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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란 공격 10분전 취소한 트럼프 “전쟁 일어나면 말살”

    이란 공격 10분전 취소한 트럼프 “전쟁 일어나면 말살”

    트럼프 “이란인 150명 사망할 거란 보고받고 취소”NYT “이란과 전쟁시 재선 어렵단 측근 조언 들은 것”군사적 긴장 속 이라크 주둔 미군 부대 경계 강화미군 무인기(드론)를 격추시킨 이란에 대한 보복 공격을 실행 직전 중단시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과의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면서도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전례 없는 말살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1일(현지시간) NBC 방송과 인터뷰에서 “나는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건 당신이 이제껏 결코 본 적이 없었던 말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난 그렇게 하길 원하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전제조건 없이 이란과 대화를 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다만 그는 “당신들(이란)은 핵무기를 가질 수 없다”면서 “그와 관련해 이야기하고 싶다면 좋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들은 앞으로 오랫동안 결딴난 경제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의 미군 무인기(드론) 격추에 대한 보복 공격을 실행 직전 중단시킨 경위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앞서 이란 혁명수비대는 20일 새벽 4시 5분 대공방어 미사일 ‘세봄 호르다드’로 미 해군의 무인정찰기(드론) ‘RQ-4 글로벌 호크’를 격추시켰다.이란 측은 격추 전 이란 영공에 침범한 미군 드론에 여러 차례 경고를 보냈지만 아무 응답이 없어 격추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은 드론이 이란 영공을 침입한 적이 없으며 국제공역에서 공격당했다고 반박했다. 드론 격추 소식을 보고받은 백악관 강경파 참모진은 즉각 보복 공격을 주장했고 실제 미 국방부도 공격 준비에 착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우리는 어젯밤(20일) 세 곳에 보복하려 했다. (이란인이) 얼마나 많이 죽느냐고 물으니 ‘150명입니다’라는 게 장군의 대답이었다”면서 “(미군) 무인기 격추에 비례하지 않아서 공격 10분 전에 내가 중단시켰다”고 밝힌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NBC와 인터뷰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어떤 것도 허가되지 않았다. 상황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라며 이란 공격에 대해 최종 지시를 내린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전날 보복 타격을 위해 전투기가 이미 출격한 상태였는지를 묻는 말에는 “아니다. 하지만 곧 그렇게 (출격)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정도까지 상황이 벌어졌을 수도 있었다”고 답했다.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대통령이 공격을 중단시키는데 비공식 참모진의 조언이 큰 영향을 줬다고 보도했다. 평소 트럼프 대통령이 즐겨 보는 뉴스채널인 폭스뉴스의 진행자 터커 칼슨이 이란의 도발에 무력 대응하는 것이 ‘미친 짓’이라고 조언했다는 것이다. NYT에 따르면 칼슨은 강경파 참모들의 조언이 최선이 아니며 이란과 전쟁을 하게 되면 재선과는 ‘작별 키스’를 하게 될 것이라고 트럼프에게 강조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잭 킨 전 미 육군참모차장은 NYT에 이 외의 다른 요소들도 공격 취소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킨 전 차장은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 최고 지도자들이 드론 격추를 명령한 지휘관에게 격분했다는 정보를 추가로 입수했다”며 “이것이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한편 이라크군이 미국과 이란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함에 따라 이라크 바그다드의 미군 공군기지에 대한 경계수위를 높였다고 밝혔다. 이라크 공군의 팔라흐 파레스 사령관은 AP통신에 “(이라크군을 훈련하는) 미군 교관이 있는 바그다드 북부 발라드 공군기지에 대한 경계 수준을 상향했다”며 “기지 내부와 인근 지역의 순찰·검문 강화와 야간 외출금지 시간 연장 등이 포함된다”라고 말했다. 발라드 공군기지는 이라크에 주둔한 미군 기지 가운데 가장 큰 곳 중 하나다. 이곳에는 지난주 박격포탄 3발이 떨어졌다. 이라크군의 이런 조처는 이란 혁명수비대가 지원하는 이라크 시아파 민병대나 무장조직이 미군의 대(對)이란 압박에 대응하려고 미군 기지나 시설, 미국인을 겨냥한 군사 행동을 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정부는 이라크의 친이란 무장조직에 미군을 포함한 미국인과 미국 시설, 외교공관이 공격받으면 이란에 즉각 보복하겠다는 입장이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로켓포 쏴서라도”… 전두환 재판서 나온 헬기 사격

    “로켓포 쏴서라도”… 전두환 재판서 나온 헬기 사격

    軍상황일지·보급품·관련자 진술 등 제출 헬기용 벌컨포탄 1500발도 항공대 지급 “사단장이 무장헬기 조종사 호출” 증언도 “헌혈하는 사람에게 헬기가 총 쏴” 회고 ‘로켓포를 쏴서라도 때려라.’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무장한 군 헬기가 사격을 강행했다는 정황을 입증하는 기록물이 10일 ‘전두환 형사재판’에 등장했다. 광주지법 형사8단독 장동혁 부장 심리로 열린 전두환(88) 전 대통령의 사자명예훼손 사건 3차 공판기일에는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 등 시민 6명이 5·18 당시 헬기 사격 목격담을 쏟아냈다. 정 전 회장은 육군 항공대 상황일지,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 보급지원현황 자료, 계엄군의 진술 기록 등을 토대로 1980년 5월 당시 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했다. 정 전 회장이 공개한 자료에는 군 헬기가 항쟁에 참여한 시민을 사살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해당 자료는 육군 1항공여단 상황일지로 1980년 5월 27일 오전 5시 10분 상황에 대해 ‘전과 폭도사살 2명’이라고 기재됐다. 1항공여단은 전남도청에서 항전하던 광주 시민을 진압하고자 계엄군을 광주 도심에 다시 투입한 상무충정작전의 지원부대다. 정 전 회장은 전교사가 광주에 투입한 헬기에 지급한 보급품을 기록한 군 자료도 공개했다. 1980년 5월 전남북 계엄분소였던 전교사는 20㎜ 벌컨포탄 1500발을 항공대에 지급한 것으로 기록됐다. 정 전 회장은 무력 진압 지시를 받았다는 계엄군 증언을 담은 자료도 챙겨 왔다. 자료에는 1980년 5월 22일 오전 10시쯤 육군 31사단장이 505항공대 소속 500MD 무장헬기 조종사를 호출해 ‘로켓포를 쏴서라도 때려라’며 출동 명령을 내렸다는 증언이 담겼다.관련 자료를 공개한 정 전 회장은 옛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가 이뤄진 1980년 5월 21일 오후 헬기 사격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옛 전남매일신문사 앞쪽에서 동명동 집에 가려고 남동과 서석초등학교 방면으로 갔다”며 “당시 공중에서 헬기가 빙빙 돌며 ‘땅땅땅’ 총 쏘는 소리가 들려 근처 나무 밑으로 피신했다”고 말했다. 증언에 나선 최윤춘(56)씨는 1980년 5월 광주간호원보조양성소에 다니며 광주기독병원으로 실습을 나갔다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회고했다. 최씨는 “헬기가 낮게 날더니 ‘다다다’ 총소리가 났다. 맑은 날이었는데 마른 땅에 빗방울이 튀듯 바닥에 총알이 떨어지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최씨는 “의사 가운을 입고 긴급 환자를 이송하는 차에도 총을 쏘던 시절이었다. 헌혈하는 사람에게 헬기에서 총을 쏘는 게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총소리가 빈번했고 총상 환자가 넘쳐났다”고 강조했다. 전 전 대통령은 2017년 4월에 발간한 회고록을 통해 ‘5·18 당시 헬기 기총소사는 없었던 만큼 조비오 신부가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것은 왜곡된 악의적 주장이다. 조 신부는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다’라고 주장, 고 조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지난해 5월 3일 형사재판에 넘겨졌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6·25전쟁이 터졌다, 그래도 카메라는 돌아갔다…군·관 신분이지만 열정 하나로

    6·25전쟁이 터졌다, 그래도 카메라는 돌아갔다…군·관 신분이지만 열정 하나로

    해방 이후 열악한 제작 환경에도 불구하고 영화인들은 ‘한국’ 영화를 찾아가는 데 열중했다. 1948년 22편, 1949년 20편이라는 제작 편수는 영화계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됐음을 수치로 말해 준다. 국가 건설이라는 과제와 영화 예술을 멈추지 않겠다는 영화인들의 의지, 한국영화를 기다리는 관객들의 열망이 서로 조우한 결과였다. 하지만 1950년 발발한 6·25전쟁으로 그나마 일궈낸 영화산업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민족상잔의 비극 앞에 10여편의 촬영 현장은 곧바로 중단됐고, 영화인들 역시 피란민들과 같이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주목할 부분은 영화인들은 곧 다시 모였고, 영화 제작에 착수했다는 점이다. 영화인들은 1951년 1·4 후퇴 이후 진해, 대구, 부산 등 후방 도시의 군과 관으로 속속 집결해 뉴스영화와 기록영화 제작에 참가했다. 이른바 종군 활동을 통해 영화 작업을 이어 간 것이다. 또 피란 도시의 영화인들은 극영화를 만들기도 했는데, ‘악야’(신상옥 감독·1952), ‘태양의 거리’(민경식 감독·1952) 같은 작품들이 리얼리즘 화법을 통해 전시의 공기를 담아냈다. 6·25전쟁 기간 영화인들이 보여 준 고군분투는 1954년 이후 한국영화계가 곧바로 가동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국방부·공군·육군본부 등 소속으로 촬영 1·4 후퇴 이후 영화인들은 국방부 촬영대, 공군 촬영대, 육군본부 촬영대, 해군 촬영대 등 군과 미 공보원, 대한민국 공보처 등의 관에 각각 소속돼 뉴스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영화 현장에 복귀한다. 진해에 자리잡은 미 공보원에는 촬영기사 임병호, 임진환, 배성학, 현상기사 김봉수, 김형근, 녹음기사 이경순, 최칠복, 양후보, 편집기사 유재원, 김흥만, 김영희 등이 소속돼 ‘전진대한보’와 ‘리버티 뉴스’를 제작했다. 1950년 8월 대구에서 발족한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는 1951년 1·4 후퇴 이후 부산 보수동에 자리를 잡고 ‘국방 뉴스’를 제작했다. 촬영기사 김덕진, 김강윤, 김종환, 김학성, 홍일명, 심재흥, 양보환, 이성춘, 변인집, 현상기사 김창수, 노희삼, 편집기사 양주남, 김희수 그리고 정창화 감독 등이 활동했다. 대구의 공군본부 정훈감실 공군촬영대에는 홍성기 감독, 정인엽 촬영기사, 신상옥 감독, 함완섭 조명기사, 전택이, 김일해, 노경희, 황남 등의 배우들이 소속돼 있었다. 한편 1950년 9·28 서울 수복 직후부터 군의 각 부대는 정훈공작대를 조직했는데, 연극과 영화배우들은 이곳에 소속돼 피란 도시와 일선을 오가며 국민과 군인들을 위로했다. 특히 육군은 극단 신협과 악극단, 무용단으로 구성한 문예중대를 창설해 1·4 후퇴 이후 대구 문화극장(이후 한일극장)을 거점으로 공연했다. 제1소대 신협이 연극 공연을 마치면 가요인이 중심이 된 제2소대가 ‘가협’이라는 단체명으로 음악극을 공연하는 식이었다. 특히 신협의 공연은 전쟁 기간 동안 큰 인기를 누렸다. 전시 중에도 불구하고 공연마다 발 디딜 틈도 없는 초만원을 이루었다는 기록에서 그들의 공연이 전쟁에 지친 피란민들에게 잠시나마 현실을 잊는 순간이 됐음을 알 수 있다.●영화 ‘아름다운 서울’→ ‘아름다웠던 서울’로 전쟁 발발 후 극영화와 기록영화를 통틀어 처음 완성된 영화는 ‘아름다웠던 서울’(윤봉춘 감독·1950)이다. 대한민국 공보처의 의뢰로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착수한 관광문화영화 ‘아름다운 서울’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의 기록을 추가해서 ‘아름다웠던 서울’로 마무리된 것이다. 극영화 감독들이 다큐멘터리 제작 현장에 투신하게 된 것도 6·25전쟁이 만든 특별한 모습이다. 물론 촬영기사들 역시 종군기자로 활동하며 전선의 기록을 담당했다. 1951년에는 1사단의 후원을 받은 ‘서부전선’(윤봉춘 감독)과 육군본부의 후원으로 만든 ‘오랑캐의 발자취’(윤봉춘 감독)가 전황의 기록을 전했고, ‘육군포병학교’(방의석 감독)는 육군포병학교 생도들의 생활상과 교육 과정을 세미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았다. 6·25전쟁 시기에 제작된 기록영화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작품은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가 만든 ‘정의의 진격’(1951·1952) 2부작이다. 3년에 걸친 ‘정의의 진격’ 제작기는 전쟁기 한국영화사의 집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출발점은 한형모 감독이 흰 광목천에 검은 글씨로 직접 ‘국방부 촬영대’라고 쓴 완장을 만들어 차고, 전장으로 촬영을 나간 것이다. 미 보병부대의 전투를 취재하던 촬영기사 김학성과 이성춘이 박격포탄에 맞아 부상을 입기도 하는 등 한국영화사에 다시 없을 열악한 상황에서도 영화인들의 역량을 여실히 드러낸 의미 있는 작품이다. 기록영화뿐만 아니라 극영화도 기적적으로 생명을 이어 갔다. 서울이 아닌 대구, 부산, 마산 등 피란 도시에서 영화가 만들어진 것 역시 6·25전쟁으로 인한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배우 이민의 데뷔작인 ‘화랑도’(1951)는 전쟁으로 촬영이 중단됐다가 피란지 대구에서 완성됐고, 전쟁 발발 전에 서울에서 촬영을 시작했던 신상옥 감독의 데뷔작 ‘악야’(1952) 역시 배우가 모이면 촬영을 이어 나가는 방식으로 대구에서 마무리됐다. 당시 신문 지면은 “한국의 할리우드”라는 아이러니한 표현으로 피란도시 대구의 영화 제작 열기를 주목하고, ‘공포의 밤’(1952), ‘태양의 거리’(1952), ‘베일부인’(1952), ‘청춘’(1953) 등의 제작 소식에 지면을 할애했다. ●극영화 중에서는 ‘태양의 거리’만 보존돼 피란 도시 대구를 배경으로 촬영된 ‘태양의 거리’는 전쟁 시기 만들어진 극영화 중 한국영상자료원에 보존된 유일한 작품이다. 2013년 민경식 감독의 유가족으로부터 16㎜ 네거티브(원판) 필름을 입수한 덕분이다. 흥미롭게도 연출을 맡은 민경식은 1930년대 초반부터 대구 만경관에서 극장 간판을 그리고 있었다. 전쟁을 계기로 대구에 영화 제작 붐이 일자 꿈꿔 오던 감독으로 데뷔한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서울에서 잘살던 돌이 가족은 대구로 피란을 내려와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 노모(노재신)는 병이 위중하고, 형(전택이)은 무직의 불량배로 지내며, 누나 복희는 냉면집에서 일하고 있다. 돌이 가족과 친했던 문대식(박암)이 신임교사로 부임해 불량소년들을 선도하고, 돌이 가족도 돌보게 된다. 이 영화는 ‘악야’와 함께 ‘코리안 리얼리즘’을 시도한 것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마치 1940년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처럼 극영화와 기록영화가 혼재되는 영화미학을 선보인 것이다. 즉 ‘태양의 거리’는 극영화이지만, 영화의 배경으로 당시 피란도시의 모습이 그대로 기록되는 등 사료적 가치 역시 뛰어나다. 한편 민경식 감독의 동생 민정식이 북한의 두 번째 극영화 ‘용광로’(1950)를 연출한 월북영화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지역에서의 영화 제작 열기는 부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낙동강’(전창근 감독·1952)과 ‘고향의 등불’(장황연 감독·1953) 등이 경남도 공보과의 후원으로 제작됐다. 한편 제2육군병원의 후원을 받은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감독·1951)은 마산을 거점으로 만들어졌다. 이처럼 6·25전쟁기는 영화 제작의 중심이 잠시나마 서울에서 지역으로 이동했던 한국영화사의 유일한 시기로 기록된다.6·25전쟁 동안의 영화 제작은 기재보다는 사람 자체가 테크놀로지인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5㎜ 필름을 구할 수 없었기에 대부분의 극영화는 16㎜ 필름으로 제작됐고, 녹음은 현장에서의 동시녹음이 아니라 무조건 후시녹음이었다. 미공보원에는 자동현상기와 자기(磁氣)테이프식 녹음기 등이 갖춰져 있었지만, 영화인들은 목욕탕에 현상실을 만들어 손으로 직접 현상했고, 가뜩이나 필름 구하기도 쉽지 않은 형편에 녹음 역시 사운드 필름에 바로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라는 악조건과 수공업적 시설에도 불구하고 1950년에서 1953년까지 영화계는 뉴스영화와 기록영화뿐만 아니라 17편의 극영화를 제작해 한국영화의 맥을 이었다. 이는 무엇보다 군이나 각 기관에 소속돼 영화 제작을 뒷받침한 영화기술인들의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처럼 6·25전쟁 시기를 통해 구축된 인적 토대는 1954년 이후 한국영화가 성장하는 토대가 됐음을 기억해야 한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이란 “전화하면 협상? 미친 트럼프”

    로하니 “우리 선택은 대화 아닌 저항” 저농축 우라늄 생산속도 4배로 높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이틀간 “이란과 싸우고 싶지 않다”, “이란이 종말을 맞게 하겠다”, “이란이 전화하면 협상하겠다”, “이란은 거대한 힘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등 모순된 메시지를 연쇄적으로 던졌다. 이란은 트럼프 대통령을 ‘미치광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하며 핵개발 재개 가능성을 시사하는 등 결사 항전 의지를 다졌다. CNN 등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20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에서 기자단에게 “이란이 일을 저지르면 엄청난 힘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라면서 유사시 실력 행사를 하겠다고 시사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그들이 전화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협상할 것”이라면서 “그들에게 달린 문제다. 그들이 준비될 경우에만 (내게) 전화하기를 바란다”며 여지를 남겼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 직전 트위터에 “가짜뉴스가 미국이 이란과의 협상을 준비하려 한다고 전형적으로 잘못된 보도를 했다”며 협상 준비설을 부인하는 글을 올렸다. 그는 지난 19일에는 트위터에 “이란이 싸우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이란의 공식적 종말이 될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 발언은 같은 날 이라크 바그다드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500m 떨어진 지점에 로켓 포탄이 떨어진 사건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트윗 몇 시간 뒤 방송한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싸우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밝혀 혼란을 더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언행은 과거 북한에 했던 것과 매우 흡사하며, 고도의 협상 전략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CNN은 “트럼프 대통령은 최대 압박으로 상대를 벼랑 끝으로 몰아놓고 협상하는 스타일”이라면서 “상대의 위협에 더 강도 높은 위협으로 반응하다가 대화를 시작해 긴장을 완화하고 이겼다고 주장하는 식”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지금은 대화할 때가 아니다. 우리의 선택은 오직 저항뿐”이라고 말했다. 호세인 아미르 압돌라히안 이란 외무차관은 “트럼프가 우리 경제를 끝장내겠다는데 자기에게 전화를 하라니, 미친 대통령”이라고 비판했다. 이란 원자력청은 이날 중부 나탄즈의 시설에서 저농축 우라늄의 생산속도를 4배로 높였다고 밝혔다. 이란 정부는 이란 핵합의(JCPOA)가 규정한 우라늄 농축 농도 3.67%는 넘지 않되 저장 한도인 300㎏은 초과할 방침이다. 핵무기를 만들려면 90% 이상 고농축 우라늄이 필요하다. 합의를 깨지 않는 선에서 이란이 충분한 핵기술을 보유했음을 미국에 강조하고 여차하면 핵개발을 재개하겠다고 압박한 것이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수상한 장모 신다은, 공포탄 맞고 패션쇼에서 쓰러져..‘충격’

    수상한 장모 신다은, 공포탄 맞고 패션쇼에서 쓰러져..‘충격’

    신다은이 김혜선의 계략으로 인해 패션쇼에서 피습을 당한 뒤 무대에서 쓰러졌다. 20일 방송된 SBS 드라마 ‘수상한 장모’에서는 제니 한(신다은 분)의 쇼에 참석하는 오은석(박진우 분)의 모습이 전파를 탔다. 오애리(양정아 분)는 김영만(황명환 분)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 오다진(고인범 분)을 찾았으나, 오다진은 “안 된다. 모든 것은 은석이 몫이다”라며 단칼에 거절했다. 결국, 오애리는 “알았다. 양보하겠다. 은석이랑 일 잘 해보겠다. 제니 한 엄마 상대하려면 은석이 혼자 절대 안 된다”며 의지를 드러냈다. 제니 한은 한국행 티켓을 건네받은 뒤 기뻐했다. 한국을 그리워하는 제니 한을 위해 안만수(손우혁 분)가 직접 일을 기획했기 때문. 그러나 이 사실을 들은 제니 한은 “엄마가 나 대신에 안만수랑 밥 열심히 먹으라”며 그에 대해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들뜬 제니 한이 “공원 화장실, 미아리 찜질방 같은 게 생각난다”며 한국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자 왕수진(김혜선 분)은 크게 당황했다. 이어 그는 “너 그거 다 꿈 꾼거다. 한국 가기 전에 병원부터 가야겠다”고 둘러댔다. 또, “한국 다녀오면 안 서방과 결혼하라”고 종용했다. 이동주(김정현 분)과 이마음(이한서 분)은 집에서 내쫓길 위기에 처했다. 집 주인은 “세입자가 애도 없고, 돈도 달라는대로 주고 아주 맘에 든다”며 다른 사람과 집을 새로 계약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동주는 집주인으로부터 보증금을 돌려받은 뒤 좌절했다. 제니 한의 패션쇼도 시작됐다. “쇼 피날레에 나도 서겠다”는 제니 한의 말에 왕수진은 “잠잠하더니 왜 쓸데없는 데에 욕심내는 것이냐”고 그를 말렸다. 그가 뜻을 굽히지 않자 왕수진은 다른 계략을 계획했다. 쇼 끝무렵 괴한이 제니 한에게 공포탄을 쐈으며, 제니 한은 머리에 피를 흘린 뒤 무대 위에 쓰러졌다. 오은석은 제니 한에게 총을 쏜 사람의 뒤를 쫓았다. 제니 한에게 총을 쏘게 한 사람이 바로 왕수진이었던 것. “수상한 사람이 이쪽으로 뛰어 들어왔다”는 오은석의 말에 왕수진은 “그럴 일은 없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라”며 자신의 계략을 숨겼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부 seoulen@seoul.co.kr
  • [밀리터리 인사이드] ‘군인’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

    [밀리터리 인사이드] ‘군인’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

    화려한 모습 뒤에 숨겨진 군인의 노고어린이날 맞아 군인의 노력과 땀 공개 최근 많은 언론이 소방관들의 헌신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국민이 우리 가까이에서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땀흘리는 그들에게 경의를 보냅니다. 또 한편으로 우리 주변에선 좀처럼 눈에 띄지 않지만 마찬가지로 묵묵히 땀흘리며 헌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육·해·공군 장병들입니다. 마침 5일 어린이날을 맞아 장병들의 노고에 보답하기 위해 화려한 화보가 아닌 그들의 진짜 모습을 공개하려 합니다. 군을 잘 모르는 어린이, 청소년뿐만 아니라 군 생활을 직접 해본 예비역들에게도 다소 생소한 장면일 수 있습니다. 이 사진을 보고 군인이 아름답다고 느껴진다면, 마음속으로나마 작은 경의를 보내주길 바랍니다.해병대 정예부대인 수색대의 특수수색교육 과정 중 이른바 ‘지옥주’로 불리는 5일 간의 ‘극기주 훈련’은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훈련량으로 유명합니다. 식사량을 50%로 줄이고 취침도 하루 1시간으로 제한합니다. 하루도 전투화를 벗을 수도 없어 발이 물에 불어 터지는 고통을 견뎌야 합니다. 훈련 중 대원들은 무게가 80㎏인 상륙용 고무보트(IBS)를 머리로 떠받친 상태로 식사하기도 합니다.특수전사령부(특전사) 대원도 ‘인간 병기’로 불릴 정도로 전투력이 높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유사시 적의 심장부를 강타하는 역할을 맡기 때문에 체력과 인내력은 필수입니다. 그들을 떠받치는 가장 큰 힘은 ‘천리행군’으로 성할 틈이 없는 ‘발’입니다. 7~10일간 400㎞를 걷는데 전술훈련을 포함하면 실제 거리는 600㎞에 이릅니다.추위가 가시지 않은 2월, 강원 평창 황병산 일대에서 특전사의 ‘설한지 극복훈련’이 열립니다. 6·25 전쟁 당시 미 해병대 1사단이 함경남도 장진호에서 2주간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함흥으로 성공적으로 퇴각한 ‘장진호 전투’의 교훈을 되새기는 훈련입니다. 1963년부터 해마다 특전사 8개 대대가 영하 20도가 넘는 추위 속에서 9박 10일간 전술훈련을 진행해왔습니다. 여기에는 얼음물을 뚫고 가는 ‘수중침투훈련’도 포함돼 있습니다.‘탄약수’는 화려한 전차 사격에 가려진 숨은 공신입니다. 신형 K2 전차는 자동 탄약장전이 가능해 탄약수가 필요없지만 K1 전차 등은 탄약수가 직접 포탄을 장전해줘야 합니다. 무게가 29㎏에 이르는 포탄을 좁은 공간 안에서 수시로 들어올려 장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저격수’가 단순히 사격만 잘 하면 되는 직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적진에서 30분 이내에 위장해야 하고 빠른 침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체력과 순발력이 필수입니다. 또 한여름에 수일을 잠복하며 소변과 대변을 참는 고통도 감내해야 합니다. 저격팀은 2인 1조로 구성되는데 거리와 바람을 관측하는 ‘관측수’와의 팀웍도 중요합니다.해군 잠수함 승조원들은 매년 한차례 비상시를 대비해 10m 깊이 수조에서 비상탈출 훈련을 실시합니다. 너무 빠른 속도로 수면으로 올라오면 강한 수압에 눌린 공기가 갑자기 팽창해 폐를 파열시킬 수 있기 때문에 고도의 주의력이 필요한 훈련입니다.2010년 천안함 피격사건 등의 영향으로 함정 손상으로 인한 침수 대비 훈련이 강화됐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몸으로 쏟아져 나오는 물을 막아야 할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해군은 체계적으로 피해 부위를 복구해 승조원의 생존성을 높이도록 2020년까지 ‘한국형 함정 손상통제체계’를 마련할 계획입니다.전차 등의 기계화장비를 강 건너편으로 옮기는 도하작전은 ‘예술’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높은 집중력이 필요한 훈련입니다. 수많은 공병의 수작업으로 작전이 이뤄지지만, 국민들은 전차가 강을 건너는 모습만 기억할 뿐입니다.완전 무장한 상태로 진행하는 ‘고공강하훈련’은 수백회를 진행한 베테랑도 긴장의 끈을 놓기 어려운 고난도 훈련 중 하나입니다. 육군 특전사, 해병대 수색대, 해군 특수전 전단 등 특수전 부대원들은 적지 침투를 위해 매년 정기적으로 강하훈련을 받습니다. 낙하산 포장 과정에 줄이 꼬였는지, 실밥이 터졌는지 살피는 것도 그들의 중요한 임무입니다.일몰을 뒤로 하고 경계근무를 서는 병사, 일출을 감상할 여유도 없이 경계에 전념하는 전투기 조종사를 볼 때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그들이 흘렸을 땀의 의미와 깊이를 떠올리다면 더욱 큰 감동이 함께 할 겁니다.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실탄 사격장, 총알 피하는 교관의 ‘목숨건 훈련법’

    실탄 사격장, 총알 피하는 교관의 ‘목숨건 훈련법’

    실탄 사격장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채, 경찰관들의 실탄 사격을 훈련시키는 한 교관의 ‘몸짓‘이 화제다. 지난 25일 영국 외신 데일리메일이 다소 충격적으로 보이는, ‘목숨 건 실탄 사격 훈련법’을 전했다.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든 상황이 벌어진 곳은 브라질 남부 파라나에 있는 상급경찰학교 사격장 안. 훈련 방법은 간단하다. 사격 라인에 서 있는 강력계 경찰관들은 교관의 사격발사 명령과 동시에 사격을 시작하면 된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단 하나의 규칙이 있다.  사격 도중 자신들 앞쪽으로 교관이 지나가면 발사를 멈추고 대기하다 교관이 다시 지나가면 발사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비교적 간단한 훈련처럼 보이지만 자칫 실수 하나에 교관의 목숨이 날아갈 수 있다. 때문에 총을 쏘는 사람과 교관 모두 극도의 신중함과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사격라인에 있는 경찰관들이 자신 앞에 있는 교관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교관은 자신이 원하는 데로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할 수 있고,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췄다가 어느 방향으로든 다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50초 영상은 경찰관 중 한 명이 자신의 총기에 문제점을 발견하고 사격라인에 무릎을 꿇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루이즈 모라 경찰교육대 소장은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영상 속 훈련모습은 정식적인 교육 과정의 일부가 아니다”라며 “충분히 숙련되고 수 년 동안 현장에서 일해 온 경찰관들에게만 한정적으로 훈련한 것”이라고 말했다. 교관에 대해서도 “브라질 뿐만 아니라 해외 여러 곳에서 무수히 많은 작전 수행을 성공적으로 해 온 베테랑”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이 훈련은 극심한 압박 속에서 경찰관들의 스트레스 지수를 확인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활용될 수 있다”고 했다. 경찰학교 한 관계자는 “보통 사격 훈련에는 실탄과 공포탄이 함께 사용되고 있지만 동영상 속 훈련 상황에서 실탄이 사용됐는지는 아직 확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공공 안전 전문가인 페르난도 벨로소는 “실탄 사격 훈련의 첫 번째 기본 규칙 중 하나는 ‘사격수와 목표물 사이엔 그 누구도 들어가선 안 된다’라는 것”이라며 훈련을 하는 사람과 훈련을 받는 사람 모두의 안전이 가장 중요함을 지적했다. 경찰학교 관계자는 이 훈련법이 논란이 되자 “교관의 훈련 행위는 현재 내사 중에 있으며, 교관이 문책을 받고 훈련이 일시적으로 중단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아무리 뭐라해도 이 훈련법, ‘사람잡는 훈련‘임엔 두말할 필요 없는 듯 하다.사진 영상=Daily Mail 유튜브  박홍규 기자 gophk@seoul.co.kr
  • [김대영의 무기 인사이드] 스웨덴이 만든 명품 무반동총 ‘칼 구스타브 M4’

    [김대영의 무기 인사이드] 스웨덴이 만든 명품 무반동총 ‘칼 구스타브 M4’

    무반동총은 발사할 때 포신이 후퇴하지 않고 반동이 없는 포를 얘기한다. 전차를 잡는 대전차 화기 혹은 보병을 지원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등장한 무반동총은 오늘날 핵심적인 보병분대 화기로 손꼽힌다. 특히 스웨덴 사브사가 생산 중인 칼 구스타브 무반동총은 전 세계 수많은 무반동총 가운데 '명품'으로 손꼽힐 만큼 뛰어난 성능을 자랑한다.지난 1948년부터 스웨덴군이 사용한 칼 구스타브 무반동총은 'Granatgevär(유탄총) m/48'이라는 제식 명칭보다는 ‘칼 구스타브’(Carl Gustaf)로 잘 알려지게 된다. 이렇게 된 까닭은 당시 칼 구스타브 무반동총은 스웨덴 국왕 칼 10세 구스타브의 이름을 딴 칼 구스타브 조병창에서 만들어졌고, 이런 이유로 조병창의 이름을 따 칼 구스타브로 불리게 됐다. 오늘날 전 세계 40여 개국에서 사용 중인 칼 구스타브 무반동총은 크고 작은 전쟁에서 튼튼한 내구성과 강력한 위력으로 혁혁한 전과를 기록했다. 70여 년 동안 각국의 사랑을 받아온 칼 구스타브 무반동총은 초기 모델 M1을 포함 4번의 대대적인 개량을 통해 현대전에서 빠져서는 안 될 필수 무기로 자리 잡았다.특히 임무에 맞게 특화된 포탄을 사용할 수 있는 칼 구스타프 무반동총은, 대전차 뿐만 아니라 적 진지 파괴, 대인살상 등 다양한 임무를 유연하게 수행할 수 있다. 84㎜의 구경을 갖고 분당 6발의 포탄을 발사할 수 있는 칼 구스타프 무반동총은 사용자인 군인들의 전투환경을 고려해 인체공학적으로 개량되었고 특히 피로를 줄 수 있는 무게 경감에 주력했다. 가장 최근 등장한 칼 구스타프 M4는 강철 대신 티타늄과 탄소섬유를 사용해 무게가 7㎏ 미만이고 길이도 1m 이하이다. 또한 일발필중(一發必中)의 사격이 가능하도록 지능형 조준경을 채택했다. 반면 우리 육군이 사용하고 있는 대대급 직사화기인 KM67 90㎜ 무반동총의 경우 무게는 17㎏에 길이는 1.35m이다. 이 때문에 KM67 90㎜ 무반동총 사수는 육군을 전역한 예비역들 사이에서 155㎜ 견인포, 81㎜ 박격포, 장간교 조립과 함께 최악의 4대 보직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더해 KM67 90㎜ 무반동총은 조준도 힘들고 노후화되어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다.3발만 쏘면 사실상 발사대의 수명을 다하는 우리 육군의 판저파우스트-3 대전차 로켓과 달리 칼 구스타브 M4 무반동총은 1000발 이상 사격이 가능하다. 칼 구스타브 무반동총은 콧대 높은 미군의 제식무기로 채용되었다. 미군이 자국산 무기가 아닌 다른 나라의 무기를 채택한 경우는 이례적인 상황이 아니면 보기 드물다. 특히 미 특수전 부대들이 애용하고 있는데 지난 1980년대 말 미군은 특수전 부대의 장비 현대화 사업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미 육군 레인저가 사용 중이던 M67 무반동총을 대체하기 위해 각종 대전차 로켓과 무반동총을 상대로 엄격한 테스트를 진행했고 그 결과 칼 구스타브 M3 무반동총을 선택했다. 지금은 미 특수전 사령부 예하 미 육군 레인저와 그린베레로 알려진 미 육군 특전부대 그리고 미 해병대 레이더스와 미 해군의 네이비실이 칼 구스타브 M3 무반동총을 운용하고 있다. 이밖에 미 육군과 해병대도 도입해 사용 중이다. 김대영 군사평론가 kodefkim@naver.com
  • [우주를 보다] 日 하야부사2, 소행성에 ‘폭발물 투하’ 영상 공개

    [우주를 보다] 日 하야부사2, 소행성에 ‘폭발물 투하’ 영상 공개

    일본의 탐사선 하야부사2가 소행성 ‘류구’(龍宮)에 폭발물을 떨어뜨리는 모습이 영상으로 공개됐다. 지난 21일 일본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는 하야부사2가 류구 표면 기준 500m 위에서 폭발물을 떨어뜨리는 모습을 트위터에 공개했다. JAXA에 따르면 지난 5일 하야부사2는 류구의 적도 부근에 2㎏짜리 원반형태의 구리 포탄을 초당 2㎞ 속도로 떨어뜨리는데 성공했다. 이 충격으로 암석이 사방으로 튀면서 류구에 직경 수m의 인공 분화구가 생성됐다. 물론 소행성에 인위적인 구멍을 뚫는 이유는 있다.JAXA 측은 원초세계인 소행성에서 생명의 흔적을 찾고있는데 이를 위해 내부의 샘플 채취가 필수다. 다음달 JAXA는 하야부사2를 이곳 분화구 주변에 착륙시켜 암석과 모래 등을 채취할 계획으로, 탐사선이 소행성에 구멍을 내고 착륙까지 시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편 수많은 바위와 돌로 가득한 류구는 지구에서 화성 쪽으로 2억8000만㎞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지름은 870m, 공전주기는 475일, 자전주기는 7.5시간이며 태양계 형성 당시의 물질이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돼 연구가치가 매우 높다.우리말로 ‘송골매’라는 뜻을 가진 하야부사 2호는 세계 처음으로 소행성 ‘이토카와’의 미립자를 가져온 하야부사의 문제점을 보완, 개발해 지난 2014년 12월 발사됐다. 특히 하야부사 2호는 이번처럼 류구 표면의 물질을 채취하고서 2020년 말 지구로 귀환하는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다. 왕복으로 총 52억㎞에 달하는 대장정이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불 지르고 기다리다 뛰쳐나온 이웃에 흉기… 아이·여성·노인 노려

    불 지르고 기다리다 뛰쳐나온 이웃에 흉기… 아이·여성·노인 노려

    “이웃 주민들이 계단에 쓰러져 있었고,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습니다. 밖으로 나갔으면 저도 살아 있기 어려웠을 겁니다.”(303동 주민) 17일 새벽 무차별적인 방화·살인 사건이 발생한 경남 진주시 가좌동의 한 아파트 주민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주민 5명이 숨지고, 13명이 다쳤다. 이 아파트 303동 4층에 사는 안모(42)씨가 자신의 집에 불을 질러 화재 신고가 소방서에 접수된 것은 오전 4시 29분. 3분 뒤에는 경찰에도 “흉기로 사람을 찌른다”, “사람들이 대피하고 있다” 등의 절박한 112 신고가 잇따라 접수됐다. 화재 신고만 30건 접수될 정도로 재난 현장을 방불케 했다.경찰에 따르면 안씨는 오전 4시 25분쯤 범행 전 구입한 휘발유를 주방에 뿌린 뒤 신문지에 불을 붙였다. 불길이 번지자 안씨는 아파트 2층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에 자리를 잡고 대피하는 주민을 기다렸다. 화재에 놀란 주민들이 쏟아져 나오자 양손에 쥔 흉기를 무차별적으로 휘둘렀다. 309동에 사는 박모(83)씨는 오전 4시 30분쯤 신문을 가지러 밖으로 나오다가 “사람 살려”라는 소리를 듣고 303동 앞 쓰레기장 쪽으로 향했다. 박씨는 곧장 119로 신고했다. 박씨는 “303동에서 ‘살려달라’는 비명소리가 계속 들렸다”며 “그때는 불이 나서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만약 그때 303동 안으로 들어갔으면 나도 죽었을 것”이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다른 주민도 “연기가 자욱해 급히 아파트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런데 3층쯤 내려갔을 때 주민들이 반대로 뛰어올라오며 ‘누가 칼로 찌른다’고 소리를 쳤다. 주민 10여명과 함께 3층으로 뛰어 올라가 문이 열린 집에 들어가서 조용해질 때까지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오전 4시 35분 현장에 도착했고, 소방대원들은 2분 뒤에 도착했다. 경찰관 5명은 2층 복도에서 흉기를 들고 서 있는 안씨와 마주했다. 경찰이 공포탄 한 발과 테이저건 한 발을 쐈지만, 안씨가 피하는 바람에 불발됐다. 안씨는 들고 있던 흉기를 경찰을 향해 던졌다. 이번에는 경찰이 공포탄과 실탄을 한 발씩 쐈지만 역시 안씨를 비껴갔다. 안씨는 다른 손에 쥐고 있던 흉기를 경찰에게 던졌다. 안씨가 흉기를 모두 던져버린 뒤에야 경찰은 안씨를 덮칠 수 있었다. 경찰은 현장 도착 20분 만인 오전 4시 55분에야 안씨를 검거했다. 화재는 4시 58분에 진압됐다. 불은 안씨 집 내부를 모두 태우고 아파트 복도 20㎡를 그을렸다. 경찰과 소방관, 불길 속에 피 흘리며 쓰러진 주민들까지 뒤엉키는 소란에 잠에서 깬 대다수 주민들은 공포에 떨며 옥상 등으로 대피했다. 303동 10층에 거주하는 김모(67·여)씨는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밑으로 내려가려다 연기 때문에 발길을 베란다로 돌려 화를 면했다. 아수라장에서 침착하게 주민 대피를 도운 아파트 관리소 직원도 있었다. 이날 야간 당직이었던 정모(29)씨는 새벽 화재 비상벨을 듣고 현장에 달려가 2층에서 흉기를 든 안씨와 맞닥뜨렸다. 대치 과정에서 흉기에 얼굴을 다쳤지만, 각 아파트 문을 두드리며 주민들이 안전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게 도왔다. 안씨의 흉기에 찔려 숨진 황모(75)씨, 김모(65·여)씨, 이모(57·여)씨, 금모(12)양, 최모(19)양 등 5명은 아파트 1층 입구와 계단, 2층 복도에 쓰러져 있었다. 사망자는 전부 고령자와 여성이었다. 주차장과 1층 입구에서 발견된 김모(72·여)씨 등 부상자 5명은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으며, 화재 연기 등으로 인한 부상자 8명도 병원 치료를 받았다. 진주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진주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진주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살려줘” 새벽 깨운 비명소리…“문 열린 집 대피해 벌벌 떨었다”

    “살려줘” 새벽 깨운 비명소리…“문 열린 집 대피해 벌벌 떨었다”

    “이웃 주민들이 계단에 쓰러져 있었고,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습니다. 밖으로 나갔으면 저도 살아 있기 어려웠을 거예요.”(303동 주민) 17일 새벽 무차별적인 방화·살인 사건이 발생한 경남 진주시 가좌동의 한 아파트 주민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이번 사건으로 11살 소녀를 포함해 주민 5명이 숨지고, 13명이 다쳤다. 이 아파트 303동 4층에 사는 안모(42)씨가 자신의 집에 불을 질러 화재 신고가 소방서에 접수된 것은 오전 4시 29분. 3분 뒤에는 경찰에도 “흉기로 사람을 찌른다”, “사람들이 대피하고 있다”,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등의 절박한 112신고가 잇따라 접수됐다. 화재신고만 30건 접수될 정도로 재난 현장을 방불케하는 아비규환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안씨는 오전 4시 25분쯤 범행 전 구입한 휘발유를 주방에 뿌린 뒤 신문지에 불을 붙였다. 불길이 번지자 안씨는 아파트 2층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에 자리를 잡고 대피하는 주민을 기다렸다. 화재에 놀란 주민들이 쏟아져 나오자 양손에 쥔 흉기를 무차별적으로 휘둘렀다.309동에 사는 박모(83)씨는 오전 4시 30분쯤 신문을 받으러 밖으로 나오다가 “사람 살려” 소리를 듣고 303동 앞 쓰레기장 쪽으로 향했다. 곧장 119에 신고했다는 “303동에서 ‘살려달라’는 비명소리가 계속 들렸다”며 “그때는 불이 나서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만약 그때 303동 안으로 들어갔으면 나도 죽었을 것”이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다른 주민도 “연기가 자욱해 급히 아파트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런데 3층쯤 내려갔을 때 주민들이 반대로 뛰어올라오며 ‘누가 칼로 찌른다’고 소리쳤다. 주민 10여명과 함께 3층으로 뛰어 올라가, 문이 열린 집에 들어가서 조용해질 때까지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오전 4시 35분에 현장에 도착했고, 소방대원들은 2분 뒤에 도착했다. 경찰관 4명은 2층 복도에서 흉기를 들고 서 있는 안씨와 마주했다. 경찰이 공포탄 한 발과 테이저건 한 발을 쐈지만, 안씨가 피하는 바람에 불발됐다. 안씨는 들고 있던 흉기를 경찰에게 던졌다. 이번에는 경찰이 공포탄과 실탄을 한 발씩 쐈지만 역시 안씨를 비껴갔다. 안씨는 다른 손에 쥐고 있던 흉기를 경찰에게 던졌다. 안씨가 흉기를 모두 던져버린 뒤에야 경찰은 안씨를 덮칠 수 있었다. 경찰은 현장 도착 20분 만인 오전 4시 55분에야 검거했다. 화재는 4시 58분에 진압됐다. 불은 안씨 집 내부를 모두 태우고 아파트 복도 20㎡를 그을렸다.경찰과 소방관, 불길 속에 피 흘리며 쓰러진 주민들까지 뒤엉키는 소란에 잠에서 깬 대다수 주민들은 공포에 떨며 옥상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대피했다. 안씨와 같은 층에 사는 송모(82·여)씨는 엘레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온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송씨는 “불이 난 줄 알고 밖으로 나와보니 복도에 피가 흥건했고, 계단으로 가기는 두려워 엘리베이터를 탔다”고 전했다. 303동 10층에 거주하는 김모(67·여)씨는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밑으로 내려가려다 연기 때문에 발길을 베란다로 돌리면서 화를 면했다. 같은 층에 사는 이웃주민들도 연기로 인해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불이 꺼지만을 기다렸다. 김씨는 “불이 다 꺼지고 내려가 보니, 아파트 밖에서 피 흘리면서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고, 119구급대원들이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안씨의 흉기에 찔려 숨진 황모(74)씨, 김모(64·여)씨, 이모(56·여)씨, 금모(11)양, 최모(18)양 등 5명은 아파트 1층 입구와 계단, 2층 복도에 쓰러져 있었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안타깝게 숨을 거뒀다. 사망자는 전부 고령자와 여성이었다. 주차장과 1층 입구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 김모(72·여)씨 등 부상자 5명은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연기 등 화재로 인한 부상자 8명도 병원 치료를 받았다. 진주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진주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곽병찬의 역사앞에서 묻다] 전쟁 중에도 정쟁 올인 이승만… 산불도 정치에 활용하는 보수 야당

    [곽병찬의 역사앞에서 묻다] 전쟁 중에도 정쟁 올인 이승만… 산불도 정치에 활용하는 보수 야당

    전쟁엔 관심 없다, 정쟁에 ‘올인’할 뿐. 1951년 7월 초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협상이 시작됐다. 교착된 전선에서는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고지전이 전개됐다. 지난 1년 전면전 때보다 더 많은 군인이 희생당하는 처절한 전투였다. 전선에서 500여킬로미터 떨어진 임시수도 부산. 이승만 대통령은 다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산혈해의 전선에는 관심이 없었다. 국민을 현혹한 ‘북진통일’, ‘휴전협상 반대’는 당시 한국군으로는 이룰 수 없는 허황한 구호였다. 당시 그에게 절박한 것은 야당이 압도하는 2대 국회를 전복시키거나 장악하는 일이었다.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2대 총선에서 이승만 세력은 궤멸했다. 전체 210석 가운데 57석만 차지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제헌의회의원 선거에 불참했던 지사들이 대거 출마해 당선됐다. 과반이 훨씬 넘는 126석이 무소속이었다. 당시는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했다. 이승만의 재선은 불가능했다.총선 결과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국민은 제주4·3과 여순 사건 학살의 배후, 백범 김구와 몽양 여운형 등 민족지도자의 잇따른 암살의 배후에 이승만이 있다고 믿었다. 동족의 고혈을 일제에 바친 자들을 처단하기 위한 반민족행위자처벌특별위원회(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산시킨 것도 이승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민심은 이승만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는 2대 총선을 미루려 했다. 그는 이미 지방의회의원 선거도 무산시킨 터였다. 제헌의회가 1949년 7월 지방자치법을 제정해 8월 15일 이후 지방의회를 구성하도록 했지만, 이승만은 제주4·3, 여순 사건 등을 핑계로 미뤘다. 12월에는 아예 지방의회 구성을 무기한 유보하도록 지방자치법을 개정해버렸다. 미국 정부가 눈치 챘다. 한반도에서 소련과 각축하고 있던 미국은 국제여론에 민감했다. 제주4·3 문제로 소련에 된통 당한 터였다. 딘 구더햄 애치슨 국무장관이 나서서 이승만에게 경고했다. 총선을 연기한다면 대한군사경제지원을 철회하겠다! 앞서 1월 태평양 미국 방위선에서 한반도를 빼버린 애치슨이었다. 미국이 경제지원까지 중단한다면 이승만은 끝장이었다. 이승만은 꼬리를 내렸다. ‘미국의 등쌀에 밀려’ 그렇게 울며 겨자 먹기로 실시한 총선이었다.이후에도 악재가 잇따랐다. 6·25전쟁이 터졌고, 27일 새벽 몰래 서울을 버렸고, 대전에서 ‘국군이 북진 중’이라고 거짓 방송을 했다. 1951년 1월엔 간부들이 식량과 피복을 빼먹고 뜯어먹어 장정 1000여명이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수만명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던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졌다. 간부들은 이승만의 사조직 대한청년단 단원들이었다. 2월엔 국군이 어린이 359명을 포함해 민간인 719명을 학살한 거창양민학살 사건이 터졌다. 그렇다고 포기할 이승만이 아니었다. 1951년 7월 휴전협상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 본격적인 정치공작에 나섰다. 2대 대통령 선거를 8개월여 앞둔 1951년 11월 말 개헌 추진을 선언했다. 29일 공비 소탕을 명분으로 지리산 주변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날 국무회의는 대통령직선제를 뼈대로 한 개헌안도 의결했다. 30일 국회에 개헌안을 제출했다. 대통령을 국민 직접선거로 뽑자는 것이었다. 군사, 경찰, 행정권이 압도하는 전시체제였으니 직접선거로 한다면 승산은 충분했다. 북의 남침처럼 그야말로 전격전이었다. 11월 당시 교착된 160여마일 전선에서는 근접전이 격렬해지고 있었다. 11월 19일 국군은 동부전선의 요충지 월비산을 적에게 내줬다. 11월 30일엔 양구 북방 어은산과 백석산 사이의 바위 하나(크리스마스고지)를 두고 유엔과 중공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대규모 전투의 전초전이었다. 펀치볼,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백석산, 백마고지, 화살머리고지, 교암산, 지형능선, 벙커고지, 삼각고지 등은 차라리 병사의 거대한 무덤이었다. 1952년 1월 18일, 국회는 정부 개헌안을 부결시켰다. 찬성은 14표에 불과했고, 반대는 개헌선을 넘는 143표였다. 야당은 이승만이 도발하지 못하도록 내각제 개헌안을 제출했다. 대통령 직선제 도발로 벌어진 정쟁은 전면전으로 발전했다. 그날도 유엔군의 대대적인 북폭이 있었고, 고지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승만은 ‘플랜2’를 꺼냈다. 여순 사건을 핑계로 미뤘던 지방의회의원 선거를 전쟁 중에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방의회를 앞세워 국회를 압박하려는 것이었다. 경찰, 행정권은 물론 군까지 동원할 수 있는 전시체제에서 여당의 지방의회 장악은 여반장이었다. 1952년 4월 25일과 5월 10일 시읍면, 도 의회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예상대로 이승만계가 싹쓸이했다. 관제 선거로 들썩이던 4월 23일 중부전선에선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유엔군이 연천을 내줬다. 평강과 금성에선 대규모 근접전이 벌어졌다. 5월 8일 중공군은 모든 전선에서 공세를 펼쳤다. 연천 탈환을 위한 교전이 7일째 계속됐다. 유엔군은 평양, 사리원, 희천, 정주, 청진, 수안 등 후방의 병참기지 철교 등을 폭격했다. 5월 이승만의 국회 침공이 본격화했다. 지방의원들이 피란지 부산의 국회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민족자결단, 백골단, 땃벌떼 등 정체불명의 폭력배들이 가세해 국회를 무력화시켰다. 이들의 요구는 하나, 국회 해산이었다. 경찰은 수수방관했다. 5월 25일 이승만은 부산·경남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공비 소탕과 병참기지 방어가 명분이었다. 그러나 공비 소탕은 1951년 11월 25일 창설된 백야전투사령부가 4단계 작전을 통해 1952년 3월 14일 종료를 공식 선언한 터였다. 계엄군은 25일 새벽부터 소탕에 나섰다. 공비가 아니라 야당 의원이었다. 26일 아침엔 국회의원 통근버스를 크레인으로 끌고 헌병대로 연행했다. 이어 국제공산당 프락치 사건을 발표했다. 국회의원 10명이 구속됐다. 국회 기능은 마비됐다. 6월 4일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에 내각제 요소를 짬뽕한 발췌개헌안을 발의했다. 6월 11일 지방의원들이 다시 국회로 몰려와 직선제 통과 시위를 벌였다. 미국 대사관 난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전선에서는 6월 14일 중공군이 중부전선 철의 삼각지에 무려 7000여발의 포탄을 유엔군 진지에 퍼부었다. 5일 동안 중공군 1000여명이 사망했고, 그로부터 3개월간 아군 971명이 전사하고 3120명이 부상했다. 철의 삼각지대는 말 그대로 주검이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를 이룬 ‘시산혈해’였다. 6월 20일 김성수 이시영 김창숙 등 원로들의 반독재호헌구국선언대회가 폭력배들에 의해 피로 얼룩졌다. 국회에서는 발췌개헌안이 상정됐지만, 정족수 미달로 의결할 수 없었다. 이승만은 구속 의원들을 석방했다. 국회 표결에 참여하라는 것이었다. 30여개 고지전은 더욱 격렬해지고 있었다. 7월 초부터 중공군은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을 장악하기 위해 대대 규모의 공격을 해왔고, 7일엔 탱크 14대를 앞세우고 유엔군 진지를 공격했다. 유엔군은 판문점 동쪽 북한군 3개 진지를 공격했다. 수도고지 공방은 8월 초 사단 규모의 대규모 전투로 발전했고, 하룻밤에 주인이 다섯 번이나 바뀌기도 했다. 미국은 7월 9일 한국전 희생자가 전년도(1951년)보다 552명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임시수도 부산에선 7월 초부터 미군이 군정을 다시 실시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신익희 의장, 조봉암 부의장 등이 도피 중인 의원들에게 국회 등원을 설득했다. 7월 4일 헌병이 국회의사당과 회의장을 포위한 가운데 발췌개헌안에 대한 표결이 이루어졌다. 185명 출석 166명 찬성, 기권 3명, 반대 0명으로 통과됐다. 미국의 간섭이 주효했다. 미국은 휴전협상에 반대하는 이승만과 타협을 하고, 직선제를 지지했다. 이승만은 전쟁과 재난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권력 장악을 위한 정쟁 승리에 ‘올인’했다. 지난주 강원도 시민과 소방관들은 산불과 사투를 벌였다. 그 와중에 자유한국당 안팎에선 ‘북한과 협의? 빨갱이 정부!’라고 색깔론을 제기하거나 ‘촛불 정부? 산불 정부!’라고 이죽거렸다. 원내에서는 재난 컨트롤타워인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을 국회에 잡아뒀다. 재난은 외면하고 정쟁에 몰두하는 것이 이승만의 후계 집단답다. 논설고문 kbc@seoul.co.kr
  • 신체 고통 못느끼는 여성…세계 첫 사례 보고 ‘꿈의 진통제 나올까’

    신체 고통 못느끼는 여성…세계 첫 사례 보고 ‘꿈의 진통제 나올까’

    고통과 불안을 느끼지 못하는 70대 여성이 의학계에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다. 영국 런던대학교(UCL)는 지난 27일(현지시간) 보도자료를 내고 이 여성의 유전자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인버네스주 화이트브릿지 거주 여성 조 카메론(71)은 65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심한 염증성 관절 질환으로 수술을 받은 카메론 여사는 진통제 없이도 멀쩡해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의료진은 수술 후 이 여성에게 아세트아미노펜(타이레놀 등의 주성분으로 해열 진통 작용을 한다)을 처방했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하니 약도 필요가 없었다. 수술 다음 날 고통지수 평가에서는 10점 만점 중 0점을 선택할 정도였다. 카메론 여사는 사는 동안 한 번도 이렇다 할 신체적 고통을 느껴본 적이 없다. 심지어 아이 둘을 출산할 때조차 고통이 없었다. 그녀는 “8살 때 롤러스케이트를 타다가 팔이 부러진 적이 있었다. 나는 몰랐는데 사흘 뒤 엄마가 팔이 이상하게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골절 사실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이 여성은 화상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 오븐에 살이 데어 타들어가는 냄새가 나야 비로소 화상을 인지하는 정도다. 무슨 일이 있어도 불안을 잘 느끼지 않는 것 역시 특징적이다. 몇 년 전 도로를 달리던 카메론의 차가 도랑으로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그때도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고 평온함을 유지했다.수백만분의 일 확률로 나타나는 현상에 런던대학교 유전학 박사 제임스 콕스와 스코틀랜드 NHS 병원 마취통증의학과 박사 데브짓 스리바스타바는 카메론의 유전자 분석에 들어갔다. 분석 결과 그녀에게서는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유전자의 변이가 발견됐다. 하나는 위(僞) 유전자(죽은 유전자, 기능이 살아 있었지만 개체의 생존에 필수적이지는 않았던 유전자가 진화과정 동안 DNA 서열 내에 반복적으로 해로운 돌연변이가 축적되어 기능이 죽어 버린 유전자)로 여겨졌던 FAAH-OUT의 미세결실로 지금까지 발견된 적 없었던 형태였으며, 다른 하나는 FAAH 효소를 조절하는 인접 유전자의 변이였다. FAAH 유전자는 지방산 아미드의 이화작용에 관여하는 효소로 통증, 기분, 기억력과 관련이 있다. 이전의 실험에서 FAAH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쥐는 통증을 느끼는 감각이 저하되고 상처 치유 속도가 빨랐으며 공포와 불안이 적었다. 학계는 FAAH-OUT 유전자가 고통을 느끼게 하는 FAAH 유전자를 차단해 고통을 줄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카메론의 유전자를 분석한 콕스 박사는 “카메론은 FAAH-OUT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중 일부가 결손된 미세결실 상태였다. 전혀 새로운 유전자의 발견인 만큼 통증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위한 획기적인 신약 진통제 개발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스리바스타바 박사 역시 “전 세계적으로 매년 3억3000만 명이 수술 후 통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번 발견은 고통을 줄이고 회복기간을 줄이는 ‘고통 킬러’의 발견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카메론은 “6년 전 수술을 위해 병원을 찾기 전까지는 내가 정상인 줄 알았다”면서 “내 유전자 연구를 통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이라며 연구에 꾸준히 협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카메론의 이런 유전자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카메론에 따르면 그녀의 부친 조셉 역시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카메론은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탱크부대 부대장이었고 전쟁 중 다리에 포탄 파편을 맞았지만 전혀 아픈 줄 몰랐다”면서 “아버지가 그랬기에 나 역시 그런가보다 했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줄을 몰랐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카메론의 친인척 모두의 DNA 검사 결과 카메론의 딸은 변이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으나 그녀의 아들은 변이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 역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변수는 존재한다. FAAH-OUT 변이 유전자가 FAAH 유전자를 차단하면서 카메론은 뇌와 척수신경 이상을 겪고 있다. 이 때문에 평생 건망증에 시달렸으며 어눌한 말투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번 연구는 영국 마취통증학회지에 실렸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신체적 고통 전혀 못느끼는 여성…통증의학 새 희망 떠올라

    신체적 고통 전혀 못느끼는 여성…통증의학 새 희망 떠올라

    고통과 불안을 느끼지 못하는 70대 여성이 의학계에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다. 영국 런던대학교(UCL)는 지난 27일(현지시간) 보도자료를 내고 이 여성의 유전자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인버네스주 화이트브릿지 거주 여성 조 카메론(71)은 65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심한 염증성 관절 질환으로 수술을 받은 카메론 여사는 진통제 없이도 멀쩡해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의료진은 수술 후 이 여성에게 아세트아미노펜(타이레놀 등의 주성분으로 해열 진통 작용을 한다)을 처방했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하니 약도 필요가 없었다. 수술 다음 날 고통지수 평가에서는 10점 만점 중 0점을 선택할 정도였다. 카메론 여사는 사는 동안 한 번도 이렇다 할 신체적 고통을 느껴본 적이 없다. 심지어 아이 둘을 출산할 때조차 고통이 없었다. 그녀는 “8살 때 롤러스케이트를 타다가 팔이 부러진 적이 있었다. 나는 몰랐는데 사흘 뒤 엄마가 팔이 이상하게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골절 사실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이 여성은 화상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 오븐에 살이 데어 타들어가는 냄새가 나야 비로소 화상을 인지하는 정도다. 무슨 일이 있어도 불안을 잘 느끼지 않는 것 역시 특징적이다. 몇 년 전 도로를 달리던 카메론의 차가 도랑으로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그때도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고 평온함을 유지했다. 수백만분의 일 확률로 나타나는 현상에 런던대학교 유전학 박사 제임스 콕스와 스코틀랜드 NHS 병원 마취통증의학과 박사 데브짓 스리바스타바는 카메론의 유전자 분석에 들어갔다. 분석 결과 그녀에게서는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유전자의 변이가 발견됐다. 하나는 위(僞) 유전자(죽은 유전자, 기능이 살아 있었지만 개체의 생존에 필수적이지는 않았던 유전자가 진화과정 동안 DNA 서열 내에 반복적으로 해로운 돌연변이가 축적되어 기능이 죽어 버린 유전자)로 여겨졌던 FAAH-OUT의 미세결실로 지금까지 발견된 적 없었던 형태였으며, 다른 하나는 FAAH 효소를 조절하는 인접 유전자의 변이였다. FAAH 유전자는 지방산 아미드의 이화작용에 관여하는 효소로 통증, 기분, 기억력과 관련이 있다. 이전의 실험에서 FAAH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쥐는 통증을 느끼는 감각이 저하되고 상처 치유 속도가 빨랐으며 공포와 불안이 적었다. 학계는 FAAH-OUT 유전자가 고통을 느끼게 하는 FAAH 유전자를 차단해 고통을 줄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카메론의 유전자를 분석한 콕스 박사는 “카메론은 FAAH-OUT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중 일부가 결손된 미세결실 상태였다. 전혀 새로운 유전자의 발견인 만큼 통증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위한 획기적인 신약 진통제 개발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스리바스타바 박사 역시 “전 세계적으로 매년 3억3000만 명이 수술 후 통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번 발견은 고통을 줄이고 회복기간을 줄이는 ‘고통 킬러’의 발견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카메론은 “6년 전 수술을 위해 병원을 찾기 전까지는 내가 정상인 줄 알았다”면서 “내 유전자 연구를 통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이라며 연구에 꾸준히 협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카메론의 이런 유전자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카메론에 따르면 그녀의 부친 조셉 역시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카메론은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탱크부대 부대장이었고 전쟁 중 다리에 포탄 파편을 맞았지만 전혀 아픈 줄 몰랐다”면서 “아버지가 그랬기에 나 역시 그런가보다 했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줄을 몰랐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카메론의 친인척 모두의 DNA 검사 결과 카메론의 딸은 변이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으나 그녀의 아들은 변이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 역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변수는 존재한다. FAAH-OUT 변이 유전자가 FAAH 유전자를 차단하면서 카메론은 뇌와 척수신경 이상을 겪고 있다. 이 때문에 평생 건망증에 시달렸으며 어눌한 말투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번 연구는 영국 마취통증학회지에 실렸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길고 긴 군악대 생활… 어머니는 함포탄에, 동생은 총탄에 목숨 잃어”

    “길고 긴 군악대 생활… 어머니는 함포탄에, 동생은 총탄에 목숨 잃어”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9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했다. 20년간 노력해 마침내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은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김탁수 인터뷰 일시 1997년 8월 11일 장소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이규원치과 3층) 대담 김탁수(인천학도의용대 군악대 대원) 이경종(6·25 참전사 편찬위원) 이규원 치과원장(이경종 큰아들)6·25 사변과 어머니의 죽음 1950년 5월 3일 6년제 공립 인천상업중학교를 졸업하였던 그해, 6월 25일 사변이 터졌다. 내가 당시 살던 곳은 금곡동이었으며 10남매의 장남인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동생들과 같이 살았다. 1950년 9월 15일 UN군 전함들은 인천 시내를 향해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 함포탄은 우리 집 근방에도 날아왔으며 급기야는 우리 집에도 함포탄이 떨어져 그때 피란을 안 가시고 홀로 집을 지키시던 어머니께서 그 함포탄 파편 때문에 돌아가셨다. 인천학도의용대 군악대 창설 이때 나는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나의 모교 인천상업중학교 밴드부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조직된 인천학도의용대의 군악대로 창설되어서 나는 인천학도의용대 군악대원으로 9월 말일부터 활동하게 되었다. 그때 군악대는 인천학도의용대 지대 창립식에 동원되었으며 위문행사와 선무공작 등으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통일이 되는 줄 알았던 우리나라가 갑작스런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또다시 시국은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그때 들리는 소식은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과 겨울철로 접어들어 우리 국군의 전투력 부족으로 인하여 국군과 UN군은 날마다 밀리고 있다는 뉴스만 들리는 것이었다. 1950년 12월 18일 드디어 인천학도의용대가 부산을 향해 남하(南下)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군악대원들, 윈자호 수송선 타고 남하 1950년 12월 24일, 전황은 더 급박(急迫)하게 움직여 군에서 마련해준 윈자호라는 수송선으로 우리 군악대 25명과 인천학도의용대 여학생 대원 150여명은 같이 지금 인천역에 있는 파라다이스(오림포스)호텔에서 가까운 부두에서 부산을 향해 출항하였다. 3박 4일을 배 안에서만 지낸 우리들은 1950년 12월 27일 부산항 부두에 도착했다. 이날 축 늘어진 모습으로 부산부두에 올라선 우리들은 부산극장 옆에 있는 어느 큰 창고에 여학생들과 같이 묵고 있다가 동대신동에 있는 육군통신학교 부속 건물에 입주하게 되었다. 이렇게 잠자리는 해결이 되었는데 며칠 동안은 각자 가지고 간 돈으로 먹는 것은 해결하였지만 그 돈이 떨어지니까, 이제는 끼니를 때우는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1951년 1월 초 그렇게 고생스럽게 부산 생활을 하던 중에 고향 인천은 또다시 북한 공산군에게 점령(占領)당하게 되었다.군악대원 모두 육군종합학교 군악병 입대 오갈 데가 없게 된 우리들에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당시 부산 동래에 있던 육군종합학교 심유권 소위였다. 그때 심유권 소위가 말하기를 “지금 육군종합학교에는 군악대가 없어서, 군악대가 필요한데 너희들 인천학도의용대 군악대는 갈 곳이 없으니까 숙식(宿食)이 해결되는 육군종합학교 군악대로 입대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날이 1951년 1월 12일이었다. 그때쯤은 이미 고향 인천은 인민군에게 또다시 점령당해 돌아갈 수도 없어 군에 들어갈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육군종합학교에 입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인천에서 수송선을 타고 같이 남하했던 여학생 대원 150여명은 육군통신학교에 계셨던 인천상업중학교 은사님이신 신봉순 교육대장님 배려로 부산육군통신학교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동래 육군종합학교에서의 군악대 생활 육군종합학교로 간 우리들은 10여일 간 간단한 제식훈련만 받고 1951년 1월 23일 자로 군번을 받았다. 정식으로 군번을 받고 군인이 되어 바로 육군종합학교 행사에 동원되어 군악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때의 행사는 주로 장교후보생을 졸업시켜 소위로 임관시키는 임관식과 간부후보생 입교 행사였다. 당시는 전방에 장교가 부족해서였는지 매주 월요일에는 입교식이 있었으며 임관식은 토요일마다 있었다. 1951년 12월 육군종합학교는 전 부대가 부산에서 수송선을 타고 목포로 갔으며, 목포 송정리 후락산에 새터를 잡아 학교 명칭도 육군보병학교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 광주 상무대에서 군악대 군악병 생활 목포 송정리 후락산에는 육군보병학교, 육군통신학교, 육군포병학교, 육군기갑학교, 77육군병원 등이 집단으로 주둔하였으며 이 5개 부대를 통틀어 상무대(尙武臺)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상무대는 육군의 교육을 총괄하는 기관으로 육군 교육총감부 직속하에 들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군악대의 명칭도 상무대 군악대로 바뀌었으며, 행사 범위가 커지면서 상무대 군악대의 바쁜 군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후 1955년 2월에 나는 상무대에서 서울 태릉에 있는 육군사관학교로 전속되었다. 그곳에서 2년 가까이 군악대 생활을 하다가 길고 긴 6년 8개월의 군 생활을 육사에서 마치게 되었다. 동생 김윤수, 무전기 찾아 나오다 전사 내 동생 김윤수(金潤洙·큰 사진 빨간 원안)는 1934년 5월 11일 용동에서 태어나서, 인천창영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때 부산까지 걸어가서 1951년 1월 10일 육군통신병(군번 0240856)으로 자원입대하였다. 무선통신병으로 강원도 전투지역인 5사단 35연대에 배치되었다. 그때 오대산 누그미 전투에서 609무전기를 등에 지고 전투하며 전진하던 중에 적의 기습으로 갑작스런 후퇴로 잠깐 땅에 내려놓았던 무전기를 미처 간수하지 못하고 후퇴하여 후방에 와서 보니까 지휘관이 큰 소리로 “군에서 전투 중 통신병이 통신기재를 분실하면 즉결처분으로 총살이다!”라고 고함치니까 내 동생 김윤수는 다시 그 지역으로 가서 그 무전기를 찾아가지고 나오다가 적의 총탄에 맞고 전사했고, 유해는 그만 찾지 못하고, 무덤도 없이 동작동 국립 현충원 봉안관에 위패(6-7-118)로만 봉안되어 있다. 감사의 말과 남기고 싶은 말 이상이 내가 걸어온 중요한 줄거리이다. 중학생으로 자원입대하여 채 피지도 못하고 강원도 산골에서 외롭게 하늘나라로 간 내 동생 김윤수의 넋이 편안하게 잠들기를 빌 뿐이다. 무덤도 없는 동생의 행적을 글로나마 남기게 해주어 무겁던 내 마음을 다소나마 덜어 준 이경종규원 2부자(父子)에게 고마울 뿐이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참전기 21회를 마치며 69년 전, 인천에 형과 아우가 살았었습니다. 해방이 된 지는 5년 만에, 정부 수립 3년 만에 국가 멸망의 위기가 닥쳐서 2형제는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형은 하인천부두에서 배를 타고, 동생은 인천축현국민학교를 출발하여 부산까지 20일간 걸어서 남하하여, 2형제는 부산에서 자원입대하였습니다. 동생은 중학교 3학년 16살로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어린 나이였지만 자원입대하여, 전사하였습니다. 중학교 3학년생으로 나라를 위하여 죽은 동생에 대한 형의 슬픔을 어찌 글로 표현할 수 가 있겠습니까? 조국과 고향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쳤던 김윤수는 이제 고향 인천에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지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에 전사(戰死) 학생(學生)으로 기록합니다. 이규원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 日심장부에 폭탄·총성… 목숨 불사르며 ‘독립 열망’ 알린 의열단

    日심장부에 폭탄·총성… 목숨 불사르며 ‘독립 열망’ 알린 의열단

    “피고 곽재기, 이성우 두 사람은 상해, 길림, 안동현, 경성 사이를 왕래하며 동지들의 연락을 도모하고, 조선에 있는 동지로 하여금 전시 폭탄 사용의 목적을 수행할 준비를 하게 했다.”(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 형사부 재판장 이토 준키치의 판결문 일부)의열단 최초의 암살·파괴 활동 계획인 ‘밀양 폭탄 사건’은 마지막 실행 단계에서 꼬리가 잡혔다. 의열단 창단 멤버인 곽재기와 이성우는 1920년 6월 서울 인사동에서 회의를 하던 중 경찰의 급습으로 현장에서 체포됐다. 당시 스무 살도 채 안 된 단원 윤세주도 함께 잡혔다. 결국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일보사 등 3곳을 폭파하려는 계획은 뒤로 미뤄야 했다. 주범으로 지목된 곽재기와 이성우는 폭발물을 반입한 혐의로 폭발물취체(단속)벌칙 3조 위반에 해당돼 1년 만에 각각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각 피고가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안녕·질서를 방해하려 한 점은 제령 7호 위반에 해당된다고 봤지만, 폭발물취체벌칙의 형이 더 무겁다는 이유로 해당 죄만 적용하기로 했다. 윤세주(폭발물 사용 공모, 4조 위반)는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의열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1920년 9월 박재혁이 고서상으로 위장해 부산경찰서장을 찾아가 폭탄을 던졌다. 서장은 병원으로 이송 도중 숨졌다. 박재혁은 재판부로부터 사형을 선고받고 단식 투쟁 끝에 사망했다. 같은 해 12월 최수봉도 밀양경찰서 조회 시간에 폭탄 2개를 던졌다. 이 중 폭탄 1개는 안 터지고, 나머지 1개는 위력이 크지 않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최수봉에게도 사형이 선고돼 1921년 7월 형 집행을 당했다. 목숨까지 불사르는 의열단의 기개 앞에 일제는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은 의열단의 의열 투쟁은 거사 자체만 놓고 성패를 따질 수 없다고 말한다. 거사를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공판 과정을 보면 의열단 단원들은 고통스러운 신문 과정과 고문을 겪으면서도 법정에서 당당하게 ‘우리가 왜 폭탄을 던질 수밖에 없는지’를 밝히려 했다. 1921년 9월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던 김익상은 이듬해 3월 중국 상하이 황포탄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다 붙잡혔다. 김익상은 당시 중국 순경에 쫓기는 긴박한 상황에서 중국 순경이 아닌 하늘을 향해 총을 쐈다. 살인 미수, 절도, 상해, 폭발물취체규칙 위반 등 6개가 넘는 혐의로 일본 나카사키지방재판소에 끌려와 재판을 받던 김익상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와 아무 관계도 없는 중국인을 죽일 필요는 없고 오직 위협하기 위해 쏜 것이오. 하늘을 향해 쏘았던 것은 사실이다.” 의열 투쟁이 선량한 시민을 상대로 공격을 하는 테러와 분명하게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익상은 재판을 받으면서 “어떠한 형벌이든지 사양치 아니할 터이며, 이후로 제2·제3의 김익상이 뒤를 이어 일본 대관 암살을 계획하되 조선 독립을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김익상은 나카사키재판소(재판장 마츠타)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24년 1월 도쿄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지려고 했다가 휴회 중인 사실을 알고 황궁 앞으로 가서 이중교에서 폭탄을 던진 김지섭도 같은 해 11월 도쿄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김지섭은 공판 과정에서 재판장이 ‘직업이 뭐냐’는 질문에 “직업은 독립당원”이라고 했다. 최후 진술에서는 “우리 조선의 독립 선언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라면서 “조선 민중은 굶어 죽고 맞아 죽고 하는 가운데 나 홀로 적국에 들어와 사형을 받는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광경”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형이든 무죄든 둘 중에 빨리 판결을 내리라”고 했다. 김지섭의 변호인들이 재판부 기피 신청을 했을 때도 김지섭 스스로 거부했다. 김지섭은 “나는 조선사람이니 일본사람인 재판장이 어떠한 사람이 되든지 똑같을 것이니 기피 신청을 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는) 아무 죄가 없으니 무죄를 선언하든지 검사 청구대로 사형에 처하든지 하여 달라”고 말했다. 일본 사법제도의 권위와 재판관의 양심을 문제 삼으려고 했던 것으로 읽힌다. 1926년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 경성지점에 폭탄을 던지고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나석주 의거 사건과 관련, 배후조종 혐의로 검거된 김창숙은 아예 재판 자체를 거부했다. 일본인 재판장이 ‘본적이 어디냐’고 물으면 “없다”고 답하고, ‘왜 없느냐’고 또 물으면 “나라가 없는데 본적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김창숙은 법정에서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한다”면서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되는 일인가”라며 변호 조력도 거부했다. 결국 김창숙은 대구지방법원에서 1928년 12월 징역 14년을 선고받았다. 대구복심법원에 공소도 거부해 그대로 형이 확정됐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어쩐지 무겁더라···’, 낚시바늘에 걸린 박격포탄

    ‘어쩐지 무겁더라···’, 낚시바늘에 걸린 박격포탄

    한 중국인이 연못에서 낚시를 하던 중 20센티미터 길이의 폭탄을 발견했다. 당시의 상황을 뉴스플레어, 라이브릭 등 여러 외신이 전했다. 지난 4일 중국 광둥성 중부 장먼시 연못 주위에서 촬영된 영상 속, 경찰관 한 명이 특수하게 제작된 폭발 방지용 장치 속에 낚시꾼이 발견한 불발폭탄을 조심스럽게 싣고 있는 모습이다. 이 폭탄의 표면은 심하게 부식됐으며, 확인결과 세계 2차 대전 때 사용됐던 박격포탄으로 판명났다. 경찰은 이 불발탄을 운반해 안전하게 폭발시켰다. 대어를 건졌다고 생각했을 낚시꾼,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건진 것 만으로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사진=Top Life 2020 유튜브 영상부 seoultv@seoul.co.kr
  • [밀리터리 인사이드] 40년 된 예비군 소총·80년 전 탄띠 이번엔 바뀔까

    [밀리터리 인사이드] 40년 된 예비군 소총·80년 전 탄띠 이번엔 바뀔까

    구형 장비 교체 여론 왜 나왔는지 살펴봤더니총탄 방어가 불가능한 구형 헬멧 40년 된 소총2차 세계대전 때 디자인된 탄띠 지금도 사용정부, 예산 확보해 예비군 정예화 추진해야열악한 예비군 훈련비가 개선될 조짐이 보입니다. 육군은 최근 동원예비군 훈련비를 2022년까지 9만 1000원, 지역예비군 훈련비는 3만 1000원으로 단계적으로 인상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밝혔습니다. 지난해 9월 ‘왜 한국 예비군 훈련비는 세계 최하위인가’라는 기사로 이 문제를 집중 분석한 적이 있습니다. 동원훈련비는 지난해 1만 6000원에서 올해 3만 2000원으로 올랐지만 ‘2박 3일’ 기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여전히 매우 낮은 수준입니다. 지역예비군 훈련비는 더합니다. 식비 6000원, 교통비 7000원을 합쳐 하루 1만 3000원입니다. 처음 만난 4명이 어쩔 수 없이 불법 택시합승을 하도록 유도할 정도로 터무니없이 부족한 것이죠. 정부는 대대급 훈련장 187곳을 2024년까지 연대급 첨단훈련장 40곳으로 통합할 예정인데 개편이 완료되면 예비군 입·퇴소 거리가 평균 2~5배나 늘어나 비용 부담은 더 커집니다. 청년들은 이 보도를 보고 “예비군 훈련비를 현실화하라”는 원성을 쏟아냈습니다. ●2024~2033년 동원훈련비 21만원까지 인상 지난해 국방부가 한국전략문제연구소에 의뢰해 동원훈련과 지역예비군훈련 참가자, 민방위대원, 현역병 등 20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예비군 일당 적정 금액은 보통인부 노임단가 수준인 ‘10만원’(31.7%)과 최저임금 수준인 ‘6만원’(31.4%)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습니다. 그래서 육군은 2024~2033년 동원훈련비는 21만원으로, 지역예비군 훈련비는 6만원으로 꾸준히 올리는 방안을 협의한다고 합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고 말 그대로 ‘안’일 뿐이지만, 그래도 군이 구체적인 계획과 의지를 갖고 나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참고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하루 예비군훈련비는 각각 31만원, 17만원입니다. 예비군법에는 ‘실비 변상’이라는 애매한 규정만 있을 뿐 훈련비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문구조차 없으니 내친 김에 이 문제도 정부와 군이 바로잡아줬으면 합니다.아울러 육군은 앞으로 예비군 훈련비 현실화와 별개로 동원예비군 장비와 물자도 상비사단 수준으로 보강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30년이 지난 방탄헬멧과 군장, 배낭이 대부분인 예비군 개인 장구류를 앞으로 ‘신형’으로 교체한다고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실태 취재를 해오던 중 마침 군 전문가인 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 대표와 이일우 사무국장이 최근 육군본부 의뢰로 내놓은 ‘미래 예비전력 역할과 적정규모 편성’이라는 보고서를 찾았습니다. 이 보고서에 기초해 문제를 짚어보겠습니다. 우선 예비전력 예산을 보니 2005년 764억원에서 2007년 966억원, 2008년 1355억원으로 해마다 늘어나다 2014년 1469억원으로 최대로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 시기인 2015년 예산이 갑자기 1275억원으로 13.2%나 삭감됩니다. 2016년에는 다시 3.4% 감액된 1231억원이 됐습니다. 2017년 1371억원으로 11.3% 인상했지만 작년은 1325억원으로 3.3% 줄었습니다. 연구팀은 “북핵과 미사일 위협 증대에 따른 대응전력 구축과 장병 처우 개선 요구가 빗발쳐 우선 순위에서 밀렸던 예비전력 예산이 대폭 삭감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2005년부터 14년 동안 예비전력 예산은 국방예산에서 해마다 0.5%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매년 국방예산 우선 순위에서 가장 뒷자리였고, 장비 노후화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국민들도 답답했나 봅니다. 지난해 5월 국방부가 진행한 국방예산 대토론회에서 국민들이 꼽은 개선 과제 6개 과제 중 2개(예비군 훈련비 인상, 예비군 장비 지원)가 예비군 관련 내용이었습니다. ●예비전력 예산, 해마다 국방비 0.5%에도 못 미쳐 그나마 신형 장비를 지급받는 동원예비군의 사정은 나은 편입니다. 연구팀에 따르면 나일론 압착 소재를 사용한 지역예비군 ‘방탄헬멧’의 방탄성은 미군이 1980~1990년대에 사용하던 PASGT(지상군 방탄 장비) 성능의 절반에도 못 미칩니다.가까운 거리에서 폭발한 포탄이나 수류판의 파편을 겨우 막아내는 수준으로 소총탄에 대한 방호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실제로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수백m 거리에서 발사된 소총탄에 이 헬멧 착용자가 피격돼 사망한 사례가 있습니다. 연구팀은 “총탄 방어가 불가능한 구형 방탄헬멧은 있으나 마나한 장비”라고 지적했습니다. 지역예비군에게 지급하는 ‘탄띠’도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사용하던 ‘M67 피스톨 벨트’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라고 합니다. ‘탄입대’에는 M16용 30발 탄창이 3개까지 들어가지만, 실제 탄창을 채워 넣으면 포복이 어렵고 기동이 불편해 미군에서는 이미 1990년대에 퇴출된 디자인입니다. 지역예비군에게 지급하는 총기는 1974년부터 1985년까지 국내에서 면허생산된 M16A1 모델로, 무려 100만정이 보급돼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총기는 생산한 지 45년, 가장 상태가 좋은 총기도 34년이나 된 제품입니다. 성능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가장 오래된 총기는 45년 “성능 제대로 발휘 되겠나” 연구팀은 “총기는 기본적으로 금속이기 때문에 장기 보관할 때는 밀봉처리하거나 주기적으로 꺼내 정비를 해야 한다”며 “하지만 지역예비군 부대는 항상 병력이 부족하고 제한된 인원이 많은 총기를 모두 정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평시 총기 관리가 제대로 될 리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30~40년이 훌쩍 넘어가는 노후 총기와 80년 된 탄띠를 사용하면서 ‘예비군 정예화’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연구팀은 “현재 지역예비군 대원에게 지급되는 개인화기와 군장의 수준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의 예비군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낙후돼 있다. 중동이나 아프리카의 무장 민병대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예비군 중대의 비효율적 편성도 문제입니다. 인구가 많은 경기 광명시와 군포시, 구리시의 예비군 중대 담당 면적은 2.1~4.1㎢ 정도이지만 원전이 있는 경북 울진군은 98.9㎢에 이릅니다. 공군기지가 있는 충남 서산시는 49.2㎢, 한빛원전이 있는 전남 영광군은 47.2㎢입니다. 연구팀은 “현재 예비군 중대 편성은 전략적 요충지 소재 여부와 관계없이 읍·면·동 단위로 일괄 편성돼 있다”며 “주요 전략시설을 관할하는 예비군 중대 병력은 인구밀집지역 예비군 중대에 비해 적어지는 불균형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에 연구팀은 예비군 중대 편성기준을 현행 읍·면·동 단위에서 인구 30만명 기준, 시·군·구 단위로 변경해 군 구조를 재편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습니다. 앞으로 정부가 가야 할 길이 멉니다. 문제가 있으면 개선해야 할 것이고, 예산이 부족하다면 국회에 당위성을 설득해야 합니다. 국방부 조사결과처럼 예비군 지원을 늘리라는 민심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때입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위세 떨치던 IS 최후의 점거지역 시리아 바구즈에서 마지막 교전

    위세 떨치던 IS 최후의 점거지역 시리아 바구즈에서 마지막 교전

    지금으로부터 5년 전 국가 수립을 선포하며 시리아와 이라크에 위세를 떨치던 수니파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가 미국을 필두로 하는 연합군과 지난 2일(현지시간)부터 시리아에 남은 최후의 점거 지역에서 마지막 교전을 치르고 있다.알자지라는 미군의 지원을 받는 쿠르드민병대와 시리아민주군(SDF) 연합이 포탄과 공습 등을 이용해 마지막 남은 IS 전투원들과 시리아 북동부 데이르에조르 지역의 작은 마을인 바구즈에서 교전을 벌이고 있다고 3일 전했다. 앞서 열흘 이상 여성과 아이들을 난민수용소로 대피시킨 연합군은 이날부터 본격적인 공격에 들어갔다. IS무장 조직원들은 스나이퍼와 자살 폭탄 차량, 부비트랩 등으로 응수하고 있다. 바구즈에 있는 SDF 지휘관은 이날 로이터 인터뷰에서 “무장 세력이 2일 밤 폭탄이 장착된 차량을 끌고 공격에 나섰다”고 전했다. 무스타파 발리 SDF 대변인은 트위터를 통해 “이틀 동안 미국 연합군이 IS전투원들의 공격을 저지했다”면서 “SDF를 공격하려는 3대의 폭탄 차량을 파괴했다”고 말했다. IS 전투원들은 밤에는 야간 투시경이 없어 제대로 공격에 나서지 못했고, 연합군은 이 때를 틈타 반격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연이은 폭발로 불길이 일자 마을은 검은 연기로 가득 찼다. 연합군에 따르면 IS 전투원들 가운데 지하에 매복해 있는 이들도 있어 정확한 수를 가늠하긴 힘든 상황이다. 연합군 측은 현재 1000~1500여명의 남성들을 비롯해 9000여명의 여성과 아이들이 마을에 남아있는 것으로 관측된다고 밝혔다. IS는 2014년 전성기 시절 시리아 서부에서 이라크 동부에 이르기까지 8만 8000㎡에 이르는 영역을 장악했다. ‘이슬람 왕조’ 탄생을 주장하며 800만명의 지역주민들을 가혹하게 다스렸던 IS는 석유와 갈취, 절도, 납치 등을 통해 수십억 달러의 수익을 창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하노이의 경복궁… 흥망성쇠 담긴 유산

    하노이의 경복궁… 흥망성쇠 담긴 유산

    베트남 하노이 도심 한복판에 자리잡은 탕롱(Thang Long, 昇龍)왕궁은 서울로 치면 경복궁에 해당한다. 1009년 리궁윈(李公蘊)이 리 왕조를 수립한 후 수도를 지금의 하노이인 탕롱으로 옮겼고 탕롱왕궁에서 정사를 보기 시작했다. 이후 하노이는 왕도로 번성했고 탕롱왕궁은 베트남 역사의 중심이 되었다. 1802년 응우옌 왕조가 성립되면서 수도를 후에로 옮길 때까지는 말이다. 응우옌 왕조는 리 왕조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탕롱왕궁의 일부를 허물고 프랑스 건축양식으로 작은 성을 축조했다. 19세기엔 베트남도 서구열강의 표적이 되었고 1884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식민지 기간에 다시 탕롱왕궁이 행정 중심지가 됐지만 더 많은 것이 파괴되고 말았다. 1897년 프랑스는 군사 기지를 만들기 위해 탕롱왕궁의 성벽을 대부분 파괴했고 그나마 군용 관측탑으로 쓸 수 있는 하노이 깃대와 북문과 남문 정도만 남겼다. 북문의 탄흔은 당시 상황을 말해 준다. 대신 프랑스는 하노이에 바로크 양식의 오페라하우스와 롱비엔 다리, 하노이 역 같은 프랑스 건축물을 지었다. 탕롱왕궁은 ‘하노이의 경복궁’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방문자가 많지 않아 언제나 조용하다. 왕궁 전체를 아우르는 노란색은 베트남 국기인 금성홍기(金星紅旗) 한가운데 별 색깔과 닮았다. 탕롱왕궁으로 들어가는 정문엔 아치형의 입구가 다섯 개 있다. 가장 큰 가운데 문은 황제가, 중간 크기의 문은 왕족이, 끄트머리의 작은 문은 하급관리가 드나들었다. 들어서면 아치가 가로로 수십 개 이어진 콜로니얼 양식의 노란 건물이 나타난다. 주변에서 발굴된 도자기나 지붕 일부분 같은 유물을 모아 놓은 전시실이다. 지하벙커로 들어가면 베트남 전쟁 때 지휘사령부로 쓰인 사무실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고 포탄과 군복, 당시의 전화기까지 전시돼 있다. 황제의 집무실이자 침소로 쓰였던 궁전은 프랑스 부대가 포병본부를 짓는다고 모조리 파괴해버렸다. 용 조각만 덜렁 남은 황제의 계단은 화려했던 시절이 떠올라 쓸쓸하다. 이리저리 흩어진 노란색 건물에는 베트남의 흥망성쇠, 중국과 프랑스 문화, 미국과의 투쟁의 역사가 오롯이 담겼다. 외곽에선 아직도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탕롱왕궁은 중세부터 근현대까지 이어진 역사적 의미를 인정받아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렸다.‘탕롱’은 ‘승천하는 용’을 의미한다. 베트남은 중국의 제후국이었던 까닭에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중국의 영향을 받은 한자문화권에 속한다. 정선 이씨와 화산 이씨가 탕롱왕궁을 차지했던 리 왕조의 후손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베트남이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다. 물론 박항서 감독의 공이 가장 크지만. 지금 세계의 눈과 귀가 베트남 하노이로 쏠리고 있다. 하노이가 세계평화를 위해 만난 동서양의 두 용(龍)을 훨훨 날게 할 무대가 될지 기대된다. 김진 칼럼니스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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