제되기도 한다. 길 이름의 모티브는 신라 성덕왕 때 지어진 향가 ‘헌화가’(獻花歌)다. 내용이야 익히 알려져 있다. 신라시대, 경국지색의 용모를 가진 수로 부인이 강릉 태수를 제수받은 남편 순정공과 함께 ‘7번 국도’를 따라 부임지로 향하던 길이었다. 수로 부인이 해안가 천길단애에 핀 철쭉꽃을 보며 누군가 저 꽃을 꺾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혼잣말을 했다. 마침 암소를 몰고 지나던 한 노인이 선뜻 나섰고 그가 꽃을 꺾어 바치며 부른 노래가 헌화가다. 길 이름은 바로 이 옛이야기에서 따왔다. 인접한 삼척시 해안 절벽에도 같은 전설이 전해져 온다. 오래전부터 수로 부인 공원을 조성하는 등 공을 들였던 삼척시로서는 당혹스러울 법도 하다. 금진항에서 옥계시장까지의 구간에도 절경이 늘어서 있다. 다만 덜 알려졌을 뿐이다. 특히 금진항은 해거름에 찾는 게 좋다. 포구 앞바다를 빨갛게 물들이는 해넘이 풍경이 정말 빼어나다. 글 사진 강릉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33) ▶가는 길: 안반데기에 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다. 횡계에서 도암댐을 거쳐 오르는 방법과 옛 영동고속도로 끝자락, 그러니까 강릉 초입에서 닭목령 등을 되짚어 오르는 방법이 있다.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횡계나들목을 나와 용평리조트 쪽으로 방향을 잡은 뒤 리조트 입구 삼거리에서 도암댐 방면으로 직진한다. 도암댐에 못 미쳐 왼쪽 고갯길로 가면 된다. 아스팔트 길이라 일반 승용차로도 거뜬히 올라갈 수 있다. 옛 영동고속도로는 횡계 읍내를 빠져나오자마자 양떼목장 방향으로 우회전해 곧장 간다. 길 왼쪽으로 자작나무 군락지가 펼쳐진다. 정동진은 456번 ‘경강로’ 끝자락에서 35번 국도, 강릉시청 앞에서 7번 국도로 갈아탄 뒤 염전해변 방향으로 간다. 염전해변부터 정동진까지 해안도로를 따라 하슬라 아트월드, 등명락가사 등이 늘어서 있다. 강릉터미널에서 정동진까지는 오전·오후 각 4회, 모두 8회 시내버스가 운행된다. 강릉 시내 신영극장 앞에서도 정동진행 버스가 있다. 종합관광안내소 640-4414, 4531. ▶맛집: 강릉엔 유난히 커피 전문점이 많다. 전국의 이름난 바리스타들이 강릉으로 이주하면서 생긴 독특한 지역 문화다. 영진해변에 커피 전문점이 밀집돼 있는데 특히 ‘카페 보헤미안’은 재일 교포 출신의 바리스타가 직접 내려주는 드립 커피로 이름났다. 662-5365. 월·화·수요일은 영업을 하지 않는다. 요즘 제철 먹거리는 도루묵이다. 이른 아침 금진항 등 포구 주변 밥집을 찾으면 어디서든 싱싱한 도루묵찌개와 구이를 맛볼 수 있다. ▶잘 곳: 여럿이 동행한다면 경포대에 최근 문을 연 라카이샌드파인 리조트가 좋겠다. 지난 7월 문을 열어 깔끔하고 쾌적하다. 1644-3001. 금진항 주변에선 일출펜션마을이 깨끗하다. 산자락에 터를 잡아 전망도 좋다.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98) 청송 관리 왕버들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98) 청송 관리 왕버들

    나무가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면 사람들은 사진을 찍는다. 이 같은 자연스러운 행동을 스위스 태생의 영국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책 ‘여행의 기술’에서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는 본능적 욕구의 발현’이라고 했다. 덧붙여 그는 아름다움을 제 안에 온전히 담는 방법으로 순식간에 완성되는 사진보다 데생이 더 효율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긴 시간 동안 바라봐야 하기에 자연스레 마음 깊숙이 풍경을 담아둘 수 있다는 데에 근거한 이야기다. 그는 마침내 “그림을 배우기 위해 자연을 보라고 가르치기보다는 자연을 사랑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라.”는 존 러스킨의 말을 인용하며 아름다움을 소유하는 방법에 대한 에세이를 마무리했다. ●사라진 청송 지역의 자랑, ‘만세송’ “이 자리에 왕버들과 함께 서 있던 소나무가 청송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소나무라는데 그게 없으니 아무래도 허전해요. 더구나 청송 지역의 상징이 소나무라잖아요.” 시간의 흐름을 그림에 담아내는 젊은 화가 이장희(39)씨가 청송 관리 왕버들에 내려앉은 세월의 흔적을 그림에 담아낸 뒤 던져 온 이야기다. 천연기념물 제193호인 청송 관리 왕버들은 그의 이야기처럼 바짝 붙어 있던 ‘만세송’과 함께 바라보는 느낌이 독특한 나무였다. 왕버들과 소나무를 그리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할 수야 없지만 이 마을에서 두 나무의 어울림은 절묘했다. 넓은 품을 가진 왕버들 곁에서 소나무는 곧게 뻗은 줄기가 훌쩍 솟구친 채 개울가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왕버들이 초록 잎을 내려놓으면 소나무의 푸름이 도드라졌고 봄이 돼 왕버들에 물이 오르면 소나무는 생명이 약동하는 소리가 잦아든 채 다소곳이 왕버들 가지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마치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부부처럼 자연스럽고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문화재청에서 왕버들 앞에 천연기념물임을 알리는 근사한 입간판을 세우자 청송군에서는 ‘만세송’(萬歲松)이라는 소나무의 이름을 또렷이 새긴 비석을 소나무 앞에 보란 듯이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청송의 자랑이기도 했던 만세송이 싹둑 잘린 밑동만 남긴 채 왕버들 곁을 떠났다. 뎅그렇게 만세송 표지석만 남아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풍경이 화가의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는 임 그리워 “2008년 봄이었죠. 만세송에 좀나무병이 들었어요. 반드시 살릴 생각으로 대여섯 달 동안 애를 썼지만 방법이 없더군요. 할 수 없이 베어냈지요. 만세송 표지석은 진작에 철거하려 했는데 아쉬움이 남아 미적거리다가 여태 그대로 두게 된 겁니다.” ‘군목’(郡木)으로 보호하던 나무를 잃게 돼 아쉽다며 청송군청 문화관광과의 문화재담당 우용훈(52)씨도 안타까움을 털어놓았다. 군청에서는 만세송에서 받은 솔씨로 후계목을 키워 만세송이 서 있던 자리 옆에 심어놓았지만 아직 어린 나무에 불과한 탓에 살아있을 때의 만세송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만세송의 부재가 더 안타까운 것은 왕버들과 한 쌍을 이루며 전해 오는 전설 때문이기도 하다. 옛날 이 마을에는 채씨(蔡氏) 성을 가진 처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전쟁터에 나가게 되자 처녀를 좋아하던 한 총각이 아버지 대신 전쟁에 나가기를 청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와 혼사를 치르겠다는 약속을 전제로 한 제안이었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총각은 처녀와 이별 인사를 나누며 이 자리에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올 때까지 나무를 보며 자신을 잊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심은 나무가 지금의 관리 왕버들이다. 처녀는 혼인을 위해 목숨까지 던진 총각의 열정에 감동해 그를 기다리며 왕버들을 정성껏 보살폈다. 나무는 부쩍부쩍 자랐고 얼마 뒤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날이 가고 달이 지나도 총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처녀는 타오르는 그리움을 견디지 못한 채 그새 훌쩍 자란 나무에 목을 매 목숨을 끊었다. 처녀가 죽은 자리 곁에는 얼마 뒤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 처녀의 한 많은 죽음을 지켜주었다. 만세송이 그 나무다. 전설처럼 왕버들과 만세송은 처녀 총각이 살아생전에 이루지 못한 인연을 나무가 되어 이루는 듯한 형상으로 오랫동안 사이좋게 그 자리를 지켜 왔다. ●원래 크기의 절반을 잘라낸 고통도 겪어 마을 어귀 길목에 서 있는 당산나무로 사람들이 정월대보름에 꼬박꼬박 당산제를 지낸 왕버들은 문화재청에서 공들여 관리하고 있다. 키 10.2m, 가슴높이 줄기둘레 6.5m에 이르는 관리 왕버들은 특히 사방으로 뻗은 가지에서 돋은 푸른 잎이 무성해 단아하고 무척 건강해 보인다. 그러나 이 나무 역시 만세송 못지않은 시련을 겪었다. 나무는 원래 이보다 훨씬 컸다. 1967년에 관리 왕버들의 키는 지금의 두 배 가까운 18m나 됐다고 한다. 당시 서쪽으로 난 큰 줄기에 들어찬 벌집을 제거하고 썩은 줄기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나무 줄기의 상당 부분을 잘라내야 했다. 그로 인해 키가 반으로 줄어들었지만 그나마 몇 차례의 수술로 건강은 회복할 수 있었다. 줄기 중심부에는 여전히 당시의 고통을 간직한 수술 흔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나무 앞에 서면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는 임을 그리워하던 꽃다운 처녀의 얼굴이 아른거리고 처녀의 한을 달래듯 솟아오른 한 그루의 소나무도 떠오른다. 줄기의 절반을 잘라내야 했던 수난은 물론이고 곁에 붙어 있던 만세송을 떠나보내며 왕버들이 겪었을 이별의 깊은 통증도 느껴진다. 나무줄기를 따라 흩어진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아내려 애면글면하는 화가의 마음속 통증까지 더불어 느낄 수밖에 없는 관리 왕버들의 가을 풍경이다. 글 사진 청송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경북 청송군 파천면 관리 721. 중앙고속국도의 서안동나들목으로 나가서 안동시 길안면을 지나 지방도로 914호선을 이용해 동쪽으로 16.5㎞ 남짓 가면 청송군에 닿는다. 국도 31호선과 만나는 청송교차로가 나오면 직진해 교차로를 건넌 뒤 달기약수탕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개울을 건너서 청송시외버스터미널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1.7㎞ 더 간다. 언덕을 넘으면 마을이 나오고 교차로 모퉁이의 빈터에 나무가 있다. 나무 바로 앞에는 자동차를 세울 수 없으므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서 자동차를 세우고 걸어 나오는 게 좋다.
  • “독도에 불법구조물 설치 위법” 문화재청, 경북도·울릉군 고발

    문화재청이 독도에 불법 구조물을 설치한 경북도와 울릉군을 수사기관에 고발했다. <서울신문 9월 17일 자 15면> 문화재청 관계자는 26일 “최근 독도에 허가받지 않은 불법 구조물을 설치한 경북도지사와 울릉군수를 문화재보호법(제35조 1항 1호) 위반 혐의로 경북지방경찰청에 고발했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경북도와 울릉군이 행정기관임을 감안해 실무 책임자가 아닌 기관을 고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경북경찰청은 1차로 문화재청 관계자를 불러 고발인 조사를 마친 뒤 도지사와 군수 등 관련 공무원을 상대로 불법 구조물 설치 경위 등을 조사할 방침이다. 경북도지사와 울릉군수는 천연기념물 제336호인 독도 동도에 국기 게양대를 설치하면서 허가를 받지 않고 경북도기와 울릉군기, 태극문양 기단, 호랑이상, 경북도지사 명의의 표지석 등을 무단으로 설치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 이를 감추기 위해 문화재청에는 허가를 받은 국기 게양대만 설치한 것처럼 허위 보고한 혐의도 받고 있다. 현행 문화재보호법은 천연기념물 등 국가지정문화재에 시설물을 설치하려면 문화재청장의 현상변경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경북도와 울릉군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도 관계자는 “우려했던 고발 조치가 실제로 이뤄져 걱정스럽다.”면서 “최대한 원만히 사태가 수습되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울릉군 관계자도 “관계 공무원에 대한 사법기관의 조사 등 사태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구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朴 “이외수 모셔라” 文 “김두관 지켜라” 安 “건너온 다리 불살랐다”

    朴 “이외수 모셔라” 文 “김두관 지켜라” 安 “건너온 다리 불살랐다”

    ‘트위터 대통령’ 이외수 자택방문 캠프동참 요청 선대위 부위원장에 유승민·남경필 의원 내정 박근혜(얼굴)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25일 영입대상 물망에 오르내리던 소설가 이외수씨를 찾아 대선 캠프 동참을 요청했다. 박 후보는 이날 강원 양구군의 6·25 전사자 유해발굴 현장을 둘러본 뒤 돌아오는 길에 화천군 이 작가의 자택을 비공개 방문했다. 역사 인식 관련 발언으로 약 2주간 국민통합 행보가 꼬인 이후 문화 분야에서 다시 통합의 불씨를 살리겠다는 의미다. 팔로어가 150만명에 달해 ‘트위터 대통령’으로도 불리는 이 작가는 그동안 박 후보 선대위의 파격 영입 대상으로 물망에 올랐다. 이 작가는 현재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쪽과 접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가는 “(박 후보가) 국민행복을 모색하는 데 동참해 달라고 부탁했다.”면서 “언제든 나라를 위해서, 국민을 위하는 일에 저를 필요로 할 때는 돕겠다.”고 화답했다. 다만 그는 “특정 정당에 소속돼 정치에 조언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면서 “어떤 정당이든 필요로 하고 조언을 구하면 응하겠다.”고 덧붙였다. 이 작가는 박 후보가 지난 24일 과거사를 두고 사과한 것에 대해 “굉장히 힘드셨을 텐데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면서 “다른 후보들도 그 점에 대해서는 큰일 하셨다고 칭찬하는 분위기이고 국민들도 새로운 정치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 같다는 취지의 말씀을 드렸다.”고 말했다. 박 후보의 이날 방문을 두고선 젊은 층·중도 계층으로의 진입을 시도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앞서 박 후보는 양구군의 6·25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 현장을 찾아 장병들을 격려하고 21사단 여군·부사관들과 전투식량으로 점심을 함께하며 거듭 안보를 강조했다. 한편 박 후보는 당내 인사를 중심으로 한 일부 선대위 인선안을 26일 발표한다. 당초 예정됐던 대구 일정도 취소했다. 최근 여러 현안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지적에 따라 선대위 인선을 서두른 것으로 보인다. 친박(친박근혜)계 유승민 의원과 중립의 남경필 의원이 선대위 부위원장에 내정된 것으로 전해졌다. 박 후보는 이날 밤 장모상을 당한 유 의원의 빈소에 찾아가 직접 부위원장직을 제안했다. 비박(비박근혜) 대표주자인 이재오·정몽준 의원과 박 후보와 거리를 뒀던 김무성 전 원내대표 등도 선대위에서 역할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김두관 만나 협조요청…도라산역서 평화간담회 정동영·임동원·정세현·이재정 등 선대위 영입 문재인(얼굴)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는 25일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햇볕정책 전도사들을 캠프로 영입했다. 17대 대선 후보이자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동영 상임고문을 선거대책위 ‘미래캠프’ 산하 ‘남북경제연합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김대중 정부 당시 대북정책을 총괄한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을 비롯해 정세현, 이재정,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위원으로 각각 위촉했다. 무소속 안철수 후보 측 인사로 분류됐던 문정인 연세대 교수도 위원으로 영입해 눈길을 끌었다. 이는 문 후보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계승자로서 집권 후 대북 햇볕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선포한 것으로 분석된다. 여기에 안 후보를 의식해 정당 후보로서의 안정감을 부각시키고 전통적 민주당 지지 기반을 다지는 포석을 놓는 의미가 있다. 문 후보는 이날 남북 분단으로 끊긴 경의선 철도의 마지막 역인 도라산역(경기 파주시)을 방문해 남북경제연합위원회 정 위원장 등과 ‘평화가 경제다’라는 주제로 간담회를 했다. 문 후보는 남북경제연합위원회 인사들의 개성공단 방문을 허용해 달라고 남북 당국에 요청했다. 그는 “개성공단을 당초 계획대로 3단계 2000만평까지 발전시키는 것이 남북경제연합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대북 수해 지원과 더불어 이산가족 면회소를 가동해 상시 상봉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 위원장은 “5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정상회담 추진위원장으로 애썼던 문 후보가 남북경제연합 시대로 가기 위한 신북방 정책을 잘 펼쳐 나가길 바란다.”며 문 후보에게 힘을 실어줬다. 이어 군사분계선 제2통문 앞으로 이동한 문 후보는 2007년 10월 노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 앞서 작성한 ‘평화를 다지는 길, 번영으로 가는 길’이라는 친필이 적힌 표지석을 찾아 잠시 감회에 젖기도 했다. 한편 문 후보는 이날 저녁 서울 모처에서 대선 후보 경선 경쟁자였던 김두관 전 경남지사를 만나 대선 캠프 참여와 함께 지원을 요청했다. 김 전 지사도 문 후보의 뜻에 공감하며 선뜻 지원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이영준기자 apple@seoul.co.kr 대선 완주 의지 피력…야권단일화 논란 차단 감사인사 전하며 “한번 볼까요” SNS표심 잡기 안철수(얼굴) 무소속 대선 후보는 25일 ‘대선을 완주할 것이냐.’는 질문에 “지난주 수요일(대선 출마 선언일) 이미 강을 건넜다. 그리고 건너온 다리를 불살랐다.”고 밝혔다. 거듭되는 야권 단일화 논란을 차단하고 대선 완주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안 후보는 이날 서울 마포구에서 열린 ‘PD수첩’ 정상화 촉구를 위한 호프콘서트에서 방송인 김미화씨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주최 측은 안 후보를 비롯해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등 유력 대선 후보 3인을 초청했지만 안 후보만 행사에 참석했다. 안 후보는 또 추석 직후 기자회견을 갖고 ‘새 정치 청사진’을 제시하며 본격적인 정치개혁에 나설 예정이다. 안 후보는 이날 서울 종로구 공평동 선거캠프 사무실에서 ‘소통과 참여를 위한 정치 혁신 포럼’(정치혁신포럼) 회의를 주재하며 “경제 문제를 포함해 대립과 갈등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정치 개혁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치혁신포럼은 ‘정당정치와 시민정치의 생산적 결합’을 새 정치의 패러다임으로 규정하고 ▲민주주의 정치 ▲생활 정치 ▲상식 정치 ▲네트워크 정치 등 ‘4대 정치’를 제시했다. 26일에는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찾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한 후 대선 출마 선언 이후 처음으로 고향인 부산을 방문한다. 첫 지방 일정으로 새누리당의 텃밭이자 문 후보의 고향이기도 한 부산·경남(PK)을 찾는 것은 박·문 후보를 동시에 견제하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안 후보는 또 ‘이색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정치’를 펼치면서 젊은 층 표심 잡기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안 후보는 전날 페이스북 ‘안스스피커’에 32초 분량의 동영상을 올려 캠프 명칭 공모에 참여한 네티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면서 “우리 번개 한번 할까요.”라고 즉석 모임을 제안했다. 앞서 안 후보 측은 페이스북을 통해 캠프 명칭을 공모하면서 선정된 사람에게는 안 후보와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송수연기자 songsy@seoul.co.kr
  • 구리시청 표지석 등 3곳 ‘메이지 유신’ 낙서 발견

    구리시청 표지석 등 3곳 ‘메이지 유신’ 낙서 발견

    경기도 구리시청사 입구에 설치된 표지석 3곳에서 ‘메이지 유신’이라고 조잡하게 쓰인 낙서가 발견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구리시는 지난 23일 시청, 시의회, 고구려고각(鼓閣) 표지석 3곳에 검은색 페인트로 ‘메이지 유신’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고 24일 밝혔다. 시의회와 고각 표지석에는 일장기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시청 표지석에서는 저급한 그림이 발견됐다. 시는 일단 표지석에 천을 덮어 낙서를 가렸고 자체 조사를 하는 한편 경찰에도 수사를 의뢰했다. 경찰은 구리시가 태극기 도시를 표방하며 관련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표지석 훼손자의 신원 파악에 주력하고 있다. 장충식기자 jja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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