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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아이들에게 한국 음식 줬더니…세계 각국 음식에 대한 아이들 반응 화제

    미국 아이들에게 한국 음식 줬더니…세계 각국 음식에 대한 아이들 반응 화제

    미국 어린이들이 세계 각국의 아침식사를 경험해보는 영상이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영상에는 한국 음식을 먹고 난 후 보이는 아이들의 반응도 담겨 있어 눈길을 끈다. 참신한 소재들로 영상을 제작해 인기를 끌고 있는 ‘컷 비디오(Cut Video)’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미국 어린이들의 전 세계 아침 식사 맛보기(American Kids Try Breakfasts From Around the World)’라는 제목의 영상을 지난 11일 공개했다. 영상에는 한국, 브라질, 핀란드, 베트남, 폴란드, 네덜란드의 음식들이 소개됐으며 음식 자문은 레시피 사이트 ‘키친보울(Kitchenbowl)’이 함께했다. 영상을 보면, 아이들은 가장 먼저 한국의 아침 식사를 접하게 된다. 식탁에는 김치, 된장국, 갈치 등이 차려진다. 아이들은 김치를 들어 이리저리 흔들어 보이더니 맛을 보고는 매운맛에 인상을 찌푸린다. 된장국에 들어 있는 멸치를 보고는 “죽은 생선이 들어있다”며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아이들은 계속해서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음식들을 맛본다. 브라질의 아침 식사로 커피와 햄, 바나나 등이 나오는데 그 중 쓴맛의 커피를 마신 아이들은 “소똥 같은 맛”이라는 귀여운 대답을 늘어놓는다. 물론 바나나는 오물오물 맛있게 먹어치운다. 핀란드의 아침식사로는 블루베리와 참치와 양파를 곁들인 빵이 소개된다. 부드러운 맛에 한 아이는 “베개같이 부드럽다”라는 호평을 한다. 아이들은 핀란드가 어디에 있는 나라냐고 묻기도 한다. 아이들은 그렇게 각국의 음식을 먹으며 다른 나라에 대한 관심을 가져보는 기회를 갖는다. 베트남 식사로 나온 피단(숙성시킨 오리알)에 아이들은 신기해하면서도 “화장실 냄새가 난다”라고 느낀 바를 거침 없이 내뱉는다. 그러나 “맛은 좋다”며 만족스러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꽤나 귀엽다. 계란과 소시지, 감자, 사과 등 익숙한 음식들이 한 접시에 담긴 핀란드의 아침 메뉴를 본 아이들은 환호하며 허겁지겁 음식들을 입에 넣는다. 마지막으로 네덜란드의 초콜릿 토스트 하헐슬라흐(Hagelslag)를 맛본 아이들은 달콤한 맛에 푹 빠져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조금은 낯설지만 각국의 음식을 맛본 아이들은 여러 나라의 문화를 경험하고 이해하는 시간을 가진 듯 보인다. 해당 영상은 현재 110만 건 이상의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사진·영상=Cut Video/유튜브 김형우 인턴기자 hwkim@seoul.co.kr
  • 모굴 스키 서지원 동계U대회 사상 첫 메달

    모굴 스키 서지원 동계U대회 사상 첫 메달

    여자 모굴 스키 유망주 서지원(21·이화여대)이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이 종목 최초로 메달을 목에 걸었다. 서지원은 6일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열린 제27회 동계U대회 여자부 프리스타일 모굴에서 51.86점을 받아 동메달을 땄다. 한국이 동계U대회 설상 종목에서 메달을 획득한 것은 2001년 폴란드 자코파네에서 개최된 제20회 대회 스키점프 개인전과 단체전 은메달 이후 세 번째다. 토비 도슨 대표팀 감독은 “서지원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공중 동작을 보완하고 정신력을 키운다면 세계 정상급 선수가 될 것”이라고 칭찬했다. 서지원은 지난해 소치동계올림픽에서 23위에 올랐고, 지난달 미국 유타에서 열린 국제스키연맹(FIS) 월드컵 듀얼 모굴 대회에서는 6위를 차지했다. 이날 서지원과 함께 출전한 사촌 언니 서정화(25·서던캘리포니아대)는 47.58점으로 4위에 올랐고, 남자 모굴에 나선 김지헌(21·송호대)도 58.55점으로 4위를 차지했다. 지난달 24일 개막한 이번 대회에는 42개국 2100여명의 선수단이 참가했으며, 한국은 선수 89명과 임원 42명 등 총 131명이 출전했다. 임주형 기자 hermes@seoul.co.kr
  • [부고] 통일 독일 첫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별세

    [부고] 통일 독일 첫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별세

    과거사 청산과 독일 통일에 깊숙이 개입해 ‘독일 양심의 수호자’라 불렸던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이 31일(현지시간) 숨졌다고 대통령실이 공식 발표했다. 94세. 고인은 1984~1994년 대통령직에 재임하면서 정파를 가리지 않는 절대적 지지를 받아 전후 독일의 국가적 통합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로 꼽힌다. 그에게 ‘독일의 양심’이란 별명이 붙게 된 결정적 사건은 1985년 2차대전 패전 40주년을 맞아 당시 서독 수도 본에서 행한 연설이다. 이 연설에서 고인은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전쟁에 대한 부끄러운 기억들은 하나씩 있게 마련이지만, 유대인 학살은 역사상 그 어떤 일과도 비교할 수 없다”면서 독일의 역사적 책임을 명백히 했다. 아버지가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7년형을 선고받은 나치의 직업 외교관이었다는 약점과 당시 미국과 서독의 우파 지도자들이 소련과의 대결 국면을 내세워 전후 청산 문제를 피해 가려던 분위기를 일거에 뒤집는 연설이었다. 특히 연설 직전 당시 도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헬무트 콜 총리가 비트부르크에 있는 2차대전 전몰자 묘지에 참배한 것이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묘지에 묻힌 이들 가운데 일부는 히틀러의 최고 핵심 측근인 나치무장친위대 고위 장교들이었기 때문이다. 고인의 연설은 최대 우방과 같은 당 소속의 자국 우파 정부까지 공격 대상에 포함시킨 것이다. 이 때문에 독일 국가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1985년 이스라엘을 공식 방문할 수 있었다. 또 동유럽 국가와의 관계 개선에도 앞장섰다. 1989년 폴란드 침공 50주년 기념식에서 고인은 “동유럽 지역에 대한 독일의 영토적 꿈을 포기한다”고 공개 선언하기도 했다. 당시 콜 총리가 국내 정치 역학을 따져대며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던 가운데 선제적으로 선언하고 나온 것이다. 이 선언 덕에 냉전 붕괴 뒤 급속한 민주화 과정을 밟아나가던 폴란드, 체코 등 나치에 대한 피해의식이 강하게 배어 있던 동유럽 국가들을 독일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1983년 서베를린 시장 시절엔 전격적으로 동독을 방문, 에리히 호네커 당시 서기장과 회담을 갖는 파격적 행보도 선보였다. 같은 분단국이라는 점에서 한국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40년 지기였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300명의 생존자와 후손, 70년 후 ‘아우슈비츠’를 걷다

    300명의 생존자와 후손, 70년 후 ‘아우슈비츠’를 걷다

    지난 27일(이하 현지시간) 약 300여 명의 사람들이 폴란드 오시비엥침에 모여 을씨년스럽게 흐르는 조명 아래, 눈 덮힌 길을 마치 순례하듯 걸었다. 정확히 70년 전인 지난 1945년 1월 27일 '이곳'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해방을 기념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들 300여 명은 제2차 세계대전 도중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와 그들의 후손들이다. 무려 70년의 세월이 흘러 생존자 대다수가 90세가 넘는 고령이 됐지만 이들의 기억 속에 홀로코스트는 마치 어제 벌어진 일인듯 생생하다. 생존자 로만 켄트(85)는 "우리의 '과거'가 아이들의 '미래'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면서 "세계인 모두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진 잔악한 행위와 자유를 위한 전쟁을 기억해달라" 며 눈물을 흘렸다. 아우슈비츠에서 부모와 4명의 오빠와 동생을 잃은 로즈 쉰들러(85) 역시 눈물을 흘리며 "과거 아우슈비츠에 오자마자 가족들과 헤어져 이별의 시간도 갖지 못했다" 면서 "가족들의 무덤조차 없어 이곳을 찾아오는 것이 유일한 추모 방법" 이라며 고개를 떨궜다. 홀로코스트를 자행했던 독일 후손들의 뼈저린 반성도 이어지고 있다. 독일 대통령 요아힘 가우크는 이날 독일 연방의회 연설에서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것은 모든 독일인의 도덕적 의무" 라고 강조했으며 전날 앙겔라 메르켈 총리 역시 "나치의 만행을 잊지않는 것은 독일인의 영원한 책임" 이라며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편 기념행사가 열린 폴란드 남부에 위치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이자 집단 학살수용소로 악명을 떨쳤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 전역에서 희생된 유대인 600만 명 중 100만 명 이상이 이곳에서 학살됐다. 사진=게티이미지/멀티비츠 이미지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절벽서 프러포즈 받은 女, 기뻐서 ‘점프’하다 추락

    절벽서 프러포즈 받은 女, 기뻐서 ‘점프’하다 추락

    멋진 절경을 자랑하는 절벽 위에서 사랑하는 남자에게 프러포즈를 받은 불가리아 여성이 불운의 사고를 당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의 29일자 보도에 따르면, 현지시간으로 지난 27일 남자친구와 함께 스페인의 유명 휴양지인 이비싸 섬의 칼라 타리다 해변으로 여행을 떠난 디미트로바(29)라는 여성이 절벽에서 추락해 큰 부상을 입은 채 발견됐다. 현지 구조대가 출동했을 때 디미트로바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숨지고 말았다. 현지 경찰이 조사한 결과 이 여성은 절벽위에서 남자친구에게 로맨틱한 결혼 프러포즈를 받은 뒤, 너무 기쁜 나머지 몸을 들썩이며 제자리에서 점프를 하는 등 기쁨을 표현하다 중심을 잃고 추락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 경찰은 “사망한 여성의 남자친구가 가장 로맨틱한 프러포즈를 위해 직접 장소를 물색했다고 밝혔다”면서 “이 여성은 추락한 직후 심장마비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검시관들은 보고 있다”고 전했다. 절벽에서의 황당한 추락사 사건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해 8월, 포르투갈의 매우 유명한 관광지로 여행을 떠난 폴란드 커플은 절벽 위에서 절경을 배경으로 셀프카메라 사진을 찍다 추락해 사망한 바 있다. 당시 그들의 6살, 5살 된 자녀들이 사고 장면을 목격한 것으로 알려져 더욱 충격을 줬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메르켈 “나치 만행은 독일의 영구적 책임”

    메르켈 “나치 만행은 독일의 영구적 책임”

    “나치 만행을 되새겨 기억하고 모든 형태의 반유대주의와 맞서 싸우는 건 독일의 영구적 책임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70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26일(현지시간) 수도 베를린에서 열린 기념 연설에서 다시 한번 과거사를 겸허히 반성했다. 2005년 총리 취임 이후 수차례나 나치 정권의 반인륜적 만행을 강조해 온 메르켈 총리는 “아우슈비츠는 항상 인간성 회복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일깨운다”며 자유, 민주주의, 법치를 강조했다. 아베 신조 총리 등 일본의 우익 세력이 전범(戰犯)들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옹호하는 모습과 대조적인 장면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메르켈 총리는 이날 연설에서 유대인 10만명이 여전히 독일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거론했다. 그는 “이들이 오늘날까지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모욕당하고 공격받거나 위협받는 것은 독일로서는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종교와 인종에 관계없이 모두가 자유롭고 안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과 텔레그래프는 1945년 1월 27일 옛 소련군이 폴란드 남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나치로부터 해방시킨 것을 기념하는 행사가 27일 유럽 전역에서 잇따라 열렸다고 전했다.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은 베를린의 연방 하원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아우슈비츠 없이 독일의 정체성도 없다”며 “국민 모두 홀로코스트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도 파리에서 열린 행사에서 “점증하는 반유대주의 범죄나 반이슬람주의 운동을 모두 용납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밀로시 제만 체코 대통령은 프라하에서 “이슬람국가(IS)가 앞으로 거대한 홀로코스트를 벌일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트위터를 통해 “아우슈비츠의 비극에 모두가 울고 있다”고 호소했다. 한편 폴란드 남부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10년마다 한 번씩 대규모로 치러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기념행사’에는 이날 오전부터 유럽 각국의 정치인들인 몰려 헌화했다. 행사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300명이 1구역의 ‘죽음의 벽’에 헌화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생존자들은 대부분 90대 고령으로, 이 중 100명은 이스라엘에서 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100만명 이상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은 나치 대학살의 상징적 현장이다. 올해부터는 국제아우슈비츠위원회와 박물관 측이 행사를 주최했고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초청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불참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300명의 ‘아우슈비츠 생존자’ 70년 후 ‘지옥’을 걷다

    300명의 ‘아우슈비츠 생존자’ 70년 후 ‘지옥’을 걷다

    지난 27일(이하 현지시간) 약 300여 명의 사람들이 폴란드 오시비엥침에 모여 을씨년스럽게 흐르는 조명 아래, 눈 덮힌 길을 마치 순례하듯 걸었다. 정확히 70년 전인 지난 1945년 1월 27일 '이곳'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해방을 기념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들 300여 명은 제2차 세계대전 도중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와 그들의 후손들이다. 무려 70년의 세월이 흘러 생존자 대다수가 90세가 넘는 고령이 됐지만 이들의 기억 속에 홀로코스트는 마치 어제 벌어진 일인듯 생생하다. 생존자 로만 켄트(85)는 "우리의 '과거'가 아이들의 '미래'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면서 "세계인 모두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진 잔악한 행위와 자유를 위한 전쟁을 기억해달라" 며 눈물을 흘렸다. 아우슈비츠에서 부모와 4명의 오빠와 동생을 잃은 로즈 쉰들러(85) 역시 눈물을 흘리며 "과거 아우슈비츠에 오자마자 가족들과 헤어져 이별의 시간도 갖지 못했다" 면서 "가족들의 무덤조차 없어 이곳을 찾아오는 것이 유일한 추모 방법" 이라며 고개를 떨궜다. 홀로코스트를 자행했던 독일 후손들의 뼈저린 반성도 이어지고 있다. 독일 대통령 요아힘 가우크는 이날 독일 연방의회 연설에서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것은 모든 독일인의 도덕적 의무" 라고 강조했으며 전날 앙겔라 메르켈 총리 역시 "나치의 만행을 잊지않는 것은 독일인의 영원한 책임" 이라며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편 기념행사가 열린 폴란드 남부에 위치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이자 집단 학살수용소로 악명을 떨쳤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 전역에서 희생된 유대인 600만 명 중 100만 명 이상이 이곳에서 학살됐다. 사진=게티이미지/멀티비츠 이미지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영웅이 된 평범한 소년 이야기’ 국내 첫 독점 방영

    ‘영웅이 된 평범한 소년 이야기’ 국내 첫 독점 방영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등 슈퍼 영웅의 뒤를 이어 올겨울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새로운 영웅이 나타났다. 쫄쫄이팬츠를 입은 슈퍼 영웅이다.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 ‘애니맥스’는 26일부터 천방지축 소년의 코믹 어드벤처 ‘슈퍼파워 쫄쫄이팬츠!’를 국내 최초로 독점 방영한다. ‘슈퍼파워 쫄쫄이팬츠!’는 평범한 소년이 우연히 4차원 세계에서 떨어진 마법의 바지를 입고 슈퍼 영웅 ‘슈퍼쫄쫄이팬츠’로 변신하며 벌어지는 소동을 코믹하게 그리고 있다. 주인공 ‘카일’과 그의 조력자인 말하는 유니콘 ‘필립’, 카일이 짝사랑하는 여자친구 ‘레베카’, 슈퍼쫄쫄이팬츠를 노리는 큰 머리 악당 ‘코텍스’, 레베카의 아빠이자 슈퍼쫄쫄이팬츠를 없애려는 ‘유리해골’ 등 재미있고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애니메이션의 재미를 더한다. 영화 ‘캣츠 앤 독스2’,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2’ 등을 연출한 캐나다 영화 감독 브레드 페이튼이 각본과 감독을 맡아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지난해 11월 캐나다 애니메이션 TV네트워크인 ‘텔레툰’(Teletoon)에서 첫선을 보인 이후 독일, 폴란드, 호주 등 세계 곳곳에서 방영돼 인기를 끌었다. 강주연 애니맥스 편성국장은 “‘슈퍼파워 쫄쫄이팬츠!’는 말하는 유니콘, 마법의 바지, 슈퍼 영웅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요소들이 모두 모여 있는 재미있는 콘텐츠”라며 “아이들이 남은 겨울방학 동안 새롭게 등장한 슈퍼 영웅과 함께 멋진 상상의 세계에 빠져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매주 월·화 오후 6시 전파를 탄다. 총 26화 분량이며 매회 25분 방영된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카타르 명사수 ‘죽음의 경주’서 다시 웃다

    카타르 명사수 ‘죽음의 경주’서 다시 웃다

    올림픽 사격 동메달리스트인 나세르 알 아티야(45·카타르)가 ‘죽음의 경주’로 불리는 2015 다카르 랠리 자동차 부문에서 4년 만에 다시 우승을 차지했다. 알 아티야는 18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끝난 대회 마지막 날 제13구간 경주까지 총 9000여㎞에 이르는 거리를 40시간32분25초에 달려 우승했다. 2위는 2009년 이 대회 챔피언 기니엘 드 빌리에르(남아공)로 41시간7분59초를 기록했다. 알 아티야는 2011년 다카르 랠리를 제패하며 이 대회 사상 최초의 아랍권 출신 우승자로 이름을 알렸다. 특히 그는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부터 2012년 런던대회까지 올림픽에 사격 선수로 5회 연속 출전한 이색 경력을 갖고 있다. 2012년 런던올림픽 사격 남자 스키트 경기에서는 동메달을 획득해 카타르에 대회 첫 메달을 선사한 ‘명사수’다. 그는 2012년 다카르 랠리에 출전했다가 올림픽 사격 출전권이 걸린 아시아사격선수권대회 출전을 위해 랠리를 중도에 기권할 정도로 사격에도 열정을 갖고 있다. 올해 바이크 부문에서는 마크 코마(스페인)가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코마는 통산 다섯 번째 우승을 차지해 이 부문 최다 우승 기록인 스테판 페테르한셀(프랑스)의 6회 우승에 바짝 다가섰다. 해마다 사망 사고가 발생하는 이 대회에서는 올해도 사망자가 한 명 나왔다. 바이크 부문에 출전한 미할 헤르니크(폴란드)가 제3구간인 아르헨티나 산후안과 칠레시토 사이에서 사망했다. 참가자들이 2주 동안 사막지대와 오지 등 험난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이 대회의 완주율은 30% 안팎에 불과하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포용의 힘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 이후 유럽의 이슬람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12일(현지시간) DPA통신은 ‘유럽의 이슬람화를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들’(PEGIDA·페기다) 주도로 독일에서 열리는 반이슬람집회가 역풍을 맞았다고 보도했다. 베를린에서 페기다 시위대는 400여명에 불과했으나 반페기다 집회에는 4000명 넘게 참여했다. 라이프치히에서도 반페기다 시위대는 3만명, 페기다 시위대는 수백명에 불과했다. 뮌헨에서도 반페기다 쪽은 2만명이었으나 페기다 쪽은 300여명에 불과했다. BBC는 “테러 사태가 오히려 반페기다 쪽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내고 있다”고 전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이슬람은 독일의 일부이며 나는 전체 독일을 대표하는 총리”라며 반페기다 진영에 대한 지지를 명백히 했다. 예외는 드레스덴이다. 페기다 쪽 참가자는 2만 5000여명으로 지난번 시위에 비해 7000명이 늘었다. 반페기다 시위대는 7000여명 수준이었다. 드레스덴의 페기다 시위대는 프랑스 파리 희생자들을 애도한다는 의미에서 리본이나 머리띠, 옷 등을 검은색으로 채웠다. 드레스덴은 폴란드, 체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데다 시골 지역이어서 보수세가 강하다. 극우정당의 인기도 올라가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네덜란드 현지 언론의 지난 11일 여론조사 결과 헤이르트 빌더르스가 이끄는 자유당에 대한 지지도가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총선을 치를 경우 150석 가운데 31석을 차지할 것으로 나왔는데 이는 지난 총선의 2배다. 자유당은 유럽연합과 이민을 반대하는 극우정당이다. 빌더르스는 이슬람의 코란을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비유하는 등 반이슬람 언동으로 테러 위협을 받았고 현재 24시간 무장경호를 받고 있다. 한편 프랑스 경찰은 테러 사건 공범 5~6명의 뒤를 쫓고 있다고 밝혔다. 인질극 끝에 살해된 3명에 더해 모두 10여명 정도가 이번 사건에 관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마뉘엘 발스 총리는 “추가 테러 위협을 막기 위해서라도 공범을 추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불가리아 수사당국은 불가리아에서 터키로 국경을 넘으려다 체포된 아이티계 프랑스인 졸리 요아킨을 검거해 조사하고 있다. 요아킨은 테러 발생 일주일 전인 지난해 12월 30일 이전 이번 테러의 주범인 쿠아치 형제 중 1명과 수차례 접촉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에선 해킹 공격이 발생했다. 이슬람국가(IS)를 자처하는 해커가 국방부 네크워크 해킹으로 빼돌린 자료라며 인터넷에 다량의 문건을 공개했다. 이 해커는 미 중부사령부 트위터 계정에 “미국 군인들이여, 우리가 오고 있다. 등 뒤를 조심하라”는 협박 문구를 남겼다. 미 국방부는 해킹당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구체적인 피해 규모 등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로이터통신은 “공개된 정보를 보면 상당수 구글 검색으로 얻을 수 있는 수준이어서 해킹 수준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전했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K팝 열풍도 좋지만 좀 더 깊이 있는 한국문화 보여주길”

    “K팝 열풍도 좋지만 좀 더 깊이 있는 한국문화 보여주길”

    절제의 미학 속에 내면적 충만함을 추구하는 한국의 달항아리와 한국 현대미술의 한 축을 이루는 ‘단색조 회화’를 통해 한국의 정신성을 세계에 알리는 순회전시회 ‘텅빈 충만’전이 인도네시아에서 대장정의 클라이맥스를 맞고 있다. 지난해 6월 중국 상하이에서 시작돼 아시아와 유럽을 거쳐 동남아를 찾은 이 전시회의 기획자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전시감독은 “‘텅비어 있으되 가득히 충만함’으로 요약되는 한국 예술의 깊이 있는 정신성을 담은 달항아리와 단색화에 대한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며 “당장에 보여주기 쉬운 K팝이나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도 좋지만 그보다 좀 더 깊이 있는 한국 문화를 보여주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고급 문화는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지만 훨씬 효과가 지속적이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며 “현재 전 세계 24개국에 있는 28개의 한국문화원들이 주재국의 문화예술기관과 협업하는 방식으로 한 차원 높은 문화외교활동을 기반으로 한국문화의 저변을 확대해 나가면 훨씬 더 시너지 효과가 클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카르타 한국문화원과 인도네시아 국립미술관 공동 주관이었던 이번 전시의 경우 인도네시아 교육문화부가 자체 페이스북에 소식을 전하는 등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현지 문화계의 뜨거운 반응을 끌어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주관하는 ‘해외문화원 패키지프로그램 순회사업’의 첫 프로젝트였던 이번 전시는 오는 2월 브라질에서 대장정을 마무리하지만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 동유럽과 네덜란드, 독일 등에서 전시 요청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정 감독은 전했다. 단색화는 1970년대 중반 시작돼 40여년간 독창적 사조로 존재해 왔지만 지금까지 형식의 유사성으로 흔히 서구의 모노크롬 회화의 일부로 치부돼 국제 미술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돼 왔다. 이에 대해 정 감독은 “한국 단색화에는 한국문화의 정신성이 녹아 있다. 서구의 미니멀리즘이나 모노크롬 회화와 이념적, 미학적으로 차이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백자의 전통을 기반으로 한 달항아리는 형태라는 객관적 현상이 있지만 속은 텅 비어 있다. 달항아리에서 내용은 눈에 보이지 않고 형식 속에 녹아 있다. 한국의 단색조 회화도 내용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 즉 작업 그 자체를 중시하기 때문에 탈물질화된 현상으로서의 회화적 가치를 지닌다”면서 “‘텅빈 충만’전은 세계문화의 컨텍스트 안에서도 보편적 가치를 지닌 단색화의 가치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서울신문이 만난 사람] 아마추어 산악인 손영조 덕유산국립공원 자원보전과장

    [서울신문이 만난 사람] 아마추어 산악인 손영조 덕유산국립공원 자원보전과장

    5000만여 가지의 꿈과 계획이 새해를 맞아 커나가고 있을 것이다. 금연, 다이어트, 몸 만들기, 내집 마련과 같은 꿈들을 살뜰히 가꿔 나갈 것이다. 벌써 급한 이들은 다부지게 세웠던 한 해의 계획이 어그러졌다며 좌절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이들에게 1년도 아니고 14년이란 세월을 건너 자신의 계획과 꿈을 이룬 손영조(49) 덕유산국립공원사무소 자원보전과장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국내에서 7대륙 최고봉을 모두 오른 이는 엄홍길, 오은선, 고(故) 박영석, 허영호, 박영미 등 한 손으로 꼽을 정도다. 모두 난다 긴다 하는 전문 산악인들. 그런데 손씨는 다르다. 직장 생활과 산행을 병행하고 있다. 아마추어 산객으로서 뜻을 세우고 옹골차게 완성하기까지의 얘기를 듣고 싶어 지난 연말 덕유산이 있는 전북 무주로 향했다. 전북 남원 출신인 손 과장은 어릴 적부터 지리산 자락에만 오르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대기업 건설회사에 다니며 경기 안양의 등산장비점을 무작정 찾았다. 산을 좋아하는 이들을 만날 수 있겠다 싶어서였다. 그렇게 산악회에 들어 빙벽 등 등반 기술을 익혔다. 휴가를 주말에 몰아쓰기가 어려운 건설회사에 간청, 금요일 일을 마친 뒤 고속버스로 밤에 이동해 전국의 국립공원을 종주했다. 그렇게 산과의 인연을 깊이 하던 중 1995년 국립공원관리공단 채용 공고를 보고 이거다 싶었다. 산이 근무지인데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이었다. 월급이 반토막 나겠지만 그는 결혼한 지 한 달도 안 된 부인을 설득해 고향 남원으로 내려갔다. 클라이밍 기술을 아는 이가 없어 본인이 산악회를 만들고 후배들을 교육시켰다. 언제 7대륙 최고봉에 오르겠다는 뜻을 세웠는지 궁금했다. “2000년 밀레니엄을 맞아 어린 아들딸과 어렵게 헤어져 초오유(8201m) 원정에 따라 나섰는데 다른 대원이 정상에 올랐다며 캠프3에서 그만 내려가라고 하더라. 날씨도 좋고 체력에도 문제가 없었는데 허탈했다. 3시간 쪼그려 앉아 많이 울었다. 그때 내 성격대로, 내 색깔대로, 내 팀을 꾸려 원정을 다니겠다고 마음먹었고 5대륙 최고봉을 모두 오르겠다고 결심했다.” 2001년 유럽 최고봉 엘부르즈(5642m)로 첫발을 뗐고 2년 뒤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6959m)를 올랐다. 그렇게 두 봉우리를 마치니 주위의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직장에서도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고 가능성이 있겠다는 신념이 굳어졌다. 그는 남들보다 다섯 배는 더 힘들었다고 했다. 혼자서 정상 공격과 원정대장 역할, 기록에다 사진은 물론 동영상 촬영까지 해내야 했다. vx2100이란 큰 촬영 장비를 배낭에 넣고 다녔다. 여기에 오랜 시간 직장을 비울 수 없어 다른 원정대보다 빨리 정상을 공격하고 돌아와야 하는 어려움까지 겹쳤다. 이 무렵, 부인과의 갈등에 부닥친다. “원정을 갈 때마다 아내와 부딪힐 수 없으니 그런 갈등을 한번에 해결하려고 했다. 5대륙 최고봉 완등까지 하는 것으로 합의했는데 7대륙까지 끝내게 됐다.” 세 번째 여정은 2004년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 열한 살 때,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를 한국인 최초로 등정해 카퍼레이드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보면서 ‘좋아하는 산에 올라도 저렇듯 큰 명예를 얻는다’는 것을 알려준 고상돈씨가 1979년 유명을 달리했던 곳이다. 그가 마음속에 간직한 또 한 명의 산악인, 일본인 우에무라 나오미가 1984년 세계 최초로 동계 등정한 뒤 세상을 뜬 곳이기도 하다. “어제 일처럼 그때 일이 떠오른다. 1.5m 폭설이 쌓여 어떤 등반대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난 짧은 휴가 때문에 빨리 올라야만 했다. 폴란드 팀 둘이 따라 나섰는데 데날리 패스에서 돌아서버렸다. 어쩔 수 없이 나 혼자 올라가는데 폭설에 안개까지 겹쳐 하얗게만 보여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는 화이트아웃에 걸렸다. 배낭을 깔고 앉아 두 시간 동안 마음의 정리를 했다. 가족에게 빚만 잔뜩 안기고 죽게 생겼다, 뭐 이런 생각을 하는데 하늘이 개벽한 듯 열렸다.” 올라야 할 루트가 눈에 들어오고 이제 남은 것은 200m 남짓 나이프 리지. 고상돈과 우에무라가 실족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간이었다. “이곳을 건너는 데 적어도 두 명은 있어야 한다. 한 명은 확보를 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 혼자 건널 수밖에 없었다. 용기가 두려움을 한 뼘이라도 이겨야 하는데 그랬다. 30분 이상 고민하다 피켈을 꽂고 걸음을 옮기며 건넜다.” 정상임을 증명할 아무것도 없는 눈무더기를 헤치니 표식봉이 나타나 촬영한 뒤 매킨리신(神)을 영접했다. 하산하는데 폴란드 팀이 못 내려가고 있었다. 한 명은 탈진했고 다른 쪽은 설맹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 설맹에 빠진 친구를 줄로 묶고 내려와 목숨을 구해 줬더니 그들이 고맙다며 내놓은 것은 초콜릿 두 개가 고작이었다. 서로들 마주 보며 한참을 웃었다. 다른 원정대 모두 등정 사실을 믿지 않아 동영상을 되돌려 보여줬더니 모두 기겁을 했다. 그렇게 하산하다 크레바스에 빠졌다. “피켈을 찍어 추락을 면했다. 발 아래 깊이를 알 수 없는 암흑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더라. (캠프3까지 동행한) 경호야! 경호야!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가는귀 때문에 듣지 못했다. 어찌어찌 내 힘으로 기어 올라와 목숨을 건졌다.” 서두르다 보니 일주일 앞당겨 등정에 성공한 셈이 됐다. 앵커리지로 나와 귀국하려는데 비행편 예약 변경이 쉽지 않았다. 체류비가 하루 50만~70만원씩 들어 고민할 즈음, 한 주민이 자신의 목조주택 지붕에 이끼가 쌓여 보기 흉하니 제거해 달라고 해 등반 장비를 이용해 닦아내고 체류비를 훨씬 웃도는 돈을 챙겨 귀국했다. 2005년 아프리카 킬리만자로(5898m)를 다녀온 뒤 2008년 아시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기에 앞서 비용 1억 2000만원 때문에 애를 태웠다. 염태영 공단 감사(현 수원시장)의 도움을 받았다. 손 과장의 사연을 알고 일부러 지리산 연하천산장을 찾아와 밤새도록 얘기를 나눈 뒤 단장직을 수락했다. 그 덕에 대원 셋을 2년 동안 훈련시켜 원정에 함께했다. 김완주 전북지사를 만나서는 얼떨결에 “국책사업인 새만금을 전국에 홍보할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를 쳐 도움을 받았다. “두 달 휴직원을 내고 떠났는데 베이징올림픽 성화 봉송 때문에 정상 등정이 일주일 미뤄졌다. 몬순은 다가오고, 아주 애가 달았다. 다행히 중국인 대신 네팔 사람이 성화를 봉송해 정상 길이 열렸다. 그런데 오르다 생각하니 에베레스트 하나만 오르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셋 모두 히말라야가 첫 경험이었던 대원들이었다. 넷을 두 조로 나눠 부대장 일행으로 하여금 로체 정상을 공략하도록 사흘 내내 무전으로 지시하고 그들이 성공한 뒤 무사히 내려온 것을 확인하고 우리 둘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남들은 가이드도 수십 명씩 데리고 다니고 캠프마다 산소통을 비치하는데 우리는 1인당 2개만 갖고 8000m 지점에서 올라갈 때 한 번, 내려올 때 한 번 쓰게 했다. 그렇게 넷이서 두 봉우리를 단번에 등정했다고 했더니 베이스캠프의 다른 원정대들이 모두 어이없어했다.” 귀국했을 때 인천공항에 마중 나온 염 감사가 품에서 사직서를 꺼내며 “대원들이 돌아올 때까지 단장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내지 않았다”고 털어놓았을 때 감격에 북받쳤던 일도 생생하다. 이제 6대륙째로 넘어가야 하는데 남극이 문제였다. 최고봉 빈슨매시프(4895m)를 오르는 데 남극관리기구(ANI)에 4300만원을 선납해야 했다. 주위에 손을 벌려 2000만원을 만들었는데 출발 일주일을 남겨두고 갑자기 약속한 곳에서 3000만원을 주지 못하겠다고 통보해 온 것. 하지만 일주일 만에 3600만원을 빌려 떠났다. 빈슨매시프를 다녀온 뒤 생각해 보니 빚밖에 없었다. 공단으로 직장을 옮긴 뒤 20년 동안 월급 통장에서 떼어 갚은 빚만 7000만원 정도. 이자까지 치면 아파트 한 채 값은 날린 셈이었다. 해서 돈도 좀 갚고 승진 시험에 매달리느라 3년 동안 원정 계획을 미뤘다. 그리고 마지막 봉우리 오세아니아의 카르스텐즈(4884m)가 남았다. “비용을 따져 보니 1600만원 정도 들겠더라. 지난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들어온 부조금 700만원을 종잣돈으로 삼았다. 어머니가 마지막 가시는 길, 아들의 원정 비용을 도와주신 것이다.” 그렇게 지난해 11월 20일 카르스텐즈 정상을 발아래 두면서 14년에 걸친 염원을 완성했다. “공단 이사장이 직접 격려 전화도 해 주시고 마음 편하게 갈 수 있는 회사 분위기가 만들어져 홀가분한 기분으로 떠났다. 그래서 정상에 30분 있으면서 기쁘고 마음이 날아갈 듯 가볍고 이 가시밭길 꿋꿋하게 고집 하나로 밀고 온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에베레스트 오를 때보다 훨씬 좋았다.” 그러나 여느 산악인이 그렇듯 정상에서 막 돌아선 순간, 두려워졌다고 했다. 앞으로 뭘 해야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 가슴에 오래도록 묻어뒀던 이미지 하나가 선명히 떠올랐는데 에베레스트 길목의 아마다블람(6856m)이었다. 네팔 안나푸르나의 마차푸차레(6853m), 알프스 마터호른(4478m)과 함께 세계 3대 미봉(美峰)으로 손꼽히는 봉우리. 남원의 비좁은 아파트에는 그동안 구입한 등반 장비를 둘 공간이 없어 몇 해 전 컨테이너로 산막을 꾸몄다. 컨테이너 겉면에 손수 아마다블람을 그려 넣었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 주는 그의 눈빛이 유달리 빛났다. 인터뷰가 한 시간 진행됐을 때에야 그는 사실 등반할 수 없는 발을 갖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1997년 남원에 손수 만든 인공암장을 오르다 추락, 변변찮은 병원에서 수술하는 바람에 발등에 뼛조각들이 남아 있다는 것. 특히 아이젠을 차고 설사면을 걸을 때 뼛조각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라고 했다. 손 과장은 “천성 탓인지 돈 걱정을 하지 않는다”며 “돈이 없으면 주위에 빌려 달라고 하면 된다. 다녀와 갚으면 된다. 이제 커다란 목표를 이뤘으니 정 사정이 안 되면 안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그가 원정을 떠나 있는 동안 부인은 불안감을 지우려 종이접기를 배워 이제 전문가 반열에 들었고 그게 직업이 됐다. 그가 목표를 모두 이룬 뒤 남원 자택으로 돌아오자 부인은 “이제 그만할 거죠”라고 묻기부터 하더란다. 그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여느 산악인이 그렇듯 늘 거짓말을 한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말마따나 “촌스러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철두철미한 사람이다. 직장 일도 허투루 한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고 애쓰고 얼마 전에는 직무에 꼭 필요한 산림기사 자격증까지 땄다. 한국산악회 전북지부 일도 열심이고 지리산에서 근무할 때는 아들에게 ‘산맛’을 가르치려고 청소년산행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강연도 다니면서 자신의 등정 사진이 들어간 책갈피를 손수 제작해 아이들에게 나눠 준다. 따로 헬스클럽 같은 곳에 돈 쓸 이유가 무어 있느냐며 아파트 계단을 10회 정도 오르고 체육공원 시설을 이용해 웨이트를 하는 아침운동을 90분쯤 한다. 사진 촬영을 위해 향적봉 오르는 곤돌라 안에서 눈으로 뒤덮인 산 그리메를 어루만지듯 바라보던 그가 이런 말을 더했다. “정말로 신기하게도 그렇게 소규모로,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원정대를 꾸렸는데도 단 한 명도 잃지 않았다. 그 점이 나로선 가장 큰 축복이고 자랑이다.” 글 사진 무주 임병선 전문기자 bsnim@seoul.co.kr
  • 또 모터바이크… 올 다카르랠리 첫 희생

    또 모터바이크… 올 다카르랠리 첫 희생

    올해도 어김없이 또 목숨을 앗아갔다. 2주 동안 9100여 ㎞의 오프로드를 밤낮 없이 달리며 탈것과 드라이버의 한계를 시험하는 ‘죽음의 레이스’ 다카르랠리에서 나온 올해 첫 희생자다. 제35회 다카르랠리 조직위원회는 모터사이클 부문에 출전한 폴란드 출신 미할 헤르니크(39)가 경기 도중 숨진 채로 발견됐다고 7일 발표했다. 대회 사흘째 제3구간인 아르헨티나의 산후안~칠레시토 사이에서 추적 신호가 끊겨 근처를 수색한 결과 정상 경로에서 300m가량 벗어난 곳에서 숨져 있는 헤르니크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사고로 추정되지만 사망 원인은 아직 자세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험난한 코스와 지형, 잔혹한 기후에 탈것으로 맞서는 다카르랠리는 1979년 창설 이래 모두 60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갔다. 사하라 사막 북부 모리타니의 정쟁으로 인한 테러 위협 때문에 개막 전날 전격 취소된 2008년을 제외하면 이날 헤르니크의 죽음으로 2005년부터 올해까지 10년 연속 희생자를 기록했다. 또 헤르니크는 첫 대회 이후 출전 선수로는 28번째 사망자로 이름을 남겼다. 관중과 미케닉(정비사), 기자 등 대회 관계자까지 포함하면 61번째다. 더욱이 자동차, 트럭과는 달리 외부 위험에 직접 노출돼 있는 2륜과 4륜 모터사이클의 경우에는 28명 희생자 가운데 대다수인 19명이 헤르니크처럼 죽음의 레이스를 펼쳤다. 다카르랠리는 포뮬러원(F1)과 곧잘 비교되지만 위험성만 따지면 F1은 ‘애교’ 수준이고 ‘새장 속의 경주’다. 그런데도 해마다 랠리가 이어지는 건 조직위와 개최국에 돌아오는 막대한 수입 때문이다. 2009년 대회를 남미에서 처음 개최한 아르헨티나의 공식 관광 수입은 2000만 달러로 전해지지만 이외에도 TV를 통해 2주일 넘게 지켜보는 전 세계 6억 인구의 눈을 겨냥한 광고 수입도 제법 짭짤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병규 기자 cbk91065@seoul.co.kr
  • [부고] 현대사회학 고전 ‘위험사회’ 남기고 떠나다

    [부고] 현대사회학 고전 ‘위험사회’ 남기고 떠나다

    독일의 세계적인 사회학자 울리히 베크가 지난 1일(현지시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쥐트도이체차이퉁 등 현지 언론들이 3일 보도했다. 70세. 고인은 1980년대부터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회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같은 독일 출신의 위르겐 하버마스, 영국의 앤서니 기든스와 함께 현대 사회학의 흐름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8개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고 도이치빌레 등 7개 매체에 칼럼을 연재해 왔다. 1986년 출간한 저서 ‘위험사회’는 세계 35개국 언어로 번역돼 ‘위험사회론’을 이론화했다. 현대 사회학의 고전 반열에 오르며 한국 사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고인은 이 책에서 서구 중심의 산업화와 근대화가 위험사회를 낳는다고 경고했다. 이 밖에 ‘정치의 재발견’, ‘지구화의 길’,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 ‘경제 위기의 정치학’ 등 다양한 저서를 통해 기후변화, 테러리즘, 재정 위기 등을 다뤘다. 고인은 한상진 서울대 교수 등 비판적 사회학 이론을 이끌던 한국 지식인들과 빈번하게 교류했다. 지난해 7월에는 학술대회 강연차 방한해 박원순 서울시장과 대담했다. 그는 “1990년대 들어 본격화한 신자유주의를 넘어서 민주주의를 재창조하기 위해 국가 간 연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자유로운 사고의 근간에는 독특한 성장 배경이 자리한다. 1944년 독일 슈톨프(지금의 폴란드 스웁스크)에서 태어난 고인은 하노버에서 성장했다. 1960~1970년대 뮌헨대에서 공부해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6~7곳의 독일 대학을 전전하다 1992년에야 뮌헨의 루드비히 막시밀리안대에서 정식 교수로 임용됐다. 영국 런던정치경제대에선 교환교수로 일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전장의 개념 바꾼 사령관 히틀러는 바꾸지 못했네

    전장의 개념 바꾼 사령관 히틀러는 바꾸지 못했네

    구데리안/하인츠 구데리안 지음/이수영 옮김/길찾기/736쪽/2만 6000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도 예외는 아니다. 2차대전기의 수많은 전투며 관련된 인물평 역시 승전국들에 기운 것이 많다. 하지만 패전국 독일엔 ‘승자의 기록’을 뛰어넘는 걸출한 인물이 적지 않았고 대표적인 인물이 하인츠 구데리안(1888~1954)이다. 연합군을 패퇴의 연전으로 몰아간 독일 기갑부대의 창설자다. ‘기갑부대의 아버지’란 별명을 가진 구데리안은 요즘 경영·경제 영역에서도 역발상의 모델로 회자된다. ‘구데리안’은 그가 죽기 전 직접 쓴 제2차 대전 회고록이다. 히틀러를 설득해 기갑부대를 창설한 과정, 기갑부대를 이끌고 시작한 폴란드 진입, 프랑스 점령, 소련전, 패전 등 자신이 관여한 전투를 기갑부대에 초점을 맞춰 기록했다. 그에 얽힌 전략·전술 성패,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상세하게 보인다. 폴란드 진입과 오스트리아 합병 때 전투를 피하려고 평화적인 진입을 고집했던 군인의 색다른 면모가 인상적이다. 그 유명한 티거 탱크와 판터 전차 개발 과정이며 연합군을 지휘한 처칠의 사실과는 다른 전황 보고, 메시지들도 눈길을 끈다. 승전국들도 모델로 삼아 교육하는 패전국 적장 구데리안. 그 명성의 바탕은 역발상이다. 신속한 기동과 기습으로 적진을 돌파하는 전격전을 창시해 전장의 개념을 바꾼 전술의 전환. 보병부대의 부속물에 불과했던 탱크의 개념을 바꿔 탱크부대를 독립적으로 운용토록 히틀러를 설득해 마침내 기갑부대를 창설했다. 1940년 프랑스 침공은 그 혁혁한 성과의 한 부분이다. 기갑부대를 앞세운 독일군은 뫼즈강 교두보를 돌파한 뒤 프랑스를 횡단해 3주 만에 도버해협까지 진군했다. 하루 50~70㎞를 전진하는 독일군 앞에서 프랑스·영국군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고 한다. 책의 특장은 그 연전연승의 기록 이면에 숨은 그림자를 속시원히 끌어내 보인다는 점이다. 특히 히틀러를 포함한 수뇌부와의 갈등이 빈번히 등장한다. “내일 군인들은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될 거요. 독일의 안녕을 위해 이 맹세가 충실하게 지켜지길 바랄 뿐이요. 우리 군이 명예롭게 그 맹세를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구려.” 1934년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 아내에게 쓴 편지글이다. 광기의 히틀러와 나치의 앞날을 예고한 듯한 심경 표현이 곳곳에 스며 있다. 특히 1942년 히틀러 총통에게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력을 몰아준 법이 의회를 통과한 대목에선 이렇게 적고 있다. “독재자에게 무한 권력을 행사할 법적 토대를 마련해 줬다. 군인들은 관여하지 않았다. 단지 그 불행한 결과만을 감당해야 했다.” 소련전에서 후퇴와 전진을 놓고 히틀러와 마찰을 빚은 구데리안은 직위해제됐지만 유럽 전선에서 밀리던 전세를 역전시키는 방편으로 기갑부대의 필요성을 뒤늦게 파악한 히틀러의 부름을 다시 받아 1944년부터 패전 때까지 기갑총감과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나치당에 가담하지도 않았고 유대인 학살에도 반대했으며 조국 프러시아를 위해 싸운 군인이자 군사 이론가.’ 육군기계화학교장 황태섭 소장이 책 추천사에서 소개한 구데리안이다. 그 구데리안은 회고록 ‘제3제국의 주요 인물들’편에서 히틀러를 이렇게 정의한다. “히틀러는 유럽을 통일하고 싶어 했다. 그 의도는 여러 민족의 다양성에 대한 무시와 중앙집권적 방법으로 인해 처음부터 실패할 운명이었다. 위대한 모범으로 삼았던 프리드리히 대왕과 비스마르크 같은 지혜와 절제도 없이 성공에서 성공으로 실패에서 실패로 쉴 새 없이 외롭게 질주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건널목 힘겹게 건너는 할머니 겁주는 경찰차

    건널목 힘겹게 건너는 할머니 겁주는 경찰차

    건널목을 힘겹게 건너는 할머니를 겁주는 경찰 순찰차의 모습이 포착됐다. 지난 28일 폴란드 마우폴스키에주 크라쿠프 인근의 한 도로 건널목. 정지신호에 멈춘 경찰차의 모습이 블랙박스 카메라에 잡혀 있다. 할머니 한 분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상황. 연로한 할머니의 늦은 걸음걸이로 인해 빨간불 신호가 차량 출발 신호인 파란불로 바뀐다. 파란불 상태에서도 미처 건널목을 다 건너지 못한 할머니에게 1차선 도로에 정지해 있던 순찰차가 차선을 옮겨 할머니를 밀어붙인다. 순찰차에 놀란 할머니가 잰걸음으로 인도로 자리를 피한다. 이 영상을 접한 누리꾼들은 “나쁜 경찰들”, “연로한 할머니에게 저런 짓을”, “너무 하네요” 등 질타하는 댓글을 달았다. 사진·영상= RM Videos youtube 영상팀 seoultv@seoul.co.kr
  • 해외공무원 연수생을 철도공단 인턴으로 뽑는다

    해외공무원 연수생을 철도공단 인턴으로 뽑는다

    한국철도시설공단(철도공단)이 국내 대학과 국책연구소 등에서 연수 중인 해외 공무원을 대상으로 인턴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개별 국가 및 국제기구와 협력을 통한 프로그램은 많지만 국내 타 기관 연수생을 선발해 인턴십을 실시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31일 철도공단에 따르면 새해 1~2월 진행하는 글로벌 철도 인턴십에는 필리핀·몽골·과테말라·폴란드·짐바브웨 등 11개 국가의 공무원과 연구원, 교수 등 12명이 참여한다. 이들은 서울시립대와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에서 국토·도시개발 및 개발정책 분야 학위과정을 밟고 있다. 겨울방학을 활용해 한국의 철도기술을 체험하고 철도가 국가경제 발전 및 지역 균형개발에 기여한 사례를 연구할 계획이다. 인턴 참가자들은 전공분야를 고려, 각 본부에 배치해 공단 직원들과 함께 근무한다. 국제 신인도 향상 및 지식·정보 교류협력, 자국 철도산업 현황 및 진출, 한국철도와 교류 협력 방안 등의 과제를 부여했다. 철도공단과 같은 역할을 하는 몽골 국영철도공사의 쿨란 프로젝트담당관(신호통신)은 기술본부 신호통신처에서 양국 간 신호·통신 설계와 시공방식 비교 등을 연구하게 된다. 짐바브웨 재정경제개발부 페트로넬라 마빙가 수석연구원(부채관리)은 기획재무본부 재무전략처에 배치돼 자국 부채관리 현황 및 개발프로젝트 파이낸싱 사례 연구를 진행한다. 인턴 참가자들에게는 일비와 식비, 기숙사가 제공된다. 또 건설현장 및 철도산업체, 폐선부지 활용 현장 등에서의 공식 일정과는 별도로 직원 멘토링제를 통해 가정 방문 등 문화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할 계획이다. 해외 철도사업 진출에 적극 나서고 있는 철도공단은 개도국의 차세대 리더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글로벌 인턴십을 통해 한국의 철도 기술을 알리고 ‘친한파’ 인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명환 인재개발처장은 “국제협력네트워크 확대뿐 아니라 직원들이 외국인과 근무하면서 국제 감각을 향상시키는 계기로 삼을 계획”이라면서 “신청자가 많고 연수기관도 적극 지원 의사를 밝혀 프로그램 확대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전 박승기 기자 skpark@seoul.co.kr
  • 올해 세상을 떠난 세계 주요인사들 - AFP 선정

    올해 세상을 떠난 세계 주요인사들 - AFP 선정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콜롬비아 출신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부터 미국 할리우드 배우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로빈 윌리엄스까지, 올 한해 사망한 주요 유명인사를 AFP통신이 소개했다. ‘2014년 주목할 만한 사망’(Notable death in 2014)이라는 타이틀로 공개된 이 목록을 살펴보고 한해를 돌이켜보는 것은 어떨까. ■ 1월 아리엘 샤론=이스라엘 총리로 2005년 가자 지구에서의 이스라엘 철수라는 역사적 정책을 주도했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8년간 혼수상태로 투병 끝에 텔 아비브 근교 병원에서 11일,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지휘자. 밀라노 스칼라극장 음악감독,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역임하고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조직해 세계적인 수준의 음악축제로 격상시켰다. 긴 투병 생활 끝에 볼로냐에서 20일,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피트 시거=미국인 포크 가수. 우디 거스리와 함께 미국의 저항적인 프로테스트 포크를 발전시킨 중요 인물로 꼽힌다. 뉴욕 시내의 병원에서 27일,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맥시밀리안 쉘=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오스카 수상 배우. 영어권에서 독일어를 쓰며 성공한 몇 안되는 배우로 영화 ‘젊은 사자들’로 데뷔, ‘뉘른베르크의 재판’에서 피고측 변호인을 맡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병에 의해 28일,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2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미국의 오스카 배우. 2005년 영화 ‘카포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2012년 ‘마스터’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유작으로는 ‘헝거게임’ 시리즈 등이 있다. 뉴욕의 집에서 2일 약물과다 복용에 의해 46세 나이로 사망했다. 셜리 템플=미 할리우드의 영원한 아역 스타로 결혼 이후 정치에 입문해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1935년 아역 부문 오스카상을 수상해 역대 아카데미 최연소 수상을 기록했다. 캘리포니아주(州) 자택에서 10일,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파코 데 루치아=스페인의 기타리스트로 플라멩코 기타의 전설로 불렸다. 플라멩코에 재즈, 록, 보사노바, 탱고 등 다양한 음악적 요소를 결합한 ‘뉴 플라멩코’를 선보이며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고 전 세계 플라멩코 기타리스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심장마비로 25일,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3월 제라르 모르티에=벨기에 출신의 세계적인 오페라 감독. 10년간 브뤼셀의 라 모네 왕립극장을 이끌며 유럽 변방이던 이 극장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전설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 사망 이후 잘츠부르크 축제의 총감독을 맡아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암으로 투병생활 끝에 8일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메드 테잔 카바=10년 넘게 이어온 시에라리온의 내전 종식을 이끈 대통령. 빈민 구제에 실패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수도 프리타운의 집에서 13일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4월 미키 루니=미 할리우드의 전설적 배우이자 아역스타. 17세 때였던 1937년부터 1958년까지 출연한 ‘하디 보이스’ 시리즈에서 앤디 하디를 연기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8번이나 결혼했으며 말년에 자식 문제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긴 투병생활 끝에 7일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피치스 겔도프=영국의 패션 아이콘이자 탤런트로, 음악을 통한 자선활동 단체 ‘밴드 에이드’를 결성한 영국 가수 밥 겔도프의 딸이다. 영국 자택에서 7 일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25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콜롬비아 출신 작가. 중남미 문학의 거장으로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 이래 가장 인기 있는 스페인어권 작가로, 스페인어로 출간된 책 가운데 성경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렸다. 멕시코 수도 멕시코 시티에 있는 집에서 17일,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윈 틴=미얀마 군부독재에 항거한 최장기수이자 아웅산 수치 여사와 함께 제1야당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을 창설한 언론인. 수감 뒤 여러 국제 언론자유상을 받았고, 석방 뒤 2011년 민정 이양 때까지 NLD를 통해 정치 활동을 계속했다. 양곤 종합병원에서 21일,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밥 호스킨스=영국의 연기파 배우. 1980년 영국 갱스터 영화의 클래식으로 불리는 ‘롱 굿 프라이데이’를 통해 데뷔한 뒤 차가운 악당과 런던 토박이 캐릭터로 많은 영화팬의 사랑을 받았다.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등을 받았다. 폐렴에 의해 29일,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5월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공산주의 정권 시절 폴란드의 마지막 대통령. 공산당 제1서기로 있던 1981년 계엄령을 선포하고 옛소련권 국가의 첫 자유 노동조합인 연대노조(솔리대리티)를 탄압하는 등 민주화 염원을 억압했다. 수도 바르샤바의 병원에서 25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마야 안젤루=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여류시인이자 배우이며 민권 운동가이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 여성 중 한 명으로 꼽힌다. 1969년 소설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로 흑인 여성 최초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고, 끊임없는 작품활동과 더불어 작곡과 영화 출연 등 왕성한 문화 활동을 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자택에서 28일,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6월 토미 라몬=미국 펑크 밴드 ‘라몬즈’에서 생존하고 있던 마지막 오리지널 멤버.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으로 출생 이름은 토마스 어델리. 미국 뉴욕에서 11일 암으로 65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 7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레알 마드리드의 전 선수. 5일,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냉전 종결의 일익을 담당한 옛소련 마지막 외상으로 전 그루지아 대통령이다. 긴 투병 생활 끝에 7일,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로린 마젤=미국의 지휘자 겸 작곡가. 타계 직전까지 활동하며 약 7000회 무대에 섰고 음반 300장 이상을 발매했다. 미국·유럽의 오케스트라 10여 곳을 상임 지휘자로서 이끌었다. 버지니아 자택에서 13일 폐렴 합병증으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나딘 고디머=남아프리카공화국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겸 반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정책 반대운동) 활동가. 요하네스버그 자택에서 13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조니 윈터=미국의 전설적인 블루스 가수. 2003년 ‘블루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으며 미국의 음악잡지 ‘롤링스톤’에서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 100′에서 63위에 오르기도 했다. 스위스 취리히 근교의 호텔에서 16일,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8월 로빈 윌리엄스=미국의 오스카 수상 배우이자 코미디언.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역으로 열연, 국내에서도 널리 알려져있다. 또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 ‘미세스 다웃파이어’, ‘어거스트 러쉬’ 등 장기인 코믹 연기를 비롯한 뛰어난 연기력으로 인기를 끌었다. 캘리포니아 자택에서 11일, 63세의 나이로 사망한 채 발견됐고 자살로 추정되고 있다. 올해 구글 검색에서 가장 많이 거론된 인물이기도 하다. 로렌 바콜=미국의 전설적인 여배우. 명배우 험프리 보가트의 파트너로 많은 영화에서 공연했고, 결혼까지 한 ‘가장 행복한 여배우’로 유명세를 탔다. 바콜은 보가트와 최고화제작 ‘키 라르고’를 비롯, ‘소유와 무소유’, ’다크 패시지’, ‘명탐정 필립’ 등 많은 영화에서 같이 출연했다. 12일 뉴욕 자택에서 갑작스러운 뇌졸증으로,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제임스 폴리=미국 언론인. 20일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활동하는 수니파 무장 조직 ‘이슬람국가’(IS)에 의해 참수되면서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IS가 살해한 최초의 서양인으로 기록됐다. 리차드 아텐보로=영국 배우이자 프로듀서이며 영화감독이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 쥬라기 공원 개발자로 출연해 유명세를 탔다. ‘34번가의 기적’에서는 산타 클로스 역을 열연한 바 있다. 감독으로서도 맹활약해 영화 ‘간디’를 통해 아카데미 작품상 등 8개 부문을 수상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24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9월 이언 페이즐리=영국의 전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총리로, 북아일랜드의 독립에 반대했던 개신교계 민주통합당의 설립자이다. 2007년 신페인당과의 북아일랜드 공동자치정부 출범에 동의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긴 투병 생활 끝에 12일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10월 장클로드 뒤발리에=아이티의 전 독재자. 1971년 19살 나이에 ‘파파 독’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버지 프랑수와 뒤발리에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은 뒤발리에는 ‘베이비 독’으로 불리며 1986년까지 15년간 아이티를 철권 통치했다. 4일 심장마비로,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크리스토프 드 마르주리=유럽의 3대 석유기업에 드는 프랑스 기업 ‘토탈’의 최고경영자(CEO). 1974년 토탈의 회계부서에서 근무하기 시작해 2007년 CEO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다.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비행기 사고로 20일,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마이클 사타=잠비아 대통령. 삼수 끝에 2011년 대통령에 취임했다. 선동가적인 기질에 독설로 유명해 ‘킹 코브라’란 별명을 갖고 있다. 빈민옹호 정책을 써왔으며 자국 탄광에 대한 중국의 투자에 강력히 반대해왔다. 건강 이상으로 영국 런던에서 치료 중이던 28일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11월 마니타스 드 플라타=프랑스 로마 출신의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생전 녹음한 80여장의 음반들은 9300만장이나 판매되면서 플라멩코 음악을 대중화했다는 평을 얻었다. 남프랑스의 노인 시설에서 4일,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마이크 니콜스=영화 ‘졸업’으로 미국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감독. 위트 넘치고 사회풍자적인 작품을 영화와 TV, 연극 등 다양한 장르로 선보였다. 19일 심장마비에 의해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스페인 알바 공작부인, 마리아 델 로사리오 카예타나 피츠-제임스 스튜어트=세계에서 가장 많은 칭호를 가진 귀족. 폐렴을 앓은 뒤 남부 세비야의 자택에서 20일, 88 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바=레바논 출신으로 아랍권에서 가장 유명한 여가수이자 여배우. 1927년 ‘쟌넷 페갈리’란 이름으로 태어났으나 나중에 영화계에 데뷔하면서 아랍어로 아침을 뜻하는 ‘사바’로 불리기 시작했다. 수도 베이루트 교외의 호텔에서 26일,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필립 휴즈=호주 크리켓 선수. 25일 시드니에서 열린 경기 도중 공에 머리를 맞아 혼절하고 이틀 뒤인 27일 불과 2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P.D. 제임스=‘추리소설계(界)의 여왕’으로 불리는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여성 추리소설 작가. 예리한 직관을 가진 수사반장 애덤 달글리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시리즈 소설은 198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잇따라 드라마로 방영됐고, 세계적으로 수 백만부가 팔렸다. 옥스퍼드 자택에서 27일,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12월 벨기에 파비올라 왕비=고(故) 보두앵 1세의 아내. 후손이 없어 보두앵 국왕의 동생인 알베르 2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2012년 재단을 설립해 조카들과 가톨릭 자선단체에 자금을 지원했으며 이는 상속세를 내지 않으려는 것이란 비판을 받았으며 연금 삭감으로 논란을 해결했다. 가톨릭과 아동복지 문제에 헌신해 존경을 받았다. 긴 투병 생활 끝에 5일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비르나 리지=이탈리아 출신 여배우. 1960년대 할리우드에 진출해 영화 ‘25시’등의 작품에서 열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1994년 ‘여왕 마고’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2004년 이탈리아 골든 글로브 공로상을 수상했다. 수도 로마의 집에서 17일,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조 코커=영국 출신의 전설적인 록가수. 1968년 비틀즈의 노래 ‘위드 어 리틀 헬프 프럼 마이 프렌즈’와 ‘유 아 소 뷰티풀’을 커버해 스타덤에 올랐다. 말년에 폐암을 앓았으며 21일 미국 콜로라도 자택에서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진=TOPIC/SPLASH NEWS(www.topicimages.com)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올해 사망한 세계 주요인사 살펴보니…

    올해 사망한 세계 주요인사 살펴보니…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콜롬비아 출신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부터 미국 할리우드 배우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로빈 윌리엄스까지, 올 한해 사망한 주요 유명인사를 AFP통신이 소개했다. ‘2014년 주목할 만한 사망’(Notable death in 2014)이라는 타이틀로 공개된 이 목록을 살펴보고 한해를 돌이켜보는 것은 어떨까. ■ 1월 아리엘 샤론=이스라엘 총리로 2005년 가자 지구에서의 이스라엘 철수라는 역사적 정책을 주도했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8년간 혼수상태로 투병 끝에 텔 아비브 근교 병원에서 11일,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지휘자. 밀라노 스칼라극장 음악감독,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역임하고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조직해 세계적인 수준의 음악축제로 격상시켰다. 긴 투병 생활 끝에 볼로냐에서 20일,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피트 시거=미국인 포크 가수. 우디 거스리와 함께 미국의 저항적인 프로테스트 포크를 발전시킨 중요 인물로 꼽힌다. 뉴욕 시내의 병원에서 27일,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맥시밀리안 쉘=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오스카 수상 배우. 영어권에서 독일어를 쓰며 성공한 몇 안되는 배우로 영화 ‘젊은 사자들’로 데뷔, ‘뉘른베르크의 재판’에서 피고측 변호인을 맡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병에 의해 28일,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2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미국의 오스카 배우. 2005년 영화 ‘카포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2012년 ‘마스터’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유작으로는 ‘헝거게임’ 시리즈 등이 있다. 뉴욕의 집에서 2일 약물과다 복용에 의해 46세 나이로 사망했다. 셜리 템플=미 할리우드의 영원한 아역 스타로 결혼 이후 정치에 입문해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1935년 아역 부문 오스카상을 수상해 역대 아카데미 최연소 수상을 기록했다. 캘리포니아주(州) 자택에서 10일,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파코 데 루치아=스페인의 기타리스트로 플라멩코 기타의 전설로 불렸다. 플라멩코에 재즈, 록, 보사노바, 탱고 등 다양한 음악적 요소를 결합한 ‘뉴 플라멩코’를 선보이며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고 전 세계 플라멩코 기타리스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심장마비로 25일,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3월 제라르 모르티에=벨기에 출신의 세계적인 오페라 감독. 10년간 브뤼셀의 라 모네 왕립극장을 이끌며 유럽 변방이던 이 극장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전설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 사망 이후 잘츠부르크 축제의 총감독을 맡아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암으로 투병생활 끝에 8일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메드 테잔 카바=10년 넘게 이어온 시에라리온의 내전 종식을 이끈 대통령. 빈민 구제에 실패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수도 프리타운의 집에서 13일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4월 미키 루니=미 할리우드의 전설적 배우이자 아역스타. 17세 때였던 1937년부터 1958년까지 출연한 ‘하디 보이스’ 시리즈에서 앤디 하디를 연기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8번이나 결혼했으며 말년에 자식 문제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긴 투병생활 끝에 7일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피치스 겔도프=영국의 패션 아이콘이자 탤런트로, 음악을 통한 자선활동 단체 ‘밴드 에이드’를 결성한 영국 가수 밥 겔도프의 딸이다. 영국 자택에서 7 일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25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콜롬비아 출신 작가. 중남미 문학의 거장으로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 이래 가장 인기 있는 스페인어권 작가로, 스페인어로 출간된 책 가운데 성경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렸다. 멕시코 수도 멕시코 시티에 있는 집에서 17일,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윈 틴=미얀마 군부독재에 항거한 최장기수이자 아웅산 수치 여사와 함께 제1야당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을 창설한 언론인. 수감 뒤 여러 국제 언론자유상을 받았고, 석방 뒤 2011년 민정 이양 때까지 NLD를 통해 정치 활동을 계속했다. 양곤 종합병원에서 21일,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밥 호스킨스=영국의 연기파 배우. 1980년 영국 갱스터 영화의 클래식으로 불리는 ‘롱 굿 프라이데이’를 통해 데뷔한 뒤 차가운 악당과 런던 토박이 캐릭터로 많은 영화팬의 사랑을 받았다.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등을 받았다. 폐렴에 의해 29일,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5월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공산주의 정권 시절 폴란드의 마지막 대통령. 공산당 제1서기로 있던 1981년 계엄령을 선포하고 옛소련권 국가의 첫 자유 노동조합인 연대노조(솔리대리티)를 탄압하는 등 민주화 염원을 억압했다. 수도 바르샤바의 병원에서 25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마야 안젤루=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여류시인이자 배우이며 민권 운동가이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 여성 중 한 명으로 꼽힌다. 1969년 소설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로 흑인 여성 최초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고, 끊임없는 작품활동과 더불어 작곡과 영화 출연 등 왕성한 문화 활동을 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자택에서 28일,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6월 토미 라몬=미국 펑크 밴드 ‘라몬즈’에서 생존하고 있던 마지막 오리지널 멤버.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으로 출생 이름은 토마스 어델리. 미국 뉴욕에서 11일 암으로 65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 7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레알 마드리드의 전 선수. 5일,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냉전 종결의 일익을 담당한 옛소련 마지막 외상으로 전 그루지아 대통령이다. 긴 투병 생활 끝에 7일,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로린 마젤=미국의 지휘자 겸 작곡가. 타계 직전까지 활동하며 약 7000회 무대에 섰고 음반 300장 이상을 발매했다. 미국·유럽의 오케스트라 10여 곳을 상임 지휘자로서 이끌었다. 버지니아 자택에서 13일 폐렴 합병증으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나딘 고디머=남아프리카공화국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겸 반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정책 반대운동) 활동가. 요하네스버그 자택에서 13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조니 윈터=미국의 전설적인 블루스 가수. 2003년 ‘블루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으며 미국의 음악잡지 ‘롤링스톤’에서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 100′에서 63위에 오르기도 했다. 스위스 취리히 근교의 호텔에서 16일,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8월 로빈 윌리엄스=미국의 오스카 수상 배우이자 코미디언.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역으로 열연, 국내에서도 널리 알려져있다. 또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 ‘미세스 다웃파이어’, ‘어거스트 러쉬’ 등 장기인 코믹 연기를 비롯한 뛰어난 연기력으로 인기를 끌었다. 캘리포니아 자택에서 11일, 63세의 나이로 사망한 채 발견됐고 자살로 추정되고 있다. 올해 구글 검색에서 가장 많이 거론된 인물이기도 하다. 로렌 바콜=미국의 전설적인 여배우. 명배우 험프리 보가트의 파트너로 많은 영화에서 공연했고, 결혼까지 한 ‘가장 행복한 여배우’로 유명세를 탔다. 바콜은 보가트와 최고화제작 ‘키 라르고’를 비롯, ‘소유와 무소유’, ’다크 패시지’, ‘명탐정 필립’ 등 많은 영화에서 같이 출연했다. 12일 뉴욕 자택에서 갑작스러운 뇌졸증으로,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제임스 폴리=미국 언론인. 20일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활동하는 수니파 무장 조직 ‘이슬람국가’(IS)에 의해 참수되면서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IS가 살해한 최초의 서양인으로 기록됐다. 리차드 아텐보로=영국 배우이자 프로듀서이며 영화감독이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 쥬라기 공원 개발자로 출연해 유명세를 탔다. ‘34번가의 기적’에서는 산타 클로스 역을 열연한 바 있다. 감독으로서도 맹활약해 영화 ‘간디’를 통해 아카데미 작품상 등 8개 부문을 수상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24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9월 이언 페이즐리=영국의 전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총리로, 북아일랜드의 독립에 반대했던 개신교계 민주통합당의 설립자이다. 2007년 신페인당과의 북아일랜드 공동자치정부 출범에 동의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긴 투병 생활 끝에 12일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10월 장클로드 뒤발리에=아이티의 전 독재자. 1971년 19살 나이에 ‘파파 독’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버지 프랑수와 뒤발리에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은 뒤발리에는 ‘베이비 독’으로 불리며 1986년까지 15년간 아이티를 철권 통치했다. 4일 심장마비로,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크리스토프 드 마르주리=유럽의 3대 석유기업에 드는 프랑스 기업 ‘토탈’의 최고경영자(CEO). 1974년 토탈의 회계부서에서 근무하기 시작해 2007년 CEO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다.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비행기 사고로 20일,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마이클 사타=잠비아 대통령. 삼수 끝에 2011년 대통령에 취임했다. 선동가적인 기질에 독설로 유명해 ‘킹 코브라’란 별명을 갖고 있다. 빈민옹호 정책을 써왔으며 자국 탄광에 대한 중국의 투자에 강력히 반대해왔다. 건강 이상으로 영국 런던에서 치료 중이던 28일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11월 마니타스 드 플라타=프랑스 로마 출신의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생전 녹음한 80여장의 음반들은 9300만장이나 판매되면서 플라멩코 음악을 대중화했다는 평을 얻었다. 남프랑스의 노인 시설에서 4일,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마이크 니콜스=영화 ‘졸업’으로 미국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감독. 위트 넘치고 사회풍자적인 작품을 영화와 TV, 연극 등 다양한 장르로 선보였다. 19일 심장마비에 의해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스페인 알바 공작부인, 마리아 델 로사리오 카예타나 피츠-제임스 스튜어트=세계에서 가장 많은 칭호를 가진 귀족. 폐렴을 앓은 뒤 남부 세비야의 자택에서 20일, 88 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바=레바논 출신으로 아랍권에서 가장 유명한 여가수이자 여배우. 1927년 ‘쟌넷 페갈리’란 이름으로 태어났으나 나중에 영화계에 데뷔하면서 아랍어로 아침을 뜻하는 ‘사바’로 불리기 시작했다. 수도 베이루트 교외의 호텔에서 26일,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필립 휴즈=호주 크리켓 선수. 25일 시드니에서 열린 경기 도중 공에 머리를 맞아 혼절하고 이틀 뒤인 27일 불과 2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P.D. 제임스=‘추리소설계(界)의 여왕’으로 불리는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여성 추리소설 작가. 예리한 직관을 가진 수사반장 애덤 달글리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시리즈 소설은 198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잇따라 드라마로 방영됐고, 세계적으로 수 백만부가 팔렸다. 옥스퍼드 자택에서 27일,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12월 벨기에 파비올라 왕비=고(故) 보두앵 1세의 아내. 후손이 없어 보두앵 국왕의 동생인 알베르 2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2012년 재단을 설립해 조카들과 가톨릭 자선단체에 자금을 지원했으며 이는 상속세를 내지 않으려는 것이란 비판을 받았으며 연금 삭감으로 논란을 해결했다. 가톨릭과 아동복지 문제에 헌신해 존경을 받았다. 긴 투병 생활 끝에 5일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비르나 리지=이탈리아 출신 여배우. 1960년대 할리우드에 진출해 영화 ‘25시’등의 작품에서 열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1994년 ‘여왕 마고’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2004년 이탈리아 골든 글로브 공로상을 수상했다. 수도 로마의 집에서 17일,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조 코커=영국 출신의 전설적인 록가수. 1968년 비틀즈의 노래 ‘위드 어 리틀 헬프 프럼 마이 프렌즈’와 ‘유 아 소 뷰티풀’을 커버해 스타덤에 올랐다. 말년에 폐암을 앓았으며 21일 미국 콜로라도 자택에서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진=ⓒAFPBBNEWS=NEWS1(위), TOPIC/SPLASH NEWS(www.topicimages.com)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방산(防産)강국 폴란드가 K9 수입한 사연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방산(防産)강국 폴란드가 K9 수입한 사연

    최근 삼성테크윈이 폴란드와 K-9 자주포 120문을 약 3억 1000만 달러 규모에 수출하는 계약을 체결했다는 보도가 전해진 뒤 언론에서는 "명품 국산무기 K-9의 우수성을 다시 한 번 인정받았다“는 기사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사를 뜯어보면 우리 군이 대당 40억 넘는 가격에 도입하고 있는 K-9 자주포를 대당 28억원에 도입한다는 내용도 그렇고, 지난 17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계약식 행사명 자체도 'Signing Ceremony for KRAB SPH Cooperation Agreement', 즉 ‘KRAB 자주포 협력사업 조인식'으로 진행되는 등 계약 체결 현장 그 어디에서도 K-9이라는 이름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K-9을 수출한다면서 K-9이라는 이름이 빠진 계약식. 도대체 어떤 내막이 있을까? ▲폴란드, 알고 보면 방위산업 강국 폴란드는 방위산업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보다 한 발 앞선 선진국이다. 폴란드는 냉전시절 공산국가로써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맞서는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핵심 국가이기도 했지만, 무장의 대부분을 소련에 의존하던 다른 공산국가들과 달리 일찌감치 독자적인 무기체계 개발에 힘써왔던 국가였다. 폴란드는 1970년대부터 소련제를 모방해 각종 소총과 장갑차, 전차 등을 만들어 냈으며, 우리나라가 미국의 도움을 받아 T-50과 FA-50을 만들기 15년 전에 자체 기술로 스텔스 설계가 가미된 공격기 PLZ-230 ‘스콜피온(Skorpion)’을 개발해 낸 바 있는데, 이는 지금 기준으로도 대단히 획기적인 디자인과 성능을 가진 항공기였다. 모듈식 설계를 통해 기체 주요 임무 장비를 교체할 수 있었고, 야전에서의 정비성을 높였으며, 불과 250m 가량의 활주로만 확보되면 이착륙이 가능한 고성능 항공기였다. PLZ-230은 비록 시제기만 만들어지고 비행은 실시하지 못한 채 1994년 개발 예산 부족과 강대국들의 압력에 의해 취소되었지만, 폴란드 방위산업의 저력을 보여주는 기체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나라가 무려 1조 3000억 원 이상을 들여 1977년에 등장한 AS532 쿠거(Cougar) 헬기를 기반으로 약 6년에 걸쳐 KUH-1 수리온을 개발하기 20년 전에 소형 헬기인 SW-4를 개발해 약 40여 대를 폴란드 공군에 배치, 정찰 및 인원수송, 환자 수송 등 다양한 용도로 운용하고 있다. 지상 장비 분야에서도 상당한 저력을 발휘해왔다. 구소련의 T-72M1 전차를 기반으로 PT-91 전차를 개발해 실전에 배치했으며, 1990년대 중반에는 말레이시아 육군 차세대 전차 사업에서 우리나라의 K-1M(K-1 전차 말레이시아 수출형)을 꺾고 선정되기도 했었다. 이처럼 폴란드는 항공기와 유도무기는 물론, 전차와 장갑차량 분야에서도 다양한 제품을 개발해 해외 업체들과 컨소시엄을 구성, 이미 오래 전부터 해외 무기 시장에서 상당한 실적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나라가 후발 국가로부터 자주포를 수입해 간다는 것은 충분히 이상해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일 것이다. ▲폴란드판 ‘흑표 전차’ KRAB 자주포 소련 붕괴 이후 푸틴이 러시아 민족주의를 내세워 공세적인 대외 전략을 구사하면서 위협을 느낀 폴란드는 1999년 NATO에 가입하면서 기존에 러시아제 무기에 기반을 두고 있던 무기체계를 버리고 NATO 표준 무기체계를 속속 도입하기 시작했는데, 신형 자주포 프로그램 역시 이 같은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당초 폴란드 육군은 소련제 2S5 ‘Giatsint-S' 152mm 자주포와 2S1 ’Gvozdika' 122mm 자주포를 운용했지만, 1999년 NATO 가입과 동시에 NATO 표준 곡사포 규격인 155mm 도입을 위한 신형 자주포 개발 사업, ’레지나 프로젝트(Regina Project)'를 시작했다. 폴란드 국방부는 세계 최정상급 자주포를 개발한다는 목표 하에 영국 BAE시스템즈의 기술협력을 얻어 개발을 시작했는데, 개발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BAE시스템즈가 개발한 AS-90 자주포를 바탕으로 새로운 자주포를 개발해냈다. 이것이 지난 2008년 처음 등장한 'AHS KRAB' 자주포이다. 폴란드는 영국의 AS-90 자주포의 155mm 포탑을 베이스로 개발한 신형 포탑을 자국이 개발한 UPG-NG 차체와 결합하는 방식으로 KRAB 자주포를 만들어냈다. 이 자주포에 적용된 UPG-NG(Uniwersalna Platforma Gąsienicowa - Nowej Generacji) 차체는 영어로 UTP-NG(Universal Tracked Platform - Next Generation), 즉 차세대 기본 궤도 플랫폼이라는 의미인데, 폴란드군이 새로 개발하는 거의 모든 종류의 군용 궤도차량에 사용하기 위해 개발된 차체였다. 예컨대 이 차체에 신형 155mm 포탑을 얹으면 KRAB 자주포가 되는 것이고, 무인 포탑을 얹으면 Obrum 경전차가 되는 것이다. 공통된 하나의 플랫폼에 다양한 장비를 장착해 여러 용도로 사용하는 방식은 미국이나 러시아 등 군사강국이 추구하고 있는 최신 트렌드 가운데 하나이고, 이 때문에 UPG-NG 차체 역시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차세대 플랫폼이라며 큰 기대를 모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 문제점을 노출하기 시작했다. AS-90을 기반으로 새로 개발한 포탑을 UPG-NG 차체에 얹어 제작한 KRAB 자주포 10대를 폴란드 육군에 보내 시험 평가를 진행하던 중 심각한 결함이 발견된 것이다. 애초에 장갑차 플랫폼으로 나왔던 UPG-NG 차체는 20톤에 가까운 무거운 포탑을 지탱하는 것이 어려웠고, 사격할 때 엄청난 반동을 만들어내는 52구경장 155mm 곡사포를 견디기에 버거운 차체였다. 그 결과 차체에 균열이 가거나 서스펜션이 망가지는 등 고장과 부품 파손이 속출했고, 폴란드 육군은 이 자주포를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수준이라며 추가 인수를 거부하고 나섰다. 설상가상으로 개발업체가 개발기간과 비용을 단축하기 위해 UPG-NG 차체에 적용했던 S-12U 엔진은 해당 업체가 공장을 폐쇄한 상황이어서 추후 안정적인 군수지원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2008년 시제차량 등장 이후 4년 넘게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자 폴란드 국방부는 UPG-NG 차체 제작 업체인 부마르(Bumar)사에게 “늦어도 2014년까지는 해결책을 제시하라”고 요구했으나 업체는 이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결국 폴란드 국방부는 “국내 기술이 작전요구성능(ROC : Required Operational Capability)을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해외 도입으로 선회할 것”이라고 밝히고 일사천리로 K-9 자주포 차체 도입 계약을 체결해 버렸다. 폴란드 국방부가 자국산 차체를 포기하고 K-9 차체 도입 계약을 체결해버리자 부마르사는 “국내 방위산업을 죽이는 처사”라며 강력히 반발했고, AS-90 차체 수출을 기대하고 있는 영국 BAE시스템즈 역시 “AS-90의 기술이 들어간 포탑에 짝퉁 차체를 결합하는 꼴”이라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韓방사청과 비교되는 폴란드 국방부의 결단 한국산 차체 도입 계약 체결 소식에 폴란드 방산 업체들과 노동조합은 국방부가 자국 방위산업을 짓밟는 몰상식한 결정을 내렸다며 일제히 비난의 수위를 높이기 시작했지만, 일각에서는 “철밥통을 끌어안고 무능과 비효율의 극치를 보여주었던 폴란드 방위산업계에 철퇴가 내려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분명 폴란드는 다양한 무기체계 개발 경험이 있는 방위산업 강국이지만, 대부분의 무기체계가 독자개발이 아닌 소련이나 러시아제 무기를 카피한 수준이었고, 이러한 무기를 개발 및 제작하는 데에도 제대로 납기를 맞춘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총기와 탄약, 차량과 장갑차 등은 제3세계 국가들을 상대로 어느 정도 수출 실적을 가지고 있지만, 폴란드 방위산업을 먹여 살리는 주요 고객은 역시 폴란드군이었기 때문에 내수 중심으로 육성되어 온 폴란드 방산 제품들은 수출 시장에서 경쟁력이 그리 우수한 편이 아니었다. 이는 정부의 소요 제기와 정부 주도 개발, 업체의 생산과 납품 구조로 이루어진 한국의 방위산업 구조와 대단히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한국 방위산업 역시 제3세계 국가들을 대상으로 총기와 탄약, 피복류와 같은 저부가가치 제품을 수출하는데 주력해 왔고, 전차와 장갑차, 선박, 항공기 등 첨단 기술집약적 고부가가치 제품은 기술 자립도가 떨어지거나 성능, 신뢰성 면에서 검증되지 못했으면서 가격 경쟁력마저 확보하지 못해 철저히 내수에 의지해 온 경향이 있었다. 여기에 ‘국산 만능주의’와 업체의 과욕이 결부되어 개발에 필요한 기술과 예산, 자원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밀어 붙이는 국산 무기 개발과 졸속으로 만들어진 무기 체계에 일단 ‘국산 명품’이라는 딱지를 갖다 붙이는 잘못된 홍보 관행까지 겹치면서 국내 방위산업은 갈수록 골병이 들고 있다. 최근 논란이 된 K-2 흑표 전차의 국산 파워팩 역시 무리하게 국산 개발을 추진하다가 군의 전력 공백과 예산 낭비, 해외 수출 기회 좌절 등 막대한 기회비용을 치러야 했음에도, 수요자인 군이 스스로 작전요구성능을 낮춤으로써 성능 미달의 제품을 납품 받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요구 성능에 미달하는 제품은 과감히 탈락시키고 국가안보를 선택한 폴란드 국방부의 결단과 성능 미달 제품에 요구 성능을 하향해 끼워 맞춰 업체 이익을 선택한 대한민국 방위사업청의 '결단'이 이번 KRAB 자주포 차체 수출 계약을 통해 극명하게 비교되고 있다. 이일우 군사 통신원(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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