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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7­5·18」수사 검찰 발표

    ▷1,공소제기개요◁ ○서울지방검찰청 특별수사본부는 오늘 5·17,5·18사건과 관련하여 △전두환,노태우 두전직대통령을 내란등 혐의로 서울지방법원에 기소하고 △이 사건 범행 당시 제3군사령관이었던 유학성을 내란모의 참여등 혐의로,육군참모차장이었던 황영시,보안사 대공처장이었던 이학봉을 각 내란중요임무종사 등 혐의로 구속기소하였으며 △이 사건 범행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던 주영복,육군참모총장이었던 이희성을 같은 혐의로,육군사관학교장 차규헌을 내란모의참여 등 혐의로 각 불구속기소하였음 ○이로써 검찰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12·12사건과 관련하여 반란 등 혐의로 △5·6공화국 대통령 재직중 비리와 관련하여 수뢰혐의로 각 기소하고 ○행정부 등 강압 통제 △이번 사건을 추가기소함으로써 세가지 사건으로 법원의 심판을 받게 하였음. ▷2,공소사실요지◁ ○전두환 전대통령을 비롯한 피고인등은 △12·12 반란사건으로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으나 그 문책이 우려되고 △국민과 정치권의 반발이 현실화됨에 따라△정국안정을 명분으로 12·12 반란사건의 핵심관련자를 주축으로 정치주도권의 장악을 기도한 끝에 ○군사력에 의한 힘을 바탕으로 정국을 장악하기로 하고 △행정부등을 강압적인 분위기속에서 임의로 통제할 수 있는 비상기구의 설치를 구상하고 △입법부의 입법기능과 견제기능을 봉쇄할 수 있는 조치등을 강구하되 △그 개괄적 수단은 불법적 계엄확대조치 및 그 연장을 통한 폭압적 방법을 사용하기로 모의한 다음 ○국회기능 정지 시켜 ○80년 5월17일에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선포함에 있어 국무회의장 주변에 장갑차등으로 무장한 병력 6백여명을 투입하여 위압적인 분위기속에서 비상계엄 확대 선포안을 통과시키는 한편 △정당의 총재등을 체포·연금하면서 주요 정치인들을 불법적으로 체포하고 ○5월18일에는 △계엄 해제를 안건으로 소집된 임시국회를 장갑차등을 동원하여 열리지 못하게한후 △그해 10월26일 제10대 국회가 해산될 때까지 그 기능을 정지시키고 △나아가 10월27일에는 입법기능을 국민의 대표기관이 아닌 국가보위입법회의가 담당하도록 함으로써 강압에 의해 국회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고 ○또한 행정각부를 임으로 통제하기 위해 ○비상계엄 이용 개헌 △같은해 5월27일에는 대통령자문기구 명목으로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12·12 반란사건의 중요관련자들이 위원으로 취임함과 동시에 △상임위원회를 두어 그 소관위원회로 하여금 △공직자 숙정,삼청교육,언론인 해직 △개헌작업등을 추진하게 함으로써 행정각부를 조정·통제하여 국무회의와 행정각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데 이어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에 이르게 하고 ○그해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사이에는 광주지방의 시민·대학생등이 비상계엄해제,전두환 퇴진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자 피고인등의 목적을 관철할 의도하에 공수부대 병력등을 동원,과잉진압에 의한 살상행위등을 자행함과 아울러 ○비상계엄을 이용한 폭압적 분위기속에서 개헌,김대중 재판,언론기관 통폐합등 일련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헌법기관인 행정부·입법부등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등 국헌을 문란할목적으로 △전두환은 최고책임자로서 △노태우,황영시,이학봉,이희성,주영복은 각 중요임무종사자로서 △유학성,차규헌은 각 모의참여자로서 폭동하여 내란함과 동시에 반란하여 헌정질서를 유린한 범행을 저지른 것임. ▷3,향후수사계획◁ ○검찰은 5·17,5·18 사건에 대하여는 수사상황에 따라 관련자를 적법절차에 의해 계속 처리해 나가되 ○12·12 사건 관련자 전원에 대하여는 이 사건과 관련한 위헌 법률심판제청·헌법소원등 사건이 헌법재판소에 계속중에 있으므로 그 결정이 내려진 후 처리할 예정이며 ○전두환 전대통령의 수뢰 및 축재사건에 대하여도 계속 수사해 나갈 계획임.
  • 공개된 「58∼65년 외교문서」 주요내용:3

    ◎미 “4·19시위 시민혁명 안될것” 오판/선거부정 관련자 처벌 등 6개조치 권고 1960년 4·19가 일어났을 때 미국은 『학생시위가 이승만정권을 붕괴시킬 시민혁명으로 발전하지는 않을 것』으로 예측했다. 미국은 당시 이승만 정부가 선거부정을 시인하고,관련자 처벌·공정한 재선거 실시 등의 조치를 취하면 사태가 수습될 것으로 낙관했다. 외무부가 15일 공개한 외교문서 가운데는 60년 4월19일 미국 국무부가 작성한 4·19관련 문서가 포함돼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3·15 부정선거와 수많은 사상자를 내는 폭력사태(미국은 이 문서에서 학생시위를 폭동과 폭력행위로 표현했다)가 야기할 여파를 매우 우려했다. 미국은 4·19 시위가 대중의 분노를 반영하는 것으로 믿고 있으며,현 상황에서 이승만 정부가 국민적 신뢰를 확보하지 못하면 공산주의자들이 개입하기에 좋은 환경이 조성될 것으로 생각했다. 미국은 그러나 경찰과 군이 정치에 관여한다면 한반도의 안정과 안보는 훼손될 것으로 판단했다. 미국은 4·19가 국제사회에서 다음과 같은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전망했다. 첫째,자유진영에서 한국의 명예가 손상된다.둘째,한국의 유엔가입과 유엔총회에 상정된 한반도 통일을 위한 결의안에 대한 자유진영의 지지를 확보하기 어렵다.셋째,대내외적으로 한국을 전체주의 국가로 비치게 하고 한국내 여론분열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좋은 기회를 준다.넷째,미국의 국민들과 의회에 대한 한국의 이미지 훼손.다섯째,60년 여름으로 예정된 미 대통령의 방한에 대해 미 국민과 의회 일각에서 반대의견이 제시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부는 한국의 상황이 계엄령 선포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미국 정부는 한국정부가 언론·출판·집회의 자유와 비밀선거 보장,야당에 대한 부당한 차별금지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미국정부는 우리 정부에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민주적인 양당정치를 보장하기 위해 6가지 조치를 취하도록 권고했다. 우선 선거부정 사례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선거부정에 연루된 공직자를 해임할 것.또 선거법 개정을 위한 여야의 특별위원회를 구성할 것.셋째,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를 싣다가 폐간된 경향신문을 복간할 것.넷째,58년 12월24일 취해진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폐지할 것.다섯째,58년 12월 제정된 국가보안법의 논란조항을 폐지할 것.마지막으로 국민적 신뢰회복과 민주적 절차로 복귀하겠다는 정부 성명을 즉각 발표할 것 등이 그 내용이었다. 한편 60년 9월13일 주한미국대사관이 작성한 문서에 따르면 4월19일 김정렬국방장관은 하오 2시쯤 계엄령 선포 문제등을 논의하기 위해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매그루더가 부재중이어서 김장관은 커밍스 중장과 통화를 했다. 김장관은 커밍스 중장에게는 계엄령선포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고 시위진압을 위해 유엔사령관이 통제하는 병력의 출동을 허가받으려 했다. 김장관은 시위로 인한 서울 상황의 심각성을 얘기하고 한국군 15사단의 출동을 요청했으며,이에 따라 15사단은 출동했다.
  • 「영장보류」와 검찰·헌재 표정

    ◎검찰­“헌의결정 지켜보자” 관망속 애써 태연/헌의­“예고된 위헌신청… 1∼2개월안에 결정”/관련자­구속3인 “난 5·18과 무관” 억울함 호소 18일 장세동·최세창씨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가 보류되면서 5·18특별법에 대한 위헌시비가 본격화되자 검찰은 일단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지켜보겠다는 관망적 자세를 견지하면서도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헌법재판소 관계자들은 위헌제청이 이미 예상됐던 일이라는 반응을 보이며 앞으로의 심리과정 등에 대한 검토작업에 들어갔다. ○…검찰은 전두환씨측의 5·18특별법 위헌제청이라는 「기습공격」으로 장씨 등 2명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가 보류되자 당황해 하는 모습. 그러나 이종찬특별수사본부장은 『5·18특별법은 제정 당시부터 끊임 없이 위헌소지와 관련한 잡음이 일었기 때문에 위헌문제는 언젠가는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었다』면서 괘념치 않겠다는 뜻을 피력. 또 다른 검찰관계자는 『12·12와 5·18사건은 신군부측이 정권을 장악해 나가는 일련의 한 과정이고 관련자 대부분이 두 사건에 모두 연루돼 있기 때문에 관련자들의 사법처리에는 별다른 차질이 없을 것』이라고 자신하는 모습. ○…이날 상오 구속집행이 된 유학성씨 등 구속자 3명은 각기 대조적인 표정으로 억울함을 호소. 상오 10시52분쯤 서울지검 10층 조사실에서 1층 로비로 내려온 유씨는 굳은 표정으로 사진촬영 포즈를 취한 뒤 『나는 5·17과는 무관하다』고 짤막하게 항변했으며 곧이어 내려온 황영시씨도 『나는 5·18관련 회의에 참석은 많이 했지만 강경진압을 주도한 적은 없다』고 주장. 이들과 대조적으로 이학봉씨는 웃음을 띤 채 5분 남짓 손짓·몸짓을 곁들여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했는데 『나에게 적용된 내란 혐의는 전혀 인정할 수 없다』면서 『이를 내란이라고 한다면 국가 위기 상황에서 누가 앞장서 일을 하겠느냐』고 언급. 이씨는 이어 장세동씨와 최세창씨가 풀려난 것과 관련,『동지들이 풀려나 기쁘다.특히 최세창씨는 건강도 좋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한 뒤 구치소행 승용차에 탑승. ○…검찰은 구속영장발부가 보류된 장씨와 최씨에 대해 『귀가하는 마당에 보도진들에게 공개해 곤혹스럽게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본인들의 의사를 물어 몰래 귀가시키기로 결정. 장씨는 상오 10시를 전후해 검찰청사를 빠져나갔으나 15분쯤 뒤 청사 지하1층을 통해 귀가하려던 최씨는 보도진과 조우. 최씨는 『영장이 보류된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미소를 지으며 『나쁠 것이야 없지 않느냐』고 말한 뒤 『오늘 바깥 날씨가 춥냐』고 여유를 보이기도. ○…헌법재판소 관계자들은 서울지법의 김문관판사가 위헌심판제청 신청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지자 「예상했던 일」이라는 반응을 보이며 이날 상오부터 대책을 숙의. 한 관계자는 『법률적으로 이 사건 영장 판사 또는 담당 재판부가 위헌제청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건 관련자가 직접 헌재에 헌법소원을 낼 수 있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한 헌재의 판단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고 설명. 이 관계자는 헌재의 결정 과정과 관련,『구속 사건에 대한 위헌 심판 제청 사건인데다 온국민의 관심이 집중돼 있고,국력의 낭비를 줄인다는 차원에서도 가급적 빨리 결정을 내릴 것』이라면서 『기왕에 상당히 검토를 마친 사건이므로 대법원을 거쳐 헌재에 사건이 접수된 뒤 빠르면 1∼2개월 안에 결정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헌재 관계자들은 12·12 및 5·18 사건에 대한 위헌제청신청 사건이 들어오기까지는 법보다는 물리력을 앞세우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법인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 한 관계자는 『지난해 11월말 5·18 사건 등에 대한 헌재의 선고를 앞두고 이 사건의 피해자들이 소취하를 해 헌재 결정이 무산된 것은 문제가 있었다』고 강조하고 『만약 그때 헌재가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라 특별법이 제정됐더라면 오늘과 같은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시하기도. ○전씨 65회 생일맞아 ○…경찰병원에 입원 중인 전두환전대통령이 18일 5·18특별법에 대한 위헌제청이 법원에 의해 수요외면서 측근인 장세동·최세창씨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가 보류된데 대해 밝은 표정을 보였다고 가족과 측근들이 밝혔다. 특히 전씨는 지난 16일 65회 생일을 맞아 부인 이순자씨, 아들 재국·재용·재만씨와 딸 효선씨, 손자·손녀들, 이량우·석강진변호사 등의 생일축하 인사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최세창·장세동씨 「영장보류」 전말/전씨측 핵심 5인 구속에 위헌시비 제기/서울지법, 서류요건 미비 불구 신청 접수/영장 담당판사 14시간 숙고끝 “위헌제청” 12·12 및 5·18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놓고 서울 서초동 검찰청사에서 밤낮 없이 공방을 전개해 왔던 전두환전대통령측과 검찰은 지난 17일 결전의 장소를 서울지법으로 옮겼다. 이학봉·장세동씨 등 5공실세 5명에 대해 구속영장이 청구되자 전씨측이 5·18특별법에 대한 위헌시비를 전격적으로 제기하고 나온 것이다. 전씨측은 제정된지 한달여가 지나도록 특별법의 위헌여부에 대해 별달리 문제제기를 하지 않다가 이 법으로 측근들이 무더기로 구속될 위기에 처하자 영장이 접수된 직후인 이날 하오 3시40분쯤 화급히 서울지법 2층 접수실을 찾아와 「위헌여부심판제청신청서」를 냈다. 법원이 위헌소지가있다고 판단,헌법재판소에 심판을 제청하면 이들에 대한 영장은 기각되기 때문에 전씨측과 검찰은 서로 물러설 수 없는 한판승부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법원측은 장씨 등 영장청구 피의자 5명에 대한 변호인선임계가 제출되지 않는 등 서류상 요건이 미비했으나 별달리 문제삼지 않고 신청을 접수한 뒤 12·12 및 5·18사건 담당재판부인 형사합의30부(재판장 김영일부장판사)로 보냈다.전씨가 이미 12·12사건으로 기소됐고 장씨 등도 추후 기소될 예정이므로 심사주체가 30부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신청서를 받아든 재판부는 전씨는 이미 기소된 상태이므로 문제가 없지만 장씨 등은 영장심사단계에 있어 영장당직판사가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판부는 이에 전씨측 변호인인 전상석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신청취지를 명확히 해달라고 요청했다.전변호사는 이날 하오 8시20분쯤 장씨 등 5명에 대한 변호사선임계와 함께 『신청목적은 검찰측의 영장청구가 합헌적인지를 가려달라는 것』이라는 보정서를 제출했다. 영장당직판사인 합의21부 김문관판사는 이때부터 9만여쪽의 수사기록과 5·18특별법의 위헌여부를 가리기 위한 숙고에 들어갔다.검찰이 보내온 위헌제청신청에 대한 의견서도 함께 검토했다.기자들이 판사실로 전화를 걸어 진행상황을 물어보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같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18일 상오 5시20분.신청서가 접수된지 14시간여나 걸린 숙고 끝에 김판사는 12·12와 관련해 군형법상 반란죄로만 영장이 청구된 장씨와 최세창씨에 대해 『공소시효가 완성된 사람에 대해 소급해서 시효를 정지,배제하는 법률은 위헌소지가 있다』고 판단,영장발부를 보류하고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을 제청했다. ◎5·18법 위헌심판 제청 결정문 ◇주문=피의자 장세동·최세창 영장사건에 대해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2조의 위헌여부에 관한 심판을 제청한다.신청인 이학봉·유학성·황영시의 위헌심판 제청신청을 기각한다. ◇위헌신청의 대상이 된 법률규정=5·18 특별법 제 2조 1항 「79년 12월12일과 80년 5월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사범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 제 2조의 헌정질서 파괴범죄행위에 대해 국가의 소추권행사에 장애사유가 존재한 기간은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 것으로 본다」.제2조 2항 「제1항에서 국가의 소추권행사에 장애사유가 존재한 기간이라 함은 당해 범죄행위의 종료일로부터 93년 2월24일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장세동·최세창의 신청에 대한 판단=헌법 제12조 1항은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 구속 압수 수색 또는 심문을 받지 아니하며,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 보안처분 또는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헌법 제 13조 1항은 「모든 국민은 행위시의 법률에 의해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는 행위로 소추되지 아니하며,동일한 범죄에 대해 거듭 처벌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이러헌 적법절차 원리와 법률불소급의 원칙에 비추어 이미 공소시효가 완성된 사람에 대해 소급해서 그 시효를 정지 내지 배제하는 내용의 법률은 위헌이라 생각한다. ◇이학봉·유학성·황영시의 신청에대한 판단=신청자에게 적용된 반란중요임무 종사죄는 군형법 제5조 2호에 의하면 사형,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해당하는 범죄로서 공소시효가 15년인 바 영장이 청구된 1월17일은 범죄행위가 종료한 때로부터 15년이 경과되었음이 기록상 명백하다. 이에 대해 검찰은 내란 등이 일단 성공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한 경우 그 공소시효는 정당한 국가기관이 그 기능을 회복한 이후부터 비로소 진행된다고 주장한다.즉 5·18 특별법에서 국가의 소추권행사에 장애사유가 존재한 기간인 범죄행위 종료일로부터 93년 2월24일까지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다고 규정하는 것은 이같은 법리를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특별법이 합헌이라는 것이다. 검찰의 이같은 공소시효 관련 주장은 특별법이 제정되기 전에는 형사소송법 등 어떤 법률에도 없었다.그렇다면 군사반란죄의 경우 그 주도세력 등이 집권한 경우에는 공소시효가 정지된다고 볼 수 있는지 문제가 될 것이다. 형법상 내란죄는 헌법 또는 법률이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거나,헌법에 의해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해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한 경우에 성립하는 범죄로서 신청인들에게 적용된 군형법상의 반란죄와는 여러가지 면에서 성격을 달리한다.즉 내란죄의 보호법익이 국가의 존립과 안전이라고 할 때,군사반란죄의 보호법익은 군대의 조직과 기율유지,전투력 유지 등이라고 보여지고 그 외에도 내란죄와는 목적·요건 등을 달리한다.결국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정면으로 유린하는 내란죄의 경우 국가권력의 장악에 성공한 내란행위자에 대해 국민으로부터 정당하게 국가권력을 위탁받은 국가기관이 그 기능을 회복하기까지 사실상 처벌되지 않는 상태가 지속된다면 공소시효가 그 기간동안 정지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회복이라는 또다른 헌법상의 요청에 의해 가능하다고 보더라도 성격을 달리하는 군사반란죄에 대해서까지 기존의 적법절차 원리나 법률불소급 원칙과의 부조화를 감수하면서 공소시효가 정지된다고 해석하기는 어렵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내란죄부분은 특별법과는 관계없이 아직 공소시효가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인정되므로 특별법의 위헌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고,신청인들에 대해 내란죄부분만으로도 구속사유가 있다고 판단되어 각기 구속영장을 발부하는 이상 피의사실 중 군사반란죄 부분 역시 더이상 재판의 전체가 될 수 없으므로 신청인들의 제청은 이유없다고 판단된다.
  • 「12·12」·「5·18」 핵심 5명 영장

    ▷유학성◁ 피의자는 사전계획에 따라 노태우·황영시·차규헌·박준병 등과 함께 79년 12월12일 하오 6시부터 7시 사이에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하여 그곳 참석자중 최상서열자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 모임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함. 하오 9시30분쯤 자신의 주도하에 전두환·황영시·차규헌 등과 함께 국무총리공관으로 찾아가 최규하대통령에게 집단적으로 정승화총장의 연행조사를 재가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함. 그 무렵 육군 정식지휘계통에서 피의자등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진압할 움직임을 보이자 정승화총장 연행에 항의하는 장태완수경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이쪽으로 오라』고 회유함. 또 하오 9시부터 11시 사이에 윤성민참모차장,김용휴국방차관,1·2군사령관,제3군사령부 참모장 등에게 전화를 걸어 육본측 지시에 따른 병력출동의 저지를 부탁한 것을 비롯,출동가능성이 있는 제9공수여단 제26사단 수도기계화사단 등에 전화를 걸어 병력을 출동시키지 말아달라고 회유하는 등 각 부대의 출동을 사전에 저지함. 전두환등과 함께 80년5월27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령으로 제안된 국보위설치령을 의결하게 한뒤 공직자숙정계획에 따라 공직자 8천6백1명에게 사임을 강요하고 각 언론사에 언론인 3백36명의 해직을 종용하는 등 계엄하의 고유업무와 무관한 조치들을 결정함. 이를 통해 전두환등의 국정수행능력을 내외에 과시,유일한 집권세력으로 부각시키는데 이용하면서 행정부와 그 수반인 대통령을 무력화하고 10월29일부터 81년 4월10일까지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국회의 권한을 대행하도록 함. 80년 9월1일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도 언론을 계속 통제한 상태에서 집권과정의 제반조치들을 헌법에 반영하고 신당을 창당,정계를 재편하는 등 향후 집권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81년 1월24일까지 비상계엄상태를 유지함. 이로써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해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자로서 도망 및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음. ▷황영시◁ 피의자는 사전계획에 따라 노태우·유학성·차규헌 등과 함께 12월12일 하오 6시부터 7시 사이에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해 유사시 자신들의 병력을 신속히 동원할 수 있는 지휘부를 결성,그곳 참석자중 최고령자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 모임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함. 하오 9시30분쯤 자신의 주도하에 전두환·유학성·차규헌 등과 함께 국무총리공관으로 찾아가서 최규하대통령에게 집단적으로 정승화총장의 연행재가를 요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또 육군 주요지휘관이나 참모장에게 전화를 걸어 육본 정식지휘계통에 따른 병력출동을 저지하는 한편 12월13일 0시30분쯤 이상규에게 중앙청으로 병력을 출동시키도록 지시하고 1시10분쯤 박희도에게 고려대학교로 병력을 출동시키라고 지시하는 등 전두환등과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반란을 일으킴. 80년 5월초 전두환·노태우·유학성 등과 함께 수시로 만나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시국수습방안을 지지하는 결의를 하도록 한뒤 이를 추진하기로 모의함. 5월17일 전군에 소요진압부대 투입작전명령을 하달,5월18일 하오 2시30분쯤 광주의 전남대·조선대를 포함한 전국 92개 주요대학과 국회 및 신민당사와 공화당사,언론기관,공공기관등 1백36개 주요 보안목표에 계엄군 2만5천여명을 배치하여 각 해당시설을 점거함. 5월18일 상오 1시쯤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내용이 포함된 계엄포고 제10호를 발령하고 국회의원들의 국회출입을 저지함으로써 국회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함. 피의자등의 정국장악을 위한 비상계엄확대조치와 계엄군 투입 및 정치인들의 체포에 반대하고 전두환의 퇴진과 민주화추진을 요구하는 광주 학생·시민들을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발포하는 등 강경진압함. 이후 공직자 숙정,언론 통·폐합,국가보위입법회의 설치등 자신들의 향후 집권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81년 1월24일까지 비상계엄상태를 유지하는 등 폭동하여 내란을 일으킴. ▷최세창◁ 피의자는 1957년 6월 육군사관학교를 제13기로 졸업했으며 10·26사건 당시에는 제3공수여단장으로 근무했던 자임. 피의자는 10·26사건과 관련,정승화육참총장을 강제 연행해 군 지휘권을 박탈하는 한편 군의 정식지휘계통이 이를 저지할 경우 무장병력을 동원하여 이를 제압해 군의 주도권을 장악한다는사전계획을 세웠음. 이에 따라 노태우·유학성·황영시·차규헌·박준병·백운택·박희도·장기오·장세동·김진영 등과 함께 12월12일 하오 6시쯤부터 하오 7시쯤까지 사이에 경복궁내 수경사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유사시 병력을 신속히 동원할수 있는 지휘부를 결성했음. 피의자는 같은날 하오 11시30분쯤 자신이 여단장으로 있는 특전사 제3공수여단 육군중령 박종규에게,직속상관인 특전사령관 정병주를 체포하라고 지시했음. 박종규는 이날 자정쯤 서울 송파구 거여동 특전사령부에서 제3공수여단 제15대 소속 1개 지역대 병력 38명에게 사령부 외곽을 포위하도록 지시했으며 이에 따라 육군대위 김홍열·육군대위 나영조·육군중사 신현수·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육군하사 6명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 정병주와 비서실장 육군소령 김오랑이 집무실에 있는 것을 확인했음.이어 육군하사 6명이 이들에게 M16소총으로 집중사격을 가해 김오랑을 살해하고 정병주에게 중상을 입힘. 피의자는 또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을 위반하고 다음날인 13일 상오 2시쯤서울 송파구 거여동 제3공수여단 연병장에서 2개 대대병력 6백여명을 인솔하고 천호대교·강북로·한남동을 거쳐 3시경 경복궁으로 진주했음. 피의자는 이같이 반란군 지휘부 결성과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자신의 부하인 박종규에게 지시하여 직속상관인 정병주를 체포하고,제3공수여단 2개대대 병력을 인솔하여 경복궁으로 진주하는등 전두환등과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을 일으킨 반란중요임무종사자로서 도망 및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음. ▷장세동◁ 피의자는 정승화육군참모총장이 전두환의 잦은 월권행위와 지휘체계 문란행위 등을 문제삼아 인사조치할 것으로 알려지자 그 지휘권을 박탈하고 무력으로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로 결의함. 사전계획에 따라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박준병 등과 함께 12월12일 하오 6시부터 하오 7시 사이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하여 유사시 자신들의 병력을 신속히 동원할 수 있는 지휘부를 결성함. 하오 7시40분쯤 허화평으로부터 정승화총장을 무사히 연행하였으며 전두환이 정승화총장 연행조사문제를 보고하기 위해 총리공관에 갔다는 전화연락을 받고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해 있는 장성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줌. 잠시후 허화평으로부터 총장연행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연행하러간 우경윤대령이 부상을 입었으며 동원된 제33헌병대 병력이 공관경비를 맡고 있는 해병대 병력에 포위되었다는 전화연락을 받고 장성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준 뒤 제33헌병대 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김진영으로 하여금 제30경비단 소속 5분대기중대 병력 80여명을 인솔하고 총장공관으로 가서 사태를 수습하도록 조치함. 수경사에서 비상이 발령되고 장태완수경사령관으로부터 주요 지휘관 비상소집 명령이 하달되었음에도 소집에 응하지 않음. 제30경비단 상황실로 전파되는 상황과 각 부대에 전화하여 파악한 상황등을 통해 육본 수뇌부가 비상을 발령하고 정승화총장의 행방을 확인하기 위해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있다는 사실과 제9공수여단 제26사단 수도기계화사단 등에 병력출동을 전제로 한 준비명령을 하달된다는 첩보 등을 수집,제30경비단장실에 모인 장성들에게 전파함. 중요임무종사자로서 반란군 지휘부 결성과정에서 장소를 제공하고 정승화총장 연행,부대동향 및 병력이동 상황을 수시 파악,지휘부에 전파하면서 총장공관에 억류된 합수부측 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무장병력을 출동시키는 등 전두환 등과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한 자로서 도망 및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음. ▷이학봉◁ 피의자는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인 「10·26사건」당시 보안사대공처 대공수사과장으로 근무하고 육군준장으로 전역한 뒤 13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자임. 1,79년 「10·26」사건 합수부본부장으로 임명된 전두환은 계엄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마찰을 빚어왔음.이에 정총장의 지휘권을 박탈,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김재규의 범행에 관련됐는지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정승화총장을 강제연행키로 결의했음.연행일을 12월12일로 결정한 전두환으로부터 연행장소 등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를 허삼수 등에게 통보했음.또 79년 12월12일 하오 6시20분쯤 대통령 의전수석비서관 정동렬과 함께 전두환을 수행해국무총리 공관으로 가서 정총장의 연행재가를 요구했음. 피의자는 중요임무종사자로서 정총장에 대한 연행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연행장소를 결정했음.허삼수등이 정총장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합수부수사관 7명을 지원하는등 전두환등과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반란을 일으킴. 2,80년 5월초 군이 전면에 나서 정국을 장악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라는 전두환의 지시를 받았음.그뒤 전국계엄의 실시,과도정부적 성격의 소극적인 내각을 통제하기 위한 비상기구 설치 및 국회해산 등 「시국수습방안」을 추진했음.5월16일 보안부대 대공과장들을 보안사로 불러 소요 배후조종자 및 권력형 부정축재자등의 검거대상자 명단을 주고 검거를 지시,사회혼란 조성등 혐의로 김대중 국민연합공동의장,문익환목사등을 체포하고 권력형부정축재라는 불분명한 범죄혐의로 김종필 공화당총재,이후락·박종규국회의원등을 구속했음.11월12일 45개 언론사 사주들로부터 언론통폐합 조치에 이의가 없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았음. 피의자는 중요임무종사자로서 주요정치인·재야인사에 대한 수사계획을 수립,이들을 체포·구속했음.국가기관을 강압으로 전복하거나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했으며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을 일으킨 자로 도망 및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음.
  • 심리적 여운 아직… 고베항 70% 복구/일 판신대지진 1년

    ◎고아·알코올 중독 늘어 사회문제화/121조원 투입… 공공시설 재건 “순조” 일본 고베(신호)시 일대를 강타했던 한신(판신)대지진이 일어난지 17일로 만1년이 된다.지진이 많은 일본에서조차 1천년에 한번 일어날 대규모 지진이었다는 한신대지진은 일본사회에 커다란 충격파를 그렸었다. 6천3백여명이 희생된 한신대지진의 피해는 아직도 주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양친을 잃은 어린이만 5백60여명.졸지에 고아가 된 이들 어린이가운데는 아직도 3분의1정도가 부양해줄 곳을 찾지 못해 피난시설과 고아원등에서 생활하고 있다.또 지진의 공포,뒤이어 발생한 화재의 악몽,가족을 잃은 충격이 주민들을 심리적으로 괴롭히고 있고 일부 피해자들은 이를 잊기 위해 술에 매달리는 알코올의존증도 스며들고 있어 사회문제가 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폐허위에 다시 삶의 터전을 일구기 위해 바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효고(병고)현과 고베시는 총사업비 17조엔(약 1백21조원)을 투입하는 부흥계획을 실행하고 있다.그들은 단순한 복구가 아니라 부흥을 이루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그들은 지진당시 혼란을 질서로 극복한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이에 대해서는 매뉴얼사회인 일본에서 매뉴얼이 없었기 때문에 무기력하게 관의 지원을 기다린 것뿐이라는 폄하도 있지만 매뉴얼이 없을때 약탈과 폭동을 일으킨 미국 LA지진과는 여하튼 좋은 대조가 됐었다.또 「분발하자 고베」라는 구호를 내건 고베연고 프로야구팀 오릭스가 지난해 저팬시리즈에서 준우승을 하자 고베시민들은 준우승까지 분발한 오릭스팀을 뜨겁게 환영,연대감을 북돋기도 했다.화재로 싹쓸이가 된 나가타구등 낙후된 지역은 새로운 도심지를 만들기 위한 계획이 실천을 기다리고 있다. 지진으로 무너지거나 쓸 수 없게 된 건물은 지난 1년동안 거의 대부분 철거됐다.장마철에 집중적으로 작업이 이뤄져 이제는 개인주택등 일부만 미철거상태로 남아있다.그러나 새로운 건설작업은 도로,부두,고가도로등 공공시설이 우선대상이 되고 있어 빌딩,주택의 재건작업은 늦어지고 있다.이에 따라 지진당시 항구기능이 마비됐던 고베항의기능은 70%가량 복구됐으며 길게 넘어져 지진의 위력을 실감케 했던 고베시내 한신고속도의 고가도로는 교각이 세워져 상판을 기다리고 있다. 효고현과 고베시는 심각한 피해를 입은 케미컬 슈즈(신발)업계의 부흥계획을 단순히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산시설을 첨단화하고 동시에 대량고용이 가능한 멀티미디어산업 유치방안도 구상하고 있다.고베시는 또 고베항을 더욱 발전시켜 세계적인 항구로 만드는 프로젝트도 추진하고 있다. 지진후 무너진 「안전신화」에 놀란 일본정부는 도로,건물등의 내진기준을 크게 강화했다.수도고속도로공단은 오는 97년까지 도쿄 일원 수도권 고가도로의 교각 7천2백기의 안전강화공사에 착수했다. 한편 2백여명의 사망자를 내는 등 인적,물적 피해를 크게 입었던 고베시와 효고현 일대의 재일동포들도 생업기반을 완전히 잃어버린 동포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점차 정상을 찾아 생업에 힘쓰는 분위기다.
  • 북은 대남비방 중지 성의보여야/김종일(남풍 북풍)

    북한이 새해들어 대남비방 공세를 강화,남북관계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있는 북한은 지난해 군사력을 휴전선 근처로 전진배치,긴장을 고조시키더니 연말엔 장기 억류해오던 우성호선원을 송환해 한국정부의 환심을 사려는듯 추파를 던졌다. 그러나 북한은 새해들어 공동사설로 대신한 신년사에서 강도높게 우리정부를 비방한 후 연일 선전매체를 총동원,남한을 무차별 비난·비방하고 있다.로동신문(1월3일자)은 김영삼대통령의 전방장병위문과 관련,『전쟁열을 고취한 것』이라고 왜곡하면서 『전쟁머슴꾼』『미국 호전광의 앞잡이』라고 몰아붙였다.중앙방송과 평양방송(1월8일)도 한국을 『파쇼독재사회』『사람못살 인간생지옥』이라고 매도했다. 북한은 그간 월평균 1백여회 남한을 비방해왔는데 새해들어서는 비방횟수도 문제려니와 그 대상이 무차별적이고 내용또한 극렬하고 악의적이어서 그 심각성이 최고에 달한 느낌이다. 주민들의 식량난조차 해결하지못해 구걸외교를 펴고있는 북한이 대남비방공세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는 저의가 숨어있다고 보아야하겠다. 첫째,과거청산과 역사바로세우기로 우리정국과 사회가 갈등을 겪고있는 상황에서 총선이 맞물려있어 대남교란책동의 호기로 판단하고있기 때문일 것이다.둘째,최악의 식량난으로 사회일탈현상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남북대화가 이뤄질 경우 잘 살고있는 남한의 정보유입으로 체제동요가 우려되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한 술책으로 볼 수 있다. 셋째,식량폭동을 우려,주민동요를 막고 체제결속을 위해 대남긴장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북한의 대남비방은 7·4공동성명과 남북합의서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며 남북문제해결을 더욱 어렵게 할뿐이다.김영삼대통령은 새해 국정연설을 통해 북한이 대남자세를 바꿀 경우 경제난 해결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북한은 이제부터라도 적화야욕의 허황된 꿈에서 깨어나 화해를 위한 대화의 테이블로 나와야한다.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대남비방부터 중지하는 성의를 보여야하지 않겠는가.
  • 김정일 정점으로 군실세 권력전면에

    ◎「승계」지연속 김영춘·김광진·조명록·이하일차수 떠올라/당제치고 군부가 실권 장악… 모택동식 통치/최악의 식량난속 체제유지에 안간힘 북한은 누가 다스리고 있는가.김정일인가,아니면 군부인가.김일성이 사망한지 1년6개월이 지났는데도 김정일이 권력승계를 하지않은 상태에서 군부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음이 감지됨으로써 이같은 궁금증을 더해주고 있다. 지난 1일 공동사설 형식으로 발표된 북한의 신년사는 김정일을 「당 수반」이라고 호칭하고 있고 북경주재 북한대사 주창준은 3일 김정일이 오는 7월이후 권력을 승계할 것임을 시사했다.또 4일에 있은 인민무력부 궐기모임에서 참가자들은 「김정일 영도체계를 확고히 세울 것」을 다짐했다.이로 미루어 현재로선 최고실권자인 김정일이 흔들리고 있다는 이상징후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그러나 당이 군보다 우위인 북한 체제에서 군부의 영향력이 점점 강화되고 있는 반면 당은 무력화되고 있음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으며 이같은 군부의 부상은 권력구조상 심상치 않은 조짐이라는 것이정부 당국과 북한문제전문가들의 지배적인 시각이다.회복불능 상태의 경제난에,지난 여름의 대홍수로 최악의 식량난까지 겹쳐 심각한 사회불안에 휩싸이고 있는 상황에서 군부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대내외에 긴장을 조성하면서 통치전면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그 결과 권력의 중심이 당에서 군으로 이동했으며 김정일은 김일성과 같은 카리스마가 없기 때문에 군부에 의존해 군사비상통치를 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북한군의 최고통수권자는 국방위원장으로 김정일은 국방위원장겸 최고사령관으로 군을 지휘하고 있다.또 주석직이나 당총비서에 취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명령을 군최고사령관 명의로 하달하고 있다.이처럼 모택동식 군사통치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군부가 당을 제치고 권력의 중심축을 형성했으며 그 중심축에는 총참모장 김영춘 등 4명의 차수그룹이 포진,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떠오르는 별로 주목받고 있는 김영춘(64),인민무력부 제1부부장 김광진(69),인민무력부 총정치국장 조명록(66),당 군사부장 이하일(66)이 바로 4인방이다.이들은 모두 혁명 2세대로 60대이다. 총참모장 김영춘은 지난해 갑자기 부상,주목을 받고 있다.그는 92년 대장으로 진급한 후 94년 김일성 사망 당시와 지난해 오진우 사망 당시 장의위원을 맡으면서 이름이 오르내렸을 뿐 그동안 군관련직책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그러다가 작년 당창건 50돌을 앞두고 이뤄진 군고위층인사에서 차수로 승진하고 총참모장이라는 요직에 발탁됐다. 김광진은 인민무력부장 오진우가 사망했을 때 차기 부장으로 유력시 됐던 김정일의 핵심 측근.원로인 최광이부장이 됐기 때문에 그를 보좌하는 자리에 임명됐지만 실질적으로는 인민무력부를 관장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김정일과 아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최광(78)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원수로 승진시키고 부장으로 앉혔을 뿐 인민무력부의 실권자는 김광진이라는 것이다. 군부대에서 정치공작업무를 총괄하는 요직을 맡고있는 조명록은 지난 78년부터 지난해까지 무려 17년간 공군사령관을 역임한 공군통.육군의 지휘능력까지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그는 김영춘과 함께 인민무력부의 두 대들보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당 군사부장 이하일은 당의 군실세로 지난 87년부터 이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그는 당 군사위원과 국방위원을 겸직하고 있으며 김정일의 신임이 두터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현재 북한군 고위층 가운데 당군사위원과 국방위원을 모두 겸직하고 있는 사람은 원수인 최광,이을설과 차수인 김광진을 포함 모두 4명이다. 대장급으로는 김정일의 군사보좌관인 원응희,인민무력부 총정치국 부국장 이봉원,평양방어사령관 김명국,당창건 50돌 기념행사때 제병지휘관이었던 3군단장 장성우,당 군사위원인 박기서,김하규 등 5명이 핵심요직에 포진,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중 김명국,이봉원,장성우는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으로 이들은 김광진,이하일차수 등과 학연으로 군맥을 형성하고 있다. 군부의 부상과 관련,민족통일연구원의 정영태연구원은 『식량폭동 등으로 김정일 지도체제가 붕괴돼 사회혼란이 발생하면 군부가 진압을 위해 적극 개입할 것』이라며 군부의 친위쿠데타 가능성을 제기했다.그러나 군부의 영향력 증대가 김정일의 지도력을 넘어서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북한문제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관측이다.북한 주민들이 김일성의 카리스마를 인정하고 있는 한 김정일을 배제한 대안은 존재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따라서 북한 군부와 김정일은 북한이 식량난 및 경제난으로 최악의 사태를 맞고 있는 현 상황에서 권력을 공유하는 집단체제로 체제존립 위기를 극복해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 아테너서 애틀랜타까지/올림픽 100돌 성화 타오른다

    ◎1896년 첫 대회… 13개국 311명 참가/31년 LA­상업주의 적중 “대성공”… 선수촌 처음 등장/72년 뮌헨­아랍테러단 「이」 숙소 기습… 선수 9명 사망/88년 서울­개도국서 첫 개최… 159국 참가 “화합구현” 아테네에서 애틀랜타까지 1백년.오는 7월19일 미국 남부도시 애틀랜타에서 개막되는 제26회 올림픽을 계기로 근대올림픽이 1백주년을 맞는다.「근대 올림픽의 아버지」 쿠베르탱남작의 올림픽부활운동이 열매를 맺으면서 1896년 고대올림픽의 발상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13개국 3백11명의 선수들이 제1회 대회를 연지 한 세기가 흐른 것이다.그동안 올림픽은 질적·양적으로 수많은 변천을 거쳤다.그 과정을 간추려보고 올림픽의 의의 및 앞으로의 과제 등을 살펴본다. ▷약사◁ 기원 3천여년전 그리스 제우스신전 근처 계곡에 있는 올림피아에서는 4년마다 한차례씩 헤라클레스 축제를 기념하는 경기가 열렸다.달리기 멀리뛰기 창던지기 원반던지기 그리고 레슬링이었다.이 행사는 아테네 스파르타 마케도니아의 끊임없는 전쟁속에서도 10세기 이상지속되었다. 기록된 최초의 올림픽경기는 기원전 776년으로 서기 394년에 이르기까지 1천2백년 이상 이어졌다.그러나 그리스를 정복하고 있던 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가 기독교정신에 어긋나는 이교도 의식이라며 올림픽을 폐지시켜 이후 근대올림픽이 부활되기까지 15세기 동안 자취를 감춘다. 1880년대 들어 쿠베르탱남작이 부활운동을 펼치면서 드디어 1896년 첫 대회를 열기에 이르렀다.모두 10개 종목에 44개 금메달이 걸린 이 대회에서는 미국이 1위를 차지했고 그리스와 영국이 그 뒤를 이었다. ○16·40·44년대회 취소 이후 미국 세인트루이스,런던,스웨덴 스톡홀름 대회를 거친 올림픽은 1916년 베를린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개최국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취소되고 만다.이때부터 올림픽의 정치오염이 본격화된다. 제7회 대회는 1920년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열렸는데 1차대전동안 벨기에 사람들이 겪었던 슬픔을 달래주는 대회였다.반면 패전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터키는 참가가 허용되지 않았다. 다시 파리와 암스테르담을 거친 올림픽은 32년 유럽대륙을 떠나 미국 LA로 옮겨간다.이 대회는 미국의 상업주의가 적중해 대성공을 거뒀다.처음으로 선수촌이 등장했고 거의 매일 6만명 이상의 관중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4년 뒤 히틀러의 나치에 의해 올림픽은 나치의 들러리 역할로 전락했다.독일 베를린대회 주변에는 나치의 숨막히는 분위기가 감돌았고 결국은 40년 대회와 44년 대회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취소되고 만다. 52년 헬싱키대회에는 볼셰비키혁명 이래 수십년동안 올림픽을 인정치 않던 소련이 마침내 대선수단을 이끌고 등장,동·서냉전시대에서의 미국·소련 초강대국 대결을 시작한다. 이후 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때까지 11차례의 올림픽에서 미국은 4차례,소련은 7차례 1위를 차지했다. 올림픽은 56년 호주 멜버른에서 개최돼 다시 한번 대륙간 이동을 했고 64년 일본 도쿄로 넘어갔다.도쿄대회는 패전국 일본의 부흥을 꾀하는 기폭제가 됐다. 68년 멕시코대회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아프리카국가들의 보이콧위협,학생시위,시상식에서의 흑인시위 등 정치오염이 심각했다.시위폭동으로 2백60여명이 사망했다. ○올림픽정신 상처입어 72년 뮌헨대회에서는 9월5일 아침,세계평화를 추구하는 올림픽정신이 영원한 상처를 입었다.아랍테러리스트들이 이스라엘숙소를 기습,선수 9명과 테러리스트 2명,경찰 1명이 사망했고 올림픽은 34시간 중단됐으며 메인스타디움에서는 추모식이 열렸다.이때부터 올림픽의 슬픈 역사가 거듭된다. 76년 몬트리올대회는 뉴질랜드럭비팀의 남아공 여행을 꼬투리잡은 아프리카국가들의 보이콧으로 얼룩졌고 80년 모스크바 대회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는 64개 서방국가들의 불참으로 반쪽대회로 전락했다. 84년 LA대회 역시 소련등 동구권의 보복불참으로 반쪽대회였다.한국은 이 대회에서 종합10위를 차지한 뒤 88년 서울대회 4위,92년 바르셀로나대회 7위 등으로 기염을 토해 올림픽강국으로 떠오른다. 서울올림픽은 「한강의 기적」을 온세상에 자랑하면서 상처투성이의 올림픽을 되살려 놓았다.동·서 양진영 1백59개국이 참가해 「화합올림픽」을 구현했고 그동안 선진국이 독점했던 올림픽개최를 처음으로 개발도상국에서 대성공으로 마무리했다.단일민족 북한의 불참이 「옥의 티」였다. 서울대회는 초강대국 소련과 스포츠강국 동독의 올림픽 고별무대였다.이후 지구상에는 지각변동이 일어나 독일통일이 이뤄지고 소련이 붕괴됐으며 동구권 전체가 몰락했다. ○소련·동독의 고별무대 바르셀로나 대회에서 옛 소련 국가들은 EUN이라는 어정쩡한 단일팀으로 참가했다.동독은 참가대상에 존재하지 않았다.EUN은 미국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해 소련붕괴의 긴 여운을 남겼다. 애틀랜타 올림픽은 경쟁상대를 잃은,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의 안마당이 될 것이다. 근대 올림픽이 19세기에서 21세기로 3세기를 옮겨가는 길목인 2000년 대회를 놓고는 중국 북경과 호주 시드니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여 시드니로 돌아갔다.12억의 중국인들은 그들이 「천하의 중심」,즉 「중화민족」임을 과시할 절호의 기회를 놓쳐 땅을 쳤으며 2백5년전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호주땅을 밟은 곳이기도 한 시드니는 흥분의 도가니를 이뤘다. ◎의의·과제/세계평화·국제친선 구현 “이바지”/인간능력 한계 넓히는데도 도움/정치오염·상업주의 극복이 과제 올림픽헌장은 첫 머리에 올림픽의 본질과 목적을 내세우고 있다.즉 ▲육체적·도덕적 자질의 향상 ▲세계평화의 추구 ▲국제친선 등이 골자이다.올림픽은 1백년의 역사를 누리면서 이같은 올림픽정신을 구현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인종과 언어와 풍습·국적·민족·문화를 뛰어넘는 인류의 대제전으로 발전했다.인간 능력의 한계를 넓히는데에도 공헌을 해 인류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올림픽정신이 퇴색하고 있다.정치오염과 상업주의가 스포츠정신을 퇴색시키고 있다.금메달은 「돈방석」과 직결되고 있으며 대회 행사 자체도 자본주의 논리에 입각해 치러진다. TV독점중계는 올림픽을 TV의 「시녀」로 전락시켰으며 공식후원업체의 횡포 역시 심각하다. 아마추어리즘도 프로페셔널리즘 앞에서 맥을 못추고 있다.테니스 축구 농구를 시발로 프로선수들의 출전은 현대올림픽이 종착을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뿐만아니라 옛 소련·동독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과 중국,그리고 일부 권위주의국가에서 보여준 국가관리체육정책은 자본주의의 프로페셔널리즘 못지 않게 올림픽을 오염시켰다. 약물복용의 폐해 또한 심각하다.근육강화제 흥분제 진정제 호르몬제 등의 복용은 육체와 정신의 건강을 추구하는 올림픽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과 각국 스포츠지도자들의 「스포츠귀족화」 역시 올림픽의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일반대중의 평등을 추구하는 올림픽에서 이들은 이미 스포츠 특권층으로서 상당한 부와 권력을 향유해 올림픽의 이질감을 부추기고 있다. 과대망상에 가까운 민족주의·국가주의 역시 장애요인이다. 전문가들은 21세기에는 다시 한번 「올림픽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 북 식량난 진상 몰라 궁금증 증폭

    ◎중·러 수수방관…서방 반응과 대조적/우리 정부 “6월까지 문제 없을 것” 최근 북한의 식량난의 심각성을 알리는 설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예컨대 굶주림에 견디지 못한 북한주민들의 폭동 움직임이 있고,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부가 전면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그것이다.심지어는 이미 북한내에 수천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그러나 한꺼풀 벗겨보면 갖가지 설들만 춤추고 있을 뿐이다.아무도 정확한 진상을 제시하지 못해 오히려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와 관련,러시아의 알렉산드로 파노프 외무차관이 3일 주목되는 발언을 했다.이타르 타스통신과의 회견에서 『북한이 식량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아직 어느 정도의 비축물량을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고 밝힌 것이다. 러시아의 이같은 상황판단은 북한의 식량난에 대한 중국의 이례적인 「담담한」 자세와 궤를 같이 한다.북한의 가장 가까운 「혈맹」이었던 중국은 지난해부터 대북 식량지원을 사실상 끊은데 이어 사상최대라는 북한수해 구호에도 오불관언이다.물론 우리 정부조차 아직 북한의 식량사정을 정확히 규명하지는 못하고 있다.통일원·안기부·농촌경제연구원등 각기관 마다 내년도 북한의 식량부족분에 대해 다른 추정치를 내놓고 있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적으면 2백80만t에서 많으면 3백62만t까지 편차가 엄청나다. 다만 현재로선 정부 부처간에 인식이 일치하고 있는 것은 크게 두가지다.우선 북한이 현재 상당한 식량부족 사태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이다.또 미·일등 서방언론이 앞다퉈 보도하고 있는 것처럼 체제위기적 상황은 아니라는 점이 다른 하나이다. 중·러등의 시각도 북측의 독특한 공산체제의 배급체계를 고려하면 나름대로의 생존방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이를테면 공식통계에 잡히지 않는 텃밭과 뙈기밭 경작으로 인한 여유분,두끼먹기운동등 내핍능력을 감안하면 아직은 벼랑끝이 아니라는 얘기다. 북한당국이 최근 식량사정이 나쁜 지역주민들에게 상대적으로 나은 지역으로 통행을 허용하고 있는 것도 일종의 충격흡수 장치라는 분석도 있다.식량난이 양강도·자강도·함경도등에 집중되어 있음을 전제로 한 추론이다.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군량미나 비축미가 아직은 여유가 있다는 관측도 있다.북한의 지난해 곡물수확량을 어림잡아 3백84만t으로 추산하고 한달간 곡물소비량을 45만t으로 감안할 때 적어도 올 6월까지는 문제가 없다는 관측인 것이다. 따라서 지난해 수해를 빌미로 한 작금의 북한의 「구걸외교」도 다목적 포석일 수도 있다.이왕 체면이 손상된 김에 당장의 먹거리가 아닌 재고량 부족분을 채우는 수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위기는 식량부족이라는 현상황 그 자체라기 보다는 자력으로 식량난을 타개할 수 없다는데 있다는 지적이 많다.북한의 식량난이 당장 체제붕괴 수준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에너지·원자재난,외화난등 총체적 경제난속의 북한이 이를 극복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북한이 식량증산의 관건인 수입 화학비료를 재수출하고 있는 점이 북한의 직면한 딜레마를 보여주고 있다.한푼의 외화가 아쉬워 러시아등에서 수입한 비료를 중국에 「되걸이 무역」방식으로팔고 있기 때문이다.
  • 평화진전 이룬 「’95의 세계」(해외사설)

    평화의 구조가 흔들거리고 다양한 형태의 휴전이 어느 순간에 깨질 수 있으며 지극히 평화상태인 국가들에서도 전쟁이 하룻밤사이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그럼에도 멋진 일들이 1995년에 일어났다.오랫동안 처리불능으로 여겨지던 갈등들이 외교에 손을 들면서 총을 적게 쏘았고 사람도 적게 죽는 것으로 95년은 마감됐다.카리브해에서부터 발칸반도까지,남아프리카와 중동에서부터 아이리시해까지 평화의 꿈은 지구를 돌았다. 5년만에 처음으로 사라예보사람들은 저격총탄의 위협없이 거리를 건널 수 있었으며 벨파스트는 30년동안의 전쟁이후 두번째의 평화스런 크리스마스를 맞았다.1948년 건국이래 최초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요르단과 이집트와 정식으로 평화를 맺었으며 시리아와는 협상을 계속하고 있다. 끊임없는 긴장과 민간인들 사이의 간헐적 유혈사태에 대한 싫증이 중재자들을 테이블로 끌어들였다.물질적 향상에 대한 갈망도 역시 중요한 것이었다.옛 유고에서는 산산조각난 경제재건에 대한 필요성이 모든 전쟁당사자들을 협상테이블로 가게끔 했다. 냉전종식은 초반에는 분리주의자 운동에 활력을 가져왔다.그러나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으로 등장하고 모스크바가 미국과의 경쟁을 중단하자 독재자들과 게릴라들이 똑같이 수단을 잃고 남부 아프리카에서처럼 상대방을 대하게 됐다.1995년에 있어 촉매는 여전히 미국의 리더십이었다.보스니아 평화협정과 중동의 돌파구는 확고한 미국의 외교적 노력의 결과였다. 엘살바도르와 니카라과는 불안정한 민주구도 속에서도 평화를 유지하고 있으며 최악의 학살현장인 콰테말라에서는 평화회담이 진행중이다.카리브해에서는 콜롬비아를 제외하고 1950년대 초이후 처음으로 내전이나 폭동이 없었다.아프리카에서는 모잠비크와 앙골라의 내전은 실용적 외교에 무릎를 꿇었다.아시아의 다소 불운한 상태와 함께 수단의 아프리카 최장전쟁은 중재를 거부하고 있으며 종교분쟁은 르완다와 부룬디를 위협하고 있긴 하다. 1995년의 평화진전은 이처럼 가장 오래되고 결렬한 분쟁들까지도 정력적인 외교에 순종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1996년도 고무적이 되길기대한다.
  • 유엔 「국제 빈곤추방의 해」… 북녘의 실상

    ◎북한 함경도 주민 등 13만 “아사 위기설”/곡물 부족량 259만t… 절취·유랑구걸 속출/3월말 식량난 피크 예상… 체제붕괴설 확산 95년 여름 사상최악의 수해발생 이후 북한의 식량난이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다는 설이 계속 확산되고 있다. 96년에는 식량위기가 더욱 심화되어 김일성 사후 북한체제가 벼랑끝에 설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북한의 식량난과 관련해 한가지 주목되는 현상이 있다.우리 정부와 국제사회의 평가가 상당히 차이가 난다는 점이 그것이다.외신,특히 미국언론들은 북한의 식량난이 체제붕괴 일보직전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식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를테면 지난 연말 국제적십자사의 한 고위관리는 북한주민 약 13만여명이 5개월간 식량배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굶주림에 직면하고 있다고 보고했다.국제적십자사의 피에트로 칼비 파라세티 북한수해 조사단장의 증언이었다. 최근 수재 구호품 전달차 북한에 다녀온 버나드 크리셔 뉴스위크지 전 도쿄지국장의 증언도 같은 맥락이다.그는 『앞으로 3개월 이내에 획기적인 식량구호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50만명 정도의 주민이 죽어가는 상황을 맞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지난 연말 워싱턴발 외신은 이보다 한술 더떠 북한이 식량난으로 인해 일촉즉발의 주민폭동 위기를 맞고 있다고 보도했다.익명의 미국방부 관리의 말을 인용한 이 보도는 북한군부가 이같은 소요를 우려해 경찰기능까지 떠맡고 있다고 밝혔다. ○“실태 과장” 시각도 그러나 우리측 당국은 북한의 식량부족사태에 대한 국제기관들의 평가가 다소 과장됐다는 입장이다.북한이 국제사회에 식량지원을 요구하는 것은 당장의 먹거리만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재고량 부족분을 메우기 위한 계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시각이다. 북한은 아직 비축중인 군량미는 요지부동으로 풀지 않고 있다.때문에 아직은 절대절명의 위기상황은 아니라는 분석도 없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얼마간의 체감지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북한 식량난이 심각하다는데는 국내외적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이대로 간다면 단순한 식량수급의 불균형 차원을 떠나 김정일체제의존망이 걸린 문제로 비화할 수 있다는 얘기다. ○140만t 수입 불가피 정부는 당초 북한이 95년 식량부족분이 2백59만t에 이를 것으로 보았다.한해 곡물소요량이 6백72만t으로 추정되나 북한의 94년도 식량생산량은 4백13만t에 불과한 탓이다. 따라서 배급량을 줄이는 등 내핍을 통해 소비를 최소한으로 줄인다고 하더라도 최소 1백40만t의 곡물수입이 불가피하다는게 정부의 분석이었다. 이에 따라 북한은 95년 한국으로부터 쌀 15만t,일본으로부터 50만t(실제 인도분은 12월말 현재 32만여t)의 무상지원을 받았다.태국으로부터 수입한 싸라기쌀을 포함해도 외국으로부터 도입분은 89만3천t에 불과해 부족분을 메우기에는 크게 역부족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 7,8월 「1백년」만의 수마가 곡창지역을 포함한 북한전역을 훑고 갔다.미국 정보기관은 터무니없이 부풀렸다고 결론지었지만 유엔조사단도 북한면적의 75% 수해를 인정했다. 세계식량계획(WEP)은 50여만명 북한 이재민의 90일분의 식량원조를 위해 8백80만달러를 모금,2만t의 쌀지원을 약속한 바 있다.하지만 20만여달러밖에 걷히지 않는 바람에 자체 긴급기금에서 2백여만달러를 조달,5천여t을 북한에 보내는데 그쳤다. 이로 인해 함경도 등 변방지역에서는 식량절취 행위가 빈발하고 있다는 게 관계당국에 입수된 첩보다.북한주민들이 식량을 얻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유랑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더욱 심각한 사실은 96년에도 이같은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없다는데 있다.우선 유엔조사단이 수해로 인한 북한의 95년 곡물생산손실분이 1백7만∼1백45만t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국제적십자사측은 13만명의 북한주민이 아사위기를 넘기기 위해선 96년 10월 수확기까지 매달 2천여t의 곡물을 원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우리측 당국도 북한이 96년에도 심각한 식량난에 허덕일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하고 있다.그러나 통일원·안기부·농촌진흥청 등 부처별로 북한의 구체적인 식량부족분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를 내놓고 있다.예컨대 통일원은 북한의 내년도 식량부족분이 3백만여t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으나 농업경제연구원은 이보다 훨씬 많은 3백62만여t으로 잡고 있다. 농촌경제연구원은 95년 연말 북한의 95년 한해 곡물생산량을 약 2백60만6천t인 것으로 잠정 추정했다.이는 북한의 5개월분 소요량에 불과하다.96년도 북한 식량소요량을 내핍생활을 감안해 최소 6백22만4천t으로 보았을 경우다. 이중 쌀은 2백23만7천t,옥수수는 66만1천t이 부족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농경연 분석에 따르면 북한의 올해 쌀생산량은 평년수준인 1백28만5천t보다 41%나 적은 76만1천으로 단보당 생산량이 남한(4백45㎏)의 28%에 불과한 1백27㎏에 그쳤다. 이같은 추계가 사실이라면 96년 3월이면 전량이 소비돼 본격적인 춘궁기가 시작될 전망이다.물론 북한이 95년에 외부로부터 무상지원받은 쌀이 이미 전량 소비됐다는 것을 전제로 한 얘기다. 다만 통일원·농촌진흥청 등은 북한의 95년 곡물생산량이 이보다 많은 3백50여만t 정도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연초부터 국제사회를 상대로 식량구걸 행각에 동분서주하지 않고는 한해를 넘길 수 없다는관측이다. 물론 이같은 북한의 식량난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농업생산성 저하에 따른 수년간의 생산부진과 외화난 등 만성적인 경제난의 누적으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농촌경제연구원의 김운근 수석연구위윈은 『북한의 식량난이 지난 80년대 중반부터 그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90년대에 와서 그 심각성이 한층 고조됐다』고 지적했다. 물론 80년대 중반 이전이라고 해서 북한의 식량문제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단지 이때만 해도 구소련과 중국 등 동맹국으로부터 유류나 곡물을 무상지원,또는 국제가격의 절반수준으로 수입할 수 있었다. 더욱이 당시 북한의 전반적인 경제사정도 지금보다는 나았다.그래서 북한은 국제가격이 월등히 비싼 쌀을 매년 20∼30만t씩 수출하고 그대신 2∼3배나 값이싼 밀가루와 옥수수를 수입해 식량부족분을 메우는 「요령」을 부릴 여력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사정은 급격히 달라졌다.93년에 심한 냉해를 입은데 이어 94년에 우박피해,95년에 사상최대 규모의 물난리를 겪는 등 잇따른 자연재해가 북한농촌을 빈사상태로 빠뜨린 것이다. 인구의 자연증가 등으로 북한의 곡물소요량은 매년 늘어났다.그러나 곡물생산량은 91년 한해동안 4백42만7천t,92년 4백26만8천t,93년 3백88만4천t,94년 4백12만5천t으로 매년 하향곡선을 그었다. ○생산량 급전 직하 따라서 해마다 엄청난 식량부족 사태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예를 들면 94년도 총 곡물수요량을 6백67만t으로 추정할 때 부족분은 무려 2백78만6천t이었던 셈이다 여기에다 과거 「혈맹」이었던 중국마저 95년초부터 식량지원을 끊기 시작,북한의 식량난을 최악의 상황으로 만들었다.중국도 94년 자연재해로 인한 곡물 생산부진으로 대북 식량원조는커녕 동북3성과 북한과의 물물교환을 통한 음성적인 식량지원조차 금지했던 것이다. 그런데다 대외식량도입도 여의치 않았다.이 기간중 북한경제가 계속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바람에 외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외미(외미)현금구매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외채 미결제로 국제신용도가 땅에 떨어져 식량의 외상거래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북한의 실질경제성장률은 90년대 들어 줄곧 하종가를 기록했다.즉 ▲90년-3.7% ▲91년 5.2% ▲92년-7.6% ▲93년-4.3% ▲94년-1.7% 등 계속 내리막길을 걸었던 것이다. 이처럼 북한의 식량난이 가중된 원인은 여러가지로 분석된다.50년 후반부터 건설된 관계시설의 노후화 및 다락밭 건설이라는 무리한 자연개조 사업도 그 원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북한식량난의 근본적인 원인은 비능률적인 「주체농법」과 「우리식 사회주의」의 비효율성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우선 이윤동기가 없는 국영 내지 집단농장의 노동생산성이 낮은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또 시장경제체제에 경쟁이 안되는 폐쇄적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로 경제 전부문의 활력을 얻기 어렵고,그같은 상태에서 농업부문만 유독 발전하기를 기대하기는 더욱 어렵다는 지적이다.예를 들자면 경제사정이 나빠 비료나 농약투입도 덩달아 어려워졌던 것이다. 따라서 북한주민들을 기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폐쇄적 껍질을 벗고 개혁·개방에 나서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 1995년 지구촌/보스니아내전 종식·중동평화 “최대축복”

    ◎옴교 독가스 살포·불 연쇄폭탄테러로 “홍역”/각국의 부패권력자 「사정칼날」에 걸려 수난/일·사할린 대지진 등 천재지변 잦고 에볼라 등 전염병 창궐 인류 최악의 비극이라 할 2차대전이 끝나고 인류의 평화를 위해 유엔이 창설된지 50년이 된 95년.이같은 의미를 되새기기라도 하듯 지구촌은 평화를 향한 두가지 중요한 걸음을 내디뎠다.오랜 분쟁의 대명사 중동에서 평화의 기운이 무르익기 시작했고 2차대전 이후 유럽 최악의 비극이라는 보스니아 내전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냉전종식 이후 불거지고 있는 민족간·종교간 갈등의 대표적 전형이라 할 보스니아내전은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25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채 3년반만에 분쟁 종식의 돌파구를 찾았다.또 이츠하크 라빈 전총리가 암살되는 희생을 치르기는 했지만 팔레스타인 자치협정이 이행에 들어섬으로써 베들레헴이 팔레스타인에 넘겨지는 등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해묵은 분쟁이 하나둘씩 타결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이와 함께 요르단과오만 등 주변 아랍국들과 이스라엘간의 분위기도 과거의 적대일변도에서 벗어나 공존을 모색하는 동반자의 길로 접어드는 조짐을 나타내기 시작했다.북아일랜드에서의 해묵은 분쟁 역시 95년 한해를 통해 해결의 발판을 더욱 공고히 다지는 등 95년 한해 동안 지구상의 해묵은 많은 분쟁들이 타결의 실마리를 찾아 인류는 평화진전을 위해 많은 것을 기록할 수 있었다. ○르완다 난민 대학살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게 마련.인류의 역사가 늘 그래왔듯이 95년도 전쟁과 평화가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보스니아와 체첸에서의 끝없는 유혈분쟁 소식이 1년 내내 끊이지 않았다.르완다에선 정부군이 난민수용소를 공격,2천여명을 사살하는 학살극이 빚어졌다.또 중국이 핵실험을 실시한데 이어 프랑스마저 일련의 핵실험을 재개,타히티에서 반프랑스 유혈폭동이 며칠째 계속되는 등 핵문제를 둘러싸고 긴장이 계속됐다. 95년에는 또 일본에서 발생한 옴진리교의 독가스 살포사건,미국 오클라호마에서 벌어진 연방정부청사 폭탄테러와 프랑스에서의 연쇄 폭탄테러등 테러가 유난히 극성을 부려 사람들의 마음에서 불안이 사라지지 않게 했다.게다가 5천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일본 고베에서의 대지진과 2천명 가까운 사망자를 낸 사할린 네프테고르스크에서의 지진,유럽지역을 휩쓴 폭우과 폭설 등 천재지변마저 잦아 불안한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졸이게 했다.그런가 하면 에볼라 바이러스,살 파먹는 괴질 등 낯선 전염병들은 물론 콜레라같은 오랜 전염병들이 다시 창궐해 인류를 긴장시켰다. ○핵문제로 긴장 계속 새해 벽두(2일) 요르단강 서안 점령지구에서의 유태인 정착촌 확대를 선언,평화에의 희망에 불을 지폈던 라빈 전이스라엘총리는 중동평화의 실현을 눈앞에 두고 극우 유태주의자의 총탄에 쓰러짐으로써 세계인들에게 아픔을 주었다.또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대통령도 이디오피아를 방문하던 중 무장괴한들로부터 암살 기도를 받아 황급히 이집트로 되돌아갔고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그루지아대통령 역시 간신히 암살을 모면하는 등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암살 기도도 끊이지 않았다. 한편 95년 1월1일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으로 예고된 세계의 경제대전은 미·일 자동차분쟁을 둘러싸고 미국이 일본에 대해 1백%의 보복관세를 부과하는 등 세계는 이제 치열한 경쟁과 경제전쟁의 시대로 바뀌었음을 실감나게 했다.WTO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미국과 유럽연합 등은 WTO 제소라는 위협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제몫 챙기기에 열중했고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많은 나라들은 제몫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게 됐다. 경제적 측면에선 95년 일본 엔화의 초강세와 달러화의 약세가 가져온 파장이 1년 내내 계속됐다.한때 1달러당 80엔대 선까지 올라가는 등 끝이 없어 보이던 엔화의 강세는 현재 1달러당 1백엔을 조금 넘는 선에서 비교적 안정세를 보이고 있지만 미국의 경제상황에 따라 언제 다시 불거질지 모르는 세계경제의 불발탄과 같은 위험을 안고 있다. ○엔화강세 달러약세 95년 세계경제의 또다른 뚜렷한 추세는 블록화 현상이 가속화했다는 점이다.아직 완전한 실현을 이루기까지는 극복해야할 과제가 많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유럽 7개국간 국경통제를 해제하는 쉥겐조약이 발효되고 마드리드 유럽연합 정상회담에서 단일통화의 이름이 유로로 결정되는 등 유럽통합은 발빠른 움직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이에 맞서 아세안의 지역경제화,남미 등지에서의 지역경제화 등이 활발히 거론되고 그 실현을 위한 발걸음을 착실히 내디딘 한해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사회주의에서 벗어나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러시아와 폴란드 등 몇몇 과거 공산주의 나라들은 이같은 치열한 경쟁의 와중에서 개혁의 성과가 미미한데 따른 국민들의 불만이 『그래도 옛날이 좋았다』는 과거로의 회귀와 연결되면서 다시 공산당이 득세하는 풍조를 나타냈다.폴란드의 민주화를 이끈 영웅 레흐 바웬사 대통령은 공산당의 거센 바람에 밀려 알렉산데르 크바스니예프스키에게 대통령의 자리를 내주어야 했고 러시아에서는 주가노프의 공산당이 제1당으로 부상,좌경화의 바람을 더욱 거세게 했다. ○러·파 공산당 득세 95년 한국이 두 전직대통령의 비리 처단과 과거청산 문제로 떠들썩했던 것처럼 지구촌 곳곳에서도 부패한 권력자들이 법망의 그물에 걸려 수난을 당했다.이탈리아에서는 줄리오 안드레오티 전이탈리아총리가 마피아와 연루된 혐의로 법정에서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외에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총리 등 3명의 전직총리가 법정에 서게 됐다.한때 멕시코 경제개혁을 이끌어 칭송받았던 카를로스 살리나스 전멕시코대통령은 자신과 가족들의 폭넓은 비리가 파헤쳐지면서 부인과 자녀들을 데리고 미국으로의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중국에선 최대의 부정·부패사건이라고 일컬어지는 왕보삼 전북경 부시장의 자살사건으로 대대적인 반부패 숙정운동이 벌어지고 있고 빌리 클라스 나토 사무총장은 뇌물수수 혐의로 사임 압력을 받아오다 끝내 불명예퇴진하기도 했다. 한편 과거 군사독재 시절 수많은 실종자들을 낳는 등 어두운 기억의 상처 속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르헨티나,칠레 등 남미국가들에서는 참다운 과거청산 없이는 올바른 미래를 건설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군사독재 시절의 어두운 과거를 씻기 위한 노력이 활발히 진행됐다.이같은 부패단절과 과거청산의 움직임은 같은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못하도록 방지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인류를 위한 밝은 조짐으로 중동과 보스니아에서의 평화 회복 움직임 못지 않게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일본(옴진리교의 독가스 살포 사건)과 미국(오클라호마 연방정부청사 폭파 사건)에서 벌어진 두가지 테러사건은 또다른 측면에서 인류의 희망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었다.정치와 경제 두측면에서 모두 풍요로움을 자랑하는 두나라에서 발생한 테러는 일본의 경우 신흥종교의 위험성을,미국의 경우 무정부적 극우주의자들의 위험성을 일깨우면서 현대의 물질문명 속에서 목표를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잘못하면 어떤 위험 속으로 빠져들 수 있을지에 대해 경각심을 부르게 한 사건이었다. 이등휘 대만총통의 미국방문으로 야기된 미·중국,중·대만간의 갈등은 중국의 대만 무력침공 위협으로까지 이어지면서 동북아 정세에 긴장을 높여주었다.여기에 중국에 대한 반환이 1년 앞으로 다가옴으로써 야기되고 있는 홍콩의 불안,홍수피해에 따른 기근으로 식량폭동설까지 나도는 북한의 상황 악화 등이 겹쳐 동북아 정세는 극도로 혼미해졌다. 보스니아와 중동에서의 평화는 결국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 아래 이뤄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는 내년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클린턴 미대통령이 업적을 쌓기 위해 적극 매달렸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그러나 95년에 이룩한 몇가지 평화진전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국은 저마다 자신의 몫만을 늘리기 위해 열심일 뿐 진실로 평화만을 위해 전념하고 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같다.정신적 지주를 잃은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테러의 참담한 예를 보면 인류는 겉으로는 평화를 외치면서도 한발한발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도 한다. 96년 한해는 오직 평화와 축복만으로 가득찬 한해가 되기를 기원해보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할 수 있을지…
  • 미 북한 식량난 왜 부풀리나/일촉즉발의 폭동위기등 과장첩보 흘려

    ◎대선 앞둔 클린턴정부 외교치적 겨냥한듯 북한의 식량난을 둘러싸고 기묘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남북관계의 한쪽 당사자인 우리측이 신중한 관망자세를 보이고 있는 반면 미국측이 오히려 그 심각성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실제 북한주민이 과연 굶주리므로 죽어가고 있을까.또 이 순간 북한에 대한 인도적 식량지원에 나서야 하는 가등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사실 미국측은 북한이 식량난으로 붕괴가 임박했다는 첩보를 흘리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이를 테면 최근 워싱턴발 외신은 식량배급이 끊김으로써 북한이 일촉즉발의 주민폭동 위기를 맞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같은 보도가 『상당히 과장됐다』(송영대 통일원차관)는 입장이다.한마디로 외부로부터 식량지원이 없으면 내년 3월쯤 수십만명이 아사위기에 직면할 것이라는 일부 외신,특히 미국언론의 보도는 북한 식량난을 지나치게 부풀렸다는 인식이다. 정부는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하긴 하나 당장 체제붕괴로 이어질 수준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북한이 세계식량기구(FAO)가 권장하는 2개월 비축분보다 많은 6개월 분량의 전쟁비축미를 전혀 풀지 않고 있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는 것이다.북한의 「구걸외교」도 재고량 부족분을 채우기 위한 수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언론에 북한 식량난이 실상 이상으로 부풀려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우리 정부내에서 상당한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말하자면 우리측이 대북 지원에 나서도록 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압력이 아닌가하는 것이다. 이는 내년 미국 대선에서 클린턴행정부가 북한핵문제 해결등 한반도 안정을 가장 큰 외교 치적으로 내세우리라는 점을 감안한 분석이다.때문에 내년 1·4분기에는 우리측으로선 곤혹스런 상황전개에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남한으로부터 식량을 얻어내기 위한 북한의 의도적 긴장조성과 연락사무소 개설등 미·북 관계개선 코스를 가기 위한 미국측의 분위기 조성 움직임이 맞물릴 공산이 큰 탓이다.
  • 북 식량폭동·소요 조짐/군부 「적색경계」 돌입

    ◎“올 겨율 대북 특별경계를” WP지 【워싱턴·도쿄 외신 종합】 워싱턴포스트지는 23일 식량난등으로 북한의 재원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에도 북한군부에 주입하고 있는 활력의 양은 놀라울 만하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서울발 한반도 특집기사에서 서방분석가들의 말을 인용,식량난등으로 북한의 도발가능성을 우려하는 의견들이 한국내에서 적지 않지만 지난 2개월동안 북한이 유달리 공격적인 행위를 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신문은 북한이 워낙 예측불허의 행위를 한다는 점에서 이런 낙관적인 분석가들도 이번 겨울동안 북한을 예의주시해야 한다는 데 동감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일본 NHK방송은 이날 도쿄에서 수신된 북한 관영 중앙통신을 인용,『북한 인민군이 최근 「한국과 미국의 가능한 도발」에 대비,「적색경계태세」를 발령했다』고 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인민무력부 부부장 조명록이 『현재의 상황은 북한 인민군과 주민들로 하여금 항상 최고의 경계태세를 갖추도록 자극하고 있다』고 말했다는것이다. 이에 앞서 미 국방부의 한 관리는 22일 북한 군부가 최근 경찰 및 보안기능까지 떠맡고 있어 북한체제가 식량폭동 또는 민간소요를 우려하고 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고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이 관리는 북한군부는 경제·사회적 여건 악화와 때를 같이해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면서 최근 북한이 반체제 인사들의 공개처형에 수천명을 동원한 것은 잠재적 반체제인사들에 대한 경고라고 덧붙였다. 윌리엄 페리 미 국방장관도 이날 북한군부가 최근 10년이래 최대 규모의 군사작전을 전개하고 있는 사태를 우려,북한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 북한군 이상동향/워싱턴서 보는 최근 한반도 정세

    ◎식량난 악화 대처 주민소요 진압용/폭동·탈북사태 방지 “체제방어목적” 판단/“몇년 전보다 확실히 악화… 경계강화 필요” 최근 북한군 동향의 이상현상에 대한 미국내 대응이 가시화되고 있다.미항모 인디펜던스호가 한반도해역으로 출동하고 있으며 미국방정보국(DIA)등 미정보기관들이 북한에 대한 경계 강화에 들어갔다. 이같은 일련의 움직임은 북한군의 이상동향이 북한의 남침도발 가능성과 관계있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미국 고위 안보책임자들의 계속된 발언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북한군의 만약의 사태에 대한 대비태세에 돌입한 것으로 볼수 있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지는 23일 북한의 극심한 식량부족이 북한에 대한 경계를 촉구하는 변수가 되고 있다고 보도하고 『굶주림이 도발의 촉매가 될수 있다』는 한국측의 분석들을 소개하면서 『북한은 워낙 예측불허의 행위를 한다는 점에서 매우 낙관적인 분석가들도 이번 겨울 동안 북한을 예의 주시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 10월부터 휴전선 일대에서의 공군기훈련과 병력의 전진배치등 북한군의 이상동향과 관련,윌리엄 페리 미국방장관은 22일 기자회견에서 『최근 한반도 상황으로 미군의 배치를 바꾸거나 경계경보수준을 격상시켜야할 필요성은 없다』고 강조하면서도 『북한군부가 최근 10년이래 최대규모의 군사작전을 전개하고 있는 사태를 우려,북한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페리장관은 21일에도 『북한의 식량난이 이번 겨울 심각한 문제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바 있다.한 국방부관리는 『최근의 사태는 몇년전보다 확실히 더 악화된 징후를 보인다』면서 『북한군부가 지난 여름 홍수와 관련,심각한 식량난으로 인해 촉발된 주민들의 불만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같이 미국측은 북한의 군사동향이 직접적인 남침도발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식량난으로 인해 예상되는 민간소요를 대처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보는 견해가 강하다.즉 국내 폭동에 대비하고 난민이 국외로 탈출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는 분석이다. 이는 북한 군부가 최근 권력장악을 강화,경찰및보안기능까지 떠맡은 것은 북한체제가 식량폭동이나 이로인한 민간소요를 우려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는 미국방부 정보분석에서 뒷받침되고 있다.더우기 지난 수개월간 북한에서 반체제 혐의로 구속된 인사들에 대한 공개처형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군부의 영향력 강화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용」이라 할지라도 북한 군부의 세력강화는 한반도의 안보와 직결되는 문제인만큼 그에 대한 각종 대비는 필요하다는 것이 미국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이며 이같은 측면에서 인디펜던스호의 출항도 예정된 훈련이라는 미군당국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 대비책의 일환으로 볼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보는 시각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최근 북한의 이상동향 존재 자체에 대한 한·미양국의 견해는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겨울 북한의 남침도발가능성에 대한 양국의 긴밀한 대처는 어느때보다도 중요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심상찮은 북 동태 철저대비를(사설)

    북한의 동태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아사자가 나올 정도의 극심한 식량난은 이미 현장을 둘러본 유엔구호단장에 의해 확인된 바 있다.그런 상황에서 대규모 군사훈련과 군의 전진배치가 전해지고 있는 가운데 미국방부로부터 나온 외신보도들은 북한이 식량폭동과 민간소요를 경계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북한이 큰 위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음을 보여주는 조짐들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의 사정은 어떤 경우건 그대로 우리의 사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북한이 보이고 있는 심상치 않은 동향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간단히 말해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하나는 도발위험이요,또 하나는 붕괴가능성이다.어느 경우도 바람직스런 사태가 아니며 우리의 평화와 안전에 대한 중대위협인 것이다. 보도내용을 종합해 볼 때 북한의 최근 동향은 당장의 도발보다는 식량난에 따른 내부동요 대비의 의미가 큰 것으로 보인다.미국방부 관리는 북한군이 경찰 및 보안권까지 장악했으며 주민소요진압에 이미 동원되고 있다고 분석하고있다.주민의 동요가 경찰력으로 대처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반체제인사들에 대한 공개처형이 늘고 있는 것은 주민동요에 대한 위협적 경고이며 이 또한 북한주민의 폭동위험 증대를 스스로 인정하는 움직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같은 사태전개는 그것만으로도 심각한 위협이지만 군으로서도 통제하기 힘든 사태가 발생했을 경우 북한은 그냥 붕괴하고 말 것인가.그동안의 속성으로 미루어 도발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북의 군사대비태세는 그런 점에서 심각한 위협이라 할 수 있다.최근 확인된 전시국방위원회 기능강화등은 전쟁도 각오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우리로서는 붕괴와 도발을 동시에 대비하고 경계해야 하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연말연시의 해이는 물론 적어도 내년 춘궁기가 끝날 때까지는 하루 24시간 잠시도 북한에서 눈을 떼거나 방심해선 안된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 비방 중단·당국간 회담땐 대북 지원재개 신중 검토/정부

    정부는 식량부족과 수해로 인해 북한체제의 불안이 심화하고 있는 점을 유념,대남 비방 중지·당국간 회담 호응등 북한의 향후 태도변화와 연계해 단계적이고 신축적인 대북 지원방안을 검토키로 한 것으로 24일 알려졌다. 정부의 한 고위당국자는 『우성호 선원 송환이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은 되겠지만 쌀추가지원등에 부정적인 국민여론을 설득하기에는 미흡하다』면서 『수해지원이나 쌀추가지원등은 우리 국민정서와 북한의 태도를 봐가며 단계적으로 대응한다는 게 기본 입장』이라고 밝혔다. 이 당국자는 『북한이 지난 22일 우성호 송환방송을 내보내기 직전 남북쌀회담 북측 단장 전금철명의 팩시밀리 전문을 우리측 수석대표였던 이석채 정보통신부장관 앞으로 보내 선원 송환을 미리 통고 해왔다』면서 『이는 쌀지원 대화를 재개하자는 간접 메시지일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다른 한 당국자는 이와 관련,『우성호 선원송환은 인도적 차원에서 진작 이뤄졌어야 할 사안』이라며 『북한이 26일 우성호 선원들을 약속대로 돌려보낸다고 하더라도 당장 정부가 쌀을 주려 한다면 국민감정이 허용치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당국자는 그러나 『북한이 최근 부쩍 격렬해지고 있는 대남 비방을 중지하는 등 당국간 관계개선에 성의를 표시하면 긴급한 수재지원을 위한 다각적인 방안을 우선 고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의 대남비방 중지를 전제로 당국간 협의 또는 적십자 채널을 통해 『수해복구에 필요한 모포·의류·목재등을 지원할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이어 『다만 쌀추가지원은 북한당국의 공식요청에 따른 판문점등 한반도내 당국자회담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정부의 입장은 아직 확고하다』고 밝혔다. 정부가 이처럼 북한의 태도와 연계해 신축적인 대북 지원방침을 정한 것은 식량폭동 가능성 및 북한군부의 득세등 북한체제의 위기지수가 높아지고 있고,이같은 상황을 수수방관하는 것은 한반도 안정과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 교포들의 겨울(외언내언)

    4년전 우리 교포들이 집중적으로 몰려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흑인폭동이 일어났을 때 교포들의 절망과 좌절을 잊을 수가 없다.「아메리칸 드림」에의 꿈이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아픔이었을 것이다.교포들은 어느날 갑자기 나락에 서 있었다.그들의 표정과 몸짓에는 희망이 없어보였다.그리고도 로스앤젤레스에는 다음해 대화재가 휩쓸었고 또 대지진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뉴욕이다.뉴욕일원에도 우리교포들이 30여만명이나 살고있다.93년 겨울 미동북부의 겨울은 참으로 혹독했다.중부 5대호 일대에서부터 동북부 전체가 4개월여 동안이나 동토였다.그렇지 않아도 경기가 나빠 생활이 어려웠던 교포들에게 혹한은 더욱 아픈시련을 안겨주었다.한해 걸러 올겨울 뉴욕은 벌써부터 유난히 춥다고한다. 뉴욕에서 우리교포가 또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는 뉴스를 접한다.지난 19일 뉴욕의 브롱스에서 우리교포가 경영하는 신발가게에 20대 갱단 2명이 침입해 권총을 난사,5명이 죽고 3명이 중상을 입은 참사가 벌어졌다.가게주인의 부인이 목숨을 잃었고 또 다른 교포손님 1명이 중상을 입었다. 지난 7월에는 북서부 시애틀 근교에서 교포 일가족 3명이 피살된 사건이 있었다.15세된 딸만 때마침 친구 집에 갔다 화를 면했었다.이보다 앞서 5월달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교포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연이어 그곳 교포들을 놀라게 한 일이 있다.금년들어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만 모두 14건의 교포피살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그런데 그중 완전히 해결된 것은 단 1건뿐이라고 한다. 교포들이 당하는 피해 패턴이 거의가 비슷해 더욱 마음 아프다.우리교포들이 갱단들의 표적이 되고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현금 소지율이 높고 영어가 서툴러 피해를 입어도 사건경위를 설명할수 없다는 약점을 미국의 불량배들이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올겨울 미국의 우리교포들은 또 한번 더없이 추운 겨울을 나야할 것 같다.
  • 「미완의 혁명」 4·19(새로 쓰는 한국현대사:47)

    ◎「3·15마산시위」로 촉발… 한국현대사의 분기점/「혁명」·「의거」·「민중항쟁」 등 시각따라 평가 달라 1960년 4월19일 국민은 자유당 독재정권에 저항해 분연히 일어서 일주일만에 이승만 대통령을 권좌에서 쫓아냈다.비록 1년여 뒤에 일어난 「5·16」군사쿠데타로 그 꿈은 좌절되지만 「4·19」가 민주주의를 추구해 온 한국 현대사에서 뚜렷한 분기점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4·19」는 「3·15」부정선거와 이에 따른 「3·15 마산시위」로 직접 촉발됐다.그러나 이와 관련된 학생시위는 2월28일 대구에서 처음 발생했다.학생들이 반정부시위를 벌인 것은 광복이후 처음이었다.28일은 민주당 장면 부통령후보가 대구유세를 가진 날로 일요일이다.집권세력은 학생들의 유세장 참석을 막으려고 일요일인데도 고교생들을 모두 등교시키기로 했다.명목은 학교에 따라 달랐다.경북고교는 학기말시험 일정을 이날로 앞당겼고 대구고교는 전교생이 토끼사냥을 한다고 했다. ○대구서 첫 반정부 시위 학생들은 반발했다.28일 등교한 경북고생 8백여명은 하오 1시5분쯤 교문을 나서 시내 중심가를 돌며 1시간50분동안 시위를 벌였고 대구고·경북여고 학생들도 뒤를 이었다.이날 학생 2백50여명이 연행되지만 정부는 시위학생 처벌이 민심에 어긋날까 염려해 그날로 모두 석방했다. 학생시위는 3월5일 서울에서 다시 불붙었다.장면후보가 서울운동장에서 정견발표를 마친 뒤 종로4가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이자 학생이 대부분인 군중 1천여명이 뒤따랐다.퍼레이드를 끝낸 하오 5시10분쯤 시위가 시작됐다.경찰은 경찰봉을 휘두르는 한편 기마경찰을 동원,곧바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어 8일에는 대전에서,10일에는 수원과 충주,12일에는 부산·청주,13일 서울,14일에는 서울·부산·인천·포항에서 학생시위가 벌어지는등 자유당정권에 대한 저항은 전국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됐다. 제4대 정·부통령선거가 실시된 3월15일 무장경찰이 거리거리를 지키는 가운데 동이 텄다.당시 인구 15만 정도인 남녘의 항구도시 마산은 어느곳보다 시끄러운 아침을 맞았다.상오 7시 투표가 시작됐지만 민주당참관인은 대부분 투표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자유당원,경찰,반공청년단등 친정부세력이 야당 참관인의 출입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불만은 시민들 속에서도 터져나왔다.많은 마산시민들이 투표용지조차 받지 못해 선거를 할 수 없었다. 시민들은 자연스레 오동동 민주당사무실로 모여들었다.상오 10시30분 민주당 마산시당은 스스로 「선거포기」를 선언했다.그날 저녁 민주당사 앞에 시민들이 몰려 있을 때 반공청년단원 10여명이 차를 타고 몰려와 마구 몽둥이질을 하고는 달아났다.분노한 시민·학생들은 시위대로 돌변했다.시위대가 남성동파출소 앞에 이르자 소방차에서 물벼락이 날아왔고 시위대는 돌을 던졌다.이윽고 총성이 터지면서 앞선 학생이 쓰러졌다.하오 8시쯤이었다.시위대는 일단 흩어졌지만 『경찰이 학생을 쏘아 죽였다』는 소식이 시내에 퍼지면서 격분한 시위대와 총을 쏘는 경찰간에 유혈충돌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다음날 마산시내에서는 일대 검거선풍이 불었다.경찰은 시위를 민주당 마산시당이 사전계획한 「폭동」으로 몰아붙이는 한편공산간첩이 개입됐다는 쪽으로 몰고갔다.이기붕 부통령당선자가 『총을 줄 때는 쏘라고 준 것』이라고 말해 문제가 된 것도 이 무렵이다. ○마산시위서 10명 희생 하지만 마산사건은 곧 정치쟁점으로 떠올랐다.민주당은 물론 국회와 대한변호사협회,심지어 자유당까지 자체 조사단을 파견해 진상을 조사했으며 검찰도 수사팀을 현지에 보냈다.경찰이 주머니에 불온삐라를 만들어 숨진 학생 주머니에 집어넣었다든지,북마산파출소 방화범을 조작한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 3월26일 발포·고문 경찰관 5명이 구속됐다. 어느정도 분위기가 잦아들던 4월11일 김주열(당시 17세)군의 시신이 마산시청 뒤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됐다.전북 남원 태생인 김군은 마산상고 입학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3월15일 밤 김군은 형과 함께 시위행렬에 가담했다가 행방불명됐다. 그 김군이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으로 바다에 떠오르자 다시 전국에 분노의 물결을 불러일으켰다.마산에서는 이날 저녁 시위대 3만여명이 시청·파출소·소방서등 공공기관을 습격했다.하오 9시30분쯤 마산경찰서 앞에서 경찰이 또다시 총을 쏘았다.1·2차 마산시위에서 희생된 사람은 모두 10명이었다. 전국에서 시위가 잇따른 가운데 4월18일 서울에서 고대생들이 시위에 나섬으로써 「4·19」에 불을 지핀다.18일 낮 교문을 나선 고대생 3천여명은 경찰의 저지를 뚫고 태평로 국회(현 서울시의회)앞까지 진출했다.학생들은 도로에 연좌해 『3·15 부정선거를 철회하라』며 농성을 벌였다.시청·광화문등 주변에는 시민·고교생등 1만여명이 모여 이들을 격려했다.고대생들이 유진오 총장의 설득으로 4시간 반만에 농성을 풀고 학교로 돌아가는 도중 동대문시장 앞에서 정치깡패 이정재 일당이 이들을 습격했다. 고대생들이 깡패들에게 당한 사실이 보도된 4월19일 아침 서울은 분노로 들끓었다.서울대를 비롯한 10여 대학 학생들이 상오중 시위에 들어갔고 고교생들이 뒤를 이었다.시위군중은 순식간에 10만명을 넘어서 하오1시40분쯤 경무대(현 청와대)앞 저지선에 다다랐다.경찰의 일제 사격에 군중은 잠시 흩어졌지만 수는 더욱불어났다.정부는 바로 계엄을 선포했다. ○이승만 하야로 새 국면 이어 정국은 숨가쁘게 돌아갔다.21일 국무위원 일괄 사퇴를 시작으로 23일 임기가 남은 장면부통령이 사임했다.24일에는 이기붕이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한다고 발표했다.25일 하오 3백여 대학교수들이 「이승만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자 이승만은 26일 드디어 하야성명을 냈다.제1공화국은 이로써 막을 내렸다.「4·19」전기간에 걸쳐 전국에서 1백86명이 숨지고 6천여명이 부상했다. 「4·19」는 혁명인가,의거인가,아니면 민중항쟁인가.발생 35년이 지났지만 「4·19」에 대한 평가는 아직 분명하게 내려지지 않았다.따라서 「4·19」를 부르는 이름도 「4월혁명」「학생의거」「4월민중항쟁」등 다양하다.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는 의미에서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한쪽에선 학생들이 주도해 우연히 일어난데다 실제 이룬 것이 없다고 보아 의거라고 해석한다.또 「4·19」가 반독재투쟁을 거쳐 「반외세 민족통일」을 제기했다고 비중을 두는 쪽은 「민중항쟁」이라는 주장을 편다. 이처럼시각이 엇갈리는 까닭은 「4·19」가 지금도 우리 사회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당대의 큰 사건이기 때문이다.결국 「4·19」는 어느 시점까지 미완의 혁명으로 남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4·19」엿새 뒤인 25일 하오 서울시내에서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대학교수들.이승만이 다음날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제1공화국은 막을 내린다. ◎미 CIA 「한국정세 보고서」/미 “장면정권 2년이상 못 버틴다” 예측/군사쿠데타 발생가능성엔 회의적/“서방과의 연대는 지속할 것” 전망 우리의 현대사에서 「4·19」와 「5·16」으로 이어지는 60년대 초는 격동의 시기였다.독재를 거부한 국민의지가 열매를 맺는가 싶더니 1년여만에 군사쿠데타로 뒤집혔다.미국은 이 무렵 한국 상황을 어떻게 판단했을까.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최근 비밀해제된 미국 정부문서 가운데 중앙정보국(CIA)이 작성한 「한국 정세에 관한 예상 보고서」를 발굴했다.1960년 11월22일자로 된 이 보고서는 이후 몇년동안 전개될 한국의 정치상황을 내다본 것이다. CIA는 먼저장면정권이 2년이상 버티기 힘들 것으로 전망했다.국회에서 다소 우위에 있긴 하지만 당면한 숱한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리라고 보았다.또 60년 3∼4월에 활동을 개시한 「혁명세력」도 아직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정치적 균형이 새로 정착되기 전에 지도력의 변화와 세력 재배치가 있을 것이며,이러한 변동은 보수정당 우위에서 얼마간 벗어나 사회주의 세력의 신장을 가져오리라고 예측했다. 보고서는 이어 『서울정부가 대중의 열망에 부응하지 못하면 불안한 상태가 유지돼 권위적,또는 혁명적 지도자들에게 이용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그러나 군사쿠데타 가능성에 대해서는 『한국 내 상황이 두드러지게 악화돼야만 군부가 민간정권을 대체하려 들 것』이라고 분석한 뒤 『현재로선 쿠데타가 발생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한국인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침략 방어와 경제력 유지를 위해 미국등 서방과 연대해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를 이어갈 것으로 자신했다.그러면서도 ▲민족주의 감정 대두 ▲통일에 대한 열망 ▲냉전체제 아래 한국의 허약한 위상에 대한 분개심등이 중립주의에 대한 관심을 높일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밖에 장면정부가 일본과 적극적으로 새로운 접촉을 시도하고 있지만 한일관계가 정상화되기까지는 수많은 장애물이 있으며,특히 『한국 대중의 새롭고 약간은 과민한 민족적 자존심이 이를 복잡하게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4·19」와 「5·16」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중간시점에서 작성된 미 CIA 보고서는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정책 결정에 활용됐다는 점에서 가치가 뛰어난 자료이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부국장급 ▲이용원 〃 차장 ▲김성호 〃 기자 ▲김영중 조사부 〃
  • 미,중 폭동 유혈진압 진상조사/국무성·의회

    ◎기관총 난사 6명 사망·수백명 부상/“천안문사태이후 최악의 사건,중 확산 우려 【홍콩 외신 종합】 중국 노동자들의 폭동 유혈진압과 관련,미국 국무부와 의회 및 인권기구들은 이번 사건에 우려를 표명하면서 진상조사에 착수했고 중국의 심천당국과 호남성당국도 자체 진상을 조사중이라고 홍콩언론들이 6일 보도했다. 미국의 홍콩영사관과 광주영사관도 이번 사건 조사에 나섰으며 미의회 인권특별위원회 크리스 스미스 위원장은 『노동자 소요의 야만적 진압은 중국의 경제 자유화가 보다 많은 인권과 정치적 자유와 병행하지 않고있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 소재 인권단체인 「아시아인권감시」 마이크 젠드제직 의장도 『중국당국은 공안관계자들이 과도하고 부당하게 무력을 사용했는지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 남부 경제특구 광동성 심천에서 이번 폭동이 발생하자 폭동진압 경찰이 건설 노동자들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기관총을 발사하고 무차별 집단구타까지 가해 서홍창(42),두소둔(38)등 적어도 6명이 사망했으며조덕배(22) 등 최소 1백명 이상이 부상했다고 홍콩신문들이 6일 시체 사진들과 함께 사건 현장발로 보도했다. 이번 폭동은 지난 3일 상오 11시께 심천 북쪽 25㎞ 지점에 있는 용강구 갱자진용전촌에서 국영기업인 「호남성로교공사」 소속 호남성과 호북성 출신 건설 노동자수백명이 광동성내 심천∼산두간 고속도로 공사장의 통행 금지 표지를 무시하고 거만하게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오는 용전촌의 한 유력인사를 구타하고 오토바이를 압수함으로써 발생했다. 이 싸움은 곧 노동자와 이 지방유지를 비호하는 현지 경찰 및 마을 경비단 약 1천명이 삽과 쇠몽둥이 등을 들고 벌인 집단 난투극으로 확대됐으며 경관 한 명이 한노동자의 머리에 총을 겨누자 더욱 격화됐고 노동자들은 용전촌 공산당위원회 당사에 난입하고 파출소를 습격하여 당과 경찰 간부들을 폭행하고 차량을 포함한 기물들을 박살냈으며 이에 1백여명의 폭동 진압 경찰이 투입돼 노동자들에게 기관총을 발사해 2명이 현장에서 숨졌다. 이 사건은 89년 천안문사태후 발생한 가장 자극적인 유혈 진압 사건이나 중국당국과 언론은 폭동 확산을 우려해 이와 관련된 아무런 보도도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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