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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間島 개척(秘錄 南柯夢:19)

    ◎“간도 개간해 영유권 회복” 은밀히 제의/관직 물러난 심선택,부국강병책으로 진언/고종,“뜻은 거창하나 재정연구뒤 착수” 지시/심,“삼도 어사삼으면 수령출척 충당” 아뢰니 “흉년에 민폐 끼칠라…” 물리치자 없던 일로 두만강 건너 이북의 땅을 북간도(北間島)라 한다. 지금 연변 조선족이 사는 곳이다. 이곳이 고조선과 고구려,그리고 발해의 옛 강역이었던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인데,그토록 귀한 땅이 대륙의 이민족에게 넘어간 것은 고려때부터로 알려지고 있다. 그때 간도땅을 차지한 민족을 만주족,일명 여진족이라 하는데 여진족은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워 중원을 정복하는데 성공한 민족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사학자 가운데는 여진족이 이민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금과 청의 역사를 중국사에서 떼어내 한국사의 일부로 끌여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가 만일 계속 간도땅을 영유하고 있었다면 약소국의 설움을 맛보지도 않았을 것이요,일제로부터 침략당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렇게 중요한 간도에 고종황제가관심을 가진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어느날 심선택(沈善澤)이 나(정환덕)를 찾아왔다. 이 사람은 전 동부승지 의평(宜平)의 아들이다. 지난해 엄귀인(嚴貴人:엄비)의 여동생에게 장가들어 외척이 되더니 그 인연으로 성주목사(星州牧使)자리를 얻어 나갔다. 그러나 겨우 일년이 지나 어머니 상(喪)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왔다. 상를 마친 뒤 아무 직업도 없이 있다가 드디어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매우 좋은 일이 있소이다. 영감께서 황상께 아뢰어 꼭 성취되었으면 합니다. 이것은 국가를 위한 일이요,창업공신과도 맞먹는 일이니 생각이 어떠하십니까”라는 것이었다. 심선택은 흥분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고 싶은것은 북간도 개척문제였다. 그래서 정환덕은 “순서대로 조용히 말씀해보시오”라고 말했다. “북간도는 원래는 조선 땅으로 사방이 4천리나 됩니다. 남이(南怡) 장군이 당시에 백두산의 북쪽인 중국 동부지역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고 여기가 조선 땅이라는 것을 밝혔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가보면 그 지역이텅비어 있고 관할하는 사람도 없으니 그곳에 공사관(公使館)이나 영사관(領事館)을 설치해 중국과 조선이 서로 무역을 하고 버려진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으면 부국강병책이 스스로 그 안에 있을 것입니다. 영감께서는 이 사업을 각별히 힘써서 주선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북간도의 지도 한장과 북간도에 관한 사실을 조사한 서류 한 점을 꺼내 나에게 주었다. 세종때 남이장군이 세웠다는 백두산정계비는 백두산보다 훨씬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하며,목격자도 많은데 일제가 폭파했다는 설이 있다. 그뒤 18세기초에 다시 청나라가 강요하여 정계비를 백두산 남쪽에 새로 세우게 되어 백두산 천지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다. 이때 문제된 강이 토문강인데 청은 토문강을 두만강이라 주장하고 우리는 두만강이 아니라 해란강이라고 주장했다. 심선택은 이같이 간도땅의 역사를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종에게 건의하여 간도땅을 되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었다. 그런데 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은 거창한데 재정이 어려워 섣불리 착수할 수가 없다. 아직은 보류하고 재정을 연구한 뒤 착수하기로 하자”고 분부하셨다. 그래서 심선택에게 상감의 교시가 이와같다는 뜻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상감의 교시가 비록 그와같다 해도 좋은 방도가 있으니 상감께서 우리일가 심상훈(沈相薰)을 불러 “북간도의 일을 심선택과 상의하여 보라고 처분을 내리시면 방도가 나올 것이니 다시 그렇게 아뢰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대궐에 들어가 다시 아뢰었더니 상감께서 심상훈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북간도 일은 심선택과 함께 상의해 처리하라”고 교시하시었다. 심상훈은 대한제국의 공신으로 고종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심선택이 심상훈의 도움을 받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심선택의 말에 문제가 있었다. 이에 심상훈이 심선택에게 “상감께서 북간도 일을 어른(심선택)과 상의해보라는 교시를 내리셨는데 무슨 방도가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대감께서 잘 여쭈시어 나를 북쪽 삼도(三島) 어사(御史)로 삼아 옛 식대로 마패(馬牌)를 가지고 현지 수령들을 출척(黜陟)하는 권한을 갖게 해주신다면 일년도 되기 전에 쉽사리 몇천만원은 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북간도에 들어가 시설을 하면 재정의 부족은 근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어찌 국고(國庫)의 돈으로써 경비를 낭비하는 일이 있겠습니까”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농민들은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는 많이 이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역경을 딛고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청나라의 강압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 문화와 의복을 지켰다. 청나라의 관리들은 한국농민들에게 머리를 깎고 청나라 옷으로 갈아입으면 토지소유권을 준다고 유혹하였으나 백의민족으로서 긍지를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 우리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범윤(李範允)을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로 임명,파견하였다. 이 때문에 심상훈과 심선택은 의견충돌이 일어나 각자 화를 내고 헤어졌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심선택은 국가의 일에는 뜻이 없는 사람이었다. 한탄한들 어찌하겠는가. 그 뒤 심상훈이나를 찾아와 “북간도의 일은 다시 여쭈지 말라”고 단단히 요청하였다. 그리고 심상훈이 황상께 입대해서 아뢰기를 “신(臣)이 저의 일가 심선택의 말을 들어보니 북쪽 삼도(三島)백성의 재산을 거두어서 북간도를 개척하자고 하기 때문에 ‘민간의 재정이 고갈돼 있고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한데 이러한 때를 당해 저같은 일을 하고자 한다면 일이 성취되지 않을뿐 아니라 도리어 재앙을 받게 될 것이니 서로 관계하고 싶지않다’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니 황송한 마음은 모두 여쭈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알았다”고 하시었다. 이에 심선택이 나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저 일가 사람 심상훈이 나의 말을 믿지 않고 이와같이 반대하고 있으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라고 했다. 내가 대답하기를 “상감께서 처음부터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이요,심상훈이 반대한 것이 아니니 차차 일의 형편을 보아가며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많은 말을 하지 말라”고 하니 심선택은 물러가고 말았다. 독도는 우리땅이라 했듯간도도 우리땅이었다. 우리 농민들이 개척한 땅이어서 이름을 간도(墾島)라 불렀던 것인데 일제가 ‘사이 간’자로 바꿔 간도(間島)라 명명했고 1909년에 마침내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어 땅을 중국에 넘겨주고 말았다.
  • 美 의사당 공포의 총격전 3분

    ◎40대 정신병자의 소행… 의원용 출입구로 잠입/관광객들 놀라 혼비백산… 2명 죽고 2명 부상 【워싱턴=金在暎 특파원】 미국 워싱턴시 한복판에 있는 국회 의사당에서 24일 하오 4시쯤(현지시간) 한 괴한이 총기를 난사하는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고 있다. 범인은 이날 관광객들로 붐비던 의사당 1층 건물의 하원 공화당 부총무 톰 딜레이 의원사무실에 침입해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의회 경찰관들이 즉각 응사했고 이 과정에서 경찰관 2명이 숨지고 범인과 여성 관광객 1명이 부상했다. 범인은 정신병을 앓고 있는 러셀 웨스튼(41)인 것으로 경찰 조사에서 밝혀졌다. 사고 당시 하원은 본회의를 열고 있었고,상원은 산회했었으나 여름 휴가철을 맞아 의사당을 구경하러온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톰 딜레이 부총무의 대변인 존 피허리는 “하오 4시쯤 범인이 공화당 부총무 사무실에 들어와 총을 마구 쏘아댔으며 20발의 총성을 들었다”고 말했다. 범인이 침입했을 때 딜레이 부총무는 사무실 안에 있었으나 무사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3분간에걸쳐 범인과 경찰관이 총격전을 주고 받는 동안 의사당을 구경하던 관광객들이 놀라 우왕좌왕하며 급히 건물 밖으로 뛰쳐나오는 큰 소동이 벌어졌다. 사고현장은 주변에 하원 공화당 간부들의 사무실이 모여있는 곳으로 범인은 의원들의 출입구를 이용,부총무실에 침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이번 사건과 관련,일단 범인은 현장에서 총상을 입고 체포된 1명 뿐인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범행동기와 공범여부 등에 관한 수사가 진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미 의사당은 83년 폭발물이 터지는 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으며,걸프전 이후 테러리스트들의 공격 가능성과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건물 폭파사건 등을 계기로 출입자들에 대한 보안검색을 대폭 강화해왔다.
  • 혁명적 정화(金三雄 칼럼)

    단재 신채호선생은 우리는 ‘혁명적 정화’가 없는 민족이라고 아쉬워했다. 혁명 쿠데타 반정 정변 경장 등 정치상의 모든 방법이 나타났지만 한번도 ‘혁명적 정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해방 후에도 몇차례 기회가 없지 않았다. 건국과 함께 반민특위에서 친일반역자들을 처단하여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정화의 기회가 있었지만 이승만 세력에 의해 좌절되고, 4·19혁명후 독재세력을 청산할 혁명재판이 열렸지만 군사 쿠데타에 짓밟히고 말았다. 6월항쟁후 여소야대 국회의 5공청산 작업은 3당야합으로 역전되고,문민정부의 개혁은 역사의식의 부재와 너무 쉽게 부패하여 스스로 청산의 대상으로 전락되었다. 金大中 정부의 개혁작업은 지금 심한 도전에 직면했다. 모든 개혁을 좌절 역전시킨 반개혁 수구세력의 도전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최근의 몇가지 사례만 봐도 과연 이들의 도전으로 개혁이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이다. 첫째,햇볕론에 대한 수구세력의 도전이다. 이들은 동해안 간첩사건을 계기로 햇볕론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과거 햇볕론이 없고 강경일변도로 나갈때도 수차례 공비가 출몰했던 사실을 외면한채 정부의 햇볕 정책때문에 간첩이 나타난 것처럼 비판하면서 왜 응징하지 않느냐고 앙탈이다. 한바탕 붙기라도 하잔 말인지,지난 50년 강풍정책의 결과를 한 번쯤 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둘째,국민정신을 반개혁 성향으로 오도한다. 반민주와 쿠데타와 양민학살을 일삼아온 독재자들을 영웅으로 추켜세우면서 국민이 개혁보다 강압통치 시대에 향수를 갖도록 여론을 조성한다. 셋째,‘우파는 사정(司正) 좌파엔 화해’란 도식을 만들어 햇볕정책을 색깔론으로,개혁을 우파 또는 특정지역에 대한 탄압으로 비약시키면서 계층과 지역감정을 조장한다. 명백히 드러난 수뢰 정치인의 사정도 표적수사 또는 지역차별이라고 억지를 부려 정치권의 사정과 개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군사독재와 부정부패의 늪지대에서 성장해온 남한의 극우세력과 부자 세습체제에서 성장해온 북한의 극좌세력은 평소 가장 적대적 상대인 듯 하지만 비상시에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적대적 공조관계’가 유지된다. 예컨대,1972년 朴正熙의 유신헌법과 金日成의 주석제헌법 개정이 거의 동시에 단행되고, 87년 야권의 승리가 보이는 듯 할 때 마유미(김현희)의 대한항공 폭파사건,92년 대선때 이선실의 간첩사건,96년 총선때 판문점 무장북한군 출몰사건,97년 대선때 특정세력과 북측의 내통사실 등 개혁세력에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면 북한은 어김없이 안보위기나 공안사건을 만들어 수구세력을 도와주었다. 최근 북한의 잠수정침투사건도 햇볕론이 국민의 관심을 모으면서 소떼입북, 금강산관광등 한창 화해무드가 조성될 때 나타나 수구세력의 입지를 도와준 셈이다. 한국의 수구세력은 민주주의와 반공을 내세울 도덕적 자격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학살해온 독재전위 세력이었으며,반공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방편일 뿐이고, 오늘의 국난을 불러온 중심세력이기 때문이다. 독재자를 영웅시하고 화해정책을 용공시하고 사정을 계층과 지역감정으로 몰아가면서 개혁의 발목을 잡는 수구세력에 대한 ‘혁명적 정화’없이는 국난극복은 불가능하다. 50년만의정권교체는 민족모순과 사회모순을 바로 잡으라는 역사의 뜻이고,색깔론과 지역감정을 뛰어넘으라는 국민의 선택이다. 언제까지 이런 해묵은 ‘악령과 괴담’속에서 우리 정치와 사회가 세월을 보내야 하겠는가. 정부는 더 이상 원칙없는 온정주의와 눈치보기로 개혁에 갈팡질팡해서는 안된다. 좀더 과감한 사정과 개혁으로 5,000년 묵은 역사의 찌꺼기들을 퇴출시켜야 한다. 보수라는 이름 아래 역사의 방향과 전진을 가로막는 기득세력의 ‘여론’을 혁파해야 한다. 金大中 대통령은 1917년 러시아혁명의 어려웠던 시절 레닌의 침착함과, 1932년 대공황때 보인 루스벨트 대통령의 밝은 미소,프랑스가 패배한후 국민을 다시 규합한 드골의 리더십,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의 여유와 지략으로 총체적 개혁을 단행할 때이다. ‘혁명적 정화’를 통해 제2 건국을 이뤄야 한다. “태양이 비칠때 풀(草)을 말리라”는 서양격언이 있다.
  • 해안 배수관에 ‘도주흔적’/무장간첩 침투­군·경 이틀째 수색작전

    ◎간첩시신 발견된곳서 10여m 떨어져/“이끼에 발자국… 1∼2일전 지나간 자취”/육지 침투대비 예상도주로 차단 매복 ‘무장 간첩의 흔적을 찾아라’ 강원도 동해시 일대에서 이틀째 수색작전을 펴고 있는 군과 경찰은 13일 또 다른 무장간첩 1∼4명이 침투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예상 도주로를 차단한 채 추적 중이다. 무장간첩이 이용한 수중 추진기의 상태로 미루어 팀투조는 3명으로 보인다고 군 당국은 밝혔다. 이날 현장에 투입된 육군특수전학교 수중전 전문교관들은 전날 시신이 발견된 곳으로부터 10m 정도 떨어진 배수관에서 1∼2일전쯤 사람이 지나간 흔적을 발견했다. 미리 현장을 둘러본 한 교관은 “배수관에 있는 이끼에 발자국 흔적이 있고,거미줄이 일부 찢겨져 있었다”면서 “사람이 지나간 명백한 자취”라고 말했다. 이어 “바닷가로 난 배수관에는 보통 거미줄이 처져있는데 거미줄은 질겨 잘 찢어지지 않는다”면서 “찢긴 형태로 보아도 사람이 지나간 게 틀림없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군은 무장간첩 잔당이 배수구를 통해육지로 침투했을 가능성에 대비,이 일대에 있는 10여개의 배수구를 집중수색했다. 배수관은 가로 1m,세로 1.5m 가량의 크기이며,그 안에 직경 1m의 배수구가 있다. 이 배수관은 도로 밑을 통해 15m 가량 떨어진 횟집들과 연결돼 있고,뒤는 바로 산이다. 바다에서는 해군해난구조대(SSU)와 수중폭파대(UDT)가 투입돼 바다 밑을 샅샅이 뒤졌다. 육군은 무장간첩들이 이미 육지로 침투했다면 해안선 일대에 비밀창호를 파고 은신하거나 태백산맥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북으로의 복귀를 시도할 것으로 보고 주요 지점에서 매복작전을 펴고 있다. 또 육지로 침투할 경우 시신이 발견된 지점으로부터 2㎞ 북쪽에 있는 대진항 봉화대를 통해 침투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주변 수색을 펴고 있다. ◎지난달 침투 잠수정서 수충추진기 1대 발견 지난달 22일 속초 앞바다에 침투한 북한 잠수정에서 지난 12일 발견된 것과 같은 수중 추진기가 실려 있었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져 군이 잔뜩 긴장하고 있다. 군 고위 관계자는 13일 “지난달 침투했던잠수정을 진해 해군기지로 옮겨 최근 해체작업을 한 결과 이번에 발견된 수중 추진기와 모양이 같은 수중 추진기를 잠수정 앞머리 위에서 찾아냈다”고 말했다.
  • 합참 “작전실수론” 반론 제기

    합동참모본부는 26일 북한 잠수정 예인 및 수색 작전 경과를 종합 발표하면서 그동안 언론 등에서 제기한 해군의 작전 실수와 의혹 등에 대해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해 눈길을 끌었다. 합참은 우선 잠수정 예인장소 변경이 침몰의 한 이유가 됐다는 지적에 대해 “예인 당시 선체의 5분의 4 정도가 물에 잠기고 80도까지 급격히 기울어지는 등 침몰 우려가 있었고 북한의 추가 도발에 대비해 가장 가까운 항만으로 신속하게 옮기려 했다”면서 “예인 중 잠수정의 상태가 안정적으로 회복돼 넓은 해역과 구조장비 지원 등 작전 여건이 좋은 동해항으로 목적지를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발견 지점에서 즉각 인명구조 작전을 실시하지 않은 데 대해서는 “잠수정이 발견된 장소가 수심이 1,000m가 넘는 곳이며 잠수정이 침몰 직전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신속히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인도적 차원에서 승조원을 구조하기 위해 망치 신호와 수중통신기 호출을 계속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동해항으로부터 1.8㎞ 떨어진 지점에서잠수정이 침몰된 원인에 대해서는 “잠수정이 기울어진 상태에서 오랜 시간 예인되는 과정에서 부력이 약화돼 가라앉았다”면서 “잠수정과 예인선 2척에 연결된 로프 가운데 한줄은 인양을 준비하기 위해 잠수사가 풀은 것으로 인양 중 잘못으로 절단된 것이 아니 다”고 주장했다. 합참은 “우리 해군 역사상 최초로 실시한 잠수정 인양이라는 특수한 상황속에서 해군 수중폭파대(UDT)와 해난구조대(SSU) 대원들이 세계 최초로 수심 33m 해저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잠수작업을 실시해 공기주머니로 침몰한 잠수정을 인양하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강조했다.특히 예인,인양,잠수정내 탐색 등에 대한 전반적인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도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군 당국의 이같은 해명성 설명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는 의혹들은 남아있다.북한 잠수정의 임무,예인 중 탈출자 여부 등은 규명해야 할 과제 가운데 일부다. 특히 군 당국은 불과 2년만에 두번씩이나 잠수정 침투 사건을 겪으면서 해상경계망이 뚫렸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반드시 원인을 규명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 철조망 너머 금강산이‘오라’손짓(휴전선 해빙의 시대 오는가:下)

    ◎鄭周永씨 訪北후 통일전망대 관광객 북적/명파리 주민들도 “北行 뱃길 열린다” 부푼꿈 그리운 금강산.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금강산은 더욱 가까이 보였다. 꿈속에서나 갈 수 있었던 세계적인 절경 금강산.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꿈이 아니다. 자연예술의 극치인 아름다운 금강산을 현실세계에서도 갈 수 있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금강산을 향한 유람선이 오는 가을 속초를 출발할 가능성이 높다. 鄭周永 현대명예회장이 최근 북한을 방문,금강산개발에 합의한 후 현대그룹은 9월에 유람선을 띄우겠다고 밝혔다. 북한으로 떠나는 유람선은 한국관광객 뿐만이 아니라 남북 해빙의 염원도 함께 태우고 떠날 것이다. 유람선의 고동소리는 남북 화해의 새시대를 알리는 희망의 메시지가 되기를 모두 바라고 있다. ○남북 화해 새시대 바라 24일 하오 기자가 찾은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호리 동해안 절벽위의 통일전망대에는 북녘땅의 금강산을 보기 위해 몰려든 방문객들로 북적댔다. 이들은 이미 금강산을 갈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늘이 맑게 개지못해 실망스런 표정들이었지만 망원렌즈를 가까이 들이대는 이들의 눈길에는 애절함이 배어 있었다. 우뚝 솟은 비로봉을 경계로 펼쳐진 외금강 신금강 해금강 내금강의 아름다운 자태에 지그시 눈을 감는 모습도 보였다.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금강산에 대한 화답인 듯 했다. 통일전망대에서 해안쪽으로 내려오다 인근에 사는 촌로를 만났다. 명파리에 사는 李씨(76)라고만 소개한 그는 “광복 당시 양양에서 금강산 자락을 거쳐 원산으로 가는 동해 북부선 기차가 지나 다니던 터널을 보기 위해 왔다”며 “죽기 전에 철길이 다시 복원돼 기차로 금강산을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감회에 젖었다. 그가 안내하는 터널은 6·25의 상흔을 간직한 채 잡초들만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터널입구 벽에 큼지막하게 새겨진 ‘조국’이라는 글자가 분단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철로 흔적 조차 없어 양양쪽으로는 아예 철로의 흔적조차 찾아 보기 어려웠다. 방문객들마다 녹슨 철로라도 보고 싶다고 조르는 바람에 곤욕을 치른다는 게 안내장교의 얘기였다. 李씨에게 이곳을 자주 찾느냐고 묻자 “최근까지는 거의 찾은 적이 없었다”며 “그러나 鄭周永씨의 방북으로 늙은이의 마음이 동요된 탓인지 요즘은 가끔 들른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명파리 주민들의 마음은 지금 콩밭에 가있을 것이라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명파리 마을은 동해안 38선에서 북으로 84㎞지점인 통일전망대 바로 밑에 위치한 140여가구의 자그마한 동네. 대부분이 이곳에서만 살아왔으며 휴전선이 그어지기 전까지는 금강산을 내집 드나들 듯 했다. 금강산에 남다른 감회를 갖는 것도 이유가 있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자 李씨의 말대로 들뜬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도로 옆쪽으로 쭉 늘어선 음식점이나 상점 등의 간판이름이 눈에 쏙 들어왔다. 평양,함흥,금수강산,원산 등 북한지명이 대부분이었다. 지난 96년 명파리 마을이 민통선 지역에서 해제된 뒤부터 생긴 변화중의 하나라고 귀뜀했다. 마을 어귀에서 만난 주민들은 “금강산은 마을 노인들의 옛 휴식처였다”고 남북 해빙 움직임을 반겼다. 동네 노인정을 금강산자락 밑으로 옮겨야 되지않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鄭周永씨가 부풀린 기대감 탓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다소 부정적 생각을 가진 주민들도 있었다. ‘그리 쉽게 되겠느냐’는 의구심이다. 李성찬씨(65)는 “북한이 그동안 한 짓을 보면 언제 마음이 변할 지 모르겠다”며 ”한번 한 약속은 꼭 지켜주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라며 못내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李씨는 명파리 사람들이 원하는 ‘금강산구경’이 뭐겠느냐고 되물었다. “명파리 사람들은 매일 매일 분단의 아픔을 삼키며 삽니다. 한 때의 급류타기가 아니라 모두가 진정으로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고 믿을 수 있는 그런 신뢰의 분위기가 더 중요합니다” ○마을노인들 옛 휴식처 그는 “鄭周永씨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의 잠수정이 발견된 것을 보면 남북화해에 대해 아직은 섣불리 착각에 빠져 들 때가 아닌 것 같다”고 경계했다. 그러면서도 “철조망 너머로 바라다 보이는 금강산이 꿈에만 그리는 ‘금단의 땅’은 아닐 것”이라며 “鄭周永씨의 방북이 대립과 갈등으로 지속돼온 남북관계가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로 바뀌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기원했다. 6·25가 터진지 어언 48년. 홍안의 나이는 반세기의 나이테를 더했지만 아직도 어릴 적 추억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명파리의 노인들에게 금강산은 ‘마음의 고향’일지도 모른다. 녹슨 철길이 다시 놓이고,속초항에서 출발하는 금강산 관광유람선의 고동이 울리는 그날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는 ‘명파리 마을’사람들. 분단을 아픔을 뒤로 한 채 이들의 마음은 벌써 금강산에 가 있는 듯 하다. ◎“분단 현실 한스러울 뿐”/6·25 당시 북한군 철교 폭파장면 생생/철교 기둥에 박힌 총탁 상흔도 그대로 ◎“분단 현실 한스러울 뿐”/6·25 당시 북한군 철교 폭파장면 생생/철교 기둥에 박힌 총탄 상흔도 그대로/배봉리주민 朴在奉씨 “금강산 구경요. 그 좋죠. 조만간 갈 수 있다니까 아마도 내가 제일 먼저 갈 겁니다”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배봉리에 사는 朴在奉씨(83)는 금강산 얘기가 나오자 어린애처럼 즐거워 했다. 한평생을 여기서 살아왔기에 금강산에대한 일화는 몇날이 걸려도 얘기를 다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朴씨가 사는 배봉리는 통일전망대 아래의 명파리와 불과 1㎞ 남짓 떨어진 곳으로 6·25 당시 동네 개천가 앞의 철교와 터널이 북한군의 폭격으로 폐허화됐던 곳. 철교 기둥에 박힌 총탄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다. 연신 담배를 빨아들인 뒤 말문을 연 그는 “비로봉 구룡폭포 내금강 외금강 등 금강산은 안 가본 데가 없다”며 “못가는 안타까움보다는 가로막힌 현실이 더 한스러울 따름”이라고 분단의 아픔을 토로했다. “보통학교 시절 금강산을 가기 위해 친구들을 많이 꼬드겼어요. 인근 사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삼일포역에서 내린 뒤 걸어서 온정리로 들어갔지요. 한두어시간 걸렸나요. 그리고는 원정탕에 들러 몸을 깨끗이 씻지요. 명산에 들어갈 때는 몸을 단정히 해야 하거든요”이어 “금강산에서 친구들과 날밤을 새기가 일쑤였다”며 “금강산으로 들어갈 때마다 들르던 단골집이 아직도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수시로 들락거리던 금강산에 발길을 끊게된 것은 8·15광복과 함께이곳이 공산당에 접수되면서부터. 감시가 워낙 심해 놀러 다닐 분위기가 안됐다. 그러다 6·25를 맞으면서 금강산은 추억속으로 들어갔다. 일제시대 동네앞 철교를 놓을 당시 잡부로 공사일을 한 적이 있는데 6·25때는 북한이 양양으로 가는 이 철교를 부수기 위해 폭격을 한 현장도 목격했다고 회고했다. “옛 친구들이 모두 저승으로 가 금강산을 다시 찾는데도 혼자 밖에 갈 수 없게 됐다”며 “한평생 이곳을 지킨 노인네로서 느끼는 점은 부서진 철교가 다시 복원될 때 분단의 역사는 진정 그칠 수 있다는 확신뿐”이라며 총총히 발걸음을 돌렸다.
  • 北 잠수정 인양에서 내부수색까지

    ◎두번째 해치 견고… 맨홀 열고 진입/선수·선미에 에어백 4개 달아 인양/軍警 무장상태·침투목적 밤샘 조사/크레인 이용 방파제 위로 올릴 채비 【동해=특별취재반】 북한 잠수정의 내부 수색작업은 25일 밤 늦게까지 계속됐다.부슬부슬 내리는 장마비도 잠수정 주변을 감싼 긴장감을 흐트러뜨리지는 못했다.잠수정 내부의 폭발물 설치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군도 더욱 신중하게 작업을 했다. 수색 현장은 각종 서치라이트로 대낮같이 밝았다.그러나 늦게까지 승조원 전원이 사망했다는 이야기만 나돌 뿐 몇명의 사체가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쉽게 확인되지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잠수정 개방 및 내부조사=예인된 잠수정은 하오 6시쯤 동해항 북방파제에 설치된 250t짜리와 150t짜리 두대의 대형 크레인에 의해 마침내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냈다.이어 대기중이던 대 테러 전문요원 8명이 2중으로 돼있는 잠수함 해치(Hatch)를 열고 들어갔다.첫번째 해치는 예상과 달리 손으로 쉽게 열렸으며 저항의 기미는 없었다.두번째해치가 열리지 않아 대 테러 요원들은 선수쪽 맨홀을 열고 잠수정 내부로 들어가 차례 차례 정밀 수색을 실시했다.이 과정에서 대 테러요원들이 폭발물이 설치됐을 경우에 대비해 탐지작업을 하느라 많은 시간이 걸렸다. ▲육상 인양=밤 늦게까지 해상에서 1차 조사를 마친 잠수정은 크레인에 들려 방파제 위로 옮겨질 예정이다.대기 중인 군과 안기부,경찰 등 합동신문조 요원들은 육상에서 잠수정의 제원,성능,무장상태,침투목적 등에 대해 정밀조사한다. ▲예인 및 접안=이에 앞서 동해항에서 1.8㎞ 떨어진 침몰지점에서 수면으로 끌어 올려진 잠수정은 하오 3시37분쯤 예인보조선(YTL) 2대에 이끌려 조심스럽게 부두로 예인됐다.잠수정은 앞부분 2m 정도를 물밖으로 드러낸채 YTL에 이끌려 하오 4시45분쯤 동해항 북방파제 내항으로 접안됐다.대기하고 있던 대 테러요원들이 잠수정 내부 진입을 위한 탐지작업을 시작했다. ▲부상=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부상작업은 동해 앞바다에 정박중인 4,300t급 잠수함 전문구조함 ‘청해진함’의 주도 아래 해군 해난구조대(SSU)가 맡았다.SSU요원 70여명은 24일 상오 9시부터 34m 해저로 들어가 잠수정 선수와선미에 지름 4.1㎝ 철제 와이어를 감은 뒤 잠수정의 연결고리에 20t 짜리 공기주머니 4개를 차례로 연결했다.이어 25일 하오 1시50분쯤 청해진함에 연결된 호스로 잠수정에 부착해 놓은 공기주머니에 압축 공기를 주입,한 시간만인 3시쯤 수면으로 부상시키는 데 성공했다. ◎잠수정 예인 일지 ▷22일◁ ▲하오 4시33분=속초 동남방 11.5마일 해상서 북한 잠수정 발견·신고 ▲하오 4시40분=경계태세 1급 발령 ▲하오 5시30분=1함대 소속 초계함 1척 등 현장 도착 ▲하오 7시25분=군산함 예인 시작 ▷23일◁ ▲상오 0시20분=기사문항으로 들어오다 동해항으로 예인 장소 변경 ▲하오 1시=동해항 앞바다 1.8㎞ 해상에서 잠수정 침몰 ▷24일◁ ▲상오 5시=잠수정 인양작업 착수 ▲하오 8시30분=공기주머니 부착에 필요한 철선 연결후 작업중단 ▷25일◁ ▲상오 5시30분=인양작업 재개 ▲하오 3시=공기주머니 이용 잠수정 부양 성공 ▲하오 4시45분=동해항 방파제 바지선까지 예인 완료 ▲하오 6시16분 수중폭파대 잠수정 투입 시작 ▲하오 6시30분=사체 발견
  • 北 잠수정 승조원 전원 사망/海軍,내부수색

    ◎사체 강릉병원 이송 사인조사/인원수는 안밝혀져 【동해=특별취재반】 동해항 앞바다 1.8㎞ 지점에 침몰한 북한 잠수정을 예인한 해군은 25일 밤 잠수정의 내부를 수색해 사체를 확인했다. 잠수정에는 최소한 4∼5명 가량 승선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하오 11시 현재 정확한 숫자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군은 사체를 국군 강릉병원으로 옮겨 정확한 사인을 조사중이다. 해군 수중폭파대(UDT)는 하오 6시16분부터 15분동안 1차 수색에 들어가 오리발 3세트와 롯데 칠성 페트병,사각 사각 복숭아 페트병 1개를 발견했다.침투 장비인 미제 아쿠아제품의 개방회로 잠수기와 보자기 1개도 나왔다. 확인결과 1차 해치(수밀문)와 2차 해치 사이는 빈공간으로 밀폐돼 있었으며,함교의 1차 출입구와 2차 출입구의 공간 크기는 높이 2.5m,폭 0.75m로 30㎝ 정도의 물이 차 있었다. 수색조는 하오 10시43분쯤 함교 오른쪽 옆에서 길이 2.5m,폭 1m 크기의 맨홀을 발견,민간인 전문가를 동원해 뜯어냈다.하오 10시35분쯤에는 함교 2m 뒤쪽으로 길이1.5m,폭 70㎝ 크기의 철판을 제거했다. 군은 96년 잠수함을 타고 강릉 앞바다로 침투했다가 생포된 李광수씨가 “잠수정 안에 폭파장치가 돼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해 수색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또 “26일중 잠수정을 육지로 끌어올린 뒤 합동신문조를 투입,2차 정밀 조사를 하면 침투목적과 경로,잠수정 기관고장 여부 등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해군은 하오 3시쯤 잠수정을 물밑 3m까지 끌어올린 뒤 3시47분부터 예인작업을 시작,하오 4시45분쯤 동해항 방파제로 끌고 왔다. 합동참모본부는 “상오 5시30분부터 재개된 인양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돼 하오 3시쯤 잠수정을 매단 20t 용량의 공기 주머니 4개가 물위로 떠올랐다”면서 “잠수정의 선체가 3분의 1 가량 뜬 상태로 방파제까지 예인했다”고 말했다.
  • 예인·인양팀의 구성은/UDT·안기부 등 대공요원 4개팀 참여

    ◎폭발물 제거·생존자 확인 역할 분담 북한 잠수정을 끌어올려 해체하고 조사하는 과정에는 UDT팀(해군수중폭파대)과 대테러특수요원팀 등 4팀이 역할을 나눠 참여한다. 우선 UDT팀. 영해상의 잠수정 수색작업을 도맡아 잠수정을 동해항으로 예인했다. 잠수정 안의 승무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주위를 삼엄하게 경계한다. 잠수정이 바다에서 육지로 옮겨지면 주변의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것도 이들의 몫이다. 예기치 않은 상황 대비는 SSU(해난 구조대)가 맡았다. 잠수함이 동해항으로 들어오면서 갑자가 가라앉자 바다속을 오르내리며 부양용 공기주머니 4개를 잠수정의 양측면에 부착하는 작업을 했다. 덕분에 하룻만에 재개됐다. 대테러 특수요원팀도 있다. 육지로 옮겨지면 잠수정의 해치를 열어 내부 파악작업에 들어간다. 이들은 진압가스를 쏜 뒤 해치를 열고 잠수정 내부로 들어가 폭발물과 부비츄렙 제거와 생존자 확인 작업을 한다. 마지막 단계는 합동조사팀. 군과 안기부,경찰 등 3개 기관의 대공 전문 요원들로 구성됐다. 기관별로 맡은 역할에따라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조사에 돌입한다. 군쪽은 잠수정의 무장상태, 항해일자, 침투경로 등에 관한 조사를 주도한다. 안기부 파견요원은 잠수정의 소속과 임무, 경찰은 영해침범 경위를 다각적으로 조사한다. 96년 강릉 잠수함 침투 당시 생포된 李광수씨도 현지로 내려와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승무원이 한 사람이라도 생존해 있다면 설득요원으로 적격이라는 내부판단에 따른 조치다.
  • 美軍탐지 굉음 정체는/승조원들 잠수정 폭파·자살 기도한듯

    ◎美선 굉음포착 확인주장… 합참선 부인 “한국 해군함정에 의해 예인되던 북한 잠수정 내부에서 굉음이 들렸다”. 외신에 따르면 미국 행정부의 한 관리는 북한 잠수정이 발견된 지난 22일 “승무원들이 잠수정을 폭파시키려고 시도했거나 잠수정이 기관 고장으로 폭발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합참은 굉음 여부에 대해 “전혀 확인된 바 없다”고 일관되게 밝히고 있다. 굉음의 진위에 대해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승무원들의 생존 기미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어 미 관리가 언급했듯 승무원들의 자폭으로 인한‘굉음’이었을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군사 전문가들은 미군측이 굉음을 포착했다면 대게 3가지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부근 동해상에서 작전중이던 미군 잠수함이 음파탐지기(SONAR)를 통해 잠수정에서 나는 소리의 강약으로 변화를 감지했 가능성이다. 미군측은 그러나 어떠한 언급도 회피하고 있다. 둘째는 대잠수함용 초계함인 군산함에 타고 있던 미군 요원이 SONAR로 확인한 굉음을 미군측에 보고했을 가능성이다. 셋째는 해상초계기인 P3­C기에서 의심나는 지역에 음향부표를 떨어뜨린뒤 SONAR­V를 작동해 이같은 굉음을 포착했고 이를 미군측이 확인했을 수 있다. 그러나 합참 관계자는 둘째와 셋째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부인했다. 96년 강릉 잠수함 침투 상황을 미국이 사전에 감지했다는 당시 일부의 주장이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이번에도 미궁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 공기주머니 매달아 浮揚/北 잠수정 나포­인양 어떻게

    ◎구조함 2척 船首·船尾 묶어 이동/실패땐 구조선 설악호 투입키로 【특별취재반】 바다 밑에 가라앉은 북한 잠수정은 어떻게 인양될까. 합참에 따르면 북한 잠수정은 23일 하오 1시쯤 동해항 방파제로부터 1.8㎞지점에서 가라앉기 시작해 40분 후 깊이 33m 해저에 침몰했다. 잠수정의 선미 부분을 묶었던 로프는 끊겼고 선수 부분에만 로프가 연결돼 있다. 수면을 향해 머리쪽이 들린 형태이며 선미쪽 스크루 5개 중 2개가 해저에 묻혔다. 군 당국은 선체의 일부가 수면 위에 떠있을 때는 압축 공기를 잠수정 안에 넣어 부양시킨 뒤 자세를 바로잡아 내항으로 옮기려 했으나 선체가 완전히 침몰함에 따라 계획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침몰 현장에는 해군 수중폭파대(UDT)와 잠수사가 투입돼 잠수정이 파손됐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등 인양 준비작업을 하고 있다. 본격적인 인양은 24일 상오 시작된다. 군 당국은 공기주머니를 선체 양편에 부착시킨 뒤 팽창시켜 수면에 떠오르게 한 다음 2척의 구조함을 잠수정의 앞뒤에 배치,선수와 선미를 각각 로프로 연결해자세를 안정시킬 계획이다. 이 때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조금이라도 쏠리면 다시 가라앉을 수 있다. 군은 공기주머니에 의한 인양작업에 실패하면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 때 투입됐던 구조선 설악호를 투입할 계획이지만 설악호는 부산에 정박 중이어서 이동에만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잠수정이 항구에 도착하면 수중폭파대 요원들이 투입돼 선체 내부를 정밀수색한다. 이어 15명으로 구성된 합동신문조가 조사작업에 들어간다. 합참의 朴仁鎔 해상작전과장은 “공기주머니에 의한 선체 인양은 외국에서도 널리 쓰이는 방법이지만 잠수정은 선체가 둥글기 때문에 균형을 맞춰 부착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했다.
  • 北 잠수정 예인중 침몰/동해항앞 로프 끊어져… 오늘 인양

    ◎승조원 자폭 등 전원 사망 가능성 높아 【동해=특별취재반】 우리 영해에 침투했던 북한의 유고급 잠수정이 예인되던 중 23일 하오 1시쯤 최종 목적지인 동해항 방파제로부터 1.8㎞ 지점에서 가라앉아 예인작업이 지연되고 있다. 합동참모본부는 “22일 하오 7시30분부터 16시간 동안의 예인작업 끝에 동해항 앞까지 끌고왔으나 잠수정이 부력을 잃고 완전히 가라앉았다”면서 “해군 수중폭파대(UDT)와 잠수사를 동원해 작업을 하면 24일 중 잠수정을 끌어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잠수정이 가라앉은 지역의 수심은 30∼40m 가량이다. 합참은 선체에 구멍이 생겼거나 부양장치인 밸러스트 탱크의 밸브가 고장나 선체가 가라앉은 것으로 보고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林鍾千 합참 작전부장은 승조원의 생존여부와 관련,“예인 도중 여러차례에 걸쳐 수중 음향 탐지기를 동원하고 잠수사들이 망치로 선체를 두들겼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면서 “현재로서는 승조원들이 자폭 등으로 모두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이어 “잠수정 내부에 물이 차 익사나 산소 부족으로 질식사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도 “예인에 앞서 잠수정 내부로부터 나온 굉음을 우리측이 탐지했다”고 전하고 “승조원들이 자폭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한편 군 당국은 북한 잠수정의 승조원은 5∼6명 가량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 金 대통령 모범용사 격려 안팎

    ◎“軍 처우개선·공정인사로 사기 진작” 서울신문사가 6월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선정한 국군모범용사 부부 117명이 車一錫 서울신문 사장과 함께 23일 상오 金大中 대통령과 부인 李姬鎬 여사가 청와대에서 베푼 다과회에 참석했다. 이들은 다과회를 마친 뒤 청와대 경내를 둘러보고,대통령 휘장이 새겨진 남녀용 시계 한쌍씩을 선물받았다. 金대통령은 모범용사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격려했다. 金대통령은 먼저 군인들의 처우개선을 약속하고 출신 지역과 학력 차별이 없는 공정한 군인사를 다짐했다. 또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했다가 한강다리를 폭파하고 후퇴한 6·25 당시 李承晩 정부의 무책임을 비판하면서,정부와 군의 역할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金대통령은 이어 “여러분은 청춘을 군에 맡기겠다는 장하고 보배로운 결심을 한 사람들”이라고 치하한 뒤 ‘안보의 기둥’이라고 치켜세웠다. 부인들에게는 “몸바쳐 나라를 지키는 남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라”고주문한 뒤 “여러분 자식들도 아버지를 그렇게 생각하도록 가르쳐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金대통령의 관심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육군 金永喆 원사(54)의 건배사가 끝나자 “하사관이 전투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말도 잘한다”며 분위기를 유도했다. 이어 공군 金宗立(43)·해군 裵澤根 원사(47)와 여군 成眞英 중사(36)에게 보직과 건의사항 등을 묻기도 했다. “차려놓은 것이니 많이 들고 가도록하라”는 권유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에 앞서 車 서울신문사장은 초청에 감사의 뜻을 표시한 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충성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행사에는 千容宅 국방장관과 金重權 대통령비서실장,林東源 외교안보수석,金辰浩 합참의장 및 육·해·공군 참모총장이 참석했다.
  • 잠수정 눈앞 침몰에 ‘당혹’/동해항 인양현장 르포

    ◎수중폭파대 물밑 투입… 긴급 부양작업/예인 18시간… 한때 투항 권유 방송도 【동해=특별취재반】 23일 하오 1시쯤 강원도 동해항.이날 새벽부터 양양 해군기지 앞바다에서 예인돼 오던 북한 잠수정이 모습을 드러냈다.진초록색 얼룩무늬의 선체도 육안으로 희미하게 구별할 수 있었다. 잠수정을 삼엄하게 호위하는 우리 구축함과 경비정 7척도 시야에 들어왔다.해군의 초계함 ‘군산함’이 예인에 나선 지 18시간이 지난 시각이었다. 해군은 잠수정을 끌고 오면서 지난 96년 강릉 앞바다에 잠수함으로 침투했다가 붙잡힌 李광수씨를 데려가 투항 권유 방송을 계속했다. 100여명의 주민들과 군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5㎝ 쇠줄에 묶여 이끌려 오던 잠수정은 순조롭게 해군기지로 들어오는 듯했다. 30분쯤 지났을까. 3노트를 유지하던 항해속도가 항구로 접근하면서 줄어들자 잠수정의 뒷부분이 조금씩 물에 가라앉기 시작했다.동해항에서 1.8㎞ 떨어진 지점이었다.북방파제 300m 앞까지 끌어오겠다는 것이 군 당국의 계획이었다. 잠수정이 가라 앉자 이른 아침부터 방파제에 나와 예인을 기다리던 군 관계들에게도 비상이 걸렸다.침몰 원인이 무엇인지,승무원들이 살아 있는지를 알아보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잠수정을 끌고 오던 로프를 큰 배에서 작은 배로 옮기던 중 부력을 잃고 잠수정이 수심 30m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고 해군측은 설명했다. 승무원들의 생존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군 관계자는 예인 도중 투항 방송도 하고 망치로 잠수정을 두드려 보기도 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 전했다.몇차례 교신도 시도했지만 허사였다.잠수정의 표류 현장에 우리 군 헬기가 도착하기 전 잠수정 내부에서 폭발음이 들렸다는 소식도 들렸다. 결국 군은 적어도 3명 이상인 승무원들이 모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잠수정이 가라앉자 해군은 수중폭파대(UDT) 요원들을 물속으로 들여보내 선체 확인과 부양작업을 서둘렀다.요원들은 선체에 손상이 없고 탈출한 흔적도 없다고 알려왔다.그러나 다시 물위로 끌어올리는 데는 24일 하오까지 하루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얘기였다.
  • “파키스탄 핵실험 횟수·규모 과장”/美 CIA 의문 제기

    【뉴델리 AFP 연합】 파키스탄이 실시한 핵실험은 5차례가 아니라 단 한차례였다고 조지 페르난데스 인도 국방장관이 31일 주장했다. 또 핵실험을 관찰해온 미국도 중앙정보국 등 당국자들이 규모가 파키스탄정부의 발표보다 위력 보다 현저히 떨어진다고 보고있다고 미 언론들이 보도했다. 페르난데스 장관은 이날 TV 방송에 출연,“미국의 중앙정보국(CIA)으로부터 파키스탄이 단 한차례만 실험을 해 놓고 인도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 5차례 한 것처럼 발표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밝혔다. 미국은 또 30일 파키스탄의 실험 규모가 당초 알려진 12Kt이 아닌 훨씬 적은 2,000t 정도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인도의 타임스 오브 인디아는 “TNT 6∼10Kt급 핵폭탄 한 개만이 성공적으로 폭발했다”는 소식통들의 말을 전하면서 이는 30∼35Kt급을 폭파시켰다는 파키스탄의 주장과 배치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당초 파키스탄 핵개발사업의 주역인 압둘 카디르 칸 박사는 5차례 실시된 1차 핵실험이 모두 성공을 거두었으며 파키스탄은 보다 강력한 수소폭탄을 폭발시킬 능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었다. 한편 인도는 이날 모든 핵무기 보유국을 향해 “비차별적인 핵무기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을 빠른 시일내 갖자”고 촉구했다.
  • 건축문화의 해/任英淑 논설위원(外言內言)

    한 건축가가 자신이 설계한 건물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한다.자기 작품대로 공사를 안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건축가는 법정에 서게 되지만 저작권을 인정 받아 재판에서 이긴다.지난 60년대 미국 영화‘마천루’ 이야기다.그러나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그 영화 주인공처럼 투철한 작가정신을 고집하는 건축가를 찾기는 힘들다.예술가로서의 건축가는 존재하기 힘든 곳이 우리 사회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건축은 문화 예술의 한 분야라기보다는 부동산 개념으로만 이해되고 있다.그래서 최근까지도 공공건물의 기공식이나 준공식의 테이프를 자르는 자리에 시공회사 대표는 초대 받아도 그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는 초대받지 못했다.화가의 전시회 개막식에 주인공은 없고 표구점 주인이 테이프를 자르는 것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졌던 셈이다. 문화관광부가 오는 99년을 ‘건축문화의 해’로 지정했다.한국 건축이 부동산의 차원에서 벗어나 문화예술로 이해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한 나라의 건축문화 수준은 건축가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건축주와 그 사회의 전체적인 문화수준에 따라 결정된다.따라서 ‘건축문화의 해’는 우리 문화의식에 변화를 가져 와 도시환경 개선은 물론 문화·관광산업의 활성화에도 기여할 것이다. 사실 유럽 관광은 건축 순례에 다름 아니다.이탈리아 건축가 지오폰티는 그의 저서 ‘건축예찬’에서 이렇게 선언한다.“이탈리아의 절반은 하느님에 의해,나머지는 건축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오랜 세월로 축적된 건축유산 못지 않게 현대건축도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음은 가우디를 배출한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목격할 수 있다.이 도시를 찾는 관광객의 대부분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비롯 가우디가 남긴 건축을 보려는 사람들이다. 마침 99년엔 중국 베이징에서 113개국 건축가 4천여명이 참가하는 세계건축가연맹(UIA) 총회가 열린다.이 총회와 연계시켜 공동사업을 추진하고 관광객을 유치하겠다는 계획을 문화관광부는 밝히고 있다.“건물은 많아도 건축유산은 빈약”(金壽根)한 서울이지만 시도해 볼만 한 일이다. ‘건축문화의 해’를 계기로우리 건축행정도 건교부의 건설행정에서 문화관광부의 문화행정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물량 위주의 건설행정과 법·제도 또한 개선돼야 하며 건축교육에 대한 재검토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시청 폭파 협박 괴전화/서울시 검문검색 소동(조약돌)

    ○…30대 남자가 서울시청을 폭파하겠다는 협박전화를 해 경찰이 수색작업과 검문검색을 벌이는 등 한때 긴장했으나 해프닝.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 9일 하오 8시16분쯤 30대 남자가 112로 서울경찰청에 전화를 걸어 ‘11일 하오 2시에 서울시청을 폭파하겠다’고 했다. 경찰은 전화 발신지 추적에 나서 영등포구 여의도동 진주아파트 앞 공중전화에서 통화한 사실을 밝혀내는 한편 경찰 85명을 투입,검문검색과 함께 수색작업을 벌였으나 폭발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시 관계자는 “협박전화가 걸려온 뒤 건물내부에 대한 수색작업을 벌이는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으나 폭발물을 찾지 못했고,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면서 “시정에 불만을 품은 사람의 장난전화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 “北에 비료주면 화약 만들지도”/黃長燁씨 귀순 1년 회견

    ◎민간차원 교류 확대… 개혁·개방 유도해야/北 국가기반 붕괴땐 주체사상도 변할것 黃長燁 전 북한노동당비서는 7일 기자간담회에서 인삿말을 통해 북한에서는 낙제생이었지만 지금 한국에서는 ‘1학년생’이라고 자칭(自稱)했다.또 궁한 쥐가 고양이를 무는 일이 없도록 북한에 식량,의약품 등을 지원해줘야 하며 전력을 약화시켜 북한의 전쟁도발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黃전비서와 金德弘 전 여광무역대표의 일문일답. ­1년간 어떻게 지냈는가. ▲黃=글을 많이 썼다.95년에 썼던 ‘광명한 미래’를 고쳐쓰고 철학의 기본문제,개혁개방에 관한 것도 썼다.또 동화책을 60여권 읽었다. ▲金=전쟁의 폐허위에서 국민들이 창조한 정신적·물질적 부의 현장을 보았다.그러나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것에는 불만이었다. ­지난해만해도 북한에 비료 등을 제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는데 오늘 인삿말에서는 민간차원 교류를 확대해 개혁개방으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입장이 바뀌었는가. ▲黃=바뀐 것 없다.식량 등을 지원할때북한 주민들이 남한의 동포들이 보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또 비료는 화약을 만드는데 사용되기 때문에 양곡이 낫다고 생각한다.비료 20만t이면 양곡 2백만t을 줄 수 있다. ­북한의 개혁·개방을 촉진시키면 북한주민들이 정신무장돼있는 주체사상도 변모될 수 있는가.또 黃전비서는 지금 주체철학을 버렸는가. ▲黃=내가 만든 인간중심의 주체철학과 지금 수령절대주의의 주체사상은 구조적으로 다르다.지금 북한 대중은 주체철학,맑스주의가 뭔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국가)기반이 허물어지면 주체사상도 변할 것이다.나의 사상이나 신념은 달라진 것이 없다. ­국내 친북세력의 규모가 얼마라는 등의 보도가 있었다.어떻게 보는가. ▲黃=북에 있을때는 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다.북한 당중앙위 대남사업부서만 4개나 있다. 한국에서는 통일전선부 하나만 알고 金容淳 대남담당비서만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국내 지하당조직을 전문적으로 보는 부서도 따로 있다.아웅산사건은 작전부,KAL기 폭파사건은 대외조사부가 각각 한것이다. ­고향을 떠나온뒤 인간적 고뇌도 많을텐데. ▲黃=가족사진을 가지고 왔는데 보는게 겁이나 구석에 밀쳐놨다.체험해보지 않고서는 모를 것이다.그러나 개인보다 가족,가족보다 민족이 귀중하다는 생각을 한다.
  • 팔 하마스 軍 지도자 샤리프 피살/사살된후 차량 폭과 돼

    【라말라 APA FP 연합】 팔레스타인의 과격 회교운동 단체인 하마스의 고위 군사지도자 모히에딘 샤리프(32)가 지난달 30일 요르단강 서안도시 라말라에서 피살된 채 발견됐다고 팔레스타인 경찰이 1일 발표했다. 이스라엘의 1급 수배범이기도 한 샤리프는 괴한들에 의해 사살된 후 차량에 태워졌으며 이 차량은 1일밤 라말라의 공업지대에서 원격조종에 의해 폭파됐다고 경찰은 밝혔다.
  • “北서 간첩교육때 실종 日人 목격”/93년 망명 安明進씨 증언

    ◎77년 행방불명 요코다 포함… 납치설 입증 【도쿄 연합】 북한 공작원으로 있다가 지난 93년 한국으로 망명한 安明進씨(29)는 31일 강연회를 통해 “북한에서 간첩교육을 받고 있을 당시 일본인 10명을 목격했다”고 밝혔다. 일본을 방문중인 安씨는 이날 도쿄도(都) 미나토(港)구 자유당 본부에서 개최된 강연회에서 이같이 말하고 “니가타에서 77년에 행방불명됐던 요코다(橫田) 메구미양도 그들중에 포함돼 있다”고 증언했다.그는 “6년간 교육을 받던 공작원 양성학교의 본교에서 7명,병원에서 2명,폭파훈련장에서 1명의 일본인을 보았다”고 말하고 “학교에서 젊은 미혼여성은 요코다양 밖에 없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공작원 선배가 ‘자신이 일본 니가타에서 납치했다’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일본인의 납치 목적에 대해 “지인 관계나 습관 등을 캐물어서 북한 공작원이 일본인으로 행세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는 언제든지 일본인을 납치토록 명령이 하달됐다”고 설명했다.한편 일본 자민당 방북단과 동행,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던 데라코시 도모에(寺越友枝·67)씨는 35년전 일본해역에서 행방불명된 아들 데라코시 다케시(寺越武志·48)씨와의 상봉이 이뤄져 북한의 일본인 납치설을 뒷받침,앞으로 일본측의 대응이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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