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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몸길이 9m’ 깃털있는 티라노사우루스 발견

    몸길이 9m로 추정되는 깃털 달린 신종 티라노 사우루스 화석이 발견돼 학계가 주목하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발견된 깃털 달린 육식공룡 화석 중 가장 큰 크기라 관심을 끌고 있는 것. 중국과학원과 캐나다 앨버타대학 등의 합동조사단은 중국 랴오닝성 익시안 지층에서 ‘티라노 사우루스상과’인 신종 공룡 화석을 발견했다고 5일자 영국 과학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발견된 화석은 모두 3마리로, 머리부터 꼬리에 걸쳐 있는 각각의 뼈 외에도 목과 팔은 물론 꼬리 주위에 길이 15~20cm의 섬유질 깃털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가장 큰 개체는 몸길이 9m, 무게 1.4톤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돼 다 자란 성체로 추정되며 나머지 2마리는 성장 중이었던 젊은 개체로 확인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공룡은 ‘깃털 달린 폭군’이란 뜻의 라틴어 유티라누스(Yutyrannus)와 ‘화려하다’란 뜻의 표준 중국어인 후아리(huali)를 합쳐 ‘유티라누스 후아리’로 명명됐다고 한다. 연구진에 따르면 이들 화석은 지화학 분석을 통해 백악기 초기인 약 1억 2500만년전 형성됐던 것으로 나타났으며 신종 공룡은 백악기 기간 중 가장 추웠던 초기 기온 10℃에 서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연구를 이끈 중국의 슈싱 박사는 “이들 공룡은 체온 유지를 위해 길고 뻣뻣한 많은 깃털을 갖고 있었으며 그 형태는 구조상 오늘날 병아리 깃털과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깃털 공룡은 모두 2.5m 이하로 작았다. 하지만 이번 깃털 달린 대형 육식 공룡의 발견으로 이들의 깃털은 체온 유지나 이성을 끌어당기는 장식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연구진은 현재 유티라누스 후아리의 깃털 색상을 규명하기 위해 연구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윤태희기자 th20022@seoul.co.kr
  • 이집트 검찰 ‘폭군’ 무바라크 사형 구형

    이집트 검찰이 5일(현지시간) 축출된 옛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에 대해 유혈 진압을 지시한 혐의로 사형을 구형했다. 무스타파 술레이만 이집트 검찰총장은 이날 카이로에서 열린 재판에서 “(무바라크의) 계획적 살인에 대해 사형을 구형한다.”고 말했다. 무바라크는 시민혁명이 진행된 지난해 1월 25일부터 2월 11일까지 18일 동안 실탄과 최루탄, 물대포, 고무탄 등을 쏘며 시위대를 강경 진압해 850여명의 사망자를 내고 집권 기간 부정 축재를 한 혐의로 기소됐다. 술레이만 총장은 “공공의 대통령은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꼬집으면서 “우리의 궁금증은 무바라크가 시위대를 살해하라고 지시했는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왜 폭력을 끝내기 위해 개입하지 못했는지에 있다.”고 덧붙였다. 이집트 검찰은 재판 과정에서 무바라크 전 대통령을 ‘폭군’으로 지칭하고 “무바라크가 실탄 사용을 허가했다.”고 주장하는 등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검찰은 이날 재판에서 무바라크 정권의 안보 책임자와 고위 경찰 지휘관 6명에 대해서도 사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집트 법원이 지난달 29일 시위대를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된 경찰관 5명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무바라크에게도 비슷한 판결이 내려지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궁예는 폭군인가, 권력의 희생자인가

    궁예는 폭군인가, 권력의 희생자인가

    24일 밤 10시 KBS 1TV ‘역사스페셜’은 궁예와 왕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다룬 ‘선각대사비의 증언-궁예는 폭군인가’를 방영한다. 흔히 알려진 내용에 따르면 궁예는 도술에 빠진 ‘얼빠진 중’이다. 왕건은 그런 궁예를 내쫓고 후삼국 통일을 이룩한 ‘위인’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역사는 언제나 승리자의 기록. 고려를 만들어 낸 왕건의 입장에서 궁예를 폄하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특히 왕건이 정통 지방 유력가 집안 출신에 복잡한 혼맥관계로 왕권 강화에 힘썼다는 점에 주목한다. 궁예의 혁명적 사회개혁 사상을 감당해 낼 자신이 없던 기득권층으로서는 궁예가 마뜩잖을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다. 궁예와는 불가능했던 모종의 타협이, 왕건과는 가능하지 않았겠느냐는 얘기다. 그런데 이는 추정의 영역이다. 뒤집어 보려 해도 궁예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은 탓이다. 분명 궁예는 후삼국이 서로 다투던 혼란기에 한반도 중부를 장악한 제왕이었음에도 그렇다. 그나마 남아 있는 기록은 폭군 궁예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전남 강진 무위사에 세워진 선각대사비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나왔다. 선각대사비는 고려의 건국을 예언한 인물로 꼽히는 선각대사의 행적을 기록해 둔 비석. 여기에 후삼국 통일과정과 고려 건국 비화를 새겨 두었는데, 왕을 뜻하는 의미로 금상(今上)과 대왕(大王)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금상은 당연히 현재의 왕인 왕건을 일컫는 말인데, 문제는 대왕이다. 예전에는 당연히 왕건일 것이라 봐 왔으나 최연식 목포대 교수가 이 단어가 궁예를 일컫는다는 해석을 내놓은 것. 금상과 대왕을 구분해 놓은 것은 이 때문 아니겠느냐는 주장이다. 이에 따라 고려 건국을 예언했다고 해서 왕건의 최측근으로 대접받는 선각대사도 실은 처음에는 궁예의 최측근이었다고 최 교수는 본다. 근거로 당나라에 10여년간 유학하고 돌아온 선각대사를 궁예가 선종의 큰스님으로 대우했고, 만나 보길 원했다는 점을 든다. 최 교수가 더 주목하는 것은 나주 점령의 의의다. 나주를 차지하는 것은 후삼국 통일의 핵심 가운데 하나다. 912년 나주 공략으로 한반도 중원을 장악한 궁예는 이를 기반으로 신라와 백제를 압박해 나간다. 그러나 궁예의 권력기반은 흔들렸고, 왕건은 918년 마침내 궁예를 제거하고 고려를 세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WHO&WHAT] 무궁무진한 미래 사극 주역들

    [WHO&WHAT] 무궁무진한 미래 사극 주역들

     등장인물이 칼에 찔리거나 물에 빠진다. 거의 매회 생명의 위기를 맞고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장면이 되풀이되지만 보는 사람들은 이미 그가 역경을 극복하고, 죽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심지어 그가 품은 꿈이 어떤 형태로 이뤄지는지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반면 때가 되면 누가 원해도 주인공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다. 비극을 희극으로 바꿀 수도 없고, 삼각관계의 결말도 정해져 있다. 드라마라면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는 ‘시청자의 요청’이나 ‘여론’도 통하지 않는다. 바로 끝이 정해진 드라마 사극의 운명이다.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엮어야 한다는 점에서 사극은 줄타기에 가깝다. 김종서와 수양대군이 사실은 사돈이었다는 줄거리로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렸던 드라마 ‘공주의 남자’는 김종서의 손자와 수양대군의 딸이 연인이었다는 몇 줄의 야사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그들 가문의 족보로 보면 엄연한 허구다.  이순신 장군을 한산대첩에서 미리 전사시키거나 명성황후가 사실은 살아있다는 식의 무리수만 두지 않는다면 사극은 무한한 상상력이 보장된다. 특히 주인공을 바꾸거나 조금만 틀어본다면 무궁무진한 시나리오를 얻을 수 있다. 역사는 승자의 시각에서 쓰이지만, 사극은 그렇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왕의 여자, 왕이 되지 못하고 스러져간 세자는 물론 아무런 공헌도 남기지 못하고 살다갔다는 기록만 남긴 사람도 얼마든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 사극이다. 수백년간 ‘성춘향과 이몽룡’의 시각에서 쓰인 춘향전이 방자의 시각에서 쓰이기만 해도 얼마나 달라지는지 이미 영화 ‘방자전’을 통해 입증되지 않았는가.  이번주 가상인터뷰 ‘후 앤드 왓’(Who&What)에서는 미래에 영화나 드라마의 중심이 될 사극의 주인공들을 찾아봤다. 시놉시스를 통해 이미 만들어진 사극에서는 주인공의 주변인, 엑스트라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려졌던 그들의 시각에서 역사를 한번 들여다보자.  드라마나 책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는 한글 창제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얘기가 그녀의 시가였던 죽산 안씨 문중 문헌에 기록돼 있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의 공으로만 알고 있는 한글 창제에 조선시대의 공주가 관여했다는 것은 누구나 흥미를 가질 만한 소재다. 정의공주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나올 수 있다는 기대가 생기지 않는가.  조선왕조 518년간 27명의 왕이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왕이 되지 못한 세자 11명이 있었다. 장자 계승을 토대로 한 유교적 사상이 지배했지만, 정작 맏아들이 왕위를 이은 것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등 6명에 불과하다. 순종은 요절한 형이 있는 차남이었다. 왕후 자리는 ‘국모’로 불리며 절대 비워서는 안 되는 자리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29년이나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문종은 세자 시절 두 명의 세자빈을 폐위시켰고, 홀로 왕위에 올라 세자빈을 왕후에 추증한 유일한 홀아비 왕이었다. ‘왜’라는 궁금증을 품으면 스토리가 될 소재는 얼마든지 있다. 여기 세 가지의 스토리를 꺼내봤다.    [심양의 왕자들] 청나라 볼모 8년… 소현·효종 형제와 그들 부부의 불운했던 삶  ●주요 등장인물  소현세자 이왕/세자빈 강씨/효종/효종비 인선왕후/인조/인조의 후궁 조소용  ●극적 요소  조선의 세자 27명 중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우유부단한 형 소현세자와 강인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동생 효종 형제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 남편만큼 불행했던 소현세자빈 강씨와 남편보다 더욱 강건했던 인선왕후의 시각에서 풀어간다.  ●시놉시스  스물네 살이 되어서야 세자로 봉해진 소현세자는 결혼 8년 만에 후사를 보지만 불과 몇 달 뒤 병자호란이 터진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의심 많은 아버지 인조는 전쟁 과정에서 신하들에게 책임을 미루는 무책임한 군주의 모습을 보이기 일쑤였고, 세자에게도 항상 짜증 섞인 태도로 일관한다. 삼전도의 굴욕과 함께 세자는 아버지와 대신들의 강권에 의해 “자진해서 적국에 볼모로 가겠다.”고 말해버린 후 울음을 터뜨리는 유약한 모습이었다. 세자 부부는 동생 봉림대군(훗날의 효종) 부부와 함께 볼모살이를 떠난다. 가는 길에 청나라 군대가 조선의 여러 고을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노비로 끌고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세자는 무력감을, 봉림대군은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정작 청나라에 도착한 후 세자는 돌변한다. 이국에서의 고생으로 몸은 무너져 갔지만 조국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진 세자로서의 책임감은 점차 커져간다. 반면 세자빈은 오랜 타국생활을 겪으면서 조선에서 건너온 물건을 팔아 재산을 모으기 시작한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인조는 아들과 며느리를 불신하고 점점 더 싸늘한 시선을 보내게 된다. 볼모살이 8년 만에 돌아온 세자를 인조는 ‘오랑캐 물이 들었다.’며 만나 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급기야 황제의 하사품이라며 세자가 내민 벼루를 세자의 머리를 향해 집어던졌다. 결국 귀국 두 달 만에 세자는 인조와 애첩인 조소용에 의해 독살당하고 만다. 인조는 예비 국모의 체통을 내팽개친 며느리도 가만두지 않았다. 인조의 수라상에 오른 전복구이에 독이 들었다는 누명을 씌워 세자빈 강씨를 폐위시켜 죽이고 만다.  청나라의 문물에 관심을 두고 배우려고 했던 형과 달리 봉림대군은 오로지 병자호란의 복수에만 관심이 있었다. 형의 죽음 이후 세자에 책봉되어, 효종이 된 봉림대군은 북벌을 위해 궁중 살림을 극도로 긴축했고, 인선왕후 역시 이에 앞장섰다. 인선왕후는 병자호란 당시 피신한 강화도에서 오랑캐에게 잡힐 처지가 되자 자결하려고 했고, 볼모살이 후 돌아와 왕후가 되자 청나라의 첩자 노릇을 하던 김자점과 조소용의 역모를 밝혀내 처단한 여걸이었다. 하지만 효종은 순치제의 등장으로 청나라가 더욱 강해지면서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죽었고, 인선왕후는 아들 현종이 그 뜻을 이루기를 바랐지만 현종은 그럴 뜻이 없었다. 결국 8년간이나 굴욕의 세월을 보낸 왕가의 형제와 그 부인들은 마지막까지 뜻하는 바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비운의 주인공들이 되고 만다.    [7일의 행복, 영원한 이별] 7일만에 폐위 단경왕후… 50년 넘도록 중종만을 그리며  ●주요 등장인물  단경왕후 신씨/중종  ●극적 요소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왕후로 단종비 정순왕후와 중종의 첫 번째 부인 단경왕후 신씨를 꼽는 이들이 많다. 왕의 이복동생에서 한순간 왕이 된 남편과, 남편을 왕으로 만든 세력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왕후 자리를 내놓아야 했던 비운의 여성. 그리고 그녀를 향한 임금의 순애보가 담긴 치마바위 이야기.  ●시놉시스  성종은 왕비였던 윤씨가 연산군을 낳고 폐위된 후 세 번째 왕후로 정현왕후 윤씨를 맞아 진성대군을 낳았다. 진성대군은 12살 때 13세인 신수근의 딸과 결혼했다. 왕이 되지 못하는 대군의 생활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고, 이들 부부 역시 이를 충실하게 지켰다. 특히 연산군이 폭군으로 변하면서 사람들은 진성대군에게 관심을 쏟기 시작했고, 진성대군은 더욱 은인자중했다. 어느 날 밤, 여러 장수와 조정 대신들이 진성대군의 집에 들이닥쳤다. 횃불을 켜 든 이들은 “반정을 일으켰으니, 대군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인 것을 알게 된 대군 부부는 조용히 결과를 기다렸고, 그 결과 하루아침에 왕좌에 올라 중종이 됐다. 왕비가 됐다는 기쁨을 누리고 있던 다음 날 아침, 단경왕후에게 급작스러운 소식이 날아든다. 아버지 신수근이 전날 밤 반정군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신수근의 여동생은 연산군의 비였고, 폐주의 처남인 아버지가 죽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다. 모든 가족들이 반정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노비로 끌려가는 와중에도 단경왕후는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중종이 보위에 오르고 7일이 지나자 반정 공신들은 단경왕후의 폐위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중종과 단경왕후는 보기 드물게 의좋은 부부였지만 칼로 정권을 잡은 반정 공신들 앞에서 그는 무력했다. 결국 단경왕후는 폐위돼 사가로 나가야 했고, 이때 중종은 19세, 왕후는 20세였다. 중종은 새로운 왕비 간택을 1년 가까이 미뤘지만, 신하들의 압박에 장경왕후 윤씨를 새 왕비로 맞았다. 그러나 중종은 항상 인왕산 산자락을 바라보면서 단경왕후를 그렸다. 이를 전해들은 신씨는 인왕산 바위에 자신의 분홍치마를 펼쳐놓고 남편이 자신을 잊지 않기를 바랐다. 10년 후 장경왕후가 원자를 낳고 죽자 일부 대신들이 다시 단경왕후를 불러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반정 공신들의 힘은 여전히 막강했고, 결국 신씨는 잊혀졌다. 고작 7일간의 왕후 생활을 하고 스무 살에 왕궁에서 쫓겨난 단경왕후는 무려 71세까지 50년 넘게 남편만을 그리며 살았다.    [왕궁의 스캔들] 조선 최초 세자 이방석은 여색에 빠지고 세자빈은 불륜을  ●주요 등장인물  이방석/이성계/태종/정도전/세자빈 유씨/이만  ●극적 요소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국정의 기틀을 잡은 강인한 왕 태종과의 관계에서 희생양이 된 조선 최초의 세자 이방석. 어린 나이에 형에게 목숨을 잃기까지 자신의 의지는 아무것도 없었던 불운한 그와, 조선왕실 최초의 스캔들을 일으킨 세자빈 유씨를 통해 왕실의 비틀어진 모습을 들여다본다.  ●시놉시스  북방의 무인 이성계는 두 번째 부인 강씨(신덕왕후)와의 사이에서 48세에 막내아들을 본다. 방석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아이는 조선이 개국했을 때 11세였고, 한 달 만에 조선 최초의 세자에 책봉된다. 어머니 신덕왕후와 개국공신들이 장성해 사병을 가진 이방원(태종)과 이방간 등을 경계한 덕분이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장군이 되겠다는 꿈을 꿨던 방석은 본인의 자리를 탐탁지 않아 했다. 총명하지 않은 방석은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고, 어느새 여색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궁궐을 나서 기생집에 가고, 사냥 대신 민간의 가축을 쏘아 죽이는 일도 허다했다. 한편 방석에게는 나이가 한참 많은 세자빈 유씨가 있었다. 어린아이와 결혼해 억지로 궁궐에 끌려온 유씨는 마음 줄 곳을 찾지 못하다가 궁궐의 내시 이만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철없는 망나니 방석보다는 정감 있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주는 이만에게 마음이 끌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개국 초기, 궁궐 안팎이 어지러운 상황에서 몰래 불륜을 이어가던 이들의 행동은 결국 태조에게 발각되고, 끝을 맞게 된다. 태조는 이만을 참수하고 세자빈은 폐서인해 사가로 내쫓았다. 조선왕조에 처음으로 기록된 불륜스토리의 결말이었다.  방석을 앞세운 정도전 등 일부 개국공신들은 태조의 장성한 왕자들이 거느린 사병이 거슬리기 시작한다. 결국 정도전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요동 정벌을 기획했고, 왕자들이 사병 차출을 거부하자 관직을 빼앗고 사병까지 몰수했다. 그러나 불과 17일 만에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태조에게 세자 폐위를 요구했다. 경각에 달린 방석의 목숨을 살려 주는 조건으로 태조는 영안군(정종)을 세자로 삼았다. 그러나 방석은 대궐 밖으로 나서는 순간 이방원 일가의 칼을 맞고 스러졌다. 임금의 적자였던 방석이 ‘대군’의 위치를 돌려받은 것은 그로부터 270여년이 흐른 숙종 6년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올라, 자유로움을 갈망하던 철부지 세자는 ‘조선왕조의 첫 세자’이자 ‘권력투쟁의 희생양’으로만 남았다. 폐서인된 세자빈 유씨가 그 후 어떻게 살았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참고문헌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왕후들(이수광·다산북스)  왕을 낳은 후궁들(최선경·김영사)  왕이 못된 세자들(함규진·김영사)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박영규·들녘)  정의공주(한소진·해냄출판사)  소현세자(박안식·예담) 서울신문은 매주 1회 독특한 포맷의 가상 인터뷰 [WHO&WHAT(후 앤드 왓)]을 1개면에 걸쳐 연재하고 있습니다. 일반 신문기사로는 다루기 힘든 동서고금의 지식과 역사의 정수들을 만남 또는 대담의 형식을 통해 알기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청소년, 어른 모두에게 즐겁고 색다른 지식의 장이 될 것으로 자부합니다. 특히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훌륭한 논술교재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WHO&WHAT] “퀴즈쇼서 인간에 완승한 슈퍼컴 왓슨(Watson)을 만나다” [WHO&WHAT] 무덤에서 불러낸 독재자 4인의 가상만찬 ‘재스민 혁명’을 논하다 [WHO&WHAT] 천재소년 송유근, ‘우주비행 성공 50주년’ 맞아 유리 가가린을 만나다 [WHO&WHAT] ‘슈퍼히어로’ 스파이더맨, 정신과 전문의 김상준 원장과 상담하다 [WHO&WHAT] 지구수비대 지원한 인간형 로봇 ‘마루’ “아톰·태권V처럼 지구 지켜서…” [WHO&WHAT] ‘최악’ 통념 B형 男기자, 혈액형의 아버지 ‘란트슈타이너’에 따지다 [WHO&WHAT] ‘전 세계 여성의 로망’ 버킨백을 만나다 [WHO&WHAT] 선택 따라 전혀 다른 결과…”이렇게 검색하면 진리가 밝혀질까?” [WHO&WHAT] “남느냐, 떠나느냐” 희곡으로 본 어느 서재 도서들의 열띤 논쟁 [WHO&WHAT] ‘위대한 유산’ 남긴 간송미술관의 전형필, 그리고 우피치미술관의 메디치 [WHO&WHAT]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 그는 왜 라파엘로를 죽이고 싶었을까 [WHO&WHAT] ‘美우주왕복선은 초대형 폭탄이나 마찬가지’ 물리학자 파인먼의 폭로 [WHO&WHAT] 외규장각 도서 귀환으로 본 약탈문화재의 ‘수구초심(首丘初心)’ [WHO&WHAT] “재능만 주고 사랑은 주지 않던 나쁜 부모들” 유명 인사들의 회상기 [WHO&WHAT] 인류역사를 바꾼 ‘억세게 운 좋은 사내들’ 서바이벌 현장…과연 승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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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HO&WHAT] 미래 사극의 주인공을 만나다

    [WHO&WHAT] 미래 사극의 주인공을 만나다

     등장인물이 칼에 찔리거나 물에 빠진다. 거의 매회 생명의 위기를 맞고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장면이 되풀이되지만 보는 사람들은 이미 그가 역경을 극복하고, 죽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심지어 그가 품은 꿈이 어떤 형태로 이뤄지는지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반면 때가 되면 누가 원해도 주인공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다. 비극을 희극으로 바꿀 수도 없고, 삼각관계의 결말도 정해져 있다. 드라마라면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는 ‘시청자의 요청’이나 ‘여론’도 통하지 않는다. 바로 끝이 정해진 드라마 사극의 운명이다.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엮어야 한다는 점에서 사극은 줄타기에 가깝다. 김종서와 수양대군이 사실은 사돈이었다는 줄거리로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렸던 드라마 ‘공주의 남자’는 김종서의 손자와 수양대군의 딸이 연인이었다는 몇 줄의 야사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그들 가문의 족보로 보면 엄연한 허구다.  이순신 장군을 한산대첩에서 미리 전사시키거나 명성황후가 사실은 살아있다는 식의 무리수만 두지 않는다면 사극은 무한한 상상력이 보장된다. 특히 주인공을 바꾸거나 조금만 틀어본다면 무궁무진한 시나리오를 얻을 수 있다. 역사는 승자의 시각에서 쓰이지만, 사극은 그렇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왕의 여자, 왕이 되지 못하고 스러져간 세자는 물론 아무런 공헌도 남기지 못하고 살다갔다는 기록만 남긴 사람도 얼마든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 사극이다. 수백년간 ‘성춘향과 이몽룡’의 시각에서 쓰인 춘향전이 방자의 시각에서 쓰이기만 해도 얼마나 달라지는지 이미 영화 ‘방자전’을 통해 입증되지 않았는가.  이번주 가상인터뷰 ‘후 앤드 왓’(Who&What)에서는 미래에 영화나 드라마의 중심이 될 사극의 주인공들을 찾아봤다. 시놉시스를 통해 이미 만들어진 사극에서는 주인공의 주변인, 엑스트라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려졌던 그들의 시각에서 역사를 한번 들여다보자.  드라마나 책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는 한글 창제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얘기가 그녀의 시가였던 죽산 안씨 문중 문헌에 기록돼 있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의 공으로만 알고 있는 한글 창제에 조선시대의 공주가 관여했다는 것은 누구나 흥미를 가질 만한 소재다. 정의공주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나올 수 있다는 기대가 생기지 않는가.  조선왕조 518년간 27명의 왕이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왕이 되지 못한 세자 11명이 있었다. 장자 계승을 토대로 한 유교적 사상이 지배했지만, 정작 맏아들이 왕위를 이은 것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등 6명에 불과하다. 순종은 요절한 형이 있는 차남이었다. 왕후 자리는 ‘국모’로 불리며 절대 비워서는 안 되는 자리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29년이나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문종은 세자 시절 두 명의 세자빈을 폐위시켰고, 홀로 왕위에 올라 세자빈을 왕후에 추증한 유일한 홀아비 왕이었다. ‘왜’라는 궁금증을 품으면 스토리가 될 소재는 얼마든지 있다. 여기 세 가지의 스토리를 꺼내봤다.    ##심양의 왕자들  ●주요 등장인물  소현세자 이왕/세자빈 강씨/효종/효종비 인선왕후/인조/인조의 후궁 조소용  ●극적 요소  조선의 세자 27명 중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우유부단한 형 소현세자와 강인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동생 효종 형제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 남편만큼 불행했던 소현세자빈 강씨와 남편보다 더욱 강건했던 인선왕후의 시각에서 풀어간다.  ●시놉시스  스물네 살이 되어서야 세자로 봉해진 소현세자는 결혼 8년 만에 후사를 보지만 불과 몇 달 뒤 병자호란이 터진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의심 많은 아버지 인조는 전쟁 과정에서 신하들에게 책임을 미루는 무책임한 군주의 모습을 보이기 일쑤였고, 세자에게도 항상 짜증 섞인 태도로 일관한다. 삼전도의 굴욕과 함께 세자는 아버지와 대신들의 강권에 의해 “자진해서 적국에 볼모로 가겠다.”고 말해버린 후 울음을 터뜨리는 유약한 모습이었다. 세자 부부는 동생 봉림대군(훗날의 효종) 부부와 함께 볼모살이를 떠난다. 가는 길에 청나라 군대가 조선의 여러 고을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노비로 끌고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세자는 무력감을, 봉림대군은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정작 청나라에 도착한 후 세자는 돌변한다. 이국에서의 고생으로 몸은 무너져 갔지만 조국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진 세자로서의 책임감은 점차 커져간다. 반면 세자빈은 오랜 타국생활을 겪으면서 조선에서 건너온 물건을 팔아 재산을 모으기 시작한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인조는 아들과 며느리를 불신하고 점점 더 싸늘한 시선을 보내게 된다. 볼모살이 8년 만에 돌아온 세자를 인조는 ‘오랑캐 물이 들었다.’며 만나 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급기야 황제의 하사품이라며 세자가 내민 벼루를 세자의 머리를 향해 집어던졌다. 결국 귀국 두 달 만에 세자는 인조와 애첩인 조소용에 의해 독살당하고 만다. 인조는 예비 국모의 체통을 내팽개친 며느리도 가만두지 않았다. 인조의 수라상에 오른 전복구이에 독이 들었다는 누명을 씌워 세자빈 강씨를 폐위시켜 죽이고 만다.  청나라의 문물에 관심을 두고 배우려고 했던 형과 달리 봉림대군은 오로지 병자호란의 복수에만 관심이 있었다. 형의 죽음 이후 세자에 책봉되어, 효종이 된 봉림대군은 북벌을 위해 궁중 살림을 극도로 긴축했고, 인선왕후 역시 이에 앞장섰다. 인선왕후는 병자호란 당시 피신한 강화도에서 오랑캐에게 잡힐 처지가 되자 자결하려고 했고, 볼모살이 후 돌아와 왕후가 되자 청나라의 첩자 노릇을 하던 김자점과 조소용의 역모를 밝혀내 처단한 여걸이었다. 하지만 효종은 순치제의 등장으로 청나라가 더욱 강해지면서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죽었고, 인선왕후는 아들 현종이 그 뜻을 이루기를 바랐지만 현종은 그럴 뜻이 없었다. 결국 8년간이나 굴욕의 세월을 보낸 왕가의 형제와 그 부인들은 마지막까지 뜻하는 바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비운의 주인공들이 되고 만다.    ##7일의 행복, 영원한 이별  ●주요 등장인물  단경왕후 신씨/중종  ●극적 요소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왕후로 단종비 정순왕후와 중종의 첫 번째 부인 단경왕후 신씨를 꼽는 이들이 많다. 왕의 이복동생에서 한순간 왕이 된 남편과, 남편을 왕으로 만든 세력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왕후 자리를 내놓아야 했던 비운의 여성. 그리고 그녀를 향한 임금의 순애보가 담긴 치마바위 이야기.  ●시놉시스  성종은 왕비였던 윤씨가 연산군을 낳고 폐위된 후 세 번째 왕후로 정현왕후 윤씨를 맞아 진성대군을 낳았다. 진성대군은 12살 때 13세인 신수근의 딸과 결혼했다. 왕이 되지 못하는 대군의 생활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고, 이들 부부 역시 이를 충실하게 지켰다. 특히 연산군이 폭군으로 변하면서 사람들은 진성대군에게 관심을 쏟기 시작했고, 진성대군은 더욱 은인자중했다. 어느 날 밤, 여러 장수와 조정 대신들이 진성대군의 집에 들이닥쳤다. 횃불을 켜 든 이들은 “반정을 일으켰으니, 대군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인 것을 알게 된 대군 부부는 조용히 결과를 기다렸고, 그 결과 하루아침에 왕좌에 올라 중종이 됐다. 왕비가 됐다는 기쁨을 누리고 있던 다음 날 아침, 단경왕후에게 급작스러운 소식이 날아든다. 아버지 신수근이 전날 밤 반정군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신수근의 여동생은 연산군의 비였고, 폐주의 처남인 아버지가 죽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다. 모든 가족들이 반정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노비로 끌려가는 와중에도 단경왕후는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중종이 보위에 오르고 7일이 지나자 반정 공신들은 단경왕후의 폐위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중종과 단경왕후는 보기 드물게 의좋은 부부였지만 칼로 정권을 잡은 반정 공신들 앞에서 그는 무력했다. 결국 단경왕후는 폐위돼 사가로 나가야 했고, 이때 중종은 19세, 왕후는 20세였다. 중종은 새로운 왕비 간택을 1년 가까이 미뤘지만, 신하들의 압박에 장경왕후 윤씨를 새 왕비로 맞았다. 그러나 중종은 항상 인왕산 산자락을 바라보면서 단경왕후를 그렸다. 이를 전해들은 신씨는 인왕산 바위에 자신의 분홍치마를 펼쳐놓고 남편이 자신을 잊지 않기를 바랐다. 10년 후 장경왕후가 원자를 낳고 죽자 일부 대신들이 다시 단경왕후를 불러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반정 공신들의 힘은 여전히 막강했고, 결국 신씨는 잊혀졌다. 고작 7일간의 왕후 생활을 하고 스무 살에 왕궁에서 쫓겨난 단경왕후는 무려 71세까지 50년 넘게 남편만을 그리며 살았다.    ##왕궁의 스캔들  ●주요 등장인물  이방석/이성계/태종/정도전/세자빈 유씨/이만  ●극적 요소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국정의 기틀을 잡은 강인한 왕 태종과의 관계에서 희생양이 된 조선 최초의 세자 이방석. 어린 나이에 형에게 목숨을 잃기까지 자신의 의지는 아무것도 없었던 불운한 그와, 조선왕실 최초의 스캔들을 일으킨 세자빈 유씨를 통해 왕실의 비틀어진 모습을 들여다본다.  ●시놉시스  북방의 무인 이성계는 두 번째 부인 강씨(신덕왕후)와의 사이에서 48세에 막내아들을 본다. 방석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아이는 조선이 개국했을 때 11세였고, 한 달 만에 조선 최초의 세자에 책봉된다. 어머니 신덕왕후와 개국공신들이 장성해 사병을 가진 이방원(태종)과 이방간 등을 경계한 덕분이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장군이 되겠다는 꿈을 꿨던 방석은 본인의 자리를 탐탁지 않아 했다. 총명하지 않은 방석은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고, 어느새 여색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궁궐을 나서 기생집에 가고, 사냥 대신 민간의 가축을 쏘아 죽이는 일도 허다했다. 한편 방석에게는 나이가 한참 많은 세자빈 유씨가 있었다. 어린아이와 결혼해 억지로 궁궐에 끌려온 유씨는 마음 줄 곳을 찾지 못하다가 궁궐의 내시 이만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철없는 망나니 방석보다는 정감 있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주는 이만에게 마음이 끌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개국 초기, 궁궐 안팎이 어지러운 상황에서 몰래 불륜을 이어가던 이들의 행동은 결국 태조에게 발각되고, 끝을 맞게 된다. 태조는 이만을 참수하고 세자빈은 폐서인해 사가로 내쫓았다. 조선왕조에 처음으로 기록된 불륜스토리의 결말이었다.  방석을 앞세운 정도전 등 일부 개국공신들은 태조의 장성한 왕자들이 거느린 사병이 거슬리기 시작한다. 결국 정도전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요동 정벌을 기획했고, 왕자들이 사병 차출을 거부하자 관직을 빼앗고 사병까지 몰수했다. 그러나 불과 17일 만에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태조에게 세자 폐위를 요구했다. 경각에 달린 방석의 목숨을 살려 주는 조건으로 태조는 영안군(정종)을 세자로 삼았다. 그러나 방석은 대궐 밖으로 나서는 순간 이방원 일가의 칼을 맞고 스러졌다. 임금의 적자였던 방석이 ‘대군’의 위치를 돌려받은 것은 그로부터 270여년이 흐른 숙종 6년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올라, 자유로움을 갈망하던 철부지 세자는 ‘조선왕조의 첫 세자’이자 ‘권력투쟁의 희생양’으로만 남았다. 폐서인된 세자빈 유씨가 그 후 어떻게 살았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참고문헌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왕후들(이수광·다산북스)  왕을 낳은 후궁들(최선경·김영사)  왕이 못된 세자들(함규진·김영사)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박영규·들녘)  정의공주(한소진·해냄출판사)  소현세자(박안식·예담)
  • [씨줄날줄] 푸틴과 재벌/최광숙 논설위원

    “당장 그 보좌관을 청와대에서 내보내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뒤늦게 재벌가 패밀리가 청와대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일하는 것을 알고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재벌가 일원이 경제 정책을 비롯한 국정 전반에 대해 모든 보고를 받는 비서실장의 측근으로 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전 전 대통령의 뜻이었다는 게 당시 비서실장을 지낸 인사의 회고다. 최고 권력자와 재벌의 관계는 변화무쌍한 것 같다. 가까워 특혜를 보기도 하고, 눈 밖에 나면 끝장나기도 한다. 전두환 정권 때 ‘왕자표 고무신’으로 출발했던 국제그룹이 공중분해된 것도 사실 ‘괘씸죄’에 걸린 것이라는 게 재계의 정설인 것을 보면 그렇다. 당시 재계에서는 “영부인이 하는 일에 소홀했다.” “대통령 주최 만찬에 양정모 회장이 폭설로 늦게 참석했다가 밉보였다.”는 등 소문이 떠돌았다. 정권에 밉보여 재벌이 해체된 경우라면 러시아를 빼놓을 수 없다. 푸틴 대통령은 당선 이후 ‘올리가리히’로 불리던 신흥재벌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기업·재산을 빼앗긴 신흥재벌 베레조프스키와 구진스키 등은 영국 등으로 아예 도망을 가야 했다. 한때 ‘세계 최대 갑부’로 통하던 석유회사 유코스의 호도르코프스키 전 회장은 워낙 푸틴에게 찍혀 회사도 날리고, 횡령 등의 혐의로 13년의 징역형을 받고 현재 시베리아 감옥에 있다. 그들은 옐친 시절 정경유착으로 국영기업이던 원유·가스·광물 등 국가 기간산업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인물들이다. 그들의 도움으로 대통령이 된 푸틴이지만 그는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하는 것을 눈 감아주지 않았다. 서방국가에서는 그런 그를 정적을 과감히 제거하고 언론을 탄압하는, 잔인한 권위주의 폭군으로 여겼지만 러시아 국민들의 반응은 달랐다. 옛 소련 붕괴 후 정치적·경제적 혼란에 빠진 러시아를 ‘강한 러시아’로 키웠던 푸틴의 반재벌 행보는 총리 시절에도 이어져 국민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던 것이다. 2009년 6월 푸틴 총리는 금융위기로 3개월째 조업을 중단하고 임금을 체불한 공장을 찾아가 공장 소유주인 러시아 최고 부호 데리파스카에게 “(공장 재가동을 위한) 합의서에 서명하라.”고 소리치며 합의문과 펜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푸틴 앞에서 벌벌 떨며 서명하던 재벌의 모습은 TV에 생중계되기도 했다. 자본주의 국가의 지도자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약자의 편에 선 것으로 비춰지는 그 모습에서 신선함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진시황 폭군인가, 영웅인가

    중국은 왜 유럽처럼 다양한 민족과 언어와 국가로 나뉘지 않고 전제적이고 획일적인 통일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다양하고 이질적인 민족과 문화가 산재해 있었던 드넓은 유라시아 대륙의 상당 부분이 어떻게 중화제국에 의해 통일성과 일관성을 갖고 굴러올 수 있었을까. ‘진시황 평전’은 이 같은 질문에 적지 않은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 책은 진시황 개인에 관한 단순한 전기가 아니다. 격동의 전국시대에 서쪽 변방의 작은 제후국이 어떻게 독립된 나라로 발전했으며 전통적인 강대국들을 꺾고 천하 통일을 이뤘는지, 어떻게 새 시대를 열었는지를 역사서에 근거해 기록했다. 저자는 역사학자인 장펀톈(張分田) 중국 난카이(南開)대학 중국사회사연구센터 교수. 한글판은 중국 런민(人民)출판사 ‘중국역대제왕전기’ 시리즈 중 하나인 ‘진시황전’(秦始皇傳) 2007년판을 완역한 것이다. 저자는 역사 문헌과 연구물들을 근거로 들며 “중국 문명의 틀을 만들었다는 한나라는 진나라의 여러 제도를 계승했다.”(漢承秦制)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진나라의 역사상 지위가 한나라의 원형, 기본 틀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 뒤 2000년 동안 ‘진나라 제도’(秦制)의 기본 원칙과 제도가 중국 역사를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야별로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이와 함께 500년의 춘추전국시대는 진나라의 역사로 수렴되고, 진의 역사는 진시황과 그의 가족사라고 지적하면서 진시황을 비난의 대상이 아닌 새로운 질서의 창조자로 자리매김하고 재조명하려 했다. 또 진시황을 사회역사적인 의미를 포함해 다각도로 분석했다. “세계사에서 그는 최초로 진정한 국가와 법의 이론 체계를 현실화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제국을 세운 대표적인 인물이며 춘추전국의 사회적·역사적 변혁을 완성한 주인공이다.” 저자는 진시황을 법제사의 관점에서는 최초로 ‘법치’를 실천한 황제이지만 법가를 중심으로 각종 사상가들을 포용하고 수용한 ‘잡가(雜家)적인 황제’였다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그가 추진했던 모든 정책과 사업은 과거 춘추전국시대에 각 제후국에서 시행했던 각종 변법, 즉 주나라를 정통으로 삼는 사상 및 문화적 전통과 각 제후국들이 시도했던 각종 법률, 제도의 개혁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라고 지적했다. 저자는 또 진시황을 영웅과 폭군의 일면을 모두 지닌 야누스적인 인물이었다고 정의하면서도 그의 정치를 폭압으로만 해석하려는 경향에는 반대했다. 당시 선진국이었던 초나라, 제나라 등 6국의 연합 전선을 무너뜨리고 통일한 과정과 전략 등 통일을 위한 진시황의 정치·군사·외교 책략도 곁들였다. 4만 8000원. 이석우 편집위원 jun88@seoul.co.kr
  • 시대 초월한 설득의 예술

    우리 앞에 첩첩산중처럼 놓여져 있는 난관과 현실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강한 힘으로 우리를 누르려고 눈을 부릅뜨고 다가오는 힘센 자들과 ‘탐욕스러운 폭군들’을 어떻게 대응하고 설득시켜, 우리의 자존을 지켜 나갈 수 있을까. 중국 전국시대 고전 귀곡자(鬼谷子)에서 저자는 그 답을 찾았다. ‘귀곡자 교양강의’(심의용 지음, 돌베개펴냄)는 주역을 전공한 고전학자인 저자가 귀곡자의 원래 뜻과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현대적인 상황과 철학 지식을 바탕으로 풀이해 놓은 저작이다. 저자는 낙관도 비관도 않는 객관적이고 치밀한 현실 인식이 귀곡자의 출발점이라고 지적하면서 왜 이 책이 고대 중국 외교관들에게 교과서가 될 수 있었는지를 살폈다. 또 “현실 지형과 객관적 조건을 냉정하고 면밀하게 파악하고 그곳에 잠재된 가능성을 창출해 낼 수 있는 현실 전략의 구사”가 귀곡자가 우리에게 전하려 하는 가르침의 요체라고 강조한다. 현실 상황을 파악하고 역동적 평형을 유지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유연한 실천 능력을 통해 ‘현대의 전국시대’를 사는 독자들이 살아남고, 자존을 지키라고 충고한다. 역대 중국 유학자들은 귀곡자를 소인배와 음모의 책, 권모술수의 궤변으로 폄하했다. 그러나 저자는 귀곡자를 재해석했고, 그를 종횡가의 비조 자리로 복귀시켰다. 또 유가에 의해 저평가된 종횡가들이 당시 정치에서 뛰어난 현실 감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했음을 조명했다. 그들이 주관적 도덕성에 집착하거나 신분 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엄격한 분석과 사고로 현실 개혁과 진보를 이룬 행동하는 집단이라고 평했다. 전쟁에서도 금도와 규칙을 지키고 존중했던 춘추시대에서 생존만이 중요한 아비규환의 전국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을 지켜봤던 귀곡자의 원저자(책의 이름과 같은 귀곡자)는 급변하는 상황속에서, 자신(나라)을 지키는 길이 상대방의 마음을 흔쾌히 움직일 수 있는 설득과 유세의 힘이라고 봤다. 그리고 내면을 드러내는 통로인 입을 통해 정보와 사실을 부각시키고 은폐하는 방법으로 전략적 주도권을 잡고, 쟁점을 통합하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정보를 모으고 파악하고, 상대 의도를 어루만지면서 마음 속의 생각을 이끌어 내라고 조언한다. 드러냄과 감춤, 열림과 닫힘의 예술인 폐합술을 통해 상대방을 움직이고, 틈새를 통해 감춰진 잠재성을 읽고, 그 위험을 통제하고 잠재성을 실현시키라고 조언한다. “틈새는 기회고, 위험의 감수이며,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려는 정치적 도전”이라고 말한다. 1만 2000원. 이석우 편집위원 jun88@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수상록’의 미셸 드 몽테뉴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수상록’의 미셸 드 몽테뉴

    1560년, 수년간 ‘진짜’ 마르탱 게르 행세를 한 ‘가짜’ 마르탱 게르에 대한 재판이 파리 고등법원에서 진행되었다.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라는 책과 영화로도 잘 알려진 이 희대의 사건은, 재판 말미에 진짜 마르탱 게르가 출현하는 대반전을 거쳐 가짜 마르탱 게르가 처형당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당시 보르도 고등법원에서 근무하면서 이 사건을 전해들은 몽테뉴는, 이 사건의 진실을 법으로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가짜 마르탱 게르는 최선을 다해 진짜 마르탱 게르로 살았고, 진짜의 죽마고우도 아내도 모두 가짜 마르탱 게르를 진짜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진실은 대체 어디에 존재하는가. 법이 진실을 판단할 권리와 능력이 있는가. 몽테뉴가 보기에 마르탱 게르 사건은 법이나 지성으로 판단할 수 없는 인간의 모순성과 삶의 불가해함, 사실을 넘어선 진실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가톨릭이냐 프로테스탄트냐, 루터파냐 칼뱅파냐를 기준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에 ‘가짜 마르탱 게르’처럼 온전히 자신의 행위와 말과 정신으로 자립(自立)하기를 갈망했던 자. 삶의 진실을 신에게 묻지 않고 자신의 걸음 속에 담고자 했던 자. 스스로 미친 자가 되어 길을 떠난 돈키호테보다 조금 앞서, 여기, 자신을 탐색함으로써 광기의 시대를 온전히 살아낸 자, 몽테뉴가 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네가 어떤 일을 하든지, 네 힘을 다해서 하여라. 네가 장차 들어갈 무덤 속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다.” 몽테뉴는 ‘전도서’의 구절을 12개나 발췌하여 서재 천장에 명문으로 새겨 놓았다고 한다. 몽테뉴가 인용한 유일한 성서 구절이다. 살벌한 ‘종교의 시대’에 몽테뉴는 대담하게도,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자신의 무기로 삼았다. 그는 고전 속에서 자기 시대와 인간을 읽었으며, 고전을 통해 전란의 늪에서 재생(Re-naissance)할 수 있었다. 흔히 르네상스를 찬란한 빛과 색의 시대로 상상하지만, 정작 16세기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전쟁과 죽음이다. 1598년에 낭트칙령이 공포됨으로써 기나긴 종교전쟁이 막을 내리기 전까지, 가톨릭과 이에 ‘항의’하는 프로테스탄트, 종교를 내세운 왕과 귀족들의 대규모 살육경쟁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거기에 기근과 페스트까지, 16세기는 흡사 태피스트리처럼, 화려한 문예부흥의 뒷면에 상상할 수도 없는 상처와 모순을 깔고 있었다. 휴머니즘? 그런 건 헛되고 헛된 이상에 불과했고, ‘그리스도의 이름’은 살육에 필요한 명분일 뿐이었다. “기독교의 적개심만큼 격렬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의 신앙심은 우리의 증오심, 잔혹함, 야심, 탐혹, 중상모략, 반역의 성향을 조장할 때는 참으로 놀랄 만한 힘을 발휘한다. 우리의 종교는 악덕을 근절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오히려 악덕을 감추고 키우고 부추기고 있다.” 전란의 한복판에서 몽테뉴는 그리스, 로마인들의 절제된 태도를 견지한 채 광신의 결과를 묵묵히 응시했다. 에라스무스의 자유주의 교육을 신봉하고, 칼 대신 펜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간파한 부친은 몽테뉴에게 두 살 때부터 라틴어를 교육시킨다. 우리로 치면, 모두가 한글을 쓰는 시대에 한문으로만 말하고 쓰게 하는, 기이한 조기교육을 실행한 셈이다. 몽테뉴가 어떤 종교나 정파와도 거리를 두며 보신(保身)할 수 있었던 데는 부친의 이런 ‘반시대적’ 조기교육이 공헌한 바가 크다. 청년기에 파리 왕립교수단에서 그리스 철학을 공부한 몽테뉴는 유학을 마치고 고향 보르도로 돌아온 1557년부터 고등법원에서 조세심의관으로 근무하게 된다. 어떤 절차로 법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법관이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법률이 신뢰를 얻는 것은 공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법률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법률이 가진 권위의 불가사의한 근거이고, 그 밖에는 아무 근거도 없다. 어쨌든 늘 공허하고 판단이 불안정한 인간이 법률을 만든다.” 몽테뉴의 ‘몽테뉴다움’이 여기 있다. 그는 한번도 자신이 서 있는 지반을 확신한 적이 없다. 법관으로 근무할 때는 법의 판단력을, 파리 궁정에서 왕의 시종무관으로 근무할 때는 국가와 군주권력의 토대를 의심했다. 가톨릭이었지만 프로테스탄트에 적대적이지 않았고, 또 한편으로는 ‘새것’을 만들려는 일체의 개혁주의에 진저리를 쳤다. 확신으로 움직이는 제도와 권력에 대한 주의 깊은 거리감 때문인지, 후대는 그를 비겁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몽테뉴는, 모든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는 ‘유토피아’를 상상한 대가로 처형된 토머스 모어보다는, “우리 인간은 얻어맞거나 걷어차이면서도 왜 이처럼 참을성 있게 폭군의 굴레와 족쇄를 감수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했던 에티엔 드 라 보에시에 주목한다. 나는, 인간은 왜 이토록 무력한가. 인간이란 모순으로 가득 찬 존재고, “자신에 대해 절대적으로, 단순하게, 결정적으로, 혼란이나 혼동 없이, 단 한마디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자신을 끔찍하게 미워했던 어머니와, 동생과 바람난 아내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음경을 도려내는 듯한 통증을 동반한 신장결석증을 앓으면서도 병원 한번 찾지 않고 고통을 감내한 것도, 어떤 것도(그것이 심지어 병이나 죽음일지라도) 함부로 판단하거나 내쳐서는 안 된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일생의 화두는 이런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13년간의 법관 생활을 마치고 마흔 살이 된 몽테뉴는 고향으로 내려가 이 문제에 대한 탐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에세’, 전장에서의 산책 “무언가를 찾는 사람은 누구나 ‘찾아냈다’, ‘찾을 수 없다’, ‘아직 찾고 있다’ 가운데 어느 하나로 귀착한다.” 몽테뉴가 주목한 것은 ‘아직 찾고 있는 중’이었던 회의론자들이다. “확실한 것은 하나도 입증될 수 없다. 판단의 주체도, 판단의 대상도 끊임없는 변화와 동요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성을 필요로 하는 건, 결정하고 선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전제를 의심하기 위해서다. “회의론자는 온갖 의견들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반대되는 판단은 나를 분개시키지도 흥분시키지도 않고, 오히려 나를 눈뜨게 하고 단련할 뿐이다.” 이것이 몽테뉴 식의 회의였고, 때문에 그의 회의는 가볍고 명랑하다. 1572년부터 거의 죽기 직전까지 수정과 첨삭을 거듭하며 집필한 ‘에세’는 그의 명랑하고도 예리한 질문들로 가득하다. 흔히 ‘수상록’으로 번역되는 ‘에세’(Les Essais)는 몽테뉴 자신의 말을 빌리면 “정신의 잡동사니”이자 사유 시험(essai)이라고 할 수 있다. 몽테뉴는 “평화가 그 온전한 모습을 보여준 일이 전혀 없던” 전쟁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즉흥적 사유를 기록하는 일에 몰두한다. “여기에 쓰고 있는 것은 오로지 내 타고난 능력의 시험(essai)일 뿐, 후천적으로 얻은 능력의 시험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남들이 내 무지를 공격해도 별로 곤란할 건 없다. 무지의 자각이야말로 판단력을 갖추고 있다는 가장 아름답고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무리 흐트러진 걸음걸이라도 평소의 자연스러운 내 걸음걸이를 보여주고 싶다.” 문체에서 느껴지는 극도의 침착함과 단순함, 종종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명랑한 어조 때문에 ‘에세’를 읽으며 화약냄새와 총포 소리를 연상하기란 쉽지 않다. 몽테뉴는 평가하고 판단하기보다는, 판단을 중지한 채 의심하고 회의한다. 그는 신 앞에서 맹세의 언어를 남발하는 권력자보다는 시장의 언어로 삶의 지혜를 기록하는 은자(隱者)가 되길 꿈꿨다. 무도한 세상이 종종 그의 판단과 능력을 필요로 하기도 했지만, 그때도 그는 중심을 잃지 않고 나아갔다가 침착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펜으로 걸었다”. “인생은 그 자체로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그대가 인생에 마련해 주는 자리의 좋고 나쁨에 따른다.” 자신으로부터 출발해서 인간과 자연과 이성을 사유한 몽테뉴가 터득한 지혜다. ●니체·푸코가 회의주의 본받아 세상을 편히 사는 법을 알아내라는 과제가 주어진다면 몽테뉴와 함께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던 니체는, 손을 떨게 하거나 눈물을 글썽거리게 하지 않는, 겸허하면서도 용기 있는 그의 사상을 예찬했다. 우리는 인간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만 말할 수 있을 뿐, 인간의 본질이라든가 의무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푸코 역시 몽테뉴의 회의주의를 한편에 늘 품고 있었다. 우리 자신의 최고 걸작품은 “떳떳하게 살아가는 일”이라며, 과(過)도 부족도 없이 “분수에 맞는 평이하고 건강한 지혜”를 최고의 지혜로 삼았던 몽테뉴. 이 죽음과 불안의 시대에, 나 역시 그의 가르침을 본받고 싶다. “나는 그날그날을 살고 있다. 그리고 실례인 줄 알면서도, 단지 나만을 위해 살고 있다. 내 목적은 그것뿐이다.” 채운 남산강학원
  • [글로벌 시대] 맹자와 현대 동북아의 민주주의/고토 노부유키 홍익대 교양외국어학부 교수

    [글로벌 시대] 맹자와 현대 동북아의 민주주의/고토 노부유키 홍익대 교양외국어학부 교수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유교가 문화와 사상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양국의 유교 문화 사이에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 그 핵심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일본의 저명한 동양학자인 가이즈카 시게키의 견해를 참고로 해서 이 점으로부터 논의하기로 한다. 중국 명나라 때 당시 해상무역에 종사했던 사람들 사이에는 맹자를 싣고 일본으로 가는 배는 바다에서 난파된다고 하는 속설이 확산되어 있었다고 한다. 문헌에서는 명나라 말기에 나온 사조제(謝肇?)의 수필 오잡저(五?俎)에 언급되어 있다. 또 일본 에도 시대의 작가 우에다 아키나리는 우게쓰 모노가타리(雨月物語)에 등장하는 인물을 통해 대략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12세기 배경). ‘주 나라의 무왕이 은 나라의 주왕(紂王)을 치고 천하통일을 한 사건은 신하의 군주에 대한 하극상으로 간주해서는 아니된다. 인의(仁義)를 상실한 주왕은 더 이상 군주가 아니기 때문에 무왕은 폭군으로 전락한 주왕을 쳤다고 하는 내용이 맹자에 적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유명한 중국서적임에도 불구하고 맹자만은 아직도 일본으로 건너오지 않았다. 맹자를 싣고 오는 배는 반드시 폭풍에 당하고 침몰해 버리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되는가 하면, 일본은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천지개벽 이후 한번도 끊기지 않은 황통이 상속되어 왔는데, 맹자처럼 건방진 사상이 전해 오면 후세에 하나님의 후예인 천황을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해악이 일어날 우려가 있어서, 팔백만신(八百万之神)이 맹자를 싫어해서 가미카제(神風)를 일으켜 배를 전복시켜 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글에서 인용되고 있는 맹자의 말씀은 이른바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알려진 내용이며, 민위귀(民?貴), 사직차지(社稷次之), 군위경(君??) 즉 사람이 가장 귀하며 사직은 다음이며 군주를 가장 가벼운 것으로 한다고 하는 문장으로 알려진, 이른바 민본주의와 더불어 생각하면 백성은 전제정치에 반대하고 혁명을 수행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선언한 민주주의적 정치사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맹자사상이 일본이라는 나라에는 맞지 않는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9세기에 맹자가 일본에 전해졌지만, 옛날부터 역성혁명에 대한 부분만은 가르치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서 에도 막부 타도와 메이지 정부수립에 공헌한 인물들을 육성함으로써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도자로 알려져 있는 요시다 쇼인도 역시 맹자를 애독하면서도 역성혁명은 일본의 정치체제에 맞지 않다고 해서 외면했다. 이처럼 일본의 맹자 인식은 한국의 유교와는 분명히 다르다. 한국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권교체가 이루어질 때 역성혁명에 근거했다고 하는 사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역성혁명이란 정치적 변혁이나 반란을 정당화하는 호칭으로 계속 사용되어 왔다. 한편 일본에서는, 예를 들면 메이지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메이지유신을 역성혁명이라고 본다면 곤란할 것이다. 왜냐하면 역성혁명 사상에서는 장래 정치지도부가 부패하거나 포학을 실시했을 경우 혁명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항상 열려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 사회는 아시아적 민주주의 사상의 기원인 맹자의 역성혁명론을 배우지 않았다. 일본인은 ‘민주주의’를 유교, 즉 맹자에게서가 아니라 메이지 유신 이후에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시대 흐름에 따라서, 또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민주화 시대에 구미로부터 배웠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일본에서는 시대의 슬로건이 메이지 유신 이래의 ‘탈아입구’에서 ‘탈구입아(脫歐入亞)’로 전환된 듯하다. 그렇다면 일본인은 탈구입아를 맹자의 사상으로 다시 시작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맹자는 현재 북한 지도부에 대해 2000년의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강력한 질타의 말을 계속 발신하고 있다.
  • [25일 TV 하이라이트]

    ●현장르포 동행(KBS1 밤 11시 40분) 폭우 피해를 입은 지 열흘이 지난 뒤 성렬씨 가족이 집을 찾았다.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30만원을 내는 지하 월세방이다. 6개월 전 시댁에서 분가해 처음으로 가져 본 성렬씨 가족만의 공간이다. 처음 이사 와 좋아하던 아이들의 모습이 엊그제 같다. 그런데 이번 폭우가 휩쓸고 간 자리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는데…. ●호루라기(KBS2 밤 8시 50분) 칼을 휘두르며 아내를 위협하는 남편. 그리고 술만 마시면 폭군으로 돌변하는 남편을 피해 밤마다 도망가는 아내가 있다. 온갖 폭언과 폭력에 시달려 온 어머니를 보면서 아버지를 ‘괴물’이라고 말하는 딸. 과연 이 가족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인권수사대’에서 남편의 폭력에서 아내를 구출하는 현장을 따라가 본다. ●불굴의 며느리(MBC 밤 8시 15분) 법원에서 나오던 형우는 살던 집에서 쫓겨나게 된 한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문 회장은 신우를 태국지사 책임자로 발령내고, 신우는 영심과의 결혼 문제를 매듭짓기 전엔 절대 갈 수 없다고 말한다. 영심은 신우에게 잘 다녀오라고 하지만 마음은 착잡하다. 한편 신우는 영심을 성당으로 데려가 정식으로 프러포즈한다. ●스캔 2고(SBS 오후 4시) 세찬은 정의감에 똘똘 뭉친 다혈진 소년이다. 겉보기보다 상냥한 소년 세찬은 친구들과 우주 기차를 놓쳐 경품으로 탄 티켓이 못 쓰게 된다. 하는 수 없이 세찬과 친구들은 화물선을 타게 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화물선이 우주 해적인 스네이퀸에게 잡히게 된다. 두리는 스네이퀸에게 스캔투고 대결을 펼치자고 제안한다. ●EIDF 2011 콜롬비아 특별전-팔렌케의 사람들(EBS 오후 1시 15분) 콜롬비아에 있는 팔렌케 데 산 바실리오 마을은 17세기 벤코스 비오호에 의해 세워졌다. 그리고 아메리카대륙 최초로 노예들이 식민지 체제에서 독립한 성벽 마을이다. 2008년에는 사라질 위험에 처한 음악 유산을 보존하고자 최초로 음악 스튜디오가 설립됐다. 산티아고 포사다, 시몬 메히아 감독 작품이다. ●코끼리 하늘 날다(OBS 밤 11시) 대한민국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도전했다. 바로 살과의 전쟁, 100㎏이 넘는 여성들의 건강한 살빼기 프로젝트. 어느덧 다이어트 10주 차에 접어든 코끼리 3인방은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상태다. 그리고 체중도 쉽게 빠지지 않는 정체기 상태가 찾아온다. 고심 끝에 제작진은 ‘초심으로 돌아가기’ 프로젝트를 준비한다.
  • 반군, 트리폴리 함락작전 개시… “국제공항 장악”

    반군, 트리폴리 함락작전 개시… “국제공항 장악”

    지난 6개월 동안 내전을 벌여 온 리비아가 반군이 ‘인어공주’라는 작전명 아래 처음으로 수도 트리폴리를 포위하고 시내에 진입하기 시작하면서 중요한 고비를 맞고 있다. 로이터·AFP 등 서방 외신들은 트리폴리 내부에서도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의 41년 철권정치에 반대해 봉기가 일어났다면서 카다피 정권 붕괴가 사실상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21일(현지시간) 전했다. 알자지라는 목격자와 반군 측을 인용해 20일 저녁부터 다음 날 오전까지 트리폴리 시내 곳곳에서 반군과 카다피 친위부대 사이에 전투가 이어졌다고 전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소속 공군이 공중 지원해 주는 것도 반군에 적잖은 힘이 되고 있다. 20일 나토는 리비아 정보 당국 수장이자 카다피의 처남인 압둘라 알세누시의 자택을 비롯해 트리폴리 외곽을 집중 폭격했다. 반군은 지난주 트리폴리에서 서쪽으로 50㎞ 떨어진 자위야를 장악해 트리폴리와 이웃 나라 튀니지를 연결하는 보급로를 차단한 데 이어 20일에는 트리폴리 동쪽 140㎞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 즐리탄을 점령했다. 알자지라는 반군이 트리폴리 근교의 수크 알고마, 타주라, 우라다, 알사바 등의 지역까지 차지했다고 전했다. 반군이 운영하는 텔레비전 방송은 반군이 무기고는 물론 트리폴리 국제공항도 차지했다고 보도했다. 반군 대표기구인 국가과도위원회(NTC) 압델 하피즈 고가 부의장은 “트리폴리에서 반군과 조율한 봉기가 일어났다. 그들은 오랫동안 (봉기를) 준비해 왔다.”면서 “카다피 친위부대원 상당수가 도망쳤다.”고 주장했다. 반면 카다피 국가원수는 21일 새벽 국영 텔레비전에 방영된 육성 메시지를 통해 “리비아 국민이 ‘쥐새끼들’을 소탕했다.”면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리비아 석유를 탐하고 있다. 반군은 리비아를 대표하지 않으며 리비아 국민을 파괴하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무사 이브라힘 정부 대변인도 “일부 무장한 반군들이 트리폴리에 잠입했지만 곧바로 격퇴했고 지금은 평온을 되찾았다.”고 말해 트리폴리에서 양측이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미국 CNN방송은 정부 당국자의 말을 인용해 카다피가 ‘최후 결전’을 준비하는 것 같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아직까지 카다피가 리비아를 떠나려 한다는 징후는 없다고 전했다. 반면 마크 토너 미 국무부 대변인은 19일 CNN에 “언제 카다피가 물러날지는 모르지만 물러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카다피 정권에는 악재가 계속되고 있다. 이웃 나라인 튀니지는 반군 대표기구 NTC를 “리비아를 대표하는 유일한 기구”로 공식 인정했다. 게다가 내부에선 이탈자가 계속 나오고 있다. 카다피 정권 내 2인자였던 압데살람 잘루드 전 총리가 트리폴리를 떠나 반군 진영에 합류했다. 잘루드는 알자지라에 올린 영상에서 트리폴리 시민들에게 “폭군에 대항해 봉기하라.”고 촉구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봉건시대 외동딸의 혁명과 사랑

    봉건시대 외동딸의 혁명과 사랑

    사대부의 외동딸 ‘차아나’는 자신의 꿈에 따로 경계를 두지 않았다. 봉건의 시대 상황 속에서 여자로서 드러낼 수밖에 없는 한계 또한 긋지 않았다. 사회적 제약에 연연해하지 않고 위민의 정치,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 과감히 뛰어들어 모반의 혁명 의지를 펼쳐낸다. 장편소설 ‘제국의 고백’(경향신문사 펴냄)은 작가 이지수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시대, 고대국가 ‘아제국’(亞制國)이라는 나라의 상황을 통해 개인과 국가가 얽혀 있는 모습을 그려낸 판타지 역사소설이다. ‘아제국’의 절대군주는 수제헌. 폭군에 가깝다. 실상은 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는 가슴속 죄의식을 위악적으로 풀어내는 인물이다. 그는 차아나를 우연히 만나 삶과 위정의 방향에 변화의 계기를 찾는다. 차아나 또한 오랜 시간 인생의 지표처럼 여겼던 수제헌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그를 위해 직언하고 모반의 무리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반란군 수장은 고주노다. 차아나는 둘 사이를 오가며 국가와 정치체제의 올바른 상을 잡아가고, 때로는 둘 사이에서 마음을 정하지 못해 흔들리기도 한다. 소설은 수제헌과 고주노가 출생의 비밀로 얽혀 있음을 보여주며 급물살을 탄다. 이지수는 작가의 말을 통해 “수제헌의 인간적 갈등과 죄책감을 통해 독재정치의 폐해와 전제군주제가 빠질 수 있는 위험, 그리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그리려 했다.”고 밝혔다. 이지수는 1993년생, 만 18세 고등학생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을 떠나 캐나다 밴쿠버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쳤고, 현재 미국 뉴햄프셔주 세인트폴스쿨을 다니고 있다. 오는 9월 12학년이 된다. 한국으로 치면 고 3이 되는 셈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문학 소녀류 취향’의 소설이 아닌 역사 판타지라는 형식을 통해 만만치 않은 문장력과 상상력, 현실과의 접점 등을 풀어냈다는 사실이 쉬 믿기지 않는다. 또한 소설 읽기에 쉼표가 되는 동시에 이 소설의 맛을 더욱 살려낸 몇 장의 삽화는 작품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욱 부추긴다. 서울예술고 1학년인 곽성민의 그림이다. 자기 분야에서 일찍 재능을 틔운 두 사람이 절묘하게 만났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악덕 부모의 항변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야”

    1932년 영국 런던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난다. 훗날 ‘세기의 미녀’로 추앙받게 될 아이였지만, 당시 모습은 너무 끔찍했다. ‘다모증’ 때문에 갓 태어난 원숭이 새끼보다 털이 많았다. 엄마에게조차 “지금까지 본 아기들 중 가장 이상한 아기”였으니 말이다. 15개월째 겨우 일어서고, 두 돌이 지나서야 원숭이 같던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한 아이는 그때부터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로 변하듯, 아름다운 소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빼어난 외모는 그녀에게서 유년기를 빼앗아 갔다. 이후의 삶 또한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 얘기다. 열한 살이 된 ‘리즈’는 1943년 ‘녹원의 천사’라는 영화에서 말을 타고 장애물 경주에 참가하는 ‘벨벳’ 역할을 따낸다. 그러나 체구가 너무 작은 것이 문제였다. 영화사는 이듬해 1월까지 크랭크인을 미뤘는데, 이 사이 극성스러운 엄마 사라 테일러는 호르몬 약제 등을 동원해 불과 4개월 만에 딸의 키를 7㎝나 키워 놓는다. 외모 탓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배우 출신 엄마의 욕망 때문에 리즈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배우로 자라난다. 리즈는 삶과 허구를 혼동할 만큼 배역에 몰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면의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무려 여덟 번이나 결혼을 하고, 술과 약물에 의존하기도 했다. 훌륭한 위인 뒤에는 훌륭한 부모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있다. 자식들을 끔찍이 학대하거나 혹은 자식에게 광적으로 집착하거나, 반대로 철저히 방치한 부모 밑에서 특별한 재능을 꽃피운 자식들이 나오기도 한다. ‘18인의 천재와 끔찍한 부모들’(외르크 치틀라우 지음, 강희진 옮김, 미래의창 펴냄)은 괴물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천재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저자는 천재의 부모들을 폭군형과 교관형, 집작형, 이기적 부모 등 네 유형로 나눈다. 독일 성직자 마르틴 루터는 ‘폭군형 부모’를 뒀다. 어린 시절 호두 한 알 때문에 피가 나도록 맞기도 했는데, ‘자비로운 아버지’에 대한 루터의 이상이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의 배경이 되곤 한다. 모차르트와 마이클 잭슨 등은 교관형 부모 아래서 자랐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어린 아들의 몸이 다 망가질 정도로 혹독한 연주여행을 강요했고, 마이클 잭슨의 아버지는 일곱 살의 어린 마이클을 새벽 2시에 깨워 무대에 세우기도 했다. 독일어 원제를 번역하면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야’다. 부모들의 항변은 동서가 같고, 고금이라고 다르지 않은 게다. 1만 3000원.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영화프리뷰] ‘워터 포 엘리펀트’

    1930년대 미국 대공황기. 아이비리그 명문대 수의학과 졸업을 앞둔 제이컵(로버트 패틴슨)은 부모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하루아침에 인생이 뒤바뀐다. 모든 것을 잃고 충격을 받은 그는 정처 없이 일자리를 찾으러 다니다 벤지니 서커스단의 기차를 타게 된다. 서커스단에서 수의사로 일하게 된 그는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제이컵은 서커스단 최고의 스타이자 단장의 아름다운 아내 말레나(리즈 위더스푼)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제이컵과 말레나는 서커스단의 새로운 흥행 보증수표로 떠오른 코끼리를 함께 돌보고 훈련시키면서 호감을 느끼지만, 서커스단의 폭군으로 군림하는 단장 어거스트(크리스토프 왈츠)가 이들의 관계를 눈치채고 둘 사이를 떼어 놓으려고 한다. ‘워터 포 엘리펀트’는 대공황 당시 최대 호황을 누렸던 서커스단을 배경으로 한 영화지만, 주인공들의 애정 관계에 얽힌 스토리가 더 중심을 이루는 영화다. 블록버스터 영화 ‘나는 전설이다’에서 뛰어난 시각 효과에 서사적인 스토리를 결합시켜 호평을 받았던 프랜시스 로렌스 감독은 이번에도 서커스라는 화려한 쇼에 서사적인 로맨스를 덧입히려고 했다. 하지만 전작에 비해 강렬하거나 웅장한 느낌은 덜하다. 백발노인이 된 제이컵이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고전적인 시대 배경만큼이나 주인공들의 삼각 관계도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광폭한 남편의 학대를 피해 금지된 사랑을 나누는 제이컵과 말레나의 감정선이 섬세하고 애절하게 표현되지 않아 감정 이입이 어렵고 오히려 동물에게 호된 매질을 서슴지 않는 어거스트의 잔인함에만 시선이 쏠리는 불균형을 낳았다. 영화 ‘트와일라잇’ 시리즈로 전 세계 소녀팬들을 사로잡은 로버트 패틴슨은 성숙한 캐릭터에 도전했지만, 시대를 뛰어넘는 격정적인 로맨스를 표현하기에는 아직 내공이 부족해 보인다. 단, 동물을 좋아하거나 1930년대 미국 서커스단의 정취를 느끼고 싶은 관객이라면 초대형 천막 안에서 사자, 호랑이 같은 맹수들이 부리는 묘기에 눈길이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분량이나 스케일이 작아 영화 ‘시카고’나 ‘물랭루즈’처럼 화려하고 관능적인 볼거리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미국에서 280만부를 판매한 세라 그루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15세 관람가. 5월 4일 개봉.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영화계 장학사업 선도 원로배우 신영균

    [김문이 만난사람] 영화계 장학사업 선도 원로배우 신영균

    노래 하나 감상해본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구름따라 흐른다 나도 흐른다/아가씨야 내 마음 믿지 말아라 번개처럼 지나갈 청춘이란다.’ 한운사 작사, 황문평 작곡의 ‘빨간 마후라’다. 얼핏 짧고 단순한 노래 같지만 대한민국 공군 출신들에게는 영원히 가슴 속에 남아 추억의 되새김질을 하게 하는 노래다. 또한 40~50대 이상의 남성들에게는 영화를 통해 익숙하게 다가오는 노래이기도 하다. 1964년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영화 ‘빨간 마후라’는 공군 전투기가 하늘을 나는 장면과 시원한 활주로, 빨간 머플러가 컬러 필름으로 표현돼 관객을 압도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서울 충무로 명보극장에서만 25만 관객을 기록했다. 특히 이 영화는 세계 여러 나라에 수출됐으며 주연으로 나온 신영균(83)씨는 당시 제11회 아시아영화제에서 남우 주연상을 수상했다. 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한류 스타가 누구냐고 했을 때 영화계에선 신씨를 거론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이런 추억을 담은 ‘빨간 마후라’는 대구 달성군 유가면 양리에 위치한 고 유치곤 장군의 호국기념관에 노래비로 세워져 이곳을 찾는 많은 관람객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 중구 명보아트홀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원로 영화배우 신씨가 2010년 10월 출연한 재산으로 출범한 재단법인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이사장 안성기)이 현판식과 함께 영화인 자녀 19명에게 2011년도 상반기 장학증서와 장학금을 전달했다. ●영화인 자녀 19명에게 첫 장학금 전달 영화인 총연합회 회원단체와 영화인회의 등 8개 영화 관련 단체로부터 추천받은 영화인 자녀 이동규(서원대 유아교육학과 1학년), 임원룡(서울대 경영학부 4학년)군 등 대학생 10명과 홍민호(경복고 3학년), 정원(동두천외국어고 1학년)군 등 고교생 9명에게 총 4000여만원의 장학금을 지원했다. 이들 장학생 중에는 영화배우 허기호(허장강씨의 장남)씨의 아들 허진우(안양대학교 공연예술학과 1학년)군도 포함됐다. 이 자리에서 신씨는 명보시네마테크 운영, 신영균연기예술상 제정과 함께 영화 인재 발굴 사업으로 청소년 영화제 ‘필름 게이트’와 방학 시즌 어린이 영화 체험 교실인 ‘꿈나무 필름 아트 캠프’ 등을 추진할 계획을 밝혀 눈길을 끌었다. 올 연말에는 제1회 신영균영화연기대상 수상자가 처음으로 나올 예정이다. 이처럼 ‘빨간 마후라’와 ‘5인의 해병’ 등으로 일찍부터 원조 한류스타의 명성을 얻은 신씨는 팔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500억원을 사회에 헌납하는 등 국내 영화 발전을 위해 새로운 열정과 의욕을 보이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지난 21일 오후 서울 명동에 있는 사무실에서 신씨를 만났다. 때마침 김두호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현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도 함께 있어 자연스럽게 차를 마시며 인터뷰가 진행됐다. 검은색 양복에다 빨간 넥타이 차림이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40대로 보인다.”고 인사를 하자 “에구 뭘, 마음이 젊어서 그런가.”라며 파안대소했다. 그래서 건강 얘기부터 먼저 나왔다. “운동을 자주 하는 편입니다. 가끔 골프 라운딩도 하고 헬스클럽에는 일주일에 두어번 정도 나가지요. 나이 먹어서는 근육 운동을 자주 해야 돼요. 골격이 튼튼해지니까. 그래서 웨이트 트레이닝도 합니다.” ●294편 영화 거의 다 기억… 팔순의 나이 무색 신씨는 웃음이 호탕하다. 생각을 젊게 하고 행동 또한 그러하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했다. 기억력 또한 남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1960년 조긍하 감독의 ‘과부’로 데뷔한 이후 1978년 ‘화조’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출연한 294편의 영화를 거의 줄줄 꿰고 있었다. ‘빨간 마후라’에 출연한 동료 배우 최무룡씨를 비롯해 ‘5인의 해병’에 등장하는 황해·곽규석·박노식씨 등에 대한 추억도 또렷하게 떠올린다. 이들 중 유일하게 혼자 살아남아 우리나라 영화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감회가 특별하다. 신씨는 알다시피 지난해 10월 자신의 사재 대부분을 털어 장학사업에 쓰겠다고 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 후 후회는 한번도 없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장학사업)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인들의 작업 환경이 아직도 열악합니다. 특히 그들 중에는 재능 있는 자녀가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격려와 보탬이 된다면 그것처럼 보람 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대를 잇는 훌륭한 연기자들을 잠시 떠올린다. 1955년 ‘피아골’로 데뷔한 고 이예춘씨의 아들 이덕화와 손녀 이지현, 고 김승호씨의 아들 김희라와 손자 김기주, 오발탄의 명배우 고 김진규씨의 아들 김성준, 고 황해씨의 아들 전영록, 고 독고성씨의 아들 독고영재와 손자 독고준, 고 박노식씨의 아들 박준규 등. ●치과의사 하면서도 연기에 대한 꿈 간직 신씨 자신도 가난과 배고픔을 몸소 겪었기에 연기에 자질이 있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청춘극단’에서 2년 동안 연기를 하다가 생활의 비참함을 벗어나고자 좀 더 안정적인 치과의사가 되기 위해 서울대 치과대학에 진학했다. 해군 대위로 군복무를 마친 그는 1958년 서울 회현동에 ‘동남치과’를 개업했으나 도저히 끼를 못 버려 2년 뒤 황순원 원작 ‘과부’로 연기자의 길을 걸었다. “처음에 연극을 했는데 생활이 영 말이 아니더군요. 그래서 직업적으로 전망이 좋다는 치과의사가 되고자 했지요. 하지만 연기에 대한 꿈을 도저히 버릴 수가 없더라고요.” 데뷔작 ‘과부’에서 처음 주연으로 발탁될 당시를 회고한 그는 “배역도 좋고 작품도 좋았는데 머리를 잘라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며 “많이 고민했지만 순전히 연기에 대한 욕심 하나로 출연을 결정했다.”고 에피소드를 털어놨다. 이후 신씨는 다양한 스타일의 캐릭터를 소화하면서 스타의 길로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다. ‘빨간 마후라’ ‘5인의 해병’ 같은 군사물은 물론이고 ‘연산군’에서는 폭군,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는 멜로물의 주인공, ‘저 높은 곳을 향하여’에서는 종교인으로 등장하며 타고난 끼를 유감 없이 발휘했다. 18년 동안 294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니 그의 열정과 끼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렇다면 한참 인기 가도를 달릴 때 왜 배우를 그만두게 됐을까. “당시 군사정권이었죠. 검열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권총을 쏘는 장면도 ‘왜 이 각도에서 총을 쏴야 하느냐’ 등의 이유로 가위질을 많이 당했지요. 그러다 보니 영화에 대한 매력도 없어지고 편수도 줄고, 관객 또한 마찬가지로 흥미를 잃게 됩니다.” ●군사정권시절 검열 심해 배우 생활 그만둬 배우를 그만둔 이후에는 제주도에서 영화박물관 건립에 열정을 쏟는다. 그가 제주도와 인연이 된 것은 영화 ‘마적’(신상옥 감독)이었다. 이 영화는 1967년 제주도에서 촬영됐는데 당시 신씨는 드넓은 초원에서 영화박물관을 생각하게 됐다. 결국 오랜 노력 끝에 1999년 제주 남원읍에 ‘신영영화박물관’을 건립했다. 이때부터 신씨가 부자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어떻게 부를 일궜을까. “제 인생의 특징을 말한다면 실패를 안 했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려고 무리하게 욕심을 내지도 않았고 또 무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요. 인격적으로는 겸손하자고 늘 생각했어요.” 신씨는 배우 시절 영화배우라는 직업을 늘 불안하게 여겼다. 그래서 1960년대 친구와 함께 서울 금호동에 동시 상영을 하는 ‘금호극장’을 지었다. 영화는 많으나 극장이 턱없이 모자라는 현실에서 발동이 걸렸던 것. 이후 명보극장 바로 옆에 있는 명보제과를 인수했다. 이때 부인 김선희 여사가 팔을 걷어붙여 직접 빵을 굽고 장사도 하면서 사업을 키워 나갔다. 당시 명보제과는 뉴욕제과와 태극당, 풍년제과 등과 함께 4대 제과로 꼽힐 정도였다. 그러던 1977년 8월 명보극장을 인수하게 된다. 이후 ‘지옥의 묵시록’과 ‘빠삐용’ 등의 외국 영화와 ‘내가 버린 여자’(이문웅 감독), ‘속 별들의 고향’(하길종 감독), ‘미워도 다시 한번’(변장호 감독) 등의 한국 영화가 잇달아 대박을 터뜨렸다. 그가 지난해 기부 대상을 ‘명보극장’으로 정한 것도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 극장 소유는 영화인들의 꿈이었고 이제는 그 꿈을 후배들에게 돌려주려는 생각에서였다. 무엇이든 간절히 바라고 노력하면 언젠가 꿈이 이뤄진다는 철학도 포함됐다. 신씨는 지금도 꿈을 꾼다. 헤밍웨이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노인과 바다’ 같은 영화에 출연해 멋진 연기로 영화배우로서 마무리를 잘하고 싶단다. 이를 위한 구상이 현재 기획 단계에 있다고 귀띔했다. 그의 취미는 나무 심기다. 신영영화박물관 옆에 많은 나무들을 심었단다. 서른두살에 영화 나무를 처음 심은 이후 지금도 꾸준히 나무를 심고 있다고 했다. 팔순 나이에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에서 또 한번 영원히 자라는 나무를 심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편집위원 km@seoul.co.kr ■신영균은 치과의사 → 배우 → 국회의원… ‘빨간 마후라’로 아시아 영화제 남우주연상 1928년 황해도 평산의 산 속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교육열에 의해 일찍 서울로 월남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우연히 교회 연극을 통해 연기를 접한 뒤 줄곧 배우를 꿈꿨다. 한성고를 졸업하자마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청춘극단’에 들어갔다. 하지만 극단 배우로 생계 유지가 힘들자 다시 공부를 시작해 서울대 치의학과에 합격했다. 대학에 다니면서도 총학생회 연극부를 창립해 활동했고 졸업 후 치과의사로 일하다 1960년 32살의 나이에 영화 ‘과부’로 데뷔했다. 이어 1961년 ‘마부’로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하고, 1962년에는 ‘연산군’으로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차지하며 데뷔 2년 만에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출연작 중 단연 압권은 ‘빨간 마후라’(1964)이다. 이 영화로 아시아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원조 한류스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던 1970년대, 유신정권 아래 영화에 대한 사전 검열이 심해지면서 영화계가 침체됐고 1978년 ‘화조’를 끝으로 배우 활동을 접었다. 이후 명보극장을 중심으로 영화사업에 뛰어들었고 15, 16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99년 제주도에 영화박물관을 지었으며 지난해에는 사재 500억원을 선뜻 내놓아 세상을 놀라게 했다. 지난 18일에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 현판식을 가지면서 장학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주요 대표작으로는 열녀문(1963), 쌀(1963), 달기(1964), 시장(1966), 천하장사 임꺽정(1968), 대원군(1968), 미워도 다시 한번(1968) 등이 있으며 18년 동안 모두 294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 “조국 리비아 구해주세요…카다피여 국민들 내버려두라”

    “돌멩이 하나 던진 적 없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발 내 조국 리비아를 구해 주십시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리비아 제재안 표결을 하루 앞둔 지난 25일(현지시간) 한 외교관이 15개국 대표 앞에 섰다. 그는 다름 아닌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의 오랜 친구이자 최측근인 모하메드 샬람 유엔 주재 리비아 대사였다. 그는 “단호하고 대담한 결의안을 기대한다.”며 호소한 뒤 카다피를 향해 “나의 형제 카다피여, 이제 리비아 국민들을 내버려두라.”고 촉구했다. 샬람 대사는 그동안 이브라힘 다바시 유엔 주재 리비아 부대사를 전면에 내세운 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역시 ‘카다피 충성파’에 속하지만 유혈 진압 소식에 “카다피는 미친 사람”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던 다바시와는 달리,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동고동락해 온 친구에게 차마 직접 손가락질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날 샬람 대사는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기라도 하듯 격정적인 목소리로 안보리 회의장을 가득 채웠다. 단상을 내려옴과 동시에 마음의 짐도 내려놓은 듯한 그는 자신이 연설하는 동안 눈물을 보였던 다바시 부대사와 말없이 포옹했다. 가장 먼저 카다피에게 등을 돌렸던 관료는 압델 에후니 아랍연맹 주재 리비아 대사다. 그는 “카다피 정권은 이제 역사 속 쓰레기”라고 거침없이 카다피를 비판했다. 이어 중국 주재 대사관의 고위 외교관인 후세인 엘메스라티는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정부를 대표하는 이 자리에서 물러난다.”며 사임 의사를 밝혔다. 또 ‘피의 금요일’을 맞은 25일 사임 의사를 밝힌 압둘 라흐만 알 압바르 리비아 검찰총장은 “정의와 법의 원칙을 믿었지만 현 상황은 정반대로 폭력이 대화와 민주주의를 대신하고 있다.”며 카다피를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 또 26일 사임 발표를 한 이브라힘 엠도레드 포르투갈 주재 리비아 대사도 카다피 정권을 “불의한 파쇼 폭군 정권”이라 규정하며 물러난 뒤 ‘혁명’에 가담해 자신의 모든 경험과 능력을 보태겠다고 약속했다. 카다피 정권의 핵심 세력을 이뤘던 이들은 연일 ‘폭탄 발언’을 이어 나갔다. 무스타파 압델 잘릴 전 법무장관은 “카다피는 시위가 일어나기 전부터 용병들을 고용했다.”면서 “이들에게 리비아 시민권을 주기로 결정까지 된 상황”이라고 폭로했다. 특히 1988년 270명이 사망한 미국 팬암기 폭파 사건은 카다피가 직접 지시한 것이라고 밝히면서 파문을 일으켰다. 유네스 알 아비디 전 내무장관은 최근 카다피 암살을 선동하기까지 했다. 나길회·유대근기자 kkirina@seoul.co.kr
  • ‘부시 휴~’ 자택 폭파시도 사우디 청년체포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테러 위험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미 법무부는 24일(현지시간) 미 연방수사국(FBI)이 부시 전 대통령의 텍사스 자택과 원자력발전소, 댐 등을 폭파하려 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20세 청년 칼리드 알리 알다와사리를 체포했다고 밝혔다. 알다와사리는 2008년 미국에 입국, 최근까지 텍사스의 사우스 플레인스 칼리지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FBI가 그의 자택을 압수 수색한 결과 그는 미국에 공부하러 오기 수년 전부터 이미 테러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고, 부시 전 대통령의 자택을 ‘폭군의 집’이라 부르며 폭발물을 넣은 인형으로 공격할 계획을 짰다. 또 폭발물을 설치한 유모차를 이용해 캘리포니아 주와 콜로라도 주의 댐 12곳, 원자력발전소 등을 날리려 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알카에다, 리비아 민주화 시위 전폭 지원?

     국제테러조직 알카에다의 북아프리카 지부(AQIM)가 리비아 반정부 시위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하고 나섰다. ‘재스민 혁명’으로 불리는 중동 및 북아프리카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는 일부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AFP통신은 23일(현지시간) “AQIM이 미국의 이슬람 웹사이트 감시기구인 SITE에 올린 성명을 통해 ‘리비아 반정부 시위대의 싸움을 알라신을 사랑하는 무슬림 모두의 싸움’이라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AQIM은 “우리는 알라신으로부터 부여받은 힘으로 당신들을 도울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AQIM은 성명에서 카다피를 ‘냉혹한 악질 사기꾼’으로 지칭하며 시위대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점을 여러차례 밝혔다. 이미 성공한 튀니지와 이집트의 반정부 시위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무슬림의 권리와 재산을 가로채고 존엄한 삶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마저도 갖지 못하게 했던 폭군들로부터 당신들을 지킬 것”이라며 “리비아인들의 혁명은 올바른 주장이며 후원을 보내겠다.”고 강조했다.  AQIM은 성명에서 이번 사태를 자신들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계기로 활용하려는 의도도 숨기지 않았다. 북아프리카 정권들이 권력에 집착하는 것 자체가 그동안 알카에다가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했다는 주장이 거짓이었음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한편 이날 AQIM은 성명에서 알카에다가 리비아 동부지역에 거점을 마련했다는 리비아 외무성을 주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칼레드 카심 리비아 외무차관은 리비아 동부 데르나 지역에 알카에다 세력이 무력 장악에 나섰다고 밝힌 바 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고전 톡톡 다시 읽기] (53) 루쉰 ‘광인일기’

    [고전 톡톡 다시 읽기] (53) 루쉰 ‘광인일기’

    제1차 세계대전(1914~18)이 막바지에 달했을 무렵, 루쉰(迅)이란 필명으로 쓰인 소설이 잡지 ‘신청년’에 발표된다. 이 작품이 중국 최초의 근대소설 ‘광인일기’다. 소설이 발표된 시기는 민주주의와 인도주의 등의 새로운 사상이 전 세계를 휩쓴 후, 신해혁명(1911)으로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된 지 7년이 되던 해였다. 정치체제도 바뀌고 전쟁도 끝나가는데, 루쉰이 보기에 중국인들의 생활방식이나 태도는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혁명은 일어났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이다. 그는 이런 현실에 절망했고, 그 후 침묵한다. ‘광인일기’는 7년이란 긴 침묵의 시간을 깨고 나온 소설이다. ●광인의 공포-‘나는 잡아먹힐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주인공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낯설게 느껴진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이 식인종이라는 걸 느끼는 순간, “나 역시 인간이다. 놈들은 나를 먹고 싶어진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된 것. 이제 이 공포심은 구체적 징후들을 통해 극대화되어간다. 길거리에서 한 여인이 자기 자식을 때리면서 “물어뜯어 버리기 전에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라고 하는 말이나, 시체를 먹으면 담보가 커진다는 속설을 믿은 마을 사람들이 사람을 죽여 그 자의 내장을 기름에 튀겨 먹었다는 이야기나,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 등에서 말이다. 심지어 조가(趙家)네 개에게서조차 살기를 느낀다. 그는 식인이 자행되는 세계 속에 놓인 자신을 발견한다. 주변 사람 모두가 그의 적이다. 동시에 그 모두에게 이제 그는 광인이다. 그는 다음 번 식인의 희생자가 자신일 거라고 확신한다. “나를 무서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를 없애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나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소름이 오싹하였다. 놈들이 완전 채비를 갖추었구나, 생각하였다.” 자기가 느끼는 공포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그는 역사책을 뒤진다. 역사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인의도덕’이란 좋은 말과 그 사이에 쓰인 ‘식인’이란 두 글자다! 그는 전통이란 이름으로 4000년 간 지속되어온 식인의 역사가 자신을 꼼짝 없이 제물로 만들 것이라는 위협을 느낀다. 형도, 광증을 치료해준다는 의원도 사실은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식인이었다고 하는 공포 속에서 ‘광인’은 하이에나 같은 이들에 둘러싸여 먹지도 자지도 못한다. 가족과 세계, 역사가 모두 광인의 적이다. ●광인의 자각-‘4000년 식인 역사를 가진 나!’ 늙은이는 방을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작은 소리로 형에게 속삭였다. “어서어서 먹어버리는 겁니다.” 형은 끄덕였다. 그렇던가, 형까지도 그렇던가, 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대발견은 뜻밖인 것 같았으나 실은 뜻밖이 아니었다. 한패가 되어 나를 먹으려 하는 인간이 나의 형인 것이다. -인간을 먹는 것이 나의 형이다. -나는 인간을 먹는 인간의 동생이다. 나 자신이 먹혀버린다 해도 여전히 나는 인간을 먹는 인간의 동생이다. 광인은 형이 자신을 먹으려는 식인들과 한패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대발견’은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과 연결된다. 그렇다, 나도 식인종의 동생이다! 동생을 잡아먹은 형, 이에 동조한 어머니, 그리고 나. 혈연으로 엮인 관계 속에서 자신도 식인사회의 동조자였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의 인식은 전환된다. 나 역시 식인사회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인간이 아니고 그 사회의 일부일 뿐이라는 철저한 자각과 함께 비로소 그는 광증에서 벗어난다. 나는 피해망상에서 벗어나 이 시대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나는 인간을 먹는 인간을 저주함에 있어, 먼저 형부터 저주하리라. 인간을 먹는 인간을 개심(改心)시키는 데 있어 먼저 형부터 개심시키리라.” 그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개심시키고자 한다. 그는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 야만의 역사를 벗어나야 한다고 형을 설득한다. 고대의 요리사 역아(易牙)가 자신의 아들을 삶아서 폭군 걸주(桀紂)에게 먹인 이야기는 과거의 전설이 아니라 현재 일어나고 있다. 처형된 혁명가의 피에 만두를 찍어먹는 자들을 보라. 루쉰은 부모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낸 자를 효자라고, 물에 빠진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강물에 몸을 던지는 딸을 효녀라고 칭송하는 중국의 전통에서 시대의 절망을 느꼈다. 인의도덕과 같은 덕목은 왜 언제나 가해행위로 증명되어야 하는가. 4000년 동안의 중국역사를 관통하는 것은 ‘식인’의 폭력성과 잔인함이다. 거기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예전부터 내려온 방식을 그대로 반복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이들에게 루쉰은 광인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 우리는 이런 식인의 역사와 단절해야 한다고. ●출구의 발견-‘아이를 구하라’ 인간을 먹은 일이 없는 아이가 아직 있는지 모르겠다. 아이를 구하라. 소설은 ‘아이를 구하라’는 광인의 절박한 외침으로 끝난다. 식인의 역사를 단절하기 위해 주인공은 아직 식인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희망을 건다. 광인의 희망은 절망 끝에서 발견한 출구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이동생의 고기를 먹었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이 ‘아이를 구하라’는 절박한 외침을 낳은 것! 이제 그는 외치기 위해서라도 기어코 살아남아야 한다. ‘광인일기’는 시대의 어둠에 갇혀 있던 한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뚫고 나오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일기는 그렇게 되기까지의 병과 자각의 흔적이다. 식인하지 않은 아이들을 위해 광인은 자기 한계를 넘어 새로운 길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청년아, 나를 딛고 나아가라!” 시대의 적막을 뚫고 탄생한 ‘광인일기’는 우리들에게 던져진 한 ‘광인’의 외침이다. 어쩌면 우리야말로 잡아먹힐지도 모른다는 피해망상 속에서 살기 위해 다른 자들을 잡아먹는 식인이 아닐까? “죽어도 이 한 걸음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는 광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 누구인가. 최태람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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