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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한·중 수교 25주년의 뿌리/이강국 주중 시안 총영사

    [기고] 한·중 수교 25주년의 뿌리/이강국 주중 시안 총영사

    시안(西安)은 주진한당(周秦漢唐) 등 고대 중국 왕조들이 도읍지를 정한 곳으로 발길 닿는 곳곳에 역사의 숨결이 서려 있다. 진시황 병마용, 양귀비가 노닐던 화칭츠, 시안비림박물관 등 경탄을 자아내고도 남을 만한 유적과 박물관이 즐비하다. 도교가 발생하고 불교가 융성했다. 따라서 시안은 역사의 뿌리, 종교 발전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근원이라 할 수 있다.시안은 한·중 교류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자주 쓰이는 ‘분수령’이란 말은 시안 주위의 친링산맥을 기점으로 황허(黃河)와 창장(長江)의 원천이 갈린다는 데서 시작됐고 ‘경위분명’(涇渭分明)은 관중평원을 흐르는 경수(涇水)는 탁하고 위수(渭水)는 맑아 뚜렷이 구별된다는 데서 나왔다. 국제적이고 개방적이었던 당나라 때에 한·중 간 교류가 빈번하게 전개되어 관련 유적과 유물들이 시안에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당 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묘인 건릉(乾陵)의 배장묘인 장회태자 이현(李賢)의 묘에서 발굴된 사신도에서 깃털 장식이 달린 모자(조우관)를 쓰고 흰색 도포를 입은 인물은 고구려 또는 신라 사신으로 추정되고 있다. 건릉에 있는 61개의 석인상(石人像) 중에 신라인 석상은 왼손에 한민족이 잘 다루는 활을 들고 있다. 또한 시안에는 우리 선현들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흥교사(興敎寺)에는 불경 번역 등에 많은 업적을 남긴 원측 스님의 사리탑이 현장, 규기의 사리탑과 나란히 있다. 인도, 서역을 순례한 후 장안에 와서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라는 불후의 기행문을 남긴 혜초 스님은 당나라 황제의 명으로 선유사(仙遊寺) 옥녀담 거북바위에서 기우제를 주관하기도 했다. 선유사는 댐 공사로 인해 이전하여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거북바위도 옮겨지고 혜초 기념비와 비정이 세워졌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빈공과(賓貢科)에 장원 급제해 벼슬에 올랐으며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황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기여했고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한·중 양국은 수천 년 동안 이어진 관계 속에서 교류하고 협력해 왔으며 양국 관계는 수많은 사람의 열정으로 다져져 왔다. 일제 침략으로 고통을 당할 때에는 어려움을 나누면서 도왔는데, 시안시 두취전(杜曲鎭)에 세워진 광복군 제2지대 표지석이 하나의 상징이다. 양국 정상 간 합의에 따라 시작된 인문유대 강화 사업의 일환으로 한·중 인문교류공동위원회가 출범된 후 중국에서는 최초로 시안에서 2014년 11월에 동 공동위가 개최되었다. 요즘 사드 문제로 한·중 관계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걱정인 것은 인적교류가 많이 줄었다는 것이다. 청소년, 학술, 대학 간 교류, 관광교류 등 다양한 형태의 인적교류는 민간교류의 근간이고 양국 관계발전의 밑바탕이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양국은 교류와 협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진정한 우호국가라면 국민 간 교류협력 촉진은 의무 사항에 해당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오히려 역사를 돌아보면서 선현들이 이루어 놓은 성과를 기반으로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한·중 수교 25주년을 즈음해 교류의 뿌리가 깊은 시안에서 양국 관계의 밝은 앞날을 그려 본다.
  • 박정희 기념도서관 표지석에 열흘만에 또 ‘붉은색 낙서’

    박정희 기념도서관 표지석에 열흘만에 또 ‘붉은색 낙서’

    서울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도서관 표지석에 지난 8일에 이어 누군가가 또 낙서를 했다.17일 서울 마포경찰서에 따르면 이날 오전 1시 40분쯤 마포구 상암동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 표지석 앞면에 낙서가 돼 있는 것을 시민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낙서는 붉은색 스프레이로 돼 있었다. 지난 8일에도 누군가 붉은색 스프레이로 ‘개XX’라는 욕설을 적어놓고 달아났다. 박 대통령 표지석에 낙서가 적힌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경찰은 같은 색 스프레이를 쓴 점으로 미뤄 동일범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주변 폐쇄회로(CC)TV 영상을 분석하고 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현장 행정] 중구 퇴계로 역사와 예술로 덮다

    [현장 행정] 중구 퇴계로 역사와 예술로 덮다

    서울 중구 퇴계로 필동2가는 조선시대 명재상 서애(西厓) 유성룡(1542~1607) 선생이 살았던 곳이다. 그는 25세 때 문과에 급제해 병조 판서, 영의정, 좌의정 등 핵심직책을 수행하며 당시 종6품 정읍현감이던 이순신 장군을 정3품인 전라좌수사로 천거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공을 세웠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 유성룡 선생의 집터였던 흔적은 어디에도 없고, 표지석만 남았다.최창식 중구청장은 지난 8일 이곳을 찾아 “유성룡 선생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때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라며 “선생의 이름을 딴 마당을 만들어 동국대 후문에서 서애길을 거쳐 충무로역에 이르는 일대를 대학문화거리로 조성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충무로역에서 대한극장을 지나 퇴계로4가 방면으로 걷다 보면 나오는 SK주유소 뒤편에 퇴계로 44길과 서애로가 만나는 지점이 있다. 이곳에 얼기설기 지어진 민간 건물을 매입해 소규모 광장과 유성룡 기념관을 만든다. 동국대 후문에서 빠져나오는 학생 누구라도 한 번쯤은 유성룡 선생 집터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머물며 역사를 마주하게 해 주고 싶다는 것이 최 구청장의 생각이다. 구는 지난 4년간 서애로 환경 개선을 위한 기초 작업을 벌였다. 걷기에 비좁고 불법주차가 난무한 서애로를 확 바꿨다. 보행로 너비는 3배로 확장했다. 멋스럽고 특색 있는 상점도 유치했다. 서애로는 충무로 5가 55-1에서 필동 3가 78-2에 이르는 폭 15m, 길이 830m의 2차선 도로를 가리킨다. 변화의 바람은 서애로를 넘어 퇴계로 30길(필동 2가)까지 불고 있다. 남산골 한옥마을과 한국의 집을 지나자 이번에는 형형색색의 벽화·조각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문화예술인 사이에서는 입소문이 나 이미 자리를 잡은 ‘예술통’(문화예술 거리)이었다. 서애길과의 차이는 예술통을 일군 주체가 민간이라는 점이다. 광고 회사 핸즈BTL미디어그룹의 박동훈(53) 대표가 주인공이다. 2014년 필동을 문화예술 거리로 만들기로 하고, 회사 수익을 투자해 맺은 결실이 필동문화예술공간인 ‘예술통’이다. 박 대표가 판을 짰다면, 최 구청장은 일찌감치 도로환경 개선 등을 통해 이런 움직임을 지원했다. 그 결과 쓰레기 더미가 쌓여 악취를 풍기던 골목길 구석구석에 세상에서 제일 작은 박물관·갤러리가 문을 열었다. 일명 ‘스트리트 뮤지엄’이다. 최 구청장은 “남산 등 자연환경, 역사문화 유적 등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중구가 낙후됐다는 편견을 버려 달라”며 “‘연세대 앞’(명물거리) 등이 부럽지 않은 대학문화거리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서울포토]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 표지석 욕설 현장감식

    [서울포토]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 표지석 욕설 현장감식

    8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 표지석에 붉은색 락카로 욕설이 적혀 있다는 주민의 신고가 접수된 가운데 경찰이 현장감식을 벌이고 있다. 최해국 선임기자 seaworld@seoul.co.kr
  • 박정희 도서관 표지석에 누군가가 빨간 스프레이로 ‘개XX’ 욕설

    박정희 도서관 표지석에 누군가가 빨간 스프레이로 ‘개XX’ 욕설

    서울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 표지석에 붉은색 락카로 욕설이 적혀 있어 경찰에 수사에 나섰다.8일 서울 마포경찰서에 따르면 이날 오전 5시 45분쯤 마포구 상암동 박정희 대통령 기념 도서관 표지석에 붉은색 스프레이로 ‘개XX’라는 욕설이 적혀 있다는 주민의 신고가 경찰에 접수됐다. 욕설은 표지석 앞뒤에 모두 쓰여 있었다. 경찰은 박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이 이를 적은 것으로 추정하고 주변 폐쇄회로(CC)TV 등을 확인하고 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고종이 쓴 ‘한양공원비’… 불행했던 남산을 품었네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고종이 쓴 ‘한양공원비’… 불행했던 남산을 품었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한양공원비는 서울 중구 소파로 57 남산케이블카 승강장에서 100여m 올라간 지점에 무심히 서 있다. 차를 타고 남산을 드라이브하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외진 곳이다. 한양공원비의 내력을 설명하는 표석이나 안내문은 없다. 비석보호용으로 보이는 사각 돌기둥 3개가 꼽혀 있다.한양공원은 기억이나 사건 목록에 없는 이름이다.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1908년 남산 기슭 30만평을 무상임대받아 조성한 위락시설이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10년 공원 입구에 표지석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비석의 정체는 표지석이었다. 표지석 앞에 또 표지석을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혼자 서 있는 상황이 이해된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885년 불과 19가구 89명에 불과하던 국내 일본인 수가 1905년 러·일전쟁 승리 후 1986가구 7677명으로 불었다. 열도에서 건너온 일본인 가족용 놀이터였다. 앞면에 새겨진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는 네 글자는 고종의 친필글씨이다. 1910년이면 끈 떨어진 권력이지만 황제의 글씨를 함부로 길거리에 세우지는 않았을 터인데 왜 친필을 내렸을까. 남산땅을 야금야금 잠식한 채 곳곳에 신사와 공원을 세우는 것을 보다 못한 고종이 이곳이 조선땅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지명이 들어간 비석을 하사한 게 아닌가 추측해 볼 뿐이다. 비석은 왜 이곳에 있을까. 한양공원은 공원 구실을 못했다. 일제는 공짜로 얻은 땅에 13만평 규모의 조선신궁을 짓기로 하면서 무성하던 소나무를 송두리째 뽑았다. 해방 이후 행방이 묘연하던 비석은 2002년 케이블카 승강장 근처 철조망 안쪽 풀숲에서 발견됐다. 비석 뒷면은 곰보딱지처럼 무참하게 정으로 쪼여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다. 비석 뒷면을 놓고 말이 많았다. 비석을 세우는 데 돈을 댄 친일 부역자의 명단이라는 설이 난무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조선신궁 건립 10주년 기념으로 발간한 사진집인 ‘은뢰’에 실린 비문 뒷면 사진을 통해 문구 대부분이 해독됐다. 전체 내용은 일본인 경성거류민단장이 쓴 평범한 ‘한양공원기’에 불과했다. 한양공원비는 홀로 남산의 불행했던 과거를 품고 비바람 앞에 서 있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 145m를 날아 과녁에 꽂혔다, 국궁의 이 운치

    145m를 날아 과녁에 꽂혔다, 국궁의 이 운치

    두 발을 편하게 벌린다. 물동이를 머리에 이는 듯 활을 들어 올린다. 숨을 천천히 내쉬며 활을 잡은 앞손을 힘껏 밀고 시위를 잡은 뒷손으로 화살을 쥐고 호랑이 꼬리를 잡아당기는 듯 끌어당긴다. 두 팔이 파르르 떨린다. ‘툭’ 소리와 함께 시위를 떠난 화살이 인왕산 치맛자락 허공을 갈랐다. 145m 바깥에 세운 과녁 옆으로 초록 불빛이 켜졌다. 명중이다.●서울 시내 조망 황학정엔 30~90대 궁사 북적 16일 서울 종로구 사직동 황학정에선 궁사들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인왕산 아래 사직공원 단군성전 오른쪽에 자리했다. 1899년 고종황제의 어명을 받들어 지었으니 우리나라 스포츠의 첫걸음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활쏘기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본래 경희궁 회상전 북측에 세웠던 활터에서 유래했다. 일제강점기 경희궁 회상전이 훼손된 후 현재 장소로 옮겨졌다. 황학정 정자에 앉아 산등성이와 서울 시내가 어우러진 장관에 취해 있으면 활쏘기 시간을 알리는 징소리가 울린다. 30대부터 90대까지 허리춤에 노란 띠를 두른 궁수들이 일렬로 자리를 잡는다. 과녁은 반대편 언덕에 있다 보니 산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화살을 보는 것도 운치를 자아낸다. 4년 넘게 활쏘기를 했다는 한 60대 회원은 “활 쏘는 이들은 다들 건강해 90세를 넘긴 회원도 있다”면서 “예로부터 국궁을 건강에 최고로 쳤다”고 자랑했다. 또 “활을 쏘려면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꼿꼿해야 하니 몸이 반듯해진다”면서 “뒤로는 인왕산, 앞에는 서울 시내의 멋진 경치를 두고 활을 쏘면 정신 수양도 된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7월부터 활터를 다닌 다른 회원은 “혼자서도 가능한 운동이라 좋다”면서 “테니스처럼 게임 상대와 장소 예약을 하지 않아도 된다. 내키면 홀로 한 시간이든 하루 종일이든 할 수 있다”고 말했다.●양궁은 검지와 중지로 시위에 화살 걸어 당겨 종로에 황학정이 있다면 중구에는 조선시대 민간인이 사용하던 활터인 석호정을 빼놓을 수 없다. 남산 중턱에서 물결 치는 소나무숲 위로 화살이 날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신비롭게 느껴진다. 석호정은 남산공원길과 맞닿아 있어 지나가는 시민들도 쉽게 구경할 수 있다. 6년 전 국궁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윤복남(50)씨는 “서민들에겐 다가서기 어려웠던 국궁이 이젠 일반 성인과 아이들도 쉽게 즐길 수 있는 스포츠로 거듭났다”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국궁의 재미를 알렸으면 좋겠다”고 귀띔했다. 활의 역사는 수렵생활을 하던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활은 사냥감과 직접 싸우지 않더라도 먼 거리에서 제압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다. 옛 활쏘기는 전투기술인 동시에 선비들의 교양필수과목이었다. 이 땅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기록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바로 활을 잘 쏜다는 기록이다. 수천년 역사를 함께한 전통 활, 국궁은 지금도 시민들의 생활체육으로 남아 있다. 서울에 8곳을 비롯해 전국 380여곳 국궁장에서 3만여명이 회원으로 활동한다. 대부분의 국궁장은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활을 쏘기 위해 145m 거리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궁과 양궁은 무엇보다 쏘는 방식에서 다르다. 국궁은 표적을 볼 때 비대칭이다. 양궁은 한가운데 화살을 날리지만, 국궁은 치우치게 돼 있어서 오조준을 해야 한다. 자기가 편한 표적 보는 기준을 찾아 안정적으로 화살을 보내야 한다. 화살을 잡는 방식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국궁은 엄지와 검지로 화살을 움켜쥐는 반면, 양궁은 검지와 중지로 활시위에 걸친다. 이 때문에 양궁은 깍지를 검지에 끼지만, 국궁은 엄지에 깍지를 낀다. 사극에서 흔히 보는 활쏘기 방식은 사실 국적 불명인 셈이다. 뜻밖에도 국궁장엔 젊은이들도 눈에 띈다. 직장인 권상오(27)씨는 “놀이공원 국궁 체험장에서 활쏘기를 해봤다”며 “금방 익숙해져서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다”고 말했다. 대학 때 교양 수업으로 처음 국궁을 만났다는 정변교(26)씨는 “수업 뒤 계속하고 싶어서 활을 샀는데 집 근처에는 활터가 없어 아쉬웠다”며 “나중에 생활체육으로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석호정엔 習射無言 표지석… 정신수양에 좋아 석호정 이름도 활쏘기와 맞닿아 있다. 중국 한나라 문제(文帝) 때 어느 장군이 사냥터에서 큰 호랑이를 보고 활을 쏴 적중시켰다. 가까이서 보니 바위였다. 의문이 들어 다시 활을 쐈으나 이번엔 화살이 튕겨 나왔다. 장군은 매사에 신경을 써서 노력하면 이루지 못할 게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석호정 마당엔 습사무언(習射無言)이라고 적힌 표지석이 손님을 반긴다. 회원들은 “활쏘기 하나에도 말을 앞세우지 말라는 경종을 울리는 것”이라며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아울러 “화살이 시위를 떠나는 순간 모든 게 판가름 나듯이, 자세를 제대로 갖추지 않으면 과녁을 맞히기도 힘들다”고 목소리를 모았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문재인이 투표 후 찾아간 곳은? “하나도 홀가분 안 합니다”

    문재인이 투표 후 찾아간 곳은? “하나도 홀가분 안 합니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가 19대 대선 선거일인 9일 투표를 마치고 자택 뒷산으로 산책을했다. 문 후보는 이날 오전 투표를 마친 뒤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자택에 들어갔다가 잠시 뒤인 10시 30분께 주황색 등산복을 입고 노란색 등산화를 신은 채 집 앞을 지키던 기자들 앞에 나타났다.부인 김정숙 씨와 자택 뒤편 야트막한 산으로 발길을 돌린 문 후보는 정상에 오른 뒤 바위에 걸터앉아서 상념에 잠긴 듯 먼 산을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산행에 따라나선 일부 기자들이 선거와 관련한 질문을 하기도 전에 문 후보는 산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문 후보는 “도로 때문에 산길이 끊겼는데 은평구청장이 생태연결 다리를 놔서 여기와 북한산이 이어진다”고 말했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가 있을 법한 곳을 가리키면서는 “내가 청와대에 갔을 때 순수비가 있었다는 표지석만 남고 순수비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있었는데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한테 ‘이미테이션을 세우면 어떤가’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부인 김씨는 “이 길로 손주를 보러 가기도 한다”며 “쉬엄쉬엄 걸어서 다녀온다”고 하고는 일어서서 문 후보와 집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취재진이 ‘선거운동도 끝나서 홀가분할 것도 같고 맘이 더 무거울 것 같기도 하다’며 소회를 묻자 문 후보는 “하나도 홀가분 안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는 당선되더라도 즉시 국정운영에 나서야 하는 상황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보인다. 문 후보는 내려오는 길에도 대선 언급은 일체 하지 않았다. 주변의 꽃과 나무에 시선을 두고 내려오며 즉석에서 ‘식물 강의’를 벌였다. 문 후보는 국회의원 시절에도 봄이면 국회 의원동산에 핀 꽃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설명과 함께 올리는 등 식물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전해졌다. 문 후보는 기자들에게 한창 식물을 설명하다 뒤늦게 부인 김씨가 뒤로 처진 걸 알고는 잠시 멈춰 기다리기도 했다. 대선 기간 몇 달씩 호남에서 남편 대신 선거운동을 해 ‘호남 특보’로 불린 김씨는 소감을 묻자 “이제 이야기 안한다”며 웃음과 함께 손사래를 쳤다. 문 후보는 10시 47분쯤 자택으로 들어갔다. 20여 분 뒤 딸 다혜씨 부부와 외손자도 집안으로 향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동부지법, 문정 비즈밸리 시대

    서울동부지법, 문정 비즈밸리 시대

    서울 송파구가 서울 동남권 경제발전의 거점이 될 ‘문정 비즈밸리’ 시대를 개막했다. 송파구는 27일 비즈밸리에 새로 입주한 서울동부지방법원 신청사 준공식을 열며 단지 본격 입주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날 준공식은 박춘희(왼쪽 세 번째) 송파구청장을 비롯해 양승태 대법원장, 권성동 국회법사위원장 등 법조계 관계자 2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현판 제막식, 기념식수, 표지석 제막 순으로 이뤄졌다.‘문정도시개발 사업지구’인 비즈밸리는 문정역 일대 54만 8239㎡ 부지에 들어서는 지식기반 산업 특화지역이다. 2013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내년 말까지 ICT 융합, 생명공학, 친환경 녹색산업, 비즈니스&연구, 디자인&패션 등 2000여개 기업체가 입주할 예정이다. 구에 따르면 예상 상주인구 3만 5000명, 2조원에 이르는 생산유발 효과, 2만명 이상의 고용창출이 기대된다. 업무단지와 함께 법조타운, 문정 컬처밸리 등도 함께 들어선다. 서울동부지법 신청사가 들어서는 법조타운(17만 776㎡)은 문정 비즈밸리의 중요 축으로, 앞서 서울동부지방검찰청, 구치소, 법무부 부속시설 등이 지난달 이전을 완료했다. 구는 문정지구 입주민의 생활 불편을 최소화하고 안정적인 정착을 지원하려고 지난해 10월부터 ‘종합행정지원단’을 운영 중이다. 박춘희 송파구청장은 “서울동부지법을 시작으로 올해 말까지 신성장동력산업 기업체들이 입주하게 된다”며 “입주 기관과 입주민의 안정적인 정착과 발전을 위해 구 차원 행정력을 아낌없이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말빛 발견] 말을 관리하던 사람 거덜

    서울 종로소방서 근처 길가엔 그곳이 ‘사복시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엔 사복시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도 들어 있다. “사복시 터.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던 수레, 말, 마구, 목장을 맡아보던 관청의 터. … 여기에 있던 외사복시는 1907년에 폐지되었다.” 사복시는 궁중의 가마나 말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기관이었던 것이다. 사복시 앞의 개천은 늘 말똥도 있고 지저분했던 것 같다.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는 “당신의 입은 사복개천이야”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사복개천’은 아주 더러운 물이 흐르는 개천을 뜻한다. 사복시의 개천이 매우 더러운 데서 왔다. ‘입이 걸기가 사복개천 같다’는 속담도 있다. 말을 조금도 삼가지 않고 상스럽게 함부로 지껄인다는 뜻으로 쓰인다. 사복시의 관원은 어땠는지 몰라도, 이곳의 종들은 사복개천 같은 행동을 했던 모양이다. ‘거덜’이라고 불린 이들은 말을 돌보고 관리하는 일을 했다. 여기에다 높은 벼슬아치가 행차할 때 길을 틔우는 일도 했다. 사극에서 “쉬~ 물렀거라” 하는 이들이 거덜이다. 거덜은 지위는 낮았지만, 위세는 대단했다. 예를 갖추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발길질을 해댔다. 우쭐대며 몸을 흔들고 다녔다. 여기에 허세까지 더해진 게 그들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거덜’에 새로운 뜻이 붙었다. ‘재산이 없어짐. 하려던 일이 여지없이 결딴남.’ ‘거들거들, 거들먹거리다, 거들대다, 거드름’ 같은 말들도 ‘거덜’에서 왔다. 그 옛날 ‘거덜’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허세는 말 속에 남았다. 이경우 어문팀장 wlee@seoul.co.kr
  • “우도 안내판 오류 찾자” 1년 발품 판 아이들

    “우도 안내판 오류 찾자” 1년 발품 판 아이들

    ‘섬 속의 섬’ 제주 우도에 사는 어린이들이 우도 이야기라는 책을 펴냈다.우도초·중학교는 학교 동아리인 우도사랑 탐험대의 지난 1년간의 활동상을 담은 ‘우도익힘책-우도탐험대가 들려주는 우도이야기’를 6일 발간했다. 이들은 발간사에서 “우도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에서 우도 관광이 멈춰 버린다면 정작 우도의 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 우도에는 눈으로 보는 것도 많지만, 마음과 머리를 동원해서 봐야 할 숨겨진 역사와 문화가 많다”고 밝혔다. 이 책은 지난해 우도사랑 탐험대 학생 16명(초 10·중 6)이 직접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우도 곳곳의 표지석이나 안내판을 확인, 오류가 있거나 훼손된 부분을 파악한 내용 등을 담고 있다. 각자 맡은 표지석과 안내판 현장을 찾아가 사진을 촬영하고 내용을 정리하고서 교사들과 함께 맞춤법부터 역사적 사실이 맞게 기록됐는지, 명칭이 적절히 쓰였는지 등을 꼼꼼히 살펴봤다. 60여 개의 표지석·안내판 가운데 태반은 오류가 있었다. 아예 안내문이 유실되거나 없는 곳도 있었다. 사례는 이렇다. 천진리 동천진동의 어룡굴 안내문에는 이형상의 ‘남환박물’이 ‘남한박물’로,‘신증동국여지승람’이 ‘신중동여지승람’으로 잘못 적혀 있었다. 우도를 직접 방문한 감회를 글로 남긴 조선시대 시인 백호 임제에 대한 안내문에는 ‘남명소승’이 ‘남영소승’으로 잘못 표기된 등이다. 탐험대는 우도가 유명 관광지로 부상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우도 8경’에 2경을 추가로 선정해 ‘우도 10경’을 만들었다. 우도 8경은 과거 우도중 교장이던 향토사학자 김찬흡 선생이 우도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자 선정한 것으로, ‘밤과 낮으로 보아도, 하늘과 땅에서 둘러봐도, 앞과 뒤에서 찾아봐도, 동과 서에서 살펴봐도 우도는 하늘이 내린 아름다운 섬’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탐험대는 여기에 ‘남과 북에서 봐도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담아 ‘남도비양’(우도 비양도의 풍광)과 ‘북해석문’(우도 최북단 바닷가에 산재한 돌로 된 문화유적지의 별칭) 등 2경을 추가했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대구 朴대통령 생가터에 ‘가짜 대통령’ 표지판 등장

    대구 朴대통령 생가터에 ‘가짜 대통령’ 표지판 등장

    박근혜 대통령 생가터 표지석이 있던 곳에 ‘가짜 대통령 박근혜 생가터’라는 제목의 표지판이 들어섰다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구 시민사회단체 연대 조직인 ‘박근혜 퇴진 대구시민행동’은 지난 21일 박 대통령 생가터 표지석 받침대 위에 ‘가짜 대통령 박근혜 생가터’라는 제목의 표지판을 세웠다. 이들은 전날 대구 중구 대중교통전용지구에서 시민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12차 대구시국대회를 개최하면서 자체 제작한 표지판을 만들어 설치했다. 길이 180㎝, 폭 60㎝의 철재로 제작된 이 표지판에는 박 대통령이 죄수복을 입은 채 포승줄에 묶여 있는 이미지와 함께 박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조롱하는 글, 박 대통령의 죄목 등이 적시돼 있었다. 이 표지판은 이날 밤늦게 중구청에 의해 다시 철거당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신영복 교수 1주기… ‘만남’의 장 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널리 알려진 신영복 교수의 1주기 추모 행사가 내년 1월 10일부터 열흘 동안 ‘만남’을 주제로 다채롭게 열린다. 성공회대는 1주기 당일인 15일 오후 3시 학교 내 성미가엘성당에서 추도식을 엄수한다. 교내에 마련된 더불어숲 추모공원 표지석 공개 및 추모 공원 조성의 의미와 취지를 소개하는 등 더불어숲 추모 사업 계획 발표가 곁들여진다. 앞서 10일부터 19일까지 서울 인사동 동산방화랑에서 추모 전시회가 열린다. 고인이 생애 마지막으로 쓴 ‘더불어숲’ 작품을 비롯한 유작 서화 14점과 고인과 ‘만남’을 가진 이야기가 담긴 서화 16점 등 30점이 전시된다. 이철수 화백이 고인의 글씨를 넣은 작품 2점을 새로 창작했다. 고인이 서울시에 기증한 ‘서울’, 동물보호 단체 카라의 임순례 감독에게 선물한 ‘더불어숨’, 한학자 이구영 선생에게 선물한 ‘춘향전 병풍’ 등 사람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던 고인의 모습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작품들도 전시된다. 19일 오후 8시 한남동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에서는 추모 콘서트가 열린다. 고인의 동료이자 제자였던 성공회대 교수 밴드 ‘더숲트리오’를 비롯해 성공회대 제자이자 방송인인 김제동과 가수 윤도현, 성공회대 인문학습원을 통해 인연을 맺었던 가수 이은미 그리고 작곡가 김형석, 퓨전 에스닉 밴드 두번째달이 무대에 오른다. 배우 문소리·권해효, 아나운서 고민정이 각자의 사연과 고인의 글귀를 낭송한다. 공연 연출은 성공회대 제자인 탁현민 교수가 맡았다. 공연 수익금 전액은 추모 사업 기금으로 사용된다. 한편 최근 고인의 뜻에 따라 그간 유료 판매되던 컴퓨터용 폰트(서체)인 신영복체가 비상업적 용도에 한해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서울 근대의 풍경을 찾아… “마포종점에서 내립니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서울 근대의 풍경을 찾아… “마포종점에서 내립니다”

    서울신문이 서울시·문화지평과 함께 진행한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이 지난 3일 마포대로 일대 답사를 마지막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지난 7월부터 시작해 5개월간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서울의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나선 여정에는 서울시민 1000여명이 참여했다. 횟수로는 20회를 진행하면서 서울의 역사를 지탱하고 있는 서울미래유산 372개 중 150여개를 찾아다니며 그 속에 담긴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났다. 답사에는 성인뿐만 아니라 유치원생부터 초·중·고 및 대학생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남녀노소가 함께 서울의 큰길과 골목을 누볐다. 미래유산은 미래 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문화자산을 말한다. 비록 지금은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았지만 미래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답사를 주관한 문화지평이 답사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답사 후기를 받아 본 결과 대부분 그런 가치를 충분히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울시는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와 페이스북 그룹 ‘문화지평’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미래유산을 홍보하고 있다. 서울신문과 서울시는 또 내년에도 더 깊고 촘촘한 역사탐방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 충정로에서 마포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를 예부터 애오개로 불렀다. 애오개란 이름 유래는 매우 다양하다. 모두 그럴 듯한 해설이 붙어 어떤 게 정설인지 모를 정도다. 지난 3일 오전 10시 애오개역에서 시작된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은 애오개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됐다. 전상봉 서울미래유산 해설사는 “애오개는 인근 만리재에 비해 고개가 아이처럼 작다는 뜻의 아이고개가 변한 것이라든지, 옛날 도성에서 어린아이가 죽으면 서소문을 통해 이 고개 밖으로 묻어서 ‘아이고개’라고 했던 데서 유래했다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고 운을 떼면서 답사를 시작했다. 이날 답사 주제는 ‘마포대로 위에 남은 근대 서울의 풍경’이다. 마포대로 주변에 있는 60년이 넘은 노포 음식점과 한국정교회 성 니콜라스 성당 등 근대 역사를 담은 서울미래유산을 중심으로 둘러봤다. 마포대로는 교통이 발달하기 전 도성에서 남대문을 지나 배가 있는 삼개(마포) 나루를 가려고 발달된 길이다. 현재는 마포대교 북단부터 아현교차로까지 길이 2.8km에 달하는 도로다. 마포대로는 과거 ‘귀빈로’라는 별명이 있다. 외국 정상들이 김포공항을 통해 국빈 방문을 하면 마포대로를 통해 서울 도심에 진입했다. 이때 도로 인근에 있는 초·중생들이 연도에 나와 양국 국기를 흔들며 정상을 맞이했다고 한다. 인근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한선영(46) 씨는 “아무것도 모르던 초등학교 때 불려나가 작은 국기를 흔들었던 기억이 있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 방한 때가 아니었나 싶다”고 회상했다. 카터 대통령이 오기 전 VIP들은 한강대교를 건너 지금의 한강로를 통해 도심으로 들어왔다. 1975년 방한한 아프리카 가봉의 봉고 대통령은 김포가도, 제2한강교(지금의 양화대교), 신촌로터리를 통해 시청으로 진입했다. 1979년 6월 29일 방한한 카터 대통령은 이튿날 여의도에서 열린 서울시민환영행사를 마치고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마포대로를 거쳐 청와대로 향했다. 귀빈로는 사실 카터 대통령 때문에 만들어졌다. 서울시민환영대회뿐 아니라 다음날 여의도침례교회와 국회 방문 일정 등 두 차례나 마포대로를 지났기 때문에 귀빈로 중에서도 특히 이 구간 정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 마포대로가 귀빈로를 대표하는 별명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는 카터 대통령 방한 전인 1979년 5월 공항에서 여의도, 서울대교(지금의 마포대교), 마포로, 서소문, 시청 간 총연장 20㎞에 달하는 길을 귀빈로라 명하고 환경정비를 명한다. 시야에 들어오는 상가, 빌딩, 심지어 개인 주택까지 건물, 간판, 담장 등을 자비로 고쳐야 했다. 물론 시예산도 2억 6200만원을 배정했다. 이때 신민당사, 마포중고등학교 등이 재개발됐고 아현초등학교, 마포경찰서는 제외돼 지금도 볼 수 있다. 마포대로 일대에는 마포옥, 최대포집, 역전회관 등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3개의 식당 ‘노포’(鋪)가 있다. 마포옥은 1949년경 개업하여 2대째 가업을 이어 오고 있는 설렁탕 전문점이다. 1970년 리모델링해 옛 모습은 사라졌지만 음식 맛은 그대로라는 평을 받고 있다. 최대포집은 1955년 공덕로터리 인근에서 처음 문을 연 돼지갈비 전문식당이다. 역전회관은 서울시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62년 용산역 앞에서 창업주 홍종엽씨가 ‘역전식당’으로 개업한 바싹불고기 전문식당이다. 2012년 현 위치로 이전해 창업주 대를 이어 2대 김도영 씨가 현재까지 운영해오고 있다. 창업주는 전라도 순천에서 불고기, 수육을 팔았던 호상식당 김막동이란 할머니에게 전수받았다고 한다. 답사 날 잠시 들른 역전식당엔 김도영 대표가 없었다. 김 대표는 요즘 미슐랭가이드에서 발표한 빕 구르망 맛집을 찾아다니느라 바쁘다. 이날도 답사팀이 방문했지만 명동교자 벤치마킹을 위해 다녀오느라 자리에 없었다. 대신 박덕자(63) 역전식당 매니저가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후 이에 대한 질문이 많아졌다”며 “종업원들이 선정 이유를 설명하면서 나름 자부심을 갖는다”고 말했다. 이들 서울미래유산 마포지역 식당 노포들은 반세기를 꾸준하게 한결같은 입맛으로 식객들을 사로잡았고 그 맛은 현재진행형이다. 마포대로를 걷다가 마포트라팰리스 2차 길 건너편 언덕바지를 보면 고색창연한 돔 지붕을 가진 교회건물이 보인다. 한국정교회 성 니콜라스 대성당이다. 안토니우스 임종훈 신부는 “성 니콜라스 대성당은 한국정교회 한국 관구의 중심이 되는 교회로 1903년 고종이 하사한 정동 땅에 축성한 것을 1968년에 지금 장소로 옮겨 신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정교회는 1899년 대한제국에 진주해 있던 러시아군과 러시아 외교관들을 위해 러시아정교회에서 신부를 파견하면서 역사가 시작됐다. 이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과 한국전쟁 등으로 한국정교회는 그리스정교회 산하로 소속이 바뀐 뒤 뉴질랜드 그리스정교회 대주교청 관할기를 거쳐 2004년 6월 한국 대교구로 독립했다. 성 니콜라스 대성당은 1968년 콘크리트 구조로 지어진 비잔틴 양식의 국내 유일의 정교회 성당으로 종교사적, 건축사적 보존 가치가 높은 종교시설물이다. 안토니우스 신부는 “현재 한국정교회는 서울에 1곳을 포함 전국에 7개 교회 건물이 있으며 3000여명의 신자가 있다”고 말했다. 정동에서 지금 자리로 이전한 원인은 고종이 하사한 땅을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수탈당하고 해방 후에는 정부에 귀속됐기 때문이다. 정부와 부지반환 소송을 벌이면서 승소했다. 하지만, 막대한 소송비용 감당하기 어려워 땅을 팔아서 소송비용을 제하고 남는 금액으로 현재 터를 샀다. 지금 자리는 경성감옥 교도소장 관저가 있던 자리다. 경성감옥은 마포경찰서 건너편 지금의 서부지방법원이 있는 자리다. 전 해설사는 “일제는 경성감옥에서 1㎞ 정도 떨어진 마포연와공장에 죄수들을 데려가 강제 노역을 시켰다”며 “연와공장은 지금 삼성마포아파트 자리”라고 설명했다. 옛 신민당사가 있었던 자리에는 현재 SK허브그린 빌딩이 들어서 있다. 이 빌딩 앞 인도에는 신민당사 터 황동표지판이 박혀 있다. 삼각형 표지판에는 ‘1979. 8. 11 야당 당사에서 농성하던 YH무역 노동자 김경숙이 경찰 진압과정에서 사망’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 도화동에 살았던 이봉규(55) 중산고 역사교사는 “당시 전투경찰 차가 즐비했는데 11일 아침에는 모두 사라지고 소방차가 물청소를 하고 있었다”며 “신문에는 여공이 투신자살한 것으로 보도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에 따르면 삼각형은 국가폭력을 의미한다. 원형은 시민저항, 사각형은 제도 내 폭력이란 의미로 인권과 관련된 표지판이 서울에만 38개소에 설치돼 있다. 청계천 피복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에 이어 김경숙의 희생으로 노동운동이 민주화운동을 견인하는 기폭제가 됐다. 아현중학교 자리는 조선시대 가난한 전염병자를 치료하기 위해 도성 밖 서쪽에 설치했던 의료기관 ‘활인서’ 터다. 공덕동 396-4번지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인 아소당(我笑堂) 인근에 설치된 ‘공덕리 금표’ 표지석이 있다. 아소당은 대원군이 권력 무상을 스스로 비웃으면서 지은 이름이다. 공덕리 금표에는 아소당에 120보 내 접근을 불허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답사팀은 마포내로 남단 한강변에 이르러 강변한신코어, 마포타워를 끼고 옛 마포장터에 올랐다. 오르막을 오르며 만난 안정호(78)씨는 “지금도 일주일에 1회씩 현장을 나가 역사 공부를 한다”며 “후손에게 유산으로 남겨주기 위해 답사 후에는 반드시 기록을 남긴다”고 노익장을 과시했다. 마포장은 현재 마포동 419번지 벽산빌라 일대로 추정되는 곳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해방 후 귀국해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대단원의 막은 마포종점에서 내렸다. 마포어린이공원에는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 노래비가 서 있다. 대학 간호학과 동기인 유은주·변선주·이현주 씨와 함께 나온 김묘경(49) 씨는 “서울신문을 보고 친구들과 같이 나오게 됐다”면서 “내년에도 프로그램이 진행된다면 모두 참여하고 싶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글 사진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 5·18민주공원 광주 정신 기린다

    5·18민주공원 광주 정신 기린다

    오늘 준공식… 상징 조형물 설치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발원지인 전남대 정문 일대에 ‘5·18민주공원’이 조성돼 시민들에게 개방된다. 전남대는 20일 오전 정문에서 지병문 전남대 총장과 윤장현 광주시장, 노동일 전남대 총동창회장 등 각계 인사,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5·18민주공원’ 준공식 및 상징조형물 제막식을 갖는다고 19일 밝혔다. 5·18민주공원은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비롯해 4·19혁명(1960년), 민청학련사건(1974년), 우리의 교육지표선언(1974년), 6월 항쟁(1987년) 등 전남대 민족·민주운동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구성됐다. 이번에 개방되는 민주공원은 5·18민주화운동의 발원지(5·18사적 제1호)인 전남대 정문의 역사성을 살려 기존의 5·18소공원까지 확장됐다. 정문 서측 숲에는 민주화운동 기념마당과 민주의 길 등을 갖추고 공모를 통해 선정한 상징조형물을 설치해 역사성과 장소성을 표현했다. 상징조형물 ‘피어나다’는 박정용 작가의 응모작으로, 5·18민주화운동을 통해 얻은 숭고한 광주정신 ‘민주·인권·평화’의 가치가 3개의 꽃잎으로 피어나는 순간을 조형화했다. 정문 동측의 5·18소공원에는 ‘사적 제1호’ 표지석 등 기존 시설물에 대한 시각적 효과를 높이고 오월길과 안내판 등을 정비해 5·18발원지로서의 공간 기능을 대폭 확충했다. 전남대는 이곳을 자라나는 세대 등을 위한 민주주의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할 방침이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제주 516도로 기념비 붉은 글씨로 ‘독재자‘ 써서 훼손해

    제주 516도로 기념비 붉은 글씨로 ‘독재자‘ 써서 훼손해

    제주시 산천단 인근 도로 도로변에 세워진 ‘5·16도로’ 기념비가 훼손된 사실이 확인됐다. 15일 제주시 아라동주민센터 등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 각하’( 朴正熙 大統領 閣下)라는 글씨가 새겨진 5·16도로 기념비 정면에 누군가가 빨간색 페인트로 ‘독재자’라고 써 놓았다. 또 옆면에는 한글로 ‘유신망령’, 반대편에는 다시 ‘독재자’라는 낙서가 새겨졌다. 도로를 향한 정면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낙서가 표시되는 등 표지석 전체가 낙서로 훼손됐다. 높이 2m의 이 기념비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건설된 516도로 개통을 기념하려고 1967년 세워졌다. 기념비 정면에는 한자로 오일육도로(五一六道路)라고 표기돼 있다. 당시 청와대를 찾은 제주도청 공무원이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휘호를 받아 제주로 온 뒤, 이 바위에 음각으로 새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5·16도로는 제주시 남문로터리에서 남북을 가로질러 서귀포시 비석사거리까지 잇는 한라산 횡단도로로 정식 명칭은 ‘지방도 제1131호선’이다 이곳을 516도로라는 명칭을 누가 붙였는지는 대한 기록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당시 군사정권이 5·16쿠데타를 정당화 하고 기념하기 위해 5·16도로라는 명칭을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10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제주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산인 516도로 명칭을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불거진 상태다. 서귀포신문이 지난달 27일부터 30일까지 SNS 등을 통해 도민 의견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 846명 가운데 87.3%가 ‘516도로명칭을 바꾸어야 한다’고 응답했다. 아라동주민센터는 조만간 페인트 세척 작업과 함께 경찰에 수사 의뢰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군주의 성덕 뻗는 길, 광화문… ‘광장 민주주의’ 새 성지로 타올라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군주의 성덕 뻗는 길, 광화문… ‘광장 민주주의’ 새 성지로 타올라

    서울신문이 서울시·문화지평과 함께 진행하는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은 서울의 근현대 문화유산 중에서 미래 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문화 자산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다. 서울미래유산은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고 서울 시민들이 근현대를 살아오면서 함께 만들어 온 공통의 기억과 감성이 이입된 대상 모두가 선정 후보가 될 수 있다. 서울미래유산 선정 사업은 미래 세대에게 전할 100년 후의 보물을 지금부터 보존하고 관심을 기울이자는 의미다. 미래유산 발굴 및 제안은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나 페이스북 ‘문화지평’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서울시 미래유산보존위원회, 서울시 마을 만들기 사업 등 지역 공동체 차원에서도 이뤄지고 있다. 서울시는 최근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를 개편했다. 가독성 향상을 위한 디자인 개편 외에도 9000여건에 이르는 미래유산 아카이브 서비스, 스토리 텔링형 체험 코스 안내, 360도 미래유산 가상현실(VR) 촬영 등 콘텐츠 분야를 대폭 보강했다. 미래유산 검색 서비스는 내 주변의 미래유산뿐만 아니라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 연계를 통한 관광명소, 음식점, 숙박 정보도 함께 제공한다. 지난 11월 26일 대한민국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광화문광장 촛불 집회에는 150만명이 모였다. 매주 토요일에 열리는 역사탐방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과 맞물리면서 우연히 대학로, 종각, 세종대로 등 역사의 한복판에서 이어지고 있다. 열아홉 번째 역사탐방은 전상봉 서울미래유산 해설사의 해설로 뜨거운 촛불의 광장이자 민주주의 역사를 새로 쓴 광화문광장과 세종대로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세종대로는 조선시대 육조거리다. 육조거리는 육조가 있던 거리로 현재 광화문 앞에서 광화문 사거리까지 이르는 조선의 행정·정치 중심지였다. 지금도 정부서울청사, 외교부 청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미국대사관 등 공관들이 들어서 있어 역사적 명맥을 잇고 있다. 전 해설사는 “역성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태조 이성계가 개경을 등지고 한양으로 들어온 날은 1394년 10월 28일인데 서울시는 정도 600주년인 1994년부터 이날을 ‘서울 시민의 날’로 지정했다”고 말했다. 육조거리는 한양 천도 이듬해 경복궁이 준공되던 해인 1395년에 조성됐다. 세종문화회관 인근에 세워진 육조터 표지석에는 당시 관아 위치를 그려 놓아 이해를 돕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광화문통, 조선총독부 앞이라서 총독부 광장이라 불렸고 미군정기에는 군정청광장으로도 불렸다. 해방 직후 세종로로 개칭하고 너비 100m(16차선), 길이 600m로 한국에서 가장 넓은 도로로 조성됐다. 2010년 세종로와 태평로를 합쳐서 세종대로라 이름 지었다. 세종대로 사이에 조성된 광화문광장은 종로~광화문 삼거리에 이르는 구간 6개 차로를 공원화한 것으로 2009년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광장은 길이 555m, 너비 34m로 조성됐다. 이날 답사가 시작된 오전 10시 무렵 광화문광장에는 촛불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시민들이 서서히 모여들고 있었다. 답사팀이 모이기로 한 세종문화회관 계단도 밤샘 집회를 한 시민들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 해설사는 “이번 답사는 바로 옆 세종문화회관을 비롯해 세종대왕 동상, 이순신 장군 동상,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도로원표, 광화문 지하보도, 배화여고 캠벨기념관 등 서울미래유산이 밀집해 있는 코스”라며 “특히 6·10 민주항쟁에서 지금 벌어지는 촛불 집회까지 광장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새 성지”라고 소개했다. 전 해설사는 이어 “1978년 완공된 세종문화회관은 건축가 엄덕문이 설계한 건물로, 검정 기와나 붉은색 기둥 없이 서까래, 공포, 배흘림기둥과 문살무늬 디자인 등 한옥 요소를 현대적 감각으로 변용한 성공 사례로 꼽힌다”고 설명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5000명이 들어가는 평양만수대극장보다 크게 만들라고 주문했으나, 엄 건축가는 “4200석 이상 되면 3류가 된다”고 설득했다는 일화가 있다. 세종문화회관 옆에는 세종로공원이 조성돼 있다. 바로 곁에는 한글이 창제된 경복궁, 한글을 지켜 온 한글학회와 주시경 선생 집터 등 ‘한글’ 주제가 관통하는 길도 있다. 한글가온길이라 명명된 이 길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세종대왕 동상부터 시작해 세종문화회관, 세종 예술의 정원 등 세종대로와 새문안길로 이어지는 총길이 2.5㎞의 길을 일컫는다. 이번 답사로와도 비슷하게 겹치면서 한글역사문화, 서울미래유산을 한데 엮는 테마길로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광화문 왼쪽 앞에 파수꾼처럼 서 있는 덩치 큰 건물은 정부서울청사 본관이다. 정부 기능이 커지면서 청사가 부족해지자 1967년 착공해 1970년 완공했다. 과거에는 정부중앙청사, 정부종합청사 등으로 불렸다. 당시 고궁 앞에 사각의 권위적인 건물을 세운다는 지적도 있었다고 한다. 답사팀이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을 지날 즈음 금세 비나 눈이 올 것처럼 날씨가 흐리고 기온이 뚝 떨어졌다. 답사 뒤풀이에서 전 해설사가 “추위 탓에 입이 얼어 정확한 발음을 내는 데 애먹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전 해설사는 “광화문은 서경 ‘요전’ 편에 나오는 말로, ‘광피사표(光被四表) 화급만방(化及萬方)’에서 온 것”이라며 “광(光·군주의 덕)은 사방으로 덮이고 화(化·바른 정치)는 만방에 미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군주의 부덕과 삿된 정치 탓에 촛불 민심이 속속 광화문광장으로 집결하고 있는 상황인 탓에 해설이 귀에 더욱 들어왔다. 광화문 앞 세종대로 횡단보도를 건너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층으로 올라갔다.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현대사 박물관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뒤 2012년 개관했다. 전 해설사는 “박물관 전시 자료가 뉴라이트 쪽 사관으로 채워진 경향이 있어서 사학계 내부 반발이 있었다”며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국정 교과서와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된다”고 지적했다. 미국 대사관 뒤편으로는 허름한 종로구청이 보인다. 현 종로구청사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수송초등학교 용도로 지어졌다. 종로구청에서 1975년부터 사용했고 수송초등학교는 1977년 폐교됐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종로구청 모두 서울미래유산이다. 광화문 사거리 교보빌딩 앞에는 대한민국 사적 제171호 고종황제칭경비가 있다. 고종 즉위 40년을 기려 1902년 세운 기념비다. 돌거북 위에 세워진 비석의 앞면에는 ‘대한제국 대황제 보령 망육순 어극사십년 칭경기념송’이라는 황태자 순종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돌거북 옆에는 사각형 돌에 주요 18개 도시 간 거리를 표시해 놓은 일본식 도로원표(서울미래유산)가 있다. 원래 광화문 네거리 이순신 장군 터에 있던 것을 도로를 정비하면서 옮겼다. 한국식 도로원표는 원래 위치에서 남쪽으로 151m 떨어진 세종로 광화문파출소 앞 미관광장에 있다. 이날 답사가 두 번째라는 김민선(26·여)씨는 “그간 고종황제칭경비만 봤지 도로원표는 궁금해하지도 않았는데 작은 돌이지만 기준점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놀라워했다. 전 해설사가 답사팀을 광화문 지하보도로 이끌 무렵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기 시작했다. 세종로 지하도는 14대 서울시장을 지낸 ‘불도저 시장’ 김현옥(1926~1997)의 작품이다. 김 시장은 개통 때 “우리는 동양에서 제일 크고 아름다운 지하보도를 만들었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약한 기술력에 무리한 공기 단축으로 날림공사였다는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광복 이후 우리 기술로 건설된 첫 지하도란 의미에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지하보도를 빠져나오자 이순신 장군 동상이 내려다보고 있다. 뒤편 멀리서는 세종대왕 동상이 이순신 장군을 부르는 듯 오른손을 들고 앉아 있다. 세종대왕 동상의 거대함과 이순신 장군 동상의 고압적 높이는 우리의 권위적 동상 문화를 여실히 보여 준다. 전 해설사는 “벨기에 오줌싸개 소년이나 덴마크 인어공주 상은 그리 크지 않지만 전 세계인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며 “세종대왕과 마치 경호실장 같은 이순신 장군이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어색하기 그지없다”고 지적했다. 세종로를 벗어나 새문안로를 따라 다시 북쪽으로 걸었다. 1973년 문을 연 국내 최초 슈퍼마켓 ‘고려쇼핑’이 있었다는 표지 자리에는 골목상권을 헤집고 들어온 대기업 슈퍼가 대신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자 종교교회라는 감리교단 교회가 나왔다. 1910년 종교(宗橋)가 있는 자리에 지어져 종교교회라 이름 붙었다. 두 번째 예배당(1958~1999)은 정으로 깬 화강암으로 지었고 현재 예배당(2002~)은 매끈한 대리석으로 신축했다. 건물 외벽 일부를 남겨 변천 역사를 알게 하는 센스 있는 건물이다. 서울미래유산인 사직터널과 대한민국 사적 제121호 사직단을 지나 1920년 세워진 최초의 공공도서관인 종로도서관(구 경성도서관)에 이르자 눈발이 제법 거세졌다. 경성도서관은 한성부윤, 국회의원을 지낸 이범승(1887~1976)이 운영하다가 경영난을 못 이겨 관에 이관된 뒤 오늘에 이른다. 후대는 이곳을 민족 계몽 활동의 장으로 이용했다고는 하나, 이범승은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명단 관료 부문에 포함되는 등 친일파로 분류돼 있다. 전 해설사는 배화여고 캠벨기념관 앞에서 “이곳은 종교교회를 세운 미국 남감리교의 여성 선교사 조세핀 필 캠벨이 개교한 캐롤라이나 학당을 개칭한 곳”이라고 설명했다. 캠벨기념관은 그를 기념하기 위해 1926년 신축된 뒤 1944년 일본군 통신부대가 점유, 한국전쟁 때 반파됐고, 이후 개축, 중수공사 등 우여곡절을 거쳐 현재 교무실 등 본관 건물로 사용 중인 서울미래유산이다. 마지막 답사지인 배화여고 건물 뒤편에 자리잡은 백사 이항복의 집터 필운대(시 문화재자료 제9호)를 오를 때엔 눈발이 시야를 가릴 정도였다. 배화여대에서 바라본 백악산과 그 밑에 있는 청와대가 어지럽게 흩날리는 눈발 속에 가물거렸다. 글 사진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 땅끝, 희망 시작… 언제나 36.5℃

    땅끝, 희망 시작… 언제나 36.5℃

    북위 34도 17분 38초. 섬을 제외하고 한반도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곳. 전남 해남의 땅끝마을 안내판에 적힌 글귀다. 뭍은 여기서 끝나지만 희망은 비로소 시작된다.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 남루했던 한 해를 남김없이 털어 내고 순백의 도화지 같은 새해를 맞으려는 이들이 땅끝마을을 찾는 건 바로 그 때문일 터다. ●모노레일 타고 사자봉에 올라 온몸으로 맞는 새로운 시작 땅끝마을을 찾는 이들은 대개 서정적인 해넘이 풍경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땅의 끝이라는 지리적 상징성 속에서 한 해의 모든 시름을 부여안고 가라앉는 해를 보는 느낌이 각별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땅끝마을은 사실 해돋이 장면이 더 힘차고 아름답다. 겨울철엔 마을 왼쪽의 백일도와 흑일도 사이에서 해가 뜬다. 방울토마토를 닮은 해가 너른 바다와 크고 작은 섬들을 붉게 물들이는 장면은 서정적이면서도 장쾌하다. 맴섬 일출도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맴섬은 땅끝마을 표지석 바로 앞에 있는 갯바위다. 일 년에 단 두 차례, 2월과 10월 중순에 맴섬 사이로 해가 떠오른다. 이 장면을 담기 위해 전국의 사진가들이 몰린다. 새해엔 이 모습을 보기 어렵다. 하지만 뭐, 꼭 맴섬 일출이라야 맛이랴. 바닷가에 서서 온몸으로 새 시작을 맞으시라. 외려 그게 낫다. 포구 뒤는 사자봉이다. 정상에 세워진 횃불 모양의 전망대가 이채롭다. 높이 400여m의 사자봉까지는 모노레일이 운행되고 있다. 바다를 굽어보며 수월하게 오를 수 있다. 전망대 주변에 땅끝탑과 희망의 샘, 산책로 등이 조성돼 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따라 땅끝조각공원 등 명소 즐비 땅끝마을 주변의 적요한 해안가를 돌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송지면 엄남리 해안에서 땅끝마을을 거쳐 사구리 해안까지 가는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중 하나다. 드라이브 코스 주변에 송호해변, 땅끝관광지, 땅끝해양자연사박물관, 사구미해변, 땅끝조각공원 등 명소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땅끝조각공원에 서면 땅끝마을과 주변 풍경이 한눈에 담긴다. 바다를 향해 돌출한 ‘땅의 끝’과 보길도 등 주변 섬들이 그림처럼 어우러진다. 땅끝조각공원에는 26점의 조각 작품이 전시돼 있다. 해남의 산천과 남도의 풍광을 새긴 작품들을 찬찬히 둘러보는 것도 좋겠다. 아울러 송호해변은 울창한 솔숲, 사구미해변은 1.5㎞에 이르는 모래사장이 아름답다. ●이순신 장군과 ‘女스파이’ 어란의 구구절절한 전설 깃들어 해남 여정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어란 여인’ 이야기다. 명량해전의 틈바구니에서 이순신 장군과 ‘여성 스파이’ 어란, 그리고 그의 연인이었던 왜군 장수가 얽히고설켜 영화 같은 이야기를 펼쳐 낸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전설’ 수준의 이야기로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어란 여인 이야기는 사실 정사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편에 관련 내용이 비치고,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보여지는 대목이 등장한다는 것이 전부다. 이순신 장군과 명량해전의 눈부신 전공을 폄훼하려는 의도가 있는 이야기라며 불온한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게다가 일본인 손에 의해 전해진 이야기란 점은 이 같은 부정적 인식에 불쏘시개로 작용하고 있다. 이야기의 얼개를 되짚어 올라가다 보면 꼭 두 개의 시점으로 제작된 영화를 보는 듯하다. 첫 장면은 해남의 일본인 사와무라 하치만다로에서 시작된다. 일제강점기 순사였던 그의 귀에 어느 날 어란 여인 이야기가 흘러 들어간다. 평소 해남 땅에 뼈를 묻고 싶다고 말했던 그가 일본으로 돌아간 뒤 유고집이 나오는데, 바로 여기에 그동안 채집했던 어란 여인 이야기가 담긴다. 이게 2006년 해남의 박승룡옹에게 전해졌고, 비로소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두 번째 장면은 전쟁터에서 시작된다. 정유재란 때 어란진에 주둔하던 왜장 간 마사가게(菅正陰)는 어느 날 자신의 연인이었던 어란에게 출병 기일을 발설한다. 어란 여인은 이를 이순신 장군에게 전하고, 이는 명량해전을 대승으로 이끄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어란 여인은 ‘해남의 논개’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하지만 어란 여인은 명량해전 이튿날 여낭터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자신의 연인이 울돌목 해전에서 전사한 것을 비관해서다. 자신의 첩보 덕에 조선은 누란의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정작 자신과 연인은 죽음으로 연을 끊어야 했다. 이러구러 여낭터에서 떠밀려 온 어란 여인의 시신은 한 어부가 거둬 어란마을 끝자락의 바닷가에 묻는다. 그 자리엔 그의 영혼을 위로하는 석등롱(石燈籠)이 세워진다. 어란 여인과 관련해 찾아볼 만한 장소는 두 곳이다. 그가 몸을 던진 여낭터와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 석등롱을 세운 어란마을이다. 여낭터는 어란마을 건너편의 바위벼랑 중턱에 있다. 어란항 초입에 ‘여낭터 가는 길’이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국문 아래쪽엔 일본어도 병기돼 있다. 여낭터엔 ‘어란의 여인상’과 표지비가 조성돼 있다. 동굴 형태의 자연석 아래 세워진 어란상은 뜻밖에 작달막하다. 일부에서 ‘미녀 스파이’ 운운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이미지다. 기념비 앞면엔 투신 날짜가 적혀 있다. 1597년 9월 17일. 명량대첩 하루 뒤다. 기념비 양옆엔 모두 네 명의 일본인 이름이 적혀 있다. 고니시 유이치로 형제는 어란상과 표지비 조성 비용을 댄 이들이다. 일제강점기에 해남에서 태어난 이들의 부친은 어란리 심상소학교 교장을 지냈고, 외조부는 어란리에 최초로 김 양식을 도입한 인물이라고 한다. 여낭터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눈부시다. 청잣빛의 모티브가 됐다는 영롱한 바다, 어란 바다 위를 가득 메운 양식 어구들, 그 너머로 남도의 뭍과 섬들이 어우러져 있다.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어선이 아니었다면 그림으로 착각할 만한 풍경이다. ●거대한 인공 호수엔 30여종 겨울 철새의 ‘화려의 군무’ 해남에는 거대한 인공 호수가 세 곳 있다. 모두 겨울철 탐조 여행으로 이름난 호수다. 영암과 경계를 이룬 영암호는 세 호수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해마다 30여종의 겨울 철새가 찾는 철새 도래지이기도 하다. 특히 가창오리가 많이 찾는다. 11월부터 도래하기 시작해 12월쯤 최대 개체수를 이룬다. 올해도 30만여 마리가 찾아와 군무를 펼치고 있다. 이웃한 금호호엔 목재데크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탁 트인 호수 주변을 걷는 맛이 각별하다. 고천암호는 국내 최대 규모의 갈대밭이 있는 곳이다. 호수와 간척지 등을 합친 둘레가 14㎞에 달한다. 차를 타고 다니며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윤두서 고택도 둘러볼 만하다. 조선의 선비화가 공재 윤두서가 기거했던 고택이다.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이 살아 있는 건물로 1670년 지어져 1811년에 중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립 당시엔 48칸 규모였으나 문간채와 사랑채는 사라지고 현재 안채와 곳간, 헛간, 사당 등이 남아 있다. 글 사진 해남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여행수첩 (지역번호 061) →가는 길 : 여낭터 찾기가 쉽지 않다. 땅끝마을에서 77번 국도를 타고 송지면사무소 앞 네거리까지 간 뒤 어란항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어란항 초입에 세워진 이정표를 보고 우회전해 마을로 들어간 뒤 두 번의 갈림길에서 모두 좌회전해 곧장 간다. 야트막한 언덕을 넘고 나면 제주~해남 간 전력변환소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30m 정도 걸으면 작은 묘가 나오고, 그 옆으로 난 소로를 따라 20분 정도 걸으면 여낭터다. 어란마을 석등롱은 어란항 뒤편의 골목길을 따라 끝까지 간 뒤 민가 건물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나온다. 해남관광안내소 532-1330. →맛집 : 해남 읍내 천일식당(536-4001)은 떡갈비와 한정식으로 이름났다. 계절 별미로는 삼치회가 꼽힌다. 햇김에 흰 밥과 묵은 김치, 삼치 선어 등을 올려 먹는다. 이학식당(532-0203) 등이 알려졌다. 땅끝마을 쪽에서는 땅끝바다횟집(534-6422), 본동기사식당(535-2437) 등이 맛집으로 입소문 났다. →잘 곳 : 땅끝비치(534-1002)는 한국관광공사에서 지정한 굿스테이 업소다. 땅끝마을 언덕에 있다. 유선장여관(534-2959)은 각종 여행서와 언론 매체 등에 오르내리며 명소 반열에 오른 숙소다. 영화 ‘서편제’ 촬영지이기도 하다.
  • 하나되어 함께 걷고픈 길… 가슴 시리도록 보고픈 너

    하나되어 함께 걷고픈 길… 가슴 시리도록 보고픈 너

    분단의 아픔 간직한 잔교리 38평화마을 ~ 겨울철 서퍼들의 천국 기사문 해변·죽도 ~ 바다 위 고즈넉한 절집 휴휴암 ~ 갈대밭 품은 포매호 ~ 도루묵 풍년인 남애항… 아! 그곳에 가고 싶다 난데없이 왠 38선이냐 싶겠다. 아무리 곱씹어 봐도 38선이 운위돼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려우니 말이다. 사실 이 계절과 특별한 연관은 없다. 그저 한적한 겨울 바다가 보고 싶었고, 노릇노릇 구워진 도루묵 구이도 먹고 싶던 차에 그에 걸맞은 핑곗거리가 하나 필요했을 뿐이다. 그러자니 속초나 강릉처럼 사람 몰리는 곳은 싫고, 다소 외져도 풍경과 계절 별미가 있는 곳이어야 했다. 그래서 찾은 곳이 강원 양양, 그리고 ‘38선 숨길’이었다. 설악산 한계령을 넘어간다. 양양으로 가려면 꼭 거쳐야 하는 길이다. 눈이 쌓이면 무척이나 위험한 길로 변하지만, 그 전까지는 방문객들에게 나라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풍경의 유희를 안겨 주는 구간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풍으로 화사했던 산자락은 헐벗고 야위었다. 반면 여름 내내 숲에 가려졌던 암릉들은 선이 더욱 굵어졌고, 늘 푸른 소나무의 자태도 어느 계절보다 청청하다. ‘38선 숨길’은 현북면 잔교리, 이른바 ‘38평화마을’에서 서면 영덕리까지 이어지는 38㎞의 트레킹 코스다. 영덕리에서 역순으로 올 수도 있지만, 대개는 잔교리를 들머리 삼는다. 한데 왜 하필 ‘숨길’이고 ‘잔교리’였을까. 현지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요약하면 이렇다. 숨길은 남과 북이 숨을 쉬듯 막힘없이 소통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긴 문구다. 줄곧 38선을 따라간다. 잔교리는 국군의 날 제정의 토대가 된 마을이다. 그 연원을 따져 보려면 시계추를 1945년 광복 직후로 되돌려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한반도에 38선이 그어진다. 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천상륙작전과 9·28 서울 수복 등으로 승승장구하며 북진을 거듭할 무렵 유엔에서 연합군 측에 38선을 넘지 말 것을 지시한다. 연합군이 머뭇대던 사이 국군에 북진 명령이 내려졌고, 국군 3사단 23연대가 최초로 잔교리의 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한다. 그날이 1950년 10월 1일이다. 현재 국군의 날은 이날을 기려 1956년 제정한 것이다. 38선이 그어질 당시 잔교리 또한 마을 중심을 흐르는 잔교천(현 38선천)을 경계로 남북으로 나뉜다. 격의 없이 지내던 마을 주민들이 하루아침에 겯고 트는 사이가 된 것이다. 그 비극적인 과거를 되새기기 위해 38선을 따라 걷는 길을 만들었다. 그게 ‘38선 숨길’이다. 사실 일반 여행객들에게 ‘38선 숨길’은 그리 만만한 거리가 아니다. 상징성은 선명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풍경이 있는 것도 아니다. 들머리와 날머리를 연결하는 교통 수단도 마땅치 않다. 그 탓에 보통은 38선 휴게소에서 여러 조형물들이 늘어선 길을 따라 ‘38평화마을’까지 다녀오거나, 좀더 걸어 대치리까지 간 뒤 내려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38선 휴게소는 7번 국도 바로 옆 기사문 해변에 터를 잡았다. 38선 상징비와 탱크를 형상화한 38선 미니주제체험관 등이 마련돼 있다. 시퍼런 바다 위에선 서퍼 몇몇이 파도를 즐기고 있다. 기사문 해변부터 강릉 방향으로 동산 해변을 거쳐 죽도 해변에 이르는 구간은 서퍼들의 천국이다. 특히 겨울철이면 먼바다에서부터 둘둘 말려 온 파도가 해안까지 이어져 서핑을 즐기는 데 최적의 여건을 제공해 준다고 한다. 휴게소 오른쪽의 지하보도로 7번 국도를 가로지르면 곧바로 ‘38평화마을’로 연결된다. 지하보도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총을 든 청년의 서늘한 눈빛, 녹슨 철모를 뚫고 피는 꽃 등이 인상적이다. 지하보도 너머는 38선천이다. 개울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작은 하천이다. 이 실개천을 두고 한때 남북으로 나뉘어 대치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마을 안으로 들면 다양한 조형물들이 시선을 끈다. 2012년 공공미술사업으로 조성된 작품들이다. 그물에 갇힌 포탄도 있고, 남북 어부가 함께 평화를 낚기도 하고, 평화를 배달하는 우체부의 모습도 눈에 띈다. 마을 인근에도 38선 돌파 기념비, 관동8경 중 하나인 하조대, 일제강점기 3·1운동을 기리는 만세공원 등 볼거리가 제법 많다. 마을을 돌아 나와 양양 여정을 이어 간다. 목적지는 남애항이다. 영화 ‘고래사냥’(1984)의 촬영지였던 곳. 가수 송창식이 부른 동명의 노래에서 보듯 억압받던 그 시절의 청춘들이 완행 열차 타고 찾길 꿈을 꿨던 곳이다. 기암들의 자태가 인상적인 동산항과 인구항 사이에 죽도라는 섬이 있다. 둘레 1㎞, 높이 54m로 섬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크기다. 몇 해 전만 해도 죽도암 주변의 분위기는 고즈넉했다. 이정표가 있어도 찾기 힘들 만큼 외진 곳이었다. 한데 요즘은 이 일대에서 가장 ‘핫’한 곳으로 변했다. 도회지에서 젊은 서퍼들이 즐겨 찾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건물이 올라가고 이국적인 분위기의 밥집, 술집도 우후죽순처럼 늘고 있다. 죽도 주변엔 철재 데크가 놓여졌다. 섬 뒤편에 없는 듯 숨은 죽도암(竹島庵)까지 다녀올 수 있다. 해안도로를 따라 좀더 아래로 내려가면 휴휴암(休休庵)과 만난다. 바다로 뻗은 너른 반석이 인상적인 절집이다. 반석 주변에선 늘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물론 먹이는 돈 주고 사야 한다. 먹이를 뿌리면 30~40㎝에 달하는 황어들이 몰려온다. 수백 마리는 족히 넘어 뵌다. 황어뿐 아니다. 방생한 우럭 새끼 등이 도무지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뿌린 먹이에 길들여진 탓이다. 사람이 환경에 개입하는 건 여러 면에서 고민이 뒤따라야 하는 문제다. 절집에서 물고기 새끼를 방생하고, 먹이를 주는 게 온당한 일인지 좀더 따져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휴휴암 인근의 포매호도 아름답다. 포매호는 강원 북부 해안에 발달한 여러 석호 중 하나다. 화진포 등에 견줘 규모는 작아도 풍경은 제법 옹골차다. 포매호 주변 갈대밭에 조성된 목재 데크를 따라 산책을 즐기는 재미가 각별하다. 남애항은 양양에서 가장 큰 항구다. 매일 아침 열리는 수산물 경매 시장도 근동에서는 가장 크다. 이맘때 위판되는 해산물은 대개가 도루묵이다. 낭자하게 진행되는 여느 항구도시의 경매장과 달리 비교적 짧고 조용하게 경매가 이어진다. 호시탐탐 도루묵을 노리는 갈매기들과 경매사, 어민들이 뒤엉킨 번다한 한때가 지나고 나면 사위가 적요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때 항구 주변을 돌아보는 것도 좋다. 도루묵으로 허기를 달래고, 내일을 위해 그물을 손질하는 어민들과 만날 수 있다. 일렬로 길게 늘어선 활어회센터를 지나면 남애항 바다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 앞에 영화 ‘고래사냥’ 촬영지 표지석이 서 있다. 배우 안성기, 이미숙, 김수철 등이 주연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여기서 촬영됐다고 한다. 전망대 2층의 스카이워크에 오르면 남애항과 망망대해, 파란 하늘이 가슴 가득 담긴다. 글 사진 양양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33) →가는 길 :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서울~양양 간 고속도로를 타고 동홍천 나들목으로 나가 44번 국도로 갈아탄 뒤 한계령을 넘어서면 곧 양양이다. 이어 동해고속도로로 바꿔 타고 하조대 나들목으로 나갈 수도 있고, 7번 국도를 타고 천천히 내려갈 수도 있다. →맛집 : 한계령 너머 범부리에 있는 범부막국수(671-0743)는 이른바 ‘가성비’ 뛰어난 맛집이다. 막국수와 메밀만두 등으로 이름났다. 외양은 거칠고 투박해 뵈지만 맛은 차지고 부드럽다. 계절 별미로는 역시 도루묵이 첫손 꼽힌다. 남애항에서 경매가 끝난 뒤 직접 사서 조리해 먹거나, 주변 음식점에서 맛볼 수 있다. 잠수부횟집(671-9855)은 회, 멍게 등 여러 해산물을 싱싱하게 내는 집으로 알려져 있다. 이맘때면 오징어 물회도 별미다. 동산항 끝에 있다. →잘 곳 : 가족 단위라면 쏠비치 호텔&리조트(1588-4888)가 맞춤하다. 다만 비수기에도 투숙객이 몰려 방 구하기가 만만하지 않다. 서퍼들이 즐겨 찾으면서 기사문항부터 남애항에 이르기까지 숙박업소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었다. 특히 죽도 쪽에 젊은층 취향의 숙소가 많다.
  •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따뜻한 예술인의 낭만… 뜨거운 지식인의 고뇌… 은은한 근현대 문·예향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따뜻한 예술인의 낭만… 뜨거운 지식인의 고뇌… 은은한 근현대 문·예향

    서울신문은 ‘서울미래유산’을 시민과 공유하기 위해 서울시·문화지평과 함께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을 매주 토요일 진행한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co.kr)에서 답사 코스 확인과 참가 신청을 할 수 있다. 다음달 3일 20회차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은 전상봉 서울미래유산해설사의 설명으로 오전 10시부터 2시간 30분가량 마포대로 일대를 살펴본다. 이 지역은 활인서터, 경성감옥터, 3·1만세 시위터, 별영청터, 읍청루터 등 유적지와 최대포집, 역전회관 등 서울미래유산 노포식당이 즐비하다. 관심 있는 시민은 오전 10시까지 지하철 5호선 애오개역 2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되면 인증서와 함께 소유주가 원할 경우 건물 외벽에 현판을 부착한다. 상징 도안은 서울미래유산으로 등록됐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 인장 형식으로 디자인됐다. 인장색은 서울 대표색 중 ‘단청빨간색’을 사용했다. 서울미래유산은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은 서울의 근현대 문화유산 중에서 미래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문화자산 중에서 선정한다. 서울시는 지금까지 372개의 미래유산을 지정했고 앞으로 1000개까지 늘린다는 방침이다.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은 생전에 “건축은 빛과 벽돌이 짓는 시”라고 했다. 김수근은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기사에 여러 번 등장한다. 자유센터, 경동교회, 불광동 성당, 잠실 종합운동장, 정부서울청사, 워커힐 호텔 힐탑바(현 피자힐) 등 도심 곳곳에 그가 설계한 건축물이 많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17회차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출발지였던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은 그의 건축물이 유독 많은 곳이다. 샘터극장, 아르코예술극장, 아르코미술관, 옛 한국국제협력단 건물 등 그가 말한 ‘벽돌이 짓는 시’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벽돌 건물이 사방에 들어서 있다. 그가 건축재료로 벽돌을 좋아했던 이유는 ‘실용과 예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리 급해도 벽돌은 한꺼번에 쌓지 못한다. 때문에 한 장 한 장 단정히 쌓지 않으면 무너지거나 제대로 힘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 벽돌이 지닌 조소성은 무한히 인간화되는 과정을 상징한다”고 했던 벽돌예찬론자였다. 샘터사옥, 아르코예술극장, 아르코미술관은 모두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김수근作 샘터사옥·아르코예술극장한 장 한 장 쌓아올린 벽돌과 빛으로 지은 건물 샘터사옥은 1979년 지어져 연극인·화가 등 예술인들의 만남의 장소로 많이 이용되는 공간이다. 대학로 랜드마크 중 한 곳이다. 1980년 제2회 한국건축가협회상을 받을 정도로 건축미를 인정받았다. 이날 해설을 맡은 한선영 서울미래유산해설사는 “샘터 사옥은 종로구 미관 건물로 지정돼 있어서 건물 외관을 건드리지 않고 유지, 보수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며 “대학로를 상징하는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으로서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자부심을 갖고 있다. 건립 당시 모습이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돼 있어 건축사적인 측면에서 보존 가치가 높다”고 해설했다. 아르코예술극장은 ‘공연예술 진흥과 공연인구 저변 확대를 위한 전문공간 확보, 재정난을 겪는 예술단체들을 위한 발표공간 마련·조성’이라는 취지로 1981년 문을 열었다. 아르코예술극장 개관은 명동·광화문 등 시내에 있던 공연장들을 동숭동으로 이동시키는 촉매 역할을 했다. 현재 동숭동 일대는 97개 극장이 들어서 있고 명실상부한 연극과 문예의 중심지다. 아르코미술관은 옛 서울대 본관 자리에 들어선 전시 전문 공간이다. 미술관이라는 기능 때문에 창이 없다는 특징이 있다. 이 건물들이 위치한 마로니에 공원은 과거 서울대 본부가 있던 곳이다. 1975년 3월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뒤 택지로 개발하려 했지만 여론에 따라 공원으로 조성됐다. 지금은 서울대학교유지기념비를 통해 과거 상아탑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마로니에 공원에는 조선 중기 문신인 해남 윤선도의 생가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조선 후기 화가인 표암 강세황도 동승아트센터 근처에서 자랐다. 소설가 김훈도 마로니에 공원 뒤쪽 낙산을 올라가는 이화동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소설가 한무숙도 혜화동에서 태어났다. 마로니에 공원으로 대변되는 대학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문향과 예향’이 넘쳤던 곳이었다. 미래유산 보고 서울대병원·학림다방근대 의학의 산실… 민주화운동의 불씨가 된 곳 공원 건너편에는 서울미래유산이자 근대 의학의 산실인 서울대병원이 있다. 병원 내 시계탑 건물은 1907년 고종 황제 칙령으로 설립한 대한 의원 건물로 사적 248호로 지정돼 있다. 지금은 의학박물관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앞서 1885년 제중원, 1899년 의학교, 1899년 광제원, 1902년 의학교부속병원, 1905년 대한국적십자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07년 대한의원으로 개원했다. 대한의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의 맥을 이으며 서울대병원의 전신이 된다. 대학로에서 서울대병원을 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서울대 의과대학 정문 옆에는 서울미래유산 학림다방이 있다. 학림다방은 1956년 문을 열었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불씨가 된 학림사건으로 유명한 곳이다. 소설가 이청준·김승옥, 시인 김지하·황지우 등 문학인들이 단골로 다녔던 곳이다. 다방 이름은 서울대 문리대가 마로니에 공원에 있던 시절의 축제인 ‘학림제’에서 따왔다. 신반포에 사는 김혜정(45)씨는 “학창 시절 마로니에 공원에서 연극 보고 나와서 커피를 마시던 추억이 떠오른다”며 “그동안 서울의 많은 것을 못 보고 살았는데 앞으로 부지런히 찾아다니겠다”고 말했다. 시비·기념비·흉상 가득한 대학로안창호 비석·타고르 시비 등 곳곳에 새긴 역사 대학로 주변에는 유난히 돌에 새긴 시비와 기념비, 흉상들이 많다. 흥사단 건물 앞에는 도산 안창호(1878~1938)의 흉상과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란 말씀 비석이 서 있다. 그 옆으로는 시인 김광균(1914∼1993)의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설야’(雪夜) 시비와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로 우리나라를 알렸던 인도 시인 타고르의 흉상 시비도 나란히 서 있다. 혜화동 로터리 우리은행 혜화동 지점 앞에는 한국기독교문인협회장을 지낸 김영진 시인의 ‘혜화동 로터리’라는 시비도 서 있다. 혜화동 로터리에는 4·19혁명 때 서울대와 함께 큰 몫을 한 동성고등학교가 있다. 학교 담벼락 앞에는 ‘4·19 횃불 바로 여기에서’라는 표석이 그날의 역사를 품고 섰다. 동성고 옆으로는 등록문화재 제230호로 지정된 혜화동 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혜화동 로터리 북쪽에는 1953년 문을 연 동양서림이란 책방이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역사학자 이병도(1896~1989)의 장녀인 이순경씨가 문을 연 이 서점은 점원으로 일하던 최주보씨가 인수해 딸에게 물려줬다. 답사에 참가한 이동고(51) 한·아세안센터 부장은 “늦잠 자던 토요일에 일찌감치 도심으로 나와 문화유산을 만나면서 걷다 보니 주말이 산뜻하다”며 “서울신문과 서울시의 답사 기획이 시민들의 인문지식 함양에 좋은 밑거름이 되고 있다”고 했다. 60년 문화 이용원·40년 연우소극장혜화로 골목마다 시대상 간직·공연 열기 이어가 혜화동 로터리부터 혜화초등학교까지 이어지는 혜화로 골목 구석구석에는 동숭무대소극장, 선돌극장. 눈빛극장, 게릴라극장 등이 포진하면서 대학로의 공연예술 열기를 이어가고 있다. 이 골목에는 1940년대 문을 연 문화 이용원이 중간에 몇 차례 주인이 바뀌긴 했지만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다. 같은 장소에서 60여년 동안 운영된 이발소로, 혜화동 일대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장소로 서울미래유산이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오르면 혜화 칼국수가 나오는데, 이곳은 1970년대부터 경상도식 사골국수를 전문으로 했다. 박정희 정권이 1969년 분식장려운동을 펼치면서 국숫집이 성업할 당시 문을 연 것으로 보인다. 한 해설사는 “고개 넘어 한성대 입구 성북동 ‘국시집’은 서울미래유산이지만, 역사가 더 오래된 혜화 칼국수는 미래유산으로 지정받지 못했다”며 “서울미래유산은 소유주의 자율적인 참여를 우선시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내년이면 창단 40주년을 맞는 연우소극장 골목으로 접어들어 내리막을 걸으면 등록문화재 357호인 장면 가옥이 나온다. 장면(1899~1966)은 제1공화국 국무총리와 부총리, 내각제였던 제2공화국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정치 거목이다. 장면의 처남 김정희가 설계한 이 집은 한·일·양식이 혼합된 특징을 갖는다. 한옥으로 된 한명숙 문학관도 인접해 있다. 이 지역부터 시작된 명륜동 한옥밀집지역 전체가 서울미래유산이다. 과천 청계 초등학교 3학년 고승현(9)군은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엄마와 같이 나왔다”며 “경기도에도 이런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울대병원에서 공식 답사를 마치고 한 해설사는 희망자를 이끌고 이화동벽화마을(서울미래유산)과 이화장(사적 497호)을 보기 위해 길을 건넜다. 이날 대학로는 이미 제3차 민중총궐기 참가자들로 꽉 차 있었다. 이화장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귀국 후 살았고, 3·15 부정선거 후폭풍으로 하야한 후에도 잠시 머물렀던 공간이다. 역시 박근혜 정부의 하야 여론이 무성한 시점, 미묘한 감정으로 열일곱 번째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이 마무리됐다. 글 사진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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