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폭압
    2026-04-08
    검색기록 지우기
  • 임대
    2026-04-08
    검색기록 지우기
  • 라틴
    2026-04-0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542
  • [씨줄날줄] 전태일의 편지

    투사들이 대개 그렇듯 전태일 열사도 원래는 순진한 청년이었다.그는 “민족을 위해 한번 더 십자가를 지기로 했다”는 삼선개헌에 즈음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담화를곧이곧대로 믿는 백성이었다.그가 처음 서울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비참한 작업환경에 눈을 떴을 때만 해도 대통령 각하가 이런 현실을 알면 즉각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었다.그는 1969년 11월,3선 개헌 후유증으로 정국이 어수선할 무렵에 박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다. “존경하옵는 대통령 각하.옥체안녕하시옵니까.혁명 후 오늘까지 저희들은 각하께서 이루신 모든 실제를 높이 존경합니다.그리고 앞으로도 길이길이 존경할 것입니다.삼선개헌에 관하여 저희들이 알지 못하는 참으로 깊은 희생을 각하께선 마침내 행하심을 머리숙여 음미합니다.끝까지 인내심과 현명하신 용기에 또 한번 밝아오는 대한민국의 무거운십자가를 국민들은 존경과 신뢰로 각하께 돌릴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에 대한 그의 존경과 믿음은 배신감과 분노로 바뀐다.편지를 쓴 지 1년도 채 안되는 1970년8월 그는모종의 결단을 내린다.그리고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긴다. “이 순간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일생을 두고 맹세한,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될 나약한 생명체들.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조금만 참고 견디어라.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오늘은 8월 둘째 토요일.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무고한 생명들이 시들고 있는 이 때에한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오니 하느님, 긍휼과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민주투사로 나서기 전,문익환(文益煥) 목사는 풀잎 하나,바람 한 점에도 감동하는 시인이었다.그런데 독재자의 폭압이 한 시인의 감성을 분노로 바꿔놓았다.31년 전 오늘,“근로기준법 준수하라”고 절규하면서 자기 몸을 불사른 전태일도 순하디 순한 청년이었다.“박정희의 경제개발은 전태일의 죽음과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다”는 ‘딴지일보’의계산법이 무리가 아닌 것 같다.전태일 말고도 수많은꽃다운 청춘들,그뿐인가? 5·18로 재발된 쿠데타 악습, 지역감정 망령 등은 어떻게 할 것인가. 김재성 논설위원 jskim@
  • 이무영경찰청장 회고 “”無최루탄 오늘로 3년””

    “오늘은 이땅에서 최루탄이 사라진지 만 3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무영(李茂永) 경찰청장은 3일 ‘무최루탄 3년을회상하며’라는 A4용지 7장 분량의 글을 일선 경찰관서에배포했다. 이 청장은 이 글에서 지난 98년 1월12일 서울지방경찰청장에 취임하면서 ‘무최루탄’을 선언했고 그해 9월3일 만도기계 노사분규 현장에서 최루탄을 사용한 뒤 ‘최루탄연기’가 사라졌다고 밝혔다. 이 청장은 “최루탄은 과거 군사·귄위정부 시절 국민의손발을 묶고 입을 막아온 폭압정치의 도구요 통제의 상징이었다”면서 “경찰이 먼저 최루탄을 포기함으로써 시위대가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 빌미를 없앴다”고 주장했다. 그는 “과격 시위현장에서 화염병이 등장할 때마다 최루탄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유혹에도 빠질 뻔했으나 점차 평화적 시위문화가 정착되는 모습을 보고 최루탄 사용을 끝까지 자제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합법보장,불법필벌이라는 원칙 아래 시위현장에폴리스라인을 설치하고 여경기동대를 배치한 결과,평화적인 시위장면이 외국 언론에 소개돼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고 소개했다. 이 청장은 “민주주의의 참된 가치는 이해집단의 대립과갈등을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라면서“이기주의를 버리고 국민·사회 통합을 이루자”고 호소했다. 한편 화염병은 지난 95년 3만7,647개,96년 7만24개,97년 8만994개로 급격히 늘다가 무최루탄 원칙이 시작된 98년부터 1,529개,99년 613개,2000년 746개,2001년 2,443개등으로 감소세를 나타냈다.반면 최루탄은 95년 1월부터 98년 9월3일까지 48만636발이 사용됐다. 조현석기자 hyun68@
  • [사설] ‘8·15특사’ 연례행사 아니다

    정부와 민주당이 8·15특사 문제를 두고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민주당 인권특위 이종걸(李鍾杰)위원장은 지난달 30일 “8·15광복절을 맞아 권영해(權寧海)전 안기부장을 포함한 488명에 대한 특별사면·복권을 정부에 건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그러나 청와대는 바로 그날 “올 광복절에는 특사가 없다”고 일축했다.민주당은 ‘특별사면건의는 이 위원장의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당의 입장을 정리했다.그러나 사면 대상자의 명단까지 작성된 ‘사면 건의안’이 어떻게 한 특위위원장의 ‘개인적인 생각’일 수 있겠는가.당정간에 손발이 제대로 맞지 않는 문제는 그것대로지적해야 하겠으나, 우리는 이 기회에 사면에 관한 근본적인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3권분립의 원칙을 뛰어넘어 대통령이 독자적으로 행사하는사면권은 국가 형벌권에 대한 반성이라는 측면과 인권에 대한 배려,그리고 국민화합의 측면에서 바람직한 제도다.그동안 국민의 정부는 7차례에 걸쳐 일반사면 및 특별사면,복권을 단행했다.그 결과 수백만명의 국민들이 혜택을 입게 됐다. 현 정부가 지나칠 정도로 많은 사면·복권을 단행한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헌정 50년만에 처음 이뤄진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의미에서,지난 시절 폭압적 권력에 희생된국민들과 국제통화기금관리체제에서 희생을 강요당한 국민들의 눈물을 닦아줘야만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의 사면권은 사법권에 대한 중대한 제한이기 때문에 그 행사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사면권의 지나친행사는 법의 안정성을 해쳐 국민들 사이에 법을 경시하는풍조를 만연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몇년 동안 감옥을살고나와 또 몇년만 살다보면 사면·복권이 이뤄지는 마당에 누가 법을 무서워 하겠는가.시국사범에 대한 특사면 모를까 선거사범을 특사하면 어떻게 선거풍토를 바로잡겠는가.더구나 이번 광복절은 특사를 단행해야 할 만한 특별한 이유도 없다.“지나친 관용은 정의에 반할 수도 있다.”‘8·15특사’가 연례행사로 돼서는 안되는 이유다.
  • 종교인 1,000인선언 “”족벌언론에 보내는 경고장””

    ◎종교인 1,000인선언 주도 청화스님 . “우리 사회의 지상과제가 남북통일을 포함한 민족화해임은 그 누구도 인정하는 것이고 종교인들 역시 동감하고 있습니다.그동안 종교인들이 언론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않았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그러나 작금의 상황을볼때 종교인들이 더이상 침묵할 수 없다는 데 뜻을 모았습니다.”종교인들의 ‘언론개혁을 위한 종교인 1,000인 선언’에주도적인 역할을 한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의장 청화 스님(대한불교 조계종 중앙종회 수석 부의장)은 25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종교인 선언을 발표하게 된 배경을 이같이 설명하고 “앞으로 종교계가 강력히 연대해 언론개혁 운동에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스님은 이어 “그동안 언론의 불의와 횡포,민족에 대한 배신을 숱하게 겪었고 특히 무소불위의 족벌언론 권력으로인한 피해도 지켜봤다”면서 “언론개혁은 더이상 피할 수없는 준엄한 현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곳곳에서 족벌언론에 대한 불만이 분출하고 채찍이 가해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하고 “족벌언론을 포함한 비리 언론사들로 하여금 언론개혁에 대한 사회적 열망을 깊이 인식시키기 위해 ‘1,000인 선언’을 추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특히 “비리 족벌언론들이 대국민 사과 등을 회피할경우 엄청난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고 경고했다. 스님은 “이날 선언은 비리 족벌언론에게 종교계가 던지는심각한 통첩”이라고 규정한 뒤 “1,000인 선언이 사회에큰 반향을 일으켜 언론개혁이 반드시 성취되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김성호기자 kimus@. ◎격앙된 '종교인 1,000인 선언' 회견장. 25일 서울프레스센터 외신기자클럽에서 열린 ‘언론개혁종교인 1,000인 선언’ 행사는 종교인 대표 40여명과 기자 등 모두 6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 시간 동안 열렸다.기자회견은 선언 낭독에 이어 행사 개최 배경 설명,질의응답 순으로 이뤄졌다.배경 설명까지는 여느 기자회견과 마찬가지로 차분하게 진행됐으나 질의응답때 조선일보 기자와동아일보 기자가 잇달아 가시돋친 질문을 던지는 바람에회견장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답변에 나선 종교인대표들도 한때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먼저 조선일보 기자는 “종교인들이 언론사 세무조사가진행 중인 상황에서 사법적 판단이 나오기도 전에 예단하는 것이 아닌가” “종교인들은 균열된 사회를 통합하는역할을 맡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물었다.이에 단상에 앉아 있던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전 의장 이해학 목사는 “독재자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정의롭게 살려는 사람들에게 비판적이었던 언론을 보면서 언론 개혁의필요성을 절감해왔다”고 받아쳤다. 이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고문인 김병상 신부는 “문제의 언론사들은 일제와 군사정권 시절 민중들의 어려움을 옹호하고 대변하기보다는 오히려 민중 폭압에 앞장선기사를 실을 때가 많았다”면서 “우리 몸의 병도 가장 중한 것부터 찾아내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의 답변이 끝나자마자 동아일보 기자가 나서 “종교인들이 방송매체 등을 제외한 채 특정 언론만 겨냥해 연대운동에 나선 이유가 무엇인지 해명해달라”고 따졌다.한국기독교장로회 교회와사회위원장 문대골 목사는 이에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종교인들의 언론개혁 선언은 일반인들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고 문제 해결을 돕기 위한 공동대응인 만큼 언론사들도 적극 동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질의응답은 20여분간 계속됐고 더 이상 추가 질문은 없었다. 김성호기자. ◎‘종교인 1,000인 선언' 요약. ■비리 족벌 언론사·언론사주 대국민 사과문 발표및 자정입장 천명= 그간 사회지도층과 일부 기업의 불법과 탈세행각을 강도있게 비판해온 자신들의 행태를 언론사들 스스로잘 알고 있을 것이다.자신의 비리를 마치 ‘언론탄압’의형국으로 몰고 있는 것은 국민들을 현혹하는 행위이자,사회적 공기의 책임을 포기하는 행위이다.다행히 일부 족벌언론사를 제외하고 탈세혐의가 드러난 언론사들이 국민에게 솔직히 사과하고 새롭게 거듭날 것을 약속하고 있다는사실에 희망을 본다.족벌언론사 역시 국민에게 책임있는사과와 자정의지를 밝혀야 할 것이며 비리 언론사주 역시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한다. ■언론개혁에 대한 정치공방 즉각 중단=불법 비리 언론사에 동조,망국적 병폐인 지역주의와 색깔론까지 유포하는무책임한 정치행태에 우려를 표한다.색깔론이나 지역주의를 들먹이고 있는 일부 정치권의 행위는 언론개혁에 대한국민의 바람을 거부하는 행위이며 반역사적 행동임을 지적한다. ■검찰의 비리 언론사주 엄정 수사,법에 따른 후속조치 단행 =엄정한 법집행과 국민 앞에 바른 공개를 원칙으로 수사가 진행돼야 한다.비리 언론사주와 관계자에 대한 수사와사법처리를 놓고 정치적 타협을 하려한다면 국민의 저항에직면할 것임을 엄중 경고한다. ■모든 언론인들의 언론개혁 운동 동참 호소= 일부 언론사가 국민의 지탄과 개혁대상으로 전락되었지만 양식있는 기자들이 남아있을 것으로 믿는다.사주의 전횡과 독단에 맞서 경영과 편집의 독립을 확보하고 정론직필을 걷고자 하는 언론인의 목소리를 기대한다.
  • [김삼웅 칼럼] 진짜 언론인 함석헌 100주년

    오늘(13일)은 함석헌선생 탄생 100주년이다. 함석헌은 역사연구가·사상가·민권운동가·잡지발행인 등 여러가지로 분류되지만 ‘진짜 언론인’도 한 범주라 하겠다. 언론인이면 언론인이지 진짜는 뭐고 가짜는 뭐냐고 할지 모르지만 상품에 진짜와 가짜가 있고 진실한 사람과 위선자가있듯이 언론인도 마찬가지다. 특히 오랜 독재와 냉전시대에사이비언론(인)이 득세하고 판칠 때 함석헌이야말로 진짜 언론인의 역할을 했다. 제도언론에 지면이 허용될 때는 할 말을 하고,지면이 봉쇄당할 때는 ‘언론게릴라전’을 펴면서 독재와 냉전세력과 싸웠다. 최근 어떤 신문이 ‘할 말은 하는 신문’을 구호로 내걸었지만,그런 신문이 독재에 침묵하거나 곡필을 서슴지 않을 때함석헌은 진짜 할 말을 했다. 억압시대에는 비굴하고 민주시대에는 방종하는 사이비 비판이 아니라 남들이 입을 다물때,천지가 암흑에 덮일 때 그는 할 말을 했다. 친일언론이 식민지 백성들을 전쟁터로 몰아갈 때 함석헌은동지들과 ‘성서조선’을 만들며 어둠에 묻힌 조선역사를 쓰다가 투옥되고,자유당 천하에서 대부분의 언론이 어용족 또는 만송족(晩松族)일 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논설을 썼다가 감옥엘 갔다. 5·16쿠데타로 온세상이 공포에싸일 때는 ‘5·16을 어떻게 볼까’란 쿠데타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군사정권의 폭압 속에서도 정치군인들에게 할 말을다한 것이다. 당시 족벌언론이 쓴 쿠데타 지지 사설과 기사,논평은 한국언론사의 치부를 드러낸다. 독재권력이 강화되면서 지식인은 두 갈래 부류로 나타났다. 저항과 타협의 길이었다. 저항자는 설 땅을 잃고 타협자는풍요가 따랐다. 고려무인정권 때도 그랬고 일제식민시대도그랬다. 그리고 비굴하게 타협하면서 무인정권과 식민통치를찬양한 세력이 시대의 주류가 되었다. 군사독재 시절도 예외가 아니었다. 함석헌 등 진짜 비판자는 도태되고 사이비들이 득세하여 사세를 키우고 영향력을증대시켰다. 전두환정권에서 이런 현상은 절정을 이루었다. 언론통제가 심해지자 함석헌은 제도언론인들에게 언론게릴라전을 제창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언론활동이 불가능한상황이기에 게릴라전술로 언론투쟁을 하자는 것이었다. 게릴라전은 정규군이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특수임무가 요구될때 전개된다. 신문사주와 간부들이 군사독재와 유착된 상태에서 언론의 정상적 기능(정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게릴라전을 제창했던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의 목마른 외침은 빈 산의 메아리에 그쳤다. 독재의 짓누름도 심했지만 그들이 던져준 이권과 고깃덩이도만만찮았다. 또 긴 세월 길들여진 보신주의 언론인들이 게릴라로 활동하기에는 너무 배부르고 비대해졌다. 특히 양심적 기자들이 자유언론의 횃불을 들었다가 쫓겨나면서부터 진짜 저항언론의 맥은 끊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직접 게릴라전에 나섰다. 함석헌은 사이비들처럼 사주의 지침이나 시세에 따라 아무권력이나 무조건 지지 또는 반대하는 따위의 언론인과는 격이 달랐다. 군사독재를 준엄하게 비판하다가도 통일문제는지극히 전향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되어야 합니다. 갈라진 이대로는 살 수 없고 산다고 해도 사람이 아닙니다. 남은 북을 믿고 북은 남을 믿고 일어섭시다.”(북한동포에게 보내는 편지) 30여년 전에 쓴 글이 지금 읽어도 감동을 준다. 참글은 이렇게 이념과 시공을 뛰어넘는다. 그 자신 진짜 언론인인 송건호씨는 함석헌을 타고난 언론인으로 평가한다. 신문기자나 논설위원의 경력은 없지만 타고난 언론인이란 두가지 논거를 들었다. 첫째,문장이 보통 언론인 이상으로 유려하고 평이하다. 언론인과 비언론인의 구분은 문장이 쉬운가 난삽한가라면 함선생의 문장은 간결하고 쉽다. 둘째,시대를 보는 눈이 예리하다. 나날의 시사문제에 날카롭다는 것이 아니라 시대 이면에 흐르는 사조를 꿰뚫는 눈이날카롭다는 주장이었다. 그렇다. 함석헌은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아는 용기있는 언론인이었고 용기의 원천은 역사의식이었다. 역사의식이 없는용기는 풍차에 칼질하는 만용이거나 멧돼지의 저돌성이다.타락한 언론의 저돌성이 ‘비판’의 이름으로 설치는 시대에함석헌의 참언론정신이 그립다. △김삼웅 주필 kimsu@
  • [발언대] “남영동 대공분실을 박종철 기념관으로”

    지난 12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경찰청 보안3과에서는 박종철열사 14주기 위령제가 열렸다.박열사가 고문치사를 당한 바로 그 현장에서열린 것이다.실로 14년만의 일이다.정권이 세 차례나 바뀌었지만 이곳은 단 한번도 공개되지 않았다. 참으로 놀라웠다.강산이 한번 바뀌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건만 모든것이 그대로였다.침대 욕조 변기 세면기 책상….‘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필자도 14년 전바로 이곳에서 고문과 협박 속에서 죽지 못하고 살아나왔다. 박종철 열사.스무살 꽃같은 젊음은 야수들의 물고문 끝에 스러지고말았다.하지만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아니 죽지 않고 되살아났다.열사는 노도와도 같은 87년 6월 대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그리고 이한열열사 조성만열사 강경대열사 김귀정열사 들과 함께 이 나라를 치떨리는 군사독재의 수렁에서 건져내었다. 그렇게 열사들의 죽음에 기대어 우리는 군사 독재정권을 종식시키고민주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 대공분실은 ‘경찰청 보안3과’로 이름만 바뀐 채 지속되고 있다.인권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미흡하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우는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이곳 남영동 대공분실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으로 거듭나야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박종철 민주기념관’으로 성역화하자.그리하여 어두운 시절에도 독재정권의 폭압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열사들이 있었음을 기억하자. 그들의 고귀한 희생에 힘입어 우리는 민주주의를 일구고 인권을 지켜온,부끄러우나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었음을 기억하자.그리하여 열사의 정신을 오늘에 계승하고 이땅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가 영원히 수호될 것임을 선언하자.그것이 부끄러운 역사를 자랑스러운 미래로 바꾸는 길이 아니겠는가. 장영달 [국회의원]
  • 대한매일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작-최하림론(1)

    *역사와 개인이 만나는 시의 자리-최하림론. 1.거친 육성(肉聲)과 혼돈을 넘어서 고야의 한 그림에는 황폐하고 공포스러운 표정의 크로노스가 자식을잡아먹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그림 속의 주인공 크로노스는 ‘시간’을 상징하는 신으로서 자식을 낳는 족족 잡아 삼키는데,자식 중에하나인 제우스를 삼켰다가 제우스의 아내 메티스〔‘숙려(熟慮)’라는 뜻의 여신〕가 준 약을 마시게 되어 그를 토해놓는다.아버지의 뱃속에서 놓여난 제우스는 아버지 크로노스를 무한지옥인 타르타로스에가두어 버리고 은(銀)의 시대를 펼친다. 인간 상상력의 한 중요한 테마가 실현되어 있는 크로노스의 신화에서, 우리는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인류의 뿌리 깊은 욕망을확인할 수 있다. 크로노스의 자식들인 우리 인간은 그의 뱃속에서 삶을 영위하지만,그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을 열망한다.종교를 비롯한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 신화적 상상력을 실현하려는 욕망의 발현이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 밖에 존재할 수 없으며,인간의 삶이란 결국 시간과 벌이는 고투의 흔적이다.시간은 모든 고통의 원천이자 자기동일성의 근원적 조건인 것이다.우리는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서 생의 좌표와 의미를 가늠하고 수정한다. 시간이 거쳐가고 남은 자리에 부려져있는 소모와 쇠약, 또 한켠에서 벌어지는 생성의 현장은 인간의 근원을 돌아보게 하는 냉엄한 지표이다. 인간의 경험과 욕망을 담아내는 문학은 궁극적으로 시간과 투쟁하는존재의 모습을 형상화한다.시의 경우,이 대결의 양상은 정서적 직접성과 대상의 중층성이라는 성격을 띠게 되는데,여기서 대상의 중층성이란,현실과의 역동적 상호 작용 속에서 구축되는 한 시인의 작품 세계에는 현실의 시간적 궤적과 생리적 연치가 더해가면서 변모하는 한자연인의 모습이 함께 담겨있음을 말한다. 시에는 시대와 개인을 통과한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시는 시대와 개인,역사와 인간이 삼투하며 길항하는 생생한 내면의 현장이다.한 시인의 시세계를 조감함으로써 우리 자신 속에도 깃들어 살고 있는 시간의 신이 한 인간의 몸을 빌어 건네는 전언을 들을 수 있으며,아울러 몸 속에 지핀 시간과의 길고도 험한 싸움을 수행하는 한 정신의 고언(苦言)도 듣게 되는것이다. 이미 다섯 권의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1976),『작은 마을에서』(1982),『겨울 깊은 물소리』(1987),『속이 깊은 심연으로』(1991),『굴참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온다』(1998) ― 을 상재한 바 있는 최하림은 역사와 현실에 대한 진지한 사색과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압축된 풍경과 서정적 형식을 통해 형상화해 왔다.그의 시에서 우리는 지나온 역사의 의미와 그 현실을 통과한 한 개인의 정신의 풍경을,더불어 몸을 받은 존재로서 시간을 경험하는 한 인간의 고단한 삶의역정을 보게 된다. 최하림의 시가 현실참여적 성격을 보이는 1970,80년대는 전사회적으로 정치적 열기가 강렬한 시기였다. 소위〈시의 시대〉로 불렸던 이 연대(年代)에 시가 발휘한 힘은 분화(噴火)를 꿈꾸던 당대인의 욕망과 상상력에서 발원한 것이었다.극렬한 용출을 욕망하게 만든 억압적 상황은 역설적으로 시에 힘을 실어주었던 배후(背後)였으며,현실의 후광 속에서 시는 단일하면서도강렬한 상징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그러나 한편으로는 역사와 현실의거대한 깃발 아래,개인의 실존에 대한 시적 사유의 깊이나 언어적 성취가 상대적으로 소외되기도 하였다. 시 장르의 폭발력이 외부에 있었던 만큼,현실적 열기가 지나간 현장에는 작부들의 사이비 신세타령만이 웅성댈 뿐,역사와 현실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들은 이제 실종되고 없다.80년대가 부려놓고 간 피폐하고 앙상한 언어의 잔해들 위로,묵시록적 상상력과 정신분열증적 언어들이 쇄말리즘의 안개 속에 밀려와 있고,‘시의 죽음’이 풍문처럼떠도는 상황에서 한 세기가 막을 내렸다. 그리고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미만하던 세기말의 암울한 전망과 우려가 새로운 세기의 도래와함께 말끔하게 제거되면서,그 자리에는 기술자본주의의 지칠 줄 모르는 광란의 질주에 도취되어,그것에 저항하고 개입할 의지를 포기한상혼(商魂)들이 혼몽 속을 헤매고 있다. 최하림 시의 독자적 가능성은,‘역사적 연대’의 흔적들이 썰물처럼빠져나간 이 흉흉한 시점에서도 여전히 역사와 현실에 대한 진지한천착을 서정적긴장 속에서 일관되게 수행해 오고 있다는 점,아울러그러한 작업이 자기 존재,나아가 존재 일반에 대한 깊은 성찰에까지닿아있어 시적 사유의 폭과 깊이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 놓여 있다. 우리는 그의 시에서 7,80년대의 날선 육성(肉聲)과 90년대의 세기말적 언어들을 넘어서는 치열한 시적 사유를 만나게 된다.깊은 고통과오랜 침잠의 시간들이 동행하는 그 세계에서,우리는 ‘역사의 시대’에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개인의 실존적 고뇌들이 진지한 역사적 상상력과 조우하는 장면을 목도할 수 있다.역사와 개인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최하림의 시적 태도는 우리 시대 문학의 자리를 새삼 되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강인한 정신 속에 길이 있다.길을 만들고,그 길을 가는 것은 문학의 태생적인 운명이다.그것은 포기하지 않는 꿈이,문학의 배태(胚胎)된 자리이기 때문이다. 2.역사의 공범의식,그 도덕적 순결성〈아우슈비쯔〉는 시간의 진행을 진보의 역사로 인식했던 인류에게근본적인 반성의 계기였다.근대의 쌍생아인 자본주의와 역사주의 모두에 가능태로 잠복해 있던 폭력적 욕망이 그 포악성을 드러낸 자리에서 역사는 시간의 근본적인 의미와 방향을 인간으로 하여금 되묻도록 요구하였다.20세기의 인류에게 〈아우슈비쯔〉가 있었던 것처럼우리 현대사의 한 극점에는 〈광주〉가 놓여있다.역사적 상상력의 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주〉는 결과적으로 역사적 현실로부터 선회하는 최초의 기점이 되었다.그것은 고통의 진원지를 응시하는 힘의부족에서 연유한 것이었는데,〈광주〉를 문제삼던 많은 사람들은,아예 〈광주〉가 서있던 ‘역사의 자리’를 떠나버리고 말았다.바로 이지점이, 최하림을 여타의 시인들과 갈라놓는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한국사의 비극적 상징인 [광주]를 통과하면서, 그리고 ‘현실사회주의권의 해체’라는 세계사적 변혁을 지나면서 최하림은 역사와 존재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사유 속으로 침잠한다.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의 붕괴를 그는 외부적 현실을 통해서 해소하지 않고, 역사를 내면속에 소환하는 방식으로 끌어안는다.역사의 내면화는 필연적으로 역사를 윤리학의 차원으로 환원한다.역사는 익명의 타자의 것이 아닌,주체의 윤리적 실천의 장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따라서 외부에 대한공격적인 정서보다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반성적 사유가 시의 주를 이루게 된다.낭만적 격정과 들끓는 고뇌로부터 한걸음 비켜선 자리에서 최하림은 지나온 역사와 시간을,그리고 시와 인간을 응시한다. 어둠과 함께 온 기억들에 싸여 나는/나를 밝혀주지 못하는 불빛을본다/빛이 멀면 편안하다 죄가 많은/우리는 죄들이 두렵고 어둠이 내려서/아름다우니 어둠에 몸 섞는다/이런 밤 새들은 얼마나 조심스레/그들의 하늘을 날았던지/내 영혼은 어디를 방황했던지/검은 유리 같은 공기 속에서 길들은/보이지 않게 밤으로 이동하고/새로운 추억이짐짝처럼 마른 나무 밑에 쌓인다/시간이 별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흘러 간다/시간을 따라서 광목도로 어디쯤 걸음을 멈추고 쉴 곳이 있을것이다/잠시 유숙할 집이 있을 것이다/우리에게 범한 죄를 우리가 사할 때가 있을 것이다/한 사람에게만은 사랑이었고 배반이었던 여자도어디쯤 있을 것이다/그러나 세상은 결국너를 버리고 달려간다/세상은 고통스럽고 일어서는 자는 숨을 수 없어서 불행하다/내 가슴은 사직처럼 허물어져간다/예감을 노래해선 안 된다/나는 밤으로 간다 잘있거라/한번도 힘껏 꽃잎 피지 못하고/한번도 힘껏 울어보지 못한/정다운 말들아 내 딸들아 ―「光木道路」 전문 한바탕의 회오리 같은 역사가 훑고 지나간 내면 세계에,짙은 허무와체념이 배음을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쓸쓸한 어조 사이로 배어나오는고통과 절망 속에,내면으로 귀환한 역사의 흔적이 음각되어 있다. 이흔적이 구체화된 기억의 형상은 최하림의 역사 인식을 반영하는 중요한 단초로서,그의 시 곳곳에는 역사가 남기고 간 상처가 고통의 기억으로 잔존해 있다.그 기억의 공간은,‘절망의 부레 찢어지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악마구리같이 아우성치며’(「말하기 전에,나는」) ‘피투성이 된 붉고붉은 입술들’(「우리들은 오늘도」) ‘갈가리찢긴 육신의 목소리’(「무등산」)들이 ‘합창을 이루는’, 아비규환의 절규가 가득한 곳이다.이러한 고통스러운 공포의 기억을 조성한과거는‘몇 대의 트럭이 난폭하게 거리를 질러가고’(「부식 동판화」) ‘탐욕스러운 개들이 안개 속으로 달려가’ (「고통의 문지방」)며 ‘사나이가 시간을 죄스레 칼질하고 생채기에서 뚝,뚝, 피가 흐르는’(「상처」),폭력과 살육으로 얼룩진 광란의 시간이다.주목할 점은 이러한 과거의 기억이 역사 자체의 이미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시적 화자를 끊임없이 고통스럽게 만드는 ‘죄와 벌’의 이미지로 출현한다는 사실이다.이는 “기억의 아이들이 붉은 얼굴로 지나가고/어디서인지 흰 이를 드러내며 킬킬킬킬/웃는 아이”(「섬진강」)와 같이 과거의 기억에 대응하는 심리적 이미지가 대체로 자조적이고 자학적인 형상으로 각인되어 시인의 내면에 환기된다는 점에서 보다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역사적 현장을 투과하면서 굴절,각인된 이러한이미지들은 시인이 과거의 역사를 자기반성의 방식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최하림에게서 과거는 부정적 실체라기보다,폭압적 상황을 결과적으로 방기했던 고통스런 부채의 시간인 것이다. 역사를 내면화하는 이러한 방식은 최하림의 많은 시편들을 의식의풍경으로 읽게 만든다.인용된 시의 배경인 ‘어둠’의 상황은 죄의식속에 고통스러워하는 화자의 내면을 상징한다.‘빛’과 대조되는 ‘어둠’은,공포와 방황의 시간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윤리적 자의식의내면 상태를 보여준다.이 어둠 속에는 한국 근대사의 비극적 경험과현실사회주의권의 몰락이 각인시켜놓은 고통스러운 상흔,시간을 역사의 진보로 인식한 20세기적 사유의 참담한 좌절이 가로놓여져 있다. ‘빛’으로 생각했던 역사와 시간의 배반을 절망적인 체념으로 추억하면서도,자신을 ‘어둠과 함께 온’ 역사의 주체로 사유하는 시인에게 과거의 기억은 ‘짐짝’ 같이 둔중한 고통의 추억이 될 수밖에 없다.광포한 역사의 기억이 형벌과 같은 공포의 대상이라면,그 기억의공간 속에서 시인은 자신을 유형수(流刑囚)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폭력적인 역사,패배의 역사를 주체가 되어 감내하려는 태도는 최하림시의 역사 의식과 도덕적 순결성의 원천이다. 역사의 폭력에 희생된영혼들이 ‘보이지 않는 내 맘속의맘까지도 감시한다’(「죽은 자들이여,너희는 어디 있는가」)는 토로나,‘말’에 대한 자학적인 공격,그리고 시의 언어를 형벌로 인식하는 태도 등은 최하림이 과거의 역사적 경험을 의식의 내면으로 소환하여 현재의 윤리적 검열의 내적장치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베드로] 연작시들과 [소록도] 시편들은,자신을 불행한 역사의 공범자로 인식하는 시인의 이러한 의식을 반영한다.가롯유다뿐만 아니라베드로 역시,예수를 로마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팔아넘긴 공범자라는죄의식이 죽음과 패배의 시대를 통과한 최하림의 내면 속에 자리잡고있는 것이다. 포악한 현실의 암묵적 공범이라는 이러한 윤리적 자의식은 “우리에게 범한 죄를 우리가 사할 때가 있을 것이”라는 대용서의 전제를 마련한다.이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예수의 정신과 상통하는 것으로서,우리는 최하림의 시에서 개인의 윤리성의 문제로 화육(化肉)한 역사의 실체를 만나게 된다.그에게 있어서 역사는자신의 [시와 삶]을 향해 끊임없이 윤리적 질문을 투척하는 고통의실체인것이며,시는 역사에 바치는 고해성사인 셈이다.따라서 시 초반부의 ‘빛이 멀면 편안하다’는 진술은,회한과 고통이 배어있는 역설적 고백으로서,이러한 도덕적 순결성은 윤리적인 차원을 넘어 종교적인 성격에까지 닿아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최하림의 시는 시간을 보는 시각에서 지상으로 복귀한다. ‘사랑’이자 ‘배반’이었던 역사와, 역사의 연인들은 시간의 무심한흐름 속 ‘어디쯤 걸음을 멈추고 쉴’ 것이기 때문이다.시인은 영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명멸하는 역사와 인간 존재의 의미를 되묻는다. ‘세상은 결국 너를 버리고 달려갈’ 것이고 역사의 전망을 모색하는 자는 ‘숨을 수 없어서 불행할’ 것이지만, 그래도 시인은 다시그 역사의 암담한 ‘밤으로 갈’ 것임을 밝히고 있다. ‘예감을 노래해선 안 된다’는 당위적 진술과 ‘나는 밤으로 간다’는 고백 사이에는, ‘역사의 진보’라는 믿음의 종말이 몰고온 뼈아픈 각성과 현재의 암담함을 감내하겠다는 고뇌의 의지가 가로놓여 있다.시간의 냉혹함을 응시하는 유한한 역사적 존재의 허무와 절망을 그대로 끌어안으면서도 결코, 역사적 삶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에서 우리는 어둠 속을 걸어가는 한 정신의 비장한 모습을 보게 된다. 역사를 자신에 대한 윤리적 성찰의 계기로 수용하면서도,다시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최하림의 엄격한 현실주의에서 우리는 고결한 지상의 세계와 만난다.미래를 밝혀줄 어떠한 것도 남아있지 않은 현실을자기 성찰의 자리로 삼는 그 강인한 정신의 고도(孤島)는 우리에게시의 자리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 3.인간의 실존,그 처연한 고요 현재는 과거의 기억 위에서 진행되며 모든 삶은 시간 속에 묻힌다는명제는,최하림 시의 기본 전제이다. 최근 시집『굴참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온다』에는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역사와 실존의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이 시집에 수록된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동일 제목의 두 편의 시는 최하림의 시적 작업이 그동안 집요하게 천착해온 두 테마를 압축해서 보여준다.두 편의 작품에서 추구하는 [집]이란,하나는 우리 모두가 다시 꿈꾸며 세워야 할 역사적 미래를 의미하고,나머지 하나는 실존적개인이 최종적으로 도달할 적막의 세계를 상징한다. 이 두 개의 테마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작품 속에 나타나는데, 인간실존의 주제가 보다 근원적이라는 점에서 후자의 것이 최하림 시의보다 깊은 심층을 이룬다고 하겠다.이는 역사의 문제를 개인의 윤리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개인적 실존의 문제를놓지 않고 역사적 현실을 응시하는 그의 자세는, 한 평론가의 지적대로 그를 ‘고전적 정신의 표상’으로 이해하게 하는 요인이다.개인의존재성에서 출발하여 현실의 문제에 육박해가는 이러한 특징은 최하림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그의 시의 미덕이다.[집으로 가는 길] 두 번째 작품에서 우리는 그가 도달한 개인적 실존의 한 극점을 보게 된다. 많은 길을 걸어 고향집 마루에 오른다/귀에 익은 어머님 말씀은 들리지 않고/공기는 썰렁하고 뒤꼍에서는 치운 바람이 돈다/나는 마루에 벌렁 드러눕는다 이내 그런/내가 눈물겨워진다 종내는 이렇게 홀로/누울 수밖에 없다는 말 때문이/아니라 마룻바닥에 감도는 처연한고요/때문이다 마침내 나는 고요에 이르렀구나/한 달도 나무들도 오늘내 고요를/결코 풀어주지는 못하리라 ―「집으로 가는 길」(88쪽)전문 이 작품은 소리가 멎고 시간이 정지된 듯한 깊은 고적(孤寂)의 세계를 보여준다.원초적 고요에 휩싸인 흑백필름 같은 이 침묵의 세계에서 우리는 인간의 근원적인 실존의 풍경을 본다.모성의 자궁에서 나와 영원의 집으로 돌아가는 인간은,그가 출발한 고요의 세계와 도착할 침묵의 집 사이에 존재한다.그 집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길을 가야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그 ‘많은 길을 걸어’ 귀환하는 ‘고향집’은 실존의 근원지로서,길의 출발이었던 ‘어머니’조차 존재하지않는 무(無)의 세계이다.‘공기는 썰렁하고’ ‘치운 바람이 도’는그 적막의 세계에서 ‘벌렁 드러눕는’,이 시의 가장 처연한 대목은존재의 고단한 무게와 허무함을,행위를 통해 서늘하게 표현하고 있다.존재의 무게를 부려놓는 행위는 주검이 되어 땅에 몸을 누이는 행위를 환기시킨다.여기에서 시인이 도달한 ‘처연한 고요’가 감도는 ‘마룻바닥’은 내가 떠나온 어머니,그 어머니의 어머니가 도달했을 인간 보편의 공간이자 삶 속에 내재한 근원적인 침묵의 세계이다.죽음이란,결국 존재를 끌고 다니던 침묵이 보편적인 고요의 세계로 돌아가 합류하는 영역인 것이다.그 거대한 절대 침묵의 세계 속으로의 편입,그것이 바로 [집으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이 ‘처연한 고요’의 세계에 도달했다는 진술은, 시인이 이미 이 상태를 경험했음을 의미한다.그것은 사물로부터의 소외를 처절하게 체험했던 투병기간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시인이 도달한 이‘처연한 고요’의 세계는 그의 시에 등장하는 ‘무색계’(「구천동시론」)의 심연을 이루는 정서이다.색신(色身)과 물질의 속박을 벗어나 순정신적 세계를 의미하는 무색계는,최근 시집(『굴참나무 숲에서아이들이 온다』)에 다수를 차지하는 만물과 교감을 누리는 시들의정신적 바탕이라 할 수 있다.사물로 스며들고 사물에 개방되어 만물과 동화(同和)를 경험하는 투명하고 정결한 세계는,이미 무색계에 들어와 있는 상태로서,사물과의 자유로운 정신적교감을 보여주는 이시들 속에 처연한 정서가 내재되어 있는 것은 이 ‘무색계’가 육체적 실존의 끝을 기저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최하림의 시세계에 한 축을 이루는 개인적 실존의 문제는 그의 시에배어있는 허무와 쓸쓸함의 원천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존재의 막막함을 끈질기게 응시하는 그의 태도에서 우리는 실존의 처연함,그 서늘한 고요를 감지하게 된다.어떠한 과장이나 포오즈도 용납하지 않고 존재의 현실을 고스란히 감내하는 그의 준엄한 태도는,현학적 사변과 요설,감상적 자기 연민과 소영웅주의가 만연한 오늘의 문학적 현실을 반성케 하는 시정신의 본질을 보여 준다.언어의 사원에서 울려나오는 서늘한 사유는,삶이 부과한 시의 자리이자 시가 돌아가야 할 시원(始原)이다. 김문주
  • 대한매일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작-최하림론(2)

    *역사와 개인이 만나는 시의 자리-최하림론. 4.풍경의 미학 정신. 최하림의 시는 역사와 실존이 부딪치는 자리에서 수행되는 치열한시적 사유의 세계이다.두 테마에 대한 집요한 천착 과정을 통해서 그가 보여준 절제와 균형의 미학은, 그의 시세계에 시적 긴장을 유지할수 있는 동인이었다.질곡의 한국현대사를 통과하면서,그리고 그 현실에 부단한 시적 대응을 견지하면서도 특정한 관점에 경도되거나 생경한 직설의 형식을 취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그의 시가 자신을 시적 사유의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자신에 대한 성찰에서 시적 사유를 시작한다는 것은,세계와의 정서적 거리두기를 가능케 하는 미적전략이다.관조와 응시를 통해 세계에 접근하는 최하림의 시적 방식은,심미적 거리를 확보하려는 시적 태도인 셈이다.역사와 현실에 대한집요한 시적 장고(長考)는 그의 시가 기초한 진지한 미학 정신에서연유한다. 이 미학정신을 구현하는 시적 형식으로 최하림은 풍경화(風景化)의방식을 사용한다.그것은 ‘겨울’,‘골짜기’,‘밤’,‘눈’,‘개’,‘새’,‘강’,‘어둠’,‘바다’,‘사내’ 등 시대적 상징성을 확보하고 있는 소재들을 동원하여 현실을 암시하는 상황을 설정하고,그상황을 시인의 내면적 정서나 정신적 지향과 겹쳐서 하나의 압축된풍경으로 처리하는 방식을 의미한다.이러한 그의 시적 방법은 현실에대한 내적 관조와 깊은 침잠이 선행되어야 하는 창작 방법이다. 현실에 대한 직설적 토로나 생경한 비판의 형식이 아닌,그것을 하나의 형상으로 구축하는 최하림의 미학 정신은 그의 시가 발딛고 있는 기지이자 오늘의 시점까지 그의 시를 추동시킨 문학적 원동력이다.그 심미적 시정신은 자신과 현실적 사태에 대한 반성적 사유의 토양인 셈이다. 큰 나무들이 넘어진다 산과 산 새에서/강과 강 새에서 마을 새에서/길을 벗어난 사람이 어디로인지 달리고/길러진 개들이 일어서서/추운겨울을 향하여 짖는다/// 한 방향으로 흐르는 작은 강을 따라/우리들은 입을 다물고 걸어간다/저녁 그림자처럼 걸어간다 마을도/나루터도 사라지고 과거도 현재도/보이지 않는다/날아가는 새들의/불길한울음만 공중에 떠돌며/얼어붙은 겨울을 슬퍼하고/// 언덕도 상점도폭설에 막히고/거리마다 바리케이트 쳐져/사람들이/어이어이어이 울부짖고/갈색 옷을 입은 사내 몇,들리지 않는 소리로/진정하라고 말하고 또 다른 소리로/진정하라고 말하고 그 소리들이 모여/겨울나무를넘어뜨린다/// 꽁꽁 언 새벽 여섯 시,地靈처럼 걷는/사람들 새로 우리들은 걸어간다/살얼음의 아픔이 여울마다/경천동지하며 뛰어올라갈기를 날리고,/우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일단의 사내들이/사냥개를끌고 온다 개들이 짖는다/이제는 얼어붙은 우리들의 꿈이여/눈과 같은 결정체로 三韓의 삼림에 내리어오라/기다리는 노변에서 상수리숲도 우어이우어이/울고 겨울새도 울고 우리도 울고 있다.― 「겨울 精緻」 전문 암담한 시대적 상황이 구체적인 풍경으로 형상화된 작품이다. 시 전체를 물들이고 있는 음울한 절망의 정조가 ‘우리’라는 대명사와 결합되고 등장하는 소재들이 암울한 시대적 상징으로 수렴되면서, 시는비극적 현실을 환기하는 한 반영으로 읽힌다. 산에서는 숲을 숲이게만드는 ‘큰 나무들이’ 사라져 가고 ‘한 방향으로 흐르는 작은 강을 따라’ 사람들이 ‘그림자처럼’ ‘입을 다물고 걸어가는’ 상황은, 미래에 대한 전망이 몰수된 황폐하고 암담한 현실이다. 폭설로 봉쇄된 암담한 겨울,새의 울음과 숨죽인 통곡만이 가득한 강제와 감시의 현실을 시인은 ‘地靈처럼 걷는 사람들’이라는 섬뜩한죽음의 형상으로 그리고 있다.‘경천동지하며 뛰어올라 갈기를 날리는’ 듯한 것으로 생생하게 경험되는 현실의 고통은,출구에 대한 욕망의 절실함만큼이나 격렬한 것으로 감각된다.꿈마저 얼어붙은 전망부재의 현실에서 ‘우리들’은 눈을 부르고 있다.하늘을 향해 ‘내리어오라’고 주술처럼 되뇌이는 사람들의 바람 속에는 일말의 가시적인 가능성이라도 확인하고자 하는 절박함이 담겨 있다. 우리의 암울한 질곡의 현대사를 최하림의 시는 이렇게 묘사한다. 당대 현실에 대한 아무런 직설적 비판이 없는데도 이 시가 보여주는 암담하고 폭압적인 상황은,상황 자체로써 이미 현실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수행한다. 구체적 풍경을 통해 형상화된 현실은그것이 그리는대상 자체보다 생생하며,그것의 문제적 국면은 증폭되어 표출된다.구체적 풍경이 발휘하는 형상력은 시적 정서와 의식을 보다 직핍하고절실하게 드러내는 기능을 감당한다.문학의 본질적인 힘은 바로 이구체성에서 발원하는 것으로서,삶과 현실에 대한 섬세한 사유와 그것의 미적 형상화는 문학을 다른 제도와 구별짓는 힘의 원천이다.심미주의의 좌절은 야만주의를 부른다. 거친 육성과 생경함 속에 건설된시는,시간의 거센 물살을 견뎌낼 수 없으며,시대가 지나간 자리에 조잡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구체적 풍경을 통해 현실을 형상화하는 최하림의 시적 태도는, 사실적 풍경도 정신화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다음의 시에서 우리는 풍경과 의식이 상호 작용하여 삶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구체적 형상으로드러내는 최하림 시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눈이 내리니/나뭇가지들이 무게를 이기지/못하고 포물선을 그리며휘어지다가/눈을 털고 일어나고,/다시 눈을 털고 일어나고 한다/오후 내내 그 일을 단조롭게/반복한다 우리가 날마다/아침을 시작하고또/시작하는 것과 같으다/// 이런 날/하늘은 지붕 가까이/내려와 멈추고 세상 길도/들녘에서 모습을 지운다/나는 천근 무게로 눈꺼풀이/내려 앉아 꿈속처럼 눈을 감는다/아이의 속뼈같이 여린 가지들이/사라지고 또다시 가지들이/사라지고 또다시 가지들이/떠올라 머나먼 마을에/차곡차곡 쌓인다/// 나는 사나운 짐승처럼 눈벌판을/마구 쏘다니고 싶지만/나는 결코 눈길에 발자국을 남기지/못한다 눈은 나를 덮고 또 덮으며/종일 내려 쌓인다 ― 「아무 생각 없이 겨울 풍경 그리기」전문 이 시에는 오랫동안의 응시를 통해서만 포착할 수 있는 눈 내린 겨울 풍경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최하림의 [바라보는 시]가 빈번하게 펼쳐 보이는 눈여겨보지 않은 사물들의 아름다운 움직임이 정겹게그려진 작품이다.나뭇가지들이 ‘눈을 털고 일어나고 다시 털고 일어난다’는 묘사 속에는 순진무구의 서정성이 담겨 있다.비어있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정경들이 시인의 투명한 시선에 의해 포착된다.최하림의 최근시가 보여주는 정결한 세계는 이러한 시선에 의해 확보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하림의 시적 특질은 그러한 맑은 시선이나 그 시선에 포착된 자연 대상의 아름다움보다,오히려 그것을 정신성의 세계로 고양시키는 시의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눈내린 상황을 인간의 일상으로전환시키고,그것을 다시 보편적 시간의 세계로 확대하는 방식은,사물의 정경을 정신의 풍경으로 환치하는 최하림 시의 특징이라 하겠다. 여기서 눈의 의미는 일상성으로,그리고 다시 시간의 무게로 전이되면서,‘지붕’과 ‘길’과 ‘들녘’에 내린 눈은 사람과 마을을 지우는무화(無化)의 상징으로 자리를 옮긴다. 시인이 ‘눈을 감고’ 의식의심층에서 바라보는 광경은 개별적 존재들을 지워버리는 시간의 냉혹함이다.명멸하는 ‘아이의 속뼈같은’ 가지들이 ‘차곡차곡 쌓이’는‘머나먼 마을’이란, 존재들이 묻힐 시간의 영원한 심연을 의미한다.이 마을의 광경은 시인의 의식이 형상화한 정신의 풍경인 것이다.말할 수 없는 비극성을 삼키고도 저토록 평화로운 마을의 풍경,고요 속에 잔혹함을 내포한 시간의 벌판을 시인은 ‘사나운 짐승’이 되어‘마구’ ‘마구 쏘다니고’ 싶다.그것은 모든 인간의 삶 속에 내재하는 존재의 비극적 충동이다.시간의 고요한 위력 앞에 선 무력한 인간의 보잘 것 없음,정화된 풍경 속에 내재한 동적 충동의 이유인 것이다.외부의 풍경을 정신화하고 정신을 풍경화함으로써,이 시는 생의비극성을 구체적 형상으로 표현하였다. 최근의 시들을 중심으로 최하림의 많은 시들은 정적(靜寂)의 풍경을노래한다.투명하고 정결한 정서를 보여주는 이 시들 속에는 사물과의화해를 꿈꾸는 생의 충동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 꿈꾸기가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지고,바라보는 일이 종내에는 어둠으로 귀착될 것임을 시인은 안다.어둠은 죽음이고,어둠은 무(無)이다.삶에 내재하는 비극성이 동적 충동을 부른다.그가 보여주는 정화의 풍경은존재의 비극성이 미만한 시간의 풍경이며,그래서 생의 충동으로 가득한 허무의 비가(悲歌)이다. 최하림의 역사적 상상력과 실존적 고뇌는 구체적 풍경을 통해서 생생하게 형상화된다. 반성적 거리에 뿌리를 둔 이 풍경의 형식 속에는세계에 대한 깊은 응시와 성찰의 정신이 내재되어 있다.이러한 정신에 기초한 시적 사유의 세계는 그 깊이만큼의 집요함과 강인함을 내포한다.역사와 인간에 대한 비극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미학정신이 최하림의 시세계를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5.다시 꿈꾸는 아침의 역사 현재적 삶이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의의있는 연결이라는 신념이 없다면,인간은 생의 종말을 단순히 불길하고 허무한 상징으로밖에 인식할 수 없다.고통스러운 역사와 유한한 존재들을 모두 삼켜버린 시간의 냉혹함 앞에서,최하림은 인간의 자세를 생각한다.절망적인 역사와실존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역사 밖에 존재할 수 없다. 이는최하림이 끝내 포기하지 않은 시적 사유의 대전제이다.최하림에게 역사와 실존은 삶이 끌고 갈 두 개의 테마이다.‘지옥 같은 역사’의기억과 질병을 통해 찾아온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그는 황폐한 삶의현장을 다시 응시한다.“보이지 않는 들판을 간다는 것은 어려운일이다”.(「들판」) 냉엄한 역사적 현실과 인간에 대한 비극적 인식을안고 건너야 하는 그 들판은, 정신의 강인함이 요청되는 고되고 지난한 삶의 현장이다.최하림은 들판을 건너는 방법에 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새로운 길의 줄기찬 모색과 그 모색의 매력을 이야기한다. 내 눈이 너를 보고/내 귀가 너를 듣는 동안에/감추인 아침이 차츰차츰 열리고/감당할 수 없이 세상이 밝아온다/경이로운 아침이여 새벽부터 길들은/사립을 나서서 숨소리 깊은 들로 간다/내가 처음의 나그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부지런한 농부들은 벌써 몇 사람째 이슬을 털고 갔다/그들의 발걸음이 들을 깨우고 비린내음 물씬한/밭고랑옥수수들을 흔든다 옥수수들이/눈 비비며 일어나 제 모습 본다/우리도 어느 날,들을 가면서 우리가 지나는 모습/볼 것이다 긴 낫 들고,그림자 드리우며,/존재하는 것들이 밝게 얼굴 드러낼 것이다/언덕으로 올라가는 도랑에서,나는 잠시,햇빛에 싸여,/걸음이 미치지 않는곳의 신비를 본다/가려고 하지 않는 길들은 매력있다 ― 「밭고랑 옥수수」전문 건강한 아침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들을 깨우고 새벽을여는 농부들의 모습을 통해 새로운 역사의 모색을 그리고 있는 이 시에는 역사의 운동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 담겨 있다.‘차츰차츰 열리’는 역사의 새벽을 ‘감추인 아침’이라고 적고 있는 표현에는,[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나는] 의식의 개안을 통해 아침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시인의 인식이 내재되어 있다.‘감당할 수 없이 밝아오’는 ‘경이로운 아침’은 그것을 향해 눈과 귀를 열어두고 있는 ‘동안’,다시 말해 정화된 응시의 시간이 있고 나서야 찾아오는 국면인 것이다.이는 ‘오래오래’ ‘멈춘 평화’의 시간을 거쳐야 비로소 ‘보이지 않는 들판’을 건널 수 있다는 「들판」의 사유와도 상통한다.이응시의 시간은 ‘처음의 나그네’를 ‘부지런한 농부’로 전환시키는인식의 계기이다. ‘이슬을 털고’ ‘들을 깨우고’ ‘밭고랑 옥수수들을 흔’들며 역사의 새벽을 걸어가는 이 부지런한 농부들의 발걸음에서,‘숨소리 깊은 들’은 건강한 생명력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가개인에게 의식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러한 상상력 속에는,역사란 개인의 고통과 반성을 통해서 성취되는 변증법적 삶이라는 인식이 담겨 있다. 들을 찾아 나서는 ‘농부들’은 바로 끊임없는 자기부정을 통해 굳건한 존재로 선 역사적 주체들인 것이다.‘걸음이 미치지 않는 곳’의 ‘신비’함과 그 길의 매력은 바로 이러한 고통과 반성을 거친 자들의 가슴 속에 찾아온다.역사는,아니 역사적 삶은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패배 속에서 다시 꿈꾸는 것임을,최하림은 새벽을 여는 농부들의 힘찬 발걸음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역사적 세계에 대한 염원은 최근 시들에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아침 이미지]에서 잘 드러난다. “미소 속으로 아버지가 쇠스랑을 메고/온다 이슬 젖은 잠방이 바람으로 온다/(오오 고통스런 세상으로 오시는 아버지!)/노동으로 빛난얼굴을 하고 아버지는/사립으로 온다 우리 가족은 모두/아침의 유대속에서 아침의 빛을 뿌리며//온다 새로운 아이들이 따뜻한 유대 속으로/온다 무성한 시간의 숲을 헤치고/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포르릉포르릉 날며”(「아침 유대」,5·6연)에 그려진 것처럼,찬란한 역사의아침은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노동을 통해서 열리는 세계이다. 황폐한대지를 갈고 고르는 노동을 통해서 이룩되는 역사, 그 노동으로 다져진 아버지의 ‘빛난 얼굴’은, 고통을 통해 새로운 전망을 열어가는역사의 변증법적 운동력을 상징한다.개인의 고통과 줄기찬 노동이 역사를 일구어 간다.역사의 아침은,고통을 견디고 또다시 꿈꾸는 강인한 정신 속에 깃드는 것임을 최하림의 시는 보여준다. [농부의 대지적 상상력]이라 부를 수 있는 최하림의 역사 의식은 인간적 실존에 기초한 공동체의 연대를 모색한다.그 삶이란 “모서리들이/조금씩 조금씩 부서지고 모서리들이/닳아지고 모서리들이 정다워지면서/죽음 가까이 죽음처럼 둥글”(「모카커피를 마시며」)어 지는조화와 화해의 삶이며, 모든 존재의 동질적 비극성에 기초한 관용과사랑의 정신에서 연유하는 삶이다.아울러 이러한 개인의 유대가 지향하는 공동체적 삶은 ‘목적이 없고 관객이 없으므로 그들 자신이 춤이고 즐거움’(「즐거운 딸들」)이 되는,과정 자체가 하나의 목적을이루는 삶이다.존재에의 연민에 뿌리를 둔 공동체의 유대는,개인의실존과 역사가 만나는 인간적 역사의 모습이며,냉소주의와 자기아집에 대항하는 부단한 투쟁의 역사인 것이다. 집요하게 존재와 역사의 막막함을 들여다보는 최하림의 질긴 시적고투의 역정은,속도와 효용성이 주도하는 현실세계에 있어서 시의 역할을 재고하게 하는 육중한 무게를 지니고 있다. ‘밤새도록 죽지를눈에 박고 졸며 혼몽 속을 헤매’(「눈을 맞으며」)는 굴뚝새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출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실종된 역사를 고통스럽게 견뎌내는 최하림의 고독한 견인주의는 우리에게 시와 시인의 자리를 돌아보게 한다.시의 진정한 자리는 인간적 진실을고민하고 탐색하는 반성적 사유와 그것을 구체화하는 미학 정신 위에서 건설되며,인간적 진실은 경험과 존재가, 사색과 생이 만나는 자리위에 구축된다. 시의 위의(威儀)는 준엄한 자기 반성과, 그 반성을 통해 한 단계 나아간 진실에의 깨달음에서 발현된다.최하림이 한 작은 글에서 ‘창조적 정신을 잃고 관성에 의지하는 시’가 ‘지상의 평화를 헤친다’고했던 고백은,시적 정신의 정수가 무엇인지를 시사한다.새로운 세기의시의 모습이 인간과 역사를 보다 창조적인 시각으로 열어 보일 길찾기가 될 것이라면,최하림의 시적 작업은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하고극복해야 할 언덕이다.더불어 그의 시가 현재를 넘어서 또다른 세계에 도달할 것을 믿는 것은,그의 진지하고 강인한 정신의 역투에 대한믿음에서이다. 김문주
  • [사설] ‘대화 해결 원칙’을 평가한다

    파업까지 예고했던 한전사태가 노사협상을 통해 극적으로 타결됐다. 우리는 노조와 사용자측이 극한 대결을 피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사태를 해결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그것은 한전노조의 파업 철회로노동계의 ‘겨울투쟁’ 기세가 꺾였다는 그런 단기적 관점에서가 아니다.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대로 잡아가고 있다는 장기적인 전망에서 그렇다.다섯달 넘게 끌었던 지난번 의·약분업 갈등도결국 대화와 타협으로 마무리됐다. 이같은 사안들은 비록 사회적 혼란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다른 측면에서 보면 우리 사회가 대화와 타협을 통해 민주사회로 성숙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같은 우리 사회의 진전은 그동안 민주사회의 기본인 대화와 타협을 강조해온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국정철학과 일치한다.사실 우리사회는 그동안 사회적 갈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갈등을 대화와 타협을 통해 극복하려는 노력을 애써 외면하거나 폄하(貶下)해온 측면이없지 않다. 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혼란만 보았지 대화를 통한 사회적성숙은 보지 못했다는 말이다.우리가 대화와 타협을 통한 이번 한전사태의 해결을 지켜보면서 정부의 ‘대화 해결 원칙’을 새삼스레 평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의 진행 방향과 민주주의에 대한 ‘상식’을 짚고 넘어갈 필요성을 느낀다.역사는 현존 인류 일부가 찬성하든 반대하든,일단 민주주의의 확산·심화쪽으로 흘러가고 있다.논의의 폭을한국의 경우로 좁혀 보기로 하자.과거 폭압적 정치 아래서는 이러저러한 사회적 갈등을 권력이 일방적으로 억압할 수 있었다.그리고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사회적 갈등을 둘러싼 혼란이 너무도 심한 나머지,지난날 독재권력의 명령일하에 사회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억압의 시대’에 향수를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의 발전에 역행하는 일이다. 지금은 정치권력이사회 전반을 좌우하던 시대가 더 이상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그 만큼 민주화됐거나 적어도 민주화로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사회적 갈등을 대화와 타협을 통해 극복하는 것을그 기본으로 하는사회체제다.굳이 한마디 보태자면,민주주의에 따르는 사회적 비용은 더 큰 사회적 낭비를 막기 위한 필수적 비용이라는사실이겠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간에, 국경이 더 이상 의미가없는 세계화시대에서 총체적인 구조조정을 강요받고 있다.현실과 사리가 이렇다면 우리 사회의 갈등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해결하는 길밖에 없다.한국통신과 한국담배인삼공사 등 공기업 구조조정이나 그에 따른 노사갈등도 대화와 타협을 통해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 [대한광장] 사회 곳곳에 숨어있는‘지뢰들’

    이달 말에 다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질 것이란 소식을 들으니 무척 반갑다.한동안 우리를 들뜨게 한 뜨거운 드라마의 열기가 어지간히 식었고 언제부턴가는 국내 일들이 이것 저것 불거지면서 한쪽으로밀린 것 같던 이산가족 상봉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을 생각하니가슴이 뛴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현실에서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너무나 멀다.불과 두어달 전 남과 북의 가족이 상봉하는 장면을 보고 흥분하고 울던그 감격이 어느새 우리가 살아가는 일들 속에 스미고 녹아 형체도 없이 사라진 것은 아닌가 싶다. 이런 모습은 그만큼 지금 당장의 삶이각박하기도 하고 힘들다는 것의 반영일 것이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나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거대한 망각증에 빠져 있는 것만 같다. 우리의 맥박 안으로 들어왔던 남북 통일이라는 문제가 국내의 여러가지 일들 속에 얽히면서 아스라해지는 이런 현상은,거꾸로 민족 통일이라는 과업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의 한 예증이기도 하지만너무도 우리는 많은 것을 잊고 사는 것 같다. 이산가족 상봉을 우리는 통속극 한편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통일이라는 것이 몇백명 스포트라이트를받는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도 되고 또한 통일을이루는 과정에는 지금 각각의 형편대로 살아가는 모습과는 다른 그무엇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라는 얘기도 될 듯싶다.또한 그 문제를 천착하지 않으면 우리도 알지 못하는 그런 곳으로 자칫하면 떠밀려가고마는 것이 아닐까 반성해야 된다는 생각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우리는 분단시대를 말하고 민주화와 통일을 얘기할 때 여러 논의들을 생각한다.예전에 우리는 분명히 말했다.민주화와 통일은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일이며, 참된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통일이라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특히 경제적 측면에서 민주화가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통일이 되면 기득권층이 그대로 온존히 남을 뿐이며 그때는 어려운 사람이 더욱 어렵게 되리라는 말도 했다. 원론적이긴 하나 그 말들이 제기하는 의미를 이제는 진지하게 살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논의가 왕성하게 제기되던 1970∼80년대 상황과 지금은많이 다르다.우선 통일이라는 문제가 지금처럼 현실감 있게 느껴지지않았고 사회 전반의 민주화 진척상황도 달랐다. 유신시절이나 5공 초기 그리고 노태우정권 시절까지를 평범한 시민 입장에서 회고한다 하여도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절은 그야말로 천국이라 느껴짐직도 하다. 그러나 민주화라는 문제는 단순히 정치적 폭압이 사라졌다 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우리의 삶,특히 경제 영역에서의 민주화라는 문제가 달성되지 않는한 문제는 모양을 달리해서 언제든지 불거지는 난제 중의 난제인 것이다. 한가지 더 생각할 문제는 정치적 폭압이 사라진 만큼 다수 민중의욕망수위도 상향 조정되면서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는 점이다.우리사회 전반의 이익집단들이 제기하는 주장이나, 자기 주장을 관철하는방법이 더욱 드높아지고 거세지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민의 정부’가 가는 길이 그야말로 지뢰밭이라고 생각한다.이 문제를해결하면 다음 문제가 불쑥 제기되고, 이 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문제가 제기되고. 지뢰 얘기를 하다 보니 지뢰는 전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대도시등산로 주변 21곳에 대인지뢰 7만여개가 매설되어 있다는 보도가 눈에 들어온다.우리가 사는 생활 현장에서 그 지뢰들이 터지기를 기다렸을 것이라 생각해 보면 등골이 오싹하다.또한 빨간색과 그렇지 않은 색깔밖에 모르는 5공 출신 한 국회의원이 집권여당을 일러 ‘노동당 2중대’라는 말을 해놓고도 멀쩡하게 소신 운운한다. 제거해야 할 이 터무니없는 지뢰들! 가야 할 길 참으로 멀다. 강형철 시인·숭의여대 교수
  • [김삼웅 칼럼] 박정희기념관 아닌 국가자료관을

    결론부터 말해서 정부의 박정희기념관 건립 지원문제는 유보하는 것이 옳다.일반 정치사안이나 정책문제는 때에 따라 정부의 입장과 일관성 때문에 강행이 불가피한 경우도 없지 않겠지만 박정희기념관건립문제와 같은 역사적사안은 국민여론과 먼 미래를 내다보면서 신중하게 결정하고 일단 결정했더라도 국민의 뜻이 아니라면 재고하거나 취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박전대통령기념관 건립문제는 현안이나 정책문제가 아니다.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관점에서 100년 200년을 내다보고 결정해야 하는 역사문제다.정부의 발표와 함께 찬반론이 활발하고 다수의견은 불가쪽으로 잡힌 것같다.찬반론의 쟁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먼저 찬성론이다. 1)국민화합론-영호남의 지역주의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상태에서 영남을 상징하는 박정희기념관을 호남을 상징하는 김대중대통령정부가 건립함으로써 국민 화합을 모색할 수 있다. 2)민주화·근대화세력의 접합-박전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화세력과 김대통령을 핵심으로 하는 민주화세력이, 남북화해 협력시대가본격적으로 열리는 시점에서 기념관건립을 계기로 새로운 통일시대에 대처하게 된다. 3)보복정치의 단절-박전대통령으로부터 온갖 정치적 보복과 탄압을 받아온김대통령이 이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정치보복 단절의 계기가 된다. 4)정치적인 억압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근대화정책의 성공으로 국민에게 ‘잘살아보자”는 의욕을 고취시키고 산업화를 일으켜 근대국가로 도약한 박전대통령의 각종 자료를 모아 기념할 만하다.또 후발 국가들의 교육기관으로도활용가치는 충분하다. 다음에는 반대론을 들어보자. 1)일본군으로 복역하면서 항일군에게 총질을 하는 민족반역의 전력은 결코용납될 수 없다. 2)군사쿠데타로 합법정권을 타도하고 장기군사정권을 수립하여 정보정치·폭압통치로 민주주의를 짓밟은 독재자다. 3)지역차별을 통해 지역갈등을 조성하고 지역주의를 심화시켰다. 4)영구집권을 위해 유신체제를 만들고 장준하, 최종길, 인혁당사건 등 수많은 사람을 살해·처형했다.아직 유신피해자의 진상규명도 배상도 안된 상태이다. 5)백범김구선생 기념관 건립에 100억원을 지원하면서 박정희기념관 건립에 200억원을 지원한다는 것은 비중이나 국민정서에 역행된다. 6)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월드컵경기장주변에 조성되는 공원에 특정인의 기념관을 세우겠다는 것은 과학과 미래를 상징하는 그 지역의 특성상 부합되지않는다. 7)경제발전이라는 결과 때문에 독재자의 기념관을 세운다면 국민의 가치관이나 2세교육의 목표와도 모순된다. 8)역사적 문제를 동서화합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안된다.역사문제는 역사차원에서 다뤄야 한다. 9)개혁과 민주주의 인권 그리고 남북화해협력을 국정의 기조로 하는 ‘국민의 정부’의 정체성에도 위배된다. 이처럼 찬반론이 치열하고 각기 주장에 있어서 명분과 논리가 충분하다. 때문에 접합점을 찾기도 쉽지 않다.그렇다면 이를 유보하고 대안을 찾는 방법이 나을 것이다. 우리는 일제시대 임시정부를 지키면서 온생애를 항일독립운동에 바치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하다가 암살된 백범김구선생의 기념관을 이제야 시작했다.사후 50년 만의 일이다.그런데 그와 크게 대칭되는 박전대통령의 기념관을 사후 20여년밖에 안되는 시점에서 정부가 조급하게 서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직 의병기념관도, 민주화운동기념관 하나도 짓지 못한 실정이다. 어려운 국가예산 관계로 선후를 가려 역사적 안목으로 기념관이나 자료관을지어야 할 것이다.박정희기념관은 좀더 역사적 평가를 지켜보면서 국민의 공감대가 넓어질 때 지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박정희 기념관건립을 유보하고 대신 역대 대통령의 자료관을 지어그 안에 박전대통령의 각종 자료와 기록을 보존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다른 전직대통령과의 형평성과도 부합된다. 파리에 있는 나폴레옹의 묘비가 백면(白面)인 채 무명(無銘)인 것은 최대의찬사와 극악의 저주를 똑같이 용납할 수 있는 프랑스인들의 양식이다.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없을까. 김삼웅 주필 kimsu@
  • 북한 ‘불가사리’·일본 ‘고질라’ 여름극장가 대결

    전체관람 등급을 받은 괴수영화 2편이 여름방학을 맞은 극장가에 간판을 건다.북한영화로는 국내 최초로 극장용으로 선보이는 ‘불가사리’(감독 정건조·22일 개봉)와 일본 ‘원조’괴수영화로 꼽혀온 ‘고질라 2000’(감독 오가와라 타카오·8월5일 개봉).물론 영화는 2주일의 시차를 두고 개봉한다.하지만 이들이 남북 문화교류와 제3차 일본대중문화개방 이후의 파장을 점칠바로미터라는 점에서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기술면에서 단순비교했을때 ‘불가사리’는 ‘고질라’를 넘어설 수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전세계 배급을 목표로 한 본격 SF물을 찍으면서 북한은 50년 전통의 일본 ‘고질라’시리즈의 많은 부분을 고스란히 ‘답습’했다.84년 영화를 찍을 당시 조선예술영화촬영소는 일본 도호영화사의 특수촬영부를초청해 기술이전을 받았고,고질라를 연기하던 배우까지 캐스팅했다. 불가사리와 고질라의 걸음걸이와 몸짓이 흡사한 것은 그 때문이다.조정의 폭압에맞서 민중 봉기가 일어날 즈음의 고려말.평생을 대장장이로 늙어온 탁쇠(리인권)는 농민들에게서 몰수한 농기구들로 무기를 만들라는 관가의 명령에 불복한 죄로 처형당하면서 밥알로 불가사리 인형을 만든다.그렇게 괴수로 태어난 불가사리는 탁쇠의 딸 아미(장선희)를 지키며 관군을 무찌른다는 줄거리다. 단순한 선악구도에다,‘주인공’ 불가사리가 산으로 땔감이나 하러 다니는 60년대식 내러티브는 테크놀로지 영화에 길들여진 관객을 유혹해내기엔 역부족이다. ‘불가사리’는 제압할지 몰라도,일본판 ‘고질라’도 ‘할리우드 버전’의흥행을 따라잡기는 버거울 것같다.“문제는 크기”라는 구호를 자랑삼았던할리우드판이 지나간 뒤 뒤늦게 찾아온 일본 ‘고질라’는 김이 많이 빠져버린 느낌이다.고질라의 액션규모나 전체적인 디테일이 할리우드 것과는 한참수준차가 난다.이를테면 바다속에서 암괴가 날아오르는 장면은 아동용 SF만화처럼 조악하고,고질라가 육중한 걸음걸이로 해변을 걸어나오는데도 발자국이 생기지 않는다. 고질라 연구소를 운영하는 생물학자 시노다(무카다 다케히로)와 그의 어린딸,과학잡지 기자인 유키(니시다 나오미)가 고질라의 등장을 예견하고 외계생물체의 비밀을 캐나간다.등급위에서 외국영화로 분류된 ‘불가사리’는 서울 개봉관으로는 MMC를 비롯해 변두리 4개 극장밖에 잡질 못했다.홍보를 맡은 오디세이측은 “필름 원판의 신상옥 감독 이름을 빼는 등의 문제로 심의가 지연된 탓도 있지만,무엇보다 외국영화로 분류되는 바람에 관심을 보이던 극장주들조차 외면했다”며 “북한영화가 방화로 규정되면 스크린쿼터를 의식한 극장주들의 관심이 지금보다는 훨씬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현재 문화관광부는 향후 북한영화를 국산영화에 포함시킬지의 여부를 조율중이다. 황수정기자 sjh@
  • [네티즌 이슈] 언론개혁

    *더이상 미룰 수 없다. 무언가를 바꾼다는 것은 어쩌면 선택의 연속이다.그리고 선택의 이면은 무언가를 포기하는 행위도 수반한다.무엇보다 변화와 선택 혹은 포기는 물 흐르듯 흐름을 타는 것이 관건이다.개혁도 마찬가지다. 개혁의 대상이 되는 집단 내부에서 개혁의 주체들이 발언권과 영향력을 강화하면서 진행된다면 얼마나 좋을 터인가. 하지만 언론계에선 개혁을 거부하는 내부 기득권의 패악에 눌려 움찔하지도못하는 게 현실이다.더구나 언론개혁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큰 대립이 있은 후 마치 기득권의 아량인 것처럼 왜곡되고 말았고,방관하던 비겁한사람들에게 떡고물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처세술이 능한 사람들이 언론계의 상층부를 여전히 주무르고있는 한 언론개혁은 요원한 것이 아닐 수 없다.더구나 이러한 언론들에 대한독자들의 태도도 안타깝다. 단순히 냉소를 보내거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독자들이 늘고 있는 것은 언론개혁의 ‘내리막길’ 양상으로 보인다.그렇다면 이렇게 언론계 내외에서 자정능력이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에서 언론개혁의 문제는 과연 어떻게 진행할 수 있을까.그것은 수요자인 독자들이 언론에대해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자극과 타박을 수행하고 부분적이나마 진행되는언론계 내부의 개혁적 시도에 대해 함께 격려하는 일이다.그 작은 성과들이하나 둘씩 보태진다면 독자들,언론계 종사자들이 중심이 돼 언론개혁의 고삐를 쥐는 기회가 올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인터넷을 통해 많은 네티즌들이 전개하고 있는 언론개혁 운동도 같은맥락이다.대표적 사례인 안티조선사이트(www.urimodu.com) 결성과 진행과정에서 우리는 언론개혁 운동의 오르막길을 볼 수 있게 됐다.이처럼 언론계 내부의 인적·제도적 자정 노력과 함께 독자들의 언론개혁 요구가 결합되는 새로운 모습들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이제는 독자들도 변하고 있다.냉전과 지역주의라는 낡은 기득권에 발붙이고있는 언론 때문에 개혁의 발목이 잡히고 있는 이상 더는 언론개혁이 지체돼서는 안된다. 마침 단순히 취사선택되는 독자투고 지면이 아니라 독자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올리는 대한매일의 새로운 다짐은 언론개혁의 기대치를 크게 올리고 있다고 할 만하다. 김 영 인 자유기고가 everman@lycos.co.kr. *일부 네티즌의 자가당착. 대체적으로 요즈음 네티즌들은 우수하다.지난 세월을 생각할 때 그 우수함의 가중치 안에는 분명히 진보적인 편이 많다고 볼 수 있다.그러나 민주적인가치 추구 문제에 있어서는 다소 성급하거나 성숙하지 못한 면이 상당 부분있다. 로맨티시즘 대신 살벌한 정치구호가 네티즌의 몫인 양 표출되고 있다. 언론개혁 소위 ‘C일보’가 대표적 개혁의 대상으로 타깃이 되며 ‘C일보’의 논조나 철학에 반하는 단체는 개혁세력이고 반하는 개인은 진보세력이라는 등식은 아연할 만큼의 자가당착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그러한 개인들을 보면그 인식의 저변은 모두가 정치적·이념적 성향에서 출발하고 있다.이미 순수하지도 진보적이지도 않다는 것의 반증이 아닐까 싶다. ‘C일보’의 논조에 찬동하면 ‘불량보수’로 평가하고 구시대 집단으로 매도해 버리는 그런 지적 폭압성으로 무장된 세력이나 개인·단체는 절대 개혁세력도 아니요,진보세력도 아니라고 본다.나는 인위적 언론개혁은 바라지도,가능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언론개혁이라는 것은 사정기관이 사정하듯 할수도,해서도 안되겠지만 인위를 가하거나 운동으로서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고,보수언론이든 진보언론이든 나름대로 고정 독자를 가진 고유성을 훼손해서는 아니 된다는 점이다.언론개혁은 말 그대로 빌미라는 것이다. 무엇을 개혁하자는 일에 반대할 뜻은 없다.하지만 ‘C일보’를 패러디한 유치한 인터넷 사이트를 대안언론이라고 부르는 이 상황에서는 황망할 따름이다.그 사이트 개설자 역시 C일보를 씹고 있지만 토론이나 정작 본인이 왜 그런 생각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대응한 적이 없다. 사회 정의가 너무나 정치화돼 있다.민주주의의 양대 기둥은 ‘자유’와 ‘평등’인데 이것은 ‘절대보편 진리’가 아닌 언제까지나 상대적이며 역사적인 단계적 개념이다.하지만 그런 인식이 결여된 ‘유치찬란 진보 네티즌’때문에 ‘불량 반동보수언론’이 도매금으로 넘어와 연일 뭇매를 맞고 있다. 단지 정치적 배경이 아니라,구호로서가 아니라 왜 언론개혁이 필요한지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순수적이지 못한 집단운동의 밑바닥에는 정치이념적·지역적 배경이 있지나 않은지 자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박 종 환 GTVnet 대표이사 fredbach@gtvnet.co.kr.
  • [사설] 422일, 천막농성의 숙원

    시국관련 의문사 진상규명의 길이 열렸다.4일 국무회의가 민주화운동 관련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 시행령을 확정함에 따라 이달 안에 9인 규명위원회가 구성되고 다음달부터는 의문사에 대한 진정을 받아 조사활동을 시작하게된다. 현재 유가족협의회가 잠정 집계하고 있는 의문사는 45건이다.이중에는 73년 중앙정보부에서 의문사한 최종길(崔鍾吉) 서울법대 교수,75년 등산 도중 의문사한 장준하(張俊河)씨,89년 수배중 의문사한 조선대생 이철규씨·중앙대생 이내창씨 사건도 포함된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오늘이 있기까지 대의를 위해 싸우다 죽어간 사람들에대해 너무 무심했다.오늘 우리가 이나마 자유와 민주를 누릴 수 있는 것이그들의 희생 덕택일진대 진작 그들의 죽음에 얽힌 의문만이라도 규명됐어야했다.그것은 422일간에 걸친 유가족들의 천막농성이 아니라도 살아서 화합을운위하고 21세기를 노래하는 우리들의 당연한 책무가 아닌가. 이 일의 목적은 특별법과 시행령 명칭에 나타난 ‘명예회복과 보상’에만있지 않다.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넋이라도 위로해주자는 차원은 더욱 아니다.그 진정한 의미는 과거 민주화운동에 대한 국가적 공인,폭압권력에 대한 심판,그리고 부당한 권력에 대한 불복종 저항권의 국민적 확인일 것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시행령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있다.다행히 4일 발표된시행령은 유가족들과 시민단체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민주화운동의 범주 및조사대상 등에 있어서 시민단체의 안과 상당히 근접해 있다는 평가다. 그러나 규명위원회에 압수수색 등 실질수사권이 없고 소매치기범도 시한이없는데 비해 6개월에 1차 3개월 연장가능이라는 시한이 정해진 점,가해자나결정적 증인의 해외도피 등에 대한 방비책이 없는 점 등은 우려되는 부분이다.여기에다 의문사 관련,가해세력의 음성적인 방해책동도 예상된다.시행령제정과정에서 확인됐듯이 매사에 축소지향적인 일부 관료들의 자료제출 거부등 비협조적인 자세도 예상된다. 진상규명위원으로 위촉될 사람들,그리고 이 사건에 직·간접으로 관여할 인사들에게 주문한다.특별법 제정 목적이 의문사의 진상규명에 있는 이상법운용의 보다 전향적 자세가 필요하다.의문사 진상을 이 기회에 규명하지 못하면 영원히 미궁에 빠져버리기 때문이다.나라와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된 사람들의 죽음에 얽힌 의문을 덮어둔채 국민소득이 어떻고,인권이 어떻고 해봤자그것은 회칠한 무덤에 불과하다.진상규명위와 그 관련자들의 사명감이 요구된다.
  • [끊어지지 않는 지구촌 분쟁](4)티베트의 홀로서기

    반세기동안 계속되는 티베트의 독립·분리운동은 중국에게는 피하고 싶은아킬레스건이다.티베트내의 인권상황은 중국을 국제사회에서 곤혹스럽게 한다.97년 장쩌민(江澤民) 중국 주석의 미국 방문때 공식거론 여부를 놓고 막판까지 논란이 됐었고 최근 티베트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방한문제로 한-중간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올초에는 티베트 불교계 서열 3위인 카마파 라마(14세)가 인도로 월경,중국-인도관계가 불편해졌다. 비폭력 독립운동을 이끌어온 달라이 라마가 98년 11월 티베트 독립 포기를선언하고 ‘완전 자치’를 요구하면서 티베트 문제는 새 국면에 들어섰다.공은 중국 정부에게로 넘어갔다. [분쟁의 역사] 티베트는 13세기 이후 중국과 영국의 통치를 번갈아가며 받아왔다.1911년 신해혁명이후 한족을 몰아내고 1950년 중국이 지배권을 주장하며 무력 침공할 때까지 독립을 유지해왔다.중국은 1906년 티베트에 대한 권리를 인정한 영국과의 조약을 근거로 티베트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고 있다. 1951년 5월 베이징 정권이 무력을 이용,달라이 라마 정부와 17개조의 ‘티베트 평화해방협정’을 체결했다.정교일치 체제의 존속은 인정하되 토지개혁을 포함한 사회개혁을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그러나 1959년 중국의 점령에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중국군에 의해 진압됐다.이후 79년까지 100여만명의 희생자가 생겨났다. 달라이 라마는 59년 추종자 6,000여명을 이끌고인도로 망명했다. 중국 정부는 65년 티베트에 자치구(서장)를 세웠다.67년 문화대혁명(∼1977년)이 시작되면서 역사적 유산이 모조리 파괴됐다.마오쩌둥(毛澤東) 사망을계기로 화해를 시도했지만 티베트 민족주의 저항은 약해지지 않았다.봉기 30주년인 1989년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결국 90년 5월까지계엄체제가 지속됐다. [분쟁원인]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으로서는 ‘살아있는 부처’인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한 신권정치를 인정하기 힘들다는 입장이다.티베트가 갖는 군사적·지리적 요충지로서의 의미도 빼놓을 수 없다.인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티베트 고원은 지리적으로 무기배치와 개발에 이상적이다.중국의 로스알라모스(미국 뉴멕시코주에 있는 원자력 연구 중심지)에 해당하는 ‘제 9아카데미’가 티베트 북동부에 주둔하고 있다.중국과 인도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했던 티베트가 미사일 및 핵시설등을 갖춘 중국의 전진 군사기지화되면서인도의 견제가 심화됐다. 중국은 목재·수자원·광물자원과 세계 최대의 우라늄 광산에 대한 개발권도 놓치고 싶지 않다.여기에 티베트의 독립 내지는 완전자치가 다른 소수민족에 미칠 파급효과를 우려하고 있다. [전망] 중국은 헌법에 소수민족의 자치를 인정하고 있다.하지만 티베트에 자치권을 부여한다는 것은 풍부한 자원개발 및 전략적 요충지인 티베트 고원에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수지타산에 맞지 않는 일을중국이 선택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당분간 무리일 것 같다. 김균미기자 kmkim@. *티베트 분쟁 일지. ●1913.1 달라이 라마 13세,티베트 독립 선포. ●1950.10 중국군,티베트 무력 점령. ●1951.5 티베트,중국 서장자치구에 편입. ●1959.3 티베트서 독립요구 대규모 시위, 달라이 라마 인도로 망명. ●1965.9 중국,티베트 자치구 성립 선언. ●1987.9 달라이 라마 ‘평화 5항목’제안,중국 거부. ●1987.10 대규모 독립요구 시위. ●1989.3 59년 독립시위 30주년 대규모 시위로 6명 사망,100여명 부상.중국사상 최초로 계엄령 선포. ●1989.10 달라이 라마,노벨평화상 수상. ●1992.4,1993.10 티베트서 폭동 발생,사원들 폐쇄. ●1998.11 달라이 라마,티베트 독립포기 발표. *열매 맺는 망명정부 외교. 달라이 라마가 이끄는 인도 다람살라의 티베트 망명정부는 인도와 네팔 부탄 등에 흩어져 사는 13만여 티베트인들의 중심이 되고 있다. 망명정부는 완전 자치를 쟁취하기 위해 대(對)유엔,미국,유럽 등 국제적인지원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이같은 노력의 결과 미국은 특히 티베트 문제를중국의 민주주의,인권문제에 포함시켜 미국의 대중국 정책에 반영하고 있다. 망명정부는 사법부인 티베트 최고사법위원회와 입법부인 국민대표국회,행정부로 이뤄져있다.내각과 국회는 5년마다 선거로 구성원들을 선출한다.또 뉴델리와 뉴욕 런던파리 등 10여개 도시에 대표사무소를 설치,티베트의 상황을 세계에 알리는데 활용하고 있다. 현재는 ‘국제 티베트 운동’의 후원 아래 세계 곳곳에 있는 수백개의 ‘티베트 우호회’ 지부들이 티베트 돕기에 나섰다.특히 미국의 영화배우 리처드기어 등 헐리우드 인사들이 티베트 돕기운동에 동참하고 티베트 관련 영화‘쿤둔’과 ‘티베트에서의 7년’이 개봉되면서 티베트에 대한 세계인들의관심이 높아지고 있다.티베트의 인권보호와 문화를 지키기 위한 ‘세계 티베트의 날’ 행사가 매년 열리는 등 국제적인 지원행사가 끊이질 않고 있다.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 운동과는 별개로 티베트 독립운동세력은 한때 미국과타이완의 지원을 받아가며 중국에 무력으로 대항하기도 했다. 하지만 70년대이후 미국과 중국관계가 호전되면서 지원이 끊어졌고 지금은 비조직적인 소요가 산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김균미기자. * 印 다람살라 망명정부 르포. [다람살라(인도) 김성호기자] 인도 동북부 해발 1,900m의 산악지역인 다람살라.망명자들을 비롯,티베트와 인도 전역에 퍼져 사는 티베트인들이 고유의종교와 문화를 잃지 않으려 몸부림치며 자치에의 염원을 이어가는 이색지대다.마치 일제하 상하이 임시정부를 연상시키는 듯하다. 중국의 폭압이 한창이던 59년 6,000여명의 측근과 함께 티베트를 탈출한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네루 당시 인도 총리의 주선으로 정착하면서 세계의 이목이 쏠리게 된 망명도시.89년 달라이 라마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뒤 본격적견제에 나선 중국 정부와 이에 맞선 티베트인들의 줄다리기가 오늘도 팽팽히 벌어지고 있다. 망명 티베트인 1만명이 사는 고지대와 인도인 2만명이 거주하는 저지대를합쳐 인구는 총 3만명.소형차 한대가 간신히 통행할 수 있는 비좁은 길을 따라 상가와 집들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다.망명정부 청사가 자리잡은 거리를중심으로 사원과 학교가 산재하며 어느 곳에서든 티베트 승려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거리에는 티베트 불교가 좋아 무작정 찾아든 서방세계의 젊은이들이 불상이며 탱화를 벌여 놓은 좌판 주위에 몰려 있는 모습이 쉽게 눈에 띈다. 손님 주위에는 어김없이 인도 걸인들의 구걸이 이어진다. TCV(Tibetian Children’s Village)와 도서관은 티베트의 전통과 종교를 이어가려는 노력이 가장 두드러진 곳.달라이 라마의 누이동생 제툰 페마가 총괄하는 TCV는 일종의 종합학교로 티베트 불교 중심의 9년 과정.인도 전역에7개의 학교가 운영되는데 다람살라에는 700명이 수학중이며 한국 학생도 4명이 있다.59년 망명 때 티베트인들이 등짐을 져 날라온 경전 7,000종이 고스란히 보관된 도서관엔 각국 학생·승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티베트 문화의 진수를 볼 수 있는 곳은 역시 사원.조캉사원엔 티베트에 불교를 전한 파드마삼바바와 관세음보살상 옆에 60년대 문화혁명 때 티베트에서 파괴된 불상의 목 2개가 함께 봉안돼 있다.티베트 불교와 티베트인들의비극을 그대로 보여준다.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에 파괴된 티베트 사원은 6,000여개.산꼭대기 달라이 라마의 거처 주변에 자리잡은 중앙대회당에는 1년에한번씩 달라이 라마의 법어가 내려지며 남걀사원 역시 정월 대보름 달라이라마의 법문을 듣기 위해 북새통을 이룬다.사원 곳곳에서 손을 뻗고 엎드려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는 승려와 일반인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예비 비구니들이 10년에 걸친 교육을 통해 사미계를 받는 비구니 강원을 들어서면 파르라니 깎은 머리의 예비 승려들이 읽는 독경소리가 신비감을 전한다. 토속 주술신앙과 티베트 불교가 혼합된 독특한 형태를 갖춘 네퉁사원은 신통을 받은 승려가 달라이 라마에게 행동지침을 전하는 신탁의 장소다. 정부 청사거리.달라이라마가 신왕(神王) 위치에 있지만 총리 1명,장관 7명으로 구성된 내각 카샥과 망명 티베트인들이 뽑은 46명의 의원이 모인 의회등 나름대로 자치의 틀을 갖추고 있다.중국 대륙을 통일한 공산당이 50년 티베트를 쳐들어오면서 트기 시작한 비극의 싹이 결국 이곳으로 귀결된 것이다.59년 중국 침공에 맞선 독립시위에는 잔혹한 진압이 따랐고 그때 티베트 전체 인구의 20%인 12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정치적인 이유로 감옥에 갇히거나행방불명된 이들은 헤아릴 수 없다.티베트에서 최근 망명한 전직 경찰관 탐딘 체링씨(56)는“폭압의 잔혹성은 59년 끝난 게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있다”면서 “60년 이후 약 20만명이 더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옛 티베트의 면모를 아스라히 풍기면서도 차츰 현대문명의 물결이 스며들고있는 다람살라가 언제까지 티베트 고유의 문화와 종교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티베트인들이 더이상 달라이 라마를 필요로 하지 않는 상황이될 때 나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란 달라이 라마의 말이막연하게나마 다람살라의 앞날을 점쳐볼 수 있게 한다.
  • 7월의 독립운동가 김한종 선생

    국가보훈처는 30일 항일의병으로 활약하고 비밀결사조직인 대한광복회에서의열독립투쟁을 전개한 일우(一宇) 김한종(金漢鍾·1883∼1921) 선생을 광복회 등 유관기관과 공동으로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883년 충남예산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충남 홍주성을 탈환하기 위해 의병으로참여했고 경술국치이후 충청지역 동지들을 모아 부여를 방문하는 조선총독암살계획을 모의했다. 선생은 1917년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정치로 의열투쟁이 여의치 않자 비밀결사체인 대한광복회에 가입,충청도지부장을 맡아 조직 확대,군자금 모금,악덕지주 및 친일부호배 처단 등 ‘독립전쟁 준비전략’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이듬해 1월 대한광복회 조직이 적발되면서 충청도지부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돼 1919년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1921년 7월28일 38세의 젊은 나이로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o@
  • [사설] 부끄러운 386정치인들

    5·18 광주민주항쟁 20주년 기념식 참석과 망월동 묘역 참배를 위해 광주에 내려갔던 민주당 386세대 정치인들과 일부 젊은 의원들이 17일 밤 현지의한 술집에서 ‘음주가무’를 한 사실이 드러나 국민들을 격분케 하고 있다. 그들 젊은 정치인은 17일 낮 망월동 묘역을 참배하고 5·18영령들의 뜻을 이어 가겠음을 다짐했다. 여야 386세대 정치신인들이 80년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 열사의 묘소 앞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본 많은 국민들은 “역시 386세대는 다르다!”고 감탄하지 않았던가.그들 중일부가 낮에는 묘역을 참배하고 밤에는 술집에 갔다니,이를 역리(逆理)라고할 것인지 이중성(二重性)이라고 할 것인지 말문이 막힐 뿐이다. 광주가 어떤 곳인가,더구나 5월의 광주는? 평범한 시민들도 너나없이 경건히 옷깃을 여미며 ‘5월 광주’의 의미를 되새기지 않는가.하물며 그들은 정치인들이자 국민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젊은 정치인들이다.17일 밤이라면 5·18 20주년 기념행사의 전야제가 벌어지고있었다.바로 몇시간 전에 “산 자여 따르라!”고 목이 메어 외쳤던 그 입에 어찌 감히 술잔을 댈 생각을 할 수 있는가. 물론 국민들도 이해는 한다.80년 신군부의 그 엄혹한 폭압 아래 ‘폭도’로 매도됐던 ‘임들’이 오늘날 ‘민주열사’로 새롭게 자리매김을 한 현실 앞에서 그들과 뜻을 같이 했던 젊은 정치인들이 느꼈을 법한 감격,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부담감과 마침내 정치인의 자리에 오르게 된 개인적 감회가 뒤엉킨 복합적 심리상태를.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의를 빚은 그들이 그날 밤 연출한 실태(失態)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다.물의를 빚은 당사자들은 “비록 우발적이지만 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깊이 반성하고,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신중한 처신을 하겠다”고 공동명의로 국민들 앞에 사죄하는 성명을 냈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실망은 분노로 증폭된다.국민들은 386으로 대변되는 젊은 정치인들을 향해 “새 정치가 고작 그런 거냐?”,“의원직을 사퇴하라”,“망월동을 다시 찾아가 영령들 앞에 사죄하라”며 비난의목소리를 높이고있다.그동안 정치신인들을 흰눈으로 흘겨보던 기성 정치인들도 “386세대 정치신인들은 검증을 받지 못했다”며 ‘거품론’을 제기하고 나선다.이번 총선에서 386세대가 각광을 받은 것은 기존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작용한 측면도 있다.우리 정치판에서 해야할 일이 많은 정치신인들이 도덕성에 상처를 입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그러므로 그들은 이번 사태에 대한 반성을 정치개혁을 위한 행동으로 증명해야 할 것이다.
  • 다큐·시사고발 프로 외압에 ‘흔들’

    요즘은 TV프로그램 만들기가 힘들어졌다.프로그램이 방송되기도 전에 내용이 알려지면서 각종 로비와 방송중지 요청에 시달린다.방송이 나간 뒤에는당사자들이 강력하게 반발,제작진이 사과하는 사태까지 발생하고 있다.이는시사고발 프로그램일수록 심각하다. MBC ‘다큐멘터리 성공시대’ 21일 방영분은 이해 당사자들의 강력한 항의로 방송내용이 바뀐 경우이다.원래는 ‘철도청장 정종환’을 방송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철도청의 ‘철도노조 전면적 직선제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본부’에서 ‘철도청장 정종환’ 방영 소식을 미리 듣고 MBC에 항의서한을 보내 “정종환 철도청장은 대한항공 역사 신축공사 관련 기업에게 거액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가 있고 철도노조로부터 수차례 금품수수를 했으며 폭압적 권위주의로 현장을 통치해 왔기 때문에 성공시대 출연자로 합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제작진은 처음엔 “확인되지 않은 사항으로 방송을 취소하면 우리가 그것을 확인해주는 셈이 된다”며 방송강행을 주장하다가 MBC 노조의 중재로 방송을 보류하기로 했다.대신 그동안 ‘성공시대’에 출연했던 사람들의 어린시절을 분석,성공의 모티브를 찾아보는 ‘가정의 달 특집’을 방송했다. 지난 16일 방송된 MBC ‘PD수첩-족벌은 영원한가’는 여진(餘震)에 시달리고 있다.이 프로는 우리 사회 선진화의 걸림돌도 재벌과 언론족벌을 지적했다.재벌과 관련해서는 5% 정도의 지분 밖에 없는 총수일가가 교묘하게 대기업 집단을 소유,지배해가는 방법을 보여주면서 편법,탈법 증여와 상속을 통한 족벌체제의 대물림 과정을 상세히 보도했다.삼성은 이건희 회장과 이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씨 사이의 편법증여와 상속이 집중 부각되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방송이 나간 직후 MBC에 주기로 했던 5억원의 협찬금을 주지 않기로 했다. MBC 관계자는 “삼성측에서 ‘이런 보도가 나갔는데 어떻게 윗분들에게 협찬금 5억원에 대한 결재를 받을 수 있겠느냐’며 협찬 철회의사를 밝혔다”고 말했다.삼성은 MBC가 6월30일 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여는 한국전쟁 50주년 기념 루치아노 파바로티 초청 한반도 평화콘서트에 5억원의협찬금을 내기로 했었다. 이에 앞서 SBS의 ‘뉴스추적-연예브로커의 은밀한 유혹’으로 불거진 연예인노조와 SBS의 싸움은 송도균 SBS사장이 노조위원장을 만나 사과의 뜻을 전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등 방송내용을 둘러싼 이해당사자들의 목소리가 매우 강경해졌다. 전경하기자 lark3@
  • [오늘의 눈] ‘3·1절’을 ‘독립절’로 바꾸자

    어제는 새 천년 들어 처음 맞는 ‘3·1절’이었다.오전 10시 세종문화회관에서는 대통령 내외와 3부 요인,그리고 독립유공자·시민·학생 등이 ‘3·1운동’ 81주년 기념식을 갖고 그날의 독립·자주정신을 기렸다. ‘3·1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한 지 9년째인 1919년 3월1일 거족적으로 전개한 항일 만세시위의거이다.위로는 민족대표에서부터 아래로는 초동급부,남녀노소에 이르기까지,지역적으로도 국내는 물론 만주·연해주 등 해외에서도 이에 동참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편찬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3월1일부터 4월말까지 만 두달 동안 전국 212개 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는 약 110만명이참가했으며 사망 7,509명, 부상 1만5,961명,피검자는 46,948명인 것으로 나와 있다. 우리는 이날의 ‘만세시위의거’를 ‘3·1운동’이라고 부르고 있다.그러나과연 ‘운동’이라는 용어가 적절한 것인지 따져볼 일이다. 3·1만세의거는전국 방방곡곡에서 온 국민이 일제의 폭압 통치에 항거해 비폭력적 방법으로전개한 항일 투쟁임이 분명하다.그런데도 이를 마치 ‘새마을운동’ ‘ 의식개혁운동’과 같이 ‘운동’이란 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마땅히 ‘3·1만세의거’ 또는 의거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3·1만세시위의거’로 고쳐 불러야 한다.1926년의 ‘6·10만세운동’ 역시 같은차원에서 ‘6·10만세의거’로 고쳐야 할 것이다. 그동안 ‘만세시위의거’를 ‘운동’으로 불러온 것은 해방 후 학계의 식민사관과 독립운동가 진영의 몰역사적인 역사관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지금까지 나온 역사 서적은 전문서나 대중서 할 것 없이 거의 ‘운동’으로표기돼 있다.심지어 정신문화연구원이 펴낸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시 ‘3·1운동’ 일명 ‘기미독립만세운동’으로 표현하고 있다. ‘3·1절’ 역시 명칭 개정을 재고해야 한다.현 ‘3·1절’은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생겨난 것인데 다른 국경일,즉 제헌절·광복절·개천절 등은 모두 그날의 의미를 명칭에 담고 있는 반면 유독 ‘3·1절’만 날짜를 명칭으로 삼고 있다. 3·1만세의거는 조국 독립을 위해 전 민족이 만세시위를 벌인 날이니 ‘독립절’ 또는 ‘만세절’로 고쳐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정운현 특집기획팀 차장
  • [사설] 민주열사와 의문사

    정쟁에만 매달려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고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아오던 국회가 신통한 일을 해냈다.28일 국회 본회의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법’과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등을 통과시킨 것이다.‘민주열사들’에 관한 이 두 법률안의 국회 통과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가 국회의사당 앞에서 420일 동안 천막농성을 벌여온 사실에서 볼수 있듯 그동안 재야단체들의 끈질긴 투쟁과 평생 민주와 인권을 위해 투쟁해온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강한 입법의지가 만들어낸 산물이다.비록 보수세력의 완강한 저항으로 당초 법안 내용에서 일부 후퇴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폭압의 세기’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입법이 이뤄진 것은 다행한 일이다. 우리는 지난 97년 12월 헌정 50년사상 최초로 평화적인 여·야 정권교체를이룩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민주정부를 갖게 됐다.길고도 긴 세월에 걸친역대 군사정권의 압제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민주세력은 나라의 민주화와겨레의 하나됨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우리가 오늘날 이나마 자유와민주를 누릴 수 있게 된 것도 그 밑바탕에는 수많은 인사들이 민주·통일의제단에 피와 땀과 눈물을 바쳤기 때문이다.그 험난한 과정에서 많은 민주인사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러므로 독재정권에 의해 일방적으로 ‘반국가 사범’ 또는 ‘극렬분자’로 매도당했던 민주인사들의 명예를 회복해주고 의문사의 진상을 규명해서 그희생자들의 넋을 달래주는 작업은 당연히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열사들에 관한 이 두 법률의 제정 노력은 보수·기득권세력의 조직적인 저항과 맞서야만 했다.그러나 역사는 비록 더디긴 하되 앞으로 나아가는 것.마침내 민주열사에 관한 두 법률이 제정되기에 이른 것이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법’은 국무총리 산하에 설치되는 심의위의 결정에 따라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 발의 시점인 69년 8월7일 이후권위주의적 통치에 저항하다가 사망·부상·행방불명이 됐거나,유죄판결·해직·학사징계를 받은 민주화운동 관련자와 유족들이 명예회복과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보상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들의 높은 뜻을 널리현창(顯彰)하는 국가적 사회적 노력도 있어야겠다.‘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은 대통령 산하의 진상규명위가 의문사 사건을 조사해서 위법사실이 있을경우 검찰에 고발하거나 수사의뢰를 요청하고,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했음이 인정되면 ‘민주화운동 관련자법’에 따른 보상심사를 요청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의문사 진상규명 노력에는 가해자들의 집요한 저항이 예상되는 만큼 국민들의 날카로운 감시가 요청된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